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이의 소망이야기 지은이: 토머스 하디 외/차은숙 옮김 출판사: 푸른샘 어머니와 아들 그 밤색 머리카락은 뒤에서 바라보는 사람의 눈에는 놀랍고 신비롭게 비쳐 왔다. 새까만 깃털을 단 검은 수달피 모자 밑에, 마치 한 바구니의 골풀처럼 긴 머리를 땋고 사려서 그야 말로 흔히 볼 수 없는 절묘한 묘기를 부리고 있었다. 누구라도 이렇게 땋고 사리고 해서 손질한 것을 보면, 적어도 한 달이나 일년 쫌 손을 대 지 않으려고 정성을 들인 것으로 알 것이다. 그러나 잠자리에 들 때면 모조리 풀어 버렸으 므로 단지 하루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그것은 정성스럽게 손질한 수고를 무모하게 낭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그녀는 가엾게도 그 머리를 자기 손으로 매일 그렇게 단장하 는 것이다. 하녀도 없었지만, 그보다도 그녀는 자신의 머리모양을 유일한 자랑거리로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귀찮지도 않은 듯이 언제나 정성을 들여 매만졌다. 젊은 부인인 그녀는, 몸에 약간의 장애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바퀴가 달린 의자에 앉아 있 었다. 그 의자는 음악당 앞의 잔디밭에 놓여 있었는데, 거기서 연주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 연주회는 교외에 있는 소공원이나 개인 소유 정원의 한구석에서 열리는 따뜻한 어느 유월에 개최되는 연례행사였다. 그것은 지방 단체가 자선 사업을 위해 기금을 모으려는 행사이기도 했다. 이 대도시는 갖 가지로 복잡한 곳이어서 인접한 지역 밖의 사람들은 아무도 그와 같은 자선 단체나 악대나 소공원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지만, 뜻밖에도 시민들은 이와 같은 행사를 잘도 알 아내 매번 청중들이 잔디밭에 가득 차게 되었다. 연주회가 진행되는 동안에 많은 청중들은 의자에 앉아 있는 그 젊은 부인을 눈여겨보았 다. 그녀의 뒷머리는 그녀의 자리가 여느 사람보다 두드러지게 앞으로 나와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많은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교묘하게 땋아 올린 머리와 새하얀 귀, 목덜미, 그리 고 별로 처지지도 않고 혈색이 나쁘지도 않은 곡선이 뒤에 앉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녀의 용 모가 아름다우리라는 기대를 갖게 했다. 그러나 그같은 기대는 얼굴이 드러나면 실망을 느 끼기 마련이었다. 그 여인이 고개를 돌려 슬쩍 뒤를 돌아다보았을 때, 뒤에 있던 모든 사람 들이 상상한 것처럼 미인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들이 상상한 것보다 훨씬 늙어 보였 다. 그러나 그 얼굴은 매력을 잃지 않았으며, 병색이 배어 있지도 않았다. 그녀가 곁에 서 있는 열두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에게 이야기를 하려고 고개를 돌릴 때마다, 그녀의 얼굴 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 소년의 모자와 재킷으로 보아 소년은 꽤 이름 있는 사 립 중학교에 다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 가까이 서 있는 사람들은 소년이 그녀에게 어머니라고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연주가 끝나고 청중들이 흩어지게 되자, 많은 사람들은 일부러 그녀 곁을 지나서 돌아갔다. 대부분의 청중들에게 호기심을 던져 준 그녀를 똑똑히 보려고 가까이 다가갔던 것이다. 그 녀는 방해를 받지 않고 휠체어를 굴리며 나갈 수 있도록 길이 트일 때까지 가만히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의 시선을 기대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한편 그들 의 호기심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눈을 들어 우수에 깃든, 그러면서도 부드럽고 상 냥한 갈색 눈동자로 자기를 바라보는 몇몇 사람의 시선을 받아들였다. 드디어 그녀는 정원 밖으로 나와 포장된 도로를 지나서 그 학생과 함께 모든 사람의 시야 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몇몇 사람들은 그녀가 이웃 교구에 사는 목사의 후처로 절름발이라는 말을 하였다. 대부분이 그녀를 가리켜 무슨 사연이 있는 여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소년은 집으로 돌아가면서, 아버지가 그들이 집에 없기 때문에 쓸쓸해 하시지 않았 을까 하고 어머니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요 몇 시간 동안은 즐거워 허셨으니까 쓸쓸해 허시지는 않았을 거다. 그녀가 말했다. 하셨다예요. 허셨다가 아니고요. 사립 중학교 학생은 참을성 없이 꽤나 까다롭게 말트집 을 잡았다. 이젠 그만한 것쯤은 아셔야지요. 어머니는 얼른 말을 고쳤다. 그리고 아들이 말트집 삼아 고쳐준 것에 대해서도 나무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아들의 입가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닦으라고 말하며, 충분히 아들의 무례한 말투에 보복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는 그러지도 않았다. 입에 과자 부스러기가 묻은 것은 감춰둔 과자를 남몰래 먹으려다가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 후 이 가엾은 여인과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 말씨는 그녀의 내력과도 인연이 깊었다. 그녀는 자기 스스로가 자기 인생을 이렇게 만 들어 놓은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이었던가 하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듯 했다. 런던에서 약 50마일쯤 떨어진 북부 웨스트 석세스 한 구석에 있는 주청 소재지인 올드 블 리컴에서 멀지 않은 곳에, 목사 사택이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 있었다. 그녀는 그 고장을 속 속들이 알고 있었지만, 아직 아들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그녀는 바로 이 케이미드라는 촌락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지금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 것도 겨우 열아홉살 밖에 되지 않은 소녀시절에 그 곳에서 일어나게 되었던 어떤 일에 기인한다. 이 희비극의 시작은 거룩한 남편의 전처가 죽 음으로 인해 생긴 일이라고 그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당시 이 목사님 댁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계집아이에 불과했다. 그러던 그녀가 여러 해 동안 그 전처의 자리를 차지 해 왔으며, 지금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봄날 저녁 때의 일이었다.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으나 전처가 죽었을 때, 그녀는 같 은 마을에 살고 있는 양친에게 이 비보를 알리기 위해 해가 질 무렵에 집을 나섰다. 그녀가 앞뒤로 열리는 하얀 색깔의 문을 열고 뜰 안에 들어서서, 저녁 하늘의 밝은 빛을 가로막으며 서쪽에 늘어서 있는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문득 한 남자가 울타리 안에 서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별로 놀라지 않았지만 짖궂게 고함을 쳤다. 오, 샘. 깜짝 놀랐어요. 그는 그녀가 잘 아는 젊은 정원사였다. 그녀는 그에게 집안에서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하여 자세히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주고받던 젊은 두 남녀는 비극이 그들 자신에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들과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일어났을 때 생기는 초연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마치 철인이라도 된 듯이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들과도 깊은 관계가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목사님 댁에 눌러 있을 거요?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문 제에 관해 생각해 본 일도 없었다. 그럼요, 아마 그렇게 될 거예요. 그녀가 대답했다. 모 든 것이 여느 때나 다름없으리라고 생각해요. 남자는 천천히 양친의 집을 향해 가는 그녀를 따라 발길을 옮겨 놓았다. 이윽고 그의 팔 이 조용히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그녀는 소리 없이 팔을 밀어 버렸다. 그러나 그는 다시 허 리로 팔을 가져왔으므로 그녀는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이봐요, 사랑하는 소피. 그 집에 눌러 있겠다고 결정한 건 아니지요? 나는 앞으로 가정을 갖고 싶어요. 지금 당장은 어렵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가정을 이루게 될 거예요. 아이, 샘. 왜 그렇게 조급히 서두르세요. 내가 언제 당신을 좋아한다고 말했어요? 공연히 자기 맘대로 남의 뒤를 쫓아다니면서 그러세요? 그렇지만 나라고 다른 사람처럼 프로포즈를 해서는 안 된다는 법이 있어요? 그녀가 집에 도착하자 남자는 그녀에게 작별 인사로 키스를 하려고 몸을 슬쩍 구부렸다. 샘, 안돼. 그럼 못 써요. 그녀는 고함을 치고 입을 손으로 가렸다. 이런 날 밤일수록 보다 경건하게 지내야 해요. 그녀는 키스도 허락하지 않았지만, 그를 집 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그대로 헤어졌다. 홀아비가 된 목사는 그때 나이가 마흔 살쯤 되었다. 그리고 문벌이 좋은 데다 어린아이도 없었다. 이 지방에는 토착지주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대학 교수의 봉급을 받으며 은둔 생활 을 하고 있었다. 남의 눈길을 피하는 그의 버릇은 날로 심해졌다. 그는 종전보다도 더욱더 사람들의 눈길을 피했다. 외부 세계에서는 개혁의 물결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지만, 그는 이와 전혀 보조를 맞추지 않았다. 아내가 죽었지만 그의 가정은 여러 달 동안 종전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요리사, 가정부, 하인 등은 그저 마음이 내키는 대로 일을 하기도 하고 더러 놀기도 했다. 목사는 그들이 일을 하고 안하는 것에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다 그는 단 한 사람밖에 없는 이 집에, 많은 하인들이 필요 없으리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 되어 식구를 줄이기로 작정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잔심부름을 하는 소피가 미리 그에게 떠나야겠다고 입을 열었다. 왜 그러나? 목사가 말했다. 샘 홉슨이 저와 결혼을 하자고 합니다. 그래? 너도 결혼하고 싶니? 아니요. 그렇지만 저도 가정을 가져야 할 테니까요. 그리고 저희 두 사람 중 하나는 나가 야 한다는 말도 들었어요. 며칠이 지난 후에 그녀가 다시 말했다. 내보내시지 않는다면 당장 떠나고 싶지는 않습니 다, 나리. 그리고 샘과 말다툼을 했어요. 그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는 가끔 그녀의 부드러운 태도를 의식하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그녀를 눈여겨 본 일은 없었다. 그야말로 고양이 새끼처럼 가냘프고 상냥하게 생긴 계집애였다. 그녀는 그의 집에서 오랫동안 일하던 한 사람의 하녀였다. 만일 소피가 가버린다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고민했다. 그러나 소피는 가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나간 것이다. 그 리고 모든 것은 다시금 전처럼 조용하게 돌아갔다. 목사 트와이코트 씨가 병이 나자 소피가 식사를 날랐다. 어느 날 그녀는 방에서 나가자마 자 층계에서 쟁반을 든 채 나동그라졌다. 다리를 삐어 일어나지 못했으므로 마을의 외과 의 사를 불러와야 했다. 목사의 병은 나았지만 소피는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는 그 후 다시는 많이 걷거나 오랫동안 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녀의 다리가 웬만큼 낫게 되자 그녀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걷지도 뛰어다니지도 못하고, 실제로 그렇게 움직일 수도 없으니 이제는 마땅히 떠나는 게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앉아서 하는 일은 충분히 할 수 있으며, 숙모가 재봉사라는 이야기도 했다. 목사는 그녀가 자기 때문에 큰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것이 미안해서 이렇게 말했다. 아니다, 소피 야. 절름발이거나 아니거나 나는 너를 보낼 수 없다. 절대로 내 곁을 떠나서는 안돼. 그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분명히 말할 수는 없지만, 자 기 볼에 그의 입술이 닿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자기와 결혼해 달라고 말했다. 그녀는 솔직히 말해서 그를 사랑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 거의 숭배에 가까운 존경 심을 품고 있었다. 설혹 그가 그녀에게 무례하게 대하더라도, 그녀에게 그토록 거룩하고 위 엄있게 보이는 사람을 감히 거절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 자리에서 목사 의 아내가 되는 것을 허락해 버렸다. 맑게 개인 어느 날 아침, 교회의 창들이 환기를 위해 활짝 열려져 있고, 새들이 지저귀며 훨훨 날아와 지붕 들보에 앉아 있을 때, 조용히 결혼식이 열리고 있었다. 목사와 이웃 교구 의 목사보가 한쪽 문으로 들어오고, 그 뒤를 두 사람의 입회자가 따랐다. 다른 쪽 문으로는 사회자가 들어왔고, 잠시 후에 신랑, 신부가 함께 들어왔다. 트와이코트 씨는 이 결혼으로 말미암아 소피의 온순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사회적 으로 매장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런던의 남부에 있는 어느 교회의 목사 인 그의 친구와 교구의 목사직을 교체하여,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그들 부부는 그리로 떠 나갔다. 그들은 숲과 잡목 덤불과 영지가 딸린 아름다운 시골집을 버리고, 거리에 있는 좁고 누추 한 집에 들게 되었다. 또한 그들은 아름다운 종소리를 버리고, 언제나 귀에 거슬리는 단조로 운 종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모두가 그녀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녀가 전에 어떠한 지위에 있었는지를 아는 사람들과는 멀리 떨어지게 되었으므 로, 외부의 눈총을 훨씬 덜 받게 되었다. 이것은 그들이 시골 교구에서 참고 살아야 하는 불 편을 벌충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소피는 누구라도 아내로 삼고 싶어할 만큼 매력이 있는 여자였지만, 숙녀로서는 부족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살림을 하거나 예의범절에 있어서는 훌륭한 솜씨를 보여 주었 지만, 교양과 지식면에 있어서는 감각이 무딘 편이었다. 남편은 결혼한 지 14년이 되도록 그녀를 가르치느라고 무척 애를 썼지만, 아직도 기본적 인 용법조차도 혼동하는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몇 사람 되지 않는 주위의 친지들 사 이에서도 존경을 받지는 못했다. 