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 지은이:앙드레 지드 옮긴이:장용환 발행자:구보희 발행처:고려문학사 발행일:1990년 4월 15일 차례 제1부 제2부 제3부 제4부 제5부 제6부 제7부 제8부 알리싸의 일기 사랑의 도식 타망고 @ff 읽기 전에 앙드레 지드는 1869년 11월 22일 빠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빠리 대학 법학부 교수로서 남부 랑그독 출신이고 어머니는 북부 노르망디 태생이었다. 아버지 쪽의 조상은 대대로 프로테스탄트로 신앙심 깊은 위그노 교도였다. 어머니 쪽의 골드 집안의 조상은 모두 카톨릭이었으나 조부가 신교도 여인과 결혼한 후로 신교도가 되었다. 따라서 지이드 정신의 종교적 기반은 완전히 신교도적인 적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의 극단적인 자기 반성벽도 이 신교도적 피의 유전, 그리고 신교도적 가정 환경과 교육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는 지이드가 열 한 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의 교육은 완전히 어머니와 백모, 예전에 어머니와 가정 교사였던 안나 등 여자들의 손에 맡겨졌다. 여덟 살 대 알사스 학원에 들어갔으나 병적인 소심증과 혼미고 두뇌의 활동이 둔해서 성적은 언제나 좋지 못했다. 또 그때부터 벌써 자위 행위를 하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더욱이 태어날 때부터 나약한 체질이었기 때문에 몇 번이나 퇴학하여 학업이 언제나 불규칙했다. 그러나 소년 지이드의 어두운 정신에 빛이나 아름다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동물이나 식물에 대한 애정은 어린 영혼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긴 하지만, 자전적 작품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않으면"에 그려져 있는 소년 지이드의 그것은 이상할 정도로 강한 것이었다. 감수성이 강한 소년에게서 흔히 보는 신경 장애(이 신경장애는 마흔 살을 넘어서 다시 재발하여 그를 괴롭혔다)가 소년 지이드의 심신의 정상적인 발육에 커다란 벽이 된 것은 사실이고, 또 가정의 엄격한 청교도적 분위기가 아름다운 것, 자연적인 것을 향하려는 마음에 적지 않은 제약을 준 것도 사실이다. 요컨대 소년 지이드의 영혼은 오랫동안 번데기 상태에 놓여 있었던 셈이다. 이 번데기 상태에 두 살 위인 사촌 누이 마들레에느 롱드에 대한 청순한 사랑에 의해서 차차 그 껍질을 벗기 시작했다.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않으면"에 씌어 있는 것처럼, 사촌 누이가 그녀 어머니의 불의를 알고 깊은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소년 지이드는 어린 마음에도 그녀를 돕는 것만이 자기의 의무이며 또 거기에 자신의 존재 이유가 있다고 느꼈다. 이 때의 충격이 소년의 어두운 정신에 한 줄기 빛을 던져 주고, 여기에서 비로소 그는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인식하게 되었다. 소년 지이드는 서서히 번데기의 상태에서 벗어나 "아미엘의 일기"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베에토벤이며 슈우만 등을 듣고 도취할 수 있게까지 되었다. 열 대여섯 살이 되자, 그의 독서열은 차차 왕성해졌다. 소년 지이드가 맨 처음으로 고른 것은 떼오필 고띠에의 시집이었다. 당시 고띠에는 관습적인 것에 대한 경멸. 해방, 방종 등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일반에게 알려져 있었다. 소년 지이드가 이것을 고띠에는 어머니에 대한 도전도 있었으나,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도전이었다. 또 산책하는 소년 지이드의 바지 주머니에는 늘 위고의 시집이 있었다. 그중의 몇 편은 완전히 암기하여 가끔 마들레에느에게 들려 주었다. 그는 하이네도 탐독했다. 그의 정신에 비상한 영향을 준 대상을 그리이스의 시인 중에서 발견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지이드는 르꽁뜨 드 리일의 번역으로 읽었는데, 그는 이것을 통해 올림포스 신들의 호감이 가는 근엄함과 인간의 고뇌를 알았다. 지이드가 이런 이교도적 정열에 불탔던 것을 바로 그가 그리스도교에 한창 열중해 있던 때였다. 이 두 개의 상반되는 것이 서로 방해하지 않고 양립하고 있었던 것은, 생각해 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당시의 지이드는 결코 미지근한 세례 지망자가 아니리 열광적인 구도자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의 사원은, 그 자신의 말을 빌 것 같으면서 마치 '동방이 활짝 열리고 빛과 음악과 시가 자유롭게 흘러들어오는 이슬람교 사원과 같은 것'이었다. 1891년 스물 두 살 때 지이드는 사촌 누이 마들레에느에 대한 사랑을 중심으로 당시 그가 고민하고 있던 영혼과 육체의 싸움, 형이상학적인 불안과 고뇌를 단편적인 일기 형식을 빌어 쓴 "앙드레 왈떼르의 수기"를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이 작품을 읽은 마들레에느로부터 구혼을 거절당했다. 이 무렵, 지이드는 에레다아의 살롱을 다니고 이어 말라르메 '화요회'의 열렬한 단골 손님이 되었는데 여기서도 그는 그저 '스승의 목소리를 눈으로 듣고 있는' 지극히 눈에 띄지 않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이 무렵 그는 그의 일생에 가장 혼란한 시기에 처해 있었다. 그때까지는 어릴 때부터 엄격하게 훈련받은 청교도적인 극기주의가 그의 영혼의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청춘이 눈뜸과 동시에 그것은 완전히 뒤집히고 말았다. 육체의 순결을 고집하는 것이 자유 분방한 상상을 유발하여 오히려 영혼을 더욱 불결하게 하는 결과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신에의 준엄한 추종은 오히려 영혼의 균형을 깨뜨려 자신에게 불안을 주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운명을 걸고 성패를 가름하는 시도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 그리스도교와 결별한 것이다. 1893년 10원 지이드는 친구인 화가 뽈 알베르 로렌스와 함께 아프리카의 알제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이 여행에서 과거의 너무나 병적인 고뇌, 낭만주의, 우울 등을 버리고 균형과 충실과 건강을 찾으려고 했다. 말하자면 고전주의에 대한 최초의 동경이었던 것이다. 이 여행 도중 지이드는 폐결핵에 걸려 한 해 겨울을 비스크라에서 보냈다. 그는 이 여행 중 이상한 경험을 했다. 그에게서는 본래부터 동성애적인 경향이 있어 여성에 대해서는 전혀 성욕을 느끼지 못했다. 이 성적 이상에 대한 번민과 싸움은 날이 갈수록 그 경향을 더욱 심화시키고있었다. 그것을 극복하는 한 방편으로 어느 날밤에 창부를 품에 안았다., 그는 이 창부와의 행위에서 만족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눈을 감고, 언젠가 울타리 틈으로 엿본 아름다운 아라비아 소녀의 모습을 상상하면서만 가능했다. 그의 성적이상은 이것으로 고쳐지지 않았으나 이 시도는 건강 회복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는 이 하룻밤을 보낸 후 이상할 정도로 안정감을 느꼈다. 지이드는 소생의 기쁨을 안고 빠리로 돌아왔으나 빠리 문단은 그가 전에 숨쉬던 그런 곳은 아니었다. 전에는 동경의 대상이었던 살롱도 지금은 죽음의 냄새로 가득 차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 속에 일어난 변화를 말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아부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자신과 그들과의 사이에 있는 너무나 큰 간격에 할말을 잃었다. 그들이 만족하고 있는 빈약하고 비참한 것에 대한 연민은 마침내 절망의 분노로 바뀌었다. 만약 이 고뇌의 마음을 "빵뤼드" 속에 풍자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분출구를 찾지 못했더라면, 어쩌면 지이드 자신도 고백하고 있듯 그는 자살을 감행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예술가였다는 점이 위기에서 그를 구해 준 것이다. 그가 만일 단순히 심리 분석가로서 시종 했더라면, 그의 일생 동안의 고민의 원인이었던 그 의식의 분열도 아무런 수습책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지이드는 1895년 5월 31일 어머니를 잃었다. 그러한 지이드에게 남은 유일한 의지는 오직 사촌 누이 마들레에느에 대한 사랑 뿐이었다. 그녀와 결혼하려는 의지만이 그의 생활의 유일한 지침이었다. 그런데 이 애정은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애타적인 요소가 많았다. 그는 자기 자신보다도 오히려 그녀를 더 생각하고 있었다. 이 결혼에 어떠한 위험이 따를까 하는 근심 따위는 문제되지 않았다. 자기가 과연 그녀와의 결혼을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없진 않았으나 그러나 지기를 앞으로 밀어내는 것은 하나의 숙명이라고 생각했다. "앙드레 왈떼르의 수기"가 출판된 직후 마들레에느는 지이드의 구혼을 거절했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끝내는 마들레에느도 지이드의 필사적인 구혼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해 10월에, 두 사람은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으로 알려진 노르망디의 에트르따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알제리아로 신혼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이 비밀은 그가 죽은 후 1951년에 발간된 "이제 그녀는 그대 안에 있다"에 자세히 서술되어 잇다. 지이드는 앞서도 말했듯이 원래 이상성욕의 소유자로 동성애적인 취미를 갖고 있었던 데다가, 결혼 후에는 성에 대한 극단적으로 무지한 상태였으므로 마들레에느와 같은 순결한 여자에겐 육체적인 욕망은 없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그녀의 육체를 소유하려 하지 않았다. 그녀 쪽에서는 또, 남편이 소극적인 것은 자기의 매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본래 내성적인 성격이 더욱 심화되어 갔다. 부부는 마음으로는 서로 사랑하면서도 이른바 '하얀 결혼'을 유지해 지이드 부인은 일생 처녀로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마들레에느는 지이드의 생애에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앙드레 욀떼르의 수기"에 엠마뉴엘, "배덕자"의 마르슬리느, "좁은 문"의 알리싸에 그녀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음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지이드는 첫 번째 알제리 여행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생명의 송가라고 할 수 잇는 일종의 산문시 "지상의 양식"과 생명의 해방을 노래한 비극 "배덕자"를 썼다. "배덕자"는 소생한 자기의 생명을 향락하기 위해 사랑하는 아내의 생명까지 희생시킨다는 얘기인데, 이것은 그가 시도한 최초의 본격적인 줄거리가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으로 겨우 문단의 한 모퉁이를 차지하기는 했으나 그의 존재는 아직 결코 큰 것이 아니었다. 이 작품이 정당하게 평가되기까지는 근 10여 년의 세월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이드는 원래 많은 작품을 남발하는 작가는 아니었다. 하나의 작품을 끝내고 다음 작품이 나올 때까지는 상당히 오랜 기간의 마비 상태가 계속 되었다. 1905년경부터 손대 오던 "좁은 문"을 지이드는 1908년에 탈고, 당시 그가 고문격이 되어 자끄 꼬뽀, 장 슐랭베르제 등과 함께 창간했다가 내분으로 폐간, 다음해 2월에 다시 복간된 '누벨 르뷔 프랑세에즈'(통칭 'N, R, F' 제1호부터 제3호에 걸쳐 연재하여 대호평을 받았다. 이 잡지는 별로 새롭거나 특정한 교의를 쳐든 것은 아니나 작가의 내적 완성에 의해 예술의 모랄을 세우려는 성실성을 가지고 있어 당시 상업주의에 침해를 받은 문단에 상당한 자극을 주었다. 지이드는 또 신인들의 원고를 보살펴 이것을 세상에 내놓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띠보 집안 사람들"의 마르땡 뒤가르를 위시하여 장 리샤르, 자그 리비에르, 발레리 라르보 등 쟁쟁한 작가들을 발굴해(N, R, F) 산하에 모았다. 눈이 밝은 지이드도 꼭 한 번 실수를 저질렀다. 그것은 1912년 마르셀 프루우스트로부터 "스완네 집쪽으로"의 출판 의뢰를 받고 그것을 거절한 일이었다. 그러나 다시 읽고서 자기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이듬해 프루우스트에게 사과했다. 그리하여 고독했던 그의 주변도 차차 활기를 띠었으나 그 반면 옛날의 친구 몇 사람은 가톨릭교로 개종해 그의 곁을 떠났다. 특히 이 종교 문제로 그와 사이가 나빴던 것은 뽈 끌로오델이었다. 끌로오델은 지이드와 한 그룹이었는데 지이드와는 정반대의 영향을 많은 사람들에게 주고있었다. 프랑시스 쟘을 개종시킨 것도 그였고 샤를르 루이 필립도 만년에 그의 영향을 받다 카톨릭교도가 되려고 했다. 자끄 리비에르도 처음에는 지이드의 영향 아래 있었는데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무렵 다시 카톨릭교로 돌아갔다. 그밖에 1910년부터 14년 사이에 신교도였던 자끄 마리땡, 성직을 경멸하던 샤를르 빼기, '배척해야 할 르낭'의 손자 에르네스트 뿌시까리 등이 끌로오데르의 영향으로 개종해 갔다. 그러나 지이드는 끌로도델의 권고를 당연 물리쳤다. 1914년 "교황청의 지하도"가 'N, R, F'에 발표됨과 동시에 두 사람의 결별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지이드는 이 풍자적인 작품 속에서 자유인 라프까디오를 창조해 내고 어둡고 몽매한 종교계를 한껏 야유했던 것이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소위 불안에 찬 시기에, "지상의 양식" "배덕자" "교황청의 지하도" 등이 젊은 세대에게 크게 환영을 받은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의 주위에는 젊은 추종자의 무리가 급속도로 늘어갔다. 이와 함께 적도 많이 생겼다. 감각의 해방을 가르치고 광열과 유동을 설교하고 순응주의로부터의 탈피를 부르짖는 그는 세상의 혼란 양속자들의 눈에는 더할 수 없이 위험한 인물이었다. 맨 먼저 카톨릭교도인 앙리 마시스가 1921년에 "르뷔 위니베르셀"을 통해 반지이드의 횃불을 올렸다. 다시 1924년에는 "재단"이라는 논문집에서 끈질기게 지이드를 물고 늘어졌다. 훨씬 뒤인 1927년에는 역시 카톨릭파의 빅또르 프셀이 지이드의 배덕주의를 신랄하게 공격했다. 지이드에 대한 비난은 단순히 이러한 종교적인 신념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문단적 질투에 의한 것도 있었다. 예를 들어 앙리 베로는 지이드를 중심으로 한 'N, R, F'에 히스테릭한 공격의 화살을 던졌다. 지이드가 그 영광을 예언한 발레리는 "젊은 빠르끄"와 "해변의 묘지"로 화려하게 문단에 복귀하고, 프루우스트의 작품은 1919년에 꽁꾸우르 상을 획득하여 일약 그 이름을 떨쳤으며 또 쥘르 로멩, 장 지로두, 뽈 모랑 등 신진이 다투어 배출되어 'N, R, F'는 그야말로 이름 그대로 문단의 준재를 한자리에 모아 놓은 격이 되었다. 질시를 받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1925년 지이드는 스스로 자기의 유일한 소설이라고 말한 "사전군들"을 끝내자 마르끄 알레그레와 함께 콩고로 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은 그에게 커다란 전환을 갖다 주었다. 이후부터 그의 눈은 차차 사외 문제를 향해 크게 열렸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정신의 변화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것은 그의 정신의 필연적인 진전이었던 것이다. 허위와 부정에 대한 증오, 피압자에 대한 사랑, 진실 추구의 욕구 등은 시종 변치 않는 그의 정신적 태도였다. 다만 눈이 내부로부터 외부로 향해진 것만이 달라진 셈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그를 '현대의 양심'이라고 불리기에 마땅한 위대한 존재로 만든 중요한 전기가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후 지이드의 사상은 차차 좌경하여 1932년에는 공산주의로 전향할 것을 선언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 전향은 얼핏 대담한 것같이 보이긴 했으나, 당시 사람들이 말한 대로 확실한 '개종'은 아니었다. 이러한 그가 소련의 현실을 샅샅이 살펴볼 기회가 생겼다. 1936년 6월 중순, 고리끼의 와병 소식을 듣고 그는 런던에서 열리는 '문화 옹호 국제 저작가 대회'에 참석할 예정도 변경하고 급거 항공기로 모스크바로 향했다. 고리끼는 그가 도착한 다음날 영면했다. 장례식 날 그는 '문화 옹호 국제 저작가 동맹'을 대표해 '새로운 세계를 과거의 세계로 연결하고 또 미래로 이은 찬란한 운명의 작가' 고리끼에게 진정에 찬 추도사를 바쳤다. 그는 으젠느 다비, 삐엘 엘바알, 루이규 등과 함께 소련의 각종 사회 시설 및 문화 시설을 직접 눈으로 보고 다니는 동안에 강한 공감과 함께 비판 의식이 싹텄다. 그는 소련을 사랑하기 때문에 작은 결함도 모조리 적발해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문화 쇄국주의와 새로운 관료주의, 획일주의는 그를 한껏 반발시켰다. 인간주의 위에 선 순수한 모랄리스트인 그의 생각은 소령의 현실적인 정치주의와 날카롭게 대립했다. 그의 "소비에트 여행기"는 호의적인 충고자의 입장에서 씌어진 것이긴 하나 그 결벽성이 소련을 강하게 자극하여 '프라우다'지와 그 밖의 신문들이 일제히 지이드 공격에 나섰다. 프랑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에 대답한 "소비에트 여행기 수정"(1937)은 전자에 가해진 비방에 대한 반박이 주안점이 되어 자기의 말을 정당화하려는 초조감이 앞서는 바람에 본질적인 논쟁은 내버려진 느낌이 없지 않았다. 반년의 지이드의 생활은 결코 조용하고 평화로운 것은 아니었다. 1938년 4월 지이드는 사랑하는 아내 마들레에느를 잃었다. 이 충격은 대단히 컸다. 그는 이 죽음을 지극히 가까운 몇 사람에게밖에 알리지 않았다. 사랑하는 아내의 시체를 그저 예의상 찾아와 주는 무관심한 사람들의 눈에 드러내놓기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아내의 죽음이 가져온 타격에서 간신히 일어섰다고 생각하자, 이듬해인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1940년 6월에 빠리가 함락됐으나 그는 그 직전에 비시로 탈출했다가 다시금 전쟁을 피해 지중해를 바라보는 피한지 칸느 가까이에 임시로 거처를 정했다. 이 시기에 그는 괴에테에 심취하고 또 '가상 회견기'에 수록된 소(작은)논문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1942년 5월 북아프리카의 투니시아로 건너가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그 사이에 장 무이 바로로부터 의뢰받은 "햄릿"의 번역을 완성하고, 또 최후의 작품인 "떼제"를 끝마쳤다(1944년). 1947년 11월 스웨덴 아카데미는 지이드에게 노벨 문학상을 수여할 뜻을 밝혔다. 아카데미 프랑세에주의 회원으로 추대되었을 때 '나는 아직 그토록 늙지는 않았다'고 거절했던 그도 노벨상은 기쁘게 받았다. 1949년 괴에테 탄생 2백 주년을 맞이해서는 토마스 만과 나란히 괴에테 협회로부터 기념상을 받았다. 이러한 영광에 싸인 지이드는 이 무렵부터는 차차 건강이 나빴다. 지병인 폐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스위스, 남프랑스, 이탈리아 등지를 전전했으나 끝내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1951년 2월 19일 82세의 긴 생애를 마쳤다. @ff 1 다른 사람들이라면 이 이야기로 한 권의 책을 꾸며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이야기 하는 것은 내가 그러한 생활을 하기 위해 내 모든 힘과 정신을 거기다 다 기울인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저 내 추억을 적어 볼 따름이며, 꿰매거나 맞추기 위해 조작까지 할 의도는 전혀 없다. 그러한 노력이란 내가 추억을 이야기함으로써 얻으려는 마지막 즐거움마저 잇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내가 아직 열 두 살도 채 되기 전이었다. 아버지가 의사로 계시던 르아브르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아무런 이유도 없게되자 어머니는 파리로 가면 더 학업을 잘 마치리라는 생각에서 그리로 옮겨갈 작정을 하셨다. 어머니는 상부르 공원 근처에 조그만 아파트를 세내어 그곳에서 미스 아슈뷔르똥과 같이 살게 했다. 혈혈 단신의 미스 플로라 아슈뷔르똥은 처음에는 어머니의 가정교사였다가 이어 말벗이 되더니 곧 친한 친구가 되어 버렸다. 나는 다같이 부드럽고 쓸쓸한 표정에 늘 상복만 입고 있던 기억이 나는 이 두 여인 곁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퍽 오랜 뒤라고 생각되는데 어느 날 아침 어머니가 아침에 쓰는 모자의 검은 리본 대신 연보라색 리본을 단 것을 보고 나는, "엄마!" 하고 외치고 말았다. "그 빛깔은 정말 엄마에게 어울리지 않아." 다음날 어머니는 다시 검은 리본으로 고쳐 달았다. 나는 꽤 허약한 편이었다. 그래서 어머니와 미스 아슈뷔르똥은 늘 내가 지치지 않도록 마음을 썼다. 그런데도 내가 게을러지지 않았던 것은 정말 공부하기를 좋아했던 때문이다. 초여름부터 두 여인은 나를 얼굴이 창백해질 뿐인 도시에서 떠나게 할 시기가 왔다고 들먹거렸다. 6월 중순 경 해마다 여름이면 뷔꼴랭 삼촌이 맞아 주는 르아브르 근처 퐁궤즈마르를 향해 우리는 출발했다.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은 정원, 노르망디 지방의 다른 정원들과 별다른 특징이 없는 정원 안에 있는 하얀 뷔꼴랭 댁의 3층 건물은 18세기 풍의 별장들과 같은 것이었다. 정원의 정면 동쪽을 향해 20여 개의 창이 열려 있고 뒤켠에도 그만큼 달려 있다. 양쪽 곁에는 창이 없다. 창에는 작은 창유리들이 끼워져 있었는데, 최근에 갈아 낀 몇 개의 유리는 너무도 투명해서 그 주변의 것들은 푸르고 어두워 보이게 했다. 어떤 창유리에는 집안식구들이 '거품'이라고 부르는 흠이 있어 그리로 내다보면 나무는 뒤틀려 보이고 그 앞을 지나가는 우편 배달부는 갑자기 힘껏 달리기도 한다. 긴 네모꼴의 정원은 담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집 앞에는 그늘진 널찍한 잔디밭이 있고, 그 둘레로는 모래와 자갈 깔린 작은 길이 나 있었다. 이 편에서는 담이 낮아서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농가의 뜰이 보이는데, 너도밤나무를 심은 길이 이 고장 특유의 방식대로 이 농장의 뜰을 구분하고 있었다. 집 뒤쪽 서편으로, 정원은 더욱 활짝 트여 있었다. 남쪽 과수 울타리 앞, 꽃이 만발한 좁은 길은 포르투갈산 월계수의 두터운 장막과 몇 그루 나무로 바닷바람을 피하였다. 북쪽의 담을 따라 뻗어나간 또 하나의 오솔길은 나뭇가지 밑으로 사라진다. 내 사촌 누이들은 그것을 '어두운 길'이라 불렀고 저녁 노을이 지면 거기로 나가길 주저했다. 이 두 갈림길은 채소밭에 닿아 있고, 이 채소밭을 몇 층계 더 내려가면 밑에 정원과 붙어 있다. 그리고 채소밭 안쪽 조그만 비밀 문이 나 있는 담 건너편에 벌채림이 보이고 너도밤나무가 늘어선 길이 좌우 양쪽에서 그곳에 이르고 있다. 서쪽의 현관 층계에서는 이 숲 너머로 정원이 보이고 이 고원을 뒤덮은, 거둬들인 농작물을 바라볼 수 있다. 지평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조그마한 마을의 교회당이 있고 해질녘 바람이 잔잔할 때면 몇몇 집에서 피어 오르는 연기가 보인다. 여름철 아름다운 석양녘이면 저녁 식사 후 우리는 아래 정원으로 내려갔다. 우리는 그 작은 비밀문을 통해 어느 정도 주변의 경치를 바라볼 수 있는 길가의 벤치까지 갔다. 거기 폐광된 이회암 채굴터 이엉 지붕까지 놓인 벤치에 삼촌, 어머니, 미스 아슈뷔르똥이 앉는 것이었다. 우리 맞은편에 있는 조그마한 계곡은 함빡 안개에 잠기고 그 너머 숲 위의 하늘은 금빛으로 물드는 것이었다. 땅거미가 진 뒤에도 우리는 늦도록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우리가 다시 집에 돌아오면 우리와 같이는 거의 밖에 나가지 않는 아주머니가 응접실에 있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그것으로 저녁 시간이 끝나는 것이지만 흔히 밤이 이슥해서 어른들이 돌아오는 발소리가 들릴 때까지 각기 자기 방에서 책을 읽었다. 정원에서 보내는 외의 시간을 우리는 대부분 '책상'을 마련해 놓은 삼촌의 서재 '자습실'에서 보냈다. 사촌 동생인 로베르와 나는 나란히 앉아 공부했고 뒤에서는 줄리에뜨와 알리싸가 공부를 했다. 알리싸는 나보다 두 살 위였고 줄리에뜨는 한 살 아래였으며 로베르는 넷 중 가장 나이가 어렸다. 내가 여기서 쓰려 하는 것은 어린 시절의 여러 가지 첫 추억이 아니라 다만 이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틀림없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해다. 아마도 내 감수성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또한 자신의 슬픔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어머니의 슬픔을 보는 것으로 지나치게 자극을 받은 나머지 새로운 감정을 일으켰던 탓인지 나는 상당히 조숙한 편이었다. 그해 퐁궤즈마르에 다시 왔을 때 줄리에뜨와 로베르는 아주 어려 보였지만 문득 우리 둘은 이제 어린애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 그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다. 우리가 도착한 직후 미스 아슈뷔르똥과 어머니가 주고받은 대화가 내 기억을 확인해 주고 있다. 나는 어머니와 내 친구가 이야기하고 있던 방에 갑자기 들어갔었다. 외숙모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머니는 외숙모가 복을 지키지 않았다든가 혹은 지켰다 하더라도 벌써 그만 두고 말았다는 데 화를 내고있었다(사실 소복을 하고 있는 뷔꼴랭 외숙모를 상상해 본다는 것은 화려한 옷차림의 어머니를 상상해 보는 것만큼이나 어색한 노릇이다) 내 기억으론 우리가 도착하던 날 뤼씰르 뷔꼴랭은 모슬린 옷을 입고 있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타협적인 미스 아슈뷔르똥은 어머니를 진정시키려 노력하면서 조심조심 말하고 있었다. "어쨌든 흰색도 상복 차림이긴 하잖아요?" "아니, 그럼 그 어깨에 걸치고 있는 빨간 쇼올도 '상복 차림'이라 하겠어요? 플로라, 내 화를 그만 돋궈요." 하고 어머니는 소리쳤다. 내가 외숙모를 본 것은 방학 동안 뿐이었으니까 늘 낯익은, 가볍고 폭이 넓은 그 웃옷차림도 여름의 더위 탓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드러난 어깨 위에 걸치고 있었던 쇼올의 타는 듯한 빛깔보다도 어깨를 그처럼 드러낸 모습이 더욱 어머니 눈에 거슬렸던 것이다. 뤼씰르 뷔꼴랭은 퍽 아름다웠다. 내가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외숙모의 초상은 그 당시 외숙모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딸과는 자매 지간으로 보일이 만큼 앳된 모습으로 비스듬히 앉아서는 언제나 변함없는 맵시로 턱을 왼손에 괸 채 새끼손가락을 맵시 있게 입술가로 굽히고 있다. 올이 긁은 헤어네트가, 목덜미 위에 웨이브를 한, 반 쯤 헝클어진 머리를 감싸도 있다. 웃옷 깃 사이의 움푹 파인 곳엔 검은 빌로오도의 헐거운 목걸이에 매듭이 흔들거리는 검은 빌로오도의 허리띠, 모자끈으로 의자 뒤에 달아매 놓던 차양이 넓고 부드러운 밀짚 모자, 이 모든 것이 외숙모의 모습을 더욱 앳되게 만들고 있다. 오른 손은 아래로 늘어뜨린 채 덮여진 한 권의 책을 들고 있다. 뤼씰르 뷔꼴랭은 식민지 출신이었다. 양친을 몰랐다든가 아니면 일찍 여의었다든가 했다. 그 후 어머니가 들려 준 이야기로는, 내버려졌거나 아니면 고아였던 외숙모는 아직 어린애가 없던 보띠에 목사 부처가 거두어서, 곧 마르띠니끄를 떠나게 되자 당시 뷔꼴랭네가 살고 있던 르아브르로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보띠에 댁과 뷔꼴랭 댁은 서로 친해지게 되었다. 삼촌은 당시 외국의 어떤 은행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어린 뤼씰르를 보게 된 것은 그로부터 3년 후 집에 돌아왔을 때었다. 삼촌은 홀딱 만해서 곧 청혼을 했는데 그로 인해 양친과 어머니는 어지간히 속은 썩였다. 당시 뤼씰르는 16세였다. 그간에 보띠에 부인은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다. 부인은 날이 갈수록 성격이 점점 비뚤어져가는 수양딸이 두 자녀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까 두려워하기 시작한 참이었다. 게다가 살림살이도 옹색했고... 이것은 모두 보띠에 부인이 어째서 자기 동생의 청혼을 반갑게 수락했던가 하는 것을 어머니가 내게 설명해 준 이야기다. 더 나아가서 내가 상상하기로는 사춘기에 이른 뤼씰르가 그들을 몹시 당황케 했으리라는 것이다. 르아브르의 사회를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처럼 매혹적인 용모를 지녔던 이 아이에게 사람들이 어떻게 대했으리라 하는 점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훨씬 후에야 알게 되었지만 성격이 온유하고 신중하면서도 순박하여 속임수엔 감당을 못하고 악 앞에서는 완전히 당황해 버리는 보띠에 목사, 이 어진 목사는 정말 진퇴양난에 빠졌을 것이다. 보띠에 부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부인은 넷째 아들, 나와 같은 또래로 호에 내 친구가 된 아들을 낳자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뤼씰르 뷔꼴랭은 우리 생활에 별로 참여하지 않았다. 점심 식사가 끝난 후에나 겨우 자기 방에서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소파나 혹은 해먹 위에 저녁까지 길게 누워 있다가 지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녀는 윤기라곤 전혀 없는 이마에 땀이라도 닦으려는 듯 때때로 손수건을 갖다대곤 했다. 정묘한 모양에 꽃향기보다는 과일내가 풍기는 이 손수건은 내게 지극히 신기한 것이었다. 때로 그녀는 허리띠에서 여러 가지 물건과 함께 시계줄에 달린 매끄러운 은으로 만든 뚜껑이 있는 조그만한 거울을 꺼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자기 얼굴을 거기에 비춰보면서 손가락 하나를 입술에 갖다대어 침을 조금 묻혀다가 눈꼬리를 축이곤 했다. 흔히 그녀는 책을 한 권 들고 있었는데 늘 덮여진 채 책 중간 쯤엔 별갑으로 만든 페이퍼나이프 겸용의 서표가 끼워져 있었다. 사람이 다가가도 여전히 공상에 잠긴 채 누군가에게 시선을 돌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때로는 그 힘없이 나른해진 손에서, 소파의 팔걸이에서, 혹은 치마폭의 주름 사이에서, 손수건이나, 책, 혹은 무슨 꽃이나 서표가 떨어지는 것이었다. 어느 날 그 책을 주워--이건 어릴 때 추억이다--그것이 시집인 것을 보고 나는 얼굴을 붉힌 적이 있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뤼씰르 뷔꼴랭은 우리 가족 테이블로 가까이 오지 않고 피아노 앞에 앉아 쇼팽의 느린 마주르카를 치곤 했다. 때로 박자가 틀리면 어느 한 음만을 누른 채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 외숙모 곁에서 나는 언제나 까닭 모를 어색한 기분, 일종의 감탄과 두려움이 뒤섞인 그러한 느낌을 가졌었다. 무의식적인 어떤 본능이 외숙모를 경계하도록 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나는 외숙모가 플로라 아슈뷔르똥과 어머니를 경멸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미스 아슈뷔르똥은 그녀를 두려워하고 있으며 어머니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뤼씰르 뷔꼴랭 외숙모임, 나는 이제 당신을 탓하고 싶지도 않으며 또 외숙모가 많은 잘못을 저지른 사실도 잊고 싶은 심정입니다... 적어도 노여움 없이 당신에 대해 이야기 하렵니다. 그해 여름의 어느 날--혹은 그 이듬해였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비슷한 배경 속에서 내 기억은 가끔 뒤섞인다--책을 한 권 찾으러 응접실로 들어갔다. 외숙모가 거기에 있었다. 나는 곧 되돌아 나오려고 했다. 여느 때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듯하던 외숙모가 나를 불렀다. "제로옴! 돼 그렇게 급히 나가니? 내가 무서우니?" 가슴을 두근거리며 나는 그녀 쪽으로 갔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짓고 손도 내밀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내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너의 어머니는 어쩌면 이렇게 흉하게 옷을 입히니, 가엾어라!..." 그때 나는 넓은 칼라의 세일러복을 입고 있었는데 외숙모는 그것을 구기적거리기 시작했다. "세일러복의 칼라는 훨씬 더 젖혀 입는 거야!" 내 샤쓰 단추를 하나 빼면서 그녀가 말했다. "자! 봐라, 더 낫지 않는가!" 그러고는 그 작은 거울을 꺼내더니 자기 얼굴에 내 얼굴을 끌어당기고 드러낸 팔로 내 목을 휘감고 반쯤 벌려진 내 샤쓰 속으로 자기 손을 집어 넣고 웃으며 간지럽지 않으냐고 물으면서 자꾸만 더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내가 깜짝 놀라 펄쩍 뛰어 일어나는 바람에 그만 세일러복이 찢어지고 말았다. 얼굴이 홍당무가 된 채, "아유, 이런 바보!" 하고 외숙모가 소리치는 동안 나는 도망쳤다. 그러고는 정원으로 달려가 거기 채소밭 조그마한 저수통에서 손수건을 추겨 이마에 대고 뺨과 목 할 것 없이 그녀가 손 댄 곳은 어디나 닦고 문질러 냈다. 때때로 뤼씰르 뷔꼴랭은 '그의 발작'을 일으키곤 했다. 발작은 불시에 일어나 집안을 뒤엎는 것이었다 미스 아슈뷔르똥은 부랴부랴 아이들을 데리고 가 돌보아 주었지만 침실이나 응접실에서 나오는 무서운 고함소리를 들리지 않도록 막을 수는 없었다. 삼촌이 반미치광이가 되어 수건이나 화장수나 에테르를 가지러 복도를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저녁때 아직도 외숙모가 나타나지 않은 식탁에서 삼촌은 근심에 찬 늙은 안색을 하고 있었다. 발작이 거의 지나고 나면 뤼씰르 뷔꼴랭은 자기 아이들을 그의 곁으로 불렀다. 주로 로베로와 줄리에뜨를 불렀다 알리싸를 부르는 일이란 거의 없었다. 이러한 슬픈 날이면 그의 아버지가 이따금 그녀를 보러 가곤 했다. 삼촌은 곧잘 그녀와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외숙모의 발작은 하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고 있었다. 발작이 유난히도 심하던 어느 날 저녁, 응접실에서 벌어지는 일이 잘 들리지 않는 어머니 방에 꼼짝 말고 들어가 있으라는 말을 듣고 어머니와 함께 들어가 앉아 있는데, "주인님 어서 내려오세요, 마님께서 지금 돌아가셔요." 하고 하녀가 소리치면서 복도를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삼촌은 알리싸의 방에 올라가 계셨다 어머니가 삼촌을 부르러 가셨다. 15분 후 내가 있던 방의 열려진 창 앞으로 두 분이 무심히 지나갈 때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똑바로 말해 볼까? 이건 모두 연극이야!" 그리고는 음절을 끊으면서 몇 번이나, "연...극...이야!" 라고 되풀이하는 것이다. 이 일은 방학이 끝날 무렵에 생겼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년 후의 일이었다. 그후로는 오랫동안 외숙모를 만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집안을 뒤엎은 슬픈 사건을 이야기하기 전에 도한 그 사건의 결말에 조금 앞서 그때까지도 뤼씰르 뷔꼴랭에 대해 내가 느끼고 있었던 복잡하고도 막연한 감정을 그야말로 증오심으로 바꾸어 놓은 사정을 이야기하기 전에, 내 사촌 누이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가 됐다. 알리싸 뷔꼴랭이 예쁘다는 것을 나는 그때까지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이끌렸던 것은 단순한 미의 매력보다는 다른 어떤 매력 때문이다. 물론 그녀는 자기 어머니를 많이 닮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길이 주는 표정이 그녀의 어머니와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에 서로가 닮았다는 사실을 훨씬 뒤에야 알게 되었다. 나는 지금 그녀의 얼굴을 그리지 못하겠다. 얼굴의 윤곽 뿐 아니라 눈동자의 빛마저도 이제는 기억에 희미하다. 단지 지금 생각나는 것은 그 무렵에 벌써 슬픔이 깃든 듯한 미소를 띤 표정과 커다란 곡선을 그리면서 눈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눈썹의 선뿐이었다. 나는 그러한 눈썹을 어디서고 본 적이 없다. 오직 단테시대의 피렌체 조상에서 본 적이 있다. 그래서 어릴 때의 베아트리체도 그처럼 높이 곡선을 그린 눈썹이었으리라 상상하고 싶다. 이 눈썹은 그녀의 눈길에, 그녀의 몸 전체에, 근심과 신뢰가 동시에 섞인 질문의 표정을, 그렇다, 열정적인 질문의 표정을 주었다. 그녀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질문이요, 기다림이었다. 이 질문이 어떻게 나를 사로잡았으며 나의 생애를 결정짓게 되었는가를 이제부터 이야기하겠다. 그러나 보는 이에 따라서는 줄리에뜨가 더 예뻐 보였을 것이다. 기쁨과 건강이 그녀에게서 그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미는 그 언니의 우아한 미와 비교할 때 어쩐지 외형적이고 누구에게나 단번에 드러나는 것 같았다. 사촌 동생 로베르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아이였다. 단지 내 나이 또래의 아이였을 뿐이다. 나는 줄리에뜨가 로베르하고 같이 놀았고 알리싸와는 같이 이야기를 했다. 알리싸는 우리 장난에 끼는 일이 없었다. 아무리 먼 과거로 되돌아가도 내 눈에 그려지는 알리싸는 언제나 진지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명상에 잠겨 있는 모습이다.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 이제 나는 곧 그것을 이야기하겠다. 그러나 그보다도 먼저 다시는 아주머니 이야기가 나오지 않도록 아주머니 이야기를 끝맺을 생각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년 후네 어머니와 나는 부활제 방학을 보내려고 르아브르에 갔다. 시내에서 퍽 비좁게 사는 삼촌댁을 피해 한결 집이 넓은 이모 댁에서 지냈다. 내가 좀처럼 만날 기회가 없었던 쁠랑띠에 이모는 여러 해 전부터 과부였다. 나보다 훨씬 나이도 많고 성격도 나와는 판이한 이모의 아이들을 나는 겨우 얼굴이나 알 정도였다. 르아브르에서 사람들이 쁠랑띠에 댁이라고 부르는,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 중턱에 있었다. 뷔꼴랭 댁은 상가 근처에 있었는데 가파른 언덕길로 이 두 집을 순식간에 오고 갈 수가 있었다. 나는 하구에도 몇 차례씩 이 길을 오르내렸다. 그날 나는 삼촌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식후 얼마 안 있어 삼촌은 곧 외출을 했다. 나는 삼촌을 따라 사무실까지 갔다가 어머니를 찾아 쁠랑띠에 이모댁으로 갔다. 어머니는 이모와 함께 외출을 했는데 저녁 식사 때나 돌아오실 모양이었다. 곧 나는 다시 시내로 내려왔다. 이 시내에서 마음껏 산책할 기회를 그때까진 별로 갖지 못했었다. 나는 부두로 내려갔다. 바다의 안개로 뒤덮인 이 부두는 음울해 보였다. 나는 한두 시간 이 부둣가를 헤매다녔다. 문득 방금 만나고 온 알리싸를 찾아가 놀래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달음질쳐서 시내를 지나 뷔꼴랭 댁의 초인종을 눌렀다. 이미 나는 층계 위를 뛰어오르고 있었다. 대문을 연 하녀가 나를 가로막았다. "올라가지 마세요, 제로움 도련님. 올라가지 마세요, 마님께서 발작이 나셨어요." 그러나 나는 그대로 지나쳐 올라갔다. 외숙모를 보러 온 것은 아니니까...알리싸의 방은 4층에 있었고 2층에는 응접실과 식당이 있고 3층에는 외숙모 방이 있는데 그곳에서 말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방문이 열려 있는데 그 앞을 지나가야만 했다. 한 줄기 불빛이 흘러나와 층계참을 꺾어 비치고 있었다. 들키지 않을까 조마조마하여 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몸을 숨긴 채 다음과 같은 광경을 보아 아연했다. 커튼이 내려지긴 했지만 두 개의 가지 달린 촛대에 꽂힌 촛불이 화려한 불빛을 뿌리고 있는데 방 한가운데 외숙모가 긴 의자에 누워 있고 그 발 밑에는 로베르와 줄리에뜨가 있었다. 외숙모 뒤에는 중위 복장을 한 낯선 청년이 서 있었다. 이 두 어린애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 보면 망측한 일이지만 당시 나의 순진한 생각으론 오히려 그것이 안심이 되었었다.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뷔꼴랭, 내게 양 한 마리가 있다면 정말 뷔꼴랭이라 이름 붙여줄걸." 하고 되풀이하는 이 낯선 사나이를 두 아이는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외숙모는 깔깔대고 웃었다. 외숙모는 그 젊은 사나이에게 담배를 한 대 내밀자 그는 불을 붙였고 외숙모는 몇 모금 빠는 것이었다. 담배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자 사나이는 그 담배를 주우려고 달려나와 쇼올에 발이 걸린 철하면서 외숙모 앞에서 무릎을 끓는 것이었다...이 우스꽝스러운 연극 덕분에 나는 들키지 않고 빠져나갔다. 나는 알리싸의 방문 앞에 섰다. 잠시 나는 그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웃음소리와 떠드는 소리가 아래층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아마도 그 소리가 내 노크하는 소리를 덮어 버렸는지 대답이 없었다. 문을 밀어 보니 조용히 열렸다. 방안은 어둠이 깃들어 나는 곧 알리싸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저무는 저녁 햇살이 스며드는 창문을 등진 채 침대머리에 무릎을 끓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접근해 가자 여전히 앉은 채 고개를 돌리고는 이렇게 속삭였다. "아, 제로옴 또 왔어?" 나는 키스를 하려고 몸을 굽혔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에 젖어 있었다.... 이 순간이 나의 생애를 결정지었다. 지금도 그 순간을 회상해 보면 마음이 괴롭다. 물론 나로서는 알리싸의 슬픔의 동기를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슬픔이 팔딱거리는 이 조그마한 영혼, 흐느낌으로 온통 흔들리는 이 연약한 육신에 대해서는 너무도 심한 것이라는 사살을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여전히 무릎을 끓고 있는 그녀 곁에 서 있었다. 나는 내 마음속에 솟아오르는 이 새로운 격정을 무엇이라 표현할지 몰랐다. 단지 그녀의 머리를 내 가슴에 꼭 껴안고 내 영혼이 흘러넘치는 입술을 그녀의 이마에 대고 있을 따름이었다. 사랑과 연민, 그리고 감격, 희생감, 정성이 뒤얽힌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도취되어 나는 애 힘껏 하느님을 불렀고 이제는 내 삶의 목표가 공포의 악과 삶으로부터 이 소녀를 보호하는 것 뿐이라 다짐하면서 스스로 내 몸을 바치기로 했다. 기도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감싸 주었다, 어렴풋이 그녀의 말이 들려 왔다. "제로옴! 들키지 않았어? 자 빨리 가, 들키면 안 돼." 그리고는 좀 더 음성을 낮추어, "제로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불쌍한 아버진 아무것도 모르셔...." 그래서 나는 어머니에게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러나 쁠랑띠에 이모와 어머니와의 끊임없는 속삭임, 두 분의 뭔가 숨기는 듯한 안절부절 못하는 근심스러운 모습, 또 그들이 밀담하는 곳에 내가 접근할 때마다, "애야, 저리 가서 놀아라." 하면서 나를 멀리하던 일, 이런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두 부인이 뷔꼴랭 댁의 비밀을 전혀 모르지는 않는다는 것을 짐작케 했다. 우리가 빠리에 돌아오자마자 한 장의 전보가 어머니를 다시 르아브르로 불러 갔다. 외숙모가 도망쳐 버렸다는 것이다. "어떤 남자하고요?" 나는 어머니가 나를 맡기고 간 미스 아슈뷔르똥에게 물었다. "얘야, 그것은 어머니께 여쭈어 봐라. 난 뭐라 대답할 게 없다." 라고 이번 사건을 완전히 어리둥절해 진 이 노부인은 대답했다. 이틀 후에 그녀와 나는 어머니를 좇아 떠났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그 다음날 교회에서 사촌누이들을 만나기로 되었는데 그 생각만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어린 내 마음으로는 우리가 이런 장소에서 만난다는 것으로써 우리들의 재회가 신성화된다는 것이 대단히 대견스러웠던 것이다. 어쨌든 아주머니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으며 어머니에게 묻지 않는 편이 좋으리라 생각했다. 그날 아침 작은 교회당에는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았다. 보띠에 목사는 아마도 의식적으로,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묵도의 주제로 삼은 것 같았다. 알리싸는 나보다 조금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녀와 옆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에 주의 깊게 듣고 있던 그 말씀도 그녀를 통해 듣는 듯 싶었다. 삼촌은 어머니 곁에 앉아 울고 있었다. 목사는 먼저 전체 구절을 내리 읽었다.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작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드무니라.' 그러고 나서 주제를 명백하게 분류하면서 목사는 먼저 넓은길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멍하니 정신이 나간 채 꿈속에서처럼 아주머니 방을 다시 그려 보았다. 누워서 웃고 있는 아주머니가 보였고 번쩍이는 복장을 입은 장교가 웃고 있는 것도 보였다. 웃음이라든가 기쁨 자체가 불쾌하고 모욕적인 것으로 생각되고 추악한 죄악의 과장인 것처럼 보였다.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보띠에 목사는 계속했다. 그러고도 자세히 설명해 나갔다. 나는 빈들빈들 히히덕거리며 앞으로 나가면서 행렬을 이루는 화려한 차림새의 군중을 보았다. 