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내려다본다 2 지은이 : A.J. 크로닌 출판사 : 성바오로출판사 11 더비 징병 제도가 실시되자 아서와 배러스 사이는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그들은 이제 서로의 적대 감정을 감출 수 없게 되었다.아서의 이름이 징병 등록부에 실렸고 신 징병 제도에 의한 서류도 받았다.그러나 그는 징병에 응하겠다는 선서를 하지 않았다.그리고 선서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당장 어떤 소동이 일어나지도 않았다.그는 식사 때마다 집에 늦게 들어옴으로 해서 가능한 한,배러스를 피하였다.넵튠 탄광에서도 대부분의 시간을 지하에서 보냈고 아침에도 일찍 현장에 도착하여 배러스가 탄광에 나오기 전에 허즈페드와 함께 갱내로 들러가 버리곤 했다.그러나 이렇게 미리 조심을 한다 해도 우연히 만나게 되는 것까지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그럴 때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증오와 긴장이 흘렀다.아서가 하루 일이 끝내고 탄가루투성이가된 지친 몸으로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배러스는 거게에서 일을 하고 있는 때가 많았다.그러나 그때마다 배러스는 모르는 체하며 일에만 분주한 척함으로써 아서가 이 탄광에서는 거의 필요없는 존재라는 것을 똑똑히 깨닫도록 하는 것이었다.어쩌다가 산더미 같은 서류에서 머리를 치켜들고 아서를 바라보는 때도 있지만 상을 찌푸리고 '왜 가지 않고 아직도 거기 있느냐?' 하는 듯한 표정을 보일 뿐이었다.아서가 이런 아버지를 완전히 무시하듯 말없이 돌아서 버리면 배러스는 모욕을 느낀 것이 분명한 얼굴이 되어 불쾌한 기분을 억지로 누르는 듯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를 두드리는 것이었다. 아서는 자기가 탄광에 출입하는 것을 아버지가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정월 초순경 제5구층의 갱목을 새것으로 바꾸어야 했을 때,너무 질이 나쁜 것을 사용하므로 그는 하는 수 없이 잔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배러스는 금세 화를 냈다. "넌 네 일이나 하고 광산 걱정은 내게 맡겨.네 충고가 필요할 땐 내가 말하겠다." 아서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그는 그 갱목들이 얼마나 약하고 또 그 몇 개는 밑부분이 완전히 썩고 말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는 아버지가 지나치게 싸구려 재료만 사용하는 데에는 질려버렸다. 탄값이 오른 데다 날개가 돋친 듯이 탄이 팔리는 바람에 넵튠 탄광으로는 홍수라도 난 듯이 돈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배러스는 그 무서운 재난이 지나간 후인 데도 불구하고 탄광의 보다 안전한 개선을 위해서는 한 푼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타인 캐슬의 <아거스> 신문의 석간에 징병 법안이 성문화되었다는 것이 크게 보도되었다.그 신문을 읽은 배러스는 몹시 기쁜 얼굴이 되었다. "이렇게 되면 병역을 기피하던 놈들도 좀 섬뜩해질 게야." 그는 식탁에 앉자마자 큰 소리로 말했다. "이제 놈들을 이 잡듯이 해서 몰아낼 때가 온 거야.놈들은 지금까지 병역 면제가 되는 직장에서 너무 오랫동안 잘 피해 있었지." 그는 의기양양한 웃음을 웃으며 덧붙였다. "이렇게만 되면 놈들도 이젠 뭔가 생각을 좀 하게 되겠지." 그것은 저녁 식사 때였고 드문 일이었지만 아서도 함께 있었다.배러스는 그 말을 캐리 고모에게 하고 있었지만 그 말 속에 박혀 있는 가시는 아서를 향한 것이 분명했다. "참으로 괘씸한 일이지,캐럴라인." 그는 큰 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자기 조국을 위해 싸워야 할 건강한 젊은 놈들이,그 놈들이 없어도 얼마든지 해 나갈 수 있는 편안한 직장에서 지금까지 빈둥거리면서 전쟁터로 나가는 것을 피하고 있었단 말이야.군에 들어가면 어떻겠냐고 물어봐도 전혀 귀도 기울이려고 하지 않는 거야.그렇지만 지금이야말로 놈들을 군에 때려넣어야 할 때야." "네에,그렇군요,리처드 오라버니." 캐리 고모는 음식 접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아서 쪽을 떨리는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물론 난 이렇게 될 줄을 알고 있었다." 배러스는 같은 어조로 계속 말했다. "그리고 나는 틀림없이 이 법안 실시에 한 손을 거들게 될 게다.우리들끼리의 이야기지만 지방 징병 면제 심사국의 어떤 자리에 앉아달라는 교섭이 와 있거든." "심사국이라구요,리처드 오라버니?" "심사국의 요직이지." 배러스는 일부러 아서의 눈길을 피하며 말했다. "내가 그 자리에 간다면 허튼 수작은 일체 없어질 거야. 정말이다.이제야 말로 시국은 중대하게 되었고,모두가 한시라도 빨리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면 할수록 더 좋은 게야.넌 언젠가 헤티와 바로 이러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지.그 애도 징병 기피자들의 눈을 뜨게 해줄 때가 되었다고 상당히 강하게 느끼고 있더군.그런 인간들은 완전히 잡초 뽑듯 뽑아버려야 한다는 이야기였어." 아서는 천천히 눈을 들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배러스는 새로 맞춘 잿빛 양복을 입고 있었고 그 단추 구멍에는 꽃이 꽃혀 있었다.아버지는 최근에 아주 근사한 새 양복을 몇 벌 주문해 입었다.그 양복은 지금까지 입었던 어떤 것보다 아주 멋있는 것으로 보아 타인 캐슬의 단골 양복점을 바꾼 것이 분명했다.거기다 단추 구멍에 꽂은 꽃도 온실에서 방금 꺾어온 뜻 싱싱한 진홍빛 카네이션 꽃이었다.그의 모습은 지나치게 꾸민 것이 잘 드러나 보였다.그의 눈빛도 빛났고 무엇엔가 열중하고 있는 묘한 흥분을 보이고 있었다. "두고 보아,캐럴라인." 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심사국이 발족되면 놈들은 앞을 다투어 군대의 깃발 아래로 달려 갈테니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캐리 고모는 괴로워서 못 견디겠다는 얼굴로 식구들의 표정을 살펴보고 있었다.배러스는 자기의 시계를 들여다보았다.그것도 그의 습관 중의 하나였다. "자아," 그는 무언가 생각난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난 가봐야 겠어.캐럴라인,아무도 나를 기다리느라고 자지 않는 수고를 하지 말아줘.난 늦게 돌아오게 될 테니까.헤티와 함께 킹즈 극장에 갈 약속을 했지.'산의 여자'를 공연한다더군.런던 극단이 출연하는 것인데 아주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어.헤티가 보고 싶어 야단이어서 함께 같이 가기로 한 거야." 배러스는 단추 구멍의 꽃을 만지작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러고는 아서에겐 눈도 돌리지 않고 캐럴라인에게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힘찬 걸음으로 방을 걸어나가 버렸다. 아서는 입을 다문 채로 꼼짝도 하지 않고 식탁 앞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새로 맞춘 옷,그 단추 구멍의 꽃,갑자기 멋을 내기 시작한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그 만남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었다.처음엔 아픈 상처에 대한 보상이라는 것이 훌륭한 구실이 되어 주었다.사실 아서는 헤티를 모욕적으로 대했던 것이다.그러므로 '헤티에게 그것을 메워준다.'는 의무감이 배러스에게 생길 수도 있었다.그러나 아서는 그 관계가 그러한 단순한 보상의 경지를 뛰어넘어 더 깊게 진행되고 있음을 보고 있었다.모든 것은 더욱 분명해지고 있었다.아서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그 한숨 소리에 캐리 고모는 불안한 듯 몸을 움직였다. "오늘 저녁은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는구나,아서.이 케이크 좀 먹어보겠니?" "먹고 싶지 않아요,캐리 고모님." "얼마나 맛이 있는 지 모른다.조금만 먹어 보렴." 고모는 걱정스런 목소리로 자꾸 권했다.그는 괴로운 생각 속에서 그녀를 바라보며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다.그는 자기 마음속에 있는 모든 고뇌를 그녀에게 털어놓고 싶은 충동이 급작스럽게 일어났다.그러나 그런 소리를 한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 분명하므로 그는 꾹 참았다.캐리 고모는 친절하고 그녀 나름대로 자기를 사랑해주고 있음을 잘 알지만,그녀는 겁이 많고 아버지에 대해서는 무조건 외경의 마음을 품고 있으므로 그녀에게 별로 도움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식탁에서 일어나 식당 밖으로 나왔다.현관 홀에 선 그는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다.그의 마음속에서는 지금 자신의 괴로움과 외로움을 달래줄 대상을 찾고 있었다.헤티와 만날 수 있다면... 그의 목구멍으로부터 뜨거운 덩어리 같은 것이 치밀어 올랐다.어떻게 해야 좋을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 마음에는 의지할 곳도 없다는 외로움만 가득했다.그는 몸을 돌려 천천히 2층으로 올라갔다.어머니의 방 앞을 지나가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그리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오늘은 좀 어떠세요?" 그는 조용히 물었다.그녀는 휙 돌아보더니 베개에 몸을 의지한 채 얼굴을 찌푸렸다.살이 찐 창백한 얼굴은 만사가 귀찮다는 짜증스러움이 가득했다. "머리가 몹시 아프다.그런데 너는 왜 그렇게 문을 요란스럽게 열어 남을 놀라게 하니?" "죄송해요,어머니." 그는 침대 곁에 걸터앉으려 했다.그러자 그녀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아니,아서.그렇게 앉지 마라.이렇게 머리가 아플 때 침대에 누가 앉으면 난 머리가 더 아프단다.그래서 누가 앉을까봐 언제나 걱정이란다." 그는 얼굴을 붉히면서 얼른 몸을 일으켰다.어머니에게도 자기는 쓸데없는 존재라는 느낌이 아프게 다가왔지만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어머니야말로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가.그러자 갑자기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솟구쳐 올랐다.다정스레 대해주던 어릴 때의 추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어머니의 품에 안겨 그 부드러운 옷자락에 감싸이던 따뜻함이 지금도 그의 마음속을 덥혀주는 느낌이었다.그는 그 어머니의 사랑과 손길을 다시 한 번 맛 보고 싶었다.그리고 지금이야말로 어느 때보다도 그 사랑과 위로가 필요한 때였다.그는 한 마디 한마디를 주워 모으듯이 천천히 말했다. "어머니,제 이야기 좀 해도 되겠습니까?" 그녀는 아들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난 머리가 몹시 아프단다." "긴 이야기가 아녜요,어머니.전 지금 누구의 도움이 필요해요." "아니, 안 돼.어떤 이야기도 지금은 들을 수가 없어.난 머리가 아프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잖니,아서?" 그는 입을 다물었다. 얼굴빛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고 또 아들의 상태를 볼 여유가 없었다.그녀는 눈을 감는 채 자신의 말을 계속했다.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픈지 모르겠다. 이렇게 자꾸 머리가 아픈 것이 내 생각엔 프랑스에서 쏘아대는 포탄의 진동이 내 머리에까지 울려오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진단다. 물론 그 포성을 듣는 것은 아니야.그렇지만 포탄이 터질 때의 대단한 진동이 이곳까지 오는 것은 분명해.그래서 내 등까지 아프다고 해도 누구 하나 곧이듣거나 동정해주는 사람이 없지만 말이다.요즘은 등의 통증도 더 심해지고 있단다.아서,정말 그 포격이 내 두통을 더 심하게 하는 것일까?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글쎄요,전 잘 모르긴 하지만 그 포격과 어머니의 등과는 별 상관이 없을 거예요." 아무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머니에게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고는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울적함이 더 크게 밀려왔다.그러나 그것을 알 리 없는 어머니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들어봐라,아서.나는 내 등에 대해서 불평을 하지 않으려고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루이스 선생이 준 바르는 약은 아주 효과가 있단다.아코니트,벨라돈나,클로로포름인데 사실은 이 약들이 무서운 독성을 가진 것이라던데 나에게는 효험이 있다니 정말 이상한 일 아니니?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중이지? 아,그래,그 포성에 관한 것인데... 어제 신문을 보았는데 요즘 비가 많이 오는 것도 바로 그 영향이라는 구나.그러니 내 생각도 일리가 있는 것이지.그래,분명해. 그리고 루이스 선생에 관한 것인데 포탄 두통이라는 새로운 병이 생겼다는 거야.물론 신경과민에서 오는 것이지.나도 그 병을 앓고 있단다." "그렇군요,어머니." 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다시 대화가 끊어졌다.그러자 어머니는 또 이야기를 시작했다.자신의 여러 가지 증상에 대한 세세한 이야기였다.한 반시간 그렇게 이야기하던 어머니는 갑자기 한 손을 자기 머리 쪽으로 치켜들며 이제는 피곤해서 더 말을 할 수가 없으니 어서 방을 나가달라는 손짓을 하는 것이었다.그는 묵묵히 방을 나왔다.15분 후 어머니 방을 지나갈 때 방 안에서는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날이 갈수록 아서에게는 고뇌 속에 혼자 틀어박혀 있다는 외로움이 더 커갔다.다른 사람들과 단절된 존재라는 느낌, 거의 버림받고 있다는 느낌은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그는 자기의 활동 범위를 더욱 좁히기 시작했다.다만 일할 때만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밖에서도 그는 자기에게 향하는 이상한 눈초리를 느꼈다.암스트롱과 허즈페드와 일부 광부들이 그랬고,길거리에서는 자기에게 던져지는 비난의 소리를 듣기까지 했다. 이제는 밖의 사람들까지도 어버지를 따르지 않는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그것이 군에 입대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과 합쳐져 그를 아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배러스는 자기의 견해를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었다.그의 단호한 애국적 태도는 모든 이에게서 갈채를 받았다.그는 지금과 같은 국가적인 초긴급 사태에서,자기가 해야할 일 앞에서는 혈육간의 사적인 감정도 끼여들지 않도록 하고 있는 훌륭한 인물로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었다.아서는 모든 사람들이 그처럼 훌륭한 아버지와 자기 자신 사이의 암투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마음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2월에 들어서자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그리고 3월 중순에 드디어 슬리스케일 병역면제 심사국이 발족을 했다.심사국은 5명의 위원으로 제임스 래미지,양복점 주인 베이츠,머치슨 노인,신 베들 가 교회의 이녹 로우 목사와 리처드 배러스를 임명했고 그들은 만장일치로 배러스를 의장으로 선출했다.이 5명의 위원외에도 타인캐슬 연대의 더글러스 대위가 군을 대표하여 상임 고문이 되었으며,슬리스케일 읍의회의 서기 러터가 심사국 서기를 겸임했다. 아서는 초조와 긴장 가운데 심사국의 초기 활동을 바라보았다. 그 심사국은 엄격하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사건이 상정될 때마다 면제는 모두 거부되었다.더글러스는 완전한 독재자였다.그는 신청자를 위협적으로 대했고,별로 고려해보는 일도 없이 신청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즉석에서 선언해버리는 것이었다. "우리 군대는 저 사람을 필요로 하오." 더욱이 래미지와 배러스 두 사람 다 뇌물 같은 것은 받지 않는 다는 애국주의로 마음이 부풀어 있었고,다른 사람들은 별로 실권이 없었다. 사실상 본래 심사국은 신청자가 군에 입대할 수 없는 이유를 제기할 때 과연 그 재기하고 있는 이유가 정당한지를 논의하기 위한 곳이었다.그러나 그 위원들이 하고 있는 일들을 보면 본래의 취지와는 상당히 다르게 신청자들에게 어떻게 해서 라도 전쟁터로 내보내려고 설득하는 데에만 주력하고 있었다.그들은 설득을 받아들이지 않고 끝까지 징집을 거부하는 이는 교도소로 보내는 극한적인 방법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서는 심사국의 이러한 처사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분노를 억누르면서 매일 밤 아버지가 돌아오는 것을 지켜보았다.배러스는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그는 아서에게 들으라는 듯이 캐리 고모에게 심사국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큰 소리로 이야기하곤 했다. 3월 말 어느 날이었다.저녁식사에 좀 늦게 들어온 아버지는 더욱 기분이 좋아보였다.그는 아서에게는 눈도 주지 않고 자리에 앉자마자 뜨거운 버터 토스트를 자기 접시에 듬뿍 덜어서는 먹기 시작하였다.식사가 어느 정도 끝나자 그는 그날 오후 오랫동안 시간을 끌었던 심사 건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신청자는 신학대학교 학생으로 종교상의 이유에서 면제를 신청해왔다고 했다. "래미지가 그 신청자에게 제일 먼저 한 질문이 무엇인지 알아?" 그는 부드러운 토스트를 가득 문 채 말했다. "그 사람에게 목욕한 적이 있느냐는 거였어." 그는 음식을 씹어 삼키느라고 말을 잠시 끊었다가 의기양양하게 웃어 젖힌 후 다시 말했다. "그런데 진짜 멋있는 질문을 한 사람은 역시 더글러스였어. 더글러스는 나를 보고 곁눈질을 하더니 그 젊은이에게 다짜고짜 이렇게 호통을 쳤어. '징집을 기피하는 자는 총살형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하고 말야.그러자 그 질문은 금세 효력을 나타내더군. 아마 너희들도 그가 움츠러들던 꼴을 보았더라면 웃지 않곤 못 배겼을걸. 그 가엾은 젊은이는 이제 3개월 안으로 프랑스 전선으로 갈 게다." 그는 통쾌하다는 듯 다시 크게 웃었다.아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식탁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입술까지 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버지는 그게 재미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총을 잡아서는 안 되는 사람을 우격다짐으로 전쟁터로 내몰면서 그렇게도 기분이 좋으세요? 그 사람이 억지로 총을 잡고 누군가를 죽여야 할 때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떠리라는 것을 생각이나 해보셨어요? 정말 훌륭하신 일을 하셨습니다.전쟁터의 그 처참한 살인 행위들을 사진이라도 찍어서 걸어놓고 즐겨보시죠... 그렇게 신나신다면. 그 사진들은 아버지와 아마 잘 어울릴 겁니다.정말 잘 어울릴 겁니다.그러나 전 아버지처럼 그런 것을 기뻐하거나 찬양할 수가 없습니다.저는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합니다. 생명을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그러니 저를 협박해서 그 살인행위에 끌어들이는 일은 없으시도록 제발 부탁합니다.진심으로 그런 일은 없도록 부탁드립니다." 아서는 숨이 막혀오는 듯한 느낌에 겨우 말을 끝냈다.그는 자신의 말은 끝났으므로 더 있을 필요도 없다는 듯 급히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갔다.그러자 배러스의 음성이 그를 멈추게 했다. "잠깐만 기다려라,아서. 그렇지 않아도 너와 이야기할 기회를 기다렸는데 마침 잘됐구나." 아서는 돌아섰다.그는 캐리 고모가 숨을 몰아 쉬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잠시 침묵이 흘렀다. "좋습니다." 아서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배러스는 새로운 토스트를 들고 천천히 그것을 먹기 시작했다.캐리 고모는 마치 쓰러질 것처럼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그녀는 가슴이 터질 듯 심장이 뛰는 것을 얼마 동안은 참고 있었으나 드디어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실례한다는 말을 하고 재빨리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배러스는 차를 다 마시고 입을 천천히 닦으면서 충혈된 커다란 눈으로 아서를 노려보았다. "우선 너에게 물을 것이 있다.이것이 마지막 질문이다.넌 입대 문제를 어떻게 할 생각이냐?" 아서는 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아서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으나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빛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입대할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분명히 말해두는데 넵튠 탄광에서는 네가 필요치 않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되어도 네 결심은 변함이 없다는 거냐?" "그렇습니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렇다면,"배러스는 아주 천천히 힘을 주어 말했다. "너에 대한 심사청원을 심사국에 내야겠다.아마 내 예상으로는 다음 주 화요일쯤 너에 대한 심사가 있을 것 같구나.마음의 준비를 해두기 바란다." 아서는 두려움으로 머리가 띵해졌다.그의 눈길이 바닥을 향했다.그는 그래도 아버지의 애정을 기대하고 있었다.아버지가 자기를 탄광에서 쫓아내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으므로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내 아들이라는 사실이 너를 보호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너도 이제는 알아둘 때가 온 것 같다.너는 젊고 군대에 가야 할 나이다.변명 따위는 하지 마라.난 벌써 결심한 지 오래이다.너를 내 등 뒤에다 감추어두지 않겠다고... ."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있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이 너를 위한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한다.너에겐 그것이 필요해!" "정말 잘못 생각하셨습니다."아서는 내면에서 솟구치는 격한 감정을 누르며 침착하게 말했다."아버지는 제가 심사국에 나가는 것을 겁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배러스는 싸늘하게 웃었다. "그렇고말고." "아버지는 역시 저를 잘 모르십니다.전 심사국에 나가겠습니다.얼마든지 나가겠습니다." 배러스의 이마에 핏줄이 드러났다. "오해는 하지 마라.넌 보통 기피자와 똑같이 다루어질 테니까.난 더글러스 대위와 그 일에 관해서 벌써 이야기한 바 있다. 특별 대우란 전혀 없을 것이다.내 결심도 변하지 않는 한 넌 군에 입대하지 않을 수 없을 게다." 아서는 다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그러고는 여전히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아버진 제가 지금 어떻게 하기를 바라십니까?" "네가 네 의무를 행하기를 바랄 뿐이다." 배러스는 갑자기 일어섰다.그리고 식기 선반 앞에서 잠시 가슴을 펴고 단정한 자세로 섰다. "내일 타인캐슬로 가서 입대하도록 해라.너를 위해서 말하는데 그것이 너를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일 게다.강제로 징집되는 모욕을 당하기 전에.이게 네게 해줄 수 있는 나의 마지막 말이다." 그리고 그는 밖을 나가버렸다.아서는 식탁 앞에 그대로 ㄴ아 있었다.그는 여전히 자기 몸이 떨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그는 식탁 위에다 팔꿈치를 대고 한 손으로 머리를 받쳤다. 캐리 고모는 10분 가량 후에 방 안으로 살금살금 들어오다가 그렇게 앉아 있는 그를 발견했다.그녀는 그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아버님께 거역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정신을 차려라.너를 위해서도 넌 그렇게 해야 한다.아버지 말씀을 따르도록 해라."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마치 아무 말도 못 들은 사람처럼 앞만 노려 보고 있었다. "이봐,아서야." 캐리 고모는 다시 간곡히 부탁을 하듯 말했다."세상엔 거역할 수 없는 것도 있단다.나보다 그런 걸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다.넌 내가 좋아하던 싫어하던 간에 따르기만 하면 되는 거야.아서,난 네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무섭구나.아서,난 네가 일생을 망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다.아버님 원하시는 대로 해드려라,제발,아서야." "전 그렇게는 못합니다."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건 안 돼,아서."그녀는 애원했다."그런 식으로 해서는 정말 안 된다.제발,아서야,이렇게 빈다.난 뭔가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서 정말 불안해서 못 살겠구나.아,무엇보다도 가문에 누를 끼치는 불명예! 그 불명예를 좀 생각해보렴.얘야,제발 아버님이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약속해다오." "못 하겠습니다."그는 여전히 작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제 생각대로 끝까지 할 작정입니다." 그는 일어서서 고마움이 담긴 미소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자기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그 다음 날 아침 그는 심사국에 출두하라는 호출장을 받았다.그 우편물이 도착했을 때 집에 있었던 배러스는 아서가 그 엷은 황색 봉투의 봉을 뜯는 동안 그를 살피듯 곁눈질로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아서가 무엇인가 말하리라고 기대했으나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그는 적이 실망했다.아서는 그 편지를 호주머니에 넣더니 그대로 밖을 나가버렸다.아서는 아버지가 자기의 굴복을 계산에 넣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그러나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굴복을 하지 않겠다고 단단히 결심하고 있었다. 그의 본성은 강하지 못했으나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경멸이 그를 그토록 강하게 만든 것이었다. 드디어 화요일 아침이 되었다.아서가 나가야 될 시간은 10시였고,장소는 구 베들 가 국민학교였다. 심사국은 낡은 학교 강당을 사용하고 있었는데,그곳은 법정으로서는 꼭 알맞는 넓이였다.일반 방청인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뒤편에는 방청석까지 마련해놓고 있었다.강당 안쪽에는 높은 단이 설치되어 그 위의 테이블 앞에 5명의 위원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서기 러터가 테이블 한쪽끝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군부 대표 더글러스 대위는 그 반대쪽 끝에 앉아 있었다.뒷벽에는 커다란 영국 국기가 걸렸고 그 밑에는 이제 소용이 없게 된 흑판,쓰다 남은 백묵 컵을 뚜껑처럼 만들어놓은 오래된 물병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아서는 10시 5분 전에 구 베들 가 국민학교에 도착했다.담당 경찰 로덤 경사가 그에게 심사가 제일 먼저라고 말해주면서 퉁명스런 얼굴로 회전 도어를 열어 심리 법정 안으로 들어 가게 해주었다. 아서가 입정했을 때 장내에서는 흥분된 수군거림이 들려왔다.그는 얼굴을 들고 사람들로 꽉 차 있는 방청석을 쳐다보았다.탄광에서 낯이 익은 광부들 얼굴이 보였다.여자들도 있었는데,달동네 사람들인 한나 브레이스,리디 부인,수잔 콜더 할머니,웹트 부인이 눈에 띄였다.신문기자석도 만원이었고 두 사람의 사진 기자가 창가에 기댄 채 서 있는 것도 보였다.아서는 재빨리 눈을 돌렸다. 이 심사가 사람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을 보니,이미 극도로 긴장된 그의 신경은 더욱 팽팽하게 당겨졌다.그는 강당 한 가운데의 자기 자리에 앉아 손수건을 꺼냈다.예민한 성격인 그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게 되니 온몸이 움츠러들면서 떨려오기까지 했다.그러나 자기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도,또 이렇게 끝까지 버티겠다는 결의를 굳게 해준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 그 마음 약함에서 기인된 것이었다.배짱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는 지금 자기의 입장을,그리고 군중의 집단적인 적의를 똑똑히 의식하고 있었다.그는 죽도록 괴로웠다.정신마저 멍해진 그는 자기가 실제로 죄를 진 사람인 것처럼 느꼈다. 방청석에서 또 다른 소란이 일다가 곧 조용해졌다.심사국 위원들이 러터와 더글러스 대위의 수행을 받으며 옆문으로 줄을 지어 들어 왔기 때문이다.더글러스 대위는 빨간 색의 약간 얽은 얼굴에 땅달막한 몸집이었다.자기의 바로 뒤에 서 있던 로덤 경사가 "일어서시오!"하는 소리에 아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그리고 머리를 꼿꼿이 치켜들었다.그의 눈은 마치 자석에 끌리듯 높은 의장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눈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그는 마치 거미 줄에 얽힌 벌레나 최면술에 걸린 사람처럼 생각이 중단된 상태로 멍하니 서 있었다. 배러스는 테이블 앞으로 몸을 내밀어 더글러스 대위 쪽을 향했다.그들은 무슨 말인가 주고받았다.그러자 더글러스가 찬성한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이면서 어깨를 호기롭게 펴더니 주먹으로 테이블을 요란스레 두드렸다. 방청석과 강당 중앙에서 일고 있던 호기심에 찬 속삭임이 쥐 죽은 듯이 사라지면서 일종의 긴장된 침묵이 뒤따라왔다.더글러스는 그의 잿빛 눈을 천천히 굴리며 방청객,신문 기자,아서를 둘러보았다.그러고 나서 그는 위원들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그는 누구나 다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본 건은 이 심사국에서 매우 놀라운 충성을 이미 바쳐오신 우리의 존경하는 의장님 자제에 관한 것이어서 특히 괴롭고 고통스런 심사가 되겠다.그러나 사실은 명백하다.아서 배러스라는 청년은 넵튠 탄광에서 사실상 필요 없는 인물이며 전투 요원으로서는 적격자다.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본관이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그러나 본 건의 심리를 시작하기 전에 피심리자의 부친인 베러스 씨에 대한 본관 개인으로서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표명할 필요를 느낀다.배리스씨는 자신의 혈육이라는 개인적인 정리를 떠나 놀라운 용기와 감탄스러운 애국심으로 전혀 흔들림이 없이 자기의 의무를 수행해나갔다. 본관의 생각으로는,우리는 이 분의 경탄스러운 처신에 열렬한 존경과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이것은 너무나 감탄스러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자 박수소리가 온 법정을 울리며 힘차게 터져나왔다.아무도 그것을 제지하려는 사람은 없었다.그 박수가 끝나자 더글러스는 계속해서 말했다. "이 불행하고 난처한 상황에 있어 우리 당국 측에서도 어느정도 양보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군 당국의 대표로서 미리 밝혀둔다.그러므로 이번일은 본건의 신청자가 다만 전투근무 지원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그 다음 연대 편입과 훈련 등의 사항에 관하여는 당국의 충분한 고려가 있을 것임을 말해두는 바이다." 그는 아서를 힐문하는 듯한 눈으로 날카롭게 노려보았다.아서는 바싹 마른 입술을 축였다.그는 지금 모든 사람들이 자기에게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 몹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그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말했다. "본인은 전투근무를 거부합니다." "이봐,설마 진정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진정입니다."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고 긴장감은 더욱 고조되었다.더글러스는 마치 그이상 자기는 어찌할 수 없다는 듯한 눈짓을 배러스와 교환했다.그러자 제임스 래미지가 이제는 자기 차례라는 듯 머리를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왜 전투를 거부하는가?" 심문이 시작된 것이다.아서는 목이 굵은 이 무식한 푸줏간 주인에게로 눈을 돌렸다.그의 좁은 이마와 조그맣게 움푹 들어간 두 눈이 마치 소와 돼지의 모습을 하나로 섞은 것처럼 보였다.아서는 겨우 들릴 만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본인은 어떤 사람도 죽이고 싶지가 않습니다." "큰 소리로 말해."래미지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그렇게 낮은 소리로 말하면 아무도 들을 수가 없잖은가." 목이 잠긴 소리로 아서는 되풀이했다. "본인은 어떤 사람도 죽이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건 무슨 이유에서인가?" 래미지가 경멸하는 투로 물었다.평생 동안 수많은 생명을 죽인 그에게는 이같은 말은 수수께끼처럼 들릴 뿐이었다. "그건 제 양심에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한동안의 침묵이 흐르고 나자 이윽고 래미지가 거칠게 말했다. "그런 약해빠진 양심이 자네를 불행으로 이끌어간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겠군." 이녹 로우 목사가 다급히 말을 가로막았다.그는 키가 크고 몸이 여윈 남자로서 무엇으로 꼭 찝은 듯한 우스꽝스러운 코 때문에 위엄이라곤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다.제임스 래미지는 교회의 중요한 인물로서 그의 봉급의 반을 내고 있는 형편이라 언제나 그를 지지해왔고 그의 어떤 허물도 다 덮어주면서 매달려 살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봐."그는 아서에게 말을 던졌다."군은 교회에 나가는가?교회에서도 자기 조국에 봉사하는 합법적 살인을 막는 법은 없네." "어떠한 경우에도 합법적 살인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걱합니다." 로우 목사는 볼품없는 머리를 수탉처럼 치켜세웠다. "그건 무슨 뜻인가?" "본인은 종교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견지에서의 종교 같은 것은 말입니다.목사님은 그리스도교에 관해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총검을 손에 드시고 독일 군인이나 영국 군인을,그건 어느 쪽이라 해도 좋겠습니다만,그들을 함부로 찔러 죽인다는 것,즉 그리스도께서 영국 기관총 뒤나 또는 독일 기관총 뒤에 앉으셔서 전혀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을 수십 명씩 마구 휘갈겨 죽인다는 것을 본인으로선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로우 목사는 공포와 수치감으로 얼굴이 빨개졌다.그는 대단히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이건 하느님에 대한 모독이다." 그는 래미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머치슨은 그 논의를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을 용서치 않았다.코담배를 피워 지저분해 보이는 키가 작은 식료품 상인인 그는 성서에 관한 자기 지식을 자랑하고 싶었다.몸을 앞으로 내밀며 그는 마치 햄 반 파운드를 저울에 달아 팔 때를 연상시키는 투로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눈에는 눈,이에는 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모르는가?" 로우 목사는 이제야말로 골치 아프게 되었다는 생각에 얼굴을 찌푸렸다. "틀립니다."아서가 외쳤다."그리스도께선 그런 말씀은 절대로 하신 적이 없습니다." "말씀하셨어,틀림없이."머치슨은 늑대처럼 으르렁대며 말했다."틀림없이 성서에 있다니까." 그는 자기가 이겼다는 의기양양함까지 보이며 의자에서 몸을 벌렁 뒤로 젖혔다. 이번에는 양복점 주인 베이츠가 말을 가로막았다.그는 늘 보관하고 있는 하나의 질문이 있어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질문을 꼭 하고 마는 것이었다.그런데 이번에도 그는 그 질문을 할 때가 됐다는 것을 느꼈다.그는 길게 드리워진 수염을 비틀면서 물었다. "만일 독일 사람이 너의 어머니를 공격해오면 어떻게 할 텐가?" 아서는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따위 질문에 대답한다고 해서 제 마음속에 있는 것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아마 독일에서도 그와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아시겠습니까?우리 나라 군인들에 관해서 그들도 그렇게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 물어볼 것이라는 말입니다." "넌 독일 사람을 죽이겠느냐?아니면 독일 사람이 너의 어머니를 죽이도록 내버려두겠느냐?" 베이츠는 집요하게 질문에 매달렸다.아서는 대답을 그만두어 버렸다.그는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그러자 베이츠는 자기가 이겼다는 태도로 심사위원들을 훑어보았다. 침묵이 흘렀다.테이블 앞에 ㅇ아 있는 모든 위원들은 배러스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사실 배러스도 이제 자신이 말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그는 목구멍을 맑게 하려는 듯이 한 번 큰 기침을 했다.그의 눈은 반짝였고 높은 광대뼈에 약간의 홍조가 떠올랐다.그는 아서의 머리 꼭대기를 노려보았다. "너는 이 중대한 국가적 위기,국민 모든 사람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는 이 무서운 세계전쟁의 필연성을 인정하지 않을 작정이냐?" 아버지가 말을 시작하자 아서는 다시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다시 한 번 자신의 약한 마음이 애처롭게도 자기를 꽁꽁 묶는 듯한 느낌이 왔다.그는 침착한 마음으로 용기있게 자신의 심중을 말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간절히 갈망했다.그러나 그의 입술은 더욱 떨렸고 그는 말을 더듬거릴 뿐이었다. "저는 인간들이 서로를 살육하도록 한 곳으로 몰아넣고,온 유럽에서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굶어 죽게 하고 있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그런 짓이 무엇 때문인지를 사실상 그 누구도 알고 있지 못할 지금은 더욱 그렇습니다." 배러스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이 전쟁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하고 있는 것이다." 아서의 목소리가 점차로 높아지며 외치듯이 말했다. "다음 전쟁이 또 발생하면 역시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죽이도록 하려는 목적에서 또다시 되풀이 될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래미지는 불쾌한 얼굴이었다.그는 자기 앞의 펜을 집어 그것으로 테이블을 쿡,쿡,찍기 시작했다.그는 지금까지 심사국에서 항상 보다 강력한 조치를 해왔던 것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이같은 애매모호한 말장난에 말려들고 있는 상황을 참기가 어려웠다. "그따위 우유부단한 이야기는 집어치워."그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자,어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배러스는 지금까지 늘 래미지를 멸시해왔고,그의 어떤 말에도 항상 싸늘한 냉소를 보일 뿐이었는데 오늘은 그의 불손한 말에 전연 노하는 기색이 없었다.배러스는 석상처럼 굳은 표정이 되어 무의식적으로 테이불을 톡톡 두들기고 있었다. "입대하기를 거부하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아서는 급하게 숨을 들이키며 말했다. "제기랄!"래미지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도대체 무슨 말씨름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무엇 때문에 말을 빙빙 돌려 지껄이고 있는거요?솔직히 말하게 하든가,아니면 입을 틀어막든가 해야지." "본인 스스로 설명할 기회를 줍시다." 로우 목사는 보호해줄 필요를 느낀 듯 연민에 찬 어조로 말했다.아서는 다시 몸을 꼿꼿이 세우면서 대답했다. "전 지금까지 한 것 외에 더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저는 인간의 생명을 부정하고 마구 희생시키는 것에 반대합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전쟁에서든 전쟁이 아닌 그 밖의 경우든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이 마지막 말을 할 때 아서의 눈길은 아버지를 향해 날카롭게 던져졌다. "제기랄!"래미지는 다시 신음하듯 소리쳤다."저따위 어리석은 소리를 지껄이게 하다니!" 그러자 이때 뜻하지 않은 음성이 방청석 가운데에서 들려왔다. 키가 작고 별 특징이 없는 여성이었지만 많은 관중을 개의치 않는 듯 매우 침착했다.웹트 부인이었다.그녀는 맑은 목소리로 조리있게 대답했다. "청년의 말은 지당합니다.제 생각에도 심사위원 여러분들 모두가 좀 잘못된 생각을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세상 사람들이 너희는 살생을 하지 말지어다라는 말씀을 기억해낸다면 전쟁은 내일이라도 당장 끝날 것입니다." 순식간에 장내는 서로 외쳐대며 항의하는 소음의 폭풍으로 가득 차버렸다.몇 사람의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왔다. "창피한 줄을 알라구!" "닥쳐!" "저 여자를 끌어내!" 웨트 부인은 난폭한 사람들에 의해 문 쪽으로 끌려나가 버렸다.질서가 회복되자 더글러스 대위는 테이블을 요란하게 두드렸다. "또다시 이런 소요가 발생하면 본관은 모두를 퇴장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입을 다물고 심사원 쪽을 바라보았다.매 심사 건마다 회의가 옆길로 빗나가 사태를 본론으로 재빨리 돌이키게 할 필요는 있었다.그런데 이번엔 문제가 너무 지나치게 빗나간 것이 명백했다.더글러스는 경멸의 빛을 감출 필요도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아서의 말을 듣고 있었다.더글러스 대위는 하사관 출신이다.오랬동안 하사관을 지내다가 운이 좋아 장교로 승진된 것이다.그러므로 학력이 낮았는데 이것 때문에 그는 지나칠 만큼 고집이 세고 남의 의견은 무시해버리는 경향이 짙었다.전형적인 독재형의 표본이라고 할 그는 지금 몹시 기분이 상해 있었으므로 말씨가 더욱 퉁명스러웠다. "괜찮다면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자.아서 군은 군복무를 거부한다고 했다.그러나 그 다음에 오는 결과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는가?" 아서는 더글러스의 얼굴에 나타난 험악한 증오의 빛을 보자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그의 얼굴빛은 더욱 창백해졌다. "그 결과가 어떻다고 해도 저의 태도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좋다!그렇다고 해도 2,3년 동안이나 교도소에 썩기를 원하지는 않을 텐데,어떤가?" 장내에는 일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아서는 자기에게 던져지는 군중들의 시선이 돌팔매처럼 아프게 느껴졌다.그는 정신이 얼떨떨했다.여기에 서 있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어떤 환상인 것만 같았다.이렇게 무섭고 곤란한 처지에 자신이 서 있다는 것이 아무래도 믿겨지지가 않았다.그러나 그는 어떤 힘에 떠밀리듯이 자신도 놀랄 수밖에 없는 대답을 했다. "제가 교도소에 가고 싶지 않다는 심정은 대부분의 군인들이 참호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는 것과 같은 걸 겁니다." 더글러스의 눈길이 더욱 사나워졌다.그는 더 큰 목소리로 외치듯이 말했다.그는 더 큰 목소리로 외치듯이 말했다. "군인들은 신성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출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는 교도소행을 저의 의무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방청석에서 한숨소리가 새어 나왔다.더글러스는 분노를 억제하기 위함인 듯 천장으로 잠시 시선을 돌렸다.이윽고 그는 배러스 쪽으로 몸을 돌렸다.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미안합니다만 이젠 어쩔 수가 없습니다.'라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에다 던졌다. 배러스는 의자 속에서 굳어버린 사람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가 천천히 이마를 문질렀다.그는 자기 주의의 심사위원들이 서로 소곤대는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처럼 몸을 굽히고 있더니 드디어 결정을 내린 듯 위엄 있게 입을 열었다. "여러분 모두도 저와 같은 의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엄숙하게 한 손을 치켜들었다.장내에는 숨이 막힐 듯한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그는 아서의 머리 위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마지막 판결을 내렸다. "본 심사위원회는 이 사건을 신중히 고려한 결과,"그는 명확하고 관례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선고했다."위원 일동은 병역 면제를 용인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일치했음을 알린다." 그러자 장내에 요란한 박수와 높은 환호성이 터져나왔다.서기 러터도 이번에는 제지하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방청석에서 한 여인이 외쳤다. "잘하셨습니다,배러스 사장님.잘하셨습니다. 더글러스 대위가 테이블 너머로 몸을 기울이며 손을 내밀었다.그들 모두와 악수를 나누는 배러스의 표정에는 몹시 감격한 빛이 있었으나 그래도 역시 어딘가 석연치 못한 구석이 보이는 듯했다.그는 박수소리와 그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청석 쪽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아서는 핏기 잃은 얼굴을 깊이 숙인 채 법정 중앙에 그대로 서 있었다.그는 어서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그는 군중들의 흥분과는 정반대되는 공포와 괴로움으로 온몸이 찢기는 듯했다.그는 아버지를 향해 머리를 치켜들었다.그의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이윽고 그는 몸을 돌려 법정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날 저녁 배러스는 늦게 돌아왔다.현관 홀에서 그는 우연히 아서와 마주쳤다.그는 잠시 발을 멈추고 당황함을 감춘 묘한 태도로 불쑥 말했다. "네가 원한다면 항소할 수 있다.항소할 수도 있단 말이다." 아서는 아버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그는 이제 평정을 찾은 자신을 느꼈다. "저를 이 모양으로 만든 것은 아버집니다.전 항소는 하지 않겠습니다.전 끝까지 제 생각대로 하겠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좋다." 배러스도 체념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네 생각에 달렸으니까 좋도록 해야지." 그는 발길을 돌려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아서는 계단을 올라가면서 캐리 고모가 울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그날 밤 읍내는 커다란 흥분에 휩싸였다.배러스의 결단이 읍내 사람들의 애국심에 불을 지른 것이다.군중들은 깃발을 흔들며 모두 거리로 몰려나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면서 거리를 행진했다.웹트 부인의 상점 앞을 지나던 군중들은 누가 시작했는지 모르게 유리창을 부숴버렸다.그 다음엔 핸즈 메서의 가게로 행진해갔다.핸즈 노인은 지금까지 외국인이라는 의심을 받아왔는데 흥분된 군중들에게 그 의심은 확정적인 것이 돼버렸다.그의 상점은 순식간에 파괴되었다.유리창은 산산조각이 나고 상점의 물건들도 성난 손길들이 사정없이 짓이겨 버렸다.빨갛고 파란 무늬의 기둥 간판-메서 노인에게는 언제나 자랑이었던 멋있던 간판-도 땅바닥에서 밟혀버렸다.깜짝 놀라 침대에서 일어난 핸즈 노인은 항의할 사이도 없이 마룻바닥으로 굴러 떨러져 버렸다. 그 이틀 후 아서는 체포되어 타인캐슬 병영으로 연행되었다.그것은 완전한 평정과 질서가 유지되는 가운데 일어난 사건이었다.그는 이제 모든 것이 평온하게 그리고 자기 자신의 자유의사와는 전혀 관계 없이 기계적인 조직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느낌이었다.그는 병영에서도 군복을 입는 것을 거부했다.그는 당장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2년의 중노동형을 선고받고 벤튼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이 두 번째의 법정에서 나올 때 마치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것처럼 생각되는 자신의 일을 생각해보았다.그것은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다만 아버지의 얼굴빛이 묘하게 보였던 기억,얼굴이 빨개진 채 당황하면서 어쩔 줄을 몰라하던 그 모습만이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12 죄수 호송마차가 벤튼 교도소 밖에서 삐걱하며 급정거를 하자 무의 바깥쪽 빗장이 벗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아서는 형무소로 호송되는 마차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자신에게 일깨우면서 어둡고 좁은 좌석에 꼿꼿이 앉아 있었다. 마차는 앞으로 삐걱거리며 나아가다가 다시 멈추었다.그러자 마차 문이 확 열리면서 차가운 밤바람이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문 저머로부터 교도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아서와 다른 네 사람이 비좁게 칸막이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타인캐슬에서 벤튼까지는 길이 좋지 않아 몹시 흔들리는 불편한 여정이었지만 이제 그것도 끝나버리고 그들은 교도소의 안마당에 서 있게 된 것이다.밤하늘엔 무겁게 구름이 드리워져 있어 캄캄했으며 비까지 쏟아지고 있었다.아스팔트의 우묵 팬 곳마다 검은 빗물이 고여 있는 것이 불빛에 더욱 음산해 보였다.아서는 잽싸게 주위를 둘러보았다.급경사가 진 성곽 같은 지붕이 얹힌 높다란 잿빛 담,쇠창살이 박힌 창들의 행렬,번쩍번쩍하는 비옷을 입은 교도관들,주위는 아치형 통로위의 황색 외등에서 흐릿하게 비추는 빛으로 가까스로 그 윤곽이 드러나 보였다.다섯 명의 죄수는 물을 퍼붓는 것처럼 쏟아지는 빗속에 서 있다가 교도관의 구령에 따라 행진하듯이 걸어서 하얗게 회칠을 한 방 안으로 들어갔다.그 방은 불빛이 너무 환해서 오랫동안 어둡던 곳에 있다 들어온 그들은 몹시 눈이 부셨다.아무런 가구도 없는 그 방 안에는 단지 테이블 하나만 있었고,그 앞에 한 사람이 서류뭉치와 장부를 앞에 펼쳐놓고 앉아 있었다.그는 대머리가 벗겨진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남자였다.호송차를 함께 타고 온 교도관이 그 사람에게 가까이 가 이야기를 했다.그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아서는 자기와 함께 실려온 다른 네 명의 죄수들을 바라보았다.두 명은 어쩐지 비슷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몸이 왜소하고 초라한 그들은 검은 넥타이를 똑같이 매고 있었으며,얼굴은 길죽하고 퀘이커 교도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는데 둘이 형제간이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다른 사람은 풀이 죽어 보이는 창백한 얼굴에 금테 코안경을 끼고 있었다.그도 역시 곁의 두 사람처럼 남을 해칠 것 같은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몹시 불안한 기색으로 어쩔 줄을 몰라하는 모습이었다.마지막 한 사람은 키가 크고 수염이 텁수룩한 것이 지저분해 보였는데,그는 이러한 곳에 와 있는 것이 아주 익숙하다는 듯 유유자적한 표정이었다. 테이블 앞의 남자가 호송차의 교도관에게 이야기하던 것을 멈추었다.그는 펜을 집어 들더니 소리를 질렀다. "거기 한 줄로 서,알겠나?" 그는 교도소의 인수 책임자였다.그는 한사람 한사람의 형 판결장을 기계적으로 크게 독하면서 성명과 직업,종교,갖고 있는 현금을 장부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수염이 많은 남자가 첫 번째로 불렸다.힉스라고 불리운 그는 돈이라고는 일푼이었다.폭행죄로 들어와 3년의 중노동형을 받은 그는 직업도 없는 건달이었다.그 다음으로 아서가 불렸다.아서가 가진 현금은 정확히 4파운드 6실링 10펜스 반이었다.인수 책임자는 아서의 돈을 다 세고 나더니 지폐와 그 옆에 쌓아놓은 은화들을 바라보며 빈정대는 투로 한마디했다. "징병 기피자 새끼가 돈은 많군!" 두 형제와 영락한 회사원이 앞으로 불려나왔다.그들 셋더 전쟁 반대자였다.양심을 어길 수 없다는 것이 반대의 이유였다.인수 책임자는 이따위 돼지만도 못한 반국민적인 새끼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데에 울분을 참을 수 없어서인지 그들을 더욱 사납게 다루었다. 신고가 끝나자 그는 일어서서 안쪽 문의 자물쇠를 열었다.그는 말없이 엄지손가락으로 안으로 들어가라는 신호를 했다.그들이 양쪽에 조그만 방들이 늘어서 있는 복도로 한 줄로 들어서자 그 남자가 말했다. "입고 있는 것을 몽땅 벗어." 그들은 명령대로 재빨리 옷을 벗었다.퀘이커 교도 형제들은 무척 난감한 듯 옷을 천천히 벗다가 아무래도 수치감을 이길 수 없는지 내의는 벗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힉스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킥킥대며 벌거벗은 더러운 몸뚱이를 천연덕스럽게 내보였다.몸뚱이에는 부스럼 자리마저 보였으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오히려 두 다리를 쩍 벌리더니 싱긋 웃으며 그 불쌍한 형제들에게 쌍스러운 몸짓까지 해 보이며 놀렸다. "자아,자아,아가씨들,부끄러워할 것 없다구.우린 이제부터 새우잡이를 하러 나갈 테니까." "닥쳐,이 새끼." 인수관이 소리치자 힉스는 찔끔해서 입을 다물었다.그는 아부하는 얼굴로 굽실거리며 걸어나가 저울대 위로 올라갔다.그들은 차례대로 몸무게를 달고 키를 재었다.그것이 끝나자 힉스는 교도소 내부를 잘 안다는 듯 앞장을 서서 콘크리트로 된 복도를 지나 목욕탕으로 들어갔다.목욕탕에는 이미 누가 하고 나간 듯 별로 뜨거워 보이지도 않는 물에는 때가 둥둥 떠 있었고 몹시도 더러웠다.아서는 어느새 그 더러운 물 속에 들어가 씻고 있는 힉스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뒤따라온 인수 책임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 속에 꼭 들어가야 합니까?" "그래,아무 소리 말고 들어가!" 불결한 목욕이 끝나자 옷이 주어졌다.아서는 노란 플란넬 내의와 팬티,양말 한 켤레 그리고 커다란 검은 화살표 무늬가 가득히 찍힌 카키색 옷을 한 벌 받았다.그 옷은 윗저고리가 꽉 끼이고 바지도 무릎을 겨우 가렸다.그는 자기옷을 내려다보다가 픽 웃고 말았다.군복이 싫다고 이곳까지 왔는데 그 옷도 군복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안쪽 문이 열리며 의사가 들어왔다.혈색이 좋아 보이는 얼굴에 앞니가 온통 금으로 번쩍이는 그는 씩씩한 걸음걸이로 청진기를 흔들어대며 그들 앞에 와 앉았다.그의 행동은 놀랍도록 빨랐다.그는 그들을 재빠르게 훑어보더니 기계 기술자처럼 그의 임무를 놀라운 속도로 해치우기 시작했다.아서 차례가 되었다.그는 하나에서 아흔아홉까지 세어보라고 하면서 두세 번 가슴을 두드려 보는 것으로 내과 진찰을 끝내더니 혹시 성병을 앓은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그것으로 끝이었다.물론 아서는 이 의사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만일 자신이라고 해도 이 의사보다 더 친절한 방법으로 해나갈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아서는 모든 일을 냉정하고도 공정하게 판단하려고 애썼다.그는 피할 없는 이 현실을 모두 인정하면서 침착하게 잘 받아들이자고 자신에게 몇 번이나 다짐했다.그는 전날 밤에 이 문제에 대해 여러 면으로 생각하다가 그렇게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아마 자기는 발광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형식적인 진찰이 끝나자 대머리 교도관은 새로운 교도관에게 그들을 넘겨주고는 의사와 함께 나가버렸다.새로운 교도관은 마치 말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입을 꼭 다문 채 그들을 점검했다.이 교도관은 키가 작은 탄탄한 몸집에 머리가 납작했는데 별로 호감을 주지 못하는 인상이었다.그는 윗입술이 짧을 뿐 아니라 입술 전체가 아주 얄팍했다.별로 잘생기지 못한 머리통을 앞으로 쑥 내밀고 있는 자세는 오랫동안 감시만 해온 이 직업에서 비롯된 듯했다.그가 바로 콜린즈 교도관이었다. 조사를 끝낸 콜린즈는 그들에게 수인 번호와 감방 번호를 알려주었다.아서의 수인 번호는 115,감방 번호는 273이었다.콜린즈는 무거운 철문의 자물쇠를 열면서 비로소 입을 열었다. "자,나를 따라라.힘차게 행진해야 한다." 그들은 걸어나왔다.콜린즈 교도관의 싸늘한 눈 아래에서 그들은 한 줄로 서서 교도소의 본관으로 행진해 들어갔다. 교도소 건물은 우물 정(#)자의 형태를 이루고 있어 감방이 붙어 있는 회랑들이 굉장한 높이까지 층층을 이루며 빙 둘러 있었다.그 회랑 하나하나가 모두 잠겨져 있어 서로 연결된 회랑 전면은 어마어마한 동물 우리같이 보였다.공기는 차가왔고 소독약 냄새와 차가운 흙감방의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왔다.그 냄새애 아서는 다시 한 번 몸이 떨리는 공포를 느꼈다. 콜린즈는 아서를 273호 감방으로 데리고 갔다.제 3회랑 안에 있는 그 감방은 넓이가 2미터에 길이가 4미터쯤 되어 있고 천장만 지독스레 높았다.사면의 벽은 벽돌로 위에는 백색,아래는 황갈색으로 페인트칠이 되어 있었다.한쪽 벽 높은 곳에 육중하게 격자를 박아 넣은 작은 창이 하나 달려 있었지만 사실 창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못 되어서 ,어두운 방 안에는 밖에서 켜고 끄게 되어 있는 철망으로 덮인 전고 하나가 희미한 빛을 던지고 있었다.방바닥은 시멘트였고 구석에 에나멜 칠을 한 주전자 하나와 변기가 놓여 있었다.수백 개의 이 변기들로부터 풍기는 냄새가 바로 교도소 특유의 냄새였다. 침대는 2미터 길이에 1미터 넓이의 판자로서 그 위엔 담요만 있을 뿐 매트리스도 깔려 있지 않았다.그 침대 바로 위엔 에나멜 칠을 한 컵 하나와 접시,주석으로 된 스푼과 나이프들이 놓여 있는 선반이 하나 달려 있었다.그 외에도 작은 칠판 하나와 분필이 선반 위에 달아매여 있었고 그 칠판 아래에는 읽으라고 유혹하듯 기대어 세워놓은 조그만 성경책이 한 권 있었다. 아서는 그 모든 것을 둘러본 다음 눈을 돌려 문간에 서 있는 콜린즈를 보았다.그는 감방에 대한 아서의 감상을 마치 듣고 싶다는 듯 그때까지 서 있었다.그의 입술은 약간 아래로 처져 있고 머리를 역시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아서가 말이 없자 그도 아무 말도 없이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조그만 감시창이 달린 문이 쾅 하고 닫히자 아서는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그는 이제 교도소 안에 갇힌 것이다.그는 이제 아서 배러스가 아니고 115호 죄수였다. 단단한 결심을 하고 있었으나 냉혹한 절망감이 그를 엄습했다.그것은 지독한 것이었다.예상했던 것보다 몇 배나 지독한 상황이었다.교도소라는 곳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를 때 교도소에 관해서 얘기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그러나 이렇게 안에 갇히게 되니 이 상황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실감하게 되었다.교도소는 과연 무서운 곳이었다.그는 굳게 문이 닫혀진 컴컴하고 작은 독방을 휘이 둘러보았다. 7시가 되자 저녁식사가 배급되었다.그것은 새로 수감된 죄수들을 위한 특별식으로 물이 많은 죽 한 사발이었다.구억질이 나는 냄새가 진동하는 것이었지만 아서는 선 채로 억지로 그 죽을 다 먹었다.먹고 나서는 침대 가장자리에 다시 걸터앉았다.아무리 생각을 굴려본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칠판에다 무었을 써 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는 '내가 여기에 왜 와 있는가?' 하는 것을 다시 생각했다.자기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여기에 와 있는 것이다.자신이 여기에 와 있는 것은 살인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살인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괴상한 일이었다. 또 흥미 있는 일이기도 했다.그러나 그것에 대하여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 흥미도 사라져 가는 것이었다.그의 손바닥에서 땀이 솟아나기 시작했다.그가 신경과민증에 걸려 있다는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땀이 손바닥에서 샘처럼 솟아나면서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어떤 소리,마치 개가 짖는 듯한 소리가 들려와 그는 깜짝 놀랐다.그것은 교도소의 밑바닥인 가장 낮은 회랑에서 들려오고 있었다.그 소리는 사람이 아닌 짐승의 울부짖음 같았다.아서는 벌떡 일어섰다.그의 마음은 팽팽히 긴장되어 그 무서우리만치 처절한 울부짖음을 따라 떨리기 시작했다.그는 귀를 기울였다.그 울부짖음은 괴상하고도 높은 울림으로 온 건물 내로 퍼져갔다.그러다가 그 소리는 갑자기 뚝 끊어졌다.마치 어떤 무섭고 강력한 것에 의해 갑자기 꽉 막혀 들려오지 않는 듯했다.그 다음은 정적이 계속되었다.그러나 그 정적은 마치 울부짖음이 어떻게 해서 뚝 끊어지게 되었는가를 소곤거려 주는 것만 같았다. 아서는 감방 안을 왔다갔다했다.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으나 차츰차츰 그 걸음걸이는 빨라졌다.그는 울부짖는 소리가 다시 시작되는 것을 줄곧 기다렸으나 결국 들려오지 않았다.그가 감방의 콘크리트 바닥을 거의 달리다시피 하면서 왔다갔다하고 있을 때 갑작스레 벨 소리가 울려퍼지더니 전등불이 꺼져버렸다. 그는 감방 한복판에 막대기처럼 뻣뻣이 서 있다가 화살표 무늬가 찍힌 군복을 어둠 속에서 천천히 벗고는 널빤지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그러나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그는 자기가 지금은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을 것이라고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이 널빤지 침대의 딱딱함에 익숙해질 것이라고 혼자서 말하고 혼자서 대답했다.그러는 사이에 괴로운 생각들이 거대한 수레바퀴처럼 머리 속에서 빙빙 돌면서 번쩍번쩍하다가 차츰 그것이 더욱 커지더니 드디어 방을 가득 채워버렸다.빙빙 도는 수레바퀴 속에는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온갖 장면들과 함께 돌아가고 있었다.아버지 헤티,래미지,심사국,넵튠 탄광,탄광 속에서 죽은 광부들,눈을 흡뜬 채 전쟁터에서 죽어 나둥그러지고 있는 군인들,이 모든 것이 한데 뒤섞여 더욱 빠르게 도는 것이었다.그는 이같은 혼돈 속으로 빨려들지 않기 위해 침대의 가장자리를 땀이 흐르는 두 손으로 꼭 잡았다.그러는 사이에 밤이 어느새 지나갔다. 기상시간은 5시 반이었다.아직도 어두운데 벨 소리가 울였으므로 아서는 일어났다.그는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담요를 개고 감방을 청소했다.그 일이 거의 끝나기도 전에 열쇠로 자물쇠를 비트는 소리가 들렸다.그 자물쇠를 여는 열쇠소리는 특이해서 두 개의 금속이 서로 싫으면서도 강제로 엇물려서 돌아가는 것같이 덜그럭 끼익하는 요란한 소리를 냈다.그것은 사람의 골수 속까지 파고드는 기분 나쁜 소리였다.콜린즈가 우편낭 몇 개를 방 안에다 집어 던져 넣었다. "그걸 기워." 그 말을 하기가 무섭게 문은 덜컹 다시 닫혀버렸다.아서는 우편낭을 집어 들었다.갈색의 빛깔이 바랜 자루들이었는데 그것들을 어떻게 기워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그는 그 캔버스 천으로 된 자우를 앞에 놓고는 7시가 될 때까지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7시가 되자 열쇠소리가 다시 들리며 아침식사가 들어왔다.아침식사는 멀건 죽 한 그릇에 빵 한 덩어리였다. 식사가 끝나자 콜린즈의 단단한 머리가 구멍 속으로 거의 들어오다시피 해서 감방 안을 들여다보았다.그는 그대로 놓여져 있는 우편낭을 바라보더니 아서를 딱하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부드럽게 말했다. "나와서 운동을 해." 운동은 형무소 안마당에서 하는 것이었다.마당은 미끌미끌한 아스팔트였는데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한쪽 끝에는 단이 하나 만들어져 있었다.그 단 위에는 교도관이 서서 죄수들이 원을 그리며 빙빙 돌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그는 죄수들이 서로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주임무였으므로 가끔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 해!" 오래 된 죄수들은 기묘하게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서로 대화를 나누곤 했기 때문이었다. 마당 한복판에는 변소가 하나 있었는데,나지막한 기둥 위에다가 둥근 금속같은 것을 얹어놓았다.죄수들은 마당을 빙빙 돌다가 교도관에게 손을 들어 화장실에 가도 좋은지 허가를 얻었다.죄수들이 변소로 들어가면 그들의 머리와 다리가 밖에서 보이도록 되어 있어 여간 우스꽝스럽지 않았으나,그러한 변소라도 오래도록 앉아 있는 것은 굉장한 대접을 받는 것으로 교도관의 마음에 든 죄수에게만 허용되는 특권이었다. 아서는 다른 죄수들과 함께 마당을 빙빙 돌았다.새벽의 어스름한 속에서 다리를 질질 끌면서 빙빙 도는 죄수들은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벗어난 정신병자들처럼 보였다.죄수들의 얼굴은 모두 비굴함과 희망을 잃은 무표정으로 덮여 있었다.교도소의 고약한 냄새가 배어 있는 그들의 몸에는 불필요한 물건처럼 팔이 디룽거리고 있었다.아서는 두 사람 건너서 힉스가 걷고 있는 것을 보았다.그는 어깨 너머로 아는 체하며 눈을 찡긋했다. "담배 피우고 싶지 않아?" 힉스가 입을 묘하게 오무리며 말했다.그러자 단 위에서 교도관이 소리쳤다. "말을 하지 말라고 했잖아.너,514호,입 다물어,임마!" 마치 수레바퀴처럼 빙빙 도는 가운데에서 아서는 그의 머리 속이 더러운 변소를 축으로 해서 돌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그 가운데에서 교도관의 말하지 말라는 호통이 계속 울리고 있었다. "말을 말아.말을 하지 말라니까." 운동은마치 미친놈들이 회전목마를 타는 것 같았다.9시가 되자 죄수들은 작업장으로 들어갓다.길쭉한 작업장 안에서 그들은 우편낭을 꿰매는 것이었다.아서는 다시 몇 개의 우편낭을 집어주던 작업 감독관 비비는 그가 처음 들어온 신참자라는 것을 알자 허리를 굽히면서 설명을 해주었다. "이봐,멍청이.이렇게 꿰매는 거야." 말은 그렇게 거칠었지만 커다란 바늘로 두꺼운 캔버스 천이 두 겹으로 접힌 곳을 꿰매는 방법을 보여주는 태도는 제법 상냥하기까지 했다.그리고 다시 덧붙이둣 큰 소리로 말했다. "우편낭을 많이 꿰매면 밤에 코코아를 마시게 된다.알겠나,멍청아?아주 맛이 좋고 뜨끈뜨끈한 코코아가 한 사발이다!" 비비의 목소리에 깃든 친절함이 아서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그는 우편낭을 꿰매기 시작했다.작업장 안에는 100명 가량의 죄수들이 우편낭 꿰매는 일을 하고 있었다.아서의 옆사람은 늙은이로 수염이 허연 그는 꿰매는 것도 기술적이고 속도가 빨라서 틀림없이 코코아를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그는 우편낭을 바꾸어 들 때마다 겨드랑이 밑을 벅벅 긁으면서 아서를 슬쩍 쳐다보는 것이었다.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만일 말을 하게 된다면 속도가 떨어져 코코아를 좋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12시가 되자 벨이 다시 울렸다.그들은 일을 중단하고 점심을 먹으러 줄지어 독방으로 돌아왔다.그 유별난 열쇠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점심식사는 수프와 빵,냄새가 고약한 마가린이었다.점심식사가 끝나자 콜린즈가 들여다보는 구멍을 덜컥 닫아버렸다.그 문을 닫기 직전 그는 위협적으로 보이는 눈망을 굴리며 말했다. "네놈은 아무것도 안 하려고 어기에 온 것이 아니야.빨리빨리 그 우편낭을 꿰매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 아서는 우편낭 꿰매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그의 부드러운 손은 두꺼운 캔버스 천에다 바늘을 찌를 때마다 차차 아픔을 느끼기 시작했다.한쪽 엄지손가락에는 물집이 생겼다.그는 그저 반사적으로 일을 했다.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왜 일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았다.이제 그의 동작은 어느새 자동적이 되어 그저 우편낭을 꿰맬 뿐이었다.다시 열쇠소리가 들려왔다.콜린즈가 멀건 죽과 빵 한 덩어리의 저녁식사를 들고 들어왔다.감방으로 들어온 그는 먼저 우편낭을 바라보고,그 다음 아서를 바라보더니 짧은 윗입술을 젖히며 이빨을 드러냈다.