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한 페이지 지은이: 에밀졸라 출판사: 장원 @p 13 옮긴이의 말 프랑스 자연주의의 대표자인 졸라는 우리 나라 독자들에게 낯설지 않은 작가 이다. 그렇지만, 그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 우리말로 번역되어 독자들이 쉽게 읽 을 수 있는 것의 수효는 많지 않다. ‘나나’, ‘목로주점’,‘제르미날’과 몇 몇 단편이 그 전부이다. 지금 새로 소개하려는 이 작품은 루공 마까르 총서 중 여덟번째 소설로 졸라 가 서른여덟 살이 되던 1878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루공 마까르 총서는 한 어머니에게 난 삐에르 루공, 위르쉴 마까르, 앙뜨완느 마까르, 이 세 남매의 자손을 주인공으로 하는 스무 편의 소설을 일컫는다. 이 총서의 부제인 ‘제 2 제정기 한 집안의 사회적,유전적 역사’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졸라는 유전과 사회적 환경의 영향 아래 한 집안의 변천사를 그렸다. 이 작품에 앞서 1876년, 졸라는 총서 일곱 번째 소설인 ‘목로주점’을 연재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빠리 하층 노동자들의 생활상을 그린 이 작품은 그 적 나라한 묘사로 물의를 빚은 나머지 연재를 중단해야 하였다. 졸라는 다음 해에 이 소설을 훨씬 부드럽게 수정하여 단행본으로 출판하였다. 그럼에도 한 비평가 는 ‘목로주점’이 ‘사실적이 아니라 추잡하며, 노골적이 아니라 외설’이라고 혹평했다. @p 14 이때까지 루공 마까르 총서의 초기 작품들은 성직자, 정치가, 부자들의 음모와 이전투구,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 등을 소재로 다루었으며 사회, 정치적 비판의 성격이 강했다. 졸라 자신도 그 점을 인정하고 전혀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이려 는 생각을 갖게 된다. 자신을 비난하는 비평가들에게 유명해지거나 돈을 벌고 싶어서 자극적인 소설들을 쓴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자신의 작가적 재능 이 폭넓은 것임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쓰여진 작품이 ‘사랑의 한페이지’이다. 빠리 변두리에서 어린 딸과 함께 외롭게 살고 있는 ‘헤라 여신’ 처럼 당당한 아름다움을 지닌 미망인 엘 렌느와 옆 집에 사는 의사의 사랑 이야기는 졸라의 이름에 붙어 다니는 자연주 의가 우리에게 연상시키는 추악한 인간 현실과는 거리가 먼 서정적 분위기 속에 서 전개된다. 엘렌느가 살고 있는 고지대에서는 빠리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엘렌느는 창 가에 앉아 눈앞에 펼쳐진 빠리를 바라보며 사랑을 꿈꾸기도 하고, 정열을 불태 우기도 하며, 절망에 몸부림치기도 한다. 엘렌느의 감정이 이입된, 시시각각 변 화하는 빠리 광경의 묘사는 이 작품에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갖게 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번역하는 데 다른 장면보다 두 배의 시간과 정성을 쏟아 하느라고 했 지만 아름다운 원문을 훼손하지나 않았는지 염려스럽다. 하지만 이 감미로운 사랑 이야기도 ‘한 집안의 사회적·유전적 역사’라는 루공 마까르 총서의 대의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엘렌느의 열두 살짜리 딸인 쟌 느는 외증조모인 아델라이드, 외조모인 위르쉴을 닮아 신경증을 앓고 있는 병약 한 소녀이다. 병으로 인하여 나이보다 훨씬 조숙한 이 아이는 제 어머니와 의사 의 사랑을 막연하게 감지하고 병적으로 어머니를 질투하고 감시한다. 또, 엘렌느 가 드나드는 드베를로 의사 집의 파티나 거기 모이는 사람들을 통해서 당시 부 르주아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의사 부인 @p 15 쥴리에뜨가 사교계 청년 말리뇽과 벌이는 경박한 사랑놀음은 당시의 문란한 풍 속을 엿보게 해주는 동시에 엘렌느의 진지한 사랑과는 사뭇 대조를 이룬다. 외롭게 홀로 사는 과부가 딸의 병 때문에 젊은 미남 의사를 알게 되어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은 어찌 보면 진부하기도 하다. 하지만, 작품을 읽다 보면 어느덧, 엘렌느가 품고 있는 불륜의 사랑을 따뜻한 눈으로 감싸 주게 되고 그녀를 애틋 하게 여기게 된다. 그런 점에서 졸라가 창조해 낸 여인 엘렌느는 역시 불륜의 사랑을 다룬 플로베르의 유명한 작품‘보바리 부인’의 여주인공 엠마와는 대조 적이다. 엘렌느와 달리, 엠마는 이해할 수는 있지만 선뜻 동화되기는 어려운 인 물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자신의 여느 작품에 비해 혹시 지루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졸라에 게 바로 그 플로베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내가 어머니라면 내 딸에게 그걸 읽으라고 권하지는 않겠소! 이렇게 나이를 많이 먹었는데도 그 소설은 나를 설레이게 하고 흥분시켰다오. 누구라도 사족을 못쓰고 엘렌느를 원할 것이오. 당신의 의사 선생을 정말 잘 이해할 수 있소.(...) 당신은 진짜 수컷이오. 내가 그걸 안 게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p 17 제 1 부 1 푸르스름한 갓을 쓴 등잔이 벽난로 위, 한 권의 책 뒤에서 타오르고 있었고, 그 그림자에 방이 반나마 잠겨 있었다. 차분한 빛이 작은 원탁과 긴 의자를 비 추고, 벨벳 커튼의 굵은 주름을 흘러내린 다음, 두 창문 사이에 놓인 자단목 장 의 거울을 푸르게 빛나게 했다. 벽지와 가구, 양탄자를 푸른 색으로 통일시킨 방 은 호사스런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밤이 되자 구름처럼 흐릿한 부드러움을 띠 었다. 창문 맞은편 어두운 쪽에, 역시 벨벳 휘장을 친 침대는 시트의 창백한 빛 에 싸여 커다란 검은 덩어리 같이 놓여 있었다. 엘렌느는 어머니이자 미망인답 게 고요한 모습으로 팔을 포개고 가볍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고요한 가운데 시계가 1시를 쳤다. 시내의 소음은 꺼졌다. 빠리는 아득한 웅웅 거림을 트로까데로 언덕 위로 보낼 뿐이었다. 엘렌느의 여린 숨결은 부드러워서 젖가슴의 정숙한 선을 들썩이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평화롭고 깊은 단잠에 빠 져 있었는데, 단정한 옆모습과 단단히 잡아 묶은 밤색 머리카락, 기울어진 머리 는 무엇엔가 귀를 기울이다가 잠에 떨어진 것 같았다. 방구석에는 활짝 열린 옆 방 문이 벽에 어둠침침한 사각 구멍을 뚫어 놓고 있었다. @p 18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시계가 반을 쳤다. 시계추는 방 전체를 망각의 세계 로 빠져들게 만든 잠의 힘에 눌려 희미하게 똑딱거렸다. 등잔도 자고 있고 가구 들도 자고 있었다. 원탁 위에는 불꺼진 램프 옆에 여인의 일감이 자고 있었다. 엘렌느는 잠자는 모습조차 진지하고 선량한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시계가 2시를 쳤을 때, 이 평화는 깨졌다. 어두운 옆 방에서 한숨이 흘러나왔 다. 이불깃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그리고 다시 조용해졌다. 이제는 짓눌린 듯한 헐떡거림이 들렸다. 엘렌느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벌떡 몸을 일 으켰다. 괴로워하는 어린 것의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이 그녀를 깨웠다. 아 직 잠에 취해서 관자놀이에 손을 대고 있다가, 둔탁한 비명소리에 그녀는 화들 짝 놀라 양탄자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쟌느! ...쟌느!... 왜 그러니? 말해 봐!” 그녀는 물었다. 아이가 아무 대답 없자 그녀는 등잔을 향해 달려 가면서 중얼 거렸다. “맙소사! 얘가 몸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야. 내가 드러눕는 게 아니었어.” 그녀는 무거운 침묵이 깔린 옆 방으로 급히 들어갔다. 그러나 기름에 푹 젖은 등불은 천장에 둥근 반점을 만들 정도의 가물가물한 빛을 낼 뿐이었다. 엘렌느 는 쇠침대 위를 굽어 보았으나 처음에는 아무 것도 분별할 수 없었다. 잠시 후 걷어찬 이불 위로 고개를 제끼고 뻣뻣하게 목근육이 굳어져 경직되어 있는 쟌느 가 희끄무레한 빛에 보였다. 근육수축이 일어나 가련한 귀여운 얼굴을 비뚤어지 게 만들었고, 눈은 동공이 열려 늘어진 커튼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이런, 세상에!” 그녀는 외쳤다. @p 19 “세상에! 얘가 죽는구나!” 그녀는 등잔을 놓고 떨리는 손으로 딸을 어루만졌다. 맥박이 느껴지지 않았다. 심장이 멎은 것 같앗다. 가는 팔다리가 심하게 팽팽해졌다. 그녀는 질겁하여 혼 이 나가서 더듬거렸다. “얘가 죽어가요! 도와 줘요!... 얘야! 얘야!”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여기저기 부딪히면서 빙빙 돌다가 자기 방으 로 다시 왔다. 그리고는 다시 옆 방으로 돌아가 계속 살려 달라고 외치면서 침 대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녀는 팔로 쟌느를 감싸고 대답해 보라고 애원하면서 손으로 몸을 어루만지고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한 마디도, 한 마디도 없었다. 도대체 얘가 어디가 아픈가? 전날 약을 좀 먹으려고 했던가? 바깥 공기가 애를 흥분시켰나? 그녀는 아이의 말소리를 들으려고 애를 썼다. “말해 봐, 쟌느. 아! 말 좀 해봐, 제발!” 세상에! 어찌 해야 하나! 이렇게 한밤중에 갑작스럽게. 불빛 하나 없는데. 머릿 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스스로 묻고 대답하면서 딸에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배가 아파서 그런거야. 아니 목이 아파서 그런거야. 별일은 아니야. 진정해야 해. 그녀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팔 안에 딸아이가 뻣뻣해져 있다고 생각하자 애간장이 뒤집어졌다. 그녀는 경련을 일으켜 숨도 쉬지 않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애쓰면서,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꾹 참 았다. 그러나 돌연,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러댔다. “로잘리! 로잘리!... 빨리 의사 좀 불러!... 애가 죽어가!” 그녀는 식당과 부엌을 가로지르며 외쳤다. 부엌 뒤에 붙은 작은 방에서 자고 있던 하녀는 놀라서 소리지르며 깼다. 엘렌 느가 뛰어 들어왔다. 얼음장 같은 2월 밤의 추위도 느끼지 못하는 듯, 그녀는 속 옷바람으로 동동거렸다. 저 아이는 애를 @p 20 죽게 만들 참인가! 1분이 기나긴 시간처럼 흘렀다. 그녀는 부엌으로 갔다가 방으 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손으로 더듬어서 아무렇게나 치마를 걸치고 어깨에 숄을 둘렀다. 그녀는 가구들을 손에 닿는대로 어지르며 그렇게 정돈된 평화가 감돌고 있던 방안을 절망적인 몸부림으로 채웠다. 그리고는 슬리퍼를 신은 채 문은 열 어 제끼고,‘내가 가야 의사를 데려올 수 있을 거야’ 하고 생각하면서 4층을 뛰어 내려갔다. 문지기 아주머니가 줄을 잡아당겨 문을 열어 주자, 엘렌느는 윙윙거리는 귀를 감싸며 정신없이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비뇌즈 가(1. 현재 빠리 16구에 속하는 트로까데로 광장과 빠시 묘지 부근의 거리)를 내려가, 전에 쟌느 를 보아 준 적이 있는 보댕 의사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영겁 같은 기다림 끝에 하인이 나타나, 의사 선생께서는 해산하는 부인을 돕기 위해 나갔다고 대답했다. 엘렌느는 보도 위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는 빠시 지구에 다른 의사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는 잠시 동안 집들을 쳐다보며 길을 헤맸다. 얼음 같은 바람이 한 줄기 불었다. 저녁에 가볍게 내려 쌓인 눈 위를 그녀는 슬리퍼 바람으로 걸 었다. 당장 의사를 찾지 못하면 딸을 죽이고 말 것이라는 고통스런 생각과 함께 딸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녀는 비뇌즈 가로 다시 올라가 아무 초인종 이나 눌렀다. 물어볼 수는 있겠지. 그러면 아무 주소를 가르쳐 줄거야. 아무도 서둘러 나와 주지 않아서 그녀는 또 초인종을 울렸다. 겨울바람에 얇은 치마는 다리에 감겼고, 머리는 산발이 되었다. 마침내 하인이 문을 열고 나와서 드베를르 의사 선생님은 잠자리에 들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마침내 의사가 사는 집의 초인종을 울린 것이었다. 하늘이 나를 버리지 않는구나!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인을 떼밀었다. @p 21 “우리 애가, 우리 애가 죽어요!... 선생님이 오셔야 한다고 전해 주세요.” 그녀는 같은 소리를 계속 되풀이했다. 그곳은 온통 벽지를 바른 작은 건물이었다. 그녀는 하인과 실랑이하면서, 뭐라 고 잔소리하던간에 아이가 죽어간다는 말만 되뇌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한 방 앞에 이르러 그녀는 잠시 머뭇했다. 마침 옆 방에서 의사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 리자 그녀는 다가가서 문에 대고 소리쳤다. “서둘러 주세요, 선생님. 제발... 우리 애가 죽어가요!” 넥타이도 매지 않은 채 웃옷만 걸치고 의사가 나타나자, 그녀는 그를 잡아당 기며 더이상 옷을 입게 놔두지 않았다. 그는 그 여인을 알고 있었다. 여인은 옆 집에 살고 있었는데 그것은 자기가 세놓은 집이었다. 그가 빨리 질러 가기 위해 두 집 사이에 난 통행문을 지나 정원을 통과하자 그녀는 문득 기억이 살아났다. “그렇군요, 의사 선생님이신 걸 알고 있었는데. 정신이 나갔나봐요... 어서 가 시지요.” 그녀가 속삭였다. 계단에서 그녀는 의사를 먼저 오르게 했다. 신이라도 그보다 더 정중히 모시 진 않았을 것이다. 위층에는 로잘리가 쟌느 옆에 있었고, 탁자 위에 놓인 램프에 는 불을 붙여 놓았다. 의사는 방에 들어서자 램프를 집어 들고 황급히 아이를 비추었다. 아이는 아직도 고통스럽게 뻣뻣해 있었다. 고개만이 흘러내려 있었고, 짧은 경련이 얼굴을 지나가곤 했다. 그는 잠시 동안 입을 다물고 아무 말하지 않았다. 엘렌느는 불안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애원하는 듯한 어머니의 눈 길을 의식하자 중얼거렸다. “별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놔두어선 안 됩니다. 바깥 공기를 쐬어야 해요.” @p 22 엘렌느는 힘찬 동작으로 아이를 안아 올렸다. 괜찮다는 말에 의사의 손에 입 이라도 맞출 지경이었다. 안도감이 그녀를 감쌌다. 그러나 그녀가 쟌느를 자신의 큰 침대에 내려놓자 어린 소녀의 가련한 육체는 심한 경련으로 푸들거렸다. 의 사는 램프 갓을 벗겨 밝은 빛이 방안을 채우게 했다. 그는 창문을 활짝 연 다음 로잘리에게 침대를 휘장 밖으로 끌어 내리라고 일렀다. 엘렌느는 다시 고통에 싸여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얘는 죽어가고 있어요, 선생님!... 이것 보세요!... 아이를 알아볼 수가 없군요.” 의사는 대답하지 않고 주의깊은 눈길로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말했 다. “저쪽 구석으로 가셔서 아이가 자기 몸에 생채기를 내지 않도록 손을 잡아 주세요... 자, 가만히, 부드럽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발작에는 과정이 있는 법입 니다.” 두 사람은 침대 위에 몸을 굽히고 갑작스런 발작 끝에 사지를 늘어뜨리고 있 는 쟌느를 붙들었다. 의사는 드러난 목을 감추기 위해 상의의 단추를 채웠다. 엘 렌느는 아까 어깨 위에 걸친 숄을 계속 끌어올렸다. 그러나 쟌느가 몸부림치면 서 숄 크뜨머리를 잡아당기고 상의 윗단추를 풀어 놓았다. 그들은 그것을 서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둘 다 상대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발작이 진정되었다. 소녀는 심한 쇠약상태에 빠진 것 같았다. 발 작의 결과에 대해 어머니에게 안심하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사는 환자에 열 중해 있었다. 여전히 환자를 바라보면서 그는 마침내 좁은 통로에 서 있는 엘렌 느에게 짤막한 질문을 던졌다. “아이가 몇 살입니까?” “열 살 반입니다, 선생님.” @p 23 침묵이 흘렀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쟌느의 감겨진 눈꺼풀을 뒤집어, 점막 을 살펴보려고 몸을 숙였다. 그리고는 엘렌느는 쳐다보지도 않고 질문을 계속했 다. “어릴 때 경련을 일으킨 적이 있나요?” “네, 하지만 여섯 살이 되면서 경련을 일으키지 않게 되었지요... 이 아이는 아주 민감해요. 며칠 전부터 아이가 어디 불편하다 싶었어요. 경련과 실신을 한 적이 있어요.” “집안에 신경계통의 질환을 앓은 사람이 있습니까?” “모르겠어요. 어머님은 가슴앓이로 돌아가셨죠.” 그녀는 수치심 때문에 망설였다. 격리 수용소에 감금되었던 할머니(2. 아델라 이드 푸끄, 일명 디드 아주머니. 남편 루공과 애인 마까르에게서 세 자녀를 두며 그 자손들인 루공과 마까르 두 집안의 이야기가 졸라의 유명한 루공 마까르 총 서를 이룬다. 우리의 주인공 엘렌느는 아델라이드의 딸 위르실 마까르가 모자 제조공 무레에게 시집가서 낳은 세 자녀 중 하나이다.)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집안은 대대로 비참했다. “주의하세요. 다시 발작이 옵니다.” 의사가 급히 말했다. 쟌느는 눈을 떴다. 아이는 말없이 초점 잃은 눈으로 잠시 주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곳을 응시하더니 뻣뻣해진 사지를 뻗으면서 몸을 뒤집었다. 아이는 새빨개지더니 한순간 납빛으로 창백해지고 경련을 일으켰다. “아이를 늦추어 주면 안 됩니다. 그 쪽 손을 잡으세요.” 의사가 말했다. 그는 원탁으로 달려갔다. 들어오면서 그 위에 작은 약품상자를 놓아 두었던 것이다. 그는 작은 병을 가지고 돌아와 아이에게 들이마시게 했다. 쟌느는 강한 채찍을 맞은 듯이 경련하였고 어머니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p 24 “안 돼요, 에테르는 안 돼요! 에테르를 마시면 정신을 잃어요.” 어머니는 냄새로 그걸 알아차리고 외쳤다. 두 사람은 간신히 아이를 붙들 수 있었다. 아이는 반으로 접힌 것처럼 발꿈치 와 목덜미로 버티고서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그리고 툭 떨어져서 침대 가장자 리까지 내던져진 것처럼 몸부림을 쳤다. 엄지를 손바닥쪽으로 하고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아이는 때때로 손을 쫙 펴고 무언가를 허공중에서 잡아 비틀려고 했다. 그러다가 어머니의 숄이 손에 닿자 그걸 꽉 붙었었다. 그러나 어머니를 특 히 고통스럽게 한 것은 그녀가 말했듯이 더이상 딸을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었 다. 가엾은 어린 것의 상냥한 얼굴은 윤곽이 뒤틀리고, 눈은 희멀건 흰 자위를 까뒤집고 있었다. “어떻게 좀 해보세요. 더이상 견딜 수 없어요, 선생님.” 그녀는 속삭였다. 그녀는 비슷한 발작을 일으키다가 질식해 죽은 마르세이유의 이웃집 딸이 생 각났다. 의사가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속인 건지도 몰랐다. 아이의 불규칙한 호흡이 멈출 때마다, 그녀는 쟌느의 마지막 숨결이 얼굴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불쌍함과 두려움으로 제 정신을 잃고 상심 하여 울었다. 이불을 발로 차서 드러난 아이의 순결한 벗은 몸에 눈물이 떨어졌 다. 그동안 의사는 길고 유연한 손가락으로 목 아래 부분을 가볍게 압박하였다. 발작의 강도는 완화되었다. 경련이 약해지면서 쟌느는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아 이는 팔을 벌리고 베개를 고인 머리는 가슴께로 숙이고 침대 가운데 축 늘어졌 다. 그 모습은 마치 어린 예수 같았다. 엘렌느는 허리를 굽혀 그 이마에 오랫동 안 키스하였다. “끝났나요? 또 발작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녀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p 25 그는 잘 모르겠다는 몸짓을 했다. 그리고 대답했다. “어쨌든 심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는 로잘리에게 물병과 컵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는 물로 컵을 반쯤 채우고 약병 두 개를 꺼내 몇 방울 떨어뜨렸다. 엘렌느가 아이의 머리를 받쳐 주자 그 는 약 한 숟가락을 꽉 다문 이빨 사이로 흘려 넣었다. 램프의 흰 불꽃이 높게 타올라 가구가 넘어져 있는 어지러운 방안을 비추었다. 엘렌느가 잠자리에 들면 서 안락의자 등에 걸쳐 놓았던 옷가지는 바닥에 흘러내려 양탄자 위에 흩어져 있었다. 의사는 코르셋을 밟고 다니다가 더 이상 발길에 채지 않도록 주워 놓았 다. 어지러진 침대와 흐트러진 옷에서 마편초 냄새가 났다. 갑작스럽게 드러난 여인의 은밀한 부분이었다. 의사는 손수 대야를 찾아다 수건을 담가서 쟌느의 이마에 올려놓았다. “마님, 감기 걸리시겠어요. 창문을 닫으면 안 될까요? 바람이 너무 차요.” 로잘리가 이를 덜덜 떨면서 말했다. “아니 아니, 창문을 그대로 놔줘... 그렇죠, 선생님?” 엘렌느가 외쳤다. 미풍이 커튼을 들어올리며 불어 들어왔다. 그녀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숄은 거의 젖가슴이 드러나도록 어깨에서 벗어졌고, 틀어올린 머리는 풀어져 허리까 지 헐클어진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있었다. 그녀는 아이에게 열중하는 일 말고는 다 잊어버리고, 빨리 움직일 수 있도록 벗은 팔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바삐 움 직이는 여인 앞에서 의사는 자신의 풀어 헤쳐진 윗도리라든지 쟌느가 잡아챈 셔 츠 깃 따위는 더 이상 염두에 두지 않았다. “아이를 좀 일으켜 보십시오. 아니, 그게 아니고... 제 손을 잡으세요.” 그가 말했다. @p 26 그는 여자의 손을 잡아 아이의 머리를 받치게 하고는 약을 한 숟갈 더 먹이려 고 했다. 그리고 그는 여자를 자기 곁으로 불렀다. 딸이 훨씬 안정을 되찾은 걸 보며 어머니는 믿음을 갖고 복종하였다. “자... 제가 청진하는 동안 머리를 어깨로 받쳐 주세요.” 엘렌느는 시키는 대로 했다. 의사는 쟌느의 가슴에 귀를 대기 위해서 몸을 숙 였다. 그의 뺨이 여자의 드러난 어깨를 스쳤다. 아이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으 면서 그는 어머니의 심장이 뛰는 소리도 들었을 것이다. 몸을 일으키자, 그의 숨 결이 엘렌느의 숨결과 섞였다. “아무 이상 없습니다.” 그녀가 기뻐하는 동안 의사는 차분하게 말했다. “아이를 다시 눕히십시오. 이제 가만 놔두어야 합니다.” 또 발작이 일어났으나 그리 심하진 않았다. 쟌느는 더듬더듬 무슨 말인가를 했다. 짧은 간격을 두고 두 번 발작이 일어났다. 아이는 탈진 상태에 빠졌고, 의 사는 다시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는 아이의 머리를 높이 괴어 주고, 이불을 턱까지 덮어 주었다. 그리고 한 시간 가까이 아이의 호흡이 정상적으로 되기를 기다리면서 아이를 지켜보았다. 침대 맞은편에는 엘렌느가 움직이지 않고 마찬 가지로 지키고 있었다. 조금씩 쟌느의 얼굴에는 평화가 감돌았다. 램프의 뿌연 빛이 아이를 비추었다. 약간 긴 듯한 아이의 보기 좋은 타원형 얼굴은 어린 염소 같은 가냘픔과 우아함 을 회복하였다. 감겨진 아름다운 눈은, 깊은 빛을 발하는 눈동자가 비쳐 보일 정 도로 투명하고 푸르스름한 눈꺼풀로 덮여 있었다. 갸름한 코는 가볍게 벌름거렸 고, 조금 큰 듯한 입은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먹물처럼 검은 머리카락을 활짝 펼치고 아이는 자고 있었다. “이제 됐습니다.” 의사가 나지막히 말했다. @p 27 그는 돌아서서 약병을 챙기고 돌아갈 준비를 했다. 엘렌느는 사정하면서 다가 갔다. “선생님, 가지 마세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발작이 또 일어나면... 선생님께 서 아이를 구해 주신 거예요.” 그는 더이상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몸짓을 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를 안심 시키기 위해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로잘리에게 가서 자라고 했다. 지붕을 하얗 게 덮은 눈 위로 곧 희미하고 뿌연 해가 떠올랐다. 의사는 창문을 닫으러 갔다. 적막이 감도는 가운데 두 사람은 아주 낮은 목소리로 간간이 말을 주고 받았다. “분명히 심각한 병은 아닙니다만 그 나이에는 많은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특히 애가 발작을 일으키지 않고 행복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도록 돌보아 주셔 야 합니다.” 의사가 말했다. 잠시 사이를 두고 엘렌느가 말했다. “이 아이는 아주 민감하고 신경질적이에요... 저는 아이를 한결같이 다루질 못해요. 가엾게도 이 아이는 너무 예민해서 우려될 정도로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요... 이 애는 저를 몹시 좋아해요. 다른 애들을 귀여워하면 눈물을 흘릴 정도로 샘을 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머니의 말을 되뇌었다. “그래요, 예민하고 신경질적이고 샘이 많다... 보댕 선생이 그 애를 치료하셨 지요? 제가 그 분과 상의해 보지요. 충격적인 치료법은 피해야겠어요. 이제 한 여성으로서 건강이 결정될 시기에 있으니까요.” 그렇게 헌신적인 의사를 보자 엘렌느는 감사하는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 “선생님, 여러 가지로 보살펴 주셔서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 르겠습니다!” @p 28 그리고는 목소리를 높여서 쟌느가 깨지나 않았나 그녀는 침대를 들여다보러 갔다. 아이는 입술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발그레한 모습으로 자고 있었다. 조 용한 방에는 나른한 기운이 감돌았다. 벽지와 가구, 흩어진 옷가지는 진정된 듯 원래의 상태로 제 자리를 찾아갔다. 두 창문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에 모든 것 이 잠긴 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엘렌느는 아까처럼 좁은 통로에 서 있었고, 의사는 침대 맞은편에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가벼운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는 쟌느가 있었다. “애 아빠는 자주 아프곤 했지요. 하지만 저는 늘 건강해요.” 엘렌느는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여태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던 의사는 눈을 들었다. 그리고는 미소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키가 크고 당당하여서, 금빛이 감도는 밤색 머리의 헤라 여신 같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옆 모습은 조각과도 같은 엄숙한 단정함 을 드러냈다. 잿빛 눈과 흰 이는 얼굴 전체를 환히 빛나게 했다. 약간 억센 듯한 둥근 턱은 분별 있고 진지한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의사를 놀라게 한 것은 눈 부시게 드러난 어머니의 몸이었다. 숄은 흘러내려 젖가슴을 노출시켰고 팔도 드 러나 있었다. 갈색을 띤 금빛 머리카락은 어깨 위를 흘러내려 젖가슴 속으로 사 라졌다. 되는 대로 비끄러맨 구겨지고 헝클어진 치마를 입고 있었지만 그녀는 당당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남자의 눈길 앞에서도 그녀를 고상하게 지켜 주는, 정숙하고 바른 몸가짐에서 오는 품위였다. @p 29 여자도 잠시 남자를 관찰하였다. 드베를르 의사는 서른다섯쯤의 나이로 수염 을 기르지 않은 갸름한 얼굴, 잿빛 눈, 얇은 입을 갖고 있었다. 여자는 그를 바 라보면서 목이 드러나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이렇게 잠든 어린 쟌느를 사이 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조금 전에는 넓었던 공간이 죄어든 것 같았다. 아이 는 너무 얇은 호흡을 하고 있었다. 엘렌느는 천천히 숄을 끌어올려 몸을 감쌌고, 의사는 상의 단추를 채웠다. “엄마, 엄마.” 쟌느는 자면서 중얼거렸다. 아이는 잠을 깼다. 눈을 뜨고 의사를 보자 불안해했다. “누구야? 누구야?” 아이는 물었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키스하였다. “자거라, 얘야, 네가 좀 아팠단다... 이분은 친구야.” 아이는 아무 기억이 나지 않아서 놀란 듯햇다. 졸음이 다시 아이를 덮치고 아 이는 안심한 기색으로 속삭이면서 다시 잠들어 버렸다. “아이! 졸려... 안녕, 엄마... 그분이 엄마 친구라면 내 친구이기도 하지.” 의사는 약품상자를 넣었다. 그리고 조용히 인사를 한 뒤 가버렸다. 엘렌느는 잠시 아이의 호흡을 살폈다. 그녀는 침댓가에 초점없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타 고 있는 채 내버려 둔 램프가 환해진 햇빛에 빛을 잃고 있었다. 2 다음 날, 엘렌느는 드베를르 의사에게 감사하러 가는 게 옳을지 @p 30 생각해 보았다. 자기가 의사를 마구잡이로 끌고 온 일이나, 그가 쟌느 곁에서 밤 새도록 지내 준 일은 의사가 보통 왕진해서 하는 일을 넘어선 것이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부담을 안겨 주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표현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내 키지 않아서 이틀 동안이나 망설였다. 그렇게 망설이면서 그녀는 의사를 생각하 였다. 하루 아침에는 의사와 마주쳤으나 그녀는 아이처럼 몸을 숨겼다. 그러고는 자신의 소심한 행동을 몹시 언짢게 여겼다. 그녀의 차분하고 곧은 품성은 삶에 끼어든 혼란에 항의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그 날로 의사에게 감사하러 가야겠다 고 작정하였다. 아이가 발작을 일으킨 것은 화요일과 수요일 사이의 밤이었는데, 어느덧 토요 일이 되어 있었다. 쟌느는 완전히 회복하였다. 몹시 당황하여 달려온 보댕 의사 는 벌써 명성과 부를 쌓은 젊은 동료에 대해 늙고 가난한 동네 의사가 갖는 존 경심을 가지고 드베를르 의사에 대해 말했다. 그럼에도 그는 야릇한 미소를 지 으면서 그의 행운은 온 빠시 사람들이 존경하던 아버지 드베를르가 물려준 것이 라고 말했다. 아들은 150만이라는 재산과 상류층 고객들을 물려 받는 수고를 했 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주 실력 있는 의사이며 그와 함께 우리 어린 쟌느의 소중한 건강에 관해 의견을 나누게 되다니 좋은 일이라고 서둘러 덧붙였다. 3시쯤 엘렌느는 딸과 함께 내려갔다. 옆 집 초인종을 누르기 위해서는 비뇌즈 가에서 몇 걸음만 내려가면 되었다. 두 사람은 아직 상복을 입고 있었다. 문을 열어 준 사람은 정장과 넥타이를 한 집사였다. 엘렌느는 오리엔트식 큰 문이 달 린 커다란 현관을 기억할 수 있었다. 양쪽으로 활짝 핀 꽃이 화분에 담겨 있는 것이 새로 눈에 띌 뿐이었다. 하인은 회록색 가구가 딸린, 벽지를 바른 작은 살 롱으로 그들을 안내하였다. 그는 서서 기다렸다. 엘렌느는 그에게 이름을 말해 주었다. @p 31 “그량장 부인이에요.” 하인은 노랑색과 검정색으로 된 몹시 화려한 살롱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한 쪽 으로 비켜서서 되풀이했다. “그량장 부인이십니다.” 엘렌느는 문턱에서 멈칫거렸다. 저쪽 끝 벽난롯가에 젊은 여인이 치마 폭으로 좁다란 긴 의자를 다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이 얼핏 보였다. 여인의 맞은편에는 모자를 쓰고 숄을 두른 나이든 부인이 와 있었다. “실례합니다. 드베를르 선생님을 뵙고 싶은데요.” 엘렌느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쟌느의 손을 잡고 먼저 들어가게 했다. 젊은 부인과 이렇게 맞닥뜨리 자 그녀는 놀라고 당황하였다. 무엇 때문에 의사 선생님을 뵙겠다고 했을까? 하 지만 그녀는 그가 결혼했음을 알고 있었다. 마침 드베를르 부인은 빠르고 다소 날카로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맺는 중이었 다. “오! 근사해요, 근사해!... 그녀는 진짜같이 죽었어요!... 자, 그녀는 이렇게 가 슴을 움켜쥐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파랗게 되었지요... 마드모아젤 오렐리, 정말이 지 꼭 보러 가셔야 해요...” 그리고 그녀는 일어서서 옷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몹시 내며 문까지 와서 아주 상냥하게 말했다. “들어오시지요, 부인... 남편은 집에 없어요... 전날 밤 그렇게 아팠던 게 이 예쁜 아가씨인가 보죠... 좀 앉으세요.” 쟌느는 수줍어하며 의자 모퉁이에 앉고 엘렌느는 안락의자에 앉았다. 드베를 르 부인은 예쁜 웃음을 짓고 말하면서 자그마한 긴 의자에 다시 몸을 묻었다. “오늘은 제 날이에요. 저는 토요일에 손님을 초대하거든요... 그래서 삐에르는 모두 이리로 맞아들이지요. 지난 토요일에는 콧 @p 32 물 흘리는 대령을 데려왔더라니까요.” “무슨 그런 말을, 쥴리에뜨!” 그녀를 태어날 때부터 보아 왔으며 지금은 가난한 늙은 친구인 노처녀 오렐리 양이 중얼거렸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엘렌느는 살롱의 호화스러움과 커튼, 별처럼 반짝이는 검 정과 황금색의 의자에 시선을 보냈다. 벽난로와 피아노, 탁자 위에는 꽃들이 활 짝 피어 있었다. 유리창을 통해 정원의 밝은 빛이 들어왔다. 정원의 잎이 진 나 무와 벌거벗은 대지가 보였다. 난방장치가 뿜어 내는 고른 열로 방은 몹시 더웠 다. 벽난로에는 장작개비 하나가 벌건 숯이 되고 있었다. 엘렌느는 살롱에서 타 오르는 불꽃이 행복한 분위기를 위해 꾸며진 것임을 알아보았다. 드베를르 부인 은 먹물처럼 검은 머리와 우유처럼 흰 살결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자그마하 고 통통하였으며, 동작은 느리고 우아하였다. 방안의 황금빛을 받아서 짙고 숱많 은 머리카락은 그녀의 창백한 피부에 왁스를 입힌 듯한 광택을 띠게 했다. 엘렌 느는 정말 반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경련은 정말 끔찍해요.” 드베를르 부인이 말을 이었다. “우리 뤼시앵도 그런 적이 있었어요. 아주 어렸을 때이긴 하지만... 그래 얼마 나 걱정이 되셨어요! 어쨌든 저 아이는 이제 완전히 나은 것 같군요.” 얘기를 끄집어 내면서 부인 쪽에서도 엘렌느가 몹시 아름다운 데 놀라고 매혹 되어서 엘렌느를 바라보았다. 고상하고 엄숙한 자태를 검은 옷으로 휘감고 여왕 같은 표정을 한 이런 여인을 본 적이 없었다. 오렐리 양과 눈짓을 주고 받으며, 부인은 자신도 모르게 찬탄의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순진하게 매혹되어 엘 렌느를 훑어보았고, 엘렌느도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 @p 33 드베를르 부인은 허리에 매달린 부채를 집으며 긴 의자 위에 천천히 몸을 눕 혔다. “부인, 어제 보드빌(1. 1792년 극작가 삐스에 의해 설립된 극장. 부르스 광장 에 있었으며 제 2제정기에 뒤마 피스, 에밀 오지에 등의 현대극을 상연하였다. 1925년에 폐관되었다.) 첫 공연에 가시지 않으셨어요?” “저는 연극을 보러 가지 않아요.” 엘렌느가 대답했다. “오! 노에미는 정말 멋졌어요!... 그녀는 진짜같이 죽더군요!... 그녀는 이렇게 가슴을 움켜쥐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파랗게 되었어요... 굉장한 반향을 일으켰지 요.” 잠시 동안 그녀는 아까 칭찬했던 여배우의 인기를 평했다. 그리고는 신인의 작품이 출품된 전람회, 떠들썩하게 광고는 하지만 대단찮은 소설 같은 빠리의 다른 소문들로 옮겨 갔고, 오렐리 양과 소곤소곤 위험한 연애사건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그녀는 지칠 줄 모르는 빠른 어조로, 늘 숨쉬는 공기처럼 그 소리에 싸여서 이 얘기 저 얘기로 옮겨 갔다. 엘렌느는 그 세계에서 낯선 존재였기 때 문에 듣는 데 만족하면서 간간이 짤막한 대답을 했다. 문이 열리고 하인이 방문을 알렸다. “셰르메뜨 부인과 띠소 부인이 오셨습니다.” 성장을 한 두 부인이 들어섰다. 드베를르 부인은 급히 그 쪽을 향했다. 장식이 너무 많이 달린 검은 비단옷 자락이 길게 끌려 그녀는 몸을 돌릴 때마다 그것을 발로 차내야 했다. 잠시 동안 날카로운 목소리들이 빠르게 뒤섞였다. “정말 멋지군요!... 이렇게 차리신 걸 본 적이 없는데요.” “이래서 여기 오게 된다니까!” “정말 흠잡을 데 없군요.” @p 34 “오! 좀 앉고 봅시다. 우리는 아직도 스무 집이나 방문해야 해요.” “금방 가시면 안 되지요.” 두 부인은 긴 의자에 걸터 앉았다. 그리고 더욱 뾰족한 피리 같은 소리가 다 시 흘러 나왔다. “어제 보드빌에 가셨어요?” “오! 멋졌어요!” “그녀가 단추를 끄르고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던 모습 보셨죠? 대단한 장면이 에요.” “그녀는 얼굴빛이 파래지는 무슨 약을 먹었다고 하던데요.” “아니에요, 연기 동작은 계산된 거예요.... 그걸 먼저 보셔야지요.” “경탄할 만해요.” 두 부인은 일어서서 사라졌다. 살롱은 다시 훈기를 머금은 평화가 찾아왔다. 벽난로 위에서 히야신스가 강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순간 잔디 위에서 자리 다툼을 하는 참새떼의 요란한 소리가 정원으로부터 들려 왔다. 다시 자리에 앉 기 전에 드베를르 부인은 맞은편 창문의 수놓인 망사 발을 내렸다. 살롱의 금빛 이 더 부드러워지고 부인은 제 자리에 앉았다. “미안합니다. 예고치 않은 방문객 때문에...”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엘렌느에게 호의를 가지고 침착하게 말했다. 그녀는 틀림없이 세준 집에 떠도는 이야기를 들어서 엘렌느의 사정을 다소 아는 듯했다. 호의를 표시 하는 듯하면서 그녀는 아주 교묘하고 대담하게 리슐리외 가에 있는 바르 호텔에 서 일어난 엘렌느 남편의 끔찍한 죽음에 대해 말을 꺼냈다. “부인께서는 빠리에 막 도착하셨었지요? 빠리에 오셨던 적도 없 @p 35 구요... 긴 여행 끝에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남의 집에서 상을 당하다니 정 말 무서운 일이에요.” 엘렌느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녀는 정말 끔찍한 시간을 보냈었 다. 도착한 다음 날, 함께 외출하려는데 결국 남편을 앗아간 병이 갑작스럽게 찾 아왔다. 그녀는 길을 몰랐고 자신이 어느 동네에 있는지도 몰랐다. 일주일 동안 그녀는 온 빠리가 창 밑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고독의 밑바닥에 혼 자 내버려져 어찌 해야 할 바를 모르며 죽어가는 사람과 방안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밖에 나왔을 때 그녀는 미망인이 되어 있었다. 약병으로 가득 찬 큰 방, 짐조차 풀지 못했던 그 방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쳤다. “사람들이 그러는데 남편께서는 부인 나이의 곱절이라구요?” 오렐리 양은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귀를 기울이고 있고, 드베를르 부 인은 깊은 관심을 표시하면서 물었다. “아니에요. 그는 저보다 고작 여섯 살 더 많은걸요.” 엘렌느가 대답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간단하게 자신의 결혼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그녀가 마르세이 유의 쁘띠뜨 마리 가에서 ‘무레’ 모자공장을 경영하던 친정에 살 때 남편이 그녀에게 품은 열렬한 사랑, 부유한 제당업자인 그량장 가문이 처녀가 가난한 집안임에 화가 나서 끈질기게 반대했던 일, 끝내 허락을 얻지 못하고 치른 슬픈 비밀 결혼, 한 친척 아저씨가 죽으면서 2천 프랑 정도의 연금을 상속해 줄 때까 지 불안했던 생활들을 이야기했다. 결국 마르세이유에 대하여 품고 있던 미움의 감정은 그량장으로 하여금 빠리에 가서 정착하기로 결정하게 했다. “그러면 몇 살에 결혼하셨나요?” 드베를르 부인이 또 물었다. @p 36 “열일곱이었어요.” “무척 아름다웠겠군요.” 대화는 끊어졌다. 엘렌느는 그 말을 들은 것 같지 않았다. “망글랭 부인이 오셨습니다.” 하인이 알렸다. 한 젊은 여인이 조심스럽게 거북해하며 나타났다. 드베를르 부인은 눈에 보일 듯 말듯 몸을 일으켰을 뿐이었다. 그녀가 돌보아 주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부 인에게 감사하러 온 것이었다. 여인은 고작 몇 분 정도 머물더니 절을 하고 물 러갔다. 그러자 드베를르 부인은 함께 알고 있는 주브 사제 이야기를 꺼내면서 말을 다시 이었다. 그느 빠시 지구의 본당인 노트르담 드그라스의 초라한 임시 주임 사제였다. 그러나 그의 자비심은 그를 그 구역에서 가장 유명하고 사랑받는 신 부가 되게 하였다. “오! 정말 자비로운 분이지요.” 그녀는 경건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신부님은 우리에게 아주 고맙게 대해 주셨어요.” 엘렌느가 말했다. “남편은 전에 마르세이유에서 그분을 알고 지냈어요... 그분은 제 불행을 듣 고 모든 일을 맡아 주셨어요. 그분이 우리를 빠시에 자리잡게 해주셨지요.” “신부님은 형제분이 있으시지요?” 쥴리에뜨가 물었다. “네, 그 어머님이 재혼을 하셨어요... 랑보 씨도 남편을 알고 있어요... 그분은 랑뷔또 가에 남부지방 산물과 기름을 취급하는 큰 가게를 냈어요. 돈을 많이 버 는가 봐요.” 그리고 그녀는 명랑하게 덧붙였다. “신부님과 동생 모두 저와 친하게 지내지요.” @p 37 쟌느는 의자에 걸터앉아 지루해하면서 조바심나는 표정으로 어머니를 바라보 고 있었다. 염소처럼 갸날픈 얼굴은 거기서 하는 이야기를 유감스럽게 여기는 듯 괴로운 표정이었다. 아이는 때때로 가구를 곁눈질하면서, 섬세한 감수성으로 막연한 위험을 예감하고 경계심을 품으며 살롱의 무겁고 강한 향기를 맡고 있었 다. 그리고는 폭군 같은 애착을 품은 시선을 어머니에게로 옮기곤 했다. 드베를르 부인은 아이의 불편한 기색을 알아차렸다. “어른처럼 점잖던 꼬마 아가씨가 싫증이 나셨네... 어디 보자, 탁자 위에 그림 책이 있네.” 쟌느는 그림책을 가지러 갔다. 그러나 아이의 시선은 책 너머로 애원하듯 어 머니에게 향해 있었다. 엘렌느는 환대에 힘을 얻어 떠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침착한 성질이었고, 여러 시간 동안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을 수 있었다. 그렇지 만 하인이 계속해서 베르띠에 부인, 기로 부인, 르바쇠르 부인의 방문을 알렸기 때문에 그녀도 일어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드베를르 부인은 외쳤다. “좀 계세요. 우리 아들을 보여 드려야겠어요.” 사람들은 벽난로 앞에 큰 원으로 둘러앉았다. 부인들은 모두 한꺼번에 이야기 했다. 어떤 부인은 머리가 빠개지는 듯하다고 했다. 닷새 전부터 새벽 4시 전에 는 잠들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다른 한 부인은 유모들에 대해 신랄하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정직한 유모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대화는 재봉사들에게로 옮겨 갔다. 드베를르 부인은 괜찮은 옷을 만드는 여자 재봉사는 없고 남자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두 부인은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이야기가 끓긴 사이에 서너 마디를 들을 수 있었다. 나른한 손으로 부채질하면서 모두들 웃기 시작했다. “말리뇽 씨가 오셨습니다.” 하인이 알렸다. @p 38 단정하게 차려입은 키가 큰 청년이 들어섰다. 가벼운 탄성이 그를 맞이하였다. 드베를르 부인은 일어서지 않은 채 말을 건네며 손을 내밀었다. “어제 보드빌에 가셨나요?” “지독했어요!” 그는 소리쳤다. “지독하다니요!... 그녀는 대단하던걸요. 가슴을 움켜쥐며 고개를 떨구고...” “그만두십시오! 구역질나는 사실주의예요.” 그러자, 논쟁이 일어났다. 사실주의가 일도양단되었다. 청년은 사실주의를 전 혀 바라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시겠어요!” 그는 목청을 높이며 말했다. “아무것도! 그것은 예술의 품위를 떨어뜨릴 뿐입니다.” 사람들은 무대 위에서 예쁘장한 것들을 보는 것으로 끝나게 되고 만다. 어째 서 노에미는 연기를 끝까지 밀고 나가지 않았는가? 그는 부인들에게 충격을 줄 만한 동작을 대충 해보였다. 어머! 끔찍하기도 해라! 그러나 드베를르 부인이 여 배우가 불러일으킨 굉장한 반향을 강조했고, 르바쇠르 부인은 한 여자가 발코니 에서 기절한 사건을 강조함으로써 그것이 굉장한 성공이었다는 사실은 인정되었 다. 성공이라는 말로 논의는 깨끗이 결론지어졌다. 청년은 치마폭을 활짝 펼친 부인들 한가운데서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었 다. 그는 의사 집안과 아주 친밀한 듯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화병에서 꽃 한 송이를 집어 들고 자근자근 씹었다. 드베를르 부인이 물었다. “그 소설 읽었어요?” 그러나 그는 부인이 말을 맺도록 놔두지 않고 거만하게 대답했다. @p 39 “저는 1년에 두 권 밖에는 읽지 않습니다.” 예술가 협회의 전시회로 말할 것 같으면 관심을 쏟을 가치도 없었다. 그리하 여, 그 날의 모든 이야깃거리가 떨어지자 그는 쥴리에뜨의 긴 의자로 가서 팔을 기대더니 낮게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다. 그 동안 다른 부인들은 자기들끼리 활 발히 얘기했다. “저런! 그 청년이 갔군요.” 베르띠에 부인이 돌아보더니 외쳤다. “나는 한 시간 전에 로비노 부인 댁에서 그를 만났어요.” “그래요. 그리고 르꽁뜨 부인 댁으로 가는 거예요.” 드베를르 부인이 말했다. “그 사람은 빠리에서 제일 바쁘답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엘렌느를 향해 계속했다. “모두들 아주 좋아하는 뛰어난 청년이지요. 그는 외환 업무에 손을 대고 있 어요. 게다가 부자이고 다방면에 재주가 있지요.” 부인들이 일어섰다. “안녕히 계세요, 부인. 수요일을 기대하겠어요.” “네, 그래요, 수요일에.” “오늘 밤에 오실 건가요? 나는 누구와 있어야 할지 모르겠다구요. 당신이 가 면 나도 갈 거예요.” “물론이죠! 가겠어요, 약속해요. 기로 씨에게 안부 전해 주세요.” 드베를르 부인이 돌아왔을 때, 그녀는 엘렌느가 살롱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쟌느는 어머니에게 꼭 매달려 있었고 어머니는 아이의 손을 잡고 있 었다. 아이는 떨리는 손으로 어머니를 어루만지면서 조금씩 문쪽으로 잡아당겼 다. “아! 맞아.” 여주인은 중얼거렸다. 그녀는 하인을 부르는 벨을 울렸다. @p 40 “삐에르, 스미슨 양에게 뤼시앵을 데려오라고 하세요.” 기다리는 동안 아무 예고도 없는데 문이 무람없이 다시 열렸다. 열여섯쯤 된 아름다운 아가씨가 볼이 포동포동하고 안색이 발그레한 노인네를 이끌고 들어왔 다. “언니, 잘 있었어요?” 아가씨는 드베를르 부인을 껴안으며 말했다. “안녕, 뽈린느... 안녕하셨어요? 아버지...” 부인은 대답했다. 벽난로 모퉁이에서 까딱 않고 있던 오렐리 양은 르뗄리에 씨에게 인사하려고 일어섰다. 그는 까뾔신 로에 커다란 비단가게를 가지고 있었 다. 부인과 사별한 후 그는 훌륭한 신랑감을 구해 주려고 막내딸을 어디에나 데 리고 다녔다. “언니 어제 보드빌에 갔었어요?” 뽈린느가 물었다. “오! 멋있었지!” 쥴리에뜨는 거울 앞에서 삐쳐 나온 고수머리를 고치며 기계적으로 되풀이했 다. 뽈린느는 응석받이처럼 뾰로통했다. “어리다는 것은 따분한 일이에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어요!... 나는 어제 자 정에 아빠하고 연극이 어떻게 되어 가나 알아보려고 입구까지 갔었어요.” “그래, 우리는 말리뇽을 만났단다. 그 젊은이는 잘 나가는 듯하던데.” 아버지가 말했다. “저런! 그 사람이 좀 전에 여기 왔었는데 아주 나쁜 듯이 보이던데요. 그 사 람은 알 수가 없다니까.” “손님이 많았어요?” 뽈린느가 갑자가 주제를 바꾸며 물었다. @p 41 “그래! 한심한 아주머니들이지! 언제나 만원이라니까... 죽을 지경이야...” 그리고는 예의상 소개하는 걸 잊어버렸음을 생각해 내고는 말을 돌렸다. “저희 아버님, 그리고 여동생이에요... 그량장 부인이세요...” 영국인 가정교사 스미슨 양이 어린 소녀의 손을 잡고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애들 얘기, 어머니를 걱정시키는 잔병치레 얘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드베를르 부 인은 기다리게 한 걸 나무라기 위해 영어로 뭐라고 쏘아 붙였다. “아! 우리 뤼시앵이 왔구나!” 뽈린느는 치마폭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아이 앞에 무릎을 꿇고 외쳤다. “애를 놔둬라.” 쥴리에뜨가 말했다. “이리 오너라, 뤼시앵. 이리 와서 이 아가씨에게 인사하거라.” 어린 소년은 당황하여 다가왔다. 아이는 기껏해야 일곱 살 정도였는데 뚱뚱하 고 키가 작았으며 인형처럼 앙증맞게 꾸며져 있었다. 웃으면서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을 보자 그는 멈췄다. 그리고는 놀란 듯한 푸른 눈으로 쟌느를 살펴보았 다. “자, 어서.” 어머니가 재촉했다. 소년은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면서 한 걸음 떼어 놓았다. 목이 어깨에 파묻히 고 입술은 강하고 두툼했으며 약간 찌푸려진 음울한 눈썹을 지닌 둔해 뵈는 소 년이었다. 쟌느는 그를 두려워하는 듯했다. 표정이 심각해지면서 창백하고 음울 하게 변했기 때문이었다. “얘야, 너도 상냥하게 대해야지.” @p 42 엘렌느가 딸의 뻣뻣한 태도를 보고 말했다. 소녀는 어머니의 손목을 놓지 않고 장갑과 소맷부리 사이의 살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소녀는 고개를 숙이고 애무 앞에서 도망칠 태세를 갖추고 있는 까다 로운 야성의 처녀처럼 불안한 낯으로 뤼시앵을 기다렸다. 하지만 어머니가 부드 럽게 밀자 소녀 쪽에서도 한 걸음 떼어 놓았다. “꼬마 아가씨, 그 아이를 안아 줘야 해요.” 드베를르 부인이 웃으며 다시 말했다. “여자들은 처음 인사할 때 항상 그렇게 하거든... 아! 이 커다란 바보!” “안아 주거라, 쟌느.” 엘렌느가 말했다. 아이는 눈을 들어 어머니를 바라본 다음, 소년의 당황한 모습에 마음을 누그 러뜨리고, 그 어릿한 표정에 힘을 얻은 듯 상냥하게 웃었다. 소녀의 얼굴은 마음 속에 불현듯 일어난 호의로 밝아졌다. “그럴게, 엄마.” 소녀는 속삭였다. 어깨를 잡고, 거의 뤼시앵을 들어올리면서 소녀는 양 볼에 힘차게 키스했다. 소년도 소녀를 기꺼이 포옹하였다. “잘 했어!” 둘을 부추긴 사람들이 외쳤다. 엘렌느는 인사를 하고 드베를르 부인의 배웅을 받으며 문으로 갔다. “의사 선생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해 주세요... 선생님은 지난 밤 저를 죽을 것 같은 불안에서 구해 주셨지요.” 그녀는 말했다. “그런데 앙리는 집에 없나?” @p 43 르뗄리에 씨가 참견했다. “네, 늦을 거예요.” 줄리에뜨가 대답했다. 오렐리 양이 그량장 부인과 함께 일어서는 것을 보고 그녀는 덧붙였다. “우리와 식사하게 남아 계세요. 그러기로 되어 있잖아요.” 노처녀는 매주 토요일 이러한 초대를 기다리고 있었고 마침내 모자와 숄을 벗 기로 했다. 살롱은 숨이 막혔다. 르뗄리에 씨는 창문을 열러 갔으나 벌써 꽃망울 이 터지고 있는 라일락 꽃을 열심히 들여다보느라고 그 앞에 계속 서 있었다. 뽈린느는 뤼시앵과 함께, 방문객들이 어질러 놓은 의자와 안락의자 사이를 뛰어 다니며 놀고 있었다. 문턱에서 드베를르 부인은 탁 터놓고 호의어린 태도로 악수를 청했다. “언짢게 생각하지 않으시겠지요? 남편이 부인에 대해 얘기했는데 저는 마음 이 끌렸어요. 당신의 불행, 그리고 외로움... 어쨌든 당신을 만나게 되서 정말 기 뻐요. 또 뵙게 되겠지요.” “그러믄요, 고맙습니다.” 약간 머리가 이상한 듯해 보이는 이 부인이 이렇게 열심히 호의를 보이는 데 감동해서 엘렌느는 대답했다. 두 여인은 손을 잡고 마주 보며 웃었다. 쥴리에뜨 는 정다운 표정으로 이 갑작스런 우정의 이유를 고백했다. “부인은 아름다워서 누구라도 부인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엘렌느는 명랑하게 웃기 시작했다. 아름답다는 말은 그녀를 푸근하게 해 주었 다. 그녀는 뤼시앵과 뽈린느가 장난치는 걸 열심히 보고 있는 쟌느를 불렀다. 드 베를르 부인은 또 말을 걸며 잠시 소 @p 44 녀를 붙잡았다. “너희들은 이제 친구니까 안녕해야지.” 두 어린이는 서로 손 끝으로 키스를 보냈다. 3 수요일마다 엘렌느는 랑보 씨와 주브 사제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 었다. 엘렌느가 상을 당하자 그들은 그녀를 평소의 외로움에서 일주일에 한 번 이라도 끌어내기 위해 허물없이 찾아와 식사를 했다. 그래서 수요일의 저녁식사 는 습관이 되고 말았다. 손님들은 정확히 7시가 되면 어김없이 똑같은 조용한 기쁨을 띠고 나타났다. 수요일에 엘렌느는 창가에 앉아 손님을 기다리면서, 석양빛에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앉아 부드러운 평화 속에서 낮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 고지대에서는 소음은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자단목과 푸른 벨벳으로 꽤 돈을 들여 치장한 이 넓은 방이 마음에 들었다. 경황이 없는 가운데 친구들이 그녀를 이곳에 자리잡게 했을 때, 처음 얼마 동안 그녀는 이 방이 너무 호화로워서 다 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랑보는 그 일에 참견을 하지 않았던 신부가 찬탄을 금 치 못할 정도로 이곳을 안락하고 아름답게 꾸미려고 있는 힘을 다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집이 제 마음처럼 단순하고 건실함을 깨달았고 결국 행복한 기분이 되었다. 무거운 커튼과 화려하면서 어두운 가구는 가라앉은 분위기를 더하게 했 다. 여러 시간 일하는 동안, 그녀의 유일한 휴식은 눈앞에 파도 이는 바다처럼 지붕이 펼쳐 있는 거대한 빠리를 넓은 지평선까지 바라보는 일이었다. 마음속 외로운 구석이 넓은 곳을 바라보면 탁 트이는 듯했다. @p 45 “엄마. 이제 잘 보이지 않아.” 그녀 곁의 낮은 의자에 앉아 있던 쟌느가 말했다. 아이는 어둠에 잠긴 빠리를 보며 책을 떨어뜨렸다. 평소 아이는 거의 말이 없 었다. 아이를 나가 놀게 하려면 화를 내야 할 지경이었다. 보댕 의사의 지시로 어머니는 아이를 매일 두 시간씩 볼로뉴숲에 데려갔다. 그것이 유일한 외출이었 고 18개월 동안 두 모녀는 빠리 시내에 세 번도 내려가지 않았다. 아이는 그 커 다란 푸른 방 외에는 어디에서고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엘렌느는 아이에게 음 악을 배우게 하려던 것을 단념해야 했다. 고요한 동네에서 울리는 오르산 소리 에 아이는 눈물이 핑 돌면서 몸을 떨었다. 아이는 주브사제의 가난한 사람들에 게 보낼 배내옷을 바느질하는 어머니를 도왔다. 로잘리가 램프를 가지고 들어왔을 때는 완전히 밤이 되어 있었다. 요리를 하 느라고 그녀는 바삐 돌아가고 있는 듯하였다. 수요일의 저녁식사는 그 집에 생 기를 불어넣는 유일한 큰 일이었다. “마님, 오늘 저녁에는 신사분들이 오시지 않나요?” 하녀가 물었다. “아직 7시15분 전이야. 곧 오실테지.” 로잘리는 신부의 선물이었다. 로잘리가 생판 아는 게 없이 빠리에 당도하던 날, 신부는 그녀를 오를레앙 역에서 만나 데려왔다. 그녀를 신부에게 보낸 이는 보스의 신부로 그와는 신학교 동창이었다. 그녀는 키가 작고 뚱뚱했으며 꼭 끼 는 본네트를 쓴 둥근 얼굴과 검고 뻣뻣한 머리, 주저앉은 코와 붉은 입술을 하 고 있었다. 그녀는 신부의 하녀였던 대모와 함께 사제관에서 자랐기 때문에 요 리를 썩 잘했다. “아, 랑보 씨에요!” 그녀는 초인종이 울리기도 전에 문을 열러 가면서 말했다. @p 46 키가 크고 단정한 랑보 씨가 시골 공증인 같은 넓적한 얼굴을 드러냈다. 마흔 다섯인데 머리는 벌써 잿빛이었다. 그러나 그의 커다란 푸른 눈은 어린아이의 놀란 듯한 순진하고 부드러운 표정을 간직하고 있었다. “신부님이세요. 이제 모두 오셨네!” 로잘리가 또 문을 열며 말했다. 랑보 씨는 엘렌느와 악수를 하고, 제 집에 온 것처럼 미소지으며 말없이 앉았다. 쟌느는 신부의 목에 매달렸다. “안녕하세요, 신부님! 저 많이 아팠어요.” 아이가 말했다. “많이 아팠구나!” 두 사람은 걱정했다. 신부는 작고 깡 말랐으며 머리가 크고 맵시가 없는데다 옷은 되는대로 입고 있었다. 그러나 평소에 반쯤 감겨져있던 그의 눈은 크게 떠 졌고 자애로운 빛으로 가득 찼다. 쟌느는 한 손은 신부에게 한 손은 랑보 씨에 게 맡기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아이의 손을 잡은 채 걱정스러운 눈으로 들여 다보았다. 엘렌느는 발작이 일어난 일을 이야기해야 했다. 신부는 알리지 않았다 고 화를 낼 뻔했다. 그리고 별일 없이 지나갔는지, 또 발작하지는 않았는지 질문 을 해댔다. 어머니는 미소를 지었다. "두 분은 저보다 아이를 더 사랑하시네요. 너무 그러시면 제가 기죽잖아요." 그녀는 말했다. "아니에요, 팔다리가 좀 아프고 머리가 무거운 것 말고는 아무일 없어요. 그렇 지만 그것과 끈질기게 싸워야 할 거예요."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하녀가 알리러 왔다. 식당에는 마호가니로 된 식탁, 찬장, 여덟개의 의자가 놓여 있 @p 47 었다. 로잘리는 붉은 모직 커튼을 치러 갔다. 아주 단순한 모양의 매달린 촛대, 구리테가 달린 흰 자기 램프가 식기와 짝을 이룬 접시, 김이 나는 수프를 비추 고 있었다. 수요일마다 저녁식사에서는 똑같은 대화가 오고갔다. 그러나 그날은 자연히 드베를르 의사가 화제가 되었다. 의사는 독실한 신자가 아니었지만 신부 는 그를 몹시 칭찬했다. 그는 의사가 성품이 곧고 너그러운 마음씨를 가졌으며, 아주 모범적인 아버지요 남편이라고 평했다. 드베를르 부인은 독특한 빠리식 교 육을 받았기 때문에 외양은 다소 요란해 보이지만 훌륭한 부인이라고 했다. 한 마디로 그림 같은 부부였다. 엘렌느는 만족해 보였다. 그녀도 그 부부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신부가 그렇게 말하자 지난 번에 그녀를 다소 겁에 질리게 했 던 교제를 계속 이어갈 용기를 갖게 되었다. “당신은 너무 갇혀 지내고 있어요.” 신부는 잘라 말했다. “옳은 말이오.” 랑보 씨도 거들었다. 엘렌느는 두 분이 계시는 것으로 충분해요 하는 듯, 그리고 새로 누구를 사귀 는 것이 두렵다는 듯 조용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시계가 10시를 치자 신부와 그 동생은 모자를 집었다. 쟌느는 방안의 안락의자에서 막 잠이 들 었다. 그들은 아이를 잠시 굽어보고 평화롭게 잠든 모습에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발 끝으로 떠나면서 현관에서 소리를 죽여 말했다. “다음 수요일에 만납시다.” “잊고 있었는데...” 신부는 두 계단을 다시 올라와 속삭였다. “페띠 할멈이 병이 났어요. 가봐 주셔야겠어요.” “내일 가 보겠습니다.” @p 48 엘렌느가 대답했다. 신부는 일부러 그녀를 가난한 교구민에게 보냈다. 두 사람은 가만가만 모든 문제를 함께 이야기했고, 그런 일에 대해서는 척하면 서로 알아듣고 남들 앞에 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다음 날 엘렌느는 홀로 외출했다. 아이가 중풍들린 노 인 집에 자선방문을 다녀와서 이틀간 오한을 일으킨 후로 그녀는 쟌느를 데려가 는 것을 피했다. 밖에서 그녀는 비뇌즈 가를 따라 내려가다 레이누아르 가로 접 어들었다. 오 골목에서 그녀는 인접한 정원의 벽 사이에 끼인 듯한 이상한 계단 으로 해서 빠시 고지대에서 강가로 내려가는 가파른 소로를 택했다. 그 비탈 아 래 허물어져 가는 집의 지붕 밑 방에 폐띠 할멈이 살고 있었다. 둥근 천창으로 빛이 들어오고 초라한 침대와 망가진 식탁, 속에 넣은 짚이 삐져 나온 의자가 있었다. “아! 부인이세요?” 할멈은 엘렌느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신음하기 시작했다. 페띠 할멈은 누워 있었다. 할멈은 가난에도 불구하고 부은 것처럼 살이 찌고 부푼 듯한 얼굴이었으며, 마비된 손으로 덮고 있는 누더기 이불을 끌어당겼다. 그녀는 가느다란 작은 눈과 징징 우는 목소리로 끊임없이 사설을 늘어놓았으며, 부산하게 겸손을 떨었다. “아! 부인, 고마워요!... 이거 몸이 아파서! 개들이 옆구리를 물고 늘어지는 것 같다우... 아이구구, 뱃속에도 확실히 뭐가 있어요, 자, 거기에요. 보세요. 겉은 멀 쩡해도 속에 병이 있는 걸요. 아이구! 이틀 전부터 멈추질 않아요. 세상에! 이렇 게 아플 수가... 아! 부인, 고맙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잊지 마세요. 복을 받으 실 거예요. 그러믄요, 복을 받고 말구요...” 엘렌느는 앉아 있다가 식탁 위에 김이 오르는 찻주전자가 있는 것을 보고 옆 에 있는 찻잔에 따라서 환자에게 내밀었다. 주전자 옆에는 설탕 봉지와 오렌지 두 개, 과자가 있었다. @p 49 “누가 왔었나요?” 그녀가 물었다. “네, 어떤 부인이요. 그렇지만 필요한 게 그것뿐이 아니에요. 아! 고기가 좀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옆 집 색시가 고깃국을 끓여 줄텐데...아이구 아야! 점 점더 쑤시는구만. 정말 물어뜯는 것 같다니까요... 뜨끈한 국물이라도 먹었으면... ” 쥐어짜는 듯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할멈은 가느다란 눈으로 엘렌느가 호주머니 를 뒤지는 것을 살폈다. 식탁 위에 10프랑짜리 동전이 놓이는 것을 보자 앉으려 고 끙끙거리면서 더욱 푸념을 늘어놓았다. 푸념을 되풀이하는 동안, 발버둥치면 서 팔을 뻗자 동전은 사라졌다. “세상에! 또 발작이에요. 이렇게는 견딜수 없어요... 하느님이 복을 내리실 거 예요. 부인... 아이구, 온 몸을 뒤흔드는 통증이에요... 신부님께서 부인이 오실 거 라고 약속했지요. 부인께서는 정말 눈치가 빠르시군요. 고기를 좀 사러가야 겠 어요. 아픈게 허벅다리로 내려가는군요. 도와 주시겠어요.? 참을 수가 없어요. 참 을 수가...” 그녀는 돌아눕고자 했다. 엘렌느는 장갑을 벗고 최대한 부드럽게 노파를 부축 해서 다시 눕혔다. 엘렌느가 아직 몸을 굽히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드베를르 의 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녀는 놀라서 얼굴이 빨개졌다. 그도 남 몰래 이런 방문을 하고 있구나! “의사 선생님이시군요.” 노파는 입 속에서 중얼거렸다. “당신들은 착한 분들이에요. 하느님이 축복을 내려 주시기를!” 의사는 엘렌느에게 조심스럽게 인사했다. 그가 들어오자 페띠할멈은 더이상 그렇게 신음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앓는 어린애처럼 계속 바람새는 소리로 조그맣게 신음했다. 그녀는 부인과 의 @p 50 사가 서로 아는 사이인 것을 알아차리자, 주름으로 쪼글쪼글한 얼굴에 음험한 표정을 담고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의사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진 다음, 오른쪽 옆구리를 타진했다. 그리고 막 자리에 앉은 엘렌느에게 돌아 서서 속삭였다. “간장산통이에요. 며칠 있으면 걸어다니게 될 겁니다.” 의사는 수첨 한 장을 찢어서 그 위에 몇 줄을 적고 페띠 할멈에게 말했다. “자, 이것을 빠시 가에 있는 약국에 가져 가세요. 약을 받아서 두 시간마다 한 숟갈씩 드세요.” 할멈은 또 다시 축원을 했다. 엘렌느는 앉은 채로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 주치자 의사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머뭇머뭇하였다. 그리고 인사를 하고는 먼저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그가 한 층도 채 내려가지 않아서 페띠 할멈은 신음소리 를 다시 시작했다. “아! 정말 친절한 의사 선생님이세요!...처방이 좀 들으면 좋겠는데! 줄줄 흐 르는 콧물 때문에 죽을 지경이라우. 몸 안의 물이 다 마를 지경이라니까...아! 그 친절한 의사 선생님을 안다고 말씀하시지 그랬어요! 선생님을 아신 지 오래 되 지요, 아마?...아이구! 목말라! 피 속에 불덩이가 있는 것 같다우... 선생님은 결혼 하겼지요? 그 분은 좋은 아내와 예쁜 어린애들을 가질 만해요... 친절한 사람들 끼리 아는 것을 보면 기쁘답니다.” 엘렌느는 환자에게 마실 것을 주려고 일어섰다. “그럼 이만 가보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내일 오겠어요.” 그녀는 말했다. “그래요... 상냥도 하시지!...그런데 내의가 좀 있었으면...내 잠옷을 보시구랴. 두쪽이 되었어요. 걸레 위에서 자는 거지요... 하지만 아무래도 괜찮아요. 하느님 께서 이 모든 것을 갚아 주실 거예요.” @p 51 다음 날 엘레느가 도착했을 때, 드베를르 의사는 페띠 할멈 집에 있었다. 노파 가 입심 좋게 징징거리고 있는 동안, 그는 의자에 앉아 처방을 쓰고 있었다. “이제는, 선생님, 납덩이 같아요. 확실히 옆구리에 납이 들어 있어요. 그게 1 백 파운드는 나가서 돌아 누울 수가 없어요.” 그녀는 엘렌느를 보고도 더 이상 멈추지 않았다. “아! 부인이시군요... 나는 친절하신 선생님께 말씀드렸어요.‘부인은 오실 거 예요. 하늘이 무너져도 부인은 오실 거예요’라구... 진짜 성녀에요. 낙원의 천사 구요. 게다가 아름다우시구. 정말 아름다워서 부인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 사람들 은 길에 무릎을 꿇을 거예요... 부인, 병이 전혀 나아지지가 않았어요. 요때쯤이 면 여기 납이 있는 것 같아요... 나는 부인이 내게 해준 걸 전부 선생님께 얘기 했어요. 임금님이라도 그 이상 못 할 거예요... 부인을 좋아하지 않으려면 아주아 주 심술이 사나워야겠지요...” 그녀가 작은 눈을 반쯤 감고 긴 베개 위에 머리를 흔들면서 이야기를 늘어놓 고 있는 동안, 의사는 몹시 거북해하는 엘렌느에게 미소지었다. “페띠 할머니, 내의를 좀 가져왔어요...” 그녀는 중얼거렸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복을 받으실 거예요... 친절하신 의사선생님은 찾아오는 손님보다 불쌍한 사람들에게 더 힘을 쏟고 계신답니다. 부인은 선생님께서 나를 넉 달 동안 돌보아 주신 걸 모르시지요? 약이며 국이며 포도주까지. 누구한테나 그렇게 고맙게 대해 주는 부자는 많지 않아요. 이분도 착한 천사예요... 아이구! 뱃속에 집채만한 게 들어 앉았어요...” 이번에는 의사가 어쩔줄 몰라했다. 그는 일어서서 엘렌느에게 의자를 권하려 고 했다. 그녀는 거기 15분 정도 있으려는 생각으로 @p 52 왔지만 “괜찮습니다, 선생님, 매우 바빠서요.” 라고 말하면서 사양했다. 그동안 페띠 할멈은 여전히 머리를 흔들며 팔을 뻗쳤다. 내의 꾸러미는 침대 밑으로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그녀는 계속 말했다. “아! 두 분은 잘 어울려요... 그게 사실이니까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화를 내 지는 않으시겠지요... 한 사람을 보면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다니까... 착한 사람 들끼리는 서로 이해하는 법이에요...아이구! 손 좀 빌려 주시겠수? 돌아 누워야겟 어요!... 그럼요, 서로 이해하구 말구요.” “안녕히 계세요. 페띠 할머니. 내일 올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엘렌느는 의사에게 자리를 내주면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다음날 또 올라왔다. 노파는 잠들어 있었다. 잠이 깨서 의자 위에 검은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여인을 보자 노파는 외쳤다. “선생님은 왔다 가셨어요... 그런데 나한테 무슨 약을 먹게 했는지 모르겠어 요. 나는 막대기처럼 뻣뻣해요... 아! 우리는 부인에 대해 얘기했다우. 선생님은 여러 가지를 물으셨어요. 당신이 항상 슬퍼보이는지, 항상 같은 표정인지... 정말 좋은 분이세요!” 그녀는 잠시 말을 늦추고,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싶어서 눈치보며 아양떠는 가난뱅이의 표정으로 엘렌느의 얼굴에서 그 말의 효험을 살폈다. 그녀는 부인의 이마가 불쾌함으로 주름살이 지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왜냐하면 팽팽하게 빛나던 부은 얼굴이 시무룩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입속말을 계속했 다. “계속 잤어요. 아마 약을 잘못 먹은 것 같아요... 아농시아시옹 가에 한 여자 가 있었는데 약사가 딴 사람 약을 잘못 줘서 죽게 했대요.” 그날 엘렌느는 페띠 할멈이 태어났다는, 양질의 우유가 생산되 @p 53 는 노르망디 지방 얘기를 들으며 반 시간이나 머물렀다. 말이 없다가 그녀는 지 나가는 말로 물었다. “오래 전부터 의사 선생님을 아세요?” 노파는 몸을 길게 뻗고 눈꺼풀을 반쯤 떴다 감았다.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그녀는 거의 꺼져 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아버지가 48년 전 나를 치료해 줬을 때 선생을 데리고 왔었죠." “그 분 아버님은 성인 같았다고 하던데요." “그래요, 그래요... 너무 지나칠 정도였어요. 오히려 아들이 더 낫지요. 그가 진찰하면 빌로드 손이 만지는 것 같아요." 다시 침묵이 깔렸다. “선생님게서 지시하신 대로 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 분은 아주 아는 게 많 으시지요. 제 딸도 구해줬어요." “그럴 거예요!" 기운을 되찾은 듯 페띠 할멈이 외쳤다. "믿음직하구말구요. 그 분은 다 죽어가는 남자애를 고친 적도 있지요... 이렇게 말하는 걸 말리지 마세요. 그런 의사는 둘도 없지요. 나는 팔도 시원찮고 아무데 서나 자빠지곤 한다우... 그래도 나는 매일 저녁 하느님께 감사해요. 그래요. 나 는 당신들 두 분을 잊지 않고 있어요! 나는 당신들을 위해 기도하지요... 하느님 께서 당신들을 보호해 주시고 당신들 소원을 들어 주실 거예요! 하느님께서 복 을 내려 주시기를! 그리고 천국에 당신들 자리를 마련해 주시기를!“ 할멈은 몸을 일으키고 손을 모으고서 아주 열심히 비는 것 같았다. 엘렌느는 한참이나 그녀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고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노파의 시끄러운 아첨은 결국 엘렌느를 달래서 누그러 @p 54 지게 했다. 그녀는 떠나면서 할멈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를 위해서 옷과 모자를 가져다 주겠다고 약속했다. 한 주일 내내 엘렌느는 페띠 할멈을 돌보았다. 매일 오후 할멈을 방문하는 것 이 일과가 되었다. 그녀는 특히 오 골목에 이상한 친근감을 느꼈다. 이 가파른 소로는 조용하고 시원했으며, 비 오는 날이면 고지대에서 흘러내리는 급한 물줄 기에 씻겨서 늘 깨끗한 포석 때문에 엘레느의 마음에 들었다. 그곳에 이르러, 이 웃 거리에 사는 사람들조차 알까말까 해서 대개는 아무도 다니지 않는 골목의 급한 경사가 구석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을 바라보면 높은 데서부터 이상한 감정 이 일곤했다. 그녀는 대담하게 레이누아르 가를 따라 있는 집 밑의 궁륭으로 들 어갔다. 그녀는 완만한 계단으로 된 8층을 잰 걸음으로 내려갔다. 계단을 따라 좁은 통로를 반이나 차지하는 자갈 깔린 도랑이 나 있었다. 양쪽 정원 벽은 회 색 곰팡이로 침식되어 부풀어 있었다. 내려가는 도중 그녀는 거기 드리워진 가 로등에 주의를 기울이거나, 한 번도 열려진 것을 본 일이 없는 문 뒤의 정원에 서 나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숨을 돌리기 위해 멈추곤 했다. 때로 한 할머니가 오른쪽 벽에 붙어 있는 검게 빛나는 철제 난간에 의지하여 올라오거나, 한 부인 이 우산을 지팡이처럼 짚고 올라왔다. 한 무리 아이들이 구두굽소리를 내면서 굴러 내려가기도 했다. 그러나 대개는 그녀 혼자였고 그것이 숲 속의 오솔길처 럼 그늘지고 조용한 이계단의 커다란 매력이었다. 밑에서 그녀는 눈을 들었다. 방금 그녀가 위태롭게 내려온 비탈은 가파로워서 가벼운 공포를 일으켰다. 그녀는 옷갈피에 오 골목의 평화와 신선함을 간직한 채 페띠 할 @p 55 멈 집에 들어서곤 했다. 이 비참과 고통의 구덩이도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못했다. 그녀는 환기를 시키기 위해 천창을 열고 걸리적거리는 식탁을 치우며 제 집에 있는 것 같이 행동했다. 헐벗은 다락방과 흰 회벽, 찌그러진 가구는 처 녀적에 꿈구었던 단순한 삶을 생각나게 했다. 그러나 특히 마음에 든 것은 과거 에 그녀가 숨쉬고 살았던 연민의 정이었다. 환자를 간호하는 역할, 노파의 계속 되는 푸념 등 둘레에서 보고 느끼는 것은 그녀를 무한한 동정심으로 떨게 했다. 그녀는 눈에 띠게 조바심치며 드베를르 의사의 방문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녀는 의사에게 페띠 할멈의 상태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잠시 나란히 서서 얼굴을 마 주 보며 다른 일을 이야기했다. 두 사람은 친밀해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비슷한 취향을 갖고 있음을 알고 놀라워했다. 그들은 자주 말 없이도 서로 이해하였으 며, 마음 속에는 불현듯 똑같은 자비심이 넘치는 것이었다. 일상적인 경우는 넘 어서 맺어지는 이러한 공감, 동정심으로 흐물흐물해지면서 저항하지 못하고 굴 복하게 되는 이러한 공감이야말로 엘렌느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감미로웠다. 그 녀는 처음에는 의사를 두려워했다. 그의 집 살롱에서라면 그녀는 본성을 누르면 서 냉정함을 유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 의자에 같이 앉아, 그들의 사 이를 좁혀 주고 마음을 풀어주는 가난하고 누추한 환경을 은근히 기뻐하면서,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그들은 곁에서 몇 년을 산 것처럼 서로 이해하게 되었다. 페 띠 할멈의 누추한 방은 그들의 선량함으로 환해졌다. 한편, 할멈은 아주 천천히 회복되어 갔다. 할멈이 지금은 종아리에 납덩어리가 있는 것 같다고 하자 의사는 놀라서, 그녀가 안일하게 누워만 있다고 나무랐다. 그녀는 늘 신음하였고 머리를 흔들면서 드러누워 있었다. 또, 그들을 자유롭게 놔두려는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어느 날은 진짜 잠든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눈꺼풀 밑 @p 56 에서 가느다란 눈꼬리로 그들을 엿보고 있었다. 결국 엘렌느는 일어서야 했다. 다음 날, 엘렌느는 약속했던 옷과 모자를 가져왔다. 의사가 오자 할멈은 갑자기 외쳤다. “저런! 옆 색시가 고깃국을 봐 달라고 했는데!” 할멈은 나가면서 둘만 남겨놓고 문을 닫아 버렸다. 의사는 엘렌느에게 때때로 비뇌즈 가의 자기 정원에서 오후를 보낼겸 내려오라고 졸랐다. “아내가 부인의 방문에 답례할 겁니다. 그리고 부인을 다시 초대할 거예요... 그것은 따님에게도 대단히 좋을 겁니다.” “사양하지 않겠어요. 저는 사람들이 격식을 갖추어서 찾아오길 기다리는 건 아니에요. 다만 경솔하게 처신하는 게 아닌지 걱정돼요... 어쨌든 다시 뵙겠지요. ”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들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다가 의사는 놀랐다. “할머니는 도대체 어딜 간 것이지요? 국을 본다고 간 지가 15분이나 됐는데. ” 엘렌느는 그제서야 문이 닫힌 것을 보았다. 그것은 당장 눈에 거슬리지는 않 았다. 그녀는 의사에게 드베를르 부인에 대해 칭찬을 했다. 그러나 의사가 계속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기 때문에 그녀도 거북해졌다. “할머니가 왜 안 오는지 이상하군요.” 이번에도 그녀가 중얼거렸다. 대화는 끊겼다. 엘렌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천창을 열었다. 아이들의 웃음이 하늘에 높이 뜬 푸른 달 같은 천창으로 들어왔다. 그들을 보고 있는 것은 그 둥근 구멍 말고는 없었고 그들은 사람들의 눈길이 @p 57 닫지 않는 곳에 단 둘이 있었다. 애들이 멀리 사라져 가면서 조용해졌다.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적막이 감돌았다. 아무도 외딴 지붕밑 방에 그들을 찾으러 올 리는 없었지만 그들은 더욱 당황하였다. 엘렌느는 스스로 불안을 느끼며 의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왕진이 밀려 있어요.” 그는 곧 말했다. “할머니가 오지 않으니 가야겠습니다.” 그는 사라졌다. 엘렌느는 앉아 있었다. 페띠 할멈은 곧 수다를 늘어놓으며 돌 아왔다. “아! 기어 올 수가 없었어요. 무력증에 빠져서요... 그래 의사선생님은 떠나셨 나요? 물론 여기는 편하지가 않지요. 나같이 불행한 사람에게 시간을 내시다니 당신들은 하늘의 천사 같은 분들이세요. 그렇지만 하느님게서 모두 갚아 주실 거예요. 오늘은 아픈게 발까지 내려가서 계단에 앉아야 했어요. 당신들이 소리를 내지 않아서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런데 의자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안락의 자만 하나 있어도! 매트리스가 너무 나빠요. 당신들이 오면 부끄럽지요... 이 집 은 당신들 거예요. 필요하다면 나는 무슨 일이라도 하겠어요. 내가 자주 이렇게 기도하는 걸 하느님은 아시지요... 하느님! 이 착한 신사분과 부인이 원하시는 걸 이루게 해주십시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아멘!” 엘렌느는 그 말을 듣고 이상하게 거북함을 느꼈다. 페띠 할멈의 부은 얼굴은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그녀는 이 좁은 방에서 이런 불안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녀는 거기서 불결한 가난을 보았다. 그녀는 공기의 부족과 거기 갇혀 있는 비 참한 타락상들을 보았다. 그녀는 페띠 할멈이 늘어놓은 축원에 오히려 기분이 언짢아져서 서둘러 떠났다. 오 골목에는 또 다른 슬픈 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려가 @p 58 면서 오른쪽으로 골목 중간쯤 벽에는 구덩이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철망으 로 덮어높은 안 쓰는 우물이었다. 이틀 전부터 그 옆을 지나가면서 그녀는 구덩 이 밑에서 고양이 야옹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가 올라가는데 우는 소리가 또 들렸다. 그런데 애처롭게 죽어가면서 내는 소리 같았다. 못 쓰는 우물에 던져 진 불쌍한 고양이가 굶어서 천천히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자 엘렌느 의 가슴은 찢어졌다. 죽어가면서 내는 그 야옹 소리가 무서워 앞으로는 오래도 록 그 계단을 감히 내려오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 엘렌느는 걸음을 재촉 했다. 그 날은 벌써 수요일이었다. 저녁 7시에 엘렌느가 작은 조끼를 완성했을 때, 익숙한 초인종 소리가 짧게 두 번 울렸다. “오늘은 신부님께서 먼저 오셨네요... 아! 랑보 씨도 함께 오셨어요." 로잘리가 말하며 문을 열었다. 저녁식사는 아주 명랑하였고 쟌느는 훨씬 나아졌다. 아이의 응석을 받아 주곤 하는 두 형제는 보댕 의사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샐러드를 먹도록 내버 려 두었다. 그래서, 기가 오른 아이는 사람들이 방으로 갈 때 어머니에게 속삭이 면서 목에 매달렸다. “엄마, 내일 할머니 집에 갈 때 나도 데려가, 응?” 그러나 신부와 랑보 씨가 먼저 아이를 야단쳤다. 아직 아이가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기 때문에 아이를 불쌍한 사람 집에 데려 갈 수 없었다. 지난번에 아이 는 두 번이나 기절을 했고, 사흘 내내 자는 동안에도 부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아니야, 울지 않을께. 약속해.” 아이는 되풀이했다. “소용없단다, 얘야. 할머니는 이제 좋아졌어... 나는 이제 나가지 않아. 너랑 하루종일 있을거야.” @p 59 어머니는 말하면서 아이를 껴안았다. 4 그 다음주에 드베를르 부인은 그랑쟝 부인에게 답례 방문을 했고, 몹시 다정 하고 상냥하게 굴었다. 그녀는 떠나면서 입구에서 말했다. “제게 약속하신 거예요... 날이 좋아지면 쟌느를 데리고 정원에 내려오겠다고 요. 이건 의사의 지시예요.” 엘레느는 웃었다. “네, 네, 알겠어요. 믿으세요.” 사흘 뒤 2월의 맑은 오후, 그녀는 정말 딸을 데리고 내려갔다. 문지기 아주머 니가 통행문을 열어 주었다. 정원 한 구석, 일본식 정자를 개조해 만든 온실 안 에서 그녀는 드베를르 부인과 여동생 뽈린느를 발견하였는데, 작은 탁자 위에 수예감을 놔둔 채 잊어버리고 둘다 손을 놓고 있었다. “아! 정말 상냥하세요!” 쥴리에뜨가 말했다. “자, 이리 앉으세요... 뽈린느, 탁자를 밀어라... 앉아 있으면 아직 좀 추워요. 이 정자 안에 있으면 애들을 잘 볼 수 있답니다... 가서 놀아라, 얘들아, 넘어지 지 않게 조심해.” 정원의 넓은 창구는 열려 있었고, 양 옆으로는 틀 속에서 움직이는 유리를 잡 아당길 수 있었다. 그래서, 천막 입구에서처럼 정원이 활짝 펼쳐져 있었다. 그곳 은 중앙에 잔디가 있고 양 가에 화단이 있는 부르주아식 정원이었다. 비뇌즈 가 와는 창살로만 막혀있었다. 하지만 녹음의 커튼이 하도 짙게 드리워 길 쪽에서 는 시선이 @p 60 뚫고 들어올 수 없었다. 송악, 참으아리, 인동덩굴이 얼크러진 채 창살을 휘감고 있었다. 이파리로 된 첫번째 벽 다음에는 라일락과 양골담초가 자라고 있었다. 겨울철에도 송악의 끈질긴 잎과 얼킨 가지가 시선을 차단시켰다. 그러나 멋있는 것은 안쪽에 있는 아름드리 나무들이었다. 근사한 느릅나무가 5층집의 검은 벽 을 가리고 있었다. 그 나무들은 이웃 건물들 틈바구니에서도 공원의 한 모퉁이 같은 착각을 갖게 했으며 살롱처럼 쓸고 닦은 이 조그만 빠리식 정원을 훨씬 넓 어 보이게 했다. 두 느릅나무 사이에는 습기 때문에 발판이 초록색으로 변한 그네가 매달려 있었다. 엘렌느는 구경을 하면서 자세히 보려고 기웃기웃하였다. “아! 너무 좁은 곳이지요.” 드베를르 부인이 나른하게 말했다. “하지만 빠리에는 나무가 드물어서요... 제 집에 댓 그루라도 있어 다행이지 요.” 엘렌느가 중얼거렸다. “멋있어요.” 그 날은 뿌연 하늘에서 태양이 먼지 같은 붉으레한 금빛을 내고 있었다. 잎이 떨어진 가지 사이로 빛이 천천히 떨어졌다. 나무들은 붉으레했고, 보랏빛 도는 새순이 회색 표면의 색조를 부드럽게 해주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잔디 위의 오 솔길을 따라 자갈과 풀이 명확한 구획을 짓고 있고, 지면에는 가벼운 아지랑이 가 떠올라 흩어졌다. 꽃은 피지 않았으나 대지를 비추는 태양의 명랑함이 봄을 알리고 있었다. “지금은 아직 쓸쓸해요.” 드베를르 부인이 다시 말했다. “6월이 되면 정말 아늑하지요. 나무들은 이웃 사람들이 엿보는 @p 61 걸 막아 주고, 완전히 우리만의 집이 되지요...” 그러다가, 그녀는 말을 멈추고 소리쳤다. “뤼시앵, 분수를 만지지 말아라!” 쟌느에게 정원을 자랑하던 소년은 소녀를 현관 계단 아래 분수 앞으로 데려갔 다. 그는 수도꼭지를 열고 장화 끝이 젖도록 내밀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아주 좋아하는 놀이였다. 쟌느는 아주 심각하게 발이 젖는 것을 보고 있었다. “기다려요.” 뽈린느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내가 저 아이를 얌전하게 만들겠어요.” 쥴리에뜨가 말했다. “아니, 넌 저 아이보다도 철이 없어. 전에는 너희 둘 다 물에 빠진 것을 사람 들이 모두 알지 않니... 다 큰 처녀가 잠시를 가만히 있지 못하니 별나기도 하 지...” 그리고는 몸을 돌리고 말했다. “듣고 있니? 뤼시앵, 당장 수도꼭지를 잠궈!” 어린애는 질겁하여 복종하였다. 그러나 아이는 꼭지를 더 틀었고, 물은 아이가 기겁하리만큼 세게 소리를 내며 뿜어 나왔다. 아이는 어개까지 물을 뒤집어 쓰 고 물러났다. “수도꼭지를 당장 잠궈!” 어머니는 얼굴이 빨개지도록 열이 올라서 되풀이 했다. 뤼시앵이 성난 물줄기 앞에서 두려움에 차서 멈추게 할 방도를 모르는 채 울 먹이고 있는데, 그 때까지 말없이 있던 쟌느는 아주 조심스럽게 분수로 다가갔 다. 소녀는 치마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소매를 적시지 않도록 걷어올리고, 손목 을 뻗어서 물을 튀기지 않고 수도꼭지를 잠궜다. 놀라고 존경심에 사로잡힌 뤼 시앵은 울음이 쑥 들어가서 소녀에게 커다란 눈을 흡떴다. @p 62 “정말 저 애 때문에 이성을 잃는다니까요.” 다시 흰 얼굴빛으로 돌아온 드베를르 부인이 말하며, 피곤으로 지친 듯 몸을 뻗었다. 엘렌느는 한 마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쟌느, 손잡고 산책하면서 놀아라.” 쟌느는 뤼시앵의 손을 잡았다. 두 아이는 진지하게 종종걸음으로 오솔길로 사 라졌다. 소녀가 훨씬 키가 커서 소년의 팔은 공중에 매달렸다. 그러나 잔디 주위 를 격식을 갖추어서 도는 이 점잖은 놀이에 둘 다 정신이 팔린 듯했으며, 저희 들이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쟌느는 진짜 숙녀처럼 초점이 없는 나른한 시선을 하고 있었다. 뤼시앵은 가끔 그의 동반자를 흘끔흘끔 곁눈 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우습지요?” 드베를르 부인이 미소를 띤 채 침착을 되찾고 속삭였다. “쟌느는 정말 예쁜 아이로군요... 얌전하고 영리하고...” “남 앞에 있을 때는 그렇지요.” 엘렌느가 대답했다. “그 애는 끔찍한 경험을 했어요. 하지만 나를 몹시 좋아해서 내가 힘들지 않 도록 말을 잘 들으려고 노력하지요,” 부인들은 아이들 얘기를 했다. 여자애들은 사내애들보다 훨씬 조숙하다. 하지 만 뤼시앵의 어리숙한 표정을 믿으면 안 된다. 1년전만 해도 좀 풀어 놓기만 하 면 장난꾸러기가 되곤 했다. 모르는 새에 화제는 맞은편 작은 집에 사는 여자에 게로 옮아갔다. 그 집에 서는 정말 갖가지 일이 일어나요... 드베를르 부인이 동 생에게 말하기 위해 얘기를 멈췄다. “뽈린느, 잠깐 정원에 가 보겠니.” 처녀는 조용히 나가서 나무 밑에 앉았다. 사람들이 이야기 도중 @p 63 처녀 앞에서 말하기에 너무 거친 화제가 나오게 되면 그녀를 내보내는데 익숙해 있었다. “어제 창문을 내다보고 있는데...” 쥴리에뜨는 말을 이었다. “나는 그 여자가 아주 벗은 모습을 보고 말았아요. 그 여자는 커튼조차 치지 않고 있더군요. 창피한 일이죠! 애들이 볼 수도 있었거든요.” 그녀는 수치스럽다는 표정으로, 하지만 입가에는 옅은 웃음을 띠고 아주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뽈린느! 돌아와도 좋다.” 나무 아래서 뽈린느는 무관심한 표정으로 언니의 얘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쥴리에뜨가 엘렌느에게 얘기를 계속하는 동안, 처녀는 정자 안으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부인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나요?” “아니요, 우리 집 창문은 그 집 쪽으로 나 있지 않아요.” 엘렌느는 대답했다. 처녀는 제가 듣지 못한 부분이 있음에도 이해한다는 듯이 천사같은 흰 얼굴로 듣고 있었다. “어머!” 그녀는 문으로 바깥을 내다보며 말했다. “나무에 신기하게도 새둥지가 있어요!” 한편, 드베를르 부인은 체면치레로 자수를 집어들었지만 1분에 두 바늘쯤 떴 다. 엘렌느도 그냥 있을 수 없어서 다음에는 일감을 가져와도 되겠느냐고 물었 다. 약간 지루해져서 그녀는 몸을 돌려 일본식 정자를 살펴보았다. 벽과 천장은 날아오르는 황새와 나비, 활짝 핀 꽃, 푸른 배가 누런 강 위에 떠있는 경치가 금 실로 짜여진 천이 발라져 있었다. 고운 돗자리로 된 바닥에는 앉은 자리와 쇠상 @p 64 자로 된 화분이 있었고, 칠한 가구, 각색 골동품, 작은 청동상, 작은 도자기, 원색 으로 얼룩덜룩 칠해진 장난감 따위가 쌓여 있었다. 구석에는 다리를 포개고 벌 거벗은 배가 불거져 나온 작센 자기 인형이 있었는데 조금만 밀어도 미친 듯이 머리를 흔들면서 굉장히 좋아하곤 하였다. “그거 정말 못생겼지요?” 