그들과 발을 맞추어 한 걸음 나가자면 알리싸에게서 떨어져야 하기 때문에 나는 그런 행렬에 낄 수도 없고 또 끼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러자 보띠에 목사는 인용문의 첫구절을 되풀이했다. 나는 힘써 들어가야 할 그 좁은 문을 보았다. 잠겨있던 꿈속에서 나는 그 문을 흡사 압연기처럼 상상하고 나 자신이 그 사이로 애써 들어가며 말할 수 없는, 그러나 하느님의 축복의 예감이 섞여 있는 그러한 고통을 느낀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이 문은 바로 알리싸의 방문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리로 들어가려고 스스로를 억제하며 내 속에 이기심으로 남아 있는 모든 것을 비워버리는 것이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작고 협착하여' 보띠에 목사는 계속했다. 그리고 모든 고난, 모든 슬픔 너머네 또 다른 하나의 말고 신비롭고 거룩한 기쁨, 내 영혼이 이미 갈망하기 시작한 다른 하나의 즐거움을 나는 상상하고 예감했다. 그 기쁨은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러운 바이올린과 같았고 또한 알리싸의 마음이 녹아 버리는 맹렬한 불꽃처럼 상상되었다. 우리는 다같이 묵시록에 적혀 있는 것 같은, 휜 옷을 입고 손에 손을 잡고 꼭같은 목표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이러한 어린애의 갖가지 꿈이 미소를 자아낸들 어떠랴. 나는 그것을 꾸밈없이 이야기할 뿐이다. 혹시 분명치 않은 점도 있겠지만 그건 단지 아주 정확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언어와 불완전한 비유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를 찾는 이가 드무니'라고 보띠에 목사는 끝을 맺었다. '찾는 이가 드무니라'... 나는 그 중의 한 사람이 되리라. 설교 끝난 무렵 내 마음은 너무나도 긴장되어 예배가 끝나자 나는 사촌 누이를 찾아보려 하지도 않은 채 뛰어나왔다.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벌써부터 나의 결심을(나는 이미 결심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시련에 던져 보고 싶었으며, 이렇게 곧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옴으로써 더욱 그녀에게 적합한 인간이 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ff 2 이 준엄한 교훈은 의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뿐 아닐 천성적으로 그 터전이 마련되어 있는 하나의 영혼을 발견하였으며, 또한 부모님이 보여 주신 모범은 내 마음에서 싹트기 시작한 충동을 억눌러 주던 청교도적 규율과 결합되어 이 영혼을 '덕'이라 하는 것에로 이끌어가 버렸다. 자신을 억제하는 것은 남들이 방종하는 것만큼 내게는 자연스러웠고 네가 굴종했던 이 엄한 규율도 혐오감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내 마음을 기쁘게 했다. 나는 행복 그 자체보다도 행복에 이르기에까지의 무한한 노력을 미래에서 찾았으며 이미 행복과 덕을 혼돈하고 있었다. 물론 열 네 살된 소년으로서 막연히 기다리는 상태였다. 그러나 알리싸에 대한 나의 사랑이 단연 그러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게 하였다. 그것은 급작스러운 마음의 계시였는데 그로 인해 나는 나 자신을 의식하게 되었다. 즉 나는 내성적이며 활발치 못하고 늘 기다리고 있는 상태로서 남의 일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과감성도 없이 자신과 싸워 이겨낸다는 외에 다른 승리를 꿈꾸어 보지 못하는 그러한 인간으로 보였다 나는 공부하기를 좋아했으며 장난도 깊이 생각을 하거나 혹은 힘드는 것이 아니면 열중할 수 없었다. 내 나이 또래 아이들과는 별로 사귀지 않았고 같이 어울린다해도 그것은 단지 우정이나 호의로서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이듬해 빠리에 와 내 동급생이 된 아벨 보띠에와는 잘 어울렸다. 그는 상냥한, 만사 태평의 소년으로서 나는 그에 대해 존경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애정을 느꼈다. 적어도 그와 어울리고 있으면 내 마음이 늘 날아가고 있던 르아브르와 퐁궤즈마르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가 내 사촌 누이의 동생이 아니었던들--게다가 그는 누이들과 별로 닮은 점도 없었다--나는 그를 만날 생각이 별로 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나는 사랑에 열중해 있었기 때문에 로베르나 아벨에 대한 우정도 어떤 의미를 가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알리싸는 복음서에 나오는 값진 진주와 같았고 나는 그 진주를 얻기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버린 사람이었다. 비록 내가 아직 어린애이긴 했지만 지금 그것을 사랑이라 이야기하고 사촌 누이에 대해 느낀 감정을 그렇게 부르는 것은 잘못된 일일까? 그 후 내가 경험한 중에 이보다 더 사랑이라는 이름에 적합하다고 여겨진 것은 없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육체적인 가장 뚜렷한 고민으로 괴로워할 나이가 됐을 때도 내 기질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즉 어렸을 때 내가 그녀에게 적합한 인간이 되려고 했던 그녀를 보다 직접적인 방법으로 내것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공부, 노력, 경건한 행위 등 모든 것을 나는 신비롭게 알리싸에게 바쳤으며 그녀만을 위해 한 일을 그녀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보다 깨끗한 덕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나는 독한 술 같은 겸양에 도취해 있었다. 내 자신의 즐거움이란 별로 염두에 두지도 않고...아! 나는 어떤 노력이 필요치 않은 일에는 만족 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나만이 이러한 덕행에 대한 경쟁심에 사로잡혀 있었던가? 알리싸는 그러한 내 마음을 눈치 채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안지 그녀를 위해서만 노력을 기울였던 나 때문에, 나를 위해, 특별히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꾸밈없는 그녀의 영혼 속에서는 모든 것이 아주 단순한 아름다움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덕은 너무나도 자유롭고 우아했기 때문에 방임 상태에 있는 것 같았다. 그 앳된 미소로 인해 그녀의 눈길에 깃든 엄숙한 빛도 오히려 매력적이었다. 그녀가 너무나도 부드럽고 다정한,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듯한 시선을 위로 치켜올리는 모습을 나는 지금도 다시 그려본다. 그러고 보면 삼촌이 마음이 괴로울 때면 이 맏딸에게서 조력과 의견을 구하시던 까닭도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 이듬해 여름 나는 자주 삼촌이 그녀와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슬픔으로 인해 삼촌은 훨씬 더 늙으셨다. 식사 때도 삼촌은 통 말이 없다가 때때로 갑자기 쾌활한 표정을 애써 지어내곤 하셨는데, 그것은 침묵보다도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 알리싸가 찾으러 갈 때까지 삼촌은 서재에서 담배만 피웠고 알리싸가 빌다시피 해야 겨우 방에서 나왔다. 알리싸는 삼촌을 마치 어린애처럼 정원으로 인도했다. 둘이는 꽃이 만발한 오솔길을 내려가 채소밭 층계 근처, 몇 개의 의자가 놓인 둥그런 갈림길에 가서 앉는 것이었다. 어느 날 석양 무렵, 나는 크고도 붉은 한 그루의 너도밤나무 그늘 밑 잔디밭에 누워 늦도록 책을 읽고 있었다. 꽃이 만발한 그 오솔길과 나 시이에는 월계수 울타리가 있을 뿐이어서 보이지는 않아도 서리는 그대로 들리는 곳인데, 알리싸와 외삼촌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아마도 막 로베르 이야기를 하고 난 듯 싶었다. 알리싸가 내 이름을 말하는 소리가 들려, 내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자 삼촌은 큰 소리로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음! 그 애, 그 애는 늘 공부하길 좋아할 거야." 나도 모르게 엿듣게 된 나는 자리를 떠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내가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무슨 기척이라도 내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기침을 할 것인가? '나 여기 있어요! 이야기 소리가 들려요!'라고 소리를 칠 것인가? 내가 잠자코 있었던 것은 더 들어 보고 싶은 호기심에서가 아니라 어색하고 수줍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둘이는 그냥 내 앞을 지나갔을 뿐이고 나 또한 그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지도 못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천천히 걷고 있었다. 아마도 알리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팔에 바구니를 걸고, 시든 꽃을 따버리기도 하고 자주 끼고 바다 안개 때문에 울타리 밑으로 떨어진 아직 푸릇푸릇한 열매들을 줍기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와 맑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버지, 펠리씨 고모부는 훌륭한 분이었어요?" 삼촌의 음성은 낮고 희미해서 나는 삼촌의 대답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알리싸는 재차 물었다. "아주 훌륭하셨어요?" 여전히 희미한 대답이었다. 그러자 알리싸가 다시 물었다. "제로옴은 총명하죠?" 내가 어떻게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훌륭한 사람이 되리라 생각하세요?" 여기서 삼촌의 음성이 높아졌다. "여기서 넌 어떤 뜻으로 '훌륭한'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지 먼저 알고 싶다. 겉보기에는 그렇지도 않고, 적어도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으면서도 사실은 아주 훌륭한 사람,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아주 훌륭한 사람이 있는 법이다." "나도 그런 뜻으로 말한 거에요." 라고 알리사가 말했다. "게다가 또... 어디 벌써부터야 알 수 있겠니? 그 애는 아직 너무 어리니까... 그래 분명히 유망한 애야. 하지만 그것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야..." "또 무엇이 필요하죠?" "글쎄, 무엇이라 할까? 신뢰라든가, 조력이라든가, 사랑이라든가...." "조력이라뇨?" 하고 알리싸가 물었다. "내가 받아 보지 못한 애정이라든가 존경 같은 것 말이다." 삼촌은 쓸쓸하게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는 두 사람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저녁 기도 시간에 나는 본의 아닌 실수를 뉘우치고 사촌 누이에게 고백하리라 작정했다. 이때는 좀 더 캐보려는 호기심도 섞여 있었을 것이다. 그 이튿날 내가 말을 꺼내자마자 그녀는, "그렇지만 제로옴, 그렇게 엿듣는 건 아주 나쁜 짓이야. 기척을 내든가 자리를 떠나든가 했어야 할 게 아냐?" 하고 말했다. "정말 난 엿들은 게 아냐. 그저 들려왔을 뿐이야, 그리고 그쪽도 그냥 지나가 버렸잖아." "우리는 천천히 걷고 있었는걸." "그래, 그렇지만 내게는 들릴락말락할 정도였어. 그리고는 곧 들리지 않게 되었어... 그런데 성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물었을 때 삼촌이 뭐라 대답하셨지?" "제로옴."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다 듣고 나서 뭘 그래. 내게 한 번 되풀이시키고 싶은 모양이지?" "아냐, 정말 첫머리밖엔 듣지 못했어. 신뢰와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때 말이야." "그리고 나서 또 여러 가지 많은 것이 필요하다고 하셨어." "그래 뭐라고 대답했어?" 그녀는 갑자기 정색을 하고는, "인생에 있어서의 도움을 말씀하시길래 네게는 어머니가 계시다고 대답했어." 하고 말했다. "아아 알리싸, 어머니가 언제까지나 나와 함께 계실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아... 그리고 그것은 다른 일 아냐...." 그녀는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아버지도 그렇게 대답하셨어." 나는 떨면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내가 장차 어떤 사림이 되든 간에 그것은 모두가 너를 위해서야." "그렇지만 제로옴, 나도 또한 떠날지 모르잖아?" 나의 영혼은 내 말 속에 들어가 있었다. "나는 절대 너를 떠나지 않을 테야." 그녀는 어깨를 약간 으슥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혼자서 걸어다닐 만큼 강하지 못해? 하느님께는 혼자 걸어서 도달해야 돼." "그렇지만 내게 길을 가르쳐 줄 사람은 너야." "왜 그리스도 외의 다른 인도자를 찾을까... 우리가 서로 가장 가까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우리 둘이 저마다 서로를 잊고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때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래." 나는 말을 가로챘다. "우리를 결합시켜 주십사고 나는 밤낮으로 기도하고 있어." "넌 하느님 품안에서 결합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잘 알고 있어. 그것은 둘이서 꼭같이 찬양하는 동일한 것 속에서 서로를 열심히 찾는 거야. 네가 찬양하는 것을 나도 역시 찬양하는 것은 너를 다시 찾아보려는 생각에서인 것 같아." "너의 찬양은 순수하지가 않구나." "너무 나를 궁지에 몰아넣지 마. 천국이라도 거기서 내가 널 찾지 못할 것이라면 난 멸시해 버릴 거야." 그녀는 손가락을 하나 입술에 갖다대더니 약간 엄숙한 말투로 말하는 것이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우리들의 대화를 여기에 옮기면서 나는 아이들이 얼마나 애써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가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어린애답지 않아 어색하게 생각도리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변명이라도 할 것인가? 나는 우리의 대화를 좀 더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꾸며 대고 싶지 않다. 우리는 라틴어판 복음서를 구해서 긴 구절들을 외곤 했다. 동생 로베르를 도와 준다는 구실로 알리싸는 나와 함께 라틴어를 배웠다. 그러나 지금 사실 그녀가 따라올 것 같지 않은 공부에는 나도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이것이 때때로 내게 방해가 외었다 할지라도 남들이 생각하듯이 내 정신적인 비약을 저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녀는 어디서나 자유롭게 나보다 앞서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의 마음은 그녀를 따라 방향을 정하는 것이었으며 그 당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 우리가 '사색이라 부르던 것도 흔히는 좀 더 그럴 듯한 마음의 일치에 대한 하나의 구실, 감정의 가장 ,사랑을 덮는 겉치레에 지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 깊이를 알 수 없었던 나의 그러한 감정에 대해 처음에는 염려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차츰 기력이 약해짐에 따라 우리 둘을 어머니로서 포옹해 주고 싶어하셨다. 어머니는 오래 전부터 숙환이었던 심장병의 고통이 차츰 더해 가셨다. 발작이 매우 심하던 어느 날 어머니는 나를 곁으로 부르셨다. "얘야, 너도 보다시피 나도 이제는 퍽 늙었다." 하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언제 갑자기 너를 두고 가버리게 될지...." 숨이 가빠져서 어머니는 말을 끊으셨다. 나는 더 참을 수가 없어 내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는 듯한 그 말을 그만 하고 말았다. "어머니, 아실 테지만 난 알리싸하고 결혼하고 싶었다." 그러자 이러한 내 말이 필경 어머니의 가장 깊은 속마음에 있던 생각과 바로 이어졌음인지 어머니는 곧 이렇게 받으셨다. "그래, 내가 하려던 이야기가 바로 그거다, 제로옴." "어머니!" 나는 흐느끼면서 말했다. "알리싸는 날 사랑하죠?" "그럼, 얘야." 어머니는 몇 번이나 정답게 '그럼 얘야' 하고 반복하셨다. 어머니는 말씀하시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이어, "만사를 하느님이 하시는 대로 맡겨 두어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는 곁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애 머리 위에 손을 얹으시고 다시, "하느님이 너희를 보호하여 주시옵기를, 하느님께서 너희를 보호하여 주시옵기를." 하시고는 잠속에 빠지셨는데 나는 끼우려고 생각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았다. 그 다음 날은 어머니의 기분도 좀 나으셨다. 나는 또 다시 학교로 되돌아갔고 절반밖에 못한 고백담 같은 이야기는 또 다시 침묵에 싸였다. 뿐만 아니라 그 이상 내가 무엇을 알 수 있었을 것인가? 알리싸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설혹 그때까지도 내가 그 점에 대해 다소 의심쩍었다 하더라도 뒤이어 일어난 슬픈 사건을 당하여서는 그러한 의심은 영원히 내 마음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어느 날 저녁 어머니는 미스 아슈뷔르똥과 내가 지켜보는 앞에서 아주 조용히 운명하셨다. 어머니의 생명을 앗아간 마지막 발작은 처음에는 그 이전의 발작에 비해 그다지 심한 것 같지 않았다. 임종에 가까워서야 위험한 증세가 나타났기 때문에 친척들도 달려올 틈이 없었다. 첫날밤은 나는 어머니의 옛 친구 곁에서 이 그리운 이의 주검을 지키면서 새웠다. 나는 어머니를 생전에 깊이 사랑했다. 그러나 눈물이 흘러내리는데도 마음속은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데 놀랐다. 내가 눈물을 흘린 것은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적은 친구가 이렇게 자기보다 앞서 하느님 곁으로 가는 것을 보고 있는 미스 아슈뷔르똥이 측은히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심으로써 사촌 누이가 보다 속히 내게 가까이 오리라는 숨은 생각이 나의 슬픔을 억누르고 있었다. 다음날 삼촌이 오셨다. 삼촌은 당신 딸의 편지를 내게 전하셨는데, 그녀는 그 다음날 쁠랑띠에 이모와 같이 왔다. ...제로옴, 나의 벗, 나의 동생, 기다리고 계시던 큰 만족을 드릴 수 있었을 몇 마디 말을 돌아가시기 전에 드리지 못한 것이 얼마나 마음 아픈지 몰라. 이제는 어머님께서 용서해 주시고 앞으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길 빌 뿐이야. 그럼 안녕히, 내 가엾은 벗! 어느 때보다도 더욱 다정한 너의 알리싸. 이 편지는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여쭈어 드리지 못해 마음 아프다는 그 몇 마디 말이란 바로 우리 두 사람의 앞날을 기약하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러나 나는 아직 너무도 어렸기 때문에 대번 구혼을 하지 못했다. 그 외에 그녀와 무슨 약속이 필요했던가? 우리는 이미 약혼한 사이나 다름없지 않았던가?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삼촌도 거기에 아무런 이의가 없었다. 오히려 삼촌은 벌써부터 나를 자식처럼 대해주고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에 시작된 부활절 방학을 나는 르아브르에서 지냈다. 묵기는 쁠랑띠에 이모 댁에서 묵었지만 식사는 거의 뷔꼴랭 삼촌 댁에서 했다. 펠리씨 쁠랑띠에 이모는 더할나위 없이 훌륭한 부인이었지만 내 사촌 누이들과 나는 그리 친숙하게 지내지 못했다. 늘 숨이 턱에 닿을 정도로 분주했다. 태도나 음성이 다같이 거칠었다. 아무 때나 우리들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 귀찮을 정도로 애무를 하는 것이었다. 뷔꼴랭 삼촌도 이모를 퍽 좋아했지만 이모와 이야기하는 목소리만으로도 얼마나 어머니를 더 좋아했던가 넉넉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얘야." 어느날 저녁 이모가 말했다. "네가 올 여름엔 뭘 할 작정인지 모르지만 내 할 일을 결정하기 전에 네 계획부터 좀 알았으면 좋겠다. 혹 네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아직 별로 생각해 보지 못했어요." 하고 나는 대답했다. "여행이나 해볼까 생각합니다." 이모가 말을 이었다. "알겠지만 퐁궤즈마르와 마찬가지로 우리 집에서도 애가 오는 것은 언제든지 환영이다. 하긴 거기에 가면 삼촌이랑 줄리에뜨가 반가와하겠지만...." "알리싸 말씀이죠?" "참 그렇구나! 미안하다. 네가 좋아하는 건 줄리에뜨라고 생각했구나! 네 삼촌이 이야기해 주기 전까지는... 그게 아직 한 달도 채 못됐다... 알다시피 난 너희를 퍽 사랑하지만 잘 알지는 못하는구나. 너희들을 만나볼 기회가 별로 없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난 또 살피는 성격이 못돼서 나와 관계 없는 일은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너는 노상 줄리에뜨하고만 놀길래... 난 생각하길... 그 애는 참 예쁘고 활달하니까." "네, 저는 여전히 그 애하고 잘 놀아요. 하지만 제가 사랑하는 건 알리싸입니다." "옳아! 옳아, 그야 다 너 좋을 대로가 아니냐. 난 말하자면 그 내를 전혀 모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그 애야 어디 그렇게 말이 있니? 어쨌든 네가 그 애를 택했을 때야 무슨 그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하지만 이모님, 저는 알리싸를 골라서 사랑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또 이유 같은 것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화낼 건 없다. 제로옴. 악의로 한 말은 아니니까... 네 말을 듣다 보니 무슨 말을 하려했는지 깜빡 잊었구나... 옳지 옳지! 그러니 결국 만사는 혼인을 해야 끝장이 나는 건데, 네 복장 때문에 벌써 청혼을 할 수야 없지 않니? 예법상 말이다. 게다가 넌 또 아직 어리고... 그래 내 생각으로는 어머니와 함께도 아니고 하니 네가 퐁궤즈마르에 가는 것도 좀 쑥스러워 보일지 모르고...." "글쎄, 제가 여행 이야길 꺼낸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래, 그러니 말이다. 내가 있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 같아서 이번 여름 한 달 동안만은 여유를 두었단다." "제가 말만 하면 미스 아슈뷔르똥이 와줄 텐데요." "그녀가 와 주리라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하나 그것만으론 충분치가 못해! 나도 함께 가지. 아니, 내가 가엾은 어머니 구실을 대신 하겠다는 건 아니다." 이모는 갑자기 흐느끼면서 말했다. "단지 집안 일을 돌볼 작정이다... 그러면 너나 삼촌이나 알리싸가 어색해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펠리씨 이모는 자신이 우리와 함께 있는 일의 효과를 착각하고 있었다. 사실 우리는 단지 이모 때문에 거북살스러웠다. 예정대로 이모는 7월부터 퐁궤즈마르에 와 있었고 미스 아슈뷔르똥과 나도 곧 따라왔다. 알리싸의 집안 일을 거들어 준다는 구실로 그처럼 조용하던 이 집안을 늘 시끄럽게 했다.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려고 또 이모 말을 빌면 '만사를 수월하게'하기 위해 서두르는 폼이 너무도 심해서 알리싸와 나는 이모 앞에서 늘 어색한 채 반벙어리가 되는 것이었다. 이모는 우리가 퍽 쌀쌀하다고 생각했을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인가? 반대로 줄리에뜨의 성격은 호들갑스런 이모의 성격과 잘 어울렸다. 그리고 이모가 작은 조카딸을 유별나게 귀여워하는 것을 보는 데서 오는 어떤 반감이 이모에 대한 애정을 줄게 했던 것 같다. 어느 날 아침 우편물을 받고 나서 이모는 나를 불렀다. "제로옴, 정말 딱하게 됐다. 내 딸아이가 앓는다고 나를 부르니 아무래도 널 두고 떠나야할까 보다...." 부질없는 걱정에 사로 잡혀 나는 삼촌을 보러 갔다. 이모가 떠난 후에도 그대로 퐁궤즈마르에 머무를 것인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두를 꺼내자마자 삼촌은, "자연스러운 일들을 누이는 왜 또 복잡하게 생각할까? 그래 넌 무엇 때문에 우리 곁을 떠나겠다는 거냐, 제로옴?" 하고 소리쳤다. "너는 이제 내 자식이 아니냐?" 이모는 단지 두 주일을 퐁궤즈마르에 머물렀을 뿐이다. 이모가 떠나자 집은 다시 잠잠해졌다. 내 복장은 우리의 사랑을 흐리게 하기는커녕 더욱 깊게 했다. 단조로운 나날이 시작되었다. 거기에서는 마치 메아리치는 곳처럼 우리 마음의 작은 움직임도 들려 오는 것이었다. 이모가 따난 며칠 후인 어느 날 저녁 우리는 식탁에 앉아 이모 이야기를 했다. 지금도 그것이 생각난다. "왜 그렇게 법석이람!" 하고 우린 말했다. "인생의 파도는 그다지도 그의 영혼에 휴식을 줄 수 없는 것일까?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이여, 그의 그림자는 여기서 무엇이 되었는가?" ...라고 한 건 괴에테가 슈타인 부인을 두고 '이 영혼 속에 세계가 비치는 것은 보기에도 아름다우리라'고 쓴 말이 생각았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대번 무슨 등급 같은 것을 정하고 가장 으뜸가는 등급은 명상의 능력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때까지 잠자코 계시던 삼촌이 쓸쓸히 웃으면서 이야기를 이으셨다. "얘들아, 비록 부서져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은 알아 보신단다. 사람의 생애 중에 어느 한 시기만을 가지고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피하자. 너희들이 싫어하는 모든 점은 더 여러 가지 사건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고, 그런 사건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너희들처럼 가혹하게 그를 비난할 수가 없다. 젊은 시절에 남들이 좋아하는 성격도 늙어 갈수록 타락되는 거란다. 지금 너희들이 분주하다고 부르는 펠리씨 이모의 성격도 처음에는 생기 발랄하여 귀엽고 생각나는 대로 해버린다든가 소탈하다든가 애교가 있다든가 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우리도 지금의 너희들과 비슷하다. 나는 너와 퍽 비슷했었다. 제로옴, 아마 지금 생각하기보다도 훨씬 더 비슷했었을 거야. 펠리씨는 또 지금의 줄리에뜨와 아주 비슷했다... 그래, 몸맵시까지도...." 그리고 문득 삼촌은 그 딸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내 목소리를 들으면 펠리씨 목소리를 듣는 것 같다. 미소지을 때도 너와 같았다. 그리고 이건 얼마 안 가서 없어졌지만 가끔 아무것도 안하고 의자에 앉아서 팔꿈치를 짚고 깍지 낀 두 손을 이마에다 갖다대곤 가만히 있곤 했었다." 미스 아슈뷔르똥은 나를 돌아보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네 어머니 모습을 지닌 것은 알리싸다." 그해 여름은 찬란했다. 만물에 푸른 하늘이 스며든 것 같았다. 우리의 열정은 불행도 죽음도 극복하고 있었다. 어둠은 우리 앞에서 물러낫다. 아침마다 나는 기쁨으로 잠을 깼다. 동틀 무렵이면 일어나서 해를 맞으러 달려가곤 했다... 지금도 그때를 회상해 보면 이슬로 함빡 젖은 시절이었다. 늦도록 자지 않는 습관이 있었던 알리싸에 비해 아침 일찍 일어나는 줄리에뜨는 나와 함께 정원으로 내려가곤 했다. 자기 언니와 나 사이에서 그녀는 심부름꾼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는 끊임없이 그녀에게 우리의 사랑을 이야기했고 그녀도 내 이야기에 싫증을 내는 것 같지 않았다. 알리싸 앞에서는 너무나 격정적인 사랑으로 인한 조심과 압박감 때문에 감히 하지 못하던 이야기도 줄리에뜨에게는 털어놓았다. 알리싸도 나의 이런 장난을 눈치챈 것 같았다. 우리가 자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는지 혹은 모르는 척한 것인지, 자기 동생 앞에서 내가 아주 쾌활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도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았다. 아! 사랑의, 벅찬 사랑의 가장된 미묘함이여! 어떤 비밀의 길을 거쳐 그대는 우리를 웃음에서 눈물로, 가장 천진한 기쁨에서 덕행의 요구로 이끌어 가는가! 그 여름은 너무도 맑게, 너무도 매끄럽게 가버렸기 때문에 나는 그 가버린 날들에 대해 이제 아무런 기억도 남은 것이 없다. 그 무렵에 있었던 일이란 단지 이야기와 독서 뿐.... "슬픈 꿈을 꾸었어." 방학이 끝날 무렵의 어느 날 아침 알리싸가 내게 말했다. "난 살아 있었는데 넌 죽어있었어. 아니, 네가 죽는 걸 본 건 아니고 단지 네가 죽어 버렸다는 거야. 정말 무서웠어. 그건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일이어서 네가 잠시 어디 가고 없을 따름이라고 마음 먹었어. 우리가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꼭 다시 만날 길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 어떻게 하면 되나 하고 안간힘을 쓰다가 잠이 깼어." "아침에도 꿈속에 있는 것 같았어. 꼭 그 꿈을 계속하는 것 같았어. 여전히 너와 떨어져 있는 것 같았고, 앞으로도 오래오래..." 하고는 낮은 소리로 덧붙였다. "일생 동안 떨어져 있게 될 것 같았어. 그리고 일생 동안 몹시 애를 써야 될 것 같았어...." "어째서?" "저마다 서로를 만나기 위해 몹시 애써야만 할 것 같았어."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정색해서 받아들이지 않았거나 혹은 정색해서 받아들이기가 두려웠다.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그녀에게 반박이나 하려는 듯이 갑자기 용기를 내어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난 오늘 아침 어찌나 너와 결혼하려고 했던지, 죽음 밖에는 아무것도 우리를 떼어 놓지 못하리라는 꿈을 꾸었어." "너는 죽음이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 하고 그녀는 말을 받았다. "말하자면...." "나는 오히려 죽음이 접근시켜 줄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그래 생전에 떨어져 있던 것을 접근시켜 줄 거야." 이 이야기는 모두가 골수에까지 사무쳐 지금도 그 말의 억양까지 들리는 둣하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이 지닌 중대한 뜻을 훨씬 후에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여름은 사라져 가고 있었다. 벌써 들판은 대부분 텅 비어 있었고 시야는 더욱 허전하게 넓어졌다. 내가 떠나기 전날, 아니 그 전전날 줄리에뜨와 같이 나는 아래 정원 숲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어제 저녁 알리싸에게 암송해 준 게 뭐지?" 줄리에뜨가 물었다. "언제 말야?" "그 폐광 벤치에서 말이야. 둘이만 남겨놓고 우리가 먼저 와버렸을 때...." "아아, 보드레르의 시 구절이었을 거야...." "어느 거지? 내게는 말해 주고 싶지 않아?" 이윽고 우리는 차가운 어둠 속에 잠기리.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는 곧 여느 때와 다른 떨리는 목소리로 받아 읊었다. 잘 있거라, 우리의 너무나도 짧았던 우리들 여름날의 화려한 빛이여! "아니, 너 그걸 알고 있었니?" 하고 나는 놀라 소리쳤다. "넌 시를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왜? 오빠가 내게 읊어 주지 않아서?" 그녀는 웃으면서 다소 부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때때로 오빠는 나를 바보 취급하는 것 같애." "아주 총명하면서도 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거든. 난 한 번도 네가 시 이야기 하는 걸 들어보지 못했고, 또 너도 나한테 시를 읊어 달라도 부탁해 본 적이 없지 않아?" "그야 알리싸가 도맡고 있으니까...." 그녀는 잠시 말이 없더니, "모레 떠나는 거야?" 하고 물었다. "그래야겠어." "이 겨울에는 무엇을 할 작정이야?" "사범 학교 1학년이야." "알리싸하고는 언제 결혼할 거야?" "병역을 마치기 전에는 안되겠지. 그리고 그 다음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더 잘 알기 전에는 안 할 생각이야." "그걸 아직도 모르고 있어?" "아직 알고 싶지도 않아. 마음 끄는 일이 너무나 많아 무엇이든 하나를 택해서 그것에만 몰두해야 하는 그러한 시기를 난 될 수 있는 대로 미룰 생각이야." "약혼을 미루는 것도 생활이 고정될까 두려워서야?" 나는 말없이 어깨만 으쓱했다. 그녀는 다그쳐 물었다. "그럼 왜 약혼을 미루고 있어? 왜 당장 약혼하지 않는 거야?" "구태여 약혼할 필요가 어디 있니? 세상 사람들이야 알든 말든 지금도, 또 앞으로도 우린 서로가 짝이 아냐. 나는 내 생명을 그녀에게 바치려 하고 있는데 네 애정을 무슨 약속 따위로 얽어매는 편이 좋아 보일 것 같아?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맹세 같은 건 사랑에 대한 모독이야... 알리싸를 믿지 못하게 되면 그녀와 약혼을 하지." "내가 믿지 못하는 건 알리싸가 아니라...."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그러나 내가 뜻하지 않게 알리싸와 그 아버지의 대화를 엿들었던 정원까지 왔다. 그러자 불현듯 좀 전에 정원 쪽으로 나가던 알리싸가 어쩌면 지금쯤 그 둥그런 갈림길에 앉아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직접 대해서는 하지 못하던 이야기를 그녀에게 직접 들려 주게 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내 마음을 유혹했다. 내가 꾸민 연극에 신이 나서 소리를 높여, "아아." 하고 내가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흔히 하는 좀 과장된 감격적인 어조로 나는 외쳤다. 그리고 나 자신의 이야기에 너무나 열중했기 때문에 줄리에뜨가 하는 말 속에 그녀가 입에 올리지 않고 있는 말뜻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아! 사랑하는 이의 영혼 위에 몸을 굽혀 우리가 그 영혼 속에 비치는 모습이 어떤 것인지. 마치 거울 속처럼 들여다볼 수만 있다면! 상대방의 마음속에서도 자기 자신 속에서처럼 아니, 자기 자신 속에서보다 한층 뚜렷이 지기의 모습을 헤아려 볼 수 있기만 하다면! 애정은 얼마나 부드러워질까! 사랑은 또 얼마나 순수해질까...." 줄리에뜨가 쓰라린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나는 그것이 내가 늘어놓은 이 값싼 서정이 자아낸 효과라 생각하고 흡족해했다. 그녀는 갑자기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제로옴, 제로옴, 꼭 알리싸를 행복하게 해 준다고 다짐해 줘. 만일 오빠로 인해 언니가 고민하는 일이 있게 된다면 난 정말로 오빠를 미워할 테야." "하지만 줄리에뜨." 나는 그녀를 끌어안아 이마를 쳐들면서 말했다. "그렇게 되면 나 자신을 증오하게 될 거야. 내가 알아 주기만 한다면... 내가 아직 앞길을 결정하지 않고 있는 것은 오직 알리싸와 함께 좀 더 훌륭한 생활을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알리싸 없이도 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도 난 하고 싶지 않아..." "오빠가 그런 이야기할 땐 알리싸는 뭐라고 하지?" "하지만 난 그런 얘길 알리싸에겐 전혀 하질 않아. 우리가 아직 약혼을 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야. 결혼이라든가 또 그 다음에는 뭘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선 우린 아직 한 번도 이야기해 본 적이 없어. 아, 줄리에뜨! 알리싸와 함께 있는 삶이 얼마나 행복하게 되는지 나는 감히... 알겠지? 그녀에겐 감히 그런 이야길 못해." "갑자기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서?" "아니, 그게 아니야. 단지 두려워... 알리싸를 겁내게 할까 봐, 알겠니?... 내가 예상하는 그 큰 행복에 알리싸가 겁내지 않을까 두려워서! 언젠가 알리싸에게 여행하고 싶지 않는다고 하면서 단지 그러한 나라들이 있고, 그러한 아름다운 나라들에 남들이 가볼 수 있다는 것을 알면 그것으로 만족이라는 거야." "오빠는 여행하고 싶어?" "어디든지 다 가보고 싶어! 삶 자체가 내게는 긴 여행으로만 보여. 그녀와 함께 여러 가지 책과 온갖 사람들과 여러 나라를 거쳐가는 긴 여행 같애...'닻을 올려라'하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 본 적 있니?" "그럼, 때때로 생각해." 하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나는 그녀 말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아 마치 상처받은 새처럼 그녀의 말이 땅에 떨어지게 내버려둔 채 말을 계속했다. "밤에 떠난다. 여명의 눈부신 햇살 속에 서 잠을 깬다. 믿지 못할 파도 위에 단둘임을 느낀다...." "그러고는 아주 어렸을 때 지도에서 보았던 어느 항구에 도착한다. 거기서는 온갖 것이 낯설고... 오빠가 팔에 기댄 알리싸와 함께 배에서 발판으로 내려오는 게 보이는 것 같애." "우리는 바로 우체국으로 가서." 하고 나는 웃으며 덧붙였다. "줄리에뜨가 우리에게 부쳐 준 편지를 찾고...." "이 줄리에뜨가 남아 있는 퐁궤즈마르에서 부친 편지를? 아마도 오빠와 언니에게 퐁궤즈마르는 작고 쓸쓸하고 까마득하게 보일 거야...." 이것이 분명 그녀의 말이었는지 나는 단언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내 마음은 너무나도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사랑의 표현 말고는 아무 이야기도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둥그런 갈림길 근처에 다다랐다. 막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별안간 그늘에서 알리싸가 나타났다. 그녀의 안색이 너무나도 창백하여 줄리에뜨는 질색하여 소리를 쳤다. "정말 몸이 이상해." 하고 알리싸는 중얼거렸다. "바람이 차서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러고는 곧 우리 곁을 떠나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해 돌아가 버렸다. "우리가 하던 이야기를 들었어." 알리싸가 좀 멀어지자마자 줄리에뜨가 소리쳤다. "하지만 알리싸가 기분 상할 이야기는 없었어. 반대로...." "가겠어." 언니 뒤를 쫓아가면서 그녀가 말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알리싸는 저녁 식사 때 나타났지만 곧 골치가 아프다고 하면서 돌아가 버렸다. 그녀는 우리의 대화에서 무엇을 들었던가? 그리하여 나는 걱정스럽게 우리가 하던 말을 회상해 보았다. 그리고 내가 줄리에뜨에게 몸에 팔을 감고 있었다는 것이 아마 잘못이었는지 무른다고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이미 어릴 때부터 우리가 늘 하던 버릇이 아니었던가. 뿐만 아니라 알리싸는 이미 몇 차례나 우리가 그렇게 걷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아! 나는 스스로의 잘못을 더듬어 찾고 있으면서도, 내게 잘 들리지 않아서 기억도 별로 나지 않는 줄리에뜨의 말을 알리싸가 나보다 더 잘 알아들었으리라는 것은 단 한 번도 생각질 못했으니 나는 얼마나 슬픈 장님이었던가. 할 수 없지! 불안으로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고 알리싸가 나를 의심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겁이 나서, 나는 또다른 위험이라곤 도무지 생각지도 못한 채 줄리에뜨에게 내가 한 말에 구애 없이, 어쩌면 그녀가 내게 한 말이 자극되어 나는 근심과 걱정에서 헤어나기 위해 다음날 약혼을 해버리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내가 떠나기 전날이었다. 그녀가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려니 싶었다. 그녀는 나를 피하는 것 같았다. 단둘이서는 만나지도 못한 채 해가 져버렀다. 서로 이야기도 나눠보지도 못한 채 떠나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서 나는 저녁 식사 조금 전에 그녀의 방으로 갔다. 그녀는 산호 목걸이를 거는 중이었는데 그것을 걸어매려고 두 팔을 올린 채 등을 문 쪽으로 돌리고 두 개의 촛불 사이에 있는 거울 속을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본 것은 거울 속에서였다.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얼마동안 그대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문이 닫혀져있지를 않았니?" 그녀는 말했다. "노크를 했는데 대답이 없었어. 알리싸, 내가 내일 떠나는 걸 알고 있어?" 그녀는 아무 대답도 없이 끝내 걸어매지 못한 목걸이를 벽난로 위에 놓았다. '약혼'이란 말이 너무나 노골적이고 거칠게 여겨졌기 때문에 나는 생각나는 대로 종잡을 수 없이 빗대어 말했다. 그녀는 나의 말뜻을 알아듣자 휘청거리는 듯 벽난로에 몸을 기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몸이 너무나 떨렸기 때문에 그녀를 쳐다보는 것을 조심조심 피했다. 나는 그녀 곁에 있었고 눈을 들지 않은 채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피하지는 않았지만 얼굴을 약간 숙이면서 내 손을 들어 입술에 갖다대고 기댄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니야! 제로옴, 아니야! 약혼하지 말자. 제발...." 내 심장이 너무나도 뛰었기 때문에 그녀도 그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녀는 한결 다정스럽게 말했다. "안 돼! 아직은...." 그리고는 내가, "왜?" 하고 묻자, "묻고 싶은 건 애 편이야, 왜 이 상태를 바꾸자는 거야?" 나는 감히 그 전날 이야기를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히 내가 그것을 생각하고 있다고 느꼈음인지 내 생각에 답하는 듯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 넌. 나는 그렇게까지 행복해질 필요가 없어. 이대로 우린 행복하지 않아?"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려고 했다. "그렇지 않아, 널 두고 떠나야 하니까." "이봐, 제로옴. 오늘 저녁엔 이야기 못하겠어.... 우리의 마지막 순간을 망치지 말자... 아냐, 아냐, 난 한결같이 널 사랑하고 있어, 안심해. 내가 편지 쓸게, 이유를 설명할께. 꼭 쓸게, 내일이라도...네가 떠나면 곧, 자 이젠 가! 어머나, 우는 것 좀 봐...가 줘." 그녀는 나를 밀어내더니 조용히 몸을 빼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작별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그녀에게 한 마디 말도 못했고, 이튿날 내가 떠날 때도 그녀는 자기 방에 있었다. 나를 태운 마차가 멀어져 가는 것을 창가에서 바라보며 작별의 손짓을 하고 있는 그녀를 나는 보았다. @ff 3 나는 그해, 아벨 보띠에를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 그는 징집되기 전에 지원 입대를 한 것이었고, 한편 나는 수사학급 강의를 한 번 더 들으면서 학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벨보다 두 살 아래인 나는 우리가 그 해 입학할 예정이었던 '에꼴르 노르말르'(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병역을 연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반갑게 다시 만났다. 제대 후 그는 한 달 이상이나 여행을 했다. 나는 그가 변하지 않았나 걱정했지만 그는 좀 더 침착해졌을 뿐 조금도 매력은 잃지 않고 있었다. 개학하기 전날 오후를 상부르 공원에서 함께 산책하면서 나는 혼자 간직하고 있던 내 사랑 이야기를 그 이상 숨길 수 없어 길게 해주었다. 하긴 그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해 몇몇 여인들과 경험을 얻었던 그는 약간 자만심이 깃든 선배 행세를 하려드는 것이었지만 나는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 이른바 마지막 말이란 것을 내가 할 줄 몰랐다고 빈정대면서 여자를 마음이 변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은 하나의 공리라고 설명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지껄이도록 내버려두긴 했지만 그의 훌륭한 이론이 나나 알리싸에게는 전혀 부질없다는 것, 그리고 그가 우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을 따름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도착한 이튿날 나는 다음과 같은 알리싸의 편지를 받았다. 그리운 제로옴 나는 네가 제의한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어."네가 제의한 것! 우리의 약혼을 이렇게 부르다니!" 나는 내게 너무 나아가 많지 않은가 두려워. 너의 아직 여자들을 사귈 기회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생각되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내 생각으로는 내가 어의 것이 되고 나서 네 마음에 들지 못한다면 후에 나도 괴로와질 거야. 편지를 읽으면서 무척 화를 내겠지. 지금 난 네가 좀더 생의 경험을 쌓을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너를 위해서라는 것을 이해해줘. 나로서는 너를 사랑하지 않게 될 수는 결코 없으리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야. --알리싸 사랑하지 않게 되다니! 