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이의 소망이야기 지은이: 토머스 하디 외/차은숙 옮김 출판사: 푸른샘 없었던 이야기 화창한 6월 어느 날, 그러나 그 날이 화창했던 것은 열씨 온도계(빙점과 비등점 사이를 80도로 나눈 온도계)로 28도였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그 화창한 6월 어느 날은 어디나 할 것 없이 더웠다. 바로 얼마 전에 벤 건초 무더기가 있는 정원 속의 풀밭은 더더욱 더웠다. 왜냐하면 그 곳은 벚나무 숲이 무성해서 바람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온 세상이 거의 잠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양껏 먹고 점심 식사 후에 낮잠을 즐겼으며, 새들은 입을 다물어 버렸고, 많은 벌레들까지도 더위에서 몸을 피하고 있었다. 가축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큰 가축들이 나 작은 가축들이나 모두 처마 밑에 숨어 버렸던 것이다. 개는 스스로 헛간 밑에 구덩이를 파고 드러누웠다. 그리고 눈을 반쯤 감고 거의 반 아르 쉰(제정 러시아의 길이 단위로 1아르쉰은 0.711미터)이나 되는 장밋빛 혀를 내밀며 숨을 헐 떡이고 있었다. 그 개는 때때로 치명적인 더위에서 오는 권태 때문에 심한 하품을 했다. 그 리고 그때마다 낑낑하는 가냘픈 비명까지 질러대는 것이었다. 돼지들은 이미 열세 마리나 되는 새끼 돼지들을 데리고 강가로 가서 시꺼먼 진흙탕 속에 드러누워 있었다. 그래서 진흙 속에서는 심한 콧바람을 불어대는 두 개의 구멍이 뚫린 돼지의 코 끝과, 진흙을 흠뻑 뒤집 어 쓴 길다란 돼지의 둥글고 축 늘어진 귀가 보일 뿐이었다. 다만 암탉만은 더위에 아랑곳 하지 않고 부엌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면한 마른 땅을 발로 허적거리면서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것들은 그곳에 한 톨의 낱알도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 나 그것이 수탉에게는 틀림없이 언짢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이따금씩 바보 같은 표정을 지 으며 있는 소리를 다 내서, 이게 무슨 추태람! 하고 소리를 질렀으니 말이다. 하여튼 우리는 무더운 풀밭을 떠났다. 그러나 그 풀밭에는 잠들지 않은 주인네들이 한 패 가 앉아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다 앉아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 중 늙은 밤색 말은 마부인 안톤의 채찍이 자기 옆구리에 날아들까 두려워하면서 건 초 무더기를 헤치고 있었고, 어떤 나비의 애벌레도 역시 앉아 있지는 않았다. 차라리 엎드려 있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말에 있는 것이 아니다. 벚나무 밑에는 몸집은 작지만 매우 진지한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달팽이, 쇠똥구리, 도마뱀, 그리고 앞에서 말한 애벌레 따위가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귀뚜라미가 달려왔다. 옆에는 늙은 밤색 말이 암흑색 털을 내민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의 말을 엿듣고 서 있었다. 그리고 말 등에는 파리 두 마리가 앉아 있었다. 모임은 점잖았다. 그러나 상당히 활기띤 언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각자가 자신의 의 견과 개성이 강했기 때문에 아무도 다른 의견에 동조하지 않았다. 나의 생각으로는, 하고 쇠똥구리가 말했다. 견실한 동물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자손 을 생각해야 합니다. 생활이란 다음 세대를 위한 노동입니다. 자연에 의해 부과된 의무를 스 스로 수행하는 자는 확고한 지반 위에 서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 고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는 책임을 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를 보십시오. 누가 나보다 더 노동을 하고 있습니까? 누가 그런 무거운 단자를, 나와 닮은 새로운 쇠똥구리가 자라날 수 있도록 내가 두엄으로 그토록 잘 만들어낸 단자를, 하루종일 쉬지도 않고 굴리고 있습니까? 그리고 새로운 쇠똥구리가 이 세상에 나타날 때에 그렇다. 나는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 을 모두 해 버렸다 고 양심적으로 말할 수 있는 자가 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노동 이란 바로 이런 것을 의미합니다! 여보게, 이 친구야. 자네는 노동과 함께 꺼져 버리게! 하고 바로 쇠똥구리가 말하고 있을 때에, 더위를 무릅쓰고 무시무시하게 큰 마른 줄기 한 조각을 끌고 온 개미가 말했다. 그는 잠깐 멈추고 뒷다리 넷으로 앉아 앞다리 둘로 땀에 흠뻑 젖은 자신의 얼굴을 닦았다. 그래, 나도 일을 하고 있어. 그것도 자네보다 좀 더하는 편이지. 그러나 자네는 자신을 위해서 일하고 있지 않나, 혹은 자기 자손을 위해서라고 말해도 마찬가지야. 모두가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아... 자네가 발로 통나무를 굴려보았다면 그때에는 나처럼 될 걸세. 무엇이 이 더위 속에서까지 힘이 빠져 녹초가 되도록 나에게 일을 시키는지 모르겠어. 이렇게 해도 고 맙다는 말을 하는 자는 아무도 없어. 우리는 불행한 일개미야. 밤낮 일만 하는데 대체 무엇 을 가지고 우리의 생활이 아름답다는 말인가? 내 팔자야... 여보세요. 쇠똥구리님, 당신은 너무나 붙임성이 없으시고 그리고 개미님, 당신은 지나치 게 생활을 우울하게 보시네요. 하고 귀뚜라미가 대꾸했다. 아니예요, 쇠똥구리님. 나는 역시 칙칙 소리를 내기도 하고 뛰기도 하는 것이 좋아요. 그 밖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 양심의 가 책 따위는 받지 않아요! 그리고 또 당신은 도마뱀 아주머니가 내놓은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 도 언급하지 않으셨어요. 그 분은 세계란 무엇인가? 하고 물으셨잖아요. 그런데 당신은 자신 의 두엄 단자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셨어요. 이건 실례라고도 할 수 있지요. 세계는 세계니까 요. 내 생각으로는 그것은 매우 좋은 거라고 봐요. 왜냐하면, 거기에는 우리를 위한 이런 풀 도 있고, 태양도 있고, 또 산도 바람도 있으니 말이에요. 그리고 그건 매우 큰 거예요! 당신 들이 여기서 이런 나무 사이에 살고 있으면 세계가 얼마나 크고 넓은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어요. 나는 들판에 있을 때는 때때로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높이 뛰어 오르곤 해요. 정 말이에요. 굉장한 높이까지 올라가요. 그리고 그 높은 곳에서 보고 나는 세계가 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정말이야. 하고 잠자코 듣고 있던 밤색 말이 거들었다. 그러나 너희들은 모두 내가 평생 보아온 것의 1백분의 1도 볼 수 없어. 베르스타(1베르스타는 1.077킬로미터)가 무언지 너희 는 모르니 가엾은 일이야... 여기서 1베르스타만 가면 루빠레프카라는 마을이 있어. 나는 매 일 통을 지고 물을 가지러 간다. 그러나 거기서는 절대로 나에게 먹이를 주지 않는단다. 그 런데 다른 방향에는 예피모프카와 키슬랴코프카가 있어. 그 마을에는 종이 있는 교회가 있 지, 그리고 그 다음에는 스바토 트로이츠코예가 있고, 또 그 다음은 바고야 블렌스크가 있단 다. 바고야 블렌스크에서는 늘 나에게 건초를 주지. 그러나 그곳 건초는 질이 좋지는 않단 다. 그런가 하면 니콜라예프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은 여기서 8베르스타나 떨어진 거리야. 거기서는 매우 좋은 건초와 귀리를 주지. 그렇지만 나는 그곳으로 가는 일만은 좋아하지 않 아.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주인이 마부에게 우리를 몰아치라고 명령하기 때문에 마부가 채찍으로 우리를 아프게 때린단다. 그리고 또 있어. 알렉산드로프카 벨로제르카헤스손, 그곳 역시 먼 거린데... 그렇지만 어찌 너희가 이것을 모두 알 수 있겠는가 말이다! 말하자면 이 것이 세계라는 것이야.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야. 말하자면 단지 중요한 부분이지. 그렇게 말하고 밤색 말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의 아랫입술은 아직 뭔가 중얼거리는 듯이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노령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열일곱 살이었다. 말에 있어서 그것은 사람의 일흔 살과 마찬가지였다. 저는 당신의 지혜로운 말의 뜻은 모릅니다. 그래요,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말에 따르지 도 않겠습니다. 하고 달팽이가 말했다. 저에게는 우엉이 있지요. 그리고 그것으로 만족합니 다. 그도 그럴 것이 저는 벌써 나흘이나 기어다니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우엉은 아직 없어지 지 않았거든요. 이 우엉 저쪽에는 또 다른 우엉이 있지요. 그리고 그 우엉에도 틀림없이 또 다른 달팽이가 앉아 있을 거예요. 그것이면 그만이지요. 그러니 어디로든 뛸 필요가 전혀 없 어요. 그것은 단지 시시한 일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쌓여 있는 잎사귀를 먹으면 됩니다. 만 일 기어가기가 싫지 않았다면, 저는 벌써 이야기하는 당신들에게서 멀리 떠나가 버렸을 거 예요. 당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골치가 아플 뿐이지, 아무 소용도 없어요. 아니 실례합니다만, 도대체 왜 그러시지요? 하고 귀뚜라미가 물었다. 무한이라든가, 그 외의 특별한 좋은 제목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매우 유쾌한 일입니다. 물론 자신의 배를 채울 것만 걱정하는 현실적인 성격도 있기는 합니다. 당신이라든가, 혹은 거기 있는 매우 예쁜 애벌레처럼 말이지요... 아아, 아니예요. 저의 이야기는 그만두세요. 제발, 그만 두세요. 저를 건드리지 마세요! 하 고 애벌레는 슬픈 듯이 외쳤다. 저는 그것을 미래의 생활을 위해서라고 이해하고 있어요. 단지 미래의 생활을 위해서. 그래, 어떤 미래의 생활을 위해서란 말인가? 하고 밤색 말이 물었다. 당신은 모르겠죠. 제가 죽어서 여러 가지 색깔의 날개를 가진 나비가 된다는 걸? 밤색 말이나 도마뱀, 그리고 달팽이는 그것을 몰랐다. 그러나 곤충들은 얼마간의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모두 잠시 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래의 생활에 대해서는 아무도 분 별있는 말을 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확고한 신념에는 존경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하고 마침내 귀뚜라미가 딱딱거리는 소 리로 말했다. 누구든지 또 뭔가 말하고 싶은 분은 없습니까? 아마 당신들은 원하시겠지 요? 하고 그는 파리들 쪽을 돌아다보았다. 그러자 그들 중에서 나이먹은 파리가 대답했다. 저희들은 불편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저희들은 지금 막 방에서 나오는 참입니다. 주부 가 방금 끓여낸 잼을 그릇에 담아서 늘어놓았기 때문에 저희들은 지붕 밑으로 몰래 들어가 실컷 먹었습니다. 저희들은 만족하고 있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잼 속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 러나 어떻게 합니까? 그분은 이 세상에서 이미 충분히 살았지요. 그러니 저희들은 만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고 도마뱀이 말했다. 저는 여러분의 말씀이 모두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만 반면에... 그러나 도마뱀은 그 반면에 어쨌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무엇인지 그녀의 꼬리가 꾸욱 땅에 눌린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잠이 깬 마부 안톤이 밤색 말을 데리러 온 것이었다. 그는 갑자기 그의 큰 장화를 신고 모임에 뛰어들어 그것을 짓밟아 버린 것이다. 파리들만은 잼 투성이가 되어 죽은 자신 들의 어머니를 핥아먹기 위해서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도마뱀은 잘라진 꼬리를 가지고 도 망쳤다. 안톤은 밤색 말의 이마털을 붙잡아 그를 정원에서 끌고 갔다. 통을 얹어 물을 길어 오려는 것이었다. 그는 끌고 가면서, 자, 가자. 이 꼬랑지야! 하고 말했다. 이 말에 대해서 밤색 말은 단지 속삭임으로 대답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도마뱀은 꼬리없이 혼자 남았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꼬리는 자랐다. 그러나 그 것은 언제까지나 끝이 뭉툭하고 거무튀튀한 채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어째서 꼬리를 상했 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도마뱀은 겸손히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저는 자신의 신념을 말 하려고 결심했기 때문에 꼬리가 끊겼습니다. 그녀의 말도 또한 옳았다. 보세볼로드 가르신(1855-1888): 러시아의 소설가. 그는 인간에 대한 인도주의적인 태도와, 인간 사회에 불행을 가져오는 악에 대한 뼈저린 감정을 예술의 기조로 작품을 썼다. 작품으 로는 상봉 , 겁쟁이 , 병사와 장교 , 병사 이바노프의 회상 등이 있다. 살아있는 주검 그날 아침에 내가 눈을 뜨자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어 있었고, 주위는 솟아오른 아침 햇살이 어젯밤에 내린 비로 축축한 대지를 비치고 있어, 이중 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마차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에 나는 작은 과수원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과수원은 이제 황폐한 마당이 되었지만, 그 둘레는 축축하여 숲이 무성하고 좋은 향기로 싸여 있었다. 맑은 하늘 아래서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신다는 것이 얼마나 상쾌한 일긴가. 푸른 하늘에 는 종달새가 지저귀고, 방울같이 맑은 소리는 은구슬처럼 떨어져 내려왔다. 종달새는 아마도 그 날개에 이슬을 싣고 지나갔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노랫소리마저 이슬에 젖은 듯이 느껴 졌다. 나는 모자를 벗고 신선한 공기를 가슴 속 깊숙이 들이마셨다. 나지막한 비탈길 위로 나무 덩굴이 우거진 곳에 벌집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수풀이 마치 두꺼운 벽처럼 우거져 있고, 그 사이에 오솔길이 뱀처럼 꼬불꼬불 뚫려져 있었다. 그 위로는 검푸른 삼나무가 뾰족한 막대기처럼 무성하게 줄기를 뻗고 있었다. 나는 이 오솔길을 따라 꼬불꼬불 돌아서 벌집 앞으로 다가갔다. 그 곁에는 가느다란 나뭇 가지를 얼기설기 엮어 지은 헛간이 있었다. 그것은 겨울 한 철에 벌집을 간수해 두는 곳이 었다. 나는 반쯤 열려있는 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속은 어둡고 고요했으며, 매우 건조했다. 그리고 박하와 향유 냄새가 진동했다. 한 구석에는 네 발이 달린 침대가 놓여 있 고, 그 위에 이불로 덮어씌운 무언가 조그만 것이 있었다. 내가 그곳에서 돌아 나오려고 했을 때, 말소리가 들려왔다. 서방님, 서방님! 표도르 베트로비치! 그것은 힘이 없고 연약한 목쉰 듯한 목소리였다. 마치 갈대가 흔들리며 내는 소리와도 같 았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표도르 베트로비치! 어서 들어오세요. 같은 음성이 되풀이되었다. 그것은 구석에 놓여 있는 침대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나는 그 곁으로 다가갔다. 나는 너무나 놀라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우뚝 서고 말았다. 내 앞에는 살아있는 한 사람이 가로 누워 있었다. 오랜 세월 버려진 누런색 머리칼에 얼굴은 마르고 초췌하여 흡사 성상 같았다. 코는 날카 로워 마치 주머니칼같이 뾰죽하고, 입술은 어디 붙어 있는지 분간할 수조차 없었다. 다만 눈 과 이만이 하얗게 반짝이고 있었다. 수건 밑으로 몇 오라기의 머리칼이 이마 위에 흩어져 있었다. 이불이 겹쳐진 턱 밑에는 구릿빛 작은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얼굴은 상당히 아름다워 보였다. 그렇지만 반면에 그 얼 굴에는 까닭 모를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나는 그녀의 싸늘한 볼 위에 떠오른 고통스러운 미소를 보자, 한층 더 처참하게 생각되었다. 저를 모르시겠어요, 서방님?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나 그 입술은 전혀 움직이 지 않았다. 그러실 수밖에 없을 테지요. 어떻게 저를 아시겠어요? 저를 루케리아예요. 혹시 생각이 나시는지요. 서방님 어머님이신 스타이스코 마님 댁에서 발레를 가르쳤죠... 기억이 나시나요? 합창을 할 때면 지휘를 하기도 했던 나를? 루케리아! 나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르짖었다. 당신이었구려! 네, 서방님. 제가 바로 그 루케리아랍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나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멍한 눈을 내게로 돌리고 움직이지도 못하 는, 우중충한 그녀의 얼굴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이런 일도 있을 수 있을까? 