엘렌느의 눈길을 좇고 있던 뽈린느가 외쳤다. “봐요, 언니. 언니가 사들이는 것은 모두 싸구려라는 걸 알아요? 말리뇽은 언 니의 일본 취향을‘13수짜리 잡동사니’라고 부르지요... 그런데 내가 그를 만났 을 때 그는 어떤 여자와 같이 있었어요. 그러니가 바리에떼 극장(1. 1807년부터 몽마르뜨 로에 있던 극장으로 통속희극을 상연하였다.)의 플로랑스하고요.“ “어디라구? 약 좀 올려 줘야지!” 쥴리에뜨가 귀가 번쩍 뜨여 물었다. “그러니까 그게 어디냐 하면... 그런데 그가 오늘 오지 않는게 확실해요?” 그러나 그녀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 부인들은 없어진 아이들을 걱정했다. 애들 이 어디 갔을까? 두 어머니가 애들을 불렀을 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대답했다. “우리 여기 있어요.!” 아이들은 정말 잔디밭 한가운데 참빗살 나무에 반쯤 가려서 풀속에 앉아 있었 다. “너희들 뭐하는 거니?” “우리는 여관에 왔어요.!” 뤼시앵이 외쳤다.. “방에서 쉬는 거예요.” @p 65 부인들은 즐거운 표정으로 잠시 애들을 바라보았다. 쟌느는 능숙하게 놀이를 지어내곤 했다. 소녀는 밥을 짓기 위해 주위의 풀을 잘랐다. 여행가방은 나무더 미에서 주워 온 널판지 끄트머리였다. 지금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쟌느는 저 희들이 스위스에 와 있으며 빙하계곡을 보러 갈 거라고 되풀이해서 열을 올렸 고, 뤼시앵은 어리둥절했다. “어머! 그가와요!” 갑자기 뽈린느가 말했다. 드베를르 부인은 고개를 돌려 현관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말리뇽을 보았다. 그가 인사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는 말했다. “친절도 하셔라! 우리 집에 싸구려만 있다고 사방 외치며 돌아다니신다구요! ” “그렇고말고요.” 그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이 작은 살롱은... 확실히 싸구려 투성이에요. 당신은 볼 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그녀는 몹시 언짢아했다. “자기 인형은 어때요?” “그것도요. 모든 게 소시민적이에요... 취향이 있어야지요. 당신은 내게 꾸미 는 걸 맡기려 하지 않았어요.” 그러자, 그녀는 정말 화가 난 듯 얼굴이 빨개지며 말을 끊었다. “그 취향이라는 것에 대해 얘기 좀 해봅시다! 근사해요, 당신의 취향이란! 당 신이 어떤 여자하고 같이 있는 것을 사람들이 봤다더군요...” “어떤 여자요?” 그는 그 무례한 공격에 놀라서 물었다. “훌륭한 선택이에요. 당신에게 찬사를 보내지요. 온 빠리에 얼굴 @p 66 이 팔린 여자를...” 그러나 그녀는 뽈린느를 보자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뽈린느를 잊고 있었다. “뽈린느, 잠깐 정원에 가 있어.” “싫어요. 정말 지겨워요! 사람들은 항상 나를 못살게 굴어요.” 처녀는 대들면서 잘라 말했다. “정원으로 가.” 쥴리에뜨가 좀더 엄하게 되풀이했다. 처녀는 마지못해 가면서 몸을 돌려 덧붙였다. “하지만 서둘러서 끝내 주세요.” 뽈린느가 자리를 피하자 드베를르 부인은 다시 말리뇽에게 덤벼들었다. 말리 뇽처럼 뛰어난 젊은이가 어떻게 플로랑스 같은 여자와 사람들 앞에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그 여자는 적어도 마흔은 먹었으며 끔찍하게 못생겼고, 첫번 공연 서부터 오케스트라 전부와 너 나 하면서 지내지 않는가. “끝났어요?” 뾰로통한 얼굴로 나무 밑을 거닐며 뽈린느가 외쳤다. “심심하다구요.” 그러나 말리뇽은 변명을 하고 있었다. 나는 플로랑스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을 건낸 일조차 없다. 때로 친구 부인을 동반하는 수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내가 어떤 여자하고 같이 있는 것을 보았을 수는 있다. 그렇다면 나를 본 사람이 누구냐? 증거와 증인을 대라. “뽈린느!” 드베를르 부인이 다짜고짜 목청을 높여서 물었다. “너 이 분이 플로랑스하고 있는 것을 보았지?” “그럼요.” @p 67 처녀가 대답하였다. “비뇽 맞은편 길에서요.” 드베를르 부인은 말리뇽의 어색한 웃음 앞에 의기양양해져서 외쳤다. “뽈린느, 돌아와도 된다. 끝났어.” 말리뇽은 폴리 드라마띠끄의 다음날 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드베를르 부인 에게 악감을 품지 않은 양 그것을 점잖게 내밀었다. 두 사람은 늘상 다투곤 했 다. 뽈린느는 지금 상연되는 연극을 보러가도 될지 알고 싶어했다. 말리뇽이 고 개를 흔들며 웃자, 그녀는 작가들이 젊은 처녀들을 위한 희곡을 쓸 수도 있을텐 데 정말 바보라고 말했다. 그녀가 봐도 괜찮은 것은 ‘흰 옷의 부인’과 고전극 뿐이었다. 그동안 부인들은 아이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뤼시앵이 끔찍한 비명을 올렸다. “쟌느, 너 그 애를 어떻게 했니?” 엘렌느가 물었다. “아무 짓 안했어, 엄마. 얘가 땅바닥에 몸을 던졌어.” 일이 어떻게 된 것이냐 하면 아이들은 방금 유명한 빙하계곡으로 길을 떠난 참이었다. 쟌느가 이제 산에 당도했다고 말했기 때문에 아이들은 바위를 넘기 위해 다리를 높이 올렸다. 그러나 뤼시앵은 이 동작으로 몹시 숨이 가빠져 발을 헛딛고 화단 가운데 벌렁 @p 68 자빠지게 되었다. 땅에 자빠지자 소년은 원숭이처럼 화가 나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그 애를 일으켜 줘라.” 엘렌느가 다시 소리쳤다. “일어나려고 하질 않아. 엄마. 뒹글고 있어.” 쟌느는 버릇없이 자란 소년을 보고 화가나고 마음이 상해서 뒷걸음질쳤다. 이 아이는 놀 줄을 몰랐고, 이 아이를 일으키려 하다간 저도 더러워질 게 뻔했다. 소녀는 체면을 깎인 공작부인처럼 토라져 있었다. 뤼시앵의 비명소리 때문에 조 급해진 드베를르 부인은 동생에게 아이를 일으켜 주고 조용히 시키라고 일렀다. 뽈린느는 더이상 묻지 않고 달려가, 아이 옆 당바닥에 몸을 던지고 잠시 같이 뒹굴었다. 아이는 발버둥치며 붙잡히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의 겨 드랑이를 잡고 일어났다. 그리고 아이를 달래려고 말했다. “그쳐, 울보야! 우리 그네 타러 가자.” 뤼시양은 울음을 딱 그쳤고 쟌느는 심각한 표정이 사라지고 강렬한 기쁨으로 얼굴이 밝아졌다. 셋은 그네로 뛰어갔다. 그러나 그네에 앉은 것은 뽈린느였다. “밀어 줘.” 뽈린느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아이들은 그녀를 약간 움직이게 할수 있을 뿐이었다. “밀어!” 그녀는 되풀이했다. “아! 바보들, 밑 줄도 모르는군.” 정자 안에서 드베를르 부인은 가벼운 오한을 느꼈다. 그녀는 밝은 햇빛에도 불구하고 날이 다뜻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말 @p 69 리뇽에게 에스파니아식 옷걸이에 걸려 있는 두건달린 흰 캐시미어 겉옷을 가져 다 달라고 부탁했다. 말리뇽은 그녀의 어깨에 걸칠 겉옷을 가져다 주기 위해 일 어섰다. 두 사람은 엘렌느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하는 화제들을 가지고 친근하 게 이야기했다. 그래서, 엘렌느는 뽈린느가 본의 아니게 아이들을 그네에서 떨어 지게 하지 않나 하는 걱정으로 불안해하며, 두 사람이 유행하는 모자에 대해 이 야기에 열중하도록 놔두고 정원으로 갔다. 쟌느는 어머니를 보자마자, 애원하듯 어리광스런 표정으로 다가왔다. “엄마, 엄마.” 아이는 속삭였다. “안 돼.” 그 뜻을 짐작한 어머니는 대답했다. “너는 그네 타면 안 되는 것을 알지?” 쟌느는 그네뛰기를 아주 좋아하였다. 새가 되는 것 같다고 아이는 말했다. 얼 굴에 스치는 바람과 갑작스런 비상, 날개짓하듯 율동적이고 끊임없는 진동은 구 름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처럼 감미로웠다, 아이는 높이 날아가는 것 같다고 생 각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항상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한 번은 질겁하여 혼 이 나간 눈을 크게 뜨고 기절한 아이가 그네에 매달려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또 한 번은 그네에서 떨어져 새총을 맞은 제비처럼 뻣뻣해져 있기도 했다. “엄마, 조금만 타면 괜찮을 거야, 아주 조그만.” 아이는 계속 졸랐다. 어머니는 시끄럽게 하지 않으려고 아이를 그네 위에 앉혔다. 아이는 기도가 통한 신자처럼 기쁨으로 환해졌고 줄을 잡은 주먹은 기쁨으로 가볍게 떨렸다. 엘렌느가 너무 천천히 밀자 아이는 “더 @p 70 세게, 더 세게.“ 하고 속삭였다. 그러나 엘렌느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줄을 잡고 있었다. 그러 자, 그녀 자신이 신이나서 얼굴은 발그레 해졌고 나무판에 전달되는 미는 힘이 힘차졌다. 평소 지녔던 신중함은 딸과 한덩이가 되어 노느라고 사라져 버렸다. “이젠 됐다.” 그녀는 쟌느의 겨드랑이를 들어올리면서 잘라 말했다. “그러면 엄마가 해봐. 응?” 아이는 목에 매달린 채 말했다. 아이는 어머니가 날아오르는 것을 보려고 안달하였다. 그렇게 말하면서 제가 뛰는 것보다 어머니가 뛰는 것을 더 기뻐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웃으면서 누 가 나를 밀어 주겠니 하고 물었다. 바로 그 때, 랑보 씨가 문지기 아주머니의 인 도를 받아 나타났다. 그는 엘렌느의 집에서 드베를르 부인을 만난 일이 있었다. 그래서, 엘렌느가 집에 없는 것을 발견하자 거기 나타나도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드베를르 부인은 이 점잖은 사람의 고지식한 태도에 마음이 움직여 아주 상냥하 게 맞아 주었다. 그리고는 말리뇽과 나누던 재치 있는 대화로 다시 돌아갔다. “아저씨가 밀어 주면 되지! 우리는 지금 집에 있는 게 아니야.” 쟌느는 어머니의 주위를 팔작팔작 뒤면서 말했다. “입 좀 다물지 못하겠니! 우리는 지금 집에 있는 게 아니야.” 엘렌느는 짐짓 엄격하게 말했다. “저런!” 랑보 씨가 중얼거렸다. “원하신다면 제가 밀어 드리겠습니다. 시골에 있을 때는...” 엘렌느는 갑자기 타고 싶어졌다. 처녀적에는 여러 시간 동안 그 @p 71 네를 뛰었고, 그 아련한 추억이 그녀를 고집스런 욕망으로 채웠다. 잔디가에 뤼 시앵과 앉아 있던 뽈린느가 탁 트인 아가씨답게 거리낌없는 태도로 끼어들었다. “그래요. 신사분이 당신을 밀어 주실 거예요... 그 다음에는 저를 밀어 주실 거구요. 그렇죠, 저도 밀어 주실거죠?” 그래서, 엘렌느는 결심하였다. 뛰어난 미모가 지닌 차가운 단정함 아래 숨어 있는 그녀의 젊음은 매혹적인 순진함을 발산하였다. 그녀는 여학생처럼 단순하 고 명랑해 보였다. 특히 그녀는 숙녀인 듯 얌전을 떨지 않았다. 웃으면서 그녀는 다리를 보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녀는 끈을 달래 가지고 발목 위로 치마를 묶었다. 그리고 그네에 올라가서 팔을 벌려 줄을 잡고 명랑하게 외쳤다. “됐어요, 랑보 씨, 처음에는 살살 미세요.” 랑보 씨는 나뭇가지에 모자를 걸었다. 넓적하고 선량한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줄이 튼튼한지 확인하고 나무를 쳐다 본 다음 살살 밀어 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엘렌느가 상복을 벗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연보랏빛 리본이 달린 회색치마를 입고 있었다. 똑바로 서서 요람에 흔들리는 듯 땅을 쓸면서 그 녀는 천천히 뛰기 시작하였다. “미세요! 미세요!” 그녀가 말했다. 그러자, 랑보 씨는 팔을 내밀어 움직이고 있는 널을 잡고 좀더 세게 밀었다. 엘렌느는 올라갔다. 날아오를 때마다 그녀는 더 공중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박자 는 느렸다. 말없는 아름다운 얼굴에 맑은 눈을 한 그녀는 다소 심각하고 여전히 단정해 보였다. 콧방울만이 바람을 들이마시려는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치마 주 름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지만 틀어올린 머리 한 가닥이 풀어져 흘러내렸다. “미세요! 미세요!” @p 72 힘껏 미는 힘에 그녀는 날려 올라갔다. 그녀는 점점 더 높이 태양을 향해 올 라갔다. 그녀에게서 가벼운 바람이 일어 정원으로 불어갔다. 이제 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얼굴이 발그레해졌으며 눈은 그네가 진동하는 데 따라 별처럼 흘렀 다. 흘러내린 머리다발이 목 위에서 흔들렸다. 치마는 묶고 있는 끈에도 불구하 고 말려 올라가 발목의 흰 살결을 드러나게 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자기 고향인 듯 공중을 날면서, 가슴이 탁 트이고 거침없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미세요! 미세요!” 랑보 씨는 땀에 젖어서,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있는 힘을 다해 밀었다. 비명이 일었다. 엘렌느는 계속 구르고 있었다. “오! 엄마! 오! 엄마!” 쟌느는 환희에 차서 되풀이 했다. 아이는 잔디에 앉아 있었다. 가볍게 이는 바람을 전부 들이마신 듯 가슴을 손 으로 움켜쥐고 어머니를 보고 있었다. 아이는 숨을 죽이고 어깨로 박자를 맞추 며 그네의 긴 진동을 좇았다. 아이가 소리질렀다. “더 세게! 더 세게!” 어머니는 계속 뛰고 있었다. 높이 올라갈 때면 그녀의 발은 나뭇가지를 스쳤 다. “더 세게! 더 세게! 오! 엄마, 더 세게!” 엘렌느가 허공에 있는데 나무가 휘어지면서 센 바람을 맞은 것처럼 우지직했 다. 돌풍 같은 소리를 내면서 펄럭이는 치마폭의 소용돌이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팔을 벌리고 가슴을 내밀고 내려오면서 그녀는 약간 고개를 숙이며 잠깐 굽어보 았다. 그리고 펄쩍 뛰어올랐다. 그녀가 다시 떨어질 때, 피하는 듯 뒤로 제껴진 고개는 의식을 잃고 눈꺼풀을 닫고 있었다. 오르고 내리고 하는 이 즐거움 @p 73 은 그녀에게 현기증을 일으켰다. 높이 올라가면 그녀는 황금빛 먼지처럼 내리비 추고 있는 2월의 태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녀의 밤 빛 머리카락은 호박색 으로 빛났다. 불꽃같이 생긴 연보랏빛 비단 리본이 흰 빛을 띤 옷 주위에 봄이 오고 있었다. 보랏빛 새싹들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옻칠처럼 섬세한 색조를 띠고 있었다. 쟌느는 손을 모았다. 어머니는 금빛 후광을 달고 천국으로 날아 올라가는 성 녀처럼 보였다. 아이는 아직도 “오! 엄마, 오! 엄마...”하고 갈라진 목소리로 종 알거렸다. 그동안 드베를르 부인과 말리뇽도 흥미가 끌려서 나무 아래로 다가왔 다. 말리뇽은 이 부인이 아주 대담하다고 생각했다. 드베를르 부인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어지러울 거예요.” 엘렌느도 그 말을 들었다. 그녀가 나무 사이에서 외쳤기 때문이다. “아! 나는 강한 심장을 갖고 있어요!... 랑보 씨, 미세요. 괜찮아요.” 정말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였다. 그녀는 거기 있는 두 남자는 신경쓰지 않 는 듯했다. 확실히 그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다발은 헝클어지고 치마 를 묶었던 끈은 느슨해져서 치마는 깃발처럼 소리를 내며 펄럭였다. 그녀는 올 라갔다. 그러나 갑자기 그녀가 외쳤다. “됐어요, 랑보 씨, 됐어요.” 드베를르 의사가 현관계단 위에 막 나타난 참이었다. 그는 다가와서 아내를 부드럽게 껴안고 뤼시앵을 들어올려 이마에 키스하였다. 그리고 웃으면서 엘렌 느를 바라보았다. “됐어요, 됐어요.” 엘렌느는 계속 말했다. @p 74 “왜 그러십니까? 제가 방해가 되었습니까?” 그가 물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고 심각해졌다. 그러나 있는 대로 흔들리고 있던 그네는 멈추지 않고 여전히 엘렌느를 높이 올라가게 하면서 규칙적인 진동을 지속하였 다. 의사는 놀라고 매혹되어 찬탄하였다. 그만큼 봄의 태양 속에서 부드럽게 흔 들리고 있는 그녀는 고대 조각의 순수함을 지닌 채 당당하고 크고 강했다. 그러 나 그녀는 흥분한 듯했다. 그녀가 갑자기 그네에서 뛰어내렸다. “저런! 저런!” 모두 소리쳤다. 엘렌느는 둔한 신음소리를 냈다. 그녀는 오솔길의 포석 위에 떨어져서 일어나 지 못했다. “저런! 무모하게도!” 의사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모두 그 주위로 몰려들었다. 랑보 씨는 자신도 몹시 놀랐지만 쟌느가 너무 심 하게 울어 아이를 팔로 감싸 주어야 했다. 한편 의사는 엘렌느에게 급히 물었다. “오른족 다리에 힘을 받았지요? 일어설 수 없어요?” 그러나 그녀가 대답 없이 넋을 잃고 있자 그는 또 물었다. “통증이 있습니까?” “무릎이 지긋이 아파요.” 그녀가 괴로운 듯 말했다. 그러자, 그는 붕대와 약상자를 가져오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그리고 되풀이해 서 말했다. “봐야 해요. 봐야 해요... 별건 아닐테지만.” 그는 포석 위에 무릎을 꿇었다. 엘렌느는 그를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그가 손 을 내밀자 그녀는 애를 써서 몸을 일으키며 발 주위 @p 75 를 치마로 감쌌다. "싫어요. 싫어요.“ 그녀는 속삭였다. “그래도 잘 봐야 합니다...” 그가 말했다. 그녀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리고 낮은 소리로 말을 이었다. “싫어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는 우선 놀라서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목까지 빨개져 있었다. 잠깐 동 안 눈이 마주치고 그들은 서로의 마음 속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자가 당황하여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더 이상 진찰하겠다고 우기지 않고 옆에 서 있었다. 엘렌느는 눈짓으로 랑보 씨를 불렀다. 그녀는 그의 귀에다 대고 말했다. “보댕 선생님을 모셔 와 주세요. 제가 다리를 좀 다쳤다고 말씀 드리고요.” 2분쯤 뒤에 보댕 의사가 오자 그녀는 일어서기 위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였 다. 그리고 노의사와 랑보 씨에게 의지해서 자기 집으로 올라갔다. 쟌느는 흑흑 거리면서 뒤따랐다.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베를르 의사가 동료에게 말했다. “저희를 안심시켜 주십시오.” 정원에서 사람들을 제멋대로 얘기했다. 말리뇽은 여자들이란 정말 이상하다고 소리쳤다. 도대체 그 부인은 왜 뛰어내릴 마음을 먹었을까? 뽈린느는 그 사고로 그네 타는 재미를 보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화가 나서 그렇게 그네를 높이 뛰 는 것은 무모하다고 말했다. 의사는 말이 없었고 걱정스러워 보였다. “심각하지는 않습니다.” @p 76 보댕 의사가 다시 내려오면서 말했다. “그냥 삐었어요. 한 보름은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할걸요.” 그러자, 드베를르 의사는 말리뇽의 어깨를 탁 쳤다. 그는 날이 너무 쌀쌀하다 면서 아내가 집안에 들어가기를 바랐다. 그 자신은 뤼시앵을 안고 키스를 퍼부 으면서 데리고 들어갔다. 방의 두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빠리는 고지대 정상에 지어진 집의 발치에 꺼져 들어간 심연 속에 평평하고 넓게 펼쳐져 있었다. 시계가 10시를 알렸다. 2 월의 아름다운 아침은 봄의 부드러움과 향기를 품고 있었다. 엘렌느는 긴 의자 위에 몸을 뻗고 무릎에는 아직 붕대를 감고 창문 앞에서 독 서를 하고 있었다. 이제 통증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매일 하던 바느질도 하지 않고 일주일 전부터 거기 붙어 있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그녀는 원탁 위에 굴러다니던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는 책을 집어들었다. 그녀는 밤마다 그 책으로 등잔을 가렸는데, 그것은 랑보 씨가 건전 도서로만 채워 준 작은 서가에 서 지난 18개월 동안 그녀가 끄집어 낸 유일한 책이었다. 평소 그녀는 소설이란 거짓되고 유치한 것이라고 여겨왔다. 그 책은 월터 스코트의‘아이반호’로 처 음에는 그녀를 몹시 지루하게 했다. 그런데 이상한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그 녀는 지루했지만 때로 감동하면서 그 책을 다 읽었다. 그리고 손에서 책이 흘러 내리는 것도 모르고 몇 분 동안 광활한 지평선에 눈길을 주었다. 그 날 아침, 빠리는 깨어나면서 미소짓듯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다. 세느 강 계 곡을 따라 올라온 수증기에 양 안이 잠겨 있었다. 점 @p 77 점 커지는 태양이 우윳빛 엷은 김을 비추고 있었다. 계절의 빛깔인 듯 둥둥 떠 다니는 모슬린에 감싸인 도시에서는 아무것도 분별되지 않았다. 저지대는 두꺼 운 구름이 푸르스름한 색조로 짙게 드리워져 있는 반면, 평지는 아주 고운 금빛 먼지 같은 투명함에 싸여 있어서 길이 뻗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고지대에 는 성당의 돔과 첨탑이 안개 속에 구멍을 뚫고 너덜너덜한 구름으로 싸인 잿빛 실루엣을 드러내며 하늘을 찢어 놓고 있었다. 때때로 연깃자락이 거대한 새의 무거운 날개처럼 날아 올라와 공기 속으로 삼켜지듯 흩어졌다. 빠리 위에 내려 와 잠들고 있는 거대한 운무 너머로 거의 흰색에 가까운 바랜 듯한 푸른색 맑은 하늘이 깊은 궁륭처럼 펼쳐졌다. 태양이 부드러운 빛의 먼지 속에서 떠올랐다. 어린아이의 연한 금빛 머리카락 같은 빛이 산산이 부서져 허공을 온통 따스하게 반짝이게 했다. 그것은 축제이며 지고한 평화, 무한히 부드러운 기쁨이었으며, 그동안 도시는 나른하고 졸리운 듯한 금빛 화살 투성이가 되어 아른거리는 레이 스 아래 가리워져 있었다. 엘렌느는 일주일 동안 눈앞에 펼쳐지는 거대한 빠리를 보며 심심파적했다. 그 녀는 전혀 싫증이 나지 않았다. 그것은 대양처럼 깊이를 알 수 없고 변화무쌍하 였으며 아침에는 말쑥하고 저녁에는 타오르는 듯하였으며 하늘빛에 따라 슬프기 도 하고 명랑하기도 하였다. 햇빛은 그곳에 황금 물결을 흐르게 했고, 구름은 그 곳을 어둡게 하면서 돌풍을 일게 했다. 그것은 항상 새롭게 변했다. 오렌지 빛의 고요한 접시이기도 하다가 시시각각 납빛이 번져 가는 바람이기도 했으며, 맑고 생기 있는 날씨가 지붕마루마다 빛나기도 하고 소나기가 지평선을 마구잡이 혼 돈 속에 사라지게 하면서 하늘과 땅을 잠기게 하기도 했다. 엘렌느는 거기서 향 수와 넓은 세상에 대한 희망을 맛보았다. 그녀는 얼굴에 숨결이 훅 끼치기도 하 고 쓴 냄새가 와 닿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도시의 끝없는 소음에서 @p 78 그녀는 벼랑의 바위를 때리는 밀물의 환상을 보지 않았을까? 책이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그녀는 초점을 잃고 몽상에 잠겨 있었다. 그 렇게 책을 놓치는 것은 읽기를 계속하기보다 이해하거나 기다릴 필요가 있어서 였다. 그녀는 호기심을 당장 충족시키지 않는 데서 기쁨을 찾았다. 이야기는 그 녀를 질식시킬 듯한 감동으로 부풀게 했다. 그 날 아침, 마침 빠리는 그녀의 마 음속에 있는 것과 같은 기쁨과 막연한 흔들림을 지니고 있었다. 모르는 것에서 어렴풋한 짐작으로, 그리고 젊음을 다시 시작하는 듯한 막연한 기분으로 천천히 알게 되는 것은 큰 매력이었다. 소설들은 얼마나 거짓투성이인가! 소설을 읽지 않은 것은 현명한 일이었다. 그 것은 삶에 대해 정확한 느낌을 가져 본 일이 없는 텅 빈 머리를 위해 지어 낸 달콤한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매혹되었고, 아름다운 유태인 레베카와 귀 족 로웨나, 이 두 여인이 그렇게도 열렬히 사랑했던 기사 아이반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라면 로위나의 참을성 있는 고요함과 성실함으로 사랑했을 것 같았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그녀가 하지 않았는데도 그녀의 내부에서 울리 는 그 말은 그녀를 놀라게 하고 미소짓게 하였다. 멀리에서는 뿌연 솜털 구름이 미풍에 날려 백조떼처럼 빠리 위를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 넓은 안개의 장막이 걷혔다. 그러자 좌안이 꿈 속에 보이는 요정의 마을처럼 흔들거리며 베일을 쓰 고 나타났다. 그러나 거대한 수증기가 몰려와 그 마을은 넘쳐 흐르는 수증기에 집어삼켜졌다. 이제는 모든 지역에 골고루 퍼진 수증기가 잔잔한 흰 물이 담긴 아름다운 호수를 이루고 있었다. 좀더 진한 한 줄기 흐름이 잿빛 곡선을 그리며 세느 강 줄기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렇게도 고요한 흰 물 위로 천천히 지나 가는 그림자들은 처녀시절에 꿈꾸는 듯한 시선으로 좇곤 했던 장밋빛 돛을 단 배들로 보였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그녀는 둥둥 떠다니는 꿈을 꾸면서 미소 @p 79 지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책을 다시 집어들었다. 그녀는 성을 공격하는 장면에 와 있 었다. 레베카는 상처를 입은 아이반호를 보살피고 창문으로 지켜본 전투상황을 그에게 알려준다. 그녀는 멋진 거짓말 속에 있음을 느꼈고 황금 과실이 열리는 낙원에 있는 듯이 그곳을 거닐며 온갖 환상을 들이마셨다. 그 장면의 끝에 이르 러 베일로 몸을 감은 레베카가 잠든 기사 옆에서 상냥하게 지켜보고 있을 때 엘 렌느는 다시 책을 떨어뜨렸다. 가슴이 감동으로 부풀어 올라 계속 읽을 수가 없 었다. 세상에! 이런 모든 것이 사실일까? 의사가 시킨 대로 움직이지 않고 마비된 것처럼 긴 의자 위에 벌렁 누워, 그녀는 붉그레한 금빛 태양 아래 신비스럽게 잠겨 있는 빠리를 굽어보았다. 소설에서 읽은 몇 페이지로 인해 자신의 삶이 고 개를 들고 일어섰다. 그녀는 처녀 때 마르세이유에서 무레라는 모자점을 하던 친정에서 살았다. 쁘띠뜨 마리 가는 침침했고, 모자 만드는 데 쓰는 펄펄 끓는 물통이 있던 집은 날씨가 좋은 날에도 습기로 가득 찬 밋밋한 냄새를 내뿜었다. 또 병치레만 하던 어머니가 창백한 입굴로 말없이 자기에게 키스해 주던 것도 떠올랐다. 어린 시절, 그녀는 방에서 햇빛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 주위 사람들 은 모두 일을 많이 하였고, 뼈빠지게 일하는 것을 당연한 걸로 알았다. 그게 전 부였다. 결혼할 때까지 아무 일도 끼어들지 않고 그런 날들이 계속되었다. 어느 날 아침, 어머니와 함께 시장에서 돌아오다가 그녀는 채소가 가득 담긴 바구니 를 그량쟝 아들과 부딪혔다. 샤를르는 가던 길을 돌아서서 두 사람을 따라왔다. 그녀의 사랑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석 달 동안 그녀는 용기가 없고 서툴 러 감히 다가오지 못하는 그를 끓임없이 만났다. 그녀는 열여섯이었고, 이 숭배 자를 부잣집 아들로 여기고 다소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그녀는 못생긴 그를 비웃 @p 80 으며, 축축한 큰집의 어두움 속에서 태평스러운 밤들을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결혼하였다. 그 결혼은 아직도 그녀에게는 놀라운 것이었다. 샤를르는 그녀를 몹 시 사랑해서 저녁마다 그녀가 잠자리에 들면 맨발에 키스하기 위해 무릎을 꿇곤 했다. 그녀는 그를 어린애 같다고 야단치면서 애정어린 미소를 짓곤 했다. 그리 고 회색빛 삶이 또 시작되었다. 12년동안 그녀는 풍파라곤 모르고 지냈다. 그녀 는 가난한 살림을 꾸리느라고 매일매일 사소한 근심에 싸여서 육체적으로나 정 신적으로나 들뜨는 일 없이 아주 조용하고 행복하였다. 그녀는 샤를르에게 관대 한 어머니 같았고, 샤를르는 항상 대리석 같은 아내의 발에 키스하였다. 그 이상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갑자기 바르호텔의 방과 죽어 누운 남편과 의 자에 걸린 상복을 보았다. 그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어느 겨울날처럼 울었었다. 그 다음에 또 여러 날이 지나갔다. 두 달 전부터 그녀는 딸과 함께 다시금 아주 행복하고 고요해진 것을 느꼈다. 맙소사! 그게 전부란 말인가? 그러면 이 책이 온 존재를 환히 밝혀 주는 지고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 도대체 뭐란 말인 가? 지평선에 잠든 듯한 호수 위에는 순간 길다란 균열이 생겼다, 문득 호수는 갈 라진 것처럼 보였다, 틈새가 생기고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혼란을 예고하는 와지 끈 소리가 났다. 더 높이 뜬 태양은 승리의 영광처럼 빛을 내뿜으며 의기양양하 게 안개를 공격하였다. 보이지 않는 수문이 수조를 비우듯 조금씩 큰 호수를 말 라 들어갔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짙었던 수증기는 엷어져 무지개처럼 발랄한 빛을 띠며 투명해졌다. 부드러운 푸른 빛이였던 좌안 전체는 천천히 짙어져, 식 물원 쪽 구석은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우안의 뛸르리 궁 쪽은 살색 천 같은 창 백한 장미빛이였고, 몽마르트르 쪽으로 가면서 금빛에 둘러싸여 타오르는 진홍 색 잉걸불빛이 되었다. 한편, 저멀리 공장지대는 벽돌색으로 어둠침침해지면서 불꽃이 @p 81 점점 꺼져 가듯 판암의 푸르스름한 회색으로 변했다. 아직도 떨리는 듯 달아나 는 도시는 맑은 물을 통해 들여다보이는 바다 밑바닥처럼 분별되지 않았다. 거 기에는 키 큰 풀이 무성한 무시무시한 숲이 있고 끔찍스러운 것들이 우글거리며 괴물들이 언뜻 보였다. 그 동안 물은 계속 줄어 갔다. 이제는 펼쳐진 얇은 모슬 린 천조각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천조각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빠리의 모 습이 분명해지면서 꿈은 깨었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안개가 물러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동안 그 말이 왜 그 렇게 부드럽게 다가온 것일까? 어린애처럼 보살펴 주었던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 던 것일까? 가슴을 찌르는 기억이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가 돌아간지 3주 만에 그녀의 옷이 아직 걸려 있는 옷장 안에서 목매단 채 발견된 아버지의 기억이. 늘 사랑했던 여인의 체취를 미미하게 발산하고 있는 옷에 싸여서, 아버지는 치 마 하나에 얼굴을 묻고 뻣뻣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몽상은 훌쩍 뛰어넘 었다. 그녀는 그 날 아침, 로잘리로 인해 중단한 그 달치 가계와 속주머니 사정 을 생각해 보았다. 자신의 규모있는 살림에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녀는 30년 이 상 꿋꿋하게 품위를 지키면서 살아왔다. 고지식한 것만이 그녀의 마음에 들었다. 과거를 돌아볼 때 한순간이라도 약했던 적은 없었다. 그녀는 똑바르고 평탄한 길을 변함없는 걸음으로 걸어왔다. 틀림없이 세월은 또 흐를 것이고 그녀의 발은 장애물에 부딪히지 않고 고요한 걸음을 계속할 것이었다. 그러한 생각은 영웅숭배로 마음이 들뜬 거짓된 존재들에게 분노와 경멸을 느끼게 했으며, 그녀 를 엄격하게 만들었다. 유일한 진짜 삶은 넓은 평화 한가운데를 흘러가는 자신 의 삶이었다. 빠리 위에는 곧 날려 올라갈 듯 하늘하늘한 망사 같은 가느다란 한줄기 연기밖엔 없었다. 불현듯 마음이 누그러졌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모든 것, 정숙함에 대한 자부심까지도 애무하는 듯한 그 말 @p 82 로 그녀를 이끌어갔다. 몽상은 아주 엷어지고 그녀는 젖은 눈을 하고 봄에 물든 채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빠리가 천천히 드러날 무렵, 엘렌느는 책을 다시 들 참이었다. 망령을 불러 내 려는 것처럼 바람 한 줄기 불지 않았다. 마지막 망사가 벗겨져 날아올라가 공중 으로 흩어졌다. 엘렌느는 그 거대한 기지개를 보면서 손으로 턱을 고였다. 끝간 데 없는 계곡에 건물들이 겹쳐 있었다. 아늑한 능선 위에는 첩첩이 겹쳐 진 지붕들이 드러나 보였으며, 굴곡진 대지 저편, 보이지 않는 교외까지 멀리 집 들의 물결이 펼쳐져 있음이 느껴졌다. 그것은 무한한 미지의 파도를 숨긴 바다 였다. 빠리는 하늘만큼 넓게 펼쳐져 있었다. 눈부신 아침 햇살을 받고 노랗게 물 든 도시는 익은 보리밭 같았다. 거대한 화폭은 단순해서, 하늘의 창백한 푸른색 과 지붕의 황금빛 두 가지 색조뿐이었다. 출렁거리는 봄빛은 사물에 어린애 같 은 부드러움을 주었다. 아주 사소한 것까지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빛 은 투명하였다. 정신없이 돌로 뒤엉킨 빠리는 수정처럼 빛났다. 꼼짝 않고 반짝 거리는 이 고요함 속으로 가끔 숨결이 스쳐갔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불꽃을 통 해 본 것처럼 부드럽고 떨리는 선을 이룬 동네들이 보였다. 엘렌느는 우선 트로까네로 언덕을 따라 강가까지 창문 아래 펼쳐진 넓은 곳 에 흥미를 느꼈다. 사관학교의 칙칙한 건물 안쪽 구석에 갇혀 있는 벌거벗은 네 모인 샹 드 마르스를 보려고 고개를 빼야 했다. 아래쪽 세느 강 양 안의 보도와 광장을 지나는 행인들은 벌레처럼 꼬물거리며 움직이는 수많은 검은 점으로 보 였다. 노란 합승마차의 몸체가 빛을 발했다. 화물마차와 삯마차가 기계 장치를 닮은 섬세한 말들을 달고 애들 장난감만한 크기로 다리를 건너갔다. 잔디가 덮 인 비탈을 따라 걷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흰 앞치마 @p 83 를 두른 한 하녀는 빛나는 풀처럼 보였다. 엘렌느는 눈을 들었다. 군중들은 가루 가 되어 보이지 않게 되고, 지붕들은 모래 알갱이만 하게 되었다. 버려지고 빈 것처럼 도시는 거대한 뼈대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오직 그것을 울리는 둔한 진 동만이 살아 있다는 표시였다. 거기서 맨 앞 왼족으로는 붉은 지붕들이 빛나고 있었고, 마뉘떵따시옹(5. 현재 도쿄 가인 드비이 나루에 있는 군수품 창고의 옛 이름.)의 높은 굴뚝은 천천히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강 맞은편을 차지하고 있었 는데, 빈 가지와 벌써 뾰족한 푸른 순이 돋아나기 시작한 둥그런 꼭대기가 분명 하게 보였다. 중앙에서 세느 강은 넓어지면서 회색 제방으로 둘러싸여 당당하게 흐르고, 하역된 통들과 기중기의 윤곽, 줄지어 선 무개화차들로 항구 같은 분위 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엘렌느는 먹물 빛 새를 닮은 작은 배들이 지나가는 빛나 는 수면으로 눈길을 돌리곤 했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긴 시선으로 그 당당한 흐름을 거슬러 올라오곤 했다. 그것은 빠리를 두개로 나누는 은으로 된 리본 같 았다. 그 날 아침, 물은 태양에서 흘러나오는 듯하였고, 수평선은 더 선명한 빛 을 띠지는 않았다. 젊은 여인의 눈길은 먼저 앵발리드 교에 머물렀다가 꽁꼬르 드 교로, 르와이얄 교로 옮겨 갔다. 다리들은 계속 이어지고 서로 가까워지다가 포개져서 여러 모양의 난간을 가진 대여섯 층짜리 육교처럼 되었다. 이 덧없는 건축물 사이로 강이 푸른 옷자락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더 들었다. 저편 강흐름은 집들이 뒤죽박죽 흩어져 있는 속으로 갈라져 들어갔다. 시떼 섬 양쪽 의 다리는 이편 강안에서 저 편 강안으로 드리워진 실 같았다. 황금빛으로 완전 히 물든 노트르 담 사원의 탑이 지평선의 표지처럼 솟아 있었고, 그 너머로 강 과 건물, 거대한 나무둥치들은 빛나는 먼지일 따름이었다. @p 84 그녀는 눈이 부셔서 이 의기양양한 빠리 중심부를 떠났다. 도시의 모든 영광이 활활 타오르는 듯하였다. 우안쪽 샹 젤리제 수림에는 산업박물관(6. 세트 강과 샹 젤리제 사이의 현재 쁘띠 빨레 자리. 1855년의 만국 박람회를 위해 건설되었 다.)의 커다란 유리들이 눈처럼 희게 펼쳐졌다. 더 멀리 묘석을 닮은 마들렌느의 허물어진 지붕 뒤로는 거대한 오페라(7. 제2제정기를 대표하는 기념비적 건물. 샤를르 가르니에의 설계로 1862년에서 1875년까지 건축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소설이 펼쳐지는 제2제정 초기에는 아직 이 건물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 이다. 졸라는 원래 잡지에 연재되었던 이 소설을 단행본으로 출판하면서, 이 착 오가 자신의 잘못이라고 서문에서 해명하였다.)건물이 솟아 있었다. 그리고 다른 건축물들, 둥근 지붕들, 탑이 있었다. 방돔 기둥, 생 뱅상 드 뽈, 생 자끄 탑이 있 고 훨씬 가까이에는 마로니에 숲에 반쯤 가려진 뛸르리 궁과 루브르 신관(8. 루 브르를 완성한 이는 나뽈레옹 3세이다. 그는 1852년 이 공사를 위해 2천 5백만 프랑의 예산을 통과시켰다. 뛸르리 궁은 왕가가 살던 곳이었는데 1871년 꼬뮌 때 소실되었다.)의 육중한 사가 건물이 있었다. 좌안에는 앵발리드의 돔이 금박 을 철철 흘리고 있었고, 그 너머로는 생 쉴삐스의 짝짝이 두 탑이 빛을 받아 뿌 옇게 되어 있었다. 더 앞 오른쪽에는 생뜨 끌로띨드의 새 뾰족탑이 있고, 언덕위 에는 확고하게 자리잡은 푸르스름한 빵떼옹이 도시를 압도하고 있었다. 가느다 란 기둥들은 드넓은 하늘에 펼치고, 비끄러맨 풍선처럼 비단결을 하고 허공에서 꼼짝 않고 있었다. 이제 엘렌느는 게으르게 스쳐 지나가는 눈길로 빠리를 전부 흩어 보았다. 지 붕들이 펼쳐진 모양을 보건대 계곡은 움푹 하였다. 물랭 언덕은 낡은 판암들로 들끓는 듯한 물결을 이루며 높아지고, 대대로의 선은 시내처럼 급히 흘러내리면 서 기왓장조차 보이지 않는 올망졸망한 집들을 집어삼켰다. 아침 이맘때면 비스 듬히 떠오른 @p 85 해는 트로까데로를 향해 모두 돌아앉아 있는 집들의 정면에는 전혀 들지 않았 다. 창문은 하나도 빛나지 않았다. 지붕 위에 있는 유리창들만이 붉게 구워진 기 왓장 틈새에서 날카롭게 반짝거리는 운모의 빛을 던지고 있었다. 집들은 회색이 긴 했으나 반사된 빛으로 데워진 회색이었다. 그러나 빛은 동네에 파고들어, 엘 렌느 앞에 똑바로 뻗어 있는 긴 거리들은 그늘에 햇살로 금을 그어 놓은 듯 하 였다. 오직 왼쪽에 있는 몽마르트르 언덕과 뻬르 라셰즈 고지대만 갈라진 틈이 없이 둥글고 밋밋한 넓은 지평선이 불룩 솟아 있었다. 맨 앞쪽에 그렇게 선명하 게 보였던 세세한 부분들, 톱니 모양의 셀수 없는 굴뚝과 작은 바둑판 무늬를 이루던 수천 개의 창문은 사라져 버리고 노랑과 파랑으로 뒤섞여 끝없는 도시의 뒤죽박죽 속에 혼합되어 버렸다. 시선이 닿지 않는 변두리는 떨리면서 퍼져가는 해맑은 하늘 아래, 보랏빛 안개에 잠긴 조약돌 해변이 펼쳐진 듯하였다. 쟌느가 명랑하게 들어왔을 때, 엘렌느는 몹시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엄마, 그런데!” 아이는 커다란 노란 꽃무 다발을 들고 있었다. 아이는 웃으면서 뭘 사오나 로 잘리가 시장에서 돌아오는 길목을 지켰노라고 이야기 했다. 바구니를 들쑤시는 것은 아이들의 즐거움이었다. “이것 봐, 엄마! 밑에 이게 있었어... 냄새 좀 맡아 봐. 아! 좋은 냄새.” 자줏빛 무늬로 얼룩진 야생화에서 풍기는 찌르는 듯한 냄새가 방안을 가득 채 웠다. 엘렌느는 격렬하게 쟌느를 품에 안았고 꽃무 다발은 무릎에 떨어졌다. 사 랑해요! 사랑해요! 그렇다, 그녀는 아이를 사랑하였다. 이제까지 나의 삶을 채워 온 이 커다란 사랑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부드럽고 고요하고, 어떠한 권태도 스 며들 수 없 @p 86 는 그 영원한 사랑으로 그녀는 충분하였다. 그녀를 딸과 갈라 놓으려는 위협적 인 생각을 물리치려는 것처럼 그녀는 아이를 더욱 꼭 껴안았다. 한편 딸아이는 난데없는 키스의 횡재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아이는 젖은 눈으로 가는 목을 어 리광부리듯 어머니의 어깨에 비볐다. 그리고 어머니의 허리에 팔을 감고 가슴에 볼을 대고 아주 얌전하게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꽃무가 향기를 뿜고 있었다. 오랫동안 두 사람은 말하지 않았다. 드디어 쟌느가 움직이지 않은 채 낮은 목 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기 강 쪽에 아주 빨갛고 둥근 지붕이 보이지... 그런데 그게 뭐야?” 그것은 연구소의 돔이었다. 엘렌느는 잠시 바라보며 생각하는 듯 했다. 그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모르겠구나, 얘야.” 소녀는 대답에 만족했고 다시 침묵이 깔렸다. 그러나 아이는 곧 다른 질문을 했다. “저기, 아주 가까이 저 예쁜 숲은?” 아이는 손가락으로 뛸르리 공원 한 켠을 가리키며 또 물었다. “저 아름다운 숲 말이냐?” 어머니가 속삭였다. “저 왼쪽에 말이지?... 모르겠구나, 얘야.” “아!” 쟌느가 말했다. 그리고 잠시 몽상에 잠긴 후, 아이는 시무룩하게 덧붙였다. “우리는 아무것도 몰라!” 정말 두 사람은 빠리에 대해 전혀 몰랐다. 18개월 전부터 그들은 언제나 눈 아래 빠리를 보고 있었지만 돌 한 조각 아는 바가 없었 @p 87 다. 딱 세번 그들은 시내에 내려갔을 뿐이었다. 그러나 각 구역들이 엄청나게 뒤 죽박죽 섞여 있어서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하고, 소란 때문에 머리가 아파져서 다시 집으로 올라와 버렸다. 그렇지만 쟌느는 가끔 고집을 피웠다. “아! 엄마, 말해줘!” 아이는 물었다. “저 새하얀 유리로 된 것은 뭐야?... 저것은 너무 커. 엄마는 알아야지.” 아이는 산업박물관을 가리켰다. 엘렌느는 망설였다. “그건 역인가?... 아니야, 극장인가 봐.” 그녀는 웃었다. 그녀는 늘 하는 대답을 되풀이하면서 쟌느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모르겠구나, 얘야.” 그들은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은 채 빠리를 바라보았다. 빠리가 거기 있으며 그것을 모른다는 사실은 아주 달콤하였다. 그것은 무한과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었다. 그들은 한없는 볼거리가 있는 세계의 문턱에서, 내려가기를 거부하면서 멈춰 서 있는 것 같았다. 때때로 빠리는 뜨겁고 흥분한 듯한 숨결을 끼쳐서 그 들을 불안하게 했다. 그러나 그 날 아침, 빠리는 명랑하고 어린애같이 순진하였 으며, 그 신비함은 얼굴을 애무하듯 간질러 줄 따름이었다. 쟌느는 붙어 앉아 어머니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고 엘렌느는 책을 다시 들었 다. 빛나고 고요한 하늘에는 미풍조차 일지 않았다. 마니떵따시옹의 연기는 똑바 로 하늘로 올라가, 아주 높은 데서 가벼운 솜털처럼 흩어졌다. 잔물결이 집에 닿 을락 말락, 거기 갇혀 있는 모든 모든 인생들이 만들어 낸 삶의 울림처럼 도시 위를 쓸고 지나갔다. 거리의 높은 목소리는 햇빛 속에서 행복한 유순함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시끄러운 소리가 쟌느의 주의를 끌었다. 그것은 이웃 @p 88 비둘기 집을 빠져 나온 흰 비둘기들의 날갯짓 소리였다. 비둘기들은 창문 맞은 편에서 공중을 날고 있었다. 새들은 지평선을 가득 메우고 그 날개는 날아다니 는 눈처럼 넓은 빠리를 가렸다. 다시 초점을 잃은 눈을 들고, 엘렌느는 깊은 몽상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레이 디 로웨나였다. 그녀는 고귀한 사람답게 깊이 있고 평화롭게 사랑하였다. 이 봄 의 아침과 그렇게도 온화한 큰 도시, 무릎위에서 향기를 뿜고 있는 새로 핀 꽃 무는 그녀의 마음을 조금씩 조금씩 녹아들게 했다. @p 89 제 2 부 1 어느 날 아침, 쟌느가 손뼉을 치며 팔짝팔짝 뛰어들어왔을 때, 엘렌느는 며칠 동안 흩어놓은 책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엄마, 군인이야! 군인!” 아이는 외쳤다. “뭐? 군인?” 젊은 여인은 말했다. “군인이라니 무슨 소리야?” 그러나 아이는 좋아서 지나치게 흥분해 있었다. 아이는 더욱 팔짝팔짝 뛰며 더 이상 설명은 하지 않고 “군인이라니까! 군인”하고 되풀이했다. 방문을 열어 놓은 채 놔두었기 때문에 엘렌느는 일어섰다. 그리고 현관에 키 작은 군인이 한 사람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몹시 놀랐다. 로잘리는 외출중이었다. 어머니가 그러 지 말라고 일렀는데도 쟌느는 층계에서 놀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여보세요, 무슨일이지요?” 엘렌느가 물었다. 키작은 군인은 레이스가 달린 실내복 차림을 한 매우 아름답고 피부가 흰 부 인의 출현에 몹시 당황해서 발로 바닥을 문지르며 인 @p 90 사를 하고는 서둘러 더듬더듬 말했다. “실례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다른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여전히 발을 끌면서 벽까지 물러났다. 그 러나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데다가 그 부인이 저도 모르게 미소를 띠고 기다 리고 있는 것을 보자, 그는 재빨리 오른쪽 주머니를 뒤져 거기서 푸른 손수건과 나이프, 빵조각을 끄집어 내었다. 그는 물건들을 각각 살피고는 다시 집어 넣어 버렸다. 그리고 왼쪽 주머니로 옮겨 갔다. 거기에는 끈쪼가리, 녹슨 못 두개, 반 쪽짜리 신문으로 싼 그림들이 들어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모두 쑤셔넣고 근심 스런 낯으로 제 다리를 쳤다. 그리고 어쩔줄 모르며 더듬거렸다. “죄송합니다... 용서하세요...” 그러다가, 갑자기 사람좋은 웃음을 터뜨리며 코에 손가락을 얹었다. 멍청이! 그는 기억을 해냈다. 그는 외투 단추를 두 개 끄르고 팔꿈치까지 손을 넣어 가 슴을 뒤졌다. 드디어 그는 편지 한 통을 꺼냈고 엘렌느에게 건네기 전에 먼지를 털려는 듯 마구 흔들었다. “나한테 온 편지가 확실해요?” 그녀가 말했다. 봉투에는 새로획이 마분지로 만든 수도사처럼 기우뚱한 시골 사람의 서툰 글 씨체로 그녀의 이름과 주소가 씌어 있었다. 이상한 표현과 철자법에 더듬거리며 읽기를 마치자, 그녀는 다시 웃음이 떠올랐다. 그것은 로잘리의 아주머니가 쓴 편지로, ‘신부님이 두번이나 미사를 드렸는데도 불구하고’ 군대에 가게 된 제 피랭 라꾸르를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아주머니는 제피랭이 로잘리의 애인이므로 두 젊은이를 일요일날 서로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부탁을 같은 말로 되풀이한 것이 석 장이나 되었는데,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하려고 줄곧 애쓰다가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어 있 @p 91 었다. 그리고 편지를 맺으려고 할 때, 문득 그말을 생각해 낸 것 같았다. 아주머 니는 잉크의 얼룩이 번지도록 펜을 꾹꾹 눌러서 ‘신부님께서도 좋다고 하셨습 니다’라고 썼다. 엘렌느는 천천히 편지를 접었다. 그녀는 속 뜻을 풀어 보려고 하면서 군인을 쳐다보기 위해 두세번 고개를 들었다. 그는 여전히 벽에 붙어 서 있었는데 입술 이 달싹거렸다. 그는 가볍게 턱을 움직이면서 편지의 문장을 따라 읽는 듯하였 다. 그는 분명 편지를 외우고 있었다. “그러면 댁이 제피랭 라꾸르세요?” 부인이 말했다. 그는 웃기 시작했고 고개를 흔들었다. “거기 있지 말고 들어와, 이 친구야.” 엘렌느가 자리에 앉을 때 제피랭은 따라 들어오려 했지만 그냥 문 옆에 선 채 로 있었다. 현관이 어두워서 그녀는 그를 잘 보지 못했다. 그는 딱 로잘리 키만 했다. 어쩌면 1센티쯤 작은 지도 몰랐다. 그도 군인이었다. 짧게 깍은 적갈색 머 리에 수염은 한 오라기 없고, 동그란 얼굴은 주근깨로 덮여 있고 송곳 구멍처럼 작은 두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너무 큰 새 외투는 그를 더 살쪄 보이게 했다. 그는 붉은 바지에 싸인 양 다리를 벌리고, 넓은 챙이 달린 모자를 앞에 흔들면 서 있었는데, 어리둥절해서 작은 몸을 둥글게 움츠리고 군복 아래 땀냄새를 풍 기면서 있는 모습은 우스꽝스럽고 측은한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엘렌느는 몇 가지 알아보려고 그에게 질문을 하였다. “일주일 전에 보스를 떠났나요?” “그렇습니다, 부인.” “빠리에 온 후로 곤란한 점은 없나요?” “아닙니다, 부인.” @p 92 그는 대담해져서 푸른 벨벳 벽지에 인상을 받은 듯 방안을 둘러보았다. “로잘리는 지금 없어요.” 엘렌느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곧 돌아올 거예요... 아주머니는 댁이 로잘리와 교제중이라고 하셨더 군요.” 작은 군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어색한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발 끝으로 양탄자를 긁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제대하고 결혼해야 겠네요.” 젊은 여인은 계속했다. “물론입니다.” 그는 몹시 빨개지며 말했다. “맹세코... 확실합니다.” 그는 부인의 친절한 표정에 힘을 얻어, 손가락 사이로 모자를 돌리며 말하기 로 작정했다. “좋은 날씨예요... 꼬마일 때 우리는 같이 밭서리를 갔습니다. 그래서 회초리 로 한바탕 얻어맞았지요. 정말입니다... 라꾸르 집안과 삐숑 집안은 나란히 살아 왔다고 말할 수 있지요. 로잘리와 저는 거의 한솥밥을 먹으며 자랐어요... 그런데 로잘리네 식구들은 다 죽었어요. 마르그리뜨 아주머니가 그 애를 먹여 살렸지요. 그런데 그앤 정말 말괄량이이예요. 벌써 기막힌 팔뚝을 가졌지요.” 그는 흥분한 것 같다고 느끼며 말을 멈췄다. 그리고 주저하는 목소리로 물었 다. “아마 그 애가 다 얘기했을 테지요?” “네, 하지만 계속 얘기하세요.” 엘레느는 재미있어 하며 대답했다. “드디어...” @p 93 그는 말을 이었다. “그 애는 종달새보다 더 살이 찌진 않았지만 아주 튼튼해졌어요. 그애는 팔 을 겉어붙이고 일을 했습니다. 그걸 보셨어야 하는건데! 하루는 그 애가 저도 아 는 어떤 사람을 한방 먹였지요. 그래요, 한방 먹였어요. 제가 알기론 시커먼 멍 이 일주일은 갔어요. 그 정도지요. 고향에서는 모두 우리가 결혼할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러기로 한 건 10여년이 안 되었어요... 이상입니다. 부인, 이상입니다...” 그는 손가락을 편 손을 가슴위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엘렌느는 심각해졌다. 제 집 부엌에 군인을 들여놓는다는 생각은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신부님이 허락했 다 할지라도 그녀에게는 좀 위태하게 여겨졌다. 시골 사람들은 그런 문제에 아 주 관대하고 연인들은 빨리 진도가 나간다. 그녀는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제피 랭은 그런 눈치를 채자 우스워 죽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예절을 지키느라 고 진정하였다. “아! 부인, 아! 부인... 부인은 그 애를 잘 모르시는군요. 저는 따귀를 맞을 거 예요!... 맙소사! 사내애들은 희롱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까? 저는 때때로 그 애 를 꼬집지요. 그러면 그 애는 입을 내밀고 획 돌아가 버린답니다... 아주머니께서 는 거듭 말씀하십니다. ‘얘야, 더듬도록 놔두지 말아라. 그러면 네게 해가 된단 다.’ 신부님도 참견을 하십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의 우정은 늘 유지되고 있지 요... 사람들은 군대 가는 제비뽑기가 끝난 다음, 우리를 결혼시키려고 했지요. 그러니 제대로 될 리가 있습니까! 일이 잘못되고 만 거지요. 로잘리는 저를 기다 리며 시집갈 돈을 모으기 위해 빠리에서 일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된 거예요...” 그는 몸을 좌우로 흔들고 한 손에서 다른 손으로 모자를 옮겨 쥐었다. 그러나 엘렌느가 침묵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부인이 @p 94 자기의 성실성을 의심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했다. 그는 열이 올라 소리쳤다. “제가 그 애를 속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맹세한다고 말씀드렸는데 도! 저는 그 애와 결혼할 겁니다. 그건 우리를 비추는 햇빛처럼 분명한 겁니다. 저는 서약할 준비가 되어 있다구요... 그래요, 부인께서 원한다면 저는 종이에 서 명을 해서 드리겠어요...” 그는 흥분해서 일어섰다. 그리고 펜과 잉크가 어디 없을까 두리번거리면서 방 안을 왔다갔다 했다. 엘렌느는 급히 그를 진정시키려 했다. 그는 되풀이했다. “서명을 해드리는 게 좋겠어요... 어떻습니까? 그러면 부인께서는 훨씬 편안 하실 겁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사라졌던 쟌느가 손뼉을 치고 춤을 추며 들어왔다. “로잘리! 로잘리! 로잘리!” 아이는 경쾌하게 곡조를 붙여 노래했다. 열린 문으로 정말 바구니를 들고 올라오는 하녀의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피랭은 방구석으로 피했다. 소리없는 웃음으로 입이 귀까지 찢어졌다. 송곳구 멍 같은 눈은 시골사람다운 악의 없는 교활함으로 빛났다. 로잘리는 평소에 그 렇듯이 그 날 아침 시장 본 것을 주인 마님에게 보이려고 곧장 방으로 들어왔 다. “마님.” 하녀는 말했다. “꽃양배추를 샀어요... 자, 보세요!... 18수에 두 포기예요. 비싸지 않죠...” 고개를 들어 히죽히죽 웃고 있는 제피랭을 보았을때, 그녀는 반쯤 열린 바구 니를 내미는 중이었다. 그녀는 너무 놀라 양탄자에 못 @p 95 박힌 것처럼 서 있었다. 2, 3분이 흘렀다. 그녀는 그가 군복을 입고 있어서 바로 알아보지 못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의 둥근 눈은 커졌고, 작고 살찐 얼굴은 창 백해졌다. 그녀의 검고 빳빳한 머리카락만이 움직였다. “오!” 그녀는 간단히 말했다. 그리고 놀라서 바구니를 놓쳤다. 꽃양배추, 양파, 감자 같은 식료품이 바닥에 굴렀다. 신이 난 쟌느는 소리를 질렀고, 의자며 거울달린 장롱 아래까지 굴러가 는 감자를 따라 뛰어가다가 방 한가운데 넘어졌다. 그럼에도 로잘리는 여전히 굳어 버린 채 움직이지 않았고 “세상에! 너구나!... 여기 웬 일이야? 여기 웬 일 이야?” 하고 되풀이 할 따름이었다. 그녀는 엘렌느를 행해 물었다. “마님께서 이 사람을 들어오게 하셨어요?” 제피랭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으로 눈꺼풀을 깜박이는 데 만족했다. 로잘리의 눈에 반가움의 눈물이 번졌다. 그녀는 다시 만나게 된 기쁨 을 표현하기 위해 빈정거림보다 나은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녀는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야! 이것 보라지. 그 옷을 입으니까 멋진데, 말쑥하구!... 내가 네 옆을 지나 가게 된다면 ‘무사하기를 바래요’라고만 말하지는 않겠는데!... 야, 이렇게 됐 어! 등에다 초소를 지고 다니는 것 같다. 머리두 근사하게 밀었는데, 성당지기의 푸들 강아지를 닮았구나... 맙소사! 정말 못났다, 못났어!” 화가 난 제피랭도 한 마디 하려고 결심했다. “그건 물론 내 잘못이 아니야. 너라도 군대에 가면 볼 만할 걸.” 그들은 저희들이 어디 있는지, 방도 엘렌느도 감자를 줍고 있는 @p 96 쟌느도 완전히 잊어버렸다. 하녀는 앞치마에 손을 감고, 작은 군인 앞에 심어 놓 은 듯 서 있었다. “그런데, 게서는 별일 없는가?” 그녀가 물었다. “물론이지, 기냐르네 암소가 아픈 걸 빼고는 말이야. 수의사가 왔었는데, 그 사람은 소가 물이 꽉 찼다고 그렇게 말했어.” “소가 물이 찼으면 끝이지. 그거 말고는 별일 없어?” “응, 응... 밭 감시인이 팔을 부러뜨렸고, 까니베 영감이 죽었고... 신부님께서 는 그랑발에서 돌아오시다가 30수가 든 지갑을 잃어버리셨지... 말하자면 별일 없어.” 그들은 말을 그쳤다. 그리고 빛나는 눈으로 마주 보았다. 시치미를 뗀 입술이 다정하게 찡그리느라고 천천히 씰룩거렸다. 그들은 서로 손조차 내밀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은 그들에게는 포옹 대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로잘리는 갑자기 눈 싸움을 그치고, 자기가 사온 채소가 나뒹굴고 있는 것을 보고 시무룩해졌다. 무 슨 난장판이람! 나한테 이런 일을 저지르게 하다니! 마님은 그를 계단에서 기다 리게 하셨어야 했어. 그녀는 도와 주기를 바라지 않는 쟌느의 고집을 거스르면 서, 투덜투덜 쭈그리고 앉아 바구니에 감자며 양파며 꽃양배추를 도로 주워 담 았다. 그리고 더이상 제피랭을 쳐다 보지도 않고 부엌으로 가려 할 때, 두 연인 이 순진하고 밝은 데 용기를 얻은 엘렌느가 하녀를 불러 세웠다. “들어 봐. 네 아주머니께서 이 총각이 일요일날 너를 보러 오는 걸 허락해 달라고 나한테 부탁하셨어. 이 총각은 오후에 오면 될테고, 너는 무리가 안 되도 록 해봐.” 로잘리는 멈춰 서서 고개만 돌렸다. 그녀는 대단히 만족했지만 투덜거리는 표 정은 여전했다. “오! 마님, 이 사람은 정말 저를 귀찮게 하네요!” @p 97 그녀는 소리쳤다. 그리고 어깨 너머로 제피랭에게 눈길을 주고 다시 정답게 찡그려 보였다. 작 은 군인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말없는 웃음으로 입이 찢어졌다. 그는 가슴에 모 자를 얹고, 고맙다고 하며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문이 닫혔으나, 그는 계단에서 아직도 절을 하였다. “엄마, 그 사람이 로잘리 오빠야?” 쟌느가 물었다. 엘렌느는 그 물음에 완전히 당황하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갑작스런 호의가 발동하여 그런 허락을 내린 일을 후회하였다. 그녀는 잠시 궁리 끝에 대답했다. “아니, 사촌이야.” “아하!” 아이가 의젓하게 말했다. 로잘리가 일하는 부엌은 햇빛이 환한 드베를르 의사네 정원을 향해 있었다. 여름이면 널따란 창문으로 느릅나무 가지가 들어왔다. 그곳은 집에서 가장 명랑 한 방으로 아주 환하고, 눈부실 정도로 빛이 들어 오후가 되면 로잘리는 푸른 목면 커튼을 쳐야 했다. 그녀는 부엌이 좁은 데 대해 불평하지 않았다. 그것은 창자처럼 길었는데, 오른쪽에 화덕이 있고 왼쪽에 식탁과 찬장이 있었다. 그녀는 가구와 그릇들을 잘 정돈하여, 창문가에 저녁에 일할 수 있는 작은 구석을 마련 해 놓았다. 그녀는 냄비, 주전자, 접시들을 윤이나게 해놓는 데 자부심을 가졌다. 해가 들면 반사광선이 벽을 비추었다. 놋그릇은 황금빛을 던졌고, 양철그릇은 은 빛 달처럼 둥글게 빛났으며, 그 번쩍거리는 빛 속에 푸르고 흰 도기 화덕은 창 백한 음영을 주었다. 다음 토요일, 저녁 나절에 엘렌느는 가구라도 옮기는 것 같은 소리를 듣고는 가보려고 마음먹었다. @p 98 “무슨 일이지? 가구와 씨름이라도 하고 있나?” 그녀는 물었다. “닦고 있어요.” 머리를 헝크르고 땀을 흘리며 쭈그리고 앉아, 짧은 팔로 있는 힘을 다해 바닥 타일을 문지르고 있던 로잘리가 대답했다. 그것이 끝나자 그녀는 걸레질을 했다. 그녀가 이렇게 부엌을 반지르르하게 해 놓은 적은 없었다. 신혼집처럼 말쑥해서 새색시가 자도 될 것 같았다. 식탁과 찬 장은 손톱이 닳도록 새 것같이 닦아 놓았다. 또 얼마나 잘 정리해 놓았는지 냄 비며 단지들은 크기 순으로 정돈되어 있었고, 그을음 하나 없이 반짝이는 프라 이팬과 석쇠까지 각자 제 자리에 걸려 있었다. 엘렌느는 잠시 말없이 서 있다가 웃으며 물러났다. 그리하여 토요일마다 먼지와 물을 뒤집어쓰고 4시간이나 그렇게 청소하였다. 로잘리는 일요일날 제피랭에게 자기의 깔끔함을 보이고 싶어했다. 그녀는 그렇 게 그 날을 맞이하였다. 거미줄 하나라도 있으면 부끄러운 일이었다. 주위의 모 든 것이 반짝반짝하게 되면 그녀는 상냥해져서 노래를 불렀다. 3시가 되어서야 그녀는 손을 닦고, 리본 달린 모자를 썼다. 그리고 목면 커튼을 반쯤 잡아당겨 방안에 빛이 적당히 들어오게 하고, 모든 것이 잘 정돈된 가운데 백리향과 월계 잎 향기에 싸여서 제피랭을 기다렸다. 정확히 3시 반이 되면 제피랭이 나타났다. 그는 동네의 시계들이 반을 치지 않으면 길에서 서성거렸다. 로잘리는 투박한 신발이 계단을 울리는 소리를 듣고 있다가, 그가 층계참에 딱 멈추면 문을 열었 다. 그녀는 군인에게 초인종을 만지지 못하게 했다. 언제나 그들은 같은 말을 주 고받았다. “너니?” “응, 나야." @p 99 그들은 반짝이는 눈과 새침한 입을 하고 얼굴을 마주 한 채 있었다. 그리고 제피랭은 로잘리를 따라 들어갔다. 하지만 군모와 칼을 벗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그녀는 부엌에 그런 물건이 있는 것이 싫어서, 칼과 군모를 선반 구석에 숨겼다. 그런 다음, 그녀는 애인을 창가에 마련된 구석자리에 앉히고 움 직이지 못하게 했다. “얌전하게 있어... 내가 마님 저녁을 준비하는 걸 구경해도 좋아.” 그러나 그는 대개 빈 손으로 오지는 않았다. 보통 그는 오전에는 친구들과 함 께 왠지 고향이 그리워서 뫼동 숲을 이리저리 거닐며 한가하게 바깥 공기를 마 시면서 보냈다. 그는 손이 심심해서 나뭇가지를 꺾어 다듬어 가지고 걸어다니면 서 갖가지 복잡한 모양으로 장식하였다. 그의 걸음은 느려졌고, 모자를 목에 건 채, 눈은 나무를 후비는 칼에서 떼지 않으면서 도랑가에 멈추기도 했다. 그는 그 나무 조각들을 버리지 않고 오후에 로잘리에게 가져다 주었다. 로잘리는 부엌을 더럽힐까 봐 조그맣게 외마디를 지르며 그것을 남자의 손에서 빼앗아 갔다. 그 녀는 사실은 그것을 모으고 있었다. 그녀의 침대 밑에는 갖가지 모양과 길이의 꾸러미가 들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알이 들어 있는 새둥지를 모자에 담아 손수건으로 덮어 가지고 왔다. 새알로 오믈렛을 만들면 아주 맛있지. 그는 말했다. 로잘리는 그 끔찍한 생각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둥지만은 놔뒀다가 나무 조각과 함께 모아 두었다. 제피랭의 호주머니는 항상 터질 지경이었다. 세느 강가에서 주워 온 투명한 조 약돌, 낡은 편자, 쪼그라진 야생귤, 넝마주이도 줍지않는 잡동사니 같은 별난 것 들을 그는 거기서 끄집어냈다. 그는 특히 그림을 좋아했다. 길을 걸으면서 그는 초콜릿이나 비누를 포장했던 종이들을 모았는데 그 종이에는 흑인과 야자나무, 이집트의 무희, 장미꽃 다발 등이 그려 있었다. 꿈꾸는 듯한 금발 여인이 그려진 찌그러진 낡은 상자 거 @p 100 죽, 채색 판화, 사탕을 쌌던 은박지 등 근처 시장에서 버려진 것들이 그에게는 가슴을 부풀게 하는 소중한 발견이었다. 그 모든 노획품은 호주머니로 빨려 들 어갔다. 가장 귀한 것은 신문지 조각으로 쌌다. 일요일날, 로잘리가 소스와 구이 를 하는 사이에 틈이 나면 그는 그림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원하면 그 것을 주었다. 다만 둘레의 종이가 깨끗하지 못하면 그는 그림을 오려 냈는데, 그 일을 그는 몹시 재미있어 했다. 종이 부스러기가 접시 속으로 날아들면 로잘리 는 화를 냈다. 촌사람의 짓궂은 장난은 더 심해졌고 그는 결국 가위를 뺏기곤 하였다. 때로는 그녀가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갑자기 가위를 돌려 주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소스가 작은 냄비에서 보글거렸다. 견장 때문에 어깨가 넓어진 듯한 제피랭이 고개를 숙이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 로잘리는 나무주걱을 손에 들고 소스를 지켜보았다. 제피랭의 머리칼은 하도 짧게 깍아서 두개골의 골격이 그대로 보일 지경이었으며, 노란 칼라는 헐어서 볕에 탄 목이 드러나 있었다. 15 분 내내 둘은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제피랭은 고개를 들고 아주 주의깊은 표정으로 로잘리가 밀가루를 넣고, 파슬리를 다지고 소금과 후추로 간을 맞추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들릴듯 말듯 감탄사가 흘러 나왔다. “야! 되게 좋은 냄새가 나는데!” 한창 열중하고 있는 요리사 아가씨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침묵이 흐 른 뒤에 이번에는 로잘리가 말했다. “그래, 뭉근히 끓여야 해.” 그들의 대화는 거기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 그들은 고향에 대해서도 더 얘기 하지 않았다. 어떤 추억이 되살아나면 그들은 척하면 서로 통했고, 오후 내내 쿡 쿡거리며 웃었다. 그들은 그걸로 충분했다. 로잘리가 문에서 제피랭을 배웅할 때 면, 둘 다 아주 즐겁게 보 @p 101 냈다고 생각했다. “그럼 가 봐! 나는 마님께 저녁을 차려 드려야 해.” 그녀는 군모와 검을 돌려 주고는 그를 앞세워 밀어냈다. 그리고 볼에 기쁜 빛 을 띠고 저녁을 차렸다. 한편, 그는 팔을 흔들면서 그곳에서 묻어 온 백리향과 월계수 잎의 향기로 뱃속이 근질거리는 것을 느끼며 병영으로 돌아갔다. 처음에 엘렌느는 그들을 감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가끔 뭘 시키려고 불현듯 나타났다. 그리고 제피랭이 한결같이 창문과 식탁 사이의 구석, 사암으로 된 물동이 근처에 다리를 꾸겨 넣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부인이 나타나 면 그는 위병소에서처럼 일어나, 선 채로 있었다. 부인이 말을 붙이면 인사와 존 경어린 빛으로 뭐라고 구시렁거리는 외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엘렌느는 불현듯 나타나도 아무런 어색한 기색이 없고, 그들의 얼굴에서 참을성 있는 연인들의 차분함을 보고는 점차 마음을 놓았다. 그래도, 로잘리는 제피랭보다는 훨씬 약은 듯했다. 빠시 가와 프랑끌랭 가, 비 뇌즈 가, 이렇게 세 길밖에는 몰랐지만 그녀는 벌써 몇 달을 빠리에서 살았고 쓴 맛을 보았는 데 비해, 그는 군대에서 어리숙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녀는 부인 에게 제피랭이 ‘어벙해졌다’고 단언했다. 고향에서는 확실히 더 영악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군복을 입어서 그렇다고 말했다. 군대에 간 사내아이들은 구제 할 수 없는 멍청이가 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제피랭은 새로운 생활에 얼이 빠 져서 눈은 둥그래지고 거위처럼 뒤뚱뒤뚱하고 있었다. 그의 견장 밑에는 시골사 람들의 둔함이 남아 있었고, 병영은 아직 그에게 빠리 출신 보병의 의기양양한 태도라든지 말투를 가르치지 못했다. 부인은 안심할 수 있었다! 그는 처녀와 시 시덕거릴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로잘리는 모성을 드러냈다. 그녀는 꼬치를 구우면서 설 @p 102 교를 늘어놓고, 피해야 할 위험에 대해서도 충고를 해댔다. 그러면 그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복종했다. 일요일마다 그는 미사에 참석했고 아침 저녁으로 는 경건하게 기도드린다는 것을 맹세해야 했다. 또, 그녀는 청결상태에 대해 잔 소리를 늘어놓고, 그가 갈 때면 솔질을 하고 웃옷 단추를 다시 달아 주고 잘못 된 것이 없나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검사하였다. 또, 그녀는 건강을 걱정하면서 온갖 병을 예방하는 식이요법들을 지시했다. 제피랭은 그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물동이를 채워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가 물을 엎지르지나 않을까 걱정되어서 그 녀는 오랫동안 거절하였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계단에 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양동이 두 개를 들고 올라왔고, 그 다음부터 물동이 채우는 일을 도맡게 되었다. 그는 다른 사소한 일과 힘드는 일을 했으며, 로잘리가 깜박 잊어버린 버 터를 사러 기꺼이 잡화상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결국에는 요리까지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채소를 다듬었다. 그 다음에 그녀는 채소 다지는 일을 허락했다. 여섯 주가 지날 때까지 소스에 손을 대지는 못했지만 나무국자를 손에 들고 지켜보 았다. 로잘리는 그를 조수로 삼았으며, 빨간 바지를 입고 노란 칼라를 단 그가 부엌데기처럼 손에 행주를 들고 화덕 앞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고 가끔 웃 음을 터뜨렸다. 어느 일요일, 엘렌느는 부엌에 가 보았다. 슬리퍼를 신어서 발소리가 나지 않 았기 때문에 부엌 문턱에 다다랐는데도 하녀나 군인은 그녀가 온 것을 몰랐다. 구석에서 제피랭은 김이 나는 수프 그릇 앞에 앉아 있었다. 문 쪽으로 등을 돌 린 로잘리는 길다란 빵조각을 잘라 주고 있었다. “좀 먹어! 너무 걸어서 배고플거야. 자! 다 먹은거야? 더 먹을거야?” 그녀는 다정스럽고 염려하는 눈길로 그를 감쌌다. 그는 완전히 @p 103 둥근 얼굴을 하고 사발 앞에 편히 앉아 수프를 마시고 빵조각을 삼키고 있었다. 주근깨로 누런 얼굴이 그릇에서 올라오는 김으로 빨개졌다. 그는 중얼거렸다. “야! 정말 맛있는데! 이 안에 뭘 넣었지?” “잠깐.” 그녀가 다시 말했다. “파를 좋아하면...” 그러나 몸을 돌리다가 그녀는 부인을 보았다. 그녀는 조그맣게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두 사람은 놀라서 얼어 붙었다. 로잘리는 갑자기 여러 가지로 변명을 했 다. “제 잘못이에요. 마님, 정말이에요... 저는 수프를 먹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어찌 된거냐 하면 제가 말했지요.‘혹시 내 몫의 수프를 먹겠으면 좀 줄게...’그 렇지? 말해 봐, 응. 그래서 이렇게 되었잖아.. .” 주인 마님이 침묵을 지키자 불안해진 그녀는 부인이 화가 났다고 생각했고 갈 라진 목소리로 계속했다. “이 사람은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어요, 마님. 그래서 날당근 하나를 훔쳐 먹었지요... 군인들은 정말 못 먹어요! 그런데다 그는 멀리 강을 따라서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갔었대요. 마님이라도 그렇게 말씀하셨을 거예요. ‘로잘리, 그 사 람한테 수프 좀 주어라...’” 엘렌느는 입안 가득 든 것을 감히 삼키지 못하고 있는 작은 군인 앞에서 엄격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래! 이 사람이 배가 고프면 저녁을 먹고 가게 해야겠구나. 그것뿐이야...그 래도 괜찮아.” 그녀는 그 때문에 벌써 전에도 한 번 평소의 엄격함을 잊어버렸듯이 두 사람 앞에서도 또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 @p 104 은 이 부엌에서 얼마나 행복할까! 반쯤 쳐진 목면 커튼으로 넘어가는 햇빛이 들 어오고 있었다. 놋그릇은 방안의 어슴프레한 빛을 받아 장밋빛으로 빛나며 안쪽 벽을 물들였다. 이 황금빛이 어스름 속에서 두 사람은 달처럼 고요하고 확실해 서 단정히 정리된 그릇들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았다. 그들은 화덕에서 나는 좋은 냄새에 식욕이 왕성해지고 마음이 살찌면서 피어나고 있었다. “엄마, 있잖아.” 그날 저녁 쟌느는 한참 생각한 끝에 물었다. “로잘리의 사촌은 절대 로잘리를 안아 주지 않아. 그런데 왜 그러지?” “왜 그들이 포옹하기를 바라니?” 엘렌느는 대답했다. 그들은 결혼식날 포옹할 것이리라. 2 수요일, 수프가 나온 후, 엘렌느는 이렇게 말하며 귀를 기울였다. “비가 너무 많이 오는데요, 들리세요? 두 분께서는 오늘 저녁 흠뻑 젖으시겠 어요.” “내 낡은 옷은 벌써 어깨가 좀 젖었다오.” 신부가 중얼거렸다. “저는 갈 길이 멀지만...” 랑보씨가 말했다. “그래도 걸어갈 겁니다. 저는 그게 좋아요... 그리고 우산이 있거든요.” @p 105 쟌느는 심각하게 마지막 남은 한 숟가락의 국수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 고 천천히 말했다. “로잘리는 날씨가 나빠 두 분이 안 오실 거라고 했어요. 엄마는 오실 거라고 했고요... 정말 친절하세요. 이렇게 늘 오시니까요.” 식탁 둘레에 앉은 사람들은 웃었다. 엘렌느는 두 형제를 향해 다정하게 고개 를 끄떡였다. 바깥에서는 폭우가 계속 귀가 멍멍하도록 쏟아지고 있었고 갑작스 런 돌풍이 덧창을 우지끈거리게 했다. 겨울이 다시 온 듯 했다. 로잘리는 조심스 럽게 붉은 커튼 줄을 잡아 당겼다. 줄에 매달린 새 하얀 전등의 차분한 빛이 밝 혀 주고 있는 아늑한 작은 식당은 요란한 폭풍 속에서 마음을 녹여 주는 부드러 운 친밀감을 띠고 있었다. 마호가니 찬장 위에서 도자기가 부드러운 빛을 반사 하고 있었다. 평화롭게 식탁에 앉은 네 사람은 소시민다운 청결함을 지닌 식기 앞에서 하녀가 가져올 맛있는 음식을 기다리며 서두르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 다. “저런! 기다리고 계셨군요!” 접시를 들고 들어오면서 로잘리가 허물없이 말했다. 그것은 랑보씨를 위한 요 리로, 살을 떠서 오븐에 구운 가자미였다. 그것은 맨 마지막에 강한 불로 익혀야 제 맛이 났다. 랑보씨는 쟌느를 재미있게 하고, 요리 솜씨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로 잘리를 기쁘게 하기 위해 미식가인 척했다. 그는 로잘리를 돌아보며 물었다. “봅시다, 오늘은 무엇을 먹게 되나?... 언제나 배가 다 찬 다음에 깜짝 놀랄 만한 것을 가져온단 말씀이야.” “오!” 하녀가 받았다. “언제나처럼 세가지예요. 더는 없어요... 가자미살 다음에는 @p 106 작은 양배추를 곁들인 양고기를 드시게 될 거예요... 정말로 더는 없어요.” 그러나 랑보씨는 곁눈질로 쟌느를 보았다. 아이는 손을 모아 터지는 웃음을 틀어막으며, 거짓말이라고 말하듯 고개를 저으며 매우 좋아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의심하는 표정으로 혀를 찼고, 로잘리는 짐짓 화내는 체했다. “아가씨가 웃으니까 믿지 않으시는군요...” 그녀가 다시 말했다. “좋아요! 내기해요. 지금 드시고 싶은 걸 참으시면 집에 돌아가셔서 또 식탁 에 앉으셔야 할 걸요.” 하녀가 나가자 아이는 더 심하게 웃었고 말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했다. “아저씨는 너무 먹보예요.” 아이가 말을 꺼냈다. “저는 부엌에 갔었는데요...” 그러나 아이는 말을 끊었다. “아! 아니야, 말하면 안 되지, 엄마?...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요. 제가 웃 은건 골려 드릴려고 그런 거예요.” 이런 장면은 수요일마다 되풀이되었고 언제나 사람들을 재미있게 했다. 엘렌 느는 랑보 씨가 이런 놀이에 참여해 주는 데 고마움을 느꼈다. 왜냐하면 그녀는 랑보 씨가 오래도록 프로방스식으로 검소하게 하루에 올리브 몇 개와 앤쵸비로 살아왔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주브 신부로 말하면 뭘 먹는지도 몰랐다. 사람 들은 종종 신부가 뭘 먹는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는 것을 놀렸다. 쟌느는 반짝이 는 눈으로 신부를 훔쳐 보았다. 요리가 각자의 접시에 놓이자 아이는 “대구가 맛있는데요.”하고 신부를 향해 말했다. “그렇구나, 애야.” @p 107 신부가 중얼거렸다. “가만있자, 대구가 맞구나. 나는 가자미인줄 알았지.” 모두 웃음을 터뜨리면 그는 순진하게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다시 식당에 온 로잘리는 몹시 기분이 상했다. 고향의 신부님은 요리에 대해 썩 잘 알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오르는 닭을 자르는 순간, 그는 그 나이를 알아맞추었고, 저녁 메뉴를 알려고 미리 부엌에 들어올 필요가 없었다. 냄새면 충분했다. 세상에! 그 녀가 주브 신부 같은 사람 밑에서 일을 했다면 지금쯤 오믈렛을 뒤집을 줄도 몰 랐을 것이다. 음식 맛을 아는 감각이 전혀 없는 것이 어떻게 해볼 도리 없는 결 점이기나 한 듯 신부는 당황한 빛으로 변명을 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정 말 너무 많은 다른 것들이 들어 있었다. “이건 양의 넓적다리예요.” 로잘리는 양고기 요리를 식탁에 놓으며 못을 박았다. 주브 신부를 위시해서 모든 사람들이 또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가느다란 눈 을 깜박거리며 큰 머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럼, 양의 넓적다리지, 그렇고 말고. 나도 그것을 알 수 있어요.” 그가 말했다. 그런데 그 날 신부는 평소보다도 더욱 딴 데 정신이 팔려 있는 것 같았다. 밥 먹기 귀찮은 사람이 집에서 선 채로 후딱 식사를 해치우듯 그는 빨리 먹었다. 그는 딴데 열중해서 다른 사람들이 끝내기를 기다리며 대화에는 단지 미소로만 답하였다. 그는 격려와 염려가 담긴 시선을 동생에게 자꾸 던졌다. 랑보 씨 역시 평소의 침착함을 잃고 있는 듯했다. 그는 자꾸 얘기를 하려 하고, 의자에서 몸을 들썩거리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는데 그것은 평소의 침착한 성질에 어울리지 않았다. 작은 양배추를 먹었으나 로잘리는 아직 @p 108 후식을 가져오지 않고 있었다. 침묵이 흘렀다. 밖에서는 폭우가 더욱 세게 퍼부 었고 철철 흐르는 물줄기가 집을 때렸다. 식당 안은 다소 숨이 막혔다. 엘렌느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며 두 형제들이 뭔가 말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걱정스럽게 그들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중얼거렸다. “아유! 정말 비가 많이 오시네!... 그렇지요? 걱정이 되시나 봐요. 두 분 모두 고민하는 빛이신데요?” 그들은 아니라고 하면서 그녀를 안심시켰다. 로잘리가 커다란 접시를 들고 나 타나자 랑보 씨는 마음의 동요를 감추려고 탄성을 올렸다. “내가 뭐라고 했어요! 아직도 놀란 만한 것이 있잖아요!” 그 날의 예상치 못한 요리는 로잘리의 특기 중 하나인 바닐라 크림이었다. 그 녀가 접시를 테이블 위에 놓으며 말없이 벙긋 웃는 걸 보면 요리가 성공적인 게 분명했다. 쟌느는 손뼉을 치며 되풀이했다. “나는 알았어요. 나는 알았어요!... 부엌에 달걀이 있는 걸 봤거든요.” “하지만 나는 배가 부른걸!” 랑보 씨가 낙심한 표정으로 받았다. 로잘리는 화를 누르는 듯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의젓하게 말 했을 뿐이었다. “저런! 랑보 씨를 위해 만든 건데요!... 좋아요! 그러면 드시지 마세요... 그래 요, 그럴 수 있으시다면요...” 그는 포기한 듯 크림을 한 조각 크게 떴다. 신부는 정신이 딴 데 팔려서 냅킨 을 돌돌 말고는, 자주 그런 일이 있긴 했지만 후식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일어 섰다. 그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거닐었다. 그러다가 엘렌느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랑보 씨에게 의미있는 눈짓 @p 109 을 찡긋하고 젊은 여인을 침실로 데려갔다. 그들 뒤에는 문이 열린 채 있었고 내용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느린 말소리가 거의 다 들렸다. “빨리 드세요.” 쟌느는 과자 하나도 먹을 수 없어 보이는 랑보 씨에게 말하고 있었다. “제가 만든 것을 보여 드릴게요.”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하지만 로잘리가 상을 치우기 시작하자 그도 일어서야 했다. “그래,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라.” 아이가 그를 방으로 끌고 가려 하자 그는 중얼거렸다. 그는 당황하며 걱정스런 낯빛으로 문에서 멀어졌다. 그 때, 신부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지자 그는 힘이 빠져 치워진 식탁에 도로 주저앉아야 했다. 그는 주 머니에서 신문지를 꺼냈다. “내가 작은 마차를 만들어 줄게.” 그러자 쟌느는 더 이상 방에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랑보 씨는 종이를 가 지고 여러 가지 장난감을 만드는 재주를 가지고 있어서 아이를 신기하게 했다. 그는 말과 배, 수도원장 모자, 짐마차, 새장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 날은 종이를 접는 손이 떨렸고 자잘한 부분을 잘 접을 수가 없었다. 옆 방에서 나는 조그만 소리에도 그는 고개를 움츠렸다. 그런데도 잔뜩 재미가 난 쟌느는 옆에 붙어 식 탁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 다음엔 마차에 묶을 꼬꼬닭을 만들어 주세요.” 아이가 말했다. 주브 신부는 방 안쪽, 전등갓이 방에 던지고 있는 뚜렷한 그림자속에 서 있었 다. 엘렌느는 언제나 제 자리인 원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수요일날 찾아오 는 이 손님들을 별반 어렵게 여기지 않 @p 110 았기 때문에 일감을 들고 있었다. 둥글고 밝은 빛 속에서 작은 아기 모자를 꿰 매는 그녀의 흰 손만 보였다. “쟌느는 이제 염려스럽지 않습니까?” 신부가 물었다. 대답하기 전에 그녀는 머리부터 끄덕였다. “드베를르 선생님은 완전히 괜찮다고 하세요.” 그녀가 말했다. “그렇지만 저 어린 것은 아직도 신경이 너무 섬약해요... 어제도 저 아이가 의자에서 정신을 잃고 있는 걸 발견했어요.” “쟌느는 운동이 부족해요.” 신부가 받았다. “둘 다 너무 갇혀 있어요. 바깥 나들이도 많이 하지 않구요.” 그는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흘렀다. 그는 분명 어떻게 다음 애기로 옮겨 가야 할지 알았을 테지만 말을 꺼내기 전에 심사숙고했다. 그는 의자를 당겨서 엘렌 느 옆에 앉았다. “이봐요, 얼마 전부터 나는 부인과 진지하게 애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이런 생활은 바람직하지가 않아요. 이렇게 숨어 사는 것은 부인 나이에는 걸맞지 않 아요. 세상과 관계를 끊고 사는 것은 부인에게나 아이에게나 나쁘지요... 많은 위 험이 있어요. 건강상의 위험도 있고 다른 것도 있지요...” 엘렌느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지요, 신부님?” 그녀는 물었다. “아이구! 나는 세상을 잘 모릅니다.” 신부는 약간 당황해서 계속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여자가 아무 바람막이도 없이 있으면 극히 위험하다는 것은 알지 요... 요컨대 부인은 너무 외롭고 부인이 빠져 있는 @p 111 고독은 건강에 해로워요. 내 말을 들어요. 언젠가는 그 때문에 괴로워할 날이 올 거예요.” “하지만 저는 불만이 없어요. 저는 이대로 좋습니다.” 그녀는 성급하게 외쳤다. 노신부는 큰 머리를 천천히 흔들었다. “확실히 이런 생활은 평온하지요. 부인이 완전히 행복하다는 걸 이해할 수 있어요. 다만 외로움이나 몽상이 점점 더 심해지면 어디까지 갈지 모르는 법입 니다... 오! 나는 부인을 잘 알아요. 부인은 잘못을 저지를 사람은 아니지요... 그 러나 그러다가 평정을 잃어버릴지도 몰라요. 어느 날 아침, 갑자기 가슴 속에 빈 채로 놔둔 그 자리가 고통스럽고 말하기 어려운 감정으로 차 있는 것을 발견한 다면 때는 늦은 거지요.” 어둠 속에서 엘렌느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그렇다면 신부님은 내 마음 을 읽은 걸까? 마음 속에 자라고 있는 혼란을, 나의 삶을 채우고 있지만 아직 묻고 싶지 않은 마음 속 동요를 알고 있는 걸까? 일감이 무릎 위로 떨어졌다. 그녀는 마음이 약해져, 존재 깊은 곳에 눌러 놓은 막연한 것들을 명확하게 설명 해 주고 큰 소리로 고백하는 것을 허락해 줄 신앙심 깊은 공범자를 신부로부터 기대하였다. 아마 그는 모든 것을 알고 내게 물어 본 것이리라. 그녀는 대답하려 고 했다. “저는 신부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그녀는 속삭였다. “제가 항상 신부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을 잘 아시지요?” 신부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는 천천히 신중하게 말했다. “부인은 재혼을 하셔야 합니다.” 그녀는 그 말을 듣자 어안이 벙벙해서 팔을 늘어뜨린 채 말이 없었다. 그녀는 다른 말을 기대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이해하지 못 @p 112 했다. 그러나 신부는 결혼을 결심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말을 이었다. “부인은 아직 젊어요... 그 나이에 외출도 안 하고 세상 일을 아무것도 모르 면서 더 이상 빠리 한 구석에 이렇게 있을 수는 없어요. 나중에 혼자 사는 것을 쓰디쓰게 후회하지 않으려면 보통의 삶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부인은 이렇게 은둔해 사는 것이 서서히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를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 인이 눈에 띄게 창백해지는 게 보여서 걱정스러워요.” 신부는 그녀가 중간에 자신의 입장을 얘기하기를 바라며 한 문장 말할 때마다 사이를 두었다. 그러나 그녀는 놀라서 얼어 붙기라도 한 듯 냉정하게 있었다. “그래요, 부인은 아이가 있어요.” 그는 말을 이었다. “그 때문에 항상 조심스럽지요... 다만 쟌느도 잘 되려면 아버지의 힘이 아주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오! 나는 진짜 아버지 노릇을 할 만한 아주 좋 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그가 말을 마치도록 놔두지 않았다. 그녀는 예상 외로 반발하고 반항 하면서 갑자기 외쳤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싫습니다... 저한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신부 님!... 절대 안해요. 아시겠어요? 절대!” 속이 뒤집혔다. 격렬하게 거부하느라고 그녀 자신이 정신을 잃고 있었다. 신부 의 제안은 알고 싶지 않은 마음 속 어두운 구석을 흔들어 놓았다. 그녀는 고통 을 맛보자 비로소 제 병이 깊음을 깨달았고, 가리고 있던 마지막 옷이 벗어져 나간 여인처럼 수치심으로 당황하였다. 늙은 신부의 웃음띤 맑은 눈길 아래, 그녀는 발버둥쳤다. @p 113 “저는 싫어요! 저는 누구도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도, 신부가 바라보기만 하자 그녀는 그가 제 얼굴에서 거짓말임을 읽었다 고 생각했다. 그녀는 얼굴이 빨개져 더듬거렸다. “생각해 보세요. 상복을 벗은 지 보름 되었어요... 그건 불가능해요...” “부인.” 신부가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말을 꺼내기 전에 많이 생각했어요. 나는 부인의 행복이 거기 있다고 생각했어요. 진정해요. 부인 원하는 대로 하세요.” 이야기가 끊겼다. 엘렌느는 입술까지 올라온 항의의 말을 쏟아 붓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일감을 다시 잡고 고개를 숙인 채 몇 바늘 꿰맸다. 조용한 가 운데 식당에서 말하는 쟌느의 높은 목소리가 들렸다. “마차에는 꼬꼬닭을 매다는 게 아니라 말을 매다는 거예요... 그런데 말을 만 들 줄 모르세요?” “몰라. 말은 너무 어렵단다.” 랑보 씨가 대답했다. “그렇지만 네가 원하면 너한테 마차 만드는 법을 가르쳐 줄게.” 놀이는 항상 그렇게 끝났다. 쟌느는 몹시 주의깊게 제 친구가 종이로 여러 개 의 작은 네모를 접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저도 해보았다. 그러나 잘 접어지지 않자 발을 굴렀다. 그렇지만 아이는 벌써 배와 수도원장 모자를 접을 줄 알았다. “자, 봐라.” 랑보 씨는 참을 성 있게 되풀이했다. “네 귀를 접어 가지고 뒤집어서... .” 조금 전에 그는 귀를 기울여 옆 방에서 하는 이야기를 몇 마디 알아들은 것 같았다. 그의 가엾은 손은 더 떨렸고, 그의 혀는 어쩔 @p 114 줄 몰라 하면서 단어를 반쯤 삼켜 버렸다. 엘렌느는 진정하지 못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재혼하다니 누구하고요?” 일감을 작은 탁자 위에 놓으며 그녀는 갑자기 신부에게 물었다. “누구 생각해 둔 사람이 있으신게죠?” 주브 신부는 일어서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그렇다는 표시로 고개 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 사람이 누군가요?” 그녀가 받았다. 그는 잠시 그녀 앞에 선 채 있었다. 그는 말하면서 천천히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상관이오! 거절한 마당에.” “어쨌든 알고 싶어요.” 그녀가 말했다. “누군지도 모르고 어떻게 결정을 할 수 있겠어요?” 신부는 여전히 선 채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금방 대답하지 않았다. 다소 서글픈 웃음이 그의 입술에 떠올랐다. 결국 그는 거의 꺼질 듯한 소리로 말했다. “세상에! 그게 누군지 짐작 못 하겠소?” 