그것이 새삼스럽게 문제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서글펴지기보다도 오히려 어리벙벙했고 너무나 당황해서 이 편지를 아벨에게 보여 주러 달려갔다. "그래 어쩔 셈이냐?" 편지를 읽고 나서 아벨은 입술은 꼭 다문 채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나는 불안과 슬픔에 차 두 손을 들었다. "어쨌든 답장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여자하고 다툴 때는 지는 법이니까. 이봐, 토요일에 르아브르에 가서 하루 묵으면 일요일 아침에는 ㅍ궤즈마르에 도착할 수 있고 월요일 첫째 시간까지는 여기에 돌아올 수 있어. 나도 입대 후에 네 친척들을 만나뵙지 못했으니까. 이것으로 핑계는 충분히 되고 또 인사 치레도 되지. 만일 알리싸가 이것을 한낱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일은 더 수월하게 되는 거야! 네가 알리싸와 이야기하는 동안 난 줄리에뜨를 맡지. 어린애 짓은 하지 않도록 명심하고. 사실은 네 이야기 속에는 뭔가 알 수 없는 게 있어. 아마 내게는 사실을 다 털어놓지 않은 모양이지? 허나 관계 없다. 내가 알아낼 테니까. 무엇보다도 우리가 간다는 것을 알리지 마. 불시에 네 사촌 누이를 찾아가서 무장할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단 말이야." 정원의 사립문을 밀면서 내 가슴은 몹시 두근거렸다. 줄리에뜨는 곧 내려오지 않았다. 우리가 삼촌이며 미스 아슈뷔르똥과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응접실에 들어왔다. 우리의 느닷없는 방문이 그녀의 마음을 당황케 만든 것 같았으나 그녀는 내색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벨이 하던 말을 생각하고, 그녀가 그토록 한참 동안 나타나지 않고 있었던 것은 바로 나에 대비할 무장을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줄리에뜨의 몹시 쾌활한 태도는 알리싸의 신중한 모습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돌아 온 것을 못마땅해 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적어도 그것을 자기의 태도로써 나타내려는 듯 싶었고, 나는 그러한 감정 뒤에 숨겨져 있는 더욱 세찬 감정을 찾아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우리와 꽤 떨어진 창가에 앉아, 수를 놓는 데만 열중하고 있는 듯 입술을 움직이며 바늘 매듭을 세고 있었다. 다행히도 아벨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야기할 기력도 없었고, 따라서 그가 군대 생활과 여행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들 이 재회의 첫 순간은 퍽 침울했을 것이다. 삼촌도 퍽 근심스러운 기색이었다. 점심 식사가 끝난 후 줄리에뜨는 나를 따로 불러 정원으로 데리고 갔다. "글쎄 네게 청혼을 하는 사람이 다 있다니!" 우리가 단둘이 있게 되자 그녀는 소리쳤다. "펠리씨 고모님이 어제 아버지께 편지로 청혼을 전한 거야. 고모님 말로는 뭐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나. 올봄에 사교계에서 몇 번 나를 보고 홀딱 반했대." "너도 그 사람 눈여겨 봤니?"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청혼자에 대해 반감적인 말투로 풀었다. "그래, 누군지 알아. 사람좋은 돈키호테 타입이야. 교양도 없고, 못나고 시시한 사람인데 퍽 걸작이어서 고모도 그 사람 앞에선 웃음을 참지 못하는 모양이야." "그래, 그 자가 유망해 보이니?" 나는 비웃는 조로 말했다. "어머나! 오빠, 농담도! 장사치야. 오빠가 그 사람 한 번만 보면 그런 질문은 안할 거야." "그래서 삼촌은 뭐라고 대답하셨어?" "내가 대답한 대로지. 시집가기엔 아직 나이가 어리다고...그런데 곤란하게도." 하고 그녀는 웃으며 덧붙였다. "고모님은 반대할 걸 예측했던 거야. 그래 편지 덧붙임에 에뜨와르 떼씨에르 씨는--그 사람 이름이야--시기를 기다리는 건 별문제 아니며 벌써부터 후보를 하는 것은 단지 '선수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덧붙였어...터무니없는 짓이지. 하지만 어떻게 해? 그 사람이 너무 못났다고 전해 달랄 수도 없고!" "그럴 순 없지. 하지만 포도 재배자에겐 시집가고 싶지 않다고도 할 수 있지 않아?"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대답했다. "그런 건 다 고모한텐 통하지 않는 이야기야... 그 이야긴 이제 그만해. 알리싸가 편지했어?" 그녀는 아주 구변 좋게 말을 했지만 무척 흥분되어 있는 듯했다. 알리싸의 편지를 내가 내밀자 그녀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읽었다. "그래 오빠는 어떻게 할 거야?" 그녀의 말소리에는 노여움이 서 있는 듯했다. "이젠 나도 모르겠어." 하고 나는 대답했다. "막상 여기 와보니 차라리 편질 쓰는 편이 좋았을 것 같애. 그래서 온 것을 벌써 후회하고 있어. 그녀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겠니?" "오빠를 자유롭게 해주려는 거야." "하지만 내가 뭐 그런 걸 바라고 있나? 그런데 알리싸가 왜 이 편지를 했는지 알겠니?" "몰라!" 그녀의 대답이 너무나 매몰찼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진정한 이유는 짐작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 일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라고 그 순간부터 믿기 시작했다. 이윽고 우리가 따라 걷고 있던 오솔길이 다시 오던 길로 되도는 굽이에서 그녀는 갑자기 발길을 돌리면서 말했다. "이젠 갈래. 나하고 이야기하기 위해 오빠가 온 건 아니니까. 너무 오래 같이 있었어." 그녀가 집으로 달려간 잠시 후에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응접실로 들어갔을 때 그녀는 여전히 되는대로 즉흥적으로 피아노를 치면서 자기를 보러 온 아벨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을 남겨 놓은 채 나왔다. 그리고는 알리싸를 찾아 한참 동안 정원을 헤매다녔다. 그녀는 과수원 안쪽 담 밑에서 너도밤나무 숲의 가랑잎 냄새에 그 향기가 뒤섞여 나는 첫 국화를 꺾고 있었다. 대기에는 가을이 담뿍 배어 있었다. 울타리에 내리쪼이는 햇살도 겨우 온기를 던져 줄 뿐 하늘은 동녘 나라인 양 맑았다. 아벨이 여행 선물로 갖다 주어 당장 쓰고 나온 젤란드식의 큼직한 모자로 가려진 그녀의 얼굴은 틀에 끼인 듯 네모반듯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도 처음에는 돌아다보지 않았지만 억제하지 못하고 가볍게 몸을 떠는 것으로 보아 내 발자국소리를 알아 챈 것을 나는 깨달았다. 나는 벌써 그녀가 할 책망과 그녀의 눈길이 나로 하여금 느끼게 할 준엄성에 대비해 마음을 긴장시키고 용기를 냈다. 그러나 아주 가까이 이르러 조심스럽게 걸음을 늦추자 그녀는 처음엔 얼굴을 돌리지 않았지만 마치 성난 어린애처럼 얼굴을 숙인 채 꽃을 담뿍 쥐어든 손을 나를 향해 둥 뒤로 내밀면서 오라고 청하는 시늉을 했다. 이러한 몸짓에 오히려 이번에는 내가 일부러 멈추어 서자, 비로소 그녀는 몸을 돌려 내게로 몇 걸음 걸어오더니 얼굴을 드는 것이었다. 그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눈길에 비추어지자 온갖 것이 갑자기 다시금 단순하고 쉽게만 생각되어 나는 변함없는 목소리로 힘들지 않게 말문을 열었다. "편지를 보고 다시 왔어." "그럴 줄 알았어." 하고는 그녀는 신랄한 책망조의 억양을 부드럽게 하면서, "내가 화를 내는 것도 바로 그 점이야. 왜 내 맘을 오해하지? 아무 일도 아니었는데...." 하고 말했다."그러자 벌써 슬픔과 번민은 정말로 나 혼자 꾸며 댄 것이어서 단지 내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듯싶었다". "내가 앞서도 말했지만 우리는 이대로 행복하잖아? 그러니 그것을 네가 바꾸자는 데 내가 반대한대서 놀랄 것은 없는데?" "사실 그녀 곁에 있기만 하면 나는 행복했다. 너무나도 행복해서 다시는 그녀의 생각 외의 다른 생각은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미 나는 그녀의 미소밖에는, 그리고 이렇게 그녀와 더불어 꽃이 만발한 오솔길을 그녀 손을 잡고 거니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바라고 있지 않았다. "그러는 편이 좋다면...." 하고 나는 그 순간의 완전한 행복에 몸을 맡기고 모든 다른 희망을 포기한 채 엄숙하게 말했다. "그러는 편이 좋다면 약혼하지 않기로 해. 처음 편지를 받았을 때 난 내가 정말 행복하다는 것과 이제부터는 그 행복이 사라져 버리려 한다는 것을 동시에 깨달았어. 아! 옛날의 내 행복을 다시 돌려 줘. 그 행복 없이는 못견디겠어. 일생을 기다려도 좋을 만큼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어.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된다거나 내 사랑을 의심한다거나 하는 생각은, 알리싸, 난 정말 못견디겠어." "아아! 제로옴, 난 그걸 의심할 수는 없어." 이 말을 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쓸쓸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을 환히 빛내 주던 미소가 너무도 티없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나는 의구심을 갖고 항변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그녀의 목소리 깊이 내가 느낀 그 서글픔의 여운도 그러고 보면 단지 나의 두려움과 형변에서 나온 것 같았다. 그리고 밑도 끝도 없이 나는 나의 계획, 공부, 그리고 얻을 것이 많을 내 새 생활에 관해 횡설수설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에꼴르 노르말르는 최근 개편된 것과는 퍽 달라 몹시 규율이 까다롭기는 했지만, 게으르다든가 다루기 까다로운 학생들에게나 구속감을 주었을 뿐 부지런히 노력하는 학생에겐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거의 수도사적인 이 관습이 사회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사회란 별로 내 마음을 끌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알리싸가 두려워하게 되면 나도 대번에 싫어질 그러한 것에 불과했다. 미수 아슈뷔르똥도 없으니 일요일이 되면 아벨과 함께 거기에 가서 몇 시간 보내리라. 일요일마다 나는 알리싸에게 편지를 쓰며 내 생활을 낱낱이 알려 주리라. 이때 우리는 열어젖힌 온실 유리창에 걸터앉아 있었다. 알리싸는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이것저것 묻는 것이었다. 그처럼 조심성 있는 그녀의 따뜻한 마음, 그처럼 절실한 그녀의 애정을 나는 일찍기 느낀 일이 없었다. 근심과 걱정 그리고 아주 작은 마음의 동요까지도 푸른 하늘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안개처럼 그녀의 미소 속으로 증발되고 그 애틋한 친밀감 속에 흡수되는 듯했다. 이윽고 줄리에뜨와 아벨이 우리를 찾아와 너도밤나무 숲의 벤치에 앉아 한 사람씩 번갈아 가며 스윈번의 '시대의 개가'를 한 구절씩 읽고 또 되풀이 해서 읽으면서 우리는 나머지 시간을 보냈다. 저녁이 됐다. "자!" 우리가 떠날 무렵 나의 입을 맞추면서 알리싸가 말했다. 반은 농담 같기도 하고 반은 누님같은 태도였다. 무분별한 내 행동 때문에 아마도 그런 태도를 취한 듯했고 또 그것을 알리싸가 즐겨 취한 듯싶은 태도였다. "자, 이제부터는 그렇게 공상적인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약속해...." "그래 약혼했니?" 우리가 또다시 단둘이 있게 되자 아벨이 내게 물었다. "이젠 그런 건 문제가 아냐." 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는 모든 다른 질문을 딱 잘라 버리는 어조로 덧붙였다. 이대로가 훨씬 좋아. 오늘 오후 만큼 행복했던 때는 없었어." "나도 그래!" 하고 그는 소리쳤다. 그리고는 갑자기 내 목을 끌어안더니, "기막히고 희한한 이야기를 하나 해줄까? 제로옴, 난 줄리에뜨가 미칠 듯이 좋아! 지난해에도 그런 생각을 좀 하긴 했지만. 그러나 나도 세상 맛을 보았고 해서 어의 사촌누이들을 한 번 더 보기 전에는 아무것도 네게 말하고 싶지 않았어. 이제는 됐어, 내 인생도 결정이 됐어." 사랑하노라, 사랑하노라기보다는 --나는 줄리에뜨를 예찬하노라. "오래 전부터 난 네게 의형제 같은 애정을 느꼈어...." 그러고는 웃다가 장난을 치다가 하면서 팔을 벌려 나를 끌어 안고는 우리가 탄 빠리 행 열차 속 좌석 위를 어린애처럼 딩구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고백을 듣고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거기에는 느껴지는 과장된 표현은 나로서는 듣기에 좀 어색했다. 하지만 그처럼 벅찬 감격과 희열에 대해 어떻게 항거할 것인가? "그래, 어떻게 됐어! 고백을 했다?" 그가 이야기를 털어놓는 사이에 나는 물었다. "천만에!" 하고 그는 소리쳤다 "이야기의 가장 멋진 대목을 태워 버리고 싶진 자아."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순간은 '그대를 사랑하노라'고 말할 때가 아니니... "이봐 나를 책망하지는 못하겠지, 느림보 대장인 너로선 말야?" "하지만 네 생각엔 그녀가 그녀 편지에서...." 나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녀가 나를 보면서 당황해 하던 것을 못봤어? 우리가 거기 있는 동안 줄곧 흥분해서 얼굴을 붉히고 이야기를 쉬지 않고...아니, 넌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야. 너야 알리싸한테만 정신이 쏠려 있었으니 말이야. 줄리에뜨가 어찌나 이것저것 캐묻는지! 또 얼마나 내 말을 솔깃히게 들으며 좋아했는지 몰라! 1년 동안에 굉장히 총명해 졌어. 어떻게 해서 그녀가 독서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네가 생각하게 되었는지 난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독서란 단지 알리싸만을 위한 것이라고 너는 늘 생각하는 모양이지... 하지만 그녀는 놀랄 만큼 많이 알고 있단 말야. 저녁 식사 전에 우리가 무엇을 하고 놀았는지 알아? 단테의 칸쪼네를 암송하며 즐겼어. 둘이서 번갈아가며 암송했는데 내가 틀리면 그녀가 척척 고쳐 줬어, 왜 너도 알지? 내 마음 가득 채워 주는 사랑의 마음이여. 그녀가 이탈리아 말을 배운걸 너는 말해 주지 않았지." "나도 그건 몰랐는데!" 나는 놀라서 말했다. "아니, '칸쪼네'를 시작할 때 너한테서 배웠다고 하던데." "아마 내가 그 언니한테 읽어 주는 것을 들었던 모양이지. 그녀는 흔히 우리 곁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었거나 수를 놓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해하고 있는 듯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그랬을 거야. 알리싸와 너는 지독한 이기주의자니까. 자기네 사랑에만 열중하여 이 지능, 이 영혼이 놀랍도록 꽃피는 건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니 말이야. 내가 나 자신을 추켜 세우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나는 때맞추어 나타난 거야. 아니, 천만에 널 탓하는 것 아니야. 너도 알다시피...." 그는 다시 나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단지 이것만 약속해 줘. 이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알리싸에게 알리지 않겠다고. 내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줄리에뜨는 애 것이야. 그건 틀림없어. 다음 방학까지 그대로 내버려두어도 아무일 없을 정도야. 그때까지는 편지도 쓰지 않을 작정이야. 그렇지만 새해 방학만 되면 너와 나는 르아브르에 가서 방학을 지내고, 그러고...." "그러고는?" "그러고 나서 알리싸는 갑자기 우리의 약혼을 알게 되는 거야. 이 일을 나는 깨끗이 해치울 작정이야. 그리고 어떻게 되는지 알아? 네가 획득하지 못한 그 알리싸의 승낙을 내가 본을 보여 줌으로써 얻어 준단 말야. 너희들 결혼 전에는 우리도 결혼할 수 없지 않느냐고. 우리 둘이는 알리싸를 설득시킬 작정야." 그는 줄곧 이야기를 계속하여 기차가 빠리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노르말르에 우리가 돌아왔을 때까지도, 그칠 줄 모르는 이야기의 조수 속으로 나를 잠겨들게 했다. 우리가 역에서 에꼴르 노르말르까지 걸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또 밤이 깊어졌는데도 아벨은 내 방에 따라 들어와서 아침이 될 때까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아벨은 현재와 미래를 다루는 데 열중했다. 그는 이미 우리 두 쌍의 결혼을 예견하고 이야기하는 것이었고, 각자의 놀라움과 기쁨을 상상하여 그리기도 했고 우리의 아름다운 이야기, 우정 그리고 내 사랑에서 자기가 한 역할의 아름다움에 도취하기도 했다. 나는 이처럼 솔깃한 열정에 별반 저항도 못한 채 공상적인 그의 제안에 매력을 느낀 나머지 마침내 자신도 그런 기분에 점점 끌려들어갔다. 사랑의 덕택으로 우리의 야망과 용기는 부풀어 오르기만 했다. 에꼴르를 졸업하면 곧 보띠에 목사의 주례로 우리 두 쌍의 결혼이 이루어질 것이고 넷이서는 여행을 떠난다. 그런 다음 우리가 거창한 일에 착수하면 우리의 아내들은 즐거이 거기에 협력해 줄 것이다. 교수직엔 별로 마음이 없고, 글쓰는 소질을 타고 났다고 자신하는 아벨은 몇 편의 희곡에서 성공을 거두어 별로 없던 재산을 삽시간에 굉장하게 만들 것이다. 학문에서 오는 이익보다 학문 그 자체에 마음이 끌리는 나는 종교 철학의 연구에 몰두하고 그 역사를 써 보리라... 그러나 그 많은 희망들을 여기서 회상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다음날 우리는 다시 공부에 열중했다. @ff 4 새해 방학까지는 너무도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전번 알리싸와의 대화로 열광된 나의 믿음은 잠시도 동요되지 않았다. 계획했던 대로 나는 일요일마다 그녀에게 긴 편지를 썼다. 그 외의 날에도 동급생들과는 떨어져서 아벨을 만날 뿐 단지 알리싸를 그리워하며 살았고, 애가 좋아하는 책에는 내 자신이 거기서 얻는 흥미보다도 알리싸가 맛볼 수 있는 재미를 먼저 고려하여 그녀에게 도움이 되도록 여러 가지 표를 했다. 그녀의 편지에는 여전히 나를 불안케 하는 것이 있었다. 비록 내 편지에 대해 꽤 규칙적으로 답을 해주기는 했지만 나를 따라 오는 그녀의 열성은 마음으로 이끌린다기보다는 오히려 내 공부를 격려해 주려는 배려가 엿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감상, 토론, 비평 등이 내게는 단지 내가 생각하는 바를 나타내려는 방법에 지나지 않았음에 생각을 내게 숨기려는 것 같았다. 때로 나는 그녀가 그것으로 장난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무슨 상관이 있으랴.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나는 편지 속에 전혀 불안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12월 말 경, 아벨과 나는 르아브르를 향해 떠났다. 나는 쁠랑띠에 이모 댁에 머물렀다. 내가 도착했을 때 이모는 집에 없었다. 그러나 내 방에 들어가 있자, 곧 하인이 오더니 이모가 응접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 주었다. 그러나 내 방에 들어가 있자, 곧 하인이 오더니 이모가 응접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 주었다. 내 건강, 숙소, 공부에 관해서 대충 듣고 나자 이모는 곧 그 애정이 넘치는 호기심에 이끌려 아무 조심성 없이 말했다. "퐁궤즈마르에서는 만족했는지, 너는 내게 아직 말하지 않았지? 일이 좀 진척됐니?" 나는 이모의 이 어설픈 친절을 참아야만 했다. 아무리 순수하고 다정한 말씨로 대해 줘도 역시 마음 아프게 느껴지는 그러한 감정을 이처럼 간단히 다루는 걸 듣는 건 괴로웠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는 이모의 어조가 너무나도 구김살 없고 정다왔기 때문에 화를 낸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 같았다. 하지만 처음에는 대꾸를 좀 했다. "지난 봄에는 약혼이 시기상조라고 말씀하시기 않았어요?" "그래, 나도 안다. 처음에는 으레 그렇게 말하는 법이야." 이모는 나의 한 손을 잡아 자기의 두 손 안에 감동적으로 꼭 쥐면서 서슴지 않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네 공부라든가 병역 때문에 몇 해 더 기다리기 전에는 결혼을 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생각 같아서는 약혼을 오래 끄는 것은 불찬성이야. 그렇게 되면 처녀들은 지쳐버리거든. 때때로 그것은 아주 딱하게도 여겨진단다. 그건 그렇고, 약혼은 반드시 공개해 둘 필요가 있어. 단지 그렇게 하면 남들이...아무렴, 은근히 속짐작으로 이제는 그 처녀에게 손을 뻗쳐 볼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단 말이야. 그리고 그렇게 해 두면 너희들도 편지나 교제를 떳떳이 할 수 있지. 그리고 다른 사람이 청혼해 오면...그것도 물론 있을 법한 일이지." 이모는 그럴 듯한 웃음을 띠면서 암시조로 말했다. "그런 경우에는...아닙니다, 그럴 수가 없게 됐습니다라고 은근히 거절할 수도 있단 말이다. 너도 알겠지만 줄리에뜨한테 청혼이 들어왔단다. 올겨울에 그 애는 남의 눈에 무척 띄었거든. 그 애는 아직 좀 어리지. 그래 그 애도 그걸 이유로 대답했어. 한데 그 청년은 기다리겠다는 거야. 정확히 말해서 그 사람은 이미 청년이 아니야. 아무튼 좋은 자리야. 아주 틀림없는 사람이지. 너도 내일이면 볼 거다. 우리 집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러 올 테니까. 네가 본 인상이 어떤지 내게 좀 말해 주려무나." "이모, 모르긴 하지만 그 남자는 헛수고하는 게 아닐까요. 줄리에뜨에게 다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에요." 나는 아벨의 이름을 대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말했다. "응?" 설마 하는 표정으로 이모는 입을 뾰족 내밀고 머리를 갸우뚱하면서 의심쩍다는 듯이 말했다. "놀라운 얘기구나, 그렇다면 왜 그 애가 내게 아무말도 하지 않았을까?" 나는 더이상 말하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두고 보면 알겠지. 줄리에뜨는 요즘 좀 앓고 있단다...." 하고 이모는 다시 계속했다. "우린 지금 그 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그래? 알리싸도 귀여운 아이야, 그런데 그 애한테 선언을 했니 안했니?" 이 '선언'이란 말이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게 거친 듯해서 나는 발끈했으나 거짓말을 못하는 성미라 정면으로 질문을 받자 그만 우물쭈물 대답해 버렸다. "네." 그러자 얼굴이 화끈 달아오름을 느꼈다. "그래 그 애는 뭐라고 하든?0 나는 고개를 숙였다. 대답하고 싶지가 않았다. 이번에는 한층 더 막연히, 그리고 마음이 내키지 않는 어조로 말했다. "약혼하길 반대했어요." "그래! 그것도 일리가 있어." 하고 이모는 소리쳤다. "너희야 언제든 할 수 있으니까, 그렇구말구...." "제발 그 이야긴 그만 해요, 이모." 나는 말을 막으려 했으나 헛일이었다. "그 애로선 있음직한 일이야. 그 애는 언제나 너보다는 분별이 있어 보였으니까." 나는 이때 무엇 때문이었는지 잘 모르긴 했으나, 아마 그렇게 다그쳐 물어서 흥분되었음인지, 갑자기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래서 마치 어린애처럼 마음씨 좋은 이모의 무릎에 이마를 비벼 대며 흐느끼면서, "아니에요. 이모, 이모는 몰라요." 하고 소리쳤다. "그 애는 기다려 달라고 하지도 않았어요...." "뭐라고? 그 애가 너를 싫어하기라고 한단 말이냐?" 이모는 손으로 내 이마를 받쳐올리면서 퍽 따뜻한 어조로 말했다. "그것도 아니에요...아니에요. 확실히 그런 것도 아니에요." 나는 서글프게 머리를 저었다. "이제는 그 애가 너를 사랑하지 않을까봐 겁이 나니?" "아아! 아니에요, 제가 두려워하는 건 그가 아니에요." "얘야, 좀 더 분명하게 말을 해야 내가 알지." 약한 내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 나는 부끄럽고 슬펐다. 내가 애매한 태도를 취한 동기를 이모는 틀림없이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만일 알리싸가 약혼을 거절한 이면에 어떤 뚜렷한 동기가 있다면 이모가 나를 도와 부드럽게 그녀에게 물어 봄으로써 그것을 밝혀낼 수도 있을 성싶었다. 이모는 스스로 그 이야기를 꺼냈다. "얘야!" 하고 이모는 말을 이었다. "내일 아침 알리싸는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미러 올 테니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내 당장 알아보마. 그것을 점심 때 알려 줄게. 그럼 네가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게 될 거야, 틀림없이." 나는 뷔꼴랭 댁으로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정말 며칠 전부터 앓고 있던 줄리에뜨는 사람이 변한 듯했다. 그녀의 눈초리에는 적지 않게 표독스럽고 또 거의 쏘는 듯한 표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 때문에 전보다 훨씬 더 자기 언니와는 달라 보였다. 그날 저녁 나는 알리싸와 줄리에뜨에게 별다른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나도 이야기할 맘이 내키지 않았고 삼촌이 피로해 보여서 식사가 끝난 귀 곧 물러나와 버렸다. 쁠랑띠에 이모가 꾸미는 크리스마스트리는 해마다 많은 아이들과 친척들, 친구들을 모여들게 하는 것이었다. 이 트리는 계단 골을 이루는 현관 한 어귀에 세워져 있었는데 이 현관은 첫 문간방, 응접실, 찬장을 들여놓은 온실 비슷한 방의 유리문 등으로 되어 있었다. 트리의 장식은 아직 끝나지 않아 축제일 아침, 죽 애가 도착 한 이튿날, 알리싸는 이모 말대로 꽤 일찍 와서 여러 가지 장식, 촛불, 과실, 과자, 장난감 등을 나뭇가지에 다는 일을 거들었다. 나도 그러한 일을 그녀 곁에서 거들고 싶었으나 이목 그녀와 이야기를 하도록 해야만 했다. 그래 나는 그녀를 보지도 않고 집을 나와 아침 한나절을 불안한 마음을 달래느라고 애썼다. 줄리에뜨를 다시 보고 싶어서 나는 먼저 뷔꼴랭 댁으로 갔다. 아벨이 나보다 앞서 그녀 곁에 와 있다는 말을 듣고 나는 중요한 이야기를 방해할까 두려워 곧 물러나와 점심 때까지 부둣가의 거리를 헤매다녔다. "이런 바보!" 내가 들어오자 이모가 소리쳤다.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살아가다니. 오늘 아침 네가 한 소리는 모두가 당치도 않아.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얘길 꺼냈다. 우리 일을 거드느라고 피곤해진 미스 아슈뷔르똥을 산책이나 하라고 내보내고 알리싸와 단들이 있게 되자, 나는 곧 왜 지난 여름에 약혼하지 않았느냐고 아주 간단하게 물었다. 아마 그 애가 당황했으리라 너는 생각하겠지? 그 애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아주 침착하게 제 동생보다 먼저 결혼하기가 싫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더라. 만일 너도 그 애에게 솔직히 물어 보았더라면 그렇게 대답했을 거야. 혼자서 괴로워한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야, 그렇지? 그봐, 솔직하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야. 가엾은 알리싸는 아버지를 떠날 수가 없다는 거야... 우리는 별별 이야기를 다 했다. 그 내는 참 지각이 있어. 제가 네가 적합한지 어떤지 아직 자신이 없대. 또 너보다 너무 나이가 많은 것을 걱정하며 네 게는 줄리에뜨 또래의 여자가 차라리 나을 것 같다고...." 이모는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듣지 않았다. 내게 중요한 것은 단 한가지, 즉 알리싸가 제 동생보다 먼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벨이 있지 않은가! 그 녀석 말이 옳았구나. 그 녀석은 단번에 두 쌍의 결혼을 성사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아주 간단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모가 밝혀 준 이야기는 나를 흥분시켰고 나는 최선을 다해 이 흥분을 이모에게 감추었다. 이모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기쁨, 그리고 또 그것이 모두 다 자기의 덕택이라고 생각될수록 그만큼 이모에게 흡족감을 줄 그러한 기쁨만을 보였다. 점심이 끝나자 나는 구실을 만들어 이모 곁을 떠나 아벨에게로 달려갔다. "어때! 내가 뭐라고 그랬어!" 내가 기쁨을 알려 주자마자 그는 나를 껴안으며 소리쳤다. "이봐, 오늘 아침 줄리에뜨와 한 이야긴데, 거의 결정적인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우리는 거의 네 이야기만 했지. 그러나 그녀는 피곤해서 마음이 안정되지 않은 것 같았어. 지나치게 깊이 들어가면 그녀의 신경을 자극할까 두려웠고, 너무 오래 머물러 있으면 그녀를 흥분시킬까 염려도 되었어. 네 말을 듣고 나니 일은 다 됐어! 이봐, 내 단장과 모자를 달려가 가져올게. 혹시 도중에 날아가려고 하면 붙잡아 줄 셈치고 뷔꼴랭 댁 문전까지만 동반해 줘. 나는 외포리옹보다 더 몸이 가벼워진 것 같애. 자기 언니가 승낙을 거절하는 이유가 단지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줄리에뜨가 알게 되면, 그리고 곧 내가 청혼을 하면...아아! 이봐, 나는 우리 아버지가 오늘 저녁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행복에 겨워 눈물을 흘리면서 주님을 찬양하며 축복에 넘치는 손을 무릎 끓은 네 사람의 약혼자의 머리 위에 뻗치시는 게 벌써 눈에 선해. 미스 아슈뷔르똥은 한숨 속으로 증발해 버릴 것이고 쁠랑띠에 이모님도 웃음속에 녹아 버릴 거야. 그리고 환하게 불 밝혀진 크리스마스트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할 것이고 성경에 나오는 산들처럼 손뼉을 칠 거야." 크리스마스트리에 불이 켜지고 아이들, 친척들, 그리고 친구들이 그 주위에 모여들게 되는 것은 해가 질 무렵으로 정해져 있었다. 아벨과 헤어지고 나자 불안과 초조로 인해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아, 나는 기다리는 동안을 잊으려고 생뜨 아드레스의 낭떠러지까지 걸어갔다가 길을 잃어, 겨우 쁠랑띠에 이모 댁에 왔을 때는 다행히 조금 전부터 축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현관에 들어서자 나는 알리싸를 보았다.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던 듯 나를 보자 곧 내게로 왔다. 엷은 겉옷 깃 사이가 파여진 곳에는 목에서부터 오래된 자그마한 자수정 십자가를 늘이고 있었다. 어머니의 기념으로 내가 준 것인데, 그녀가 달고 있는 것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긴장된 그녀의 얼굴과 괴로운 표정이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왜 이렇게 늦었지?" 그녀는 다급하고 숨가쁜 목소리로 말했다.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낭떠러지 길에서 방향을 잃어버렸어...그런데 왜 안색이 그리 좋지 않지... 아니, 알리싸, 웬일이야?" 그녀는 잠시 당황한 듯 내 앞에서 입술을 떨고 있었다. 이러한 고뇌의 표정을 보자 마음이 아파 나는 감히 묻지를 못했다. 그녀는 내 얼굴을 끌어 당기려는 듯 내 목에 손을 갖다댔다. 무언가 이야기를 하려는 눈치였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손님들이 들어왔다. 힘이 빠진 그녀의 손이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이제는 시간이 없어." 하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내 눈에 눈물이 글썽이는 것을 보고 마치 그런 하잘것없는 변명으로 나를 진정시킬 수 있을 것처럼 내 눈길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냐...안심해, 단지 머리가 좀 아플 뿐이야. 어린애들이 너무 소란을 피워서...이리로 피해 온 거야...이제는 그 애들 곁에 돌아가 봐야지..." 그녀는 급히 내게서 멀어져 갔다.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나를 그녀에게서 떼어 놓았다. 나는 응접실에 가서 다시 그녀를 만나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방 저 끝에서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채 놀이를 짜주고 있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여러 사람들이 보였고 그녀에게로 가려면 필시 누구에게 붙잡힐 것 같았다. 인사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혹시 벽을 따라 살짝 빠져나간다면...나는 그렇게 해보았다. 정원으로 난 커다란 유리문 앞을 막 지나가려는 순간, 누가 내 팔을 잡는 것을 느꼈다. 문에 반쯤 몸을 숨기고 커튼으로 몸을 휘감은 줄리에뜨가 거기 있었다. "온실로 가!" 하고 그녀는 재빨리 말했다. "꼭 할 말이 있어, 그쪽으로 혼자 가. 곧 따라갈게." 그러고는 문을 조금 열더니 정원으로 사라졌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나는 곧 아벨을 보고 싶었다. 아벨은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현관으로 되돌아온 나는 줄리에뜨가 기다리고 있는 온실로 갔다. 그녀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 있었다. 눈썹을 찌푸리고 있어 그녀의 눈초리는 날카롭고 괴로운 표정을 띠고 있었다. 목소리마저 거칠고 경련을 일으킬 듯 싶었다. 그녀는 뭔가 분노로 흥분되어 있었다. 나는 불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름다움에 놀라 어색할 지경이었다. 우리는 단둘이었다. "알리싸가 이야기 했어?" 하고 그녀는 내게 다그쳐 물었다. "겨우 두어 마디, 내가 아주 늦게 와서 말야." "언니는 내가 자기보다 먼저 결혼하길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아?" "응." 그녀는 뚫어지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언니는 내가 누구와 결혼하기를 바라고 있는지 알아?"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건 오빠야!" 하고 그녀는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그렇대도!" 그녀의 목소리에는 절망과 승리감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그녀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기보다 되로 몸을 젖혔다. "이제는 내게 남은 할 일이 무엇인지 알겠어." 정원으로 통하는 문을 열면서 희미하게 덧붙여 말하더니 그녀는 문을 쾅 닫고 버렸다. 내 머리와 가슴 속에서 모든 것이 비틀거렸다. 관자놀이에서 맥박이 뛰논 것을 느꼈다. 단 한 가지 생각만이 그런 내 마음의 혼란을 버티고 있었다. 아벨을 찾자, 그러면 그는 아마도 이 두 자매의 기이한 이야기를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혼란된 모습이 누구에게나 뜨일 것 같아서 응접실에서 다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밖으로 나왔다. 정원의 차가운 공기가 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나는 잠시 그대로 정원에 머물러 있었다. 어둠이 짙어지면서 바다 안개가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나뭇가지는 앙상했고 땅과 하늘은 한없이 쓸쓸해 보였다...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크리스마스트리에 둘러선 어린이들의 합창인 모양이었다. 나는 현관을 통해 다시 들어갔다. 응접실과 문간방의 문이 모두 열려 있었다. 이제는 텅 빈 응접실에서 피아노 뒤에 반쯤 몸을 가린 이모가 줄리에뜨와 이야기하는 것이 보였다. 문간방에는 잔뜩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를 둘러싸도 손님들이 빈틈없이 모여 있었다. 어린애들은 이미 찬송가를 마친 때였다.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보띠에 목사가 설교 비슷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얘기는 이른바 '좋은 씨를 뿌리기' 위해서는 어떠한 기회도 놓치지 말라는 것이었다. 불빛과 훈기가 나는 싫었다. 나는 다시 나가고 싶었다. 문에 기대어 선 아벨이 보였다. 그는 얼마 전부터 그곳에 서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적의에 찬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는데 우리의 시선이 마주치자 어깨를 들먹였다. 나는 그에게로 갔다. "바보!"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하더니 갑자기, "아아, 이봐, 나가자. 좋은 말씀은 이제 지긋지긋해!" 했다. 우리가 밖으로 나오자 그는 다시 한번 "바보!" 하고는 아무 말 없이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나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 애가 사랑하는 건 바로 너야, 이 바보야! 나한테 그런 것을 말해 줄 수도 없었니?" 나는 아찔했다. 더 알고 싶지도 않았다. "말할 수 없었지? 너 혼자선 그것을 깨달을 수가 없었을 테니까!" 그는 내 팔을 잡더니 미친 듯이 흔들어 댔어. 악문 이빨 사이로 새어나오는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숨찼다. "아벨, 제발 부탁이야." 잠시 후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그가 나를 끌고가는 동안 말했다. "그렇게 흥분하지 말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내게 말을 좀 해.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어." 가로등 불빛 밑에서 그는 느닷없이 나를 세우더니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와락 나를 끌어안고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는 흐느끼며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잘못했어, 나도 바보야. 너와 마찬가지로 나도 잘 몰랐어." 울고 나더니 다소 마음이 진정되는 듯싶었다. 그는 머리를 들더니 다시 울기 시작하면서 말을 계속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이제 와서 다시 그 이야기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어. 네게 말했지만 아침에 줄리에뜨와 이야기했어. 굉장히 예쁘고 쾌활했지. 난 그것이 다 나 때문인 줄 알았어. 알고 보니 그것은 순전히 우리가 너의 이야기를 한 까닭이었어." "그때는 짐작을 못했니?" "못했어, 확실히는. 하지만 지금에 와서 아무리 작은 대목이라도 환히 짐작이 가...." "그렇다면 알리싸는...." "알리싸가 희생을 하는 거지. 동생의 비밀을 알자 자기 자리를 양보하려 한 거지. 어때, 넌! 뭐 이해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지... 나는 줄리에뜨에게 다시 한번 이야기하고 싶었어. 내가 말을 꺼내자마자...아니, 내 말을 알아듣기 시작하자마자 그녀는 우리가 앉아 있던 소파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그런 줄 알고 있었어요.] 하는 거야. 그런데 그 어조는 그런 줄 몰랐던 사람의 어조야...." "아! 농담은 제발 그만둬!" "어째서? 참 우스운 이야기야... 그녀는 자기 언니 방으로 뛰어갔어. 그러자 느닷없이 격렬한 소리가 들려 와, 난 깜짝 놀랐지. 잠시 후에 줄리에뜨가 다시 나온 줄 알았는데 나를 보고 어색한 표정을 짓더니 앞을 지나가면서 잽싸게 '안녕하세요?' 하더군...그것뿐이야." "줄리에뜨는 다시 보지 못했니?" 아벨은 약간 망설였다. "봤어, 알리싸가 가버린 후에 방문을 열었지. 줄리에뜨는 난로 앞 대리석 위에 팔꿈치를 세우고 두 손으로 턱을 받친 채 꼼짝 않고 서 있었어.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을 뚫어지게 노려보면서. 내 기척을 듣더니 돌아보지도 않은 채 발을 흔들어 대면서 '제발 나가 줘요!' 하는데 그 어조가 어찌나 매몰찬지 더 묻지도 않고 나와 버렸어. 그게 전부야." "그래 이제부터는?" "아! 털어놓고 나니 기분이 봄 낫군. 그래 이제부터는, 글쎄...넌 이제부터 줄리에뜨의 사랑이 식도록 해야겠지. 내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러기 전엔 알리싸는 네게 돌아오지 않을 거야." 우리는 오랫동안 말없이 걸었다. "돌아가자." 하고 마침내 그가 말했다. "손님들도 이제는 다 갔을 거야. 아버지가 날 기다리실지도 모르고." 우리는 돌아왔다. 과연 응접실은 텅 비어 있었다. 문간방에는 장식이 다 떨어지고 촛불도 거의 다 꺼진 크리스마스트리 곁에 이모와 그 두 아이들, 뷔꼴랭 삼촌, 미스 아슈뷔르똥, 목사, 사촌 누이들, 그리고 이모가 여태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과, 그가 바로 줄리에뜨가 말하던 청혼자라는 것을 이때 처음 알게 된, 너무도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사나이 뿐 아무도 업었다. 우리들 중 누구보다도 크고 튼튼하고 대머리에 혈색이 좋으며, 다른 계급, 다른 사회, 다른 종족에 속한 그 사나이는 우리 사이에 끼인 것이 퍽이나 어색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는 희끗희끗한 거창한 카이제르 수염 끝을 초조한 듯 잡아 당겼다 비볐다 하는 것이었다. 문이 활짝 열린 현관에는 이제 불빛도 없었다. 우리 둘이 소리없이 들어왔기 때문에 아무도 우리가 와 있는 줄 몰랐다. 오싹하는 어떤 예감이 나를 엄습했다. "멈춰!" 아벨이 내 팔을 잡으며 말했다. 그 순간 우리는 그 낯선 사나이가 줄리에뜨에게 다가가서는 그녀가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아무런 저항도 없이 내맡긴 손을 잡는 것을 보았다. 캄캄한 어둠이 내 가슴을 덮었다.... "아벨, 도대체 어떻게 된 셈이야." 아직도 깨닫지 못한 것처럼, 혹은 잘못 알았기를 바라는 것처럼 나는 중얼거렸다. "글쎄! 저 애는 경매를 하고 있는 거야." 그는 이빨 사이로 새어나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 언니한테 지기 싫다, 이 말이지. 천사들도 하늘에서 박수 갈채를 보내고 있을 거야." 삼촌이 오더니 미스 아슈뷔르똥과 이모에게 둘러싸여 있는 줄리에뜨의 뺨에 입맞추었다. 보띠에 목사도 가까이 왔다.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알리싸가 나를 보고 뛰어오더니 떨면서 "제로옴, 이럴 수가 없어. 그 애는 저 이를 사랑하지 않아. 바로 오늘 아침에도 그렇게 말했어. 제발 좀 말려, 제로옴. 아아! 저 애가 어떻게 되려고...." 하고 낮은 소리고 부르짖었다. 그녀는 절망적인 애원을 하면서 내 어깨에 매달렸다. 그녀의 이 고통을 덜어 줄 수만 있다면 나는 목숨이라도 바치고 싶었다. 갑자기 크리스마스트리 곁에서 고함 소리,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우리는 달려갔다. 줄리에뜨가 의식을 잃은 채 이모의 팔에 안겨 있었다. 모두가 다급히 그녀를 들여다보고 있어서 내게는 잘 보이지 않았다. 헝클어진 머리칼이 무섭도록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귀로 잡아당기고 있는 듯 했다. 그녀의 몸이 그처럼 경련하고 있는 것을 보면 보통으로 기절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아니야! 아니야!" 하고 이모는 벌써 어절 줄 모르는 뷔꼴랭 삼촌을 안심시키려고 큰 소리로 말했다. 보띠에 목사도 집게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면서 위로를 하고 있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흥분한 때문이야. 신경이 좀 발작 한 것 뿐이야. 떼씨에르 씨, 튼튼하시니까 좀 거들어 줘요. 내 방으로 올려가야겠어요. 애 침대로...." 그리고 나서 이모가 자기 맏아들 쪽으로 몸을 굽혀 귀에 대고 몇 마디 속삭이자 그는 의사를 청하러 가는 듯 곧 나가 버렸다. 이모와 그 청혼자는 그들 팔에 몸을 반쯤 젖히고 안기어 있는 줄리에뜨를 어깨 밑으로 손을 넣어 받치고 있었다. 아벨은 자칫하면 뒤로 떨어질 듯한 머리를 받쳐 주고 있고, 몸을 굽혀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모으며 마구 입을 맞추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나는 방문 앞에 멈추어 섰다. 줄리에뜨는 침대 위에 뉘어졌다. 알리싸가 떼씨에르 씨와 아벨에게 몇 마디 말을 했지만 내겐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문까지 그 두 사람을 따라 나와서 쁠랑띠에 이모와 단둘이서 간호하고 싶으니 자기 동생이 안정하도록 돌아가 달라고 당부했다. 아벨이 내 팔을 잡고 밖으로 이끌어, 우리는 아무런 목표도 용기도 생각도 없이 오랫동안 어둠 속을 거닐었다. @ff 5 알리싸에 대한 사랑만이 내 삶의 유일한 이유였다. 나는 그 사람에 매달렸으며 그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고, 또 기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다음날 내가 그녀를 만나러 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모가 나를 잡더니 금방 받은 편지를 내게 내밀었다. 줄리에뜨의 그 심한 흥분은 의사 선생님이 처방해 준 몰약으로 아침결에야 겨우 가라앉았습니다. 당분간 제로옴이 이곳에 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줄리에뜨가 그의 발걸음 소리나 목소리를 알아챌 수 있을 것 같아서인데, 지금 그 애에게는 절대 안정이 필요합니다. 줄리에뜨의 상태로 보아 아무래도 제가 이곳에 머물러야 할 것 같아요. 제로옴이 떠나기 전에 제가 만나지 못하게 되면 후에 제가 편지하겠다고 전해 주세요. 이 방문 금지는 순전히 나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이모나 그 외의 누구도 뷔꼴랭 댁의 초인종을 누를 수 있었고, 이모는 오늘 아침에도 거기에 갈 셈이었다. 내 발걸음 소리? 목소리? 얼마나 어설픈 구실인가... 아무든 좋다. "좋습니다. 가지 않겠습니다." 알리싸를 쉬 만날 수 없다는 것은 퍽 마음 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반면 다시 그녀를 만나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동생의 병을 내 탓으로 돌리지나 않을까 두려웠고, 따라서 그녀가 성이 난 것을 보느니 보다는 차라리 만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벨만은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의 방문 앞에서 하녀가 쪽지 하나를 전해 주었다. 