이 미이라같 은 여자가 가장 아름답던 여인, 그 날씬하고 포동포동한 윤기가 흐르던, 그리고 미소를 지으 며 노래부르던 여인이라니! 그 당시 모든 젊은이들의 선망의 대상이던 루케리아에 대해서는 열여섯 살의 소년이던 나 까지도 은근히 연정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 루케리아! 대체 어찌된 일이요? 이윽고 나는 입을 열었다. 네, 아주 끔찍한 일을 당했지요. 괜찮으시다면 제 얘기를 들어주세요. 그 통 위에 앉으세 요. 가까이 오셔서, 그러지 않으면 제 말이 들리지 않을 거예요. 이젠 말도 제대로 못하겠어 요. 하지만 이렇게 만나 뵙게 되니 기쁘네요. 그런데 서방님은 어떻게 알렉세예프같은 곳엘 다 오셨지요? 루케리아는 힘없고 조용한 목소리로 차근차근 말했다. 포수 엘모라이가 이끌고 왔어요. 그렇지만 그보다도 내가 듣고 싶은 것은... 제 신상에 관한 말이죠? 네, 물론 말씀드리지요. 꽤 오래 전이지요. 아마 육, 칠 년도 더 됐을 거예요. 저는 바실리 포리야코프와 깊이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생각나세요? 왜 그 아름 다운 곱슬머리의 근사한 남자 말예요. 서방님 어머님 심부름을 맡아 하던 남자죠. 마침 그 때 서방님은 모스크바로 공부하러 가시고 시골에 계시지 않았지요. 바실리와 저는 서로 몹 시 사랑했어요. 저는 잠시도 그를 잊을 수가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 봄날 새벽이었어요. 날 이 밝을 무렵 일찍 잠이 깬 저는 어쩐 일인지 다시 잠을 이룰 수가 없더군요. 뜰에서는 꾀 꼬리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었지요. 저는 침대에서 일어나 그 소리를 들으려고 층계로 나가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어요. 꾀꼬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쉬지 않고 노래를 불 렀어요. 그런데 느닷없이 누군가가 저를 부르는 듯한 생각이 들었어요. 그것은 루케리아 하 고 다정하게 부르는 바실리의 목소리 같았어요. 저는 주위를 둘러봤어요. 그런데 아마 저는 잠이 덜 깼던 모양이에요. 그만 발을 헛디뎌 층계 위에서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어요. 그러나 저는 별로 크게 다치지 않은 걸로 생각했죠. 곧 일어나서 제 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 으니까요. 하기야 몸 안의 어딘가가 아픈 것 같긴 했지만... 숨을 좀 돌려야겠어요... 잠깐만... 정말 미안해요, 서방님! 루케리아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 나는 그녀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즐거운 듯이 거의 한숨도 쉬지 않고 신음 소리도 내지 않으며, 투덜거리지도 않고 동정을 구하는 빛도 없이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로는. 루케리아는 말을 계속했다. 제 몸이 차츰 여위고 아프기 시작했 어요. 피부색은 검어지고 걸음조차 옮기기 어려웠어요. 그 일이 있은 뒤로는 두 다리를 쓸 수가 없고, 일어설 수도 없게 되어 누워 있기만 했지요. 그러자 식욕이 점차 없어지고 병세 는 더욱 악화되었지요. 서방님 어머님께서는 저를 진찰 받게 해주시고, 입원까지 시켜주셨지 요. 그러나 병세는 조금도 차도가 없었어요. 의사들은 모두 제 병이 무슨 병인지 몰랐어요. 의사는 여러 가지 치료를 해 주었어요. 인두를 불에 달구어 척추를 지지기도 하고, 얼음으로 온 몸을 싸늘하게 식히기도 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어요. 결국에는 몸이 아주 비틀리고 말았지 뭐예요. 그래서 의사는 치료를 해 봤자 소용이 없다는 진단을 내렸고, 불구자를 언제 가지나 댁에 둘 수도 없고 해서 이곳으로 보내신 거지요. 여기에는 친척도 있으니까요. 보시 는 바와 같이 제가 이런 곳에서 이러고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루케리아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이건 너무 해, 이런 곳에 누워 있다니! 나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뒷말이 미처 떠오르지 않아 이렇게 말했다. 그럼 바실리 포리야코프는 어떻게 됐지요? 그것은 매우 바보같은 질문이었다. 그녀는 잠깐 먼 산을 바라보았다. 포리야코프가 어떻게 됐느냐구요? 그이는 저를 동정해 주었어요. 그렇지만 다른 여자와 결혼했지요. 그린노오에 태생의 처녀하구요. 그린노오에를 아시죠? 여기서 과히 멀지 않아 요. 그 여자의 이름은 아그라페나예요. 그이는 저를 몹시 사랑해 주었어요. 그렇지만 젊었으 므로 혼자 살 수 없었던 거죠. 그리고 제 자신이 이 꼴이 되어 가지고 그이의 상대가 될 수 있겠어요? 그이와 결혼한 색시도 사람이 좋고 귀엽게 생긴 처녀였어요. 지금은 아이까지 낳 았어요. 그이도 이 근처에 살고 있으며, 가까운 곳에서 서기 일을 하고 있지요. 서방님의 어 머님이 신원보증을 서 주시고 그곳으로 보내 주셨으니까요. 일을 제법 잘하고 있나봐요. 그럼 당신은 줄곧 이곳에 누워만 있었단 말인가요?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벌써 칠 년이나 돼요. 여름에는 이 헛간에 누워 있지만, 날씨가 추워지면 욕실 쪽으 로 옮겨 달라고 해서 거기 누워 있지요. 보살펴 주는 사람이라도 있나요? 염려해 주는 사람 말이에요. 네, 그러믄요. 어디나 친절한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죠. 저는 완전히 버림받은 것은 아니 에요. 그리고 저는 보기보다는 남에게 수고를 덜 끼치고 지낼 수 있거든요. 음식도 여느 사 람과 같이 먹을뿐더러 물도 이 병에 들어 있답니다. 이 병에는 언제나 깨끗한 물이 담겨 있 고 병까지 손이 닿기도 해요, 한 팔을 아직 쓸 수 있거든요. 그리고 이곳에는 고아 소녀가 있는데 가끔 와서는 제 시중을 들어주지요. 정말 착한 아이에요. 방금 다녀갔는데 혹시 못 보셨나요? 정말 귀엽고 예쁜 소녀지요. 그 소녀가 가끔 꽃 같은 걸 갖다 주지요. 옛날에는 정원에 꽃이 무척 많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한 포기도 없다면서요. 하지만 들에 핀 들꽃도 좋아합니다. 정원의 꽃들보다 더 좋은 향기가 나는 것들이 있어요. 들백합 같은 것들은 정말 향기가 좋아요. 루케리아, 당신은 지루하다거나 처량한 생각이 들지 않나요? 그렇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저는 속이고 싶지는 않아요. 처음에는 못 견딜 것 같았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습관이 되어 그럭저럭 견딜 수 있게 되었어요. 이젠 아무렇지 도 않아요. 세상엔 저보다 더 불행한 분들도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그게 무슨 말이죠?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엔 비바람을 피할 지붕조차 없는 사람도 있고, 또 눈이 먼 사람 도, 귀먼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래도 저는 모든 것을 분명히 볼 수 있고, 무슨 소리나 들을 수 있거든요. 땅 속에서 두더지가 굴을 파는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어요. 그리고 어떤 냄새 라도 맡을 수 있지요. 밭에 호밀꽃이나 마당의 보리수꽃이 피면 누구보다도 먼저 제가 맡지 요. 바람이 꽃향기를 실어다 주거든요.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나는 사람은 저보다도 훨씬 고 통을 당하고 있어요. 그건 사실이에요. 몸이 성한 사람은 누구나 죄에 물들기가 쉽지만, 저 는 죄와는 이제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 되었어요. 조금 전에도 알렉세이 신부님이 성찬식을 베풀러 오셔서, 당신은 참회를 할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있으니 죄를 지을 까닭도 없을 테 니까요. 하고 저에게 말씀하시더군요. 저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마음 속으로 짓는 죄는 어떻 게 하지요? 그러자 신부님이 웃으시며 대답하셨어요. 글쎄... 대단한 죄는 아니겠지요. 그건 사실이에요. 저는 마음 속으로도 큰 죄는 짓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루케리아는 말을 계속했 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저는 무슨 일이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으며, 또한 그 런 일들이 떠오르지 않도록 주의해 왔으니까요. 그러노라면 시간은 훨씬 더 빠르게 지나가 게 마련이지요. 나는 그야말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루케리아, 당신은 늘 혼자 있으면서 어떻게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지낼 수 있다는 거 요? 언제나 잠만 잘 수도 없을 텐데. 아녜요. 서방님! 늘 잠만 잘 정도로 편하진 않아요. 못 견딜 정도로 아픈 건 아니지만, 오 른쪽 몸이 속속들이 쑤시기 때문에 마음대로 잠을 잘 수도 없어요. 이렇게 늘 혼자 누워 있 지만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아요. 저는 다만 제가 살아서 숨을 쉰다는 것 외에는 아무 일에 도 신경이 쓰이지 않아요. 저는 눈을 떠보기도 하고 귀를 기울여보기도 하지요. 꿀벌이 날아 다니며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하고, 비둘기가 지붕 위에 내려앉아 구구거리는 소리 가 들리기도 해요. 암탉은 병아리를 이끌고 빵 부스러기를 주워먹으러 와요. 그리고 참새며 나비들이 날아오기도 하고, 어쨌든 여간 재미나지 않아요. 작년에는 제비가 저 구석에 둥지 를 만들고 새끼를 여러 마리 깠어요. 정말 재미있더군요. 한 놈이 먹이를 물고 돌아와서는 새끼에게 먹이를 주지요. 그리고는 다시 나간답니다. 그러면 또 다른 놈이 곧 돌아오지요. 그런데 이 놈이 둥지로 들어가지 않고 지나쳐 버리는 수가 있어요. 그럴라치면 새끼들은 조 그만 주둥이를 내밀고 짹짹 울지요... 저는 그 제비가 이듬해에도 와 주기를 고대했지만, 들 리는 말에 의하면 어떤 포수가 총으로 쏘았다나 봐요. 그런 새를 잡아 무얼 하겠다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더군요. 제비는 딱정벌레만큼도 소용이 없는 건데... 어쨌든 사냥이란 잔인한 짓 같아요. 나는 제비를 쏘지는 않았어요. 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그런데 한 번은! 루케리아는 말을 계속했다. 아주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요. 느닷없이 토끼 한 마리가 뛰어들어오지 않겠어요. 산토끼 말예요. 아마 사냥개한테라도 쫓긴 모양이에 요. 문으로 황급히 뛰어 들어와서는 오랫동안 제 옆에 몸을 숨기고 있었어요. 연신 코를 벌 름거리고 수염을 비쭉거리면서요... 그러면서 저를 쳐다보질 않겠어요? 아마 제가 무섭지 않 았던가봐요. 한참 있다가 살금살금 일어서더니 뛰어 나갔어요. 그때의 모습을 어떻게 말씀드 리면 좋을까요. 참으로 귀여운 토끼였습니다. 루케리아는 우습지 않느냐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를 즐겁게 해 주려고 미소 를 지었다. 그녀는 혀끝으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겨울이 되면 아무래도 몸이 더 나빠지는 것 같아요. 늘 어두컴컴하거든요. 촛불을 켜는 것도 그렇고 또 켠들 모슨 소용이 있겠어요? 책을 읽을 때나 필요하지요. 전 본래 독서를 좋아했지요. 그렇지만 무엇을 읽으면 좋을까요? 읽을 거라곤 아무 것도 없으니 말예요. 그리 고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손으로 들 수가 있어야죠. 알렉세이 신부님께서 위안이 될 거라면서 달력을 가져왔지만, 다시 생각하시곤 소용이 없을 거라면서 도로 가져가셨어요. 그 러나 어두운 속에서도 귀를 기울이면 언제나 무슨 소리든 들려요.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라든 가 또는 쥐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라든가. 아무 것도 생각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은 바로 이 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이지요. 그리고 저는 쉬지 않고 기도를 드리고 있지요. 루케리아는 잠 시 숨을 돌린 다음 말을 계속했다. 사실 저는 무어라고 기도를 드려야 좋을지 잘 알진 못 해요. 하지만 하나님을 괴롭혀 드릴 필요가 어디 있겠어요? 새삼스럽게 무엇을 바라겠어요? 하나님은 제게 필요한 것을 더 잘 알고 계셔요. 하나님은 제게 십자가를 주신 거지요. 저를 사랑하시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저는 임종의 기도, 마리아의 찬미, 고뇌하는 자들의 소망을 되풀이해 외우고는 다시 조용히 드러눕지요. 아무 생각도 않고 또 하는 일도 없이 나날을 보내고 있는 거죠.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침묵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좁은 통 위에 꼼짝도 않고 앉 아 있었다. 내 앞에 누워 있는 이 무참한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나에게 전해져 왔다. 나는 무엇인가 마비된 것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루케리아! 하고 내가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을 마을에 있는 가장 좋은 병원에 입원시키 고 싶은데... 어때요? 아직 치료하면 나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이대로 혼자 버려둘 수는 없 구요. 루케리아의 미간이 약간 움직였다. 아녜요. 제발 병원 소린 하지 마세요. 그녀는 오히려 못마땅하다는 듯이 나직한 목소리 로 대답했다. 제 일에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그런 곳에 가면 오히려 괴로움만 더 당할 뿐 이에요! 이젠 고칠 수 없어요. 언젠가도 어떤 의사가 저를 진찰해 보겠다는 걸 완강히 거절 했지만, 그는 듣지 않고 저를 이리저리 뒤척이면서 손발을 두들겨보기도 하고 잡아당겨보기 도 하면서 제게 말하더군요. 나는 학자이므로 학문을 위해 이런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당 신은 불평을 하시면 안 됩니다. 나는 여러 가지 학문상의 공로로 상도 받았고, 당신같은 사 람들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의사는 여기저기 두드려보고 나서 제 병명을 말해 주었어 요. 무언가 꽤 긴 이름이었어요. 그리고 그는 가 버렸어요. 그후 한 주일 동안은 뼈가 쑤시 고 아파서 혼이 났어요. 서방님은 저더러 늘 혼자 있느냐고 말씀하시지만, 언제나 그런 건 아니예요. 마을 사람들도 가끔 들여다봐 주지요. 그렇다고 폐를 끼치는 건 아니지만요. 마을 처녀들도 와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지요. 그리고 순례하는 여인들이 길을 잘못 들 어 여기 와서는 예루살렘의 이야기며 갈릴리의 이야기, 그 밖에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재미 나는 이야기들을 들려주기도 해요. 게다가 저는 혼자 있어도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편 이 좋은 걸요. 정말 그렇습니다. 그러니 서방님은 제 걱정일랑 조금도 하지 마세요. 병원같 은 곳에 제발 보내지 말아 주세요. 호의만은 감사하지만 제발 제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을 쓰지 말아 주세요. 부탁해요. 그렇다면 좋도록 해요. 루케리아, 나는 다만 당신을 위해서 한 말입니다. 서방님이 저를 위해 염려하시는 건 잘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서방님, 저를 도와주시겠다 는 것이 뜻대로 될 것 같아요? 사람은 남의 마음 속을 알 수 없는 법이거든요. 그리고 사람 은 누구나 자기 일을 스스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서방님은 제 말을 믿지 못하 시겠지만, 사실 저도 가끔 외로운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리고 이 세상에는 저 하나밖에 아무도 없는 것같이 생각되기도 하지요. 다만 저 혼자 살고 있는 것같이 말예요. 그러나 한 편 누군가가 저를 축복해 주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거든요... 그리고 저는 가끔 이상한 환 상에 사로잡히기도 해요. 대체 어떤 환상인데요? 루케리아! 뭐라고 설명하기도 어려운 환상이에요. 게다가 보는 즉시 잊어버리고 말아요. 마치 구름 같은 것이 공중에서 내려와 확 퍼지면서 둥둥 뜨는 것 같은 상쾌한 기분이 되거든요. 그렇 지만 그게 뭔지 알 수 없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곁에 있을 때는 전혀 보이지 않아요. 그리고 그럴 때는 제가 불행하다는 생각밖에는 안 들어요. 루케리아는 괴로운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호흡도 수족과 마찬가지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었다. 서방님은 제 일을 몹시 염려하시는데 제발 그러지 마세요. 서방님께서 마음 놓으시도록 다른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혹 기억 나세요? 제가 젊었을 때는 얼마나 활달했는지? 그야말로 말괄량이였지요. 그래서 그런지 저는 지금도 툭하면 노래를 부르곤 해요. 노래를 불러요, 당신이? 예. 옛날 노래며, 흥겨운 노래, 캐럴송 같은 여러 가지 노래를 부르죠! 저는 노래를 많이 기억하고 있어요. 아직도 잊어버리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무도회의 노래만은 안 불러요. 