아니, 그녀는 짐작할 수 없었다. 그녀는 생각해 보았고 놀랐다. 그러자, 그는 몸짓을 했을 뿐이었다. 그는 고개짓으로 식당을 가리켰다. “저분이라구요!” 그녀가 소리를 죽이며 부르짖었다. 그리고는 몹시 심각해졌다. 그녀는 더 이상 격하게 항의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슬픔만이 감돌고 있었다. 오래도록 그녀는 생각에 잠겨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전 @p 115 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어떤 항변도 제기하지 못했다. 랑보 씨는 그녀가 두려움 없이 믿고 손을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의 선의를 알았기 때문에 그의 소시민적인 둔함을 우스개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호감에도 불구하고 그가 저를 사랑한다는 생각은 그녀를 오싹하게 했 다. 그동안 신부는 방 이 끝에서 저 끝으로 거닐고 있었다. 식당문 앞을 지나며, 그는 엘렌느를 부드럽게 불렀다. “자, 이리 와 보세요.” 그녀는 일어나서 바라보았다. 랑보 씨는 쟌느를 제 의자에 앉힌 참이었다. 자신은 식탁에 기대어 소녀의 발 치에 몸을 굽혔다. 아이 앞에 무릎을 꿇고, 그는 아이를 팔로 감쌌다. 식탁 위에 는 닭을 비끄러맨 마차, 배, 상자, 수도원장 모자가 있었다. “그런데 너는 나를 좋아하니? 나를 좋아한다고 해봐.” 그가 말하고 있었다. “그래요, 나는 아저씨가 좋아요. 아시잖아요.” 그는 위험을 무릎쓰고 사랑을 고백하는 것처럼 떨면서 망설였다. “그러면 내가 여기 너하고 항상 같이 있을까 하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래? ” “야! 나는 좋아요. 그러면 같이 놀 수 있겠네요. 그렇죠? 그러면 재미있을 거 예요.” “들어 봐. 항상 말이야. 내가 항상 같이 있는단 말이야.” 쟌느는 배를 집어 순경 모자로 만들었다. 아이는 중얼거렸다. “아! 엄마가 허락해야지요.” 그 대답은 그를 완전히 걱정 속에 빠뜨린 것 같았다. 그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물론이지.” @p 116 그가 말했다. “그런데 엄마가 좋다고 하시면 너는 안 된다고 하지 않는거지, 그렇지?” 순경 모자를 다 접은 쟌느는 신이 나서 제가 붙인 곡조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네,네,네라고 하지요... 네,네,네라고 하지요... 그런데 이거 얼마나 예쁜지 보 세요. 내가 만든 모자!” 랑보 씨는 눈물이 글썽글썽해져서 무릎으로 일어서 아이를 껴안았고 아이도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는 형에게 엘렌느의 의사를 묻게 하고, 자신은 쟌느의 동의를 구했던 것이다. “저것 보세요.” 신부가 웃음을 띠고 말했다. “애가 좋아하잖아요.” 엘렌느는 심각한 채였다. 그녀는 더 이상 논박하지 않았다. 신부는 변론을 또 시작했고 랑보 씨의 좋은 점을 늘어놓았다. 그는 쟌느에게 딱 맞는 아빠가 아닌 가? 부인은 그를 잘 알고 그에게 의지하면 아무런 위험도 없다. 그런데도 엘렌 느가 침묵을 지키자 신부는 감동적이고 위엄 있는 어조로 동생을 위해서가 아니 라 부인의 행복을 위해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저는 신부님을 믿고, 신부님께서 저를 좋아하시는 것도 압니다.” 엘렌느가 급히 말했다. “저는 신부님 앞에서 동생 분께 대답하고 싶습니다.” 시계가 10시를 쳤다. 랑보 씨가 침실로 들어왔다. 그녀 쪽에서도 손을 내밀고 그를 맞으며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당신의 청혼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매우 고맙게 생각합니다. 잘 말씀하셨어 요...” @p 117 그녀는 차분하게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큰 손을 잡고 있었다. 그는 온몸을 떨 며 감히 눈을 들지 못했다. “다만 저는 잘 생각해 봐야겠어요. 아마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녀는 말을 이었다. “오! 부인께서 원하신다면 여섯 달, 일 년 아니 그 이상이라도 좋습니다.” 그는 당장 내쫓기지 않는 데 만족해서 마음을 놓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보일듯 말듯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친구로 있는 거예요.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우리 집에 와 주세요. 다만 제가 이 일을 다시 말씀드릴 때까지 기다려 주신다고 약속하세요... 괜찮겠어요?” 그는 손을 빼고 계속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승낙을 표시하며 열에 들떠서 모자를 찾았다. 나가려는 순간, 그는 할 말을 찾아 냈다. “들어 보십시오.” 그는 중얼거렸다. “부인은 지금 제 마음이 어떤지를 아셨지요? 그래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제 마음은 항상 그런 걸로 아십시오. 신부님이 설명하셨어야 하는데... 10년 후라도 마음이 내키면 눈치만 주세요. 부인이 하자는 대로 하겠습니다.” 끝으로 이번에는 그가 엘렌느의 손을 잡고 부서져라 꽉 쥐었다. 계단에서 두 형제는 평소처럼 “수요일에 만납시다.” 하고 말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네, 수요일에 또 뵙겠어요.” 엘렌느가 대답하였다. 방으로 돌아오자 덧문을 때리는 폭우소리가 그녀를 가슴 아프게 @p 118 했다. 세상에! 웬 이런 줄기찬 비람. 불쌍한 두 사람은 완전히 젖어 버릴거야! 그 녀는 창문을 열고 길을 내려다보았다. 갑작스런 바람이 가스등을 쓸고 지나갔다. 반짝이는 빗방울 자국과 희미한 물웅덩이 한가운데로 홍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뻐서 춤을 추며 가고 있는 랑보 씨의 검은 옷을 입은 둥그런 등이 보였다. 하지만 쟌느는 제 친구의 마지막 말 몇 마디를 다시 생각하면서 몹시 심각해 있었다. 아이는 짧은 장화를 벗고 속옷 바람으로 깊은 생각에 잠겨 침댓가에 앉아 있었다. 어머니가 잘 자라는 키스를 해주려고 들어왔을 때, 아이는 그러고 있었다. “잘 자, 쟌느. 엄마한테 뽀뽀해야지.” 그런데도 들은 기색이 없어서 엘렌느는 아이의 허리를 감싸며 그 앞에 쪼그리 고 앉았다. 그리고 가만히 물었다. “그 아저씨가 우리하고 같이 살면 좋겠니?” 쟌느는 그 물음에 놀란 것 같지 않았다. 아이는 틀림없이 그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알겠니?” 어머니가 다시 말했다. “그러면 밤이나 낮이나 식탁이나 어디서나 항상 같이 있는거야.” 소녀의 맑은 눈에 불안감이 떠올랐다. 아이는 어머니의 어깨에 뺨을 대고 목 에 키스하고는 몸을 떨며 귀에다 속삭였다. “엄마, 아저씨가 엄마를 껴안나요?” 엘렌느의 이마에 홍조가 번졌다. 그녀는 처음에 아이의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 야 좋을지 몰랐다. 그러다가 대답했다. “아빠처럼 하지, 아가야.” 그러자, 작은 팔이 뻣뻣해졌고 쟌느는 갑자기 호박 같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아이는 더듬거렸다. @p 119 “오! 안 돼, 안 돼, 난 싫어... 엄마, 제발 ,아저씨한테 내가 싫어한다고 말해. 가서 싫다고 해...” 아이는 흑흑거리며 어머니의 품에 몸을 던지고 눈물과 키스를 퍼부었다. 엘렌 느는 잘 될 거라고 되풀이하며 아이를 달래려고 했다. 그러나 쟌느는 당장 단호 한 대답을 듣기를 원했다. “안 된다고 해, 엄마. 안 된다고... 나는 죽을지도 몰라...오! 절대 안 돼. 그렇 지? 절대 안 돼!” “그럼! 안 되지. 약속할게. 이제 얌전히 자거라.” 어머니와 떨어질 수 없는 듯이, 어머니를 제게서 빼앗아 가려는 사람으로부터 지키려는 듯이 몇 분을 더 말없이 열렬하게 아이는 어머니를 껴안고 있었다. 그 런 다음에야 엘렌느는 아이를 눕힐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이 옆에서 얼마 동안 지켜야 했다. 자면서 아이는 움찔거렸고 반 시간마다 눈을 떠 어머니가 거 기 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손에 입을 대고 다시 잠들었다. 3 기분좋게 포근한 달이었다. 4월의 해는 레이스처럼 부드럽고 가벼우며 고운 푸르름으로 정원을 물들였다. 창살에는 헝클어진 참으아리 덩굴이 가느다란 새 순을 내밀고 있었고, 망울진 인동덩굴은 달착지근하고 미묘한 향기를 뿜고 있었 다. 단정하게 깎인 잔디 양쪽 가장자리에는 붉은 제라늄과 흰 꽃무가 화단을 장 식하고 있었다. 이웃 건물들 때문에 좁아진 안쪽에는 몇 그루 느릅나무가 가지 로 푸른 장막을 드리우고 있었는데, 그 작은 잎들이 미풍에도 살랑거리곤 했다. 석 주일도 넘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랬다. 엘렌느의 마음 @p 120 속에 간직된 환희, 새로운 젊음을 축하하려는 봄의 기적이었다. 매일 오후, 그녀 는 쟌느와 정원에 내려갔다. 그녀의 자리는 오른쪽에서 첫번째 느릅나무로 정해 져 있었다. 의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보도의 포석 위에서 전날 제 가 흘린 실밥들을 발견하곤 했다. “제 집처럼 생각하세요.” 저녁마다 드베를르 부인은 되풀이했다. 그녀는 지난 여섯 달 동안 엘렌느가 자신에게 열중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내일 봐요. 더 일찍 오시면 안 되나요?” 실제로 엘렌느는 제 집에 있는 듯했다. 차차 그녀는 그늘진 구석 자리에 익숙 해졌고 어린아이처럼 조바심하며 거기 내려갈 시간을 기다렸다. 그 부잣집 정원 에서 특히 마음에 드는 것은 말끔한 잔디와 관목이었다. 풀 한 포기라도 정돈된 가지의 균형을 흩어 놓지 않았다. 아침마다 쓰레질한 산책길은 융단의 폭신함을 발에 느끼게 했다. 그녀는 거기서 지나친 흥분으로 괴로워할 염려 없이 조용하 고 안온하게 지냈다. 말끔하게 다듬어진 화단과, 정원사가 누래진 잎을 하나하나 뜯어낸 송악 덩굴에서는 마음을 어지럽힐 어떤 일도 생기지 않았다. 느릅나무로 둘러싸인 그늘, 드베를르 부인이 남기고 간 한 줄기 강한 사향을 머금은 은밀한 구석에서 엘렌느는 거실 안에 있는 듯하였다. 고개를 들면 보이는 하늘만이 밖 에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었고, 그러면 그녀는 깊게 심호흡을 하곤 했다. 종종 두 여인은 둘이서만 오후를 지내곤 했다. 쟌느와 뤼시앵은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고, 긴 침묵이 흘렀다. 그러면, 몽상이라고는 하지 않는 드베를르 부인 은 엘렌느가 말없이 들어 주는 데 만족해서, 엘렌느가 머리라도 다소 끄덕일라 치면 재미있는 데를 되풀이하면서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다. 가까운 부인들에 대 @p 121 한 그칠 줄 모르는 이야기, 다가올 겨울에 있을 초대 계획, 그 날 일어난 일들에 대한 쓰잘 데 없는 감상 등 하여튼 이 예쁜 여인의 좁은 이마 속에서 부딪치고 있는 모든 세속 잡사들이었다. 이야기 도중, 애들에 대한 갑작스런 사랑의 발로 나 우정을 찬미하는 감동어린 문장들이 섞여들었다. 엘렌느는 그녀가 손을 꽉 쥐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녀는 늘 듣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꾸준히 마음을 풀 어 주는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그녀는 쥴리에뜨의 애무에 몹시 감동을 받았 고, 쥴리에뜨에게 아주 친절하다고, 천사처럼 친절하다고 말해 주었다. 전에는 방문객이 있었는데, 그러면 드베를르 부인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 다. 그녀는 매년 시기가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부활절 후부터 토요일 모임을 중 단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외로움을 두려워해서 누군가가 격식을 차리지 않 고 제 집 정원으로 찾아오면 몹시 기뻐하곤 했다. 그즈음 그녀의 최대 관심사는 8월 동안 어느 해변에서 지낼지 정하는 일이었다. 방문할 때마다 그녀는 같은 얘기를 또 시작하였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지만 마음을 정할 수 없었 다. 그것은 그녀를 위해서가 아니라 뤼시앵을 위해서였다. 잘생긴 말리뇽이 와서 투박한 의자 위에 말타듯 걸터앉았다. 그는 시골을 혐오했다. 그는 해변에 가면 감기에 걸린다면서 빠리를 떠나는 것은 미친 짓이 틀림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해변에 대해 의견을 말했다. 그는 어디든 지저분하고 트루빌(1. 노르망디 지방 해안. 각광받는 피서지로 사교계 인사들이 해수욕을 즐기러 모여 들었다.) 말고는 조금이라도 깨끗한 데가 없다고 단언했다. 엘렌느는 매일 똑같은 얘기를 들었지만 싫증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만가만 흔들어 잠재우는 듯한 단조로운 나날에 행복해하였다. 한 달이 다 @p 122 가도록 드베를르 부인은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어느 날 저녁, 엘렌느가 돌아가려고 하는데 쥴리에뜨가 말했다. “나는 내일 외출해야 해요. 그렇다고 내려오는 걸 꺼리실 필요는 없어요... 기 다리세요. 늦지 않을 테니까.” 엘렌느는 그렇게 했다. 그녀는 정원에서 홀로 감미로운 오후를 보냈다. 그녀의 머리 위, 나무들 사이에서 날아오르는 참새의 날갯짓 소리만이 들렸다. 이 양지 바른 작은 구석의 모든 매력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 날부터 가장 행복한 오후 는 드베를르 부인이 그녀를 내버려 둔 날이 되었다. 그녀와 드베를르 집 사이에는 차차 친밀한 관계가 맺어졌다. 식사 시간이 되 어서 붙드는 바람에 그녀는 그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녀가 느릅나무 아래서 지체하고 있고, 삐에르가 ‘식사 준비되었습니다’하고 계단을 내려오면 쥴리에 뜨는 저녁 먹고 가라고 간청했고, 그녀도 가끔 그렇게 했다. 어린아이들이 시끌 벅적 명랑하게 떠드는 가족적인 저녁식사였다. 드베를르 의사와 엘렌느는 다소 냉정한 듯한 사리밝은 기질을 공유하고 있는 좋은 친구처럼 보였다. 쥴리에뜨조 차도 종종 “오! 당신들은 서로 잘 통하는 것 같군요. 나한테는 그게 성가셔요. 당신들의 침착성 말이에요.” 하고 외치곤 했다. 매일 오후, 6시경 의사는 왕진에서 돌아왔다. 그는 정원에서 부인들을 보고 다 가와 앉곤 했다. 처음에 엘렌느는 부부끼리만 있도록 곧 물러나려고 했었다. 그 러나 쥴리에뜨가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면 몹시 성을 냈기 때문에 그녀는 머물러 있게 되었다. 그녀는 늘 잘 결속되어 있는 듯한 이 가족의 사생활에 반쯤 끼어 들게 되었다. 의사가 돌아오면 아내는 언제나 다정하게 볼을 내밀었고, 그는 볼 에 입을 맞췄다. 뤼시앵은 다리에 올라탔고 그는 아들을 도와 기 @p 123 어오르드록 했다. 그는 이야기를 하면서 아들을 무릎 위에 태우고 있었다. 아이 가 작은 손으로 아빠의 입을 막고, 이야기 도중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기도 하면 서 몹시 버릇없이 굴면, 그는 결국 쟌느하고 놀라고 하면서 아이를 땅에 내려놓 곤 했다. 엘렌느는 그러한 장난에 미소를 지었으며, 조용한 눈길로 그들 아빠와 엄마, 아이를 바라보기 위해 잠시 일감을 놓곤 했다. 남편의 입맞춤은 그녀를 거 북하게 하지 않았으며, 뤼시앵의 장난질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그녀는 행복한 가정의 평화 속에서 휴식했다. 그러는 동안, 높은 가지를 노랗게 물들이며 해가 지곤 했다. 창백한 하늘에서 고요함이 내리깔렸다.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 보기를 너무 좋아하는 쥴리에뜨는 어떤 때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문득문득 남편에게 물음 을 던졌다. “당신 어디 갔었어요? 뭘 하셨어요?” 그러면 의사는 왕진한 일을 이야기했고, 아는 사람의 안부를 전해 주거나 다 른 집에서 눈에 띈 가구나 천 같은 정보들을 말해 주었다. 이야기 도중, 그의 눈 은 종종 엘렌느의 눈과 마주쳤다. 둘 다 외면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읽으려는 것처럼 잠시 진지하게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눈꺼풀을 내리깔고 미소지었다. 조심스럽게 나른한 태를 짓고 있었지만 쥴리에뜨는 마음 이 들떠 있어서 두 사람을 오래 함께 얘기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젊은 여인은 모든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몇 마디 말 또는 느릿느릿 평범한 대 화를 나누었는데, 그것은 깊은 의미를 갖는 듯했고 음성 너머의 세계로 연장되 는 듯했다. 그들은 완전히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듯, 말할 때마다 가벼운 의미조 차도 서로 알아챘다. 그것은 존재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친밀하고 절대적인 일치였으며 말하지 않아도 두 사람을 긴밀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때때로 쥴리에 뜨는 혼자만 늘 얘기하는데 다소 부끄러움을 느끼고 @p 124 까치처럼 수다떠는 것을 멈추었다. “그런데 부인은 재미없나요?” 그녀는 말했다. “우리는 전혀 부인의 흥미를 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나 봐요.” “아니에요. 저한테 신경쓰지 마세요.” 엘렌느는 명랑하게 대답했다. “지루하지 않아요. 저는 얘기하지 않고 듣는 게 더 좋답니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오래도록 입을 다물고 있으면 거기 있는 즐거움을 더 잘 맛볼 수 있었다. 일감에 고개를 숙이고, 의사와 서로를 밀착시키는 긴 시 선을 교환하기 위해 멀리멀리 눈길을 주면서 그녀는 자기중심적인 감정에 일부 러 빠져들었다. 그녀와 그 남자 사이에는 숨겨진 감정, 이 세상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더 달콤한 어떤 것이 있음을 그녀는 이제 인정하였다. 그러나 정숙함에 흠 가는 일 없이 그녀는 평화롭게 비밀을 간직하였다. 무슨 나 쁜 생각이 그녀를 동요시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내와 아이에게 얼마나 잘하는가! 그가 뤼시앵을 잡고 팔짝팔짝 뛰어오르게 하거나 쥴리에뜨의 뺨에 입 을 맞추면 그녀는 그가 더 좋아졌다.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를 보게 된 후, 그들의 우정은 커졌다. 그녀는 식구들과 있는 것 같았고, 그들과 멀어질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쥴리에뜨가 그를 앙리라고 부르는 걸 들으면서, 그녀는 마음 깊은 곳에서 그를 자연스럽게 앙리라고 불렀다. 그녀의 입술이 ‘선생님’ 이라고 말하면 그녀의 몸 속에서는 ‘앙리’라는 반향이 울렸다. 어는 날, 의사는 느릅나무 아래 홀로 있는 엘렌느를 발견하였다. 쥴리에뜨는 거의 매일 오후 외출하였다. “저런! 집사람은 여기 없습니까?” @p 125 그가 말했다. “네, 부인은 저를 내팽개쳤어요.” 그녀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좀 일찍 돌아오셨군요.” 아이들은 정원 저쪽 끝에서 놀고 있었다. 그는 여자 옆에 앉았다. 그렇게 가까 이 마주 하고 앉아 있어도 그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마음을 부풀게 하는 다정한 감정을 암시하고픈 생각을 일순간도 하지 않고 그들은 한 시이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였다., 그런 것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두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할지 모르는 걸까? 그들은 해야 할 고백이 없 었다. 함께 있고 여러 가지 문제를 서로 이해하고, 매일 저녁 그녀가 보는 데서 아내에게 키스해 주던 바로 그 자리에서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즐기는 것으로 그들은 기뻐하기에 족했다. 그 날, 의사는 그녀가 정신 없이 일에 몰두하는 것을 놀렸다. “부인은 제가 부인의 눈색깔도 모르는 것을 아십니까?” 그가 말했다. “부인은 늘 바늘에만 눈을 주고 계시는군요.” 그녀는 고개를 들고 평소처럼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를 놀리시나요?” 그녀는 부드럽게 물었다. 그러나 그는 말을 이었다. “아! 부인의 눈은 회색이에요... 푸는 빛이 도는 회색, 그렇지요?” 그들이 한 일은 그 정도였다. 그러나 처음 나눈 그 말들은 한없는 달콤함을 띠었다. 그 날부터 그는 종종 어스름녘에 여자가 홀로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 다. 의식하지도 않았고, 그러려는 생각도 없었지만 둘의 친밀함은 커져 갔다. 사 람들이 듣고 있을 때는 들을 수 없었던 다정한 목소리로 바뀌어 그들은 이야기 를 나누었다. 그 @p 126 러는 동안, 쥴리에뜨가 빠리 시내의 쇼핑에서 떠들썩한 열기를 몰아 가지고 돌 아오는 경우에도 매번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방해받지 않고, 자리를 물 리지도 않고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아름다운 봄, 라일락이 만발한 정원은 그들이 품고 있는 첫 열정의 황홀경을 크게 더해 주는 것 같았다. 그 달이 다갈 무렵 드베를르 부인은 커다란 계획으로 들떠 있었다. 그녀는 불현듯 어린이 무 도회를 열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참이었다. 계절은 적당히 무르익어 있었고 그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서 그녀는 곧장 수선스럽게 준비에 뛰어들었다. 그녀는 아주 근사하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가장 무도회로 하려고 했다. 그녀는 집에서 나 밖에서나 어디 가든 무도회 얘기밖에 하지 않았다. 정원에서는 끊이지 않고 의견이 이어졌다. 멋쟁이 말리뇽은 그 계획이 ‘유치한’ 짓이라고 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그는 관심을 표시하면서, 알고 지내는 코믹 가수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했다. 어느 날 오후, 모두 나무 아래 있는데 쥴리에뜨는 뤼시앵과 쟌느에게는 어떤 의상이 좋을까 진지하게 물었다. “정말 어떤 게 좋을까요?” 그녀는 말했다. “나는 흰 공단 삐에로 옷이 어떨까 생각해 봤는데.” “그건 너무 평범해요.” 말리뇽이 잘라 말했다. “삐에로가 한 다스는 될 걸요... 잠깐만, 뭐 좋은 게 있을텐데.” 그는 가느다란 지팡이 꼭지를 빨면서 곰곰 생각하기 시작했다. 뽈린느가 생각 이 떠올라 외쳤다. “나는 희극에 나오는 하녀 복장을 하고 싶은데요...” “뭐라구!” @p 127 드베를르 부인이 놀라면서 말했다. “너는 변장하는 게 아니야! 네가 어린애인 줄 아니? 바보... 너는 흰 드레스를 입고 오면 좋겠다.” “어머! 재미있을 것 같은데.” 열여덟 살이라는 나이와 처녀티가 나는 몸매에도 불구하고 애들하고 펄쩍펄쩍 뛰어다니기를 좋아하는 뽈린느가 중얼거렸다. 한편, 엘렌느는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때때로 의사와 그 앞에 서서 얘기하고 있는 랑보 씨에게 미소짓기 위해 고개를 드는 외에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랑보 씨도 드디어 드베를르 가의 친밀한 모임에 끼어들게 되었다. “쟌느, 너는 뭘 입고 싶지?” 의사가 물었다. 그러나 말리뇽의 감탄사가 그의 말을 가로막아 버렸다. “생각났어요!... 이 15세 때의 후작이오!” 그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가는 지팡이를 흔들었다. 그러나 주위에 있는 사람 들이 전혀 감격하지 않자 놀란 것 같았다. “저런! 모르겠어요? …뤼시앵이 어린 손님들을 맞게 되지요? 그러려면 그 애 를 후작같이 입혀서 살롱 문에 서 있게 해야 합니다. 옆에는 커다란 장미 다발 을 놓고요. 그 애는 숙녀들에게 인사를 합니다.” “그렇지만...” 쥴리에뜨가 반박했다. “후작이 한 다스는 될 텐데요.” “그게 어때서요?” 말리뇽이 침착하게 말했다. “후작이 많을수록 재미있을 거예요. 이거야말로 참신하다는 것을 말씀드립니 다... 집주인은 후작이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p 128 무도회에 흠이 되죠.“ 그는 확실히 신념에 차 있어서 쥴리에뜨도 결국 덩달아 열을 내게 되었다. 작 은 꽃다발을 수놓은 흰 공단 뽕빠두르 후작 의상은 정말 매혹적일 거야. “그럼 쟌느는?” 의사가 또 물었다. 늘 좋아하는 아양부리는 태도로 소녀는 어머니의 어깨에 기대러 와 있었다. 어머니가 입을 열려고 하자 아이는 속삭였다. “엄마, 나한테 약속한 거 알지?” “그게 뭐지?” 주위에서 물었다. 딸이 눈으로 사정하자 엘렌느는 웃으며 대답했다. “쟌느는 제 의상을 미리 말하는 게 싫다는군요.” “그래요!” 아이가 외쳤다. “어떤 의상인지 말해 버리면 효과가 전혀 없어지잖아요.” 사람들은 잠시 그 깜찍함 때문에 재미있어 했다. 랑보 씨는 짓궂게 굴었다. 얼 마 전부터 쟌느는 그에게 부어 있었다. 이 낙심천만한 불쌍한 사람은 어린 친구 의 호의를 어떻게 회복해야 좋을지 알지 못하고, 아이에게 접근하려고 아이를 놀리곤 하였다. 그는 아이를 보면서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내가 말할거야. 내가 말할거야...” 아이는 완전히 창백해졌다. 아이의 순한 얼굴은 괴로워서 사납게 굳어졌고, 이 마는 두 줄의 굵은 주름이 잡혔으며, 턱은 신경질적으로 시무룩해졌다. “아저씨...” 아이는 더듬거렸다. @p 129 “아무 말도 하면 안 돼요.” 그가 계속 말하겠다는 표정을 짓자 아이는 미친 듯이 소리지르며 그에게 달려 들었다. “입 다물어요! 말하지 마세요!... 하지 말란 말예요!...” 엘렌느는 때때로 소녀를 무시무시하게 뒤흔들어 놓는 맹목적인 분노의 발작을 예감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엄하게 말했다. “쟌느, 주의해라. 버릇을 고쳐 줘야겠구나!” 그러나 쟌느에게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아이는 머리에서 발 끝까지 몸을 떨고 발을 구르며 목멘 소리로 외쳤다. “하지 마요!...하지 마요!...” 목소리는 점점 더 쉬고 갈라졌다. 아이는 경련을 일으킨 손으로 랑보 씨의 팔 을 움켜쥐고 굉장한 힘으로 그 팔을 비틀었다. 엘렌느는 아이를 위협해 보았지 만 아무 소용 없었다. 엄하게 꾸짖어도 아이가 수그러들지 않자 여러 사람 앞에 서 벌어진 그 장면에 몹시 마음이 상한 그녀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쟌느, 너는 엄마를 몹시 힘들게 하는구나.” 아이는 곧 잡았던 팔을 놓고 고개를 돌렸다. 상심한 얼굴로 눈물을 참고 있는 제 어머니를 보자,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고 더듬거리며 어머니의 목에 매달렸다. “아니야, 엄마... 아니야, 엄마...” 아이는 어머니가 울지 못하게 하려는 듯,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어머니는 천천히 아이를 밀어냈다. 가슴이 무너지며 제 정신을 잃은 아이는 몇 발짝 떨어 진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 더욱 심하게 흑흑거렸다. 항상 쟌느를 본받으라는 소 리를 들어 왔던 뤼시앵은 놀라고 좀 당황한 듯이 쟌느를 주시하였다. 엘렌느가 일감을 정리하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을 사과하자, 쥴리에뜨는 무슨 말씀이 @p 130 냐고 하면서 위로했다. 애들이 저지른 잘못은 모두 용서해 주어야 한다. 오히려 쟌느는 아주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고, 불쌍하게도 너무나 비탄에 빠져 있으 므로 벌써 충분히 벌을 받은 것이다. 쥴리에뜨는 아이를 안아 주려고 불렀지만, 쟌느는 용서받으려고 하지 않고 숨이 막히도록 울면서 벤치 위에 그대로 있었 다. 그러는 동안, 랑보 씨와 의사가 다가왔다. 랑보 씨는 몸을 굽히고 놀란 듯한 선량한 목소리로 물었다. “보자, 아가야, 왜 화가 났지? 내가 뭘 잘못했니?” “오!” 아이는 얼굴에서 팔을 떼고 엉망이 된 얼굴을 드러내며 말했다. “엄마를 빼앗아 가려고 했어요.” 듣고 있는 의사는 웃기 시작했다. 랑보 씨는 그 말을 금방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소리지?” “그랬잖아요. 요전번 수요일에... 오! 잘 알잖아요. 무릎을 꿇고 나한테 아저씨 가 집에 있으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지요.” 의사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핏기를 잃은 그의 입술이 떨렸다. 반대로 랑보 씨의 뺨에는 홍조가 떠올랐고 목소리를 낮추어 더듬거리며 말했다. “너는 우리가 같이 놀 수 있을 거라고 말했지/” “아니에요, 아니에요, 나는 몰랐어요.” 아이는 격하게 말했다. “나는 싫어요. 아시겠어요!... 이제 그 얘기는 절대 하지 마세요. 절대로 하지 않아야 친구로 있을 거예요.” 엘렌느는 바구니에 일감을 담아 가지고 일어서다 대화의 끝 부분을 들었다. “자, 올라가, 쟌느.” @p 131 그녀가 말했다. “울더라도 사람들을 난처하게는 하지 말아야지.” 아이를 앞으로 밀면서 그녀는 인사했다. 의사는 몹시 창백해져서 여자를 뚫어 질 듯 바라보았다. 랑보 씨는 어쩔 줄 몰라했다. 드베를르 부인과 뽈린느는 말리 뇽의 응원을 받아서, 뤼시앵이 입을 뽕빠두르 후작의 의상에 대해 활발히 의논 하면서 가운데 놓은 아이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다음 날, 엘렌느는 느릅나무 아래 혼자 있었다. 드베를르 부인은 무도회를 위 해 쇼핑을 가면서 뤼시앵과 쟌느를 데리고 갔다. 의사는 평소보다 일찍 돌아와 급히 계단을 내려왔다. 그러나 그는 앉지 않고 나무에서 흠집이 난 잔가지를 꺾 으면서 젊은 여인의 주의를 맴돌았다. 그녀는 그가 움직이는 것이 불안한 듯 한 순간 눈을 들었다. 그리고 다소 떨리는 손으로 다시 바늘을 꽂았다. “날씨가 나빠지는데요.” 침묵이 흐르자 불편해진 여자가 말했다. “오늘 오후는 추울 지경이에요.” “아직 4월이거든요.” 남자는 목소리를 가라앉히려고 애쓰며 말했다. 그는 가려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는 다시 다가와서 갑자기 물었다. “그런데 결혼하실 겁니까?” 거친 그의 물음은 일감을 떨어뜨릴 정도로 그녀를 놀라게 했다. 그녀는 새하 얘졌다. 극단적인 의지의 힘으로 그녀는 커다랗게 뜬 눈을 남자에게 고정시키고 대리석 같은 얼굴을 허물지 않고 있었다. 여자가 대답하지 않자 남자는 애원조 로 말했다. “오! 부탁이오. 단 한 마디만... 결혼할 겁니까?” “아마 그럴 거예요. 그게 당신에게 중요한가요?” @p 132 마침내 여자는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격렬한 몸짓을 했다. 그리고 소리쳤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오!” “왜 그렇죠?”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여자가 다시 말했다. 그 시선은 입술까지 올라온 말을 못박아 버렸고, 그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 는 관자놀이에 손을 얹고 잠시 그대로 있었다. 그는 숨이 막히는 듯, 어떤 격렬 한 행동을 하게 될까 두려운 듯 멀어져 갔고, 여자는 고요하게 일감을 다시 잡 는 체했다. 그러나 달콤했던 매혹적인 오후는 깨져 버렸다. 그 다음 날부터 남자는 다정 하고 친절하게 대하려 해도 소용이 없었고, 엘렌느는 단 둘이 남게 되면 불편을 느꼈다. 두 사람이 같이 있다는 데 순수한 기쁨을 느끼면서 마음의 혼란 없이 가까이 있도록 해준 평화로운 믿음과 친근함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를 질겁시키지 않으려는 배려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때때로 여자가 남몰래 몸을 떨 며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평소의 참착성을 잃고 있었다. 오싹함이 엄습해서 그녀는 손을 늘어뜨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힘없이 있 었다. 갖가지 분노와 욕망이 그녀에게 일고 있는 듯했다. 엘렌느는 쟌느가 떨어져 있는 것을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 의사는 언제나 자 신과 여자 사이에 커다랗고 투명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꼬마 증인을 발견했 다. 그러나 엘렌느를 특히 괴롭힌 것은 드베를르 부인 앞에서 갑자기 당황하게 되는 것이었다. 부인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돌아와서 외출에서 들은 이야기를 하며 엘렌느를 ‘마 쉐르’라고 부를 때면 더 이상 전처럼 미소어린 평온한 낯 으로 @p 133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엘렌느의 존재 깊은 곳에서 명확히 밝히고 싶지 않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그것은 수치심 같기도 하고 원한 같기도 하였다. 그러면 그녀의 정직한 본성은 반항하였다. 그녀는 쥴리에뜨에게 손을 내밀었지 만, 친구의 손이 피부를 스치면 움찔하고 떨리는 것을 어쩌지 못하였다. 그동안 날씨가 나빠졌다. 폭우는 부인들을 일본식 정자 안으로 피신하게 했다. 단정했던 정원은 물바다로 변했고 사람들은 신발이 젖을까 봐 감히 오솔길로 나 서지 못했다. 구름 사이로 햇빛이 다시 빛나자 물에 젖은 초록잎들은 씻긴 듯했 고 라일락은 작은 꽃망울마다 진주를 달고 있었다. 느릅나무 아래 굵은 물방울 이 뚝뚝 떨어졌다. “드디어, 토요일로 다가왔어요!” 어느 날, 드베를르 부인이 말했다. “아! 나는 할 수 있는 일은 다했어요... 그렇지요? 2시에 오세요. 쟌느는 뤼시 앵하고 같이 손님을 맞게 될 거예요.” 무도회 준비로 들떠 다정한 감정에 휩싸인 부인은 두 아이를 껴안은 다음, 웃 으면서 엘렌느의 팔을 잡고 양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이건 나를 위한 거예요.” 부인은 명랑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되겠지요. 실컷 뛰어다녔거든요. 무도회가 얼마나 성공적일지 두고 보세요.” 엘렌느는 냉랭하게 있었다. 의사는 목에 매달린 뤼시앵의 금발머리 너머로 부 인들을 보고 있었다. @p 134 4 작은 저택의 현관에는 삐에르가 정장에 흰 넥타이를 매고 서 있다가 마차 바 퀴 소리가 나면 문을 열었다. 축축한 공기가 확 끼쳤고 습기를 머금은 오후의 노란 광선이 휘장과 관엽 식물로 꽉 찬 좁은 현관방을 비추고 있었다. 2시인데 도 겨울의 침울한 낮처럼 해가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나 하인이 첫번째 살롱의 문을 열자마자, 강렬한 빛이 손님의 눈을 부시 게 했다. 덧문을 닫고 조심스럽게 커튼을 쳐서 희끄무레한 자연광선은 조금도 스며들지 않았다. 가구 위에 놓인 램프와 촛대에서 불타고 있는 초, 크리스탈 장 식들이 살롱을 휘황찬란한 예배당처럼 밝히고 있었다. 회록색 벽지 때문에 조명 에서 나오는 빛이 다소 죽은 듯한 작은 살롱 안쪽에, 검정과 황금색의 큰 살롱 이 해마다 정월이면 드베를르 부인이 여는 무도회 때처럼 장식되어 빛나고 있었 다. 그동안 아이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뽈린느는 몹시 분주하게 붉은 커튼으로 가려 모습이 바뀐 식당 문 앞쪽에 살롱 의자들을 줄맞춰 정돈하고 있었다. “아빠...” 그녀는 소리질렀다. “좀 도와 주세요. 우리끼리는 할 수가 없어요.” 뒷짐을 지고 촛대를 살펴보고 있던 르뗄리에 씨는 도와 주려고 허둥대며 달려 왔다. 뽈린느 자신도 의자를 날랐다. 그녀는 언니의 명령대로 흰 옷을 입고 있었 다. 하지만 윗옷을 네모지게 터서 젖가슴이 보였다. “자, 됐어요.” 그녀는 다시 말했다. @p 135 “이제 사람들이 와도 되겠어요. 그런데 쥴리에뜨는 어디다 정신을 팔고 있는 걸까? 언니는 뤼시앵에게 아직 옷도 입히지 않았나봐.” 바로 그 때, 드베를르 부인이 어린 후작을 데리고 왔다. 거기 있던 모든 사람 들은 탄성을 올렸다. 아이! 사랑스러워라! 꽃다발을 수놓은 흰 공단 옷 위에 금 실로 수놓은 헐렁한 조끼를 겹쳐 입고, 앵두색 비단 반바지를 입은 아이는 정말 귀여웠다. 아이의 턱과 조그만 손은 레이스에 파묻혀 있었다. 커다란 장밋빛 리 본을 단 장난감 검이 엉덩이께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자, 정중하게 인사를 해야지.” 아이를 첫번째 방으로 끌고 가면서 어머니가 말했다. 아이는 일주일 전부터 연습을 했다. 소년은 작은 장딴지로 기사처럼 버티고 서서 분칠한 머리를 약간 제끼고 왼쪽 팔 아래 삼각모를 갖다 대었다. 초대받은 아가씨들이 나타날 때마다, 그렇게 절을 하고 팔을 빌려 주고 인사하고 다시 돌 아왔다. 주위의 웃음을 자아낼 정도로 아이는 시침을 떼고 진지하게 있었다. 이 렇게 뤼시앵은 앙증맞게 젖짜는 아가씨 옷을 입고 허리띠에는 우유통을 매단 다 섯 살짜리 아가씨 마르그리뜨 띠소를 인도했다. 또 베르띠에 가의 꼬마 블랑쉬 와 소피도 인도했는데, 하나는 광대 옷을 입었고 다른 하나는 말괄량이 하녀 옷 을 입고 있었다. 또 어머니가 늘 스페인풍으로 입히길 좋아하는 다 큰 처녀가 된 열네 살짜리 발랑띤느 드셰르메뜨도 맞이했다. 하지만, 제일 어린 두살배기부 터 열 살 먹은 맏이까지 키대로 서서 나타난 르바쇠르 가의 다섯 아가씨 앞에서 는 극도로 당황하였다. 다섯 명 모두 ‘빨간 모자’로 변장하였는데, 챙 없는 작 은 모자를 쓰고, 검은 벨벳 테를 두른 진홍빛 공단 드레스를 입고 그 위에 레이 스로 된 넓은 앞치마를 덧입고 있었다. 아이는 용감하게 마음먹고 모자를 내던 졌다. 그리고 제일 큰 두명을 왼쪽 팔과 오른쪽 팔에 끼고, 나머지 셋은 뒤따르 게 하고 살롱으로 @p 136 들어갔다. 그는 어린 신사로서의 멋진 태연함을 조금도 잃지 않아서 사람들을 매우 즐겁게 했다. 한편, 드베를르 부인은 한 구석에서 동생과 다투고 있었다. “이럴 수가! 이렇게 가슴이 드러난 옷을 입다니!” “흥! 이게 어때서! 아빠도 아무 말 안 하셨는걸.” 뽈린느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꽃다발을 달면 되겠지.” 그녀는 화분에 핀 생화를 하 줌 꺾어 가슴에 쑤셔 넣었다. 잠시 후 부인들과 도시적인 세련된 차림을 한 어머니들이 드베를르 부인을 둘러쌌고, 벌써 무도회 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뤼시앵이 지나가자 어머니는 분칠한 고수 머리를 바로잡아 주었고, 아이는 발돋음을 하고 물었다. “그런데, 쟌느는?” “곧 오겠지. 아가...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라... 빨리 가 봐. 기로 댁 꼬마가 왔 어... 아! 알사스 아가씨처럼 입었네.” 살롱은 꽉 찼고 붉은 커튼 맞은편에 줄지어 놓은 의자도 거의 다 찼다. 애들 목소리가 떠들썩하게 났다. 사내애들은 떼를 지어 나타났다. 벌써 아를르깽 광대 셋, 어릿광대 넷, 피가로 하나, 티롤과 스코틀랜드 복장을 한 여러 애들이 있었 다. 베르띠에 댁 도령은 시동 차림을 하였고, 젖내나는 두 살 반짜리 기로 댁 도 령은 삐에로 의상을 아주 재미있게 입고 있어서 지나치는 사람들마다 안아 주려 고 들어올렸다. “쟌느가 왔네.” 갑자기 드베를르 부인이 말했다. “오! 정말 사랑스럽군.” 가벼운 경탄과 함께 수군거리는 소리가 지나갔고 고개가 그 쪽을 향했다. 쟌 느는 첫번째 살롱 문턱에 있었고, 어머니는 아직 현 @p 137 관에서 외투를 벗고 있는 중이었다. 아이는 위엄 있고 기발한 일본옷을 입고 있 었다. 기이한 새와 꽃이 수놓인 긴 옷은 작은 발까지 덮었고, 넓은 요대 아래 벌 어진 자락으로 노란 물결 무늬가 있는 초록빛 도는 치마가 보였다. 염소같이 빛 나는 가는 눈과 턱, 긴 핀을 찔러 틀어올린 높은 머리 아래 갸날픈 얼굴은 차와 안식향 향기를 풍기며 걷는 진짜 에도의 처녀 같은 인상을 주었고, 무엇과도 견 줄 수 없는 이상한 매력을 발했다. 소녀는 고향을 그리는 이국꽃처럼 병적 우울 함을 풍기며 문턱에 주저하듯 서 있었다. 아이의 뒤에 엘렌느가 나타났다. 두 사람은 거리의 희끄무레한 빛에서 갑자기 강한 조명불빛 아래로 들어왔기 때문에, 눈이 부셔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그래도 웃으면서 눈꺼풀을 깜박거렸다. 살롱의 더운 공기와 바이올렛 꽃 향기가 강하게 떠도는 냄새로 두 사람은 다소 숨이 막혀서, 싱싱한 볼이 빨개졌다. 손님 들은 들어오면서 모두 그렇게 놀랍고 주저하는 표정을 했다. “아, 그런데, 뤼시앵?” 드베를르 부인이 말했다. 아이는 쟌느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급히 달려와 절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소녀의 팔을 잡았다. 꽃다발을 수놓은 옷을 입은 어린 후작이나 자줏빛으로 수 놓은 긴 옷을 입은 일본 아가씨나 둘 다 예민하고 부드러워서 섬세하게 칠하고 금박을 입힌 두 개의 작센 도기 인형이 갑자기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알겠니?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뤼시앵이 속삭였다. “지겨워. 팔을 빌려 주는 것 말야... 응? 우리 같이 있자.” @p 138 아이는 의자 맨 앞 줄에 소녀와 함께 앉았다. 그는 집주인으로서 해야 할 일 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정말 걱정했어요.” 쥴리에뜨는 엘렌느에게 자꾸 말을 걸었다. “쟌느가 몸이 불편하지나 않나 해서요.” 엘렌느는 미안해했다. 애들하고는 한도 끝도 없지요. 의사가 뒤에서 다가오는 것을 느꼈을 때, 그녀는 아직 살롱 한 구석 부인들 틈에 선 채로 있었다. 그는 붉은 커튼을 제치고 들어오다가, 다시 머리를 내밀고 마지막 지시를 내리고는 들어온 참이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멈췄다. 그쪽으로 돌아서 있지 않았는데도 남자 역시 젊은 여인을 알아보았다. 검은 명주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어느 때보 다도 여왕처럼 아름다웠다. 그녀가 밖에서 몰아온 시원함이 투명한 천 아래 비 쳐 보이는 팔과 어깨에서 발산되는 것 같아서 그는 전율을 느꼈다. “형부한테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군요.” 뽈린느가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앙리.” 그는 다가가서 부인들에게 인사했다. 거기 있던 오렐리 양은 자신이 데려온 먼 사촌을 소개하기 위해 잠시 그를 붙들었다. 그는 인사를 한 후 남아 있었다. 엘렌느는 말없이 검은 장갑에 싸인 손을 내밀었고, 그는 차마 그 손을 세게 쥐 지 못했다. “아이! 당신 거기 있었군요!” 드베를르 부인이 다시 나타나면서 소리쳤다. “당신을 찾으러 사방 다녔어요... 3시 가까이 됐는데, 시작해야 되지 않겠어 요?” “물론이지. 곧 시작합시다.” 이제 살롱은 꽉 차 있었다. 방 가장자리, 촛대의 휘황한 불빛 아 @p 139 래는 부모들의 도시풍 차림새로 어두운 테두리를 두른 듯하였다. 부인들은 의자 를 당겨서 한쪽에 무리를 짓고 있었고, 벽을 따라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남자 들이 그 틈새를 메우고 있었다. 옆에 붙은 살롱 문에는 프록코트가 점점 더 많 이 겹쳐 쌓였다. 모든 빛이 넓은 방 가운데에서 움직이는 어린이들을 향하고 있 었다. 거기에는 1백 명가량 되는 애들이 뒤섞여서, 밝은 빛깔 옷들로 화려하게 울긋불긋하였는데 파랑색과 장미색이 환하게 두드러졌다. 원래의 고운 빛에서 붉은 황금빛까지 갖가지 농담의 금발 머리가 들을 이루고 리본과 꽃이 불쑥 솟 아 있었다. 깔깔거리는 웃음에 금발 머리카락들은 수확기의 고식이 산들바람에 흔들리듯 출렁거렸다. 때때로 리본과 레이스, 비단, 벨벳이 뒤섞인 가운데 한 얼 굴이 이쪽을 향했다. 장밋빛 코와 푸른 두 눈, 웃고 있거나 뾰로통한 입은 정신 이 팔려 있는 듯했다. 개중에는 열 살짜리 애들 틈에 파묻혀 있는 어른 장화 키 만한 얼굴도 있어서, 어머니들이 멀리서 보면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치마를 부 풀리고 있는 계집아이들 옆에서 사내애들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거북한 듯 보였다. 어떤 애들은 알지 못하는 옆의 여자애를 팔꿈치로 찌르고 얼굴을 마주 보고 웃으면서 벌써 이성에 대한 대담함을 드러냈다. 소녀들은 여왕처럼 있지 않으면 서너 명씩 무리를 지어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큰 소리로 얘기하 면서 앉아 있는 의자를 부숴 버릴 듯 난리를 쳤다. 모든 눈동자는 붉은 커튼에 박혀 있었다. “잠깐만!” 식당문을 가볍게 세 번 두드리면서 의사가 말했다. 붉은 커튼이 천천히 열렸다. 문틀 안에 인형 극장이 나타났다. 그러자, 조용해 졌다. 어릿광대가 무대 뒤에서 갑자기 사나운 꽥 소리를 지르며 뛰어 나왔고, 어 린 기로는 놀라고 신이 나서 탄성으로 답했다. 어릿광대가 단장을 두들겨 패고 순경을 죽이며 인간의 모 @p 140 든 신성한 법규를 짓밟는 끔찍한 연극이었다. 막대기가 나무로 된 머리를 쪼개 놓을 때마다 무자비한 관람석에서는 자지러질 듯한 웃음이 터졌다. 꼬챙이가 가 슴을 뚫고, 결투의 탄환이 적수의 두개골을 속 빈 호박처럼 깨부수고, 팔다리가 뒤죽박죽 포개지고 사람들이 곤죽이 되면, 꺼질 줄 모르고 사방에서 일어나는 왁자지껄한 웃음소리는 배로 커졌다. 어릿광대가 무대가에서 순경의 목을 톱으 로 켜자 웃음은 절정에 달했다. 그 광경은 대단한 즐거움을 불러 일으켜서 관객 들의 줄은 서로 엎어지느라고 헝클어졌다. 장밋빛 볼과 흰 피부를 한 네 살짜리 여자아이는 행복한 듯 가슴에 고사리손을 대고 있었는데, 아주 굉장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애들은 박수를 치고, 소년들은 피리처럼 높은 여자애들의 소리에 반주를 넣듯 묵직한 소리로 입을 벌리고 웃었다. “정말 재미있어 하는군요.” 의사가 속삭였다. “정말 우스워요!” 흥분한 어린아이들은 이제 연극과 뒤섞여 버렸다. 아이들은 배우의 상대역을 했다. 줄거리를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한 어린 계집아이는 금방 일어날 일을 설명 하였다. ‘조금 있으면 저 사람은 제 아내를 죽여. 이제 저 사람은 붙잡혀.’ 르 바쇠르 막내는 두 살이었는데 갑자기 소리쳤다. “엄마, 저 사람을 마른 빵에 넣어?” 그것은 깊이 생각한 끝에 나온 감탄의 말이었다. 한편, 엘렌느는 아이들 틈에 서 딸을 찾고 있었다. @p 141 “쟌느가 보이지 않는군요. 그 애도 재미있어 할까요?” 의사는 허리를 굽혀 머리를 엘렌느에게 가까이 하고 속삭였다. “자, 저기 어릿광대하고 노르망디 아가씨 사이에 머리에 꽂은 핀이 보이지 요? 좋아서 웃고 있는데요.” 그는 엘렌느의 얼굴에서 전해 오는 미지근한 온기를 볼에 느끼며 몸을 굽힌 채 있었다. 아직까지 어떤 고백도 그들은 한 일이 없었고 그러한 침묵은 두 사 람을 친밀한 상태로 유지시켰다. 다만 얼마 전부터 알지 모할 동요가 그것을 방 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꾸밈없는 웃음 속에서 장난꾸러기들과 마주 하자 여자는 다시 어린아이가 되었고, 앙리의 숨결이 목덜미에 후끈하게 느껴졌으나 내버려 두고 있었다. 소리나는 막대기를 내리치자 그녀는 숨을 들이쉬며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빛나는 눈으로 남자를 향해 돌아보았다. “맙소사! 정말 어리석군요!” 그녀는 여러 번 말했다. “아유! 저렇게 때리다니!” 그는 전율하면서 대답했다. “아! 머리가 딱딱하군요.” 그것이 그의 느낌 전부였다. 그들은 둘 다 어린이가 되어 있었다. 얼토당토않 은 어릿광대의 삶은 그들을 김빠지게 했다. 연극이 마지막에 이르러 악마가 나 타나고 일대 싸움이 벌어져 부분별한 살육이 행해지자 엘렌느는 몸을 뒤로 젖혔 고, 앉아 있는 안락의자 등받이에 놓여 있던 앙리의 손을 찧어 버렸다. 한편, 아 래 있는 어린이들은 소리를 지르고 손뼉을 치며 열광하여 의자들이 삐걱거렸다. 붉은 커튼이 다시 내려졌다. 소란스런 가운데 뽈린느가 언제나 하는 식으로 말리뇽이 온 것을 알렸다. “아! 멋쟁이 말리뇽이에요.” 그는 헐떡거리면서 의자를 밀어젖히고 나타났다. @p 142 “세상에! 뭘 하는 데 이렇게 꽉꽉 닫아 놓은 거예요!” 그는 놀라움에 주저하면서 외쳤다. “무덤에 들어오는 것 같아요.” 그리고 다가오고 있는 드베를르 부인 쪽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저를 뛰어다니게 하셨으니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겁니다! 오늘 아침부터 저 는 뻬르디게를 찾아다녔어요. 아시죠? 제가 말한 가수... 하지만 그를 만날 수 없 어서 키다리 모리조를 데리고 왔습니다...” 키다리 모리조는 작은 공들을 감추는 재주로 살롱을 유쾌하게 만드는 재주꾼 이었다. 사람들은 원탁을 내주었고 그는 가장 근사한 재주를 선보였으나 관중들 은 조금도 흥미를 갖지 않았다. 불쌍한 어린 것들은 아주 심각해졌다. 젖내나는 어린애들은 손가락을 빨며 잠이 들었다. 좀더 나이든 아이들은 방심한 채 하품 을 하고 있는 부모들에게 고개를 돌리고 웃어 보였다. 키다리 모리조가 원탁을 치우려 하자 모두 안도하였다. “오! 아주 잘하지요.” 말리뇽이 드베를르 부인의 목에 대고 속삭였다. 붉은 커튼이 다시 열리고 요술 같은 광경이 어린이들을 일어서게 했다. 중앙 램프와 가지가 열 개씩 달린 두 촛대의 휘황한 불빛 아래, 만찬 때처럼 장식되어 차려진 긴 식탁이 놓인 식당이 펼쳐졌다. 50벌의 식기가 놓여 있었다. 가운데와 양 끝에 놓인 운두가 낮은 바구니 안에는 꽃이 수북하게 피었고 높은 굽이 달린 그릇들이 놓였는데 그 안에는 ‘깜짝 선물’들이 금박과 오색 종이를 반짝이며 쌓여 있었다. 쌓아올린 케이크, 설탕 입힌 과일 피라미드, 수북한 샌드 위치, 그 아래에는 사탕과 과자가 가득 담긴 여러 개의 접시들이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럼주에 적신 건포도를 넣은 카스테라, 슈크 @p 143 림, 브리오슈가 비스킷과 크로끼뇰, 아몬드를 넣은 과자와 엇갈려 있고 젤리가 크리스탈 단지 안에서 흔들거렸다. 크림이 여러 개의 자기 단지를 채우고 있었 다. 식탁을 빙 둘러 회식자들의 허리 높이, 손닿는 데에는 샴페인 병의 은빛 마 개가 빛나고 있었다. 아이들이 꿈 속에서나 그릴 수 있을 굉장한 티테이블로, 만 찬 식탁처럼 엄숙하게 차려져서 어른들의 식탁을 동화적으로 암시하고 있었으 며, 과자점과 장난감 가게를 그 위에 있는 대로 들이부은 것 같았다. “자, 숙녀들과 팔을 끼세요.” 아이들의 환호에 웃음을 띠면서 드베를르 부인이 말했다. 그러나 행진은 질서정연하지 못했다. 뤼시앵은 의기양양해서 쟌느와 팔을 끼 고 맨 먼저 걸어갔다. 그 뒤로 다른 애들이 다소 밀치며 몰려들었다. 엄마들이 제 자리를 찾아 주러 와야 했다. 엄마들은 거기 머물러서 아주 어린 꼬마들 뒤 에 서서 사고를 일으키지 않나 감시하였다. 사실 처음에는 연회에 참가한 꼬마 손님들은 몹시 거북한 듯했다. 아이들은 서로 쳐다보고, 애들이 자리에 앉고 어 른들은 서 있는 반대 상황을 막연히 불안해하면서, 이 모든 맛난 것들을 감히 건드리지 못하였다. 마침내 제일 큰 애들이 용기를 내어 손을 뻗었다. 엄마들이 쌓아 올린 케이크를 잘라 주위에 권하며 합세하자 아이들은 활발하게 상에 달려 들었고 곧 몹시 소란스러워졌다. 식탁의 완벽한 대칭은 돌풍이 쓸고 간 것처럼 허물어졌다. 모든 접시들이 길게 뻗은 팔 사이로 한꺼번에 돌아다녔고, 그 팔들 은 스치면서 접시를 비웠다. 베르띠에 가의 어린 두 딸 블랑쉬와 소피는 접시를 들고 웃고 있었는데 그 접시에는 잼이며, 크림이며, 케이크, 과일 등이 전부 얹 혀 있었다. 르바쇠르 가의 다섯 딸들은 단 것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었고, 발 랑띤느는 열네 살이라는 나이 @p 144 에 걸맞게 주위를 돌보며 철든 숙녀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한편 뤼시앵은 신사 다움을 뽐내기 위해 샴페인 병마개를 땄다. 그러나 몹시 서툴러서 내용물을 앵 두색 비단 반바지에 엎지르고 말았다. 사고였다. “병을 놔 둬!” 뽈린느가 소리질렀다. “내가 병마개를 따 줄께.” 그녀는 저로서는 재미삼아서 별난 행동을 하고 있었다. 하인이 나타나자 그녀 는 초콜릿차 주전자를 빼앗아 카페의 급사처럼 재빠르게 잔에 따르며 흥겨워했 다. 그리고 유리잔과 시럽이 든 유리병 사이를 다니면서 그것들을 전부 열어 놓 고는 어른들이 잊고 있는 계집아이들을 잔뜩 먹이기 위해 이 애 저 애한테 자꾸 물었다. “너 뭐 좀 먹을래, 거기 뚱뚱한 애? 응? 브리오슈?... 잠깐만, 예쁘지, 오렌지 줄게... 먹어 봐, 바보야, 노는 것은 그 담에 하고!” 좀더 침착한 드베를르 부인은 애들이란 가만 내버려 두어야 하고, 그러면 애 들도 그럭저럭 잘 해나갈 수 있다고 되풀이 말했다. 방 한쪽에서는 엘렌느와 몇 몇 부인들이 식탁의 광경을 보며 웃고 있었다. 모든 장밋빛 주둥이들이 예쁜 흰 이를 드러내고 와작와작 먹고 있었다. 엄격하게 잘 키워진 어린이들이 때로 어 린 야만인 같은 실수에 빠져 자신을 잊고 있는 모습처럼 우스꽝스러운 것은 없 다. 아이들은 바닥까지 비우려고 양 손으로 잔을 잡고 얼굴에 묻히고 옷을 더렵 혔다. 왁자지껄 하는 소리가 커졌다. 아이들은 마지막 접시까지 휩쓸었다. 쟌느 조차도 살롱에서 까드릴이 연주되는 소리를 듣고 의자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 다. 어머니가 너무 먹는다고 나무라며 다가가자 아이는 말했다. “오1 엄마, 나 오늘 정말 좋아요.” 음악은 아이들을 일어나게 했다. 식탁 주위는 점점 텅 비어서 이 @p 145 윽고 한가운데 살찐 아기밖에는 남지 않았다. 아기는 피아노 소리를 무시하는 듯했다. 목에 냅킨을 두르고 턱이 식탁보에 닿을 정도로 키가 작았는데 눈을 둥 그렇게 뜨고 어머니가 초콜릿차 숟갈을 댈 때마다 입을 내밀었다. 잔이 비었는 데도 아기는 눈을 더 크게 뜨고 계속 삼키며 입술을 핥았다. “이크! 이 녀석 좀 보게. 신나는구나!” 말리뇽이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 때, ‘깜짝 선물’이 나눠지고 있었다. 애들은 식탁을 떠나면서 각자 얇은 황금빛 종이에 싸인 선물을 들고 와 포장을 뜯느라고 바빴다. 어린이들은 거기 서 장난감과 얇은 종이로 만든 기묘한 머리장식, 새, 나비 따위를 끄집어냈다. 그러나 가장 신나는 것은 폭죽이었다. ‘깜짝 선물’마다 폭죽이 들어 있었는데, 사내애들은 너무 좋아 신이 나서 쏘아댔고, 계집아이들은 몇 번이고 해보려고 하면서 눈을 감았다. 잠시 동안 일제사격의 건조한 폭발음만이 들렸다. 이러한 소동 속에서 아이들은 피아노가 끊임없이 까드릴 곡조를 연주하고 있는 살롱으 로 돌아갔다. “브리오슈를 하나 먹어야겠어.” 오렐리 양이 앉으며 중얼거렸다. 아직도 많은 후식이 흩어져 있는 빈 식탁에 부인들이 자리를 잡았다. 먹기 위 해 점잖게 기다려 온 열 명가량의 부인이었다. 하인이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에 바쁘게 된 것은 말리뇽이었다. 그는 초콜릿차 주전자를 비우고 병 속을 살펴보 고 잔을 찾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부인들에게 계속 친절을 베풀면서도 그는 덧 창이 닫혀있는 데 여전히 집착하였다. “이건 정말 굴 속에 있는 겁니다.” 엘렌느는 드베를르 부인과 이야기하면서 서 있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건드리 는 것을 느꼈을 때, 부인은 살롱으로 돌아가는 중이 @p 146 었고 엘렌느는 그 뒤를 따르려 하고 있었다. 의사가 그녀에게 웃어 보였다. 그는 여자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 드십니까?” 그가 물었다. 이 평범한 질문 속에 너무나 간절한 애원이 담겨 있어 여자는 큰 혼란을 느꼈 다. 남자가 제게 다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주위를 둘러싼 흥 겨움 속에서 그녀도 차차 흥분되었다. 소리치고 팔짝팔짝 뒤는 작은 아이들은 여자에게 열기를 옮겨 주었다. 여자는 발그레한 뺨과 빛나는 눈을 하고 처음에 는 거절하였다. “고맙지만, 아무것도 생각없어요.” 그러나 조바심에 사로잡힌 남자가 고집을 부렸기 때문에,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대답했다. “좋아요! 차 한 잔 주세요.” 남자는 달려가서 차를 가져왔다. 차를 내미는 남자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여 자가 마시고 있는 동안 남자는 가슴 속에 치미는 고백으로 부풀어 올라 떨리는 입술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여자는 빈잔을 내밀고 물러섰다. 남자가 잔을 이동 식기대에 놓는 동안, 그녀는 차근차근 접시를 조사하며 천천히 씹어 먹고 있는 오렐리 양만 있는 식당에 그를 혼자 내버려 두고 도망쳤다. 살롱 안쪽에서 피아노가 크게 연주되고 있었다.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랑스 럽고도 우스꽝스러운 무도회가 시작되었다. 쟌느와 뤼시앵이 까드릴을 추고 있 는 둘레에 원이 만들어졌다. 어린 후작은 다소 얼굴이 흐려져 있었다. 소년은 쟌 느를 잡을 때만 기분이 좋았다. 아니는 쟌느를 양 팔로 껴안고 돌았다. 쟌느는 소년이 옷을 구기는 것이 싫어서 숙녀처럼 이쪽저쪽으로 몸을 틀었다. 꽃다발을 수놓은 흰 공단 옷이 기이한 새와 꽃을 수놓은 긴 옷과 섞였고, 두 개의 고풍스 런 작센 자기 인형은 진열장에 놓인 장식품처럼 이상 @p 147 한 우아함을 풍겼다. 까드릴이 끝나자 엘렌느는 옷을 바로잡아 주려고 쟌느를 불렀다. “그 애가 그랬어, 엄마.” 어린 소녀가 말했다. “그 애가 비벼대서 그래. 참을 수 없어.” 살롱 둘레에는 부모들이 미소짓고 있었다. 피아노가 다시 연주되자 꼬마들은 다시 팔짝팔짝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 은 경계심을 품었다. 아이들은 심각해 있었고 점잖게 보이려고 깡총거리고 싶은 것을 참았다. 몇 명은 춤출 줄 알았지만 곡을 모르는 대부분은 팔다리를 어쩔 줄 모르면서 마루 위를 왔다갔다 했다. 그러자, 뽈린느가 끼어들었다. “참견 좀 해야겠네... 아유! 얼간이들!” 그녀는 까드릴 한가운데 뛰어들어, 오른손과 왼손에 하나씩 붙들고 춤추면서 어찌나 흔들었던지 마루널이 삐걱거렸다. 제각기 뒤축을 부딪히는 무수한 작은 발소리밖에는 들리지 않았고, 피아노는 저 혼자 박자를 맞추어 연주하였다. 어른 들도 합세하였다. 드베를르 부인과 엘렌느는 소녀들이 감히 뛰어들지 못하고 부 끄러워 하고 있는 것을 보자, 그 애들을 사람이 가장 많은 데로 데려갔다. 두 부 인은 대오를 짓고, 기사들을 부추겨서 원을 만들게 했다. 어머니들이 아주 어린 아기들을 그리고 보냈기 때문에 한동안 두 부인은 아기들의 손을 잡고 뛰게 해 주었다. 그리하여 무도회는 한창 무르익었다. 춤추는 아이들은 사감선생이 없는 틈을 타 좋아라고 장난하는 기숙사생처럼 웃고 서로 떼밀면서 마음껏 놀았다. 축소된 세계 속에서, 소설이나 연극에 나오는 환상적인 옷과 모든 민속의상을 입고 꼬마 신사와 꼬마 숙녀들이 뒤섞여 있는 이 카니발처럼 꾸밈 없는 기쁨은 없었다. 장밋빛 입술과 푸른 눈, 몹시 부드러운 표정 때문에 옷들도 애들다운 신 선함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어 @p 148 느 잘생긴 왕자의 결혼식에 사랑의 신들이 변장하고 나타나는 요정 이야기 속의 축제 같았다. “숨이 막혀요.” 말리뇽이 말했다. “바람을 쐬러 가야겠어요.” 그는 커다란 살롱의 문을 열고 나갔다. 한낮의 거리에서 한순간 희끄무레한 빛이 들어와 램프와 촛대의 휘황한 빛을 죽게 했다. 15분마다 말리뇽은 문을 들 락거렸다. 그러나 피아노는 멈추지 않았다. 기로 댁 어린 아가씨는 금발에 알사스 풍의 검은 나비를 달고 저보다 두 배는 큰 어릿광대 팔에 매달려 춤을 추었다. 스코 틀랜드 도령은 마르그리뜨 띠소를 너무 빨리 돌려 소녀는 그 와중에 우유통을 잃어버렸다. 서로 꼭 붙어 있는 베르띠에 댁 두 아가씨 블랑쉬와 소피는 방울을 짤랑거리며, 광대의 팔에 하녀가 매달려서 함께 뛰었다. 하지만 르바쇠르 아가씨 들을 안 보고 지나칠 수는 없었다. ‘빨간 모자’들은 수가 늘어난 것 같았다. 도처에 검은 벨벳 테를 두른 진홍색 공단 드레스와 챙없는 작은 모자가 있었다. 한편, 좀 큰 소년 소녀들은 편하게 춤추려고 다른 살롱 구석에 피신해 있었다. 스페인식 머리수건을 쓴 발랑띤느 드 세르메뜨는 정장차림을 한 어린 신사 앞에 서 제법 스텝을 밟고 있었다. 갑자기 문 뒤 구석에서 두 살짜리 삐에로 기로 도 령과 시골 아가씨 차림을 한 동갑나기가 넘어질까 두려워 서로 꼭 끌어안고, 엉 큼하게 뺨에 뺨을 대고 단 둘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더 못하겠어요.” 식당 문에 기대며 엘렌느가 말했다. 그녀는 뛰느라고 얼굴이 빨개져 부채질을 했다. 그녀의 가슴이 비치는 명주 저고리 안에서 불룩거렸다. 그녀는 또다시 어깨에 앙 @p 149 리의 입김을 느꼈다. 그는 계속 등 뒤에 있었다. 그녀는 남자가 곧 말하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더 이상 남자의 고백을 피할 기운도 없었다. 그는 다가와서 아 주 낮게 머리카락 속에 대고 말했다. “사랑하오! 오, 사랑하오!” 그것은 이글이글 달아오른 숨결처럼 여자를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태웠다. 맙소사! 그는 결국 말을 해 버렸고, 여자는 더 이상 모르는 척 감미로운 평화를 누릴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부채 뒤에 붉어진 얼굴을 숨겼다. 아이들은 마지막 까드릴에 열광하여 발뒤축을 더욱 세게 두드렸다. 은을 부딪는 듯한 웃음소리가 울리고 새떼 같은 목소리가 가벼운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작은 악마들의 갤롭 춤이 되어 버린 어린이들의 원무에서 시원한 바람이 일었다. “사랑하오! 오, 당신을 사랑하오!” 앙리는 되풀이했다. 그녀는 또 한 번 몸을 부르르 떨며 더 이상 듣지 않으려 했다. 고개를 숙이고 그녀는 식당 안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그 방은 비어 있었다. 르뗄리에 씨만이 의 자 위에서 평화롭게 자고 있었다. 앙리는 여자를 쫓아갔다. 그는 추문의 위험을 무릅쓰고 여자의 손을 쥐었다. 그 얼굴은 열정으로 격동되어 있어 여자를 떨게 했다. 그는 계속 되풀이했다. “사랑하오... 사랑하오...” “저를 내버려 두세요.” 여자는 꺼질 듯이 중얼거렸다. “저를 내버려 두세요. 당신은 미쳤어요...” 옆에서는 작은 발자국 소리와 함께 어지러운 무도회가 계속되고 있는데! 소음 에 파묻혀 잘 들리지 않는 피아노 음에 맞추어 블랑쉬 베르띠에가 떠는 소리가 들렸다. 드베를르 부인과 뽈린느는 박자를 맞추기 위해 손뼉을 쳤다. 폴카의 박 자였다. 엘렌느는 쟌느와 뤼 @p 150 시앵이 서로 손을 허리에 감고 웃으며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돌발적으로 몸을 빼서 옆 방으로 피했다. 그 방은 환한 빛이 들어오는 사무실이었다. 갑작스럽게 밝아져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두려웠다. 누구나 분명히 읽을 수 있는 열정을 얼굴에 담고 살롱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녀는 무도회의 춤추는 소리를 뒤로 하고 정원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갔다. 5 제 방으로 올라와, 다시 감미로운 고립 속에 있게 되자 엘렌느는 질식할 것 같았다. 그녀를 뒤흔드는 감정의 열렬하고 급박한 숨결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도 조용하고, 외따로 떨어져 푸른 벨벳 벽지 아래 잠든 듯한 방은 그녀를 놀라게 했다. 이것이 내 방이던가? 이 답답한 죽은 듯이 외로운 구석이? 그녀는 거칠게 창문을 열고 팔꿈치를 괴고는 빠리를 바라보았다. 비가 멈추고 괴물의 무리 같은 구름이 물러가고 있었다. 흐트러진 구름의 무 리가 지평선을 안개에 잠긴 듯 흐릿하게 했다. 푸른 구멍이 도시 위에 생겨서 차츰 넓어졌다. 창틀에 떨리는 팔꿈치를 받치고 너무 급히 올라오느라 아직도 숨을 몰아쉬는 엘렌느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가슴을 들먹이면 서 쿵쿵 부딪는 소리만 들렸다.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강물과 넓은 계 곡, 거기 살고 있는 2백만, 거대한 주거지와 멀리 보이는 산비탈에는 그녀의 가 쁜 숨결을 평화롭고 고르게 해줄 공기가 충분히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몇 분 동안 그녀는 완전히 위기감에 사로잡혀 정신을 놓고 그렇게 있었다. 혼 란된 생각과 감각이 거대한 흐름처럼 내부에 일어 그 @p 151 소리가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이해하는 걸 방해하였다. 귀는 윙윙거렸고 눈은 천천히 이동하는 넓고 밝은 얼룩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장갑낀 손을 살펴보다 가 왼쪽 장갑의 단추를 새로 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음을 깨닫고 놀랐다. 그 녀는 크게 말해 보았다. 그리고 점점 낮은 소리로 몇 번 되풀이했다. “사랑하오... 사랑하오... 맙소사! 사랑하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깍지 낀 손 안에 얼굴을 묻었고, 둘레의 어둠을 더 깊게 하려는 듯 닫힌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꺼져버리고 싶은 욕망,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암흑 밑바닥에 홀로 있고 싶은 욕망이 그녀를 덮쳤다. 그녀의 호흡이 차분해졌다. 빠리는 얼굴에 강한 숨결을 불었다. 그녀는 보지 않고도 빠리가 거 기 있음을 느꼈고, 창문을 떠나면 그 무한함으로 자신을 안심하게 해주는 도시 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곧, 그녀는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자기도 모르게 고백의 장면이 다시 떠올랐 다. 먹물처럼 깜깜한 바탕에 앙리가 유난히 선명하고 생생하게 나타나서 그 입 술의 안절부절 못하는 작은 떨림까지도 분별할 수 있었다. 그는 다가와서 몸을 굽혔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그 다음을 물리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어깨 를 스치는 열기를 느꼈고, 목소리를 들었다. “사랑하오... 사랑하오...” 그녀가 있는 힘껏 그 영상을 쫓아내면 멀리서부터 그것이 다시 떠올라 점점 확대되는 것이 보였다. 또 다시 앙리였다. 그는 같은 말을 하며 식당으로 쫓아왔다. “사 랑하오... 사랑하오...” 그 말의 반복이 내부에서 종소리처럼 낭랑하게 울렸다. 손발 끝까지 크게 울리는 그 말밖에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 말은 가슴을 찢어놓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생각하려고 하면서 여전히 앙리의 영상을 몰아내 려고 애썼다. 그가 말해 버린 이상 다시는 감히 그를 대면하지 못하리라. 남자의 맹렬함이 그들의 다정함을 상하게 한 것 @p 152 이다. 남자가 그것을 무자비하게 내뱉지 않았을 때의 다정했던 시간들이 떠올랐 다. 피어나는 봄의 고요함 속에서 정원 한 구석에서 흘러간 시간들을. 맙소사! 말을 하다니! 그 생각은 끈질겼으며 너무 크고 무거워져, 벼락이 눈앞에서 빠리 를 쪼개 놓는다 하더라도 그녀에게는 그만큼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 상처받은 자존심이 뱃속 깊은 데서 올라와 그녀를 어지럽게 만드는 물리칠 수 없는 집요한 욕망과 혼합되었다. 그는 말고 계속 말 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지난 삶을 모조리 휩쓸어 버리는 타는 듯한 말과 함께 그가 집요하게 떠올랐다. “사랑하오... 사랑하오...” 하지만 그런 중에도 그녀는 눈감아 버린 어둠 뒤에 펼쳐진 막막한 넓이를 의 식하였다. 높은 목소리가 올라왔다. 생생한 파동이 퍼지며 그녀를 둘러쌌다. 신 경질적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는 손에도 불구하고 소음과 냄새, 빛까지 얼굴을 때렸다. 때로 갑작스런 섬광이 감겨진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는 듯했다. 순간 꿈 속에서 용해된 햇빛 위에 건물과 첨탑, 돔이 떠오르는 것이 보인 듯했다. 그녀는 손을 떼고 눈을 떴다. 눈이 부셨다. 하늘이 움푹 꺼지면서 앙리는 사라졌다. 저 맞은편에 한 줄의 구름만 보였다. 백묵 같은 돌더미가 굴러내려 쌓였다. 지 금은 맑은 남색 하늘에 가벼운 흰 구름이 바람에 부푼 돛을 단 작은 선대처럼 천천히 떠가고 있을 뿐이었다. 북쪽, 몽마르트르 위에는 바랜 비단 폭을 펼친 듯 한 고요한 바다 한 모퉁이에 고기잡이 배 몇 척이 펼쳐 놓은 아주 고운 그물이 보였다. 해질녘에는 창문에서 보이지 않는 뫼동 언덕 쪽은 아직도 소나기 줄기 에 해가 잠겨 있는 것이 분명했다. 개어 있는 쪽의 빠리도 어둠침침하게 보이는 것은 젖었다가 마르고 있는 지붕의 김으로 흐릿하였기 때문이다. 판암의 푸르스 름한 회색이 도시의 유일한 색조였 @p 153 고, 수천 개의 창문과 뾰족한 지붕 마루, 나무들은 아주 선명한 까만 점을 이루 고 있었다. 세느 강은 낡은 은괴처럼 변색된 빛을 발하였다. 양 안의 건물들은 그을음을 칠해 놓은 듯했다. 녹슨 생 자끄 탑은 박물관의 고물처럼 서 있고, 빵 떼옹은 어둑한 부근 지역위로 거대한 영구대 같은 윤곽을 드러내었다. 앵발리드 의 돔만이 금박에 싸여 빛을 발하였다. 도시에 드리워진 어슴푸레한 장막 가운 데 꿈꾸는 듯한 애수를 띠고 환하게 빛나고 있는 램프불이라고 할 만하였다. 거 리는 분별할 수 없었다. 빠리는 구름에 덮여 있었고, 지평선만 투명한 하늘 아래 거대하고 섬세한 참빗살나무처럼 활활 타고 있었다. 엘렌느는 침울한 도시를 내려다보며 자신이 앙리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생 각하였다. 이제 그의 영상이 그녀를 따라다니지 않자, 그녀는 몹시 강해졌다. 어 떤 저항감이 몇 주 동안 홀린 듯 그 남자로 채워져 있던 상태를 거부하게 했다. 그렇다,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 그녀는 그의 행동이나 생각, 그 무엇도 알지 못 했다. 그녀는 그가 훌륭한 지성을 갖추었는지조차 말할 수 없었다. 지성보다도 감정이 모자라는 것은 아닐까? 그 하나하나마다 맛보게 되는 씁쓰름함으로 가득 차면서, 그녀는 이렇게 모든 추측을 해보았다. 그녀는 줄곧 자신의 무지와 그를 알지 못하게 방해하고 갈라놓는 앙리와 저 사이의 벽에 부딪혔다. 그녀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는 타는 듯한 말을 쏟 아놓아 지금까지 행복하게 평화로웠던 제 삶에 파란을 가져온 난폭한 인간일 뿐 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괴로울까? 갑자기, 그녀는 불과 여섯 주일 전, 그에게 자기는 존재조차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그 생각은 그녀를 견딜 수 없게 했다. 세상에! 서로에게 존재하지도 않았고, 쳐다보지도 않았고, 만 나지도 않았지! 눈물이 고이고 그녀는 절망스럽게 손을 마주 잡았다. @p 154 엘렌느는 저 멀리 노트르 담의 탑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구름 사이로 한 줄 기 빛이 뻗쳐 탑을 금빛으로 물들였다. 수많은 복잡한 생각들이 서로 부딪치고 있는 것처럼 머리가 무거웠다.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평소처럼 고요한 눈길로 지 붕의 바다 위를 산책하며 고요함을 회복하고 빠리에 흥미를 느낄 수 있기를 바 랐으리라. 이맘때면 그 커다란 도시의 알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부드러운 꿈처럼 얼마나 그녀를 달래 주었던가! 그동안 눈앞의 빠리는 햇빛에 환해졌다. 노트르 담 위를 비춘 첫번째 빛에 이어 다른 빛들이 도시를 비추었다. 천체가 기울면서 구름을 쪼개 놓았다. 그러자, 어둠과 밝음으로 얼룩덜룩해진 시내가 펼쳐졌다. 좌안은 잠시 납 같은 회색이 되었고, 커다란 짐승 가죽처럼 강을 따라 펼쳐진 우안에는 둥근 빛이 호랑이 무늬를 수놓았다. 바람이 구름을 흩어놓자, 그 형태 가 변하며 움직였다. 그것은 금빛 색조의 지붕 위를 한 방향으로 계속 부드럽게 조용히 미끄러져 날아가는 검은 조각들이었다. 그중에는 전열을 갖추고 대칭으 로 함대를 이룬 훨씬 작은 것들에 둘러싸여 해군 제독의 배처럼 위풍당당하게 항해하는 거대한 것들도 있었다. 한순간 길게 뻗은 넓은 그늘이 파충류처럼 아 가리를 벌리고 집어삼킬 듯 빠리를 내달았다. 그 그늘은 지평선 속으로 기어다 니는 벌레처럼 작아져 사라져 버리고, 한 줄기 빛이 갈라진 구름 사이로 쏟아져 나와 그것이 남긴 빈 구멍에 떨어졌다. 거기서 금빛 먼지가 고운 모래처럼 피어 나 커다란 원추형으로 퍼지고, 춤추듯 빛을 튀면서 쉬지 않고 샹 젤리제 쪽에 내리는 것이 보였다. 이 반짝이는 소나기가 계속 피어오르는 빛먼지와 함께 한 참 지속되었다. 그렇다! 열정은 치명적이었다. 엘렌느는 이제 자신을 방어하지 않았다. 그녀는 제 마음을 거스르는 데 힘이 다했음을 느꼈다. 앙리는 그녀를 안을 수 있으리라. 그녀는 자신을 포기하였다. 더 이상 발버둥치지 않자 무한한 행복이 느껴졌다. 무엇 때문에 더 이상 @p 155 거부하랴? 나는 충분히 기다리지 않았던가? 지난 삶의 기억이 그녀를 경멸감과 격렬함으로 꽉 채웠다. 전에는 어떻게 그리도 자부심을 갖고 냉랭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 마르세이유의 쁘띠뜨 마리가, 항상 덜덜 떨리던 그 거리의 젊은 처녀 가 다시 보였다. 혼인한 자신이, 벗은 발에 키스하던 덩치 큰 어린애 옆에서 자 잘한 살림 걱정 속에 파묻혀 얼어 있는 자신이 다시 보였다. 고요함을 흩어놓을 아무런 감동도 없이 똑같은 발걸음으로 똑같은 길을 따라온 지난 사람의 모든 순간들이 다시 보였다. 지금 그러한 무사함, 사랑 없이 잠들어 있음은 그녀를 노 하게 했다. 삶의 빈 자리를 메꿀 것이라고는 정숙한 아내로서의 자존심밖에 없 이 마음을 닫고 남은 30년을 지내는 것이 행복하리라고 생각하다니! 아! 경건한 여인들의 메마른 기쁨 속에 사람들 가두는 이러한 고지식함, 정직이라는 조심성 은 얼마나 속임수인가! 아니야, 아니야, 이젠 됐어. 나는 살고 싶어! 이성이라구? 끔찍한 빈정거림이 올라왔다. 정말 동정심이 느껴졌다. 기나긴 지난 삶 속에서 이성은 방금 한 시간 동안 맛보았던 기쁨만큼도 가져다 주지 못하였다. 그녀는 타락을 부정하였었다. 그리고 발에 돌뿌리 하나 걸리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으 리라고 우둔하게 믿는 허영심을 가졌었다. 그렇다! 오늘 그녀는 타락이 필요했 다. 그녀는 당장 그리고 심각한 타락을 바랐다. 모든 반항심이 그 절대적인 욕망 과 손을 잡았다. 오! 포옹 속에 꺼져 버리리라. 경험해 보지 못했던 모든 것을 한순간이라도 누리리라!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커다란 슬픔이 깔리고 있었다. 허망하고 막막한 느 낌이 들며 가슴이 죄어들었다. 그녀는 변명하였다. 나는 자유가 아닌가? 앙리를 사랑하더라도 누구를 속이는 것이 아니며, 그의 애무가 기쁘다면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다고 용서가 될까? 근 2년 동안 내 삶은 어떠하였나? 미망인이라는 입장, 완전한 해방, 외로움, 이 모든 것이 자신을 열정에 약하게 하고 그리로 향 @p 156 하게 했음을 그녀는 알았다. 고요히 그녀를 위로해 주는 오랜 친구인 신부와 그 동생 틈에서 지낸 기나긴 저녁 동안 열정이 마음 속에 비집고 들어온 것이 틀림 없었다. 세상과 떨어져 몹시 폐쇄적으로 스스로 갇혀 지냈지만, 지평선에서 우르 렁거리는 빠리를 바라보며 그녀는 열정을 품어 왔다. 창문에 팔꿈치를 괴고, 전 에 알지 못했던 몽상에 사로잡혀 조금씩 느슨해지며 열정을 품어 왔다. 어떤 기 억이 되살아났다. 도시가 크리스탈처럼 희고 분명하던 맑은 봄날 아침의 기억이. 긴 의자에 누워 무릎에 책을 떨어뜨리고 나른하게 바라보던, 어린애처럼 불그레 한 황금빛 빠리. 그 날 아침, 사랑이 눈을 떴다. 이름지을 수도 없을 만큼 가녀 린 떨림으로. 그녀는 거기 맞설 만큼 자신이 강하리라 믿었다. 오늘, 그녀는 같 은 자리에 있었다. 눈앞의 빠리는 지는 해로 불타고, 거센 열정이 그녀를 집어삼 켰다. 투명한 아침이 붉게 물든 저녁이 되는데 한나절이면 충분한 듯했다. 가슴 속이 불꽃으로 활활 타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하늘은 변했다. 뫼동 언덕 쪽으로 기울어진 태양이 마지막 구름을 헤 치며 빛을 발했다. 푸른 창공이 장엄하게 불타올랐다. 지평선 아득히 슈아지 르 르와와 샤랑똥 부근의 먼 곳에 걸쳐 무너져 내린 듯 쌓여 있는 백묵 같은 무더 기 돌은 진하게 칠한 테를 두른 진홍빛 덩어리가 되었다. 빠리 위 푸른 하늘을 천천히 항해하는 작은 구름 선단이 자줏빛 돛을 펼쳤다. 몽마르트르 위에 펼쳐 진 고운 비단 그물은 어느 새 황금 줄로 변해 있었고, 그 규칙적인 그물코는 떠 오르는 별을 잡으려 하고 있었다. 타오르는 궁륭 아래, 넓은 그늘이 줄을 긋고 있는 아주 노란 도시가 펼쳐 있었다. 아래쪽 넓은 광장에는 큰 길을 따라, 마차 와 합승마차가 수많은 행인들 사이로 오렌짓빛 먼지를 일으키며 엇갈려 갔다. 까만 벌레 같던 사람들은 불그레한 금빛을 띠고 한 방울 빛처럼 빛나고 있었다. 바싹 붙어서 열을 짓고 드비이 나루를 따라 걷고 있는 신학생 무리는 번 @p 157 진 듯한 빛 속에 황토색 법의 자락을 끌고 있었다. 그리고는 마차고 길가는 사 람이고 사라져 버렸다. 더 밀리로는 군데군데 초롱이 반짝이며 차마가 줄지어 있는 것밖에 짐작할 수 없었다. 왼쪽 마뉘떵따시옹의 곧고 높은 장밋빛 굴뚝은 피부처럼 예민한 색조를 띤 부드러운 연기를 뭉게뭉게 토해 내었다. 강 저편 오 르세 나루의 느릅나무들은 햇빛에 구멍을 뚫어 놓은 듯 침침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광선이 비스듬히 비껴 가는 강둑 사이로 세느 강에는 파랑, 노랑, 초록 이 섞여 흩어지고 부서지며, 춤추듯 물결을 일었다. 동방의 바다같이 얼룩덜룩한 색은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점점 눈부신 황금빛 색조 한 가지로 되었다. 그것 은 보이지 않는 용광로에서 지평선 위로 솟아오른 금괴처럼 식어 감에 따라 강 한 색이 되며 퍼져 갔다. 이 빛나는 흐름 위에 층층이 놓인 다리들은 희미한 곡 선같이 가늘게 보이다가 회색 줄이 되면서 첩첩이 불타고 있는 집들 사이로 사 라졌다. 그 집들 맨 꼭대기에는 노트르 담의 두 탑이 횃불처럼 타고 있었다. 우 안이나 좌안이나 건물들이 활활 타고 있었다. 샹 젤리제 수림 한가운데 산업박 물관의 유리는 이글거리는 깜부기 불을 깔아 놓은 듯했다. 멀리 마들렌느의 무 너진 지붕 뒤로 거대한 덩치의 오페라 건물은 구리덩어리 같았다. 다른 건축물, 둥근 지붕, 탑, 방돔 기둥, 생 뱅상 드 뽈, 생 자끄 탑, 가까이로 루브르와 뛸르리 의 신관은 네거리마다 거대한 장작더미를 세워 놓은 것같이 화염에 둘러싸여 있 었다. 앵발리드의 돔은 불길에 휩싸여 불똥이 튀고 있어서 활활 타는 골조가 부 근을 덮치며 무너져 내리지나 않을까 매순간 겁을 먹게 했다. 생 쉴삐스의 짝짝 이 탑 너머로 빵떼옹이 삭정이가 되어 가는 불붙은 왕궁처럼 어두운 빛을 발하 며 하늘에 떠올라 있었다. 해는 기울어 가고, 온 빠리는 장작더미같이 타오르는 건물들로 환해졌다. 빛이 지붕마루를 달리고 골짜기에 검은 연기가 가라앉았다. 트로까데로를 향한 정면의 창문 @p 158 이 한꺼번에 반짝이는 빛을 반사하여, 거대한 용광로가 풀무질로 끊임없이 들끓 어 오르듯, 시내에서 올라온 반짝이는 비를 빨갛게 물들였다. 인접한 곳에서 불 꽃이 계속 다시 뿜어 나왔고, 거리는 그슬린 듯 어둡게 패여 있었다. 먼 곳의 평 지는 폐허가 되었지만 아직도 따스한 외곽지역을 뒤덮고 있는 뻘건 재 속에는 갑자기 쑤석거린 화로에서 나온 것 같은 불덩이가 드문드문 빛나고 있었다. 이 윽고 빠리는 용광로가 되었다. 빠리는 불탔다. 하늘은 더욱 뻘개졌고, 붉은 빛과 금빛의 거대한 도시 위에서 구름이 피를 흘렸다. 조그만 손이 어깨에 얹혀 움찔했을 때, 엘렌느는 불꽃에 몸을 담그고 자신을 다 태워 버릴 것 같은 열정에 몸을 맡긴 채 불타는 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녀에게 정신이 들게 한 사람은 쟌느였다. “엄마! 엄마!” 그녀가 돌아보자 아니는 말했다. “아! 정말 행복해!... 그런데 들리지 않았어? 엄마를 열 번은 불렀을 거야.” 아직도 일본 아가씨 차림인 소녀는 기쁨으로 눈을 빛내며 볼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이는 어머니에게 대답할 틈을 주지 않았다. “나를 내버리고 갔지? 끝까지 엄마를 찾아 사방 헤맸단 말야. 뽈린느가 계단 아래까지 데려다 주지 않았으면 오지 못했을 거야.” 그리고 쉴새없이 “나를 사랑해?”하고 물으면서 예쁜 몸짓으로 얼굴을 어머 니의 입술로 가져왔다. 엘렌느는 무심하게 아이에게 키스하였다. 아이가 이렇게 빨리 돌아온 것을 보 자 조바심 비슷한 놀라움이 일어났다. 무도회에서 피해 나온 지 정말 한 시간이 나 되었나? 아이가 자꾸 물어서 그녀는 사실은 몸이 약간 좋지 않았으며 바깥 공기를 쐬었더니 좋아졌다, 잠시 조용히 있었더니 괜찮다고 말했다. “아! 괜찮아. 나는 너무 피곤해.” @p 159 쟌느가 속삭였다. “이제 얌전하게 있을 거야... 그런데 엄마, 나 얘기해도 되지?” 아이는 곧바로 옷을 벗기지 않는 데 기분이 좋아서 어머니에게 바싹 다가앉았 다. 자줏빛으로 수놓은 긴 옷과 초록빛 감도는 치마는 아이를 황홀하게 했다. 틀 어올린 머리를 가로지른 긴 핀에 달린 장식에서 달그락 소리가 나도록 아이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끄덕했다. 아이의 입에서는 서두르듯 술술 말이 흘러 나왔다. “엄마, 있잖아, 어릿광대 역을 한 사람은 회색 수염이 난 늙은 사람이야. 커 튼이 열릴 때 똑똑히 봤어... 그런데 꼬마 기로는 울었어. 바보같이! 사람들이 순 경 아저씨가 온다고 했는데도 그 애는 너무 소리를 질러서 데려가야 했어... 다 과회 시간에 마르그리뜨는 잼으로 우유짜는 아가씨 옷을 죄다 더럽혔어. 그 애 엄마는 ‘아유! 더러워!’하고 소리지르면서 닦아 주었지. 마르그리뜨는 머리카 락 속까지 잼을 묻혔다니까... 나는 가만히 있었어. 애들이 케이크에 덤벼드는 것 을 보니 아주 재미있었어. 그 애들은 가정교육이 안 되어 있어. 그렇지, 엄마?” 아이는 아까 일을 돌이켜보며 몇 초씩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생각에 잠긴 듯 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엄마, 노랗고 안에 흰 크림이 들어 있는 케이크 먹어 봤어? 아! 정 말 정말 맛있었어!... 나는 옆에 있는 접시를 계속 붙들고 있었어.” 엘렌느는 아이가 지껄이는 소리를 듣지 않았다. 그러나 쟌느는 머리가 너무 꽉 차 있어서 그것을 가볍게 하려는 듯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이는 무도회의 자 잘한 것까지 무척 상세하게 되풀이하였다. 아주 사소한 사실도 몹시 중대하게 여겨졌다. “엄마는 몰랐지? 무도회가 시작되려는데 허리띠가 풀어졌어. 누군지 모르겠 는데 어떤 부인이 핀을 꽂아 주었어. 그래서 내가 말했 @P 160 지. ‘정말 고맙습니다, 부인...’ 그런데 춤을 추다가 뤼시앵이 그 핀에 찔렸어. 그 애가 물었어. ‘네 앞쪽에 찌르는 게 뭐니?’ 나는 깜박 잊어버리고 그런 게 없다고 대답했어. 뽈린느가 나를 살펴보더니 핀을 제대로 해주었어... 그런데 엄 마는 상상도 못할거야. 애들이 서로 떼밀고, 어떤 커다란 남자애가 소피의 등을 밀어서 그 애는 넘어질 뻔했다구. 르바쇠르 집 애들은 발을 모아서 팔짝팔짝 뛰 었지. 물론 그렇게 춤추면 안 되지... 그런데 가장 멋진건 맨 마지막이었어. 엄마 는 거기 없었느니까 모를거야. 모두 손을 잡고 둥글게 섰지. 우스워 죽겠어. 다 큰 어른들도 그렇게 둘러섰다니까. 정말이야, 정말!... 믿어지지가 않아, 엄마?“ 엘렌느의 침묵이 마침내 아이를 성나게 했다. 아이는 더 꼭 붙으면서 어머니 의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응응 하는 반응밖에 끌어내지 못하자 자신도 점점 입 을 다물고 어린 가슴을 꽉 채우고 있는 무도회를 생각하면서 어머니처럼 꿈 속 에 빠져들어갔다. 모녀는 불타는 빠리를 바라보며 둘 다 말없이 앉아 있었다. 피 가 뚝뚝 떨어지는 구름으로 빛나는 빠리는 쏟아지는 불에 열정의 죄를 보속하는 전설의 도시처럼 두 사람에게는 미지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둥글게 춤을 췄어?” 소스라쳐 깨어나며 엘렌느가 문득 물었다. “응, 응” 이번에는 쟌느가 몽상에 잠겨서 중얼거렸다. “그러면 의사 선생님은? 그분도 춤췄어?” “그럼, 나하고 빙빙 돌았는걸... 나를 들어 올리면서 물었어. ‘엄마 어디 계 시니? 엄마 어니 계시니?’ 그리고 나를 안아 주었어.” 엘렌느는 저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그녀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였다. 무엇 때문 에 앙리를 알 필요가 있을까? 그를 모르는 것이, 영원히 그를 모르는 것이, 그냥 오래 전부터 기다려 온 사람처럼 그 @P 161 를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감미로울 것 같았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놀라고 불안 해했을까? 그는 맞춤한 시간에 그녀의 길 위에 나타난 참이었다. 그래 좋아, 그 녀의 솔직한 성질은 모든 것을 인정했다. 사랑하며, 사랑받고 있다는 생각을 인 정하자. 고요함이 마음 속에 내려앉았다. 그녀는 그 행복을 망치지 않을 만한 힘 을 자신이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어둠이 깔리고 바깥 공기에는 찬 기운이 실렸다. 쟌느는 꿈결에 진저 리를 쳤다. 아이는 어머니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그 물음이 마음 깊이 남아 있는 듯 아이는 또 물었다. “나를 사랑하지?” 엘렌느는 웃음을 띤 채, 두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감싸고 한순간 그 얼굴을 살피는 듯햇다. 그리고 작은 장미빛 자국 위, 입 근처에 오래도록 입술을 눌렀 다. 바로 그곳에 앙리가 키스했음을 그녀는 잘 알았다. 동그란 원반 같은 해가 뫼동 언덕의 어두운 등성이에 걸렸다. 아직도 비스듬 한 빛이 빠리 위에 길게 뻗어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커진 앵발리드 돔의 그늘에 생 제르맹 구역 일대가 잠겨 있었다. 오페라, 생 자끄 탑, 기둥, 첨탑들이 우안에 검은 줄무늬를 그렸다. 건물 정면의 선들, 그 사이로 뻗어 있는 길, 작은 섬처럼 솟아 있는 지붕들은 더욱 어둡고 강하게 타올랐다. 집들이 삭정이가 되어 무너 져 내리는 것처럼, 어두워진 유리창 안에는 불타고 있는 얇은 파편들이 꺼져 가 고 있었다. 먼 곳에서 종이 울렸다. 소란한 소리가 흩어지고 점점 가라앉았다. 저녁이 다가오자 더욱 넓어진 하늘이, 금빛과 자줏빛 결이 있는 보랏빛 보자기 처럼 불그레한 도시 위로 둥글게 펼쳐졌다. 불현듯 무시무시한 불길이 다시 일 며, 빠리는 저 멀리 아득한 외곽까지 밝혀 주는 마지막 불길을 내뿜었다. 회색 재가 내렸다. 동네는 타버린 숯처럼 가볍고 꺼멓게 우뚝 서 있었다. 제 3 부 1 5월 어느 날 아침, 로잘리가 손에 든 행주를 채 놓지도 못하고 부엌에서 뛰어 들어와, 버릇 없는 하녀의 허물 없는 투로 말했다. “오! 마님, 빨리 와 보세요... 저 아래 의사 댁 정원에 신부님이 오셔서 땅을 파헤치는 중이에요.” 엘렌느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쟌느는 벌써 구경을 하려고 내닫고 있는 중이었다. 앙이는 돌아와서 외쳤다. “로잘리는 바보야! 신부님은 땅을 파헤치는 게 아니야. 정원사하고 함께 있는 데 작은 수레에 나무를 실어 놓았어... 드베를르 부인은 장미를 전부 모으고 있 고...” “성당에서 쓰려는 것이란다.” 벽걸이를 짜느라고 몹시 열중해 있는 엘렌느가 조용히 말했다. 몇 분 뒤 초인종소리가 나고 주브 신부가 나타났다. 다음 수요일에는 기다리 지 말라고 알리러 온 것이었다. 성모의 달 행사로 매일 저녁 할 일이 있었다. 주 임신부는 그에게 성당을 꾸미는 일을 맡겼다. 아마 멋지게 될 것이었다. 여러 부 인들이 꽃을 제공했다. 그는 제단 양쪽에 놓으려고 4미터짜리 종려나무를 기다 리고 있었다. “아! 엄마...엄마.” @p 163 듣고 있던 쟌느는 감탄하여 중얼거렸다. “좋아요! 신부님” 엘렌느가 웃으면서 말했다. “신부님이 오실 수 없으면 저희가 뵈러 가면 되지요. 보세요, 꽃 얘기를 하시 니까 쟌느는 제 정신이 아니에요.” 그녀는 전혀 독실한 신자가 아니었을뿐더러, 성당에서 나올 때까지 덜덜 떠는 딸의 건강을 구실로 미사에조차 참석하지 않았다. 늙은 신부는 그녀에게 종교에 관해 예기하는 것을 피했다. 그는 마음이 아름 다우면 슬기와 정숙으로 혼자서도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선량한 관용심 을 가지고 말할 뿐이었다. 언젠가는 하느님께서 그녀를 움직이실 것이다. 다음 날 저녁에도 쟌느는 성모의 달만 생각하였다. 아이는 어머니에게 질문을 하면서, 수천 개의 초와 성스러운 합창, 그윽한 향내, 흰장미로 꽉 찬 성당을 그 려 보았다. 아이는 신부에게서 들은, 행운을 가져다 주는 성모의 레이스 드레스 를 더 잘 볼 수 있도록 제단 근처에 앉고 싶어했다. 그러나 엘렌느는 그 전에 병이 나면 데려가지 않겠다고 위협해서 아이를 진정시켰다. 마침내 저녁이 되었고, 식사를 마친 후 두 사람은 출발했다. 아직 밤은 선선하 엿다. 성당이 있는 아농시아옹 가에 이르렀을 때, 아이는 떨고 있었다. “성당은 난방이 되고 있을꺼야.” 어머니가 말했다. “우리 난방 장치 근처에 앉도록 하자.” 