그런 그녀가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어느 새 많이 자란 아들이 어머니의 부족 한 점을 알아차릴 뿐만 아니라, 때로는 불만을 터뜨리기까지 하는 점이었다. 그녀는 지금까 지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는 조금도 돈을 아끼지 않았으며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그녀는 이 조그마한 도시에 살면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머리를 아름답게 땋아 내리는 일로 몇 시간씩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새 능금같이 싱싱하던 그녀의 볼은 희미한 분 홍빛으로 바래져 갔다. 다리는 그 후로도 본래의 힘을 되찾지 못해 걷는 것은 되도록 피해 야만 했다. 한편 남편은 살기에 편하고 가정적인 비밀을 보장할 수 있는 런던의 생활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보다 20년이나 손위인데다 요새는 중병까지 들어 시달림을 받고 있는 처지였다. 그래도 오늘은 아내가 아들 렌돌프를 데리고 음악회에 가도 무방할 만큼 그 의 증세는 한결 호전된 듯 보였다. 이튿날 우리는 그녀가 과부의 상복을 입고 나타난 것을 목격했다. 트와이코트 씨는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런던 남쪽에 있는 묘지에 묻히게 되었다. 만약 그 묘지에 있는 모든 시체 들이 무덤에서 되살아나 꼿꼿이 몸을 일으킨다고 하더라도, 그를 알아보거나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소년은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나서 학교로 되돌아갔다. 이렇게 주위 환경이 변해 가는 동안에 소피도 나이를 먹어 외모는 제법 성숙해졌지만, 실제로 그녀는 어린애나 다름이 없 었다. 그녀는 일상생활에 쓸 얼마간의 수입 이외에는 돈을 마음대로 쓸 수도 없었다. 그녀는 세상 물정에 어두워 남에게 속아넘어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모든 재산을 은행에 안 전하게 맡겨 놓았다. 아들은 사립 고등학교의 과정을 마치면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시켜 장차 성직자가 되게 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단지 먹고 마시면서 머리를 땋아 내리는 것이 그녀의 가장 큰 일과일 뿐,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방학 때 아들이 돌아오면 맞아들일 수 있도록 집이나 지키고 있으면 되었던 것이다. 남편은 자기가 아내보다 훨씬 먼저 죽으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생전에 교회와 목사관이 있는 거리에 그녀 명의로 별장 양식으로 된 집을 사 두었다. 이 집은 칸막이 벽으로 두 세 대가 살게끔 구분되어 있었으며,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은 그녀의 소유였다. 그녀는 지금 이 집에 살면서 앞에 있는 작은 잔디밭을 내다보기도 하고, 난간 사이로 사 람과 마차들이 끊임없이 오고 가는 모습을 구경하기도 했다. 또 이층 창가에 몸을 내밀고 무성한 나무들과 안개 낀 대기, 단조롭게 늘어서 있는 문들과 큰길을 분주하게 오가는 행인 들의 모습 등을 바라보곤 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아들은 귀족적인 학식과 고전 문법, 그리고 까다로운 성미는 두 루 갖추고 있었지만, 해와 달에게까지 미칠 듯 싶던 소년시절의 동정심은 점점 사그라져 가 고 있었다. 아들은 어렸을 적에 다른 아이들보다 감정이 풍부하고 동정심도 많았다. 또한 그녀는 누 구보다도 아들의 그러한 동정심을 무척 대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아들은 가 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보다는, 돈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 였다. 아울러 점점 더 그녀에게서 멀리 떠나갔다. 소피가 살고 있는 곳은 상인들과 하급 점원들이 득실거리는 변두리여서, 그녀의 유일한 이야기 상대는 자기 집 두 하인 뿐이었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 뒤로 정성껏 매만지던 머리 손질도 그만 두었으므로, 아들의 눈에는 그런 어머니가 한심스럽게만 보였다. 소피의 가슴 속에서는 아들에 대한 애정이 샘물처럼 솟아났지만, 아들은 그 사랑을 알지도 못했고, 별로 원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녀의 애정은 가슴 깊이 간직된 채 남아 있었다. 그녀의 생활은 감당키 어려울 만큼 쓸쓸했다. 남들처럼 마음대로 산책을 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드라이브나 여행 같은 데도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이렇게 하는 일없이 일 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갔다. 그녀는 지금도 그 교외의 한길을 내다보면서 고향을 생각하고 있었다. 일찍이 자기가 태 어났으며, 설사 들에 나가 노동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었다. 그녀는 때때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하여 밤중이나 이른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 조 용한 거리를 내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거기에는 많은 가로등이 무슨 행렬이라도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보초처럼 죽 늘어서 있었다. 그런데 날마다 새벽 한 시쯤이면 그러한 행렬이 있었다. 그것은 시골 마차들이 코벤트 가든 시장으로 배추를 싣고 지나갈 때였다. 그녀는 그 마차들이 이 고요하고 어두컴컴한 시간에 지나가는 것을 가끔 볼 수 있었다. 죽 늘어선 마차마다 금방이라도 뒤집혀 떨어질 듯하면서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푸른 양배 추 다발이나, 콩과 완두가 들어있는 광주리들이 수북이 쌓여있고, 눈처럼 하얀 무더미와 흔 들거리는 갖가지 농산물들이 실려 밤일을 하는 늙은 말에 끌려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늙 은 말은 다른 모든 동물들이 잠들어 있는 이 고요한 시간에 왜 이렇게 일을 해야 하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녀는 마음이 울적하고 신경이 예민해져 좀처럼 잠들 수 없을 때, 외투를 몸에 걸치고 이러한 광경을 내려다보면서 때로는 안스러운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싱싱한 야 채들이 가로등 맞은편으로 운반되어 올 때, 오랜 시간의 여행으로 땀에 젖은 말들이 온통 번질번질한 모습으로 콧김을 뿜어대는 것을 바라보면 한결 마음이 진정되는 것이었다. 이처럼 마차를 몰고 이 거리를 지나가는 농부들의 생활은 낮에 일하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 소피에게는 무척 흥미롭고 일종의 매력까지 느껴졌다. 어느 날 아침에 한 남자가 마차로 감자를 싣고 지나가면서 한길에 늘어선 집들의 창문을 유심히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남자의 모습이 어쩐지 눈에 익은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녀는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마차는 앞이 누런 갈색이고 구식이라 찾기가 쉬웠다. 그녀는 사흘째 되는 날 밤에 그 마차를 다시 볼 수가 있었다. 그 남자는 그녀가 상상했던 것처럼 전에 케이미드에서 정원사로 있었으며 한때 그녀에게 청혼했던 샘 홉슨이었다. 그녀는 가끔 그를 생각하곤 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하는 오막살이 생활이, 오히려 그녀가 지금껏 살아오고 있는 지금의 생활보다 훨씬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보았다. 그녀는 그를 열렬히 사모한 것은 아니었지만, 현재의 우울한 생활에 그의 출현은 그녀에게 커다란 흥분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기대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옳은 것이라 고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잠자리로 돌아가서 다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처럼 채소 장수들은 새벽 한 시나 두 시 경이면 반드시 시내로 들어왔다. 그렇지만 그 들이 언제쯤 돌아가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들의 빈 마차는 흔히 차들이 붐비는 대낮엔 눈 에 잘 띄지 않았지만,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에 빈 마차가 지나가는 것을 언젠가 본 기억이 떠올랐다. 아직 4월이었지만, 그녀는 아침 식사를 마친 후에 창문을 열고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보 고 있었다. 엷은 햇살이 그녀를 내리쬐고 있었다. 바느질감을 들고 앉았지만, 눈은 여전히 거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열 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그녀가 기다리던 빈 마차가 짐을 풀고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샘은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마차를 몰고 있었다. 샘! 그녀가 외쳤다. 깜짝 놀라 뒤돌아보는 그의 얼굴엔 광채가 흘렀다. 그는 어린아이를 불러서 말고삐를 잡 게 하고서 이쪽으로 다가와 창 밑에 섰다. 난 마음대로 움직이질 못해요, 샘! 내려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내가 여기 살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트와이코트 부인! 이 거리 어느 모퉁이에 살고 있다는 건 알았지요. 그는 그 자신이 이 거리에 나타나게 된 사연을 짤막하게 설명하였다. 그는 이미 오래 전 부터 올드블리컴 근처에서 채소를 가꾸던 것을 집어치우고, 지금은 런던 남쪽에서 채소밭을 하는 사람의 지배인으로 있으면서, 한 주일에 두세 번쯤 농산물을 싣고 코벤트 가든으로 가 는 것이 그의 일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호기심 넘치는 질문에 그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덧붙여서, 2년 전에 올드블리 컴 신문에서 옛날 케이미드의 목사가 남부 런던에서 사망했다는 기사를 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이 지역으로 이사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녀의 주소를 알고자 이 지역을 찾아 헤매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지금의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그들은 어린아이들처럼 같이 놀던 북부 웨스트 석세스의 고향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녀 는 상류층에 속하는 자신이, 샘과 같은 남자와 너무 허물없게 굴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 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 뿐이었다. 두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쏟아지 고,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트와이코트 부인, 아무래도 당신은 행복하지 못한 것 같군요. 샘이 말했다. 예, 물론 행복할 수가 없지요! 남편을 재작년에 잃었는데요. 실은 그런 의미에서 한 말은 아닙니다. 고향에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으세요? 여기가 고향인 걸요. 이 집은 평생 내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나도 그 말 뜻을 알겠어 요... 그녀는 다시 솔직하게 대답했다. 사실 그래요, 샘. 고향이... 우리들의 고향이 그립군 요. 난 그곳에서 살고 싶어요. 다시는 그곳에서 떠나지 않고 거기서 죽고 싶어요. 그녀는 또다시 자기의 신분을 떠올렸다. 그렇지만 그것은 순간적인 감정일 뿐이죠. 아들이 있어요. 몹시 귀엽답니다. 지금은 학교에 가고 없지만요. 학교가 가까이 있습니까? 이 거리에도 학교가 많이 있는 것은 나도 알고 있어요. 그렇지 않아요. 그런 삼류 학교가 아니에요! 영국에서도 제일 좋은 곳에 있지요. 아 참, 잊었습니다. 부인이 오래 전부터 숙녀가 되셨다는 것을! 아니, 나는 숙녀가 아니에요. 그녀는 서글픈 표정으로 말했다. 결코 숙녀는 되지 못할 거예요. 그렇지만 내 아들은 신사예요. 그래서 그 애는 나를... 아, 얼마나 귀찮게 구는지 못 견디겠어요. 이처럼 기묘하게 다시 만나게 된 그들은 급속도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낮이나 밤이나 창문을 지키고 있다가 그와 몇 마디씩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었다. 그녀는 유일한 옛 친구와 함께 거리를 거닐면서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하고, 집 앞에 서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몹시 안타깝게 생각했다. 6월 초순 어느 날 밤이었다. 여러 날 만에 그녀는 다시 창틀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문을 밀고 들어와서 친절하게 입을 열었다. 함께 바람이라도 쏘이는 게 어때요? 오늘 아침에는 짐이 절반밖에 차지 않았어요. 나와 함께 코벤트 가든까지 타고 가시겠어요? 양배추 단 위 에 편안한 자리가 있으니까요. 그 위에 푸대도 펴놓았어요. 사람들이 일어나기 전에 집에 돌 아올 수 있을 거요. 그녀는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러나 이내 흥분이 되어 급히 옷을 갈아입고 외투와 베일로 몸을 가린 채, 조심스럽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문을 열었을 때 이미 샘은 대문 앞 계단 위 에 와 있었다. 그는 억센 팔로 그녀를 번쩍 들어 조그마한 안마당을 가로질러 마차 위에 올려놓았다. 사 람의 그림자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곧고 평탄한 큰 길 위에, 가로등만이 양쪽에 늘어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시각에는 이 도시도 시골처럼 공기가 신선했다. 서쪽 하늘에는 아직도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동쪽에선 동이 트기 시작해 훤한 빛이 비쳐 오고 있었다. 샘은 그녀를 자리 위에 올 려놓고 조심스럽게 마차를 몰았다. 그들은 옛날과 다름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샘은 분위기가 너무 가까워지는 것 같으면 자기를 억제하곤 했다. 집에 있으면 너무 적적해요. 이렇게 나서고 나니 마음이 좀 즐거워지는군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트와이코트 부인, 낮에는 이처럼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없답니다. 다음에도 또 나 오시겠죠? 점차 어둠이 걷히고 날이 밝아왔다. 참새가 분주하게 날아다니고, 그들 주위는 점점 집들 이 많아졌다. 그들이 강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환하게 밝았다. 그들은 다리 위에서 세인트 폴 사원 쪽으로부터 아침해가 번쩍이며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강물은 그 쪽을 향해 번쩍 이는 것 같았고, 배는 한 척도 움직이지 않았다. 