무슨 까닭에서인지 콜린즈는 아서에 대해 뭔가 앙심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그러나 그는 별로 서두르지 않았다.앞으로 얼마든지 괴롭힐 건덕지가 많았고 또 오랜 경험에서 그는 시간을 질질 끌면서 더욱더 재미있는 방법을 짜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이것밖에 못 했나?여기는 게으름 피우는 놈을 기르는 곳이 아니야." "전 아직 익숙하지 못해서... ." 아서는 무의식적이었지만 상대방의 기분을 맞춰주는 어조로 이야기했다.그것은 콜린즈에게 우선 잘 보여야 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그는 눈을 들어 콜린즈를 바라보면서 더욱 두려움이 커졌다.그의 만들어지다가 만 듯한 납작한 머리통이 더욱 위협적으로 그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다.아서는 콜린즈가 어서 가버리기만을 바랐지만 그는 더욱 얼굴을 가까이 가져오면서 말했다. "어서 익숙해지도록 노력해야 돼.여기서 게으름이나 부리면서 전쟁터를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게다."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의 눈길은 소름이 끼치도록 사나웠다.아서는 벨 소리를 들을 때까지 쉬지 않고 일했다.8시가 되자 벨이 울렸다.벨소리는 굉장히 큰 음향으로 교도소의 깊은 구석구석까지 가득 채우는 듯했다.아서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다시 밤새도록 혼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는 침대에 앉아서 카키색 바지에 찍혀 있는 커다란 검은 화살무늬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집게손가락으로 그 무늬를 더듬기 시작했다.어떻게 해서 자기의 옷에 이 화살무늬가 찍혀야만 했을까?그는 자기의 온몸에까지 화살무늬가 찍혀진 것처럼 느끼다가,커다란 화살에 박혀 자기는 꼼짝도 할 수 없다는 공포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이제 아서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말살달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커다란 화살이 자기를 죽여버리고 말았다는 생각이 생생한 현실로 다가왔다. 9시가 되자 불이 꺼졌다.그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옷을 벗고는 널빤지 침대 위에 누웠다.온몸이 굳어버린 듯한 가운데 그래도잠이 들었다.그러나 그 잠은 오래가지 못했다.한밤중이 되자,그는 지난밤에도 놀랐던 그 울부짖음 소리에 다시 놀라 눈을 떠야 했다.그 울부짖음은 한 번 시작되자 그치기를 잊어버린 것처럼 무시무시한 울림을 주변에 퍼뜨리면서 계속되었다.그것은 사나운 야수의 울부짖음이 분명했다.아서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잠깐 잠이 들었었기 때문에 머리는 맑았고 정신도 말짱했다.그래서 더욱 그 소리가 견디기 어려웠다.그는 이 울부짖음도,암흑도,고독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미쳐버릴 것만 같았다.그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제발 조용히 해.제발 조용히 하란 말야." 그는 소리만이 아니라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감방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그는 미치광이처럼 소리지르며 문을 마구 두드려댔다.그러자 금세 다른 죄수들도 함께 외치며 문을 두드려대기 시작했다.캄캄한 지하 묘지를 닮은 회랑 아래층부터 꼭대기까지 외치고 두드리는 우뢰 같은 소리가 물결처럼 온 건물을 휩쌌다.그러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그 어대한 외침과 두드리는 소리는 차츰차츰 암흑 속으로 빨려들어가듯 낮아지다가 이윽고 다시 정적이 밀려왔다. 아서는 한동안 가슴을 두근어리며 양팔을 쫙 펴고 닫힌 문의 차가운 쇠창살에다 뺨을 꽉 누른 채 서 있었다.한덩안 그렇게 서 있던 그는 이제 방 안을 걷기 시작했다.몇 발자국 걸을 수도 없는 좁은 공간이었지만 그는 움직였다.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여전히 두 손은 주먹을 꽉 쥔 채 그는 걷고 또 걸었지만 긴장은 풀리지 않았다.침대 위로 몸을 던져봐도 고통과 두려움으로 꽉 조여진 신경은 풀리지가 않았다.그는 일어나 다시 걸었다.걷는 것만이 지금의 자신을 지탱시켜주는 유일한 방법으로 생각되었다.그는 쉬지 않고 방 안을 돌았다. 열쇠소리가 들릴 때도 그는 걷고 있었다.그 열쇠소리는 하루가 시작된다는 소리이기도 했다.그는 문이 열리자 깜짝놀라며 방 한복판에 우뚝 섰다.콜린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울부짖음 때문에 잠을 못 잤어요.그 소리 때문에 한잠도 못 잤다구요." "못난 녀석!" 콜린즈는 코웃음을 쳤다. "전 잘 수가 없었다구요,그 울부짖음은 도대체 뭐죠?" "입 닥쳐!" "그 울부짖음 소리는 뭡니까?누가 그러는 겁니까?" "입 닥치라고 했잖아.정신이 던 놈이 이 안에 있다구... 정신병자가 이 안에 있어.자,알았으면 이젠 입 다물어.쓸데없는 소리는 그만둬." 아서는 얼굴울 두 손으로 감싼 채 가만히 서 있었다.진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다리는 후둘후둘 떨려오고 온몸에는 식은땀이 흘렀다.드는 죽을 것만 같았다.콜린즈가 사발에다 떠놓고 간 고기 수프도 먹을 수가 없었다.수프의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나 도저히 먹을 생각이 나지 않았다.그는 그릇을 옆으로 밀쳐놓고 침대 위에 앉았다. 갑자기 열쇠소리가 들렸다.콜린즈가 싸늘한 비웃음을 띠우며 들어왔다.그의 얇은 입술이 옆으로 비틀렸다. "왜 안 먹나?" 아서는 멍청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먹을 수가 없어요." "내가 말을 할 때에는 일어서야하는 거야." 아서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자,식사를 해!" "먹을 수가 없어요." 콜린즈의 입술이 제자리로 돌아왔다.그의 얇은 입술은 시퍼런 색깔이었다. "입에 맞지 않는 다는 건가?비겁한 기피자의 구미에 이런 수프는 맞지 않는다는 말씀이야?어서 이걸 먹어,이 비겁한 새끼야!" 아서는 멍청한 얼굴로 여전히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먹을 수가 없어요." 콜린즈가 자신의 턱을 톡톡쳤다.이건 일이 재미있게 되어가는구나 하는 얼굴이었다. "넌 뭘 원하는 거야?강제로 네 목구멍에 이 국물을 쏟아 붓기를 기다리는 거야?언젠가 해봤지.목구멍에다 튜브를 쑤셔넣고는 국물을 쏟아넣는 방법도 있는데,그렇게 해줄까?" "미안합니다.저 국물을 마셨다간 금세 토할 것만 같아요." 아서는 고개를 숙였다.그러자 콜린즈의 무서운 목소리가 날아왔다. "명령이가.그 사발을 손에 들어." 아서는 몸을 굽혀 사발을 집어 들었다.콜린즈가 그의 거동을 노려보았다.콜린즈는 처음부터 아서가 ㅈ은 집안에서 훌륭한 교육을 방고 자란 청년이라는 것이 못마땅했다.그 외에도 또 이유가 있었다.콜린즈는 그것을 아서에게 천천히 말했다. "난 네놈을 잘 보아왔다.난 이 세상에서 제일 보기 싫은 것이 징병기피자다.그런데 네놈이 바로 그런 놈이지.내 아들은 지금 일선에 나가서 언제 총알을 맞을지 모를 형편이야.그만하면 무슨 뜻인지 알겠지?네 놈이 왜 이 국물을 꼭 마셔야 하는지도 알겠지?어서 그 수프를 건방잔 네 입 속에 쏟아넣어.이 비겁한 새끼야!" 아서는 수프를 떠 먹기 시작했다.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이던 그는 갑자기 기계 작동이 멈춘 듯 손을 놓았다. "도저히 넘어가지가 않습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그의 내장이 뒤틀리면서 지금까지 겨우 밀어넣었던 것들을 콜린즈의 구두 위에 다 토하고 말았다. 콜린즈의 안색이 납덩이처럼 변했다.그는 아서가 일부러 자기 구두 위에다 토했다고 생각했다.그는 갑자기 손을 들어 아서의 얼굴을 힘껏 후려쳤다.아서는 얼굴이 온통 부서져 나가는 느낌이었다.그는 콜린즈를 노려보았다. "당신은 나를 때릴 권리가 없어요.당신이 나를 구타했다는 것을 나는 고발하겠소." "고발하겠다고?좋아,이것까지 고발해라!" 콜린즈는 코웃음을 치며 이번에는 주먹을 휘둘러 그를 바닥에 때려눕혔다.아서는 짚단처럼 바닥으로 쓰러지면서 약한 신음소리를 냈다.그 소리는 콜린즈에게 참호 속에 있을 자기 아들을 생각나게 했다.그는 시원하다는 듯 싱긋 웃으며 더러워진 구두를 아서의 옷깃으로 닦고 나서는 여전히 얇은 입술에 웃음을 띤 채 방을 나갔다.문을 다시 잠그는 열쇠소리가 온 방 안을 울렸다. 13 아서가 감방의 시멘트 바닥 위의 썩은 내를 풍기는 오물 위에 정신을 잃고 뻗어 있던 그날,조는 타인캐슬의 센트럴 호텔에서 굴요리를 앞에 놓고 매우 점잖게 앉아 있었다.최근에 조는 굴요리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다.굴요리는 정말 맛이 있었다.아주 놀랍도록 기막힌 맛이었다.특히 위에 부담이 없어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는 점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조는 기분이 좋을 땐 한 접시의 굴을 혼자 다 처리하고도 끄떡없었다.그는 요즘 기분이 좋았으므로 매콤한 고추 양념을 끼얹어 먹는 굴요리는 언제나 기가 막혔다.그 중에서도 크고 살찐 굴이 더 맛있었다. 때가 때인지라 어떤 음식 이를테면, 쇠고기나 닭고기는 점점 귀해졌다.그렇기 때문에 요령 있는 사람들은 굴이 나는 철을 기억하고는 센트럴로 모여들어 기막힌 굴요리를 즐기는 것이었다.조도 이 센트럴에서 잘 통하는 인사 중의 하나가 되었다.그는 그 동안 이 호텔을 자주 드나들 수 있는 신분이 되어 이제는 모두 낯이 익었고,특히 웨이터들은 굽실대며 그를 안으로 모셔들이곤 했다.그 중에서도 호텔 지배인 수 영감은 그 누구보다도 더욱 친절하게 그를 대해주었다.그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언젠가 조가 그에게 은근히 말했다. "수 영감,주식을 좀 사보시지 그래,크로커와 디킨즌을 좀 사둔다면 그리 손해는 없울 거네.하하... 그렇게 질린 얼굴은 하지 말게.당신이 모험을 ㅅ어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가정애 충실하고... 다 알고 있지.그렇지만 이건 좀 다른 이야기야.한번 재미로 백 주쯤 사보는 걸세." 일 주일 후 수는 식당 입구에서 조를 기다리고 있다가 거의 무릎을 꿇는 시늉을 하면서 그를 식당으로 모셔들었다.그러고는 제일 좋은 자리로 그를 안내했다. "아,그렇군.좀 재미를 본 모양이지... 얼마쯤 벌었나? 60파운드... 담배값은 되는군.하하... 이젠 알겠나? 앞으로도 생각이 있다면 내 뒤를 따라다녀봐요.내가 나쁘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 돈! 조는 마지막 굴을 포크 끝으로 찔러 솜씨 좋게 입 안으로 슬쩍 밀어넣으면서 생각했다.웨이터가 흩어진 굴 껍질을 치우고 스테이크를 가지고 올 동안 그는 식당 안을 기분 좋은 시선으로 쭉 훑어보았다.센트럴 호텔의 식당은 요즘에 와서 더욱 성황을 이루었다.전쟁통에 돈푼이나 벌었다는 사람들이면 으레 모여드는 이곳은 언제나 사업에 바쁜 수완 좋은 장사꾼들로 가득했다.조는 그 사람들을 거의 다 알고 있었다.군수공장 위원회의 위원인 빙엄과 하워드,또 변호사 스내그,잉그램 공장의 경영주 잉그램,양조장이 토그드,타인캐슬 상공회의소의 거물 웨인라이트,거기다 마멀레이드 제조업자로 유명한 페닝튼 등과 그는 용의주도하게 접촉을 해오고 있었다.돈이 많은 사람들,자기에게 유용하리라고 생각되는 자와는 어떻게 해서든지 관계를 맺었다.그에게는 인간적으로 누구를 좋아한다거나 진정한 우정을 키운다든가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오직 자기의 위치를 높여줄 수 있는 사람들하고만 교제를 했다.그리고 그의 태도는 언제나 성실해 보였고 따뜻한 친절미로 넘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어디에서도 훌륭한 인물로서 대접받았다. 창가에 앉았던 두 사람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그가 고개를 끄덕여 아는 척을 하자 그들도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었다.그 두 사람은 수완이 좋은 한 패거리인 보스톡과 스토크스였다.그렇다.그들은 둘이 다 아즈 세상 일에 훤한 수완가였다.보스톡은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엔 조그마한 구둣방을 하면서 이스트타운에 작은 기성품 구두공장을 가지고 있었다.그런데 이 2년 반 동안 보스톡은 큼직한 군납 계약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성공했다.군대에 납품을 한다는 것은 보통 이익이 생기는 일이 아니었다.그도 그럴 것이 그가 납품하는 구두에는 가죽이라곤 1인치도 사용되지 않았다.말만 구두였지 가죽은 하나도 쓰지 않은 엉터리 물건을 그는 굉장한 값으로 군대에 팔아 넘기고 있는 것이었다.보스톡은 어느 날 밤 카운티 클럽에서 술이 취해 그 비밀을 조금 누설하고 말았다.그는 가즉 대신 어떤 나무 껍질을 대용품으로 쓰고 있는데,물론 그 구두의 수명은 아랑곳하지 않았다.그는 아주 슬픈 얼굴을 지으며 그렇게 해도 괜찮은 것이 군인들의 수명이 그 형편 없는 구두보다도 더 짧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불쌍한 일이야!아,정말 가련한일이 아니겠나?" 보스톡은 그렇게 말하다가 갑자기 애국적 열정에 사로잡혀 느닷없이 훌쩍거리기까지 했다. 스토크스는 원래 이름 없는 양복점 주인이었는데,그도 요즘엔 군복 납품의 모든 권리를 한 손에 쥐게 되어 이제는 큰 공장의 주인으로서 거들먹거리는 중이었다.그는 크로커즈타운에서 가장 열렬한 애국자였다.그는 말끝마다 '국가적 필요'를 갖다붙이면서 공장의 가난한 여공들의 점심시간을 줄였고,일요일에도 오후 8시까지 일을 시켰다.물론 국가를 위한 일이므로 임금을 더 주는 것도 아니었다.그는 가난한 이웃 사람들에게 싼값에 하청을 주어 바지 한 벌에 7펜스,군복 상하에 1실링 6펜스,셔츠는 한 타스에 2실링,밴드는 한 타스에 8펜스를 주었다.그리고 거기에서 실값을 빼는 것도 잊지 않았다.그런데 그것에서 얻는 이익은... 조는 생각을 하면서 입술을 빨았다.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밴드의 예만 들어도 한 타스에 18실링씩 받고 납품을 하는 것이다.그러니 그 이익이 얼마인가! 사실 이 문제가 거론된 바 있었다.어느 사회주의 신봉자가 셋방살이 하청공원들에게 시간당 평균 1펜스를 주고 있다는 것에 분격하여 노동착취로고 국회에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조는 그 말을 듣고는 코웃음을 쳤다.병신같이!노동착취라니,그 여공들은 일을 얻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판이 아닌가.일을 할 사람은 너무나 많이 있는 것이다.가게 앞에 마가린 배급을 타려고 줄을 짓고 서 있는 무리들은 조금도줄어들지 않는 형편이다.그것만 아니라 지금은 전쟁 중이 아닌가! 조의 경험으로 볼 때 사람이 권세와 부를 얻기 위해서 전쟁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 같았다.사실 조가 밀링튼 공장에서 대단한 세력을 얻고 있는 것도 모두 전쟁 덕분이었다.지금은 모든 종업원이-모건,어빙 거기다 잔소리꾼인 도비 영감까지-그를 무서워하고 있었다.조는 싱긋 웃으며 의자에 몸을 기대고는 맛이 특별한 시가의 띠를 조심스레 벗겼다.스토크스와 보스톡은 띠를 두른 채로 시가를 피울지도 모른다.그 새끼들은 굉장한 돈을 버는 놈들이다.그렇지만 자기는 놈들보다도 더 멋있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조의 미소 지은 얼굴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그러다가 짐 모슨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보자,그는 갑작스레 아부하는 미소를 띠우며 자세를 고치고 앉았다.일요일의 점심식사는 자기 집에서 먹는 버릇이 있는 모슨이 2시경이 되면 이곳에 들른다는 것을 아는 그는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짐은 혼잡한 홀 안을 몸을 옆으로 세우며 겨우 뚫고 들어와 조의 테이블 앞에 앉았다.무겁게 눈 두덩이가 처진 그의 눈이 조를 향해 치켜들어졌다.조도 그 대꾸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만이 통할 수 있는 인사 방법이었다.모슨이 지겨운 표정으로 식당 안을 두리번거리는 덩안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위스키로 하겠소,짐?" 조가 먼저 물었다.짐은 머리를 흔들고는 하품을 했다.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경기가 어때?" "그다지 나쁘진 않아." 조는 별 중요할 것도 없다는 태도로 조끼의 호주머니에서 종이쪽지 하나를 꺼냈다. "지난주의 생산고는 유산탄 200톤,수류탄이 1만 톤에 봉탄,그러니까 소이탄이라는 것이 1천 개,거기다가 18파운드짜리 포탄이 1천 500개였어." "제기랄." 짐은 작은 유리접시에서 이쑤시개 하나를 집어들면서 말했다. "자네가 좀더 신중하게 하지 않는다면 자네 회사의 그 무지한 생산량만으로도 이 빌어먹을 전쟁을 끝내게 될 판이네그려." 조는 조심성 있게 싱긋이 웃었다. "너무 안달하지 말아요,짐.이 포탄 가운데는 코코넛 열매도 깨뜨리지 못하는 포탄도 있으니까 말이오.맙소사,지난주네 우리가 받은 주물엔 왜 그렇게 속에 구멍이 뚫린 것들이 많은지,원.그게 다 담신이 마지막으로 납품해준 것이란 말이야,짐.기가 막혀서.그 덕택에 포탄의 절반이 마치 그뤼예르 치즈처럼 되어 나왔지.다 불발탄이야.그 구멍들을 다 메우느라고 페인트칠을 두 번이나 했다네." "아니,정말 불발탄이란 밀인가,응?" "그렇다고 해서 사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니야,짐.포신에서 나가기만 하면 어디론가 날아갈 테니까." "그거 안됐군그래." 짐은 이쑤시개를 아직도 입에 문 채 알겠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그러고 나더니 말했다. "이번 주에는 얼마쯤 가지고 갈 수 있나?" 조는 목을 수탉처럼 쭉 뻗으며 생각에 잠기는 척하다가 말했다. "150톤만 보내주게." 모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짐.이봐.명세서를 금주엔 350톤이라고 해서 보내줘.이젠 200톤을 더 붙여주게.조금씩 떨어 먹는 것에는 지쳤어." 짐의 영 속을 알 수 없는 눈이 '그래도 안전해?' 하고 묻고 있었다.그러다가 그는 천천히 말했다.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말게.도비 놈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지." "아,새끼! 그 새끼가 어떻단 말인가? 명세서가 온대도 그 새낀 주조장에서 무엇을 어느 정도 사용하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네.장부상의 숫자만 맞으면 총계가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새끼니까." 조는 말은 그렇게 했으나 아무래도 속이 편치 못했다.도비,그 고집 세고 까다로운 코안경쟁이를 힌반 매수해보려고 애써봤지만,지금까지 이것만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그러나 다행히도 도비는 무슨 일에든 간섭은 했지만 속여 먹기는 쉬었다.그는 자기가 해야 하는 수일 보고서를 세밀히 조사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리고 실제적인 면에는 도통 백지였던 것이다.지난 몇 개월 동안 조는 모슨과 잔재미를 보는 거래를 내내 해오고 있었다.이를테면,오늘처럼 그는 부스러기 쇠를 150톤 주문했지만 서명을 하는 명세서엔 350톤으로 기록한다.그러면 도비는 350톤이라고 기록하게 될 것이고,모슨과 조는 톤당 7파운드로 200톤을 갈라 먹게 되는 것이었다.1천 400파운드라는 수입을 잡은 셈인데 짐과 조가 서로 합작극을 벌여서 얻는 부수입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었다.그러나 그것으로서도 그들이 전쟁이라는 경기에 충심으로 감사하기에 족한 일이었다. 거래가 만족스럽게 결정되자 모슨은 자기 가슴을 어루만지며 의자에 벌렁 젖혀 앉았다.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저기 두 놈이 오는군." 스토크스와 보스톡이 일어나서 이쪽으로 오더니 그들의 식탁 옆에 섰다.두 사람은 음식을 먹고 술에 취해 얼굴이 불그스레해져 기분이 좋았으나 그러면서도 잘난 체하는 태도를 감출 수 없었다.스토크스는 자기의 시가통을 조와 모슨에게 내밀어주었다.조가 반쯤 피운 자기의 하바나를 집어치우고 금 테두리를 한 악어 껍질 담배 케이스 위로 담배를 고르기라도 하듯이 몸을 굽히자 스토크스는 눈을 꿈벅거리며 말했다. "이건 냄샐 맡아볼 필요도 없는 거야. 한 개에 반 달러씩 주었으니까." "농담이 전혀 아니라구.요즘 물가를 생각해봐." 보스톡이 아주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는 브랜디를 겨우 넉 잔 마셨을 뿐이었다.그래서 약간 흔들렸지만 아직은 멀쩡했다. "달걀 한 개가 5펜스 한다는 것 알고 있잖나?" "그것쯤이야.당신네들은 얼마든지 사먹을 수 있잖수." 조가 말했다. "난 달걀은 안 먹어." 보스톡이 말했다. "달걀을 먹으면 담즙과다가 되고 게다가 나는 너무 바쁘단 말일세.난 이번엔 켄튼에다 굉장한 대저택을 사기로 했지.여편네도 원하고 딸년이 그러자구 야단이란 말이야.아아 참,여자,여자가 다 뭐냐 말야.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달걀 한 개에 5펜스나 하면,도대체 이놈의 전쟁은 앞으로 어떻게 될거냐.이 말씀이야." 시가를 자르면서 모슨이 말했다. "거기다 보험을 걸면 되잖아,난 이미 그렇게 했다구.15퍼센트야,금년 내에 전쟁이 끝난다는 보증으로.그만한 값어치는 있거든." 보스톡은 아주 진지한 어조로 논의를 벌이기 시작했다. "난 달걀 애길하고 있는 거야,짐." 스토크스가 조에게 눈짓을 보냈다.그리고 그는 말했다. "왜 암탉이 대로를 활보하겠나?" 보스톡이 스토크스를 바라봤다.그는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무슨 엉뚱한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엉뚱한 소리라니?네가 그런 뜻을 알 리가 없지... ." 스토크스는 그를 놀리듯이 말하면서 보스톡의 어깨에 다정스레 몸을 이댔다.조와 모슨은 경멸의 시선을 교환하며 그들을 바라봤다. 스토크스와 보스톡은 돈 같은 것을 지닐 위인들이 아니었다.허풍이나 떨고 다니는 그들은 이 돈벌이의 전쟁에서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언젠가 두 인간들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조는 모슨과 말 없는 가운데 그들을 멸시하는 시선을 교환하는 동안 자기가 더울 높아지는 듯 의기양양한 기분이 되었다.그는 득의만면한 얼굴로 입에다 시가를 물고는 조소하는 듯이 담배연기를 시원스레 뿜어냈다. "오늘 오후엔 뭘 할 작정인가,짐?" 스토크스가 호의에 찬 목소리로 모슨에게 물었다.모슨은 조에게 달렸다는 듯이 눈길을 조에게 보냈다. "카운티 클럽에나 가볼까?" "그것 좋겠군.우리 다 함께 가세그려." 조와 모슨이 일어났다.그들은 한덩어리가 되어 식당문 쪽으로 갔다.제복을 입은 소녀가 이 의기양양한 남성들,마치 전우주의 주인들인 것처럼 보이는 그들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며 문을 열어주었다.그들이 센트럴 그릴의 돌층계 위에 서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조는 청색 명주 스카프를 고쳐 두르려고 약간 뒤편에 서 있는데 모슨이 다정스레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조.우리 넷이 꼭 맞는데,당구나 치도록 하자." 그러나 조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얼굴로 번쩍거리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미안하지만 짐,난 급한 볼일이 있어." 보스톡이 살찐 집게손가락을 내저으며 말이 히힝거리듯 웃었다. "그래,그래.아마 바쁠 거야.브라운 부인과의 약속이 있을 테니까." 조는 머리를 내저었다. "그런 소리 하지 마.아주 중요한 용무라고." "한바탕 전쟁을 하러 그는 거겠지.아주 신나는 전쟁 말일세." 스토크스가 야비한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그러자 그들은 부러운 둣이 조를 바라보았다. "그럼,잘해보게.우리와 함께 가기는 틀렸으니... 자,어서들 가세나." 보스톡의 말에 그들은 클럽으로 들어갔다.조는 그들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층계를 내려와 활기찬 걸음걸이로 자가용을 세워놓은 곳으로 걸어갔다.그는 차에 엔진을 걸어 위틀리를 향하여 출발했다.라우라를 매점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조용한 일요일의 거리를 차를 몰고 있는 그의 머리 속에는 모슨이 계획하고 있는 일,돈,포탄,강철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맛있는 음식과 슬을 포식하고 최상의 만족감을 느끼는 그는 앞으로 다가올 오후의 일을 생각하자 더욱 큰 희열로 빠져들어 갔다.그는 싱긋이 미소를 지었다.그것은 여유만만한 자기 만족의 미소였다.라우라는 여자로서 그만이었다.또 그뿐만 아니라 그녀에게서 도움을 받고 있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우선 그는 그녀에게서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었다.예복의 넥타이 매는 것부터 전세든지 이미 반년이 되는 그 작은 비밀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다 그녀의 덕분이었다.그는 이제 더 신사다워지고 촌티 나던 예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그녀는 카우티 클럽의 회원이 되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조심스럽게 손을 써서 하워즈 가나 페닝튼 가,심지어는 존 러틀리 부인의 저택에까지 초대를 받도록 해주었다.그러한 여러 가지 일들을 그에게 해주는 것이 그녀로서도 꽤 기쁜 모양이었다.그녀는 이제 완전히 그에게 사로잡혀 버린 것이다.그리고 자기도 라루라를 완전히 알고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는 그전부터 여자들에 대해서라면 환히 알고 있다는 것을 언제나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이를테면,겁을 집어먹는 여자들,냉정한 여자들-이런 여자들은 가장 평범한 여자들이다.-척하는 여자들 등등이다.그러나 라우라 같은 형의 여자는 그로서도 처음이었다.하지만 어찌보면 그녀가 자기 자신에게 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위틀리 군수공장 아래의 광장 안으로 차가 미끌어져 들어가자-여러가지 이유로 해서 그들은 언제나 여기서 만나는 것이다.-라루라는 이미 모퉁이를 돌아 걸어오는 중이었다.그녀가 늘 시 간을 잘 지킨다는 것도 그가 기뻐하는 일 중에 하나였다.그는 모자를 벗으며 인사했으나 차 밖으로는 나가지 않고 그녀에게 문을 열어주었다.그녀는 차에 올랐다.그들은 아무 말도 나누지 않은 채 아파트로 차를 몰았다. 그들은 서로 말을 건네지 않았다.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서로를 알고 있다는 친숙함에서 오는 침묵이었다.그는 자기 옆에 그녀가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고,그것이 여간 기쁜 것이 아니었다.그녀는 엇을 멋있게 입을 줄 아는 여자였다.아무리 평범한 옷이어도 그녀가 걸치는 순간 그 옷은 이주 멋있는 것으로 변했다.지금 입고 있는 짙은 곤색의 옷도 그녀에게 꼭 어울리는 것이었다.그녀에 대한 그의 느씸은 아내를 사랑하는 그리고 무척 자랑스러워하는 남편의 기 분과 비슷한 것이었다.그러므로 그녀와 같이 있다고 해서 마음 설레거나 흥분되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이나 오히려 시들해지는 그런 느낌마저 있었다. "어디서 점심 드셨어요?" 그녀가 먼저 물었다. "센트럴." 그는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전 매점엥서 베이컨 새드위치로 간단하게 먹었어요." 그는 빙긋이 웃었다.이 여자는 음식엔 관심이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런 장소에 싫증을 느끼지 않았나보군.이직도 카나리아에게 모이를 주고 있는 건가?" "네." 그녀는 생각에 잠긴 어조로 말했다. "아직도 저에게 타락하지 않은 순수한 면이 남아 있다는 것을 그렇게 해서나마 확인하고 싶은 거죠." 그는 소리 내어 웃었고 그것으로 그런 화제는 끝났다.그들은 사소한 일들에 관해서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윽고 노던 로드의 끝까지 왔다.그 큰 길 뒤편으로 조의 아파트가 있었다.그 집은 다른 사람이 이미 들어 있는 아파트의 아래층 반만을 빌린 것이나 두 사람으로서는 꽤 쓸만했다.천장이 높은 방들과 벽난로와 장식 쇠고리가 있었고,앞뒤가 확 트인 정원이 아름다운 집이었다.그리고 가구들도 고급스러웠는데 물론 라우라가 자기 취향에 맞춰 고른 것이었다.그러나 이 집이 무엇보다 좋은 것은 두 사람이 만나는 데 방해될 것이 없이 조용하다는 점이었다.파출부에게 오전 중에만 와서 일하도록 했고,또 얘로우에서는 8킬로나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거리낄 것 없이 자유스러웠다.이웃을 만났을 때에는 기장 쉬운 이야기로 남매간이라고 했다. 조가 문을 열고 두 사람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그는 거실에 있는 전기 히터의 스위치를 올리고는 구두를 벗기 시작했다.라우라는 선 채로 우유를 한 잔 따라 마시면서 조의 등을 바라보았다. "위스키 소다 한 잔 드릴까요?"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일요판 신문을 손에 들고는 경제란을 펼쳤다.그녀는 말없이 그를 자세히 바라보면서 우유를 마셨다.그녀는 그가 이야기를 걸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이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방 안을 왔다갔다했다.그러다가 그녀는 살그머니 옆의 침실로 들어갔다.조는 안 보는 척했지만 그녀가 자기를 바라보다가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녀의 옷 벗는 소리를 듣고 있던 그는 신문을 내려놓으면서 이빨을 드러내고 싱긋 웃었다.그들 두 사람은 마치 시도가 교회에 예배를 보러 가듯,일요일 오후면 조용히 그리고 점잖게 잠자리를 함께 하는 것이었다.그러나 최근에 와서 그는 열을 별로 올리지 않게 되었으므로 은근히 라우라에게 약을 올리는 것을 재미로 삼고 있었다.지금도 그는 공연히 꾸물어리며 신문을 읽는 체하다가 하품을 한바탕 하고는 침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하얀 잠옷을 걸치고 침대 위에 반듯이 누워 있었다.그녀의 머리는 멋있게 손질이 되어 있었고,옷들은 잘 개켜져서 의자 위에 놓여 있었다.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기는 마치 마법이라도 불러일으킬 듯이 온 방에 출렁거렸다.그녀에겐 품위가 있다는 것을 그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일주일 전에 그는 위틀리 공장의 여공 하나와 놀아본 적이 있었다.-사실은 그녀의 방까지 따라갔었다.-그녀도 아주 멋있는 여자였고 라우라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느낌을 주어 신선했지만 야한 잠옷이라든가 초라한 침대 같은 것이 그에게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그렇다.라우라가 그에게 많은 교육을 시켰다는 것만은 명백한 사실이다.신사의 매너를 배우는 최선의 방법은 상류층의 애인과 함께 잠을 자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라우라가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천천히 옷을 벗고는 열쇠,순금 담배 케이스와 흩어진 잔던 따위를 장농 위에다 나란히 놓았다.그는 속옷 바람으로 서서 남은 잔돈까지 계산하고 나서야 비로소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저에게 돈을 얼마나 지불하면 좋을까를 계산하신 거예요?" 그녀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러자 그는 방이 떠나갈 듯한 요란한 소리로 웃어 젖혔다.그 웃음 속에는 승자의 통쾌감이 가득했다. "사실은 말이에요,조,전 거의 모든 것을 다 주어버린 사함이에요.아주 소소한 담배 케이스,시계,커프스 버튼 같은 것부터 시작해서 자가용까지 다 주어버렸어요.여기 있는 집안 살림도 모두 나에게서 뺏은 거잖아요.아니,당신도 노상 내게 수표를 끊어주겠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나고 잘 알있어요.그렇지만 주건 안 주건 그런 것은 난 상관이 없어요.난 그렇게 째째해지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지요.다만 내가 당신을 위해서 한 일들이 당신이 알고 있는지 가끔 그게 궁금할 뿐이에요." 그는 여전히 기분이 좋다는 듯이 싱글거리며 지신의 팔뚝을 어루만졌다. "글쎄,그것들은 당신이 좋아서 준 것들이 아니던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군요." 그녀는 한동안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우리가 처음 만날 때를 기억하세요? 그날 아침 당신은 서류 때문에 왔었죠? 그때 당신은 정말 무지한 촌뜨기 청년이었어요.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변했군요." "아! 그랬었지... ." 그는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듯이 더욱 크게 웃었다. "그렇지만 중요한 건 당신이 나에게 미쳐버렸다는 거지.당신은 거의 미친 듯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난 알아." "당신은 정말 뻔뻔스럽군요.이봐요,조.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은 이제 내게서 싫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나도 알아요.그리고 나를 이용했을 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자신에게 필요한 만큼 당신은 나를 잘 이용했어요.출세의 길로 달리기 위해서... ." "그리고 당신도 나를 이렇게 이용하고 있지 않아?" 침묵이 흘렀다.그녀가 다시 입을 열어 천천히 말했다. "어쨌든 당신은 고마운 사람이에요.내게 지신에 대한 혐오감을 이렇게까지 느끼게 해주는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가 없을 테니까요." "아니,이봐.지금은 그런 이야기가 맞지 않는 때인 것 같은데,더 기분 좋은 이야기를 하자구." 그는 속옷을 벗어 던지고는 침대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그녀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욕정이 슬퍼지는 듯 깊은 한숨을 쉬었다.그들은 약 한시간 동안 함께 있었다.그러나 조는 그 동안에도 어딘가 불편했다.그녀가 자기에게 달라붙어 누워 있는 것이 그날따라 더욱 답답하게 느껴졌다.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에는 그녀에게 남성다움을 과시하고픈 허세에,즉 스탠리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자신의 멋있는 육체에 대한 만족감으로 그는 자랑스럽기만 했다.그러나 이제는 아무런 흥미도 없었다.그녀가 눈을 떴을 때 그는 베개 너머로 약간 조소하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를 이젠 좋아하지 않으시죠,조?" "내 마음은 다 알잖아."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눈길을 아래로 돌렸다. "아아,조." "왜 그래?" "아무것도 아녜요.사랑을 느끼든 말든 모두 당신의 자유니까.다만 당신은 인정이라곤 조금도 없는 사람이에요.가끔 그런 생각을 하면 소름이 오싹 끼쳐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말 무서워요.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그는 그녀가 그럴수록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그 내밀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그는 그저 싱글거리면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그는 그녀의 얼굴에 나타나는 복잡한 감정의 기복에서 쾌감 비슷한 만족감을 느꼈다.그렇다.이제 그는 그녀의 남편과 같은 자리에 올라선 것이다.물론 그는 그녀가 여전히 좋았다.그러나 그는 그녀의 마음을 꼭 잡아놓고 자기에게 매달리게 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었다.그는 그녀의 기분이 몹시 가라앉은 것을 알았으나 자기는 기분이 좋은 척했다. "아,우리 차나 한 잔 마시면 어때? 난 몹시 목이 마른걸." 그가 이빨을 드러내며 싱긋 웃는데 갑작스레 전화가 울였다.그는 여전히 싱글거리며 그녀의 몸 위로 손을 내밀어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네.가울런입니다.네.모건... 네... 모르겠는데,아니,전혀 알 수 없어요. ... 뭐라고!" 조의 명랑하던 음성이 바뀌었다.긴 침묵이 흘렀다. "그래요? ... 맙소사,설마 그럴라구,사무실에 그게 왔단 말이지. ... 응,응,모건... 네,물론이지. ... 내가 곧 거기로 가지요,네,내가 직접 가지요." 조는 수화기를 놓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다시 긴 침묵이 흘렀다. "무슨 전화예요?" "그러니까-." 조는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말야... ." "그런데,뭐예요?" 그는 침대 시트의 가장자리를 잡아당기면서 머뭇거렸다. "사무실로 전보가 왔대." 라우라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러다가 갑자기 음성을 높였다. "스탠리의 전보지요?" "별일은 없을 거야.다만 포탄 쇼크를 받았다는데,별일은 없을 거야." "포탄 쇼크!" 그녀의 입술이 새하얘졌다. "다른 일은 없다니까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어." 라우라는 이마에 한 손을 짚었다. "이걸 어떻게 하죠? 뭔가 일이 일어나리라고 예감했어요.난 알고 있었어.알고 있었다구." 그녀는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 걱정할 것 없다니까,정신 차려.그 사람은 찰과상 하나 입지 않았다는 거야.포탄이 옆에 떨어졌지만 운수 좋게 땅에 파묻혔대.다만 쇼크를 받았을 뿐인데 안정이 필요해서 집으로 보내는 것이라고 했어.집에서 치료 받으면 곧 나을 거야." 그가 손을 잡으려 하자 그녀는 놀라며 물러섰다. "안 돼요,나를 그냥 내버려둬요.나를 혼자 내버려두란 말이에요... ."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괜찮다니까 왜 이렇게 야단이야." 그러나 그녀는 몸을 돌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흐느껴 울면서 잠옷을 벗어 던졌다.그러고는 의자 위를 더듬거리면서 재빨리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라우라... ." 그는 그녀가 우는 것을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 당황해서 그녀를 달래려 했다.그러나 그녀는 사납게 소리질렀다. "시끄러워요.당신이 하는 말은 사태를 더 악화시킬 뿐이에요.당신 때문에 난 그만 머리가 돌아버렸어요.당신 때문에 난 이렇게 돼버렸어요.그런데 이제는 스탠리마저... 이걸 어떻게 하면 좋죠?" 그녀는 옷을 다 입자 모자를 집어 들고는 흐느끼면서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는 한동안 팔꿈치를 세우고 그대로 있다가 벌거숭이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침대 옆 태이블 쪽으로 손을 뻗쳤다.길게 하품을 하면서 그는 태연한 얼굴로 담배를 빼어 물었다. 14 1916년 봄.힐다와 그레이스가 런던에서 간호사가 된 지도 거의 14개월이 지났다.힐다는 지금 그의 생애 중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걱정스러운 아버지의 변화,넵튠 탄광의 재난 사건이 남긴 모든 괴로운 여운,아서가 형무소에 투옥된 일,그 모든 우울한 일들은 캐리 고모의 슬픈 편지를 통해서 모두 전해지고 있었지만 그것들이 그녀에게는 거의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이 소식을 듣고 그레이스는 힐다에게 사정했다. "힐다 언니,아서 오빠를 구하기 위해서 뭔가 해야 되겠어.그런 고생을 하도록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잖아.어떻게 할까,응,언니?" 그러나 힐다는 칼로 베듯 딱 잘라 말했다.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아무것도 할 수 없어.그런 사건에서 피하는 일 외에는." 그레이스는 좀 놀라는 듯했지만 힐다는 자신의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병원으로 사용되는 벨그레이브 광장에 있는 켈 경의 저택은 아름다운 유리 세공의 샹들리에와 몇 개의 그림,융단 벽걸이를 제외하고는 아무 장식도 없는 큰 집이었으나,병원으로는 아주 알맞게 개조되어 있었다.6개의 방운 모두 어마어마하게 컸고,노다란 천장과 반짝이는 떡갈나무 바닥으로 되어 있어 병실로 사용하기에 알맞았다.집 뒤에 있는 커다란 온실이 수술실로 꾸며졌는데 힐다가 그처럼 행복한 순간들을 보내는 곳은 바로 이곳이었다. 힐다는 이 벨그레이브 광장으로 옮겨온 후로 모든 것에 놀랄 만한 진보를 했다.6개월이 경과하는 사이에 그녀는 보통 사람이 3년간을 훈련을 쌓아야 습득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몸에 익힐 수 있었다.이에 감탄한 간호부장 미스 깁스는 힐다를 가장 능숙한 간호사만이 갈 수 있는 수술실 근무애 추천해주었다.수술실 근무는 힐다의 괴팍한 성격에 꼭 알맞는 곳이었다.침울한 성격에 남에게 전혀 의존하지 않고 매사가 정확한 힐다는 수술실에서 곧 그의 놀라운 솜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사람들과는 별로 사귀려 들지 않았다.다만 실수라곤 전혀 없이 완전하게 자기 임무를 수행할 뿐이었다.쉬는 시간에는 열심히 공부했다.그녀의 학구열은 대단했고 공부해야 할 것은 너무 많았다.그녀는 원래 그러한 사람이었다.자신을 방해하고 억제하는 것이 없어지고 그녀의 본 모습이 드러나게 되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외모로만 보아도 조금도 빈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수술실 담당의사 네스는 경력이 짧은 이 새로운 간호사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자주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면서 원래 무뚝뚝한 데다가 더욱 엄격하게 대했다.그러나 힐다는 첫 수술 때부터 놀라을 정도로 젭싸게 움직였다.의사가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네스는 현역이 아니라 명예직 군의관이었다.키가 작고 몹시 무뚝뚝한 적황색 머리칼의 네스는 수술할 때마다 땀을 비오듯이 흘리는 것이 특징이었다.그러나 그의 복부 수술 솜씨는 따를 사람이 없었다.몇 주가 지나지 않아 그는 깁스에게 힐다의 간호사로서의 뛰어난 자질을 칭찬 비슷이 비추었다.이 말은 곧 힐다에게 전해졌지만 그녀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미스 깁스는 좀 과장된 표현으로 '눈부신 명예'라고 그녀를 치켜세웠지만 힐다는 무간심하기까지 했다. 마음속으로 만족과 약간의 흥분을 느꼈지만 그것은 곧 억제되었다.그리고 이러한 성공은 그녀가 지금까지 지녀온 결심을 더욱 공고히 해주고 더 높은 야망을 갖게 해 주었다.네스의 절개,봉합 그리고 접합 등을 하고 있는 능숙한 솜씨를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속에는 수술실 간호사에서 머물 수 없다는 더 높은 야심이 꿈틀대는 것이었다.자기도 네스처럼 그러한 수술을 하게 될 때가 오리라! 그때까지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 할 뿐이라고 다짐했다.그녀는 의사,외과의사가 되는 것이 최대의 꿈이었다.자기는 아마 그 출발이 좀 늦었는지도 모른다.그러나 아직 젊다.이제 스물다섯 살인 것이다.그리고 이제 그 무서운 법산저택에서 해방되었으니 다른 어떤 방해가 있어라도 목적을 달성하고 말 것이다.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힐다는 행복했다.-그녀에게는 원대한 포부가 있고 또 귀여운 동생 그레잉스가 있는 것이다. 그레이스는 힐다처럼 드러나게 성공을 하지 못했다.아니 그레이스에게는 성공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고 또 그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언제나 단정치 못한 옷차림에 시간 관념이 없고 매사가 정확하지 못하여 딱할 정도로 그레이스의 성공이란 까마득한 것이었다.힐다가 그처럼 찬사를 받으면서 수술실에서 일에 열중하는 동안 그레이스는 마룻바닥이나 닦고 지하실의 세면기나 청소해야 했다.그러나 그레이스는 그런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오히려 그 일에 만족하고 있었다.그리고 지나친 열의 때문에 그녀는 두 번이나 미스 깁스에게 불려가서 꾸중을 들었다.병동 부엌에서 환자 아내들에게 차를 끓여 주었다는 것과,또 간호사를 모욕했기 때문에 근신 처분을 받은 하사관에게 고급 담배를 몰래 주었던 일 때문이었다.미스 깁스의 조금도 거침이 없는 표현을 빌린다면 그레이스는 무능한 여자,어떻게 손을 써볼 수도 없는 엉리석은 사람이었다.자신을 좀더 잘 알아 개선하지 않는다면 평생 그 간호 보조사 자리를 떠날 수가 없을 것이라고 그녀는 단정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그레이스라는 사람이었다.그리고 힐다와 미스 깁스를 빼놓고는 그레이스가 그 태도를 고치기를 바라거나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모두들 그레이스를 사랑했다.아니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간호사 기숙사는 그 병원에서 1.5킬로쯤 떨어진 슬로몬 가에 있었다.이 기숙사에 있는 그레이스의 작은 방은 어떤 사람에게나 친절하게 개방되어 있었다.별로 잘 정돈된 방은 아니었으나 누구나 마음 편하게 드나들면서 담배나 잡지 또는 레코드 판,전쟁의 부산물인 가짜 초콜릿 등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그레이스에게는 언제나 약속이 많았다.서로 다투어 차를 마시러 가자고 하든가 영화구경을 가자고 했고 심지어는 휴가로 잠시 귀국한 오빠를 소개시켜준다고 끌고 나가는 열성파도 있었다.그레이스는 이 모든 것을 유쾌하게 받아들였다. 힐다는 정반대였다.누구와도 사귀지 않았다.언제나 잘 정돈된 그의 방에는 한사람의 친구도 찾아오는 일이 없었고 또한 바라지도 않았다.다만 그레이스만이 드나들 뿐이었다.힐다는 그레이스만을 원하고 있었다.그 아이만 옆에 있어 준다면 행복했다.그래서 그레이스가 너무 여러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할 수 없었다.더구나 남자들과 아무 스스럼 없이 다니는 것은 혐오감까지 일으키는 것이었다.좀처럼 자기 감정을 나타내지 않는 힐다였지만 이런 것만은 참지 못해서 자주 화를 냈다. 3월도 다 가던 어느 날 그레이스와 만난 자리에서 힐다는 조심스러운 충고를 했다. "그레이스,그런 천한 남자들하고 어울려 다니는 짓은 그만둬." 그레이스의 천진스러운 얼굴은 의문의 표정을 지으며 힐다를 바라보았다. "언니는 왜 그 사람들을 경멸해?얼마나 착한 사람들인데...난 그들이 외로워하니까 같이 차를 마시러 다닌 것뿐이야." "그렇게 간단한 게 아냐.너도 이젠 얌전해질 나이가 됐잖니. ...나가고 싶을 땐 내가 같이 가줄게.다른 사람과는 약속하지 말아." 힐다의 지나친 간섭과 독선은 그레이스를 귀찮게 했지만 그것을 탓하지 않았다.언제나 온순하게 따랐고 그것이 그레이스의 천성이기도 했다.그러나 이러한 그레이스도 힐다에게 굽히지 않고 강경하게 맞설 때가 있었다.편지에 관한 것이었다.그레이스는 누군가와 편지를 주고 받고 있었는데 힐다가 이것을 가장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편지 교환은 계속되었다.그 편지는 매주에 한 번씩,어떤 때는 두 번 올 때도 있었다.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프랑스 전선의 야전 우체국 소인이 찍힌 이 편지는 언제나 같은 사람에게 오고 있었다. 4월로 접어든 어느 날 저녁이었다.두 사람은 일을 끝내고 기숙사로 돌아가고 있었다.어느새 거리는 어둠에 싸이고 있었다. 잠잠히 걷고 있던 힐다가 갑자기 이야기를 꺼냈다. "너 오늘 또 편지 받았지... 프랑스에서 오는 편지." "응." 힐다는 공연히 화가 나서 얼굴이 굳어졌다. "그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 어둠 속에서 그레이스의 얼굴도 붉어졌다.대답하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대답을 회피하거나 이야기를 돌리는 것을 싫어하는 그레이스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댄 티즈데일." "댄 티즈데일이라고!" 힐다의 음성은 경악과 경멸로 자기도 모르게 음성이 떨려 나왔다. "네가 티즈데일하고... 그 천한 빵집 아들과... ?" 그레이스는 태연했다. "맞아.바로 그 티즈데일이야." "아니,얘가?" 힐다는 걸음을 멈추었다.평소의 힐다답지 않게 몹시 흥분하고 있는 그녀는 좀 우스꽝스러웠다.자신도 그렇게 느꼈지만 이상하게 억제할 수가 없었다. "너 지금 제정신이니? 그렇게 멍청이 같은 얘길하고 있다니... ." "그게 왜 멍청이 같은 얘기야? 난 진실을 말하고 있을 뿐야." 힐다의 입술이 보기 싫게 비뚤어졌다. "그 천한 빵집 아드님하고의 교제가 진실이라고... 그레이스,우리 가문을 생각해본 일이 있니?부끄럽지도 않니?" 그레이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러나 조용하고 힘있는 목소리는 분명했다. "언니가 아무리 멸시하고 빈정댄다고 해도 나나 티즈데일은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어요.이 세상에서 댄처럼 아름답고 진실한 편지를 쓰는 사람은 처음이에요." "그래,마음대로 생각하렴.그러나 나도 천하고 비열하다는 생각은 바꾸지 않겠다.그리고 난 네 언니야.또 지금 이곳에 있는 한,너의 유일한 보호자이기도 하니까 얼빠진 아이처럼 그따위 천한 짓은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내 의무라고 생각한다.어리석은 생각 때문에 일생을 망친 여자들은 네가 아니라도 너무 많아요.그 여자들이 사랑한 사람들이 뭐 전쟁영웅이라고!당치도 않아.그 편지 교환은 당장 그만둬." 그레이스는 머리를 흔들었다. "미안해,언니." "미안할 건 없어.그만두면 일은 끝나니까." "안 돼요." 그레이스는 울고 있었다.그러나 쇳소리처럼 퉁겨져 나오는 그 짤막한 거부는 그레이스의 것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힐다는 어색해져 버렸다.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는 장벽 같은 것이 두 사람 사이를 막아버린 느낌이었다.그러나 그녀는 물러서지는 않았다.그녀의 강한 자만심과 또 그레이스에 대한 편협한 애정은 더욱 그녀를 강박했다.힐다는 자신의 행동방향을 정하고 그 방향대로 그레이스도 강제로 끌고 가려고 했다.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엄격하고 단호한 태도로 명령하는 식이었고 그 가운데에는 경멸감이 숨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그러나 그레이스에게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여전히 편지를 받는 즐거움을 누리며 힐다를 상관하지 않았다.그리고 힐다의 이 위압적인 태도도 오래가지 못했다.그레이스를 너무 좋아하고 있었고 또 힐다로서도 계속 고집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다시 힐다는 상냥해졌다.우선 용서를 청하면서 다가왔다.그러나 댄과의 관계를 허락할 수 없다는 고집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일방적인 것이었다.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신분에 맞지 않는 교제를 끊을 것을 종용하고 설득시키려 했으나 온순한 그레이스도 이때만은 강경했다. 힐다는 끊임없이 날아오는 혐오스러운 편지를 늘 감시했다.6월의 어느 날 아침 일찍이 우편함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서 편지들을 조사하다가 그 편지의 소인이 프랑스가 아닌 러프버러인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그녀는 아침식사가 끝나자마자 그레이스를 불렀다.여전히 조소하는 얼굴로 이야기를 꺼냈다. "그 사람 주소가 바뀌었더구나." "응." 그레이스는 관심 없다는 듯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부상당했니?" "응." "중상이래?" "아니." "그럼 그곳에 입원해 있겠구나." "그렇겠지." 힐다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쉬었다.이곳과는 멀리 떨어진 러프버러 병원이라니 곧 회복되는 대로 프랑스의 전선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그러나 입술을 비쭉거리며 또 빈정대었다. "안 됐구나.이곳으로 오지 못해서.통속소설이 더 멋있어질 뻔했는데 말야." 그레이스는 휙 몸을 돌렸다.그러나 힐다의 조롱은 계속되었다. "마취에서 깨어날 때 곁에서 울고 있는 너를 발견한다면... 근사하지 않겠니?" 힐다의 목소리는 떨렸다.얼굴도 붉어졌다.이렇게 저속한 야유를 던지고 있는 자신이 너무 불쾌하고 혐오스러웠기 때문이다.자신은 질투를 하고 있는 것이다.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그레이스는 아무 말도 못 들은 것처럼 걸어갔다.앞치마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편지를 손으로 눌렀다.근무 중에 그녀는 그 편지를 몇 번이나 읽었다. 댄은 솜에서의 대공격에서 왼쪽 팔뚝과 손목에 부상을 입었다.그러나 가벼운 것이어서 곧 회복될 거라며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아프지는 않지만 다만 팔을 쓸 수 없을 뿐이라고 했다. 그런데 댄의 편지가 7월 말이 되면서 끊어졌다.몹시 궁금한 날들이 계속되면 7월 마지막 날이었다.일을 끝내고 기숙사가 있는 슬로몬 가로 걸어가던 그녀는 기숙사 바로 맞은편에 팔을 어깨에 걸쳐 맨 군복 차림의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녀는 혼자 돌아오는 길이었고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몸도 피곤할 뿐 아니라 아서의 일 이후로 점점 더 엉망이 되고 있는 집안일들이 마음을 편치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다.한번 잘못되기 시작하니 모든 것이 다 잘못되는 듯한 느낌이었다.또 미스 깁스는 단정치 못하다고 또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별로 관심이 없던 그 소리도 자꾸 듣게 되니 유쾌하지 못했다.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댄의 편지가 끊어졌다는 것이었다.댄의 편지가 자신의 생활안에서 이렇게 큰 자리를 잡고 있었다니 새삼 놀랄 일이었다.그의 편지가 오지 않는 이 며칠 동안은 얼마나 어둡고 지루한 시간들이었는가.마음은 방향을 잃은 채 갈팡질팡하고 모든 것이 재미없었다.그런데 눈앞에 군복의 남자가 서 있는 것이었다.그레이스는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순간 그녀의 심장이 크게 고동치기 시작했다.바로 댄 티즈데일,그 사람이 서 있었다.그는 천천히 길을 건너왔다.멍하니 서 있는 그녀 앞으로 오자 그는 상관에게 하듯 어색하게 거수경례를 했다. "아,댄! 당신인 줄 알았어요.난 당신이 이렇게 찾아올 줄 알았다니까요." 지금까지 그 어둡고 불쾌하던 우울은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그 대신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이 그녀를 쓰러뜨릴 것처럼 밀려왔다.그녀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을 잡는 댄은 떨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그녀 앞에 서게 될 때마다 느끼게 되는 부끄러움은 고통스러울 정도였다.그는 그녀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순박하고 천진스러운,어린 시절의 눈빛 그대로인 그녀의 커다란 눈을 바라보는 것이 왜 이렇게 두려운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그레이스는 지금까지 자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그래서 댄을 만날 때마다 신기했다.지금도 쩔쩔매는 그의 모습에 웃음이 터지려고 하다가 또 울어버릴 것 같가도 했다.그녀는 그 바보 같은 발작을 눌러버리기 위해서 얼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어요?왜 기숙사 응접실에서 기다리지 않았어요,댄?"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난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어.그저 그레이스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잠깐 인사만 하고 가려고... ." 댄은 얼굴을 다시 붉혔다. "잠깐만이라구요?" 그녀는 섭섭함을 웃음으로 얼버무리면서 거북하게 올려 맨 그의 팔을 바라보았다. "팔을 많이 다쳤어요?많이 아파요?" "손목을 좀 상했어... 힘줄이 잘못됐대." 걱정스러운 눈빛인 그레이스에게 그는 처음으로 밝게 웃어 보였다. "오히려 감사해야지.이 팔목 정형 때문에 랭엄 요양소로 오게 된 거니까.전기치료도 하고 새 운동기구도 사용하면서 6주쯤 치료하면 원상으로 된대.그럼 다시 전선으로 가야지." "6주간 동안이나!" 그녀가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자 댄은 좀더 활기찬 모습이 되었다.그러나 역시 어색하게 머뭇거리다가 시간이 없음을 알자 겨우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말야,혹시 괜찮다면,아직 다른 약속이 없다면... ." "다른 약속 같은 것은 없어요.혹시 있다고 해도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내 옛날 친구가 왔는데... 내가 얼마나 기쁜지 아세요?" 그녀는 말을 뚝 끊고 눈이 부시다는 듯 이제는 완전히 어른이 된 댄을 올려다보았다.그녀는 역시 단정한 차림이 아니었다.아무렇게나 빗어올린 머리는 모자 밖으로 한움큼이나 밀려나와 있고 뺨에도 열심히 청소를 했다는 표시처럼 더러운 얼룩이 묻어 있었다.그러나 그런 것은 댄에게도 상관이 없었다.댄은 다시 용기를 내어 말을 이었다. "난 내일 두 시간쯤 시간을 낼 수 있어.차 마시러 갈까?" 그는 웃었지만 눈은 여전히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좋아요." 그녀는 아무 꾸밈이 없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댄이 청하지 않았으면 내가 청할 뻔했어요.하지만 여자가 먼저 그런 부탁을 하면 부끄러운 일이죠." 그녀의 솔직한 말에 댄도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6주간 동안이나 매일 만날 수 있다니... 꿈을 꾸고 있느 것 같아요." 그녀는 말을 끊고 그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그렇지만 또 만나야 할 여자 친구가 있는 거 아녜요?" 그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금세 근심에 찬 눈빛이 되었다.그레이스는 행복하게 웃었다.댄을 다시 만나다니 정말 엇있는 일이었다.댄은 가로수가 늘어서 있는 길을 마차로 태워주던 그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녀에겐 가장 멋있는 친구다.버드나무에 물이 오르기 시작하면 기 즌가지를 꺽어 피리를 만들어주고,슬루스 모래 언덕에서 금빛 굴뚝새 둥지를 가르쳐주던 그리고 에이버리 농장에서 밀짚모자를 가져다주던 그 댄이 지금 조금도 변함 없이 자기 앞에 서 있는 것이다.육군 중위의 차림으로 훨씬 몸이 건장해지고,한 팔은 붕대로 묶여 있지만 그 옛날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엄격한 군대생활에서 그는 많은 것을 배우고 얻었겠지만 그레이스가 변할 수 없는 것처럼 그도 완벽한 군인으로 변모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겸손한 댄일 뿐이다.그레이스는 댄과 사랑을 하고 있다고는 감히 생각하지 못했다.다만 그를 만난 순간 집을 떠난 이후로 이렇게 기뻤던 일은 없었다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내일 3시,밖에서 기다려줘요.댄,너무 소문 나게 하지 말아요.난 일자리를 잃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녀는 그가 대답할 사이도 없이 돌층계를 뛰어오라가 버렸다. 다음날 그들은 약속대로 만났다.옥스퍼드 가에 새로 문을 연 해리스 다방에 마주 앉았다.오랫동안 이야기를 했다.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끊이지를 않았다.댄은 어색한 수줍음을 벗어나자 놀랍도록 이야기를 잘했다.그레이스가 생각한 대로 댄은 멋있는 사람이었다.그리고 댄은 자기의 이야기만 늘어놓는 사람이 아니었다.그레이스의 이야기를 무척 듣고 싶어했고 열심히 귀를 기울여주었다.그레이스는 자기의 이야기를 이렇게 열심히 들어주는 사람은 만난 일이 없었다.힘을 얻은 그레이스는 지금까지 마음속에 뭉쳐 있던 이야기들을 모두 털어놓았다.아서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였다.댄은 묵묵히 심각한 얼굴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 탄광 사건 이레 우리 집안은 이상하게 뒤틀리고 만 느낌이에요.집에 대한 애착이 점점 없어져요.이젠 집에 돌아가고 싶지도 않아요." 그는 근심과 연민이 담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나도 이해가 가는군.정말 그렇겠어." 그의 따뜻한 위로의 말을 듣자 그레이스는 금세 마음이 평온해졌다.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다보았다. "댄,넵튠으로 다시 간다는 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요." 댄은 고개를 숙였다. "나도 넵튠에 너무 오래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장래문제에 대해서 생각도 많이 해봤어.솔작히 말해서 난 탄광일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아.그렇지만... 이러 말을 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런 끔찍한 사건은 언제나 있어 온 거고 조금 떠들다간 잠잠해져 버리게 되지.어쩔 수 없는 거야."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만일 전쟁에서 살아 남는다면 난 농사를 짓고 싶어." "정말 그게 어울릴 것 같군요." 그레이스는 눈을 빛내며 댄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그들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끝이 없었다.심부름하는 소녀가 두 번이나 다가와 무얼 더 들겠냐며 불쾌한 채근을 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벙을 나와서는 하이드 차크를 산보했다.서팬타인 연못을 돌아 하이드 파크 모퉁이로 다시 돌아오는 동안 시계는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간호사 기숙사 앞까지 오자 그레이스는 댄을 올려다보았다. "나와 만나는 것이 싫지 않아면 댄,내일 다시 만나요." 그레이스와 댄은 매일 만나게 되었다.만나서는 호젓한 곳을 찾아다니면서 두 사람만의 시간을 즐겼다.아아,그들은 얼마나 즐거웠던가!첼시 제방을 걸었고,푸트지까지 기선을 타고 갔다가 리치먼드까지 버스를 타기도 했다.아주 초라한 작은 다방에도 들어가 보고 소호에서 이태리 음식을 먹었다.그건 별로 돈이 많이 들지 않는 평범한 것이었으나 이들에게는 아주 호사스러운 것이었다.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그런 일들이 이미 수없이 되풀이되었겠지만 이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신기하고 소중한 것들이었다. 켄징튼 공원에 갔다가 돌아오던 저녁이었다.기숙사 앞에서 힐다와 두 사람은 정면으로 마주쳤다.힐다는 그들의 일을 모두 알고 있었다.다만 우연히 만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일부러 만난다는 것은 치사한 일처럼 생각되었던 것이다.힐다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안녕하세요?" 힐다의 인사는 상냥했지만 고개를 바짝 들고 있는 모습은 한 번 단단히 맞서 보겠다는 태도가 분명했다. "안녕하십니까,배러스 양." 댄의 음성에도 팽팽한 긴장이 담겨 있었다. "댄은 전쟁을 아주 잘 이용하고 있군요." 힐다의 모욕적인 말에 그레이스가 끼여들었다. "언니,함부로 말하지 말아요.댄이 일부러 부상이라도 당했다는 거야?" "아니,그게 아니야.두 사람 다 흥분하지 말고 잘 들어둬요.내 말은 이 전쟁이 끝나 안정과 평화가 다시 찾아오면 우리 모두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안정된 삶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거지." 거만한 얼굴로 싸늘하게 내뱉는 그녀의 말뜻은 실로 지독한 것이었다.댄의 얼굴빛이 창백해졌다.그는 냉정한 작별 인사를 끝내고는 그레이스에게 눈도 주지 않은 채 휙 돌아서서 가버렸다. 기숙사에 돌아와서도 힐다는 여전히 의기양양한 얼굴로 그레이스를 돌아다봤다. "너도 잘 기억하겠구나.우리가 소꿉놀이를 할 때 그 빵집 이들이 말랑말랑한 빵을 갖다주곤 하던 것 말이다." 그레이스가 사납게 다가와 계단을 오르던 힐다의 찰을 거칠게 잡았다. "언니,마지막 경고야!한 번만 더 댄과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한다면 난 언니 곁을 떠나버릴 거야.잘 이억해둬요.!" 두 사람의 시선이 불꽃이 튈 것처럼 격렬하게 마주쳤다.힐다가 먼저 시선을 돌려버렸다. 드디어 댄과의 마지막 만남의 날이 다가왔다.목요일이었다.다음 주 월요일이면 댄은 멀리 프랑스의 그의 부대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손목의 부상은 깨끗이 낳았다.붕대를 풀어버린 지도 오래다.그들은 이 마지막 날을 큐가든즈(런던 서부의 국립 식물원)에서 지내기로 했다.식물원에 대한 정열이 대단한 댄이 이 식물원을 몹시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다.그레서 마지막 산책 장소로 큐 식물원을 남겨두었던 것이다.그러나 그날의 산책은 별로 재미가 없었다.아침부터 날씨가 좋지 않았다.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두 사람의 기분도 좋을 수 없었다.마지막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힐다의 조소 어린 비난이 두 사람을 늘 ㅉ아 다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댄은 말이 없었다.그레이스는 슬퍼지기까지 했다.이 몇 주 동안 그레이스는 자신이 댄을 분명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그러나 댄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그의 마음을 알 수 없는 이 상태로 그가 프랑스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그레이스는 참을 수가 없었다.그레이스는 댄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아마 친구 정도로 생각할 뿐이고 그 이상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도대체 누가 나 같은 여자를 사랑하겠는가? 슬픈 일이지만 자신처럼 바보스럽고 경솔하고 예쁘지도 못한 여자를 진정으로 좋아할 남자는 없을 것이라고 그레이스는 일찍부터 단정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사실을 알고 싶고 확인하고 싶었다.끝내 말 한마디도 없이 떠나가 버릴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댄의 옆에서 같이 걷는 동안 그레이스의 마음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두 사람은 푸른 종 모양의 수선화가 가득 핀 숲의 바로 위에 있는 작은 호숫가로 올라갔다.물오리들이 맑은 물에서 헤엄 치며 놀고 있었다.그림처럼 아름웠다.댄은 감동한 얼굴로 오래도록 물오리들을 바라보았다.그러곤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도 가능하다면 물오리도 키우고 싶군." 그레이스도 고개를 끄덕였다.나와는 무슨 상과이냐고 생각하면서도 "아주 좋을 거예요,댄." 하고 대답했다.그레이스는 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자기 마음의 의문과 슬픔 모두를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목구멍이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두 사람은 그 물가에 버려진 사람들처럼 오래도록 서 있었다.즐겁게 날개를 푸드덕대는 새드릉ㄹ 멍하니 바라다보면서 자신들의 슬픔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처럼.그때 갑작스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걷잡을 수 없이 거센 빗발이었다. "큰일났네." 그레이스는 소리쳤지만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다.숨이 막힐 것 같던 것이 시원한 빗발에 씻기는 느낌이었다.당황하며 사방을 둘러보던 댄은 그레이스의 손을 잡았다. "뛰자.저기 보이는 온실로 가자." 줄기찬 빗속을 달렸다.보통 때 같으면 몹시 재미있을 달리기였다.그러나 전혀 즐겁지 않았다.난초를 가꾸고 있는 그 온살 안은 스팀까지 들어오고 있었다.그레이스는 청색 군용 레인코트를 입고 있었으나 댄은 군복 바람이어서 웃옷이 흠뻑 젖었다.우선 숨을 돌린 그레이스는 근심스러운 눈으로 댄을 바라보았다. "옷이 너무 젖었어요,댄." 주위의 탐스러운 난초의 푸른 줄기들이 자신들을 더욱 초라하게 보이게 했다.스팀용 굵은 파이프들을 바라보던 그레이스는 다시 댄을 바라보았다. "댄,웃옷을 벗어서 말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그대로 있다간 틀림없이 감기 걸릴 거예요." 댄은 모든 것이 귀찮았다.잦은 옷이 거추장스럽긴 했지만 그대로 가만히 있고 싶었다.그러나 그레이스의 어떤 말도 거절해본 일이 없는 그는 이번에도 아무 말 없이 옷을 벗었다.그레이스가 잦은 옷을 말릴 곳을 찾고 있는데 다른 쪽 문이 열리며 늙수그레한 정원사가 들어왔다.그는 두 사람이 비를 피해 뛰어오던 것을 본 듯 친절한 미소를 띠었다. "이쪽으로 와서 말려요.이쪽 파이프가 더 뜨거우니까." 그레이스는 그에게 감사하며 가리키는 대로 구석진 곳으로 갔다.그곳엔 뜨거운 파이프 여러 개가 연결되어 있었다.그녀는 댄의 웃옷을 걸쳐놓고는 파이프 바로 위에 걸려 있는 거울을 무심코 바라보다가 흠칫 놀랐다.생각보다 훨씬 더 볼썽 사나운 여자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뛰어오는 바람에 머리는 모자 밖으로 마구 헝클어져 흘러내린 데다가 얼굴은 오늘따라 푸르죽죽하게 생기마저 없어 보였다.맙소사!그녀는 더욱 비참해져서 얼른 고개를 숙였다.댄에게 이 보기 싫은 모습이 어떻게 보일까 생각하니 부끄러워지기까지 했다.댄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더욱 그녀를 처지게 했다. 댄의 옷이 마르기를 기다리며 그는 벽에 몸을 기대어 섰다.댄이 잇는 곳이 보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웠다.말이 많은 정원사의 이야기가 좀 귀찮았지만 귀를 기울이는 척했다.정원사는 전쟁 때문에 점점 더 석탄을 구하기가 힘들어진다고 불평을 하고 있었다.이제 곧 가을이 올 테고 그러면 온실용 연료는 점점 더 양이 늘 텐데 아무 대책도 없다는 것이었다. 옷은 금세 말랐다.따뜻한 웃옷을 들고 움푹한 곳에서 나오니 댄은 비가 줄기차게 쏟아지는 밖을 뚫어지게 내다보고 있었다.그레이스를 돌아다보는 얼굴은 몹시 어두웠다. "주말에도 비가 오겠지?" "그럴 것 같군요." 그레이스는 대답을 하면서 그의 앞으로 옷을 내밀었다.이마위로 헝클어진 머리를 그대로 둔 채 두 손으로 옷을 들고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몹시 처량해 보였다.댄은 정신이 나가버린 사람처럼 그녀를 바라보았다.얼마 동안이나 바라보고 있었을까.그는 그녀가 너무 불쌍해 보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신음 소리처럼 그는 중얼거렸다. "사랑해,그레이스." 그레이스의 눈이 커다랗게 열렸다. "사랑해,그레이스." 옷이 바닥으로 떨어졌다.두 사람은 누가 먼저인지도 모르게 서로 얼싸안았다.그레이스의 가슴은 행복감에 다시 고동치기 시작했다. "아아,댄." "말하지 않을 구 없었어,그레이스.