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주드(상) 지은이: 토마스 하디 출판사: 영풍문고 초판 서문 이 소설이 현재와 같은 형태로 출판되어 빛을 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 이유는 잡지에 먼저 연재되었기 때문이다. 소설의 내력을 간단 히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 작품의 구상은 1850년부터 했지만 원고는 1887년 이후에 쓰기 시작했 다. 작품의 소재가 된 것들 중에는 그 전 해에 있었던 한 여자의 죽음으로 부터 암시를 받게 된 부분도 있다. 무대가 되고 있는 현장을 다시 찾았던 것은 1892년 10월이었으며 이야기의 유곽을 잡은 것은 1892년과 1893년의 봄 사이였다. 현재와 같은 충분한 분량이 씌여진 것은 1893년 8월에서 이 듬해에 걸쳐서였으며 두서너 장을 제외한 전체 원고는 1894년 말까지 출판 사에 넘겨졌다. 이 소설이 최초로 발표된 것은 1894년 11월 말에 <하퍼> 지의 연재소설로서였으며 그후 매달 연재되었다. 그러나 <더버빌가의 테스>처럼 잡지에 게재되었던 부분은 여러 가지 이 유로 생략되고 고쳐졌지만 지금의 이 책이 본래 형태대로 전모를 드러낸 최초의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 소설의 제목을 결정하는데 어려움이 따랐기 때문에 이 소설도 다른 몇몇 작품들처럼 가제로 발표했다. 사실은 두 가지 제목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결국 현재의 제명이 나름대로 가장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것이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던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성인 남녀를 독자층으로 하는 소설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 져 있는 어떤 이야기보다 강렬한 정열의 흔적을 추적했으며 그로 인한 초 조와 열병, 조소, 재화 등을 거리낌없이 다루어 보려고 시도했다. 육체와 영혼 사이에 벌어진 처참한 투쟁을 솔직하게 그려 보았으며, 이루지 못한 숙원이 지니는 비극을 묘사해보려고 시도한 소설이다. 나는 그러한 소설을 만들기 위해 처리 방법에 있어 하등의 예외를 설정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서는 고려하지 않는다. <비운의 주드>는 이전의 작품들처럼 일련의 표면적인 것, 즉 개인적인 인상 위에 형태와 통일성을 부여해 보려는 노력에 불과하다. 그러한 표면 적인 것이 시종일관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지리멸렬하느냐 또는 항구성을 갖느냐 또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냐 등등의 문제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1895년 8월 덧붙이는 말 16년 전에 앞서 게재한 해설적인 서문이 실린 이 소설이 간행된 후에 예 상하지 못했던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났다. 이제 그 당시에 무슨 일이 일어 났었는지를 잠시 되돌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이 소설이 출판되고 채 며칠이 지나기고 전에 신간 비평가들은 <더버빌 가의 테스>의 경우와는 비교도 안될 만한 논조로 이 소설을 혹평했다. 하 지만 그런 비난의 목소리와는 다른 견해를 주장하는 비평가들도 두서넛은 있었다. 이 소설의 줄거리에 관한 영국에서의 반응은 곧 미국으로 전해졌 으며 대서양너머에서는 비판의 소리가 더욱 격심했다. 내 눈에 비친 그러한 처참한 공격의 특징은 줄거리에 관한 것이 대부분 이었다. 비난들은 두 주인공의 꺽여버린 이상을 묘사한 부분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 나로서는 흥미를 갖고 가장 열성을 기울인 부분이 결국 영미 양국의 적의에 찬 신문 잡지에 의해서 철저하게 무시당한 셈이었다. 주드 의 생애의 반대 국면을 나타내는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슬픔을 자아내기 위해 세부적으로 묘사한, 약 2, 30페이지만이 논란거리가 되는 거의 유일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희한하게도 어떤 가정신문에 이미 실린 적이 있는 황 당무계한 이야기가 다음해에 다시 게재되면서 동일한 종류의 비난이 계속 해서 나에게 집중되었다. <비운의 주드>에 얽힌 불행에 관한 것은 이 정도로 끝내기로 하자. 신 문 잡지로부터 그런 판정을 받은 후에 <비운의 주드>가 다음으로 당했던 재난은 어느 주교의 손에 입수된 후에 태워졌다는 불운이었다. 아마도 그 주교는 나를 불에 태워버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화풀이로 이 책을 태워버 렸을 것이다. 그러나 드디어 어떤 사람이 <비운의 주드>가 난해한 주제를 엄격하게 다룬 도덕적 작품임을 평가해 주었다. 마치 저자가 서문에서 이 작품을 그 런 의도에서 썼다는 것을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듯이 발견해 준 것 이었다. 그 후 꽤 많은 사람들이 나에 대한 저주를 풀었고 사건은 결말을 짓게 되었다. 이 한가지 사건이 인간의 행위에 미친 효과, 그것도 내 자신 에게 미친 유일한 효과는, 계속해서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흥미를 나로부 터 뿌리째 뽑아버린 것이었다. 맹렬한 비난의 와중에서 발생한 여러 사건 중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 자기 자신의 정직한 행동을 감추지 않는 미국의 어느 문인은 나에게 다음 과 같은 말을 해주었다. 그는 지독한 악평에 관심이 끌려 이 책을 구입했는데, 아무리 읽어보아 도 해로운 내용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에는 악당 같은 비평가 들의 꼬임에 넘어가 공연히 1달러 반만 축내고 '종교 및 윤리의 논문'이라 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책을 사게 되버린 것에 울화가 치밀어 욕을 퍼부으 면서 책을 집어던져 버렸다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동감을 표했다. 그리고 세간에 유포되고 있는 거짓말은 독 자들에게 내 책의 보급을 늘리기 위해 내가 꾸며낸 계략이 결코 아니었다 고 정직하게 그에게 확인시켜주었다. 세계적인 명성이 있는 잡지에 게재된 영향력있는 평론에 언급된 공포스 러운 표제에 이끌려 이 책을 보고서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는 어떤 부인이 나와 친분을 맺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온 일도 있었다. 그러면 이 책 자체로 돌아가 보기로 하자. 나는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비 극적 장치로서는 결혼제도를 대폭 활용했고 가정적 측면에서 이 소설의 주 제는, 디드로(프랑스의 백과전서파의 사상가)의 말을 빌리면, 민법은 자연 법(이것은 약간의 주석을 요하는 말인데)의 공표에 불과하다고 보며, 1895 년 이래 이 나라에서 결혼 문제가 '팔리지 않고 남아 있는 상품처럼 오염 되어 있는' 현상(어느 박식한 작가가 일전에 지적한 말이지만)을 가져온데 대해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받았었다. 그러나 어쩐지 나로서는 이해가 되 지 않는다. 당시의 나의 의견은, 만일 나의 기억에 착오가 없다면, 지금도 동일하다. 결혼이 당사자 중 어느 한 쪽에게 혹독한 일이 된다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나 도덕적으로 더 이상 결혼이 아니기 때문에 즉각 파기되어야만하고 그런 류의 결혼은 한 가지의 비극적 줄거리를 성립시키는 충분한 소재가 될 것 이라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카타르시스적인 어떤 성질이, 그 속에서 희망이 발견될 수도 있는 한가지 비극적인 이야기를 성립시키는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학비조차도 없이 인문지식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고생했던 2, 30년 전의 여러 가지의 어려움도 이 소설 속에서 같은 방법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삽화를 아주 훌륭한 시설에 대한 공격으로 생각하는 일부 독자가 있었으며 또는 러스킨 칼리지(존 러스킨의 사상에 따라 노동하는 청년들을 가리키기 위해서 세운 대학)가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창설되었을 때 그것 은 '비운의 주드 칼리지'라고 명명되어야 한다고 말해준 사람도 있었다. 인간적 본능에 부적합한 녹슬고 성가신 주형에 인간적 본능을 억지로 적 용시키려는 시도는 계속 있어왔다. 그러한 현상 속에서 비극을 찾아보려는 예술가의 노력은 많은 대가를 치룬다. 비평가 블루 다이어와 이 책을 불 속에 던져버린 주교를 위해 한 마디 하자면, 그들의 의도는 다만 이런 말 을 하고 싶었음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원래 우리 영국인들은 생각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의 특권을 실행할 것이다. 물론 당신이 진실하지 않은 것과 평범하지 않은 것을 묘사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고 또는 예술의 기준에 반대하지 않았을지 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인습 위에서 번영하고 있는 우리가 결코 허락할 수 없는 인생관의 묘사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다는 말일까. 이 속에서 묘사된 몇 가지의 결혼장면 에 대해 말한다면, 신을 모독하는 결혼반대연맹이 계획되고 있다고 <블랙 우드>지에서 소란을 피운 한 부인의 비명에도 불구하고, 성찬식이라는 그 유명한 계약은 현재도 상당한 효력을 거두고 있으며 세간의 남녀들은 역시 가벼운 마음으로 결혼하고 진정한 결혼이든 아니든 결혼에 임한다. 성실한 독자들은 끊임없는 다음과 같은 힐책을 들려준다 - 당신은 문제 를 발견해 놓았을 뿐 그것을 내팽개치고 필요한 개혁의 방법은 지적해주지 않는다. 독일에서 <비운의 주드>가 연재소설로 발표된 후의 일인데 그 나라의 노련한 문학 평론가는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 여주인공 수 브라이드헤 드는 매년 수천명이나 되는 세간의 주목을 끌게 되는 여자 - 즉 여권 신장 운동을 하는 여자 - 호리호리한 체격에 창백한 안색을 한 '마흔'의 여자 - 아직도 주로 도시에서 근대적 여러조건에 의해 만들어지는 지성화되고 해 방된 신경섬유로 이루어진 것 같은 여자 - 대개 같은 여자로서, 직업으로 서 결혼의 필연성을 인정하지 않고도 연애할 수 있다는 허가장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신들만이 우월하다는 자만심이 차 있는 듯한 - 에 관한 소설에 있어서의 최초의 인물이라고 했다. 이 평론가의 지적에 있어서 유감스러운 점은 이러한 신참자의 초상이 남 자의 집필에 내맡겨져 동성의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 다. 만일 동성의 필자가 묘사했다면 여주인공을 결코 좌절하게는 하지 않 았을 것이다. 이 단정이 세월에 의해서 과연 증명되었는지 나로서는 무어라 말할 수 없다. 또한 이 소설 발표 이래 세월의 골을 넘어 내용의 좋고 나쁨은 고사 하고 약간의 어구 정정을 넘어서는 일반적인 비평을 이 작품에 내린다는 것도 나로서는 못할 일이다. 그리고 책 속에는 저자가 의식적으로 담아놓 은 것보다도 더 많은 내용이 들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 그것이 책에게는 이득이 되는 수도 있고 손실이 되는 수도 있다. 토머스 하디 1912년 4월 의문은 죽이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3장 6절 제1부 메리그린에서 그렇다. 여자를 위해 분별 심을 잃고 여자를 위해 머슴 되는 자 많다. 여자 때문에 몸을 망친 자, 몸을 그르친 자, 죄를 범한 자도 많다. 아, 남자들이여, 여자들로 인한 이와 같은 것들을 보고도 여자를 약하다 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에스드러스 1-1 학교 선생이 마을을 떠나려 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아쉬워하 는 것 같았다. 크레스콤의 방앗간 주인은 20마일 정도 떨어진 도시로 떠나 는 그의 짐을 운반해주기 위해 하얀 차일이 둘러쳐 있는 작은 마차를 빌려 주었다. 작은 마차였지만 떠나가는 선생의 짐을 싣기에는 충분했다. 교사에 비치된 가구들의 일부는 관리인 측에서 제공한 것이어서 선생이 가져가야 할 성가신 짐이라면 책을 꾸려놓은 상자 외에는 작은 피아노 한 대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선생이 기악을 공부해보겠다고 생각했던 그 해에 경매로 사두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열의는 곧 식어 버렸고 연주에는 조금도 진전이 없었다. 그렇게 애써 구입한 그 물건은 그후에 집 을 옮겨다닐 때마다 선생에게는 늘 애물단지가 되어 버렸다. 교구의 목사는 떠나가는 광경을 바라보는 것에 싫증이 났는지 그날은 외 출을 해 버렸다. 그는 저녁때까지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때가 되면 새로 부임한 선생이 도착해서 정리를 끝내고 모든 일이 본래대로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대장장이와 농장의 집사와 함께 난처한 모습으로 응접실의 악기 앞에 서 있었다. 선생은 마차에 그것을 싣고 간다고 해도 크리스트민스터 에 가서는 우선 임시로 하숙에 들것이므로 어떻게 해야 할지 속수무책이라 고 했다. 어른들 틈에 끼어 사려 깊게 짐꾸리는 일을 도와주고 있던 열한 살 짜리 작은 소년이 어른들이 난감해하며 턱을 문지르고 있을 때 자신의 목소리에 스스로 얼굴을 붉히며 큰 소리로 말했다. "대고모님 댁에 땔감을 저장해두는 커다란 헛간이 있어요. 선생님께서 정착하실 집이 결정될 때까지는 그 헛간에 피아노를 두면 될 거예요." "그럴듯한 생각인데." 대장장이가 말했다. 그들은 대표 한 사람을 독신으로 살고 있는 노파인 소년의 대고모 댁으 로 보내서 필로트슨 선생이 피아노를 찾으러 올 때까지 맡아줄수 있는지를 물어보기로 결정했다. 대장장이와 집사가 헛간이 쓸만한지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자리를 뜨 자 소년과 선생만이 남게 되었다. "주드, 내가 떠나가게 되어 섭섭하니?" 선생이 친절하게 물었다. 소년의 눈에는 눈물이 차 올랐다. 소년은 정규의 주간 학생이 아니라 선 생의 임기동안에만 야간에 다니던 학생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정규학 생들은 지금 마치 자진해서 열심히 도와주는 것에는 어울리지 않는 유서 깊은 제자들이라도 되는 것처럼 멀리 떨어진 곳에서 팔짱만 끼고 있었다. 소년은 손에 쥐고 있던 책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그것은 필로트슨 선생 이 이별의 선물로 소년에게 준 것이었다. 선생도 섭섭함을 나타냈다. "나도 섭섭해." "왜 떠나세요, 선생님?" "아..... 그건, 이야기하자면 길어. 너는 선생님의 기분을 이해하지 못할 거야, 주드. 아마 훗날에는 이해할 수 있겠지." "저는 지금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선생님." "그래, 그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하면 안 돼. 너는 대학과 학위가 어떤 것 인지 알고 있어? 그것은 학생들을 훌륭하게 가르치는 데 있어 중요한 품질 증명서와 같은 거란다. 크리스트민스터나 그 근처에 살게 된다는 것은 말 하자면, 본거지에 살게 되는 것과 같단다. 그리고 선생님의 계획을 조금이 라도 실행할 수 있게 되면 크리스트민스터에 있는 것이 다른 것에 있는 것 보다 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대장장이가 함께 갔던 집사가 돌아왔다. 혼자 사는 나이 많은 폴리부인 의 땔감을 쌓아두는 헛간은 건조해서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다. 노파도 기 꺼이 맡아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피아노는 다른 여러 사람들의 일손을 더 빌려 옮기기로 하고 저녁때까지는 학교에 두기로 했다. 선생은 마침내 주 위를 힐끔 둘러보았다. 주드 소년은 조그마한 물건들을 싣는 일을 도왔고 아홉 시가 되자 필로 트슨 선생은 책상과 그 밖의 짐꾸러미 옆에 올라타 동료들에게 작별을 고 했다. "주드, 선생님은 너를 잊지 못할 거야." 마차가 떠날 때 그는 빙그레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착한 사람이 되거라, 잊지 말고. 새와 짐승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하고 읽 을 수 있는 책은 다 읽도록 해라. 그리고 만일 크리스트민스터에 들르게 되거든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꼭 나를 찾아오너라." 마차는 삐걱거리면서 푸른 들판을 건너갔고 목사관이 있는 곳쯤에서 모 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소년은 풀밭 가장자리에 있는 우물가로 돌아왔다. 소년은 이곳에 물통을 버려둔 채 자기를 귀여워해 주었던 후원자이며 선생 인 그분의 짐 싣는 일을 도와 드렸다. 소년의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우물 뚜껑을 열고 두레박을 내리려 하던 소년은 멈추어 서서 이마와 양 팔을 우물 가장자리에 기댔다. 아직 나이는 어렸지만 소년의 얼굴에는 생 의 괴로움을 느끼는 듯한 사려 깊고 고집스러운 표정이 나타났다. 그가 응시하고 있던 우물은 이 동네만큼이나 오래된 것이었다. 이 우물 은 지금 소년이 서 있는 곳에서 보면 백길이나 될 것 같은 깊은 밑바닥에 서 일렁이며 빛을 내고 있는 원반처럼 보였다. 우물의 위쪽과 가까운 벽은 온통 푸른 이끼로 덮여 있었고 더 가까운 곳에는 골고사리들이 돋아나 있 었다. 그는 변덕 심한 소년들이 그러는 것처럼 비장감을 띤 목소리로, '이런 아 침에 선생님은 몇십 번이나 이 우물에서 물을 길으셨지만 이제 다시는 그 러시지 않을 거야' 라고 중얼거렸다. '지금의 나처럼 물을 긷다가 지쳐 물통을 집으로 나르기 전에 약간 쉬며 우물 속을 들여다보시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았었지! 그렇지만 선생님은 너 무 똑똑 하셔서 언제까지나 이런 데서 오래 계시지는 않아! 이렇게 작고 지루한 곳에서는 말이야!' 소년의 눈에서 흐른 눈물이 우물 속으로 떨어졌다. 아침에는 약간안개가 끼어 있었다. 소년이 토해 내는 한숨도 자욱한 안개가 되어 조용하고 묵직 한 대기 위로 퍼지며 녹아들었다. 그때 갑작스러운 외침소리가 그의 생각 을 깨뜨렸다. "물 좀 가져와라, 이 게으름뱅이 녀석아!" 그것은 멀지 않은 것에 위치한 이끼낀 지붕을 이고 있는 오두막집에서 나와 마당문 쪽으로 다가가고 있던 노파가 외친 소리였다. 소년은 재빨리 손짓으로 알아들었다는 신호를 보냈고 그런 소년의 체격으로는 대단히 무 거워 보이는 물통을 들어올려 내려놓고는 그 큰 물통의 물을 보다 작은 다 개의 물통에 나누어 붓고서 잠시 쉬며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물통을 들고 우물가의 질척질척한 풀밭을 가로질러갔다. 우물은 작은 마을, 아니 마을이라기보다 더 작은 두메산골의 메리그린이 라는 마을의 거의 한가운데 있었다. 이 마을은 작기도 했지만 고풍스럽기도 했으며 부웨섹스의 구릉지대에 인접한 울퉁불퉁한 고지의 산골짜기에 안겨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고풍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이 우물만이 전혀 변하 지 않은 채로 이어져 내려오는 이 지방사의 유일한 유적이었다. 갈대로 지 붕을 얹고 비탈이 진 지붕위로 불쑥 튀어나온 창문이 달린 집중에는 그 즈 음 헐려버린 것이 많았다. 그리고 녹지의 나무들도 많이 벌목되었다. 무엇 보다도 곱사등처럼 목조의 작은 탑이 붙어 있고 기묘한 추녀마루가 있었던 본래의 교회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해체된 교회는 시골길의 포장용 자갈로 쓰였는가 하면 근처 돼지우리의 벽이나 정원의 앉는 돌, 울타리 막이, 화단 의 바위와 흙 등으로 이용되었다. 그 대신 영국인의 눈에는 서먹서먹한 최신식 고딕 풍의 높고 새로운 건 물이 런던을 당일치기 여행으로 다녀온 어느 사적 말살자의 손에 의해 다 른 장소에 건축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여러 신에게 바쳐져 왔던 옛 사원이 오랫동안 서 있던 자리는 아주 옛날부터 묘지 터였던 푸르고 평평한 풀밭 터에 기록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무연고자의 묘는 값싼 쇠로 만 들어진 십자가로 기념되었지만, 그 십자가도 5년 후에는 훼손될 물건에 지 나지 않았다. 1-2 주드 폴리의 몸은 호리호리했지만 한 번도 쉬지 않고 물이 가득찬 두 개 의 물통을 오두막집까지 운반했다. 대문 위쪽에는 <빵집, 드루르실라 폴 리> 라는 노란 색의 글자로 페인트칠한 작은 장방형의 푸른 간판이 걸려 있었다. 납으로 만들어진 작은 창문 - 이것이 현재 몇 채 남지 않은 구식 집이라는 증거인데 - 안에 과자병 다섯 개와 작은 롤빵 세 개를 담은 버드 나무 모양의 접시 한 개가 있었다. 집 뒤쪽에서 물통을 비우고 있을 때 집안에서는 간판의 주인 드루실라 대고모와 몇몇 마을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활기찬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선생의 출발을 전송한 후여서 이사 장면의 세세한 부분과 곁들여 선생의 앞날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애는 누구죠?" 한 여자가 주드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물었다. 그 여자는 어딘가 외지의 사람처럼 보였다. "글쎄, 그렇게 물어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윌리엄즈 부인. 저 애는 내 생질의 아들이에요. 요전에 부인께서 다녀간 다음에 온 아이라구요." 이렇게 대답한 나이 많은 토박이는 키 크고 수척한 여자였다. 그녀는 아 무리 시시한 화제라도 구성지게 이야기를 해서 주위의 이목을 끌었다. "저 애는 남 웨섹스의 멜스톡에서 왔는데 벌써 일 년정도가 되었어요. 어쩐지 나쁜 운이 겹쳐서요, 벨린다." 그녀는 오른쪽으로 몸을 돌렸다. "저 애의 아버지는 멜스톡에 살았는데 심한 전신마비에 걸려 이틀동안 앓다가 작고했어요, 캐롤라인." 이번에는 왼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하느님이 네 아버지나 어머니처럼 너도 같이 데리고 갔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가여운 녀석! 그러나 이 아이가 어떻게든 지낼 수 있을 때까지 같이 있기로 하고 데리고 온 거예요. 하지만 이 아이에게 되도록 한푼이라도 돈을 벌게 해야만 해요. 바로 지금은 농장주 트라우댐 을 대신해서 밭의 새들을 쫓고 있어요. 그것이 이 아이를 위한 일인 거예 요. 왜 도망치는 거지, 주드?"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때 그 아이는 일제히 쏠리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얼굴을 얻어맞은 듯한 묘한 기분이 되어 옆으로 몸을 피했다. 주드를 데리고 있는 것은 폴리 양 또는 폴리 부인(이곳 여자들은 구별하 지 않고 그렇게 불렀다) 의 아주 좋은 계획이라고 이 고장의 세탁 아줌마 가 대답했다. "부인께서 외로울 때는 같이 어울려 주고 물을 길어오게도 하고 밤이면 창문을 닫아주고 빵굽는 일도 도와 줄 수 있겠군요." 폴리 노파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째서 너는 선생님한테 크리스트민스터로 데리고 가서 학자가 되게 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는 거냐?" 그녀는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농담조로 말을 이었다. "선생님이 이 애보다 더 좋은 애를 데리고 갈 수는 없을 것이라고 나는 장담해요. 이 애는 진짜 책미치광이예요. 그건 우리 집안의 유전이라고 할 수 있는 버릇이지요. 이 애의 사촌누이인 수도 마찬가지라고 하더군요. 그 조카딸은 이 마을에서 아니, 이 방에서 태어났지만 수년 동안 보지 못했어 요. 수의 엄마인 나의 질녀는 과거에 결혼하고 나서 몇 년 동안 집 한 칸 도 없다가 그후에 생겼다고 하는데 - 글세 그후의 이야기는 하고 싶지도 않아요. 주드, 얘야 , 결혼하지 마라. 폴리가의 사람들에게는 이제 결혼 같 은 것은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들의 외동딸 수를 내가 친자식처럼 길렀는 데, 그런데 벨린다, 결국 질녀가 세상을 떠나다니! 아, 나이도 어린 여자가 그런 괴로움을 당하다니!" 주드는 이야기의 전반적인 흐름이 자기에게로 또다시 집중되는 것을 알 아차리고 그 장소를 떠나 빵집으로 가서 아침으로 준비된 얇은 귀리 빵을 먹었다. 휴식시간이 끝났기 때문에 뒤쪽의 생울타리를 넘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소로를 따라 북쪽으로 가다가 마침내 보리씨를 심어 놓은 고원지대 의 넓다란 분지에 다다랐다. 이 광막한 분지가 트라우댐 농장주를 위해 주 드가 일하는 장소였다. 그는 그곳 한가운데로 내려갔다. 들판의 갈색 표면은 사방 하늘을 향해 펼쳐져 있고 그 끝은 서서히 안개 속으로 사라져 적막감은 더욱더 깊어졌다. 이 단조로운 풍경 가운데 지난 해 수확한 밀집가리로 가까이 아가가면 날아가는 까마귀 떼와 지금 지나온 휴경지를 가로지르는 작은 길 등이 눈길을 끌었다. 이 길은 옛날 수많은 그의 조상들이 밟아서 다져놓았지만 지금은 누가 지나가는지 거의 알 수 없었다. "정말 싫증나는 곳이야!" 그는 중얼거렸다. 써레질해서 북돋아 놓은 신선한 골의 열은 새 골덴천의 홈처럼 퍼져 주 위에 전반적으로 야박한 공리주의적인 분위기를 더했고 그 농담의 구분을 벗겨 버리고 요즈음 두서너 달간을 넘어서 거슬러 올라가는 모든 역사를 제거했다. 하지만 사실 이 주위의 흙덩이 하나 돌멩이 하나에도 많은 연상이 남아 있었다 - 그 옛날의 추수 날로부터 전해오는 노래, 사람의 입에서 새어나 온 말들, 용감한 공적 등의 메아리가 남아 있었다. 땅의 어느 구석이나 다 옛날의 활기와 행락과 말놀이와 언쟁과 권태 등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곳은 없었다. 들판의 어떤 장소에도 이삭줍는 무리들이 햇빛을 쬐며 웅크 려 앉지 않았던 곳은 없었다. 인근 부락의 인구를 늘어나게 했던 연애와 결합도 보리 베기와 그 곡물 의 운반작업 중에 이루어졌다. 이 들판을 저 멀리 있는 농장과 갈라놓는 생울타리 아래에서 아가씨들은 다음 수확까지는 자신을 돌아다보지도 않게 될 연인에게 몸을 맡겼다. 그리고 그 오래된 보리밭에서는 많은 남자들이 한 여인에게 사랑의 약속을 하고 가까운 교회에서 약속을 이행한 후엔 다 음 해의 파종 기까지는 또다시 여자의 소리를 들어도 몸이 떨리지 않게끔 되었다. 그러나 이런 일들에 애해 주드나 그의 주위에 있는 까마귀들은 관심이 없었다. 이곳은 그들에게는 쓸쓸한 장소에 지나지 않았다. 주드의 입장에서 보면 그곳은 일하는 장소에 지나지 않았으며 까마귀 떼들의 입장에서 보면 먹을거리가 풍부한 곡창이라는 그런 차이를 지닌 것에 지나지 않았다. 소년은 앞에서 말한 보릿가리 아래에 서서 이삼 초씩 깡통이나 장난감을 힘차게 흔들었다. 딸랑 소리가 날 적마다 까마귀 떼는 쪼아먹는 것을 중지 하고 날아올라 갑옷에 붙은 술 장식처럼 번쩍이는 날개를 펼치고 유유히 날아가 버렸다. 마침내 방향을 바꿔서 다시 날아와 서는 소년을 경계하는 듯이 살피면서 먹이를 찾아 좀더 은밀한 곳으로 내려앉았다. 그는 팔이 아플 때까지 깡통을 흔들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의 마음속 에는 식욕을 방해받은 새들에게 동정심이 생겨났다. 저 까마귀들도 주드 자신처럼 쓸모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왜 새들을 쫓아 버려야 하는가? 까마귀들은 더욱더 온순한 친구들이 거나 남에게 신세를 지는 사람들과 같은 태도를 나타냈다 - 까마귀들은 적어도 그에게 관심을 품어주는 것으로 소년이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들처럼 생각되었다. 소년의 대고모조차도 그에게는 관심이 없다고 자주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 는 깡통 흔드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랬더니 새들이 다시 내려왔다. "가련한 것들!" 주드는 큰 소리로 외쳤다. "좀 먹어라 - 먹으라고. 우리에게는 많이 있단다. 트라우댐 농장주는 너 희들을 먹일 만큼은 있을 거야. 그렇다면 먹어라, 새들아, 마음껏 배불리 먹으라고!" 새들은 밤색의 흙 위에 점점이 쏟아 부은 잉크 자국처럼 멈춰서 모이를 먹었다. 그래서 주드는 그들의 식욕을 즐겼다. 마술 같은 연민의 실오라기 가 그의 생활과 그들의 생활을 묶어놓았다. 짧고 가련한 그들의 생활은 주 드의 생활과 너무 많이 흡사했다. 그는 이맘때쯤 해서 깡통을 내팽개쳤다. 깡통은 이제 새들에게나 그런 새들의 친구가 된 자기 자신에게나 불쾌하고 보잘것없는 천한 도구에 불과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소년은 갑자기 자신의 엉덩이를 심하게 얻어맞고 이어서 깡통이 요 란하게 소리를 냈다는 것은 알아차렸다. 새들과 주드는 동시에 놀라 펄쩍 뛰어 올랐다. 놀란 주드의 눈에 저 훌륭한 트라우댐이 그곳에 나타나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비쳐졌다. 화가 나서 붉어진 그의 얼굴은 무서워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주드를 내려깔 듯 째려보고 있었고 손에는 깡통이 들려 있 었다. "그래, '먹어라, 귀여운 새들아' 라고 말했지. 이 꼬마녀석아? '멀어라, 새 들아' 라고 말이다, 정말이지! 엉덩이 좀 맞아야겠구나. 그리고 '먹어라, 귀 여운 새들아"라고 또 서둘러서 지껄여 보라구! 너는 밭에는 오지도 않고 선생이 있는 곳에 가서 빈들거렸더구나, 그렇지, 이놈아! 네가 까마귀 떼를 쫓는다는 품삯으로 6펜스를 번다는 게 고작 이 짓이냐!" 트라우댐은 이러한 노여움에 찬 말을 주드의 귀에다 마구 퍼부어 대면 서 왼손으로 소년의 팔을 나꿔챈 다음 그의 호리호리한 몸뚱이를 팔길이만 큼 잡고서 돌렸다. 그리고 주드가 가지고 있던 깡통의 판대기로 또다시 엉 덩이를 쳤다. 마침내 주드가 한 바퀴씩 돌 때마다 매맞는 소리가 들판에 메아리쳤다. "때리지 마세요 - 제발요!" 빙빙 돌고 있던 소년은 외쳤다. 마치 낚시에 걸려 꿈틀거리면서 육지 쪽 으로 끌려오는 물고기 같았다. 그의 몸뚱이는 원심력의 지배를 받고 빙빙 돌았다. 언덕, 보릿가리, 농장, 작은 길, 까마귀떼 등이 대단한 속도로 원주 경쟁을 하는 것처럼 그의 주위를 빙빙 달았다. "나는 - 난 - 주인님 - 여기 땅 속에는 보리가 많이 있다고 생각한 것 뿐입니다. 파종하는 걸 보았습니다. 까마귀 떼가 약간은 먹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주인님이 손해보는 일은 없을 거라고요. 게다가 필로트 슨 선생님께서 새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하라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필로트 슨 선생님께서 새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하라고 하셨습니다 - 아, 아, 아!" 이 솔직한 해명은 주드가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굳게 입을 다물었을 때 보다도 더욱더 농장주를 화나게 했던 것 같았다. 그는 계속해서 소년을 질 질 끌며 돌리면서 두들겼다. 깡통의 딸랑거리는 소리는 계속해서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멀리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귀에까지 들렸다. 그들은 그것이 주드가 힘을 다해 깡통을 두드리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안개 바로 뒤편에 가려진 갓 지은 교회 탑간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기부금을 낸 사람은 다름 아닌 이 농장주였다. 트라우댐은 곧 소년의 형벌에 싫증이 나서 떨고 있는 소년을 세워 놓은 채 주머니에서 6펜스를 꺼내어 그것을 소년에게 그날의 일당으로 건네주고 는 다시는 이 들판에 서성대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주드는 황급히 그로부터 물러나 엉엉 울면서 좁은 길을 따라 걸었다. 구 타당한 고통은 심했지만 그 때문에 운 것은 아니었다. 신이 창조한 새들에 게 이로운 것이 신이 만든 정원사에게는 해롭다는 이 지구 설계상의 결함 을 알았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이 교구에 오고 나서 1년도 채 되기 전에 아주 부끄러운 일을 저질러 이제부터는 일생 동안 대고모의 말썽꾸러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에 압도되었기 때문에 울었던 것이다. 주드는 마음속에 이런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채로 마을에 모습을 나타 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높은 생울타리 뒤로 이어진 우회로를 따라 목 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했다. 그는 목장에서 수십 마리의 지렁이가 이런 계절의, 이런 날씨에 흔히 언제나 그러는 것처럼 축축한 땅의 표면에서 통 통하게 몸을 도사려 서로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보통의 걸음으로 걸어 가려면 몇 마리쯤은 밟아서 으깨지 않고서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걸어 나 아갈 수 없었다. 트라우댐 농장주는 방금 소년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소년은 어떤 것에도 상처를 입히지는 못했다. 그는 새새끼의 둥우리를 집으로 가지고 오게 되 면 이내 애처로워져서 한밤중까지 자지 않고 뜬눈으로 지새다가 다음날 아 침이 되면 새새끼들과 둥우리를 제자리에 되돌려 놓았다. 그는 나무를 벌채해서 쓰러뜨리거나 나뭇가지를 베어내는 것조차 볼 수 없었다. 가지가 잘린 자리에서 수액이 솟아 나와 나무가 흠뻑 출혈하는 것 처럼 보여서 어쩔 수 없이 하는 때늦은 가지치기도 유년시절의 그에게는 대단한 슬픔이었다. 이것은 성격의 연약함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생애가 막을 내리고 모든 것이 다 잘 되었다고 하기 전 까지는 그가 수많은 아픔을 맛봐야 할 운명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는 지렁이를 단 한 마리도 죽이지 않고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 길을 지났다. 오두막집으로 들어갔을 때 대고모가 1페니 짜리 빵을 어린 소녀에게 파 는 것이 보였다. 어린 손님이 가버리자 대고모는 말했다. "그래, 벌써 돌아왔니?" "쫓겨났어요." "뭐라구?" "내가 까마귀 떼에게 보리를 조금 먹게 해주었다고 트라우댐 주인이 나 를 내쫓았어요. 그리고 이게 품삯이에요. 이젠 이게 마지막 품삯이래요!" 그는 슬픈 표정으로 6펜스를 테이블 위에 던졌다. "아!" 대고모는 숨을 멈추면서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일도 하지 않는 그를 봄 내내 어떻게 먹여 살리느냐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만일 네가 새들을 쫓지 못한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저 봐! 그렇게 언짢은 얼굴을 하지 마라! 근본을 따지자면 트라우댐 농장주가 나 보다 나을 것은 하나도 없어. 그러나 욥 (신이 내린 시련을 견뎌 정의로운 사람) 도 이렇게 말했어, '이제는 나보다 젊은 자들이 나를 비웃는구나. 그 들의 아비들은 재가 보기에 나의 양께 지키는 개중에도 둘 만하지 못한 자 이니라,' (욥기 제 30장) 아무튼 트라우댐의 아버지는 내 아버지에게 고용 된 날품팔이 장인이었어. 너를 그에게 고용시키도록 한 내가 바보였어. 다 만 너에게 쓰라린 일을 경험하지 못하게 하려는 생각에서 그랬는데." 주드가 의무를 등한히 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녀의 품위를 떨어뜨렸기 때문에 대고모는 더욱 화를 냈다. 주로 그런 견지에서 그를 힐책했고 도덕 적인 측면에서 그를 나무란다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트라우댐 농장주가 뿌린 것을 새들에게 먹이면 못써. 그런 일을 한 건 물론 잘못한 거야. 주드야, 주드, 왜 네 선생님하고 함께 크리스트민스터라 는 델 안 갔느냐? 그러나 아, 아냐 - 가엾은 못난이 - 네 집 혈통에 그런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야!" "그 아름다운 도시는 어디에 있어요, 대고모님? 필로트슨 선생님이 가신 곳 말이에요." 소년은 조용히 생각하고 나서 물었다. "어이쿠! 넌 크리스트민스터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어야지. 여기서 20마일쯤은 될 거야. 그렇지만 내 생각에 그곳은 너무 좋은 곳이어서 가엾 게도 너하고는 별로 상관이 없단다." "그런데 필로트슨 선생님은 언제나 거기에 계실까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제가 가서 선생님을 만나볼 수 있을까요?" "어이쿠 안 돼! 넌 여기서 자라지 않았잖아. 자랐다 해도 그렇게 물어보 는 게 아니다. 우리는 크리스트민스터 사람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고 그들 도 우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단다." 주드는 자신의 존재가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을 여느 때보다 더 절실하 게 느끼면서 밖으로 나와 돼지우리 옆에 있는 보릿짚 더미 위에 누웠다. 이맘때쯤에는 안개가 보다 엷어져서 태양을 안개 사이로 볼 수가 있었다. 주드는 밀짚모자를 얼굴 위로 끌어당기고 밀짚 틈 사이로 백광을 쳐다보면 서 멍하게 생각에 잠겼다. 성장한다는 것에는 여러 가지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세간의 일들은 그가 생각했던 대로 되지는 않았다. 자연계의 이치는 너무 무서워서 도저히 관심을 갖지는 못했다. 살아 있는 것중의 어느 한 무리에 게 베푸는 자비가 다른 무리에게는 잔혹한 처사가 된다는 것이 그를 불안 하게 했다. 사람은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렸을 때 느끼는 것처럼 원주상의 한가운데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일종의 전율감을 느끼게 된다. 주위 전체는 무엇인가 번쩍이고 현란했으며 딸랑딸랑 울리는 것이 웅성거리는 것 같았 다. 그리고 그 잡음과 섬광이 생활이라는 작은 세포에 부딪쳐서 그것을 흔 들어놓고 찌그러지게 했다. 만일 그가 성장하는 것을 막을 수만 있다면! 그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 았다. 그때 그는 본래의 소년으로 되돌아가서 이제까지의 낙담을 떨쳐버리고 벌떡 일어났다. 남은 아침나절 동안 그는 대고모를 도왔다. 그러나 오후에 는 할 일이 없어서 마을로 갔다. 거기서 그는 어떤 사람에게 크리스트민스 터가 어느 쪽에 있느냐고 물었다. "크리스트민스터라니? 아, 그래, 저 건너편이란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가본 적이 없어. 없구말구. 나는 그곳에 볼일이 없었으니까." 그 사람은 북동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그것은 주드가 그렇게도 창피를 당했던 밭이 있는 방향이었다. 이 우연한 일치에 대해서는 잠깐 동안 불쾌 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이번 일로 겁이 났기 때문에 오히려 크리스트민 스터라는 도시에 대한 호기심이 더해졌다. 트라우댐 농장주는 주드에게 그 밭에 두 번 다시 나타나지 말라고 말했 다. 그러나 크리스트민스터는 그 밭 너머에 있고 그곳으로 가는 길은 누구 나 걸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작은 마을을 살짝 빠져나와 그 길에서 한치도 어긋나지 않고 오늘 아침 벌을 받던 우묵한 장소로 내려왔다. 그리 고 맞은편의 길고 지루한 오르막길을 올라갔는데 마침내 작은 길이 나무들 의 숲 옆에서 고속도로와 마주치는 곳까지 왔다. 여기서 경작지는 끊어졌 고 그의 눈앞에 고속도로와 마주치는 곳까지 왔다. 여기서 경작지는 끊어 졌고 그의 눈앞에 펼쳐진 전망은 단지 황량하고 넓은 고원이었다. 1-3 생울타리 없는 고속도로나 그 양쪽 어느 곳에도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 다. 그리고 허연 도로는 언덕을 올라가서 하늘 속으로 사라져 가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 그 꼭대기에서 고속도로와 직각으로 교차하는 푸른 '등성잇 길'이 하나 있었다. - 이 지방을 꿰뚫고 있는 이 길은 본래 로마인이 세운 이크닐드 도로였다. 이 고대의 작은 길은 수마일에 걸쳐 동서로 뻗쳐 있고 아직까지도 기억에 생생할 만큼 양과 소떼를 장터나 시장으로 몰고가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길은 이제 버려져서 잡초만 자라 무성했다. 소년은 마을로 온 이래 이만큼 북쪽으로 멀리 나와 본 적이 없었다. 두 서너 달 전의 어느, 어두운 밤에 남쪽의 정거장에서 이 마을로 마차꾼에게 이끌려 온 뒤 오늘날까지 이 고원의 바로 가장자리 아래에 이토록 광막하 고 평탄한 지대가 가까이에 전개되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 다. 동서로 걸친 북쪽의 반원형의 전경은 사오십 마일의 거리까지 그의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곳은 분명히 여기서 숨쉬고 있는 공기보다도 더욱 푸르고 습기 있는 대기로 가득 차 있을 것이었다. 도로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비바람에 찌들어 붉은 색을 띤 회색 의 벽돌과 기와로 지은 낡은 헛간 한 채가 서 있었다. 이 지방사람들은 이 곳을 '갈색의 집' 이라고 불렀다. 소년이 이 앞을 지나가려고 할 때에 사다 리가 처마 끝에 걸쳐져 있는 것이 보였다. 더욱 높이 오르면 더 멀리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소년은 멈춰서 그것을 쳐다보았다. 비탈진 지붕 에서 두 사람이 기와를 손질하고 있었다. 그는 등성잇길로 접어들어 헛간 쪽으로 다가갔다. 소년은 부러운 듯이 얼마 동안 일꾼들을 쳐다보다가 용기를 내서 사다리 를 올라가 그들 옆에 섰다. "그래, 얘야, 그런데 여기에 무슨 일로 올라왔니?" "크리스트민스터라는 도시가 어디에 있습니까, 가르쳐주시겠어요?" "크리스트민스터는 나무숲 너머 저 건너편에 있단다. 볼 수도 있단다. 적 어도 날씨가 좋은 날이면 말이다. 지금은 볼 수 없지만." 단조로운 노동에서 벗어나 기분전환이 될 만한 화젯거리가 생겨 기쁘다 는 표정으로 다른 일꾼도 고개를 돌려 방금 가리켰던 방향 쪽을 쳐다보았 다. "이런 날씨라면 그곳을 못 본단다." 그는 말했다. "내가 그 도시를 보았을 때는 태양이 뻘겋게 달아서 지고 있을 때였지. 그때의 모습을 어떻다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 "성스러운 예루살렘 같군요." 소년은 진지한 얼굴로 암시했다. "그거야, 내 머리로는 그런 것이 생각나지는 않지. 그러나 오늘따라 크리 스트민스터가 전혀 보이지 않네." 소년도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멀리 떨어진 그 도시는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헛간에서 내려왔다. 소년과 같은 나이에는 흔히 그렇듯이 그는 갑 자기 마음이 변해 크리스트민스터를 체념하고 등성잇길을 따라 걸으면서 무엇인가 흥미를 끄는 자연물이 혹시 없는가 하고 주위의 제방을 돌아보았 다. 그가 메리그린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헛간 앞을 다시 지나갈 때 사닥다 리는 여전히 그 상태로 있었지만 일꾼들은 그날의 일을 끝냈는지 이미 자 리를 떠나고 없었다. 저녁때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직도 안개는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 나 발 아래쪽에 이어진 습한 평원지대와 강줄기 지역을 제외하고는 안개가 약간 개어있었다. 소년은 크리스트민스터가 다시 생각났다. 그가 대고모의 집에서 이삼 마일이나 일부러 멀리 나왔기 때문에 말로만 들어왔던 그 멋 진 도시를 적어도 한번만은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곳에서 아 무리 기다린들 밤이 되기 전에는 하늘이 개일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소 년은 이런 장소를 떠나기 싫었다. 북쪽의 일대는 마을쪽으로 불과 이삼백 야드 물러만 가도 보이지 않게 되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일꾼들이 아까 가리켰던 방향을 다시 한번 쳐다보려고 사닥다리 를 올라갔다. 지붕 기와보다 더 높이 솟아 있는 제일 높은 단까지 기어올 라갔다. 한동안은 이렇게 까지 멀리 나오지 못할 것이다. 아마 기도를 하면 크리스트민스터를 보고 싶다는 소원이 성취될지도 모른다. 기도를 해도, 어 떤 일은 때로는 성취 안 되는 일이 있지만 반면에 성취되는 일도 있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소년은 어떤 잡지에서, 교회를 짓던 사람이 그것을 마무리할 자금이 떨 어져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더니 그 돈이 다음날 우편으로 왔다는 이야기 를 읽은 적이 있었다. 다른 사람도 똑같은 일을 시도해 보았다. 그런데 그 때는 돈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후에 알고 보니 무릎을 꿇었을 때 입었던 바지가 사악한 유태인이 만든 것이었다고 했다. 낙담할 일만은 아니라고 소년은 생각을 고쳐먹고 사닥다리에서 몸을 돌 려 세 번째의 단 위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위쪽으로 몸을 기댄 채 제발 안개가 걷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세우고 기다렸다. 10분에서 15분 정도가 지나자 안개 가 북쪽의 지평선에서부터 완전히 개기 시작해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맑은 하늘이 되었다. 일몰 되기 약 5분전에는 서쪽 하늘의 구름도 흩어지고 태 양도 약간 드러났다. 그래서 석판 같은 두 개의 붕운 사이에서 찬란한 광 선이 뚜렷하게 실낱처럼 새어나왔다. 소년은 당장 북쪽 방향으로 눈을 돌 렸다. 그의 시야에 누런 옥같은 불빛의 작은 점들이 비쳤다. 공기의 투명도가 시시각각 더해짐에 따라서 불빛의 누런 점들은 풍향계, 창문, 눅눅한 지붕 의 석판, 겨우 모습을 드러낸 첨탑, 둥근 지붕, 석회석 건축물 그리고 기타 여러 가지의 윤곽물에 붙은 불빛의 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곳이 야말로 확실히 크리스트민스터였다. 직접 본 것이 아니라면 특이한 대기 상태에서 비롯된 신기루였는지도 모른다. 소년이 계속 주시하는 가운데 어느 순간 창문과 풍향계는 불빛을 잃었고 바람에 꺼지는 촛불처럼 갑자기 소란스럽게 사라졌다. 희미해진 도시는 안 개 속에 가려졌다. 서쪽을 바라보니 태양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 늘의 전경은 벌써 저승길처럼 어두워졌고 근처의 사물들은 괴물과 같은 색 깔과 형태를 띠고 있었다. 소년은 불안해져서 사닥다리를 내려와 곧바로 집을 향해 출발했고 사냥 꾼 헌(중세기 전설 속의 망령으로 윈저숲의 감시인) 이나 크리스천을 기다 리며 누워 있는 아폴리언(번연의 <철로역정>의 괴물), 이마의 구멍으로 숨 을 내뿜는 선장, 악마가 갈아탄 배 위에서 선장 주위에 뒹굴고 있는 시체 들이 밤마다 반란을 되풀이하는 이야기 등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는 자신이 이런 공포 담을 믿지 않을 정도로 성장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교회 탑과 어두막집 창문의 불빛이 보였을 때는 기뻤다. 비록 그 곳이 자기가 태어난 집도 아니며 대고모가 자기를 별로 도와주지도 않았지 만 말이다. 그 노파의 '가게' 창문은 작은 유리가 24장으로 나뉘어져 납세공의 창살 에 끼워져 있고 그 중에는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으로 녹슨 유리도 있어 내부에 진열된 빈약하고 값싼 견본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남아 있는 물 건도 힘센 남자라면 혼자서도 넉넉히 운반할 수 있는 양에 불과했다. 그런 가게 내부와 주위에서 소년은 오랫동안 변화도 없이 정말 겉모습만의 생활 을 해 왔다. 그러나 그의 제한된 환경에 비하면 그의 꿈은 컸다. 소년은 차가운 백악의 단단한 장벽을 넘어 북쪽으로 늘 화려한 도시를 엿보고 있었다. 그 도시야말로 소년이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비유한 꿈속의 장소였다. <묵시록> 의 저자가 품은 꿈보다도 화가의 상상이 많이 담겨 있었지만 다이아몬드 상인과 같은 상상은 아니었다. 그 도시가 구체성과 영구성을 가지고 소년의 생활 속으로 분명하게 파고 들어온 것은 주로 소년이 그 지식과 목적을 대단히 존경하는 사람이 현재 거기에서 갈고 있다는 - 단지 그것뿐만 아니라 보다 사려 깊고 정신적으로 빛나는 사람들 속에서 생활한다는 사실에서 생겨났다. 음산하고 습기찬 계절에는 크리스트민스터에도 비가 내릴 거라고 생각하 면서도 그곳에 이렇게 적적하게 비가 왔으리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 다. 소년이 한두 시간 마을의 경계선을 벗어나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은 아 니었지만 어쩌다가 외출하게 되면 언덕에 있는 '갈색의 집' 까지 몰래 빠져 나와 계속해서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았다. 어떤 때는 둥근 지붕이나 첨탑이 나타나서 위안을 받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약간의 연기가 눈에 보이기도 했다. 그 연기에는 어딘가 향연 같은 신비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 일이 있던 어느 날, 날이 어두워진 뒤 전망대까지 올라가거나 아니 면 1,2 마일 앞으로 더 가면 그 도시의 야경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 각이 소년에게 불현듯 떠올랐다. 혼자서 갔다가 돌아와야 했지만 상관없었 다. 소년은 그런 경우에 약간의 용기를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계획은 마침내 실현되었다. 소년이 전망대가 있는 장소까지 왔을 때 는 별로 늦지 않았다. 해가 막 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동북의 하늘은 이미 어두워졌고 그 방향으로 바람도 가세하여 그곳은 충분히 어두워 보였다. 그는 보답을 받았다. 그러나 소년이 바라본 것은 절반쯤 기대했던 것처럼 열을 지어 늘어선 불빛은 아니었다. 개개의 불빛은 보이지 않았고 다만 희 미하고 몽롱한 후광처럼 뿌연 빛이 큰 원을 그리고 있었다. 1,2 마일만 더 가면 그 도시와 불빛이 보일 것처럼 생각되었다. 소년은 저 붉은 후광 속 어느 곳에 선생님이 계실까 하고 생각했다. 이 제 그는 메리그린 사람들의 누구와도 연락이 없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에 게는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소년은 붉은 안개 속에서 마치 네부카드네자르 왕의 난로 속에 투영된 사람들의 그림자처럼 필로트슨 선 생님이 한가로이 산책하는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소년은 미풍이 한 시간에 10 마일의 속도로 분다고 들었던 것이 지금 그 의 머리 속에 떠올랐다. 소년은 지금 얼굴을 동북쪽으로 향하고 입술을 벌 려 달콤한 술이라도 마시는 것처럼 미풍을 들이마셨다. "너, 미풍이여." 그는 애무하듯이 미풍에게 말했다. "한두 시간 전만 해도 크리스트민스터 도시에 있었겠지. 거리를 떠다니 고 풍향계를 돌리고 필로트슨 선생님의 얼굴을 만지고 그 선생님께서 들이 마셨을 네가 이제는 여기로 와서 내가 들이마시고 있구나 - 넌 같은 바람 이겠지." 바람과 함께 소년 쪽으로 무엇인가가 갑자기 날아왔다. 그것은 그곳에서 - 거기에 살고 있는 누군가로부터 날아온 전언문 같았다. 그것은 확실히 종소리였고 도시의 소리였다. 소리는 약했지만 아름다운 소리로 소년에게 외쳤다. "이곳의 우리는 행복합니다!" 이렇게 정신적으로 비약을 하는 사이에 소년은 자신의 몸이 어디에 있는 가를 완전히 잊었다. 그리고 거친 목소리에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소 년이 멈춘 언덕 꼭대기에서 아래로 2,3 야드 떨어진 곳에 한 무리의 말이 나타났는데, 30분이나 걸려 대단히 경사진 바닥에서 꾸불꾸불한 길로 올라 와 소년이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말 등에는 석탄 짐이 실려 있었다. 이 고원지대에 연료를 들여오려면 이런 샛길을 지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 다. 말을 따라 마부와 조수와 한 소년이 함께 올라왔다. 그 소년이 마차바 퀴 뒤에 큰돌을 발로 차 넣어 허덕이는 말에게 긴 휴식을 주자 고삐를 잡 고 있던 나머지 두 사람은 집에서 술병을 꺼내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열심히 마셨다. 나이가 든 이 두 사람은 목소리가 순했다. 주드는 그들에게 크리스트민 스터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어림도 없지, 이런 짐을 끌고 어떻게!" 그들이 대답했다. "내가 말하는 도시는 저 건너의 도시예요!" 소년은 대단해 낭만적으로 크리스트민스터에 애착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 에 그 이름을 또다시 말할 때 연인의 이름을 부르려고 하는 젊은 남자처럼 수줍어했다. 그는 먼 하늘의 빛을 가리켰다. 그들 어른의 눈으로는 거의 알 아보지 못하는 불빛이었다. "정말 그렇구나, 동북쪽에 약간 더 많은 불빛이 보이는 것 같군. 그렇지 만, 나는 몰라보겠는데. 틀림없이 거기가 크리스트민스터인지는 모르겠어." 이때 이리로 올 때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읽으려고 겨드랑이에 끼고 온 작은 이야기책이 길위에 떨어졌다. 소년이 그것을 주워들고 구겨진 페이지 를 펼치고 있을 때 마부는 그 소년의 동작을 지켜보았다. "이봐, 어린 친구, 네 머리의 방향을 바꾸기 전에는 그쪽에는 읽는 책은 읽지 못할 거야." 그는 말했다. "왜요?" "아, 크리스트민스터에서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 이해하는 그런 책은 무 엇이나 거들떠보지도 않는단 말이야." 마부는 시간을 때울 요량으로 말을 계속했다. "같은 말을 지껄이는 집이 전혀 없었던 바벨탑이 세워졌을 때, 도무지 갈피를 못 잡는 말밖에 통용이 안 되는 거야, 그런 이국의 말을 쑥독새가 빠르게 나는 것처럼 그들은 빠르게 읽는다는 거지. 거기에선 모든 게 학문 이란다. 학문 아닌 게 없단다. 종교만 빼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도 따지고 보면 학문이지. 왜냐하면 우리가 이해를 못하는 것이니까. 그렇단다, 그곳 은 진지한 고장이란다. 밤거리에 매춘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모판에서 모를 기르는 것처럼 거기서는 성직자들을 양성한다는 거지? 빈둥 거리는 풋내기 소년을 행실이 부정한 번뇌도 하지 않는 엄숙한 전도사로 만들어내는 데 - 봅, 몇 년이 걸린다던가? 5년은 걸린다지만, 5년 걸려서 된다면, 과연 해볼 만도 하네. 그들은 성직자 만드는 기술자니까. 갈고 닦 고, 긴 얼굴을 모나지 않게 하고, 길고 검은 코트와 조끼 그리고 성경에 나 오는 종교의식의 옷깃과 모자 등을 씌워보라지. 전도사의 어머니도 종종 전도사를 알아보지 못할 테니까. 그것이 그들의 장사란다. 다른 사람들의 장사도 매한가지란다." "그렇지만 아저씨는 어떻게 그런 것을 아세요?" "자, 끼어들지 말라구. 얘야, 어른이 말씀하시는 데 끼어드는 건 못쓴다. 앞쪽의 말을 옆으로 치워, 바비. 무언가 오는 것 같아. 내가 지금 대학생활 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거 알지. 생활수준도 한층 높을 거야. 두말할 나위도 없단다. 하기야 선망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 산 위에서 몸뚱이를 좁 게 하고 있지만 그들은 정신이 높다는 거야 - 정말 고상한 기질의 사람들 이지 - 그 중에는 - 큰 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떠벌려서 수백 파운드나 버 는 사람들도 있다지. 그리고 그 중에는 체격이 튼튼해서 은잔 가득 돈을 벌어들이는 젊은이도 있다. 음악으로 말할 것 같으면, 크리스트민스터에서 는 어디를 가도 멋진 음악을 들을 수 있지. 신심이 있어서 노래를 하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모두 타인과 어울려 기분 좋은 소리를 내지 않고서는 있을 수가 없단다. 그리고 훌륭한 거리도 있지 - 큰 거리야 - 세계에서 어 디를 가도 그런 곳은 없어. 나는 크리스트민스터에 관해서는 조금 알고 있 지." 이때쯤 되어 말들은 기력을 회복했고 마구도 다시 달았다. 주드는 먼 쪽 의 후광에 찬양하는 듯한 고별의 눈길을 보내면서 방향을 바꾸어 그의 뛰 어날 정도의 박식한 친구와 같이 걸었다. 마부는 계속 걸으면서 그 도시에 관해 더 많이 자세하게, 즉 탑과 회관과 교회 등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마차가 십자로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주드는 마부에게 이야기를 해준 데 대 해 따뜻하게 감사를 표시했고 자신도 크리스트민스터에 관해 그의 반만큼 이라도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좋을 거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건 사람들이 말한 것들은 것에 불과하지." 마부는 전혀 자만하지 않았다. "나 역시 너와 마찬가지로 그곳을 한번도 가본 일이 없어.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너에게 말했을 뿐이야. 나처럼 세상을 떠돌아다니고 온 갖 계급의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여러 가지 것을 듣지 않을 수 없단다. 내 친구가 젊었을 때 크리스트민스터의 크로지어 호텔에서 구두닦이를 했 는데, 그의 말년에는 형제처럼 잘 지내고 있지." 주드는 집으로 혼자 걸어오면서 너무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밤길의 무서움도 잊었다. 그는 갑자기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무엇인가를 찾아서 그곳에 닻을 내려 매달리고 싶은 것이 주드의 간절한 마음이었다. 그는 갑자기 마음을 먹었다. 무언가 동경할 만한 어떤 장소를 찾고 싶었다. 만일 그 도시에 간다면 그런 장소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그곳이야말로 농장주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하등의 장해물도 없으며 비웃음의 대상도 안 될 것이고 언제까지나 지켜보고 기다리는 것이 가능하고 소문으로 들었 던 옛날의 사람들처럼 어떤 멋진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장소는 아닐까? 15 분전에 바라본 그 후광이 소년의 눈에 비쳤던 것처럼 그 장소가 지금 어두 운 길을 더듬어 가는 그의 마음에 다가왔다. "그곳에는 광명의 도시다." 그는 중얼거렸다. "그곳에는 지혜의 나무가 자란다." 그는 두서너 발짝 걸어가면서 부언했다. "그곳은 사람을 가르치는 교육자들이 나오고 들어가는 것이야." "그곳은 학문과 종교로 무장된 성이라고 불러도 좋은 곳이야." 주드는 이런 비유를 중얼거리고 나서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마침내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그런 곳이라면 나에게 적격일 거야." 1-4 소년은 마음을 집중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발걸음도 느려졌는 데 - 어느 면에서는 생각하는 것이 노인과 같았고, 또 어떤 면에서 생각하 는 것을 보면 자기 나이보다도 훨씬 어린애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문득 발걸음도 가벼운 보행자가 그를 지나쳐갔다. 날씨가 어둑어둑해졌는 데도 불구하고 소년은 이 사람이 뛰어나게 높은 모자와 연미복을 입고 있 는 것을 알 수가 있었고 소리가 나지 않는 장화를 신은 탓인지 발을 옮겨 날쌔게 걸을 적마다 회중시계의 줄이 마구 흔들려 야광이 번쩍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드는 문득 외로워져 그를 따라잡으려고 애썼다. "이봐! 난 바빠. 