이 런 몸으로 춤을 출 수가 있어야지요. 어떤 의미에서 부르죠? 기분 전환을 위해선가요? 네, 기분 전환을 위해서죠. 소리를 크게 낼 수는 없지만, 옆에서 알아들을 수는 있지요. 아까 소녀가 저를 돌봐준다고 말씀드렸죠. 그 소녀는 아주 똑똑한 아이예요. 벌써 노래를 네 가지나 배웠거든요. 제 말이 믿어지지 않으시죠?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곧 노래를 불러드 릴 테니까요. 루케리아는 숨을 들이마셨다. 이 산송장 같은 인간이 노래를 부르려고 한다는 것이, 나로 하여금 말할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했다. 그러나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겨우 들릴 정도의 맑고 깨끗한 노랫소리가 귓전을 울려왔다. 노래는 한 가지, 두 가지 계속되었다. 그녀는 목장에서 라는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노래 했지만 돌같이 굳은 그녀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그 눈도 한 곳만을 응시하고 있었 다. 그러나 한 가닥의 연기처럼 주위를 뒤흔들며 사라지는 가느다란 그녀의 노랫소리는 듣 는 이의 심금을 울렸다. 그녀는 그 속에다 모든 상념을 부어 넣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어 느 새 내 마음 속을 차지하고 있던 두려움은 씻은 듯이 가셔 버렸다. 그리고 내 가슴 속에 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연민으로 차올랐다. 아아, 이젠 안 되겠어요, 힘이 없군요. 서방님을 만난 기쁨으로 가슴이 두근거려서요. 그녀는 눈을 감았다. 나는 나뭇가지와도 같은 그녀의 조그만 손가락 위에 나의 손을 포갰다. 금빛 속눈썹에 에 워싸인 축축한 눈꺼풀은 다시 감기고 조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어두컴컴한 속에서도 그녀의 눈은 눈물에 젖은 채 빛나고 있었다. 나는 꼼짝 않 고 서 있었다. 전 바보였어요! 루케리아는 뜻밖에도 야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눈을 깜박거리며 눈물을 삼키려고 했다. 정말 부끄럽군요. 내가 왜 이럴까! 이런 일은 통 없었는데. 작년 봄 에 바실리가 다녀간 이후로는 없었던 일입니다. 그 사람이 제 곁에 앉아 서로 이야기할 때 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떠나고 나니까 몹시 쓸쓸해져 많이 울었지요. 저는 왜 눈물 을 흘렸을까요? 하기야 여인들이란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곧잘 눈물을 흘리기 마련이니까 요. 서방님, 손수건 갖고 계시죠? 미안하지만 좀 닦아주시겠어요? 나는 즉시 그녀의 눈언저리를 닦아주었다. 그리고 그 손수건을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그녀 는 처음에는 사양했다. 이런 걸 놓고 가신들 제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 손수건은 매우 값진 것일 뿐만 아니라 아직 하얗고 깨끗했다. 그녀는 가냘픈 손가락으 로 손수건을 잡더니 놓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는 차츰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그녀의 용 모를 환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의 창백한 구릿빛 얼굴에는 불그스레한 홍조가 떠돌고 있 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녀의 얼굴에서는 아직도 지난날의 아름답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서방님, 저에게 잠을 잘 수 있느냐고 물으셨죠? 루케리아는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잠자는 시간은 불과 얼마 안 되지만, 잠잘 때마다 꿈을 꾸지요. 그건 정말 아름다운 꿈이에 요! 꿈 속에서는 앓아 누워 있진 않아요. 언제나 젊고 건강한 몸이죠... 다만 한 가지 안타까 운 것은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려고 하면 마치 쇠사슬에 묶여 있는 것같이 몸이 부자유 한 것이지요. 언젠가는 정말 굉장한 꿈을 꾸었어요! 그 얘기를 들려 드릴까요? 그럼 들어보 세요. 저는 주위가 온통 키가 큰 밀이 황금빛으로 무르익은 어느 농장의 밀밭에 서 있었어 요. 저는 그때 붉은색의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서 있었어요. 그런데 그 개는 본래 심술궂어서 자꾸만 저를 물어뜯으려고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저는 낫을 한 자루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 은 보통 낫이 아니고 낫 모양을 한 달이었어요. 저는 그 달로 밀을 메어야 했어요. 그러는 동안에 저는 더위에 지치고 달빛이 저를 노려보는 것 같아 그만 몸이 축 늘어지고 맥이 빠 졌어요. 주위에는 들국화가 가득 피어 있었어요. 그리고 그 꽃송이들은 모두 저를 바라보고 있었지요. 저는 정신없이 그 꽃을 따려고 했어요. 바실리가 오기로 되어 있어서 화환을 만들 려고 했지요. 악속시간까지면 충분히 화환을 엮을 수 있을 줄 알았지요. 그래서 꽃을 꺾기 시작했지만, 아무리 꺾어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 버리잖겠어요. 그래서 화환을 만들 수가 없 었어요. 계속 그러고 있는데 누군가가 제 곁에 와서 루케리아! 루케리아! 하고 부르는 거예 요. 아아, 시간을 맞추지 못했구나. 결국 못 만들고 말았구나 하고 저는 생각했지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지라 저는 화환 대신 달을 머리 위에 얹었어요. 제가 그것을 머리 위에 얹자 곧 온 몸에서 광채가 나면서 사방을 환하게 비추는 것이었어요. 그러자 별 조화가 다 있죠! 밀밭을 가로질러 저에게 다가온 분은 바실리가 아니라 예수님이 아니겠어요? 저도 그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어요. 그림으로 본 모습과도 달랐어요. 그렇지만 그분은 틀림없는 예수님이었어요. 수염이 없고 키가 크며 젊으셨어요. 몸에는 흰 옷을 입고 금빛 허리띠를 두르고 계셨어요. 예수님께서는 제게 손을 내밀며 말씀하셨어요. 두려워 마 라, 나의 어린양아. 나를 따르라, 그리하여 하늘나라의 합창과 무도회를 지휘하며 낙원의 노 래를 부르라. 하고요. 저는 그 손에 꽉 매달렸어요. 개는 제 발뒤꿈치를 따라왔어요. 우리는 갑자기 공중으로 떠올랐어요. 예수님은 앞장서서 기러기같이 긴 날개를 펼치시고 저는 그 뒤를 따라갔어요. 그러나 저의 개는 우리를 뒤쫓질 못했어요. 저는 그 때에야 비로소 깨달았 어요. 그 개가 내 병이라는 것을, 그리고 천국에는 병이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말예요. 루 케리아는 잠시 숨을 돌렸다. 그리고 말을 계속했다. 그 밖에 또 한 가지 본 것이 있어요. 그건 아마 환상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그게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겠어요. 제가 이 오 두막집에서 자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돌아가신 부모님이 찾아오셔서 아무 말 없이 제 게 깍듯이 절을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물었지요. 아버님, 어머님, 대체 무슨 까닭으로 제게 절을 하십니까? 그러자 부모님이 대답하셨어요. 무슨 까닭이냐구? 너는 이 세상에서 온갖 풍파를 다 겪었다. 그 때문에 너는 네 영혼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짐마저 벗게 하 였다. 그래서 우린 매우 편하게 지내고 있단다. 너는 네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의 죄마저 벗 겨 주었단다. 이렇게 말씀하시며 또다시 저에게 절을 하시는 것 같더니 그대로 사라지셨어 요. 그 뒤에는 별밖엔 다른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이 일이 자꾸 맘에 걸려 고해성 사를 할 적에 신부님께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신부님께서 그것은 환상이 아닙니다. 환영 은 다른 데 나타납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지요. 루케리아는 말을 계속했다. 꿈 속에서 저는 길가 버드나무 밑에 앉아 있었어요. 저는 마치 순례자처럼 지팡 이를 들고, 어깨에는 전대를 메고, 손수건으로 이마를 동여맸지요. 그리고 저는 먼 곳으로 순례를 떠나야만 했어요. 순례자들은 잇따라 내 곁을 지나갔어요. 그들은 터덜터덜 걸어와서 는 모두 같은 방향으로 사라졌어요. 어느 누구나 몹시 피곤해 보였으며, 모두 비슷한 모습들 을 하고 있었어요. 저는 그들 가운데서 서성거리고 있는 한 여인을 보았어요. 그 여인은 다 른 사람들보다 건장하고 이상한 옷을 입고 있었어요. 그것은 러시아 의복도 아니었어요. 얼 굴도 거칠고 험상궂은 것이 여느 사람과는 달랐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 여인의 곁을 피해 가더군요. 그런데 그 여인이 갑자기 성큼성큼 제게로 다가오는 것이었어요. 그러 더니 발걸음을 멈추고 저를 뚫어질 듯이 쳐다보는 것이었어요. 그 크고 누런 눈은 마치 매 의 눈과 같았어요. 저는 그녀에게 물었어요. 누구시지요? 그러자 그 여인은 대답했어요. 나 는 당신을 데리러 온 죽음의 사자요. 그러나 저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어요. 오히려 몹시 기 쁘더군요. 저는 성호를 그었어요. 그러자 죽음의 사자인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어요. 루케리 아, 미안하지만 아직 당신을 데려갈 수는 없소. 잘 있어요! 저는 이 말을 듣고 몹시 슬퍼했 어요. 저를 데려 가세요, 아주머니. 제발 데려가 주세요! 제가 애원하자 저의 사자는 뒤돌아 보면서 입을 열었어요. 그러나 무슨 소리인지 분명히 알아들을 수 없었어요. 성 베드로 축 일이 지난 다음에... 이 말을 듣자마자 저는 잠에서 깨어났어요, 정말 이상한 꿈이었지요... 루케리아는 천장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그런데 저는 안타깝게도 가 끔 일주일씩이나 한잠도 못 이룰 때가 있어요. 작년엔 어느 아주머니가 찾아오셔서 수면제 를 한 병 주셨어요. 그리고 한 번에 마흔 방울씩 마시라고 하시더군요. 그 약은 효과가 좋아 서 잠을 잘 이룰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 약도 이젠 거의 다 떨어졌어요. 서방님은 그게 무 슨 약인지 아세요? 어떻게 하면 그 약을 구할 수 있을까요? 그 여인은 필시 루케리아에게 모르핀제를 구해 주었을 것이다. 나는 그것과 같은 약을 구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그녀의 끈질긴 인내력에 다시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서방님도!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인내니 뭐니 하세요. 그게 누구였더라? 그렇지 고행자 시메온이었어요. 그분이야말로 인내가 대단한 분이지요. 사십 년 동안이나 기둥 위에서 살았다지 뭐예요? 그리고 또한 성인은 가슴까지 땅 속에 파묻혀 얼굴 을 개미 떼한테 파먹혔다더군요? 어느 학자한테서 들은 이야기인데, 그 중에는 이런 것도 있어요. 어느 나라에 한때 이슈마엘군이 쳐들어 왔대요. 그들은 그 나라 백성들을 괴롭히고 죽이는 등 온갖 행패를 다 부렸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러자 순결한 처녀가 나타났어요. 그 처녀는 큰 칼을 차고 8파운드나 되는 무거운 갑옷을 입고 나서서 그들의 원수인 이슈마 엘군을 공격하여 멀리 쫓아내었다니 않아요? 적을 몰아낸 그녀는 적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더군요. 나를 화형에 처해 주시오. 내 나라를 위해서 나는 화형을 받겠다고 맹세했으니까 요. 그러자 이슈마엘군은 그 여인을 붙들어 불에 태워 죽였대요. 그 때부터 그 나라 사람들 은 자유를 되찾게 되었대요! 이 얼마나 훌륭한 행위입니까, 그런 것에 비한다면 저의 경우 는 아무 것도 아니지요. 나는 어떻게 그녀가 잔다르크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나는 그녀의 나이를 물어보았다. 스물 여덟이나 아홉... 아직 서른까진 안되었어요. 그런데 왜 나이 같은 걸 물으시죠? 저 는 또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루케리아는 갑자기 자지러질 듯이 기침을 했다. 너무 이야길 많이 해서 그런가 보군요. 내가 입을 열었다. 아마 그런가 봐요. 그녀는 간신히 기침을 참으며, 겨우 들릴 정도의 작은 소리로 말했 다. 이제는 말을 그만 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지요. 그렇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서방님이 떠나시면 저는 또 말없이 누워만 있을 텐데요. 그런데 어쨌든 가슴이 꽉 메이는 것 같군요. 나는 약을 보내 주겠다고 거듭 말하고 나서 그녀와 작별을 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이 있 으면 말하라고 당부했다. 아무 것도 필요 없어요. 저는 이 상태로 만족해요. 그녀는 감격한 어조로 말했다. 부디 서방님의 가족 모두가 안녕하시기를 빕니다. 서방님, 어머님께도 안부 전해 주세요. 이 근처 의 농부들은 모두 가난해요. 만일 소작료를 조금이라도 덜어 주신다면... 농부들은 농토도 적 고 돈도 없지 않겠어요? 그렇게 해 주신다면 모두들 얼마나 고마워할까요. 그렇지만 저는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어요. 저는 만족하니까요. 나는 그녀의 소원을 이루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는 나를 다시 불러 세웠다. 서방님, 혹시 기억나세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과 입 술에서는 이상한 광채가 발했다. 옛날에 제 머리카락이 어떠했는지 생각나세요? 무릎까지 닿는 치렁치렁한 긴 머리였지요. 그걸 큰 맘 먹고 잘라버렸지요. 벌써 오래 됐어요. 정말 탐 스러운 머리였지요. 그렇지만 몸이 이렇게 되고 보니 가눌 수도 없어 미련없이 잘라 버리게 되었죠. 그럼 서방님, 안녕히 가세요! 이젠 더 이야기할 기력도 없군요. 나는 그날 사냥을 나서기 전에 그 마을의 관할 순경과 루케리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 다. 그는 나에게 루케리아를 마을에서 살아있는 송장이라고 부른다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그 녀는 불구의 몸이지만, 남에게 전혀 폐를 끼치지 않을뿐더러 한 마디의 불평이나 불만도 털 어놓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쉬운 소리를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일을 해 주어도 기뻐해요. 그야 말로 보기 드문 선량한 여인이지요. 순경은 말을 계속했다. 그 여자가 하나님에게 벌을 받 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그 여 인이 벌을 받고 있는지 아닌지... 어쨌든 그런 것을 판단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저 두고 볼 뿐이지요. 몇 주일 후 나는 루케리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의 죽음의 사자는 성 베드로 축일이 끝나자 그녀에게 찾아간 것이다. 그날 루케리아는 종소리를 듣고 있었다는 것이다. 알렉세예프에서 교회당까지는 5마일도 더 될 뿐만 아니라 그날은 주일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루케리아는 사람들에게 종소리가 교회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니고 공중에서 들려온다고 했 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그 종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던 모 양이다. 투르게네프(1818-1883): 러시아의 소설가.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페테르부르크 대학을 마 치고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844년에 서사시 파리샤 를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 고, 여러 작품들을 모아 엮은 사냥꾼의 일기 로 작가로서의 확고한 인정을 받았다. 러시아 사회의 현실과 문제점들을 주제로 많은 작품을 발표했으며,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함 께 러시아의 3대 문호로 꼽힌다. 주요작품으로 루딘 , 그 전날밤 , 아버지와 아들 , 처녀집 등이 있다. 쥘르 아저씨 수염이 하얗게 난 늙은 거지가 우리들 앞에 손을 내밀었다. 친구인 조제프 다브랑쉬가 그 에게 5프랑을 쥐어 주었다. 내가 놀라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 늙은 거지를 보면 언제나 머릿속에 어떤 추억이 떠오른다네. 이젠 그 이야기를 자네 에게 해주려네. 우리 집안은 아브르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리 넉넉한 형편이 못되었네. 간신히 꾸려 나가 는 형편이었지. 아버지는 직장에서 언제나 늦게 돌아오셨지만, 수입은 별로 많지 못했고, 그 리고 누나도 둘이나 있었네. 살림이 옹색하였으므로 어머니는 괴로움을 당하셨지. 그래서 때때로 아버지의 귀에 거슬 리는 말도 하고, 또 은근히 비꼬기도 하구...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난처해 하셨네. 아버지는 아무 대꾸도 못하고 손으로 땀을 씻으려는 듯이 이마를 매만지는 것이었네. 그러나 실상 이 마에는 땀이 배어 있지 않았네. 나는 그분이 몹시 괴로워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네. 우리는 모든 면에서 돈을 아껴 썼지. 