코벤트 가든 근처에서 그는 그녀를 승용마차에 태웠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 주 보고 작별을 고했다. 그녀는 무사히 집에 되돌아왔다. 그리고 발을 절룩거리며 문 앞으로 다가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열쇠로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샘이 나타나 다시금 용기를 얻게 되었다. 그녀의 두 볼은 붉게 상기되어 매우 아 름답게 보였다. 그녀는 아들 이외의 다른 곳에서, 사는 보람을 찾게 되었다. 그녀는 이런 여행이 자신에게 생기를 되찾아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옳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그와 같은 생각을 잊어버리고 더욱 그와 가까워졌다. 샘은 지난 날 그 녀가 자기에게 너무 냉정하게 굴었지만, 그래도 그녀를 잊을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오 랫동안 망설이다가 한가지 계획을 그녀에게 말했다. 그는 런던의 일자리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고 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 힘으로 채소가게를 운영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때 마침 적당한 가게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럼 그렇게 하시지 그래요, 샘? 그녀가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그건 당신이... 함께 거들어 줄지 몰라서요. 당신이 싫어할 줄... 아니 못하실 줄 압니다. 오랫동안 숙녀 노릇을 하던 당신이, 나 같은 놈의 아내가 될 수 없을 테니 말이요. 나도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군요. 그녀도 그의 말에 당황해 하면서 대꾸했다. 당신이 할 수만 있다면... 그는 말을 계속했다. 당신은 가만히 뒷방에 앉아서 가끔 내가 나갈 때 유리창으로 내다만 보아도 됩니다. 물론 물건을 지키기만 하면 되니까 다리가 불편 해도 상관없을 거예요. 소피,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데요... 이런 생각을 해도 괜찮겠 지요! 그가 애원하듯이 말했다. 샘,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그녀는 그의 손위에 자기 손을 가만히 얹으며 말했다. 나 혼 자 몸이라면 그럴 수 있어요. 기꺼이 받아들이겠어요. 나의 모든 것을 잃더라도 말이에요. 그런 것은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마음이 편하지요. 당신의 너그러운 마음씨에 감사드려요. 샘, 그렇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어요. 내게는 아 들이 있어요. 가끔 나는 이런 생각을 하지요. 그 애는 정말 내 자식이 아니라 죽은 남편에게 서 맡은 아이라고. 그 애는 인간적인 면에서 나와는 전혀 다르답니다. 제 아버지를 많이 닮 았어요. 그 애는 교육을 많이 받았지만, 나는 전혀 교육을 받지 못했거든요. 그 애의 어머니 로서 자격이 많이 부족하죠. 아들과 의논해 보겠어요. 그야 물론이지요. 샘은 그녀가 두려워하는 까닭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결정은 당신 이 하는 것 아니겠소? 소피... 트와이코트 부인!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아들은 어디까지나 아들이고 당신은 당신이니까요. 모르시는 말씀이에요, 샘. 만약 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당신과 결혼하겠어요. 그렇지만 좀 기다려야 해요. 생각할 여유를 주세요. 그 정도의 대답만 들어도 그는 흡족했다. 그는 즐거운 기분으로 헤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지 못했다. 렌돌프에게는 감히 말도 꺼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옥스퍼드 대학으로 진 학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녀가 하는 일이 아들의 생애에 별다 른 영향도 끼칠 것 같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을 너그럽게 이해해 줄까? 만약에 아들 이 그녀의 말에 반대한다면 자신은 아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있을까? 연중행사로 되어 있는 사립 중학교 간의 크리켓 시합이 로드 운동장에서 열리게 되어 있 었지만, 그녀는 아들에게 그런 말을 한마디도 비추지 않았다. 트와이코트 부인은 어느 때보다도 생기가 있어 보였다. 그리하여 렌돌프와 함께 시합 구 경을 나섰다. 그녀는 가끔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다니기도 하였다. 그녀는 구경꾼들 사이로 돌아다니면서 그 문제를 끄집어 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자 갑자기 마음이 명랑해졌다. 아들은 경기에 열중한 나머지 집안 일 같은 것은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그들은 이렇게 나란히 거닐면서도 전혀 동떨어진 생각을 하며, 눈부신 7월의 태양 아래서 거닐고 있었다. 소피는 자기 아들처럼 넓고 흰 칼라와 축이 낮은 모자를 쓴 수많은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커다란 사륜 마차가 아무 데나 줄을 지어 늘어서고, 그 밑에는 갖가지 음식 찌꺼기들과 음료수 병들이 흩어져 있고, 유리컵이며, 접시 그리고 은식기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한편 마차 위에는 부모들이 의기양양하게 앉아 있었다. 그녀처럼 초라한 어머니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만일 렌돌프가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이들 상류층만 염두에 두지 않는 다면, 모든 것이 얼마나 행복할까! 필드에서 배트로 공을 약간 쳤는데도 많은 친척들이 큰 환호성을 올리는 것이었다. 렌돌 프는 운동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 구경하기 위해 껑충 뛰어 올랐다. 소피는 진작 마음 속에 준비해 둔 말이 목구멍까지 끌어 오르는 것을 느꼈으나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아무 래도 결과가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의 이야기와 렌돌프가 좋아하는 유형 사이에는 커다 란 거리가 있었다. 그녀는 좀더 좋은 기회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어느 날 저녁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교외 의 집에 아들과 단둘이 있게 되었을 때, 드디어 침묵을 깨고 자기는 재혼하게 될지도 모른 다고 말했다. 그것도 가까운 장래에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완전히 독립해서 살아가 게 될 때라는 조건을 달아 아들의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아들은 어머니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조금도 탓하지 않고 상대자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머뭇거렸다. 아들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기왕이면 의부가 신사였으면 해요. 네가 말하는 그런 신사는 아니란다. 하고 그녀가 수줍은 듯이 말했다. 네 아버지를 만 나기 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이야. 나와 같은 계층의 사람이란다. 그녀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었다. 그러자 젊은이의 얼굴은 잠시 굳어지더니 책상 위에 엎드려 크게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그 얼굴에 닥치는 대로 키스를 하였다. 그리고 지금 도 어느 측면에서는 어린애이기도 한 아들 등을 두드려 주며, 자기도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 았다. 아들은 다소 마음이 진정되자 자기 방으로 재빨리 돌아가 문을 닫아 걸었다. 어머니는 열 쇠 구멍으로 방 안을 살피며, 밖에서 서성거렸다. 그는 한참 후에야 겨우 대답을 했다. 그는 방 안에서 밖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이게 무슨 창피람! 나는 이제 끝장이야! 촌뜨기 같으 니라고! 농부를! 시골뜨기를! 영국 안의 수많은 신사들 앞에서 나에게 망신을 주려고! 그만 둬라. 내가 잘못 생각했나 보다! 그렇지 않도록 노력하마! 그녀도 비장하게 외쳤다. 렌돌프가 그해 여름 집을 떠나기 전에 샘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는 뜻밖에도 운이 좋아서 예상외로 손쉽게 가게를 사들일 수 있었다고 그녀에게 알려 왔다. 그는 이미 가게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그의 가게는 그 도시에서 제일 클 뿐 아니라, 과일 과 채소를 함께 취급하고 있어 앞으로는 그녀와 함께 살아도 될 만한 집이 될 것이라고 설 명하였다. 그는 그녀에게 달려와 만나도 되겠느냐는 의견을 물어왔다. 그녀는 그에게 아직 마지막 대답을 좀 더 기다려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가을을 지루하게 보내고 크리스마스 휴가로 렌돌프가 집에 돌아왔을 때, 또다시 그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그러나 젊은 신사는 어머니의 말을 무조건 거절했다. 그리하여 그 문제는 몇 달을 그대로 덮어둔 채 지나갔다. 그 후 그녀는 다시 기회를 보아 자신의 재혼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그러나 아들의 반대가 더욱 심하자 그녀는 일단 포기해 버렸다. 그렇지만 자신의 작은 행복을 이루고 싶은 그녀는 기다림에 지쳐, 아들을 타이르기도 하고 애원해 보기도 하면서 여러 해를 보냈다. 샘은 단호한 태도로 자기의 구혼 문제를 매듭지으려고 했다. 마침 대학생인 소피의 아들 이 부활절 휴가로 옥스퍼드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다시 아들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 냈다. 그녀는 아들이 목사로 임명되면 가정을 갖게 될 것이고, 교양없는 말투에 무식한 자신 이 아들의 방해만 될 터이니, 차라리 자기가 재혼하여 멀리 떠나 사는 것이 아들을 위해서 는 좋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들은 이번에도 더욱 화를 낼 뿐 결코 어머니의 뜻에 찬성하지는 않았다. 아들은 어머니 의 취향에 대한 분노와 경멸로 인하여 끝까지 자기의 주장을 고집하였다. 그리고는 자기 침 실에 마련해 놓은 십자가와 제단 앞에 어머니를 데리고 가서 무릎을 꿇게 하고, 자기의 허 락이 없이는 새뮤얼 홉슨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라고 윽박질렀다. 이렇게 해야만 돌 아가신 아버님에게 면목이 섭니다. 하고 그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가엾은 여인은 맹세를 하였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아들이 성직의 임명을 받고 목회일 이 한창 바쁘게 되면 곧 누그러질 것이라며 한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아들은 어머니가 성실한 채소 장수와 목가적인 생활을 함께 해 나가더라도 이 세상에서 손해볼 것이 아무 것도 없을 터이지만, 그가 받은 교육이 그의 인간성을 완전히 박탈해 버 려 그를 아주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녀의 절름거리는 다리는 날이 갈수록 더 기능을 상실하여 자기 집에서 밖으로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녀는 그 집에서 하루하루를 외롭게 보내고 있었다. 나는 왜 샘하고 결 혼하면 안 되는 거지? 왜 그럴까! 그녀는 곁에 아무도 없을 때면 이처럼 푸념하듯이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그 후 약 4년이 지나 한 중년 신사가 올드블리컴에서 제일 큰 과일가게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상점의 주인이었다. 그러나 그 날은 보통 일할 때 입는 옷 대신에 말쑥한 까만 복장을 하고 있었으며, 창문엔 일부 덧문이 닫혀져 있었다. 정거장에서 장례식 행렬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행렬은 그의 상점 앞을 지나 케이미 드 마을을 향해 시가지를 빠져나갔다. 남자의 두 눈엔 눈물이 글썽이고, 영구차가 지나가자 모자를 손으로 벗어 들었다. 그리고 영구차에서는 앞섶이 높은 조끼를 입고 말끔히 면도를 한 젊은 목사가, 먹구름처럼 험악한 눈초리로 거기 서 있는 상점 주인을 쏘아보고 있었다. 토머스 하디(1840-1928): 영국의 소설가이며 시인. 도싯 주에서 석공의 아들로 태어나 중 등교육을 받고 건축사무소에 들어갔으나 후에 문필 활동을 했다. 고향인 웨스트 석세스 지 방을 무대로 한 소설로 유명한데, 그는 작품 속에서 당시 영국 사회의 인습과 편협한 종교 인의 태도를 비판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귀향 , 주드 , 테스 등이 있다. 고향 그 농장은 서머셋셔 산의 움푹 들어간 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옛 석조건물 주위에는 창 고며 닭장, 화장실 등이 빙 둘러 서 있었다. 문 위에는 그 집을 세운 날짜가 그 시대의 우아 한 글씨체로 1673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 집은 낡고 퇴색하여 주위를 에워싼 나무들과 얼 른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풍경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흔히 지주들의 저택 주변에 어울릴 만한 높은 느릅나무들이 한길에서 아담한 뜰 안까지 죽 늘어서 있었다. 이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그 집만큼이나 감각이 둔하고 끈기있고 또한 소박했다. 그들에게 오직 한 가지 자랑거리는 그 집을 지은 후로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거쳐 대대로 끊기지 않고, 그 집에서 태어나 그 집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삼백 년 동안이나 그 집 주변의 땅을 일구며 살아왔다. 조지 메도우즈는 이제 오십 고개를 넘어선 사람으로 아내는 두 살 아래였다. 두 부부는 한창 때 키가 늘씬하고 멋이 있었다. 그리고 2남 3녀의 자녀들도 건장하고 잘생겨, 신사 숙 녀가 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들은 자기 고장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일찍이 그렇게 하나로 뭉친 가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명랑하고 부지런하고 또 친절했다. 그들의 생활은 가장을 중심으로 협조적이었다. 그것은 마치 베토벤의 교향곡처럼 생활에 커다란 아름다움을 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행복했으며, 또 그 행복을 누릴 만한 자격 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집 가장은 조지 메도우즈가 아니라, 그의 어머니라고 말했다. 그녀는 아들보다 훨씬 남자다웠다. 일흔의 할머니로 키가 크고 몸집이 꼿꼿하며 회색머리에는 위엄 이 있었다. 얼굴에는 주름이 많이 잡혀 있었으나 눈은 밝고 날카로웠다. 그 집과 농장에서는 이 할머니의 말이 법률처럼 권위가 있었다. 할머니는 유머가 있고, 엄하면서도 자비로웠다. 식구들은 그 할머니의 농담에 곧잘 즐거워하였고, 또 그것을 남들에게 옮기기도 했다. 할머 니는 훌륭한 여류 실업가이기도 하여, 이 할머니를 능가하려면 이른 새벽에 일어나야만 했 다. 할머니는 개성이 뚜렷하고 남다른 친절과 비웃기를 잘 하는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 다. 