그러나 나하고 같이 가려거든 빨리 걸어야 하겠어.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네, 빌버트 의사 선생님이시죠?" "아 - 난 어디든지 알려져 있군.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는 직업이 니까 당연하지." 빌버트는 떠돌이 돌팔이의사로 시골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었지만 그 외에는 주구 하나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좋지 않은 일 이 생겼을 때 조사를 피하기 위해 극도로 몸조심을 했기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들만이 그의 환자들이었고 웨섹스 일대에 퍼져있는 그의 평판도 마을 사람들 사이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그의 신분은 자본과 광고의 조직적인 제도를 가진 돌팔이의사들보다 훨씬 낮았고 그의 구역도 더욱 애매했다. 그는 사실 시대에 뒤떨어진 생존자였다. 그가 돌아다니는 지역은 상당히 없었다. 웨섹스 지방의 사방에 그의 발길이 거의 미치고 있었다. 어느 날 주드는, 이 남자가 어느 노파에게 아픈 다리의 묘약이라고 하면 서 색을 넣은 돼지기름 한 병을 파는 것을 본적이 있었다. 효험이 뚜렷한 그 연고는 돌팔이의사의 말을 빌리면 시나이 산(모세가 하느님에게서 십계 를 받은 곳)의 풀을 뜯어먹고 살며 생명을 걸지 않고는 포획할 수 없는 어 떤 특별한 동물로 만든 약이라고 했는데, 노파는 그대가로 보름에 1실링씩 분할 지급해서 1기니를 지불하기로 했다. 주드는 이 의사의 약에 관해 벌써 의혹을 품고 있었지만 여러 곳을 떠돌 아다니는 인물임에는 틀림없으며, 별로 그런 전문적인 것에 관해서가 아니 라면, 신용할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의사 선생님, 선생님은 크리스트민스터에 가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그럼, 여러 번 갔었지." 키가 크고 후리후리한 그가 대답했다. "그곳은 내가 제일 자주 가는 것 중의 하나지." "학문과 종교로 유명한 도시지요?" "얘야, 네가 거기를 가 보았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 여하튼 대학 세탁부의 아들들까지도 라틴어로 말할 수 있다니까. 비평가의 입장에서 말 한다면, 훌륭한 라틴어는 아니지만. 내가 대학 학부시절에는 그런 걸 자주 '부정확한 라틴어' 라고 냉대했었지." "그리고 그리스어는요?" "글세 - 성직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신약성서를 원서로 읽을 수 있을 지도 모르지." "전, 독학으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공부하고 싶습니다." "멋진 희망이다. 각 언어의 문법부터 공부해야지." "전, 언젠가 크리스트민스터로 갈 생각입니다." "네가 그곳에 갈 때는 반드시 천식과 숨찬병은 물론 온갖 종류의 위장병 을 모두 정확하게 고치는 묘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오직 빌버트 의사뿐 이라고 소문을 퍼뜨려주길 부탁하네. 한 통에 2실링 3펜스야. 특별히 정부 의 보증인에 의한 인가도 받은 거니까." "만인 제가 이 일대에서 선전해 주면 문법책을 구해주시겠어요?" "너한테 내 것을 기꺼이 팔겠다. 내가 학교 다닌 때 사용했던 거야." "아, 선생님. 고마워요!" 주드는 헐떡이며 감사를 표했다. 왜냐하면 의사의 걸음이 놀라울 정도로 빨라 주드는 옆구리가 쑤실 정도로 종종걸음을 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넌 뒤에 처지는 게 좋겠구나, 어린 친구. 자, 이렇게 하자. 만일 네가 동 네 집집마다 가서 빌버트 의사 선생의 환금연고와 구명수와 부인용 환약에 대해 선전을 꼭 해준다면 나는 너에게 문법책을 주고 기초를 가르쳐 주겠 다. "문법책은 어디로 가져오실 거지요?" "나는 2주일 후의 같은 일요일, 7시 25분에 꼭 여기를 지나갈 거야. 나의 행동은 유성이 궤도를 도는 것처럼 아주 정확하지." "그럼 여기에서 만나 뵙도록 하겠습니다." "내 약의 주문도 받아 가지고 오는 거지?" "네, 의사 선생님." 주드는 말을 마친 다음 뒤쳐져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크리스트민 스터로 접근하기 위해서 가능한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갔 다. 그후 2주일동안 주드는 열심히 뛰어다녔고 그 생각이 마음속에 떠오를 때마다 얼굴에도 그것이 나타나서 미소지었다. 그 생각들은 소년을 맞이해 주고 고개를 끄덕여 주는 사람들과도 같았다 - 그리고 그의 맑은 웃음소리 에서 어떤 멋진 아이디어의 실마리를 잡았을 때 젊은이들의 얼굴에서 볼 수 있는 희한하게도 아름다운 그 빛이 나타났다. 마치 그들의 투명한 천성의 내면에 초자연적인 등불이 내걸려 그들의 주 위가 천국이라는 기분 좋은 공상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았다. 주드는 많은 치료법을 알고 있는 그 남자와의 약속을 정직하게 지켰다. 주드는 이제야 마음속으로 그 남자를 신뢰했고 의사한테서 선금을 받은 대 리인처럼 근처의 작은 마을들을 이리 저리로 걸어 돌아다녔다. 약속한 저녁, 그는 고원에서 몸도 움직이지 못한 채 - 그곳은 빌버트와 헤어졌던 장소였는데 - 서 있었다. 그리고 빌버트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돌팔이의사는 정확하게 그 시간에 왔다. 그러나 놀랍게도 주드는 빌버트의 보조에 맞춰서 걸었지만 이 보행자는 단 일보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젊은 동반자를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비록 2주일이 지난 저녁이지만 날이 꽤 밝았는데도 불구하고..... 주드는 틀림없이 자기가 다른 모자를 쓰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의사 에게 격식을 갖추어 인사를 했다. "그런데, 왜 그러지?" 의사는 아무 생각이 없는 듯이 말했다. "제가 왔습니다." "넌 누구지? 아 - 그렇군! 주문 좀 받았니, 얘야?" "네." 주드는 세간에서 유명한 환약과 연고를 시험해 보겠다는 마을사람들의 이름과 주소를 알려주었다. 돌팔이의사는 주의 깊게 이들을 머리 속에 기 억해 두었다. "그런데 라틴어와 그리스어 문법책은요?" 주드의 목소리는 불안으로 떨렸다. "그게 어떻다는 거야?" "선생님이 학위를 얻기 전에 사용한 문법책을 가져다주시기로 했는데 요." "아, 그래, 그래! 깜빡했구나 - 깜빡! 너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내 어 깨에 걸려 있어서 말이다. 얘야, 다른 일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어." 주드는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충분히 자제했다. 그리고 무뚝뚝하고 괴로운 목소리로 거듭 말했다. "가지고 오시지 않았군요!" "그래. 그런데 환자들의 주문을 좀더 많이 받아와야 한다. 그러면 다음 번에 문법책을 가지고 오마." 주드는 뒤에 남았다. 그는 순진한 소년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어린이에게 주어지는 순간적으로 번쩍이는 천부적인 직관에 의해 그 돌팔이 의사가 얼 마나 비열한 근성의 소유자인가를 곧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본성을 가진 사람으로부터는 어떤 지적인 빛도 얻을 수 없었다. 그가 상상 속에서 그리던 월계관의 잎은 떨어져버렸다. 그는 대문 쪽으 로 가서 그곳에 기대어 비통하게 울었다. 이러한 실망 끝에 잠시 망연한 기분이 계속되었다. 아마 알프레드스턴에 문법책을 주문하면 입수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돈이 필요했고 어떤 책을 주문해야 할지 사전 지식도 필요했다. 비록 몸은 의지 할 곳이 있어 걱정 없었지만 어디까지나 남의 집에 얹혀서 얻어먹는 신세 이기 때문에 그 자신이 자유롭게 쓸 돈은 한푼도 없었다. 오늘 날짜로 필로트슨 선생으로부터 피아노를 보내달라는 편지가 와서 주드는 한 가지 생각을 짜냈다. 선생님께 편지를 보내 크리스트민스터에서 문법책을 입수해달라고 부탁하면 어떨까? 피아노의 상자 속에다 살짝 넣으 면 반드시 수신인의 눈에 띄게 될 것이다. 낡은 헌책이라도 보내달라면 어 떨까? - 그것들도 대학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매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 다. 이러한 의도를 대고모에게 말한다면 그것은 실패로 끝나게 될 것이다. 혼자서 결행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이삼 일 더 숙고하고 나서 그것을 실행했다. 피아노가 발송되는 날 - 그날은 때마침 그의 생일이었지만 - 주드는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 앞으 로 보내는 짐꾸러미 상자 속에 몰래 편지를 끼워 넣었다. 이런 소행이 드 루실라 대고모에게 들통나 그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까봐 걱정되었다. 피아노는 발송되었다. 주드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고 아침이 되면 대고모 가 일을 시작하기 전에 시골 우체국으로 가서 확인해 보았다. 마침내 한 개의 소포가 마을에 도착했다. 소포 안에 두 권의 얇은 책이 들어 있는 것 이 보였다. 그는 그것을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지고 가서 벌목한 느릅나무 아래에 앉아 펼쳐보았다. 주드가 처음 크리스트민스터에 대해 환희를 느끼고, 환영을 그리며 그 가능성을 꿈꿔 온 이래, 한 언어의 표현을 다른 언어로 바꾸는데 관련되는 그 모든 과정을 그는 호기심 있게 생각했다. 그가 배우고 싶다고 생각하는 언어의 문법은 우선 첫째로 비밀의 기호의 성질에 관한 규칙, 처방, 단서 등을 포함하고 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리하여 일단 알게 되면 그것 을 단지 응용함으로써 자국어의 무든 말들을 외국어로 바꿀 수 있을 것이 라는 생각이었다. 그의 어린아이 같은 생각은, 사실은 '그림의 법칙' (그림이 발표한 인도 유럽 기어에서 게르만 기어로의 자음 추이에 관한 법칙)으로 보통 알려진 것을 극단의 수학적인 정밀함까지 추진한 것으로, 조잡한 규칙을 이상적인 완성까지 확대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필요한 언어의 단어는, 그것 을 발견하는 기술을 습득만 하면 그것이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문법책이 이런 기술을 가르쳐줄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그렇게 때문에 그는 소포의 소인이 크리스트민스터국이라는 것을 알아차 리고 끈을 풀고 책을 펼쳐 보았는데, 제일 먼저 나타난 라틴어 문법책이 눈에 띄었을 때 자신의 눈을 거의 믿을 수 없었다. 그 책은 낡은 것이었다. 낯선 이름들이 적혀 있는, 30년이나 묵은 얼룩진 책으로 본문에 대한 온갖 적의에서 장난기 섞인 낙서가 마구 씌어져 있었 다. 또한 주드 자신의 연대보다도 20년이나 앞선 날짜가 제멋대로 휘갈려 져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주드를 놀라게 하지 않았다. 그가 순진하게 상상한 것과 같은 음운전환의 법칙은 전혀 없었고 (있기 는 좀 있지만 이 문법가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라틴어와 그리스의 모든 단어들을 꾸준히 수년간의 희생을 치루어 샅샅이 암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주드는 그 책들을 던져버렸고 느릅나무에 의지해 뒤로 누운 채 15분 정 도 아주 비참한 기분이 되었다. 그는 전에도 자주 그랬듯이 모자를 얼굴 위까지 눌러쓰고 밀짚모자의 코 사이를 통해서 살짝 스며드는 태양을 지켜 보았다. 이것이 라틴어이고 그리스어란다. 그렇다면 이성을 잃은 엄청난 환 상을 본 것이다! 그가 장차 다가올 것일 라고 생각했던 매력은 정말 이스 라엘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맛본 노고(출애굽기 제 1장, 12에서 14절)와 같았다. 크리스트민스터에 있는 위대한 학교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두뇌를 가 지고 있길래 몇만 개나되는 단어를 하나 하나씩 익힌다는 것일까! 하고 그 는 곧 생각했다. 그의 머리로는 이런 것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그르다란 햇빛이 모자의 코를 통해 계속해서 그의 얼굴에 흘러 들어올 때 그는 책 같은 것을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고 그러면 또 다른 책은 보고 싶지도 않게 되었을 것이며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 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와 그의 고뇌를 물어보고 그의 생각이 문법학자 보다도 훨씬 진보한 것이라고 말해 원기를 북돋워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무도 위로해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 드는 자신의 대단한 오류를 인정하고 기세가 푹 꺾이어 이 세상에서 사라 져 버리고 싶다고 계속 생각했다. 1-5 계속해서 삼사 년 동안 메리 그린 마을 부근의 작은 길과 샛길을 따라서 이상하고 독특한 모양의 마차가 역시 이상하고 독특하게 지나가는 것이 눈 에 띄었다. 주드는 책을 받고 나서 한두 달이 지나는 동안 이제는 사어가 연출하는 빈약한 속임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은 이런 고어의 본질에 대한 실 망이 결국 크리스트민스터의 학문을 더욱더 숭배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어 든, 활어든 언어에는 본래의 고유한 까다로움이 있다는 것을 주드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를 습득하는 것은 헤라클레스와 같은 대사 업(네우스의 아들로 불사가 되기 위해서 12가지의 위업을 수행함)이기 때 문에 거기에 끌려 가정했던 속성 학습법보다는 일보 일보의 정복에 서서히 더 큰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소위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먼지 낀 책 속에 감겨 있는 관념 위에 세워 진 산더미 같은 자료의 무게는 그를 자극해서 집요한 생쥐와 같은 교활성 으로 그 무거운 것들을 하나씩 부분적으로 움직여 보려고 했다. 주드는 무뚝뚝한 독신인 대고모를 능력껏 도와서 방해가 되지 않도록 애 를 썼다. 그래서 작은 시골 빵집의 장사도 자연히 커졌다. 늙고 머리가 축 처진 말도 경매에서 8파운드로 사들였고 포장을 엷은 갈색으로 칠한 덜거 덕거리는 마차도 이삼 파운드 더 주고 샀다. 이 마차로 일 주일에 세 번씩 바로 메리 그린 주위에 거주하는 마을사람들과 외로운 소작인들에게 빵을 배달하는 것이 주드의 일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독특한 모양이란 결국 마차 그 자체보다도 주드가 길을 따라 배달 가는 행동을 지칭한 말이었다. 이 마차는 주드가 '독학'으로 자 신을 교육하는 장소였다. 말이 길과 어느 집에서 잠시 멈추어야 하는가를 알게 되자, 주드는 전면에 자리잡고 고삐를 축 늘어뜨리고, 읽고 있던 책을 포장에 매달린 가죽 줄로 눌러가면서 재치있게 펼친 채로 무릎 위에서 사 전을 찾았고,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지만 시저, 베르길리우스 또는 호라티 우스 등의 비교적 쉬운 문장을 잘 알지도 못한 채로 반소경이 비틀거리는 것처럼 더듬거리면서 읽었다. 이런 장면을 마음 씨 좋은 선생이 바라보았다면 반드시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가 읽은 부분은 그 뜻을 파악하고 원문의 정신을 이해한다기 보다는 추측하는 정도였지만, 그래도 타인으로부터 배우고 얻 는 것과는 어딘가 다른 의미가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때가 종종 있었다. 주드가 입수할 수 있었던 유일한 책은 프랑스 왕자판(루이 14세 때 왕자 의 교육을 위해서 편집한 라틴어 교과서)의 낡은 책이었다. 왜냐하면 그 책들은 폐품이 되어 값도 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책도 태만한 학생들 과는 달리 주드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그는 힘들고 외로운 행상의 나날 속 에서도 최소한의 독서 량은 채웠다. 모르는 구문은 간혹 지나치게 되는 학 생이나 가정교사에게 물었다. 이런 조잡한 임시 변통의 방법으로 학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별로 없었겠지만 그는 자기가 더듬어가고 싶은 길 을 점점 파고 들어갔다. 주드는 지금쯤 무덤 속에 묻혀졌을 사람들의 손때가 묻은 이 낡은 책장 들을 부지런히 읽었다. 그토록 먼 옛날에 씌어졌는데도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풍기는 선현들의 사상을 주드가 한창 파내는 동안, 뼈만 앙상한 늙 은 말은 터벅터벅 그의 정해진 길을 따라 걸어갔다. 바로 그때, ' 빵장수, 오늘은 두 덩어리 주세요. 이렇게 오래된 빵은 반납 이에요.' 라는 노파의 외침소리가 나고 마차가 서면 디도의 비탄(아이네아 스 영웅에 대한 연모의 정에 애타는 디도 여왕의 비탄소리)에서 깨어나 주 드는 제정신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는 작은 길에서 자주 사람들을 만났지만 그들을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점차 이웃사람들은 주드의 일과 놀이(그들은 독서도 노는 것이라고 생각했 다)의방식에 대해 입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그런 방식은 본인에게는 편리 할지 모르지만 같은 길을 여행하는 타인들에게는 아무래도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이웃에 사는 어느 주민이 그 지역의 경찰에게 소년이 마차를 몰 면서 독서하는 것을 허용하지 말 것과 그를 현행범으로 체포해 알프레드스 턴 경찰의 즉결재판소에 끌고 가 노상에서의 위험한 행위를 한데 대해 벌 금형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경찰은 주드를 잡기 위해 잠 복했고 마침내 어느 날 그에게 경고 조치가 내려졌다. 주드는 매일 새벽 3시면 일어나 오븐에 불을 지피고 빵을 반죽해 구워야 했기 때문에 밤에는 빵 재료를 들여놓자마자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그래 서 만일 마차를 타고 가는 동안 고전을 읽지 못한다면 공부할 시간이 없었 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한 전방이나 주위를 잘 살펴 멀리서 누군가가, 특히 경찰이 나타나면 빨리 책을 무릎 밑으로 숨기는 것만이 유일한 방안 이었다. 하지만 경찰들도 주드의 배달마차가 지나가는 길을 되도록 이면 피했다. 그렇게 외진 지역에서 어떤 일이 닥쳤을 때 가장 위험한 것은 저 드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종종 생울타리 너머로 그의 마차 가 눈에 띄면 경찰들은 다른 방향으로 순찰 길을 바꾸어 가곤 했다. 주드 폴리가 16살쯤 되어 학업에 현저한 진보를 나타내던 어느 날, 귀로 에 <백년 제가, (호라티우스가 지은 4행시. 19년으로 이루어진 범신론적인 찬가로 이교의 일신, 월신 등을 비롯한 로마의 산하, 영토, 영웅 등을 찬양 함)를 더듬거리며 읽던 중 그는 때마침 '갈색의 집'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 다. 어느새 주위 광선의 상태가 면했기 때문에 그는 퍼뜩 정신이 들어 하 늘을 쳐다보았다. 태양은 졌지만 반대 방향의 숲 뒤에선 보름달이 때마침 떠오르고 있었 다. 마음 가득 시상이 차 오른 그는 문득 말을 멈추고 마차에서 내려 주위 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펼쳐진 책을 지닌 채 길가의 뚝방위에 무릎을 꿇었다. 수년 전에 주드를 사닥다리 위에서 무릎 꿇게 한 일이 있던 때와 같은 충동적인 감격이 그의 몸을 휩쌌다. 그는 우선 월신을 향해 기도하고 그러 고 나서 반대쪽 하늘에서 사라져가는 광채를 향해 '일신이여! 숲을 비추는 월신 이여!(<백년 제가>의 제1행)라고 소리내어 시를 읊었다. 그러자 월신 들은 그의 거동을 부드럽게 꼬치꼬치 캘 듯이 지켜보는 것 같았다. 주드는 한낮의 햇빛 속에서는 결코 만족시킬 수 없는 범신론적 환상에 빠져들면서 이 찬가를 되풀이했다. 말은 그의 찬가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서 있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자신의 미신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선천적이 든 후천적이든 학자가 아니면 기독교 성직자기 되겠다는 자가 상식과 습관 으로부터 이토록 빗나가 망각에 빠진다는 것은 자신의 소망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것은 이단의 서적을 너무 읽었기 때문이었다. 순간 주드는 자신이 모순에 빠져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과연 인 생의 목적에 들어맞는 완전히 올바른 서적을 읽고 있는지, 아닌지를 의아 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교문학과 크리스트민스터의 중세기풍의 대학, 즉 종교적 낭만이 배어 있는 석조의 전당 사이에는 어떤 조화도 거의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는 결국 독서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 기독교의 젊은이로서 잘못된 감정 을 길러냈다고 결론을 내렸다. 사무엘 클라크가 편한 호메로스의 <일리아 드> (초보자용의 그리스 원문대역판은 즐겼지만 헌 책방에서 우편으로 손 에 넣은 그리스어 원문인 <신약성서>는 아직 공부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여태까지 익숙해진 이오니아 방언인 그리스어를 버리고 다른 새로 운 방언을 택했으며 그후 오랫동안 그리스 바하(1745-1812, 독일 학자로 그리스어의 <4복음서> 및 <사도서>를 출판했음) 의 원문으로 된 <복음 서>와 <사도행서>에만 독서를 국한했다. 게다가 어느 날 알프레드스턴에 갔을 때, 책방에서 이웃의 목사가 남겨 놓았다는 초대 그리스도교 교부들의 서적을 발견해서 처음으로 교부문헌 (초기 기독교 시애의 교부나 신학자들이 남긴 문헌)에 입문하게 되었다. 이러한 방침 변경으로 그는 일요일마다 걸어갈 수 있는 교회는 다 방문 했고 15세기제의 놋쇠와 묘석에 새겨진 라틴어의 비문을 판독하면서 다녔 다. 이 와중에 그는 지력이 뛰어난 곱사등이 노파를 만났다. 그녀는 무엇이 든지 악치는 대로 다 읽었고 광명과 학문의도시의 남만 적인 매력을 주드 에게 소상하게 말해 주었다. 그곳으로 꼭 가겠다고 주드가 굳게 결심한 것 은 그후부터였다. 그러나 그 도시에 간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현재도 한푼의 수입 이 없었다. 몇 년이 걸릴지 모를 지적 노동을 끝내는 동안 호구지책을 할 수 있는 직업다운 직업이나 안정된 일거리를 그는 한가지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시민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먹는 것과 입는 것과 자는곳이다. 그러나 먹을 것을 준비하는 노동으로 인한 수입은 너무 부족 했다. 입을 것을 장만하는 일에는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그러나 잠잘 곳을 마련하는 데는 마음이 내켰다. 도시에서는 집이 세워진다. 그래서 그도 집짓는 일을 배우기로 했다. 그 는 알지도 못하는 백부를 떠올렸다. 백부는 종매 수잔나의 아버지이고 교 회 전속의 세금 공이었으며 어떤 재료로도 여하한 중세 풍의 기술을 내보 일 수 있는 수완이 있었다. 그런 일이라면 그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백부의 업적을 더듬어 보면, 그리고 학자의 혼을 담고 있는 건물의 뼈대들과 지내는 것이 그렇게 아주 빗나간 일도 아닐 것이다. 연습 삼아 그는 자그마한 석회암 덩어리를 얻어 공부는 잠시 중단하고 틈을 내 교구의 교회에 있는 성인상의 머리와 기둥의 머리장식을 복사하는 데 열정을 쏟았다. 알프레드스턴에는 보잘것없는 석공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주드 는 대고모의 작은 가게에서 자기 대신 일할 일군을 발견하자 곧 이 석공에 게 노동을 하는 대신으로 적은 임금을 받기로 하였다. 여기서 주드는 적어 도 석회암 가공법의 기초를 배우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얼마 후 그는 같 은 장소의 교회설계사를 만나 이 건축가의 지도를 받으면서 기술을 익혔 다. 마을 교회의 황폐한 석조 건물을 능숙해질 대까지 개수하며 솜씨를 익 혔다. 이러한 기술을 익히는 것은 더욱 큰일을 하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나 석공이라는 직업 자체 도 흥미를 느끼게 했다. 그는 이제 알프레드스턴의 작은 읍에서 주당 6일 은 하숙을 하고 토요일 저녁때가 되면 메리그린 마을로 돌아왔다. 이리하 여 그는 19세가 되었으며 20세가 되어갔다. 1-6 그의 생애 중에 잊지 못할 어느 토요일 오후 3시쯤, 주드는 알프레드스 턴에서 메리그린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화창하고 온화한 여름날씨였다. 그는 등에 연장을 짊어지고 걸었고 바구니에서는 작은 끌이 큰 것과 부 딪치며 희미하게 짤랑거렸다. 주말이라 그는 일을 일찍 끝내고 평소에 잘 다니지 않던 우회로를 따라 시내를 빠져 나왔다. 대고모의 부탁으로 크레 스콤 근처의 제분소를 방문하기로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열에 들떠 있었다. 일이 년 후면 크리스트민스터에서 살게 되고 그 렇게도 꿈꾸어오던 배움의 문을 두드리게 될 자신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 했다. 물론 그는 어떤 자격으로든 지금 당장 그곳에 갈수 있었 지만 그러나 그는 현재 그가 할 수 있는 것보다 조금은 더 확실한 생계수 단을 가지고 그 도시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가 지금까지 해놓은 일들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온화한 만족감으로 전 신이 충만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때때로 길을 따라가면서 양쪽의 시골 풍경에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것들은 거의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런 행동은 그가 일 에 몰두하지 않을 때에도 그가 하는 일에 익숙해진 습관화된 어떤 행위를 자동적으로 반복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를 정말로 집중하게 하는 한 가지 는 자신이 이룩해 놓은 지적재산을 머리 속으로 평가하는 것이었다. "나는 보통의 고존, 특히 라틴어를 읽는 데는 여느 학생의 능력 정도는 가지고 있단 말야." 이것은 사실이었다. 주드는 혼자 길을 걷는 외로움을 라틴어로 가상의 대화를 나누면서 달랠 수 있을 만큼 그것에 능숙했다. "나는 <일리아드>를 두 번이나 읽었고 게다가 제9권의 피닉스의 연설이 나 제 14권에 있는 헥토르와 아이아스의 싸움, 제 8권의 아킬레스가 무장 하지 않고 싸움에 나오는 대목과 그가 입은 천상의 갑옷, 제 23권의 장례 경기와 같은 대목들은 꽤 친숙해 있다. 나는 또한 헤시오도스를 얼마간 공 부했고 투키디데스의 모음글 몇 편과 많은 희랍 성서 등도 공부했지. 다만 그리스의 방언에 대한 책이 한 가지만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첫 번째 6권과 11권, 그리고 12권을 포함해서 수학도 어느 정도 공부했지. 그리고 대수학에 있어서도 간단한 문제 정도 는 해낼 수 있어." "난 유클리드 기하학의 첫 번째 5권과 11권, 그리고 12권을 포함해서 수 학도 어느 정도 공부했지. 그리고 대수학에 있어서도 간단한 문제 정도는 해낼 수 있어." "나는 교부에 대해서도 좀 알고 로마와 영국의 역사에 대해서도 좀 알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단지 초보일 뿐이다. 그러나 책을 구하기 어려운 여기에 서는 더 많은 진전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크리스트민스터에 정착하는 것에 내 모든 심혈을 기울여야만 한다. 거기에서 나는 상당한 진 전을 보게 될 것이고 내 현재의 지식은 어린애의 무지함처럼 보이게 될 것 이다. 나는 돈을 모아야만 한다. 아니 모을 것이다. 그러면 어느 대학이든 한 군데쯤은 나에게 문호를 개방할 것이고 지금 당장은 나를 외면할지 몰 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환영해 줄 것이다." "나는 신학 박사가 될 거야." 그는 계속해서 꿈을 꾸었다. 그리고 순수하고 열성적이며 현명한 기독교 인으로서 생활을 한다면 주교가 될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가 주교가 된다면 얼마나 좋은 모범이 되겠는가! 만약 그의 수입이 5천 파운드가 되 면 4천 5백 파운드를 어떤 형태로든 기부하고 나머지로 살아도 그에겐 사 치스러운 생활이 될 것이다. 글세, 다시 생각해보니 주교는 어림없는 일이 다. 그는 대수사에 밑줄을 그었다. 아마도 수사의 자격으로도 주교만큼이나 훌륭한 학식이 있으며 유용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주교에 대해 다 시 생각했다. "크리스트민스터에 정착하게 되면, 여기서는 구할 수 없는 책들을 읽게 될 것이다. 리비우스, 타키투스, 헤로도토스, 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아리 스토파네스와 같은 것들을 말이야." "하하하! 저런, 저런!" 다른 편 산울타리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 다. 그의 생각은 계속되고 있었다. "-에우리피데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루크레티우스, 에피테투스, 세 네카 그리고 안토니우스. 그밖에도 나는 다른 것들을 섭렵해야만 한다. 교 부들에 관해 철저하게 읽고 비드나 교회사도 일반적인 것은 보아야 한다. 히브리어도 훑어보아야 한다. 난 아직 글자밖에 모르니까." "-그러나 나는 열심히 공부할 수 있다. 고맙게도 내겐 지구력이 있다..... 크리스트민스터가 내게 입학을 허락해서 내 모교가 되게 해야지. 그리고 나는 그 학교가 가장 만족하는 그의 사랑하는 동문이 될 것이다." 미래에 대한 생각에 몰두하느라 주드의 걸음은 느렸다. 그리고 그는 마 술램프에 의해 미래가 그곳에 던져지기라도 한 것처럼 땅을 쳐다보며 이제 는 아주 조용히 서 있었다. 그때 갑자기 무엇인가 그의 귀를 날카롭게 철 석하고 때렸다. 그는 부드럽고 차가운 물체가 그에게 날아와 그의 발밑에 떨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언 듯 보니 고기 조각이었다. 그 지방 사람들이 부츠에 윤을 내는데 사 용하는 거세된 돼지의 특정부위였다. 돼지는 이 근방에는 아주 많았다. 불 웨섹스의 일부 지방에서는 많은 수의 돼지를 사육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울타리의 건너편에는 시냇물이 있었다. 그제야 처음으로 그는 작은 목 소리가 들리는 것을 깨달았고 웃음소리가 그의 꿈들과 뒤섞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둑을 올라가 울타리 쪽을 보았다. 멀리 시냇물 쪽에 정원과 돼지 울타리가 있는 작은 농가가 있었다. 그 앞의 개울 주변에 돼지의 내장을 담은 바구니와 접시를 지닌 젊은 여자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 흐르는 물에 그것들을 씻고 있었다. 마침내 그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 을 느꼈는지 한두 명이 장난스럽게 그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그 여자들은 주드가 자신들을 관찰하고 있는 것을 의식하고 얌전한 척 입을 다물고 열심히 헹구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 "고맙군요, 그래!" 주드가 간단히 말했다. "난 던지지 않았어." 한 처녀가 옆사람에게 말했다. 마치 이 젊은 남자의 존재를 깨닫지 못했 다는 투였다. "나도 아니야." 두 번째 처녀가 대답했다. "아, 애니, 너 어떻게 그럴 수 있니!" 세 번째 처녀가 말했다. "만약 내가 무엇인가를 던진다면 그런 것은 안 던졌을 거다." "후후! 나는 저런 남잔 싫어!" 그들은 웃었다. 그리고 위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보란 듯이 서로에게 책 임을 미루면서 그들의 일을 계속했다. 주드는 자기의 얼굴을 닦으면서 냉소적으로 그들의 말을 받아넘겼다. "당신이 그것을 던지지 않았다. 이 말이죠!" 상류 쪽에 있는 세 사람 중 한 소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검은 눈동자의 처녀로 그렇게 예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봐 줄 만한 용모였다. 비록 피부와 성격이 좀 거칠어 보이긴 했지만, 그녀는 둥글고 풍만한 가슴과 두터운 입술, 완벽한 치아 그리고 코친 종닭의 알 같은 풍만한 피부색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완전하고 실질적인 암컷에 지나지 않았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 주드는 그의 마음속에 부글거리는 학문의 꿈을 방해한 것이 바로 이 여자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절대로 말해주지 않을 거예요." 그녀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누가 그랬건 남의 재산을 낭비해선 안됩니다." "아, 그건 별거 아니에요." "그러나 내 생각엔 당신은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은 모양인데?" "예, 그래요, 만약 당신이 좋으시다면요." "내가 내려갈까요? 아니면, 당신이 여기 위에 판자 다리로 오겠소?" 아마도 그녀는 이런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가 말 을 하고 있을 때 그녀의 눈이 그의 눈에 와서 머물렀고 거기엔 앞으로 일 어날 어떤 가능성에 대한 무언의 선언이 그녀와 그 사이에서 순간적으로 번뜩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드 폴리에 관한 한. 거기에는 어떤 종류의 예견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 이 셋중에서 선택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여자는 이러한 경우 선택되어지는 것이고, 좀더 친해지고자 하는 어떤 목적도 없이 사령부에서 오는 접촉 명 령에 단순히 복종하듯이 그의 장래 계획과는 무관하게 인생의 최후 목표를 여성에게 두고 있는 그런 불행한 남자들의 부름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 게 된다. 그녀는 벌떡 일어서면서 말했다. "거기 떨어져 있는 것을 갖다주세요." 주드는 그제서야 그녀가 자기 아버지의 사업과 관련된 어떤 문제에 대해 전할 말이 있었기 때문에 신호를 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연장이 든 바구니를 내려놓고 고기 덩어리를 주워 막대기로 좁은 길 을 헤치면서 울타리를 넘어갔다. 판자 다리를 향해 그들은 시내의 양둑을 각기 평행으로 걸었다. 그 아가 씨는 둑방이 가까워지자 주드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양쪽 뺨의 안쪽을 약간 빨아들였다. 그런 방법에 의해서 그녀가 마술 같이 웃고 있는 한, 그녀는 계속 머금고 있을 수 있는 완벽한 보조개를 만들어냈다. 자기 마음대로 보 조개를 만들어내는 것은 알려지지 않은 기교는 아니었지만, 많은 여자들이 시도하는데 비한다면 석 훌륭하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 다. 그들은 판자 다리 중간에서 만났다. 주드는 그녀의 활같은 무기를 되던져 주면서 그녀가 왜 그에게 손을 흔드는 대신에 이 기발한 대포를 사용해 그 를 무례하게 멈추게 했는지 그 설명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리의 난간을 손으로 잡고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다른 쪽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연애의 호기심으로 그녀는 눈을 돌려 그를 샅샅 이 훑어보았다. "당신은 내가 그런 수치스러운 물건을 던졌다고 생각하시진 않으시겠 죠?" "아, 물론 아니에요." "우린 어떤 것도 내버리기를 싫어하시는 성격인 아버지를 위해 이일을 하고 있었어요. 그는 그것을 가죽에 바르는 방수지로 사용한대요." 그녀는 잔디 위에 있는 고깃덩어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그것을 던졌을까요?" 주드는 그녀의 말을 의심하고 있었지만 예의상 정중하게 물었다. "뻔뻔스럽기 때문이죠. 하지만 아무에게도 내가 말했다고 하지 마세요, 꼭이요!" "내가 어떻게 말할 수 있겠어요, 난 당신의 이름도 모르는데." "아, 이런, 내 이름을 말해드릴까요?" "그래요!" "아라벨라 돈이에요. 나는 여기 살고 있어요." "내가 만일 이 길로 자주 다녔다면 그 사실을 이미 알았을 것입니다. 그 러나 나는 주로 큰길을 따라 곧장 다니거든요." "우리 아버지는 돼지를 치세요. 친구들은 내가 순대를 만들 내장 씻는 것 을 돕고 있어요." 그들은 주금씩 이야기를 진행시키며 다리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아 라벨라의 몸집과 인품이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는 남자에 대한 여자의 무언 의 부름은 드디어 주드를 본의 아니게 그 장소에 못박아 놓았다. 그것은 그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 주드는 여자를 조금도 여자 로 보지 않았고 성이란 것도 마치 그의 인생과 목적 밖의 어떤 존재로 막 연히 여겨왔을 뿐이었다. 그는 그녀의 눈에서 입으로, 입에서 가슴으로 그 리고 고의 노출된 둥근 팔로 시선을 옮겼다. 팔은 차가운 물에 젖어 얼룩 덜럭하게 반점이 생겨 있었고 대리석처럼 단단해 보였다. "당신은 정말 멋진 처녀로군요!" 그는 중얼거렸다. 그녀의 매력에 대한 그의 느낌을 표현하기에는 말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아, 당신은 나를 일요일에 보셔야만 해요!" 그녀는 기분이 좋아져서 말했다. "그래도 될까요?" 그가 물었다. "그것은 당신 생각 여하에 달려 있어요. 지금은 나를 따라 다니는 사람 이 없지만 한두 주일 후면 생길지도 모르지요." 그녀는 웃지 않고 말했다. 그래서 보조개가 사라졌다. 주드는 이상하게 기분이 붕 떠 있는 느낌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당신은 날 만날 건가요?" "좋아요." 그녀는 이맘때쯤 잠시 옆으로 얼굴을 돌려서, 말하기 전에 뺨 안쪽을 빨 아들여 다시 한 번 보조개를 만들었다. 그러나 주드는 아직 그녀의 전반적 인 인상에 대해서는 더 깊이 알지 못했다. "이번 일요일은요?" 그는 크게 마음먹고 말을 했다. "그건 내일이지요?" "그래요." "내가 찾아갈까요?" "네." 그녀는 승리감에 들떠 얼굴이 상기되었고 되돌아서면서 부드러운 눈빛으 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시냇가의 풀밭으로 내려가 그녀의 동료들과 다시 합류했다. 주드 폴리는 연장 바구니를 어깨에 메고 자신이 생각해 봐도 어이가 없 을 정도의 정열을 지닌 채 멍하니 그의 외로운 길을 다시 걸어갔다. 그가 지금 들이키는 공기는 아주 새로운 공기였다. 이것은 그가 어딜 가든지 따 라다녔으며 그것이 얼마나 계속될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튼 한 장의 유리 로 가리는 것처럼 그의 현실의 호흡에서 나누어진 새로운 것이었다. 단지 이 삼분 전까지만 해도 그가 그렇게 명확하게 틀에 짜놓은 독서, 노동과 배움에 대한 목적들이 자신도 모르게 와르르 무너져내려 한구석으로 밀려 가고 말았다. "그래, 이건 단지 잠깐의 즐거움이야."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를 끌어들이는 그 처녀의 본성에는 무언가 부족함이 있었지만 어떤 풍부함이 막연하게나마 느껴졌다. 상식 있는 사람 은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 여자 를 잠시 동안의 위안거리 정도로 단정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녀에게 있는 어떤 것은, 문학의 연구나 크리스트민스터로 가는 장대한 꿈에 몰두하는 주드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전적으로 반감을 불러일으킬 만 한 것이었다. 그녀가 처음에 그를 공격할 때 그런 화살 같은 무기를 선택 한 것은 그녀가 정숙한 아가씨가 못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것을 그는 지적인 안목으로 깨닫게 되었지만 그것마저 금방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마치 반짝이는 등불에 의해 벽에 새겨진 비명이 일순간 나타났다가 사라 지는 것과도 같은 이치였다. 스쳐 가는 이러한 분별의 힘이 곧 사라지자 밀려오는 신선하고 격렬한 쾌락에 대한 생각으로 주드는 온전히 자신을 가 눈 수가 없게 되었다. 바로 자기 옆에 놓였는데도 지금껏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감각적 흥미의 새로운 수로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가슴에 불을 질러 놓은 이성의 한 여자를, 다가오는 일요일 에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 아가씨는 동료들과 합류해서, 맑은 시냇물에 물을 튕겨 가며 내장을 두드리고 헹구는 일을 조용히 다시 시작했다. "너 그 사람을 사로잡았니?" 애니라고 부르는 소녀가 간단히 물었다. "몰라, 그것보다 다른 걸 던질 걸 그랬어!" 아라벨라가 후회스러운 듯이 중얼거렸다. "괜찮아! 비록 네가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는 아무 것도 몰라. 그는 메리 그린에 있는 두르실라 폴리 할머니의 빵마차를 몰다가 알프레드스턴에서 일한 애. 그때부터 그는 매우 콧대가 높아졌고 항상 책을 읽고 다닌대. 사 람들이 그러는데 그는 학자가 되고 싶어한대." "그가 무엇이 되든 상관 안해. 그러니 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말아 줘." "아, 넌 아니라고! 우릴 속이려고 할 필요는 없어! 만일 네가 원하지 않 는다면 무엇 때문에 그이와 이야기한 거니? 네가 좋아하든 안 하든 그는 아이처럼 단순한 사람이야. 난 다 알고 있었단다. 네가 다리 위에서 말을 건넸을 때 마치 태어나서 여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너를 쳐 다보는 그를 말이야. 그러니까 그 사람이 조금이라도 좋아하는 여자라면 얼마든지 그를 낚아챌 수 있어, 만일 옳은 방법으로 그를 잡기만 한다면 말이야." 1-7 다음날 주드 폴리는 비스듬히 천장이 기울어져 있는 방에서 탁자 위에 있는 책들과 그 위 벽토에 지난 몇 달 동안 등불 연기에 그을린 검은 반점 을 바라보며 쉬었다. 그가 아라벨라 돈을 만나고 24시간이 지난 오후였다. 그는 지난주 동안 하나의 목적 - 그리스 성서를 다시 읽는 것 -을 위해 오늘 오후를 비워 놓기로 결심했었다. 그의 새로운 성서는 그가 가지고 있는 낡은 복사본보 다 더 훌륭한 것으로 많은 교정 자들에 의해 수정된 것이었다. 그리스 바 하의 원전을 따랐고, 여백에는 주석이 있었다. 그는 이 책을 자랑스러워했 는데 대담하게도 런던에 있는 출판업자에게 주문하여 얻은, 이전에는 시도 해 본적이 없는 방식으로 구입한 책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주일에 이틀밖에 자지 않는 대고모의 조용한 지붕 밑에서 전과 같이 오후의 독서가 주는 기쁨을 즐길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의 원활하고 조용한 일상 생활에 방해가 되는 새로운 사건이 어제 일어났다. 당장 그의 기분은 겨울의 허물을 벗어버린 뱀이 새로 생긴 피부의 훌륭함과 민감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느낌이 되었다. 그는 절대 그녀를 만나러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앉아서 성서를 펴 들고 양 팔꿈치를 탁자 위에 꼿꼿이 세워 관자놀이를 손으로 짚은 채. <신 약성서>를 읽기 시작했다. H KAI NH I AHKH. 그녀를 데리러 가겠다고 약속했던가? 분명히 그랬다. 가엾게도 그녀는 집에서 기다리겠지. 그리고는 그 때문에 오후를 망치겠지. 약속은 고사하고 라도, 그녀에게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녀와의 신용을 깨뜨려서는 안 되었다. 비록 일요일과 평일 저녁만이 그의 유일한 독서시간이었지만, 다른 젊은 이들이 그토록 여러 번 놀면서 오후를 지내는 것에 비하면, 오후를 한번쯤 이런 일로 보낼 여유를 가져도 지장은 없을 것이다. 오늘이 지나면 아마 도 그녀를 다시 만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장래의 계획을 고려하면 이와 같은 일은 있어서도 안 되었다. 요약컨대, 엄청난 억센 어떤 힘이 현실적으로 그에게 강하게 작용했다. 지금까지 그를 움직였던 정신이라든가 감화력 같은 것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힘이었다. 이 힘은 그의 이성과 의지를 조금도 돌보아주지 않는 듯 했고, 이른바 그의 고상한 의도를 위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 같았으 며, 난폭한 교사가 짓궂은 학생의 목덜미를 잡고 끌고 감으로써, 그가 결국 존경도 하지 않고, 한 지역의 같은 주민이라는 점 말고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한 여인의 포옹을 향해서 떠밀려 가는 듯이 느껴졌다. <신약성서>의 문구도 지금은 더 이상 주드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미 마음을 굳힌 주드는 벌떡 일나서서 방을 가로질러 나갔다. 사실 그는 이런 경우를 예상하고 이미 나들이옷을 입고 있었다. 3분이 지나자 그는 집을 나서서 고지대의 맞은편 언덕에 있는 아라벨라의 외딴집과 마을 사이에 있 는 텅 비어 공허하고 넓은 보리밭을 가로질러 길을 내려갔다. 그는 걸으면서 시계를 쳐다보았다. 두 시간 후면 돌아올 수 있을 것 같 았고 마차 시간이 지난 후엔 책 읽을 시간도 있을 것 같았다. 작은 길이 차도와 맞닿은 곳에 있는 몇 그루의 생기 없는 전나무와 한 채의 작은 집을 지나치자, 그는 서둘러 그 옆을 자나 돌아볼 틈도 없이 왼 쪽으로 험한 내리막을 따라 '갈색의 집' 서쪽으로 걸어갔다. 거기 백악층모양으로 된 곳에서 주드는 시냇물을 따라 걸어서 마침내 그 녀의 집에 도착했다. 돼지우리 냄새가 집 뒤에서 흘러나왔고, 그 냄새의 주인공들이 꿀꿀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마당으로 들어서서 지팡이 손잡이로 문을 두들겼다. 누군가가 창문으로 그를 보았는지, 집안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라벨라! 네 남자 친구가 너를 꾀러 온 모양이다. 서둘러 가봐라, 얘 야!" 주드는 그 소리에 움찔했다.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녀를 꾀러 온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그녀와 함께 거닐 참이었으며, 아마도 키스는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꾀다'는 말은 너무 목적성이 강한 느낌이 들어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서자 눈부신 나들이옷을 차려 입은 아라벨라가 2층에서 내려왔다. "앉게나,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가?" 검은 구레나룻이 나 있는 정력적인 그녀의 아버지가 밖에서 들었던 것과 같은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곧 밖으로 나가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녀가 주드에게 속삭였다. "그러지요." 그가 말했다. " '갈색의 집' 까지 갔다 오지요. 30분이면 될 겁니다." 아라벨라는 누추한 환경 속에서도 너무 예뻤기 때문에 그는 오길 잘했다 고 생각했으며, 지금까지 자기를 괴롭혔던 모든 불안이 사라졌다. 두 사람은 우선 넓은 고지대의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오르막길을 오르는 동안 그는 이따금 그녀의 손을 잡아 도와주었다. 그러고 나서 산꼭대기를 다라 왼편으로 꺾어들어 '갈색의 집'에서 큰길과 교차하는 지점까지 산마루 길로 들어섰다. 이곳이 바로 크리스트민스터를 보고 싶은 마음에 가끔 찾 아오곤 하던 곳이었다. 그는 아라벨라에게 이 지방의 가장 흔해 바진 객담을 이야기했는데 이때 의 열성은 최근에 찬양 받는 대학의 모든 특대 연구생들과 철학을 논할 때 느꼈던 열의보다 더 대단했다. 그가 무릎을 꿇고서 다이아나 여신이나 피버스 일신에게 소원을 빌었던 장소들을 지나면서도 신화에 그러한 신들이 있었는지 생각하지 못했고 태 양은 아라벨라의 얼굴을 비추는 데 필요한 등불일 뿐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는 형용할 수 없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었다.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초기의 학자, 미래의 문학박사, 교수, 고위직 성직자 등이 되어야 할 주드는 나들이옷에 리본을 달고서 자기와 산보를 해주고 있는 이 예쁜 시골아가씨의 은혜를 베푸는 듯한 태도에 명예와 영광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갈색의 집'에 도착했다. 이 지점에서 주드는 되돌아 갈 계획이었 다. 그러나 그들이 광활한 북쪽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들로부터 2마 일쯤 떨어진 거리에 있는 작은 도시 근방에서 짙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 는 것을 보고 놀랐다. "불이 났어요!" 아라벨라가 말했다. "달려가서 구경해요. 그리 멀지 않으니까요!" 주드의 가슴속에 꿈틀거리기 시작한 그 정 때문에 이제 그녀의 기호를 꺾어보겠다는 의지는 남아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와 더 오래있을 구실이 생겨 그는 더욱 기뻤다. 그들은 바른 걸음으로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언덕 밑 평지에 도착해서 1마일쯤 걸어갔을 때 그들은 화재 현장이 생각보다 훨씬 더 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가보기로 시작한 바에야,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5시 정 각에 이르어서야 그들은 화재가 난 장소에 도착했다. 메리그린에서 약 6마 일 정도였으며 아라벨라의 집에서는 3마일 덜어진 곳이었다. 그들이 거기 에 도착하지 화재는 이미 진화되었으므로 처참한 화재 현장을 잠시 살펴본 후에 왔던 길로 되돌아섰다. 그들은 알프레드스턴의 시내를 거쳐 돌아가기 로 했다. 아라벨라가 차로 마시고 싶다고 말해서, 그들은 그다지 훌륭하지 않은 선술집에 들어가 차를 주문했다. 맥주를 주문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들은 오래 기다려야만 했다. 여종업원이 주드를 알아보고는 안에 있는 여주인에 게 속삭이듯 놀라움을 표시했다. '유별나게 거들먹거리던' 그 학생이 저속 하게 몸을 굽혀 아라벨라와 교제한다는 내용이었다. 아라벨라는 어떤 말인 가를 추측하고 애인의 진지하고 온화한 시선을 응시하면서 웃었다. 그것은 사냥감을 손에 쥐고 있는 여자의 야비한 승리감에 찬웃음이었다. 그들은 앉아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벽에 걸려 있는 삼손과 데릴라의 사 진과 탁자 위에 있는 둥근 맥주의 앙금을 보았고 발밑에 있는 톱밥으로 가 득한 타구를 둘러보았다. 이 장소의 전경은 주드에게 실망을 주었다. 저녁 해가 비스듬히 비치고 있던 일요일 저녁이라 술마시기에는 때가 너무 이르 고 달리 쉴 만한 곳도 찾지 못해서 운 나쁜 여행자가 하는 수없이 묵고 있 는 술집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차가 나오기를 더 이상은 기다 릴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어쩔 도리가 없잖아요?" 주드가 말했다. "당신 집까진 3마일을 더 걸어가야 하니까요." "맥주 같은 건 있을 거예요." 아라벨라가 말했다. "맥주요, 아, 그래요. 그걸 잊고 있었군요. 일요일 저녁에 선술집에 와서 맥주를 주문한다는 데 좀 별나기는 하지만요." "그렇지만 우린 그럴 생각은 없었어요." "그랬지요." 주드는 이쯤 되자 이렇게 성미에 맞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맥주를 시켰고 맥주는 곧 나왔다. 아라벨라가 그것을 맛보았다. "으아! 맛이 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주드도 맥주 맛을 보았다. "왜 그래요?" 그가 말했다. "사실 난 맥주 맛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꽤 좋아하지요. 그런데, 독서하 는 데 좋지 않아서 커피를 더 즐겨요. 그러나 이 맥주는 괜찮은 것 같은데 요." "섞였단 말이에요 - 마시지 못하겠어요!" 그녀가 이 맥주에서 맛을 가려낸 성분 중에는 맥아와 호프 외에도 서너 가지를 더 언급했기 때문에 주드는 깜짝 놀랐다. "별걸 다 알고 있군요!" 그는 기분 좋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녀는 맥주에 대한 불평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몫을 다 마셨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시 길을 나섰다. 이제는 날이 거의 저물어 시내의 불빛이 비 추지 않는 곳까지 오게 되자 그들은 바짝 붙어서 걸었고 드디어 몸과 몸이 맞닿게 되었다. 그녀는 그가 왜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지 않는지 의아해 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는 아주 대담한 것처럼 보 이는 것을 말했을 뿐이었다. "내 팔을 잡아요.' 그녀는 그의 팔을 잡고서 그의 어깨 쪽까지 접근했다. 주드는 여체의 온 기를 느끼면서 한 팔에는 지팡이를 끼고 오른팔로는 제자리에 있는 그녀의 오른팔을 잡았다. "우린 이 정도면 친한 사이인가요?" 그가 그녀를 살폈다. "그래요." 그녀는 말하며 혼자 속으로 덧붙였다. '좀 미지근한 사내군.' 그도 혼자 생각했다. '내가 얼마나 타락했는가!' 이렇게 두 사람이 고지대의 기슭에 다다르자 어둠 속에서도 희뿌옇게 도 로가 오르막길로 뻗어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이 지점에서 아라벨라의 집 으로 통하는 외길은 경사면을 올라가서 오른쪽의 골자기로 다시 내려가도 록 되어 있었다. 그들이 다 올라가기 전에 두 남자와 거의 부닥칠 뻔했다. 이들은 풀밭 사이로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연애하는 사람들은 - 사시사철 날씨를 가리지 않고 바깥에서 쏘다니는 걸 볼 수 있지요. 연애하는 사람들과 집없는 개들 말이요." 그들 중 한 사람이 말하더니 함께 언덕을 내려가 자취를 감추었다. 아라벨라는 가볍게 킥킥거렸다. "우리는 연인들인가요?" 주드가 물었다. "그쪽에서 더 잘 알면서요." "그런가요, 그쪽에서 말할 수도 있잖아요?" 그녀는 대답대신으로 그의 어깨의 머리를 기댔다. 주드는 그 몸짓을 알 아차리고 그녀의 허리에 한 쪽 팔을 감고서 끌어당겨 그녀에게 키스를 했 다. 그들은 대답 대신으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주드는 그 몸짓을 알 아차리고 그녀의 허리에 한쪽 팔을 감고서 끌어당겨 그녀에게 키스를 했 다. 그들은 더 이상 팔짱을 끼고 걷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원하는 대로 서로 부둥켜안았다. 주드는 날이 어두운데 어떻겠느냐고 혼잣말을 뇌까렸 다. 그들은 긴 오르막길을 어느 정도 올라갔을 때 약속이라도 한 듯이 멈 추었는데 그때 그는 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들이 정상에 오르자 그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손은 그대로 두어도 괜찮아요, 원한다면요." 그녀가 상냥하게 말했다. 그는 그녀가 말한 대로했다. 그리고 그녀가 얼마나 믿음직한가 하고 생 각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천천히 그녀의 집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자신의 집 을 나섰을 때의 시간은 세시 반이었고 다섯시 반까지는 집에 돌아와 <신 약성서>를 읽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다시 포옹하고 나서 그녀의 집까지 데 려다 주었을 때는 이미 아홉 시였다. 그녀는 잠깐만이라도 집으로 들어가자고 권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이 상하게 생각되어 마치 어둠 속을 혼자서 걸어온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 다. 그는 양보를 했고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열리자, 그녀의 부모님 외에도 몇몇 이웃사람들이 빙 둘러앉아 있 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 축하한다는 듯한 말을 했고 주드를 장차 아 라벨라의 남편 감으로 진지하게 맞아들였다. 그들과 주드는 전연 별개의 세계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장소의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아 당황했다. 그는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오늘 오후 단 한번만이라도 아라벨라와 유쾌하게 산책하고 싶은 것뿐이었 다. 이것이 전부였다. 그는 아라벨라의 계모인, 평범한 생김새에 품격이고 뭐고 없는 단순하고 조용한 여자와 대화를 나누었을 뿐 오래 머물러 있지 는 않았다. 그는 그들 모두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안도감을 느끼면서 고원 을 넘어가는 길로 뛰쳐나왔다. 그러나 그런 기분도 잠시일 뿐 얼마 안 있어 아라벨라가 다시 그의 마음 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걸으면서 어제의 주드와는 별개의 인간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책이 도대체 어떻다는 것인가? 여태까지 매일 한순간 도 헛되지 않으려고 그렇게 엄격하게 고수해 온 의지란 뭣이란 말인가? '헛되도다!' 이것은 보는 사람의 견해에 따라서 뜻이 달랐다. 그 자신은 이 제 처음으로 삶의 보람을 맛보게 되었다. 생을 헛되게 산 것이 아니었다. 대학졸업생이 되거나 목사가 되거나 아 니면 교황 따위가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여자를 사랑하는 편이 더 멋있었 다.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대고모는 이미 잠자리에 들어 있었다. 공부를 게 을리 했다는 막연한 느낌이 자신의 눈앞에 있는 모든 사물들의 표면에 씌 어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등불을 켜지 않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의 방의 어두운 내부는 그를 맞아서 슬픈 인사로 말을 건넸다. 책은 마치 그가 버리고 가버린 듯 펼쳐져 있었고 표지에 대문자로 씌어 있는 '신약성서(H KAI NH I AHKH.)'라고 죽은 사람의 아직 덜 감긴 눈 처럼, 어두운 별빛 속에서 원망이라도 하듯 자기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주드는 다음날 아침 일찍, 늘 그렇듯이 일주일간 집을 비우기 위해 대고 모의 집을 떠나야만 했다. 연장과 필수품, 읽지 않고 내버려둔 책등속을 바 구니에 넣었을 때 그는 허망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열광적인 행위를 위해 자기 자신에게까지도 숨기려고 했다. 이에 반해 아라벨라는 그녀의 모든 친구와 친지들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는 몇 시간 전 어둠 속에 싸여 연인과 나란히 거닐었던 그 길을 어슴 푸레한 새벽빛에 의지해 더듬더듬 언덕의 아래쪽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천 천히 걷다가 그는 처음으로 그녀와 키스했던 자리에 섰다. 해가 방금 전에 떴기 때문에 아마 그후로 그곳을 지나갔을 사람은 아무 도 없었을 것이다. 