혹시 어떤 사람이 식사에 초대해도 답례하기가 뭣해서 짐짓 가지 않았으며, 식료품 같은 것도 깎고 깎아서 사들이고, 그 밖에 다른 물건도 주로 재고품 을 사곤 했다네. 누이들은 자기 옷을 손수 지어 입고, 1미터에 15쌍팀 밖에 안하는 레이스를 살 때에도 오랫동안 흥정을 하곤 했지. 식사도 기름기 있는 수프나 소스로 요리한 고기뿐이 었네. 물론 위생적이고 영양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난 좀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었네. 나는 단추를 잃어버리거나, 바지를 좀 찢기기만 해도 크게 야단을 맞곤 했네. 그러나 주일 이면 모두 저마다 정장을 하고 부두로 산책을 나갔었네. 아버지는 플록코트를 걸치시고 실 크햇을 쓰시고 장갑을 끼시고는, 축제일 때처럼 화려한 옷차림을 한 어머니에게 팔을 내맡 기시곤 했지. 누이들은 제일 먼저 떠날 준비를 마치고는 출발 신호만을 기다리고 있는 거야. 그러나 막상 떠나려고 하면, 아버지의 코트에 눈에 잘 띄지 않던 얼룩이 발견되곤 했는데, 그럴 때면 부랴부랴 헝겊 조각에 벤젠을 적셔 가지고 지워버리시곤 했다네. 아버지께서는 머리에 실크햇을 쓰시고 셔츠 바람으로 이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계셨으 며, 어머니는 근시 안경을 고쳐 쓰시고는 장갑을 더럽힐까봐 벗어놓고, 부리나케 그 작업을 하셨다네. 우리 일행은 위풍도 당당하게 길을 떠났네. 두 누님은 서로 팔장을 끼고 앞장을 섰지. 혼 기가 되어 사람들의 눈에 띄게 하려는 생각이 아니겠나. 나는 어머니의 왼쪽에, 아버지는 그 오른쪽에 서서 나란히 걷기 시작했지. 나는 지금도 그 때 가난한 부모님들이 그 주일날 소 풍에서 애써 위엄을 보이려고 하시던 일이 눈앞에 선하네. 두 분 다 의젓한 표정으로 마치 무슨 중대한 일이 오직 엄숙한 태도에 달려 있기나 한 것처럼, 목을 곧게 세우시고 다리를 꼿꼿이 펴며 점잖게 걸어가셨네. 그리고 아버지는 주일마다 먼 미지의 바다에서 큰 배들이 항구에 들어오는 것을 보셨는 데, 그럴 때마다 으레 이렇게 말씀하셨다네. 쥘르가 저 배에 타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버지의 동생인 쥘르 아저씨는 우리 집안의 유일한 희망이나 다름없었네. 한때는 식구들 이 저마다 무서워했지만 말이야. 나는 어릴 적부터 그 아저씨의 인상이 내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다네. 나는 아저씨가 미국으로 떠나던 날까지 어떤 생활을 해왔는지 잘 알고 있었어. 그 무렵에 아저씨의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면, 우리는 작은 목소리로 귓속말을 하곤 했지. 아저씨가 아마 나쁜 일을 저질렀던가봐. 말하자면 돈을 좀 낭비했던 모양이야. 그런 일은 가난한 집안에서는 무엇보다도 큰 죄가 아니겠나. 부잣집에서는 사내가 난봉이나 별 짓을 다하지만 말일세. 그래봐야 세상 사람들은 다만 난봉꾼이라고 웃어넘길 테지. 그러나 가난한 집안의 자식이 부모의 재산을 축냈다면 그건 문제가 다르다네. 금방 고약한 놈이요, 못된 놈 이요, 불효자로 낙인이 찍히게 되거든. 아무튼 쥘르 아저씨는 아버지가 크게 기대를 걸고 계시던 유산을 상당히 축낸 것이 사실 이야. 물론 자기 몫을 다 없앤 다음의 일이네. 그러자 누가 아저씨에게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태워 준 모양이야. 그 무렵에는 사람들이 아 브르에서 뉴욕으로 가는 상선을 타고 미국으로 떠났다네. 아저씨는 미국에 가자마자 무슨 장사를 시작했다고 편지로 알려 왔네. 그 편지의 사연인 즉, 그간 돈을 좀 벌게 되었으니 아버지께 끼친 피해를 변상해 드리고 싶다는 거야. 아무튼 이 편지는 우리 가족들에게 커다란 감격을 주었네. 남들의 수군거림처럼 한 푼의 값어치도 없는 쥘르가 별안간 훌륭한 사람, 얌전한 사람, 다브랑쉬 가문의 어느 누구보다도 손색이 없 는 성실한 진짜 다브랑쉬가 되었으니 말일세. 어느 선장의 말에 의하면, 아저씨는 큰 가게를 빌려서 유망한 장사를 한다는 거야. 2년 후에 온 두 번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네. 사랑하는 필립 형님! 저는 몸 건강히 잘 있습니다. 저의 건강만큼은 걱정하지 마십사 하 고 이 편지를 드리는 바입니다. 사업도 잘 되어갑니다. 저는 내일 남미로 긴 여행을 떠나려 합니다. 어쩌면 몇 해 동안 소식도 전해 드리지 못하고 지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편지를 드리지 못하더라도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 밑천 잡으면 아브르로 돌아가겠습니다. 아 마 머지 않은 장래에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함께 행복하게 살 것을 빌며... 이 편지는 대뜸 우리 집안의 복음이 되어 버렸다네. 모두들 심심하면 이 편지를 꺼내 읽 고 남들에게 보여 주기도 했다네. 아닌게 아니라,그 후로 십 년 동안이나 아저씨는 감감무소식이었어.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날이 갈수록 기대가 커지는 모양이셨어. 그리고 어머니까지도 때때로 이런 말을 하셨네. 쥘 르 서방님이 돌아오기만 하면 우리 형편이 한결 나아질 텐데. 적어도 고생은 벗어나게 될 거야. 서방님은 그런 사람이니까.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주일마다 수평선 저쪽으로부터 커다란 까만 기선이 뱀처럼 구불구불 하늘로 연기를 뿜으며 오는 것을 보면서, 같은 말을 되풀이하곤 하셨네. 쥘르가 저 배에 타 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고는 마치 아저씨가 손수건이라도 흔들면서 필립 형님... 하고 소리치기나 하는 것처 럼 기다리곤 했었네. 아버지는 그가 분명히 돌아올 것을 전제로, 수많은 계획을 세웠다네. 아저씨가 벌어온 돈 으로 앵구우빌 근방에 조그마한 농장을 하나 사려고도 하셨네. 아버지는 아마 진작 그 땅을 사들일 예비 교섭도 하셨을지 모르겠네. 그 때 큰누이는 벌써 나이가 스물여덟이고, 작은누이는 스물여섯이었지. 그런데 두 누이가 다 미혼이라 그것이 또 온 집안에 적지 않은 두통거리였다네. 그런데 마침 작은 누이에게 청혼을 하는 사람이 나타났네그려. 회사에 다녔는데 돈은 없 지만 정직한 사람이었어. 어느 날 저녁에 보여준 쥘르 아저씨의 편지가 이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망설임을 버리고 결단을 내리게 했으리라고 나는 지금도 믿고 있네. 아무튼 그의 청혼은 성립되어, 결혼식을 올린 다음 가족들이 함께 저지로 간단한 여행을 떠나기로 하였네. 저지는 가난한 사람들이 여행하기에는 안성맞춤이거든, 우선 가까우니까. 정기선으로 바다 를 건너가면 타국땅에 내릴 수 있네. 그 조그마한 섬은 영국 땅일세. 그러나 프랑스 사람도 배로 두 시간만 가면 이웃 나라 사람들 눈앞에 나타나서 그 영국식 천막으로 덮여 있는 섬 의 풍습을 살펴볼 수가 있단 말이야. 이 저지 여행이 집안 식구들의 커다란 관심사로 한시 도 잊을 수 없는 꿈이 되고 기대가 되어버렸네. 드디어 출발하는 날이 다가왔네. 나한테는 그것이 마치 어제 일처럼 눈앞에 선하네. 그랑 빌 부두에 머문 증기선은 발동을 걸고 있었네. 아버지는 침착성을 잃고 우리가 짐짝 세 개 를 배에 싣는 것을 감독하시고,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듯 큰누이의 팔을 붙들어 주셨네. 큰누 이는 동생이 떠난 후로는 거의 정신나간 사람처럼 되었네. 마치 혼자 둥지에 남겨진 병아리 의 신세라고나 할까? 한편 신혼부부는 언제나 뒤쳐져 있었으므로 나는 번번이 뒤돌아보곤 했네. 배에서 고동소리가 울려와 우리는 모두 배에 올라탔네. 배는 부두를 떠나 푸른 대리석 탁 자처럼 평평한 바다를 뒤로 하고 떠났네. 우리는 좀처럼 여행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흔히 갖는 자부심과 만족감으로 멀어져 가는 해안선을 바라보고 있었네. 아버지는 바로 그날 아침에 얼룩을 모조리 지워버린 코트 위로 배를 내밀고, 벤젠 냄새를 주위에 온통 퍼뜨리고 계셨지. 외출하실 때는 언제나 그 냄새를 퍼뜨리므로, 나는 그 냄새를 맡기만 하면 주일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 아버지는 갑자기 두 신사가 두 명의 귀부인에게 굴을 권하고 있는 광경을 보았네. 누더기 를 걸친 한 늙은 선원이 칼로 껍질을 까서 신사들에게 넘겨주면, 그들은 그것을 부인들에게 내미는 것이었네. 부인들은 깨끗한 손수건에 그 껍질을 올려놓고는 옷을 더럽힐까봐 입을 내밀고 물을 빨아 마시고는 껍질을 바다로 내던지곤 했네. 아버지는 달리는 배 위에서 굴을 먹는 것이 퍽 인상적이었던가봐. 그리하여 그것을 세련 된 좋은 취미로 생각하시고는 어머니와 누나들의 곁으로 다가오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네. 굴 좀 사 줄까? 어머니는 돈이 아까워 주저하였지만 누나들은 곧 찬성했네. 그러자 어머니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씀하셨지. 나는 배가 아플까봐 겁이 나요. 애들이나 사 주세요. 그러나 많이 사 시면 안돼요. 탈이 날지 모르니까. 그리고는 나에게 이렇게 덧붙여 말씀하셨네. 조제프에 게는 필요 없어요. 사내애들은 버릇이 나빠지면 안되니까요. 그리하여 나는 할 수 없이 어머니 곁에 남아있게 되었지만, 마음 속으로는 이런 차별 대 우를 받는 것이 못마땅했네. 나는 아버지가 위풍당당하게 두 딸과 사위를 데리고 그 누더기 를 걸친 늙은 선원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눈여겨보고 있었네. 두 귀부인은 방금 자리를 떠난 뒤였네. 아버지는 굴물을 흘리지 않고 먹는 방법을 누나들 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손수 시범을 보이시려고 굴 하나를 손에 들었네. 그 부인들을 흉내 내려고 하였으나 굴물이 금방 코트에 떨어지고 말았네그려. 어머니의 투덜대는 소리가 들려 왔지. 잠자코 계셨으면 좋잖아요. 그러자 갑자기 아버지는 긴장한 얼굴로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며, 굴 껍질을 까는 선원을 둘러싼 식구들을 뚫어지게 바라보고는 불쑥 우리 앞으로 오시지 않겠나. 얼굴이 몹시 창백 하고 눈빛이 이상하게 보였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어머니께 이렇게 말씀하셨네. 저기 저 굴 껍질을 까는 사내는 쥘르를 꼭 닮았어. 어머니는 영문을 몰라 이렇게 반문하셨네. 어느 쥘르요? 물론... 내 동생 말이야... 미국에서 잘 살고 있으니까 망정이지, 그렇지만 않다면 틀림없 이 쥘르라고 착각하게 생겼어. 어머니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씀하셨네. 당신 미쳤구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왜 그런 당치 않은 소리를 하세요? 그리도 아버지께서는 여전히 우기셨네. 그럼 당신이 직접 가서 확인해 보구려.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딸들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겨놓았네. 나는 그 사내를 유심 히 바라보았지. 늙고 추하고 주름살이 굉장한 그는 자기 일에 열중하느라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었네. 어머니는 다시 돌아오셨지. 보아하니 후들후들 떨고 계시지 않겠나. 어머니는 다급한 어조 로 말씀하셨네. 내가 보기에도 틀림없이 그 서방님 같아요. 선장에게 가서 알아보세요. 그 러나 조심해야 돼요. 형편이 이렇게 되었다면 우리에게 짐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아버지는 선장을 찾아가셨네. 나도 뒤쫓아갔지. 웬일인지 가슴이 무척 설레었어. 선장은 키가 크고 메마르고 양 볼에 구레나룻을 기른 신사로, 갑판 위를 마치 인도인들의 우편선을 지휘하는 사람처럼 의젓한 모습으로 거닐고 있었네. 아버지는 선장 앞으로 점잖게 다가가서, 찬사를 섞어가며 선장 직책에 관한 것을 몇 가지 물으셨네. 저지 섬의 중요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생산물은 무엇입니까? 인구는 얼마나 됩니까? 풍 속과 습관은 어떻습니까? 토질은요...? 마치 미합중국을 화제로 삼고 있는 것같은 말투였네. 그리고는 우리가 타고 있는 선박 익 스프레스호에 관한 이야기를 끄집어내더니, 화제가 자연히 승무원에게로 옮아갔네. 아버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마침내 이렇게 물었네. 저기 굴 껍질을 까는 사람이 있지요? 무척 재미있 는 사람같아 보이는데 저 노인의 내막을 좀 아십니까? 선장은 이 말에 짜증이 나는 듯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네. 작년에 미국에서 만난 부랑자인 데, 프랑스 사람이기에 데리고 왔지요. 아브르에 친척도 살고 있나봐요. 그러나 그들에게 빚 을 진 것이 있어 찾아가지 않겠다는 거요. 이름은 아마 쥘르 다르망쉬인가 다르방쉬인가 잘 모르지만, 아무튼 그와 비슷해요. 한동안 유복하게 지낸 적도 있는 모양인데 이젠 보시다시 피 저 꼴이 되었지요. 아버지는 얼굴이 납덩이처럼 되면서 눈이 휘둥그래지더니 목이 막혀 더듬더듬 간신히 이 렇게 말씀하셨네. 아...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지요... 선장님 고 맙습니다. 아버지는 그 자리를 뜨셨네. 선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 었네. 아버지는 어머니 곁으로 돌아오셨네. 얼마나 당황하고 계셨던지 어머니가 먼저 입을 여셨네. 앉으세요. 남들이 눈치채겠어요. 아버지는 의자에 주저앉으며 중얼거리셨네. 맞았어. 쥘르야, 틀림없는 쥘르야! 그리고 이 렇게 덧붙이셨네. 어떡하지? 어머니는 얼른 대답하셨네. 아이들을 데려와야 해요. 조제프는 모든 걸 다 알고 있으니, 그 애를 보내서 데려 오도록 해요. 사위가 눈치채지 못하게 각별히 조심해야 돼요. 아버지는 얼빠진 사람처럼 중얼거리셨네. 아, 이게 무슨 꼴이람! 어머니는 화를 버럭 내며 덧붙여 말씀하셨네. 그 도둑이 무엇을 하랴 싶어 언제나 의심 이 가더니... 그러니 다시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될 수밖에... 그럼 그렇지, 다브랑쉬 집안 사 람에게서 무엇을 바랄꼬!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핀잔을 받으면 언제나 그러하시듯 손을 이 마로 가져가셨고, 어머니는 말씀을 계속하셨네. 조제프가 가서 먹은 굴 값이나 치르도록 그 에게 돈이나 주세요. 그 거지가 절대로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게 해야 되요. 눈에 띄어봐요. 우리 꼴이 어떻게 되겠어요. 자 우리는 저 끝으로 가요. 그 작자가 우리에게 가까이 오지 못 하도록 해요.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5프랑을 주시고 나서, 가족들은 모두 데리고 멀찌감치 가버리셨네. 누이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네. 나는 어머니가 배멀미를 하신다고 일러주었지. 그리고는 굴 까는 사람에게 가서 물었네. 우리가 먹은 굴 값이 모두 얼마나 됩 니까? 나는 그때 얼마나 아저씨! 하고 부르고 싶었는지 정말 모르네. 그가 대답했네. 2프랑 50쌍팀입니다. 내가 5프랑을 내어주니까, 그는 돈을 거슬러 주었네. 나는 그의 손을 유심히 바라보았네. 쭈글쭈글해진 가엾은 뱃사람 손 말일세. 나는 또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네. 지치고 늙은 비참한 얼굴이었네. 나는 생각했네. 저 사람이 바로 아버지의 동생이면 우리 삼촌이로구나! 나는 그에게 10수를 팁으로 주었네. 그는 매우 고맙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네. 복 많이 받으십시오. 도련님! 그것은 구걸하는 자의 가엾은 목소리였네. 아마 그는 미국에서 거지생활을 했을 걸세. 누이들은 내가 그에게 선심을 쓰는 것을 보자 어이가 없다는 듯이 힐끗 쳐다보았네. 내가 남은 2프랑을 아버지에게 돌려드리자 어머니는 깜짝 놀라며 물으셨네. 아니 그게 3 프랑이래?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나는 분명한 목소리로 어머니께 말했네. 팁으로 10수를 주었어요. 어머니는 펄쩍 뛰며 나를 빤히 쳐다보셨네. 미친 녀석 같으니! 그래 저 비렁뱅이에게 10 수나 주었단 말이야! 아버지가 눈짓으로 사위를 가리키자, 어머니는 그만 입을 다물어 버리셨지. 우리도 입을 다물어 버렸네. 그때 우리 앞으로 멀리 수평선 위에 보랏빛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네. 그것이 바로 저지 섬이었네. 배가 부두에 가까이 갔을 때, 나는 다시 한번 쥘르 아저씨를 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 네. 그에게 가서 다정한 말로 위로해 주고 싶었네. 그러나 더는 굴을 먹으려는 사람이 없게 되자, 그의 모습도 사라져 버렸네. 아마 그는 냄 새가 고약한 배 밑창으로 내려갔을 걸세. 거기가 그 비참한 남자의 숙소였을 테니까. 우리는 돌아올 때, 그를 다시 만나지 않으려고 생 말로호를 탔네. 어머니는 불쾌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계셨지. 그 후로 나는 삼촌을 다시는 보지 못했네. 자, 이제는 자네도 알겠지. 내가 왜 때때로 5프랑씩이나 거지에게 쥐어 주는지... 모파상(1850-1893): 프랑스의 극작가이며 소설가. 노르망디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부터 플로베르에게서 문학 지도를 받았다. 그의 작품은 뛰어난 기교와 정확한 필치로 10여 년의 작품활동 기간에 30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단편소설의 완성자로 일컬어지는 그는, 자연주 의적 수법으로 인생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데, 대표작으로는 여자의 일생 , 목걸이 , 달빛 등이 있다. 겨울의 꿈 심한 추위에 그녀는 감기를 앓고 자리에 누워 있었다. 이웃 마을에서 양봉가가 벌을 옮기 러 온 것이 바로 그때였다. 벌통은 그녀의 침실 창문 밖 발코니의 함석지붕 밑 깊숙한 곳에 여러 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쇳덩이, 얼음, 돌 등 광물성 경치를 내다보고 있었다. 요염한 유령처럼 푸른빛을 띤 유백색 서리 안개는 위쪽으로 갈수록 한결 흰빛이 짙었다. 그 뒤에서 희멀건 해가 열기 를 잃고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심지를 내린 채 돌보는 이 없는 가스등이, 어느 빈집의 수의를 걸친 물건들이며 검은 유품들을 기가 막히다는 듯이 내려다보고 있었고, 사방에는 너무나 깊은 고요가 깃들어 오히려 그녀 귀에는 끊임없는 여운으로 메아리치는 듯했다. 