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어." 그레이스는 울었다. "우리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죠? 댄,모든 게 현실이죠?" 댄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레이스는 다시 깊이 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언제까지 돌아가야 해요?" 댄은 오랫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겨우 입을 열었다. "월요일." "오늘이 무슨 요일이죠?" "목요일이지." 그레이스는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화내지 말아요." 댄은 빙긋이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내가 왜 화를 내?" 그레이스는 입술을 물었다.그러나 결심한 듯이 빠르게 말했다. "댄,우리 토요일에 결혼해요." 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렬버렸다.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의 온 영혼이 그 눈빛 속에 담겨 있는 듯했다. "그레이스!" 그는 속삭이듯 이름을 불렀다. 난초들 뒤에서 이들을 바라보고 있던 늙은 정원사는 부족한 석탄 같은 것은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넋을 잃은 사람처럼 이 젊은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토요일에 결혼을 했다.그레이스는 주말휴가를 얻기 위해 미스 깁스를 설복하는 데 진땀을 뺐다.그 주말여행은 그들 두 사람의 신혼여행이었다.그들은 브라이튼으로 갔다.댄이 말한 것처럼 비가 몹시 쏟아지는 주말이었으나 두 사람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15 그 해 8월 하순의 어느 날 오후,승강기가 파라다이스 갱구로부터 천천히 올라왔다.배러스는 암스트롱과 허즈페드와 함께 그 승강기에서 나와 탄광 구내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배러스도 탄광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검은 노퍽 재킷( 등에 띠가 있는 작업복)과 반바지에다 가죽으로 된 둥간 스컬 캡 그리고 튼튼한 지팡이를 손이 들고 있었다.그는 마치 막이 오르기 전 무대에 서 있는 배우 같은 자세로 갱내 감독들의 시선을 느끼면서 암스트롱과 허즈페드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아무래도... ." 그는 천천히 말했다. "이건 신문사에 알리는 것이 좋겠군.'아거스'지가 제일 낫겠지.알면 기뻐할 게야." "알겠습니다,사장님.내일 전화해놓겠습니다,틀림없이." 암스트롱이 말했다. "신설도로의 공사비 견적서를 상세하게 잘 보여주도록 해." "네,알겠습니다." "아,그리고 말이야,암스트롱.이런 계획을 하게 된 중대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애국적인 견지에서라는 것도 알리도록.우리가 파라다이스 갱구에 다시 들어가게 될 때,생산고는 배가될 터이고 그것은 국가적으로도 이익이 될 수 있을테니까." 배러스는 고개를 끄덕끄덕해 보이는 구내의 문 쪽으로 갔다.자신이 입고 있는 탄광복이 의미하는 절대적인 권위를 의식하면서 그는 법산저택 쪽으로 걸어갔다.거리에서도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에 넘친 인사를 귀찮을 정도로 받아야 했으나 그는 온화한 미소와 겸손한 태도로 일일이 응답했다.주민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는 이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그의 애국적인 여러 활동들은 확실히 범인으로서는 따를 수 없는 비상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그리고 이상하게도 아서가 교도소로 갔다는 것이 그의 비상한 활동을 더욱 격화시키고 있는 듯했다.처음엔 배러스도 자신의 해결 방법이 가지고 온 뜻밖의 결과에 상당히 당황한 것이 사실이었다.그러나 그러한 당황함에 붙잡혀 있을 그가 아니었다.그리고 너무 여러 가지 일들이 쉴 틈 없이 자꾸 밀어 닥치는 바람에 사실상 교도소에서 고통을 겪고 있을 아서의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다.그러므로 그는 아무런 괴로움도 느끼지 않은 채 아서의 복역을 공공연하게 인정하며,호연스럽게 공식석상에서도 유감의 뜻을 표하는 행동을 할 수 있었다. 누구나 다 배러스의 영웅적인 태도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 사건은 신문을 통해서 널리 보도되었다.'아거스'지는 '용맹스러운 아버지'라는 표제 아래 2단 기사로 보도했고,'선데이 에코'지는 '애국자에게 모자를 벗으라'라는 제목으로 이 특종을 논설기사로 다루었다.그것은 슬리스케일 뿐만 아니라 타인캐슬에서도 굉장한 충격을 주었다.배러스는 거대한 영광과 광휘 속으로 빨려들어 갔으며 그것은 그에게 절대로 불유쾌한 것이 아니었다.헤티와 센트럴에서 가끔 식사를 하면서,만인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쏠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그 만족감은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그는 점점 더 바빠지는 공인이 되어갔다.그리고 가는 곳마다 존경의 감탄 속에 파묻혔다.그 결과 그는 자기의 행동이 언제나 영웅적이라는 환각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처음엔 주위의 반응에 대해서 상당히 조심하면서 방어하는 자세를 보였지만 이제는 모두 당연한 것이 되었다.배러스는 자기를 조용히 되돌아보거나 자기 생각을 깊이 해볼 시간을 가질 수도 없게 되었다.너무 바쁘고 항상 할 일이 많았다.얼굴이 상기된 채 언제나 여러 가지 일에 몰두하는 그의 모습은 그렇게 보기 좋은 것만은 아니었으나 본인은 알 수가 없었다.그는 점점 더 외적인 일에만,공적인 사업과 명성에만,소란과 갈채와 군중에게로만 마음을 뺏기고 있었다. 심사 위원회에서의 그의 활약은 더욱 눈부시게 되었다.배러스가 그 자리에 있는 한 어써한 정당한 이유가 있는 신청자라도 병역면제를 얻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그는 공평무사해 보이는 근엄한 얼굴로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면서,어떤 조리가 서지 않은 흥분된 항의에도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자세로 있곤 했다.그러나 그는 사실상 그 사건의 내용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그의 결정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병역면제란 있을 수 없었다. 심사해가는 동안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이 어지간히 지쳐 있는 것을 볼 때 그는 방법을 바꾸었다.사건들의 심사를 놀랍도록 빨리 진행시켜 건수를 올리는 것이었다.그런 일들이 그의 뜻대로 잘 풀린 날은 자기 만족감과 동료들의 찬사에 묻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지금 카우펀 가를 걸어가고 있는 그의 얼굴 위에는 어느 때보다도 더욱 짙은 만족감이 흐르고 있었다.오늘 넵튠 탄광에서 그가 결정한 것은 그의 명예를 더욱 빛내줄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지난 몇 개월 동안 파라다이스 갱구를 어쩔 수 없이 폐쇄해왔다는 것을 그는 늘 못마땅하게 여겨온 터이지만,내려앉은 현무암을 뚫어 새로운 도로를 만들기 위한 그 막대한 비용을 생각하면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그러나 이제는 당국의 현명한 조치에 의하여 도로 개설에 필요한 비용을 파라다이스에서 채굴한 석탄을 정부에 납품하는 것으로 상쇄할 수 있게 되었다.더욱 기쁜 것은착공에 앞서서 예산을 미리 융자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전시라는 세계의 불행을 이용하여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많아지면 많아졌지 줄어들 수는 없다는 것을 그는 이러한 일을 통해서 더욱 굳게 믿게 되었다.석탄 가격은 톤당 20실링을 훨씬 더 상회했고,따라서 넵튠 탄광에서만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돈을 벌고 있는 중이었다.배러스는 자기 재산을 생각하기만 해도 미칠 지경으로 기뻤고 마치 마약에 취한 둣한 황홀감을 느낄 정도였다. 그는 결코 수전노는 아니었다.다만 돈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는 것일 뿐이다.돈을 마음대로 쓸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 그를 얼마나 만족스럽게 해주는지 몰랐다. 어린아이처럼 즐거워지는 것은 5파운드라는 거액이 자기에게는 5펜스처럼 느껴진다는 것이었다.그리고 현재 그를 더 흥분케 하는 것은 돈을 쓰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얼마든지 돈을 쓸 수 있는데 그 기회를 놓쳐버린다는 것은 그로서는 너무나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로 여겨지는 것이었다.그는 보다 좋고 보다 새로운 여러 가지를 원하는 마음을 억제하지 않았다.그는 법산저택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새로운 가구와 카펫,새 축음기,자동차,사치스러운 안락의자,특수 정수장치 그리고 구식 풍금은 피아노와 바꾸었다.그림을 더 사지 않는 것은 다른 뜻이 있었다.그림 수집은 그의 소유욕을 억제했던 옛날 일에 속했다.그리고 예술작품이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아직도 그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지만-이를테면 그는 자주 "난 내가 수집한 그림 속에다 한 재산을 저장하고 있지!"하고 만족스럽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엔 그 수집을 더 계속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그의 도락은 이제 더욱 화사하고 임의적이며 변칙적이 되었다.그는 일시적인 기분에 따라 물건을 사곤 했다.그는 소위 '우연히 물건을 손에 넣는 것'에 대한 기쁨을 더욱 많이 누리고 싶어했다.그는 잡다한 물건과 골동품 상점들이 즐비한 타인캐슬 아케이드의 단골손님이 되었다.그는 그런곳엘 가면 반드시 얼마간의 물건을 사가지고 의기양양해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가 헤티에게 준 선물들도 다 그러한 타성을 보여주는 것들이었다.전처럼 아버지다운 애정이 담긴 소박한 물건들,그러니까 사탕이나 향수 또는 손수건을 넣은 리본 달린 상자 따위가 아닌 색다른 의미가 느껴지는 선물들이었다.거의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그는 헤티를 자기의 강인한 활동에서 오는 긴장해소를 위한 탈출구로 생각하게 되었다.헤티는 언제나 그를 기쁘게 해주었다.헤티가 열두 살 어린 소녀로서 곧잘 자기의 무릎에 껑충 뛰어 올라앉으며 페퍼민트 껌을-그는 그런 것들을 늘 조끼 주머니 속에 가지고 다녔다.-달라고 조르던 옛날에도,그는 헤티에게서 이상한 감촉을 경험했었다.그녀의 비누 냄새가 섞인 청결한 냄새가 그때도 그의 후각을 자극했고,헤티는 아서의 아름답고 귀여운 아내가 될 만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그러나 지금은 아서의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그 변화는 헤티가 눈물을 흘리며 법산의 식당에서 매달려오던 바로 그 일요일부터 시작되었다.그 순간부터 배러스는 아서가 해주어야 할 것을 자신이 떠맡기 시작했다.그 동기는 분명히 연민이었다.헤티를 위로해주어 다른 쓸데없는 잡념을 갖지 못하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더군다나 아서가 교도소로 가는 마지막 파국이 발생하자 그는 헤티에게 더 큰 위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그러므로 자신의 태도가 조금도 양심에 거리끼거나 불편하지 않았고,이제는 그러한 새로운 불안이 자꾸 발생하므로써 자신의 행동이 더욱 자연스러워질 수 있는 것이 내심 유쾌했다. 그는 눈에 뜨일 정도로 멋을 부리기 시작했다.고급 양복점으로 단골을 바꾸고 명주 넥타이와 명주 양말을 꼭 신었다.그레인저 가 근처의 스티록스 이발소에도 자주 들러 얼굴 마사지를 하는가 하면,머리 손질에도 여간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었다.그는 헤티와 함께 다니는 것에 좀더 다른 기쁨을 느끼기 시작했다.오는 밤에도 새로 시작되는 연극제의 개막식을 보러 킹 극장엘 가기로 약속했다. 배러스는 법산의 차도를 걸어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어떤 기대감에 흥분을 누르기가 어려웠다.그는 곧장 2층으로 올라가 목욕을 하는 도중 뜨거운 물속에서 뭄을 쭉 뻗고 누워 자신의 몸을 새삼스럽게 살펴보며 만족감을 느꼈다.남성으로서의 당당한 육체를 확인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그는 옷을 입고는 아래층으로 내려와 단추 구멍에 꽃을 꽂았다.그 싱싱한 꽃을 위해서 캐리 고모는 온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오늘도 그녀는 온실에 갔었다.해리어트의 등을 반시간이나 문질러주고 아스파라거스를 좀 자르려고 채소밭으로 갔다.캐리 고모는 이 전쟁 동안에 특히 채소밭을 가꾸는 데 정성을 쏟았다.또 채소뿐만 아니라 닭과 오리까지 길러 점점 물자가 부족해지는 때인데도 이 집에서는 별 어려움 없이 먹을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감자,고기,마가린 등을 사지 못해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로 식품점 앞에는 장사진을 이루곤 했지만,법산저택의 식탁에는 언제나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풍족하게 놓여 있는 것이었다. 리처드가 들어가자 캐리 고모는 존경에 찬 눈길을 치켜들었다.그녀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오늘도 수고가 많으셨죠,리처드 오라버니." 그는 기분이 좋은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파라다이스 탄광 속으로 신작로를 뚫기로 했어,캐럴라인." "어머나,리처드 오라버니.정말 기쁜 소식이군요." 그녀는 그가 사업 이야기까지 해주는 것이 너무 기뻐 얼굴이 상기되었다. "그렇게 되면 행방불명된 그 열 명의 광부도 찾을 수가 있겠지.내가 얼마나 그것을 바라고 있는지 사람들은 모를 거야." "그렇구말구요,오라버니." "그들의 시신을 찾으면 사회장으로 거창하게 장례식을 치러줄 생각이야.경비가 얼마 들든지 다 내줄 거야.훌륭한 사람들이었으니 그만한 대우는 해주어야지." 캐리 고모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잠깐의 침묵 후에 그녀는 문 쪽으로 가면서 말했다. "오라버니,저녁 식탁에 올릴 아스파라거스를 좀 잘라가지고 와야겠어요." 그녀는 리처드의 대답을 듣고 싶어 문 앞에서 기다렸다.왜냐하면 리처드는 그녀의 아스파라거스 요리 솜씨를 늘 칭찬해왔기 때문이다.그러나 오늘은 고개만 끄덕거려 보이며 말했다. "아,참,오늘 밤엔 샌드위치를 준비해두는 것 잊지 말아요.헤티를 극장에 데려가기로 해서 좀 늦을 테니까." 캐리 고모는 얼굴이 붉어졌다.그녀는 퇴색한 낡은 블라우스 속에서 몸뚱이가 스르르 빠져나와 다 해진 밭갈이용 신발 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그녀는 떨리는 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어요,오라버니." 그녀는 밭으로 나갔다.밭으로 간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누르면서 채소를 땄다.아서의 불행이 절정에 달하면서-그의 교도소행을 이처럼 돌려서 표현하는 것은 과연 캐리 고모다운 것이기도 했다.-헤티와 리처드 사이가 그녀를 무섭도록 괴롭혔다.물론 리처드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그러나 헤티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더욱이 그가 헤티에게 최근에 보낸 선물들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는 그녀는 더 심한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캐리 고모는 왠지 헤티가 증오스러울 정도로 미웠다. 그날 밤 캐리 고모는 내내 걱정이 되어 리처드가 돌아올 때까지 잠들 수가 없었다.배러스가 집에 돌아온 것은 거의 11시가 다 되어서였다.헤티도 함께였다.그들은 극장이 너무 더웠기 때문에 시원한 드라이브나 하자고 해서 집에까지 온 것이다.바틀리가 헤티를 다시 집까지 데려다줄 것이었다. 두 사람은 유쾌한 얼굴로 응접실로 들어갔다. "이제 집으로 가야죠,이 집에서는 재워주지 않을 테니까." 헤티는 명랑하게 말하고는 배러스의 손에서 담배를 받아들며 의자 팔걸이에 걸터앉았다.그렇게 앉으니 날씬한 발목이 아주 예쁘게 드러났다. "우리 샌드위치 먹을까?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배러스가 다정하게 말하면서 식당으로 들어갔다.그는 그녀를 빨리 보내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그러나 그는 그러한 느낌에 대해서는 일부러 모른 척했다.그는 언제나 자신을 도덕적인 인간으로 생각하고 또 믿고 있었기에 자기가 생각하는 것은 모두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물론 그는 자기가 요즘 많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자신 안에 새로운 젊음이 되살아난 듯한 흥분이 스스로를 자주 괴롭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건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내심 기뻐하고 있었다.두 번쯤 심한 현기증의 발작도 있었으나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그는 자신의 건강한 육체에 대해 언제나 감탄을 하면서 자랑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는 응접실로 되돌아왔다. "자아,샌드위치를 가져왔어.좀 먹어봐." 헤티는 말없이 닭고기 샌드위치를 받았다. "갑자기 조용해졌구나." 그는 그녀의 작고 매혹적인 옆얼굴을 곁눈질하면서 말했다. "그래요?" 그녀는 먼 곳으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사실 배러스의 얼굴에 나타난 이상한 흥분의 빛이 그녀를 불안하게 했던 것이다.그의 마음속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이 분명하게 느껴졌다.지난 몇 주 동안 그가 보내온 선물들에서도 뭔가 심상치 않음이 느껴지고 있었다.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헤티에게는 전혀 흥미가 없는 것이었다.아니 흥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혐오스럽기까지 했다.그녀는 천진스럽게도 아무런 대가 없이 계속 그러한 친절과 호의가 주어지기만을 바라고 있었다.헤티는 스스로의 말을 빌린다면 착한 소녀였다.하지만 윤리 의식이란 것은 희박했다.그녀는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갖고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주가를 올리려는 얄팍한 계산에 의해서였다.그녀는 좋은 신랑감을 만나는 것,즉 자기에게 돈과 지위를 가져다줄 훌륭한 결혼을 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순결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리고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서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그녀는 가끔 매혹적인 자태를 지어 보일 때도 있지만 그녀의 내면에는 욕정 같은 것은 전혀 생기지 않았다.그녀의 언니인 라우라가 그런 경향은 혼자 다 유전으로 받아버렸다.배러스에 대해서는 그의 친절이나 상냥함이 그저 싫지 않았을 뿐이다.더욱이 아서의 투옥은 그녀의 허영심에 무서운 충격을 주었고,자기의 즐거운 장래에서 아서가 제외되어야 한다는 것은 여간 슬픈 일이 아니었으므로 배러스에게서 따뜻한 위로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또한 여러 사람들 앞에서 배러스와 함께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자신의 체면을 세우는 데에도 굉장히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응접실은 새로 사들인 화려한 전등갓들이 카펫 위에다 둥근 불빛의 웅덩이들을 만들며 천장에도 신비로운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불빛이 아주 예뻐요." 그녀는 살짝 일어나서 등불의 그늘 쪽으로 다가가 그 가장자리들을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말했다.그녀는 일부러 밝은 얼굴을 지으며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담배 안 피우세요?" 그녀는 그가 담배라도 피우면 이 숨막힐 듯한 분위기가 좀 가벼워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그는 그녀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흔들었다. "생각이 없어." "그래요?저는 피우고 싶은데요." 그가 담뱃불을 붙여주자 그녀는 축음기 쪽으로 가서 노래를 틀었다.그러면서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일 딜리에서 디크 퍼브즈 남매와 차를 마시기로 했어요." 그녀의 말에 그의 얼굴빛이 싹 바뀌었다.그는 어느새 질투를 느끼도록까지 감정의 진전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그는 특히 젊은 퍼브즈를 뱀을 보듯이 혐오하고 있었다.그것은 그가 헤티와 어릴 때부터 친했다는 것뿐 아니라 지금은 공군 중위로거 영웅이 되어 인기를 끌고 있는 까닭이었다.최근 동북지방에는 공습이 심했다.그런데 퍼브즈는 단독으로 채펠린 상공을 날아가 적의 항공모함을 단번에 침몰시켰다.타인캐슬은 디크 퍼브즈의 명성으로 발칵 뒤집히다시피 했다.그가 빅토리아 십자훈장까지 받았다는 소문까지 퍼져 레스토랑에 얼굴만 내보여도 찬탄의 대소동이 일어나곤 하는 판국이었다. 이런 것들이 배러스의 머리에 떠올라 그는 몹시 퉁명스럽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너도 그 퍼브즈란 놈의 뒤를 쫓아다니고 있는 거구나." "쫓아다니다니요. ... 난 그런 경박한 사람은 아녜요.그렇지만 인기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만나면 더 재미있는 것만은 사실이예요.그 사람과 함께 앉아 있으면 모두 우리 쪽만을 부러운 듯 쳐다보거든요.그게 기분 나쁠 건 없잖아요." 배러스는 가까스로 분노를 눌렀다.그는 긴의자로 가서 앉았으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고 숨소리도 무거웠다. "헤티,이리 와 앉거라." "전 서 있는 게 좋은데요,극장에서 내내 앉아 있었잖아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가볍게 말했으나 그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고 말투가 강압적으로 변했다. "이리 와 앉으라니까!" 그녀는 지금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으므로 다시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의자 한쪽에 걸터앉았다. "왜 기분이 안 좋으세요?피곤하세요?" "그렇진 않아." 그는 말투를 금세 누그려뜨렸지만 표정은 그대로였다.그녀는 장난이라도 하면서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지만 그게 잘 되지를 않았다.가까이 보이는 그의 충혈된 눈과 투박한 어깨,꼭 끼어 보이는 조끼의 굵은 주름들이 갑자기 보기 싫어질 뿐이었다. "내가 준 이 팔찌,마음에 드니?" 그는 손을 뻗쳐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에 걸린 금속제 팔찌를 건드렸다. "네,아주.그렇지만 이런 선물은 이제 그만하세요.너무 비싼 선물은 부담스러워요." "그런 걱정은 말아. 난 이제부터 돈을 좀더 쓰면서 살려고 한다.너에게도 더 비싸고 좋은 것을 주고 싶어." 그의 말투는 더욱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워졌다.여자의 감정 따위에는 아주 둔감한 그로서는 그녀의 마음에 들고 싶다는 생각이 강할수록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했다. "지금까지도 너무 많은 것을 주셨어요.그리고 너무 잘해 주셨어요." 그녀는 시선을 돌렸다.그러자 배러스가 이번에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때 마침 레코드가 멈췄으므로 그녀는 잘 됐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 그쪽으로 갔다.그는 멈칫했으나 자리에 앉은 채 계속 그녀에게서 시건을 돌리지 않았다.그녀는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할 때라고 생각했으나 자연스럽게 행동하자고 자신을 타이르면서 배러스 곁을 지나가는데 그가 급작스레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그녀는 그의 힘에 끌려 무릎 위로 거북하게 주저앉는 모습이 되어버렸다.그녀는 멍한 상태에서 일어날 생각도 못 한 채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바로 그때 그들 뒤편의 문이 열렸다.그리고 캐리 고모의 얼굴이 쑥 들어오다가 멈춰버렸다.그녀는 밤이 늦었는데 음악소리가 들려 아래층으로 내려왔다가 무심코 문을 열었던 것이다.이 광경을 본 그녀는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렇게 무서운 것은 처음 본 것 같았다.그녀는 자신이 기절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그녀는 겨우 몸을 돌려 방을 나와 와들와들 떨면서 2층으로 올라갔다. 다행이랄까,배러스도 헤티도 캐리 고모가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문을 닫고 나간 것을 알지 못했다.특히 배러스는 눈앞의 헤티에게 취해버려 다른 것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그녀의 가냘픈 몸의 부드러운 촉감과 향긋한 냄새에 그는 거의 제정신을 잃고 있었다. "헤티,내가 얼마나 너를 좋아하는지 알고 있지?" 그 투박하고 어색한 사랑의 고백이 헤티의 감미롭고 황홀한 상태를 단번에 깨트려버렸다.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어 몸을 비틀었다. "어서 손을 치우세요.난 누가 나를 좋아하건 상관이 없으니까요.어서 놓으세요!" 그녀의 말소리가 의외로 날카로웠기 깨문에 그는 팔을 늦추었으나 그녀를 놓을 생각은 없는 듯했다.오히려 그의 손이 그녀의 무릎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안 돼요!" 그녀가 날카롭게 외치며 몸을 빼려 하자 그는 더욱 강하게 껴안으며 목덜미에다 얼굴을 묻었다.그녀의 온몸에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마치 흉칙한 벌레가 닿은 듯했다.몸을 비틀어 그의 품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그의 뺨을 후려쳤다. "비별한 사람 같으니!"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추하고 더러운 사람이에요.다시는 저를 찾을 생각을 마세요.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생각할 테니까 고마운 줄이나 아세요!" 그는 더듬거리면서 변명을 늘어놓으려고 했으나 어느새 헤티는 방을 뛰쳐나가 버렸다.그는 한동안 마치 그녀를 잡으려는 듯이 손을 그대로 내뻗은 채 방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그의 심장은 마치 망치로 내려치는 것처럼 요란스럽게 뛰었고,머리는 심하게 얻어맞은 것 같은 통증이 느껴지면서 어지러웠다.수치감 같은 것은 없었다.그녀가 가버린 것은 자신이 젊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아픔처럼 떠오르고 있었다.텅 빈 방 안에 부드러운 불빛들이 이상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갑자기 자신이 뇌일혈로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섬광처럼 떠오르자 날카로운 공포감이 뇌리를 쑤시듯이 지나갔다.그는 뻐개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오는 머리에 손을 얹은 채 의자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16 한편 캐리 고모는 캄캄한 방에 앉아 헤티를 태운 차가 떠나는 소리를 들었다.두 개의 부드러운 빛줄기가 방을 위협하듯 ㅎ으며 지나가고 나자 다시 암흑과 침묵이 그녀를 휩쌌다.몸이 견딜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방금 응접실에거 본 광경은 그녀가 지금까지 지녀왔던 거룩한 믿음을 갈가리 찢어버린 것이다.리처드가 그런 사람이라니!생각할수록 몸이 더 떨려왔다. 캐리 고모에게 믿음이 있었다면 그것은 리처드에 대한 것뿐이었다.15년 동안 그녀는 리처드에게 그녀가 바칠 수 있는 모든 존경과 사랑을 다 바쳐왔다.그녀는 감히 리처드에게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항상 멀리 있어야 했지만 그겻이 리처드를 흠모하고,그 흠모하는 마음을 깊숙히 간직하며 키워오는 것을 방해하는 일은 이제까지 하나도 없었다.굳이 캐내어 본다면 캐리 고모는 한때 죽은 앨버트 전하에 대해 애정을 느낀 일이 있기는 했지만 리처드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캐리 고모는 리처드라는 존재 때문에 자신의 삶이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그에게서 비추어지는 그 따뜻한 빛 속에서 그녀의 폐쇄된 삶은 모든 가치와 의미를 찾고 살아갈 의욕까지 느끼는 것이었다.그런데 이제는 그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이 15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갈아입을 옷을 챙겨주고,음식을 만들고 빨래를 하면서 그 생생한 기쁨 속애 살게 해주던 화려한 우상이 너무나 어이없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떨리던 것이 진정되면서 막혔던 눈물이 흐느낌과 함께 터져나왔다.처절한 통곡이었다.그때 해리어트의 지팡이 소리가 들려왔다.해리어트는 누구를 부르고 싶을 때는 언제나 침대 옆에 놓아둔 지팡이로 벽을 두드리는 것이었다.분명히 그녀를 부르는 소리였다.그러나 지금은 해리어트에게 가볼 마음도 없었다.눈앞에 어른거리는 리처드의 모습이 그녀를 그 자리에 결박이라도 해둔 것 같았다.그 변해버린 리처드란 언제나 위선의 탈을 쓰고 있었던 그의 본 모습이었는데도 캐리 고모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리처드라는 사람 속에 음흉스럽게 숨어 있던 악의 씨앗에서 드디어 싹이 튼 것이라는 생각은 그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그녀는 다만 리처드가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잠시 제정신을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팡이 소리가 다시 커졌다.그녀는 잠시 자기의 생각에 몰두해서 그 소리를 잊었던 것이다.꼴사나운 모양을 하고 있긴 하지만 해리어트에게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렇지 않으면 해리어트는 더 심한 발작을 일으켜 온 집안을 소란케 할 것이다.그녀는 일어섰다.다리가 휘청거리며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천천히 해리어트의 방으로 들어갔다.방 안이 어두워서 다행스러웠다.침대 옆의 푸른 전구가 희미하게 방 안의 윤곽을 밝혀주고 있었다.늘 머리가 아픈 해리어트가 강한 불빛을 싫어하는 까닭이었다. 캐리 고모는 커다란 살찐 암소를 연상케 하는 해리어트의 몸이 침대 위에서 몹시 떨고 있음을 보았다.몹시 화가 났을 때 보이는 증세였다. "왜 이렇게 늦었어,캐럴라인?30분이상이나 벽을 두드렸어.듣지 못했다는 말은 하지도 말아요." "죄송해요,물론 듣구말구요.그런데 빨리 올 수가 없었어요.정말 죄송해요.약을 드릴게요." 그러나 해리어트는 그렇게 쉽게 넘어가려 들지 않았다.기다리는 동안 너무 화가 치밀어 참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푸들푸들 떨었다. "오기 싫어서 늦은 것이라고 솔직히 말하는 게 어때?이젠 나도 싫단 말야.머리가 뻐개지는 것처럼 아파서 불러도 이제는 와주지도 않고... 그만둬요.혼자 죽어버릴 테니까 어서 가!" 캐리 고모는 새로운 공포로 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그게 아녜요,해리어트.자,진정해요.약을 드릴게." 그녀는 애리어트의 손을 잡았다가 놓으면서 얼른 돌아섰다.그러나 점점 더 눈앞은 희미하고 어지어워지는 것이었다.절대로 쓰러져서는 안 된다고 입술을 깨물며 무작정 약병들이 즐비한 작은 테이블 앞으로 갔다. "발레리언 진정제를 드릴까요?" "그건 싫어.전에 먹던 브롬칼리를 줘요.루이스 선생이 주신 그 냄새 좋은 것 말야.그게 역시 제일 효과가 있는 것 같아.저 구석 선반에 있어요." 해리어트는 조금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요." 캐리 고모는 상냥한 대답을 보내면서 선반 쪽으로 가서 약병들을 더듬거렸다.그러나 약병들이 너무 많아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곳이죠,해리어트?" "그쪽에 있잖아?" 해리어트는 또 화가 나는 듯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오늘 밤엔 고모가 좀 이상해졌어.바보같이 그 약병 하나 못 찾다니... 바로 고모 손 밑에 있는 거야.저번에 마시고 나서 내가 분명히 그곳에 놓아두었으니 어서 가져와요." "이거예요?" 캐리 고모는 이 방을 나가기까지 제발 쓰러지지 않게 해달라고 속으로 빌면서 약병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게 아니라니까.바로 그 옆에 것이야.그 옆에 푸른 병,그게 맞아요.도대체 오늘은 왜 그렇게 멍청이같이 굴까?" 캐리 고모는 휘청거리면서 그 약병을 집어 들고 작은 테이블 쪽으로 돌아섰다.그녀의 손이 너무 떨리고 있어 약을 따를 일이 또 무서웠다. "분량이 어떻게 되요,해리어트?" "그 병에 써 있는 글도 안 보여?두 스푼 가득히 줘요." 지금 캐리 고모는 글을 읽을 수도 없었다.그녀는 다만 시키는 대로 했다.그녀는 어서 자기 방으로 돌아가 눕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두 스푼 정도의 약을 간신히 컵에 따랐다.약 냄새가 좀 독하다고 느껴졌다.그러나 자기 정신이 이상해서 그런 모양일 거라고 생각했다.해리어트는 무얼 꾸물거리느냐고 독촉이 심했다.그녀는 정신 없이 침대 앞으로 다가가 될 수 있는 대로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하면서 약을 내밀었다.일어나 앉았던 해리어트는 못마땅한 얼굴로 유리컵을 빼앗듯이 받았다. "정말 병신이 되어버렸나 봐.갑자기 꾸물거리면서 말귀도 못 알아듣고 고모를 보니까 내 머리가 더 아파요." 해리어트는 말을 끝내자마자 눈을 딱 감더니 그 약을 대번에 꿀꺽 마셔버렸다.방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해리어트는 약의 효과를 기다리는지 잠시 눈을 감은 채로 있었다.그러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컵을 내던졌다. "이건 그 약이 아니야." 캐리 고모의 온몸이 공포로 얼어붙었다.그녀는 화석처럼 섰다가 겨우 몸을 움직여 전기 스위치를 올렸다.환한 불빛 아래서 그녀는 미친 듯이 약병을 주워 들었다.그 약병에는 '바르는 약'이라고 씌여 있었다. 해리어트는 배를 움켜 잡고 버둥거리고 있었다. 침대에 누운 이래 처음으로 진짜 고통을 당하는 것이었다.그녀의 얼굴은 점차로 퍼렇게 질려 가고 입술은 검은 색으로 타 들어갔다. "물-." 그녀는 배를 움켜잡은채 겨우 입술을 움직였다. "물 좀 줘.불이 나는 것 같아." 캐리 고모는 세면대에 있는 물병의 물을 급히 들고 왔다.그러나 물은 넘어 가지 않았다.물은 부어오른 입술 위로 흘러내려 시트를 적실 뿐이었다.그러나 해리어트는 벌써 감각을 잃은 듯 여전히 헐떡이는 소리로 물을 찾았다.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때야 캐리 고모의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의사를 불러야 한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떠올랐다.물컵을 내던지고는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염증이 생겨 언제나 아리 한 쪽을 끌고 다니는 그녀는 아픈 것도 잊은 듯 계단을 구르듯이 내려갔다.2층 침실로 올라오려던 앤과 계단 아래에서 부딪쳤다.캐리 고모는 앤을 꽉 움켜 잡았다. "의사! 의사를 불러줘요.빨리 전화해요.어떤 의사든지 당장 오라고 해요.빨리,빨리,의사-." 놀란 앤은 캐리 고모를 바라보았다.그러나 늘 조용하고 침착한 앤은 곧 중대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자 전화기 앞으로 달려갔다.루이스 의사가 전화를 받고 즉시 달려오겠다고 했다.그러나 혹시 늦을 경우를 생각해서 앤은 자기의 담당인 프록터 의사에게도 전화를 걸어 곧 와줄 것을 부탁했다. 그동안 캐리 고모는 호분을 찾으러 부엌으로 달려갔다.호분이 해독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호분을 들고 나오다가 응접실에서 나오는 리처드를 보았다.리처드는 집안이 너무 소란스러워 방에서 나온 듯했다. "무슨 일들야?" "해리어트 언니가... ." 그녀는 말을 잊지 못했다.호분 봉지를 너무 꽉 쥐었기 때문에 봉지가 터져 하얀 가루가 마루 위로 떨어졌다. "해리어트가?" 그는 무거운 음성으로 되물었다.그러나 캐리 고모는 어느새 2층으로 달려 올라가고 있었다.그 뒤를 배러스는 천천히 따라갔다. 밝은 불빛 아래에서 해리어트는 조용히 누워 있었다.약병들의 행렬이 이상하게 더 드러나 보였다.그녀의 몸은 괴상하게 뒤틀린 채 신음 소리도 그쳤다.고무 같은 끈끈한 점액이 새까맣게 탄 채 벌어져 있는 입술에 엉겨 있었다.가끔 가다가 다리가 약간 실룩거렸고 그 실룩거림과 함께 코를 고는 듯한 숨소리도 높아지곤 했다.캐리 고모는 급히 호분 가루를 물에 개어서는 부풀어 터진 입 안으로 넣으려고 애를 썼다.리처드가 방으로 들어왔다.그는 넋이 빠진 듯 멍하니 그 처참한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아니,여보." 잔뜩 목이 쉰 음성이었다.해리어트는 대답 대신에 입 안으로 흘러들어간 호분가루를 내뱉었다.리처드는 좀더 앞으로 다가서며 술에 취한 사람처럼 다시 무엇을 중얼거렸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때 루이스 의사가 빠른 걸음으로 들어왔다.그는 까만 손가방을 들고 호기롭게 걸어 들어왔다.그러나 해리어트를 보자 안색이 대번에 질려버렸다.그러곤 캐리 고모에게 어서 스코트 의사를 오시도록 하라고 성급하게 말했다.캐리 고모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쏜살같이 달려나갔다.리처드는 창가의 움푹 들어간 곳으로 물러섰다. 스코트 의사가 바쁘게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슬리스케일에서부터 걸어온 프록터 의사도 도착했다.의사 셋이서 머리를 맞대고 해리어트를 소생시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써보았다.작은 주사기들로 연거푸 주사를 놓아주고 이제는 반응이 없어진 눈꺼풀을 뒤집어보며 소생할 기미가 보이는지 살폈다.때가 늦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위 세척을 시작했다.해리어트의 위에서는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이 나왔다.그들은 해리어트가 먹은 음식이 나왔다.그들은 해리어트가 먹은 저녁이 얼마나 맛있고 풍부한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었다.그녀가 먹은 아스파라거스의 양은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그러나 해리어트는 그것을 볼 수 없었다.이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저 세상으로 가버린 것이었다. 소생을 위한 최후의 시도가 끝난 후 드디어 의사들은 손을 떼었다.루이스 의사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리처드에게로 다가갔다.리처드는 여전히 창가의 그곳에 뻣뻣이 굳은 자세로 서 있었다. "유감스럽습니다,배러스 사장님." 그는 진심으로 슬퍼하는 표정이었다. "죄송하게도 이젠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는 것 같습니다." 배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루이스 의사는 배러스의 관자놀이 정맥이 세게 꿈틀거리며 이마가 검푸르게 충혈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슬픔의 충격으로 혈압이 올라갔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우리는 가능한 일은 다 해보았습니다." 그는 동정어린 목소리로 다시 덧붙여 말했다. "네에." 리처드는 이상스런 목소리로 겨우 대답을 했다.루이스는 슬픈 눈빛으로 배러스를 바라보았다.물론 이 사나이가 해리어트의 진짜 살인범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 수가 없었다. 17 힐다마저 비탄에 빠졌다.그레이스와 함께 어머니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병원으로 돌아온 지 몇 주일이 자나도록 그녀는 침울한 안색으로 말을 하지 않았다.그녀도 자기 집의 심상찮은 분위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마음속의 이러한 번민들 때문에 환자에게 불친절했고,네스에게도 무례하게 굴었다.그러나 일만은 지칠 줄 모르는 열성으로 무섭게 해냈다.그레이스에게도 다시 독점적이고 질투에 찬 애정을 보였다. 휴무인 날 오후,두 사람은 천천히 리전트 가를 걸어서 나이츠브리지 발 버스를 타기 위해 옥스포드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힐다는 집안 일의 여러 가지 복잡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신랄한 어조로 끝내면서 빈정대는 눈초리로 그레이스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넌 무슨 일이든 간단하게 처리해버리는 기질이니까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게 어떻겠니?" "글쎄.난 아마 별 소용이 되지 않을 거야." "그건 무슨 뜻이니?" 그때 그들이 탈 버스가 요란한 소음을 내며 정거장으로 들어섰다.그레이스는 버스에 올라 자리를 잡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신이 임신했다는 것을 처음으로 털어놓았다.힐다는 대번에 얼굴이 빨개졌다.그녀의 표정은 마치 열병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보였다.그녀는 너무나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안내양이 와서 요금을 받아갔다.이윽고 참을 수 없는 듯 힐다는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넌,마치 결혼한 것이 큰 자랑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이구나.넌,네가 잘해서 내가 아무 소리를 안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넌 바보야,너같은 바보는 이 세상에 또 없을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레이스도 지지 않고 대답했다. "넌 틀림없는 바보야.난 전쟁이 만들어준 아기 같은 건 아무 흥미도 없어." 힐다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이제는 더 참을 것도 없다는 듯 속에 차 있던 분노를 쏟아놓았다. "나도 그래요.전쟁통에 낳은 아가들이 흥미가 있을 리 없죠.다만 내 아기만은 달라요." "이 멍청이 같으니라구,그 티즈데일 집안에 미치더니 드디어 그 모양이 됐구나.병원도 당장 그만두도록 해.구역질이 난다.이젠 나도 상관 않겠어.난 지금까지 집안의 복잡한 일에 한 번도 휘말려든 적이 없었어.앞으로도 그럴거야.더군더나 이렇게 지저분한 일은 정말 듣고 싶지도 않아.입에 올리기도 창피해.못생긴 간호사들이 얼마나 많이 이런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참 기가 막힌 이야기야.그런데도 전쟁 영웅들에게 아기를 낳아주는 것이 큰 애국이라도 되는 것처럼 뽐낸단 말야.아,구역질 나.그레이스,분명히 말해두겠는데 나하곤 상관없는 일이니까 네가 어디 가서 아기를 낳든지 말든지 내게 이야기도 하지 말아줘.이 불결한 일은 듣지 않았던 것으로 할 테니까." 힐다가 참고 참았던 분통을 있는 대로 터뜨리며 떠들어댔지만 그레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대답일 때도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댄과의 교제 이래로 힐다와는 의견이 일치돼본 일이란 없으니까 새삼스레 동정이나 이해를 바라지도 않았다.그러나 지금 이야기는 너무 지나친 모욕인 것 같았다.그러나 힐다 편에서는 조금도 지나칠 것이 없었다.얼마나 귀여워 하고 사랑하던 그레이스인가!그런데 그 아이가 너절한 사람의 아기를 가진 것이다.더군다나 전쟁에 나가 생명이 위험한 군인의 아기를.힐다로서는 그 일에 도움을 준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가장 큰 죄악에 함께 손을 잡는 듯한 역겨움이 그녀의 마음을 굳게 닫아버렸다.해러드 상정 앞에서 버스가 멈추자 힐다는 그레이스에게 눈도 주지 않은 채 먼저 버스에서 내렸다.그러나 힐다의 두 눈에는 눈물이 핑 돌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혼자서 모든 것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다음날 아침 우선 깁스 간호부장을 만나러 갔다.깁스 간호부장은 그레이스에게는 언제나 친절하지 못했다.그러나 오늘 아침 그의 태도는 아무래도 지나쳤다.힐다 이상으로 격분한 얼굴로 그레이스를 죄인처럼 다루었다. "난 그런 일에는 이젠 정말 넌더리가 나요.배러스 간호사,당신이 여기에 온 것은 무엇 때문이었지요?부상자들을 간호하기 위해서였나요,아니면 그런 것 때문이었나요?우리는 당신을 이 전시에 보다 유용하고 쓸모있는 간호사로 키우기 위해서 그만큼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훈련과 교육을 시켰던 거예요.당신 언니를 보세요.왜 그 훌륭한 모범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면서도 조금도 본받지 못합니까?당신은 언제나 조심성이 없고 간호사답지 못한 실책만 저질러왔어요.이제는 나의 인내에도 한도가 있다는 걸 말씀드릴 때가 온 것 같습니다.이 이상 더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레이스는 얼떨떨해졌다.자신이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단 말인가?힐다나 깁스가 결혼이 굉장히 추한 일이나 되는 것처럼 떠들고 있는 것이 이상스러웠다.그러나 그레이스는 쉽게 넘어지는 사람이 아니었다.그녀는 단순하고 고지식하며 조심성이 없는 어리석은 사람이고 그리고 미스 깁스가 말하듯 난처한 일만 저지르는 그런 사람이지만,그녀는 남이 알 수 없는 단단함과 현명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누가 무엇이라 하든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그리고 곧 자기가 세운 계획대로 추진해나가기로 했다.어머니까지 계시지 않는 법산저택은 이제 아무런 매력도 없었다.그녀는 캐리 고모에게 편지를 냈고 곧 회답도 받았다.캐리 고모는 당황하고 있음이 분명했다.종잡을 수 없는 장황스런 내용이 캐리 고모의 혼란한 정신상태와 함께 집안의 음울한 분위기를 잘 반영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좀더 빨리 자기의 방향을 결정지었다.새삼스럽게 슬프거나 외로울 것도 없었다.단념이 빠르고 현실적인 그녀의 현명함은 지나간 사건들에 매달리기보다 그 정열을 새로운 앞날을 시작하는 데 쏟을 줄 알았다.그리고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다소 무관심할 수 있는 그 관대함 덕분이기도 했다.그레이스는 자기가 당한 괴로움이나 어려움보다 장차 태어날 아기를 위해서만 마음을 기울였기 때문에 그렇게 빨리 자신의 일을 결정할 수 있었다. 1월 첫 토요일,하루 휴가를 얻은 그레이스는 기차를 타고 서섹스 지방으로 갔다.그곳은 낯선 곳이었으나 그 지방이 자기에게 맞을 것 같은 예감을 느껴 곧 가보기로 한 것이다.서섹스 지방은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북쪽 지방 특유의 황량한 기후 가운데에 끼여 있으나 그 지방만은 따뜻한 햇빛이 쪼이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그녀는 서섹스 지방에 대해서 간호사 친구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었다.그 간호사 친구는 바넘 역 근처의 윈러시라는 곳에서 주말을 보냈는데 그때 함께 있었던 케이스 부인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던 것이 그레이스에게 그 지방과 함께 너무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이다. 기차는 서섹스 지방으로 들어가 바넘 역 플랫폼에 그녀를 내려놓았다.생각보다 쓸쓸한 곳이었다.양철 지붕의 초라한 집 몇 채와 텅 빈 소 외양간과 우유깡통 더미가 그곳 풍경의 전부였다.별로 마음에 드는 곳이 아니었다.그러나 그레이스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윈러시라고 씌여져 있는 도표를 바라보았다.그 도표에는 윈러시까지 1.6킬로라고 표시되어 있었다.그녀는 걷기로 했다.날씨는 바람이 불어 시원하면서도 생생한 활기를 느끼게 해주었다.불어오는 바람 속엔 바다 소금 냄새가 뒤섞인 습기 찬 흙냄새가 물씬거렸다.그 바람을 쏘이면서 걷자니 자연의 아름다움이 새삼스레 가슴을 꽉 채웠다.이 아름다운 땅에서 사람들은 왜 전쟁을 일으켜 자연을 파괴하고 사람들의 생명까지 앗아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걸어갈수록 걸음은 활기차고 젊음이 넘치는 얼굴에도 오랜만에 생기가 돌았다.윈러시는 신기한 곳이었다.아주 자그마한 마을로서 한편은 널따란 시골의 들판이고,한편은 바다를 낀 길이 외줄로 뻗어 있는 재미있게 생긴 곳이었다.그 작은 길거리 중간쯤에 상점 하나가 있었다.그 상점 앞에는 가게 주인이 손수 만든 것이 틀림없는 페인트로 칠한 간판이 붙어 있었는데,그 간판에는 '미시즈 케이스-잡화,의복,약품류'라고 씌여 있었다.그러나 윈도 안에는 살리실산 상자 하나가 있을 뿐 약품 같은 것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그레이스는 첫눈에 그 상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오랬동안 윈도 안을 들여다보며 어렸을 때 낯익었던 물건들을 하나하나 찾아보았다.배급품이 확실한 슬립 짐이라는 사탕과자와 곱 스토퍼즈라는 과자도 있었는데,그것은 아름다운 적백색으로 크고 예쁘지만 속은 텅 빈 것이어서 아쉬웠던 기억이 떠올랐다.그레이스는 이렇게 실컷 구경을 한 다음,만족한 숨을 한 번 쉬고나서 그 상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그러나 너무나 감정에 도취되어 안을 잘 살펴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발을 헛디뎌 하마터면 나동그라질 뻔했다.가게 안이 캄캄해 계단 하나를 내려가야 하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그레이스가 멋있게 생긴 감자의 종자를 넣어둔 통에 가서 쾅 부딪치며 겨우 멈춰 서자 카운터 뒤에서 어떤 음성이 들려왔다. "아이 어쩌나,아가씨... 그 계단이 언제나 말썽이랍니다." 통을 붙잡은 채 그레이스는 자기를 아가씨라고 부른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그 사람이 케이스 부인임에 틀림없는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아요.전 언제나 이 모양이랍니다.통이나 안깨졌으면 다행이겠어요." 케이스 부인은 그레이스의 재치 있는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더욱 친절한 미소를 띠어 보였다. "아가씨도 별 말씀을.아가씨야말로 다치지 않았어요?" 그레이스도 미소를 지었다.케이스 부인을 보는 사람은 누구든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그녀는 유난히 맑게 빛나는 작은 눈이 인상적인 데다 곱사등을 한 아주 기묘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그리고 케이스 부인의 곱사등은 조금도 흉해 보이지 않아,로맨틱한 것이라고 하면 실례가 될지 모르지만-어릴 때 척추 카리에스를 앓아 휘어버렸다.-그렇게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머리는 지나치게 몸통 쪽에 가까이 붙었고,눈이 동그란 구슬처럼 반짝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꼭 달걀 위에 앉아 있는 늙은 암탉처럼 희극적인 인상이었다.그것도 갈색 암탉이었다.케이스 부인의 피부는 아주 검어진 코밑부분을 제외하고는 온통 주름진 적갈색으로 보였기 때문이다.코밑의 까만 자국은 그녀가 코담배를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하숙을 좀 할 수 있을까 해서 들른 거예요.몽고메리 간호사의 소개를 받아서 온 사람입니다." "아아,알겠어요." 케이스 부인은 겨우 기억이 나는 듯 두 손을 비볐다. "기억이 나는군요.그 사람은 아주 활발한 아가씨였어요.그런데 이번 여름에 하숙을 하시겠다는 건가요?" "아니예요.바로 오고 싶어요.전 좀 사정이 있답니다.곧 아기를 낳을 거예요." "알겠어요." 케이스 부인은 조금 사이를 두고 대답했다.그러나 그 대답이 허락한다는 뜻인지 알 수 없는 그레이스는 조금 초조했다. "그런 사정인데요,괜찮으시겠어요?" "네,알겠어요,아가씨.정말 좀 특별한 사정이군요.잘 알겠어요." 그레이스는 그때 참았던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케이스 부인과 자기는 말을 하면서 자꾸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보게 되었는데,그게 바로 이 작은 집이 너무 어두워서라고 생각하니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진 것이었다.케이스 부인도 덩달아 웃었지만 그러나 석연치 못한 것이 있는 듯 그레이스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아가씨는 농담을 좋아하시는 모양이군요.그런데 이런 말씀드려도 좋을지 모르지만,혹시 남편이 전쟁터에나 다른 곳에 가 계시는 게 아니우?" 그레이스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녀의 의심이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그레이스는 댄과 자기 집안에 관해서 간단하게 이야기해주었다.케이스 부인은 다시 다정스런 표정이 되었다.안심이 된 모양이었다. "사실은 다 알고 있었다우,아가씨.난 사람의 얼굴만 보아도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우.그렇지만 독일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오고 버터 값도 오르는 판국이니 좀 조심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럼 하숙방을 구경해보실려우?" 하숙방은 멋있었다.그것은 그레이스가 생각한 대로였다.방이 두 개인데 서로 연결된 것들이고 2층이었다.바닥은 고르지 못했고 천정은 엉뚱하게 툭 불거져 나와 있어서 침대 쪽으로 가려면 허리를 반쯤 굽혀야 했다.거실은 더 형편 없어서 겨우 몸을 세울 수 있는,방이라고도 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그러나 놀랍도록 깨끗했고 새것이 분명한 모슬린 천의 커튼이 달려 있을 뿐 아니라 빅토리아 여왕 대관식 장면의 멋진 사진까지 걸려 있었다.그리고 케이스 부인의 조카가 모아온 새알을 담은 상자 하나와,철도국 직원이었다가 유주신장염으로 죽었다는 남편의 커다란 사진이 걸려 있었다.내려다보이는 뒤뜰도 아름다웠다.기다란 모양의 뜰에는 벚꽃나무가 가득 차 있었다.그레이스는 봄이 되어 나무들이 꽃을 활짝 피우고 산들바람에 그 꽃잎들이 날리는 모양까지 보이는 듯했다.담 너머로는 들판의 소들이 보였고 또 느릅나무들이 줄지어 선 것도 보였다.그레이스는 창가에 서니 왠지 눈물이 핑 돌았다.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약간 감상적이 되면서 댄의 생각을 하게 됐던 것이다. 그녀는 케이스 부인에게로 돌아섰다. "빌려주신다면 이 방들을 다 쓰겠어요." 기분이 좋아진 케이스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내려가서 차라도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합시다." 그들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케이스 부인은 계단 난간을 붙들며 내려갔는데 그녀는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두 사람은 몇 잔인지도 모르게 차를 마셔가며 긴 이야기를 나누느라고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케이스 부인은 하나도 숨김없이 이야길 털어놓았다.그녀는 욕심이 조금도 없는 사람이었다. "주당 15실링이면... ." 케이스 부인은 아무래도 암탉을 연상케 하는 머리를 한쪽으로 갸우뚱하며 말했다. "집세가 너무 비싼가요?" "천만에 그렇지 않아요." 그레이스는 고개를 흔들며 급히 말했다.그래서 아무런 논쟁도 없이 가장 중대한 문제도 해결되었다. 그들은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서로를 점점 더 잘 알게 되었다.케이스 부인은 실제적인 일들을 많이 가르쳐주었다.이 마을에는 퍼셀 노인의 농장에 전화가 있는데 노인은 그 전화를 기꺼이 빌려줄 것이다.그리고 여기서 4.8킬로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피틀햄프튼에는 훌륭한 의사들이 많이 있으니 그 점도 안심할 수 있다는 것 등이었다.케이스 부인은 마지막으로 자기 남편이 왜 신장염에 걸려 죽었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었다.그들은 서로 마음이 통하는 따뜻한 정을 느꼈다.그것은 아주 유쾌하고 기쁜 느낌이었다. 바넘 역으로 다시 나와 4시 10분 기차를 탔을 때 그레이스는 오랜만에 아주 즐거웠다.그레이스는 본디 약지 못했다.힐다와 미스 깁스가 본 대로 그레이스는 정말 너무 어리석었다.오늘의 결정을 안다면 그들은 또 호들갑을 떨며 야단을 쳤을 것이다.그들이라면 임산부에게 알맞는 침대와 목욕실이 완비된 일류 산부인과 병원을 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그들이 만일 그레이스가 바넘 역을 향해 떠나간 것을 보았더라면 그리고 또 약간 들창코인 케이스 부인 가게의 유리창에다 꾹 눌러대며 안을 들여다보던 광경을 보았더라면,틀림없이 미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레이스는 기숙사로 돌아와서도 기분이 여전히 좋았다.힐다 언니하고도 화해를 하고 싶었다.그래서 얼굴을 빛내며 그녀는 힐다의 방문을 두드렸다.뺨은 신선한 밤공기로 상기되었고 눈은 희망으로 반짝였다. "힐다 언니,나 멋있는 곳을 찾았어요.서섹스 주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을 찾아냈어." "어련하실라구!" 힐다는 차갑게 말했다.그녀는 그레이스가 어디에 가서 어떻게 준비를 하고 왔는지 알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지만 아직도 너무 감정이 상해 있었고,그러한 호기심을 보이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그레이스의 얼굴에서 빛나던 생기가 점점 사라져갔다. "언니,듣고 싶지 않아?" 그녀는 풀이 죽은 음성으로 물었다. "다음에 들을 기회가 있겠지." 힐다는 잡지를 집어 들었다.그레이스는 돌아서서 방을 나왔다.문이 닫히는 순간,힐다는 벌떡 일어나 그레이스 뒤를 쫓아가려고 했다.그러나 힐다는 다시 주저 앉았다.어떤 사람의 뒤를 쫓아간다는 것은 힐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그녀는 괴로움을 눌렀다.그러다가 그녀는 들고 있던 잡지를 사납게 방구석으로 집어던졌다.바로 그날 밤에 런던에는 적기의 공습이 있었다.적기가 날아오는 밤이면 그레이슨느 힐다의 방으로 와서 침대 속으로 파고들곤 했다.그러나 그날 밤엔 힐다가 그처럼 기다렸으나 그레이스는 끝내 오지 않았다. 해산할 때가 점점 다가왔다.토요일이 될 때마다 그레이스는 자기에게 필요할지 모를 자잘구레한 것들을 사들이는 데에 대단히 즐거움을 느꼈다.댄은 일 주일에 두 번씩 편지를 보내왔다.그는 아가를 낳는 그때에 날짜를 맞추어 휴가를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몇 번이나 똑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그는 휴가를 어떻게 해서라도 얻겠다고 했다.안 되면 남의 휴가를 빌려보고,그것도 안 되면 휴가 용지를 훔쳐서라도 오고 싶다는 것이었다.물론 그런 것도 다,그러니까 도버 해협을 헤엄쳐 건너는 것까지도,앞으로 전선에서 공격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댄의 편지들은 그레이스에게는 그전보다 더욱더 위안을 주었다.그녀는 여전히 힐다와의 화해를 바라고 있었다.병원을 나서던 마지막 날,그녀는 작별인사를 하려고 힐다의 방으로 올라갔으나 힐다는 수술실에 가 있었다.그레이스는 슬펐지만 그대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18 1917년 4월 16일 스탠리 밀링튼은 타인캐슬로 돌아왔다.그 동안 내내 라우라는 스탠리가 입원해 있던 오윅셔 주의 소브리지에 내려가 있었다.조는 아무 소식도 듣지 못하다가 그들이 돌아온다고 힐톱으로 보낸 소식을 전해 들었다.그는 라우라가 울면서 아파트를 뛰쳐나가던 그날 저녁 이래 편지 한 장도 받아보지 못했다.그렇지만 마중 나와 달라는 초대를 받지 못했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 있을 조가 아니었다.그는 정거장에 나가지 못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고 생각했다.조라는 인간의 특징은 바로 어떠한 미묘한 입장이라도 간단하게 해결해버리는 점에 있는 것이다.그뿐 아니라 그는 그 사장 부부가 자기가 나타나기를 바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왜 바라지 않겠는가?그는 라우라가 멋있게 연출할 장면도 관대히 봐줄 각오가 되어 있었다.어떤 태도를 보여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자기도 스탠리의 영웅적 행위를 열렬히 찬양하고,그가 회복한 것에 대해서도 기쁨을 표시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그는 환영하는 마음과 동정심에 스스로 감동되어 벅찬 마음을 안고 정거장으로 차를 몰았다. 그러나 기차가 들어오고 스탠리를 발견했을 때 조의 빛나던 미소는 사라졌다. "오셨군요,사장님." 그는 정중하게 말했다.스탠리는 손을 내밀었다.그러나 전연 생기가 없는 손은 조의 손 안에서 축 늘어진 채로 있을 뿐이었다. "난 포탄으로 생매장을 당했었소." 그의 첫 말이었다.조는 라우라의 침착한 표정을 힐끗 쳐다보았다.플랫폼은 매우 혼잡해서 승객들은 그들을 밀치며 지나갔고,짐꾼들도 빠져나가느라 부산을 떨었다.그 혼잡한 가운데서 막대기처럼 굳어 있는 스탠리를 빨리 움직이게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라우라는 조의 눈길을 피한 채,스탠리ㄹ의 팔을 부축하여 개찰구 쪽으로 갔다.개찰구를 나오면서 스탠리는 다시 조에게 다정스레 말했다. "난 포탄으로 생매장을 당했었소." 그들은 자동차에 올랐다.센트럴 정거장에서 힐톱까지 가는 동안 조는 스탠리에게 자주 곁눈질을 했다.그러면서 그는 속으로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정말 이런 정도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그는 스탠리가 같은 말을 다시 하지 않기를 바랐다.그러나 스탠리는 같은 말을 다시 하지 않기를 바랐다.그러나 스탠리는 같은 말을 또 했다. "난 포탄에 생매장을 당했었소." 조는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겨우 누르며 정중하게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사장님.사장님은 포탄에 생매장을 당하셨던 겁니다. 스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는 마치 장작개비처럼 뻣뻣하게 뒷좌석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그의 눈은 앞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무표정한 얼굴도 몸도 그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도록 변해버렸다.그는 두 손으로 마치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앞좌석을 꽉 잡은 채 잔뜩 긴장해서 앉아 있었다.너무나 초라하고 비참했다.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조는 용기를 북돋아주듯이 말했다.그는 스탠리가 찰과상 하나 당하지 않은 생생한 건강상태려니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런데 이 모양으로 돼버린 것이다.조가 다시 혀를 차며 라우라를 슬쩍 훔쳐 보았다.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한 팔로 스탠리를 부축하고 있었다. 차가 힐톱에 닿자 조는 먼저 뛰어내렸다.그는 자기만이 그를 도와줄 수 있다는 듯이 뽐내기까지 하면서 그를 부축했다. "자,이쪽입니다.계단을 조심하세요.자아,조심하세요." 스탠리 사장은 너무 조심스러웠다.차에서 내리면서 필요가 없는데도 손을 꼭 붙들고 땅으로 내려섰다.그는 몹시 경계하는 표정이었다.특히 머리를 금세 어떤 것에라도 얻어맞을 듯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그러더니 그는 머리를 곧추세우고 천천히 걸었다.목이 딱 굳어버린 사람처럼 보였다.그러나 굳은 곳은 목뿐 아니라 몸 전체였다.그의 몸뚱아리는 어떤 충동의 연속으로 작동되고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그 동작은 해체된 기계처럼 각기 따로따로 이루어졌다.그것은 아주 완전한 기계인간의 동작과 같았다. "손을 잡아드릴까요?" 스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대답을 하지 않는 습관이 들어버린 것 같았다.그러나 곧 그는 말했다. "다리는 괜찮아.그런데 이 머리가 문제야.난 입원하고 있었지.난,포탄으로 생매장을 당했었거든!" 라우라가 대문 앞에 서서 운전사에게 짐을 나르도록 지시하고 있는 동안 조는 스탠리를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베시가 문턱 돌계단에 서서 그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베시의 눈이 휘둥그래졌다.조는 아주 정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스탠리 사장님이 돌아오셨어,베시." 스탠리는 베시에겐 눈도 주지 않고 똑바로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 의자에 걸터 앉았다.아주 불안한 자세였다.집주인이 돌아왔다고 볼 수 없었다.그 집은 이제 스탠리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할 만큼 어설픈 동작이었다.그는 자기의 조끼 단추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다가 베시를 바라보았다.그제야 그는 베시를 알아보는 듯했다.그녀에게 반가운 미소를 띠었다.베시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조는 스탠리의 모자를 벗겨주면서 유쾌한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아,사장님은 점심을 드시면 좀 나아지실 거야.베시,그렇게 보이지 않아?" 조는 베시를 향하여 싱긋 웃어 보였다.그리고 베시는 정말로 멋있는 아가씨라는 생각을 한 번 해보는 것이었다.그는 언제나 베시에게 다정했다. 베시는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조는 그녀가 부엌에서 흐느끼면서 가정부에게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스탠리는 응접실을 두리번거렸다.응접실을 두리번거리기 위해 그는 머리를 돌리는 것이 아니라 의자 가장자리에 앉아서 몸뚱아리 전체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돌리는 것이었다.그렇게 하고 있는데 라우라가 들어왔다. "돌아도신 것을 뵙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사장님." 조는 두 손을 비비며 마음에서 진정으로 우러나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까,사모님?" "그래요." 라우라는 스탠리에게로 다가갔다.그녀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보였다. "이제 2층으로 가시지 않을래요?" 그녀가 말했다.그러나 스탠리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그는 라우라에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했다.그뿐만 아니라 이상하게도 라우라가 자기에게 관심을 표시하는 것에 화를 내고 있는 듯했다.그는 계속해서 응접실을 두리번거렸다.그렇게 둘러보는 그의 눈빛에는 묘한 빛이 흐르고 있었다.어두운 빛의 엷은 막으로 가려진 듯 전보다 더 검게 보이는 눈 속에는 뭔지 모를 그 무엇이 흐르고 있었다.그 감정을 알아보기는 매우 어려웠다.그것은 너무도 갑작스레 나타났다가 빠르게 사라져버리기 때문이었다.그러나 그것은 틀림없는 공포의 감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그것도 무슨 특정한 공포감이 아니라 그저 막연한 공포로 보였다.그는 응접실을 두리번거리는 동작을 끝냈다.그리고 말했다. "유쾌한 여행이었어." "그럼요,멋있었습니다!" "소음만을 제외하고는." "소음이라니요,사장님." "기차 바퀴소리 말이야,터널 속에서 말이야." 제기랄!하고 조는 생각했다. "난 말이야-." "말씀하세요." 그때 12시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조가 재빨리 말했다."자아,점심식사를 드셔야지요.사장님은 점심을 잡수시고 나면 훨씬 좋아지실 겝니다.그렇지 않습니까,사모님? 기운을 회복하는 데는 점심을 드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점심을 먹으면 그 다음엔 좀 누워야겠어." 스탠리가 말했다."의사가 그렇게 하라고 일러주더군.내가 떠나기 전에 꼭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라고 하더군." 그들은 점심을 먹으러 들어갔다.라우라는 식당 문턱에서 잠깐 발을 멈추었다. "가울런 씨,공장으로 가셔야 하지 않아요?" 그녀는 조를 바라보지도 않고 쌀쌀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공장에선 제가 없어도 일이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염려 마세요." "제 생각엔 저 양반도 댁이 돌아가기를 원할 것 같은데요.안 그래요,여보?" 스탠리의 얼굴에 짜증스러운 표정이 드러났다. "아냐,아냐.조를 계속 있게 해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조는 상냥스레 미소를 지었다.라우라는 할 수 없다는 듯 그 자리를 떴다.두 사람은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수프를 끝내자 스탠리는 의사의 지시를 자기가 잊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함인 듯 다시 조에게 말했다. "난 점심을 먹고 나면 좀 누워야겠어.의사가 그렇게 하라고 했거든.그리고 일어나면 뜨개질을 할 거야." 조의 입이 딱 벌어졌다.그러나 이건 웃을 일이 아니다.제기랄,그렇다.이건 웃을 일이 아니다.그는 아주 경이에 찬 태도로 말했다. "사장님이 뜨개질을 하신다구요?" 라우라는 이야기를 가로막으려는 듯이 몸을 움직였지만 스탠리는 계속해서 그에 대한 설명을 했다.그는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몹시 즐거워지는 모양이었다. "뜨개질을 하면 머리가 맑아져요.병원에서 난 뜨개질하는 것을 배웠지.포탄으로 생매장을 당한 후에." 조는 스탠리의 얼굴에서 자기의 시선을 황급히 돌렸다.뜨개질이라... 그는 과거를 생각했다.지난날의 스탠리를 회상해보았다.겨우 1년 전 바로 이 방엥서 떠들던 스탠리 사장을.성조기와 영국을 위하여 독일놈들을 한 방 쾅 먹이고 싶다고 뻐기던 그였다.