주드는 지면을 바라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가 허리를 굽혀 가까이 바 라보니 그들이 서로 꼭 껴안고 서 있을 때 생긴 그들의 발자국이 축축한 흙 위에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가까스로 보였다. 그녀는 지금 그 자리에 없지만 자연이라는 천 위에 상상력이 아로새겨진 자수모양(워즈워스와 키 츠의 시 인용구)은 고거 그대로의 그녀의 존재를 너무 잘 나타내주었기 때 문에 그의 가슴속에는 무엇으로도 메꿀수 없는 공허함이 차지하고 있었다. 가지를 자른 버드나무 한 그루가 그 장소 가까이에 있었다. 그 나무는 세간에 있는 보통의 버드나무와는 달라서 언젠가 본 기억이 있었다. 약속 한 대로 그녀를 만날 수 있는 날까지의 6일간이 사라져 버릴 수만 있다면, 가령 자기의 명이 이번 주로 한정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터였다 - 이것 을 그는 얼마나 절실하게 소망했던가. 한 시간 반쯤 지나자 아라벨라가 같은 길을 토요일에 함께 있었던 두 명 의 친구와 걸어갔다. 그녀는 키스했던 그 장소와 그것을 알려주는 버드나 무도 무심코 지나쳤다. 그러나 키스한 사실에 대해서는 다른 두 사람에게 그저 털어놓기만 했다. "그리고, 그가 너한테 뭐라고 하든." "음, 그러니까....." 그녀는 주드의 부드러운 말들을 차례차례로 들려주었다. 만일 주드가 울 타리 뒤에서 전날 저녁에 있었던 자신의 비밀과 행동들이 모조리 폭로되는 것을 들었다면 분명히 대경실색했을 것이다. "그 남자가 너한테 푹 빠졌나봐! 빠져도 대단히 말야!" 애니가 분별 있는 척 속삭였다. "넌 좋겠다!" 잠시 후에, 아라벨라는 묘하게도 나직하고 굶주린 듯한 육감적인 어조로 대답했다. "그 사람 나한테 반했어. 틀림없어! 그러나 난 반했다는 건 마음에 안차. 그 사람의 것이 되고 싶어 - 결혼해줘야 해! 난 그 사람을 가져야 해. 만 일 내가 그에게 나 자신을 바치지 못한다면 난 미쳐버릴 거야! 내가 그를 처음으로 보았을 때 그렇게 해야 한다고 느꼈었어!" "그는 낭만적으로 곧고 정직하니까, 네가 올바른 방법으로만 그를 붙들 면 남편으로 삼을 수 있을 거야." 아라벨라는 잠시 생각한 후에 물었다. "올바른 방법이 뭐야?" "아니, 모르고 있어 - 정말 몰라!" 세 번째 여자인 사라가 말했다. "난 정말 몰라 - 그렇지만 보통 하는 것처럼 사랑을 설득하기는 해도 사 내가 너무 기어오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정도지!" 세 번째 여자가 두 번째 여자를 보면서 말했다. "얘는 정말로 모르고 있나봐!" "분명히 모르고 있어!" 애니가 말했다. "도시에서 살았다고 해도 괜찮을 애가 말야! 그럼 우리가 좋은 걸 가르 쳐줘야겠구나. 나한테도 배울 게 있을 테니까." "그래, 어떻게 하면 좋은데, 남자를 틀림없이 잡는다는 게? 난 순진해서 아무 것도 모르니까 아는 대로 다 털어놓아 봐!" "남편으로 만드는 거야." "남편으로." "그 사람같이 의리 있고 진실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시골사람을 골라서. 군인이라든가 뱃사람이라든가 여기저기 도시에서 온 사람이라든가 그리고 불쌍한 여자들을 속이는 남자들은 안 돼. 난 친구가 그런 해를 입는 건 원 치 않아." "그런 사람 같으면 좋겠는데!" 아라벨라의 친구들은 서로 쳐다보고 나서는 익살맞게 눈을 치켜 뜨고 능 글맞게 웃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한 여자가 아라벨라에게 가까이 다가 가서는 근처에 아무도 없는데도 낮은 목소리로 내용을 말해주었고 다른 여 자는 아라벨라가 어떤 반응을 보여줄 것인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지켜보 았다. "어머나!" 아라벨라는 천천히 말을 했다. "난 그런 생각은 전혀 못했어! 그렇지만 그 남자가 의리 없는 인간이라 면? 그렇다면 여자가 그런 짓을 안 하느니만 못하지!"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 새끼를 잡지! 게다가, 너는 일을 벌이기 전에 그 사람이 의리가 있는지를 확인해야 해. 너는 틀림없이 안전할 거야. 나한테 그런 기회가 오기만 한다면! 많은 아가씨들이 그렇게 한단 말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도대체 여자들이 어떻게 결혼을 한단 말이니?" 아라벨라는 생각에 잠겨 조용히 걸어갔다. "해보겠어!" 그녀는 속삭였다. 그러나 친구들에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1-8 어느 주말, 주드는 여느 때처럼 알프레드스턴에 있는 그의 하숙집을 나 와 메리그린에 있는 대고모에게로 떠났다. 이 길은 이제 침울한 늙은 친척 을 만나고 싶은 것과는 전혀 다른 큰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언덕을 오르기 전에 오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것은 정해진 약 속에 의해서가 아닌 단지 지나는 길에 잠깐 아라벨라를 보려는 의도였다. 그녀의 집에 도착하기 전에 그의 민첩한 눈은 마당 생울타리 너머에서 여 기저기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그녀의 머리를 알아볼 수 있었다. 문안으로 들어서자 세 마리의 살찌지 않은 돼지새끼들이 우리를 훌쩍 뛰어넘어 도망 쳤고 그녀는 우리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몰아 넣으려고 혼자서 애를 쓰고 있었다. 주드를 보았을 때 그녀의 표정은 돼지들을 몰고 있었던 딱딱함에서 사랑 으로 가득찬 부드러운 표정으로 변했다. 그녀는 연민의 눈으로 주드를 보 았다. 돼지들은 그 틈을 이용해 몸을 돌려 도망쳐버렸다. "아침에 겨우 가둬 놓았는데." 그녀는 소리지르며 애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돼지를 쫓는 데만 몰두했 다. "스패들홀트 농장에서 바로 어제 데리고 온 것들이에요. 거기서 아버지 가 아주 비싸게 사오신건데 - 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네. 어리석 은 것들! 마당문 좀 닫고 돼지 모는 것 좀 도와주실래요? 집에 남자라고는 아무도 없고 어머니만 계세요. 신경 쓰지 않으면 놓쳐 버리거든요." 그는 그녀를 돕기 위해 쌓아둔 감자나 양배추를 뛰어넘으며 잽싸게 움직 였다. 가끔씩 둘이 함께 뛰기도 했고 그때마다 그녀를 붙들고 잠시 동안 키스했다. 첫 번째 돼지는 금방 돌아왔고 두 번째 것은 약간 힘들었다. 그 런데 다리가 긴 세 번째 놈은 고집이 세고 날쌔서 마당 생울타리의 구멍을 빠져나가 샛길로 도망쳐버렸다. "따라가지 않으면 놓쳐요!" 그녀가 말했다. "빨리 날 따라오세요." 아라벨라는 단숨에 돼지 뒤를 따라 밖으로 뛰어나왔다. 주드는 그녀와 나란히 뛰었고 달아나는 돼지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이 따금 그들은 지나가는 소년에게 잡아달라고 외쳐 보았으나 돼지는 교묘하 게 빠져나가 전처럼 계속 뛰어갔다. "내손을 잡아." 주드가 말했다. "숨이 찬가봐." 아라벨라는 기꺼이 뜨거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뛰어 갔다. "돼지를 사올 때 집까지 몰고 왔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그렇게 하면 꼭 돌아가는 길을 알게 되거든요. 마차로 실어왔어야 하는 건데." 이때쯤 돼지는 넓은 고지로 통하는 열려진 문까지 도달했다. 문을 통과 한 돼지는 짧은 다리가 할 수 있는 한, 민첩하게 달렸다. 만일 수적 자들도 문안으로 들어와 고지의 꼭대기까지 올라가 돼지를 계속 쫓으려 한다면 전 주인 집까지 달려야 할게 분명했다. 정상에서 보이는 돼지는 마치 작은 점 처럼 보였다. 먼저 살던 집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젠 다 틀렸어요." 아라벨라는 소리쳤다. "그놈은 우리가 그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벌써 가 있을 거예요. 도중에 잃어버리거나 도둑맞은 것이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그 집에선 우 리 돼지란 걸 아니까 바로 돌려줄 거예요. 후 - 너무 덥네." 그녀는 주드의 손을 꼭 잡은 채 한쪽으로 몸의 방향을 바꿔 성장을 멈춘 왜소한 가시나무 아래쪽의 잔디 위에 몸을 내던지며 갑자기 주드를 끌어당 겼다. "어머, 미안해요. 넘어뜨릴 뻔했군요. 하지만 나도 너무 지쳐서요!" 언덕 꼭대기의 비탈진 흙 위에 아라벨라는 무기력하게 누워 몸을 화살처 럼 쭉 뻗고는 푸른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전히 주드의 손을 따뜻하 게 잡은 채였다. 주드는 그녀 옆에 팔꿈치를 괴고 누웠다. "이렇게 달려 왔는데, 모두 헛수고예요." 그녀는 계속 말해였고 너무 숨이 가빠 몸을 들썩거렸다. 얼굴은 홍조를 띄었고 도톰한 붉은 입술은 벌어졌으며 피부에는 땀이 영롱한 이슬처럼 맺 혀 있었다. "저 -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안해요?" "나도 숨이 차요. 언덕을 단번에 올라왔더니." 두 사람은 환전한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 주위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없었다. 1마일 이내에 누군가가 있다면 반드시 그들의 눈에 띄게 될 것이 다. 사실, 그들은 이 마을의 언덕배기 중 한곳에 와 있었기 때문에 크리스 트민스터 주위의 모든 풍경은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곳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주드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머, 이 나무 위에 이렇게 귀여운 것이 있네요." 아라벨라가 말했다. "쐐기 벌레의 일종일까. 전엔 못 보던 아주 예쁜 녹색과 황색벌레예요!" "어디?" 주드는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거기선 안 보여요. 이리 와야 해요." 주드는 몸을 굽혀 더욱 그녀 가까이 가서 머리를 그녀의 얼굴 바로 앞까 지 내밀었다. "아냐, 난 안 보여." 그는 말했다. "저기 봐요. 가지가 갈라진 곳, 잎이 흔들리고 있는 바로 옆 - 저기!" 그녀는 주드를 부드럽게 자기 옆으로 끌어들였다. "안 보이는데." 그는 반복해서 말했다. 그의 뒤통수가 아라벨라의 볼과 맞닿아 있었다. "그렇지만 일어서면 볼 수 있을 거야." 그래서 그는 일어나 그녀의 시선이 뻗고 있는 방향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쩜 그렇게 둔할 수가 있어요?" 그녀는 짜증스럽게 말하면서 얼굴을 돌려버렸다. "난 그런 건 보이든 말든 상관없어. 그렇잖아?" 그는 말하고 나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일어서요." "왜요?" "난 키스를 하고 싶어.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단 기다리고 있었 단 말야." 그녀는 얼굴을 홱 돌리고서 잠시 동안 주드를 곁눈으로 빤히 들여다보고 있더니 이윽고 입술을 약간 삐죽거리며 벌떡 일어나서는 갑자기 고함을 쳤 다. "나는 빨리 가야 해요!" 그리고는 집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주드는 그녀를 따라 함께 걸었다. "한 번이면 돼!" 그가 애원했다. 그렇게는 안될걸요!" 그는 놀랐다. "왜 그래?" 아라벨라는 화가 난 듯 입술을 꽉 다물었다. 주드는 귀염받는 새끼 양처 럼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발걸음을 늦추고서 나란히 걸 으면서 조용히 다른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손을 잡으려 하거나 허리를 끌어안으려 할 때면 아라벨라는 어김없이 손을 뿌리쳤다. 이리하여 두 사람이 그녀의 집 근처까지 내려왔을 때 아라벨라는 오만불손 한 태도로 주드에게 살짝 머리를 숙이고는 집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내가 그녀에게 너무 편하게 대했나?" 주드는 혼자 중얼거리고 한숨을 내쉬면서 메리그린으로 돌아갔다. 일요일 아침, 아라벨라의 집안에서는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매주 한번 꼴 로 벌어지는 안식일의 특별한 저녁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그녀의 아버지 는 창틀에 매달린 작은 거울 앞에서 수염을 깎았고 바로 그 옆에서 어머니 와 아라벨라는 콩깍지를 까고 있었다. 이웃집 여자가 근처 교회에서 아침 예배를 보고 오는 도중에 면도칼을 손에 쥐고 창 옆에서 수염을 깎고 있는 돈을 보자 고개를 끄덕이면서 안으 로 들어왔다. 그 여자는 느닷없이 아라벨라에게 농담조로 말을 걸었다. "난, 네가 그 남자하고 같이 달려가는 걸 봤단다. 아무쪼록 잘 됐으면 좋 겠구나." 아라벨라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다만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듣기론 그는 곧 크리스트민스터로 갈 모양이더라." "그 말을 최근에 들으셨나요, 요 최근에 말예요?" 아라벨라는 사납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 아냐! 그에게 그런 계획이 있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다 알고 있었 어. 그는 단지 기회만 엿보고 있던 중이라던데. 아, 그래. 그 사람도 같이 다닐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요즘 젊은 사람들은 믿을 수가 있어 야지. 여기저기 여자만 집적거리고 다니거든. 우리 젊었을 때하곤 너무 틀 려." 수다쟁이가 나가자 아라벨라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있잖아요, 아빠, 엄마께서 오늘 저녁에 차를 마신 후에 애들린 댁 으로 가주셨으면 해요. 다들 잘 있는지 안부도 전해주시고요. 그게 싫으시 거든 펜즈워스에 저녁 예배가 있으니까 그리로 가보시든지요. 걸어서 갈 수 있을 거예요." "그래? 그럼 오늘 저녁에 무슨 일이라도 있니?" "아니요, 그저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요. 그 사람 부끄럼을 많이 타는 사 람이라서 식구들이 다 있으면 안 찾아오거든요. 전 그 사람을 무척 좋아하 는데 마음을 쓰지 않으면 그 사람을 붙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단 말이에 요." "날씨도 좋구, 네가 원한다면 우린 나가도 상관없다만...." 오후에 아라벨라는 주드와 만나 산책을 했다. 그는 이번 주 내내 희랍어 나 라틴어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언어에 관한 책은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언덕길을 배회하며 올라가서 산등성이를 따라 가파르게 뻗어있 는 경주로까지 간 다음 근처에 있는 고대 브리튼의 유적이라는 원형의 흙 으로 만든 둑이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주드는 이 경주로가 개척되었던 웅 대한 시대의 일이나, 아마도 로마인이 이 지역을 아직 모르고 있던 시대에 이 길을 수시로 왕래하곤 했었을 가축상인들을 생각했다. 그들의 아래쪽 평지에서 교회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 수리가 점점 약해지면서 단음으로 되었다가 빨라지더니 멈추고 말았다. "이젠 돌아가요." 종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아라벨라가 말했다. 주드도 동의했다. 그녀가 옆에만 있다면 어디에 있으나 상관없었다. 그들 이 아라벨라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우물쭈물 거리며 말했다. "난 들어가고 싶지가 않아. 그런데 왜 당신은 그렇게 서두르는 거요? 아 직 어두워지지도 않았는데." "잠깐 기다려봐요." "어머! 모두 교회에 가셨나봐." 그녀는 구두닦개 뒤를 더듬어 열쇠를 찾아 문을 열었다. "그럼, 잠깐만 들어오시겠어요?" 아라벨라가 가벼운 기분으로 물었다. "우리 둘뿐이에요." "들어가고 말고요." 주드는 뜻밖에도 사정이 변했기 때문에 쾌활하게 대답했다. 두 사람은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차가 마시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다. 그러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오히려 아라벨라와 앉아서 이야기를 나 누고 싶었다. 그녀는 상의와 모자를 벗었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딱 붙어 앉았다. "제발 내 몸엔 손대지 마세요." 그녀는 상냥하게 말했다. "난 달걀을 갖고 있거든요. 이걸 다른 안전한 곳에도 넣어두는 편이 나 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녀는 상의의 깃을 풀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요?" 그녀의 연인이 물었다. "달걀이에요. 코친 달걀이에요. 난 지금 신기한 종을 부화시키려고 하는 중이에요. 어딜 가나 항상 지니고 다니지요. 이렇게 해서 3주정도만 있으면 병아리가 나와요." "어디다 두는 거요?" "여기요." 그녀는 가슴에 손을 넣어서 달걀을 꺼냈다. 그것은 양모로 싸여져 있었 고 만일의 경우를 위해 돼지 방광으로 감싸둔 것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주 드에게 보이고 나서 제자리에 도로 넣고서 말했다. "이젠 내 옆으로 오지 않도록 해요. 깨고 싶지 않아요. 처음부터 다시 시 작해야 하니까요." "당신은 왜 이런 이상한 짓을 하지?" "옛날부터 해온 습관인 걸요. 생물을 낳게 하는 것은 여자의 본성일 테 니까." "나에겐 몹시 성가신데."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거참 잘 됐군요! 이 정도로 참으셔야 해요." 아라벨라는 의자의 방향을 바꾸고 그 뒤에서 조심스럽게 뺨을 주드에게 내밀었다. "너무 째째하군." "아까 달걀을 꺼냈을 때 나를 잡았더라면 좋을 뻔했는데요! 어서!" 그녀는 도전해오듯 말했다. "다시 꺼낼께요!." 그녀는 다시 한 번 달걀을 재빨리 끄집어냈다. 그러나 주드가 그녀 쪽으 로 손을 뻗기도 전에 아라벨라는 그것을 또 제자리에 넣고 말았다. 그리고 는 자신의 계략에 흥분해서 웃었다. 하지만 약간의 실랑이가 있은 후에 주 드가 달걀을 향하여 돌진해가서 의기양양하게 그것을 손에 넣고 말았다. 그녀의 뺨이 빨개졌고 그 역시 두 사람이 하고 있었던 일을 깨닫고 나서 얼굴을 붉혔다. 두 사람은 숨을 몰아쉬면서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자 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한번만 키스해 줘. 이제 난 달걀을 안 깨고서도 키스할 수 있게 됐으니 까. 그리고 돌아갈게!" 그러나 아라벨라는 벌떡 일어나면서 외쳤다. "그 이전에 날 먼저 잡아야 해요!" 그녀가 도망치기 시작했기 때문에 주드는 그 뒤를 쫓았다. 벌써 방안은 어두워졌으며 작은 참문에서 스며드는 빛으로는 그녀가 어떻게 하고 있는 가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웃음소리로 아라벨라가 계단을 뛰어 내 려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주드는 그녀 쪽을 향해 달려갔 다. 1-9 그로부터 2개월쯤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에도 그들은 자주 만났다. 아라 벨라는 불만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언제나 상상 속에 잠겨 기다리기도 하 고 동시에 의아해하기도 했다. 어느 날 그녀는 순회의사 빌버트를 만났다. 그녀는 그 근처의 시골집에 살고 있는 농부들처럼 이 돌팔이 의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경 험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라벨라는 요즘 약간 우울해 있었지 만 의사가 떠나기 전쯤에 그녀는 좀더 명랑하게 되었다. 그날 밤도 그녀는 주드와 만날 약속을 지켰다. 주드는 슬퍼 보였다. "난 떠날 거야." 그는 아라벨라에게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야 할 것 같아. 그렇게 하는 것이 당신이나 나에게 더 좋을 거야. 이건 내 생각인데-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야 했어! 물론 내가 더 잘못했지만, 돌이키기에는 아주 늦진 않았어." 아라벨라는 울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니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말은 참 쉽게 하시네요! 나는 아직 당신에게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눈물이 젖은 눈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다보았다. "무슨 일이야?" 그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설마?" "그래요! 당신이 날 버리면, 난 어떡해요!" "아라벨라, 무순 말을 그렇게 하는 거요. 당신! 내가 당신을 버리지 못한 다는 걸 잘 알면서." "그렇다면......" "당신도 알고 있듯이 난 아직 임금도 제대로 못 받는 일을 하고 있는 거 나 다름없어. 이런 일을 먼저 생각했어야 했던 거요. 일이 이렇게 되기전에 - 그러나 당신의 사정이 그렇다면 우리는 결혼을 해야겠지! 그밖에 내가 월 더 생각할 일이 있겠어?" "난 생각해 봤단 말이에요. 당신,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리면 더욱 도망치 고 싶어질 거라고요. 그 일을 혼자 떠맡을까봐!" "내가 생각지도 않고 있는 것까지 알고 있나 보군. 하긴 6개월 저에, 아 니, 3개월 전까지만 해도 결혼 같은 건 꿈에도 생각 안 했었지. 결혼은 내 계획을 완전히 무너뜨릴 테니까. 당신하고 알게 되기 전에 세운 계획이었 지만 이제 와 보니 계획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여러 가지 책에 관한 일이며 학위의 일, 엄두도 못 낼 특대 장학금에 관한 일 같은 여러 가지로 꿈꿔 왔었지만, 좋아. 우리 결혼합시다. 그럴 수밖에 없어." 그 날밤 그는 어둠 속을 거닐면서 자신을 반성했다. 그의 생각으로는, 아 라벨라가 여성의 표본으로서 별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 었다. 지나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주드가 경험한 것 처럼 여자와 친해져 길을 잘못 든 명예심 있는 청년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만이 시골의 풍습이었기 때문에 그는 아라벨라에게 했던 말을 굳게 지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책임을 질 각오가 되어 있었다. 자기 자신을 달래려고 하는 말인지는 몰라도 그는 아직도 아라벨라에게 인위적인 믿음 같은 것을 간직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아라벨라 자신이 아니라. 그녀를 보는 그의 관점에 있다고 그는 때때로 간결하게 생 각했다. 교회에서의 결혼 예고는 접수되어 다음 일요일로 날짜가 잡혔다. 교구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젊은 폴리가 얼마나 우매한 사람인지에 대해 이야 기들을 했다. 그토록 수많은 독서의 결과가 이 모양이 되어서 저러다가는 애써 모은 책을 팔아 냄비를 살 지경이 되겠다고들 말했다. 대체로 그러한 사정을 추측했던 사람들은, 아라벨라의 양친들도 그 속에 끼어 있었지만, 주드와 같은 정직한 청년이 순진한 여인에게 잘못을 저질 렀다면 그것을 보상해 주기 위해서는 결혼하는 것이 당연한 행동이라고 주 장했다. 두 사람을 결혼시킨 목사 역시 만족스러워 하는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앞에서 말한 그 주례목사 앞에서, 지난 몇 주일 동안에 믿고 느끼고 원했던 것과 같은 신뢰와 애정과 희망을 죽을 때까지 간직하겠다도 맹세했다. 이 맹세 못지 않게 주목할 만한 것은 어느 누구도 그들의 맹세 를 듣고서 놀라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제빵업에 종사하고 있는 폴리의 대고모는 결혼 케이크를 만들고, 이것이 가난하고 어리숙한 조카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고 씁쓸하게 말 했다. 그가 살아서 대고모에게 폐를 끼치느니보다 그의 양친들과 함께 저 세상으로 가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라벨라는 케이크 몇 조각을 잘라 흰 편지지에 싸서, 순대 채우는 작업 을 같이 했던 동료인 애니와 사라에게 보냈다. 각 묶음에는 '유익한 충고에 감사하며' 라는 쪽지가 붙어 있었다. 이 신혼부부의 전도는 가장 낙천적인 사람들에게조차도 그리 아름다운 것이 못되었다. 석공의 도제였던 19세의 그는 견습기간이 끝날 때까지는 절반의 임금밖에 받지 못했다. 그는 처음에 시내에서 살 필요가 있을 거라 고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되면 아내는 아무 쓸모 없는 존재가 될 뿐이었다. 그래서 아주 작을지라도 조금씩 수업을 늘려 나아가야만 한다는 다급한 필 요에 의해 그는 '갈색의 집'과 메리 그린 사이에 있는 쓸쓸한 길가의 오두 막으로 거처를 정했다. 여기서 살게 되면 야채 밭에서 수익을 올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기대해 왔던 생활은 절대 아니었고, 게다가 매일 알프레드스턴을 왕 복하는 먼 길을 걸어야만 했다. 그러나 아라벨라에게는 이 모든 임시변통 이 일시적인 것으로만 여겨졌다. 그녀는 남편을 얻었다. 그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벌이 능력이 있는 남편 은 약간만 겁을 줘도 옷이나 모자를 사줄 테고, 장사에 매달리게 되면 저 어리석은 책들을 던져 버리고 실질적인 일에 매진할 것이다. 주드는 결혼식 날 밤에 댁고모집에 있는 그의 낡은 방-아주 열심히 회랍 어와 라틴어를 공부했던-을 포기하고 이 작은 오두막집으로 신부를 데리고 왔다. 아내가 처음 옷을 벗는 걸 보았을 때 그의 온몸엔 소름이 돋았다. 아라 벨라가 머리 뒤에 크게 쪽을 틀어놓았던 머리카락을 고의적으로 풀어서 빗 어 내리더니 그가 사준 화장대 위에 걸쳐놓았던 것이다. "맙소사! 당신 머리가 아니잖아?" 그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요. 요즘 점잖은 사람들은 다 이런 것을 써요." "말도 안 돼! 도시에선 그럴지 몰라도 시골에선 달라. 더욱이 당신은 본 래의 머리카락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아?" "그래요, 시골 사람으로선 그렇겠지요. 도시 남자들은 머리숱이 많은 편 을 더 좋아한 대요. 또한 내가 올드브릭햄에서 술집 여종업원이었들 때......." "올드브릭햄에서 여급 노릇을 했다고?" "그래요. 정확히 말하면 여급은 아니지만, 선술집에서 술을 따르곤 했지 요. 아주 잠깐 동안이에요. 그뿐이에요. 누군가가 이걸 사보라고 해서, 단지 호기심에서 사봤던 거예요. 돈만 많으면 올드브릭햄이 당신이 늘 말하던 크리스트민스터보단 훨씬 더 좋은 도시예요. 지위 있는 집안의 여자들은 다 가발을 쓴다고- 이발소의 조수가 말해 주던데요." 주드는 기분이 나빴다. 비록 그 말이 어느 정도는 사실일지 모르지만 도 시에 나아가 몇 해 동안 사면서도 소박한 생활이나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순진한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아타깝게도 어떤 여자들은 기교를 향한 본능이 혈관 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에 처음 보는 순간부터 남을 흉내 내는 명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여자가 가발을 쓰는 것이 그렇게까 지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이 일을 생각하지 않기 고 결심했다. 갓 시집온 새색시는 비록 집안 형편이 신통치 않을 때라도 이삼주동안은 흥미를 일깨워 보려고 궁리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아라벨라 역시 그녀의 새로운 처지나 주변 환경에 대해 남다른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 것들 이 음울한 현실의 그림자를 씻어 버리고 사뭇 보잘것없는 새댁에게도 잠시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주드 폴리의 새댁도 이런 기분으로 어 느 장날 알프레드스턴의 거리를 걷고 있었을 때, 그녀의 오랜 친구인 애니 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이 친구와 결혼식 이후 처음으로 마주쳤다. 두 사람은 전처럼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우선 웃기부터 했다.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 세상이 재미있게만 보였다. "거봐! 그 계획이 잘 들어맞았지?" 그 처녀가 유부녀에게 말했다. "그런 사람한텐 잘 먹혀들 줄 알았어.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넌 자랑 해도 돼, 그런 사람이라면." "그래." 폴리의 아내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리고 그건 언제쯤이니?" "쉿! 그런 것은 없어." "뭐?" "내가 잘못 알았어." "어머, 아라벨라, 어쩜...... 네 속을 알 수 없구나! 잘못 알았다니! 너 참 영리하구나........ 그만하면 천재 못잖은 솜씨로구나! 나 같은 건 거꾸로 서 도 모를 일이다. 난 또 네가 진짜로 낳을 것으로만 알고 있었어....... 그렇게 속일 줄은 몰랐구나!" "너 내가 속임수를 썼다고 말하지 마! 거짓말은 아니었단 말야. 난 정말 몰랐었어." "그가 틀림없이 떠들어댈 거야! 토요일 밤 같은 땐 너에게 바람을 피웠 다며 덤벼들게 될 거고! 어쨌든 완전히 걸려들었다고 할 텐데...... 두 번씩 이나 계략에 빠져버렸다고 말이야!" "첫번 일은 인정하더라도, 둘째번 일은 말 안 하겠어..... 흥, 그는 어차피 신경도 안 쓸 테니까! 내 말이 잘못됐다고 하면 오히려 기뻐할 거야. 그 밖 에 내가 무슨 짓을 학 수 있겠어? 어차피 결혼하고 말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라벨라가 소란을 피우게 된 일이 근거가 없다는 사 실을 당연히 고백해야 할 시기가 오자 그녀는 약간 불안한 기분이 들기 시 작했다. 그 기회는 어느 날 밤 잠자리에 들 때쯤에 닥쳐왔다. 두 사람은 길가의 쓸쓸한 오두막집에 있었다. 주드는 매일 그날의 일이 끝나게 되면 여기까 지 걸어서 돌아왔다. 그날 따라 12시간을 꼬박 일했기 때문에 그는 아내보 다도 먼저 잠자리에 들었다. 아라벨라가 방으로 들어섰을 때 그는 벌써 반 쯤 잠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아내가 작은 거울 앞에서 옷을 벗는 것도 거 의 의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내는 한 가지 행동에 그는 번쩍 눈을 뜨게 되었다. 그녀는 마 침 얼굴이 그의 쪽으로 반사되게끔 앉아 있었기 때문에 양뺨의 보조개를 교묘히 만드는 데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이것 은 그녀가 자신의 뜻대로 해낼 수 있는 기묘한 기술로 한 번에 쪽 빨아들 일 수가 있었다. 그는 요즘 함께 살면서 처음에 알고 지냈을 당시보다 그 보조개가 훨씬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만해, 아라벨라!"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별로 해로울 건 없지만, 그런 짓을 하고 있는 당신이 보기 싫어." 아라벨라는 돌아다보면서 웃었다. "아니, 안 주무셨어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도 꽤나 촌스러우시네요! 아무 것도 아닌 걸 가지고 말이에요." "어디서 배웠지?" "어딘지 모르겠어요, 선술집에 있었을 때 내 보조개는 벌로 힘을 안 들 여도 사라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젠 틀렸어요. 그때는 얼굴이 통통했었으 나 까요." "난 보조개 같은 건 상관하지 않아, 보조개로 여자가 예뻐지는 건 아닐 테니까. 특히 결혼한 여자로선...... 그리고 당신과 같이 육체가 풍만한 여자 는 말이오." "대부분의 다른 남자들은 당신과 달라요." "다른 남자가 어떻게 생각하건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오. 어떻게 당신은 그런 걸 다 알고 있단 말이오?" "선술집에 있었을 때 듣곤 했어요." "흠....이제 알겠군. 언젠가 일요일날 오후에 둘이서 나들이 갔을 때 맥주 에 무슨 불순물이 있다든지 했던 것도 결국 그때의 경험에서 나온 거군. 당신과 결혼했을 때만 해도 당신이 아버지의 집에서만 살았을 줄 알았는 데." "더 잘 알아보셨어야 했어요. 태어난 고향에서만 있기 보단 조금이라도 세련된 것은 다 보고 싶었던 거예요, 집에선 벌로 하는 일없이 밥만 축내 고 있었던 때라 3개월 정도 나가 살았어요." "당신도 곧 일거리가 많이 생겨나겠지. 안 그래?"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야 물론 애들을 낳아야 하단 말이지." "어머." "언제쯤 태어날까? 늘상 애매하게만 말하지 말고 정확히 말해줄수 없 소?" "말하라고요?" "그렇소. 예정일 말이오." "말할게 없는데요." "뭐라고?" "잘못 알았나 봐요." 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아라벨라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또 그럴 수가 있지?" "여잔 가끔 잘못된 공상을 하는 일이 있어요." "그러나..... 내가 물론 너무 준비 없이 덤볐기로서니, 가구 하나 없고 돈 도 한푼 없는데, 그런 식으로 서둘러 결혼식을 올리고서 집 마련도 제대로 안 되어 오두막으로 당신을 데리고 오게 하다니. 그 말을 들었기 때문에 당신 쪽 입장을 봐주어야 했어. 내 쪽의 준비가 채 되기도 전에 말이오. 맙 소사!" "그렇게 흥분하지 마세요. 엎지른 물을 주워담을 수는 없잖아요."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주드는 간단히 대답을 하고 나서 누워 버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만 이 흘렀다. 다음날 아침 주드가 눈을 떴을 때, 그는 이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문제가 되었던 점에 대해서는 아라벨라의 말을 받아들 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경우에 처하게 될 때, 세상의 통념의 힘이 작용 하는 한은 결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왜 그러한 통념이 통하는 걸까? 주드에게는 희미하고 몽롱하지만 사회의 풍습에는 무엇인가 부당한 것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랜 세월의 사색과 노고를 다 바쳐 훌륭하게 세워 놓은 계획을 말살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사회의 관습 탓이 아니었는가. 하급동물보다 우월한 존재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조금이나마 자신의 과업 을 세대의 일반적인 진보에다 공헌해 보겠다던 사나이의 유일한 기회를 빤 히 바라보면서 놓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회의 관습 때문이 아니었는가. 악이라는 성질은 조금도 내포되어 있지 않고, 고작 사람의 약점이라고 묵 과해 버릴 수도 있을 정도의 처음으로 경험한 일시적인 본능에 허를 찔렸 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과연 이 점에서 무엇을 했던가, 아니야. 그녀에게 어떠한 손해를 입혔던가- 그녀 자신은 차지하고라도 생애의 나머지를 불구 자인 양 속박 당하고 말 그러한 함정 속에 빠져들었던가. 그는 자신에게 되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라벨라와의 결혼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문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다행스러웠다. 그러나 결혼 그 자체만은 엄연한 사실로 남아 있었다. 1-10 가을 내내 주드와 그의 아내가 살찌운 돼지를 잡을 때가 다가왔다. 주드 는 보통 때보다 6시간 이상 늦지 않고 알프레드스턴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날이 새기 시작하자마자 곧 도살할 채비를 갖추었다. 그 날밤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하였다. 날이 새기까지는 아직 한참이 남아 있을 즈음 주드는 창밖을 내다보다 지면이 눈으로 덮여 있음을 알아챘다. 눈은 계절에 비해 꽤나 깊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몇 송이가 내기 고 있는 듯했다. "돼지 도살꾼이 오지 않을 수도 있겠어." 그가 아라벨라에게 말했다. "아니에요. 올 거예요. 빨리 일어나서 물을 끓이도록 하세요. 당신이 챌 로우에게 돼지를 데치도록 하려면요. 난 털을 그을리는 일이 제일 좋지만." "일어날까. 난 우리 고향 식이 제일 좋아." 주드가 말했다.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구리 솥 밑에 불을 지피고 콩깍지를 밀어 넣 었다. 촛불을 켜지 않았기 때문에 활활 타는 불꽃이 방안까지 기분 좋게 빛을 던지고 있었다. 그러나 불을 때고 있는 목적에 생각이 미치자 좋은 기분이 사라지고 말았다. 마당 구석에서 끊임없이 꿀꿀 소리를 내고 있는 아직 살아 있는 동물의 껍질을 태워 털을 벗기기 위해 물을 끓여야 한다 니. 푸줏간 주인이 오기로 되어 있는 6시 반에 물은 끓었고 주드의 아내가 밑으로 내려왔다. "챌로우 왔어요?" 아라벨라가 물었다. "아직." 두 사람은 기다리고 있었다. 눈 내린 아침은 을씨년스런 빛으로 차차 밝 아져 왔다. 아라벨라는 밖으로 나아가 길가를 바라보다가 돌아왔다. "안 와요. 간밤에 술을 마셨나 보죠. 첼로우가 못 올 정도로 눈이 내리진 않았어요." "그럼 연기해야겠어. 아무 소용없이 물만 끓였군. 저지대엔 눈이 높이 쌓 여 있을지 누가 알아." "연기 못해요. 이젠 돼지 식량이 다 떨어졌을 걸요. 어제 아침에 먹인 보 릿가루 섞인 먹이가 마지막이었어요." "어제 아침이라고? 그후엔 뭘 먹였다는 거지?" "아무 것도." "뭐...... 그럼 굶겼단 말이오?" "그래요. 마지막 하루 이틀은 그렇게 해요. 말끔한 창자를 얻기 위해서 죠. 그런 것도 모르니 참 딱하시기도 하지." "그러고 보니 저렇게 우는 이유를 알겠군, 가엽게도." "그나저나 도살하는 일은 당신이 맡아야겠어요. 할 수 없는 일이지요. 하 는 방법을 가르쳐 드릴 테니까요. 차라리 내 자신이 해치워 버릴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첼로우에게 부탁해야 할만큼 큰 돼지이긴 해도. 그 사람의 칼과 도구가 달린 바구니는 미리 갖다놨으니까. 둘이서 하면 될 것 같군 요." "물론 당신이 해선 안 돼." 주드가 말했다. "내 손으로 해야지 꼭 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는 돼지우리 쪽으로 걸어나가 2야드쯤 삽으로 눈을 치워놓고 정면에다 대를 세워 칼과 밧줄을 준비했다. 바로 근처의 나무에서 울새 한 마리가 내려다보고 있다가 앞으로 벌어질 불길한 장면을 예상했는지 배가 고픈데 도 날아가 버렸다. 이때쯤에 아라벨라가 합세했다. 주드는 손에 밧줄을 쥐고 돼지우리 안으로 들어가 겁먹은 동물에게 올가 미를 씌웠다. 돼지는 놀라 비명을 질렀고, 그 비명이 마침내 분노의 소리로 변했다. 아라벨라는 돼지우리의 문을 열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힘을 합 쳐 이 희생물을 대(臺)위로 끌어올려 놓았다. 주드가 돼지를 찍어누르고 있 는 동안 아라벨라가 돼지를 뒤집은 다음, 대에 묶어 꿈틀대지 못하도록 네 발을 줄로 챙챙 동여맸다. 돼지가 질러대는 소리는 갑자기 다른 소리로 변해 버렸다. 이제는 분노 의 소리가 아니고 절망의 외침으로 변했는데. 오래오래 길게 끌며 늘어지 고 체념해 버린 소리가 되고 말았다. "이런 일을 하게 될 줄 알았다면 차라리 돼지를 기르지 말 걸! 내 손으 로 밥을 쥐서 길렀는데." 주드가 말했다. "그렇게 마음 약한 말을 하면 안 돼요! 찌를 칼은 여기 있어요. 끝이 뾰 족해요. 어떻게 하든 좋지만 너무 깊이는 찌르지 말아요." "시간이 안 걸리게 효과적으로 찌르도록 하겠어. 그게 중요하단 말이야." "그러면 안돼요!" 아라벨라가 외쳤다. "살에서 피를 충분히 뽑아야 해요. 시간을 끌어 천천히 죽여야 해요. 살 에서 피가 덜 빠져 빨개진 것을 갖고 가면 20파운드 당 1실링 씩 손해를 보게 되요 혈관을 건드리기만 해요. 그렇게 배우고 자랐기 때문에 제대로 알고 있어요. 피를 오랫동안 흘리게 하는 것이 훌륭한 도살업자지요. 적어 도 8분이나 10분쯤은 죽이지 않고 시간을 끄는 거예요." "살빛이야 어떻든 상관없어. 가능하면 30초도 안 걸리게 해서 죽여 버리 고 말겠어." 주드는 단호하게 말했다. 도살업자가 하는 식대로 그는 벌렁 누워 있는 돼지의 목덜이 털을 깍아내 고 지방육을 갈라 놓았다. 그리고 힘껏 칼을 밀어 쑤셨다. "제기랄! 이런 건 처음 봤어요!" 그녀가 말했다. "너무 찔렀어요! 그렇게 말했는데...." "조용히 해요. 아라벨라. 조금은 불쌍하다고 생각 좀 해!" "피 받는 통이나 갖다 대요.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그것은 서툴기 그지 없었지만 자비롭게 이루어졌다. 피는 쭉 뻗쳐 나와 서 아라벨라가 바랐던 것처럼 졸졸 흘러내리지 않았다. 죽어가는 짐승의 외침은 제 3의 음조를 나타냈고 그것은 고뇌의 비명으로 바뀌었다. 마침내 유일한 친구로만 알았던 자에게 배반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돼지는 그 응시하는 눈을 아라벨라에게 고정한 채로 격렬한 원한의 빛을 던지고 있었 다. "울음소리를 못 내게 해요." 아라벨라가 말했다. "그는 소리를 내게 내버려두면 누군가가 올 거예요. 나 우리 손으로 이 런 짓하는 것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아라벨라는 주드가 땅에 내던진 칼을 집어들고서 상처를 쑤셔 기관을 잘 라 버렸다. 돼지 울음소리는 곧 그치고 다 끝나가던 숨소리가 끊어진 그 끝에서 새어 나왔다. "좀 낫군요." 그녀가 말했다. "못할 짓이군." 주드가 말했다. "어차피 돼지는 죽기 마련이에요." 동물을 움찔하며 마지막 경련을 일으켰으며 꽉 매어진 줄에도 불구하고 있는 힘을 대해 가며 발길질을 계속했다. 한순간에 떨어지던 붉은 피가 멈 추더니 커다란 숯덩이 같은 검은 응혈이 나왔다. "못된 녀석 같으나라구..... 언제나 할 수 있는 한끝까지 버티려고 한다니 까요." 피가 뜻밖에 왈칵 쏟아져 나왔기 때문에 주드는 놀라 비틀거렸다. 그는 균형을 잡으려다가 그만 피를 받아 놓은 통을 차 버렸다. "이봐요!" 아라벨라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이제 검은 순대는 못 만들게 됐어요. 너무나 아까워요. 다 당신 때문이 에요!" 주드는 통을 바로 세웠으나 이미 그 속에는 김이 나는 액체가 겨우 3분 의 1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거의 다 눈 위로 튀어 무섭고도 추한 광 경을 만들었다. 이것은 고기를 손에 넣는 일반적인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 하는 사람들에게는 잔혹하게만 보였다. 돼지의 입술이나 콧구멍은 창백해 졌으며 이윽고 하얗게 변했고, 수족의 근육도 축 늘어졌다. "고마워라! 죽었어!" 주드가 말했다. "돼지 도살이 이렇게 더러운데 뭐가 그렇게 고마운지 모르겠네요!" 아라벨라가 질책하듯이 말했다. "못사는 사람들도 먹고살아야 해요!" "알아요. 알고 있어요. 당신을 나무라고 있는 게 아니오." 갑자기 옆에서 사람 소리가 들렸다. "어이. 젊은 부부들. 잘 해치웠는데요! 제가 했던들 그쪽보다 솜씨 좋게 는 못했을 거요. 그렇고 말고요!" 칼칼한 목소리가 마당 문간에서 드려왔다. 돼지를 도살한 장소에서 그들 은 딱딱하고 억센 몸짓으로 기대어 서서 두 사람이 해 놓은 결과를 비평하 듯 바라보고 있는 챌로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서서 웃고 있으니 기분 놓으시겠지요!" 아라벨라가 말했다. "당신이 늦어지는 바람에 고기는 피투성이가 돼서 반은 못쓰게 된 걸요! 20파운드에 1실링 꼴로 쳐도 팔릴까 말까 에요." 첼로우가 사과했다. "조금만 기다렸으면 좋았을 텐데." 그가 말하고 나서 머리를 저었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해선 안 돼요. 젊은 새댁. 홀몸도 아닐 텐데. 무리를 하더라도 정도가 있어야지." "그런 건 당신이 상관할 필요 없어요." 아라벨라는 웃으며 말했다. 주드도 웃었지만 그의 웃음 속에는 강한 고 통 같은 것이 감돌고 있었다. 챌로우는 도살 작업이 늦어진 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더운물로 돼지 를 씻기도 하고 털을 깎기도 했다. 주드는 자기 상식이 모자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또 자기 대신에 남에게 이런 일을 시킨다 하더라도 역시 같은 결과가 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런데도 자기가 한 일을 남자로서 만 족할 수가 없었다. 횐 눈이 짐승의 피로 더렵혀졌다는 사실이 그리스도교 교도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정의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에게는 어쩐지 불길한 일처럼 생 각되었다. 그러나 이 일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할지 알 수 없었다. 확실히 자신은 아내의 말처럼 정이 너무 깊은 바보였다. 그는 이제 알프레드스턴으로 가는 길이 싫어졌다. 길이 그의 얼굴을 비 웃는 듯이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길가에 있는 사물들은 아내에게 구애하던 당시의 여러 가지 일을 회상시켜 주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눈 에 띄지 않게끔 주드는 일터에서 돌아오면 가능한 한, 책을 읽었다. 그러나 독서를 좋아한다 해도- 요즈음은 노동자라도 독서 정도의 취미는 갖고 있 으니까-보통사람의 영역을 탈피하거나 새로운 사상을 얻기란 가의 어렵다 고 느끼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최초로 아라벨라를 알게 되었던 시 냇가를 지나고 있을 때, 마침 그전과 다름없는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아라벨라의 친구 중 한 아가씨가 오두막집에서 그녀의 친구들에게 이야 기를 들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주드의 일이 화제가 되었던 것은 아마도 먼 발치에서 그의 자태가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오두 막집 벽이 얇아서 지나가는 주드의 귀에 그들끼리 하는 말이 그대로 들릴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얘, 그 애에게 꾀를 부리게 한 것은 바로 나란 말이야! '호랑이 굴에 들 어가야 호랑이를 얻는다.' 고 해주었거든. 내가 만일 꾀를 이용하게 하지 않았다면 그 앤 우리처럼 그런 남자의 정부가 될 순 없었을 거야." "틀림없이 그 앤 그에게 그런 말을 했을 때 아무 일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아라벨라가 이 여자에게서 무슨 꾀를 빌려 그의 정부니 아내니 하는 신 분을 얻었단 말인가? 이 암시는 불쾌했고 또 그의 마음을 괴롭혀 놓았기 때문에 집에 도착했을 때도 그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마당 문간에 바구 니를 던져놓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 그리고 대고모의 집에 가서 거기서 저 녁밥을 얻어먹기로 했다. 이 때문에 그는 약간 늦게 집에 도착했다. 그러나 아라벨라는 도살한 돼 지의 비계 덩어리에서 라드(돼지기름을 정제한 것)를 녹이느라 분주했다. 그녀는 하루종일 마을에 가 있었기 때문에 일이 밀려 있었다. 자신이 들었던 말을 아내에게 내뱉지 않으려고 주드는 거의 입을 떼지 않았다. 그러나 아라벨라는 매우 수다스러웠으며 무엇인가 말하는 도중에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의 호주머니 속에 책이 꽂혀 있는 것을 보고 그 녀는 좀더 많이 벌어야 하겠다고 덧붙여 말했다. "견습공의 급료는 아내를 부양할 만큼 넉넉하지 못해." "그럼 마누라를 얻지 말았어야죠." "이봐, 아라벨라! 그거 안됐군. 어떻게 결혼하게 됐는지 자신이 더 잘 알 면서." "그때 당신에게 말했던 것은 사실이었어요. 하나님께 맹세코 정말이라니 까요. 빌버트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요. 임신이 안된 것만도 당신 에게는 다행인줄 알아요!" "그걸 말하는 게 아니야." 주드는 성급히 말했다. "그 얘기 말고, 당신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당신 친구들이 나쁜 꾀를 쓰게 한 거 말이요. 만일 그 여자들이 그런 짓을 하도록 하지 않았다 면 우린 현재와 같은 속박에서 자유로웠을 텐데. 솔직히 말한다면 이 속박 때문에 우린 서로가 몹시 고통받고 있는 거요. 슬픈 일인지는 모르지만. 이 건 사실이오." "누가 당신에게 내 친구들 이야기를 했지요?" 어떤 나쁜 꾀를 말이에요? 꼭 듣고 싶어요." "푸우.....말하지 않겠어." "그렇지만 당신.....말해야 해요. 말 안 하면 비겁해요..." "좋아." 주드는 자신이 알게 되었던 사실을 살짝 암시해 주었다. "그라나 이런 얘기를 더 이상 들먹이고 싶진 않소. 이제 이 이야기는 하 지 맙시다." 아라벨라의 변명하려던 태도는 수그러들고 말았다. "그건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녀가 차가운 웃음을 띄며 말했다. "어떤 여자라도 그 정도의 권리는 있다고 생각해요. 결국 잘못되는 쪽은 여자일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 않아, 아라벨라. 남자가 그 때문에 평생 동안 붙어 다니는 벌을 안 받아도 된다던가 혹은 또 남자가 결혼 않고 버려도 여자가 일생 괴로워 하지 않는다면 여잔 그런 권리를 가져도 좋을지 모르지. 더욱이 한때의 잘 못이 그때만으로 끝장나거나 그 해만으로 끝나 버린다면 그런 일을 해도 괜찮을지 몰라. 그러나 일이 벌어지게 되면, 남자가 정직한 사람이라면 여 자는 남자를 함정에 빠뜨리는 결과가 되고 남자가 나쁜 사람일 경우에 여 자는 자기가 파놓은 함정에 자신이 빠져들고 마는 격이니까.... 그런 짓은 할 게 못되는 거야."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았겠어요?" "내게 생각할 시간을 줬어야 했지..... 그런데 당신은 왜 오늘밤 안달을 해가면서 돼지 비계를 녹이고 있는 거요? 이제 그만 둬요!" "안 그러면 내일 아침에 해야 해요. 오래 두면 굳어 버리니까." "그럼 내일 해요." 1-11 일요일인 다음날 아침 열시에 아라벨라는 다시 간밤의 일을 시작했다. 이 일감은 전날 밤에 있었던 화재를 떠오르게 했다. 그리고 그 것은 그녀 를 지난밤과 똑같이 걷잡을 수 없는 기분으로 몰아 넣었다. "메리그린에선 나에 관해 그런 식으로 얘길 하고 있나요-내가 당신을 옭 아맸다고? 대단한 분을 잡았군요.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을요!" 화가 나 있던 그녀의 눈에 주드의 중요한 책 몇 권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식탁 위는 책 같은 것이 놓여 있어서는 안 되는 장소라고 생각했다. "이런 책을 여기에 두다니!" 그녀는 화가 나 고함을 지르며, 책을 한 권씩 집어들어 마룻바닥 위에다 던졌다. "내 책에 손대지 마!" 그가 말했다. "그러고 싶거든 내던져도 좋지만 그렇게 더럽히는 것은 참지 못하겠군!" 라드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아라벨라의 손은 뜨거운 기름으로 더럽혀 져 있었다. 그래서 책표지에는 그녀의 손자국이 역력히 남았다. 그러나 그 녀는 일부러 몇 권의 책을 더 마룻바닥에 내던졌다. 마침내 주드는 더 이 상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치밀어서 그녀의 양팔을 잡아 중지시켰다. 그 러던 중 우연히 그녀의 묶였던 머리카락이 풀어지면서 귓전까지 흘러내렸 다. "놔요!" "책에다 손대지 않겠다고 약속해!" 그녀는 주저하듯 망설였다. "놔줘요!" 잠시 후에 그녀는 말했다. "약속해!" 주드가 손을 놓아주자 그녀는 방을 가로질러 문까지 가서 결의에 찬 표 정으로 한길로 나갔다. 아라벨라는 여기저기 거닐면서 줄곧 머리카락을 잡 아당겨 주드가 했던 것보다 더욱 헝클어지게 만들었고 윗도리의 단추도 몇 개 풀었다. 일요일 아침은 맑고 깨끗했으며 서리가 내려 있었다. 알프레 드스턴 교회의 종소리가 북쪽에서 미풍을 타고 들려왔다. 사람들은 나들이 옷을 입고 길을 따라 걷고 있었는데 대게는 연인들이었다. 몇 개월 전, 같 은 길을 시시덕거리며 걷고 있었던 주드와 아라벨라를 연상시키는 차림새 들이었다. 행인들은 그녀의 기이한 모습에 놀라 되돌아보곤 했다. 모자도 쓰지 않 은 채로 산발이 된 머리칼을 바람에 날리면서 속옷은 벌어져 있고, 일할 때의 모습 그대로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어 올려졌고 양손은 녹은 기름 냄 새를 마구 풍겼다. 지나가던 어느 사람은 겁난다는 시늉을 해보이면서 '하 느님 저희들을 구원해 주소서!' 하고 말했다. "그가 나를 어떻게 했는지 좀 보세요!" 그녀가 소리쳤다. "교회에 나가야 할 일요일 아침마다 일만 부려먹고 머리채를 잡아당기고 옷을 뜯어 놓아요!" 주드는 격양되어 우격다짐으로 그녀를 끌고 들어오려고 바깥으로 나갔으 나 갑자기 분노가 사그라 들었다. 두 사람 사이는 이미 끝나 버렸으며 그 녀가 어떤 짓을 하든 자신이 무슨 일을 하든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을 깨달 았다. 그는 멈추어 서서 아라벨라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일생이 무너지 고 말았다고 주드는 생각했다. 그것은 결혼이라는 두 사람의 근본적인 과 실에 의해 무너져 버렸다. 친근하기만 하면 한 평생의 동반자로, 어떻게 해 서든 꾸려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으로 인해 필연적인 관계도 없이 일 시적인 감정으로 결혼하게 된 데 따른 결과였다. "당신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학대했던 것처럼 그리고 당신 고모가 당신의 고모부를 학대했던 것처럼 당신도 나를 학대하는 거죠?" 그녀가 물었다. "당신네 집안은 남편이든 아내든 죄다 이상한 운명이군요!" 주드는 멍하니 그녀를 놀란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라벨라는 그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고서 지칠 때까지 걸었다. 그도 그 자리를 떠나 잠 시 동안 정처없이 방황한 후에 메리그린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는 대고모댁에 들렀다. 대고모의 병세는 최근 들어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대고모님, 우리 아버지가 어머니를 학대하셨나요? 그리고 고모도 고모 부를!" 주드는 난로 옆에 앉으면서 불쑥 물었다. 노인은 항상 쓰고 있던 유행에 뒤진 모자의 챙 밑으로 쇠약해진 눈을 치 켜뜨고 말했다 . "누가 그런 소릴 하더냐?" "다 들었어요. 난 전부 알고 싶어요." "네 마누라가 - 난 그런 걸로 보고 있다만 - 그런 것을 폭로하다니 바보 로그나! 결국 대단치도 않은 일인데 말이다. 너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께 지낼 수가 없어서 헤어졌을 뿐이다. 네가 아직 아기였을 때다만, 알프레드 스턴의 시장에서 이리로 오던 길에 - '갈색의 집' 옆의 산꼭대기에서 말이 다 - 그게 마지막 싸움이었지. 그 길로 헤어지고 말았다. 네 에미는 그리고 나서 곧 세상을 떠났단다. 간단하게 말해서 물 속에 뛰어들었던 거지. 네 애비는 널 데리고 남부 웨섹스로 갔고 그 뒤로 두 번 다신 이 마을에 오지 않았단다." 주드는 아버지가 북부 웨섹스나, 모친에 관해 임종하던 날까지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았음을 상기했다. "너의 고모도 마찬가지다. 남편에게 학대를 당해 나중엔 도저히 같이 살 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자그마한 계집애를 데리고 런던으로 가버렸단다. 폴 리 집안은 혼인하고는 맞지 않는가 보구나. 아무래도 우리하곤 맞지 않나 보다. 우리 혈통엔 내버려두면 곧잘 하던 짓도 억지로 해야 한다면 영 기 분이 내키지 않는 성미가 있단다. 이것이 너도 내 말을 듣고서 장가를 들 지 말았어야 하는 이유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헤어진 장소가 '갈색의 집' 옆이라고 말씀하셨던가 요?" "조금 더 가서 펜워스로 가는 길로 갈라지는 곳에 표지가 서 있지. 그곳 이야. 이 얘기하곤 상관없다만 옛날엔 그곳에 교수대가 있었다고 한다. 그 런 얘기는 하지 말자꾸나." 그날 저녁 주드는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인사하고 대고모의 집을 나섰다. 그러나 탁트인 고지대에 도달했을 때 길을 벗어나 어떤 큼직한 둥근 못가 로 다가갔다. 유달리 몸에 스며들 정도는 아니었지만 서리가 계속 내리고 있었고 머리 위에는 커다란 별이 서서히 나타나서 반짝였다. 주드는 먼저 한 다리를 연못 가장자리의 얼음 위에 내딛은 다음 또 다른 다리를 내딛었 다. 그러자 몸무게로 인해 얼음에 금이 갔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연못의 중심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갔다. 발밑에서는 얼음이 날카로운 소 리를 내었다. 한복판쯤 왔을 때 그는 주의를 둘러보고 펄쩍 뛰어보았다. 금 이 가는 소리는 되풀이되었지만 얼음은 깨지지 않았고 그는 연못 속으로 빠지지 못했다. 다시 한번 뛰어 보았으나 얼음 깨지는 소리는 이미 멈춰 있었다. 주드는 가장자리로 되돌아와 땅 위로 올라섰다. 그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무엇 때문에 얼음이 깨지지 않았을까? 자신 은 자살할 수 있을 정도로 위엄 있는 인간도 못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 다. 평화로운 죽음은 그를 그들의 신하로 삼기 싫어했고, 그를 받아들여 주 지도 않았던 것이다. 자살보다도 더 저급한 어떤 행동을 그가 할 수 있겠는가? 현재의 타락한 상태와 맞먹을 보다 더 저속한 행위는 대체 무엇이 있겠는가? 술에 취해 볼 수도 있었다. 그런 방법이 있다는 것을 그는 잊고 있었다. 술에 탐닉한 다는 것은 절망에 빠진 무기력한 인간이 통례로 빠져드는 판에 박은 상투 수단이다. 그는 어째서 많은 사람들이 선술집에 북적거리는지 알 것 같았 다. 그는 북쪽을 향해 언덕을 성큼성큼 내려가서 잘 모르는 이름 없는 술 집에 들렀다. 안으로 들어가 앉자마자, 벽에 걸린 삼손과 데릴라의 그림을 보고 그는 여기가 아라벨라와 처음 사귀게 되었던 일요일 밤에 함께 왔던 장소임을 알았다. 그는 술을 청하고 한 시간 동안을 줄기차게 마셔댔다. 그날밤 늦게 비틀거리며 집을 향할 때 주드는 의기소침한 기분이 깨끗이 걷히었고 머리도 아직은 꽤 맑아 있었다. 그는 소리내어 크게 웃으면서 지 금까지와는 달리 변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자신을 아라벨라가 어떤 태도로 맞이할 것인지 궁금했다. 그가 들어섰을 때 집안이 캄캄했기 때문에 그는 비틀거리면서 가까스로 등불을 켰다. 바로 그 순간 돼지고기를 요리하고 남은 비계와 넓적한 냄비 가 눈에 띄었으나, 돼지머리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낡은 봉투의 안쪽에 쓴 단 한 줄의 사연이 난로의 면직물에 덮인 통풍기에 핀으로 꽂혀 있었다. -친구들에게 갑니다.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다음날 아침 그는 하루종일 집에 남아서 돼지의 잔해를 알프레드스턴으 로 보냈다. 그리고 나서 집안을 청소하고 문에다 자물쇠를 채운 후 아내가 돌아오면 이내 알 수 있는 장소에 열쇠를 두고서 알프레드스턴의 석공 직 장으로 되돌아갔다. 그날밤 그는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와 보았는데, 아라벨라가 돌아왔다는 흔적은 없었다. 다음날도 같은 식으로 지나갔고, 또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 로 지나갔다. 그후 아라벨라로부터 편지가 왔다. 그녀는 그에게 싫증이 났다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는 느림보인데다 그 가 보내고 있는 그런 종류의 생활은 신물이 나고, 그녀도 좋아질 가망성이 없지만 그도 역시 좋아질 가망성이 없다고 했다. 그와 같은 일을 써 내려 간 뒤에 그녀는 계속해서 이렇게 썼다. 그가 아는 바와 같이 요즘은 돼지 장사도 잘 안되어 양친은 호주로 이민을 떠날 문제를 생각해 오다가 마침 내 가기로 결심이 섰기 때문에 이의가 없다면 자기도 양친과 함께 갔으면 한다고 했다. 자기 같은 여자는 시시한 고장에 있기보다는 그쪽으로 가게 되면 운이 트일 기회도 많아질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주드는 그녀가 이민을 가는 문제에 대해 추호도 이의가 없다고 답장을 써서 보냈다. 그녀가 가고 싶어하니까 이것은 현명한 처사이며 양쪽에 이 익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고 썼고, 편지 속에다 돼지를 팔아 얻은 돈 이외 에 많지는 않지만 그가 가진 돈을 동봉했다. 