네가 염려하지 않도록 몇 마디 적는다. 르아브르에서 이처럼 줄리에뜨 가까이 머물어 있다는 것이 도저히 견딜 수 업었다. 간밤에 너와 헤어진 후 사잠프톤 행 배표를 샀다. 런던의 S 집에서 방학을 보낼 셈이야. 에꼴르에서 다시 만나자. 인간의 무든 도움이 한꺼번에 나를 저버렸다. 고통밖에 남지 않은 이 체류를 단축하고 나는 개학이 되기 앞서 빠리로 돌아왔다. 나는 하느님에게로, '모든 참 된 은혜, 완전한 혜택을 주시는'하느님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나의 온갖 고행도 하느님에게 바쳤다. 나는 알리싸도 또한 하느님에게서 안식처를 구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녀도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 알리싸의 편지와 내가 쓴 답장 외에는 이렇다 할 별다른 일 없이 명상과 공부의 긴 세월이 흘렀다. 나는 그녀의 편지를 모두 간직해 두었다. 이제부터 희미한 내 추억을 이 편지들을 참고하며 더듬어 갈 생각이다. 이모를 통해서...처음에는 이모만을 통해 처음 며칠간을 줄리에뜨의 병세가 심해 모두들 얼마나 근심했는가를 알았다. 떠나온 지 이틀 만에 비로소 나는 알리싸로부터 다음과 같은 쪽지를 받았다. 그리운 제로옴, 좀 더 일찍 편지 못한 걸 용서해. 가엾은 줄리에뜨의 상태가 그럴 겨를을 주지 않았어. 네가 떠난 후 나는 거의 그 애 곁을 떠나지 못했어. 고모에게 이곳 소식을 전해 주십사고 당부했는데, 그렇게 하셨겠지. 그래서 알겠지만 사흘 전부터 줄리에뜨는 좀 나았어. 나는 벌써부터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지만 아직 마음이 놓이자 않아. 이제까지 로베르에 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그는 나보다 며칠 후에 빠리에 와서 제 누이들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오로지 그의 누이들 때문에 나는 마음내키는 이상으로 그를 보살펴 주었다. 그가 다니던 농업 학교가 쉴 때마다 나는 그를 돌봤으며 즐겁게 해주려고 애썼다. 내가 알리싸나 이모에게 감히 물을 수 없던 일도 그를 통해 알았다. 에뜨와르 떼씨에르는 줄리에뜨의 병세를 알아보려고 꾸준히 찾아왔으나 로베르가 르아브르를 떠날 때까지는 줄리에뜨는 아직 그를 만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떠나온 이래로 줄리에뜨는 자기 언니 앞에서 항구 무언을 고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얼마 안 있어 나는 이모를 통해, 내가 예측하기로는 알리싸가 곧 깨어지기를 바랐던 줄리에뜨의 약혼은 줄리에뜨 자신이 하루 바삐 공식적인 것으로 해주길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충고도 명령도 애원도 소용이 없게 된 이 결심은 그녀의 가슴에 아로새겨졌고, 그녀의 눈을 가렸고, 그녀를 침묵 속에 가두었다. 세월이 흘렀다. 하긴 나도 그녀에게 무엇이라 써야 할지 몰랐지만 알리싸로부터는 너무나 실망적인 쪽지밖에는 받지 못했다. 짙은 겨울 안개가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학업도, 그리고 나의 사랑과 신앙의 모든 열정도, 아아! 가슴으로부터 어둠과 추위를 털어내지는 못했다. 세월이 흘렀다. 느닷없이 찾아든 어느 봄날 아침, 그때 마침 르아브르에 없었던 이모에게 부쳐 온 알리싸의 편지를 이모가 내게 전해 주었다. 그 편지 가운데 이야기를 밝혀 줄 수 있는 몇 부분을 여기에 적는다. ...제가 온순하다고 칭찬해 주세요. 고모님이 시키신 대로 떼씨에르 씨를 만났어요. 그 분과 한참 이야기 했어요. 나무랄데 없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또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결혼이 제가 처음 두려워했던 것처럼 불행하게 되진 않으리라는 것도 거의 믿게 될 정도였어요. 확실히 줄리에뜨는 그 분을 사랑하지 않아요. 하나 제가 보기에는 그 분은 한 주일 한 주일 점점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는군요. 그 분은 사정도 잘 알고 줄리에뜨의 성격도 잘 파악하고 계셨어요. 그런데다 그 분은 줄리에뜨에 대한 자기 사랑의 능력에 자신을 갖고 자신의 꾸준한 마음이 반드시 모든 것을 극복하고 말 것이라 확신하고 계세요. 말하자면 줄리에뜨에게 홀딱 반하신 거죠. 정말 제로옴이 그처럼 동생을 돌봐 주는 데 대해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일종의 책임감에서 그렇게 해주고 있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의 성격과 로베르의 성격은 퍽 다르니까요--그리고 아마도 저를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 그러는 것 같아요--하지만 수행할 의무가 벅찰수록 의무는 영혼을 가꾸고 향상시켜 준다는 것을 그는 이미 터득했을 거예요. 아주 지고한 생각이죠. 큰조카딸의 이런 이야기를 너무 웃지 마세요. 왜냐하면 줄리에뜨의 결혼을 좋은 일로 바라보도록 힘쓰는 저를 받쳐 주고 도와 주는 것이 바로 이러한 생각이기 때문이에요. 그처럼 살뜰하게 염려해 주시니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고모님, 하지만 제가 불행하다고는 생각지 말아 주세요. '저는 오히려 그 반대예요.'라고 말씀 드릴 수 있어요. 줄리에뜨를 휩쓸고 간 시련이 제 마음 속에서 그 반동을 일으켰기 때문이에요. 잘 이해하지도 못한 채 되풀이해 읽던 성경 말씀이 갑자기 이해가 되었어요. '인간을 믿는 자는 불행하니라', 이 말씀은 제가 성경에서 찾아내기 훨씬 전에 제로옴이 아직 열 두 살도 채 못되고 제가 열 네 살이 되던 해 제로옴이 제게 보내 준 자그마한 크리스마스카드에서 읽은 적이 있어요. 그 카드에는 그 당시 저희들에게도 퍽 아름다워 보였던 꽃다발 곁에 꼬르네이유의 다음과 같은 주석시가 적혀 있었어요. 오늘의 사바 세계로부터 나를 주께로 인도해 올리는 힘은 어떤 불가항력의 매력인가? 인간의 무리 위에 주추를 세우는 자는 불행하리라. 솔직히 말씀드려 저는 이 시구보다는 에레미야의 그 간결한 구절을 좋아합니다. 필경 제로옴도 그 당시에는 이 구절에 별다른 주의를 하지 않은 채 카드를 골랐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날마다 저희들을 동시에 하느님께로 접근시켜 주신 것을 하느님께 감사 드리고 있습니다. 고모님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생각하고 제로옴의 공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전처럼 긴 편지를 쓰지는 않겠어요. 제로옴에 대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제가 직접 그와 이야기 못하는 걸 보상 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하시겠죠? 자주 계속 쓰게 될까 두려워 이만 그치겠어요. 이번만은 너무 꾸중하지 말아 주세요. 이 편지를 읽고 나는 얼마나 숙고했는지 모른다. 나는 이모의 주착없는 참견"편지 속에서 알리싸가 잠깐 비친 이야기, 내게 침묵을 지킨 그 이야기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내게 이 편지를 전해 주도록 이모를 충동한 그 어색한 친절을 저주했다. 이미 내가 알리싸의 침묵을 견딜 수 없게 될 바에야, 아! 그녀가 이젠 내게 하지 않는 말을 다른 사람에게 써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차라리 모르게 내버려 두는 편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그러고 보니 모두가 짜증나는 일 뿐이었다. 자기와 사이의 사소한 비밀 그처럼 쉽사리 이야기하다니. 게다가 그 자연스런 어조, 태연한 모습, 진지한 태도, 쾌활한 문맥.... "그게 아니라니까. 네게 보낸 편지가 아니라는 사실 외엔 화낼 건더기가 아무것도 없는 거야." 하고 아벨이 말했다. 그는 하루하루 내 생활의 짝이었고 성격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또는 오히려 그 때문에 아벨에게만은 나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외로울 때문 약해지는 마음, 남의 동정을 구하고 싶은 슬픈 마음, 스스로에 대한 불신임, 그리고 내가 곤란한 처지에서도 그의 충고에 대하여 지니고 있는 신뢰의 마음에서 언제나 나는 그의 도움을 바라는 것이었다. "이 편지나 좀 검토해 보자!" 그는 편지를 자기 책상 위에 펴면서 말했다. 이미 나는 사흘 밤을 분한 마음으로 보냈으며 그 분노를 나흘이나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아벨이 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 나도 자연히 끌려들어갔다. "줄리에뜨와 떼씨에르의 문제는 사랑의 불길 속에 내던져 버리자, 은? 사랑의 불길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너나 나나 잘 알지 않아? 그렇구말구! 떼씨에르는 그 불길 속에 뛰어들어 타죽는 나비 격이지...." "그런 이야긴 그만 두자." 나는 그의 농이 귀에 거슬려 말했다. "나머지 문제나 이야기하자." "나머지 문제?" 하고 그는 말했다. "나머지 문제야 모두 네게 관한 거지. 멋대로 한탄하려무나! 편지 속의 단 한 줄, 단 한 마디에도 너의 마음이 울렁대지 않는 게 있어? 편지의 사연 하나하나가 너를 향한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지. 펠리씨 아주머니는 이 편지를 네게 전해 줌으로써 결국은 원 수신인에게 돌아오게 한 것 뿐이야. 알리싸가 마치 최악의 경우에 다다른 것처럼 그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에게 편지를 부쳤던 것은 모두가 네 탓이야. 도대체 네 이모에게 꼬르네이뉴의 시구가 무슨 아랑곳이람. 말이 났으니 말이지, 실은 알리싸는 라신느의 시를 빌어서 너와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알리싸는 이 모든 것을 바로 너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앞으로 두 주일 내에 이만큼 길고 자연스럽고 마음에 드는 편자를 알리싸가 네게 쓰도록 하지 못한다면 넌 바보야...." "그녀는 도무지 그러질 않는걸!" "그건 네게 달려 있는 문제야. 내 견해를 좀 들어볼 테야? 이제부터 당분간은 너희들 사이의 사랑이나 결혼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말아. 동생의 그 일이 있은 다음에 알리싸가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일이라는 걸 너는 모르겠니! 남매간의 정이라면 면에서 공작을 해봐. 그리고 기왕 네가 그 바보 녀석을 돌봐 줄 참을성이 있는 바에야 알리싸에게는 꾸준히 로베르 이야기만 써보내. 계속해서 알리싸의 머리만 즐겁게 해줘. 그렇게 되면 나머지 일은 잘 될 거야. 아아! 편지를 써야 될 게 나라면..." "너는 그녀를 사랑할 자격이 없어!" 그러면서도 나는 아벨의 견해를 따랐다. 그러자 과연 알리싸의 편지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줄리에뜨의 행복까지는 안되더라도, 그녀의 처지가 결정되기 전에는 알리싸로부터 진정한 기쁨이나 온갖 것을 거리낌없이 내게 맡겨 버릴 마음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알리싸가 보내 주는 그 동생의 소식은 차츰 좋아졌다. 줄리에뜨의 결혼은 7월에 거행된다는 것이었다. 그날에는 아벨과 나는 학업 때문에 못 올 줄로 생각한다고 알리싸는 써 보냈다. 나는 우리가 식에 참석하지 않는 편이 더 좋을 것으로 그녀가 판단하고있다는 걸 짐작했다. 그래서 시험을 핑계삼아 우리는 축하의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결혼식이 있는 지 약 두 주일 후에 다음과 같은 알리싸의 편지를 받았다. 그리운 제로옴 어제 우연히 네가 준 아름다운 라신느의 시집을 펴보다가 벌써 근 1년간이나 내 성경에 간직하고 있는 네 조그마한 크리스마스카드 위에 적힌 몇 줄의 시구를 발견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오늘의 사바 세계로부터 나를 주께로 인도해 올리는 것은 어떤 불가항력의 매력인가? 인간의 무리 위에 주추를 세우는 자는 불행하리라. 나는 그것이 꼬르네이유의 주석시에서 발췌된 것인 줄 알았지만 솔직히 거기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었어. 헌데 아주 정신적인 그 제4곡을 읽어 나가다가 네게 전해 주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구절을 찾아냈어. 그 책 여백에 네가 마구 적어 놓은 첫 글자들로 미루어 너는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지만 (사실 그녀에게 알려 주고 싶은 좋은 구절이 있을 때마다 나는 내 책이나 그녀의 책에 그녀 이름의 글자를 써넣은 버릇이 있었다) 상관 없어. 내가 그것은 즐거워서 일부러 옮겨 쓰는 거니까. 나는 내가 찾아냈다고 생각한 것이 실은 네가 가르쳐 준 것이라는 걸 알게 되자 다소 약이 오르긴 했지만 너도 나처럼 이것을 좋아했구나 하는 즐거움 앞에서 이 어리석은 생각은 사라져 버렸어. 그것을 여기서 다시 옮겨 쓰고 있노라니 너와 함께 그것을 읽는 것 같애. 불멸하는 지혜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인간의 아들들이여, 너희 심려로 얻은 열매는 무엇이뇨? 헛된 영혼들이여, 그 무슨 과오로 너희 혈관의 깨끗한 피로 영양을 주는 빵이 아니라, 더욱 허기지게 하는 그림자를 그토록 번번이 사들이느뇨? 내가 너희에게 권하는 이 빵은 천사들의 양식이니 주께서 먼저 밀을 고르시어 손수 만드신 빵임을 알라 이 감미로운 빵은 너희가 뒤쫓는 세상 무리들의 식탁 위에는 오르지 않는 빵임을 알라 나를 따르는 자에게 이 빵을 주리라 오라, 살기를 원하는 자 잡으라 먹으라 그리고 살지어다. .... 복되이 갇혀 있는 영혼은 속박되어 평화를 찾으며 영원히 마르자 않는 힘찬 샘물로 목을 축이도다. 누구나 와서 마실 수 있는 물 그 물은 뭇 사람을 부르고 있도다 그러나 우리가 미친 듯이 찾아다니는 물은 진흙투성이 샘물이거나 언제나 흘러가 버리는 거짓된 웅덩이 뿐이로다 얼마나 아름다워! 제로옴, 얼마나 아름다워! 정말 나만큼 너도 이 시가 아름답다고 생각할까? 내 책에 있는 주를 보면 도말르 양이 부르는 이 송가를 듣자 맹뜨농 부인은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고 그 일부를 되풀이시켰대. 나도 이젠 이걸 외었는데 아무리 읊어도 싫증이 나지 않아. 그저 한 가지 섭섭한 일은 네가 이 송가를 읽는 걸 듣지 못했다는 것 뿐이야. 신혼 여행중인 부부에게는 계속 반가운 소식 뿐이야. 찌는 듯한 더위에도 줄리에뜨가 베이욘느와 비아릿쯔에서 얼마나 즐겼는지 너도 이미 알고 있지. 다음에 그들은 퐁따라비에를 거쳐 뷔르고스에 머물렀다가 피레네 산맥을 두 번이나 넘었대. 지금 몽세라에서 줄리에뜨가 보낸 감격에 찬 편지가 왔어. 아직 열흘간은 바르셀로나에 머물렀다가 에뜨와르의 포도 수확 일로 9월 이전에 님므로 돌아올 작정이래. 일주일 전부터 아버지와 나는 퐁궤즈마르에 있어. 내일이면 미스 아슈뷔르똥이 오실 것이고 로베르도 나흘 후에는 오게 되어 있어. 가엾게도 그 애가 시험에 실패했다는 것은 너도 알고 있겠지. 어려웠다기보다는 시험관이 워낙 얄궂은 문제들을 내는 바람에 그만 어리둥절했던 모양이야. 네가 편지한 것도 있고 해서 나는 그 애가 준비가 부족했다고는 생각지 않아. 단지 그 시험관은 학생들을 그처럼 골탕먹이는 에 재미를 느끼는 것 같애. 너의 성공에 대해서는 내가 새삼스럽게 축하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네겐 당연한 이야기야. 나는 그토록 너를 믿고 있는 거야. 제로옴! 네 생각만 하면 내 가슴은 부풀어올라. 전에 이야기하던 그 연구를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어? ...여기 정원에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 하지만 집안은 텅 빈 것 같애. 올해는 노지 말라고 당부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날이면 날마다 마음속으로 이 말을 되풀이 하고 있어. 그처럼 오랫동안 너를 못보고 지내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가끔 나도 모르게 너를 찾을 때가 있어. 책을 읽다가도 문득 고개를 돌리곤 해... 꼭. 다시 편지를 계속해. 밤이야, 모두가 잠들었다. 열려진 창 앞에서 지금 늦도록 네게 편지를 쓰고 있어. 정원은 향기로 찼고 바람도 따스해. 우리가 어렸을 때 퍽 아름다운 것을 보거나 들었을 때 바로 '감사합니다. 하느님. 이런 것을 만들어 주셔서'라고 했던 것이 생각나? 오늘 밤 나는 진정으로 '감사합니다, 하느님, 이처럼 아름다운 밤을 만들어 주셔서!'라고 생각했어 그러자 나는 갑자기 네가 내 겉에 있었으면 했고, 네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을 느꼈어. 너무도 사무치게 느껴서 아마 너도 느꼈을 거야. 그래 편지에서 흔히 '고귀하게 태어난 영혼에 있어서는'감탄은 감사와 혼동된다고 너는 썼지. 아직도 얼마나 쓸 것이 많은지 몰라!... 지금 나는 줄리에뜨가 써보낸 그 빛나는 나라를 생각하고 있어. 나는 좀 더 넓고 좀 빛나고 좀 더 쓸쓸한 다른 나라를 생각하고 있어. 어느날 어떻게인지도 모르지만 알지 못하는 신비로운 나라를 우리가 보게 되리라는 이상한 신념이 내 가슴속에 깃들어 있어... 내가 얼마나 기쁨의 소용돌이 속에서 얼마나 사랑에 흐느끼면서 이 편지를 읽었는지는 쉽사리 짐작이 갈 것이다. 뒤이어 딴 편지들도 왔다. 물론 알리싸는 퐁궤즈마르에 내가 가지 않은 것을 고마워 했고 그 해에도 그녀를 만나러 오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나를 보지 못해 섭섭해 했고 이제는 내가 곁에 있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듯 편지지마다 나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나오고 있었다. 거기에 견뎌 낼 힘을 나는 어디서 얻었을까? 필경 아벨의 충고와 갑자기 나의 기쁨을 헛되게 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또 마음이 끌려들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또 마음이 끌려들지나 않을 까 하는 자연적인 긴장감에서였을 것이다. 그 뒤에 온 편지들 중에서 이 이야기와 연관이 있는 것을 전부 옮겨 쓰겠다. 그리운 제로옴 네 편지를 읽노라면 온몸이 기쁨으로 녹아내리는 것 같애. 오르비에또에서 부친 편지에 답장하려던 차에 삐루즈와 아씨지에서 쓴 편지를 동시에 받았어. 마음은 여행 중이고 몸만 이곳에 있는 것 같애. 정말 나는 너와 함께 움부리아의 하얀길을 걷고 있어. 아침이면 함께 길을 떠나고 아주 새로운 눈으로 동트는 걸 바라보고...정말 꼬르또느의 언덕 위에서 나를 불렀니? 그래 나도 들었어... 아씨지 위의 산에서는 몹시 목이 말랐어! 그때 프란체스코회 수도사가 준 한 컵의 물이 얼마나 달았는지! 오, 제로옴! 나는 너를 통해서 모든 것을 보고 있어. 성 프란체스코에 대해서 네가 써 보내준 이야기는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그래, 마음의 해방이 아니라 마음의 간격을 찾아야 해. 마음의 해방이란 언제나 가증스러운 오만이 뒤따르게 마련이니까. 야심은 반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봉사하기 위해 사용해야 될 거야. 님므의 소식은 너무나 좋아서 이제는 나도 즐거움에 몸을 맡겨도 좋다고 하느님이 허락해 주신 것 같아. 올 여름의 단 한 가지 근심거리는 아버지 일이야. 내가 여러 가지로 마음을 쓰지만 아버지께선 늘 쓸쓸한 표정이야. 아니, 내가 곁에서 떠나 혼자 계시게 되면 당장에 쓸쓸해 하시고 마음을 돌려 드리기가 점점 더 힘들어져.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의 모든 즐거운 속삭임도 아버지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됐어. 이제는 거기에 귀를 기울이려 하시지 않아. 미스 아슈뷔르똥은 안녕하셔. 네 편지를 늘 두 분께 읽어 드리고 있어. 너의 편지가 올 때마다 사흘간을 그 이야기로 보내. 그러다 보면 또 다음 편지가 오고, ...로베르는 그저께 이곳을 떠났어. 나머지 방학을 R이라는 친구 집에서 보낼 생각인데 그 아버지가 모범 농장을 경영한 대. 확실히 이곳 생활은 그 아이에게도 유쾌하지 못해. 그 애가 떠나겠다고 말했을 때 나도 그의 계획에 찬성하는 수밖에 없었어. ...할 말은 태산 같애. 끝없이 이야기하고 싶어! 때로는 말이나 분명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때도 있어. 오늘 저녁은 꿈꾸듯이 쓰고 있어. 어떤 무한한 부를 주고받고 있는 듯한 숨막히는 느낌만을 품은 채 말이야. 어떻게 우리는 그처럼 긴 몇 달을 서로 침묵하고 지낼 수 있었을까? 우리는 동면을 했던 모양이지? 오! 그 무서운 침묵의 겨울이 영원히 끝나기를! 너를 다시 찾고부터는 생활도 생각도 우리의 영혼도 모두가 내게는 한없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풍요해 보여. 9월 12일 피사에서 한 편지는 잘 받았어. 여기도 아주 찬란한 날씨야. 노르망디가 그처럼 아름다운 것도 처음인 것 같애. 그제는 목표도 없이 아무 데나 발길 닿는 대로 한참동안 벌판을 거닐었지. 태양과 기쁨에 함빡 취했음인지 돌아왔을 때도 피곤하기보다는 흥분한 상태였어. 타는 듯한 태양 아래 짚더미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구태여 내가 이탈리아에 있다고 생각지 않아도 온갖 것이 아름다워 보였어. 그래, 네가 말하듯이 대자연의 '은은한 찬가' 속에서 내가 듣고 깨달은 것은 환희에로의 권유야. 그 권유는 새들의 노래마다 들려 왔어. 그것을 송이송이 꽃향기 속에서도 맡았어. 지금 나는 유일한 기도의 형식으로 예찬이란 것밖에는 이해할 수 없게 되었고, 성 프란체스코와 함께 주여! 주여! 하며 그것만을 형언할 수없이 사랑에 가득 찬 마음으로 되풀이하고 있어.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식장이가 되어간다고 걱정하진 마. 요즈음 책을 많이 읽었어. 며칠간 비가 온 덕택으로 나는 예찬을 마치 책 속에 접어 넣은 것 같애. 말브랑슈를 읽고 나서 곧 라이프니쯔의 '클라르크에의 편지'를 읽기 시작했어. 그리고 좀 휴식할 생각으로 셸리의 '첸치'를 별다른 감흥도 없이 그냥 읽었어. '라 쌍시띠브'도 읽고. 혹 네가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지난 여름 함께 읽었던 키이츠의 오드 네 편과 바꾼다면 셸리와 바이런 전부를 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애. 마찬가지로 보들레르의 소네트 몇 편과 위고 전부를 바꿀 수도 있을 것 같애. 위대한 시인이란 칭호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 가장 중요한 것은 순수한 시인이라고 생각해. 아, 모든 걸 내가 알고 이해하고, 사랑하도록 해준 데 대해 네게 감사해. ...아니, 서로 만나는 며칠 동안의 즐거움 때문에 여행을 단축시키지는 말아. 아직은 만나지 않는 편이 정말 좋을 것 같애. 나를 믿어 줘. 네가 내 곁에 있다 하더라도 이 이상으로 너를 생각할 순 없을 거야. 너를 괴롭히고 싶지는 않지만 네가 내 곁에 있기를 바라지 않게 되었어. 솔직히 말해서 네가 오늘 저녁에 온다는 걸 알면 나는 달아나 버릴 거야. 이 마지막 편지를 받은 지 얼마 안돼서, 이탈리아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는 징집되어 낭시로 이송되었다. 그 곳에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나 나는 혼자 있게 된 것이 기뻤다. 그것은, 그녀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내 긍지로서나 또 알리싸에게 있어서나 이렇듯 그녀의 편지만이 나의 유일한 안식처이며 또 그녀에 대한 추억만이 롱사르의 말처럼 '나의 유일한 마음'이라는 사실임을 고적함으로써 한층 뚜렷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우리에게 과해진 엄격한 군 규율도 쉽게 견디어 냈다. 나는 모든 일에 마음을 단단히 가졌다. 알리싸에게 쓰는 편지에도 함께 있지 못함을 섭섭하게 여긴다는 말밖에 쓰지 않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렇게 오래 헤어져 있는 중에도 우리들의 용기에 어울리는 시련을 찾아내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결코 불행하지 않는 너', 혹은 '낙담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너'라고 알리싸는 써보냈다. 이러한 그녀의 말에 증거를 보이기 위해 무엇인들 내가 견디지 못하였으랴? 우리가 헤어진 지 거의 1년이 지났다. 그녀는 그런 것을 생각지도 않는 것 같았고, 단지 이제부터 기다리기 시작한다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그것을 비난했다. 이탈리아에서도 나는 함께 있었지 않아? 나는 하루도 네 곁을 떠나지 않았는데 그것도 모르다니! 지금 잠시 너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을 이해해 줘! 그리고 이것이, 단지 이것만이 내가 '떨어져 있다'고 부르는 거야. 정말이지 나는 군인이 된 너를 상상해 보려고 애써. 하지만 도무지 그렇게 안 돼. 그저 저녁이면 베따 거리의 조그마한 방에서 글을 쓰고 있거나 책을 읽고 있는 너를 상상해 볼 따름이야. 한데 그것마저도 까마득해. 1년 후 퐁궤즈마르나 르아브르에서 너를 다시 볼 것 같애. 1년! 이미 가버린 날들을 세는 건 아냐. 나의 희망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미래의 그 날을 주시하고 있어. 정원 안쪽의 낮은 흙담, 그 밑에 국화가 바람을 피해 피어 있고, 그 위로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가 돌아다니던 그 낮은 흙담이 생각나? 줄리에뜨와 너는 곧장 천국으로 걸어가는 회교도처럼 겁도 없이 걸어다녔지? 그런데 난 몇 걸음 내딛기만 하면 현기증이 났고 그때마다 네가 밑에서 소리쳤지. "발밑을 보지 말래도! 앞을 봐! 그대로 걸어! 목표를 정하고!" 마침내--소리치는 것보다 그편이 더 좋았어--넌 담 저쪽 끝에 올라와서 나를 기다려 주었지. 그러면 난 떨리지가 않았어. 현기증도 사라져 버리고! 단지 너만을 바라보고 너의 벌린 팔 속으로 달려들곤 했지.... 너를 믿는 마음이 없다면 제로옴, 나는 어떻게될까? 네가 강하다는 것을 나는 늘 느껴야 돼. 약해지지 말아. 일종의 도전적인 기본에서, 우리의 기다림을 짐짓 연장하면서, 또한 불완전한 재회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 해서 설날까지 며칠간의 휴가를 내어 빠리의 미스 아슈뷔르똥 곁에서 보내기로 우리는 합의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러한 편지들을 전부 옮겨 쓰고 있는 건 아니다. 2월 중순쯤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그저께 뤼 드 빠리를 걷다가 M 서점 진열대에서 전에 네가 알려 주긴 했지만 그 사실에 대해서는 믿을 수가 없었던 그 아벨의 책이 공공연히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퍽 놀랐어. 침을 수가 없었어. 그래 서점으로 들어갔어. 그렇지만 그제목이 너무나도 야릇해서 점원에게 감히 말할 수가 없어 주저했지. 아무 다른 책이나 사들고 서점을 나와 버릴까 하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다행히도 카운터 옆에 '미태' 한 더미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어 한 권을 뽑아 쥐고는 입도 열지 않고 백 수우를 던졌어. 아벨이 그 책을 내게 보내 주지 않은 데 대해 감사해. 책장 넘기기가 면구스러웠어. 그 책 자체 때문이 아니라--결국 그 책에서 나는 야비성보다도 우둔성을 더 많이 발견했어--아벨이, 너의 친구 아벨 보띠에가 이 책을 썼다는 사실이 면구스러웠어. '르 땅' 지의 평론가가 말한 그 '위대한 소질'을 찾아보느라 한 장 한 장 넘겨 보았으나 헛수고였어. 아벨의 이름이 곧잘 화제에 오르는 이곳 작은 르아브르에서는 이 책에 대한 평판이 퍽 좋다는 것을 알았어. 고칠 길 없는 이 경박을 정묘니 우아니 하고 부르는 것을 듣고 있어. 물론 나는 조심을 하고 있지. 이 독후감도 단지 네게만 이야기하는 거야. 처음에는 무척 슬퍼하던 보띠에 목사님도 이제는 그 책 속에 무슨 자랑거리라도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어. 그 주위 사람들도 누구나 목사님께 그것을 믿게 하려고 애쓰고 있어. 어제만 해도 쁠랑띠에 고모댁에서... 고모님이 갑자기, "아드님이 그렇게 성공을 하셨으니 기쁘시겠습니다, 목사님." 하니까 목사님은 좀 당황해서 이렇게 대답하셨어. "뭘요, 아직 그렇게까지는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자 "하지만 꼭 그렇게 생각되실 걸요. 그렇게 생각되실 거예요." 하고 고모님이 말씀하시자, 물론 거기에 악의는 없었지만 그 어조가 워낙 고무적이어서, 모두 웃기 시작했고 목사님도 웃으셨어. 볼바아르의 어느 극장에서 상연하려고 그가 준비하고 있다는 말도 들리는데 벌써부터 신문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듯한 '신아벨라아르'가 상연되면 무슨 꼴이 될까! 불쌍한 아벨! 이제 바로 그가 원하고 또 만족할 성공일까! 어제 '마음의 위안'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어. '참되고 영원한 영광을 진실로 바라는 자는 일시적인 영광에 마음 속에서 경멸하지 않는 자는 스스로 성스러운 영광을 바라지 않는 자이니라'. 그걸 읽고 나자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 "감사합니다, 하느님. 어떠한 지상의 영광과도 비길 수 없는 이 성스러운 영광을 위해 제로옴을 선택해 주셔서". 몇 주, 몇 달이 단조로운 근무 속에서 흘러갔다. 그러나 늘 추억이나 희망에만 마음을 썼기 때문에 세월이 느리다는 것, 시간이 길다는 것을 별로 느끼지 못했었다. 삼촌과 알리싸는 6월에 해산할 줄리에뜨를 보러 님므로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좀 좋지 않은 소식이 와서 그들은 출발을 서두르게 됐다. 르아브르로 보낸 네 마지막 편지는 우리가 막 그곳을 떠난 뒤에 도착했어. 8일이나 지나서야 이곳에서 받았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한 주일 내내 나는 뭔가 허전하고 무섭고 불안하고 위축된 속에서 지냈어. 오오! 제로옴, 네가 있어야 난 참 된 나 자신일 수 있고 또 그 이상일 수 있어. 줄리에뜨는 다시 건강해졌어. 오늘일까 내일일까 하고 해산을 기다리는 중이야. 별 걱정은 없어. 오늘 아침 내가 네게 편지 쓴다는 걸 그 애도 알고 있어. 우리가 애그비이브에 도착한 다음날, "제로옴은 어떻게 됐어, 여전히 편지해?" 하고 그 애가 묻길래 속일 수 없고 해서 말을 해줬더니, "이번에 편지할 땐 이렇게 말해 줘...." 하고 잠시 망설이다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이젠 다 나았다고 말야." 하고 말했어. 언제나 쾌활한 그 애의 편지를 받으면서 나는 혹시 그 애가 짐짓 행복을 가장하고 있지나 않을까, 또 자기 자신도 그러한 기분에 잠겨든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했었어. 그런데 오늘에 와서 그 애가 행복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 애가 꿈꾸던 것, 그 애의 행복을 좌우한다고 생각하던 것과는 너무나 달라졌어. 아! 사람들이 행복이라 부르는 것은 어쩌면 이다지도 영혼과 밀접한 것일까! 행복을 외적으로 형성하는 듯한 요소는 어쩌면 그다지도 부질없는 것일까? 벌판을 혼자 거닐면서 생각한 숱한 일들을 네게 알리고 싶지는 않아. 단지 내가 그곳을 거닐며 놀란 것은 이제는 나 자신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야. 줄리에뜨가 행복한 것으로 만족해야 할 텐데... 어째서 내 마음은 억제할 수 없는 알지 못할 우울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내가 느끼는, 적어도 내가 두 눈으로 바라보는 이 고장의 아름다운 풍경도 그저 내게 알 수 없는 슬픔을 더해 줄 따름이야. 네가 이탈리아에서 내게 편지해 주던 무렵에는 너를 통해 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었어. 그런데 이제 와서는 너와 함께 보지 않는 온갖 것은 모두 내게 네게서 훔치고 있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결국 퐁궤즈마르나 르아브르에 있을 때는 울적한 나날에 대비하느라고, 견디어 내는 힘을 나는 기르고 있었어. 그런데 이곳에 와서는 그것이 아무 소용도 없어졌어. 그리고 그것이 아무 쓸모가 없게 됐다고 느끼니 계속 불안한 상태야. 이 고장 사람들이나 이 고장 즐거움에도 기분이 상해. 내가 없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지도 몰라. 아무래도 전의 내 기쁨 속에는 어떤 오만심이 깃들어 있었던가 봐. 왜냐하면 이 낯선 지방의 즐거운 분위기 속에 싸여서 내가 느끼는 것은 일종의 굴욕감이니 말야. 이곳에 온 후에는 거의 기도도 드리지 못했어. 이제 하느님께 선 옛날 그 자리엔 계시지 않으시리라는 어린애 같은 느낌이 들어. 잘 있어. 총총히 펜을 놓아야 되겠어. 이런 모독적인 말, 나의 나약한 마음, 슬픔이 부끄럽고, 또 그것을 고백한다는 것이 그리고 만일 우편 배달부가 오늘 저녁에 가져가지 않는다면 찢어 버릴 것 같은 이런 이야기를 써 보낸다는 것이 모두 부끄럽기만 해. 그 뒤에 온 편지는 그녀가 대모가 될 조카딸의 출생, 줄리에뜨와 삼촌의 기쁨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뿐, 자신의 기쁨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러자 퐁궤즈마르에서 부친 편지들이 오기 시작했다. 줄리에뜨도 7월에 그곳에 왔다. 에뜨와르 씨와 줄리에뜨는 오늘 아침에 떠났어. 무엇보다도 그 갓난애가 떠나서 서운해. 여섯 달 후에 다시 보면 그 몸집도 퍽 달라지겠지. 지금까진 그 애의 동작을 하나도 빼지 않고 보아 왔어. 생성이란 언제나 퍽 신비롭고 놀라운 거야. 우리가 평소에 주의만 하면 놀라운 일을 더 많이 보게 될 거야. 희망에 가득 찬 그 잠든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지 몰라. 발전이란 그 무슨 이기심, 자기 만족, 선에 대한 갈망의 결핍 때문에 그처럼 빨리 정지되고, 또 모든 생물이 그리도 멀리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머물러 버리는 것일까? 오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좀 더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면, 좀 더 가까이 가기를 원한다면 얼마나 마음의 격려를 받을 것인가! 줄리에뜨는 퍽 행복해 보여. 나는 그 애가 피아노와 독서를 그만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슬펐어. 하지만 에뜨와르 떼씨에르 씨는 음악이나 독서에는 별로 취미가 없어. 확실히 남편이 따라 오지 못하는 즐거움을 찾지 않는 것은 줄리에뜨의 현명한 처사 같애. 반대로 줄리에뜨는 남편이 하는 일에 흥미를 갖고 또 그이도 자기가 하는 모든 사업을 그 애에게 가르쳐 주고 있어. 금년엔 그 사업도 꽤 번창하고 있어. 다 결혼을 인해 르아브르에 많은 고객이 생긴 덕택이라고 그이는 농담을 하지. 이번에 그이가 사업 관계로 여행을 하게 될 때 로베르도 따라 갔어. 에뜨와르는 여러 가지로 그 애를 돌보아 줄 뿐 아니라 그 애의 성격도 잘 알고 있다고 하면서 그 애가 그런 일에 정말 취미를 갖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아버지는 훨씬 좋아지셨어. 딸이 행복해진 걸 보니 젊어지시는 모양이야. 농장 일, 정원 일에 다시 흥미를 느끼시고 되었고 또 미스 아슈뷔르똥과 셋이서 전에 시작했다가 떼씨에르씨 가족이 와서 중단했던 소리를 높여 읽던 독서를 다시 계속하자고 때로는 말씀하셔, 두 분에게 휴브너 남작의 여행기를 읽어 드리고 있는데 나도 퍽 재미를 느끼고 있어. 나도 이제는 독서할 시간을 더 많이 가질 거야. 하지만 네게 서 무슨 지시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 오늘 아침 몇 권의 책을 하나하나 들춰 보았지만 마음에 드는 것은 한 권도 없었어. 이 무렵부터 알리싸의 편지는 차츰 혼란되고 절박해졌다. 여름이 끝날 무렵 다음과 같은 편지가 왔다. 네가 걱정을 할까 두렵기는 하지만 내가 얼마나 너를 기다리고 있는가를 말해야만 하겠어. 너를 다시 만날 때까지의 하루하루가 짐이 되어 무겁게 나를 누르고 있어. 아직도 두 달! 지금까지 너와 떨어져 지내 온 기간보다도 더 긴 것 같애! 이 가다리는 마음을 좀 잊어 보려고 기울이는 모든 노력이 우스꽝스러운 일시적인 것으로만 여겨져서 이제 나는 아무것에도 노력을 기울일 수가 없게 됐어. 책에서도 이제는 아무런 힘이나 매력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산책도 재미가 없어. 대자연 전체가 그 위력을 잃은 채 정원도 퇴색되고 향기를 잃은 것 같애. 오히려 너의 그 고역, 의무적이고 강제적인 그 훈련, 언제나 너로부터 너 자신을 빼앗아 너를 피곤하게 하고 하루하루를 빨리 지나가게 하며 저녁이 되면 피곤에 지친 너를 잠들게 하는 그 고역이 내게는 부러워. 훈련에 관해서 써보낸 감동적인 너의 편지가 나를 사로잡고 기상 나팔 소리에 벌떡 튀어 일어나곤 했어. 확실히 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 네가 이야기하는 그 가벼운 도취, 아침 잠을 깨면서 느끼는 기쁨, 그 절반쯤 황홀한 경지, 이 모든 것을 나는 아주 손쉽게 상상할 수 있어. 새벽의 얼어붙은 눈부신 광명 속에서 말제빌르의 그 고지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얼마 점부터 몸이 좀 불편한 것 같아. 아니, 대수로운 건 아니야. 단지 너를 좀 지나치게 기다리는 탓이라 생각해. 그리고 여섯 주일 뒤에 이것이 마지막 편지야. 제로옴, 너의 돌아올 날까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리 늦어지지야 않겠지. 나는 퐁궤즈마르에서 너를 만나고 싶었으나 기후가 나빠지고 추워져서 아버지는 자꾸 시내로 돌아가자고 하셔. 지금은 줄리에뜨도 로베르도 없으니 얼마든지 집에 와서 머무를 수 있지만 너는 역시 펠리씨 고모도 그렇게 하는 걸 기뻐하시리라 생각되고. 다시 만날 날이 다가올수록 점점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어. 거의 두려움에 가까운 그러한 기분이야. 네가 돌아오기를 그처럼 기다렸는데 막상 네가 돌아온다니 두려워지는 것 같애. 이 이상 거기에 대해서 생각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어. 네가 누르는 초인종 소리, 계단을 올라오는 너의 발자국 소리를 상상하기만 해도 숨이 끊어지는 것 같고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아. 무엇보다도 내게서 어떤 말이 나오기를 기대해서는 안 돼. 내 과거가 거기서 끝나 버리는 것 같아. 그 너머 저쪽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내 삶이 정지된 듯.... 그로부터 나흘 후에, 다시 말하면 내가 제대하기 일주일 전에 극히 짧은 편지를 다시 한 통 받았다. 제로옴, 너무 오랫동안 르아브르에 머물러 우리들의 첫 재회의 기간을 길게 끌지 않기로 하려는 데는 절대 찬성이야. 지금까지 서로 편지에 쓴 것 외에 또 무슨 할 말이? 그러나 학교 등록 때문에 28일까지 빠리에 가야 한다면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가. 이틀밖에는 함께 있지 못한다고 섭섭히 생각지도 말아. 우리 앞에는 한평생이 있지 않아. @ff 6 우리는 쁠랑띠에 이모 댁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군 복무 탓인지 나는 갑자기 둔하고 어색해진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변했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헛된 인상이 우리 둘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으랴? 나는 그녀의 옛 모습을 이제는 완전히 찾아보지 못하지나 않을까 두려워서 처음에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아니, 우리를 어색하게 만든 것은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우리에게 강요하려는 약혼자끼리의 어리석은 역할, 우리 둘만을 한 자리에 남겨 두려는 친절, 우리 앞에서 물러나려는 그 친절이었다. "고모님, 정말 아무 상관없어요. 남이 들어서 어색할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어요." 알리싸는 이모가 물러나가고 수선을 피우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아니다! 그래도 그렇지 않은 거다! 난 너희들을 잘 알고 있어. 오랫동안 떨어져 있으면 자질구레하게 할말이 태산 같은 법이야." "정말이에요, 고모님. 나가시면 오히려 저희들이 쑥스러워져요." 그 목소리에는 노기마저 서려 거의 알리싸의 목소리 같지가 않았다. "이모님, 나가시면 저희는 한 마디도 이야기하지 않겠어요." 나는 웃으면서, 그러나 단둘이 남게 되면 어떻게 할까 하는 일종의 두려움에 살 잡혀 말했다. 그리하여 우리들 세 사람은 짐짓 쾌활한 척하는, 속된, 그리고 이면에는 각기 근심이 숨어 있으면서도 표면으로는 생기가 나는 듯한 그러한 이야기를 주고받곤 했다. 다음날은 삼촌이 점심에 청했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첫날 오후 그러한 희극을 끝마칠 수 있음을 다행으로 생각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헤어지고 말았다. 나는 식사 시간보다 훨씬 전에 갔으나 알리싸는 자기 친구 하나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알리싸도 그 친구에게 돌아가 달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 같았고 그 친구도 도무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 친구가 나가 버리고 단둘이 있게 되자 나는 알리싸가 점심을 같이 하자고 그 친구를 붙들지 않은 걸 짐짓 놀라는 척했다. 전날 밤 잠을 자지 못해 피곤했던 우리는 도무지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삼촌이 들어왔다. 삼촌도 이제는 많이 늙었구나 하고 내가 생각하고 있음을 알리싸는 눈치챘다. 삼촌은 귀가 어두워져 내 이야기를 잘 듣지 못했다. 그 때문에 나는 음성을 높여야 했고 따라서 내 이야기는 어설프게 됐다. 점심 식사 후에 미리 약속했던 대로 쁠랑띠에 이모가 마차로 우리들을 데리고 왔다. 이모는 우리들, 알리싸와 내가 돌아오는 도중 가장 아름다운 코오스를 걸어서 오도록 할 의도에서 오르쉐까지 태워다 주셨다. 계절에 비해서 날씨는 더운 편이었다. 우리가 걷게 된 언덕은 햇빛만 쬐고 아무런 운치도 없었다. 나무들은 잎이 져서 앉아 쉴 그늘도 없었다. 이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마차로 빨리 가야 되겠다는 생각에 우리는 걸음을 재촉했다. 두통이 나는 머리에서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질 않았다. 태연한 체하기 위해서, 혹은 그렇게 함으로써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나는 걸으면서 알리싸가 내게 맡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흥분한 데다가 빨리 걸어 숨이 가빠지고 침묵으로 어색해져서 우리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 귀에는 관자놀이가 뛰는 소리가 들렸다. 알리싸의 얼굴은 민망할 정도로 붉어 있었다. 이윽고 우리는 땀에 젖은 손을 잡고 있다는 어색함을 느껴 서로 손을 슬그머니 놓아 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너무나 서둘러 걸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야기 할 시간을 주려고 다른 길을 거쳐서 아주 천천히 몰고 온 이모의 마차보다 훨씬 먼저 네거리에 이르렀다. 우리는 언덕의 비탈에 앉았다. 갑자기 불기 시작한 찬바람에 몸이 오싹했다. 우리는 땀에 젖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모의 마차를 마중 가려고 일어섰다. 그러나 이모의 성가신 친절은 더 견디기 못해 눈에 눈물까지 글썽글썽해진 알리싸는 심한 두통이 난다고 말했다. 돌아오는 길엔 모두들 조용했다. 이튿날 잠이 깨자 몸이 무겁고 감기가 들어 아팠기 때문에 오후에야 뷔꼴랭 댁에 가볼 생각이 났다. 공교롭게도 알리싸는 혼자를 있지를 않았다. 펠리씨 이모의 손녀인 마들레느 쁠랑띠에가 거기 있었다. 나는 알리싸가 곧잘 그 애와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애는 며칠을 자기 할머니 집에서 묵고있던 참이었는데 내가 들어서자, "돌아갈 때 언덕으로 해서 가시거든 같이 올라가요." 하고 소리쳤다. 나는 무심코 승낙했다. 그래서 나는 알리싸와 단둘이 걷질 못했다. 그러나 이 귀여운 어린애가 어떤 면에서는 도움이 되기도 했다. 전날의 그 어색한 기분은 느끼지 않게 된 것이다. 우리 셋 사이에 이야기는 곧 쉽게 벌어졌고 내가 처음 염려했던 것처럼 쑥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내가, "잘 있어." 하고 인사를 하자 알리싸는 이상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다음날 떠난다는 사실을 그녀는 그때까지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더구나 얼마 안 있으면 또 만나리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잘 있어'라는 이별의 말이 어떤 서글픈 감을 자아내지도 않았다. 그러나 저녁 식사 후에도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나는 다시 시내로 내려가서 거의 한 시간을 헤매다가 뷔꼴랭 댁에 다시 갈 작정을 했다. 나를 맞으러 나온 것은 삼촌이었다. 알리싸는 몸이 불편해서 벌써 자기 방으로 올라갔고 올라간 후엔 곧 잠이 든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 삼촌과 이야기하다가 다시 나왔다. 모든 일이 이처럼 빗나가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불평을 한들 또 무슨 소용이 있으랴. 설령 만사가 우리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역시 그런 어색한 느낌을 꾸며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리싸도 그것을 느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슬펐다. 빠리에서 돌아오자 나는 곧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제로옴, 얼마나 슬픈 재회였어! 그 잘못을 너는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것 같았지만 너 자신도 그 전을 확신하지는 못했어. 그리고 이제는 앞으로도 늘 그러하리라는 생각이 들어. 항상 그러하리라는 것만을 나는 잘 알고 있어. 아아! 정말 이제는 다시 만나지 않기로 해. 서로 할 이야기가 태산같이 많은데도 왜 그런 거북한 감정, 어색한 느낌, 마비 상태, 침묵 같은 것이 우리를 엄습했을까? 네가 돌아온 첫날은 그 침묵마저도 즐거웠어. 왜냐하면 침묵은 곧 사라지고 너는 굉장한 이야기를 들려 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야. 그러기 전에 네가 떠나가 버릴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어. 그러나 오르쉐에서 우리의 침울한 산책이 침묵 속에 끝나는 것을 보고, 더구나 우리의 손이 서로 떨어져 아무런 희망도 없이 내려뜨려졌을 때, 내 가슴은 슬픔과 괴로움으로 무너지는 것 같았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슬펐던 것은 너의 손이 나의 손을 놓아 버렸다는 사실이 아니라 만일 너의 손이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의 손이 그렇게 하였으리라는 생각이야. 