{{무기여, 잘 있거라(상) 어네스트 헤밍웨이 저 }} {{작가소개 2 }} {{주요 등장 인물 3 }} 제 1 편 {{1 4 }} {{2 6 }} {{3 9 }} {{4 13 }} {{5 18 }} {{6 23 }} {{7 27 }} {{8 34 }} {{9 37 }} {{10 49 }} {{11 53 }} {{12 58 }} 제 2 편 {{13 61 }} {{14 67 }} {{15 71 }} {{16 76 }} {{17 80 }} {{18 83 }} {{19 87 }} {{20 95 }} {{21 99 }} {{22 106 }} {{23 109 }} {{24 117 }} {{}}{{작가소개 }} 1899년 7월 21일 일리노이 주의 시카고 근교인 오크 파크에서 탄생. 1917년 <캔자스시티 스타>지(紙)의 기자가 되어 '문장의 간결성'과 '약동적 표현'을 배우다 1925년 단편집 <우리들 세대에> 발간. 1926년 <봄의 급류>, <해는 또다시 뜬다>를 발간함으로써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게 되다. 1929년 <무기여 잘 있거라> 발간. 1936년 스페인 내란이 일어나자 정부군 원조를 위한 활동을 했으며 <킬리만자로의 눈> 발표. 1940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발간. 1952년 <노인과 바다> 발간. 퓰리처 상 수상. 1954년 미국 아카데미 상, 노벨 상 수상. 1961년 자택에서 엽총으로 죽음. {{}}{{주요 등장 인물 }} 프레더릭 헨리 : 이탈리아 군으로 자원 입대한 미국인. 전선에 파견되어 온 영국 간호사와 사랑에 빠진 뒤 전쟁의 참혹성에 회의를 느껴 그녀와 함께 스위스로 도망친다. 캐서린 바클리 : 이탈리아에 파견되어 온 영국인 간호사. 사랑의 상처를 입거 자원한 전선에서 미국인인 헨리와 사랑에 빠져 전선에서 도망친다. 스위스의 한 병원에서 아이를 낳다 죽는다. 리날디 중위 : 이탈리아 아말피 출신의 장교, 헨리의 절친한 친구. 신부(神父) : 이탈리아 아브루치 출신의 선량하며 마음씨 좋은 군목(軍牧)으로 항상 장교들의 놀림감이 된다. 헬렌 퍼거슨 : 영국인 간호사로 캐서린을 잘 이해하는 친구이자 동료. 제 1 편 {{}}{{1 }} 그 해의 늦은 여름이었다. 우리는 강을 건너고 들을 너머, 산들이 바라보이는 한 마을의 촌가에 머무르고 있었다. 햇볕에 하얗게 마른 자갈들이나 둥근 돌들이 깔려 있는 강에는 맑고 푸른 물이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그 마을을 지나는 부대가 있었다. 그 부대가 길을 따라 이동을 하자 근처 나뭇잎들은 뿌옇게 먼지를 뒤집어 썼다. 나무 줄기도 뿌옇게 먼지가 끼었으며, 낙엽도 빨리 졌다. 부대가 행군하면 먼지와 함께 옅은 바람이 일어나고 그 바람에 마른 잎들이 떨어졌다. 그렇게 낙엽이 쌓인 길은 끝도 없이 허옇게 이어져 있었다. 오곡이 풍성한 들과 과수원이 많았지만, 들을 건너 보이는 산은 벗은 갈색이었다. 전투가 있는 밤이면 산에서 포화(砲火)를 볼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것은 마치 여름철 번개 같았으나, 밤은 서늘했고 폭풍우가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어떤 때는 어둠 속에 바로 창 밑으로 부대가 행군하는 소리며, 견인차(牽引車)에 대포가 끌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밤이면 왕래가 번잡해졌다. 길에는 양쪽 안장에 탄약 상자를 실은 수많은 노새와 군인을 수송하는 회색 트럭이 있었고, 돛베(帆布)로 덮은, 짐을 가득 실은 다른 트럭들은 더욱 느린 속도로 움직였다. 낮에도 큰 대포가 견인차에 끌려가는 일이 있었는데, 긴 포신에는 푸른 나뭇가지가 덮였고, 견인차도 푸른 잎이 무성한 가지며 덩굴로 가려 있었다. 북쪽으로 골짜기 하나 건너에 밤나무 숲이 보였고, 그 뒤로 강 저편에 산이 하나 있었다. 그 산을 빼앗으려는 전투가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가을이 되어 우기(雨期)가 닥치자 밤나무는 잎이 모두 떨어지고 가지만 앙상했으며, 줄기가 비에 젖어 유난히 검게 보였다. 포도원 역시 엉성하고 마른 덩굴만이 남았고, 부근 일대는 가을과 더불어 젖어들어 갈색으로 변하고 죽음이 깃들었다. 강에는 안개가 끼고 산에는 구름이 드리웠고, 트럭은 흙탕물을 튀기며 달리고, 우장(雨裝)을 걸친 군인들도 진창투성이이고 흠뻑 젖어 있었다. 그들이 멘 총도 젖어 있었고, 우장 밑에는 혁대 전면에 찬 두 개의 가죽 탄약통 - 가늘고 긴 6.5밀리 탄약의 삽탄자(揷彈子)가 빽빽하게 들어 있어 묵직한 회색 가죽 탄약통이 불룩하게 내밀어, 길을 걷는 군인들은 마치 임신 6개월은 된 것 같은 꼴을 하고 행군하고 있었다. 무척 속력을 내고 달리는 소형 회색 자동차들도 있었다. 대개는 운전병 옆에 장교 한 사람과 뒷자리에 몇 사람이 더 타고 있었다. 이것들이 군용 트럭보다도 더 흙탕물을 튀겼다. 뒷자리에 앉은 장교 한 사람이 유난히 몸집이 작고 두 장군 사이에 끼어 앉아서 얼굴은 안 보이고 군모 꼭대기랑 그의 좁은 등만이 보이며, 자동차가 특별히 속력을 낼 때는 그게 대개는 국왕(國王)이었다. 국왕은 우디네에 머무르면서 이렇게 거의 날마다 전황(戰況) 시찰을 나왔으나 전황은 전혀 신통치가 않았다. 겨울로 접어들자 쉴 새 없이 비가 내렸고, 비와 더불어 콜레라가 발생했다. 그러나 콜레라는 방지되었고, 결국 군대에서는 7천 명이 이 병으로 죽었을 뿐이었다. {{}}{{2 }} 이듬 해 전투에서는 여러 번 승전을 거두었다. 골짜기 건너 산과 밤나무 숲이 있는 산허리를 점령했으며, 들을 건너 남쪽 고지에서도 승리를 몇 번 거두었다. 우리는 8월에 강을 건너서 고리치아에 있는 어떤 집에 들었다. 그 집에는 샘이 하나 있었고, 담을 두른 뜰에는 무성한 나무가 많고, 집 옆에는 자색 등나무 덩굴이 있었다. 이제 바로 그 건너 산에서 전투 중인데, 1마일도 안 되는 거리였다. 거리는 퍽 조촐했고 우리가 든 집도 썩 좋았다. 강은 집 뒤로 흘렀다. 이 읍은 아주 감쪽같이 점령되었지만 건너 산들은 점령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인들은 전쟁이 끝나면 언제고 이 읍으로 돌아올 생각인 듯, 군사적 필요 이외에는 거의 포격으로 파괴하지 않는 것이 나로서는 여간 고맙지 않았다. 거리에는 주민이 살고 있었고, 옆 골목을 올라가면 병원이나 카페나 포병대가 있으며, 갈보집도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사병용이고 하나는 장교용이었다. 여름도 다 갈 무렵 서늘한 밤이 찾아들고, 시가지 건너편 산에서는 전투가 한창이고, 철교에는 포탄 맞은 자국, 전투가 있었던 강변의 파괴된 터널, 광장 주위에 둘러선 나무들, 그 광장으로 뚫린 기다란 가로수 길, 이런 것과 더불어 거리에는 여자가 있고 국왕이 자동차로 지나가는데, 이제는 그의 얼굴과 목이 기다란 조그만 몸집과 염소 턱수염 같은 회색 수염을 가끔 볼 수 있고, 또 이런 모든 것과 더불어 포탄으로 벽이 없어진 가옥들의 내부가 갑자기 보이기도 하고, 그 뜰이나 때로는 길거리에 석회며 기와 부스러기가 흩어져 있고, 카르소 지방의 전황이 전반적으로 유리해서 시골서 보낸 작년 가을과는 전혀 딴판인 가을이 되었다. 전쟁 역시 면모가 달랐다. 시가지 건너편 산에 있던 오크나무 숲이 없어져 버렸다. 우리가 이 읍에 진주한 여름에는 푸른 숲이었으나 지금은 그루터기와 부러진 나무 등걸과 뒤집혀진 땅이 있을 뿐이었다. 가을도 끝날 무렵에 하루는 그 오크나무 숲이 있던 곳에 나가 있었는데 구름이 산을 넘어 몰려왔다. 구름은 삽시간에 산을 덮어, 해는 희미한 누런색으로 변하고 모든 것이 회색이 되고 하늘이 컴컴해지면서 갑자기 우리는 그 속에 묻히는가 했더니 눈이 쏟아졌다. 눈은 바람에 날려 비스듬히 쏟아졌고, 헐벗은 땅이 눈으로 덮이고 나무 그루터기가 삐죽이 내밀었다. 대포 위에도 눈이 쌓이고, 참호 후면의 변소로 가는 길이 눈 속에 보였다. 잠시 후 시가지로 내려온 나는 장교용 갈보집 창을 통해 눈이 내리는 모습을 구경했다. 친구와 잔 둘을 앞에 놓고 아스티 술을 마시면서 눈이 천천히 자욱하게 내리는 것을 바라보며 우리는 이제 올해도 그만인 것을 알았다. 강 상류에 있는 산들은 아직 점령을 못했고, 강 건너 산들 역시 빼앗지 못한 채로 였다. 이 모든 것이 내년으로 넘어간 것이다. 내 친구는 신부(神父)가 식당에서 나와서 진창 속을 조심스럽게 걸으며 거리를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의 주의를 끌려고 유리창을 두드렸다. 신부는 눈을 들었다. 그는 우리를 보고 미소를 보냈다. 내 친구는 몸짓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신부는 고개를 젓고 그대로 지나갔다. 그날 밤 식당에서 스파게티 코스가 끝난 다음이었다. 이 코스는 모두들 무척 빨리, 그리고 열심히 먹었다. 스파게티를 포크로 떠서 대롱대롱 매달린 가락이 없도록 높이 쳐들었다가 입으로 받아 넣든가, 쉴새 없이 긁어 올리면서 입으로 빨아들이기 마련인데, 짚으로 싼 술병에서 제 손으로 포도주를 따라 마시면서 먹었다. 술병은 금속제 받침대에 담겨 흔들거리고 있었는데 집게손가락으로 병 목을 눌러 숙이면 새빨갛고 떫고 향기로운 술이 같은 손에 들고 있는 술잔에 부어지게 마련이었다. 이 코스가 끝나자 대위는 신부를 놀리기 시작했다. 젊은 신부는 툭하면 얼굴을 붉혔다. 그는 우리처럼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회색 웃저고리 왼쪽 가슴 포켓에 자줏빛 벨벳으로 만든 십자가를 달고 있었다. 대위는 내가 완전히 이해하고 한 마디도 못 알아듣는 말이 없도록 하려고 일부러 엉터리 이탈리아 말을 썼다. 그러나 이것이 내게 도움이 되었는지 의심스러운 노릇이었다. 신부님이 오늘은 여자하구야. 대위는 신부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말했다. 신부는 미소짓고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이 대위는 곧잘 신부를 놀리는 버릇이 있었다. 거짓말이오? 대위가 물었다. 신부님이 오늘 여자하고 있는 걸 내 눈으로 본걸. 천만에 하고 신부가 대답했다. 다른 장교들도 이렇게 놀리는 게 재미있었다. 신부님은 여자하고 안 있었대 하고 대위는 계속했다. 신부님은 절대로 여자를 가까이 안 하거든 하고 내게도 설명을 했다. 그는 내 잔을 집어다가 술을 가득 붓고 줄곧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으나 신부에게서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신부님은 밤마다 5대 1이야. 식탁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낄낄거리고 웃었다. 알겠나? 신부님은 밤마다 5대 1이야. 그는 커다랗게 몸짓을 하고 웃어 댔다. 신부는 그런 말을 농담으로만 받아들였다. 로마 교황은 오스트리아 인이 전쟁에 이기기를 바란다는군 하고 소령이 말했다. 그분은 프란츠 요제프를 좋아하신다나. 거기서 돈이 나온다니까. 난 무신론자야. 그 <검은 돼지>라는 책 읽은 일 있소? 하고 중위가 물었다. 내 한 권 갖다 드리지. 내 신앙을 뒤흔들어 놓은 게 바로 그 책이라오. 그건 추잡하고 나쁜 책입니다 하고 신부가 말했다. 정말 그 책을 좋아한 건 아니겠죠. 굉장히 가치 있는 책인걸 하고 중위가 말했다. 신부가 어떤 족속인지 알 수 있거든. 자네도 좋아할걸세. 그는 나를 보고 말했다. 나는 신부를 향해서 미소를 던지고 그도 촛불 너머로 내게 미소를 보냈다. 그런 거 읽지 마시오 하고 그는 내게 말했다. 내 한 권 구해다 주지 하고 중위가 말했다. 사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신론자야 하고 소령이 말했다. 하지만 프리메이슨도 믿어지지 않는군. 그렇지만 나는 프리메이슨을 믿는데요 하고 중위가 말했다. 고상한 결사(結社)니까요. 그 때 누가 들어오면서 문이 열렸는데 눈 내리는 것이 보였다. 이제 눈이 왔으니까 이 이상 공격은 없겠군 하고 내가 말했다. 확실히 없을 거야. 하고 소령이 받았다. 자네는 휴가를 얻어야지. 로마나 나폴리나 시실리 섬으로 가 보지. 아말피로 가는 게 좋을걸 하고 중위가 나섰다. 아말피에 있는 내 가족한테 소개장을 써 주지. 아들이나 진배없이 귀여워할걸. 팔레르모로 가게나. 카프리가 좋아. 아브루치를 구경하고 카프라코타에 있는 내 가족을 찾아가시지 하고 신부가 말했다. 저 친구 아브루치 이야기하는 것 좀 보게. 여기보다도 눈이 더 많을 텐데 말이야. 이 사람은 농부 구경을 하고 싶은 게 아냐. 교양과 문화의 중심지로 보내야지. 멋진 여자가 있어야지. 나폴리의 좋은 곳 주소를 내 가르쳐 줌세. 어여쁜 젊은 여인들 - 어머니들이 딸렸지만 말이야. 하! 하! 하! 그는 신부를 바라보고 소리를 질렀다. 밤마다 신부님은 5대 1! 모두들 다시 껄껄거리고 웃었다. 자네 곧 휴가를 얻어야겠네 하고 소령이 말했다. 내가 따라가서 안내를 해 줬으면 좋겠네만 하고 중위가 말했다. 돌아올 때 축음기나 하나 들고 오게. 좋은 오페라 레코드판도 갖고 오게. 카루소를 가져와. 카루소는 그만둬. 고함이나 질렀지 별 수 있나. 자네는 그렇게 고함이라도 지를 줄 알았으면 싶잖나? 고함 뿐이야. 고함뿐이란 말야! 아브루치로 가는 게 좋을 거요 하고 신부가 말했다. 다른 장교들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재미있는 사냥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곳 사람들도 좋아질 거고 날씨는 춥지만 맑고 건조하지요. 우리 가족하고 같이 있을 수도 있어요. 우리 아버지는 사냥의 명수지요. 여보게들 하고 대위가 말했다. 닫기 전에 갈보집에나 가세. 안녕히. 나는 신부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히. 그도 인사를 했다. {{}}{{3 }} 내가 일선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도 우리 부대는 여전히 그 읍에 머물렀다. 근처에는 대포가 매우 늘었으며, 봄이 돌아왔다. 들판에는 푸른 기운이 서서히 감돌았으며, 포도 덩굴에는 조그만 푸른 싹이 돋았고, 가로수에도 작은 잎이 달렸으며, 바다에서 훈풍이 불어왔다. 나는 구름이 있고 그 위에 옛 성이 있고, 그 너머로 산들이 둘러선 읍을 바라보았다. 산은 갈색이었으나 산허리에는 약간 푸른색도 있었다. 읍에는 대포가 더 많아졌고, 병원도 몇 개 새로 생겼으며, 거리에서는 영국 남자나 간혹 여자를 만날 수 있었고, 집이 몇 채 더 포탄의 세례를 받은 것이 눈에 띄었다. 날씨가 따뜻하고 봄다워 벽에 비낀 햇살로 몸이 훈훈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수목 사이로 좁은 길을 걸어 내려가니까 우리 패들은 아직도 그전 집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고, 내가 떠날 때와 모든 것이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문이 열려 있고, 바깥 햇볕 아래 벤치에 군인이 한 명 앉아 있고, 옆문 곁에 앰뷸런스가 한 대 멈춰 있고, 문 안으로 들어서자 대리석 바닥과 병원 냄새가 풍겨왔다. 지금이 봄이라는 것 외에는 내가 여기를 떠나던 때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큰 방문으로 들여다보니까 소령이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창이 열려 있고, 햇빛이 방 안에 가득했다. 그는 나를 보지 못했다. 나는 들어가서 신고를 할까, 먼저 이층으로 올라가서 세수를 할까를 두고 망설였다. 이층으로 먼저 올라가기로 했다. 내가 리날디 중위와 같이 쓰는 방은 중마당을 내다볼 수 있었다. 창은 열려 있고, 내 침대에는 담요가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고, 내 소지품은 벽에 걸려 있고, 방독면은 장방형 주석 통에 들어 있고, 철모는 그대로 그 못에 걸려 있었다. 침대 발치에는 내 납작한 트렁크가 있고, 그 위에 기름으로 가죽이 번쩍이는 내 겨울 장화가 놓여 있었다. 푸른빛이 나는 팔각형 총신에, 턱에 꼭 맞는 까만 호도나무 개머리판이 달린 내 오스트리아 식 저격 소총이 두 침대 사이에 걸려 있었다. 조준 망원경은 트렁크 속에 넣어 둔 것이 기억났다. 리날디 중위는 다른 침대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내가 방 안에 들어온 소리를 듣고 그는 눈을 뜨고 일어나 앉았다. 여어! 얼마나 재미를 봤나? 굉장했지. 그는 악수를 하고 내목을 끌어안고 키스를 했다. 오우. 먼지투성이군. 세수를 해야겠네. 어딜 가서 뭘 했나? 당장 하나 빼놓지 말고 얘기하게. 안 간 데 없이 다 갔지. 밀라노, 플로렌스, 로마, 나폴리, 빌라 산 조반니, 메시나, 타오르미나 - 이 사람 기차 시간표 외나? 그래 멋있는 모험도 했나? 그럼. 어디서? 밀라노, 피렌체, 로마, 나폴리 - 그만 해 두게. 어디가 제일 멋졌나 말해 보게. 밀라노에서. 처음 간 데니까 그랬을 테지. 여자는 어디서 만났나? 코바에선가? 어디로 끌고 갔나? 기분이 어떻던가? 당장 모조리 털어놓게. 밤새도록 같이 있었나? 그럼. 그것쯤 아무것도 아냐. 이제 여기도 미인이 수두룩하다네. 일선에 처음 와 본 풋나기들일세. 멋있군. 내 말이 거짓말인 줄 아나? 오늘 오후에라도 나가서 보세. 거리에는 또 영국 미인들도 있어. 난 지금 미스 바클리와 연애 중이라네. 같이 데리고 가 주지. 난 아마 미스 바클리하고 결혼하게 될 것 같네. 세수를 하고 신고를 해야지. 요샌 모두들 놀구 먹나? 자네가 간 후로는 동상(凍傷), 황달, 임질, 과실 부상, 폐렴, 경성(硬性)에다 연성(軟性) 하감(下疳)이니 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네. 매주일 하나쯤은 바위 파편에 부상을 입었지. 정말 부상당한 녀석은 몇 안 돼. 다음 주일에는 전쟁을 다시 시작할 모양이야. 아마 시작하겠지. 모두들 그렇다고 하니까. 내가 미스 바클리하고 결혼해도 괜찮겠나 - 물론 전쟁이 끝나면 말이지. 물론이지. 나는 대답을 던지고 대야 가득히 물을 따랐다. 오늘 밤에 죄다 털어놓게 하고 리날디가 말했다. 지금은 잠을 좀더 자고 미스 바클리를 위해서 생기발랄하게 되어야겠어. 나는 군복 웃저고리와 셔츠를 벗고 대야의 찬물로 세수를 했다. 타월로 몸을 문지르면서 방 안이랑 창 밖이랑,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 있는 리날디를 둘러보았다. 그는 잘 생겼고 나와 동년배이고 아말피 출신이었다. 그는 외과 의사인 것을 만족해했고 우리 두 사람은 극진한 친구였다. 내가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가 눈을 떴다. 자네 돈 좀 있나? 있지. 나 50리라만 꾸어 주게. 나는 손을 닦고 벽에 걸린 군복 웃도리에서 지갑을 꺼냈다. 리날디는 지폐를 받아서 침대에서 일어나지고 않고 접어서 바지 호주머니에 슬쩍 집어 넣었다. 그는 미소를 띠었다. 미스 바클리에게 돈이 넉넉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줘야 한단 말이야. 자네는 내 극진하고도 알뜰한 친구고, 게다가 재정 보증인이야. 망할 친구 하고 내가 말했다. 그 날 밤에 식당에서 나는 신부 옆자리에 앉았는데, 그는 내가 아브루치에 안 갔었다는 말을 듣고 무척 실망하고 기분이 언짢은 모양이었다. 자기 부친에게 내가 갈 것이라는 편지를 보내서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는 것이었다. 나도 신부에 못지 않게 미안했으며, 왜 안 갔는지 나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나도 사실은 가고 싶었는데 연달아 일이 생기는 바람에 질질 끌려다니다 보니까 그렇게 됐다고 설명을 하려고 애를 썼고, 그도 결국은 알아듣고 내가 사실 가고 싶어했던 것을 이해했고, 그래서 그의 오해가 풀렸다. 나는 술을 많이 마셨고, 커피에다 스트레가를 마신 다음에 얼근한 기분으로, 사람이란 하고 싶은 일은 안 한다고, 절대로 안 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우리들은 다른 장교들이 떠들고 지껄이는 동안 이야기를 했다. 나는 아브루치에 가고 싶었다. 길이 얼어붙어 쇠처럼 단단하고, 기후가 카랑카랑하게 춥고 건조하며, 눈도 보슬보슬한 가루눈이고 눈 속에 토끼 발자국이 있고, 농부들이 모자를 벗고 나으리 라고 인사를 하고 훌륭한 사냥을 할 수 있는 곳에는 가 보지 못하고 말았다. 내가 간 곳이라고는 연기가 자욱한 카페, 방 안이 빙빙 돌아서 벽을 바라봐야만 그치는 밤, 술에 취해서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침대로 기어 들어가는 밤, 자다가 깨면 곁에 누운 것이 누군지도 모를 때의 이상한 쾌감, 어둠 속에서는 모든 세상이 현실 같지 않고 흥분하기 마련이어서, 밤이 되면 다시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걱정도 없이 같은 짓을 되풀이하면서, 이것이 전부고, 이것만이 전부고, 이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다짐하면서 아무 걱정도 안 하는 그런 곳뿐이었다. 갑자기 여러 가지 잡념에 불안할 때도 있어 여자를 끼고 자고 깨어난 아침이면 때로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날카롭고 딱딱하고 역력하게 생각나는 일도 있고, 때로는 숙박료로 말다툼도 한다. 어떤 때는 그대로 즐겁고 만족하고 흐뭇하기만 해서 아침도 점심도 맛이 있다. 어떤 때는 모든 즐거움이 사라지고 거리로 뛰쳐나가는 것이 반갑지만, 하루는 또 시작되고, 그러면 또 밤이 돌아온다. 밤에 관해서, 밤과 낮의 차이에 관해서, 낮이 아주 청명하고 추운 날이 아니면 밤이 훨씬 좋다는 것에 관해서 나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으나 되지 않았다. 지금도 도저히 이야기할 수가 없다. 그러나 경험한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는 그런 경험이 없었지만, 내가 사실은 아브루치에 가고 싶었으나 못 갔다는 것은 이해했고, 우리는 두 사람 사이에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취미가 같고 여전히 친구였다. 그는 내가 모르는 것, 배워도 금방 잊어버리는 것을 항상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나중에 안 일이지 그 때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는 전부 식당에 모이고, 식사가 끝났는데도 모두들 입심 좋게 떠들고 있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그치자 대위가 소리를 질렀다. 신부님이 행복하지 않군. 신부님은 여자가 없으면 행복하지 않아. 난 행복합니다. 하고 신부가 말했다. 신부님은 행복하지 않아. 신부님은 오스트리아가 전쟁에 이기기를 바라거든 하고 대위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듣고 있었다. 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요 하고 그는 말했다. 신부님은 우리가 공격하지 않기를 바라거든. 공격하지 않기를 바라는 거 아니요? 천만에. 전쟁이라면 공격도 해야 하겠지요. 공격해야지, 공격해야 하고 말고! 신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버려두라구. 소령이 말했다. 괜한 사람 가지고 그러지 말구. 신부로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을 테지. 하고 대위가 말했다. 우리는 모두 다 일어나서 식탁을 떴다. {{}}{{4 }} 아침에 이웃 뜰에 있는 대포를 쏘는 바람에 잠이 깨었는데, 해가 창으로 환히 비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께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자갈길은 눅눅하고 풀이 이슬에 젖어 있었다. 대포는 두 번 발사되었는데, 그 때마다 폭풍이 진동하고 창문이 흔들리고 내 잠옷 앞자락이 펄럭거렸다. 대포가 보이지는 않았으나 바로 우리 머리 위로 포격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필이면 그런 곳에 대포 진지가 있는 것이 귀찮은 일이지만 더 큰 포가 아닌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뜰을 내다보고 있자니까 트럭이 한 길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옷을 주워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주방에서 커피를 마시고 차고로 향해 나갔다. 긴 차고 지붕 아래에 차가 열 대 나란히 서 있었다. 지붕이 무겁고 앞면이 투박한 앰뷸런스들인데, 회색칠을 하고 꼭 포장 화물 자동차처럼 만든 것들이었다. 그 중 한 대를 기계 공병들이 마당에서 수리하고 있었다. 다른 세 대는 산중 전방 구호소에 올라가 있었다. 저 포병 진지가 포격당한 일이 있나? 하고 내가 한 기계 공병에게 물었다. 아니올시다, 중위님. 조그만 구릉으로 엄폐되어 있습니다. 모두 어때? 나쁘진 않지요. 이 차는 글렀지만 다른 차들은 움직입니다. 그는 일손을 멈추고 미소를 띠었다. 휴가 다녀오셨나요? 응. 그는 점퍼에 손을 닦고 히죽이 웃었다. 재미 많이 보셨어요? 다른 녀석들도 헤벌름하게 웃었다. 그럼 하고 나는 말했다. 이 차는 어디가 고장인가? 글러먹었어요. 이걸 고치면 저게 고장인걸요. 지금은 무슨 고장이야? 링을 가는 중입니다. 그들이 일을 하도록 버려두고 그 곳을 떠났다. 차는 엔진을 열어 놓고, 부분품을 작업대 위에 벌여 놓고 있었으므로 꼴이 흉하고 허전했다. 나는 창고 안에 들어가서 차를 한 대 한 대 점검했다. 대체로 깨끗한 편이었다. 몇 대는 새로 세차를 했고, 나머지는 흙이 묻어 있었다. 타이어에 상처나 돌로 터진 데가 없나 하고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모든 것이 잘 정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있어서 감독을 하고 안 하고에 별 차이가 없는 것이 분명했다. 차의 정비, 부속품의 입수 여부, 부상자나 병자를 전방 구호소에서 인수하여 산에서 내려와서 임시 수용소에 잠시 수용했다가 서류에 기재된 병원으로 후송하는 원활한 기능, 이런 것이 어느 정도 나 자신의 활동 여하에 달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확실히 내가 있느냐 없느냐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부속품 지급을 받는 데 무슨 애로는 없었나? 하고 나는 공병 상사에게 물었다. 아니오, 중위님. 지금은 가솔린 공급소가 어딘가? 같은 장소예요. 그래.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식탁에서 커피를 또 한 잔 마셨다. 커피는 연유를 타서 빛깔이 뿌옇고 달았다. 창 밖은 아름다운 봄 아침이었다. 콧속이 바싹 마르는 감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 낮에는 무척 더울 징조였다. 낮에는 산 위에 있는 파견 지점을 둘러보고 오후 늦게야 시가지로 돌아왔다. 내가 없는 동안에 전반적인 전황이 더욱 호전된 것 같았다. 다시 공격이 시작되리라는 소문을 들었다. 내가 근무하는 사단은 강 상류의 모 지점을 공격할 계획이었는데 소령이 공격 중의 병원차 집결소를 생각해 두라고 말했다. 공격은 상류의 좁은 산협으로, 강을 건너서 산허리 일대로 확대하게 되어 있었다. 병원차 집결지는 될 수 있는 대로 강과 접근해 있어야 하고 은폐되어 있어야 했다. 물론 보병이 장소는 선정하겠지만, 그 다음은 우리가 맡아서 해내야 했다. 이런 일을 하면 전투원이 된 것 같은 착각을 갖게 된다. 먼지를 흠뻑 뒤집어쓰고 목이 말라서 좀 씻으려고 내 방으로 올라갔다. 리날디는 휴고의 영문법 책을 들고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말쑥하게 차려 입고, 검은 장화를 신고, 머리는 기름을 발라 번쩍거렸다. 잘 왔네. 그는 나를 보더니 말했다. 나하고 미스 바클리를 보러 가세. 싫어. 가자니까. 제발 좀 같이 가서 좋은 인상을 주도록 해 주게. 그러지. 세수할 테니 기다리게. 씻고 가야 하네. 나는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둘이서 나섰다. 잠깐만. 하고 리날디는 말했다. 술을 한 잔씩 해 두는 게 좋을 거야. 그는 트렁크를 열고 술병을 꺼냈다. 스트레가가 아니군 하고 내가 말했다. 아니, 그래파야. 좋아. 그는 두 잔을 따랐다. 우리는 둘째 손가락을 편 채 잔을 서로 부딪쳤다. 그래파는 무척 독했다. 한 잔 더? 좋지. 우리는 둘째 잔을 마셨다. 리날디는 술병을 치우고 같이 계단을 내려갔다. 거리를 걸어가는데 퍽 더웠지만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해서 기분이 아주 좋았다. 영국군 병원은 전쟁 전에 독일인이 지은 큰 별장이었다. 미스 바클리는 정원에 있었다. 다른 간호사와 같이 있었다. 나무 사이로 그들의 흰 제복이 보이기에 그리로 걸어갔다. 리날디가 인사를 했다. 나도 인사를 했는데 리날디보다 점잖게 했다. 안녕하세요? 하고 미스 바클리가 말했다. 이탈리아 인이 아니시죠? 아, 아닙니다. 리날디는 다른 간호사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소리를 내서 웃고 있었다. 이상하시네요 - 이탈리아 군대에 계시다니. 사실은 군대가 아닙니다. 앰뷸런스 일이니까요. 그래도 이상하지 뭐에요. 왜 그렇게 되셨어요? 모르지요. 모든 일이 다 설명 가능한 건 아니니까요. 그럴까요? 난 가능한 거라고 배웠는데요. 그것 참 대단한 일이군요. 이렇게 자꾸만 토론조로 이야기를 해야 하나요? 천만에요. 그럼 안심이에요. 그렇죠? 그 막대기는 뭡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 미스 바클리는 키가 매우 컸다. 간호사 제복이라고 생각되는 옷을 입었고, 금발이며 엷은 갈색 살갗에 눈은 회색이었다. 퍽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가죽으로 싼 장난감 말채찍 같은 가는 등나무 단장을 갖고 있었다. 작년에 전사한 어떤 청년이 갖고 있던 거예요. 참 안됐습니다.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요. 나하고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솜에서 전사했어요. 처참한 전투였지요. 당신도 참전하셨어요? 아니요. 저도 이야기만 들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여기서는 그런 전투는 없군요. 내게 이 조그만 단장을 보내 줬어요. 그이 어머니가 보냈어요. 유품하고 같이 본집에 부쳤던가 봐요. 약혼 기간이 오랬나요? 8년간. 같이 자라났어요. 그럼 왜 결혼을 안 하셨나요? 모르겠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바보라서 안 했겠죠 뭘. 그걸 허락할 수 있었는데. 그이한테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알겠습니다. 누굴 사랑해 보신 일 있어요? 없는데요. 하고 내가 대답했다. 우리는 벤치에 앉았고, 내가 그녀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머리가 아름다우십니다. 이런 머리 좋아하세요? 네, 무척. 그이가 죽었을 때는 모두 잘라 버리려 했지요. 그래선 안 되지요. 그이를 위해서 뭘 해 주고 싶었어요. 난 다른 건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이한테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었던 거예요. 내가 그걸 알기만 했어도 그이는 소원대로 뭐든지 가질 수 있었을 거예요. 결혼을 하든지, 무슨 짓이든지 했을 거예요. 인제야 모든 걸 알게 됐어요. 그렇지만 그 때 그이는 전쟁에 나가고 싶어했고, 난 아무것도 몰랐거든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땐 정말 아무 것도 몰랐어요. 그런 짓을 하면 그이한테 해로울 것만 같았어요. 그이가 마땅치 않게 생각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결국 전사를 했고 아주 끝장이 나버린 거예요. 모르겠는데요. 네, 그랬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정말 끝장이 난걸요. 우리는 리날디가 다른 간호사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저 여자 이름은 뭡니까? 퍼거슨. 헬렌 퍼거슨이에요. 당신 친구는 의사라죠? 네 좋은 친굽니다. 참 다행이시군요. 이렇게 최전방에서는 좋은 사람을 만나기란 흔치 않으니까요. 여기가 최전방이지요? 그렇죠. 싱거운 일선이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지만 퍽 아름다워요. 공격을 할 모양인가요? 그렇답니다. 그럼 우리도 일거리가 생기겠군요. 지금은 놀고 있어요. 간호사 노릇은 오래 하셨어요? 1915년 말경부터예요. 그이가 출정하는 것과 동시에 시작했지요. 내가 있는 병원에 그이가 올지도 모른다는 쑥스러운 생각이었어요. 군도(軍刀)로 상처를 입어 머리에 붕대를 두르고 말이에요. 어깨에 관통상을 입었거나. 하여간 무슨 그림 같은 환상을 그리고 있었어요. 여기는 정말 그림 같은 일선입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그래요. 사람들은 프랑스가 어떤 나라인지 인식하지 못했던 거예요. 알았다면 이런 일이 계속되지는 않았겠죠. 그이는 군도로 부상을 입긴 커녕 산산조각이 나버렸죠. 나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노상 이 모양일까요? 그렇진 않겠죠. 어떻게 하면 중지가 될까요? 어디서든 파탄이 일어나겠지요. 우리가 파멸할 거예요. 프랑스에서 파멸할 거예요. 솜에서 하는 식으로 하다가는 파멸 안 될 리가 없어요. 여기서는 파멸 안 당할 테지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안 될 거예요. 작년 여름에는 잘 싸웠어요. 그래도 파멸될지 몰라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파멸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그야 독일군도 마찬가지지요. 아니에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는 리날디와 미스 퍼거슨이 있는 데로 갔다. 이탈리아를 좋아하세요? 리날디가 미스 퍼거슨에게 영어로 물었다. 좋아하구 말구요. 못 알아듣겠는데. 리날디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바스탄테 베네 하고 내가 통역을 해 주었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좋을 것도 없지요. 당신은 영국을 좋아하시나요? 별로 안 좋아요. 난 스코틀랜드 태생인걸요. 리날디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이 여자는 스코틀랜드 인이래. 그래서 영국보다 스코틀랜드가 좋대 하고 나는 이탈리아 어로 말했다. 그렇지만 스코틀랜드도 영국이니까. 나는 이 말을 미스 퍼거슨에게 통역했다. 그렇지 않아요. 하고 미스 퍼거슨이 말했다. 정말 아니에요? 그럼요. 우리는 영국인을 싫어해요. 영국인을 싫어해요? 그럼 미스 바클리도 싫으세요? 아이, 그거야 다르지요. 이분도 스코틀랜드 피가 섞였어요. 그렇게 뭐든지 고지식하게 해석하시면 안 돼요. 잠시 후에 우리는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났다. 집으로 걸어 돌아오는 길에 리날디가 말했다. 미스 바클리는 나보다 자네가 좋은 모양이야. 명백한 사실이야. 그렇지만 그 스코틀랜드 여자도 퍽 좋군 그래. 