그녀가 육중한 문을 밀고 들어가자, 문은 소리 없이 다시 닫혔고 강한 불빛과 성가가 퍼지며 온기가 두 사람을 둘러쌌다. 의식이 시작되고 있었다. 엘렌느는 중앙 홀이 벌써 꽉 찬 것을 보고 측면부로 가려 했다. 그녀는 제단으로 다가가 려고 안간힘을 쓰며, 쟌느의 @p 164 손을 잡고 참을성 있게 나아갔다. 그러다가 더 가까이 가는 것을 포기하고 맨 먼저 눈에 띈 두 개의 의자에 앉았다. 기둥이 성가대석을 반이나 가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안 보여, 엄마.” 마음이 상해서 소녀가 중얼거렸다. “자리를 잘못 잡았어.” 엘렌느는 아이의 입을 다물게 했다. 그러자 아이는 뾰로통해졌다. 아이는 앞에 앉은 한 늙은 부인의 커다란 등판밖에 볼 수 없었다. 몸을 돌린 어머니는 아이 가 의자 위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앉아!.” 어머니가 목소리를 누루며 말했다. “너 안되겠구나.” 그러나 쟌느는 고집을 부렸다. “저기 봐, 드베를르 부인이야. 저기 가운데 있어. 우리한테 뭐라고 하네.” 젊은 여인은 당황한 나머지 조급하게 굴었다. 그녀는 앉기 싫어하는 아이를 흔들었다. 무도회 후 사흘간 그녀는 온갖 바쁘다는 구실을 만들어 의사의 집에 가는 것을 피했다. “엄마....” 쟌는느 어린애다운 고집을 피우며 계속했다. “부인은 엄마를 보고 있어.‘안녕하세요’하는걸.” 엘렌느는 그쪽을 보고 인사할 수밖에 없었다. 두 여인은 서로 고개를 끄떡였 다. 주름이 수없이 잡힌 비단 드레스와 흰 레이스를 걸친 드베를르 부인은 성가 대에서 두 발짝쯤 떨어진 중앙 홀에 아주 산뜻하고 화려하게 앉아 있었다. 그녀 는 동생 뽈린느를 데리고 왔는데, 처녀는 힘차게 손짓을 했다. 성가는 계속되었 다. 아이들의 뾰족한 음이 흔들리며 끌리는 듯한 찬송가 리듬 중간중간 튀어나 오 @p 165 고, 많은 사람들이 합쳐 내는 큰 목소리가 깔렸다. “엄마보고 오라고 하네. 저봐요!” 쟌느가 의기양양해서 다시 말했다. “소용없어. 여기 있는 것으로 됐다.” “오!엄마, 저쪽으로 가... 자리가 두 개 있어.” “아니야, 내려와서 앉아.” 그런데도 두 여인은 웃으면서 저희들이 주위에 야기시킨 가벼운 술렁거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집을 피웠다. 오히려 사람들이 쳐다보는 통에 엘렌느가 할 수 없이 양보하자 쟌느는 좋아라 하였다. 엘렌느는 신이 난 쟌느를 밀면서, 화를 참느라고 떨리는 손으로 길을 헤치려고 애썼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신 도들은 계속 노래하느라고 입을 벌리고 있었으나, 방해받는 게 싫어서 성난 얼 굴로 그녀를 아래 위로 훑어보았다. 더욱 크게 휘몰아치는 목소리의 폭풍 가운 데, 그녀는 그렇게 5분은 족히 애를 썼다. 쟌느는 앞으로 지나가지 못하고 시커 멓게 속이 빈 입들을 보았다. 아이는 어머니에게 꼭 달라붙었다. 마침내 두 사람 은 성가대 앞 빈 터에 이르렀고, 몇 발짝만 더 옮기면 되었다. “이리로 오세요.” 드베를르 부인이 속삭였다. “신부님께서 부인이 올 거라구 말씀하셔서 두 자리를 맡아 두었어요.” 엘렌는는 이야기를 끊으려고 바로 미사책을 넘기며 가마의 말을 했다. 그러나 쥴리에뜨는 사교상의 예절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여기서도 제 집 살롱에서처 럼 편안하게 지껄이며 매혹적인 태도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몸을 기울이며 계 속했다. “왜 안 보이셨지요? 내가 내일 댁에 가보려고 했어요... 어디 편찮은신 건 아 니지요?” @p 166 “아니에요, 고마와요... 이런저런 일이 바빠서...” “그런데 내일은 꼭 오셔야 해요... 식구들 외에는 없어요...” “친절하시군요. 곧 뵙게 되겠지요.” 그녀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고, 찬송가를 따라 부르는 데 전 념해 있는 듯이 보였다. 뽈린느는 난방장치에서 더운 김이 올라오는 쪽에 같이 앉으려고 쟌느를 제 옆에 붙들었다. 추위를 많이 타는 그녀는 더운 김에 행복 하게도 살짝 익어 있었다. 밑에서 올라오는 따스한 김 속에서, 그 둘은 호기심에 차서 무늬목판으로 분할된 낮은 천장, 촛대가 뻗어 있고 반원형 아치로 연결된 납작한 기둥, 조각한 참나무로 된 설교단을 하나하나 살피며 목을 뺐다. 찬송가 의 물결에 따라 흔들리는 머리 너머로 두 사람은 측면부의 어두운 구석에 금붙 이들이 빛나는 외진 예배당과 큰 문 옆에 창살로 막아 놓은 세례당까지 눈길을 던졌다. 그러나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금박으로 반짝이고, 원색으로 칠해진 찬 란한 설교단이었다. 환하게 빛나는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둥근 천장에 드리워져 있었다. 거대한 촛대에는 초들이 얹힌 시렁이 줄지어 있어서 성당 안쪽 어두운 곳은 별들이 대칭으로 쏟아지는 듯했고, 나뭇잎 꽃으로 덮여 커다란 꽃다발 같 은 제단을 밝게 떠오르게 했다. 그 위에는 장미꽃이 뒤덮인 가운데, 공단과 레이 스 옷을 입고 진주관을 쓴 성모가 긴 옷을 입은 예수를 팔에 안고 있었다. “더워?” 뽈린느가 물었다. “정말 좋다.” 그러나 쟌느는 황홀감에 젖어 꽃더미 속에 있는 성모를 우러러 보고 있었다. 몸이 떨렸다. 소녀는 별난 행동을 하게 될까 봐 겁이나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고, 희고 검은 타일바닥에 신경을 쓰려고 하면서 눈을 내리깔았다. 성가대 어린 이들의 여린 목소리가 머 @p 167 리카락에 약하게 전해져 왔다. 한편, 엘렌느는 기도서에 얼굴을 묻고, 쥴리에뜨가 래이스로 스칠 때마다 되도 록 떨어져 앉으려 했다. 그녀는 이런 만남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 다. 앙리의 것이 되는 일 없이 고상하게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해도 이렇게 명 랑하고 저를 믿어 주는 부인을 배반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편치 않았다. 한 가지 만은 분명했다. 아까 말한 저녁 식사에는 절대 가지 않으리라. 그리고 어떻게 하 면 자기의 성실한 마음에 상처를 주는 관계들을 차차 끊을 수 있을까 궁리하였 다. 그러나 몇 발짝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웅웅거리는 성가대의 목소리는 깊이 생각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여태 성당에서 느끼지 못했던 충실한 신자가 되는 편안함을 맛보며, 마음을 달래 주 는 찬송가에 몸을 내맡겼다. “드 셰르메뜨 부인 이야기 들으셨어요?” 얘기가 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한 쥴리에뜨가 참지 못하고 다시 말을 걸었 다. “아니요, 모르는데요.” “그래요! 생각해 보세요... 열다섯 살 치고는 키가 꽤 큰 그집 딸 보신 적이 있죠? 그 애를 내년에 혼인시킨다는데 상대가 그 어머니 치마폭에 늘 싸여 있던 조그만 갈색 머리라니 문제라구요... 그래서 말들이 많아요.” “아!” 건성으로 듣고 있던 엘렌느가 대꾸했다. 드베를르 부인은 시시콜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찬송가가 갑자기 딱 그치고 오르간은 신음하다가 멈췄다. 명상의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제 목소리가 두드러지자 놀란 부인은 입을 다물었다. 신부 한 명이 설교단에 모습을 나타냈 다. 사람들은 한 순간 긴 @p 168 장하였고, 그는 말하기 시작했다. 아니야, 절대로 저녁식사에는 가지 않겠어. 신 부를 열심히 바라보며 그녀는 앙리와 다시 만나는 첫순간을 상상해 보았다. 사 흘 전부터 그녀는 그것을 두려워했다. 그녀가 집에만 박혀 있는다고 야단치면 서 노해서 창백해지는 남자가 떠올랐다. 그러면, 그녀도 충분히 냉정함을 유지하 지 못할까 봐 겁이 났다. 몽상 속에서 신부는 사라지고, 단지 높은 데서 떨어지 는 듯한 폐부를 찌르는 목소리와 어떤 한 구절만이 들릴 뿐이었다. “그 말로 다할 수 없는 순간, 동정녀께서는 고개를 숙이고‘여기 주님의 종 이 있사옵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오! 용감해지리라. 모든 분별심이 되돌아왔다. 사랑받는 기쁨을 맛보리라. 그리 고 나의 사랑은 절대 고백하지 않으리라. 그녀는 그러한 대가를 지불해야 평화 가 있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우연히 두 사람이 가까이 있게 되면 멀리서 나누는 눈길이나 앙리의 말 한마디로 만족하면서 그를 깊이 사랑하리라! 꿈은 기나긴 생각으로 그녀를 채웠다. 주위의 성당이 친근하고 다정해졌다. 신부는 말하고 있었다. “천사는 사라졌습니다. 마리아는 빛과 사랑으로 넘쳐서 당신 안에 일어나고 있는 성스러운 신비에 대해 묵상에 잠겼습니다.” “저 신부님 말씀을 잘 하지요?” 드벨를르 부인이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그런데 아주 젊으신 분이에요. 기껏해야 서른쯤 되었을까요?” 드벨를르 부인은 감동을 받았다. 고상한 취미에서 오는 감동처럼 종교도 그녀 를 즐겁게 했다. 성당에 꽃을 바치는 일, 예절바르고 조심성 있으며 선량한 분위 기를 풍기는 사람들의 신에게 세속적인 후원을 하는 체하면서 옷을 차려입고 성 당에 가는 일은 그녀에게 특별한 기쁨을 주었다. 앙리가 성당에 가지 않아서 자 신의 열렬한 신앙심 @P 169 이 금단의 과일 맛을 갖게 되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엘렌느는 그녀를 바라보 며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둘 다 황홀한 듯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의자와 손수건의 수선스런 소리가 일었다. 신부는 방금 마지막 외침을 남기고 설교단을 떠났다. “오!여러분의 사랑을 퍼뜨리십시오. 경건한 신도들이여, 하느님께서는 여러분 가운데 계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하느님의 존재로 가득 차 있고, 여러분의 정 신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넘칩니다!” 곧이어 오르간이 웅웅거렸다. 성모 연도가 열렬한 애정을 담은 부름과 함께 시작되었다. 성가대 어린이들의 천사 같은 목소리에 땅이 화답이라도 하는 듯 측면부 외진 예배당의 어둠 속에서 아득하고 희미하게 노래가 들렸다. 숨결이 머리 위를 지나가 꼿꼿한 초의 불꽃을 눕혔고, 마지막 향기를 뿜으며 시들고 있 는 꽃들 한가운데, 커다란 장미다발 속에서 성모 마리아가 예수를 보고 웃으려 고 고개숙인 듯이 보였다. 엘렌느는 문득 본능적인 불안에 사로잡혀 몸을 돌렸다. “너 아프지 않니?” 그녀는 물었다. 아이는 몹시 핼쓱해서 젖은 눈을 하고 연도가 일으킨 사랑의 급류에 말린 듯 장미가 한없이 불어나 비처럼 내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아이는 중얼거렸다. “아!아니야, 엄마... 맹세해요. 좋아, 정말 좋아...” 그리고 물었다. “그런데 우리 신부님은 어디 계시지?” 아이는 주브 신부를 찾고 있었다. 뽈린는가 신부를 알아보았다. 그는 성가대 옆 성직자석에 있었다. 쟌느는 일어나야 겨우 보였다. “아! 보여. 우리를 보고 계시네. 작은 눈을 하고.” 쟌느의 말에 따르면 신부는 속으로 웃을 때 ‘작은 눈을 했다.’ @p 170 엘렌느는 신부와 다정하게 고개짓을 나누었다. 그것은 엘렌느에게는 평화에 대한 확신이며, 성당을 소중하게 해줄 뿐 아니라, 그녀를 자비심에 찬 축복 속에 잠들게 해주는 고요함 같은 것이었다. 제단 앞에서 향로가 흔들리며 엷은 연기 가 피어 올랐다. 축도와 함께 성체합이 태양처럼 천천히 떠올라 땅에 엎드린 이 마 위로 미끄러져 갔다. 드베를르 부인의 말소리가 들렸을 때, 엘렌느는 행복한 마비상태 속으로 엎드려 있었다. “끝났어요. 갑시다.” 의자 소리, 발자국 소리가 둥근 천장 아래 울려 퍼졌다. 뽈린느는 쟌느의 손을 잡았다. 아이와 함께 앞서 걸어 나가면서 그녀는 물었다. “너 연극 보러 간 적 없니?” “없어요. 이게 더 아름답지요?” 소녀의 가슴은 감격으로 꽉 차서,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선언 하듯 턱을 끄덕였다. 그러나 뽈린느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녀는 한 신부 앞에 못박힌 듯 멈 춰 선 참이었다. 그는 법의 위에 흰 겉옷을 걸치고 지나가는 중이었다. 그가 몇 발짝 멀어지자 그녀는 “오!멋진 모습이야!” 하고 두 신도가 돌아다볼 정도로 자신있게 큰 소리로 말했다. 그동안 엘렌느도 몸을 일으켜, 천천히 흩어지고 있는 군중들 틈에 끼어서 쥴 리에뜨 옆에 붙어 걸었다. 그녀는 나른하고 기운이 빠진 것처럼 부드러운 감정 에 젖어서 드베를르 부인이 그렇게 가까이 있는 걸 느끼면서도 아무런 혼란도 맛보지 않았다. 한순간, 두 사람의 맨손이 스쳤고, 둘은 마주 보고 웃었다. 숨이 막혔다. 엘렌느는 쥴리에뜨를 보호하기 위해 앞서도록 했다. 두 사람의 친밀감이 되살아난 듯했다. “아셨지요?” @p 171 드베를르 부인이 물었다. “내일 저녁 부인을 기다리겠어요.” 엘렌느는 더 이상 싫다고 말할 만한 의지력을 상실했다. 바깥에 나가고 보자. 드디어 두 여인은 맨 마지막으로 빠져나왔다. 뽈린느와 쟌느는 맞은편 보도 위 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징징 우는 목소리가 그녀들을 붙들었다. “아!부인, 부인을 뵌 지 오래 되었군요!” 페띠 할멈이었다. 그녀는 성당 문 앞에서 구걸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까부터 훔쳐보고 있었던 것처럼 엘렌느의 앞길을 가로막으며 계속했다. “아!부인도 아시지만 맨날 이 배가 몹시 아팠어요... 이제는 아주 망치로 내리 치는 것 같다니까요...하지만 괜찮아요... 부인. 너무 과분한 말씀이세요... 하느님 께서 복을 내려 주시길!” 엘렌느는 할멈에게 도울 방도를 생각해 보겠다고 약속하며 동전 한닢을 떨어 뜨렸다. “저런!” 현관에 서 있던 드베를르 부인이 말했다. “누가 뽈린느와 쟌느하고 얘기하고 있네요... 앙리예요!” “그렇습지요...” 두 부인에게 가는 눈을 굴리고 있던 페띠 할멈이 다시 말했다. “친절한 의사 선생님이지요. 저 분은 미사들릴 동안 내내 여기 계셨어요. 틀 림없이 부인을 기다리고 계셨지요. 훌륭하신 분이예요! 이건 사실이니까 우리 얘 기를 듣고 계신 주님 앞에서 말할 수 있지요. 오! 나는 부인을 알고 있어요. 부 인은 정말 훌륭하신 남편을 두셨어요. 하나님께서 부인의 소망을 들어 주시길, 주님의 축복이 부인과 함께 하길 빌겠어요!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아 멘!” 오래 돈 사과처럼 쪼그라지고 수천 개의 주름이 잡힌 할멈의 얼 @p 172 굴에는 작은 눈이 불안하고 교활하게 계속 이리저리 구르면서 쥴리에뜨와 엘렌 느를 번갈아 쳐다보았기 때문에, 두 사람 중 누구에게 의사의 칭찬을 늘어놓고 있는 건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할멈은 우는 소리를 주절주절 늘어놓는 한 편, 간간이 신앙심 깊은 체하는 감탄사를 섞어 계속 중얼거리면서 부인들을 따 라왔다. 엘렌느는 앙리가 있는 것을 보자 놀라서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는 그녀를 한 번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그의 아내는 그가 평소의 신념 때문에 성당에 들어오 지 못한 것을 놀렸고, 그는 시가를 피우며 부인들을 모시러 왔노라고 간단히 설 명하였다. 어떤 새로운 난폭한 행동이라도 할까 두려워한다면 그건 틀린 생각이 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의사가 저를 다시 보려 했음을 엘렌느는 이해하였 다. 그녀와 매한가지로 그도 분별 있게 행동하기로 굳게 마음먹었음에 틀림없었 다. 그녀는 그가 마음먹은 바에 충실할 수 있을지 굳이 살피려 하지 않았다. 그 가 불행한 것을 본다면 자기도 너무나 불행할 것 같았다. 그래서 드벨를르 부부 와 헤어지면서 그녀는 명랑하게 말했다. “좋아요!알겠어요, 내일 7시에 뵙겠어요.” 그 부부와의 교제는 다시금 더욱 긴밀하게 맺혀졌고, 황홀한 삶이 시자되었다. 엘렌느는 앙리가 한 번도 미친 짓을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녀는 그렇게 상 상했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서로 그얘기를 하지 않았 고 그것을 알고 만족했다. 감미로운 시간들이었다. 그들은 애정에 관한 얘기는 하지않고, 몸짓으로 목소리의 억양으로 혹은 침묵으로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 었다. 모든 것이 그들을 사랑으로 이끌어갔고, 모든 것이 그들을 열정에 휩싸이 게 했다. 열정은 그 속에서만 숨쉴 수 있는 공기처럼 그들에게 붙어 다니고 주 위에 떠다녔다. 그들은 흠잡힐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걸 변명으로 삼고, 의식 적으로 마음의 유희를 즐겼 @p 173 다. 두 사람은 손 한번 잡은 적이 없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주고 받는 단순한 인 사말과는 다른 관능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이었다. 매일 저녁, 부인들은 성당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드베를르 부인은 신이 났고, 무도회니 연주회니 전람회니 하는 따위와는 다소 색다른 기쁨을 맛보았다. 그녀 는 이 색다른 감동이 아주 마음에 들어서, 이제는 수녀나 신부들과 같이 있지 않은 그녀는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여학생 때 얻은 종교적 심성이 경솔한 젊은 여인의 머리에 다시 떠올라서, 마치 어린 시절의 놀이가 기억난 것처럼 사소한 종교적 실천을 즐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엘렌느는 종교적 교육과는 거리가 먼 분위기에서 자라났고, 쟌느가 좋아하니까 덩달아 좋아서 그냥 매혹적인 성모달 의 행사에 나가고 있었다. 늦게 가서 나쁜 자리에 앉지 않으려고 둘은 저녁을 일찍 먹고 로잘리를 재촉하였다. 가는 길에 쥴리에뜨를 데리고 갔다. 하루는 뤼 시앵도 데리고 갔으나 너무 버릇없이 굴었기 때문에 그 다음에는 집에 남겨 두 어야 했다. 촛불이 반짝이는 더운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흐물흐물해지면서 안온 한 느낌이 들었고, 그것은 점점 엘렌느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되었다. 낮 동 안에는 불확실한 느낌이 들면서 막연한 불안감이 그녀를 앙리에 대한 생각에 매 어 놓았고, 저녁에는 성당이 다시 그녀를 잠재우곤했다. 성스러운 열광이 넘쳐 흐르며 찬송가가 울려 퍼졌다. 방금 꺾어 온 꽃들은 둥근 천장 아래 답답한 공 기를 향기로 둔하게 했다. 그녀는 거기서 햇봄의 취기와 의식으로 승화된 여인 숭배를 들이마셨다. 그녀는 흰 장미꽃 관을 쓴 처녀이며 어머니이신 마리아 앞 에서 사랑과 순결의 신비에 취하였다. 매일 그녀는 나중까지 무릎끓고 있었다. 때로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을 모아 쥐었다. 미사가 끝나면 감미로운 귀가길이 있었다. 알리는 문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밤 공기는 미지근하였으며, 그들은 드 문 드문 말을 나누며 빠시의 어둡고 조용한 거리를 지나 집으로 돌아 @p 174 갔다. “부인은 이제 열성신자가 되겠어요!” 어느 날 저녁, 드베를르 부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 그랬다. 엘렌느는 마음을 활짝 열고 신심을 가지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랑한다는 것이 이렇게 좋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녀는 감동을 위한 장소인 것처럼 성당에 갔다. 거기서는 눈물이 글썽글썽해도, 말없이 숭배하면서 넋을 잃고 멍하니 있어도 허용되었다. 그녀는 매일 저녁 한 시간 동안은 자기방 어를 하지 않았다. 그녀가 품고 있는 사랑, 낮 동안 눌러 온 사랑아 가슴에서 활 짝 피어 올라, 신심으로 떠는 군중들 속에서 내놓고 기도로 퍼질 수 있었다. 떠 듬떠듬 외우는 기도, 무릎끓기, 끊임없이 반복되는 애매한 몸짓들은 그녀를 가만 가만 흔들어 주었고, 똑같은 말, 똑같은 신호로 번역되는 한 가지 언어, 항상 똑 같은 열정인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믿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성스러운 자비 속에서 행복하였다. 쥴리에뜨는 엘렌느만 놀린 게 아니라 앙리도 신도가 될 거라고 주장했다. 이 제는 우리를 기다리러 성당 안에 들어오는 걸 보세요! 이 무신론자, 이교도 양반 은 메스 끝에서 마음을 찾았다지만, 사실은 아직도 못 찾은 거라구요! 설교단 뒤 켠, 기둥 뒤에 서 있는 그를 보면서 쥴리에뜨는 엘렌느의 팔꿈치를 건드렸다. “저 봐요. 벌써 왔어요. 저 이는 결혼 때도 고해성사를 하지 않으려 한 걸 아 세요?...아니에요, 우스운 얼굴을 하고 아주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 고 있네요. 저 이 좀 봐요!” 에렌느는 바로 고개를 들지 않았다. 미사가 끝나려고 향이 피어 오르고 오르 간이 환희에 차 울렸다. 그러나 드베를르 부인은 옆 사람을 조용히 놓아 둘 사 람이 아니었기에 엘렌느는 대답을 해야만 했다. @p 175 “네,네,보여요.” 그녀는 쳐다보지도 않고 어물어물 말했다. 그녀는 온 성당 안을 울려 퍼지는 호산나를 들을 때 이미 그를 알아보았다. 앙리의 숨결이 찬송가에 실려 목덜미에 와 닿는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이 뒤쪽 중앙 홀을 환하게 하고, 무릎끓고 있는 자신을 금빛으로 덮는 것이 보이는 듯했 다. 그러면 그녀는 말로 다한수 없이 열렬하게 기도를 올렸다. 그는 아주 진지했 고, 극장 휴게실로 부인들을 마중하러 가는 것처럼 단정한 모습으로 성당에 왔 다. 그러나 천천히 빠져나가는 신도들 틈에 끼어 두 사람이 다시 만나게 되면, 꽃과 노래로 합쳐져 더욱 굳게 맺어진 것이 느껴졌다. 그들은 얘기를 피하였다. 속마음이 입술에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름이 지나자, 드베를르 부인은 싫증이 났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걸 똑같이 해야 하는 게 싫어서 다른 일에 열정을 쏟으며 뛰어들었다. 지금은 아는 화가 집에 그림을 구하러 가느라고 오후마다 계단을 60개씩 오르면서 자선바자 에 열중하고 있었고, 저녁에는 종을 들고 부인들의 후원회를 주재하였다. 어느 목요일 저녁, 엘렌느와 어린 딸은 자기네들만 성당에 나온 것을 알게 되었다. 설 교가 끝나고 성가대원들이 성모찬가를 합창할 때 젊은 여인은 마음이 쏠리는 것 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앙리가 항상 있는 그 자리에 와 있었다. 그녀는 귀가 길을 기다리며 미사가 끝날 땔까지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아! 친절하게도 와 주셨네요1” 쟌느가 성당을 나서면서 어린애답게 허물 없이 말했다. “길이 깜깜해서 무서웠을 거예요.” 그러나 앙리는 놀란 척했다. 아내도 왔으리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엘렌느 는 짤막하게 대답하고, 말없이 뒤를 따랐다. 세사람 @p 176 이 현관을 지날 때, 한목소리가 탄식하였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느님께서 그것을 갚아 주실 겁니다...” 매일 저녁, 쟌느는 페띠 할멈의 손에 10수짜리 동존을 떨어뜨렸다. 할멈은 의 사만 엘렌느와 같이 있는 것을 보자, 평소처럼 시끄럽게 감사의 말을 늘어놓는 대신 다 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을 뿐이었다. 성당이 비자 할멈은 알 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며 발을 질질 끌고 그들을 뒤따르기 시작했다. 부인 들은 가끔 밤이 아름다우면 빠시 가로 해서 집으로 가는 대신에 5,6분 더 걸리 더라도 레이누아르 가를 택했다. 인적 없는 이 긴 길에 매혹된 것이었다. 지나가 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고 드문드문 가로등이 길을 밝히고 있었 다. 이맘때면 시내에서 떨어진 동네인 빠시는 시골 마을처럼 가는 숨을 쉬면서 벌 써 잠들어 있었다. 길 양쪽에는 하숙집들이 줄지어 있어, 시커멓게 잠들어 있는 아가씨들의 방과 아직도 불이 훤한 부엌에 손님용 식탁이 보였다. 상점들은 모 두 어두워서 유리로 된 진열장 속은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적막이 엘렌 느와 앙리에게는 커다란 기쁨이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감히 팔도 빌려주지 못했 다. 두 사람 사이에는 쟌느가 정원의 오솔길처럼 모래가 깔린 길 중앙을 걷고 있었다. 집들이 없어지고 벽이 죽 이어졌다. 벽 위에는 참으아리속 덩굴과 만발 한 라일락 꽃다발이 덮여 있었다. 커다란 정원이 집들 사이에 있는데, 가끔 쇠창 살 사이로 짙은 초록색 어둠이 들여다보였다. 훨씬 연한 색조의 잔디가 나무들 사이에 창백하게 보이는 화분에는 붓꽃 다발이 방향을 내뿜고 있었다. 세 사람 을 향기로 담뿍 적시는 봄밤의 온기 속에서 그들은 모두 발걸음을 늦추었다. 쟌 느는 어린아이답게 장난하며 하 @p 177 늘을 향해 얼굴을 들고 되풀이 했다. “오! 엄마, 저기 좀 봐. 별이 참 많지!” 그러나 뒤에서 헤띠 할멈의 발자국 소리가 그들 자신의 발자국 소리의 메아리 처럼 들렸다. 할멈은 다가왔다.끊임없이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이 다시 시작 되면서 ‘아베마리아, 그라치아 쁠레나’하는 라틴어 구절 한 귀퉁이가 들렸다. 페띠 할멈은 집으로 돌아가며 묵주신공을 하고 있었다. “나한테 동전 한 닢이 남아 있는데 줘도 돼?” 쟌느가 어머니에게 물었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아이는 몸을 돌려 할멈에게 뛰어갔다. 할멈은 오 골 목으로 접어들려 하고 있었다. 페띠 할멈은 천당의 성인들을 전부 끌어다대며 동전을 받았다. 그러면서, 그녀는 아이의 팔을 잡았다. 아이를 붙들고 목소리를 바꾸어 말했다. “또 한 부인은 몸이 편찮으신가?” “아니에요.” 쟌느가 놀라서 대답했다. “아! 하느님이 그 분을 잊지 않으시기를! 그리고 부인과 남편에게 행운이 가 득하게 해주시기를!...도망가지 마라, 착한 꼬마 아가씨. 네 어머니를 위해서 아베 마리아를 외우도록 해주겠니? 너는 아멘이라고 대답하면 된다. 너의 엄마도 좋 다고 하실거야. 그리고 나서 엄마를 따라가면 된다.” 한편, 엘렌느와 앙리는 길가에 줄지어 선 키 큰 마로니에 그늘 아래에서 이렇 게 갑작스럽게 둘만 남게 되자 몸을 떨며 있었다. 두사람은 천천히 몇 발짝 떼 었다. 바닥에는 마로니에가 흩뿌린 작은 꽃잎들이 깔려 있었다. 그들은 이 장밋 빛 양탄자 위를 걸었다. 그리고 더 가기에는 너무나 터질 듯하여 멈추어 섰다. “용서하십시오,” @p 178 앙리는 그렇게만 말했다. “네,네.” 엘렌느는 더듬거렸다. “제발 아무 말씀 마세요.” 그녀는 제 손을 스치는 남자의 손을 느꼈다. 그녀는 물러섰다. 다행스럽게도 쟌느가 뛰어 돌아왔다. “엄마! 엄마!” 아이가 외쳤다. “할머니가 나한테 ‘아베마리아’를 하게 했어. 그게 엄마한테 복을 가져다 줄 거래요.” 페띠 할멈은 묵주신공을 마치면서 오 골목의 계단을 내려갔고, 세 사람은 비 뇌즈 가로 접어들었다. 그 달이 지나갔다. 드베를르 부인은 아직도 두세 번 더 행사에 모습을 나타냈 다. 어느 일요일, 마지막으로 앙리는 엘렌느와 쟌느를 다시 기다리기로 했다. 돌 아오는 길은 감미로웠다. 그 달은 유난히 포근하게 지나갔다. 작은 성당은 열정 을 가라앉히고 그것을 불러일으키도록 생겨난 것 같았다. 처음에 엘렌느는 종교 로 도피하여 행복해하며 안정되어 있었다. 거기서는 부끄럽지 않게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일은 암암리에 진전되어, 그녀가 신심이 마비된 데 놀라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 샌가 꽁꽁 끄나풀에 묶여 있었고 그것을 끊으려면 살 점이 떨어져 나가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앙리는 점잖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 의 얼굴에 떠오르는 불길을 보았다. 그녀는 미친 듯한 욕망이 휘몰아칠까 두려 웠다 어느 날 오후, 쟌느와 산책에서 돌아오다가 그녀는 아농시아시옹 가로 접어들 어 성당에 들어갔다. 소녀는 몹시 피곤하다고 불평했다. 마지막 날까지 아이는 저녁 미사 때문에 허약해졌다고 고백 @p 179 하기가 싫었다. 그만큼 거기서 깊은 기쁨을 맛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이의 볼은 밀랍처럼 창백해져서 의사는 아이를 많이 걷게 하라고 충고했다. “여기 앉아.” 어머니가 말했다. “좀 쉬어라... 10분만 있다 가자꾸나.” 그녀는 아이를 한 기둥 옆에 앉게 했다. 그녀 자신은 의자 몇 개를 사이에 두 고 무릎을 끓었다. 중앙 홀 안쪽에서 인부들이 휘장을 고정했던 못을 뽑고 화분 을 들어내고 있었다. 성모의 달 행사는 엊저녁으로 끝났다. 엘렌느는 손에 얼굴 을 묻고, 자신이 겪고 있는 이 무서운 위기를 주브 신부에게 고백해야 하지 않 을까 생각하면서 꼼짝 않고 있었다. 신부님께서는 충고를 해주시리라. 아마도 잃 어버린 평정을 되찾게 해주시리라.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고통 그 자체에 서 넘칠 듯한 기쁨이 올라왔다. 그녀는 자신의 죄가 소중하였다. 그래서, 신부가 병을 고치지 못할까봐 떨렸다. 10분이 여러 번 흘러 한 시간이 지났다. 그녀는 마음 속의 싸움에 빠져 있었다. 마침내 젖은 눈을 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는 주브 신부가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인부에게 일을 지시하고 있었다. 그는 쟌느를 알아보고 다가온 참이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는 엘렌느에게 물었고 그녀는 얼른 몸을 바로 하며 눈물을 훔쳤다. 그녀는 무릎을 끓고 눈물을 떨굴까 봐 두려워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 는 바짝 다가와서 부드럽게 다시 말했다. “억지로 묻고 싶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어째서 나나 주임신부님이나 다른 누 구에게라도 털어놓지 않습니까?” @p 180 “나중에 하겠어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나중에요, 약속합니다.” 한편, 쟌느는 처음에는 색유리와 큰 문의 성상들, 측랑을 따라 낮은 부조로 처 리된 십자가에 못박히는 장면들을 관찰하면서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성당 의 냉기가 차차 아이를 수의처럼 덮쳤다. 생각조차 방해하는 피로감 속에서 예 배당의 성스러운 고요함과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작은 소리들, 여기서 곧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런 것들이 아이를 불안하게 했다. 그러나 특히 마음아픈 일은 꽃을 들어내는 것을 보는 일이었다. 커다란 장미 다발이 없어지자 제단은 아무 장식도 없는 차가운 모습이 되었다. 초도 없고 향의 연기도 없는 대리석은 아이를 얼어붙게 했다. 한순간 레이스를 입은 성모가 흔들리더니 두 인부의 팔 에 거꾸로 떨어졌다. 그러자, 쟌느는 약하게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팔을 뻗었다. 며칠 전부터 조짐이 엿보였던 발작으로 몸이 뒤틀리며 아이는 뻣뻣해졌다. 질겁한 엘렌느는 안내하는 신부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삯마차에 아이를 태 웠다. 그녀는 긴장하여 손을 떨며 성당의 입구를 돌아다보았다. “성당 때문이야! 성당 때문이야!” 그곳에서 열렬한 애저의 시간을 맛본 데 대한 후회와 자책으로 그녀는 격렬하 게 되풀이했다. 2 저녁에 쟌느는 좀 나아져 일어날 수 있었다. 아이는 어머니를 안 @p 181 심시키려고 고집을 피우며 식당으로 기운 없이 걸어가 빈 접시 앞에 앉았다. “별일 없을 거야.” 아이는 웃어 보이려고 애쓰며 말했다. “내가 허약한 걸 잘 알잖아. 먹어요, 엄마. 엄마가 먹는 걸 보는게 좋아.” 아이는 어머니가 한 입도 삼키지 못하고, 창백해서 떨고 있는 저를 바라보는 것을 알자 저도 좀 먹고 싶은 체했다. 잼을 조금 먹을래. 정말이야. 그러자, 엘렌 느는 서둘러 식사를 마쳤고, 아이는 여전히 웃음을 띠고 머리를 다소 신경질적 으로 떨며 사랑스런 표정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후식이 나오자 아이는 약속 을 지키려고 했다. 그러나 눈물이 핑 돌았다. “안 되겠어,엄마.” 아이는 중얼거렸다. “야단치지 마.” 무기력하게 만드는 끔찍한 피로감이 아이를 엄습하였다. 종아리는 마비된 것 같았고, 쇠로 된 손이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이는 용감하게 처신 하려 했고, 목이 쑤시는 듯 아파서 절로 터지려는 약한 비명을 참았다. 순간, 머 리가 너무 무거워지고 아픔으로 몸이 졸아들면서 제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게 되 었다. 어머니는 아이가 너무 마르고 부서질 듯 사랑스러운 것을 보자, 먹고 있던 배를 채 다 먹지 못했다. 그녀는 목이 메어 냅킨을 떨구고 쟌느를 안아 주러 왔 다. 쟌느는 어머니의 팔 안에 안겼다. “우리 아기,우리 아기...” 어린 딸이 건강할 때면 그렇게도 잘 먹어대서 즐거웠던 식당의 광경에 가슴이 무너져서 그녀는 더듬거렸다. 쟌느는 다시 웃으려고 애쓰며 몸을 일으켰다. “괴로워하지 마. 괜찮아, 정말이야. 밥을 다 먹은 다음 나를 눕혀줘... 더 먹어 요. 엄마는 빵을 요만큼도 먹지 않았잖아.” 엘렌느는 아이를 데려갔다. 그리고 작은 침대를 방 안의 제 침대 옆으로 밀고 갔다. 쟌느는 턱까지 이불을 덮고 눕자 훨씬 좋아져서 뒷머리에서 느껴지는 묵 중한 아픔 외에는 호소하지 않았다. 몸이 아프자 마음이 약해지고 아이의 열렬 한 애착은 더 커진 듯했다. 엘렌느는 아이를 사랑한다고 맹세하면서 안아 주어 야 했고, 자는 동안에도 안아 주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잠들면 아프지 않을거야.” 쟌느는 되풀이했다. “그래도 엄마는 느낄 수 있어.” 아이는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엘렌느는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옆에 앉아 있 었다. 로잘리가 발 끝으로 다가와 물러가도 좋은지 묻자 그녀는 고갯짓으로 그 러라고 대답했다. 시계가 11시를 쳤다. 계단으로 난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 가 들렸을 때, 엘렌느는 그대로 거기 앉아 있었다. 그녀는 놀라서 램프를 들고 문으로 갔다. “누구세요?” “접니다, 열어 주세요.” 눌린 듯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앙리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그 방문을 당연하게 여겨 급히 문을 열었다. 틀림 없이 의사는 쟌느가 발작을 일으킨 사실을 알았으리라. 그래서, 딸이 아픈 이유 의 반은 그에게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녀가 삼가는 마음으로 그를 부르지 않았음 에도 달려온 것이리라. 그러나 앙리는 그녀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는 얼굴이 빨개져 떨면서 식당으로 그녀를 쫓아 들어왔다. “부탁입니다, 용서하세요.” 그는 여자의 손을 잡으며 더듬거렸다. @p 183 “당신을 못 본 지 사흘이 되었고. 꼭 당신을 봐야겠다는 생각을 누를 수 없 었어요.” 엘렌느는 손을 뺐다. 그는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여자를 바라보며 계속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열어 주지 않았다면 나는 문에 그대로 있었을 거예요. 오! 이 모든 것이 미친 짓임을 잘 압니다. 그러나 당신을 사랑해요. 사랑해요...” 그녀는 몹시 심각하게 듣고 있었고 엄격한 표정으로 말이 없어서 남자를 고통 스럽게 했다. 이러한 대접을 받자 그의 모든 열정이 홍수처럼 밀려 나왔다. “아! 왜 우리가 이런 끔찍한 희극을 연출해야 합니까? 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요. 가슴이 터질 듯 하오. 나는 오늘 밤보다 더 고약한 무슨 미친 짓을 저지 를지도 몰라요. 나는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잡고 당신을...” 그는 격렬한 욕망으로 팔을 내밀었다. 그는 다가와서 여자의 옷자락에 입을 맞췄다. 열에 들뜬 그의 손이 여자를 어루만졌다. 그녀는 꼿꼿하게 서서 얼음처 럼 냉랭하였다. “그럼 아무것도 모르세요?” 그녀가 물었다. 남자가 실내복의 벌어진 소매 아래 드러난 손목을 잡고 열력한 키스를 퍼붓 자, 그녀는 드디어 짜증스런 몸짓을 했다. “놔 두세요! 당신 얘기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좀 아세요. 제가 지금 그런 일 을 생각해야 하다니요!” 그녀는 진정하고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러면 아무것도 모르세요?... 그래요! 딸애가 병이 났어요. 당신이 오셔서 다행이에요. 안심이 되는군요.” 램프를 들고 그녀는 앞장섰다. 그러나 문턱에서 그녀는 고개를 @p 184 돌리고 맑은 눈으로 바라보며 엄격하게 말했다. “여기서 또 그러시면 절대로 안 돼요... 절대로,절대로!” 그는 여전히 떨면서 여자가 하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뒤따랐다. 늦은 밤, 옷가지와 내의가 흩어져 있는 방안에서 머리가 헝클어지고 숄이 어깨에서 흘러 내린 엘렌느를 처음 본 날 밤, 그렇게도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마편초 향내가 또 났다. 여기 다시 와서 무릎을 끓고 이 사랑의 향기가 떠다니는 것을 들이마 시다니! 열렬한 사랑 속에서 이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꿈에 빠져 있지 않았던 가! 관자놀이가 터지는 것 같아서 그는 아이의 작은 쇠침대에 몸을 기댔다. “잠들었어요.” 엘렌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좀 보세요.” 그는 듣고 있지 않았다. 그의 열정은 가만히 있지 않으려 했다. 여자가 앞에서 몸을 굽히고 있어서 컬을 한 고운 머리카락과 금빛이 감도는 목덜미가 보였다. 그는 당장 여자에게 키스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느라고 눈을 감았다. “선생님, 보세요. 애가 불덩이예요... 심하지는 않겠지요, 네?” 두개골을 때리는 미친 듯한 욕망 속에서 그는 직업상 몸에 밴 습관에 따라 기 계적으로 쟌느의 맥을 짚었다... 그러나 내부의 싸움이 하도 격렬하여 그는 잠시 멍하니 있었고 어린것의 손을 쥐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듯하였다. “말씀해 보세요. 열이 심하지요?” “열이 심하다구요?” 그는 무심코 되뇌었다. 작은 손이 그의 손을 덥혔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의 내부에 @p 185 서 의사가 깨어났다. 그는 맥박을 쟀다. 눈 속에서 불길이 꺼졌다. 그는 점점 창백해지고 쟌느를 주의깊게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듯 몸을 굽혔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발작이 아주 심합니다. 당신이 옳아요... 세상에, 가엾어라!” 욕정은 사라지고 그는 여자를 도와 주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냉정함이 완전히 돌아왔다. 소녀가 신음하며 깨어났을 때, 그는 앉아서 발작이 일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들을 묻고있었다.아이는 끔찍한 두통을 호소했다.목과 어깨의 통 증이 어찌나 심한지 움직이려고 하자 눈물이 떨어졌다. 엘렌느는 아이가 그렇게 괴로워 하는 것을 보자 가슴이 무너지는 듯했지만 침대 한 편에 무릎을 끓고 아 이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며 웃어 보였다. “누가 있어, 엄마?” 아이는 고개를 돌리고 의사가 있는 걸 보자 물었다. “너도 아는 분이야.” 아이는 잠시 생각에 잠겨서 주저하는 것처럼 그를 살폈다. 부드러운 기운이 아이의 얼굴을 스쳐갔다. “응, 알아. 내가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야.” 그리고 어리광부리듯 말했다. “나를 고쳐 주셔야 해요, 선생님. 네? 엄마가 안심하게요... 선생님이 주시는 약이면 무엇이든 먹을게요. 정말이에요.” 의사는 다시 맥을 짚어 보았고, 엘렌느는 한 쪽 손을 잡고 있었다. 두 사람 가 운데서 아이는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가볍게 떨며, 주의깊은 표정으로 마치 그 두 사람을 자세히 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자,불안감이 덮쳤다. 작은 손은 경련을 일으키며 두 사람을 붙잡았다. “가지 마세요. 무서워요... 나를 지켜줘요. 아무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해요. 엄마하고 선생님만 여기 있어요. 가까이 있어 줘 @p 186 요. 아주 가까이요. 나를 지키면서 같이 있어요...” 아이는 계속 “같이,같이.....”하고 되풀이하면서 떨리는 손으로 두 사람을 가 까이 잡아당겼다. 착란상태가 이렇게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진정이 되면 쟌느는 잠에 빠졌는데 죽은 듯 숨쉬는 기척도 없었다. 잠깐 자다가 소스라쳐 깨어날 때면 소리를 듣지 도 못했고, 눈은 흰 막에 가린 듯 보지도 못했다. 의사는 밤새도록 지키고 있었 으나, 상태는 아주 나빴다. 그는 약을 가지러 잠시 내려갔다 왔을 뿐이었다. 새 벽녘에 그가 떠날 때, 엘렌느는 걱정스럽게 현관에서 배웅하였다. “어떻지요?” 그녀는 물었다. “아주 심각해요.” 의사가 말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부탁이오. 나를 믿어요... 10시쯤 다시 오겠어요. 방에 돌아오자 엘렌느는 초점 잃은 시선으로 주위를 돌아보며 앉아 있는 쟌느 를 발견하였다. “날 내버려 두고 어디 갔었어. 내버려 두고 어디 갔었어!” 아이는 소리질렀다. “오! 무서워. 혼자 있기 싫어...” 어머니는 아이를 위로하려고 키스해 주었다. 그러나 아이는 계속 찾았다. “선생님은 어디 있어? 오! 가지 말라고 해... 선생님이 여기 있었으면 좋겠 어...” “또 오실거야. 착하지.” 엘렌느도 아이와 함께 울면서 계속 말했다. “선생님은 아주 가신 게 아니야. 틀림없어. 선생님은 우리를 아주 좋아 @p 187 하시거든... 자, 착하지. 드러누워라. 엄마가 여기 있을게. 선생님이 오시길 기다 리면서.” “정말이지? 정말이지?” 아이는 조금씩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며 중얼거렸다. 끔찍한 날들이 시작되었다. 3주 동안 지독한 고통이 이어졌다. 열은 한시도 가 라앉지 않았다. 쟌느는 의사가 와서 작은 손 한쪽을 그에게 맡기고 다른 손은 어머니가 잡고 있을 때에만 다소 안정을 찾았다. 아이는 두 사람에게로 피신해 서, 제가 얼마나 열렬한 애정의 보호 아래 있는지 잘 아는 것처럼 그 두 사람에 게만 절대적인 애정을 나눠 주었다. 아이의 신경질적인 예민한 감수성은 병으로 더욱 날카로워졌고, 사랑의 기적만이 그 아이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분명 히 말해 주고 있었다. 아이는 진지하고 깊은 눈길로 몇 시간이나 침대 양 옆에 있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빈사 상태에 있는 어린 소녀의 눈 속을 인간의 모든 열정이 보일듯 말듯 스쳐갔다. 아이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멀리 가지 말라고 애 원하는 듯하기도 하고, 그렇게 그들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큰 휴식을 맛보는지 알아달라고 하는 듯하기도 한 심한 정신적 압박을 가해 오는 것이었다. 의사가 잠시 자리를 떴다 다시 나타나면, 아이는 행복해하면서 문을 떠나지 않던 두 눈 이 밝아졌다. 그리고 고요해져서 의사와 어머니가 제 옆에서 낮은 소리로 얘기 하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발작이 있은 다음 날, 보댕 의사가 나타났다. 그러나 쟌느는 부루퉁해서 고개 를 돌리고는 진찰받기를 거부하였다. “그 사람 싫어. 엄마, 그 사람 싫어. 제발.” 그래서 다음 날 그가 다시 오자, 엘렌느는 아이가 진찰받기를 싫어한다고 말 해야 했다. 노의사는 더 이상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이틀마다 올라와 상태 를 묻고, 그의 나이에 대해 존경을 표하 @p 188 는 동료 의사 드베를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엇보다도 쟌느를 속이려 들면 안 되었다. 아이는 감수성이 별나게 예민하였 다. 신부와 랑보 씨는 매일 저녁 찾아와, 괴로운 침묵 속에 한 시간가량 앉아 있 곤 하였다. 어느 날 저녁, 의사가 가고 없을 때 엘렌느는 그가 간 것을 아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랑보 씨에게 대신 손을 잡고 있으라고 눈짓했다. 그러나 2,3 분이 지나자 잠들었던 쟌느는 눈을 뜨고 손을 확 잡아뽑았다. 아이는 울면서 심 술궂은 짓이라고 말했다. “너는 이제 나를 좋아하지 않니? 이제 내가 싫어?” 불쌍한 랑보 씨는 눈물을 머금으며 되뇌었다. 아이는 대답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 그를 알아보는 것 같지도 않 았다. 이 의젓한 남자는 무거운 마음으로 조금 전에 앉아 있었던 구석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는 소리 없이 들어와 창문 옆 움푹한 곳에 슬며시 앉기에 이르렀 다. 커튼 뒤에 반쯤 숨어서 슬픔으로 굳어진 채, 병자를 쳐다보며 저녁나절을 보 냈다. 신부도 야윈 어깨 위에 몹시 창백한 큰 머리를 얹고 앉아 있었다. 그는 눈 물을 감추려고 요란하게 코를 풀었다. 어린 친구에게 닥친 위험은 불쌍한 교구 민들을 잊게 할 정도로 그를 혼란시켰다. 그러나 두 형제가 방구석에 물러나 앉아 있어도 소용이 없었다. 쟌느는 그들 이 거기 있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아이를 불편하게 했고, 아이는 열에 들떠 선 잠이 들어 있을 때도 돌아눕곤 하였다. 그러면, 어머니는 아이가 더듬거리는 말 을 듣고자 몸을 굽혔다. “오! 엄마,아파! 숨이 막혀. 사람들을 돌려보내오. 빨리, 빨리...” 엘렌느는 가능한 한 상냥하게 어린애가 자고 싶어한다고 두 형제에게 설명하 였다. 그들은 알아듣고, 고개를 수그리고 가 버렸다. 그들이 떠나자마자 쟌느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방을 한 번 둘러 @p 189 보았다. 그리고 어머니와 의사에게 한없이 다정한 눈길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아이는 속삭였다. “나는 괜찮아요. 여기 계세요.” 3주 동안 아이는 그들을 그렇게 잡아두었다. 앙리는 처음에는 하루에 두 번 왔다. 그러다가 저녁나절 내내 있게 되었다. 그는 여가시간 전부를 아이에게 바 쳤다. 처음에 그는 장티푸스가 아닌가 우려했다. 그러나 그토록 모순된 증상들이 나타나자 그는 몹시 곤혹스러워했다. 분명 파악하기 힘든 일종의 위황빈혈인 것 같았다. 그 병발증은 어린이가 여성으로 변하는 시기에 무서운 것 이었다. 그 다 음에는 심장이 나쁜가, 결핵의 초기 증상인가 의심해 보았다. 그를 초조하게 한 것은 어떻게 진정시켜야 할지 알 수 없는 쟌느의 신경질적인 흥분과 집요한 고 열이었는데, 그것은 효과적인 치료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행복과 자신의 삶 자체를 돌본다는 기분 으로 아이를 치료하는 데 온 힘과 지식을 쏟았다. 엄숙히 치료에 몰두하느라고 그의 마음은 아주 고요해졌다. 그 근심스러운 3주 동안 한 번도 그의 열정은 일 어나지 않았다. 그는 이제 엘렌느의 숨결에 부르르 떨지 않았다. 시선이 마주칠 때면, 공동의 불행으로 위협당하고 있는 두 존재의 우정어린 슬픔만이 있었다. 그래도, 매순간 두 사람의 마음은 더욱 하나로 녹아들었다. 그들은 이제 같은 생각으로만 살았다. 그 집에 도착해서 여자를 보면, 그는 쟌느가 어떻게 밤을 지 냈는지 알았고, 그녀에게 병자의 상태가 어떻다고 설명하기 위해 말할 필요가 없었다. 어머니다운 훌륭한 용기로, 그녀는 의사에게 속이지 말고 무서운 사실이 라도 말해야 한다고 맹세하게 했다. 계속 선 채로 있고,20일 동안 계속 세시간 이상을 잔 일이 없지만 그녀는 초인적인 힘과 침착함을 보여 @p 190 주었다. 눈물을 보이지 않았고, 아이의 병과 싸우는 데만 몰두하기 위해 자신의 절망을 눌렀다. 그녀의 내부와 주위에는 넓은 공동이 생겨 주위 사람들도 순간 순간의 감정도 자기 존재에 대한 의식조차도 가라앉아 버렸다. 더 이상 아무것 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로지 꺼져 가는 소중한 자식과 그 자식에게 기적 을 가져다 줄 그남자에게 의해서만 삶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 남자만 보 고 그 남자의 말만 들었다. 그의 가장 사소한 말도 지고의 중요성을 지녔으며, 그에게 힘을 주려면 그말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조건 없이 따랐다. 알지 못 하는 사이에 그녀는 돌이킬 수 없이 완전하게 그의 소유가 되었다. 거의 매일 저녁, 쟌느의 열이 높아지고 위험한 고비를 넘길 때면, 두 사람은 단 둘이 조용 히 무더운 방을 지키고 있었다. 죽음과 맞서 자신도 모르게 서로 느끼기를 원하 며 두 사람의 손은 침댓가에서 만났고, 아이의 가는 한숨과 순탄하고 규칙적인 호흡으로 발작이 지나갔음을 알릴 때까지 오래도록 손을 꽉 맞잡은 채 두 사람 은 붙어 있었다.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같이 안심하였다. 또다시 그들의 사랑은 승리하였다. 그들이 손을 더욱 굳게 잡을 때마다, 두 사람은 더욱 가깝게 결합되었다. 어느 날 저녁, 엘렌느는 앙리가 무언가 감추고 있음을 눈치챘다. 10분 전부터 그는 말없이 쟌느를 관찰하고 있었다. 아이는 참을 수 없는 갈증을 호소하였다. 목이 죄어들었고 바짝 마른 목구멍에서는 계속 씩씩거리는 소리가 났다. 반수상 태가 아이를 덮쳤다. 얼굴이 빨개지면서 둔해지고 아이는 눈꺼풀조차 들어올리 지 못했다. 아이는 꼼짝도 하지 않아서, 목구멍에서 나는 바람소리가 아니면 죽 었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나쁜 증상을 발견하셨지요, 그렇지요?” 엘렌느가 감정 없는 어조로 물었다. 그는 아니라고, 변화되니 것은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몹시 @p 191 창백했고, 무력함에 짓눌려 앉아 있었다. 엘렌느는 있는 힘을 다하여 긴장하고 있었지만 침대 한 옆의 의자에 주저 앉았다. “모두 말씀해 주세요. 당신은 저한테 모든 것을 얘기하겠다고 맹세하셨어요. 가망이 없나요?” 그가 입을 다물고 있자, 그녀는 격렬하게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은 제가 강하다는 것을 아시지요... 제가 울 것 같아요? 절망을 한 것 같아요? 말씀하세요. 저는 사실을 알고 싶어요.” 앙리는 여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느릿느릿 말했다. “좋아요. 지금부터 한 시간 후까지도 이 반수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면 끝장이 라오.” 엘렌느는 눈물을 떨구지 않았다. 그녀는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듯한 공포를 느끼며 굳어져 있었다. 그녀의 눈길이 쟌느를 내려다 보더니, 그녀는 무릎을 꿇 고 어깨로 아이를 보호하려는 듯 눈부신 모습으로 아이를 품 안에 끌어안았다. 한참 동안 그녀는 아이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보면서 제 숨결을, 제 생명을 불어 넣고 싶은 듯 얼굴 가까이 대고 있었다. 어린 병자의 헐떡이는 호흡은 더욱 급 박해졌다. “그러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나요?” 그녀는 고개를 들면서 다시 말했다. “당신은 왜 여기 있죠? 무언가 해보세요...” 그는 낙담한 몸짓을 했다. “무언가 하세요... 제가 알아요? 무엇이든지 하세요. 뭔가 할일이 있을 테지 요. 아이를 죽게 놔둬서는 안 돼요. 그럴순 없어요!” “최선을 다하겠소.” 의사는 단지 그렇게 말했다. 그는 일어섰다. 그리고 비장한 싸움을 시작하였다. 모든 침착함과 의사로서의 결단을 동원하였다. 그 때까지 그는 이미 생명이 고 @p 192 갈된 그 작은 육체를 더 쇠약하게 만들까 봐 격렬한 방법은 감히 사용하지 않았 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열두어 마리의 거머리를 찾아오도록 로잘리를 보냈다. 그는 그것이 아이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필사적인 시도임을 감추지 않았다. 거머리를 가져오자 그는 여자가 순간 마음이 약해진 것을 알았다. “오! 세상에...” 그녀는 중얼거렸다. “세상에, 애를 죽이겠어요.” 그는 동의를 얻어야 했다. “그래요! 그걸 써야 합니다. 용기를 가져야 하오!” 그녀는 쟌느를 놓지 않았다. 그녀는 일어서기를 거절하고 아이 머리를 제 어 깨에 기대게 했다. 의사는 굳은 얼굴로 지금 하려는 시도에 정신을 팔려서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거머리들이 피를 빨지 않았다. 몇 분이 흘렀다. 어둠 속에 잠겨 있는 큰 방에서 시계추만이 무자비하고 끈질긴 소리를 냈다. 매 초마다 희망이 사라졌다. 램프 갓에서 떨어지는 둥그스름한 노란 빛 아래, 괴로 워하는 쟌느의 작은 벗은 몸은 어질러진 시트 한가운데 밀랍처럼 창백하였다. 엘렌느는 무표정한 눈으로 목이 메어, 벌써 축 늘어진 작은 팔다리를 바라보았 다. 아이의 피 한방울을 위해서라면 그녀는 기꺼이 제 피 전부를 바쳤을 것이다. 드디어 붉은 방울이 보였다. 거머리가 피를 빨아들였다. 한 마리 한 마리 거머리 가 달라붙었다. 아이의 목숨은 정해졌다. 폐부를 찌르는 듯한 감동의 처절한 순 간이었다. 쟌느가 내쉬는 이 한숨은 마지막 숨일까? 생명이 돌아온 것일까? 한 순간 엘렌느는 아이가 뻣뻣해지는 것을 느끼며 애가 갔구나 생각하였다. 그녀는 탐욕스럽게 피를 빨고 있는 벌레들을 떼어 버리고 싶은 사나운 욕망을 느꼈다. 그러나 훨씬 강력한 힘이 그녀를 버티게 했다.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굳어 있었 @p 193 다. 시계추는 계속 똑닥거리고 있었고, 방안은 걱정스럽게 기다리고 있는 듯하였 다. 아이가 몸부림을 쳤다. 눈꺼풀이 천천히 들어올려지더니, 아이는 놀라고 피곤 한 듯 다시 눈을 감았다. 한숨과도 같은 가벼운 경련이 아이의 얼굴을 스쳐갔다 입술이 꼼지락거렸다. 엘렌느는 열망과 긴장 속에서 강한 기대감을 가지고 아이 를 들여다보았다. “엄마,엄마.” 쟌느가 중얼거렸다. 앙리가 머리맡,젊은 여인 곁으로 왔다. “살아났어요.” “살아났어...살아났어...” 엘렌느는 더듬거리며 반복했다. 그녀는 기쁨에 넘쳐 미친 듯이 딸을 바라보고, 의사를 바라보면서 침대 옆 바닥에 무릎을 끓었다. 그리고는 격렬하게 일어서더니 앙리의 목에 매달렸다. “아! 사랑해요!” 그녀는 외쳤다. 그녀는 남자에게 키스하고 포옹하였다. 그녀의 마음이 위기에 처한 순간 드디 어 흘러나온, 그렇게도 오랫동안 참아 왔던 고백이었다. 어머니와 연인이 그 달 콤한 순간 하나로 되었다. 그녀는 고마움으로 불타는 사랑을 바쳤다. “눈물이 나요. 보세요, 눈물이 나요.” 그녀는 중얼거렸다. “세상에! 당신을 사랑해요.정말 행복해요!” 그녀는 훨씬 친근해진 목소리로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3주 동안 말라붙었던 눈물이 볼 위로 철철 흘러내렸다. 복받쳐오른 다정한 감정에 완전히 휩쓸려서 그녀는 어린애처럼 아늑하고 편하게 그의 팔에 안겨 있었다. 그리고 다시 무릎 을 끓더니 아이를 어깨에 기대 @p 194 어 재우려고 다시 안았다. 아이가 쉬는 동안 그녀는 가끔 앙리에게 열정이 가득 찬 젖은 눈을 들었다. 행복한 방이었다. 의사는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 쟌느는 침대에 누워 턱까지 이불을 덮고 베개에 고운 갈색 머리를 눕히고, 기진맥진하긴 했지만 진정이 되 어서 눈을 감고 있었다. 벽난로 가까이 끌어다 놓은 원탁에 놓인 램프는 방 한 구석만 비추고 있어서, 좁은 침상가, 늘 있던 자리에 앉아 있는 엘렌느와 앙리는 어슴프레한 어둠 속에 있었다. 어린애는 두 사람을 갈라 놓은 게 아니라 반대로 가까워지게 했고, 사랑의 첫밤에 순결함을 더해 주었다. 두 사람 모두 고통스런 여러 날을 지낸 후라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둘은 마음을 활짝 열고 나란히 있게 되었다. 같이 떨면서 헤쳐 나온 공포와 기쁨을 통해 그들은 서로 더욱 사랑하게 되었음을 알았다. 방안은 따스하고 은밀한 분위기로 공범자 가 되어 주었다. 환자의 침대 주위에는 감동어린 침묵이 깔렸고 방안은 믿음으 로 차 있었다. 엘렌느는 때때로 일어나 발 끝을 들고 약을 찾거나, 램프의 심지 를 돋우거나, 로잘리에게 심부름을 시키러 갔다. 그러면, 의사는 그녀를 눈으로 좇으며 가만히 걸으라는 눈짓을 하였다 그녀가 다시 앉으면 그들은 웃음을 교환 하였다. 그들은 말을 나누지 않았고, 쟌느가 저희들의 사랑 그 자체인 것처럼 아 이에게만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가끔 아이를 돌보며 이불을 끌어 올려 줄 때나 머리를 괴어 줄 때, 두 사람의 손은 잠시 가까이 있는 걸 잊고 서로 닿았다. 무 의식적이고 스쳐 지나가는 그 애무는 두 사람이 괜찮다고 여기는 유일한 것이었 다. “나는 자지 않아.” 쟌느가 중얼거렸다. “엄마와 선생님이 여기 있는 걸 잘 알아요.” 그들은 아이가 말하는 것을 들으며 즐거워했다. 그들은 손을 풀었 @p 195 다. 다른 욕심은 없었다. 아이는 그들을 만족스럽고 평온하게 했다. “괜찮니, 얘야?” 아이가 움직이는 것을 보며 엘렌느가 물었다. 쟌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는 꿈꾸듯 말했다. “아! 응, 느낄 수가 없어. 하지만, 얘기 소리는 들려. 그래서 기분이 좋아.” 잠시 후, 아이는 눈꺼풀을 들고 그들을 보려고 애썼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으 며 눈부시게 미소를 지었다. 다음 날 신부와 랑보 씨가 나타났을 때, 엘렌느는 초조한 빛을 보였다. 그들은 은밀한 행복에 잠겨 있는 그녀를 방해했다. 그들이 나쁜 소식을 들을까 봐 떨면 서 안부를 묻자, 그녀는 쌀쌀맞게도 쟌느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 이가 살아난 것을 앙리와 둘이서만 기뻐하고 싶다는 이기적이니 욕구 때문에 별 로 깊이 생각도 않고 그렇게 대답하였다. 무엇 때문에 우리들의 행복을 나누어 주랴? 그 행복은 두 사람에게 속한 것이어서, 다른 누가 그것을 안다면 줄어들 것만 같이 생각되었다. 두 사람의 사랑에 이방인이 끼어드는 것과도 같았다. 신부가 침대로 다가왔다. “쟌느, 우리다. 네 친구들이야.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겠니!” 아이는 무겁게 도리질을 했다. 아이는 그들을 알아보았지만 얘기하고 싶지 않 아서 어머니에게 근심스럽게 의미 있는 시선을 던졌다. 두 호인은 다른 날보다 도 더욱 슬픔에 잠겨 가 버렸다. 사흘 뒤, 앙리는 환자에게 처음으로 달걀 반숙을 주게 했다. 그것은 아주 큰 일이었다. 쟌느는 문을 닫고 어머니와 의사만 있는데서 그것을 먹고 싶어했다. 마침 랑보 씨가 와 있었는데, 아이는 침대 위에 냅킨을 깔고 있는 어머니의 귀 에 대고 살짝 속삭였다. “잠깐만, 아저씨가 가고 나면 먹을래.” @p 196 랑보 씨가 떠나자마자 아이는 재촉했다. “빨리, 빨리... 사람들이 없을 때 먹어야지.” 엘렌느는 아이를 앉히고, 앙리는 아이가 기대도록 베개 두 개를 받쳤다. 냅킨 을 깔고 무릎 위에 접시를 놓는 동안, 쟌느는 웃으면서 기다렸다. “내가 깨뜨려 줄까?” 어머니가 물었다. “응,그래,엄마.” “내가 세 숟갈 떠 줄게.” 의사가 말했다. “아! 네 숟갈이야. 난 네 숟갈 먹을거야.” 아이는 이제 의사에게 반말을 하고 있었다. 의사가 첫 숟갈을 내밀자 아이는 그의 손을 잡았다. 아이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좋아 죽겠다는 듯이 두 손에 번갈아 입을 맞췄다. “자, 지각 있게 굴어야지.” 거의 울음이 터질 지경인 아이를 보고 엘렌느가 말했다. “우리를 기쁘게 하려면 달걀을 먹어야지.” 그러자, 쟌느는 먹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이는 너무 몸이 약해져 두 숟갈을 먹자 물리고 말았다. 아이는 이가 물렁물렁해진 것 같다면서 음식을 삼키며 웃 었다. 앙리는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엘렌느는 눈물이 핑 돌았다. 하느님! 우리 아이가 먹는 걸 보게 되다니! 이어서 아이는 빵을 먹었다. 먼저 먹은 달걀은 뱃 속을 부드럽게 해주었다. 쟌느가 죽어서 뻣뻣하게 시트에 싸여 있는 광경이 갑 자기 떠오르며 그녀를 얼어 붙게 했다. 그런데 이 애가 먹고 있다니, 병이 나아 머뭇머뭇 느린 동작으로 이렇게 얌전하게 먹고 있다니! “야단치지 마. 엄마... 먹을 수 있는 만큼 먹었어. 세 숟갈째야 @p 197 ...됐어?” “그래, 됐다. 얘야... 엄마가 얼마나 기쁜지 모르지?” 숨막힐 듯한 행복감에 넘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앙리의 어깨에 기댔다. 두 사람은 아이를 보며 웃었다. 그러나 아이는 천천히 불안감에 사로 잡혔다. 아이 는 두 사람을 외면하면서, 더 이상 먹지 않고 고개를 떨구었다. 경계심과 분노의 그림자가 아이의 얼굴을 창백하게 했다. 아이를 다시 눕혀야 했다. 3 회복은 여러 달 걸렸다. 8월이 되어서도 쟌느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이는 저녁에만 한두 시간 일어나 있었다. 창문까지 가는 것도 아이에게는 굉장히 힘 든 일이었는데, 아이는 거기서 지는 해로 타는 듯한 빠리를 바라보며 안락의자 에 파묻혀 있었다. 아이의 가엾은 다리는 지탱하기를 거부하였다. 아이는 희미하 게 웃으며 자기는 작은 새만큼도 피가 없어서 수프를 많이 먹어야 한다고 말했 다. 아이는 국물에 날고기를 잘라 넣은 것을 먹었다. 어서 정원에 놀러 가고 싶 은 마음에 아이는 그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단조롭고 아름답게 물 흐르듯 몇 주가 지나고 몇 달이 지났다. 엘렌느는 날짜 를 세지 않았다. 그녀는 집 밖을 나가지 않았고, 쟌느 곁에서 세상을 잊고 있었 다. 바깥의 소식은 그녀에게까지 미치지 않았다. 연기와 소음이 지평선까지 꽉 차 있는 빠리를 눈앞에 바라보면서도, 바위 틈에 숨은 수도자보다도 더 폐쇄적 이고 외따로 떨어져 있는 은둔생활이었다. 아이가 살아났다는 확실한 사실로 충 분하였다. 그녀는 아이의 표정, 반짝이는 눈, 명랑한 몸짓에 행복을 느꼈고, 아이 의 건강이 회복되는 것을 지켜보며 나날을 보 @p 198 냈다. 아이를 새로 낳은 것 같았다. 회복이 더딜수록 아이를 젖먹여 기르던 옛날 이 생각나면서 달콤함이 느껴졌다. 아이가 힘을 되찾아 가는 것을 보면서, 곧 걸 을 수 있을까 하고 모아 쥔 손 안의 작은 발을 살펴보던 그 옛날보다도 더 생생 한 감동을 느꼈다. 그렇지만 일말의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여러 번 쟌느의 얼굴이 창백 하게 그늘지며 갑자기 의심을 품고 사나워지는 것을 누치챘다. 어째서 아이가 그렇게 명랑하다가 갑자기 변하는 것일까? 아픈 걸까? 통증이 일어나는 것을 감추는 것일까? “말해 봐, 얘, 왜 그러니? ... 방금 웃고 있었는데 지금은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지. 대답해 봐, 어디가 아프니?” 그러나 쟌느는 획 고개를 돌리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아이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제발 날 내버려 둬.” 아이는 오후 내내 상심한 어머니가 이해할 수 없는 슬픔에 빠져 고집을 피우 고 벽만 바라보며 토라져 있었다. 의사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그가 오기만 하면 늘 발작이 일어났다. 그는 발작의 원인을 환자의 신경질적 상태에 돌렸다. 그는 아이를 거스르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라고 충고했다. 어느 날 오후, 쟌느는 자고 있었다. 앙리는 아이의 상태가 괜찮음을 보고, 창 문 앞에서 전처럼 다시 바느질에 열중해 있는 엘렌느와 이야기를 나누며 방안을 서성거렸다. 그녀가 정열적으로 사랑을 고백하던 그 무서웠던 밤 이후로 두 사 람은 별일없이 살아왔다. 두 사람은 내일을 걱정하지 않았으며 세상 모른 채 서 로 사랑한다는 감미로운 사실에 몸을 내맡겼다. 방안에는 죽어가던 환자의 여운 이 아직도 남아 있었고, 쟌느의 침대 곁에서 삼가는 마음이 모든 감각의 일깨움 을 막아 주었다. 순진한 어린아이가 숨쉬는 소리를 @p 199 들으면 그들은 차분해졌다. 하지만 환자가 점점 힘을 찾아감에 따라, 그들의 사 랑도 힘을 얻었다. 혈기가 솟구쳤다. 그들은 떨면서 나란히 앉아, 쟌느가 일어서 게 되고 자신들의 열정이 거침없이 세차게 터지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고 싶지 않아 하면서 현재의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여러 시간 동안, 그들은 아이를 깨우지 않으려고 나직한 소리로 드문드문 말 을 나누면서 제 자신을 달래었다. 아무리 일상적인 이야기라도 두 사람에게는 깊이 와 닿았다. 그 날, 두 사람은 몹시 감동해 있었다. “저 애는 이제 훨씬 좋아질 거요. 장담하오.” 의사가 말했다. “2주 안에 저 애는 정원에 내려올 수 있을 거요.” 엘렌느는 힘있게 바늘을 꽂으며 속삭였다. “어제는 여전히 슬픈 기색이었어요... 하지만, 오늘 아침에는 웃으면서 착해지 겠다고 약속했어요.” 긴 침묵이 이어졌다. 아이가 자고 있는 동안, 두 사람은 평화스러웠다. 아이가 그렇게 쉬고 있는 동안, 그들은 마음이 놓이며 서로 더욱 밀착되었다. “당신은 그 이후로 정원을 못 보았지요?” 앙리가 다시 말했다. “지금은 꽃이 만발해 있어요.” “마가렛이 피었겠네요, 그렇지요?” 그녀가 물었다. “그렇소. 화단도 근사하다오... 참으아리는 느릅나무 속까지 기어올라갔고, 잎 으로 된 둥지라고 할 만하오.” 다시 침묵이 깔렸다. 엘렌느는 바느질을 멈추고 미소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장미꽃잎이 비오듯 날리며 어슴프레한 그늘이 드 @p 200 리운 꿈같이 한적한 오솔길을 함께 거니는 광경이 그들의 머리에 똑같이 떠올랐 다. 남자는 여자 쪽으로 몸을 숙이고 실내복에서 풍기는 희미한 마편초 향기를 들이마셨다. 그러나 이불깃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그들을 방해하였다. “깼군요.” 고개를 들고 엘렌느가 말했다. 앙리는 떨어져 앉으며 역시 침대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쟌느는 작은 팔로 베 개를 안았다. 깃털 속에 턱을 묻고, 두 사람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눈꺼풀은 감긴 채였다. 호흡이 다시 느려지고 규칙적으로 되면서 아이는 다시 잠든 것 같았다. “당신은 그렇게 늘 바느질을 하오?” 의사가 다가앉으며 물었다. “손을 놓고 있을 수가 없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무의식적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면 생각이 정리가 돼요... 여러 시간 동안 지 치지 않고 같은 생각을 해요.” 그는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는 조그만 소리를 내면서 또박또박 옥 양목 천을 찌르고 있는 바늘을 지켜보았다. 그 실은 두 사람의 존재를 실어서 맺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몇 시간이라도 바느질을 할 것 같았고, 그러면 그 는 싫증내지 않고 두 사람을 가만히 흔들어 주듯 바늘이 사각사각하는 소리를 들으며 여기 있을 것 같았다. 잠이 든 아이 옆에서, 아이가 잠을 깨지 않도록 조 심조심 움직이며 이렇게 붙어 앉아 평화롭게 나날을 보내는 것, 이것이 그들의 바람이었다. 아! 그것은 감미로운 정체 상태였다. 조용한 가운데 가슴이 두근거 리는 소리가 들렸으며, 두 사람은 한없는 달콤함 속에서 오직 사랑과 영원을 느 끼며 황홀해하였다. “당신은 정말 좋은 여자요.” @p 201 그는 여자로 인한 기쁨을 표현하는데 그 말밖에는 발견하지 못하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속삭였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열렬히 사랑받고 있음을 느꼈지만 전혀 거북스럽 지 않았다. 앙리의 얼굴이 가까이 있었다. 잠시 동안 그들은 서로 바라보았다. “일하게 놔 두세요.” 그녀가 아주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러시면 끝내지를 못해요.” 그 순간, 본능적인 불안감이 그녀를 돌아다보게 했다. 그리고 그녀는 쟌느가 몹시 창백한 얼굴로 먹물처럼 검은 눈을 크게 뜨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 았다. 아이는 깃털 속에 턱을 묻고 작은 팔로는 여전히 베개를 껴안고 꼼짝 않 고 있었다. 아이는 눈만 뜨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쟌느, 왜 그러지?” 엘렌느가 물었다. “어디 아파? 왜 그래?”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는 움직이지 않았으며 눈을 내리깔지도 않았다. 뚫어질 듯 바라보는 크게 뜬 눈에는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사나운 기색이 이마 를 덮고 뺨은 창백하게 움푹 꺼졌다. 벌써 경련을 일으킬 듯 손목이 틀어지고 있었다. 엘렌느는 말해 보라고 애원하며 급히 일어섰다. 그러나 아이는 고집스럽 게 굳어 있었다. 아이는 어두운 눈길을 어머니에게 떼지 않았고 어머니는 결국 얼굴이 붉어지며 더듬거렸다. “선생님, 보세요. 대체 웬일이지요?” 앙리는 엘렌느의 의자 옆에 있던 제 의자를 밀어놓았다. 그는 침대로 다가가 베개를 꽉 거머잡고 있는 작은 손을 붙잡으려 했다. 그가 손을 대자 쟌느는 충 격을 받은 듯했다. 아이는 벽쪽으로 홱 @p 202 돌아 누우며 소리쳤다. “제발 내버려 둬요. 나를 아프게 하잖아요... 나를 내버려 두세요.” 엘렌느는 당황하며 창문 앞으로 가서 앉았다. 그러나 앙리는 그 옆에 가서 앉 지 않았다. 마침내 그들은 깨달았다. 쟌느는 질투하고 있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의사는 잠깐 말없이 서성거리다가 어머니가 침대 쪽으로 근심스런 눈길 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자 물러가 버렸다. 남자가 멀어지자 그녀는 딸에게 다가 가 양 팔로 힘차게 안아 일으켰다. 그리고 한동안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자, 착하지. 엄마 혼자야... 나를 보고 대답해 봐... 너 아픈 게 아니지? 그래, 내가 널 괴롭게 했니? 엄마한테 다 말해야지... 나한테 화났어? 무슨 생각 하는 거야?‘ 그러나 갖은 방법으로 물어봐도 소용이 없었다. 쟌느는 계속 아무것도 아니라 고 잡아떼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되풀이해 외쳤다. “엄마는 이제 날 사랑하지 않아... 이제 날 사랑하지 않아... ” 아이는 굵은 눈물방울을 떨구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얼굴에 열렬히 키스를 퍼 부으며, 경련하는 팔로 어머니의 목을 안았다. 엘렌느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고 형용할 수 없는 슬픔으로 숨이 막혀서 아이를 한동안 가슴에 안고 있었다. 그녀 는 아이와 함께 울면서 아무도 너만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맹세하였다. 그 날부터 쟌느의 말이나 시선에서는 질투가 드러났다. 생명이 위기에 처해 있었던 동안, 아이는 주위에 부드럽게 감도는 그 사랑이 자신을 구해 주리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제 아이는 다시 튼튼해졌고 더 이상 어머니를 나누어 갖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는 의사에게 원한을 품었고 그 원한은 아이가 건강해짐에 따라 모르는 새에 커져서 증오로 변했다. 그것은 의 심 많고 말없는 작은 존재인 아이의 고집스런 머릿속에 깃들게 되었 @p 203 다. 아이는 절대 그것을 명확하게 밝히려고 하지 않았으며, 제 자신도 잘 알지 못했다. 의사가 어머니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가슴이 아팠다. 아이는 두 손 을 가슴에 대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가슴은 타는 듯했고 거센 분노로 목이 메이 고 창백해졌다. 아이로서도 그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못되게 구느 냐고 나무라기라도 하면 아이는 억울하다고 느꼈고, 아무 대답도 없이 더욱 몸 이 뻣뻣해질 뿐이었다. 엘렌느는 떨면서 아이에게 자신의 불안감을 이해시킬 엄 두를 내지 못했고, 여인처럼 열정적으로 빛나는 열 한 살짜리 아이의 조숙한 눈 길 앞에서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쟌느, 너는 엄마를 몹시 힘들게 하는구나.” 아이가 미친 듯한 격정에 휩싸이는 것을 보면 그녀는 눈물이 글썽글썽해서 말했다. 그녀는 참느라고 숨이 막혔다. 그러나 예전에는 그런 말을 하면 아이는 울면서 엘렌느의 팔 안에 뛰어들곤 하였는데, 그 위력적인 말도 이제는 효력이 없었다. 아이의 성격은 변했고 하루 에도 열 번은 까탈을 부렸다. 제일 잦은 것은 로잘리에게 하듯이 제 어머니에게 퉁명스럽고 명령적인 어조로 말하며, 사소한 일로 못살게 굴고 재촉을 하고 불 평을 늘어놓는 일이었다. “차 한 잔 줘... 오래두 걸리네! 목말라 죽겠어.” 그리고 엘렌느가 차를 가져오면 “설탕을 안 탔어.. 안 마실래.”하고 홱 누워 버렸다. 다시 가져오면 너무 달다고 하면서 물리쳤다. 더 이상 어머니의 마음은 생각지도 않고 일부러 그렇게 했다. 엘렌느는 아이가 더 성질을 부릴까 봐 두려 워서 아무 대꾸도 못하고 굵은 눈물만 뺨 위에 흘리며 바라보았다. 쟌느는 특히 의사가 오는 시간을 위해서 성질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들어오자마자 아이는 침대에 납작 엎드려 낯선 것의 접근을 경계하는 야생동물 처럼 고개를 음험하게 숙였다. 어떤 날은 @p 204 손목을 내주고 눈은 천장을 바라보며 꼼짝달싹 않고 진찰하도록 내버려두고는 말을 하지 않았다. 또 어떤 날은 의사를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고, 골을 내며 손 으로 눈을 가렸다. 그 손을 떼어 내려면 팔을 비틀어야 할 지경이었다. 어느 날 저녁, 어머니가 약숟갈을 내밀자 아이는 끔찍한 소리를 했다. “싫어, 나를 독살하려는 거지?” 날카로운 아픔이 심장을 뚫고 지나가며, 엘렌느는 그 말의 저의를 생각하기가 두려워 손을 멈췄다. “무슨 말을 하는 거니, 얘야?” 그녀는 물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어? ... 약이란 맛있는 게 아니야. 그래도 먹 어야 한단다.” 그러나 쟌느는 약을 삼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고 고집스럽게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 날부터 아이는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약을 먹기도 하고 먹지 않기 도 하면서 까탈을 부렸다. 아이는 침대 옆 탁자에 놓여 있는 약병의 냄새를 맡 아 보고 의심스럽다는 듯 살펴보았다. 그리고 한번 싫다고 한 것은 영락없이 알 아보고 한 방울이라도 마시기보다는 차라리 죽으려고 했다. 의젓한 랑보 씨만이 가끔 약을 먹게 할 수 있었다. 아이는 이제 그를 지나친 애정으로 들볶았으며 특히 의사가 있을 때 그러했다. 그리고 제가 다른 한 사람과 친한 척함으로써 어머니가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보기 위해 반짝이는 눈을 굴리며 어머니를 살폈 다. “아! 아저씨로군요!” 그가 나타나면 아이는 외쳤다. “이리로 앉으세요... 오렌지 가지고 있어요?” 아이는 몸을 일으키고 웃으면서 항상 군것질거리가 들어 있는 그의 호주머니 를 뒤졌다. 그리고 어머니의 창백한 얼굴에 고통의 @p 205 기색이 떠오르는 것을 눈치채고 복수를 했다고 생각하며 만족해서 과장되게 좋아하는 척하면서 그를 껴안았다. 랑보 씨는 이렇게 어린 친구와 화해를 하게 되어 얼굴이 밝아졌다. 엘렌느는 방금 현관에서 그를 맞이하며 급하게 몇 마디 귀띔하였다. 그래서, 그는 별안간 탁자 위에서 약병을 발견한 척했다. “자! 그러면 약을 먹을까?” 쟌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이는 어물어물 말했다. “싫어, 싫어, 맛이 없어. 냄새가 나. 난 안 먹을래!” “뭐라구! 안 먹을래?” 랑보 씨는 명랑한 표정으로 따라 했다. “이건 아주 맛있는 거야. 내기를 해도 좋아... 내가 조금 마셔봐도 되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는 한 숟가락을 듬뿍 따라서 아주 맛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전혀 찡그리지 않고 마셔 버렸다. “아! 맛있는데!” 그는 중얼거렸다. “네가 틀렸어... 자, 조금만 마시면 괜찮아.” 쟌느는 재미있어서 더 이상 싫다고 하지 않았다. 아이는 랑보 씨가 맛을 보아 야만 먹으려 했는데, 주의깊게 그의 동작을 지켜보면서 약물이 그의 얼굴에 어 떤 효과를 나타내나 살피는 듯했다. 이렇게 해서 이 선량한 사람은 한 달 동안 약을 실컷 먹었다. 엘렌느가 고마워할라치면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즐겁게 아이와 약을 나누어 먹으며 자신감에 차 말하곤 하였다. “자 됐다! 아주 맛있지!” 그는 매일 저녁 아이 옆에서 지냈다. 신부도 이틀마다 꼭 들렀다. 아이는 그들 을 가능한 한 오래 잡아 두었고 그들이 모자를 집어드는 것을 보면 골을 냈다. 이제 아이는 어머니와 의사하고만 있 @p 206 게 되면 싫어했고 두 사람을 갈라 놓으려고 다른 사람들이 있기를 원했다. 종종 아이는 이유도 없이 로잘리를 불렀다. 어머니와 의사만 남으면 아이의 눈은 그 들을 떠나지 않았고, 방 어디를 가더라도 그들을 따라다녔다. 그들의 손이 서로 닿으면 아이는 창백해졌다. 그들이 낮은 소리로 말을 나누면 무슨 얘기를 하는 지 알고 싶어하면서 화가 나서 몸을 일으켰다. 심지어는 양탄자 위에서 어머니 의 옷자락이 의사의 발을 스치는 것도 참지 못했다. 아이가 금방 부들부들 떨기 때문에 그들은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서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상심한 육체, 죄 없고 병든 이 가엾은 존재는 극히 예민한 신경질에 빠진 나머지, 등 뒤에서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웃는 듯한 기색이라도 느껴지면 홱 돌아보았다. 두 사람이 특 별히 사랑을 느끼는 날이면, 아이는 풍기는 분위기에서 그것을 느꼈다. 그런 날 이면 아이는 더욱 침울해져, 격렬한 소나기가 쏟아지기 직전에 신경통이 있는 여인들이 그렇듯이 괴로움을 겪었다. 엘렌느의 주위 사람들은 모두 쟌느가 살아났음을 알게 되었다. 엘렌느 자신도 조금씩 그것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결국 아이의 발 작을 버릇없는 아이의 투정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게 되었다. 고통스러웠던 여섯 주일을 헤쳐 나온 지금, 그녀는 살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이제 딸은 몇 시간 동 안은 돌보아 주지 않아도 괜찮게 되었다. 오랫동안 자신이 존재하는지 조차 의 식하지 못했던 그녀에게 그것은 감미로운 이완이자 휴식이었으며, 살고자 하는 욕망의 시간이었다. 그녀는 서랍을 뒤져 잊었던 물건들을 즐겁게 끄집어 내며 일상적인 삶의 행복한 톱니바퀴를 다시 맞추기 위해 갖가지 자잘한 일에 몰두했 다. 이런 새로운 기분 속에서 사랑은 커져 갔으며 앙리는 그렇게 고통받은 데 대해 스스로 허락한 보상과도 같았다. 방 깊숙히 들어앉은 채, 두 사람은 모든 방해물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리고 세상과 떨어져 있었다. 그들 @p 207 의 열정에 충격을 받은 어린애 외에는 아무도 두 사람을 갈라 놓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쟌느가 그들의 욕망에 채찍을 가했다. 아이는 언제나 두 사람 사 이를 엿보며 그들을 계속 압박했고, 무관심을 가장하면서 그들을 몸서리치게 했 다. 아이가 말을 엿들으려 한다는 것을 알고, 그들은 여러 날 동안 아이가 반쯤 잠들어 있어도 말 한 마디 나누지 못했다. 어느 날 저녁, 엘렌느는 앙리를 배웅 하러 따라 나갔다. 현관에서 그녀는 말문이 막히면서 무너지듯 앙리의 팔 안에 몸을 던지려는 참이었다. 닫혀진 문 뒤에서 쟌느가 성난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 했다. “엄마! 엄마!” 그 부르는 소리는 의사의 뜨거운 키스가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스치자마자 반 동처럼 들여 왔다. 엘렌느는 급히 되돌아가야 했다. 아이가 침대에서 뛰어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덜덜 떨면서 흥분하여 속옷바람으로 뛰어오고 있는 아이 를 발견하였다. 쟌느는 사람들이 제 옆을 떠나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 날부터 두 사람에게는 올 때 갈 때 악수하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 드베를르 부인은 한 달 전부터 어린 뤼시앵과 함께 해수욕하러 가 있었다. 의사는 여가 시간을 마음대 로 쓸 수 있었지만 엘렌느 옆에서 감히 10분 이상을 보내지 못했다. 창문 앞에 서 나누던 감미로운 환담도 그만두었다. 서로 마주 볼 때면, 점점 커져 가는 불 길이 두 사람의 눈에서 활활 타올랐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괴롭힌 것은 쟌느의 변덕이었다. 어느 날 아침, 의사가 들 여다보자 아이는 눈물을 흘렸다. 그 날은 온종일 아이의 미움이 열에 들뜬 듯한 다정함으로 바뀌었다. 아이는 의사가 제 침대 옆에 있기를 원했다. 그리고 두 사 람이 나란히 앉아 감동되어 미소짓는 것을 보려는 듯 어머니를 스무 번은 불렀 다. 어머니 @p 208 는 지극히 행복해하며 이런 날들이 오래 이어지길 꿈꾸었다. 그러나 그 다음 날 앙리가 오자, 아이는 너무나 굳은 눈초리로 그를 맞이하였고 어머니는 그에게 돌아가라고 눈빛으로 애원하였다. 밤새도록 쟌느는 의사에게 친절하게 대해 준 것을 미칠 듯이 후회하면서 흥분해 있었다. 그리고 매번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아이가 한창 기분이 좋아서 그윽한 시간을 허용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나쁜 시 간들이 채찍처럼 따라왔는데, 그것들은 항상 서로 붙어 다녔다. 그러자, 엘렌느에게도 차차 반발심이 고개를 들었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그녀 는 분명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 이 심술궂은 아이는 위험한 순간을 벗어난 지금에도 이렇게 나를 못살게 구는 걸까? 그녀가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몽상, 이를테면 어느 낯모를 아름다운 고장을 앙리와 함께 걷고 있는 상상에 빠 질라치면 갑자기 뻣뻣하게 굳어 버린 쟌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의 가슴과 애간장은 끊임없이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모성과 사랑이 싸우는 틈바구니에서 그녀는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어느 날 밤, 그녀가 단호하게 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의사가 왔다 일주일 전부 터 그들은 말 한 마디 나누지 못했다. 그녀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그 러나 그는 안심시키려는 듯 여자를 방안으로 부드럽게 밀었다. 거기서는 두 사 람 모두 자신을 믿을 수 있었다. 쟌느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들은 불빛과 떨 어져 늘 앉던 창가에 앉았다. 고요한 어둠이 그들을 둘러쌌다. 두 시간 동안 그 들은 소리를 낮추려고 얼굴을 가까이 대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소리는 너무 낮아서 커다란 잠든 방안에 겨우 숨쉬는 소리 정도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가끔 그들은 고개를 돌리고 쟌느의 고운 옆모습에 눈길을 던졌다. 포개진 조그만 손 은 이불 위에 놓여 있었다. 그들은 깜빡 아이를 잊고 말았다. 소근거리는 소리가 높아졌다. 엘렌느는 별안간 소스라치면서 앙리의 키스 아래 타는 듯한 손을 @p 209 빼냈다. 그녀는 저희들이 거기서 저지를 뻔한 끔찍한 짓에 싸늘한 공포를 느꼈 다. “엄마! 엄마!” 가위에 눌린 듯 아이가 갑자기 몸을 뒤척이며 중얼거렸다. 아이는 잠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일어나 앉으려고 침대에서 몸부림쳤다. “숨어요, 제발, 숨어요.” 엘렌느는 극도로 불안해하며 되풀이했다. “당신이 있는 걸 보면, 저 애는 죽을 거예요.” 앙리는 급히 창문 옆 움푹 들어간 곳에 푸른 커튼으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아이는 계속 찡얼거렸다. “엄마, 엄마, 아! 아파!” “엄마는 여기 네 옆에 있다, 아가야. 어디가 아프지?” “모르겠어... 여기, 여기가 타는 것 같아.” 아이는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떴다. 그리고 작은 두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갑자기 아팠어. 자는데 커다란 불덩이 같은 게 느껴졌어.” “이젠 괜찮다. 이제 아무데도 아프지 않지?” “응, 응, 괜찮아.” 아이는 불안한 눈으로 방을 둘러보았다. 이제 아이는 완전히 잠에서 깨었다. 갑자기 사나운 기색이 덮이며 얼굴이 창백해졌다. “엄마 혼자 있어?” 아이가 물었다. “물론이지!” 아이는 점점 흥분하며 냄새를 맡고 두리번거리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아니야, 난 알아... 누가 있어... 무서워. 엄마, 무 @p 210 서워! 오! 나를 속이는 거지. 엄마는 혼자가 아니야...“ 신경질을 부리며 아이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면서 침대에서 뒹굴었다. 엘렌 느는 미칠 것같이 되어 앙리를 당장 나가게 했다. 그는 남아서 아이를 돌보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녀는 앙리를 밖으로 밀어냈다. 그녀는 다시 돌아와 쟌느를 팔에 안았다. 쟌느는 제 커다란 슬픔을 한 마디로 나타내는 투정을 반복했다. “엄마는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아. 엄마는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아!” “그만, 그런 말하면 안돼.” 어머니가 외쳤다. “엄마는 누구보다도 널 사랑한단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걸 너도 잘 알지!” 그녀는 자기의 사랑이 아이에게 이토록 비통한 반응을 일으킨 데 놀라면서, 아이에게만 마음을 쏟겠다고 결심하고 아침까지 아이를 보살폈다. 딸애는 엄마 의 사랑으로 살고 있었다. 다음 날, 그녀는 왕진을 청했다. 보댕 의사가 우연히 들른 듯이 와서 농담을 던지며 환자를 진찰하였다. 그는 옆 방에 있는 드베를르 의사와 한참 이야기했다. 두 사람은 현재 상태가 심각한 것은 아니라는 데 일치 를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병발증을 우려하였다. 그들은 아이의 병이 가족 안에 오랜 내력을 지닌 것으로, 학설을 벗어나는 신경증의 일종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엘렌느에게 한참 질문을 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그들이 벌써 다소간 알고 있는 사실을 얘기하였다. 그녀의 할머니는 쁠라상에서 몇 킬로 떨어진 뛸레뜨 정신병 원에 감금되어 있었으며, 어머니는 신경증의 발작과 광증으로 이어지는 삶을 보 낸 끝에 심한 폐병으로 숨졌다. 그녀 자신은 아버지를 닮았다. 얼굴을 닮았을 뿐 아니라 그의 균형감각도 닮았다. 쟌느는 반대로 할머니 쪽을 뺐다. 게다가 몸은 더 허약하였다. 쟌느 @p 211 는 할머니들처럼 키가 크고 뼈대가 굵을 것 같지는 않았다. 두 의사는 이구동성 으로 아주 조심스런 보살핌이 필요하다고 되풀이했다. 위황빈혈 증상은 여러 가 지 무서운 병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에 조심에 조심을 더하여야 했다. 