그러기 위해서 공군에 입대하고 싶다고 열망하던 순수한 영국인... 그 위대한 모험심은 어떻게 된 것인가?베리 신혼탄,공립학교 대대,육군 군의관... 전쟁을 단순히 멋있는 게임으로만 생각하던 위대한 스탠리 사장.'제기랄,이치가 지금은 전쟁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군.'조는 갑작스레 폭소를 터뜨리고 싶었다.그러자 그때 스탠리가 울상이 되어 말했다. "아,안 되겠어.난 안 되겠어." 라우라가 몸을 앞으로 내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잘못됐어요,여보?" 스탠리의 몹시 찡그린 표정이 아주 심각해 보였다. "겨자통을 닫을 수가 없어." 그는 겨자통을 닫으려고 애를 썼지만 안 된 것이다.그의 몸은 그것 때문에 벌벌 떨었다.조가 벌떡 일어섰다. "자아,제가 사장님 대신 닫아드리겠습니다." 그가 스푼을 들어 잘멋 틀어박힌 뚜껑을 빼내자 겨자통 뚜껑은 저절로 닫혔다.그는 자신의 냅킨을 집어 드렁 스탠리의 턱에 묻은 고기 국물을 닦아주었다.라우라는 처참한 표정이 되었다.그녀는 일어섰다. "전 잠깐 밖에 좀 나갔다 와야겠어요." 그녀는 외면한 채 나가버렸다.몇 분 동안 침묵이 흐른 사이에 조는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했다.이윽고 그는 입을 열었다. "사장님이 돌아오신 것을 뵙게 되닌 사실 이만저만 기쁘지 않습니다.최근에 와서 공장은 더 활발해지고 있습니다.막대한 이익을 보고 있는 중입니다.지난 달은 정말 굉장했습니다." 스탠리는 기뻐하는 얼굴이 아니었다.그저 알았다는 표정이었다.그러나 조는 계속 이야기를 해나갔다. "그런데 사무실에서 일하는 그 도비를 기억하십니까?요즈음 와서 그자는 점점 무능한 것이 드러나고 있습니다.조금도 도움이 안 되고 있어요.사장님께서 돌아오셨으니 지금이야말로 그나를 파면시켜야겠습니다." 스탠리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실은,이달 말에 그자에게 통고를 하겠다고 혼자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그렇게 해도 사장님께선 괜찮으시겠지요?" 스탠리는 다시 고개를 끄덕거렸다.그러고는 아직 조가 후식을 끝내지도 않았는데 식탁에서 장작개비 같은 몸뚱이를 갑작스레 일으켰다. "난 좀 자야겠어." "네,그렇게 하십시오,사장님." 조는 얼른 따라 일어섰다.조는 스탠리를 정성스럽게 부축했다.라우라는 한 손에 눈물에 젖은 손수건을 꽉 움켜쥐고 계단 밑에 서 있었다.그녀는 스탠리의 한 팔을 잡아주려고 했으나 조는 비켜나지 않았다.스탠리도 조에게 몸을 기대며 퉁명스럽게 라우라를 쁘리쳤다.조는 그를 도와 2층 침실로 데리고 올라가 옷을 벗는 것을 도와주었다. 옷을 벗은 스탠리의 몸뚱이는 그야말로 뼈와 가죽뿐이었다.발가벗은 채 서 있는 스탠리는 기계인간이라기보다는 기계로 조작되는 시체 같았다.그는 침대에 누울 준비가 다 되어 있었으나 침대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마치 무슨 경건한 의식을 행하는 듯이 바닥에 꿇어앉아 침대 아래를 살펴보더니 일어나서는 베개를 들어 그 밑을 들여다보았다.그러고는 식기 찬장 안도 들여다보고 양쪽 창문의 커튼도 들춰보았다.그런 연후에야 그는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그는 사지를 쭉 뻗고 아주 반듯하게 누웠다.죽은 것같이 크게 뜬 그의 두 눈은 천장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조는 조용히 방을 나왔다. 계단 밑 응접실에서 라우라는 빨갛게 부어오른 눈을 하고서 조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녀는 조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화가 났을 때 하는 버릇대로 아랫입술을 꼭 깨문채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어요.이 집에서 빨리 나가주세요.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세요." 그녀는 심장이 심하게 뛴다는 것이 겉으로도 보일 정도로 흥분하고 있었다. "아니,이럴 필요는 없잖아,라우라."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라우라,당신은 스탠리 때문에 몹시 마음이 아프겠지.당연한 일이야.난 좀 돕고 싶다는 마음뿐야.그리고 내 도움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고." "아,그걸 도움이라고 하다니!" "왜 도움이 아니라는 거야? 나도 놀랐어.아마 내가 제일 놀랐을 거야.그렇지만 우리는 좀더 침착한 마음으로 신중하게 앞으로의 일을 의논합시다.공연히 흥분하지 말아요.스탠리는 군인으로서의 임무를 훌륭히 끝내고 돌아왔어.이젠 공장일을 생각해야 할 때야." 그는 아주 너그럽고 현명한 사람처럼 타이르듯이 말했다. "어련하시겠어요." 그녀는 싸늘하게 빈정대었다. "진심이야.제기랄,라우라.나 같은 사람도 좀 믿어달란 말야.난 당신네 두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 거요.난 스탠리를 공장으로 데리고 가서 다시 일에 흥미를 갖도록 해서 어떻게 하든지 재기를 하도록 해주고 싶은 거야." "내가 당신을 몰랐아면 당신의 그말을 정말 고마워할 거예요." "진정이라니까.우린 이것에 관해서 서로 협조를 해야 할 거야.하느님에게 맹세를 하지만 라우라,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아 할게." 침묵이 흘렀다.그녀의 충혈된 눈은 그의 얼굴 위에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그녀의 호흡은 더욱 가빠지고 괴로움으로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어졌다. "당신이 뭘 해주시겠어요? 난 당신이 미울 뿐이야.내가 미운 것처럼 당신도 미울 수밖에 없어요." 그는 한 손으로 턱을 슬슬 만지며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이윽고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그 집을 나왔다.다음날 아침 공장으로 스탠리를 데리고 나가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는 11시 경에 다시 스탠리 집에 나타났다.라우라는 외출하고 없었다.스탠리는 외출복을 입고 응접실의 의자 끝에 불안하게 걸터앉아 레코드를 듣고 있었다.물룬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졸은 일이나 그가 듣고 있는 음악의 어두운 가락에 조의 얼굴은 금세 찌푸려졌다.조는 달래듯 말했다. "뭔가 활발한 걸 들으세요,사장님.요즘 유행하는 음악중에 유쾌한 것이 많지 않습니까?" 스탠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난 이 곡이 좋아.내가 좋아하는 건 이것뿐이야.난 아침 내내 이 곡을 들었어." 스탠리는 그 곡이 끝나자 다시 틀었다.조는 그 음악과 그것을 듣고 있는 스탠리까지 좀 무서워졌다.레코드를 가까이 들여다보았다.쇼팽의 '장송 행진곡'이었다.조는 몸을 휙 돌렸다. "맙소사,사장님.왜 이런 걸 듣고 계세요? 자아,자,힘을 내십시오.제가 문 앞에 차를 세워놓았습니다.어서 공장으로 가십시다." 그들은 공장으로 차를 몰고 갔다.곧바로 용광소로 들어갔다.조가 미리 그 순서를 다 짜놓았던 것이다.공장 안에 있던 모든 영국 국기가 다 내 걸렸고,조가 오래 된 장에서 뒤져낸 커다란 플래카드 하나가 공장 마당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걸려 있었다.거기에는 '환영'이라고 커다랗게 씌어져 있었다.스탠리가 조와 함께 공장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일을 멈추고 기다리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소리를 높여 만세를 불러주었다.공장 안에는 굉장히 많은 여공들이 있었다.조는 여공들이 나이 많은 남자들보다 훨씬 임금이 싸고 또 일 솜씨도 빠르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여공들은 미친 듯이 만세를 외쳐댔다.스탠리는 만세를 부르는 여공들을 바라보아ㅆ.작업복 차림의 그녀들은 유산탄용의 산탄을 만드는 여공들이었다.그는 여공들 앞에서 당황하는 것 처럼 보였다.그의 태도는 점점 불안해졌다.저기 옆에서 소곤댔다. "사장님,뭐라고 한 말씀 하세요.하고 싶은 말씀을 무엇이든 하세요." 조는 손을 번쩍 들어 모두 침묵하도록 했다.스탠리 사장은 여공들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나는 포탄으로 생매장을 당했었습니다.나는 지금까지 입원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만세소리가 일어났다.그 만세소리에 파묻힌 가운데에서 조는 재빨리 다음에 해야 할 말을 일러주었다. "나는 생산고가 증가하고 있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그리고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그대로 계속 분발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세요." 스탠리 사장은 커다란 목소리로 시키는 대로 반복했다.또다시 환성이 높아졌고 그것은 오래 계속되었다.그러자 조가 만사를 떠맡았다.그는 손을 번쩍 들고 다시 대중을 조용하게 했다.그는 모자를 머리 뒤롤 꾹 눌러쓰며 엄지 손가락을 조끼 옆구리 위쪽에다 집어넣고는 일동에게 빛나는 미소를 던졌다. "여러분은 스탠리 사징님을 만나 모두가 기뻐하고있습니다.본인도마찬가지입니다.사장님께서는 지금까지 경험하신 일을 말씀하기를 좋아하시지 않습니다.그래서 본인이 사장님 대신에 조금만 말씀드리겠습니다.여러분은 조국을 위하여 수행할 일,하지 않고는 안 될 일을 계속하셔야 하며,그 누구의 이야기에 끌려 손을 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기에 긴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그러나 이 말만은 해야겠습니다.즉 우리는 스탠리 사장님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바로 이 자리,사장님 면전에서 말씀드리고 싶다는 것입니다.본인은 사장님과 공동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그리고 여러분도 사장님을 위하여 이 과업을 수행하고 있음을 영광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본인은 알고 있습니다.스탠리 사장과 본인은 여러 가지 계획을 짜고 있습니다.그런데 사장님께서는 사장님이 프랑스에서 미력하나마 국가를 위하여 하신 일과 꼭 같이 여러분도 계속해서 미력하나마 조국을 위하여 일을 추진해주실 것을 비라고 계십니다.여러분은 다 아시고 계시겠지만 생산고를 올리기 위하여 결사적으로 일을 해야겠습니다.이것으로 본이느이 말은 마치겠습니다.여러분은 작업장으로 되돌아가기 전에 국가를 함께 불러주시고 이 공장의 지붕이 날아갈 만큼 우렁찬 만세를 다시 한 번 외쳐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그러다가 감동이 넘치는 목소리들이-왜냐하면 여성의 목소리들이기 때문에-'하느님이 국왕을 보호하소서'를 노래했다.그 애국가 봉창은 너무도 감격적이어서 조의 두 눈에는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하느님께 자신들의 왕을 보호해달라는 노래를 부르고 난 다음 그들은 스탠리 사장 만세를 부르고 조를 위한 만세를 부르고,모든 사람을 위해 만세를 불렀다.그리하여 거의 종교적인 열광 속에서 일동은 유산탄과 수류탄과 18파운드 포탄 제조소로 되돌아갔다. 조와 스탠리는 복도를 따라 사무실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그러나 그들은 얼마 멀리 가지 못하고 말았다.그 중간에 하나의 거대한 포탄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스탠리를 환영하기 위한 그 포탄은,조가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굉장히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기도 했다.그 포탄은 얘로우의 존 러틀리 노인이 조에게 보낸 선물이었다.존 러틀리 영감은 조와 함께 군수품 제조 위원회의 위원이었고,그 공장은 거대한 포탄을 생산해내고 있었다.조는 여러 가지 일을 생각게 해주는 그 아름다운 50센티 포탄을 장식해놓는 것을 굉장히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그 포탄은 멋있게 만든 목재 받침대 위에 올려놓게 해서 지금은 어떤 황홀감마저 드러내며 허공으로 주둥이를 향한 채,번쩍거리는 모습을 거인처럼 드러내고 서 있었다. 바로 그 포탄을 보자 스탠리는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그는 뻣뻣이 선 채 그 번쩍거리는 큰 포탄을 노려보았다.조는 포탄의 머리를 다정스럽게 두드렸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전 이걸 캐티 아가씨라고 부릅니다!" 스탠리 사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의 눈늬 엷은 막 아래에서 검은 빛이 점점 더 짙어졌다. "우리도 이런 큰 포탄을 만들려는 생각입니다.큰 포탄도 굉장히 수지가맞습니다.아아,참,자아,사무실로 들어갑시다.모건과 도비를 거기에서 기다리게 했습니다.그 사람들에게도 한 말씀을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스탠리 사장은 움직이지 않았다.그는 그 포탄 옆을 지나갈 수가 없었다.그는 포탄을 노려볼 뿐이었다.그 포탄은 그의 영혼까지 얼어붙게 하는 것이엇다. "사장님,갑시다.모두 사장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난 집으로 가겠어." 그의 목소리는 이주 괴상했다.그리고 근느 몸을 꼿꼿하게 세운 채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이치가 또 발작이군.' 조는 속으로 생각하며 스탠리의 팔을 꽉 움켜잡고 포탄 옆을 지나가려고 했다.그러나 스탠리는 버텼다.이마의 살갗이 뒤틀리며 눈에서는 매장되었을 때의 그 공포가 다시 생생하게 번져 나왔다.그는 숨을 헐떡거렸다. "날 가게 해줘.난 집으로 가겠어." "사장님,진정하십시오.마음을 놓으세요.저건 가짭니다.어떤 것도 이젠 사장님을 해치지 않습니다.진정하세요,사장님." 그러나 스탠리의 마음은 이미 분별력을 잃고 있었다.스탠리는 프랑스에서 바로 이런 포탄에 의해서 자신의 정신력을 잘려버리고 만 것이다.그 공포만이 그의 뇌리를 다시 흔들어놓기 시작했다.이제는 스탠리의 얼굴 전체가 모두 뒤트리기 시작했다.그의 눈 안에 나타나고 있는 공포의 빛은 바라보는 사람마저 얼어붙게 하도록 처절했다. "난,집으로 가고 싶어!" 그는 신음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죽은 사람처럼 핏기를 잃은 그의 얼굴에서 당해낼 수 없는 고뇌와 흥분이 솟구치고 있었다.조는 체념했다. "좋습니다.사장님,집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안심하십시오." 만사가 지금까지 잘 되어갔는데,공장에서 거북한 광경이 발생하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그는 급히 스탠리를 부축하여 공장 밖으로 나갔다.조의 미소는 누가 보아도 만사가 완전히 순조롭게 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유쾌한 것이었다.스탠리 사장은 아직 그다지 일에 익숙하지 못하다.병원에서 금세 퇴원했기 때문에 그건 당연한 일이다.그렇다.바로 그것이다! 자동차는 뒷좌석에 스탠리를 똑바로 앉힌 채 힐톱을 행해서 떠나갔다.조는 마지막으로 친근하고 상대방을 안심시키는 그 특유의 미소로 전송을 하고서 자기 사무실로 돌아왔다.그는 사무실 문을 닫고 앉아서 담배에 불을 당겼다.그는 담배의 맛을 깊이 음미하는 듯 유쾌한 표정이었다.그러나 그 담배맛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그는 스탠리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틀림없는 사실은 스탠리가 이젠 완전히 폐인이라는 굿이었다.스탠리가 돌아오던 날 정거장에서 그의 눈과 마주쳤을 때 조는 이미 그것을 알았던 것이다.포탄 충격이라는 것은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이었다.스탠리가 정상으로 되돌아오자면 수십 개월이 걸릴 것이다.그것도 회복하게 된다는 가정 아래서의 이야기다.그 동안에 밀링튼 공장을 지금까지보다 더욱 요령있게 이끌어가야 할 것이다.그리고 지금까지 착복해온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밀링튼 공장에서 빼내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어리석은 일이고말고.조는 타 들어가는 담뱃불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는 빈틈 없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짐 모슨의 말을 따른다면 현재 1년 통틀어 약 2천 파운드쯤 해먹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문제는 장래에 대한 것이다.그런데 어렵쇼,이것은 자기의 장래를 굳히기 위해,거대한 아니,최대의 거물이 되기에 그 얼마나 고마운 기회인가.조는 흡족한 한숨을 내쉬었다.밀링튼 공장에서도 일종의 재조정이 그렇다,그건 적합한 말이다.있어야겠다.그래,바로 그것이다.그건 아주 좋은 생각이다. 입술을 촉촉히 적시면서 조는 전화기로 손을 뻗었다.그는 짐 모슨에게 전화를 걸었다.모슨을 알게 된 것이,그리고 그와 협력을 하고 있다는 이처럼 즐거워본 적은 처음이었다.짐은 머리가 좋은 놈이어서 일에 손을 대는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또 사고를 막아내는 요령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여보세요,짐,짐 형이오?" 조는 모슨에게 사태를 보다 정확히 설명해주려고 무척 애를 썼다.그러고는 스탠리를 생각해주는 듯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그 불쌍한 인간을 보면 정말 기슴이 아픈 거야,짐.그치는 정신은 아주 말짱해,당신과 나처럼 말이야.그런데 문제는 그의 신경이거든.포탄 충격이야,알겠지?그래 ,정말이야.포탄 충격,바로 그거야.짐,알겠지?" 모슨이 뭐라고 대답하는 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조는 또 말했다. "그럼,내일 밤 당신 집에서,짐.그래,알았소.서둘 것은 없다고 봐.스내그라는 자라면 잘 알고 있지.보스톡의 사무실에서 만나서 그 계약을 맺었던 자 아닌가?아,알겠어.아이,제기랄,짐.당신은 대체 나를 무엇으로 보고 있어... 이봐,아아,알았다니까.전화로 말할 것이 아니지... 알았아니까... 부인께선 안녕하신가?... 그 좋군그래,짐.그것 정말 좋군.알았어,이 사람아.그럼 그때 만나지,잘 있어." 조는 수화기를 놓았다.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그의 큰 손은 다시 앞으로 뻗어나가 힐톱의 라우라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의 목소리는 조용하면서도 동정 어리고 신중한 것이었다. "만나서 이야기 좀 해야겠어,라우라.정말 꼭 만나야 해.그렇게 나온다고 무슨 소용이 있어,라우라? 정말 그 기분은 알고 있어.그 말은 틀리지 않아.그렇지만 우리는 인간이란 말이야.안 그래? 그러니 우린 이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어요.좋아,좋아.나를 뭐라고 해도 괜찮아.난 그런 놈이니까 말이야.그렇지만 제발 일은 똑바로 해놓잔 말이야.난 당신을 만나야겠어.그렇게 하지 않고는 안 되겠어.뭐라고!좋아,좋아.라우라,안 오겠다면,억지로 나를 만나달라는 것은 아니야.안 오겠다면... 그렇지만 마음이 돌아서서 오게 된다면,저녁 내내 아파트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 그는 2,3분 동안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가 전화를 끊어버린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그는 싱긋 웃으며 수화기를 놓고서 유쾌한 기분으로 일을 시작했다.그날 밤 그는 카운티 클럽에서 항상 저녁을 먹던 것을 그만두고 6시에 집으로 돌아왔다.휘파람을 불면서 그는 위스키에 차가운 머턴 파이를 곁들여 먹었다.다시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나서,새로 산 체크 무늬의 실내복을 입고 앉아 신문을 읽으며 기다렸다. 가끔 그의 눈은 시계 쪽을 힐끔거렸다.몇 번인가 바깥의 조각달 형태의 부지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에 그는 혹시나 하고 의자에 앉은 채로 몸을 긴장시켰다.시계바늘이 돌아감에 따라 그의 이마의 부드러운 표정은 찌푸려지기 시작했다.그러나 9시 정각에 현관문의 벨이 울리자 그는 벌떡 일어났다. 라우라는 몹시 화가 난 얼굴로 들어왔다.레인코트를 입고 머리에 꼭 맞는 갈색 모자를 쓰고 구두에는 물이 튀긴 흔적이 있었다.그녀가 힐톱으로부터 이곳까지 걸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그녀의 창백한 얼굴은 금세 울음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자,왔어요." 그녀는 적개심이 담긴 어조로 선언하듯 말했다. "도대체 하실 말씀이란 무엇이죠?"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았다.그는 줄곧 방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와줘서 고마워,라우라." "그래서요? 빨리 말씀하세요.난 오래 기다릴 수가 없어요." 그녀는 여전히 신경질적으로 갈라진 목소리였다. "우선 앉아요." 그녀는 마치 친형제에게나 하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래가지곤 이야기도 할 수 없잖아.피곤한 것 같군.완전히 지친 모습인데." 그는 난로 쪽으로 가서 불을 휘저어 새 불길이 일어나게 했다.그녀는 조소가 담긴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피곤한 한숨을 내쉬면서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난 이 저주스러운 방을 나간 그때부터 단 1분도 마음이 편한 적이 없었어요." "알고 있어." 그는 의자에 돌아와 앉아,마치 후회하는 듯한 조용한 얼굴로 난롯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될 줄이야 서로 몰랐지.라우라,어떻게 우리가 알 수 있었겠어?" "난 온종을 그이를 볼 때마다 단 1분도 그 생각에서 떠날 수가 없어요.그이는 이제 나를 보는 것만도 역겨워하고 있어요.당신도 그걸 보셨죠? 그인 내가 옆에 있는 것조차 증오스러운 모양이에요.그이는 번마우드로 갈 거예요.거기에 있는 요양소로요.그런데 나에게는 따라오지 말라는 거예요.난 그런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해요.마땅하고 말고요.아아,정말 싫어요.난 내 자신이 얼마나 역겹고 증오스러운지 몰라요." 그녀는 드디어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그가 동정하는 듯한 말을 중얼거리자 "닥쳐요."하고 그녀가 소리쳤다."난,당신도 증오해요.내 자신 이상으로 당신이 역겹고 증오스러워요." 그러나 그는 태연스러웠다. "스탠리에게 우리들 일에 관해서 조금도 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그렇지.그럴 필요는 조금도 없는 거야." 그는 사리를 잘 분별해야 한다는 듯 나중 말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도 그러길 바라고 있어요.당신이 그이에게 말해버리는 일은 없겠죠?" 그녀는 사나운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럼,그럼."그는 묘한 웃음을 일어나 식기장 쪽으로 가서는 강한 위스키 소다를 만들었다."당신이 나를 방해하지 않는다면 말이야.그렇다면 내가 말할 이유가 없지.라우라,자아,이거나 한 잔 들어요.아주 완전히 녹초가 된 표정이구만." 그녀는 엉겹결에 술잔을 받아들었으나 그녀의 얼굴을 어떤 두려움으로 더욱 어두워졌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당신을 방해한다는 것이?" "그러니까,우리는 서로 다정하게 지내야 한다 이거지,라우라." 그는 술을 조금씩 아끼듯이 마시면서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주위의 모든 사람과 친구로서 다정하게 지내자,이게 바로 내 신조야.난 지금까지 늘 누구와도 다정스레 지내왔지.서로 감정을 터뜨리게 되면 무슨 일이든 별로 좋은 일은 아니란 말씀이야.스탠리에게도 좋지 못하고,그렇게 되면 우리에게도 다 재미 없거든.스탠리는 지금 사업을 해나가는 데 내가 필요해.난 지금 회사를 확장한다거나 아니면 병합한다거나 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야.이봐,바로 얼마 전에도 난 타인캐슬의 짐 모슨에게 이야기한 바가 있지만,모슨 알지? 타인캐슬에서 일류 사업가 중의 한 사람이지.그러니까,모슨과 스탠리와 내가 협력을 하면,우리 셋이서 공장을 어떻게 재구성해나갈 것인지 아마 당신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을 거야.우린 공장을 완전히 금광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야." "알겠어요."그녀도 속삭이듯 말했다."당신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알겠어요.어찌 되었든 당신은 나에게 싫증을 느끼고 있어요.그런데 지금 당신은 나를 이용하려는 거죠? 이왕이면 우리들 사이에서 일어난 모든 것을 다 이용해 먹자... ." "제발,라우라.그러지 말고 힘을 내.이건 절대적으로 정직한 이야기야.우리가 회사를 만든다,그러면 그 속에는 우리 모두를 위한 황금 단지가 들어 있는 것이 된다,이 말일 뿐이야." "돈... 당신은 돈 외엔 아무것도 생각지 않는군요.당신은 야비한 인간이야!" "난,인간일 뿐이야.우린 모두가 인간에 불과해.그래서 내가 당신에게 반한 거지." "닥쳐요!" 그녀는 사납게 외쳤다.침묵이 흘렀다.그녀는 위스키를 마셨다.그녀의 얼굴에 훨씬 생기가 돌았다.그녀는 조를 가만히 바라다보았다.조는 어쨌든 박력이 넘치는 매력적인 남성이었다.이 몇 주일 동안 그녀는 그의 천박함,그의 탐욕,그의 음험하고 교활하기까지 한 모든 이중성을 낱낱이 보아왔다.특히 남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둔함이 얼마나 증오스러웠는지 모른다.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허물어져 가는 자신의 내면을 어떻게 지탱해낼 힘이 없었다.그는 어떤 남자에게서도 볼 수 없는 멋있는 사람이었다.그의 몸은 아름답고 강하며 탄탄한 근육의 힘은 그녀의 넋을 빼앗기에 충분했다.그 중에서도 그녀를 가장 못 견디게 만드는 것은 그의 갈색 눈빛이었다.그 눈빛은 그녀를 한없이 잡아당겨 끝없는 구렁으로 던져넣어 버리곤 하는 것이다.또 자신은 그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던가.옷 입는 것,몸을 가꾸는 법,어떤 의미로 봐서 조라는 인간은 그녀가 창조해낸 걸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낮은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아직도 내게 화를 내고 있는 거야,라우라?" "당신 같은 사람에게 화를 내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녀는 맥 빠진 음성으로 말하며 술잔을 내밀었다. "자아,술이나 더 줘요." 그는 급히 술을 따라주었다.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그 동안 당신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아? 당신 생각만 했다구." 그녀는 신경질적인 웃음소리를 내면서 술을 꿀꺽 삼켰다. "난 이제 속지 않아요.그 동안 당신이 다른 여자하고 지냈다는 거 다 알고 있어요.내가 나를 증오하고 있는,포탄에 정신까지 날려버린 헛껍데기 폐인 곁에 앉아 있는 동안 당신은 무엇을 했는지 다 알고 있어요.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어요." "믿기 싫으면 관둬,난 진정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는 지친 기색도 없이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계속 늘어놓았다. "왜 내게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그런 건 이제 문제가 아녜요.난 이제 내 자신을 찾았어요,고맙게도.당신이 이제 어떤 생활을 하건 말건 난 상관 안해요.난 스탠리에게 온 정성을 다 쏟을 거예요." "잘 알아,라우라.나도 다만 친구 사이로 잘 지내자는 거야." 그는 그녀의 빈 술잔을 달라는 듯 손을 뻗치다가 그녀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아,어쩌면 이럴 수가!어서 놓아요!" 그녀는 놀라 손을 뿌리치며 그를 바라보다가 기어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그녀는 흐느껴 울었다. "당신은 어쩌면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세요? 이제 그만 충분하지 않으세요? 나를 제발 그냥 돌려보내 주세요.가겠어요." 그녀는 일어섰다.그 순간 그의 두 팔이 그녀를 휘감았다.그는 그녀를 부드럽게,그러면서도 자신만만하고 힘차게 끌어안았다. "그냥 가게 할 수는 없어,라우라." "아,제발 나를 놓아주세요.제발... ." 그녀는 그의 품안을 밧어나려 몸부림치며 다시 거센 울음을 터뜨렸다. "이러지 마,라우라.자아,진정해요." 그녀는 몸부림을 치면서도 그의 팔 안에서 온몸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그의 몸을 느끼자 격렬한 욕망을 일으키는 자신에 대한 굴욕감으로 그녀는 더욱 흐느꼈다. "라우라!" 그는 그녀에게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아,안 돼요,조.싫어요." 그녀는 그를 밀어내려고 했으나 그의 입술은 그녀의 말을 막아버렸다.그녀는 온몸의 힘이 쑥 빠져버려 더 이상 어떻게 저항하지도 못했다.그가 자기 옆에 있다는 감각 이외에 다른 것은 모두 안개처럼 사라졌다.그녀의 육체가 그를 열렬히 원하고 있음을 어떻게 해도 속일 수가 없었다.소브리지에서의 그 답답했던 몇 주간의 고독은 지독한 것이었다.매일 보아야 하는 스탠리의 퉁명스러운 표정,프랑스의 그 어느 포탄에 남성적인 것을 모두 빼앗겨버린 기계 같은 인간의 무서운 단조로움,그녀는 그런 것을 생각하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그녀의 온몸은 어느새 달아오르고 있었다.조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했다.그는 다만 자기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이제 곧 나를 저버릴 것이다.그러나 그렇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아무 소용이 없는 노릇이다.그녀는 그가 자기를 침실로 안고 가는 것을 느꼈다.그리고 자기 옷이 벗겨지는 것도 알았다. 그녀가 힐톱으로 돌아왔을 때는 아주 늦은 밤이었다.그런대도 존 러틀리 부인이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나,부인." 존 부인은 일어서면서 라우라의 두 손을 꼭 잡았다. "부인께서 바람을 쏘이러 나가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바깥양반이 그렇게 되셨다니 어떻게 위로를 드려야 할지 정말 안타깝군요.전 그냥 가봐야겠어요.부인께선 아직도 경황이 없으신 모양이군요.당연한 일이죠.난 우리 집 영감에게 늘상 말했지만 두 분께서는 정말 너무나 다정한 한 쌍의 원앙새였는데... 그러나 너무 염려는 마세요,부인.곧 회복되실 거예요." 라우라는 그 중년 부인의 얼굴을 그저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라우라의 얼굴에는 일그러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19 1917년 11월 중순경,마사는 애니 메이서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그 추운 겨울 아침에 마사에게 이 소문을 전해준 사람은 바로 한나 브레이스였다.한나 브레이스는 애니 같은 얌전한 아가씨에게 그런 불행이 닥쳐올 줄이야 누가 알았겠느냐 하면서 마음 아파했다.갈색 머리칼을 앞창이 달린 모자 밑에 남자처럼 둘둘 말아넣은 마사는 추위로 코는 시퍼렇게 얼어 있었고,몸도 앞으로 구부정하게 굽어 있었다.그녀는 현관에 신발털개를 들고 나와서 먼지를 막 털려던 참이었다. "나는 아주 까무라칠 뻔했다우.애니가 그런 꼴인 것을 봤을 때 말이우." 한나의 사람 좋은 얼굴에는 낙심하는 표정이 가득했지만 마사의 얼굴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그녀는 표정에 아무 변화가 없었을 뿐 아니라 한나 부인의 다음 말도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돌아서서 들어가 버렸다.그렇지만 자기 말이 효과가 있었다는 것을 안 한나는 의기양양한 기분이었다.마사는 식탁앞에 앉아서 손마디가 굵은 주먹으로 턱을 고이고 한나가 방금 한 말에 대하여 생각해보았다.비꼬인 미소가 그녀의 입술 위로 감돌았다.자기는 늘 그렇게 말해오지 않았던가,애니는 좋지 못한 아이라고.이제 애니가 좋지 못한 아이라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자기 말이 맞았던 것이다.이 마사 펜윅의 말이 들어맞은 것이다. 물론 샘에게 책임이 있었다.샘은 그가 떠나던 마지막 며칠 동안 거의 밖으로만 나돌아다녔다.그녀가 화가 날 만큼,그는 주말을 완전히 밖에서 보낸 때도 있었다.그 결과가 이것이다.그렇다.샘에게도 책임은 있다.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마사의 생각으로는 사내는 절대 탓할 것이 못 되었다.마사는 은근히 기뻤다.사태가 이 모양으로 되어버린 것이 즐거 웠다.이렇게 되면 샘도 이제 애니를 높이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절대로!사내란 본디 여자가 사고를 저지르는 것을 싫어하는 법이다.거기다기 샘은 멀리 프랑스에 가 있는 것이다.그러니 그가 제대를 하고 돌아오면 샘을 타이를 수 있을 것이다.그때 샘을 잘 타일러서 애니 메이서로부터 떼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녀는 자기가 어떻게 하면 되는가를 알고 있었다.그녀에게는 정확한 계획이 세워졌다. 물론 그 첫 단계는 한나 브레이스의 말이 틀림이 없는 것인지의 여부를 알아내는 일이었다.그날 오전 11시에 마사는 외투를 걸치고 카우펀 가를 천천히 걸어가면서,애니가 흔드는 그 유명한 종소리가 나지 않나 하고 귀를 기울였다.지금 애니 메이서의 집안은 생활고로 허덕이고 있었다.퍽은 군대에 끌려갔고,메이서 영감은 해변에 수뢰를 부설했기 때문에 바다로 나갈 수 가 없는 데다가 류머티즘이 점점 더 심해져 해변 근처에서 대구 낚시로 생계를 잇고 있는 현편이었다.애니도 아버지를 도와 손낚시를 같이 하면서 밀물일 때엔 낚싯밥인 갯지렁이를 파내기도 했다.그녀는 병든 아버지를 도와 남자가 해야 할 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새벽엔 보트를 어깨로 밀어내야 했고,잿빛 바다에서 새벽 먼동이 천천히 밝아오면 항구 너머로 아버지와 함께 나가기도 했다.그러다가 시내가 모두 잠을 깨면,오전 중에 애니는 생선 광주리를 등에 메고 조그마한 주석 종을 흔들면서 생선을 팔러 다니는 것이었다. 그날 오전에 마사는 애니의 종소리를 카우펀 가의 언덕길 밑에서 들었다.마사에게는 애니의 종소리는 늘 화가 치밀게 하는 것이었지만,오늘만은 그 종소리가 별 상관이 없었다.마사의 눈에서는 독수리 눈빛 같은 사나운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그녀는 무엇보다도 한나 브레이스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을 분명히 확인할 필요가 있었는에 애니는 정말로 그러했다. 마사는 무서운 얼굴을 한 채로 천천히 걸어 내려가 이윽고 애니와 나란히 서게 되었다.애니는 미들리그 우유가게 주인인 데일 부인의 주문을 받아 길위에다 생선 바구니를 내려놓고 있는 참이었다.마사가 애니를 살피고 있는 동안 애니는 몹시 거칠어진 손으로 말끔히 내장을 훑어낸 생선을 데일 부인의 접시 위에다 담았다.그러나 마사가 이무리 사나운 눈으로 본다고 해도 애니가 말쑥한 아가씨라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녀의 얼굴은 바닷바람에 시달렸지만 윤기가 날 정도로 청결했고,청색 앞치마는 빳빳하게 풀을 먹여 다리미 자국이 선명했다.팔꿈치까지 드러난 팔뚝도 싱싱한 젊음이 넘쳤고,무엇보다도 눈빛이 맑으면서도 부드러웠다.애니가 이처럼 말끔하고 흠잡을 데 없는 어자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기 때문에 마사의 기분은 더욱 거칠어졌다.입을 꼭 다문 채 애니가 데일 부인과의 거래를 끝낼 때까지 서서 기다렸다. 애니는 이윽고 생선 바구니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그녀는 마사를 보자 얼굴이 더욱 밝아졌다.그러나 그것은 눈에 확 드러나지는 않았다.애니의 조용하면서도 평온한 표정이 좀더 밝은 표정이 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그녀는 마사가 자기의 생선을 사려는 줄로 생각했던 것이다.그것은 정말 마사가 한 번 도 베풀어주지 않았던 영광스러운 것이기도 했기에 애니는 멋적은 듯한 미소를 띠었다. "대구가 싱싱합니다.펜윅 부인." 그녀가 상냥하게 말했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애니는 자기가 너무 주제넘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얼른 덧붙여 말했다. "보통 것보다 더 크고 아주 좋은 것이랍니다." 그러나 마사는 애니를 계속 바라보기만 했다.애니는 아직도 그 뜻을 짐작하지 못했다.몸을 굽히고 생선 바구니를 번쩍 들어올려 맛에게 싱싱한 생선이 더 잘 보이도록 했다. "아버지와 제가 낚았어요.바다에 안개가 낄 때 가장 잘 물려요.지나가면서 현관 계단애다 한 마리 들여놓아 드리겠어요.들고 가시기가 어려울 테니까요." 애니로서는 최선을 다한 친절이었다.애니는 어떻게 해서라도 마사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그러나 마사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그러다가 애니가 생선에서 눈을 돌리자 거만하고도 얼음같이 차가운 눈초리로 똑바로 노려보는 것이었다.그때에야 애니는 그 시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겨우 알 수 있었다.애니는 몸을 움츠렸다.그때 마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네 생선은 필요 없어.생선뿐만 아니라 네가 갖고 있는 것은 모두 내게는 소용이 없는 것뿐이야." 그녀는 큰 키를 뻣뻣이 세우고 애니의 대답을 기다린다는 얼굴로 서 있었다.애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눈길은 모욕을 당한 슬픔을 감추지 못하며 생선 바구니 쪽으로 떨어졌다.이겼다는 표정이 역력한 마사는 점더 기다리는 듯하더니 오만하게 머리를 꼿꼿이 세운 채로 발길을 돌려 가버렸다. 애니는 눈을 들고 멀어져 가는 마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그 순간 애니의 얼굴에는 어떤 숭고한 빛마저 감돌았다.모욕을 당했다는 노여움도,그렇다고 창피한 ㅂ도 없었다.바닷바람에 거칠어졌으나 너그러운 기품이 흐르는 얼굴에는 막연한 슬픔 같은 것만이 어리고 있었다.그녀는 한동안 그대로 서 있다가 이윽고 생선 바구니를 어깨에 메고 길을 걸어 올라갔다.그녀가 흔드는 종소리는 조용히 그리고 맑게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그 후로 마사는 계획적인 새로운 습관을 실천하기 시작했다.공공연한 모욕을 주기 위한 것이 분명한 나들이를 시작한 것이었다.그녀는 달동네에서 소위 '애니에게 어떤 평판이 돌아갈'것이 분명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마사는 본래 절대로 쓸데없는 이야기를 지껄이는 사람이 아니었다.가령 남의 뒷소문 같은 것에 대해선 비웃고 멸시했다.그러나 지금 그녀는 애니가 처녀로서 임신했다는 소문을 스스로 퍼트리면서 은밀히 쾌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녀는 될 수 있는 대로 에니를 자주 길가에서 만나도록 했다.그리고 만날 때마다 몸을 위축되게 하는 싸늘한 경멸의 시선을 던졌다.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언제나 그런 시선만을 보내는 것이었다.그녀는 애니가 즐겨 걷는 산책길을 알아냈다.애니가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유일한 때인 저녁에 혼자서 걷는 그 길은 해변을 지나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서는 스누크 탄광 너머로 뻗어 있었다.읍내의 달동네 너머로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마사로서는 처음으로 걷는 길이었다.애니는 언제나 벼랑 위에 서서 먼 바다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곤 했다.때로는 마사가 먼저 거기에 도착할 때도 있었다.그러나 어느 쪽이 먼저 오든 간에 마사는 언제나 애니에게 그 지독한 시선을 던졌다.가끔 애니는 마사에게 말을 걸고 싶은 듯했으나 마사의 눈초리에 모든 말이 얼어붙어 버리는 모양이었다.이 몇 년 동안 마사는 애니 때문에 얼마나 속을 썩혀왔던가.그런데 이제는 애니가 애를 태우게 된 것이다. 마사는 샘에게 이같은 상황을 조금이라도 비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샘에게 보내는 편지에 마사는 이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현명했다.아들에게 전보다 더 많은 위문품을 보냈다.그렇게 함으로써 샘에게 자기 어머니의 존재와 정을 더 깊이 느끼도록 했다.그녀는 샘이 충실하게 보내주는 가족수당을 타고 있었기 때문에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다.그녀는 사실 샘의 가족수당에 의해서 생활해나가고 있었다. 여러 날들이 흘러갔다.슬리스케일에선 별다른 사고가 없는 평온한 날들이었다.넵튠 탄광에서는 파라다이스 갱구까지 새 도로를 뚫는 작업이 순조롭게 진척되고 있었다.제니는 여전히 타인캐슬의 친정에서 살고 있었다.마사는 그녀에 대한 소식은 듣지 못했다.톰 오글 노인의 아들인 해리 오글이 읍의원에 선출되었다.핸즈 메서는 교외 병원에서 적국인 수용소로 옮겨졌다.웹트 부인은 일 주일에 이틀씩 파이 가게를 정기적으로 열었다.잭 리디는 심한 독가스를 마셔 전선에서 귀환했다.데이빗으로부터의 편지는 한 달에 한 번씩 규칙적으로 도착했다.삶은 그런 식으로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애니 메이서는 아버지와 함께 검푸른 안개로 덮인 새벽에 낚시질로 잡은 생선을 여전히 가지고 다니며 팔았다.사람들은 애니가 생선을 팔러 다니는 것이 창피스러운 일이라고 했지만 애니는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오빠인 퍽은 가족수당을 보내줄 만한 위인이 못 되었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생선을 팔지 않고는 생계가 막연했다.애니는 창피를 무릅쓰고 생선장사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느 날 애니는 그 일을 하러 나가지 않았다.3월 22일이었다.마사는 애니를 찾았으나 허사였다.마사는 해산일이 닥쳐온 모양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화가 치밀었다. 저녁때가 되자 마사는 산책을 나섰다.해변을 따라 스누크를 지나서 그 너머 벼랑 위로 올라갔다.애니가 혹시 그곳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애니는 그곳에도 없었다.마사는 역시 자기 짐작대로 해산 준비로 나오지 못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더욱 굳어졌다.그 얌전하던 아이가 이제 사생아를 낳는다고 상상하니 어떤 쾌감마저 느껴졌다. 그러던 마사의 표정이 이내 굳어졌다.벼랑길 아래 기슭에 서 있는 애니를 보았기 때문이다.애니는 그 길을 올라오기 시작했다. 애니는 천천히 오솔길을 올라왔다.마사는 험악한 눈초리로 그녀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애니는 올라오기가 좀 힘이 드는 듯 꽤 오래 걸렸다.그녀는 마치 큰 짐을 진 사람처럼 힘겨워하면서 천천히 올라왔다.그리고 마사의 눈초리 따위는 안중에 없는 듯했다. 그녀는 마사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올라오기가 힘이 들어서 그런지 그녀의 얼굴은 유난히 창백했고 숨까지 헐떡이고 있었다.몹시 지쳐 보였다.그녀는 마사를 바라보다가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그것은 그녀의 습관이었다.그녀는 샘이 있을 먼 그곳을 언제나 바라보는 것이었다.그렇게 서 있다가 그녀는 아주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를 시작했다. "샘과 저는 지난 8월에 결혼식을 올렸답니다." 마사는 마치 무엇에 찔리기라도 한 듯이 뒤로 물러섰다.그러나 곧 정신을 차린 듯 차갑게 말했다. "거짓말은 하지 말아라." 그러나 샘이 있을 바다 건너 먼 곳으로 사선을 둔 채 애니는 슬픈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저희들은 분명히 결혼했습니다.그이가 지난 8월에 휴가를 왔을 때였습니다." "믿을 수가 없어.그리고 그럴 리가 없지.지금까지 샘의 가족수당은 나 혼자만 타고 있었어." 바다 건너편을 바라보면서 애니는 말했다. "저희들은 어머님께서 가족수당을 타시도록 하고 싶었어요.샘과 제가 똑같이 그렇게 원했기 때문에 끝까지 어머님께서 혼자 타실 수 있도록 해놓았습니다." 마사는 분노로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어쨌든 위신은 잃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튀어나오려는 난폭한 욕설을 겨우 막았다. "난 그따위 소릴 믿을 수 없어.절대로 믿지 않겠다." 애니는 천천히 아득한 바다 건너 쪽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그녀의 눈은 아무 표정이 없었다.그녀의 얼굴 위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그녀는 마사에게 손에 쥐고 있던 전보를 건네주었다.마사는 전보를 바라보았다.전보는 애니 펜윅 부인에게 온 것이었다.그리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귀하의 남편 새무얼 펜윅 병장은 3월 19일 전투에서 전사했음." 20 1918년 4월 24일,아서의 형기가 끝났다.오전 9시,평복으로 갈아입은 아서는 형무소 문을 나왔다.그는 머리를 푹 숙인 채,잿빛 석조 아치 아래를 조심스럽게 걸어나왔다.잔뜩 흐린 습기 찬 아침이었지만 햇빛과 공간에 대한 의식이 무감해진 그에게는 갑자기 부딪치게 된 바깥 사물이 모두 이상하게만 느껴졌다.그는 자기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눈을 조심스럽게 깜빡거렸다.과연 그 어두운 감방과 언제나 자기를 가로막던 교도소 담을 빠져나왔단 말인가?그는 점점 걸음을 빨리했다.교도소의 벽돌담이 이제는 자기 뒤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있다는 것을 깨달을수록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고 싶은 잠재적인 두려움이 그의 걸음을 무작정 서두르게 했다. 그러나 곧 그는 걸음을 늦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걸음에 몸이 따라주지를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는 매우 허약해졌다.마치 병원에서 중병을 앓다가 막 퇴원한 사람 같았다.몸은 너무 쉽게 피곤을 느끼고 기운이 빠져 휘청거렸다.그의 머리는 빡빡 깎여 있었다.-콜린즈가 2,3일 전에 그렇게 만들어놓았는데 그로서는 마지막으로 짓궂은 장난을 친 것이다.-그래서 아서는 마치 큰 병원에서 뇌 수술을 받고 막 퇴원한 사람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이 이상한 모습에 쏟아질 사람들의 시선이 그는 무엇보다 괴로웠다.초조한 표정으로 그는 주위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약 1.5킬로쯤 걸어서 벤튼 교외까지 왔다.그곳에서 그는 노동자들이 드나드는 허술한 커피 파는 집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화물 자동차 휴게소'라는 간판이 바깥에 붙어 있었다.그는 빡빡 깎은 머리를 감추려고 모자를 그대로 쓴 채,심부름하는 사람이 다가와도 쳐다보지 않고 달걀을 주문했다.그는 음식을 날라다줄 때도 얼굴을 들지 않았다.그 사람의 신발과 더러운 앞치마와 노랗게 니코친이 물든 손가락들만을 복 수 있었다.그 사람은 커피와 달걀을 앞에 놓자마자 돈부터 달라고 했다. 아서는 커피와 달걀을 먹었다.교도소의 주석 나이프만 사용하던 손애 튼튼한 나이프와 포크가 몹시 어색했다.어색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그의 헐렁한 옷차림은 어둑 남의 이목을 끌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그의 몸이 몹시 마른 까닭이었다.그러나 그는 생각했다.이제 교도소에서 나왔고,자유스럽다는 것에 대해서.오오,드디어 그곳에서 나온 것이다. 커피와 달걀을 먹고 나니 기분이 훨씬 좋아졌다.그래서 그는 문 쪽에 있던 그 집주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담배 한갑을 달라고 청할 수 있었다. 머리칼이 빨간 그 사나이는 무례한 호기심을 얼굴 전체에 내보이고 있었다. "스무 개짜리 말이오?" 아서는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카운터에다 1실링짜리 동전을 내놓았다.빨간 머리칼의 사나이는 아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래 있었소?" 그제야 아서는 이 사나이가 자기가 교도소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아마도 대부분의 죄수들은 석방되자 바로 이곳에 들를는지도 모른다.-그의 핼쓱한 얼굴은 창피스러움으로 붉어졌다.그래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급히 그 집을 나오고 말았다. 처음으로 피워보는 담배맛은 그리 좋지 못했다.그러나 약간 아찔한 기분을,사람의 시선에 대한 불안을 한결 가라앉게 해주었다.학교에 가는 길인 듯 보이는 한 아이가 그가 담배갑을 뜯고 있는 거승ㄹ 보고는 뒤따라 와서 담배 카드를 달라고 졸랐다.아서는 무감각한 뻣뻣한 손가락으로 담배 카드를 열심히 찾아 꺼냈다.어린아이가 말을 걸어왔다는 것과 또 이 소년의 따뜻한 손길을 잠깐이나마 감촉할 수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었다.그는 자기가 인간이라는 느낌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벤튼 종착역에서 그는 타인캐슬 행 전차를 탔다.전차 속에서도 그는 바닥만 내려다보고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그는 교도소에 있었을 때에는 교도소 밖의 세계만을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바깥 세계에 나오니까 교도소가 자꾸 생각이 났다.교도소 소장과 목사의 마지막 말들이 귓속에서 쟁쟁 울렸다. "이 생활이 자네를 새사람으로 만들어주었으리라고 생각하네." 또 교도소 전속의사가 검진을 하던 소리도 울려왔다. "셔츠를 걷어올려.바지를 내려." 운동시간 때 어깨너머로 속삭이던 힉스의 그 마지막 농담도 잊을 수 없었다. "오늘 밤엔 그 계집아이에게 가겠지,이 기피자야?" 콜린즈가 마지막 보여주던 태도도 니독한 것이었다.그가 마지막으로 열쇠소리를 내면서 문을 열었을 때 아서는 자기도 모르게 한 손을 내밀었다.그러나 콜린즈는 "병신처럼 굴지 말아,이 기피자야." 하는 소리와 함께 아서의 손에다 침을 탁 뱉어버렸다.그 일이 떠오르자 아서는 다시 손바닥을 바짓가랭이에다 닦았다. 전차는 덜커덩거리며 타인캐슬 시내 안으로 들어가 낯익은 혼잡한 거리를 지나 드디어 중앙역 앞에서 멈추었다.아서는 전차를 내려 정거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슬리스케일 행 차표를 살 작정이었다.그러나 매표구에 다가갔을 때 도저히 용기가 나질 않았다.그는 역무원에게 다가갔다. "슬리스케일 행 다음 열차는 언제 있나요?" "11시 55분." 아서는 매점 위의 큰 시계를 쳐다보았다.차표를 사서 기차를 타려면 서둘러야 했다.그러나 그는 멍청히 서 있었다.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나질 않았던 것이다.어머니의 죽음도 이미 알고 있었다.그는 자신이 이렇게 망설이는 것은 어머니가 안 계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핑계일 뿐이었다.그는 매표구에서 물러나서 '대공격 개시'라고 씌어진 플래카드를 자세히 바라보았다.그는 지금 자기 주위에서 떠들고 있는 사람들의 소란스러움과 자기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 매우 좋았다.한 소녀가 자기를 스치듯 지나갔을 때 그는 힉스가 말한 것을 다시 기억했다."오늘 밤엔 그 계집애에게 가겠지,이 기피자야?" 그는 얼굴이 붉어지며 눈길을 돌렸다.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그는 식당에 들어가 차 한 잔과 롤빵 하나를 주문했다.무엇 때문에 사실을 감출 필요가 있는가?그는 헤티가 보고 싶었다.그녀의 위로와 사랑이 어느 때 보다도 필요한 것을 느꼈다.피곤하고 고통스러운 그 마음을,그녀를 만나 어서 풀고 싶었다.헤티는 정말로 자기를 사랑해주었다.이제 만나면 그녀는 자기를 이해해 줄 것이다.가엾게 여기며 어떻게든 위안을 주려 할 것이다.그렇게 생각하니 어서 만나고 싶은 안타까움이 그를 삼켜버릴 것처럼 밀려왔다.다른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뜨거운 눈물이 가득 넘쳤다.어떤 일이 있어도 헤티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오후 1시가 다 되어갈 무렵 그는 정거장을 나와 대학로 쪽을 향하여 걷기 시작했다.그는 기운이 빠져 있기도 했지만 그보다 겁에 질려 걸음을 빨리 할 수가 없었다.천천히 경사진 길을 올라갔다.다만 헤티를 보고 싶다는 생각만이 그에게 어떤 흥분을 일으켜줄 뿐이었다.17번지 집 앞에 도착하자 그는 기대감으로 숨이 막힐 것 같았다.그는 토드의 집 맞은 편에 서서 그 집을 뚫어지게 건너다보았다.여기까지 오자 그는 안으로 들어갈 용기가 없어졌다.불행한 예감이 한꺼번에 밀려와 그의 행동을 막아버리는 것이엇다.교도소에서 나오자마자 이처럼 뜻 밖에 걸어 들어오는 자기를 보면 그 집 식구들이 얼마나 기뻐해줄것인가.그러나 무엇인가 안 된다는 생각이 그 돌계단을 올라가 초인종을 누를 용기를 빼앗아버렸다. 스는 헤티를 보고 싶은 그리움으로 온몸이 타버리는 것 같았다.그는 혹시 그녀가 집 밖으로 나오거나 또는 들어가는 것을 발견할 행운이라도 생겼으면 하고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3시가 가까이 되자 현기증이 다시 일어나 그 자리에 주저앉고만 싶었다.그는 대학로 끝머리에 있는 성벽 쪽 보리수 나무들 아래에 놓인 벤치에 앉았다가 나중에 되돌아와서 계속 지켜보자고 결정하고는 지친 다리를 질질 끌면서 길을 건넜다.그런데 그 모퉁이에서 라우라 밀링튼과 하마터면 부딪칠 뻔했다. 의외의 해후에 너무도 놀라 그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라우라는 처음엔 그를 잘 알아보지 못했다.무거운 표정으로 걸어오던 그녀의 얼굴은 거의 냉담한 채 아무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그냥 지나쳐 가버리려다가 겨우 그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어머나,아서."그녀는 숨이 넘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역시 아서였어." 아서는 눈길을 땅바닥에 떨어뜨린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네,접니다." 아서를 자세히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이 바뀌었다.그 우울하게 가라앉은 얼굴이 어떤 충격을 받은 듯했다. "우리 아빠 뵈러 왔어요?" 그는 여전히 눈길을 외면한 채 말없이 머리만 가로 흔들었다.그의 그러한 태도 속에 깃든 절망한 표정이 그녀에게 또 다른 괴로움을 더해 주었다.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팔을 잡았다. "들어가요.나도 지금 막 찾아오던 길이에요.아주 몸이 좋지 않아 보여요." "안 돼요.모두들 날 만나고 싶어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는 어린애처럼 몸을 뿌리치면서 중얼거렸다. "안 그래요.자,어쨌든 들어가요." 그녀가 강하게 끌자 그는 어린애처럼 순하게 끌려갔다.그는 곧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감정을 겨우 눌렀다. 그녀는 백에서 열쇠를 꺼내어 문을 열었다.두 사람은 뒤편의 거실로 들어갔다.그곳은 너무 잘 알고 있는 곳이었다.그의 깍여진 머리를 본 라우라는 슬픈 한숨을 내쉬면서 그의 두 어깨를 잡아 난롯가의 의자에 앉혔다.그는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그 자리에 앉았다.교도소에서 늘 하던 버릇대로 몸을 잔뜩 움츠린 채로 앉아 있는 모습은 몹시 처량해 보였다.그렇게 앉혀두고 라우라는 부엌으로 나갔다.그녀는 금세 뜨거운 차와 버터빵 하나를 쟁반에 담아 들고는 그에게로 가지고 왔다.아서가 차를 마시며 빵을 먹고 있는 동안 그녀는 내내 근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다 들어요."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그는 시키는 대로 했다.지금 집 안에 헤티도 그의 아버지도 없다는 것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그러나 마음은 담담했다.아무런 실망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그는 머리를 들어 처음으로 라우라를 바라보았다. "고마워요,라우라."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난로의 불빛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연민이 담긴 표정이 재빨리 지나갔다.아서는 그녀가 이제는 정말 늙었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녀의 눈 아래에는 엷은 기미가 끼기 시작했고,옷차림도 머리 모양도 별로 다듬지 않았 다는 느낌을 주었다.이러한 변화는 그를 좀 놀라게 했다. "뭐가 잘못된 것이라도 있나요,라우라?왜 여기 와 계세요,혼자서?" 이번엔 깊고도 고통스러운 감정이 라우라의 눈빛에 나타났다. "아무것도 잘못된 것 없어요.이번 주엔 아빠와 함께 있기로 했어요.그 동안 힐톱의 집은 잠가두는 거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여 말했다. "우리 집 그이가 번마우드의 요양소에 가 있어요.그이가 포탄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 아직 듣지 못했나요?난 여기서 뒷처리가 끝나는 대로 그이에게 갈 거예요." 그는 아무래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공장은 어떻게 하고요,라우라?" "그건 다 처리되었어요.그렇지만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구요." 그녀는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는 더욱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멍하니 바라다보았다.자기가 알고 있는 라우라는 이렇지 않았다.그녀의 얼굴에 박혀버린 듯한 슬픈 표정은 그녀의 모습까지 달라 보이게 했다.아서는 자신의 예민한 감각에 의해 그 껍데기 뒤에 숨어 있는 상처 입은 영혼을 볼 수 있었다.그러나 그는 그러한 것을 끝까지 생각해볼 수가 없었다.견딜 수 없는 피로가 다시 그를 짓눌러왔다.두 사람 가이에는 긴 침묵이 흘렀다. "성가시게 해서 미안합니다,라우라." 그는 갑자기 말했다. "성가시게 했다니,천만에요." 그는 그녀가 자기를 귀찮아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자 다시 우물거리다가 겨우 용기를 낸 듯 말을 꺼냈다. "시간이 꽤 됐지만 이왕 온 김에 기아렸다가 헤티를 만나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또다시 말이 끊어졌다.그는 라우라가 자기를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이윽고 그녀는 난로 앞 바닥에서 일어나 그의 앞에 우뚝 섰다. "헤티는 이제 여기서 살지 않아요." "... ." "여기 없어요.그 애는 지금 판버러에 살고 있어요.저어,그... ."거기서 말을 잠시 끊었다가 다시 "그러니까,아서.그곳은 디크 퍼브즈가 살고 있는 곳이죠." "어떻게 그곳에... ." 그는 그 이상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가슴속에서 낚시바늘 같은 것이 갑자기 쿡쿡 쑤셔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어머,아서.아서는 아무것도 모르는군요.그 애는 그 사람과 1월에 결혼했어요." 라우라는 아무 변화가 없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그의 눈길을 피하는 듯했으나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어깨 위에다 손을 얹었다. "급작스러운 일이었어요.그 사람이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받았을 때였는데 아서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검사기 끝난 직후였어요.그 사람은 그 채펠린 공격을 했다고 해서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받았어요.우린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어요.헤티도 갑자기 마음을 결정한 모양이었어요.결혼 공고가 모든 신문에 실렸었지요." 그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마치 돌비석처럼 무감각하게 앉아 있었다. "그랬군요,헤티가 결혼을 했군요." "그래요,아서." "꿈에도 그런 일은 생각하지 못했어요.헤티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그는 몸을 갑자기 떨기 시작했다.그러나 그녀는 현명하게 아서를 위로하려 들지는 않았다.그는 그것이 고마웠다.그는 의자에서 몸을 움직였다. "그럼,난 이제 가봐야겠군요." "안 돼요.아서,더 쉬다가 가도록 해요.안색이 너무 나빠요." "기분이 좀 안 좋을 뿐이에요." 그는 떨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이상한 기분이었다.머리 속이 무슨 깃털 같은 것으로 꽉 차 있는 것 같았다.정거장까지 갈 일이 까마득했다.그는 이마에다 손을 올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다가 천천히 문 쪽으로 갔다.라우라가 앞으로 나와 그의 팔을 잡았다. "아,안 돼요,아서.이대로 가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 거예요.걱정 말고 여기서 쉬도록 해요." "호의는 고맙지만,내가 어떻게 이곳에 있을 수가 있어요?" "무슨 상관이에요,아서.내가 거북한가요?" 아서는 힘없이 웃었다. "그래요.내가 당신의 도움을 받다니 기분이 묘하군요." 라우라는 결심을 한 듯 아서의 팔을 힘주어 잡았다. "자,내 말을 들어요,아서.이 모양으로는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어요.당신은 지금 서 있기도 어려운 지경이라구요.자,침대에 누워요.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아빠가 돌아오시면 내가 설명해드릴 테니 염려말고 어서 쉬어요." 그녀는 그를 부축해서 2층 침실로 데리고 갔다.그녀는 방 안의 가스 난로에 불을 붙이고,조용히 그러나 익숙한 솜씨로 아서의 겉옷을 벗기고는 침대에 눕혔다.그러고는 뜨거운 물주머니를 발 밑에 넣어주었다.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분이 좀 어때요?" "좋아졌어요,고맙습니다." 그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그는 한참 후에야 자기가 헤티의 방,헤티의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았다.얼마나 우스운 일인가!이렇게 해서 그리운 헤티의 침대 속에 누워 있게 되다니!"오늘 밤엔 계집애에게 가겠지,응,이 기피자야?"하던 그 말을 생각하자 웃고 싶었지만 웃을 수가 없었다.지난 일의 기억이 또다시 그의 가슴속에서 낚시바늘로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끼게 했다. 오후 5시경이었다.엷은 구름을 뚫고 비치는 햇빛이 방 안으로 비껴들어와 벽지를 빨갛게 물들였다.뒷마당에선 어린 개똥지빠귀 몇마리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매우 조용하고 현실 같지가 않은 느낌이 들었다.특히 헤티의 침대가 주는 폭신한 기분이 현실감을 멀게 하고 있었다.라우라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었다.알 수 없는 가슴 속의 그리움이 그를 괴롭혔다. "이걸 들어요,아서.그러면 잠이 올 거야." 라우라가 그를 가볍게 흔들었다.그녀는 자기에게 왜 이렇게 다정하게 해줄까!그는 몸을 일으켜 그녀가 가져온 뜨거운 수프를 마셨다.그녀는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현실감을 잃어버린 침묵의 방 안에서 그녀만이 유일한 실존을 느끼게 해주었다.쟁반을 받들고 있는 그녀의 두 손은 새하얗고 몹시 보드라워 보였다.그는 지금까지 별로 라우라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 일이 없었다.그녀에 대한 관심을 가질 일이 없었던 것이다.그런데 그녀는 지금 너무나 친절하고 그 호의가 여간 고맙지 않았다.그는 감사하는 눈으로 라우라를 올려다보았다. "나 같은 사람 때문에 왜 이렇게 애를 쓰세요,라우라?" "내가 아서라면 그런 걱정은 하지 않겠어.그런 것보다 자기 몸 걱정을 하도록 해요." 그녀는 빈 그릇을 받아 쟁반 위에다 놓았다.그녀는 일어나려 했다.그러나 아서는 손을 내밀어 마치 혼자 남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어린아이처럼 그녀를 붙들었다. "나를 혼자 남겨두지 마세요,라우라." "좋아요." 그녀는 다시 앉아 쟁반을 침대 옆 테이블 위에 얹었다.그녀는 부드럽게 이서의 이마를 만져주었다.그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그러다가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를 내면서 울었다.절망의 바닥 밑으로 떨어지는 듯한 어두운 허무감에 몸부림 치며 그는 얼굴을 그녀의 무릎에 파묻었다.그녀의 부드러운 몸에 오랫동안 외로웠던 몸을 기대보는 느낌은 여간 포근하지 않았다.마치 어릴 때 안겨본 엄마의 따뜻한 품에 다시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형언할 수 없는 평온함이 그의 온몸을 감쌌다.그는 어느새 울음을 그쳤다. "라우라."그는 속삭이며 더욱 가까이 그녀의 몸에 기댔다.순간 라우라는 쾌락의 불길이 느닷없이 그녀의 몸 속에서 이는 것을 느꼈다.그의 위안을 구하는 태도나 그녀의 몸에 닿아 있는 몸이 그녀에게 미칠 듯한 욕망의 긴장을 불러일으켰다.몸을 딱딱하게 긴장시키면서 방의 건너 쪽을 바라보던 그녀는 거울 속에 비치는 자기의 얼굴을 보았다.그때 그녀에게 급격한 반동이 일어났다.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사나운 그녀의 욕망을 눌렀다.그녀는 아서를 다시 내려다보았다.그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막 잠이 들려는 듯 입술이 열려져 있는 그는 이무 힘이 없는 어린아이의 모습 그대로였다.그러나 그녀는 너무나 분명하게 그의 마음의 상처들을 볼 수 있었다.그의 무겁게 감아버린 눈꺼풀과 좁고도 끝이 뾰족한 턱에는 무한히 슬프면서도 무어승ㄹ 동경하는 듯한 그런 표정이 어리어 있었다. 바깥에서 들려오던 개똥지빠귀의 노라도 이젠 뚝 끊어지고 밤의 어둠이 방 안으로 기어들어오고 있었다.아서는 자고 있었지만 그의 머리를 받쳐주면서 그녀는 방 안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그녀의 얼굴 표정은 슬퍼 보였지만 몹시 아름다웠다. 21 아서는 2주일 동안이나 일어나지 못하고 토드 네 집에서 누워 있어야 했다.라우라가 모셔온 의사는 아서에게서 재생불능성 빈혈 증세가 보인다는 경고를 했다.대학로 1번지에 병원을 갖고 있는 도비 의사는 토드 가족의 주치의로서 아서의 신상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친절하고 신중하게 진찰을 해 주었다.그리고 여러 차례에 걸쳐 혈구 조사를 해가면서 최서능ㄹ 다한 치료를 해주었다.그러나 아서의 병을 낫게 해준 것은 도비 의사가 아니라 라우라라고 하는 편이 옳았다.라우라가 그에게 해준 정성 어린 간호는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헌신적인 것이었다.그녀는 힐톱의 집이 비어 있었으므로 그녀의 온 생활을 아서의 간호를 위해서만 쏟을 수 있었다.잔시중을 들어주고,음식을 만들고,책을 읽어주거나 아니면 그의 옆에 말없이 앉아서 친구가 되어주는 일 등에 그녀는 자신을 모두 쏟았다.그렇게 냉정하고 자기 중심적이던 라우라로서는 이상할 정도의 행동이었다.아마도 그것은 하나의 보상행위 그러니까 자기에게도 뭔가 좋은 곳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강렬한 열망에서,속죄를 하고 싶어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그리고 라우라는 그러는 동안에 진정한 행복을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아서의 점차적인 회복이 그리고 자주 감사하다고 해오는 그 진심 어린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었다.아서가 가진 마음의 상처를 돌보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상처도 고쳐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아버지는 처음부터 모르는 척했다.무슨 일에 간섭한다는 것은 본디 토드의 성격에 맞는 일이 아니었다.그리고 그도 아서의 고집과 항거로 인한 비참한 생활을 잘 알고,이해하고 있었다.하루에 두 번씩 그는 아서가 누워 있는 방을 다녀갔다.그러나 무슨 특별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그저 자기가 왔다는 것을 알리려는 듯이 기침을 하면서 우두커니 서 있다가 가버리곤 하는 것이었다.그가 입을 잘 열지 않는 것은 위험스러운 화제,즉 넵튠 탄광이나 전쟁,헤티에 관한 것 등이 튀어나와 아서에게 고통을 안겨줄까 봐 몹시 염려한느 탓임이 분명했다.이것은 아서를 감동스럽게도 했지만 한편 그 지나친 조심성은 우습기도 했다.그는 방을 나가기 전에 꼭 한마디를 하곤 했다. "조바심할 건 하나도 없어.편안할 대로 얼마든지 오래,있고 싶은 대로 있어요." 아서의 몸은 일단 회복기에 들어서자 눈에 띄게 좋아졌다.일어나 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라우라와 함께 가벼운 산보도 하기 시작했다.두 사람은 혼잡한 장소를 피하여 읍내의 성벽을 넘어가곤 하였다.그 성벽을 넘어서면 확 트인 넓은 공원으로 맑은 날 그곳에 올라서면 오터번 산까지 다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라우라가 얼마나 헌신적인 사랑을 자신에게 쏟았는가를 그가 깊이 깨닫진 못했지만 그녀를 향하여 자주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라우라,너무 내게 잘해주셨어요.어떻게 감사를 드리면 좋을까요?" "난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그녀의 대답은 언제나 똑같았다. 맑고 신선한 아침이었다.그들 두 사람은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 잠시 벤치에 앉았다. "당신이 도와주시지 않았더라면 난 무슨 짓을 했을지 몰라요.난 큰 잘못을 저질렀을 거예요.내가 말하는 잘못이란 물론 윤리적인 것이지요.난 완전히 자포자기해서 어떤 무서운 짓도 피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이제 당신은 나를 본래의 나 자신으로 되돌려주었어요.이젠 힘도 나고 용기도 생깁니다.어떤 일에든 떳떳이 맞설 수 있을 것 같아요.하지만 공평한 일은 못 돼요.난 이렇게 건강해지고 평화스러워졌지만 내가 당신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군요." "아마 아서는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그녀는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듯하더니 다시 잠잠해져 버렸다.아서는 조용히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그러나 그녀는 멀리 시선을 던지고 있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맑은 바람이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그녀의 창백하고 순결해 보이는 옆얼굴을 조용히 바라보았다.그녀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아서는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 아세요,라우라?"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라파엘의 마돈나를 보셨겠죠? 당신은 그 마돈나와 같아요." 그녀는 얼굴을 휙 돌렸다.붉은 빛이 얼굴 전체로 서서히 퍼져나갔다.그러다가 갑자기 딱딱하게 굳어졌다.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그것은 노한 목소리였다.그녀는 정말 화가 난 모양으로 먼저 일어나서 급히 걸어가 버렸다.