벌들이 일 년 내내 쉬지 않고 들려주던 그 연약한 가물가물한 윙윙거림을 아직도 보내오 는 것인가? 한 겨울 동안 소리를 죽이고 가만가만 중얼거리다가 따스한 날씨에 따라 한결 높아지고 커지고 소리가 아니던가? 그때가 되면 마치 하나의 구심력에 붙들릴 수 없는 머리 들이 그 중심축을 뛰쳐나가 사방으로 흩어지려고, 헛된 발버둥을 치는 것처럼 뚜렷하게 윙 윙거리고 다투는 것이다. 그러나 벌들은 조용했다. 아이들 떠드는 소리도 없었다. 뜰로 나간 모양이다. 다른 모든 것처럼 아이들도 추위에 짓눌려 있나보다. 갑자기 사다리의 일부가 창을 가로질러 흔들흔들 올려지더니 제자리를 잡아 멎었다. 이윽 고 낡은 모자를 쓴 남자의 머리와 어깨가 나타났다. 그녀가 베개에 묻혀 있는 것을 곁눈질 해 본 그의 얼굴은, 주름살 투성이지만 즐거운 듯 헤벌름하게 웃었다. 안녕하십니까? 하고 그가 인사를 했다. 그녀는 말소리가 나오지 않았으므로 손을 흔들고 미소를 지으며 목을 가리켰다. 편찮으신 게로군요? 거참, 안됐습니다. 고약한 감기가 유행하니까요. 정말 이런 날씨엔 자리에 누워 있는 게 제일이죠. 그는 발코니로 올라와서 긴 유리창을 가리며 버티고 섰다. 후드가 달린 카키색 재킷을 입 은 키가 작고 어깨가 넓은 체격이었다. 희극 배우 얼굴처럼 마르고 주름살이 잡힌 타원형 얼굴이, 하루 동안 자란 수염으로 높고 낮은 데가 있어, 희미한 속에서도 반짝이는 푸른 두 눈이 영락없는 농사꾼의 눈이었다. 여기까지 벌을 옮기러 왔지만요, 분봉하기엔 고약한 시기랍니다. 이런 날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이에요. 따뜻한 날이 적당하지요. 하지만 날씨가 더 궂을 것 같지는 않고, 별 로 할 일도 없는데다가 댁에서 와 달라고 하셔서 왔어요. 그의 말은 이상하게 느리면서도 울리는 것이 조금도 이 지방 사투리를 닮지 않았다. 사투 리는 좀 더 활발하고 박력이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이 안개 낀 창으로 격리되어 있지만, 하 루 동안의 친구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병석에 누워있는 이 집 여주인에 대한 예의범절같 은 건 그로서도 문제될 게 없었다. 그녀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단순한 즐거움을 느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을 하면서 말동무가 생긴 게 즐거웠다. 친구를 데리고 올라와야겠군. 그가 사라지더니 아래 마당에서, 조지!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뭐라고 중 얼거리더니, 그가 다시 올라오고 젊은 일꾼 하나가 연장이 든 배낭을 메고 따라 올라왔다. 조지는 일자리가 어색했던지, 창 너머를 힐끗 바라본 후로는 제 일만 하고 다시는 그녀 있 는 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무척 젊고, 일꾼치고는 고상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턱이란 이마는 깊숙하게 윤곽이 졌고, 다문 입술도 뚜렷했으며, 두드러진 광대뼈에 우묵하게 파인 볼, 눈 언저리는 깊은 동 굴 같았는데, 그 속에 그지없는 슬픔을 간직한 두 눈이 있었다. 슬픔이 한 자리에 굳어서 이 미 슬픔 그것밖에는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는, 마치 동물이나 초상화의 눈 같았다. 이런 추 상적인 얼굴은 젊은이에게도 늙은이에게도 있는 얼굴이며, 여기저기서 기관사 모자나 군인 모자를 쓰고 나타나기도 하고, 숙련공의 작업복을 입고 도로 수선반에서 지나가는 그녀 자 동차를 쳐다보던 그런 얼굴이었다. 그런 싱싱한 얼굴을 볼 때마다 그녀는 막연하게, 그리고 로맨틱하게 정말 미더운 얼굴이 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평생 수많은 얼굴을 관찰할 한가한 시간이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혁명적인 이념을 품고 있는 친구나 이념적 독서회에 속해 있는 친구도 있었다. 이거 꽤 시간이 걸리겠는걸. 하고 양봉가가 말했다. 굉장히 깊이 내려간 모양이야. 일종의 공포감이 그녀를 엄습했다. 마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모험적인 대 수술이 실시되려고 하는데, 자기가 그 수술 장면을 목격해야만 하는 기분이었다. 그 종양은 이 집 몸뚱이 깊숙이 박혀 있는 것이다. 신열의 물결이 다시 밀려오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사라졌다. 그녀는 아이들이 사다리 위에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이내 아이들이 나 타났다. 존은 미리 방어할 요량으로 여동생에게 치마 위에 바지를 껴입히고, 사다리에 발 디 딜 자리를 가리켜 주었다. 그들은 발코니를 활보하고 의기양양한 얼굴로 방 안을 들여다보 고 전에 없이 소란스럽게 굴었다. 벌치는 사람이 왔어요! 조심해야 돼. 존이 그녀는 앞질러서 비웃는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말없이 그녀 는 고개를 끄덕이고 웃음을 지으며 눈동자를 굴릴 뿐이었다. 조크도 데리고 올라올까요? 그 말에 그녀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저었다. 그래두 올려 달라구 낑낑거리는 걸. 제인은 실망한 투로 말했다. 자기 친구들과 떨어진 개가 미친 듯이 짖는 소리가 아래서 들려왔다. 개한테로 내려가는 게 좋겠다. 하고 존이 싫증이 난 듯 말했다. 막상 정복을 해 놓고 보 니까 별 것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또 하나의 경우였다. 일꾼들이 온다. 우리가 있어봤자 걸리적거리기나 하겠지 뭘. 여기야, 여기다 발을 놓으란 말이야. 이 바보! 아이들은 가 버렸다. 다시 만나서 미친 듯이 떠들썩한 소리를 내고는 이윽고 조용해졌다. 그녀는 제인의 주관적인 흥미는 이미 바닥났으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존만은 짙은 분홍빛 두 귀를 가진 과학적인 관찰자로서, 오늘의 자기 위치를 지켜 어떻게 해서든지 이 일의 영 역 안으로 슬며시 끼어들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양봉가와 그의 조수가 함께 올라왔다. 그들은 함석 지붕을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낮은 음성으로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벌소리같은 낮은 음조가 약간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 다가 간간이 아아! 하는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외침소리가 들렸다. 치고 두드리고 비트는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자기는 도저히 그런 소리에는 못 견 딘다고 누가 일러 줘야 했으나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벨을 눌러서 커튼을 쳐달라고 말하고, 커튼이 쳐지자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그대로 깊은 잠에 빠졌다. 존이 문을 열고서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그녀는 잠이 깨었다. 점심 먹으러들 갔어요. 저 녁 때 벌을 옮기러 오겠대요. 지붕은 거의 다 벗겼어. 전 벌을 봤어요. 엄마도 커튼만 걷었 으면 볼 수 있었을 거야. 불렀는데도 엄마는 안 들렸나봐요? 고양이가 비둘기하고 새를 또 두 마리나 물어 왔는데, 우리가 뺏어서 가마솥 뒤에다가 따뜻하게 싸 놨어요. 그는 복도를 쿵쿵거리고 휘파람을 불면서 가 버렸다. 3시. 쌀쌀한 날씨는 매시간 굳어만 갔다. 그러나 햇볕이 엷어지기 시작하자, 한 때 푸른 대기가 바싹 다가와서 나무 꼭대기를 샅샅이 뒤지고 창살에 괴이하게 빛나는 순간이 있었 다. 마치 푸른 파도가 돌아와서 암벽 동굴과 소금에 찌든 암석을 침식하듯이. 사다리가 흔들렸다. 바람구멍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일종의 램프를 들고 그가 다시 나타났다. 한 번 구경해 보세요. 하고 그는 활달하게 불렀다. 제법 구경거리가 됩니다. 이런 구경은 아마 생전 처음일 걸요.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가운과 숄을 걸치고 비틀거리면서 창가로 걸어갔다. 요술쟁이처 럼 그는 검정 부대를 활짝 벗겼다. 그러자 엄청난 광경이 나타났다. 희멀건 벌집의 환초가 도리와 중방을 가로 세로 이랑 지우고, 톱니꼴로 덩어리가 진 채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웅웅거리는 까만 벌 무리가 갑자기 바깥 구경을 하자 귀찮다는 듯이 웅성거렸으나, 얼음처럼 차가운 공기에 힘을 잃고 꼼짝도 못했다. 비교적 활기가 있는 몇 마 리가 그 무리에서 기어 나와 공중으로 맴돌아 올라가다가는 정신을 잃고 도로 떨어져 버렸 다. 상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활기차지요? 양봉가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그녀는 그 의 얼굴을 가리켰다. 거기엔 벌이 서너 마리 느릿느릿 기어다녔다. 그는 킬킬거리면서 그걸 털어 버렸다. 전 안 쏜답니다. 쏘여도 대수롭지 않구요. 수없이 쏘여 면역이 되었으니까요. 그는 벌집 한 쪽을 뜯어서 들어 보였다. 그녀는 어찌나 그게 만져보고 싶은지 창문을 억 지로 밀어내리고, 얼굴에 폭풍처럼 와닿는 공기를 받으면서 그 남자 손에서 받아들었다. 연 약하고 색깔이 곱고 곧 부서질 듯하고 섬세한 것이, 마치 아직 덜 여문 산호 같았고, 마른 해면이나 해초 한 쪽처럼 무게가 없었다. 말랐죠, 네? 하고 양봉가는 말했다. 여기선 별로 꿀을 많이 못 따겠는데요. 지난 여름만 해도 꿀이 줄줄 흘렀겠는데요. 일 년 전에만 이 통에서 땄더라면 제법 가득 땄을 텐데, 이제 여기선 꿀다운 꿀은 못 따게 되었군요. 그녀는 그제야 알았다. 이 섬세하고 얇은 투명한 벌집은 이미 사라진 세계를 의미했던 것 이다. 그녀는 격렬하게 몸을 떨다가 예상 밖의 광경을 목격하고는 마음이 억눌렸다. 꿈이 너 무 컸었다. 지붕 밑에서 꿀이 흠뻑 쏟아지면 독이랑 항아리랑 주발에다가 받아서 저장해 두 고 빵에도 발라먹고, 푸딩에도 단맛을 내고, 아이들에게 설탕이 떨어졌다는 말을 조금 더 늦 출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너무 늦었다! 꿀은 요술처럼 사라져 버렸다. 벌을 옮길 시기가 아니야. 하고 양봉가는 되풀이 말했다. 그는 부글거리고 번쩍이는 덩어 리 위에 맥없이 램프를 흔들어대며 아무렇게나 연기를 쏘였다. 그래도 댁에서는 해 달라고 하셨지요? 그녀는 변명하고 싶었다. 벌을 옮겨야 할 필요성을 설명하고 9월부터 그를 기다렸다고 말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창을 밀어 올리고 벌집을 화장대 위에 놓고 다시 침대에 털썩 누웠다. 전쟁이 터진 이래 착 달라붙어 있는 그녀의 적이 그녀 귀에 속삭였다. 꼭 내가 생각한 그 대로야. 또 하나의 감상적인 환상이지. 행운의 마력으로 음식을 만들어 내겠다는 수작이야. 인생은 이미 그런 달콤한 종말로 이야기를 꾸미지는 않는다니까, 알겠나? 다시는 없어. 새벽 이고 황혼이고 그 싱싱한 음성으로 너를 달래던 정력의 원천이, 우리는 당신을 위해서 일합 니다, 우리가 먹고 남는 건 당신 것입니다 했지. 그러나 정작 가지려니까 없어져 버렸거든! 너는 꿀을 축적하게 내버려두고, 아직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며 너무 오래 놔 뒀어. 우글우글 한 벌떼한테서 얻는 거라고는 낡아빠진 기계가 닳는 소리같은 윙윙거리는 소리 이외엔 아무 것도 없단 말이야. 일벌들이 저희들 양식을 다 먹어 버리고 너 먹을 건 안 남겼어. 이번에는 톡톡히 맛을 봤지. 얘야, 너같은 사람은 점점 배급을 못 얻게 될 거야. 머지 않아 시골집에 사는 사람들이 공평한 자기 몫보다 더 얻게 될 걸. 일하지 않고 따내던 선물이 옛날 그대로 의 벽에서 나오기는 이제 글렀어. 너희 집 지붕은 항상 석회를 바르고 기름을 칠하고 해서 여전히 교묘하게 간직되어 있지 않니! 반쯤 뜬 눈으로 그녀는 그가 허리를 구부리고 여기저기 살피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갑 자기 그가 얼른 칼을 꺼내어 팔을 뻗어서 어디엔지 밀어 넣었다. 조금 후에 칼이 올라오고 다시 손이 누렇고 찐득찐득한 덩어리를 듬뿍 들어 올렸다. 꿀이었다. 꿀 봐! 정말 꿀이었다. 그 푸성지고 탐스럽게 엉킨 꿀이 칼 끝에 듬뿍 묻어 나왔다. 나이프를 쳐 들자 꿀물이 천천히 길다할게 호박빛으로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겨울이 한창 맹위 를 떨치는 속에서도 여름의 소우주가 달콤한 액체로 녹아든 채 매달려 있었다. 꿀 봐! 존이 아래서 소리를 질렀다. 이젠 됐다. 양봉가는 마치 실망의 중압감에서 해방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여긴 많 아, 바로 이 구석에. 이렇게 교묘하게 감춰둔 걸 본 일 있니? 한 방울이라도 안 떨어지게 해 야지 오오, 너희들도 좀 줘야지. 아가, 뛰어가서 가정부더러 접시 하나 달래서 가져와라. 그 럼 차에 타 먹게 한 덩어리 줄 테니. 아들이 급히 뛰어가는 구두 소리가 들렸다. 마치 아들이 자기를 데리고 뛰어가는 것 같았 고, 자기를 뚫고 뛰어가는 것 같았다. 모든 장애를 박차고 그가 가 버리기 전에 접시를 가지 고 돌아와서 지체없이 내줌으로써 이 중요한 사명을 다하려는 것 같았다. 이러한 아이들의 순수한 호의와 완전히 어떤 일에 정신을 집중해서 그 일에 녹아들고, 그 일과 하나가 되어 버리는 동심이 그녀로 하여금 마치 사랑이나 해산을 한 다음처럼, 몸의 괴로움을 잊고 시원 한 물결 위에 두둥실 뜨게 해서, 순간적이나마 그지없이 평화스러운 마음으로 희고 형체없 는 해변으로 실어다 주었다. 댁의 아드님, 참 기특한데요? 양봉가는 바삐 자르고 긁어내고 하면서 말했다. 나는 이 꿀만 보면 반갑답니다. 이 세상에 내가 보기 싫은 게 꼭 한 가지 있는데, 그건 꿀이 마른 벌 통이랍니다. 이 말에 그녀는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극히 미세한 단계를 밟으면서 기어서 다가오는 죽음 이 여분이 없다는 정도가 아닌 생을 영위할 만한 먹고 살 방도가 없다는 것이었다. 매몰된 광부들처럼 모든 집단의 무덤처럼 느껴졌다. 아래서 인기척과 존의 높은 음성이 들려왔다. 이거면 돼요? 되고말고, 올려 보내라구. 부엌 찬장에서 가져온 제일 큰 쇠고기 쟁반이 눈앞에 나타났다. 고맙네 이 친구, 단 게 먹고 싶을 테니 내가 조금 떼어 주지. 먹고 싶지? 엄마가 걱정 안 하실까? 그는 껄걸 웃으면서 말했다. 이런 가정적인 물음에 금방 재치있는 대답을 할 수가 없던 존은, 어머니에게 무안한 듯 계면쩍은 웃음을 짓곤 급히 사라져 버렸다. 햇볕은 서서히 엷어졌으나, 떠오르는 달이 어둠이 내리는 것을 막고 있었다. 황혼에 희미 하게 표백된 그의 그림자가 창에 비친 채 떠나지 않고 허리를 구부렸다 폈다 했다. 흥얼거 리고 콧노래를 하다가 휘파람을 불기도 했다. 간간이 벌에게 상냥스럽게 말을 걸기도 했다. 달아나라 아가, 달아나. 그리고는 가끔 벌이 닥지닥지 붙은 손을 들어 보였다. 이 녀석들이 쏘아봤자 난 괜찮아 요. 그저 좀 얼얼하지요. 꼭 망치로 잘못하다가 손가락을 때린 정도지요. 그가 벌을 쓸어버리자, 벌들은 마치 목걸이 알이 흩어지듯 떨어졌다.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미소지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창살을 가만히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그녀는 까닭 모를 놀라움에 사로잡힌 채 누워 있었 다. 아래 창이 삐걱거리며 황급하게 열리고, 창턱 너머로 어둠침침한 속에 무엇인가 그녀를 내리덮듯 다가오더니 도깨비같은 그림자가 기어 들어와서 꿋꿋이 버티고 섰다. 머리가 없는 그림자, 얼굴이 있어야 할 곳에는 흔들리는 어둠밖에 없다. 열 때문인 게다. 기다리자, 그러 면 가 버리겠지. 그녀가 용기를 내어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켜자 양봉가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얇은 천으 로 된 길고 둥근 베일이 어깨까지 달려 있는 둥그런 모자를 쓰고 있었다. 안 나오는 소리를 간신히 가다듬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게 분봉할 때 쓰는 모자예요? 아아, 이거 말이죠? 그는 웃으면서 모자를 벗었다. 이걸 쓰고 있는 걸 깜박 잊었군요. 놀라셨나요? 멋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일을 마쳤다는 걸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저 아래로 갖다 놨습니다. 꿀도 꽤 땄구 요. 내 마음도 흐뭇합니다. 벌통이 텅 빈 건 질색이니까요. 그는 창문 커튼을 닫았다. 닫아 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등화관제에 걸려들면 여간 귀찮아야죠.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난로 곁으로 다가왔다. 난로가 곧 꺼질 것 같더군요. 그래서 제가 들어왔지요. 불을 봐드릴까 해서요. 그는 꿇어앉아 재를 쑤셔내리고, 멍들고 붓고 꿀이 묻은 손으로 석탄을 더 지폈다. 금방 따뜻해질 겁니다. 아니, 그런데 심부름하는 사람도 없습니까? 있어요.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곧 누가 올 거예요. 잊어버리고 벨을 안 눌렀어요. 그녀는 스스로가 가엾어져서 울고 싶었다. 퍽 괴로우신 것 같은데요. 장뇌유로 가슴을 실컷 문질러야 합니다. 그것밖에는 없어요. 그는 금방이라도 달려들어서 가슴을 문질러 줄 듯했다. 그러나 그는 난로 곁을 떠나지 않고 생각에 잠기는 듯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이 방을 보니까 옛날이 그립군요. 물론 어렸을 때부터 잘 알고 있지요. 영감님이 우리를 데려다가 저녁에 공부를 시켰으니까요. 그분은 남을 가르치는 데는 훌륭하셨어요. 그는 킬 킬거리고 혼자 웃었다. 돌아가신 지 십 년은 됐을까요? 전혀 접촉이 없었어요. 난 열일곱에 캐나다로 건너갔지요. 그게 이십 년 전. 마누라도 못 얻고, 돈도 못 벌고, 아무 것도 아니지 요. 그는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이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돌아온 것만도 다행이지요. 출 발점으로 되돌아온 것, 그것이 지금 내가 있는 곳이죠. 지금은 결혼한 누이하고 살고 있답니 다. 