어느 날 내가 집으로 돌아가는데 조지 부인이 나를 불러 세우고 수선을 떠는 것이었다. 오늘 누가 여기에 오는지 아세요? 하고 그녀는 물으며 말을 계속했다. 조지 메도우즈 아 저씨가 오신대요. 왜 중국에 가 있던 분 아시잖아요. 아니 그분이 여태 살아 계셨나요? 그러게 말예요, 모두들 돌아가신 줄만 알았는데... 나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그 이야기는 옛날의 민요와 같은 맛을 풍겨 재 미가 있었다. 조지 메도우즈 아저씨와 그의 동생 톰은 둘 다 모두 현재의 메도우즈 할머니 가 오십여 년 전 처녀시절에, 그녀에게 청혼을 했었다. 그런데 그녀가 톰과 결혼하게 되자, 그는 해외로 떠나고 말았다. 주위 사람들은 그가 중국의 어느 해변가에 살고 있다고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그는 이십 년 전까지는 가족에게 간혹 선물을 보내오곤 했지만, 그 이후부터는 소식이 뚝 끊어져 버렸 다. 톰 메도우즈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과부가 된 메도우즈 부인은 그에게 편지로 이 사실 을 알렸으나 답장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죽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며칠 전에 그들은 포츠머스에 있는 어느 선원 숙소의 관리인에게서 한 통의 편지 를 받고 깜짝 놀랐다. 그는 지난 십 년 동안 류머티스 관절염을 앓아 절름발이가 되어 구호 를 받아 왔는데, 이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느끼자 자기가 태어난 고향집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장조카 앨버트 메도우즈가 포드 자동차로 그를 데리 러 포츠머스로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하여 그는 그날 오후에 집에 도착할 예정이었던 것이 다. 글쎄 생각 좀 해 보세요. 이곳을 오십 년이나 떠나 계셨으니, 바로 쉰 한 번째 생일이 돌 아오는 제 남편도 그 분을 한 번도 뵌 적이 없다잖아요? 메도우즈 부인은 뭐라세요? 하고 내가 물었다. 그 분의 성격을 잘 아시잖아요. 그냥 빙그레 웃기만 하세요.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떠나 실 때는 늘씬한 청년이었지, 그렇지만 동생만큼은 침착하지 못했어. 하시지 않겠어요. 그 분 이 조지의 아버지를 택한 것도 그 때문이었대요. 조지 부인은 나더러 자기 집에 들러 그를 만나 보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런던 이외에는 별로 집에서 멀리 나가본 적이 없는 시골 여인의 단순한 생각으로, 내가 중국에 가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서로 통하는 데가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나는 물론 그녀의 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내가 갔을 때는 온 집안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바닥이 돌로 되어 있는 식당에 앉아 있었는데, 메도우즈 부인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벽난로 옆에 놓인 의자에 반 듯이 앉아 있고, 아들과 며느리는 자기 자녀들과 함께 테이블 곁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메 도우즈 부인만이 좋은 비단 옷을 입고 이들과는 떨어져 앉아 있는 것이 민망스럽게 보였다. 그리고 난로 반대쪽에는 한 영감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는 몸집이 하도 메말라 마치 헐거운 헌 옷처럼 가죽만이 뼈대 위에 덮여 있는 것 같았다. 얼굴은 누렇게 떠 주름살이 우 글쭈글하고, 이는 다 빠져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와 악수를 했다. 메도우즈 씨, 고향에 돌아오셨으니 얼마나 기쁘십니까! 하고 내 가 말했다. 나는 이래뵈도 선장일세. 그가 내 말을 정정하며 말했다. 여기까지 걸어 오셨어요. 그의 조카 앨버트가 나에게 말했다. 마을 어귀까지 와서 차를 세우라고 하시더니 걷겠다고 하시잖아요. 나는 지난 2년 동안을 병석에 누워 있었네. 차에 탈 때도 사람들이 들어다 태워 주었지, 다시는 땅을 밟고 걷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네. 그러나 낯익은 느릅나무를 보니 아버님께서 그것을 아끼던 생각이 나더군 그래. 그러자 나는 걸을 수 있을 것처럼 생각되었네. 그래서 내가 스물다섯 살 때 걸어나간 바로 그 길을 이제 다시 걸어서 돌아온 거야.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에요. 하고 메도우즈 부인이 핀잔을 주었다. 아니야, 그건 나에게 힘을 주었소. 나는 과거 십 년 전보다 더욱 강해진 것 같소. 에밀리, 나는 아마도 당신보다 더 오래 살게 될 거요. 너무 자신하지 마세요. 메도우즈 부인이 대답했다. 과거 한 세대 동안에 메도우즈 부인을 직접 이름으로 부른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 영감이 부인을 너무 허물없이 대하는 것 같아서 저으기 놀랐다. 부인은 눈 언저리에 날 카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영감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에게 말할 때 맹숭맹숭한 잇몸을 드 러내고 곧잘 웃었다. 나는 그 두 노인이 반세기 동안이나 서로 얼굴을 대하지 못했다는 사 실과, 그렇게 먼 옛날에 그녀가 자기를 사랑한 그를 버리고 그의 동생을 택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들이 당시의 감정과 또 주고받은 말을 지금도 기억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또한 메도우즈 씨가 그 할머니 때문에 대대로 이어 내려온 조상의 가문을 버리고 시작한 오랫동안의 유랑생활을, 후회하는 것은 아닌지 알고 싶었다. 메도우즈 선장님, 그 동안에 결혼하신 적이 있으세요? 하고 내가 물었다. 난 결혼 안 했다네.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여자들에 대 해서는 잘 알고 있으니까. 입버릇처럼 뇌까리던 말을 또 하시는군요. 메도우즈 부인이 쏘아붙였다. 깜둥이 여편네 를 여럿 거느렸다고 해도 놀랄 것 없어요. 에밀리! 중국 여자는 깜둥이가 아니오. 그것도 몰라? 그들은 황인종이란 말이요. 오라! 그래서 당신도 누런빛을 띠고 있군요. 난 그런 줄 모르고 혹시 황달병이라도 걸리 지 않았나 했었지. 에밀리! 나는 당신 이외에는 아무하고도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소. 그대로 실 천한 것 뿐이오! 그는 조금도 비통해 하거나 분개하는 기색이 없이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 이십 마일을 걷겠다고 말했어. 그리고 그것을 실천했소. 그의 말 에는 만족감까지 띠고 있었다. 그렇다면 안심이군요. 그녀가 대답했다. 나는 중국에 대하여 그 노인과 이야기했다. 중국의 항구라면 주머니 속보다 더 잘 알고 있네. 어디에 배를 대면 좋을지 환하네. 내가 겪은 이야기를 다 하자면 반년은 걸릴 걸세. 그래요?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한 가지 이행치 못한 것이 있어요. 메도우즈 부인이 비 꼬는 말투이기는 하지만, 눈 언저리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돈을 벌지 못했다는 말이에요. 나는 돈을 모아두는 사람이 아니오. 돈을 벌어서 쓰자는 것이 내 생활신조였으니까. 나는 이 세상을 다시 산다고 하더라도 이 생활신조를 버리지 않을 거요. 아마 이렇게 말할 사람 은 별로 없을 테지. 그럼요. 하고 내가 말했다. 나는 감탄과 존경을 금치 못하는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가 다 빠진 절름발이 노인으로 땡전 한푼 없었지만, 삶을 즐기며 평생을 멋있게 살아온 분이었다. 내가 그의 곁을 떠날 때, 그는 내일 또 오라고 말했다. 중국에 대한 이야기라면 무엇이든지 들려주겠다는 것 이었다. 이튿날 그 영감님이 정말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지 확인해 보려고 느릅나무가 죽 늘어선 한 길을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정원에서 메도우즈 부인이 꽃을 꺾고 있었다. 내가 인사를 했 더니 그녀는 흰 꽃을 한아름 안은 채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창문에 커튼이 드리워진 것을 보고 의아스러웠다. 메도우즈 부인은 방 안에 햇빛이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는 줄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빨리 땅에 묻혀야 어둠 속에서 실컷 살텐데... 그녀는 언제나 이렇 게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었다. 메도우즈 선장님은 안녕하세요? 하고 내가 물었다. 그 양반은 언제나 방정맞게 걸어다녔거든. 하고 그녀는 대답했다. 글쎄, 오늘 아침에 리지가 차를 갖고 가 보았더니 돌아가셨더라지 뭐야. 그래요? 자다가 그냥 간 거야. 그 방에 갖다 놓으려고 이 꽃을 꺾고 있는 거지. 아무튼 자기 집에 서 세상을 떠났으니 다행이야. 우리 메도우즈 집안에서는 그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왔으 니까. 그들은 조지 메도우즈 영감을 잠자리에 들게 하느라고 무척 애를 썼다고 했다. 그는 가족 들에게 그 동안에 겪은 이야기를 밤늦도록 들려주었다. 그는 자기의 옛집에 돌아온 것에 무 척 기뻐했다는 것이다. 그는 부축을 받지 않고 집 안에 들어온 것을 자랑스러워했으며, 앞으 로 이십 년은 더 살겠다고 장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운명은 용케도 제자리에 와서 끝을 맺었던 것이다. 메도우즈 부인은 가슴에 안은 흰 꽃의 향기를 맡으며 말했다. 나는 톰 메도우즈와 결혼하고 조지가 고향을 떠난 후로, 나와 맞는 사람과 결혼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 모옴(1874-1965): 영국의 소설가이며 극작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롭게 자라면서 의학 공부를 했으나, 1897년에 첫 소설 램버스 라이자 를 써서 주목을 끌었다. 날카로운 필체와 기지로 인간의 심리를 묘사한 그의 소설은 여러 나라 말로 절찬을 받았다. 대표작으로 소설 에 인간의 굴레 , 달과 6펜스 , 면도날 , 희곡으로 훌륭한 사람들 , 눈호스 등이 있다. 환상을 좇는 여인 웨스트 석세스 지방의 유명한 해수욕장인 소렌트시에서 윌리엄 마치밀은 셋집을 찾아 헤 매다가 마침내 계약을 하고 나서 아내를 데리러 호텔로 돌아왔다. 아내는 마침 아이들을 데리고 바닷가로 산책을 나가고 방에 없었다. 군인처럼 생긴 급사 가 그들이 간 방향을 가리켜 주는 대로 마치밀은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원, 멀리도 왔군! 아이 숨차. 마치밀은 아내 곁에 다가서서 짜증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 었다. 그녀는 걸음을 옮기면서 책을 읽고 있었다. 세 아이들은 유모와 함께 훨씬 앞서 가고 있었다. 마치밀 부인은 책을 읽으며 명상에 잠겼다가 갑자기 놀랐다는 듯이 대답했다. 하도 돌아 오지 않으셔서, 쓸쓸한 호텔에 남아 있기가 지겨웠어요. 그렇지만 이렇게 우리를 찾으셨다니 미안해요, 윌! 나도 집을 구하느라 어지간히 골탕을 먹었다오. 공기 좋고 시원한 방이라고 해서 가보면 이건 굴 속같이 답답하고 누추하니 말이오. 마침 하나 정해 놓았는데 당신 마음에 드는지 가보지 않겠소? 방도 별로 없는 데다가 그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없습디다. 다른 방들은 모 두 사람이 들었더군. 그들 부부는 아이들과 유모가 산책을 하도록 그대로 내버려두고, 그들만 집을 보러 돌아 왔다. 그들 부부는 나이도 젊고 생김새도 서로 비슷하였으며, 그 밖의 여러 조건도 잘 갖추 어져 있었지만 성격만은 전혀 달랐다. 그렇지만 자주 부딪치는 일은 없었다. 남편은 우둔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었지만, 매우 무심한 편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아주 활 달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다른 것은 그들의 취미와 기호가 아주 미묘하고 이질적인 특색 을 지니고 있었다. 마치밀은 아내의 취미나 습성을 다소 유치하고 쑥스럽다고 생각했다. 한편 그녀는 그녀대 로 남편의 취미를 물질 위주로 천박하다고 여겨 왔던 것이다. 그녀의 남편은 북부지방의 번 화한 도시에서 총포 제조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온통 사업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반면 그의 아내는 우아하고도 고색이 창연한 어휘를 즐겨 쓰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매우 민감하고 섬세한 여인이었으므로, 총포를 제조하는 남편 사업이 생명을 살상하는 목적을 지 닌 물건을 만들어 내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마다, 남편의 직업에 대해 불만이었다. 그녀는 오 직 그들 무기 중에서 어떤 것은 인간들에게 위협이 되는 무서운 해충이나 동물을 퇴치하는 데 쓰이고 있다고 자위함으로써, 겨우 마음의 평온을 누리게 되었다. 그녀는 결혼하기 전에는 그와 같은 직업이 남편으로 맞아들이기에 합당치 않다는 생각을 해 본 일이 없었다. 어떤 일을 해서든지 살아나가야 한다는 필요성과, 모든 선량한 어머니들 이 가르치고 있는 부덕으로 말미암아, 그녀는 윌리엄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럭저럭 신혼생활을 보냈기에 그런 생각을 해본 일이 없었다. 그녀는 뒤늦게야 마치 어두운 곳에서 발이 무엇엔가 걸려 비틀거리는 사람처럼, 총포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의혹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희귀한 것인지, 흔한 것인지, 금이 들어있는지, 은이나 납이 들어있는지, 또한 그것이 쓸모가 있는 것인지의 여부도 생각해 보았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나름대로 어떤 막연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 남편이 우 둔하고 품위가 모자라는 것을 가엾게 생각하게 되었고, 그를 남편으로 맞게된 자신도 측은 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윌리엄이 알더라도 별로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을 공 상으로, 그녀의 섬세하고 미묘한 정서를 발산하는 것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으며 살아왔다. 그녀의 얼굴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우아했으며, 체격은 날씬하고 동작은 매우 경쾌하고 민첩했다. 그녀의 까만 눈은 신비롭게 광채를 발했으며, 그녀와 같은 영혼의 소유자들이 지 니고 있는 특징을 두드러지게 갖고 있었다. 그와 같은 눈동자는 그녀의 남자 친구들이나 심 지어 어떤 때는 그녀 자신에게도 상심의 원인이 되기가 일쑤였다. 남편은 키가 훤칠하고 얼굴이 길며 갈색 수염에 사색적인 눈을 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언제나 아내에게 친절하고 관대했다. 그의 말투는 무미 건조했으며, 지금같이 험악한 시대에 그와 같은 직업을 갖고 있는 것을 매우 흡족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 부부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셋집 앞에 다다랐다. 그 집은 바다에 면한 테라스가 있었고, 바람과 조수를 막는 상록수가 울창한 조그마한 정원이 앞에 있었으며, 현관까지는 돌층계로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그 집은 같은 모양으로 죽 늘어선 여러 집들 중에 하나였으므로 번호가 붙어 있었지만, 다른 집들보다 약간 컸기 때문에 이웃 사람들은 그 집을 가리켜 뉴퍼레이드13호 라고 불렀 다. 