그날 이후로 주드는 아내의 소식을 듣긴 했는데 아라벨라의 아버지나 가 족은 당장 떠나지는 않았고 가재도구를 팔아 치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이 었다. 돈의 집에서 경매가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서 주드는 자기 자신의 가재류를 간추려 달구지 편에 아라벨라 앞으로 보내주었다. 그렇게 함으로 써 아라벨라가 딴 도구와 함께 경매에 팔 수도 있을 것이며 아니면 그녀가 좋아하는 물건을 빼고 나머지만 팔아서 돈을 만들 수도 있으리라. 그런 뒤에 알프레드스턴의 하숙집으로 돌아간 주드는 어떤 가게 앞에 나 붙어 있는 조그마한 광고지에 자기의 장인이 가재를 팔고 있다는 전단이 나붙은 것을 보고서 그 날짜를 유심히 보았다. 그러나 막상 당일에도 주드 는 그 장소에 가지 않았고 알프레드스턴에서 남쪽가도를 통해서 왕래하는 사람과 달구지가 그 경매 때문에 눈에 띄게 많아진 것도 깨닫지 못했다. 며칠 후에 그는 거리의 한길에 면한 그을린 어느 고물상의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쪽에는 경매에서 사온 것이 분명한 소스팬이나 의류, 국수 방망이, 놋쇠 촛대, 회전 거울 등 잡다한 물건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주드는 액자에 들어있는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그 사진은 바로 자신의 초상이었다. 이것은 아라벨라에게 주기 위해 일부러 찍었던 것으로 어느 지방 사람을 시켜 단풍나무로 액자를 만들게 하여 결혼식 당일 아라벨라에게 주었던 것 이다. 사진 뒷면에 날짜와 함께 써넣은 '주드가 아라벨라에게' 라는 글귀는 아직 그대로 있었다. 그녀는 다른 물건들과 함께 이 사진을 경매에 붙여 처리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아!" 사진과 함께 무더기로 쌓여 있는 물건들을 바라보고 있는 주드에게 고물 상은, 그것이 주드 자신의 것인 줄도 모르고 이렇게 말을 건넸다. "그건, 메리그린으로 가는 길에 있는 한 농가에서 제가 경매를 통해 구 입한 물건들이지요. 사진만 빼내면 그 액자만으로도 아주 유용하게 사용하 실 수 있을 것입니다. 1실링에 드리죠." 벌써 아내에게 그에 대한 모든 감정조차 깡그리 사라지고 없었는지 그가 보내준 사진까지 팔아 넘겼다는 말없고 무신한 증거가 그나마 남아있던 주 드의 희미한 애정을 결정적으로 잠재워 버렸다. 그는 1실링을 지불하여 사 진을 사 가지고 하숙집으로 돌아와 액자도 함께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이삼일 후 그는 아라벨라의 부모가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편 지로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만나고 싶다는 의향을 전했으나 그녀에게서 자 신은 이왕 떠나기로 했으니 만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전갈을 받았 을 뿐이었다. 이쯤 되면 떠난다는 것은 틀림없었다. 그들이 이민을 떠난 다 음날 주드는 일과를 끝내고 저녁식사를 한 뒤 밖으로 나갔다. 그는 별빛 속을 걸으면서 생애에서 가장 큰 감동을 경험했던 바로 그 고지대를 향해 눈에 익은 길을 따라 걸어갔다. 그것은 다시 그의 것인 된 것 같았다. 주드는 현재의 자신을 확실히 자각할 수가 없었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그 길을 따라 걷고 있는 자기가 아직도 소년처럼 느껴졌다. 저 꼭대기에서 꿈꾸며 서 있었던 그때의. 크리스트민스터와 학문에 대한 열정이 다시금 마음속에 타올랐다. 그때로부터 아직 단 하루도 지나 가지 않았으며 자신 이 마치 그때의 그 소년인 듯했다. "그러나 난 어른이야." 그는 중얼거렸다. "내겐 아내가 있어. 더욱이 아내와 다투고, 헤어지는 등 더욱 성숙한 경 험을 했지." 이윽고 그는 그의 부모들이 이별을 고했던 바로 그 장소 근처에 자신이 서 있다는 것을 상기했다. 조금만 더 가면 그는 그 꼭대기에 이르를 것이 었다. 옛날에 크리스트민스터가 보인다고 생각했던 곳이다. 혹시 그것은 그 가 크리스트민스터라고 착각했던 장소에 불과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길 가 바로 옆에는 여는때처럼 이정표가 서 있었다. 주드는 그 쪽으로 가까이 가서 그 도시까지의 거리가 표시된 숫자를 읽는다기보다는 오히려 손가락 으로 만져보았다. 그는 옛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이 이정표의 뒷면에 예리한 끌로 야망 을 나타내는 글씨를 의기양양하게 파놓았던 것이 떠올랐다. 그것은 도제 생활에 들어갔던 첫째 주에 했던 일로 그대까지만 해도 어울리지 않는 여 자에 빠져 있긴 했지만 아직 희망을 굽히지는 않았었다. 그 글자를 아직 읽어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쐐기풀을 헤치고 뒤쪽으로 들어가 보았 다. 오래 전에 그토록 열중해서 파놓은 흔적을 그는 성냥불빛으로 분간해 낼 수 있었다. 저곳으로 가자 주드 폴리 잡초와 쐐기풀 속에서도 상처 하나 입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흔적을 보고서 주드의 혼에는 옛날의 불꽃이 타올랐다. 확실히 자기 계획은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전진하는 것 - 설혹 이 세상의 추한 것을 보더러도 병 적인 비탄만은 피해 보자는 것 - 이 아니었던가? Bene agere et loetari - 선을 행하여 기뻐함 - 이것이 스피노자라는 사람의 철학이라는 말을 들었 지만 지금은 자기 자신의 철학이었다. 조금 떨어진 장소로 가서 그는 동북쪽에 떠올라 있는 태양을 바라보았 다. 그저 믿음으로 보지 않았다면 거의 알아볼 수가 없을 만큼의 희미한 후광 - 작고 흐린 성운 - 이 실제 거기에 있었다. 그가 바라던 바였다. 이 제, 도제 기간이 끝나게 되거든 크리스트민스터로 가볼 것이다. 그는 한결 기분이 나아져 그의 하숙집으로 돌아와서 기도를 올렸다. 제2부 크리스트민스터에서 스스로의 영혼 외에 그는 별을 가지고 있지 않다. <새벽 전의 노래>의 서곡 16절 8행 -스워번 가까이 있다는 것을 서로 알게 되는 첫걸음을 만들어 마침내 사랑을 만들게 된다. <전신>의 4절 59행 -오비디우스 2-1 그 후 주드의 생애중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 그는 아라벨라와 나누었던 사랑과 순탄치 못한 결혼생활, 그리고 파멸로 이어진 3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어슴푸레한 풍경을 헤치고 크리스트민스터를 향해 걷고 있었다. 그는 도시의 남서쪽으로 1, 2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와 있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이 메리그린 마을과 알프레드스턴에서 꽤 떨어져 있음 을 알았다. 그의 도제기간은 끝났으며 등에 메고 있는 그의 연장 가방은 그가 새로운 시작의 길에 들어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이 시작은 아라벨라와의 교제와 그녀와의 결혼이라는 세월을 제한다면 그가 거의 10 년 동안이나 고대해 온 것이었다. 주드는 생김새가 잘 생겼다기보다는 오히려 힘차고 명상적이며 성실한 젊은 청년이었다. 그의 얼굴은 거무튀튀했고 얼굴에 어울리는 검은 눈과 짧게 다듬어진 턱수염 때문에 그의 나이보다도 성숙해 보였다. 숱이 많은 곱슬머리와 함께 이 수염은 빗질할 때나 일을 할 때, 머리에 앉은 돌가루 를 씻어낼 때 조금은 골칫거리였다. 석공으로서의 그는 시골에서 습득한 솜씨로 기념비의 돌자르기와 교회의 복구 공사를 위한 석회석의 고딕식 세공이나 또는 일반적인 조각을 포함해 서 어떤 종류의 일도 해낼 수 있었다. 그가 런던에 있었다면 아마도 더 전 문적인 '주물(鑄物)석공' 이나 엽상(葉狀)장식 조각공' 또는 '인물상 조각공' 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오후에 알프레드스턴에서 크리스민스터로 가는 도중에 있는 가까운 도시까지는 짐마차로 갔다. 그리고 그는 필요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마음내키는 대로 나머지 4마일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늘 이렇게 걸어서 그곳에 가겠다고 공상해 왔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도달한 궁극의 충동에는 희한한 인연이 얽혀 있었다. 젊은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그것은 이성적인 것보다 감성적인 것이었다. 그는 알프레드스턴에서 하숙할 때, 늙은 대고모를 방문하러 메리그린에 갔었다. 대고모의 벽난로 선반 위에 놓여 있는 한 쌍의 놋쇠 촛대 사이로 폭 넓은 챙이 달린 모자를 쓴 귀엽고 아리따운 처녀의 사진이 장식되어 있 는 것이 그의 눈에 띄었다. 그 모자 가장자리 뒤쪽은 마치 후광(後光)의 빛 살처럼 사방이 훤하게 빛났다. 그는 그녀가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대고모는 그녀가 그의 사촌인 수 브 라이드헤드이며 사이가 좋지 않은 일가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질문이 더 계속되자, 그녀가 사는 곳이 어디고 또 무엇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하여 간 크리스트민스터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대고모는 그 사진을 그에게 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진 속 의 모습은 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 잠재적인 영상은 그가 선생님 을 따라 크리스트민스터로 가고 말겠다고 했던 그의 결심을 더욱 부추겼 다. 그는 매끄럽게 구부러진 언덕의 꼭대기에 멈춰 서서 처음으로 그 도시를 가까이에서 바라보았다. 회색 돌로 짓고 암갈색의 지붕을 얹은 건물들의 도시가 웨섹스 경계에서는 소리를 지르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 었다. 겨우 발끝 하나만 들여놓아도 닿을 것만 같은 거리에 자리한 이 도시는, 고대왕국이 있었던 평원의 젖줄로서 웨섹스 평야를 유유히 흘러가는 템즈 강의 최북단에 위치해 있었다. 건물들은 석양 속에 고요히 잠겨 있었고 수많은 첨탑과 둥근 지붕 위에 서 번쩍이고 있는 이곳저곳의 풍향기는 전반적으로 흐릿한 도시의 풍경에 광채를 더해 주고 있었다. 주드가 언덕을 내려오자 짧게 자른 버드나무 사이로 황혼으로 어두워져 가는 평탄하게 이어진 길이 보였다. 그는 그 길을 더듬어 걸어갔다. 그러자 곧 도시 외곽의 등불이 점점이 보였다. 그 등불들 중에는, 여러 해 전에 그 가 꿈꾸며 보낸 나날들 속에서 그의 눈을 가만히 응시하게 할 정도의 희미 한 영광을 하늘로 쏘아 보내던 등불도 있었다. 그 등불들이 누런 눈빛을 번쩍거리면서 의아스러운 듯이 그를 쳐다보았 다. 그것들은 마치 주드가 늦게 온 것에 실망하면서도 그를 줄곧 기다려 왔지만 이제는 그를 그다지 절실하게 원하지는 않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이제 단순히 물질적인 이익보다 더 세심한 문제를 언급하는 영혼의 소유자 인 딕 휘팅턴(1423년 사망, 가난한 신분으로 런던에서 시장까지 지냈으며 여러 왕에게 자금을 조달해 주었음)에 가까웠다. 그는 탐험가와 같은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외곽거리를 따라 걸었다. 우선 그에게 필요한 것은 숙소였다. 그는 비싸지 않고 수수한 숙소가 있을 만한 지역을 조심스럽게 물색했다. 수소문한 끝에, '베르셰바'라는 별명이 붙은 외곽지역에 - 후에 알게 된 이름이지만 - 방을 한 칸 얻었다. 짐도 풀고 차(茶)도 좀 마셨다. 그러고 나서 바깥으로 나왔다. 바람이 속삭이듯 부는 달이 없는 밤이었다. 그는 가지고 온 지도를 등불 밑에서 펼쳐보았다. 지도는 미풍 때문에 펄럭거렸지만 그가 도착해야 하는 목적지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을 만큼은 충분히 볼 수 있었다. 몇 번이나 길모퉁이를 꺾은 후에, 그가 처음으로 마주친 것은 고색 창연 한 중세기식 건물이었다. 이것이 대학이구나 하고 그는 입구의 구조를 보 면서 생각했다. 그는 구내로 들어가 주변을 거닐었고, 등불이 닿지 않는 어 두운 구석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바로 이 대학 가까이에 또 다른 대학이 하나 있었고 좀더 가면 또 대학이 있었다. 그는 도시의 장엄한 숨결과 정 서에 에워싸인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일반적인 표현에 어울리지 않는 사물들 앞을 지나칠 때는 마치 그런 사물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시 선을 흘려버렸다. 그때 종이 땡그렁거리며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백한 번째의 종소리가 다 들릴 때까지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잘못 센 것이 틀림없 다고 생각했다. 종소리는 분명 백 번 울렸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 다. 탑문(塔門)이 닫혀 중정(中庭)으로는 들어가지는 못했기 때문에, 그는 담 밑과 현관 탑문 및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거기에 장식된 쇠시리와 조각의 윤곽을 손끝으로 만져보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적이 더욱 뜸해졌지만 그는 아직도 어둠사이를 뱀 처럼 기어다녔다. 지난 십년동안 이런 장면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 었다. 그러므로 적어도 하룻밤 정도는 이렇게 밤을 새워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었다. 드디어 등불빛이 칡흑같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높이 비추어 당초 (唐草)무늬가 부각된 첨탑과 톱니모양의 흉벽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분명히 인적은 끊어진 듯 했고 그 존재자체도 잊혀져 있었지만 어두운 좁 은 길을 빠져나오자 풍려한 중세기식의 지붕이 있는 주랑 현관과 벽에서 밖으로 내민 창문이 한길로 불쑥 나와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의 몰락한 듯한 분위기는 부서져내린 돌로 인해 더 분명하게 부각되 었다. 이렇게 낡고 황폐한 방들이 근대사상의 종가를 이루고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이곳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주드는 유령을 만났을 때처럼 자신이 스스로 고립되어 있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자신은 제대로 길을 걸어가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거나 발소리를 들을 수 없게 하는 그런 형국이었다. 그는 깊은 생각에 빠져 숨을 깊숙하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자기자신이 이렇게 유령이 되어버린 듯한 기분에 젖어 유서 깊은 건물의 구석구석마다 에서 나타나는 다른 수많은 영적(靈的)존재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호소했다. 아내와 살림살이가 어처구니없게 허공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난 이래로, 이 모험을 위한 준비기간동안, 그는 그의 처지에서 읽고 배울 수 있는 것 은 거의 전부 읽고 배웠다. 그것은 이렇게 고색창연한 벽에 둘러싸여 청춘이라는 시기를 보내며 성 장한 후에 그의 혼백을 여기에 머물게 한 명사들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 다. 그리고 명사들 중에는 독서를 잘못한 탓인지,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어울리지 않을 만큼 넓은 장소를 그의 공상 속에 자치하는 인물도 있었다. 건물의 능각과 흉벽과 문설주를 스쳐가는 바람소리도 그런 사람들의 망령 이 지나가는 소리로 들렸고 덩굴이 서로 스치며 내는 소리는 애처로운 그 들 영혼의 속삭임 같았으며 그림자들은 외로운 주드를 벗삼아 신경질적으 로 움직이는 그들의 가냘픈 자태처럼 보였다. 셰익스피어의 친구이며 찬미자인 사람(1572~1637,벤 존슨을 가리킴) 아주 최근에 침묵의 나라로 가버린 사람이나 현재 우리들 곁에 살고 있는 음악 적 시인에 이르기까지 고금의 시인들이 우글우글 쏟아져 나왔다. 사색적인 철학자들도 다가왔지만 그들은 항상 액자 속에 틀어박힌 초상 화처럼 주름진 이마와 서릿발처럼 허연 머릿카락을 가진 것이 아니라 젊은 이와 같은 분홍빛 얼굴과 날렵하고 활동적인 모습으로 그려졌다. 하얀 법의를 입은 근대의 신학자들도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주드 폴리 에게 있어 정말 대단한 존재는 '시사논설책자파'라고 불리는 종파의 창시자 들이었다. 열성가와 시인과 법식서 주의자등 유명한 3 인조가 그들이었다. 이 3사람이 교시한 메아리는 시골구석에 파묻혀 있는 주드에게 까지 감화 를 사랑을 주었다. 같은 대학을 나왔어도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발을 쓴 정 치가, 도락가, 변론가 그리고 회의론자 등인데, 매끈하게 면도한 역사가로 써 그리스도교에는 공교롭게도 치밀한 교분을 표시한 사람도 있었고, 의심 많은 기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신자뿐만 아니라 어떠한 방정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어서 그 회랑에 자유롭게 출입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정치가에게는 다양한 유형이 있다고 보았다. 굳건한 행동가로 과분 한 꿈을 꾸지 않는 자, 학자형, 명연설가형,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 세월속 에서 성장하는 정신의 소유자, 세월 속에서 위축되는 정신의 소유자 등이 그들이었다. 이어 그의 마음속에 뒷따라 나타난 것은 쉽사리 있지도 않을 만큼 기묘 하게 얽킨 언어학자와 과학자의 집단이었다. 그들은 모두 명상적인 얼굴과 긴장된 이마를 하고 있었지만 성실한 연구로 박쥐처럼 약해진 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인도 총독이나 아일랜드 지사와 같은 그에게는 아무 매력 도 없는 집단과 재판장이나 대법관과 같은 얇은 입술을 묵묵히 다문 거의 이름도 없는 사람들- 그런 종류의 사람들도 나타났다. 이에 비해 관장이나 고위 성직자의 부류에게는 예리한 관심이 쏠렸다. 그러한 인물이 되고 싶다는 것이 그 자신의 오래된 희망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이 무리 지어 나타났다. 인정 있는 사람도 있고 두뇌 가 뛰어난 위인도 있었다. '교회'를 위해서 라틴어의 변호를 맡은 사람도 있었고 <저녁의 찬미가>를 쓴 성도 같은 시인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 가 까이에 나타난 그 위대한 순회 설교자는 열렬한 신자이며 찬미가이고 작가 이기도 했던 사람이었지만 이 사람은 주드와 같이 잘못된 결혼의 그림자로 부터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다. 주드는 이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치 멜로드라마의 연기자가 각광을 사이에 두고 관객에게 큰 몸짓으로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쑥스러 운 행동에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이런 떠돌이의 뒤죽박죽된 말이 벽 안쪽의 어떤 학생이나 혹은 불빛 아래에서 명상하던 사람의 귀에 들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학생 은 머리를 쳐들고 이게 무슨 소리인지 그리고 무엇을 향한 것인지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주드는 이제야 비로소 여기저기에 간혹 보이는, 밤 늦게 돌아가는 도시 인을 제외하고는 단단한 육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로서는 이 고도(古都)의 전체를 독점하고 있는 것이 자신뿐이고 자기가 곧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 는 것을 깨달았다. 그 때, 그늘진 곳에서 어떤 목소리가 그에게 들려왔다. 그것은 망령의 소 리가 아닌 현실의 소리, 즉 이 지방의 소리였다. "젊은이, 자네는 오랫동안 이 주춧돌 위에 앉아 있던데, 도대체 뭘 하는 건가?" 그것은 주드가 모르는 사이에 주드를 관찰하고 있던 경찰관이 던진 말이 었다. 주드는 집으로 돌아왔고, 그가 가지고 온 책 중에서 크리스트민스터에 있는 대학들의 졸업생이 쓴 몇 권의 책에서 그들과 세상에 대한 그들의 여 러 가지 사명에 관한 전언을 조금 읽은 후 잠자리에 들었다. 꿈속에 빠지 려 할 때, 방금 조사했던 다양하고 기억될만한 말들이 그 사람들의 입을 통해 여러 가지로 중얼거려지고 속삭여지고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 중에서 어떤 말들은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었고 또 어떤 말은 그 뜻 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또 하나의 망령은 크리스터민스터를 이렇게 묘 사하고 있었다. "아, 아름다운 도시여! 우리 시대의 맹렬한 지적 삶으로서 너무 훌륭하고 너무나 사랑스럽고 너무나 잘 보존되고 너무나 평온한 도시여! 이 도시의 이루 말할 수 없는 매력이 우리를 부르고 우리 모두를 진정한 목표와 이상 과 완성을 향해 걷게 한다." 이와 함께 또 다른 하나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이것은 곡물법 개정을 옹 호했던 사람의 목소리였다. 주드는 커다란 종이 있는 그 방정에서 그 주인 공의 망령을 막 보았다. 주드는 그의 영혼이 그가 행했던 위대한 연설의 역사적 명문구를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법관님, 아마도 제가 틀렸을지 모릅니다만. 굶주림으로 위협당하는 나라 가 있을진대, 그 나라에 대한 저의 요구는 이렇습니다. 유사한 환경 속에서 일반적인 구제책으로 알려져온 대책을 이제야말로 채택해야 합니다. 그 출 처가 어떠하든 인간에게 식량을 구할 수 있는 권한을 자유롭게 주어야 한 다는 것입니다. 법관님, 내일 저를 해직시키십시오. 그러나 귀하가 저에게 서 빼앗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위탁받은 권한을 행사 한 것이 어떤 동기나 타산적 동기 때문도 아니고 어떤 야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욕망 때문도 아니며 개인적 이득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는 저의 의식 입니다." 이어서 <기독교에 대한 불멸의 장>을 쓴 교활한 작가가 중얼대기 시작 했다. "다신교를 신봉하는 그 이교 세계와 철학에 뛰어난 철학세계가 '전지전 능의 신 '이 제시한 여러 증거(기적)에 대하여 무관심한 것을 우리가 어떻 게 용서할 수가 있겠는가? 그리스와 로마의 성현들은 이 외경스런 광경으 로부터 눈을 돌려버렸고 도덕과 이 세계의 물질적 통치에 의해 일어나는 어떤 변화에 대해서도 인식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낙천주의자인 시인의 망령이 나타나 노래했다. 이 세상은 어떻게 우리들을 위해서 만들어졌는가! ····· 그리고 다수 속의 각 개인은 하나의 종합적인 계획에 의해 인류의 생활을 보충하고 돕는다.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 <노변에서>) 그런 뒤 위에서도 언급한 독신 3인조의 한 사람인 <내 생활 변명>의 저 자(뉴먼을 가리킴)가 중얼거렸다. "나의 논지는 ...... 자연 신학의 진리에 관한 절대적인 확신이 서로 일치 하거나 수렴하는 여러 개연성의 집합의 결과였다는 것 ....... 논리적 확실성 에 이르지 못한 개연성이나 심리적 확신을 낳는 일이 틀림없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 세 명 중 다른 한 사람은 논객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 조용한 말로 속 삭였다. 우리는 왜 고독하게 사는 것을 두려워하고 기죽어 있어야 하는가? 우리 모두가 고독하게 살게 됨은 바로 하늘의 의지가 아니겠는가? 주드는 또 호의적인 「스펙테이터」지에서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는 어떤 망령이 토해내는 속삭임을 들었다. 나는 위대한 사람의 묘를 바라볼 때면 질투의 모든 동기가 이 가슴속에 서 사라진다. 내가 아름다운 사람의 묘비명을 읽을 때면 분에 넘치는 모든 욕망들은 사라진다. 자식의 묘비 위에 새겨진 부모들의 탄식하는 글을 만 났을 때 내 마음은 동정심으로 녹아내린다. 또한 그 부모들 자신의 무덤을 바라볼 때 우리가 곧 뒤따라 가게 될 그들을 위해 슬퍼하고 한탄하는 것의 덧없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고위 성직자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나의 삶의 길을 가르쳐다오 내 무덤을 나의 잠자리처럼 두려워하지 않도록 나에게 죽음의 길을 가르쳐다오. 주드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익숙하고 부드러운 그 운율에 젖어 깊은 잠 에 빠져들었다. 그는 아침이 될 때까지 깨지 않았다. 유령 같은 과거는 사라지고 모든 것이 오늘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그는 너무 많이 잤다고 생각하면서 침대 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말했다. "빌어먹을! 난 나의 예쁜 사촌누이를 아주 잊어버리고 있었구나. 그리고 그녀가 항상 이곳에 있었다는 것도! 그리고 내 옛날 선생님도 잊고 있었구 나." 선생님을 말할 때의 그의 어조에는 그의 사촌누이를 말할 때보다 열의가 적게 담겨 있었다. 2-2 하찮은 빵과 치즈의 문제를 포함한 현실 문제에 대해 마지못해 생각해야 만 했기 때문에, 한동안 주드에게 혼령과 만나는 환상은 나타나지 않았으 며, 당장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으므로 고매한 사색을 즐길 여유는 없었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일자리, 즉 육체노동을 찾아야 했다. 석공일을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는 적어도 일자리라고 한다면 그것은 육 체노동밖에는 없었다. 그가 일자리를 구할 생각으로 길거리로 나오자 어젯밤에 보았던 대학들 은 전날과는 그 모습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몇 군데 대학들은 장대하게 보였고 또 어떤 대학은 지면위에 세워진 커다란 납골당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석공술에도 야만적인 면모가 약간씩은 나타나 있었다. 위대한 사람들의 영혼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 주위에 펼쳐져 있는 수많은 건축물들의 면면을 읽었는데, 그 것은 물론 건축 양식을 예술적으로 비평하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공장으 로서 또는 그들의 양식을 팔의 근육만으로 나타냈던, 현재는 죽어 없어진 직인들의 동료로서였다. 그는 주형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주형의 시초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 것들을 쓰다듬고 세공이 어려웠다든가 또는 쉬웠다든가, 시간이 많이 들었 다든가, 별로 안 들었다든가, 또는 팔이 아팠다든가 또는 도구가 편했다든 가 등등에 관해서 가늠해 보았다. 밤에 보았을 때는 완벽하고 이상적이었던 것도 낮에 보자 다소 결점이 보였고 현실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구식의 건축물에 잔인 함과 모욕이 가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불구가 된 생물을 바라보 고 있는 것처럼 몇 채의 건물에 연민을 느꼈다. 그것들은 세월과 풍우와 인간을 상대로 한 사투로 상처입고 격파당해 외형이 벗겨지고 허물어져 있 었다. 이런 역사적인 건물의 영락이 그로 하여금 오늘 아침 의도했던 대로 출 발을 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그 자신은 일을 하기 위해 -- 일해서 먹고 살기 위해 찾아왔는데, 긴요한 오전을 거의 엉망으로 보낸 셈 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무너지고 낡은 건물이 많다는 것은 어찌 보면 그만 큼 복구할 일이 많다는 것을 의미했으므로, 어느 의미에서는 마음이 든든 하기도 했다. 주드는 알프레드스턴에서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는 석공의 공 장을 길을 물어 찾아갔고 그곳에서 귀에 익은 숫돌과 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석재공장은 새로이 조성된 작은 중심지였다. 지난 밤에 시간에 침식 되어 벗겨진 벽에서 본 거소가 아주 똑같은 형태가 여기서는 모서리도 날 카롭고, 곡선도 부드럽게 조각되고 있었다. 이들의 여러 가지 형태는 근대 적인 산문에 나타난 여러 가지의 관념이고 그 이끼낀 대학 건물은 그것을 옛날의 시로 나타냈다. 고색을 띤 건물도 역시, 세워졌을 당시에는 산문적 이라고 평가받았던 적도 있을 것이다. 다만 시절을 기다린 것만으로도 시 적이 되었다. 하잘 것 없는 건물이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는 것도 인간에 게는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그는 감독에게 부탁해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창문 윗부분의 새로운 장식, 중간 문설주, 문틀, 기둥 몸체, 작은 뾰족탑, 흉벽 등이 세공대 위에서 반쯤 완성되었거나 또는 채워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것들에는 정밀성이 나 수학적 단정함, 평온함, 정확함 등의 특징이 두드러져 있었다. 그러나 대학의 오래된 벽에는 독창적인 관념의 닳고 끊어진 선밖에 남아있지 않았 다. 톱니 모양의 곡선밖에 없었다. 정밀성의 무시와 불규칙과 난잡성밖에 없었다. 잠시 동안 주드에게는 진짜 광명이 찾아왔다. 그것은 장중한 대학의 내 부에서 학문의 연구라는 미명으로 따라 다니는 위엄어린 노력에 뒤지지 않 게 가치있는 노력의 중심이 이 석세공장에도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구태의연한 관념에 압도되어 그 깨달음을 상실했다. 그는 이전 고용 주의 추천에 힘입어 자기에게 할당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나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고작해야 임시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안이라는 근대병이 그에게는 이런 형태로 나타났다. 게다가 그는 여기에서는 기껏해야 복사와 보철과 모방만이 행해지고 있 다고 생각했다. 거기에는 이 지방 특유의 고유함이 섞여 있었다. 그때 주드 는 중세기의 정신이 석탄 덩어리 속에서 화석이 된 양치식물의 잎새처럼 사멸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세계에서 일고 있는 새로운 변화 속에 고딕 식의 건축과 그것의 연상물을 받아들일 여지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가 찬양하며 존경하는 수많은 것들에 관해서 현대의 이론과 세 계관은 대단한 적의감을 품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그 주변의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이곳을 떠났고 새삼 사촌누이가 있는 곳을 생각했다. 근처 어디엔가에 그녀가 살고 있다 는 사실은 관심의 잔물결을 이루어 그녀의 존재를 실제로 느끼는 듯한 기 분이 되었다. 그는 사촌누이의 귀여운 사진을 갖고 싶어 마침내 대고모에 게 그 사진을 보내주었으면 좋겠다고 편지를 썼다. 대고모는 사진을 보내주었다. 그러나 사촌누이나 그녀의 친척을 방문해 서 폴리 가족에게 분쟁의 씨를 뿌려서는 안 된다고 첨부했다. 주드는 원래 이상할 정도로 애정이 많았기 때문에 찾아가겠다든가 안 가겠다든가 하는 약속을 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그 사진을 벽난로 위에 놓고 키스를 했다. 그러자 기분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녀가 거기서 내려다보며 자기에게 차를 대접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은 그의 원기를 북돋아주었다. 과거 속의 망령의 도시가 아닌 발랄하게 살아 있는 도시의 정감을 그에게 선사했다. 또 한 가지, 선생의 일이 남아 있었다. 아마 그는 지금 목사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위대한 인물의 거처를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쪽의 신분이 너무 지저분하고 광택이 나지 않는데다 앞으로도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운명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며 그는 여전히 고독하게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주변에서 움직였지만, 그의 눈에는 사실상 아무것도 보이 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이 고장의 발랄한 생활에 섞여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그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창문의 곡선 장 식에 새겨진 성자와 예언자들, 화랑에 늘어선 회화, 입상, 흉상, 괴수형 홈 통 주둥이, 받침돌 등은 그의 분위기를 호흡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과거의 흔적이 깊이 새겨져 있는 장소를 처음으로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이 그 역시 평소 거기에 정들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겐 전혀 의외이며 믿으 려고조차 하지 않는 과거가 스스로를 강조하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대학이 늘어서 있는 곳 주변을 지나갈 때는 그 화랑과 안뜰을 방황 하는 날이 많았다. 그럴 때는 자신의 발자국 소리가 망치소리처럼 쾅쾅 하 며 꼬마도깨비같이 메아리치는 것에 놀라곤 했다. 소위 크리스트민스터의 '정서'라는 것이 그의 가슴속으로 더욱 깊이 스며들었다. 마침내 그는 대학 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중의 어느 누구보다도 그 대학 건물의 재료와 예술 과 역사에 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 주드는 이제야 비로소 자신이 수년 이래 동경해 온 바로 그 지점에 있게 되자 그런 동경의 대상에서 자신이 실제로 무척 떨어져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드와 같은 정신생활을 함께 누리고 있는 동시대의 청년들, 아 침부터 밤까지 독서하고 배워 내면으로 흡수하는 일이 전부인 이 행운아들 과 주드를 갈라놓고 있는 것은 벽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이 벽은 얼마나 두터운 벽인가! 매일, 같은 시각, 그는 일자리를 찾으러 나서며 그들이 오가는 모습도 보 았고 그들과 어깨도 부딪쳐 보았으며 그들의 말소리도 듣고 그들의 거동도 주목해 보았다. 그 중에는 비교적 생각이 깊은 대화를 나누며 걷는 사람들 도 있었다. 그러한 대화는 기묘하게도 그 자신의 사상과 상통하는 데가 있 는 것같이 보이는 적도 자주 있었다. 그것은 그가 이 곳으로 와서 공부하 기 위해 오랜 동안 한결같이 예비공부를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런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은 마치 그가 지구의 이면에 있는 것 처럼 생각되었다. 그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는 하얀 노동복을 걸친 젊은 노동자였다. 노 동복의 주름에는 돌먼지가 끼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와 스치고 지나 갈 때도 뒤돌아보지 않았고 그의 발걸음에도 신경쓰지 않았다. 마치 그가 유리창이라도 되는 듯이 그의 건너편에 있는 친한 사람들만 알아보았다. 그들이 주드에게는 어떻게 보였든지 주드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다. 그렇지만 주드는 여기에 오면, 그들의 생활에 접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공상해 왔었다. 그러나 미래의 일은 알 수 없었다. 만일 운이 좋아 좋은 일자리를 얻게 된다면 그는 그러한 불가피한 일도 참고 견디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건강과 힘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고 용기를 냈다. 아직 그는 대학을 포함한 모든 것의 문 밖에 있었지만 언젠가는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될 것이다. 광명과 선구자들의 대전당에 들어서서 언젠가는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는 드디어 석공장으로부터 일자리가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 이것은 그 에게 날아온 최초의 격려였기 때문에 그는 흔쾌히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는 젊고 튼튼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이제부터 시작하는 일 을 열심히 이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온종일을 일하고 난 뒤 밤에는 독서를 하는 것이 그의 일과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우선 4실링 6펜스를 들여 갓이 달린 등을 샀는데 밤에 책을 읽기 위해서였다. 그런 다음 펜과 종이 그리 고 다른 곳에서는 입수할 수 없는 필요한 서적 등을 구입했다. 그러고 나 서 하숙집 아주머니가 놀란 일이지만, 그는 방에 있던 일체의 가구류 -- 거주와 수면 겸용의 유일한 가구지만 --를 옮기고 방 한가운데에 끈을 쳐 놓고 여기에 커튼을 달아 방을 두 개로 만들었다. 그리고 창문에는 두터운 빛가리개를 쳐서 아무도 자신이 수면 시간을 얼마나 줄이며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하게끔 한 다음 책을 정리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는 전에 결혼해서 시골집을 빌리고 가구를 샀던 일로 -- 가구도 아내 와 함께 없어졌지만 -- 몹시 애를 먹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저축할 여력이 조금도 없었다. 자신의 임금이 들어오기 전까지 그는 최대 한도로 돈을 아껴가며 살아야 했다. 책을 한두 권만 사도 땔감조차 살 여 유가 없는 형편이었다. 목초지 위에서 눅눅하고 냉한 바람이 밤기운과 함께 다가올 때면 그는 방한외투나 털실로 짠 장갑을 낀 채 등불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창문을 통해 주드는 대성당의 첨탑과 하반곡선의 둥근 지붕도 볼 수 있 었다. 이 도시의 대종은 둥근 지붕 밑에서 울렸다. 다리 옆에 있는 대학의 높은 탑과 높은 종루의 창문들과 몇 개씩 한써번에 높이 솟은 첨탑들도 이 층으로 올라가면 볼 수 있었다. 미래를 향한 그의 신념이 흔들릴 때마다 그는 이런 대상들을 바라보고 자극제로 삼았다. 그는 대체로 열성분자들처럼 수속절차 같은 자세한 것들에 대해 궁리하 는 편은 못되었다. 우연히 알게 된 사람들로부터 대강의 요령은 주워들었 기 때문에 그는 별로 자세한 것까지 이러쿵저러쿵 조사해 보지도 않았다. 당장 필요한 것은 돈과 지식을 모아서 준비해 두는 일이었다. 그리고 대학 의 사랑하는 자식이 되고 싶은 자에게 주어지는 어떤 기회가 올 때까지 기 다리는 것이라고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지혜도 호신이 되고 금전도 호신이 된다. 그러나 지식이 우월한 까닭은 이것을 가진 자에게 생명을 주기 때문이다.'([전도서] 7:12절) 그의 욕망은 그를 삼켜버렸고 욕망의 실현성을 숙고할 만한 여유도 그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이때, 그는 연로하고 가엾은 대고모로부터, 전에도 그녀를 괴롭힌 적이 있는 그 문제에 관해서 신경질적인 걱정이 담긴 편지를 받았다. 그녀의 걱정은 주드의 의지가 약해 그의 사촌인 수 브라이드헤드와 그녀 의 친척들과 가까워지지 않고는 못 뱃길 거라는 내용이었다. 대고모가 믿 는 바에 의하면 수의 아버지가 이제는 런던으로 돌아갔지만 그녀는 아직도 크리스트민스터에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더욱 마음에 안 드는 것은 그녀가 교회용의 상품을 판매하는 가게에서 미술가나 디자이너와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한 가게는 우상숭배를 길러내는 온상과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수는 가령 로마 구교 도가 되는 것까지는 못하더라도, 거래상 허례허식에 틀림없이 빠져버렸을 거라는 것이었다.(드루실라 폴리 대고모는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복음주의 자였다). 주드는 신학 방면보다는 지적인 쪽으로 관심이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에 수가 품고 있을 만한 그러한 의견을 이러쿵저러쿵 말한다고 해서 그에게 별로 영향을 주지는 않겠지만, 다만 수의 거처에 대한 실마리가 알려졌다 는 것은 단연 흥미거리였다. 그는 묘한 기쁨에 빠져 틈틈이 대고모의 편지 에 적혀 있는 그런 종류의 가게를 뒤지고 다녀 몇 채인가 비슷한 가게를 지나갔었다. 그러자 어느 한 가게의 계산대 뒤에 사진의 주인공과 흡사한 젊은 아가씨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시시한 용건을 만들어 그 가게로 들어갔다. 그리고 물건을 사고 나 서도 그 자리에서 머뭇거렸다. 이 가게는 부인들만으로 운영되는 것 같았 다. 진열해 놓은 물건들은 영국 국교회파의 종교서적들, 문방구, 교리에 관 한 책들, 장식품 등이었는데 선반 위에는 석고로 만들어진 작은 천사상, 고 딕풍의 액자에 끼어진 성자의 초상화, 구교에서 사용하는 예수상 못지않은 흑단의 십자가, 구교의 미사 전서라고 생각되는 기도서 등도 놓여 있었다. 그는 대단히 겸연쩍어하면서 데스크 쪽의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예쁜 여자가 그이 집안사람이라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러자 그 아가씨는 카운터 뒤에 있는 나이든 두 부인 중의 한 사람에게 말을 걸었 다. 그는 그녀의 어조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와 같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보다는 더 부드럽고 상냥했지만 확실히 그 자신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앞에는 길이 삼사 피트의 두루말이 모양으로 절단한 아연판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그 옆면은 두껍게 물감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녀는 그 위에다 국교회 경문 활 자체로, '알렐루야'라는 한 개의 단어를 화식문자로 그려넣고 있었다. '그녀의 임무는 부드럽고 신성한 그리스도 교도다운 일이다!' 주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수가 왜 이런 가게에 있는지 이것으로 잘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이런 종 류의 일에 재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녀 아버지의 직업이 교회의 금속 세공사였기 때문임에 틀림없었다. 그녀가 지금 쓰고 있는 글씨마저도 어딘 가의 성단에 걸려 신심을 권장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는 가게를 나왔다. 그녀에게 말을 거는 것은 쉬운 일이었지만, 대고모 의 부탁을 무턱대고 무시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고모는 자기를 사납도록 부려먹었다. 그렇지만 자기를 길러주기까지 했다. 지금 대고모가 자기를 억제하는 데 있어 무력하다는 사실이 주장으로서는 효과가 없는 요 구에 오히려 감동적인 박력을 더해 주었다. 그래서 주드는 전혀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수를 정식으로 방문할 만한 여유는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떠났지만, 거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거친 작업복 상의와 먼지투성이의 바지를 걸치고 있는 자 신과 비교할 때 그녀는 너무 우아하게 꾸미고 있었기 때문에 필로트슨 선 생님에 대해서 느끼는 것처럼, 그녀를 정면에서 만나야겠다는 준비가 아직 덜 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그녀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뿌리깊은 반감이 흐르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로부터 전혀 칭찬받지도 못할 여자와 바람직하지 않은 인연을 맺은 그의 불쾌한 경력에 대해 들었다면 그녀는 기독교인으로서 분명 그를 경멸할 것이다.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어떻 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수를 계속해서 지켜보았고 그녀가 그 가게에 있다는 것만으 로 만족했다. 그녀가 살아 있다는 의식은 그를 자극했지만 여전히 다소 이 상적인 인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주위에서 그는 기묘한 환상적인 백일몽을 꾸기 시작했다. 그후 2,3주가 지난 어느 날, 주드는 올드 타임가의 크로지어 대학 밖에서 몇몇 동료들과 함께 복원작업을 하고 있었다. 세공이 끝난 석회석을 마차 에서 끌어내려 보도를 건너가려는데 감독이 말했다. "모두들 소리를 지르면서 끌어올려! 영차! 영차!" 그들은 함께 석회석 덩어리를 들어올렸다. 그때 무심코 쳐다보니 그의 사촌이 바로 그의 옆에 서서, 장애물이 치워 질 때까지 한쪽 다리를 구부리고 잠시 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수는 주드 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촉촉했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예리함과 우아함을 지니고 있었다. 거기에 신비함도 흘렀다. 눈초리는 입술 표정과 함께 마치 길동무 에게 말을 건네듯이 생생해서, 전혀 무의식적이기는 했지만 그의 얼굴을 똑바로 움직이며 다가왔다. 그녀는 주드의 존재를 조금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 그는 돌을 다룰 때 햇빛 속에서 일어나는 모래 먼지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 다. 자신이 그녀와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이 어쩐지 너무 암시적이었기 때문 에 그는 몸을 떨었고 자신을 내보이기 싫다는 수줍은 본능으로 얼굴을 홱 돌렸다. 그렇지만 그녀는 주드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를 알 아볼 수도 없었고 더구나 주드라는 이름조차 들은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꿰뚫어볼 수 있었다 -- 수는 비록 시골 태생이었지만 런던 에서 처녀 시절을 보냈고 이 학문의 도시에서 성숙한 여자가 되었기 때문 에 미숙함이 완전히 없어졌을 것이었다. 그녀가 가버리고 난 뒤에도 그는 일을 계속하면서 그녀를 생각했다. 그 는 그녀에게 너무 마음이 끌렸기 때문에 그녀의 자태와 몸생김새가 잘 생 각나지 않았다. 다만 막연히 그녀의 몸집이 크지 않다는 것과 훤칠하고 경 쾌하며 세련되고 우아하다는 것밖에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입상과 같은 조용한 취향은 전혀 없었고 모든 것에 예민한 것 같았다. 그녀는 동적이고 활발하지만 화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목이 번듯하다거 나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주드 를 경탄하게 했다. 그는 틀림없이 시골뜨기였지만, 그녀는 시골에서 벗어난 지 오래 되었다. 폴리가처럼 비뚤어지고 불운하며 무엇인가에 의해 저주받 은 듯한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하여 그토록 세련되고 멋 있게 될 수가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그녀가 런던에 살았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상상했다. 그가 살았던 시화와도 같은 고장과 고독에서 자란 효과로 그의 가슴속에 여태까지 울적했던 감정은 이 순간부터는 반은 환상과도 같은 그 여자의 모습을 향해 자신도 모르게 둑을 허문 것처럼 마구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그것과는 반대로 아무리 대고모의 충고를 따르려고 해도 수와 가까워지고 싶은 욕망에 결국은 저항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드는 그녀를 친척의 한 사람으로 보려고 애썼다. 그녀를 다른 눈으로 보아서도 안 되고 또 볼 수도 없는 절대적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째는 그가 이미 결혼을 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다면 어떤 잘못이 든 범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둘째는 두 사람이 사촌 사이기 때문에 연애 에 빠져버린다는 것은, 두 사람의 열정을 세상이 용인한다 할지라도 별로 칭찬할 만한 것은 못되었다. 셋째의 이유는 가령 그가 자유의 몸일지라도 결혼을 하면 비극적인 애수를 맛보게 될 것이 뻔했다. 폴리 일가와 같은 경우 혈족 결혼은 이 역경을 배가시키게 될 것이고, 비극적인 애수는 더욱 강화되어 공포와 고통으로 변할 게 분명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수를 단지 흥미를 갖게 하는 친척으로서만 여겨야 할 것이 다. 잘아할 만한 사람, 이야기를 걸면 고개를 끄덕여줄 사람, 시간이 지나 감에 따라 차 대접 정도를 위해 불러줄 것 같은 사람으로 실제적으로 그녀 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녀에게 바치는 감정은 엄밀하게는 친척으로서의 감정, 단순히 호의를 품게 되는 자로서의 감정에 그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준 다면, 그녀는 자기에게는 그리운 별이 되고 자기를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 리는 힘이 되며 국교회 신앙의 동지가 되고, 상냥한 벗이 되어줄 것이다. 2-3 그러나 저지하려고 움직이는 여러 가지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주드의 본 능은 소극적으로 그녀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그가 다음 주 일요일에 카디 널 칼리지 부속의 카시드럴 교회당의 오전 예배식에 간 것도 그녀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녀가 자주 그곳에 참석한다는 것을 전부터 알고 있었 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오후에도 그녀를 기다렸다. 날씨가 더 욱 좋아졌다. 그는 만일 그녀가 온다면 지름길을 따라, 푸른 잔디가 깔린 대방정의 동쪽을 통과해서 교회당으로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래서 그는 종이 울리는 동안 모퉁이에 서있었다. 예배시간 이삼분 전에 그 녀는 대학 담 밑을 따라 걸어오는 사람들 틈에 끼어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그것을 알고 반대쪽으로 걸으면서 그녀의 뒤를 따라 교회당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아직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주드 쪽에서 보여지거나 알려지지 않고 그녀를 볼 수 있다는 것으로 충분 했다. 그는 현관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예배가 어느 정도 진행된 후에야 자리 를 잡고 앉았다. 음울하고 음산하며 조용한 오후였다. 이럴 때는, 어떤 종 류의 종교도 유한 계급의 사치품이 아니고 보통의 실제적인 사람들의 필요 물인 것처럼 여겨진다. 높은 채광창에서 들어오는 눈부실만큼 강렬한 빛 속에서 주드는 건너편 에서 예배보는 사람들을 어렴풋이나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는데, 수가 그들 속에 끼어 있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가 앉아 있는 좌석을 파 악했을 무렵 성가대가 시편 119장 2절의 'In quo corriget(청년들은 무엇으 로 그 행실을 깨끗하게 하려는가)'부분을 노래하고 있었고 오르간이 애수 적인 그레고리안식 음조로 바뀌면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었 다. 청년들은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하게 하려는가? 이것이야말로 주드의 관심을 끌고 있는 문제였다. 여자에 대해 동물과 같은 욕정에 빠져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고, 자살을 생각하기도 하며 술독 에 빠져들기도 했다는 점에서 주드 자신은 그 얼마나 사악하고 쓸모 없는 인간이었던가. 오르간이 연주하는 음악의 커다란 파도가 성가대 주변까지 밀어닥쳤다가 는 밀려나갔다. 그는 본래 초자연적인 것에 경도되어 자라왔으므로 이 장 엄한 건물 안으로 처음 들어서게 된 순간을 위해 어떤 사려 깊은 '하늘의 섭리'가 이 시편을 선택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믿음이 생긴 것은, 그러 므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매달 24일 저녁이면 으레 부르 는 시편이었다. 그가 특별히 그리움으로 사모하기 시작한 그녀 역시 지금 이 순간 그의 귀에 흘러들어 온 것과 똑같은 화음에 동참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그는 기 뻤다. 그녀는 아마 여기에 자주 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직업이나 습관상 그녀는 교회의 분위기에 젖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확실히 자 기 자신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민감하고 외로운 젊은이가 드디어 자신의 마지막 상념의 정착지를 찾아 내 사회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러 가지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는 의식은 마 치 헤르몬 산의 이슬([시편] 133편 3절)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 배가 진행되는 동안 줄곧 황홀한 분위기에 빠져 있었다. 그런 분위기는 그리스도의 거주지인 갈릴리에서 불어오는 것처럼 미의 신인 비너스를 받드는 키프로스 섬에서도 불어온다고 그에게 말해주고 싶 은 사람도 더러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주드는 그것을 의심했을 것이다. 주드는 그녀가 자리를 떠나 칸막이 아래를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그 녀는 그가 있는 곳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가 문에 도착했을 무렵 그녀는 넓은 길을 따라 그 길을 반쯤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나들이옷을 입고 있 었기 때문에, 그녀를 따라가 그 자신을 밝히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럴 결심까지는 아직 서 있지 않았다. 아, 그의 마음속에서 이제 싹 트고 있는 이런 종류의 감정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온당하겠는가? 그러한 감정은 예비시간 동안만은 종교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 그래서 주드는 스스로에게도 그런 정도의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러두었지만 -- 그래도 그는 이 자력의 본성에 대해 완전히 맹 목적이어서는 안 되었다. 친척간이라는 것은 구실에 불과할 뿐 수와는 일 면식도 없는 관계였다. 그래서 그는 중얼거렸다. "안 돼, 안 돼! 아내가 있는 나 따위가 그런 여자에게 가까이 가서는 안 돼!" 그러나 수는 그의 혈연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에게 아내가 있다는 사실은 가령, 아내가 엄연히 이 북반구에 있지 않더라도 어떤 의미에서 보 면 오히려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다. 그것은, 수에게 접근하는 그의 깊은 마음은 애정을 구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상념을, 수의 마 음속에 심어줌으로써 그에 대한 그녀의 접촉을 자유롭고 두려움 없게 해줄 것이다. 그러나 이쪽에 아내가 있다는 것 때문에 그녀가 자유롭고 당당하 게 그를 대한다는 것은 주드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었다. 카시드럴 교회당에서 이런 예배가 있기 며칠 전에, 맑은 눈매에 예쁘고 경쾌한 걸음걸이의 처녀 수 브라이드헤드는 오후 한나절의 휴가를 얻어 그 녀가 하숙하면서 일을 돕고 있는 교회 용품점을 나와 손에 책 한 권을 들 고는 교외로 산책을 나갔다. 이 날은, 웨섹스 지방에서 때때로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천기를 다루는 신의 변덕에 의해 끼어들기라도 한 듯 추운 날과 비오는 날 사이를 비집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1,2 마일 정도를 걸어가자 지면은 그녀가 막 빠져나온 도시보다 훨씬 높았다. 길은 푸른 들 사이를 지나고 있었다. 그녀는 층계 입구까지 왔을 때 자기 가 읽던 페이지를 끝마치기 위해 거기에 멈추었다. 그리고는 뒤돌아 탑들 과 지붕들 그리고 새것과 오래된 뾰족탑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넘어 다니기 위한 계단의 다른 편 길에서 검은 머리에 창백한 얼 굴을 한 어떤 낯선 사람이 풀 위에 앉아 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옆의 넓은 사각의 판자 위에는 많은 석고상이, 몇 개의 청동으로 만든 소상과 함께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그는 여행을 계속하려는 듯 그 물건들을 다시 챙기고 있었다. 그 물품들 은 대개가 고대의 대리석 작품을 모방해 축소한 모형들이었고 수의 눈에 익은 성자의 상과는 아주 다른 성질의 신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 중에 는 표준형의 비너스와 다이아나 여신상, 아폴로와 바커스, 마르스 같은 남 신상들도 있었다. 비록 석고상들은 그녀가 있는 데서 몇 야드 떨어져 있었지만 남서쪽의 태양빛을 받아 푸른 풀 위에 멋지게 부상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는 명석한 분별력으로 이들의 윤곽을 식별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수가 서 있는 지점 과 도시의 교회탑을 연결하는 일직선상에 정확히 위치하고 있어서 그들의 석고상은 어떻게 비교해 보아도 희한하게 인연이 없는 대조적인, 한 쌍의 관념(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또는 이교정신과 그리스도교를 언급함)을 수 의 마음속에 불러일으켰다. 그 사람은 수를 보자 정중하게 모자를 벗고 그 풍채에 걸맞는 이국적인 사투리로 '서, 석, 석고상입니다!'라고 외쳤다. 이름 높은 여러 신들과 인간 의 형상을 한 조각물이 담긴 큰 판자를, 그는 당장 솜씨좋게 무릎 위에 올 려놓았다. 그리고 그것을 머리 위까지 들어올린 후 그녀에게 다가와 계단 에 그 판자를 내려놓았다. 처음에 그는 그녀에게 작은 세공품들을 보여주었다. 