그녀는 말했다. 차 한 잔 드시겠어요? 아니요, 집에 가야지요. 하여간 고맙습니다. 꿀은 잘 딴 셈입니다. 형편없었으니까요. 살아나겠어요? 글쎄, 그건 모르지요. 벌을 옮길 시기가 아니니까요. 꿀을 훔쳐가면 벌들은 무척 풀이 죽는 모양이지요? 슬픈 노래를, 아주 슬픈 노래를 부른답니다. 그는 창가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렇지만, 잘 되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밖에요. 조지가 아침에 와서 함석을 고쳐 드릴 겁 니다. 자아,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내일은 훨씬 나으시기를 바랍니다. 창 앞에서 그는 걸음을 멈췄다. 아니, 이리로 나가야 할 까닭이 없군. 안 그래요? 하고 그는 물었다. 신사답게 나가는 게 좋겠어요. 그는 방을 가로질러 그녀의 침실 문을 열고 나간 다음에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의 경쾌 한 발자국 소리가 계단에서 들리더니 멀리 사라졌다. 그녀는 체온을 재어보고 훨씬 내려간 것을 알았다. 그 사람 덕분일 게다. 그녀는 자신이 자아내는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누워 있었다. 사람이란 의지에 따라서 행동을 한다. 그러 기 때문에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을 하기 마련이다. 인생의 일부분은 영원히 억눌려 있 다. 부서진 발코니의 영상이 그녀 뇌리에 무겁게 자리잡고 있었다. 폭격당한 집의 사진처럼 찢기고 속이 드러난 황폐해진 영상이 펼쳐졌다. 정말 이상한 날이었고, 정말 기묘한 만남과 헤어짐이었다. 자꾸만 되뇌일수록 그녀의 소극 적이고 몽상적인 한가한 삶은 덧없는 역설적인 영상과 상징이었고, 이것을 간직하기 위해 존재하는 움직일 수 없는 한 분자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만 같았다. 이것이 그녀가 궁극 적으로 기억하는 전부였다. 뜰 어디에선지 큰 가지가 와지끈 꺾이면서 떨어졌다. 아이들이 꿀 쟁반을 들고 뛰어 들어왔다. 좀 드려요? 지금은 싫다. 정말 아무 것도 목구멍을 넘기지 못하겠다. 그렇게 맛있는 꿀까지도. 맛있는 게 다 뭐예요. 형편없어요. 보기엔 아교풀 같고 맛은 너무 달아요. 확실히 식욕이 당기는 빛깔은 아니었다. 거의 갈색이고 찐득찐득해 보였다. 너무 오래 벌 통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목에 걸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너희들은 이 방에 와선 안 돼. 메리는 어디 갔니? 내 옆에 가까이 오지 마라. 어휴, 어머니. 독감이 옮을까봐서요? 존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소파의 팔걸이를 넘 어 벌렁 누워서 방바닥에 뒹굴었다. 엄마, 엄마는 뭣 때문에 그 놈들을 치워 버릴려구 그래요? 거기 있어도 아무 일 없잖아 요? 얼마나 시끄러운 줄 아니? 우리는 그 소리가 좋은 걸요. 그까짓 벌소리가 듣기 싫다면 공습이 오면 어떡하지? 분봉하는 구경을 하니까 재미있었잖니? 그건 그랬지만. 그러나 이젠 모든 것이 없어졌다. 싫도록 구경했고 실망했을 뿐이다. 작년 여름에 얼마나 많이 벌들에 쏘였나 생각해 보렴. 로버트랑, 핸슨씨랑. 아, 엄마 손님 말이지요? 주말이면 그 벌이 얼마나 낙이 되고, 화제의 중심이 되었던가. 그러나 이제부터는 물론 주 말파티같은 건 있을 수 없다. 벌도 가 버릴 때가 되었다. 제인의 눈 생각을 좀 해 보렴. 며칠을 붕대로 감고 있었잖니. 저도 생각나요. 제인은 얼굴을 붉히고 엄숙하게 말했다. 아물찮았어. 저런 말투 좀 봐! 존이 역정을 내면서 소리를 질렀다. 아물찮았다는 건 피피 디드콕크 책에서 배운 거예요. 제인은 유쾌한 듯 말했다. 모두들 쓰는 말이에요. 옥스퍼드 지방 말투라나? 그녀는 방 안을 이리저리 뛰면서 치마를 휘날리고 머리를 나풀거리더니 가만히 서서 가슴 에 손을 얹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뭔데? 하고 그녀는 물었다. 바보같으니라구. 하고 오빠가 말했다. 갑자기 미쳤니? 모르지? 하고 제인이 말했다. 심장이야, 심장이 멈추면 죽거든. 뛰었더니 내 심장 소리 가 들려. 심장이 왜 멈추니? 하고 어머니가 말했다. 언제고 한 번은 멈추지요. 하고 존이 말했다. 오늘밤이라도 멈출지 누가 알아? 아, 참... 그는 포켓에 손을 넣더니 뭔지 시커먼 물건을 꺼냈다. 이 참새를 마지막으로 엄마 방 난로의 온기로 살려보려고 가지고 왔어요. 가마솥 뒤에 놓았었는데 고양이가 돌아다니니까요. 비둘기도 잡았어요. 딱딱해서 안 먹었나봐요. 그는 참새를 살펴보았다. 살았어! 그는 그걸 가지고 불 옆으로 뛰어가서 웅크리고 앉더니, 이제 막 살아난 불 앞으로 손에 놓은 채 내밀었다. 눈을 떴어. 날개를 놀리는 걸. 제인도 그 곁에 가서 꿇어앉았다. 무척 예쁜 참새네? 갑자기 새는 손바닥에서 쏜살같이 날아오르더니 난로 선반에 가 부딪치고 다시 난로 곁의 융단에 떨어졌다. 모두들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잠시 후에 그는 가만히 손을 내밀어 다시 새를 잡으려고 했다. 그러자 새는 곧바로 불 속 으로 날아들어 석탄 위에서 파닥거리고 짹짹거렸다. 눈 깜짝할 순간에 그녀는 달려가 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뺐다. 날개 타는 냄새가 나고 숯이 된 조각이 날리면서 떨어졌다. 난로 곁의 돌 위에다가 놓았다. 모두들 가만히 들여다보 고 있었다. 갑자기 참새는 되살아나서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그 연약한 몸에 숨은 끈질 긴 생명력이 그녀는 오히려 두려웠다. 융단 위에서 참새는 절뚝절뚝 뛰어다녔다. 날개 하나는 타서 없어지고, 다리 하나는 가슴 밑에 오그라져 붙고, 꽁지도 없이 펄떨펄떡 힘차게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저래도 살까? 하고 제인이 물었다. 그럼. 존이 냉담하고 침울하게 대답했다. 이젠 두고 보는 수밖에 없지. 로자먼드 레이먼: 영국의 소설가. 런던 태생의 여류작가로, 섬세하고 서정시적 문체와 흠 잡을 데 없는 감성으로 글을 썼다. 작품으로는 싱거운 대답 , 콘힐 , 고독의 샘 등이 있다. 열망 조금 전부터 닫혀있는 버스 유리창 안에서 파리 한 마리가 빙빙 날아다니고 있었다. 파리는 웬일인지 지친 듯 소리없이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쟈닌느는 유심히 그 파리를 지 켜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없어졌다 싶더니 잠시 후 움직이지 않고 있는 남편의 손위에 앉을 것을 보았다. 날씨는 싸늘했다. 모래 섞인 바람이 유리창에 휘몰아칠 때마다 파리는 바르르 몸을 떨었 다. 한겨울 아침나절의 희미한 햇살을 받아가며 버스는 철판과 차축이 울리는 요란한 소리 를 내며 크게 흔들거리면서 겨우 굴러가고 있었다. 쟈닌느는 남편 마르셀을 바라보았다. 좁은 이마 위에 짤막하게 난 희끗희끗한 머리칼과, 넓적한 코, 일그러진 입술을 가진 그는, 마치 화가 난 반쯤은 사람이고, 반쯤은 짐승인 목신 처럼 보였다. 버스가 행길의 파인 곳을 지날 때마다 남편의 몸이 쟈닌느에게 쏠리곤 하였다. 그리하여 생기잃은 공허한 눈초리를 하고, 육중한 몸체로 다시 벌어진 아내의 두 다리 위에 주저앉는 것이었다. 다만 와이셔츠 소매보다 훨씬 긴 호색 프란넬 양복 저고리 소매가 손등을 덮고 있었으므로, 더욱 짧게 보이는 매끈매끈한 두 손만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두 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텐트천으로 만든 조그마한 트렁크를 꼭 쥐고 있었으므로, 그는 손 등에서 파리가 살금살금 기어다니는 것도 미처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바람소리가 갑자기 소란스럽더니 버스를 에워싼 모래 안개는 더욱 짙어졌다. 마치 누가 숨어서 던지기라도 하는 듯이 모래는 유리창에 부딪치는 것이었다. 파리는 추운 듯이 한쪽 날개를 움직이며 네 다리 위로 몸을 굽히더니 어디론지 날아가 버 렸다. 버스는 속도를 늦추면서 곧 멈추려는 듯했다. 이윽고 바람이 좀 가라앉는 듯 싶더니 그 모래 안개도 좀 걷혀졌다. 버스는 다시 속력을 내어 달리기 시작했다. 먼지 속에 훤하게 햇빛이 비쳐왔다. 마치 쇠붙이를 깎아 세운 듯이 호리호리하고 하얀 두세 그루의 종려나무 가 유리창 너머로 보이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마르셀이 말했다. 무슨 동네가 이 모양이람! 버스에는 조는 듯한 아랍인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아랍식 외투를 걸치고 있 었으며, 그 중에 몇몇은 좌석에 다리를 올려놓은 탓으로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유난히 건들 거리는 것이었다. 그들의 침묵과 태연자약한 태도가 쟈닌느의 마음을 몹시 억누르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여러 날을 그런 벙어리들과 함께 여행하고 있는 듯 생각되었다. 자동차는 새벽녘 철도의 종점에서 출발하여 싸늘한 아침나절 두 시간째, 이렇게 돌부리에 부딪히며 쓸쓸한 고원을 지나고 있는 참이었다. 출발할 무렵에 고원은 불그스름하게 물든 지평선까지 뻗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넓은 지 역을 바람이 휘몰아쳐 삼켜버렸다. 그 때부터 승객들은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차츰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버스 속으로 스며들어 입이나 눈에 묻은 모래를 닦아내면서, 마 치 철야라도 하듯이 침묵 속에서 여행을 계속했다. 쟈닌느! 남편이 부르는 소리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체격이 건장한 자기에게 그 이름이 얼 마나 우스꽝스러운가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마르셀은 트렁크의 행방을 물었다. 그녀는 좌석 밑의 빈 곳을 발로 더듬었다. 어떤 물체가 발에 닿았다. 그녀는 그것이 트렁크라고 단정해버 렸다. 그녀는 몸을 앞으로 수그리기만 하여도 숨이 턱에 닿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학생 시절 엔 체육을 제일 잘했으며, 호흡곤란 같은 것은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그때가 그렇게 오래 전 일이었는지 어느덧 이십오 년이나 된다. 실은 이십오 년이 문제가 아니었다. 쟈닌느가 자 유로운 독신생활을 버리고 결혼하기를 주저하며, 또한 혼자 늙어갈 앞날을 불안하게 생각하 던 것이 엊그제 같았던 것이다. 쟈닌느는 외톨이가 아니었다. 그녀의 곁을 잠시도 떠나려 하지 않던 그 법대생이 지금 곁 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녀는 그의 작은 몸집이며, 탐욕스럽고 붙임성 없는 웃음소리와 불쑥 튀어나온 검은 눈동자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결국 그를 남편으로 맞게 되었다. 그녀는 그 남자의 강한 생활욕을 사랑했던 것이다. 생활이래야 물론 그 지방의 다른 프랑 스 사람들과 별로 다른 것은 없었다. 어떤 사건이나 사람들에 대한 기대가 어긋났을 때, 실 망하는 그의 모습도 사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사랑받기를 원했다. 그런 그녀를 그는 끈질기게 정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쟈닌느가 자기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라는 것을 언제나 느끼게 함으로써, 그녀로 하여금 뚜렷한 존재가치를 깨닫게 한 셈이었다. 그렇 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버스는 요란스럽게 경적을 울리면서 얼른 눈에 띄지 않는 장애물을 헤치며 간신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안에서는 아무도 꼼짝 않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누군가가 자기를 유심히 바라보는 것을 깨닫고, 버스 통로 건너편에 자기 자리와 나란히 놓인 좌석에 고개를 돌렸다. 그 사람은 아랍인은 아니었다. 쟈닌느는 출발할 때 그를 미처 보지 못한 것이 기이하게 생각되었다. 그는 사하라에 주둔하고 있는 프랑스 군복을 입고 있었으며, 갈색 군모를 쓰고 있었는데, 햇볕에 그을린 길쭉한 얼굴은 외인부대의 날쌘 병사답게 날카롭게 보였다. 그는 약간 침울한 표정을 하고 밝은 눈초리로 쟈닌느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쟈닌 느는 얼굴이 화끈거려 남편 쪽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남편은 여전히 눈앞의 안개와 스쳐 가는 바람결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외투를 몸에 걸쳤다. 하지만 프랑스 군인의 모습은 눈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후리후리한 키에 날씬한 그 사내는 메마른 몸에 군복이 꼭 끼어 마치 말려서 부서지기 쉬 운 물건 즉, 뼈와 모래를 반죽하여 만든 사람같이 보였다. 맞은편에는 메마른 손과 햇볕에 그을린 아랍인들이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남편과 그녀는 겨우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그들은 큼직한 옷을 걸치고도 편안하게 앉아 있는 듯이 보였다. 그녀는 외투자락을 잡아올렸다. 그녀는 후리후리한 키에 별로 뚱뚱하지도 않고 알맞게 살쪄 육감적이고 탐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그것을 뭇사람들의 시선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얼굴에는 아직 애띤 데가 엿보였으며, 맑고 시원스러운 눈은 건장한 그녀의 몸집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쟈닌느가 예상했던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남편이 사업관계로 여행을 떠나면서 그녀 를 동반하려고 하였으나 그녀는 이를 반대했다. 전쟁이 끝나고 모든 거래가 정상화된 후부 터 오랜 시일을 두고 그는 이런 여행을 계획하여 왔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그는 법률 공부를 포기하고,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소규모의 포목 도매상을 하면서 그들 부부는 그럭저 럭 살아왔던 것이다. 그들이 젊었을 땐 바닷가에 나가면 행복을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마르셀은 힘드는 운동 을 좋아하지 않아 아내와 바다에 나가는 것을 곧 중지해 버렸다. 그들의 소형 자가용은 일 요일의 소풍 때 밖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 밖의 시간에는 반은 터키식이고, 반은 유럽식으 로 된 그 동네의 아르카드 그늘이 진 자기 가게에서 지내는 걸 좋아했다. 그들은 가지각색 천이 걸린 가게 위층에서 아랍식 커튼과 바로크식 가구로 장식된 방 세 개를 쓰고 있었다. 그들에겐 아기가 없었다. 언제나 덧문이 절반쯤 닫힌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그들은 몇 해 의 세월을 흘러보냈다. 여름, 바닷가, 소풍, 심지어는 하늘마저 등진 생활이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당신만은 괜찮을 거야. 그는 간혹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 다. 하지만 달갑지 않은 일은 피해야 한다. 그러나 큰 불상사라도 일어난다면 어떻게 한담? 그녀는 가끔 막연하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쟈닌느는 남편의 장부정리를 하기도 하고, 가게를 보기도 하였다. 그런데 무엇보다 도 괴로운 것은 여름이었다. 여름의 무더위가 포근한 권태감까지도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그러한 삼복 더위에 전쟁이 일어났다. 마르셀도 군대에 동원되었다가 곧 풀려나왔다. 포목 은 동이 나고, 거래는 끊기었다. 거리는 쓸쓸하고 무더웠다. 그때부터 집안에는 걱정이 생기 게 되었다. 시장에 다시 옷감이 나돌게 되자, 마르셀은 중간 도매상의 손을 거치지 않고 직접 아랍 상인들에게 물건을 팔기 위해 고원지대나 남부의 마을을 돌아다닐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는 아내를 데리고 다닐 생각이었다. 그러나 교통이 불편하여 아내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으 므로 집에 남아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마르셀이 고집을 부리므로 그녀는 못마땅한대로 승 낙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길을 나서고 보니 그녀의 상상과는 딴판이었다. 그녀는 더위 와 파리떼와 갖가지 냄새가 코를 찌르는 더러운 호텔같은 곳이 두려웠다. 추위나 살을 저미 는 듯한 바람이라든가, 돌이 깔린 극지와 같은 고원지대는 생각지도 못했다. 오히려 그녀는 종려나무와 부드러운 모래밭을 상상했었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 사막이란 온통 돌뿐이었다. 그리하여 땅 위에는 돌 사이에 드문드문 말라빠진 풀만 보일 뿐, 거칠고 싸늘한 먼지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갑자기 버스가 멎더니, 운전수가 뭐라고 중얼거렸다. 쟈닌느는 늘 들어오면서도 알 수 없 는 말이었다. 왜 그러시오? 하고 마르셀이 물었다. 운전사는 불어로 카뷰레터가 모래로 막힌 것 같다 고 대답했다. 마르셀은 또 다시 그 고장을 저주했다. 운전사는 하얀 이빨을 드러내어 웃으 며, 대단치 않은 일이므로 모래를 쓸어내면 곧 갈 수 있다고 말했다. 운전사가 문을 열자 차 디찬 모래바람이 그들의 얼굴로 몰아쳤다. 아랍인들은 제각기 외투 속에 코를 파묻었다. 문 닫아! 마르셀이 소리쳤다. 운전사는 문 앞으로 다가오면서 웃고 있었다. 그는 침착하 게 몇 개의 연장을 꺼내어 들고, 문을 열어 놓은 채 버스 앞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마르셀은 한숨을 쉬었다. 저 운전사는 난생 처음으로 엔진을 잡았나봐요. 쟈닌느가 말했다. 그녀는 갑자기 질겁을 했다. 