그러나 그 집 여주인은 반드시 코버그 하우스 라는 별명을 붙여서 다른 집과 구별하려 고 하였다. 지금은 밝은 햇살이 내리쬐어 상쾌한 모습의 집이지만, 겨울이 되면 모래 포대를 쌓아 올 려놓았다. 그리고 비바람을 막기 위해 열쇠 구멍까지 틀어막아야 했다. 비바람에 페인트칠이 거의 벗겨져, 애벌칠과 마디 장식이 드러나 보였다. 신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집주인은 그들을 맞아들여 방을 보여 주었다. 그녀의 남편은 고급 관리였는데 갑작스런 죽음으로 미망인이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생활이 어려워 지게 되었다는 사정을 말하고 나서, 조심스런 표정으로 그 집이 살기에 아주 편하다는 설명 을 덧붙였다. 마치밀 부인은 위치와 집은 마음에 들지만, 규모가 너무 작아서 방을 모두 쓰지 않으면 사는 동안에 불편이 많겠다고 했다. 집주인은 실망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첫눈에 정직 한 분들 같아서 꼭 자기 집에 세 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방 두 개는 어느 독신 남자가 장기계약을 맺고 있었다. 여름 휴가철의 비싼 방세를 치르지는 않지만 일 년 내내 방을 빌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재미있고 선량한 젊은이로 조금도 성가시게 구는 일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비싼 세를 받더라도 한 달 동안 빌려주기 위해 그 를 내보내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녀의 말을 듣고 다른 집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호텔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사무원에게 다른 집에 대해 더 물어보려고 생각했다. 그들이 호텔로 돌아와 차를 마시려고 하는데 집주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 집에 묵고 있는 젊은이가 3, 4주 정도 자기 방을 내어 주어도 상관없으니, 세를 들려는 손님을 놓치지 말라는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는 것이 다. 매우 친절하신 분이군요. 그렇지만 그분에게 그런 불편을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아요. 마 치밀 부인이 대답했다. 천만에요. 불편을 끼쳐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건 사실이에요. 집주인은 비위 좋게 말했 다. 그분은 말씀이에요. 여느 젊은이와는 전혀 다른 분입니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하고 고독 을 좋아하며 우울한 분이지요. 휴가철인 지금보다는 남서풍이 문 앞으로 몰려들고 바다가 이곳 퍼레이드를 씻어내리며 이 일대에 사람의 그림자가 전혀 보이지 않을 때, 가장 여기에 머물러 있고 싶어합니다. 실은 기분 전환을 위해 곧 맞은편 언덕의 어느 별장으로 가서 계 시겠답니다. 그러니까 그녀는 그들에게 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마치밀 일가는 이튿날 그 집을 얻어 짐을 옮겼다. 그 집은 매우 마음에 들었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마치밀 씨는 바닷가로 산책을 나가고, 마치밀 부인은 아이들을 모래사 장으로 놀러 보낸 다음 두루 집안을 살피고 나서 양복장 문에 달린 거울의 반사력을 시험해 보는 등 모든 것을 깔끔하게 정돈했다. 그녀는 젊은 독신 남자가 빌리고 있었다는 뒤쪽 거실의 가구가 어느 방 것보다 더욱 마음 에 들었다. 보기 드문 책이라기보다는, 흔해빠진 너절한 책들을 방 구석에 보관하는 식으로 책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아마도 이 방에 들어 있던 젊은 남자는 휴가철에 들어오는 손님들은 그런 책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여주인은 마치밀 부인이 못마땅해하면 적당히 변명을 하려고 문 앞에서 떠나지 않고 서 있었다. 이 방을 제 방으로 써야겠어요. 마치밀 부인이 말했다. 여기 책들이 있군요. 그런데 방 을 내 주고 가신 분은 책이 퍽 많은 모양이네요. 제가 더러 읽어도 상관없겠죠, 후퍼 부인? 아무렴요, 괜찮고 말고요. 책이 많답니다. 그분은 문학 방면에 좀 이름이 있는 분이니까 요. 시인이랍니다. 정말 시인이에요. 그리고 자기 수입도 꽤 있죠. 부자는 아니지만 시를 쓸 만한 돈은 있는 모양이에요. 시인이요? 오오! 그런 줄은 전혀 몰랐군요. 마치밀 부인은 책 한 권을 펼쳐 들고 첫 장에 있는 책 주인의 이름을 살펴보았다. 어머나! 그녀는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말을 계속했다. 로버트 트리워, 이분 이름은 잘 알고 있어요. 물론 그의 시도 알고 있지요. 우리가 빌린 방이 바로 그분 방이고, 우리가 그 분을 이 댁에서 쫓아낸 셈이군요. 잠시 후에 엘라 마치밀은 혼자 앉아서 놀랍고 흥미로운 마음으로 로버트 트리워를 생각하 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최근 경험과 심경이 더욱 그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을 돋우게 했 다. 그녀는 노력형인 어느 문인의 외동딸로서, 지난 일 년 동안 직접 시를 쓰고 있었다. 그 녀는 못 견딜 정도로 고통스러운 그녀 자신의 정서를 쏟을 수 있는 마음의 통로를 마련해 보기 위하여 몹시 애를 썼다. 그녀는 판에 박힌 듯한 살림살이와 평범한 남편에게 아기만 낳아 주는 그런 생활을 심히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므로, 마음은 항상 우울하고 권태를 느끼 고 있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맑고 빛나던 지난날의 정서는 점점 침체되고 무디어지는 것 같았다. 가명으로 무명 잡지에 그녀의 시들을 수없이 발표했으며, 두 차례는 상당히 이름있는 잡 지에 발표된 일도 있었다. 특히 그 잡지에 두 번째 게재되었을 당시에는 그녀의 시가 특별 히 작은 활자로 아래쪽에 실리고, 그 위에는 바로 로버트 트리워가 같은 주제로 쓴 두세 편 의 시가 실린 일이 있었다. 이들 두 사람의 시는 일간 신문에 보도된 어떤 비극적인 사건에 감명을 받아 동시에 떠오 르는 시상을 활용하여 지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편집자는 이 두 사람 시의 주제와 내용의 탁월성으로 함께 게재할 생각이 들었다는 설명을 실어 놓았다. 이같은 일이 있은 후로 존 아이비 라는 필명을 가진 엘라는, 로버트 트리워의 이름으로 실린 작품이라면 어떤 시를 막론하고 깊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로버트 트리워가 남 성이라는데 대하여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으며, 여성으로 처신하려는 생각도 해본 일이 없었 다. 마치밀 부인은 그녀가 남성으로 행세하는 것에 일종의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자 기의 시적인 영감이 정력적인 장사꾼의 아내, 즉 평범한 총포 제조업자와의 사이에서 태어 난 세 아이의 어머니에게서 우러난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분 명히 알고 있었다. 트리워씨의 시는 기교에 능하다기보다는 정열이 넘쳐흘렀으며, 세련되었다기보다는 풍요 하다는 면에서 최근의 다른 시인들의 작품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상징주의 자도 아니고 퇴폐주의자도 아니었다. 인생에 최선의 개연성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최악의 개연성도 있음을 관망할 줄 아는 성격을 비관주의라고 이름 짓는다면, 그도 아마 이에 속한 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용과는 거리가 먼 형식과 운율에 대하여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그는, 감정이 예술적인 형식을 능가할 때는 간혹 운율이 엉성한 엘리자베스 시대의 시처럼 14행 시를 짓는 오류를 범하는 일도 있었다. 그리하여 여러 비평가들은 누구라도 이같은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된 다고 그에게 솔직히 지적해 주는 것이었다. 엘라 마치밀은 가당치도 않은 질투심에 사로잡혀 이 경쟁자의 작품을 수없이 읽어보고 운 율을 살펴보았지만, 미약한 그녀 자신의 시에 비하면 언제나 활기가 넘쳤으므로, 그녀는 그 때마다 슬픔에 잠겼다. 간혹 그의 경향을 모방해 보기도 했지만, 도저히 그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으므로 실망에 빠지곤 했다. 이와 같은 심경으로 몇 달을 보내고 있었는데, 출판 목록에 트리워의 시편들을 모아서 한 권의 시집을 낸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그 후에 실제로 시집이 나오게 되었으며 호평을 받기도 했었다. 뿐만 아니라 시집이 꽤 팔리어 출판 비용을 치르기에 충분한 자금이 마련되 기도 했었다. 트리워의 성장에 자극을 받아 존 아이비는 자기 자신도 지금까지 많이 발표하지는 못했지 만, 세상에 공표된 몇 편의 원고와 빛을 보지 못한 작품을 주워 모으고, 게다가 새로 지은 시들도 보태어 한 권의 시집을 만들어 보고 싶은 의욕이 생겼다. 그녀의 뜻은 이루어졌지만, 그로 말미암은 막대한 출판 비용으로 큰 손해를 보았다. 몇몇 비평지가 그녀의 빈약한 시집을 소개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논평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 리하여 그 시집은 겨우 두 주일 동안 서점에 깔렸을 뿐이었다. 실의에 빠졌던 그녀는 세번째 아이를 낳게 되면서 다른 취미를 찾기로 했다. 그녀에게 이 러한 가정적인 변화가 없었던들 시집 출판으로 인한 실패로 막대한 정신적 타격을 받지 않 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남편은 병원 치료비와 출판 경비까지 지불하고 그것으로 모든 일을 끝맺었던 것이다. 그 러나 그 당시 명성은 떨치지 못했지만 엉터리 시인 취급은 받지 않았다. 그런 엘라는 최근 에 옛 시정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다시 향수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때마침 우연하게도 그녀는 로버트 트리워의 방에 있게 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새삼 놀라움과 흥 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의자에서 일어나 흥미로운 동지의 방 안을 두루 살폈다. 다 른 책들 틈에 그의 시집도 끼어 있었다. 그녀도 그 내용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마치 그녀를 소리내어 부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또 다시 읽어보았다. 그리고 다른 용건으로 여주인인 후퍼 부인을 불러다가 그 젊은 시인에 대한 일들을 물어보았다. 글쎄요, 한 번 만나 보시면 반드시 흥미를 갖게 될 겁니다. 그렇지만 너무 수줍음을 타서 만나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부인은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이 없이 그녀에게 이 방의 주인이었던 젊은 시인에 대한 여 러 가지 호기심을 풀어 주었다. 여기서 산 지 오래 되었냐구요? 예, 근 2년 가까이 되었지요. 여기서 묵지 않을 때도 아 마 이 지방의 부드러운 공기가 언제든지 돌아오도록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모양이에 요. 그분은 대부분의 시간을 글을 쓰거나 책을 읽으며 보내고, 별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알고 보면 매우 선량하고 친절하신 분이어서 누구든지 그를 사귀기만 하 면 가까이 지내려고 한답니다. 마음씨 고운 사람이란 별로 흔한 게 아니니까요. 어머, 그분은 마음씨도 곱고 선량하다구요? 그렇구 말구요. 내가 말만 하면 무엇이든지 들어준답니다. 가끔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지요. 건강을 위해 기분전환을 하시면 어떨까요! 하고 말하면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사실 그렇다면서 그분은 하루나 이틀 후에는 파리나 노르웨이 또는 그 밖의 지방으로 여행을 다 녀오기도 하지요. 그리고 돌아올 때면 훨씬 생기가 넘치고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때로는 이상한 경우도 있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늦은 밤 한 편의 시를 끝마치고 그것을 외우며 방 안을 거닐고 있었어요. 그런데 마루바닥이 삐 그덕거려서 도무지 잠들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그만... 그래도 그분과는 매우 사이가 좋답니다. 이것은 그 유명한 시인에 대하여 얘기를 주고받게 된 시초에 지나지 않았다. 언젠가는 이 런 얘기를 하다가 후퍼 부인은 엘라가 전혀 모르고 있던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것은 침대 머리맡에 둘러친 커튼 뒤의 벽지에다 연필로 조그맣게 갈겨 쓴 글씨였다. 어디 좀 보여 주세요. 마치밀 부인은 허리를 굽혀 아름다운 얼굴을 벽 가까이 갖다 대 면서 진한 호기심이 일어나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이것은 바로 그분이 쓴 시의 초고예요.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시상을 적은 거지요. 하고 후퍼 부인은 그 내막을 잘 알고 있는 듯한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대체로 이런 초고 는 지워 버리지만 아직은 읽을 수 있어요. 그분이 밤중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머리에 어떤 시상이 떠오르면 아침에 잊어 버릴까봐 그 종이에 적어 두는 거예요. 여기 씌어진 것 중에 서 일부는 잡지에 발표된 것을 내 눈으로 보았으니까요. 어떤 것은 새로 쓴 거예요. 이 종이 위에 쓴 것은 전에는 보지 못한 거예요. 바로 며칠 전에 써둔 모양이에요. 아, 그래요! 엘라 마치밀은 까닭없이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불현듯 이런 정보를 자기에게 제공해 준 집주인이 이제는 그만 나가 주었으면 싶었다. 그녀는 그 종이 쪽지에 적힌 글을 혼자서 읽 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것이다. 그것은 문학적인 호기심이라기보다는, 뭐라고 형언하기 어려 운 개인적인 흥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녀는 굉장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 감으로 혼자 읽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한편 엘라의 남편은 배멀미가 심한 아내를 함께 데리고 가느니 차라리 혼자서 뱃놀이를 가는 것이 훨씬 더 즐거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엘라를 집에 둔 채 떠난 여행에서 는 풍랑이 대단했다. 그는 단체여행을 떠나는 기선에 몸을 싣고 이처럼 혼자 떠나는 것을 조금도 싫어하지 않았다. 그 배에서는 달밤에 남녀가 쌍쌍이 춤을 추는 장면도 눈에 띄었다. 그가 아내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은 바에 의하면 일행들 중에는 별의별 사람이 많아서 그런 데에 아내를 데리고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사업이 잘되어 신이 난 제조업자가 그의 체류지를 떠나 이렇게 바닷바람을 쏘이며 기분을 전환하고 있는 동안에, 엘라의 생활은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무척 단조로웠다. 날마다 일정한 시간에 해수욕을 하고 바닷가를 산책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녀는 시에 대한 충동이 다시 일어나, 마음 속에서 솟아오르는 정열에 휩싸여 자기 주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 는지조차 거의 알지 못했다. 