그래 말야 하고 나도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별로 눈여겨 보지 않았었다. 그 여자가 좋아졌나? 아니 하고 리날디가 대답했다. {{}}{{5 }} 다음 날 오후에 나는 재차 미스 바클리를 찾아갔다. 그녀가 정원에 없어서 앰뷸런스가 서 있는 별장 옆문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간호부장을 만났다. 미스 바클리는 근무 중이라고 했다. "잘 아시겠지만 전쟁 중이니까요." 나도 안다고 말했다. "당신은 이탈리아 군에 있는 미국인입니까?" "그렇습니다, 간호부장님." "어떻게 그렇게 되셨어요? 왜 우리 군에 입대하시지 않았나요?" "모르겠어요, 지금이라도 입대할 수 있나요?" "지금은 안 되겠지요, 아마. 알구 싶어요. 왜 이탈리아 군에 입대하셨어요?" "이탈리아에 있었지요. 이탈리아 말도 할 줄 알고." "그래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난 배우는 중이에요. 아름다운 언어지요." "어떤 사람은 두 주일이면 배울 수 있다고 했지요." "아유, 난 두 주일엔 못 배우겠어요. 벌써 한 달째나 배우는걸요. 원하신다면 일곱 시 이후에나 와서 만나세요, 그 때는 비번이니까요. 그렇지만 이탈리아 인을 잔뜩 끌고 오지는 마세요." "그렇게 언어가 아름다운데도 안 됩니까?" "안 돼요. 군복도 아름답지만 안 돼요." "안녕히" 하고 내가 인사를 했다. "또 뵙겠어요, 중위님." "또 뵙겠습니다." 나는 경례를 하고 나왔다. 외국인에게 이탈리아 인에게 하는 것처럼 경례를 하기란 어색하기 짝이 없다. 이탈리아 식 경례는 수출용으로 만든 게 아닌 모양이다. 그 날은 더웠다. 나는 강 상류의 교두보(橋頭堡) 플라바까지 갔다왔다. 공격을 시작할 예정인 지점이었다. 고개에서 주교(舟橋)까지 내려가는 길은 하나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거의 1마일이나 기관총과 포탄의 사격 거리 내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작년에는 대안(對岸)까지 진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길은 공격에 필요한 전 차량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넓지 못했고, 오스트리아 군으로서는 이 도로를 강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군은 도강(渡江)에 성공했고, 대안 지대로 약간 진출해서 오스트리아 군측 강둑을 1마일 반 가량 확보했다. 굉장히 곤란한 지점이어서 오스트리아 군도 그대로 점령당한 채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오스트리아 군 역시 강 하류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있었으니까 서로 피장파장이었는지도 모른다. 오스트리아 군의 참호는 이탈리아 군 전선에서 불과 몇 야드 거리밖에 안 되는 산허리에 있었다. 조그만 읍이 하나 있었는데 지금은 엉망진창이었다. 기차 정거장의 잔해가 있었고 파괴된 철교가 있었지만, 시계(視界)에 드러나 있기 때문에 이것을 수리해서 사용할 수는 없었다. 나는 좁은 길을 따라 강까지 내려가서 언덕 밑에 있는 전방 구호소에서 차를 버리고 산등성이로 엄폐되어 있는 주교를 건너서 파괴된 읍에 있는 참호를 지나 경사진 비탈의 끝까지 가 보았다. 모두들 참호 속에 있었다. 포병의 엄호 사격을 청하거나 전화선이 절단되었을 때 신호를 하기 위해서 발사 준비를 갖춘 신호대가 세워져 있었다. 그곳은 조용하고 덥고 더러웠다. 나는 철조망 너머로 오스트리아 군 전선을 바라보았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안 보였다. 한 참호에서 아는 대위를 만나 술을 한잔하고 다리를 건너 돌아왔다. 산을 넘어서 다리까지 꼬불꼬불 내려가는 넓은 새 도로가 거의 완성 단계에 있었다. 이 도로가 완성되면 공격이 시작될 것이다. 그 길은 몇 번 급커브를 돌아 숲을 지나게 되어 있었다. 모든 보급은 이 새로 만든 도로로 하고, 빈 트럭이나 짐마차, 부상병을 실은 앰뷸런스, 그 밖에 모든 후송 차량은 좁은 구도(舊道)를 사용한다는 계획이었다. 전방 구호소는 오스트리아 군측 대안의 산기슭에 있었고, 담가병(擔架兵)이 부상자를 주교로 나르기로 되어 있었다. 공격이 시작되더라도 이것은 변동이 없을 것이다. 내가 상황 판단을 한 바에 의하면 길이 평탄해지기 시작하는 신작로의 마지막 1마일 가량은 오스트리아 군의 집요한 포격을 받을 수 있었다. 굉장한 아수라장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차가 그 마지막 난관을 통과한 후에는 엄폐되어서 주교를 건너 운반되는 부상자를 기다릴 수 있을 만한 장소를 나는 발견했다. 신작로를 차로 한번 지나 보고 싶었으나 아직 미완성이었다. 폭이 넓고 경사도 적당하게 잘 닦은 길이라 산허리에 있는 숲의 공지 사이로 바라보면 퍽 인상적이었다. 차는 강력한 브레이크 장치가 돼 있으니까 괜찮고, 아무래도 내려오는 길은 빈 차니까 염려가 없었다. 나는 좁은 길로 차를 몰고 돌아왔다. 헌병 두 명이 차를 정지시켰다. 포탄이 한 발 떨어졌다는 것인데, 기다리는 동안에 또 세 발이 도로 위에 떨어졌다. 77밀리 포탄인데 공기를 가르고 쉿쉿 소리를 내며 날아와서 맹렬한 폭발을 하고 불이 번쩍 나고는 회색 연기가 길 위를 건너갔다. 헌병이 통과하라는 신호를 했다. 포탄이 떨어진 지점을 통과하면서 길이 파괴된 곳을 피해 갔는데, 코를 찌르는 화약 냄새와 폭발된 흙과 돌, 금방 깨진 부싯돌 냄새가 풍겼다. 나는 고리치아의 우리가 들어 있는 별장까지 돌아왔다가 아까 말한 것처럼 미스 바클리를 만나러 갔는데 근무 중이었던 것이다. 저녁 식사를 부지런히 마치고 영국군이 병원으로 쓰고 있는 별장으로 갔다. 정말 넓고 아름다운 집이고 뜰에는 훌륭한 수목들이 많았다. 미스 바클리는 정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미스 퍼거슨이 같이 있었다. 그들은 나를 무척 반겼고 잠시 후에 미스 퍼거슨은 핑계를 대고 가려고 했다. "두 분만 두고 가야겠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내가 없어도 아쉬울 것 없으실 테니까요." "가지 말아, 헬렌" 하고 미스 바클리가 말했다. "정말 가야겠어. 편지를 좀 써야겠어." "안녕히 주무세요." 하고 내가 말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미스터 헨리." "검열관 귀찮게 할 소리 일랑 쓰지 마라." "걱정 마. 난 우리가 사는 곳이 얼마나 아름답고 이탈리아 인이 얼마나 용감한가 하는 이야기만 쓰니까." "그렇게만 하면 훈장을 탈 거야." "그랬으면 멋있겠네. 안녕, 캐서린." "조금 있다 만나" 하고 미스 바클리는 말했다. 미스 퍼거슨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좋은 여자군요." 하고 내가 말했다. "아 그럼요, 참 좋아요. 간호사예요." "당신은 간호사가 아닌가요?" "네, 아니에요. V.A.D라고 임시 간호사라는 거예요. 우리는 죽도록 일을 해도 아무도 신용을 안 해요." "왜 그런가요?" "별로 일이 없으면 우리 같은 건 신용을 안 하지요. 정말 일이 생기면 신용하구요." "뭐가 다른가요?" "간호사는 의사 같은 거예요. 되려면 오랜 시일이 걸려요. 임시 간호사는 단기로 되지요." "알겠습니다." "이탈리아 군은 여자가 일선 가까이 오는 것을 원치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특별히 행동을 조심해요. 외출도 안 해요." "그래도 내가 이리로 올 수 있지요." "아, 그야 그렇죠. 우리는 수녀원에 들어 있는 건 아니니까요." "전쟁 얘기는 집어치웁시다." "그러지요." 우리는 어둠 속에서 서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퍽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을 주고 가만히 있기에 손을 쥔 채 한 팔로 겨드랑이를 껴안았다. "안 돼요." 나는 팔을 내리지 않았다. "왜요?" "안 돼요." "아니, 간청합니다." 나는 키스하려고 어둠 속에서 몸을 앞으로 구부리는 순간 따끔하고 눈에서 불이 번쩍했다. 그녀가 내 뺨을 힘껏 갈겼던 것이다. 그녀 손이 내 코와 눈을 쳐서 반사적으로 눈물이 나왔다. "미안해요" 하고 그녀는 사과했다. 나는 내가 어떤 유리한 조건을 얻었다고 느꼈다. "당연하시지요." "정말 미안해 죽겠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저 비번인 간호사는 밤이면 으레 그러리라고 여겨지는 게 견딜 수 없었어요. 기분 상하게 해 드릴 생각은 없었어요. 기분 상하셨죠?" 그녀는 어둠 속에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화가 났으나 자신이 있었다. 장기에서 말을 움직이는 것처럼 앞이 환히 내다보였다. "정말 당연한 행동이었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난 조금도 언짢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겸손하시네요." "난 말이지요, 묘한 생활을 해 왔습니다. 심지어는 영어를 지껄일 기회도 없었으니까요. 그러다가 당신이 하도 아름답기에 그만 - "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쓸데없는 말씀은 그만두세요. 미안하다고 말씀드렸으니까요. 이제 화해한 거예요." "그럼요" 하고 내가 말했다. "그러구 전쟁도 멀리 쫓아 버렸구요." 그녀는 웃었다. 그녀가 웃는 소리는 처음 들었다. 나는 그녀 얼굴을 가만히 지켜 보았다. "좋은 분이세요." "아니, 그렇지도 않지요." "그래요. 좋은 분이에요. 괜찮으시다면 키스해 드리겠어요." 나는 그녀 눈을 들여다보면서 아까처럼 한 팔로 끌어안고 키스를 했다. 열렬한 키스를 하고 힘껏 껴안은 채 그녀 입술을 벌리려고 했다. 꼭 다문 채로 였다. 나는 그래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껴안고 있는데 그녀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더욱 바싹 끌어안자 그녀 심장의 고동이 느껴지고 입술이 열리고, 내 손에 머리를 떨어뜨리고 어깨에 기대어 울고 있었다. "여보세요, 나한테 잘해 주시지요, 네?" 별꼴 다 보겠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러시죠, 네?"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제부터 이상한 생활을 하게 될 테니까요." 한참 후에 같이 별장 현관문까지 걸어가서 그녀는 들어가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는 길로 이층 내 방으로 올라갔다. 리날디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미스 바클리하고 진전이 있었나?" "친구 사이야." "암내 맡은 개처럼 즐거운 모양인데."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뭐라구?" 그는 설명을 했다. "자네도 즐거운 상인데. 꼭 개가 - " "그만두세" 하고 그가 말했다. "이러다간 조금 있으면 서로 욕이 나오겠네." 그는 껄껄 웃었다. "잘 자게." "잘 자게, 강아지군." 나는 베개로 그의 촛불을 때려 엎고는 어둠 속에서 자리에 들었다. 리날디는 초를 집어다가 불을 켜고 책읽기를 계속했다. {{}}{{6 }} 나는 이틀 동안 전방 거점에 나가 있었다.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너무 늦어서 미스 바클리를 만나러 가지 못했고, 다음 날 저녁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녀가 정원에 없어서 병원 사무실에서 내려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들이 사무실로 쓰고 있는 방 벽을 따라 페인트 칠한 목제(木製) 둥근 기둥이 늘어서 있고, 그 위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흉상(胸像)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사무실과 통하는 복도에는 그런 흉상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모든 흉상은 대리석이 갖는 특성을 완전하게 발휘해서 그저 그게 그것 같았다. 조각이란 본래가 싱거운 것이지만 - 그래도 청동은 뭣 같아 보인다. 하지만 대리석 흉상이란 꼭 묘지를 바라보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긴 훌륭한 묘지가 한 군데 있기는 하다. 피사의 묘지이다. 제노아는 대리석의 나쁜 표본이 될 만한 곳이었다. 이 집은 무척 돈 많은 독일인의 별장이었다니까 저 흉상들도 비싼 물건임에 틀림없다. 누가 만들었으며, 얼마나 받았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모두가 가족들의 흉상일까, 아니면 누굴까 하고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모두가 한결같이 고전적이었다. 아무리 봐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물건들이었다. 나는 모자를 쥔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우리는 고리치아에서도 철모를 쓰도록 되어 있었으나 첫째 불편하고 아직 민간인이 피난하지 않고 있는 시가지에서는 너무 과장하는 것도 같았다. 전방 거점에 갈 때는 철모를 쓰고 영국제 방독면도 가지고 갔다. 그 때 바로 영국제가 지급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은 정말 방독면다운 물건이었다. 그리고 자동 권총도 반드시 휴대하라는 명령이었다. 군의관이나 위생 장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의자 등에 그것이 배기는 것을 느꼈다. 잘 보이는 곳에 차고 다니지 않는 날에는 체포를 당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리날디는 휴지를 쑤셔넣은 권총집을 차고 다녔다. 나는 진짜 권총을 찼는데 사격 연습을 하기 전에는 마치 권총 강도 같은 기분이었다. 총신이 짧은 7.65구경 아스트라 권총인데 사격을 하면 반동이 심해서 무엇을 명중시킨다는 것은 말도 안 되었다. 나는 사격 연습을 했는데, 과녁보다 약간 아래를 겨누고 기묘하게 생긴 짧은 총신의 반동에 익숙해지려고 애를 썼다. 그 결과 20보 거리에서 과녁의 1야드 이내를 맞힐 수는 있게 되었지만, 도대체 권총을 휴대하는 쑥스러움을 느끼다가도 이내 잊어버리고 그저 영어를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막연한 일종의 수치감을 느끼는 외에는 태연하게 가는 허리에다 그것을 달고 다녔다. 나는 의자에 앉아서 대리석 바닥이며 대리석 흉상이 놓인 둥근 기둥이며 벽에 그린 벽화 같은 것을 구경하면서 미스 바클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당번병 비슷한 친구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책상 너머로 바라보았다. 벽화는 괜찮은 편이었다. 하기야 벽화라는 것은 채색이 갈라져서 비늘처럼 떨어질 때가 되면 다 좋아 보이는 법이다. 나는 캐서린 바클리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일어났다. 나를 향해 걸어오는 그녀는 키가 별로 커 보이지 않았지만 무척 사랑스러웠다. 안녕하세요, 미스터 헨리? 하고 그녀가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나도 인사를 했다. 당번병이 책상 뒤에서 듣고 있었다. 여기 앉을까요, 밖으로 나갈까요? 나가지요. 밖이 훨씬 시원해요. 나는 그녀 뒤를 따라 정원으로 나갔다. 당번병이 우리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갈길까지 나오자 그녀가 물었다. 어디 가셨었어요? 전방 거점에 나가 있었죠. 쪽지라도 보내실 수 없었어요? 네, 잘 안 되더군요. 곧 돌아올 생각이구 해서. 그렇지만 알려 주셔야 했을 거예요. 우리는 차도를 벗어나서 나무 밑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녀 손을 잡고 걸음을 멈추고 키스를 했다. 어디 갈 만한 데가 없을까? 안 돼요. 여기서 그냥 걸어야 해요. 오래 안 오셨어요. 오늘이 사흘째지요. 그렇지만 이제 이렇게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저를 사랑하세요? 그럼. 전에도 사랑한다고 그러신 일 있죠, 네? 그럼요. 나는 거짓말을 했다. 사랑합니다. 전에 그런 말을 한 일은 없었다. 그리구 캐서린이라고 불러 주시겠어요? 캐서린. 우리는 조금 더 걸어가 어느 나무 아래에서 걸음을 멈췄다. 나는 밤에 캐서린에게로 돌아왔노라 그래 보세요. 나는 밤에 캐서린에게로 돌아왔노라. 아이, 당신 정말 돌아오셨지요? 그럼. 당신을 사랑해요. 그래서 무서웠어요. 이젠 가버리지 않지요? 천만에. 반드시 돌아오지요. 아이, 정말 사랑해요. 거기다 손을 다시 한 번 놔 주세요. 뗀 일이 없는걸. 키스할 때 얼굴이 보이도록 그 여자가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는데,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감은 눈에도 키스를 했다. 이 여자가 아무래도 너무 열을 올리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더라도 상관없다. 내가 어떤 지경에 빠지건 알 게 뭐냐. 저녁마다 장교용 갈보 집에 가서 계집애들이 우글우글 덤벼들고, 친구 장교들과 빈번히 이층으로 오르내리면서 애정의 표시랍시고 군모를 거꾸로 씌워 주고 하는 것보다는 이편이 훨씬 낫다. 나는 내가 캐서린 바클리를 사랑하고 있지 않고, 전혀 그럴 생각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카드놀이의 브리지나 마찬가지로 일종의 장난이다. 그저 카드를 갖고 하는 대신에 말로 하는 것이다. 브리지처럼 돈이나 그 밖에라도 건 것을 위해서 노름을 하는 체하면 된다. 건 것이 뭔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어디 다른 데 갈 데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하고 내가 말했다. 오래 서서 연애를 할 때 남성이 겪는 불편을 나도 경험하고 있었다. 아무 데도 갈 데가 없어요 하고 그 여자가 말했다. 그 여자의 생각은 지금까지 어디를 헤매고 있었던지 이제야 제자리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잠시 저기 앉아 있을 수 있지요. 우리는 평평한 돌 벤치에 앉고 나는 캐서린 바클리의 손을 쥐었다. 허리를 껴안지는 못하게 했다. 무척 고단하세요? 아니. 그 여자는 풀밭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우리가 치사한 장난을 하고 있는 거죠? 무슨 장난? 모르는 체하지 마세요. 일부러 모르는 체하는 게 아닌데. 좋은 분이세요. 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익숙한 선수처럼 솜씨 있게 하셔요. 그렇지만 치사한 장난이에요. 당신은 언제든지 남의 생각을 잘 아시오? 언제든지는 아니지만요. 당신 생각은 알아요. 나를 사랑하는 체하실 필요는 없어요. 오늘 저녁에는 이 정도로 그만둬요. 뭐 더 하실 말씀 있어요? 그래도 난 당신을 사랑합니다. 제발 그럴 필요가 없는데 거짓말은 그만두도록 합시다. 저도 아까는 제법 멋있는 연극을 했지만 지금은 제정신으로 돌아왔어요. 전 미치지도 않았고 정신이 나간 것도 아니에요. 어쩌다가 더러 그럴 때가 있어요. 나는 그 여자 손을 꼭 쥐었다. 사랑하는 캐서린. 이젠 아주 묘하게 들려요 - 캐서린이라고 하시는 게. 발음이 아까 같지 않아요. 그렇지만 당신은 퍽 좋으신 분이에요. 아주 착한 분이에요. 신부가 한 말과 같군요. 네, 참 착하세요. 그런데 또 저를 만나러 오시겠죠? 물론. 그런데 저를 사랑한다는 말씀은 하실 필요가 없어요. 당분간 그런 건 걷어치우기 에요. 그 여자는 일어나서 손을 내밀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나는 키스를 하려고 했다. 안 돼요. 전 고단해서 죽겠어요. 그래도 키스해 줘 하고 내가 말했다. 정말 고단해서 죽겠어요. 키스해 줘. 그렇게 하고 싶으세요? 그럼. 우리는 키스를 했다. 그 여자는 갑자기 뿌리치고 물러났다. 안 돼요, 안녕히 주무세요. 우리는 문간까지 걸어갔다. 나는 그 여자가 문 안으로 들어가서 복도로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여자가 움직이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는 것이 좋았다. 그 여자는 복도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집을 향해서 걸어갔다. 더운 밤이었고 산에서는 활발한 전투가 있는 모양이었다. 산가브리엘레 쪽에 번쩍이는 포화를 나는 가만히 지켜 보았다. 나는 빌라 로사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겉창을 닫은 다음이었으나 안에서는 아직도 술판이 계속중이었다. 누군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옷을 벗는데 리날디가 들어왔다. 아하! 하고 그는 말했다. 잘 안 된 모양이군. 애기가 심술이 났는데. 어디 갔다오나? 빌라 로사에 있었지. 배운 게 많았다네. 이 애기야. 전부 노래를 불렀지. 자네는 어디 갔었나? 영국인을 방문했지. 아이구, 내가 그 영국인에게 휩쓸려들지 않기를 천만다행이군. {{}}{{7 }} 다음날 오후, 산의 제일 거점에서 돌아온 나는 임시 수용소 앞에 차를 세웠다. 부상자와 병자는 서류에 따라 여기서 분류되고, 각각 다른 후방 병원으로 후송하는 서류가 작성되는 곳이었다. 나는 거기까지 차를 타고 가, 차 안에 앉아 있으니 운전수가 서류를 가지고 왔다. 더운 날이고 하늘은 무척 맑고 푸르고 길은 희고 먼지가 일었다. 나는 피아트 차(車)의 높은 좌석에 앉은 채 아무 생각도 않고 멍하니 있었다. 어떤 연대가 옆은 통과하는데 나는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병사들은 더워서 땀을 흘렸다. 철모를 쓴 병사도 있었으나 대개는 배낭에다 매달고 갔다. 거의 대부분의 철모는 너무 커서 쓴 사람의 귀를 덮은 지경이었다. 장교들은 전부 철모를 쓰고 있었다. 훨씬 잘 맞는 철모였다. 그들은 브리가타 바실리카타 연대 장병의 반수(半數)였다. 붉은색과 흰색 줄무늬로 된 그들의 휘장으로 알 수 있었다. 연대가 통과한 지 한참 후에 낙오자들이 따랐다 - 자기 소대를 따라가지 못한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땀과 먼지투성이로 피로해 있었다. 그중에는 몹시 나빠 보이는 병사도 있었다. 그는 다리를 절고 있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길가에 주저앉았다. 나는 차에서 내려서 가까이 갔다. 어떻게 된 거야? 그는 나를 바라보더니 일어났다. 가겠습니다. 어디가 잘못된 거야? - 전쟁이죠. 자네 다리가 어떻게 잘못된 건가 말이야? 다리가 아닙니다. 탈장입니다. 그럼 왜 차를 타고 가지 않았어? 하고 내가 물었다. 왜 병원에 가 보지 않았나? 보내 줘야지요. 중위님은 내가 고의로 탈장대(脫腸帶)를 빠뜨렸다고 하십니다. 어디 좀 보자. 많이 나와 있어요. 어떤 쪽이야? 여기에요. 나는 만져 보았다. 기침을 해 봐. 더 커질까 봐 겁납니다. 오늘 아침보다도 배나 커졌어요. 거기 앉아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이 부상자들 서류만 받으면 내가 태워 가지고 가서 너희 부대 군의관에게 인계해 줄 테니. 고의로 했다고 하실 겁니다. 군의라도 별 수는 없겠지. 하고 내가 말했다. 부상이 아니니까. 전부터 그렇지, 안 그런가? 그렇지만 탈장대를 잃어버렸으니까요. 너를 병원으로 보내 줄 거야. 제가 여기 있을 수는 없을까요, 중위님? 그건 안 돼. 너는 여기 서류가 없으니까. 운전수가 차 안에 있는 부상자의 서류를 가지고 나왔다. 105호에 네 명, 132호에 두 명입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둘 다 강 건너 병원이었다. 네가 운전해 하고 나는 명령했다. 탈장된 병사를 도와서 좌석에 앉혔다. 영어를 하시나요? 하고 그가 물었다. 그럼. 이놈의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긋지긋하지. 정말 지긋지긋해요. 하느님께 맹세코 정말이지 지긋지긋해요. 미국에 있었나? 그럼요. 피츠버그에요. 중위님이 미국인인 줄 대번에 알았습니다. 내 이탈리아 말이 서투른가? 하여튼 금방 미국인인 줄 알았어요. 이 사람도 미국인이군요. 운전사가 탈장한 병사를 돌아보며 이탈리아 말로 말했다. 저 보세요, 중위님. 저를 꼭 그 연대로 데리고 가야 합니까? 그럼. 군의관 대위는 내가 탈장인 걸 알고 있거든요. 그놈의 탈장대는 내버렸어요. 탈장이 심해지면 다시는 일선에 안 돌아가도 될 테니까요. 옳아. 어디 다른 데로 데려다 주실 수는 없으세요? 좀더 일선 가까운 곳이라면 응급 구호소 같은 데로 갈 수도 있지. 그렇지만 이렇게 떨어진 곳에서는 역시 서류를 갖춰야 해. 부대로 돌아가면 수술을 해 가지고 밤낮 일선에도 놔둘 겁니다. 나도 잘 생각해 보았다. 중위님도 밤낮 일선에 계시고 싶진 않으시죠, 안 그러세요? 하고 그는 물었다. 물론이지. 원 참, 정말이지 빌어먹을 놈의 전쟁 아니에요? 이봐 하고 나는 말했다. 여기서 내려서 길가에 아무 데나 쓰러져서 머리에 혹이라도 만들어. 그러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태워다가 어디 병원으로 보낼 테니. 여기서 차를 세워라, 알도. 우리는 길가에서 정지했다. 나는 그를 도와 내려 줬다. 꼭 여기 있겠습니다, 중위님. 하고 그는 말했다. 나중에 보자구. 우리는 계속해서 차를 몰아 1마일쯤 전방에서 연대를 지나치고 강을 건넜다. 강은 눈 녹은 물로 흐려 있었고, 다릿발 사이로 물살이 빠르게 흘렀다. 강을 건너서 들판을 가로질러 두 병원에 부상자를 내려놓았다. 귀로에는 내가 차를 몰고, 빈 차이기 때문에 피츠버그에서 온 병사를 찾으려고 속력을 내었다. 먼저 연대를 지나쳤다. 아까보다도 더 더위에 허덕이고 동작이 더 느렸다. 다음에는 낙오자들을 지나쳤다. 그러자 부상자 운반용 마차가 길가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두 병사가 탈장한 병사를 들어서 마차에 태우는 중이었다. 그를 찾으러 되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는 나를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철모가 벗겨지고 이마에는 머리털이 난 아래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코고 벗겨지고 상처난 곳에는 먼지가 묻고 머리도 온통 먼지투성이었다. 이 혹 좀 보세요! 그는 소리를 질렀다. 할 수 없군요. 나를 데리러 돌아왔대요. 별장에 돌아왔을 때는 다섯 시였다. 나는 차 씻는 데로 나가서 샤워를 했다. 그리고는 내 방의 열어 젖힌 창 앞에 바지와 셔츠 바람으로 앉아서 보고서를 꾸몄다. 이틀 후에는 공격을 개시할 계획이었고, 나는 병원차를 따라서 플라바로 가게 되어 있었다. 미국에 편지를 보낸 지 오래되었지만 써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차일피일하다 보니 이제는 영 써질 것 같지가 않았다. 쓸래야 쓸 말도 없었다. 야전용 엽서를 두어 장 부쳤다. 내가 잘 있다는 말 이외에는 아무 말도 쓰지 않았다. 이만해도 그들을 대접하는 편이다. 이런 엽서는 미국에서는 이상하고 신비롭기 때문에 퍽 귀중한 것이다. 여기도 이상하고 신비로운 전쟁 지대지만 오스트리아 군과 대치하고 있는 다른 전선에 비하면 썩 질서가 잡히고 치열한 편이었다. 오스트리아 군대는, 나폴레옹을 승자로 하기 위해 만들어진 군대였다. 어떤 나폴레옹이건 상관없었다. 우리도 나폴레옹이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런 건 없고 비만하고 원기 왕성한 카도르나 장군에다가 황새 목에 염소 수염을 기른 체소(體小)한 사나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왕뿐이었다. 전선 우익에는 아오스타 공작(公爵)이 있었다. 그는 너무 미남이라 위대한 장군으로서는 부적당했지만 남자다운 풍채였다. 이 사람을 왕으로 삼았으면 하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사실 그는 왕처럼 보였다. 국왕의 숙부로 제 3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우리가 속해 있는 것은 제 2군이었다. 제 3군에는 영국군 포병대가 약간 있었다. 나는 밀라노에서 그 부대의 포병을 두 사람 만났다. 아주 재미있는 사람들이어서 같이 하룻밤을 통쾌하게 즐겼다. 그들은 몸집이 크고 수줍어하고 곧잘 어리둥절해했으며 뭣이든지 재미있어했다. 나도 영국군하고 같이 있었으면 싶었다. 그편이 훨씬 간단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됐더라면 혹 벌써 전사를 했을지도 모른다. 앰뷸런스 근무를 하니까 살아 남은 것이다. 아니 그렇지만 앰뷸런스 근무로도 죽을 수 있다. 영국 앰뷸런스 운전병은 가끔 전사한다. 어쨌든 나는 전사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 전쟁에서 죽기는 싫다. 나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전쟁이다. 나로서는 영화에서 구경하는 전쟁 이상으로 위험한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빨리 끝나 주었으면 하고 간절하게 바란다. 아마 금년 여름쯤은 끝날지도 모른다. 아마 오스트리아 군이 굴복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다른 전쟁에서도 늘 굴복했으니까. 이놈의 전쟁은 어떻게 된 셈인가? 프랑스는 벌써 녹았다고 누구나가 말하고 있다. 프랑스 군이 반란을 일으켜서 군대가 파리로 진입했다고 리날디는 말했다. 내가 어떻게 된 셈이냐고 물으니까 리날디는 그저 아, 그건 진압되었어 라고 말했다. 전쟁 없는 오스트리아에 가 보고 싶다. 블랙 포리스트에 가 보고 싶다. 하르츠 산맥에도 가 보고 싶다. 대관절 하르츠 산맥은 어디 있는가? 카르파티아에서는 전투 중이다. 도대체 그런 데는 가 보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거기도 좋을는지 모른다. 전쟁만 없다면 스페인으로 갈 수도 있다. 해가 넘어가면서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저녁을 먹고 캐서린 바클리를 만나러 가야겠다. 지금 여기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녀와 밀라노에 있다면 좋겠다. 코바에서 식사를 하고, 더운 오후에 만초니 거리를 산보하고 운하를 건너 둑을 따라 구부러져서 캐서린 바클리를 데리고 호텔에 갔으면 좋겠다. 아마 그녀도 찬성할 것이다. 그녀는 아마 나를 전사한 자기 애인 취급을 하고 둘이서 현관문을 들어서면 포터가 모자를 벗고, 나는 관리인 책상 앞에 걸음을 멈추고 열쇠를 달라 하고, 그녀는 승강기 옆에 서 있다가 같이 승강기를 타고, 승강기는 매층 짤각 소리를 내면서 느린 속도로 올라가서 마침내 우리 방이 있는 층에 닿아 보이가 문을 열고 서 있으면 그녀가 내리고 나도 따라 내려 함께 복도를 걸어가서 내가 열쇠로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전화기를 들고, 카프리 비앙코 한 병하고 은그릇에 얼음을 가득 넣은 것을 가져오라고 하면 이내 얼음이 그릇에 부딪치는 소리가 복도를 따라 가까워지는 소리가 들리고, 보이가 문을 두드리면 나는 거기 문 밖에 두고 가라고 한다. 왜냐하면 너무 더워서 우리는 옷을 안 입었을 것이고, 창문은 열려 있고 제비가 지붕 위를 날아다니고, 얼마 안 있어 어두워져서 창가에 가 보면 아주 조그만 박쥐들이 다른 집 지붕 위를 날아다니다가 나무 위로 닿을락말락 스치고, 우리는 파크리를 마시고, 문은 잠겨 있고 날은 덥고 홑이불 한 장뿐이고, 온 밤이 있어 우리는 밀라노의 더운 밤을 밤새도록 서로 사랑할 것이다. 대개 이렇게 되어야 한다. 저녁을 빨리 먹고 캐서린 바클리를 만나러 가야겠다. 식당에서는 떠들썩하게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오늘 밤에는 술이라도 조금 마시지 않으면 도저히 그들하고 형제간처럼 지낼 수 없을 것 같아서 술을 마시고 신부하고 아일랜드 대주교(大主敎) 이야기를 했다. 그는 아마 품위가 있는 분인데 무슨 억울한 일을 당한 모양이고, 그가 억울한 일을 당한 것에 내가 미국인이기 때문에 책임의 일부를 져야 하는 모양인데, 나는 금시초문이지만 아는 체하고 있었다. 그 원인이라는 게 요컨대는 오해인 것 같은데, 이렇게 훌륭한 설명을 들으면서 그런 걸 모른대서야 너무 실례였을 것이다. 나는 그 이름이 멋지다는 생각을 했고, 미네소타 출신이기 때문에 멋진 이름이 된 거라고 생각했다. 미네소타의 아일랜드라, 위스콘신의 아일랜드라, 미시간의 아일랜드라. 아름답게 들리는 건 섬이라는 뜻을 가진 아일랜드하고 음이 같기 때문이다. 아니, 그게 아니다. 그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네, 신부님. 그렇지요, 신부님. 그럴 테지요, 신부님. 아닙니다, 글쎄, 아마 그렇겠죠, 신부님. 신부는 착한 사람이지만 지루하다. 장교들은 선량하지는 않지만 지루하다. 국왕은 착한 사람이지만 지루하다. 술은 나쁘지만 지루하지 않다. 이의 에나멜 질(質)이 벗겨져서 입 천정에 남는다. 그래서 신부는 구금되었단 말이야 하고 로카가 말했다. 신부 몸에서 3부 이자 증권을 발견했다는 거야. 물론 이건 프랑스 이야기지. 여기서 같으면 절대로 체포하지는 않지. 그는 5부 이자 증권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 없다고 부정했대. 이건 베지에에서 일어날 일이야. 내가 거기 있었는데 이 신문을 읽고 감옥에 가서 신부를 면회시켜 달라고 했지. 그가 증권을 훔쳤다는 건 명백한 일이거든. 난 한 마디도 곧이 안 들리는데 하고 리날디가 말했다. 그거야 자네 자유지. 하고 로카가 말했다. 그러나 난 지금 여기 있는 신부님을 위해서 하는 이야기야. 배울 게 많단 말이야. 이분은 신부님이니까 재미가 있을걸. 신부는 미소지었다. 계속하세요. 듣고 있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물론 증권 중에 일부는 출납이 분명치 않았지만 3부 이자 증권하고 뭐던가 정확한 건 잊어버렸지만 몇 가지 지방 채권은 신부가 가지고 있더란 말이야. 그래서 내가 감옥으로 찾아갔지. 이게 이야기의 요점이야. 나는 감방 문 밖에 서서 고해라도 하려는 것처럼 말했지. 신부님 축복을 주소서, 신부님도 죄를 지셨군요. 모두들 껄껄거리고 웃었다. 그래 뭐라던가요? 하고 신부가 물었다. 로카는 이 말은 무시하고 이 농담을 내게 설명했다. 요점을 알겠나, 응? 올바로 알아만 듣는다면 여간 재미있는 농담이 아닌 모양이었다. 내 잔에 또 술을 따라 주고 나도 샤워 벼락을 맞은 영국 졸병 이야기를 했다. 다음에는 소령이 열 한 명의 체코슬로바키아 인과 헝가리의 하사관 이야기를 했다. 술을 약간 더 마신 다음에 내가 일 전 짜리 동전을 찾아 낸 경마 기수 이야기를 했다. 그와 흡사한 걸로 밤에 잠을 못 자는 공작 부인에 관한 이탈리의 이야기가 있다고 소령이 말했다. 여기서 신부가 자리를 떴으므로 나는 서북풍이 휘몰아치는 새벽 다섯시에 마르세유에 도착한 행상인 이야기를 했다. 소령은 내가 술을 잘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는 아니 정말이라고 하면서 주신(酒神) 바커스의 시체 앞에서 진부(眞否)를 가리는 시음을 하자고 했다. 