왕과 여왕들의 흉상 과 음유시인과 날개 달린 큐피드들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이거 두 개는 얼마죠?" 그녀가 비너스와 아폴로를 손가락으로 만지면서 말했다. 그것들은 판자 위에 놓인 것 중 가장 큰 조상이었다. 그는 10실링은 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는 살 수 없는데요." 수가 말했다. 그녀는 훨씬 싼 가격을 불렀다. 그런데 놀랍게도 석고상 장 수는 그것들을 철사고리에서 꺼내 계단 너머로 넘겨주었다. 그녀는 그것들 을 마치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끌어안았다. 계산이 끝난 후, 그 이방인이 가버리자, 그녀는 그것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 걱정이 되었다. 막상 그 녀의 소유가 된 그 물건들은 너무 크고 또 너무 발가벗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본래가 신경질적이어서 자신이 저지른 일을 보고 몸을 떨었다. 그녀가 그것들을 다룰 때 하얀 석회분이 날아올라 그녀의 장갑과 상의에 묻었다. 그 물건들을 껴안고 오는 도중 불현듯 좋은 생각이 난 그녀는, 커 다란 우엉잎과 파슬리와 생울타리 속에 자라난 다른 풀들을 뜯어서 짐꾸러 미를 단단하게 쌌다. 그러자 그녀가 지니고 있는 꾸러미는 감쪽같이 자연 을 사랑하는 사람이 채집한 거대한 한아름의 식물표본 재료처럼 보였다. "그래, 어떤 물건이든 저 변함없는 교회의 값싼 장식품들보다는 나을 거 야." 그녀가 말했다. 그러나 시실 그녀는 아직도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 조사을 사지 않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따금씩 비너스의 팔이 부러지지 않았나 확인하기 위해 잎들을 들춰보면서 중앙도로와 평행을 이루어 나 있는 어두운 뒷길을 따라 영국에 서 가장 기독교적이 도시 속으로 그녀의 이교도적인 짐을 가지고 들어갔 다. 그녀는 모퉁이를 돌아 그녀가 일하고 있는 건물의 옆문까지 왔다. 그녀 가 산 물건들은 그녀의 방으로 곧바로 옮겨졌고 그녀는 즉시 그녀 소유인 상자 안에 그 물건들을 넣고 잠가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 물건들의 부피 가 너무 큰 것을 알아차리고는 갈색 종이로 그것들을 싸서 모퉁이의 방바 닥 위에 세워 두었다. 이 집의 여주인, 폰토버는 안경을 쓴 미혼의 노파로 거의 수녀원장과 같 은 차림을 하고 사는 여자였다. 예배식에 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었고 앞 에서 언급한 바 있는 바르셰바 교외에 있는 의식 존중의 성 사일러스 교회 의 신도였다. 그 교회에는 주드도 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몰락한 목사의 딸이었는데 지금으로부터 5,6년 전에 아버지가 죽 자 대담하게 교회 필수품을 취급하는 작은 가게를 인수해 가난을 면했고 지금과 같은 신용 있는 규모로까지 가게를 발전시킨 인물이었다. 그녀는 유일한 장식품으로 십자가와 염주를 목에 걸고 있었으면 '그리스도교 역년' 을 외우고 다녔다. 그녀가 수에게 차를 마시자고 불렀을 때, 수가 금방 대답을 하지 않자 그녀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때 수는 서둘러 각각의 꾸러미를 끈으로 묶고 있었다. "뭔가 샀군요, 브라이드헤드 양?" 여주인이 꾸려진 물건을 보면서 물었다. "네, 그냥 방에 장식할 것을 좀 샀어요." 수가 말했다. "그래요? 이 방은 장식이 다 돼 있다고 생각했는데." 폰토버는 고딕풍 액자에 들어간 성자와 교회식자체로 씌어진 두루마리와 기타 팔다 남은 장식물들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그게 뭐지요? 부피가 굉장히 크군요!" 그녀는 갈색 포장지에 웨이퍼(살짝 둥글게 구운 과자의 일종)만한 작은 구멍을 뚫어 그 안에 있는 것을 살펴보려고 애쓰며 말했다. "둘 다 조상이네? 이걸 어디서 산 거야?" "저, 석고상을 팔러 다니는 상인한테서 샀는데요." "모두 성인상인가?" "네." "어떤 분들이지?" "성 베드로와 성, 성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렇군. 자, 이제 커피 마시러 내려와요. 그런 다음 햇빛이 충분히 남아 있거든 지난번에 마무리하지 못한 오르간 장식 문자를 끝마치도록 해요." 단지 우연한 호기심에서 산 물건인데도 이런 방해가 끼어든다고 생각하 니 수는 빨리 꾸러미를 풀어 찬찬히 살펴보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일어났 다. 그래서 잘 때를 기다렸다가 더 이상 방해받을 염려가 없게 되자 여러 신의 옷을 편안하게 벗겨주었다. 그녀는 이 한 쌍의 조각을 옷장 위에 올려놓고 그 좌우에 촛불을 한 자 루씩 켜놓은 다음 그녀의 침대로 가서 폰토버 여주인이 꿈에도 생각 못할 책을 상자에서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본(영국의 역사가)의 저서 [로마제국 쇠망사]였다. 그 중에서 그녀가 읽고 있는 장은 배교자, 율리아 누스 황제의 통치에 관한 대목이었다. 때때로 그녀는 눈을 들어 석고상을 바라보았다. 아폴로와 비너스의 중간 쯤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의 판화가 걸려 있었기 때문에 두 조 상은 이상하게도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 광경에 의해 암시를 받고 이런 행동을 하고 싶어졌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처럼, 그녀는 마침내 벌떡 일어나 그녀의 상자에서 다른 책을 끄집 어냈다. 이번에도 시집이었다. 그리고 눈에 익은 페이지를 펼쳤다. 그대는 정복했노라, 아, 창백한 갈릴리인이여, 그대가 내뿜는 숨결에 세계는 잿빛으로 변했노라! 그녀는 그 시를 끝까지 읽었다. 그리고 촛불을 끄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방의 불도 껐다. 그녀는 보통 때 같으면 깊이 잠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밤 그녀는 좀 처럼 잠이 오지 않았고 눈을 뜰 적마다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옷장 위의 석고상이 부옇게 눈길을 끌었다. 그 주변에 있는 것은 경전이든 순교자이 든 또한 고딕풍의 액자에 있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이든간에 석고의 여러 신들과 기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을 뿐이었다. 십자가 처형도는 십자 가에 가려진 인물이 상의 그늘 때문에 보이지 않아 지금은 단지 라틴 십자 가(횡목보다 종목이 긴 표준형의 십자가)로 보였다. 때마침 교회의 시계가 새벽시간을 알렸다. 이 소리는 같은 도시의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책을 읽느라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의 귀에 도 들렸다. 토요일 밤이었기 때문에 주드는 평소와는 달리 괘종시계를 맞 추어 두지 않았다. 그래서 주드는, 그의 습관이 되어 버린 것처럼, 평소보 다 두세 시간 늦게까지 자지 않고 깨어 있었다. 그는 그리스바하의 원전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 바로 이 시간에 수는 뒹 굴면서 그녀의 이교 조상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경찰관이나 주 드의 창문 아래를 지나가는 늦게 귀가하는 시민들이 만일 거기에 서서 귀 를 기울였다면 주드에게는 형언할 수 없는 매력적인 말들, 방 안에서 열정 적으로 중얼거리는 이상한 말들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설명할 수도 없 는 괴상한 말 소리는 이와 같은 것들이었다. "알 헤민 헤이스 데오스 호 파테르, 엑스 호우 타판타 카이헤이 메이스 아우톤" (우리에겐 아버지이신 유일한 신이 있을 뿐 만물이 여기서 나와 우리 또 한 여기로 되돌아간다. --[고린도 전서] 8장 6절) 그의 말소리는 외경심에서 더욱 높아졌고, 마침내 그 책의 마지막 구절 을 낭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이 헤이스 쿠어리어스 이예소우스 크리스토스, 디후 타 판타 카이 헤 메이스 디 아우토우!"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있을 뿐, 만물이 이것에 의함이며, 우리 또 한 이것에 의함이니라!) 2-4 주드는 돌 세공 솜씨가 훌륭했으며 시골 읍내에 있는 직공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런던에서는 잎의 모양을 돌출 장식이나 둥근 장식으로 새길 때 그 잎 안에 들어가는 주름을 음각하라고 시키면 거절당할 것이다. 마치 타락이라도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주드는 고딕 양식의 문양 작업이나 창문 위를 장식하는 작 업이 별로 많이 않을 때는 다른 곳으로 가서 기념비나 묘비석에 글자를 새 기기도 했는데, 그는 그런 변화에서 즐거움을 느꼈다. 주드가 수와 두 번째로 마주친 것은 어느 교회의 내부에서, 방금 언급한 종류의 일을 하면서 사다리 위에 있을 때였다. 간단한 아침 예배가 있었는 데, 목사가 들어왔을 때 주드는 사다리에서 내려와 여섯 사람 정도의 신자 들과 함께 끝좌석에 앉았다가 기도가 끝나면 돌 깍는 일을 다시 시작하기 로 하고 있었다. 그는 예배가 반쯤 진행될 때까지도 여자 신자 중에 수가 끼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녀는 억지로 연상의 폰토버 여주인 과 동행하여 거기에 와 있었다. 주드는 그녀의 예쁜 어깨와 그녀가 일어날 때와 앉을 때의 부드럽고 희 한할 정도로 차분한 동작과 그리고 형식적으로 무릎을 꿇는 행동 등을 앉 아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가 더욱 행복한 환경에 놓이게 되었다면 저런 영국 국교회원이 자기에게 과연 무슨 도움이 되었을까하고 생각해 보았다. 신자들이 막 자리를 뜨기 시작하자 그는 일에 착수했으나, 그것은 어서 일을 끝내야 된다는 조바심에서가 아니었다. 형언할 수 없는 태도로 자신 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이 여인을 감히 이런 성스러운 장소에서 마주 대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에 대한 그의 관심이 명백히 성적인 종류의 것이라는 사실이 자명해 지면서 이제 그가 수 브라이드헤드와 친숙한 사이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되 는 세 가지 이유가 완강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사람이 일만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이다. 주드라는 이 특별한 인간이 어쨌든 사랑할 대상을 원하고 있는 것도 분 명했다. 남자들 중에는 경솔하게 여자에게 돌격해서 그녀가 거절하지 못하 는 안이한 우정의 기쁨을 낚아채고는 나머지 일은 운명에 맡겨버리는 사람 들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주드는 그렇지 않았다. 더구나 첫출발이 그래서는 곤란했다. 그러나 날이 감에 따라, 특히 외로운 저녁에는 더욱더 도덕적으로 당황 스럽게도 그녀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고 변덕스럽게 격식을 차리지 않으며 예기치 않은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데 대해 두려우면서도 희열을 경험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또 온종일 그녀의 영향력에 휩싸여 그녀가 자주 출입하는 장소를 서성거리기도 하면서 늘 그녀를 생각했고, 그의 양심이 이 싸움에서 패자 가 되는 것 같다고 스스로에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녀는 확실히 아직까지 그에겐 거의 이상적이 존재였다. 아마도 그녀를 더 잘 알게 된다면 이 의외의 열정을 치유받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 떤 목소리는, 비록 그가 그녀를 알고 싶어할지언정 그러한 열정이 소멸되 기는 바라지 않는다고 속삭였다. 적어도 그 자신의 보수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상황이 부도덕하게 되어가 고 있다는 것은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수가 국가법에 의해 평생 동안 다른 사람이 아닌 아라벨라를 사랑할 것을 허가받은 남자의 애인이 된다는 것은 주드가 현재 걷고 있는 그 길을 생각할 때 제2의 시작으로서 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이 확신은 그에게 있어서 너무 통절했기 때문에 어느 날, 평상시처럼, 그 가 이웃마을 교회에서 혼자 일하고 있을 때, 이러한 약점에 넘어가지 않도 록 기도하는 것이 그의 의무라고 느꼈다. 그러나 이러한 일에 있어 세상의 표본이 되고 싶다고 아무리 원했지만 도저히 잘 되지 못했다. 마음속의 절 실한 욕망으로부터 유혹을 받으면서도 그것에서 해방될 수 있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변명 했다. "결국,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나의 이번 일은 처음의 실수처럼 색정의 발로는 아니다.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예외적일 정도로 훌륭하 다. 때문에 이것은 지적인 공감을 구하는 소원이며 고독한 나머지 사랑의 친절을 원하는 욕구이다." 이와 같이 해서 그는 이것이 인간의 외고집임을 깨닫기를 두려워하면서 그녀를 계속해서 흠모했다. 수의 미덕이나 재능, 혹은 신앙 등에 의해 그녀 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오후 주드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떤 젊은 아가씨가 약 간 머뭇거리면서 석공장의 마당으로 들어와 흰 돌가루 먼지에 옷깃을 끌리 지 않으려고 옷깃을 들어올리면서 사무실 쪽으로 걸어갔다. "멋진 여잔데." 조 아저씨라고 불리는 사람이 말했다. "저 여자 누구야?" 다른 남자가 물었다. "모르겠는데, 어디선가 본 여자 같아. 그래, 그녀는 10년 전 성 사일러스 교회의 철공일을 맡았던 브라이드헤드의 딸이야. 그후에 런던으로 가 버렸 지.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내 생각엔 그리 좋지 않은 것 같 아. 그녀가 여기로 돌아온 걸 보니." 그러는 동안 그 젊은 아가씨는 사무실 문에 노크를 하고 주드 폴리씨가 마당에서 일을 하고 있는지를 물어왔다. 주드는 마침 그날 오후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일을 나아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실망스런 낯빛을 내보였 고, 그리고 즉시 가 버렸다. 주드가 돌아오자 그들은 그녀에 대해 설명하며 그에게 이 일을 말해 주었다. 그는 소리쳤다. "뭐? 그녀는 나의 사촌 수야!" 그는 뒤쫓아나가 그녀가 나갔다는 길을 찾아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보이 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양심적으로 피해야 한다는 다짐을 버렸다. 그리고 그날 당장 그녀를 방문할 것을 결심했다. 그가 그의 숙소에 도달했을 때 그는 그녀가 보낸 편지를 발견했다. 첫 번째 편지였다. 그 자체는 간단하고 평범한 것이었지만 뒷날 생각해보면 열렬한 정열적인 결과를 이미 잉태했 다고 생각되는 그런 부류에 속하는 것이었다. 여자한테서 남자 앞으로 온, 또는 남자한테서 여자 앞으로 놈, 이러한 최초의 순진한 편지 속에 앞으로 펼쳐질 드라마에 대한 예감이 전혀 없다는 것이야말로, 그 드라마가 펼쳐 지고 난 후 그 자줏빛의 격정을 상기하며 다시 읽게 될 때, 그 모든 사건 들은 더욱 인상적이고 엄숙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전율스럽기까지 한 것이 다. 수의 편지는 거의 기교가 없는 자연스런 문체로 씌어 있었다. 그녀는 주 드를 '친애하는 사촌오빠 주드'라고 호칭하면서 최근에야 그가 크리스트민 스터에 살고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고 썼다. 그리고 그녀에게 알 려주지 않은 것에 대해 그를 나무랐다. 함께 좋은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남과 잘 사귀지도 않았고 마음에 맞는 친구도 별로 없기 때문이라 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여기를 떠나려고 하기 때문에 사귈 수 있 는 기회는 아마 영원히 없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수가 이곳을 떠날 것이라는 소식에 주드는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 것은 그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우발적인 사건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 에게 곧바로 답장을 썼다. 그는 오늘 저녁에 그녀를 만나고 싶다고 했고 이 편지를 쓴 시간으로부터 1시간 후에 순교 유적의 표식으로 새겨진 보도 의 십자가가 있는 곳에서 기다리겠노라고 썼다. 그는 한 소년에게 편지 심부름을 보내고 난 뒤 그녀를 방문하겠다고 써 야 했는데, 너무 서둘다 밖에서 만나자고 한 것을 후회했다. 사실 그것은 시골사람들이 만나는 풍습이어서 그 외에 다른 것은 그에게 떠오르지 않았 었다. 아라벨라와는 불행하게도 이와 같은 수법으로 만났었다. 그래서 수와 같은 사랑스런 아가씨에게 이런 제안을 한다는 것은 예의가 아닌 듯 했다. 그러나 지금은 별수가 없었다. 그는 정해진 시간 몇 분전에, 막 가로등에 불이 켜진 거리로 나와서 약속 장소로 갔다. 때는 늦은 시간이 아니었지만 큰 거리는 조용했고 사람들도 거의 없었 다. 저쪽 편에서 한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바로 수였다. 그들은 동시에 십자가 표지를 향해 다가갔다. 그 표지에 이르기 전에 그녀가 그를 불렀다. "거기에서 오빠를 보고 싶지 않아요. 난생 처음인데! 좀더 저쪽으로 가세 요." 그 목소리는 비록 적극적이고 은방울 굴러가듯 맑았지만 떨리고 있었다. 그들은 평행을 이루며 걸어갔고 그녀가 마음에 드는 곳까지 가기를 기다렸 다가 주드는 그녀가 가까이 오라는 신호를 하자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 지 점은 대낮에 짐마차가 정차하는 장소였는데, 지금은 한 대도 없었다. "내가 방문하지 않고 동생더러 나오라고 해서 미안하군!" 주드는 연인같이 수줍음을 타며 말을 꺼냈다. "그러나 내 생각엔 우리가 걸으면서 얘기한다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거요." "아, 괜찮아요." 그녀는 친구처럼 자유롭게 말했다. "찾아오셔도 모실 만한 그런 장소도 없어요. 제 말은 오빠가 택한 장소 가 너무 불쾌한 곳이라 서요. 불쾌하다고 말하면 안 되겠지만, 저는 단지 그곳에 대한 연상이 우울하고 불길하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렇 지만 제가 오빠를 아직 알지도 못하는데, 이런 식으로 시작하는 게 우습지 않아요?" 주드는 그녀를 잘 보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호기심에 찬 눈으로 그 를 쳐다보았다. "오빠는 제가 오빠를 아는 것보다 저를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래. 난 가끔 사촌동생을 봤어!" "그런데, 오빠는 제가 누군지 알면서도 말을 걸지 않았다는 건가요? 그 리고 이젠 제가 떠나야 하는 데도요!" "그래, 그것은 안됐군. 나는 이곳에 친구도 한 명 없어. 여기 어딘가에 오랜 지인이 한 분 계시긴 할 텐데 아직 그를 방문하고 싶지는 않아. 혹시 사촌동생이 그 선생님에 관해 알고 있는지 궁금하군. 필로트슨 씨라고, 이 지방 어딘가 에서 목사로 계실 텐데." "몰라요. 필로트슨이라는 분을 알고는 있지만, 그는 이 지방에서 조금 벗 어난 럼즈던에 살고 있어요. 그는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세요." "아! 그와 동일인인지도 몰라. 하지만 그럴 수가! 교장 선생님을 알고 있 나? 리처드라고 하던가?" "그래요, 맞아요. 그를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그에게 책을 보낸 적은 있어요!" "그렇지만 선생님이 어떻게 그럴 수가!" 주드의 낯빛이 침울해졌다. 그 위대한 필로트슨조차 실패한 계획이라면 그가 어떻게 성공할 수 있겠는가? 만일 이 소식을 그가 그리던 수에게서 듣게 된 것이 아니었다면 그는 절망의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조차도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예감이 있었다. 그것은 대학을 통해 꿈을 이루겠다던 필로트슨의 장대한 계획이 실패했 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이 사실은 그를 의기소침하게 했다. "산책을 할까 했는데 필로트슨 선생님을 뵈러 가는 게 어때? 늦은 시간 은 아닌 것 같은데." 그녀는 동의했다. 그들은 언덕을 올라 아름답게 나무숲이 우거진 시골길 을 지나갔다. 이윽고 교회의 흉벽이 달린 탑과 사각의 작은 탑이 하늘을 배경으로 솟아 있는 교사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거리에서 어떤 사람에 게, 필로트슨 선생이 집에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는 항상 집에 있다고 그 사람이 알려주었다. 문을 두드리자 선생은 손에 촛불을 들고 무슨 일이냐 는 표정을 지으며 나왔다. 그의 얼굴은 주드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에 비 하면 많이 야위었고 고생에 찌든 모습이었다. 긴 세월이 지난 후의 필로트슨 선생과의 만남은 그들이 헤어진 이래로 주드의 상상 속에 있던 선생의 후광을 일거에 파괴시켜 수수한 얼굴빛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와 동시에 분명히 많은 고생을 감수하고 좌절을 맛보았 을 필로트슨 선생에 대해 주드의 마음속에서는 동정심이 솟아났다. 주드는 그에게 자신의 이름을 대고 어렸을 때 자기에게 친절을 베풀어 준 선생님 을 만나러 왔다고 말했다. "난 자네를 전혀 기억 못하겠는데." 선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자네가 내 제자 중의 한 명이었다고? 아마 그렇겠지. 그러나 내 나이쯤 되면, 제자들이 수천 명에 이르기 마련이지. 그리고 그들은 너무 많이 변해 서 아주 최근의 학생들을 제외하면 기억나는 학생이 별로 없지. 당연한 일 이네." "메리그린이었습니다." 주드는 오지 않는 편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그렇지. 거기에도 잠시 있었지. 그런데 이분도 내 학생이었던가요?" "아닙니다. 그 쪽은 제 사촌입니다..... 제가 선생님께 문법책을 몇 권 보 내달라고 편지를 쓴 적이 있는데, 기억나시는지요. 선생님은 그 책들을 보 내주셨습니다." "아, 그렇군! 그 일이 어렴풋이 기억나는군." "그 책들을 보내주셔서 너무 고마웠습니다. 저를 공부의 길로 이끌어주 신 분도 바로 선생님이세요. 선생님이 메리그린을 떠나시는 날 아침, 선생 님은 짐을 마차에 실으시고는 저한테 잘 있으라고 하시면서 선생님의 계획 은 대학을 나와 교회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학위는 신학자나 교사로서 무엇인가 해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던 기억은 나는군.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의 중을 말했는지는 모르겠네. 그런 생각도 여러해전에 포기하긴 했지만." "저는 그 말씀을 결코 잊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지방까지 오서 오늘 밤 여기서 선생님을 찾아 뵙게 된 겁니다." "들어오게. 그리고 자네 사촌도." 필로스튼이 말했다. 그들은 교사의 거실로 들어갔는데, 거기에는 서너 권의 책을 비추는 종 이갓을 씌운 등불이 있었다. 필로트슨 선생은 등불의 갓을 벗겼다. 그랬더 니 그들은 서로 더 잘 볼 수가 있었다. 수의 신경질적인 작은 얼굴과 명랑 한 검은 눈, 머리카락, 그녀 사촌오빠의 진실한 모습과 훨씬 성숙해진 선생 의 얼굴이나 자태에도 불빛이 비쳤다. 필로트슨 선생은 입술이 엷고 다소 고상한 입언저리에다, 약간 몸을 웅 크리는 버릇을 가지고 있는 45세의 생각 깊은 인물로 검은 프록코트를 입 고 있었다. 오래 입어 계속된 마모로 인해 견갑골과 팔꿈치언저리가 반들 반들 빛나고 있었다. 옛날의 우의가 어느새 되살아나서, 교장선생과 사촌 남매들은 각각 자기 들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선생은 아직도 가끔씩 교회 생각이 난다고 했으 며 지난 세월 그가 하려고 의도했던 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목사 자격을 얻 는 과정을 마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 동안 그는 현재의 위치를 감수하고 있는데, 교생 한 사람이 필요하다고도 말했다. 그들은 저녁 식사 때까지 머물지는 못했다. 수가 늦기 전에 집에 가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크리스트민스터로 사는 길을 함께 걸 었다. 비록 그들이 나눈 화제는 일반적인 주제들을 벗어나지 않았지만 주 드는 그의 사촌동생이 의외의 여자라는 것을 깨닫고 놀랐다. 수는 너무나 활발해서 모든 것의 근원이 그녀의 감정에 있는 것 같았다. 흥분된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주드가 그녀를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그녀의 발걸음은 빨랐다. 어떤 점에서 그녀의 이러한 민감함은 허영처럼 잘못 해 석될 수도 있었다. 그녀의 그에 대한 감정은 단지 우정의 차원이었겠지만 주드는 그가 그녀 를 알게 되기 전보다 더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이 아팠 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우울했다면 그것은 머리 위에 드리워진 어두움 탓이 아니라 그녀와의 이별이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왜 크리스트민스터를 떠나야 하지?" 주드는 서운한 듯 말했다. "어째서 사촌동생은 뉴면, 퓨지, 워드, 키빌 등과 같은 인물들이 살았던 이 역사의 도시를 떠나야 한다는 거지?" "네, 그래요. 하지만 세계 역사를 통해 볼 때 그들이 그렇게 위대할 까 요? 여기 머물어야 한다는 이유치고는 우습군요! 전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이 없어요!" 그녀는 웃었다. "난 가야만 해요." 그녀가 말을 계속했다. "제가 일하는 가게의 주인인 미스 폰토버는 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저도 그렇구요. 그러니 떠나는 것이 제일 상책이죠." "어떻게 그런 사이가 되었지?" "제가 갖고 있던 조상들을 그녀가 깨 버렸어요." "아니? 고의로 그랬단 말이요?" "그래요. 비록 내 소유물이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발견하지 바닥에 던지 고 짓밟았어요. 왜냐하면 그것이 그녀의 취향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조상의 둥근 팔과 머리통을 그녀의 발꿈치로 산산조각낸거예요. 무서운 일 이죠." "그녀가 보기엔 지나치게 구교적이었고 사도적이었나보군? 틀림없이 그 녀가 구교의 우상이니 하고 성도의 기원이 어쨌느니 말했겠군." "아니에요.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그 문제를 아주 다르게 봤어요." "아! 놀라운 일인데!" "네. 그녀가 나의 수호신을 싫어하는 것은 아주 다른 이유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말대꾸를 했지요. 결국 떠나기로 했고 나는 좀더 독 립학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해요." "다시 가르치는 일을 해보는 게 어때? 전엔 선생을 했다고 들었는데." "그것을 다시 하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나 는 미술 도안가가 되었으니까요." "필로트슨 선생님께 그의 학교에서 동생이 일하도록 해달라고 부탁해볼 까? 만일 동생이 원한다면, 그리고 교육대학에 가서 일급면허여교사가 된 다면 동생은 어떤 도안가나 교회 미술가보다도 두배의 수입과 두배의 자유 를 얻을 수 있을 거야." "그럼..... 그분께 부탁해 보세요. 이제 들어가 봐야만 해요. 안녕, 주드 오 빠!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돼서 기뻐요. 우리 부모님들이 싸웠다고 해서 우 리마저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요. 그렇죠?" 주드는 그녀의 말에 자신이 얼마나 많이 공감하고 있는가를 들키기 싫어 곧바로 자신의 숙소을 향해 걸어갔다. 수 브라이드헤드를 자기 가까이에 두고 싶은 욕망은 이제 결과야 어떻든 간에 그를 움직이는 하나의 기제가 되었다. 그래서 다음날 저녁 그는 다시 럼즈던으로 출발했다. 단지 편지 한 장만으로 그분을 설득할 수 있는 효과 가 있을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교장선생은 그와 같은 제안이 뜻밖 이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원한 것은 이년 차쯤 되는 경력자였는데." 그가 말했다. "물론 개인적으론 자네 사촌도 할 수 있다고 보지만, 그러나 그녀는 경 험이 없어서. 아, 참, 그녀는 경험이 있지, 그렇지? 현데 그녀는 정말 교사 라는 직업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주드는 아는 바도 없으면서 자기가 보기에 그녀는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필로트슨 선생을 보조하는 일에 그녀가 천성 적인 자질을 발휘할 것이라는 교묘한 주장도 펼쳤다. 주드가 말한 것에 크게 감동된 교장 선생은 지인으로서 주드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그녀를 고용하겠다고 말했다. 만일 그의 사촌이 이와 같은 진로를 진정으로 따라갈 생각이 없다면, 그리고 이 제1보는 교 생의 제1단계에 지나지 않고 교육대학에 입학해서 받는 훈련이 그 제2단계 에 해당한다고 각오하지 않으면 그녀의 시간은 많은 낭비가 될 것이고 봉 급은 거의 명목상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이번 방문이 있고 난 다음날 필로트슨은 주드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주 드가 사촌과 다시 상의를 했더니 교직이란 생각에 더욱더 아음이 끌려서 결국 그녀가 오기로 동의했다는 내용이었다. 세상을 등지고 사는 교장 선 생으로서는 사촌누이의 일자리를 알아보는 주드의 열성이 가족의 일원 사 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협동 본능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에 대한 다른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2-5 교장선생은 학교에 딸려 있는 소박한 숙소에 앉아 있었다. 학교와 숙소는 모두 현대식 건물이었다. 그는 길 건너 수 선생이 묵고 있는 낡은 집을 바 라보았다. 그 합의는 배우 빠르게 결정되었다. 필로트슨선생의 학교로 전근 오기로 돼 있었던 교생이 오지 못하게 되자 수가 그 자리를 메꾸기 위해 채용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일시적인 결정은 다음에 있을 연중 장학 관 방문 때까지만 유효했다. 일시적인 것을 영구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는 그의 허가가 필요했다. 그 것은 또한 그가 바라던 바였다. 비록 그녀가 그와 함께 있은 지 겨우 3, 4 주밖에 안 되었지만 그는 주드가 그녀에 대해 말한 것만큼 그녀가 매우 영 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의 일을 반은 덜어주는 도제를 쓰 지 않을 장인이 어디 있겠는가? 오전 8시 반이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그는 수가 학교로 가기 위해 길을 건너는 것을 보고 있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가기로 했다. 9시 20분 전에 그 녀는 길을 건넜다. 가벼운 모자를 비스듬히 쓰고 있었다. 그는 진귀한 물건 을 보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선생으로서의 그녀의 자질과는 전혀 무관한 새로운 방사광이 오늘 아침 그녀를 에워싸고 있는 듯이 보였다. 교장은 그 녀를 따라 학교에 갔고, 온종일 교실의 맨 끝에서 그녀의 수업을 지켜보았 다. 그녀는 확실히 훌륭한 선생이었다. 저녁때는, 그녀에게 개인 교수를 해주는 것이 교장 선생의 책무였다. 법 규의 한 조항에는 선생과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성이 다를 경우 상당한 지 위에 있는 나이 많은 여자가 그 자리에 참석해야만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필로트슨은 그녀의 아버지 뻘이 될 만큼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이런 경우 의 규정은 상당히 우스꽝스러웠으나 그는 성실하게 규칙대로 행했다. 그래 서 바느질로 먹고 살아가는 수의 하숙집 여주인인 과부 호스 부인을 그녀 의 방에 함께 앉아 있도록 했다. 왜냐하면 이 학교에는 달리 앉아 있을 만 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때때로 그녀가 계산할 때 - 그들의 공부가 수학일 때 - 그녀는 약간 묻 고 싶은 미소를 띄고 무의식적으로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마치 선생으로 서의 그가 그녀의 머리속에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옳은가 그른가를 제대로 알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그런 생각을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때 필로트 슨은 사실 수학에 대해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녀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다. 개인 교수로서의 그가 봐도 이상할 정도로 그는 수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 마도 그녀는 그가 자기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혹시 알아 차렸는지도 모른다. 2, 3주 동안 그들의 공부는 단조롭게 계속되었지만, 그것 자체로도 그에 겐 기쁨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예루살렘 모형 도시의 순회 박람회를 보기 위해 크리스트민스터로 아동들을 데리고 갈 일이 생겼다. 이 견학은 교육 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학생들은 일인 당 1페니에 입장할 수 있었다. 그들 은 두 줄로 길을 걸어갔다. 수는 무명으로 만든 양산을 쓰고 업지 손가락 으로 우산대를 눌러가며 학생들 옆에서 따라갔다. 그리고 필로트슨은 그의 길게 흔들리는 프록 코트를 입고 단장을 부드럽게 내저으면서 뒤를 따랐 다. 그는 수가 학교에 온 이래로 짓곤 하던 끔을 꾸는 듯한 기분에 젖어 따라가고 있었다. 그날 오후는 더웠고 먼지가 많이 날렸다. 그들이 들어선 전시장에는 사 람들이 별로 없었다. 고대 도시의 모형은 중앙에 있었다. 섬세하고 종교적 인 인자함이 풍기는 안내자가 지시봉을 들고 어린이들에게 성서에서 읽은 이름들로 알려진 다양한 지방과 장소들을 보여주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모리어 산, 여호사밧의 계곡, 시온의 도시와 성벽과 성문 등이 그것이었다. 한 성문 밖에는 무덤 같은 커다란 고분이 있었고 그 고분 위에 작은 흰색 십자가가 꽂혀 있었다. 이곳이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갈보리 언덕이라고 안내인이 말했다. "제 생각에 이 모형은 정교하긴 하지만 매우 공상적인 산물이에요." 모형을 향해 교장 선생과 함께 서 있던 수가 그에게 말했다. "예수가 살았던 시절의 예루살렘이 이와 같았다고 누가 알 수 있겠어요? 이 사람도 알지는 못했을 거라고 전 확신해요." "그것은 현재의 예루살렘을 기초로 추정하여 만든 것이라지 않소." "제 생각에는 예루살렘은 이 정도만 보아도 충분하다고 봐요." 그녀가 다시 말했다. "우리가 유태인의 후손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말이에요. 결국 예 루살렘은 그 장소나 유태인이라는 민족에게 있어서나 최상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아테네나 로마나 알레산드리아나 다 마찬가지지요." "그러나 선생, 그것이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한 번 생각해 보시오!" 수는 침묵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쉽사리 기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모형 주위에 때지어 있는 아이들의 무리 뒤쪽에 하얀 플란넬 상의를 걸친 젊은이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여호 사밧의 계곡을 살펴보려고 너 무 낮게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바람에 그의 얼굴은 가람산으로 가리어 보 이지 않았다. "여봐요, 당신의 사촌오빠 주드가 와 있었군요." 교장 선생이 말을 이었다. "그는 우리가 예루살렘을 충분히 봤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군요!" "아, 저는 사촌오빠를 미처 못 보았어요!" 그녀가 빠르고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주드 오빠, 정말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네요!" 주드는 공상에서 깨어나 그녀를 알아보았다. "아, 수!" 그가 기쁘면서도 당황하여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여기 있는 아이들은 물론 사촌동생의 학생들이겠지! 오후에 학생들이 입장하는 걸 봤어. 그래서 동생도 올지 모른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내가 너 무 열중하다 보니 자신이 어디 있는지조차 잊어버렸어. 이 모형은 어쩌면 이렇게 사람을 과거로 되돌아가게 하는 걸까! 난 몇 시간 동안이라도 이것 을 관찰하고 싶은데, 불행히도 시간이 몇 분밖에 없네. 난 일하다 말고 여 기에 왔거든!" "자네의 사촌은 너무 영리해서 그것을 혹독하게 비판하고 있었다네." 필로트슨이 농담하듯 말했다. "그녀는 모형의 정확성에 대해 아주 회의적이지!" "아니에요, 필로트슨 교장 선생님, 전 그렇지 않아요. 전혀! 전 영리하다 고 불리는 여자가 되는 게 싫어요. 요즈음은 그런 여자들이 너무 많아요!" "안 동생의 말뜻을 알겠어요." 주드가 열정적으로 끼어들며 말했다(사실은 그 역시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동생이 전적으로 옳다고 봐요." "정말 친절하시군요, 주드. 전 오빠가 저를 믿어줄줄 알았어요!" 그녀는 충동적으로 주드의 손을 잡더니 교장 선생에게 책망하는 듯한 눈 길을 주고는 주드 쪽으로 돌아섰다.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부드러운 빈 정거림에 대해 이렇게 떨리고 있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도 이상하게 느꼈 다. 그녀는 이 순간적인 감정의 표출이 향수 이 두 사람을 얼마나 복잡한 드라마로 전개되도록 할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루살렘의 모형 은 교육적인 면이 너무 지나쳐서 어린이들이 쉽게 싫증을 냈다. 그래서 오 후가 조금 지나자 그들은 럼주던을 되돌아가야 했고 주드도 자기일터로 돌 아가야 했다. 주드는 깨끗한 상의와 앞치마를 두른 어린이들이 필로트슨과 수 옆에서 시골길을 줄지어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쩐지 쓸쓸하고 불만족스러웠다. 주드만이 공통된 어떤 것에서 소외된 듯한 그런 심정이었 다. 필로트슨은 수가 수업이 없는 금요일 저녁에 산보나 하자고 주드를 초 대했다. 주드는 꼭 그러겠노라고 약속을 했다. 이렇게 하여 학생들과 교사 들은 집으로 돌아갔고 다음날 수의 수업에 들어갔던 필로트슨은 흑판에 예 루살렘의 모형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모형에는 아무런 흥미도 없었고 거의 살펴보지도 않았잖소?" 그가 말했다. "그랬습니다. 하지만 많은 부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나보다 기억력이 참 좋군요." 마침 그대, 장학관은 교육실정을 파악하기 위해 '불시 방문'을 하던 중이 었다. 그리고 이틀 후, 아침 수업시간 중간에 문의 걸쇠가 부드럽게 들어올 려지더니 당사자인 장학관이 왔다. 교생들에게 그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필 로트슨 교장에게 있어서 이 놀라움은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이 이야기의 여주인공처럼 이러한 상투적인 수법으로 의표를 찔린 적이 너무 여러 번이 었기 때문에 그는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수의 학급은 맨 끝에 있었고 그녀는 입구 쪽으로 등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장학관은 그 녀가 그의 출현을 알아차리기 전 약 30초 동안 그녀의 뒤에 서서 그녀가 가르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녀는 돌아서서 자주 두려워했던 그 순간이 이미 닥쳐왔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그녀의 소심증에 미친 이 사건으로 인해 그녀는 비명을 질러댈 정 도였다. 필로트슨은 스스로도 껴안을 수가 있었다. 머지않아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웃었다. 그러나 장학관이 떠나자 그녀는 다시 창백하게 질려서 필 로트슨은 그녀를 자기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힘을 내라고 그녀에 게 약간의 브랜디를 먹였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교장 선생님은 저한테 장학관의 '불시 방문'이 있을 거라는 것을 알려주 셨어야 했어요!" 그녀는 화가 난 듯 헐떡거렸다. "아, 전 어쩌면 좋아요! 이제 그분은 제가 교사 자격이 부족하다는 공문 을 올릴 것이고, 저는 영원히 치욕을 당하겠지요!"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수 선생. 수는 내가 본 중 가장 훌륭 한 선생이요." 그가 수에게 너무 상냥하게 대했기 때문에 그녀는 감동되었다. 그녀는 그를 신랄하게 힐난했던 것을 곧 후회했다. 상태가 회복되자 그녀는 집으 로 돌아왔다.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 주드는 마음을 졸이며 금요일 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수요일과 목요일에 그녀를 너무 보고 싶은 나머 지 날이 어두워진 뒤에도 마을로 향하는 길을 따라 걷기도 했고 집에 돌아 와서는 집중이 되지 않아 책도 읽지 못했다. 금요일이 되자 그는 일어나서 수가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옷을 차려입고 차를 서둘러 마신 다음 저 녁에 비가 올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집을 나섰다. 머리 위의 무성한 나무 들은 저녁때의 울적함을 더 하고 있었으며 눅눅한 물방울이 애처로운 듯 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것들은 그에게 예감, 비이성적인 예감을 심어 주었다. 왜냐하면 그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과 그녀와는 현재보다 더 가까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퉁이를 돌아 마을로 들어서자 목사관의 문에서 우산을 같이 쓴 두 사 람이 나오고 있는 모습이 주드의 눈에 띄었다. 주드는 그들 뒤쪽에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주드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그들 이 수와 필로트슨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었다. 필로트슨은 그녀의 머 리 위로 우산을 받쳐들고 있었다. 그들은 아마도 학교일과 관련해서 목사 관을 방문한 것이 분명했다. 그들이 비에 젖어 인적이 드문 오솔길을 따라 걸어갈 때 주드의 시야에 필로트슨이 수의 허리에 팔을 두르는 모습이 들 어왔다. 수는 그 팔을 부드럽게 치웠다. 그러나 그는 다시 팔을 둘렀고 그 녀는 걱정스러운 태도로 주위를 둘러보긴 했지만 그의 손을 내버려두었다. 그녀는 결코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그래서 주드의 존재를 알아채지는 못했 다. 주드는 병충해에 걸린 식물처럼 생울타리 옆에 주저앉았다. 주드가 생 울타리 옆에 숨어 있는 동안 그들은 수의 집에 도착했고 수와 헤어진 필로 트슨은 가까이 있는 교사를 향해 계속해서 걸어갔다. "아, 선생님은 그녀에 비해 나이가 너무 많아. 너무 늙었어!" 주드는 절망적인 심정이 되어 외쳤다. 그는 간섭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아 라벨라의 사람이 아니던가? 그는 더 이상 걸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는 크리스트민스터를 향해 발걸음을 되돌렸다. 그이 발걸음은 수와 교장 사이의 길을 가로막고 서 있을 하등의 이유도 없다고 그에게 말하는 듯했 다. 필로트슨은 수보다 약 20년은 연상이었다. 그러나 그런 조건에서도 행 복한 결혼은 얼마든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이 사촌과 필로트슨의 관계도 전적으로 자기로 인해 생겼다고 생각하니 주드의 슬픔은 더욱 가혹한 고통 이 되어버렸다. 2-6 주드의 심술궂고 매정한 늙은 대고모가 메리그린에서 몸이 좋지 않아 몸 져눕게 되었다. 그래서 주드는 다음 일요일에 그녀를 문병하러 가기로 했 다. 이 방문은 럼즈던 마을 쪽으로 돌아섰다가 자기의 사촌과 따분한 면담 을 하겠다는 생각과 충돌해서 이겨낸 노력의 결과였다. 그는 마음속 깊이 있는 말을 할 수도 없었고 그를 고문하듯 했던 그때의 장면을 드러내놓고 말할 수도 없었다. 대고모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 이날 주드는 짧은 병 문안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대고모를 위안하기 위해 보냈 다. 작은 빵 가게는 이웃에 팔아 넘겼고 여기서 나온 수익과 대고모의 저 축으로 대고모는 필수품과 그 밖의 물건들을 곤란하지 않게 공급받을 수 있었다. 같은 마을에 사는 한 과부가 대고모와 함께 지내면서 대고모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보살펴주고 있었다. 그가 떠날 때가 다 되어서야 비로소 그는 대고모와 조용히 이야기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수가 여기서 태어났나요?" "그래. 이 방에서. 그 집 식구들은 그 당시 여기서 살았단다. 왜 그것을 묻는 거냐?" "아, 그냥 알고 싶어서요." "너 지금 그 애를 만나고 있구나! 내가 너한테 뭐라고 했었냐?" 노파가 엄히 말했다. "저, 제가 그녀를 만나선 안 된다고요." "너 그 애하고 세상 얘기를 했구나?" "네." "그렇다면, 그건 그만 둬라. 그 애는 제 애비 손에 의해 양육되어서 외 가 쪽 사람을 싫어하니까. 그래서 그 애는 너 같은 일꾼에게는 어떤 호의 도 보이지 않을 꺼가. 지금쯤은 도시 처녀가 되었을 테니까. 난 그 애를 좋 아하지 않았다. 건방진 꼬마년이었지. 그 애는 너무 자주 신경이 곤두서 있 었단다. 그 애의 건방짐 때문에 난 여러 차례 그 애를 때려줬어. 언젠가 이 런 일이 있었단다. 신발과 양말을 벗어 던지고 속치마를 무릎 위까지 올리 고는 연못에 걸어 들어가는 거야. 그 앞에서 내가 창피하다고 소리를 지르 자 그 애가 '저쪽으로 가세요, 대고모님! 아무래도 고상한 사람들이 볼 만 한 광경이 못되니까요!'라고 말하는 거야." "그 애는 그때 아직 어린아이였잖아요!" "그 앤 만으로 열두 살이었단다." "그럼 그럴 수도 있었겠네요. 그러나 이제 그녀는 나이가 들어서 생각도 깊고, 상냥하고, 가냘프고, 또 민감함도 가지고 있어요." "주드!" 늙은 대고모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질렀다. "그 애와 함께 어리석은 짓을 해서는 안 된다!" "그래요, 그래야지요. 물론, 안 돼요." "네가 아라벨라라는 여자와 결혼했었지만, 그것은 한 남자가 자기 자신 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이익이 적은 짓을 한 거 야. 그러나 그 여자는 세계 반대편으로 가버렸으니 다시는 너한테 애를 먹이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아직 이혼한 건 아니니까 네가 수에게 어떤 환상을 가진다면 더 나쁜 일이 생기게 될 것이다. 만일 네 사촌이 너한테 친절하게 하거든 그저 그런 정도로만 여겨라. 그러나 친척 이상의 무언가 를 원한다면 너는 그 애를 완전히 미치게 하는 거야." "대고모님, 그녀를 헐뜯는 말은 어떤 말도 하지 마세요! 제발!" 그때, 대고모의 동거인이자 병간호를 하는 여자가 들어와 주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수 브라이드헤드를 소개하면서 과거에 대한 이야기 를 보충해 말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수는 그녀의 아버지가 런던으로 가기 전, 초원을 가로질러 마을 초등학 교에 다니고 있었을 때, 그 얼마나 이상한 아이였던가. 목사가 읽기와 암송 순서를 정했을 때 그들 중 가장 어린 수가 '작고 하얀 드레스를 입고 신발 을 신고 분홍색 띠를 두르고' 교단 위에 어떻게 나타났는가 - 그리고 그녀 가 <더 한층 높은 향상>(미국시인 롱펠로우의 시)과 <한 밤중의 향연소 리>(영국시인 바이런의 시)와 <갈가마귀>(미국시인 포우의 시)를 어떻게 암송했는가, 그리고 암송을 하는 동안에 수가 어떻게 자기의 귀여운 미간 을 찌푸렸고 비극적인 표정으로 주위를 살펴보았는지, 그리고 마치 어떤 실제 인물이 거기에 서 있는 것처럼 허공을 향해서, '밤의 해변에 있는 그 대의 당당한 이름이 무엇인가 나에게 말해다오!'라고 외쳐댔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애는 작은 띠를 두르고 단 위에 서서, 썩은 고기를 먹는 그 끔찍한 새를 바로 눈앞에 그리듯 선명하게 읊었던 거야." 병든 대고모는 마지못해 인정했다. "주드, 너도 어렸을 때 수처럼, 허공에 무엇인가 있는 것처럼 흉내내는 장난을 치곤 했단다." 옆에 있던 여자는 또한 수의 다른 특기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알고 있겠지만 그녀는 완전한 말괄량이는 아니었어요. 그러나 일반적으 로, 남자아이들만이 하는 일들을 곧잘 했지요. 나는 그녀가 저쪽 연못 위의 긴 미끄럼대에 뛰어들어 곱슬머리를 바람에 날리며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본 적이 있지요. 유리창 위에 그려진 그림처럼 하늘을 배경으로 스무 명이 한 줄로 내려와서는 멈춤 없이 다시 미끄럼대로 되돌아 올라가는 대열 주 의 한 사람이었지요. 그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사내아이들이었어요. 그리 고 그들이 그녀를 칭찬하자, 그녀는 '건방지게 굴지 마, 얘들아'라고 말하고 갑자기 집안으로 뛰어왔어요. 그들은 그녀를 다시 한번 꾀어내려 노력했지 만 그녀는 나오려 하지 않았다오." 수에 대한 이러한 회고적인 면모는 주드가 그녀에게 구혼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그는 그날 무거운 마음으로 대고모의 집을 떠났다. 그는 귀가 도중 학교에 들러 그 작은 수의 자태가 비치고 있을 교실 안을 들여 다보고 싶었지만 그런 욕구를 억제하고 계속해서 걸어갔다. 마침 일요일 저녁이라 몇 명의 마을 사람들이 외출북을 입고 서 있었다. 그가 여기 거주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이었다. 주드는 그들 중 한 사람으로 부터 인사를 받고 놀랐다. "그러니까, 올바로 찾아갔군 그래!" 주드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학문의 보금자리로 말야. '광명의 도시'로 말야. 자네가 어렸을 때 우리에게 말하곤 했잖아! 그곳은 모두 자네가 기대했던 대로이던가?" "네, 그 이상이죠!" 주드가 소리쳤다. "나도 한 번 거기에 가본 적이 있는데, 나로서는 거기에서 많은 것을 볼 순 없었네. 반은 교회 같고, 반은 양로원 같은 오래된 건물들만 잔뜩 있고 경기도 활발하지 못했어." "존, 당신 생각이 틀렸어요. 도시에서는 지나가는 사람의 눈에는 안 보이 는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나고 있어요. 그곳은 사상과 종교의 유일한 중심지 로, 이 나라의 지적 및 정신적 고장이지요. 아주 조용하고, 불경기처럼 보 이는 것은 무한한 움직임의 고요함일 뿐, 돌고 있는 팽이의 잠과 같은 것 이지요. 이것은 유명한 작가(바이런을 가리킴)의 비유를 빌린 말이지만요." "듣고 보니 정말 그럴 듯하긴 한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내가 말했듯 이 거기에 있었던 한두 시간 동안 난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네. 그래서 가게로 들어가 맥주 한 잔과 일 페니어치의 빵과 치즈를 약간 먹었지. 그 리고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렸네. 자넨 지금쯤 대학에 다니 고 있는가?" "아닙니다! 저는 대학하고는 거리가 아직 멉니다." 주드가 말했다. "어쩌다 그렇게 됐나?" 주드는 텅 빈 주머니를 툭 쳐보았다. "우리 생각대로군! 그런 곳은 자네 같은 사람을 위한 곳이 아니야. 단지 돈 많은 인간들을 위한 곳이거든." "당신의 생각이 틀렸습니다. 학교는 우리같은 사람들을 위한 곳입니다!" 주드는 약간 씁쓸하게 대답했다. 마을 사람의 말에는 최근 주드가 머물 고 있는 상상의 세계에서 그의 주의를 이끌어낼 만한 힘이 담겨 있었다. 그의 상상 속에 나타난 추상적인 인물들은 주드의 정신을 예술과 학문의 세계로 고양시켰고 학문이라는 낙원에 그를 불러 언젠가는 빛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차가운 북방의 빛에서 자신의 장래의 가망성을 되새겨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최근 그의 그리스어, 특히 그리스의 극작가들에 대해 스스로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때때로 그는 하루 일이 끝나고 나면 너무 피곤해서 열심히 공부하기 위해 필요한 비판적 주의를 유지하지 못했다. 그는 지도교사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일 개월이나 걸려 애를 쓰면서 그 가 찾아낼 수 있는 것도 즉석에서 가르쳐 줄 수 있는 친근한 친구가 있었 으면 하고 생각했다. 요즘 와서 주드는 현실을 좀더 냉정하게 바라봐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실제적인 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독학'이라는 애매한 일에 자 신의 여가를 보내는 일이 결국 무슨 도움이 될까?" "이것은 내가 전부터 생각했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또는 내가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지 못하고 그것을 할 바에는, 차라리 착수하지 않은 편이 더 나았을지 모른다...... 대학의 벽 바깥에 있으면서 언젠가 어떤 팔이 불쑥 나와 나를 데려가기를 기대하고 있다면 그것은 허사다! 내겐 특별한 정보가 필요하 다." 그래서 다음 주에 그는 그것을 찾았다. 최초의 기회라고 볼 수 있는 일 이 발생한 것은 어느날 오후였다. 그때 '모대학의 학장'이라고 들은 적이 있는 상당한 연배의 어떤 신사가 주드가 앉아 있던 공원 구내의 길을 거닐 고 있었다. 그 신사는 주드에게 가까이 다가왔고 주드는 그의 얼굴을 마음 졸이며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온화하고 이해심 많으며 겸허해 보였다. 다시 생각해보니 주드는 그에게 다가가 말을 것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 일은 그 가 훌륭한 대학의 학장에게 편지를 써 자기의 어려움을 말하고 조언을 구 하는 것이 얼마나 현명한 일이 될 것인가를 생각토록 했다. 다음 1, 2주 동안 그는 도시 주변에서 가장 유명한 학장이 누구인지를 알아내어 그들을 멀리서나마 바라보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타인 의 진가를 알아 줄 정도의 식견이 있는 다섯 명을 최종적으로 선택했다. 이 다섯 사람들에게 그는 편지를 써서 짤막하게 그의 어려움을 말하고, 그 의 궁지에 몰린 상황에 대해 조언을 바랐다. 주드는 편지를 보내고 나서 마음속으로 편지의 내용에 대해 비판하기 시 작했다. 그는 편지를 보내지 않는 편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투적인 넋두리였으며 뻔뻔스럽고 저질적이었어. 왜 난 이런 식으로 낯선 사람에게 편지를 쓴 걸까? 나는 사기꾼이나 게으른 깡패 혹은 나쁜 성격의 소유자란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들이 그 반대로 이해해 준 다 해도...... 아마 나는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마지막 구제의 기회에 대해서 어딘가로부 터 답장이 올 것 같은 희망에 집착했다. 그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아주 쑥 스러운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러나 매일 기대를 가지고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필로트슨에 대한 소식으로 그의 마음이 갑작스럽게 동요 되었다. 필로트슨이 현재의 학교를 그만두고 훨씬 남쪽인 중부 웨섹스에 있는 더 큰 학교로 전임간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 은 그의 사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좀더 수입이 많은 쪽을 선택 했다는 것, 한 사람이 두사람 몫을 벌겠다는 것 아닌가. 주드는 뭐라고 말 할 수 없었다. 필로트슨과 그 젊은 사촌동생과의 관계가 어쩐지 꺼림칙해 서 결과적으로 주드는 대학에 가겠다는 그 계획에 대해 필로트슨에게 충고 의 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 선뜻나지 않았다. 주드가 편지를 보냈던 대학의 학장들은 아무런 답장도 보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이 젊은이는 전처럼, 믿을 것은 자신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희 망은 약해지고 우울은 더해갔다. 주드는 간접적으로 알아본 결과 오랫동안 불안하게 품어왔던 생각대로 공모되는 육영금이나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이 유일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과정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그러나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는 데는 많은 레슨이 필요했고 타고난 재능도 있어야 했다 하더라도 선생님의 지도 아래 생할하면서 정해 진 선까지 연구를 쌓은 사람과 경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다른 과정, 말하자면 돈을 내고 대학에 들어가는 방법은 주드 같은 사람 에게 있어서는 정말 유일한 수단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 난점은 오로지 물질상의 문제에 있었다.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그는 계산을 해 보았다. 최상의 혜택을 받고 저축이 척척 모아진다 해도, 대학장에게 증명 서를 제출하고 대학입학 시험을 보기까지는 15년의 세월이 경과해야 했다. 그는 낙담했다. 그 계획은 희망이 없었다. 그는 이 도시 근교가 너무나도 이상하고 교활한 매력을 그에게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기에 가서 살고 교회와 강당 사이를 누비며 정신 의 세계에 물들고 싶다는 생각은 한때나마 가질 만한 것이었다. 이 장소는 지평선 위의 후광으로 그를 매료시켰고, 명확하고 이상적인 일들을 만들어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를 단지 거기에 가게만 해다오. 그러면 나머지는 시간과 끈기의 문제 가 될 테니까." 로빈슨 크루소가 큰 보트를 만든 후 중얼댔던 곳과 같은 그런 어리석음 을 그는 범했던 것이다. 