그녀는 최근에 나온 트리워의 시집을 줄줄 외울 정도로 애독하고, 자기도 그 시편들과 겨 눌 만한 시를 써 보려고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그러나 결국은 실패했던 것이다. 이러한 처 지에서 감히 가까이 접근할 수 없는 그녀의 스승에게서 느끼는 자석같은 애정이, 지적이고 추상적인 면보다도 더욱 강렬하게 풍겨왔으므로, 그녀는 좀체로 자기 마음을 종잡을 수 없 었다. 그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의 일상생활의 분위기 속에 젖어 있었으며, 그러한 주위 환 경이 그녀에게 더욱 그의 존재를 의식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녀를 움직이는 것은 자기 감정을 어떻게 해서든지 형상화해 보려는 본능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손에 잡히는 물건이 금방 그녀에게 어떤 뚜렷한 인상을 가져다주지 못하 는 데 대한 안타까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평범한 삶을 즐기는 남편과는 이미 우정 이상의 감정이 없었던 그녀는, 정열적인 자신에 게는 우연히 알게 된 이 기회가 더욱 고상해 보였다. 어느 날 아이들이 벽장 속에서 숨바꼭질을 하다가 신이 나서 어떤 옷을 꺼냈는데, 후퍼 부인은 그것이 바로 트리워씨의 것이라고 말하며 다시 벽장 못에 걸어둔 일이 있었다. 그러 자 어떤 환상에 사로잡힌 엘라는, 그날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는 늦은 오후에 주위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벽장문을 열어 젖힌 다음, 거기 걸려있는 옷 중에서 모자가 달린 방수복을 꺼내 입어보았다. 엘리야의 외투야! 하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이것이 나한테 어떤 영감을 주어 그와 시를 견주도록 해줄까? 그는 빛나는 천재니까! 그녀가 이런 생각에 잠길 때면 언제나 눈망울이 젖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의 모 습을 거울에 비춰 보는 것이었다. 그의 심장이 이 외투 속에서 고동치는 듯했으며, 그의 두 뇌가 이 모자 밑에서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것은 그녀로서는 도저히 미치 지 못하는 수준에 도달해 있는 것 같았다. 그와 비교해 볼 때 그녀는 자신의 미약함을 느끼 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러한 자의식이 그녀를 몹시 가슴 아프게 하였다. 옷을 채 벗기도 전 에 문이 열리더니 남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거 무슨 꼴이요...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얼른 옷을 벗었다. 이 벽장 속에 걸려 있더군요. 하고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장난 삼아 입어본 거예요. 이런 장난이라도 해야지 심심해서 죽겠어요. 당신이 늘 집에 계시지 않으니까요. 늘 집에 없다고? 그야... 그녀는 그날 저녁에 집주인과 더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 시인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어온 집주인은 그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무척 좋아했다. 트리워씨에게 꽤 흥미를 갖고 계신 모양이군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방금 전갈이 왔는 데 내일 오후에 들러서 이 방에서 자기가 필요한 책을 좀 찾아가고 싶다는 거예요. 그래도 괜찮겠지요! 아, 그럼요! 그럼, 만나보실 의향만 있으시다면 트리워씨를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남모르는 즐거움에 마음을 설레이면서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을 하며 잠자리에 들었 다. 이튿날 아침에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엘라! 난 당신이 한 말을 곰곰히 생각해 봤소. 내 가 무심했던 것 같군. 오늘은 마침 바람도 없고 바다가 조용할 테니 당신과 함께 요트나 타 러 가고 싶소. 엘라는 남편의 제안에 몹시 당황하고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는 남편의 제안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출발 시간이 다가오자 그녀는 준비를 갖추었다. 그렇지만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그녀는 생각에 잠겨 우두커니 서있곤 했다. 그녀는 분명히 그 시인에 대 해 연정을 느끼게 되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못 가겠어. 떠날 수 없 어! 가지 말아야지. 하고 그녀는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남편에게 뱃놀이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그러자 남편은 이유도 물어보지 않고 무관심하게 나가 버렸다. 그날은 아이들이 모두 해변에 나가고 집에 없었으므로 집안은 온종일 조용했다. 담 너머 로 바라보이는 바다의 부드럽고 끊임없는 파도 소리에 맞춰, 햇빛을 담뿍 받고 있는 덧문이 흔들렸다. 해수욕철에만 머물러온 외국 악단 그린 사일리지언의 연주가, 마을 주민 대부분과 산책하는 사람들을 코버그 하우스 근처에서 모조리 끌어가 버렸다. 이윽고 문에서 노크 소 리가 들려왔다. 마치밀 부인은 하녀의 대답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발소리도 나지 않았으므로 몸이 달았 다. 지금 자기가 앉아 있는 방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가 벨을 눌렀다. 문간에서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아닙니다. 부인... 그분은 이미 가 버렸어요. 제가 나가 보았습니다. 하녀는 이렇게 대답 했다. 곧 후퍼 부인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실망인 걸요. 그녀가 말을 이었다. 트리워씨는 결국 안 오신답니다! 그런데 노크 소리가 들려온 것 같더군요! 아니에요, 그건 어떤 분이 집을 잘못 알고 방을 빌리러 온 겁니다. 실은 깜빡 잊었어요. 트리워씨가 점심때가 되기 전에 쪽지를 보내왔어요. 책이 필요없게 되어 오지 않겠으니 자 기 차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씌어 있더군요. 엘라는 크게 실망했다. 얼마 동안 갈라진 삶 이란 그의 슬픈 시편조차도 읽을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은 바람이 불고 가슴은 조여들었다. 그리고 눈에는 눈물마저 고이게되었다. 아이 들이 양말을 적셔 가지고 엄마 앞에 달려와서 즐겁게 놀던 이야기를 조잘댔지만, 그녀의 귀 에는 한 마디도 들려오지 않았다. 후퍼 부인, 여기 사시는 분의 사진같은 것 혹시 가지신 게 없어요? 그녀는 까닭없이 그 의 이름을 대는 것이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있다마다요, 부인의 침실 난로 선반 위에 있는 사진틀에 있지요. 아니에요, 거기에는 대공비의 사진이 있을 뿐이에요. 그러면 그분사진은 그 안에 있을 거예요. 사진틀 주인은 바로 그분이랍니다. 제가 일부러 사진을 사왔지요. 그분이 가시면서 제게 부탁했답니다. 제발 이 방에 드는 분에게 제 사진 이 눈에 띄지 않게 가려 주세요. 전 그들이 나를 바라보는 게 싫을 뿐 아니라, 그들도 내가 쳐다보는 것을 원치 않을 테니까요. 그래서 그분 사진 앞에다 대공, 대공비 사진을 끼웠답 니다. 사진들도 없었지만 황족사진이 어느 개인 사진보다는 장식으로 더 어울릴 게 아니겠 어요. 아마 그분이 아시더라도 상관없을 겁니다. 그분께서는 이 방에 드는 분이 이렇게 아름 다운 귀부인인 줄 미처 몰랐을 거예요. 그렇지 않다면 아마 숨을 생각을 하지 않았겠죠. 그분은 잘 생기셨어요? 그녀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어요. 그렇지만 미남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 죠. 나도 그렇게 보게 될까요? 그녀가 재차 물었다. 부인께선 그렇게 말하실 겁니다. 어떤 분은 잘 생겼다기보다 매우 날카로운 인상을 준다 고도 하지요. 커다란 눈은 생각에 잠긴 듯하지만 어떤 때는 마치 전깃불이 비치듯이 눈에서 광채가 난답니다. 나이가 얼마나 되었지요? 아마 부인보다는 몇 살 손위일 겁니다. 서른한둘쯤 된 것 같더군요. 엘라는 서른 살을 넘긴 나이였다. 그렇지만 남들 보기엔 그보다 젊어 보였다. 그녀는 때때 로 미숙한 면도 있었지만, 감수성이 풍부한 여인으로 첫사랑보다 늦사랑이 더 강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만한 나이에 이르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 않아 적어도 허영심이 많은 여자 라면, 창문에 등을 돌리거나 덧창문을 반쯤 내리지 않고서는 자기를 찾아 온 남자 방문객을 맞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따분한 인생 여정에 접어들 것이다. 그녀는 후퍼 부인이 한 말을 되새겨 보고 다시는 나이에 대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때 전보가 한 장 날아들었다. 남편 에게서 온 것이었다. 남편은 친구들과 함께 요트로 해협을 따라 퍼드머스까지 달려왔으며 다음날까지는 돌아갈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가벼운 식사를 마치고 나서 바닷가에서 아이들과 함께 해가 질 때까지 빈둥거리 며, 무슨 감격적인 일이라도 일어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아직도 숨겨져 있는 사진을 생각 했다. 남편이 그날 밤에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자 이 젊은 여인은 섬세한 공상의 사치를 즐 기기 위해 2층으로 뛰어올라가 그 사진을 꺼내 보려다가 참았다. 그녀는 환한 오후의 햇살 보다, 혼자 있는 곳에서 적막함과 엄숙한 바다와 별들이 빚어내는 환상적인 분위기 속에서 즐기기 위해 이 흥분을 보류해 두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이들을 잠자리에 들게 했다. 그리고 아직 10시도 되지 않았는데 바로 침실로 들 어갔다. 그리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다음에 책상 앞에 의자를 갖다 놓고 걸터앉아서 트리워 의 가장 달콤한 시를 몇 편 읽기로 했다. 그 다음에 사진틀을 불 앞으로 들고 와서 뒤를 열 고 가장 멋진 것을 꺼내어 눈 앞에 쳐들었다. 그것은 매우 인상적인 얼굴이었다. 텁수룩한 검은 수염을 기르고 깊숙이 눌러 쓴 모자가 앞이마를 가리고 있었다. 아까 집주인이 말하던 커다란 검은 눈에는 무한한 슬픔이 서려 있 었다. 그리고 눈은 잘생긴 눈썹 밑에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거기 나타나 있 는 미래에 대해 조금도 기뻐하지 않는 듯이 보였다. 엘라는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그토록 잔인하게 몇 번이나 내 빛을 잃게 한 것이 당신이에요. 그녀는 오랫동안 그 사진을 바라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두 눈에 눈물을 글 썽이며 입으로 딱딱한 마분지를 잘근잘근 씹는 것이었다. 그리고 발작적으로 명랑하게 웃고 는 눈물을 닦아냈다. 남편과 세 아이를 거느린 여인이 이렇게 낯모르는 남자에게 마음이 끌린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짓인가 하고 그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니다. 그는 모르는 남자가 아닌 것이 다. 그녀는 그의 감정과 생각을 자기 자신의 그것으로 알만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과 감정은 분명히 그녀의 남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그녀의 생각이나 감정 과 꼭 같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가족을 부양해야 할 가장으로 생각한다면 그녀로서는 오히 려 남편을 다행스럽게 여기기도 했다. 사실 그이만이 나와 가장 가까운 거야. 비록 한 번도 만나보진 못했지만 윌보다는 그이 가 훨씬 나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어. 그녀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침대 곁에 있는 테이블 위에 그의 책과 사진을 놓고서 베개에 몸을 기대고는 때때 로 로버트 트리워의 시를 읽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이며 잘 되었다고 생각되는 시편 들을 표시해 두었다가 다시 읽곤 했다. 시집을 치우고 그의 사진을 시트 위에 세워 놓고는, 누워서 바라보며 그를 감상하기도 했 다. 거의 지워진 베갯머리 윗벽에 연필로 쓰여진 글씨들을 촛불을 들고 살펴보기도 하였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어구며 연수 그리고 운율이며 시의 첫 구절이나 중간 구절이 적혀 있는가 하면, 머리에 떠오른 생각들도 적혀 있었다. 이것들이 마치 셸리의 단편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것은 비록 매우 짧은 몇 마디였지만, 어찌나 강렬하고 달콤하던지 가슴을 너무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그의 입김이 그를 둘러싸고 있던 벽에서, 지금은 오히려 그녀를 둘 러싸듯이 생각되었고, 마치 그녀의 볼을 어루만지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수없이 이렇게 손을 들었을 것이다. 손에 연필을 들고 이처럼 비스듬히 적어 놓은 것을 보면 아마도 팔을 이렇게 뻗고 쓴 게 틀림없을 것이다. 살아있는 인간보다 더 진실한 모습/영원을 기르고 이와 같이 적혀 있는 시인의 시에는 틀림없이 비평의 찬서리를 염려하지 않는 어둠의 정 적 속에서 떠오른 시상의 발로였을 것이다. 아마 이것들은 달빛이나 등불 아래서 희미하게 먼동이 터 오르는 새벽녘에 쓴 것이지, 환 히 밝은 대낮에 쓴 글은 아닐 것이다. 도망치려는 시상을 붙잡았을 때 그의 팔이 놓여 있던 곳에, 지금은 자기의 머리가 얹혀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에게는 맑은 하늘과도 같은 그의 넋 이 스며들었다. 그녀는 그의 가슴 속 깊이 내려앉아 그 속삭임을 들으며 잠들어 있는 것이 다. 그녀가 이와 같이 꿈속에서 보내고 있을 때 층계를 오르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남편 이 바로 바깥 복도에까지 왔던 것이다. 엘라, 어디 있어요? 그녀는 자기 처사가 남편에게 들켜서는 안되겠다는 본능적인 생각에서 그 사진을 베개 밑 에 슬쩍 감추었다. 그러자 남편은 저녁을 배불리 먹은 사람답게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이거 실례했소. 머리가 아파요? 내가 방해를 했나 보군. 하고 윌리엄 마치밀이 말했다. 아녜요. 머리가 아픈 게 아녜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웬일로 이렇게 일찍 돌아오셨어 요? 더 있다 올 수도 있었지만, 또 하루를 허비하고 싶지 않았어. 내일은 다른 데로 가야겠 소. 식당으로 내려갈까요? 아니, 나도 이젠 피곤하군. 저녁은 잘 먹었소. 난 바로 자는 게 좋겠어. 내일 아침에는 될 수 있으면 여섯 시에 일어나야겠는데, 내가 그렇게 일찍 일어나도 당신에게 방해가 되지 않 겠소? 당신이 깨기 훨씬 전에 일어나야 할 텐데. 그는 이렇게 말을 마치고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그의 동작을 주시하면서 그 사진을 가만히 더 안으로 밀어 넣어 보이지 않게 하였다. 정말 몸이 불편한 것 아니오? 그는 이렇게 물으면서 몸을 앞으로 구부렸다. 아녜요. 단지 기분이 좀 언짢을 뿐이에요. 그렇다면 괜찮지만. 그는 몸을 굽혀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오늘 밤 당신하고 같이 지 내고 싶소. 이튿날 아침 마치밀은 6시에 눈을 떴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하품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머리 밑의 딱딱한 이건 대체 뭘까? 