바커스는 안 됩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바커스는 안 됩니다. 아니야, 바커스가 좋아, 하고 그는 우겼다. 나는 바시 필리포 빈첸차와 컵이면 컵, 글라스면 글라스로 마시기로 되었다. 바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자기는 전작(前酌)이 내 배는 되니까 그래서는 시합이 안 된다고 했다. 나는 그런 비겁한 거짓말이 어디 있으며 바커스건 바커스가 아니건 간에, 필리포 빈첸차 바시라든가, 바시 필리포 빈첸차라든가 하는 친구는 저녁내 한 방울도 안 마셨다고 해 주고, 대관절 자네 이름은 어떤 것이 옳으냐고 해 줬다. 그도 지지 않고 내 이름이 페데리코 엔레코인지, 엔리코 페데리코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바커스는 집어치우고 술이 센 놈이 이기는 걸로 하자고 내가 말하자 소령은 큰 잔에 붉은 포도주를 따라 시작하라고 했다. 그 잔을 반쯤 마시자 나는 더 마실 생각이 없었다. 갈 데가 있다는 생각이 났다. 바시가 이겼어 하고 내가 말했다. 나보다 술이 센 거야. 난 가야 할 데가 있어서. 정말 갈 데가 있지 하고 리날디가 참견을 했다. 애인을 만나러 가야 할 거야. 내가 다 알지. 다음날 밤에 하지. 하고 바시가 말했다. 다음날 자네가 좀더 술이 받는 날 말이야. 그는 내 어깨를 가볍게 쳤다. 테이블 위에는 양초에 불이 켜져 있었다. 장교들은 모두가 기분이 무척 유쾌했다. 여러분 또 만납시다. 하고 나는 나왔다. 리날디가 나를 따라나왔다. 우리는 문 밖 노상에 섰다. 취해 가지고 거기 안 가는 게 좋을걸세 하고 그가 말했다. 리닌, 난 안 취했어. 정말이야. 커피라도 좀 씹지 그래. 실없는 소리. 내 좀 얻어다 주지. 거기서 좀 왔다갔다 하고 있게. 그는 볶는 커피콩을 한 줌 가지고 왔다. 이걸 씹어 둬, 도련님아. 그러구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빌어 두지. 바커스 신 말이군. 하고 내가 말했다. 내가 데려다 줌세. 아무렇지도 않다니까. 우리는 같이 거리를 걸으면서 나는 커피를 씹었다. 영국군 병원으로 돌아가는 차도의 대문 앞에서 리날디는 작별 인사를 했다. 잘 가게. 자네도 같이 들어가지 그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난 간단한 향락이 좋아. 커피콩 고맙네. 아니야, 그까짓 거. 나는 차도를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양쪽에 늘어선 사이프러스나무들의 윤곽이 선명했다. 돌아보니까 리날디가 나를 지켜보고 섰기에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나는 응접실에 앉아서 캐서린 바클리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 복도를 내려오기에 벌떡 일어섰으나 캐서린이 아니었다. 미스 퍼거슨이었다. 안녕하세요. 하고 그 여자는 인사를 했다. 캐서린이 미안하지만 오늘 밤에는 만나 뵐 수 없다고 전해 달래요. 그것 참 안 됐군요. 몸이 불편한 건 아니겠죠. 그렇게 좋지 않은가 봐요. 내일이라도 찾아오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네, 그렇겠죠. 고맙습니다, 안녕히. 문 밖으로 나오자 나는 갑자기 고독감과 공허감을 느꼈다. 캐서린을 만난다는 것을 가볍게 생각했고, 약간 술이 취해서 만나러 오는 것도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막상 못 만나게 되니까 고독과 공허를 느끼는 것이었다. {{}}{{8 }} 다음날 오후, 그날 밤 상류에서 공격이 있을 거라는 말을 우리는 들었다. 따라서 차 네 대를 그곳으로 파견해야 했다. 사람마다 열을 내 가지고 제법 전략적인 지식이라도 있는 것처럼 떠벌렸지만, 정작 이 공격에 관해서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선두를 달리는 차에 타고 있었는데, 영국군 병원 입구 앞을 거닐 때 운전병에게 정차를 명했다. 다른 차들도 섰다. 나는 후속차 운전병들에게 그대로 가라고 명하고 코르몬스로 가는 도로 갈림길에 이를 때까지 우리 차가 따라가지 못하거든 거기서 대기하고 있으라고 했다. 나는 급히 차도를 올라가서 응접실로 들어가 미스 바클리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지금 근무 중인데요. 잠깐만 만날 수 없을까요. 그들은 당직 하사를 올려보냈는데 캐서린이 같이 내려왔다. 좀 어떠신가 하고 들렀습니다. 근무 중이라고 했지만 잠깐 만나게 해 달라고 했죠. 아무렇지도 않아요. 어제 더위에 그만 녹았던가 봐요. 가야겠습니다. 잠깐 저도 밖에 나가겠어요. 정말 괜찮아요? 나는 밖에 나와서 물었다. 그렇다니까요. 오늘 밤에 와 주시겠어요? 안 되겠는데요. 플라바 상류에서 쇼가 벌어졌는데 거기 가는 길입니다. 쇼라니요? 뭐 대단치 않은 거죠. 그래 돌아오시기는 하겠죠? 내일 돌아오지요. 그녀는 목에서 무엇인지 끄르고 있었다. 그것을 나의 손에 쥐어 주었다. 성(聖) 안토니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구 내일 밤에 오세요. 당신은 카톨릭 신자는 아니지요? 아닙니다. 그래도 성 안토니는 퍽 영검이 있대요. 당신 호의를 봐서라도 소중히 간직하지요. 안녕히. 아니, 안녕히가 아니에요. 알겠습니다. 너무 나대지 말고 조심하세요. 아이, 여기서는 키스 못 해요. 안 돼요. 알겠습니다. 돌아보니까 그 여자는 현관 돌층계에 서 있었다. 손을 흔들고 있기에 나도 손에 키스를 해서 던져 주었다. 그 여자는 또 손을 흔들었고, 나는 차도를 벗어나서 앰뷸런스 좌석에 기어올라 출발했다. 성 안토니는 조그만 흰빛 금속제 갑 속에 들어 있었다. 나는 그 갑을 열고 성상(聖像)을 손바닥에 떨어뜨렸다. 성 안토니지요? 운전병이 물었다. 응. 저도 있습니다. 그의 바른손이 핸들을 떠나서 군복 단추를 끄르고 내복 밑에서 그것을 끄집어냈다. 있죠? 나는 내 성 안토니를 갑 속에 넣고 가느다란 금 쇠사슬도 함께 거두어 가슴 호주머니에 넣었다. 차시지 않으세요? 응. 차시는 게 좋을 겁니다. 차라고 만든 거니까요. 그렇겠군. 나는 금줄의 고리를 열고 목에 건 다음에 잠갔다. 성상이 군복 밖에 매달려 있기에 군복 깃을 풀고, 내복 단추를 풀고, 그것을 내복 속으로 떨어뜨렸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그 금속제 갑을 가슴에 느꼈다. 그리고는 그것에 관해서는 잊어버렸다. 부상을 입은 후 그것을 찾지 못하고 말았다. 아마 어느 전방 응급 치료소에서 누가 슬쩍했는지도 모른다. 다리를 건너면서부터는 속력을 내고 달렸으며, 이내 멀리 아래쪽에 다른 차들이 달리는 먼지가 보였다. 도로가 커브를 돌게 되어 있는데 세 자동차가 아주 조그맣게 보이고, 바퀴에서 일어난 먼지가 나무 사이로 사라지는 것도 보였다. 우리는 그 차들을 따라잡고 구릉으로 기어 올라가는 길목으로 들어섰다. 선두를 달리기만 하면 호송 대열을 이루고 가는 것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법이라 나는 좌석에 버티고 앉아서 사방을 구경했다. 강 가까운 쪽의 산기슭을 달리고 있었는데, 가파른 길이 나타나자 멀리 북쪽으로 아직 봉우리에 눈이 덮여 있는 산들이 보였다. 돌아보니, 군용차 세 대가 먼지를 피우며 기어올라오고 있었다. 짐을 실은 노새들의 기다란 대열을 지나쳤는데, 붉은 터키 모를 쓴 병사들이 노새 곁을 걸어갔다. 그들은 저격병(狙擊兵)이었다. 노새 대열을 지나친 다음에는 도로에 아무것도 없었고, 우리는 구릉을 빠져 기어 올라 긴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와서 계곡으로 들어섰다. 도로 양측에는 나무들이 있고, 바른편에 늘어선 나무 사이로 강이 보였다. 물이 맑고 빠르고 얕았다. 강은 낮고 모래와 자갈이 뻗은 사이로 좁은 물길이 나 있고, 군데군데 자갈 깔린 강바닥으로 넓게 퍼져 번쩍이기만 하는 곳도 있었다. 둑 가까이 깊은 웅덩이도 있어 물빛이 하늘색처럼 파랬다. 강 위에 아아치 형 돌다리가 있고 거기서 좁은 길이 갈려 나간 것이 보였으며, 돌로 지은 농가를 지나쳤는데 남쪽 벽이랑 들에 있는 얕은 돌담을 등지고 배나무가 촛대 모양으로 가지를 뻗고 있었다. 길은 한참 동안이나 계곡을 달리다가 방향을 꺾으면서 다시 구릉을 기어 오르기 시작했다. 가파르게 기어 올라가면서 밤나무 숲 사이를 꼬불꼬불 누비다가 마침내 산마루와 같은 높이가 되었다. 숲 사이로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었는데, 멀리 발 아래 양군을 나누고 있는 강의 곡선이 햇빛에 빛나 보였다. 산마루 능선을 따라 새로 닦은 거친 군용 도로를 따라 달리는데 북쪽으로 두 연봉(連峯)이 보였다. 푸르고 짙은 빛인데 봉우리에 남은 눈은 햇빛을 받아 희고 아름다웠다. 길이 산마루를 따라 올라가면서 또 다른 연봉이 보이는데, 먼저 산들보다 높은 설산(雪山)이고 백묵처럼 흰빛에 고랑이 지고 이상한 평지가 있었으며, 이 모든 산들 너머로 저 멀리 또 겹겹이 산이 둘러섰는데 보일 듯 말듯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것은 모두 오스트리아의 산들이고, 이쪽에는 그런 산은 없었다. 앞을 내다보니까 길은 숲 사이로 사라진 것이 보였다. 이 도로상에 부대가 있었고, 군용 트럭과 산포(山砲)를 실은 노새가 있었으며, 길 한쪽으로 붙어서 차를 몰고 내려가자니까 멀리 아래쪽에 강이 보이고 침목(枕木)과 레일 선로와, 철로가 강을 건너는 옛 철교가 있고, 강 건너 산기슭에 점령 예정지인 마을의 파괴된 집들이 건너다 보였다. 우리가 낮은 곳으로 내려와서 강 옆을 달리는 본도로 접어들었을 때는 거의 날이 어두웠다. {{}}{{9 }} 북적거리는 도로의 양편을 옥수숫대와 밀짚 멍석으로 차면을 하였는데, 멍석으로 지붕까지 덮어서 마치 곡마단이나 토인 부락 입구 같았다. 우리는 이 멍석으로 싼 굴 속을 천천히 달려서 전에 기차 정거장이 있던 아무런 차면도 하지 않은 공지로 나왔다. 여기는 도로가 강둑보다 낮고 깊숙한 도로를 따라 둑에 굴을 파놓고 보병들이 들어가 있었다. 해는 넘어가려는 참인데 달리면서 강둑을 따라 올려다보니까 건너편에 오스트리아 군의 관측 기구(觀測氣球)가 지는 해를 등지고 시꺼멓게 보였다. 우리는 벽돌 공장을 지나서 차를 세웠다. 그 아궁이며 몇몇 깊숙한 굴이 응급 치료소로 준비되어 있었다. 내가 아는 군의관도 세 명 있었다. 나는 소령을 만나 이야기를 했는데, 전투가 벌어져서 우리 차에 환자가 실리면 차면한 도로를 거쳐 산마루에 연한 본도로 달려간다, 거기 주차장이 있어서 부상병을 옮겨 싣고 가기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도로가 혼잡하지 말아야 할 텐데 하고 그는 말했다. 단선 도로인 것이다. 도로가 강 건너 오스트리아 군의 시계(視界)에 들기 때문에 차면을 한 것이었다. 이 곳 벽돌 공장은 강둑으로 소총이나 기관총화로부터 엄폐는 되어 있다. 강에는 부서진 다리가 하나 있다. 포격이 시작되면 다른 다리를 하나 가설하고 강의 상류 완곡부의 여울을 아군이 도강할 계획이었다. 소령은 카이젤 수염을 기른 몸집이 작은 친구였다. 리비아에서 전쟁을 해 본 사람이고 상이(傷痍) 기장을 두 개나 달고 있었다. 이번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하면 내가 훈장을 타도록 주선해 보겠다고 했다. 나도 잘 되기를 바라지만 훈장은 너무 과하다고 말했다. 운전병들이 머무를 수 있는 큰 참호가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군인 하나를 딸려 안내를 해 주었다. 그를 따라가서 참호를 찾았는데, 썩 휼륭한 것이었다. 운전병들이 그것에 만족했으므로 거기다 남겨 두고 나는 되돌아왔다. 소령이 나하고 다른 장교 두 명을 넣어서 한잔하자고 했다. 럼 술을 마셨는데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밖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몇 시에 공격이 시작되느냐고 물었더니 어두워지면 곧 시작한다는 대답이었다. 나는 운전병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참호 속에 앉아서 이야기들을 하다가 내가 들어가자 그쳤다. 나는 그들에게 담배 한 갑씩을 나눠 주었다. 마케도니아라는 이름인데 너무 물렁하게 말아서 담배가 빠지기 때문에 피우기 전에 양쪽 끝을 비틀어야 하는 담배였다. 마네라가 제 라이터를 켜서 불을 돌렸다. 그 라이터는 피아트 형 자동차의 라디에이터 모양으로 생긴 것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그럼 우리가 내려오는 길에 그 주차장을 왜 못 봤을까요? 하고 파시니가 물었다. 길을 꺾어들때 바로 그 너머에 있었던 거야. 그 도로는 굉장히 혼잡해질걸요 하고 마네라가 말했다. 우리한테 포탄을 마구 퍼부을 테지요. 그러겠지. 식사는 어떻게 되나요, 중위님? 이제 시작되면 식사할 기회가 없을 텐데요. 내 지금 가서 알아보지 하고 내가 말했다. 여기 그냥 있을까요? 좀 나다녀도 괜찮습니까? 여기 있는 게 좋아. 소령이 있는 참호로 돌아갔다. 그는 야전 취사차가 올 테니까 운전병들도 스튜를 받으러 가라고 했다. 식기를 안 가졌으면 빌려 주겠다고도 했다. 가졌으리라고 대답했다. 되돌아가서 운전병들에게 식사가 오면 곧 얻어다 주마고 말했다. 마네라는 포격이 시작되기 전에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내가 나올 때까지 그들은 말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기술자들이었고 전쟁을 싫어했다. 나는 밖으로 나가서 차를 점검하고 주위를 살핀 다음에 참호로 돌아가서 네 운전병과 자리를 같이하고 앉았다. 땅에 주저앉아서 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웠다. 바깥은 거의 어두워졌다. 참호 속의 흙은 따뜻하고 건조했다. 나는 어깨를 벽에 기대고, 허리가 땅에 닿도록 반은 누워서 쉬었다. 공격에는 누가 나갑니까? 하고 구부치가 물었다. 저격병. 저격병만인가요? 그럴걸. 본격적인 공격을 할 만한 부대가 여기는 없잖아요? 본격적인 공격을 하려는 지점으로부터 적의 주의를 이리로 끌려는 거겠지. 병사들도 누가 공격하는지 알고 있나요? 모를걸. 그야 물론 모르지 하고 마네라가 말했다. 알면 공격하려고 안 할 거야. 족히 할 거야 하고 파시니가 받아 말했다. 저격병은 멍청이들이니까. 그들은 용감하고 우수한 훈련을 받은 병사들이야 하고 내가 말했다. 재 보면 흉위도 넓고 몸은 튼튼하지요. 그렇지만 멍청이들이에요. 척탄병(擲彈兵)은 키가 크지 하고 마네라가 말했다. 이건 농담이었다. 모두들 껄껄거리고 웃었다. 그들이 공격을 안 하려고 해서 열번째 병사마다 뽑아다 총살할 때 중위님도 보셨어요? 아니. 정말이에요. 나중에 그들을 일렬로 세워 놓고 열번째 병사마다 뽑아 냈지요. 헌병이 총살을 했어요. 헌병이 했지. 하고 파시니는 땅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런데 그 수류탄 투척병 말이야. 모두 6피트가 넘거든. 그들이 공격은 싫다는 거야. 모두 공격하려 들지 않으면 진작 전쟁이 끝났을 텐데. 하고 마네라가 말했다. 척탄병은 그게 아니야. 겁이 났던 거야. 장교들이 모두 그런 양가집 출신이라는군. 장교 중에도 단신 공격에 나선 사람이 더러 있었다는데. 어떤 상사가 나가려고 들지 않는 장교를 둘이나 쏘아 죽였다더군. 병사들도 더러는 나섰다잖아. 그 때 나선 병사들은 열번째를 뽑아 낼 때 안 늘어섰대. 헌병에게 총살당한 병사 중에 우리 고장 출신이 있는데 하고 파시니는 말했다. 척탄병에 어울리는 키 크고 멋있는 녀석이었다. 밤낮 로마에 있었지. 밤낮 계집애들하고 있었지. 밤낮 헌병하고 있었지. 그는 껄껄 웃었다. 지금 그 사람 본집에는 총검으로 무장한 입초가 지키고 있는데, 그 사람 부모나 누이들을 아무도 못 만나고, 아버지는 시민권을 박탈당해서 투표도 못한다는군. 그들을 보호하는 법률이란 아무것도 없대. 누구든지 그들의 재산을 빼앗을 수 있는 거지. 가족이 그 꼴이 안 된다면 공격에 나설 놈 없을걸. 있어. 알프스 산악병은 할 거야. 그 근위병들도 할 테구. 저격병 중에도 더러는 있겠지. 저격병도 도망을 쳤다더군. 지금은 잊어버리려고 하고 있지만. 중위님, 우리가 이렇게 지껄이는 걸 내버려 둬서는 안 될 텐데요. 군대 만세! 파시니가 조롱조로 말했다. 난 너희들의 화제가 뭔지 알지. 하고 내가 말했다. 그렇지만 차나 잘 몰고 그리고 - 그리고 다른 장교가 듣는 데서 지껄이지만 않으면 되는 거야 하고 마네라가 내 말을 가로채서 맺었다. 난 전쟁은 끝장을 내야 한다고 믿는다. 한쪽이 싸움을 그만둔다고 끝나는 게 아니야. 만약 우리가 싸움을 그만두면 사태는 더 악화할 거다. 이 이상 악화될 수야 없지요. 하고 파니시나 공손하게 말했다. 전쟁보다 더 나쁜 건 있을 수 없으니까요. 패전은 더 나쁘지.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파시니가 여전히 공손하게 말했다. 패전이 뭡니까?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죠. 적군이 뒤따라오는 걸. 너희 집을 빼앗고 너희 누이를 빼앗아간단 말이야.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고 파시니가 말했다. 적군이라고 어떻게 일일이 그 짓을 하겠어요. 가정은 각자가 지키라지요. 누이들은 집 안에 가둬 두라지요. 너를 교수형에 처할 거야. 그들이 들어오면 너를 또 군대로 끌어간단 말이야. 앰뷸런스 운전병이 아니라 보병으로 말이지. 그렇게 샅샅이 교수형이야 안 하겠죠. 남의 나라 사람을 군인으로 뽑아가지는 않을 테죠 하고 마네라가 말했다. 첫번 전투에서 모조리 도망치고 말 테니. 체코 인들처럼. 너희들은 정복당한다는 것이 어떤 건지 전혀 모르니까 나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거야. 중위님 하고 파시니가 말했다. 중위님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대로 내버려두시는 걸로 압니다. 들어 보세요. 전쟁처럼 나쁜 건 없습니다. 우리처럼 앰뷸런스 부대에 있는 병사는 그게 얼마나 나쁜지 사실은 잘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나쁜지 알기만 한다면 그만둘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렇지 않고선 미쳐 버릴 테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영원히 그걸 모르는 병사들이 있거든요. 장교들을 겁내는 병사들도 있구요. 그런 작자들 때문에 전쟁이 있는 거예요. 나도 전쟁이 나쁘다는 건 알지만 끝장을 봐야 해. 끝이 나나요. 전쟁이란 끝이 없는 법입니다. 아니 있어. 파시니는 고개를 저었다. 승리를 거둔다고 해서 전쟁에 이기는 건 아니에요. 아군이 산가브리엘레를 점령한들 어쩐다는 겁니까? 아군이 카르소랑 콘팔코네랑 트리에스테를 빼앗으면 뭘하는 겁니까? 그 때는 또 우리는 어디로 갑니까? 오늘, 먼 산들을 모두 보셨지요? 우리가 그 산들을 모조리 점령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오스트리아 군이 전투를 포기해 주면 다행이죠. 한쪽이 전투를 포기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 겁니까? 적군이 이탈리아까지 쳐들어오면 지쳐서 돌아가 버릴 거예요. 저희는 저희들 나라가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다 틀렸죠, 전쟁만 하고 있잖습니까. 자네 웅변가로군. 우리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책도 읽습니다. 우리는 농부가 아니에요. 우리는 기술자에요. 그렇지만 농부들도 영리해서 전쟁을 신봉하지는 않아요. 모두가 이 전쟁을 미워하지요. 한 나라를 다스리면서도 우둔하고 아무것도 모르고, 알래야 알 수도 없는 계급이 있는 법이야. 우리가 이 전쟁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인걸. 또 그 전쟁으로 돈벌이도 하지. 대개는 돈벌이는 못해 하고 파시니가 말했다. 너무들 멍청해서 말이야. 그저 무턱대고 하는 거지. 멍청해서 하는 거야. 인제 그만 해 두지 하고 마네라가 말했다. 중위님 앞이라고 너무 과했어. 중위님도 좋아하시는 걸 하고 파니시가 말했다. 세뇌를 해 드려야지. 그렇지만 이젠 그만들 해 하고 마네라가 말했다. 식사는 아직도 안 됩니까, 중위님? 하고 구부치가 물었다. 내 가 보고 오지 하고 내가 대답했다. 고르디니가 일어서서 내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중위님, 뭐 제가 할 수 있는 일 없습니까? 어떻게든 도와 드릴 수 없을까요? 그는 넷 중에서 가장 조용한 병사였다. 그럼 같이 가 보세 하고 내가 대답했다. 바깥은 어둡고 조명등의 기다란 불빛이 산 위에 움직이고 있었다. 일선에는 군용 트럭에 탑재한 대형 조명등이 있어서 밤에 일선 바로 후방 같은 데서 이들을 가끔 만나는데 군용 트럭이 한 대 길에서 약간 벗어난 지점에 정차해 있고, 장교 한 명이 지휘를 하고 대원들을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우리는 벽돌 공장을 지나서 응급 치료 본부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입구는 바깥 쪽을 푸른 가지로 약간 차면을 했는데 어둠 속에서 밤바람이 햇볕에 마른 나뭇잎을 흔들어 버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안에는 등불이 있었다. 소령은 상자 위에 앉아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의무 장교 한 사람이 공격은 한 시간 연기되었다고 알려 주었다. 그가 코냑을 한 잔 내게 권했다. 나는 널판으로 만든 테이블과 불빛에 번쩍이는 의료 기구와 세숫대야와 마개를 막은 병들을 둘러보았다. 고르디니는 내 뒤에 서 있었다. 소령이 수화기를 놓고 일어났다. 지금 시작한대 하고 그는 말했다. 다시 당겼대. 나는 밖을 내다보았다. 어둡고 오스트리아 군의 조명등이 우리 위에 있는 산을 비치고 있었다. 그래도 잠시 조용하더니 갑자기 우리 등 뒤에 있는 모든 포문에서 포격이 시작되었다. 이제 됐군. 하고 소령이 말했다. 수프 말인데요, 소령님 하고 내가 말했다. 그는 내 말을 듣지 못했다. 나는 또 한 번 되풀이했다. 아직 안 왔는데. 대형 포탄이 하나 날아와서 바깥 벽돌 공장에서 터졌다. 또 한 번 폭발이 있었고, 그 소리에는 벽돌과 흙덩이가 비처럼 쏟아지는 작은 소리도 섞여 들렸다. 뭐 먹을 건 없습니까? 파스타 아슈타(마카로니 요리의 일종 - 역자 주)는 조금 있지 하고 소령이 말했다. 뭐든지 주시면 가지고 가겠습니다. 소령이 당번병에게 명령을 하니까 당번병이 후면으로 사라지더니 싸늘한 마카로니 요리를 쇠그릇에다 담아 가지고 돌아왔다. 나는 그것을 고르디니에게 내주었다. 치즈도 있습니까? 소령이 퉁명스럽게 당번병에게 명령을 하자 그는 다시 구멍 속으로 기어 들어가서 흰 치즈를 한 덩이 들고 돌아왔다. 고맙습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안 나가는 게 좋아. 바깥에서 입구 곁에 무엇을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그것을 들고 온 병사 중 하나가 안을 들여다 보았다. 들고 들어와 하고 소령이 말했다. 뭘 하고 있는 거야? 우리가 밖으로 나가서 메어들이란 말이냐? 두 담가병은 부상병의 팔과 다리를 부축해서 메어들였다. 군복을 찢어. 하고 소령이 말했다. 그는 핀셋 끝에 거즈를 집어 들고 있었다. 두 군의관은 웃저고리를 벗었다. 이제 여기서 나가라구. 소령이 두 담가병에게 명령했다. 가자 하고 나는 고르디니에게 말했다. 포격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아. 소령이 돌아보면서 말했다. 배가 고플 테니까요 하고 내가 말했다. 그럼 좋도록 하라구. 바깥에 나오자 우리는 벽돌 공장 마당을 달려서 가로 건넜다. 포탄이 강둑 조금 못 미처에서 터졌다. 또 한 발은 돌연 폭발할 때까지 날아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우리 둘은 납작 엎드려서 번쩍하는 섬광과 폭풍과 초연(硝煙) 냄새 속에서 파편이 쌩쌩 나는 소리랑 벽돌이 와르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고르디니는 일어나서 참호를 향해서 뛰었다. 나도 치즈를 안은 채 그를 따라 뛰었다. 그 반들반들한 표면에 벽돌 먼지가 덮였다. 참호 속에서는 세 운전병이 벽에 기대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여어, 애국자들 하고 내가 불렀다. 차들은 괜찮아요? 하고 마네라가 물었다. 괜찮아. 무서웠죠, 중위님? 경치게도 알아맞히는군 하고 내가 말했다. 나는 나이프를 꺼내서 날을 닦고 치즈 표면의 더러운 표면을 저며 냈다. 구부치가 마카로니 그릇을 내게 내밀었다. 먼저 잡수세요, 중위님. 아니야 하고 내가 말했다. 그 바닥에다 놔 둬. 다들 같이 먹지. 포크가 없어요. 망할 것 하고 나는 영어로 말했다. 나는 치즈를 잘게 썰어서 마카로니 위에다 놓았다. 둘러앉으라구. 그들은 앉아서 기다렸다. 나는 엄지손가락과 둘째 손가락을 마카로니 속에 넣었다가 쳐들었다. 높이 드세요, 중위님. 팔 자라는 데까지 쳐들었더니 마카로니 가닥이 떨어졌다. 그것을 입까지 내려다가 끝에서부터 빨아들이면서 씹고, 치즈를 한 입 베어물고 씹고, 포도주를 한 잔 마셨다. 녹슨 쇠맛이었다. 나는 물병을 파시니에게 돌렸다. 썩었어요. 하고 그는 말했다. 너무 오래 물병에 넣어 두었어요. 차에서 마셔 봤지요. 모두들 먹고 있었다. 그릇 바로 위까지 턱을 내밀고 고개를 뒤로 제끼면서 가닥 끝에서부터 빨아들였다. 나는 또 한 입 먹고 치즈를 베어물고 술로 버무려 넘겼다. 뭔지 바깥에 떨어지면서 땅이 흔들렸다. 420 밀리거나 지뢰탄이군 하고 구부치가 말했다. 산에는 420밀리포가 없어 하고 내가 말했다. 적은 대형 스코다 포를 가지고 있어요. 포탄이 떨어진 구멍을 봤어요. 305 밀리 포겠지. 우리는 계속해서 먹었다. 기침 소리 같은 게 났다. 기차 엔진이 발동하는 것 같은 소리가 나더니 또 대지를 흔드는 폭발이 있었다. 이건 깊은 참호가 아닌데 하고 파시니가 말했다. 이번 건 대형 박격포야. 그렇습니다, 중위님. 나는 치즈 쪽을 다 먹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다른 소리에 섞여서 기침 소리 같은 게 들리고 츄-츄-츄-츄 하더니 용광로 문을 활짝 연 듯한 불이 번쩍 일고 흰빛인 듯하더니, 붉게 빛나면서 와르르하는 우뢰 소리가 나고 폭풍이 자꾸만 밀려들었다. 나는 숨을 쉬려고 했으나 숨이 나오지를 않았고, 내가 몸뚱이째 밖으로 밖으로 송두리째 허공으로 날아 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온몸이 빠른 속도로 날아 나가는 느낌 속에서 이젠 죽었구나 싶었다가, 아니 죽었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공중에 떴다가 날아 나가는 게 아니라 내 몸뚱이가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숨을 쉬었고 제자리에 돌아와 있었다. 땅이 갈라지고 내 머리 앞에는 갈기갈기 찢긴 대들보 나무가 있었다. 아찔한 머리로도 누가 소리를 지르는 게 들렸다. 누가 비명을 지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움직여 보려고 했으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기관총이랑 소총이 건너편에서 전면적으로 사격을 가해 오는 소리가 들렸다. 물 튀는 것 같은 커다란 소리가 나더니 조명탄이 올라 터지면서 흰 불빛을 내며 떠 있고 포탄이 터지고, 이 모든 것이 일시에 일어나는데 나는 바로 내 곁에서 누가 어머니! 아아, 어머니! 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힘껏 당기고 비틀고 해서 겨우 다리를 빼 가지고 몸을 돌려 그를 만져 봤다. 파시니였는데 내 손이 닿자 비명을 질렀다. 그의 두 다리가 나 있는 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깜깜해졌다가 환해졌다가 하는 속에서 그 다리 둘 다 무릎 위가 산산이 부서진 것을 보았다. 한쪽 다리는 없어졌고 하나는 힘줄과 바지 가랑이로 겨우 매달려 있는데, 허벅다리는 연결이 안 되어 있는 것처럼 뒤틀리고 꿈틀거리고 했다. 그는 제 팔을 물어뜯으면서 오오, 어머니 어머니! 하다가 살려 주세요, 마리아. 살려 주세요, 마리아. 오오 예수님, 나를 쏘아 주시오, 예수님 나는 쏘아 주시오, 어머니 어머니! 오오, 순결무구한 마리아님, 그쳐 줘요. 오 오오, 오오 하다가 숨이 막히면서 어머니, 어머니, 그러다가 조용해졌다. 제 팔을 깨문 채, 다리 붙은 데가 꿈틀거렸다. 담가병! 하는 두 손을 나팔처럼 입에 대고 소리쳤다. 담가병! 나는 지혈대(止血帶)를 다리에 감아 주려고 파시니 옆으로 다가가려고 했으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또 한 번 해 보니까 다리가 조금 움직였다. 팔과 팔꿈치로 간신히 뒷걸음질을 칠 수 있었다. 파시니는 이제 조용했다. 나는 그 옆에 앉아서 군복을 벗고 셔츠 자락을 찢으려고 했다. 찢어지지가 않아서 한자락 끝을 이로 물어뜯었다. 그 때 파시니의 각반 생각이 났다. 나는 목이 긴 털 양말을 신고 있었지만 파시니는 각반을 매고 있었다. 운전병은 모두 각반을 매고 있었다. 그러나 파시니는 한쪽 다리밖에 없었다. 나는 각반을 풀기 시작했는데 풀면서 보니까 도대체 지혈대가 필요 없다는 것을 알았다. 벌써 죽어 있었으니까. 나는 그가 죽은 것을 확인했다. 다른 세 병사도 찾아 봐야 했다. 나는 몸을 일으키고 있는데, 머리 속에서 무엇인지 인형의 눈알을 굴리는 추 같은 것이 덜렁덜렁하는 것을 느꼈고 그것이 내 안구의 뒷구석에 부딛쳤다. 두 다리가 미적지근하면서 축축했고, 구두 안도 젖고 미적지근했다. 맞았다는 것을 알고 몸을 구부려 손으로 무릎을 더듬었다. 무릎이 거기 없었다. 손을 뻗어 봤더니 정강이쯤에 가서 무릎이 있었다. 셔츠에 손을 닦는데 공중에 떠 있던 불빛이 느릿느릿 내려와서 그 불빛으로 내 다리를 내려다보고 겁이 더럭 났다. 하나님, 제발 여기서 빼내 주십시오. 그러나 나는 다른 세 병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운전병은 네 명이었다. 파시니는 죽었다. 그러니까 셋이 남았다. 누군가가 내 겨드랑이를 잡고 또 누군지 내 다리를 들었다. 셋이 있다. 하나는 죽었다. 하고 내가 말했다. 마네라에요. 담가를 가지러 갔었는데 하나도 없군요. 어떠세요, 중위님? 고르디니랑 구부치는 어디 있나? 고르디니는 응급 치료소에서 붕대를 하고 있습니다. 구부치는 지금 중위님 다리를 들고 있어요. 내 목을 붙드세요, 중위님. 몹시 다치셨어요? 다리야. 고르디니는 어느 정도야? 괜찮아요. 대형 박격포탄이었어요. 파시니는 죽었어. 네, 죽었어요. 포탄이 가까운 곳에 떨어지자 그들이 땅에 엎드리는 바람에 나를 떨어뜨렸다. 미안합니다, 중위님 하고 마네라가 말했다. 내 목에 매달리세요. 또 떨어뜨리기만 해 봐라. 겁이 나서 그랬어요. 너희들은 부상 안 당했나? 우리 둘은 경상입니다. 고르디니는 운전할 수 있는가? 못할 거예요. 응급 치료소까지 가기 전에 그들은 나를 또 한 번 떨어뜨렸다. 이 망할 녀석들. 하고 나는 욕을 했다. 미안합니다, 중위님 하고 마네라가 말했다. 다시는 안 떨어뜨리겠습니다. 응급 치료소 밖에는 어둠 속에 많은 병사들이 땅에 누워 있었다. 연방 부상병들을 날라들이고 날라 내오고 했다. 커튼을 열고 부상병을 내고 들일 때마다 응급 치료소에서 불이 새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시체는 한쪽에 모아 두었다. 군의관들은 어깨까지 팔을 걷고 백정처럼 피투성이가 된 채 일을 하고 있었다. 담가수가 충분치 않았다. 부상병 중 더러는 시끄럽게 굴었으나 대개는 조용했다. 응급 치료소 문을 가린 나뭇잎들이 바람에 바스락거리고 밤 공기가 냉랭해졌다. 담가병이 연달아 들어와서 담가를 내려놓고 부상병을 들어내 내려놓고는 다시 나갔다. 내가 응급 치료소에 닿자 곧 마네라가 의무 상사 한 명을 데리고 나와서 내 다리에 붕대를 감아 주었다. 그는 상처에 흙이 많이 박혀서 출혈이 심하지 않다고 말했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들어오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들어갔다. 고르디니는 운전을 못할 겁니다, 하고 마네라가 말했다. 어깨가 부서지고 머리도 다쳤다는 것이다. 그는 대단치 않다고 했지만 어깨가 빳빳해졌다고 했다. 그는 벽돌 담 곁에 앉아 있었다. 마네라와 구부치는 부상병을 가득 싣고 떠났다. 그들은 운전에 지장이 없었다. 영국병이 앰뷸런스 세 대를 몰고 왔는데, 한 대에 운전수를 두 명씩 데리고 왔다. 얼굴이 창백해지고 몹시 초췌한 고르디니가 그 운전사 한 명을 내게로 데리고 왔다. 그 영국 병사가 허리를 구부리고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몹시 다치셨습니까? 그는 키가 크고 쇠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다리를. 중상이 아니면 좋을 텐데. 담배 태우시겠어요? 고맙네. 운전병이 두 사람 없어졌다지요? 응, 하나는 죽고 하나는 지금 자네를 데리고 온 병사야. 운이 나빴군요. 앰뷸런스는 우리가 운전을 할까요? 나도 그래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어. 차도 조심해서 몰고 나중에 병사로 돌려드리지요. 206호 병사지요? 응. 아주 참한 곳이지요. 거기서 장교님을 뵌 일이 있어요. 미국 분이라고들 하더군요. 응. 전 영국인입니다. 아니야. 아니, 정말이에요. 저를 이탈리아 인인 줄 아셨어요? 저희 부대에도 이탈리아 병사가 더러 있기는 하지요. 차를 봐 주겠다는 건 정말 잘된 일이군 하고 내가 말했다. 차는 극히 주의해서 다루겠습니다. 하고 그는 몸을 일으켰다. 이 사람이 장교님을 만나 달라고 저를 보고 간청을 하더군요. 그는 고르디니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영국병은 금시 유창하고도 완벽한 이탈리아 말로 지껄였다. 이제 모든 일이 잘 되었소. 당신 상관을 만나 뵈었으니. 차 두 대는 우리가 맡겠소. 이젠 걱정하지 마시오. 그는 자리를 뜨면서 말했다. 어떻게 여기서 나가시도록 해 드려야겠군. 의무관을 만나 볼까. 우리가 후송은 해 드리지요. 그는 부상자들 사이로 조심스럽게 발을 디디면서 치료소를 향해서 걸어갔다. 담요를 걷자 불빛이 새어나오고 그가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저 친구가 중위님을 봐 드릴 겁니다. 하고 고르디니가 말했다. 프랑코, 자네는 어떤가? 저는 괜찮습니다. 그는 내 옆에 앉았다. 이내 응급 치료소 전면의 담요가 열리고 키 큰 영국병을 따라 담가병들이 나왔다. 그는 나 있는 데로 그들을 데리고 왔다. 이분이 미국인 중위야 하고 그는 이탈리아 말로 말했다. 나야 기다리지 하고 내가 말했다. 나보다 더 중상이 많은데, 난 괜찮아. 어서, 어서. 그런 쓸데없는 영웅은 되지 마시오. 그리고는 이탈리아 말로 다리께를 조심하고 들라구. 다리가 지독하게 아프니 말이야. 이분은 윌슨 대통령의 적자(嫡子)시거든. 그들은 나를 들어서 응급 치료소 안으로 들여갔다. 방 안에는 수술대마다 한창 수술로 분주했다. 소령은 성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를 알아보고 핀셋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괜찮나? 괜찮습니다. 제가 모시고 왔습니다. 하고 키 큰 영국병이 이탈리아 말로 말했다. 미국 대사의 외아드님이랍니다. 중위님은 여기 있다가 준비가 되면 수술을 받도록 해 주십시오. 수술을 마치면 첫 차편을 후송하겠습니다. 그는 허리를 구부리고 나를 내려다보면서 조수더러 아주 서류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겠습니다. 그래야 모든 것이 빨리 될 테니까요. 그는 허리를 구부리고 낮은 문으로 나갔다. 소령은 핀셋을 풀어서 대야에 던졌다. 