앙리는 늙은 보댕 의사의 말을 여태 어떤 동료에게도 가진 적이 없었던 존경 심을 갖고 들었다. 그는 제 의견에 자신이 없는 어린 학생처럼 쟌느에 대해서 물었다. 사실 그는 이 어린애 앞에서 떨게 된 것이었다. 이 아이는 그의 의학적 지식을 벗어났다. 그는 아이가 죽음으로써 그 어머니를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 한 주일이 흘렀다. 엘렌느는 그를 더이상 환자의 방에 들여놓지 않았다. 그러자, 그 자신도 충격을 받고 병이 나서 발길을 끊었다. 8월 말이 되자 쟌느는 드디어 일어나 집안을 걸어다녔다. 아이는 안심하고 웃 음을 보였다. 보름 동안 아이는 한 번도 발작을 일으키지 않았다. 어머니는 완전 히 아이의 것이었고 항상 옆에 있었으며 정성껏 아이를 돌보았다. 처음에 아이 는 경계심을 갖고 어머니의 키스를 살폈으며 그 거동을 의심했다. 잠들 때까지 손을 작고 있으려 했고, 자는 동안에도 어머니가 옆에 있기를 바랐다. 아이는 더 이상 아무도 오지 않고, 누구와도 어머니를 나누어 가지지 않음을 알게 되고, 예 전처럼 창가에 둘이 앉아 일하는 행복한 생활이 다시 이어지자 만족하여 믿음을 되찾았다. 나날이 아이는 발그레해졌다. 로잘리는 눈에 보이게 아이가 피어난다 고 말했다. 하지만 어떤 저녁, 밤이 내릴 때쯤이면 엘렌느는 의기소침해졌다. 딸이 아픈 후로 그녀는 우울하고 다소 창백해졌으며 전에 없던 굵은 주름살이 이마에 그어 졌다. 쟌느는 이러한 절망적이며 공허한 시간, 권태의 순간을 눈치채고는 막연한 후회로 마음이 무거워지며 몹시 불행하게 느껴졌다. 아이는 말없이 부드럽게 어 머니의 목에 매달렸다. 그리고 낮은 소리로 물었다. @p 212 “엄마, 행복해?” 엘렌느는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서둘러 대답했다. “그럼.” 아이는 자꾸 다짐하였다. “엄마, 행복해, 행복하냐구? ... 확실해?” “물론이지... 왜 내가 행복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면 쟌느는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작은 팔로 어머니를 꼭 껴안았다. 아이 는 말했다. 나는 엄마를 아주 사랑해. 그래서 엄마가 빠리에서 제일 행복한 엄마 였으면 좋겠어. 4 8월이 되자 드베를르 의사 집의 정원은 정말 잎으로 둘러싸인 우물처럼 되었 다. 라일락과 흑단나무가 쇠창살에 가지를 휘감고, 송악, 인동덩굴, 참으아리 같 은 덩굴식물들이 사방 가지를 뻗어 얼기설기 얽혀서 쏟아지며 벽을 타고 뻗어나 가 느릅나무 속까지 파고 들었다. 마치 한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천막을 친 것 같았고, 느릅나무는 이 초록빛 살로의 빽빽하고 튼튼한 기둥처럼 솟아 있었다. 정원은 아주 작아서 느릅나무의 늘어진 가지 하나로 충분히 가려졌다. 가운데에 노란 점처럼 떠있는 정오의 태양이 양쪽 가장자리에 화단이 있는 잔디 위에 둥 근 원을 그리고 있었다. 현관 층계에 있는 한 그루의 커다란 장미나무에는 핑크 빛 꽃이 수없이 만발해 있었다. 저녁에 더위가 수그러들면 폐부를 찌를 듯한 장 미의 훈향이 느릅나무 아래 묵직하게 깔렸다. 이 향기가 감도는 구석은 정말 말 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바바리아 오르간이 비뇌즈 가에서 폴카를 연주할 대면, 정원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웃들은 처녀림을 상상 @p 213 하곤 하였다. “마님...” 로잘리는 매일 말했다. “왜 아가씨는 정원에 내려가지 않아요? ... 나무 밑에서 편히 쉴 수 있을텐데. ” 느릅나무 가지들이 로잘리의 부엌에까지 침입하여 그녀는 손으로 잎을 따곤 했다. 그녀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그 거대한 꽃다발 속에서 즐겁게 지내고 있었다. 엘렌느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직 다 낫지 않았어. 그늘은 서늘해서 애한테 좋지 않을거야.” 하지만 로잘리는 고집을 부렸다. 그녀는 한번 좋은 생각이락 여기면 쉽사리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그늘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잘못이에요. 그 댁 에 폐가 될까 봐 그러시는 거지요. 그렇다면 잘못 알고 계신 거예요. 아가씨는 아무에게도 방해가 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아무도 안 계시거든요. 선생님께서는 안 보이시고, 부인께서는 9월 중순까지 해수욕장에 계실 거랍니다. 문지기 아주 머니가 제피랭에게 갈퀴질을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래서 두 주일 전부터 제피 랭과 저는 거기서 오후를 보냈어요. 오! 아름다워요. 정말이지 아름다워요! 엘렌느는 여전히 싫다고 했다. 쟌느는 몹시 정원에 가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앓아 누운 동안 그 얘기를 자주 했었다. 그러나 이상한 기분이 들면서 당황해서 눈을 내리깔고 어머니에게 조르지 못했다. 드디어, 다음 일요일이 되자 하녀가 씩씩거리며 나타나 말했다. “오! 마님, 아무도 없어요. 정말이에요. 저하고 갈퀴질하는 제피랭밖에 없어 요... 아가씨를 보내세요. 얼마나 상쾌한지 몰라요. 잠깐 구경하세요. 잠깐이면 괜 찮잖아요.” 그녀가 하도 고집을 부려 엘렌느는 지고 말았다. 그녀는 쟌느를 @p 214 숄로 감싸 주고, 로잘리에게는 두꺼운 담요를 가져가라고 일렀다. 아이는 큰 눈 을 말없이 기쁨으로 반짝이며 몹시 좋아하였고, 그래서 기운이 있다는 것을 보 여 주려고 혼자서 계단을 내려가겠다고 했다. 그 뒤에서 어머니는 여차하면 아 이를 붙잡을 준비를 하고 팔을 내밀며 따라갔다. 내려가서 정원에 발을 내닫자 두 사람은 모두 감탄의 소리를 질렀다. 정원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변해 있었 다.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이 밀림은 봄에 보았던 조촐하고 부르주아적인 장소와 는 닮은 데가 없어 보였다. “제가 뭐라고 했어요!” 로잘리는 의기양양해서 다시 말했다. 관목들이 자라서 산책길은 좁은 오솔길로 바뀌었고, 그 미로로 지나갈라치면 치마가 걸렸다. 부드럽고 매혹적인 신비스러움을 지닌 초록색 광선을 떨구고 있 는 잎으로 된 둥근 천장 아래서, 깊은 숲 속에 들어온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 었다. 엘렌느는 4월에 앉아 있던 느릅나무를 찾았다. “하지만 쟌느를 여기 앉혀 둘 수는 없겠어. 그늘 아래여서 너무 쌀쌀해.” “그러면 이렇게 해요.” 하녀가 대답했다. “보세요.” 세 걸음이면 숲을 벗어날 수 있었다. 초록색 틈새로 보이는 해가 잔디 위에 비치고 있었다. 따스하고 고요한 황금빛이 넓게 떨어져 숲 속의 빈 터 같았다. 고개를 들면 나뭇가지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레이스처럼 가볍게 부각되어 있 었다. 큰 장미나무의 핑크빛 꽃은 더위 때문에 다소 시든 채 줄기 위에서 잠들 어 있었다. 맨 끝에는 붉고 흰 마가렛 꽃이 낡은 벽걸이의 가장자리 장식처럼 화단에 피어 있었다. @p 215 “자, 보세요.” 로잘리는 되풀이했다. “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녀는 그늘이 끝나고 있는 산책길가에 담요를 접어서 깔았다. 그리고 다리를 쭉 펴라고 말하며 어깨에 숄을 두른 쟌느를 앉혔다. 이렇게 해서 아이의 머리는 그늘에 있고, 발은 양지 쪽에 놓이게 되었다. “좋아?” 엘렌느가 물었다. “아! 좋아.” 아이가 대답했다. “춥지 않아. 불을 쬐고 있는 것 같아... 오! 정말 상쾌해. 정말 좋아!” 그러자 닫혀 있는 덧창을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엘렌느는 잠시 집으로 올 라가야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로잘리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해를 잘 지켜보아라. 쟌느를 여기 반 시간 이상 두지 말아라. 아이한테 눈을 떼지 말아라. “걱정하지 마. 엄마!” 아이는 웃으면서 소리쳤다. “여기는 마차가 다니지 않는걸.” 홀로 되자 아이는 옆에서 조약돌을 한 줌 주워 가지고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비처럼 쏟아지게 했다. 그동안 제피랭은 갈퀴질을 했다. 그는 부인과 아가씨를 보자 나뭇가지에 걸어 두었던 외투를 바삐 걸쳤다. 그는 예의를 차리려고 갈퀴 질을 잠시 중지하고 서 있었다. 쟌느가 앓아 누운 동안에도 그는 늘 하던 대로 일요일이면 들렀다. 그러나 아주 조심스럽게 부엌으로 살짝 들어왔기 때문에, 로 잘리가 매번 안부를 전하면서 그가 집안 일을 같이 슬퍼하고 있다고 덧 @p 216 붙이지 않았던들 엘렌느는 그가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아! 그는 이 제 예절이 몸에 배어 있었다. 로잘리도 그가 촌티를 벗었다고 말했다. 그는 갈퀴 에 기대어 서서 쟌느에게 우호적인 고갯짓을 보냈다. 아이는 그를 알아보고 미 소를 지었다. “나는 아팠어요.” 아이가 말했다. “저도 압니다, 아가씨.” 가슴에 손을 놓으며 그가 대답했다. 그는 무슨 친절한 말, 분위기를 즐겁게 할 만한 농담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덧붙였다. “틀림없이 건강해질 거예요, 보세요. 이제 좋아질 거예요.” 쟌느는 조약돌을 한 줌 집었다. 제피랭은 만족해서 입이 귀까지 찢어지도록 소리없이 웃으면서 있는 힘껏 갈퀴질을 시작했다. 갈퀴가 자갈 위에서 규칙적으 로 새된 소리를 냈다. 잠시 후 로잘리는 아이가 행복하고 평온하게 장난에 열중 하고 있는 것을 보자, 갈퀴가 긁히는 소리에 끌린 듯 점점 아이로부터 멀어졌다. 제피랭은 햇빛이 내리쬐는 잔디밭 저쪽 끝에 있었다. “황소처럼 땀을 흘리네.” 그녀는 중얼거렸다. “어서 외투를 벗어. 아가씨가 기분나빠 하진 않을거야!” 그는 다시 외투를 벗어 나뭇가지에 걸었다. 가죽띠로 허리를 졸라맨 붉은 바 지는 잔뜩 치켜져 있었고, 말총속을 넣은 칼라가 달린 표백하지 않은 거친 천으 로 된 셔츠는 너무 뻣뻣해서 언제나 불룩하게 부풀어 있었다. 그는 부대에서 ‘ 영원히’라는 말과 함께 새겨 넣은 불타는 두 개의 하트 문신을 보여 주려고 몸 을 흔들며 팔을 걷었다. “오늘 아침 미사에 갔었어?” @p 217 매주 일요일마다 로잘리는 그를 심문하였다. “미사라... 미사라... ”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되풀이했다. 머리를 너무 바짝 깎아 빨간 두 귀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그의 자그마하고 둥 근 얼굴은 속으로 빈정대는 표정을 띠고 있었다. “미사에 갔구말구.” 마침내 그는 말했다. “거짓말!” 로잘리가 사납게 대꾸했다. “거짓말하는 것 다 알아. 코가 움찔거리잖아! ... 아! 제피랭, 종교를 갖지 않 으면 몸을 망칠거야... 조심하라구!” 그는 대답 대신 점잖게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그러나 그녀는 분개한 듯이 소 리를 질렀다. “또 무례하게 굴면 외투를 다시 입게 할거야! ... 부끄럽지도 않아! 아가씨가 보고 있는데.” 그러자 제피랭은 더 멋지게 갈퀴질을 했다. 사실 쟌느는 장난에 좀 싫증이 나 서 금방 눈을 든 참이었다. 아이는 조약돌 다음에는 나뭇잎을 모으다가 풀을 뜯 었다. 그러나 싫증이 나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야금야금 올라오는 해를 보면 서 노는 것이 더 좋아졌다. 조금 전까지는 무릎 아래 종아리만 따뜻한 햇살을 받고 있었다. 지금은 허리까지 햇살을 받고 있었고 온기가 여전히 올라오고 있 었다. 아이는 아주 살살 쓰다듬어 주는 것처럼 온기가 몸 속에 퍼져가는 것을 느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숄 위에서 춤추는 아름다운 금빛 반점이었다. 그것 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아이는 그것을 얼굴에 비추게 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시간을 보내면서 아이는 햇빛 속에서 작은 손을 맞잡았다. 어쩜 이렇게 손이 가 늘어 보일까! 그리고 어쩜 이렇게 투명해 보일까! 태양이 비스듬히 지나갔다. 하 지 @p 218 만 그 손은 예수의 섬세한 손을 닮았고 곱고 길쭉한 조가비 껍질처럼 예뻐 보였 다. 바깥 공기와 주위의 큰 나무들, 따뜻함은 아이를 약간 어리둥절하게 했다. 아이는 자고 있는 것 같았지만 보이고 들렸다. 아주 기분이 좋고 몹시 감미로웠 다. “아가씨, 뒤로 물러나세요.” 아이에게 돌아온 로잘리가 말했다. “볕이 너무 뜨겁군요.” 그러나 쟌느는 움직이지 않겠다고 손짓했다. 아이는 아주 기분이 좋았다. 지금 은 어른들이 숨기려고 하는 일에 대한 애들다운 호기심에 굴복하여 하녀와 작은 군인에게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아이는 구경하지 않는 듯이 보이려고 앙큼스럽 게 눈을 내리깔았다. 조는 듯이 보였지만 아이는 긴 속눈썹 사이로 살피고 있었 다. 로잘리는 잠시 그 옆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갈퀴질 소리에 가만히 있질 못 하고 자기도 모르게 다시 한 걸음 한 걸음 제피랭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요즘 달라진 그의 거동에 대해 잔소리를 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은연중에 감탄하면서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병영 근처의 식물원, 샤또 도 광장을 동료들과 한없이 어슬렁거리는 동안, 작은 군인은 빠리 병사다운 멋있고 화려한 맵시를 갖추게 되었다. 그는 여인들을 즐겁게 하는 수식어와 점잖은 명랑함, 애매한 어법을 배 웠다. 그녀는 그가 어깨를 흔들며 들려 주는 말들을 들으면서 숨막힐 듯 좋아하 곤 했다. 때때로 이해하지 못할 말을 들을 때면 그녀는 자존심이 상해 얼굴이 빨개졌다. 군복은 이제 그를 거북하게 하지 못했다. 그는 뽐내듯 팔을 들어 단추 를 끌렀다. 그는 둥근 얼굴이 드러나고 코가 솟아 보이게끔 군모를 목덜미에 달 고 다니는 법도 터득했다. 군모는 몸이 움직이는 데 따라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 는 방종해져서 술을 입에 대고 몸에 딱 달라붙는 옷을 입었다. 시침을 떼면서 빈정거리는 태도로 봐서 그는 그녀보 @p 219 다 더 여러 가지에 조예가 깊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빠리는 그를 너무 영리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매혹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해서 그를 할퀴어 줄까 아니면 바 보 같은 소리를 하도록 내버려 둘까 망설이며 뻣뻣하게 서 있었다. 한편, 제피랭은 갈퀴질을 하면서 산책길 모퉁이를 돌았다. 커다란 덤불 뒤에서 그는 로잘리에게 엉큼한 추파를 던졌다. 갈퀴로 처녀를 조금씩 제 옆으로 끌어 당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가까이 오자, 그는 난폭하게 엉덩이를 꼬집었다. “소리치지 말라구,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야!” 그는 발음을 얼버무리며 속삭였다. “자 저쪽을 봐.” 그는 희한하게 귀에다 키스했다. 이번에는 로잘리도 피가 나도록 그를 꼬집었 다. 그러자 그는 코에다 또 키스했다. 그녀는 아가씨 때문에 따귀를 한 대 올려 붙이지 못해 골이 났지만 속으로는 좋아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가시에 찔렸어요.” 그녀는 쟌느 옆으로 돌아오면서 금방 작은 고함을 지른 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아이는 덤불의 가느다란 가지 사이로 그 광경을 보았다. 붉은 바지와 군인 셔츠가 초록색 속에서 또렷하게 보였다. 아이는 천천히 로잘리를 향해 눈 을 들고 잠시 바라보았다. 입술이 촉촉하고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처녀는 더욱 빨개졌다. 아이는 다시 눈을 내리깔고 조약돌 한 움큼을 쥐었으나 장난할 기운 이 없었다. 태양은 작열하고 아이는 조는 듯 따뜻한 땅 위에 손을 댔다. 힘이 물 밀 듯이 올라오면서 숨이 막혔다. 나무는 거인처럼 튼튼해 보였고, 장미는 아이 를 향기 속에 잠기게 했다. 아이는 놀라고 흘린 듯 뭔지 모를 막연한 것을 생각 하고 있었다. @p 220 “뭘 생각하는 거예요, 아가씨?” 로잘리가 불안해져서 물었다. “모르겠어. 아무것도 아니야. 아! 알겠어... 나는 아주 늙을 때까지 살고 싶 어...” 아이는 그 말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 하고 아이는 말 했다. 저녁 식사 후에 아이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느냐 고 하자 별안간 이렇게 물었다. “엄마, 사촌끼리 결혼할 수 있어?” “물론이지. 왜 그런 걸 묻지?” “그냥... 알고 싶어서.” 엘렌느는 전부터 아이의 엉뚱한 물음에 익숙해 있었다. 아이는 정원에서 보낸 시간이 좋았는지 날이 맑으면 꼭 내려갔다. 엘렌느의 거부감도 점점 사라졌다. 저택은 닫힌 채였고 앙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결국 그녀도 정원에서 담 요 한 귀퉁이에 쟌느와 앉아 있게 되었다. 그러나 다음 일요일 아침, 창문이 열 린 것을 보자 그녀는 불안해졌다. “어머! 집안을 환기시키는 거예요.” 같이 내려가려고 하던 로잘리가 말했다. “정말 아무도 없다니까요!” 그날은 날씨가 유난히 더웠다. 잎사귀를 뚫을 듯이 황금 햇살이 쏟아졌다. 기 운이 나기 시작한 쟌느는 어머니의 팔에 기대어 10분 가량 걸어다녔다. 그리고 피곤해지자 담요로 돌아와서 엘렌느에게 앉을 자리를 조금 내주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바닥에 앉아 서로를 즐거이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갈퀴질을 마친 제 피랭은 파슬리를 뜯고 있는 로잘리를 도왔다. 파슬리 다발은 눈에 뜨이지 않게 안쪽 벽을 따라 자라 있었다. 갑자기 저택에서 커다란 소리가 났다. 엘렌느가 자리를 피해야 @p 221 겠다고 생각하는데, 드베를르 부인이 현관 계단에 나타났다. 그녀는 여행 차림으 로 매우 바쁜 듯 큰 소리로 말하며 당도하였다. 그러나 잔디에 그랑쟝 부인 모 녀가 앉아 있는 것을 보자 급히 달려와 얼싸안고 수다를 늘어놓으며 정신을 뺐 다. “어머나, 부인! ... 아! 당신을 만나서 정말 기뻐요! ... 한번 안아 보자, 쟌느. 너 아팠었다며? 가엾어라! 그렇지만 좋아졌구나. 생기가 도는데... 얼마나 부인 생각을 했는데요! 편지했는데 받으셨어요? 틀림없이 끔찍한 시간을 보내셨을 테 지요. 하지만 이제 끝났어요... 당신을 껴안아도 되겠어요?” 엘렌느는 일어서서, 양 볼에 키스를 받고 자기도 그렇게 해야 했다. 이러한 애 무는 그녀를 굳어지게 했다. 그녀는 중얼거렸다. “정원에 마음대로 들어와서 죄송해요.” “무슨 그런 말씀을!” 쥴리에뜨가 성급하게 되받았다. “여기는 당신의 집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녀는 잠시 모녀를 떠나 계단으로 다시 올라가, 활짝 열린 방에다 대고 소리 쳤다. “삐에르, 빠뜨리면 안돼요. 가방이 열일곱 개예요.” 그러나 그녀는 곧 다시 돌아와 여행에 대한 얘기를 했다. “아! 근사한 계절이었어요. 우리는 트루빌에 있었어요. 아시지요? 해변에는 서로 밟힐 정도로 사람이 많았어요. 가장 기분 좋았던 일은... 아! 그렇지요, 방문 을 받은 일이에요. 아빠가 뽈린느와 보름 동안 지내러 왔지요. 어쨌든 사람아란 제 집에 돌아오면 좋은가 봐요... 아! 그 얘기를 했던가? 아니에요, 다음에 얘기 할게요.” 그녀는 몸을 굽혀 다시 쟌느를 껴안았다. 그리고는 심각한 표정이 되더니 물 었다. @p 222 “나 얼굴이 탔어요?” “아니요, 잘 모르겠는데요.” 그녀를 바라보던 엘렌느가 대답했다. 쥴리에뜨는 맑지만 생각이 없는 눈과 포동포동한 손, 사랑스런 예쁜 얼굴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늙지 않았다. 바닷바람조차도 그녀의 무심함에서 오는 평정 을 손상시키지 못했다. 그녀는 빠리 시내의 단골 상점을 한 바퀴 돌아서 진열된 상품들의 여운을 몸에 간직한 채, 쇼핑에서 돌아온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그녀가 지나치게 친근감을 드러내서 엘렌느는 점점 더 거북해지고 몸이 굳어지 면서 불쾌해지는 걸 느꼈다. 쟌느는 담요 한가운데 앉아서 꼼짝 않고 있었다. 아 이는 양지 쪽에 있었지만 추운 듯 손을 맞잡고, 고통스러운 듯 고운 머리만을 쳐들고 있었다. “참, 뤼시앵을 못 보셨지요.” 쥴리에뜨가 외쳤다. “그 애를 보셔야 해요... 대단하다구요.” 하녀가 여행의 먼지를 씻어 낸 소년을 데리고 오자, 그녀는 아이를 보여 주려 고 살짝 밀어 한 바퀴 빙 돌게 했다. 살이 찌고 볼이 포동포동한 뤼시앵은 바닷 바람을 맞으며 해변에서 놀아 완전히 검게 타 있었다. 아이는 방금 세수를 하느 라고 부루퉁해 있었는데 터질 듯이 건강해 보였다. 수건으로 문질러 빨갛게 된 볼은 물기가 어설피 닦여져 아직 젖어 있었다. 쟌느를 보자 소년은 놀라서 동작 을 멈췄다. 소녀는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어깨에는 고수머리 가 흩어져 있었는데 무명처럼 창백한 야윈 얼굴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더욱 커 진 듯한 슬퍼 보이는 아름다운 눈이 소년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무더 위 속에서도 소녀는 약간 몸을 떨었고 추워서 불을 쬐려는 것처럼 손을 내밀고 있었다. “좋아~ 너 쟌느와 포옹하지 않을거니?” @p 223 쥴리에뜨가 말했다. 그러나 뤼시앵은 소녀가 무서운 듯했다. 소년은 드디어 결심을 하고 너무 가 까이 가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리고 잽싸게 뒤로 물러 났다. 엘렌느의 눈가에 굵은 눈물이 맺혔다. 이 애는 이렇게 튼튼한데! 쟌느는 잔디밭만 한 바퀴 돌아도 숨을 차 하지 않는가! 복많은 어머니들도 많건만! 쥴리 에뜨는 문득 잔인한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녀는 뤼시앵에게 성 을 냈다. “너는 바보구나! ... 남들이 아가씨를 그렇게 포옹하던? ... 신경쓰지 말아요. 귀염둥이, 이 아이는 트루빌에서 구제불능이 됐어요.” 그녀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다행히 의사가 나타났다. 그녀는 반갑게 외치면서 난관을 벗어났다. “아! 앙리예요!” 그는 가족들이 저녁 때나 오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기차를 탔 다. 그녀는 길게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분명한 설명은 하지 못했다. 의사는 미소 를 띠고 들었다. “어쨌든 당신은 여기 와 있지 않소. 그러면 된 거요.” 그는 방금 엘렌느에게 말없이 인사를 보냈다. 그의 눈길은 잠시 쟌느에게 머 물렀다. 그는 당황한 듯 고개를 돌렸다. 소녀는 의젓하게 그 눈길을 받아냈다. 소녀는 손깍지를 풀고 본능적으로 어머니의 옷자락을 잡았고 제 옆으로 어머니 를 끌어당겼다. “야! 이 녀석!” 의사는 뤼시앵을 들어올려 볼에 입을 맞추며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나무처럼 쑥쑥 크는구나.” “그래요! 그런데 나는 잊어버렸어요?” @p 224 쥴리에뜨가 물었다. 그녀는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뤼시앵을 한 팔로 안은 채, 몸을 굽혀 아내에게 도 역시 입을 맞췄다. 세 사람은 서로 바라보며 웃었다. 엘렌느는 몹시 창백해지면서 올라가자고 말했다. 그러나 쟌느는 거절했다. 아 이는 보고 싶었다. 아이의 눈길이 천천히 드베를르 가족에게 멎었다가 어머니에 게 돌아왔다. 남편의 키스에 쥴리에뜨가 입술을 내밀자 아이의 눈에 불꽃이 일 었다. “너무 무거운데.” 뤼시앵을 땅에 내려놓으며 의사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날씨는 좋았소? ... 나는 어제 말리뇽을 봤다오. 그가 거기서 지낸 얘 기를 하던데... 그런데 당신은 그 사람을 당신보다 먼저 떠나게 내버려 둔거요? ” “오! 그는 참을 수 없는 사람이에요!” 쥴리에뜨는 심각해지더니 당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사람은 우리를 항상 화나게 했어요.” “당신 아버님은 그를 뽈린느의 신랑감으로 기대하시는 것 같던데... 그 사람 은 뭐라고 하지 않소?” “누구요! 말리뇽을요?” 그녀는 놀라서 모욕이라도 당한 듯이 소리쳤다. 그리고는 귀찮다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아! 내버려 둬요. 미친 사람이에요! ... 집에 오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 그리고는 난데없이, 그녀의 예쁜 새 같은 성질로 봐서는 놀랄 만한 감저의 표 현을 하였다. 즉, 그녀는 고개를 치켜들고 남편을 꼭 껴안았다. 그는 너그럽고 다정하게 아내를 잠시 팔 안에 안고 있었다. 그들은 둘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잊은 듯했다. @p 225 쟌느의 눈은 그들을 떠나지 않았다. 핏기가 가신 입술을 분노에 떨면서, 아이 는 질투심 많고 심술궂은 여인의 표정이 되었다. 그 고통이 하도 격렬해서 아이 는 눈을 돌려야만 했다. 순간, 아이는 정원 안쪽에서 계속 파슬리를 찾고 있는 로잘리와 제피랭을 보았다. 틀림없이 사람들의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두 사람은 덤불이 가장 무성한 곳에 들어가 쪼그리고 있었다. 제피랭은 엉큼하게 로잘리의 발을 잡았고, 처녀는 말없이 사내의 뺨을 살짝 때렸다. 쟌느는 나뭇가지 사이로 어린애처럼 환한 작은 군인의 얼굴이 사랑에 취한 웃음으로 몹시 빨개져 숨이 넘어갈 지경임을 보았다. 떼미는 것처럼 작은 군인과 하녀는 우거진 덤불 뒤로 굴러 들어갔다. 햇빛은 똑바로 떨어지고 나무는 잎사귀 하나 까딱하지 않고 더 운 공기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느릅나무 밑에 삽이 닿지 않은 땅에서는 끈적한 향기가 났다. 마지막 남은 핑크빛 장미 꽃송이들은 계단 위에 꽃잎을 점점이 흩 날리고 있었다. 쟌느는 가슴이 터질 듯하여 다시 어머니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방금 일어난 광경 앞에서 말없이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어머니를 보자, 아이는 지극히 괴로운 눈빛을 했다. 어른들은 감히 물어볼 수 없는 어린아이의 깊은 눈 빛이었다. 드베를르 부인이 다가와 말했다. “곧 다시 뵙게 되길 바라요... 쟌느가 병이 나았으니 매일 오후 내려오게 하 세요.” 엘렌느는 벌써 구실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를 너무 피곤하게 하 고 싶지 않다고 핑계를 댔다. 그러나 쟌느가 갑자기 참견했다. “아니야, 아니야, 햇빛이 너무 좋아... 우리는 내려올 거예요, 아주머니. 제가 여기 와도 되지요, 그렇지요?” 아이는 앞에 있는 의사에게 웃어 보였다. @p 226 “선생님, 바깥 공기가 해롭지 않다고 엄마에게 말씀해 주세요.” 그는 다가왔다. 인간적인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이 남자는 어린아이가 상 냥하게 말하자 약간 얼굴을 붉혔다. “맞습니다.” 그는 중얼거렸다. “바깥 공기는 회복을 빠르게 합니다.” “아! 그것 봐, 엄마, 와야 돼.” 아이는 사랑스러운 다정한 눈빛으로 말했으나 눈물로 목이 메었다. 마침, 삐에르가 계단에 나타났다. 부인의 가방 열일곱 개를 들여 놓았던 것이 다. 쥴리에뜨는 남편과 뤼시앵을 거느리고 끔찍이 더러워져서 목욕을 해야겠노 라고 하면서 자리를 떴다. 모녀만이 남게 되자 엘렌느는 쟌느의 목에 숄을 고쳐 매 주기 위해 담요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물었다. “너 이제 의사 선생님한테 화내지 않니?” 아이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야, 엄마.” 침묵이 흘렀다. 엘렌느의 손은 떨렸고 말을 듣지 않아서 숄을 단단히 여밀 수 없었다. 그러자, 쟌느는 중얼거렸다. “선생님은 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 ... 나는 싫어...” 아이의 어두운 눈길은 굳어졌고, 작은 손은 어머니의 어깨를 쓰다듬고 있었다. 어머니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입술까지 올라온 말이 두려웠다. 해가 기울었다. 두 사람은 집으로 다시 올라갔다. 한편, 제피랭은 로잘리에게 유 들유들한 시선을 던지며 뜯어 모은 파슬리 다발을 들고 나왔다. 이제 모두 사라 지자 하녀는 멀찍이서 경계하고 있었다. 그는 담요를 접느라 쭈그리고 있는 처 녀를 고집었고, 처녀는 군인의 잔등을 빈 통 소리가 나게끔 @p 227 한 대 먹였다. 그는 만족스러웠다. 파슬리를 계속 뜯으며 부엌으로 돌아갈 때, 그는 아직도 속으로 웃고 있었다. 그날부터 쟌느는 드베를르 부인의 목소리가 들리기만 하면 정원에 내려가려고 안달을 했다. 아이는 로잘리가 늘어놓는 옆 집 험담을 열심히 듣고 그 집에서 일어나는 일에 신경을 썼다. 때로는 방을 빠져나가 부엌 창으로 엿보러 가기도 하였다. 정원에 내려가면 쥴리에뜨가 살롱에서 날라오게 한 안락의자에 파묻혀 서 뤼시앵과 한쪽에 떨어져 있었지만, 소년의 물음이나 장난은 귀찮아하면서 그 가족을 관찰하는 듯했다. 특히 의사가 있을 때면 더욱 그러하였다. 아이는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며 진력이 난 듯 몸을 길게 뻗었다. 이러한 오후 시간은 엘렌 느에게는 고통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정원에 또 오곤 했다. 자신의 전 존재가 반발함에도 불구하고 또 오곤 했다. 앙리가 쥴리에뜨의 머리카락에 키스할 때마 다 그녀의가슴은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 때마다 동요하는 표정을 감추 려고 쟌느를 돌보는 척하노라면, 아이는 검은 눈을 크게 뜨고 분노를 참느라고 턱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엘렌느 자신보다도 더 창백해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었 다. 쟌느는 고통을 참았다. 어머니가 남몰래 사랑의 고통으로 힘이 다해서 죽어 갈 때면, 아이도 너무나 침울하고 상심해서 데리고 올라가 침대에 눕혀야만 했 다. 의사가 제 아내에게 가까이 가는 걸 볼 때마다, 아이는 얼굴빛이 변하고 몸 을 떨면서 배반당한 정부처럼 활활 타는 눈길로 그를 주시하였다. “나 오늘 아침 기침했어요.” 어느 날 아이는 의사에게 말했다. “저를 보러 오셔야 해요.” 비가 내렸다. 쟌느는 의사가 다시 계속 방문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쟌느는 많 이 건강해졌다. 아이를 만족시켜 주려고 어머니는 @p 228 드베를르 집안의 저녁 초대를 두세 번 받아들였다. 아이는 오랫동안 남몰래 고 민하며 가슴이 찢어졌지만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고, 마침내 건강을 완전히 되찾 았다. 아이는 똑같은 물음을 자꾸 되풀이했다. “행복해, 엄마?” “그럼, 행복하지.” 그러면 아이는 환해졌다. 옛날에 내가 심술궂게 군 것을 용서해야 돼 하고 아 이는 말했다. 내가 그러려고 한 게 아닌데 갑자기 두통이 나서 그렇게 된거야 하고 아이는 말했다.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무언가로 아이의 마음은 터질 지경 이었다. 옮길 수도 없는 흉한 꿈과 막연한 생각들이 한꺼번에 서로 충돌하였다. 그러나 다 지난 일이고 병은 나았으며, 그런 일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었다. 밤이 왔다. 방금 나온 별들이 반짝이는 창백한 하늘에서 고운 재가 내리는 것 같았다. 재는 쉬임 없이 천천히 내려 큰 도시를 덮어버렸다. 벌써 후미진 곳에는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고, 검은 물결 같은 줄무늬가 지평선에서 올라와 남아 있 는 빛을 삼켜 버렸다. 밝음은 주저하듯 서쪽으로 물러갔다. 빠시 지구 아래쪽에 는 몇몇 지붕들을 겨우 알아볼 수 있을 뿐,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물결이 밀려 왔다. 어둠이었다. “정말 더운 밤이로군!” 엘렌느는 창가에 앉아 빠리에서 끼치는 후끈한 바람에 축 늘어져 중얼거렸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아름다운 밤이지요.” @p 229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신부가 말했다. “이번 가을은 따뜻하겠어요.” 수요일, 쟌느는 후식 때까지 유순하게 말을 잘 들었다. 어머니는 아이가 좀 피 곤해하는 걸 눈치채고 침대에 눕혔다. 아이는 작은 침대에서 잠들었고, 랑보 씨 는 원탁 앞에서 장난감을 고치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랑보 씨가 아이에게 선물 해 준, 걷기도 하고 말도 하는 자동인형인데 쟌느가 그것을 망가뜨렸던 것이다. 그는 이런 걸 고치는 데 선수였다. 엘렌느는 9월의 늦더위에 시달리다 답답해서 창문을 활짝 열러 갔다.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어둠의 바다는 그녀를 진정시켜 주었다. 그녀는 혼자 있고 싶어서 안락의자를 창가로 끌어다 놓고 앉아 있었다. 신부의 목소리는 그녀를 놀라게 했다. 그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꼬마를 잘 덮어 주었습니까? ... 여기는 높아서 항상 바람이 세지요.” 그러나 그녀는 조용히 있고 싶어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위가 적막해지 면서 사라져 가는 황혼의 아름다움을 음미하고 있었다. 야등 같은 여명이 첨탑 꼭대기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생 또귀스땡 교회의 불이 먼저 꺼지고 빵떼옹의 푸르스름한 빛은 잠시 그대로 빛났다. 반짝이는 앵발리드의 돔은 달처럼 뭉게구 름 속에 잠겨 있었다. 밤은 광막한 어둠 속에 세상이라고 하는 어슴푸레한 심연 이 펼쳐져 있는 대양이었다. 거대하고 부드러운 숨결이 보이지 않는 도시에서 불어 왔다. 웅웅거리는 소리들 속에서 강변을 소란하게 굴러가는 합승마차 소리, 쁘앵 뒤 주르 다리 위를 건너가는 기차의 기적소리가 가늘지만 분명하게 들렸 다. 최근의 폭우로 불어난 세느 강은 어둠 속에 길게 드러누워 살아 있는 생명 체처럼 크게 숨쉬며 흘러가고 있었다. 아직도 뜨거운 지붕 위에서 후덥지근한 냄새가 끼쳤다. 낮 동안의 열기가 천천히 식어가면서 강에서 @p 230 조금씩 시원한 바람이 불어 왔다. 빠리는 어둠에 잠긴 거상처럼 꿈꾸듯 휴식하 며, 눈을 뜬 채 꼼짝 않고 있었다. 도시의 활동이 정지해 버린 이 순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엘렌느의 마음을 어 루만져 주었다. 쟌느의 침대 옆을 지키며 전혀 밖에 나가지 않았던 석 달 동안, 엘렌느에게 지평선까지 펼쳐진 거대한 빠리 외에는 다른 친구라곤 없었다. 7,8월 의 더위 때문에 격자창은 거의 항상 열려 있었지만, 그녀는 끊임없는 화면을 펼 치는 빠리를 보기 위해 창가로 가거나 고개를 돌릴 여유도 없었다. 그것은 언제 나 옆에 있는 한결같은 친구처럼 그녀의 고통과 희망을 나눠 주었다. 그녀는 여 전히 빠리를 몰랐다. 그녀에게 빠리는 너무 멀었고, 그녀는 그 거리와 거기 사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문단속을 하는 몇 평방미터의 답 답한 이 방도 두 개의 창문을 열면 그녀에게는 아주 넓었다. 얼마나 자주 그녀 는 환자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창가에 팔꿈치를 고이고 눈물을 흘렸던가. 어느 날이던가, 아이가 영영 가버리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던 날, 그녀는 가슴이 무너지고 목이 메어서 하늘로 올라가는 마뉘떵 따시옹의 연기를 오랫동안 바라 보았다. 또, 희망이 타오르는 날이면 그녀는 뛸 듯한 마음으로 아득한 외곽지대 를 바라보곤 하였다. 어떤 한 건물도 그녀의 슬픔이나 기쁨과 관계되지 않은 것 은 없었다. 빠리는 그녀의 생활이었다. 그러나 날이 저물고 가스등이 아직 켜지 기 전, 약 15분 동안 모든 것이 가라앉고 잊혀진 듯 생각에 잠기는 황혼녘이 그 언제보다도 좋았다. “별이 참 많군요!” 주브 신부가 중얼거렸다. “수천 개의 별들이 반짝이고 있어요.” 그는 엘렌느 옆의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눈을 들어 여름 밤 하늘을 바라보았 다. 별자리들이 황금 못처럼 박혀 있었다. 창공은 지 @p 231 평선까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고, 거의 보이지 않는 먼지만한 별들이 반짝이는 금모래처럼 깔려 있었다. 큰곰자리가 천천히 떠올랐다. “저기...” 이번에는 그녀가 말했다. “저쪽 구석에 있는 자고 푸른 별은 저녁마다 보이는데, 밤이 되면 없어져 버 려요.” 이제 신부는 그녀에게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옆에 있자 더욱 평화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그들은 침묵을 지키다가 가끔씩 말을 주고 받았다. 그녀는 두어 번 신부에게 별의 이름을 물었다. 늘 하늘을 바라보지만 그녀는 도통 별의 이름 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도 잘 몰라서 어물거렸다. “저쪽에 아주 맑게 빛나는 아름다운 별 보이지요?” 그녀가 물었다. “왼쪽에 말이오? 초록빛나는 좀 작은 별 옆에... 너무 많아서 어딘지 모르겠 군요.” 신부가 말했다. 무수히 가물거리는 별들이 점점 커지는 것 같아서 그들은 가벼운 전율을 느끼 며 넋을 잃고 말없이 바라보았다. 무한히 깊은 하늘에는 수천 개의 별 뒤에 또 수천 개의 별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그것은 영원한 빛남, 보석처럼 차갑게 반짝 거리는 불꽃이었다. 은하수가 벌써 하얗게 모습을 나타냈다. 은하수를 이루는 무 수히 작은 뜨거운 별들은 너무 많고 너무 멀어서, 둥근 창공에 빛의 스카프처럼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하늘을 보고 있으면 무서워요.” 엘렌느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녀는 하늘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시선은 빠 @p 232 리를 집어삼켜 버리고 입을 벌리고 있는 어둠으로 되돌아왔다. 한줄기 빛도 없 이 완전한 어둠이 깔려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크고 길게 끄는 듯한 소 리가 부드럽게 들렸다. “울고 있는 겁니까?” 흐느낌 소리를 들은 신부가 물었다. “네.” 엘렌느는 간단히 대답했다. 그들은 서로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는 들먹거리며 오래 느껴 울었다. 그들 뒤 에서 쟌느는 순진하고 고요하게 잠에 빠져 있었고, 랑보 씨는 장난감을 고치는 데 열중하여 팔다리를 뜯어 놓은 인형 위에 희끗한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의 커다란 손가락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망가진 장치를 건드렸지만 가끔 용수철이 튀어나오면서 메마른 소리를 내기도 하고, 어린애 목소리로 더듬거리는 소리가 기계에서 새어 나오기도 하였다. 인형이 너무 큰 소리를 내자, 그는 낭패스런 빛 으로 하던 일을 멈추고 쟌느를 깨우지 않았나 걱정스럽게 살폈다. 그는 조심스 럽게 작업을 다시 시작하였는데 연장이라고는 가위와 송곳밖에 없었다. “왜 우는 겁니까?” 신부가 물었다. “무슨 일인지 내가 위로가 될 수 없겠습니까?” “아! 내버려 두세요.” 엘렌느가 중얼거렸다. “울면 속이 시원해져요... 조금 아까, 조금 아까...” 그녀는 흑흑거리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처음 눈물의 발 작이 엄습하였을 때, 그녀는 혼자였다. 그녀는 가슴 속에 북받치는 감정이 말라 버릴 때까지 마음놓고 어둠 속에서 흐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특별 히 마음 아픈 일은 없었 @p 233 다. 딸아이는 병이 나았고 그녀 자신은 단조롭고 평화로운 평소의 규칙적인 생 활을 되찾았다. 그런데 별안간 마음 속에 찌르는 듯한 느낌이 퍼져 갔다. 그것은 몹시 비통한 느낌, 측량할 수 없고 채울 수 없는 공허감이었으며 소중하던 모든 것들을 우중충하게 만드는 한없는 절망감이었다. 그렇게 자신을 위협하는 불행 이 무엇인지 그녀도 알 수 없었다. 그냥 희망이 없었다. 그래서, 울었다. 성모의 달에 꽃향기로 싸인 성당에서 그녀는 그렇게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 꼈었다. 지평선까지 넓게 펼쳐진 황혼녘의 빠리는 그녀에게 깊은 종교적 감명을 주었다. 평평한 대지는 넓어진 것 같았고, 거기 사는 2백만 명의 우울함이 올라 와 흩어졌다. 밤이 되어, 사그라지는 소음과 함께 도시가 사라져 버리면 그녀의 답답한 가슴은 뭉클해지면서, 이 지극한 평화 앞에 눈물이 넘쳐 흘렀다. 그녀는 손을 모아 쥐고 기도를 중얼거렸다. 신앙과 사랑, 성스러운 희생의 욕구가 그녀 를 떨게 했다. 그러면 떠오르는 별들은 그녀를 기쁨과 성스러운 것에 대한 공포 로 흥분시켰다. 한참 후 침묵을 깨고, 주브 신부는 다시 물었다. “나에게 고백하세요. 무엇 때문에 망설입니까?” 그녀는 아직도 탈진한 어린아이처럼 힘없이 울고 있었다. “성당은 부인을 무섭게 하지요.” 그는 계속했다. “한때 나는 부인이 완전히 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 렇지 않았어요. 하느님께서는 당신 식대로 하시지요... 좋아요! 신부가 믿기지 않 는다면 친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은 것도 싫다고 하시렵니까?” “맞습니다.” 그녀는 더듬더듬 대답하였다. “네, 저는 몹시 괴로워서 신부님이 필요해요. 신부님께 고백해야 @p 234 할 것이 있어요. 저는 어렸을 때, 전혀 성당에 가지 않았어요. 요즈음 저는 몹시 흥분하지 않고서는 미사를 드릴 수가 없어요. 그래요, 조금 아까 제가 흐느낀 것 은 빠리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오르간 소리를 닮아서였어요. 광막한 밤과 아름다 운 하늘 때문이었어요. 아! 저는 신앙심을 갖고 싶어요. 도와 주세요. 저를 가르 쳐 주세요.“ 주브 신부는 그녀의 손에 가볍게 손을 얹어 그녀를 진정시켰다. “내게 모든 것을 말하시오.” 그는 간단히 대꾸하였다. 그녀는 잠시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맹세합니다... 저는 신부님께 아무것도 감추지 않아요... 숨이 막히고 저절로 눈물이 솟구쳐서 그냥 우는 거예요... 신부님께서는 제 생활 을 아시잖아요. 저는 요즈음 슬픔도, 잘못도, 후회도 없어요... 저도 모르겠어요. 저도 모르겠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꺼져 들어갔다. 그러자, 신부는 천천히 이 말을 떨어뜨 렸다. “부인은 사랑에 빠졌소.” 그녀는 부르르 떨었다. 감히 아니라고 하지 못했다. 다시 침묵이 깔렸다. 눈앞 에 잠들어 있는 어둠의 바다 한가운데에서 빛이 하나 반짝거렸다. 그것은 발 밑 의 심연 어딘가이긴 했지만 정확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는 곳이었다. 여기저기 서 빛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그 불빛들은 어둠 속에서 갑자기 반짝 켜지더니 별처럼 붙박혀 반짝거렸다. 어두운 호수의 표면에 새로운 천체가 떠오른 것 같 았다. 곧 그 불빛들은 희미한 빛을 던지며 트로까데로에서 빠리까지 두 줄로 이 어졌다. 또 하나의 빛나는 점으로 된 선이 두 선을 잘라 놓았다. 구불구불한 커 브가 보이고, 별들은 기묘하고 장엄하게 퍼 @p 235 져 갔다. 엘렌느는 반짝이는 빛들을 눈으로 좇으며 여전히 아무 말하지 않고 있 었다. 그 불빛은 지평선과 맞닿은 하늘까지 한없이 펼쳐져 있어서, 땅은 사라지 고 어디나 둥근 하늘 같았다. 큰곰자리가 북극성 둘레를 천천히 돌기 시작하자 그녀는 조금 전처럼 다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불이 켜진 빠리 는 깊은 우수를 담고 펼쳐졌다. 그것은 사람들로 우글거리는 세상에 대한 끔찍 한 연상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신부는 고해성사의 습관에서 얻은 부드럽고 단조로운 어조로 그녀의 귀 에 대고 오랫동안 속삭였다. 어느 날 저녁, 내가 경고하지 않았느냐. 이렇게 외 로운 생활이 좋을 게 없으리라고. 사람이란 절대 평범한 생활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 당신은 너무 갇혀있기 때문에 위험한 몽상에 문을 열어 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나는 몹시 늙었어요.” 그는 중얼거렸다. “나는 우리에게 와서 신앙을 갈구하며 무릎을 꿇고 울면서 기도 드리는 여인 들을 많이 보았어요... 하지만 나는 속지 않아요. 그렇게 열렬히 신을 찾는 그 여 인들은 정열에 휩싸인 불쌍한 영혼들일 뿐이에요. 그 여인들이 성당에서 열렬히 사랑하는 것은 한 남자지요...” 그녀는 제 마음 속을 명백히 들여다보려고 애쓰며, 몹시 흥분하여 그 말이 귀 에 들리지 않았다. 목이 졸리는 것처럼 낮게 고백이 새어 나왔다. “그래요! 저는 사랑하고 있어요... 그게 전부예요. 그 다음은 저도 모르겠어요. 저도 모르겠어요...” 신부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지 않았다. 그녀는 열에 들떠서 토막토막 끊어진 말을 이어 나갔다. 그녀는 제 사랑을 고백하고, 그렇 @p 236 게 오래도록 자신을 짓눌러 왔던 비밀을 이 노인네와 나누면서 쓰디쓴 희열을 느꼈다. “정말이지, 더 이상 저도 제 마음을 알 수가 없어요... 저도 모르게 그런 일이 일어났어요. 아마 갑자기 그렇게 된 것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오랜만에 달콤함을 느꼈어요. 어떻게 제 능력보다 제가 더 강할 수 있습니까? 피할 수가 없었어요. 너무 행복했어요. 이제 저는 용기를 잃었어요... 제 딸은 병이 났고 저는 그 아이 를 잃을 뻔했어요. 그래요, 제 사랑은 제 고통만큼 깊었어요. 그 끔찍했던 날들 이후로 그것은 다시 막강한 힘으로 저를 덮쳤고, 저는 제 정신을 잃었어요...” 그녀는 떨면서 숨을 돌렸다. “이젠 지쳤어요... 맞아요, 신부님. 신부님께 이런 일들을 털어놓으니 마음이 좀 가라앉는군요. 하지만 부탁이에요. 제 마음 속에 일어나고 있는 일을 말씀해 주세요. 저는 아주 평온하고 행복했었지요. 이건 제 인생에서 날벼락 같은 일이 에요. 제가 왜 그래야 하지요? 왜 그게 다른 사람이 아니지요? 저는 그럴 만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저는 아주 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신부님께서는 아 세요? 저는 모르겠어요... 아! 도와 주세요. 저를 구해 주세요!” 그녀가 입을 다문 것을 보자, 신부는 늘 고해를 들어 온 사람답게 거칠 것 없 이 자연스럽게 물었다. “그의 이름을, 이름을 말해 주겠소?” 그녀는 주저했다. 이상한 소리가 고개를 돌리게 했다. 그것은 랑보 씨가 고치 고 있는 인형이 차차 제대로 작동하려고 하면서 내는 소리였다. 인형은 여전히 잘못 작동하는 톱니바퀴 소리를 끽끽 내면서, 탁자 위에서 세 걸음쯤 걸었다. 그 러더니 나동그라졌다. 랑보 씨가 아니었던들 바닥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는 팔을 내밀고 아버 @p 237 지처럼 근심스럽게 인형을 받쳐 줄 태세를 갖추고 지켜보고 있었다. 엘렌느가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자, 그는 인형이 곧 걷게 될 것이라고 약속이라도 하듯 자신 있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가위와 송곳으로 인형을 다시 쑤시기 시 작하였다. 쟌느는 자고 있었다. 엘렌느는 그 평화로운 분위기에 마음을 놓고 신부의 귀에 어떤 이름을 속삭였 다. 신부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두워서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침묵 끝에 그는 말했다. “나는 알고 있었어요. 다만 부인 스스로 고백하기를 바라고 있었지요... 얼마 나 괴로우시겠소.” 그는 의무에 대한 상투적인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기진맥진한 엘렌느 는 신부의 조용한 연민에 죽고 싶을 만큼 슬퍼져 검은 망토 같은 빠리에 금빛으 로 명멸하는 불빛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불빛은 무수히 많아졌다. 그 불들은 검 은 재만 남기고 타버린 종이에서 흩어지는 것 같았다. 그 빛나는 점은 트로까데 로 쪽에서 시작되어 시내로 퍼져 갔다. 곧 다른 화로가 왼쪽에 있는 몽마르트르 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오른쪽의 앵발리드 뒤에 다른 하나가, 훨씬 뒤쪽으로 빵 떼옹 부근에 또 하나가 나타났다. 모든 화로는 동시에 작은 불꽃을 날리며 내려 왔다. “우리가 했던 얘기를 기억하시지요?” 신부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 의견은 바뀌지 않았소... 부인께서는 결혼해야 합니다.” “저는!” 그녀는 짓눌린 듯 말했다. “저는 방금 말씀드렸어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아실 텐데요.” “결혼해야 합니다.” @p 238 그는 좀더 강하게 되풀이했다. "정직한 사함과 결혼하는 겁니다." 낡은 범의를 걸친 신부는 거대해진 듯했다. 평소 눈을 반쯤 감고 어깨 위에 숙이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큰 머리는 꼿꼿해졌다. 시선은 넓고 맑아서 그녀는 그 시선이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을 보았다. "당신은 쟌느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고, 당신에게 언제나 충실할 정직한 사람과 결혼하는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 분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맙소사! 그 분을 사랑하지 않아 요..." "당신은 그를 사랑하게 될 겁니다... 그는 선량한 사람이고 당신을 사랑합니 다." 등 뒤에서 랑보 씨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엘렌느는 목소리를 낮추며 몸부림쳤다. 그는 희망을 갖고 참을성과 굳건함을 보여주었고, 지난 여섯 달간 단 한 번도 자신의 사랑으로 그녀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영웅적인 헌신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확신을 갖고 조용히 기다렸다. 신부 는 돌아섰다. "저 사람에게 전부 말해도 되겠소?... 저 사람은 당신에게 손을 내밀어 당신을 구해 줄 것이오. 부인은 저 사람을 매우 기쁘게 할 것이오." 그녀는 필사적으로 그를 말렸다. 그녀의 마음은 반발하였다.그렇게 평화롭고 부드러우며, 사랑의 열병에 대해서 냉정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이 두 사람 모 두가 그녀를 질리게 했다. 내가 그토록 괴로워하는 것을 이렇게 부정해 버리다 니 그들은 대체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일까? 신부는 광막한 공간을 가리키며 손을 크게 휘둘렀다. @p 239 "당신이 흔들리고 있는데도, 이토록 지고한 평화와 아름다운 밤을 보세요... 왜 행복해지기를 거부합니까?" 온 빠리는 불이 켜졌다. 춤추는 듯한 작은 불꽃이 지평선 이 끝에서 저 끝까 지 어둠의 바다에 뿌려져 있었다. 이제 그 수백만의 별은 여름밤의 고요함 속에 서 확고한 빛을 내며 타고 있었다. 공중에 매달린 듯한 그 불빛들을 한 점 바람 이나 떨림으로 깜박거리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빠리는 창공처럼 넓게 무한한 저켠으로 물러나 있었다. 트로까데로 언덕 아래에는 삯마차나 합승마차의 불빛 인 듯 빠르게 움직이는 빛이 별동별처럼 꼬리를 끌며 어둠을 갈랐다. 노란 수증 기처럼 퍼져 보이는 초록색 나무 귀퉁이가 보였다. 앵발리드 교 위에는 별들이 끊임없이 교차하였다. 아래에는 훨씬 짙은 어둠의 뒤를 따라서 금빛 고리를 반 짝이는 비처럼 길게 늘어뜨린 혜성의 무리가 기적처럼 떠올라 보였다. 그것은 검은 세느강물에 다리의 가로등이 반사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너머로는 미지 의 곳이었다. 하천의 완만한 굴곡은 드문드문 비그러매여 있는 두 줄의 가스등 으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빛의 사다리처럼 빠리를 가로질러 양 끝은 하늘가의 별 속에 걸쳐 있었다. 왼쪽에는 다른 협로가 뻗쳐 내려와 았었다. 개선문에서 꽁 꼬르드 광장까지 샹 젤레리제 대로는 별들이 규칙적으로 줄지어 있었고, 광장에 는 쁠레이야드가 섬광처럼 반짝거렸다. 뛸르리, 루브르궁과 강가의 뒤섞인 집들, 저 안쪽 시청은 드문드문 밝은 네모꼴 광장으로 구획이 지어져 어두운 줄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휠씬 앞쪽 아지러운 지붕들 사이로 밝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데 거기서는 후미진 길이나 도로의 모퉁이, 확대되어 보이는 불붙은 듯한 네거 리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저쪽 강안 오른쪽에는 앵발리드 앞 광장만이 중앙의 세 별이 없는 겨울 밤 오리온 성좌처럼 직사각형으로 뚜렷하게 보였다. 생 @p 240 제르맹 지역의 긴 거리에는 서글픈 빛이 드문드문 빛나고 있었다. 그 너머로는 작은 불들로 촘촘히 밝혀진 인구 밀집 지역이 희미한 혼돈 가운데 반짝이며 빛 났다. 무수한 태양으로 밝혀진 도시 외곽을 인간의 눈이 발견할 수 없는 우주적 티끌로 채우고 있는 분진처럼, 저 멀리 교외에는 가스등과 불 밝혀진 창문이 지 평선 근처에서 개미데처럼 바글거렸다. 건물들은 초롱 하나 돛대에 걸려 있지 않은 배처럼 어둠에 잠겨 있었다. 가금 환하게 밝혀져 있는 외눈 거인 같은 건 물에서는 무슨 커다란 향연이 있는 것같이 보였다. 계단과 난간, 창문, 정면, 테 라스, 돌로 된 몸체가 보였고, 작은 조명 램프가 달린 줄이 쳐져 기이하고거대한 건툴물의 테두리는 인광을 발했다. 정신을 차리면 새로 나온 별자리와 넓어지는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엘렌느는 신부의 커다란 동작을 좇아 불 켜진 빠리를 멀리 훑어보았다. 지금 도 그녀는 그 별들의 이름을 몰랐다. 그녀의 마음 같아서는 매일 저녁 저 아래 왼족에 보이는 강렬한 빛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었으리라. 다른 것들도 그녀의 관심을 끌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도 있고 어떤 것들은 그녀를 불안하고 화 나게 했다. "신부님..." 다정하고 존경심이 어린 이 호칭을 쓰면서 그녀가 말했다. "저를 이대로 내버려 두세요... 저를 흥분시킨 것은 이 밤의 아름다움이었어 요... 신부님은 잘못 아신 거예요. 신부님은 지금 저를 위로하실 수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저를 이해하지 못하시니까요." 신부는 팔을 벌렸다. 그리고 체념한 듯 천천히 그 팔을 떨어뜨렸다. 잠시 침묵 한 후, 그는 낮게 말했다. "틀림없이 이럴 줄 알았소. 부인은 도움은 구했지만 구제는 받아들이지 않는군 요. 나는 수많은 절망적인 고백을 받았지만 수많은 @p 241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오!... 들어 봐요. 내게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시오. 인생이 부인에게 너무 짐이 된다면 정직한 한 사나이가 당신을 사랑하며 기다리고 있음 을 생각하시어... 당신은 안정을 찾으려면 그의 손에 당신의 손을 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약속드리겠어요." 엘렌느가 신중하게 대답했다. 그 때, 방안에서는 가벼운 웃음이 일었다. 쟌느는 방금 잠이 깨어 인형이 탁자 위에서 걷는 것을 보았다. 랑보씨는 수리를 마치고 매우 기뻐하며 무슨 사고가 있을까 봐 여전히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러나 인형은 끄떡없었다. 인형은 작은 발꿈치를 탁탁 부딪치면서 한 걸음마다 앵무새 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말을 하면 서 고개를 돌렸다. "아이, 귀여워!" 아직 잠에 취한 채 쟌느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고쳤어요? 망가졌었는데 이제 살아났어요... 잠깐 이리 줘 봐요. 보게 해줘요... 정말 친절하세요..." 그동안 불 켜진 빠리 위로 빛나는 구름이 떠올랐다. 그것은 화로의 붉은 숨결 이라고 할 만했다. 그것은 처음에는 어둠 속에서 창백하고 간신히 분별할 수 있 는 반사광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조금씩 밤이 깊어 감에 따라 핏빛으로 변했다. 도시 위 허공에 움직이지 않고 걸려 있는, 도시가 뿜어내는 으르렁거리는 모든 삶과 불길로 이루어진 구름은 화산 입구에 걸린 벼락과 불로 뭉쳐진 구름 같았 다. @p 242 제 4 부 1 핑거볼이 나왔다. 부인들은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씻었다. 식탁 주위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드베를르 부인은 모두 끝냈는지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말없 이 일어섰고 손님들은 의자 끄는 소리를 내면서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그녀의 오른편에 있던 노신사가 부랴부랴 팔을 빌려 주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녀는 자기가 오히려 그를 문으로 끌고 가며 속삭였다. "작은 살롱에서 커피를 드시지요." 사람들은 쌍쌍이 그녀를 뒤따랐다. 끝으로 두 부인과 두 신사가 따라왔는데, 그들은 그 행렬에 낄 생각이 없는 듯 얘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작은 살롱에서는 거북함은 사라지고 후식의 즐거움이 되살아났다. 커피는 넓은 칠쟁반에 담겨 벌 써 탁자위에 대령해 있었다. 드베를르 부인은 연회에 참석한 손님들의 제작기 다른 기호를 염려하는 여주인답게 상냥한 우아함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사실 가장 소란스럽게 남자 손님들을 접대하는 일을 도맡고 있는 사람은 뿔린느였다. 살롱에는 열두 명쯤 있었는데, 12월부터 수요일마다 드베를르 집안이 초대하는 노상 같은 사람들이었다. 저녁10시 @p 243 쯤 되면 많은 사람들이 왔다. "기로씨, 커피 드세요“ 뿔린느가 키 작은 대머리 옆에 멈추며 말했다. "아! 아니죠, 당신은 커피를 안 하시죠... 그러면 샤르트뢰즈 한 잔 어때요?" 그러나 그녀는 헷갈린 나머지 꼬냑을 가져왔다. 웃음띤 얼굴로 그녀는 태연자 약하게 사람들의 눈을 바라보면서 긴 옷자락을 끌며 좌중을 한 바퀴 돌았다. 그 녀는 백조털을 달고 등을 제모지게 판, 눈부시게 흰 인도산 캐시미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남자들은 모두 선 채로 잔을 손에 들고 턱을 벌려 한 모금 한 모 금 조금씩 마시고 있었는데, 그녀는 키 큰 청년인 아들 띠소가 잘 생긴 것을 보 자 그에게 달려들었다. 엘렌느는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그녀는 엄격하게 보이는 장식이 없는 검은 벨벳 옷을 입고 다소 싫증이 난 표정으로 떨어져 앉아 있었다. 작은 살롱안에서 사람들은 시가를 피워댔고, 시가 상자는 그녀 옆에 있는 까치발 달린 테이블 위 에 놓여 있었다. 의사가 다가와 물으며 시가를 잡았다. "쟌느는 잘 있소?" "잘 있어요." 그녀는 대답했다. "우리는 오늘 숲에 갔었어요. 그 애는 정신없이 놀았어요. 아! 지금 그 애는 곯아 떨어졌을 거예요." 두 사람 모두 매일 만나는 사람답게 친근한 미소를 띠고 다정하게 이야기했 다. 그러나 드베를르 부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 그랑쟝 부인은 기억할 거예요. 내가 9월 10일쯤 트루빌에서 돌와왔지요? 비가 내리고 해변은 견딜 수 없었어요." 그녀가 해변에서 지내던 이야기를 하자 서너 명의 부인이 그녀 @p 244 를 둘러쌌다. 엘렌느도 일어서서 그 무리에 섞였다. "우리는 디나르에서 한 달을 지냈어요." 셰르메뜨 부인이 말했다. "오! 기분좋고 멋진 곳이었어요!" "오두막 뒤에는 정원이 있고 바다 쪽으로는 테라스가 있었어요." 드베를르 부인은 계속 말했다. "내가 마자와 마부를 데려간 걸 아시지요... 그러면 산책할 때 훨씬 편해요... 그런데 르바쇠르 부인이 우리를 보러 왔어요." "그래요. 어느 일요일날이었지요." 르바쇠르 부인이 말했다. "우리는 까부르에 있었어요... 오! 거기서는 아주 근사하게 묵을 수 있지요. 그 렇지만 좀 비싼 것 같아요..." "그런데..." 베르띠에 부인이 쥴리에뜨에게 이야기를 걸며 끼어들었다. "말리뇽씨는 당신에게 헤엄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나요?" 엘렌느는 드베를르 부인의 얼굴에 갑자기 난처한 기색이 떠오르는 것을 알아 챘다. 벌써 몇 번인가 말리뇽의 이름이 그녀 앞에서 불쑥 거론되면 그녀가 불쾌 해하는 것을 본 듯했다. 그러나 젊은 여인은 다시 표정을 가다듬고 말했다. "그 사람은 정말 수영을 잘 하지요!" 그녀는 외쳤다. "하지만 누굴 가르쳐 주게 되면 사정이 다르지요!... 나는 찬물이라면 끔찍이 무서워해요. 해수욕하는 사람들을 보기만 해도 덜덜 떨리는 걸요." 그녀는 통통한 어깨를 으쓱하며 물에 젖은 새가 깃을 털 듯 귀엽 @p 245 게 진저리를 쳤다. "그러면 지어낸 얘기인가요?" 기로 부인이 말했다. "물론이지요. 바로 그 사람이 그 얘기를 만들어 낸 거예요. 거기서 우리와 한 달 동안 함계 지낸 후로 그는 나를 몹시 미워했어요." 사람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머리에 꽃술을 단 부인들은 팔을 벌리고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정장을 하고 손에 모자를 든 남자들은 몸을 굽히고 할 말을 찾 느라고 애쓰고 있었다. 드베를르 부인은 이야기를 하면서 허물없는 손님들에게 손가락 끝을 내밀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 말 없이 인사하고 지나갔다. 그 때, 오펠리 양이 들어왔다. 오자마자 그녀는 쥴리에뜨의 오돌도돌한 무늬가 있는 바 닷빛 벨벳 드레스에 대해 경탄했다. 거기 있던 부인들은 그 때서야 겨우 그녀의 옷이 새로 맞춘 것임을 알아챈 듯했다. 오! 매혹적이에요. 정말 매혹적이에요. 이 옷은 오름 양장점에서 맞춘 거예요. 사람들은 5분쯤 옷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커피를 다 마신 손님들은 벽에 붙은 장식 테이블 위고 쟁반 위고 가리지 않고 아무데나 빈 잔을 놔두었다. 노신사만이 어떤 부인과 이야기하느라고 한 모금마 다 쉬면서 아직 다 마시지 않고 있었다. 희미한 화장 냄새와 커피향이 섞인 더 운 공기가 올라왔다. "당신도 아시겠지만 저는 그 사람의 작품은 한 점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아들 띠소가 뽈린느에게 말했다. 그녀는 아버지를 따라 그림을 보러 간 적이 있는 화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어머나! 한 점도 없어요?... 제가 커피를 가져다 드릴께요." "아닙니다, 아가씨. 정말 괜찮아요." "그렇지만 저는 당신이 꼭 뭘 좀 마셨으면 좋겠는 걸요... 잠깐만요,샤르트뢰즈 가 있어요!" @p 246 드베를르 부인은 고갯짓으로 남편을 살짝 불렀다. 의사는 눈치를 채고 몸소 사 람들이 드나드는 큰 살롱의 문을 열었고 하인은 쟁반을 가져갔다. 넓은 방은 거 의 한기가 느껴질 지경이었는데, 여석개의 램프와 가지가 두개 달린 촛대가 강 렬한 흰 빛으로 방을 밝히고 있었다. 부인들은 벌써 거기 와서 벽난로 앞에 둘 러앉아 있었으나, 남자들은 펼펴진 치마폭 사이에 서 있는 두세 명밖에 없었다. 열린 채 있는 회록색 살롱 문을 통해 아들 띠소와 단 둘이 남아 있는 뽈린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이걸 따라 드리면 꼭 마셔야 해요... 이걸 어쩌면 좋아요? 삐에르가 쟁반 을 가져가 버렸군요." 그리고는 백조털이 달린 드레스를 입고 몹시 창백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그녀 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싱싱한 입술 사이로 이를 드러내고 웃으면서 말했다. "멋쟁이 말리뇽이에요" 악수와 인사말이 이어졌다. 드베를르 씨는 문 가까이 있었다. 드베를르 부인은 부인들 한가운데 아주 낮은 쿠션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시시때때로 일어섰다. 그는 아주 단정한 차림새를 하고 가리마를 타서 살짝 지진 머리카락은 목덜미까 지 내려왔다. 문턱에서 그는 약간 얼굴을 찌푸리며 뽈린느가 늘 말하듯이 '잔뜩 멋을 부리며' 외알 안경을 오른쪽 눈에 갖다댔다. 그는 살롱을 한 바퀴 둘러보았 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무관심하게 의사와 악수를 하고는 드베를르 부인에게 다 가가 검은 양복을 말쑥하게 입은 긴 몸을 구부렸다. "야! 당신이군요." 그녀는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은 지금도 해수욕하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그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는 재치있게 보이려고 대답 @p 247 했다. "물론입니다... 어느날 저는 가라앉고 있는 신대륙을 구했어요." 부인들은 그 말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드베를르 부인조차 무장히 해제된 둣이 보였다. "당신에게 신대륙을 허락해 드리죠." 그녀가 대답했다. "다만 저는 트루빌에서 한 번도 해수욕한 일이 없다는 걸 잘 아셔야 해요." "아! 제가 당신을 가르쳐 드린 일이요!" 그는 외쳤다. "그렇지요! 어느 날 저녁 식당에서 제가 팔과 다리를 흔들어야 한다고 말씀드 리지 않았던가요?" 부인들은 모두 웃기 시작했다. 그는 매혹적이었다. 쥴리에뜨는 어깨를 으쓱했 다. 그와는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그녀는 제 집에 처음 온, 재주 있는 한 여류 피아니스트 앞으로 가려고 일어섰다. 엘렌느는 불가에 평온하게 앉아서 바라보며 듣고 있었다. 특히 말리뇽은 그녀의 흥미를 끌었다. 그녀가 앉 은 안락의자 뒤에서 말소리가 들리는데 드베를르 부인에게 접근하려고 말리뇽이 교묘하게 수단을 쓰는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목소리가 바뀌었다. 그녀는 좀 더 잘 듣기 위해 허리를 제꼇다. 말리뇽의 못소리가 말했다. "당신은 어제 왜 오지 않았습니까? 저는 6시까지 기다렸습니다." "나를 가만 놔두세요. 당신 미쳤군요." 쥴리에뜨가 속삭였다. 그러자, 발음이 부정확해지면서 말리뇽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p 248 "아! 당신은 제 신대륙 이야기를 믿지 않으시는 군요. 그렇지만 저는 메달을 받았습니다. 제가 그것을 보여 드리지요." 그리고 그는 아주 낮게 덧붙였다. "당신은 내게 약속했어요... 기억하시지요..." 손님들이 다 왔다. 드베를르 부인은 인사말을 던지고, 말리뇽은 한쪽 눈에 외 알 안경을 대고 다시 부인들 가운데 있는 게 보였다. 엘렌느는 방금 주워 들은 짤막한 대화에 완전히 기가 질려 있었다. 그녀에게 그것은 날벼락이었으며 예상 치 못한 무서운 일이었다. 차분한 흰 볼과 그토록 평온한 얼굴을 한 이 행복한 여인이 어떻게 남편을 배신할 수 있을까? 그녀는 항상 드베를르 부인을 새대가 리로 여겨 왔으며, 어리석은 권태로부터 그녀를 지켜주는 톡 쏘는듯한 사랑스런 이기주의를 그녀에게서 보아 오곤 하였다. 그런데 말리뇽 같은 사람과! 그녀는 문득 의사가 머리카락을 스치며 키스하면 쥴리에뜨가 다정하게 웃음을 띠던 정 원의 오후들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그러자,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치밀면 서 그녀는 마치 제 자신이 배신을 당하기라도 한 듯 쥴리에뜨에 대한 분노로 휩 싸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앙리에 대한 그녀의 긍지를 손상시키는 일이었다. 질투심 섞인 분노가 그녀를 감쌌다.불편한 기색이 너무나 뚜렷이 그녀의 얼굴에 드러나 오렐리 양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요?... 몸이 안 좋으세요?" 노처녀는 그녀 옆에 앉아 있어서 그것을 알아차린 유일한 사람이었다. 노처녀 는 침착하고 아름다운 이 여인이 몇 시간이나 잡담을 들어 주는 데 감격하여 엘 렌느에게 강한 우정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엘렌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앙리를 보았으면 했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일어서 서 살롱으로 그를 찾으러 갔고 마침 @p 249 내 그를 발견하였다. 그는 창백한 뚱뚱한 남자앞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만족한 표정으로 엷은 웃음을 띠고 아주 평온하였다. 그녀는 잠시 그를 관찰했 다. 그리고 그를 다소 왜소하게 만드는 듯한 동정심을 느끼는 한편, 막연한 보호 심이 섞인 애정으로 그를 더욱 사랑하였다. 아직 몹시 막연한 감정이기는 하지 만 그녀는 그의 옆에서 잃어버린 행복을 벌충해 주어야 했다. "그래요!" 오렐리 양이 속삭였다. "그거 재미있겠는데요. 기로 부인의 여동생이 노래를 부른다는 군요... '뚜르뜨 렐'을 듣는 게 한 열 번째 되네요. 올겨울 그녀의 레퍼터리는 그 노래밖에 없나 봐요... 그녀가 남편과 헤어진거 아시죠. 저쪽 문 옆에 갈색 머리 남자를 보세요. 저 사람들 아주 좋아보이지요. 쥴리에뜨는 할 수 없이 저이를 받아들인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여자가 오지 않거든요..." "아!" 엘렌느가 대꾸했다. 드베를르 부인은 기로 부인의 여동생이 노래할테니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하면 서 이쪽저쪽 활발하게 다니고 있었다.살롱은 꽉 차 있었는데 30명 정도의 부인 들이 수근수근거리고 웃기도 하면서 중앙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그중에서 두 부인은 근사하게 어깻짓을 하면서 한층 높은 소리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서 있었다. 대여섯 명의 남자들이 치마폭에 파묻혀 있었지만 제 집에 있는 것처럼 몹시 편해 보였다. 여기저기서 쉿 소리! 조심성이 퍼져 갔고 와글와글하던 목소 리가 문득 낮아졌다. 얼굴들은 태연하지만 지루해하는 표정을 띠고 있었다. 더운 공기 속에서 부채질 소리만이 들렸다. @p 250 기로 부인의 여동생이 노래를 불렀지만 엘렌느는 듣고 있지 않았다. 지금 그 녀는 음악에 대한 과장된 사랑을 가장하며 '뚜르뜨렐'을 음미하고 있는 척하는 말리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저런 젊은 애와! 그들은 트루 빌에서 위험한 장난을 저지른 것이 틀림없었다. 엘렌느가 주워 들은 말로 비추 어 볼때, 쥴리에뜨는 아직 굴복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타락은 얼마 남지 않은 듯 했다. 앞쪽에서 말리뇽은 매혹적으로 몸을 흔들며 박자를 맞추고 있었 고, 드베를르 부인은 신이 나서 찬탄하고 있었다. 의사는 창백한 뚱뚱보와 대화 를 계속하려고 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상냥하고 참을 성 있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가수가 노래를 마치자 가벼운 박수가 일어났다. 그리고 찬사가 자지러졌다. "감미로워요! 매혹적이에요!" 미남 말리뇽은 부인들의 곱게 빗은 머리 위로 팔을 뻗고 여차한 소리를 제압 하며 노래하듯이 '브라보! 브라보!"를 반복하면서 장갑낀 손가락을 소리 없이 부 딪쳤다. 열광은 곧 가라앉았고 진정된 얼굴들은 마주 보고 웃었다. 몇몇 부인들은 일 어섰고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가라앉은 가운데 대화가 다시 이어졌다. 더위는 더 심해졌고 부채가 팔락거리자 화장한 부인들에게는 사향 냄새가 났다. 때때로 웅 웅거리는 얘깃소리 가운데 웃음소리가 까르르 울려 퍼지고 높은 소리로 발음된 어떤 단어가 고개를 돌리게 했다. 벌써 세 번이나 연거푸 쥴리에뜨는 작은 살롱 에 틀어박혀 있는 남자들에게 이런 식으로 부인들을 내팽개치지 말아 달라고 사 정하러 갔다 왔다. 남자들은 그녀를 따라왔다가는 10분 뒤에는 또 없어졌다. '참을 수 없는 일이야" 그녀는 화난 얼굴로 중얼거렸다. @p 251 "한 사람도 붙들어 둘 수가 없으니" 그동안 오렐리 양은 엘렌느에게 부인들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엘렌느는 의 사 집에서 열리는 야회에 겨우 두 번재 왔을 뿐이었다. 빠시 지역의 상류층과 큰 부자들은 모두 와 있었다. 오렐리양은 몸을 굽히고 말했다. "정말 그렇다는 군요... 셰르메뜨 부인이 18개월 동안이나 붙어 다니던 그 키 큰 금발머리하고 자기 딸을 혼인시킨대요... 어쨌든 장모는 사위를 사랑해 주겠 지요." 그러다가 몹시 놀란 듯 말을 중단했다. "저런! 르바쇠르 부인의 남편이 제 마누라 애인하고 얘기하고 있네!... 쥴리에 뜨는 그 사람들을 한 자리에 초대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엘렌느는 천천히 시선을 끌며 살롱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러면 이 점잖은 모임에 온 이렇게 정직해 보이는 외양을 한 부르주아지 중에는 부정한 여인들밖 엔 없단 말인가? 그녀의 촌스러운 엄격함은 빠리 생활에서 묵인되는 뒤죽박죽에 놀랐다. 쥴리에뜨가 손을 잡았을 때,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괴로워했던 데 대해 쓰디쓴 자조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까지 양심의 가책을 느끼다니 정말 어리석었어! 여기 이 부정한 여인은 세련된 애교까지 살짝부리며 축복받은 듯 부르주아적 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이제 드베를르 부인은 말리뇽과 화해한 듯하 였다. 자그마한 그녀는 안락의자 속에 예쁘장한 갈색 비단 솜옷처럼 오통통한 몸을 움츠리고 청년의 재담에 웃고 있었다. 드베를르씨가 지나갔다. "오늘 저녁에는 다투지 않습니까?" 그가 물었다. "아니에요." 쥴리에뜨는 아주 명랑하게 대답했다. @p 252 "이 사람은 너무나 어리석은 소리를 해요... 그가 하는 어리석은 소릴 당신이 죄다 들으신다면..." 다시 노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조용해지기는 더욱 어려웠다. 애들 같은 머리 모양을 한 꽤 나이든 부인과 '총회'를 튜엣으로 부르고 있는 사람은 아들 띠소 였다. 뽈린느는 문 앞의 검은 정장들 사이에 서서 예술작품을 바라보듯 드러내 놓고 찬탄하는 표정으로 노래하는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 미남이야!" 반주만 들리는 소악절 도중 그녀가 내뱉은 감탄은 너무 높아서 살롱에 있는 사람들 전부에게 들렸다. 야회는 계속되었고 사람들의 표정은 권태에 잠겼다.부인들은 3시간 전부터 같 은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은연중에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그래 도 거기서 지루한 것이 행복하였다.한쪽 귀로 흘려 듣고 있는 곡과 곡 사이에는 잡담이 이어졌다.피아노의 공허한 울림이 그 뒤를 잇는 듯했다.르뗄리에 씨는 리 용에 견직물 주문 때문에 갔던 일을 이야기했다.손 강물은 론 강물을 세차게 치 기 때문에 그것과 섞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법관 기로씨는 빠리의 악을 억제해 야 한다고 하면서 격언조의 문장을 내뱉었다.사람들은 한 중국인을 알고 있어서 그이 시시콜콜한 것들을 얘기하고 있는 한 신사를 둘러쌌다.구석에 있는 두 부 인은 하인들에 관해 속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한편,말리뇽이 좌지우지하고 있는 한 무리의 부인들은 문학을 얘기하였다.띠소 부인은 발자끄는 읽을 수가 없다고 단언하였다.그는 아니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단지 발자끄도 가끔 잘 쓴 페이지가 있다고 지적했을 뿐이었다. "좀 조용히 해주세요!" @p253 뽈린느가 소리를 질렀다. "연주가 있겠습니다." 그 부인은 썩 훌륭한 솜씨를 지닌 피아니스트였다.모든 고개가 예의상 그쪽을 향했다. 그러나 피아니스트가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동안 작은 살롱에서 토론을 벌이는 남자들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드베를르 부인은 모든 걸 포기한 듯이 보였다. 그녀는 무던히 애를 썼었다. "못 말리는 사람들이야." 그녀는 중얼거렸다. "오기 싫은 사람은 거기 있으라고 해요. 하지만 적어도 조용히는 해야지!" 그녀는 뽈린느를 보냈다. 뽈린느는 좋아서 명을 이행하러 달려갔다. "신사분들, 연주가 시작됩니다." 여왕 같은 옷차림을 하고 처녀다운 자신만만한 자유분방함으로 그녀는 말했 다. "조용히 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어요." 그녀는 무척 큰 소리로 말했다. 게다가 그녀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거기 눌러 앉아서 남자들과 웃고 농담하였으므로 시끄러운 소리 는 훨씬 더 커졌다.토론은 계속되었고, 그녀도 함께 어울렸다. 살롱에 있는 드베 를르 부인은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이미 충분한 음악을 들었기 때문 에 청중들은 냉랭하였다. 여주인은 피아니스트에게 의무적으로 과장된 찬사를 했지만, 피아니스트는 뽀로통해서 자기 자리에 다시 가 앉았다. 엘렌느는 고통스러웠다.앙리는 그녀를 보지 않는 것 같았다.그는 더 이상 그녀 에게 가까이 오지도 않았다.가끔 그는 멀리서 웃음을 보냈다.야회가 시작될 때, 그녀는 그가 그렇게 지각있게 행 @p 254 동하는 걸 보고 마음이 놓였다.그러나 다른 두 사람의 이야기를 알게 된 후로 그녀는 자기도 알지 못할 그 무언가를, 평판이 더럽혀져도 좋으니 애정의 표시 같은 것을 바라고 있었다.온갖 종류의 좋지 않은 감정들과 혼란스런 욕망이 그 녀를 들뜨게 했다.저리도 무심하다니... 그는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일 까? 그는 확실히 적절한 기회를 찾고 있는 것이리라. 아! 그에게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면, 그의 아내가 그이 이름을 더럼힌 수치를 알릴 수 있디면! 피아노가 활기 찬 짧은 음을 훑고 있는 동안, 그녀는 가만가만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꿈에 몸 을 싣고 있었다. 앙리는 쥴리에뜨를 쫓아냈고, 자기는 그의 아내로서 그와 함께 말도 알아들을 수 없는 먼 나라에 있었다. 한 목소리가 그녀를 움찔하게 했다. "아무것도 안 드세요?" 뽈린느가 말했다. 살롱은 비어 있었다.사람들은 차를 마시려고 식당으로 건너간 참이었다.엘렌느 는 힘들게 일어섰다.머릿속의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아까 들은 말이라 든지, 쥴리에뜨의 임박한 타락이라든지, 미소지으며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있는 부정한 부르주아 여인들이라든지, 이 모두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이 모든 게 정말이라면 앙리는 제 옆에 있을 것이고 두 사람은 벌써 이 집을 떠났을 것 이었다. "차 한잔 드시겠어요?" 그녀는 웃었다.그리고 그녀를 위해 식탁에 자리를 잡아 둔 두베를르 부인에게 감사를 표했다.과자와 사탕이 놓이 접시가 식탁을 덮고 있었고 커다란 빵과 두 개의 케이크가 굽달린 그릇 위에 대칭으로 올려져 있었다.긴 술장식이 달린 회 색 냅킨으로 두 개씩 분리되어 있는 찻잔은 자리가 모자라서 거의 서로 닿을 지 경이었다. @p 255 부인들만이 앉아 있었다. 그녀들은 크림단지를 건네 주기도 하고 품위 있는 자 태로 따르기도 하면서 장갑을 벗은 손 끝으로 작은 비스킷과 설탕에 절인 과일 들을 집어먹었다.그렇지만 서너 명은 헌신적으로 남자들을 접대하고 있었다.그들 은 벽을 따라 서 있었는데 무심코 부딪쳐 오는 팔꿈치를 피하려고 여러모로 조 심하면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다른 사람들은 두 개의 살롱에 남아서 케이크가 차례 오기를 기다렸다.그 때,뽈린느는 기고만장해 있었다.사람들은 더 크게 얘기 를 했고 웃음소리, 은식기가 쟁강거리는 소리가 울렸다.사향 냄새는 찌르는 듯한 차 향기로 더욱 데워졌다. "빵 좀 이리 주세요." 엘렌느 바로 옆에 있던 오렐레 양이 말했다. "사탕이란 든든하지가 않거든요." 그녀는 벌써 두 접시를 비웠다. 그리고 한 입 가득 물고서 말했다. "사람들이 물러나는 군... 이제 편해지겠어." 정말 부인들은 드베를르 부인과 악수를 나눈 다음 가 버렸다.남자들도 여러 명이 슬그머니 떠나 버렸다.집안은 텅 비었다.그러자, 이번에는 남자들이 식탁에 앉았다.그러나 오렐리양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그녀는 펀치를 한 컵 마시고 싶 었다. "제가 한 컵 가져다 드리지요." 엘렌느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오! 괜찮아요... 그러실 필요 없는데." 엘렌느는 잠시 동안 말리뇽을 살폈다.그는 의사에게로 가서 악수한 다음 지금 은 입구에서 쥴리에뜨에게 인사하고 있었다.그녀는 순결한 얼굴과 맑은 눈을 하 고 있었으며 남자는 호의를 품은 듯한 웃음을 띠고 있어, 사람들은 그날 저녁 파티에 대해 그녀에게 치사의 말을 하고 있는 줄로 알 것이었다.삐에르는 문가 에 놓인 @p 256 식기대 위에서 펀치를 따랐고,엘렌느는 다가서서 문에 드리워진 휘장 뒤에 몸을 살짝 숨겼다.그녀는 귀를 기울였다. "모레 꼭 오십시오..." 말리뇽이 말하고 있었다. "3시에 기다리겠습니다..." "좀 점잖게 구실 수 없어요?" 드베를르 부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바보 같은 얘길 하다니!" 그러나 그는 여전히 되풀이하면서 고집을 피웠다.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모레 오십시오... 어딘지 아시죠?" 그러자 그녀가 급히 속삭였다. "그래요, 좋아요. 내일 모레." 말리뇽은 고개를 숙이고 떠났다. 셰메뜨 부인이 띠소 부인과 자리를 떴다. 쥴 리에뜨는 명랑하게 그녀들을 현관까지 배웅하면서 셰르메뜨 부인에게 최대한 상 냥하게 말했다. "모레 뵈러 가지요... 저는 그 날 방문할 곳이 많아요." 엘렌느는 몹시 창백한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그동안 삐에르는 펀치를 따라 서 그녀에게 잔을 내밀었다.그녀는 기계적으로 잔을 받아서 과일 절임에 덤벼들 고 있는 오렐리 양에게 가져갔다. '아! 너무 친절하시군요." 노처녀는 외쳤다. "비에르에게 눈짓을 하면 되었을 것을... 그런데 부인들에게 펀치를 내놓지 않 는 것은 잘못이에요... 내 나이가 되면..." 그러나 그녀는 엘렌느의 창백한 안색을 알아채고 말을 멈췄다. "부인은 틀림없이 어디 아픈 것 같아요... 펀치 한 잔 마셔 봐요..." @p 257 "고마워요. 아무것도 아니예요... 더위가 너무 심해서..." 그녀는 비틀거리며 아무도 없는 살롱으로 돌아가 안락의자에 주저앉았다.램프 가 블그스름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촛대의 초는 거의 타 들어가 촛농받이에 닿 을락말락 했다. 식당에서 마지막 남은 손님들이 작별을 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렌느는 돌아가는 것을 잊어버리고, 깊이 생각해 보려고 그대로 거기 있고 싶 었다. 이것은 꿈이 아니다. 쥴리에뜨는 그 청년에게 갈 것이다. 내일 모레,나는 날짜를 알고 있다. 아!더 이상 거리끼지 않곗어. 내부에서 그러한 외침이 들려왔 다. 그러면서, 그녀는 쥴리에뜨에게 주의를 주어 실수를 피하도록 하는 것이 의 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착한 생각은 그녀를 얼음처럼 굳어지게 했 다.그녀는 그 생각을 걸리적거리는 것처럼 비껴 놓았다. 그녀가 뚫어져라 보고 있는 벽난로에서 타버린 장작개비가 탁탁거렸다. 무겁게 깔려 잠든 듯한 공기는 머리카락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어머! 여기 계시군요." 쥴리에뜨가 들어오면서 외쳤다. "아! 친절하시게도 곧장 떠나지 않으셨군요... 이제야 좀 숨을 돌릴 수 있네 요!" 엘렌느는 놀라서 일어서려는 시늉을 했다. "좀 앉으세요. 급할 거 없잖아요... 앙리,내 약병 좀 주세요." 두세 명 친한 사람들이 가지 않고 늑장을 부리고 있었다.사람들은 꺼져 버린 불앞에 앉아,벌써 졸린 듯한 넓은 방의 나른한 분위기 속에서 허식 없이 유쾌하 게 이야기했다.문이 열려있어서 비어있는 작은 살롱과 식당, 아직도 환하게 불이 켜 있지만 무거운 침묵에 잠겨있는 온 집안이 보였다.앙리는 아내에게 아주 온 화한 태도를 보였다.그는 방금 침실로 약병을 찾으러 갔다 온 참이었고,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약병의 냄새를 맡았다.그는 아내 @p 258 에게 너무 피곤한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사실 그녀는 다소 피곤을 느꼈다. 그렇 지만 그녀는 몹시 기분이 좋았고, 모든 것이 잘 되었다. 그녀는 손님들을 초대한 날 밤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침대에서 새벽 6시까지 뒤척인다고 했다. 앙리는 웃었고 손님들은 농담을 했다. 엘렌느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 집 전체 를 점점 덮쳐 오는듯한 졸음으로 무감각 상태에 빠져 부르르 떨었다. 그동안 두 사람밖에는 남지 않았다. 삐에르는 마차를 찾으러 갔다. 엘렌느는 마지막 남은 손님이었다. 시계가 1시를 쳤다. 앙리는 더 이상 체면을 차리지 않 고 몸을 일으키더니 촛농받이를 뜨겁게 만들고 있는 촛대의 두 양초를 입으로 불어 껐다. 해가 지듯 조명이 하나 둘 꺼지고 방은 알꼬브벽감처럼 어둠에 잠겨 갔다. "제가 주무르는 걸 방해하는군요." 엘렌느는 갑자기 이어서며 더듬거렸다. "이만 가 보겠어요." 그녀는 몹시 빨개져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숨이 막혔다. 부부는 현관까지 그녀를 따라 나왔다. 그러나 그곳은 추웠기 때문에 의사는 가슴이 많이 벌어진 옷을 입은 부인을 걱정했다. "들어가오. 병나겠소... 당신은 열이 심해요." "그러지요! 안녕히 가세요" 쥴리에뜨는 지금 달콤한 기분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엘렌느를 포옹하며 말했 다. "좀더 자주 놀러 오세요." 앙리는 털코트를 집어들어 엘렌느에게 입혀 주려고 펼쳤다. 그녀가 팔을 끼자 그는 깃을 세워 주고, 현관 한쪽 벽을 덮고 있는 커다란 거울 앞에서 웃으면서 옷을 여며 주었다. 그들은 단 둘이 있을 뿐이었고 거울을 통해 서로를 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코트에 싸여 앞을 보고 있던 그녀가 남자에게 안긴 채 고개를 뒤로 젖혔 @p 259 다. 석 달 전부터 두 사람은 우정어린 악수밖에는 나누지 못했다. 그들은 더이상 서로 사랑하는 감정을 내비치지 않으려 해왔다. 그는 웃음을 멈 췄다. 그의 표정은 변했으며 벅차도록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는 여자를 미친 듯 이 끌어안고 목에 키스하였다. 그녀는 남자의 키스에 답하기 위해 고개를 뒤로 제꼈다. 2 엘렌느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녀는 열에 들떠서 전전반측하였 다. 그러다가 선잠이 들면 똑같은 번민이 그녀를 소스라치게 했다. 그 악몽 같은 반수상태 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달라붙어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느 밀회장소를 알고 싶었다. 그래야 성이 찰 것 같았다. 드베를르 집에서 종종 화제에 오르던 떼부 가에 있는 말리뇽의 작은 2층집일 리는 없었다. 그러면 어디란 말인가? 도 대체 어디란 말인가?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녀의 머리는 끊이없이 회전화였다. 그녀는 떨칠 수 없는 욕망으로 안절부절 못하면서 그생각에 몰두하느라고 다른 일은 모두 잊업렸다. 날이 새자 그녀는 옷을 입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바로 내일이야.”하고 말 하고는 스스로 놀랐다. 한쪽 발에만 구두를 신은 채 손을 올려놓고, 그녀는 드 디어 그곳은아마 가구딸린 호텔이거나 눈에 뜨지 않는 월세 방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추측은 혐오감을 일으켰다. 