그는 무색한 얼굴로 그녀의 뒤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천천히 일어나서 아래로 내려왔다. 몸이 회복됨에 따라 그는 아버지와 슬리스케일,그리고 자기가 집으로 되돌아왔다는 사실에 대하여 좀더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그리고 이제는 집으로 가야 한다는 마음도 굳어갔다.비록 그의 몸 안에는 이작도 우유부단하고 두려워하는 비겁함이 있었지만,한편 사나이답게 용감해야 한다는 강건함도 그를 부추기고 있었다.교도소라는 곳은 확실히 그가 보다 더 굳센 인간이 되도록 큰 영향을 끼쳤다.그리고 지금까지 그의 삶의 지주가 되어온 정의와 저항정신도 더욱 굳어졌다. 그곳에서 지낸 3주째의 마지막 날,그날 밤에도 저녁식사 후면 으레 하던대로 두 사람은 함께 트럼프 놀이를 하고 있었다.별 특별한 말은 오가지 않았다.그는 자기 카드를 집어 들다가 어떤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불쑥 말을 해버렸다. "곧 슬리스케일로 돌아가야겠어요."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그러나 아서는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나자 오히려 떠날 날짜를 늦추고 싶은 유혹이 생겼다. 5월 16일 아침이었다.식사를 하러 아래층으로 내려와보니 토드는 벌써 외출한 후였다.식탁에 놓인 '쿠리어'신문의 한 기사가 눈에 띄었다.그는 신문을 집어 들었다.가사 내용은 아주 짤막했고,요란스러운 전쟁 뉴스의 주먹만한 활자들 가운데에 파묻혀 있었다.그러나 아서에게는 그것이 몹시 중대한 듯 그 기사 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그는 그 기사에 눈을 준 채 식탁에서 꼼짝도 하자 않았다. "무슨 중대한 기사예요?" 라우라가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아서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것처럼 앉아 있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파라다이스 탄광 안으로 길이 뚫렸어요.3일 전에 그 공사를 끝냈는데 그 길 끝에서 열 사람의 시체가 발견되었답니다.그 검시가 내일이라는군요." 그 무서운 사건의 두려움이 멀리 물러갔다가 몇 배나 더 무거워져 다시 덮쳐오는 느낌이었다.그의 마음은 그 고통스러운 무게 아래에서 바짝 움츠러들었다.그는 여전히 신문에 눈길을 준 채 말을 이었다. "그 시체의 연고자되는 사람들을 프랑스 전선에서 불러오기까지 했군요. ... 나도 돌아가야겠습니다.지금 이길로 가야겠습니다." 라우라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그녀는 그에게 커피잔을 건네주었다.그는 굳어진 얼굴로 커피를 마셨다.그는 자기 인생을 그토록 다르게 만들어버린,형편없이 망쳐버린 그 상황으로 또다시 뛰어드는 고통스러움을 생생하게 느꼈다.두려운 일이었다.그러나 도피가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자기는 돌아가야 한다.어떤 일이 있어도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식사가 끝나자 그는 라우라를 건너다보았다.라우라는 걱정스러운 눈빛이었으나 고개를 끄덕여주었다.그는 식탁에서 일어나자 곧 현관홀로 나가 모자를 쓰고 코트를 입었다.짐을 꾸릴 것도 없었다.라우라는 현관문까지 따라나왔다. "약속해줘,아서.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겠다고... ." 그는 머리를 내저었다.침묵이 흘렀다.이윽고 그는 라우라의 두 손을 잡았다. "난 감사의 말을 하는 것이 몹시 서툽니다.그렇지만 라우라,내 마음을 잘 알겠죠. ...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곧 만날 수 있겠죠.아마 그땐 나도 당신을 위해서 뭔가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럴 테지요."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그녀의 담담한 태도가 오히려 그를 당황하게 했다.그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것처럼 비좁은 현관 안에 멍하니 서 있었다.이윽고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라우라." "잘 가요." 그는 몸을 돌려 거리로 나왔다.후두둑 빗방울을 담은 돌풍이 사납게 그의 몸을 휩쌌다.역에 도착하니 10시 10분이었다.그는 급히 슬리스케일 행 차표를 샀다.10시 15분의 보통 열차는 승객이 없었다.3등 차칸은 그가 독점이라도 한 것처럼 텅텅 비어 있었다.기차가 타인캐슬을 떠나 낯이 익은 작은 역들과 운하의 철교를 건너 브렌트 터널을 지나가자 슬리스케일의 정다운 풍경이 나타나기 사작했다.아서는 이제야 본래의 자기를 찾은 듯한 묘한 기분이 되었다. 슬리스케일 플랫폼에 내려섰을 때 시계는 11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때 또 한 사람의 승객이 기차의 뒤쪽 끝에서 막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그들 두 사람은 개찰구에서 자연스레 만나게 되었다.그 사람이 데이빗 펜윅이라는 것을 알자 급작스레 가슴이 죄어드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데이빗도 대번에 아서를 알아보았으나 인사는 하지 않았다.그렇다고 해서 그를 피하려는 얼굴도 아니었다.그들은 함께 좁은 통로를 지나 거리로 나왔다. "당신도 그 검시 관계로 돌아오셨군요." 아서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그는 말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었다. 데이빗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길모퉁이를 돌아가자 바다에서 휘몰아쳐 오는 가는 빗방울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카우펀 가까지 함께 걸었다. 아서는 데이빗의 침묵과 굳은 얼굴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그러나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할수록 점점 더 입이 다물어졌다.결국 입을 연 것은 데이빗이었다.데이빗은 굳이 태연한 얼굴로 미소까지 띠워보려고 애쓰는 듯했다. "사실은 이틀 전에 돌아와서 지금 타인캐슬을 들렀다가 오는 길입니다.아내가 타인캐슬의 친정집에서 살고 있어요.내 아들놈도 거기 있죠." "그렇군요." 아서는 중얼거렸다.그는 이제야 왜 데이빗이 그 기차를 탔었는가 하는 의문이 풀렸다.그러나 그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더 이야기를 계속해나갈 화제를 찾을 서가 없었다. 다시 침묵을 지키며 두 사람은 걸었다.잉커먼 달동네의 자기 옛집 맞은편까지 오자 데이빗이 급작스레 걸음을 멈추었다.그러곤 여전히 격렬한 감정을 겨우 누르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들렀다 가지 않겠소?당신께 보여줄 것이 있는데." 억압적이고 격한,거부할 수 없는 힘에 굴복되는 듯 편치 못한 감정을 느꼈으나 아서는 아무 말 없이 데이빗을 따라 들어갔다.두 사람은 포장이 망가진 도로를 지나 23번지의 집으로 들어가 문간방에 들어섰다.덧문이 내려져 있었지만 희미한 빛 아래에서 아서는 두 개의 관이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그 관들은 아직도 뚜껑이 열린 채로 방 한복판의 평상 위에 안치되어 있었다.그것을 본 아서의 몸은 다시 오그라드는 듯한 심한 통증을 느꼈다.방아를 찧듯 쿵닥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그는 첫 번째의 관 앞으로 다가갔다.그의 눈이 로버트 펜윅의 시체의 눈과 마주쳤다.시체는 4년이 지난 것이었다.그래서 얼굴의 색깔은 백랍같이 하얗게 바랬고 피부는 마치 미이라처럼 말라서 오그라든 뼈다귀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아서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면서 두 눈을 가렸다.그는 멍한,그러면서도 비난을 가득 담고 있는 듯한 억울하게 희생된 사자의 눈을 차마 마주 볼 수가 없었다.그는 몸이 떨려왔다.나가버리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다는 생각이 겨우 그를 방 안에 잡아두고 있었다.그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데이빗은 여전히 분노를 겨우 억제한 듯한 갈라진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이걸 발견했소." 그는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아버지의 몸에 끼워져 있더군.아무도 이걸 본 사람은 없어요." 천천히 아서는 얼굴을 가렸던 손을 뗐다.그는 데이빗의 손에 들려진 종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러다가 급작스럽게 손을 벌려 그것을 받아 들고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그것은 로버트의 유서였다.그 유서를 읽어나가는 동안 그는 자기가 죽어버리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알겠소?결국 이것으로 만사가 명백하게 된 것이오." 아서는 그 유서를 계속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안색은 흙빛으로 변했다.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표저이었다. "난 이걸 더 이상 어쩌자는 의사는 없어요.그러나 당신은 당연히 알아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에이빗의 음성은 단호했다.아서는 유서에서 눈을 치켜들어 데이빗을 처음으로 보는 것처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는 벽에 몸을 기댔다.방 안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기분이었다.그것은 마치 그의 모든 괴로움과 의심과 그리고 공포의 축적이 한데 뭉쳐져 힘껏 자기를 내리치는 듯한 느낌이었다.그는 겨우 데이빗이 옆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듯 유서를 접어 그에게 되돌려주었다.데이빗은 그것을 양복의 안주머니에 받아 넣었다.목이 쉰 듯한 이상한 목소리로 아서는 말했다. "이 일은 내게 맡겨두십시오.아버지에게 알리겠습니다." 그의 온몰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바깥 공기를 마시지 않으면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인사도 없이 그 방을 뛰쳐나왔다. 그는 쓸쓸한 가로수 길을 휘몰아 때리는 심한 소낙비를 그대로 맞으면서 법산저택으로 걸어 올라갔다.장대같이 쏟아지는 빗줄기도 느끼지 못했다.어떤 환각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똑바로 걸어갔다.죽은 로버트 펜윅의 가슴에 4년 동안 간직되었던 그 접혀진 종이쪽지로 해서 이제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그가 의심하고 두려워했던 그 모든 것이 말이다.이제는 아무것도 의심하고 두려워할 것이 없어졌다.그의 앞에는 모든 일이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움직일 수 없는 확신이 거센 파도처럼 그의 온몸을 휩쓸고 있었다.그는 이 유서를 보게 된 것이 어떤 운명처럼 여겨졌다.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고 생각되었다.그리고 유서의 내용은 자꾸 확대되어 그 자체에 측량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의미를 더 첨가시키고,그 의미의 하나하나는 각기 다른 뜻이 있고 또 자기가 현재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면서도 역시 그 모든 것이 하나의 결론에 귀착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그 결론은 자기 아버지에게 모든 잘못이 있었다는 그것뿐이었다.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은 분노가 거세게 치밀어 올랐다.그는 우선 아버지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법산저택의 돌계단을 올라가 초인종 줄을 잡아당겼다.캐리 고모가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그녀는 문턱에 굳어버린 것처럼 우뚝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놀란 눈은 아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러다가 이윽고 고마움과 연민으로 범벅이 된 아우성을 내지르며 두 팔로 아서의 목을 휘감았다. "아아!아서,우리 아서가 이제 돌아왔구나!" 그녀는 목이 메어 울었다. "이렇게 돌아오다니... 난 누군가 했구나.네가 이렇게 올 줄은 정말 몰랐단다.그런데 영 얼굴이 못쓰게 됐구나.아서야,정말 꼴이 말이 아니구나.그럴 수밖에 없지.그렇지만 돌아왔으니 이젠 괜찮다.그런데 이게 정말이냐?난 꿈만 같구나." 가까스로 자기의 감정을 가누면서 그녀는 아서를 현관 안으로 간신히 데리고 들어가 코트를 벗기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자를 받았다.그러는 사이에도 애정에 넘치는 말들이 계속 그녀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아서가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엔 어쩔 수 없이 슬픔이 끼여들지 않을 수 없었다.그녀는 두 손을 비비면서 그의 주위를 떠나지 못했고,얼굴은 슬픔을 누르느라고 입술이 괴상하게 뒤틀리고 있었다. "어서 뮈 좀 먹도록 하자.점심을 곧 준비할게.우선 우유나 비스킷 좀 먹지 않겠니?" "생각이 없어요,캐리 고모님." 그는 식당으로 데리고 가려는 그녀의 손을 누르면서 물었다. "어바지께선 아직 안 돌아오셨나요?" "아직 안 오셨어." 캐리 고모는 말을 더듬거렸다.아서의 묻는 태도가 이상해서 겁이 났기 때문이다. "점심때는 오시겠죠?" 캐리 고모는 숨이 찬 모양이었다.그녀의 입이 더욱 일그러지면서 입술 양쪽이 신경질적으로 떨렸다. "물론 오시지.1시경에 오신다고 하셨단다.그리고 오늘 오후엔 처리할 일이 이주 많다고 하시더구나.장례식을 치러야 하니 당연하지.그렇지만 일이 잘 되어가는 모양이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아무 말 없이 주위를 휘이 둘러보는 그는 자기가 없는 동안 집안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새로 들여놓은 것이 분명한 번쩍거리는 가구들,새 카펫과 커튼,현관에 새롭게 보이는 전기 시설들,그것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교도소의 독방과 그 안에서 겪어야 했던 괴로움을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것과는 너무나 상반되는 이 호화스러움은 또 다른 반발을 솟구치게 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부채질했다.온몸이 덜리는 것을 다시 느꼈다.극심한 흥분까지 몰아오는 그 분노는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일종의 황홀상태에까지 그를 몰고 갔다.그는 자신이 강한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그는 자기가 지금부터 하고자 하는 것,아니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무엇인지 확연히 알 수 있었다.그는 캐리 고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잠깐 2층으로 올라가겠어요." "오냐,그러렴.어서 올라가거라." 캐리 고모도 아서의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더욱 초조해지는 얼굴로 서둘러 말했다. "점심은 1시다.아주 맛있게 준비해놓을게... ."그러나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걱정스러운 음성으로 결국 그에게 말했다."아서야,제발 부탁한다.아버지를 다시 화나게 해드리지 말아라.아버지는 아주 바쁘시단다.그리고 건강이 좋지 않으시단다.전과 달리 자주 화를 내신단다." "화를 내신다구요?" 아서는 되물었다.그는 그 말의 뜻을 좀더 바로 알고 싶다는 얼굴이었다.그러나 그는 곧 발길을 돌려 2층으로 올라갔다.자기 방으로 가는 것이 아니었다.그는 아버지의 서재로 들어갔다.그 방은 아서가 어렸을 때부터 출입금지였던 신성한 금단의 방이었다.넓은 방 중앙에 아버지의 책상이 놓여 있었다.단단하고도 사치스러워 보이는 나뭇결 무늬에 옷칠을 한 마호가니 책상은 가장자리에까지 장식 구슬이 박혀 있었다.육중한 구리 자물쇠와 손잡이들이 복잡한 그 책상은 방보다도 더욱 신성하고 엄숙해 보이기까지 했다.그 책상을 바라보는 아서의 얼굴은 들끓어오르는 적개심으로 다시 뻘겋게 달아올랐다.몹시 크고 단단해 보이는 그 책상이야말로 배러스의 인간성을 보다 잘 보여주는,말하자면 아서를 망쳐버린 모든 것을 상징하고 있는 증오스럽기 짝이 없는 물건이었다. 아서는 난로 옆에 놓여 있는 불쑤시개 쇠꼬챙이를 집어 들었다.그는 곧 자물쇠를 때려부수고는 꼭대기 서랍부터 열어젖혀 뒤지기 시작했다.둘째칸 자물쇠도 간단하게 때려부수고 서랍을 열어젖혔다.그런 식으로 그는 서랍을 몽땅 열어서는 샅샅이 뒤졌다.그 책상 안에는 아버지의 재산을 세세히 적은 장부들로 꽉 차 있었다.주식권 영수증,수표,미불 저당의 일람표,아버지의 꼼꼼한 필적으로 씌어진 가죽 표지의 두꺼운 장부,거기에는 어마어마한 부동산 목록이 빠짐없이 들어 있었다.소장하고 있는 회화목록이라는 설명이 붙은 다른 장부에는 그림 하나하나에 대한 구입가격이 날짜별로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었다.세번째 장부는 투자내용 기록이었다.아서는 재빨리 그 기입란을 훑어내려 갔다.모든 게 확실했고,상환은 틀림없었다.조금씩 투자한 액수들이지만 다 보태면 틀림없는 투자 증권만도 20만 파운드가 되었다.분노에 찬 아서는 그책을 휙 집어 팽개쳤다.20만 파운드.무수한 숫자의 행렬 사이를 달리는 이 거대한 금액,교묘한 수완이 쌓아올려 가는 부의 축적 앞에서 은밀한 만족을 즐기는 그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구역질이 나도록 치사했고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돈,돈,돈.광부들의 육체의 땀과 피로 만든 돈.광부들이야 죽든 살든 상관이 없는 것이다.문제는 돈이다.돈,돈,돈.죽음과 파괴와 기아와 전쟁도,이 엄청난 황금의 무게가 안전한 한,그 모든게 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서는 또 다른 서랍을 비틀었다.이제 그에게는 분노로 들끓는 복수의 악령만이 작용하고 있을 뿐이었다.그는 이제 엄청난 재산의 기록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그는 찾아야 할 것이 있었다.설계도!구 넵튠 탄광의 설계도는 바로 이곳 어딘가에 있을 것이 틀림없다.그는 자기 아버지의 근성을 잘 알고 있었다.탐욕만이 우글거리는 그 인간적인 내면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왜 자기는 이런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 아버지는 기록이라든가 서류 같은 것은 절대 파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만일 로버트 펜윅의 유서가 거짓이 아니라면 설계도는 있을 것이고,그것은 바로 이곳에 있을 것이다. 서랍이 하나하나 방바닥에 뒤엎어져 철저히 조사되었다.드디어 맨 밑바닥의 서랍 속에서 양피지로 된 얄팍한 두루마리 종이 하나가 나왔다.몹시 더럽고 구겨져 언뜻 보기에는 아무 쓸모도 없어 보이는 것이었다.아서의 입술에선 무거운 신음이 새어나왔다.그는 얼굴이 시뻘겋게 된 채 그 평면도를 펴놓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그 평면도에는 폐광의 위치가 명백히 그려져 있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그 폐광은 밑바닥 쪽에서 목제 제방둑과 평행을 이루고 있었으며,그 둑의 안쪽과는 약 60센티 가량 사이를 두고 서로 닿아 있었다.아서는 교도소 생활로 흐릿하게 된 눈을 비벼대며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았다.그는 아버지의 손으로 만들어진 복사물의 계산한 자국까지 복 수 있었다.그것은 무서운 불법행위에 대한 결정적 증거였다. 그는 무릎을 펴고 일어서서 천천히 설계도를 말았다.거대한 속임수의 전모가 그의 흥분된 눈앞에 떠올랐다.그는 두 손으로 그 설계도를 꽉 움켜쥐고 그 신성한 방 한복판에 우뚝 섰다.아직 고통스럽던 교도소 생활의 잔영이 남아 있는 창백한 얼굴에서 눈만이 불타 오르는 것 처럼 빛나고 있었다.입가에 미소가 흘렀다.아버지의 기막힌 죄상과 아울러 인간의 지나친 욕심이 낳아놓은 역설적 현실을 바보하는 듯한 비꼬인 웃음이었다.그의 미소는 더 견딜 수 없는 듯 신경질적인 웃음소리로 터져나왔다.그는 온몸을 떨면서 웃어댔다.몸 안에는 난폭한 격정이 솟구쳤다.주위의 것들을 온통 두들겨 부수고 불태워 버리고 싶은 격정을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겨우 참았다.그는 자신의 광기를 겨우겨우 눌렀다.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왔다.현관 홀 중앙에 버티고 서서 현관문에 눈을 던진 채 그는 기다렸다.가끔 시계 쪽을 바라볼 때마다 초조한 열기가 왈칵 밀려오곤 했다.드디어 그는 소스라치듯 놀라며 온몸을 더욱 긴장시켰다.1시 25분 전,자동차가 마당에 멈추는 소리가 들려오고 곧 부산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현관으로 다가왔다.현관문이 휙 열리며 아버지가 안으로 들어섰다.순간 모든 움직임이 멈춰버리는 듯한 긴장감이 흘렀다.아서의 눈과 아버지의 눈이 마주쳤다. 아서는 숨이 막혀오는 것 같은 긴장감을 느끼며 겨우 숨을 삼켰다.아버지는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정말 믿을 수 없었다.훨씬 비대해진 것만이 아니라 단단하던 몸매가 어딘지 느슨해진 것처럼 보이고,양 볼이 무겁게 처진 얼굴은 몹시 늙어 보였다.양복 깃 사이로 삐져나온 목 뒤로는 필요 없는 비계살이 둘둘 말려 있었다.그리고 옛날의 고요하고 차분하던 거동 대신 뭔가 당황하고 안정감이 없어 보이는 몸짓은 자연스러움을 잃고 있었다.손은 가만 있지 못하고 연방 신문을 들추고 만지작거렸다.눈은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다 보려는 듯 이리저리 방향을 돌리며 움직였다.마음도 주위 사물을 따라 예민하게 반응하고,하잘것없는 일에까지 관심을 기울이느라고 분주한 것이 밖에까지 내보였다.아서는 아버지를 보자마자 이러한 상태를 대번에 알 수 있었다.어떻게 해서든지 과거를 부정하고 현실에만 집착하여 모든 재미를 다 맛보려는 억지스러운 태도가 그대로 감지되는 것이었다.그리고 그는 그것이 또한 한 인간이 붕괴되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라는 것도 알았다.그는 아버지가 현관 홀로 들어설 때 계단 쪽에 등을 돌린 채 그대로 서 있었다.두 사람 다 잠시 입이 열리지 않았다. 배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네가 돌아왔구나.이건 뜻밖의 큰 기쁨이다." 아서는 말을 하지 않았다.그는 아버지가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 신문과 함께 들고 온 물건들을 그 위에 놓는 것을 바라보았다.배러스는 그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이직도 전쟁 중이라는 걸 너도 알고 있을 게다.그리고 내 견해도 변하지 않았다.난 징병 기피자 따위를 이 집에 들여놓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아두면 좋겠구나." 아서는 감정을 억누른 메마른 음성으로 말했다. "난 징병을 기피하는 대신 교도소에서 그 대가를 치렀습니다.충분한 보상이 되고도 남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배러스는 테이블 위의 물건을 옮길 필요가 없는데도 이리저리 자꾸 옮기면서 비웃는 듯이 말했다. "감옥살이는 네가 선택한 것이었지. ... 네가 개심하지 않는다면 다시 옥살이로 되돌아갈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네게 이로울 게다." 배러스는 물건 정돈을 하던 손을 잠시 멈추고 아서에게 슬쩍 곁눈질을 보냈다.그러더니 홀 안을 왔다갔다 걷기 시작했다.그는 화려한 금시계를 꺼내어 시간을 보더니 여전히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난 점심 후에 또 약속이 있다.밤에도 참석해야 할 회합이 두 개나 있어.오늘은 내겐 좀 힘겨운 날이다.너와 이야기할 틈도 없어.난 아주 바빠." "그렇게 바빠야 전쟁에 이긴다는 겁니까,아버지?사실 그렇겠군요." 배러스는 당황했다.관자놀이의 정맥이 갑지기 불끈 솟았다. "그렇다!네놈이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나도 분명히 말해주겠다만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왔다는 것을 나는 누구 앞에서든 말할 수 있다." 아서의 꽉 다문 입술이 보기 싫게 비틀어졌다.어떻게 해도 누를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그의 온몸을 휩쓸었다. "아,그렇죠,자랑스러운 아버지!아버지는 사실 누구보다도 진정한 애국자십니다.모든 사람이 다 아버지를 높이 칭찬하더군요.어떤 회합이나 위원회도 다 아버지를 필요로 하고 있고,신문도 아버지의 희생 정신과 용기를 극구 칭송하고 있더군요.그러나 아버지가 그처럼 영광스런 승리에 도취되어 연설을 하고 있을 때 수천 명의 사람들은 전쟁터에서 의미 없는 죽음을 맞고 있습니다.아버지는 이런 시기를 틈타 명예만 높일 뿐 아니라 또 돈까지 벌고 계십니다.그것도 몇 천,몇 만 파운드라는 엄청난 돈을 버는 것입니다.그러니 어떻게 매일매일이 신나지 않겠습니까!물론 그것은 넵튠 탄광에서 광부들의 피땀을 짜낸 것이지요.그 돈은 아버지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천박한 것뿐인데도 아버지는 그것도 이 나라와 국민들을 위한 것인 양 속이면서 공공연하게 외치고 있는 뒤로 자신의 욕심을 교묘히 채우고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높아졌다. "아버지는 이 세상에 자기 자신만이 있을 뿐입니다.자신의 욕심,자신의 돈,자신의 이기심,그것뿐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난 교도소에 갈 짓은 하지 않았다.교도소와는 거리가 먼 깨끗한 사람이지!" "자신만만하시군요!아마 아버지도 곧 그것으로 가게 될 겁니다.이번에는 난 아버지를 대신해서 수인 노릇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아서는 흥분으로 덜덜 떨며 소리를 질렀다.배러스는 왔다갔다하던 걸음을 갑자기 멈추었다.그의 눈이 무섭게 그를 쏘아보았다. "그게 무슨 뜻이지?넌 제정신이 아니구나." "천만에요.난 정신이 말짱합니다.차라리 미쳐버렸으면 행복할 텐데 말입니다." 배러스는 아서를 뚫어질 듯이 노려보았다.그러다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는 모습은 그를 희망이 없는 놈이라고 불쌍히 여기는 듯했다.그는 불안스러운 몸짓으로 다시 시계를 꺼내어 붉게 충혈된 눈으로 들여다보았다. "아,나가야 할 시간이다.점심 후에 아주 중요한 약속이 있다." "아버지,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아서가 말했다.그는 자기 내부에 숨어 있는 그 소름 끼치는 일들에 사로잡혀 버린 격렬한 감정에 떨면서 거기에 그대로 서 있었다. "너의 이야기를 들을 시간은 없다." 배러스는 얼굴이 시뻘개지며 계단 쪽으로 갔으나 아서의 무거운 목소리가 그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제 말씀을 먼저 들으셔야 합니다.이제 그 파라다이스 재난의 전모가 모두 드러난 셈입니다.로버트 펜윅이 유서를 남겼습니다.아버지는 이제 꼼짝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배러스의 얼굴에 서서히 두려움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배러스의 얼굴에서 두려움의 빛이 다시 공포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건 거짓말이다.절대로 그렇지 않다.내게는 아무 책임도 없다."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전 구 넵튠 탄광의 평면도를 찾아냈습니다." 배러스의 얼굴은 완전히 충혈되고 목덜미의 혈관이 검붉은 색깔로 불끈불끈 솟아나왔다.그는 현기증이 나는 듯 테이블에 몸을 의지했다.그리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넌 미쳤어.넌 제정신이 아냐.난 네 말을 들을 시간이 없다." "그 평면도를 없애지 않고 그냥 놔두신 것이 실책이셨어요,아버지." 그러자 배러스는 자제력을 잃어버렸다.그는 드디어 고함을 질렀다. "네가 뭘 알아?왜 내가 그것을 없애야 한다는 거야?난느 아무것도 잘못이 없다.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했다.난 아무 꺼릴 것이 없어.그리고 그건 이제 다 끝난 일이야.난 바쁘다.날 잡지 말아." 그는 손잡이 남간을 꽉 움켜잡고 있다가 거센 숨결을 내뿜으며 아서 곁을 지나가려 했다.그러나 아서는 석상처럼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죠,어서 회의에 나가세요.그러나 전 아버지가 그 광부들을 살해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그리고 저는 그들이 재판에서 정당하게 다뤄지는 것을 두고 볼 작정입니다." 배러스가 더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섰다. "난 그들에게 임금을 줘야 했어.그러기 위해서는 탄광에서 어느 정도 수지가 맞도록 해야지.그래서 나도 광부들도 어느 정도 위험을 무릅써야 했지.우리는 모두가 인간이다.우리는 누구나 다 실수가 있는 법이다.난 다시 말하지만 최선을 다했다.그 이상은 불가항력이었어.그리고 그 사건을 이미 다 처리된 일이다.다시 재판을 열 일이 못 돼.난 점심을 먹고 중요한 회의에 참석해야 해." 그는 급하고 부산스러운 몸짓으로 회중시계를 더듬었다.그는 호주머니의 위치를 잘못 짚어 시계를 찾지 못했으나 그것은 금세 잊어버리고 분노와 절망감으로 불타 오르는 듯한 속에서 아서를 노려보았다. 아서는 갑자기 구토증을 느꼈다.이것이 바로 자기 아버지의 모습인 것이다.이러한 아버지를 자기는 신처럼 떠받들며 사랑을 바쳐왔다.그는 냉랭한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전 그 설계도를 제출해야 할 곳에 내놓도록 하겠습니다.저의 행동을 말릴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배러스는 혈관이 마치 터져나올 것처럼 불룩 솟은 이마로 손을 가져갔다. "난 네가 하고 있는 말을 정말 알아들을 수가 없구나."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그야말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그는 다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난 회의에 가야 해.난 지금 빨리 점심을 먹고 회의에 가야 해.오늘은 까딱 잘못하면 늦을 것 같구나." 그는 지금 몹시 당황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그는 몸을 한 번 부르르 떨더니 겨우 시계를 찾아냈다.여전히 검붉은 혈색의 사나운 표정으로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재빠른 걸음으로 아서를 지나쳐 2층으로 올라갔다. 아서는 긴장과 회한이 얽힌 표정을 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는 마음이 텅 비어버린 느낌이었다.그는 지금까지 자기 자신이 주장하는 정의를 위하여 너무나 긴장한 가운데 악착같은 투쟁을 벌이며 신경을 곤두세웠다.그런데 싸움은 너무 허망하게 끝나 버렸다.투쟁을 할 준비를 단단히 하고 다가서 보니 그 적수는 너무나 불쌍한 허깨비였다.싸울 건덕지도 없는 것이다.무엇을 해야 할까?평면도를 어디로 보낼 마음도 일어나지 않았다.아버지라는 인간은 그저 불쌍한 사람일 뿐이다.그는 인생의 위선과 무자비함에 두들겨 맞아 박살이 나버린 듯한 감을 느끼며 계단 난간에 몸을 웅크리고 기댄 채 서 있었다.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마음 밑바닥에서부터 터져나오는 처절한 것이었다.2층에서 아버지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쿵쿵 바닥을 밟는 요란한 발소리가 얼마나 불안하며 당황하고 있는지를 드러내고 있었다.수돗물이 쏟아지는 소리도 들렸다.그러다가 급작스레 쾅하고 무거운 것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휙 몸을 돌려 다시 귀를 기울였다.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질 않았다.갑자기 온 집안이 조용해졌다.그는 2층으로 달려 올라갔다.캐리 고모도 달려왔다.두 사람은 목욕탕 문으로 달려가 문을 쾅쾅 두들겼다.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아서는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다. 리처드 배러스는 얼굴이 절반에 비누거품을 칠한 채 한 손에는 여전히 비누를 들고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그러나 아직 의식은 있어 거칠게 숨을 쉬고 있었다.뇌출혈이었다. 제 3부 1 1918년 11월 15일,해가 밝게 빛나는 날씨였다.넵튠 탄광의 반출탑은 밝은 햇빛을 듬뿍 받아 부드러운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받침대 위에서,활차가 무지개 빛으로 번쩍이며 돌아가고 있었다.기관실에서 양털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수증기가 푹 솟구쳐 올라와서는 환기통 위에 마치 조그마한 후광인 양 걸려 있다가 사라졌다. 아서 배러스는 카우펀 가를 가벼운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탄광 위에 떠돌고 있는 맑은 대기와 무지개 빛깔의 활차 그리고 후광처럼 보이는 수증기까지,보이는 것 모두가 아름답고 즐겁기만 했다.모든 것이 넵튠 탄광의 미래를 축복하는 손길로 느껴졌다.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기가 이렇게 행복해지리라고는,구 암흑과 불행만을 안겨주던 탄광의 모든 일이 해결되어 이토록 놀랍고도 멋있는 것으로 변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전쟁이 계속되던 몇 년 동안을 얼마나 인생을 회의하고 공포에 싸여 괴로워했던가.그렇다.그 얼마나 큰 괴로움에 빠져 있었던가!자기 인생은 완전히 끝장이 났다고 느꼈던 것이다.그런데 지금은 미래가 자기 앞에 웅장한 노래라도 부르듯 펼쳐져 있다.이것은 그 동안 겪었던 모든 고뇌에 대한 보상인지도 모른다. 그는 활짝 열린 큰 문을 지나 활기찬 걸음으로 아스팔트가 깔린 구내를 걸어갔다.그는 잿빛 트위드 양복의 널따란 칼라에 청백색 나비 넥타이를 맨 점잖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스물여섯이라는 나이에 비하면 나이가 들어 보이긴 했지만 그것은 그의 표정에 드러나고 있는 진지함 때문이기도 했다. 암스트롱과 허즈페드 두 사람이 사무실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그 두 직원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문 뒤에다 모자를 벗어 걸었다.정수리에는 벌써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윤기 도는 아름다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는 자기 책상 앞에 앉았다. "그렇다면 다 결말이 난 것 같군요.배너먼이 이제 마지막 서류를 완성했습니다." 암스트롱이 헛기침을 하며 아첨하는 목소리롤 얼른 맞장구를 쳤다. "정말 저도 매우 기쁩니다.저는 처음부터 사장님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나 성공하실 줄 알았습니다.성공 못 하실 까닭이 없죠.사실 과거부터 우리들은 모든 것을 다 잘해 왔으니까요." "장차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오,암스트롱." "네,그렇습니다." 암스트롱은 아서를 힐끔 곁눈질하면서 말을 급히 끊었다.잠시 침묵이 흘렀다.아서는 의자에서 몸을 젖혀 앉으며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할 말이 있소.우리가 출발부터 만사를 명확히 이해하는 가운데 일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서 이야기하는 것이지만,여러분은 여기서 지금까지 일을 하면서 명령을 내리시는 제 아버지의 방법에 익숙해왔습니다.그런데 지금은 아버지 대신 내가 일을 해야 하므로 이제부터는 내가 하는 방삭에 익숙해져야 하겠습니다.그것이 이 넵튠 탄광에서의 제일 첫 번째의 개혁이 되겠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할 겁니다.우리는 이제 여러 가지 개혁을 할 것입니다.그리고 지금이 그러한 개혁들을 하기에 가장 알맞은 때라고 봅니다.전쟁도 끝났고,이젠 다시 전쟁 같은 것은 없을 겁니다.전쟁 동안 어떻게 해왔든 간에 우리는 평화가 왔다는 이 사실을 모두가 다 같이 긍정해야 하겠습니다.우리는 이제 평화를 획득했으니 이 평화를 계속 누려야 할 것입니다.이제 파괴행위는 중지되었다 그 말씀입니다.다행히도 우리는 하나의 혁신을 위한 재건설을 시작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바로 그게 우리가 여기서 하려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우리는 이제 또 다른 재난이 절대로 일어날 위험성이 없는 안전한 탄광을 건설코자 하는 것입니다.아시겠소?안전한 탄광,그리고 누구에게나 공평하자 이 말입니다.그리고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이것이 빠른 시일 내에 실천되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그는 여기서 말을 잠깐 끊었다가 다시 시작했다."지금까지 월급이 얼마였소,암스트롱?400파운드,그렇소?" 암스트롱은 얼굴을 붉히면서 눈길을 아래로 떨구었다. "네,바로 그 액수입니다만,그 액수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신다면... ." "그리고 당신,허즈페드는?" 허즈페드는 잠깐 둔한 웃음소리를 냈다. "저는 지금까지 3년 동안 250파운드 그대로 있는 것입죠만 아무래도 더 이상 오를 것 같지도 않은뎁쇼." "아니오.지금부터 여러부느이 봉급을 올려주겠소.암스트롱,당신의 봉급을 500파운드로 올리겠소.이번 달 1일부터.그리고 허즈페드 당신도 같은 날짜로 350파운드요." 암스트롱의 붉은 얼굴빛이 더욱 붉어졌다.그는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정말,각별한 배려를 해주셔서 무엇이라고 감사할지 모르겠습니다." "네에,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허즈페드도 둔한 눈빛을 빛내면서 한마디했다. "그럼 이것으로 그 이야기는 끝난 것으로 하고,두 분 다 이곳에서 좀 기다려주시오.타인캐슬에서 토드씨가 11시까지 이곳에 오시도록 약속이 돼 있으니까.이제부터 완전한 내사를 할 작정이오.아시겠소?" "네,염려 마십쇼,배러스 사장님." 암스트롱은 황송하다는 듯 넙죽 절까지 하고는 허즈페드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아서는 혼자 사무실에 남았다.그는 창문 쪽으로 걸어가 잠시 거기에 서서 햇빛이 밝은 탄광 구내를 내다보았다.광부들이 이리저리 바삐 오가고 있고 탄차가 선로 위를 내려오고 있는 옆으로는 기관차가 의기양양하게 달리고 있었다.그의 눈은 마음 속의 감정이 격해짐에 따라 더욱 빛났다.나는 결국 공연한 고생을 한 것이 아니었다.이제부터 본 때를 보여주리라 드디어 그 기회는 온 것이다.그는 입을 꾹 다물면서 미소를 띠었다. 그는 책상으로 되돌아와 앉아서 왼편의 맨 위쪽 서랍에서 청구서와 송장철을 끄집어냈다.이 송장들은 너무 들여다보아서 거의 다 암기하고 있을 정도였는데 그것을 처음 볼 때 그는 몹시 충격을 받았다.그것들은 싸구려 벽돌,약해빠진 기둥,금방 내려앉을 것 같은 천장 갱목 등 모두 싸구려만 찾아다니며 사 모은 것이 분명한 형편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그 가격들을 보면 터무니없는 것이어서 공짜라고 해도 좋을 것들이었고,규정 위반의 경계선을 묘하게 재주를 부려 피하고 있었다.이를테면 여분의 권양기 같은 것도 10년이 넘은 물건으로서 파산해서 경매품으로 나도는 것을 사들인 중고품이었다.이것이 아버지가 해놓은 모든 일의 전모였다.그는 이제 이러한 모든 것을 개선할 참이었다.깜짝 놀랄 정도로 뒤바꾸어 놓을 것이다.그는 책상 앞에 앉아서 계산을 하기 사작했다.그때 나이가 일흔 셋이면서도 아직도 몸이 튼튼한 솔 피킹즈가 문 쪽에서 얼굴을 내밀고는 애덤 토드가 왔다는 것을 알렸다.아서는 벌떡 일어나서 토드를 맞아들였다.그와 만난다는 일은 언제나 유쾌하고 기쁜 일이었다.토드는 거의 변한 데가 없었다.여전히 과묵하며 어딘가 몸이 편치 못한 듯한 피곤한 기색에 눈자위에는 노란 기가 감돌고 있는 그에게서는 아직도 옛날의 그 정향나무 향기가 풍겼다.그는 아서가 자리를 내주는 대로 책상 옆에 앉았다.여전히 조용했다.자기를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 소박한 성품 때문이었다.짧은 침묵이 흘렀다.이윽고 아서가 서류철을 토드에게 건네주었다. "이걸 한 번 봐주십시오." 토드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면서 그 서류철을 천천히 넘기면서 훑어보았다. "싸구려 물건들이 제법 있구먼." 그는 담담히 말했다. "물건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뿐입니다.쓰레기로 다 내버려야겠어요." 토드 노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아서의 말에 동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아서는 조심스레 목소리를 낮추면서 말했다. "저 좀 보십시오,토드 아저씨.존 아저씨에겐 아주 툭 털어놓고 말씀드리겠습니다.아저씨께선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니까요.저에겐 경고 같은 건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이제 저는 사태를 올바르게 수습할 지위에 올랐습니다.전 넵튠 탄광을 탄광지대에서 가장 안전한 곳으로 만들어볼 작정입니다." "잘 됐네,아서.자네는 이제 그러한 능력을 갖게 됐으니까." "배너먼이 서명을 하여 관리를 일임할 수 있도록 해준 덕분입니다." 아서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정열에 불타고 있었다. "지금 저하고 함께 탄광 구내를 돌아보시도록 하시죠.그리고 갱내에도 들어가 보아주십시오.저의 아버지에게 하신 것처럼 제게도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십시오.아버지 때와는 좀 다를 겁니다.저는 아저씨의 조언을 받아들일테니까요." "좋다,아서." "이 쓰레기들을 바꾸는 것부터 시작하겠습니다.우선 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갱 속의 모든 썩은 지주들을 갈아내고 재목을 불태워 버린 다음 벽돌로 만든 것들도 다 뜯어내도록 할 겁니다.새로 만든 갱도는 철근을 두르도록 하겠습니다.천장은 시멘트로 굳히고 신품 색인기를 투입할 작정입니다." "그러자면 돈이 많이 들 텐데... ." "돈이라구요!돈이라면 전쟁 동안에 이 탄광으로 마구 쏟아져 들어왔습니다.그 재난사건 때 쏟아지던 물과 마찬가지로 말씀입니다.전 그 돈 중의 얼마를,아니 필요하다면 그 전부를 다 투자할 작정입니다.전 새로운 넵튠 탄광을 만들어보겠습니다.전 안전한 탄광을 이룩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겠습니다.전 광부들이 진짜로 좋은 환경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게 본보기를 보이겠습니다.욕탕,건조실,탈의실 같은 모든 후생시설까지 철저히 마련할 작정입니다." "그렇겠군,아서.이해가 가네." 아서는 자리에서 급히 일어났다. "자,같이 가보시겠습니까?" 그들은 갱구,기관실,그리고 펌프실을 둘러보았다.그리고 갱 안으로 들어갔다.암스트롱과 허즈페드를 대동한 두 사람은 지상과 지하를 철저히 점검했다.또 그에 대해서 구체적인 의견을 나누면서 가능 여부의 시험까지 해보았다.아서는 뚜렷한 자기 주관을 지니고 있었고,그것은 언제나 훌륭한 것이었으므로 토드와 별 문제 없이 합의를 볼 수 있었다.그들이 사무실에 돌아온 것은 2시였다.토드는 약간 피로한 기색이었다.토드와 아서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가벼운 음식들을 청하여 나누면서 잠깐 쉬었다.위스키까지 한 잔 마시고 나자 토드는 다시 기운이 나는 모양이었다.정향을 씹으면서 그는 종이쪽지 위에다가 연필로 오랫동안 무엇을 계산했다.이윽고 그는 머리를 들었다. "이렇게 하는 데 얼마만큼 돈이 드는지 대강이라도 생각해보았나?" 그는 천천히 물었다. "해보지 않았습니다." 아서는 별 큰 문제가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악 10만 파운드 가량의 돈이 들 것 같네." "그만큼 탄광이 다 썩어빠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서는 급작스러운 감정의 충동에 불끈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정도의 비용은 감당할 수 있습니다.그 두 배가 든다 해도 상관없습니다.전 어떤 희생이 오더라도 해낼 생각입니다." "알겠네,아서.그러나 명심할 것은 그 재료들을 구하는 데 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일세.기계 생산공장들이 전쟁 동안에 생산을 중지했고,본래의 생산으로 전환한 공장들이라 해도 준치 빠른 몇몇 공장들뿐이니 말일세." 노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소문에 플래트에 있는 공장이 그래도 제일 괜찮게 한다더군." "밀링튼 공장 말씀입니까?" "밀링튼 공장,바로 그 공장이야." 토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스탠리가 그걸 모슨과 가울런에게 팔아 넘겼지."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면서 서류를 가방에 챙겨넣고는 천천히 가방을 닫았다. 아서는 토드의 팔을 잡았다. "피곤하시죠?" 그는 상냥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정식으로 점심을 잡수셔야죠.시간은 좀 늦었지만 법산애서 모두들 아저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힐다가 집에 와 있어요.그리고 그레이스와 댄도 며칠 묵고 있는 중입니다.아저씨,같이 가세요." 토드는 거절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따듯한 햇볕을 받으며 법산저택으로 차를 몰았다.따뜻한 햇볕 탓인지 토드는 오랜만에 기분이 유쾌해지는 듯했다.언제나 마음을 채우고 있던 그 비관적인 음울함도 좀 덜 느껴지는 것 같았다.아서의 일도 기분이 썩 좋은 일이었다.그의 아버지로서는 도저히 생각도 못할 일이다.아니 그의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으로는 누구든지 실천에 옮기기 아주 어려운 훌륭한 일이다. "여보게,아서,넵튠에서 자네 아버지를 만나지 않는다는 게 이상스럽게 여겨지는군그래." 아서는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래도 아버지는 다시 그곳에 나타나시지 못하실 겁니다."그러나 곧 밝은 음성으로 말했다."물론 많이 회복되셨습니다.처음보다는 아주 많이 좋아지신 편이죠.거동은 어려우시지만 몇 년이든 사실 수 있다고 루이스 의사가 말하더군요.오른쪽 몸을 완전히 쓰시지 못하고 말씀도 하시지 못하는 상태입니다만,뇌신경 중의 하나가 끊어진 모양입니다.솔직히 말씀드린다면 토드 아저씨,아버지의 정신상태는 정상이 아닙니다." 거기서 잠시 말이 끊어졌다가 한참 후에 아서는 나직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의 유일한 희망은 제가 넵튠에서 하고 있는 일의 결과를 아버지께서 보실 수 있을 만큼만 오래 살아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뜨거운 어떤 감정이 급작스레 토드의 몸을 휩쌌다.날씨와 아까 마셨던 위스키와 그리고 아서가 이루고자 하는 그 원대한 포부에 대한 감동이었다.토드는 겨우 감정을 누르면서 말했다. "나도 자네 아버님이 그걸 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네." 두 사람은 서로가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다는 뿌듯한 감정을 느끼며 유쾌한 얼굴로 법산저택 안으로 들어섰다.시간은 많이 늦었으나 식구들은 식당에서 그들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인사를 나누면서 그들은 각기 자리를 잡았다.아서가 식탁 맨 위쪽에 앉고,캐리 고모가 맨 아래쪽,토드와 힐다가 한편에 그리고 그레이스와 댄이 그 맞은편에 앉았다. 모든 사람이 즐거워 보였다.너무나 평화스럽고 행복한 분위기는 어떤 기적을 보는 듯했다.토드는 법산저택의 식탁이 이처럼 화기애애한 것을 자기 평생에 처음 본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물론 그 뭔가 잃어버린 것 같은 섭섭함을 어쩔 수 없었지만.그것은 꼭 있어야 할 사람이 없다는 느낌이었다.그 사람은 2층에서 말도 못 하고 반신불수가 된 채 누워 있으면서도 이상스럽게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토드는 잠시 그러한 생각에 잠겼다가 힐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힐다가 제일 많이 아빠를 닮은 것 같구나.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하여튼 네가 유능한 간호사이니 아버지를 위해서는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힐다는 머리를 내저었다. "이 집 간호사는 캐리 고모랍니다." 아서가 방 안이 울리도록 큰 소리로 웃었다. "아저씬 힐다가 지금 무엇 때문에 이 집에 와 있는지 상상도 못 하실 겁니다.이 아가씨는 의학공부를 시작하겠다는 겁니다.내달에 런던으로 떠납니다." "의학이라!" 토드는 말을 되받았다.그러나 그는 양고기 먹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는 척하며 자신의 놀란 기색을 감췄다. "힐다 누나는 아주 기뻐하고 있죠.그래서 요즘은 식구들에게도 아주 상냥하답니다." 아서는 댄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댄은 얼굴이 붉어졌다.힐다의 차가운 눈초리를 다시 느꼈기 때문이다.그는 법산저택에서 자기의 위치가 어딘가 어색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그가 이 집에 온 것은 어디까지나 그레이스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다.지금도 그는 식탁 아래에서 자기 손을 더듬고 있는 그레이스의 손을 느꼈다.그는 2층에 재워둔 자기들의 아기와 그리고 미래를 생각하면서 그레이스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따뜻하고 안심되는 포근한 감정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힐다가 자기를 냉대하는 태도 따위는 관심을 갖지 말자고 다시 다짐했다.그는 붉어진 얼굴을 쳐들다가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토드의 시선과 부딪쳤다. "이젠 전쟁도 끝났으니,자넨 다시 넵튠에서 일을 시작할 작정인가?" 토드가 말했다.댄은 감자 조각을 잘못 삼켜 캑캑거렸다. "아닙니다."그는 말했다."전 농사를 지을 작정입니다." 그레이스가 식탁 아래로 댄의 손을 더 꽉 잡으며 말을 이었다. "저도 아기 아빠가 탄광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토드 아저씨,저희는 서섹스 주로 내려갑니다.저희는 그곳 윈러시에다 토지를 조금 사놓았답니다.아기 아빠가 제대하면서 돈을 좀 받은 걸로 산 거죠." "이 사람들은 아주 고집쟁이들이랍니다." 아서가 설명하듯 다시 이야기했다. "전 사실 탄광에서 댄이 저와 함께 일해주길 간절히 바랐습니다.그걸 납득시키려고 무진 애를 썼죠.그런데도 이 사람들은 조금도 굽히려 들질 않아요.막무가내로 독립해서만 살겠다는 겁니다.한 푼의 돈도 받고 싶어하지 않아요.자기들 힘으로만 해보겠다는 거예요.이게 바로 그레이스가 하는 일이죠.그레이스는 아이들을 키우는 데에 그 지방이 석 좋은 것이라는 걸 알자 아이뿐만 아니라 병아리와 돼지 새끼도 그렇게 키워보고 싶다는 겁니다." 그레이스는 아서의 말을 전적으로 긍정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방긋이 웃었다. "토드 아저씨,꼭 한 번 오셔서 구경하세요.손님방도 멋있게 준비해놓았으니까요.그런데 숙박비는 비싸답니다." 모두 유쾌하게 웃었다.토드는 그레이스의 인생에 대한 열의와 그녀의 결연한 태도에 놀라며 여간해서 보이는 않는 그 조용한 미소를 그레이스에게 보냈다.그는 그레이스의 이야기가 유쾌하고 멋있으면서도 어딘가 아픔을 느끼게 한다고 생각했다.어찌 되었든 그런 이야기들을 듣노라니 새삼 자신이 매우 늙었다는 느낌을 어쩔 수 없었다. 캐리 고모는 머리를 한쪽으로 갸우뚱하게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소리 없이 빠져나갔다.해리어트는 죽고 없지만 그 대신 또 다른 환자를 간호해주기 위해서였다. 더러운 내의나 방바닥 깔개를 갈아치우고 요강을 비우고 하는 일에 있어 캐리 고모의 능숙한 손길은 법산저택에서는 역시 없어선 안 될 귀중한 것이었다. 캐리 고모가 자기를 뜸으로 해서 식탁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그 동안 잊었던 2층의 배러스에 대한 연민을 갑자기 일깨워주었다.흥겹던 식탁에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서는 토드를 자동차까지 배웅했다.역까지 그를 태워다주기로 한 것이다.토드는 2층의 배러스는 만나지 않기로 했다.도리어 그의 마음을 괴롭게 할지도 모른다고 토드는 생각했던 것이다.잠시 동안 아서와 토드는 차 옆에 서 있었다. "그럼 거기에 필요한 자재에 대해선 추후에 알려주겠네."이렇게 말한 다음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토드는 다시 말했다."자네가 하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야,아서.그 계획이 그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면 틀림없이 모범 탄광이 탄생할 거야." 그 말은 아서의 마음에 새로운 흥분을 일으켰다.모범 탄광이라! "그게 바로 제가 꿈꾸던 일입니다."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까지 없던 모범 탄광이라는 것 말씀입니다." 침묵이 흘렀다.이윽고 토드는 악수를 하고 차에 올랐다.차가 떠나고 나서도 아서는 차도에 서 있었다.그는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태양이 그의 몸 위에 밝은 햇살을 퍼붓고 있었다.세상은 따뜻한 기운으로 대기를 감싸 안고 있었고 무서운 과거는 어디에서도 그 흔적을 볼 수 없었다.자신은 기적적으로 부활하였고,자신의 이상은 지금 그의 앞에 활짝 펼쳐져 있는 것이었다.오,영광스러운 부활이여! 그는 그 행복감이 흐트러질 것을 두려워하는 듯 천천히 몸을 돌려 2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매일 빠뜨리지 않는 일인 아버지를 방문하기 위해서였다.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배러스는 축 늘어진 자세로 꼼짝도 하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그의 오무라든 오른손은 색깔마저 적갈색으로 죽어 있었다.얼굴의 반쯤도 근육이 딱딱하게 굳었고,주름살이 깊이 팬 턱으로 침이 흐르고 있었다.생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다만 눈만이 살아 있어 아서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동물의 눈처럼 예민하게 번득이는 눈매로 아서 쪽을 바라보았다. 아서는 침대 옆에 앉았다.아버지에게 가졌던 온갖 증오감과 적대감은 다 사라지고 없었다.침착하게 가라앉은 마음에는 연민을 느낄 뿐이었다.그는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시작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아버지에게 설명했다.의사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의 회복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그리고 정말,아서는 아버지가 그것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결박당한 짐승의 눈과 같은 그 둔하게 디룩거리는 눈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이야기를 계속했다.그러다가 그는 말을 멈추었다.아버지가 그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그의 마비된 입술은 말을 하고 싶어 애쓰는 것이 분명했다.그러나 아무리 그의 입 가까이 몸을 굽혀도 조금도 알아 들을 수 없었다.아서는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2 12월 17일,토요일 저녁 6시에 영광된 종전을 맞아 데이빗은 고향으로 돌아왔다.기차가 타인캐슬 중앙역에 멈추자마자 그는 차에서 펄쩍 뛰어내려 플랫폼으로 급히 내려섰다.기대에 찬 눈을 개찰구 쪽으로 보내며 제니와 로버트가 혹시 나왔을까 해서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그가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은 샐리 선리였다.그는 손을 내흔들었다.식구들이 자기의 전보를 받은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샐리도 조심스럽게 손을 마주 흔들어 보였으나 그는 보지 못했다.그는 차표 회수원에게 자기 증명서에 관한 설명을 하느라고 바빴다.드디어 그는 개찰구를 헐떡거리며 겨우 빠져나왔다.얼굴에는 온통 웃음이 흘렀다. "햐아,샐리!식구들은 모두 어딨지?" 그의 원기완성한 인사말에 끌려 그녀도 역시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역시 아까와 똑같은 당혹스러운 태도가 엿보였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기뻐요,데이빗.그런데 잠깐 이야기할 게 있어요.기차가 어떻게나 오래 연착했는지!너무 기다렸기 때문에 커피라도 한잔 해야겠어요." "커피가 마시고 싶으면 집으로 빨리 가면 될 것 아니오.멀지도 않은데." "아니."샐리는 고개를 흔들었다."난 지금 마시고 싶어요.이리 들어가요." 그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으나 그녀를 따라 역의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샐리는 카운터에서 커피 두 잔을 시켜서는 냉기가 도는 둥근 대리석이 깔린 테이블 쪽으로 그걸 가지고 왔다.데이빗은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앞에 커피잔을 놓아주자 거절했다. "난 마시고 싶지 않아.기차에서 막 마시고 내리는 길이었지." 그러나 그녀는 그의 말을 무시하는 듯했다.그녀가 테이블 앞에 앉았기 때문에 그도 따라 앉을 수 밖에 없었다.테이블 위에는 누가 방금 맥주를 마시고 간 모양으로 맥주 거품이 흘러 있었다.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데이빗." "무슨 말인데... 이렇게 급하게 해야만 하는 거야." "그래요.집으로 가기 전에 먼저 알아두는 것이 좋을 거예요." 그녀는 스푼을 들어 커피를 휘저었다.그러나 커피를 마시지는 않았다.그녀의 눈은 데이빗을 바라보고 있었다.짙은 연민에 담긴 애절한 눈빛이었다.그러나 데이빗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다만 광대뼈가 두드러져 둔하게 보일 뿐 매력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면서 샐리에게 어떤 일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느꼈다. 그녀는 커피를 아주 천천히 마셨다.커피를 천천히 마심으로써 더 시간을 끌고 싶어하는 듯했다.데이빗은 이제 참을 수가 없어진 듯 자기 배낭으로 손을 뻗쳤다. "어서 가자!지난 번 휴가를 왔다 간 지 9개월만이라는 걸 알고 있겠지?난 지금 제니와 아기가 보고 싶어 죽겠어.아기는 어때?로버트,내 아들놈 말이야." 그녀는 급작스레 결심을 한 듯이 한 번 더 그 어두운 눈빛을 그에게로 치켜들었다. "데이빗,정말 제니의 잘못은 아니었어요." "무슨 이야기야." "언니가 군수공장에 일을 하러 다녔다든가 뭐 그러한 것 때문은 아니란 말이에요." 그녀는 잠시 말을 중단했다가 결심한 듯 재빨리 말했다."아기가 몸이 아주 허약했다는 거승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죠.데이빗,내 말은 결코 제니 언니의 실수가 아니었다는 걸 믿어달라는 거예요." 그는 맥주 거품 자국이 있는 테이블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바깥에서는 귀국하는 용감한 군인들을 환호하며 맞는 사람들의 소란한 소리들이 들려왔다.기관차가 빈정대듯 삑 하고 기적을 울렸다. 그는 한마디도 할 필요가 없었다.그는 왜 샐리가 그런 식으로 자기를 바라보는가를 이제 알았다.자기는 아이가 보고 싶어 손가락을 꼽으며 고대했지만 그것은 이제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로버트는 이 세상에 없었던 것이다. 샐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8월에 장염에 걸려 불과 이틀 동안 앓았을 뿐이었단는 것,그리고 제니가 그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거승ㄹ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데이빗은 입술을 깨문 채 말없이 듣고 있었다.전쟁터에 가 있었던 덕분으로 그는 자신을 억제하는 것을 익혔던 것이다.샐리가 말을 다 끝내도 그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제니 언니에게 심하게 야단치지 말아요."그녀가 애원했다."언니가 내게 간절히 부탁했어요." "그러지.아무 말도 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말아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배낭을 어깨에 둘러메고 그녀가 앞서 나가도록 문을 열어주었다.두 사람은 정거장 밖으로 걸어나와 스코츠드 가를 따라 걸어갔담.117번지 앞까지 오자 그녀는 발을 멈추었다. "난 지금 들어가지 않겠어요.먼저 들어가세요." 데이빗은 되돌아 서서 가고 있는 그녀의 등을 바라보았다.그의 가슴엔 고통스러움이 일고 있었다.그런 중에도 자기를 만나준 샐리의 그 다정스러움이 자꾸 되새겨졌다.정말 다정한 착한 여자다.샐리는!제니가 위틀리 공장에서 일하는 것을,로버트를 슬리스케일의 맑은 바다 공기에서 이 혼탁한 도회로 데리고 오는 것을 데이빗이 싫어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곧 그는 그러한 생각에서 마음을 툭툭 털어버렸다.어두운 얼굴 표정을 억지로 밝게 가지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제니는 거실의 낡은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명주 스타킹을 신은 발을 어루만지고 있었다.그것은 제니가 곧잘 하는 행동이었다.그 모습을 보니 마음은 그리움으로 높이 고동쳤다.문에서 그는 소리를 질렀다. "제니!" 그녀는 눈을 들었다.잠시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기만 했다.제니가 먼저 울먹이며 양팔을 내밀었다. "어머나,여보,드디어 돌아오셨군요!" 그는 천천히 다가갔다.발작이라도 일으키는 사람처럼 그녀는 그를 와락 얼싸안으며 저고리 옷깃 안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마세요.여보.내게 화를 내지 마세요,부탁이에요,어쩔 수가 없었어요.정말 어쩔 수가 없었어요.우리 아기는 한창 재롱을 피우며 잘 걸어다녔어요.정말 귀여운 꼬마였어요.그런데 전 공장에서 일하느라고 늘 바빴어요.의사를 불러야 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별로 많이 아픈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죠.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 예쁘던 얼굴이 핼쓱하게 핏기를 잃더니 엄마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거예요.그러다가... 천사가 우리 아기를 데리고 가버렸을 때 내가 얼마나 슬펐는지 아세요?여보,오,여보... ." 제니는 다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울고 있는 그녀의 마음속에는 어떤 두러움이 생기고 있었다.울면서 하소연하다 보니 사실 하지 않았으면 더 좋을 이야기까지 모두 해버렸기 때문이다.아기가 죽을 당시의 이야기를 해놓고 보니 역시 자기의 잘못이 없다고 볼 수가 없는 것이다.그러나 데이빗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그저 조용히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제니는 당황함을 감추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소리를 높여 말했다. "여보,당신이 돌아오시지 않았다면 아마 제 마음은 터지고 말았을 거예요.아아,정말 기뻐요.당신은 정말 몰라요.오오,여보,이 몇 달 동안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여보,정말 알았다고 해주세요.그건 제 잘못이 아니었어요.난 견딜 수가 없었어요.너무너무 괴로웠어요." 그녀는 가쁜 숨을 급하게 내쉬고 나서는 또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이제 당신이 돌아오셨으니,위대하고도 용감한 당신이 전쟁에서 무사히 돌아오셨으니 이젠 아무 걱정 없어요.아아,정말,난 잠도 잘 수 없었고 제대로 식사도 할 수가 없었다구요... ." 그는 어린아이처럼 매달리는 그녀를 꼭 안아저었다.쿠션이 바닥으로 미끄러져 떨어졌다.그 순간 반쯤 먹은 초콜릿 상자 하나와 여성 잡지 한권이 밖으로 삐져나왔다.데이빗은 여전히 자기 아내를 위로하려고 애쓰면서 그 쿠션을 제자리에 올려놓았다.그녀는 머리를 들고 눈물 속에서 미소를 지었다. "당신 저를 다시 만나서 기쁘세요?그렇다고 말씀하세요.여보오,네에,여보?" "그래,돌아오니 행복하군,제니."그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시작했다."전쟁은 끝났어.우리는 지금부터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하는 거야." "아아,여보,물론 그래야죠."그녀의 목소리가 약간 떨면서 응답했다."나도 그러고 싶어요.아아,당신은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남편이에요.당신은 이제 문학사 자격증을 얻으셔야죠.그래서 얼른 교장 선생님이 되셔야지요." "아니야,제니."그는 이상하게 딱딱한 말투로 제니의 이야기를 막았다."이젠 교편생활은 안 할 거야.그건 막다른 골목이야.이제 그 직업은 끝났어.난 옛날에 벌써 그만뒀어야 했어." "그럼 뭘 하시려고,여보?" 그녀는 다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얼굴로 물었다.데이빗의 눈가에 굵은 주름살이 생길 정도로 그의 얼굴은 전에 없이 엄격하게 굳어졌다.제니는 그 변화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해리 뉴전트가 타인캐슬 연맹 사무국의 헤든에게 보내는 편지를 내게 주었어.그곳에 취직이 될 것이 거의 확실해.그건 인새의 시작일 뿐야,제니." 그의 목소리에는 뜨거운 열의가 번득이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성공으로 향하는 그 제 1단계가 시작되는 거야." "그렇지만 여보... ." "아아,알고 있어,월급은 적을 거야."그는 제니의 말을 막으며 성급하게 다시 말했다."운이 좋으면 주당 2파운드겠지.그러나 우리 둘이 살아가기엔 충분할 거야.당신은 내일 슬리스케일로 떠나요.집을 청소하고 살 준비를 해 놓도록 해요.난 헤든과 일을 결정한 다음에 집으로 갈 테니까." "그러나 여보."그녀는 당황해서 다시 숨을 급하게 내쉬면서도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되겠다 싶은지 입을 열었다."주당 2파운드라니... 그건 너무하지 않아요?난 지금까지 4파운드를 받고 있었어요." 그는 제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돈 같은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야,제니.난 돈을 벌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둬.이젠 타협은 절대로 하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난... ."그녀는 전에 하던 것처럼 그의 저고리 깃을 만지작거리며 애원했다."나 좀더 일할 수 없겠어요,데이빗?너무 보수가 좋잖아요?" 그의 입술이 꽉 다물어지면 눈썹이 찌푸려졌다. "제니."그는 조용히 말했다."이번만은 우리에게 닥친 일을 서로 이해하고 처리해나가도록 분명히 해야겠어." "아니,여보,우린 뭐 서로 잘 이해하고 있잖아요."그녀는 그의 저고리 속으로 한 번 더 얼굴을 파묻으며 갑자기 울먹거렸다."그리고 아아,난 정말 당신을 사랑하고 있단 말이에요!" "그래 나도 당신을 사랑해,제니."그는 천천히 말했다."우리 짐을 싸서 어서 슬리스케일의 집으로 떠나자구."그는 마치 미래를 꿰뚫어 보듯 앞을 노려보았다."난 이번에야말로 진짜 직장을 얻게 된 거야.해리 뉴전트는 내 친구야.나는 연맹 사무국에서 출발하여 읍의원에 출발하는 거야,알겠지... 성공한다면... ." "어머나,정말 여보... 읍의회,정말 정말 멋있어요,여보." 그녀는 눈물에 젖어 있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그에게 매달렸다.그녀는 벌써 자기가 읍의원의 사모님이나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그녀의 얼굴에 기쁨의 표정이 넘치면서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그녀는 정말 취미가 고상한 여자답게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었다.명주로 만든 꼭 맞는 짧은 윗도리와 엉덩이가 꽉 끼는 멋있는 스커트,예쁜 한 쌍의 반지까지 끼고 있었다.그녀가 매력적이가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그런데 그녀는 최근에 좀 지나치게 일을 했던 모양이다.그녀의 두 뺨의 엷은 화장기 아래로 붉은 기가 도는 실날같은 핏줄이 내비치고 있었다.그러나 그것 때문에 활짝 핀 꽃송이처럼 그녀의 입술은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는 머리를 한쪽으로 젖힌 채 매력이 넘치는 표정으로 입술을 벌리고 웃으면서 남편을 바라보았다. "어때요?"그녀는 물었다."당신,아직도 저를 좋아하세요?" 그녀는 무엇을 암시하는 듯한 미소를 보냈다."아빠하고 엄마는 휘틀리 만에 가셨어요.샐리가 그곳 오락장의 입장권을 사드렸거든요.모두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그는 일어나서 창가로 다가가 마당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제니의 입술이 삐쭉거렸다.그녀는 데이빗이 좀 변했다는 것을 다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전보다 더욱 엄격해졌고 매사가 더욱 확실해졌다.그리고 그의 외고집은 이제 확고한 결단의 의지로 변해 있었다. 조금 후 앨프와 애더가 돌아왔을 때 데이빗은 아주 기분이 유쾌해 보였지만 제니와 함께 다음날 램 가의 자기들 집으로 떠나가야 한다는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금세 못마땅해하는 애더의 불만 같은 것은 모른 척해 버리는 것이었다.제니는 그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날 아침 9시 45분 차로 그녀는 슬리스케일을 향하여 출발했다.데이빗은 헤든과 만나기 위해 그곳에 남았다. 연맹 사무국의 지부는 중앙역에서 아주 가까운 러드 가에 있었다.사무실은 검소한 두 개의 방뿐이었다.바깥쪽 방에는 약간 얽은 자국이 있는 얼굴의,광부 출신이 분명해 보이는 노인이 커다란 캐비닛 앞에서 카드를 정리하며 서 있었다.안쪽의 작은 방 문에는 개인방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그 방에는 리놀륨이나 카펫 같은 것은 볼 수도 없었고,더러운 마룻바닥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벽에도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고 다만 한 쌍의 도표와 그 지방의 지도 한 장 그리고 '방바닥에 침을 뱉지 마시오.'라는 공고 하나가 붙어 있을 따름이었다.톰 헤든이 안쪽 사무실에서 나오면서 그의 짧은 파이프를 입에서 뺐다.그는 불도 없는 빈 난로 쪽으로 가려고 하다가 그 공고문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이 바닥에다 그대로 침을 뱉었다. "그래,군이 펜윅이군."그가 먼저 말을 시작했다."전쟁 전 심문회에서 군을 본 적이 있었지.난 군의 아버지도 잘 알고 있네." 그는 재빨리 손을 잡아 악수를 나누고는 데이빗이 들고 있는 소개장은 손을 내저어 거절했다. "해리 뉴전트가 작접 나한테 편지를 보냈더군.그 속에 돈이 들어 있지 않다면 내게 보일 필요도 없네." 그는 데이빗에게 음침한 미소를 보냈다.