이렇게 남을 속이는 경내의 경치와 소리를 견문할 수 있는 곳에 오지 않았다면, 또한 재주를 짜서 돈을 버는 유일한 목적만 을 추구하면서 대학에 들어갈 계획을 진지하게 검토했더라면, 그것은 어떤 점에서 바라보아도 훨씬 그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가 확실히 알게 된 것은 모든 계획은 논리적인 조사가 닿기만 하면 무지개 빛의 비누거품처럼 터져 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는 지난 과거 의 추억을 스스로 돌이켜보았다. 그러자 감개는 하이네(1797~1859, 독일의 시인)의 기분과 흡사했다. 영감을 받고 번쩍이는 젊은이의 누 위에서 나는 어릿광대의 얼룩무늬 고깔을 보노라! 그가 이런 계획에 수를 끌어들여 그녀를 낙담시키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 었다. 자신의 신분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통렬한 경위는 되도록 이 면 그녀에게 밝혀서는 안 되었다. 결국, 그녀는 그가 학자의 준비도 갖추지 못했고, 가난하며 앞날도 내다보지 못한 채 무모하게 도전해왔던 비참한 투쟁의 일부분만을 알았을 뿐이다. 그는 자기가 꿈에서 깨어난 그날 오후의 상황을 영원히 기억했다. 그는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몰랐기 때문에 이 희한하고 이상한 도시 한가 운데 독특하게 지어진 극장의 팔각형 방으로 올라갔다. 이 방은 사방이 모 두 창이라서 도시 전체와 건축물들을 바라볼 수가 있었다. 주드는 명상적 이면서도 슬픈 듯이 그러나 착실하게 연속되는 모든 광경을 훑어보았다. 그런 건물들과 거기에 딸린 학회나 특권은 결코 주드의 편이 아니었다. 그가 여태까지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했던 대도서관의 우뚝 솟은 지붕에 서 그는 다양한 뽀족탑, 강당, 박공, 거리, 교회, 정원, 방정 등으로 시선을 차례대로 옮겨갔다. 이것들은 비할 데 없는 파노라마로 앙상블을 이루고 있었다. 자신의 운명은 이런 것들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숙하고 있는 초라한 빈민가의 임금 노동자들 사이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이 도시를 예찬하는 유람객들로부터는 인정받지 못하겠지만, 이러한 시민 이 없다면 열심히 노력하는 독서가도 책을 읽지 못할 것이고 고매한 사상 가들도 살아갈 수가 없을 것이다. 그는 도시 너머의 전원을 바라보았고 또 나무숲 쪽도 쳐다보았다. 그 나 무들은 처음으로 그의 마음의 지주가 되었고 이제는 미칠 것 같은 고뇌가 된 그녀를 가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시련이 없었더라면 그는 그의 운 명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수를 일생의 반려자로 삼을 수만 있었더라도 그는 기꺼이 그의 야망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녀가 없음으로 해서 그 동안 강제해온 긴장의 반발이 그에게 불행한 영향을 끼칠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필로트슨도 현재 그 가 처해 있는 것과 유사한 지적 절망을 겪었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 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교장 선생은 상냥한 수의 위로를 받고 있지만 그 에겐 위안해줄 사람이 없었다. 그는 거리로 내려와 술집에 도착할 때까지 멍한 상태로 있었다. 그는 몇 잔의 맥주를 빠른 속도로 연달아 마셨다. 그가 술집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그는 깜박이는 가로등 사이를 지나 저녁을 먹기 위해 집으로 터 벅터벅 걸어갔다. 그가 식탁에 앉자 얼마 안 되어 하숙집 여주인이 그에게 온 편지를 가져다 주었다. 여주인은 편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듯 이 그것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주드는 그 편지를 보자마자, 그가 학장 앞으로 의뢰장을 써 보낸 대학 중의 한 학교의 각인이 찍혀 있는 것을 보았다. "마침내 한 통이 왔구나!" 주드는 소리쳤다. 내용은 간단했다. 그리고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 그것은 학자의 친필임에는 틀림없었다. 거기엔 이렇게 씌여 있었다. 석공 주드 폴리 귀하 귀하의 편지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직공으로서의 귀하의 편지 내용을 판단해 보건대 귀하는 다른 일을 하는 것보다 귀하의 환경에 충실하는 것 이 더 많은 성공의 기회를 가지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귀하에게 드리는 저의 조언입니다. -비브리얼 칼리지, T. 티터피네이 매우 분별 있는 이 충고에 주드는 몹시 분개했다. 그런 일은 처음부터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10년이 걸린 고생에 비하면 엄청난 타격이었 고 그 영향으로 그는 분별없이 식탁에서 일어나 평상시처럼 책을 읽는 대 신 아래층으로 내려가 거리로 나왔다. 그는 술집에 가서 선 채로 두서너 잔을 들이켰다. 그러고 나서 이 도시 중앙에 있는 '십자로'라고 불리는 곳까지 무의식적으로 걸어갔다. 마침내 황홀경에 빠진 사람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의 무리를 멍하게 바라보다가 제 정신이 들자 그는 거기 주재하고 있는 경찰관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 경찰관은 하품을 하며 팔을 쭉 펴고 발끝으로 1인치 반 정도 올렸다 내리면서 재미있다는 듯 주드를 쳐다보며 말했다. "너무 취했군, 젊은이." "아니에요. 이제 시작인걸요." 그는 비꼬듯 대답했다. 그가 아무리 술을 마셨어도 그의 두뇌는 충분히 술을 마시지 않은 사람 과 같은 상태였다. 경찰관의 말이 멀리 부분적으로만 들렸고 그는 아무도 자기를 생각해 주지 않는 가운데 자신처럼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 몇 명이 나 저 십자로에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십자로는 이 도시의 어떤 대학보다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이곳은 서로 만나서 희비극 을 연출하는 인간 무리들의 망령으로 우굴거리고 있었고 그런 망령들이 여 러 겹으로 층을 만들고 있는 장소였다. 그들은 가장 박진감 넘치는 일을 실제로 연출해 놓았다. '십자로'에 서서 사람들은 나폴레옹을 논했고 아메 리카의 상실을 이야기하며 찰스 왕의 처형과 순교자의 화형을 논했고, 십 자군이나 노르만 정복, 더 나아가 시저의 도래 등에 관해서 이야기했을 것 이다. 여기서 남자와 여자는 서로 만나 사랑하고 미워하며, 결혼도 하고 이별 도 했을 것이다. 서로를 기다리기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했으며 또 서로가 정복하고 저주하고 축복하기도 했으리라. 그는 도시 생활이 학교 생활보다 한없이 풍부하고 변화무쌍하며 인간을 고찰할 수 있는 방대한 서적이라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지금 그의 눈앞에 서 고투하고 있는 남녀의 무리는 그리스도나 대성당은 잘 몰라도 그들이야 말로 크리스트민스터의 실체였다. 이곳저곳을 흘러 다니는 학생들과 교수 들은 지방적 의미에서 말한다면 크리스트민스터의 실질을 구성하는 개체들 이 전혀 아니었다. 그는 시계를 꺼내보고 계속 같은 생각을 하며 걸어갔다. 마침내 경쾌한 음악회가 열리고 있는 술집 앞까지 오게 되었다. 주드가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엔 젊은 남녀 점원들과 군인들, 견습공들, 담배를 피우는 11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들과 꽤나 고상한 차림을 하고 이런 분위기를 낯설어 하는 여 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제 진짜 크리스트민스터의 생활과 접촉할 기회 가 온 것이다. 악단은 연주를 계속했고 사람들은 어슬렁거리며 서로 부딪 치기도 했다. 때때로 어떤 사람은 무대로 뛰어올라가 우스꽝스러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수의 영혼이 그의 주위를 맴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주드가 희롱하는 여자들과 함께 잠시나마 환락을 맛보기 위해 술을 마시며 놀아나지 않도록 그 혼이 주드를 감시하는 것 같았다. 10시에 그는 그곳을 빠져 나와 그에 게 편지를 보내준 학장이 있는 학교의 정문을 지나 집으로 오는 우회로를 택했다. 대학의 문은 닫혀 있었다. 충동적으로 그는 직공답게 늘 가지고 아니던 분필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리고 벽에다 다음과 같이 썼다. "나도 너희만큼 총명이 있어, 나는 너희보다 열등하지 않다. 누가 그 같 은 일을 알지 못하겠는가?"(욥기, 12장 3절) 2-7 비웃음으로 일격을 가한 일은 그의 마음을 풀어주었지만, 다음날이 되자 그는 자신의 그러한 자부심을 비웃었다. 그 비웃음은 건전하지 못한 것이 었다. 그는 학장이 보낸 편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편지의 행마다에 배어 잇 는 어투가 처음엔 그를 분개하게 했지만 지금은 그의 간을 얼어붙게 했다. 그 자신이 정말 바보처럼 보였다. 지성의 대상과 애정의 대상 두 가지를 뺏기게 된 그는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가 대학생으로서의 자신의 운명을 단념하고 싶을 때마다 수와의 가망 없는 관계가 그의 평온함을 방해하며 나타났다. 지금껏 그가 만나왔 던 지우 중에 그가 공명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을 한 번 결혼했다는 이 유 때문에 잃어버려야 한다는 것에 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다시 진짜 크리스트민스터의 생활로 뛰어들었다. 그는 이제 어두운 골목에 있는 지붕이 낮은 술집을 찾아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 술집은 아주 잘 알려진 장소였고 단순히 그 희한한 술집의 생김새로 그의 흥미를 끄었던 곳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거의 하루종일 앉아 있었고, 자기는 본래 근성이 나쁘며 뭔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 보겠다고 기대해봤자 바랄 게 없다고 자책했다. 저녁이 되자 이 술집에 단골들이 하나씩 찾아들었다. 주드는 가진 돈을 다 써버렸지만 아직도 구석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비스켓을 조금 먹 은 것을 제외하곤 온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오래도록 술을 마신 사람 특유의 체념과 냉소에 젖어 모여드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그들 중 몇몇과 어울리게 되었다. 젊었을 때는 신앙심 깊은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신을 모독하는 말을 예사 롭게 곧잘 하는 타락한 교회 철물상인 틴커 테일러와 코가 빨간 경매인, 짐 아저씨와 조 아저씨로 불리는 두 명의 고딕 건축에 종사하는 석공들이 그들이었다. 그밖에 몇몇 사무원들과 성복 제조사의 조수들도 있었으며 상 대에 따라 가지각색의 태도를 보이는 '복댁 아줌마'와 '주근깨 아줌마'라고 별명이 붙은 두 부인들도 있었다. 도박에 관해 잘 안다는 어떤 경마사와 극장에서 나온 떠돌이 배우, 그리 고 교복을 입지 않았지만 대학생이란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무모한 두 청 년도 거기에 끼어 있었다. 그 학생들은 불독새끼에 관해 문제로 어떤 사람 을 만나기 위해 살짝 들렀다가 눌러앉아 경마사와 함께 술을 마시며 짤막 한 파이프 담배를 피웠고 가끔씩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대화하는 사람의 수가 많아졌다. 그들은 크리스트민스터의 사교계를 헐 뜯었고 대학 학감들이나 행정가들 그리고 그 밖의 대학 당국자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적절한 존경을 받을 것인가에 대한 의견들이 관대하고 허심탄회 하게 오고 갔다. 주드 폴리는 술에 취해 있는 중에서도 머리가 좋은 사람한테서 찾아볼 수 있는 그런 침착성으로 다소 단호하게 자기의 의견을 개진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가져왔던 그의 야심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모든 것이 기계 적인 광기로 그의 혀에 오르내렸다. 그것들은 학문과 연구에 대한 화제로 변했다. 그가 술을 마시지 않았다 면 스스로도 측은하게 여겼을 정도로 구구하게 그는 자신의 학식에 대해 지껄여댔다. "난 상관없어." 그는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대학의 학장이든, 총장이든, 연구원이든, 석사든 뭐든 말이야! 그들이 내 게 기회만 준다면 난 그들의 분야에서 그들을 이길 수 있어. 그리고 그들 이 아직 하지 못한 일을 내가 해 보일 수 있다, 이거야!" "들어봐, 들어!" 한 대학생들이 구석에서 말하고 있었다. 그들은 강아지에 대한 사적인 얘기를 하고 있었다. "자네는 항상 책을 좋아한다고 들었네." 틴커 테일러가 말했다. "그래서 난 자네의 말을 의심하진 않아. 하지만 내 경우엔 좀 다르네. 책 속에서보다는 그 바깥에서 배울 것이 더 많다는 말아야. 그래서 난 이 길 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의 이런 인간은 되지 않았 을 텐데 말이야." "자넨 성직을 목표로 하고 있었지?" 조 아저씨가 끼어들며 말했다. "만일 자네가 그와 같은 야망을 가진 학자라면 왜 우리에게 자네 학식의 일례를 보여주지 않는가? 여봐, 교리를 라틴어로 말해 보겠어? 우리 고향 에서는 목사 지망생이 있으면 이렇게 해서 시험해 본다구!"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주드는 거만하게 말했다. "못할 걸! 잘난 척이나 해보자는 수작이지!" 여자 한 사람이 소리쳤다. "닥쳐요, 복댁 아줌마!" 학생 중 한 명이 말했다. "조용히!" 그는 술잔의 술을 다 마셔 버리고 나서 잔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말 했다. "저 구석에 있는 분이 좌중의 분위기를 진작하기 위해 라틴어로 신앙 신 조를 암송한답니다." "난 하지 않겠소." 주드가 말했다. "아니요, 한번 해봐요!" 성복 제조공이 말했다. "자넨 할 수 없어!" 조 아저씨가 말했다. "아니야, 그는 할 수 있어!" 틴커 테일러가 말했다. "맹세코 난 할 수 있어요!" 주드가 말했다. "그럼, 자, 내게 스카치 한잔 사게. 그러면 내 당장 해 보이지." "그거 그럴듯한 제안이군요." 이렇게 말한 대학생이 스카치 값으로 돈을 내놓았다. 술집 여급은 자신 이 열등한 족속들 사이에서 할 수 없이 살고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술을 만들어 주드에게 건네주었다. 주드는 스카치를 마시고 일어나 주저하지 않 고 웅변조로 암송하기 시작했다. "크레도 인 우눔 듀움, 파트렘 오움니포텐덤, 패트 인비시리움." (나는 믿노라. 유일한 신. 전능한 아버지, 천지와 모든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의 창조주를.) "잘 한다! 훌륭한 라틴어야!" 대학생 중 한 명이 외쳤다. 그러나 그는 그 문장의 한 단어도 이해하지 못했다. 술집에 있던 나머지 사람들 사이에는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여급 도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주드의 목소리는 낭랑하게 울려퍼졌고 주인 이 졸고 있던 안쪽 거실까지 들려 주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고 나와 보았다. 주드는 처음과 같이 꾸준히 낭독을 계속했다. 크루키픽스스 에티암프로 노비스. 스브 본시오 빌라도 팟스스, 에토 세풀 터스 에스트. 에토 레스러렉시트 디에, 세큼덤, 스크리프토라스."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히고 고난을 당하고 장사지냈으나 성공의 말씀을 좇아 사흘만에 부활하셨도다.) "저건 니케아 신경이다." 잠자코 있던 다른 대학생이 비꼬듯 말했다. "우린 사도신경을 원했는데!"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그리고 어떤 바보라도 니케아가 가장 역사적인 신경이라는 건 알고 있어!" "계속해, 계속하라구!" 경매인이 말했다. 그러나 주드의 정신은 곧 혼란스러워져 더 계속할 수 가 없었다. 그는 이마에 손을 얹었다. 얼굴엔 고통의 표정이 나타났다. "그에게 한잔 더 주지, 그러면 생각이 나서 그걸 끝낼 수 있을 거요." 틴커 테일러가 말했다. 누군가가 3페니짜리 은화를 던졌고 술 한잔이 그 에게 건네졌다. 주드는 컵을 보지 않은 채 팔을 뻗어 컵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술을 마셨다. 되살아난 목소리로 잠시 동안 계속하더니 끝부분에 가 서는 회중을 이끄는 사제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에트 인 스포리톰, 도미니움 에트 비비칸뎀, 퀴이엑스 파토fp 필리오쿠에 프로케디트. 퀴이 쿰 파토레 에트 필리오 시물 아도라토르 에트 쿵그리피 토우르. 퀴이 로쿠트스 에스트 페르 프로페타스. (나는 성령을 믿노다. 성령은 생명을 주시고 아버지와 아들에서 나서 아 버지와 아들과 함께 숭배받는 예언자에 의하여 전하여지느니라.) 에트 우남 카토리캄 에트 아포스톨리캄 에클레시암. 콘피테오르 우남 바 티스마 인 레미쇼넴 페카토룸. 에트 엑스펙토 레스르렉시오우넴 모르트오 우룸. 에트 비탐 벤투리 사이쿠리. 아멘. (나는 사도들에 의한 유일한 성공회를 믿노라. 죄의 사면을 얻는 유일한 세례를 신임하노라. 죽은 자의 부활과 내세의 생명을 바라노라. 아멘.) "잘했어!" 그들은 알아들은 처음이자 마지막 단어인 아멘을 듣고 나서 몇몇 사람들 이 말했다. 주드는 자기 머리 속의 노여움을 떨쳐버리려는 듯 주위 사람들 을 향해 말했다. "당신들은 모두 바보야!" 그가 소리쳤다. "지금 당신들 중 내가 말한 신앙신조가 맞는지 아닌지를 가려낼 자 누가 있어? 당신네 바보 같은 머리로 구별할 수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통 알 아들을 수 없는 말로 '쥐잡는 사람의 딸'을 외웠어도 모르지! 못 올 데를 왔군! 이런 형편없는 패거리들 사이에 와 있다니!" 골치아픈 주정꾼들 때문에 이미 면허를 잃을 뻔한 적이 있었던 술집 주 인은 다른 소동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염려하면서 카운터로 나왔다. 그러나 주드는 갑작스런 이성의 섬광을 받아 구역질이 치밀어올라 그 자리를 떠났 다. 그가 밖으로 나오지 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는 급히 길을 따라 가다가 곧게 뻗은 큰 길로 돌아섰다. 그리고 신작로와 만나는 지점까 지 계속 따라 걸어갔다. 예의 술친구들의 소리는 이미 그의 등 뒤에서 모 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아마도 그녀에게라면 날아갈 수도 있으리라는 어린아이 같은 열망 에 사로잡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터무니없는 욕망과 잘못된 판단은 이 제 그에겐 나타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한 시간이 지났다. 10시를 자나 11시가 되었을 무렵에, 그는 럼즈던 마을로 들어서서 시골집에 도착했다. 그녀의 방인 듯한 아래층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 주드는 벽 가까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유리창을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그는 초조 하게 불렀다. "수, 수!" 그녀는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이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그 방의 불이 없 어졌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빗장이 풀리고 문이 열리더니 수가 손에 촛불 을 들고 나타났다. "주드예요? 그렇군요! 나의 사촌오빠, 웬일이세요?" "나 말이야, 여기에 오지 않을 수가 없었어, 수!" 그가 현관 계단에 주저앉으면서 말했다. "난 너무 사악해, 수. 내 마음이 거의 무너질 것 같아. 이대로의 내 생활 을 견딜 수가 없어! 그래서 난 술을 마시고 신을 모독하고, 또 그와 비슷한 말도 했어. 형편없는 곳에서 성스러운 말을 했어요. 경건함을 빼고 말해서 는 결코 안 되는 말들도 반복했어! 아, 나를 어떻게든 해줘. 수, 날 죽여줘. 상관없어! 이 세상 나머지 모든 사람들이 하는 것같이 단지 나를 싫어하고 경멸하지만 말아줘!" "오빠, 몸이 좋지 않군요, 가엾게도! 아니에요, 난 오빠를 경멸하지 않을 거예요. 물론 안 하지요. 안으로 들어와 좀 쉬세요. 오빠를 위해 어떻게 했 으면 좋겠어요. 자, 나한테 기대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녀는 한 손으로 촛불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를 부축해서 문안으 로 들여놓았다. 단 하나밖에 없는 안락의자에 그를 뉘인 다음 다른 의자에 는 그의 발을 걸쳐 올리고서 그의 부츠를 벗겼다. 주드는 점점 제정신을 찾기 시작했다. "사랑스런 수!" 그의 목소리는 슬픔과 회한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그녀는 뭘 좀 먹겠느 냐고 그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그에게 자라 고 권했고 그녀는 아침에 일찍 아래층으로 내려와 그에게 아침밥을 가져다 주겠다고 말하고 나서 곧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곧 깊은 잠에 빠졌고 새벽까지 깨지 않았다. 처음에 그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나 차차 모든 정황이 분명하게 생각났 다. 그것은, 그가 제정신이 들자,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녀가 그의 추태를 보게 된 것이다. 이제 어떻게 그녀의 얼굴을 대할까? 수는 곧 아침이 되면 그를 보려고 내려오겠지. 그녀가 말을 건네면 그는 그녀와 어색한 대면을 해야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용히 부츠를 신고 그녀가 못에 걸어두었던 모자를 벗겨 들고 집 밖으로 소리 없이 빠져나왔 다. 지금 그에겐 어디론가 어두운 곳으로 도망가 숨어서 기도라도 해야겠 다는 생각뿐이었다. 그에게 떠오른 유일한 장소는 메리그린이었다. 그는 크 리스트민스터의 하숙집에 들러 보았다. 그의 고용주로부터 온 해고통지서 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짐을 싸들고 나서 그는 가시처럼 자기를 괴롭힌 그 도시를 등지고 남웨섹스로 떠났다. 그이 주머니에는 돈이 한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조금 모아둔 돈은 크리스트민스터의 한 은행에 저금되어 있었고, 다행히 건드리지 않아 그 돈만은 남아 있었다. 이제 그는 메리그린으로 가기 위해 걷는 수밖에 없었 다. 거리는 거의 20마일이나 되었기 때문에 그가 술을 깨는 데 시간은 충 분했다. 저녁때가 되어 알프레드스턴에 다다르자 그는 그의 조끼를 저당잡혔고 도시에서 1, 2마일 정도 빠져나외 건초더미 아래에서 잠을 잤다. 새벽이 되 자 그는 일어나 그의 옷에 묻은 건초씨와 줄기들을 털어내고 다시 출발했 다. 길게 뻗은 하얀 길을 힘차게 걸어 멀리 보이는 언덕을 내려갔다. 언덕의 꼭대기에 이정표를 지나갔는데 그곳은 몇 년 전 그가 그의 희망들을 새겨 놓았던 곳이었다. 그가 옛날의 마을에 닿자, 마을 사람들은 아침식사중이었다. 그는 지치고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지만 머리는 평상시처럼 맑은 상태였다. 우물옆에 앉 은 그는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그리스도와 같은 처지인가를 생각했다. 그 는 가까이 있는 물통의 물로 세수를 한 다음 그의 대고모의 집으로 갔다. 그는 침대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대고모를 보았다. 대고모와 함께 사 는 여자가 옆에서 그녀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뭐, 일자리를 잃었다구!" 대고모는 항아리 뚜껑만큼 무거워진 눈꺼풀을 내리깔고 깊게 움푹 들어 간 눈으로 주드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한평생을 의식주라는 물질적 문제에 만 국한해서 싸워온 대고모 같은 인간에게는 주드의 실추된 모습의 원인이 오직 실업 때문이라고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그래요." 주드가 무겁게 대답했다.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요." 그는 약간의 식사로 원기를 회복하고 나서 그 옛날의 자기 방으로 올라 가 기술자답게 짧은 팔 옷을 갈아입고 누웠다. 그가 잠깐 동안 잠이 들었 다가 깼을 때, 마치 지옥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그것은 분명히 지옥이었 다. 야망과 사랑에 모두 실패했다는 '자각의 지옥'이었다. 그가 이 마을을 떠 나기 전에 빠졌던 이전의 그 나락을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그 당시 그가 생각했던 것 중에서 가장 깊은 심연이었지만 현재의 이것만큼 깊은 것은 아니었다. 이전의 것이 희망의 외부가 무너진 것이라면 지금의 것은 제2방 어선의 붕괴를 의미했다. 그가 만일 여자였다면 그가 지금 겪고 있는 신경질적인 긴장감에 짓눌려 비명을 질렀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의 남자다움이 그러한 위안의 방법을 부정했다. 그는 비참함 속에서 이를 악물었다. 라오콘상(아폴로 사 제의 조각상이며 유명한 로마의 조각품으로 고통의 표정을 짓고 있다)의 입가에 감도는 그것처럼 그의 양눈썹 사이에는 주름이 패였다. 울음소리 같은 바람이 나무들 사이를 지나갔고 그 바람은 굴뚝 속에서 오르간 페달 같은 소리를 냈다. 묘지기도 없는 교회묘지의 벽엔 담쟁이덩굴이 무성해서 잎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새로운 장소에 세워진 빅토리아조 고딕양식 건축의 풍향기는 벌써 삐걱삐걱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바닥 깊이에서 울려나오는 소 리는 반드시 문밖의 바람소리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목소리였다. 그는 잠시동안 그 소리의 출처를 추측해 보았다. 부목사가 옆방에서 대 고모와 함께 기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부목사에 대해 대고모가 말 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곧 기도 소리가 그치고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발소 리가 들려왔다. 주드는 일어나서 '여보세요!' 하고 외쳤다. 발소리가 그의 방을 향했고 문이 열리다. 그 사람이 안을 들여다 보았다. 젊은 목사였다. "하이리즈 목사님이시죠. 대고모님께서 몇 번인가 목사님에 대해 말씀했 었어요. 저, 저는 지금 막 돌아왔습니다. 한때는 저도 선한 뜻을 품었었지 요. 꼴사납게 되어버렸습니다. 현재는 우울하다 못해 미칠 지경입니다. 술 도 마셨고 기타구질구질한 짓도 했지요." 주드는 목사에게 자기의 최근 계획과 행동을 선선히 털어놓았다. 그러나 무의식적인 편견으로 학문의 욕심에 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고 신학에 관해서만 자세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까지는 입신출세의 일반적인 계획의 일부분이었다. "이제 저는 얼마나 바보였는지 알게 됐어요. 그것은 모두 내 탓이었지만 요." 주드는 결론짓기 위해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전 대학 진학의 희망이 무너진 것을 결코 후회하진 않습니다. 성공할 확신이 있더라도 다시 시작하진 않을 겁니다. 전 이제 더 이상 사 회적 성공은 싫습니다. 그러나 뭔가 좋은 일을 하고 싶다고는 느끼고 있습 니다. 그래도 전 교회에 대해서는 쓰디쓴 후회를 합니다. 교회의 성직에 오 를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이웃사람이 있을 거라는 따위는 생각도 해보지 못한 부 목사는 깊은 관심을 보이며 마침내 그에게 말했다. "성직에 대한 하늘의 부름을 당신이 진정으로 느낀다면 그리고 내가 판 단하건대 당신은 사상도 있고 교양도 갖추셨으니 가면장설교사로 교회에 들어오면 어떨까요? 하지만 과음만은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 "만일 저한테 절 지탱해 줄 수 있는 어떤 희망만 있다면 그 정도 과음쯤 이야 피할 수 있겠지요!" 제 3 부 멜체스터에서 아, 신랑이여, 그녀와 같은 여자는 결코 없으리라. -사포(H.T.워튼) 3-1 지적이고 경쟁적인 생활과는 전혀 다른, 신앙과 애타적 생활, 그것은 그 에게는 새로운 발상이었다. 크리스트민스터의 학교에서는 두 과목씩이나 최우등의 성적을 올리지 않아도, 또는 보통의 지식만 있으면 그의 동료들 에게 설교도 하고 선을 행할 수가 있었다. 끝내는 주교의 지위에까지 오르 겠다는 이전의 공상은 윤리적 열의나 신학적 열의가 아닌 그저 법의를 입 고 활보해 보고 싶은 세속적인 야심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의 원래 계획 전체가 더욱 고상한 본능에 기초를 두지 않고 단지 문명의 인위적인 산물 에 불과한 일종의 사회적 불안에서 생겨난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지금은 결국 그러한 종류의 불안으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와 똑같은 사욕의 길을 걸어가는 젊은이들이 수천 명씩이나 있었다. 허영의 날들을 그의 아내와 함께 먹고 마시며 속 편하게 살아가는 육욕적인 시골뜨기들이 그보다 훨씬 호감이 가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렇듯 배우지도 못한 상태에서 교회에 들어가 낮은 목사보 이상 의 계급에 오르지 못하고 외진 마을이나 도시의 빈민가에서 초라한 목사복 을 입고 허무하게 죽게 될 것이라는 것엔 일맥의 선함과 위대함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아마 참 종교일지도 모르며 참회하는 인간이 따 라가야 할 속죄의 길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품어왔던 계획과는 전혀 다르게 변해 버린 이 새로운 생각이 떠 올랐을 때, 희망의 빛이 쓸쓸하고 외롭게 앉아 있는 그를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이 일은 그 후 며칠 동안, 12년간 계속되어 온 그의 지적 경력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고 말았다. 그는 이 침체기간 동안 새로운 희망을 추진할 만한 일은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이웃 마을들의 묘비를 세우면서 글자를 새기는 따위의 소소한 일 들을 했고 그에게 일부러 가벼운 인사를 건네는 농장주와 그 밖의 시골 사 람들로부터 사회의 낙오자로 인식 받고 반품된 물건처럼 대우받는 것을 감 수했다. 이 새로운 계획에 대한 인간적 흥미는 - 그것은 가장 정신적이고 자기 희생적인 사람에게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지만 - 소인이 채 마르지도 않은, 수로부터 온 편지 한 통으로 인해 생기게 되었다. 그녀는 매우 격정적인 글을 보내왔다. 그리고 그녀 자신의 소식으로는 왕실의 장학생을 뽑는 시험에 합격하여 부분적으로는 주드의 영향으로 그 녀가 선택한 천직을 다하기 위해 멜체스터의 교육대학에 입학할 예정이라 는 내용 외에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 멜체스터에는 신학대학도 있었다. 이곳은 조용하고 차분한 장소로 종교 적인 분위기가 흐르는 곳인데, 아직 세속적인 학문이나 지적인 영리함 같 은 것들은 확고히 세워져 있지 않았다. 여기에서라면 그가 품고 잇는 애타 적 검정이 그가 가지고 있지 않는 재기 발랄함보다 더 높이 평가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크리스트민스터에서 보통의 고전을 연마하기 위해 등한시했던 신학 에 관한 책을 읽으며 당분간 그의 직업으로 계속 돈을 벌어야했다. 그러니, 큰 도시로 나가 일자리를 구하고 공부에 대한 전망을 추진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모르고 있던 낯선 고장에 대한 그의 지나친 인간적 흥미는 전 적으로 수의 편지로 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수는 그런 흥미를 일으 키기에는 이전보다 훨씬 어울리지 않는 입장에 있다고 생각해야만 했기 때 문에 거기에는 윤리상 한 가지 모순이 있었다. 그는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 했고 수를 단지 친구로, 나아가서는 여자 친척으로 사랑하게 되길 바랐다. 그는 30세의 나이에 성직을 시작하게 될 차후의 수년을 계획하고 설계해 보았다. 이 나이는 그가 모범으로 섬겼던 그리스도가 갈릴리에서 처음으로 설교를 시작한 해였기 때문에 특별히 그의 관심을 끌었다. 이렇게 하면, 신 중한 공부를 위해서도, 나중에 신학교에서 필수의 수업기한을 이수해 보겠 다는 의도를 위해서도, 그리고 자신의 직업으로 학비를 벌어들이기 위해서 도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새, 크리스마스가 왔다가 지나가 버렸다. 수는 공부하러 이미 멜체스 터 교육대학에 가 있었다. 이때는 주드가 새 일자리를 얻기에는 1년 중 가 장 좋지 않은 시기였다. 그래서 그는 해가 길어질 때까지 약 한 달 정도는 멜체스터로 가는 출발을 미루어야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수에게 보냈다. 그녀는 기꺼이 그 말에 따랐기 때문에 차라리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 면 더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했다. 그날 밤 그가 수의 집에 찾아가 괴상한 행동을 하고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 때, 그녀는 단 한번도 그것에 대해 비난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주드에게 남달리 신경을 쓰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필로트슨 교장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한마디 말이 없었다. 그러나, 갑자기 수한테서 제법 열정에 넘치는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몹시 외롭고 따분하다는 사연이었다. 그녀는 현재의 자리가 싫어졌으며 예전의 그 도안 사 시절보다도 못하다고 했다. 이보다 더 나쁜 곳은 어디에도 없으며 자신 은 친구도 하나 없는 아주 외로운 처지이므로 당장 와줄 수 없겠느냐고 했 다. 하긴 그가 와준다고 해도 학교의 규칙이 꽤 엄격하여 그녀는 제한된 시 간 동안만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이 대학에 가라고 충고한 사람은 필로트 슨 교장이었지만 그녀는 그의 말을 듣지 말았어야만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 다. 필로트슨의 구애는 분명하게 말하자면 잘 진행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주드는 괜히 별 이유도 없이 그저 기뻤다. 그는 최근 몇 개월 동안 맛보지 못한 상쾌한 심정으로 짐을 꾸려 멜체스터로 떠났다. 이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느니 만큼 그는 일부러 술을 팔지 않는 호텔을 찾았다. 정거장을 걸어나오면서 그는 그런 종류의 작은 숙소를 발 견했다. 식사를 하고 나서 희미한 불빛 속을 거닐며 시내의 다리를 건너 대성당의 경내쪽으로 모퉁이를 돌았다. 안개가 짙게 깔린 날이었다. 그는 영국에서도 가장 우아하게 솟은 건축 물의 담벽 아래에 멈춰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주 높은 건물은 지붕 끝까지 다 보였고 그 위쪽으로 점점 멀리, 그리 고 가늘게 첨탑이 솟아서 마침내 그 꼭대기는 자욱하게 낀 안개 속에 자취 를 감추고 있었다. 등불이 켜지기 시작했고 그는 서쪽의 입구 쪽으로 발길을 돌려 계속 돌 아다녔다. 그는 주변에 많은 석재들이 나뒹굴고 있는 것을 보고 좋은 징조 라고 생각하였다. 대성당이 상당한 규모의 복구공사나 보수작업을 진행하 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신앙적 미신에 가득 차서 이것을 신의 뜻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성 직에의 부름을 기다리는 동안 이곳에서 그의 기술을 활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고, 이를 신의 깊은 사려가 내려준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때 그는 온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널찍한 이마에 풍성한 검은 머리카락과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수와 자기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를 생 각했지 때문이었다. 타오르는 듯한 눈매, 때로는 대담하고 부드러움을 가지고 있는 눈빛의 수, 그녀는 스페인 풍의 그림판화에서 볼 수 있는 소녀와 흡사했다. 그녀는 바로 이 경내에, 서쪽의 정면과 마주하고 있는 이 건물 중의 한곳에 있었 다. 그는 넒은 자갈길을 따라 그 건물 쪽으로 향했다. 그것은 15세기의 오래 된 건축물로 한때는 궁전이었지만 지금은 교육대학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창문엔 중간 문설주가 있고 창살이 끼어 있으며 정면의 안마당은 담벽에 의해 도로와 막혀 있었다. 주드는 대문을 열고 현관문 있는 데로 가서 사촌 여동생과의 면담을 요 청하였다. 그는 조심스레 대기실로 안내되었고 몇 분 후 그녀가 들어왔다. 수는 여기 온 지 얼마 안되었음에도 예전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 다. 그녀의 경쾌한 몸놀림은 완전히 사라졌고 동작의 곡선미도 그렇게 돋 보이지 않았으며 인습의 장막이나 미묘함도 마찬가지로 사라지고 없었다. 수는 그를 오도록 편지를 쓴 여자가 전혀 아니었다. 그 편지도 일시적 충동으로 쉽게 휘갈겨 쓴 것이어서 다시 생각하면 약간은 후회하고 싶어지 는 편지일 것이다. 바로 주드가 보인 추태를 연상하고 편지를 쓰지 않았으 면 좋았을 것이라고 후회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자괴감에 빠 져 돌연 흥분했다. "나를 타락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수? 그런 꼴로 찾아갔 다가, 이렇게 수치스런 꼴로 돌아와서......" "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 하고 있어요! 오빠는, 오빠가 그럴만한 사 연이 있다는 걸 제가 납득할 수 있도록 충분히 얘기했잖아요. 전 오빠의 인격을 의심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어요, 가엾은 주드! 정말 와주셔서 기 뻐요!" 그녀는 조그마한 레이스 칼러가 달린 진한 보라색 가운을 입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평범한 옷으로 호히호리한 몸매에 우아하게 늘어져 있었다. 이전까지 당시 유행에 따라 길게 길렀던 머리는 지금은 단단하게 묶여 있 었다. 전체적으로 엄격한 규율에 의해 다듬어진 여자라는 인생을 주고 있 었지만 아직 그 규율이 미치지 못한 깊은 바닥에서는 일종의 숨겨진 빛이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애교를 띠며 마중하러 나온 듯했지만 그의 키스를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사촌간에 흔히 하는 그런 식의 감정을 떠나 키스하고 싶은 열망에 불타 있었다. 그녀한테서는 그를 연인으로 본다든가 또는 그렇게 생각해 보려는 기색 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비록 주드가 연인같이 행동할 권리가 있다 하더라도 그녀는 그의 나쁜 면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결혼에 얽힌 사연을 수에게 털어놓고 싶었지만 막상 말하고 난 뒤 그녀와의 교제로 인 한 행복을 잃을까봐 두려워 고백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수는 그와 함께 시내로 내려갔다. 두 사람은 걸어가면서 그저 스쳐 가는 이야기만 나누었다. 주드는 물건을 사서 수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수줍어하면서 배가 몹시 고프다고 말했다. 학교의 식사가 부족했기 때문에 정찬과 차와 야식을 합친 것 같은 음식이 지금은 이 세상에서 제일 먹고 싶다고 말했다. 주드는 수를 어느 작은 음식점으로 데리고 가 그 가게의 모든 메뉴를 주 문했지만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그곳은 대단한 곳은 아니었지만 아무도 없는 곳에서 둘만이 마주보며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즐거운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수는 당시의 학교상태를 있는 그대로 말했다. 그 안에서의 조잡한 생활 이나, 같은 주교 관할구의 각 방면에서 모여든 동창생들의 잡다한 성격에 대해 말했고, 아침 일찍 일어나 가스등 아래에서 일을 해야하는 것이며 규 칙에 얽매여 본 일이 없는 젊은이들의 쓰라림에 대해 말했다. 주드는 그런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가 정말 알고 싶은 것은 그러한 것들이 아니고 수와 필로트슨과의 관계였는데, 그녀는 그 이야기는 전혀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이 식사를 끝냈을 때 주드는 충동적으로 그녀의 손 위에 자기의 손 을 얹었다. 그녀는 그를 보고 미소짓더니 작고 부드러운 손으로 아주 자연 스럽게 그의 손을 보고 미소짓더니 작고 부드러운 손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쥐면서 마치 사려고 하는 장갑인 양 그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펴 가며 그것들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손이 거칠어졌네요, 주드!" "그래. 하루종일 망치와 끌을 쥐고 있으면 동생 손도 이렇게 될 거야." "거칠어져도 난 싫지 않아요. 남자들이 일에 종사하고 있는 걸 보면 존 경하고픈 생각이 들어요...... 어쨌든 전 이 교육대학에 온 게 기뻐요. 2년간 의 교습이 끝나게 되면 어떻게든 독립을 하게 되겠지요! 전 시험도 꽤 좋 은 성적으로 통과하게 될 거예요. 그렇게 되면 필로트슨 선생님도 저를 큰 학교에 보내주기 위해 애써 줄 거구요." 수는 마침내 그 문제를 꺼내고 말았다. "나 조금 물어볼 것이 있는데 걱정이 돼서 그래." 주드가 말했다. "선생님은 동생을 따뜻하게 돌봐주시는데, 혹시 동생과 결혼하길 원하고 있는 것 아냐?" "어머, 그렇게 어리석은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그분이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없었단 말인가?" "설령 있었다 해도, 그게 어쨌다는 거지요? 그런 나이 많으신 분하고!" "아, 수, 그분은 그렇게 늙지 않았어. 난 언젠가 선생님이 어떤 일을 하 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설마, 나에게 키스하는 장면 같은 건 아니겠지요!" "그런 건 아니었지만 너의 허리를 팔로 감싸안고 있었지." "아, 생각나요. 난 그분이 그렇게 할 줄은 전혀 몰랐어요." "그 문제를 발뺌하려고 애쓰고 있군, 수. 그건 정말 좋지 못한데." 언제나 민감했던 수의 입술이 떨리기 시작했고 눈도 반짝거리기 시작했 다. 이런 비난에 뭔가 할말을 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전부 얘길 털어 놓으면 화내실 거예요. 그래서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럼, 좋아, 됐어." 그는 위로하듯 말했다. "사실 내겐 물을 만한 권리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아." "얘기하겠어요!" 수는 타고난 옹고집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렇게 된 거예요. 난 약속을 했었지요. 약속요. 2년 후에 교육대학을 나와 자격증을 따게 되면 그분과 결혼하기로 말예요. 그분의 계획은 결혼 하고 나서 좋은 도시로 나가 큰 남녀공학 학교를 맡아보겠다는 것이었어 요. 그분께선 남학생 반을 맡고, 난 여학생 반을 맡고 말예요. 부부교사들 은 종종 그렇게들 하는데, 수입도 꽤 좋대요." "아, 수...... 물론 당연한 일이지. 동생은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는데, 그때 마침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말과는 달리 눈짓엔 심한 질책이 담겨 있었다. 그는 수의 손에서 자 기의 손을 떼고 창쪽으로 얼굴을 돌려버렸다. 수는 움직이지 않고 수동적 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화낼 줄 알았어요!" 그녀는 조금도 감정을 흐트리는 기색 없이 말했다. "그래요, 내 잘못이었나 봐요! 이제는 절 만나러 오지 마세요. 만나지 않 는 게 나을 뻔했군요! 용건이 있을 때만 편지를 하기로 해요!" 이것이 주드에게는 더 견딜 수 없는 일이라는 것쯤은 수도 잘 알고 있었 다. 그러나 그는 곧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그럼, 그렇게 해요." 그는 재빨리 말했다. "너의 약혼은 나에겐 아무 상관도 없단 말이야. 난 동생을 만나고 싶을 땐 당연히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어. 언젠가 또 만나겠지." "이제 그런 얘긴 더이상 하지 않기로 해요. 오랜만에 함께 한 우리의 저 녁을 나무 망치는 것 같군요. 앞으로 2년 후의 일 같은 건 상관하지 말아 요." 수는 그에게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다. 주드도 이 화제를 더 이상 지속하 고 싶지 않았다. "우리 저 대성당에 가서 앉아 볼까?" 그들의 식사가 끝났을 때, 그가 제의했다. "대성당요? 네, 좋아요. 그렇지만 앉아서 쉬느니 차라리 정거장으로 가 요." 어딘지 그녀의 목소리에는 괴로운 듯한 여운이 섞여 있었다. "정거장이 요즘은 이 읍의 생활 중심지지요. 대성당 같은 건 이미 구식 이에요." "너는 정말 현대적이군 그래!" "나처럼 오빠도 지난 몇 해 동안을 중세의 분위기 속에서 지냈더라면 틀 림없이 현대적이 되었을 거예요! 4, 5세기 전만 같아도 대성당이 훌륭한 곳 이었겠지만 이젠 볼장 다본 거지요...... 저 역시 현대적이진 않아요. 전 중 세적이라기보단 오히려 고대적이거든요." 주드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자, 이젠 더 이상 거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어요!" 그녀가 외쳤다. "다만 오빠는 제가 얼마만큼 나쁜 여자인지 그걸 모르고 계세요. 그렇지 않다면 절 이렇게 생각해 주지 않았을 것이고 제 약혼애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겠죠. 시간이 있으니 경내를 한바퀴 돌고 전 들어 가봐야겠어요. 안 그러면 오는 저녁에 쫓겨나게 될 거예요." 그는 수를 문까지 바래다주고 헤어졌다. 그의 지난번의 불행한 방문이 그녀의 약혼을 기정 사실화시켰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글펐다. 수가 드러내놓고 비치진 않았지만 그녀의 주드에 대한 비난이 필로트슨과의 약혼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났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다음날 그는 일자리를 구하러 나갔지만 크리스트민스터에서처럼 쉽지는 않았다. 이 조용한 도시에서는 돌 깎는 일이 대체적으로 활발하지 않았고 기능공들도 거의 토박이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점차적으로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가 처음으로 맡은 일거리는 언덕 위의 묘지에서 조각하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그가 원했던 일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대성당의 보수 공사로 상당한 규모의 일거리였다. 내부의 석조물 전부를 조사해 새것으로 바꾸는 일이었다. 그 일을 전부 마치는 데는 자그마치 수년이 걸릴 것 같았다. 주드는 끌 과 망치를 다루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지 때문에 이 고장에서 얼마나 오해 머물 것인가는 오로지 그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느꼈다. 주드가 경내의 대문 가까운 곳에 얻은 하숙집은 목사보의 주택으로도 손 색이 없을 정도였으나 그의 임금에 비해 집세가 높아, 여느 기능공들은 흔 히 지불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가였다. 침실과 거실을 겸한 방에는 이 집 여주인이 어릴 적에 가정부로 살았던 목사관과 부감독 저택의 사진이 액자화돼 걸려 있었다. 그리고 아래층 응 접실 난로 선반 위에는 부인이 결혼할 당시 동료 하인들로부터 받았다는 취지의 글이 기입된 괘종시계가 놓여 있었다. 주드는 자기 손으로 만든 교회의 조각이나 기념비의 사진을 꺼내 자신의 방을 장식하고 만족한 기분이 들었다. 주드는 시내의 책방에 신학에 관한 서적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 었다. 그는 그러한 책을 상대로 여태까지의 방침과는 다른 방향으로 연구 를 재개했다. 교부문학과 페일리(1743-1805, 자연신학자로 삼위일체설을 배격하고 그 리스도를 신으로 삼는 대신 유일의 신격을 주장했음)나 버틀러(1969-1752, 브리스틀의 감독을 지낸 신학자)와 같은 딱딱한 서적을 벗어나 뉴먼, 퓨지 와 같은 근대의 석학들의 책을 수없이 읽었다. 그는 또 오르간을 임대해 하숙집에 들여놓고 여러 가지의 찬미가를 단음 이나 복음으로 연습하기도 했다. 3-2 "내일은 휴일인데, 어디 가고 싶은 곳은 없어?" "전 3시부터 9시까지 휴가를 얻어 놓았어요. 그 동안에는 어디든 갔다올 수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주드, 폐허 같은데 가는 건 전 싫어요. 그런 곳 은 별로예요." "그럼 워더 성으로 가지. 그러고 나서 또 가고 싶다면 폰트힐 저택에도 갈 수 있고. 내일 오후 동안에 모두 가볼 수 있는 곳들이지." "워더 성은 고딕풍의 폐허예요. 난 고딕은 싫은데!" "아냐, 전혀 달라. 그건 고전적인 건축물이야. 코린트식이지. 그림도 많이 있구." "아, 그럼 그렇게 해요. 코린트란 어감이 맘에 들어요. 우리 가요." 몇 주일이 지난 어느 날, 두 사람의 대화는 이와 같이 오고 갔고 다음날 아침, 그들은 떠날 채비를 했다. 이번 수풍을 준비하면서 주드는 깎아놓은 보석처럼 빛이 났고 활달해졌다. 그는 이제부터 보내려고 하는 일관성 없 는 생활에 관해서는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수의 태도는 주드에게 있어서 하나의 사랑스런 수수께끼였다. 그는 이 이상 아무 것도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데리러 교문을 찾아가야 하는 가슴 설레이는 날은 어김없이 찾아 왔다. 그녀는 스스로의 뜻이기보다는 다소 강압적이라고 할만한 부위기에 의해 수녀처럼 간소한 옷차림을 하고 나타났다. 두 사람은 정거장까지 길 을 따라 나란히 걸었는데, 짐꾼이 실례한다고 외치던 일, 기차의 기적 소 리, 이러한 모든 것들이 하나의 아름다운 결정체를 형성했다. 수를 바라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것은 그녀가 매우 소박한 복 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이러한 의상에 억제되어 있는 매력을 자 신만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주드는 적잖이 위안이 되었다. 포목상에서 10파운드의 돈만 들이면 그녀의 실생활이나 진정한 자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지만, 멜체스터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그녀 를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차장은 그들을 연인이라고 생각하고 두 사 람만 들어가는 차칸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쓸데없이 호의를 보이는군요!" 수가 말했다. 주드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은 불필요할 정도로 잔인한 짓이며, 또 부분적으로는 진실하지 못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두 사람은 큰 정원에 둘러싸인 워더 성에 도착해 화랑을 둘러보았다. 주 드는 일부러 델사르트, 귀도 에니, 스파뇨레토, 사소페르라토, 카를로 돌치 와 그 밖의 화가들이 그린 종교화 앞에 멈추었다. 수는 참을성 있게 주드 의 옆에 멈추어 서서, 성모상이나, 성가족, 성도들의 그림을 바라보며 점차 마음이 경건해져 가는 그의 얼굴을 비판적으로 훔쳐보기도 했다. 이리하여 완전히 살펴보았다 싶으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 렐리나 레이놀스의 그림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 그녀의 마음속에 사촌에 대한 깊은 관심이 생기고 있음은 명백했다. 그 것은 자기가 먼저 빠져 나온 것과 같은 미로에서 타인이 어떻게 해야 좋을 지 아주 난처해하며 나오려고 하는 것을 보고 흥미를 느끼는 사람의 심리 와 같은 것이었다. 밖으로 나왔을 때 그들에게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식사를 하고 나자 주드는, 고지의 시골을 가로질러 북쪽 7마일쯤 되는 저쪽 정거 장에서 멜체스터 방면으로 돌아가는 다른 철도의 기차를 잡아타자고 제안 했다. 수는 오늘 하루의 자유분방함을 만끽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떠한 모험이 라도 해보고 싶은 기분이 들어 흔쾌히 동의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근처에 있는 정거장을 뒤로하고 떠났다. 시원하게 탁 트인 전원이 넓고도 높게 펼쳐져 있었다. 두 사람은 이야기 를 나누면서 뛰는 것처럼 걸어갔다. 주드는 작은 숲에서 수를 위해 그녀의 키 정도가 되는 길고 몹시 굽은 지팡이 한 개를 꺾어 왔는데, 그 지팡이를 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양치기 소녀처럼 보였다. 여행길의 절반쯤 되는 거리를 걸어왔을 무렵, 두 사람은 마침 동서로 나 있는 큰 길을 건너게 되었다. 이 길은 런던과 랜스엔드 곶을 연결하는 오 래된 도로였다. 두 사람은 멈추어 서서 잠시 여기저기를 바라보았으며 한 때는 활발했던 이 통로에 불어닥친 현재의 황폐함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 다. 때마침 바람이 휙 불어 닥쳐서, 짚과 건초줄기들을 땅 위에서 쓸어가 버렸다. 두 사람은 이 도로를 건너 지나갔다. 그러나 반 마일도 채 가기 전에 수 는 지친 듯이 보였다. 주드도 마음이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상당한 거리를 함께 걸어왔는데, 만일 그들이 목표한 역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정 말 곤란해질 것이었다. 오랫동안 막막하게 펼쳐진 언덕과 순무밭 쪽에는 집 한 채 눈에 띄지 않 았다. 그러나 가까스로 어떤 양의 우리에서 사립문을 세우고 있는 양치기 를 만날 수 있었다. 양치기는 이 부근에는 자신과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 이 단 한 채 있을 뿐이라며 전방의 작고 움푹 팬 곳을 가리켰는데 거기에 선 푸른 연기가 희미하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양치기는 그들에게 쉬어가라 고 권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하기로 하고, 이빨이 하나도 없는 한 노파의 안내를 받아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주인의 호의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이 집에서 쉴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두 사람은 손님으로서 이 노파에게 최대한 친절하려고 애썼다. "작고 멋진 집이네요." 주드가 말했다. "아, 멋진 것까진 잘 모르겠수. 짚으로 지붕을 이어야 하는데, 짚이란 게 어디서 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나 비싼지 이럴 바엔 기와를 이는 편이 훨씬 쌀 것 같으우." 두 사람이 앉아 쉬고 있을 때 양치기가 들어왔다. "나한테는 신경쓰지 마십시오!" 양치기는 염려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댁들이 계시고 싶을 때까지 계십시오. 그런데, 오늘밤 기차로 멜체스터 로 돌아가실 생각입니까? 댁들은 이 근방의 지세를 잘 모르고 계셔서 그렇 습니다만, 돌아가시기 힘들 겁니다. 제가 잠깐 모셔다 드릴 수도 있습니다 만, 어쨌든 기차는 떠나고 없을 겁니다." 두 사람은 놀라 벌떡 일어섰다. "오늘밤은 여기서 쉬십시오. 안 그래요, 어머니?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잠자리야 별로 좋지 않습니다만, 세상엔 여기보다 못한 데도 많습니다." 그는 주드 쪽을 향해 몸을 돌리면서 물었다. "부부신가요?" "아, 아닙니다!" 주드가 말했다. "아, 뭐 꼭 나쁜 이야길 하려고 한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자분은 어 머님 방으로 가시면 되고, 선생과 나는 여자들이 가고 나면 바깥방에서 잡 시다. 첫 기차 시간에 늦지 않도록 일찍 깨워드리지요. 오늘밤 기차는 벌써 늦어버렸으니까요." 두 사람은 곰곰이 생각해 본 끝에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식탁에 앉아 양치기와 그의 모친이 끓여내 온 베이컨과 야채로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전, 이런 곳이 좋아요." 집주인이 접시를 치우고 있는 동안 수가 말했다. "중력과 발아의 작용 외에는 어떤 법칙에도 속박되어 있지 않거든요." "너는 좋아한다고 생각만 하는 거야.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 너는 전적으 로 문명의 산물이야." 주드가 말했다. 불현듯 그녀의 약혼 사실이 생각나 다시금 그의 마음이 괴로워졌다.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주드. 난 독서 같은 건 좋아하지만, 어린시절의 생활이나 자유로 돌아가고 싶어요." "수는 어렸을 적의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어? 나의 눈엔 네가 세상 의 인습과 관계없는 사람으론 보이질 않거든." "어머, 난 그렇지 않아요! 오빠는 내 자신을 속속들이 모르고 계시나 봐 요." "그건 또 무슨 말이지?" "전 이스마엘족(아브라함과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과 같이 버림받은 자를 가리킴)인 걸요." "너는 도시에서 자란 엄연한 숙녀야." 그녀는 격렬한 불만의 기색을 보이고는 얼굴을 돌려버렸다. 그 다음날 아침 양치기는 약속대로 두 사람을 깨웠다. 맑고 청명한 날씨 였으며, 기차가 있는 역까지의 4마일을 그들은 즐겁게 걸었다. 그들이 멜체 스터에 도착한 뒤 경내까지 걸어가 다시 갇혀 지내게 될 오래 된 건물의 박공들이 수의 눈앞에 솟았을 때 그녀는 다소 겁에 질려 있는 것처럼 중얼 거렸다. "야단맞을 거예요!" 두 사람은 커다란 벨을 누르고는 기다렸다. "아, 오빠에게 줄 물건을 가지고 있는데, 깜박 잊고 있었네요." 수는 재빠르게 말하고 나서 호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새로 찍은 작은 내 사진인데, 받아주시겠어요?" "기꺼이 받겠어!" 그는 기쁘게 그것을 받았다. 곧이어 문지기가 다가왔다. 문을 열어주는 그의 얼굴에는 희미하게나마 불길한 징조가 깃들어 있는 듯이 보였다. 