그녀는 두꺼운 벽지가 발라져 있고 꽃이 있고 벽난로는 커다란 장작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근사한 아파트를 상상해 보았다. 그러나 거기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쥴리에뜨와 말리뇽이 아니었다. 바깥 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그 포근한 은신처에서 그녀는 앙리와 함께 있는 자 신을 보았다. 그녀는 잘못 여며진 실 @p 260 내복을 걸친 채 몸을 떨었다. 그러면 그곳이 어딜까? 도대체 어딜까? “잘 잤어, 엄마!” 잠이 깬 쟌느가 외쳤다. 건강이 좋아진 후로 아이는 다시 내실에서 자고 있었다. 아이는 언제나처럼 속옷바람인 채로 맨발로 다가와 앨랜느의 목에 매달렸다. 그리고 다시 뛰어가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는 침대에 잠시 쑤시고 다시 와서 “잘잤어, 엄마!”하고 는 또 뛰어갔다. 이번에는 깔깔 거리고 웃으면서 머리 위로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 밑에서 늘린 듯 한 큰목소리로 말했다. “니 없다…… 나 없어…….” 그러나 엘렌느는 다른 날처럼 장난치지 않았다. 그러자, 심심해진 쟌느는 다시 잠이 들어 버렸다, 너무 이른 새벽이였다. 8시쯤 로잘리가 나타나서 아침 나절에 나갔다 온 얘기를 시작했다. 오! 밖에는 온통 진창이에요. 우유를 가지러 가다가 진창에 신발이 빠질뻔했지 뭐예요. 이젠 진짜 얼음이 녹을 때예요. 그런데다 바 람도 따뜻해서 숨이 막힐 것 같아료.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듯 부인에게 어떤 늙은 여자가 찾아왔다고 말했다. “보세요” 초인종이 들리는 소리를 듣자 그녀는 외쳤다. 그 여자는 페띠 할멈이었다. 그러나 흰 보네트를 쓰고 가슴 부분에 격자무늬 가 있는 새 옷을 입어서 아주 말쑥하고 그럴 듯했다. 그렇지만 징징거리는 목소리는 여전했다. “선량하신 부인, 저여요. 실례합니다... 부인께 물어 볼 게 좀 있어서...” @p 261 엘렌느는 할멈이 그렇게 잘 차리고 나타난 데 다소 놀라서 바라보았다. “좀 나아지셨나요. 페띠 할머니?” “네, 네, 말하자면 좀 나아진거죠... 아시다시피 뱃속에 이상한 뭐가 들어 있 는 건 여전해요. 그게 돌아다니고 있지만 어쨌든 나아졌어요... 그리고 재수좋은 일이 있어요. 놀라운 일이에요. 글쎄, 나도 운이 좋을따가 있으니. 어떤 신사분이 내게 집안일을 맏겼어요. 아! 그런데 사연이 있어요...” 말이 늦춰지면서, 쪼글쪼글 주름잡힌 얼굴에 교활한 작은 눈이 이리저리 구르 며 살폈다. 엘렌느가 물어 봐주기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엘레느는 로잘리 가 방금 지펴 놓은 불가에 않아서 다른 데 정신이 팔린 듯한 괴로운 료정을 하 고 건성으로 듣고 있었다. “나한테 물어 볼 게 뭐지요, 페띠 할머니?” 그녀가 말했다. 노파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방안의 자단못 가구와 푸른 벨벳 벽 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궁기가 낀 비굴하고 아첨하는 표정으로 증얼거렸다. “정말 집이 예쁘군요. 부인, 실례했어요... 우리 신사분도 이런 방을 갖고 있 지요. 그 방은 장밋빛이지만... 오! 전부 지어 낸 얘기 같지요! 점잖은 집안의 총 각이 내가 사는 건물에 아파트를 빌리러 오다니 말이에요. 그래서 하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 건물의 2층과 3층에 있는 아파트는 썩 괜찮아요. 그리고 아주 조용 하지요! 마차 한 대 안 지나가니까, 마치 시골에 사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그 리고 일꾼들이 보름도 넘게 일을 했지요. 그래서 그 방을 보석처럼 만들었어요... ” 그녀는 엘레느가 관심을 보이자 말을 멈췄다. @p 262 “일 때문이래요.” 그녀는 더욱 목소리를 끌면서 말을 이었다. “그 사람 말이 일때문이래요... 아시다시피 우리 건물에는 문지기가 없어요. 그게 그 사람 마음에 들었지요. 그 사람은 문지기를 좋아하지 않더군요. 그래요! 옳지요...” 그러나 그녀는 갑자기 생각이 난 것처럼 다시 말을 멈췄다. “가만있자! 부인은 우리 신사분을 아실 거예요... 그 사람은 부인의 친구를 만 나는 걸요.” “아!” “엘렌느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되었다. “틀림없이, 이 옆에 사는 부인이예요. 당신이 성당에 같이 갔던 부인... 그 부 인이 하루는 왔었어요.” 페띠 할멈의 눈은 선량한 부인의 감정을 엿보느라고 가늘어졌다. 엘렌느는 애 써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그 부인이 그 사람 집에 올라갔나요?” “아니에요. 부인은 갑자기 잊었던 것이 생각났었나 봐요. 아마 뭘 잊었던게 지... 나는 문에 나와 있었지요. 부인은 내게 뱅상씨가 있느냐고 물었어요. 그러 더니, 마부에게 ‘너무 늦었어요. 돌아가세요...’하고 외치며 마차 안으로 다시 몸을 감추었어요. 오! 정말 말할 나위 없이 활기차고 친절한 부인이에요. 그런 사람들은 그리 흔치 않아요. 당신 말고는 그 부인뿐이죠...하느님께서 당신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길!” 노파는 묵주신공을 올리다 방해를 받은 열성신도처럼 내용 없는 문장들을 술 술 늘어놓으며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 쉴새없이 그녀는 말을 이었다. “좋은 구두 한 켤레 있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신사분은 몹시 친 @p 263 절하지만 그것까지 달라고 할 수는 없지요... 이렇게 새 옷을 얻어 입었거든요. 그저 구두 한 켤레만 있으면 되는데. 내 것은 구멍이 나서, 이렇게 땅이 질척거 리는 때가 오면 배를 아프게 한다구요... 정말 어제는 배가 아파서 오후 내내 몸 을 뒤틀었지요... 그저 좋은 구두 한 켤레만 있으면...” “내가 한 켤레 가져다 드리겠어요. 페띠 할머니.” 엘렌느는 손짓으로 노파를 내보내며 말했다. 노파가 감사의 말과 함께 절을 하며 뒷걸음으로 물러나려 할 때, 그녀는 물었 다. “몇 시에 혼자 계세요?” “신사분은 6시 후에는 절대로 거기 있지 않아요.” 노파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러실 필요 없어요. 내가 와서 이 집 문지기한테 구두를 받아 가면 될텐데요... 어쨌든 좋으실 대로 하세요. 당신은 낙원의 천사예요. 하느님께서 복 을 내리실 거예요.” 층계참에서는 아직도 탄성이 들렸다. 엘렌느는 이상하게도 딱 때맞춰 노파가 가져다 준 정보에 얼이 빠진 채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이제 밀회 장소를 알게 되 었다. 그 황폐한 낡은 집에 장밋빛 방이라니! 그녀는 페띠 할멈을 방문하러 올라 갈 때면 지나야 했던 습기가 배어 나오는 계단이며 층마다 기름 때 묻은 손가락 으로 새까매진 노란 문이며, 지난 겨울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던 모든 궁핍을 다 시 보았다. 그녀는 그 추한 궁핍 가운데서 장밋빛 방을 상상해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녀가 깊은 몽상에 잠겨 있을 때, 따스한 작은 두 손이 불면으로 충혈 된 그녀의 눈을 가렸도, 웃음 띤 목소리가 물었다. “누구게?... 누구게?” 그것은 방금 혼자 옷을 입은 쟌느였다. 페띠 할멈의 목소리가 아 @p 264 이를 일어나게 했다. 제가 자는 방 문이 닫혀있는 걸 보자 아이는 어머니를 놀 래 주려고 잽싸게 서둘렀던 것이다. “누구게?... 누구게?” 점점 웃음 섞인 소리가 되면서 아이는 되풀이했다. 그때, 로잘리가 아침을 갖고 들어왔다. “너는 알지. 그렇지만 말하지 마... 너한테 아무 것도 안 물어봤어.” “그만 해. 정신 나갔니!” 엘렌느가 말했다. “너인 걸 안단다.” 아이는 슬그머니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서 고개를 젖히고 제가 생각해 낸 장난 에 기분이 좋아 가지고 몸을 흔들며 자신 있는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 “아니야! 이건 다른 아이일걸... 음? 엄마를 저녁식사에 초대한다는 제 엄마의 편지를 가지고 온 소녀지... 그런데 얘가 엄마의 눈을 가리고...” “바보 같은 짓 하지 마라.” 엘렌느가 아이를 일으켜 세우며 다시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로잘리, 상을 차려라.” 그러나 하녀는 소녀를 살피면서 아가씨가 좀 야하다고 놀렸다. 정말 쟌느는 서두르느라고 신발조차 신지 않았다. 아이는 짧은 프란넬 치마를 입었는데 갈라 진 틈으로 속옷자락이 삐져 나와 있었다. 부드러운 프란넬 짧은 윗도리는 단추 를 잠그지 않아서 아직 여물지 않은 나체를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자그마하고 섬세한 납작한 가슴에는 겨우 맺기 시작한 장밋빛 젖꼭지와 떨리는 듯한 선이 보였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비뚤어지게 신은 긴 양말까지 치렁치렁했고 내의 는 부랴부랴 꿰입었지만, 그러고도 아이는 뽀얀 게 @p 265 사랑스러웠다. 아이는 고개를 숙여 제 모습을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얌전하지? 어마, 나 좀 봐!... 어때? 이렇게 하고 있을까 봐... 얌전하지!” 엘렌느는 짜증스런 몸짓을 억제하며 매일 아침 되풀이되는 질문을 했다. “너 세수했니?” “오! 엄마.” 아아는 갑자기 시무룩해져 중얼거렸다. “오! 엄마... 비가 오고 너무 흐려서...” “그러면 너는 아침 먹지 마라... 얘 좀 씻겨 주렴, 로잘리.” 평상시 그녀는 그런 일에 신경을 많이 써서 자신이 직접 하였다. 그러나 오늘 그녀는 정말 몸이 편치 않았다. 몹시 따뜻한 날인데도 그녀는 덜덜 떨면서 불에 바싹 다가갔다. 로잘리는 작은 탁자를 벽난로 가까이 끌어다가 상보를 깔고 두 개의 흰 자기 주발을 놓았다. 불 앞에는 랑보 씨의 선물인 은제 주전자에서 밀 크 커피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자고 일어나 잔뜩 어질러지고 아직도 조는 듯 한 헝클어진 방은 이러한 아침 시간이면 미소를 짓게 하는 친근함이 있었다. “엄마, 엄마!” 쟌느가 작은 방 구석에서 소리쳤다. “로잘리는 너무 세게 문질러. 생채기가 난다구... 아이! 차갑단 말이야!” 엘렌느는 뚫어져라 주전자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가서 알아보고 싶었다. 빠리의 불결한 한 구석에 있는 밀회 장소를 생각하자 알 수 없는 분노가 그녀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하였다. 그녀는 그 비밀이 혐오스러운 취미라고 생각했지만, 소 @p 266 설적인 상상력에 사로잡혀 ‘섭정시대의 작은 집’(1.풍속이 와해된 섭정시대 (1850∼1870)의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밀회장소를 일컫는 은어)에 싼 값으 로 활기를 불어넣는 데 열중했을 말리뇽의 재기는 인정하고 있었다. 불쾌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장밋빛 방에 넘치고 있을 흐릿한 빛과 고요한 분위기에 끌린 듯 들떠 있었다. “아가씨...” 로잘리는 자꾸 중얼대고 있었다. “씻지 못하게 하면 어머니를 부를 거예요.” “이것 봐! 비누가 눈에 들어갔잖아.” 울음섞인 목소리로 쟌느가 대답했다. “됐어. 놔 줘... 귀는 내일 씻을테야.” 그러나 물이 흘러내리는 소리는 계속되고 대야에 수건을 짜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몸싸움을 하는 소리가 났다. 우는 소리가 나고 그러자마자 다시 명랑한 모습으로 외치며 아이가 나타났다. “끝났어, 끝났어...” 아이는 젖은 머리카락을 하고 박박 씻겨져 발그레한 얼굴로 상쾌한 냄새를 풍 기며 몸을 흔들었다. 몸부림치느라고 윗도리는 미끄러져 벗겨졌고 치마는 풀어 져 있었다. 긴 양말은 작은 종아리를 드러내며 흘러내려 있었다. 로잘리가 불쑥 아가씨는 예수님을 닮았네요 하고 말했다. 그러나 쟌느는 깨끗해져서 몹시 자랑 스러웠다. 아이는 다시 옷을 입는 게 싫었다. “좀 봐, 엄마. 내 손하고 목하고 귀를 봐... 으응! 불 좀 쪼일게. 너무 기분 좋 아... 이제 그러지 마. 나 오늘 아침 먹어도 되지?” 아이는 불 앞에 있는 작은 제 안락의자에 몸을 움츠리고 앉았다. 로잘리는 밀 크 커피를 부었다. 쟌느는 무릎 위에 주발을 놓고 어른 @p 267 스런 표정으로 의젓하게 토스트를 담갔다. 평소 엘렌느는 아이에게 그런 식으로 먹지 못하게 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그녀는 빵에는 손대 지 않고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식사를 대신했다. 마지막 모금을 먹으려다가 쟌 느는 후회에 사로잡혔다. 어머니가 몹시 창백함을 보고, 아이는 슬픔으로 가슴이 터질 듯하여 주발을 놓고 목에 매달렸다. “엄마, 어디 아픈거야?... 내가 엄마를 힘들게 했어, 응?” “아니다. 아가, 그 반대야. 너는 아주 착하구나.” 엘렌느는 아이를 껴안으며 중얼거렸다. “좀 피곤하구나. 잠을 잘 못잤어... 가서 놀아라. 걱정하지 말구.” 그녀는 하루가 끔직하게 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밤을 가다리며 뭘 해야 할까? 얼마 전부터 그녀는 더 이상 바늘을 잡지 않았다. 일하는 게 너무 힘들었 다. 몇 시간 동안 그녀는 손을 놓고 앉아 있었다. 방안은 질식할 듯 하였고, 그 녀는 바람을 쐬러 밖에 나가고 싶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를 병들게 한 것 은 이 방이었다. 그녀는 거기서 산 두 해를 억울해하면서 그 방을 미워하였다. 푸른 벨벳으로 꾸며지고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을 지닌 그 방이 지겨워졌 으며, 귀가 멍멍해지도록 길에서 소음이 들리는 작은 아파트가 좋겠다고 생각했 다. 세상에! 시간이 어찌 이다지도 느린 걸까! 그녀는 책을 집었다. 그러나 머릿 속에 울리고 있는 한가지 생각이 그녀의 눈과 읽기 시작한 페이지 사이에 자꾸 똑같은 상상을 떠오르게 했다. 그동안 로잘리는 방을 치웠고 쟌느는 머리를 빗고 옷을 입었다. 가구들은 제 자리에 놓여졌고 어머니는 창가에서 독서를 하려고 애쓰고 있었으며 아이는 부 산할 정도로 기분이 명랑한 날이어서 대단한 놀이를 시작하였다. 아이는 혼자였 지만 그것은 전혀 문제 @p 268 가 되지 않았다. 아이는 아주 우스울 정도로 의젓하게 자신을 갖고 서너 사람 역할을 잘 해내곤 하였다. 우선 아이는 이웃 집을 방문한 부인이 되었다. 아이는 식당으로 사라졌다가 애교스럽게 둘러보면서 웃음을 띠고 인사를 하면서 등장하 였다. “안녕하세요. 부인...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부인?... 뵈온 지 퍽 오래 되었지 요? 정말 놀라워요.. 세상에! 저는 병이 났었다구요, 부인. 그래요, 콜레라에 걸렸 었죠. 아주 좋지 않았어요. 오!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요. 정말이지 젊어지셨 어요. 그런데 댁의 아이들은요, 부인? 저는 지난 여름 이후로 아이가 셋이 되었 답니다.” 아이는 탁자 앞에서 인사를 계속했다. 그 탁자는 방문한 집의 부인 노릇을 하 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아이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고는 한 시간 동안이 나 정말 비상하게 풍부한 문장을 동원하여 일상적인 여러 얘기를 늘어놓았다. “바보 같은 짓 말아라, 쟌느.” 소음에 참을 수 없게 되면 어머니는 가끔씩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엄마, 나는 친구 집에 있다구... 그 친구는 나한테 말을 하고 나는 대 답을 해야 하거든... 차를 대접할 때 호주머니에 과자를 넣지 않은 거지?” 그리고는 다시 시작했다. “안녕히 계세요, 부인. 차 잘 마셨어요... 남편께도 안부 전해 주세요...”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어 아이는 마차로 외출하였다. 아이는 사내애처럼 의자 에 다리를 벌리고 걸터 앉아 쇼핑을 하러 갔다. “쟝, 그렇게 빨리 몰지 마. 무섭잖아... 세워 줘! 부인용품점 앞이야... 아가씨, 이 모자 얼마지요? 3백 프랑이라구요? 비싸진 않군요. 하지만 예쁘지가 않아요. 나는 위에 새가 얹힌 걸 원한다 @p 269 구요. 이만큼 큰 새가요... 자, 쟝, 식료품점으로 데려다 쥐. 꿀 없어요? 있지요. 부인,여기 있습니다. 오1 좋군요! 그것은 사지 않겠어요. 설탕 2수어치 주세요... 그런데 조심해야지. 쟝! 마차가 뒤집어졌잖아! 순경 아저씨, 짐마차가 우리에게 달려들었어요... 다치신 데 없습니까, 부인? 아니에요, 전혀... 쟝, 쟝! 돌아가자. 자 어서! 가만, 내의를 주문해야겠다. 부인용 내의 세다스요... 그리고 짧은 장화 와 코르셋도 필요한데요... 어서! 어서! 정말 끝이 없다니까!” 아이는 부채질을 했다. 그리고 집에 돌와와 아랫사람들을 꾸짖는 부인 시늉을 했다. 아이는 절대 레퍼터리가 딸리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환상적인 상상력이 끊임없이 발휘되는 열광적인 놀이로, 아이의 작은 머릿속에서는 모든 인생살이 의 축도가 들끓다가 조각조각 나오는 것이었다. 아침 나절과 오후 내내 아이는 빙빙 돌고 춤추고 지껄였다. 싫증이 나면 둥근 의자, 구석에서 눈에 띈 우산, 바 닥에서 주운 천조각 따위가 아이에게 새로운 창의력을 계속 발휘하면서 다른 놀 이에 뛰어드는데 충분한 재료가 되어 주었다. 아이는 인물이며 장소, 사건 등 모 든 것을 고안하였다. 마치 제 또래 아이들 12명과 함께 있는 것처럼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드디어 저녁 때가 되었다. 6시가 울리려 하고 있었다. 엘렌느는 오후 내내 불안 한 무기력 상태에서 보내다가 정신이 들며 어깨에 급히 숄을 걸쳤다. “어디 가, 엄마?” 쟌느가 놀라서 물었다. “그래, 이 근처에 볼 일이 있어. 오래 걸리진 않을거야... 얌전히 있어라.” 밖에는 얼었던 땅이 계속 풀리고 있어 진흙이 내를 이루며 도로에 흘러내렸 다. 엘렌느는 전에 페띠 할멈을 데려간 적이 있는 빠 @p 270 시 가의 구두점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레이누아르 가로 왔다. 하늘은 잿빛이 었고 포도에서는 안개가 올라왔다.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축축한 수증기 속에서 노란 점처럼 드문드문 빛나고 있는 가스등 외에는 인적이 끊겨 불안스러운 길이 그녀 앞에 뻗어 있었다. 그녀는 마치 밀회하러 가는 양 몸을 감추려고 집들에 닿을락말락 스치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오 골목으로 문 득 접어들자 그녀는 진짜 공포감에 사로잡혀 궁륭 아래 발을 멈췄다. 골목은 그 녀의 발 아래 검은 구멍처럼 열려 있었다. 골목 끝은 보이지 않았고, 어두운 관 중앙에서 골목을 비추고 있는 가로등 하나의 떨리는 불빛이 보일 뿐이었다. 마 침내 그녀는 마음을 굳게 먹고 굴러 떨어지지 않으려고 쇠난간을 잡았다. 발 끝 으로 그녀는 넓은 계단을 더듬어 내려갔다. 밤이 되자 엄청나게 길어진 듯한 벽 들이 양쪽에서 죄어 들었다. 위에서는 잎이 떨어진 나뭇가지들이 경련을 일으키 며 뻗친 손이 달린 거대한 팔 같은 윤곽을 희미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어떤 정원의 문이 곧 열리고 한 남자가 덤벼들 것만 같은 생각에 몸을 떨었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그녀는 최대한 빨리 내려갔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그 림자가 튀어 나왔다. 그 그림자가 기침을 하자 그녀는 소름이 끼치며 얼어 버렸 다. 그것은 힘들게 올라오고 있는 늙은 여자였다. 그제서야, 그녀는 마음이 놓임 을 느꼈고 진창에 끌리는 옷자락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진창이 깊어서 걸음 을 옮길 때마다 짧은 장화는 달라붙었다. 내려가서 그녀는 본능적으로 돌아보았 다. 골목에는 축축한 나뭇가지에서 물방울이 뚝뚝 듣고 있었고, 가로등은 습기가 스며들어 위태하게 우물 옆에 매달려 있는 소형 램프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엘렌느는 그렇게도 자주 왔었던 골목의 큰 집 위층에 있는 다락방으로 곧장 올라갔다. 그러나 문을 두드려도 아무 기척이 없었다. 그녀는 몹시 당황해서 다 시 내려왔다. 페띠 할멈은 분명히 2층 아 @p 271 파트에 있는 것 같았다. 다만 엘렌느는 그곳에 몸을 드러낼 용기가 없었다. 그녀 는 석유 램프로 밝혀진 골목에서 5분가량 있었다. 그녀는 다시 올라가 주저하면 서 문들을 바라보았다. 노파가 층계 난간 위로 몸을 내밀었을 때, 그녀는 가버리 려고 하던 참이었다. “저런, 계단에 계셨구랴. 부인!” 노파는 외쳤다. “들어오세요! 거기 계시면 병이 난다구요... 오! 그는 오늘 안오나 봐요. 아주 잠깐만...” 그녀는 페띠 할멈이 열어둔 문을 바라보았다. 화덕 모퉁이가 보였다. “정말 나혼자 있어요.” 노파는 되풀이했다. “들어오세요... 이쪽은 부엌이에요... 아! 부인은 가난한 사람한테 거만하지가 않아요. 누구라도 그렇다고 할 거예요.” 자신이 하는 짓이 창피해서 내키지 않았지만 엘렌느는 노파의 뒤를 따랐다. “여기 구두를 가져 왔어요, 페띠 할머니...” “어머나! 어떻게 감사해야 하우?... 오! 훌륭한 구두야!... 가만, 이걸 신어 봐야 겠어요. 내 발에 딱 맞는구만. 장갑처럼 쏙 들어가는데... 근사해요! 어쨋든 이걸 신으면 잘 걸을 수 있을 거예요. 비도 무섭지 않을거구... 부인께서 나를 구해 준 거예요. 아마 10년은 더 살 수 있을 거예요, 부인...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 니예요. 이건 우리를 비춰주는 저 불빛처럼 확실한 거예요. 나는 아첨꾼이 아니 예요...” @p 272 할멈은 제 말에 감동하여 엘렌느의 손을 붙들고 입을 맞췄다. 냄비에는 포도 주가 끓고 있었다. 식탁 위 램프가에는 반쯤 비우다 만 보르도 병이 가느다란 목을 빼고 있었다. 거기에는 접시 네 개와 컵 하나, 프라이팬 두 개, 큰 냄비 하 나가 있을 뿐이었다. 페띠 할멈은 총각의 부엌에 임시로 거처하면서 자기 먹을 것을 데우는 데만 화로를 쓰고 있는 듯했다. 엘렌느의 눈길이 냄비로 향해진 것 을 보자 할멈은 기침을 하면서 청승을 떨었다. “뱃속이 또 시작이라우.” 그녀는 신음했다. “의사가 하는 말은 소용이 없어요. 뱃속에 벌레가 들어 있는 게 틀림없어요... 그런데 포도주 한 방울이면 기운을 차리지요... 나는 몹시 앓고 있어요, 부인. 이 런 병이 누구에게도 걸리지 않았으면 해요. 이건 너무 고약하거든요... 사실 요즈 음 나는 좀 안일하게 세월을 보내고 있지요. 산전수전을 다 겪었으니 좀 안일하 게 지내도 되는 거 아니겠어요?... 나는 운좋게도 아주 친절한 신사분과 만나게 되었지요. 하느님 그를 축복해 주소서! 그리고는 그녀는 포도주에다 커다란 설탕 두 덩어리를 넣었다. 더 살이 쪄서 그녀의 작은 두 눈은 부어 오른 얼굴에 파묻혔다. 살기가 편해져서인지 그녀의 동작은 느릿해졌다. 삶에 대한 갈망이 드디어 충족된 듯이 보였다. 그녀는 이러 한 삶을 위해 태어난 것이었다. 그녀가 설탕을 집어넣을 때, 엘렌느는 찬장 구석 에 잼 단지와 비스킷 봉지, 신사에게서 훔친 시가까지 여러 가지 맛난 것들이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됐어요! 안녕히 계세요, 페띠 할머니. 이제 가봐야겠어요.” 엘렌느가 말했다. 그러나 할멈은 화덕 구석으로 냄비를 밀어내며 중얼거렸다. “잠깐만요, 이건 너무 뜨겁군요. 좀 있다 마셔야겠어요... 아 @p 273 니에요, 아니에요, 이리로 나가지 마세요. 부인을 부엌에서 맞이해서 죄송하군 요... 한 바퀴 돌아봅시다.” 그녀는 램프를 들고 좁은 복도로 들어갔다. 엘렌느는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할 멈을 따라갔다. 복도는 금이 가고 연기에 그을렸으며 습기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닥에는 두꺼운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페띠 할멈은 조용 하고 외진 방안을 몇 발짝 왔다갔다 했다. “자!” 램프를 들어올리며 그녀는 말했다. “좋지요?” 그것은 문으로 서로 통하게 되어 있는 두 개의 정사각형 방이었는데 양쪽으로 열리는 문짝을 떼어내서 단지 문틀만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두 방 모두 큰 타원 형 액자로 장식된 루이 14세의 초상과 꽃줄 사이에서 뛰놀고 있는 볼이 포동포 동한 큐피트가 그려진 장밋빛 두꺼운 무명으로 발라져 있었다. 첫번째 방에는 조그만 원탁과 의자 두 개, 안락의자가 있었다. 좀 작은 두 번째 방에는 커다란 침대가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다. 페띠 할멈은 천장에 금박을 입힌 사슬로 매달 려 있는 크리스탈 등을 가리켰다. 할멈이 보기에 그 등은 극에 달한 사치를 보 여 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설명했다. “그 신사분이 얼마나 웃기는지 부인은 모르실 거예요. 그는 한낮인데도 불을 켜놓고 시가를 피우며 허공을 바라보고 있답니다... 그 사람은 그게 재미난 듯했 어요... 나하고는 상관없지만 그렇게 돈을 써 버리다니!” 엘렌느는 말없이 두 방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외설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방 들은 너무 붉었고 침대는 너무 컸으며 가구들은 너무 새 것이었다. 거기에서는 자만심에 상처르 입힐 정도로 유혹하려는 의도가 느껴졌다. 실내장식가라면 곧 질리고 말 것이었다. 엘렌 @p 274 느는 점점 당황하며 불안해했고 할멈은 눈을 깜박이며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 다. “그는 자기를 뱅상 씨라고 부르게 했어요... 나한테는 아무런들 마찬가지지요. 그는 지불할 때... 그 총각 말이에요.” “다음에 뵙겠어요, 페띠 할머니.” 엘렌느는 숨이 막혀서 인사를 되풀이했다. 그녀는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다. 문은 열자 아무 치장도 없고 끔찍하게 더러 운 조그만 세 개의 방이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찢어진 벽지가 늘어져 있고 천 장은 시꺼맸으며, 탕일 빠진 바닥에는 회벽토가 흩어져 있었다. 해묵은 가난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쪽이 아니에요. 그쪽이 아니에요!” 페띠 할멈이 소리쳤다. “평소에는 그 문이 닫혀 있었는데... 그것은 손보지 않은 방이에요. 그럼요, 이것만으로도 벌써 많은 비용을 들였는 걸요... 아! 그건 확실히 그다지 아름답지 못하지요... 이리로 가세요, 부인. 이리로...” 엘렌느가 장밋빛 벽지 발린 침실을 다시 지날 때, 할멈은 그녀의 손에 키스하 기 위해 그녀를 붙들어 세웠다. “자, 나는 배은망덕한 인간이 아니예요... 이 구두를 항상 기억하겠어요. 이건 나한테 잘 맞고 따뜻해서 30리는 걸을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런데 하느님께 당 신을 위해 뭘 부탁했으면 좋겠어요? 오 하느님, 제 말을 들어 주소서. 이 부인을 가장 행복한 여인으로 만들어 주소서! 당신께서 제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제가 이 부인을 위해 바라는 바를 아실 것이옵니다. 성부와 성자, 성신의 이름으로 아 멘!” 갑자기 열성적인 신앙심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녀는 거듭 성호를 그으며 커 다란 침대와 크리스탈 등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p 275 계단으로 통하는 문을 열면서 전혀 달라진 목소리로 엘렌느의 귀에다 대고 덧 붙였다. “필요하시면 부엌 문을 두드리세요. 나는 거기 늘 있으니까.” 엘렌느는 덤벙거리면서 수상한 데서 빠져나오는 사람처럼 뒤를 돌아보며 계단 을 내려갔다. 그리고 오 골목으로 다시 올라가 어디로 가는지 의식도 없이 비뇌 즈 가로 접어들었다. 노파의 마지막 말이 그녀를 놀라게 했을 뿐이었다. 단연코 이 집에 다시 발을 들여 놓는 일은 없으리라. 더 갖다 줄 것도 없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부엌문을 두드리겠는가? 지금 그녀는 방을 보았고 만족하였다. 그 녀는 자신과 타인들에게 경멸감을 느꼈다. 그곳에 가다니 얼마나 비열한 일인가! 무명으로 바른 두 개의 방이 끊임없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의자가 놓인 자리라 든지 침대에 쳐진 커튼의 주름 같은 사소한 것까지도 떠올랐다. 그러나 항상 그 것에 이어서 다른 세 개의 좁은 방, 더럽고 빈 채 내버려 둔 방들이 펼쳐졌다. 볼이 포동포동한 큐피드 아래 감추어진 부스럼난 벽과 같은 그 광경은 그녀의 마음 속에 분노와 욕지기를 불러일으켰다. “아! 부인!” 계단에서 내다보고 있던 로잘리가 외쳤다. “저녁밥이 맛있을 거예요! 모든 게 30분이나 끓고 있었는 걸요.” 식탁에서 쟌느는 어머니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어디 갔었느냐? 뭘 했느냐? 짤 막한 대답밖에는 얻어 내지 못하자 아이는 혼자 소꿉장난을 하면서 놀았다. 아 이는 옆에 있는 의자에 인형을 앉히고 다정하게 후식의 반을 덜어서 내밀었다. “아가씨, 무엇보다도 깨끗하게 먹어야 해요... 자, 닦으세요... 오! 더러워라. 아 직 냅킨도 쓸 줄 모르나 봐... 거기 놓아요. 예쁘지... 자, 비스킷이 있어요. 뭐라구 요? 잼이 더 먹고 싶다구요?... 응! 그거 좋지요... 내가 사과를 깎아 줄게요...” @P 276 아이는 인형 몫을 의자 위에 놓았다. 그러나 접시가 비자 아이는 인형 노릇을 하면서 단 것을 하나씩 다시 집어먹었다. “오! 맛있군요!... 이렇게 맛있는 잼은 먹어 본 일이 없어요. 부인, 이 잼을 어 디서 구하셨나요? 우리 남편에게 한 병 사오라고 해야겠어요... 이렇게 좋은 사 과를 정원에서 따셨나요, 부인?” 아이는 놀다가 잠이 들어서 팔에 인형을 안은 채 방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아 침부터 그치지 않고 놀았던 것이다. 작은 다리는 더 이상 버터내지 못했고 놀이 의 피곤이 아이를 덮쳤다. 자면서도 아이는 웃고 있었다. 아마 계속 놀고 있는 꿈을 꾸는 듯 했다. 어머니는 꼼짝 않고 늘어진 채 천사들의 세계를 날아다니고 있는 아이를 눕혔다. 이제 엘렌느는 방안에 홀로 있었다. 그녀는 문을 닫고 꺼진 불 옆에서 끔찍한 저녁 나절을 보냈다. 의자는 달아나고 말하기 창피한 생각들이 마음 속에서 꾸 물꾸물 움직였다. 엘렌느가 알지 못했던 심술사납고 육감적인 여인이 나타나 거 역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진 목소리로 엘렌느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자정을 칠 때, 그녀는 가까스로 잠이 들었다. 그러나 침대에서 고통은 견딜 수 없이 되었다. 그 녀는 선잠을 자면서 뜬 숯 위에 누운 듯이 몸을 뒤채었다. 불면 속에서 확대된 영상들이 그녀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두개골 속에는 하나의 생각이 자리를 잡았 다. 그녀는 그 생각을 밀어 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생각은 깊이 파고 들어서 가슴을 죄고 그녀를 온통 삼켜 버렸다. 2시쯤 그녀는 몽유병 환자처럼 핼쓱해져 뻣뻣하고도 단호하게 일어나서, 램프를 켜고 필체를 감추면서 편지를 썼다. 그것은 애매한 밀고로서 드베를르 의사에게 바로 그날, 여사여사한 장소에 여사여사한 시간에 가 보라는, 설명도 서명도 없는 석 줄의 쪽지였다. 그녀는 겉 봉을 봉한 다음 안락의자에 걸쳐 둔 옷의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자리 에 눕자 곧 잠 @P 277 이 들어서 숨쉬는 소리도 없이 납처럼 깊은 잠 속에 빠져 의식을 잃어버렸다. 3. 다음 날, 로잘리는 9시나 되어서야 아침을 차릴 수 있었다. 엘렌느는 간밤의 악몽으로 몹시 창백하고 기진맥진하여 늦게 일어났다. 그녀는 호주머니를 뒤져 서 편지를 만져 보고 그것을 깊숙히 처박은 다음, 말없이 식탁 앞에 앉으러 갔 다. 쟌느 역시 불안하고 우울한 안색을 하고 있었으며 머리가 묵직했다.아이는 그 날 아침에는 놀 마음이 나지 않아 마지못해 침대에서 일어났다. 하늘을 그을 린 듯한 빛이었고 희끄무레한 빛이 방안을 처량하게 하다가 갑작스런 폭우가 유 리창을 때렸다. “아가씨는 기분이 좋지 않군요.” 로잘리가 혼잣말을 하였다. “이틀 연달아 신날 수는 없지요... 어제 그렇게 깡총거리고 놀았으니!” “너 아프니, 쟌느?” 엘렌느가 물었다. “아니,엄마.” 소녀가 대답했다. “고약한 날씨야.” 엘렌느는 다시 침묵에 잠겼다. 그녀는 커피를 마신 다음에도 불꽃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서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일어서면서 그녀는 줄리에뜨에게 충고하여 오후의 약속을 취소하게 만드는 게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녀는 @p 278 알지 못했다. 그러나 갑자기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엄습하면서 머릿속에는 그 것을 해야 한다는 피할 수 없고 강박적인 생각 외에는 없었다. 10시가 되자 그 녀는 옷을 입었다. 쟌느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모자를 집는 것을 보 자, 아이는 추운 듯이 작은 손을 꼭 움켜 쥐었고 고통의 그림자가 얼굴에 내리 덮였다. 평소에 아이는 어머니가 외출하려고 하면 떨어지지 않으려 하고 어디든 따라가려고 하면서 심한 질투심을 나타냈다. “로잘리.” 엘렌느가 말했다. “방을 빨리 치우고... 여기 있어. 곧 돌아올테니까.” 그녀는 몸을 굽히고 쟌느가 기분 상한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급히 포옹하였 다. 그녀가 나가자마자 아이는 의젓하게 불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눈물을 떨구 고 말았다. “아이! 미워, 아가씨!” 하녀는 위로하려고 되풀이했다. “자! 누가 엄마를 훔쳐가지는 않아요. 엄마가 볼 일을 보게 해드려야지... 맨 날 엄마 치마에 매달려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동안 엘렌느는 폭우를 피하기 위해 벽에 붙어서 비뇌즈 가 모퉁이를 돌고 있었다. 삐에르가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는 당황한 듯이 보였다. “드베를르 부인 계십니까?” “네, 부인, 하지만 잘 모르겠는데요...” 엘렌느가 허물없이 살롱으로 향하자 그는 실례를 무릅쓰고 그녀를 가로막았 다. “기다리십시오, 부인. 제가 가 보겠습니다.” 그는 문을 아주 조금만 열고 방안으로 슬쩍 들어갔다. 곧 쥴리에뜨의 성난 목 소리가 들렸다. @p 279 “뭐예요, 들어오게 했어요! 내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일렀잖아 요... 어처구니없군요. 1분도 조용히 있을 수가 없다니.” 엘렌느는 의무로 여기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결심으로 문을 밀었다. “저런, 당신이군요!” 그녀를 보자 쥴리에뜨가 말했다. “내가 잘못 들었어요...” 그러나 쥴리에뜨는 여전히 기분 상한 표정이었다. 분명 방문객은 그녀에게 방 해가 되었다. “방해를 했나요?” 엘렌느가 물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이해하세요. 우리는 사람들에게 뜻밖의 기쁨을 주려고 해요. 수요일 모임에서 공연하려고 ‘변덕'(1. 뮈쎄가 1837년에 발표한 희곡)을 연습하고 있답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침 시간 을 고른거죠... 오! 이제 됐지요. 당신은 아무 말 않고 계시면 돼요. 그게 전부예 요.” 그녀는 엘렌느에게 더 이상 신경쓰지 않고 손뼉을 치며 살롱 한 가운데 서 있 는 베르띠에 부인에게 다시 말했다. “자, 자, 연습합시다... 당신은 그 문장에 충분한 섬세함을 싣지 않았어요.‘남 편 모르게 돈주머니를 갖고 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 눈에 다소 기이하게 보일테 죠...’ 그걸 다시 해보세요.” 엘렌느는 그녀가 열중하고 있는 데 몹시 놀란 채 뒤쪽에 앉았다. 의자와 탁자 를 벽 쪽으로 밀어 놓아서 양탄자는 넓게 비어 있었다. 우아한 금발 머리인 베 르띠에 부인은 단어를 기억해 내려고 천장 @p 280 을 쳐다보면서 독백을 외웠다. 레리 부인 역을 맡고 있는 아름다운 갈색 머리의 당당한 기로 부인은 안락의자에 앉아 등장할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벼운 아침 치장을 한 부인들은 모자와 장갑조차도 벗지 않고 있었다. 부인들 앞에서 뮈쎄의 책을 손에 든 쥴리에뜨는 머리가 헝클어진 채 헐렁한 흰색 캐시미어 실 내복을 입고 무대감독처럼 자신 있는 태도로 배우들에게 억양이며 연기를 지시 하였다. 햇빛이 아주 희미하게, 자그마하게 수놓은 명주 망사 커튼 사이로 에스 파니아 자물쇠 고리 위에 교차되어 있었는데, 창 너머로 젖어서 빛을 잃은 정원 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게 보였다. “감정이 충분하질 않아요." 쥴리에뜨는 잘라 말했다. “좀더 억양을 넣고 단어마다 힘을 주세요. ‘자 그러면, 나의 소중한 돈주머 니, 치장을 끝내 드리겠어요...’ 다시 시작하세요.” “나는 역을 망치고 말 거예요.” 베르띠에 부인이 기운 없이 말했다. “어째서 당신이 나 대신 이역을 하지 않죠? 당신이라면 마띨드 역할을 우아 하게 해낼텐데.” “아! 나는 안돼요... 무엇보다도 금발이어야 하거든요. 그리고 나는 잘 가르칠 수는 있지만 직접 하지는 못해요... 연습합시다, 연습해요.” 엘렌느는 구석에 있었다. 연기 중인 베르띠에 부인은 돌아보지 조차 않았고, 기로 부인은 가볍게 고개만 까딱 했다. 그녀는 자신이 불청객이며 앉지 말았어 야 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더 이상 의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생각이 아니라, 때로 이곳에서 느꼈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혼란스러운 이상한 감정이었다. 그녀는 무심하게 맞이하는 쥴리에뜨의 태도에 쓰라림을 느꼈다. 쥴리에뜨의 우정은 항상 변덕스러웠다. 그녀는 @p 281 석 달 동안 어떤 사람들에게 푹 빠져셔 그 사람들을 열렬히 껴안고 그들 없이는 못 살 듯하다가 하루 아침에 아무 설명도 없이 더 이상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틀림없이 다른 일들처럼 그 점에 있어서도 유행을 좇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주위에 있는 누군가를 좋아하면 자기도 그 사람을 좋아해야 한다고 생 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애정의 돌변은 성정이 관대하고 고요하여 언제나 꾸준 한 우정을 바라는 엘렌느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그녀는 사람들의 호의가 얄 팍한 데 진정 절망하면서 종종 슬픔에 가득 차서 드베를르 집을 나섰다. 그러나 그 날 그녀가 겪고 있는 위기 속에서 그것은 더욱 신랄한 아픔으로 느껴졌다. “샤비니의 장면을 해봅시다.” 쥴리에뜨가 말했다. “그는 오늘 아침에는 오지 않을 거예요... 레리 부인이 등장합니다. 자, 기로 부인... 대사를 하세요.” 그리고 그녀는 읽었다. “내가 그에게 이 지갑을 보여 주는 광경을 상상해 보시죠.” 기로 부인이 일어섰다. 미칠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 자, 아주 친절하시군요. 어디 봅시다.” 아까 하인이 문을 열었을 때, 엘렌느는 전혀 다른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 녀는 줄리에뜨가 밀회에 대한 생각으로 몸을 떨며 한편으로는 망설이고 한편으 로는 끌리면서 신경이 들떠 몹시 창백해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녀는 자신이 쥴리에뜨에게 잘 생각해 보라고 간곡히 권하는 광경을, 그리고 젊은 여인이 흐 느낌으로 목이 메어 품 안에 뛰어드는 광경을 상상하였다. 그러면 두 여인은 함 께 눈물을 흘리리라. 나는 이제 앙리를 잃겠지만 그의 행복을 지켜 주었다는 생 각을 하며 물러나리라. 그런데 그녀는 전혀 알지 못 @p 282 하는 연극 연습 가운데로 뛰어들게 된 것이었다. 쥴리에뜨는 분명히 숙면을 취 한 듯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베르띠에 부인의 연기를 고쳐 줄 만큼 정신 도 말짱했고 오후에 할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괘념치 않고 있었다. 이러한 냉담 함과 경쾌함은 열의에 불타서 달려온 엘렌느를 얼어 붙게 했다. 그녀는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불쑥 물었다. “누가 그 샤비니를 하지요?” “말리뇽이에요.” 놀란 듯이 돌아보면서 쥴리에뜨가 말했다. “그는 지난 겨울 내내 샤비니 역을 했지요... 진력이 나서 그는 연습에 나오 지 않는답니다... 자, 여러분, 샤비니의 대사를 읽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나갈 수가 없으니까요.” 그러자 그녀는 분위기에 빠져들어 저절로 굵어진 목소리와 기사 같은 표정으 로 사내 역할을 하였다. 베르띠에 부인도 다시 하기 시작했고, 뚱뚱한 기로 부인 은 발랄하고 재치있게 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삐에르가 난로에 장작을 더 넣으려고 들어왔다. 그는 슬며시 부인들을 살피고는 우습다고 생각했다. 한편 엘렌느는 비통한 심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음을 단단히 먹고 쥴리에 뜨와 따로 얘기할 기회를 만들려고 애썼다. “잠깐 얘기할 게 있는데요.” “아! 안 되겠는 걸요... 보시다시피, 연습중이라... 내일은 어때요.” 엘렌느는 입을 다물었다. 젊은 여인의 무심한 어조는 그녀를 자극하였다. 자신 은 지난 밤 이래 그렇게도 고통스런 번민을 겪었건만 상대방은 저렇게 평온한 것을 보자 그녀는 분노를 느꼈다. 순간 그녀는 일어서서 될 대로 되게 놔둘 마 음을 먹었다. 저런 여자를 구하려 하다니 정말 어리석었다. 간밤의 악몽이 되살 아났다. 확확 @p 283 열이 나는 그녀의 손은 주머니 속의 편지를 더듬어서 꼭 거머쥐었다. 다른 사람 들이 나를 좋아하지도, 나처럼 고통당하지도 않는 마당에 무엇 때문에 그들을 좋아하랴? “아! 아주 좋아요.” 갑자기 쥴리에뜨가 소리쳤다. 베르띠에 부인은 기로 부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흐느끼면서 되풀이했다. “그이는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게 틀림없어요, 틀림없다구요.” “이건 대단한 성공일 거예요.” 쥴리에뜨가 말했다. “잠시 쉬는 게 어때요?...‘그이는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게 틀림없어요. 틀림없 다구요.’그리고 머리를 기대고 있는 거예요. 멋지군요... 기로 부인에게 말이죠. ”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이 장면은 변덕스런 상상이지요...” 뚱뚱한 부인은 단언했다. “바로 그렇죠! 그러나 장면이 기니까, 어때요? 잠시 쉬도록 하죠... 그 부분은 조정해야겠어요.” 그리고 세 여자는 살롱의 배치를 의논했다. 왼쪽 식당 문은 등장과 퇴장을 하 는 데 쓰일테고 오른쪽에는 안락의자를 놓고 구석에 긴 의자를 놓는다. 테이블 은 벽난로 쪽으로 밀어놓는다. 엘렌느는 일어서서 무대 배치에 흥미가 있는 듯 그녀들을 뒤따랐다. 쥴리에뜨를 설득하려는 계획은 단념하였으나 그녀가 약속장 소에 나타나는 걸 막으려는 최후의 시도만이라도 해볼 생각이었다. “당신이 셰르메뜨 부인을 방문하겠다고 한 날이 오늘이 아닌지 여쭈어 보러 왔어요.” 엘렌느는 물었다. @p 284 “그래요, 오늘 오후지요.” “그런데 괜찮으시면 같이 가겠어요. 그 부인은 찾아뵙겠다고 약속한 지 오래 되었거든요.” 순간 쥴리에뜨는 당황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곧 정신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그러면 정말 좋겠지요... 하지만 쇼핑할 게 많아서 단골가게에 먼저 들러야 해요. 몇 시에 셰르메뜨 부인 댁에 가게 될지 잘 모르겠는데요.” “괜찮아요.” 엘렌느가 대답했다. “바람도 쐴겸 같이 가지요.” “아, 솔직히 말하면... 그래요! 자꾸 그러지 말아요. 당신이 따라오면 신경이 쓰일 거예요... 다음 월요일에 가세요.” 아무런 감정도 없이 아주 차분한 미소와 함께 분명한 어조로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엘렌느는 아연실색해서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쥴리에뜨를 한 대 올려 붙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쥴리에뜨는 말을 마치자마자 벽 난로 근처로 작은 원탁을 옮기려 하였다. 연습은 다시 시작되었고 엘렌느는 뒤 로 물러났다. 아까의 장면에 이어서 독백을 하게 된 기로 부인은 힘차게 다음 두 문장을 내뱉었다. “하지만 남자의 마음이란 정말 알 수 없는 심연이야! 아, 진정 우리들은 그들 보다 낫다구!”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의문이 어수선하게 들었지만 오로지 혼란되고 격렬한 생각만이 엘렌느를 휩쌀 뿐이었다. 그녀는 쥴리에뜨의 흠잡을 데 없는 차분함에 복수하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욕망을 느꼈다. 그 고요함은 자신이 열에 들떠 몸부림치며 괴로워한데 대한 모욕인 것 같았다. 그녀는 줄리에뜨가 파멸하 기를 바랐다. @p 285 그래도 쥴리에뜨가 냉랭한 무관심을 유지할 수 있는지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는 섬세하고 조심성 많은 자신을 경멸하였다. 지금이라면 스무 번이라도 앙 리에게 말할 수 있으리라. “당신을 사랑해요. 나를 가지세요. 우리 함께 어디로 가 버려요.” 그리고 최초의 밀회 세 시간 전에 제 집에서 희극을 연습하고 있 는 이 여인의 고요하고 흰 얼굴을 까딱 않고 그에게 보여 주리라. 그렇지만 이 순간에도 그녀는 쥴리에뜨보다 더욱 동요하고 있었다. 갑자기 격정적인 말이 터 지지 않을까 두려워지면서 이 살롱의 즐거운 평화 속에서 혼자만 흥분하고 있다 는 생각은 그녀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비열한 인간이란 말인가? 문이 열리고 그녀는 앙리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냥 계속하세요... 지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연습을 끝나려 하고 있었다. 샤비니의 대사를 읽고 있던 쥴리에뜨는 기로 부 인의 손을 잡으러 왔다. “에르네스띤느, 당신을 사모합니다!” 그녀는 자신 있게 소리쳤다. “그러면 당신은 블랭비유 부인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건가요?” 기로 부인이 대사를 외었다. 그러나 쥴리에뜨는 남편이 오자 계속하지 않았다. 남자들은 알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의사는 부인들에게 몹시 상냥했다. 그는 부인들에게 찬사를 보내고 커다 란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보증했다.검은 장갑을 끼고 말끔하게 면도된 단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는 왕진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들어오면서 그는 엘렌느에 게 고개를 약간 까딱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을 뿐이었다. 그는 꼬메디 프랑 세즈에서 아주 유명한 배우가 레리 부인 역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어서 기로 부인에게 그 부분의 연기에 대해 조언했다. @p 286 “샤비니가 당신의 발 밑에 몸을 던지면 당신은 벽난로 쪽으로 가셔서 지갑을 불에 던져 넣으셔야 합니다. 싸늘하게요. 그렇지 않습니까? 화를 내지도 않고 사 랑 놀음을 하는 여인답게...” “그래요, 그래요, 우릴 내버려 두세요.” 쥴리에뜨가 되풀이했다. “다 안다니까요.” 마침내 그가 제 사무실 문을 밀고 들어가자 그녀는 동작을 계속했다. “에르네스띤느, 당신을 사모합니다!” 앙리는 방을 나가기 전에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엘렌느에게 고개를 까딱했 다. 그녀는 어떤 파국을 기대하면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의사가 갑작스럽게 들 어오자 그녀는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그가 방을 나가자 아무 것도 모른 채 깍듯이 예절을 지키는 그가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그 자신이 이 바보 같은 희극에 한몫 거들다니! 그리고 내가 여기 있는 것을 보고도 눈에 불 꽃 하나 일지 않다니! 그러자, 이 집 전체가 그녀에게 불친절하고 냉랭해졌다.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그녀를 제지하는 것은 더 이상 없었다. 쥴리에뜨 만큼이나 앙리가 미웠다. 그녀는 부르르 떨리는 손가락으로 호주머니 속의 편지 를 다시 쥐었다. ‘안녕히 계세요’하고 중얼거리고는 주위의 가구들이 빙빙 도 는 것 같은 현기증 속에서 그녀는 방을 나왔다. 기로 부인이 외우는 대사가 웅 웅거리는 귀에 부딪쳤다. “안녕, 당신은 오늘 저를 원망하겠지만 내일은 제게 우정을 느끼게 될 거예 요. 저를 믿으세요. 우정은 변덕스런 애정보다 낫답니다.” 보도로 나와 문을 닫으면서 그녀는 거칠게 편지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기계적 으로 편지함에 그것을 밀어넣었다. 다시 닫혀 버린 @P 287 좁은 구리판을 바라보며 그녀는 멍청하게 잠시 서 있었다. “해버렸어.” 그녀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장밋빛 무명을 바른 두 방과 목동 아가씨들, 커다란 침대가 다시 눈앞에 떠올 랐다. 말리뇽과 쥴리에뜨가 거기 있다. 갑자기 벽이 갈라지며 남편이 들어온다. 그 이상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녀는 몹시 침착하였다. 직감적으로 그녀는 누가 편지를 넣는 광경을 목격하지 않았나 살폈다. 길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모퉁 이를 돌아 다시 올라갔다. “얌전하게 있었니, 아가?” 그녀는 쟌느를 껴안으며 말했다. 소녀는 안락의자에 그대로 앉은 채 뾰로통한 얼굴을 들었다. 대답 없이 아이 는 어머니의 목에 두 팔을 감고 긴 한숨을 내쉬며 키스하였다. 아이는 매우 상 심해 있었다. 점심때 로잘리는 놀라워했다. “그런데 마님, 볼일이 오래 걸리셨네요?” “그러면 어때서?” 엘렌느가 물었다. “마님께서 식사를 잘 하셔서요... 식욕이 통 없으신지 오래 되었거든요...” 정말 그랬다. 그녀는 몹시 배가 고팠다. 긴장이 갑자기 풀리면서 허기가 졌다. 형용할 수 없는 안도감과 평화가 느껴졌다. 최근 이틀 동안 흔들림을 겪은 끝에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팔다리는 목욕탕에서 나왔을 때처럼 흐물흐물 풀려 있었 다. 다만 어딘가 압박감이, 짓누르는 듯한 막연한 중압감이 느껴졌다. 방에 돌아오자 그녀의 눈길은 곧장 시계에 가서 멎었다. 바늘은 12시 2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쥴리에뜨의 밀회는 3시로 약속되어 @p 288 있었다. 아직 두 시간 반이 남았구나.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계산했다. 하지만 그 녀는 전혀 급할 게 없었다. 바늘은 움직이고 있고 이제 와서 누구라도 그것을 멈추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일이 되어 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거야. 오래 전부 터 시작만 했을 뿐인 아기 모자가 원탁위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집어 들고 창가에 앉아 꿰매기 시작하였다. 방안은 완전한 정적이 감돌았다. 쟌 느는 평소의 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아이는 지친 듯 팔을 내려뜨리고 있었다. “엄마...” 아이가 말했다. “나는 공부하기 싫어. 재미가 없어.” “그래, 아가야, 하지 말려무나... 자, 바늘에 실을 꿰어 주렴.” 아이는 아무 말 없이 느릿느릿 그 일에 열중했다. 실 끝을 가지런히 조심스럽 게 자른 후 바늘 귀에 꿰는 데 시간이 한없이 걸렸다. 아이가 간신히 실을 꿰고 나면 어머니는 바로바로 실이 꿰어진 바늘을 가져다 썼다. “얘야, 좀더 빨리 해야겠다... 오늘 저녁에는 아기 모자 여섯 개를 끝내야 하 거든.” 그녀는 시계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1시 10분이군. 아직도 두 시간가량 남았어. 지금쯤 쥴리에뜨는 옷을 입시 시작했을거야. 앙리는 편지를 받았을테고. 아! 그는 틀림없이 거기 갈거야. 때와 장소가 정확하게 지시되어 있어서 그는 금 세 깨닫게 될거야. 그러나 그런 것들은 아직 너무 아득한 일로 느껴졌고 그녀는 담담하였다. 그녀는 여직공처럼 열심히 또박또박 바느질을 하였다. 일분일분 시 간이 흘렀다. 시계가 2시를 쳤다. 초인종 소리가 그녀를 놀라게 했다. “누구지, 엄마?” @p 289 의자 위에서 소스라치며 쟌느가 물었다. 랑보 씨가 들어오자 아이는 말했다. “아저씨군요!... 왜 그렇게 벨을 세게 눌렀어요? 무섭잖아요.” 이 점잖은 사나이는 어쩔 줄 모르는 듯했다. 실제로 그는 어정쩡하게 손을 늘 어뜨리고 있었다. “오늘은 기분이 좋지 않아요. 몸이 아파요.” 쟌느는 계속했다. “나를 무섭게 하시면 안 돼요.” 랑보 씨는 염려했다. 그러면 어린 것에게 무슨 일이 있단 말인가? 로잘리의 말마따나 아이가 지금 기분이 안 좋은 상태에 있음을 알리기 위해 엘렌느가 가 볍게 눈짓을 하는 것을 보고서야 그는 안심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평소 그가 낮에 방문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그래서 그는 곧 자신이 방문한 이유를 설 명하려 했다. 고향사람인 늙은 노동자 하나가 나이 때문에 일자리를 얻지 못하 고 그의 아내는 손바닥만한 방에서 중풍에 걸려 누워 있는데 그 비참함은 상상 하기 힘들 정도라는 것이었다. 그날 아침도 어찌 지내나 보려고 그는 그 집에 갔었다. 지붕 밑 다락방의 천장은 유리가 깨져 비가 새고 있었다. 짚으로 만든 매트 위에 낡은 커튼을 덮은 아내가 드러누웠는데 얼이 빠진 남편은 바닥에 쭈 그리고 앉아서 빗자루질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듯했다. “아, 불쌍한 사람들이군요. 불쌍한 사람들이군요!” 엘렌느는 눈물이 날 만큼 측은해서 되풀이했다. 랑보 씨를 어찌할 바 모르게 하는 사람은 늙은 노동자가 아니었다. 랑보 씨는 그를 제 집에 데려다 시킬만한 일을 발견할 수 있을 터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중풍 환자인 아내를 한순간이라도 혼자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보따리나 다름 없는 그녀를 어디다 놔두고 어떻게 한단 말인가? @p 290 “저는 부인 생각을 했답니다.” 그는 계속했다. “그 여자를 빨리 자선기관에 들어가도록 해줘야겠어요... 제가 직접 드베를르 씨를 찾아갈 수도 있겠지만 부인이 그 분을 더 잘 아니까 말씀하시면 더 영향력 이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그 분이 도와 줄 생각이 있다면 내일이라도 일을 처 리했으면 하는데요.” 쟌느는 몹시 창백해져셔 동정심으로 몸을 떨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이는 손을 모으고 중얼거렸다. “오! 엄마, 도와줘요. 그 불쌍한 여자를 도와줘요...” “그럼, 그러구말구!” 엘렌느는 감정이 북받쳐서 말했다. “되도록 빨리 의사 선생님께 말하겠어요. 그 분이 일을 처리해 줄 거예요... 랑보 씨, 이름과 주소를 주세요.” 그는 작은 원탁에 대고 메모를 적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2시 35분이군요. 아마 의사 선생님은 지금 댁에 계실 겁니다.” 일어서 있던 그녀는 소스라치면서 시계를 보았다. 벌써 2시 35분이었다. 바늘 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더듬거리면서 의사 선생은 왕진을 나갔을 거 라고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시계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랑보 씨는 모자 를 들고 선 채로 그 이야기를 또 시작했다. 그 불쌍한 사람들은 하다못해 화로 까지 팔아 먹어서 겨울이 되었는데도 불도 피우지 못하고 지내고 있다. 12월 말 에는 나흘이나 굶었다. 엘렌느는 안됐다는 한탄을 발했다. 바늘은 3시 20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랑보 씨는 떠날 때까지 2분은 더 잡아먹었다. “좋아요! 부인만 믿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p 291 그리고 쟌느는 안아 주기 위해 몸을 굽혔다. “안녕, 아가.” “안녕히 가세요... 안심하세요. 엄마는 잊어버리지 않을 거예요. 내가 기억하 도록 할게요.” 엘렌느가 랑보 씨를 현관까지 배웅하고 돌아오자 시계 바늘은 45분에 가 있었 다. 15분만 있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벽난로 앞에 꼼작 않고 앉아 있는 그녀에 게 갑작스런 광경이 떠올랐다. 쥴리에뜨는 벌써 거기 가 있을 것이다. 앙리가 들 어오고 그녀를 보게 될 것이다. 엘렌느는 그 방을 잘 알았다. 그녀는 놀랄만큼 확실하게 아주 세세한 것까지도 파악하고 있었다. 랑보 씨의 비감한 얘기에 마 음이 흔들려서 수족에서 얼굴까지 몸이 부르르 떨림을 느꼈다. 그러자, 마음 속 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수치스런 짓을 한거야. 내가 쓴 편지는 비열한 밀고가 아니더냐. 눈이 멀 듯한 빛 속에서 망치로 한 대 맞은 것처럼 그런 생각이 들었 다. 그래, 그 따위 수치스런 짓을 하다니! 그녀는 간섭할 생각이 없었는데 다른 사람의 못된 행동을 우연히 목격하게 된 사람처럼 얼이 빠져서 편지함에 편지를 던져 넣던 장면을 회상하였다. 그녀는 꿈에서 깨어났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왜 여기서 시계판 위의 바늘만 지켜보고 있는단 말인가? 다시 2분이 더 흘러갔 다. “엄마...” 쟌느가 말했다. “엄마가 괜찮으면 오늘 저녁 같이 의사 선생남을 만나러 가. 산책도 할겸. 나 는 오늘 답답해.” 엘렌느는 듣고 있지 않았다. 또 3분이 지나갔다. 그렇게 가증스러운 짓이 이루 어지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부시시 정신이 들며 그것을 막아야겠다는 맹렬한 의지밖에는 마음 속에 없었다. 꼭 막아야 했다. 그러지 못하면 더 이상 살 수 없 으리라. 미친 듯이 그녀는 @p 292 방으로 달려갔다. “아! 나를 데려가는거지!” 쟌느는 좋아서 소리쳤다. “지금 당장 의사 선생님을 보러 가는거야, 엄마?” “아니, 아니.” 그녀는 짧은 장화를 찾느라고 몸을 숙여 침대 밑을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그녀는 장화를 찾지 못했다. 지금 신고 있는 가벼운 실내화를 그대로 신고 나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대범하게 걱정을 털어버렸다.그리고는 숄을 찾으려 고 거울달린 장롱을 쑤석거렸다. 쟌느가 어리광을 부리며 다가왔다. “그럼 의사 선생님 댁에 가는 거 아니야, 엄마?” “그래.” “응, 그래도 나를 데려가 줘...응! 나도 데려가. 그러면 정말 좋을거야!” 그녀는 마침내 숄을 찾아 어깨에 둘렀다. 세상에! 10분밖에는 안 남았네. 정말 시간이 날아가는 것 같구나. 거기 가서 뭔진 모르겠지만 무엇인가 해야 하리라. 가는 도중 생각이 나겠지. “엄마, 나도 데려가.” 쟌느는 점점 더 낮고 애절한 목소리로 자꾸 졸랐다. “너를 데려갈 수 없단다.” 엘렌느가 말했다. “애들은 갈 수가 없는 데야... 모자 좀 줄래?” 쟌느의 얼굴은 납빛이 되었다. 아이의 눈은 어두워지고 목소리는 퉁명스러워 졌다. 아이는 물었다. “어디 가는데?” 어머니는 모자 끈을 매는 데 열중하여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는 @p 293 계속했다. “엄마는 요새 맨날 혼자 나가... 어제도 나갔고 오늘도 나갔지. 그리고 또 나 가려구. 나는 너무 질렸어. 여기서 혼자 있으면 무서워... 나를 내버려 두면 죽어 버릴 거야, 죽어 버린다구, 엄마...” 아이는 울먹이면서 비통함과 분이 치밀어 엘렌느의 치맛자락에 매달렸다. “자, 엄마를 놔라. 얌전하게 굴어야지. 곧 돌아올거야.” 엘렌느는 되풀이했다. “싫어, 싫단 말이야... 싫단 말이야...” 아이는 더듬거렸다. “아!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지. 그렇지 않으면 나를 데려갈 거야... 아! 나는 엄마가 다른 사람들을 더 사랑하는 걸 잘 알아... 나도 데려가 줘. 나도 데려가 줘. 안 그러면 나가서 땅바닥에 있을거야. 엄마는 내가 땅바닥에 있는 걸 보게 될거야.” 아이는 어머니의 다리에 가는 팔을 감고 옷자락에 얼굴을 묻고 울면서 어머니 가 가지 못하게 힘을 주며 달라붙었다. 시계 바늘은 자꾸 움직여 3시 10분 전을 가리켰다. 그러자, 엘렌느는 여유 있게 닿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제 정 신을 잃은 그녀는 쟌느를 확 밀쳐내며 소리질렀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아이로구나! 정말 버릇없는 애야!... 그렇게 울면 혼날 줄 알아라!” 그녀는 방을 나가서 문을 꽝 닫았다. 쟌느는 그 사나움에 눈물을 뚝 그치고 몸이 굳은 채 하얗게 질려서 창문까지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아이는 문 쪽으로 팔을 내밀고 울먹였다. “엄마, 엄마.” 그리고는 어머니가 자기를 속이고 있다 는 생각에 질투심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눈을 크게 뜬 채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아 있었다. @p 294 길로 나서자 엘렌느는 걸음을 재촉했다. 비는 멎어 있었다. 물받이에서 뚝뚝 떨어지는 굵은 방울들이 어깨를 적실 따름이었다. 그녀는 밖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려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제 시간에 당도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는 없었다. 오 골목에 접어들었을 때 그녀는 일순간 망설였다. 계단은 도랑으로 바뀌어 있었고 레이누아르 가에서 넘친 물줄기가 휩쓸려 내리고 있었다. 벽에 에워싸인 계단에서는 물거품이 용솟음쳤다. 포석은 폭우로 씻겨 거울처럼 반질 거렸다. 잿빛 하늘에서 내리비치는 희끄무레한 빛이 검은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 는 길을 뽀얗게 했다. 그녀는 가까스로 치마를 걷어 쥐고 내려갔다. 물은 발목까 지 차올랐고 신발은 구덩이에 빠져서 벗겨질 지경이었다. 내려가는 길을 따라 주위에서는 숲 속 풀 밑을 흐르는 작은 시내의 졸졸거리는 소리와도 흡사한 맑 은 속삭임이 들렸다. 문득 그녀는 계단이 있는 문 앞에 서게 되었다. 그녀는 헐떡거라며 괴로워하 면서 서 있었다. 그리고는 부엌문을 두드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나, 부인이구랴!” 페띠 할멈이 말했다. 그녀는 이제 징징거리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가느다란 눈은 반짝거리고 있었 고, 쪼글쪼글한 주름살에서는 비위를 맞추려는 듯한 웃음이 쏟아졌다. 할멈은 이 제 거리낌이 없어져서 더듬거리는 엘렌느의 얘기를 들으며 그녀의 손을 살짝 때 렸다. 엘렌느는 할멈에게 20프랑을 건네 주었다. “복을 받으실 거예요!” 언제나처럼 페띠 할멈은 중얼거렸다. “마음대로 하세요. 부인.” @p 295 4 안락의자에 몸을 제끼고 앉은 말리뇽은 활활 타고 있는 불 앞으로 다리를 뻗 으며 조용하 기다렸다. 그는 세심하게 창문의 커튼을 내리고 초에 불을 붙여 놓 았다. 그가 있는 첫번째 방은 샹들리에와 두 개의 촛대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그와 반대로 침실은 어두웠다. 천장에 매달린 크리스탈 등만이 희미한 어스름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말리뇽은 시계를 끄집어 냈다. “제기랄!” 그는 중얼거렸다. “오늘도 나를 바람맞힐 건가?” 그는 가볍게 하품을 했다. 한 시간 전부터 기다렸지만 조금도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일어나서 준비상태를 한번 둘러보았다. 안락의자의 배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2인용 긴 의자를 벽난로 앞으로 밀고 왔다. 촛불은 무명으로 바른 벽에 장밋빛 반사광을 비추며 타올랐다. 바깥에는 돌풍이 불었지만 방안은 따뜻하고 고요하였으며 숨이 막힐 듯하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침실을 들여다보 았다. 그리고 거기서 허영심의 만족을 맛보았다. 그 방은 벽감처럼 아늑한 것이 아주 고급스럽고 근사해 보였다. 침대는 관능저인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그가 베개의 레이스를 바로잡고 있을 때, 누군가가 문을 짧게 세 번 두드렸다. 그게 정해 놓은 신호였다. “드디어 오셨군.” 그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크게 말했다. 그리고 문을 열러 달려갔다. 쥴리에뜨는 털코트에 단단히 싸여서 모자의 베일 을 내린 채 들어왔다. 말리뇽이 가만히 문을 닫는 동안 그녀는 말문이 막힐 정 도로 감정이 동요하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잠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젊은이가 미처 그 @p 296 녀의 손을 잡기도 전에 그녀는 베일을 들어올리고 다소 창백하지만 아주 침착헤 게 웃음띤 얼굴을 드러내었다. “어머! 불을 켜 놓았네요.” 그녀는 외쳤다. “나는 당신이 그런 걸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 대낮에 불을 켜 놓는 것 말이 에요.” 미리 생각해 둔 열정적인 제스처로 그녀를 으스러지게 껴안을 태세를 갖추고 있던 말리뇽은 당황해서 날씨가 너무 나쁜데다 창문이 애매하게 나 있어서 그랬 다고 설명하였다. 게다가, 그는 밤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당신은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에요.” 그녀는 그를 놀리듯 말을 받았다. “지난 봄 제가 애들을 위한 파티를 열었을 때 당신은 잔소리를 하지 않았었 나요? 굴 속에 있는 것 같다느니, 무덤 속에 들어가는 것 같다느니... 하여튼 당 신의 취미가 바뀐 걸로 해두지요.” 그녀는 목소리를 다소 굵게 해 자신 있는 체하면서 방문 중인 사람처럼 보이 려 했다. 그것이 그녀의 동요를 말해 주는 오직 하나의 증거였다. 간간이 그녀는 목에 뭐가 걸린 것처럼 턱을 가볍게 수축시켰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빛났고, 그 녀는 자신의 무모한 행동에 대해 생생한 쾌감을 맛보았다. 그것은 그녀를 바꾸 어 놓았다. 그녀는 애인을 가지고 있는 셰르메뜨 부인을 생각했다. 맙소사! 어쨌 든 재미있는 일이야. “당신이 어떻게 꾸며 놓았나 구경 좀 해요.” 그녀는 방을 한 바퀴 돌았다. 그는 당장 포옹해야 하지 않을까 곰곰 생각하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지금 그럴 수는 없어. 기다려야 해. 한편 여자는 가 구를 보고 벽을 살펴보았으며 고개를 들어 위를 보고 뒤로 물러서서 말했다. @p 297 “이 무명 벽지는 전혀 좋지 않아요. 흔해빠진 거예요. 어디서 이 끔찍한 장밋 빛을 찾아 냈죠?... 그리고 의자는 나무에 금박을 칠하지 않았으면 괜찮을 뻔했 어요... 그림도 하나 없고 실내 장식품도 하나 없군요. 이 샹들리에와 촛대처럼 멋이 없는 건 처음 봤어요... 아 ! 좋아요! 내 일본식 정자를 아직도 비웃어 보시 지 그래요!” 그녀는 웃었다. 항상 가슴에 맺혀 있었던 그 옛날의 공격에 대해 멋지게 복수 한 것이다. “당신 취미는 정말 근사해요. 얘기 좀 해보자구요! ... 하지만 내 사기 인형이 당신 가구보다는 낫다는 것을 모르시나 보죠!... 신참 점원이라도 이런 장밋빛을 고르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은 세탁부를 유혹하려고 하는 거예요?” 말리뇽은 너무 화가 나서 아무 대답도 못했다. 그는 여자를 침실로 데려가려 고 애를 썼다. 그녀는 이렇게 어두운 장소에는 들어가지 않겠노라고 하면서 문 턱에 멈춰 섰다. 게다가 그녀는 그 방이 살롱보다도 한층 더하다는 것을 충분히 보았다. 모두가 생 땅뜨완느(1 바스띠유에서 나씨옹 사이의 생 땅뜨완느 가를 중 심한 빠리의 지역으로 루이 14세 때부터 가구점이며 목공소가 밀집해 있었다.)에 서 사 온 것이었다. 그녀가 특히 놀림감으로 생각한 것은 천장에 매달린 등이었 다. 그녀는 인정사정이 없었다. 자꾸 그 싸구려 등 얘기를 끄집어내며 도대체 가 구라고는 지녀 본 적이 없는 여공들이 만들어 낸 걸 거라고 주장했다. 7프랑 50 수만 주면 아무 시장에서나 비슷한 등을 살 수 있을 거라고도 했다. “그건 90프랑 주고 산 거라구요.” 마침내 참다 못한 말리뇽이 소리쳤다. 그가 화를 내자 여자는 신이 난 듯했다. 그는 진정하고 은근히 @p 298 물었다. “코트를 벗지 않으시겠습니까?” “좋아요.” 그녀는 대답했다. “이 집은 덥군요!” 그녀는 모자까지 벗었고 남자는 그것을 침대 위에 코트와 함께 놓아 두려고 갔다. 그가 돌아왔을 때, 그는 여자가 주위를 둘러보며 불가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녀는 심각해져 있었으며 화해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몹시 흉하기는 하지만 당신이 잘못이라는 것은 아니에요. 이 두 방은 아주 멋질 수 있었을 텐데.” “오! 내가 그렇게 꾸미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데요!” 그는 상관없다는 몸짓을 하며 내뱉었다. 그리고는 즉시 그 어리석은 말을 후회했다. 그 이상 촌스럽고 서투를 수는 없 었다. 여자는 목구멍에 단단한 것이 걸린 듯 고개를 숙였다. 잠시 그녀는 자기가 왜 여기 와 있는지 잊어버린 듯 했다. 그는 최소한 자기가 그녀에게 야기시킨 혼란을 이용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쥴리에뜨.” 그는 여자 쪽으로 몸을 숙이며 말했다. 그녀는 손짓으로 그를 앉혔다. 그것은 트루빌에서 해수욕하던 때였다. 대서양을 바라보는 데 싫증이 난 말리뇽은 사랑 에 빠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이미 3년전부터 두 사람은 매일 아 웅다웅하며 지내 왔었다. 어느 날 저녁, 그는 여자의 손을 잡았다. 여자는 화를 내지 않았고 처음에는 농담을 했다. 머리는 비고 마음은 경박한 그녀는 제가 그 를 사랑하고 있다고 상상하게 되었다. 여태껏 그녀는 주위의 친구들이 하는 일 이라면 거의 모두 했 @p 299 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열애의 경험이 없었다. 호기심과 다른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이 그녀를 충동질했다. 처음부터 젊은이가 거칠게 나왔다면 그녀는 꼼짝없이 거칠게 굴복했으리라. 그러나 그는 재간으로 여자를 정복하겟다는 자 만심에 차서 여자가 달콤한 사랑놀음에 익숙해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래서, 희 가극 속의 연인들처럼 함께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어느 날 밤, 그가 처음으로 여자에게 달려들자 그녀는 놀란데다 제가 즐기고 있는 그 공상을 어지럽힌 데 화가 나서 그를 쫓아버렸다. 빠리에 오자 말리뇽은 훨씬 능란하게 해내리라고 결심했다. 만찬이며 무도회, 새로 무대에 올려진 연극 따위의 오락이 그저그렇게 시들해진 무렵인 지루한 겨울 막바지의 권태로운 시기에 그는 다시 여자에게 달 려들었다. 외딴 곳에 완전히 살림이 구비된 아파트를 얻어서 밀회를 한다는 비 밀스런 계획이 풍기는 수상한 분위기는 그녀를 끌어당겻다. 그 계획은 별난 것 같아 보였고 모든 것을 잘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그녀의 내심은 아주 평온하여 서 말리뇽의 집에서도 자선심으로 그림을 사 주려고 방문한 화가의 작업실에서 느낀 이상으로 흥분이 되지 않았다. “쥴리에뜨, 쥴리에뜨.” 젊은이는 상냥한 어조를 내려고 애쓰면서 되풀이했다. “자, 좀 현명하게 구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벽난로 위에서 중국풍 화열 가리개를 집어들고는 제 집 살롱에서처럼 아주 편하게 말을 계속하였다. “오늘 아침 연습이 있었던 걸 아시지요?... 베르띠에 부인에게 역을 맡긴 게 잘못이 아닌지 걱정이에요. 그녀는 징징 짜는 견딜 수 없는 마띨드에요... 마띨드 가 자기 지갑을 보면서 하는 그 멋진 독백 있잖아요. ‘불쌍한 것, 조금 전에도 너한테 키스했었는데 @p 300 ...‘ 그래요! 그걸 마치 인사말을 준비하는 여학생같이 암송한다니까요... 정말 걱정스러워요.“ “기로 부인은 어때요?” 그는 의자를 당겨서 여자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오1 그녀는 완벽해요... 뛰어난 레리 부인을 발굴해 낸 거예요. 신랄하고 활 기 있고...” 그녀는 말하는 도중에 그가 손에 키스하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그것을 의식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가장 나쁜 일은...”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없는 거예요. 우선 당신은 베르띠에 부인의 연기를 고쳐 주어야 해 요. 그리고 당신이 없으면 우리끼리는 호흡을 맞추기가 곤란해요.” 그는 여자의 허리에 팔을 감는 데 성공했다. “제 역할을 잘 알기 때문에...” 그는 속삭였다. “그래요, 좋아요. 그래도 조정해야 할 장면이 있지요... 우리에게 사나흘 아침 시간을 내줄 수 없다니 친절하지 못해요.” 그가 목에 키스를 쏟아 부었기 때문에 그녀는 계속할 수 없었다. 그때서야 그 녀는 자신이 그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자는 들고 있던 화열 가 리개로 그를 가볍게 때리며 밀어냈다. 그녀는 그 이상의 짓을 하도록 놔두지는 않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녀의 흰 얼굴은 뜨거운 열을 받아서 발개졌고 얇 게 다물어진 입술은 이상한 느낌을 받고 놀란 호기심 많은 여인의 부드러움이 감돌고 있었다. 정말 이것뿐이야! 어떻게 하나 끝까지 놔둬야 했을까. 두려움이 엄습하였다. “가만 놔둬요.” @p 301 그녀는 어색한 표정으로 웃으며 중얼거렸다. “또 그러면 화낼 거예요.” 그는 여자의 마음이 움직였다고 믿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았다. 제 발로 들어온 이상 나가거나 말거나 모르는 척 하고 있으면 굴복하고 말거 야. 그렇게 생각하자 말은 필요없었다. 그는 다시 여자의 손을 잡고, 어깨를 안 으려 했다. 한동안 여자는 몸을 맡기려는 듯 했다. 단지 눈을 감기만 하면 된다 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그러고 싶은 욕망이 일어났으나 그녀는 마음 깊이 아주 맑은 정신으로 그것을 가늠해 보았다. 그러자, 누군가가 안 돼 하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미처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그녀는 외쳤다. “안 돼요, 안 돼요.” 그녀는 되풀이했다. “나를 놔줘요. 내게 나쁜 짓을 하면 안 돼요... 싫어요, 싫어요.” 남자가 자기를 침실 쪽으로 밀면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그녀는 홱 몸을 빼냈다. 그녀는 욕망을 넘어선 이상한 힘에 복종하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제 자 신과 그에 대해 화가 났다. 흥분하여 토막토막 끊어진 말이 흘러나왔다. 아! 나 의 신뢰를 잘도 갚는군요. 이렇게 난폭하게 나오다니 대체 뭘 원하는 거예요? 당신은 비겁자예요. 영원히 당신을 내 집에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그 는 얼이 빠진 것처럼 그녀가 지껄이는 대로 내버려 두었고 심술궂고 바보스러운 웃음을 띤 채 그녀를 쫓아다녔다. 그녀는 안락의자 뒤에 피해서 말을 더듬었다. 남자가 자기를 덮치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잡혔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 다. 일생에서 가장 불쾌한 순간이었다. 소란을 피우며 두 사람은 수치와 사나움으로 안색이 변해서 그렇게 대치하고 있었다. 그 때 문이 열리고 침실을 가로지르는 발자 @p 302 국 소리가 들렸다. 어떤 목소리가 두 사람에게 외쳤다. “피하세요, 피하세요... 그러지 않으면 발각돼요.” 그것은 엘렌느였다. 두 사람 다 아연실색하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도 놀라서 그들은 자신들이 처해 있는 난처한 상황을 잊어버렸다. 쥴리에뜨는 방해를 받았 다는 기색도 없었다. “피하세요.” 엘렌느가 다시 말했다. “잠시 후면 당신 남편이 여기 올 거예요.” “남편이라구요?” 젊은 여인은 중얼거렸다. “남편이... 왜요? 무엇 때문에요?” 그녀는 넋이 나가 버렸다. 머릿 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엘렌느가 나타나 남편이 올거라고 말하다니 이만저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엘렌느는 화 를 낼 듯한 몸짓을 했다. “아! 지금 당신에게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남편께 서 곧 올 거예요. 누가 당신을 일러 바친 거예요. 빨리 가세요. 두 분 모두 가세 요.” 그러자, 쥴리에뜨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그녀는 당황하여 종작없는 말을 내 뱉으며 두 방 사이를 왔다갔다 했다. “아! 세상에, 아! 세상에... 고마워요. 내 외투가 어디 있지? 바보 같으니라구, 이 방은 왜 이리 어둡담! 내 외투를 갖다 줘요. 아니 내가 찾을 테니까 촛불을 가져다 줘요... 내가 고마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소매를 낄 수가 없 내. 모르겠어, 안되겠는데...” 두려움이 그녀를 마비시켰기 때문에 엘렌느는 그녀가 외투 입는 것을 도와 주 어야 했다. 쥴리에뜨는 모자를 비뚤게 쓰고 끈도 매지 않았다. 하지만 더 안된 일은 모자 베일을 찾느라고 1분은 족히 흘 @p 303 려 버린 것이었다. 그것은 침대 밑에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무어라 중얼거리면 서 어찌할 바를 모르며 떨리는 손으로 무언가 위험에 빠질 만한 것을 잊어버리 지나 않았나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정말 뼈아픈 교훈이야!... 뼈아픈 교훈이야! 아! 이젠 끝났어.” 말리뇽은 몹시 창백해져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탓하고 조롱하며 발을 굴렀다. 그가 분명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생각은 자기는 확실히 운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다만 변변치 못한 질문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면 저도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도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으나 그는 짐짓 짐작한 채 말을 계속하면서 지 팡이를 집어들었다. 시간은 충분하다. 계단이 또 하나 있다. 인부들이 드나들던 쓰지 않는 계단인데 그리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드베를르 부인의 마차가 문 앞에 있을 터인즉 그걸 타고 강가로 내려가면 된다. 그리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진정하세요. 모두 잘 될 거예요... 자, 이리로 오십시오.” 그는 문을 열었다. 땟국에 절은 어둡고 황폐한 세 개의 작은 방이 나란히 보 였다. 습기가 확 끼쳤다. 쥴리에뜨는 그 비참한 곳에 발을 딛기 전에 소리높이 외치며 마지막 저항을 했다. “어떻게 이런 데를 올 수 있었을까! 정말 끔찍하군요!... 자신을 용서할 수 없 을 거예요.” “서둘러요.” 쥴리에뜨만큼이나 불안에 떨고 있는 엘렌느가 말했다. 그녀는 쥴리에뜨를 밀었다. 그러자, 젊은 여인은 울면서 엘렌느의 목에 매달렸 다. 신경질적인 반응이었다. 수치심이 그녀를 덮쳤다. 그녀는 자기가 왜 이 사람 집에 왔는지 변명하고 싶었으리라. 그리고는 본능적으로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치마를 걷어쥐었다. @p 304 앞서 가던 말리뇽은 계단에 흩어져 있는 회 부스러기를 구두 끝으로 치워 버렸 다. 문이 닫혔다. 한편 엘렌느는 작은 살롱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녀는 귀를 기울였다. 적막이, 숨막힐 듯 후덥지근한 적막이 주위에 깔려 있었다. 삭정이로 변한 장작불의 타 닥거리는 소리만이 그 적막을 흔들뿐이었다. 귀가 잉잉거리면서 아무 소리도 들 리지 않았다. 영원처럼 여겨지는 한 순간이 지난 후, 다급한 마차소리가 들려 왔 다. 그것은 쥴리에뜨의 마차가 떠나가는 소리였다. 그제서야 그녀는 한숨을 내쉬 며 홀로 말없이 감사했다. 비열한 행동을 했다는 후회를 하지 않아도 되리라고 생각하자, 그녀는 뭐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감사와 기쁨으로 가득 찬 감정에 빠져 들었다. 그녀는 안심하였고 몹시 감동한 데다 끔직한 위기에서 벗어나자 갑자기 맥이 탁 풀려 그 자리를 피할 기운이 도저히 없었다. 마음 속으로 그녀 는 앙리가 곧 올 것이고, 누군가를 발견하리라는 생각을 했다. 문을 두드리는 소 리가 났다. 그녀는 급히 문을 열었다. 무엇보다도 기막힌 놀라움이었다. 앙리는 불안감으로 창백한 얼굴을 하고 아 까 받은 서명 없는 편지로 머리가 꽉 찬 채 들어왔다. 그러나 그녀를 보자 외침 이 터져 나왔다. “당신이요!... 세상에! 당신이었구려!” 그 외침은 기쁨보다는 놀라움 때문이었다. 그렇게 대담하게 밀회를 청하다니 그로서는 기대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자 이 관능적인 비밀 장소에서 이렇게 예기치 못한 기회를 만남으로써 남성적인 모든 욕망이 촉발되었다. “당신은 날 사랑하는군. 당신은 날 사랑하는군.” 그는 중얼거렸다. “당신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나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소!” 그는 팔을 벌리고 그녀를 안으려 했다. 그가 들어왔을 때, 엘렌 @p 305 느는 그에게 웃어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창백해져서 뒷걸음질쳤다. 확실히 그녀 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둘이 잠깐 대화를 나누면서 적당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이다. 앙리는 그녀가 만 나자고 한 줄로 알고 있다. 그녀는 일이 이리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었다. 그녀는 반항했다. “앙리, 부탁이에요... 놔 주세요...” 그러나 남자는 이미 그녀의 손목을 잡았고, 키스로 그녀를 정복할 셈인 듯 천 천히 끌어당겼다. 몇 달 동안 마음 속에서 자라왔고 나중에는 두 사람의 친교가 끊어짐으로써 잠잠해진 사랑은 그가 엘렌느를 잊기 시작했던 만큼 더욱 격렬하 게 폭발하였다. 그의 가슴 속에 있는 피가 전부 빰으로 올라왔다. 그녀는 익히 알고 있는 그의 타는 듯한 얼굴을 보자 질겁하여 몸부림쳤다. 이미 두 번이나 그는 그러한 미친 듯한 시선으로 여자를 바라보지 않았던가. “놔 주세요. 저를 겁나게 하시는군요... 정말 이러시면 안 돼요.” 그러자, 그는 다시 한 번 놀란 듯했다. “정말 당신이 내게 편지를 하였소?” 그가 물었다. 여자는 순간 망설였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네.” 그녀는 마침내 말했다. 하지만 쥴리에뜨를 피하게 하고서 그녀를 일러 바칠 수는 없었다. 그녀는 함 정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 앙리는 두 방을 살펴보면서 그 조명과 장식에 놀라워 했다. 그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당신이 이렇게 한 거요?” @p 306 그리고 그녀가 아무 대답을 않자 말했다. “당신의 편지는 나를 몹시 곤혹스럽게 했소... 엘렌느, 내게 뭔가를 숨기는구 려. 제발, 나를 안심시켜 주오.” 그녀는 듣고 있지 않았다. 그의 착각도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여기 서 무얼 하려고 하였던가? 무엇 때문에 그를 기다렸던가? 그녀는 핑계를 생각해 낼 수 없었다. 제 스스로도 밀회를 요구한 게 아니라고 확신할 수가 없었다. 포 옹이 그녀를 감쌌고, 그녀는 천천히 빨려들어갔다. 남자는 여자를 더욱 꽉 껴안았다. 그리고 여자에게서 진실을 끌어 내려는 듯 입술을 거의 닿을 만큼 가까이 하고 물었다. “나를 기다렸소? 나를 기다렸소?” 그러자, 그녀를 무너뜨리는 피로와 연약함이 덮쳐 왔고, 여자는 힘없이 몸을 맡기며 그가 말하는 대로 말하고 그가 원하는대로 원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신을 기다렸어요. 앙리...” 두 사람의 입술은 더욱 가까워졌다. “그런데 그 편지는 웬거요?... 여기서 당신을 만나다니!... 도대체 여기는 어디 요?” “묻지 마세요. 절대 알려고 하지도 마세요... 제게 맹세하세요... 그냥 제가 당 신 옆에 있고 당신도 그걸 잘 알고 있어요. 그 이상을 원하시나요?” “나를 사랑하오?” “네,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은 내 것이오? 엘렌느, 완전히 내 것이오?” “네, 완전히.” 입술과 입술을 포개고 두 사람은 서로 키스하였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잊고 초 인적인 힘에 굴복하였다. 그것이 이제는 자연스럽고 @p 307 필요한 일로 여겨졌다. 마음 속에는 평화가 감돌고 젊은 날의 추억과 감정만이 다가왔다. 쁘띠뜨 마리 가에 살던 처녀 시절, 이처럼 겨울 어느 날, 다림질을 하 려고 피워 놓은 석탄불 앞에서 질식해 죽을 뻔하였었지. 어느 날인가 한여름에 창문이 열려 있었는데 어두운 길을 헤매던 방울새 한 마리가 방안에 들어와 한 바퀴 돌았었지. 그런데 왜 죽을 뻔했던 일이 생각나는 걸까? 온 존재가 감미롭 게 녹아 없어지는 것 같은 가운데 그녀는 어린애처럼 되고 서글픔이 가득 차 오 르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흠뻑 젖었군.” 앙리가 속삭였다. “걸어서 왔소?” 친근한 어조가 되면서 그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마치 누가 듣기라도 하는 것 처럼 그는 여자의 귀에 대고 말했다. 여자가 몸을 내맡기자 그의 욕망은 도리어 주저하였다. 그는 여자를 뜨겁고 수줍게 애무하면서 감히 더 나아가지 못하고 지체하였다. 그녀의 건강에 대해 오라비같이 근심하면서, 세심하고 따뜻한 배려 를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발이 다 젖었어. 병이 나겠어요.” 그는 말했다. “저런! 이런 신발로 거리를 달려 올 마음을 먹다니!” 그는 여자를 불 앞에 앉혔다. 그녀는 웃으면서 저항하지 않고 그가 신발을 벗 기도록 발을 내맡겼다. 작은 실내화는 오 골목의 물구덩이에 빠져서 젖은 솜처 럼 무거워져 있었다. 그는 신발을 벗겨서 벽난로 양 옆에 놓았다. 양말 역시 젖 어 있었고 발꿈치까지 얼룩이 묻어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질 새도 없이 그 는 이런 일상적인 예의에서 벗어난 와중에도 상냥함이 가득 찬 짐짓 화난 @p 308 몸짓으로 신발을 벗기며 말했다. “이러면 감기에 걸려요.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하오.” 그리고는 발받침을 받쳐 주었다. 눈처럼 흰 두 발이 불 앞에서 장밋빛으로 빛 났다. 다소 답답한 분위기였다. 커다란 침대가 있는 침실은 한 켠에서 고요하게 있었다. 야등은 가라앉아 있었고 경황중에 흘러내린 입구의 커튼 한 쪽이 문을 반나마 가리고 있었다. 작은 살롱에는 높이 타오르고 있는 촛불이 야회가 끝날 무렵 같은 진한 향기를 발산하였다. 고요한 가운데 간간이 바깥에서는 많은 비 가 쏟아져 철철 흐르는 둔중한 소리가 들려 왔다. “네, 그래요, 춥군요.” 그녀는 방안이 후덥지근한데도 진저리를 치며 속삭였다. 눈에 젖은 발은 얼어 있었다. 