톰 헤든이라는 사람은 그 자체가 음침해 보였다.숱이 많은 검은 머리에 역시 두터운 검은 눈썹,흙빛의 깨끗지 못한 피부에 키가 작고 성질이 불 같은 그는 또 무시무시한 정력을 지닌 사나이였다.땀을 많이 흘리는 그는 어느 곳에나 침을 함부로 내뱉고 욕설도 서슴지 않는 괴팍한 사람이었다.음식과 술과 일을 똑같이 좋아하며,또 신성한 것을 모독하는 것에 묘한 재주를 갖고 있었다.그가 입버릇처럼 내뱉는 말은 'X같이 지독한'이라는 것이었다.그런가 하면 굉장한 정치연설가인 데다가 어떤 질문에도 임기응변으로서 즉석응답에 막히는 법이 없는 재기가 넘치는 사람이기도 했다.그러나 때를 잘못 타고났는지 이 궁벽한 읍내인 슬리스케일 지부에 15년간이나 붙들려 있는,말하자면 실의에 찬 사나이였다.그는 그 이상 더 성공을 할 기미가 전연 보이지 않았는데 자신도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그는 세수도 자주 하지 않았다.일생 동안 잠옷 같은 것은 입는 일이 없는,형식이란 걸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래,군은 그놈의 X같은 지독한 전쟁터에 해리와 같이 참전했었단 말이지?" 헤든은 빈정대는 어투로 물었다. "좋아서 전쟁터에 나갔다느니 하는 따위의 말은 듣고 싶지 않네.자,이리 와서 엉덩이나 걸치지." 두 사람은 자그마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그들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서로를 좀더 잘 알 수 있었다.전쟁통에 헤든이 데리고 있던 사무원이 전사해 버린 것이다.그 X같이 지독한 더비 징병제도로 인해 끌려나가 샹프레 숲의 전투에서 재수 없게도 대가리에 관통을 당했던 것이다.헤든은 해리 뉴전트의 얼굴을 봐서 데이빗의 임시 고용을 허락한다는 이야기를 했다.그러나 모든 것은 데이빗에게 달려 있다고 했는데,노동자들의 '요구'와 '부양금 지급'과 '통신 사무'를 한꺼번에 그리고 민첩하게 해내야 한다는 것이 조건이었다.거기다 데이빗은 자기 봉급을 좀 과하게 생각했던 것 같았다.봉급은 주당 겨우 35실링이었다. "내 문제를 익혀야 할 게야." 헤든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자,이걸 한번 보게." 그는 권태로운 표정으로 서랍을 열더니 신문 한 장을 꺼내 데이빗에게 집어 던졌다.[주간 노동]지로 몇 해나 묵은 신문이었다.누렇게 찌든 신문은 얼마나 소중히 간직해왔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었지만,어딘가 김이 다 빠진 시시한 것이 되고 만 듯한 느낌이었다.그 신문의 논설문에 청색 연필로 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게 내가 쓴 거야.한번 읽어봐.내가 X같이 지독한 그걸 썼지." 헤든이 바라보지 않는 척하고 있는 동안 데이빗은 그 논설문을 읽었다.'궁정과 뒷골목'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그 논설문은 버킹엄 궁전과 필자가 알고 있는 또 다른 궁전,즉 블로그즈 뒷골목을 빗대어서 쓴 글로 내용이 상당히 신랄했다.어휘는 비록 서툴고 천한 것이었지만 비교 대조하는 방법은 아주 신선했다."젊은 드폴링튼 부인은 하얀 비단 드레스를 걸치고 있는데,장식품이 요란스러운 치맛자락은 바닥에 끌리고 있었다.값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귀한 진주 목걸이가 그녀의 귀족적인 목덜미를 장식하고 있었고,모자의 깃털은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밴드로 매여 있었다."그리고 바로 그 밑으로 이어지는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슬래니 노파는 잡역부이다.그녀는 아무런 깃털 모자도 쓰지 있지 않았고,스커트 모양을 한 낡은 삼베 자루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뒷골목 아파트의 단칸방에서 살고 있으며 주당 12실링을 받고 있는 그녀는 폐렴을 앓고 있다." 데이빗은 그 문장의 진지성과 강렬한 힘에 이끌려 자기도 모르게 그 논설문을 다 읽었다.그 논설문은 진지하면서도 계급사회에 대한 지독한 증오가 스며든,말하자면 헤든이라는 인간 자체를 요약한 것이었다. "좋군요." 데이빗이 짧게 말했다.그러나 그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임을 느낄 수 있었다.헤든은 미소를 보였다.그렇게 미소를 보이는 것,그것은 곧 그의 가장 큰 약한 곳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바로 데이빗을 친구로서 인정한다는 의미기도 했다.그는 그 신문을 받아 다시 조심스럽게 넣으면서 말했다. "이게 바로 놈들에 대한 내 생각이지.난 그 새끼들을 증오해.X같이 지독한 새끼들을 모두 다.난 이 근처에 사는 그 새끼들 중의 몇 놈에게 원한을 사고 있어.그것들은 내 글 장단에 춤을 추고 있는 형편이지.이를테면 군이 사는 X같이 지독한 슬리스케일을 한번 예를 들어 보자구.그곳에서도 조금 장난을 해볼까 하는데 말야.멀지 않은 장래에." 데이빗의 얼굴에 몹시 흥미로워하는 표정이 나타났다. "꼭 그렇게 해볼 작정이네."헤든은 다시 음침하게 웃었다."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을 앞으로 보게 될 테니까 좀 기다리게.늙은 배러스는 드디어 쓰러졌지만 그 자식 새끼가 무슨 쇼를 벌이려고 하는 모양인데 말이야.그 새끼는 자기 애비가 광부의 피를 빨아 모은 돈의 일부를 사용해서 갱구에 목욕탕,그것도 아무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새로운 욕실 장치를 한다고 자기 자랑을 떠벌여대면서 잉여 이득에 부가되는 부가세를 면하려고 꾀를 쓰는 모양이야.뭐 그 X같이 지독한 곳에 새 예루살렘 같은 이상향을 세운다고 하면서 우리를 속이려 든단 말이거든.그렇지만 기다려보란 말이야,기다려봐.그 재난사건 때 놈들이 한 짓을 우리는 잊지 않았거든.그놈들은 그 사건에서 너무 수월하게 빠져나갔어.내가 전쟁이 끝나기를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그 새끼들의 뒷덜미를 잡기 위해서였지.그 새끼들도 내가 X같이 지독히 한바탕 해줘서 좀 깨닫고 자세를 고쳐야 하는 거야." 헤든은 갑자기 말을 뚝 끊고 앞을 노려보았다.잠시 그의 표정은 기분 나쁘도록 침통하게 보였다.이윽고 그는 불이 꺼진 담배 파이프에 다시 불을 붙였다.그러고는 아직 답장을 내지 않은 통신물이 담긴 접시를 자기 앞으로 끌어 당겼다. "월요일부터 근무를 시작하게,그럼... ."그는 데이빗에게 말을 끝내면서 다시 농담을 던졌다."가보게!더 이상 자네의 자가용을 밖에 세워두었다간 운전사가 도망가 버릴테니까.어서 가보도록 하게." 데이빗은 슬리스케일 행 열차에 올랐다.차 안에서 그는 내내 자신의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해보기에 바빴다.그가 세운 계획의 첫 단계는 이제 시작된 것이다.그것은 굉장한 것이 못 되는,아니 그와는 반대되는 겸손한 첫걸음이었다.그러나 그것은 앞으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다.목적은 그의 앞에 명백히 정의되어 놓여 있었다.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이렇게 시작한 이상 도중하차를 해서는 안 된다고 단단히 결심했다.이번 출발은 전부냐 아니면 전무냐의 양단간에 걸친 일이었다. 제니는 집안을 정리하면서 그녀다운 가벼운 흥분에 싸여 있었다.제니는 자신이 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주저했었다는 일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새로운 일에 몰두해 흥분된 소리를 지르곤 했다. "이봐요.여보,이 예쁜 도자기 촛대를 난 까맣게 잊고 있었군요."그러고는 또 "어머나,이것 봐!이 과자 접시의 벗겨진 모양을 좀 봐요,그 젊은 장사꾼이 이건 순수한 니켈로 만든 접시라고 내게 몇 번이나 맹세를 했었는데... 아이 참,나는 너무 수다스러운 것 같아요.안 그래요,여보?"하면서 깔깔대곤 했다. 데이빗도 웃옷을 벗고 옷소매를 걷어올린 후 가구를 옮기기 시작했다.그러고 나서 숫돌과 파라핀을 꺼내 무릎을 꿇고 앉아서 난로 철망의 녹을 벗겨냈다.그는 마루를 훔치고 나서 제니가 언젠가 아름다운 정원으로 만들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지금은 잡초가 무성한 그 작은 마당의 풀을 뽑았다.그들은 3시까지 집안 정돈과 청소를 하고 둘이서 간단히 식사를 했다.그 다음에 그는 몸을 씻고 매무새를 고친 후 밖으로 나왔다. 전쟁으로 인한 황폐와 비참과 공포를 뒤로 두고 이처럼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 멋있는 일이었다.그는 램가를 천천히 걸어가면서 슬리스케일의 친밀함이 자신을 다시 감싸주는 것을 느꼈다.검은 반출탑이 읍내와 항만과 바다 위로 높이 솟은 것을 보는 것도 기뻤다.달동네로 가는 도중이었으나 그 사이에 여러 사람과 만나게 되어 악수를 나누었다.무사히 돌아온 그를 모두가 축하해주었다.그들이 보여주는 인정은 데이빗의 가슴을 흐뭇하게 해주었고,타오르고 있는 그의 희망에 더욱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었다. 그는 제일 먼저 어머니의 집으로 가서 한 시간쯤 있었다.샘의 죽음은 마사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특히 샘이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다른 어떤 것보다도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마사는 샘의 결혼을 아직도 인정하지 않았다.자기 마음에서조차 그것을 완전히 지워 없애고 있는 것 같았다.그러나 샘이 결혼했다는 것은 온 읍내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다.그리고 애니가 낳은 사내아이도 벌써 12개월이나 되너 새뮤얼 펜윅이라는 세례명까지 받았다.그러나 마사로서는 그 결혼은 결혼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그녀는 그러한 사실에 대하여 등을 돌리고는,샘은 자기 외의 어떠한 다른 사람에게도 속해 있지 않다는 생각을 굳게 지니고 있었다. 데이빗이 어머니 집을 나와 잉커먼을 지나서 해리 오글의 집에 온 것은 5시였다.해리 오글은 오글의 아들 중 장남으로서 그 재난 때 목숨을 잃은 봅 오글의 형이었다.나이는 마흔다섯이며 로버트 펜윅의 생존 중에 그를 따르던 사람으로 늘 로버트를 칭찬했다.목이 쉰 답답한 목소리의 그는 창백한 안색에 철사처럼 비쩍 마른 사나이였다.그러나 목소리는 그 모양이었지만 해리는 광부들 사이에서 '지혜로운 사람'으로 인기가 있었고,총회의 서기와 의료 보조회의 회계원으로 슬리스케일 읍의회의 노동자 대표였다. 해리 오글은 데이빗을 보자 반가워했다.두 사람은 집 뒤쪽의 부엌에 마주 앉아 그 동안의 소식을 서로 나누었다.데이빗은 인사가 대충 끝나자 해리 앞으로 몸을 굽히며 진지하게 말했다. "해리!부탁이 좀 있어서 왔소.내달에 있는 읍의회 선거에 나를 지명하도록 협조해주십사 하고 말입니다." 해리는 여간해서 남에게 질문을 하는 일도 없었고 또 놀란 표정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지금도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추천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데이빗,아무래도 당선될 가망이 없는데 소용없는 일이 아닐까.머치슨이 자네 지구에서 출마할걸세.그놈은 10년간이나 출마해왔으니까." "그건 알고 있습니다!그러나 그치는 여섯 번이나 있는 의회에 한 번밖에 참석하고 있지 않아요." 데이빗의 흥분이 해리에게 흥미를 주는 듯했다. "그래서 그놈은 언제나 당선하는지도 모르지." "한번 입후보해보겠습니다,해리."데이빗은 그의 지난날의 성급한 성격이 다시 되살아오는 것을 겨우 누르면서 말했다."한번 출마해본다는 것은 밑져야 본전이니까요." 다시 침묵이 흘렀다. "좋아."해리가 말했다."자네가 그러기로 작정했다는 걸 알고 있는 이상 나도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보겠네." 데이빗은 그날 밤 이것으로 자기는 두 번째의 걸음을 내디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그는 제니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0일 후에 그의 추천이 실제로 확정되었을 때 비로소 그녀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읍의회!데이빗이 읍의회 의원에 입후보한다. ... 아아!'제니는 미친 둣이 흥분했다.왜 그는 진작 이야기해주지 않았을까?그가 돌아온 날 밤 스코츠드 가의 친정집에서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농담일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정말이란다.정말 놀라울 뿐이다.'아아,사랑하는 내 남편,여보!' 기쁨에 넘치며 제니는 선거전에 뛰어들었다.권유를 하러 돌아다녔고,아름다운 '선거 유인물'을 만들기도 했다.클래리에겐 자동차 판매점에 근무하는 남자 친구가 있는데,그 사람이 자동차 한 대를 빌려줄지도 모른다고 해서 그녀는 뛸 듯이 기뻐했다.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녀는 데이빗과 함께 그 차를 타고 선거구를 돌 계획을 세웠다.또 새로 온 영화관의 지배인을 설득해서 스크린을 통해 데이빗에 관한 선전을 하면 어떻겠느냐는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했다.제니는 집의 모든 창문에다 빨간 색깔로 '펜윅에게 표를 던지자'라는 글을 쓴 포스터를 붙여놓았다.이 포스터는 제니를 가장 기쁘게 해주었다.그녀는 곧잘 바깥으로 나가서 하루에도 몇 번씩 그 포스터를 우러러보는 것이었다. "여보,이제 당신이 드디어 유명해지려 하는군요!" 그녀는 들뜬 기분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이렇게 종알거렸다.그러나 그녀는 이런 말을 할 때 왜 데이빗이 화가 난 것처럼 입을 꽉 다물고 돌아서 버리는지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 물론 그녀는 데이빗의 '당선'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벌써부터 읍의원 부인들과 티 파티를 열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그리고 슬루스 모래 언덕의 꼭대기에 신축한 으리으리한 래미지 씨 저택으로 그 부인을 방문하는 자신의 모습을 마음속에서 그려보면서,이와 같은 모든 것은 진정한 출세를 하기 위한 어떤 계기가 돼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읍의원이 된다고 해도 사실상 돈이라는 것과는 전혀 인연이 닿지 않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뭔가 중요한 단계로 나아가게 해줄 밑받침이 될 것이라는 기대에 부푸는 것이었다.그녀는 그 외의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데이빗의 행동 배후에 있는 동기 같은 것은 이해하고 알아들을 능력이 없었다.투표일이 닥쳐왔다.데이빗은 당선된다는 자신은 없었다.그러나 그의 이름은 슬리스케일에선 잘 통하는 이름이었다.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탄광에서 죽었고 형은 전사했으며 그 자신은 3년 동안 전선에서 지냈다는 경력은 별로 나쁜 것이 아니었다.전선에서 귀국하여 입후보를 한다는 것 속에는,자기는 그걸 경멸하고 있지만,유리한 면이 있는 것이다.그러나 그는 한 번도 입후보해본 적이 없었고 또 읍의원의 경험도 없었다.게다가 머치슨은 가볍게 볼 적수가 아니었다.그는 속이 들여다뵈는 수작으로 선거기간 중에 자기 상점을 찾는 고객을 위해 특별 할인기간을 두었고,단골손님에게는 향기가 좋은 비누상자나 정어리 통조림 같은 것을 슬쩍 넣어주는 선심을 잊지 않았다.그것이 머치슨의 인기를 올리는 강력한 선거전술인 것이다.선거 당일인 토요일 오후 데이빗은 거리를 걷고 있었다.그때 투표소인 신 베들 가 국민학교에서 나오는 애니와 마주쳤다.애니는 반갑게 웃으며 걸음을 멈추었다. "지금 막 당신에게 투표하고 나오는 중이에요."애니는 솔직하게 말했다. "투표시간에 맞추려고 장사도 일찍 끝냈어요." 데이빗의 표정은 밝아졌다.애니가 자기를 위하여 없는 시간을 내면서 투표를 했다고 생각하니 즐겁지 않을 수 없었다. "고마워요,애니." 그들은 말없이 한동안 서로 마주 보고 서 있었다.애니는 원래 말이 없는 편이었다.그래서 오늘도 다른 이야기를 더 하지 않았다.그러나 데이빗은 그녀의 모든 바람이 나기 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엇다.그는 갑자기 그녀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자기 형 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를 위로해주고 싶었고,아기의 건강도 물어보고 싶었다.그리고 또 자기의 죽은 아들 로버트에 관해서도 그녀에게 털어놓고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소란스럽고 혼잡한 거리에서 그런 이야기들을 할 수 없었다.그는 시무룩해지면서 엉뚱한 말을 했다. "난 절대로 당선이 안 될 겁니다." "글쎄,"그녀는 엷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될지 안 될지는 두고 봐야죠.이런 일은 뚜껑을 열어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니까요." 그러고 나서 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보이고는 그의 곁을 떠났다. 데이빗은 애니가 가버리자 그녀의 말이야말로 현명하고 또 자기를 격려해주는 말이며 당선 가능성의 서광을 비추어주는 것임을 느꼈다.결과가 발표되였다.의외의 일이 일어났다.그가 마흔일곱 표 차로 머치슨을 물리친 것이다.그는 당선된 것이었다. 제니는 표차가 너무도 근소했기 때문에 조금 실망을 한 듯했지만 데이빗이 당선되었다는 것에 정신이 나가도록 기뻐했다. 데이빗에겐 그러한 들뜬 기분은 없었다.데이빗은 의사록과 의사일정 같은 것들을 한번 쭉 훑어보면서 자질구레한 지방정치의 복잡한 실정을 조사하고 또 사회적,종교적,개인적인 이해로 빚어지는 ㅌ상적인 일들과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주고받는 식의 불성실한 정치 전례들을 들추어보았다.물론 그러한 것의 대표적은 본보기는 래미지였다.래미지는 과거 4년 동안 읍의회를 제멋대로 휘둘러왔다.데이빗은 그 첫출발부터 래미지와 심하게 부딪쳐야 한다는 것을 예감하고 있엇다. 11월 2일 밤,읍의회가 소집되었다.의장은 래미지였다.출석의원은 해리 오글,데이빗,베들 가 교회의 이녹 로우 목사,국민학교 교잘 스트로더,양복점의 베이츠,가스 회사의 커놀리 그리고 서기 러터였다.첫 모임때부터 래미지와 베이츠와 커놀리는 뒷방에서 만나 스스럼 없이 인사들을 나누었다.껄껄대며 너털웃음을 웃는가 하면 상대방의 등을 툭툭 치기도 하면서 의기양양하게 세상 이야기를 늘어놓았다.한편 그들이 떠들어대는 야비한 농담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곳에 있던 로우 목사는 커놀리에겐 경건하게 그리고 래미지에겐 아첨하는 태도를 보이며 인사했다.데이빗과 해리 오글에겐는 아무도 아는 체하는 사람이 없엇다.일동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자 래미지는 데이빗에게 차가운 시선을 한번 보냈다. "우리의 옛 동료 머치슨이 지금 이 자기에 없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럽소." 그는 그 외쳐대는 듯한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그 대신 낯선 사람이 와 있어 여러분들은 좀 어색하겠지만 잘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염려 말게,이 사람아."해리가 데이빗에게 속삭였다."저 새끼의 씨부렁거리는 말투에는 곧 익숙해질 테니까." 일동은 자기에 앉았다.러터가 지난 의회의 마지막 의사록을 읽기 시작했다.그는 빠른 어조로 그러나 몹시 권태롭게 시조라도 읊듯이 읽어나갔다.그러고는 거의 숨도 쉬지 않고 같은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였다. "우선 첫째는 식육과 의료 계약을 가결하는 건이 되겠습니다.여러분께서는 이미 본건이 가결된 것으로 알고 계십니다만." "맞았어." 래미지가 맞장구를 치며 하품을 했다.그는 테이블 맨 위쪽의 의자에 위로 벌렁 몸을 젖히고 앉아서 커다란 붉은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두 손은 자기의 어마어마한 배 위에서 깍지를 끼고 있었다. "그렇소.그 건은 통과되었소." 베이츠가 양쪽 엄지손가락을 물레방아처럼 빙빙 돌리며 테이블을 열심히 바라보면서 동의했다. "그럼 가결된 것으로 하겠습니다,여러분." 러터가 말하고는 의사록 쪽으로 손을 뻗쳤다.그때 데이빗이 조용히 나섰다. "잠깐만!" 침묵이 흘렀다.아주 묘한 침묵이었다. "본인은 그 계약이라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데이빗은 지극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볼 필요고 없어요." 래미지가 냉소를 보냈다. "다수가결이 되었으니까." "오,그런가요!" 데이빗이 놀랐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가 언제 투표를 했었나요." 서리 러터는 불편스러운 표정으로 펜촉에 무언가 붙어 있는 것처럼 그것만을 바라보고 있었다.서기는 데이빗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앗다.결국 그 힐문하는 듯한 눈초리와 마주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계약서를 좀 봅시다." 데이빗이 요구했다.그는 그 계약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그는 다만 의사록에 기입되는 것을 지연시키려는 것뿐이다.이같은 계약은 슬리스케일에선 꽤 오랫동안 묵인되어온 것이다.사실 의료 계약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위생 검사관과 보건 순시관,그리고 기타 잡다한 읍직원에게 입히는 제복 공급에 관한 것으로서 양복점 주인인 베이츠가 그 거래에서 부당한 이익을 올리고 있아곤 하나 그 총액은 빤한 것이었다.그러나 식육 계약은 달랐다.읍내의 공립병원에 공급하는 일체의 권리를 래미지에게 주는 이 식육 계약은 공공연한 부정행위였다.청구서에서는 최고의 가격으로 견적을 내나 실제적으로 래미지의 손을 통해서 나가는 고기는 언제나 찌꺼기 고기들이었다. 데이빗은 러터가 신경질적으로 내미는 계약서들 가운데서 식육에 관한 것을 조사하기 시작했다.금액도 상당한 것으로서 총액이 300파운드나 되었다.그는 일동의 눈길이 자기에게 향해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그 청회색의 서류를 일부러 천천히 넘겨 회의를 지연시켰다. "이건 경쟁입찰입니까?" 그는 다시 질문을 했다.이제는 더 이상 자기를 억제할 수 없어진 래미지가 테이블 건너에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그의 붉은 상판은 분노와 적의를 똑똑히 드러내고 있었다. "난 15년 이상이나 그 형태로 계약을 맺어왔는데 무슨 이의라도 있단 말인가?" 데이빗이 래미지를 건너다보았다.최초의 시련이 드디어 온 것이다.그는 마음을 침착하게 가라앉혀 감정에 휘말리지 않도록 경계하며 말했다. "이의를 갖는 사람도 많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멋대로 한번 해보시지!" 래미지는 온통 얼굴이 시뻘개졌다. "래미지 의원,래미지 의원." 동정을 보내고 있다는 표시인지 로우 목사는 거의 우는 소리로 래미지를 불렀다.읍의원 중에서 특히 로우는 언제나 래미비에게 아양을 떠는 인물이었다.그것은 이유가 있었다.래미지는 베들 가 교회의 중요한 창립임원이었고,가난한 양떼 사이의 황금 송아지라고도 할 수 잇는 귀중한 신도였기 때문이다.그래서 지금도 로우는 데이빗 쪽을 바라보면서 불만스러운 듯이 힐책조로 말했다. "귀하는 이 회의에서 신참자라는 것을 잊지 않으면 좋겠소.에-,펜윅이라고 했던가.귀 의원은 아무래도 지나치게 의심이 많은 것 같소.이 계약은 공개적으로 행해진다는 것을 귀하는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 데이빗이 대답했다. "지방 신문에 6밀리 정도의 크기로 실린 것을 말씀하시는 모양인데,그런 광고는 아마 아무도 보지 않을 겁니다." "사람들이 그걸 꼭 봐야 할 까닭은 뭐야?" 래미지가 테이블 끝에서 짖어대듯이 소리를 질렀다."그리고 너는 무엇 때문에 모가지를 내밀고 참견하는 거야?그 계약은 15년간이나 내 것이었어.그리고 지금까지 아무도 빌어먹을 잔소리 같은 것은 한 일이 없었어." "당신의 썩은 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제외하고 말이죠." 데이빗이 여전히 평정을 잃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무도 말이 없는 무거운 침묵이 좌중을 내리눌렀다.해리 오글이 데이빗에게 조심하라는 듯한 눈짓을 보냈다.러터 서기는 공포로 얼굴이 파래졌다.분노로 어쩔 줄을 모르는 래미지가 큰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명예 훼손이다."그는 계속 고함을 질렀다."저따위 자식에게는 법률이라는게 어떤 것인지 맛을 보여줄 필요가 있어.베이츠,러터,여러분 모두 내 증인이 되어주시오.저 자식을 내 명예를 훼손했소!" 러터는 항의를 하고 싶은 듯 그의 가냘픈 얼굴을 치켜들었다.로우 목사도 우는 듯한 얼굴로 무엇인가 말하고 싶다는 표정이었다.그러나 래미지는 쉬지 않고 짖어댔다. "저 자식이 한 말을 어서 취소하도록 해주시오.이 의회까지도 더럽힌 말이니 당연히 그래야지." 러터가 말했다. "취소할 것을 귀 의원에게 요청합니다,펜윅 의원." 이상스러운 열기가 데이빗의 온몸을 휩쌌다.그는 래미지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안쪽 호주머니를 뒤져 한 다발의 서류를 꺼냈다.그는 천천히 말했다."취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방금 말한 본인의 진술을 증명하면 되지 않겠습니까?본인은 증거를 모아두었습니다.여기에 읍내 병원에 있는 환자 25명으로부터 진술과 세 사람의 간호사와 간호장 자신이 진술하고 또 서명까지 한 공술서가 있습니다.그들은 모두 당신의 고기를 먹은 사람들입니다,래미지 의원.그리고 간호장의 말에 의하면 그 고기는 개도 먹지 않을 고기라고 했습니다.여러분에게 이걸 읽어드리겠습니다.래미지 의원께서는 이걸 표창장이라고 간주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 무거운 침묵 속에서 데이빗이 래미지의 고기에 대한 고기에 대한 소위 그 표창장을 읽어 나갔다.딱딱하고 힘줄투성이고,때로는 썩은 고기가 섞이기도 했다는 솔직한 증언들이었다.병실 담당 잡역부의 한 사람인 제인 로리는 이상한 냄새가 나는 양고기를 먹은 후 심한 복통을 앓았다고 했는가 하면,그 병원의 기빙즈 간호사는 불결한 고기에서만 볼 수 잇는 기생충을 인체 내에서 발견했다는 중대한 증언들을 했다. 데이빗이 다 읽고 났을 때 방 안 공기는 돌처럼 딱딱해졌다.그는 서류를 조용히 접으면서,옆의 해리가 시원히 해치웠다는 기쁨으로 얼굴을 씰룩거리고 있는 것과 함께 증오와 분노로 금세 졸도라도 할 것 같은 래미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건 거짓말이야.내가 공급하는 고기는 어디까지나 최상품이었어." 래미지가 말을 더듬거리며 소리쳤다.오글이 처음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그 상품의 고기가 너무 가엾구려." 로우 목사가 진주 반지를 낀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아마 개중에 때로는 나쁜 것도 좀 있었겠지요.실수라는 것도 있을 수 있으니까." 해리 오글이 중얼거렸다. "15년간이나 계속됐다는 거요.당신이 말하는 그 빌어먹을 '때로는'이라는 것이." 커놀리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이군.어서 투표에 붙이자구." 그는 이런 문제를 쉽사리 결정 짓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그는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투표에 붙여요." "그러면 자네가 지네,데이빗." 해리 오글이 열기에 뜬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베이츠,커놀리,래미지,로우는 언제나 서로의 이익을 위해 단합되어 있었다.데이빗이 로우 목사를 향하였다. "복음의 전도자이신 목사님께 호소합니다.귀 의원께서는 병원의 환자들이 계속해서 나쁜 고기를 먹는 것을 바라십니까?" 로우 목사는 조금 얼굴이 붉어졌다가 금세 완강한 표정으로 변했다. "본인은 아직도 납득이 잘 안 갑니다." 데이빗은 로우 목사를 단념했다.그는 래미지에게 눈길은 고정시켰다.그는 천천히 말했다. "아주 명백히 말씀드리겠습니다.만일 이 의회가 식육 입찰을 떳떳이 공고하는 새로운 공시를 하도록 허가하기를 거부한다면 본인은 이 공술서를 주의 위생 의무관 앞으로 제출해서 이 문제 전반에 관한 완전한 조사를 요청할 작정입니다." 래미지의 눈과 데이빗의 눈은 허공에서 불꽃을 일으켰다.그러나 래미지의 눈이 먼저 밑으로 떨어졌다.그는 겁을 먹었던 것이다.그는 지난 15년 동안이나 의회를 휘둘러 나쁜 고기를 팔아왔고 저울을 속여왔다.그는 정말로 겁이났다.심문에 걸려 모든 게 명백히 드러난다면 그때는 만사가 끝장이다.이 썩어빠질 훼방꾼 같은 돼지새끼 때문에.그는 재빨리 생각을 굴렸다.가령 내가 죽는 일이 있어도 언젠가 저놈의 새끼와 한바탕 할 것이다.그는 높은 목소리로 퉁명스레 말했다. "투표할 필요는 없어.공시를 하도록 할 테니까.육시랄 것... 난 떳떳하게 공개입찰을 해서 네놈 앞에 보여줄 테다." 승리의 영광스러운 물결이 데이빗의 온 몸을 휩쓸었다.내가 이겼다.내가 이겼다.긴 여정의 그 첫걸음이 이제 한 계단을 올라선 것이다.나도 할 수 있는 것이다.그리고 나는 계속할 것이다.회의는 계속 진행되었다. 3 데이빗이 읍의회에 당선된 후의 결과는 제니에겐 슬프게도 실망만을 안겨주었다.제니의 열성은 언제나 너무 지나쳐 즐거운 추억을 항상 흐리게 하는 일이 많았는데 제니의 선거 열의도 마치 로케트처럼 치솟았다가 어이없이 피익하고 사라져버리는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 선거를 통하여 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희망했다.특히 그녀는 래미지 부인과 교제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갖고 있었다.래미지 부인이 베푸는 그 오후의 파티는 슬리스케일에서는 가장 '격조 높은'파티로 소문 나 있었다.국민학교 교장의 사모님 스트로더 부인도 그 파티에는 얼굴을 내밀었다.그리고 암스트롱 부인과 의사 프록터 사모님과 양복점 주인의 아내인 베이츠 부인도 나타나는 것이었다.베이츠 부인이 참석할 정도라면 펜윅 부인이 참석 못 할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하는 것이 제니가 숨막힐 정도로 애절하게 자문자답해보는 문제였다.티 파티에서는 흔히 음악이 곁들여지는 법인데 노래 솜씨가 제니보다 더 뛰어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는 것도 제니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다.제니가 좋아하는 '지나간 일'이라는 노래는 아주 아름다운 노래일 뿐만 아니라 클래식에 속하는 고상한 곡이었다.제니는 슬루스 모래 언덕 위에 신축한 붉은 사암 저택의 우아한 응접실에서 슬리스케일의 모든 명사 부인들이 보는 앞에서 그 노래가 부르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아아,아아,제니는 래미지 부인과 어떻게 해서라도 접근해볼 수만 있다면,하는 열망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러나 래미지 부인으로부터는 전혀 아는 체하는 기색이 없었다.길을 가다가 서로 마주치는 기회가 있었는데도 인사를 나누고 싶어하는 기미마저 보이지 않았다.그러다가 12월 초순에 무서운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어느 화요일 오후 제니가 모슬린 옷감을 조금 사려고 베이츠 상점을 찾아갔을 때였다.'맵스 저널'이라는 잡지에서 커즌 매리언느라는 유명한 디자이너가 모슬린이 머지않아 날씬한 여성의 내의감으로서 유행될 것이라고 쓴 기사를 보았기 때문이었다.그런데 그 상점 카운터 앞에서 바로 래미지 부인이 고급 레이스 감을 고르고 잇었는데 그녀는 기분이 좋은 듯,항상 어두워 보이던 얼굴이 지금은 아주 상냥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그러나 몸집이 큰 데다가 광대뼈가 그러난 얼굴은 아무래도 좋은 인상이라곤 할 수 없었다. 제니는 이 좋은 기회를 갖개 된 것이 우선 기뻤다.그녀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래미지 부인 곁으로 다가갔다.남편들이 같은 읍의원이니까 우리들도 동등하게 사귈 수 있다는 자만감에 마음이 부풀었다.그녀는 애를 써서 겨우 부인 옆에 설 수 있었다. 그녀는 예쁘게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래미지 부인.오늘은 날씨가 아주 좋군요." 래미지 부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그녀는 제니를 바라보았다.그러나 제나가 누구인지를 알아본 것이 분명했는데도 금세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어버렸다.유쾌하고 상냥하던 표정까지 싹 변하면서 냉정한 얼굴고 쌀쌀하게 말했다. "전혀 만나뵌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누구시든가?" 이 예기치 못한 대답에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제니는 좀더 비참한 실수를 저질렀다.제니는 긴장된 얼굴로 자기의 신분을 밝혔다. "저 펜윅 부인이에요.저의 남편도 읍의회 의원이지요,래미지 부인." 래미지 부인은 잔인하게도 제니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오오,제게 그걸 알려주고 싶으셨군요." 그녀는 싸늘하게 웃어 보였다.그러고는 어깨를 한번 치켜 보이더니 레이스 옷감 쪽으로 돌아서서는 젊은 여점원을 향해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값은 상관하지 말아요.무엇보다도 제일 비싸고 좋은 것을 골라줘요.물론 집까지 배달해주고 계산은 내 앞으로 달아놓으세요." 제니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그녀는 창피해서 그만 죽고 싶을 뿐이었다.그런 모욕,그리고 그것도 부인복 상점의 젊은 여점원 앞에서!그녀는 휙 발길을 돌려 가게로부터 도망치다시피 나왔다. 그날 저녁 그녀는 데이빗에게 이 모든 이야기를 눈물까지 흘려가면서 털어놓았다.그는 엄숙한 얼굴로 입술을 꽉 다문 채 이야기를 들었다.이윽고 그는 천천히 말했다. "래미지와 내가 서로 멱살을 잡고 있는 판인데,그 부인이 당신을 얼싸안고 반가워하길 바란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제니.지난 3개월 동안 나는 그 작자의 썩은 고기 납품 계약을 봉쇄해버렸거든.그리고 또 슬루스 모래 언덕에 신축한 그 작자의 집 앞으로 지나가는 새 도로의 건설비를 받아내려고 읍에다가 쉬쉬하며 요구하고 있는 500파운드도 막으려고 하는 중이야.새 도로는 그 작자 외에는 아무에게도 무용지물이거든!지난번 의회 때에는 그 작자의 더러운 도살장이 위반하고 있는 여섯 가지의 위법행위를 지적했었어.그러니 그 작자가 나를 얼마나 미워하고 있을지 짐작이 가겠지,당신도?" 그녀는 뜨거운 눈물이 가득 담긴 눈으로 그를 원망스럽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왜 당신은 그렇게 남이 싫다는 일에 앞장을 서시는 거예요?"그녀는 흐느꼈다."정말 당신은 이상한 사람이에요.래미지 씨의 편이 되면 당신은 훨씬 유리할 텐데... 난 당신이 출세하기를 바란단 말예요." 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제니,그렇게 해서 하는 출세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해줬잖아.나는 좀 이상한 인간일지도 몰라.난 지난 몇 년 동안 참 많은 경험을 해왔어.탄광의 재난사건이라든가,이번의 전쟁 같은 재해의 원인이 되는 악폐와 과감히 싸움을 시작해야 할 때인 거야." "그렇지만 데이빗,당신은 주당 35실링밖에 벌지 못하고 있으면서... ." 그의 가슴이 몹시 답답해왔다.그는 논쟁을 그만두고 그녀를 조용히 바라다보았다.그러다가 일어나서 다른 방으로 가버렸다.이러한 그의 행동은 제니로 하여금 데이빗이 자기를 버릴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갖게 만들었다.그러자 자신이 더욱 불쌍해져서 그녀는 다시 울었다.은근히 분노가 치솟았다. 그러나 데이빗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그녀에게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뿐이었다.그녀가 전혀 자기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안 것이다.그녀는 자기 쪽으로 그를 끌어당기려고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는 그럴수록 자신의 소신을 지켜나가기 위하여 더욱 엄격해질 수밖에 없었다.제니에게는 이것이 참을 수 없는 모욕처럼 느껴졌다.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자만심으로 넘쳐 있는 그녀는 데이빗이 그러한 면에 대해서도 무관심함을 알자 더욱 분노가 깊어졌다.제니는 결코 자신이 멸시를 받아가며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이 상처받은 것에 대해 보복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데이빗을 기쁘게 해주려는 노력을 완전히 그만두어 버렸다.데이빗은 저녁에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와도 난롯불도 꺼지고 저녁식사도 마련되지 않은 밤을 보내야 했다.그러나 그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이것이 그녀를 더욱 약 오르게 했다.그녀는 그를 화나게 만들어 싸움을 하려고 덤벼들었다.그의 무능을 탓하고 조롱하기 시작했다. "나는 전쟁 동안에도 주당 4파운드씩 벌고 있었다는 걸 잊지는 않으셨죠?그건 지금 당신이 버는 것의 두 배가 넘는 것이었어요!" "난 돈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니까,제니." "나도 돈 같은 건 관심 없어요.당신도 알고 계시죠?난 째째하지 않아요.우리들이 신혼여행을 할 때 재가 당신에게 선물한 그 양복 기억 나세요?아아,그건 정말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어요.그 당시만 해도 당신은 뭐 하나 할 줄 아는 것이 없었어요.만일 내가 당신이라면 자기 부인에게 만족하게 해주지도 못하고 집안도 잘 꾸려나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렇게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거예요.당신은 부끄러움도 모른느 사람이에요." "인간은 모두 자기의 기준이 따로 있는 거야,제니!" "그거야 물론이죠."그녀는 다시 심술궂은 목소리로 말했다."난 언제든지 내가 원할 땐 직업을 얻을 수 있어요.오늘 아침에도 신문을 죽 훑어보니 내가 쉽게 얻을 만한 직장이 대여섯 개나 되던데요?그래요!난 언제든지 부인 모자점 점원 같은 걸 할 수 있거든요." "참아요,제니!나도 당신이 생각하는 정도로 얼간이는 아니니까.때를 기다립시다." 그러나 만일 제니가 그때의 실정을 파악했더라면 그녀 역시 자기 자신이 상황에 맞추도록 함으로써 어느 정도 타협적으로 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사실 데이빗은 헤든과 합작하여 성공을 거두고 잇었다.그는 헤든을 따라 지방의 공제조합 회의가 열릴 대마다 참석하곤 했다.그때마다 그는 연설을 해줄 것을 요청받곤 했는데,세그힐에서는 지역 공회당에 1천 500명의 청중이 모인 앞에서 사우스 포트 결의안의 문제에 관하여 연설을 했었다.헤든은 사실 그 회의가 열리기로 결정이 되자 매우 걱정이 되어 데이빗이 모든 문제를 처리하도록 그에게 일임해버렸던 것이다.그런데 그 회의 때의 연설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그가 연단에서 내려왔을 때 그는 군중들에게 둘러싸였다.군중들이 그와 악수만이라도 나누고 싶어 야단들인 것에 그도 어리둥절했다.76세의 고령에 술꾼이고 사고덩어리로 정평이 있는 재크 브리그즈 노인은 세그힐 조합 지부의 어른격인 인물이었다.그 노인은 데이빗의 팔뚝을 잡고 아프도록 흔들었다. "정말,"재크 노인은 목이 쉰 데다가 사투리가 심했다."자넨 굉장히 훌륭한 연설을 했네.난 많은 사람들의 연설을 들었지만서도 자네보다 잘 하는 말을 못 들었다니까.자넨 아마 굉장히 높게 될 거야.이 사람,수고했네!" 그리고 헤든 역시 흥분한 얼굴로 그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무학자인 헤든이 데이빗을 저혀 질투하지 않는다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은 이것으로써 더욱 명확해졌다.헤든은 친구가 별로 없었다.그의 격렬한 성격이 어떤 우정도 지닐 수 없게 했다.그런데 헤든은 처음부터 데이빗이 마음에 들었다.헤든은 데이빗이라는 인간에게서 흔히 볼 수 없는 청렴한 정신을 발견했던 것이다.지금까지 인간 쓰레기들을 너무도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헤든은 데이빗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자기의 타고난 천성을 잘 발휘할 수 있는 꼭 맞는 자리를 찾은 데이빗이 그는 자랑스러웠다.침착하고도 통찰력이 뛰어나며 진지한 타고난 웅변가,현명하면서도 정열적이고 성실한 인간인 그가 자기들의 동료,언제나 업신여김만을 당하는 보잘것없는 인간들을 위해서 큰 일을 할지도 모를 사나이라는 것을 헤든은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이다.헤든은 자기 자신을 엄격히 타일렀다.어렵게 만난 보통이 아닌 이 인간을 비꼬거나 질투하지 않도록 하자.그리고 이자를 끝까지 도와주기로 하자!라고 그는 스스로에게 맹세했다.타인캐슬 시의 여러 신문에 차츰 이런 소식이 실리기 시작하자 역시 가장 기뻐하며 읽은 사람은 헤든이었다.타인캐슬의 신문들은 데이빗이라는 새로운 기삿감을 발견했던 것이다.슬리스케일에 뿌리를 단단히 박고 있는 교묘한 악폐에 대한 그의 공격은 특종이 별로 없던 그 당시의 신문사로서는 단비와 같이 고마운 기삿거리였다.때때로 타인캐슬의 여러 신문들은 데이빗과 그의 활약을 '슬리스케일 읍의회의 분규!','슬리스케일의 골칫거리 인물 다시 활약!'이라는 식으로 표제를 화려하게 붙여 더들곤 했다. 헤든은 데이빗의 즉흥적인 통쾌한 답변들이 실린 기사를 볼 때마다 파안대소를 하는 것이었다.그는 여전히 신문에 고개를 박은 채 "정말 그 새끼에게 그런 말을 했나,데이빗?"하고 묻는 일도 있었다. "별로 그렇게 좋은 대답은 못 됐습니다만... ." "래미지 새끼의 그 지독스런 도살장이 돼지 도살에 적합치 않다고 자네가 그놈에게 말했을 때,그놈의 상판때기가 어땠는지 내가 한번 봤더라면 좋았는데!" 데이빗의 타고난 겸손한 성격은 더욱더 톰 헤든과의 일에 도움이 되었다.만일 그가 조금이라도 잘난 체하는 기미를 보였다면 헤든은 그를 벌써 떠나버렸을 것이다.그러나 그는 그러한 태도를 보이는 일이 없었다.헤든은 타인캐슬의 '아거스'지에 실린 데이빗을 칭송하는 기사를 잘라서는 정성스럽게 청색 연필로 줄까지 그어서 옛 친구 해리 뉴전트에게 보내주었다. 제니는 그러한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거기에다 제니는 인내심이 없는 여자였기 때문에 데이빗이 일에 열중하고 있는 것을 자기에게 소홀히 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했고,그렇게 생각하자 밈칠 지경이 되고 말았다.그래서 그녀는 다시 머치슨 상점의 환자용 포도주를 애용하는 기분 좋은 위안을 찾아내게 되었다.1919년 봄,제니는 상당한 포도주 상용자가 되어 있었다.그리고 바로 그때 정신적으로 매우 큰 충격을 주는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 5월 5일 일요일에 찰리 가울런 노인이 사망했다.찰리는 6개월 동안이나 신장염을 앓고 있엇다.죽을 즈음에는 온몸이 퉁퉁 봇고 옆구리에서 끊임없이 물이 나오는 고통을 당하다가 그만 하느님에게로 가고 말앗던 것이다.평생 동안 별로 물을 좋아하지 않았던 찰리가 마지막 판에는 뱃속에 물이 들어찬 채로 죽었다는 것은 묘한 느낌을 안겨주었다.그리고 찰리는 아무 돌보아주는 이도 없는 쓸쓸한 가운데에서 혼자 비참하게 죽어갔다.그 이틀 후에야 조가 슬리스케일에 나타났다. 조가 슬리스케일에 온 것은 굉장한 소동을 일으키는 대사건이었다.그는 화요일 아침 진한 초록빛 제복을 입은 운전사가 모는 번쩍거리는 25년 형의 최신식 자가용을 타고 왔다.조는 앨머 달동네 자기 집 앞에서 차를 내리자마자 곧 입이 딱 벌어진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버렸다.집에는 해리 오글과 새고 부임한 탄량 검사원인 제이크 윅스,넵튠 탄과의 갱내 계원 등 몇 사람이 와 있었다.장례식이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조가 굉장한 출세를 했다는 소문은 다들 잘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의 변한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저 아연할 뿐이엇다.과거에 조의 감독이었던 프랭크 윔슬리가 당장 그의 이름에다'나으리'라는 말을 붙여 불렀다.조는 점잖으면서도 기막힐 정도로 멋을 부리고 있었다.덮개를 씌운 구두에 커프스 버튼은 광택 안 나는 순금이었고,시계줄도 최상품인 백금이었다.면도를 깨끗이 한 준수한 얼굴에 손톱엔 매니큐어를 발라 반들반들 빛나는 것이 부유한 사업가의 모습을 유감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해리는 파라다이스 탄광에서 손수레 탄차를 밀고 있던 당시의 어린 조에 대한 기억과 싸우면서,너무나 변해버린 모습에 위압감을 느껴 어색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렇게 만나다니 기쁘네,조.우리들 몇 사람이 돈을 좀 마련했지.자네 부친의 장례식은 우리 손으로 하고 싶어서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요,해리."조는 과장된 얼굴로 화를 냈다."당신은 지금 양로원에 있던 노인처럼 우리 아버지를 취급하는 모양인데 그렇게 빈궁했단 말이오?" 그의 눈은 조금도 변함이 없는,오히려 더 더러워진 부엌 주위를 한 바퀴 휙 둘러보았다.그 부엌은 바로 그가 칼날에 묻었던 고기 파이 국물을 혓바닥으로 핥아 먹곤 하던 곳이었다.그의 눈길은 다시 아버지 시체가 들어 있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검은 관으로 떨어졌다. "기가 막혀서."그는 갑자기 외치듯이 말했다."왜 아무도 내게 알려주지 않았소?왜 당신들은 내게 편지도 보내지 못했는가 말이오?당신들은 모두 내가 어떻게 산다는 것을 알고 있지들 않았소?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이것이 그리스도교를 믿는 나라인가,아니면 뭔가?불쌍한 노인을 이런 식으로 돌아가시게 했다니,당신들은 정말 부끄럽지도 않소?내 공장으로 잠깐 '전화'를 걸어준다는 것이 그렇게도 힘드는 일이란 말인가... ." 그는 장례식에서도 애정에 넘ㅁ쳤다.묘소 앞에서는 커다란 명주 손수건에다 얼굴을 묻고 큰 소리로 울며 눈물을 쏟았다.그러한 행동이 그에게 어욱 호감과 신뢰를 갖게 해주었다는 것을 누구나 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묘지에서 곧장 램 가의 피킹즈 집으로 차를 몰고 가서 화려한 묘석을 주문했다. "청구서를 내게 보내주시오,톰."그는 또 웅변을 토했다."비용은 문제가 젼혀 안 되니까!"그 후 톰은 그에게 청구서를 보냈다.그러나 회답이 없어 몇 번이나 보내야 했는데 그가 돈을 받았다는 소문은 아무도 듣지 못했다. 장례식이 끝난 후 조는 성공한 인간이 흔히 하는 식으로 감개무량한 얼굴로 읍내를 한 바퀴 돌앗다.그는 앨머 달동네의 집을 찍은 사진을 갖고 싶다고 해서 해리 오글의 마음을 끌엇다.그것도 아주 크게 확대한 사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해리는 사진사 블레어에게 급히 부탁하여 그 집 사진을 찍어 청구서와 함께 조에게로 보내달라고 했다. 그날 마지막으로 조는 옛 친구 데이빗을 만나기 위하여 잠깐 들렀다.그가 슬리스케일을 방문했다가 이곳까지 온다는 소식은 조보다 앞서서 그 집에 도착했다.제니는 그것을 데이빗에게 알리는 한편 약간 흥분된 마음으로 조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조는 제니의 극진한 환대를 가볍게 사양했다.그는 타인캐슬의 센트럴 호텔에서 만찬 약속이 있었던 것이다.제니는 주춤거렸다.그러나 실망을 꾹 눌렀다.조는 아주 친근한 듯한,연인 사이에서나 보임직한 시선으로 제니를 훑어보는 것이었으나 제니는 더욱 맥이 빠졌다.이젠 모든 것이 다 틀려버렸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녀의 눈빛에는 즐거운 빛이 싹 가시고 말았다.그리고 교태도 사라졌다.그녀는 그의 앞에 말없이 앉아 잇엇다.몸을 떨면서 모처럼의 좋은 기회를 놓친다는 아쉬운 마음을 안고서. 그러나 그녀는 귀에 온 신경을 모았다.조가 자신에 대해서 떠들어대는 이야기의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그러는 가운데 그녀는 두 사나이를 비교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조의 혁혁한 성공과 데이빗의 비참한 실패를. 조는 매우 솔직하게 말했다.조에게는 언제나 솔직한 면이 있었고,그것은 그를 더욱 멋있게 보이게 했다.그는 전쟁이 너무 일찍 끝났다고 보는 것이 분명했다.그리고 이번 전쟁은 그다지 나쁜 전쟁은 아니었다는 결론이었다.그 덕분에 그는 굉장한 부자가 되었기 때문이다.조는 순금으로 된 담배 케이스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온 방 안은 이국적인 터키의 향내로 가득 찼다.조는 몸을 앞으로 내밀고는 다정스레 데이빗의 무릎을 툭툭 쳤다. "우리는 밀링튼의 주물공장을 사들였지.짐 모슨과 손을 잡았다네.가엾은 스탠리 사장에겐 정말 안된 일이지만,그는 이젠 영원히 번마우드에서 나오지 못할 걸세.그의 부인과 함께 있다네.그는 플래트 그곳에서 일을 할 수가 없어진 거야.좋은 사람이었는데 말이야.그러나 착실한 점이 좀 부족했지.그는 완전히 폐인이야.신경이 완전히 망가졌다는 소문이더군.아니,이렇게 된 것이 그 친구에겐 가장 좋을 일이었는지도 모르지.우리가 그의 손에서 공장을 인수한 것이 말이야.그는 역시 상당한 값을 받아갔으니까.정말 그때 그치는 상당한 값을 받아갔다네." 조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그리고 담배연기를 빨아들이며 데이빗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그것은 그의 허풍스러운 이야기를 믿게 하는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우리 회사에서 넵튠 탄과의 새로운 시설 자재를 주문받았다는 걸 자넨 알고 있었지? 뭐,그래.우리 회사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재빨리 본래의 일로 돌아갔거든 모든 얼간이들이 소구경 포탄 주물의 쓰레기 더미 위에 눌러앉아서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우린 탄광 도구와 받침 기둥과 운반 용구 들의 제조로 되돌아간 것이라네,알겠나?" 그러한 이야기 중간 중간에 조는 여전히 그 흉금을 탁 터놓은 듯한 미소를 짓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전쟁 중엔 탄광에서 모두 생산,생산,하며 떠들었지.영국 영토 내의 탄광이라고 한다면 어느 하나도 설비의 개선 같은 것을 할 시간이 없었어.자재가 손에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해도 말이야.물론 첫째는 자재를 구할 수가 없었지만 말일세.그래서 새태가 회복되면 모두가 자재,자재,하고 아우성을 칠 것이라는 걸 짐과 나는 생각했고,또 그들이 그렇게 아우성을 쳐도 짐과 나처럼 일찍 깨달은 자들이 없으리라는 것도 생각했지." 조는 점잖게 한숨을 한번 내쉬엇다. "이렇게 해서 결국 우리가 넵튠의 주문을 받게 된거야.아하하하... .우리는 5만 파운드의 물건을 올해 안으로 넵튠 탄광에다 갖다 바쳐야 한다네." 전설 속에서나 들어봄직한 5만 파운드라는 금액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조의 말은 싸구려 가구와 터키 담배 향내로 꽉 차버린 그 조그마한 방 안에서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특히 그것은 가엾은 제니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조가 그렇게도 어마어마한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니!그녀는 의자에 몸을 움츠리고 앉아 손망과 놀라움으로 달아오르는 마음을 꾹 눌렀다. 조는 자기가 만들어내는 그 분위기의 효과를 알아차렸다.제니의 눈 속에 담긴 허기짐,데이빗의 눈에서 ㅅ아지는 차가운 적개심을 보았다.그는 더욱 흥겨워졌다. "그런데 말이야,우리는 공장 이름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그 연구로 또 바쁘다네.모슨 가울런 회사라고 할까 생각 중인데 그 명칭이 아주 멋있다고 생각 안 되나?미안하군,회사에 관한 이야기만 자꾸 해서... 사실 자네에게는 흥미도 없을 텐데.그런데 나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을 생각이네.손이 닿는 대로 온갖 사업을 다 하고 있지.이를테면 자네는 '종전 천리국'이라는 말 들어봤겠지.전혀 못 들었나?" 조는 유감스럽다는 듯이 혀를 찼다. "아니,자네도 그러한 것쯤은 정말 소문이라도 들었어야 하는 것인데.자네가 그런 기관에 관한 소식을 듣고 있었다면 약간의 돈도 벌었을지 모르지.물론 무엇이든 하자면 뒤에서 대어주는 자본금이 있어야 하겠지만.정부는 말이야,지금까지 전력을 기울여 온갖 물건을 사들이고 또 발주하기도 했고 징발해왔었는데,이젠 그 물건들이 몽땅 필요 없게 되었다 이 말씀이야.고무로 만든 그 늘었다 줄었다 하는 신발에서부터 상선,함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다 그렇단 말일세.그리고 정부가 그러한 것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스스로 깨닫게 되면 자연히 정부에서는 그것들을 없애려 할 것이란 말이야!" 국왕의 충성스런 신민인 조는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뒤로 젖히면서,미력으로나마 정부가 물건을 없애려는 것에 협조한다는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기특하다는 듯 이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었다. "바깥에 있는 내 자가용 봤나?" "그럼 보고말고요,조.정말 멋있어요." 제니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다지 나쁘지는 않지,그다지 나쁘진 않아."조도 시인했다."산 지 불과 한 달밖에 안 되네.저걸 어떻게 해서 입수했는지 그 이야길 한번 들어보게." 그는 조그마한 갈색 눈을 번쩍거리며 잠시 숨을 돌렸다. "6주일 전 짐과 나는 모어페드 너머에 있는 정부의 어떤 물건을 구경하러 갔었지.우리는 조림지 가까이의 제재공장에서 사용하다가 급해서 깜박 잊고 그냥 가버린 두 대의 트랙터를 우연히 발견했단 말일세.그 트랙터는 썩은 재목들 사이에 있었는데 완전히 녹이 슬어버렸고 무성한 잡초에 바퀴가 가려버릴 정도였다네.아무 쓸모 없는 고철이었지.그러나 잘 살펴보면 그것은 신품과 똑같이 한 대에 2,3천 파운드의 값어치가 있는 것이었어." 조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계속했다. "짐과 나는 가 트랙터를 고철값으로 불하를 받아가지고 와버렸지.우리는 타인캐슬까지 그 두 대의 트랙터를 끌고 와서는 깨끗이 청소를 하고 페인트칠을 해서 적당한 가격을 받고 팔아 넘겼다네.이익금은 둘이 나눠 가졌지.저 밖에 있는 자가용이 바로 그것의 소득이라네." 침묵이 흘렀다.이윽고 제니의 창백한 입술에서 찬탄의 한숨이 뒤틀리듯 새어나왔다.그 경탄스러운,정말로 경탄스러운 자가용이 바로 바깥에 서 있는 것이다.간단한 단 한 번의 거래를 통해서 말이다.정말 머리를 써도 묘하게 썼다.아아,그런 이야기들은 그녀의 성격으로는 듣고 넘겨버릴 수가 없는 것이었다.가슴을 누가 쥐어뜯는 것처럼 괴로웠다. 조는 거기까지 이야기를 하고는 그만두었다.조는 이야기를 끝내야 할 때를 잘 알고 있었다.그는 벽난로 선반 위에 있는 에나멜 칠을 한 시계 쪽으로 눈길을 옮기다가는 깜짝 놀란 듯이 벌떡 일어섰다.번쩍거리는 금시계를 다시 꺼내어 보았다. "이크!가봐야 할 시간이 되었군.어물어물하다가는 짐과의 약속시간에 늦겠는걸.이렇게 빨리 가게 돼서 미안하지만 7시에 센트럴에 가야 하기 때문에 이만 작별해야겠네." 그는 악수를 하고 문 쪽으로 걸어가면서도 수다스럽게 웃고 지껄이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그러한 모습이 그를 더욱 호인처럼 보여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가버리자 데이빗은 그 특유의 냉소를 띠우며 제니를 바라보았다. "바로 이게 조라는 인간이야,잘 봤겠지." 제니는 화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요.그게 조라는 걸 나도 알아요.당신은 어떤 뜻에서 그런 말을 하시는 거죠?" 제니는 뾰로통하게 성이 나서 대들었다. "아아,아무것도 아니야,제니.그러나 이제 그 친구가 가고 나니,그 친구가 아직도 내게 3파운드의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나서 하는 소리지." 제니는 더욱 화가 치밀었다.그것은 선망과 함께 조가 그렇게도 냉정하게 자기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음으로 인한 분노였다.그녀의 입술이 심하게 비뚤어졌다. "3파운드라구요?"그녀는 냉소했다."그런 돈은 조에게는 음식점의 웨이터에게 던져주는 팁 정도죠.그이는 부자가 될 만한 사람이에요.그 사람은 당신같은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인종이 다른 거예요.그이야말로 사나이다운 사나이죠.그이야말로 일을 할 줄 아는,세상에 나가서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이란 말이에요.당신은 왜 그이처럼 못 되죠?그의 자가용과 멋있는 양복과 보석과 또 그가 피우던 담배 좀 보세요.그를 좀 똑똑히 보란 말이에요.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사람인지 좀 부끄러워할 줄 알란 말씀이에요." 제니의 음성은 아우성을 치듯 높아졌다. "조라는 사람은 자기 아내를 즐겁게 해줄 줄 아는 멋있는 남자예요.고급 레스토랑이나 사교장에도 데리고 다니면서 품위 있는 생활을 하도록 해줄 겨예요.그런데 당신은 뭐예요?내게 뭘 해주었어요?당신은 아예 조를 따라갈 자격도 없어요.당신은 정말 졸장부야.인생에서 뒤쳐진 패배자!그게 바로 당신이에요.그개 바로 조가 지금 평가하는 당신이란 말이에요.지금 그이는 자기의 멋있는 자가용을 타고 가면서 당신을 비웃고 있을 거예요.그이는 당신을 생각하면서 혼자서 껄껄대고 있을 거란 말이에요.인생의 낙오자라고 불쌍히 여기고 있을 겨예요.낙오자,낙오자,낙오자아!" 그녀의 목소리는 날카로운 금속성처럼 방 안에 울려 퍼졌다.그녀의 입술엔 거품이 흐르고 눈에는 증오가 불탔다. 그는 그러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주먹을 꼭 움켜쥐고 서 있었다.그는 끝까지 자기 자신을 눌렀다.그리고 이 여자를 발작에서 벗어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혼자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스는 몸을 돌렸다.방을 나와서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제니는 응접실에 남아서 숨을 뜨겁게 몰아 쉬었다.그녀는 데이빗 뒤를 ㅉ아 부엌으로 가서 끝장을 내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았다.그녀는 아직도 자기 혀 끝에 남아 있는 비웃음과 모욕적인 말들을 억지로 삼켰다.그러한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을 그녀는 알고 있는 것이다.그녀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값비싼 고급 담배의 냄새가 아직도 방 안 공기에 맴돌고 있어 그것이 그녀를 더욱 미치게 했다.그녀는 방에서 뛰쳐나와 모자를 쓰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귀가한 것은 밤이 늦어 거의 11시가 다 되었을 때였다.그러나 데이빗은 자고 있지 않았다.그는 부엌의 조리대 옆에 앉아서 이제 막 실시되고 있는 '신석탄산업 법령'의 초판 책자에 열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자를 약간 삐뚜름하게 쓰고는 비틀거리며 부엌으로 들어섰다.그녀는 손을 댈 수 없을 정도고 술이 취해 있었다. "여보."그녀는 다시 빈정댔다."아직도 돈벌이에 바빠요?" 그녀의 말소리는 완전히 혀가 꼬부라졌으나 얼굴 표정은 천연덕스러웠다.데이빗은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그녀가 그토록 취한 것은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나 혼자 내버려두어요." 그녀는 흔들거리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내게 손-을 대지 말아요.손 저리 비켜요.당신은 내게 그런 도움을 줄 만한 자격도 없어요오!" 그의 내부에서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 터져나왔다. "제니!"그는 애원했다. "지에니!"그녀는 그의 말을 흉내내며 술에 취한 얼굴을 일부러 치켜들었다.그녀는 데이빗 쪽으로 비틀거리며 다가갔다.옆구리에다가 두 손을 짚고는 똑바로 섰다. "당신 아주 좋은 사람이에요.이런 곳에 나를 쳐박아두어 아까운 청춘을 썩히게 하고.그러나 당신이 전쟁에 나가 있을 때 내가 재미를 많이 봤다는 걸 모르고 있죠?난 지금도 재미를 보고 싶다 이 말이에요!" "제발 그만둬,제니." 그는 그녀에게 사정했다.그는 고통으로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당신,어서 가서 누워요." "난 눕지 않겠어!당신 같은 것하고는 같이 안 자... ." 그녀는 깔깔대고 웃었다. 그녀의 거동을 지켜보던 데이빗은 갑자기 자기들의 아이 생각을 했다.그 생각은 제니가 지금 이렇게 타락한 행동을 보이고 있는 것을 더욱 참을 수 없게 했다. "제발,제니,정신차려.지금 내가 너에게 아무것도 아닌 인간처럼 보인다 해도 우리들의 아기를 생각해봐,난 그 일에 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난 네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혼자서만 참았어.그 아이 일을 생각한다면 감히 이렇게 할 수는 없을 거야." 그녀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그녀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점점 더 크게 웃어댔다. "난 그걸 당신께 얘기해줘야겠어요."그녀는 조소했다."오랜 동안 참아왔지만 이제는 해야겠어.우리 아기라고?좋아하지 마.이 친구야.그 아이가 당신 아들인지 어떻게 알지?" 그는 이해할 수가 없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바보야."그녀는 갑작스레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그 아인 조의 아들이었어!" 그는 비로소 이해했다.그녀의 말뜻을.그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되어버렸다.그는 사납게 그녀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그게 사실이겠지?" 흐릿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던 그녀는 일시에 술이 확 깨어버리는 느낌이었다.자기가 너무 도에 넘쳤다는 것을 겨우 알았다.그녀는 데이빗에게 그러한 사실을 누설할 마음은 절대로 없었다.겁에 질린 그녀는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그녀는 그 자리에 무너지듯 쓰러졌다.데이빗의 다리를 안은 채 그녀는 미친 듯이 울어댔다. "여보,여보!미안해요,여보.난 나쁜 사람이에요.아주 나쁜 여자,정말 몹쓸 여자예요.이제부턴 다시는 놀아나지 않겠어요.다시는,다시는,다시는.착한 사람이 될게요,착한 아내가 되겠어요,난 몸이 불편해요,그래서 괴로워요.정말 몸이 아파요.오늘은 힘을 내려고 조금 술을 마셨던 거예요." 그녀는 오래도록 울고 또 울었다. 엄하고도 차가운 얼굴을 한 데이빗은 그녀를 소파 쪽으로 질질 끌고 가서 그녀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받쳐 올렸다.그녀는 미친 듯 몸부림을 치면서 말을 계속했다.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여보.오,정말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전 실제로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절대로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그이가 내게 추근거렸기 때문에 그리고 기건 이제 다 끝났어요,몇 년 전에.조금 아까 당신은 그렇다는 걸 다 보셨잖아요.당신은 나를 그이의 발바닥에 묻은 진흙 같은 여자라고 생각하실지도 몰라요.당신은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분이에여.그런데 난 몸이 아파요.여보,아아,난 몸이 정말 좋지 않았어요.몇 년 동안 휴일 한번 갖지 못했잖아요.정말 몸이 불편해요.아아!한 번만 용서해주신다면,여보,여보,여보... ." 그는 그녀로부터 눈을 돌렸다.그는 그녀 스스로 자신을 매섭게 매질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그에게는 다시 견딜 수 없는 아픔이 저 깊은 내부로부터 밀려오고 있었다.그녀의 말은 정말 무서운 일격이었다.자기는 죽은 아들,로버트를 회상하는 것을 좋아했다.가슴속에 남몰래 그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다.그런데 이 여자는 그것마저 더럽히고 만 것이 아닌가! 이윽고 그녀의 울음소리가 낮아지고 발꿈치를 굴러대던 것도 조용해졌다.침묵이 흘렀다.데이빗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극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말자.제니,네가 한 말 전부가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을 알겠어.그리고 너는 몸이 좋지 못해,잠깐 휴양을 하면 좋을 거야.서섹스의 댄 티즈데일의 농장엘 좀 가 있으면 어떨까?그건 쉽게 주선할 수 있지.난 댄과 연락을 하고 있기 때문에... ." "농장으로요?"제니는 숨이 막힐 듯 흥분했다.고뇌에 차 있으면서도 호기심이 빛나는 눈을 번쩍 치켜들었다."서섹스에 내려가 있으라구요?" "그래!" "아아,여보."제니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버림받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너무도 기뻤다.그리고 데이빗의 친절함이 너무 고마웠고,모든 게 너무 좋았다. "당신은 저에게 너무도 고마운 분이에요.여보,저를 한번 꼭 껴안아주세요.그리고 아직도 나를 사랑한다고 말씀해주세요." "그곳에 가서는 술은 입에도 대지 않겠다고 약속해주겠어?" "하구말구요,여보,하구말구요.약속하죠." 흐느껴 울면서 그녀는 착하고 정숙해지겠다는 맹세를 진심으로 했다. "그럼,좋아.내가 주선을 해주지,제니." "아아,여보."목이 메인 채 흐느끼면서 그녀는 그에게 매달렸다."당신은 정말 이 세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가장 훌륭한 남성이에요." 4 그 다음달 6월 초순의 어느 날 아침 데이빗은 타인캐슬의 센트럴 정거장에서 제니를 전송했다.제니가 윈러시로 내려가 있도록 그레이스 티즈데일과 합의를 보는 일은 간단했다.그레이스는 아주 흔쾌히 승낙을 했다.데이빗의 월급이란 쥐꼬리만큼이었으니 제니의 휴양비도 많이 줄 수 없었지만,그레이스가 보낸 솔직하고도 가식 없는 편지를 볼 때 환영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니는 휴양을 간다는 일에 또 어린아이처럼 흥분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그녀는 기분이 좋으면서도 미안한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닭들에게 모이를 주고,귀여운 어린 양을 얼싸안으며 3주일 동안 평화스럽게 지내다가 신선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전보다 더욱 예뻐져서 데이빗을 만나러 돌아오는 자기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녀는 데이빗과 함께 차 안 객실의 열린 문 옆에 서 있었다.객실의 구석자기에는 신문과 잡지 한 권까지 놓여져 있었다.그녀는 잡지까지 사주면서 섬세한 배려를 잊지 않는 데이빗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그러나 그것은 데이빗이 잡지를 잘 선택해주었다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다만 한 여성이 여행을 떠날 때는 잡지 한 권쯤 가지고 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고,제니는 의당 그래야 할 일을 할 때보다 더 행복할 때는 없었다.그녀는 데이빗에게 끝없이 재잘대면서 가끔 그에게 부드럽고도 감상적인 시선을 보냈다.그것은 회한과 그 보상의 진지한 바람이 담긴 것이기도 했다.데이빗은 전혀 말이 없었다.그녀는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다만 막연히 자기가 바보스럽게 누설해버린 그 비밀을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할 뿐이었다.그녀는 그가 그 모든 것을 이제 다 잊어버렸다고 혹은 그 사실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믿고 싶었다.그것은 그가 한 번도 그 일에 대해서는 말한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좌우간 그가 자기를 용서한 것만은 확실했다.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그녀의 허영심을 만족시켰다.자기가 털어놓은 이야기가 그에게 얼마나 무서운 타격이었는가 하는 것은 전혀 깨닫지 못했다.그는 그 전까지는 그녀가 정절을 지키고 있다고 완전히 믿고 있었다.그리고 귀여운 로버트의 추억을,깊은 애정을 가지고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다.그런데 술에 취한 경솔한 한마디로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산산조각으로 만들고 말았다.그는 매우 괴로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책망하고,엄하게 힐문하여 모든 지저분한 내용을 자백시키고 초죽음이 될 때까지 그녀를 때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그것 때문에 제니는 그가 아무 괴로움도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속단했다.그녀는 데이빗을 사실상 모르고 있었다.그에게 침묵을 지키게 하는 그 성격의 강인함과 훌륭함을 그녀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었다.그녀는 마음속으로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고 있었으며 약간의 경멸하는 마음까지 있었다. 그녀는 정거장 끝에 있는 커다란 시계를 바라보았다. "어머나!"그녀는 호들갑스럽게 놀라며 말했다."거의 시간이 다 됐네!" 그녀는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데이빗이 문을 닫으려는데 기적이 울렸다.그녀는 그를 다정하게 포옹했다.그녀의 마지막 말은 더욱 달콤한 것이었다. "제가 없으면 당신 쓸쓸하시겠죠?여보,그렇죠?" 그녀는 기쁜 한숨을 쉬며 자기에 앉았다.그 여행은 길었짐나 잡지와 샌드위치가 있고 동승자들을 재미있게 살펴보느라고 지루할 틈도 없었다.제니는 사람들을 보면 단번에 어떤 계층의 사람인가를 알아내는 이상한 재주가 있는 것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주위 사람들의 옷차림과 장신구를 세세히 살펴보며 값을 매겨나가는 것 또한 여간 재미있지 않았다. 제니는 2시에 기차를 한 번 갈아 타야 했다.3시가 되자 식당칸으로 가서 차를 마시며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된 멋있는 금발 청년과 점잖은 대화를 나누었다.사실 그 청년은 의료기 외판원이라고 했다.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킬킬대고 웃었다.그러다가 컬러코츠로 신혼여행을 갔을 때에 데이빗을 속이기 위해서 지어냈던 이야기 속의 대머리 장사꾼 생각이 떠올랐다.그리운 데이빗!그 청년은 아주 멋있는 금발이었지만 그녀는 무관심했다.다만 그 청년이 자기의 직업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으므로 예의상 흥미를 보였을 뿐이었다.상대가 작별 인사를 했을 때도 과연 숙녀답게 얌전히 악수를 나누며 매우 점잖게 행동을 했다. 4시 반에 그녀는 바넘 승환역에 도착했다.댄이 정거장에 마중을 나와주었다.댄은 더 몸집이 커졌고,건강이 넘쳐 보이는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다.그는 헌 군복 셔츠에 코르덴 바지 위에는 각반을 두르고 있었다.댄은 뒷부분이 트럭처럼 되어 있는 소형 포드 자동차를 몰고 왔다.그녀의 여행가방을 마치 깃털처럼 가볍게 차에 싣고 그는 윈러시의 농장으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농장에 온 것도 기뻤지만 그레이스의 환영은 그 농장보다 더 그녀를 기쁘게 했다.그레이스는 막 낳은 달걀과 케이크와 서섹스의 그리들 케이크라고 하는 맛있는 과자를 따끈한 차와 함께 준비했다.모두 함께 자기에 앉았다.제니,그레이스,댄,꼬마 캐럴라인 앤 그리고 아직 아기인 토머스-이 아이는 디커리 독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때에만 대답을 했다.-였다.그 아이는 그레이스 오른편의 높은 의자에 앉혀졌다.그들이 자기잡은 곳은 돌바닥으로 된 넓은 부엌방이었다.제니는 그 그리들 케이크와 신선한 달걀과 디커리 독에게 황홀할 정도로 마음이 끌렸다.제니는 그 모든 것에 넋을 잃었다.너무도 만족스럽고 좋았다. 