차 옆에 있는 언덕 위에 검은 피륙에 감긴 형체들이 어디선가 말없이 나타나서 외투 깃 아래 베일을 쓴 눈을 껌벅거리며 여행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목자들이야! 하고 마르셀이 말했다. 차 안은 조용했다. 승객들은 고개를 숙인 채, 고원 위를 몰아치는 바람소리를 듣고 있는 듯이 보였다. 쟈닌느는 갑자기 짐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 데 적지 아니 놀랐다. 실은 기차 종 점에서 운전사가 여객들의 고리짝과 수하물을 버스 지붕 위에 얹었던 것이다. 차 찬의 그물 선반에는 우툴두툴한 지팡이와 넓적한 광주리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남쪽 사람들은 거의가 빈손으로 여행을 하는 모양이었다. 운전사가 돌아왔다. 여전히 활달했다. 그도 역시 얼굴을 싸매고 있었는데 눈만은 웃고 있 었다. 그는 출발을 알리며 문을 닫았다. 바람소리는 들리지 않고 유리창에 부딪는 모래소리 만이 들려왔다. 엔진이 붕붕거리더니 꺼져버렸다. 오랜 실랑이 끝에 겨우 엔진이 걸리었으므로 운전사는 엑셀레이터를 밟아 요란한 소리를 냈다. 버스는 한참 허덕이다가 다시 떠났다.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던 목자들의 누더기 더 미 속에서 팔 하나가 올라가더니 곧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길은 더욱 험악하여 버스가 마구 뒤뚱거리기 시작했다. 그 진동으로 말미암아 아랍인들은 사뭇 건들거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쟈닌느가 잠이 들려는데, 향기로운 사탕이 가득 든 노란 봉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주둔병은 그녀에게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 쟈닌느는 주저하다가 하 나 집어들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주둔병은 봉지를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미소를 거 두었다. 그리고 그는 오른편 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에게로 몸을 돌렸으나 겨 우 억센 목덜미가 보일 따름이었다. 그는 유리창 너머로 푸석푸석한 흙더미에서 일어나는 짙은 먼지 안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버스는 여러 시간을 달렸다. 승객들은 피로로 말미암아 숨소리조차 조용했다. 그런데 밖에 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랍식 외투를 입은 아이들이 팽이처럼 뱅뱅 돌면서 손벽을 치며 버스 주변에 모여들었다. 버스는 나지막한 집들이 늘어선 가도를 달리고 있었 다. 오아시스에 도착한 것이다. 바람은 여전히 몰아쳤으나 벽돌이 가로막아 모래먼지가 햇빛 을 가리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하늘은 흐렸다. 아이들의 아우성 속에서 브레이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버스는 더러운 유리창이 달린 진흙으로 지은 호텔 앞에 멈추었다. 쟈닌느는 버스에서 내렸다. 그녀는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지붕 너머로 노랗고 가느다란 회교사원의 탑이 보였다. 왼쪽에는 오아시스 종려나무들이 무성하여 그곳으로 가보고 싶었 다. 그러나 정오가 가까웠는데도 추위는 여전하여 바람에 온몸이 떨릴 정도였다. 쟈닌느는 남편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남편보다도 자기를 향해 다가오는 그 군인이 먼저 눈에 띄었다. 그녀는 그의 미소나 인사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 녀 곁을 지나가 버렸다. 남편은 버스 지붕에 얹어둔 포목 트렁크와 거무스름한 고리짝을 내 리게 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운전사 혼자서 짐을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일 을 멈추고 지붕 위에 서서 버스 주변에 몰려든 아랍식 외투들에게 무어라고 떠들어대고 있 었다. 쟈닌느는 뼈와 가죽으로 만들어진 듯 보이는 얼굴들에 둘러싸여, 그들이 떠들어대는 아우성 소리에 심한 피로를 느꼈다. 전 방으로 올라가겠어요. 하고 그는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은 조급하게 운전사에게 지시 하고 있었다. 쟈닌느는 호텔로 들어섰다. 메마르고 무뚝뚝한 주인이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주인은 그녀를 거리가 내다보이는 차고 위의 2층 방으로 안내했다. 방 안에는 쇠로 된 침대, 흰 페인트칠을 한 의자와 옷걸이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갈대로 만든 병풍 뒤가 화장실로 되어 있는데, 세면대는 부드러운 모래 먼지로 덮여 있었다. 주인이 문을 닫았을 때, 석회칠 을 한 벽에서 싸늘한 한기가 솟아나왔다. 쟈닌느는 핸드백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 또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눕든가 서 있어야 했다. 그리고 추위에 떨어야만 했다. 그녀는 핸드백을 손에 든 채, 하늘이 내다보이는 천장 가까이 뚫린 바람구멍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쟈닌느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자기도 모르는 것이었다. 다만 고독과 추위 그리고 가슴을 누르는 압박감만 있을 뿐이었다. 사실 그녀는 꿈속에 잠겨 있는 듯이 보였다. 남편의 고함소리와 함께 거리에서 들려오는 소음보다도, 바람구멍으로 통하여 들려 오는 소리에 더 정신을 팔고 있었다. 이제는 잔물결이 조잘대는 것같이 종려나무를 흔들어 대는 바람소리에 일종의 친근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이윽고 바람이 한층 세차게 몰아치는가 싶더니 물결의 조잘거림은 거센 파도의 울부짖음으로 변하였다. 쟈닌느는 벽 저편에 종려나 무의 바다가 폭풍에 물결치고 있는 광경을 상상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예상했던 거와 딴판 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파도는 피로한 눈을 한결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는 두 팔을 늘어뜨린 채, 어깨를 웅크리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냉기가 무거운 두 다리를 타고 기어오 르는 것이었다. 그녀는 날씬한 종려나무와 자기의 처녀시절을 연상하고 있었다. 일행은 몸을 씻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남루한 벽 위에는 울긋울긋하게 잼 속에 빠진 듯한 낙타와 종려나무가 그려져 있었다. 아치 모양의 창문을 통하여 약간의 광선이 스며들었다. 마르셀은 호텔 주인에게서 상인들에게 관한 정보를 들었다. 작업복에 훈장을 단 늙은 아랍 인 두 사람이 시중을 들고 있었다. 마르셀은 빵을 뜯으며 골똘히 생각하다가 아내에게 냉수 를 마시지 않도록 주의시켰다. 끓인 물이 아니야. 포도주를 마셔. 온몸이 노곤한 그녀는 모든 게 귀찮았다. 포도주도 좋아하지 않았던 그녀는, 메뉴에 돼지 고기라고 적혀 있는 거이 눈에 띄었다. - 코란에 돼지고기는 금하고 있지만, 잘 구우면 아 주 좋은 음식이죠. 우린 그런 요리법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소? 쟈닌느는 아무 생각도 않고 있었다. 아니 그녀는 예언자를 무색케 하는 요리사들을 생각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서둘러야 했다. 그들은 이튿날 아침에는 더 남쪽으로 떠나야 했고, 그날 오후에는 그곳의 굵직한 상인들을 모두 만나야 했다. 마르셀은 늙은 아랍인에게 커피를 독촉했다. 아 랍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종종걸음으로 나가버렸다. 아침에는 조용히, 밤에는 서두르지 말고. 마르셀은 웃으면서 말했다. 커피가 나왔다. 그 들은 급히 커피를 마시고 먼지투성이인 거리로 나섰다. 마르셀은 트렁크를 나르기 위해 젊 은 아랍인 한 사람을 불렀다. 그런데 품삯 때문에 시비가 벌어졌다. 마르셀은 이 점에 대하 여 여러 번 말했지만, 그들은 두 배의 품삯을 요구했던 것이다. 쟈닌느는 몹시 못마땅했지만 짐을 진 두 사람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녀는 홀가분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육중한 털외투를 껴입고 있었다. 잘 굽기는 했지만 돼지고기와 포도주가 그녀에게는 달가운 것이 못되었다. 그들 일행은 나무들이 뽀얀 먼지를 쓰고 죽 늘어선 조그마한 공원 곁을 지나갔다. 간간이 마주치는 아랍인들은 외투자락을 걷어올리고 이쪽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쟈닌느는 그들에게서 몸에는 비록 누더기를 걸쳤을망정 자기 고장에서 볼 수 없 었던 당당한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그녀는 군중들 속을 헤치고 지나가는 트렁크를 뒤쫓고 있었다. 그들은 황토로 된 성벽문을 지나서, 역시 먼지를 뒤집어 쓴 나무들이 무성하고 상점 들이 길게 늘어선 좁은 광장에 이르렀다. 그들은 포탄 모양으로 된 푸른 회칠을 한 작은 집 앞에 멈춰섰다. 안에는 방이 하나밖에 없었으며, 출입구를 통해서만 겨우 햇빛이 들어가 게 되어 있었다. 반짝거리는 판자 뒤에 흰 콧수염을 기른 늙은 아랍인 한 사람이, 각각 색깔 이 다른 세 개의 작은 컵에 차주전자를 기울였다 들었다 하면서 차를 따르고 있었다. 어둠침침한 상점 안에서 그들은 아무 것도 분별할 수 없었지만, 박하차의 신선한 향기가 문턱에 선 마르셀과 쟈닌느를 맞아 주었다. 문을 들어서니, 주석으로 만든 차주전자와 찻잔 과 쟁반들이 그림엽서를 꽂은 회전대에 뒤섞여 일종의 장식을 이루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 마르셀은 카운터와 마주쳤다. 쟈닌느는 입구에서 햇볕을 막지 않으려고 비켜서서 기다렸다. 그러자 그녀는 늙은이 뒤의 어둠침침한 곳에 아랍인 두 사람이 자기를 쳐다보며 웃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상점 안쪽으로 잔뜩 쌓여 있는 불룩한 부대 위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진홍색과 검은색의 양탄자와 수를 놓은 명주가 벽에 죽 걸려 있었다. 땅바닥에는 향기로운 씨앗이 든 작은 상자가 가득 놓여 있었다. 카운터 위에는 반짝이는 구리 쟁반이 달린 저울과 눈금이 닳아서 지워진 낡은 자 둘레에 설탕 덩어리가 놓이고, 그 중의 하나는 푸른 포장지가 벗겨져서 꼭대기가 부서져 나갔다. 늙은 상인이 카운터 위에 찻잔을 놓고 인 사를 할 때, 차 향기와 방 안에서 나는 포목과 향료의 냄새가 진동했다. 흥정을 할 때 마르셀은 언제나 하는 버릇대로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했다. 그는 트렁크를 열고 늙은 상인에게 포목과 명주를 꺼내 보이고는 그것을 펴놓기 위해 저 울과 자를 밀어놓았다. 그는 흥분하여 언성을 높이면서 어색하게 웃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 치 남의 마음에 들고 싶어하면서도 자신이 없는 여자의 태도 같았다. 그는 손을 크게 벌리 고 매매하는 시늉을 하였지만, 늙은이는 고개를 저으며 자기 뒤에 앉은 두 아랍인에게 차 쟁반을 넘겨주며 몇 마디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말은 마르셀을 실망케 한 모양이었다. 마르셀은 포목을 걷어서 트렁크에 집어넣고는 이마에 나지도 않은 땀을 씻는 것이었다. 그는 어린 짐꾼을 불러서 시장 쪽으로 발을 옮겼다. 첫 가게에서 주인의 태도는 거만스러웠 지만 먼젓번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자식들, 마치 성인이라도 된 줄 알지만 장삿속은 매일반이야. 먹고살기란 어려운 것이 지. 마르셀은 이렇게 말했다. 쟈닌느는 말없이 남편의 뒤를 따랐다. 바람은 전혀 일지 않았다. 하늘은 군데군데 개이기 시작했고, 싸늘한 햇빛이 두꺼운 구름을 뚫고 쏟아져 내렸다. 그들은 광장을 떠나 흙담을 끼고 좁은 길을 걷고 있었다. 흙담 위에는 시든 섣달의 장미 가 매달려 있었고, 여기저기 시들고 벌레먹은 석류가 달려 있었다. 먼지와 커피의 향기, 나 무 껍질을 태우는 연기, 돌냄새, 양냄새 등이 뒤섞여 그 거리에 감돌고 있었다. 흙벽으로 된 상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쟈닌느는 다리가 무거워졌다. 그러나 남편은 물건이 팔리 기 시작하자 점점 명랑해지고 더욱 상냥해졌다. 그는 쟈닌느를 프리트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번 여행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아무렴요. 하고 쟈닌느도 맞장구를 쳤다. 그들과 직접 타협하는 게 좋겠어요. 그들은 다름 도심지로 돌아왔다. 해는 오후가 된지 오래고 이제 하늘도 거의 개어 있었다. 그들은 광장에서 발을 멈추었다. 마르셀은 손을 비비며 트렁크를 살펴보고 있었다. 저것 봐요. 쟈닌느가 말했다. 광장 저쪽에서 메마르고 억세게 생긴 아랍인 하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하늘색 외투 를 입고 노랗고 부드러운 장화를 신고, 손에 장갑을 끼고, 햇볕에 그을린 독수리같은 얼굴을 쳐들고 있었다. 터번에 달린 수실만이 쟈닌느가 때때로 동경하여 오던 식민지 부대의 프랑 스 장교들과 구별되었다. 그는 그들이 서 있는 곳으로 곧장 걸어왔다. 그는 천천히 장갑을 빼면서 그들이 서 있는 곳 너머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저런, 저 녀석도 장군이나 된 듯이 으시대는군 그래. 마르셀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 다. 사실 그러했다. 이 고장 사람들은 모두들 거만했지만 그자는 더욱 심했다. 그는 텅 빈 광장을 지나 트렁크도 일행도 안중에 없다는 듯이 곧장 걸어오고 있었다. 그 아랍인이 가까 이 다가오자 마르셀은 갑자기 트렁크의 손잡이를 쥐고 뒤로 잡아당겼다. 아랍인은 아무 것 도 못 본 듯이 성벽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쟈닌느는 남편을 쳐다보았다. 그는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놈들은 안하무인이란 말이야. 쟈닌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도 아랍인이 으시대는 꼴이 밉살스럽고 갑자기 자기 자신이 불행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그곳을 떠나고 싶었다. 더욱 그들의 아파트 가 그리워졌다. 그러나 호텔의 차디찬 방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자 몹시도 심란 해지는 것이었다. 그녀는 문득 사막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성벽의 망루에 올라가보라고 하던 호텔주인의 말 이 생각났다. 그녀는 트렁크는 호텔에 맡기고 망루에 올라가 구경이나 하자고 남편에게 말 했다. 그러나 남편은 오히려 피곤하니 저녁식사 전에 한잠 자고 싶다고 했다. 제발 그렇게 해요. 그녀는 호텔 앞에서 남편을 기다렸다. 흰옷을 입은 군중들은 점점 수가 늘어갔다. 모두가 남자들뿐이므로 그녀는 그렇게 많은 남자들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다만 몇몇 남자들이 그 메마르고 누르죽죽한 얼굴을 이쪽으로 돌릴 뿐이었다. 쟈닌느에게는 그 얼굴들이 버스 속의 프랑스 병정이나, 장갑을 낀 아랍인이나 모두가 한 결같이 교활하고 거만하게 보였다. 그들은 타국 여자에게 얼굴을 돌리기는 하였지만, 결코 유심히 바라보지 않았으며, 발목이 아파서 서 있는 그녀의 곁을 가볍게 그리고 묵묵히 스쳐 서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쟈닌느는 불쾌하여 더욱 그곳을 떠나고 싶었다. 자신이 왜 따라와서 이 고생인가 하고 생각하니 더욱 기분이 씁쓸했다. 그때 마르셀이 저만치서 내려 오고 있었다. 그들이 성벽에 오른 것은 오후 다섯시였다. 바람은 전혀 일지 않았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었다. 오늘따라 더욱 매서워진 추위가 그들의 볼을 저미는 듯 하였다. 층계 중간에 한 늙은 아랍사람이 벽에 기대어 서서 그들에게 안내해 드릴까요 하고 물었 다. 그러나 그들이 거절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흙이 굳어버 린 층계가 몇 군데 있었는데, 위태로운 길다란 층계는 위로 올라감에 따라서 공간이 넓어져, 점점 퍼져가는 차고 건조한 햇빛을 받고 있었다. 오아시스 특유의 갖가지 소리가 역력히 들려왔다. 맑은 대기가 위로 올라갈수록 긴 진폭 으로 주위에서 진동하는 것 같았다. 마치 그들이 지나가면서 광선의 결정체 위에 더욱 큰 음파를 일으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망루에 이르러 우렁찬 또 하나의 음악으로 울려, 그 반 향이 점점 자기 위의 공간을 채우다가 갑자기 멎어버리고, 끝없는 벌판에 자기 혼자 남게 되는 것같이 느껴졌다. 쟈닌느의 시선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천천히 옮겨갔으나, 그 순수한 곡선 위엔 단 하나의 장애물도 없었다. 발 밑에는 아랍인 촌락의 푸르고도 흰 테라스가 얼기설기 겹쳐 있었으며, 햇볕에 널어놓은 고추가 군데군데 검붉게 얼룩져 보였다. 사람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지 만,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 진흙담으로 고르지 못하게 구분된 네모꼴 종려나무밭이 망루에서는 맛볼 수 없던 바람으로 꼭대기가 설렁거리고, 더욱 멀리서는 생명의 흔적을 찾 아볼 수 없는 거무칙칙한 돌이 깔린 벌판이 지평선까지 뻗고 있었다. 오아시스가 있는 마을 에서 서쪽으로 종려나무밭을 따라 흐르고 있는 냇가엔 거무스름하고 큼직한 천막들이 보였 다. 그리고 그 주변에 거리가 멀어서 콩알만하게 보이는 낙타떼들이 잿빛 대지 위에 숨은 뜻을 지닌 이상한 암호를 이루고 있었다. 사막에서의 침묵은 허공처럼 끝도 없이 펼쳐졌다. 