그는 손으로 그 발을 감싸 주고자 했다. 그의 손 은 뜨거웠고 곧 발을 따스하게 해주었다. “감각이 느껴져요?” 그가 물었다. “당신 발은 아주 작아서 폭 감싸 쥘 수가 있군요.” 그는 열에 들뜬 손가락으로 발을 꼭 쥐었다. 장밋빛 발 끝만이 삐져 나왔다. 그녀는 발목을 올렸고 발꿈치가 가볍게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손을 펴고, 엄지가 다소 벌어진 섬세하고 부드러운 발을 잠깐 들여다보았다. 유혹이 너무나 강렬하여서 그는 발에 입을 맞췄다.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 아니, 불을 쬐도록 해요... 따뜻해질 때까지.” 두 사람 모두 시간과 장소에 대한 의식을 잃었다. 그들은 긴 겨울 밤이 시작 되기에는 아직 멀었다고 막연히 느낄 뿐이었다. 방안의 졸리운 듯한 누기 속에 서 타들어가고 있는 촛불은 여러 시간 동안 이러고 있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게 했다. 그들은 더 이상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주위에는 무인지경이 펼쳐지 고 있었다. 소음도 @p 309 없고 사람의 소리도 들리지 않고 폭풍이 휘몰아치는 밤바다 같은 느낌뿐이었다. 그들은 지상에서 천리나 떨어진 세상 밖에 있었다. 그들은 사람들과 사물에 비 끄러매어져 있는 관계를 완전히 망각해 버려서 바로 이순간, 여기서 태어났고 이제 두 사람이 서로 끌아 안게 되면 죽어야 할 것 같았다. 더 이상 할 말조차 없었다. 그들의 감정은 말로 나타낼 수가 없었다. 두 사람 은 이미 서로 잘 알았지만 과거의 만남은 중요치 않았다. 오직 현재의 순간만이 존재하였다. 그들은 사랑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결혼한 지 10년은 되는 이들처 럼 익숙하게 그 순간을 천천히 살고 있었다. “따뜻해졌소?” “아! 네, 고마워요.” 그녀는 걱정스러운 빛으로 굽어보며 속삭였다. “신발이 마를 것 같지 않네요.” 남자는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작은 신발을 집어서 장작 받침쇠에 기대 놓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렇게 하면 마를 거요. 틀림없어요.” 그는 몸을 돌려 발에 또 다시 키스하면서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벽난로에 차 있는 잉걸불이 두 사람을 수끈후끈하게 했다. 그녀는 욕망으로 정신을 잃은 남 자의 더듬은 손길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그녀 자 신조차도 지워지면서, 그렇게 더운 방에서 쇠창살이 달린 커다란 화덕을 굽어보 던 처녀 시절의 추억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었다. 지금처럼 녹아 없어지는 느낌 이었다고 그녀는 회상하였다. 그것은 그녀를 뒤덮고 있는 앙리의 키스보다 달콤 하지는 않았지만 관능적이며 느리게 덮쳐 오는 죽음같았었다. 남자가 그녀를 침 실로 데려가기 위해 팔에 안았을 때, 그녀는 마지먹으로 일말의 불안감을 느꼈 다. 누군가가 소리치는 @p 310 것 같았고 어둠 속에서 훌쩍이는 누군가를 잊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짧은 전율처럼 지나갔고 방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 방은 낯 선 곳이었고 어떤 사물도 그녀에게 무의미했다. 더욱 세찬 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퍼부었다. 그러자, 스마라도 덮친 듯 그녀는 앙리의 어깨에 몸을 맡기고 안 고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두 사람 뒤로 나머지 한 쪽 커튼마저 경황 중에 흘러 내렸다. 꺼져 가는 불 앞에 놓인 신발을 신으러 맨발로 돌아왔을 때, 엘렌느는 자기들 이 그 날처럼 서로 사랑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5 쟌느는 문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어머니가 황급히 나간 데 심히 마음이 상해 있었다. 아이는 고개를 돌렸다. 방은 비어 있었고 고요하였다. 그러나 아이에게 는 달려 나가는 급한 발소리, 치마가 스치는 소리, 계단의 문이 꽝 다시 닫히는 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 하였다. 그리고는 끝이었다. 저 혼자였다. 혼자일 뿐, 완전히 혼자일 뿐. 침대 위에는 벗어 내던진 어머니의 실내복이 걸 려 있었는데, 치마는 널브러져 있고 소매는 긴 베개에 걸쳐 있는 것이 크나큰 슬픔에 쭈그러들어 몸을 던지고 흑흑 우는 이상하게 일그러진 사람의 형용이었 다. 내의는 흩어져 있었고 검은 끈이 상장처럼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부딪 혀서 비뚤어진 의자며 거울달린 장롱 앞에 밀어 제쳐진 원탁이며 하는 것들 사 이에 아이는 혼자였다. 아이는 어머니가 벗어 놓은 죽은 사람처럼 납작해진 실 내복을 바라보며 눈물로 목이 메는 것을 느꼈다. 아이 @p 311 는 손을 그러잡고 마지막으로 불러보았다. “엄마! 엄마!” 그러나 푸른 벨벳을 두른 방은 잠잠하였다. 모든 것이 끝났고 아이는 혼자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시계가 3시를 쳤다. 희끄무레한 빛이 비스듬히 창문으 로 들어왔다. 그을음 빛깔의 구름이 스치면서 하늘을 더 어둡게 했다. 엷은 김이 서린 유리창을 통해 안개 덮인 빠리가 보였다. 수증기로 윤곽이 흐릿하였고 원 경은 짙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맑은 날 오후에는 조금만 굽어보면 동네 가 손에 잡힐 듯하였는데 오늘은 도시까지도 아이에게 친근하지 않았다. 뭘 해야 할까? 어쩔 줄 모르는 가느다란 팔이 가슴을 눌렀다. 이렇게 내버려 지다니 화가 치밀도록 심술궂고 부당한 일이며, 한없이 처참하였다. 이렇게 비열 한 일은 당해 본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이 사라질 것 같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 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아이는 제 옆 안락의자에 인형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인형은 다리를 쭉 뻗고 방석에 기대앉아 사람처럼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자동인형이 아니라 마분지로 만든 얼굴과 곱슬곱슬한 머리, 칠한 눈을 한 커다란 인형이었는데, 그 움직이지 않는 시선은 때로 아이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옷을 벗기고 입히고 한지 2년이나 되어서 턱과 뺨에는 생채기가 나 있었고, 겨를 넣은 분홍색 팔다리는 늘어졌으며 낡은 천은 기묘하게 물컹거렸다. 지금 인형은 속치마만 입은 잠자리 차림새로 움직이지 않는 팔을 한 쪽은 허공 으로, 다른 쪽은 아래로 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저와 함께 있음을 알자 쟌느는 순간 덜 불행한 것 같았다. 아이는 인형을 팔에 꼬옥 껴안았다. 인형의 머리는 앞으로 흔들리면서 목을 꺽었다. 아이는 인형에게 말했다. 나는 아주 친절하고 착하단다. 나는 절대로 너를 혼자 두고 나가지 않아. 너는 내 보물이야, 귀여운 것, 내 사랑. 몸을 떨고 아직도 나오려는 울음을 참으려고 하면서 아이는 @p 312 인형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이렇게 미친 듯이 애무를 하고 나자 조금 직성이 풀리는 듯했다. 인형은 아이 의 팔에서 넝마처럼 툭 떨어졌다. 아이는 일어서서 유리창에 이마를 박고 밖을 내다보았다. 비는 그쳐 있었다. 마지막 비구름이 바람에 날려 희미한 회색빛 줄 무늬처럼 보이는 뻬르 라셰즈 언덕 부근의 지평선을 떠다니고 있었다. 소나기가 지나간 빠리는 골고루 빛을 받아 빛나면서 외롭고 서글픈 장엄함을 띠었다. 죽 어 버린 별빛을 받아 드러난 악몽속의 도시들처럼 사람 하나 없었다. 정말 그것 은 아름답지 못했다. 아슴푸레 아이는 세상에 나온 이래 사랑했던 것들을 생각 했다. 마르세이유에 살 적, 가장 오랜 친구는 커다란 붉은 고양이였는데 그 놈은 무게가 썩 나갔다. 아이는 그 놈을 팔로 꼭 껴안아 배에 대고는 이 의자에서 저 의자로 옮기곤 했지만 그 놈을 성을 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놈은 사라져 버렸 다. 그것은 아이가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심술궂은 행동이었다. 다음에는 참새 가 있었다. 그 놈은 죽어서 어느 날 아침 새장의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너무 바 보스러운 것 같아서, 제 마음을 아프게 하고 전적으로 부당하게 저를 쓰라리게 할 양으로 망가져 버린 장난감들은 꼽지 않았다. 주먹만한 크기의 인형 하나는 머리가 찌그러져서 특히 아이를 낙심하게 했었다. 아이는 그것을 몹시 소중히 했었기 때문에 몰래 마당 한 구석에 묻어 주었다. 훨씬 나중에 그게 다시 보소 싶어서 파 보았더니 너무나 까맣게 보기 싫게 되어서 무서운 나머지 병이 났었 다. 언제나 상대방이 저보다 먼저 사랑을 그만두곤 했다. 그것들은 망가지거나 떠나갔다. 요컨대 그들이 잘못이었다. 그런데 왜 그럴까? 나는 변한 적이 없는 데. 나는 무언가를 사랑한다면 평생 동안 그럴 것이다. 단념이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거대하고 괴물스런 그것이 아이의 조그만 가슴으로 들어오면 그 가슴 은 언제나 터지고야 말았다. 혼란된 상념 가운데 한 @p 313 가닥 전율이 천천히 마음 속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이란 언젠가는 떠나가는 것이 다. 그래서 제 갈 길로 가는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볼 수도 없고 더 이상 사랑 할 수도 없으리라. 아이는 우수에 잠긴 넓은 빠리를 바라보며, 열두 살짜리의 정 념으로 예감하게 된 존재의 잔인함에 얼어 붙은 채 있었다. 그러는 동안 아이의 입김은 유리 창을 흐리게 했다. 아이는 밖이 보이지 않자 입김을 손으로 지웠다. 멀리 비에 씻긴 건물들이 잘 닦인 거울처럼 반들거렸다. 지붕들 사이로 창백한 정면을 드러내며 말쑥하고 분명하게 줄지어선 집들은 무 지무지하게 많은 빨래를 다갈색 풀이 돋은 초원 위에서 말릴 때처럼 펼쳐진 무 명조각으로 보였다. 날이 훤해지면서 아직도 도시를 수증기처럼 덮고 있는 구름 의 끄트머리에서 뿌연 햇살이 내비쳤다. 어느 구석에선가 하늘이 미소짓고 있는 듯 동네들 위로 주저주저하는 명랑한 기운이 느껴졌다. 쟌느는 강나루와 트로까 데로 언덕을 내려다보았다. 사납게 퍼붓던 비가 그친 뒤 거리는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마차가 느리게 덜거덕거리며 지나갔고, 아직도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고요 한 길 가운데로 합승마차가 소리도 요란하게 지나갔다. 우산들이 접히고, 나무 밑에서 비를 긋던 행인들은 개울처럼 물이 흘러 반짝거리는 웅덩이 한가운데를 지나 이쪽 보도에서 저쪽 보도로 건너기를 감행하였다. 아이는 다리 근처 장난 감 가게 천막 아래 서 있는 옷을 잘 차려 입은 부인과 어린 딸 아이에게 특히 흥미를 느꼈다. 그들은 비가 오자 놀라서 그곳에 몸을 피한 것 같았다. 소녀는 여러 가지를 듬뿍 샀는데도 굴렁쇠를 갖겠다고 부인을 조르고 있었다. 이제 그 들은 가 버렸다. 발이 묶여 있다 풀려난 아이는 웃으면서 보도 위로 굴렁쇠를 굴리며 뛰어갔다. 그러자, 쟌느는 다시 몹시 서글퍼졌고 인형도 끔찍하게 보였 다. 아이는 굴렁쇠가 갖고 싶었다. 그것을 저기서 굴리면서 뛰어가면 어머니는 뒤에서 종종걸음으로 @p 314 쫓아오며 멀리 가지 말라고 외칠 텐데. 모든 것이 어지러워졌다. 계속 아이는 유 리창을 닦았다. 창을 여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이는 반항심이 차오 름을 느꼈다. 어머니가 저를 데려 가지 않은 이상 저도 밖을 내다보는 것쯤이야 어떠랴 싶었다. 아이는 창을 열고, 어머니가 그곳에서 말없이 팔을 괴고 있던 것 을 흉내내어 어른처럼 팔을 괴었다. 바람은 습기를 머금고 부드러워서 아주 기분좋게 느껴졌다. 지평선에 점점 퍼 져 가는 어스름이 고개를 들게 했다. 머리 위에 거대한 새가 날개를 펴고 나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처음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은 맑았다. 그 러나 어두운 점 하나가 지붕 마루 위로 솟아서 퍼지더니 하늘을 먹어 들어갔다. 무시무시한 서풍이 불더니 새로운 알갱이가 생겼다. 날이 빠르게 어두워지더니, 창백한 빛에 건물의 정면이 오래된 녹이 슨 듯한 색조를 띠면서 도시는 우울해 졌다. 그리고는 곧 비가 쏟아졌다. 거리는 빗자루를 쓸어낸 듯 텅 비었다. 우산 이 다시 펴졌고 길 옆으로 피한 행인들은 지푸라기처럼 안 보이게 되었다. 한 노부인은 양 손으로 치마를 거머쥐었는데 비가 들이붓듯 모자에 쏟아지고 있었 다. 비는 옮겨 가고 있었다. 성난 듯이 퍼부으면서 빠리 쪽으로 가고 있는 구름 을 볼 수 있었다. 굵은 장대비가 먼지를 일으키며 다그닥다그닥 달려가는 말처 럼 강나루 큰 길을 휩쓸었다. 그러면 조그마한 흰 연기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지면에서 피어올랐다. 장대비는 샹젤리제로 해서 생 제르맹 구의 길다란 곧은 길들을 들이치고 넓은 광장과 빈 터, 인적 없는 네거리를 단번에 채웠다. 몇 초 사이에 점점 더 촘촘해진 빗줄기에 가려 도시는 희미해졌고 녹아 버린 듯이 보 였다. 그것은 광막한 하늘로부터 땅까지 비스듬하게 쳐진 한 폭의 커튼과 같았 다. 수증기가 올라왔다. 빗방울의 무수한 찰싹거림은 고철을 움직일 때 나는 둔 탁한 소리 같았다. @p 315 쟌느는 그 야단스러움에 어리벙벙해져 뒤로 물러섰다. 앞에 희끄무레한 벽이 생긴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는 비를 좋아했기 때문에 다시 가서 팔을 괴었다. 그리고는 손 위에서 부서지는 차가운 굵은 빗방울을 만져 보려고 팔을 내밀었 다. 그게 재미있어서 아이는 소맷부리를 다 적셨다. 인형은 아이처럼 머리가 아 픈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아이는 인형을 벽에 기대 창턱에 걸터앉혔다. 빗방울 이 인형에 튀는 것을 보면서 아이는 인형이 기분좋아 하리라고 생각했다. 뻣뻣 한 인형은 조그만 입에 계속 사라지지 않는 미소를 띠고 어깨에 비를 맞고 있었 다. 비바람이 속치마를 들어올렸다. 겨로 채워진 인형의 불쌍한 몸은 덜덜 떨렸 다. 왜 엄마는 날 데려가지 않은 걸까? 손을 때리는 물방울을 느끼면서 쟌느는 또 다시 밖에 나가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혔다. 거리에 있으면 좋을텐데. 아이는 비 의 장막 뒤에서 보도 위로 굴렁쇠를 굴리며 가는 소녀를 다시 보았다. 그 애가 어머니와 외출한 거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두 사람 모두 매우 만족스 러워 보였고 그걸로 봐서 비가 오더라도 애들을 데려갈 수 있다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데려가고 싶어야 했다. 왜 엄마는 데려가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자, 꼬 리를 치켜들고 맞은편 지붕으로 가 버린 붉은 고양이가 생각났다. 그리고 모이 를 먹이려고 애쓰는데도 모르는 척 죽어 버린 바보 같은 작은 참새도 생각났다. 그런 그런 일들이 자꾸 떠오르면서 그들은 나를 그렇게 좋아하질 않은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 2분이면 나갈 준비를 마칠 수 있었을 텐데. 기분좋은 날이면 아이는 빨리 옷을 입을 수 있었다. 로잘리가 벗겨 놓은 장화, 반코트, 모자, 그거 면 됐다. 어머니는 2분 정도는 기다릴 수 있었을 텐데. 아는 이들 집에 갈 때, 어머니는 그렇게 서두르지 않았다. 불로뉴 숲에 갈 때 어머니는 손을 잡고 천천 히 거닐면서 빠시 가에 있는 상점들마다 멈추어 서곤 했다. 쟌느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P 316 검은 눈썹은 찡그려졌고 섬세한 윤곽은 심술궂은 노처녀의 창백한 얼굴처럼 질 투심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어머니가 애들은 갈 수 없는 어딘가에 갔으리라고 막연히 느꼇다. 무언가를 숨기려고 나를 데려가지 않은 게야. 그런 생각이 들자 가슴이 설명할 수 없는 슬픔으로 죄어들며 아파 왔다. 비는 점차 가늘어졌고 빠리를 가리고 있는 커튼은 투명해졌다. 앵발리드의 둥 근 지붕이 빛을 진동시키는 빗속에서 가볍게 떨리는 듯 먼저 나타났다. 조수가 빠져 나가면서 시내가 드러나고, 물이 철철 흘러 떨어지는 지붕은 홍수에서 벗 어난 도시 꼴이었다. 아직도 거리거리는 수증기로 자욱한 강을 이루고 있었다. 불현듯 한 줄기 불꽃이 쏟아지면서 빛살이 물결 한가운데 떨어졌다. 눈물에 젖 어 있다가 한순간 방긋 웃는 것이었다. 샹 젤리제 구역은 이제 더이상 비가 내 리지 않았고, 비는 좌안을 스쳐서 시떼 섬으로, 먼 외곽으로 물러갔다. 빗방울이 햇빛을 받아 밀도 있는 가느다란 금속줄처럼 뿌렸다. 오른편에 무지개가 빛났다. 햇빛이 퍼지면서 장밋빛과 푸른빛 무늬가 애들이 그린 알록달록한 수채화처럼 지평선에 그려졌다. 수정 도시는 황금의 눈이 내린 듯 활활 타올랐다. 그리고 빛 이 꺼지면서 구름이 퍼지고 웃음은 눈물 속에 잠겼다. 빠리는 납빛 하늘 아래 길게 소리내어 흐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소매가 젖은 쟌느는 기침을 했다. 그러나 아이는 어머니가 빠리에 내려갔을 거라는 생각에 골몰하여 몸에 스며드는 냉기도 느끼지 못했다. 아이는 요새 앵 발리드와 빵떼옹, 생 자끄 탑, 이 세 건물을 알고 있었다. 아이는 그 이름을 되 풀이했고 그것들이 보이면 뭔지도 모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곤 했다. 엄마는 틀 림없이 저기 있을 거야. 아이는 어머니가 빵떼옹에 있다고 상상했다. 그것은 도 시의 이마에 꽂힌 깃털장식처럼 가장 놀랍고 거대한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 고는 의문에 잠겼다. 쟌느에게 빠리는 애들이 갈 수 없는 곳으로 되어 있었다. @P 317 아무도 자기를 거기 데려간 적이 없었다. ‘엄마는 저기 어딘가에 있어, 이러 저러한 일을 하고 있을 거야’하고 조용히 상상해 볼 수 있도록 아이는 알고 싶 었으리라. 그러나 그곳은 너무도 넓어 보여서 사람을 찾을 길이 없었다. 아이의 시선이 단번에 넓은 시내의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옮겨갔다. 오히려 왼쪽에 있는 언덕 위 지붕이 많이 보이는 데가 아닐까? 아니면 아주 가까이 벌거벗은 가지가 죽은 나무단을 닮은 큰 나무 밑일까? 지붕을 벗겨 버릴 수 있다면! 그런데 저 새가만 건물은 뭐야? 그리고 저 길에 가고 잇는 커다란 것은 뭐람? 아이는 사람 들이 서로 아웅다웅할 시내가 무서웠다. 확실히 알 수는 없었지만 거기는 진자 북적대고 아주 추해서 소녀들은 봐서 안 되는 데였다. 할 수 있는 모호한 모든 추측을 머리에 떠올리자 아이는 울고 싶어졌고, 아이다운 무지가 발동하였다. 담 배를 피우고 연신 으르렁거리면서 거칠게 살고 있는 낯모르는 빠리의 입김이 부 드러운 해동기를 틈타 아이에게까지 끼쳐 왔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찌꺼기가 역한 냄새를 뿜어 내는, 전염병에 오염된 우물을 들여다보았을 때처럼 어린 고 개를 돌리게 하는 쓰레기와 죄, 곤궁의 냄새였다. 아이는 무수한 앵발리드들, 빵 떼옹들, 생 자그 탑들을 불러 보고 세어 보았다. 그리고 더이상 알 수는 없지만 어머니가 저 안, 짐작할 수 없는 어딘가 야비한 장소에 있다는 뿌리칠 수 없는 생각에 눌린 채 수치스러워했다. 쟌느는 문득 획 돌아다보았다. 확실히 누군가 방안을 걸어다니고 있었다. 손 끝이 어깨를 가볍게 스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방안은 비어 있었고 엘렌느가 마구 어질러 두고 나간 그대로였다. 실내복은 긴 베개 위에 찌그러진 모습으로 늘어져 여전히 울고 있었다. 쟌느는 몹시 창백한 얼굴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가 슴이 찢어졌다. 저 혼자였다. 오로지 저 혼자였다. 그럴 수가! 엄마는 나가면서 나를 떼밀었어. 바닥에 넘어질 정도로 아주 세게. 그것이 고통스럽 @p 318 게 다시 떠오르면서 난폭한 대접을 받은 아픔이 손목과 어깨에 다시 느껴졌다. 왜 나를 밀쳤을가? 나는 고분고분했고 야단맞을 짓을 하지 않았는데. 평소에 아 이는 아주 부드러운 말만을 들어 왔기 때문에 그런 취급은 반발심을 일으켰다. 아이는 어른들이 늑대가 온다고 위협하면 늑대가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그게 보 이는 듯한 애들다운 공포감을 느꼈다. 어두운 데에 자기를 덮치려 하는 무언가 있는 것 같았다. 질투섞인 분노로 가슴이 점점 터질 듯하여 아이는 창백한 얼굴 로 두려워하였다. 문득 어머니가 저를 그렇게 세게 밀어젖히고 그리로 달려간 사람들을 더 사랑하는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아이는 가슴에 두 손을 대 었다. 이제 알겠어. 엄마는 나를 배신한거야. 빠리는 질풍이 다시 불어닥치기를 기다리면서 매우 근심스런 빛이 감돌았다. 칙칙해진 대기가 술렁거리고 두터운 구름이 떠다녔다. 창가에 있는 쟌느는 심하 게 기침했다. 감기에 걸렸다고 생각하자 복수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는 크 게 병이 났으면 했다. 가슴에 손을 대고 불편함이 커 가는지 느겨 보았다. 고통 이 느껴졌고 아이의 육체는 그 속에 기꺼이 빠져들었다. 아이는 공포에 떨며 방 에 뭐가 있을까 봐 완전히 얼어서 감히 고개를 돌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나는 어려서 힘도 없는데. 그런데 이 새로운 아픔은 뭘까? 부그러움과 쓰디쓴 감미로 움으로 나를 채우는 이 아픔의 발작은? 남들이 저를 놀리거나 웃는데도 자구 간 지럽히면 이런 짜증스런 전율에 빠질 때가 있었다. 몸이 뻣뻣해진 채, 아이는 순 결하고 때묻지 않은 사지의 반항을 느끼며 가만히 기다렸다. 존재 깊숙한 데서 성적 충동이 눈을 뜨며 어디선가 한 대 맞은 것처럼 생생한 아픔이 용솟음쳤다. 아이는 기진해서 꺼지는 소리로 “엄마!엄마!” 외쳤다. 도와 달라고 부르는 것 인지 제가 어머니 때문에 아파서 죽어가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외침이었다. @P 319 그 때, 폭풍우가 몰아쳤다. 어두워진 도시 위에 불안스럽게 깔린 무거운 침묵 속에서 바람이 울부짖었다. 빠리에 퍼져 가는 우지끈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침 묵 속에서 바람이 울부짖었다. 빠리에 퍼져 가는 우지끈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덧문이 부딪치고 기왓장이 날며 굴뚝과 물 받이가 포석 위에 떨어졌다. 몇 초 동안 잠잠해졌다. 다시 바람이 불어 지평선을 어마어마한 숨결로 채우고 흔들리 는 지붕의 바다는 물결을 일으키며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버렸다. 잠시 혼돈뿐 이었다. 먹물 자국처럼 번져 가는 엄청난 구름이, 바람에 조각조각 갈라져 흩어 진 듯 산만하게 떠다니는 더 작은 구름 사이를 치달렸다. 한순간 두 층운이 부 딪쳐 구릿빛 허공에 파편을 흩뿌리며 산산이 부서졌다. 하늘에 흩어진 조각들을 불어제끼며 푹풍이 휘몰아칠 때마다, 허공에는 군대가 박살나고 거대한 붕괴가 일어났으며 그로 인한 너덜너덜한 잔해들이 곧 빠리를 짜부라뜨릴 것 같았다. 여전히 비는 오지 않았다. 갑자기 시내 한가운데 구름이 움푹 꺼지며 물기둥이 세느 강 흐름을 거슬러 올라갔다. 부딪치는 물방울로 탁해지고 무수한 동심원이 수놓인 초록 때 같았던 하천은 흙탕물로 변했다. 빗줄기 뒤로 물보라 속에서 다 리들이 하나한 가볍고 가느다랗게 다시 나타났다. 인적 없는 좌우 강나루에는 회색 선으로만 보일 뿐인 보도를 따라 나무들이 사납게 흔들리고 있었다. 저쪽 노트를 담 위에는 구름이 갈라지면서 시데 섬이 잠길 지경으로 폭우가 퍼붓고 있었다. 물에 잠긴 시내에는 탑들만 높이 솟아올라 표류물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사방 하늘이 열리면서 세번이나 우안을 살필 듯했다. 첫번재 물결은 도 시 외곽을 훑고 퍼져 가면서 비죽 튀어 나온 생 뱅상 드 뽈과 생 자끄 탑을 때 렸고 그것들은 포말 아래 하얗게 되었다. 다른 두 물결은 차례로 몽마르트르와 샹 젤리제에 쏟아졌다. 때때로 유리에 비가 튀며 뿌연 김을 내는 산업 박물관이 며, 꺼져 버린 달처럼 안개 속에 떠 있는 생 또귀스 땡의 둥근 지붕이며, 물로 좍좍 씻어낸 쇠락한 뜰의 포석을 닮은 평평한 지붕을 이고 있는 마들레느가 보 였다. @p 320 앞쪽의 거대하고 거무스름한 덩치 큰 오페라는 몰아치는 폭풍우에 저항하다 밑바닥이 바위 틈에 끼어 버린 돛대가 떨어져 나간 배를 연상케 했다. 물보라에 가린 좌안에는 앵발리드의 돔과 생뜨 끌로띨드의 첨탑, 습기에 젖은 공기 속에 부드럽게 녹아 있는 생 쉴삐스 탑이 보였다. 구름 하나가 퍼져 갔다. 빵떼옹의 열주가 물바다로 되면서 낮은 지역은 침수될 듯하였다. 그리고는 곧 이어서 빗 줄기가 온 도시를 때렸다. 하늘이 땅을 덮치는 듯했다. 거리는 물에 잠겨서, 도 시의 종말을 알리는 듯한 격렬한 요동 속에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하였다. 야단 스럽게 개울을 이루고 흘러내리는 물소리며, 홈통을 타고 내려가는 요란한 물소 리가 어우러져 계속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한편, 마구 퍼붓는 소나기 때문 에 어디나 같은 빛의 누런 흙탕으로 지저분하게 된 빠리 머리 위에는 구름이 풀 어지면서 창백한 납빛을 띠더니 균열도 얼룩도 없이 골고루 퍼졌다. 비가 가늘 어지면서 방울방울 똑바로 떨어졌다. 돌풍이 다시 한 번 불어오자 회색빛 줄무 늬가 큰 물결처럼 일었다. 약간 비스듬히 떨어지는 빗방울이 벽을 때리며 휘파 람 소리를 냈다. 바람이 멎자 빗방울은 다수 수직이 되면서 빠시 언덕에서 샤랑 똥 저지대까지 끈질기게 떨어져 꽂혔다. 극심한 경련 끝에 파괴되고 죽은 것처 럼 거대한 도시가 뒤집어진 돌들이 널린 모습을 드러내며 흐릿한 하늘 아래 펼 쳐졌다. 쟌느는 창에 매달려 기진한 채 다시 중얼거렸다. “엄마!엄마!” 폭풍우가 쓸 고 간 빠리를 바라보자 엄청난 피로가 아이를 완전히 무력하게 만들었다. 머리 카락은 흩어지고 얼굴은 빗방울에 젖은채, 아이는 그 기진맥진한 상태 속에서 방금 몸을 떨게 했던 쓰디쓴 감미로움의 맛을 느꼈다. 뭔지 돌이킬 수 없는 회 한으로 마음은 울고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다. 아이는 제가 몹시 늙어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간이 흐르겠지만 나는 이 방을 볼 수 없으리라. @p 321 잊혀지는 거나 혼자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린 가슴은 절망에 차서 주위 가 다 우울하였다. 아픈 아이를 아까처럼 야단치는 건 아주 부당한 일이야. 그 생각은 아이를 활활 태우고, 두통처럼 달라붙었다. 아까 틀림없이 어디가 부러진 것 같았다. 아이는 그런 대접을 막을 수 없었다. 그저 사람들이 하는 대로 놔둘 수밖에 없었다. 이젠 너무 질렸어. 아이는 창틀에 엎드려 팔장을 꼈다. 졸음이 덮쳐서 머리를 기댄 채, 때때로 비를 보려고 눈을 크게 떴다. 여전히, 여전히 비가 내렸다. 창백한 하늘은 녹아서 물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바람이 지나가고 단조로운 으르릉 소리가 들렸다. 제왕 같은 비는 장엄한 고요 속에 제가 정복한 조용하고 인적 없는 도시를 한없이 때렸다. 엄청난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유리창 너무로 보이는 떨리는 윤곽을 한 유령 같은 빠리는 해체될 듯 싶었다. 그것은 이제 쟌느에게 병이 나길 고대하면서 잠들고 싶은 욕망밖에 는 가져다 주지 않았다. 아이가 알지 못하는 악, 미지의 것이 아이에게 스며들어 기침을 하게 만들려고 안개 속에 감돌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을 뜰 때마다 숨이 넘어갈 듯한 기침이 올라왔다. 아이는 몇 초 동안 빠리를 바라보며 있었다. 그리 고는 빠리의 모습을 간직한 채 다시 머리를 떨구었다. 빠리가 제 위에 펼쳐져서 저를 누르는 것 같았다. 비는 여전히 내렸다. 지금 몇 시나 되었을까? 쟌느는 알 수 없었다. 시계가 가 지 않는 건지도 몰랐다. 고개를 돌리는 것조차 너무 피곤한 일로 여겨졌다. 어머 니가 나간 지 적어도 일주일은 되는 듯했다. 아이는 기다리는 일을 그만두고, 어 머니를 다시 볼 생각을 단념하였다. 그리고는 모든 일을 망각하였다. 남들이 저 에게 저지른 나쁜 짓, 방금 경험한 이상한 아픔, 세상이 저를 내버린 일까지도. 어떤 묵직한 것이 차가운 돌처럼 내부에서 가라 앉았다. 다만 몹시 불행할 따름 이었다. @p 322 아! 자기가 동전을 내주곤 하던 문 아래 쓰러져 있는 가난뱅이들만큼 불행하 였다. 이런 상태가 그치지 않으리라. 앞으로 몇 년이고 이러하리라. 그것은 어린 소녀에게는 너무 엄청나고 과중한 일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이제 널 사랑하지 않다니. 너무 춥고 기침이 나! 아이는 무거운 눈꺼풀을 감았다. 어린 시절의 희 미한 추억이 마지막으로 떠올랐다. 누런 밀이며 작은 곡식 알갱이가 집채처럼 커다란 건초더미 아래 굴러다니는 방앗간에 갔던 일이. 1분이 백 년 같은 여러 시간이 흘렀다. 영원히 쉬지 않고 달리고 있는 고요한 기차 같은 비는 대지를 물에 잠기게 하려는 듯 끊임없이 내렸다. 쟌느는 잠이 들었다. 아이 옆에는 창턱에 걸쳐 몸이 꺾인 인형이 다리는 방에, 머리는 밖에 두고 있었다. 분홍빛 살갗에 달라붙은 속치마, 움직이지 않는 눈동자,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은 익사한 사람 같았다. 인형은 울고 싶어질 만큼 삐쩍 말라 가지고 조그만 시체처럼 기묘하고 가슴 아픈 자세를 하고 있었다. 잠이 든 쟌느 가 기침을 했다. 그러나 이제 눈은 뜨지 않았고, 머리는 엇갈린 팔 위에서 흔들 거렸다. 기침은 식식거리며 사그라들었고 아이는 깨지 않았다. 더이상 아무 일 없었다. 아이는 어둠 속에서 자고 있었다. 발그레해진 손가락을 타고 맑은 물방 울이 흐르는 데도 아이는 손을 치우지 않았다. 물은 방울방울 창문 아래 입을 벌리고 있는 광막한 공간으로 떨어졌다. 이렇게 여러 시간이, 또 여러 시간이 지 나갔다. 지평선 쪽은 어둠의 도시처럼 자취 없이 사라져 버리고 하늘은 넓게 펼 쳐진 흐릿한 혼돈으로 빠져들었다. 회색 비가 여전히 질기게 내렸다. 제 5 부 @P 323 엘렌느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밤이 된 지 오랬다. 그녀가 난간에 의지해서 힘겹게 계단을 오르는 동안, 우산에서는 물방울이 뚝 뚝 떨어졌다. 문 앞에서 그녀는 몇 초 동안 심호흡을 했다. 주위에 쏟아지는 폭 우와 옆구리를 부딪치며 뛰어가는 사람들ㅇ, 물웅덩이에 반사되는 가로등 불빛 들로 아직도 멍멍하였다. 그녀는 방금 주고받은 키스를 충격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 열쇠를 찾으면서 그녀는 후회도 기쁨도 없음을 깨달았다. 그 저 그랬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런 일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열쇠는 찾을 수 가 없었다. 다른 옷 호주머니에 넣어 둔 것이 틀림 없었다. 그녀는 몹시 속이 상 했다. 할멈 집 문 앞에 있는 것 같았다. 어쨌든 초인종을 울려야 했다. “아! 마 님이군요.” 문을 열며 로잘리가 말했다. “걱정하던 참이었어요.” 부엌 하수구에 갖다 놓으려고 우산을 집으면서 그녀는 말했다. “어머나! 웬 비가 이렇게 오나!... 제피랭이 방금 왔는데 흠뻑 젖었더라니까 요... 제가 저녁 먹고 가라고 붙들었어요. 마님. 그 사람은 10시까지 시간이 있대 요.” @P 324 엘렌느는 기계적으로 로잘리의 뒤를 따랐다. 엘렌느는 모자를 벗기 전에 방들 을 둘러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잘했다, 얘야.” 그녀가 대답했다. 그녀는 불이 지펴진 화덕을 바라보며 잠시 부엌 문턱에 머물러 있었다. 본능 적으로 그녀는 장롱을 열었다가 닫았다. 모든 가구들이 제 자리에 있음을 볼 수 있었고 그것은 그녀에게 기쁨을 자아냈다. 제피랭은 정중하게 일어섰다. 그녀는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미소지었다. “고기를 구워야 할지 모르겠네요.” 하녀가 말했다. “대체 지금 몇 시지?” 엘렌느가 물었다. “곧 7시예요. 마님.” “뭐라구! 7시라구!.” 그녀는 몹시 놀랐다. 시간 관념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화들짝 깨어나 서 물었다. “쟌느는?” “아! 아가씨는 아주 얌전했어요. 마님. 하도 소리가 없어서 잠이든 줄 알았다 니까요.” “그 애한테 등불을 가져다 놓아 주지 않았어?” 로잘리는 제피랭이 가져다 준 그림에 빠져 있었노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서 말 문이 막혔다. 아가씨는 조용히 있었어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던 게죠. 그러 나 엘렌느는 더 이상 하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방으로 들어갔다. 찬 기운이 끼쳤다. “쟌느!쟌느!” @p 325 그녀는 불렀다.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녀는 안락의자에 부딪혔다. 그녀가 어중간하게 열어 놓 은 식당 문으로 들어온 빛이 양탄자 자락을 비추었다. 그녀는 진저리를 쳤다. 축 축한 공기와 계속 줄줄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게 방안에 비가 들이치는 것 같았 다. 몸을 돌려 그녀는 잿빛 하늘 가운데 입을 벌리고 있는 희미한 창문 틀을 보 았다. “누가 창문을 열어 놓았네!” 그녀는 소리쳤다 “쟌느! 쟌느!”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견딜 수 없는 불안감으로 가슴이 죄어들었다. 그녀는 창문을 보러 갔다. 손으로 더듬자 머리카락이 잡히는 것이었다. 쟌느였다. 로잘 리가 등잔을 가져오자 엇갈린 팔 위에 볼을 대고 잠든 창백한 아이의 모습이 드 러났다. 지붕에서 떨어지는 물이 튀어서 아이를 적시고 있었다. 아이는 절망과 피곤으로 기진해서 숨소리조차 없었다. 아이는 절망과 피곤으로 기진해서 숨소 리조차 없었다. 푸르스름한 눈꺼풀을 덮고 눈썹가에는 굵은 눈물이 맺혀 있었다. “불쌍한 것!” 엘렌느는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세상에, 애가 차디차네!... 창문을 건드리지 말라고 일렀는데 이 시간에 여기서 잠이 들다니!... 쟌느, 쟌느, 대답해, 일어나!” 로잘리는 슬며시 자리를 피했다. 어머니가 겨드랑이를 끼고 일으켰지만 아이 는 납처럼 무거운 수마가 덮쳐서 깨어날 줄 모르며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마침 내 아이는 눈꺼풀을 들었다. 램프 불빛에 눈이 부신 채 얼이 빠진 듯 마비되어 있었다. “쟌느, 나야... 어떻게 된거야? 봐라, 엄마가 돌아왔단다.” 그러나 아이는 알아듣지 못하고 멍청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p 326 “아!...아!” 아이는 마치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어머니를 살폈다. 그리고는 갑자기, 벌벌 뗘 는 것이 방안의 추위를 느낀 듯했다. 정신이 돌아오자 눈가에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이는 저를 건드리는 것을 싫어하면서 발버 둥쳤다. “엄마,엄마... 아! 놔. 너무 꽉 껴안았어. 나는 괜찮단 말야.” 아이는 어머니가 두려운 듯 그 팔에서 빠져 나오려고 했다. 불안한 눈길로 어 머니의 손에서 팔가지 훑어보았다. 한쪽 손은 장갑이 벗겨져 있었다. 아이는 낯 선 손길의 애무를 피하려 하는 야생동물 같은 표정으로 따스한 맨손가락과 축축 한 손바닥 앞에서 물러났다. 그것은 더 이상 마편초 향기를 풍기지 않았고 손가 락은 더 길어 보였으며 손바닥은 더 축축해진 것 같았다. 아이는 달라진 듯한 그 살갗이 닿는 데 질색하였다. “얘야, 너를 꾸짖는 게 아니야.” 엘렌느는 계속 말하였다. “그러면 안 되지?... 엄마를 안아 줘야지.” 쟌느는 여전히 뒤로 물러났다. 아이는 어머니의 옷과 외투도 본적이 없는 것 같았다. 허리띠는 느슨하였고 주름도 신경에 거슬리게 잡혀 있었다. 어머니는 왜 갈피갈피 뭔지 모를 슬프고 추레한 꼴을 하고 옷차림도 엉망인 채 어딜 갔다 온 걸까? 어머니의 치마는 진흙투성이였고 신발은 벌어졌으며, 옷입을 줄 모르고 꼬마들에게 화를 내며 야단칠때 어머니가 하는 말마따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 다. “엄마를 안아 줘야지, 쟌느.” 그러나 아이는 그 목소리가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 목소리는 더 커진 것 같았 다. 아이는 얼굴을 쳐다보고는 눈가의 잔주름과 열에 들뜬 듯 붉은 입술, 이상하 게 그늘로 뒤덮인 얼굴을 보고 놀랐다. @P 327 아이는 그러한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군가 괴롭게 했을 때처럼 가슴 이 아프기 시작했다. 아이는 미묘하게 눈에 거슬리는 것들을 눈치채고 거기서 무언가 배신의 냄새가 풍기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어머니가 다가오자 화를 내 며 눈물을 떨구었다. “싫어, 싫어, 제발... 아! 엄마는 나를 혼자 놔 두었어. 아! 나는 너무 비참했 어.” “하지만 이제 엄마가 오지 않았니? 아가야... 울지 마. 엄마가 왔단다.” “아니야, 아니야, 끝났어. 나는 엄마가 없어도 돼... 오! 나는 기다리고 기다렸 어. 너무 괴로웠어.” 엘렌느는 아이를 잡고 부드럽게 끌어당겼지만 아이는 고집을 피우며 되풀이했 다. “아니야, 아니야. 이제는 전 같지 않아. 엄마는 전하고 달라.” “뭐라고?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도 몰라. 하여튼 엄마는 전하고 달라.” “모르겠어. 엄마는 전하고 달라... 아니라고 하지마... 이제 엄마 냄새가 나지 않아. 끝났어. 끝났어. 나는 죽고 싶어.” 완전히 창백해져서 엘렌느는 아이를 다시 팔에 안았다. 그러면 그게 내 얼굴 에 씌어 있나 보지? 그녀는 아이에게 키스했다. 아이가 심히 불쾌한 표정으로 몸서리를 쳐서 그녀는 이마에 두 번째 키스를 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녀는 아이 를 안고 있었다. 둘 다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쟌느는 신경질의 발작으로 몸이 굳어지며 조용히 울었다. 엘렌느는 아이의 기분을 맞춰 주려고 해서는 안 되겠 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이 말 못할 수치심이 자리잡고 있었다. 어 깨에 걸린 아이의 무게가 그녀의 얼굴을 달아오르게 했다. 그녀는 잔느를 내려 놓았다. 두 사람 다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P 328 “이제 착하지. 눈물을 닦아.” 엘렌느가 말했다. “이제 괜찮을 거야.” 아이는 고분고분 말을 들으며 다소 겁먹은 듯 눈을 내리깔고 얌전하게 있었 다. 그러나 갑작스런 기침의 발작이 일어났다. “세상에! 병이 났나 보군. 정말 한시도 집을 비울 수 없네... 너 추웠구나?” “응 엄마, 등이 추웠어.” “자! 이 숄을 둘러라. 식당 난로에 불을 피웠을 게다. 곧 따뜻해 질거야... 배 고프니?” 쟌느는 망설였다. 아이는 하마터면 아니라고 사실대로 말할 뻔 하였다. 그러나 아이는 다시 눈을 피하며 나지막하게 “응, 엄마.” 하고는 물러났다. “그래, 별일 아니야.” 엘렌느는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싶어서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제발 부탁이다. 심술쟁이야. 엄마한테 겁 좀 주지 말아다오.” 로잘리가 식사가 주닙되었다고 알리러 오자 엘레느는 하녀를 심하게 야단쳤 다. 하녀는 고개를 숙이고 마님 말씀이 옳으며 아가씨를 잘 돌보아야 했다고 중 얼거렸다. 하녀는 마님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그녀가 옷 벗는 것을 거들었다. 세 상에! 마님 꼴이 어째 이렇담! 쟌느는 하나씩 떨어지는 옷들을 심문이라도 하듯 지켜보았다. 진흙물이 든 면직물 사이에서 제게 감추려는 무언가가 미끄러져 떨 어지지나 않나 기다리는 듯했다. 치마 끈이 유별나게 잘 풀어지지 않았다. 로잘 리는 매듭을 풀려고 잠시 끙끙대야 했다. 아이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고 싶은 호기심에 사로잡혀, 매듭에 짜증스럽게 매달리고 있는 하녀의 조바심에 끌린 듯 다가갔다. 그러나 아이는 가까이 있지 못했다. @P 329 옷에서 발산되는 거북스러운 온기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서 안락의자 뒤에 몸 을 숨겼다. 아이는 외면했다. 옷을 갈아 입는 어머니의 모습이 이토록 아이를 거 북하게 한적은 없었다. “마님 이제 편하실 거예요.” 로잘리가 말했다. “흠뻑 젖었을 때 마른 옷을 갈아 입으면 기분이 좋은 법이죠.” 부드러운 플란넬로 된 푸른색 실내복을 걸친 엘렌느는 정말 편해진 듯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질질 글리던 옷의 무게가 어개에 느겨지지 않았고 긴장 이 풀리면서 집에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녀가 수프를 식탁에 차려 놓았 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얼굴과 손부터 씻고 싶었다. 그녀가 아직도 촉촉한 채 말 금하게 되어서 실내복의 단추를 턱가지 잠그고 나자 쟌느는 그녀에게 다가와 손 을 잡고 키스하였다. 하지만 식탁에서 모녀는 말이 없었다. 난로는 지글지글 타올랐고 작은 식당은 반들거리는 마호가니와 깨끗한 도자기로 즐거운 분위기가 가득 하였다. 그러나 엘렌느는 다시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종의 무감각 상태에 빠진 듯했다. 그녀는 배고픈 표정으로 기계적으로 먹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쟌느는 어머니 의 동작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남몰래 유리잔 너머로 살폈다. 그러다가 기침을 했다. 아이를 잊어버리고 있던 어머니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어머나! 아직도 기침을 하네!... 이제 따뜻하지 않니?” “아! 엄마, 따뜻해.” 그녀는 아이가 거짓말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손을 만져 보려고 했다. 그러 다가 아이의 접시가 그대로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배고프다고 하구선... 맛이 없어?” @P 330 “아니, 엄마. 먹고 있어.” 쟌느는 먹으려고 애를 섰으며 한 입을 얼른 삼켰다. 엘렌느는 잠시 아이를 지 켜보았으나 어두운 아까 그 방의 기억이 다시 머리를 차지하였다. 아이는 어머 니가 정신을 팔고 있음을 잘 알았다. 식사가 끝날 무렵 아이의 쇠약한 사지는 의자 위에 축 늘어졌다. 아이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노처녀처럼 생기 없는 눈 을 한 것이 애늙은이와 흡사했다. “아가씨 잼 안 먹어요?” 로잘리가 물었다. “그러면 상을 치울까요?” 엘렌느는 초점 잃은 눈을 하고 있었다. “엄마, 잠이 와.” 잠긴 목소리로 쟌느가 말했다. “자러 가도 돼?... 누웠으면 좋겠어.” 어머니는 다시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프니? 아가! 어디가 아프지? 말해 봐라.!” “아니야, 말했잖아... 잠이 온다구, 잘시간이야.” 아프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아이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세워 보였 다. 마비된 발이 마루 위에서 비틀거렸다. 아이는 가구를 짚고서 방으로 갔다. 온 몸이 타는 듯했지만 울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어머니는 아이를 눕히려 고 따라왔다. 어머니는 잠잘 채비를 위해 머리를 묶어 주었을 뿐이고 아이는 스 스로 황급히 옷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혼자 이불 속에 미끄러져 들어가 눈을 감았다. “괜찮니?” 엘렌느가 이불을 끌어당겨 이불 귀를 여며 주면서 물었다. “아주 좋아. 내버려 둬. 이제 잘 테니까 불을 가져가도 돼.” @P 331 아이는 눈을 뜨고 아무도 보지 않는 가운데 혼자 아픔을 느끼기 위해서 어둠 속에 있게 되는 것 한 가지만을 바랐다. 램프가 치워지자 아이는 아주 크게 눈 을 떴다. 한편 엘렌느는 방 한 구석에서 왔다갔다 했다. 움직이고 싶은 이상한 욕구가 그녀를 서 있게 했다. 드러눕는다는 생각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시계를 바 라보았다. 9시 20분 전이었다. 무엇을 할까? 그녀는 뭘 찾는지 의식하지 못하고 서랍을 뒤졌다. 그리고 서가로 다가가 제목을 읽는 것만도 지겨워하며 뭘 고르 려는 생각도 없이 책들을 훑어보았다. 방안이 고요해지자 귀에서 잉잉거리는 소 리가 들렸다. 고립감과 가라앉은 공기가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시끄러운 소리, 사람들 소리, 주의를 끌 만한 어떤 소리가 있었으면 했다. 두어 번 그녀는 쟌느 가 숨소리조차 내고 있지 않은 작은 방문에 대고 귀를 기울여 보았다. 모두 잠 들어 있었고 그녀만이 아직도 손에 잡히는 물건들을 이리 놓았다 저리 놓았다 하며 어정거리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한 생각이 떠올랐다. 제피랭이 아직도 로 잘리와 함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러자, 마음이 놓이면서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즐거워져서 슬리퍼를 끌며 부엌으로 향했다. 현관에서 작은 복도를 통하는 유리문을 막 열었을 때 그녀는 철썩 하고 힘껏 따귀를 올려 붙이는 소리에 놀랐다. 로잘리의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 또 꼬집으려고!... 손 치워!” 제피랭은 우물우물 중얼거렸다. “별것도 아닌거 가지고 왜 그래, 좋아서 그러는 건데... 됐어...” 문이 삐그덕거렸다. 엘렌느가 들어갔을 때, 군인과 하녀는 조용히 식탁에 앉 아 둘 다 접시에 코를 박고 있었다. 조금 전 거리김 없이 희롱을 한 사람들이 아닌 듯했다. 단지 얼굴이 몹시 상기되어 있었고 눈은 촛불처럼 빛났으며 그들 이 앉은 밀짚 의자에서는 싱싱한 생기가 전해졌다. @P 332 로잘리가 일어나서 급히 달려왔다. “마님 뭐 필요한 게 있으세요?” 엘렌느는 적당한 구실을 궁리해 두지 않았다. 그녀는 그들을 보고 이야기하고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어서 온 것이었다. 그녀는 부끄러움을 느꼇고 아무 일도 아니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따뜻한 물 있어?” 마침내 그녀가 물었다. “없는데요, 마님. 불이 꺼졌거든요... 아! 하지만 괜찮아요. 5분만 계시면 가져 다 드릴게요. 곧 끓이지요.” 하녀는 석탄을 넣고 주전자를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마님이 문턱에 그대로 있 는 것을 보자 말했다. “5분만 있으면 돼요. 마님, 제가 가져다 드릴께요.” 그러자, 엘레느는 확실치 않은 몸짓을 했다. “바쁘지 않은데 기다리지 뭐... 신경쓰지 말고 어서 들어... 총각이 곧 부대로 돌아가야 할텐데.” 그 말에 로잘리는 다시 앉았다. 제피랭은 일어서서 군대식으로 경례를 붙이고 는 예의범절을 알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팔꿈치를 벌리고 다시 고기를 잘랐 다. 마님이 식사를 마친 후, 이렇게 둘이 함께 식사를 할 때면 두 사람은 부엌 중앙으로 식탁을 끌어내지 않고 벽을 바라보면서 나란히 앉는 편을 더 좋아하였 다. 이렇게 앉으면 부스러기를 흘릴 염려 없이 서로 무릎을 치거나 고집거나 따 귀를 때릴 수도 있었다. 눈을 들면 냄비들의 정겨운 모습이 들어왔다. 월계수와 백리향 다발이 드리워져 있고 양념통은 후추 냄새를 풍겼다. 주위에는 미처 하 지 못한 설거지감이 되는 대로 늘어놓여 있었다. 그렇지만 부엌은 식욕이 왕성 한 두 연인에게 기분좋은 곳이었고 병영에서는 맛볼 수 없는 것을 제공하였다. 톡 쏘는 샐러드의 식초 냄새에 섞여 구운 고기 냄새가 났다. @P 333 등잔불빛이 구리와 함석 용기들 위에 일렁거렸다. 화덕이 무섭게 달구어져서 그들은 창문을 조금 열었다. 정원에서 불어 오는 상쾌한 바람이 푸른 면직 커튼 을 부풀어 오르게 했다. “10시까지 정확하게 돌아가야 하나요?” 엘레는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마님.” 제피랭이 대답했다. “꽤 멀지요!... 합승마차를 타나요?” “아! 마님, 가끔은요... 하지만 운동삼아 달리는 것도 괜찮거든요.” 그녀는 부엌을 거닐다가 실내복 위에 깍지긴 손을 늘어뜨리고 찬장에 기대섰 다. 그녀는 험상궂은 그 날 날시와 병영에서는 무얼 먹는지, 그리고 계란이 비 싼 데 대해 얘기했다. 그러나 그녀가 질문을 하면 그들은 대답했고 그리고는 대 화가 끊어졌다. 그녀느 이렇게 등 뒤에서 두 사람을 거북하게 했다. 그들은 어깨 를 움추리고 접시에 대고 말을 하면서 돌아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깨끗하게 먹 으려고 아주 조금씩 먹었다. 엘렌느는 차분해져 있었다. “염려마세요. 마님.” 로잘리가 말했다 “물이 벌써 끓기 시작하는 걸요... 불이 더 좋았으면...” 엘렌느는 로잘리에게 신경쓰지 말라고 일렀다. 조금 지나자 그녀는 단지 다리 에 심한 피로가 느껴질 따름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녀는 부엌을 가로질러 창 가로 갔다. 거기에는 뒤집어서 사닥다리로 쓰는 아주 높은 나무 의자가 있는 게 보였다. 그러난 그녀는 곧바로 앉지 않았다. 그녀는 식탁 한 구석에 그림 한 무 더기가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P 334 “어머나!” 제피랭에게 잘 대해 주고 싶어서 그녀는 그림을 집으며 말했다. 키 작은 군인은 소리 없이 미소지었다. 그는 눈으로 그림을 쫓다가 마님이 예 쁜 그림을 보고 있으면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이 환해졌다. “그건...” 갑자기 그가 말했다. “땅쁠 가에서 주운 거예요... 바구니에 담긴 꽃을 들고 있는 예쁜 여자지요.” 엘레느는 앉았다. 그녀는 금박을 입히고 색칠한 드롭스 곽 포장지의 아름다운 여인을 들여다보았다. 제피랭은 그것을 공들여 닦아 놓았다. 의자 등에 행주가 걸려 있어서 기댈 수가 없자 그녀는 그것을 치워 버리고 다시 그림에 빠져들었 다. 두 연인은 마님이 상냥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거북스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엘렌느는 그림을 보고 하나하나 무릎 위에 놓았다. 보일듯 말듯 웃으며 그녀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고 그들의 예기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이봐.” 하녀가 속삭였다. “양고기는 먹지 않을거야?” 그는 좋다싫다 대답하지 않고 누가 간지럽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몸을 흔들었 다. 그리고 그녀가 접시 위에 두꺼운 고기 조각을 놓아주자 좋아서 헤벌쭉해졌 다. 그의 붉은 견장이 들석거렸고 헤벌어진 큰 귀가 달린 둥근 머리는 사기 인 형의 머리처럼 노란 깃 속에서 흔들렸다. 그는 마님에게 예의를 갖추기 위해 부 엌에서 절대 단추를 풀지 않는 윗옷이 터져 나갈 만큼 등을 들썩거리며 웃었다. “이건 루베 신부님의 순무보다 낫군.” @P 335 그는 한 입 가득 물고 간신히 말했다. 고향을 생각하자 두 사람은 우스워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로잘리는 굴러떨 어지지 않으려고 식탁을 붙잡았다. 그들이 첫 영성체를 받기도 전인 어느 날, 제 피랭은 루베 신부의 밭에서 순무 세개를 훔쳤다. 그 순무는 너무 딱딱했어. 그 래, 이가 부러질 정도로 딱딱했어. 그런데도 로잘리는 학교 뒤에서 제 몫을 깨물 어 먹었지. 그래서 두 사람이 함께 무얼 먹게 되면 제피랭은 언제나 잊지 않고 말했다. “이건 루베 신부님의 순무보다 낫군.” 그럴 때마다 로잘리는 치마끈이 끊어질 정도로 배꼽을 잡았다. 치마끈이 끊어 지는 소리가 들리면 군인은 “응!또 끊어졌지?”하고 의기양양해서 말했다. 그는 그것을 알아보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뺨만 살짝 맞았다. “가만 있어. 넌 이걸 바로 할 수 없잖아... 멍청이, 또 끈을 끊어뜨리게 했어. 매주 이걸 새로 달아야 한다구.” 그래도 그가 더듬자 그녀는 굵은 손가락으로 그 손을 꼬집어 비틀었다. 그녀 는 마님이 저희들을 보고 있음을 성난 눈으로 가리켰지만 그는 여전히 장난에 들떠 있었다. 별로 저어하는 기색도 없이 그는 뺨이 불룩해지도록 한 입 가득 넣고 훈련받는 신병 같은 표정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여자들은 비록 숙녀일지라 도 그런 장난이 싫지는 않을 거라고 말하고 싶은 얼굴이었다. 서로 사랑하는 사 람들을 바라보는 것은 확실히 즐거운 일이다. “군대가 5년 남았던가요?” 자신의 고통을 잊어버리고 높은 나무 의자에 앉아서 엘렌느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마님. 경우에 따라서는 4년이 될지도 모릅니다.” 로잘리는 마님이 저희들의 결혼문제를 생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P 336 그녀는 짐짓 성을 내며 소리쳤다. “오! 마님, 아직도 10년은 남았어요. 저는 이 사람을 제대시켜 달라고 정부에 탄원하지 않을 거예요... 이 사람은 맨날 간지럼만 태운다니까요. 틀림없이 망나 니가 될 거예요... 그래, 웃어도 소용없어. 나한테는 안 통해. 시장님이 여기 있다 해도 농담거리만 찾는다구요.” 그가 마님 앞에서 진짜 유혹자인 듯 더욱 히쭉히쭉 웃자 하녀는 벌컥 성을 냈 다. “이봐, 내가 경고했어!... 마님, 아시다시피 이 사람은 속으로는 아직도 얼간이 예요. 사람들은 군복이 그들을 어리석게 만든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테죠. 하지만 동료들과 같이 있는 분위기가 그래요. 제가 저이를 내쫓으면 아마 계단에서 징 징 울 걸요... 나는 네가 아무래도 좋다구! 내가 맘만 먹으면 내 발길질 맛을 보 려고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걸?” 그녀는 그를 아주 가까이서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걱정스러운 낯이 되는 그의 선량한 밀기울빛 얼굴을 보자 그녀는 불현듯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래서 태도를 바꿀 새도 없이 말했다. “야! 너한테 아직 말을 안 했는데, 아주머니에게서 편지를 받았어... 기냐르네 가 집을 팔려고 한데. 그래, 거의 거저나 다름없이... 아마 나중을 위해서...” “우아!” 입이 함박같이 벌어지며 제피랭이 말했다. “그거 좋지... 암소 두 마리도 먹일 수 있겠군.”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후식을 먹을 차례가 되었다. 군인은 어린아이처럼 맛있게 빵에 바른 포도잼을 핥았고 하녀는 주부 같은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사과 껍질을 벗겼다. 그는 남은 손을 식탁 아래로 쑤셔넣어 하녀의 무릎을 어루만졌 다. 그렇지만 살살 어루만졌기 때문에 하녀는 모르는 척했다. @P 337 점잖게 구는 한, 그녀도 성을 내지 않았다. 인정하려 들지는 않았지만 그녀도 그런 장난을 좋아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만족스러운 듯 가볍게 의자에 서 들썩거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날로 즐거운 공모가 이루어졌다. “마님, 물이 끓고 있네요.” 이야기가 끊어지자 로잘리가 말했다. 엘렌느는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다정함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엘레느는 그 두 사람의 꿈을 계속 생각했다. 기냐르의 집을 사서 두 마리의 소를 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였다. 사내는 식탁 밑에 손을 넣은 채 시침을 뚝 떼고 있고 어린 하녀는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뻣뻣하게 서있는 광 경은 그녀를 웃음짓게 했다. 그들과의 거리는 좁혀졌고 그녀는 더이상 자기나 타인에 대한 의식도, 어디 있는지, 무엇 하러 왔는지에 대한 의식도 없어졌다. 놋그릇은 벽에서 빛나고, 그녀는 포근한 감이 들면서 어질러진 부엌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면서 몽롱한 얼굴로 얼굴로 있었다. 이렇게 흉허물 없는 행동은 생리 적 욕구를 만족시킨 듯 뿌듯한 기쁨을 주었다. 다만 그곳은 너무 더웠다. 화덕에 서 나는 열기가 창백한 그녀의 이마에 구슬땀이 흐르게 했다. 뒤쪽에 열려 있는 창에서 기분좋은 찬바람이 목덜미에 끼쳤다. “마님, 물이 끓어요.” 로잘리가 다시 한번 말했다. “다 졸아 붙겠네요.” 그러면서 하녀는 주전자를 그녀의 앞에 놓았다. 엘렌느는 잠시 놀랐지만 일어 서야 했다. “아!그래... 고맙구나.” 더 이상 핑계가 없어 그녀는 할 수 없이 천천히 부엌을 나왔다. @P 338 방에 돌아오자 주전자는 그녀를 당황스럽게 했다. 정념이 한꺼번에 내부에서 폭발하였다. 천치같이 무감각한 상태는 용암처럼 끓어 오르는 생명의 흐름 속에 녹아 버렸다. 그 흐름은 끓어 넘치며 그녀를 태웠다. 그녀는 여태 경험하지 못했 던 관능적 쾌락에 몸을 떨었다.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녀의 감각은 채워지지 못 한 엄청난 욕망을 느끼며 눈을 떴다. 방 가운데 똑바로 서서 그녀는 손을 올려 비틀며 몸을 쭉 뻗었다. 무기력한 사지가 우두둑 소리를 냈다. 오! 그녀는 그를 사랑하고 원하였다. 이 다음에도 그처럼 자신을 내던지리라. 벌거벗은 팔을 바라보며 실내복을 벗고 있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그 녀를 불안하게 했다. 그녀는 쟌느가 기침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램프를 비 추어 보았다. 아이는 눈꺼풀을 닫고 자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안심한 어머니가 돌아서자 아이는 눈을 크게 떴다. 검은 눈은 방으로 돌아가는 어머니를 뒤쫓고 있었다. 다시 기침의 발작이 목을 아프게 했다. 아이는 이불 속에 머리를 처박고 소리를 죽였다. 어둠 속에서 아이는 눈을 뜨고 있었다. 곰곰 생각한 끝에 이러다 가 신음소리도 없이 죽으리라는 것을 불현듯 깨달은 듯했다. 2 그 다음 날, 엘렌느는 여러 가지 실제적인 생각을 하였다. 그녀는 무슨 경솔한 짓으로 앙리를 잃게 되지나 않을까 몸을 떨면서 스스로 자신의 행복을 지켜야겠 다는 강렬한 욕구와 함께 눈을 떴다. @P 339 해뜨기 직전의 싸늘한 이 시간, 방안은 아직도 마비된 듯 잠들어 있는 가운데 그녀는 전 존재를 다 바쳐 그를 사랑하고 갈망하였다. 능란하게 처신하려고 이 렇게 잔걱정을 한 적은 없었다. 첫번째는 오늘 아침에라도 쥴리에뜨를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면 난처한 설명이나 모든 것을 위태롭게 할 많나 추궁 을 피할 수 있을 것이었다. 9시경 드베를르 부인 집에 이르자 그녀는 연극의 주인공처럼 붉은 눈자위와 창백한 얼굴을 하고 이미 일어나 있는 부인을 발견하였다. 그녀를 보자 그 가엾 은 여인은 나의 천사라고 부르며 울면서 품안에 몸을 던졌다. 나는 말리뇽을 전 혀 사랑하지 않아요. 오! 맹세해요!세상에! 세상에!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에요! 나는 죽었을 거예요. 정말이에요! 왜냐하면 이제 맨날 똑같은 불가항력적 감정이 라든가 쓰라림, 거짓말 따위는 손톱만큼도 견딜 수 없거든요. 다시 자유로워졌다 는 게 얼만 좋은지 몰라요! 부인은 시원해진 듯 웃었다. 그리고는 엘렌느에게 저 를 경멸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면서 다시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열에 들뜬 데 에는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 었다. 엊저녁 남편은 몹시 흥분하여 돌아왔다. 그녀는 엘레느에게 수없이 질문을 퍼부어 댔다. 그러자, 엘레느는 스스로 놀랄 만큼 대담하고도 능숙하게 세세한 사실을 지어내어 장황하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남편은 전혀 의심치 못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자기가 그 일을 알고 그녀를 구하려고 한 나머지 그런 식으 로 밀회를 방해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쥴리에뜨는 그 말에 귀를 기울 였고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은 넘치는 기쁨으로 환해지면서 그 지어 낸 이야기 를 받아들였다. 그녀는 또 다시 엘렌느의 목에 매달렸다. 엘렌느는 그 애무에 전 혀 거북함을 느기지 않았을뿐더러, 신뢰를 배반하는 걸 고통스러워하며 조마조 마했던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진정하겠노라는 약속을 하게 한 다음 그녀와 헤어질 때 그녀는 마음 속으로 자신의 교묘함을 기뻐하였고 기분이 좋아 서 그집을 나왔다. @P 340 며칠이 지나갔다. 엘렌느의 존재는 마치 자리를 바꾼 것 같았다. 그녀의 마음 은 더 이상 제 집에 있는 게 아니라 시시각각 앙리만을 생각하면서 그의 집에 있었다. 이웃한 작은 저택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곳에서만 가슴이 뛰었다. 구실이 생기면 그녀는 그리로 달려갔고 그와 같은 공기를 호흡하는 데 만족하여 제 자신을 망각하였다. 이렇게 정신이 홀려 황홀해진 나머지 쥴리에뜨 의 모습조차도 앙리의 한 부속물처럼 그녀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하지만 앙리는 아직 한순간도 그녀와 단 둘이 만나지 못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두 번째의 밀 회를 늦추고 있는 듯했다. 어느 날 저녁, 그가 여자를 따라 현관까지 나오자 그 녀는 그에게 다시는 오골목의 그 집에 가지 말라고 다짐시키면서, 그러면 제 평 판이 위태로워진다고 덧붙였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어느 날 밤 어디서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다시 갖게 될 열렬한 포옹을 기대하며 몸을 떨었다. 엘렌느는 끊임없이 욕망하면서 오로지 그 순간만을 위해 존재하였다. 다른 사람은 염두에 없었고 그것만을 바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단지 옆에서 쟌느가 기침을 하는 것만이 행복한 가운데 유일한 불안이었다. 쟌느는 마른 기침을 자주 했고, 저녁 무렵에는 더 심해졌다. 그러면서 미열이 났다. 자는 동안에는 식은 땀을 흘렸다. 그러나 어머니가 물어 보면 아이는 병이 난 게 아니고 아픈 데도 없다고 대답했다. 틀림없이 감기 끝 무렵이라 그럴거야. 엘렌느는 이렇게 자위하며 마음을 놓고는 아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황홀경에 빠져 있으면서도 어딘지 꼬 집어 말할 수 없는 데서 피를 흘리는 상처의 아픔처럼 막연하나마 고통스런 느 낌을 지니고 있었다. @P 341 그녀를 부드러움 속에 잠기게 하는 이유 없는 기쁨 속에서도 때때로 불안감이 엄습하였으며 등 뒤에 불행이 도사리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돌아보고 미소를 지었다. 너무 행복하면 염려가 되는 법이지.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금 전에 기침을 하던 쟌느는 띠잔느 차를 마시고 있었고 아무렇지도 않았다. 한편, 어느 날 오후, 친구로서 방문한 노의사 보댕 씨는 작고 푸른 눈으로 쟌 느를 곁눈질해 살피느라고 정신을 팔면서 미적미적하고 있었다. 그는 아이와 노 는 체하면서 질문을 했다. 의사는 그 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열흘 뒤 에 그는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쟌느를 살피려 하지 않고, 여러 곳을 구경한 늙은이답게 유쾌하게 여행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전에 나는 군의로 복무했었지 요. 그래서 이탈리아라면 잘 알고 있어요. 봄이면 찬탄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나라지요. 그랑쟝 부인께서는 왜 따님을 데리고 거기 한 번 가지 않으 십니가? 그는 이런 식으로 은근슬쩍 제말대로 태양의 나라에 가서 잠시 머물다 오라고 권유하였다. 엘렌느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조금 큰 소리 로 말했다. 둘 다 병은 정말 아닙니다. 하지만 분위기를 바구면 젊어지지요. 그 녀는 빠리를 떠난다고 생각하자 견딜 수 없는 찬 바람이 스미면서 창백해졌다. 세상에! 그렇게 멀리 가다니, 그렇게 멀리! 단번에 앙리를 잃게 될텐데, 우리의 사랑을 내일도 없이 내버려 두다니! 가슴이 찢어질 듯이 비통하여 그녀는 혼란 을 감추기 위해 쟌느 쪽을 항했다. 쟌느는 가고 싶니? 아이는 추운 듯이 손을 맞잡고 있었다. 아! 좋아, 정말 좋겠어! 햇빛 속을 엄마하고 나하고 단 둘이 걸었 으면 좋겠어. 그래! 우리 둘이서만. 볼에 열이 올라 있는 아이의 파리하게 야윈 얼굴은 새로운 생활에 대한 희망으로 빛났다. 그러나 엘렌느는 이 세상 모두, 신 부며 보댕 의사며 쟌느까지도 저를 앙리와 떼어놓기 위해 공모하고 있다고 여기 면서 경계심과 반발심에 차서 더 이상 듣고 있지 않았다. @P 342 그녀가 그렇게 창백해지는 걸 보고 노의사는 자신이 조심성이 없었다고 생각 했다. 그래서 그는 다음에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급할 건 없다고 서둘러 말 했다. 마침 그 날, 드베를르 부인은 집에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의사가 가자마자 엘렌 느는 급히 모자를 썼다. 쟌느는 외출하지 않으려고 했다. 불 옆에 있는 게 더 나 아. 얌전히 있을게. 창문은 열지 않을테야. 얼마 전부터 아이는 어머니를 따라가 겠다고 조르지 않았다. 다만 어머니를 오래도록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혼자가 되면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몇 시간이나 꼼짝 않고 있었다. “엄마, 거기 멀어? 이탈리아 말야.” 엘렌느가 안아 주려고 다가오자 아이는 물었다. “그래! 아주 멀단다. 아가야.” 그러나 쟌느는 목에 매달려 있었다. 아이는 어머니가 곧바로 일어서지 못하게 하면서 속삭였다. “으응? 여기는 로잘리한테 맡기면 되잖아. 우리는 로잘리가 없어도 되구... 그 리 크지 않은 가방 하나만 가져가면 돼... 아! 얼마나 좋을까, 엄마! 우리끼리만 있으면!... 자 봐! 나는 이만큼 살이 찔거야.” 아이는 뺨을 부풀리며 팔을 둥글게 벌렸다. 엘렌느는 나중에 보자고 말했다. 그리고는 로잘리에게 아가씨를 잘 보라고 이르고는 나가 버렸다. 아이는 벽난로 앞 한 구석에 몸을 둥글게 움츠리고 장작이 타는 것을 바라보며 꿈에 잠겼다. 가금 아이는 불을 쬐기 위해 기계적으로 팔을 뻗었다. 불길의 일렁임은 큰 눈을 피곤하게 했다. 아이는 정신이 빠져 랑보 씨가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 는 여러 번 왔었다. 그는 드베를르 의사가 아직 구빈원에 들여보내 주지 않은 중풍들린 여인을 핑계삼곤 했다. 쟌느가 홀로 있는 것을 보자 그는 벽난로 앞 맞은편 구석에 앉았다. @P 343 그리고 어른 하고처럼 이야기를 했다. 정말 안된 일이야. 그 불쌍한 여자는 지 난 주부터 기다렸거든, 하지만 조금 있다 내려가 봐야겠어. 의사를 만나 보면 뭐 라고 대답이 있을 테지. 그러면서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왜 너를 데려가지 않았지?” 그가 물었다. 쟌느는 몹시 피로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남의 집에 가는 건 너무 신경이 쓰 여요. 아무것도 재미가 없어요. 그리고는 덧붙였다. “나는 늙었어요. 계속 놀지도 못해요... 엄마는 나가는 게 좋고, 나는집에 있 는 게 좋아요. 그래서 같이 있을 수가 없어요.” 침묵이 흘렀다. 아이는 몸을 떨더니 장밋빛으로 발게 타오르고 있는 잉걸불에 두 손을 쬐었다. 정말 아이는 널따란 숄을 둘러쓰고 목에 하나, 머리에 한 목도 리를 감고 할머니처럼 앉아 있었다. 이 온갖 헝겊 밑에, 깃을 푸시시하게 부풀리고 있는 병든 새만큼도 살집이 없 는 아이가 느껴졌다. 랑보 씨는 깍지낀 손을 무릎 위에 얹고 불을 바라보고 있 었다. 그리고는 쟌느를 돌아보면서 어머니가 어제도 외출하셨냐고 물었다. 아이 는 그렇다고 했다. 그러면 그저께도, 그리고 그 전에도 나가셨니? 아이는 턱을 끄덕이며 계속 그렇다고 했다. 랑보 씨와 소녀는 커다란 걱정을 공유하고 있기 나한 듯 각각 창백하고 심각한 얼굴로 오래 마주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린 계집아이와 중늙은이가 함께 나눌 만한 얘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저희들이 왜 그렇게 스글픈지, 왜 집이 비면 이렇게 벽난로 양쪽에 앉아 있기를 좋아하는지 너무도 잘 알았다. 그것은 그들 에게 퍽 위로가 되었다. 저희들이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덜 느끼기 위해 그들은 서로 바싹 다가앉았다. @P 344 부드러운 감정이 밀려 오면서 그들은 서로 끌어안고 울고 싶어졌다. “춥지요? 아저씨,그럴 거예요... 여기 불 옆으로 와요.” “아니다. 춥지 않아.” “아! 거짓말 손이 얼음장 같은데... 가까이 오세요. 안 그러면 나 화낼 거예요. ” 그러자, 그는 걱정이 되었다. “엄마는 네가 마실 띠잔느 차를 끓여 두지 않았지? 그렇지... 내가 끓여 줄 까? 어때? 암! 나는 아주 차를 잘 끓이지... 내가 돌보아 주면 말야. 너는 부족한 게 없을 텐데.” 그는 감히 그 이상 명확한 암시를 할 수는 없었다. 쟌느는 띠잔느 차는 역겹 다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 차를 너무 많이 마셨어요. 그렇지만 자주 아이 는 랑보 씨가 어머니처럼 주위를 맴돌도록 놔두었다. 그러면 그는 아이의 어깨 에 베개를 받쳐 주기도 하고, 먹는 걸 잊어 버릴 뻔한 약을 챙겨 주기도 하고, 팔에 매달린 아이를 방으로 부축해 데려가기도 하였다. 그런 일들은 두 사람의 마음을 그윽하게 해주는 작은 친절이었다. 쟌느가 그 사람좋은 신사를 당황하게 하는 불길을 간직한 눈으로 말하듯이, 두 사람은 어머니가 없는 틈을 타서 아빠 와 딸 놀이를 하는 것이었다. 불현듯 슬픔이 북받혀 올라왔고, 그들은 서로에 대 한 연민에 휩싸여 몰래 눈치를 보면서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날, 긴 침묵 끝에 아이는 이미 어머니에게 했던 질문을 랑보씨에게 던졌다. “이탈리아는 멀어요?” “오! 그럴게다.” 랑보 씨가 말했다. “저기 마르세이유보다 멀지. 그런데... 왜 나한테 그런 걸 묻지?” @P 345 “왜냐하면요.” 아이는 심각하게 말했다.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게 불만이었다. 아이는 늘 아팠고, 기숙 학교에도 다 닌 적이 없었다. 둘 다 입을 다물었다. 난로불의 후덥지근한 온기가 그들을 졸립 게 했다. 한편, 엘렌느는 일본식 정자에서 드베를르 부인과 뽈린느를 발견했다. 그녀들 은 종종 거기서 오후를 보내곤 하였다. 그곳은 매우 더웠다. 온풍구에서는 숨막 힐 듯한 더운 김이 뿜어 나오고 있었다. 넓은 유리창은 닫혀 있었고 겨울 옷을 입고 있는 좁은 정원이 내다 보였는데, 나무의 검은 잔가지가 갈색 땅에서 도드 라져 보여 검은 물감으로 그린 근사하게 마무리된 커다란 그림 같았다. 두 자매 는 심하게 논쟁하고 있었다. “날 좀 조용히 내버려 둬!” 쥴리에뜨가 소리쳤다. “물론 우리의 관심은 터키를 유지하는 거지.” “나는 한 러시아인하고 얘기를 했는데...” 뽈린느도 역시 열이 올라서 맞받았다. “성 페테르스부르그에서는 우리를 좋아한대요. 우리의 진짜 동맹국은 그쪽이 야.” 그러자, 쥴리에뜨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끼고 말했다. “그러면 유럽의 평화는 어떻게 유지되지?” 동방문제가 빠리를 열광시키고 있었다. 지금 주고받는 얘기는 바로 그것이었 다. @P 346 다소라도 사교계에 드나드는 여성이라면 모두 최근에는 다른 얘기는 하지 않 았다. 열흘 전부터 드베를르 부인 역시 외교 정책 문제에 확신을 가지고 뛰어들 었다. 그녀는 발생할지도 모르는 여러 가지 우발적인 일에 대해 확고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동생 뽈린느는 명백한 프랑스의 이익에 반하여 러시아를 지지해 야 한다는 독창적인 의견을 제시해서 그녀의 심사를 몹시 건드렸다. 그녀는 뽈 린느를 누르려고 하다가 성미를 냈다. “자! 입 좀 다물어. 멍청이 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네가 나하고 그 문제를 연구했다면...” 그녀는 엘렌느가 들어오자 인사를 하느라고 말을 멈췄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와 주시다니 정말 친절하군요... 부인은 모르시죠? 오늘 아침 최후통첩이 발표되었답니다. 하원 회의는 아주 소란했었죠.” “네, 저는 몰라요.” 엘렌느가 대답했다. 그러한 문제는 그녀를 아연하게 했다. “저는 거의 외출하지 않거든요!” 하지만 쥴리에뜨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영 국 장군들과 러시아 장군들의 이름을 익숙하게 들먹이면서 뽈린느에게 어째서 흑해를 중립화해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었다. 그 때 앙리가 손에 신문을 한 뭉치 들고 나타났다. 엘렌느는 그가 자기를 위해 내려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눈 은 서로를 찾았고, 서로 강한 시선을 주고 받았다. 그리고는 길고 길고 말없는 악수를 나눔으로써 서로를 완전히 감쌌다. “신문에 뭐가 났어요?” 쥴리에뜨가 열광적으로 물었다. “신문에?” 의사가 말했다. @P 347 “언제나 별거 없지요.” 그러자, 잠시 동방 문제는 잊혀졌다. 중요한 사람이지만 아직 오지 않고 있는 누군가에 대한 얘기가 몇 번 왔다갔다 했다. 뽈린느는 3시가 다 되어 간다고 환 기시켰다. 오! 그가 오겠군요. 하고 드베를르 부인은 단언했다. 그는 지나칠 정도 로 분명하게 약속을 지키거든요. 엘렌느는 건성으로 듣고 있었다. 앙리와 상관없 는 것은 모두 그녀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그녀는 더 이상 일감을 가져 오지 않 았다. 대화가 낯설었지만 그녀는 늘 되풀이하는 유치한 공상에 자주 정신을 팔 면서 두 시간씩 앉아 있었다. 어떤 기적이 일어나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다. 그리고 저와 앙리만 남게 된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제게 질문을 하는 쥴리에 뜨에게 대답했다. 항상 자신의 눈길을 좇고 있는 앙리의 눈길은 그녀를 달콤하 면서도 피곤하게 했다. 그는 난로불을 뒤적이려는 것처럼 그녀의 뒤로 지나갔다. 머리카락을 스치는 그의 떨림이 전해 오자 엘렌느는 그가 밀회를 요구하고 있음 을 느꼈다. 그녀는 동의하였다. 더 이상 기다릴 힘이 없었다. “초인종이 울리네. 그 사람일 거예요.” 갑자기 뽈리는가 말했다. 두 자매는 무관심한 표정을 지었다. 엄숙하리만치 반듯한 옷차림을 하고 나타 난 사람은 말리뇽이었다. 그는 모여 있는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그르나 그 는 평소의 농담은 삼갔다. 얼마 전부터 나타나지 않았던 이 집에 의례적인 방문 을 한 것이었다. 의사와 뽈린느가 그에게 방문이 뜸해서 섭섭했다는 인사를 하 고 있는 동안, 쥴리에뜨는 엘렌느의 귀에 대고 말했다. 엘렌느는 철저한 무관심 에도 불구하고 놀라고 있었다. “놀랍지요?... 맙소사! 하지만 나는 저 사람을 원망하지는 않아요. 알고 보면 그는 아주 착한 청년이라서 그에게 화를 낼 수 없게 되지요... @P 348 그가 뽈린느를 위해서 남편감을 찾아 낸 걸 아세요? 친절하지요. 안그래요?” “정말 그렇군요.” 엘렌느는 상냥하게 중얼거렸다. “그래요, 저 사람 친구인데 아주 부자이고 결혼할 생각은 전혀 없다나요. 그 가 우리에게 데려오겠다고 약속했어요. 우리는 오늘 확답을 얻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러니 이해하시겠죠? 나는 많은 것을 겪었어요. 오! 이제 위험한 일은 없어요. 우리는 이제 서로 잘 알거든요.” 그녀는 예쁘게 웃음지으며 스스로 불러일으킨 지난 기억에 약간 얼굴을 붉혔 다. 그리고 활발하게 말리뇽과 대화를 독차지하였다. 엘렌느도 같이 웃고 있었 다. 그렇게 쉽게 사는 방식은 그녀에게도 변명이 되었다. 우울한 드라마를 꿈꾸 는 것은 잘못이었다. 모든 것이 호감어린 친절로 해결되었다. 그녀가 이렇게 금 지된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느슨한 행복을 맛보고 있는 사이에 쥴리에뜨와 뽈린 느는 정자의 문을 열고 말리뇽을 정원으로 데려갔다. 갑자기 그녀는 목덜미 뒤 에서 낮고 열려한 앙리의 목소리를 들었다. “부탁이오, 엘렌느. 오! 부탁이오...” 그녀는 몸을 떨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불안하게 주위를 둘러 보았다. 두 사 람뿐이었다. 그녀는 다른 세 사람이 산책길을 잔걸음으로 거닐고 있음을 보았다. 앙리는 대담하게도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녀는 몸을 떨었다. 두려움으로 완전 히 흥분되었다. “당신이 좋을 때라면.” 그가 밀회를 요구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들은 급히 몇 마디를 나누었다. “오늘 저녁 오 골목에 있는 그 집에서 기다려요.” “안 돼요. 그럴 수는 없어요... 제가 설명해 드렸잖아요. 그집 얘기는 않겠다 고 맹세하셨지요...” @P 349 “그러면 당신이 마음에 드는 다른 곳으로 합시다. 당신을 보기만 하면 되오... 오늘 밤, 당신 집은 어떻소?” 그녀는 저항했다. 그러나 두 여인과 말리뇽이 돌아오는 것을 보자 두려움에 사로잡혀 손짓으로만 거부의 뜻을 표시할 수 있었다. 드베를르 부인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꽃이 만발한 오랑캐꽃 덤 불을 보여 주기 위해 젊은이를 데려간 척했다. 그녀는 걸음을 재촉하면서 환한 얼굴로 앞장서서 들어왔다. “됐어요!” 그녀가 말했다. “뭐가요?” 엘렌느는 아직도 여전히 당황해 있어서 기억을 못 하고 물었다. “결혼 말이에요!... 아! 정말 시원하게 됐어요! 뽈린느는 이제 알맞은 나이가 지나가기 시작했거든요. 청년이 그 애를 보고 마음에 든다고 했대요. 내일 우리 는 아빠 집에서 저녁식사를 할 거예요... 그런 좋은 소식을 가져오다니 말린뇽을 안아 주고 싶어요.” 앙리는 완벽한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엘렌느 옆에서 떨어졌다. 그 역시 말리뇽이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처제가 시집가게 된 것을 알자 아 내와 더불어 즐거워하는 듯이 보였다. 그리고 엘렌느에게 장갑 한 짝을 잃어버 릴 것 같다고 주의를 주었다. 그녀는 고맙다고 했다. 정원에서 농담하고 있는 뽈 린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말리뇽 쪽으로 몸을 숙이고 간간이 들리게 속 삭이다가 웃음을 터뜨렸으며 그도 마찬가지로 귓속말로 대답하고 있었다. 다가 올 일에 대해 속내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는 게 분명하였다. 열린 채 있는 정자 의 문을 통해 엘렌느는 황호랗게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 바로 그때, 방에서는 쟌느와 랑보 씨가 잉걸불의 열기에 둔해져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이가 문득 긴 침묵을 깨고 몽상에 종지부를 찍듯 물었다. @P 350 “같이 부엌에 갈래요?... 엄마가 보이지 않나 가 봐요.” “그러자꾸나.” 랑보 씨가 대답했다. 그 날은 아이가 훨씬 주도적이었다. 아이는 유리창에 몸을 기대지 않고 얼굴 만 갖다댔다. 랑보 씨도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잎이 다 떨어져서 커다란 맑은 유 리를 통해 일본식 정자 안이 훈히 들여다 보였다. 스튜를 끓이는 중이던 로잘리 는 아가씨를 이상하게 여겼다. 그러나 아이는 어머니의 옷을 알아보았다. 아이는 어머니를 가리키면서 더 잘 보려고 얼굴이 찌그러질 정도로 유리창에 바싹 붙었 다. 그러자, 뽈린느가 고개를 들더니 손짓을 했다. 엘렌느가 나타나서 손짓으로 불렀다. “아가씨를 봤네요.” 하녀가 말했다. “내려오라고 하는데요.” 랑보 씨는 창문을 열어야 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쟌느를 데려오라고 부탁했다. 모두 아이가 오기를 바랐다. 쟌느는 격렬하게 뿌리치고는 일부러 유리창을 똑똑 쳤다고 랑보 씨를 나무라며 방으로 달아났다. 아이는 어머니를 보는 것은 좋았 지만 그 집에는 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았다. 랑보 씨가 아이에게 애원하듯 여러 가지로 물어 보았지만 아이는 어떤 물음에라도 답이 될 수 있는 막무가내인 이 유를 댈 뿐이었다. “나에게 억지로 말하게 하지 마세요.” 마침내 아이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는 아이를 계속 타일렀다. 너는 어머니에게 많은 마음 고생을 시키지 않았느냐. 사람이란 남들에게 실례되는 어리석은 짓을 해서는 안된다. 내가 몸을 싸줄 테니까 춥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아이의 몸을 숄로 감쌌다. @P 351 그리고 털실로 짠 작은 두건을 씌워 주려고 머리에 감은 목도리를 풀었다. 준 비가 되고 나서도 아이는 여전히 투정을 했다. 마침내, 아이는 기분이 나빠지면 곧 다시 집에 데려다 준다는 조건으로 따라 나섰다. 문지기 아주머니가 정원으 로 통하는 문을 열어 주었고 저우언에서는 모두 즐거운 환호성을 지르면서 그들 을 맞아 주었다. 특히 드베를르 부인은 아잉에게 호감을 표시했다. 그녀는 아이 를 온풍구 옆 안락의자에 앉히고, 아이에게 공기가 다소 차다고 느끼자 당장 유 리창을 닫도록 했다. 말리뇽은 돌아갔다. 엘렌느는 아이가 숄을 포대기처럼 두르 고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사람들 앞에 나타난 것을 보자 약간 창피해서 소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집어넣어 주고 있는데 쥴리에뜨가 외쳤다. “놔 두세요! 우리는 한 식구 아니에요?... 불쌍한 쟌느!우리가 보고 싶었구나. ” 그녀는 벨을 누르고, 스미슨 양과 뤼시앵이 산책에서 돌아왔는지 물었다. 아직 안 돌아왔다는군요. 어제는 르바쇠르 다섯 아가씨를 울렸지 뭐예요. “우리 ‘비둘기 난다’놀이 할래?” 곧 결혼하게 된다는 생각에 황홀해진 뽈린느가 물었다. “힘들지 않은 거야.” 그러나 쟌느는 도리질을 했다. 아이는 눈을 내리깐 채 저를 애워 싸고 있는 사람들을 차례로 천천히 바라보았다. 의사는 랑보씨가 돌봐 주고 있는 여인이 구빈원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랑보 씨는 몹시 감동한 나머 지, 개인적으로 커다란 신세를 진 것처럼 의사의 손을 잡았다. 각자 안락의자에 자리를 잡았고 대화는 화기애애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목소리가 느려지더니 간 혹 침묵이 깔렸다. @p 352 드베를르 부인과 동생이 얘기를 하고 있었고 엘렌느는 두 남자를 상대하고 있 었다. “보댕 선생님이 우리에게 이탈리아 여행을 권했어요.” “아! 그래서 쟌느가 내게 물었군요!” 랑보 씨가 외쳤다. “거기 가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아이는 말없이 작은 두 손을 가슴에 대고 우울한 얼굴을 활짝 폈다. 아이의 눈길은 두려운 듯 의사 쪽을 살폈다. 어머니가 그에게 조언을 구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볍게 몸을 떨었지만 침착함을 유지하였다. 그런데 늘 그렇듯이 어떤 화제에나 참견하고 싶어하는 쥴리에뜨가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 다. “어디라구요? 이탈리아라고 했어요?... 이탈리아에 갈 거라고 한 적이 없잖아 요?...아, 정말 우연의 일치군요! 바로 오늘 아침 나는 앙리에게 나폴리에 데려가 달라고 졸랐답니다... 나는 10년전부터 나폴리를 보고 싶어해 왔거든요. 봄마다 저이는 약속을 하지만 지키질 않아요.” “싫다고 하지는 않았잖소.” 의사가 중얼거렸다. “뭐라구요? 싫다고 하지 않았다구요?... 당신은 환자들을 내버려 둘 수 없다 고 하면서 단호하게 거절했어요.” 쟌느는 귀를 기울였다. 커다란 주름살이 아이의 맑은 이마에 그려졌고 아이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하나씩 비틀었다. “아! 환자들이라면...” 의사가 대꾸했다. “몇 주 동안 동료 의사에게 맡기면 될 거요... 당신이 그렇게 가고 싶다면 말 이오...” “선생님.” @p 353 엘렌느가 말을 잘랐다. “선생님께서도 여행이 쟌느에게 좋으리라는 의견이세요?” “물론이죠. 그러면 다리에 완전히 힘이 되돌아올 겁니다... 애들은 항상 여행 을 하면 좋아지죠.” 쥴리에뜨가 외쳤다. “그럼 우리도 뤼시앵을 데려가요. 모두 함께 가는 거예요... 좋지요? “물론이오. 당신이 원한다면 나도 좋소.” 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쟌느는 고개를 숙이고 눈시울을 뜨겁게 적시는 고통과 분노의 굵은 눈물을 훔 쳤다. 아이는 더 이상 듣지 않고 보지 않으려는 듯이 안락의자 깊숙히 몸을 기 댔다. 드베를르 부인은 눈앞에 놓인 뜻하지 않은 기분전환거리에 황홀해져 수다 스럽게 지껄이기 시작했다. 오! 저이는 정말 친절해요! 그녀는 그를 억지로 껴안 았다. 그리고는 당장 준비할 것을 얘기했다. 다음 주에 떠나요. 저런! 그러면 준 비할 시간이 없겠는데! 그리고는 여정을 그려 보고 싶어했다. 이렇게 가야 해요. 로마에서 일주일 묵고 기로 부인이 얘기한 멋진 시골에 머무르는 거예요. 그리 고는 자기도 남편과 함께 따라가기 위해 여행을 늦추라고 하는 뽈리는와 다투기 시작했다. “아! 안돼, 무슨 소리야!” 그녀는 말했다. “우리가 돌아오면 식을 올리라구.” 그들은 쟌느를 잊고 있었다. 아이는 뚫어져라 어머니와 의사를 살폈다. 확실히 이제는 엘레느도 앙리와 가깝게 지낼 수 있는 기회가 될 그 여행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우리 둘이 태양의 날에 가서 매일 함께 지내고 한가한 시간을 보내면 정말 즐거울 거야. 온화한 웃음이 입술에 떠올랐다. 그를 잃게 될까 봐 얼마나 두려워 했던가. @P 354 이제 내 사랑과 함께 떠날 수 있다니 얼마나 행복한가! 쥴리에뜨가 그들이 지 나갈 지방들을 필쳐 보이자 두 사람 모두 벌써 꿈같은 봄 속을 거닐고 있는 듯 했다. 눈으로는 그곳에서, 우리가 함께 지나갈 그 어느 곳에서나 서로 사랑하리 라 하고 서로 말하고 있었다. 한편, 슬픔으로 점점 말이 없어진 랑보 씨는 쟌느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챘다. “너 기분이 좋지 않구나?” 그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아!그래요. 정말 기분이 좋지 않아요... 집으로 올라가요. 부탁이에요.” “하지만 어머니한테 먼저 얘기하려무나.” “싫어요, 싫어요. 엄마는 지금 얘기 중인 걸요. 그럴 틈이 없어요. 올라가요. 올라가요.” 그는 아이의 팔을 잡고 엘렌느에게 애가 좀 피곤해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녀는 올라가서 기다리라고 부탁하였다. 그녀는 눈길로 그들을 좇았다. 소녀는 아 주 가볍긴 하지만 랑보 씨의 손을 잡았고, 그는 3층에서 멈췄다. 아이는 그의 어 깨에 고개를 기댔다. 둘은 가슴 아프게 서로 바라보았다. 어떤 소리도 얼어 붙은 계단의 고요함을 깨뜨리지 않았다. 그는 속삭였다. “이탈리아에 가게 돼서 좋지, 그렇지?” 그러나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제는 가고 싶지 않다고, 내 방에서 죽는 게 더 좋다고 중얼거렸다. 오! 나는 안 갈 거예요. 나는 병이 들거예요. 그 러리라는 걸 잘 알아요. 아무 데도, 아무 데도 안 갈거예요. 내 구두는 불쌍한 사라에게 주면 돼요. 그리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아주 낮게 말했다. “아저씨가 어느 날 저녁, 나한테 물어 본 것 기억하세요?” @p 355 “그게 뭐지, 얘야?” “언제나 엄마하고 있겠다는 것이요. 언제나 말예요... 그래요! 아저씨가 지금 도 그러고 싶으시다면 나도 좋아요.” 랑보 씨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는 아이에게 부드럽게 키스했다. 아이 는 목소리를 더 낮추며 말했다. “그 때 내가 막 화를 내서 아저씨도 아마 기분이 상하셨을 거예요. 나는 그 때 몰랐어요. 이해하시지요... 하지만 내가 바라는 사람은 아저씨예요. 오! 지금 말할까요? 지금요... 나는 누구보다도 아저씨를 좋아해요.” 