수 는 고개를 돌려 주드를 쳐다보고는 손을 흔들며 안으로 들어갔다. 3-3 다소 나이든 사람도 있었지만, 주로 열아홉에서 스물한 살까지 70명의 여성들이 멜체스터의 교육대학으로 알려져 있는 일종의 수녀원 같은 곳을 꽉 채우고 있어서, 그곳은 매우 다양한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이 속에는 직공이나 목사, 의사, 소상인, 농부, 우유상, 군인, 선원, 시골사람들의 딸 등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 앞서 말한 휴일날 밤에 그들은 학교의 커다란 교실에 앉아, 수 브라이드 헤드가 문을 닫을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수군거리고 있 었다. "수는 젊은 남자와 한께 나갔대." 젊은 남자를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어느 학생이 말했다. "트레이슬리 선생님이 그녀가 젊은 남자와 함께 정거장에 있는 것을 보 았대. 그녀는 돌아오면 따끔하게 야단맞을 거야." "그 남자는 수의 사촌이라던데." 발랄한 신입생이 말했다. "그런 변명은 우리 학교에선 너무 많이 쓰였기 때문에 처벌을 면하는 데 는 별로 효과가 없을 거야." 2학년 반장이 냉담하게 말했다. 사실은 1년 전쯤에 유감스럽게도 어느 학생이 유혹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 학생도 연인과 만나기 위해 같은 말로 변명을 했었다. 이 사건이 추문 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후로 학교 당국에선 사촌이라는 말에 신경이 예민 했다. 9시에 인원점검이 있었다. 트레이슬리 선생님이 세 번이나 수의 이름을 낭랑하게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9시 15분에 70명은 일제히 일어서서 '저녁찬가'를 부르고 무릎을 꿇고 기 도를 드렸다. 기도가 끝난 후 저녁식사를 했는데, 모든 소녀들의 생각은 수 브라이드헤드가 대체 어디에 있을까 하는 데 쏠렸다. 주드가 창 너머로 들여다본 것을 목격한 몇 명의 학생은 그토록 마음이 상냥해 보이는 청년에게 키스 받는 기쁨을 맛볼 수만 있다면, 수가 받게 될 벌 같은 것은 문제가 안 된다고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학생들 중의 그 어느 누구도 사촌간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30분 후에 그들 모두는 조그마한 침실에 누웠다. 그들의 귀엽고 여성다 운 얼굴은 길게 뻗은 기숙사의 군데군데에서 반짝이고 있는 가스등 쪽으로 향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에는 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형상 지어진 여성이라는 성의 벌로 '연약한 자'라는 명이 새겨져 있었다. 이 형벌을 받 고 있는 이상은 제아무리 왕성한 의욕과 능력을 발휘해 보아도 냉혹한 자 연의 법칙이 변하지 않는 한 그들은 결코 강해질 수가 없었다. 그들은 예 쁘고, 암시적이며, 애처로운 시선을 보내면서도, 그 아름다움이나 연정을 스스로 깨닫지도 못하고 발견해 내지도 못할 것이다. 앞으로 세상의 거센 폭풍이나 중압감에 시달리게 되고, 부정, 고독, 출산 과 남편과의 사별 같은 고통을 겪고 난 후에 그들의 마음은 오늘의 이 경 험을 어떻게 회상할 것인가. 여교사 한 사람이 등불을 끄려고 들어왔다. 끄기 전에 여전히 비어있는 수의 침대를 마지막으로 한번 쳐다보았다. 그녀의 발치쯤에 있는 작은 화 장대에는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소녀다운 장식물이 있었는 데, 그 중에서도 두드러지게 눈길을 끄는 것은 액자에 든 사진이었다. 수의 화장대는 볼품 있는 전시장이었다. 벨벳 천에 금은의 바늘 세공을 한 거울 옆의 액자 안에는 두 사람의 사진이 세워져 있었다. "이 사람들은 누군가요? 브라이드헤드가 말한 적이 있나요?" 여교사가 물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여러분도 알다시피 친척의 사진만을 책상 위에 놔 둘 수 있어요." "이쪽의 중년 남자는요." 옆 침대에 있던 학생이 말했다. "브라이드헤드가 근무했던 학교의 선생님으로 필로트슨 선생이래요." "또 한 사람, 이 각모를 쓰고 제복을 입은 대학생은 누구지요?" "친구라나 봐요. 전에 친구였나본데, 이름을 말한 적은 없어요." "그녀를 부르러 온 사람이 이중에 있나요?" "아뇨." "대학생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지요?" "확실해요. 그 사람은 검은 수염이 나 있는 젊은 남자였어요." 이내 불이 꺼졌고 소녀들은 잠에 빠져들 때까지 수에 관한 여러 가지 억 측을 제멋대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여기로 오기 전에, 런던이나 크 리스트민스터에서 도대체 어떤 일을 했을까 하고 의아해 했다. 그 중에서도 조심성 없는 학생들 몇몇은 침대에서 빠져 나와, 건너편 대 성당의 웅장한 서편 입구 정면이나 그 뒤쪽에 솟아 있는 첨탑들을 세로창 살이 나 있는 창문을 통해 내다보기도 했다. 그들은 그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수가 자고 있어야 할 구석을 바라 보았지만 침대의 주인은 없었다. 그들은 아침 화장을 하는 둥 마는 둥하고 가스등 불빛을 비춰가며 아침 레슨을 마친 뒤, 비로소 옷을 갈아입고 아침 식사를 했다. 그러고 나자 입구문의 벨소리가 크게 울려왔다. 사감이 나갔 다가 다시 되돌아와서는, 허가 없이 브라이드헤드에게 말을 건네서는 안 된다는 교장의 명령을 전했다. 수는 기숙사에 돌아와 서둘러 몸치장을 하고, 피로하면서도 상기된 표정 으로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침실로 들어갔으나 누구 한 사람 그녀를 맞아주 거나 말을 걸지 않았다. 학생들은 아침식사를 하러 아래층에 내려갔을 때 수가 따라오지 않았다 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수가 엄하게 혼이 났으며, 1주일 동안의 독방생활을 명령받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수는 방밖을 한 걸음도 못 나갔고 식사도 거기서 했으며, 독서만을 할 수 있었다. 너무 가혹한 벌이라고 70명의 학생들은 수군거렸다. 학생들은 단체 서명 을 작성해 수의 처벌을 경감해 달라고 교장에게 제출했으나 이는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오후 늦게 지리과목 여교사가 강의를 시작했을 때 학생들은 팔짱을 낀 채 앉아 있었다. "공부하지 않겠다. 이건가요?" 여선생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브라이드헤드와 외박했던 남자가 사촌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됐음을 여러분에게 알리는 것이 좋겠군요. 그런 친척이 수에겐 한 사람도 없어요. 우리는 크리스트민스터에 조회해서 확인도 했어요." "저희들은 그녀의 말을 듣고 싶습니다." 반장이 말했다. "그 청년은 술집에서 술에 취해 불경스러운 행동을 하다 크리스트민스터 의 일자리에서 쫓겨난 경력이 있어요. 그래서 이곳으로 옮겨와 사는 건데, 그건 전적으로 브라이드헤드와 가까이 있고 싶어서지." 그러나 그들이 완강히 버티며 미동도 하지 않자 여선생은 윗사람에게 상 의해 보겠다며 교실을 나가버렸다. 곧 황혼이 깃들기 시작하였다. 학생들은 여전히 앉아 있었고, 옆 교실에서는 1학년 학생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 려왔다. 그 와중에 한 학생이 뛰어들어와 수 브라이드헤드가 감금당해 있 던 방을 빠져 나와 어디론가 달아 나버렸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그녀가 어떻게 해서 교외로 빠져나가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아래쪽 구내의 경계는 강물로 둘러싸여 있는데다가 옆문은 자물쇠로 잠겨 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텅 빈방으로 달려가 중앙의 창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등 불을 들고 잔디밭과 관목 사이, 나무 그늘도 찾아보았지만 수는 그 어디에 도 숨어 있지 않았다. 정문의 수위에게 물어보자 그는 잠시 생각 끝에 뒤 쪽의 강물에서 첨벙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오리가 강물 을 따라 상류에서 내려온 것이라 생각하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 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강을 건너갔어." 여선생이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익사했을 거요!" 수위가 말했다. 사감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수가 익사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경 악한 것이 아니라, 모든 신문에 이 사건이 5단 기사로 상세히 보도될 것이 두려워서였다. 그렇게 되면 1년 전의 추문과 더불어 장차 몇 달 동안, 학교 당국은 씻을 수 없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더 많은 등불을 확보해 강을 조사해 보았다. 마침내 그들은 들판을 향해 펼쳐져 있는 건너편 강가의 진흙 속에 작은 구두 발자국이 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곳은 모든 지리 교과서에서도 경의를 표할 정도로 주내 제일의 강이었 다. 흥분한 수가 어깨까지 차는 이 깊은 물을 건너 달아났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수가 익사함으로써 학교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았 다는 점을 알게 되자 사감은 거만하게 말하기 시작했고, 그런 학생이 사라 졌다는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이라는 듯 만족감까지 표시했다. 그날 밤 주드는 경내의 산 어귀 옆에 위치한 하숙집에 있었다. 그는 해 가 지고 난 이 시각쯤이면 종종 수가 기거하는 기숙사의 건너편 경내에 들 어가, 이곳저곳을 오가는 여학생들의 머리와 창문의 해 가리개에 비친 그 림자를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사려분별이 없는 동숙자들이 경멸하는 서적 이나 읽고, 온종일 독서만 하고 공부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고 생각해 보기 도 했다. 그러나 오늘밤의 그는 차를 마시고 몸단장을 끝내고는, 놀랍도록 싼값으 로 중고 서적상에서 구입한 퓨지 편의 <교부문학총서> 한 질의 제29권을 탐독하고 있었다. 그는 가볍게 창문에서 뭔가 덜컥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이내 그 소리가 또 들려왔다. 분명히 누군가가 자갈을 던진 것 같 았다. 그는 일어나서 조용히 창틀을 들어올렸다. "주드!" 아래에서 소리가 났다. "수!" "그래요, 나예요! 다른 사람한테 들키지 않고 올라갈 수 있겠어요?" "아, 염려마." "그럼, 내려오지 마세요. 그리고 창문을 닫아요." 주드는 기다렸다. 오래 된 시골 도시에서처럼 현관문은 누구나 손잡이를 돌려 열 수 있게 되어 있어서, 그녀도 어렵잖게 방으로 들어올 수 있을 것 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곤경에 빠졌을 때 수한테로 달 려갔던 것처럼 그녀 역시 곤경에 빠져 자기한테로 도망쳐온 것이라는 생각 에 그의 마음은 설레었다. 어쩌면 그들은 이렇게도 닮은 걸까! 그는 방문을 살짝 열고서 어둠 속의 계단을 소리 없이 올라오는 기척을 엿들었다. 이윽고 수가 램프의 불빛 속 으로 나타났다. 그는 가까이 가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수는 바다의 신처럼 함빡 젖어 있었고, 옷은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장식대에 있는 여신처럼 몸 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나, 추워 죽겠어! 난로 가까이로 가야겠어요." 수는 어금니를 달달 떨면서 말했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이런 몸을 불기도 약한 난로로 말린다는 것이 터무니없어 보였다. "대체 웬일이지?" 그는 너무나 놀라 부드러운 애칭이 자신도 모르게 새어나올 것을 조심하 며 물었다. "이곳에서 제일 큰 강을 걸어서 건넜어요. 그렇게 해서 온 거예요! 오빠 와 같이 밤을 지샜다고 절 감금 처분했어요. 그런 부당한 처벌은 견딜 수 가 없었어요. 그래서 창문을 넘고 강을 건너 도망쳐온 거예요!" 수는 평소처럼, 특유의 마음내키는 어조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 지만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분홍빛의 얇은 입술을 떨기 시작하더니 왈칵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수, 이걸 다 벗어야 해! 자, 그러려면 여주인의 옷이라도 빌려와야 하겠 는걸. 내가 부탁해 볼게." "아니예요! 제발 여주인에겐 알리지 말아주세요! 학교 바로 옆이라 곧 쫓아오게 될 거예요." "그럼 내 옷이라도 입도록 해. 괜찮을까?" "괜찮아요." "일요일 나들이옷이야. 여긴 방이 좀 좁아." 다른 방이 없었기 때문에, 주드의 방은 하나에서 열까지 협소했다. 여유 가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서랍을 열고 가장 좋은 그의 나들이 옷을 끄집어내 훌훌 털고 나서 말했다. "옷 갈아입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지?" "10분 정도요." 주드는 방을 나와 거리로 내려가서 서성거렸다. 시계가 7시 반을 치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돌아섰다. 그의 유일한 안락의자에 일요일의 주드로 변장한 채 앉아 있는 갸름하고 연약해 보이는 사람이 수였다. 그 무방비 상태가 너무나 가여워 그의 가슴은 뭉클해졌다. 난로 앞에 놓인 나머지 두 개의 의자에는 그녀의 함빡 젖은 옷이 걸려 있었다. 주드가 옆에 앉자 그녀는 벌겋게 달아올랐는데, 그것도 잠시뿐이었 다. "내 몸에 걸쳤던 옷을 모두 저기에 걸어놓고 이렇게 앉아 있는 날 보니 우습지요, 주드. 그렇지만, 아무 뜻도 없는 짓이지요! 여자는 옷을 몸에 걸 친다뿐이니까요. 남녀의 성별과는 관계없는 라사나 린넨에 불과하니까요. 몸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럼 내 옷 좀 말려 주시겠어요? 부탁이 에요, 주드. 마르거든 곧 하숙을 구할 거예요.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요." "몸이 아프면 그러지 마, 수. 여기에 잠자코 있도록 해요. 귀여운, 귀여운 수! 뭐 좀 먹을 걸 갖다줄까?" "나도 몰라요! 웬일인지 오한이 가라앉지를 않네요. 좀 따뜻했으면 좋겠 는데." 주드는 그의 또 다른 외투를 수에게 걸쳐주고 나서 근처의 술집으로 뛰 어갔다. 거기서 작은 병 한 개를 손에 구해 쥐고 돌아왔다. "여기 최상품의 브랜디를 6펜스 주고 사왔어. 이걸 단숨에 마셔보도록 해요. 남기지 말고." 그는 말했다. "이것을 어떻게 병째 마실 수 있겠어요." 주드가 화장대 위에서 잔을 가지고 와 브랜디에 물을 탔다. 수는 약간 한숨을 쉬고 나서 꿀꺽 삼켜버렸다. 그리고 안락의자 뒤쪽으로가 누워버렸 다. 수는 어제 두 사람이 헤어지고 난 후부터의 일을 상세히 말하기 시작했 다. 그러나 얘기 도중 더듬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깊은 잠에 빠져든 것이었다. 그녀가 감기에라도 들까봐 주드 는 걱정했으나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리자 안심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살펴보았다. 장밋빛처럼 핏기운 이 돌기 시작했고 축 늘어진 손도 이제는 차갑지 않았다. 주드는 자기의 등을 난롯불 쪽으로 돌리고 서서 수의 잠자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 녀한테서 거의 신성함을 느꼈다. 3-4 주드의 몽상은 계단을 올라오며 내는 삐거덕거리는 발소리에 의해 중단 되었다. 의자에서 마르고 있던 수의 의복을 그는 황급히 집어들어 침대 밑으로 쑤셔 넣고 나서 책상머리에 앉아 책 읽는 시늉을 했다. 누군가가 문을 두 드렸고 이내 문이 열렸다. 바로 이 하숙집의 여주인이었다. "아니, 폴리 씨, 집에 있었는지 전혀 몰랐어요. 저넉식사를 하실 건지 물 어보러 왔어요. 젊은 신사분이 와 계시는가 보군요." "네, 아주머니. 오늘 저녁엔 아래로 내려갈 수 없을 것 같으니, 쟁반에 다 식사를 갖다 주시겠어요? 차도 한 잔 했으면 하는데요." 주드는 평소 아래층으로 내려가 주인집 식구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공 연히 수고를 끼치는 게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하숙집 여주인 이 저녁식사를 2층으로 가지고 올라왔기 때문에 주드는 그것을 문 있는 데 서 받아들었다. 여주인이 내려가고 나자, 그는 벽난로 뒤쪽의 선반 위에 찻주전자를 올 려놓고 새삼 수의 옷을 꺼내 보았다. 아직 젖어 있었다. 두꺼운 모직 가운 에는 물기가 많이 남아 있었다. 그는 다시 옷을 걸쳐두고 벽난로의 불을 지펴 옷에서 일어나는 김이 굴뚝으로 빨려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 다. 수가 돌연 말했다. "주드!" "그래, 기분이 좀 어때?" "좋아졌어요. 아주 많이. 그런데 제가 잠에 골아 떨어졌었던 모양이지요? 지금 몇 시나 됐어요? 분명히 늦지는 않았겠지요?" "10시가 지났는데." "정말? 전 어떡하면 좋아요!" 그녀는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다. "그대로 있어요." "네, 저도 그러고 싶어요. 하지만 소문이 어떻게 날지 몰라서...... 그건 그 렇고 오빠는 어떡하실 거예요?" "난 여기 난로불 옆에서 밤새 책이나 읽을까 해. 내일은 일요일이니까, 밖에 나갈 필요는 없겠지. 너는 여기서 쉬고 나면 몸이 나아질테니 걱정 말아. 난 괜찮으니까. 여기 저녁밥도 갖다 두었어." 수는 일어나 낮아 처량하게 숨을 쉬며 말했다. "아직 어질어질해요, 좋아진 것 같더니만. 그런데 제가 여기에 있으면 안 되지 않아요?" 저녁식사는 그녀에게 얼마간의 원기를 돌려주었다. 그녀는 차를 마시고 다시 눕자 명랑해지고 쾌활해졌다. 차가 진한 녹차여서인지 아니면 너무 오래 우려서인지 그후 그녀는 이상 하리만큼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비록 차를 마시지 않은 주드의 눈은 거슴츠레해지기 시작했지만 곧 수의 이야기가 그의 주의를 끌었다. "오빠는 절 가리켜 근대문명의 산물이니 뭐니 하고 말씀하셨지요?" 그녀가 침묵을 깨뜨리며 말했다. "그런 식으로 부르시면 이상하단 말이에요." "왜지?" "글세, 그건 아주 틀린 지적이니까요. 전, 문명을 부정하는 사람이잖아 요." "대단히 철학적이구나, 부정이란 말은 심오한 표현이지." "그래요? 제가 학식 있는 것같이 보여요?" 그녀는 야유조로 말했다.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보통 아가씨들처럼 말하지 않는 것 같아서. 말하자면, 아무런 볼품도 없는 그런 여자들 말이야." "전 볼품은 있다고 생각해요. 라틴어나 희랍어는 읽지 못하지만 그들의 문법만은 알고 있어요. 그러나 대개의 희랍어나 라틴어 고전은 번역된 댁 으로 읽고 있어요. 다른 책도 마찬가지예요. 렘프리에르(영국의 고전학자), 카툴루스(87~54? B.C, 로마의 서정시인), 마르티알리스(40?~100?, 로마의 풍 자시인), 주베날리스(60?~130?, 로마 전성기의 통렬한 풍자시인), 루키아누 (120?~180?, 그리스의 풍자가), 보먼트(1584~1616. 영국 엘리자베스 왕조의 희곡작가)와 플레처(1579~1625. 엘리자베스 시대의 극작가), 보카치오 (1313~1375, 이탈리아의 작가), 스카롱(1610~1660, 프랑스의 풍자적 희곡작 가), 드 브랑통(1540~1614?, 프랑스의 역사가), 스턴(1713~1768, 영국의 작 가), 과디포(1660~1731), 스몰렛(1721~1771, 스코틀랜드 태생의 영국작가), 필딩(1707~1754, 영국의 사실주의 소설의 시조), 셰익스피어나 성서까지도 읽었단 말이에요. 이러한 서적에는 불건전한 내용도 있지만, 대부분 여운을 남기고 신비롭게 끝난다는 것도 알고 있지요." "나보단 훨씬 많이 읽었군." 주드는 탄식하며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야릇한 책들을 읽게 되었지?" "글쎄요." 수는 생각에 잠긴 듯이 말했다. "우연히 그렇게 되었지요. 내 생애는 흔히 사람들이 말하듯 내 안의 특 성이라는 것에 의해 형성되었어요. 난 세상의 남성들에 대해 전혀 두려움 이 없어요. 남성들이 쓴 책 같은 건 두렵지도 않아요. 여러 남성들과 어울 려본 적도 있고요. 그중 한두 사람과는 각별했죠. 이런 경우 대부분의 여자 들은 어떤 종류의 기분을 갖게 되는데, 말하자면 정조를 뺏기지 말아야지 하는 식으로요. 내가 사귄 남자들에게서 전 그런 기분을 안 가져 봤어요. 미개에 가까운 육감적인 남자의 경우라면 별 문제겠지만요. 여느 남성은 여자 쪽에서 먼저 유인하지 않으면 낮이든 밤이든 집 안이든 집 밖이든, 여자를 괴롭히지는 않지요. 여자가 눈치로 '어서요' 하기 전에 남자란 그렇 게 하는 걸 항상 두려워하죠. 그러나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제가 열 여덟 살 때 크리스트민스터에서 어느 대학생과 친밀하게 지냈는데 그가 나한테 많은 것을 가르쳐줬죠. 도저히 내 힘으론 구해 볼 수도 없는 책들을 빌려 줬지요." "지금은 헤어진 거요?" "그래요! 죽었어요. 학위를 따고, 크리스트민스터를 떠나고 난 2, 3년 뒤 에, 가엾게도." "그 사람과는 자주 만났을 것 같은데?" "그럼요. 우리는 함께 곧잘 산책했어요. 소풍이다 독서여행이다 등등으로 마치 친구처럼 말이에요. 그 사람이 함께 살자고 하길래 난 편지로 승낙을 했어요. 그렇지만 런던에서 함께 동거할 때, 그는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사실상 그는 날 정부로 삼고 싶었 던 거죠. 그러나 난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어요. 만일 내 계획에 동의 해 주지 않으면 떠나겠다고 말했더니, 그는 승낙을 해주더군요. 우리는 같은 방에서 15개월을 살았어요. 이럭저럭 그 사람은 런던의 그 사람은 런던의 큰 일간지에서 유력한 기자로 일했지만, 곧 병을 얻어 해외로 요양을 떠나 야 했어요. 그 사람은 제게 곧잘 이런 말을 했어요. 그렇게 좁은 집에 같이 살면서 자기를 멀리 했기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고 말예요. 그런 여자가 있 으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대요. 그가 외국에서 돌아왔을 땐, 정말 죽기 위해 돌아온 듯 했어요. 그 사람의 죽음은 나의 잔인함에 대해 소름 끼치는 후회를 맛보게 해주었어요. 하긴 폐병으로 죽었으니 제 탓은 아니 었지요. 저는 그의 장례식 때 샌드본까지 갔었는데, 제가 그 사람에게 실연 의 상처를 줬기 때문인 것 같았어요. 그것은 남자가 여자보다 훨씬 나은 점이지요!" "맙소사! 그 후에 너는 어떻게 지내게 됐지?" "아, 나한테 화를 내고 있군요!" 은방울소리 같은 낭랑한 그녀의 목소리에 갑자기 콘트랄토(여성의 최저 음역) 같은 비극적인 음조가 깃들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이런 얘기 오빠한테 하지 말 걸 그랬지요!" "아냐, 화나지 않았어. 전부 얘기해 봐." "그러고 나서 난 그의 유산을 정말 가엾게도 물거품 같은 계획에다 투자 해 몽땅 날리고 말았어요. 난 한동안 런던 여기저기서 혼자 생활을 하다가 곧 크리스트민스터로 돌아오고 말았어요. 역시 런던에 계시던 부친께서 롱 에이커 거리 근처에서 미술조금공 일을 시작하셨지만, 날 받아주시지 않았 어요. 그 때문에 그럭저럭 미술 장식점에 근무하게 됐던 거지요. 그리고 거 기서 오빠가 날 찾아낸 거예요. ...... 내가 얼마나 몹쓸 여자인지 전에 오빠 는 모를 거라고 말했었지요!" 주드는, 마치 자기가 감싸주려는 사람의 마음속을 더욱 주의 깊게 읽어 내려는 듯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를 돌아다보았다. 그는 떨리는 목소 리로 말했다. "수, 네가 어떤 생활을 해왔든 이 세상의 인습을 타파해 낼 수 있을 만 큼 순수하다고 믿고 있어!" "전 오빠가 생각하는 것만큼 순수하지 않아요. 아시다시피 지금 난, '그 대의 공상이 입혀 놓은 허망한 모형에서부터 그 옷을 확 잡아당기고 있는' 거예요." 그녀는 짐짓 냉소를 띠며 말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가득했다. "그렇지만 전 어떤 연인에게도 몸을 맡겨본 적이 없어요. 혹시 오빠가 그런 것에 대해 불안해 한다면요! 전 태어날 때의 몸 그대로예요." "난 수를 전적으로 믿고 있어. 그렇지만 지키지 못하는 여자들도 있지." "아마 못 지키겠지요. 나보다 나은 사람도 못 지킬 거예요. 그래서 사람 들은 나더러 냉정한 여자라고 하더군요. 섹스가 없는 여자라나요. 그렇지만 그런 말은 인정하고 싶지 않아요! 가장 정열적이고 에로틱한 시인들 중 어 떤 이들은 일상생활을 자신을 억제하며 해나가는 사람도 있거든요." "필로트슨 선생에게도 그 대학 출신의 박학한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들 려주었어?" "그럼요, 오래 전에. 누구에게도 이 문제를 비밀로 하진 않아요." "선생님은 뭐라 그랬는데?" "비판하는 말은 한마디도 안하셨어요. 내가 뭘 했던지, 그분에게는 내가 전부라는 등 그런 말만 했어요." 주드는 굉장히 의기소침해졌다. 수가 그녀 나름의 이상한 행동과 성에 대한 무관심한 태도로 자신에게서 점점 멀어져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 다. "주드, 정말 나 때문에 화나신 거 아니에요?" 그녀가 갑자기 물었다. 두드러지게 상냥한 목소리여서 여태까지 그토록 경쾌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던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생 각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오빠만은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화가 났는지 안 났는지 그건 나도 모르겠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건 동생을 무척 걱정하고 있다는 것뿐이야." "나도 오빠에게 무척 마음을 쓰고 있어요. 여태까지 내가 만났던 어느 누구보다도......" "너는 내게 관심이 있는 게 아냐.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군. 이제 이런 소리에 대답하지 마." 또다시 긴 침묵이 흘렀다. 그는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수가 자기를 심하게 대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의지할 데가 없는 그 녀의 처지가 그녀를 자기보다도 더 강하게 만든 것 같았다. 그는 화제를 바꾸기 위해 말했다. "난 공부를 꽤 했지만, 일상적인 일에 관해선 상당히 무지하지. 알다시피 신학에 몰두해 있었으니까. 만일 네가 여기에 있지 않았다면 내가 지금쯤 뭘 하고 있었을 것 같아? 저녁 지도를 올리고 있었겠지. 너는 그런 일엔 마음 내켜하지 않겠지만." "그래요, 그럴 거예요. 언짢아하지 말아요. 난 안 좋아해요. 기도 같은 걸 하고 있으면 난 왠지 위선자 같은 생각이 들어요." "아무래도 기도를 같이 해주진 않을 것 같으니 나도 그런 제안을 하진 않겠어. 기억하고 있겠지만, 언젠가 목사가 돼보고 싶다고 말한적이 있었 지." "성직에 오르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그래." "그렇다면 아직도 그 희망을 버리진 않았나 보지요? 난 또 지금쯤은 벌 써 버린 걸로 알고 있었지요." "물론 안 버렸어. 동생이 크리스트민스터 식의 영국 국교회주의에 휩쓸 려 다닐 때 기도하는 것만은 나와 같으리라고 쉽게 생각했었는데. 그건 그 렇고 필로트슨 선생님은......" "전 크리스트민스터에 대해서는 조금도 경의를 표하고 싶지 않아요. 단 지 지적인 면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요." 수 브라이드헤드는 자못 진지하게 말했다. "아까 말했던 그 친구가 나한테서 그런 걸 앗아가 버렸지요. 그 친구만 큼 신앙심이 없으면서도 그 친구만큼 도덕적인 사람을 전 알지 못해요. 크 리스트민스터의 지성은 낡은 병에 억지로 넣은 새술과 같은 거지요. 크리 스트민스터의 중세주의는 반드시 버려졌어야 해요. 그렇지 않다간 크리스 트민스터 그 자체가 못 쓰게 돼버릴 테니까요. 하긴 사람이란 때때로 낡은 신앙의 전통에 남몰래 애착을 갖게 마련이지요. 아무렴 뚜렷한 어느 파의 사상가들에 의해 감동적이며 소박한 열성으로 보전되어 온 전통이니까요. 그러나 제가 제일 슬프거나 좋을 때 어떤 기분이 드는지 아세요? 이런 시 구와 같은 느낌이 들었지요. 아, 소름끼치게 창백해진 성자들의 영광이여, 교수형 당한 신들의 죽은 수족들이여! -스원번의 시에서 인용 "수, 그런 수릴 하다니, 결코 좋은 친구라고 할 수 없겠는걸!" "알았어요. 안 그럴 게요, 주드!" 그녀는 목이 메인 듯 격앙된 어조로 말하고 나서 얼굴을 돌렸다. "네가 거기에 가지 못해 분하기 하지만, 크리스트민스터는 영광스런 많 은 것들을 가졌다고 생각해." 그는 수로 하여금 더욱 울고 싶도록 비난해주고 싶다는 충동을 자제하면 서 온건하게 말했다. "거긴 무지한 곳이에요. 시내에 있는 사람들이나 직공들이나 취객들이나 빈민들을 제외하고는요." 수는 여전히 주드와는 다른 생각을 고수하면서 심술궂게 말했다. "그들만이 있는 그대로의 인생을 제대로 보고 있어요. 오빠는 몸소 그것 을 증명했지요. 수많은 대학들이 설립될 당시만 해도 크리스트민스터에서 는 오빠와 같은 사람을 받아들였답니다. 돈도, 기회도, 연고도 없이 오직 학문에 대한 열정만을 지니 사람들을 말이에요. 그러나 오빠는 네 팔을 흔 들면서 활보하는 백만장자의 자식들에 의해 보도 밖으로 밀려나고 만 거 죠." "어쨌든 대학이 수여하는 증서 같은 건 상관없어. 난 좀더 높은 것을 바 라고 있으니까." "그럼, 난 더욱 넓고 보다 진실된 것을 바라고 있어요." 그녀가 주장했다. "현재 크리스트민스터의 지성은 한 방향만을 쫓고 있어요. 그러니까 각 축을 벌이고 있는 두 마리의 숫사슴처럼 대학과 종교가 가만히 서서 보고 있는 중이지요." "필로트슨 선생님은......" "그곳은 물영숭배자와 유령을 보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지요!" 그가 필로트슨 선생에 대해 이야기하려 할 때마다 수는 말끝을 돌려버렸 다. 그는 필로트슨의 비호를 받는 사람으로서, 나아가서는 그의 약혼자로서 의 수의 생활에 관해 병적일 만큼 궁금했으나 그녀는 그 점에 관해 밝히려 들지 않았다. "과연 그렇군. 그런 말을 듣고 보니, 나도 역시 같은 패로군. 난 언제나 망령을 보게 될까봐 두려워." "그렇지만, 오빠는 좋은 분이에요!" 그녀가 중얼댔다. 그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는 아무 대답도 못했다. "오빠는 현재, '시사논설책자파'의 단계에 와 계시군요, 그렇지요?" 그녀가 덧붙여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경박 하게 말하곤 했는데 그것은 그녀의 상투수단이었다. "저, 제가 거기에 머물렀던 것은 언제쯤이었을까요? 그 해는 천 팔 백......"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는군, 수. 비꼬는 소리같이 들려. 그런데 한가지 네가 해주었으면 하는 것이 있는데, 해주겠어? 난 지금부터 성서를 좀 읽 고 기도를 할 거야. 그러니까 너는 여기에 있는 책 중에서 마음에 드는 책 을 골라 읽도록 해. 내게 등을 돌리고 앉아서 말이야. 아무래도 너는 나와 함께 기도하긴 싫을 테니까?" "오빠를 보고 있을 게요." "안돼. 놀려대지 말아요, 수." "네, 네. 오빠가 하라는 대로 할 게요. 귀찮게 하지 않을 게요, 주드." 마치 어린아이가 앞으로는 아주 얌전하게 굴겠다고 말하는 듯한 어조로 대답하고 나서 그녀는 그가 하라는 대로 등을 돌리고 앉았다. 주드가 사용 하고 있는 성서와는 다른 작은 책 한 권이 수 가까이에 놓여 있었다. 주드 가 묵상을 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그것을 집어들어서 페이지를 들추었다. 수는 기도를 마치고 자기에게 다가온 주드에게 명랑하게 말했다. "주드, 아주 새로운 신약성서를 만들어 드릴까요? 크리스트민스터에 있 을 때, 제가 제 자신을 위해 만들어본 것 같은 것을 말이에요." "그래, 만들어줘. 그런 건 어떻게 만들었지?" "낡은 성서를 고쳐서 만들었죠. 모든 <사도서한>이나 <복음서>를 각각 의 팜플렛으로 나누어 그것이 씌어진 연대순으로 재조정하고 <데살로니가 서>를 책 맨 머리에 내놓고, 그리고 다른 서들을 순서대로 두고 네 개의 <복음서>를 맨 끝으로 돌려버렸지요. 그러고 나서 장정을 하고 고치게 한 거예요. 내 대학 친구인 아무개는, 이름은 아무래도 상관 없지만, 그건 참 좋은 생각이라고 말했어요. 나중에 읽어보니까, 전에 신약을 읽었을 때보다 두 배나 더 재미있고, 두 배나 이해하기 쉬웠다는 거예요." "흠!" 주드는 신성모독을 느낀 기분이었다. 수가 <솔로몬의 아가>의 페이지를 응시한면서 말했다. "이건 얼마나 엄청난 문학상의 범죄겠어요! 각 장의 처음에 붙어 있는 개요 말이에요. 그런 놀란 표정 짓지 마세요. 누구도 장의 첫머리에서 영감 을 구하려 들지 않아요. 실제로 많은 신학자들은 첫머리를 경멸적으로 다 루고 있지요. 장로나 주교 24인도, 몇 사람이 모이든 숫자는 아무 상관 없 겠지만 심각해진 얼굴을 서로 맞대고서 이런 부질없는 것을 쓰고 있었다 니, 생각만 해도 아주 우스꽝스럽지요." 주드는 곤혹스러운 빛을 띠면서 중얼거렸다. "너는 참으로 볼테르(1694~1778, 종교적 회의론자인 프랑스의 작가)적인 것 같아!" "그래요? 그렇다면 난 아무말도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어느 누구도 성 서를 꾸며댈 권리는 없다는 사실은 말해야겠어요.! 그 위대하고 정열적인 노래에 담긴 황홀하고도 자연적이며 인간적인 사랑을 교회식의 추상 관념 으로 호도하려 드는 사기를 난 싫어하거든요!" 그녀의 말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아니 그에게 비난받은 데 대해 짜증 을 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눈은 눈물로 젖어 있었다. "진정으로 날 두둔해 주는 친구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바랬지요. 그러나 어느 누구 한 사람 나의 편이 되어 주지 않았어요!" "하지만, 귀여운 수. 난 너의 생각을 반대하고 있는 건 아니야." 그는 수의 손을 잡으며 그녀가 개인적인 감정을 단순한 토론에 끌어들인 데 대해서 깜짝 놀랐다. "아니에요, 반대하고 있어요. 오빠는 반대하고 있어요!" 그녀는 울먹이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얼굴을 돌렸다. "오빠는 교육대학의 그 패들을 두둔하고 있는 거예요. 적어도 그렇게 보 여요! 내가 주장하는 것은, '아, 여자 중 가장 어여쁜 자여, 그대의 사랑하 는 저는 어디로 갔는가' (<구약성서>, 아가, 6장 1절)와 같은 시구를, '여기 는 교회가 그 신앙을 고백케 하는 곳'이라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주 바보스럽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대로 생각하지! 동생은 아무거나 그런 식으로 해서 개인적 인 문제로 삼아버리는 게 탈이야! 그렇다면 나도, 건방지지만, 아까 그 말 을 응용해 보고 싶은 생각이 얼마든지 들게 된단 말이오. 나에겐 오직 너 만이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고 말할 수 있어!" "그러나 지금 와서 그런 말을 해도 아무 소용 없어요!" 수의 목소리는 엄격했지만 부드러운 어조로 변했다.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마치 술집에서의 허물없는 옛 친구나 되는 것처 럼 손을 마주잡았다. 그리고 주드는 이러한 가설적인 주제로 설전을 벌이 는 것이 쑥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수는 성서와 같은 고서 속에 씌어져 있는 일로 소리를 높이는 우둔함을 알게 되었다. "오빠의 믿음을 방해하지 않겠어요. 정말로!" 그녀가 달래듯 말을 이었다. 지금은 오히려 주드 쪽의 신경이 곤두서 있 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전 누군가를 고상한 목적을 가진 사람으로 이끌고 싶었어요. 그리고 오빠를 만났고 오빠가 내 친구가 되고 싶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난...... 죄다 털어놓을까요? 오빠야말로 그런 남자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오빠가 너무 전통을 따르니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던 거예요." "그래, 사람은 무엇인가를 신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모든 문제 를 기하학에서처럼 증명한 뒤에 믿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지. 난 그리스도 교를 신봉하고 있어." "그렇지만 세상엔 그리스도교보다도 더 나쁜 것을 믿는 경우도 있어요." "그럴 수도 있겠지. 아마 나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을지 모르니까!" 그는 아라벨라가 생각났다. "그게 무어냐고 묻지는 않겠어요. 서로에게 곤란해져서 서로를 괴롭히진 말아야지요." 그녀는 신뢰한다는 듯 그를 올려보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주드의 가슴을 파고드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난 늘 동생을 사랑해!" 주드가 말했다. "저도요, 오빠를 사랑해요! 오빠는 헌신적인 분이니까요, 그리고 결점투 성이이고 귀찮게 굴고 보잘것없는 이 수를 용서해 주실 테니까!" 수가 보여준 남녀 양성적인 그 부드러움은 너무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데가 있어서 주드는 시선을 돌렸다. 그 가엾은 청년에게 실연의 상처 를 안겨준 것도 바로 이것이 아니었던가? 자기도 그 두 가지 양성이 춤을 추는 경우에 해당하는 두 번째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누가 뭐래도, 수는 너무 사랑스러웠다. 그녀가 그토록 쉽사리 상대 남성을 무시할 수가 있는 것처럼 만일 수가 여성이라는 의식만을 주드가 극복해낼 수만 있다 면, 그 얼마나 돈독한 동지가 되어 줄 것인가. 상상의 문제에 대해서 의견 의 차이를 보이는 두 사람은 일상적인 인간의 경험이란 점에서는 오히려 그들을 더 가깝게 끌고 갔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여태까지 주드가 만났던 그 어떤 여자보다도 그에게는 가까웠다. 세월이나, 신조나 그리고 부재도 그를 그녀에게서 떼어놓을 수 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 스도교에 대해서 갖고 있는 그녀의 불신은 그를 다시금 슬프게 했다. 한동안 두 사람은 앉아 있었지만 곧 수는 잠에 빠져들었다. 그도 의자에 기댄 채로 선잠을 잤으나, 깜빡 잠이 깰 적마다 난로가에 걸쳐놓은 수의 옷을 뒤집어 놓고 불을 지폈다. 6시경에 그는 완전히 잠에서 깨어났고 촛 불을 켜서 살펴보니, 옷은 벌써 말라 있었다. 수가 앉아 있는 의자는 그의 의자보다 훨씬 아늑했기 때문에 그녀는 주드의 외투를 두른 채 아직 잠에 서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금방 구운 빵처럼 따뜻해 보였고, 그리고 가니메데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의 술시중을 든 트로이의 미소년) 같은 미소년의 얼굴이었다. 그는 옷을 그녀의 옆에 갖다놓고 어깨 를 흔들어 깨운 다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3-9 다음날 아침 9시와 9시 반 사이에 두 사람은 크리스트민스터로의 귀로에 올랐는데, 그들이 탄 3등칸의 칸막이에는 승객이 한 사람도 없었다. 기차 시간에 맞추려고 서둘러 몸치장을 했던 탓인지 아라벨라는 그 얼굴이라고 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두 사람이 크리스트민스터의 정거장을 나왔을 때, 그녀는 술집에서 일해야 할 시간까지 아직 30분 정도 여유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시내 가장자리까지 걸어 나왔다. 이곳은 알 프레드스턴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주드는 멀리까지 이어져 나간 간선도로 를 바라보았다. "아...... 내가 생각해도 너무 의지박약해, 나는!" 그가 드디어 중얼거렸다. "뭐라고요?" 아라벨라가 물었다. "바로 이 길이 옛날 굉장한 꿈을 풀고서 크리스트민스터로 들어왔던 길 이오." "이 도로에 무슨 사연이 있건간에, 이젠 시간이 없어요. 난 2시까진 술집 에 가 있어야 하니까요. 그리고 아까도 말한 것처럼 당신과 함께 대고모의 병문안을 가기 위해 하루의 휴가를 얻는 일은 하지 않겠어요. 그럼 여기에 서 헤어지는 편이 낫겠어요. 중앙로를 당신하고 같이 걷는 건 난 싫어요. 아직 어떠한 결정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니까요." "좋아요. 그러나 오늘 일어났을 때, 나하고 헤어지기 전에 하고 싶은 말 이 있다고 했잖았소?" "그래요. 두 가진데, 특히 한 가지는 얘기하고 싶어요. 그렇지만 당신이 이것을 비밀로 해두지 않을 거예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털어놓겠지만요. 당신이 날 정직한 여자로 알아줬으면 해요. 내가 간밤에 운을 띄웠던 건데. 저어, 시드니 호텔 지배인에 관한 말이에요." 아라벨라는 다소 서둘러 말했다. "비밀을 지켜주시겠어요?" "좋아, 약속하오!" 주드는 참을성 없이 말했다. "당신의 비밀 같은 건 폭로하고 싶지 않소." "내가 그 사람과 만나 산보할 때마다, 그 사람은 나의 용모가 맘에 든다 면서 결혼해 달라고 조르더군요. 난 잉글랜드엔 두 번 다신 돌아오고 싶은 생각이 없었어요. 더욱이 아버지 집을 뛰쳐나온 후로는 집도 없이 오스트 레일리아에 홀로 남겨진 상태였고 해서, 마침내 승낙했죠. 그리고 결혼했던 거예요." "뭐...... 그와 결혼했다구?" "그래요." "정식으로, 법적 수속을 밟고...... 교회에서 말이요?" "그래요. 내가 이리로 오기 직전까지 그와 함께 생활했었지요. 곰곰이 생 각해 보니 어리석은 짓이었어요. 그렇지만 그랬었어요. 자, 이걸로 얘긴 끈 이에요. 날 비난하지 말아요! 그는 영국으로 날 찾아올 거라고 말했죠. 가 엾은 노인! 그렇지만 그 양반이 돌아와 보았댔자, 날 좀처럼 찾을 것 같진 않군요." 주드는 새파랗게 질려서 옴짝달싹 못한 채로 서 있었다. "도대체, 왜 간밤엔 털어놓질 않았지?" 그가 말했다. "사실은 말하려고 했어요...... 이제 나하고 화해 안할 생각인가요?" "오라, 술집 단골들에게 한 남편 얘기는 그 사람을 말했던 거군!" "물론이죠...... 이봐요, 그런 일로 해서 소란 피우지 말아요!" "이젠 더 할 말이 없소!" 주드는 대꾸했다. "당신이 고백한 그 범죄에 대해 난 아무 할 말이 없소!" "범죄라뇨? 웃기시네요! 그런 건 당신 쪽에서 보면 흔히 있는 일이지요. 누구나 다들 하는 짓 아닌가요! 좋아요, 당신이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난 그 사람한테로 돌아가겠어요. 날 죽고 못살도록 좋아했고, 우린 오스트레일 리아에서 여느 부부 못지 않게 고상하게 살았어요! 당신이 어디에 사는지, 그런 건 아랑곳도 하지 않았어요." "난 지금 당신을 비난하려고 하는 게 아니오. 할 말은 많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대체 날 보고 어떻게 해달라는 거요?" "아무것도 해주실 필요는 없어요. 또 한 가지 얘기할 것이 있는데, 현재 로서는 서로가 얼굴을 맞대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해요! 당신한테서 들은 당신의 사정에 대해 좀더 생각해 보고 연락드릴게요." 이렇게 두 사람은 헤어졌다. 아라벨라가 술집이 있는 호텔 쪽으로 사라 져가는 것을 지켜보고 나서 주드는 곧 근처의 역으로 들어갔다. 알프레드 스턴으로 돌아가는 기차가 출발하기까지에는 아직도 45분의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주드는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내디뎠고, 그러다 보니 도 심의 십자로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전에도 여러 차례 그랬던 것처럼, 이 십자로에 서서 중심가를 바라보았다. 이 중심가에는 대학들이 줄지어 서 있었는데, 오직 제노바의 궁전가와 같이 유럽 대륙식의 길게 내다보이는 경치를 제외한다면 비견될 만한 것이라고는 없는 경관이었다. 연속되는 빌 딩의 선들은 건축설계도처럼 아침의 대기속에서 뚜렷이 부각되어 있었다. 그러나 주드는 결코 이러한 조망을 감상하거나 비판하지는 않았다. 간밤 내내 아라벨라의 접근에 대해서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웠던 의식, 그녀와 다시 맺어진 경험에 대한 타락된 감상, 새벽녘에 그녀가 잠들었을 때의 자 태 같은 것 등이 되살아남으로써 거리의 조망은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 다.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는 동침한 남녀로서 가질 수 있는 저주받은 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만약 그가 아라벨라에 대해 원한을 느낄 수만 있었어도 이만큼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비난하면서도 한편 으로는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 주드는 방향을 바꾸어 왔던 길로 발길을 돌렸다. 다시 역 쪽으로 가까이 가고 있을 때 주드는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 움찔했다. 이름 을 부르는 소리에 놀란 것이었다. 그의 눈앞에 환영처럼 서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수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대경실색했다. 그녀의 얼굴엔 꿈이 라도 꾸듯 불길함과 수심이 역력했고, 작은 입가는 신경질적으로 떨리고 있었으며, 긴장한 눈초리는 힐난하는 듯했다. "아, 주드, 반가워요. 이렇게 만나게 돼서요!" 그녀는 흐느끼듯 급하고 고르지 못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고 나서 결혼 한 뒤 처음으로 마주쳤다는 그의 생각을 알아차리고는 얼굴을 붉혔다. 두 사람은 격앙된 감정을 감추려고 서로 시선을 피한 채 말없이 손을 잡 았다. 그리고 잠시 동안 나란히 걸었고, 이윽고 수가 걱정하는 듯한 표정으 로 그를 응시했다. "오빠의 편지대로 전 어젯밤 알프레드스턴 역에 도착했어요. 그런데 아 무도 마중을 나와 있지 않더군요! 혼자서 메리그린으로 갔지요. 대고모님께 선 조금 나아졌어요. 저는 대고모님과 자지 않고 기다렸었는데, 오빠는 밤 새 오지 않았어요. 전 몹시 불안했어요. 아마도 옛날의 그리운 도시로 오랜 만에 나가셔서, 나도 마음이 산만해져서, 그래서 언젠가 대학에 들어가려다 가 못 들어가 실망했단 때처럼 침통한 기분을 털어버릴 양으로 딴 짓을 하 고 있지나 않을까 하구요. 그리고 두 번 다시는 그런 짓은 하지 않겠다고 나한테 했던 언약도 잊지나 않았는지, 그런 생각을 했지요. 꼭 그렇게 되신 줄로만 알았어요. 그러니까 절 마중나오지 않은 거라구요!" "그래서, 여기까지 나왔군. 나를 찾아서 구해 주려고, 마치 천사처럼 말 이지!" "아침 기차로 와서 오빠를 찾아내려고 애쓴 거예요, 행여나...... 행여나 해가면서요." "난 너와의 약속을 한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어! 어제와 같은 잘못은 두 번 다신 안할 거야. 정말! 더 나은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난 그 런 짓을 하고 있진 않았어. 그 생각만 해도 신물이 날 지경이야." "오빠의 외박이 그러한 일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걸 알게 되니 기쁘군 요. 그렇지만." 수는 사뭇 뾰로통한 어조로 말했다. "간밤엔 돌아오지 않았고, 그리고 마중을 나오지도 않았어요. 편지 쓰신 대로 말예요!" "못 가서 미안해. 9시에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겼어. 그런데 너무 늦어져 타야 할 기차도 못 탔고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어." 그는 그리운 마음으로 연인의 얼굴을 보면서, 그녀가 일찍이 볼 수 없었 던 가장 상냥스럽고 사심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동지, 그의 선명한 공상 속 에서 살고 있는 동지, 그리하여 혼의 떨림이 손발에까지 꿰뚫어보일 만큼 신선한 환상 속에 살고 있는 동지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자 그는 아라벨라 와 동행하며 시간을 보냈던 속된 자신의 근성이 마음속 깊이 부끄러워졌 다. 그의 인생에서 최근에 일어났던 일들을 여느 남성의 아내에게 억지로 강요한다는 것은 너무나 조잡하고 부도덕한 일이었다. 그리고 수는 이미 필로트슨의 사람이었다. "나와 함께 돌아가겠어?" 그가 말했다. "마침 기차가 있어. 대고모님 상태는 어떤 건지...... 그럼, 수. 전적으로 나 때문에 와준 거로군. 어지간히 일찍 일어났어야 했을 텐데, 가엾게도!" "그래요. 혼자서 간호하면서 앉아 있다 보니 오빠의 일이 걱정이 돼 견 딜 수가 있어야지요. 먼동이 틀 무렵 출발해 여기로 온 거예요. 제발, 이런 식의 쓸데없는 도덕심으로 두 번 다시 날 놀라게 하지 마세요." 수가 그의 쓸데없는 도덕심 때문에 놀랬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 다. 가차에 오르고 나서야 겨우 그는 수의 손을 놓았다. 이 기차는 조금 전 에 아라벨라와 나란히 내렸던 객차인 듯했다. 이제 그 기차에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있었고 주드는 수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섬세한 윤 곽과, 조그맣고 단단하며 사과처럼 부푼 육체의 선을 그는 바라보았다. 아 라벨라의 풍만한 육체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수는 주드가 자신을 바 라보고 있음을 알면서도 전방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과 마주치면 무엇인가 귀찮은 토론이라도 시작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 듯했다. "수, 너는 이미 결혼을 했어, 나처럼. 그 일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 을 만큼 우린 급히 서둘렀던 것 같아!" "뭐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니까요." 그녀가 서둘러 받았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내가 바라는 것은......" "주드, 저에 관한 말은 하지 마세요. 그러지 않았으면 해요!" 그녀는 간청하듯 말했다. "곤란하니까요. 이렇게 말해서 미안해요........ 간밤엔 어디에 계셨어요?" 그녀는 화제를 바꾸기 위해서 자못 순진하게 질문을 했다. 그도 그것을 알아채고, 그저 '여관에서' 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뜻밖의 인물과 만나게 된 것을 그녀에게 털어놓으면 얼마나 마음에 안도감이 들까하는 느낌도 들었 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아라벨라가 결혼을 했었다는 사실 때문에 주드의 마음은 흔들렸고, 그런 부질없는 이야기를 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남의 부인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두 사람은 어색하게 이야기를 지속했고 그러는 동안에 알프레드스턴에 도착했다. 수가 이젠 옛날의 그녀가 아니라 '필로트슨'으로 호칭된다는 사 실은 개인으로서 그녀와 친숙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그의 욕구를 무디 게 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수란 사람 그 자체는 변하지 않은 것만 같았다. 메리그린 마을로 가자면, 기차에서 내려 5마일 정도의 여정이 아직도 남 아 있었다. 그 길은 거의 오르막길로 되어 있어서, 걸어가든 마차를 타고 가든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주드는 이 길을 아라벨라와 걸어본 적은 있었 지만 수와 나란히 걸어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지금 수를 길동무로 삼고 걸어가는 것은 밝은 등불을 가지고서 걸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불 은 전날밤의 어두운 연상을 일시적으로나마 꺼주는 것 같기도 했다. 수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그녀에 관해 얘기 하지 않으려고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주드는 깨달았다. 그래서 마침내 그 는 남편은 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네, 그래요." 수는 말했다. "온종일 학교에 박혀 있지 않으면 안돼요. 그렇지 않으면 함께 왔을 텐 데요. 친절한 분이시구, 자신의 원칙에 어긋나면서까지 나를 위해서라면 하 루쯤 학교도 쉴 수 있다고 말할 정도예요. 원래 학생들에게 임시 휴가를 주는 것도 강력하게 반대하던 분이신데. 다만 내가 그렇게 못하게 했어요. 나 혼자서 오는 게 좋을 것 같았고, 더욱이 드루실라 대고모님은 너무 변 덕이 많으셔서 초면에 남이나 다름없는 그분이 오게 되면 서로 어색하게 될 것만 같아서요. 대고모님은 또 문병객을 거의 못 알아보실 정도니까, 그 분과 함께 가자고 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생각해요." 필로트슨에 대한 칭찬의 말을 들으면서 주드는 시무룩하게 걸어갔다. "동생은 아무 일에나 필로트슨 선생님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구 나. 당연히 그렇게 해야만 하겠지만." 그는 말했다. "물론이지요." "행복한 아내가 돼야 해." "물론 전 행복해요." "아직은 새색시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은데, 내가 동생을 그 사람에게 인도한 지 며칠도 안됐으니까 말이야!" "네, 알아요! 알고 있어요!" <주부행동 지침서>라는 책에서 그대로 따온 것같이 생각되는 판에 박은 듯한, 엄격하고 적절하며 생기없는 말을 단정적으로 부정하는 듯한 표정이 수의 얼굴에 나타났다. 주드는 수의 목소리에서 나오는 모든 떨림의 성질 을 잘 알고 있었고, 그녀의 정신상태의 징후를 모두 읽을 수 있었다. 그래 서 결혼한 지 한 달도 채 안 되는데도 그녀가 벌써 행복하지 않음을 알았 다. 그러나 수가 신혼생활에서 빠져나와 별로 친하지도 않은 대고모의 임 종을 보러 왔다는 사실만으로 이와 같이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본래 수는 그러한 짓을 할 수 있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하여튼 난 늘 네가 행복하길 바래, 필로트슨 부인." 그녀는 비난하는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냐, 너는 필로트슨 사모님이 아니야." 주드가 중얼거렸다. "너는 친애하는, 자유로운 수 브라이드헤드지. 그걸 자기 자신이 모르고 있을 뿐이야. 주부라는 신분이 아직 너를 망가뜨리진 않았어. 그 큰 위장도 동생을 개성 없는 미립자로 소화시키진 못한 거야." 수는 감정이 상한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가 보기엔 남편이라는 신분도 아직 오빠를 부숴놓진 못했어요!" "아냐, 난 완전히 부숴져버렸지!" 그는 자못 슬프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두 사람은 '갈색의 집'과 메리그린 마을의 중간쯤 되는 지점에 있는 전나 무 밑의 쓸쓸한 오두막집에까지 이르렀다. 그곳은 주드가 아라벨라와의 결 혼생활을 했고 또 싸워서 헤어진 곳이기도 했다. 그는 그 집을 뒤돌아보았 다. 이제는 초라한 한 가족이 살고 있었다. 그는 수에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내하고 내가 살았던 곳이 저기 저 집이지. 난 저 집에서 아내를 맞아 들였었지." 수도 그 오두막집을 보았다. "저 집과 오빠와의 관계는 마치 셰스톤의 학교와 나와의 관계와 다르지 않군요." "그래. 그러나 난 저기서 동생처럼 행복하지 못했어." 수는 무언으로 항변하듯 입술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들은 잠시 걸었는데 이윽고 수는 주드의 반응을 알기 위해서 힐끗 그를 쳐다보았다. 주드는 온 화하게 말했다. "물론 내가 동생의 행복에 관해 지나치게 말했는지도 모르겠어. 그건 아 무도 알 수 없는 일이지." "주드, 잠깐만이라도 그런 생각하지 말아요. 아무리 날 골탕먹이려고 해 도, 아직 그분은 남편으로서 친절하게 저를 대해 주고 있어요. 저에게 완전 한 자유를 주고 있죠. 대개의 나이 많은 남편들은 그렇게 해주지 않는다고 들 하지만........ 그분의 나이가 너무 많다고 해서 제가 불행할 거라고 생각 한다면 그것은 오빠가 잘못 생각하는 거예요." "난 그분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야. 동생을 생각해 그러는 거지." "그럼 제게 괴로운 말은 하지 마셔야죠." "그래, 그렇게 하지."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지만, 필로트슨을 남편으로 삼고 있으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자기가 해서는 안될 일을 수가 했음을 그는 알아챘다. 두 사람은 분지의 들판으로 들어섰다. 옛날 주드가 농장주에게 매를 맞 았던 바로 그 장소였다. 언덕길을 올라 대고모님의 집이 가까웠을 때 그들 은 문간에 서 있는 에들린 미망인을 보았다. 두 사람의 자태를 보자 그녀 는 원망스러운 듯 양손을 들어올리면서 외쳤다. "대고모님께선 아래층에 계셔요. 거짓말 같은 말이지만, 벌떡 일어나 앉 으시더니 아무리 뭐라 해도 안 돌아오셔요. 어떻게 해야 할지 나도 모르겠 어요!" 집안으로 들어가 보니, 노파는 과연 담요에 휘감긴 채로 난로 옆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세바스찬의 '나사로'(예수가 죽음에서 살린 남자) 같은 얼굴 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대고모가 공허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 너희들이 날 놀라게 하는구나! 난 이제 남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그 런 2층에 틀어박혀 있진 않겠다! 너희들 반쪽 만큼도 못한 자들이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는 데는 더 이상 못 참겠구나! 아, 너도 결혼한 것을 후회하 게 될 거구, 주드도 후회하고 있다만." 그녀는 수 쪽을 향해 덧붙여 말했다. "폴리 집안 사람들은 모두 다 그렇단다. 폴리 집안이 아니더라도 대개가 그렇겠지만, 나같이 독신으로 있었으면 좋을 뻔했는데, 바보 같으니! 남자 들도 많을 텐데 하필이면 필로트슨 교장 선생이라니! 어째서 그 사람하고 결혼한 거지?" "대고모님, 대체 무엇이 여자들을 결혼하게 하는 거죠?" "아! 넌 그 사람을 사랑했단 말이지." "그렇게 확실히는 말하지 않겠어요." "지금도 좋으냐?" "그런 거 묻지 말아주세요, 대고모님." "난 그 사람을 잘 기억하고 있단다. 꽤 교양 있고 훌륭한 인물이지. 그러 나, 맙소사! 네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진 않다만...... 감정이 섬세한 여자는 도저히 견뎌내지 못하는 남자들이 여기저기에 많이 있는 법이란다. 말을 하자면 그 사람도 네게 그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하긴 네가 나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내 생각은 그랬었다!" 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갔다. 주드가 뒤를 따라 나가 보았더니 그녀가 헛간에서 울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봐, 울지 마!" 주드는 당황하며 말했다. "악의가 있는 분은 아니야. 지금은 워낙 까다로워지고 이상해지신 건 사 실이지만." "아, 아니에요. 그것 때문이 아니에요." 수는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대고모님께서 무뚝뚝하셔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뭐요?" "대고모님 말씀은 사실이에요. 그건 사실이라니까요." "뭐, 뭐야?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말이야?" 주드가 물었다. "꼭 그런 건 아니고요." 수는 황급히 말했다. "전 역시, 결혼하지 말았어야만 했어요!" 수가 과연 진심에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 그는 처음에 의아하게 생각 했다. 두 사람은 방으로 돌아왔고, 그리고 화제도 부드러워졌다. 대고모는 자신과 같은 주름투성이의 병든 노인을 일부러 찾아준 신혼의 젊은 여성은 그리 흔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수를 상냥하게 달래주었다. 그날 오후 수는 떠날 준비를 했고 주드는 이웃 사람을 사서 알프레드스 턴까지 마차로 데려다 주도록 했다. "너만 괜찮다면 역까지 함께 가고 싶은데." 그가 말했다. 수는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웃 남자가 이륜마차를 몰고 왔다. 그 리고 수가 거부하는 듯한 눈짓을 보였기 때문에 주드는 지나칠 정도로 조 심스럽게 그녀를 도와 태워주었다. "내가 멜체스터로 돌아가게 되면....... 