쟈닌느는 몸 전체를 벽에 기대인 채 소리없이 앞에 벌어진 허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서 있었다. 옆에서는 남편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는 추워서 내려가고 싶어했다. 도대체 여기 서 볼 게 무엇이람? 하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쟈닌느는 지평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멀 리 남쪽 하늘과 땅이 선을 이루며 마주치는 곳에서 그녀가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그 무엇 이, 자기에게 부족했던 그 무엇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오 후의 햇볕은 점점 엷어져 결정체같아 보이던 빛이 액체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자연스럽게 한 여인의 마음 속에 몇 해를 두고 습관과 권태로 단단히 묶여있던 매듭이 서서 히 풀려가는 것이었다. 쟈닌느는 유목민들의 야영소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는 없 었다. 그 검은 텐트 마을에는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그곳 사람들의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들은 오늘날까지 그들의 존재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보잘것없는 사람들로서, 집도 없이 세상과 동떨어져서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방대한 지역을 방황하는 한 무리의 나그네들이었다. 그 지역은 넓은 대지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 대지는 멀리 남쪽으로 강물이 숲을 기름지게 하는 곳까지 수천 킬로미터나 뻗쳐 있었다. 옛날부터 속속들이 황폐한 이 메마른 벌판을 끊임없이 헤매는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으나, 아 무도 섬기지 않는 이 기이한 왕국에 비참하지만 자유스러운 영주들이었다. 쟈닌느는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녀는 어찌하여 이런 생각이 그토록 마음을 흐뭇하게 하 고 또한 못 견디게 애수에 잠기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다만 언젠가는 그 왕국이 자기에게 약속되어 있으면서도 결코 자기의 것이 될 수 없으며, 다만 언제나 거기에 있는 하늘과 흘러넘치는 햇살 위에 눈을 뜬 순간만이 영원히 자기 것이 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 었다. 그녀는 아랍인 촌락에서 들려오던 사람들의 말소리가 갑자기 잠잠해지는 순간, 세월의 흐름이 정지된 듯이 느껴졌다. 따라서 그 순간부터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을 듯이 생각되었 다. 이제부터는 괴로움과 감격에 울던 자기 마음 이외의 생명은 정지된 것만 같았다. 그러나 햇빛은 흐려지기 시작했다. 열기가 식어버린 태양은 붉게 물든 서쪽 하늘로 기울 어져 갔다. 한편 동쪽에서는 잿빛 파도가 넓은 공간으로 서서히 퍼지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개 짖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 소리는 싸늘한 하늘에 메아리쳤다. 쟈닌느 는 추위에 이가 덜덜 떨리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다간 얼어죽겠어, 바보같이. 그만 돌아가지. 이렇게 말하며 마르셀은 아내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난간에서 몸을 돌려 남편의 뒤를 따랐다. 층계에 앉아 있던 아랍 노인은 이 들 내외가 마을로 내려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쟈닌느는 아무 것도 바라보지 않고 발을 옮겨놓다가 갑자기 심한 피로를 느꼈으므로, 허리를 굽히고 무거운 자기 자신을 질질 끌다시피 길을 걷고 있었다. 이미 흥분은 가라앉았다. 그녀는 자기가 발을 들여놓았던 그 세계에 어울리기에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 덩치가 크고 살결이 희다고 생각했다. 어린이, 소녀, 말라빠진 사내, 슬쩍 스치고 지나가던 주둔병 따위만이 이 땅을 활보할 수 있는 사람 들이었다. 쟈닌느는 잠들기까지, 아니 죽기까지 자기 자신을 끌고 다니는 일 외에 무엇이 남 아 있단 말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녀는 사실 식당까지 몸을 질질 끌고 갔다. 남편은 피곤하다면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녀는 그동안 감기와 싸우고 있었다.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침대까지 남편의 뒤를 따라 억지로 기어가 말없이 곧 불을 껐다. 방은 쌀쌀했다. 그녀는 열이 심해지며 오한이 났다. 숨 도 답답해졌다. 피는 맥박을 치며 돌고 있었으나 전신은 차가웠다. 그녀는 무서운 생각이 들 어 돌아누웠다. 그러자 침대가 삐걱거렸다. 그녀는 병을 물리치려고 무진 애를 썼다. 남편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거리의 소음이 공기구멍을 통해 귀에 들려왔다. 그녀는 잠을 자야만 했 다. 그러나 검은 천막의 환상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속눈썹 밑으로 움직이지 않던 낙타들이 스쳐가고, 호젓한 고독감이 그녀의 마음 속에 몰려오고 있었다. 거듭 생각할수록 이곳에 온 것이 불만이었다. 그녀는 그같이 생각하면서 잠이 들었다. 잠시 후에 눈을 떴다. 주위는 고요하였다. 그러나 마을 변두리에서 목쉰 개 짖는 소리가 고요한 밤 공기를 뒤흔들고 있었다. 그녀는 몸서리쳤다. 다시 뒤로 돌아누웠다. 그녀의 어깨 에 남편의 단단한 어깨가 닿았다. 그녀는 잠결에 남편에게 몸을 기대었다. 아주 잠든 것이 아니라, 어렴풋이 잠이 오자 가장 마음놓을 수 있는 안식처나 되는 듯이 남편의 어깨에 무 의식적으로 마구 매달리는 것이었다. 말은 하느라고 하였지만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나오 지 않았다. 따라서 자신에게도 전혀 들리지 않고, 다만 남편의 체온만을 느낄 따름이었다. 이십 년 동안 아플 때나 여행을 할 때나 두 사람은 밤마다 이렇게 체온을 나누며 지내온 것 이다. 그밖에 쟈닌느는 집에서 할 일이란 별로 없었다. 어린애도 없었다. 그녀에게 아쉬운 것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오직 남편이 자기를 필요로 하는 것에 만족을 느끼며, 남편과 고락을 같이 해 왔 을 뿐이다. 마르셀이 그녀에게 준 기쁨이란 그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느끼게 하는 것뿐 이었다. 그는 아마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비록 증오에 찬 사랑이라도 느낀다 면 그와 같이 찌푸린 얼굴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스런 얼굴이란 어떤 것인 가? 그들은 밤이면 손으로 더듬으며 사랑해왔다. 어둠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랑 이외에, 대낮 에 떳떳이 내세울 수 있는 사랑이 있었단 말인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오직 그녀가 남편 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것을 의지하고 살아왔다. 특히 밤에는 그러했다. 밤마다 남편은 세상 남자들의 얼굴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그런 완고한 태 도로 있기를 싫어하고, 늙어 죽기를 싫어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광란에 사로잡혀 오직 관능 속에 고독과 밤의 불안을 몰아내 버리는 것이었다. 이것은 육욕에 사로잡힌 광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공통된 모습이었다. 마르셀은 마치 아내를 멀리하려는 듯이 몸을 꿈틀거렸다. 그렇다!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 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아내 아닌 다른 애인에게 손을 대기가 두려웠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들 부부는 이미 헤어졌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혼자서 어떻게 산단 말인가. 하기야 혼자 사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그들의 천직이나 불행이 이성과 가까워지는 것을 가로막아 밤마 다 죽음과 같은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셀은 특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어린애 처럼 무력하고 고통을 두려워하며, 쟈닌느를 필요로 하는 마르셀은 그때 신음소리를 냈다. 그녀는 남편에게 바싹 다가가서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속으로 옛날 자기가 붙 인 애칭으로 그를 불렀다. 그 애칭은 지금도 때때로 사용해 왔지만, 둘이 다 그 의미에 대해 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녀는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 애칭을 불렀다. 그녀 역시 남편과 그의 힘과 기백이 필요했 던 것이다. 그리고 죽는 것이 두려웠다. 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 고 그녀는 까닭모를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리하여 남편에게서 몸을 떼었다. 아니다. 나는 아 무 것도 극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행복하지 못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사실 가슴아프게도 그녀는 죽을 때까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마음의 짐에 눌려 질식할 것 같았다. 그 짐은 이십 년 동안이나 무의식 중에 지고 오다가 갑자기 깨닫게 되어 힘껏 대결하고 있는 것이다. 남편이나 다른 사람은 벗어나지 못할지라도 그녀만은 그 무거운 짐에서 벗어 나고 싶었다. 그녀는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아서 가까이서 들리는 듯한 부름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밤의 한 끝에서 개 짖는 소리만이 힘없이 계속해 들려왔다. 미풍이 종려나무 숲을 스쳐가는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그 바람은 고요한 하늘 아래 사막과 밤이 연결되어 생명 의 영위가 끊어짐으로써 늙은이도 죽는 이도 없는 곳으로부터 불어오고 있었다. 드디어 바 람이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녀는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사실 그 소리 는 묵살할 수도 있고, 알아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귀에는 다만 소리없는 호소만이 들릴 뿐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당장에 대꾸하지 않으면 영원히 정체를 알 수 없는 호소였다. 그렇다, 당장에. 적어도 그것만은 확실했다. 쟈닌느는 살며시 몸을 일으켜 움직이지 않는 남편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남편은 잠 들어 있었다. 곧 침대 속에서 느끼던 온도가 사라져 온몸이 추워왔다. 그녀는 현관의 덧문을 통해 스며드는 희미한 광선 속에서 주섬주섬 옷을 찾아 입기 시작했다. 구두를 들고 문 앞 으로 갔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살며시 손잡이를 돌렸다. 손잡이 소리가 삐꺽거려서 그녀는 잠시 주춤했다. 가슴이 미칠 듯이 뛰었다. 그녀는 귀를 기울였다. 사방의 정적이 그녀의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으므로 다시 손잡이를 돌렸다. 손잡이가 돌아 가는 소리가 그녀에게 무한한 해방감을 가져다주었다. 드디어 문을 열고 밖으로 빠져나가 조심스럽게 다시 문을 닫았다. 그리고 뺨을 문에 대고 서 있었다. 잠시 후 남편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돌아섰다. 얼굴에 차디찬 밤바람이 부딪쳤다. 그녀는 복도를 뛰어갔다. 호 텔 문은 닫혀 있었다. 빗장을 뽑는 동안에 순찰을 돌던 경비원이 찌푸린 얼굴을 하고 층계 위에 나타나 아랍어로 말을 걸었다. 곧 돌아와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어둠 속으로 뛰어나갔다. 하늘에서는 별들이 종려나무들과 집들 위에 내리비치고 있었다. 그녀는 큰길을 따라 달음 질치고 있었다. 그 길은 성벽쪽으로 뻗쳐 있었는데, 밤이라 인기척은 없었다. 이제는 태양을 정복해버린 추위가 밤을 독점하고 있었다. 차디찬 공기가 폐부를 찌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장님처럼 어둠 속을 달리고 있었다. 큰길 끝에서 불빛이 나타나더니 이리저리 휘저 으면서 다가왔다. 그녀는 발길을 멈추었다. 날개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점점 커 지는 불빛 뒤에 커다란 아랍식 외투들과 그 밑에 반짝이는 가느다란 자전거 바퀴들이 눈에 띄었다. 아랍외투들이 그녀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둠 속에서 세 개의 붉은 불길이 솟아오르 더니 곧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다시 성벽을 향해 달려갔다. 층계 한복판에서 숨이 가빴으므 로 좀 쉬고 싶었다. 안간힘을 쓰며 테라스에 올라가 난간에 몸을 던져 아랫배를 기대었다. 그녀는 숨이 턱에 닿았다. 모든 것이 눈앞에 가물거렸다. 그렇게 달려왔지만 몸은 조금도 녹 지 않고 도리어 사지가 덜덜 떨렸다. 그러나 들이마신 찬 공기가 체내에서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토록 떨리는 중에도 미지근한 체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밤의 공간으로 눈을 돌렸다. 가끔 사나운 추위가 돌을 깨뜨려 모래를 만드느라고 사그락거리는 희미한 소리가 들릴 뿐, 그 밖엔 아무 소리도 그녀를 에워싼 고적과 침묵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잠시 후 에 일종의 소용돌이가 온통 하늘을 자기 주위에 끌어내리려는 듯했다. 메마르고 차디찬 밤 의 장막 속에서 수천 개의 별들이 끊임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번들거리는 얼음 덩어 리들은 순식간에 흩어져서 어느새 지평선 쪽으로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쟈닌느는 하늘에 떠도는 별들을 한없이 바라보며, 그 별들과 함께 돌아가고 있었다. 신비 한 이 천체의 운행이, 추위와 욕정으로 싸우고 있는 그녀를 차츰 심오한 자기 존재에로 이 끌어가고 있었다. 눈앞에서 별이 하나씩 떨어져서 사라졌다. 그때마다 그녀는 밤을 향해 마 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면서 추위도, 생사에 대한 불안도 잊어버렸 다. 두려움에 쫓기면서 무작정 뛰쳐나온 그녀는 드디어 자기 자신의 근원을 발견한 것 같았 다. 이젠 더 이상 떨지 않게 된 육체의 피가 다시 솟아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난간 꼭대기에 아랫배를 기대고 움직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아직도 산란한 자기의 마음이 가라앉기를 기다 리고 있었다. 별들이 성좌에서 사막의 지평선 위에 하나씩 떨어지고 있었다. 어둠의 물결이 그녀를 부드럽게 애무하기 시작해 추위를 몰아내고, 그녀의 심장으로부터 솟아올라 끊임없 이 출렁거리며 신음소리가 새어나오는 입술까지 넘쳐흐르고 있었다. 푸른 하늘이 그녀 위에 펼쳐지자 그녀는 그 순간 차디찬 대지 위에 쓰러졌다. 그녀가 방을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조심조심 되돌아왔을 때, 아직 남편은 잠에서 깨어나 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자리에 눕자 그는 낑낑거리며 요란스럽게 일어났다. 그는 무 엇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는 일어나서 전등을 켰다. 등불이 쟈닌느 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쳐왔다. 그는 비틀거리며 세면대로 걸어가서 물병을 주욱 들이켰다. 그는 침대에 누우려고 한쪽 무릎을 침대에 올려놓은 채, 영문도 모르며 아내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아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눈물을 떨어뜨리며 울고 있었다. 염려 말아요. 하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알베르 카뮈(1913-1960): 프랑스의 소설가이며 극작가.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에서 태어 나 제1차 세계대전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빈민가에서 소년시절을 보내고, 고학 으로 대학을 다녔다. 그는 세상의 근원적인 부조리에 저항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이방인 으로 명성을 떨친다. 1957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며, 1960년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었 다. 작품으로 페스트 , 시지프의 신화 , 전락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