왜냐하면 나의 손은 이미 너의 손 안에서 즐거움을 잊었으니까. 그 다음 날, 어제였지. 아침결에 나는 미친 듯이 너를 기다렸어. 집안에 있기에는 너무나 마음이 뒤숭숭해서 네가 오더라도 내가 있는 곳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방파제로 오라고 쪽지를 적어 두고 집을 나와 버렸어. 오랫동안 파도가 센 바다를 바라보았지만 너도 없이 혼자서 바라보기엔 너무도 가슴이 아팠어. 문득 네가 내 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떠올라 다시 집으로 돌아와 버렸어. 오후에는 혼자 있지 못하리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어. 왜냐하면 마들레느가 오겠다고 그 전날 말하길래 너와는 아침에 만날 생각으로 와도 좋다고 했지.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 애가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이라도 좋은 시간을 이번 재회에 가질 수 있었던 것 같애. 잠시 동안 나도 그처럼 힘들지 않은 우리들의대화가 오래오래 계속될 것만 같은 이상한 환상에 빠졌어. 그래서 내가 그 애와 함께 않아 있던 소파 가까이로 네가 다가와서 나를 향해 몸을 굽히며, "잘 있어." 하고 말했을 때 난 대답조차 할 수 없었어. 모든 것이 끝아 버리는 것 같았어. 갑자기 네가 떠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야. 마드레느와 함께 네가 나가버리자마자 그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으며 또 참을 수 없는 일로 생각되었어. 그래서 내가 다시 뛰쳐나갔다는 것을, 너는 짐작도 못했을 거야! 좀 더 너와 이야기하고 싶었고 아직 내가 하지 않았던 많은 이야기를 네게 들려주고 싶었어. 벌써 나는 펠리씨 고모 댁을 향해 달리고 있었어. 하지만 너무 늦었어. 시간도 없고, 용기도 없었어. 나는 맥없이 돌아왔어... 이별의 편질 쓰기로 했어. 왜냐하면 결국 우리가 편지를 주고받는 건 단지 커다란 환영에 지나지 않으며 너나 나나 자기 자신에 대하여 편지를 쓰고 있음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너무도 뚜렷이 떠올랐기 때문이야. 그리고 제로옴! 제로옴! 아! 우리는 늘 떨어져 있어 왔다는 생각! 나는 이 편지를 찢었어. 정말이야. 하지만 지금 다시 쓰고 있어. 처음 편지와 별다름 없어. 오오, 내가 전보다 너를 더 사랑하는 건 아니야! 제로옴! 오히려 반대로 네가 내 곁에 오는 순간 나는 마음이 혼란해지며 어색해졌지만 또 그때처럼 사무치도록 너를 사랑하고 있다고 느껴 본 적도 없었어. 하지만 거기에는 절망감이 깃들어 있었어. 왜냐하면 솔직히 말해서 나는 너와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더욱 너를 사랑했기 때문이야. 벌써부터 그렇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어. 아아! 그렇게도 보고 싶던 너를 다시 만나자 이러한 걱정이 옳았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어. 그리고 제로옴, 너도 그것을 인정해야 돼. 잘 있어, 이토록 사랑하는 제로옴, 하느님이 너를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시기를. 안심하고 우리가 접근해 갈 수 있는 것은 하느님 뿐이야. 그리고 마치 이 편지만으로는 아직 나를 충분히 괴롭히지 못한 것처럼 다음날 그 편지에 다음과 같은 추신을 덧붙였다. 이 편지를 부치기 전에 우리 두 사람에 관한 일에 대하여 좀더 신중한 태도를 지녀 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었어. 너와 나만이 알고 있어야 할 일을 줄리에뜨나 아벨에게 들려줌으로써 내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몇 번인지 몰라. 바로 이런 점에서도 네가 눈치 채기 훨씬 전부터 나는 너의 사랑이 무엇보다도 머릿속의 사랑, 애정과 신뢰에 대한 아름답고 지적인 집착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됐어. 내가 이 편지를 아벨에게 보여 주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이 몇 줄을 덧붙였음에 틀림이 없었다. 어떤 날카로운 예감에서 그녀는 그다지도 신중하게 되었을까? 전에 내가 한 이야기 종에서 아벨의 조언을 눈치 챈 것일까? 그로부터 나는 나와 아벨 사이에 커다란 거리가 있음을 느꼈다! 우리는 상이한 두 갈래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내 슬픔의 쓰라린 짐을 나 혼자 짊어지도록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라면 그러한 조언은 아무런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그후의 사흘간을 나는 고통 속에서 지냈다. 나는 알리싸에게 회답을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너무 지나친 논쟁이나 심한 항의가 한 마디라도 실수를 하여 우리의 상처를 고칠 수 없을 정도로 깊게 만들지 않을까 두려웠다. 내 사랑이 몸부림치는 편지를 나는 몇 번이나 썼다가 지우고 썼다가 지우곤 했다. 결국은 부치기로 결심했던 그 편지의 사본, 눈물에 씻긴 이 종이를 오늘에 와서도 눈물 없이 나는 다시 읽을 수가 없다. 알리싸! 나를, 우리 둘을 불쌍히 여겨 줘! 너의 편지는 너무도 괴로운 것이었어. 네 걱정을 그저 웃어 버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 네가 써보낸 모든 것을 나도 느끼고 있었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가 두려웠어. 단지 가상에 지나지 않는 것을 어째서 너는 소름이 끼치는 사실로 생각하는지! 그리고 어째서 그것을 어와 나 사이에 자꾸 두텁게 만들고 있는지! 만일 네가 나를 그 전체가 부인하고 있는 이 잔인한 가정을 멀리 떨어버리고 싶어! 하지만 일시적인 너의 두려움이 무슨 상관이 있어? 알리싸, 이론을 캐려고 하니 말이 얼어붙어. 단지 내 가슴에 울부짖는 소리만 들릴 뿐이야. 나는 기교를 부리기에 너무나 너를 사랑하고 있고 또 사랑하면 할수록 무엇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머릿속의 사랑'... 거기에 대해 나는 무엇이라 대답해야 할까. 나는 온 영혼을 기울여 너를 사랑하고 있는데 어떻게 나의 지성과 애정을 구별할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의 편지 왕래가 너의 가혹한 비난의 원인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또 그러한 편지 왕래 때문에 고무되었던 우리에게 뒤이어 찾아 온 현실에의 전락이 그토록 쓰라린 상처를 줬기 때문에, 또한 네가 편지를 한다 하더라도 이제는 단지 너 자신에게 편지할 뿐이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제발 당분간은 편지 왕래를 끊기로 해. 그리고 이어서 그녀의 판단에 항의하면서 생각을 돌이켜 주도록 호소하고 다시 한번 만날 약속을 해달라고 청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는 만사가 어긋나 있었다. 무대 장치나 단역배우나 계절도 신통치 못했고 열이 올라 있던 우리의 편지 왕래까지도 우리의 재회에 대비해서 별다른 준비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다시 만날 때까지 침묵을 지키리라. 나는 돌아오는 봄 퐁궤즈마르에서 우리의 재회를 갖고 싶었다. 거기서라면 지나간 날의 추억도 내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고 사촌도 반가이 맞아 주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부활제 방학을 이용해서 며칠이고 알리싸가 좋다고 생각하는 동안 퐁궤즈마르에 머무르고 싶었다. 내 결심은 확고한 것이었다. 편지를 부치자 나는 곧 학업에 열중할 수가 있었다. 그 해가 끝날 무렵 나는 알리싸를 다시 보게 되었다. 몇 달 전부터 건강이 나빠지고 있었던 미스 아슈뷔르똥이 크리스마스를 나흘 앞두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제대 후에 나는 다시 그녀와 함께 살았으며 거의 함께 있었기 때문에 임종에도 그 곁에 있을 수가 있었다. 알리싸에게서 온 엽서를 받아 보고 나는 이번 나의 슬픔보다도 우리의 침묵의 맹세를 그녀가 더욱 중요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삼촌이 참석을 못하시기 때문에 자기가 매장에만 잠시 참례하러 오겠다고 적혀 있었다. 장례식에서도 그리고 상여를 따라갈 때도 거의 그녀와 나 둘뿐이었다. 나란히 걸으면서 우리는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에서 그녀가 내 곁에 앉아 있을 때 나는 몇 번이고 그녀의 다정한 눈길이 내게로 오는 것을 느꼈다. "그럼 알았지." 헤어질 무렵 그녀는 말했다. "부활절 전에는 아무것도...." "그래, 하지만 부활절에는...." "기다리고 있겠어." 우리는 묘지입구에 있었다. 나는 역까지 바래다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지나가는 마차를 세우더니 잘 있으란 말 한 마디 없이 나를 두고 가버렸다. @ff 7 "알리싸가 정원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4월 말 퐁궤즈마르에 도착하자 삼촌은 친아버지처럼 내게 키스를 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선뜻 뛰어나와 나를 맞아 주지 않아서 처음에는 서운했으나 곧 그녀가 다시 만나게 된 첫 순간의 너절한 인사치레를 우리가 생략할 수 있게 해 준 것이 고마왔다. 그녀는 정원 안쪽에 있었다. 때마침 철을 만나 활짝 핀 라일락, 마가목, 금잔화, 웨즐리아 등의 꽃 덩굴로 빽빽이 둘러싸인 그 둥그런 갈림길로 나는 천천히 걸어갔다. 너무 머리서부터 그녀를 보지 않도록, 아니 내가 오는 것을 그녀가 보지 못하도록 나는 정원 한쪽의 나뭇가지 밑으로 공기 서늘한 그늘진 오솔길을 따라갔다. 나는 천천히 걸었다. 하늘도 나의 기쁨처럼 산뜻하게 빛나고 아련하게 맑았다. 아마도 그녀는 내가 다른 쪽 길로 오리라 생각하고 기다렸던 모양이다. 나는 그녀 가까이 등뒤에까지 갔다.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시간마저 나와 함께 멈춘 것 같았다 이 순간이야말로 행복 그 자체보다 앞서 오고, 또 행복 그 자체도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녀 앞에서 무릎을 끓고 싶었다. 나는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러자 그녀도 이 발걸음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별안간 일어서더니 놓고 있던 그 수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잊어버린 채 내게로 두 팔을 내밀어 내 어깨 위에 두 손을 얹었다. 얼마동안을 우리는 그렇게 서 있었다. 그녀는 두 팔을 내민 채 미소를 띠면서 고개를 갸웃하고 말없이 다정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휜 옷차림이었다. 나는 지나칠 정도로 경건한 그녀의 얼굴에서 앳된 그 미소를 다시 보았다.... "이것봐, 알리싸." 나는 갑자기 소리쳤다. "나는 앞으로 열 이틀 동안 방학이야. 하지만 네가 싫다면 단 하루도 더 머무르지 않을 테야. 그러니 내일은 퐁궤즈마르를 떠나야 되리라는 걸 표시해 줄 무슨 신호를 결정하기로 해. 그러면 다음날 아무런 비난이나 불평도 없이 떠날 테야. 알았지?" 미리 준비한 말이 아니어서 한결 수월하게 이야기할 수가 있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저녁 식사하러 내려갈 때 네가 좋아하는 그 자색 수정 십자가를 내가 달고 있지 않은 저녁, 알겠어?" 하고 말했다. "그것이 나의 마지막 저녁이란 말이지?" "하지만 눈물도 한숨도 없이 떠나야 해."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겠어. 그 마지막 저녁에도 그 전날 저녁과 다름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헤어질 테야. 아직 알아차리질 못했나 하고 네가 생각할 정도로 말야. 다음날 네가 찾을 때는 나는 이미 없을 거야." 그녀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입술로 가져오면서 나는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지금부터 그 마지막 밤까지는 어떤 눈치도 보이지 않기로 해." 이제는 이 재회의 엄숙한 분위기로 하여 자칫하면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어색한 느낌을 씻어 버릴 차례였다. 나는 말을 계속했다. "정말이지 네 곁에서 지낼 요 며칠이 우리들의 지난날과 꼭 같았으면 좋겠어... 말하자면 우리도 이 며칠이 예외적인 것이라고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지. 그리고 처음에는 너무 이야기하려고 애쓰지 않았다면...." 그녀는 웃기 시작했다. 나는 덧붙였다. "우리가 함께 해볼 만한 일은 없을까?" 전부터 우리는 정원을 가꾸는 데 재미를 붙여 왔다. 아직 익숙지 못한 정원사가 전에 있던 정원사의 뒤를 이어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 두 달 동안이나 방치해 두었던 정원에는 할 일이 많았고 장미나무에도 손길이 가지 않아 그 중 싱싱하게 자라나는 것들에는 시든 가지가 잔뜩 뒤얽혀 있었다. 새끼친 가지들이 다른 가지를 시들게 했다. 이 장미나무는 대부분 우리 가 접붙여 놓은 것들이었다. 우리가 손질한 그 장미들을 우리는 잘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것을 돌보느라고 처음 사흘동안은 힘든 이야기를 하지 않고도 서로 이야기할 수 있었고 이야기를 주고받지 않을 때에도 그 침묵이 힘겹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리하여 우리는 차츰 다시 서로 익숙해졌다. 나는 어떤 설명보다도 이렇게 서로 익숙해져 간다는 데 더욱 기대를 걸었다. 헤어져 있다는 기억마저 이미 우리 사이에서 사라졌고 내가 그녀에게 느끼던 두려움도, 또 그녀가 내게서 두려워하던 마음의 긴장도 차츰 흐려져 가고 있었다. 쓸쓸했던 나의 지난 가을 방문 때보다 한층 앳된 알리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아직도 그녀와 키스해 본 적이 없었다. 저녁마다 나는 그녀 웃옷 위에서 조그마한 자색 수정 십자가가 자그만 금줄에 달려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내 가슴 속에는 또다시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희망이라고? 아니, 그것은 차리리 확신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알리싸도 또한 느끼고 있으리라고 나는 짐작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자신을 거의 의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를 의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차츰 우리의 대화는 대담해져 갔다. "알리싸." 아름다운 대기가 웃음을 머금고 우리의 가슴이 꽃봉오리처럼 피어나던 어느 날 아침 나는 말했다. "이제는 줄리에뜨도 행복하게 되었으니 우리도..." 나는 천천히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갑자기 그녀의 안색이 너무나 창백해져서 나는 말끝을 맺지 못했다. 그녀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을 시작했다. "네 곁에서 나는 더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고 있어... 하지만 내 말을 들어 봐, 우리는 행복하려고 태어난 건 아냐." "그렇다고 영혼이 행복 외에 무엇을 택한단 말이야?" 하고 나는 성급히 소리쳤다. 그녀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성스러운 것을...." 그 목소리가 너무도 낮았기 때문에 나는 이 말을 들었다기보다는 그러한 말일 거라고 짐작했다. 내 모든 행복은 날개를 펴고 나를 버린 채 하늘로 날아가고 있었다. "너 없이 나는 그렇게 될 수가 없어." 나는 그녀의 두 무릎에 이마를 파묻고 어린애처럼 울면서 말을 이었다. "너 없이는 안 돼, 너 없이는 안 돼!" 그 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흘러갔다. 그러나 그 저녁, 알리싸는 구 조그마한 자색 수정 십자가를 달지 않고 나타났다. 이튿날 나는 약속한 대로 충분한 새벽녘에 떠났다. 그 다음 날 나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거기에는 세익스피어의 시 몇 줄이 인용구로 적혀 있었다. 그 곡을 다시 한번, 꺼질 둣 스러지는 곡이더라. 오오, 오랑캐꽃 핀 언덕 위를 스쳐 내 귀엔 들려 왔다--됐어 그만, 이젠 아까처럼 감미롭지 못해 그래! 아침 내내 나도 모르게 너를 찾았어. 제로옴, 네가 떠났다는 것을 나는 믿을 수가 없었어. 네가 약속을 지켜 준 것이 원망스러웠어. 나는 이것이 장난이려니 생각했어. 덩굴마다 네가 나타날까 하고 보러 갔어. 하지만 너는 정말 떠나 버렸어. 고마워. 그러고 나서는 온종일 네게 알려 주고 싶은 몇 가지 생각에 사로잡히고 그리고 또 만일 그 생각들을 네게 알려주지 않는다면, 네게 해주어야 할 일을 소홀히 했다는 느낌과, 마땅히 네게 꾸중을 들을 만한 것이라고 장차 생각하게 되리라는 이상하고도 또렷한 두려움에 사로잡혔어. 네가 퐁궤즈마르에 체류한 처음 몇 시간 에 곁에서 느낀 내 온몸과 마음의 그 야릇한 충족감에 놀랐고 그것이 곧 불안해졌어. '이 이상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을 정도의 충족감!'이라고 너는 내게 말했어. 그런데 내가 불안해 하는 것은 바로 그거야. 내 의도를 잘못 이해할까 두려워. 제로옴, 가장 강렬한 내 심정의 표현을 하나의 까다로운 이론의 전개(오오! 얼마나 어설픈 이론일까)로 생각지나 않을 까 두려워.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행복이 아닐 거야.'라고 내게 한 말이 생각나? 그때 나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어. 하지만 아니야. 제로옴, 그것은 우리를 충족시켜 주지 않아. 지난 가을 우리는 이러한 충족감 뒤에 어떤 슬픔이 깃들어 있는 가를 깨닫지 못했던가? 오오! 하느님, 그러한 충족감이 진실된 것이 아니도록 해 주시옵소서! 우리는 하나의 다른 행복을 위해서 태어났어. 전에 우리가 주고받은 편지가 가을의 재회를 슬프게 했듯이 이제 네가 여기 있었다는 추억이 오늘 내가 쓰는 이 편지의 기쁨을 앗아가 버렸어. 언제나 네 곁에서 지낼 때면 느꼈던 그 황홀감이 이제는 어디로 갔나? 편지를 주고받고 서로 만나고 했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이 가질 수 있는 그 순수한 기쁨을 우리는 남김없이 고갈시켜 버렸어. 그래서 나는 이제 나도 모르게 '십이야'에 나오는 오시노처럼 부르짖고 있어. '됐어 그만, 이젠 아까처럼 감미롭지 못해.' 잘 있어, 제로옴. '이로부터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시작되노라'. 아아!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너도 알까? --영원한 너의 알리싸 덕이라 하는 함정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온갖 영웅적인 기본이 나를 현혹하면서 나를 자꾸 이끌어가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러한 기분을 사랑과 분리해서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리싸의 편지는 나를 가장 무모한 열정으로도 도취 시켰다. 내가 좀 더 덕을 쌓으려고 한 것도 단지 알리싸만을 위해서였다. 어쩐 길도 위로 올라가는 길이라면 그것은 나를 알리싸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 줄 것 같았다. 아아! 대지가 제 아무리 갑작스럽게 좁나진다 하더라도 단지 우리 둘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라면 오히려 넓다고 생각될 것이었다. 아아! 나는 아직도 그녀의 미묘한 가장을 간파하지 못했으며 또 이변에도 이제 겨우 올라간 상상봉에서 그녀가 나를 두고 다시 도망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긴 답장을 썼다. 나는 그 중에서도 어느 정도 상황을 짐작케 할 수 있는 단지 한 구절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나의 사랑은 내가 지니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 돼. 내 모든 덕행이 거기에 딸려 있고, 사랑이야말로 나를 나 이상의 위치로 끌어올려 주는 것같이 생각 돼. 또 만일 사랑이 없다면 난 대부분 평범한 인간들이 차지하는 보통의 높이로 다시 떨어져내릴 수밖에 없을 것 같애. 너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가장 험준한 길도 내겐 언제나 좋은 길이라 생각돼. 이 편지에 나는 또 무슨 망을 덧붙였는지 그녀는 다음과 같은 회답을 보냈다. 하지만 제로옴, 성스럽게 된다는 것은 하나의 선택이 아니라 의무야(편지에는 이 의무란 단어 밑에 줄이 셋이나 그어져 있었다). 만일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와 다름이 없는 사람이마면 너도 역시 이것을 피하지는 못할 거야. 그것 뿐이었다. 우리의 편지 왕래는 이것으로 끝났고 아무리 교묘한 충고나 굳건한 의지도 어찌할 도리가 없으리라 하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기보다도 오히려 예감했다. 하지만 나는 또다시 애정에 넘치는 긴 편지를 썼다. 세 번째 편지를 부친 뒤에 나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제로옴 내가 네게 편지를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생각지는 말아. 다만 마음이 내키지 않을 뿐이야. 네 편지는 여전히 나를 즐겁게 해주고 있지만 이렇게까지 네가 나를 생각하도록 만든 데 대해서 나는 점점 더 나 자신을 꾸짖고 있어. 이젠 여름도 멀지 않았어. 당분간은 편지를 쓰지 않기로 하고, 9월 하순의 두 주일을 퐁궤즈마르에 와서 함께 보내 줄, 수 없겠어? 승낙한다면 답장은 필요 없어, 그것을 승낙의 표시로 알 테니까? 회답이 없기를 바래. 나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 이 침묵이야말로 그녀가 나에게 부과한 마지막 시련이었음에 틀림없다. 몇 달 동안의 공부와 몇 주일의 여행을 마치고 퐁궤즈마르에 왔을 때 나의 마음은 지극히 안정되어 있었다. 이 짧은 이야기로써 처음에는 나 자신도 이해 못했던 일을 어떻게 독자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 후 나를 여지없이 절망 속으로 밀어넣은 그 슬픈 사건 이 외에 무엇을 내가 여기에 적을 수 있을 것인가? 지금에 와서는 그 가장 부자연스러워 보이던 가면 밑에서 아직도 사랑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한 것을 통탄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그 가면밖에 보이지를 않아 옛날의 모습을 찾아볼 길이 없을 만큼 그녀가 변한 것을 보고 비난하지는 않았어, 알리싸. 단지 지난 그녀가 변한 것을 보고 비난하지는 않았어 알리싸, 단지 지난날의 너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어 절망에 울었을 따름이야. 너의 애정이 지니고 있었던 침묵의 술책이나 잔인한 기교 등에 의하여 네가 품었던 사랑의 힘을 잴 수 있게 된 지금에 와서 나는 너로부터 잔인하게 설움을 받으면서도 그로 인해 더욱 너를 사랑해야 할 것인가? 경멸? 냉정? 아니, 이겨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마주 서 싸울 아무런 대상도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가끔 주저했고 내 불행도 내가 꾸며낸 것이 아닐까 의심해 보기도 했다. 그처럼 내 불행의 원인은 미묘했고 그토록 알리싸는 모르는 척 했던 것이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한탄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 어느 때보다도 그녀는 애교 있게 나를 대해 주었다. 그녀가 그토록 친절하고 상냥해 보이기도 처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거의 속아넘어갔다. 전과 달리 납작하게 졸라맨 머리 매무새로 인해 표정까지 달라질 정도로 그녀의 얼굴이 딱딱해 보였다는 것이 무슨 상관이었으랴! 거친 촉감을 주는 검은 색의 어울리지 않는 웃옷으로 말미암아 그 아름다운 몸의 곡선이 손상되었기로 그것이 무슨 상관이었으랴. 그것 스스로 혹은 내가 부탁한다면 그녀는 고치리라고 나는 어리석게도 생각했다. 나는 그녀의 친절하고 상냥한 마음씨가 슬펐다. 그러한 일은 우리 사이에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서 충동보다는 오히려 결심을, 또 말하기는 거북하지만 사람보다는 오히려 예의를 발견하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저녁 때 응접실에 들어서면서 나는 피아노가 없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실망한 소리로 묻자, "수선하러 보냈어." 하고 아주 태연한 목소리로 알리싸가 대답했다. "글쎄 몇 번이나 내가 말하지 않았니?" 삼촌은 거의 엄하다고 할 만한 꾸지람조로 말했다. "기왕 고치러 보냈더라면 좋지 않았겠니. 네가 서둘렀기 때문에 커다란 즐거움을 하나 잃었어...." "하지만 아버지." 알리싸는 붉어진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요새는 빈소리만 나서 제로옴 역시 아무 곡도 치지 못했을 거예요." "네가 치는 것을 들었을 땐 그렇게 고장난 것 같지는 않았는데." 하고 삼촌이 말했다. 그녀는 얼마 동안 그늘진 쪽으로 몸을 굽힌 채 안락의자의 덮개 치수를 재는 데 몰두하는 듯 말이 없다가 이윽고 방에서 나가더니 한참만에야 삼촌이 저녁마다 드는 탕약을 쟁반에 받쳐들고 돌아왔다. 다음날도 그녀는 그 머리 모양이나 옷차림을 바꾸지 않았다. 집 앞에 내놓은 벤치에서 앉아 그녀는 전날 저녁부터 손에서 떼지 않던, 바느질이라기보다는 꿰매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자기 옆의 벤치였는지 혹은 탁자 위엔지 낡은 양말이 가득든 바구니를 놓고 그 속에서 줄곧 일거리를 꺼내는 것이었다. 며칠 뒤에는 냅킨과 홑이불을 만지고 있었다... 이러한 일에 그녀는 완전히 몰두해 있는 것 같았고 이로 인해 입술은 표정을 잃었고 눈에는 광채가 없었다. "알리싸!" 어느 날 저녁 나는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 멋없게 변한 것을 보고 놀라 소리를 쳤다. 그녀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변해 버렸고 내가 조금 전부터 뚫어지게 그녀를 쳐다보았으나 내 눈길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왜 그래?" 그녀는 머리를 들며 말했다. "내 말이 들리는지 알아 보고 싶었어. 네가 하고 있는 생각이 내게서 멀리 가 있는 것 같아서." "아니야, 난 여기 있어. 하지만 여간 조심을 하지 않고는 꿰매질 못해." "바느질하는 동안에 책을 읽어 줄까?" "잘 들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왜 그렇게 신경 쓰이는 일을 하지?" "내가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해야 돼." "이런 일로 하루하루 벌어 사는 여자들이 많지 않아. 절약을 하려고 이런 보람 없는 일을 하는 건 아니겠지?" 그녀는 대뜸 그 일이 어떤 일보다 더 재미가 있으며 벌써 오래 전부터 다른 일은 하지 않아 다른 일에는 서툴러져 버렸다고 단언하는 것이었다. 말을 하면서 그녀는 줄곧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의 음성이 그 순간보다 더 부드러웠던 적은 없었지만 그러나 나는 한없이 서글펐다 그녀의 표정은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왜 그렇게 슬퍼하지?'라고 말하는 듯 싶었다. 그리하여 내 마음 속의 모든 항의는 입술에까지 올라오기도 전에 목에서 막혀 버렸다. 그로부터 이틀 뒤 둘이서 장미꽃을 꺾고 나자 그녀는 나에게 그 해에는 아직 한번도 들어가 보지 못했던 자기 방으로 꺾은 꽃을 옮겨 달라고 했다. 나는 얼마나 희망에 부풀었던가! 나는 이 말을 듣고 슬퍼해서는 안된다고 다시 한번 마음 먹었다. 그녀의 말 한 마디로 내 마음은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방에 들어설 때마다 나는 감격에 사로잡히곤 했다. 거기에는 무엇인지 모르게 아늑한 고요함이 감돌아 알리싸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것이었다. 창과 침대 둘레에 친 커튼의 푸른 그늘, 반들반들한 마호가니 가구들, 정돈되고 정결하고 조용한 방안 분위기가 그녀의 티없는 순결함과 사색적인 우아로움을 이야기해 주는 것이었다. 그날 아침 그녀의 침대 곁 벽에 내가 전에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두 개의 커다란 마사치오 의 사진이 걸려 있지 않은 것을 보고 나는 놀랐다. 어떻게 됐느냐고 물으려던 찰나에 내 시선은 바로 그 옆, 그녀가 애독하는 책들을 얹어 주는 선반 위로 갔다. 이 조그마한 장서는 절반은 내가 준 책과 또 절반 은 우리가 같이 읽은 책으로 오랜 간을 두고 꾸며졌던 것이다. 나는 그 책들이 모두 없어지고 재신 그녀가 경멸해 주었으면 싶던 저속한 신앙에 관한 너절한 작은 책자들만이 꽂혀 있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눈을 드니 알리싸는 웃고 있었다. 그렇다, 알리싸는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미안해." 하고 그녀는 곧 말했다. "네 표정을 보고 웃었어. 내 장서를 보며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길래...." 나는 농담할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 "아니, 알리싸, 정말로 요즘은 저런 책을 읽고 있어?" "응, 이상해?" "자양이 많은 양식에 익숙해 온 지성은 이런 무미 건조한 것을 맛보면 구역질이 날 것이라 생각했는데." "무슨 소리지?" 하고 그녀는 말했다. "이건 모두 경건한 사람들로서 열심히 자기들이 생각하는 바를 설명하고, 나와 솔직히 이야기해 주는 사람들이야. 그리고 나는 이런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퍽 좋아. 처음부터 이 사림들은 미사 여구의 함정에도 빠지지 않았으며, 나 또한 이 사람들의 쓴 것을 읽으면서 세속적인 찬양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그래 이제는 이런 것밖에는 읽지 않아?"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래, 몇 달 전부터는. 게다가 이제는 독서할 시간도 별로 없어. 사실은 아주 최근에도 네가 전에 감탄할 만하다고 가르쳐 주려고 해보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제 키를 한 자 늘여 보려고 애를 쓴 사나이와 같은 결과가 되어 버렸어." "네게 그런 이상한 생각을 일으키게 한 그 '위대한 작자'란 누구야?" "그 작자가 내게 그런 생각을 일으키게 한 건 아니야. 단지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그렇게 생각했을 따름이야, 빠스깔이야. 아마도 벌로 좋지 않은 구절을 읽었던 모양이야..." 나는 초조한 몸짓을 했다. 그녀는 아직 손질하지 않은 꽃다발에서 눈을 들지도 않은 채 마치 교과서나 암송하듯이 맑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 몸짓에 잠시 말을 끊더니 같은 어조로 계속했다. "그와 같은 호언 장담이나 열성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어. 하지만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거의 없어. 빠스깔의 그 비상한 어조가 신앙에서라기보다는 오히려 회의의 결과가 아닌가 하고 나는 가끔 생각했어. 완전한 신앙이란 그처럼 눈물을 흘린다거나 목소리를 떠는 법이 없으니까." "빠스깔의 음성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그 떨림, 그 눈물에 있는 거야." 라고 나는 반박을 하려 했으나 용기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말 속에는 내가 알리싸에게서 귀히 여기던 것을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때의 대화를 고치거나 논리적인 것으로 다듬지 않고 그대로 여기에 옮긴다. "만일 그가 현세의 생활에서 먼저 즐거움을 제거해 버리지 않았더라면." 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현세의 생활을 저울에 달아본다면 아마도...." "어떻단 말이야?" 나는 그녀의 이상한 이야기에 놀라 물었다. "그가 풀이하는 막연한 행복보다 더 무거울지 몰라." "그렇다면 그 행복을 믿지 않아?" 하고 나는 소리쳤다. "그건 아무래도 좋아."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거래같이 이해타산이 있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 행복은 차라리 막연한 편이 좋겠어. 하느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덕행에 몸을 바치는 것은 무슨 보수를 바라서가 아니라 타고난 고귀한 마음씨 때문이 아니겠어?" "바로 거기에서 저 빠스깔과 같은 고귀한 마음의 피난처인 그 비밀의 회의주의가 나온 거야." "회의주의가 아니지, 장세니즘이야." 하고 그녀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어? 여기 이 불쌍한 사람들은--하고 그녀는 자기 책을 돌아보았다.--자기들이 장세니스트인지 또는 다른 그 무엇인지 대답하라고 하면 퍽 당황해 할 거야. 이들은 마치 바람에 불리는 풀잎처럼 당황해 할 거야. 이들은 마치 바람에 불리는 풀잎처럼 아무런 악의도 괴로움도 또 아름다움을 보이려는 마음도 없이 그저 하느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있는 거야. 자기들이 보잘 것 없는 존재라 생각하면서, 단지 자기들에게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 앞에서 자기들 스스로의 모습을 지워 버림으로써 그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알리싸." 하고 나는 소리쳤다. "왜 너는 너의 날개를 떼어 버리려는 거야?" 그녀의 음성이 너무나 잔잔하고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그만큼 내 고함 소리는 우스울 정도로 과장된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 빠스깔을 읽고 얻은 것은...." "뭐야?" 그녀가 말을 중단했기 때문에 내가 물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야. '생명을 구하려고 애쓰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다.' 그 나머지 것은...." 그녀는 한층 더 환히 미소를 지으며 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을 계속했다. "사실은 잘 모르겠어. 이 조그마한 사람들과 얼마 동안 살고 있다가 위대한 사람들의 숭고한 정신에 접하게 되면 당장 숨이 가빠져서." 당황해 버린 나는 대답할 말을 전혀 찾아내지 못했다. "만일 오늘이라도 너도 함께 이 설교집과 명상록을 읽어야 한다면 나는...." "하지만." 하고 그녀는 내 말을 가로막았다. "네가 이런 걸 읽은 것을 보면 나는 서글퍼질 거야! 나는 네가 이런 것보다는 훨씬 훌륭한 것을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해." 그녀는 지극히 간결한 어조로 또 이처럼 자기와 나의 생을 분리시키는 이러한 말이 나를 얼마나 슬프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염두에도 없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의 머리는 확확 달아 올랐다. 나는 좀 더 이야기하고 그리고 울고 싶었다. 만일 그녀가 내 눈물을 보았더라면 굴북됐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벽난로 위에 팔꿈치를 짚고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 괴로움을 보지 못했는지 혹은 보고도 못본 체하는지 계속해서 꽃만 매만지고 있었다. 이때 식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이러다간 점심 먹을 채비를 못하겠네." 하고 그녀는 말했다. "어서 가 줘." 그러고 나서 무슨 장난 이야기나 하듯 말했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또 해." 그 이야기는 다시 계속되지 않았다. 늘 나와는 엇갈리게 되었다. 그것은 그녀가 나를 피해서가 아니라 단지 뜻하지 않았던 일이 훨씬 더 급박하고도 중요하게 닥쳐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차례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나의 이 차례라 하는 것은 그 끊임없이 생겨나는 집안 일이라든가 꼭 해야 될 곳간 일의 감독이라든가, 소작인들이나 또는 그때 그녀가 점점 더 열중하게 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방문이라든가 하는 따위의 일이 다 끝난 뒤에야 돌아오는 것이었다. 내게는 그 나머지 시간, 극히 짧은 시간밖에는 차례가 오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분주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이런 자질구레한 일을 하는 것을 보고, 또 나 자신 그녀 뒤를 따라다니기를 단념했기 때문에 그녀가 얼마나 나를 소홀히 하고 있는가 하는 느낌은 그다지 들지 않았던 것이다. 잠시 이야기를 해보아도 그러한 느낌은 더욱 절실해졌다. 알리싸와 잠시나마 이야기를 하게 될 경우에도 그것은 어설픈 대화에 지나지 않았고 어린애 장난을 시중들어 주는 것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막연히 미소를 지으며 내 곁을 재빨리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그 어느 때보다도 내게서 멀리 떠나가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미소에는 가끔 멸시에 가까운 표정, 어딘가 비꼬는 듯한 표정이 섞여 있는 것 같았고 또 그렇게 내 욕망을 피하는 데 재미를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스스로 나무람을 받을 짓을 하고 싶지 않고 또 내가 무엇을 그녀에게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될 뿐 아니라 무엇을 그녀에게 비난해야 할지도 몰라 나는 마침내 모든 불만을 내 자신에게로 돌려 버렸다. 그처럼 크나큰 행복을 기대했던 며칠이 이렇게 흘러가 버렸다. 나는 날이 흘러가는 것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 날짜를 늘여 보고 싶지도 않았고 시간의 흐름을 늦추고 싶지도 않았다. 그토록 나의 고통은 하루하루 커가기만 했다. 그러나 내가 떠나기 이틀 전 알리싸가 나를 따라 폐광이 된 이회암 채굴터 근처에 있는 그 벤치에 함께 갔을 때, 안개가 끼지 않아 지평선 끝까지 모든 것이 하나하나 파랗게 물들어 있었고, 지나간 날의 가장 어렴풋한 추억마저 뚜렷이 생각나는 그러한 어느 맑은 가을 저녁이었다. 나는 참다 못해 어떤 행복을 잃었기에 지금 난 이다지도 불행하게 되었나 하는 것을 말해 보았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어?" 하고 그녀는 곧 대답했다. "지금 너는 어떤 환영에 대한 사랑에 빠져 있는 거야." "아니야, 환영이 아니야, 알리싸." "마음 속에 그리는 어떤 영상과...." "아아! 난 그런 걸 만들어 내고 있는 게 아니야. 알리싸는 정말 나의 여인이었어. 나는 지금 옛날의 그 알리싸를 부르고 있어. 알리싸! 너는 내가 사랑하던 여자였어. 그때의 너를 너는 지금 어떻게 해버렸지? 어떻게 해버렸어?" 그녀는 잠시 동안 말없이 천천히 꽃 산 송이를 꺾으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제로옴, 왜 그전보다도 나를 덜 사랑한다고 솔직히 말하지 못해?" "왜냐구? 그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야, 그건 정말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야." 나는 분노에 차 소리쳤다. "왜냐하면 이보다 더 널 사랑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야." "지금의 나를 사랑하고... 그러면서도 옛날의 나를 그리워하고!"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려 하면서 또 어깨를 약간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나는 내 사랑을 과거에 붙여 둘 수는 없어." 땅이 내 발밑에서 꺼지는 듯싶었다. 그래서 나는 무엇에고 잡히는 대로 매달렸다. "사랑도 모든 다른 것도 함께 흘러가 버리는 거야." "내 사랑은 내가 죽을 때까지 함께 할 거야." "그것도 차츰 기울어 갈 거야. 네가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알리싸는 이젠 단지 너의 추억 속에 남아 있을 뿐이야. 그녀를 사랑한 적도 있었지, 하고 네가 단순히 추억에 잠길 날이 올 거야." "너는 마치 다른 무엇이 내 마음 속에서 알리싸에 대치될 수 있거나 또는 애 마음이 이제 더 사랑을 해서는 안된다는 투로 말하고 있어. 너 자신 나를 사랑해 왔다는 것은 다 잊었어? 그렇지 않고서야 나를 괴롭히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듯이 보일 수가 있어?" 나는 파랗게 질린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그녀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냐, 아냐. 알리싸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아무것도 변한 게 없지 않아?" 나는 그녀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그녀는 더욱 자신 있게 말을 이었다. "한 마디로 말할 수 있는데, 왜 못하지?" "무슨 말을?" "나는 나이가 많아." "쓸데없는 소리." 나는 그 당장 나도 또한 그녀만큼 나이를 더 먹었으며 두 사람의 나이 차는 언제나 다름이 없다고 항의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유일한 기회는 이렇게 해서 지나가 버렸다. 나는 말다툼에 끌려들어감으로써 모든 유리한 점을 포기한 폭이 됐다. 나는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나는 그녀와 나 자신에 대한 불만을 품고 또 그때까지 내가 '덕'이라고 부르던 것에 대한 막연한 혐오감과 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 그 집념에 대한 울화에 가득 찬 채 퐁궤즈마르를 떠났다. 이 마지막 해후에서 내 사랑을 너무 과장했던 나마지 나는 모든 열정을 소비해 버린 것 같았다. 처음 내가 항변해 보려던 알리싸의 말 한 마디가 내 항변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생생하고 의기 양양하게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래! 그녀의 말이 맞을 거야, 난 이제까지 환영만을 사랑하고 있었던 거야. 내가 사랑했었고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 알리싸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거야... 그래! 우리는 나이가 든 거야! 내 마음을 얼어붙게 한 그녀의 멋없는 변모도 결국은 자연스러운 일에 지나지 않는 거야. 내가 그녀를 조금씩 조금씩 높여 갔고 내가 좋아하던 모든 것으로 그녀를 장식하면서 그녀를 마음속에서 우상화했다고 한들 그러한 내 노력에서 지금 피로 외에 무엇이 남아 있는가? 저 혼자 있게 되자마자 알리싸는 자기의 수준, 그 평범한 수준으로 내려가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내려가 버리자 나는 사랑할 기분이 내키지 않게 되었다. 아아!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그녀를 올려 놓았던 그 높은 곳에서 다시 그녀와 함께 있으려던 그 덕행에 대한 헌신적인 노력도 이제는 얼마나 어리석고 터무니 없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인가! 조금만 긍지가 덜했던들 우리의 사랑은 순탄했을 것이다. 하지만 재상이 없이는 사랑에의 집착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고집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충실한 것도 아니다. 충실하다면 그것은 과오에 대해서 충실할 뿐이다. 지금까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고 자인하는 것이 가정 현명한 일이 아닐까? 그러던 때에 아테네 학원에 추천을 받아 나는 별다른 야망도 흥미도 없이 다만 떠난다는 생각에서, 달아나 버리기나 하는 것처럼 즐거워서 입학을 하기로 했다. @ff 8 그런대로 나는 다시 한번 알리싸를 만났다. 그것은 3년 후 여름도 끝날 무 렵이었다. 열 달 전에 나는 그녀의 편지로 삼촌이 별세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 었다. 당시 나는 여행을 하고 있었던 팔레스티나에서 꽤 긴 답장을 부쳤지만 종내 회답이 없었다. 르아브르에 있던 내가 어떤 구실로 자연스럽게 퐁궤즈마르에까지 가게 되었던 것인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알리싸가 그곳에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홀로 있지 않으면 어쩔까 하고 걱정이 되었다. 나는 그곳에 갈 것이라고 예고도 하지 않았다. 여느 때 방문하는 것처럼 찾아가는 것이 싫어서 나는 이렇다 할 생각 없이 걸어갔다. 들어가 볼 것인가? 그래 그렇게 하자. 나는 단지 홀로 그 가로수 길을 거닐다가 혹시 지금도 가끔 그녀가 와서 앉을지도 모를 벤치 위에서 앉아 보자...그리고 나는 내가 가버린 후에 내가 다녀갔다는 것을 그녀에게 알리려면 어떤 표시를 남겨야 할 것인가 하는 것까지 궁리했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나는 천천히 걸었다. 그녀를 만나지 않기로 결심을 하자 내 마음을 졸라매고 있던 쓰라린 슬픔은 거의 감미로운 애수로 바뀌었다. 나는 벌써 가로수가 있는 길까지 이르렀다. 나는 들키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어 농가의 안마당을 구분하고 있는 둑을 따라 길가를 걸었다. 나는 이 둑의 한 지점에서 올라갔다. 낯선 정원사가 오솔길에서 제초 작업을 하고 있다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새로 세워진 울타리가 안쪽을 둘러싸고 있었다. 내가 지나가는 발자국소리를 듣고 개가 짖었다. 좀 더 나아가 가로수길이 끝나는 곳엣 나는 흙담이 있는 바른편으로 돌았다. 그러고는 이제 막 걸어온 길과는 병행되는 너도밤나무 숲이 있는 곳을 향해 채소밭의 그 비밀 문 앞을 지나갔다. 그때 문득 이 문을 통해 정원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문은 닫혀 있었다. 