나는 눈으로 그의 손의 동작을 좇았다. 이번에는 붕대를 감았다. 그러나 담가병들이 환자를 수술대에서 내려놓았다. 내가 미국인 중위를 맡지 하고 한 사람이 말했다. 그들은 나를 수술대 위에 올려놓았다. 수술대는 딱딱하고 미끄러웠다. 여러가지 강렬한 냄새가 - 약 냄새며 향긋한 피 냄새가 풍겼다. 내 군복 바지를 벗기고 군의관 대위는 연방 진찰을 하면서 상사에게 자기가 부르는 대로 받아쓰도록 하였다. 좌우 대퇴부(左右大腿部), 좌우 무릎 관절 및 우족에 다수의 외상(外傷). 우측 무릎 관절 및 우족부는 심부(深部) 부상, 두피 파열상(頭皮破裂傷). 그는 탐침(探針)을 찔렀다 - (아픈가?) (아이구, 네!) 두개골 골절 가능성, 근무 중 부상. 이래 놔야 고의로 부상했다고 군법 회의에 회부되지 않거든. 브랜디 한잔 하려나? 대관절 어떻게 하다가 이 지경을 당했나? 무슨 짓을 하려던 거야? 자살할 생각이었나? 파상풍 예방을 해 두라구. 그리고 양쪽 다리에 十자표를 그려 넣구. 됐어. 좀 깨끗이 닦아내고, 씻고 나서 붕대를 감아야겠군. 자네 피는 예쁘게 응결돼는데. 조수가 서류에서 눈을 떼고 물었다. 부상 이유는 뭐라고 할까요? 뭐에 맞았는가? 하고 군의관 대위가 물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박격포탄입니다. 대위는 굉장히 아프게 상처를 주무르고 조직체를 갈라 내고 하면서 - 확실한가? 나는 - 가만히 누워 있으려고 애를 쓰고 살이 잘릴 때는 뱃속까지 부드득 떨리는 것을 느끼면서 그럴 겁니다. 군의관 대위는 - (뭣인지 발견해 낸 것에 흥미를 느끼는 듯하더니) 적의 박격포탄 파편이군. 자네가 해 달라면 이런 것을 몇 개 더 찾아봐도 좋지만 그럴 필요는 없겠지. 여기다 약을 고루 발라 놓구 - 이거 따끔한가? 좋아, 나중에 아플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통증은 아직 시작도 안 됐으니까. 브랜디나 한 잔 갖다 주라구. 충격이 심해서 통증을 못 느끼는 게지. 그렇지만 괜찮을 것 같아. 화농만 안 하면 걱정할 것 없어. 요새는 여간해서 화농은 안 하니까. 머리는 어떤가? 지독합니다. 그럼 브랜디는 많이 안 마시는 게 좋겠군. 골절이 있다면 염증을 일으켜서는 안 되니까. 여기는 어떤가? 전신에 땀이 흘렀다. 지독하게 아파요! 하고 내가 말했다. 확실히 골절이 된 모양이군, 붕대를 해 줄 테니 머리를 내두르지 말게. 그는 붕대를 감았다. 손을 재빠르게 놀려서 붕대를 단단하고 맵시 있게 감았다. 됐어, 행원을 비네, 프랑스 만세! 그 친구 미국인이야 하고 다른 대위가 말했다. 나는 또 프랑스 인이라는 줄 알았지. 프랑스 말도 하기에 말이야. 하고 대위는 말했다. 전부터 안면은 있는데 난 꼭 프랑스 인으로만 알았군. 그는 코냑을 반 컵 마셨다. 중상자를 날라 오라구. 그 파상풍 예방제를 좀더 가져오구. 거기서 나올 때 담요 자락이 내 얼굴을 스쳤다. 바깥에서 의무 하사관이 내가 누운 곁에 무릎을 꿇고 물었다. 이름은? 그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성? 이름? 계급? 출생지? 병과? 소속 부대? 등등이었다. 머리에 부상을 당해서 안됐습니다. 중위님. 아까보다 좀 나으세요. 이제 영국군 앰뷸런스로 후송해 드리지요. 난 괜찮아, 고맙네 하고 나는 말했다. 소령이 말하던 통증이 시작되어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관심도 없고 또 아무 관련도 없었다. 조금 있다가 영국군 앰뷸런스가 왔고 나를 담가에 올려놓더니 차 높이까지 쳐들어서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옆에는 얼굴 전체를 붕대로 감고 핏기 없는 코만 보이는 다른 군인이 한 명 담가에 담긴 채 누워 있었다. 그는 몹시 숨소리가 거칠었다. 담가를 몇 개 더 올려다가 천정 가죽띠에 매달았다. 키 큰 영국군 운전병이 뒤로 돌아와서 들여다보고 말했다. 가만가만 몰지요. 편안하게 계십시오. 엔진에 발동이 걸리는 걸 느끼고, 그가 운전석에 앉는 것을 느끼고, 브레이크를 풀고 클러치를 넣는 것을 느끼자 차는 출발했다. 나는 가만히 누워서 제멋대로 맹위를 떨치는 통증을 지긋이 참고 있었다. 병원차는 도로를 따라 올라갔으나 교통이 혼잡해서 속력이 느렸고 간간이 정지도 하고 뒷걸음질을 쳐서야 방향을 돌리기도 했지만, 종내는 퍽 빠른 속력으로 언덕길을 달려 올라갔다. 나는 무엇인지 뚝뚝 듣는 소리를 느꼈다. 처음에는 느릿느릿하고 규칙적이었다가 이내 줄줄 흘렀다. 나는 운전병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는 차를 세우고 뒷창으로 들여다보았다. 뭡니까? 내 위의 담가에 누운 부상병이 출혈 중이야. 정상까지 얼마 안 남았습니다. 혼자서는 담가를 내릴 수가 없어요. 그는 차를 출발시켰다. 줄줄 흐르는 피는 그대로 흘러내렸다. 어두워서 머리 위에 있는 돛베 어디쯤에서 피가 떨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게 떨어지지 않도록 몸을 옆으로 옮겨 보려고 했다. 내 내복 밑으로 흘러내려온 데는 뜨뜻하고 끈적끈적했다. 나는 춥고 다리는 아프고 해서 무척 괴로왔다. 조금 있자니까 위에서 흘러내리는 것이 적어지고 다시 방울로 듣기 시작하더니, 담가에 누운 사람이 좀더 편한 자세를 취하면서 돛베가 움직이는 것을 듣고 느낄 수 있었다. 그 사람 어떻습니까? 하고 영국군 병사가 물었다. 이제 거의 다 올라 왔습니다. 죽은 것 같은데. 하고 내가 말했다. 핏방울은 천천히 떨어졌다. 마치 해가 진 후에 고드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길을 따라 올라갈수록 차 안의 밤 공기는 추워졌다. 정상에 있는 주차지에서 그 담가를 내리고 다른 담가를 싣고 그대로 달렸다. {{}}{{10 }} 오후에, 야전 병실에서 누가 나를 찾아왔다는 말을 들었다. 더운 날이었으며 방 안에는 파리가 많았다. 내 간호병은 종이를 잘라서 막대기 끝에 묶어 가지고 파리를 쫓았다. 나는 파리떼가 천정에 가 앉는 것을 지켜 보았다. 그가 파리 쫓기를 멈추고 졸면 다시 내려오는데, 나는 그것들을 쫓다가 마지막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도 자버렸다. 무척 더워서 잠이 깨자 다리가 가려웠다. 간호병을 깨웠더니 붕대 위로 탄산수를 부어 주었다. 그 덕에 침대가 젖어 시원했다. 잠이 깬 부상병들은 병상 너머로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오후는 조용한 시간이었다. 아침에는 간호사 셋과 군의관 한 사람이 병상을 차례로 돌면서 환자를 침대에서 내려서 치료실로 옮겨가고, 상처를 치료받는 동안에 침대를 정돈하게 되어 있었다. 치료실로 옮겨지는 과정은 결코 편한 일이 아니었고, 환자를 침대에 눕혀 둔 채로 자리를 정돈할 수도 있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간호병이 탄산수를 다 따르자 침대가 시원하고 기분이 좋았고 발바닥 가려운 데를 알려서 긁어 달래고 있는데, 군의관 한 사람이 리날디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는 급한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침대 위로 몸을 구부리고 키스를 했다. 나는 그가 장갑을 끼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떤가, 우리 애기? 좀 나은가? 이걸 가져왔지 - 코냑 병이었다. 간호병이 의자를 가져와서 그는 앉았다. 그러구 희소식도 가져왔네. 자네는 훈장을 타게 될 거야. 은(銀) 훈장을 타게 해 주려고 하고 있지만 아마 동(銅)밖에 못 타게 될 거야. 뭘 했다고? 중상을 입었으니까. 자네가 무슨 영웅적인 행동을 했다는 것을 증명만 할 수 있다면 은을 탈 수 있다고 그러데. 그게 안 되면 동이야. 어떻게 된 건지 정확하게 이야기해 보게. 무슨 영웅적인 행동을 했나? 아니 하고 나는 말했다. 치즈를 먹다가 맞았어. 농담 말고. 부상 전후에 무슨 영웅적 행동을 했을 것 아닌가. 잘 생각해 봐. 한 거 없어. 누구를 업고 가지 않았나? 고르디니란 녀석은 자네가 몇 사람을 등으로 업어 날랐다지만, 제 1 응급 치료소에 있는 군의관 소령이 그건 불가능하다고 한단 말이야. 전공(戰功) 신청서에 소령이 서명을 해야 하거든. 아무도 나르지 않았어. 움직일 수가 없었는 걸. 그거야 문제가 안 되지. 하고 리날디가 말했다. 그는 장갑을 벗었다. 은 훈장을 타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다른 병사보다 먼저 치료받는 걸 거절하지 않았나? 그렇게 단호하게 거절하지도 않았어. 그건 문제가 안 돼. 자네가 얼마나 중상을 입었나 보란 말이야. 자네는 늘 일선을 지원하는 용감한 행동을 하지 않았나 말이야. 게다가 작전도 성공했거든. 그래 아군은 강을 건넜나? 굉장했다네. 포로를 거의 천 명이나 잡았어. 공보(公報)에 났어. 못 봤나. 자네? 아니. 내 갖다 주지. 성공적인 기습이었어. 모두들 어떤가? 굉장하지. 우리는 전부 사기 충천이야. 모두 자네를 자랑하고 있네. 어떻게 된 건지 정황을 똑똑히 이야기해 보라니까. 꼭 은 훈장을 탈 거야. 이야기해 보라구. 모조리 이야기 해 봐.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했다. 아마 자네는 영국 훈장도 타게 될 거야. 거기 영국 군인이 한 명 있었다니까. 자네를 추천할 생각이 있는지 내가 한번 만나서 물어 보지. 그 친구가 뭘 할 수 있을 거야. 많이 아픈가? 한잔하게. 간호병, 가서 병마개 뽑기 좀 가져와. 아, 그런데 내가 창자를 3미터나 잘라 내는 수술을 해낸 솜씨를 좀 보여 주어야 할 텐데. 이젠 기술이 말할 수 없이 늘었다네. 의학 잡지 <란체트>에 실릴 만하네. 자네가 번역만 해 주면 <란체트>로 보낼 생각일세. 난 나날이 기술이 늘어 간단 말이야. 야, 이 친구야. 몸이 어떤가 정말? 그 병마개 뽑기인지 뭔지 어디 있담? 자네가 어떻게 용감하고 조용한지 난 자네가 아프다는 것도 잊어버렸네 그려. 그는 장갑으로 침대 가장자리를 후려 갈겼다. 병마개 뽑기 가져왔습니다. 중위님. 하고 간호병이 말했다. 마개를 뽑아. 컵도 가져오구. 그거 마셔, 우리 얘기야. 자네 머리는 좀 어떤가? 난 자네 서류를 봤어. 골절은 없더군. 그 제 1 치료소에 있는 소령은 돼지 백정이지 뭘. 내가 자넬 봤더라면 전혀 안 아프게 했을 거야. 난 누구라도 아프게 하진 않으니까. 수술하는 요령을 배우거든. 매일 어떻게 하면 좀더 쉽고 솜씨 있게 수술하는가 배우고 있단 말일세. 너무 지껄이네만 용서해야 하네. 자네가 중상을 입은 것을 보고 난 굉장한 감동을 받았어. 자아. 그거 마시게. 좋은 술이야. 15리라 줬어. 그만하면 좋을 테지. 오성(五星)(술의 상표 이름 - 역자 주)일세. 여기서 나가면 그 영국 군인을 만나보지. 그 친구가 영국 훈장을 타게 해 주겠지. 영국에서는 그렇게 훈장을 막 주진 않네. 자네는 겸손하기만 하군. 내가 연락 장교를 보내지. 그 사람은 영어를 할 줄 아니까. 자네 미스 바클리 만났나? 내 이리 데리고 오지. 지금 금방 가서 데리고 옴세. 가지 마. 하고 나는 말했다. 고리치아 이야기나 하게. 계집들이 어떤가? 계집다운 건 없어. 벌써 두 주일이나 교체를 안 하니 말이야. 난 이젠 거긴 안 가네. 창피하게 됐어. 계집이라는 건 없어. 모두 낯익은 전우란 말이야. 전혀 안 가나 그래? 새 것 왔나 하고 가 보는 정도야. 잠깐 들리는 거지. 모두들 자네 안부를 묻데. 너무 오래 있어서 모두 친구가 돼버렸으니 창피한 노릇이지 뭔가? 아마 여자들이 이젠 일선에 안 오려고 하는 가 보지. 오구 싶어하지 무슨 소린가. 여자야 얼마든지 있다네. 그저 운영을 잘못 하는 거야. 후방에서 참호 속에 숨어 있는 녀석들 위안거리로 붙들어 두는 거야. 리날디도 신세 가련하군. 하고 내가 말했다. 새 여자 하나 없이 홀로 싸움터에 와 있으니. 리날디는 코냑을 또 한 잔 따라 마셨다. 해로운 것 같지 않으니 한 잔 마시게. 나는 코냑을 마셨다. 넘어가는 대로 화끈했다. 리날디는 또 한 잔을 따랐다. 그는 조금 조용해졌다. 잔을 높이 들었다. 자네의 용감한 부상을 위해서 축배. 은 훈장을 위해서 축배. 그런데 자네 이렇게 더운 날씨에 항상 누워 있으면 화가 안 나는가? 가끔 나지. 난 그렇게 누워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하겠어. 미쳐 버릴 거야. 지금도 미쳤잖은가. 자네가 돌아와 줬으면 좋겠어. 밤이면 연애를 끝내고 들어오는 녀석이 있어야지. 놀려 줄 녀석이 없단 말이야. 돈을 꾸어 줄 친구도 없구. 친형제 같은 동거인이 있어야지, 왜 부상은 당해 가지고 그러나? 신부를 놀려 먹으면 되잖아. 그 신부 말이지. 내가 왜 그 신부를 놀리나. 대위가 그러지. 난 그 친구를 좋아하는걸. 신부가 꼭 있어야 한다면 그 신부가 제일이야. 자네를 보러 올걸세. 굉장히 준비를 하고 있다네. 나도 좋아해. 아, 내가 알지. 난 이따금 자네하고 그 친구가 약간 그런 거 아닌가 하는데. 안 그래? 아니야, 쓸데없는 소리. 정말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니까. 안코나 여단의 제 1연대 녀석들처럼 약간 그런 거라고 말야. 원, 망할 친구. 그는 일어나서 장갑을 끼었다. 자네를 놀려 먹으면 재미있단 말이야. 신부도 있겠다. 영국 여자도 있겠다. 그렇지만 사실 한 꺼풀 벗기면 꼭 나 같지. 아니, 그렇지 않아. 아니야, 서로 비슷해. 자네는 진짜 이탈리아 인이야. 불이랑 연기만 굉장히 나고 속에는 아무것도 없거든. 자네는 그저 미국인인 체하는 게지. 우리는 친형제 같고 서로 사랑하고 있단 말이야. 내가 없는 동안 얌전하게 굴라구. 하고 내가 말했다. 미스 바클리를 보내지. 내가 없이 그 여자하고만 있는 게 더 좋겠지. 두 사람은 더욱 순결하고 더욱 상냥하니까. 원, 고약한 친구 같으니라구. 보내 줌세. 자네 그 사랑스럽고 냉정한 여신을. 영국 여신을. 정말이지 그런 여자는 존경이나 해야지 남자가 무슨 딴 짓을 하겠나? 영국 여자란 그 밖에 뭣에 쓸 데가 있나? 자네는 무식하고 입이 험한 이탈리아 인이야. 입이 험한 뭐라구? 무식한 이탈리아 촌뜨기야. 촌뜨기라구! 자네는 냉혈 동물인...촌뜨기다. 자네는 무식해. 멍청해. 나는 그 말이 그를 따끔하게 한 것을 알고 계속했다. 소식불통이야. 풋나기고, 풋나기니까 멍청해. 정말? 내 자네가 좋아하는 그 얌전한 여자에 관해서 한 마디 하지. 자네 여신 말이야. 항상 얌전한 처녀를 건드리는 것하고 거리의 계집과 관계하는 것하고 다른 건 한 가지 뿐이야. 처녀에게는 귀찮은 일이 따른단 말이야. 이게 내가 아는 전부라네. 그는 장갑으로 침대를 쳤다. 처녀가 그걸 좋아하는지 어쩐지 알 도리가 없거든. 화는 내지 말게. 화내는 게 아니야. 이 친구야, 자네 좋으라고 이야기해 주는 거야. 자네에게 귀찮은 일이 생길까 봐 그러는 거야. 차이란 그것 뿐이야? 물론. 그러나 수백만의 자네 같은 바보는 그걸 모르지. 그런 걸 이야기해 주니 기특하지. 이 친구야, 입씨름은 그만두세. 난 자네를 너무 좋아하니 말일세. 그렇지만 바보 짓은 말게. 천만에, 나도 자네처럼 영리하겠네. 화내지 마, 이 친구야. 웃게. 한잔들게. 이제 정말 가 봐야겠군. 정말 자네는 고마운 옛 친구야. 이젠 알았군. 한 꺼풀 벗기면 같다니까. 우리는 전우 아닌가, 작별 인사로 키스해 주게. 너절한 친구 같으니. 아니야. 그저 내가 더 인정이 있는 게지. 그의 호흡이 나를 향해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잘 있게. 또 보러 옴세. 그의 호흡은 멀어졌다. 자네가 그럴 생각이 없으면 키스는 그만둠세. 영국 여자를 보내 주지. 잘 있게. 코냑은 침대 밑에 있네. 어서 일어나게. 그는 가버렸다. {{}}{{11 }} 해질 무렵에 신부가 왔다. 병원에서 수프를 갖다 주고 먹고 난 다음에 그릇을 치웠고, 나는 누워서 줄줄이 늘어선 침대를 바라보다가, 석양의 미풍에 약간 움직이는 나무 끝을 창 밖으로 내다보다가 했다. 미풍이 창으로 들어와서 저녁때는 조금 시원했다. 파리떼는 이제 천정이나 전선에 매달린 전구에 붙어 있었다. 전등은 밤에 누가 찾아오거나 무슨 일을 할 때만 켜 두었다. 황혼 다음에 어둠이 와서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아주 어릴 때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이른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 눕혀진 것만 같았다. 간호병이 침대 사이를 누비고 와서 걸음을 멈췄다. 누군지 같이 온 사람이 있었다. 그게 신부였다. 그는 조그만 몸집에 갈색 얼굴로 어리둥절해서 거기 서 있었다. 어떠시오? 하고 그는 물었다. 침대 곁 마루바닥에 무슨 꾸러미를 내려 놓았다. 괜찮습니다, 신부님. 그는 아까 리날디가 앉았던 의자에 앉아서 어리둥절한 채 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얼굴이 몹시 피로해 보이는 것이 눈에 띄었다. 잠깐밖에 못 있겠습니다. 벌써 늦어서요. 하고 그는 말했다. 늦지 않습니다. 식당에서는 여전들합니까? 그는 미소했다. 나는 아직도 큰 놀림감이지요. 목소리도 피로한 것같이 들렸다. 다행히 모두들 잘 있지요. 괜찮으시다니 다행입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아프진 않나요? 그는 무척 피로해 보였는데 이렇게 피곤한 그를 별로 본 일이 없었다. 이젠 안 아파요. 식당에서도 당신이 없어서 섭섭해합니다. 나도 거기 가고 싶구먼요. 늘 잡담을 즐겼으니까요. 몇 가지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하고 그는 꾸러미를 집어들었다. 이건 모기장이오. 이건 백포도주고. 백포도주 좋아하시나요? 그리고 이건 영국 신문들입니다. 끌러 주십시오. 그는 기뻐하면서 그것들을 끌렀다. 나는 모기장을 손으로 들어 봤다. 백포도주는 그가 들어서 내게 보이고 다시 침대 옆 마루바닥에 놓았다. 나는 영국 신문 뭉치 하나를 집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석양이 신문에 닿도록 신문지를 돌려서 표제는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세계 뉴스>였다. 다른 건 그림이 있는 신문입니다. 이걸 읽으면 여간 재미있지 않겠는데요. 어디서 구하셨나요? 메스트레로 주문을 했지요. 더 갖다 드리겠습니다.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신부님. 백포도주 한잔 하실까요? 고맙습니다. 둬 두세요. 당신을 위해서 사온 거니까. 아니 한 잔만 드세요. 그러지요. 나중에 더 갖다 드리지요. 간호병이 컵을 가져오고 병 마개를 뽑았다. 마개를 부스러뜨렸기 때문에 나머지는 병 속에다 쑤셔넣을 수 밖에 없었다. 신부는 실망하는 듯했으나, 괜찮소. 아무래도 좋소. 했다. 신부님 건강을 축복해서 축배를 듭니다. 당신의 완쾌를 빌면서. 그리고는 손에 컵을 든 채 우리는 서로 바라보았다. 우리는 종종 같이 이야기를 했고 좋은 친구였으나, 오늘 밤에는 그것이 어려웠다. 어떻게 된 겁니까, 신부님? 아주 피곤해 보이는데요. 더위 때문에 그럴 거예요. 아니요, 아직 겨우 봄인데. 기분이 몹시 안 좋군요. 전쟁 혐오증이군요.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전쟁은 미워합니다. 나 역시 전쟁을 향락하지는 않지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고개를 저어 보이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당신은 전쟁을 염려하지 않습니다. 전쟁을 모릅니다. 그런 말을 하는 걸 용서하시오. 당신이 부상당한 걸 알면서도. 우연히 다친걸요. 그렇지만 부상까지 당하고서도 아직 전쟁을 모르고 있어요. 보면 알지요, 내 자신도 모르지만 약간 느끼기는 합니다. 내가 부상당할 때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답니다. 파시니가 이야기를 했지요. 신부는 컵을 내려놓았다. 그는 무슨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도 그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들 기분은 압니다. 그래도 다르지요. 그렇지만 정말 그 사람들이나 같습니다. 장교들은 아무것도 모르지요. 더러는 알지요. 퍽 섬세한 사람도 있어서 누구보다도 침울한 기분을 느끼지요. 대개는 그렇지 않지요. 교육이나 돈은 아니지요. 무슨 다른 것입니다. 만약에 교육과 돈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파시니 같은 사람은 장교가 되고 싶어하지는 않을 겁니다. 나도 장교가 되고 싶지는 않거든요. 신부님 계급은 장교 대우 아닙니까. 나도 장교구요. 나야 장교는 아니지요. 당신은 이탈리아 인도 아니니까. 외국인이니까. 그러나 당신은 병사들과 가깝다기보다는 장교 편에 가까운 사람이에요. 뭐가 다른가요? 알아듣기 쉽게 말할 수는 없군요.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나라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지요. 그런데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러나 전자가 후자에게도 전쟁을 하도록 만들지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돕고 있고. 당신이야 외국인이지요. 당신은 애국자입니다. 그리고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은요? 이들이 전쟁을 그만두게 할 수 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그는 또 창 밖을 내다보았다. 나는 그의 얼굴을 지켜 보고 있었다. 대관절 이들이 전쟁을 방지한 역사가 있습니까? 그들은 무엇이건 방지할 수 있도록 조직되어 있지 않지요. 조직이 되면 지도자가 그들을 팔아 버립니다. 그럼 영영 희망은 없군요? 희망이 없을 수가 있나요, 그러나 때로는 나도 희망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항상 희망을 가지려고 노력하지만 때로는 안 될 적도 있어요. 아마 전쟁이 끝날 테지요. 나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신부님은 뭘 하시겠습니까? 가능하다면 아브루치로 돌아가렵니다. 그의 갈색 얼굴에는 갑자기 희색이 돌았다. 아브루치를 사랑하시는군요. 그럼요, 무척 사랑합니다. 그렇다면 거기로 돌아가야지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겠어요. 거기 가서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봉사할 수 있다면. 그리고 존경도 받고 말이지요. 하고 내가 말했다. 그래 존경도 받고. 받지 말란 법이 있나요? 안 받을 까닭이 없지요. 신부님은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그거야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 고향에서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건 허무맹랑한 농담이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그는 나를 바라보고 미소지었다. 알지만 당신은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않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습니까? 하고 그는 물었다. 밤이면 가끔 하나님이 두려울 때는 있지요. 당신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나는 뭐든지 열렬히 사랑하지 않는 성품이랍니다. 아니요 하고 그는 말했다. 사랑해 보세요. 당신이 밤이면 내게 하던 이야기.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그건 단지 정열이고 육욕이지요. 사랑을 하면 그것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싶은 법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희생하고 싶지요. 봉사하고 싶구요. 나는 사랑을 못 합니다. 사랑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될 걸 알고 있습니다. 그 때는 당신도 행복할 겁니다. 나는 지금도 행복한걸요. 항상 행복했구요. 그건 문제가 다르지요. 이건 가져 보지 않고는 모르는 행복입니다. 글쎄요 하고 내가 말했다. 만약에 가지게 되거든 알려 드리지요. 너무 오래 앉아서 너무 많이 이야기를 했군요. 그는 정말 그게 걱정인 것 같았다. 아니 가지 마세요. 여자를 사랑하는 건 어떨까요? 만약에 내가 어떤 여자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신을 사랑하는 것과 흡사할까요? 그건 나로서는 모르겠습니다. 여자를 사랑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어머니는요? 그렇지요, 어머니야 사랑했겠지요. 신부님은 항상 하나님을 사랑하셨나요? 어린 소년 시절부터 줄곧. 그래요.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신부님은 아직도 기특한 소년입니다. 난 소년이지만 하고 그는 말했다. 당신은 나를 신부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려. 그거야 예의지요. 그는 미소했다. 정말 가야겠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뭐 부탁할 거 없습니까? 그는 무슨 부탁이라도 받았으면 좋겠다는 표정이었다. 아니요. 그저 같이 이야기를 해 주시면 만족합니다. 식당에 모이는 패들에게도 안부하더라고 전하지요. 여러가지 좋은 선물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만에. 또 만나러 와 주세요. 그러지요, 안녕히. 그는 내 손을 가만가만 두드렸다. 그럼 또. 나는 사투리로 말했다. 그럼 또. 그도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방 안은 어두웠는데 침대 발치에 앉아 있던 간호병이 일어나서 신부와 나갔다. 나는 그이가 퍽 좋았다. 그래서 장차 그가 아브루치로 돌아가서 살게 되었으면 싶었다. 그는 식당에서 노상 놀림감이 되었고 용하게 그것을 참았는데,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면 어떤 생활을 할 것인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카프라코타에서는 시가지 아래 시내에 송어가 있다고 했다. 밤에 피리를 부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고 했다. 젊은 남자가 세레나데를 부를 때도 피리는 금물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고 내가 물었다. 밤에 피리 소리를 듣는 것은 처녀들에게 해롭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농부는 모두 우리를 나으리 라고 부르고, 길에서 만나면 모자를 벗는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는 날마다 사냥을 하는데 농가에 들러서 식사를 한다는 것이다. 농부들은 언제나 그것을 명예로 여긴다는 것이다. 외국인이 사냥을 오면 결코 구금당한 일이 없다는 증명서를 제출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랑 사소 디탈리아에는 곰이 있지만 그 곳에서는 퍽 멀다는 것이었다. 아퀼라는 아담한 고을이다. 여름에도 밤이면 서늘하고 아브루치의 봄은 이탈리아에서도 가장 아름답다. 그러나 밤나무 숲으로 샤낭을 가는 가을이 아주 즐겁다. 새들은 모두 포도를 먹기 때문에 고기 맛이 좋고, 농부들은 자기 집에서 같이 밥을 먹어 주면 명예로 알기 때문에 점심을 싸 가지고 갈 필요가 없다 -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조금 후에 나는 잠이 들었다. {{}}{{12 }} 병실은 길고, 바른편에 창문들이 있고, 멀리 막바지에 치료실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내가 누워 있는 침대의 열은 창을 향해 있었고, 창문 밑에 있는 또 다른 열은 벽을 향해 있었다. 그래서 왼편으로 돌아 누우면 치료실 출입문이 보였다. 멀리 막바지에는 또 하나 문이 있어서 가끔 사람들이 그 문으로 들어왔다. 누가 죽으려고 하면 침대 주위에 휘장을 둘러쳐서 죽는 것을 보지 못하게 했고, 군의관과 남자 간호병의 신발과 각반만이 휘장 아래로 보일 뿐이었고, 임종시에는 속삭이는 소리가 들릴 적도 있었다. 조금 있으면 휘장 뒤에서 신부가 나오고, 간호병들이 휘장 뒤로 다시 들어가서 담요를 덮은 시체를 들고 나와서 침대 사이 통로로 운반해 가면, 누군가가 휘장을 접어서 가지고 가버린다. 그 날 아침에 우리 병실을 맡고 있는 소령이 내일 여행을 해도 괜찮겠느냐고 내게 물었다.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아침 일찍 나를 전송하겠다고 했다. 너무 더워지기 전에 여행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치료실로 옮기기 위해서 침대에서 들어올리면 창 밖을 내다볼 수 있는데, 마당에 새로 만든 무덤들이 보였다. 마당으로 나가는 문 바깥에 한 병사가 앉아서 십자가를 만들고, 마당에 묻힌 병사의 성명, 계급, 소속 연대를 거기다가 페인트로 쓰고 있었다. 그도 역시 병실 시중을 드는 병사인데 한가한 틈을 이용해서 오스트리아 군의 소총 탄피로 라이터를 만들어서 내게 선사한 일도 있었다. 군의관들은 무척 친절했고 퍽 유능한 사람들인 것 같았다. 그들은 나를 밀라노로 보내려고 애를 썼다. 거기는 엑스레이 시설도 여기보다는 훌륭하고, 수술 후에 기계 치료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나 역시 밀라노로 가고 싶었다. 공격이 시작되면 병원이 침대를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될 수만 있다면 우리를 후송해 버리려고 했다. 내가 야전 병원을 떠나는 전날 밤에 리날디가 식당 친구인 소령을 데리고 나를 찾아왔다. 내가 밀라노에 새로 설치된 미군 병원으로 전송된다고 그들은 말했다. 미군 위생대 몇 부대가 이리로 파견될 텐데, 이 병원이 그들과 그 밖에 이탈리아에서 근무하는 미국인의 뒤치닥거리를 하게 될 거라고 했다. 적십자에는 미국인이 많다고 했다. 미국은 독일에 대해서는 선전 포고를 했으나 오스트리아에 대해서는 안 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인들은 미국이 오스트리아에 대해서도 선전 포고를 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고, 그래서 파견되어 오는 미국인에 대해서는 심지어 적십자 관계라도 열렬한 환영을 했다. 윌슨 대통령이 오스트리아에 대해서도 선전 포고를 할 것 같으냐고 묻기에 나는 그건 시간 문제라고 대답했다. 오스트리아에 무슨 원한이 있는지 몰랐지만 독일에 대해서 선전 포고를 한 이상 오스트리아에 대해서도 하는 것이 논리적인 것 같았다. 터키에 대해서도 선전 포고를 할 것 같으냐고 묻기에 그건 의심스럽다고 대답했다. 터키는 우리 국민이 좋아하는 새라고(터키는 칠면조 - 역자 주) 했더니 이 농담을 잘못 알아듣고 당황하고 의혹을 품기에, 나는 아마 터키에 대해서도 선전 포고를 할 거라고 대답했다. 그럼 불가리아에 대해서는? 우리는 브랜디를 몇 잔에 마셨는데, 나는 물론 불가리아에 대해서도, 또 일본에 대해서도 할 거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일본은 영국의 연합국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음흉한 영국은 믿을 수 없어, 일본은 하와이가 탐이 나는 거야, 하고 내가 말했다. 하와이가 어디 있기에? 태평양에 있지. 왜 일본은 그걸 탐내나? 정말 탐을 내는 건 아니냐 하고, 내가 말했다. 그저 그런 이야기가 있지. 일본인은 우수하고 키가 작은 국민인데 춤이랑 약한 술을 좋아하지. 프랑스 인 같군, 하고 소령이 말했다. 우리는 니스와 사부아를 프랑스로부터 빼앗는다. 우리는 코르시카와 아드리아 해 연안을 전부 빼앗는다고 리날디가 말했다. 이탈리아는 로마 시대의 영광으로 돌아간다고 소령이 말했다. 난 로마를 안 좋아해, 하고 내가 말했다. 덥고 벼룩천지야. 로마를 안 좋아해? 천만에, 나는 로마가 좋아. 로마는 모든 나라의 어머니야. 나는 로물루스를 먹여 기른 티베르 강을 잊을 수 없어. 뭐라고? 아무것도 아냐. 우리 모두 로마로 가지, 오늘 밤에 로마로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자구. 로마는 아름다운 도시야, 하고 소령이 말했다. 모든 국가의 어머니요 아버지지, 하고 내가 말했다. 로마는 여성이야, 하고 리날디가 말했다. 아버지가 될 수는 없어. 그럼 아버지는 누구야, 성신(聖神)인가? 신을 모독하지 말아. 모독이 아니야, 알려고 물어 보는 거야. 자네 취했네, 애기야. 누가 나를 취하게 했나? 내가 취하게 했지, 하고 소령이 말했다. 자네를 좋아하고 미국이 전쟁에 개입했기 때문에 내가 취하게 했어. 곤드레가 되도록 취해 보지, 하고 내가 말했다. 자네는 내일 떠나, 애기야, 하고 리날디가 말했다. 로마로, 내가 말했다. 아니야, 밀라노야. 밀라노로, 수정궁(水晶宮)으로, 코바로, 캄파리로, 비피로, 갈레리아로, 소령이 말했다. 자네는 행운아야. 그랑 이탈리아로 가야지. 거기서 조지한테 돈을 꾸어야지, 하고 내가 말했다. 스칼라로, 리날디가 말했다. 스칼라에도 갈 테지. 저녁마다 가야지, 내가 말했다. 저녁마다 갈 수는 없을 거야, 하고 소령이 말했다. 입장권이 굉장히 비싸거든. 할아버지 명의로 일람불(一覽拂) 환어음을 떼지 뭘, 하고 내가 말했다. 일람 뭐라구? 일람불 환어음 말야. 할아버지가 돈을 치러 주거나 내가 감옥에 가는 게지. 은행에 있는 커닝햄 씨가 맡아 해 주지. 나는 일람불 환어음을 먹고 사니까. 자기가 죽고 이탈리아를 살리려는 애국자인 손자를 할아버지가 감옥으로 보낼 수 있는가 말이야. 미국인 가리발디(이탈리아의 애국자 - 역자 주) 만세, 하고 리날디가 말했다. 일람불 환어음 만세, 하고 내가 말했다. 우리 좀 조용해야겠어, 하고 소령이 말했다. 아까부터 몇 번이나 조용히 하라는 주의를 받았어. 자네 정말 내일 떠나나, 페데리코? 글쎄 미군 병원으로 간다니까요, 하고 리날디가 말했다. 예쁜 미국인 간호부 곁으로. 야전 병원의 수염을 기른 간호병이 아니고, 그래 그래 미군 병원으로 가는 건 나도 알아, 소령이 말했다. 수염 기른 거야 어떻담, 내가 말했다. 누구든지 수염을 기르고 싶거든 기르게 내버려둬. 소령님은 왜 수염을 안 기르시나요? 방독면 속에 안 들어가거든. 들어가요. 방독면 속에는 뭐든지 들어가요. 난 방독면 속에서 토한 일도 있는걸요. 애기야, 제발 소리 좀 지르지 마, 리날디가 말했다. 자네가 일선에 간 것은 다 알고 있어. 아아, 그런데 자네가 없어지면 난 어떡하지? 이젠 가야겠어, 소령이 말했다. 센티멘털해지는군. 여보게, 자네가 들으면 놀랄 만한 소식이 있네. 자네 그 영국 여자 말야, 알겠지? 저녁마다 병원으로 만나러 가던 그 영국 여자 말일세. 그 여자도 밀라노로 간대. 다른 간호사 한 사람하고 같이 미군 병원으로 간대. 미국서 아직 간호사를 못 데려왔다나. 오늘 병원장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지. 여기는 전선인데 여자가 너무 많다는 거야. 그래서 몇은 후방으로 돌려보낸다는군. 감상이 어떤가 응? 좋으이. 그래? 자네는 큰 도시에 있게 되고, 자네 영국 여자가 껴안아 줄 테지. 난 왜 부상도 안 당하나? 자네도 당하게 될지 아나, 내가 말했다. 가야겠어, 소령이 말했다. 우리가 술이 취해서 떠들어 대서 페데리코 정신만 산란하게 만들어 놨어. 가지 마시오. 아니 가야 해. 잘 있게. 조심하게. 재미 많이 보게. 안녕. 안녕. 안녕. 애기야, 빨리 돌아와. 리날디가 내게 키스를 했다. 자네 리졸 냄새가 나는군. 애기야, 안녕. 안녕. 재미 많이 보게. 소령이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들은 가만가만 발 끝으로 걸어나갔다. 