그는 아내가 자고 있는 줄 알고 베개 밑을 뒤져서 무엇인가를 꺼내었다. 그녀는 반쯤 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그것이 트리워 씨의 사진임을 알게 되었다. 원 세상에! 남편은 놀란 얼굴로 말했다. 뭔데 그러세요? 아내가 물었다. 오오, 당신도 잠이 깨었소? 하하하! 왜 그렇게 웃으세요? 웬 놈팽이의 사진이야. 우리 집주인의 친굴 테지. 그런데 이 사진이 어떻게 여기에 있을 까? 자리를 펼 때 선반을 건드려서 위에서 떨어졌나보군! 어제 내가 본 사진인데, 그때 들어간 모양이군요. 오오, 그럼 이 작자가 당신의 친구요? 맙소사! 엘라는 자기가 사모하는 남자에 대한 남편의 조소를 견디며 잠자코 듣고만 있을 수 없었 다. 똑똑한 사람이에요.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 귀에도 쑥스러울 정도로 들렸지만, 저절로 입 밖에 흘러나온 말이었다.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유망한 시인이에요. 나는 아직 한 번도 만나본 일이 없지만 우리가 들기 전에 이 방 두 개를 쓰고 있었나봐요. 그걸 어떻게 아나,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다면서? 후퍼 부인이 그 사진을 저한테 보여 주면서 말했어요. 아, 그래? 난 그만 가야겠군. 오늘은 일찍 돌아오게 될 거요. 함께 가지 못해 미안하오. 아이들이 물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그날 마치밀 부인은 후퍼 부인에게 트리워 씨가 언제 올 것 같으냐고 물어보았다. 다음 주에 돌아와서 손님들이 떠날 때까지 이 근처에 있는 친구 집에서 계실 거예요. 아 무튼 오시는 건 틀림없어요. 하고 그녀는 대답했다. 마치밀은 오후에 일찌감치 돌아왔다. 그는 자기가 없는 동안에 보내 온 편지들을 뜯어보 고 갑자기 가족들과 함께 당초의 계획보다 일주일 앞당겨서, 그러니까 사흘 후에 떠나야겠 다고 말했다. 일주일쯤 더 머물러 있어도 되잖아요? 그녀가 남편에게 애원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전 여기가 좋아요. 그렇지만 난 싫은 걸. 이젠 지루하기도 하고. 그럼 나하고 아이들은 남겨 두고 혼자 가세요. 엘라, 당신도 고집이 어지간하구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한단 말이오? 그럼 또 당신을 데 리러 와야 하지 않겠소. 그러지 말고 함께 돌아갑시다. 얼마 후에 노스 웨일즈나 프라이턴에 가서 지냅시다. 아직도 사흘은 더 남아 있으니까. 그녀는 자기와 맞서는 남편의 말주변에 대해서는 절망적인 찬탄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 다. 이제 완전히 매혹되어 버린 남자를 만나보지 못하는 것이 그녀의 운명인 듯이 보였다. 그 러나 그녀는 끝까지 그를 만나보기로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그녀는 트리워가 맞은편 섬의 번화가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 머물러 있다는 소식을 집주인으로부터 전해들은 다음 날 오후에, 근처의 부두에서 배를 타고 그리로 건너가 보았다. 그것은 얼마나 허황된 여행이었던가! 그녀는 그 집 위치를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그 집인 듯 싶어 길가는 사람들보고 저 집에 시인이 살고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저마다 모른다는 것이었다. 설사 그가 그곳에 산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감히 방문할 수 있겠는가? 물론 세상에는 그런 일을 얼마든지 해치울 만한 배짱이 있는 여자도 있겠지만, 그녀에게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불쑥 찾아가면 그는 미친 여자라고 생각할 것이 아닌가? 또한 이쪽에 서 그더러 찾아와 달라고 청할 수도 있겠으나, 그녀에게는 그럴 만한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림처럼 아름다운 바닷가의 언덕을 서성거리다 가족들이 기다리 지 않도록 저녁 시간에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뜻밖에도 마지막 순간에 그렇게 원하면 나중에 자기가 데리러 오지 않는다는 조건 을 걸고, 이번 주 마지막 날까지 아이들과 함께 이곳에 머물러 있어도 좋다고 말했다. 그녀 는 체류기간이 연장되어 무척 기뻤으나 그런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이튿날 아침에 마치밀은 혼자서 떠났다. 그런데 트리워는 그 주가 다 지나가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토요일 아침에 그녀는 그렇게 정열을 불태우던 고장을 남아있던 가족들과 같이 떠났다. 쓸쓸하고 황량하기 짝이 없는 기차의 뜨거운 좌석에는 먼지가 수북이 쌓이고, 뜨거운 햇살 이 비쳐왔다. 끝없이 뻗은 길에 전선이 지저분하게 줄을 지어 그녀의 길동무가 될 뿐이었다. 창 밖의 짙푸른 수평선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그와 더불어 그녀가 머물던 시인의 집도 사라 져 버렸다. 너무나도 마음이 우울해 책을 읽으려고 하였지만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이었다. 마치밀씨의 사업은 날로 번창해 갔다. 그리하여 그의 가족은 커다란 새 집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그 집은 그가 사업을 하는 중부 도시에서 2, 3마일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대지도 상당히 넓었다. 교외의 생활이 으레 그렇듯이 어떤 계절에는 몹시 쓸쓸하였다. 그리하여 엘라가 그곳에서 서정적이고 비탄에 사로잡힌 시를 쓰기에는 최적의 장소가 되었다. 그녀는 집에 돌아오자 곧 애독하고 있는 최신 잡지에 트리워씨의 시가 실려 있는 것을 발 견하였다. 그것은 그녀가 소렌트시로 피서를 가기 직전에 쓴 것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벽 에 연필로 적어 놓았던 그 구절이 들어 있었다. 후퍼 부인이 벽에 적어 놓은 것이 최근의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었다. 엘라는 견딜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혀 발작적으로 펜을 들어 동료 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자기도 같은 길을 걸으면서 피나는 노력을 하였지만 헛수고로 그친 데 비해, 당신은 영혼을 움직이는 시상과 운율을 잘 표현한 데 대해 경의를 표한다는, 존 아이비라는 이름으로 축하 의 편지를 띄웠다. 며칠 후에 회답이 왔지만 그것은 그녀의 기대에 몹시 어긋난 것이었다. 그는 겸손하고 짤 막한 문장을 통해 자기는 아이비씨의 시를 잘 알지 못하지만, 언젠가 전도가 매우 촉망되는 시를 그 이름으로 발표한 것을 본 기억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아이비씨와 편지로 사귀 게 된 것을 매우 기뻐한다면서, 앞으로 그 이름으로 써내는 시에 큰 기대와 관심을 갖고 보 겠다는 사연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편지는 겉으로는 남자의 편지 같았지만, 다소 여리고 소심한 데가 있는 것은 사실 이었다. 그러므로 트리워씨는 아랫사람을 대하듯이 답장을 보내왔다. 그렇지만 그게 무슨 상 관이란 말인가? 그는 분명히 답장을 보내오지 않았는가! 이것은 그녀가 머물고 있던 바로 그 방에 돌아가서 그의 손으로 직접 써 보낸 편지인 것이다. 그들의 편지 왕래는 두 달 남짓 계속되었다. 엘라 마치밀은 가끔 자기가 쓴 시구 가운데 서 가장 잘 되었다고 생각되는 것을 골라서 적어 보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받아보기는 하였지만 자세히 읽었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의 시를 회신에 적어 보내는 일 도 전혀 없었다. 엘라는 트리워가 자기를 동성으로 알고 이렇게 행동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훨씬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그같은 편지 왕래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녀는 몹시 안타까운 나머지 그가 자기를 한 번 보기만 하면 사태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고 넌지시 비추었다. 기회가 있었다 면 그녀는 주저치 않고 자기가 여자라는 것을 상대방에게 밝혀서 사태를 일변시켰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 지방과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신문의 편집인인 남편 친구가, 어느 날 저녁에 그들 내 외와 식사를 같이 했다. 그들의 이야기가 그 시인에게 미치자, 그는 화가인 자기의 아우가 트리워씨의 친구라는 말을 하며, 그 사람은 지금 웨일스에 함께 머물러 있다고 말했다. 엘라는 이 편집인의 아우라는 사람도 좀 알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에 그녀는 편지를 써서 화가에게 돌아가는 길에 자기 집에 들러서 며칠 동안 묵어가라는 내용으로 초대를 했다. 친 구인 트리워씨도 자기가 사귀고 싶어하는 사람이므로 가능하다면 함께 와 달라고 요청했다. 며칠 후에 답장이 왔다. 자기와 트리워는 남부 지방으로 가는 길에 그녀의 초청에 응하겠 다고 말하고, 이 초대를 매우 고맙고 기쁘게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방문하는 날짜는 다음 주 수요일이라고 덧붙였다. 엘라는 자못 생기가 넘쳐흘렀다. 자기가 계획한 일이 성사된 것이다. 그녀가 사모하면서도 아직까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남자가 오게 되는 것이다. 보라, 그는 우리 집 담 너머에 서 있다. 그는 창을 바라본다. 창살 사이로 그 모습을 나타 낸다. 하고 그녀는 열광적으로 읊어 내려갔다. 그리고 겨울은 가고 비가 그쳤다. 이 땅에도 꽃이 만발하여 새들이 찾아와 노래할 때가 되었다. 이 땅 위에 거북이의 숨쉬는 소리가 들 려온다. 이젠 그가 묵고 식사하는 데 대한 여러 가지 배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녀는 들뜬 마음으로 모든 준비를 마치고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그날이 오기를 고대했다. 오후 5시쯤 초인종 소리와 함께 편집인의 동생 목소리가 현관에서 들려왔다. 그녀는 여류 시인이므로, 아니 그녀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엘라는 값진 옷감으로 고대 그리 스의 카이톤이라는 속옷과 비슷한 그 당시에 유행하던 드레스를 만들어 입었다. 지나치게 호화롭지는 않았지만, 스타일이 그 당시의 예술적인 기질을 가진 여인이나 낭만적인 여인들 이 많이 애용하는 풍이었다. 엘라가 지난번 런던에 갔을 때 본드가에 있는 의상실에서 지은 것이었다. 그녀는 들어오는 손님의 뒤를 넘겨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대체 로버트 트리워는 어디 있단 말인가? 아, 정말 미안합니다. 화가는 인사를 나눈 다음에 이렇게 말을 계속했다. 트리워라는 친구는 정말 묘한 사람입니다. 마치밀 부인, 처음에는 오겠다고 하더니 또다시 못 오겠다고 하는군요. 배낭을 메고 먼지를 뒤집어쓰며 수 마일을 걸어왔더니만,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겠 다는군요. 그분, 그분은 오시지 않나요? 네, 안 옵니다. 자기 대신 제게 사과해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그녀는 아랫입술이 몹시 떨려 제대로 말도 못했다. 그녀는 실망과 낭패감 속에서 어디로 도망이라도 쳐서 눈이 붓도록 울고 싶었다. 지금 막 저 건너 큰길에서 헤어졌습니다. 뭐요? 그렇다면 우리 집 문 앞을 지나갔단 말씀이군요! 네, 우리가 문 앞까지 왔을 때, 정말 훌륭한 문이더군요. 제가 보아온 현대식 철문 중에 서 가장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거기까지 와서 걸음을 멈추고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그 친구는 작별을 하며 돌아가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지요. 사실 지금 저도 기분이 다소 우울해 서 어떤 사람도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이 다시 없는 호인이고 매우 다정한 친구입니다 만, 가끔 안정을 잃고 침통해 할 때가 있지요.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아요. 그 사람의 시는 아시는 바와 마찬가지로 너무 에로틱하고 정열적인 면이 있지요. 그는 어제 발 간된 모 잡지에서 무지막지한 혹평을 받았답니다. 정거장에서 우연히 그것을 읽게 되었지요. 아마 부인도 읽으셨겠지요? 아녜요. 읽지 않기를 잘 하셨습니다. 생각할 가치도 없는 글이죠. 그 잡지를 읽는 독자 중에 옹졸 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쓴 글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는 그 글을 읽 고 나자 완전히 마음의 평정을 잃었습니다. 그에게 충격을 준 것은 중상모략입니다. 공정한 비판은 받아 마땅하지만, 공연한 중상모략과 거짓말은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거였어요. 트 리워의 약점은 바로 그런 데 있답니다. 그는 혼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사교계나 재계의 잡음 속에서 살아왔다면 아무렇지 않을 말에도 마음에 큰 상처를 받지요. 그래서 이곳에 오 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어요. 밖에서 보기에도 모두 최신식 건물인데다, 이거 실례가 될지 모 르겠습니다만 돈냄새가 너무 풍긴다고 하면서... 그렇지만 이곳에 오셨더라면 동지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아셨을 텐데! 혹시 그 주소로 띄운 편지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못 들으셨어요? 예, 그 말은 들었습니다. 존 아이비라고요. 아마 그때 그곳에 와 있던 부인의 일가일 거 라고 말하더군요. 그분께서 아이비에 대한 아무런 논평도 없으셨어요? 예, 아이비라는 사람에 대해 별로 흥미가 없는 것 같더군요. 로버트 트리워는 그녀의 집이나 시나 그것을 쓴 사람에게 전혀 흥미를 갖지 않았다는 것 이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 물러나기가 바쁘게 아이들에게 달려가서 그들에게 마구 키스를 퍼부으며 상한 감정을 씻어 버리려고 애를 썼지만, 아이들마저 그녀의 남편처럼 평범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지었으므로 소름이 끼치도록 혐오감만 느꼈다. 우둔하고 순진한 그 화가는 그녀가 기다리던 사람은 자기가 아니고 트리워 뿐이라는 것을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깨닫지 못했다. 그는 이 방문을 매우 즐겁게 생각했으며 엘라 의 남편과 어울려 다니기를 매우 좋아했다. 엘라의 남편도 그를 매우 좋아했다. 그리하여 그 근처를 모조리 구경시켜 주었지만 그들 모두는 엘라의 상한 기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화가가 떠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은 어느 날 아침에, 그녀는 2층에 홀로 앉아서 방금 배 달된 런던 신문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그녀는 거기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발견하였다. 시인의 자살 - 장래가 촉망되는 서정시인 중에 한 사람으로 최근 여러 해 동안 널리 알 려진 로버트 트리워씨가, 지난 토요일 밤에 소렌트시에 있는 그의 숙소에서 권총으로 관자 놀이를 쏴 자살을 했다. 트리워씨는 독자들도 기억하리라고 생각되는 새로운 시집을 최근에 발표하여 지금보다 훨씬 광범위한 독자들의 주목을 끌었었다. 