차를 마신 후 그레이스는 제니를 농장을 안내했다.농장은 겨우 40에이커에 불과한 것으로서 그것도 퍼셀 노인으로부터 세를 내고 빌린 것이었다.그레이스는 눈치 빠른 제니가 이미 알아버린 것들에 대해서 감추려 하지 않았다.그레이스는 아주 솔직하게 댄과 자기는 사실 너무 일이 벅차다고 말했다.양계는 댄이 주로 맡아 하고 있는데 힘이 드는 것에 비해 이득이 너무 박하다는 것이었다.그래서 여름철엔 피서객들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하숙을 치기도 하는데,그것이 부수입으로서는 꽤 괜찮다고 말하면서 그레이스는 미소를 지었다.그레이스는 자주 미소를 지었다.그녀는 댄과 캐럴라인 앤 그리고 디커리 독과 의 생활이 지극히 행복했던 것이다.그녀는 흑인 노예처럼 일을 해야 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그녀는 넵튠 탄광에서 댄을 빼낸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그 무서운 탄광으로부터 멀리멀리 떨어져 살 수 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그레이스에게는 돈 같은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레이스가 이처럼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하자 감복한 제니는 정말 그렇다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면서 그녀는 어쩌면 우리 남편과 그렇게 똑같은 말을 하느냐며 놀라기도 했다.사실 데이빗도 돈 같은 것이 무슨 상관이냐고 항상 말해오지 않았던가!그리고 지금은 자신도 그 말에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는 심정이기도 했다.자기가 그레이스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면 문제는 다르지만 말이다. 여행으로 지친 제니는 그날 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그리고 오랜만에 실컷 잘 수 있었다.이침에 일어나니 맑은 햇빛과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푸른 나무들과 소들의 울음소리가 한가롭게 들렸다.아아,정말 아름답구나!제니는 편안하게 누워서 생각했다.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기분이 아주 좋은 제니는 노래하듯 말했다.그러자 통통하게 살이 오른 귀여운 소녀-마을에서 그레이스를 도와주러 오는 소녀-가 제니를 위해 차를 들고 들어왔다.페그라고 불리우는 그 소여는 뺨이 버찌처럼 새빨갰고 짧고 통통한 다리가 유난히 드러나 보였다. 천천히 차를 마신 후 제니는 일어났다.화장복을 입고,황색 깃털로 장식된 슬리퍼를 신은 그녀는 우선 욕실로 갔다.욕실도 재미있게 되어 있었다.오래된 집을 별로 개조하지 않은 채 쓰고 있어서 넓은 마루에는 깔개 같은 것도 없었고,벽에도 벽지 대신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그레이스가 손수 페인트칠을 한 것이었다.밝게 칠해진 낡고 퇴색한 다른 것들까지 모두 밝게 해주어서 기분이 좋았다.목욕통도 새것은 아니었으나 매우 청결하게 에나멜이 칠해져 있었다.제니는 목욕을 했다.집에서는 절대고 아침에 목욕을 하는 일이 없었던 그녀였지만 이렇게 살고 있는 동안은 좀더 고상해져야 하므로 목욕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침식사 후 제니는 혼자서 농장을 돌아다니며 구석구석에서 신선한 매력을 발견했다.예쁜 병아리들,곡간의 특이한 냄새,향기로운 범의귀꽃으로 가득한,그레이스가 좋아하는 돌을 쌓아 만든 정원,꼬리를 흔들면서 뛰어 달아나는 귀여운 새끼돼지들.아아,시골은 얼마나 신기한 곳인가.제니는 로맨틱한 소설을 보는 듯한 황홀경 속에서 깊게 숨을 내쉬었다. 11시에 그레이스는 수영을 하지 않겠느냐고 제니에게 물어왔다.여름이면 댄과 그 가족들은 매일 수영을 하러 간다는 것이었다.아무리 정신 없이 바빠도 이 수영만은 빼놓을 수 없는 행사라고 그레이스는 말했다.댄과 이것만은 꼭 실행한다는 엄숙한 서약을 했다는 것이다.제니는 수영을 하지 못했지만 그들과 함께 바닷가로 나갔다.바닷가라곤 해도 농장 구석에 있는 볼품 없는 모래밭이었다. 제니는 모래밭에 서서 구경을 하고 그레이스와 댄과 아이들은 물 속으로 들어갔다.댄이 캐럴라인 앤을 맡았고,그레이스는 디커리 독을 안았다.그들은 얕은 물에서 싫증도 내지 않고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그러고 나서 두 아이들이 따뜻하고 보드라운 모래 위에 사지를 뻗고 누워 있는 동안 그레이스와 댄은 바다 안쪽 멀리까지 멋있게 헤엄쳐 갔다가 돌아오는 것이었다.그때의 그들은 마치 제니가 갖고 있던 잡지의 표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제니는 목구멍이 꽉 막히는 듯한 느낌이었다.그레이스의 단단하고도 늘씬한 몸은 햇볕에 그을러 아름다운 갈색이었다.그들은 다시 놀이를 시작했는데 디커리 독을 공처럼 서로 던지자 디커리 독은 무섭지도 않은 듯 좋다고 웃는 것이었다.캐럴라인 앤은 발가벗은 채로 그들 사이를 뛰어다니면서 디커리 독을 자기에게도 던져달라고 소리를 질러댔다.아름답고 즐거운 광경이었다. 이윽고 댄이 휴식이 끝난 듯 급히 포드 자동차를 몰고 피틀햄프튼으로 돌아갔다.제니는 깊은 생각에 잠기면서 그레이스와 함께 돌아왔다.이 행복한 사람들에게 돈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이들에게는 건강하고 신선한 공기와 즐겨 뛰어들 수 있는 바다,그리고 따뜻한 햇빛이 있는 것이다. 제니는 점심후에 당장 앉아서 네 장이나 되는 눈물에 젖은 편지를 데이빗에게 썼는데,그 안에는 단순한 전원생활에 대한 감탄과 즐거움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그 편지를 다 쓰자 그녀는 일부러 바넘 승환역까지 걸어가서 우체통에 넣었다.그녀는 자기가 아주 다른 사람처럼 변화되고 정화된 듯한 기분까지 느꼈다.이제야 겨우 본연의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같은 느낌이기도 했다.자기도 원하기만 하면 그레이스처럼 될 수 있을 것이다.못될 이유가 없는 것이다.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그녀는 오솔길의 울타리에서 콧 등을 내민 어린 새끼양을 다정스레 쓰다듬어주려 했다.그러나 새끼양은 도망을 쳐 들판의 한복판에 서서 근처의 건초더미에다 똥을 쌌다.그러나 상관없는 일이다.상관없는 일이고말고,모든 것이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멋있기만 한데,뭘. 그 다음날도 날씨는 맑고 햇빛은 따갑게 내리쬐었다.또 다음날도 그리고 또 다음날도 날씨는 여전히 좋았고 자연은 아름다웠다.그러나 그렇게 지나노라니 그렇게 멋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제니는 인간이란 시간이 감에 따라 무엇에나 익숙해지는 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농장이 좋은 건 틀림없으나 처음처럼 좋은 것은 아님도 바로 그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이상한 일이었다.그 다음 토요일 그녀는 바닷가에 앉아서 담배를 즐기면서 혼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그것은 댄과 그레이스가 친절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다.댄과 그레이스는 더 바랄 수 없을 정도로 변함없이 친절했다.그러나 이곳에 와있는 것도 이젠 약간 지루하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바닷가엔 사람의 모습이라곤 보이지 않았다.병아리들에게 모이를 준다는 것도 솔직히 말해서 이젠 지겨워졌다.거기다 그 돼지-그녀는 이 더러운 동물을 보는 것에도 아주 싫증이 났다. 그녀는 바닷가에서 일어나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바넘 읍까지 걸어보았다.바넘에서 담배 한 갑과 조간 신문을 샀다.그리고 메리도트 호텔에 들러서는 포도주를 한 잔 마셨다.이곳은 콧구멍만한 집이었다.그런데 이 고장 사람들이 이곳을 호텔이라고 부르는 것이 우스꽝스러웠다.맞은편 벽에 걸려 있는 배스 맥주회사의 광고용 거울에 비치는 자신이 무척 멋있게 보였다.이렇게 아름다운 자신의 자태를 보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메리도트의 심술궂은 노파뿐이었다.그 노파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주문한 것도 제대로 잘 갖다주려 하지 않았다.노파는 닭에게 모이를 주고 있었다.제니는 갑자기 견딜 수 없이 권태로워졌다.그리고 이곳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가련해졌다.그녀는 불쾌한 얼굴로 집에 돌아와서 자기 방으로 곧장 올라가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그것은 런던의 신문이었다.제니는 런던을 아주 좋아했다.그녀는 지금까지 런던에 네 번 가보았는데 갈 때마다 그곳이 더욱 좋아졌다.그녀는 런던 사교계의 소식을 몽땅 다 읽고 나서 이번엔 광고 쪽으로 눈을 돌렸다.광고는 더욱 흥미를 끄는 것이었다.그 중에서도 특히 경험 있는 판매원을 구한다는 내용에서 그녀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제니는 그날 밤 깊을 생각을 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은 비가 오고 있었다.당장 기분이 나빠졌다.제니는 멍하니 비 오는 것을 바라보았다.'하필이면 일요일에 비가 오다니.'그녀는 교회에 가는 것도 거절하고 집 안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캐럴라인 앤과 놀았다.오후가 되자 그레이스는 쉬러 가고 댄은 곡간으로 가서 건초를 쌓아올리고 있었다.조금 후 제니는 곡간으로 어슬렁어슬렁 들어갔다. "어머나,여기서 일하고 계시는군요."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댄에게 인사하면서 곁으로 다가갔다.상냥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그녀에게서는 교태가 흘렀다.댄은 덤덤한 얼굴로 웃지도 않고 그녀를 돌아보며 아는 척을 했다.그러나 그것뿐으로 그는 다시 등을 돌려 건초를 쌓는 일을 계속했다. 제니의 얼굴이 숙여졌다.그러나 자기의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하여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댄이라는 사람은 그레이스 외에는 어떠한 여자에게도 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는 터였다.그리고 아무 매력도 없는 무쪽같이 무뚝뚝한 사나이일 뿐이었다.그녀는 빗속으로 어슬렁거리며 걸어나왔다.'무쪽 같은 사나이'라고 그녀는 중얼댔다."빌어먹을 무쪽 같은 사나이!" 그 다음날도 계속 비가 왔다.제니의 불만은 더욱 커갔다.이렇게 썩어빠진 짐승의 동굴 같은 곳에서 자기는 얼마 동안이나 있어야 하는 것일까? 아직도 12일이나 더 남았다.그녀는 그것을 자신이 왜 견뎌내야 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그녀는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에 대해서는 잠시 잊어버리고는 이렇게 맥빠지고 싱거운 생활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이제부터야말로 그녀는 활기찬 삶을,좀 재미있는 것을 하고 싶었다.그러자 이 구석으로 자신을 보내버린 데이빗이 원망스러워졌다.아니 갑자기 증오스럽기까지 했다.나를 멀리 떠나보냄으로써 그는 기뻤을 것이다.그는 틀림없이 타인캐슬에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그녀는 사내들이 자기 아내가 없을 때에 어떻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데이빗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이 동굴 같은 곳에 자기가 틀어박혀 있는 동안 그는 분명히 자기 멋대로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제니는 데이빗과 자기와의 사이에 일어났던 모든 일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그러자 그녀는 자기가 이곳에 파묻혀 있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더 깊어졌다.자신은 주당 4파운드를 벌 수 있고 또 런던에서 재미도 볼 수 있는데 왜 바보같이 이렇게 있어야 하는가? 그녀는 사실 지나치게 물렁한 데이빗을 어떤 면으로는 사랑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다음날에는 해가 나서 대기는 아주 밝게 빛났지만 제니의 얼굴 표정은 조금도 밝아지지 않았다.집 안의 문이란 문은 모조리 다 활짝 열려 사랑스러운 미풍이 불어왔다.그레이스는 버찌 쨈을 만들고 있었다.자기네 과수원에서 직접 딴 싱싱한 열매였다.넓은 부엌방에서 그녀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행복한 듯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그녀는 제니의 기분이 과히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그래서 소젖을 짜서는 제일 먼저 제니에게 한 잔을 가져다주었다.거품이 이는 우유는 고소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난 우유가 싫다우." 제니는 고개를 흔들고는 햇빛이 비치는 마당으로 부루퉁해서 나가버렸다.벌들이 꽃 사이에서 윙윙거리고,마당 구석에서는 댄이 장작을 패고 있었다.들판 건너로는 소들이 나무 그늘 아래에서 새김질을 하며 누워 있엇다.아름다운 광경이었다.그러나 제니에게는 그렇지 않았다.그녀는 이제 이런 광경이 싫어졌다.싫을 뿐 아니라 미워졌다.그녀는 런던만이 그리웠고 마음은 런던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도시의 소음과 혼잡과 그 마력이 그리웠다.그녀는 다시 바넘에 가서 신문을 한 장 샀다.상점 바깥에 서서 광고란을 읽었다.꽤 많은 광고들을 다 읽었다.그 광고 중 하나가 자신에게 직장을 얻게 해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그녀는 정거장으로 걸어가 런던 행 기차를 물어보았다.4시에 출발하는 급행열차가 하나 남아 있었다.머리 속에서 번개 같은 생각이 지나가자 마음이 결정되었다.그날 오후 그레이스가 차를 끓이는 일에 분주한 동안 제니는 짐을 싸 들고 살짝 집을 빠져나왔다.그녀는 런던 행 4시 기차를 탔다. 그레이스는 제니를 부르러 갔다가 그녀가 짐을 구려 나가버렸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무척 당황했다.그녀는 부엌으로 뛰어내려왔다. "여보,댄!제니가 가버렸어요.우리가 뭘 잘못했을까요?" 댄은 큰 빵 조각에다 새로 만든 버찌 잼을 바르다가 그 손을 멈추었다. "정말 가버렸어?" "네.여보,우리가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을까요?야단 났네!" 댄은 빵에다 열심히 잼을 발라서는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걱정할 것 없어,그레이스.그 여자 별로 좋지 못한 사람 같아.그 여자 좀 이상하던데?" 댄은 역시 제니가 생각했듯 무쪽 같은 사나이는 아닌 모양이었다.그날 밤 댄은 데이빗에게 편지를 썼다.이유는 모르나 제니가 윈러시에 머무는 시간을 이처럼 단축시킨 것에 대해서 몹시 유감수럽게 생각하며 그녀가 무사히 귀가하기를 바란다는 정중한 내용이었다. 데이빗은 그 다음날 저녁에 그 편지를 받았다.그는 불안해졌다.제니는 도착하지 않았던 것이다.그는 집을 보아주고 있는 어머니를 건너다보았다.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제니가 다음날엔 도착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뭐니 뭐니 해도 그는 제니를 사랑했다.이제 그녀는 곧 올 것이다.그는 기쁜 마음으로 그녀를 기다렸으나 제니는 오지 않았다. 5 조용하게 그리고 다정하게 캐리 고모는 리처드를 휠체어에 태워,잔디밭 위에 서늘한 그늘을 만들고 있는 등나무 밑으로 똑바로 밀고 갔다.날씨는 따뜻하고 밝은 햇빛이 어디에나 가득했다.등나무에는 보라색 꽃들이 무성하게 매달려 나무 전체사 마치 커다란 보랏빛 꽃처럼 보였으며,깨끗이 깎인 잔디 위에 쾌적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었다.이 그늘 아래에서 캐리 고모는 부산스러운 움직임으로 리처드를 앉히기 시작했다.거기에는 바틀리를 시켜 리처드의 발을 올려놓게 하기 위해 특별히 만든 작은 발판과 뜨거운 기운을 가장 오래 지탱한다는 알루미늄으로 만든 보온병이 있었고,그 다음엔 온몸을 덮을 담요가 있었다.캐리 고모는 리처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특히 리처드의 병세가 드디어 '호전되고'있는 지금 그를 기쁘게 해주는 비결도 알게 되었로,그것은 또 그녀의 기쁨이었다. 캐리 고모는 리처드가 그날,즉 꼭 3개월 1주일 전에 자기에게 말을 걸었던 것,그러니까 병세가 호전되고 있다는 최초의 표시를 나타냈던 것을 절대로 잊어버리고 싶지 않았다.침대 속에서 커다란 나무 둥치처럼 말도 못 하고 무겁게 누워 그녀가 왔다갔다하는 것만을 멀뚱히 바라보면서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던 그가,둔하면서도 뱀처럼 무서운 눈길만 보여주던 그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던 것이다. "그게 너... 캐럴라인." 그 목소리를 듣자 그녀는 너무 놀라 까무러칠 뻔했다.그것은 너무나 큰 기쁨이었다.마치 엄마가 첫 아기의 첫마디 말을 듣는 그런 마음이고 느낌이엇다. "그래요,리처드 오라버니."그녀는 자기의 가슴을 움켜잡으면서 외치듯이 말했다."나,캐럴라인... 캐럴라인이에요." 그는 다시 더듬거리며 "내가 뭐라고 했지?"하고 중얼거렸으나 곧 흥미를 잃어버린 듯 다시 입을 다물었다.그러나 그런 것이 문제가 되자 않았다.그는 말을 했던 것이다. 병세의 호전에 감동된 그녀는 간호를 더욱 지성스럽게 했다.하루에 온몸을 두 번씩이나,그것도 아주 조심스럽게 씻겨주었고 매일 밤 알콜로 등을 문질러주고 향기로운 백분가루를 뿌려주었다.그렇게 해도 피부가 눌려 짓무르는 거승ㄹ 막기는 어려웠고,때로는 하루에 네 번씩이나 젖은 시트를 갈아주어야 했지만 그녀는 그것도 예사로 해치웠다.그러한 그녀의 노력으로 리처드의 병세는 더욱 호전되고 있었다.마비된 쪽의 동작도 아주 약간이긴 하지만 회복이 되기 시작했다.그리고 그녀는 마치 해리어트 생전에 그녀에게 해주었듯이 그의 오른쪽 팔을 한 시간 동안이나 계속해서 주물러주었다.그렇게 주물러주고 있노라면 그의 둔한 시선은 그녀에게 내내 머물러 있었고,그의 눈매에는 어떤 교활한 빛이 보이기도 했다.가끔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당신은 훌륭한 여자야,캐럴라인.그런데 저놈들이 나를 매수하려고 해.전류를 자꾸 보내고 있어." 사람들이 몸에다가 전기를 보내고 있다고 그는 믿고 있었다.그래서 밤이 되면 그는 늘 자기 침대를 벽에서 떼어 그놈들이 옆방으로부터 전류를 보낼 수 없도록 하라고 캐리 고모에게 부탁했다.그는 그 말을 할 때에도 단어를 몽땅 빼버리는 수가 있어 알아듣기 어려웠지만,캐리 고모는 잘 알아듣고 그대로 해주었다. 이렇게 전류에 대한 생각을 갖는 데에는 뭔가 원인이 있을 법하기도 하지만 캐리 고모는 그런 것엔 관여를 하지 않았다.그녀는 리처드의 판단을 의심해 본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그녀의 일념은 오직 그에게 용기를 주고 그 망상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는 것뿐이었다.그래서 그녀는 험프리워드라는 여류작가를 자주 생각했다.이 작가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로서 정신적인 긴장이 생길 때 그녀의 글을 읽음으로써 그것을 다 풀어버릴 수 있었던 적이 많았다.캐리 고모는 매일 오후와 저녁에 리처드에게 큰 소리로 그녀의 소설을 읽어주기 시작했다.우선 '로즈 부인의 딸'이라는 책을 시작했는데,이것은 캐리 고모가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이러한 것은 자기 본위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았고,게다가 너무 심취해버리곤 해서 읽어가다가는 눈물을 쏟는 일까지 많아 과연 리처드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그는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거나 아니면 자기 옷을 잡아당기거나 또는 입에다 손을 집어넣는 의미 없는 행동을 하다간 1장이 끝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저놈들이 나를 매수하려는 거야.전류를 보내서 말이야!" 날씨가 좋으면 그녀는 리처드를 휠체어에 태워 신선한 바깥 공기를 쏘이도록 했고,그가 잔디밭 위에 앉아 있을 수 있게 되자 그녀는 다시 한 단계를 높였다.즉 그가 책을 손에 쥐고 읽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리처드도 어쩐 일인지는 모르나 워드 부인의 소설에 매우 흥미를 가진 듯했다.그는 '로즈 부인의 딸'을 무릎에 놓아주면 우선 시계를 끄집어내서 보고는 연필을 손에 잡고 몹시 힘을 들여,그 책의 빈 곳에다가 왼손으로 "작업 시작 11.15"이라고 써넣었다.그리고 4페이지쯤 넘기고서는 그 페이지 밑의 빈 곳에다 "12.15*4 교대시간 종료"라고 써넣는 것이었다.그 일이 끝나면 그는 어린아이처럼 놓아했다.손이 떨려서 거의 글씨를 읽을 수가 없을 정도인데도 그는 언제까지나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자리에 앉자 캐리 고모도 그의 옆 걸상에 따라 앉으면서 말했다. "힐다한테서 편지가 왔어요.그 앤 또 다른 시험에 합격했대요.뭐라고 했는지 들어보세요." 그는 등나무의 커다란 꽃송이들 쪽으로 멍하니 눈을 둔 채 말했다. "힐다는 훌륭한 여자다.당신도 정말 훌륭한 여자야,캐럴라인."그리고 또 덧붙여 말했다."해리어트도 훌륭한 여자였지." 캐리 고모는 그가 엉뚱한 소리를 지껄이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상관하지 않고 경쾌하게 말을 이었다. "힐다의 변화는 정말 놀라워요.리처드 오라벼니,그 애는 자기 공부에 아주 기쁨을 느낀다고 편지에 썼어요.들어봐요,리처드 오랄버니." 그녀는 1920년 5월 14일의 날인이 찍힌 힐다의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그 편지는 첼시에서 보낸 것이었다.캐리 고모는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읽어,리처드가 조금이라도 더 알아들을 수 있도록 애를 썼다.그러나 편지 읽는 것이 끝나자 그는 울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왜 나한테는 아무 편지도 오지 않아?... 편지라고는 하나도 오지 않는구나.아서는 어딨어?그놈은 불효자야... 그놈은 넵튠에서 뭘 하고 있지?참,내 수첩은 어딨지?... 내 수첩을 줘." "네,오라버니." 그녀는 그를 위로하면서 얼른 그의 수첩을 손에 쥐어주었다.그는 수첩을 무릎에 얹고는 그녀가 뜨개질 감을 꺼내서 뜨개질을 시작할 때까지 그녀를 지켜보다가,이윽고 그의 마비된 손으로 들여다보지 못하게 가리고는 다음과 같이 써 내려갔다. "넵튠을 지키기 위해 앞서 쓴 것에 추가함."그러고 나서 자기 시계를 살짝 바라보더니 첨가했다. "12.22*3.14 그리고 앞으로의 일도 고려해서... ." 그때 어떤 소리가 들려와 그의 글을 방해했다.누가 본다는 것이 가장 두려운 그는 공포에 질려 쓰던 것을 멈추고 수첩을 어설프게 닫아버렸다.앤이 우유를 들고 잔디 위를 걸어오고 있었다.그는 다가오는 앤을 바라보자 미소까지 지으며 그녀를 향하여 고개를 끄덕여주었다.앤 역시 훌륭한 여자였던 것이다.앤도 그의 미소와 머리를 끄덕거려 주는 것을 알아차린 듯했지만 그녀는 리처드를 조심스럽게 피하면서 캐리 고모에게 쟁반을 주고는 재빨리 가버렸다. 그러자 리처드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그는 화를 내면서 우유를 밀쳐냈다. "왜 저 애는 가버리는 거야?왜 아서는 오지 않아?그놈은 뭘 하고 있어?도대체 그놈은 어딨어?" 그 말들은 그의 분노와는 달리 입술에서 맥없이 굴러나왔다. "네,오라버니,네."캐리 고모는 열심히 대답했다."아서는 탄광에서 일 보고 있어요.곧 점심 먹으러 올 거예요.오라버니도 아시잖아요." "그놈은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놈은 나한테 뭘 감추고 말하지 않는 게 있어." "아무것도 감추고 있지 않아요.리처드 오라버니.그 앤 오라버니에게 다 알려드리잖아요.우유나 잡수세요.조심하세요,다 쏟아지네.자아 자!수첩 다시 드릴까요?그게 좋겠군요." "아냐,아냐.좋을 것도 없어 그놈은 모르고 있어.전혀 머리가 돌지 않는 놈이야... 그리고 여러 가지 일에 장난질을 하고 있어.그놈은 나를 여기에 묶어둘 작정이야.전류가 또 벽을 통해 온다.그놈도 조심을 하지 않으면-." 그는 눈알을 교활하게 굴리면서 말했다. "그놈도 조심을 하지 않으면 골칫거리에 걸려 들거야.사고... 재난사건... 심문회... 병신같이!" "네,그래요,오라버니." "내가 다시 그놈에게 말을 해줘야겠어... 자꾸 얘기해줘야겠어.지금같이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알려줘야겠어." "맞아요,리처드 오라버니." "그렇다면 이 우유잔을 들고 가만히 있어.넌 너무 말이 많아.내가 아무 일도 못 하게 되잖아." 이때 또 다른 소리가 그를 방해했다.이번엔 아서가 차도를 올라오고 있었다.아까와 마찬가지로 그는 숨기듯 급히 캐리 고모에게 빈 우유잔을 건네주고는 아주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아서를 기다렸다.그러나 그는 떨고 있었다.분노와 불신감으로 떨고 있었다. 아서는 잔디밭을 건너 등나무 쪽으로 왔다.반바지에다 무거운 탄광 장화를 신고 있는 그는 피곤한 듯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엇다.그는 1년 이상이나 지나치게 긴장되는 것을 느끼면서도 일을 쉬지 못하고 계속해오고 있었다.완성되는 것을 볼 때까지 늦추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그 덕분에 이제는 넵튠 탄광의 개량 공사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새 목욕탕도 완성되었고,샌드그트륨 오버갬트 회사의 최신형을 견본으로 한 건조 저장실은 6월 말에 낙성될 전망이었다.갱내의 시설도 모두 개선되어 지금까지의 퍼스고프 사의 통풍기를 모두 빼내고 최신식 공기 펌프로 바꾸었으며,패쇄장치와 권양 로프도 새것으로 갈았다.권양기도 콘크리트로 단단히 기초 공사를 한 후 그 위에 세웠고,동력 전기도 새로운 발전소에서 공급받도록 했다.이러한 새 설비를 갖춘 넵튠을 보면 이전의 넵튠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옛날의 그 엉성했던 설비는 정연하고도 능률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얼마나 많은 노력을 경주해왔던가!그리고 얼마나 많은 돈을!그러나 그가 해낸 웅장한 모습은 그에게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주고도 남았다.그가 걱정이 되어 의기소침할 때도 그것이 그를 지탱해주었다.그 동안 어려운 일이 많이 있었다.광부들은 그의 의도를 의심했다.병역을 기피했다는 과거는 그를 더욱 의심하게 했다.거기다가 그의 기질 때문에 가끔 자기의 의도와 역행되어 이유 없는 우울의 발작에 빠지기도 했으며,그런 때는 아무 곳도 의지할 곳이 없다는 고독감을 혼자 짓씹어야 했다. 그러한 기분은 배러스 옆으로 다가갈 때도 그의 어깨 위에 감돌고 있었다.그래서 그의 말씨는 더욱 부드럽고 인내 깊게 해주었다. "어떠세요,아버지?" 배러스는 그를 치켜 보았다.그 모습에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권위를 보이려는 듯한 억지가 보였다. "넌 뭘 하고 오는 중이냐?" "글로브 탄광 속에 들어갔었어요,오늘 오전 중엔." 아서는 온순하게 설명을 했다.그리고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즐어워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지금 거기서 우리는 채탄을 하고 있습니다. "글로브에서?" "네,아버지.지금은 석탄의 양이 많이 줄어들었어요.요즈음은 주로 촉탄을 캐내서 톤당 55실링을 받고 있지요." "55실링이라." 배러스의 눈에 순간적인 지성의 번쩍임이 일어났다.그는 격노한 표정을 지었다.그것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것과 반대될 때에 나타나는 그의 습관이기도 했다. "난 그 탄을 80실링 받았다.그런데 그렇게 헐값에 넘기다니... 그건 아주 큰 잘못이다.넌 뭔가에 붙잡혀 있어서 제대로 생각을 못 하고 있어.넌 뭔가를 내게 감추고 있는 거야." "아닙니다,아버지.가격이 하락했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마세요.지난주에 탄가가 또 10실링 떨어졌다는 것을 아버지도 아셔야 해요." 배러스의 얼굴에서 분노의 빛은 사라졌으나 그는 계속 의심스럽게 아서를 노려보았다.그의 마비된 마음속에서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는 다시 중얼거렸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었지?자,말해봐... 말해봐... 네가 하고 있는 일을 말해보라니까." 아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전부터 전 다 설명을 해드리려고 했어요.아버지,전 넵튠을 위해 저의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안전과 효율,협동을 위한 건전한 방법을 쓰고 있는 겁니다.아시겠습니까,아버지?이쪽에서 종업원들을 공정하게 대우하면 그들고 우리에게 그렇게 할 겁니다.그건 너무나 당연한 결론이죠." 그러자 배러스의 반응이 맹렬해졌다.그의 두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그의 얼굴이 보기 싫게 찌그러지면서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다. "넌 쓸데없이 돈을 낭비하고 있어.너무나 많은 돈을 써버렸어." "전 아버지께서 의당히 쓰셨어야 할 돈을 썼을 뿐입니다.그것을 인정하셔야 합니다,아버지." 배러스는 아무 말도 듣지 않았다.그는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난 참을 수 없다.네가 그 돈을 몽땅 서버리다니... 난 참을 수가 없어.넌 그 귀한 돈을 낭비하고 있는 것뿐이야." "제발,아버지 진정하세요.그러시다간 건강이 또 나빠지셔요." "난 참을 수가 없다.넌 바보야.다음 주엔 내가 탄광으로 나갈 테다.그때까지 기다려라.내가 다음 주에 본을 보여주마." 배러스의 얼굴에 다시 검붉은 핏기가 확 몰려들면서 그는 말을 더듬거렸다. "그렇게 하세요,아버지." 아서는 부드럽게 말했다.집 안에서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그는 무거운 발길을 돌려 가버렸다. 배러스의 분노로 몸을 떨며 아서가 현관으로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이윽고 그의 표정은 어린애 같은 교활한 표정으로 바뀌었다.그는 자기가 깔고 앉은 깔개 밑을 뒤져 수첩을 꺼내 캐리 고모 에게 슬쩍 눈길을 주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넵튠을 지키기 위하여 다음 주 본인의 의도에 반하여 지출된 금액에 대해 규명할 것.본인이 지금 탄광주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 긴요함.메모.임시로 탄광에서 떠나 있는 동안 주모자를 엄중히 감시할 것." 다 쓰고 나자 그는 자기가 쓴 글을 어린애처럼 기뻐하면서 바라보았다.그러다가 그는 천진한 모습이 되어 집 쪽으로 데리고 갈 것을 캐리 고모에게 신호로 알렸다. 데이빗은 그날 아침 해리 뉴전트를 만나기로 했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올랐다. 보통 때는 눈을 뜨면 으레 떠오르는 생각은 제니에 관한 것, 그녀가 자기로부터 떠나서 미 지의 세계로 가버렸다는 가슴 아픈 기억이었다. 그러나 오늘 아침엔 첫 번째로 떠오른 사람 이 해리였다. 그는 잠깐 누운 채로 뉴전트와의 우정과, 프랑스 전선에서의 과거를 회상해보았다. 뉴전드 와 그는 흔들리는 '들것'을 함께 들고 허리를 굽히고 전선을 달리곤했다. 해리 뉴전트와 함 께 얼마나 많이 그러한 침묵 속의 행군을 했던가! 그는 아래층에서 움직이고 있는 어머니의 발자국 소리와 뜨거운 불에 굽는 베이컨 냄새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벌떡 일어나 면도와 세수를 한 후 옷을 입고 계단을 뛰어내려와 부엌방으로 들어갔다. 아질8시도 채 안 되었지 만 마사는 한 시갈ㄴ 훨씬 전부터 일어나 있었기 때문에 난롯불은 뜨겁게 타고 있었다. 그 난로는 새것처럼 번쩍거렸다. 그리고 난로 주위도 잘 닦여 반들거렸다. 식탁엔 흰 식탁보가 깔려 있고, 그 위엔 달걀과 베이컨이-바로 그 순간 프라이팬에서 접시에 옮긴-그를 기다리 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머니." 그는 인사를 하고 앉으며 식탁 에 있는 '헤럴드' 신문을 들었다. 마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거리면서 아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녀는 아 침인사나 저녁인사를 하는 습관이 없었다. 마사가 하는 말은 꼭 필요한 것뿐이었다. 절대로 필요없는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아들의 구두글 들고 말없이 닦기 시작했다. 그는 잠깐 동안 신문을 기 시작했다. 해리 뉴전트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 전날 짐 더전과 클레먼트 베빙튼과 함께, 애즐리에서 있는 새로운 회관의 개관식에 참석앴던 모습이었다. 갑자기 그는 얼글을 들고 마사가 자기 의 구두를 닦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안색을 바꾸며 힐책하듯 말했다. "그런 일은 하시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리잖았어요?" 그러나 마사는 구두를 계속해서 닦았다. "난 언제나 구두를 닦아왔다. 그래, 한 켤레가 아니 고 다섯 켤레를 닦아야 할 때도 있었지. 그런데 이제 와서 이것을 그만둘 이유가 없다." "왜 어머니께선 제가 그걸 하도록 두고 함께 앉아서 아침식사를 하시지 않는 겁니까?" 그는 완강히 따지듯 물었다. "그렇게 쉽게 습관을 바꾸지 못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단다." 그녀는 오히려 구두를 더욱 힘들여 문지르면서 말했다. "그런데 내가 바로 그런 사람 중에 하나란 다." 그는 난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집을 지켜주려고 왔을뿐이다. 그러므로 다른 일을 더 하신다는 것은 미안한 일이 다. 더욱이 그는 어머니가 온갖 정성을 다 기울여 자기 뒤를 돌보아주긴 하나 무엇인가 자 기를 멀리하고 있는 듯한 눈치를 느꼈다. 그는 자기를 편안하게 해주려는 어머니의 친절한 행동 이면에는 빈정대는 듯한 차가움이 까려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를 바라보던 그는 어 머니의 진심이 무엇인지 알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는 지나가는 말처럼 이야기를 시작 앴다. "오늘은 해리 뉴전트와 점심을 들기로 했어요, 어머니." 그녀는 다른 쪽 구두를 집어 들고 닦기 시작했다. 그녀의 강인한 모습은 창문을 등지고 있어 뚜렷이 드러 다, 그녀는 구 두를 문지르며 조소하듯이 말했다. "점심을 든다고?" 그는 혼자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 바 로 저것이다. 어머니는 드디어 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신중하게 그는 말을 계속했다. "그렇다면 해리와 함께 빵 한조각을 같이 나눈다고 말할까요? 만일 그런 표현이 어머니 마 음에 더 드신다면 어머니께서도 틀림없이 뉴전트란 이름을 들으셨을 거에요, 국회의원 해리 뉴전트죠, 그사람은 나와 친구예요. 사귀어 둘 만한 좋은 사람이죠." "아,그렇겠구나!" 그녀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 그는 아까 보다 더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자랑을 하는 체하면서 이야기를 계속해나갔다. "사실 국회의원인 해리 뉴전트와 아무나 다 점심을 함께 할 기회를 가질 수는 없답니다. 그는 사 실 누구나 다 우러러보는 노동계의 거물이거든요, 점심을 같이 한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 랍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어머니?" 그녀는 씁쓸한미소를 지으면서 머리를 치켜들 었다. 그러다가 아들과 시선이 마주치고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아들의 꾀임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아챘다.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상기된 얼굴을 감추기 위하여 재빨리 몸을 굽혀 아들의 구두를 난로 옆에다 대고 쬐기 시작했다. 그러나 입술에 떠오른 조롱하는 듯한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얼마든지 자랑해라. 네가 그런 말로 나를 속여넘기진 못할 테니까." "전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 머니, 전 떳떳하게 이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걱정하시고 또 싫어하 신다는 것도 알아요, 그러나 전 이길로 갈 겁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 실망하시기 전에 풀먹 인 와이셔츠를 입게 될 테니까 기다려보세요." "아니, 난 그런 와이셔츠를 결코 다려주지 않 을 게다." 그녀는 더욱 입을 비쭉거렸지만 그는 어머니의 기분이 좋아녔다는 것을 알아차렸 다,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어머니를 설득시키고 싶어 좀더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 니까, 어머니. 제가 하는 일에 대해서 너무 반대만 하지 마세요. 전 좋은 일이 하고 싶은 거 예요." "난 너에게 반대하지 않는다." 그년느 여전히 얼굴을 감ㅊ우려고 난롯가에 몸을 굽힌 채 말했다. "난 다만 네가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 것뿐이다. 읍의회라든가, 정치라든 가, 그런 것들이 난 싫단다. 네가 언제나 내세우는 굴유화라는 거, 난 그런 바보짓을 절대로 찬성할 수 없다. 찬성하지 않고말고. 그런 건 내 길이 아니다. 우리 조상들의 어느 분도 그런 것을 떠든 분은 안 계시 다, 우리 조상들이 살아오신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탄광의 주인 나 으리가 계시게 마련이고 우리는 그저 일하는 광부일 따름이다. 이런 것 외에 다른 걸 생각 한다는 것은 아주 온당치 못한 일이라는 것이내 생각이다." 침묵이 흘렀다. 그녀의 말투는 거칠었지만 마음으로는 그를 부드럽게 받아들이고 싶어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화제를 바꾸었다. 오래전부터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또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뭐 냐?" 그년느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애니에 댜한 거예요, 어머니. 그리고 샘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싶어요. 그놈이 얼마나 컸 는지 아세요? 애니가 온 정성을 다 쏟아 키우고 있다는 것은 어머니도 알고 계시죠, 어머니, 이젠 마음을 정하실 때가 된 것 같은데요. 어머니, 이제 그 두사람을 이집에 들어오도록 해 주세요, 어머니만 좋다고 하신다면 전 아무 상관도 없어요. 어머니, 지난 일은 다 잊으세요." 그녀의 얼굴이 대번에 얼어 었다. " 왜 내가 그들을 받아들여야 한단 말이냐? 내가 왜 그래야 한다니?" "샘이 어머니의 손자기 때문이에요. 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왜 그렇게 오랫동안 화를 풀지 못하지는 거죠? 어머니 가 가장 사랑하던 아들의 자식인데,얼마나 기쁘세요. 그리고 애니도 얼마나 훌륭한 여잡니 까? 어머니, 애니와 샘이 얼마나 곤란한지 아세요? 아버지는 병들어 누워서 잔소리만 많고, 그오빠는 탄광에는 잘 나가지 않고 생활이 엄망인 모양이에요. 그런데 그 살림을 애니가 다 꾸려가고 있는 거예요. 어머니, 놀랍지 않으세요?"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심술궂게 말했다. 그가 애니를 칭찬한 것이 그녀의 자존심을 상하 게 한 것이다. "그래, 어디 더 말해봐라. 그 야이가 그렇게 효녀 노륵 하고 있는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인지 그 집 족속들은 그렇게 게으르고 불한당 같다니까." "아, 알았어요. 어머니, 그만두세요. 어머니 마음을 상하게 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는 조용히 말을 끝내고는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후 그녀는 그의 접시에다 베이컨을 더 얹어주었다. 그것은 그녀가 자기도 사리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고 자기 나름대 로 친절한 사람이라는 것은 보여주는 그녀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행동을 모른 척했다. 지금까지 자기가 말한 것이 아무 소용 없다는 것에 슬며시 화가 났기 때문이다. 9시 15분 전에 그는 식탁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아들의 웃옷을 입혀주었다. "늦지 않도록 해라. 그 거창한 점심을 먹느라고 말이다." "네에." 그는 어머니에게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문 밖으로 나왔다. 어쨌든 어머니에게 화를 낸다는 것은 자신에게도 좋을 것이 없었으므로 다 잊자는 마음으로 털어버리면서 길을 걸었 다. 정거장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걸음은 가벼워졌다, 아침 공기는 차가웠고 서리가 내린 길 바닥은 딱딱하게 얼어 있었다. 달동네에서 넵튠 탄광으로 가던 젊은이들이 그에게 인사를 했다. 만일 자기가 우쭐댈 마음이 있었다면 지금이야말고 기회가 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이 읍내에서 명사가 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 적어도 이 지방에서는 그러 나 그렇다고 해도 자신은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신 베들 가 국민하교 앞을 지 나갈 때 교장 스트로더가 인사하느 것을 보자 그는 정말 우스웠다. 그는 데이빗을 보자 겁 에 질린 눈길을 급히 아래로 내리깔며 억지로 존경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며 인사를 보냈다. 스트로더는 읍의회의 의장 래미지를 제일 두려워했다. 그는 데이빗과 악수라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였다. 엣날의 스트로더는 얼마나 심한 경멸로 데이빗을 대했던가. 프리홀드 가를 반쯤 내려갔을 때 그는 허들리 가를 따라 건축되고 있는 광부들의 새집의 행렬을 보았 다. 인부들이 벽돌을 쌓고 모르타르를 배합하고 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그 광경은 그를 흥 분케 했다, 그러한 광경 뒤에 숨은 승리의 묘한 상징성, 희망을 약속하느 모습을 보았기 때 문이다. 돌이 갈라진 방바닥,사닥다리 같은 2층 계단, 빈대가 파먹은 벽 그리고 옥외 변소 따위가 달린 달동네 집들을 때려부수고 대신 이러한 새 건물들을 슬루스 모래 언덕위의 래 미지 저택이 빤히 보이는 곳에 세웠으면 하는 생각에 그는 싱긋이 웃었다. 그는 마음이 가 라앉지 않아 기차를 타고도 신문을 읽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타인태슬에 내리자 그는 여전히 깊은 생각에ㅐ 잠기며 러드 가 쪽으로 걸어갔다. 러드 가 모퉁이 신문 판매대가 있 는 상점 바깥에 플래마드 하나가 걸려 있었다. 거기엔 '광부를 위한 탄광'이라고 씌어져 있었다. 그것은 노동신문의 것이었다. 그 옆에도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거기첸 '파크 골목의 파티에 조랑말 탄 귀부인'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것은 노동신문의 포스터가 아니었다. 데이빗은 이상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헤든은 아직 사 무실에 나와 있지 않았다. 데이빗은 외투와 모자를 걸고 나서, 잔심부름을 하는 잭 해더링튼 노인과 인사를 나눈 다음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오전 내내 그는 일을 했다. 12시 반에 헤든 이 들어왔다. 확실히 기분이 좋지 못한 안색이었다. 그럴 때 그의 태도는 함부로 말도 걸 수 없을 정도롤 사나왔다. "에즐리에 갔다 왔어요, 놈?" "아냐." 헤든은 짤막하게 대답한 후 계속 책상 위의 신문을 넘기며 뭘 찾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찾고 나서는 실망한 얼굴이었다. "이 세그힐의 답장들은 어떻게 했나?" 그는 잠시 후에 개가 짖어대듯 사납게 물었다. "기록해서 철해뒀지요." "지날하네" 헤든은 앓는 소리를 내더니 다시 외쳤다. "넌 양심적이긴 하지만 결국 병신새끼야!" 그는 데이빗을 바라보았다. 당혹함과 애정이 섞인 묘한 표정이었다. 그는 모자를 귀 쪽으로 젖혀 삐뚜름하게 눌러 쓰더니 난로 쪽에다가 칵!하고 침을 뱉았다. "뭐 언짢은 일이라도 생 겼나요, 톰?" "제기랄, 닥쳐. 어쨌든 가자. 같이 지독한 그 연회가 열릴 시간이다. 난 오전 내내 뉴전트와 같이 있었지. 그 새끼가 늦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더군. 짐 더전과 우리의 하느님인 베빙튼도 그곳에 나타날게다." 모스 이스턴 호텔 쪽을 향하여 그레인져 가를 걸어 가면서도 헤든은 내내 말이 없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시계는 1시 15분 전이었다. 시간이 너무 일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라운지에 있는 등나무 테이블 앞에 앉았다. 아마 헤든은 그렇게 하려고 미리 생각했던 모양으로 술을 두 잔 들이키고 나더니 기분이 좀 나아진 모양이었다. 그는 약간 쾌활해진 표정으로 데이빗을 바라보았다. "사실은 난 그것에 대해서 굉장히 기뻐하고 있네, 다만 그게 지독한 고통이 될 테니까 걱 정이지." "도데체 무슨 이야길 하고 있는 겁니까?" "아무것도 아닐세. 셰익스피어가 말한 것처럼 아무것도 아니지. 이크, 이봐, 저기 상류층 명 사들이 오신다." 해리 뉴전트, 더전과 클레먼트 베빙튼이 들어오자 그는 일어섰다 그는 일어섰다. 벌떡 일어 선 데이빗은 해리와 따뜻한 악수를 나누고 나서 더전과 베빙튼에게 소개되었다. 더전은 옛 친구처럼 손을 꽉잡고 흔들어댔지만 배빙튼의 악수는 싸늘하고 소원한 감을 주는 것이었다. 헤든은 단숨에 자기 위스키를 들이켰다. 더전은 좌중의 모든 사람에게 술을 권했지만 뉴전 트가 고개를 흔들며 사양했기 때문에 일행은 모두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길쭉한 식당 안은 벽도 천장도 모두 고상한 크림색으로 칠해져 있었고,조용한 앨든 광장 쪽과 노스 이스턴 정 거장 쪽으로 있는 창문은 모두 활짝 열려 있었다. 방 안은 소님으로 거의 꽉 차 있었다. 그 러나 지배인은 그들을 반갑게 맞아들여,특히 베빙튼에게 정중히 절을 하며 식탁으로 안내했 다, 그는 베빙튼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틀레먼트 베빙튼은 최근에 와서 상당히 세상의 주목을 꿀었다. 키가 크고 냉정한 표정의 거만한 태도에다,눈에 별로 드러나지는 않으나 항상 좋은 옷을 입고 있는 그는 언제나 불안 하게 시선을 움직였다 그러나 점낳은 말씨와 침울한 미소를 잘 띠는 그는 자기 쪽으로 사람 들의 주의력을 묘하게 끌어 자신을 뉴스의 초점이 되게 하는 요령이 있었다. 그에게는 모든 것에 무관심한 듯한 표면 아래 열광적인 야심을 감추고 있는 듯 보이는 무엇이 있었다. 그 는 원래 귀족 출신으로서 윈체스터와 옥스퍼드 대학을 나왔다. 그는 런던에서 잠깐이지만 사교계에 나선 적도 있었고, 버프런드에서 매일 아침 펜싱을 했다. 이러한 그가 노동당에 이끌린 것은 신념에서인지 쫀느 일신상의 문제 때문인지는 베빙튼 자신도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번 선거 때, 보수당에 지반을 가진 첼워드 버러와 싸워 서 멋있게 의석을 차지했던 것이다. 아직 그는 집행위원회까지 진출하진 않았지만 그것을 노리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데이빗은 그를 처음 보았지만 싫은 느낌이었다. 더전은 아주 딴판이었다. 짐 더전은 뉴전트처럼 오랜 세월 동안 광부 조합의 집행위원이었 다. 키가 작은 강인한 체 에 친절이 넘치는 사람으로서 발음을 할 때 'ㅎ' 음따위를 멋대로 빼버리는 위인이었다. 또 좌담을 능란하게 해치우며 노래도 경쾌하게 잘 불렀다. 그는 25년 가까이 세크힐에서 경쟁 상대 없이 선출된 의원이기도 했다. 또 그의 재미있는 점은 누구든 세례명으로 불러버린다는 점이었다. 그는 웨이터에게 눈을 깜박거리며, 손으  크기와 두께까지 가리켜 보이면서 양고기의 허리 부분을 청하고는 맥주도 큰 잔으로 가져다 달라고 주문했는데 그 모습은 너무나 희극적이었다. 뿔테 안경을 낀 그의 모습은 마치 늙은 부엉이를 연상케 했다. 다른 이들도 모두 음식을 주문했다. 헤든은 더전과 같은 것을 주문했 고 뉴전트와 데이빗은 구운 쇠고기와 구운 감자, 베빙튼은 석쇠에 구운 혀가자미에다 바싹 구운 빵과 탄산수를 주문했다. "다시 만나서 반갑군." 뉴전트는 다정하고도 안심시키는 듯한 특유한 미소를 띠우며 데이빗을 바라보았다. 해리 뉴전트에게는 언제나 정다움이 넘쳤다. 그의 솔직하고도 변화가 없는 성격에서 오는 진실성 도 매력이 있었다. 그는 베빙튼처럼 자기를 믿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의 행동에는 억지 같은 것이 없었고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 그대로를 내보였다. 데이빗은 지 금 뉴전트가 격려해주는 듯한 태도를 보여주는 그 뒤에는 뭔가 목적이 있다는 것을 감지했 다. 그는 베빙튼과 더전도 역시 자기를 자세히 뜯어보며 점수를 매기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별로 나쁘지 않은 곳이군." 두루마리 빵을 씹으며 주위를 살펴보던 더전이 두 손을 비비면서 말했다. "귀하께서는 거울을 좋아하시겠지?" 베빙튼 의원은 불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놀리듯 말했다. "귀하의 목을 조금만 돌리시면 더전 의원의 귀하신 모습이 단번에 여섯 개나 나타날 터이니 얼마나 기분이 좋으시오" "맞았어. 클레먼트 의원, 지당한 말씀이야." 더전은 아까보다 더욱 상냥하게ㅐ 두 손을 비비면서 동의 했다. 짐은 정치상의 위기에 처할 때나 감격한 때에는 울기까지 하는 사람이지만, 조롱을 당하거나 개인적인 비난을 받을 때 는 하마처럼 무감각했다. "저쪽에 넓은 모자에다 청색 옷을 입은 아주 멋있는 아가씨가 있군그래." "응, 난 언제나 미인에겐 맥을 못 춘다는 걸 알지 않나, 클레먼트 의원." "한번 다가가서 오늘 저녁 밀회 약속을 해보시지그래." "안 되겠어,클레먼트 의원. 생각해보니 안 되겠어, 클레먼트 의원. 생각해보니 안 되겠어. 좋은 생각이긴 하지만 말이야. 런던행3시 기차표를 사놓았으니 다 틀렸어!" 이말을 듣고 헤든이 껄껄대고 웃었다. 그러자 베빙튼의 냉정한 표정이 놀란 기색을 띠며 갑자기 헤든의 존재를 발견한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더니 다시 그를 잊어버리고 마는 것 같았다. 뉴전트가 데이빗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네는 슬리스케일을 마구 휘젓느라고 바쁘다는 소문인데." "처음 듣는 소리인데요." 데이 빗은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천하가 다 아는 일이지." 헤든이 퉁명스럽게 참견을 했다. 헤든은 베빙튼의 거드름 피우는 태도에 기분이 나빠져 런 던 출신의 저런 얼간이 정치가에게는지지 않겠다는 결연한 태도였다. 그는 큰 잔으로 스카치 위스키를 두잔이나 들이킨 데다 맥주를 또 마셨기 때문에 누구에게든 마구 대들고 싶은 기분이었다. "의원께선 신문도 안 읽었나? 이 읍의원은 이 주의 새로운 주택 건립 계획을 통과시켰다네. 임산부 보양원도 개설했고, 결식 아동에게는 우유 급식을 하고 있지. 그쪽엔 ㅇ부터 오직 행위만을 한는 놈이 있어서 지방해정은 오랜 동안 기막힌 웃음거리가 되어왔거든. 그러나 지금은 그 노나먹기 식으로만 해오던 인간들 사이에 한 사람의 정직한 인간이 끼여들었기 때문에, 놈들은 이제 모두 정숙 히 앉아 신의 두려움도 알게 되었고 구세군에라도 들어가겠다고 지원하는 판국이야." 헤든 은 자기의 맥주를 한 모금 꿀꺽삼켰다. "아아,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 이 친구는 그놈들을 여지 업싱 지독하게 때려눕혔다네." 침묵이 흘렀다. 뉴전트는 기분이 좋은 듯이 보였다. 더전은 양고기 조각에다 케처을 바르고 나서 이빨을 드러내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 당의 인간들도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해리 의원, 더험 녀석을 당장 내 고 소금을 뿌리고 싶다네." 최근의 의사록이 화재에 오르자 데이빗은 급작스레 흥미를 나타내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 다. "국유화의 어떤 가망성이라도 있나요?" 베빙튼과뉴전트가 눈짓을 교환했다. 그러는 동안 더전은 재미있다는 듯이 뿔로 된 안경테 뒤에서 빙그래 웃고 있었다. 그는 데이빗 앞의 테이블 위에다 마디가 굵은 집게손가락을 얹 었다. "존 생키 경이 그의 의사록 속에 제출한 것 자네도 알고 있겠지. 모든 석탄 산업과 탄 광 기업은 정부에게로 그 운영권이 넘어가게 한다는 것이었어. 로이드 조지 씨가 8월 1일 하원에서 말한 것도 알고 있겠지. 정부는 석탄 채굴권의 국가 매상 정책을 승인한다.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한 왕립 위원회의 모든 보고에서도 완전 만장일치라는 것이야. 자! 이 이상 더 뭘 바라고 있나, 자네는? 이건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모르겠나!" 그리고는 즐겁다는 표정을 지으며 짐 더전은 껄껄대고 웃기 시작했다. "알겠군요." 데이빗은 침착하게 말했다. "상당히 재미있었지,위원회는." 더전이 더욱더 유쾌하게 웃었다. "봅 스마일 리가 노덤블런드 공작과 밀고 당기던 논쟁을 자네도 들어보았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리고 프랭크가 뷰트 후작에게 그의 석탄 채굴권과 사도 통행권이 어떻게 이루어졌 느내고 추궁해 들어가던 것도 들어보았으면 좋았을 거야, 그러한 것이 모두 에드워드 6세라 는 열살 먹은 아이의 서명에서 결정되는 것이야. 아아, 정말 재미를 보았지. 그러나 제기랄,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닐세. 난 켈 경의 머릿가죽을 벗길 선전 포고를 하고 싶었단 말일세. 그 치의 증조부가 찰스 2세에게 뚜쟁이 노릇을 꽤나 한 모양인데, 그 때문에 모든 탄광지역을 다 수중에 넣었거든. 그걸 좋다고 맞장구 칠 수 있어? 페하의 주말을 위한 뚜쟁이 노릇을 잘 해냈다고 해서 몇만 파운드의 채굴권 수익을 먹는다 이 말씀이야." 더전은 몸을 뒤로 젖혀 앉으며 나이프와 포크가 덜그덕거리도록 그 농담을 즐기며 큰소리 로 웃어 젖혔다. "저에겐 재미있는 것도 아니군요." 데이빗이 날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정부는 위원회에 몸을 판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터무니 없는 사기입니 다." "그건 바로 해리 의원이 하원 의원석에서 발언한 말과 꼭 같군. 그러나 정말은 그런 말 을 한다고 해도 별수 없는 거야. 이봐, 웨이터, 감자 튀김 하나 더 갖다주게." 더전이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뉴전트는 데이빗을 관찰하면서, 하얀 달빛이 철조망과 진흙 바닥과 포단의 포격 구멍의 처참한 광경 위를 비춰주고 있을 때, 전선의 모래 주머니 밑에 웅크리고 앉아서 서로가 긴 논쟁을 벌이던 과거를 회상했다. "자네는 국유화에 대해서 아직도 강경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그는 물었다. 데이빗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좌중에선 무답이 상책이 것이다. 잠시 말이 끊겼다. 무언 속에서 뉴전트는 더전에게 눈짓으로 물으니 더전은 입에다 감자를 가득 말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베빙튼을 바라보았다. 베빙튼도 희미하고 어물쩍거리긴 했 으나 좋다느 듯을 보내왔다. 드디어 쥬전트가 데이빗에게로 눈을 돌렸다. "들어봐, 데이빗." 가는 엄숙히 말했다. "노동당 위원회는 여기 3지구를 합병해서 하나의 완전한 새 구역을 만들기로 결정했지. 에 즐리의 신 회관이 본부가 되는 거야. 그래서 우리는 지구 회계뿐만 아니라 북부 탄광노동자 연맹의 유급서기를 겸한 새로운조직 서기가 필요해. 우리는 젊고 활동적인 사람을 물색 중 이었어. 오늘 아침 내가 헤든에게 미리 말했지만, 지금 공식 바 를 하겠네. 우리는 자네에 게 그 직책을 맡게 하려고 지금 이곳에 자네를 초대한 것일세." 데이빗은 완전히 넋이 바져 해리 뉴전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너무나 중대한 문제였다. 그 는 얼굴이 상기되었다. "저에게 지원을 하라 이 말씀입니가?" 뉴전트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자네 이름과 다른 세사람의 이름이 지난주에 위원회 에 제출되었지. 그런데 여기 있는 사람들이 위원들이니까, 자네가 새 서기로 임명된 거야." 그는 손을 내밀었다. 기계적으로 데이빗은 그 손을 잡았다. 그러는 동안 드디어 중대한 임무 를 맞게 되었다는 무거움이 가슴을 콱 막히게 했다. "그렇지만, 헤든은..." 그는 고개를 돌려 톰을 바라보았다. 그는 헤든보다도 자기가 선발되었다는 생각에 당황하 고 있었다. "헤든이 자네를 추천했어." 뉴전트는 조용히 말했다. 헤든의 눈이 데이빗의 눈과 재ㅃ라리 다시 마주쳤다. 상처를 입었 으면서도 역시 용감한 사나이의 영횬이 거기에드러나 있었다. 이윽고 헤든은 턱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 나는 돈을 주고 사정을 한다 해도 그 직책은 맡지 않겠네. 젊은이가 필요하니까. 난 러드 가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누가 뭐라고 해도 그곳을 떠나지 않겠네." 그의 미소는 어딘가 긴장되어 보이긴 했지만 밝은 것이었다. 그는 데이빗에게 손을 쑥 내 밀었다. 베빙튼은 회중시계를 꺼내 보았다. 감격적인 이 장면이 좀 길어진느 것이 피곤한 모 양이었다. "기차는3시에 떠난다고 했지." 그는 말했다. 일행은 일어나 옆문으로 나가 정거장 안으로 들어갔다. 일행이 혼잡한 플랫폼 쪽으로 건너갔을 때 뉴전트는 약간 뒤에 쳐졌다. 그는 데이빗의 손을 꽉 잡았다. "드디어 자네에게 기회가 왔군." 그는 말했다. "진짜 기회야. 난 자네가 그 직책을 맡기를 진심으로 바랐네 자네가 그걸 어떻게 처리해가 는지 우리는 두고 볼 판이지." 기차 옆에는 어느 신문사 사진기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짐더전은 안경을 끼면서 갑자기 점잖은 표정이 되었다. 그는 사직 찍히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다. "사업이 잘 되어가는 것 같은데." 그는 데이빗에게 말했다. "저치들이 이제 나를 찍으면, 오늘 벌써 두 번째가 되는 거야." 그 소리를 어깨 너머로 들은 베빙튼은 차갑게 미소를 지엇다. 그는 천천히 앞쪽으로 나아가면서 말했다. "놀랄 것 없네, 내가 두 번 다 미리 불러둔 것이니까." 해리 뉴전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 다. 기차가 초란스럽게 떠났다. 데이빗은 헤든과 나란히 서서 뉴전트의 조용하고 밝은 얼굴 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 다음해 2월 초순경 아서가 모슨 가울런 상사와 계약을 체결했을 때, 그는 드디어 회사 의 정세가 완전히 바뀌게 된 것을 느꼈다. 탄광 사업은 지난 12개월 동안 무척 어려웠다. 독 일로부터 석탄을 받아오는 전쟁 배상행위가 넵튠 퇀광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수출 무역에 큰 타격을 주었다. 프랑스도 물론 질은 좋지만 값비싼 아서의 석탄보다는 독일로부터의 거 의 무료로 사들일 수 있는 석탄을 사용했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미국이 유럽시장에 개입 하여 영국의 독점이었던 전시시장에 강력하고도 잔인한 경쟁자로 등장했던 것이다. 아서도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유럽에서 지금까지 있었던 석탄 기근이 영국석탄의 수출 가격을 인 위적으로 인상시켰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엇다. 그는 번영이한 너무 허황된 것임을 통감하면서 구내의 지방 소비자와 판매 계약을 맺어 넵 튠 탄광을 재건해보려는 방향으로 자신의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모슨 가울런 상사와의 재 계약도 멀리 1918년으로 돌아가, 넵튠 탄광 시설자재의 주문이 이루어졌을 때 암묵적인 동 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모슨 가울런은 빈틈 없는 거래선이기 때문에 아서는 그들을 설복 하여 계약을 이행케 했으나 가격을 최하선까지 아프레 깎아내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주 만족해서 손에 그 계약서 초안을 들고 암스트롱의 집무실로 들어 갔다. "한번 촉어봐 주시오. 다음 4개월 동안은 주야 교대로 풀 가동을 해야겠소." 암스트롱도 즐거운 표정으로 호주머 니에서 안경을 꺼내서-그의 시력은 이제 과거 같지가 않았다. - 천천히 계약서를 훑어보았 다. "모든 가울런입니까?" 그가 소리치듯 말했다. "이 사람, 보통 성공을 한게 아니야. 그ㅇ날 아버지와 함께 탄차를 끄는 마부였던 것을 생 각해 본다면 말입니다." 사무실 안을 서성거리던 아서는 약간 비꼬는 듯한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것은 그 친구에게 생각나지 않게 하는 것이 좋겠군. 암스트롱, 그 친구 10 시에 오게 되어 있어요, 당신은 계약 서명의 증인으로 참석해주시오." "네에 , 그렇게 하죠. 그사람 지금ㄷ은 타인캐슬의 거물이죠, 주구에게 물어봐도." 암스트롱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다시 말했다. "모슨과 그치는 대여섯 개의 사업에 손대고 있답니다. 그 공장도 인수햇다는 소문이더군요. 아시죠? 지난달에 파산한 타인캐슬의 놋쇠공장 말씀입니다." "알고 있소." 아서는 짧게 말했지만, 역시 또 하나의 지방 사업체가 파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근심스럽게 만들었다. "가울런의 사업은 한창 뻗어나가는 중이오. 그래서 이 계약도 체결하게 되는 거지." 암스트롱은 그의 금테 안경 너머로 아서를 빤히 쳐다보다가 다시 계약서 내요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세밀히 읽었다. 그러다가 아서를 바라보지 않은 채 말했다. "위약금이란 구절이 들어 있군요." "당연하지." "사장님 부친께선 절대로 위약금 조항을 인정하시지 않았습니다." 암스트롱은 중얼댔다. 아서는 아버지를 예로 들어 자신을 면전에서 비난을 하면 언제나 화 가 치솟았다. 그는 뒷짐을 지고 방 안을 좀더 빠른 걸음으로 쩡다갔다하다가 신경질적인 격 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엔 싫다좋다 할 수가 없단 말이오. 양보해주지 않으면 안 돼요, 우리가 계약을 맺지 않으면 다른 어떤 사람이 하고 말 거요. 게다가 우린 계약을 맺지 않으면 다른 어떤 사람 이 하고 말거요. 게다가 우린 이런 계약이라면 어김없이 이행할 수가 있을 테니까. 광부들과 골치 썩을 문제도 없을 것이고 아직도 국가는 통제하에 있고, 정보는 8월3일까지 통제를 철 페하지 않는다고 명확히 언질을 주고 있거든. 그러니까 우리는 4개월간에 계약을 완수해야 하는데 6개월 이상의 통제가 보장되거 있단 말이오. 그 이상 더 필요한게 뭐가 있소? 그런데 제기랄, 암스트롱, 잘 아다시피 우리는 일을 해야 한단 말이오." "그건 사실입니다." 암스트롱은 천천히 동의했다. " 전 다만 생각을 좀 해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사장님께선 늘 계시는 일이 어떤 것 인지 잘 알고 계시니까요." 마당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와 아서의 말을 방해했다. 그는 걸어다니던 것을 멈추고 창가 에 섰다. 침묵이 흘렀다. "가울런이 오는군." 그는 마당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저 친구, 이제는 손추레 탄차를 끌고 있던 것처럼 보이진 않는걸." 1분쯤 후에 조가 사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넓은 깃의 청색 양복을 입고 있는 근느 성 실함과 호의가 넘치는 태도로 손을 벌리며 다가왔다. 그는 아서와 암스트롱과 힘찬 악수를 하고 나서 사무실이 매우 마음에 드는 듯 방 안을 두리번 거렸다. "이 탄광에 다시 오게 되 다니 참 감개무량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 이곳에서 일했다는 것을 기억하시겠조, 암스트롱 씨?" 아서가 염려했던 어색함 같은 것은 하나도 없이 조는 겸손하고 소탈하게 말했다. 그의 태도는 솔직 담백했고 훌륭함이 엿보였다. "그랬었조, 닷신 밑에서 일했죠, 암스트롱씨. 난 인생 최최의 기초 훈련을 이곳에서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사장님의 아버님으로부터, 그러니까 배러스 사장님으로부터 난 생애 최초 의 임금을 받은 것입니다. 아아, 생각해보면 그다지 오래 된 것도 아닙니다." 그는 멋있게 줄을 세운 바지에 주름이 잡히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 다. "네,정말입니다." 그는 감개무량한 듯이 말했다. "나는 이 계약을 체결한다고 생각하닌 정말 굉장히 기뻤습니다. 일종의 감상일지도 모르죠. 그러나 그건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 아닙니까? 난 이탄광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사장님이 하시는 그 운영방법을 좋아합니다. 배러스 사장님, 사장님께선 여기를 놀랄 만한 곳으로 만 드셨습니다. 정말 놀랄 만한 변화입니다. 내 동업자인 짐 모슨에게도 그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만, 사업엔 피도 눈물도 없다고 하 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조. 그런 사람들은 사업의 뜻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지식도 없는 그런 작자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배러스 사장님?" 아서는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조의 그 즐거운 표정이 풍기는 매력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물론 우리 쪽에서도 이계약을 맺게 되는 것을 크게 기뻐하고 있습니다." 조는 점잖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업이란 생각하는 것처럼 그헐게 좋은 것도 아니죠, 배러스 사장님? 아아, 다 알고 있조, 알고 있어요. 사장님께서 일부러 설명하실 필요도 없습 니다. 광주리 하나에다 달걀을 몽땅 넣어두면 깨지는 날엔 반을 건질까말까죠. 바로 그래서 짐과 나는 자꾸 확장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는 잠시 말을 엄추고 아서의 책상 위에 놓인 담배 통에서 담배 한 대를 집었다. "우리 가 내달부터 출범한다는 걸 알고 계셨나요?" "새 회사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공공회사죠, 시기가 성숙했습니다. 시장은 경기가 상승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설마 자기 이익을 포기 하는 것은 아니겠죠?" 존은 매우 즐겁다는 듯이 웃어 젖혔다. "우리를 어떻게 취급하시는 말씀입니까, 배러스 사 장님? 우리 한 다발의 주권과 주역회의에서 조정하는 이익만 얻고, 영업고 은 20만 파운드 를 받고 팔아 넘기는 거죠." "그렇군요." 아서는 움찔했다. 그순간 그는 넵튠의 불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 자 자기도 그 기절초풍할 이익에 손을 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하는 욕심이 무럭무 럭 일어났다. 모두 말이 없었다. 그러자 자기도 그 기절초풍할 이익에 손을 댈 수 있는 방법 은 없는 것일까 하는 욕심이 무럭무럭 일어났다. 모두 말이 없어 . 이으곡 아서가 책상쪽으 로 다가갔다. " 그러면 계약을 체결하면 아떻겠습니까" "좋습니다. 배러스 사장님. 그쪽만 좋으시다면 저는 언제나 괜찮습니다. 할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하하하...그리고 아주 깨끗하고 정직한 거래니까요." "문의할 점이 고 하나 있습니 다. 이 위약금 항목 말입니다만." "그래서요?" "우리가 계약을 이행하는 데 대해서는 추호도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만." 조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그 조항에 대해서 왜 걱정을 하십니까?" "저는 걱정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최저선까지 가격을 깎았으며, 애로우까지의 운 송비까지도 포함되어 있으니 이 조항을 삭제했으면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는 끝까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우호적이나 그러면서도 유감스럽다는 기색을 갈고 말했다. "아아, 그런데 우리도 우리 자신을 보호해야 하니까요. 배러스 사장님, 코크스용 석탄의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므로 그 석탄이 입수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로서는 입증받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게 바로 페어 플레이라도 하는겆ㅎ, 결 국 우리들도 노력하고 있는 이상, 귀측에서도 이떤 성의를 보여주신다는 보증을 바라는 것 뿐입니다. 만일 그것이 싫으시다면 물론, 그러니까 우리들은 다만..." "아니 좋습니다." 아서가 대번에 수그러지며 말했다. 괜찮습니다.귀측에서 그렇게 주장하신 다면 우리들도 동의합니다." 아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계약만은 놓치고 싶지가 않았다. 게다가 위약금의 조목이 당 연지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처럼 혼란한 시대엔 어떠한 회사라도 요구하게 마련인 좀 까다로운 거래방법에 불과한 것이었다. 조는 커다란 금 뚜껑이 씌워진 만년필을 꺼내서 계약서에 서명했다. 그의 성공에 어울릴 만큼 화려한 서명이었다. 암스트롱은 그 옆 에다가 조심스럽게 입회인으로서의 서명을 했다. 과거에 조가 탄차를 너무 빨리 달리게 한다고 삭도에서 1킬로나 따라가며 고함을 질렀던 것을 생각하면서. 그것이 끝나자 조느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힘차게 악수를 한 다음, 자동차 를 타고 ㅊ기양양하게 타임캐슬을 향하여 떠나갔다. 조가 떠나고 나자 아서는 조금 염려가 되는 표정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이것은 일상적인 버릇으로 뭔가 일이 결정된 뒤에 그는 늘 그런 것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가울런에게 한 방 먹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털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만의 하나라도 뜻 지 않은 사고가 일어나 계약을 이행 못 할 경우에 대비해서 보험에 들어두면 하는 생각이 얼핏 일어났다. 충동적으로 그는 전화의 수화기를 집어들고 거래처인 이글 동맹회사를 불러냈다. 그러나 계약금이 터무니없이 높아 서 쥐꼬리만한 자기 이익까지도 그것이 집어삼키고 말 것 같았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이 문제를 머리 속에서 털어 없애버렸다. 사실 2월 10일부터 광부 들의 2교대 작업을 시작되어 갱내의 활기찬 움직임을 보자 아서는 지금까지의 근심을 싹 잊 고 말았다. 오랫동안 불황이 계속된 뒤였기 때문에 그는 탄광의 맥박이 마치 자기의 맥박처 럼 느껴졌다. 녑튠의 고동 치는 장대한 힘, 그것은 삶의 가치를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 이야말로 그가 갈구하던 것이며, 모든 사람을 위한 공정한 일, 공정한 임금, 공정한 이익 바 로 그것이었다. 그는 이 몇 개월 동안 전에 없던 행복한 기분의 맛보았다. 그날 밤 법산저택에 돌아왔을 때 그는 의기양양하게 아버지에게로 갔다."오늘부터 2교대 로 작업을 계속 진행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도 기뻐하실일이라 말씀드립니다. 탄광은 다 시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배러스는 의심으로 몸을 벌벌 떨면서 아서를 가만히 살펴보기만 했다. 방 안은 전 류를 방어하기 위하여 캐리 고모를 시켜 문도 창도 다 꽉꽉 닫아놓게 하고 있어 참을 수 없 을 정도로 공기가 탁했다. 뭔가 쓰다가 만 종이가 그의 방석 깔개 밑에서 반쯤 내다보였고, 지팡이도 한나 놓여 있었다. 