나는 무척 취해 왔으나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밀라노를 향해서 출발, 48시간 후에 도착했다. 형편없는 여행이었다. 메스트레에 이르기 전에 열차는 대피선에서 장시간을 머물렀고, 아이들이 몰려와서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한 아이를 붙들고 코냑을 한 병 사오랬더니 돌아와서 그래파밖에 구할 수 없다고 했다. 그거라도 사오라고 하고 거스름돈을 아이에게 심부름 값을 준 다음에, 내 옆에 누운 친구하고 나눠 마시고 취해서 비첸차를 지나도록 잤다. 여기서 잠이 깨자 마루바닥에 토했다. 이건 놀랄 일이 아닌 것이 내 옆의 친구는 벌써 여러 번 마루 바닥에 토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아무래도 갈증을 참아 낼 수가 없어서 베로나 교외의 정거장에서 열차 차창 밖을 왔다갔다 하는 병사를 불러서 물을 청했더니 갖다 주었다. 술에 취한 죠르제티를 깨워서 물을 권했다. 그는 어깨에 부어 달라고 하고는 또 잠이 들었다. 그 병사는 내가 주는 수고값을 받지 않고 물이 많은 오렌지를 하나 갖다 주었다. 나는 그것을 벗겨서 물을 빨아 먹고 찌꺼기를 뱉고, 그 병사가 화물 열차 옆을 왔다갔다 하는 것을 바라고 있자니까 얼마 후에 열차가 덜컹하더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 2 편 {{}}{{13 }} 아침 일찍 밀라노에 도착했는데, 역원들이 우리를 화물 열차 플랫폼에 내려놓았다. 앰뷸런스가 나를 미군 병원으로 옮겨갔다. 담가에 누운 채 앰뷸런스에 실려 갔기 때문에 어디를 통과하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담가를 내릴 때 보니까 시장이 있고 문을 연 술집이 보이는데 여자가 소제를 하고 있었다. 거리에 물을 뿌리고 있어서 이른 아침 냄새가 났다. 그들은 담가를 내려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포터가 그들과 같이 나왔다. 그는 회색 수염을 기르고, 수위 모자를 쓰고, 셔츠 소매를 걷고 있었다. 담가째로는 승강기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담가에서 내려서 승강기로 올라갈 것인지, 담가째로 계단을 메고 올라갈 것인지를 의논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의논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들은 승강기로 오르기로 결정했다. 나는 담가에서 내렸다. 조심해 하고 내가 말했다. 가만가만 다루라구. 승강기 안은 우리들만 해도 좁아서 다리가 구부러지니까 여간 아픈 것이 아니었다. 다리를 펴 주게. 하고 내가 말했다. 펴지지 않습니다, 중위님. 좁아서요. 이 말을 한 병사는 나를 안고 있었고, 나는 두 팔로 그의 목에 매달렸다. 얼굴에 그의 입김이 와 닿는데 마늘과 붉은 포도주의 금속성 냄새가 났다. 조용히 하시오. 하고 다른 사나이가 말했다. 어떤 빌어먹을 놈이, 조용히 있잖은가. 조용히 하라구요. 내 다리를 든 병사가 말했다. 승강기 문이 닫히고, 철장문이 닫히고, 4층 단추를 포터가 누르는 것을 보았다. 포터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승강기는 천천히 올라갔다. 무거운가? 나는 마늘 냄새가 나는 사람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그는 얼굴에 땀을 흘리며 낑낑거리고 있었다. 승강기는 천천히 올라가서 멈췄다. 다리를 든 병사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발코니에 있었다. 놋쇠 손잡이가 달린 문이 대여섯 개 있었다. 다리를 든 사람이 단추를 눌러 초인종을 울렸다. 방 안에 벨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포터가 계단으로 올라갔다. 어디들 있는 거요? 하고 담가병이 물었다. 모르지 하고 포터가 대답했다. 아래층에서 자니까. 누구든지 불러 오시오. 포터는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고 하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경을 쓴 중년 부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머리가 풀어져서 금방 흘러내릴 것 같았고, 간호사복을 입고 있었다. 난 모릅니다. 하고 간호사가 말했다. 난 이탈리아 말을 모릅니다. 내가 영어를 합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나를 어느 병실이고 수용해 달라는 것입니다. 준비된 방이 하나도 없어요. 환자를 받게 되어 있지 않은데요. 간호부는 머리를 치켜올리고 근시안인 눈을 찌푸리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데나 나를 수용할 만한 병실을 이 사람들에게 보여 주시오. 모르겠어요. 환자를 받게 되어 있지 않아요. 어떤 방에도 수용할 수는 없어요. 아무 방이나 좋습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그리고 포터를 보고 이탈리아 어로 빈 방을 찾아 보시오. 했다. 전부 비었어요 하고 포터가 말했다. 중위님이 첫 환자에요. 그는 손에 모자를 쥔 채 중년 간호사를 바라보았다. 제발 적선하는 셈치고 방에 데려다 눕혀 주시오. 다리를 구부리고 있었기 때문에 통증이 계속 중이었으며, 뼈 속으로 파고 들었다가 나왔다가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포터가 회색 머리 간호사를 따라 들어가더니 이윽고 빠른 걸음으로 돌아왔다. 따라오시오. 긴 복도를 지나서 겉창이 닫혀 있는 방으로 나를 들고 갔다. 신품 가구 냄새가 났다. 침대 하나와 거울이 달린 커다란 옷장이 놓여 있었다. 그들은 침대 위에 나를 내려놓았다. 홑이불은 없어요. 하고 여인이 말했다. 잠겨 있어서요. 나는 간호사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 포터에게 말했다. 내 주머니에 돈이 있어. 단추가 잠겨 있는 주머니에. 포터는 돈을 꺼냈다. 두 담가병은 모자를 손에 쥐고 침대 옆에 서 있었다. 저 사람들에게 하나 앞에 5리라씩 나눠 주고, 자네도 5리라 갖게. 내 다른 주머니에 서류가 있어. 그건 간호사에게 주고. 담가병은 경례를 하고 고맙다고 말했다. 잘 가게, 고맙네. 그들은 재차 경례를 하고 나갔다. 그 서류에 하고 나는 간호사에게 말했다. 내 증상이랑 지금까지 받은 치료가 적혀 있습니다. 여인은 그것을 집어들고 안경 너머로 들여다보았다. 서류는 석 장인데 접혀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고 여인이 말했다. 이탈리아 어를 읽을 줄 모르니까요. 나는 의사 명령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여인은 울기 시작하더니 서류를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미국인이세요? 울면서 이렇게 물었다. 그렇소.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내 서류를 놔 두시오. 방 안은 컴컴하고 서늘했다. 누운 채로 방 저쪽 벽에 걸린 큰 거울을 볼 수 있었지만 거울에 비친 것은 안 보였다. 포터가 침대 옆에 서 있었다. 그는 얼굴도 잘 생기고 퍽 친절했다. 가도 좋아 하고 그에게 말했다. 당신도 가도 좋습니다. 간호사에게도 말했다. 이름이 뭡니까? 미세스 워커에요. 가도 좋습니다. 미세스 워커. 좀 잤으면 해서요. 나는 혼자 방 안에 남았다. 서늘하고 병원 냄새가 안 났다. 매트리스는 단단해서 편안했고, 거의 숨도 안 쉬고 가만히 누워서 통증이 덜해 가는 쾌감을 맛보고 있었다. 한동안 있다가 물이 먹고 싶어서 침대 곁의 초인종 전선을 발견하고 눌러 봤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나는 잠이 들었다. 잠이 깨자 사방을 둘러보았다. 겉창 사이로 햇빛이 들어왔다. 커다란 옷장과 텅 빈 벽과 의자 두 개가 보였다. 더러운 붕대가 감긴 내 다리는 침대 밖으로 삐죽 나와 있었다. 나는 그것을 움직이지 않도록 조심했다. 목이 말라서 초인종 있는 곳으로 팔을 뻗어 단추를 눌렀다. 문 열리는 소리가 나기에 바라보았더니 간호사였다. 이번에는 젊고 아름다웠다. 안녕하시오? 하고 내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하면서 간호사는 침대 곁으로 왔다. 의사 선생님이 안 계시답니다. 코모 호수에 가셨어요. 환자를 받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어요. 그런데 어디가 편찮으세요? 부상당했죠. 다리와 발과 머리를 다쳤어요. 성함은요? 헨리. 프레더릭 헨리올시다. 몸을 닦아 드리지요. 그렇지만 선생님이 오시도록 붕대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미스 바클리라고 여기 있습니까? 아니요. 여기는 그런 이름을 가진 여자는 없습니다. 내가 들어왔을 때 울던 여자는 누굽니까? 간호사는 웃었다. 미세스 워커에요. 야근이 돼서 자고 있었던 거예요. 누가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요.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간호사는 내 옷을 벗겼고, 붕대만 남기고 알몸이 되자 가만가만 아주 부드럽게 닦아 주었다. 무척 기분이 좋았다. 머리에도 붕대가 있었는데 가장자리를 돌아가면서 말끔히 닦았다. 어디서 부상을 당하셨어요? 플라바 북쪽 이손초에서요. 그거 어디인데요? 어디를 대 봐야 어딘지 전혀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많이 아프세요? 아니. 이제 대단치는 않군요. 간호사는 내 입에 체온계를 꽂았다. 이탈리아 인은 겨드랑이 밑에 꽂습니다. 말씀하지 마세요. 체온계를 꺼내자 수은주를 읽고, 다시 흔들어서 내렸다. 몇 도지요? 그런 건 알려 드리지 않는 법이에요. 어떤지 말해 주시오. 거의 평온이에요. 신열이 나 본 일은 없으니까. 내 다리에는 낡은 쇠붙이가 가득하답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박격포탄 파편이니 낡은 나사못이니, 침대 스프링이니 하는 것들이 들어 있단 말이오. 간호사는 머리를 젓고 미소지었다. 다리에 만약 이상한 물체도 들어 있다면 화농해서 열이 날 텐데요. 좋아요 하고 내가 말했다. 뭐가 나올지 보면 알 거요. 간호사는 나가더니 이른 아침에 왔던 그 늙은 간호사는 데리고 들어왔다. 둘이서 같이 침대를 정돈하고 나를 눕혔다. 처음 당하는 일인데 그럴 듯한 솜씨들이었다. 여기 책임자는 누구세요? 미스 바 캠펜이에요. 간호사는 몇 명이나 되나요? 우리 둘 뿐이에요. 더 오지는 않아요? 몇 명 더 온대요. 언제나 여기 닿는답니까? 모르지요. 환자가 뭐 그렇게 질문이 많으세요? 환자가 아니지요, 부상병이지. 하고 내가 말했다. 그들이 자리를 봐 줘서 나는 깨끗하고 부드러운 시트를 밑에 깔고, 또 한 장은 덮고 누웠다. 미세스 워커가 나가더니 파자마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것을 입으니까 아주 상쾌하고 옷다운 옷을 입은 기분이었다. 친절하게 해 줘서 고맙습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미스 게이지라는 그 간호사가 킬킬 웃었다. 물 한 컵 갖다 주시겠어요? 그럼요. 그리고 아침 식사를 하셔야지요. 아침은 싫습니다. 겉창이나 좀 올려 주실까요? 방 안은 침침했었는데 겉창을 올리니까 환하게 밝은 햇빛이 들어와서 바깥 발코니와 그 너머로 기와를 인 지붕이랑 굴뚝이 보였다. 기와 지붕 너머로 흰 구름과 무척 푸른 하늘을 보았다. 다른 간호사들이 언제나 오는지 모르시오? 왜요? 우리가 간호를 잘못해서 그러세요? 무척 잘해 주는데요. 변기 쓰시고 싶으세요? 해 볼까요. 그들은 나를 도와 일으켜 주었으나 용변이 되지를 않았다. 마침내 나는 누워서 열린 문으로 발코니 쪽을 내다보았다. 의사는 언제 오나요? 돌아오셔야지요. 코모 호반으로 전화를 걸기는 걸었지만. 다른 의사는 없어요? 그분이 이 병원 의사 선생님이세요. 미스 게이지는 물 주전자와 유리컵을 가지고 왔다. 나는 석 잔을 마시고 그들이 나간 후에 한동안 창 밖을 내다보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점심을 조금 들었고, 오후에 간호부장인 미스 반 캠펜이 나를 보러 왔다. 그도 나를 안 좋아했지만 나도 그가 싫었다. 몸집이 작고 의심이 많고, 지위에 안 어울릴 만큼 고상한 체했다.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내가 이탈리아 인과 같이 있었던 것이 무슨 불명예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식사 때 포도주를 마셔도 좋습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 의사가 지시하셔야만 됩니다. 그럼 의사가 돌아오도록 못 마십니까? 절대로 안 됩니다. 결국 돌아오시도록 주선을 하고 계시겠군요? 코모 호반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녀가 나가자 미스 게이지가 돌아왔다. 왜 미스 반 캠펜에게 무뚝뚝하게 대하셨어요? 아주 솜씨 있게 일을 봐 준 다음에 내게 이렇게 물었다.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그렇지만 너무 애교가 없더군. 중위님이 아주 거만하고 무뚝뚝하다고 그러던데요. 천만에, 허지만 의사 없는 병원이 있을 수 있을까요? 오신다니까요. 코모 호반으로 전화를 걸었어요. 거기서 뭘 하고 있나요? 해수욕? 아니요. 거기 병원을 갖고 계시죠. 왜 다른 의사를 두지 않을까? 쉬! 쉬! 얌전하게 기다리면 오십니다. 나는 포터를 불러서 그가 들어오자 이탈리아 말로 술집에 가서 친차노 한 병과 키안티 한 병, 석간 신문을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나갔다가 그것들을 신문에 싸 가지고 돌아와서 풀었다. 나는 병마개를 빼라고 하고, 포도주와 베르무트는 침대 밑에 넣어 두라고 했다. 나 혼자 두고 다들 나가 버려서 나는 침대에 누운 채 한동안 신문을 뒤지고, 일선 소식이며 전사한 장교 명단과 그들에게 수여된 훈장의 종류 같은 것을 읽다가, 친차노 술병을 집어서 배 위에 올려놓고, 싸늘한 유리 컵을 역시 배 위에 올려놓고 조금씩 마셨다. 술을 안 따를 때는 병을 그대로 배 위에 놓고 있었기 때문에 배에 여러 개 동그라미 자국이 남았고, 바깥 거리의 지붕 위가 어두워져 가는 것을 지켜 보고 있었다. 제비가 원을 그리면서 빙빙 도는 것을 바라보고, 매가 지붕 위를 날아다니는 것을 바라보고 하다가 친차노를 마시곤 했다. 미스 게이지가 계란술을 만들어 가지고 올라왔다. 그녀가 들어올 때 나는 술병을 침대 반대편으로 내려서 감췄다. 미스 반 캠펜이 여기다가 셰리를 조금 넣었어요. 너무 그분한테 무뚝뚝하게 굴지 마세요. 젊은 분도 아니고 이 병원에서 큰 책임을 맡고 있으니까요. 미세스 워커는 너무 늙어 별로 도움이 안 돼요. 훌륭한 분이오 하고 내가 말했다. 고맙기 짝이 없지요. 곧 저녁을 갖다 드리겠어요. 괜찮아요. 하고 내가 말했다. 별로 배가 고프지 않군요. 그녀가 식사를 가지고 와서 침대 곁 탁자에 놓기에 고맙다고 하고 저녁을 조금 먹었다. 이내 바깥은 어두워졌고, 탐조등(探照燈)의 불빛이 하늘에서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동안 그걸 바라보고 있다가 잠이 들었다. 곤하게 잤는데, 단 한 번 땀이 나고 무섭고 해서 깼다가 다시 잠이 들면서 꿈을 안 꾸려고 애를 썼다. 날이 밝기 훨씬 전에 잠이 깨어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눈을 뜨고 있노라니까 날이 밝기 시작했다. 고단해서 날이 아주 밝자 다시 잠이 들었다. {{}}{{14 }} 눈을 떴을 때 방 안이 환하게 밝아 있었다. 일선에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을 느꼈으며, 침대에서 몸을 뻗어 보았다. 다리에 통증을 느껴 내려다보니까 아직 더러운 붕대 그대로인 다리가 보였고, 비로소 내가 어디 있는가를 알았다. 손을 뻗어 벨의 줄을 잡고 단추를 눌렀다. 홀에서 벨이 찌르르하고 울리고, 고무창을 댄 신을 신은 사람이 홀을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미스 게이지였는데 밝은 곳에서 보니까 약간 더 늙어 보였고, 별로 예쁘지도 않았다. 잘 주무셨어요? 하고 그녀는 인사를 했다. 예, 고맙소, 아주 잘 잤지요. 이발사를 부를 수 있을까요? 저녁에 와 봤더니 이걸 안고 주무시더군요. 그녀는 옷장 문을 열고 베르무트의 병을 쳐들어 보였다. 거의 빈 병이었다. 침대 밑에 있던 것도 옷장 속에 넣어 두었어요. 하고 그 여자는 말했다. 왜 절 보고 잔을 갖다 달래지 그랬어요? 술을 못하게 할 줄 알았지요. 같이 조금 들어도 좋았을 텐데. 멋있는 분이시군. 혼자 드시는 건 좋지 않아요 하고 그 여자가 말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세요. 알겠소. 중위님 친구라는 미스 바클리가 왔어요. 정말? 네, 난 그녀가 안 좋아요. 장차 좋아하게 되겠죠. 아주 좋은 사람이니까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예쁘긴 해요. 조금만 이쪽으로 옮겨 누우실 수 있어요? 됐어요. 아침 식사 전에 몸을 닦아 드려야지. 그녀는 수건과 비누, 온수로 내 몸을 닦아 주었다. 어깨를 들어 보세요. 됐어요. 아침 먹기 전에 이발사를 부를 수 있을까요? 포터를 시켜 불러 오지요. 그녀는 나갔다가 되돌아왔다. 부르러 갔어요 하고 들고 있던 수건을 물 대야에 담갔다. 이발사가 포터를 따라왔다. 쉰 살쯤 되는, 수염을 치켜 기른 사나이였다. 미스 게이지가 내 몸 닦는 일을 끝내고 나가자 이발사는 내 얼굴에 비누 거품을 바르고 면도를 했다. 무척 점잔을 빼고 말이 없었다. 어떻게 된 거요? 아무 뉴스도 없소? 무슨 뉴스요? 아무 뉴스나. 거리는 어떻소? 전시니까요 하고 그는 말했다. 도처에 적의 귀가 있어요. 나는 그를 올려다 보았다. 얼굴을 움직이지 마세요. 하면서 그는 면도를 계속했다. 아무 이야기도 않겠어요. 어떻게 된 셈이야? 하고 내가 물었다. 난 이탈리아 인이오. 적과 내통하지는 않겠어요. 지껄이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이 친구가 돌았다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면도 밑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상책이다. 나는 또 한 번 그를 잘 봐 두려고 했다. 조심해요. 하고 그는 말했다. 면도가 잘 드니까요. 면도가 끝나자 돈을 치르고 팁으로 반 리라를 주었다. 그는 동전을 되돌렸다. 안 받겠어요. 난 일선에 나가 있지는 않지만 이탈리아 사람이오. 빨리 꺼져 버려. 실례했습니다. 하고 그는 면도를 신문지에 쌌다. 동전 다섯 닢을 침대 곁 탁자 위에 둔 채로 나가 버렸다. 나는 벨을 눌렀다. 미스 게이지가 왔다. 포터 좀 불러 주시겠어요? 그러지요. 포터가 왔다. 그는 웃음을 참느라고 애를 썼다. 그 이발사가 미쳤지? 아닙니다, 중위님. 잘못 안 거예요. 잘못 알아듣고 중위님이 오스트리아 장교라고 한 줄 안 거랍니다. 그래 하고 내가 말했다. 하 하 하! 포터는 웃었다. 재미있는 사람이에요. 조금만 움직이면 이렇게 해 버릴 작정이었다고 - 그는 손가락으로 목 자르는 시늉을 했다. 하 하 하! 그는 웃음을 참으려고 애를 썼다. 중위님이 오스트리아 인이 아니라고 했더니. 하 하 하! 하 하 하! 나는 씹어 뱉듯이 말했다. 그 녀석이 내 목을 도렸더라면 재미있었겠군. 하 하 하! 아니죠, 중위님.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 자가 오스트리아 인을 얼마나 무서워하는데요. 하 하 하. 하 하 하! 이젠 나가라구. 그는 나갔다. 복도에서 그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누가 복도를 걸어오는 소리가 났다. 문께를 바라보았다. 캐서린 바클리였다. 그녀는 방으로 들어와서 침대로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캐서린은 인사를 했다. 신선하고 젊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를 본 일이 없는 것 같았다. 여어 하고 나도 인사를 했다. 그녀를 보자 사랑의 불길이 타올랐다. 모든 것이 내 가슴 속에서 온통 뒤집혀졌다. 그녀는 문 쪽을 바라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침대 옆에 걸터앉아 몸을 구부려서 키스했다. 나는 그녀를 와락 잡아당겨서 키스하며 그녀의 가슴의 고동을 느꼈다. 내 사랑 하고 나는 말했다. 용케 이리로 왔구려. 그다지 어렵지 않았어요. 눌러 있기가 어려울 테죠. 있어 줘야지 하고 내가 말했다. 아아, 정말 잘 됐어. 나는 미칠 것 같았다. 그녀가 정말 거기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고, 그저 꼭 껴안고 있었다. 이럼 안 돼요. 그 여자가 말했다. 아직 몸도 완쾌가 안 되셨는데. 아냐, 괜찮아. 자아. 아니에요. 아직 기운도 없으실 텐데. 천만에. 괜찮아. 자아, 얼른. 나를 사랑하세요? 진정으로 사랑하지. 미쳐 버렸다니까. 자아, 어서. 우리 가슴이 뛰는 거 아시겠어요? 가슴이야 아무래도 좋아. 당신을 갖고 싶어. 당신한테 미쳤어. 정말 나를 사랑하세요? 자꾸 그 말만 하지 말아요. 자아, 어서, 자아, 캐서린. 좋아요. 잠깐만요. 그래, 문 닫고 와. 안 돼요, 그건 - 자아, 말하지 마. 자아 이리. 캐서린은 침대 곁 의자에 앉았다. 문은 복도를 향해 열려 있었다. 광포한 순간이 사라지고 이제는 기분이 훨씬 좋았다. 그녀가 물었다. 이젠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믿으세요? 아아, 귀여운 사람 하고 나는 말했다. 당신은 여기 있어야 해. 아무도 다른 데로 못 보내. 난 당신을 미칠 것같이 사랑하고 있어. 무척 조심해야 해요. 아까는 정말 미친 거예요. 그래서는 못 써요. 밤에는 할 수 있지. 무척 조심해야 해요. 다른 사람 있는 데서는 조심해야 해요. 그러지. 그래야 해요. 당신은 좋은 분이에요. 날 사랑하지요, 네? 다신 그런 말 말아. 내가 그 말을 들으면 얼마나 섭섭한지 당신은 모를 거야. 그럼 다음부터 조심하죠. 이 이상 당신을 괴롭혀 드려서는 안 되니까요. 정말 이젠 가 봐야겠어요. 곧 돌아와 줘. 될 수 있으면 돌아올게요. 굿바이. 갔다올게요. 그녀는 나갔다. 정말이지 나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누구와도 사랑에 빠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사랑에 빠져 버렸고, 밀라노의 병원에 누워서 가지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데 드디어 미스 게이지가 들어왔다. 의사 선생님이 오신답니다. 하고 말했다. 코모 호수에서 전화가 왔어요. 언제 온답니까? 오늘 오후에는 도착하실 거예요. {{}}{{15 }} 오후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의사는 야위고 말이 없는 조그만 사람인데 전쟁으로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그는 섬세하고 세련된 혐오의 표정으로 내 넓적다리에서 조그만 강철 파편을 여러 개 꺼냈다. 그는 눈(雪) 인가 하는 약명이 붙은 국부 마취제를 썼는데, 이것은 조직을 동결시켜 탐침(探針)이나 메스나 핀셋이 그 동결된 부분의 밑에까지 들어가지 않으면 통증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마취된 국부를 환자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한참 후에 의사는 섬세한 신경이 완전히 소모되었는지 엑스레이를 찍어 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탐침으로서는 충분히 찾아 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종합 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그 의사는 잘 흥분하고 명랑하며 유능한 사람이었다. 어깨를 일으켜 세우고 찍었으므로, 환자가 직접 기계를 통해 비치는 커다란 이질체(異質體)를 볼 수 있었다. 원판은 나중에 보내준다고 했다. 의사는 자기 수첩에 내 이름과 소속 연대와 감상을 써 달라고 했다. 그는 사진으로 본 이질체가 흉악하고 끔찍하다고 단언했다. 오스트리아 인은 모두 개새끼들이라고 했다. 몇 놈이나 죽였소? 사실은 하나도 안 죽였지만 기분을 흡족하게 해 주고 싶어서 무척 많이 죽였다고 대답했다. 미스 게이지가 나를 따라갔었는데, 그는 그녀를 끌어안다시피 하고 클레오파트라보다도 미인이라고 했다. 이 여자가 내 말을 알아들을까? 이집트의 전 여왕 클레오파트라 말이야. 그래, 정말 미인이야. 우리는 앰뷸런스로 작은 병원으로 돌아왔고, 한동안 메어올려져서 간신히 이층 침대에 다시 누웠다. 원판은 오후에 도착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후에 해 보내겠다고 하더니 그대로 실행한 셈이다. 캐서린 바클리가 그 원판들을 내게 보여 주었다. 붉은 봉투 속에 들어 있었는데 그 봉투에서 꺼내 가지고 불빛에 비춰서 우리 두 사람이 봤다. 이게 당신 바른편 다리에요 하고는 원판을 봉투에 넣었다. 이게 왼쪽이구요. 치워 버려요 하고 내가 말했다. 그리고 침대로 와요. 안 돼요. 그녀가 말했다. 잠깐 사진을 보여 드리려고 가져온 거예요. 그녀는 나가 버리고 나는 누워 있었다. 더운 오후여서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 역겨웠다. 포터를 불러서 신문을 사 오라고 했다. 살 수 있는 대로 모조리 사 오라고 했다. 그가 돌아오기 전에 의사가 세 명 들어왔다. 늘 경험하는 일이지만 투약(投藥)에 실패한 의사는 다른 의사를 불러다가 같이 상의도 하고 도움을 구하는 경향이 있다. 맹장을 제대로 떼내지 못하는 의사는 편도선을 성공적으로 떼내지 못할 의사를 환자에게 추천하는 법이다. 이 사람들도 그런 의사 세 사람이었다. 이 분이 그 젊은 군인이오. 손이 고운 이 병원 의사가 말했다. 어떻소? 수염을 기른 키가 크고 말라 빠진 의사가 인사를 했다. 붉은 봉투에 든 엑스레이 사진을 들고 온 세째번 의사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붕대를 풀까? 수염 기른 의사가 물었다. 그럽시다. 간호사, 붕대를 풀라구. 이 병원 의사가 미스 게이지에게 명령했다. 미스 게이지가 붕대를 풀었다. 나는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야전 병원에서는 별로 신선하지 않은 햄버거 스테이크 같아 보였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처가 굳었고, 무릎께가 부었으며, 색깔이 변해 있었다. 장딴지는 살이 빠졌으나 화농한 곳은 없었다. 아주 깨끗하거든 하고 이 병원 의사가 말했다. 아주 깨끗하단 말이야. 음. 수염난 의사가 수긍했다. 세째번 의사는 이 병원 의사 어깨 너머로 보고 있었다. 무릎을 놀려 보시오 하고 수염난 의사가 말했다. 안 됩니다. 관절을 시험해 볼까? 수염난 의사가 물었다. 그는 군복 소매에 별 셋과 곁에 줄이 하나 있었다. 이것은 그가 선임 대위라는 표시였다. 그럽시다. 이 병원 의사가 말했다. 두 사람이 내 바른편 다리를 조심스럽게 들고 구부렸다. 아픕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네, 네. 조금만 더 구부려 봅시다. 그만 하시오. 그 이상은 안 구부러집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관절이 부분적으로 상했군. 하고 선임 대위가 말했다. 닥터, 그 원판 다시 한 번 볼까요? 세번째 의사가 원판 한 장을 내주었다. 아니 왼쪽 다리 말이오. 그게 왼쪽 다립니다, 닥터. 그렇군. 각도를 잘못 보고 있었어. 그는 원판을 돌려주었다. 또 한 장의 원판을 그는 한동안 살폈다. 여기 아니요, 닥터? 그는 빛에 비춰서 둥글고 뚜렷하게 나타나는 이질체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들은 한동안 그 원판을 살폈다. 한 가지만은 말할 수 있겠군 하고 수염난 선임 대위가 말했다. 시간 문제야. 석 달, 글쎄, 여섯 달 걸릴지도 모르지. 물론 관절액이 새로 형성되어야겠죠. 물론이지. 시간 문제야. 탄환을 포낭(包囊)이 둘러싸기 전에는 양심상 이런 무릎을 절개할 수 없으니까. 동감입니다, 닥터. 여섯 달을 어떡한다는 겁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 여섯 달쯤 걸려서 탄환을 포낭이 둘러싸야 안전하게 무릎을 수술할 수 있단 말이오. 믿어지지 않는데요. 하고 내가 말했다. 무릎을 그대로 갖고 있고 싶겠지, 젊은 친구? 아니요. 내가 대답했다. 뭐? 잘라 버리고 싶어요. 하고 내가 말했다. 잘라 내고 갈고리를 달면 되니까요. 무슨 소리야? 갈고리라니? 농담을 하는 겁니다 하고 이 병원 의사가 말했다. 그는 내 어깨를 가만가만 두들겼다. 무릎이야 절단하고 싶지 않지요. 이 사람은 아주 용감한 젊은 친구랍니다. 은제 전공 훈장을 타도록 신청 중이니까요. 축하합니다. 하고 선임 대위가 말했다. 그는 내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안전하게 하려면 적어도 한 6개월 기다렸다가 무릎을 수술해야 하겠다는 거요. 물론 당신이 다른 의견을 가졌다면 그대로 해도 좋구요. 감사합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군의관님 의견을 존중하겠습니다. 선임 대위는 시계를 보았다. 우리는 가야겠소. 행운을 빕니다. 행운을 빕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나는 세째번 의사, 바리니 대위, 앙리 중위와 악수를 했고 그들 세 사람은 모두 나갔다. 미스 게이지 하고 내가 불렀다. 그녀가 들어왔다. 우리 병원 의사보구 잠깐만 와 달라고 하시오. 그가 모자를 든 채 들어와서 침대 곁에 섰다. 날 만나자고 했소? 네. 난 수술을 받기 위해서 여섯 달이나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대관절 군의관님은 여섯 달을 병석에 누워 있은 경험이 있습니까? 항상 침대에 누워 있지 않아도 됩니다. 처음 얼마는 상처에 일광을 쏘여야 해요. 그 다음엔 지팡이를 쓸 수 있지요. 여섯 달 후에 수술을 받는단 말입니까? 그게 안전한 방법이지요. 이질체를 포낭이 둘러싸게 버려두어야 하고, 관절액이 새로 형성되어야 하니까. 그 다음에는 무릎을 수술해도 안전할 겁니다. 정말 그렇게 오래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그게 안전한 방법이에요. 아까 그 선임 대위는 어떤 사람입니까? 밀라노에서도 아주 뛰어난 외과 의사지요. 선임 대위 아닙니까, 그렇죠? 네, 그래도 우수한 외과 의사지요. 난 내 다리를 선임 대위가 멋대로 다루는 건 싫은데요. 우수하다면 소령으로 승진했을 테니까요. 난 선임 대위가 뭔지 압니다. 닥터. 우수한 외과의에 틀림없고, 난 내가 아는 다른 누구의 진단보다도 그분의 진단을 따르고 싶은데요. 누구 다른 의사에게 보여 볼 순 없을까요? 물론 원한다면 할 수 있죠. 그렇지만 나로서는 바렐라 박사의 의견을 따르고 싶습니다. 다른 의사를 불러다가 보여 주실 수 있겠어요? 발렌티니보고 와 달라고 하지요. 그건 어떤 사람입니까? 종합 병원 외과의사지요. 좋습니다. 호의에 감사합니다. 이해해 주시겠지만 난 여섯 달을 침대에 누워 있을 수 없어요. 누워 있지 않아도 된다니까요. 먼저 일광욕을 해야 해요. 그 다음엔 가벼운 운동을 해도 좋아요. 포낭이 둘러 싼 다음엔 수술을 해도 되니까요. 그렇지만 여섯 달은 못 기다립니다. 그는 모자를 쥔 손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활짝 펴면서 미소를 띠었다. 일선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안달이군요. 물론이죠. 참 장하십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정말 훌륭한 분입니다. 그는 몸을 구부리고 내 앞 이마에 가볍게 키스를 해 주었다. 발렌티니는 불러 오죠. 안달하고 흥분하고 하지 마십시오. 가만히 참고 있어요. 한잔 하시렵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 아닙니다. 난 술은 안 합니다. 한 잔만 드시오. 나는 벨을 눌러서 잔을 가져 오라고 했다. 아니 정말 안 합니다. 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 안녕히 하고 내가 말했다. 안녕히. 두 시간 후에 발렌티니 박사가 병실에 들어왔다. 무척 덤비는 사람인데 수염 끝이 뾰족하게 위로 뻗쳐 있었다. 소령이고 얼굴이 검게 그을고 노상 웃고 있었다. 어떡하다 이렇게 부상을 입었소? 몹시 다쳤군. 하고 그는 말했다. 어디 사진 좀 봅시다. 그래, 그래, 그렇군. 자넨 염소처럼 건강해 보이는군 그래. 저 예쁜 아가씨는 누구야 자네 애인인가? 그럴 것 같더라니. 굉장한 전쟁이지? 이건 어때? 멋진 친구로군. 새로 태어나는 것보다 낫게 해 주지. 이거 아픈가? 물론 아프겠지. 자네를 아프게 해 주는 걸 좋아하지, 이 의사들은 말이야. 지금까지 어떤 치료를 해 주었나? 저 아가씨 이탈리아 말은 못하나? 배워야지. 정말 미인인걸. 내가 가르쳐 줘도 좋지. 내가 여기 환자로 입원을 할까? 그게 아니라 아가씨 해산은 무료로 봐 드리지. 무슨 말인지 아가씨가 알아듣나? 옥동자를 낳아 주겠는데, 자기를 닮은 금발을 말이야. 좋아. 그만하면 됐어. 정말 미인인걸. 나하고 저녁 먹으로 가겠나 물어 봐 달라구. 아니지, 자네 애인을 빼앗아 가진 않아. 됐어. 됐습니다, 아가씨. 이젠 끝났어. 이제 알고 싶은 건 다 알았어. 그는 내 어깨를 가만가만 두들겼다. 붕대는 매지 말라구. 한 잔 드시겠습니까, 발렌티니 박사님? 한 잔? 물론이지. 열 잔이라도 들지. 어디 있나? 장 안에 있습니다. 미스 바클리가 병을 갖다 주겠지요. 축배! 아가씨를 위해서 축배! 정말 미인이야. 내가 이보다 나은 코냑을 갖다 주지. 그는 수염을 닦았다. 언제쯤 수술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내일 아침. 그 전에는 안 돼. 위를 비워야 하니까. 깨끗이 씻어 놔야지. 아래층에서 늙은 간호사를 만나서 지시해 두지. 잘 있게. 내일 만나세. 그보다 나은 코냑을 갖다 주지. 여기가 퍽 편한 것 같군. 잘 있게. 내일까지. 푹 잘 자 두게. 아침 일찍 만나세. 그는 문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수염이 꼿꼿이 곧추서고 거무스레한 얼굴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소령이기 때문에 소매에는 네모꼴 안에 별 하나가 있었다. {{}}{{16 }} 그 날 밤 발코니로 통하는 열린 문으로 박쥐 한 마리가 방에 날아 들어왔다. 시가지의 지붕 위에 덮인 밤을 내다보는 그 문이었다. 시가지 위 밤 하늘의 희미한 빛 말고는 방 안은 깜깜해서 박쥐는 놀라지도 않고 바깥에 있는 것처럼 방 안을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우리는 누운 채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쥐도 우리를 본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는 가만히 누워만 있었으니까. 박쥐도 우리를 본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는 가만히 누워만 있었으니까. 박쥐가 날아 나가고 난 다음에 탐조등이 켜지더니 하늘을 한 번 가로 지르고 꺼져 버렸고 다시 깜깜해졌다. 밤에는 미풍이 불었고 옆 지붕에서 고사포병들이 지껄이는 소리가 들렸다. 