그러나 안의 빗장이 퍽 약해서 나는 어깨로 밀어 부술까 하고 생각했다. 바로 이때 발자국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담이 움푹 들어간 곳에 몸을 숨겼다. 정원에서 나오는 것이 누구인지 나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발자국소리를 듣고 그것이 알리싸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몇 걸음 앞으로 나오더니 가냘픈 목소리로 부르는 것이었다. "제로옴이야?...." 심하게 고동을 치던 내 심상이 딱 멈추었다. 그러고는 막혀 버린 나의 목에서 단 한 마디 말도 나오지 못하는 동안 그녀는 좀 더 힘을 주어 되풀이해 불렀다. "제로옴, 너지?" 그녀가 나를 이렇게 부르는 소리를 듣자 나는 너무도 벅찬 감동에 못이겨 무릎을 끊고 앉았다. 여전히 내가 대답을 못하자 알리싸는 몇 걸음 걸어나와 담을 돌았다. 그러자 나는 내 몸에 알리싸를 느꼈다. 그녀는 당장에 보기가 두려운 듯이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내게로 몸을 굽히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그녀의 그 가냘픈 두 손에 마구 입술을 갖다댔다. "왜 숨었지?" 그녀는 헤어져 있던 3년간이 불과 며칠 동안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어떻게 나인 줄 알았어?" "기다리고 있었어." "기다리고 있었다고?" 나는 너무나도 놀라서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풀이할 뿐이었다. 내가 여전히 무릎을 끓고 있자니까, "벤치로 가자."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래, 나는 다시 한번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사흘 전부터 나는 저녁마다 이곳에 와서 오늘처럼 너를 불렀어. 왜 대답을 하지 않았지?" "네가 그렇게 갑자기 오지 않았던들 난 너를 보지 못하고 떠났을 거야." 나는 기절할 뻔했던 감동을 억누르면서 처음 말했다. "마침 르아브르를 지나던 길이라 저 가로수 길을 좀 거닐어 보고 정원 주변도 돌아보고, 요즘도 네가 와서 앉을 듯 싶은 이회암 채굴터에 있는 그 벤치에서 잠시 쉬어볼까 했을 따름이야. 그러고는...." "사흘 전부터 저녁마다 이곳에 와서 내가 무엇을 읽었나 좀 봐." 그녀는 내 말을 막으면서 한 다발의 편지를 내밀었다. 내가 이탈리아에서 보낸 편지들이었다. 이때 나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변해 있었다. 야위고 파리해진 그녀의 모습이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내 팔에 기대 의지해 있으면서도 그녀는 춥거나 혹은 겁에 질린 듯 내게 바짝 붙어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복상 중이었다. 모자 대신 머리에 쓰고 있던 검은 베일이 그녀의 얼굴을 더욱 창백하게 보이게 했다.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금시 기절할 것 같았다. 나는 요즈음 퐁궤즈마르에 그녀 혼자 있는지의 여부가 궁금해 물었다. 혼자는 아니었다. 로베르가 함께 있다는 것이었다. 8월에는 줄리에뜨와 에뜨와르, 그리고 그들의 세 아이가 와서 한 달 동안 함께 지내고 갔다고도 했다. 우리는 벤치까지 왔다. 우리는 앉았다. 그러나 얼마 동안 우리의 대화는 여전히 진부한 소식을 묻는 정도였다. 그녀는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나는 별로 내키지 않은 기분으로 이제는 내가 일에 대한 흥미를 상실했다는 것을 그녀가 깨달아 주었으면 싶었다. 그녀가 전에 나를 실망시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었다. 그렇게 보였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나는 원한과 사랑으로 마음이 가득 차서 될 수 있는 대로 쌀쌀하게 아야기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때때로 용솟음쳐 올라오는 감동에 목소리가 떨려나와 스스로도 원망스러웠다. 얼마 전부터 한 조각 구름에 가리어 있던 석양이 우리 맞은편 지평선에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는 턴 빈 들판을 떨리는 낙조로 가득 채우고 우리 발 밑에 펼쳐 있는 좁은 골짜기를 느닷없이 붉은 빛으로 뒤덮더니 이윽고 사라져 버렸다. 나는 황홀해서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 빛나는 도취경이 다시 한번 나를 휘감고 나의 뼈속까지 스며드는 것을 느끼자 원망의 마음은 사라져 버리고 마음 속에서는 사랑의 속삭임만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몸을 굽혀 내게 기대고 있던 알리싸가 일어섰다. 그녀가 웃옷 속에서 보드라운 종이에 싼 조그마한 물건을 꺼내 내게 내밀려다가 망설이듯 멈추어 버리는 것을 의아해서 바라보자. "자, 제로옴, 이건 나의 자색 수정 십자가야. 오래 전부터 네게 주고 싶었어. 사흘 전서부터 저녁마다 이렇게 가지고 왔어." "그걸 어떻게 하라는 거지?" 나는 아주 투명스럽게 물었다. "나에 대한 추억으로 이걸 간직했다가 너의 딸에게 주어." "딸이라니?" 무슨 말인지 깨닫지를 못해 나는 알리싸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조용히 내 말을 잘 들어줘, 부탁이야. 아니, 나를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 그렇지 않아도 말하기가 힘들어. 하지만 이것은 꼭 이야기하고 싶어. 이것 봐, 제로옴, 언젠가는 결혼할 것 아냐? 아니, 대답하지 말아. 말을 막지 말아 줘. 부탁이야. 나는 단지 내가 너를 퍽 사랑했다는 것을 네가 잊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그리고...벌써 오래 전부터, 3년 전부터...네가 좋아하던 이 조그마한 십자가를 너의 딸이 어느 날 누가 준 것인지도 모르면서 나의 기념으로 달아줄 날이 올 것을 생각해 보았어... 그리고 어쩌면 그 애에게... 내 이름을 붙여 줄 수도 있으리라고...." 그녀는 목이 메어 말을 끊었다. 나는 적의에 찬 어조로 소리쳤다. "왜 네가 직접 주지 않고?" 그녀는 말을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녀의 입술은 마치 흐느껴 우는 어린애의 입술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울지는 않았다. 이상하게 반짝이는 그녀의 눈길은 얼굴을 초인간적이며 천사와 같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알리싸! 내가 누구와 결혼을 하겠어? 내가 너밖에는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아...." 그리고는 갑자기 미친 듯이 난폭하게 그녀를 껴안으면서 나는 마고 키스를 했다. 얼마동안 나는 거의 뒤로 몸을 젖힌 채, 온몸을 내맡긴 듯한 그녀를 꼭 껴안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눈길이 흐려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눈시울이 닫혀지며 비길 데 없을이만큼 뚜렷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들 서로를 불쌍히 여겨 줘, 제로옴. 우리의 사랑에 상처를 주지 마." 아마 그때도 그녀는 말했을 것이다. "비겁한 짓은 하지 말아." 혹은 이것은 내 자신 스스로 한 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갑자기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경건한 마음으로 그녀를 두 팔로 감싸면서 말했다. "그렇게도 나를 사랑했다면 어째서 항상 나를 밀어냈어? 이것 봐! 처음에 나는 줄리에뜨의 결혼을 기다렸어. 너도 또한 그녀가 행복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 그녀는 이제 행복해. 이건 너 자신이 네게 한 이야기야. 오랫동안 나는 네가 아버지를 모시고 계속 그 곁에서 지내길 바란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이제는 우리 단 둘 뿐 아냐?" "오오! 지난 일엔 마음을 쓰지 않기로 해." 하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이제는 이미 페이지를 넘기고 난 뒤야." "그러나 아직 늦지 않았어, 알리싸!" "아니야 제로옴, 이제는 늦었어. 사랑을 통해 우리가 서로를 위해 사랑보다 더 훌륭한 것을 엿보게 되었을 때부터 때는 이미 늦었던 거야. 네 덕택으로 내 꿈은 그처럼 높이높이 올라갔고 따라서 이지는 인간 세상의 어떤 충족감도 그것을 손상시키진 못할 것일까 하고 나는 종종 생각해 봤어. 우리의 사랑이 완전치 못한 순간부터 나는 우리의 사랑을 지탱해 낼 수가 없을 것 같았어." "서로가 떨어져 살 때 우리의 삶이 어떠한 것일까 생각해 봤어?" "아니! 전혀." "이젠 알겠지! 나는 3년 전부터 테가 없어 쓰라린 마음으로 헤매다녔어...." 저녁이 다가오고 있었다. "추워." 그녀는 일어서더니 내가 팔을 다시 잡을 수도 없을 정도로 쇼올을 바싹 죄어서 몸을 감싸면서 말했다.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또 우리가 잘못 이해하지나 않았나 걱정하던 이 성경 구절이 생각날 거야, '하느님이 우리를 위하여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 말을 항상 믿고 있어?" 우리는 잠시 동안 말없이 걸었다.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더욱 좋은 것, 그것을 상상학 수 있어, 제로옴?"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솟아오르는 채 그녀는 여전히 '그 더욱 좋은 것!'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우리는 조금 전에 그녀가 나왔던 채소밭의 비밀문 앞에 이르렀다. 그녀는 나를 돌아다보며, "안녕." 하고 말했다. "아니야, 더 오지 마. 안녕, 사랑하는 나의 벗, 이제부터 시작되는 거야, 더 좋은 것이." 그녀는 팔을 뻗쳐 내 어깨 위에 두 손을 얹고 형언할 수 없는 사랑에 가득 찬 눈으로 붙드는 듯 혹은 가라는 듯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이 닫히고 그 위로 빗장 지르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참을 수 없이 복받치는 절망에 사로잡혀 그 문에 기잰 채 쓰러졌다. 그리고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오랫동안 울고 흐느꼈다. 그러나 그녀를 붙잡았더라면, 그 문을 밀치고 들어갔더라면. 어떻게든지 해서--하긴 내가 못 들어가도록 잠겨 있지도 않았겠지만--집안으로 들어갔더라면. 하지만 아니가. 지금에 와서 이 모든 과거를 훑어보아도...아니다. 그것은 내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나의 심정을 모르는 사람은 그때의 내 심정도 몰랐을 것이다. 걷잡을 수 없는 불안에 사로잡혀 나는 며칠 뒤 줄리에뜨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퐁궤즈마르에 갔었다는 것, 알리싸의 창백하고 여윈 모습에 놀랐다는 것을 썼다. 알리싸의 건강에 주의해 달라는 부탁과 알리싸 자신에게서는 이제 편지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으니 그녀 대신 가끔 소식이나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후 한 달도 채 못되어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제로옴 너무나도 슬픈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우리의 가엾은 알리싸는 이미 이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아아! 오빠가 편지 속에서 걱정을 한 것도 다 근거가 있는 일이었군요. 몇 달 전부터 언니는 확실한 병 증세도 없이 점점 쇠약해 졌어요. 그래 언니는 애 애걸에 못이겨 르아브르의 A 의사의 진찰을 받기도 했어요. 그 후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걱정할 게 없다는 내용이었어요. 그러나 오빠가 다녀가신 뒤 사흘 만에 언니는 갑자기 퐁궤즈마르를 떠났습니다. 그것도 로베르의 편지를 받고서야 알았습니다. 언니가 편지를 하는 일은 극히 드물어서 로베르가 아니었던들 그런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 거예요. 언니한테서 소식이 없다고 걱정하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언니를 그대로 떠나도록 내버려 둔 것과 도 빠리까지 따라가지 않은데 대해 나는 로베르를 호되게 나무랐습니다. 그 뒤에는 언니의 주소조차 모르게 되었답니다. 언니를 볼 수도 없고 편지도 낼 수가 없으니 내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며칠 뒤에 로베르가 빠리에 갔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를 못했습니다. 어찌나 게으른지 그의 성의를 의심할 지경이었습니다. 결국 경찰에 알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뜨와르가 가서 언니가 숨어 있던 작은 요양원을 찾아냈어요. 아아! 그러나 이미 늦었어요. 언니의 죽음을 알리는 원장의 편지와 언니를 다시 보지도 못한 에뜨와르의 전보를 동시에 받았습니다. 마지막 날 언니는 우리가 통지를 받을 수 있도록 한 장의 봉투 위에 우리의 주소를 적어 놓았습니다. 다른 한 장의 봉투에는 르아브르의 우리 공증인에게 보낸 유언장 사본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편지의 한 부분은 오빠에 관한 것인 듯 생각됩니다. 근간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저께 치른 장례식에는 에뜨와르와 로베르가 참석했습니다. 상여를 따라간 것은 그 둘만이 아니었습니다. 요양원 환자 몇 사람이 자진하여 식에 참석했고 묘까지 상여를 따라갔습니다. 나는 다섯째 아이의 출산이 오늘 내일 해서 섭섭하게도 집을 나서지 못했습니다. 오빠, 언니의 죽음이 얼마나 오빠를 슬프게 할 것인가를 알고 있어요. 편지를 쓰는데도 퍽 힘이 드는군요. 하지만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에뜨와르나 로베르조차도 우리 둘만이 이해할 수 있었던 알리싸에 관한 이야기를 맡기고 싶지는 않았어요. 이제는 나이 먹은 가정 주부 가 됐고 쌓이고 쌓인 잿더미가 뜨겁게 불타오르던 과거를 뒤덮어 버린 지금, 오빠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어해도 되겠지요. 어느 날이고 볼일이 있거나 혹은 마음이 내키셔서 님므에 오시게 되거든 에그비이브에 들러 주세요. 에뜨와르도 오빠를 만나게 되면 퍽 기뻐할 거고 우리 둘이 알리싸 이야기도 할 수 있겠죠. 그럼 안녕히 계세요, 오빠. 서글픈 마음으로 키스를 보내 드립니다. 며칠 뒤 나는 알리싸가 퐁궤즈마르를 로베르에게 남겨 주었으나 자기 방에 있던 모든 물건과 몇 개의 가구만은 줄리에뜨에게 보내도록 부탁했다는 것을 알았다. 알리싸가 내 이름을 적어 내가 마지막으로 그녀를 방문했을 때 내가 받기를 거절했던 그 조그만 자색 수정 십자가를 알리싸가 자기 목에 달아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을 알았다. 또 그렇게 했다는 것도 나는 에뜨와르를 통해 알았다. 공증인이 내게 발송해 온 봉함 봉투에는 알리싸의 일기가 들어 있었다. 그 중 여러 부분을 나는 이곳에 옮겨 보겠다. 아무런 설명도 가하지 않은 채 그대로 옮길 생각이다. 이 일기를 읽으면서 내가 여러 가지로 반성해 본 점, 그리고 붓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나의 심적인 혼란을 여러분은 충분히 짐작해 주시리라 믿는다. @ff 알리싸의 일기 에그비이브에서 그저께 르아브르 출발, 어제 님므에 도착, 나의 첫 여행! 집안 일에서 벗어나 홀가분한 무위 속에서 오늘 188x년 5월 23일, 스물 다섯 살이 되는 생일을 맞아 나는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이렇다 할 즐거움은 없이 그저 벗삼아 보려는 생각에서이다. 왜냐하면 아마도 난생 처음으로 나는 홀로임을 느끼기 때문이다. 낯선, 거의 타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리고 아직 아무런 인연도 맺지 못한 고장에서. 이 고장이 내게 속삭여 주는 것은 노르망디나 또는 퐁궤즈마르에서 늘 듣던 것에 불과 하지만--왜냐하면 하느님은 어디서나 다름이 없으시니까--하지만 이 남부 지방은 내가 아직 들어보지 못한 언어를 쓰고 있다. 5월 24일 줄리에뜨는 내 옆의 소파에서 졸고 있다. 정원과 통하는 모래 깔린 안마당과 같은 높이로 이탈리아식으로 지어진 이 집에 매력을 주는 활짝 열린 갤러리 안이다. 줄리에뜨는 소파에 앉은 채로 여러 가지 색깔의 집오리들이 뛰놀고 두 마리의 백조가 헤엄치고 있는 연못까지 펼쳐져 있는 잔디밭을 바라보고 있다. 여름에도 마르는 일이 없다는 한 줄기 시냇물이 연못에 물을 채우고 차츰 야생의 숲으로 변해가는 정원을 가로질러 메마른 벌판과 포도밭 사이를 굽이치다가 멀리, 아주 멀리 살져 버리고 있다. ...어제, 에뜨와르 떼씨에르는 내가 줄리에뜨와 같이 있는 동안에 아버지를 정원, 농장, 지하실, 창고, 그리고 포도밭으로 안내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야 일찍부터 처음으로 공원의 이것저것을 살펴보며 산책할 수가 있었다. 이름 모를 수많은 초목들, 나는 점심 때 그 이름을 알아보려고 하나하나 잔가지들을 꺾어 모았다. 보르게에즈나 도리아 빵뺄리 별장에서 제로옴이 찬미하던 샌느 베에르가 이 속에 끼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우리가 사는 북부 지방의 초목과 같은 종류이긴 하지만 그 모습은 전혀 다르다. 공원이 거의 끝나는 곳에서 이 초목들은 좁고도 신비로운 빈터를 둘러싼 채 감촉이 보드라운 잔디 위에 늘어져 요정들의 합창을 권유하고 있다. 퐁궤즈마르에서의 자연에 대한 나의 감정이 그처럼 기독교적이었던 데 반해 이곳에서는 나도 모르게 신화적인 것으로 변해 가는 것이 놀랍고 두려울 지경이다. 하지만 점점 나를 압박하던 일종의 그 두려움도 역시 종교적인 것이었다. 여기 있는 것은 성스러운 숲이다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공기는 수정처럼 맑고 이상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나는 오르페우스와 아르미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갑자기 새의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는 바로 내 곁에서 들려 왔고 또 너무나 감동적이고 맑았기 때문에 불현듯 자연 전체가 그 노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나는 잠시 나무에 기대 서 있다가 아직 아무도 일어나기 전에 다시 돌아왔다. 5월 25일 제로옴에게서는 여전히 편지가 없다. 르아브르로 편지를 했으면 이리로 다시 발송되었을 텐데...나의 불안도 단지 이 일기에 고백할 수 있을 따름이다. 어제는 보오까지 산책을 하고 사흘 전부터는 기도를 드리고 있지만 이 불안은 가실 길이 없다. 오늘 다른 것은 쓰지 못하겠다. 에그비이브에 온 이래로 내가 느끼고 있는 이 이상한 우울은 무슨 까닭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우울을 너무도 가슴 깊이 느끼고 있기 때문에 벌써 오래 전부터 그곳에 뿌리박고 있었던 것 같고, 나 자신 자랑스럽게 여겨 왔던 기쁨마저도 실은 이 우울을 감싸고 있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5월 27일 나 자신을 속일 필요가 어디 있을까? 내가 줄리에뜨의 행복을 기뻐하는 것은 다분히 이론적인 것이다. 내가 그처럼 바라던 그 애의 행복, 내 행복까지도 희생해 주려던 그 행복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 나는 거기에 마음 괴로워하고 있다. 얼마나 복잡한가! 그래...그 애가 내 희생을 필요로 하지 않고 행복을 찾았다는 것, 내 희생 없이도 애는 행복해질 수 있었다는 데 대해 내 마음 속에 되돌아온 무서운 이기주의가 분개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제로옴의 침묵이 얼마나 나를 불안케 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고 스스로의 희생이 정말 내 가슴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일까? 하고 나는 물어 본다. 하느님께서 내게 그러한 희생을 요구하시지 않는 데 대해 나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나는 그러한 능력이 없었던 것일까? 5월 28일 이렇게 내 슬픔을 분석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나는 벌써 이 일기장에 집착해 있다. 이미 내 마음 속에서 제거되었다고 생각했던 간사한 마음이 여기서 다시 나래를 펴는 것일까? 아니다. 이 일기는 내 영혼이 그 앞에서 단장을 하는, 만족을 주는 거울이 되어서는 안된다! 내가 이 일기를 쓰는 것은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심심풀이로서가 아니다. 슬픔 때문인 것이다. 슬픔이란 내가 오랫동안 모르고 지낸 온, 이제는 증오하며 영혼으로부터 떨쳐 버리고 싶은 죄의 상태이다. 이 일기는 내 마음 속에 다시 행복이 깃들도록 나를 도와야 한다. 슬픔이란 하나의 착잡이다. 나는 한 번도 나의 행복을 분석해 보려고 해보지 않았다. 퐁궤즈마르에서도 나는 정말 홀로였다. 여기서보다도 더 홀로였다. 그런데 어째서 그것이 느껴지지 않을까? 제로옴이 이탈리아에서 편지를 하였을 때, 나 없이 모든 것을 바로 본다는 것, 나 없이 그가 산다는 것을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고, 마음으로 그를 따랐고, 그의 즐거움이 나의 즐거움이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지금 나는 나도 모르게 부르고 있다. 내가 보는 모든 새로운 것도 그가 없이는 마음을 괴롭힐 뿐이다. 6월 10일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이 일기는 오랫동안 중단됐다. 귀여운 리즈의 출생, 줄리에뜨를 간호하면서 지샌 긴 밤들, 제로옴에게 쓸 수 있을 모든 것을 여기에 적는다는 것은 아무런 흥미도 없다. 나는 허다한 여성들에게 공통적인 '너무 쓴다'라는 견딜 수 없는 결정을 피하고 싶다. 이 일기를 자기 완성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삼고 싶다. 그 뒤에는 책을 읽다가 적어 둔 메모라든가 책에서 베낀 구절 등이었다. 그리고서는 또 다시 퐁궤즈마르에서의 날짜로 계속되었다 7월 16일 줄리에뜨는 행복하다. 그 애 자신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고 또 그렇게 보인다. 나는 그것을 의심할 권리도 없고 이유도 없다. 그런데 지금 그 애 곁에서 내가 느끼는 이 불만족감, 어색한 기분은 어디에 연유하는 것일까?....아마도 그것은 이 행복이 너무나 쉽사리 획득되었고 또 너무나 빈틈없이 '들어맞는'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영혼을 죄고 질식시킨다는 느낌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지금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이 행복 그 자체인지 혹은 행복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인지 묻고 있다. 오오, 주여! 제가 너무 쉽게 도달할 수 있는 행복은 제게서 멀리 해 주소서! 제가 당신에게 이를 때까지 제 행복을 미루고 연기 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옵소서. 그 다음은 여러 장이 뜯겨져 나갔다. 아마 르아브르에서의 우리의 쓰라린 재회에 관한 대목이었을 것이다. 일기는 그 다음해에 다시 시작되었다. 날짜는 적혀 있지 않으나 틀림없이 내가 퐁궤즈마르에 머물러 있던 때에 쓴 것이다. 때때로 그 이야기하는 데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을 내가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는 나에게 나 자신을 내가 설명해 주고 또 밝혀 준다. 그가 없이 내가 존재할 수 있을까? 그가 있기 때문에 나는 존재하는 것이다. 즉 나는 그에 대해서 내가 느끼는 것이 과연 남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그것인가 망설여진다. 흔히 사람들이 그려내는 사랑이란 내가 그리는 사랑과는 너무나 다르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나 자신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그를 사랑하고 싶다. 그가 없이 살아야 한다면 무엇 하나 내게 기쁨을 줄 것은 없다. 내가 덕을 행하는 것도 모두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이다. 그런데도 그의 곁에 있으면 그것이 흔들거리는 걸 느낀다. 나는 피아노 연습하기를 좋아했다. 하루하루 진전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또한 내가 외국어로 된 책을 읽을 때 맛보는 즐거움을 설명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외국어가 더 좋다든가 내가 좋아하는 몇몇 작가들이 외국 작가들만 못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뜻과 감정을 이해하기가 좀 어렵다는 것과 그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며 차츰차츰 보다 더 잘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데서 느끼는 무의식적인 자만심이, 지적인 쾌락에 알지 못할 영혼의 만족감을 더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이 영혼의 만족 없이는 살아가지 못할 것 같다. 아무리 행복해도 나는 진보가 없는 상태는 바랄 수가 없다. 신성한 기쁨이란 하느님 안에서의 융합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언어의 희롱을 꺼리지 않는다면 나는 진보적이 아닌 기쁨을 경멸한다고 말할 것이다. 오늘 아침 우리 둘이는 가로수가 있는 길가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또 할 필요도 없었다... 별안간 그는 나에게 내세라는 것을 믿느냐고 물었다. "물론이야 제로옴." 하고 나는 소리쳤다. "내게 그것은 희망 이상의 것이야. 그것은 확신이야." 그러나 갑자기 내가 외친 이 말 속으로 나의 모든 신앙이 쏟아져 들어간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런데." 하고 잠시 말을 중단하더니, "신앙이 없다면 넌 지금과는 행동이 달라질까?" 하고 그는 덧붙였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어?"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역시 너 자신의 생각이야 어떻든간에 일단 열렬한 신앙에 잠긴 이상 달리 행동할 수 없는 거야. 그리고 만일 달라진다면 난 너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 아니야, 제로옴, 아니야, 우리가 덕을 행하는 것은 미래의 보상을 위해서가 아니야. 고귀하게 태어난 영혼에게는 스스로의 고행에 대한 보상을 생각한다는 것은 모욕적인 말이야. 그것은 이러한 영혼이 지니는 아름다움의 형상이야. 아버지의 건강이 다시 나빠졌다. 제발 대단한 병이 아니시기를 바라지만 사흘 전부터 우유로만 연명을 하고 계신다. 어젯 저녁 제로옴이 자기 방으로 올라간 후에 나와 함께 늦도록 앉아 있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거의--그런 일이 없었는데 어째서 그랬는지--누워 있었다. 등갓이 내 눈과 내 몸의 상체에 불빛을 가려 주고 있었다. 나는 옷에서 비죽이 나와 불빛에 드러나 있는 두 발끝을 기계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들어오시더니 문 앞에 서신 채로 미소하시는 듯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시는 것이었다. 어쩐지 당황해져서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아버지는 손짓을 하시며, "이리 와 내 옆에 앉아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밤이 퍽 깊었는데도 가려 하시지 않고 헤어지신 이래 처음으로 나에게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하시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서 어머니와 결혼하시게 되었는지, 얼마나 어머니를 사랑하셨는지, 또 처음에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얼마나 귀중한 존재였던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아버지." 하고 나는 마침내 말했다. "왜 오늘 저녁에 그런 이야기를 하세요? 하필 오늘 저녁에...." "그건 방금 응접실로 들어서면서 소파 위에 누워 있는 너를 보았을 때, 잠깐 도안이지만 네 어미를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야." 내가 그렇게 고집해서 물어 본 이유는 그날 저녁 제로옴이 내가 앉은 안락의자에 기대어 서서 내게 몸을 굽혀 나의 어깨 너머로 내가 읽던 책을 함께 읽었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 숨결을 느낄 수가 있었고 그의 체온과 떨림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책을 읽는 척하고 있었지만 이미 아무 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책 줄조차 가려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너무도 이상한 심적 동요에 사로 잡혔기 때문에 아직 그럴 기력이 있을 때 서둘러 일어섰다. 다행히도 그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나는 잠시 밖으로 나올 수가 있었다. 하지만 잠시 후 응접실에서 홀로 그 소파에 누워 있었을 때 나는 정말 어머니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불안하고 답답하고 나 자신 비참하게 여겨졌을 뿐 아니라 회한처럼 마음 속에 솟아오르는 지난 날의 추억에 쫓겨 그날 밤 나는 거의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주여, 악의 모습을 띤 모든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가르쳐 주시옵소서. 가엾은 제로옴! 그가 약간의 몸짓을 하기만 하면 되리라는 것, 그리고 때로는 내가 그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기만 한다면.... 아직 어렸을 때 나는 벌써 그가 있기 때문에 아름다워지고 싶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완전'을 지향했던 것도 그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완전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가 없어야 된다는 것, 이것이 오오, 주여! 바로 당신의 모든 가르침 중에서 무엇보다도 저의 영혼을 당황케 하는 것입니다. 덕과 사랑이 융합되는 영혼을 지닐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사랑한다는 것, 힘껏 더욱 더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덕이라는 것이 있을까? 나는 때때로 의심해 본다. 하지만 아아! 어떤 날에는 덕이란 사랑에 대한 항거로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럴 수가 있을까? 내 마음의 가장 자연스러운 경향을 감히 덕이라 부를 수 있을까? 오오 매혹적인 궤변! 허울 좋은 권유! 종잡을 수 없는 행복의 환영이여! 오늘 아침 라 브리에르(17세기의 작가. '성격론'의 저자)가 쓴 책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때로는 금지되어 있기는 하지만 너무도 소중한 쾌락과 정다운 유혹이 있어 그것이 허용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자연스러울 때가 있다. 이처럼 큰 매력은 덕행으로써 그것은 단념해 버릴 수 있다는 그 매력으로써가 아니면 도저히 물리칠 수가 없는 것이다.' 어째서 나는 이 구절에서 변명을 찾아냈던가! 사랑의 매력보다 더욱 세차고 더욱 감미로운 매력이 나를 은근히 이끌고 있기 때문일까? 오오! 사랑의 힘으로 우리들 두 사람의 영혼을 동시에 사랑을 넘어선 저 건너까지 이끌어갈 수만 있다면! 아아! 이제는 너무나 잘 깨닫고 있다. 하느님과 그의 사이에는 단지 나라는 장애물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그가 말하는 것처럼, 처음에는 나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그의 마음이 하느님께로 향했다 하더라도 이제는 그 사랑이 그를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로 하여 지체하고 나를 사랑하는 데만 치우친다. 나는 그가 덕을 향해 앞으로 나가는 것을 가로막는 우상이 되었다. 우리 둘 중에 한 사람만이라도 거기에 도달해야 한다. 주여, 비열한 저의 마음은 도저히 이 사랑을 극복할 수 없게 되었으니, 주여, 제발 그가 저를 사랑하지 않도록 만들 힘을 제게 주시옵소서. 그러하오면 저의 공덕보다 무한히 훌륭한 그의 공덕을 당신에게 바칠 것이오니... 그리고 오늘 그를 읽어 제 영혼은 흐느끼고 있으나 그것은 장차 당신의 품에 다시 그를 찾으려 함이 아니오니까?... 말씀해 주소서, 오, 하느님! 어느 영혼이 그의 영혼보다 더 타당하겠습니까? 그는 저를 사랑한다는 것보다는 좀 더 훌륭한 것을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옵니까? 그러니 그로 인해 걸음을 멈추게 된다면 저는 그만큼 더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옵니까? 영웅적일 수 있는 모든 것이 행복 속에서는 얼마나 위축되고 있습니까!.. 일요일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히브리 서 11장 40절 참조) 5월 3일 월요일 행복이 바로 곁에 있어 손짓을 해준다면... 손을 내밀기만 하면 잡을 수 있을 텐데... 오늘 아침 그와 이야기하면서 나는 희생을 이겨냈다. 월요일 저녁 그가 내일 떠난다.... 그리운 제로옴 나는 언제나 끝없이 애정으로써 너를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내 입으로 그런 말은 결코 못하게 될 거야. 내가 내 눈과 입술과 영혼에 가하는 속박이 너무도 견디기 힘들어서 너와 헤어진다는 것은 내게는 오히려 해방이기도 하고 쓰디쓴 만족이기도 하다. 나는 이성적인 행동을 하려고 노력하지만 막상 행동을 하게 되면 나를 움직이게 하던 이성은 나를 저버리거니 혹은 그것이 어리숙해 보인다. 그리고 나는 이미 그것을 믿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나로 하여금 그를 피하게 하는 이유? 이미 나는 그런 걸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이유도 모르는 채 서글프게도 그를 피하고 있는 것이다. 주여! 제로옴과 제가 손을 맞잡고 서로 의지하면서 당신에게로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평생을 통해 마치 두 사람의 순례자처럼 때때로 둘 중 한 사람이, "피곤하면 내게 기대." 하고 말하면 다른 한 사람이, "네가 곁에 있는 것을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해." 라고 대답하면서 당신을 향해 나아가도록 해주시옵소서. 아닙니다, 주여! 당신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둘이서 나란히 걸어가기에는 너무도 좁은 길입니다. 7월 4일 6주일 이상이나 일기를 펼치지 않았다. 지난달의 일기 몇 장을 다시 읽어 보면서 나는 애써 좋은 문장을 쓰려고 노력했던 어리석고도 그릇된 나의 속마음을 글 속에서 대뜸 알아보았다. 순전히 그의 탓이다. 그가 없이 살아 나갈 수 있기 위한 도움이나 될까 하고 쓰기 시작한 일기 속에서도 마치 계속해서 그에게 편지라도 쓰는 것 같다. 문장이 잘 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모두 찢어 버렸다. "이러한 나의 마음의 나는 잘 알고 있다." 그에 관한 부분은 전부 찢어 버렸어야 했을 것이다. 한 장도 남김 없이 모두 뜯어냈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자 벌써 나는 이 몇 장을 찢어 버렸다는데 어느 정도의 긍지를 느꼈다. 내 마음이 이토록 병들지 않았다면 웃어넘겼을 긍지이다. 정말로 뜻있는 일을 한 것 같고 그 버린 몇 장 속에 무슨 중요한 것이나 들어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7월 6일 나는 책장으로부터 그의 책들을 추방해 버려야만 했다. 책에서 책으로 나는 그를 피하지만 어디에서나 그를 만났다. 나 혼자 펴보는 책장 속에서도 그 구절을 읽어 주던 그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 온다. 그가 흥미를 느끼는 것이 아니면 나도 별로 흥미가 없었다. 나는 사고방식마저 그의 것을 취했기 때문에 우리 둘의 생각이 같은 것이라고 느끼면서 기뻐할 수 있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그의 생각과 나의 생각을 구별 할 수가 없다. 때로는 그의 문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악문을 쓰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에게 대항한다는 것은 역시 그에게 전념하는 것이다. 얼마 동안은 성경만을 읽고(아마 '예수를 본받아'도 함께) 이 일기장에는 읽은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 하나씩을 매일 적을 작정이다. 이 뒤에는 일종의 '나날의 양식'이 적혀 있고 여기에 7월 1일부터 시작되는 하루하루의 날짜마다 발췌구가 하나씩 덧붙여 있었다. 여기에도 주석이 붙은 부분만을 옮겨 쓴다. 7월 20일 '네가 있는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누가 복음 18장 22절 참조). 나는 제로옴만을 생각하고 있는 나의 마음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동시에 제로옴에게도 그렇게 하기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닐까? 주여, 제게 그러한 용기를 주시옵소서. 7월 24일 나는 '마음의 위안'을 읽기를 중단했다. 그 옛 글은 퍽 재미가 있었지만 마음을 산만케 하는 무엇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맛본 거의 이교도적인 즐거움은 내가 구하려던 교훈과는 전혀 방향이 다른 것이다. '예수를 본받아'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것 역시 아무래도 이해가 안되는 라틴어 원본으로는 읽지 않기로 했다. 내가 택한 번역본에 서명이 없는 것이 마음에 든다. 신교파의 번역임에 틀림없는데 표제에는 '모든 기독교 단체에 적합함'이라고 적혀 있다. '오오! 그대가 덕을 향해 나갈 때 어떤 평안을 얻을 것이며 어떤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주게 될 것인지 안다면 그대는 더욱 정성들여 거기에 매진할 것이다.' 8월 10일 주여, 제가 당신을 향하여 어린 신앙심의 충동과 천사들의 초인간적인 목소리로 외칠 때 이 모든 것은 제로옴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서 오는 것임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나 당신과 저 사이에 그의 모습을 두심은 어찌된 연유이옵니까? 8월 14일 이 일을 완수하는 데는 앞으로 두 달... 오오, 주여!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8월 20일 아직도 내 마음 속에서 희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나도 느끼고 있다. 내 슬픔으로 미루어 나는 그것을 느끼고 있다. 주여, 이 기쁨, 지금까지는 오직 그만이 내게 가르쳐 주던 이 기쁨을 당신만이 제게 주시옵소서. 8월 28일 나는 얼마나 속되고 서글픈 덕에 이르렀나! 스스로 나 자신에 대해 지나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일까?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하자. 언제나 하느님께, 힘을 주시옵소서 하고 탄원을 하다니, 얼마나 비겁한 일인가! 이제 내 기도는 온통 하소연 뿐이다. 8월 29일 '들에 핀 백합을 보라...'"[누가 복음]12장 27절" 이 간단한 말씀이 오늘 아침 풀길 없는 슬픔에 나를 잠기게 했다. 들로 나와 나도 모르게 되풀이 한 이 말이 내 마음과 눈을 눈물로 가득 채웠다. 나는 농부가 몸을 굽혀 쟁기질을 하고 있는 끝없는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들에 핀 백합을...'하지만 주여, 그 백합은 어디에 있사옵니까? 9월 16일 밤 10시 다시 그를 만났다. 나와 같은 지붕 밑에 있는 것이다. 그의 창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잔디밭을 비추고 있다. 내가 이 몇 줄을 적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는 잠들지 않고 있다. 아마도 나를 생각하고 있겠지. 그는 변하지 않았다. 그도 그렇게 말하고 나도 그렇게 느낀다. 그의 사랑이 나를 용납하지 않도록 내가 결심한 그대로의 나를 그에게 보일 수 있을까? 9월 24일 오오! 속마음은 꺼질 듯하면서도 끝내 무관심과 냉담을 가장 했던 잔인한 대화... 지금까지는 그를 피한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 나는 하느님께서 내게 이겨낼 힘을 주시리라 생각했고 싸움을 피하는 것은 비겁한 것이리라고도 생각했다. 나는 과연 승리를 했던가? 제로옴은 전보다 나를 덜 사랑하게 되었는가? 아아! 이것은 내가 바라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지금보다 더 그를 사랑해 본 적은 없다. 그리고 주여, 제게서 그를 구해내시기 위해 저의 희생이 필요 하시다면 뜻대로 하시옵소서! '저의 마음과 영혼 안에 들어오셔서 저의 고난을 짊어지시고 당신의 수난에서 아직 남아 있는 고통을 저의 속에서 계속하여 감당하옵소서.' 우리는 빠스깔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그에게 무엇이라 말할 수 있었던가? 그 무슨 부끄럽고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했던 가! 그런 말을 하면서도 괴로웠지만 오늘밤은 그런 말이 하느님에 대한 모독인 것처럼 뉘우쳐진다. 묵직한 '빵세'를 다시 뽑아들었다. 저절로 펴진 것이 로안네즈 양(로안네즈 공작의 누이로 빠스깔의 애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적은 곳이다. '자진해서 남을 따라갈 때는 속박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항거하기 시작하고 홀로 떨어져 걷기 시작하면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이 너무나 내 가슴을 찔렀기 때문에 더 읽어 나갈 기력이 없어졌다. 그러나 이 책의 다른 곳을 펼치면서 나는 아직까지 읽어보지 못한 훌륭한 구절을 발견했다. 그래서 이제 막 베꼈다. 일기의 첫 부분은 여기에서 끝나고 있었다. 그 다음 부분은 아마 찢어 버린 모양이다. 왜냐하면 알리싸가 남긴 서류에는 그로부터 3년 뒤 다시 퐁궤즈마르에서--9월에--즉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나기 조금 전부터, 이 일기가 다시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일기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되고 있다. 9월 17일 주여, 제가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당신은 잘 아시옵니다. 9월 20일 주여, 그를 제게 주옵소서. 그러면 이 마음을 당신에게 바치오리다. 주여, 한 번만 더 그를 만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이 마음을 당신에게 드리기로 약속하옵니다. 그러하오니 저의 사랑이 당신에게 청하는 것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의 남은 목숨은 당신에게 바치겠나이다. 주여, 저의 이 천박한 기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저는 제 입술에서 그의 이름을 떼지도 못하겠고 제 마음의 고통을 잊지도 못하겠나이다. 주여, 당신께 외치옵니다. 슬픔에 잠겨 있는 저를 버리지 마시옵소서. 9월 21일 '너희가 나의 이름으로 나의 아버지께 구하는 모든 것은'(요한 복음 14장 13절 참조) 주여, 당신의 이름으로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러하오나 비록 제가 기도를 드리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당신은 이 마음에서 타오르는 소원을 알아 주실 줄 아옵니다. 9월 27일 오늘 아침부터는 마음이 퍽 안정되어 있다. 어젯밤은 묵상과 기도로 거의 지새웠다. 그런데 문득 어린 시절에 성령에 대해서 그려 보던 상상과 비슷한 광채가, 찬란한 마음의 평안이 나를 둘러싸고 나에게 내려오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이 기쁨이 신경의 흥분이나 아닐까 두려워 얼른 잠자리에 들어갔다. 이 크나큰 행복감이 사라지기 전에 나는 곧 잠이 들었다. 오늘 아침에도 이 행복감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제는 그가 올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9월 30일 제로옴! 나의 벗, 아직 동생이라고 부르지만 동생보다 한없이 더 사랑하는 너... 그 너도밤나무 숲에서 내가 얼마나 너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는지...저녁 때마다 해가 질 무렵이면 나는 채소 밭의 작은 문을 나서서 이미 어둠이 깃든 가로수 길로 내려갔어. 갑자기 너의 대답 소리가 들리고 그리하여 돌이 많은 언덕 위에서 재빨리 지나치는 너의 모습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또는 벤치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너의 그림자가 멀리서 보이다 할지라도 내 가슴은 놀라 뛰지 않을 거야. 오히려 네 모습이 보이지 않는 데 놀랄 거야. 10월 1일 아직도 아무 소식이 없다. 태양은 비할 데 없이 맑은 하늘에서 졌다. 나는 기다리고 있다. 나는 곧 이 벤치에 그와 함께 나란히 앉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벌써 그의 음성이 들린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는 것이 좋다. 바로 여기에 그는 올 것이다. 나는 그의 손 안에 내 손을 놓으리라. 그리고 나의 이마를 그의 어깨 위에 얹으리라. 나는 그의 곁에서 호흡을 하게 될 것이다. 어제도 다시 읽어 보려고 그가 보낸 편지를 몇 장 가지고 나왔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너무나 그의 생각으로 가득 차서 편지를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그가 좋아하던 그 자색 수정 십자가, 지나간 어느 여름, 그가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동안 저녁마다 내가 목에 걸었던 그 십자가도 몸에 지니고 나왔었다. 