언제든 동생을 찾아가 봐도 되겠 지?" 그는 다소 심기가 상해 물었다. 수는 몸을 구부려 온건하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아직은 찾아오면 곤란해요. 오빠의 기분이 그리 좋아보이진 않으니까요." "그럼, 좋아. 안녕!" 주드가 말했다. "안녕!" 수는 손을 흔들고 떠나버렸다. "너의 말이 옳아! 가지 않겠어." 주드는 중얼거렸다. 그는 그날밤과 그 다음날도, 그녀를 만나보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기 위 해 온갖 수단을 다 써가며 보냈다. 그는 수를 사랑하고 싶은 열정을 식히 느라 거의 굶고 지내다시피 했다. 그는 수양을 쌓기 위해 여러 가지 설교 서를 읽었고, 제2세기의 금욕주의자들을 다룬 교회사 중의 장귀도 찾아보 았다. 그가 메리그린에서 멜체스터로 돌아오기 전에, 아라벨라한테서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봉투를 보자, 아라벨라와 하룻밤의 정을 맺었던 쪽이 수에 대한 애착보다도 훨씬 강한 자기 저주의 감정이 되어 되살아났다. 편지에 는 크리스트민스터국의 소인이 아니라 런던의 소인이 찍혀 있었다. 아라벨 라는 편지에 쓰길, 그날 아침 크리스트민스터에서 그들이 헤어진 뒤 2, 3일 쯤 지나 오스트레일리아의 그 남자에게서 애정어린 편지가 와 그녀는 깜짝 놀랐다고 했다. 그는 그녀를 찾으러 멀리 영국까지 와 람베스에서 주점 하 나를 인수하게 되었는데, 이곳에 살면서 함께 장사하기를 원한다는 것이었 다. 그곳은 인구도 많고 부자 동네인데다가 애주가들도 많아서 사업이 번 창할 거라고 했다. 벌써 매월 2백 파운드의 수입을 올리고 있는데 수입은 앞으로도 두 배는 더 늘어날 것 같다고 했다. 그 남자는 아라벨라를 아직도 몹시 사랑하고 있으니, 어디서 살고 있는 지 거처를 알려달라고 부탁해 왔다는 것이다. 원래 그들이 헤어진 것은 사 소한 말다툼 때문인데다, 크리스트민스터에서의 거처도 일시적인 것이고 해서 그녀는 그 남자와 다시 합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아라벨라는 곧 그 남자와 정식으로 결혼할 것이고, 첫 번째 남편인 주드보다도 오히려 그 남 자가 자신의 남편이라고 스스로도 느끼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작별을 고하면서, 그에게 아무런 악의도 품고 있지 않다고 썼다. 아울러 주 드가 약한 여자인 자신을 공격하거나 불리한 밀고를 해서 파멸 속으로 빠 뜨리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을 믿는다고 했다. 이제 겨우 처지를 개선 하고, 품위 있는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기회가 자신에게 찾아왔다고 그녀 는 적고 있었다. 3-10 주드는 멜체스터로 돌아왔다. 이곳은 수가 살고 있는 곳으로부터 불과 12마일 반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는 이런 연유로 더 남쪽으로는 내려 가지 않았다. 그러나 크리스트민스터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슬픈 곳이 되 어 버렸다면, 셰스톤에서 가까운 멜체스터는 백병전의 접전에서 연적을 쓰 러뜨릴 영광을 그에게 부여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위험이 있었다. 초기 그 리스도교 계의 성직자나 처녀 교단의 단원들은 유혹으로부터의 비열한 도 피를 경멸해 일부러 그러한 접전을 감수했으며, 한 방에 기거하면서도 서 로 죄를 범하지 않았다. 주드는 그러나 여기에서, '모욕받은 본능이 때로는 자신의 권능을 주장할 때도 있다'는 역사가(에드워드 기본을 가리킴)의 촌 철살인의 경구를 상기해 보지는 않았다. 그는 지금 열에 들뜬 절망적인 태도로 승직을 얻기 위한 면학으로 되돌 아왔다.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데 너무 게을렀고 가르침의 대의에 대한 충절도 최근 더욱 희박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수에 대한 열정은 그의 영혼을 괴롭혔다. 그러나 아라벨라를 법적으로 포기한다는 것도 본능 적으로 수에 대한 열정 못지 않게 나쁜 것 같이 생각되었다. 하기야 그때 의 아라벨라는 시드니에서 결혼했던 남편에 관한 일을 말하지 않은 상태였 으나 말을 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술로써 현실도피를 하고 싶은 욕구를 억눌렀다. 사실 그는 술이 좋 아서 마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단지 심적으로 견디기 힘든 비통한 사태 에서 벗어나 보기 위해 마셨다. 그는 자신이 볼 때 훌륭한 목사가 되기에 는 너무 다정다감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낙심해 버렸다. 그가 바랄 수 있는 최상의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정신과 육체의 끊임없는 투쟁 가운데 언제나 육체가 승리하지 않는 것이었다. 신학공부에 도움이 될까 해서 그는 취미삼아 교회 음악과 화성학을 몸에 붙이게 된 결과, 상당히 정확하게 음보를 따라 3부나 4부의 합창에 참가할 수 있는 기술을 익히게 되었다. 멜체스터에서 1, 2마일쯤 떨어진 곳에 복원 된 마을 교회가 있었다. 여기에 주드는 새로운 기둥과 기둥머리를 세워주 러 간 일이 있었다. 그런 연유로 오르간 연주자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고, 결국 그는 베이스를 맡아 성가대에도 참가하게 되었다. 이 교구로 그는 일요일마다 두 번씩 걸어갔다. 어떤 때는 주일에도 가는 일이 있었다. 부활절이 가까워진 무렵의 어느날 밤 연습차 성가대가 소집 됐을 때, 웨섹스 태생의 작곡가가 작곡했다는 새로운 찬미가가 나오게 되 어 성가대는 다음 주일의 합창을 위해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이 곡은 이상 하리만큼 감상적인 데가 있는 작품이었다. 되풀이 해 가면서 모두 부르고 났을 때, 그 하모니가 주드의 마음속 깊이 스며들어와 그는 너무나 감동스 러웠다. 곡의 연습이 끝나자 그는 오르간 연주자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악보는 원본으로서 '십자가 밑에서'라는 찬미가의 제목과 함께 작곡가의 이 름이 씌어져 있었다. "그래요." 오르간 연주자가 말했다. "이 지방 사람이지요. 이곳과 크리스트민스터의 중간쯤에 있는 케넷브리 지에 사는 전문 음악가지요. 목사님이 아시는 분인데, 크리스트민스터의 전 통 속에서 훈련받고 교육받은 사람으로 그것이 이 곡에도 잘 나타나 있지 요. 케넷브리지의 큰 교회에서 연주도 하고 흰 옷을 입은 성가대도 지휘하 고 계신대요. 멜체스터에도 가끔 온답니다. 이곳의 대성당 오르간 연주자의 자리가 비어 있었을 때, 후임자가 되려고 연습하신 적도 있었지요. 이번 부 활절에는 이 찬미가가 도처에서 유행하고 있다고들 해요." 그는 귀로에 이 곡을 콧노래로 불러보았고 작곡가와 그가 왜 이런 노래 를 만들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걸었다. 그 얼마나 동정심이 많은 인 물인가 싶었다. 그는 수나 아라벨라의 일로 인해 고뇌를 겪고 있었기 때문 에 더욱 이 음악가를 알고 싶어졌다. "그러면 나의 이 곤경도 이해해 줄 수 있을 거야." 주드는 감상에 사로잡혀 말했다. 만일 이 세상에서 시원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벗을 고를 수 있다면, 이 작곡가가 그일 것이다. 이 사람은 틀림없이 괴로움도 겪고 동경도 해보았을 것이다. 음악가를 만나러 갈 만한 여유는 시간상으로나 금전상으로나 없었지만, 주드 폴리는 원래 어린아이 같은 데가 있어서 다음 일요일엔 어떤 일이 있 더라도 케넷브리지로 가보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당일이 되자, 그는 아침 일찍 출발했다. 그 도시로 가자면 구불구불한 철도로 가는 길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꼭 점심때쯤해서 그곳에 가 닿았으며 닿자마자 그는 다리를 건너 이상하게 생긴 오래된 도시로 들어서서 작곡가의 집을 물어보았다. 조금 더 가면 빨간 벽돌집이 있는데 바로 그곳이 그 작곡가의 집이라고 길을 가던 어떤 사람이 가르쳐 주었다. 더욱이 그 작곡가가 이 거리를 따라 걸어간 지는 5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어느 쪽으로요?" 주드는 지체없이 물었다. "교회 있는 데서 똑바른 방향으로요." 주드는 허겁지겁 그의 뒤를 쫓았다. 이윽고 검고 긴 상의에 테가 늘어진 검은 펠트 모자를 쓴 사람이 멀지 않은 전방에서 걸어가는 게 보였다. 그 래서 그는 더욱 넓게 보폭을 떼어 놓으면서 뒤를 쫓아갔다. "굶주린 영혼이 한 충만한 영혼을 좇는구나! 어떻게 해서든 저분에게 말 을 건네야겠다!"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주드가 따라잡기 전에 음악가는 집안으로 들어가버렸기 때문에 지금이 방문하기엔 적절한 시간인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예의에 맞건 않건 지금 방문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게다가 그의 방문을 더 늦추기에는 돌아갈 길이 너무 멀었다. 아마도 이분은 비할 데 없이 훌 륭한 조언자가 되어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상의 정도가 못 되는 정열이 종교를 위해 제공된 입구를 통해 그의 가슴에 교활하게 파고 들고 있는 이런 경우에는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주드는 벨을 눌렀다. 그는 안으로 안내되었다. 음악가는 곧 나왔다. 그는 고상한 복장을 하고 친절한 표정과 솔직한 태 도로 상냥스럽게 주드를 맞아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드는 자기의 용 무를 설명하기가 어쩐지 어색하게 여겨졌다. "저는 멜체스터 근처에 있는 작은 교회의 성가대에서 노래부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주드가 말했다. "금주에 '십자가 밑에서'를 연습했는데, 실례지만 선생님께서 작곡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내가 했소. 1년 전쯤에." "저는 이 곡이 좋아서요. 이런 아름다운 곡은 처음 듣습니다!" "아, 그래요. 다른 사람들도 그런 말들을 하더군요. 그런데, 이걸 출판만 할 수 있다면 돈벌이가 좋을 텐데요. 함께 묶어서 내고 싶은 곡들도 있어 요. 아직 어느 한 곡도 5파운드 이상을 벌어 보지 못했어요. 요즘의 출판업 자들은....... 나같이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한테서 악보원고의 청서대도 채 못되는 돈으로 판권을 빼앗아가곤 하니까요. 지금 말한 곡은 이 근방의 여러 친구들과 멜체스터의 친지에게 빌려준 것입니다. 그래서 노래로 불려지게 됐죠. 그러나 음악이란 별로 의지할 게 못되는 가엾은 단 장 같은 것이어서, 난 깨끗이 그만 둘까 하지요. 선생 같은 양반도 돈을 벌 고 싶거들랑 장사꾼이 되는 게 상책일 거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포 도주상인이지요. 이것은 아직 배달은 안했지만, 지금부터 내보내려는 상품 목록이오. 한 장 받아보시지요." 그는 빨간 선으로 가장자리를 장식해서 꾸민 소책자 모양의 상품광고목 록을 주드에게 넘겨주었다. 펼쳐보니 여러 가지 클라레 포도주, 샴페인, 포 트 와인, 셰리 포도주 등과 기타 여러 종류의 포도주가 열거되어 있었다. 이 사람은 이런 상품으로 새사업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영혼의 음악을 전 달하는 사람이 바로 이런 인물이었다니 하는 생각이 들자 주드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신뢰감을 갖고 자신의 고뇌를 고백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대화는 조금 더 계속되었다. 그러나 부자연스럽기 그지 없었 다. 왜냐하면 이 음악가는 주드가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태도 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주드의 풍채나 언어 사용에 현 혹되어 신분이나 직업을 과대평가한 것 같았다. 주드는 그 음악가에게 이 토록 숭고한 작곡을 한 것에 대해 축하한다는 말을 더듬거리며 하고 나서 는 서둘러 작별인사를 했다. 으스스한 봄날씨에 불기운조차 없어 더욱 썰렁한 객실에 몸을 싣고 느린 기치로 돌아오는 도중 내내, 그는 자신이 이러한 바보스런 여행을 한 데 대해서 낙심했다. 그러나 멜체스터의 하숙집에 도착하니 한 통의 편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에 집을 나간 직후 온 편지였다. 그것은 수가 보내온, 회한이 담긴 짤막한 편지였다. 그녀는 자신을 만나러 오지 말라고 말한 것에 대해 깊이 뉘우치고 있으며 그러한 자신의 인습적 행동에 대해 경멸하고 있다고 썼다. 아울러 꼭 오늘인 일요일의 11시 45분 기차를 타고 와 1시 반에 그들 부부와 함께 식사를 해주었으면 한다는 편지였다. 주드는 편지를 미리 읽지 못한 데 대해 머리카락을 거의 쥐어뜯고 싶을 정도로 분통을 터뜨렸다. 때가 너무 늦어서 편지의 주문대로 행동할 수 없 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요즈음의 그는 자기를 상당히 단련시켰고, 마침내 그 황당무계한 케넷브리지로의 원정도 그를 유혹에서 멀리 하기 위한 또 하나의 '신'의 특별한 간섭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수와 만나고 싶었 기 때문에 너무나 화가 났다. 그래서 그는 당장 펜을 들어, 오늘의 경위를 설명하고 다음 일요일까지 기다리고 있을 만큼 참을성이 없으므로 이번 주 의 아무 날이고 좋으니 날짜만 정해 준다면 그날 만나러 가겠노라고 수 앞 으로 편지를 써서 보냈다. 그의 편지는 너무 열렬하게 씌어져서 수는 회답을 성부활절 전 금요일의 앞인 목요일까지 늦추었다. 상대방이 외곬으로 나올 때는 일부러 냉정해지 는 것이 수의 평소 태도였다. 만일 그가 오고 싶으면 그날 오후에 와 주었 으면 한다고 그녀는 답장에 썼다. 자기는 현재 남편의 학교에서 조교 노릇 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날보다 더 일찍 그를 초대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 다. 그래서 주드는 얼마 되지 않지만 하루치의 급료를 포기하고 휴가를 내 어 수가 있는 곳으로 떠났다. 제 4 부 셰스톤에서 인간의 복지와 자선의 명백한 급무에 임하기보다는 결혼이나 기타의 의 식에 임하는 자는 구교도이든 신교도이든 또는 무슨 파의 사람이라고 공언 하든 그는 형식적 위선자에 지나지 않는다. - 존 밀턴 4-1 셰스톤은 고대 브리튼의 팔라도(샤프츠베리의 전설적인 호칭)였다. '그곳 이 세워진 때부터 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드레이턴이 노래한 것 처럼) 예나 지금이나 꿈의 도시다. 옛날의 성과 세 곳의 화폐주조소, 남웨 섹스에서 으뜸가는 장관이었던 제단 후부의 지붕을 반원형으로 지은 건축 양식의 수도원, 열두 개의 교회, 사원, 기도실, 병원, 박공의 석회석으로 된 저택 등 - 지금은 모두 무자비하게 쓰러졌지만 - 그런 것들이 자아내는 각별한 환상은 이곳을 찾는 사람을 본의 아니게 우울한 애수에 빠져들게 했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자극적인 상쾌한 대기나 끝이 없이 펼쳐진 풍 경도 그러한 우수를 좀처럼 쫓아버리지는 못했다. 이곳은 왕, 여왕, 수도원장, 수녀원장, 성자, 주교, 기사, 향사 등의 매장 지였다. '순교자인' 에드워드 왕의 유골이 성스런 보존물로 정중하게 이장 된 이래 셰스톤의 명성은 높아졌고 유럽 각지에서 온 순례자들의 참배소가 될 정도로 그 평판은 영국 해안을 너머 멀리 퍼졌다. 위대한 '중세'가 만들 어낸 이 아름다운 창조에 있어서 '가톨릭 수도원의 철폐' (헨리 8세가 명했 음)는 역사가들이 말한 대로 조종이 되었다. 어마어마하게 큰 수도원의 파 괴와 더불어 전역이 온통 붕괴되어 폐허가 되었다. 순교자의 유골도 그것 을 보관한 신성한 건축물과 운명을 함께 했고 그들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 지금은 비석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읍의 그림 같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특이성은 현재도 여전했다. 그러 나 이상하게도 이러한 장점이 풍광의 미 따위를 문제로 삼지 않았다고 일 컬어지는 중세에서조차 많은 문인들에게 주목받았지만 요즘에는 등한시되 고 있어서, 영국에서 가장 색다르고 진기한 명소 중의 하나가 된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블랙무어 계곡 하천의 깊은 충적층의 유럽에서 돌출해 자치읍의 북, 남, 서 등 세 방향에서 우뚝 솟은, 험하고 당당한 절벽의 꼭대기에 독특한 위 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 읍의 그린 성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남부, 중부 그 리고 저부 웨섹스 등 3주의 초목으로 뒤덮인 목초지도 한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 예기치 못한 여행자의 눈을 갑자기 놀라게 하는데, 이것은 마치 이 지역의 약효 있다는 공기가 여행자의 폐에 돌연한 놀람이 되는 것과 같다. 기차로는 이곳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도보로 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 이지만 차선으로는 경량의 수레를 이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수레를 이용 하려면 동북 방향 쪽으로 일종의 지협이 있어서 높은 백악질의 고원과 읍 을 연결하고 있기 때문에 이 지협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은 세상에서 잊혀진 셰스톤, 즉 팔라도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 다. 읍이 산 위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물이 매우 귀해서 말이든 당나 귀든 사람이든 산기슭의 우물물을 가득 채운 물통이나 물단지를 지고 구불 구불한 언덕길을 헉헉대며 올라가야 했고, 물 행상인들은 길어온 물을 한 양동이에 반 페니 값으로 팔기도 했다. 물의 공급이 어려운 것 외에 두 가지 다른 이상한 사실이 있다. 묘지가 교회 뒤쪽에 지붕처럼 가파르게 솟아올라 있다는 것과 과거 이 읍의 수도 원과 가정 모두 부정부패가 만연하는 기묘한 시대를 겪었다는 것이 그것이 다. 이 때문에 셰스톤엔 다른 곳에서 얻을 수 없는 명물 세 가지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즉 묘지는 교회의 뾰족탑보다도 하늘에 더 가깝고, 맥주는 물 보다 더 흔하며, 정직한 아내나 아가씨들보다도 음탕한 여자가 더 많다는 것이다. 중세 이후, 주민들은 너무 가난해서 그들의 목사들을 위해 헌금을 낼 수 없었고 그래서 교회는 쓰러질 수밖에 없었으며, 공공연히 예배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일요일 오후면 그들은,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앉 아 컵을 앞에 두고 부득이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 다. 당시의 셰스톤 사람들은 분명 유머 감각이 있었던 것 같다. 이곳은 셰스톤다운 또다른 하나의 특수성 - 이것은 현대적인 것이지만 - 을 갖고 있다. 그것은 셰스톤이 장날이나 시장을 주된 생업의 장으로 삼 고 떠돌아다니는 마차나 극단, 사격연습장같이 행상하는 사람들의 휴식처 이자 근거지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외지에서 온 야생조류들이 긴 비행을 마치고 잠깐 쉬기 위해 혹은 먼 곳을 향하는 노정에서 회귀해 높은 곳으로 모여드는 것처럼, 이곳 절벽의 산 위에 세워진 읍에도 멀리서 온 노란색과 초록색의 대상들이 망연한 침묵 속에 서 있곤 했는데, 그것은 마치 그들이 풍경의 변화에 너무 놀란 나머지 여행을 계속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겨울을 이곳에서 지내고 봄이 오면 왔던 길을 밟아 다시 떠나갔다. 어느 날 오후 4시쯤, 주드는 생전 처음으로 가장 가까운 역에서 미풍이 부는 이 별난 곳으로 올라갔다. 애써서 언덕길을 올라 꼭대기에 도착해서 하늘로 우뚝 솟은 읍의 첫 번째 집들을 지나 학교 건물 쪽으로 걸어갔다. 시간이 너무 일렀다. 학생들은 아직도 학교에 남아서, 모기떼처럼 작게 윙 윙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수도원의 보행길을 따라 두서너 발자 국 물러났다. 거기서 그는 운명적인 인연으로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 랑하는 사람의 거주지가 된 지점을 바라보았다. 석조 건물로 지어진 커다란 학교 앞에는 반들거리는 생쥐 색깔의 너도밤 나무가 무성했는데, 이 나무들은 마치 고원에서만 자라는 것 같았다. 그는 창살과 채광살로 만들어진 창문 사이로 안에서 공부하고 있는 검은 색과 갈색, 담황색의 학생들의 머리를 보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심하게 고동치는 가슴을 안고 옛날 대수도원의 정원이 한때 그 언저리까지 뻗어 있었다는 평탄한 고지대까지 걸어 내려갔다. 그는 아이들이 떠나기 전까지는 학교에 들어가기를 꺼렸기 때문에, 여기 서 머물렀다. 드디어 아이들의 목소리가 바깥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3세기 전의 대수녀원장, 소수도원 원장 및 부원장과 50명의 수녀들이 조용히 오 가던 이 길에 빨강과 파란색 상의에 하얀 앞치마를 두른 여자아이들이 깡 충깡충 뛰면서 나타났다. 다시 발걸음을 되돌렸을 때 자신이 너무 오랫동 안 기다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는 마지막으로 귀가하는 학생의 뒤를 따라 읍으로 떠나버린 뒤였고 필로트슨 선생은 쇼츠퍼드에서 열리는 교사 회의에 참석하여 오후 내내 여기 있지 않았다. 주드는 텅빈 교실로 들어가 앉았다. 교실 바닥을 청소하고 있던 소녀는 2, 3분만 있으면 필로트슨 선생님이 돌아올 거라고 알려주었다. 피아노 한 대가 가까이 있었는데 - 사실은 필로트슨이 메리그린에 있을 때부터 가지 고 있던 낡은 그 피아노였다 - 비록 날씨가 어두운 오후여서 피아노 건반 을 거의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주드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만져보고는 지 난 주에 자기를 아주 감동하게 한 찬송가를 쳐보지 않을 수 없었다. 주드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주드는 빗자루를 들고 있던 그 어린 소녀일 것이라고 생각해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주드에게 접근해 저음부를 치는 그의 왼손가락 위에 가볍게 자신의 손가락을 올려놓 는 것이었다. 이 손은 그도 알 것 같은 작은 손이었다. 주드는 뒤돌아보았 다. "멈추지 마세요." 수가 말했다. "전 이 곡이 좋아요. 제가 멜체스터를 떠나기 전에 배운 곡이죠. 교육대 학에서도 곧잘 연주하곤 했어요." "난 동생 앞에서 서투르게 칠 순 없어. 내 대신 쳐봐요." "아, 그래요. 한 번 해볼까요." 수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그 곡을 쳤다. 그녀의 솜씨는,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친 것에 비하면 성스럽게까지 느껴졌다. 그녀도 주드 처럼 - 그녀 자신도 놀란 듯 - 과거에 대한 회상으로 동요된 듯했다. 그녀 의 연주가 끝나자 그이 손이 그녀의 손 쪽으로 움직였고 두 사람의 손은 중도에서 마주쳤다. 주드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았는데, 그것은 마치 그녀가 결혼하기 전에 그렇게 했던 것과 똑같았다. "제가 이 곡을 좋아하다니 이상해요. 왜냐하면요......" 그녀가 돌변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냐하면?" "난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거든요." "쉽게 감동받지 않는다는 말이야?" "꼭 그렇다는 말은 아니지만." "아, 하지만 동생은 역시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인 것 같아. 왜냐하면 동생 은 나와 같이 마음으로 느끼니까." "그러나 생각하는 쪽은 아니지요." 그녀는 연주를 계속했다. 그리고 갑자기 뒤돌아보았다. 그때 전혀 예측하 지 못한 충동에 이끌려 두 사람은 다시 서로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억지로 웃어 보이면서 그의 손을 재빨리 뿌리치고 말했다. "참 재미있네요! 우린 무엇 때문에 이럴까요?" "내가 좀 전에 말한 것처럼 우리 둘이 서로 닮았기 때문이지." "우리의 생각은 닮지 않았어요! 우리의 감정은 약간 닮았을지 몰라도." "그런데 감정은 생각을 지배하지...... 이 곡의 작곡자가 내가 만나 본 사 람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면 욕이 되겠지?" "뭐라구요, 오빠가 안다구요?" "난 그를 만나러 갔었어." "아, 오빠는 바보 같아요. 내가 했어야만 할 일을 하시다니. 왜 그랬어 요?" "왜냐하면 우리는 닮지 않았기 때문이지." 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자, 차나 좀 마실까요." 사가 말했다. "집에서보다 여기서 마시는 게 어때요? 주전자와 컵을 가져오게 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오빠도 아시는 것처럼 우린 학교에서 살지 않아요. 오빠도 아시는 것처럼 우린 학교에서 살지 않아요. 오빠도 아시는 것처럼 우린 학 교에서 살지 않아요. 길 건너 '올드 그로브 플레이스'라 불리는 오래된 주 택에 살아요. 그 집은 너무 구식이고 음침해서 무섭게 저를 짓누르는 것 같아요. 그런 집은 가끔 방문하는 건 좋지만 살기엔 좋지 않아요. 전 옛날 거기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의 무게에 짓눌려 땅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이 학교처럼 새로운 장소에서는 생활을 지탱해 내기만 하 면 되지요. 앉으세요. 제가 에이다에게 다기들을 가져오라고 말하겠어요." 그는 그녀가 나가기 전 뚜껑을 열어놓은 난롯불을 쬐며 기다렸다. 그녀 는 다를 준비한 하녀를 대동하고 들어와 불빛 앞에 자리를 잡았다. 걸쳐놓 은 놋쇠 주전자 밑의 알콜 램프에서도 푸른 빛이 흘러나왔다. "이 주전자는 오빠가 준 결혼 선물이에요." 그녀는 주전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군." 주드가 말했다. 그가 선물로 준 주전자에서 물끓는 소리가 났는데, 그 소 리에는 약간의 야유가 섞여 있는 듯했다. 그는 화제를 바꾸기 위해서 말했 다. "신약성서 중에서 읽을 만한 경외서를 알고 있어? 동생이 학교에서 그런 책을 읽지는 않겠지만." "물론 안 읽죠! 그랬다간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할 걸요. 그렇지만 하나 있긴 있어요. 옛날 친구가 살아 있을 땐 저도 그것에 관심이 있었지요. 하 지만 지금은 친숙하지 않아요. 쿠퍼의 <경외 복음서> 말이에요." "그건 내가 읽어보고 싶은 책 같군." 그러나 그의 생각은 그 '옛날 친구'에 대한 아픔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말한 옛날 친구는 젊은 시절에 그녀가 알았던 대학생 친구를 두고 하는 말 이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수가 필로트슨에게 이 친구 이야기를 했는지 안했는지 궁금했다. "<니고데모의 복음서>도 아주 좋은 책이에요." 그녀는 주드의 질투심을 달래려고 말을 계속했다. 그녀는 늘 그랬던 것 처럼, 분명히 그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실제로 지금처럼 아무 상관도 없는 화제에 관해 말할 때도 그들의 감정 사이에는 제2의 무언의 대화가 통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상호 관계는 그만큼 완전했다. "그것은 진짜 순수한 작품인 것 같아요. 또 모두 운문으로 구분되어 있 잖아요. 그래서 그것은 꿈속에서 다른 복음 전도자를 읽는 것 같아요. 내용 은 같지만 표현은 다르죠. 그렇지만 주드, 아직도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고 계세요? 그리스도교 변증학을 공부하세요?" "그럼. 난 어느 때보다 열심히 신학을 공부하고 있어." 그녀는 호기심에 차 그를 쳐다보았다. "왜 날 그렇게 쳐다보지?" 주드가 말했다. "아, 그 이유를 알고 싶으세요?" "이런 분야에 대해 내가 모르는 것을 동생이 말해 줄 수도 있으니까. 동 생은 사랑하던 죽은 친구한테서 많은 것을 틀림없이 배웠을 테니 말이야." "이제 그런 얘기는 그만둬요!" 그녀는 달래듯이 말했다. "오빠가 아름다운 찬송가를 배운 그 교회에서 다음 주에도 조각 일을 할 건가요?" "그럴 거요, 아마." "그것 참 잘됐네요. 제가 오빠를 만나러 그리로 가도 되겠어요? 아무때 나 오후에, 기차로 반 시간이면 돼요." "아니, 오지 마!" "뭐라구요? 그럼 우린 더 이상 친구가 아닌가요? 예전에 그렇게 지내온 것처럼 말이에요." "그래." "그건 미처 몰랐군요. 오빠는 저를 친절하게 대해 주시리라고 생각했는 데!" "아니, 이젠 그렇지 않을 거야." "제가 뭘 기분 나쁘게 했나요? 틀림없이 우리 두 사람은......" 그녀는 목소리가 떨려 나오는 바람에 말을 멈추었다. "수, 난 때때로 동생이 바람난 여자라고 생각했어." 그가 갑작스럽게 말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주드는 그 녀의 얼굴이 붉어져 있는 것을 주전자의 불꽃을 통해 보고는 깜짝 놀랐다. "오빠와 더 이상 말하지 않겠어요, 주드!"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언젠가처럼 비극적인 음조로 돌아가 있 었다. "이제 날이 너무 어두워졌으니 더 이상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을 수 없군 요. 품어서는 안 될 감정을 품게 하는 병적인 수난일의 곡을 치고 난 후니 까요! 우린 이렇게 앉아 더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구요. 그래요, 돌아가세요. 오빠가 제게 실수를 한 거예요! 전 오빠가 심하게 말한 것과는 정반대예요. 아, 주드. 그렇게 말하다니 정말 잔인하시군요! 그러나 전 오빠에게 진실을 말할 수 없어요. 어떻게 제가 일시적인 충동에 무너졌는지, 또는 만일 제가 매력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그것을 충분히 발휘하기 위해 태어났을 거라는 것을 제가 얼마나 많이 느끼고 있는지, 그런 기분을 이야기한다면 오빠는 충격받을 거예요. 어떤 여자들에게는 사랑받고 싶은 마음도 끝없고, 사랑하 고 싶은 마음도 끝없어요. 그리고 사랑하고 싶은 여자들의 경우, 주교가 허 락한 남편을 계속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오 빠는 너무 지나치게 정직해서 저의 이런 기분을 이해하지 못해요! 자, 돌아 가세요. 유감스럽게도 남편이 집에 없으니까요." "정말 유감스럽다고 생각하오?" "실은 예의상 해본 말이에요! 솔직히 유감스럽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서 글픈 얘기지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에요!" 그들은 몇 번이고 손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주드가 나갈 때도 그 의 손가락을 가볍게 만졌다. 그가 문간을 나서자 그녀는 실망한 낯으로 긴 의자에 훌쩍 올라가 창문의 쇠창틀을 열었다. 마침 그 밑의 작은 길을 주 드가 지나가고 있었다. "몇 시에 여기서 떠나면 기차를 탈 수 있어요, 주드?" 그녀가 물었다. 그는 좀 놀라며 시선을 들어 쳐다보았다. "45분쯤 지나면 시간에 맞추어 승합마차가 올 거요." "그 동안 혼자 뭘 하실 거예요?" "아, 그냥 돌아다니지 뭐. 아마 저 오래된 교회에 가서 앉아 있을지도 모 르겠소." "이렇게 오빠를 몰아내다니, 전 참 박정한 여자지요! 오빠가 어둠 침침한 교회에 들어가 있을 필요는 없어요. 거기 계세요." "어디?" "오빠가 있는 거기 말이에요. 오빠는 안에 있을 때보다 바깥에서 더 좋 은 대화를 할 수 있을 거예요. 절 만나기 위해 반나절 일도 포기하시다니, 너무 고마워요! 오빠는 수많은 꿈을 꾸는 요셉 같아요. 주드, 또 비극적인 돈키호테 같기도 하구요. 그리고 때때로 오빠는 사람들이 그에게 돌을 던 질 때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던 성 스티븐 같기도 해요. 아, 가엾 은 친구, 동지. 오빠는 아직도 고통스러우시죠!" 높은 창문턱이 두 사람 사이에 있어서 그는 그녀에게 닿을 수 없었고, 아까 둘만이 마주앉았을 때 걱정했던 격의 없는 태도에 이제 몰두 해버리 는 것 같았다. 그녀는 넘쳐흐르는 듯한 감정을 누르지 못하는 어조로 여전 히 계속해서 말했다. "문명 덕분에 틀에 박혀버린 사회라는 주형은, 우리의 실제의 모습과 아 무 관계가 없어요. 그것은 마치 평범한 성좌의 모양이 진짜 별의 모양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과 같죠. 전 리처드 필로트슨 부인으로 불리며 그런 이름의 배우자와 조용히 부부생활을 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실은 리처드 필로트슨 부인이라기보다 정상적이 아닌 열정과 설명할 수 없는 반감을 지 닌 채 혼자 방황하는 그런 여자죠. 자, 더 이상 머물렀다간 마차를 놓치겠 어요. 또 와주세요. 그땐 집으로 오세요." "그러지! 언제가 좋겠소?" 주드가 물었다. "다음주 오늘요. 안녕, 잘 가세요!" 그녀는 한 손을 들어 주드의 이마를 가엾은 듯이 한 번 어루만졌다. 주 드는 작별인사를 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빔포트 가를 지날 때, 마차가 출발하는 바퀴소리를 들은 듯했다. 그 가 번화가의 '듀크스 암스' 여관에 도착했을 때 마차는 이미 떠나고 없었 다. 이번 기차 시간에 대기 위해서 도보로 역에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는 다음 기차, 즉 그날 밤 멜체스터로 가는 마지막 기차를 타기로 했다. 그는 잠시 돌아다녔고 먹을 것을 좀 샀다. 그러고 나서도 30분 정도가 남았다. 그의 발걸음은 어느새 학교의 건물 쪽으로 향했다. 보리수가 나란 히 서 있는 '트리니티 교회'의 유서깊은 묘지를 지나 돌아와보니 학교 건물 은 완전히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수는 길 건너 오래된 '듀크스 암스' 여 관에 산다고 말했었다. 고풍스러운 집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 집을 쉽게 찾 을 수 있었다. 아직 덧문이 내려 있지 않은 앞창문을 통해 반짝이는 촛불빛이 보였다. 그는 내부도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마룻바닥은 바깥 노면보다 2단 가량 낮았다. 이 집은 세워진 지 몇 세기가 흐르는 동안 도로가 더 높이 올라가 게 되어 있었다. 수는 금방 집으로 돌아왔음에 틀림없었다. 객실이나 거실 로 쓰는 것 같은 방에서 그녀는 모자를 쓴 채 서 있었다. 이 방의 벽은 마 룻바닥에서 천장까지 판벽 붙인 참나무 널빤지로 붙여져 있었다. 그녀의 약간 머리 위쪽의 천장에는 주물이 박힌 큰 대들보가 종횡으로 가로질러 있었다. 선반도 같은 종류의 묵직한 제품으로 제임스 왕조풍의 벽기둥과 당초무늬의 장식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이 집은 수세기의 무게에 눌려 정 말로 여기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젊은 부인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단의 반짇고리를 열고 사진을 꺼내 잠시 동안 뚫어지게 들여다보 더니 그것을 가슴에다 대었다. 그리고는 다시 그곳에 넣어두었다. 그녀는 창문을 닫지 않은 것을 깨닫고 손에 초를 들고는 창문 앞으로 다 가갔다. 너무 어두워서 그녀는 주드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얼 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눈썹이 긴 검은 눈 언저리에는 틀림없이 눈물 의 흔적이 비치고 있었다. 수가 덧문을 닫자 주드는 집으로의 외로운 여정을 계속하기 위해 발걸음 을 돌렸다. "그녀가 보았던 것은 누구의 사진이었을까?" 그는 중얼거렸다. 일전에 그의 사진을 그녀에게 준 적은 있었지만 그녀 에게는 다른 사람의 사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혹시 자신의 사진은 아니 었을까? 그는 그녀의 초대에 응해 다시 그녀를 보러 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 다.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신앙심 깊은 사람들이나 수가 불경스럽게도 점잖 은 태도로 그의 반신이라고 별명을 붙이던 성도들까지도 만일 그들 자신의 힘을 의심한다면 이러한 만남은 당연히 피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는 피할 수가 없었다. 그는 만날 때까지의 기간 동안 계속 금식도 하고 기 도도 했지만 그의 인간성은 신성보다도 더 강력했다. 4-2 그러나 신이라도 취하지 못할 조치를 여자는 정통으로 취했다. 그 다음 날 아침 수한테서 편지가 왔다. 다음주에 오지 마세요. 오빠 자신을 위해서라도 오지 마세요. 병적인 찬 송가와 황혼의 영향을 받아 우린 너무 방종했어요. 이제는 가능한 한, 생각 하지 마세요. - 수산나 플로렌스 메리 올림 그의 실망감은 격심했다. 그녀가 결국 이런 식으로 이름을 서명했을 때, 그녀의 기분과 얼굴 표정까지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답장을 썼다. 나도 동의해. 동생의 말이 옳아요. 이것은 내가 지금 배워야 한다고 생각 하는 체념의 교훈이오. - 주드 씀 그는 부활절 전날 이 편지를 부쳤다. 그들의 결정은 결말이 난 것 같았 다. 그러나 그들의 결정과는 다른 힘과 법칙이 작용하고 있었다. 부활절인 월요일 아침에 그는 만일 심각한 일이 생기면 전보를 곧바로 쳐달라고 부 탁해 둔 에들린 부인으로부터 전갈을 받았다. - 대고모 위독. 빨리 귀가 바람. 그는 도구들을 내팽개치고 떠났다. 3시간 30분쯤 지난 후에 그는 메리그 린 부근의 고지대를 가로질러 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마을로 가는 오솔길 이 이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곧 분지의 들판으로 내려갔 다. 그가 분지의 건너편으로 올라갔을 때, 길 건너 문있는 데서 그의 접근 을 쭉 지켜보고 있던 노동자 한 사람이 불안하게 다가와 뭔가 말을 하려는 것을 보고 그는 중얼거렸다. "저 사람 얼굴을 보니 대고모님이 돌아가신 것을 알 수 있겠구나. 가엾 은 드루실라 대고모님!" 그가 생각했던 대로였다. 에들린 부인이 주드에게 그 사람을 보내 소식 을 전하게 한 것이었다. "대고모님은 당신을 알아보지 못했을 거요. 그녀는 유리알 눈을 가진 인 형같이 꼼짝 않고 누워 있었으니까요. 그러니 당신이 여기 있지 않았다는 게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 사람이 말했다. 주드는 대고모집으로 들어갔다. 그날 오후 모든 일의 준비가 끝나고 장례 준비를 마친 사람들도 맥주를 다 마시고 가버린 후, 그는 조용히 혼자 앉아 있었다. 비록 그들이 편지를 하지 않기로 동의한 지 2, 3일 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 사실만은 수에게도 알려야 할 것 같았다. 그는 가장 간단한 말로 썼다. 드루실라 대고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셨소. 장례식은 금요일 오후에 있을 예정이오. 그는 상중 내내 메리그린 마을과 그 주위에서 머물렀다. 금요일 아침에 는 묘가 완성되었는지를 보러 갔다. 그는 수가 올 것인지 궁금했다. 그녀한 테서는 아무 답장도 없었다. 그것은 그녀가 올 것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 는 그녀가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기차 시간에 맞추어, 정오쯤 문을 잠그 고는 분지 들판을 가로질러 '갈색의 집' 근처의 고지대 끝으로 갔다. 여기 에서 그는 북쪽으로 펼쳐진 방대한 전망과 더 가까이에 있는 알프레드스턴 의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알프레드스턴으로 2마일쯤 떨어진 곳에서 한 줄 기 흰 연기가 오른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녀가 도착했는지 여부를 알기까지는 아직도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 다. 어쨌든 그는 기다렸다. 마침내 작은 임대마차가 언덕 기슭에 멈추더니 한 사람이 내리고 그 마차는 되돌아갔다. 승객이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그 사람이 그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오늘따라 더 가냘퍼 보 여서 그가 열정적이고 강렬하게 포옹을 했다가는 부서질 것 같았다. 그러 나 그로서는 그런 포옹을 할 입장에 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언덕길을 3분 의 2쯤 올라왔을 때, 걱정스러운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그녀가 그 순간 자기를 알아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곧 슬픈 미소를 띠었고 그가 맞이하려고 그 길을 내려갈 때까지 계속 그런 자세로 있었다. "오빠 홀로 장례식에 참석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너무 슬펐어요. 그래 서 결국 오게 된 거예요." 그녀는 불안한 듯 빠르게 말했다. "충실한 나의 수!" 주드가 중얼거렸다. 장지까지는 한참을 가야 했지만 그녀의 타고난, 기묘한 이중적 성격 탓 에 포착하기 어려운 태도로 수는 더이상의 인사말을 하기 위해 서 있으려 하지 않았다. 그로서는 이런 순간의 비통함을 느낄 기회가 앞으로는 없을 것 같아서 조용히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필요성 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아니면 그보다 더 많이 알면서도 애써 그런 감 정을 내색하려고 하지 않는 것인지도 몰랐다. 슬프고 간단한 장례식이 막 끝났다. 법석대던 장의사 사람들은 더 중요 한 장례식이 한 시간쯤 후에 3마일쯤 떨어진 교회에서 있다며 빠른 걸음으 로 떠나갔다. 드루실라 대고모는 조상들의 묘에서 좀 떨어진 새로운 땅에 안장되었다. 수와 주드는 무덤까지 나란히 다녀왔고 이제 친숙한 집에서 차를 마시기 위해 둘러 앉았다. 돌아가신 분에 대한 이 마지막 보살핌 속 에서 적어도 두 사람의 삶을 하나가 됐다. "대고모님께선 처음부터 끝까지 결혼을 반대하셨다면서요?" 수가 중얼거렸다. "그렇소. 특히 우리 가문의 식구들에 대해서는." 그녀의 눈이 그의 눈과 마주치자 한동안 그의 눈을 응시했다. "우리 집안은 슬픈 가문인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주드?" "대고모님은 우리 폴리 집안은 결혼하면 남편이나 아내가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지. 확실히 우리 집안은 불행한 사람들만 나왔소. 나도 그런 사람이지!" 수는 침묵을 지켰다. "남편이나 아내가 제3자에게 그들의 결혼이 불행하다고 말하는 것이 잘 못된 것일까요, 주드?" 그녀는 실험하는 듯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만일 결혼식이 종교적 의식이라면 그것은 아마도 잘못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만일 결혼이 단지 가사나 지방세와 국세 부담에 물질적 편의가 있 다는 것과 또한 자손에게 토지나 재산을 상속하게 하는 것 - 이 경우엔 부 친의 계통을 밝힐 필요가 있겠지만 - 그런 것에 기초한, 치사한 계약에 지 나지 않는다면, 결혼이 남녀 어느 쪽이든 상처와 괴로움만 안겨주는 것이 라 해도 틀린 말을 아니지 않을까요?" "어쨌든 나도 동생한테 그렇게 말했었지." 곧이어 그녀가 말을 이어나갔다. "상대에게 어떤 특정한 잘못이 없는데도 배우자를 미워하는 부부가 있다 고 생각하세요?" "그래요. 난 그렇다고 생각하오. 가령, 어느 한쪽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 다면." "그렇지만 그런 경우를 제외한다면요? 만일 여자가 남편과 함께 살기 싫 어진다면요, 까닭 없이." 그녀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주드는 뭔가 짚이는 데가 있었다. "비록 그녀가 남편을 존경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해도, 까닭 없이 육체 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다면 그 여자를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단지 한 가지 예를 든 것뿐이에요. 이런 경우 여자가 갖고 있는 위선은 어떻게 해 야 하는 걸까요?" 주드는 그녀에게 난처한 시선을 보냈다. 그는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면 서 말했다. "그건 바로 내 경험과 교리가 모순을 겪는 경우들 중의 하나요. 이치를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 비록 난 그렇지 못하지만 그렇게 되기를 원 하오 - 그 위선은 벗어버려야 하겠지요. 경험과 편견이 없는 자연에 비춰 말한다면 말이오. 수, 동생은 아무래도 행복하지 못한 것 같군!" "아니에요, 난 행복해요!" 그녀는 반박했다.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한 남자와 결혼한 지 8주밖에 안 된 여자가 어떻 게 불행할 수 있겠어요?" "자유롭게 선택했다구!" "왜 그 말을 반복하지요? 전 6시 기차로 돌아가봐야 해요. 오빠는 여기 서 머무르시겠어요?" "대고모의 주변을 정리하려면 2, 3일은 머물러야 할 것 같아. 이 집도 벌 써 남의 손에 넘어간 상태요. 기차 타는 데까지 바래다 줄까?" 수는 그만두라는 뜻의 웃음을 지었다. "그러지 마세요. 그렇지만 도중까지는 괜찮아요." "잠깐, 동생은 오늘밤 갈 수 없겠는데! 기차는 셰스톤까지는 안가. 여기 서 지냈다가 내일 돌아가야만 하겠어. 만일 여기서 지내는 게 싫다면, 에들 린 부인의 집으로 가면 돼. 거긴 방이 많으니까." "그럼, 좋아요." 그녀는 의심스러운 듯이 말했다. "남편한테 확실하게 오늘 돌아가겠다고 말하지도 않았으니까요." 주드는 근처에 있는 그 미망인의 집에 수가 와서 잘 거라고 알려주고는 다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우리가 처한 환경은 너무도 무서워, 수. 무서워!" 그는 마룻바닥을 내려다보다가 갑작스럽게 말했다. "아니! 왜 그래요?" "이 어두운 운명 속에서 내가 담당하고 있는 역할이 어떻다는 것을 모두 동생한테 말할 수가 없소. 동생은 그 사람과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소. 동생 이 결혼하기 전부터 난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 했지. 그러나 그건 내 잘못이었어. 난 간섭해야만 했던 거야!" "그런데 뭣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 "왜냐하면 난 동생의 정체를 꿰뚫어볼 수 있기 때문이야. 가엾은 나의 동생!" 그녀의 손이 탁자 위에 있었고 주드는 그의 손을 그 위에 얹었다. 수는 손을 뺐다. "우습군, 수." 그는 소리쳤다. "이런 얘길 하는 중인데! 이런 문제에 관한 것이라면 동생보다 내가 더 엄격하고 형식적인데 말이야. 동생이 이런 순진한 행동을 거부한다는 것은 동생의 어리석은 모순을 보여주는 것밖에 안돼!" "제가 너무 얌전을 뺐나보군요." 그녀가 후회하듯이 말했다. "단지 전 그것을 우리들의 장난이라고 생각했어요. 너무 자주 있는 것 같긴 하지만요. 자, 오빠 마음대로 잡으세요. 이렇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래, 됐어." "하지만. 난 그분한테 이런 일을 말해야만 해요." "누구 말이오?" "리처드요." "아, 물론이지. 만일 동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러나 아무것도 아 닌 일이라면 쓸데없이 그를 괴롭히는 게 될 텐데." "글쎄요. 오빠는 단지 사촌오빠로서 말한 게 아닌가요?" "물론이지. 내게 사랑의 감정은 전혀 남아 있지 않으니까." "그건 새로운 소식이군요. 어떻게 그렇게 된 거예요?" "아라벨라를 만났어." 그녀는 이 말에 일격을 얻어맞은 듯했다. 그리고는 호기심에서 물었다. "언제 그녀를 봤어요?" "내가 크리스트민스터에 있을 때였지." "그럼 그녀가 돌아왔군요. 오빠는 나한테 그런 말 한 적 없잖아요! 이제 그녀와 함께 살게 된 건가요?" "물론이지. 마치 동생이 남편과 함께 사는 것처럼 말이야." 그녀는 돌보지 않아 시들어버린 제라늄과 선인장이 담긴 화분이 있는 창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눈물로 젖을 때까지 창문 밖 멀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주드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만일, 만일 오빠가 저한테 말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왜 오빠는 그녀가 돌아온 것을 그렇게 기뻐하죠? 만일 그때 그것이 사실이라면요! 물론 지금 은 그렇지 않겠지요! 오빠의 마음은 어떻게 그렇게 금방 아라벨라에게 되 돌아갈 수 있었나요?" "특별한 하늘의 도움을 받은 것 같아." "아,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상냥하지만 노한 듯이 말했다. "오빠는 저를 놀리고 있어요. 바로 그런 거예요. 제가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말이지요!" "나도 모르겠어. 알고 싶지도 않고." "만일 제가 불행하다면 그것은 제 탓이고 제 사악함 때문이에요. 제가 그분을 싫어할 권리는 없으니까요! 그는 모든 면에서 제게 사려 깊은 분이 지요. 그리고 그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 그런지 지식도 풍부할 뿐더러 아주 재미있는 분이에요. 주드, 오빠는 남자가 자신과 같은 연령의 여자와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자기보다 훨씬 어린 여자와, 그러니 까 저와 그이가 18세나 차이나는 것처럼 그런 여자와 걸혼해야 한다고 생 각하세요?" "그것은 서로가 어떻게 느끼느냐에 달려 있는 거지." 그는 그녀에게 자기 만족의 기회를 하나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수는 아 무 도움 없이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그녀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눈물을 흘릴 듯이 말했다. "전, 오빠가 제게 그랬던 것처럼 저도 오빠에게 솔직해야겠어요. 오빤 제 가 뭘 말하려고 하는지 벌써 알고 있나요? 전 비록 필로트슨 선생을 친구 로서 좋아하긴 하지만 사랑하진 않아요. 남편감으로 그와 함께 산다는 것 은 제게 고역이에요! 이제 사실을 털어놓았어요. 여태까지 행복한 척 해왔 지만 이젠 어쩔 수가 없군요. 오빠는 저를 영원히 경멸하겠지요!" 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탁자보 위에 엎드려 조용히 흐느끼기 시 작했다. 몸이 떨리는 바람에 세발 달린 탁자가 약간 흔들렸다. "전 결혼한 지 불과 한두 달밖에 안됐는데!" 그녀는 탁자 위의 손에 얼굴을 묻은 채 말을 계속했다. "결혼 초에 여자는 주눅들게 마련이라지만, 대여섯 해 지나다보면 다 익 숙해지고 무관심하게 된다고들 해요. 그러나 그것은 마치 수족 하나가 절 단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익숙해져 조금도 불편을 느끼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주드는 거의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말문을 열었다.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고 생각했어, 수! 아, 내가 생각했던 거야!" "그러나 오빠가 생각하는 것하고는 같지 않아요! 나의 사악함을 제외하 면 아무것도 잘못된 건 없어요. 털어놓을 수 없는 어떤 이유 때문에 오빠 는 나의 나쁜 점을, 아내의 입장에서 생겨난 혐오라고 부르겠지요. 그리고 세간의 일반적인 사람들의 눈에서 바라본다면 그건 뭔가 혐오로서 받아들 일 수 없는 것이겠지요! 저를 괴롭게 하는 것은 남편이 원하는 것은 저도 따라야 한다는 거예요! 그의 말은 도덕적으로 모두 옳으니까 그래요. 그런 것은 본래 자발적인 합의를 본질로 삼고 있는 것인데, 언제나 특정한 감정 을 느껴야 한다니 지겨운 계약이에요! 나는 오히려 그가 날 때려주든 부정 을 저지르든, 아니면 무슨 일이든 해서 이런 내 심정을 정당화시킬 어떤 행동이라도 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그는 그런 것조차 전혀 하지 않아 요. 단지 내 기분을 알고 나서는 조금 냉정해진 것뿐이지요. 그것이 바로 장례식에 그가 오지 않았던 이유예요. 아, 난 너무 비참해요. 난 어쩌면 좋 아요! 나한테 가까이 오지 마세요, 주드. 오빠는 그래서는 안되니까요. 가까 이 오지 마세요, 오지 마세요!" 그러나 주드는 벌떡 일어나 얼굴을 맞대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귀 쪽 에 갖다댔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엔 맞대지 못했다. "그러지 말라고 말했잖아요, 주드!" "알고 있어. 난 단지 동생을 위로해 주고 싶을 뿐이야! 이 모든 일은 우 리가 만나기 전에 한 나의 결혼 때문에 일어난 거요? 만일 그런 일만 없었 어도 동생은 내 아내가 되어 있었을 거요. 안 그렇소?"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급하게 일어나, 기분 전환 삼아 교회 묘지에 있는 대고모의 무덤까지 산책을 하겠다며 집을 나갔다. 주드는 그녀를 따라가지 않았다. 20분쯤 후에 그는, 그녀가 마을 녹지를 가로질러 에들린 부인집으 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곧 그녀는 그녀의 가방을 가질러 어린 여 자아이를 보냈다. 그 아이는 수가 오늘밤 너무 피곤해서 그를 다시 만나러 올 수 없다는 말을 전했다. 대고모집의 쓸쓸한 방에서 주드는 밤의 장막 속에 갇힌 에들린의 오두막 집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그는 수도 역시 그 벽 안에서 외로이 앉아 낙 심하고 있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라' 는 그의 헌신적인 신념에도 다시 의문이 갔다. 그는 피곤해서 일찍 쉬려고 했다. 그러나 바로 가까이에 수가 있다는 생 각 때문에 선잠만 잤다. 2시간쯤 지나서야 그는 좀더 깊은 잠을 자기 시작 했는데,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벌떡 일어났다. 그것은 그가 메 리그린에서 살 때 들었던 것과 같은 친숙한 소리였다. 덫에 걸린 토끼의 비명소리였다. 작은 토끼의 습성이 그렇듯 비명을 연이여 되풀이하지는 않 았다. 아마도 한두 번 이상은 비명을 지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토끼는 덫을 쳐놓은 사람이 와서 머리통을 칠 아침까지는 그 고통을 참아가며 지 내야 할 것이다. 어렸을 때 지렁이의 생명을 구해준 적이 있었던 그는 찢 겨져 나가는 다리 때문에 고통스러워할 토끼의 모습을 그려보기 시작했다. 만일 '고약한 덫'에 뒷다리가 걸렸다면 덫의 톱니가 다리뼈에서 다리살을 벗겨낼 때까지 6시간 동안 발을 빼려고 잡아당기고 있을 것이다. 스프링이 약한 도구라서 간신히 빠져나갈 수 있다 해도 다리의 괴저 때문에 토끼는 들판에서 죽고 말 것이다. 만일 '좋은 덫'에 앞다리가 걸렸다 해도 뼈가 부 러지고 다리가 거의 두 조각 나 도망칠 수는 없게 될 것이다. 거의 30분이 지나자 토끼는 다시 한번 비명을 질렀다. 주드는 토끼를 고통에서 해방시 켜 놓지 않는 한 더 이상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옷을 입고 급히 아래로 내려가, 달빛을 따라 초원을 가로질러 소리가 나는 쪽으 로 갔다. 그는 그 과수댁의 정원 울타리께에 이르렀을 때 멈춰 섰다. 죽어 가는 동물이 질질 끌고가는 덫의 달그락거리는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고 그 는 그 소리를 따라갔다. 그리고 현장에 도착하자 손바닥으로 토끼의 뒷목 을 강하게 내리쳤다. 축 늘어지며 토끼가 죽었다. 주드는 돌아오는 길에 이 웃 오두막집 1층의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 한 여자를 발견했 다. "주드!" 그녀가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수였다. "오빠지요?" "그래, 나야!" "전 전혀 잠이 안 와서요. 게다가 토끼 소리도 들었어요. 얼마나 고통스 러울까 하고 생각했지요. 내려가서 그 동물을 죽여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오빠가 먼저 와주셔서 너무 기뻐요. 이런 철제 덫은 놓지 못하게 해야 하 는 거 아니에요?" 주드는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은 너무 낮아서 그녀의 허리까지 보일 정 도였다. 수는 문고리를 빼고 주드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가져갔다. 달빛에 비치는 그녀의 얼굴은 생각에 잠긴 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소리가 동생을 깨웠어?" 그가 말했다. "아니에요, 전 깨어 있었어요." "왜 그랬지?" "아, 오빠는 알면서....... 오빠의 종교적 교의에 비쳐본다면, 저처럼 문제 있는 기혼녀가 어떤 남자를 은밀한 친구로 두고 있다면 그건 죄가 되겠지 요. 저의 지금 행동도 마찬가지고요. 지금도 말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요!"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그가 말했다. "그것이 정말 내 의견이었는지는 몰라도 내 교의와 나는 결별하기 시작 했어." "그걸 알아요. 그걸 알고 있었다구요! 제가 오빠의 신앙을 방해하지 않겠 다고 맹세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죠. 그러나 오빠를 보니 너무 기뻐요! 그런데 아, 오빠를 다시는 안 만나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이제 우리 둘 사이 를 마지막으로 연결해 주시던 드루실라 대고모도 돌아가셨으니까요!" 주드는 그녀의 손을 잡고 그 위에 키스했다. "더 강한 연결끈이 남아 있어!" 그가 말했다. "난 이제 더 이상 나의 교의나 종교에 대해 관심두지 않을 거야! 그런 것들은 없어지게 놔둬! 내가 동생을 도울 수 있도록 하겠어. 비록 내가 동 생을 정말 사랑하고, 그리고 동생도......."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오빠가 뭘 말하려고 하는지 알아요. 하지만 거 기까지는 인정할 수 없어요. 오빠 좋으실 대로 생각하세요. 그러나 저에게 억지로 그 질문에 답하게는 하지 마세요!" "난 어떻게 되든, 동생이 행복해지길 바래!" "전 행복해질 수 없어요! 제 기분을 알아주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사람 들은 제가 변덕스럽고 까다롭다고 저를 비난하지요. 그것은 문명화된 삶 속에서 연애 때문에 생긴 보통의 비극이라고 할 수 없는, 이혼하면 구원받 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비극이에요! 아 마 이러한 고통을 토로할 다른 상대가 있었다면, 오빠한테 이런 말을 하진 않았겠지요. 그러나 제겐 그런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전 누군가에게 말해 야만 했어요! 주드, 전 그와 결혼하기 전에는, 비록 결혼이 어떻다는 걸 알 고 있었지만 그 뜻을 정확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어요. 전 정말 바보였 어요. 나이도 충분히 먹었고 경험도 많이 했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교육 대학에 들어갔을 때도 바보 같은 자만심에서 앞만 보고 돌진했던 거예요. 그런 무지에서 행한 일들을 원상태대로 돌릴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요! 이런 일은 많은 여성들한테서 일어나고 있죠. 다른 여자들과 차이가 있 다면, 저는 그것에 복종하는 대신 그것을 차버리고 있다는 거죠. 우리가 태 어난 이 불행한 시대의 야만스런 관습과 미신을, 후세 사람들이 돌이켜 본 다면 도대체 무어라 말할까요!" "상당히 신랄하군, 수!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바라는 것은........." "이제 들어가 보셔야지요!" 일순간의 충동으로 그녀는 창틀 위로 몸을 굽혀 주드의 머리 위에 그녀 의 얼굴을 비벼대고는 울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 위에 거의 닿을 듯 말 듯 하게 키스를 하고는 잽싸게 뒤로 물러섰다. 그래서 주드는 그녀를 끌어안 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분명히 그녀를 포옹할 수 있었을 것 이다. 그녀가 창을 닫았기 때문에 주드도 그의 오두막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