서늘해서 그들은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밤에 누가 올라오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웠지만, 캐서린 말로는 모두 잔다고 했다. 밤 동안에 꼭 한 번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 보니 그녀가 없었다. 그러나 곧 복도를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리며 캐서린이 침대로 돌아와서, 아래층에 갔다왔으며 걱정 없다고, 다들 잔다고 말했다. 미스 반 캠펜 방문에 귀를 대고 자는 숨소리를 들었다고. 그녀가 크래커를 좀 가지고 왔기에 그걸 먹고 베르무트를 약간 마셨다. 무척 배가 고팠으나 그것도 아침에는 전부 토해 버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날이 밝은 아침에 다시 잠이 들었는데 잠이 깨어 보니 캐서린은 또 가 버리고 없었다. 이윽고 산뜻하고 귀여운 모습으로 캐서린이 들어와서 침대에 걸터앉았고, 내가 입에 체온계를 물고 있는 동안에 해가 솟아올랐고, 우리는 지붕 위 이슬 냄새를 맡고 이웃 지붕 고사포병블의 커피 냄새를 맡았다. 둘이서 산보나 갈 수 있었으면.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바퀴 달린 의자가 있으면 내가 밀어 드릴 텐데. 의자에 앉는 건 어떻게 하구? 우리가 앉혀 드리지요. 공원에 나가서 옥외에서 아침 식사를 할 수 있겠군. 나는 열린 문 밖을 내다보았다. 지금 정작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발렌티니 박사의 수술을 받도록 준비하는 거예요. 하고 그 여자가 말했다. 훌륭한 사람 같던데. 난 당신처럼 그이가 좋은 줄은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좋은 분 같아요. 침대로 좀 오구려, 캐서린. 하고 내가 말했다. 안 돼요. 멋진 하룻밤을 즐기지 않았어요? 그런데 당신 오늘 밤에도 야근할 수 있겠소? 아마 되겠지요. 그렇지만 당신은 나를 원하지 않을 텐데 뭐. 천만에 그럴 리가 있나. 아니에요. 당신은 수술을 받아 보시지 않았어요. 어떤 상태가 되는지 모르세요. 괜찮을 거야. 몸이 아프면 나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게 될 거예요. 그럼 지금 와요. 안 돼요. 그녀는 말했다. 체온표를 만들고 당신 준비를 해야지요.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지 않나 봐. 아니라면 이리 좀 와요. 정말 고집장이야. 그녀는 키스를 했다. 체온표는 이상 없어요. 당신 체온은 늘 정상적이에요. 체온까지도 멋지다니까요. 당신 손에 가면 모든 것이 멋지지. 아이, 아니에요. 당신 체온이 멋진 거예요. 당신 체온이 자랑스러워 죽겠어요. 우리 아이들은 모두 체온이 멋질 테지. 우리 아이들은 형편없는 체온이겠죠 뭐. 발렌티니한테 수술받는 준비로 나를 어떻게 한다는거요? 대단한 것 아니에요. 그래도 퍽 기분 나쁜 일이에요. 당신이 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싫어요. 난 다른 사람이 당신 몸에 손대는 것 싫어요. 바보지요? 다른 사람이 손을 대면 화가 나서 죽겠어요. 퍼거슨도? 특히 퍼거슨하구 게이지하구 또 한 사람은 뭐라더라? 워커 말이야? 맞았어요. 여긴 간호사가 너무 많아요. 환자가 더 들어와야지 잘못하면 쫓겨나겠어요. 지금 네 명이 있으니까요. 아마 환자가 더 오겠지. 간호사가 그만큼은 필요할 거요. 꽤 큰 병원인 걸. 좀더 들어왔으면 좋겠어요. 쫓겨나면 난 어떻게 하죠? 환자가 더 들지 않으면 내보낼 거예요. 나도 나가지.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당신은 아직 못 나가요. 그렇지만 빨리 나으세요. 그럼 어디로구 같이 가지요. 그 다음엔 어떻게 되지? 아마 전쟁이 끝나겠죠. 언제까지나 전쟁만 할라구요. 나을 거야. 하고 내가 말했다. 발렌티니가 고쳐 주겠지. 그렇게 굉장한 수염이 있는 걸 보면 고쳐 드릴 거예요. 그런데 여보세요, 마취에 들어갈 때는 무슨 다른 생각을 하세요 - 우리 생각 말구요. 마취에 걸리면 누구든지 비밀을 지껄이기 쉬운 거예요.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 뭐든지. 우리 생각만 빼놓고 뭐든지 생각하세요. 당신 일가 생각을 하세요. 다른 여자 생각을 하시든지. 싫어. 그럼 기도를 드리세요. 굉장히 좋은 인상을 줄 테니까요. 아마 나는 안 지껄일 거야. 그건 그래요. 아무 말도 안 하는 사람도 많아요. 난 안 지껄여. 여보, 장담하지 말아요. 제발 장담하지 말아요. 당신은 좋은 분이시니 장담은 하지 마세요. 난 한 마디도 안 해. 저 봐, 장담하시네. 장담할 것 없다니까요. 의사가 크게 숨을 쉬라고 하거든 기도를 올리든지 시를 외든지 하세요. 그래야 좋은 분이고 내가 당신을 자랑으로 알지요. 그렇잖아도 자랑으로 알긴 하지만요. 체온도 멋지고 어린애처럼 베개를 끌어안고 그걸 난 줄 알고 잘 주무시니까. 아니 다른 여자로 알고 그러신 거예요? 예쁜 이탈리아 여자? 당신이지. 물론 나지요. 아아, 당신을 사랑해요. 발렌티니 씨가 다리를 감쪽같이 고쳐 줄 거예요. 내가 수술에 입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다행이에요. 그래도 저녁에 야근은 하지? 그럼요. 그렇지만 당신은 정신이 없을걸요. 두고 보면 알겠지. 이봐요. 이제 당신은 몸 안팎이 죄다 깨끗해졌어요. 고백하세요. 지금까지 여자를 몇이나 사랑했어요? 하나도 없어. 나두요? 당신이야 사랑하지. 정말 나 말고 몇이에요? 없어. 몇 사람이나 하고 - 뭐라면 좋을까? - 같이 잤어요? 없어. 거짓말. 정말야. 좋아요. 내게는 꼭 그대로 거짓말을 우기세요. 그게 내가 바라는 바니까요. 예쁜 여자들이었어요? 같이 잔 여자가 없다니까. 옳지. 퍽 매력이 있었나요? 그런 건 전혀 몰라. 당신은 내 것이야. 그게 참말이고 아직 한번도 다른 사람의 것이 되어 본 일이 없었단 말이에요. 그렇지만 그런 일이 있었어도 괜찮아요. 그런 것들은 겁나지 않아요. 그래도 그런 이야기는 내게 하지 말아요. 남자가 여자하고 잘 때 말이에요, 돈 이야기를 꺼내는 건 언제인가요? 몰라. 물론 모르시겠지. 여자가 남자를 사랑한다고 그러나요? 그건 알려 주세요. 그건 알고 싶어요. 그렇지. 남자가 그걸 바랄 때는 말이야. 남자도 여자를 사랑한다고 그러구요? 꼭 알려 주세요. 중요한 문제니까요. 남자가 그러구 싶으면 그러지. 그렇지만 당신은 그런 일이 없죠? 정말이죠? 없어. 정말 없었단 말이죠. 바른 대로 말해 주시죠? 없다니까. 나는 거짓말을 했다. 안 하셨을 거야.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안 하셨다는 걸 난 알아요. 아아, 당신을 사랑해요. 바깥에는 해가 지붕 위로 올라오고, 햇빛을 받은 사원(寺院)의 뾰족탑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몸 안팎을 말끔히 씻어 내고 의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여자는 남자가 듣고 싶어하는 말만 하나요? 하고 캐서린이 또 물었다. 꼭 그런 것도 아니지. 그렇지만 난 그럴래요. 당신이 듣고 싶어하는 말만 하고, 당신이 원하는 짓만 하고, 그러면 다른 여자 생각은 안 나시겠지요? 네? 그녀는 퍽 행복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원하는 말만 하고, 당신이 원하는 짓만 하면 틀림없이 당신 마음에 들겠죠? 안 그래요? 그럼. 그럼, 인제 준비가 다 되었는데 뭘 해 드릴까요? 또 한 번 침대로 와요. 좋아요. 가겠어요. 아아, 달링 달링 달링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거 보세요. 당신이 원하는 거면 뭐든지 하잖아요. 정말 귀여워. 난 아직 이런 짓 잘 못할지도 몰라요. 정말 귀여워. 당신이 원하는 거면 나도 원해요. 이제는 나라는 건 없어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에요. 귀여운 사람. 나도 꽤 좋지요? 안 그래요? 다른 여자 생각 없지요? 네 그럼. 그렇죠? 나도 좋아요. 난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요. {{}}{{17 }} 수술이 끝나고 마취에서 깨어 보니 나는 아주 가버린 것은 아니었다. 가버리지 않게 마련인 것이다. 그저 질식할 뿐이다. 그건 죽는 것과는 다르다. 화학 작용으로 질식하는 것이고, 그래서 감각이 없어지고, 토해도 담즙(膽汁)밖에는 안 올라오고, 토한 후에도 조금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는 술 취한 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나는 침대 끝에 모래 부대가 있는 것을 보았다. 깁스에 댄 파이프 위에 올려놓은 것이었다. 조금 있으려니까 미스 게이지가 보였다. 좀 어떠세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좀 낫군요. 하고 내가 대답했다. 군의관님이 정말 훌륭한 무릎 수술을 하셨어요. 얼마나 걸렸소? 두 시간 반 걸렸어요. 내가 무슨 어리석은 말 안 했소? 아니요, 말하지 마세요. 조용히 안정하세요. 나는 괴로웠고 캐서린 말이 옳았다. 야근을 누가 하든 마찬가지였다. 이제 이 병원에는 나 말고 환자가 셋이 있었다. 조지아 출신으로 적십자에 근무하다가 말라리아에 걸린 야윈 청년과, 뉴욕 출신인데 말라리아와 황달에 걸린 역시 야윈 참한 청년이 있었고, 또 한 사람은 유산탄(榴霰彈)과 고성능 폭발탄을 합친 포탄의 신관(信管) 뚜껑을 기념물로 가지려고 나사못을 빼려고 했다는 역시 참한 청년이었다. 이것은 오스트리아 군이 산악 지대에서 사용한 유산탄인데, 폭발 후에도 신관 뚜껑이 무엇에고 닿기만 하면 터지는 것이었다. 캐서린 바클리는 노상 야근을 맡아 놓고 하려고 했기 때문에 간호사들이 모두 그녀를 좋아했다. 말라리아에 걸린 두 환자들은 간호가 별로 필요하지 않았고, 포탄의 신관 못을 뽑으려던 군인은 우리 두 사람 편이어서 밤이면 꼭 필요한 일이 아니고서는 벨을 누르지 않았다. 근무 시간 틈을 타서 우리는 늘 같이 있었다. 나는 캐서린을 무척 사랑했고 그녀도 나를 사랑했다. 나는 낮 동안 잤고, 잠을 안 잘 때는 짧은 편지를 써서 퍼거슨을 시켜 보내곤 하였다. 퍼거슨은 착한 여자였다. 그녀에 관해서는 오빠가 52 사단에 한 명 있고, 메소포타미아에도 한 명 있다는 것밖에는 몰랐지만 캐서린 바클리에게는 퍽 잘해 주었다. 우리 결혼식에 와 주겠소? 한번은 내가 퍼거슨에게 이렇게 물어 보았다. 결혼 못할걸요, 뭘. 왜 못해? 못할 거예요. 건 왜? 결혼하기 전에 싸울 거예요. 절대로 안 싸울걸. 아직 두고 봐야지요. 절대로 안 싸워. 그럼 당신이 죽을 거예요. 싸우든지 죽든지. 다들 그렇게 되니까요. 결혼하게는 안 돼요. 나는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잡지 마세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울고 있지 않아요. 아마 두 분은 잘 되겠지요. 그렇지만 캐서린이 애기를 갖게 하거나 하지는 마세요. 그런 일이 있게 되면 내가 가만 있지 않을 거예요.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있나. 그러니까 조심하시라구요. 두 분이 잘 되길 바래요. 재미 많이 보세요. 그러잖아도 재미 보는 참이오. 그럼 싸우지 말고, 그녀를 난처하게 하지 마세요. 안 그런다니까. 그러니까 조심하세요. 캐서린이 전쟁 고아를 갖는 건 보구 싶잖으니까요. 참 당신은 좋은 분이오, 퍼기. 그렇지도 않아요, 내게까지 아첨할 건 없어요. 다리는 좀 어떠세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머리는요? 그 여자는 손끝으로 내 머리 정수리를 만져 보았다. 그것은 신경이 마비된 발을 만지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머리는 아파 본 일이 없는데. 그런 중상을 당하면 미치는 수도 있어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래? 아무렇지도 않아. 재수가 좋으신 분이야. 편지 쓰셨어요? 내려갈래요. 여기 있소. 하고 내가 말했다. 당분간 캐서린에게 야근해 달라고 하지 마셔야겠어요. 무척 피곤한 것 같아요. 알겠소. 그러지. 나는 하고 싶지만 캐서린이 하게 해야지요. 다른 간호사들은 캐서린이 해 주니까 좋아하구요. 조금 쉬게 해야 할 거예요. 그럽시다. 미스 반 캠펜 말로는 중위님은 오전 중에는 내내 주무신다던데요. 그렇겠지. 캐서린이 밤에 좀 쉬도록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쉬게 해야겠소. 말뿐이신 걸 뭐. 좀 쉬게 해 주시면 중위님을 존경하겠어요. 쉬게 한다니까. 믿어지지 않아요. 그녀는 편지를 들고 나가 버렸다. 나는 벨을 눌렀다. 조금 있다가 미스 게이지가 들어왔다. 부르셨어요? 얘기할 게 있어서요. 미스 바클리가 당분간 야근을 쉬어야 할 것 같지 않소? 무척 고단해 보이던데. 왜 줄곧 혼자만 야근을 하죠? 미스 게이지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당신들 편이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한테는 그렇게 시치미를 뗄 필요가 없어요. 무슨 말씀인지? 쑥스럽게 굴지 마세요. 그 이야기뿐이에요? 베르무트 한 잔 하겠소? 좋아요. 한 잔 마시고 가 봐야 해요. 그녀는 옷장에서 술병을 꺼내고 유리컵을 하나만 가지고 왔다. 당신은 컵으로 마시오. 난 병째 마시지. 건강을 축복합니다. 미스 게이지는 건배를 했다. 미스 반 캠펜이 내가 아침에 늦잠 자는 걸 뭐랍디까? 그저 툴툴거리는 거죠. 중위님을 특별 대우 환자라구 해요. 원 백여우 같으니라구.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하고 미스 게이지가 말했다. 그저 늙고 변덕스러워서 그렇죠. 중위님을 좋아하진 않아요. 물론. 하지만 전 안 그래요. 게다가 당신 편이구요. 그걸 잊어버리지 마세요. 정말 더할 수 없이 좋은 분이야. 천만에, 중위님이 누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다 알아요. 그렇지만 난 중위님하고 한편이에요. 다리는 좀 어떠세요? 괜찮소. 차가운 탄산수를 좀 갖다 부어 드리지요. 깁스한 밑이 퍽 가려우실 거예요. 바깥이 뜨거우니까요. 참 좋은 분이야. 많이 가려우세요? 아니. 괜찮아요. 모래 주머니를 잘 놔 드리죠. 그녀는 몸을 구부렸다. 당신 편이니까요. 알고 있어. 아니 모르셔요. 그렇지만 언젠가는 아시게 될 테죠. 캐서린 바클리는 사흘 밤을 비번으로 지내고 다시 돌아왔다. 마치 먼 여행이나 갔다가 다시 만난 것만 같았다. {{}}{{18 }} 그 해 여름 동안 우리는 재미있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밖에 나갈 수 있게 되자, 우리는 마차를 타고 공원으로 갔다. 말이 천천히 걷고, 윤이 나도록 닦은 실크해트를 쓴 마부의 등이 앞자리에 높이 보이고, 캐서린 바클리가 내 옆에 앉아 있던 그 마차를 나는 기억하고 있다. 서로 손이 닿으면, 내 손이 슬쩍 그녀 손에 닿기만 해도 우리는 흥분했다. 나중에 내가 목발을 짚고 돌아다닐 수 있게 되면서 우리는 비피나 그랑 이탈리아 같은 데로 저녁 식사를 하러 가서 바깥 베란다에 자리를 잡았다. 급사들이 드나들고, 사람들이 지나가고, 갓을 씌운 촛불이 테이블 보에 놓여 있고 했는데, 그랑 이탈리아가 제일 마음에 든다는 결정을 본 다음부터는 조지라는 급사장이 우리를 위해서 테이블을 잡아 두고 기다렸다. 그는 훌륭한 급사여서 식사 주문은 그에게 맡겨 버리고, 우리는 오고가는 사람들이랑 황혼에 잠긴 베란다를 구경하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하였다. 우리는 얼음에 채운 백(白) 드라이 카프리를 마셨지만, 프레사니 바르베라니 하는 달콤한 백(白)포도주 등 여러가지 다른 술도 마셔 보았다. 전쟁 때문에 포도주 전문의 급사가 없었으며, 내가 프레사 같은 포도주에 관해서 질문을 하면 조지는 부끄러운 듯한 미소를 띠었다. 포도주에서 딸기 맛이 난다고 해서 포도주를 만드는 나라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하고 그는 말했다. 그러면 어때요? 하고 캐서린이 물었다. 훌륭할 것 같은데요. 부인께서는 원하신다면 그걸 드시지요. 하고 조지가 말했다. 그렇지만 중위님을 위해서는 마르고 포도주를 작은 걸로 한 병 갖다 드리죠. 그것도 한 번 마셔 보지. 중위님, 저로서는 권하지는 않겠습니다. 딸기 맛조차 안나니까요. 날지도 모르지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딸기 맛이 나면 훌륭하겠는데. 가지고 와 보지요. 하고 조지가 말했다. 그랬다가 부인께서 실컷 맛을 보시고 난 다음에 가져 가겠습니다. 그건 별로 술 같지가 않았다. 그의 말대로 딸기 맛조차도 나지 않았다. 우리는 카프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루 저녁에는 내게 돈이 옹색했는데, 조지가 백 리라 꿔 주었다. 괜찮습니다, 중위님. 하고 그는 말했다. 저는 그런 사정을 알고 있으니까요. 남자가 돈이 옹색해지는 내막을 잘 압니다. 만약에 중위님이나 부인께서나 돈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꿔 드리겠습니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우리는 베란다를 빠져 나와 다른 식당들이며 쇠문이 닫힌 가게들을 지나 거닐다가 샌드위치를 파는 조그만 집에서 발을 멈췄다. 레터스가 딸린 햄 샌드위치와 갈색 윤택이 나는 흡사 손가락 크기 만한 롤빵으로 만든 안초비 샌드위치 등이 있었다. 이런 것을 사다 두었다가 밤중에 배가 고프면 먹곤 하였다. 그리고는 사원 앞 베란다 밖에서 무개(無蓋)마차를 타고 병원으로 돌아왔다. 병원 현관에서는 포터가 나와서 목발을 짚은 나를 도와 내려 주었다. 나는 마부에게 돈을 치르고, 승강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캐서린은 간호사들이 거처하는 층에서 내리고, 나는 더 올라가서 목발을 짚고 복도를 걸어 내 방으로 들어갔다. 어떤 때는 곧 옷을 벗고 자리에 들었으나, 어떤 때는 발코니로 나가서 다리를 다른 의자 위에 올려 놓고 지붕 위를 날아다니는 제비들을 바라보면서 캐서린을 기다렸다. 캐서린이 올라오면 오랜 여행이나 갔다온 것처럼 반가웠고, 그녀가 대야를 날라다 주는 것을 목발을 짚고 복도로 따라다니기도 하고 문 밖에서 기다리기도 했지만, 방 안에까지 따라 들어가는 수도 있었다. 그건 거기 있는 사람이 우리와 한편이냐 아니냐에 달려 있었다. 그녀가 할 일을 다 마치면 우리는 내 방 밖 발코니에 나가 앉았다. 나중에 내가 자리에 들고, 환자들이 모두 잠이 들고, 아무도 자기를 찾을 사람이 없을 것을 확인하면 그녀도 자리로 들어온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풀어 주는 것을 좋아했는데, 내가 머리를 풀어 주는 동안 그녀는 갑자기 몸을 숙여 키스를 하는 이외에는 침대에 앉아서 꼼짝 않는다. 나는 그 여자를 바라보고 하다가 마지막으로 핀 두 개를 뽑으면 머리가 온통 쏟아져 내려오고, 그 여자가 머리를 숙이면 우리는 함께 그 속에 묻혀서 천막 속이나 폭포 뒤에 있는 것 같았다. 그녀 머리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워 어떤 때는 누워서 그녀가 열린 문으로 새어드는 빛으로 머리를 틀어 올리는 것을 지켜 보노라면 밤인데도 빛나는 품이 마치 호수가 날이 완전히 밝기 바로 전에 가끔 빛나는 것과 같았다. 그녀는 얼굴과 몸이 아름다웠고, 부드러운 피부가 또한 아름다웠다. 우리가 나란히 누우면 나는 그녀 볼이며 이마며 눈 아래며 턱이며 목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꼭 피아노 키처럼 매끄러워. 하면 그 여자도 손가락으로 내 턱을 어루만지면서 사지(砂紙)처럼 매끄러워서 피아노 키가 아파해요. 했다. 껄끄러워? 아니, 그저 놀려 본 거예요. 밤이면 좋기만 했고, 서로 몸이 닿는 것만으로 우리는 행복했다. 그런 모든 본격적인 재미 이외에도 우리는 여러 가지 사랑의 기교를 부려서 두 사람이 각각 다른 방에 있으면서도 머리는 서로를 생각하도록 하려고 애를 썼다. 이것이 간간이 성공했는데, 아마 두 사람 생각이 늘 같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 그녀가 이 병원으로 온 첫날에 결혼한 것으로 치고 결혼 후 몇 달이 되었나를 계산해 보는 것이었다. 나는 정말 결혼했으면 했지만, 캐서린은 우리가 결혼하면 병원 당국이 자기를 내보낼 거라고 말하고 형식적인 절차를 시작하기만 해도 그들은 자기를 감시해서 결국 우리들 관계를 망쳐 놓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탈리아의 법률에 따라 결혼해야 하는데 형식적인 절차가 굉장했다. 나는 어린애가 생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걱정스러워서 정식으로 결혼하고 싶었으나 우리는 우리끼리는 결혼한 것으로 치고 걱정하지 않기로 했고, 사실은 정식 결혼하지 않은 것을 나는 더욱 즐기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룻밤은 여기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캐서린이 그렇지만 여보, 나는 쫓겨나요. 했다. 아마 안 그럴 거야. 쫓겨나요. 나를 집으로 돌려보낼 테니까, 전쟁이 끝나도록 우리는 헤어져 있어야 해요. 내가 휴가에 찾아가지. 휴가라 해도 스코틀랜드까지 왔다 되돌아가게 되나요. 그리구 난 당신 곁을 떠나지 않겠어요. 지금 결혼한다고 무슨 이익이 있어요? 우리는 정말은 결혼한 걸요. 이 이상 결혼할 수는 없어요. 난 그저 당신을 위해서 그러는 거야. 나라는 건 없어요. 나는 당신이에요. 나를 따로 떼어 놓지 마세요. 난 여자란 언제나 결혼하고 싶어하는 걸로 아는데. 그렇지요. 그렇지만 여보, 난 결혼했어요. 난 당신하고 결혼했어요. 좋은 아내 노릇 하잖아요? 사랑스러운 아내지. 여보세요, 난 결혼은 기다리던 경험이 있어요. 그런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 내가 당신만을 사랑하는 걸 아시지요. 예전에 다른 남자가 나를 사랑했더라도 기분 나쁘게 생각해선 안 돼요. 기분 나쁜걸. 당신이 모든 것을 다 차지했는데 이미 죽은 사람을 질투해선 안 돼요. 질투는 안 해. 그래도 그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 그래도 그러셔. 난 당신이 뭇 여자를 상대한 걸 알고 있는데도 조금도 문제삼지 않아요. 어떻게 비밀리에 결혼할 방도가 없을까? 만약에 내게 어떤 일이 있든지, 당신이 어린애를 갖게 되더라도 말이야. 교회나 국가가 인정하는 방도 이외에는 결혼할 길이 없어요. 우리는 비밀리에 결혼한 거예요. 그야 내가 무슨 종교를 가졌다면 그건 중대한 문제겠지요. 그러나 난 종교가 없으니까요. 당신이 성(聖) 안토니 호신부(護身符)를 주지 않았어? 그건 행운을 비는 거예요. 누가 내게 선사한 거예요. 그럼 당신은 아무런 걱정도 없소? 당신 곁을 떠나야 하지 않나 하는 걱정뿐이에요. 당신이 내 종교예요. 당신은 내가 얻은 모든 것이에요. 좋아. 그러나 나는 당신이 결혼하고 싶으면 당장에 하겠어. 여보, 나를 정식 아내로 만들어야 할 것처럼 이야기하지 마세요. 난 어엿한 정식 아내예요. 당신이 그저 행복하고 자랑스럽게 생각만 한다면 뭐든지 창피해할 건 없잖아요. 그래 당신은 행복하지 않으세요? 그러나 당신은 나를 버리고 다른 남자한테로 가지는 않겠지? 그럼요. 절대로 다른 남자 때문에 당신을 버리지는 않을 거예요. 우리 앞날에는 온갖 무시무시한 일이 다 일어나겠지요. 그렇지만 그것만은 염려할 필요 없어요. 염려는 안 해. 그러나 나는 당신을 극진히 사랑하는데, 당신은 전에 다른 남자를 사랑한 일이 있으니까. 그래 그 남자가 어떻게 됐지요? 죽었지. 그래요. 만약 그이가 안 죽었다면 난 당신하고 만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정숙하지 않았던 게 아니지요. 난 결점이 많지만 정숙하긴 해요. 앞으로도 내가 너무 정숙해서 진저리가 나실 거예요. 난 곧 일선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당신이 가는 날까지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도록 해요. 난 이렇게 행복하구요, 둘이서 이렇게 재미를 보구 있잖아요. 난 오랜 동안 행복을 몰랐고 그래서 당신하고 만났을 때는 거의 미쳐 있었나 봐요. 아마 미쳐 있었을 거예요. 그렇지만 지금 우리는 행복하고 서로 사랑하고 있어요. 그저 행복을 즐기기만 해요. 당신도 행복하지요, 네? 내가 뭐 당신이 싫어하는 짓 하는 건 없어요? 뭐든지 당신을 즐겁게 해 드릴 것 없어요? 머리를 풀어 내릴까요? 장난하고 싶으세요? 그래, 자리로 들어와요. 좋아요. 환자들을 둘러보고 올게요. {{}}{{19 }} 여름은 그렇게 갔다. 여름이 더웠고, 신문에 많은 전과가 보도되었다는 것 이외에는 그 시절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지 않다. 나는 건강이 퍽 좋았고, 다리 상처도 빨리 나아서 처음 목발을 짚은 지 오래지 않아 그것 없이 지팡이만으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종합 병원에서 무릎을 굽히는 치료며 반사경 상자 속에서의 자외선 조사(照射)며 마사지며 목욕으로 기계 치료를 받았다. 오후면 그런 치료를 받으러 갔는데, 치료가 끝나면 카페에 들러서 술을 한잔하고 신문을 읽고 하였다. 거리를 쏘다니지는 않고 파케에서 곧장 병원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캐서린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나머지 시간은 희생해도 좋았다. 대개는 아침에 잠을 자고, 오후에는 간혹 경마 구경을 갔다가 늦게 기계 요법의 치료를 받으러 갔다. 때로는 영미(英美) 클럽에 들러서 창 앞에 있는 깊숙한 가죽 쿠션 의자에 몸을 묻고 잡지를 읽었다. 내가 목발 없이도 걸을 수 있게 되자 병원 측에서는 우리 둘이 같이 외출하는 것을 꺼려했다. 간호사가 별로 간호가 필요한 것 같지도 않은 환자하고 단신 같이 다닌다는 것은 온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후에는 같이 있을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래도 퍼거슨이 동행을 해 주면 간혹 저녁 식사를 같이 하러 갈 수도 있었다. 미스 반 캠펜은 캐서린이 일을 많이 맡아 주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극히 친밀한 사정을 인정해 주었다. 그녀는 캐서린이 썩 좋은 가정 출신이라고 생각해서 나중에는 편파적이라고 할 만큼 캐서린을 두둔했다. 미스 반 캠펜은 가문을 퍽 존중했고, 자신도 훌륭한 문벌의 태생이었다. 병원 일이 또한 무척 바빠서 거기에 늘 매달려 있었다. 그 해 여름은 무척 더웠고, 밀라노에는 아는 사람도 많았으나 나는 오후가 끝나기가 무섭게 병원으로 돌아오려고 안달이었다. 일선의 전황은 아군이 카르소까지 진출했고, 플라바를 가로질러 쿠크까지는 이미 점령하고, 지금은 바인시차 고원을 점령하는 작전 중이었다. 서부 전선은 전세가 그다지 유리한 것 같지는 않았다. 전쟁이 상당히 장기간 끌 것 같아 보였다. 우리 미국도 참전은 했지만 내 생각으로는 대부대를 수송해서 전투 훈련을 시키려면 실히 1년은 걸릴 것 같았다. 내년은 전세가 악화할는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유리하게 전개될 가망도 있었다. 이탈리아는 어마어마한 양의 인적 손실을 당하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할 수 있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바인시차 지방이나 산가브리엘레 산을 모두 점령한다고 하더라도 오스트리아까지는 첩첩한 산들이 가로놓여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았다. 모든 험산 준령이 저편에 있었다. 카르소에서는 전진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바다 가까운 저지(低地)에는 늪과 습지가 많았다. 나폴레옹 같으면 평지에서 오스트리아 군을 섬멸했을 것이다. 그는 결코 산악 지대에서 그들과 전투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평지로 진격해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베로나 근방에서 섬멸해 버렸을 것이다. 서부 전선에서는 아직 누가 누구를 쳐부수는 일도 없었다. 그저 영구히 계속될지도 몰랐다. 아마도 또 한 번 백년 전쟁 이 될지도 몰랐다. 나는 신문을 신문걸이에 걸고 클럽을 나왔다.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서 만초니 가로를 걸어 올라갔다. 그랑 호텔 밖에서 마이어스와 그의 아내가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만났다. 경마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부인은 검은 색 새틴으로 차려 입은 유방이 큰 여인이었다. 남편은 키가 작고 늙었으며 흰 수염을 기르고 지팡이를 짚었는데, 편평족(扁平足) 걸음걸이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그녀는 악수를 했다. 그러나 마이어스 씨는 여어 했을 뿐이다. 경마에서 재미 보셨어요? 성적이 좋았죠. 정말 멋있었어요. 세 번이나 이겼죠. 선생님은요? 하고 내가 마이어스 씨에게 물었다. 괜찮았소. 한 번 이겼다오. 이분 성적은 나도 몰라요. 하고 마이어스 부인이 말했다. 나한테는 안 가르쳐 주니까요. 늘 괜찮은 편이야. 하고 마이어스 씨가 말했다. 태도가 공손했다. 당신도 좀 나오구려. 그가 이야기할 때는 상대를 바라보는 법이 없고, 누구 다른 사람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는다. 가려던 참이에요. 하고 내가 말했다. 문병하러 한 번 가려던 참이었어요. 하고 마이어스 부인이 말했다. 내 아들들에게 갖다 줄 게 있어요. 당신네들은 모두 내 아들이에요. 정말 귀여운 아들들이에요. 모두들 반가워할 겁니다. 귀여운 아들들. 당신두요. 당신도 내 아들이야.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귀여운 아들들에게 안부 전하세요. 가지고 갈 물건이 잔뜩 있는데. 고급 마르살라 포도주랑 케이크랑. 안녕히 가세요. 하고 내가 말했다. 모두들 무척 반가워할 겁니다. 안녕히. 하고 마이어스 씨가 말했다. 갈레리아에 좀 나오시구려. 내 식탁을 아시지요. 우리는 오후에는 언제든지 거기 있어요. 나는 거리를 걸어 올라갔다. 코바에 가서 캐서린에게 갖다 줄 물건을 살 생각이었다. 코바에서 쵸콜렛 한 상자를 샀는데, 점원이 포장을 하는 동안에 바로 갔다. 영국인 둘과 항공병 몇 사람이 있었다. 나는 혼자 마티니를 마시고 돈을 치르고 쵸콜렛 상자를 카운터에서 집어들고 병원을 향해서 걸었다. 스칼라 극장을 지나 훨씬 올라간 거리에 있는 조그만 바 바깥에 내가 아는 몇 사람이 있었다. 부영사와 노래 공부를 하는 두 사람과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이탈리아 인으로 지금 이탈리아 군에 들어가 있는 에토레 모레티라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들과 어울려서 한잔했다. 가수 중 한 사람은 랄프 시몬스가 본명인데 엔리코 델 크레도라는 이름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가 얼마나 노래를 잘 부르는지 나는 몰랐으나, 그는 금방이라도 굉장한 일이 일어날 것처럼 굴었다. 그는 살이 찌고 코와 입 언저리가 건초열(乾草熱)에 걸린 사람처럼 바싹 말라 있었다. 피아첸차에서 노래를 부르고 왔다고 했다. <토스카>를 불렀는데 썩 잘 되었다고 했다. 물론 당신은 내 노래를 못 들었지요? 하고 그가 말했다. 언제 여기서 부르나요? 가을에 스칼라 극장에서 부를 겁니다. 틀림없이 청중이 의자를 던질걸. 하고 에토레가 말했다. 모데나에서 청중이 이 친구한테 의자를 던진 이야기 들었나?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야. 손님들이 의자를 내던졌다네. 하고 에토레가 말했다. 내가 현장에 있었는걸. 나도 의자 여섯 개를 내 손으로 던졌으니까. 넌 샌프란시스코에서 쫓겨온 이탈리아 놈이란 말이야. 이 사람은 이탈리아 말 발음을 못하거든. 하고 에토레가 말했다. 어디를 가든지 의자 세례를 받는단 말야. 피아첸차 극장은 북부 이탈리아에서도 가장 부르기 힘드는 곳이야. 하고 다른 테너 가수가 말했다. 정말이지 여간해서는 인기를 얻기 어려운 극장이야. 이 테너 가수의 본 이름은 에드가 손더스인데 에두아르도 조반니라는 이름으로 노래를 불렀다. 거기 가서 의자 던지는 광경을 좀 구경할 걸 그랬군. 하고 에토레가 말했다. 자네는 이탈리아 말 노래는 못 부르는 사람이야. 바보 같으니라구. 하고 에드가 손더스에게 말했다. 의자 던지는 말밖에는 모르는 모양이군. 자네들 둘이 노래부를 때 청중은 의자를 던지는 것밖에는 모르지. 하고 에토레가 말했다. 그래도 미국에 돌아가면 스칼라 극장에서 대성공을 거뒀다고 떠벌릴 테지. 스칼라에서는 첫 곡도 부르지 못하고 말걸. 스칼라에서 부를 거야. 하고 시몬스가 말했다. 시월에 <토스카>를 부르게 돼 있어. 우리도 가세, 응 맥? 에토레는 부영사에게 말했다. 누가 따라가서 보호해 줘야 할 거 아냐. 아마 미국 군대가 가서 보호해 주겠지. 하고 부영사가 말했다. 한 잔 더 들겠나 시몬스? 손더스, 자네도 한잔하지. 그럼. 하고 손더스가 말했다. 자네가 은메달을 탄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하고 에토레는 내게 말했다. 어떤 전공 표창을 받게 되나? 모르지. 받게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걸. 받게 될 테지. 아, 그럼 코바 술집 색시들은 당신이 굉장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걸. 오스트리아 군대를 2백 명 가량 죽였거나 적군의 참호를 단신으로 탈취했다고들 생각할 거야. 정말이지 나는 훈장을 타려고 군인 노릇을 했었지. 그래 훈장을 몇 개나 탔나, 에토레? 하고 부영사가 물었다. 그 친구가 안 탄 훈장이 있을라구. 하고 시몬스가 말했다. 이 친구를 위해서 전쟁하는 거니까. 내가 동메달을 두 번, 은메달을 세 번 탔지. 하고 에토레가 말했다. 그런데 전공 표창장은 한 번밖에 통과가 안 됐어. 다른 건 어떻게 되구? 하고 시몬스가 물었다. 작전이 성공하지 못했어. 하고 에토레가 말했다. 작전이 성공하지 않으면 모든 표창은 보류가 되거든. 부상은 몇 번이나 당했나, 에토레? 중상이 세 번. 그래서 전상(戰傷) 휘장이 세 개야. 이거 아냐? 그는 군복 소매를 돌려 보였다. 전공 휘장은 어깨에서 8인치쯤 아래에다 천을 꿰맨 검은 바탕에 은빛 평행선 세 줄이었다. 자네도 하나 있지. 에토레는 내게 말했다. 정말이지 이걸 갖는다는 건 멋있어. 훈장보다 이게 차라리 나을 거야. 정말이지 셋쯤 타게 되면 굉장한 거지. 병원에 석 달 입원해야 하는 부상에도 겨우 하나밖에 못 타니 말이야. 어디를 부상당했지? 하고 부영사가 물었다. 에토레는 소매를 걷어 올렸다. 여기. 그는 움푹하게 패인 번질번질한 붉은 상처를 내보였다. 이 다리에도 있지. 각반을 쳤기 때문에 보여 줄 수는 없군. 또 한 군데는 발이야. 내 발에는 죽은 뼈가 있는데 지금도 냄새가 나거든 아침마다 조금씩 부스러기를 뽑아 내는데 언제나 냄새가 고약하단 말이야. 뭣에 맞았는데? 하고 시몬스가 물었다. 수류탄이야. 그 감자 찧는 절구공이 같은 놈 말야. 그놈이 내 발 한쪽을 온통 날려 버렸거든. 자네도 감자 찧는 절구공이 같은 것 알겠지 그려? 알고 말고. 그 경칠 녀석이 그걸 던지는 걸 내가 봤거든. 하고 에토레가 말했다. 그걸 맞아 넘어지고는 이젠 죽었구나 싶었는데 그놈의 절구공이 속에 아무것도 안 들었거든. 그 경칠 녀석을 내 소총으로 쏘아 죽였지. 