아래, 정원에서 엘렌느는 다시 자신을 잊고 있었따. 사람들은 계속 여행 얘기 를 하였다. 그녀는 터질 듯한 가슴을 열어 보이고, 앙리에게 자신이 얼마만한 행 복으로 숨막힐 듯한지 말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쥴리에뜨와 뽈린느가 옷을 몇 벌이나 가져가야 하는지 의논하고 있는 동안,그녀는 앙리 쪽으로 몸을 굽히고 아까 거절했던 밀회를 약속하였다. “오늘 밤 오세요. 기다리겠어요.” 마침내 집으로 올라가려는데, 그녀는 어쩔 줄 모르며 계단을 달려 내려오고 있는 로잘리를 만났다. 주인 마님을 보자마자 하녀는 외쳤다. “마님!마님! 빨리 와 보세요!... 아가씨가 좋지 않아요. 피를 토했어요. 3 식탁을 떠나면서 의사는 어떤 부인이 해산기가 있어 오늘 밤은 그 부인 옆에 서 지내야 할 것 같다고 아내에게 말해 두었다. 그는 9시에 집을 나와서 강가로 내려가 어두운 밤, 인적 끊긴 나루를 따라 걸었다. @p 356 축축한 미풍이 불어 왔다. 물이 불어난 세느 강이 먹물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11시를 치자 그는 트로까데로 언덕을 다시 올라와 집 주위를 배회하였다. 네모 진 커다란 집채는 짙은 어둠으로 보였다. 그런데 식당 유리창이 아직도 환했다. 그는 한 바퀴 돌았다. 부엌 창도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그는 놀라고 점점 불 안해졌지만 기다렸다. 커튼 뒤에서 그림자가 보였다. 부산한 기색이 집 전체에 차 있었다. 랑보 씨가 저녁식사까지 남아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 점잖은 사람 은 10시가 넘도록 남아 있은 적이 없었다. 그는 올라갈 용기를 내지 못했다. 로 잘리가 문을 열면 뭐라고 한담? 마침내 12시가 되자 미칠 듯이 조바심이 난 그 는 모든 조심성을 잊고 초인종을 울렸다. 베르쥬레 부인이 있는 수위실 앞을 대 구도 없이 지나쳤다. 올라가자 그를 맞이한 사람은 로잘리였다. "선생님이시군요. 들어오세요. 오셨다고 말슴드리겠어요. 마님은 선생님을 반가 워하실 거예요." 하녀는 이 시각에 그르 보고도 아무런 놀라움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식당으로 들어가는 동안, 하녀는 어쩔줄 모르며 말을 이었다. "아! 아가씨 굉장히 아파요. 선생님... 정말 끔직한 밤이에요! 다리가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녀는 안으로 들어갔다. 의사는 기계적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는 자신이 의사 임을 잊고 있었다. 나루를 따라 거닐면서 그는 엘렌느가 옆 방에 자들어 있는 쟌느를 깨우지 않으려고 그의 입술에 손가락을 대며 안으로 인도하리라고 상상 하였다. 희미한 야등이 타오르고 방안은 어둠에 잠겨 있으리라. 두 사람의 키스 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리라. 그런데 그는 방문온 손님처럼 모자를 무릎에 얹 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문 뒤에서는 끈질긴 기침만이 고요함을 찢고 있었다. @P 357 로잘리가 다시 나타나 손에 대야를 든 채 급히 식당을 가로질러 왔다. 그리고 그에게 간단한 전갈을 했다. “마님께서 들어오지 마시랍니다.” 그는 그냥 갈 수 없어서 앉아 있었다. 그러면, 만나자고 한 날이 다른 날이었 던가?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어리둥절했다. 그는 곰곰 생 각해 보았다. 불상한 쟌느가 정말 쇠약해진 모양이구나. 애들은 걱정거리에다 골 치덩이리일 뿐이야. 그러나 문이 다시 열리더니 보댕 의사가 몹시 미안하다고 하면서 나타났다. 잠깐 동안에 그는 여러 말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선생을 찾으 러 갔었어요. 명망 있는 동료에게 의견을 구하는 것은 항상 좋은 일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드베를르 의사는 귀에서 웅웅 소리가 나는 것을 느끼며 되풀이 했다. 노의사는 마음을 진정하였으나 확실한 진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며 난 처한 모양이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고 이야기 중간중간 눈을 깜박이면서 의학 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증상을 설명했다. 가래섞인 기침과 극심한 쇠약, 고열이 있는데 아마 티푸스 열인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오랫동안 환자가 치료를 받아 온 빈혈성 신경증이 예기치 않은 병발증을 일으킬까 봐 우려된다는 얘기는 뚜렷이 하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는 한 문장을 말할 때마다 물었다. 드베를르 의사는 어물거리는 몸짓으로 대답했다. 동료가 얘기하고 있는 동안 그는 점점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왜 올라왔던가? @p 358 "나는 두 가지 발포제를 처방했어요." 노의사는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선생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소! ... 하지만 한 번 가보시오. 그 다음에 애기해 보십시다." 노의사는 그를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방은 램프로 아주 희미하게 밝혀져 있었다. 비슷했던 밤들이 생각났다. 가구와 벽이 아주 짙은 어둠속에 잠들어 있 는 가운데, 똑 같은 후덥지근한 냄새와 똑 같은 숨막힐 듯 가라앉은 공기.하지만 아무도 전처럼 그를 맞아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지도 않았다. 낙심한채 안락의자 에 앉아있는 랑보씨는 조는듯이 보였다. 침대앞에 흰 실내복을 입고 서있는 알 렌느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창백한 얼굴이 몹시 크게 보였다. 그는 1분 정도 쟌 느를 진찰했다. 아이는 너무 쇠약해서 눈을 뜨는 것조차도 힘들어 했다. 아이는 땀에 젖어 축 늘어져 있었는데 창백한 얼굴에 광대뼈 부근만 몹시 뜨거웠다. "이건 급성 결핵입니다." 마침내 그는 바라는 바는 아니었지만 소리를 높여 말했다. 오래전부터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예측이라도 한 듯 아무런 놀라움도 표시하지 않았다. 엘렌느가 소리를 듣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서우리만치 침착하였고 눈 에는 눈물기도 없이 싸늘하였다. "그렇지요?" 보댕의사는 먼저 말하기 싫었을 뿐이라는 듯 동의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 이며 짧게 말했다. 노의사는 다시 아이를 청진하였다. 쟌느는 사지를 늘어뜨리고 저를 왜 귀찮게 하는지 알지 못하는 듯 몸을 내맡겼다. 두 의사간에는 몇 마디 말이 급히 오갔 다. 노의사는 목에 바람이 든 것처럼 금간 항아리 소리를 내면서 단어를 중얼거 렸다. 하지만 그는 아 @p 359 직도 망설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모세 기관지염이라고 했다. 드베를르 의사는 틀림없이 오한같은 우연한 요인이 병을 유발했을 테지만, 위황빈혈이 가 슴앓이로 연결되는 경우도 여러 번 목격했다고 설명했다. 앨렌느는 그들 뒤에 서서 기다렸다. “당신도 들어 봐요.” 보댕의사는 앙리에게 자리를 내주며 말했다. 드베를르 의사는 몸을 굽히고 쟌느를 안으려고 했다. 아이는 눈꺼풀도 들어 올리지 못했고 열이 펄펄 나면서 가만히 있었다. 벌어진 속옷사이로 보일듯 말 듯 솟아오른 애들같은 가슴이 보였다. 이미 죽음에 닿아있는 이 사춘기의 징후 보다 더 애처롭고 순결한 것은 없었다. 아이는 노의사의 손이 닿았을 때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앙리의 손가락이 스치자 마자 충격을 받았다. 미친 듯이 날뛰는 수줍음이 아이가 빠져있는 기진맥진 상태에서 아이를 일깨웠다. 아 이는 마치 파렴치한 짓을 당해 놀란 젊은 여인 같은 몸짓을 했다. 아이는 바싹 마른 팔로 가슴을 그러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엄마... 엄마...” 아이는 눈을 떴다. 그리고 그 사나이가 거기 있는 것을 알자 경악하였다. 제거 벌거벗고 있음을 깨닫자 아이는 이불을 마구 끌어올리며 수치스러워 눈물을 흘 렸다. 아이는 고통속에서 단번에 열살을 더 먹은 것 같았으며, 죽음을 앞두고 이 남자가 저를 만져서는 안 되며 자기를 통해 어머니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해할 만큼 조숙한 열두 살이 된 것 같았다. 아이는 도움을 구하며 다시 외쳤 다. “엄마... 엄마... 제발...” 아직 아무 말도 않고 있던 엘렌느는 앙리 곁으로 왔다. 그녀는 남자를 대리석 같은 얼굴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를 건 @p 360 드리며 목이 졸리는 듯한 소리로 단 한 마디 했다. "가세요!" 보댕의사는 침대에서 기침의 발작으로 몸부림치고 있는 쟌느를 진정시키려 했 다. 그는 이제 네가 싫어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며 네가 조용히 쉬도록 모두 갈 거라고 다짐했다. "가세요." 엘렌느가 애인의 귀에 대고 나지막하고 확고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우리가 이 애를 죽인 걸 아시지요?" 아무 말도 못하고 앙리는 자리를 떴다. 그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며 잠시 식당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는 보댕의사가 나오지 않는 것을 보자, 방을 나와 로잘리가 불을 켤 겨를도 없이 계단을 더듬어 내려 왔다. 자신이 많은 연구를 했던 병인 급성 결핵의 벼락같은 진행에 생각이 미쳤 다. 좁쌀 모양의 결절이 급속하게 불어나면서 점점 숨이 가빠지겠지. 쟌느는 분 명 3주를 넘기지 못 할거야. 일주일이 흘렀다. 빠리 위, 창문위로 보이는 넓은 하늘에 해가 뜨고 졌다. 엘 렌느는 가차없이 또박또박 지나가는 시간에 대해 명확한 느낌이 없었다. 그녀 는 딸 아이의 운명이 정해진 것을 알았다. 그녀는 마음깊이 일어나는 가슴을 저 미는 듯한 공포에 휩싸여 넋이 나가 있었다. 그것은 희망이 끊긴 기다림이었으 며, 죽음이 용서치 않으리라는 확신이었다. 그녀는 한방울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 다. 계속 서서 느리지만 정확한 동작으로 환자를 간호하며 가만가만 방안을 걸 어 다녔다. 때때로 피로로 지치면 의자에 앉아서 몇 시간이고 아이를 바라보았 다. 쟌느는 약해져 가고 있었다. 몹시 고통스런 구토가 아이의 기력을 꺾었으며 열은 내리지 않았다. 보댕의사가 와서 아이를 잠깐 진찰하고 처방을 내렸다. 물 러가는 의사의 @p 361 굽은 등이 너무나 무력감을 나타내고 있어서 어머니는 뭐라고 묻기 위해 그를 따라 나가지도 않았다. 발작이 일어난 다음날 주브신부가 달려왔다. 신부와 그의 동생은 매일 와서 감히 상태를 묻지도 못하고 엘렌느와 말없이 악수를 나누었다. 그들은 돌아가 면서 환자를 지키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녀는 10시쯤 되면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녀는 밤에 누가 있는 것을 원치 않았다. 어느 날 저녁, 그 전날부터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하던 신부가 그녀를 한쪽으로 데려갔다. “한 가지 생각해 봤는데...” 그는 중얼거렸다. “저 애는 건강 때문에 영성체를 미뤄 왔어요... 여기서 첫 영성체를 할 수도 있는데...” 엘렌느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모르는 듯 했다. 평소의 관용에도 불구하고 신부가 하늘나라의 일을 걱정하고 있음을 알자 그녀는 놀라웠을 뿐 아니라 다소 상처를 입기까지 하였다. 그녀는 상관없다는 몸짓을 하면서 말했다. “아니요. 저 애를 괴롭히는 걸 바라지 않아요. 천국이 있다면 저 애는 거기 곧장 올라가게 될 거예요.” 그러나 그 날 저녁 쟌느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기만하는 가장 멋진 사기꾼 한 명과 만나게 되었다. 환자의 섬약한 귀에 신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부님이시군요.” 아이가 말했다. “영성체 애기를 하시는 거죠... 곧 하실 거예요?” “그렇구 말구, 아가.” 그가 대답했다. 그러자, 아이는 이야기를 하려고 그가 가까이 오기를 바랐다.어 @p 362 머니는 베개를 괴어 주었고, 아이는 조그맣게 앉아 있었다. 바짝 타 들어간 입술 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맑은 눈에는 벌써 죽음이 다가와 있었다. "오! 기분이 좋아요." 아이가 말했다.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말씀해 보세요. 나는 꽃다발을 들고 흰옷을 입는거죠? ... 성당은 성 마리아 축제때처럼 아름다운 가요?" "더 아름답지." "정말이예요? 그렇게 부드러운 노래도 하나요? ... 빨리요,빨리?" 아이는 기쁨에 젖어 들었다. 아이는 하느님을 정말 사랑하며 찬송가가 불리 워 질 때 하느님을 보았노라고 말하면서,황홀경에 빠져 눈앞에 드리워진 침대커 튼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화분의 꽃들이 나비처럼 흩날리고 있는 가운데 오르 간 소리가 들렸고, 빙빙 돌고 있는 등불이 보였다. 그러나 심한 기침이 나서 몸 부림치며 침대에 엎어졌다. 아이는 여전히 웃으면서 기침하는 줄도 모르는 듯 자꾸 말했다. "나는 내일 일어날 거예요. 교리문답을 틀리지 않도록 공부할 거예요. 그러 면 모두 좋잖아요." 엘렌느는 침대 발치에서 눈물을 흘렸다. 울지도 못하던 그녀는 쟌느의 웃음 소리를 듣자 봇물같은 눈물이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목이 메었다. 절망하는 모습을 감추려고 그녀는 식당으로 피했다. 신부는 그녀 를 뒤따랐다. 랑보씨는 소녀를 돌보기 위해 급히 일어섰다. "어머나! 엄마가 소리질렀어요. 아픈가요?" 아이가 물었다. @p 363 “엄마라구?” 그가 대답했다. “소리지르지 않았어. 오히려 네가 튼튼해져서 웃었지.” 식당에서는 엘렌느가 식탁에 고개숙이고 있었는데 마주 잡은 손 사이로 흐느 낌이 터져 나왔다. 신부는 몸을 숙이고 자제하라고 간청하였다. 그녀는 눈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을 들고 스스로를 원망하였다. 제가 그 아이를 죽였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떠듬떠듬 모든 고백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쟌느가 제 옆에 있었더라면 그 사람에게 약해지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저는 낯모르는 방에서 그 애를 만나야 했어요. 하느님! 아이와 함께 저도 데려다 주세요. 더 이상 살수 없어요. 신부는 질겁하여 죄를 사해 주겠다고 약속하며 그녀를 진정 시켰다. 초인종이 울렸다. 현관에서 말소리가 났다. 로잘리가 들어왔을 때, 엘렌느는 눈을 훔치고 있었다. “마님,드베를리 선생님이예요.” “그가 들어오는 것 원치 않아.” “아가씨 소식을 물으셨어요.” “그 애가 죽어간다고 말해.” 문이 열린 채로 있었기 때문에 앙리는 그 말을 다 들었다. 그는 하녀를 기다 리지 않고 다시 내려갔다. 그는 매일 올라와 똑 같은 대답을 듣고 사라졌다. 엘렌느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은 방문객들이었다. 그녀가 드베를리 집에서 사귄 부인들은 그녀를 위로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셰메뜨리부인,르바쇠르부인,기 로부인을 비롯한 여러 부인들이 나타났다. 부인들은 들어오겠다고 청하지는 않 았으나 로잘리에게 너무 큰소리로 질문을 해대서 그 시끄러운 소리가 좁은 아파 트의 얇은 벽을 통해 울려 퍼졌다. 짜증이 났지만 엘렌느는 부인들 @p 364 을 식당으로 맞아들여서 선 채로 간단한 말을 나누었다. 그녀는 내의를 갈아입 는 것도 잊고,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대충 틀어 올리고 하루종일 실내복 차림으로 있었다. 상기된 얼굴에,눈은 피로로 감겨지고 말라붙고 쓴 맛이 도는 입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줄리에뜨가 올라왔을 때, 그녀는 들어오지 말라고 할 수가 없어서 잠시 침대 맡에 있게 했다. 어느 날,줄리에뜨는 상냥하게 말했다. “당신은 너무 몸을 돌보지 않고 있어요. 좀 힘을 내세요.” 쥴리에뜨는 빠리 시민들이 골몰하고 있는 사건들을 말해주며 그녀의 관심을 돌리려고 했고 엘렌느는 대꾸를 해야했다. “곧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아시지요... 정말 지긋지긋해요.나는 전쟁에 나가야 할 사촌이 둘이나 있어요.” 이렇게 줄리에뜨는 빠리시내에 외출했다 돌아오면,오후동안 지껄인 수다로 상 기되어 환자의 가라앉은 방에 긴 치맛자락으로 바람을 일으키며 올라오곤 했다. 그녀는 목소를 낮추고 안됐다는 표정을 지으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특유 의 무식함이 저절로 드러나는데다가,그녀 자신이 건강한데 대해 만족하고 의기 양양해 있음이 누가보나 분명했다. 엘렌느는 그녀 앞에서 기가 죽었고 질투심 으로 고통스러웠다. “아주머니...” 어느 날 저녁 쟌느가 속삭였다. “왜 뤼시앵은 놀러 오지 않아요?” 쥴리에뜨는 순간 당황하여 웃기만 하였다. “그 애도 나처럼 아파요?” 소녀는 다시 물었다. “아니,아프지 않아... 그앤 중학교에 들어갔어.” 엘렌느가 현관에 배웅하러 따라 나왔을 때,그녀는 거짓말을 해 @p 365 명하려 들었다. "오! 나도 그 애를 데려오고 싶어요. 전염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애들은 바로 겁을 먹거든요. 게다가 뤼시앵은 너무 얼떠요! 댁의 가엾은 꼬마를 보면 울지도 몰라요..." "네,네,그럼요." 이 명랑한 여자는 정말 튼튼한 아들을 두었지 하고 생각하자 가슴이 무너지면 서 엘렌느는 말을 가로 막았다. 두 번째 주일이 지나갔다. 병은 계속 갈 길을 가고 있었고 매 순간마다 쟌느 의 생명을 조금씩 앗아가고 있었다. 병은 그 연약하고 귀여운 육체를 한 단계 한 단계 파괴하며 한 번도 면해주는 법이 없었고, 벼락같이 빠르면서도 서두르 지 않았다. 피 섞인 가래가 없어지고 때로 기침도 멎었다. 압박감이 아이를 짓 눌러서 숨쉬기가 곤란하게 되었고,아이의 조그만 가슴속은 병으로 엉망진창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허약한 환자가 견디기에 너무 가혹하여서 그 소리 를 듣고 신부와 랑보씨는 눈시울이 젖었다. 며칠 낮과 밤을 씩씩거리는 소리가 커튼아래서 들려왔다. 일격이면 죽어버릴 불쌍한 존재는 구슬땀을 흘리고 애를 쓰면서 죽지 않았다. 기진맥진한 어머니는 그 헐떡거리는 소리를 견딜힘이 없 어서 옆방으로 가 벽에 머리를 기댔다. 점점 쟌느는 고립되어갔다. 아이는 이제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고 어느 외딴 곳에 홀로 살고 있는 것처럼 흐릿하고 아득한 인상밖에는 없었다. 아이를 둘러 싸고 있는 사람들은 주의를 끌려고 아이가 알아듣도록 서로 이름을 부르고 했지 만 아이는 웃지도 않고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피곤한 표정으로 벽을 향해 누웠 다. 어둠이 아이를 둘러쌓고,질투심으로 화가나서 뾰로통한 채 아이는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환자의 변덕스러움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느 날 아침, @p 366 아이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오늘이 일요일이야?" "아니!" 엘렌느가 대답했다. "금요일이야... 왜 알려고 하지?" 아이는 방금 물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다. 그러나 그 다음다음 날 로잘리가 방에 들어오자 아이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일요일이야... 제피랭이 와 있지? 그를 오라고 해줘." 하녀는 망설였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엘레느는 하녀에게 괜찮다는 눈짓을 했다. 아이는 되풀이 했다. "그를 데려와. 둘 다 같이 오면 좋겠어." 로잘리가 제피랭과 같이 오자 아이는 베개 위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었다. 키 작은 군인은 맨머리에 넓적한 손을 늘어뜨리고 주책없는 감정을 숨기려고 몸을 흔들었다. 그는 아가씨를 좋아하였다. 부엌에서도 말했지만 죽어가는 아이를 보는 것은 그를 심히 난처하게 하였다. 로잘리가 명랑하게 굴라고 미리 말해 주 었지만 너무나 창백하고 한줌도 안되는 아이를 보자 그는 질린 얼굴로 멍청해 있었다. 그에게는 자신만만한 태도와 분별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재치 있는 문장들이 뱅뱅 돌기만 하고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녀는 뒤에서 그를 웃기 려고 꼬집었다. 그러나 그는 단지 이렇게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그리고 여러분..." 쟌느는 바싹 마른 팔로 여전히 몸을 받치고 있었다. 아이는 쾡한 큰 눈을 뜨 고 무얼 찾는 기색이었다. 머릿속이 진동하였고, 아이가 빠져있는 어둠 속에 갑 자기 강한 빛이 비쳐 눈을 멀게 했다. "가까이 오세요." 엘렌느가 군인에게 말했다. @P 367 "아가씨가 당신을 보자고 한 거예요." 햇빛이 창문으로 들어와 커다란 노란 원을 만들었다. 그 안에서 양탄자의 먼 지가 춤추고 있었다. 3월이 되어서 밖에는 봄이 오고 있었다. 한 걸음 다가서 자 제피랭은 햇빛 속에 나서게 되었다. 밀기울 빛 주근깨 투성이의 둥근 얼굴은 익은 보리처럼 황금빛 후광을 띠었고, 윗옷의 단추가 번쩍거렸으며 붉은 바지는 개양귀비 발처럼 시뻘개졌다. 그래서 쟌느는 그를 알아보았다. "왜 그러지,아가야?" 어머니가 물었다. "우리 모두 여기 있단다." 그러자, 그녀는 깨달았다. "로잘리, 이리와...아가씨가 너를 보고 싶어하는구나." 이번에는 로잘리가 햇빛 속으로 나섰다. 그녀가 쓰고 있는 모자의 주름이 어 깨위로 제껴져서 나비 날개처럼 날아 오르려 하고 있었다. 금 빛 가루가 억센 검은 머리카락과 납작한 코와 두꺼운 입술을 지닌 선량한 얼굴에 떨어졌다. 방 안에는 햇빛을 받으며 나란히 서 있는 군인과 하녀밖에 없는 것 같았다. 쟌느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됐다! 애야." 엘렌느가 다시 말했다. "이들에게 아무 말도 안 할거니?... 자, 여기 두 사람이 같이 있어." 쟌느는 아주 나이 먹은 할머니처럼 가볍게 머리를 떨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팔짱을 낄 채비를 갖춘 남편과 아내처럼 서 있 었다. 봄의 온기가 그들을 녹여주었다. 그들은 아가씨를 즐겁게 하려고 어벙하지 만 다정한 표정으로 서로 마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들의 오동통한 등에서는 싱싱한 향기 @p 368 가 났다. 제피랭이 로잘리를 손아귀에 넣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둘만 있었다면 그는 보기 좋게 따귀를 맞았을 것이다. 그것이 두 사람의 눈에 씌여 있었다. “좋아! 너 아무 할말 없어?” 쟌느는 더욱 숨을 몰아쉬면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한마디도 하지 않 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기 때문에 제피랭과 로잘리는 곧 방을 나 가야 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그리고 여러분...” 어리둥절해진 군인은 나가면서 다시 한번 말했다. 그것은 쟌느가 부린 최후의 변덕들 중 하나였다. 아이는 우울한 기분에 젖어 있어서 아무것도 아이를 거기서 끌어 낼 수가 없었다. 아이는 어머니를 포함해 서 모두로부터 멀어졌다. 어머니가 아이의 시선을 찾아 침대 위에 허리를 굽히 면 아이는 커튼의 그림자 따위가 눈앞을 스쳐 간 것처럼 무표정한 채 있었다. 아이는 죽음을 느끼는 버려진 여인이 우울하게 체념한 듯 침묵을 지켰다. 가끔 아이는 오래도록 눈꺼풀을 반쯤 뜨고 있었는데 그 가늘게 뜬 눈이 무슨 고집스 런 생각에 잠겨 있는지 가늠할 도리가 없었다. 아이에게는 옆에 눕혀있는 커다 란 인형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 날 밤 누군 가가 아이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덜어주려고 인형을 주었다. 그 후로 아이는 인형을 놓지 않았고 누가 그것을 치우려고 하면 사나운 몸짓으로 가로막았다. 인형은 마분지로 된 머리 를 긴 베게에 눕히고 어깨까지 이불을 덮고 환자처럼 누워 있었다. 아이는 가 끔씩 타는듯한 손으로 인형을 돌보았고, 속이 비고 잡아 뜯긴 분홍빛 팔다리를 어루 만졌다. 몇 시간동안 아이의 눈은 늘 한군데만 보고 있는 칠한 눈과 웃음 을 그치지 않는 흰 이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면 애정이 치밀면서 인형을 가슴 에 꼭 안아주고 작은 가발에 뺨을 대고 싶은 욕망이 들었고 그렇게 애무하고 나 면 아이는 위로가 @p 369 되는 듯 했다. 아이는 이렇게 커다란 인형에 대한 사랑 속에 도피하였다. 잠에 서 깨면 인형이 거기 있나 확인하였고, 인형만을 보고 인형과 애기를 하고,인형 이 귀에다 뭐라고 속삭이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에 웃음의 그림자 비슷한 것을 띠었다. 세 번째 주일이 지나갔다. 어느 날 아침, 노의사가 찾아왔다. 엘렌느는 딸아 이가 그 날을 넘기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 전날부터 아이는 제 행동에 대한 의식마저도 없어져 버린 마비상태에 있었다. 이제 아무도 죽음과 싸우지 않았고 시간만 재고 있었다. 환자가 극심한 갈증으로 고통스러워 하자 의사는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아편이 든 음료를 주라고 일렀을 뿐이었다. 모든 치료가 포기된 것을 보자 앨렌느는 백치가 되어 버렸다. 탁자 위에 여러 가지 약이 놓 여 있는 한, 그녀는 아직도 아이가 나으리라는 기적을 바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약병도 약봉지도 없었고 마지막 믿는 구석도 사라져 버렸다. 그녀에게는 이제 한가지 본능 외에는 없었다. 쟌느옆에 있는 것,아이를 떠나지 않는 것,아 이를 바라보는 것,의사는 끔찍한 광경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자질구레한 심부름 을 시키면서 그녀를 떼어놓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녀는 보아야한다는 육감에 끌린 듯 다시 돌아왔다. 꼿꼿하게 서서 얼굴에 절망을 가득 담 은채 팔을 내려 뜨리고 그녀는 기다렸다. 1시경에 주브신부와 랑보씨가 왔다. 의사가 그들을 맞으러 나가서 뭐라고 한 마디 했다. 두 사람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들은 굳어 버린 듯이 서 있었는데 손만이 떨리고 있었다. 엘렌느는 돌아 다보지 않았다. 날은 4월초의 맑은 오후답게 화창하였다. 쟌느는 침대에서 몸을 뒤척였다. 갈 증에 시달려 때때로 입술이 힘들게 달싹거렸다. 아이는 이불 밖으로 속이 비치 는 가련한 손을 내놓았다. 그리고 손을 허공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사정없는 병 의 작업은 끝이 났다. 아 @p 370 이는 이제 기침도 하지 않았다. 꺼져가는 목소리는 다만 씩씩거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좀 전부터 아이는 고개를 돌리고 눈으로 빛을 찾았다. 보댕의사는 창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쟌느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뺨을 베개에 댄 채 빠 리를 바라보았다. 눌린듯한 숨결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이 고통스런 3주 동안 여러 번 아이는 이렇게 지평선까지 펼쳐진 도시를 향해 누워있었다. 아이의 얼굴은 심각해져서 생각에 잠겼다. 이 마지막 순간, 빠리는 4월의 금빛 태양아래 웃고 있었다. 밖에서 부드러운 바람과 애들의 웃음소리,참 새 떼 지저귀는 소리가 날려왔다. 죽어가는 아이는 있는 힘을 다해 먼 교외에서 피어 오르는 연기를 눈으로 좇으려 하였다. 그리고 제가 알고 잇는 세 건물,앵발 리드 빵떼옹,생 자끄 탑을 찾았다. 그리고는 알지 못하는 곳이 펼쳐졌다. 지친 눈꺼풀이 드넓은 지붕의 바다를 보며 반쯤 감겼다. 아이는 제가 점점 가벼워져 서 새처럼 날아 오르게 되길 꿈 꾸는 것 같았다. 그러면 아이는 알게 되리라. 제 가 탑과 돔 위에 있다는 것을. 일고여덟 번 날갯짓을 하면 어른들이 애들에게 감추려 하는 금지된 것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그러나 새로운 불안이 아이를 덮쳤다. 아이의 손은 여전히 찾고 있었다. 아이는 작은 팔로 가슴에 커다란 인형 을 끌어안고 있어야만 진정이 되었다. 그녀는 인형을 가져가고 싶었다. 아이의 시선이 햇빛을 받아 온통 장밋빛으로 빛나고 있는 굴뚝사이로 멀리 비껴갔다. 4시가 되자 저녁이 벌써 푸르스름한 그늘을 드리우기 시작하였다. 숨이 막히 면서 요동이 없는 느린 고통이 그 끝이 었다. 어린 천사는 이제 저항할 힘이 없 었다. 랑보씨는 버티지 못하고 털썩 무릎을 꿇었으며,조용한 흐느낌으로 들먹거 리면서 비통함을 감추려고 커튼 뒤로 기어갔다. 신부는 환자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쥐고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중얼거렸다. @p 371 "쟌느,쟌느." 엘렌느는 머리카락이 쭈볏 서는 공포로 얼어붙어 중얼거렸다. 그녀는 의사를 밀치고 바닥에 몸을 던졌다. 딸아이를 아주 가까이서 보기 위 해 침대에 기댔다. 쟌느는 눈을 떴다. 그러나 어머니를 보지 않았다. 그 눈길은 여전히 저쪽 저물어 가는 빠리를 향하고 있었다. 아이는 마지막 사랑인 인형을 더욱 더 꼭 끌어 안았다. 큰 한숨을 쉬고 좀더 짧은 두 번의 숨을 쉬었다. 눈이 흐려지고, 얼굴은 순간 생생한 고통을 드러냈다. 그러나 곧 아이는 안정된 것 같 았다. 아이는 입을 벌린 채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끝났소.” 의사가 맥을 짚어보며 말했다. 쟌느는 표정 없는 큰 눈으로 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염소같은 얼굴은 찌푸 린 눈썹에서 드리운 회색 그림자와 굳어버린 윤곽으로 좀 길어 보였다. 아이는 이렇게 죽어서도 질투하는 여인의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인형은 고개를 젖히고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아이와 마찬가지로 죽은 것 같이 보였 다. “끝났소.” 의사는 차가운 작은 손을 제자리에 놓으며 말했다. 엘렌느는 고개를 들고 두개골이 튀어나오려 하기라도 하는 듯이 주먹으로 이 마를 눌렀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미친듯한 시선으로 앞을 두리 번 거렸다. 그 러자,딸꾹질같은 것이 가슴속에서 터져 나왔다. 그녀는 막 침대발치에서 거기 내 버려둔 채 잊고 있었던 작은 구두 한 켤레를 보았다. 끝났어.쟌느는 이제 저걸 신지 않을 거야. 구두는 불쌍한 사람한테 주면되지.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죽은 아이의 손에 얼굴을 비벼대며 바닥에 앉아 있었다. 랑보씨는 흑흑거렸다. 신부는 목소리를 높였고,로잘리는 빠끔히 열린 식당문에서 너무 큰 소리로 울지 않으려고 손수건을 깨물고 있었다. @p 372 바로 그 때,드베를르 의사가 초인종을 눌렀다. 그는 소식을 알고 싶어서 올라 오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는 어때요?" 그가 물었다. "아! 선생님..." 로잘리는 더듬거렸다. "죽었어요." 그는 매일매일 기다려 왔지만 그 종말에 놀라서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그리고 는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맙소사! 불쌍한 어린 것! 이 무슨 불행인가!" 그는 이런 어리석고 한심한 말밖에 하지 못했다. 문이 다시 닫혔고 그는 내 려갔다. 4 드베를르 부인은 쟌느의 죽음을 알고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48시간 동안이나 제 정신을 잃고 혹심한 충격에 빠져있었다. 상식을 벗어난 소란한 절망이었다. 그녀는 엘렌느의 팔에 몸을 던지기 위해 올라왔다. 그리고 한두 마디 오가기도 전에,죽은 아이에게 감동적인 장례식을 마련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떠오 르자 온 정신이 그리로 쏠렸다. 그녀는 헌신적으로 사소한 일들을 떠맡았다. 어 머니는 눈물로 탈진하여 의자 위에 넋을 앉아 있었고,평판에 어울리게 행동해왔 던 랑보씨도 정신이 나갔다. 그는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동의하였다. 엘렌느는 한 순간 퍼뜩 정신이 들어서 꽃이,많은 꽃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드베를르부인은 1분도 허비하지 않고 무한한 수고를 하였다. 그 @p 373 녀는 다음 날 하루 종일, 비보를 알리기 위해 아는 부인들의 집을 전부 돌아다 녔다. 그녀의 꿈은 흰옷을 입은 소녀들을 줄지어 행진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 려면 적어도 서른 명은 필요하였는데, 그녀는 숫자를 다 채우고 서야 집에 돌아 왔다. 그녀는 휘장을 고르고 갖가지 일을 의논하며 장례식을 지휘하는데 몰두했 다. 정원 철책에 휘장을 치고, 뾰족한 초록 잎을 막 내밀기 시작한 라일락 꽃 한 가운데 시신을 놓도록 해요. 그러면 멋질 거예요. "아이구! 내일 날씨만 좋다면!" 여러 가지 볼일을 본 다음,그날 저녁 그녀가 내 뱉은 말이었다. 싱싱하고 맑은 봄의 숨결이 끼치는 가운데 푸른 하늘과 금빛 태양이 빛나는 화창한 아침이었다. 운구는 10시로 정해져 있었다. 9시부터 휘장이 쳐졌다. 쥴리 에뜨는 인부들에게 지시하려고 내려왔다. 그녀는 나무를 완전히 가리지 않기를 바랐다. 은빛 술이 달린 흰 휘장이 라일락 나무에서 접히면서 두 짝의 철책문 사이에 현관처럼 벌어지도록 쳐졌다. 그러나 그녀는 곧 살롱으로 돌아가야 했다. 부인들을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랑장 부인의 두 방이 혼잡하지 않도록 사 람들은 그녀 집에 모였다. 단지 그녀를 언짢게 한 일은 남편이 아침에 베르사 이유로 떠나야 했던 것이었다. 미룰 수 없는 왕진이 있어서라고 그는 말했다. 그 녀는 홀로 남았고, 용케 해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베르띠에 부인이 두 딸을 데리고 맨 먼저 도착했다. "글쎄 말이에요." 드베를르 부인은 외쳤다. "앙리가 나만 놔두고 나가 버렸어요!... 참! 뤼시앵,안녕하세요 안 하니?" 뤼시앵은 검은 장갑을 끼고 완전히 장례식 준비를 하고 옆에 있었다. 그는 소 피와 블랑슈가 견진례 때처럼 하고 온 것을 보자 놀 @p 374 란 듯하였다. 비단 리본이 모슬린 드레스를 졸라매고 있었고,땅까지 끄리는 베일 은 작은 망사 비단 모자를 가리고 있었다. 두 어머니가 애기를 나누는 동안 세 어린이들은 옷 때문에 다소 뻣뻣하게 선채 서로 바라보았다. 그러자,뤼시앵이 말 했다. "쟌느가 죽었어." 아이는 마음이 아팠지만 그래도 놀란 듯 웃고 있었다. 어제부터 쟌느가 죽었 다는 생각은 아이를 고분고분하게 만들었다. 어머니가 일에 몰두해서 묻는 말에 대답을 않자,아이는 하인들에게 물었다. 사람이 죽으면 움직이지 않는거야? "그 애가 죽었어.그 애가 죽었어." 흰 베일에 싸여 발그레한 두 자매가 말을 따라 했다. "그 애를 볼 수 있을까?" 아이는 초점을 잃고 입을 벌린 채 잠시 곰곰 생각하였다. 제가 아는 것을 벗 어난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짐작해 보려는 듯 하였다. 그리고는 낮은 소리 로 말했다. "이제 볼 수 없을거야." 그 동안 다른 소녀들도 도착했다. 뤼시앵은 어머니의 눈짓에 따라서 그 애들 을 맞으러 갔다. 큰 눈에 구름같은 모슬린 옷을 입은 마르그리뜨 띠소는 어린 마리아처럼 보였다. 블론드 빛 머리카락이 작은 모자에서 빠져 나와서 베일의 흰빛과 대조되어 금핀을 꽂은 순례자처럼 보이게 했다. 다섯 명의 르바쇠르 아 가씨들이 도착하자 소리를 죽인 웃음이 퍼졌다. 그 소녀들은 선두에 있는 맏이 와 맨 꼬리에 붙어있는 막내까지 모두 비슷해서 기숙생들 같았다. 너무 부풀린 치마를 입어서 소녀들은 방한구석을 다 차지했다. 그러나 어린 기로가 나타나자 속삭임이 퍼졌다. 사람들은 웃으면서 그 애를 구경하고 뽀뽀해주려고 아이를 돌 렸다. 아이를 커다랗고 둥글게 만들고 있는 하늘하늘한 얇은 천에 덮여서,새처럼 조그만 @p 375 아이는 깃털을 부풀리고 있는 흰멧비둘기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조 차도 아이의 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살롱은 점점 눈이 내린 것처럼 되어 버렸 다. 연미복을 입은 몇 명의 소년들 만이 새까만 점처럼 서 있었다. 뤼시앵은 제 어린 파트너가 죽었기 때문에 다른 소녀를 찾고 있었다. 아이는 매우 망설였다. 아이는 쟌느처럼 저보다 키가 큰 파트너를 바라는 듯 했다. 하지만 머리카락이 눈에 띈 마르그리뜨로 정한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소녀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 다. “시신은 아직 내려오지 않았어요.” 뽈린느가 쥴리에뜨에게 말하러 왔다. 뽈린느는 무도회 준비로 법석을 떨 때처럼 정신을 빼고 있었다. 언니는 그가 흰옷을 입고 오지 않은 것을 가까스로 깨달았다. “어머나!” 쥴리에뜨는 소리쳤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니?... 내가 올라가야겠다. 부인들 하고 있어라. ” 쥴리에뜨는 칙칙한 옷을 입은 어머니들이 낮은 소리로 이야기하고,아이들은 옷을 구길까 봐 꼼짝도 못하고 있는 살롱을 급히 나섰다. 올라가서 시신을 안치 한 방에 들어서자 냉기가 확 끼쳤다. 쟌느는 손을 모은채 누워 있었다. 마르그리 뜨나 르바쇠르 딸들처럼 흰 옷과 흰 모자,흰 구두를 신고 있었다. 모자 위에 놓 인 흰 장미화환이 아이를 밑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추앙된 꼬마 숙 녀들의 여왕처럼 보이게 했다. 창문 앞에는 수자직을 이중으로 깐 참나무 관이 보석함처럼 열린 채 두 의자 위에 걸쳐 놓여 있었다. 가구들은 잘 정돈되어 있 었고 촛불이 타고 있었다. 문을 닫아 놓은 방은 어둠침침했고 오래 전부터 격리 되어 온 동굴처럼 습기가 섞인 냄새와 평화가 감돌고 있었다. 햇볕과 바깥의 밝 은 분위기로 부 @p 376 터 들어온 쥴리에뜨는 감히 재촉을 못하고 말 없이 딱 멈춰 섰다. "벌써 사람들이 많이 모였어요." 마침내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대답이 없자, 그녀는 뭔가 말하기 위해서 덧붙였다. "앙리는 베르사이유에 왕진을 가야했어요.양해해 주세요." 침대에 앉아 있던 엘렌느는 그녀를 향해 쾡한 눈을 들었다. 누구도 그녀를 이 방에서 나가게 할 수 없었다. 36시간 전부터 그녀와 함께 밤을 새워 온 랑보씨 와 주브신부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기 그대로 있었다. 끝없는 비통 속 에서 지낸 이틀 밤은 그녀를 산산이 부숴 놓았다. 그리고 끔찍한 고통 속에서 마지막 옷 입히기가 끝났다. 그 녀는 고집을 부려서 손수 죽은 아이의 발에 흰 비단신을 신겼다. 그리고는 극심한 상심으로 마비된 듯,기진맥진하여 꼼짝 않고 있었다. "꽃이 준비되었나요?" 그녀는 드베를르 부인을 쳐다보며 애를 써서 입을 열었다. "그럼요." 드베를르 부인은 대답했다. "염려마세요." 딸의 마지막 숨이 끊긴 후로 그녀는 그 걱정밖에는 하지 않았다. 꽃,탐스런 꽃 다발,새로운 사람을 볼 때마다 그녀는 불안해 했고 충분한 꽃을 얻지 못할까 봐 두려워 하는 듯했다. "장미도 있어요?"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그녀는 또 물었다. "네... 틀림없이 만족할 거예요." 그녀는 머리를 끄덕이고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장의사 일꾼들이 층 계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일을 마쳐야 했다. 술 취한 사람처럼 몸을 흔들고 있 던 랑보씨는 쥴리에뜨에게 그 가엾은 @p 377 여인을 데려가도록 도와 달라는 듯이 애원하는 눈짓을 했다. 두 사람은 가만히 엘렌느의 팔을 꼈다. 그들은 그녀를 일으켜 세워 식당으로 데려갔다. 그러나 그 녀는 왜 그러는지 알고는 격렬한 절망의 발작을 일으키며 그들을 뿌리쳤다. 그 것은 비통한 광경이었다. 그녀는 침대 앞에 무릎을 던지고 방안 가득 소란하게 반항하며 시트에 매달렷다. 쟌느는 영원한 침묵 속에 차갑게 굳어져 누운 채 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얼굴은 약간 검어 졌고 입은 뾰로통하게 앙다물고 있었다. 질투하는 딸의 용서 없고 음울한 이 마스크는 엘렌느를 미치게 만들었 다. 36시간 전부터 그녀는 회한에 얼어붙어 무덤에 들어갈 시간이 다가올수록 사나워지는 그 얼굴을 바라다 보았다. 쟌느가 마지막 순간 웃어주었다면 얼마나 위로가 될까! "안 돼요,안 돼요!" 그녀는 외쳤다. "부탁이예요. 잠깐만 내버려 두세요... 그 애를 데려갈 수 없어요. 그 애를 안아 주고 싶어요... 오! 잠깐만, 잠깐만..." 그녀는 떨리는 팔로 아이를 안고,지겨운 듯이 등을 돌리고 현관에 숨어있는 사람들에게 아이를 뺏기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입술은 차가운 얼굴을 따스하게 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쟌느가 고집을 부리고 거절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자,그녀는 저를 에워싸고 잇는 손에 몸을 맡겼다. 그녀는 식당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스무 번이나 희미한 탄식을 되풀이 했다. "하느님... 하느님..." 랑보씨와 드베를르 부인도 슬픔 때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짧은 침묵 끝에 부인이 문을 열었고,일은 끝났다. 들릴락말락한 가벼운 스침 외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미리 기름을 발라 둔 나사 못이 영원히 뚜껑을 닫아 버렸다. 방은 비었 고 흰 휘장이 관을 덮었다. @p 378 문은 열린 채로 있었고, 사람들은 엘렌느를 가만 내버려 두었다. 그녀는 다시 들어와 벽에 둘러싸여 있는 가구들을 정신잃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방금 시신 을 가져간 참이었다. 로잘리는 방금 나간 아이의 가벼운 자국까지 지우기 위해 이불을 잡아 당겼다. 그러자, 미친 사람처럼 팔을 벌리고 손을 내밀며 엘렌느는 계단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녀는 내려가려고 했으나 랑보 씨가 그녀를 붙들었다. 드베를르 부인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녀는 침착하게 굴겠 으며 매장하는 데는 따라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보도록 해주셔야 해요. 정자 안에서 조용히 있을게요. 두 사람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울었다. 그녀에게 옷을 입혀 줘야 했다. 쥴리에뜨는 검은 숄로 실내복을 가렸다. 다만 모자가 눈에 띄지 않았다. 마침내 모자를 하나 찾아내서 거기 달린 붉은 마편초 꽃다발을 잡아뜯 었다. 장례행렬을 인도해야 하는 랑보 씨가 엘렌느의 팔을 꼈다. 정원으로 내려 가자 드베를르 부인이 속삭였다. “부인을 떠나지 마세요. 저는 할 일이 많아서...” 그녀는 가버렸다. 엘렌느는 앞을 살피며 힘들게 걸었다. 밝은 햇빛 속에 나서 자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 얼마나 아름다운 아침인가! 그러나 눈길이 철 책을 똑바로 향하자 그녀는 흰 천 아래 놓인 작은 관을 곧 알아보았다. 두세 걸 음 떼어놓자 랑보 씨가 잡았다. “자, 용기를 내세요.” 스스로도 몸서리를 치면서 랑보 씨가 말했다. 그들은 바라보았다. 좁은 관이 빛에 물들고 있었다. 발치에 있는 레이스 방석 위에는 은십자가가 놓였고, 왼쪽에는 성수채가 성수반에 담겨 있었다. 커다란 초 들은 춤추듯 날아오르는 작은 정령처럼 태양에 얼룩무늬를 만들 뿐 불꽃 없이 타올랐다. 장막 아래에는 보랏빛 도는 싹이 난 나뭇가지들로 정자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 @p 379 곳은 봄이 한창이었다. 휘장이 벌어진 틈으로 넓은 띠를 이룬 금빛 먼지가 떨어 져서 관을 덮고 있는 꽃가지를 피어나게 하였다. 그곳에는 꽃사태가 난 듯하였 다. 흰 장미 다발과 흰 동백, 흰 라일락, 흰 카네이션 등 흰 꽃잎이 눈처럼 쌓여 있었다. 시신은 천에서 미끄러진 꽃송이들로 묻혀 버렸다. 바닥에는 흰 방카, 흰 히야신스가 흩어져 꽃잎을 뿌리고 있었다. 드불게 비뇌즈 가를 지나는 행인들은 놀란 듯 웃음을 머금고 어린 주검이 꽃 속에 잠들고 있는, 태양이 빛나는 정원 앞에 걸음을 멈췄다. 모든 흰색은 노래하는 듯하였으며 찬란한 순수함이 밝게 빛났다. 태양이 장막과 꽃다발과 화관을 생명의 떨림으로 따뜻하게 내리쪼였다. 장미 위에서 벌 한마리가 윙윙거렸다. “꽃이예요... 꽃이예요.” 다른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엘렌느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입을 막았다.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쟌느가 더울 것 같았 다. 그 생각은 아이를 온통 꽃으로 덮어 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으로 연약해진 마음을 더욱 무너지게 했다. 그녀는 다가가려고 했고, 랑보 씨도 더이상 만류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장막 아래는 얼마나 좋은가! 향기가 올라왔다. 미지근한 공 기가 조용히 감돌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굽혀 장미 한 송이를 골랐다. 그녀는 그것을 가슴에 꽂으려고 이리로 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이 떨려서 랑보 씨는 겁을 먹었다. “거기 계시지 마십시오.” 그는 엘렌느를 끌면서 말했다. “병이 납니다.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지요.” 살롱 문이 활짝 열렸을 때, 그는 엘렌느를 정자로 데려가려 하고 있었다. 뽈린 느가 먼저 나타났다. 그녀는 행렬을 지휘하는 일을 떠 맡았다. 어린 소녀들이 하 나씩하나씩 내려왔다. 그것은 기적과 같 @p 380 이 만발한 산사나무처럼 철 이르게 활짝 핀 꽃들이었다. 흰 드레스가 햇빛 아래 부풀어 올라 투명하게 비쳐 보였고, 백조의 날개에서처럼 흰색의 미세한 농담이 스쳐갔다. 사과나무 한 그루가 꽃잎을 흩날리고, 천사들이 떠 다녔으며, 드레스 들은 봄의 순진함 그 자체였다. 소녀들은 끊이지 않고 나와서 벌써 현관 앞 계 단을 둘러쌌다. 소녀들은 밖에서 나오자 일시에 활짝 피어나서 솜털처럼 나는 듯 사뿐사뿐 계속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정원이 온통 하얗게 되고 어린 소녀들로 느슨하게 이루어진 대열을 앞에 대하 자 엘렌느는 추억이 떠올랐다. 어린 발들이 즐거이 춤추며 돌아가던 지난 봄의 무도회가 생각났다. 허리띠에 우유병을 단 젖짜는 소녀 옷을 입은 마르그리뜨며 방울을 딸랑거리는 ‘쾌활’의 정령으로 분장한 언니 블랑쉬와 팔을 끼고 돌아 가던 말괄량이 하녀 옷을 입은 소피가 다시 눈에 보였다. 르바쇠르 다섯 딸은 까만 벨벳 띠를 두른 진홍색 수자직 작은 모자를 쓰고 ‘빨간 모자’ 차림을 했 었고, 어린 기로는 머리에 알사스 아가씨처럼 나비를 달고 저보다 두 배는 키가 큰 광대 차림 소년하고 미친 듯이 팔짝팔짝 뛰었었다. 오늘은 모두 흰 옷이었다. 쟌느도 흰 옷을 입고 흰 수자직 베개를 베고 꽃 속에 누워 있었다. 긴 팔을 찔 러 머리를 틀어 올리고 새가 수놓인 자줏빛 긴 옷을 입은 아리따운 일본 아가씨 는 흰 옷을 입고 떠나가 버렸다. “애들이 많이 컸구나!” 엘레느는 눈물을 뿌리며 중얼거렸다. 모두 거기 있는데 제 딸만 없었다. 랑보 씨는 그녀를 정자 아래 들어가게 했 다. 그러나 그녀는 문턱에 서 있었다. 행진이 시작되는 것을 보고 싶었다. 부인 들이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러 왔다. 아이들은 놀란 푸른 눈으로 그녀 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뽈리느는 주위를 돌면서 순서를 정해 주었다. 그녀는 상 @p 381 황이 상황이니만큼 목소리를 죽이고 있었으나, 가끔 그것을 잊어버렸다. “자, 말을 들어야지... 여기 봐, 이 바보, 너는 벌써 옷을 더럽혔구나. 내가 너 희들을 데리러 올게, 움직이지 마.” 영구차가 도착하였다. 떠나야 했다. 드베를르 부인이 나타나서 외쳤다. “꽃다발을 잊었어!... 뽈린느, 빨리 꽃다발 좀!” 그러자, 약간의 혼란이 일어났다. 소녀들에게는 각각 흰 장미꽃다발이 준비되 어 있었는데 그것을 나누어 주어야 했다. 애들은 신이 나서 촛불처럼 커다란 꽃 다발을 앞에 들었다. 마르그리뜨 곁을 떠나지 않고 있는 뤼시앵은 소녀가 얼굴 에 꽃을 대주자 달콤하게 냄새를 들이마셨다. 손에 꽃을 든 어린 계집아이들은 햇빛을 받으며 웃었다. 그리고는, 인부들이 영구차에 싣고 있는 관을 눈으로 좇 더니 금방 심각해졌다. “그 애가 저 안에 있어?” 소피가 아주 조그맣게 물었다. 언니 블랑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언니가 말했다. “어른들 것은 이만하다구.” 소녀는 관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아이는 팔을 최대한 넓게 벌려 보였다. 그러 나 어린 마르그리뜨는 코를 장미 속에 박고 간지럽다고 하면서 웃었다. 그러자, 다른 애들도 그걸 시험해 보기 위해 따라서 코를 박았다. 누군가 주의를 주었고 애들은 다시 얌전해졌다. 장례행렬이 밖으로 줄지어 나갔다. 비뇌즈 가 모퉁이에서 맨머리바람에 헌 신 을 신은 한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앞치맛자락으로 빰을 훔치고 있었다. 몇몇 사 람들이 창문에 붙어 있었고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조용한 거리에 들렸다. 영구 차는 은빛 술을 단 흰 휘장을 드리우고 소리 없이 굴러갔다. 다져진 땅에 부딪 히는 두 마리 @p 382 흰 말의 따그닥따그닥 발굽소리만이 둔하게 들렸다. 마차가 나르는 것은 꽃다발 과 화환더미 같았다. 관은 보이지 않았고 마차가 가볍게 덜걱거리자 쌓아 올려 진 꽃다발이 흔들거리면서, 라일락 가지가 마차 뒤에 흩뿔려졌다. 네 귀퉁이에는 흰 물결 무늬 천으로 된 긴 리본이 나부꼈다. 소피, 마르그리뜨, 르바쇠르 다섯 딸 중 하나, 어린 기로 이렇게 네 소녀가 리본을 잡았는데 어린 기로는 너무 어 려서 뒤뚱거렸기 때문에 어머니가 따라가고 있었다. 다른 소녀들은 바짝 붙어서 손에 장미 다발을 들고 영구차를 에워쌌다. 소녀들은 가만가만 걸어갔다. 베일이 나부끼고 마차바퀴는 어린 천사들의 귀여운 얼굴들이 웃고 있는 구름 위에 얹혀 진 것처럼 모슬린 사이를 굴러갔다. 뒤에는 창백한 얼굴을 수그린 랑보 씨를 따 라 부인들과 몇몇 소년들, 로잘리, 제피랭, 드베를르 부인 집 하인들이 걸어왔다. 상장을 두른 다섯 대의 빈 마차가 그 뒤를 따랐다. 햇빛이 가득한 길로 이 봄의 마차가 지나가자 흰 비둘기가 푸드득 날아 올랐다. “아유! 난감한 일이야!” 드베르를 부인은 움직이는 행렬을 보면서 말했다. “앙리는 왕진을 미뤘어야지! 내가 그렇게 얘기했건만.” 그녀는 정자 안 의자에 주저앉아 있는 엘렌느를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앙리 가 있었다면 그녀를 좀 위로해 줄 수 있었을 텐데. 남편이 없으니 딱한 일이었 다. 다행히도 오렐리 양이 그 일을 자청했다. 드베를르 부인은 슬픈 일을 좋아하 지 않았을뿐더러 아이들이 돌아올 때를 맞춰 간단한 간식을 준비시켜야 했다. 드베를르 부인은 성당으로 향하는 장렬을 따라잡으려고 빠시 가로 해서 바삐 달 려갔다. 이제 정원은 비었고 인부들이 장막을 걷고 있었다. 모래 위에 쟌느가 지나간 자리에는 흩어진 동백 꽃잎밖에는 없었다. 갑자기 적 @p 383 막과 외로움에 빠져들면서 엘렌느는 새삼 영원한 이별의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 다. 한 번만이라도 더 그 애 옆에 있었으면, 단 한번만이라도! 쟌느가 앙심을 품고 무표정한 얼굴로 화가 난 채 가버렸다는 생각이 끈질지게 떠오르면서 그녀 를 벌겋게 단 인두로 지져대었다. 오렐리 양이 옆에서 지키고 있음을 보자 그녀 는 살짝 빠져 나가서 묘지로 달려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래요, 정말 커다란 슬픔이에요.” 안락의자에 편안하게 앉아서 노처녀는 되풀이했다. “나도 애들을 좋아하지요. 특히 계집아이들을요. 하지만 이런 일을 생각하면 결혼하지 않길 잘 했어요. 마음 아픈 일을 겪지 않아도 되거든요.” 그녀는 나름대로 엘렌느를 위로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여섯 먕의 자녀를 두었으나 모두 잃어버린 한 친구 얘기를 했다. 어머니한테 손찌검을 하는 큰아 들만 하나 남아 있는 다른 부인 얘기도 했다. 그런 자식은 죽었어야 해요. 그러 면 어머니는 고생 없이 마음을 달래며 살아갈텐데. 엘렌느는 듣고 있는 척했다. 그녀는 조바심으로 몸을 한 번 떨었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좀 안정이 된 것 같구려.” 마침내 오렐리 양이 말했다. “그럼요, 늘 사리에 맞게 행동해야지요.” 일본식 정자 안에는 식당으로 통하는 문이 나 있었다. 오렐리 양은 일어서서 문을 열고 목을 내밀었다. 케이크 접시가 식탁을 덮고 있었다. 엘렌느는 잽싸게 정원으로 달아났다. 철문은 열려 있었고 장의사 인부들은 사닥다리를 나르고 있 었다. 비뇌즈 가는 왼쪽에서 레제르브와르 가와 만나고 있었는데 그리로 가면 빠시 묘지가 있었다. 거대한 버팀벽이 뮈에뜨 로에 솟아 있고, 묘지는 언덕과 트로가 데로, 거리들, 빠리 전체가 내려다보이 @p 384 는 넓은 테라스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스무 걸음쯤 가자 엘렌느는 입을 벌리고 있는 문 앞에 당도하였다. 그 뒤로는 흰 무덤과 검은 십자가들의 황량한 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들어갔다. 첫번째 길 모퉁이에 서있는 두 그루 키 큰 라 일락에는 싹이 트고 있었다. 장례식이 드물게 있기 때문에 풀들이 마구 자라 있 었으며, 푸르스름한 가운데 실편백 몇 그루가 칙칙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엘렌느는 똑바로 걸어 들어갔다. 참새떼가 짹짹거리고 무덤 파는 인부 하나가 흙을 한 삽 떠서 던진 다음 고개를 들었다. 아직 장례행렬이 도착하지 않았는지 묘지는 비어 있는 듯하였다. 그녀는 오른쪽으로 질러가서 테라스의 난간에 이르 렀다. 한 바퀴 둘러보자 아카시아 나무에 핀 꽃다발 뒤로 흰 옷을 입은 소녀들 이 눈에 띄었다.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쟌느의 시신을 내려놓은 참이었고 소녀 들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주브 신부는 팔을 내밀며 마지막으로 축복하 였다. 그녀는 구덩이를 다시 메우는 돌의 둔탁한 소리만을 들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 한편, 뽈린느가 먼저 그녀를 보았고 드베를르 부인에게 손가락질하였다. 드베 를르 부인은 화가 난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저런! 저 사람이 여기 왔네. 그러면 안 되는데, 정말 악취미야!” 그녀는 앞으로 나가서 비난의 표정을 지었다. 다른 부인들이 무슨 일인가 하 고 다가왔다. 랑보 씨는 엘렌느 옆으로 다가가 말없이 서 있었다. 그녀는 피곤 하였고 쓰러질 것 같아 아카시아 나무에 기댔다. 그녀는 온순하게 고개를 끄덕 였지만 오직 한가지 생각으로 가슴이 메일 듯하였다. 너무 늦게 왔어. 구덩이에 떨어지는 돌소리가 들렸지. 그녀의 눈은 자꾸 구덩이를 쳐다보았다. 묘지 지키는 사람이 발자국을 쓸고 있었다. “뽈린느, 애들을 지켜라.” 드베를르 부인이 말했다. @p 385 무릎을 꿇고 있던 어린 소녀들은 흰 참새들이 날아오르는 것처럼 일어섰다. 몇 명은 너무 작아서 치마가 다리에 감긴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래서, 그 애들을 일으켜 주어야 했다. 쟌느를 구덩이에 내려놓는 동안 큰 애들은 구덩 이 속을 보기 위해 고개를 뺐다. 그 속은 너무 어두웠고 아이들은 몸서리를 치 면서 창백해졌다. 소피가 아주 작은 소리로 저 속에서 몇 년이고, 몇 년이고 있 는 거라고 잘라 말했다. 밤에도? 르바쇠르 딸 중 하나가 물었다. 그래, 밤에도 계속 있는 거야. 오! 밤이 되면, 블랑쉬는 무서워 죽을 거야. 모두 도둑 이야기를 들을 때처럼 눈을 크게 뜨고 서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구덩이 주위에 흩어져 서 있게 되자 다시 발그레해졌다. 그건 정말이 아니라. 우스갯소리지. 날 씨는 너무 좋았고 키 큰 풀이 자란 정원은 아름다웠다. 이 돌 뒤에 숨어서 술래 잡기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어린 발들은 벌써 춤을 췄고 흰 드레스가 날개처럼 팔락거렸다. 침묵하고 있는 무덤들 사이로 햇빛이 한가하고 따스하게 어린 것들 을 내리쪼였다. 뤼시앵은 마르그리뜨의 베일 밑으로 손을 쑤셔 넣기에 이르렀다. 아이는 머리카락을 만져 보면서 머리카락이 그렇게 노란데 무얼 바르지 않았는 지 알아보려고 했다. 소녀는 머리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아이는 소녀에게 우리 결혼하자 하고 말했다. 마르그리뜨도 그러고 싶었지만 남자애가 머리를 잡아당 기지나 않을까 겁이 났다. 아이는 계속 머리카락을 만졌다. 그것은 편지지처럼 부드러웠다. “멀리들 가지 말아라.” 뽈린느가 소리쳤다. “좋아! 이제 가자꾸나.” 드베를르 부인이 말했다. “이제 할 일이 없어. 애들이 배가 고플거야.” 소풍나온 기숙생들처럼 흩어져 있는 소녀들을 불러 모아야 했 @p 386 다. 아이들을 세어 보니 어린 기로가 없었다. 마침내, 오솔길 저 끝에서 어머니 의 양산을 받고 심각하게 산책을 하고 있는 아이를 발견하였다. 부인들은 흰 드 레스의 물결을 앞세우고 문쪽으로 향했다. 베르띠에 부인은 뽈린느에게 다음 달 로 날이 정해진 혼인을 축하했다. 드벨를르 부인은 남편과 함께 뤼시앵을 데리 고 사흘 예정으로 나폴리로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몰려 나갔다. 제피 랭과 로잘리가 맨 뒤에 남았다. 그들도 멀어져 갔다. 그들은 매우 마음이 아팠 지만 팔을 끼고 황홀한 기분으로 산책하였다. 느릿느릿 걸음을 떼어 놓으면서, 길 모퉁이에 이르자 밝은 빛 속에서 한순간 두 여인의 등이 춤추듯 으쓱거렸다. “가시지요.” 랑보 씨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엘렌느는 손짓으로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다. 이제 그녀 홀로 남았고 인생의 한 페이지가 뜯겨져 나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마지막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자 고통스럽게 구덩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주브 신부도 아직 일어서지 않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기도하였다. 그리고 신부는 아무 말 없이 자애와 용서를 담은 아름다운 눈으로 그녀가 일어서는 걸 도와 주었다. “부인을 부축해 드리게.” 그는 랑보 씨에게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빠리는 화창한 아침 봄볕 아래 지평선이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묘지에서 방울새 한 마리가 노래했다. 5 2년이 흘렸다. 12월 아침, 작은 묘지는 매서운 추위 속에 잠들어 있었다. @P 387 어제부터 북풍이 불어 가는 눈발을 뿌렸다. 뿌옇게 된 하늘에서 가끔씩 눈송 이가 깃털처럼 가볍게 날아서 떨어졌다. 눈은 벌써 굳어 가고 있었고, 테라스 난 간에도 백조 목털 같은 눈이 쌓였다. 이 흰 선 너머에도 백조 목털 같은 눈이 쌓였다. 이 흰 선 너머에는 안개낀 듯 창백한 지평선까지 빠리가 펼쳐져 있었다. 랑보 부인은 쟌느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아직도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 녀의 남편은 방금 말없이 일어섰다. 두 사람은 11월에 마르세이유에서 결혼하였 다. 랑보 씨는 레알에 있는 집을 팔았는데 매매를 마무리짓기 위해 사흘 전부터 빠리에 와 있었다. 레제르브와르 가에 대기 중인 마차는 호텔에 가서 짐을 실은 후, 기차역으로 그들을 데려가기로 되어 있었다. 엘렌느는 여기 와서 무릎을 꿇 어야겠다는 일념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녀는 무릎을 얼게 만드는 바닥의 냉기를 느끼지 못하는 듯 고개를 수그리고 가만히 있었다. 그동안 바람이 그쳤다. 랑보 씨는 그녀가 조용히 고통스런 추억에 잠길 수 있 도록 테라스로 나섰다. 저 먼 빠리에서 안개가 피어올랐다. 거대한 빠리는 희미 하고 창백한 구름 속에 가라앉았다. 트로까데로 언덕 기슭에 보이는 납빛 도시 는 느릿느릿 떨어지고 있는 그쳐 가는 눈발 아래 죽은 것 같았다. 바람은 점점 자고, 도시는 감지할 수 없게 계속 명멸하는, 어두운 바탕의 창백한 점으로 보였 다. 마뉘떵따시옹 굴뚝의 벽돌 탑은 오래 된 구릿빛을 띠었고 그 너머로 흰빛이 끝없이 펼쳐지며 두꺼워져서 나부끼는 얇은 천을 겹겹이 펼쳐 놓은 듯하였다. 공중에서 마술에 걸려 잠든 채 흔들흔들 떨어지는 꿈의 비 속에서 숨쉬는 것이 라곤 하나도 없었다. 눈송이는 지붕이 가까워지면 나는 걸 늦추는 듯하였다. 눈 송이는 하나씩하나씩 끝도 없이 수도 없이, 휘날리는 꽃잎보다도 조용하게 쌓였 다. 발자국 소리도 없이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이 무리들로부터 @P 388 대지도 생명도 망각해 버리는 절대적인 평화가 왔다. 하늘은 아직도 연기가 일 렁이는 우윳빛으로 여기저기 동시에 점점 밝아졌다. 조금씩 반짝이는 집들의 작 은 섬이 솟아나고, 도시는 거리와 광장으로 분할된 조감도처럼 드러났다. 그 단 면과 음영이 각 구역의 거대한 뼈대를 그려 내고 있었다. 엘렌느는 천천히 일어섰다. 바닥의 눈 위에 그녀의 두 무릎 자국이 남아 있었 다. 가장자리를 털로 댄 짙은 색 넓은 코트로 몸을 감싼 그녀는 온통 흰색을 배 경으로 당당한 어깨를 하고 훤칠해 보였다. 모자에 달린 검은 벨벳을 꼬아 만든 리본 장식이 이마 위에 왕관 모양의 그늘을 드리웠다. 그녀는 아름다운 고요한 얼굴을 되찾고 있었다. 잿빛 눈과 흰 이, 다소 엑센 둥근 턱은 그녀에게 분별있 고 확고한 인상을 주었다.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옆 모습은 다시금 조각의 엄격 한 순수함을 띠었다. 더운 피는 창백한 기운이 어린 볼 속에 잠들어 있었다. 원 래의 정숙하고 고상한 생활로 돌아갔음이 느껴졌다. 두 줄기 눈물이 눈꺼풀에서 흘러내렸다. 그녀의 차분함은 지나간 고통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녀는 무덤 앞에 서 있었다. 쟌느의 이름과 그 밑에는 열두 살 어린 주검의 짧은 생애를 말 해 주는 두 개의 날짜가 새겨진 단순한 기둥이 있었다. 주위에는 묘지가 시트의 흰빛으로 펼쳐져 있었다. 헐어빠진 무덤 모서리며 상 복을 입은 팔과 흡사한 철십자가가 그 시트에 구멍을 뚫어 놓았다. 엘렌느와 랑 보 씨의 발자국만이 이 버려진 구석에 한 줄기 나 있었다. 주검들이 티끌 하나 없는 완전한 고독 속에 잠들어 있는 곳이었다. 오솔길에는 나무들이 가벼운 환 영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끔 가지에 너무 많이 쌓인 눈더미가 소리 없이 떨어질 뿐 움직이는 것은 없었다. 반대편 끝은 검게 짓밟혀 뭉개져 있었다. 이렇게 눈이 쌓였는데도 장례식이 있는 모양이었다. 두 번째 장례행렬이 왼쪽에서 왔다. 관과 행렬이 창백한 목면 위를 도려 낸 @P 389 그림자처럼 말없이 지나갔다. 엘렌느는 제 옆에서 다리는 끄는 거지를 보고 몽상에서 깨어났다. 그 사람은 페띠 할멈이었다. 터져서 끈으로 얽어맨 커다란 남자 구두에는 눈이 묵직하게 붙어 있었다. 엘렌느는 할멈이 이렇게 처참한 몰골로 떨고 있는 걸 본 적이 없 었다. 할멈은 한층 더러운 누더기를 걸치고 아직도 비게살이 붙은 채 멍청한 얼 굴을 하고 있었다. 서리가 내리고 비가 몰아치는 궂은 계절이 오자 할멈은 너그 러운 사람들의 동정에 기대를 걸고 장례행렬을 따라다녔다. 묘지에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종전을 내밀게 함을 할멈은 랑았다. 그녀는 무덤들을 찾아다니 며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들이 눈물을 떨굴때 다가갔다. 그러면 그들은 거절하 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 두 번째 장례행렬을 따라 들어온 노파는 멀리서 엘렌느늘 엿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엘렌느늘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눈물을 찔끔 거리면서 손을 내밀고 집에서 두 아이가 배고파 죽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엘렌 느는 이 유령 앞에서 말없이 듣고 있었다. 애들은 불도 없는 방에 있어요. 큰애 는 가슴앓이로 가 버렸더요. 갑자기 페띠 할멈이 말을 멈추었다. 얼굴에 잡힌 쪼 글쪼글한 주름살 속을 무언가 스치고 지나갔ㄷ다. 가느다란 눈이 깜박거렸다. 어 머나! 부인이군요!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 주셨나 봐요! 할멈은 아이들 얘기를 바 로잡지도 않고 끊임없이 홍수처럼 지껄이며 신세타령을 시작했다. 이가 더 많이 빠져서 그녀의 얘기는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신이 만든 모든 비참이 제 머리에 떨어졌어요. 저는 겨우 석 달 정도 그 집에 있었을 뿐인데 신사분은 저 를 해고하셨답니다. 그래요, 뭔가 늘 붙어다니고 지금도 여기저기 스믈거려요. 옆집 여자는 자는 동안 입으로 거미가 들어간 게 틀림없다고 합니다. 불만 좀 있으면 배를 따스하게 할 수 있을 텐데. 낙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어요. 그런데 정 말 아무것도, 성냥 그트머리 하나 없어요. 부인은 @P 390 여행을 다녀오셨나 보지요? 뭐 일이 있었겠지요. 어쨌든 아주 건강하고 생기 있 고 아름다우시군요. 하느님께서 복을 내리실 거예요. 엘렌느가 지갑을 꺼내자, 페띠 할멈을 쟌느의 무덤 철택에 기대어 숨을 돌렸다. 장례행렬은 사라졌다. 어디선지 가까운 구덩이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무덤파는 인부가 곡괭이를 내리치는 규칙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노파는 지갑에서 눈을 떼지 않고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동냥을 더 받으려고 아첨을 하면서 또 한 부인에 대해 얘기했다. 그 부인은 너그러운 분이라고는 할 수 없어요. 그럼 요!그 부인은 줄 줄을 몰라서 돈이 쓸모가 없어요. 이 말을 하면서 노파는 조심 스럽게 엘렌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대담하게도 의사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아! 그 의사 선생은 정말 훌융하고도 훌륭한 분이에요. 지난 여름, 그 분은 부인 과 함께 또 여행을 했어요. 아드님도 많이 자랐어요. 잘 생긴 어린애지요. 그러 나 지갑을 여는 엘렌느의 손가락이 떨리자 페띠 할멈은 갑자기 목소리를 바꾸었 다. 어리벙벙하고 질겁을 한 노파는 그 부인이 딸의 무덤 옆에 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녀는 더듬거리고 한숨을 쉬면서 부인에게 눈물을 자아내 려고 애섰다. 아주 착한 귀염둥이였지요. 흰 동전을 내미는 사랑스러운 작은 손 이 아직도 눈에 선할 걸요. 머리카락이 아주 길었지요. 커다란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불쌍한 사람을 바라보곤 했는데! 아!그런 천사는 다시 없을 거예요. 온 빠 시를 다 찾아봐도 그런 애는 없어요. 날이 좋아지면 일요일마다 방둑에서 따모 든 데이지 꽃다발을 가져오겠어요. 그녀는 엘렌느가 말을 막으려는 몸짓을 하자 불안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한 걸까? 그 착한 부인은 울지 않았다. 20수짜리 동전을 내밀었을 뿐이었다. 한편, 랑보 씨는 테라스 난간에 다가서 있었다. 에렌느는 그에게로 @P 391 갔다. 랑보 씨를 보자 페띠 할멈의 눈이 갑자기 빛났다. 그녀는 랑보 씨를 알지 못했다. 이 사람은 새 애인이 틀림없어. 노파는 모든 덕담을 외치면서 발을 질질 끌고 엘렌느의 뒤를 따라갔다. 랑보씨 옆에 이르자 노파는 다시 의사 얘기를 끄 집어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면 멋진 장례식이 치러질 거예요. 그분께서 거저 치 료해 준 가난뱅이들이 시신을 뒤따를 테지요! 그런데 그분은 좀 한량이에요. 아 무도 아니라고는 못할 걸요. 빠시의 부인들은 선생님을 잘 알지요. 하지만 그렇 다구 아내를 사랑하는데 문제될 게 있겠어요. 정말 상냥한 부인이라 사이가 나 빠질 수도 있었겠지만 그냥 넘어가고 말았지요. 정밀 비둘기 같은 부부예요. 부 인께서는 그분들께 인사를 하셨어요? 그분들은 댁에 계실 거예요. 방금 비뇌즈 가에서 덧창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거든요. 그분들은 전에 부인을 참 좋아하셨 지요. 부인을 만나면 얼마나 기뻐하시겠어요? 마지막 문장들을 우물거리며 노파 는 랑보 씨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점잖은 사람답게 조용히 그 말을 듣고 있었 다. 제 앞에서 옛날 기억을 들쑤시는 데도도 그의 평화로운 얼굴에는 그림자조 차 스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이 악착스러운 거지가 엘렌느를 귀찮게 한다는 생 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그가 주머니를 뒤져서 동냥을 주며 저리로 가라는 몸짓 을 했다. 두 번째 흰 동전을 보자 페띠 할멈은 감사를 연발했다. 장작을 좀 사서 아픈 데를 따뜻하게 할 수 있겠군요. 뱃속을 가라앉히는 데는 그것밖에는 없어 요. 그래요, 정말 비둘기 같은 부부예요. 지난 겨울, 부인이 두 번째 아기를 낳은 것만 봐도 그게 확실하지요. 세례식 날, 성당 문에서 의사 선생님은 100수를 제 게 주셨지요. 아! 좋은 분들끼리는 서로 만난다니까요. 여기 계신 부인께서 그분 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신 거예요. 부디 부인께서 상심하시지 않도록 하세요. 부 인을 호강시켜 드리시구요. 성부자 성자와 성신 @P 392 의 이름으로 아멘! 페띠 할멈이 주기도문과 성모경을 세 번씩 중얼중얼 외우면서 무덤 사이로 사 라지는 동안 엘렌느는 빠리를 마주하고 똑바로 서 있었다. 눈이 그치고 마지막 눈송이가 지친 듯 천천히 지붕 위에 내려앉았다. 흩어지고 있는 안개 뒤로 회식 진주 같은 광대한 하늘에 금빛 도는 태양이 해맑은 장밋빛으로 빛났다. 몽마르 트르 위에는 깨끗이 씩기고 부드러워서 흰 수자직 그늘 같은 푸르스름한 지평선 에 한 줄의 푸른 테두리가 둘려져 있었다. 빠리는 안개를 헤치고 나와, 확 트인 눈 덮인 벌판을 드러냈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죽음 속에 빠리를 가두려고 몰 려 왔다가 패되한 군대였다. 이제 날아다니는 반점들은 도시를 깜박거리게 하지 않았고, 그 창백한 파동만이 녹슨 듯한 건물 정면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흰 덩어 리 속에 잠들어 있는 집들은 수세기 동안의 습기로 곰팡이가 슨 것처럼 까맣게 도드라져 보였다. 거리 전체가 초석으로 뒤덮여 파괴된 것같이 보였다. 지붕은 휘어져 있고, 창문은 벌써 부숴졌다. 석고로 덮힌 사각형처럼 보이는 광장에는 오만가지 잔해가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몽마르트르 쪽의 푸른 테두리가 넓어 지면서, 밝은 빛이 샘물처럼 투명하고 차갑게 흘렀다. 빠리는 거울 아래 놓인 듯, 원경이 동양화 같은 산뜻함을 띠었다. 털코트의 소맷부리에 손을 넣고 엘렌느는 생각에 잠겼다. 단 한가지 생각만이 마음 속에서 메아리처럼 울렸다. 그들이 아이를 가졌다지? 장미빛 오동통한 계 집아이를. 쟌느가 말을 시작하던 무렵의 깜찍한 모습이 떠올랐다. 14개월 된 여 자애들이란 정말 귀엽지! 그녀는 달수를 세어 보았다. 14개월이면 아이를 가진 게 어림잡아 2년 전쯤 되었겠군. 바로 그 때거나 보름쯤 후거나. 그러자, 햇빛이 비치는 이탈리아가 떠올랐다. 향기로운 밤에 연인들이 허리에 팔을 감고 어디론 지 사라지는 곳, 황금빛 과실이 열리는 이상향, @P 393 앙리와 쥴리에뜨가 밝은 달빛을 받으며, 저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연인으로 되돌아간 듯 서로 사랑했을거야. 장밋빛 오동통한 계집아이의 맨살이 햇빛을 받아 웃음짓고, 아이가 옹알이를 하려고 애쓰면 어머니는 키스로 아이를 덮었겠지! 그녀는 화도 내지 않고 별 느낌도 없이 그런 것들을 생각하였다. 슬픔 속에 고요함이 번져 갔다. 태양의 나라가 사라지고, 그녀의 시선은 빠리를 천천 천히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겨울은 빠리의 거대한 몸체를 뻣뻣하게 해 놓았다. 거대한 대리석상은 지고의 평화를 간직한 채 차갑게 누워 있었고, 해묵은 고통 으로 더 이상 감각이 없어진 지친 팔다리를 하고 있었다. 빵떼옹 위로 푸른 구 멍이 뚫렸다. 그녀의 추억은 여러 날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녀는 마르세이유에서 일종의 마 비 상태에 빠져 있었다. 어느날 아침, 쁘띠뜨 마리가를 지나가다가 어린 시절의 집 앞에서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운 기억이었다. 랑보 씨는 자주 들렀다. 그녀는 그를 주위에 쳐진 보호벽처럼 느꼈다. 그는 아무것도 요구 하지 않았고, 절대 속마음을 열어 보이지 않았다. 가을 무렵 어느날 저녁, 그녀 는 랑보 씨가 커다란 슬픔에 짓눌려 눈자위가 빨개져 가지고 들어오는 것을 보 았다. 형님인 주브 신부가 돌아가신 것이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그를 위로해 주 었다. 그리고는 분명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신부는 끊임없이 두 사람 뒤에 있 는 것 같았고, 그녀는 체념으로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랑보 씨에게 양보했다. 그 가 다시 얘기를 끄집어 냈을 때, 그녀는 거절할 이유를 발견할 수 없었다. 승낙 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겨졌다. 상을 마치자 그녀 쪽에서 랑보 씨와 세부적인 일을 확실하게 정하였다. 오랜 친구의 손은 주체할 수 없는 애정으로 떨렸다. 그 녀가 하자는 대로 그는 몇 달을 기다렸다. 그에게는 의사표시만으로도 충분하였 다. 두 사람은 검은 옷을 입고 결혼하였다. 혼인식 날 밤, 그 역시 벗은 발에 키 스하였다. @P 394 조각 같은 그녀의 발은 다시 대리석처럼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생활이 펼쳐졌 다. 푸른 하늘이 지평선까지 퍼져 가는 동안, 기억이 살아나면서 엘렌느는 놀랍다 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1년 동안 미쳤던 걸까? 지금와서 비뇌즈 가의 방에서 3 년 가까이 살던 그 여인을 돌이켜보니 낯선 사람처럼 여겨졌다. 그 여인의 행동 은 경멸감과 놀라움을 느끼게 했다. 미친 짓이었어. 맹목적이고 추악한 짓이었 어! 하지만 그녀가 그런 일을 불러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한 구석에 숨어서 딸을 애지중지하며 조용히 살고 있었다. 앞에는 신기할 것도, 욕망도 없는 길이 뻗어 있었다. 바람이 한 번 불자 그녀는 땅에 넘어졌다. 지금도 그녀는 스스로 해명하지 못했다. 자기라는 존재가 자신에게 혹하지 않고 어떤 타인처럼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럴 수가 있다니? 내가 그런 짓을 하다니!오싹한 추위가 그녀 를 얼어 붙게 했다. 쟌느는 장미꽃에 덮여 가 버렸다. 고통으로 마비되어 그녀는 다시금 욕망도, 호기심도 없이 똑바로 난 길을 천천히 걸어가면서 차분함을 되 찾았다. 그녀의 삶은 정숙한 여인의 자존심과 엄격한 평화를 회복하였다. 랑보씨는 한 걸음 내디뎠다. 이 슬픈 장소에서 아내를 데려가고 싶었다. 그러 나 몸짓으로 엘렌느는 잠시 더 머물고 싶다는 의사사를 표시했다. 그녀는 난간 에 다가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뮈에뜨로의 마차 대기소에는 오래 되어 낡아 빠진 차체들이 꼬리를 물고 보도가에 줄지어 있었다. 허옇게 된 바퀴와 뚜껑, 더 떼가 앉은 말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거기에서 썩어 가고 있는 듯하였다. 마부들 은 서리가 앉은 외투 속에 뻣뻣하게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눈위로 마차 몇 대가 하나씩하나씩 힘들게 전진하였다. 짐승들은 미끄러지면서 목을 빼어 물었 고, 사람들은 자리에서 내려와 욕지거리를 하며 고삐를 잡았다. 유리창 뒤로는 10분 거리를 45분에 가는 @P 395 이골이 난 승객들이 참을성 있게 고개를 쿠션에 기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솜처 럼 쌓인 눈이 시끄러운 소리를 흡수하고 있었다. 목소리만이 얼어 붙은 것처럼 이상하게 명료한 울림을 지니며 죽은 듯이 조용한 거리에서 올라왔다. 외쳐 부 르는 소리, 빙판에 미끄러져 놀라는 사람들의 웃음, 채찍을 휘두르는 짐마차꾼의 고함, 두려움으로 씩씩거리는 말의 콧바람 소리들이. 오른편 저 멀리에는 나루의 키 큰 나무들이 멋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나무들은 유리세공품이라고 할 만 했는데, 예술가다운 변덕에서 꽃송이가 꽃힌 팔을 비틀어 놓은 거대한 베니스제 촛대 같았다. 북쪽 면은 바람이 나무둥치를 기둥처럼 바꾸어 놓았다. 높은 데에 는 흰 선으로 테두리를 다른 까만 잔가지들의 섬세한 윤곽이 깃털 장식들, 솜털 로 덮힌 잔가지들과 헝클어져 있었다. 날씨는 얼어 붙었고 투명한 공기 속에는 한 줄기 온김도 지나가지 않았다. 엘렌느는 앙리가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년 동안 그녀는 그를 거 의 매일 보다시피 했다. 몇 시간씩 바싹 붙어 앉아 눈을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그를 알지 못했다. 어느날 저녁, 그녀는 몸을 내맡겼고, 그는 그녀를 안았다. 그래도 그녀는 그를 알지 못했다. 그녀는 알지도 못하면서 무진 애를 썼다. 그는 어디서 왔을까? 어떻게 그가 내 옆에 있게 되었을까? 외 간 남자에게 굴복하느니보다 차라리 죽어 버렸을 그녀가 굴복한 그 사람은 어떤 남자인가? 그녀는 그를 몰랐다. 현기증이 일어나 사리 분별을 흔들리게 했다. 마 지막 순간에도 맨 첫날처럼 그는 낯선 사람으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흩어진 작은 것들, 그의 말이며 그의 행동이며 그를 연상케 하는 모든 것들을 헛되어 주워 모았다. 그는 아내와 아이를 사랑하였고, 섬세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으 며, 교육을 잘 받은 사람답게 단정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자, 그의 타는 듯한 얼굴과 욕망으로 떨리는 손이 떠올랐다. 시간이 흘러 @P 396 그는 사라져 가 버렸다. 이제 그녀는 맨 처음 어디에서 그에세 말을 했던가 알 지 못했다. 그는 가 버렸고 그의 그림자도 함께 가 버렸다. 그들의 이야기는 다 른 결말이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것을 몰랐었다. 도시 위에는 티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펼쳐졌다. 엘렌느는 추억이 싫증나 고개를 들었다. 깨끗한 하늘이 기분좋았다. 그것은 투명하고 아주 창백한 푸른 빛, 햇빛이 환한 가운데 살짝 감도는 푸른 빛이었다. 지평선 위에 낮게 걸린 별 이 은제 램프처럼 반짝 빛났다. 그것은 눈의 반사를 받아 얼어 붙은 공중에서 온기 없이 타올랐다. 아래쪽에는 넓은 지붕들이며 마뉘떵따시옹의 기와며 강변 에 서 있는 집들의 판암이 검정색 단을 덧댄 흰 이불보를 널어 놓은 듯하였다. 강 저편에는 샹 드 마르스 광장이 초원처럼 펼쳐졌고 그곳에 보이는 칙칙한 점 들과 한가로운 마차들은 방울소리와 함께 줄지어 가는 러시아의 썰매를 생각나 게 했다. 한편, 멀어서 조그마해 보이는 오르세 나루의 느릅나무는 바늘이 비죽 비죽 솟고 섬세한 수정 꽃이 만발한 채 줄지어 있었다. 이 움직이지 않는 얼음 바다 가운데, 흰 담비털을 두른 강둑 사이로 세느 강의 흙탕물이 흘러가고 있었 다. 어제부터 강에 얼음이 떠내려왔다. 얼음덩어리가 앵발리드 교각에 부딪쳐 으 스러지면서 아치 아래로 휩쓸려 들어가는 것이 분명히 보였다. 다리들은 하얀 레이스처럼 가늘어지면서, 노트르 담의 탑이 눈덮힌 꼭대기를 삐죽 드러내고 있 는 시떼 섬의 반짝이는 바위까지 층을 이루었다. 왼쪽에도 뾰족한 것들이 고르 지게 평평한 지역에 솟아 있었다. 생 또귀스땡, 오페라, 생 자끄 탑은 만년설을 이고 있는 산봉우리 같았고, 훨씬 가까이에 새 건물을 잇대어 지은 뛸르리 궁와 루브르 궁의 별채들은 사슬처럼 때묻지 않은 정상의 산마루를 이루었다. 오른쪽 에는 또 앵발리드와 생 쉴삐스, 빵떼옹의 하얀 봉우리가 있었다. 멀치감치 있는 빵떼옹은 @P 397 짙푸른 하늘 위로 솟아 푸르스름한 대리석 빛을 띠면서 꿈의 궁전 같은 윤곽을 드러냈다. 목소리도 올라가지 않았다. 거리는 갈라진 회색 틈으로 보였고, 네거 리는 와지끈 균열이 일어난 것 같았다. 줄지어 있는 집들은 사라져 버렸다. 오직 가까운 데 있는 건물의 정면에서는 창문이 수천 개의 가느다란 줄처럼 눈에 들 어왔다. 새하얀 천조각들이 뒤섞이면서 환하게 빛나는 먼 곳, 푸른 그림자가 푸 른 하늘로 이어지는 호수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빠리는 꽝꽝 얼어 붙어서 드넓 고 맑게 은빛 태양 아래 빛나고 있었다. 엘렌느는 마지막으로 냉정한 도시를 감싸듯 응시하였다. 이 도시 역시 그녀에 게는 미지의 것으로 남아 있었다. 이곳을 떠날 때처럼, 3년 동안 매일 바라보던 때처럼, 도시는 눈 속에서 고요하게 불멸의 모습을 지니고 있음을 그녀는 다시 발견하였다. 빠리는 그녀의 과거로 가득 찬 곳이었다. 빠리와 함께 그녀는 사랑 하였고, 빠리와 함께 쟌느는 죽었다. 그러나 지난 날들을 같이했던 이 친구는 측 은한 표정도 없이 거대한 얼굴에 고요함을 띠고 있었다. 그 얼굴은 세느 강 물 결이 실어 가는 눈물과 웃음의 말없는 증인이었다. 그것은 때로는 사나운 괴물 로, 때로는 선량한 거인으로 생각되었다. 오늘, 그녀는 너르고 무심한 이 도시가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임을 느꼈다. 그것은 그냥 펼쳐져 있었다. 그것이 인생이었 다. 한편, 랑보씨는 그녀를 데려가려고 가볍게 건드렸다. 그의 선량한 얼굴은 걱정 스런 빛을 띠고 있었다. 그는 중얼거렸다. “괴로워하지 말아요.”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랑보 부인은 그를 보 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녀의 얼굴은 추위로 발그레했고 눈은 맑았다. 그녀는 이미 멀리 있었고, 인생은 다시 시작되었다. “큰 짐을 잘 꾸렸는지 모르겠네요.” @P 398 그녀가 말했다. 랑보 씨는 확인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기차는 정오에 떠날 것이고 그들은 시 간이 있었다. 사람들이 길에 모래를 뿌리고 있었다. 마차는 한 시간도 걸리지 않 을 것이다. 문득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은 낚싯대를 잊고 있는 게 분명하오!” “아! 정말 그렇군요!” 그녀는 그걸 잊은 데 놀라고 안타까워서 소리쳤다. “어제 그걸 사러 갔어요.” 그것은 아주 평범한 낚싯대였으나 그런 모델은 마르세이유에서는 팔지 않았 다. 그들은 바닷가에 작은 시골집을 갖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여름을 지내 기로 되어 있었다. 랑보 씨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역으로 가는 길에 낚싯대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을 우산과 함께 묶어 놓으리라. 그는 무덤 사이를 가로 질러 바쁜 걸음으로 그녀와 함께 걸어갔다. 묘지는 텅 비었고 눈 위에는 그들의 발자국만이 남았다. 쟌느는 죽어서, 영원히 빠리를 바라보며 홀로 남았다. @P 399 작가 소개 1840년(4월 2일) : 베니스 출신의 토목기사인 프랑수아 졸라(Framcois Zola)와 ' 에밀리 오베르(Enukue Aubert)의 아들로 빠리에서 태어남. 1843년 : 부친이 액상 프로방스(Aix-en-Provence)의 운하와 댐 공사를 맡게 되 어 가족들이 엑스로 이주 1947년 : 부친의 죽음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부딪히게 됨. 1852년~1858년 : 엑스의 부르봉 중학교(College Bourbon)에 다님 한 해 위인 세 잔느(Cezanne)와 친교를 맺음. 1858년(2월) : 장학금을 받아서 고등학교에 갈 수 있게 되어 가족들과 다시 빠리 로 이주. 1858년~1859년 : 생 루이 고등학교(Lycee Saint-Louis)에서 수학. 이과대학 입학 자격시험에 연달아 두 번 실패. 1859년~1861년 : 불안하고 절망에 빠져 있던 시기로 일시적인 직업들을 전전. 1862년 : 아쉐뜨(Hachette)출판사에 취직, 광고 업무를 맡게 됨. 문인, 기자들과 교류를 맺음. 1864년 : 첫번째 작품인 단편집 「니농에게 주는 이야기」(Contes a Ninon)를 발표. 가브리엘-알렉상드린느 멜리(Gabrielle-Alexandrine Meley)라는 여성을 만 나 1870년 결혼 1865년 : 아쉐뜨 출판사를 떠나, 「쁘띠 주르날」(Petit Journal)의 통신원으로 기 자생활 시작 1867년 : 「떼레즈 라껭」(Therese Raquin) 1868년 : 「루공-마까르」(Rougon-Macquart)총서를 구상. 1871년~1876년 : 총서 제 1권 「루공 가의 행운」(La Fortune des Rougon)을 출간. 잇달아 이전투구」(La Curee)(총서 2:1872년), 「빠리의 배속」(Le Ventre de Paris)(총서 3:1873년),「쁠라상의 정복」(La Conquete de Plassans)(총서 4:1874년), 무레 신부의 잘못」(La Faute de l'abbe Mouret)(총서 5:1875년), 「외젠느 루공 각하」(Son Excellence Eugene Rougon)(총서 6:1876sus)를 발표. 1876년 : 「목로주점」(L'Assommoir)(총서 7) 연재 시작. 대담하고 적나라한 묘 사로 물의를 일으킴. 1878년 : 「사랑의 한페이지」(Une page d'amour)(총서 8) 1880년 : 「나나」(Nana)(총서 9). 모빠상(Maupassant), 위스먼스(Huysmans)등 젊은 작가들과 함께 자연주의 작품집 「메당의 밤」(Les Soirees de Medan)을 발표.「실험소설론」Le Roman experimental)을 발표하여 자연주의의 기치를 내걸음. 1882년~188년 : 「살림」(Pot-Bouille)(총서 10:1882년), 「부인들의 행복」(Au bonheur des dames)(총서 11: 1883년),「삶의 기쁨」(La Joie de vivre)(총서 12:1884년),「제르미날」(Germinal)(총서 13:1885년) 1886년 : 「작품」(L'OEuver)(총서 14).세잔느와의 결별 1887년 : 「토지」(La Terre)(총서 15)연재 시작.다섯 명의 젊은 작가들이「르 피가로」(Le Figaro)지에 졸라와 「토지」를 비난하는 선언문을 발표함. 1888년 : 두 번째 부인이 될 쟌느 로즈로(Jeanne Rozerot)와 만남. 꿈」(Le Reve)(총서 16) 1889년 : 쟌느 로즈로와의 사이에서 딸 드니즈(Denise)태어남. 1890년 : 「금수 같은 인간」(La Bete humaine)(총서 17) 1891년 : 「돈」(L'Argent)(총서 18). 아들 쟈크(Jacques)태어남. 1892년 : 「와해」(La debacle)(총서 19) 1893년 : 루공-마까르 총서의 마지막 작품인 「빠스깔 의사」(Le Docteur Pascal)(총서20) 1897년 ~ 1898년 : 국가 기밀 누설죄로 사형언도를 받은 드레퓌스(Dreyfus)의 무 고함을 믿은 졸라는 그를 옹호하는 글들을 언론에 게재. 이로서 1898년 2월, 3000프랑의 벌금과 1년형을 언도받음. 그 해 7월, 두 번째 유죄 선고를 받고 영 국에 망명 1899년(6월) : 드레퓌스의 사면과 함께 프랑스에 돌아옴. 1902년(9월 29일) : 빠리의 아파트에서 의문의 질식사. 시신은 몽마르트르 (Montmartre)묘지에 매장되었다가 1908년 빵떼옹(Partheon)으로 옮겨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