미지의 여성에게 드리는 서정 시 라는 제목으로 엮은 이 시집은, 대체로 정열적인 내용으로서 그것이 끼치는 비상한 감정 의 폭에 대해 이미 본지에서는 칭송을 아끼지 않았지만, 이 시집이 모 지의 신랄한 비평의 대상이 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확실한 증거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문제의 잡지가 그의 책 상 위에 놓여 있었으며, 그와 같은 비평이 지상에 실린 이후로 그가 매우 침울했다는 사실 로 미루어 보아, 그 글이 비극의 원인이 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하게 된다... 수사 결과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었으며, 멀리 있는 친구에게 남긴 다음과 같은 편지 내 용도 실려 있었다. 친애하는 벗에게... 이 편지가 미처 자네 손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이미 내 주위의 것을 보고 듣고 알게 되는 괴로움을 면하고 있을 걸세. 나는 나의 이같은 처사가 건전하고 논리 적이라는 것을 장담할 수 있지만, 구태여 자네에게 구구한 설명을 늘어놓아 자네를 번거롭 게 만들고 싶지는 않네. 만약 하느님께서 내게 어머니나 누이 그 밖에 날 몹시 아껴주는 여 성을 보내 주셨더라면, 나는 내 생명을 더 연장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네. 그러 나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오랫동안 그런 여인을 동경해 왔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고, 손에 잡히지 않은 여인은 내 마지막 시집의 영감으로 군림했다네. 세상에서는 구구한 말들이 떠 돌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환상의 여인에 불과했으며, 현실적인 여인을 가리킨 건 아니 었네. 그녀는 끝내 나타나 주지 않았으며 만날 수 없었다네. 나는 어느 여인이든 실제로 나 를 학대하거나 사랑하여 그것이 내 죽음과 관련이 되었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이 점을 분명히 밝혀 두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했네. 하숙집 여주인에게 폐를 끼치게 되어 미안하 다고 말해주게. 그렇지만 내가 그 방에 있었다는 것은 아마 곧 잊어버리게 될 걸세. 모든 비 용을 치를 만한 돈은 은행에 예금되어 있네. - R. 트리워 엘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이 기사에 잠시 동안 멍청하니 앉아 있다가 옆방으로 달려가서 침대에 얼굴을 묻고 쓰러져 버렸다. 그녀의 슬픔은 그녀를 수천 조각으로 부숴 버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한 시간 이상이나 숨막힐 듯한 슬픔에 휩싸여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입술로 간신히 이렇게 중얼거렸다. 오, 만약 그가 나를 알기만 하였다면, 단 한 번만이라도 내가 그를 만나기만 했다면, 그 리하여 그의 뜨거운 이마에 내 손을 얹고 키스를 하고 내가 그를 얼마나 사모하는가를 알려 주었다면, 그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치나 비방도 달게 받아들이고 그를 위하여 모든 걸 바 칠 수 있었을 텐데. 그랬더라면 아마 그 귀중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안 돼, 그건 용납될 수 없는 일이야. 신의 무서운 질투로 행복은 그와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 던 거야! 모든 가능성은 사라져 버렸다. 이제는 영영 만날 가망이 없어져 버렸다. 그렇지만 영원히 현실로 되돌아올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있을 법도 하겠지만 영원히 사라진/시간/삭막한 인생에/남녀의 가슴이 간직하고 있는/시 간 마치 아직도 그녀의 환상 속에서 그 시간은 거의 보이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는 소렌트 시에 있는 그의 숙소 여주인에게 제3자의입장에서 편지를 띄웠다. 그녀는 후퍼 부인에게, 신 문에서 그 시인의 죽음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며, 후퍼 부인도 알다시피 코버그 하우스에 머 물고 있는 동안에 트리워 씨에게 커다란 흥미를 갖고 있던 관계로, 그의 관 뚜껑을 덮기 전 에 그의 머리카락을 조금만 얻어서 보내주면, 그것을 영원한 기념으로 삼겠다고 했다. 그리 고 사진틀에 있던 사진도 함께 보내 주었으면 고맙겠다고 매우 상냥한 어조로 부탁한 다음 에, 1파운드의 우편어음을 동봉했다. 회신 우편으로 요청한 물건이 든 편지가 왔다. 엘라는 사진을 받아들자 눈물을 흘리며, 그 것을 비밀 서랍에 넣어 두었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흰 리본으로 매어 고이 품속에 간직하고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끔씩 꺼내어 입을 맞추었다. 대체 그게 뭐요? 한 번은 그녀가 그와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을 남편이 보고 신문에서 눈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뭘 보고 우는 거요? 머리카락을? 대체 누구의 머리칼이오? 죽었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누가? 당신이 당장 밝히라고 하지 않는다면 지금 대답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의 목소리 속에 는 침통한 빛이 서려 있었다. 아, 그래! 대답하지 않아 불쾌하세요? 내가 언젠가는 알려 드릴게요. 아무 상관도 없다니까. 그는 분명한 곡조도 없는 휘파람을 불면서 사라져 버렸다. 그렇지만 그는 공장으로 나가 자 다시 그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도 소렌트시에서 자신들이 묵고 있던 집에서 최근에 자살극이 벌어진 기사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내의 손에 그의 시집이 들려 있는 것을 보 았으며, 그들이 소렌트시에서 그 집에 방을 빌렸을 때 집주인으로부터 트리워에 대한 이야 기를 단편적으로 들은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자 갑자기 부아가 치밀어 외쳤다. 물론 그 녀석일 거야! 대체 그 녀석을 무슨 재주로 알게 되었담. 여자란 정말로 교활한 동물이란 말이야!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일상 업무를 처리해 나갔다. 반면 집에 있는 엘라는 비 장한 결심을 하고 있었다. 후퍼 부인은 머리카락과 사진을 보내면서 그의 장례식 날짜를 기 별해 주었다. 시간이 가면서 이 정많은 여자는 그가 어디에 묻히는지도 알고 싶었다. 그녀는 남편이나 그밖의 어떠한 사람도 그녀의 괴팍한 성격을 어떻게 생각하건 전혀 개의 치 않게 되었다. 그녀는 오늘 오후에 외출해서 내일 아침에나 돌아오겠다는 간단한 쪽지만 책상 위에 남겨 두고, 안팎 하인들에게 같은 말을 당부하고 나서 걸어서 집을 나섰다. 마치밀씨는 오후에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왔다. 모든 하인들은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유모는 그를 조용한 방으로 안내하며 지난 며칠 동안 부인의 태도로 보아 부인은 너무나 큰 슬픔에 잠겨 있었으므로, 혹시 투신자살이라도 하러 나선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근심스럽 게 말했다. 마치밀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내가 그런 짓을 하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집안 사람들에게 행방은 밝히지 않았지만, 자기를 기다리느라고 밤을 새우지는 말라 고 당부하고 나서 집을 나섰다. 그는 정거장으로 달려가 소렌트행 차표를 샀다. 그는 급행을 타고 나섰지만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주위가 컴컴했다. 그는 아내가 자 기보다 먼저 떠났다면 완행열차밖에 없으므로 그녀가 자기보다 그다지 빨리 도착하지는 못 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렌트시는 휴가철이 아니었으므로 길거리는 몹시 쓸쓸하고 관광마차도 요금이 저렴했다. 그는 묘지로 가는 길을 물어 곧 그곳에 다다랐다. 문이 잠겨 있었다. 묘지 관리인이 경내에 아무도 없다고 말하면서도 문을 열어주었다. 시간은 별로 늦지 않았으나 주위는 캄캄했다. 그는 관리인의 설명을 들은 대로 그날 매장 한 두 무덤이 있는 구획으로 길을 따라 꾸불꾸불 더듬어 올라갔다. 그는 풀뿌리에 발끝을 채이기도 하고, 말뚝에 걸리기도 하면서 가끔 몸을 구부리고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나 두 루 살폈다.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점점 걸음을 옮겨 길이 난 지점에 이르자, 새로 묻은 무 덤 곁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도 발소리를 듣고 땅에서 벌떡 일어섰다. 엘라!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그는 격분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집에서 뛰쳐나오다니, 나는 그런 일은 상상도 못했소! 그렇다고 내가 이 가엾은 남자를 질투하자는 게 아니오. 그 러나 결혼을 해 아이를 셋씩이나 낳고, 머지 않아 넷째를 낳게 될 당신같은 여인이, 죽은 옛 애인에게 정신을 빼앗긴다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요! 당신은 지금 갇혀 있다는 것을 알 고 있소? 아마 밤새도록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거요.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당신을 위해서 그와 당신이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았기를 바라오. 그런 모욕적인 말씀은 입에 담지 마세요, 윌. 난 이같은 꼴은 다시는 당하지 않을 거요. 듣고 있소? 앞으로 명심하기 바라오! 알겠어요.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는 그녀의 팔을 끼고 묘지 밖으로 나갔다. 그렇지만 그날 밤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초라한 모습을 남의 눈에 띄게 하고 싶지도 않았으므로, 그는 아내를 정거장 근처에 있는 허술한 카페로 데리고 갔다. 그리하여 이튿날 이른 아침에 그곳에서 떠났다. 말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결혼생활에서 흔히 일어나는 불협화음의 일종이라는 생각에서 그 들은 한 마디의 말도 나누지 않고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오가 되어서야 집에 도착 하였다. 여러 달이 지나갔다. 두 사람은 아무도 감히 이 일에 대하여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 러나 엘라는 곧잘 슬픔에 잠기고 불안한 감정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리고 슬픔으로 말미암 아 몸은 날로 수척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에겐 네 번째 해산의 괴로움을 겪어야할 날이 점점 다가왔다. 그렇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이겨낼 것 같지 않아요. 어느 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원 그런 철없는 소리가 어디 있소? 지금까지 잘 견뎌 왔는데 이번이라고 무슨 일이 있을 라구?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난 죽으리라는 걸 거의 확신하고 있어요. 엘라와 프 랭크 그리고 타이니만 아니라면 차라리 그것도 괜찮겠어요. 나는 어떡허구? 당신이야 곧바로 새로운 여자를 구하겠지요. 그녀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마땅히 그렇게 할 권리가 있지 않아요? 나는 그것을 인정하니까요. 엘라, 당신은 아직도 그... 시 짓는 친군가 하는 사람을 못 잊는 게 아니요? 그녀는 남편의 그 같은 말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래도 이번에는 영영 일어나지 못할 거예요. 그녀는 거듭 말했다. 뭔가가 그것을 암시하고 있어요. 이같은 생각은 흔히 그렇듯이 매우 상서롭지 못한 일의 시초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6 주가 지난 5월 어느 날 맥도 없고 핏기도 없는 그녀는 숨을 한 번 몰아 쉰 다음 더는 계속 할 힘도 없이 한 생명을 낳았다. 그 대신에 건강하고 활기찼던 그녀는 점점 쇠약해져 갔다. 그녀는 임종하기 전 마치밀에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윌, 당신도 아시겠지만 우리가 소렌트 시에 갔을 때 일어난 일을 숨김없이 고백하고 싶었어요. 아마 내가 무엇에 사로잡혔는지도 모르겠어요. 어떻게 감히 당신을, 남편인 당신을 그렇게 잊어버릴 수 있었는지 나도 도무지 알 수 없어요. 그런데 나는 일종의 병에 걸려 있었던 거예요. 당신은 나에게 친절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했으며, 당신은 나의 지적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느끼게 되었지요. 그렇지만 그 사람은 나와 공감할 뿐 아니라 아니 훨씬 더 나를 능가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아마 나는 좀더 나는 제대로 이해해 주는 사람을 원하고 있었나봐요. 그녀는 기진맥진하여 그 이상 말을 계속하지 못하고 몇 시간 후에 갑자기 허탈상태에 빠 지더니 마침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리하여 시인에 대한 감정을 더 이상 남편에게 말하지 못했다. 윌리엄 마치밀은 지난 날 일에 대해서 질투로 말미암아 마음이 산란해지지는 않았다. 그 리고 이미 죽어 버린, 다시는 자기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칠 힘이 없게 된 남자에 대한 애정 고백을, 아내에게 강요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내가 죽은 지 여러 해가 지난 후, 재혼할 여인을 집안에 맞아들이기 전에 정리 할 것들을 뒤적이고 있다가 우연히 봉투 속에 든 한 줌의 머리털과 전처의 필적으로 죽은 시인의 사진 뒤에 날짜가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소렌트시에서 지내고 있을 때의 날짜였다. 마치밀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그 머리칼과 사진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자신 의 탄생으로 인해 어머니의 죽음을 초래하게 된 어린 사내아이는 지금 아장아장 걸어다니면 서 한참 수선을 부렸다. 그는 아이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테이블 위에 사진을 세워 놓은 다 음, 머리털을 아이의 머리털과 견주면서 아이의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사진과 비교해 보는 것이었다. 그러자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엘라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남자와 비슷한 모습 을 발견했다. 그 시인의 꿈을 꾸는 듯한 독특한 표정이 마치 어떤 고정된 관념처럼 어린아이 얼굴에 깃 들어 있었으며, 머리카락도 그와 꼭 같았다.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니까? 하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그놈하고 하숙집에서 놀아난 게 사실이군! 어디 봐, 날짜가 8월 두번째 주라. 5월 세번째 주고... 그렇군... 그래. 이 자식아! 저리가, 넌 내 자식이 아니야. 토머스 하디(1840-1928): 영국의 소설가이며 시인. 도싯 주에서 석공의 아들로 태어나 중 등교육을 받고 건축사무소에 들어갔으나 후에 문필 활동을 했다. 고향인 웨스트 석세스 지 방을 무대로 한 소설을 즐겨 썼는데, 그는 작품 속에서 당시 영국 사회의 인습과 편협한 종 교인의 태도를 공격하고 폭로했다. 주요 작품으로 귀향 , 주드 , 테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