난 항상 소총을 갖고 다니기 때문에 그 녀석들은 내가 장교라는 걸 대개는 모르지. 그 녀석이 어떻게 생겼던가? 하고 시몬스가 물었다. 수류탄이 그것 하나밖에 없었어. 하고 에토레가 말했다. 왜 그걸 던졌는지 모르지. 아마 늘 하나 던져 봤으면 했던 거야. 진짜 전투는 한번도 구경해 보지 못했겠지. 그 경칠 녀석을 정통으로 쏘아 죽였어. 자네가 쏘았을 때 그 녀석 쌍통이 어떻던가? 하고 시몬스가 물었다. 원 내가 알 턱이 있어? 하고 에토레가 말했다. 배때기를 쏘았지. 대가리를 쏘다간 빗맞을까 봐 말이야. 자네 장교가 된 지는 얼마나 되나? 하고 내가 물었다. 2년. 곧 대위로 진급할 거야. 자네는 중위를 몇 년 했지? 이럭저럭 3년이군. 이탈리아 말을 썩 잘 하지는 못하니까 대위는 안 될걸. 하고 에토레가 말했다. 말은 하지만 읽고 쓰는 건 잘 못하니 말일세. 대위가 되려면 교육을 받아야 해. 자네는 왜 미국 군대에 안 들어갔나? 아마 들어가게 될 테지. 나도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 그런데 대위 봉급이 얼마나 되지, 맥? 정확한 건 모르겠는걸. 2백 50달러 가량 되겠지, 아마. 하나님 맙소사. 2백 50달러 있으면 뭐든지 하겠는데. 자네가 빨리 미국 군대에 들어가는 게 좋겠어. 그리고 나도 들어갈 수 있나 좀 알아보게. 그러지. 이탈리아 말로는 1개 중대라도 지휘할 수 있으니까 영어로 하는 것도 곧 배우게 될 테지. 자네야 장군이 될 걸. 하고 시몬스가 말했다. 아니야, 내가 장군이 되기에는 아는 것이 부족해. 장군이란 무지무지하게 아는 게 많아야 하거든. 자네들은 전쟁은 거저 먹는 줄 알지. 자네들 머리로는 이등 하사도 못 될거야. 그런 거 안 돼도 되는 게 천만다행이군. 하고 시몬스가 말했다. 자네 같은 놈팡이들을 군에서 징발하게 되면 병정 노릇을 해야 할 걸. 거참 두 녀석을 모두 내 소대에다 입대시켰으면 좋겠다. 맥, 자네도 말야. 맥, 자네는 내 연락병으로 하고 싶은데. 굉장하신데. 하고 맥이 말했다. 그렇지만 자네가 어째 군국주의자 같은게 탈이야.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내가 대령은 될 거야. 하고 에토레가 말했다. 전사만 않으면 말이지. 전사는 않지. 그는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군복 칼라에 달린 별을 만졌다. 왜 이러는지 아나? 우리는 누구든지 전사라는 말을 입에 담으면 반드시 이 별을 만지기로 돼 있어. 인제 그만 가세, 심 하고 손더스가 일어났다. 그러세. 또 만나세. 하고 내가 인사를 했다. 나도 가봐야겠어. 바 안의 시계는 여섯 시 십오분 전이었다. 잘 가게, 에토레. 잘 가게 프레드. 하고 에토레가 인사를 했다. 자네가 은메달을 타게 되어서 참 잘 됐네. 탈지 모르겠어. 타게 될 테지 뭘. 타게 되리라는 소문을 들었어. 글쎄 또 만나세. 하고 내가 말했다. 사고나 내지 말게. 에토레. 내 걱정은 하지 말어. 술도 안 마시고 냄새를 맡고 다니지도 않으니까. 난 주정뱅이나 갈보 사냥꾼이 아니거든. 내 신상에 좋은 게 어떤 건지 잘 알고 있다네. 또 보세. 하고 내가 말했다. 자네가 대위 진급을 하게 되었다니 반갑네. 진급을 기다리고만 있어야 할 필요는 없거든. 전공을 세워서 대위가 될 생각이야. 알겠나? 별 세 개 위에 검(劍) 두 자루를 교차시키고 왕관이 있는 거 말야. 그게 바로 나야. 행운을 비네. 행운을 비네. 언제쯤 일선으로 돌아가나? 곧 가게 될 테지. 그래 또 만나게 되겠지. 잘 가게. 잘 가게. 몸조심하게. 나는 병원으로 가는 지름길로 빠지는 뒷골목을 걸어 내려갔다. 에토레는 스물 세 살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숙부 밑에서 자랐는데, 토리노에 있는 부모를 찾아왔다가 선전 포고를 당한 것이었다. 그는 누이동생이 있는데 자기와 함께 미국에 있는 숙부에게로 가서 금년에 사범 학교를 졸업할 예정이었다. 그는 전형적인 영웅형이어서 만나는 사람마다 싫증이 나도록 하는 것이었다. 캐서린도 그 사람이라면 딱 질색이었다. 우리 나라에도 영웅은 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지만, 여보, 우리 나라 영웅들은 좀 더 조용해요. 난 별로 그 사람이 비위에 거슬리지 않는데. 나두요. 그이가 너무 자신만만하고 나를 지긋지긋하고 진저리나고 질색을 하도록 싫증나게 해 주지만 않는다면 별로 비위에 거슬리지 않아요. 나도 싫증이 나긴 해. 그렇게 말씀하시니 고마와요. 그렇지만 당신은 그렇게 말씀하실 필요가 없어요. 당신이야 일선에서의 그분을 상상할 수 있고, 또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아시겠지만 내겐 조금도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 타입이에요. 나도 알아. 알아 줘서 고마워요. 나도 그분이 좋아지도록 노력은 하겠지만 정말이지 지긋지긋한 사람이에요. 오늘 저녁때 만났는데 곧 대위로 승급한다더군. 잘됐군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그분이 좋아하겠군요. 내가 계급이 좀 더 올랐으면 하는 생각은 없소? 아니요. 그저 고급 식당에 들어갈 자격이 있을 만한 계급이면 그만이죠, 뭐. 그럼 지금 내 계급이 꼭 알맞군. 당신 계급이 그만이에요. 난 이 이상 다른 계급은 원치 않아요. 계급 때문에 머리가 이상해질지도 모르니까요. 난 당신이 잘난 체 않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당신이 잘난 체하더라도 당신하고 결혼하겠지만 잘난 체 안 하는 남편을 갖는다는 건 퍽 마음이 놓이거든요. 우리는 바깥 발코니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달이 뜨리라고 생각되었는데 시가에는 안개가 자욱해서 달은 안 뜨고, 조금 후에는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우리는 안으로 들어왔다. 바깥에서는 안개가 비로 바뀌고, 조금 후에는 세차게 내려서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들렸다. 나는 일어나서 비가 들이치나 보려고 문 앞에 가서 서 보았으나 괜찮기에 문은 열린 채로 두었다. 또 누굴 만났어요? 하고 캐서린이 물었다. 마이어스 부부를 만났지. 그분들도 이상한 사람들이지요. 남편은 본국에서 감옥 신세를 졌다나 봐. 죽을 때가 되었으니까 내보낸게지. 그런데 그 후에 밀라노에서 행복하게 살기만 하잖아요. 얼마나 행복한지 누가 아나. 감옥에서 나온 다음이니까 행복하겠죠, 뭐. 부인이 뭔지 병원으로 선물을 가져오겠다더군. 늘 훌륭한 선물을 가져와요. 당신도 그분의 귀여운 아들이에요? 그 중 한 사람은 되지. 당신네들은 모두 그분의 귀여운 아들이니까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그분은 아들을 좋아하나 봐요, 빗소리 좀 들어 보세요. 세차게 내리는데. 그런데 당신은 언제나 날 사랑하죠, 네? 그럼. 저렇게 비가 쏟아져도 변함없죠? 없지. 비로소 안심했어요. 난 비가 겁이 나요. 왜? 나는 졸렸다. 바깥에서는 비가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다. 모르겠어요. 항상 비는 무서워요. 난 좋은데. 나도 빗속을 걷는 건 좋아요. 그러나 사랑에는 굉장히 가혹해요. 나는 언제나 당신을 사랑할 거요. 내 사랑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우박이 오나 또 뭐가 있죠? 몰라. 졸음이 오는 모양이야. 여보, 그럼 주무세요. 난 뭐가 어떻든 간에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당신이 정말 비를 무서워하는 건 아니지, 안 그래? 당신하고 같이 있을 때는 안 무서워요. 왜 비가 무서울까? 모르지요. 말해 봐. 조르지 마세요. 말해 봐. 싫어요. 말해 봐. 좋아요. 그 속에 죽어 있는 나를 가끔 보기 때문에 무서워요. 아냐. 가끔 당신이 그 속에 죽어 있는 걸 봐요. 그게 좀더 가깝군. 여보, 그렇지 않아요. 내가 당신을 지킬 테니까요. 내가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제가 저를 지키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제발 그 이야기는 그만둡시다. 오늘 밤에는 스코틀랜드 사람처럼 말이 많고 미친 것같이 구는 건 원하지 않아. 같이 있을 날도 많지는 않을 텐데. 아니에요. 그렇지만 난 스코틀랜드 사람이고 미쳤어요. 그래도 그 이야기는 그만두죠. 모두 잠꼬대에요. 그래 모두 잠꼬대야. 모두 잠꼬대에요. 잠꼬대에 불과해요. 난 비가 무섭지 않아요. 난 비가 무섭지 않아요. 아아, 아아, 하나님 무섭지 않게 해 주세요. 캐서린은 울었다. 내가 달래니까 울음을 그쳤다. 그러나 바깥에는 계속해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20 }} 하루는 오후에 모두들 경마 구경을 갔다. 퍼거슨도 갔고, 포탄 신관으로 눈을 다친 군인 크로웰 로저스도 같이 갔다. 점심 후에 여자들은 옷을 갈아 입으러 가고, 크로웰과 나는 그의 병실 침대에 걸터앉아서 경마에 나오는 말들의 과거 성적이며 예상이 실린 경마 신문을 읽고 있었다. 크로웰은 머리에 붕대를 매고 있었고, 경마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줄곧 경마 신문을 읽고 심심풀이로 모든 말의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모조리 형편없는 말들이지만 고작 이런 말밖에는 구할 수가 없다고 했다. 노 신사 마이어스 씨가 이 청년을 좋아해서 정보를 알려 주곤 하였다. 마이어스는 거의 경마 때마다 계속해서 이겼으나 자기 배당금이 줄어들기 때문에 정보 제공을 꺼려했다. 경마는 무척 엉터리였다. 다른 모든 경마장에서 출장 금지가 된 패들이 이 곳 이탈리아에서는 경마에 나왔다. 마이어스의 정보는 신빙성이 있긴 하지만 가끔 숫제 대답을 안 하는 일도 있고, 마지못해 말해 주면서도 불쾌해하는 것 같아서 나는 그에게 묻는 것을 싫어했으나, 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느끼는 모양이었고, 더구나 크로웰에게는 잘 가르쳐 주었다. 크로웰은 눈을 다쳤고 그 중에도 한쪽 눈은 많이 다쳤는데, 마이어스도 눈이 나쁘기 때문에 크로웰을 좋아하는 것이었다. 마이어스는 자기가 어느 말에 걸었다는 것을 아내에게도 알리지 않기 때문에 그 여자는 땄다가 잃었다가 했지만, 대개는 잃는 편이고 말만 많았다. 우리 네 사람은 무개마차를 타고 산시로를 향해 달렸다. 날씨가 좋았고, 우리는 공원을 빠져 전차길을 따라 달리다가 길에 먼지가 이는 교외로 나갔다. 철책을 두른 별장이 있고, 나무가 무성한 넓은 정원이 있고, 물이 가득히 흐르는 도랑이 있고, 잎사귀에 먼지를 쓴 푸른 채전이 있었다. 온 들이 한눈에 들었으며, 농가가 보이고, 봇도랑이 있는 기름진 푸른 농장이 보이고 북녘에 산들이 보였다. 경마장으로 가는 마차가 많았는데, 문을 지키는 사람은 우리가 군복 차림이었기 때문에 입장권 없이 들어가게 하였다. 우리는 마차에서 내려 프로그램을 사 가지고 내야(內野)를 가로질러 경주로의 부드럽고 푹신푹신한 잔디밭을 지나 말의 대기소로 갔다. 본부 스탠드는 오래된 목조 건물이고, 마권(馬券) 매장은 스탠드 밑에 한 줄로 마굿간까지 늘어서 있었다. 내야의 경계 울에는 군인이 한 패 몰려 있었다. 말 대기소에는 꽤 많은 사람이 모여서 본부 스탠드 뒤 나무 밑에서 말들을 빙빙 돌려 걸려 보고 있었다. 아는 얼굴도 많았는데 우리는 퍼거슨과 캐서린을 위해서 자리를 잡아 주고 말을 구경했다. 말들은 한 마리씩 번갈아 머리를 숙이고 둘레를 돌았고, 마부가 고삐를 잡고 있었다. 한 마리는 자주색이 도는 검은 말이었는데, 크로웰은 일부러 물을 들인 것이라고 장담을 했다. 가만히 보니 그랬을 것도 같았다. 그 말은 안장을 놓으라는 신호의 벨이 울리기 직전에 끌려 나왔다. 마부 완장에 적힌 번호로 프로그램에서 그 말을 찾아 보았더니 자팔라크라는 이름의 검정색 거세마(去勢馬)라고 올라 있었다. 이 경마는 상금 1천 리라 이상의 경마에서 우승한 일이 없는 말들만 출장하게 되어 있었다. 캐서린은 염색을 한 거라고 확언했다. 퍼거슨은 잘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 말에 걸기로 의견이 일치해서 백 리라를 추렴했다. 마권 할당표에는 이 말은 35대 1의 비율로 배당금이 돌아온다고 적혀 있었다. 크로웰이 마권을 사러 간 동안 우리는 기수들이 한 번 더 말을 달려 보고 나무 밑을 나와서 경주로로 갔다가 출발 지점으로 천천히 말을 몰고 가는 것을 지켜 보고 있었다. 우리는 경마를 보려고 본부 스탠드로 올라갔다. 당시 산시로에는 자동식 출발 장치가 없어서 출발계가 말들을 일렬로 늘어 세우는데, 경주로 저쪽에 그들이 조그맣게 보였으며, 말채찍으로 소리를 내어 출발을 시켰다. 검정말이 선두를 달리며 우리 앞을 통과했고, 경주로를 도는 곳에서는 망원경으로 보았는데, 기수가 말을 억제해 보려고 애를 쓰는데 도저히 억제하지 못했고, 코너를 돌아서 곧은 경주로로 나오자 다른 말보다 검정말이 15 마신(馬身)이나 앞을 달렷다. 결승점을 지난 다음에도 마구 달려서 다시 코너 있는 곳까지 뛰어가는 것이었다. 얼마나 멋있어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우리 3천 리라 이상 벌겠네요. 그 말 굉장한 말인가 봐요? 돈 치르기 전에 염색한 게 변하지 말았으면 좋겠구먼. 하고 크로웰이 말했다. 정말 굉장한 말이었어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마이어스 씨도 그 말에 걸었는지 모르겠네요. 이긴 말에 걸었었습니까? 하고 내가 마이어스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난 안 걸었어요. 하고 마이어스 부인이 말했다. 당신들은 어느 말에 걸었소? 자팔라크에요. 정말? 그 말은 35 대 1 인데! 우린 그 말의 색깔이 마음에 들었어요. 난 마음에 안 들었어. 어째 시시해 보여서 그만. 모두들 그 말에 걸지 말라고 하잖아요. 크게 할당이 돌아오지는 않을걸. 하고 마이어스가 말했다. 배당 비율표에 35 대 1로 나와 있는데요. 하고 내가 말했다. 크게 할당이 돌아오지는 않을거야. 하고 마이어스가 말했다. 마지막 순간에 그 말에 돈을 많이들 걸었거든. 누가요? 캠프턴과 그 일당이지. 두고 보면 알걸. 2 대 1 이상은 안 돌아올 거요. 그럼 3천 리라 못 벌게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이런 엉터리 경마는 질색이에요! 그래도 2백 리라는 되겠군. 그까짓것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 돈 가지구야 뭐에다 쓰겠어요. 난 3천 리라를 벌겠다고 생각했는데. 엉터리고 치사한 경마로군요. 하고 퍼거슨이 말했다. 물론. 하며 캐서린이 말했다. 엉터리라는 걸 몰랐으면 도대체 그 말에 걸지도 않았겠지만요. 그래도 3천 리라는 괜찮았는데. 내려가서 한잔하고 얼마나 할당해 주는가 봅시다 그려. 하고 크로웰이 말했다. 우리는 번호를 써 붙인 곳으로 나갔다. 할당금을 내준다는 신호를 벨이 울리고 자팔라크란 이름 뒤에 18.50 이란 게시가 나붙었다. 이것은 건 돈 10리라의 배액도 안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는 본부 스탠드 아래 있는 바로 가서 위스키 소다를 각자 한 잔씩 했다. 아는 이탈리아 인을 몇 만나고 부영사 맥아담스도 우리가 여자들 있는 데로 갔을 때 나타나서 다가왔다. 이탈리아 인은 예의가 발랐다. 맥아담스는 우리다 또 한 번 걸려고 아래로 내려간 동안 캐서린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마이어스 씨가 마권 매장 가까이에 서 있었다. 어느 말에 걸었나 물어 보지? 내가 크로웰에게 말했다. 마이어스 영감님, 어디다 거셨어요? 하고 크로웰이 물었다. 마이어스 씨는 프로그램을 꺼내 들고 연필로 5번을 가리켰다. 우리도 그 말에 걸어도 괜찮습니까? 하고 크로웰이 물었다. 걸어 보우. 걸어 봐. 그런데 우리집 사람보고는 내가 대 줬다고 말아. 한잔 하시렵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 아니요. 난 술은 안 하니까. 우리는 5번의 우승에 백 리라 걸고, 삼착(三着) 이내 순위에도 백 리라를 걸고는 위스키 소다를 한 잔씩 더했다. 나는 기분이 상쾌해서 이탈리아 인 두 사람과 인사를 건넸는데, 그들은 같이 잔을 나눈 다음 여자들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이 사람들도 퍽 예의가 바른 사람들이어서 전에 우리가 사귄 두 이탈리아 인과 비길 만했다. 얼마 뒤엔 아무도 앉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나는 캐서린에 마권을 내주었다. 어떤 말이에요? 모르겠어. 마이어스 씨가 건 말이야. 이름도 모르세요? 몰라. 프로그램을 보면 알겠지. 5번일 거야. 아마. 맹신(盲信)이구먼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5번이 우승을 하기는 했는데 할당은 형편이 없었다. 마이어스 씨는 분개했다. 20리라 따려구 2백 리라를 걸다니. 하고 그는 말했다. 10리라 배당 12리라가 말이 돼! 우리 집 사람은 20리라를 잃었어. 같이 내려가겠어요. 캐서린이 내게 말했다. 이탈리아 인이 모두 일어섰다.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서 말 대기소로 갔다. 당신은 이런 거 좋아하세요? 캐서린이 물었다. 응. 좋아하는 것 같아. 글쎄 괜찮기는 한데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렇지만 여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건 견딜 수 없어요. 많은 사람을 만난 것도 아닌데. 그렇긴 하지만요. 마이어스 부처니 아내와 딸을 데리고 온 은행가니 하는 사람들은 - 그 사람은 내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 주는 사람인걸 하고 내가 말했다. 그야 그렇겠지만 그 사람이 안 해 주면 다른 사람이 해 주겠죠. 맨 나중에 만난 네 사람은 형편없는 사람들이던걸요. 그럼 우리는 여기 남아서 울에서 구경하지. 그게 좋겠어요. 그리구요 여보, 이번에는 마이어스 씨가 걸지도 않고, 들어 보지도 못한 말에 한번 걸어 봐요. 그럽시다. 우리가 나의 빛 이라는 이름의 말에 걸었더니 이 말은 다섯 마리가 뛰는 경마에서 네째를 했다. 우리는 울에 몸을 기대고 말들이 지나가는 것을, 말굽 소리도 요란하게 지나가는 것을 지켜 보았고, 멀리 보이는 산이며 숲과 들 저편에 있는 밀라노를 바라보았다. 여기가 훨씬 상쾌해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말들은 몸이 흠뻑 젖고 땀을 흘리며 문을 지나 제자리로 돌아오고, 기수들은 말을 달래 가면서 나무 밑으로 타고 가서 내렸다. 한 잔 생각 없으세요? 여기서 한잔하면서 경마를 구경해도 되겠어요. 내가 가져오지. 하고 내가 말했다. 아이를 시키세요. 캐서린이 말했다. 캐서린이 손을 들자 마굿간 옆 파고다 바에서 소년이 왔다. 우리는 둥근 철제 테이블에 앉았다. 우리만 있는 편이 낫지 않아요? 그래. 내가 대답했다. 모두 같이 있으면 난 퍽 쓸쓸해요. 여기가 그만이군. 그럼요. 정말 아름다운 코스에요. 아름답군. 당신 재미를 망쳐 드릴 생각은 없어요. 언제든지 저리로 가시고 싶으면 같이 가겠어요. 아니야. 하고 나는 말했다. 여기 그대로 있으면서 이거나 마시지. 나중에 내려가서 장애물 경주 구경이나 합시다. 당신은 끔찍이도 내겐 잘해 주셔. 캐서린이 말했다. 한동안 둘이서만 있다가 다시 다른 사람들 있는 데로 가니까 기분이 후련했다. 퍽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21 }} 9월이 되자 비로소 서늘한 밤이 찾아들었다. 얼마 있지 않아 낮에는 선선해졌고, 공원의 나뭇잎 색이 변해서 우리는 여름이 간 것을 알았다. 전선의 전황(戰況)은 극히 불리해서 아직도 산가브리엘레를 점령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인시차 고지(高地)의 전투는 끝났고, 중순경이면 산가브리엘레의 전투도 끝날 예정이었다. 결국은 점령을 못하고 말았다. 에토레는 일선으로 돌아갔다. 말들도 로마로 옮겨 가서 경마도 없었다. 크로웰은 로마로 후송되었는데, 미국으로 송환될 예정이었다. 거리에서는 전쟁을 반대하는 폭동이 두 번 있었고, 투린에서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 클럽에서 어느 영국 소령이 이탈리아 군은 바인시차 고지와 산가브리엘레에서 15만 명을 잃었다고 내게 이야기했다. 그 밖에 카르소에서도 4만 명의 손실이 있었다고 했다. 같이 술을 마시는데 그가 이야기를 했다. 이 방면의 전투고 금년은 이제 그만이고, 이탈리아 군은 감당도 못하면서 욕심만 부렸다고 말했다. 플란더스 전선(戰線)의 공격도 신통치 않았다. 금년 가을처럼 전사자가 난다면 연합군은 1년이면 끝장날 것이다. 모두 끝장이 난 셈이지만 우리가 그걸 모르고 있는 한 염려 없다고 그는 말했다. 우린 모두 끝장났다. 중요한 건 그걸 인정하지 않는 일이다. 그걸 마지막으로 인식하는 나라가 전쟁에 이기는 것이다. 우리는 한 잔 더 들었다. 당신은 어느 부대의 참모요? 아니올시다. 그는 참모였다. 클럽 안에는 커다란 가죽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은 우리 둘 뿐이었다. 그의 반장화는 손질을 깨끗이 한 윤이 안 나는 가죽이었다. 훌륭한 반장화였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들은 사단이니 병력이니 이 따위를 기준으로 해서만 생각한다. 사단 사단하고 떠들다가 그걸 보내 주면 모두 몰살시키고 있다. 모두 끝장났다. 독일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정말이지 그들이야말로 군인이다. 독일놈들이 군인이야. 그래도 그들 역시 끝장난 거다. 모두가 끝장이다. 나는 러시아 군은 어떠냐고 물었다. 그들은 벌써 옛날에 끝장났다고 그는 말했다. 나도 곧 그들이 끝장난 걸 알게 되리라고 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군도 끝장났어. 독일놈들 사단이 몇 개 있으면 해 볼 만하겠지. 이번 가을에 오스트리아 군이 공격할 것 같소? 물론 하겠지. 이탈리아 군도 끝장났어. 그들이 끝장난 건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야. 독일놈들이 트렌티노를 뚫고 내려와서 비첸차에서 철도를 절단하게 되면 이탈리아 군은 어디로 가나? 1916 년에도 그런 작전을 했지요, 하고 내가 말했다. 독일군이 아니었지. 아니 독일군이요, 하고 내가 말했다. 그렇지만 그런 작전은 아마 안 할 것 같아, 하고 그는 말했다. 너무 명백하니까. 무슨 복잡한 작전을 해 가지고 그럴 듯하게 끝장날 테지. 난 가야겠소, 하고 내가 말했다. 병원으로 돌아가야 했다. 잘 가오 하고 그는 인사를 했다. 유쾌하게 무운을 빕니다. 했다. 그의 비관적인 세계와 개인적인 명랑은 무척 대조적이었다. 나는 이발소에 들러서 면도를 하고 병원으로 돌아왔다. 꽤 오래 견딜 수 있을 만큼 내 다리는 나았다. 사흘 전에 시험을 받았다. 종합 병원에서의 치료 과정이 끝나려면 아직 약간 더 치료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나는 절름거리지 않는 연습을 하면서 보도를 걸었다. 한 노인이 회랑(回廊) 아래서 실루엣을 오려 내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구경했다. 두 처녀가 포즈를 취하고 있었는데, 그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 채 가끔 그들을 바라보면서 빠른 솜씨로 두 여자가 함께 있는 실루엣을 오려 내고 있었다. 여자들은 킬킬 웃었다. 노인은 그것을 흰 종이에 풀로 붙여서 그들에게 내주기 전에 내게 보여 주었다. 아름답지요. 하고 그는 말했다. 중위님도 하나 하시지요? 여자들은 저희 실루엣을 보고 웃으면서 가버렸다. 잘생긴 처녀들이었다. 그 중 하나는 병원에서 길 건너 술 파는 가게에서 일하는 여자였다. 해 보시오. 내가 말했다. 모자를 벗으세요. 아니 쓴 채로 해 줘요. 그럼 아름답게 안 될 텐데. 하고 그는 말했다. 그렇지만, 그는 명랑해지면서 그게 더 군인답게 되겠지요. 그는 검은 종이를 가위로 오려 내고, 두껍게 오려진 두 장을 따로 떼어서 그 옆얼굴을 대지(臺紙)에다 붙여 내게 주었다. 얼마요? 괜찮습니다. 그는 손을 내저었다. 그저 가지시라고 만든 겁니다. 받으세요. 하고 나는 동전을 꺼내들고 말했다. 미안하니까요. 아닙니다. 그저 심심풀이로 만들어 본 거예요. 애인에게 주세요. 고맙습니다. 또 만납시다. 안녕히 가세요. 나는 병원으로 걸음을 돌렸다. 편지가 몇 장, 공용 한 장과 그 밖에 몇 장이 와 있었다. 3주간의 병후 요양 휴가를 줄 테니 그 기간이 끝나면 일선으로 귀환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편지를 주의 깊게 읽었다. 그래, 그렇게 되었단 말이지. 요양 휴가는 내 치료 과정이 끝나는 10월 4일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3주일이면 스물 한 날이다. 그럼 10월 25일이 된다. 나는 병원에 안 들어가겠다고 말하고, 그 길로 병원에서 조금 떨어진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로 가서, 식탁에서 편지랑 <코리에레 델라 세라> 신문을 읽었다. 할아버지가 보낸 편지에는 가족들의 소식과 애국적인 격려가 적혀 있었고, 2백 달라 송금 수표와 신문 오린 것이 몇 장 들어 있었다. 장교 식당에서의 우리 친구인 신부가 보낸 싱거운 편지, 프랑스 군의 비행사가 된 친구의 편지도 있었는데, 형편없이 행패를 부리는 패거리와 같이 있다면서 그 이야기를 써 보낸 것이었다. 리날디의 짧은 편지에는 넌 언제까지나 밀라노에서 빈둥거릴 셈이며,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고 했다. 돌아올 때는 레코드판을 사 오라고 하면서 리스트를 동봉해 보냈다. 나는 식사를 하면서 키안티 작은 병을 한 병 마시고, 코냑 한 잔과 커피를 마시고, 신문을 읽고나서 편지들을 호주머니에 넣고, 신문과 팁을 테이블 위에 남겨 두고 나왔다. 병원 내 방으로 돌아와서 외출복을 벗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다음에, 발코니로 통하는 문의 커튼을 닫고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아서 미세스 마이어스가 입원 병사들 보라고 두고 간 보스턴 신문을 읽었다. 시카고 화이트 삭스 팀이 아메리칸 리그 전에서 우승의 길을 달리고 있었고, 내셔널 리그에서는 뉴욕 자이언트 팀이 우세했다. 베이브 루스가 당시의 보스턴 팀의 투수였다. 신문마다 싱겁고, 뉴스라야 지역적이고 너절한 것뿐이고, 전쟁 뉴스는 모조리 케케묵은 것이었다. 미국의 뉴스라는 건 신병 훈련소에 관한 이야기 뿐이었다. 내가 그 훈련소에 안 있는 것만 다행이었다. 읽을 수 있는 거라고는 야구 뉴스 뿐이었으나 그것마저 눈꼽만큼도 흥미가 없었다. 신문이 한꺼번에 많으면 도저히 흥미를 가지고 읽을 수 없는 법이다. 게다가 때 늦은 신문이었으나 한동안 그걸 읽었다. 미국이 정말 참전할 텐가, 메이저 리그 전을 중단할 텐가 하고 생각했다. 대개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밀라노에서는 아직도 경마를 하고 있고, 전쟁이 이 이상 악화될 것 같지는 않다. 프랑스에서는 벌써 경마를 걷어 치웠다. 자팔라크라는 말은 프랑스에서 온 말이었다. 캐서린은 아홉 시까지는 근무가 없었다. 아홉 시에 근무를 하러 왔는데 처음엔 복도로 지나다니는 소리가 들렸고, 한 번은 지나가는 모습을 볼 수도 있었다. 이방 저방을 드나들더니 드디어 내 방에 들어왔다. 늦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어찌나 할 일이 많은지. 어떠세요? 나는 편지 이야기며 휴가 이야기를 했다. 그거 참 멋있군요. 어디로 가시고 싶으세요?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아. 여기 있고 싶어.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장소를 택하시면 나도 같이 가겠어요. 어떻게 간단 말이오? 몰라요. 그래도 가겠어요. 굉장한 용기로군. 그렇지도 않아요. 하지만 아무것도 밑질 것이 없는 인생은 그렇게 다루기 어려운 게 아니에요.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한때는 굉장한 것 같던 장애물이 얼마나 보잘 것 없어 보이나를 생각했을 따름이에요. 내 생각 같아서는 쉽지 않은 일 같은데. 아무것도 아니죠, 뭘. 필요하다면 떠나 버리면 그만이니까요. 그렇지만 거기까지 이르지는 않겠지요. 어디로 갈까? 아무 데고 상관 없어요. 아무 데나 당신이 원하는 데라면. 아무 데나 아는 사람이 없는 데라면. 아무 데로 가나 좋단 말이오? 그럼요. 아무 데고 좋아질 거예요. 그녀는 흥분하고 긴장한 것 같았다. 캐서린, 오늘은 좀 이상한데. 아니에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냐, 좀 이상해. 아니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니야, 내가 아는 걸. 말해 봐요. 나한테는 말할 수 있잖아. 아무것도 아니라니깐. 말해 봐. 말하기 싫어요. 내가 당신을 불행하게 하거나 심려를 끼쳐 드릴까 봐 겁이 나요. 천만에. 정말이죠? 나야 걱정이 안 되지만 당신이 걱정할까 봐 그래요. 당신이 걱정 않는다면 나도 걱정이 안 되는 거야. 말하고 싶지 않아요. 말해 봐. 꼭 해야 해요? 그럼. 아기를 가졌어요. 거의 석 달은 됐어요. 걱정이 되세요? 제발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해선 안 돼요. 괜찮아. 정말 괜찮아요? 물론. 별 짓을 다 했어요. 별의별 약을 다 먹었지만 아무 효과도 없었어요. 난 걱정 안 해.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그리구 난 걱정 안 했어요. 당신도 걱정하거나 기분 나빠 하시면 안 돼요. 난 당신을 걱정할 뿐이야. 글쎄 그렇다니깐. 그런 걱정을 해서는 안 된단 말이에요. 누구든지 어린애를 갖는데요 뭘. 나만 가졌나요. 자연스러운 일이니까요. 당신은 정말 용기가 있어. 그렇지도 않아요. 하지만 당신은 염려해서는 안 돼요. 내가 어떻게든 해서 당신을 괴롭히지 않게 하겠어요. 전에는 괴롭힌 일도 있었지만요. 그래도 지금까지 착한 여자였지 않아요? 당신은 지금까지 아무것도 몰랐지요, 네? 몰랐는걸.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그저 걱정만 안 하시면 되는 거예요. 당신이 걱정하는 게 눈에 보여요. 그러지 마세요. 지금 당장 그만 두세요. 술 한 잔 드시겠어요? 술을 드시면 언제든지 명랑해지시니까요. 아니, 난 명랑하다니까. 그런데 당신은 정말 용기가 있구려. 그런 게 아니에요. 그렇지만 우리 둘이 갈 장소를 당신이 선택하기만 하면 내가 모든 준비는 할게요. 시월이니까 멋있을 거예요. 두 사람만이 멋있는 시간을 보내고, 당신이 일선에 있는 동안은 날마다 편지하겠어요. 당신은 어디로 가서 있겠소? 아직 모르겠어요. 어디든지 멋있는 곳으로 가야죠. 내가 그런 곳을 찾아 보겠어요. 한동안 우리는 조용히 앉은 채 말이 없었다. 캐서린은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고, 나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서로 몸에 손을 대는 일도 없었다. 누가 방 안으로 쑥 들어섰을 때, 어색한 기분으로 마주보고 앉아 있을 때처럼 서로 떨어져 있었다. 드디어 그녀가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았다. 화나시지 않았지요, 네? 아니. 함정에 빠졌다는 기분도 안 느끼시죠? 약간은. 그러나 당신 때문이라는 생각은 없어. 누가 나 때문이랬어요. 바보 같은 소리 마세요. 하여간 함정에 빠진 걸 말한 거예요. 생리적으로는 언제나 함정에 빠진 듯한 기분을 느끼는 법이야.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내 손을 그대로 쥔 채 그녀는 멀리 날아가는 것 같았다. 언제나 라는 건 그렇게 고운 말이 아니군요. 미안해. 괜찮아요. 그렇지만 난 아기를 가져 본 일이 없고, 누구를 사랑해 본 일조차 없잖아요. 그리고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 드리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언제나 라는 말씀은 너무해요. 내 혓바닥을 잘라 버리고 싶어. 하고 내가 제의를 했다. 아아, 당신두! 그녀는 제 자리로 정신이 돌아왔다. 내 말에 개의하지 마세요. 우리는 다시 한 마음이 되고 어색한 기분은 사라졌다. 우리는 정말 한 몸이나 마찬가지니까 일부러 오해를 해서는 안 돼요. 안 되지. 그렇지만 흔히들 그러거든요. 서로 사랑하면서 일부러 오해를 해 가지고 싸우고, 그 다음에는 갑자기 서로 서먹서먹해 지거든요. 우리는 안 싸워야지. 싸우지 말아야지요. 이 세상에서 우리 둘만이 한 편이고, 나머지는 모두가 남이니까요. 만약에 우리 둘 사이에 무슨 불화가 있으면 그 땐 우리는 파멸이고, 나머지 세상이 우리를 정복하는 거예요. 정복하지 못할 거야. 하고 내가 말했다. 당신이 너무나 용감하니까 말이야. 용감한 자에게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나게 마련이거든. 그들 역시 죽기는 하죠. 그러나 단 한 번 죽지. 모르겠어요. 누가 그런 말을 했어요? 비겁한 자는 천 번을 죽고, 용감한 자는 한 번 밖에 안 죽는다는 말이지? 그래요. 누구의 말이에요? 모르겠어. 그 사람은 아마 비겁한 자였나 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비겁한 자에 대해서는 많이 알면서 용감한 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으니까요. 용감한 자는 만약 그가 영리하다면 아마 2천 번은 죽을 거예요. 거기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을 뿐이에요. 나도 모르겠어. 용감한 자의 머리 속까지 들여다보기는 어렵겠지. 그래요 그러기 때문에 용감한 자 행세를 하지요. 당신은 권위자구려. 맞았어요. 권위자가 될 자격이 충분해요. 당신은 용기가 있어. 아니에요. 그렇지만 용자(勇者)가 되고 싶기는 해요. 난 용자가 아니야. 난 나 자신의 실력을 잘 알고 있어. 오래 전선에 나가 있자니까 자신을 잘 알게 되거든. 2할 3푼은 치지만 그 이상은 도저히 못 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야구 선수와 같지. 2할 3푼을 치는 야구 선수란 뭐에요? 굉장히 인상적인 말이네요. 그런 것도 아니야. 야구에서는 2류 타자를 말하는 거야. 그래도 타자는 타자니까요. 하고 그 여자는 내 약을 올렸다. 아마 우리는 둘 다 자존심이 강한 모양이야. 하고 내가 말했다. 그렇지만 당신은 용감해. 아니라니까요. 용감해지기를 희망은 해요. 우리는 둘 다 용감해. 하고 내가 말했다. 그리고 나는 술을 한 잔 하면 굉장히 용감해. 우리는 정말 굉장한 사람들이네요. 하고 캐서린은 말했다. 그녀는 양복장으로 가서 코냑과 글라스를 들고 왔다. 한 잔 드세요, 여보. 내게 잘 해 주셨으니까요. 별로 생각이 없는데. 한 잔 들어요. 그러지. 나는 글라스에 3분의 1 가량 코냑을 따라서 마셨다. 근사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브랜디는 용자의 술이라지요. 그래도 당신은 과음하면 안 돼요. 전쟁이 끝나면 어디 가서 살까? 양로원에라도 가서 살겠지요. 3년 동안은 어린애처럼 전쟁이 크리스마스에 끝났으면 하고 기다렸어요. 그러나 지금은 우리 아들이 해군 소령이나 되면 끝날까 하고 기다리고 있어요. 육군 대장이 될지도 모르지. 백년 전쟁을 한다면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겠군요. 당신은 술 안 하겠소? 싫어요. 