아 십자가를 그에게 주고 싶다. 이미 오래 전부터 나는 이런 생각을 꿈꾸고 있었다. 그가 결혼을 하면 나는 그의 첫딸인 작은 알리싸의 대모가 되어 이 보석을 주고... 왜 나는 이런 말을 하지 못했을까? 10월 2일 오늘 내 영혼은 하늘에 등지를 친 새처럼 가볍고 즐겁다. 그는 틀림없이 오늘 올 것이다. 나는 그것을 느끼고 또 알고 있다. 무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외치고 싶다. 여기에도 그것을 적어야겠다. 내 기쁨을 숨기고 싶지는 않다. 평소에는 그처럼 방심한 채 내게 무관심한 로베르조차도 나의 기쁨을 알아챘다. 그가 묻는 말에 나는 당황했고 또 무엇이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저녁까지 어떻게 기다릴까? 알 수 없는 투명한 띠가 어느 곳을 보아도 그의 모습을 크게 확대시켜 내 눈에 비추어 주며 사랑의 모든 빛을 내 마음의 단 하나 초점 위에 집중시키고 있다. 오오! 기다림이란 이다지도 나를 지치게 하는 것일까! 주여, 행복의 그 큰 문을 잠시 동안만이라도 제게 보여 주시옵소서! 10월 3일 모든 것이 꺼져 버렸다. 아아! 그는 마치 그림자처럼 나의 두 팔에서 빠져나갔다. 바로 저기에, 저기에 그가 있었다. 아직도 나는 그를 느끼고 있다. 나는 그를 부르고 있다. 내 손, 내 입술이 어둠 속에서 그를 찾고 있다. 헛되이.... 나는 기도할 수도 없고 잠들 수도 없다. 다시 어두운 정원으로 나갔다. 내 방에서나 집안 어디서나 그저 무섭다. 슬픈 마음에 못이겨 나는 그를 뒤에 남긴 채 돌아와 버린 문까지 다시 갔다. 어리석은 희망을 품고 그 문을 열어 보았다. 그가 돌아와 있었으면! 나는 불러 보았다. 어둠 속을 더듬었다. 그에게 편지를 쓰려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 슬픔을 지탱할 길이 없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 그에게 무엇이라 이야기했던가? 내가 무엇을 했던가? 부슨 필요로 나는 그의 앞에서 언제나 나의 덕을 과장하는 것일까? 나의 온 마음이 부정하는 덕이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일까? 하느님이 나의 입술에서 나오게 하신 말씀을 나는 몰래 배반하고 있었다. 내 마음 속에 가득 차 있던 것은 하나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제로옴, 제로옴! 곁에 있으면 내가 죽을 것 같은 나의 불쌍한 벗, 내가 이야기한 것 중에서 내 사랑이 네게 들려 주었던 것 외에는 다 잊어 줘. 편지를 썼다가 찢어 버렸다. 그리고 다시 썼다. 벌써 새벽이다. 내 마음처럼 슬프고 눈물에 함빡 젖은 잿빛의 새벽...농장에서 일 시작하는 소리가 들리고 잠들었던 모든 것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이제는 일어나라. 때가 왔느니라.' 편지는 부치지 않겠다. 10월 5일 저를 앗아가 버리신 질투심 많은 하느님, 이제는 저의 마음을 독점하시옵소서. 이제는 어떠한 열정도 이 마음을 저버릴 것이오며, 어느 하나 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아직도 제 마음에 남아 있는 슬픔의 찌꺼기를 이겨내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이 집, 이 정원이 어쩔 수 없이 제 사랑을 북돋우고 있습니다. 당신만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달아나고 싶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재산은 가난한 사람을 위해 처분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제가 쉽사리 팔 수 없는 퐁궤즈마르의 이 집만은 로베르에게 주는 것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유언장은 썼지만 필요한 수속 절차는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 그리고 어제 공증인을 만났을 때도 그가 내 결심을 눈치채고 줄리에뜨나 로베르에게 알리까 두려워서 충분히 이야기하지 못했다. 빠리에 가서 이 일을 마치자. 10월 10일 이곳에 도착하자 너무도 피곤해서 처음 이틀간은 꼼짝 못하고 누워 지냈다. 내가 싫다는 데도 청해 온 의사는 꼭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반대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러나 나는 수술하기가 무섭다는 것과 기운이 좀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것을 쉽사리 의사에게 납득시킬 수가 있었다. 이름과 주소도 숨길 수가 있었다. 나를 이곳에 받아들이고 또 하느님께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동안은 아무런 곤란이 없도록 나는 이곳 사무실에 충분히 돈을 맡겨 놓았다. 방도 마음에 든다. 깨끗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벽의 장식이 된다. 나 자신 스스로 기쁨마저 느끼는 데 놀랐다. 생에 대한 아무런 애착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하느님만으로 만족해야 하고 또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차지하실 때 비로소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성경 외에는 아무 책도 가져오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그 안에 적혀 있는 말씀보다도 빠스깔의 그 열광적인 흐느낌 소리가 더 강하게 내 마음속에서 메아리치고 있다. '하느님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나의 기다림을 채워 줄 수 없다.' 오오, 경솔한 내 마음이 바랐던 것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기쁨이었다. 주여! 이 외치는 소리를 듣기 위해 당신은 나를 절망 속에 빠뜨렸나이까? 10월 12일 당신의 통치가 군림하옵기를! 저의 마음 속에 군림하옵기를. 그리하여 당신만이 나를 다스려 주소서. 이제는 아낌없이 이 마음을 송두리째 당신께 바치겠나이다. 퍽 노쇠한 것처럼 피곤하면서도 내 영혼은 이상한 동심을 간직하고 싶다. 방안의 모든 것이 잘 정돈되고 머리맡에 벗어 둔 옷이 잘 개어 있지 않으면 잠들 수 없었던 지난날의 소녀 그대로의 마음이다. 죽을 준비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10월 13일 찢기 전에 다시 한번 일기를 읽었다. '자기가 느끼는 괴로움을 털어놓는 것은 훌륭한 마음을 지닌 사람으론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아름다운 말은 끌로떨드 드보(실증주의 사상가 오귀스뜨 꽁뜨의 애인이 젊은 미망인)가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일기를 불 속에 던지려는 순간 일종의 경고와 같은 것이 나는 제지했다. 이미 이 일기는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것을 제로옴에게서 빼앗을 권리가 내게는 없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단지 그를 위해서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품었던 걱정이나 근심도 이제 와서는 너무도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되어 이제는 거기에 아무런 중요성도 없게 되었고 제로옴이 그로 인해 고민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주여, 저 자신은 이미 도달할 수 없어 단념해 버린 덕의 절정까지 그만이라도 밀어올리려고 미칠 듯이 바랐던 이 마음의 어설픈 표현을 그가 이일기장 속에서 때로 찾아볼 수 있도록 하여 주옵소서. '주여, 제가 이르지 못한 그 바위 위로 저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시편 31편 3절) 10월 15일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빠스깔이 결정적인 개종 후 옷 속에 꿰매어 넣고 다녔다는 기도문) 인간적인 기쁨과 모든 고통을 초월한 곳에서, 그렇다! 나는 이 찬란한 기쁨을 예감한다. 내가 다다르지 못한 그 반석의 이름이 '행복'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나는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나의 삶은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아! 주여! 그러하오나 당신께서는 욕심 없는 깨끗한 영혼에게는 그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당신의 성스러운 말씀은 '주 안에서 죽는 자는 지금부터 행복하리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옵니까? 여기에서 저의 신앙은 동요된 것입니다. 주여, 힘껏 당신께 외치옵니다. 저는 어둠 속에 있사옵니다. 새벽을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목숨이 다하도록 당신께 외치고 있나이다. 제 마음의 갈증을 풀어 주시옵소서. 저는 바로 이 행복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사옵니다. 혹은 이 행복을 가지고 있다고 자위해야 하겠나이까? 새벽도 되기 전에, 날이 밝아 오는 것을 알린다기보다는 그것을 부르고 있는 애타는 새처럼 저는 밤이 새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노래를 불러야 하겠나이까? 10월 16일 제로옴, 나는 네게 완전한 기쁨을 가르쳐 주고 싶어. 오늘 아침 심한 구토로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그 직후에 너무도 심신이 약해지는 것 같아서 잠시 동안은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처음엔 온몸에 아주 조용한 평온이 깃들었다. 그리고는 심한 고통, 육체와 영혼의 전율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내 생애의 급격하고도 명료한 계시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 방의 벽이 보기 흉하게 노출되어 있는 것을 처음으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겁이 났다. 지금도 마음을 안정시키고 가라앉히기 위해 이렇게 쓰고 잇는 것이다. 오오, 주여! 당신을 모독함이 없이 종말에 이르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아직 일어날 수가 있었다. 어린애처럼 무릎을 끓었다. 이제는 자신이 홀로라는 것을 또다시 깨닫기 전에 빨리 죽고 싶다. 지난 해 나는 줄리에뜨를 다시 만났다. 알리싸의 죽음을 알린 그녀의 마지막 편지를 받은 뒤로 10년 이상이 지났다. 나는 프로방스 지방에 여행을 갔던 길에 잠시 밈므에 들렀다. 소란한 도시 중심지인 프쉐르 거리에 위치한 떼씨에르 댁은 퍽 훌륭해 보였다. 이미 통지는 했지만 막상 문턱을 넘을 때 내 마음은 적지 않게 설레었다. 하녀의 안내로 응접실에 올라가 있노라니 잠시 후에 줄리에뜨가 들어왔다. 쁘랑띠에 이모를 보는 듯했다. 걸음걸이, 몸맵시하며 반가와 어쩔 줄 모르는 품이 판에 박힌 듯했다. 곧 내게 여러 가지를 물어 댔다. 나의 대답은 기다리지 않고, 그간 어떻게 지냈느냐, 빠리의 거처는 어떠냐, 무슨 일을 하느냐, 대인 관계는 어떠냐, 남프랑스에는 무슨 일로 왔느냐, 왜 에그비이브까지 가지 않느냐, 그곳에 가면 에뜨와르도 퍽 반가와 할 텐데 등. 그리고는 자기 남편, 어린애들, 자기 동생, 추수 이야기, 그리고 불경기 등 여러 가지 소식을 들려 주었다. 로베르는 퐁궤즈마르 집을 팔고 에그비이브에 와 산다는 것, 지금도 에뜨와르와 동업을 하고 있어 에뜨와르는 여행도 하고 자기 사업상의 판매고를 더욱 확장하는 데 전심할 수도 있다는 것, 한편 로베르는 밭에 남아 여러 가지 계획을 확장 개선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러는 동안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과거를 회상시켜 줄 것이 없나 찾아보았다. 나는 응접실의 새 가구 중에 퐁궤즈마르에 있던 가구가 몇 개 끼어 있는 것을 분명히 알아보았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서 떨고 있는 이 과거를 줄리에뜨는 모르거나 그렇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열 두서너 살짜리 사내아이 둘이 계단에서 놀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을 부러 내게 인사를 시켰다. 맏딸인 리즈는 제 아버지를 따라 에그비이브에 가고 없었다. 산책 나간 열 살짜리 사내 아이도 곧 낳게 괴리라던 아이가 바로 이 아이였던 것이다. 이 마지막 출산은 난산이었으며 그로 인해 줄리에뜨는 오랫동안 고생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난해, 마음을 돌이킨 듯 그녀는 또 딸을 낳았는데 말하는 걸 들어보니 다른 아이보다 이 아이를 특히 더 귀여워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 애가 자고 있는 방이 바로 내 옆방이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가보지 않겠어요?" 그래서 내가 따라가자, "오빠, 편지로는 부탁할 용기가 나질 않았는데...이 애 대부가 돼주시겠어요?" "좋다면야 그렇게 하지." 나는 약간 놀란 채 요람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름이 뭐지?" "알리싸...." 줄리에뜨는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 "좀 닮은 것 같지 않아요?" 나는 대답 없이 줄리에뜨의 손을 꼭 쥐었다. 그 작은 알리싸는 어머니가 안아 일으키자 눈을 반짝 떴다. 나는 어린애를 받아 안았다. "오빠는 정말 훌륭한 아빠가 될 거예요." 줄리에뜨는 애써 웃으면서 말했다. "언제까지 결혼하지 않을 작정이세요?" "여러 가지 일을 잊을 때까지." 나는 그녀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았다. "곧 잊고 싶으세요?" "언제까지나 잊고 싶지 않아." 그녀는 불쑥, "이리로 오세요." 하고는 좀더 작고 벌써 어둠이 깃든 방으로 앞장서 들어갔다. 그 방에는 두 개의 문이 있어 하나는 줄리에뜨의 방으로 통해 있고 다른 하나는 응접실로 통했다. "잠시라도 틈이 있으면 이 방에서 쉬곤 해요. 이 집에선 제일 조용한 방이에요. 여기에 오면 생활의 피난처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이 작은 방의 창은 다른 방들처럼 시가지의 소음이 들리는 곳으로 나 있지 않고 나무가 있는 안뜰을 향하고 있었다. "앉으세요." 그녀는 안락의자에 힘없이 앉으면서 말했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면, 오빠는 언제까지나 알리싸의 추억에 성실하려는 거죠?" 나는 잠시 대답 없이 앉아 있었다. "오히려 알리싸가 나에 대해 생각하여 주던 것에 관해서겠지...아니, 내가 무슨 칭찬받을 일이나 한 것처럼 생각지는 말아. 그렇게 할 수밖엔 없었다고 생각해. 설사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다 할지라도 나는 단지 그 여자를 사랑하는 척 할 수밖엔 없을 것 같아." "아아!" 그녀는 짐짓 무관심한 척했다. 그리고는 내게서 얼굴을 돌리더니 무슨 잃어버린 물건이라도 찾아내려는 것처럼 마룻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무런 희망도 없는 사랑이 그처럼 오래도록 마음 속에 간직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땅거미가 잿빛 밀물처럼 몰려와 물건들을 하나하나 어둠 속에 잠기게 하자, 이러한 물건들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나 제각기 지난날의 추억을 속삭이는 것 같았다. 나는 알리싸의 방을 다시 보는 듯했다. 줄리에뜨가 이 방에 그 모든 가구를 옮겨다 놓은 것이었다. 이재 그녀는 다시 내게로 얼굴을 돌렸다. 이미 얼굴을 윤곽을 구별할 수 없어, 그녀가 눈을 감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몹시 아름다워 보였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자! 이젠 잠을 깨야죠...."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녀가 일어서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한걸음 내밀더니 맥이 빠진 듯 곁에 있는 의자에 다시 털썩 주저앉는 것이었다. 그녀는 두 손을 얼굴로 가져갔다.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램프를 들고 하녀가 들어왔다. @ff 부록 1 사랑의 도식(지드) 욕정은 타오르는 불길, 그것이 닿는 모든 것은 벌써 재가 되어 버린다.--약간의 바람에도 흩날리는 가벼운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영원한 것만을 생각하기로 하자. --칼트롱(인생이란 하나의 꿈)에서 우리 작품들은 우리들 자신의 사실 그대로의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기보다는 차라리 우리들의 애처로운 욕망, 영원히 금지된 다른 삶과 그리고 이루지 못할 모든 몸짓들에 대한 희구였을 것이다. 여기에 나는 너무도 내 생각을 혼란케 하고 실재하기를 바랐던 한 꿈의 이야기를 쓸 생각이다. 지난 봄 나는 행복에의 욕망으로 지쳐 버렸다. 나는 내게서 더욱 완전한 어떤 개화를 바랐던 것이다. 나는 행복하기를 바랐다--마치 이 세상에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는 듯이, 마치 과거라는 것이 항상 우리들을 압도하지 않기라도 한 듯이, 또 삶이라는 것이 삶의 비애에 대한 나날의 습관으로 빚어진 것이 아니라는 듯이, 또 삶이라는 것이 삶의 비애에 대한 나날의 습관으로 빚어진 것이 아니라는 듯이, 그리고 내일 이 어제의 연속이 아니기라도 한 듯이--꿈에서 깨어나자 곧, 오늘 나의 넋은 습관적인 자기 모색으로 벌써 되돌아서지 않기라도 한 듯이. 그리하여 무든 작품은 하루 하루 미루어 온 유혹 이상의 것은 아닌 것이다. 1 약간의 바람에도 흩날리는 가벼운 먼지. 새벽이 왔다. 뤼크는 아직도 어두운 숲에서 꽃을 가지고 나왔다. 아침 냉기에 몸을 떨면서 그는 기슭의 비탈진 곳에 앉아 해뜨기를 기다렸다. 그의 앞에는 알록달록한 꽃과 수증기로 반짝이는 이슬로 축축이 젖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뤼크는 모든 행복을 기다렸다. 하늘을 날던 벌떼가 다시 내려앉듯이 행복은 쉬 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자신을 위하여 모든 것은 벌써 잘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터 오는 먼동은 끝없는 환희에 전율하고 봄은 미소의 부름으로 싹트고 있었다. 노랫소리가 떨며 퍼지더니 윤무를 추며 소녀들이 나타났다. 미친 듯 축축한 풀잎 속을 밤 사이에 헝클어진 머리 그대로 그녀들은 온갖 꽃을 다 꺾었으며, 꽃바구니 마냥 치마를 걷어올리고 하얗게 드러낸 그들의 발은 춤의 율동을 쫓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곧 그 윤무에 지치자 목장 아래 샘물 쪽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몸을 씻고 물 위로 떠오르는 그들의 모습을 비추어 보며 그날의 즐거움을 맞으려 채비를 하는 것이다. 서로 헤어지면, 그들은 곧 자기 동무들을 잊는다. 라셀은 혼자서 꿈을 꾸며 돌아왔다. 그녀는 떨어진 꽃들을 집어들고, 새로운 꽃을 꺾으려고 몸을 수그려 뤼크가 다가오는 것도 못 본 체했다. 그녀는 노란 미나리아제비며 사르비아며 실국화 그리고도 풀밭에 있는 온갖 꽃을 다 꺾어들었다. 뤼크는 계곡에 있던 다지타리스와 자색빛 히아신드를 꺾어 가지고 왔었다. 그는 라셀의 바로 곁에 있었다. 이제 라셀은 꽃을 엮는 참이었다. 뤼크는 자기 꽃도 그 꽃다발 속에 넣었으면 싶었지만 감히 그러질 못했다. 갑자기 그 꽃을 그녀의 발 아래 던지고 그는 말했다. "이거, 숲속의 어두운 꽃들이죠. 어둠 속에서 내가 꺾었어요. 당신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 때 나타난 분이 바로 당신이었으니까요. 나는 밤새도록 당신을 찾았습니다. 당신은 이 봄날처럼 아름답군요. 게다가 나보다는 훨씬 젊고 오늘 아침엔 당신의 해맑은 발을 보았지요. 당신이 친구들과 같이 있어서 가까이 가지 못했어요. 이제야 당신은 혼자군요. 내 꽃을 가지시오. 그리고 이리 오시오. 우리 함께 즐거운 놀이나 배웁시다." 라셀은 은근한 웃음을 띄우고 있다. 뤼크는 그녀의 손을 잡고 함께 돌아갔다. 그 날은 장난과 웃음 속에서 지나갔다. 저녁에 뤼크는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 밤이 오면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몇 번이나 너무 더운 침대에서 벗어나 방안을 서성거리거나 열어 젖힌 창 밖으로 몸을 내밀어 보기도 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 있어서 사람이란 그들의 육체에 따라서 찬란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기가 좀 젊고 훨씬 더 아름답기를 바라고 있었다. 밤새도 록 뤼크는 라셀을 탐내고 있었다. 아침이 되자 그는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라일락 핀 길 끝에 그녀의 집이 있었다. 그리고는 나지막한 울타리가 둘러싸인 장미 가득한 정원. 무엇보다도 먼저 뤼크는 라셀이 노래하는 소리를 들었다. 저녁녘까지 그는 거기서 지내고, 다음 날 아침에 또 왔다. 매일같이 그는 왔다. 눈뜨기가 무섭게 그는 달려가는 것이었다. 라셀은 정원에서 미소를 띠고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 날이 지났다. 뤼크는 어쩌지도 못하였다. 라셀이 먼저 제 몸을 맡겼다. 어느 날 아침 줄곧 오던 소사나무 아래에서 그녀를 볼 수 없었던 뤼크는 그녀의 방으로 올라가 보기로 했다. 라셀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의 알몸으로 다만 쇼올만을 걸치고 그것도 거의 다 흘러내린 채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틀림없이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뤼크는 들어서자 벌겋게 상기되어 빙그레 웃었다.--그러나 몹시도 부드러운 그녀의 날씬한 다리를 보자 그는 거기서 어떤 연약함을 느꼈다. 그녀 앞에 무릎을 끓고 그는 섬세한 발에다 입을 맞추고 흘러내린 쇼올 자락을 여며 주었다. 뤼크는 사랑을 갈망했지마는 어떤 상처 같은 걸 두려워 하듯 육체의 소유를 겁내고 있었다. 우리들이 받았던 서글픈 교육, 눈부시게 빛나면서도 차분히 가라앉은 맑은 쾌락을 그것이 우리들에게 서러운 오열과 상심으로 혹은 침울하고 고독한 것으로 느끼게 한다. 우리는 이제는 신에게 행복의 자리에까지 우리들을 끌어올려 달라고는 더 빌지 않을 것이다--그런데 아니다! 뤼크는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누가 창안하여 처음 한 것일지라도, 자기에게 또다시 같은 짓을 되풀이만 한다는 것은 가소로운 편집광이 하는 일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뤼크는 이 여인을 소유했다. 만약 그들을 둘러싼 즐겁고, 같이 나눈 기쁨과 똑 같은 자연의 힘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지금 어떻게 내가 그들의 기쁨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사상이란 이제는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하였다. 그들은 행복하는 데에만 몰두해서 그들의 문제는 오직 욕망이었고, 그들의 정은 날마다 비밀스레 깊어만 갔다. 어느 말 저녁, 그가 언제나 하던 것처럼 그녀의 곁을 물러나려고 할 때, 그녀는 말했다. "왜 가려고 하세요? 만약 다른 애인이라도 있으시다면 좋아요.--그렇다면 가 보세요. 저는 질투하지는 않아요. 그렇지 않다면 여기 계시고--자, 이리 오세요, 네. 나의 침대가 당신을 부르고 있어요." 그 때부터 그는 매일 밤을 거기서 지냈다. 대기는 좀 더 따뜻해졌고, 밤이 몹시도 아름다워서 그들은 이제 더 창문을 닫지 않았었다. 이처럼 그들은 달빛 아래에서 잠들어 있었고, 난만하게 만발한 장미나무가 하나 뻗어 올라 창을 둘러쌌다. 그들은 그 장미가지로 창틀을 둘렀기 때문에, 장미 향기는 그 침실에 있는 꽃다발의 향기와 섞여 있었다. 사랑 때문에 그들은 밤 늦게야 잠이 들었고, 취한 사람들처럼--밤동안의 피로를 아직도 다 풀지 못한 채, 느지막하게 눈을 떴었다. 정원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샘물에 몸을 씻었다. 뤼크는 라셀이 알몸으로 나뭇잎 아래에서 목욕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산책을 나서는 것이었다. 가끔은 풀밭에 앉아, 하염없이 저녁이 오기를 기다렸다. 해가 지는 걸 바라보고 있다가 드디어 대기가 부드러워지면 그들은 천천히 그 보금자리로 되돌아 왔다. 바다는 그리 멀지 않았다. 힘찬 조수로 밤이면 그들은 가냘프나마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가끔 그들은 바닷가의 모래사장까지 내려가기도 하였다. 좁고 구불구불한 냇물 줄기 하나 없는 계곡을 지나야 했다. 그 계곡에는 양골담초와 금작화들이 얽혀져 있었고, 바람이 거기서는 모래를 좇듯이 불고 있었다. 그러자 모래사장이 열리었다. 커다란 선박이나 작은 배 하나 없는 물구비다. 하지만 바다는 잠잠하다. 거의 정면으로 멀리 작음 섬을 이루고 있는 듯한 굴곡선 해안선이 보였고 바로 그 지점에 커다란 정원을 둘러친 호화스러운 철책 같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저물녘에 그 철책은 황금으로라도 만들어진 듯 눈부시게 빛났다. 그들은 바다에도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가까운 곳에 마을이 하나 있었지마는,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자주 그쪽으로 지나가 보지는 않았다. 비가 올 때나 혹은 그것도 귀찮아서 풀밭에조차 내려가지 않을 때는, 라셀은 길게 누운 채 그의 발치에 앉아 있는 뤼크에게 이야기해 달라고 졸라댔다. 그녀는 말하였다. "말씀하세요. 저 지금 듣고 있어요. 내가 잠들더라도 그치지 마세요, 네. 봄날의정원 이야길 해주세요. 당신 잘 알고 있잖아요,. 그리고 그 높은 테라스 이야기 말이에요." 그래서 뤼크는 테라스며, 한 줄로 심어 놓은 마로니에며, 그리고 들판에 걸려 있는 여러 정원들을 이야기했다. 아침이면 어린 소녀들이 거기 와서 놀았고, 서로 손을 잡나 둥그렇게 원무를 추었다. 해는 아직도 들판 위로 높이 떠올라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나무들은 그늘을 이루지 못했다. 조금 후에 얌전한 큰 처녀들이 화단 가운데로 들어와서 꽃장식을 만들고 있었다--"라셀, 당신이 꽃을 엮었던 것처럼 말이야." 정오쯤 되어서 몇 쌍의 부부들이 나타났었다.--태양은 수목들 위를 지나고 있었기 때문에 나뭇가지들로 엮어진 불투명 한 둥근 천정은 좁은 길을 좀 더 서늘하게 하는 듯싶었다. 그 길을 거닐던 사람들을 이젠 나지막한 소리로 밖엔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윽고 눈부시던 빛이 좀 사그라지자 여름이 쫙 펼쳐 있는 듯이 보이는 들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소풍객들은 난간에 팔꿈치를 괴기도 하고 몸을 기대기도 하였다. 여러 패로 나뉘어 앉은 부인네들은, 어떤 이는 털실을 감고, 또 다른 이들은 그것으로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갔다. 학생들이 들어왔다. 학교시간이 끝난 것이다. 어린이들은 구슬치기를 하고 놀았다. 저녁이 되었다. 소풍객들이 좀 뜸해졌다. 그러나 아직도 어떤 이들은 모여서 끝내 버린 일이라도 말하듯, 벌써 그날 하루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테라스의 그림자가 들판위로 길게 깔려 있고, 저 멀리 지평선 맑은 하늘에는 몹시도 가늘고 서늘한 달이 나타났다. "밤에 나는 텅 빈 테라스를 거닐려고 왔지...." 뤼크는 말을 그치고, 이야기 소리에 잠든 라셀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훨씬 더 긴 산보도 하였다. 그 때는 봄도 다 간 마지막 무렵이었다. 그들의 집이 자리잡고 있던 작은 산을 기어오르다가, 중턱에서 그들은 맞은편 산록에 운하 하나를 발견했다. 그 운하를 따라 포플라들이 줄지어 있었으며, 비스듬하게 물 줄기를 따라 길이 나 있었다. 지세는 계속하여 내리받이였다. 다리를 건너 그 운하를 지날 수 있었지마는 타는 듯한 태양은 그들을 물 기슭으로 따라가게 하였다. 계곡으로부터 열기가 물결치듯 올라왔고, 들판에는 대기가 흔들리고 있었다. 저 멀리, 큰 길을 집마차가 지나가느라고 먼지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들은 들판에 펼쳐진 여름을 보았다. 길이며 수목들, 그리고 그 운하는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이 작은 산의 굴곡을 따라가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도 둑길을 걸어 그 운하를 따라 전부였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매우 오랫동안 걸었지마는 그것이 한없이 계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자, 곧 거기에 싫증을 느끼고 돌아와 버렸다. 2 부인--바로 당신에게 저는 이 이야기를 들려 주려고 합니다. 우리들의 서글픈 사랑이 황야에서 길을 잃고 헤매었다는 것을 당신은 아십니다. 제가 여간해서는 웃지 않는다고 이전에 불평하신 당신이십니다. 이 이야기는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 속에서 사랑이 주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보았습니다. 제가 찾아낸 것이 권태 뿐이라면 그것은 저의 탓입니다. 당신은 저에게 행복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게 하셨지요. 한 권의 책 속에 기쁨이란 얼마나 짧은 것이며, 그것은 또 어찌나 빨리 이야기가 끝나 버리는지. 결함도 애수도 없는 미소란 얼마나 평범한 것인지! 그리고 남들의 사랑, 그들을 행복케 하는 그 사랑이 우리들에게는 부슨 소용이 있다는 것인가. 그들에게 안 되었지만 뤼크와 라셀은 서로 사랑하였습니다. 나의 이야기에 일관성을 주기 위하여, 그들은 사랑 이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권태라고 해도 행복의 권태 밖에서 알지 못하였습니다. 꽃을 꺾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단조로운 일거리였습니다. 그들은 더욱 깊은 어떠한 탐구를 위해서 그 욕망을 버려본 적도 없었고, 기다림이 가져오는 번민, 초조감도 별로 느껴보지 못하였습니다. 소유에의 두려움과 격정적인 사랑 때문에--아! 부인 우리들이 그랬던 것처럼--꼭 껴안아 주고 싶은 애인을 밀쳐 버리는 몸짓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탐나는 꽃을, 그 꽃이 미적지근한 그들의 손에서는 더욱 빨리 시들어 버린다는 것을 생각해 보지도 않고 송두리째 꺾어 버렸습니다. 그들처럼 아무 의식 없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행복할진저! 그들은 의식 때문에 피로한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우리를 피로케 하는 것은 사랑이나 또는 죄악 때문이 아니라 지나간 일을 돌이켜 보고 탄식하는 데서 옵니다. 따라서 그들은 흘러가는 과거의 물위에 둥실둥실 떠내려가는 그들의 옛 행동을 좀처럼 되돌아 보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속하는 이러한 환희는 슬픔을 모른다는 데서 왔던 것입니다. 그들은 몇 번이고 되풀이할 수 있는 키스와 포옹 외에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의 삶이 진정으로 융합되었던 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지 때였습니다. 새파란 공중에 그들 머리 위의 높은 나뭇가지들은 더없이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여름! 여름! 그것을 찬미가처럼 노래해야겠지요. --다섯 시--나는 일어났다. "새벽이다". 나는 들로 나갔다.--풀잎에 맺힌 신선한 이슬, 아침 냉기에 서린 발을 씻을 수 있는 맑은 물이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았다면, 또 벌판에 비치는 아침 햇살들과 들의 현기를 그들이 알고 있다면, 게다가 여명이 자기를 향해 잔디밭으로 내려오는 이에게 던지는 환영의 미소, 이 모든 것을 그들이 알고 있었다면,--그들은 아마도 잠들어 누워 있지는 않았겠지, ...그러나 뤼크와 라셀은 간밤의 키스에 지쳐 있고, 사랑이 가져온 피곤은 여명이 벌판에게 주었을 미소보다 더 많은 미소를 아마 꿈 속에서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 그들은 집 밖으로 나섰다. 어느 봄날 그들이 따라갔던 그 계곡 그 운하에 그들은 당도했다. 그러나 작은 산을 오르지 않고 돌아서 갔기 때문에 그들은 그 운하가 한 커다란 애와 합치는 곳으로 오게 되었다. 그 운하는 배를 끄는 데 사용되고 있었다. 그들은 수문 위로 해서 물을 건넜다. 그리고는 배를 끌어 올리는 길을 따라갔다. 오른쪽으로 운하가 있었고 위쪽으로는 큰 강이었다. 저편 쪽 강기슭도 역시 길이 있었다. 그리고, 다섯 줄의 평행한 이 길들은 그들의 시전 밖으로 좁은 계곡 속으로 접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날 그들의 산책은 상당히 장거리였지마는 별로 이야기할 만큼 흥미있는 짓은 아니었다. 그들은 해변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다시 그 계곡을 내려갔다. 바다를 앞에 두고 그들은 앉았다. 요 얼마 전에 있던 폭풍우로 파도는 모래 밭 위의 깊은 곳에 있던 조개껍질이며, 뿌리 뽑힌 해초 나부랑이를 떠밀어 올려 놓았다. 아직도 부풀어 있는 파도가 끊임없는 소음으로 정신을 못차리게 하였다. 그래서 라셀은 갑자기 어떤 불안을 느꼈다. 그녀는 뤼크가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고 느꼈다. 더욱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소름이 끼쳤다. 그래서 그들은 일어섰다. 뤼크는 앞장서서 몹시 잰걸음으로 얼굴을 약간 찌푸려 험상궂게 하고 걸었다. 시커먼 흠투성이의 톱나무가 하나 거기 있었다. 이름도 모를 말뚝, 어느 배의 파편, 먼 어느 섬의 목재였을 이 통나무 앞에서 그들은 멈추어 섰다. 그리고 나서 뤼크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라셀은 어쩔 수 없이 또 본능적으로 뤼크에게 몸을 기대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 뤼크의 내부에 꿈틀거리는 모험에 대한 불안과 갈망을 어렴풋이 느끼면서 그들은 선 채로 머물러 있었다. 태양은 물러가서 해만의 저 너머로, 멀리 바다의 끝없는 수평선이 갑들 사이로 빠져 달아나는 듯이 보이는 해협 뒤로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태양이 가라앉는 동안 그들의 맞은편 섬 같은 것 위에서는 이름 모를 그 정원의 철책이 꺼져 가는 낙조를 받아,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거의 초자연적인 모양으로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하였다. 적어도 이것에 관해서 그들에게는 무어라고 서로 주고받을 말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황금이라기보다는 강철로 된 그 쇠창살들을, 본래부터 그런 것인지 혹은 특별히 잘 닦아서 그런 것인지 자기 자신이 빛을 내고 있는 듯 보였다 기이 한 것은 그 철책너머까지를 보았다고 생각했지마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말할 수 없었다. 뤼크와 라셀은 서로가 그것에 대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돌아오는 길에 라셀은 모래 위에서 크고 바짝 마르고 검고, 탄력 있는 일부러 그렇게 만든 듯한 기이한 모양의 알을 하나 발견했다. 너무 괴상한 것이어서 그것이 그들에게는 퍽 중요한 것이라고 느꼈고, 그래서 그 이유를 골똘히 생각해 볼 정도였다. 이 날의 기억은 그들에게 막연한 어떤 불안을 남겨 놓았다. 때때로 어쩔 수 없게 저 바다 앞에 꼭 닫힌 그 정원을 생각하며, 그것에 끌려 자꾸 알아보고 싶어졌다. 그런데, 그곳으로 데려다 줄 배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어느 날 아침 출발하여 해안을 따라 거기에 도달할 때까지 걷기로 작정하였다. 날이 새기 전에 그들은 일어나서 길을 떠났다. 아직도 날은 어둑하고 싸늘했다. 그들은 자기들과는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진 순례자들처럼 진지하고 묵묵하게 생각에 잠겨 걸어갔다. 그리고 다 식어 버린 호기심은 그들의 마음에 한 의무감 같은 것을 남겨 놓았던 것이다--왜냐 하면 그것은 이제 욕망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데 라셀은 발 끝에 채여 굴러다니는 길 위의 자갈이나 발을 디딜 때마다 빠져 들어가는 흐물거리는 모래에도 불평하지 않았다.--어떤 때는 모래밭을 따라, 어떤 때는 들을 가로 질러서--한번은 다리를 찾을 때까지 강둑을 거슬러 올라갔고, 그리고는 또 되돌아 내려오고,--다시 새로운 벌판을 건너고...아! 이렇게 해서 그들은 드디어 거의 그 담벽 아래까지 왔다. 그것은 정원이었다--그런데, 사람들을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려고, 돌로 쌓은 도랑으로 끌어들인 조수가 담 밑을 치고 있었으며, 거기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이 담은 방파제 모양 바다 가운데로 뻗쳐 나와 있었기 때문에, 이 해안에서는 음산한 석회질 갑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그들은 벽을 끼고 걸어갔다.--그 때는 정원의 벽에 그늘 하나 없을 무렵이었다. 그들은 담장 속에 거의 감추어진 듯한 조그마한 닫힌 문을 보았다.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그 벽은 굽어 있었고, 태양도 또한 날이 지나는 동안 그들을 따라 담 벽을 도는 것 같았다. 그 담 위로는 나뭇가지들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나뭇잎 하나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정원 안에서는 그치지 않는 웃음소리 같은 것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따금씩 분수의 물이 말하는 것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갑작 그들은 바다 앞으로 나와 있었다. 그러자 그들은 커다란 슬픔에 잠겼다. 그리고 돌아오려고 다시 길을 떠나 길을 떠나기 전에 잠깐 앉았다. 그들 앞에는 저편 쪽에 돌로 된 갑이 바다 가운데로 나가 있었고, 벽도 계속해 있어서 바닷물이 뛰어넘을 수 없는 그 도랑에 들어와 담벽 밑을 찰싹거리고 있었다. 슬픔이 한꺼번에 좁은 틈새로 들어와 그들 속으로 뚫고 들어왔고, 그들을 가득 채웠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오늘의 코오스 때문에 지쳐 있었고 게다가 헛수고만 한 것이 맥이 빠진 것이다. 태양은 지금 그 정원 뒤쪽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 담이 덮은 그늘 속으로 걸어갔다. 그들에게는 그 그늘이 어떤 신비를 지니고 있듯이 보였다. 그들은 이따금씩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긁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린 듯해서 걸음을 멈추면 그 소리도 따라 그쳤다. 그건 그들이 걷느라고 머리가 어지러워져서 그러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들이 집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밤도 깊어 있었다. 다음 날 낮 휴식 때 라셀이 말했다. "여름날의 새벽을 이야기해 주세요. 내 게으름 땜에 여기 당신 곁에 있으니 말이에요." 뤼크는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여름이었지, 그렇지만 아직 동트기 전이었어. 아직 새들도 지저귀지 않았고, 숲은 이제 겨우 눈을 뜬 참이었지." "아! 숲이 아니었어요. 가로수였어요. 동이 텄는데도 아직 새들이 지저귀지 않았다면, 그건 아직도 밤이 머무적거리고 있는 너무도 깊은 계곡 때문이지요. 그러나 훤한 빛이 언덕의 꼭대기를 벌써 밝혀 주었지요." 라고 라셀은 말했다 "그 상봉의 밝은 빛 쪽으로." 하고 뤼크는 말을 이었다. 두 기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말을 몰았다. 밤새도록 계곡을 따라 달린 뒤, 가장 높이 주위가 내려다보이는 그 언덕을 향하여 오랫동안 어둠 속을 달린 뒤라, 그들은 묵묵히 엄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말들을 천천히 그 곧고 가파른 길을 올라갔다. 그들이 올라가자 그들 둘레에는 빛이 점점 크게 번져갔다. 언덕위로 해가 나타났다.--언덕 위에는 다른 더 넓은 가로수 길이 펼쳐져서 먼저 길을 뚝 자르고 언덕의 상봉으로 이어져 있었다. 주 기사는 멈추었다. 하나가 말했다. "여보게 이제 해어지기로 하지. 우리 둘을 부르는 길은 똑같은 길이 아니니까.--그리고 나도 충분히 용기는 가지고 있으니, 자네가 나를 도와 줄 필요도 없단 말일세. 게다가 한 사람이 가려는 곳은 다른 한 사람에게는 무용한 곳이고--." 그러자 상대편이 말했다. "잘 자게. 친구여!" 그런 다음 등을 돌려 그들은 각기 외로운 정복을 향하여 가버렸다. 그때 모든 새들은 잠에서 깨어났다. 나뭇잎사귀 아래로는 사랑의 추격이 있고, 하늘에는 곤충들의 윤무가 벌어졌다. 벌꿀의 붕붕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잔디밭 위에는 꿀을 담은 새로운 꽃들이 피어났다. 미묘한 속삭임이 일어났다. 더 멀리 대지가 끝나는 곳에서 이제 나뭇잎밖에 더 보이는 게 없었다. 저 아래 희미하게 밝은 계곡에는 수목들의 흔들리는 끝가지들이 보이고 더 아래 쪽에는 안개가 끼어 있었다. 오! 사슴들이 물 마시러 내려오는 걸 보려고 우리는 얼마나 몸을 숙이었는지! "그래 그 두 기사는 어떻게 되었어요?" 라셀이 물었다. "아! 그들은 그만 내버려 두고, 가로수 길 이야기를 하기로 하지." ...정오 쯤해서 한떼의 젊은 여자들이 그곳에 왔다. 그녀들은 당신이 단신 친구들과 했듯이 서로 손을 잡고 걷고 있었지. 그녀들은 웃고 있었다. 다음엔 멋진 금장식과 비단 옷을 입은 남자들이 왔다. 다같이 함께 앉아 이야기들을 했다. 낮은 지나갔다. 그들은 입을 다물고 묵묵히 있었다. 어둠이 이미 위로 뻗쳐져 있었다. 그들은 일어나서 해가 지는 걸 보러 갔다, 가로수 길은 불안과 소곤거림으로 가득찼다. 모든 것이 잠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리고는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저녁이었다. 가지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잿빛의 나무 등걸은 어둠 속에서 신비롭게 보였다. 저녁놀의 새 소리가 일어났다. 그 때 벌써 시작되는 밤 속에 두 기사가 되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걷고 있었다. 그들의 말은 매우 피로한 기색이었다. 그들은 헛수고를 한 때문에 아침보다 더 엄숙해 보이고 허리가 굽어 있었다. 그래서 말 한 마디 나누지 않고 다시 만나서 언덕길을 내려가더니 어둠 속 나뭇가지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뤼크, 그렇담 뭣하러 떠났었대요? 길 떠날 필요가 없어요. 당신은 저의 모든 생활이지 않아요?" 하고 라셀이 말했다. "그렇지만, 라셀,--당신은 내 생활의 전부가 아니거든 내게는 또 다른 일들도 있으니까." 뤼크가 말했다. 3 부인, 저는 이 이야기에 싫증이 났습니다. 제가 여러 문장을 지었다면, 그건 남을 위해서이지 결코 제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당신은 잘 아십니다. 저는 계절과 영혼과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가을을 이야기해야겠지요. 저는 부슨 일이건 한 번 계획한 일은 포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만났다. 그런데 그녀들은 꽃을 꺾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비슷하다고 믿었다. 그녀들은 길을 줄곧 따라가리라 마음먹으며, 서로 손을 잡았다. 그러나 그들의 과거의 영향이 그들을 떼어 놓는다, 그들의 손은 풀어지고, 그들은 각자의 지나간 일 때문에 혼자서 길을 계속해 갈 것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이별이다. 왜냐 하면 단지 비슷한 과거만 이 여러 영혼들을 닮은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영혼들에게는 모든 것이 계속되는 것이다.--부인, 당신도 아시다시피 나란히 가는 이들은 서로 만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 뤼크와 라셀은 결국 헤어지고 말았다. 어느 날 단 하루, 여름의 어느 한 순간에만 그들의 인생곡선이 서로 얽던 것이다--그게 유일한 접촉의 교차점이었는데, 지금은 벌써 그들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도 가까운 모래 위에 앉아서, 뤼크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라셀은 다른 쪽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때때로 풀어지는 사랑을 다시 움켜쥐려고 하였지만, 그것도 신기한 즐거움은 아니었고 이미 고갈된 것이었다. 그래서 뤼크는 출발을 꿈꾸면서 행복에 잠겨 있었다. 라셀도 그를 더 붙들지 않았다.--그들이 함께 밖에 나갈 때에는 그들은 꿈에 잠겨 걸었다--차라리 나는 생각에 잠겨서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들은 거의 마주 바라보질 않고 그들의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뤼크는 이제는 더 사랑을 꿈꾸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그들의 살랑은 몹시 감미로운 추억 같은 것, 시들어 버린 아름다운 꽃들의 향기 같은 것을 그들 내부에 남겨 놓았다.--꽃 장식으로부터 남은 것 같은 것 말이다.--그러나 아무런 슬픔도 아무런 서러움도 없이 며칠 동안 그들은 이처럼 힘없이 말 한 마디 나누지 않고 걸었다. 가을의 나뭇잎들이 갖는 눈부신 색조, 물 위에 비치는 아름다운 반사 때문에 그들은 잠자듯 잔잔한 물을 더 좋아하였고, 그래서 물가를 천천히 산책하였다. 수목은 빛을 받아 찬란하였고 또 바람에 울렸다. 나뭇잎은 떨어져 지평선을 드러냈다. 뤼크는 광대한 삶을 꿈꾸고 있었다.--나도 그걸 꿈꾸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을 하는 것이지만 내 생각엔, 그는 필경 그 걸 꿈꾸었을 것이다--부인, 나는 뤼크와 라셀이 싫증났습니다. 이제 또 그들에 대해 무엇을 당신에게 더 이상 이야기할 게 있겠습니까? 그들은 다시 한 번 돌아가서 그 교묘한 철책의 정원을 보고 싶어했다. 벽을 끼고 가다가 그들은 그 감추어진 작은 문을 찾아냈다. 전에는 꼭 닫혀져 빗장조차도 없던 것이 이제는 활짝 열려 있어서 그들은 들어갔다.--그것은 버려 준 정원이었다. 그 정원 통로들의 아름다움은 무엇으로도 그럴 수 없는 것이었다 가을이 잔디를 덮었고, 나뭇가지들은 꺾어져 있었다. 잡초가 우거져 뒤덮여 있었다. 금잔디며 보릿잎 같은 풀들로 그들은 조용히 그 안을 걷고 있었다. 빨간 방울새가 지저귀고 있는 적갈색의 과일 나무로 가득찬 숲 곁을. 나는 가을의 찬란함을 사랑한다. 