당신은 술 드시면 언제나 기분이 좋지만 나는 어지러워지기만 해요. 그럼 브랜디는 마셔 본 일이 없나? 없구말구요. 나는 구식 아내예요. 나는 팔을 뻗어 마루바닥의 코냑 병을 집어서 또 한 잔을 따랐다. 당신 전우들을 한 번 둘러보고 오는 게 좋겠어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그 때까지 신문이라도 보세요. 꼭 가야 하오? 지금 가든지 나중에 가든지. 좋아, 지금 갔다 오구려. 나중에 올게요. 그 때까지 신문이나 다 읽지. 하고 내가 말했다. {{}}{{22 }} 그 날은 밤이 되면서 쌀쌀해졌고 다음 날은 비가 내렸다. 종합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비가 많이 쏟아져 흠뻑 젖어 들어왔다. 내 방으로 올라와서도 발코니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바람이 창문 유리에 비를 몰아 뿌려 주었다. 옷을 갈아입고 브랜디를 약간 마셨으나 브랜디 맛이 좋지 않았다. 밤에는 몸이 불편하고 다음 날 아침에는 식사한 것을 토해 버렸다. 틀림없어. 하고 의사가 말했다. 눈 흰자위를 보라구. 미스 게이지가 들여다 보았다. 거울을 들어 내게도 보여 주었다. 눈의 흰자위가 노랗게 되었으며 황달이었다. 나는 그 병을 두 주일 동안 앓았다. 그 때문에 우리는 병후 보양 휴가를 둘이서 같이 보내지 못했다. 우리는 라고 마지오레에 있는 팔란차로 갈 계획이었다. 그 곳은 나뭇잎이 물드는 가을철이 썩 좋았다. 산보할 수 있는 길이 있고 호수에서 송어 낚시질을 할 수도 있었다. 팔란차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이니까 스트레사보다도 좋을 것이었다. 스트레사는 밀라노에서 가기가 아주 쉽기 때문에 항상 아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팔란차에는 아담한 마을이 있고, 어부들이 사는 섬까지 배를 저어 갈 수도 있고 가장 큰 섬에는 레스토랑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가지 않았다. 내가 황달로 누워 있을 때 하루는 미스 반 캠펜이 방으로 들어와서 내 양복장 문을 열어 보고 빈 병들이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포터에게 빈 병을 한 아름 가져가게 했는데, 틀림없이 그 여자가 그 광경을 보고 더 남아 있는 것을 찾아 내려고 올라온 것이었다. 그건 대개 베르무트 병, 마르살라 병. 까프리 병. 빈 키안티 병, 그리고 코냑 병 두어 개였다. 포터는 베르무트가 들었던 큰 병과 짚으로 싼 키안티 병은 가져가고, 브랜디 병을 마지막으로 남겨 두었던 것이다. 미스 반 캠펜이 발견한 것은 이 브랜디 병이었고, 큄멜 술이 들어 있던 곰처럼 생긴 병이었다. 곰처럼 생긴 병이 특히 그 여자를 노하게 하였다. 그 여자는 그 병을 쳐들었다. 곰은 앞발을 들고 주저앉았고, 유리로 괸 곰 대가리에는 코르크 마개가 있고, 병바닥에는 아직도 끈적끈적한 결정(結晶)이 남아 있었다. 나는 껄껄 웃었다. 그건 큄멜 술이오. 하고 나는 말했다. 최고급품은 그런 곰 모양의 병에 든 것이오. 러시아 산이라오. 저게 모두 브랜디 병이지요. 안 그래요? 미스 반 캠펜이 물었다. 잘 보이지는 않는데요. 그래도 아마 그럴 겁니다. 언제부터 이 짓을 하셨나요? 그건 내가 사서 내 손으로 들고 들어 온 것들이오. 하고 나는 말했다. 이탈리아 장교들이 자주 나를 찾아오는데 그분들 대접하려고 사다 두었던 거요. 그럼 중위님은 안 마셨지요? 하고 그 여자가 물었다. 나도 마셨지요. 브랜디라니. 하고 그 여자가 말했다. 브랜디 빈 병이 열 한 개나 되고 게다가 저 곰처럼 생긴 술까지. 큄멜이오. 누구를 보내서 모두 치워 버리도록 하겠어요. 저 빈 병이 전부에요? 지금 현재로서는. 그런 것도 모르고 황달에 걸렸다고 가엾게 생각했군요. 동정도 중위님에게는 낭비에요. 고맙소. 전선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 건 비난할 수 없을 것도 같아요. 그렇지만 알콜 중독으로 황달에 걸리는 것보다는 좀더 영리한 방법이 있을 법도 한데요. 무슨 중독이오? 알콜 중독이라니까요. 내 말 못 들으시나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다른 방도를 강구하지 않는다면 황달만 완쾌되면 전선으로 돌아가야 될지도 모르겠어요. 자청해서 걸린 황달로 병후 요양 휴가를 얻을 자격이 있을 것 같지 않군요. 그렇게 생각하시오? 그럼요. 미스 반 캠펜, 당신도 황달을 앓아 본 일이 있소? 아니요, 그러나 황달병 환자는 얼마든지 봤지요. 그래서 환자들이 황달에 걸려서 좋아하는 걸 봤단 말이군. 전선보다는 나을 테니까요. 미스 반 캠펜, 당신은 제 발로 제 불알을 걷어차서 병신이 되려고 한 사람도 알고 있소? 미스 반 캠펜은 이 질문을 무시해 버렸다. 무시해 버리거나 이 방에서 나가 버리거나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나를 싫어했고, 지금 앙갚음을 할 기회가 돌아왔기 때문에 이 방에서 나갈 생각은 아예 없었다. 고의로 부상을 입고 전선을 모면하려고 한 군인을 많이 알고 있어요. 그건 내가 물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잖소. 고의로 부상을 입은 사람이야 나도 알고 있다오. 내가 물은 건 제 발로 제 불알을 걷어차서 병신이 되려고 한 사람을 알고 있느냐는 거요. 왜 그러냐 하면 그것이 황달과 가장 가까운 감각이고, 부녀자들은 그런 감각을 아직 경험하지 못 했으리라고 믿으니까요. 미스 반 캠펜 - 미스 반 캠펜은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중에 미스 게이지가 들어왔다. 반 캠펜에게 무슨 소리를 하셨어요? 노발대발 하던데요. 감각을 비교해 봤지. 아직 해산(解産)을 경험해 보지 못 했다는 사실을 깨우쳐 줄 생각이었는데 - 바보시군요. 하고 게이지 말했다. 앙갚음을 할 거예요. 앙갚음이야 벌써부터 당하고 있는 걸. 내 휴가를 몰수해 버렸고, 나를 군법 회의에 걸려고 음모를 꾸밀지도 모르지. 정말 야비한 여자야. 그전부터 중위님을 싫어하긴 했어요. 하고 게이지가 말했다. 그런데 대관절 뭣 때문에 그래요? 내가 전선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 술을 마시고 황달에 걸리도록 했다는 거야. 피이. 하고 게이지가 말했다. 술이라고는 한 방울도 안 마셨다고 제가 증언(證言)해도 좋아요. 누구든지 한 방울도 안 마셨다고 증언해 줄 거예요. 술병을 발견해 버렸다오. 그 병들 좀 치워 버리라고 아마 골백번은 말했을 거예요. 지금 병이 어디 있죠? 옷장 안에. 가방 있어요? 없소. 그 륙색에다 넣으시오. 미스 게이지가 술병들을 륙색에도 꾸렸다. 포터에게 맡기지요. 하면서 문 밖으로 가지고 나가려고 했다. 잠깐만. 미스 반 캠펜이 말했다. 이 병들은 내가 가지고 가겠어요. 그 여자는 포터를 데리고 왔던 것이다. 이걸 들고 가시오. 내가 리포트 낼 때 군의관께 보여 드려야겠어요. 그 여자는 복도로 나가 버렸다. 포터가 륙색을 가지고 갔다. 그 속에 뭣이 들었는지 포터는 잘 알고 있었다. 내가 휴가를 놓친 것 외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23 }} 내가 전선으로 돌아가는 날 밤에 나는 포터를 보내어 투린에서 오는 기차의 좌석을 잡아 두라고 했다. 기차는 한밤중에 떠날 예정이었다. 투린에서 정비해서 출발하면 밀라노에는 밤 열 시 반경에 닿고, 출발할 때까지는 정거장에 머물러 있었다. 자리를 잡으려면 기차가 들어올 때 미리 정거장에 가 있어야 했다. 양복점에서 일을 하다가 기관총수가 되어 지금 휴가 중인 친구를 포터가 데리고 갔다. 둘이나 갔으니 좌석 하나야 잡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입장권 살 돈을 주고 내 짐을 가지고 가라고 했다. 큰 륙색 하나와 잡낭(雜囊)이 두 개 있었다. 병원에서는 다섯 시경에 작별을 하고 나왔다. 포터가 내 짐을 이미 제 방에다 가져다 두었는데, 나는 자정 조금 전에 정거장으로 가겠다고 일러 두었다. 그의 아내는 나를 나으리 라고 부르면서 울었다. 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악수를 하고 또 울고 하였다. 등을 가만가만 두드려 주었더니 또 한 번 울었다. 그녀는 그 동안 내 옷가지를 꿰매 주었는데, 머리고 희고 늘 행복스러운 얼굴이었으며 몸집이 뚱뚱했다. 울 때는 얼굴 전체가 일그러졌다. 나는 거리 모퉁이에 있는 술집으로 들어가서 창 밖을 내다보면서 기다렸다. 바깥은 어둡고 춥고 안개가 끼어 있었다. 내가 마신 커피와 그래파 술값을 치르고, 유리창을 통해서 불빛 속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지켜 보았다. 캐서린이 나타난 것을 보고 창을 똑똑 두드렸다. 그녀는 돌아보고 나를 발견하고 미소를 머금었고, 나는 일어나 나가서 그녀를 맞았다. 그녀는 진한 남색 케이프와 펠트 모자를 쓰고 있었다. 우리는 같이 걸었다. 술집들이 군데군데 있는 보도를 걷고 시장을 건너서 걸어 올라가 아치가 덮인 길을 빠져 사원으로 갔다. 전차 선로가 뻗어 있고 그 너머가 사원이었다. 사원은 안개 속에 희고 젖어 있었다. 우리는 전차 선로를 건넜다. 왼쪽에 가게들이 있고, 창문에는 불이 켜 있고, 갈레리아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었다. 광장에는 안개가 자욱했고, 사원 앞으로 가까이 갔을 때 사원은 굉장히 커 보이고, 돌은 젖어 있었다. 들어가 볼까? 싫어요. 캐서린이 대답했다. 우리는 그대로 걸었다. 앞길의 돌 부벽(扶壁) 그늘에 한 군인이 여자를 데리고 서 있었는데 우리는 그들 곁을 지나갔다. 그들은 돌 벽에 바싹 기대어 서 있었고, 사내가 망토 자락으로 여자를 꼭 싸안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 같군. 하고 내가 말했다. 우리 같은 사람은 없어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기분이 좋아서 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저 사람들 갈 곳이 있었으면 좋겠군. 있어 봐야 별 수 있겠어요. 글쎄, 누구나 갈 곳이 있어야지. 사원이 있잖아요. 하고 캐서린은 말했다. 우리는 사원을 지났다. 광장 막바지를 건너 사원을 돌아다 보았다. 안개 속의 사원은 아름다웠다. 우리는 가죽 제품을 파는 상점 앞에 서 있었다. 진열장에는 승마화와 륙색과 스키 구두가 있었다. 하나하나의 상품을 무슨 전시물이나 되는 것처럼 륙색을 한 가운데 진열하고, 승마화와 스키 구두를 양쪽에 멀찌감치 떼어 놓았다. 가죽은 길이 든 안장처럼 검고 매끄럽게 기름을 먹인 것이었다. 기름을 먹인 가죽에 전등 불빛이 번쩍였다. 언제 같이 스키를 가자구. 두 달만 있으면 뮈렌에서 스키를 할 거예요. 그리로 가지. 그래요. 우리는 다른 진열장들을 지나 옆길로 돌아 나갔다. 이 길은 와 본 일이 없어요. 병원에 다니던 길이야. 하고 내가 말했다. 좁은 골목이라 우리는 바른편으로 붙어서 걸었다. 안개 속을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다.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고, 모든 진열장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우리는 진열장 속의 치즈 무더기를 들여다 보았다. 나는 총포상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잠깐만 들려 갑시다. 총을 한 자루 사야겠어. 무슨 총을요? 권총 말이야. 우리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혁대를 풀어 빈 권총집이 다린 채로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카운터 뒤에는 여자가 둘이 있었다. 그들이 권총을 몇 자루 갖다 놓았다. 이 권총집에 맞아야 합니다. 나는 권총집을 열면서 말했다. 회색 가죽으로 된 권총집인데, 거리에 나다닐 때 차려고 고물상에서 구한 물건이었다. 괜찮은 권총이에요? 캐서린이 물었다. 모두 비슷비슷하군. 이 권총 한 번 시험해 볼까요? 나는 한 여자에게 물었다. 지금은 쏘아 보실 만한 장소가 없어요. 하고 그 여자가 대답했다. 그러나 물건은 썩 좋아요. 이거면 절대로 실수를 안 하실 거예요. 나는 그 총을 빼앗아 들고 방아쇠를 당겨 보았다. 스프링이 약간 센 편이었으나 감각은 괜찮았다. 조준을 맞춰서 한 번 더 당겨 보았다. 쓰던 물건이에요. 하고 여자가 알려 주었다. 명사수였던 어느 장교가 쓰던 물건이에요. 여기서 팔았던가요? 그럼요. 어떻게 다시 돌아왔나요? 그 장교 당번병한테서 샀어요. 내 권총도 있을지도 모르겠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 이게 얼마요? 50 리라에요. 무척 싸지요, 뭘. 좋아요. 예비 삽탄자 두 벌하고 실탄 한 상자 주시오. 그 여자는 카운터 밑에서 시키는 대로 꺼내 왔다. 대검은 필요 없으세요? 중고품으로 아주 싼 물건이 있는데요. 나는 전선으로 가는 길이오. 아, 그러세요. 그럼 대검 같은 건 필요 없으시겠어요. 나는 권총과 실탄 값을 치르고, 탄창을 채워 제자리에 넣고, 권총을 빈 권총집에 넣고, 예비 삽탄자에 나머지 탄환을 채워서 권총집에 달려 있는 가죽 주머니에 넣은 다음에 혁대를 찼다. 권총이 달리니까 혁대가 묵직했다. 그래도 정규 권총을 사는 편이 나았을 성 싶었다. 그거라야 언제든지 탄환을 구할 수가 있었다. 이젠 완전무장이 됐군. 하고 내가 말했다. 꼭 잊지 않고 해야 할 일 중의 하나야. 어떤 놈이 병원으로 가는 길에 내 권총을 떼어가 버렸거든. 권총 성능이 좋은 거면 좋겠어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뭐 다른 건 필요 없으세요? 하고 여점원이 물었다. 별로 없소. 그 권총에는 끈이 있습니다. 나도 봤소. 그 여자는 뭘 좀더 팔고 싶어했다. 호각은 필요 없으세요? 필요 없소. 그 여자는 안녕히 가라고 인사를 하고, 우리는 보도로 나왔다. 캐서린은 고개를 돌려 가게 안을 들여다 보았다. 여점원이 내다보고 우리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나무에 조그만 거울을 많이 박은 것은 뭣에다 쓰는 거예요? 새들을 끌어오기 위한 물건이지. 들에 가지고 가서 빙빙 돌리면 종달새가 그걸 보고 날아 오는데 이탈리아 사람들은 엽총으로 쏘아 잡거든. 꾀가 많은 백성들이군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미국에서는 종달새 같은 건 안 잡겠지요? 별로 안 잡지. 우리는 거리를 횡단해서 거리 건너편으로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젠 좀 마음이 놓이네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처음 나왔을 때는 무서웠어요. 우리는 둘이 있으면 언제든지 마음이 놓이게 마련이야. 우리는 언제든지 같이 있을 테지요. 그렇지. 자정에 내가 떠나는 것만 빼놓고. 여보, 그 생각은 말아요. 우리는 그대로 거리를 걸어 올라갔다. 안개로 불빛이 노랗게 보였다. 피로하지 않으세요? 하고 캐서린이 물었다. 당신은? 난 괜찮아요. 걷는 게 재미있거든요. 그렇지만 너무 오래 걷지는 맙시다. 네. 우리는 불빛이 없는 옆 골목으로 돌아 내려가서 거리를 걸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캐서린에게 키스를 했다. 키스를 하면서 그녀 손을 어깨에 느꼈다. 그녀는 내 망토를 끌어당겨서 우리 두 사람의 몸을 감쌌다. 우리는 높은 벽이 있는 거리에 서 있었다. 어디 앉을 데로 갑시다. 좋아요. 캐서린이 대답했다. 우리는 넓은 길이 있는 곳까지 걸어나갔는데, 거기는 운하 곁이었다. 건너편에는 벽돌 벽과 건물이 있었다. 훨씬 앞에 거리 아래쪽에는 전차가 다리를 건너가는 것이 보였다. 저 다리께까지 가면 마차를 잡을 수 있을 거야. 하고 내가 말했다. 우리는 안개 속에서, 다리 위에 서서 마차가 지나가는 것을 기다렸다. 전차가 몇 대 지나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가득 타고 있었다. 마차가 한 대 오기는 했으나 사람이 타고 있었다. 안개는 점점 비로 변해 가고 있었다. 걷든지 전차를 타든지 해야겠어요. 캐서린이 말했다. 마차가 오겠지. 여기가 지나가는 길목이니까. 여기 하나 오는군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마부는 말을 세우고 미터에 달린 금속판 표지(標識)를 내렸다. 좌석 위에는 포장을 올렸고, 마부 외투에는 물방울이 있었다. 우리는 좌석에 나란히 앉아서 편한 자세를 취했고, 포장이 좌석을 어둡게 해 주었다. 어디로 가자고 했어요? 정거장으로. 정거장 건너편에 우리가 갈 수 있는 호텔이 있지. 그대로 가도 괜찮아요? 짐도 안 가지고요. 괜찮아. 하고 나는 말했다. 거리를 치달려 빗속을 정거장까지 가는 데는 상당히 시간이 걸렸다. 저녁은 안 먹어요? 캐서린이 물었다. 배고플 것 같아요. 우리 방으로 가져다 먹으면 되지. 입을 게 아무것도 없어요. 나이트 가운조차도 없어요. 하나 삽시다 그려. 나는 마부를 불렀다. 만초니 가(街)로 나가서 쭉 올라갑시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 모퉁이에서 왼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큰 거리로 나가자 캐서린은 상점을 찾았다. 여기 상점이 있네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내가 마차를 세우자 캐서린은 내려서 보도를 건너가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마차 안에서 뒤로 허리를 펴고 기대어 그녀를 기다렸다. 비가 내렸고 나는 젖은 거리며 빗속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말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녀는 꾸러미를 안고 돌아와서 마차 안으로 들어왔고 마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굉장히 비싼 물건이에요, 여보.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렇지만 아주 훌륭한 나이트 가운이에요. 호텔에 도착하자 내가 안으로 들어가서 지배인과 이야기하는 동안 캐서린에게는 마차 안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호텔에는 방이 많았다. 나는 마차로 돌아와서 마부에게 삯을 치르고, 캐서린과 나는 같이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단추가 두 줄로 달린 제복을 입은 소년이 나와서 꾸러미를 받아 들고 들어갔다. 지배인은 승강기 쪽을 보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붉은 천과 놋쇠를 많이 쓴 승강기였다. 지배인은 우리들과 승강기를 타고 올라왔다. 식사는 방에서 드시겠습니까? 그러겠소. 메뉴를 올려다 주시오. 하고 내가 말했다. 식사 때 특별히 주문하실 건 없으십니까? 사냥한 새라든지 수플레 같은 것 말씀입니다. 승강기는 번번이 쨀깍쨀깍 소리를 내면서 세 층을 통과한 다음에 쨀깍 소리를 내면서 멎었다. 사냥한 새에는 뭣이 있소? 꿩이나 누른 도요새가 있습니다. 도요새로 하시오. 하고 내가 말했다. 우리는 복도를 걸어갔다. 융단은 낡았고 방문이 많이 있었다. 지배인은 어느 한 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열쇠로 문을 열었다. 여기올시다. 아늑한 방입니다. 제복을 입은 소년이 방 한가운데 테이블 위에다 짐을 내려놓았다. 지배인이 커튼을 젖혔다. 바깥은 안개가 짙습니다. 하고 지배인이 말했다. 방은 붉은 플러시 천으로 꾸몄고, 여기저기 거울이 많았고, 의자가 둘, 벨벳 커버를 한 커다란 침대가 있었다. 욕실로 들어가는 문이 보였다. 메뉴를 올려 보내겠습니다. 하고 지배인이 말했다. 그는 허리를 굽혀 보이고 나갔다. 나는 창문으로 다가서서 밖을 내다보고 줄을 당겨서 두꺼운 플러시 천 커튼을 쳤다. 캐서린은 침대에 걸터 앉아서 유리로 만든 샹들리에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자를 벗어 버렸기 때문에 머리가 불빛에 빛났다. 거울에 얼굴을 비쳐 보고 손을 머리로 가져갔다. 나는 다른 세 개의 거울에서도 그 여자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기분이 좋은 것 같지 않았다. 케이프를 침대 위에 떨어뜨렸다. 왜 기분이 좋지 않은가 본데? 난 그전에는 한번도 자신을 매춘부라고 느껴 본 일이 없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창께로 가서 커튼을 젖히고 밖을 내다 보았다. 나는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신이 왜 매춘부란 말이오? 그건 나도 알아요. 그렇지만 그런 기분이 든다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거든요. 그녀의 목소리는 냉랭하고 힘이 없었다. 여기가 우리가 올 수 있는 제일 좋은 호텔인 걸. 하고 내가 말했다. 나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광장 건너로 정거장의 전등이 보였다. 거리에는 마차들이 지나가고, 공원의 나무도 볼 수 있었다. 호텔 불빛이 젖은 포도에 번쩍였다. 제기랄. 지금 여기서 말다툼을 시작한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리로 오세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냉랭한 어조가 전혀 사라져 있었다. 이리 와요. 다시 착한 애인이 될게요. 하는 침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미소짓고 있었다. 나는 그녀 곁으로 다가가서 그녀 곁에 앉아 키스를 했다. 내 착한 애인이야. 정말 난 당신 거예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식사를 마치자 우리는 기분이 좋아졌고, 조금 있자니까 더욱 명랑해졌으며, 얼마 있지 않아 호텔 방이 우리집이나 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병원의 내 방이 우리집이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 방 역시 우리집이었다. 캐서린은 식사하는 동안 내 군복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무척 시장했던 참이라 식사가 맛이 있었고, 우리는 카프리 한 병과 상 에스테프 한 병을 다 마셨는데, 내가 거의 전부를 마셨지만 캐서린도 마셨고, 그 술기운에 그녀는 기분이 무척 유쾌해졌다. 저녁 식사로는 수플레 감자와 도요새에다 프레드 마롱과 야채 샐러드를 먹고, 디저트로는 자바이오네를 들었다. 훌륭한 방이에요. 캐서린이 말했다. 아늑한 방이에요. 밀라노에 있는 동안 줄곧 이 방에 있을 걸 그랬죠. 묘한 방이지. 그래도 괜찮은 방이야. 악(惡)이란 멋있군요. 캐서린의 말이었다. 악을 찾아 들어오는 사람들도 악에 대해서는 고상한 취미가 있나 봐요. 붉은 플러시 천은 정말이지 훌륭해요. 꼭 안성마춤이에요. 그리고 저 거울들도 아주 매혹적이에요. 당신은 참 귀여운 소리를 하는군. 이런 방에서 아침에 잠을 깨면 기분이 어떤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정말 멋있는 방이에요. 나는 상 에스테프를 또 한 잔 따랐다. 우리도 정말 죄가 되는 일을 해 보구 싶어요. 캐서린이 말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모두가 죄 없고 순진한 것 같아요. 우리가 무슨 잘못된 짓을 한다는 건 믿어지지가 않아요. 당신은 대단한 여자군. 난 그저 동경해요. 해 보고 싶을 뿐이에요. 당신은 착하고 순진한 여자야. 하고 내가 말했다. 난 순진한 여자에요. 당신 말고는 아직 아무도 그걸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한번은 당신을 카보우 호텔로 어떻게 하면 데리고 가나. 그러면 기분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하루 오후를 보낸 일이 있어. 아주 능글능글한 분이군요. 이건 카보우 호텔이 아니잖아요? 아니지. 거기서는 우리 같은 건 받아 주지도 않을 거야. 언제고 받아 줄 날이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게 우리 두 사람이 다른 점이에요. 난 그 때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전혀 안 했단 말이오? 조금. 그녀는 말했다. 요런 귀염둥이 같으니라구. 나는 술을 한 잔 더 따랐다. 난 아주 순진한 여자에요. 캐서린의 말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 약간 돈 여자라고 생각했지. 약간 돌아 있었어요. 그렇지만 난 복잡하게 돈 건 아니었어요. 당신을 어리둥절하게 한 일은 없잖아요. 그렇죠? 술이란 위대한 거야. 하고 내가 말했다. 나쁜 일은 모조리 잊어버리게 하거든. 좋은 것이기는 해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그래도 우리 아버지는 술 때 아주 악질적인 통풍을 앓았어요. 당신 아버지가 살아 계시오? 네. 하고 캐서린이 대답했다. 통풍 환자에요. 아버지는 안 만나도 좋아요. 당신은 아버지가 안 계셔요? 아니. 계부(繼父)가 있지. 내가 그 분 좋아지게 되겠어요? 안 만나도 괜찮아. 정말 재미있는 시간을 즐겼어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난 이제 다른 건 아무것도 흥미 없어요. 난 당신과 결혼해서 정말 행복해요. 웨이터가 들어와서 그릇을 가지고 나갔다. 조금 후에는 두 사람 다 조용해졌고 빗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래쪽 거리에서 자동차가 경적을 울렸다. 언제나 내 등 뒤에 들리는 소리 세월의 날개 돋친 수레가 다가오는 소리 하고 내가 말했다. 나도 그 시 알아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마벨(18세기 영국 시인 - 역자 주)의 시지요. 그렇지만 그건 남자하고 같이 살고 싶지 않은 여자를 노래한 시에요. 내 머리는 아주 명철하고 냉정해져서 현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어린애는 어디서 낳겠소? 몰라요. 어디든지 가장 좋은 곳에서 낳아야지요. 그런 주선을 어떻게 하지? 최선을 다해서 하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은. 전쟁이 끝나기 전에 어린애를 몇쯤 더 낳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가야 할 시간이 거의 다 됐군. 알아요. 나가고 싶으시면 서두르세요. 아니야. 그럼 걱정할 것 없어요. 지금까지는 기분이 좋으셨는데 인제 또 걱정을 하시는군요. 걱정 안 하지. 얼마나 자주 편지 주겠소? 날마다 쓰죠. 편지를 검열하나요? 영어를 잘 모르니까 내용을 삭제하거나 하지는 못하지. 그럼 알아보기 어렵게 써 보내야지.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그렇지만 너무 어렵게는 하지 말아. 그 사람들이 약간 알아보기 힘들게 하겠어요. 이젠 정말 나가야 할 시간인데. 좋아요, 나가요. 이렇게 훌륭한 우리집을 떠나고 싶지 않군. 나두요. 그래도 가야 하니. 나가요. 아직 한 번도 우리집에서 마음놓고 지낸 일이 없군요. 장차는 그렇게 되겠지. 당신이 돌아올 때는 내가 당신을 위해서 훌륭한 집을 마련해 두겠어요. 혹 곧 돌아오게 될지도 모르지. 혹 다리에 경미한 부상을 입게 되지도 모르지요. 아니면 귓밥 같은 데라도. 아니에요. 당신 귓밥은 지금 그대로 두고 싶은걸요. 다리는 안 그렇구? 다리는 이미 부상을 입은 곳이거든요. 여보, 인제는 나가야 하겠어, 정말로. 좋아요. 앞서 나가세요. {{}}{{24 }} 우리는 승강기를 타지 않고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계단의 융단은 낡은 것이었다. 저녁 식사를 가져왔을 때 이미 대금은 치렀는데, 그 식사를 가져왔던 웨이터가 문 가까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인사를 했고 나는 그를 따라 옆 방으로 들어가서 방값을 치렀다. 지배인은 나를 잘 안다고 수선을 피우고 방값을 미리 내려고 해도 거절했는데, 사실은 내가 방값을 안 치르고 나갈까 봐 웨이터를 문 밖에서 지키게 하고 자러 간 모양이었다. 방값을 떼인 일도 있었으리라 싶었다. 잘 아는 사이라도 그런 일이 있을 것이다. 전쟁 중에는 잘 아는 사람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내가 웨이터에게 마차를 불러 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내가 들고 있던 캐서린의 꾸러미를 받아 들고, 우산을 받고 밖으로 나갔다. 유리창을 통해서 그가 빗속으로 거리를 건너가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현관 옆 방에 서서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캐서린 기분이 어떻소? 졸려요. 나는 속이 텅 빈 것처럼 시장한데. 뭐 잡수실 것 가지셨어요? 응, 배낭 속에 있어. 나는 마차가 오는 것을 보았다. 마차가 멈추고, 말은 빗속에 머리를 푹 숙이고 있었고, 웨이터가 내리더니 우산을 펴들고 호텔 쪽으로 걸어왔다. 우리는 현관 문 앞에서 그를 맞아 그 우산을 받고 차도에 있는 마차까지 젖은 포도를 걸어갔다. 하수구에는 빗물이 내려갔다. 좌석에 짐이 있습니다. 하고 웨이터가 말했다. 그는 우리가 마차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우산을 받쳐 주었고, 나는 그에게 팁을 주었다. 고맙습니다. 즐거운 여행을 하십시오. 하고 그가 말했다. 마부가 고삐를 들자 말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웨이터는 우산을 받은 채 발걸음을 돌려서 호텔로 돌아갔다. 마차는 거리를 달려 내려와서 왼쪽으로 돌아 바로 정거장 앞에서 바른쪽으로 돌았다. 기총병(騎銃) 두 명이 간신히 비를 피해서 불 밑에 서 있었다. 불빛이 그들의 모자를 비춰 주었다. 정거장의 불빛으로 비가 맑고 투명하게 내리고 있었다. 정거장 지붕 밑에서 포터가 어깨에 비를 맞으면서 나왔다. 아니야. 하고 내가 말했다. 고맙소만 필요 없소. 그는 다시 지붕 밑으로 돌아갔다. 나는 캐서린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 얼굴이 마차 포장 그늘에 가려 있었다. 작별 인사를 하는 게 좋겠군. 나는 들어갈 수 없어요? 안 돼, 그럼 안녕. 병원을 마부에게 가르쳐 주시겠어요? 그러지. 나는 마부에게 가는 곳을 알려 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 하고 나는 말했다. 몸조심하고 뱃속의 캐서린도 조심하우. 안녕히 가세요. 안녕. 내가 빗속으로 걸음을 내딛자 마차는 떠났다. 캐서린이 몸을 내밀어서 불빛으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미소짓고 손을 흔들었다. 마차는 거리를 달려가는데 캐서린은 지붕 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가리키는 곳을 보았으나 기총병 두 사람과 아치뿐이었다. 나더러 비 안 맞는 곳으로 들어가라는 뜻임을 알았다. 나는 그 밑으로 들어가서 우두커니 서서 마차가 길 모퉁이를 돌아가는 것을 지켜 보았다. 마차가 안 보이게 된 다음에야 나는 정거장을 빠져 통로를 걸어 내려가서 기차 있는 곳으로 갔다. 플랫폼에서 병원의 포터가 나를 찾고 있었다. 그를 따라 차 안으로 들어가서 붐비는 사람 틈을 헤치고 통로를 따라가서 기관총수가 만원인 좌석 한 구석에 앉아 있는 차간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내 륙색과 배낭은 그의 머리 위 수하물 선반에 놓여 있었다. 복도에도 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고, 찻간 안에 있던 승객들은 우리가 들어가자 일제히 우리를 바라보았다. 기차 안은 좌석이 모자라서 모두가 적의에 가득 차 있었다. 기관총수는 나를 앉히려고 일어섰다. 누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돌아다 보았다. 턱에 붉은 상처가 있는 키가 크고 마른 포병 대위였다. 그는 복도의 유리를 통해서 들여다 보더니 차간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 나는 몸을 돌려 그와 마주보고 섰다. 그는 나보다 키가 크고 모자 차양 밑으로 보이는 그의 얼굴은 무척 말랐고, 상처는 아직 생생하고 번쩍거렸다. 차간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짓은 할 수 없는 거요. 하고 그는 말했다. 병사를 시켜 자리를 잡는 건 안 되는 거야. 벌써 해 버린 걸요. 그는 침을 꿀꺽 삼켰는데, 그의 후골(喉骨)이 올라갔다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기관총수는 좌석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유리창으로 들여다보았다. 차간 안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짓을 할 권리가 없는 거요. 나는 귀관이 오기 두 시간 전부터 여기 와 있었소. 뭘 원하시나요? 좌석이오. 나도 그런데요. 나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지켜 보았고, 차간 안의 모든 사람이 내 편이 아닌 것을 느꼈다. 나는 그들을 나무랄 생각이 없었다. 대위 역시 옳은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좌석이 필요했다. 그래도 아무도 말이 없었다. 원 빌어먹을, 하고 나는 생각했다. 앉으시오, 대위님. 하고 내가 말했다. 기관총수가 비켜나고 키 큰 대위가 앉았다.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자존심을 상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좌석은 빼앗은 셈이었다. 내 짐을 내려와. 하고 나는 기관총수에게 명령했다. 우리는 복도로 나왔다. 기차는 만원이었고, 좌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포터와 기관총수에게 각각 10 리라씩을 주었다. 플랫폼으로 내려가서 창문으로 들여다보고 다녔지만 좌석은 없었다. 아마 브레시아에서 내릴 사람이 있을 겁니다. 포터가 말했다. 브레이사에선 타는 사람이 더 많을 거야. 하고 기관총수가 말했다. 나는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고, 서로 악수를 하고 그들은 떠났다. 두 사람은 미안해하는 표정이었다. 기차가 출발할 때 우리 모두가 기차 안 복도에 있었다. 나는 정거장을 벗어나면서 불빛을 바라보고 구내를 둘러보고 했다.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고, 이내 창문은 비에 젖어 바깥이 내다보이지 않았다. 얼마 후 나는 복도 마루바닥에서 잤다. 먼저 돈이랑 서류를 지갑에 넣어서 내 내복 웃도리와 바지 사이로 넣었기 때문에, 지갑은 바지 가랑이 안쪽에 들어 있었다. 나는 밤새도록 잤다. 브레시아와 베로나에서 잠을 깨었으나 더욱 많은 사람이 탈 뿐이었다. 나는 곧 잠으로 되돌아갔다. 나는 베낭을 베고 짐이 만져지도록 팔로 그걸 끌어안고 잤는데, 누구든지 나를 밟을 생각이 없으면 넘어가야 했다. 복도에는 마루바닥에서 자는 사람들이 쭉 줄을 지어 누워 있었다. 다른 승객들은 창틀을 잡거나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이 기차는 언제나 만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