거기에는 돌 의자가 있었고 석상들이 있었으며 덧창은 닫히고 출입문들이 밀폐된 커다란 저택이 한 채 우뚝 서 있었다.--정원에는 축제의 자취가 남아 있었으며, 무르익은 과일들이 과수 울타리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저녁이 되자 그들은 되돌아 왔다. "가을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라고 라셀은 말했다. "가을." 뤼크는 말했다. "아! 그건 숲 전체를 말하는 것이지. 그리고 숲 기슭에 있는 갈색의 연못이란 사슴들이 오고, 그리고 뿔피리가 울리지. 와아! 사냥개들이 마구 짖어대고--사슴들은 펄쩍 뛰어 달아나지. 우리 커다란 나무들 밑을 거닐어 보자구--사냥꾼의 떼가 달려오네--그건 지나갔고--당신, 의장마를 본 적이 있어? 뿔피리 소리가 멀어지는군. 숲속으로 멀어지는 것이지. 자, 저녁이 내려앉는 고요한 연못을 보러 가자!" "당신이 하는 이야긴 우스워요. '의장대'라는 말은 이젠 아무도 안 쓰는 걸요. 게다가 저는 시끄러운 건 모두 싫어해요. 자, 이제 그만 잡시다." 라고 라셀이 말했다. 그래서 뤼크는 그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아직 그는 졸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헤어진 것은 그 뒤 얼마 안가서였다. 눈물도 눈웃음도 없는 이별. 말 없이 자연스럽게.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다 끝났다. 부인, 여기도 이제 가을이군요. 비가 옵니다. 숲은 죽고 그리곤 겨울이 곧 오겠지요. 저는 당신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의 영혼은 활활 타다가 가라앉곤 합니다. 저는 불 가까이 앉아 있습니다. 제 곁에는 책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저는 혼자 있습니다 저는 생각에 잠겨있습니다. 저는 귀를 기울여 듣고 있습니다--옛날처럼 신비로 가득찬 아름다운 우리의 사랑을 다시 하지 않겠습니까?--저는 행복합니다. 살아 있습니다. 고귀한 생각들을 저는 품고 있습니다. 우리들을 싫증나게 하는 이 이야기를 당신한테 저는 끝까지 하였습니다. 이제 커다란 일들이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바다 위에서, 인생의 대양 위에서 영광스러운 조난들이 기다리고 있음을--그런데도 우리들은 책 위에 몸을 굽힌 채로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욕망은 더욱 확실한 행동 쪽으로 가버리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그러나 때때로 너무나 계속된 연구에 지쳐서, 저는 숲속으로 비속을 내려 갑니다. 가을이 끝나가는 걸 보러 가는 것입니다--저는 알고 있습니다. 어떤 저녁에는 이러한 산책으로부터 돌아와 저는 불 가까이 앉습니다. 삶의 행복에 도취한 듯이, 그리고 이러한 도취에 거의 흐느껴 울며, 앞으로 해야 할 진지한 일감들을 나의 생각 속에서 느끼면서--저는 행동하겠다! 저는 움직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위대한 말 없는 작품을 사랑할 것입니다. 그건 시도 될 것이고 이야기도 될 것이며 희곡도 될 것입니다.--나의 누이여, 마치 당신이 깊이 생각하고 그랬듯이 이제 저는 떠나겠습니다. 그러나 항해의 행복을 꿈꾸어 보십시오.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나, 저는 이 이야기 전부를 길게 끄는 것을 벌써 겨울이지만 좋아했을 겁니다, 우리들은 어느 날 홀란드의 어떤 마을로 우리들만이 떠나게 될 겁니다. 길은 눈으로 뒤덮이고 얼어붙은 운하를 사람들은 얼음을 치우고 있을 겝니다. 당신은 저와 함께 오랫동안 들판까지 얼음을 타고, 그리고 우리는 눈으로 무엇을 만들고 있는 들판 안에 있게 될 것입니다. 눈은 끝없이 하얗게 펼쳐 있고 싸늘한 공기를 느끼는 것도 상쾌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돌아옵니다. 이제 당신은 방안의 내 곁에 있을 겝니다. 불 가까이 내려진 커어튼, 우리들의 모든 생각을, 나의 누이여,--그때 당신은 제게 말할 것입니다. "어떤 것이든지 우리의 길을 돌릴 만큼 가치 있는 것은 없어요. 지나가면서 모든 것을 다 받아들입시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이러한 것들보다는 훨씬 멀어요--그러니까, 이런 것들과 혼동하지 말아야 해요--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쟁취할 때까지 전진할 거예요. 아! 장애물을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불행할지니. 사실은 목표란 없어요. 사물은 목적도 장애물도 아니거든요. 아니지요. 결코 장애물은 아니지요 단지 그것들을 넘어 뛰어야 해요. 우리의 유일한 목표, 그것은 하나님이지요. 우리들은 하나님에게서 눈길을 떼지는 않을 거예요. 무엇을 통해서든 하나님은 보이니까요. 자 이제부터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걸어갑시다. 오직 우리들 때문에 빛나는 통로를. 바른편에는 예술품들이 왼편으로는 풍경들이 전개되는, 우리 앞에 펼쳐진 가야 할 길을--그리고 이제는 이 영혼들을 아름답고 즐겁게 해야 하지 않겠어요? 우리들 주위에 슬픔을 싹트게 하는 것은 오직 우리들을 눈물이니까요." 우리의 욕망의 대상이여, 너희들은 손가락을 누르자 마자 재밖에 남기지 않는, 덧없는 결성체와 비슷하다. 불어라, 내 사유의 바람들이여--너희들을 이러한 재로 날려 보낼지니. @ff 부록 2 타망고(P. 메리메) 르두선장은 훌륭한 선원이었다. 그는 단순한 일개 수부로 출발하여 신호조수가 되었다. 트라팔가로 해전 때 나무파편에 맞아 왼손이 부러졌다. 그는 절단 수술을 받고 곧 좋은 근무성적 증명서를 가지고 제대하였다. 쉬는 게 그의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어서 다시 배를 탈 기회가 오자 그는 사략선의 제2부 선장으로 근무했다. 몇 번의 상선 나포에서 얻은 돈으로 그는 서적들을 사서 이미 실지로는 완전히 익혔던 항해술을 연구할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그는 합포 셋에 60명의 승무원을 거느린 사략선의 선장이 되었다. 제르세이섬의 연안무역선들은 아직도 그의 무용담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평화조약은 그를 곤경에 빠뜨렸다. 그는 전쟁 통에 약간의 재산을 긁어 모았고 계속 영국 상선들의 희생으로 그 재산을 늘리려고 기대했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평화로운 무역상인들에게 봉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과감하고 경험 많은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지 때문에, 선선히 그에게 배를 맡기는 사람이 나섰다. 흑인 매매가 금지되었고, 따라서 그것을 감행하려면 프랑스 세관의 주도한 경계도 속여야 했고--그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뿐만 아니라 가장 모험적인 일로는 영국 순양함을 피해야만 하는 때였던 만큼 르두 선장은 흑단무역상들에게는 일약 귀중한 인물이 되었다. 그처럼 오랫동안 하급 지위에 눌려 있던 대부분의 선원들과는 아주 달라서, 그는 여러 가지 개혁에 대한 깊은 혐오심도 없었고 상급자들에 대해서 번번이 가지는 틀에 박힌 근성도 그에게는 없었다. 르두 선장은 그와 반대로 솔선하여 선주에게 음료수 저장용으로 철통 사용을 권했다. 그의 배에서는 흔히 노예선들이 비치하는 노예 수갑이나 쇠사슬 등도 새로운 방법으로 만들어 녹이 슬지 않도록 세심하게 칠하여져 있었다. 그러나 노예상인들 사이에 가장 그의 명성을 떨치게 한 것은 그 자신이 지휘하여 노예매매를 위한 쌍주범선을 건조한 일이었다. 그것은 전함처럼 길고 좁다란 날씬한 범선이었지만 매우 많은 수효의 흑인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그는 그 배를 '희망호'라고 명명했다. 그는 노예를 수용할, 좁다랗고 지하굴처럼 된 선창의 여러 층을 높이 석 자 네 치로 제한했고, 그만한 공간이면 보통키의 노예들이 편히 앉아 있을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일어설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르두의 말은 이러했다. "식민지에 도착하면 그들은 너무나 실컷 서 있게 될텐데!" 흑인들은 배의 양측 내벽에 등을 기대고 두 줄로 늘어 앉아서 그 두 줄 사이에 빈 자리가 남게 되어 다른 노예선에선 그저 통로로만 사용되고 있었다. 르두는 이번 자리에 다른 노예들을 더 실어 첫 두 줄의 노예들과는 수직으로 눕게 할 것을 착안했다. 그래서 그의 배는 같은 급의 다른 노예선보다는 한 선창에 십여 명을 더 실을 수 있었다 엄밀히 하면 좀 더 실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정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6주 이상이나 걸리는 한해 동안 노예 하나에 길이 다섯 자 넓이, 두 자 쯤은 공간을 주어 떼어 놓게 해야 할 것 아닌가. 르두는 선주에게 그러한 너그러운 조치를 변명하여 이렇게 말했다. "여하간 흑인들도 결국은 백인과 마찬가지 인간들이니까요." '희망호'는 낭트에서 출범했다. 그 후 미신가들이 지적한 것처럼 어느 금요일이었다. 검사관들이 그 범선을 면밀히 살펴 보았지만 솨사슬과 수갑, 그리고 이유는 모르지만 '재판봉'이라고 부르는 철봉 따위로 가득찬 여섯 개의 커다란 상자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또 '희망호'가 싣고 갈 거대한 물탱크에도 놀라지 않았다. '희망호'는 서류상으로는 목재와 상아 교역을 하기 위하여 세네갈밖에 가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항해가 길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친 조심성이 해로울 수도 없다. 뜻밖의 폭풍으로 해상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되면 물 없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리하여 '희망호'는 모든 장비를 유감없이 갖춰 가지고 어느 금요일에 출범했다. 르두는 아마도 돛대가 좀 더 튼튼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게다. 그렇지만 자기가 지휘하는 한 불평할 것 없었다. 아프리카 해안까지 항해는 쾌적 신속했다. 그는 영국 순양함이 그 부분을 감시하지 않는 틈을 타 다시 조알강에 닻을 내렸다. 그 지방 중개인들이 곧 배로 몰려 왔다. 그 이상 바랄 나위 없이 유리한 시기였다. 이름난 전사이자 인신매매자인 타밍고가 굉장히 많은 노예를 해안으로 끌고 온 직후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 거래품이 귀해지면 곧 재빨리 공급을 할 수 있는 힘과 수단에 자신을 가지는 사내답게, 싸게 노예를 팔아 넘기고 있었다. 르두 선장은 베에서 내려 타망고를 방문했다. 그는 갑작스레 세워진 움집 안에서 그를 만났다. 타망고는 두 여자와 몇몇 부하 상인과 노예 인솔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백인 선장을 접견하기 위해서 선장을 하고 있었다. 아직도 하사관의 소매 표시가 붙은 푸른 헌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양어깨에는 각각 두 개의 금줄 견장이 한 단추에 붙어 있어, 하나는 앞으로, 또 하나는 등 뒤로 늘어져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속샤쓰를 입고 있지 않았고 옷의 기장이 좀 짧아서 그 상의의 흰 안과 기네천으로 된 팬츠 사이에 꽤 넓은 폭의 검은 피부가 드러나 보이는 꼴이, 흡사 널따란 허리띠 같았다. 커다란 기병 군도를 허리에 끈으로 매달았고 손에는 좋은 영국제 이연발 총을 들고 있었다. 이렇게 장비를 갖춘 그 아프리카 전사는 멋으로 쳐서 파리나 런던의 가장 완벽한 멋쟁이도 뺨칠 지경이라고 자부하는 모양이다. 르두 선장은 잠시 동안 말 없이 그를 유심히 살펴 보았다. 그 동안 타망고는 마치 외국 장군 앞을 사열 행진하는 척탄병 모양으로 우뚝 몸을 일으키고, 자기 모습이 백인에게 준 것으로 생각되는 깊은 감명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르두는 그 방면의 전문가로서 그를 살펴본 후에 부관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쾌한을 마르티니크까지 무사히 다치지 않게 데려가면 적어도 천냥은 받고 팔 수 있겠는걸." 자리에 앉았다. 욜로프 부족의 말을 조금 아는 선부가 통역 구실을 했다. 첫 인사말이 교환된 연후, 배의 사동 하나가 소줏병이니 바구니를 가지고 왔다. 술을 마시고 선장은 타망고의 기분을 흐뭇하게 해 주기 위해서 나폴레옹 초상이 섭새겨진 구리고 만든 화약통을 선물로 주었다. 적당한 인사로 선물을 받고 나서 움집 밖으로 나가 그늘 밑에 소줏병들을 앞에 놓고 앉았다. 타망고는 이윽고 신호를 하더니 그가 팔 노예들을 데려 오게 했다. 노예들이 한 줄로 길게 늘어서서 나타났다. 피로와 공포에 눌려 허리가 구부정했다. 저마다 길이 여섯 자 이상의 긴 갈퀴에 목이 끼어 있었고, 목을 낀 두 개의 갈퀴 날 끝은 목덜미 쪽으로 막대기를 대고 연결해 놓았다. 전진을 시키려 할 때는 인도자가 맨 첫머리 노예의 갈퀴대를 어깨에 멘다. 첫 노예는 바로 자기 뒷사람의 갈퀴대를 메고, 둘째는 셋째 노예의 그것을 둘러메고 민 끝까지 그런 식으로 연결된다. 정지시키려고 할 때는 일행의 우두머리가 메고 있던 뒷놈의 갈퀴대 뾰족한 끝을 땅에 쿡 박아 세우면 온 행령이 멎어버린다. 길이 6척이나 되는 굵다란 막대기를 목에 메어 앞으로 매달고서는 행진을 빠져 달아날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쯤은 쉬 판단 할 수 있다. 남녀 노예가 하나하나 앞을 지나갈 때마다 선장은 어깨를 들썩 치켜 보았다. 그가 보기에는 사내들은 모두 허약하고 여자들은 너무 늙었거나 너무 어리거나 하여 그는 흑인종의 퇴화를 한탄하는 것이었다. "모두 퇴화해 버리는군. 예전엔 전혀 딴판이었어. 여자들은 키가 다섯 자 여섯 치는 실히 되었구, 사내들은 네 명만 붙으면 삼주범선의 권양기를 들려 왕닻줄을 감아 올릴 수 있었거든." 그러나 연방 깎아 내리면서도 제일차로 가장 건장하고 잘 생긴 흑인들을 골라냈다. 그들의 대가로는 보통의 값을 치르려고 했지만 그 밖의 노예에 대해서는 값을 깎았다. 타망고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지기 이익을 옹호하고 자기 상품을 자랑하며 사람 구하기가 힘들다는 등, 매매가 위험하다는 점 등을 말했다. 그는 선장이 배에 실으려는 노예들에 대해 얼마라는 값을 청구하며 결말을 맺었다. 통역이 타망고의 제안을 불어로 통역하기가 무섭게 르두는 놀람과 분격으로 나가자빠질 뻔했다. 그러더니 지독한 욕설을 중얼거리며 그렇듯 터무니 없는 사내와는 일절 거래를 끊겠다는 듯이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그러자 타망고는 그를 말리고 간신히 다시 주저앉혔다. 또 술병 하나를 따 가지고 입씨름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흑인이 백인의 제안을 엉터리 없는 미친 수작으로 여겼다. 고함을 지르고 오랫동안 옥신각신하며 야단스레 소주를 마셔 댔다. 그런데 소주는 협상중의 양 진영에 서로 다른 효과를 나타냈다. 프랑스인은 마실수록 값을 깎고, 아프리카 사람은 잔을 거듭할수록 자기 주장을 양보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술병 든 바구니가 비게 될 무렵 합의에 도달했다. 조악한 면직물, 화약, 부싯돌, 소주 세 통, 잘 조절되지 못한 소총 50정 따위로 160명의 노예가 교환되었다. 선장은 협상 성립을 확인하기 위하여 반 이상 취해 버린 흑인의 손바닥을 쳤다. 그리고 곧 노예들을 프랑스인 선원들에게 넘기자 그들은 부랴부랴 노예들의 목에 매단 나무 갈퀴를 풀고 쇠로 만든 목고랑과 수갑으로 갈아 채웠다. 그것이 바로 유럽 문명의 우월성을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다. 아직 30명의 노예가 남아 있었다. 모두 어린애든가 늙은이 또는 불구의 여자들이었다. 배는 만원이었다. 타망고는 그 폐품을 어찌 처리하여야 할지를 몰라서 하나에 소주 한 병씩에 팔겠노라고 제안했다. 솔깃한 제안이었다. 그는 문득 낭트에서 본 "시칠랴의 만도" 공연 때의 광경이 생각났다. 벌서 가득 찬 하층 자리에 뚱뚱보들이 상당히 많이 뚫고 들어갔는데 그대로 인체의 압축력의 덕분으로 땅바닥 자리 에 비비고 끼어 앉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는 30명 중에서 좀 더 날씬한 노예 20명을 뽑았다. 그러자 타망고는 나머지 열 명에 대해서 하나에 수주 한잔씩을 청구했다. 르두는 역마차에도 아이들은 찻삯을 내지 않으며 자리도 반밖에 차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그래 아이 셋을 받고 그 이상은 한 명도 더 맡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자 타망고는 아직도 일곱 명이나 남은 것을 보고 총을 집어 들더니 맨 먼저 나오는 여자를 겨누었다. 방금 팔린 세 아이의 어머니였다. 그는 백인에게 말했다. "사시우, 아니면 여잘 죽이겠소. 소주 한 잔 싫다면 쏘겠소." "제기랄, 날더러 그걸 어떡하라구?" 르두의 대답이었다. 타망고는 총을 쐈다. 노예는 땅바닥에 쓰러졌다. 타망고는 아주 녹초가 된 늙은이를 겨누며 외쳤다. "자, 또 하나, 소주 한 잔, 아니면..." 그때 그의 아내 중의하나가 그의 팔을 밀어 돌렸다. 총알은 빗나갔다. 그 여인은 노인을 보고 지기 남편이 '장로'"혹은 마술사"를 죽이려는 참이라는 걸 알았던 것이다. 그 노인이 그 여인에게 장차 왕비가 되리라는 예언을 했던 일이 있었다. 술기운에 제정신을 잃은 타망고는 자기 뜻에 반대하는 것을 보고 자제할 수가 없었다. 그는 총개머리로 자기 아내를 냅다 후려갈겼다. 그리고는 르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 이 여잘 주지." 예쁜 여자였다. 르두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로 보았다. 이윽고 여자 손을 잡았다. "이것쯤 처넣을 자리야 있을 테지." 통역은 인정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타망고에게 담뱃곽을 주고 나머지 여섯 명을 달라고 했다. 그는 갈퀴를 풀어 주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고 했다. 곧 그들은 해안에서 2천리나 떨어진 그들의 나라로 돌아가려니 난처한 모양으로 이리저리 흩어져 달아났다. 그런데도 선장은 타망고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되도록 빨리 뱃짐을 싣데 하도록 재촉했다. 강에 오래 머물러 있는 건 신중한 처사가 아니었다. 순양함들이 다시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다음날 출범하고자 했다. 타망고는 풀밭 그늘 위에 누워 술이 깨도록 잠을 잤다. 그가 잠을 깼을 때 배는 벌써 돛을 달고 강을 내려가는 중이었다. 타망고는 전날의 폭음으로 아직 머리가 흐리멍덩한 채고 자기 아내 에이체를 찾았다. 불행히도 에이체가 그의 비위를 거슬러 그가 백인 선장에게 선물로 그녀를 주었고 선장이 그녀를 배에 실었다는 대답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아연실색한 타망고는 자기 머리를 치며 후회하더니 총을 집었다. 강은 바다로 흘러 들기 전에 몇 차례 구불구불 돌아 가는지라 그는 가장 빠른 길로 해서 작은 포구로 달려갔다. 하구에서 5리쯤 떨어진 곳이었다. 거기서 통나무 배를 구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것을 타고 범선을 쫓아가려는 것이었다. 강이 구불구불하므로 범선이 지체할 것이었다. 그의 생각이 맞았다. 과연 그는 통나무배에 올라타고 노예선에 다다를 만한 시간 여유가 있었다. 르두는 그를 보고 깜짝 놀랐지만, 아내를 되돌려 달라는 데는 더욱 놀랐다. "준 것을 되찾을 순 없지." 흑인은 노예와 교환으로 받은 물건 중의 일부를 반환하겠노라고 하며 거듭 달라붙었다. 선장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에이체는 아주 좋은 여자애며, 자기 곁에 두겠다고 말했다. 가련한 타망고는 눈물을 좍좍 흘리며 마치 외과수술을 받는 가엾은 환자처럼 폐부를 찌르는 듯한 신음소리를 냈다. 귀여운 에이체 이름을 부르며 갑판 위를 딩구는가 하면 자살이라도 하려는 듯이 판자에 머리를 사뭇 부딪치곤 했다. 선장은 한결같이 무표정한 낯으로 강기슭을 가리키며 이제 배가 떠나야 할 시간이라는 몸짓을 했다. 그러나 타망고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자기 옷에 단 금으로 된 견장, 총, 군도까지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선장은 막무가내였다. 이렇게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희망호' 부선장은 선장에게 말했다. "지난 밤에 노예가 세 명이나 죽었으니, 나직 빈 자리가 있소. 이 억센 놈은 혼자만으로도 죽은 세 명보다 더 값이 나갈텐데, 어째 그놈을 데려가지 않을 거요?" 르두는 곰곰 생각했다--타망고는 천 냥은 실히 받고 팔리게다. 이번 항해는 전망이 매우 유리하게 도어 가는데, 아마 이것으로 마지막이 될 게다. 마지막으로 한 재산 만들고 노예거래를 그만 두는 이 마당에 기네 해안지방에 남기는 자기 평판이 좋건 나쁘건 그런 건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뿐 아니라 강기슭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으니 아프리카의 전사도 전혀 자기 손아귀에 들어 있는 셈이다. 이제 남은 길이라고는 그에게서 무기를 빼앗는 일 뿐이다. 타망고가 아직 무기를 쥐고 있는 동안 그에게 손을 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르두는 총을 살펴보고 그 총이 아름다운 에이체와 바꿀 만한 물건인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총을 보자고 했다. 그래 총의 격발장치를 다루어 보면서 슬그머니인화용 화약을 털어 버리기까지 했다. 한편 부선장은 군도를 만져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타망고가 무장을 해제 당하자 억센 선원들이 달려들어 자빠뜨리고 그를 결박하기 시작했다. 흑인의 저항은 참으로 영웅적이었다. 처음의 낭패에서 제 정신을 차리자 그 불리한 입자에도 불구하고 그는 두 선부를 상대로 오랫동안 싸웠다. 그의 놀라운 힘으로 해서 그는 드디어 일어섰다. 자기 목을 붙들고 있는 사내를 주먹으로 후려쳐서 쓰러뜨렸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부선장에게 달려들어 군도를 빼앗으려 했다. 부선장은 군도로 그의 머리를 내리쳐서 깊지는 않지만 커다란 상처를 입혔다. 타망고는 다시 쓰러졌다. 대뜸 그의 팔다리를 결박했다. 대항하는 동안 그는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고 마치 덫에 걸린 산돼지처럼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저항을 해도 쓸데없음을 알자 그는 눈을 감고 꼼짝 않고 있었다. 그의 가쁘고 억센 숨결만이 그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아무렴! 놈이 팔아 먹은 흑인들이 이번에는 놈 자신의 노예가 된 것을 보고 쾌재의 웃음을 터뜨릴 게다. 이번에야말로 그들은 신의 뜻을 보게 될 게다." 선장은 이렇게 외쳤다. 그런데 가련한 타망고는 온통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전날 여섯 명의 노예 목숨을 건져 준 어진 통역이 다가와서 그의 상처에 붕대를 감아주고 몇 마디 위안의 말을 해 주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를 일이다. 흑인은 송장처럼 꼼짝 않고 있었다. 선원 두 명이 들어 그를 선창의 제자리로 짐짝을 운반하듯이 옮겨갔다. 이틀 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다. 겨우 그가 눈을 뜨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전에 그에게 붙잡혔던 노예들의 일행도 바로 그가 자기네들 한복판에 나타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었다. 타망고가 그들에게 준 공포감이 아직도 그토록 큰 것이어서 어느 누구도 감히 자기를 처참한 지경에 몰아넣은 장본인의 이 같은 처참한 꼴을 보고 모욕을 가하는 자도 없었다. 육지에서 불어 오는 순풍을 만나 베는 쏜살같이 아프리카 해안에서 멀리 떠나가고 있었다. 벌써 영국 순양함에 대한 불안이 없어진 해역에 다다랐으므로 선장은 지금 자기 배가 향해가고 있는 식민지에서 그를 기다리는 막대한 이익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흑단 재목'은 손상 없이 유지되고 있는 셈이었다. 전염병도 발생하지 않았다. 열 둘만이 그것도 가장 허약한 노예가 더위에 죽었다. 그건 부스러기 상품에 불과했다. 그는 자기 인간화물이, 되도록 항해의 피로를 적게 받도록 하기 위해서 날마다 낮에는 노예들을 갑판 위에 올려오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비참한 노예들은 삼분의 일씩 교대하여 갑판에 한 시간 동안 올라와 있음으로써 하루 종일 필요한 공기의 보급을 받는 셈이었다. 승무원의 일부는 완전무장을 하고 노예들의 반란에 대비하여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뿐더러 그들의 고랑을 완전히 풀어 주지 않도록 주의를 했다. 바이올린을 켤 줄 아는 어떤 신부는 음악 연주로 그들에게 한 턱을 쓰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 검은 얼굴들이 일제히 악사 쪽으로 돌려지고 차츰 그 마비된 듯한 절망의 표정을 잃어 가며, 활짝 웃음을 터뜨리고 사슬이 용납할 때는 박수를 하기도 하는 모양을 보면 참으로 괴상한 광경이었다. 건강에는 운동이 필요하다. 그래서 르두 선장의 몸조리법의 하나는 노예들에게 때때로 춤을 추게 하는 것이다. 마치 배에 말들을 실었을 때면 긴 항해에 대비하여 가끔 말들을 뒷발로 일어서게 하는 수법과 같은 것이다. "얘들아, 자 춤춰라. 마음껏 즐겨라." 이렇게 선장은 역마차 채찍을 휘두르며 벽력 같은 호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가련한 흑인들은 펄쩍펄쩍 뛰며 춤을 추곤 했다. 타망고는 얼마동안은 상처 때문에 승강구 밑에 눌러 있어야만 했다. 드디어 그가 갑판 위에 나타났다. 그래 우선 겁에 질린 노예들의 한복판에서 버젓이 고개를 들고, 배 둘레의 망망한 바다 위로 서글픈 그러나 조용한 시성을 한 번 던졌다. 그리고 나서 그는 누웠다. 아니 갑판 마룻바닥 위에 쓰러졌다. 몸에 감긴 사슬을 좀 덜 거북하도록 가려 놓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르두는 뒤쪽 지휘탑 위에 앉아 태평스레 파이프를 피우고 있었다. 선장 곁에는 에이체가 사슬에 묶이지도 않고, 목에는 푸른 무명의 멋진 옷을 걸치고, 예쁜 모로코 슬리퍼를 신고서, 손에 술병이 얹힌 쟁반을 들고, 선장에게 술을 따라 줄 채비를 갖추고 서 있었다. 그녀가 선장 곁에서 높은 구실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타망고를 미워하는 한 흑인이 그에게 저쪽을 보라는 시늉을 했다. 타망고는 고개를 돌려 에이체를 보고는 고함을 질렀다. 벌떡 일어서더니 지휘탑 쪽으로 달려갔다. 경비 선원들이 해상규율의 그토록 큰 위반에 대항할 겨를도 주지 않는다. "에이체!" 그의 벽력 같은 고함이 떨어졌다. 에이체는 공포에 질린 외마디소리를 질렀다. "백인들의 고장엔 '마마, 줌보'가 없는 줄 아느냐?" 벌써 선원들이 곤봉을 들고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타망고는 무감각한 듯이 팔짱을 끼고 태연히 제 자기로 돌아가고 있었다. 한편 에이체는 눈물을 거두지 못하며 그 수수께끼 같은 말에 질겁을 하여 꼼짝달싹 못하는 듯이 보였다. 통역은 그 한마디로 그렇듯 공포를 자아내는 그 무서운 '마마, 줌보'로 공갈을 때리는 거죠. 나도 내 눈으로 마마, 줌보를 봤고 그 계략을 깨달았죠. 그런데 흑인들이란... 워낙 단순하니까 아무 것도 모른단 말이요. 생각해 보시우, 어느 날 밤, 여자들이 한창 춤을 추며, 그들의 말로 '폴카'를 하며 즐기고 있는데, 난데없이 컴컴하게 우거진 숲속에서 이상한 음악이 들려오지 않겠어요? 누가 연주하는지 통 눈에 띄지 않고 말입니다. 악사들은 모두 숲속에 숨어 있었죠. 갈대피리, 나무통북, 바라포스 박을 절반 잘라서 만든 기타아 따위 악기였죠. 그 모든 게 땅 위에 마귀를 내려오게 하는 곡조를 연주하는 겁니다. 여자들은 그 곡을 듣자 대쯤 와들와들 떨기 시작하지 않겠소. 글쎄, 그녀들은 도망치려고 하지만 남편들이 꽉 붙들고 있거든요. 그녀들은 어떤 화가 미칠 것인가를 잘 알고 있지요. 그때 별안간 숲속에서 커다란 흰 모습이 나타나지 않겠어요. 키는 우리 배의 새끼돛대만한 게 대가리는 보아소말만 하고, 눈은 크기가 배 닻구멍만하고, 아가리는 속에 불길이 이는 마귀의 아가리구. 그게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겁니다. 숲속에서 약 백 미터까지 밖에 걸어 나오지 않더군요. 그러자 여편네들이 고함을 질렀습니다. '마마, 줌보다!'이렇게 그녀들은 마치 굴장수들처럼 소리를 지르며 야단법석을 떤단 말입니다. 그러자 남편들이 공갈을 때리며, '이 화냥년들, 어디 너희들이 얌전히 굴었는지 말해 봐라. 거짓말을 했다간 적 마마, 줌보가 너희들을 생으로 집어삼킨다.' 그 중에는 곧이곧대로 털어놓을 만큼 소박한 여자들도 있지요. 그럴 땐 남편들이 마구 두들겨 패지요." 얘기를 듣고 있던 선장이 물었다. "그럼, 그 마마, 줌보란 흰 모습이 뭣이지?" "그야 커다란 흰 천으로 괴상스럽게 차려 입힌 어릿광대죠. 머리 대신에 기다란 막대기 끝에 속을 파낸 호박을 꽂고, 그 속에 촛불을 켜 놓은 겨죠. 대수로운 계략도 아닙니다. 그리구 흑인쯤 손아귀에 넣는데는 그다지 큰 재간도 필요없구요. 여하간 마마, 줌보란 좋은 착안이죠. 나래도 내 아내가 그런 걸 믿어 주었으면 좋겠는걸요." "내 아내로 말하자면 마마, 줌보는 두려워하지 않지만 막대기 든 사내를 무서워하지. 그뿐더러 나를 속였다가는 내가 어떻게 처리할지 잘 알고 있으니까. 우리 르두 집안 사람들은 참을성이 없거든. 비록 내 팔목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지만, 계집 하나쯤 다루는 건 누워 떡먹기란 말야. 저 마마, 줌보니 뭐니 떠드는 괴상한 놈에게 좀 얌전히 굴라구 말해 줘. 이 아줌마가 두려워하지 않도록 말야. 그렇지 않음 놈의 등때기에 갈구리질을 해서 검은 껍데기가 쇠고기 날것처럼 붉어지도록 하겠다구 말야." 그 말을 남기고 선장은 자기 선실로 내려가서 에이치를 불러 놓고 달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애무를 해도 두들겨패도(결국 사람이란 끈기를 잃고 마니까) 그 예쁜 흑인 여자를 다룰 수 있게 만들지는 못했다. 여자 눈에서는 눈물이 좍좍 흘렀다. 선장은 화가 나서 다시 갑판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당직 고급 승무원이 그때하던 지휘에 대해 말다툼을 했다. 그날 밤 승무원들이 거의 모두 깊이 잠들었을 때, 우선 배 중간층에서 장엄하고 불길한 곡조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더니, 이어 끔찍스럽게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욕설과 위협이 섞인 굵직한 르두의 목소리와 그 무서운 채찍소리가 온 배안에 울렸다. 한순간 후에는 모든 게 다시 고요해졌다. 다음날 타망고가 온통 상처투성이가 된 얼굴로 나타났다. 그러나 태도는 전과 다름없이 버젓하고 단호했다. 에이체는 그를 보기가 무섭게 지휘탑 선장 곁을 떠나 타망고 쪽으로 재빨리 달려가더니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쌓이고 쌓인 절망의 어조로 말했다. "용서해 주어요, 타망고. 저를 용서해요!" 타망고는 잠시 그녀를 뚫어지게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서 통역이 곁에 없음을 보고 말해다. "줄칼을!" 그리고는 에이체에게 등을 돌려 대고 갑판 위에 누워 버렸다. 선장은 그녀를 호되게 꾸짖고 뺨까지 후려치고는 전 남편에 게 말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주고받은 짤막한 대화 내용은 꿈에도 생각 않고 그 점에 관해서 물어 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타망고는 다른 노예들과 함께 틀어박혀서 밤낮 없이 그들에게 자유를 되찾기 위해서 사내다운 노력을 시도해 보자고 설교했다. 그는 백인들의 수효가 적다는 점을 그들에게 말하고, 경비원들이 날이 갈수록 경비가 허술해지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는 뚜렷한 설명 없이 자기 힘으로 그들을 그들의 나라로 돌려 보낼 수 있다고 말하며, 흑인들이 넋을 잃고 신봉하는 비교에 통달한 자기 지능을 자랑하며, 자기 계획을 도와 주지 않는 자들은 귀신의 복수를 받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가 이렇게 긴 밀담을 하는 동안 그는 필르 부족의 사투리만을 사용하여 노예들은 대부분이 알아 듣지만 통역은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설교하는 타망고의 명심과, 평소 노예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그에게 복종하는 습성이 놀라울 만큼 그의 웅변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흑인들은 그 자신이 실행에 옮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훨씬 전에 거사의 날짜를 정하도록 그를 재촉했다. 그는 막연히 그저 나직 시기 상조이며, 꿈에 나타났던 귀신이 아직도 거사의 날짜를 알려 주지 않았지만, 모두들 자기 신호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고 공모자들에게 지시했다. 그 반면 그는 경비원들의 경계태세를 실험에 볼 기회를 노리고 방심하지 않았다. 한번은 한 선부가 총을 뱃전에 기대어 놓은 채 날치떼가 비를 쫓아오는 광경을 바라보며 좋아하고 있었다. 타망고는 그 총을 집어들고 전에 그가 선원들의 훈련하는 것을 본 대로 징글맞은 몸짓으로 흉내를 내며 총을 가지고 다루기 시작했다. 한순간 후에 그는 총을 빼앗겼다. 그러나 즉각 의심을 받지 않고 무기에 손을 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무기를 사용할 때가 온대도, 그의 손에서 그것을 빼앗으려는 자는 매우 담대한 자일 것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어느날 에이체는 그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신호를 보내며 그에게 과자 하나를 던졌다. 그 과자 속에 줄칼이 들어 있었다. 음모의 성공 여부는 그 연장에 달려 있었다. 타망고는 줄칼을 먼저 자기 측근자들에게 보여 주질 않았다 그러나 밤이 되자 그는 괴상한 짓을 하면서 무엇인가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점점 열을 올리더니 마침내 고함을 지르기까지 했다. 그 음성의 갖가지 억양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그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사람과 활발히 대화를 주고 받는 듯이 보였다. 노예들을 모두 바로 그 순간에 귀신이 자기네들 사이에 출현했음을 의심치 않고 벌벌 떨고 있었다. 타망고는 환희의 고함을 지름으로써 그 장면을 끝냈다. 그는 외쳤다. "동지들, 내가 고사드린 대감님이 전에 내게 약속하셨던 것을 방금 주셨다. 그래 나는 우리들의 행방의 연장을 내 손안에 쥐고 있다. 지금 너희들이 조금만 힘을 쓰면 곧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다." 그는 옆에 있던 노예에게 줄칼을 만져 보게 했다. 그 속임수가 아무리 허술하다 할지라도 그보다 더 허술한 사람들에게는 대뜸 신용을 얻게 되었다. 오랫동안 기다린 끝에 복수와 자유의 날이 왔다. 엄숙한 서약 보았다. 아름다운 범선 '희망호'는 마치 경솔한 기사의 박차를 받고 뒷발로 버티고 치솟아 일어서는 준마처럼, 이 전무후무한 운전을 당하고는 파도 위로 껑충 뛰어 올랐다. 마치 화가 나서 그 무식한 조종사와 함께 바닷속에 가라앉아 버리려는 듯했다. 닻과 키의 방향의 필연적인 상호관계가 느닷없이 깨지자 배는 너무도 격심하게 기울어져서 당장이라도 물 속에 침몰될 듯이 보였다. 여러 흑인들이나 자빠지고, 어떤 자는 뱃전 밖으로 나가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곧 배는 다시 한번 파멸과 항쟁해 보려는 듯이 당당히 다시 일어나 물결을 갈랐다. 바람이 한층 강하게 불었다. 별안간 무서운 소리를 내며 돛대 둘이 갑판 위 몇 자를 남기고 부러졌다. 여러 파편과 육중한 밧줄의 그물 같은 것으로 온통 갑판이 뒤덮였다. 흑인들은 질겁을 하고 고함을 지르며 승강구 밑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바람 받을 것이 이미 없어졌으므로, 배는 다시 일어섰고, 파도를 따라 둥실둥실 떠돌고 있었다. 그러자 대담한 흑인들이 다시 갑판 위로 올라가서 갑판에 널린 파편들을 걷어치웠다. 타망고는 꼼짝 않고 있었다. 에이체는 그 곁에 있었지만 한 마디도 감히 말을 걸지 못했다. 한두 명씩 흑인들이 다가 왔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곧 뇌성 같은 비난과 욕설로 변했다. "배신자! 사기꾼! 우리들의 불행을 일으킨 건 너다. 우리를 백인에게 판 것도 너다. 백인들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지시한 것도 너다. 너는 네 지식을 자랑했고 우리를 고향으로 돌려보내 준다고 약속했다. 우리는 네 말을 믿었다. 우리가 정신을 잃었었지! 그런데 네가 백인들의 귀신을 건드렸기 때문에 우리는 모조리 죽일 뻔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규탄하는 것이었다. 타망고는 당당히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를 에워싸고 있던 흑인들은 겁이 나서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총 두 개를 집어 들더니 아내에게, 뒤따르라는 몸짓을 하고는 길을 열어 주는 군중 속을 가로질러 이물 쪽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빈통들과 판자들을 끌어다가 방책 같은 것을 둘러쌓고는 그 호 같은 곳 한 복판에 주저 앉았다. 그 위로 위협하는 듯이 총 두 정의 총검이 삐죽이나와 있었다. 흑인들은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반란자들 중에는 눈물을 줄줄 흘리는 자가 있는가 하면 한편 공중으로 두 손을 들고 그들과 백인들의 귀신에 호수하며 비는 자들도 있었다. 또 나침반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끊임없는 움직임에 탄복하며 그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나침반에 애원하는 자들도 있고, 침울한 절망에 잠겨 갑판 위에 쓰러져 있는 자들도 있었다. 그 절망한 자들 속에, 공포에 사로잡혀 울부짖는 여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아무도 주려는 생각도 하지 않는 구원을 애원하는 20명 가량의 부상자들을 상상해 보라. 갑자기 흑인 하나가 불쑥 갑판 위로 나타났다. 그는 만면에 희색이 넘치고 있었다. 백인들이 술을 간직해 둔 장소를 방금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 좋아하는 표정이며 거동이 막 술을 시음해 보았다는 것을 역력히 증명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듣자 이 불쌍한 자들의 고함소리가 한순간 멎었다. 그들은 식료품 창고로 달려가서 실컷 술을 마셨다. 한순간 후에는 갑판 위를 펄쩍펄쩍 뛰고 웃고 하는 광경이 벌어졌다. 가장 난폭스러운 술기운의 온갖 추태를 다 연출했다. 부상자들의 신음과 흐느끼는 울음 소리를 반주 삼아 그들은 춤을 추고 노래를 했다. 그런 소란 속에 해가 지고 다시 밤이 새었다. 아침에 잠이 깨자 다시 절망이 짓눌렀다. 바다는 풍랑이 거세고 하늘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들은 의논했다. 몇몇 마술의 입문자들이, 타망고 앞에서는 그들의 술법을 감히 입 밖에도 내자 못하던 축들이지만, 차례차례로 그들의 고사를 올려 보았다. 여러 가지 강력한 주문도 시험해 봤다. 시도는 모두가 수포로 돌아가 실망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마침내 아직도 오에서 나오지 않고 있는 타망고 얘기를 꺼냈다. 여하간에 그는 그들 중에 가장 유식한 자였고 오직 그만이 자기가 몰아넣은 그 무서운 처지에서 그들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화해사절로 한 늙은이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늙은이는 그에게 나와서 의견을 말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타망고는 옛날 로마사절들의 간청을 물리쳤던 코리올랑처럼 까딱 않고 그의 청을 못들은 체했다. 밤이 되어 혼란의 틈을 탓 그는 과자와 소금에 절인 고기를 장만해 놓았다. 그는 자기 은신처에서 혼자 살 결심을 한 듯이 보였다. 술은 아직 남아 있었다. 적어도 술을 마시면 바다도 노예 신세도 다가오는 죽음도 잊을 수가 있었다. 잠을 자면 꿈을 꾸고 꿈에는 아프리카가 나타나고, 고무나무숲이며 짚으로 덮은 움집이며 그늘로 온 마을을 덮은 바오바브나무들이 떠올랐다. 전날의 폭음 난장판이 되풀이되었다. 그러면서 며칠이 지났다. 고함을 치고, 울부짖고 자기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그러다가는 술에 취하여 잠든다--이것이 그들의 생활이었다. 너무 마시고 는 몇 명이 죽어 뻗었다. 어떤 자는 바다에 몸을 던지고, 혹은 칼로 자살을 하기도 했다. 어느날 아침 타망고는 자기 보루에서 나오더니 부러진 왕돛대 곁까지 나갔다. 그는 입을 열었다. "노예들아, 신령이 내 꿈에 나타났다. 그리고 너희들을 이 궁지에서 끌어내어 고향으로 돌려보낼 방도를 계시해 주었다. 너희들의 배은망덕은 내버림을 받아 마땅하거니와, 그러나 나는 이 울부짖는 여자들과 아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나는 너희들을 용서한다. 내 말을 들어라." 흑인들을 모두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그의 주위에 몰려 들었다. 그는 다시 계속했다. "백인들만이 이 거대한 나무집을 움직이게 하는 마력을 가진 주문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고자의 마상이와 비슷한 이 가벼운 마상이들을 맘대로 저을 수가 있다." 흑인들은 그의 말을 믿었다. 그 이상 무모한 계획은 없었다. 나침반의 용법을 모르고 전혀 낯선 하늘 밑에서는 그저 되는대로 떠돌아다닐 뿐이었다. 타망고의 생각으로는 앞으로 곧장 저어 가면 결국은 어떤 흑인들이 사는 육지를 소유하고 있고 백인들은 배 위에서 사는 족속이니까. 그것이 어린 시절에 자기 어머니에게 들은 말이었다. 보우트에 올라탈 모든 준비가 갖춰졌다. 그러나 작은 보오트가 하나 달린 큰 단정 하나만이 쓸만한 상태에 있었다. 아직 살아 있는 80명의 흑인들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적었다. 부상자와 환자들은 모조리 버려야만 했다. 대부분은 버리고 가기 전에 죽여 달라고 빌었다.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물에 뜨게 했고 너무 많이 실려진 두 배는 물결치는 바다를 헤치고 큰 배 곁으로 떠났다. 바다는 시시각각 이 두 배를 집어 삼키려고 위협했다. 작은 보우트가 먼저 떠났다. 타망고는 에이체와 함께 큰 단정에 자리를 잡았다. 작은 보우트보다는 더 무겁고 짐을 더 많이 실었기 때문에 상당히 뒤떨어져 있었다. 범선에 버림받은 몇몇 불쌍한 자들의 신음소리가 아직도 들려오고 있었다. 그때 매우 억센 파도가 단정을 때리는 바람결에 단정에는 물이 가득 찼다. 삽시간에 단정은 전복 되었다. 보우트는 그들의 재난을 보고 노젓는 손을 더욱 재촉했다. 조난자들을 더 끌어 오리게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단정에 탔던 사람들은 거의 전부 익사했다. 열 두어 명쯤만이 다시 큰 배에 올라탔다. 그 중에는 타망고와 에이체도 들어 있었다. 해가 질 무렵 보우트는 수평선 뒤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그 운명이 어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다. 굶주림의 고문의 처참한 장면을 길게 묘사하여 독자를 지치게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20명 가량이 좁은 자리에서 때로는 풍랑이 심한 바다에 흔들리며, 때로는 활활 타는 듯한 햇빛을 받으며 나날이 오죽잖은 양식을 가지고 서로 다투었다. 과자 한 조각에 싸움이 한 번씩 일어났고, 그때마다 약자는 죽는 것이다. 강자가 그를 죽이기 때문이 아니고 그를 죽게끔 내버려 두기 때문이다. 며칠이 지나고 보니 '희망호'에 산 사람이라고는 타망고와 에이체 뿐이었다. 어느날 밤 풍랑이 심하고 바람이 억세게 불었다. 게다가 어찌나 캄캄한지 배 뒤쪽에서 뱃머리가 보이자 않을 정도였다. 에이체는 선장실 침대의 깔포단 위에 누워 있었고, 타망고는 그의 발치에 앉아 있었다. 들이 모두 오래 전부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마침내 에이체가 외치듯 입을 열었다 "타망고, 당신이 받는 이 고통은 모두 나 때문이에요...." "나는 괴롭지 않다." 그는 내뱉듯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아직 남아 있던 과자 반 조각을 아내 쪽으로 던져 줬다. "당신을 위해 간직해 두세요. 나는 시장하지 않아요. 그리구 뭣 때문에 먹겠어요? 내가 죽을 때가 온 거 아니겠어요?" 그녀는 과자 조각을 슬며시 밀어 주며 말했다. 타망고는 대답 없이 일어서더니 비틀거리며 갑판으로 올라가서 부러진 돛대 밑에 주저앉았다. 고개를 푹 수기고 자기 가족의 노래를 휘파람으로 불렀다. 별안간 커다란 고함소리가 바람 소리를 누르고 들려왔다. 불빛이 나타났다. 다른 고함소리도 들려왔다. 시커멓고 거대한 배가 순식간에 자기 배 곁을 스쳐가는 것을 보았다. 저편 배의 돛들이 바로 머리 위로 지나갈 정도로 가까웠다. 돛대에 매달린 초롱불에 비쳐진 얼굴 둘이 보일 뿐이었다. 그 사람들은 또 한 번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곧 그들의 배는 억센 바람에 끌려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필경 경비원들은 이 난파선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풍랑이 심해서 뱃머리를 돌릴 수 없었다. 잠시 후 타망고는 대포의 불길을 보고 또 폭음을 들었다. 이어 또 다른 포화가 보였으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다음날은 수평선에 돛 하나 나타나지 않았다. 타망고는 깔포단 위에 다시 벌떡 눕고 눈을 감았다. 얼마나 시일이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거대한 영국 범선 '벨론호'의 승무원이 돛대 없는 배를 발견했다. 단정을 갖다 대고 올라가 보니 죽은 흑인 여자 하나와 흑인 남자가 있었다. 그 흑인 남자는 어찌 살이 빠지고 여위었는지 흡사 미이라 같은 꼴이었다. 의식을 잃고 있었지만 아직 한가닥 숨결만은 남아 있었다. 의사가 맡아서 간호를 했다. '벨론호'가 킹스턴에 도착했을 때는 타망고는 완전한 건강체로 회복되었다. 그에게 지난 일을 물었다. 그는 아는 대로 대답했다. 식민지 농장주들은 그를 반란 흑인으로 교수형에 처하려고 했다. 그러나 총독은 인정있는 사람이어서 그에게 흥미를 가졌다. 결국 그는 정당한 자기 방위권을 행사했을 뿐이니 그의 경우는 변호받을 만하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 그리고 타망고가 죽인 것은 프랑스 사람들 뿐이었다. 노예선은 몰수하는 법이니 노예선에서 데려온 흑인들을 대우하듯이 그를 대우하기로 했다. 총독은 그에게 자유를 주었다. 다시 말하면 영국의 총독부에서 일하게 했다 그러나 임금은 일당 6전에 식사를 제공할 뿐이었다. 75연대장이 그를 보고 데려다가 지기 연대 군악대의 심벌즈를 치게 했다. 그는 영어를 조금 배웠다. 그러나 거의 입을 여는 법이 없었다. 그 재신 독한 럼주와 타피아주를 지나치게 마셨다. 그는 병원에서 폐렴으로 죽었다. @f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