이제 그는 그것을 사용하여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 약간 걸 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 의당히 그래야지." 그는 겨우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게... 그렇게 돼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아서는 약간 얼굴이 붉어졌다. "그렇겠죠, 아버지. 그러나 요즘은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즘이라구!" 이제는 허옇게 된 그의 눈썹이 악의에 차 실룩거렸다. "요즘이라 구...아아! 넌 시대의 뜻을 모르고 있어. 난 그걸 아는 데 많은 세월이 걸렸다. ...그러나 기다려주마. 그래 기다리면서 보고 있겠다. " 그는 아버지의 수척한 모습에 마음 아픈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전 아버지께서 알고 싶어하실 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아버 지..." "네가바보라는 걸 난 알고 있다. 난 네가 하려는 말을 이미 다 알고 있어. 그래, 맞다. 웃어 라....바보처럼 자구 웃어라. 그러나 내 말을 귀담아 들어두어라... 탄광은 내가 복귀할 때까지 는 제대로 잘 되지 않을 게다." "그래요, 아버지." 아서는 아버지의 기분을 맞추어 말했다. "빨리 나으셔서 복귀하셔야죠." 그는 잠깐 그 방 안에 있다가 아주 좋은 기분으로 차를 마시러 나왔다. 그는 그 다음 며칠 동안도 기분이 좋았다. 식사도 잘 했고, 일도 열심히 했으며,휴식도 즐거웠다. 그는 최근에 와서 정말 휴식을 거의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는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는 몸과 마음이 넵튠 탄광에 모두 묶여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저녁이면 의자에 머리를 수그리고 앉아서 도대체 어떻게 일을 시작해야 할 것인가 하고 심각하게 생각에 잠기던 것 도 끝났다. 몸을 쭈욱 뻗고 휴식을 취하며 손에 책을 들 수도 있게 되었다. 그는 힐다와 그 레이스에게 편지도 써 보냈다. 그는 심신이 다시 새로워지고 힘이 솟는 것을 느꼈다. 만사가 아주 순조로웠던 2월16일 아침, 그는 아침식사를 하려고 2층에서 내려와 행복한 마 음으로 신문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주 맛있게 포도를 먹기 시작했다. 바로 그 때 갑자기 신문의 중간 면의 표제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는 마치 못 박힌 듯이 그 표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들고 있던 스푼을 놓고 기사를 모두 읽었다. 이윽고 아침식사할 생각도 업성진 듯 냅킨을 풀어 던지고 의자를 위로 밀어 젖히며 일어나 현관 홀에 있는 전화기 쪽으로 달려갔다. 전화기를 확 잡아당겨서는 북부 탄광 연맹 의 지도적 인물이기도 한 합동 채탄회사의 프로버트를 불렀다. "프로버트 사장님," 근느 말 을 더듬거렸다. "{더 타임즈}지를 보셨습니까? 통제를 풀게 한다는군요, 국왕이 칙서가 반포되어 그것이 3 월 22일부로. 당장 입법화된다는군요." 프로버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아, 나도 봤소, 아서, 그래요. 그래,알고 있어요. ...너무 빨라요.." "글쎄,3월 22일 이라니... 이럴 수가!" 아서는 절망적인 음성으로 그의 말을 가로 막았다. "다음달이 아닙니까! 정말 믿을 수 없습 니다. 8월까진 통제를 해제하지 않겠다고 당국에서 선언했잖았습니까?"프로버트도 놀란 듯 말했으나 어딘가 인위적인 냄새를 피우고 있었다. "나도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아서, 우리는 이제 골치 아픈 사태로 직행하고 만 것이오. 이건 우리에게 폭탄을 던진 것이나 마찬가지요!" "사장님을 뵈야겠습니다. 만나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프로버트 사장님, 곧장 가겠습니다." 혹시 거절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서는 자기 말만 끝네고는 얼른 수화기를 놓았다. 외 투를 걸쳐 입으며 그는 차고 쪽으로 달려가 큰 세단과 바꾼 경쾌한 2인용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는 무서운 속력을 내어 해안 쪽으로 4마일이나 되는 헤링튼에 있는 프로버트 사 장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그는 7분만에 도착아혀 글세 거실로 안내되었다. 거실의 활활 타는 난로 옆 폭신한 가죽의 자에 프로버트는 한가히 앉아서, 무릎 위에 신문을 얹은 채 아침식사 후의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 방 안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과 같았다. 따뜻하고 푹신한 융단이 깔린 방, 부 유한 노인은 알맞게 식사를 끝내고 커피와 하바나 담배의 자욱한 향기에 잠겨, 하루일을 시 작하기 직전의 휴식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프로버트 사장님," 아서는 소리를 지르다시피 앴다. "이럴 수가 없습니다.." 에드가 프로버 트는 일어서서 온화하고도 무거운 표정을 띠며 아서의 손을 잡았다. "나도 똑같이 걱정하고 있네, 이 사람아." 그는 여전히 아서의 손을 잡은 채 말했다. "정말 놀라운 일이네, 이것 참." 그는 65세 가량의 키가 크고 당당한 체구의 사람으로서 백 발의 머리칼에 까만 눈썹을 가진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는 '북부 탄광연맹'의 회원으로서 그 것을 놀랄 만큼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그는 굉장한 부자로 많은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는 기부자의 명단을 공표하고 있는 온갖 지방 자선단체에 많은 기부를 했다. 겨울마다 타 인캐슬의 비밀 공제조합에서 경영하는 병원에 기부를 호소하는 포스터에 그의 사진이 위엄 있게 실렸고, 그 사진 아래엔 "본 사업 목적을 절대로 지지하는 에가가 프로버트 사장은 여 러분이 모두 함께 참여 하기를 부탁한다."라고 씌어 있었다. 그렇게 해서 30년 동안을 그는 아무 원성도 사지 않고 자기 회사의 고용인들을 착취해왔 다. 그는 매혹적인 늙은 약한이었다. 그는 시가를 든 손을 점잖게 흔들며 말했다. 그러나 아서는 침착하게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계속해 서 소리쳤다. "어떻게 되는 판이죠? 그게 알고 싶은 겁니다. 저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 아마 몹시 골치 아프게 되겠지." 프로버트는 난로 깔개 위에 두 다리를 쩍 벌리고 서서 천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당국은 왜 그렇게 느닷없는 일을 했습니까?" "정부는 말이야, 아서. 우리들의 이익을 나누어 받는 것은 좋아하지만 손해까지 함께 나눌 생각은 없기 때문이지. 쉽게 말해서 경기가 좋을 때 발을 빼겠다 이거지. 그러나 솔직히 말 해서 난 이 사태를 유감으로 여기지 않네. 우리 둘만의 이야기지만, 난 웨스트민스터(영국 국회)와 내밀한 연란이 지금까지 있어 왔어. 이제 장리할 시간이 온 거야.전쟁 이래 우리 사 업주와 노동자 사이엔 폭풍이 불려 하고 있었던 것이란 말일세 우리측은 함께 방책을 세워 일치 단결해서 싸워야 하네." "싸운다고요?" 프로버트는 시가 연기의 향기로운 냄새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모습은 매우 지혜롭 고 인자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마치 은발의 산타클로스와 바나도우 박사(빈민 아동교육 에 헌신한 인물)를 하나로 뭉쳐놓은 듯싶었다. 아니 그보다 더 훌륭했다. 그는 점잖게 말했다. "난 임금을 40퍼센트 깎아내리는 것을 제의할 작정이네." "40퍼센트! 아니, 그건 전쟁 전 수준보다 더 낮은 임금인데 광부들이 참아 내리라고 보십니까? 그들은 분명히 파업을 할 겁니다." "아니지. 그들은 파업할 기회를 가질 수가 없을 걸세. 그들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금세 일자리를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 그에게는 아무런 적의도 보이지 않았고 부드러운 초탈의 모습까지 드러나 있었다. "일자리를 뺏는다고요! 그건 서로의 파멸을 불러올 뿐입니다." 프로버트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면서 고통스러워하는 아서를 바라보았다. 그 눈초리에는 보호자 같은 측은한 빛이 담겨 있었다. "우리 업주들은 대부분이 전쟁에서 조금씩은 돈을 벌어서 어딘가에 감추어 두었으 리라고 생각하네. 우리는 광부들이 사리를 분간할 때까지 그것을 꺼내 먹으면 그만이잖은가. 그럼, 그럼. 우리는 그걸로 살면 되구말구." 남 모르게 저축해둔 돈이라! 아서는 넵튠 탄광의 시설과 개량에 투자한 자금을 생각했다. 그리고 현재의 전시간제 계약을 생각했다. 참을 수 없는 뜨거운 분노가 온몸을 휩쌌다. "전 우리 광부들을 내쫓지 않겠습니다. 전 그러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2교대 전시간제로 넵튠에서 작업 중입니다.40퍼센트 임금 절하는 미친 짓입니다. 전 합당한 임금을 지불할 각오를 하겠습니다. 전 작업 중인 탄광을 휴업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전 누가 뭐라고 해도 내 목구멍을 내가 막아버리지는 않을 겁니다." 프로버튼느 아서의 등 을 더욱 자애롭게 두드려주었다. 그러면서 아서의 명예롭지 못한 기피자로서의 전력을 일깨 우면서 격한 혈기로 일을 망쳐서는 안된다고 점잖게 타일렀다. "그럼 못써, 이 사람아. 사태를 그렇게 몰고 나가면 안 되네. 자네는 본디 성급하다는 것을 내가 잘 알지. 자, 좀더 침착하게 생각하면서 사태를 잘 관찰하기로 하세. 우리는 일 주일 내에 연맹 총회를 열 걸세. 그때까진 자네 마음도 좀 가라앉겠지. 자네는 우리와 협력하는 것이 좋을 걸세. 자네 혼자서는 다른 뾰족한 수가 없어." 아서는 눈에 핏발을 세운 채 프로버트를 쏘아보았다. 입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나 혼자서는 별 도리가 없다고! 그것은 사실이다.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연맹에 묶여 있는 형편 이다. 그는 신음을 했다. "저에겐 치명적인 일입니다." 프로버트는 더욱 느긋해지면서 그를 툭 쳤다. "광부들은 자기네 입장이 어떻다는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다네,아서. 아침식산느 했나? 커피라도 가져오게 할까?"그는 갑자기 활기를 띠며 친절해졌다. "괜찮습니다. 전 돌아가 보겠습니다." "자네 어른께서는 어떠신가?" 프로버트는 다정하게 물었다. "자네 아버지가 넵튠에 못나가시니 정말 힘들겠군. 그래, 정말 그럴 거야. 그러나 소문에는 쾌차해가신다구 들리더만. 자네 어른은 연맹에서 가장 오래된 내 친구라네. 자네 어른이 연맹에 다시 나오시게 되기를 바라네. 내 안부를 전해드리게." "네." 아서는 고 개를 숙여 보이곤 문을 나섰다. "자네 정말 커피라도 들지 않겠나?" "아니, 생각이 없습니다." 아서는 이 늙은 사기꾼이 내심으로는 자기를 비웃고 있음에 틀림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프로버트의 저택에서 나외 자동차에 천천히 올랐다. 넵튠으로 돌아오자 그는 사무실로 들어와 책상 앞에 앉았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사태를 다시 천천히 생각해보았다. 그는 현재 작업 중인 탄광을 놀랄 만큼 휼륭하게 개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당한 계약으로 전시간제 작업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광부들에게 적절한 임금을 지불해주고 싶었다. 또 그럴 각오도 되 어 있었다. 그러나 연맹의 협약을 단독으로파기하고 뛰쳐나온다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은 무 모한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광부들은 그러한 임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제 겨우 잊혀졌다고 생각했던 끔찍한 싸움이 또 한 번, 그리고 어느 때보다도 더 치열하 게 터지고 말 것이다. 진퇴양난이란 바로 이런 것일 게다. 그가 곧 울음이라도 터질 듯한 얼 굴로 앉아 있는데 암스트롱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성급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 리기 시작했다. "그 코크스 석탄 채굴을 서두르도록 합시다. 암스트롱, 최대한으로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거요. 아시갰소?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보시오. 모든 광부들을 다 동원하시도." "네. 염려 마십시오, 사장님." 암스트롱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러나 아 서는 그에게 사실을 알리고 지 않았으므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는 종이 쪽지 위에다가 몇 가지 계산을 해보다가 연필을 내던져 버리고는 앞을 쏘아보았다. 그날은 2월 6일이었다. 그 다음날 연맹총회가 열렸다. 그리고 모든 지방 탄광 소유주들에게 그 결과를 알리는 회람 장이 돌려졌다. 그 회람장에는 앞으로 있게 될 탄광폐쇄에 대비해 신중히 처신하여 석탄 저 장을 많이 할 것을 촉구하고 있었다. 아서는 그 비밀 서류를 받고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겨우 6주 사이에 어떻게 4개월분의 생산고를 올릴 것인가! 3월 24일에 석탄 통제 해제령이 입법화되었다. 아서는 광부들에게 곧 고용계약을 종료하 겠다는 통보를 냈다. 그리고 3월 31일 계약했던 분량의 반밖에 이행하지 못한 채 조업정지 에 들어갔다. 그날은 비가 오는 음산한 날이었다. 아서는 오후에 억수같이 퍼붓는 빗속에 마 지막 탄차가 갱 밖으로 나오는 것을 침울하게 바라보며 자기 사무실에 서 있었다. 그때 톰 헤든이 걸어 들어왔다. 묵묵히 들어오는 헤든에게는 뭔가 불길한 징조가 있어 보 였다. 그는 무섭도록 음산한 표정으로 닫혀진 문을 등지고 아서와 정면으로 마주섰다. 그의 탄탄해 보이는 몸은 마치 다가오는 탄광폐쇄라는 무거운 짐을 벌써 지고 있기나 하듯이 약 간 앞으로 굽어 있었다. "당신에게 꼭 한마디만 물어볼 것이 있소." 근느 잠시 입을 다물었 다가 다시 열었다. "당신은 이 탄광의 모든 광부에게 해고 통보를 했다는데?" "그게 어떻다 는 겁니까? 다른 탄광과 똑같이 했을 뿐입니다." 헤든은 가볍게 웃었다. 무서운 웃음이어 . "아니지. 분명히 다른 점이 있어. 이 지방에서 이곳은 가장 물이 많이 나오는 탄광인데 보안요원과 펌프계에까지 해고 통지를 냈다 이 말 씀이야." 아서는 자제를 하려고 애쓰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당신과 싸움 을 하기엔 내가 너무 괴롭소. 헤든 의원, 나에게는 모든 종업원에게 통지를 내지 안ㅅㅎ으면 안 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잖습니까?" "당신은 또 다른 침수 사건을 원하고 있소?" 헤든의 목소리에 이상한 울림이 섞여 있었다. 분노인지 아니면 조롱인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아서는 거의 자제력을 잃어갔다. 자기는 아무런 책망받을 짓을 한 것이 없다. 왜 내가 헤든의 잔소리를 참고 들어야 하는가? 그의 마음 밑바닥에서 앞에 서 있는 인간을 후려치고 싶은 격분이 서서히 밀고 올라오는 것 을 느끼면서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보안요원은 계속 작업을 할 거요." "아아, 그렇군. 이제 겨우 생각이 난 모양이군. 하지만 잊지 마시오. 내 일깨움에 겨우 보안요원들이 일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는 것을 내가 아 니었더라면, 나를 뒤에서부추 주는 그 고마운 인간들이 없었다면 당신네이 그 탄광은 아마 24시간 내에 물천지가 되버렸겠지. 알겠나? 물에 잠겨버려 모두 장이 났을 거라고! 당신이 굶겨 죽요 거름더미로 만들어버려 모두 장이 났을 거라고! 당신이 굶겨 죽여 거름더미로 만들어버리려는 그 불쌍한 광부들은 지 금도 계속해서 물을 퍼내 당신네들의 재산을 지켜주고, 당신네들이 편안하게 뒤굴도록 해주 고 있다는 것을 말이오. 내 말은 조금이라도 씹어서 새겨 들으시오. 그래서 그 맛이 어떤지도 알아보란 말이오." 헤든도 이 자리에 더 있다간 자신이 무슨 짓 을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말을 끝내자마자 급히 문을요란스럽게 닫으며 나가버렸다. 아서는 책상 앞에주저 낮았다. 그는 거기에 오랫도앙ㄴ 앉아 있어 . 이윽고 어둠이 사무실 안으로 스며들어왔고, 보안요원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다 난광을 빠져나갔다. 그도 그 곳을 나와 집 으로 돌아갔다. 탄광폐업이 시작되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어둡고 음울한날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탄광의 안전은 확보되어 있었다. 그는 아무 할 일이 없었다. 광부들과 궁핍이라는 망령이 서로 투재을 벌이는 것을 멀거니 서서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또 새로운 날이 밝았지만 아무 벼노하도 보이지 안항ㅆ다. 아서는 상대가 되지 않는 자들의 비참한 싸움의 종말이 어떠리라는 것을 뻔히 알 면서도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남자와 여자. 어린애들까지도 빰이 패도로 여위고, 모든 사람들의 얼굴엔 어둠이 덮였다, 거리엔 웃음소리도,노는 모습도 다 사라지고 말았다. 그의 가슴속에서 참을 수 없는 아픔이 점점 더해 갔다. 인간이 인간에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위대하고도 영우너한 평화를 도래케 하기 위한 전쟁, 인간의 문명에 영광스러움 을 안겨주려는 전쟁, 그것이 겨우 끝나자 이제 또 이것은 무엇인가? 약간의 품삯을 받을 뿐인 노예들아 땅속에서 비지땀과 진흙에 파묻혀 위험에 목숨을 내걸 고 열심히 일을 하여라.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굶어 죽든지 하라! 결국 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한 여인이 잉커먼 달동네에서 아기를 낳다가 죽었다. 검시관에 게 압력을 받은 스코드 의사는 한마디의 의학용어로 사인을 규명했다. 영양실조라는 지극히 막연한 것이었다. 마가린과 빵, 그것만을 먹고 사는 세월. 때로는 그것마저도 없었다. 대영제 국의 국가를 노래한 건강한 아들을 기르라는 슬로건이 걸려 있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슬 로건일 따름이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생각이 아서의 머리 속에 끊임없이 이어져 마침내는 한덩어리로 뭉쳐 져 불타 올랐다. 그 첫 달이 다 지나갈 무렵 탄광 달동네의 궁핍은 극단에 이르렀다. 그는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사설 급식소 계획을 실행에 옮겨 읍내에다 무료 급식소를 열었다. 그 러나 그의 자선은 감사보다도 증오심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광부들을 탓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의 비통한 기분을 이해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끌어들일 수 있는 능력을 지니지 못한 것을 뼈가 아프도 록 실감했다. 그는 극적인 인기를 모을 수 있는 소질도,또 인심을 얻기 위해서 마음을 사로 잡을 만한 성격도 못 되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광부들은 그를 신용하려 들지 않았다. 그의 급식소 밖에는 다음과 같은 낙서가 있었다. "징병 기피자는 지옥으로 가라." 지워버리면 또다시 같은 문구나 더 밉살스러운 문구가 새로 어 있는 것이었다. 젊은 광 부들이 그에게 가장 심한 적의를 품고 있었다. 잭 리디와 차 리밍을 우두머리로 하고 있는 그들은 대개 넵튠 재난사건에서 형과 아버지를 잃은 이들이었다. 그들은 뚜렷한 이유도 없 이 자기네들의 증오를 그에게로 돌렸다. 이러한 드러나지 않는 비웃음과 거부는 줄기차게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서는 8만 명의 완전무장된 방위대의 결성에 관한 기사를 읽 었다. 그 기사는 이상한 불쾌감을 느끼게 했다. 방위대,무엇을 방위한다는 것일까? 5월,합동 채탄소 주변에서 소동이 일어나자 군대가 그 지역에 파견되었다. 수 업싱 많은 '법령'이 발표되었고,프로버트 사장은 그의 가족들과 함께 번마우드에서 지극히 만족스러운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그때 아서는 슬리스케일에 남아 있 었다. 4월 5월이 지나고 6월로 접어들자 아서에게는 해괴한 엽서가 나랑들기 시작했다. 그것 도 너무나 유치하고 엉뚱한 중상에 찬 글이었다. 상스럽기까지 한 그 무명의 엽서는 매일 한 장씩, 지렁이가 기는 듯한 흉한 필체로 씌어져 날아들었다. 아서는 그것이 일부러 필체를 감추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엽 서들을 무시했지만 차츰 그것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통의 원인이 되어갔다. 도대체 어떤 작자가 그러한 악의로 자기를 추적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달의 그믐께쯤 되었을 때 범인이 우연치 않은 기회에 드러났다. 법산 저택에 오는 심부름꾼 아이에ㄱ 막 엽서를 전하려는 현장을 목격했던 것이다. 그 범인은 바로 아버지 배러스였다. 그는 편지뿐 아니라 끝없이 아서를 감시하고 있어 이것이 더욱 사람을 피곤하게 했다. 더욱 이 광부들이 그를 배척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그렇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이러한 모든 것은 노인 치메 증세에서 온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서에게는 무서운 고통이었고 몸마저 쇠약해지게 했다. 7월1일에 드디어 음험하게 뿌리를 뻗어가던 분규가 끝장이 났다. 광부들이 패배의 쓴 잔을 마신 것이다. 굴욕을 당하는 가운데 그들이 결국 분쇄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아서에게는 승 리란 것도 없었다. 예약 불이행으로 인한 손해는 컸다. 그럼에도 그느 광부들이 탄광 구내를 마치 물이 흘러가듯이 꽉 채우며 지나가는 것을 보고, 또 반출탑 위에서 연동차륜이 다시 도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자신의 낙심을 훌훌 털어 없앴다. 역전이란 것은 반드시 일어나 는 것. 이것은 자신 또는 누구의 실수에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이어 . 그는 이 런 것에 지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바로 이 순간부터다시 출발해야 하는 것이었다. 1925년 여름의 어느 일요일이었다. 모래 언덕까지 오후 산책을 하고 돌아온 데이빗은 램 가의 거리 끝에서 애니와 샘을 만났다. 데이빗을 보자 샘은 신이 나서 고함을 지르며 앞으 로 달려왔다. 데이빗이 자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샘은 노래하는 것 처럼 크게 소리쳤다. "토요일에도 나, 놀았다구. 신나지?" "응, 좋았겠구나, 샘." 데이빗이 샘 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샘도 이제 휴일이 필요할 정도로 컸구나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 꼈다. 샘은 이제 여덟살이었다. 창백한 얼굴에 울툭불툭한 이마와 그리고 명랑한 파란 눈이 웃을 때마다 감기는 게 꼭 아 버지를 닮았다. 샘은 어머니와의 이 일요일 산보를 위하여 깨끗이 손질된 옷을 입고 있었다. 모두 애니가 손수 만들어 입힌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구두가 너무 커 보였다. 마치 미루나 무 처럼 너무나 빨리 크기 때문에 오랫동안 신을 뿐만 아니라 비 오는 날에도 신을 수 있도 록 크고 튼튼한 것을 찾다가 보니 고만 구두가 터무니없이 커지고 만 것이다. "얼마나 바쁘세요. 애니?" 데이빗은 옆으로 조용히 다가온 애니에게 고개를 돌렸다. 애니는 인사 대신 웃어 보이다가 샘을 바라보았다. "전 샘 때문에 여간 속이 상하지 않아요." 그러 나 애니의 얼굴은 사랑으로 넘쳤다. "글세 슬루스 모래 언덕을 자꾸 기어오르다가 새로 산 셀룰로이드 칼라를 부러뜨렸답니다." "아니, 그건 도토리를 따려다 그랬던 거야." 샘이 아주 정색을 하며 소리쳤다. "난 도토리를 갖고 싶었어요,데이빗." "데이빗 삼촌이라고 해." 애니 가 주의를 주었다. "넌 어쩌면 그렇게 잘 잊어버리니?" "괜찮아요, 애니. 우리는 옛날부터 친구였으니까. 안 그래, 샘?" "그럼!" 샘이 이빨을 드러 내며 웃었다. 데이빗도 따라 웃었다. 그러다 애니를 바라보자 그는 미소를 얼른 지워버렸다. 애니가 너무 피곤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눈 밑은 검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얼굴 은 무섭도록 창백해 보였다. 그녀는 옆에 있는 벽에다 손을 짚고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었 다. 애니는 지금까지 너무 힘들게 살아왔다. 친정 아버지 메이서는 류머티즘으로 완전히 폐 인이 되다시피 앴고, 오빠 퍽은 탄광으로 일하러 가는 날보다 노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런 데 다 샘도 돌봐야 하는 것이다. 애니는 그동안 남의 집 빨래도 해왔고 청소부 노릇도 해보았다. 데이빗은 애니에게 여러 차례 도움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애니는 완강히 거절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혼자 살아보겠다는 태도였다. 지금도 그는 약간 놀란 듯이 크게 떠졌다. "글쎄요, 제가 학교 다니 던 때는 휴일이란 것이 있었조. 제 아이처럼 말예요." 애니는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이것이 그녀의 휴일에 대한 솔직한 개념이었다. 그녀는 휴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일 이 없었다. 더군다나 아름다운 해안가나 경치 좋은 산길을 가본다는 것은 자기와 너무나 거 리가 먼 일이었다. 그녀가 아무런 생각 없이 단순하게 대답하는 그 속에 담긴 아픔이 데이 빗의 목을 메이게 했다. 그는 순간적으로 의외의 결심을 했다. 그리고 그는 이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듯이 성급 하게 말했다. "샘과 함께 휘틀리 만으로 일 주일쯤 휴양을 떠나보는 것이 어떨까요?" 그녀 는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길 위에 시선을 던진채 아주 조용히 서 있었다. 샘은 환성을 질 렀다. "휘틀리 만이래. 엄마! 아아, 난 휘틀리 만에 가고 싶어!" 데이빗이 애니를 바라다보았 다. "해리 뉴전트 의원이 내게 편지를 보내왔어요 26일 그곳에서 마나자는 겁니다." 그는 그 말 뒤에 얼른 거짓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난 일 주일쯤 미리 가서 쉬어야겠다고 생각했지 요." 그녀는 여전히 길 위에 시선을 던진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 보였다. 그녀는 역시 고개를 흔들었다. "저희는 안 되겠어요. 혼자 다녀오세요" "야야, 엄마!" 샘이 호소하듯이 외쳤다. "애니, 건 강을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샘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그녀도 그 점은 인정했다. 그리고 사 실 샘과 함께 휘틀리 만에서 일 주일을 지낸다는 것은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로 기쁜 일이었 다. 데이빗에 댓한 고마움이 울컥 일어났다. 그러나 그녀의 머리 속에는 곤란한 일들이, 장애가 되는 여러 가지 일들이 떠오르는 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녀는 머리 속에는 곤란한 일들이, 장애가 되는 여러 가지 일들이 떠오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우선 입고 갈 옷이 없었다. 그녀는 데이빗을 '꼴볼견의 구경거리'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또 자기가 돌봐야 할 집과 아버지가 있다. 퍽은 혼자 내버려두면 술타령만 할 것이다. 그때 멋있는 생각이 그녀에 게 떠올랐다. 그녀는 기뻐서 소리쳤다. "샘만 데리고 가주세요!" 데이빗이 고개를 흔들었다. "샘은 엄마하고 함께 가는 것이 아니라면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정말야, 엄마아!" 견에서 소리치는 샘의 조그만 창백한 얼굴에는 제발 같이 가자는 애원의 빛이 가 득차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눈을 든 그녀는 데이빗에게 아주 조용한 미소를 보냈다. "좋아 요, 데이빗. 가겠어요. 그토록 우리를 기쁘게 해주려고 하시는데...." 생각하지도 않았던 그 일은 곧 결정이 되었다. 데이빗은 기쁨을 느꼈다. 요즘 와서 거의 잊고 있었던 기쁨이었다. 마음속에 감자기 어떤 빛이 비쳐오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는 애니와 샘이 방타제 길 쪽으로 걸어 내려가는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샘은 자기 엄마 주위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저리 뛰며 기뻐 죽겠다는 모습이었다. 커다란 구두, 부러진 칼라를 끼고도 그런 것은 아랑곳없이 오직 휘틀리 만에 대한 동경으 로 부푼 모습이었다. 데이빗은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마당에도 잡초라곤 보이지 않았다. 자긍ㄴ 마당은 깨끗하고 깔끔하게 손질이 되어 밝은 황색의 한련꽃이 벽에 늘어뜨린 하얀 실을 타고 뻗어오르고 있었다. 마사의 솜씨였다. 입구의 돌층계도 하얀 점토를 발라 반질반질 닦여져 조개껍질 모양을 이루게 했다. 창의 덧문에도 마사의 솜씨만이 해낼 수 있는 멋있는 레이스 장식이 12인치나 되게 늘어져 있었 다. 훌륭한 탄광부들의 집에는 어김없이 코바늘 뜨개질로 가장자리가 장식된 덧문이 있었다. 그것은 착실한 광부라는 표시기도 했다. 그러나 슬리스케일의 어느 광부의 집도 이것보다 더 멋있지는 못했다. 그느 현곤에서 모자를 벗어 들고 부엌방으로 들어갔다. 마사는 그의 저 녁식사 준비로 네덜란드 갓냉이를 다듬고 있었다. 마사는 언제나 아들을 위해서 바빴다. 그녀의 몸 속에는 편윅 가가 자랑하는 봉사정신이 봉사정신이 맥박 치고 있었다. 부엌도 매우 청결하여 이 지역에서 흔히 말하듯 마룻바닥 위 에 음식이 떨어져도 안심하고 집어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가구도 모두 번쩍거렸고 찬장 속의 질그릇들도 반들거렸다. 마사의 친정아버지가 볼링 경기에서 상품으로 받았던 질그릇 들도 반들거렸다. 마사의 친정아버지가 볼링 경기에서 상품으로 받았던 대리석 시계는 잉커 먼달동네 집을 처분했을 때 그녀가 가지고 온 유일한 물건이었다. 그 후륭한 대리석 사발시계는 조상 전래의 가보나 되듯이 높은 벽난로 선반 위에 소중하게 놓여 있었다. 집 안은 아늑한 일요일의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그는 마사를 바라보면서 말했 다. "어머니, 한 일 주일 가량 휘틀리 만에 다녀오실 생각 없으세요? 19일에 그곳에 가기로 했는데요." 그녀는 갓냉이 다듬는 일에만 열중하며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어머니가 아마 말 을 듣지 못한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내가 휘틀리 만에 가서 뭘 한다니?" "어머니가 좋아하실 것이 많이 있어요. 그리고 애니와 샘도 함께 갈 거예요. 그러니 어머니 도 이런 기회에 가시면 좋잖아요." 그는 어머니의 마음을 돌리고 싶어 간절한 마음으로 부 탁했다. 그러나 마사는 등을 돌린 채 잠시 아무 말이 없다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안 가겠다. 젊은 너희들이나 잘 다녀오너라." 다듬은 갓냉이를 담은 쟁반을 들고 돌아서는 그녀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창가의 소파에 앉아 그는 노동자의 독립 이라는 주간지를 손에 들었다. 지난 12개월동안 그는 이 잡지에 '주간 평론'을 기고해왔다. 그의 글은 첫 페이지에 실려있 었고, 화요일에 세그힐에서 했던 그의 연설도 전문이 다 실려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글 은 읽지 않았다. 그는 이제 35세였다. 지난 4년 동안 그는 조금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지역 조직에 앞장을 섰고, 지역을 순회하며 가는 곳마다 연설을 했다. 자신이 힘들고 고생 이 되는 것은 조금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에즐리의 회원을 4천명 이상이나 증가 시켰다. 그는 강인하고 정력이 넘치는 유능한 사람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 동안 쓴 논문들은 앤빌 출판부에서 간행되었고, "국가와 탄광"이라는 논문은 러셀 상을 탔다. 그 상장과 메달은 2층에 두었다가 어느 틈에 옷장 뒤로 사라졌다. 그는 이제 성공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가끔 그의 마음을 스쳐 지나가는 어떤 슬픔을 느껴야 했다. 그 종달새의 소리는 20여 년 전 그곳을 자주 찾아왔던 소년 시절을 회상케 했다. 그러다가 그 는 제니의 생각에 잠겨버렸다. 도대체 제니는 어디에 있을까? 그리운 제니, 그토록 많은 사 연이 있었음에도 그의 마음은 여전히 제니를 사랑하고 있었고, 그녀가 없는 것이 쓸쓸하여 자꾸만 생각에 잠기게 되는 것이었다. 태양의 광선과 종달새의 노랫소리 속에서 그녀에 대 한 추억은 그를 슬프게 했다. 애니와 샘을 만날 수 있어서 그의 기분이 훨씬 좋아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애니를 만 나 느꼈던 슬픔이 다시 그에게 밀려왔다. 마사에게도 책임이 있는지 모른다. 그녀의 태도가 말이다! 인간들에게 이처럼 난공불락의 딱딱한 마음이 있는데 인류의 대집단의 움직임을 변 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어머니, 마사라는 사람이야말로 변화를 모르는, 용서가 없는 사람인 것이다. 저녁을 먹고 나니 그의 기분이 좀 좋아졌다. 마사의 용서할 줄 모르는 마음과는 달리 그녀가 요리해준 갓냉이는 아 주 맛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 앉아서 해리에게 편지를 썼다. 더전과 베빙튼, 해리는 그 해에도 의석을 여 전히 지킬 수가 있었다. 베빙튼에게 매우 아슬아슬한 일이 있긴 했다. 베빙튼이 지명되었을 때 피터 아우트 럼 경이 제기한 이혼 소송에 관련된 추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운 좋게 잘 해결되어 베빙튼은 가까스로 당선되었다. 데이빗은 해리에게 긴 편지를 썼다. 편지 가 끝나자 그는 에리히 플리트너가 쓴 국가 통치에 있어서의 실험이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 그는 최근 플리트너가 쓴 국가 통치에 있어서의 실험이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 그는 최근 플리트너와 막스 세링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막스 세링의 공동사회에서의 공격이란 저서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오늘 밤에는 플리트너도 그의 마음을 끌지 못했다. 그는 앞으로 다가올 '휘틀리 만 공겨'을 생각해보았다. 샘이 함게 있기 때문에 더욱 재미있을 것이다. 좀 성가시기도 하겠지 만 그놈이 제일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안겨주면 얌전해질 것이다. 좀 성가시기도 하겠지만 그놈이 제일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안겨주면 얌전해질 것이다. 그렇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스크림을 잊어서는 안 된다. 틀림없이 애니도 아이스크림에는 꼼짝 못 할 것이다. 이탈 리아의 진짜 아이스크림을, 혀 위에서 스르르 녹아버리는 그런 것 앞에선 애니도 꼼짝 못 할 것이다. 그는 생각만 해도 재미가 있다는 듯 의자 뒤로 몸을 젖히며 큰 소리로 껄껄대고 웃었다. 그 후의 10일간은 휘틀리 만과 수영과 애니와 샘을 자기 머리 속에서 없앨 수가 없었다. 19 일 아침 그는 타인캐슬의 ㅅ트럴 정거장으로 나갔다. 거기서 애니와 샘을 만나기로 한 것이 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흥분하고 있었다. 그는 어떤 배상 사건으로 인해 마지막 순간에야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기 때문에 급히 개찰구 쪽으로 갔다. 애니와 샘이 기다리며 서 있었 다. "내가 늦을까봐 걱정했지요?" 그는 숨을 헐떡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아직도 흥분 을 하고 숨을 헐떡일 만큼 자기가 젊어 있다는 것이 기뻤다. "아직 시간은 넉넉해요." 애니 가 그녀 특유의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샘은 아무 말도 없이 얌전히 서 있었다. 얌전히 있어야 한다고 단단히 다짐을 해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의 깨끗한 얼굴과 빛나는 눈은 기쁨에 벅차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휘틀리 만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데이빗 이 가방을 들고 앞장서갔다. 애니는 미안해서 쩔쩔맸다. 퍽 오빠에게서 빌린 그 가방은 무 겁기도 했지만 너무 초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애니는 늘 크고 무거운 생선 광주리를 들고 다녔기 때문에 그런 가방쯤은 아무것도 아니어서, 데이빗이 그 무거운 가방을 들어주 느라고 애쓰는 것이 민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조용히 그가 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 다. 이윽고 그들이 좌석을 찾아 앉자 기적이 울리며 차가 출발했다. 샘은 데이빗의 옆의 구석 자리에 앉았고 애니는 그 맞은편에 자리잡았다. 기차가 교외를 지나 평화스러워 보이는 전 원의 시골로 들어서자, 샘은 흥분을 도저히 누를 수가 없는지 끝없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저기 기관차, 저 화물차, 아, 저 큰 기중기 좀 봐요! 아아! 저 큰 굴뚝좀 봐. 난 저렇게 큰 굴뚝은 처음이야!" 그 굴뚝은 그 굴뚝 꼭대기에 올라서 청소도 하고 수리도 하는 사람의 이야기로 넘어갔다. 굴뚝은 적어도 600미터쯤 되어 보였는데, 그 까마득하게 높 은 곳에 올라간다는 것이 얼마나 멋있겠느냐는이야기로 꼬마는 열을 올렸다. "그런 샘은 이 다음에 굴뚝 청소부가 되면 좋겠네." 데이빗이 애니 쪽으로 미소를 보내며 말하자 샘은 머 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야니야." 그는 음성을 약간 낮추었다. "난 우리 아빠처럼 될 거야." "광부말이냐?" "응, 난 꼭 광부가 될 거야." 샘은 아주 엄숙하 게 말했다. 샘의 모습이 너무 진지했기 때문에 데이빗은 웃음이 나왔다."그래, 좋아. 그렇지 만 앞으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하자." 사실 그러하기를 바라면서 그는 말했다. 긴 여행은 아니었지만 유쾌한 여행이었다. 얼마 안 있어 그들은 휘틀리 만에 도착했다. 데이빗은 태런트 가의 여관방을 하나 빌렸다. 그곳은 조용한 거리인데 다 웨이벌리 호텔까지 산책로가 뚫려 있는 곳으로, 이곳 지부의 서기디키 가 추천해준 곳이었다. 디키의 말에 의하면 그 집 여주인 레슬리 부인은 지역 위원회가 개최될 때 늘 연맹 대표 자들에게 싼 값으로 숙소를 제공해준다는 것이었다. 레슬리 부인은 약 20년 전 헤드링튼에 서 발생한 탄광 사고 때 생명을 잃은 어떤 의사의 미망인이었다. 지금은 모든 사람이 그 사 고를 까맣게 잊고 말았다. 하지만 레슬리 부인이 좁다란 안마당과 노팅검 레이스로 된 커튼, 유리로 만든 벽난로 위 선반 장식, 아주 낡아버린 피아노 등이 있는 붉은 벽돌집들이 늘어 선, 이 짓밟혀버린 듯 좁다란 골목 안에서 하숙집을 경영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낙반 사고 때문인 것이다. 레슬리 부인은 키가 크고 피부가 검은 조용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재미가 없는 무뚝뚝한 성격이긴 했으나 화내는 일도 없었다. 그녀에게서 해변가의 하숙집 여주인이라는 냄새나 특징은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세 사람을 조용히 맞 아들여 예약한 방으로 안내해주면서 뜻하지 않은 실수를 했다. 애니를 데이빗의 부인으로 생각한 것이다. "남편되시는 분과 이 앞쪽 방을 사용하세요, 아기는 뒤쪽의 작은 방을 준비 해놓았답니다." 순간 애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으나 조금도 어색함이 없이 대답했다. "이 분은 저의 시동생이 되신답니다. 제 남편은 전쟁 때 전사하셨지요," 얼굴을 붉힌 것은 레슬리 부인 쪽이었다. 그녀는 머리카락까지 새빨개지도록 당황하며 말했 다. "정말 실례를 했군요, 편지를 주셨을 때 다 알아 뒀어야 했느데..." 애니와 샘이 앞쪽 방 을 사용하고 데이빗은 뒤쪽의 조그마한 방을 쓰기로 했다. 레슬리 부인이 자신의 실수가 애 니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까봐 걱정하면서 친철하게 하려고 애쓴 덕분에 두 사람은 금세 친구가 되었다. 휴가는 즐겁게 흘러갔다. 샘의 덕분이기도 했다. 샘의 천진스러운 모습은 옆 에 있는 사람까지 유쾌하게 만들었다. 데이빗도 천성이 명랑하긴 했지만 샘과 함께 있는 시 간과 같은 즐거움은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날씨는 더웠지만 휘틀리 만에 언제나 불고 있 는 선선한 바람이 무더위를 막아주었다. 그들은 매일 아침 수영을 하고는 백사장에서 프랑스식 크리켓 놀이를 했고, 엄청난 양의 과일과 아이스크림을 먹어댔다. 또 컬러코츠까지 산보를 가 그곳 브라운 빌딩에서 노파가 경영하는 옛날식의 게 요리집에도 가보았다. 콜타르 냄새와 어망 냄새를 풍기는 두 칸 정도 될 듯한 그 식당은 조그만 현관부터가 매력적이었다. 작은 식탁과 말털 소파에 앉아 껍질에 서 금방 빼낸 싱싱한 게요리가 잘 맞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세 사람은 그런 걱정은 까 맣게 잊은 채 열심히 먹었다. 음식점의 주인 노파는 그들을 유심히 바라보며, 특히 샘이 귀 엽다는 듯 친절히 웃어 보이면서 점토로 만든 담뱃대를 내내 물고 있었다. 그 곳에서 돌아 올 때에는 산책로를 따라서 왔다. 오는 동안 샘은 데이빗의 손에 매달려 걸였는데 너무 물 어볼 것이 많아서였다. 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의문덩어리인 긋 끊임없이 물었으나 데 이빗은 조금도 귀찮아하지 않고 대답해주었다. 또 샘의 질문은 언제나 성급애서 마치 기관총을 쏘아대는 것 같고 대답하기가 곤란한 것도 있었으나 그럴 땐 적절한 대답을 만들어냈다. 또 샘의 질문은 언제나 성급해서 마치 기관총 을 쏘아대는 것 같고 대답하기가 곤란한 것도 있었으나 그럴 땐 적절한 대답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때는 샘도 눈치를 채고는 데이빗의 손을 흔들어대는 것이었다. "에이, 삼촌, 이번 에도 날 속이려고 했지. 난 안 속아, 안 속는다구." 그러나 샘은 속임수가 들어 있는 대답을 더 좋아했다. 이렇게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며 걷는 동안 애니는 좀 떨어져 걸으면서 잔 잔한 미소를 띠울 뿐이었다. 그녀는 본디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데이빗과 샘이 함께 다니기를 바랐지만 자주 사양 했다. 그는 언제나 할 일이 있다는 것을 핑계로 삼곤 했는데 사실 그녀는 항상 바빴다. 집안 정리나 시장을 보러 간다든가, 레슬리 부인과 차 마시는 시간을 가지느라고 집에 남아 있곤 하는 것이었다. 또 애니는 레슬리 부인과 함께 식사 준비하기를 좋아했다. 특히 데이빗이 좋 아하는 음식이 무엇인가를 알아 그것을 해주고 싶어 애를 썼다. 그녀는 데이빗에게 감사하느 마음니 너무 컸으나 그 감사를 드러나게 하는 것도 주제 넘는 것 같아 조심하려 하면서도, 기회만 있으면 온갖 정성을 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데이빗은 그녀의 이러한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수요일 오후 그는 외출에서 돌아오다가 애니가 자기 의 잿빛 플란넬 바지를 들고2층으로 올라가려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부엌에서 그것을 다린 후 갖다두려는 참이었다. 그것을 보자 지금까지 은근히 참아오던 화가 치밀었다. "뭣 때문에 그런 필요 없는 일을 하는 거예요? 이렇게 좋은 날씨에 집 안에 처박혀 다림질이나 하다 니...어서 바닷가로 나갑시다."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나중에 가겠어요, 먼저 나가보세요." "나주엥라," 그는 벌컥 화를 냈다. "언제나 나중에, 아 니면 곧, 그렇지 않으면 레슬리 부인과 이야기 좀 하고 나서군요, 애니, 당신은 이곳에 휴가 를 온겁니다. 일부러 이곳까지 오자고 한 내성의도 생각해보세요." "죄송해요. 그러나 난 이 렇게 집안일을 돌보는 것이 더 즐거운걸요. 전 그런 사람이에요." "말도 안되는 소리! 이곳 에 온 이상 내 말을 따라주세요. 이제부터는 항상 우리와 행동을 같이해 주세요. 정말 부탁 입니다." "네에, 그렇게 할게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 데이빗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러 나 전 걱정이 되어서 그래요. 공연히 성가시게 해드리는 것이 아닌가해서...데이빗 삼촌이야 말로 편히 쉬셔야 되잖아요..."데이빗은 머리를 흔들었다. "필요 없는 신경은 그만 쓰세요. 저를 더 이상 화내게 하고 싶지 않다면 어서 모자를 쓰고 나오세요." 애니는 온순히 따랐다. 세 사람은 오후의 햇볕이 따가운 모래사장으로 나왔다. 샘은 얕은 물에서 놀고 두 사람은 모래밭에 앉았다. 애니는 고개를 치켜들고 햇 을 쬐었다. 그에게는 애니가 신비로운 여자라는 느낌이 다시 강하게 들었다. 그녀는 멋있는 여자였다. 외모가 아름답고 매력적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깊은 내면에서 풍기는 멋이 흘러 넘치는, 겸손하고 조용하고 어디 한군데 빈틈이 없이 완벽하면서도 부드 럽고 상냥한 여자였다. 그는 아직 젊고 예뻣다. 태양을 향하여 고개를 들고 있는 그녀의 조 용한 얼굴은 평화로우면서도 어딘가 슬픔이 깃든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한 얼굴은 평화로우면서도 어딘가 슬픔이 깃든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너무 비하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데이빗에게 귀찮은 존재가 될까봐 두려워했다. 데이빗은 요 즈음에 외서 그런 것을 더욱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이런 변화는 그녀의 의기소침을 나타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이 번 기회에야말로 이런 불편한 벽을 헐어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모래밭에 팔꿈치로 몸 을 괴고 누우면서 샘은 물가에서 양동이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애니,우리사이는 지금 어떻 습니까? 우리는 옛날부터 가장 친한 친구였는데 말입니다. 지금은 좀 의심이 되는 군요 애 니는 여전히 태양 쪽으로 눈을 감은 얼굴을 치켜든 채 대답했다. "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아 요. 데이빗 삼촌은 저의 가장 다정한 친구예요." 그는 손가락 사이로 보드라운 모래를 흘러 내기게 하면서 그녀를 바라보고 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난 믿을 수가 없군요. 난 자주 궁금해져요. 애니 당신의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이 들어 있을까 하고 말예요. 당신은 요즘 너무 신비로워졌어요. 마치 성모 마리아처럼...조금도 이 세상 사람 같지가 않아서 난 화가 나요. 왜 자기를 숨기세요?" "제가 데이빗 삼촌이라면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겠어요." 그녀는 가냘픈 미소를 띠었다. "난 언제나 변함 없느 애니, 당신이 꼼짝 못하도록 내가 막 휘드를 테니까 단단히 준비하 세요."그는 빙글빙글 웃으며 여전히 같은 모양으로 눈을 감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 늘밤 샘을 재워놓고 우리끼리만 유원지로 가는 겁니다. 그곳에서 난 상신을 정신 없게 만들 어버릴 작정이에요. 무섭게 빠른 전기 자동차에 태웠다가는 시속80마일로 공중을 선회하는 기차에 밀어넣을 겁니다. 그래서 당신의 신비로운 껍질을 벗겨버리고 옛날의 팔팔했던 애 니를 다시 찾아낼 겁니다. " "'유람철도'는 저도 타보고 싶었어요."그녀는 여느 때의 그 미소 를 지으며, 내심을 알 수 없는 모습으로 말했다. "그렇지만 입장료가 꽤 비쌀걸요?" 그는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다. "애니. 정말 당신은 어 쩔 수 없군요, 내가 졌습니다. 하지만 입장료가 백만 파운드라도 그 유람철도를 한번 타봅시 다.!"그들은 갔다. 조금도 의심할 줄을 모르는 샘이 박하과자에 속아서 일찍 잠들자 데이빗 과 애니는 타인캐슬의 유원지로 나갔다. 바람이 전혀 없는 거리는 조용하고 밤의 경치는 아 름다웠다. 데이빗은 갑자기 이곳으로 신혼여행을 왔던 일이 떠올랐다. 제니와 함께 지냈던 모든 기억이 너무나 생생하게 떠올라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는 어느세 애니에게 제니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얼마나 어리석고 비참한 것인지 알면 서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은 제니와 함께 신혼여행을 왔던 곳입니다." "알고 있 어요," 애니는 나직이 대답하며 슬픈 눈으로 건너다보았다. "아주 옛날 일 같군요, 정말 조 금도 현실 같지가 않아요. 별로 오래 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한동한 말이 끊어졌다. 천 천히 걷고 있는 그의 마음속에 돌연히 제니에 대한 뜨거운 애정이 불길처럼 솟아올닸다. 그 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제니가 없다는 것이 정말 쓸쓸합니다. 제니를 잊을 수가 없어요, 지금이라도 제니가 내게로 되돌아와 준다면 하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데이빗. 삼촌이 제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저도 잘 알고 있어요." 말이 다시 ㄲ,ㄴㅎ어졌다. 두 사람은 자꾸 걸었다. 유원지 안으로 들어가서도 두 사람은 신이 나지 않았다. 특히 애니 는 마음이 착 가라앉은 듯 이상한 놀이들을 보아도 신기해하지도 않았다. 데이빗은 우울한 기분을 툭툭 털어버리기로 했다. 애니를 기쁘게 해주고 명랑하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힘을 냈다. 그느 '거울로 된 방'에서 시작하여 기상천외의 온 갖 놀이터로 애니를 데리고 다녔다. 유람철도는 역시 예상대로 애니를 가장 즐겁게 해주었 다. 끔찍한 지옥의 터널을 통과하는 데 기가 질려 애니는 그만 숨도 잘 쉴 수가 없을 정도 였다. 또 굉장한 것은 "거인 경주기"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9시경에 거인 경주기를 탔다. 그 차는 갑작스레 내리막으로 떨어져내리는가 하면 또 눈이 팽팽 돌 만큼 높이 날아올라 전등 불이 혼히 빛나는 유원지 전체가 두 사람 주위를 뱅글뱅글도는 느낌이었다. 도는 것이 멈추자 그 차는 높이 치솟기 시작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높이까지 올라가 유 원지 전체가 두 사람 주위의 풍경을 만끽하도록 슬슬 기듯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것이 었다. 그러나 관람객이 천천히 경치를 관상하고 있는 동안 눈 깜짝할 사이에 그것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급강하하여 끝없는 밑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다. 아래로 아래로 멈추는 것을 잊은 듯이 쏜살같이 떨어지는 그 안에서는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무시무시한 낙하였다. 온몸이 산산조각이 돼버리는 듯 아찔아찔한 순간을 지나노라면 죽었 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비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차는 다 른 하나의 꼭대기까지 뛰어오르더니 거기서 다시 아래로 마구 떨어져 내려오는 것이었다. 데이빗은 애니의 손을 잡아 차에서 내려오도록 도와주었다. 그녀는 볼을 빨갗게 물들이고 모자를 삐뚜름하게 쓴채 데이빗의 팔을 잡고 흔들거리며 서서는 몹시 즐거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이 참, 데이빗."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다시는 이런 것 타지 말아 요." 그러면서 그녀는 깔깔대고 웃기 시작했다. 그녀는 웃고 또 웃어댔다. 그러고는 다싯 숨이 차서 헐떡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정말 신났어요." 그는 미소를 머금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웃을 수 있군요. 내가 바라던 게 바로 이겁니다." 그들은 유원 지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유원지는 어디든지 만원이었다. 폭포같이 The아지 는 음악소리, 외쳐대는 행상인들 가운데에서 흔들거리는 불빛과 관중들이 한덩어리가 되어 빙빙 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나같이 가난한 얼굴들이었다. 타인사이드에서 온 광부들, 십 헤드의 철공들, 얘로우의 주물공들과 연철공들 그리고 세그힐과 헤드링튼, 에즐리에서 온채 단부들로서 모자를 머리 뒤통수에 얹거나 머플러를 풀어 헤치고 귀 뒤에다가 담배꽁초를 끼 운 모습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온 여자들도 얼굴이 상기된 행복스러운 모습으로 종이봉지에 담긴 것들을 먹으면서 그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 봉지의 것을 다 먹고 나면 그 봉 지에 입김을 불어넣어 팡하고 터뜨리곤 했다. 어떤 장난꾼들은 티저를 가지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것이야말로 가난 한자들, 이름도 없이 그늘에 사는 인간들의 축제였다. 그때 돌연히 데이빗ㄷ이 애니를 향해 말했다. "이런 곳이 바로 내가 속하는 곳입니다. 이들은 나의 사람들입니다. 난 이들 속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말을 수긍하지 않았다. 그녀는 머리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데이빗, 당신은 꼭대기까지 올라가셔야 해요." 그녀의 음성은 느렸으나 솔 직하고 열의에 찬 것이었다. "모드가 다 그렇게 말하고 있답니다. 데이빗 읍의원 다음 선거 땐 국회에 들어가실 거라구요." "누가 그런 말을 합디까?" "넵튠 탄광의 모든 젊은이들이 그 렇게 말한다더군요. 퍽 오빠에게서 들은 이야기예요. 데이빗이야말로 자기들을 위해서 일할 분이라고." "그럴 수만 있다면." 그는 길고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해안을 따라 태런트 가를 향하여 돌아올 때, 둥근 달아 바다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유원지의 소란과 번쩍이는 불빛이 그들 뒤로 차 츰 멀어져 갔다. 모든 것이 고요했다.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하여 애니에게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열기를 띠어가자 그는 자기 옆에서 조용히 귀를 기울이며 걷고 있는 애니를 잊어 버릴 정도로 자신의 이야기에 도취되었다. 그는 실로 오랜만에 자신의 내부에 응결되고 있 는 거대한 포부를 털어놓는 것이었다. 결코 자기 자신을 위한 야망이라곤 추호도 없었다. 그 는 광부들, 오래도록 남에게 억압만 당해온 사람들을 휘해 투쟁할 것이었다. "정의와 안전입 니다."그는 나지막ㅎ산 목소리로 결론을 내렸다. "탄광 사업이란 어떠한 사업과도 다릅니다. 그건 국유화가 필요합니다. 광부들의 목슴은 그 여하에 달려 있조. 막대한 이익을 추구하는 사기업으로 머무르는 한, 안전은 무시되는 거죠. 가끔가다가 안전을 떠들곤 합니다만 그것뿐 입니다. 그러다가 사건이 터지고 마는 겁니다. 넵툰에서의 사건도 그런 식이었조." 태런트 가를 올라갈 때 투 사람 사이엔 침묵이 흘렀다. 데이빗은 미안하다는 듯 애니를 바라보았다. "너무 지루한 이야기였습니다. 사실 이런 이야 기는의회에서 책상이나 치면서 늘어놓아야 할 이야기들이었는데...미안합니다." "별 말씀을.. 전 진실이 담긴 이야기는 다 좋아해요, 그 말씀이 실천될 때가서 오기를 바랍니다. " "내일 해리 뉴전트 의원이 올 때 인사시켜드리죠, 해리 의원은 정말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누구라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매력적인 사람이조."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싫어요, 그 런 유명인사는. 전 그런 분 만나고 싶지 않아요." 데이빗이 슬리스케일에 돌아오자마자 만난 첫 번째 사람은 제임스 래미지였다. 월요일 아 침 그는 월요일 아침 그는 애니와 샘과 함께 휘틀리 만에서 타인캐슬로 올라와 두사람을 먼 저 기차에 태워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는 애즐리로 달려가 회관에서 종일 일을 보고 저녁 7시에 리스케일 역에서 나오다가 하마 터면 래미지와 부딪칠 뻔한 것이다. 래미지는 석간 신문을 사려고 신문 판매대 쪽으로 걸어 가는 중이었다. 래미지는 통로 한복판에서 창백한 얼굴로 걸음을 멈추었다. 데이빗은 그의 얼굴 표정에서 그도 알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스태플튼 의원은 토요일 밤에 프리메이슨 병 원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타인캐슬 헤럴드 지에는 의미심장한 기사가 실려 있었 던 것이다. "이봐, 이봐." 래미지는 매우 빈정대는 어조로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나간다는 소문이더군." 데입시도 상냥하나 상대를 긁는 듯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렇답니다. 래미지 의원!" "흥! 그래 자네가 당선될 거라고 생각하나?"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만..." 데이빗의 겸손한 대답은 그의 분노를 더욱 돋우어주었다. 래미지는 흥 미롭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려던 노력을 집어치웠다. 그의 크고 뻘건 얼굴이 더욱 뻘겋게 되었다. 그는 한 손을 불끈 쥐더니 다른 손바닥을 쾅 내리쳤다. "내가 있는 한 말라 비틀어진 선동가 따위를 이 지구 국회으원으로 뽑도록 놓아 두지는 낳을 테니까.두고 봐!" 데이빗은 재미았다는 얼굴로 래미지의 일그러진 얼굴을 바라 보았다. 증오로 가득 찬 얼굴이었다. 데이빗은 래미지의 부정한 푹리를 봉쇄해버렸다. 그래 서 병원에는 싱싱한 상등품의 고기를 납품해야 했고, 위생이 무시되었던 도살장시설과 방파 제 뒤에 있는 불결한 아파트도 큰 문제로 드러나 버렸다. 데이빗은 그가 정당한 방법으로 이익을 취하면서 가난하나 이웃을 도울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였으나 래미지에게 있어서는 참을 수 없는 간섭이요 부당한 방해일 뿐이었다. 래미지는 데이빗이 잡아주고 싶도록 미웠다. 데이빗은 아랑곳없다는 듯이 침착하게 대답을 했다. "물론 귀 의원께서는 축 입후보자를 지지하시겠죠." 다행히 그 다음날은 하늘이 파랗 게 개인 사이로 해가 빛나고 있었다 데이빗은 목과 영혼을 모두 선거정에 쏟아 부었다. 넵 튠 탄광 문 앞에서 순번 교대광부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모자를 벗고 해리 오글과 탄량 감사원 스 그라고 빌 스노우와 합께 트럭을 타고서 선거전 시작의 준비를 했다. 차 리밍이 자원하여 운전기사 노릇을 했다. 데이빗은 한창 힘차고 신랄한 선거연설을 하다가 도중에서 그만두었다. 그는 광부들이 모 두 배가 고파 점심을 먹는일이 더 급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오래 붙들어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배가 고픈 채 갱에서 나와본 경험이 없는 로스코라면 모르지만 그 로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연설은 성공적이었다. 데이빗의 정견은 쉽고, 아주 간단한 것이었지만 그만큼 실질적인 것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그것은 광부들을 위한 정의라는 것이었다. 탄광의 국유화가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결코 정 의도 실천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청중들은 이해했다. 그는 바로 그 문제 하나만을 내세웠다. 다른 것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 문제로 선거전을 벌이기에 그는 정말로 알맞은 입후보자였다. 그것은 그의 평생의 신념을 내놓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선거전의 첫 주가 끝났을 때 톰 헤든이 타인캐슬에서 데이빗의 응원연설을 하러 왔다. 데이빗은 연설에 서 인신 공격이 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로스코도 정정당당히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선거전 분위기는 깨끗했다. 그러나 헤 든은 역시 헤든이었다. 연설에 앞서서 데이빗이 주의를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톰 헤든은 깨 끗한 연설 갔은 것은 질색이라고 하며 한사코 들으려 하지 않았다. 헤든은 거무튀튀한 얼굴 에 조롱이 담긴 웃음을 띠고는 연설을 시작했다. 9월 11일 투표일이었다. 그 전잘인 10일 금 요일 밤 6시에 슬리스케일 시공관에서 데이빗은 최후의 정견 발표회에 가졌다. 회의장은 만 원을 이루웠고, 복도에도 청중들은 3중으로 겹쳐 서 있었으며 더운 밤이었기 때문에 확 열 어젖힌 문들 주위에도 군중들이 모여 있었다. 데이빗을 응원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단 위게 올라가 있었다. 톰 헤든, 해리 오글, 윅스, 친 치, 젊은 브레이스, 그리고 톰 오글 노인과 피터 윌슨과 카마이클 선생 등 카마이클 선생은 데이빗과 함께 주말을 보내려고 윌링튼에서 특별히 올라왔던 것이다. 데이빗이 연설을 하려 고 앞으로 나아가자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그는 작은 테이블과 아무도 마신 적이 없는 파리똥이 더덕더덕한 물병 앞에 섰다ㅓ. 장내가 너무도 조용해서 먼 스누크 해안 에서 철썩거리는 파도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지경이었다. 그의 눈앞엣는 자기를 지켜보는 수많은 얼굴들이 연단의 밝은 전등불 저쪽까지 하나의 큰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 뭔가를 상징하는 듯 창백하면서도 그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 을 그라고 무수한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분간할 수가 있 었다. 맨 앞줄에는 애니가 조용하면서도 긴장된눈을 자기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 보였고, 그 녀 옆에는 퍽과 네드 싱클레어와 톰 타운리 차 리밍 매우 심각한 생각에 잠긴 듯이 상을 찌 푸린 잭 리디 우드 슬레터리 등 몇 심 명에달하는 녑튠 탄광의 광부들을 볼 수 있었다. 그 소리에 와아 하느 환호성이 일어났다가 다시 고요해졌다. 그는 말을 이었다. "생각해보니 이 회관 안에 와 걔시는 모든 분들의 목숨은 탄광과 결부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가 광부들이고 그 광부들의 식구들입니다. 여러분은 모두가 탄 공에 묶여 있습니다. 제가 오늘 밤 여러분에게 드리고자 하는 말은 바로 그렇나 탄광에 관 한 문제 즉 여러분 전체에게 관련된 아주 중대한 문제가 되겠습니다..." 뜨거운 감정의 열기로 점점 높아지는 데이빗의 목소리가 무더운 장내에 크게 울리기 시작 했다. 그는 사유권 제도를 예를 들어, 그것이 종종 안전을 무시하게 되는 그 근본적인 원인 은 단순ㅇ히 이익만 추구하기 때문이며, 그럼으로써 회사의 주주가 가장 먼저이고 광부는 맨 끝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다음엔 채굴권으로 넘어갔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공동사회에 봉사하는 이 공동사회에 봉사하는 보수로서 부여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몇 백 년 전부터 얻은 독 점권 때문에 한 지구에서 막대한 이익을 추구하도록 인정해주는 따위의 용서 할 수 없는 부 도덕한 제도라고 했다. 그다음 그는 재빨리 청중 앞에다 그러한 제도에 대신할 새 제도를 제시했다. 그는 청중들에게 국유화라는 것이 무슨 듯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라고 호소했다. 첫째, 그것은 탄광을 모두 통합하는 일이며. 관릴를 통합하여 생산방법을 개선해가는 일이 다. 그렇게 함으로써 결과는 소비자에게 석탄을 공급하는 제도를 필연적으로 다시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그것은 탄광 내의 안전한 노동을 뜻한다고 했다. 전국에는 구식이고 설비가 나 쁜 탄광들이 수백 개도 더 있는데, 탄광을 사유로 하는 제도로 인해서 광부들은 작업만을 해야 할 뿐 작업의 우험성이라든가 자기네가 한는 집업이 부당하고 말할 수 있는 권리는 주 어지지 않고 있다. 데이빗이 하원에 처음 소개되면서 우선 느낀 것은 자기가 그곳에서 얼마나 하찮고 보잘것 없는 인물인가 하는 것이었다. 누구와도 연줄이 닿지 않은 외로운 국회의원임을 통감했다. 그는 이 소외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들게 싸워야했다. 우스운 일이긴 하지만 등원 첫날 그 를 맞아 준 인물들은 런던의 경찰관들이었다. 일찍 하원에 도착한 그는 처음이면 누구나 그 러하듯이 일반인의 출입구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를 제지하던 경찰관은 그의 신분을 알자 특별 출입구가 있는 곳을 상냥하게 가르쳐주었 다. 대이빗은 가운데 마당을 지나고 올리버 크롬웰 동상을 돌아 줄줄이 정차한 자동차 사이 에서 거만스레 어정이는 비둘기 떼들을 지나서 국회의원 특별 출입문을 통헤 안으로 들어갔 다. 거기에도 또 다른 친전한 경차관이 서 있다가 그를 휴게실로 안내했다. 휴게실은 옷걸이 못이 죽 박혀 있는 긴 방이었는데 몇몇 옷걸이 못에는 묘한 핑크빛 테이프가 매어져 있었 다.데이빗이 모자와 외투를 벗었을 때 이곳을 경비하느 또 한 사람의 경찰관이 서 있다가 그를 휴게실로 안내했다. 3시에 뉴전트와 베빙튼이 도착했다. 그는 그들 두 사람과 함께 엷은 천색표지의 책들로 꽉 찬 넓은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날은 길고도 천장이 높은 의사당과 유유히 의자에 기대 앉은 국회의원들 의사봉을 앞에 두고 앉은 의장 자기의 진짜 일이 드디어 시작되었다는 확 신 속에 몹시 긴장되었다. 힐다는 기뻤다,그러나 경탄할 그 연설은 그녀와 전연 무관한 것이 라고 볼 수 없었다. 아서는 넵튠 탄광의 사무실 창가에 서서 탄광 구내를 꽉 메운 광부들을 내다보면서 1921년 에 있었던 탄광 폐쇄 소동을 마음 아프게 회상하고 있었다. 그 소동이야말로 그를 괴롭혔온 모든 산업쟁의의 첫출발이었고 그 쟁의는 1926년 총 파업으로까지 치달었던 것이다. 그는 눈을감으며 그와 같은 무모한 싸움은 이제 모두 잊어버리자고 생각했다. 그런가 하면 허락 이안 된 광부들의 비참한 모습은 차마 바라 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광부가 다 일할 수 있을 만큼의 작업량이 없기 때문에, 시간계 앞에서 그처럼 검사를 받아 승자와 패자가 갈라지도록 하고 있었다. 6시간 교대를 한다면 모든 광부들이 다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서 문제될 것이 없었다. 지금은 그것까지 신경 쓸 여지가 없는 것이다.어떤 게약조건이든 어떤 노동환 경이든 다만 일거리만 있으면 되니 제발 일거리만 주시오 하는 처지였다. 아서는 창가에서 물러나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광부들의 얼굴 표정이 그를 노항주지 않았다. 특히 한 광부의 얼굴이 그의 시선을 끌었다. 퍽 메이서여 . 아서는 퍽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작업시간도 잘 지키지 않고, 월요일 아치미이면 으레 결근이고 술에 젖어 사는 게으른 놈팽이다. 그런데 지금 펄은 그렇나 자신을 잘 알면서도 남과 똑같이 일거리를 얻고 싶어 두려두려움과 불안으로 벌벌 떠는 모습으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어디선가 잭 리디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잭은줄에 끼여들지는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기다란 행렬 을 짓고 서 있는 것이 몹시 못마땋하다는 긋이 둘러보며 왔다갔다 하더니 사람들을 향해 열 변을 토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잭은 그 재난사건에서 목숨을 잃은 톰과 패트 리디의 형이었다. 과거엔 멋있고 건장한 젊 은이였지만 지금은 증오와 울분으로 얼굴까지 사나워지고 형편없는 몰골이 되어버렸다. 재 난사건 뒤애 전쟁터에 나가 파셍델드의 전투에서 허벅다리 관통상을 입어 절름방이가 되었 기 때문에 허즈케드는 넵큔 탄광에 그를 받아들이기를 거절했다. 퍽은 잭이 무슨 말을 하리 라는 것을 다 알고 있었지만 머리를 치켜들고 그가 떠들어대는 말에 멍한 얼굴로 귀를 기울 이고 있었다. 잭의 암담하고도 처절한 목소리 속엔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삶에대한 분노, 이와 같은 상황으로 그를 끌고 온 운명과 사회에 대한 분노가 섞여 있었다. 잭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금방 쓰러질 것 같은 걸로는 우리 여편네나 애새끼들을 먹여 살 릴 수 없단 말이다. 그대 어떤 손 하나가 잭의 어깨를 움켜 잡았다. 잭은 말을 멈추고 가만 히 서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로덤 경사였다. 그는 몸이 뚱뚱하고 잘난 척하고 으스 대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의젓한 소리로 달래듯 말했다. 데이빗의 정치적 발언은 서서히 빛을 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오래 기다려야 한느 느린 성 장이긴 했으나 5년 전 그의 신분에 비추어보면 놀랄 만한 변모였다. 그가 주장하는 지론이 나 목표는 아주 명쾌하고 타당한 것이었으나. 그것을 향해 가는 길을 몹시 험하고 또 더뎠 다. 데이빗의 인생은 바야흐로 아름답게 만개되고 있었다. 그는 건가했다. 정신도 막았고 아 무리 많을 일을 해내도 어려운 줄을 몰랐다. 정굴은 뒤승승하고 정부는 붕귀의 위기에 직면 해서 총사퇴를 거론 중이었다. 현 국가의 경제는 하나의 폭력과 압박으로 국민을 괴롭히고 있었다. 국민들 사이에 이러한 제도하에서는 국가가 절대로 재건되지 못할 것이라는 인식이 더욱 널리 퍼져갔다. 실업수당을 받고 있는 노동자도 이제는 줏데없는 인간찌꺼기로 불리워 지지 않았다. 세계 정세를 꼬집는 풍자가 거리낌없이 나돌았다.데이빗은 노동당이 정권을 장악할 기회 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점칠 수 있었다. 바로 금년이 선거가 있는 해였다. 선거에선느 탄광 문제를 내걸고 투쟁을 벌여야 했다. 당은 이미 그것을 공약했다. 광부들에게 이익이 되고 사 회에 번영을 가져다주는 이 위대한 국가적 건설 계획은 그 얼마나 빛나는 당의 정강이 되어 줄 것인가!활짝 개인 4울의 아침에 데이빗은 자기 집 창가에 앉아 신문을 훑어보면서 기분 이 매우 좋았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그는 이번의 계획안인 동력부문을 구체화하기 위해 제출된 최근의 경과룰 보여주는 저온도 보고서의 연구에 오전 시간을 보내겠다고 잔뜩 벼르고 있었다. 그 런데 그때 뜻하지 않은 전화가 울려왔다. 대체로 전화는 터커 부인이 받았는데 전화벨이 계 속 울리기 때문에 그가 신문을 놓고 중간 계단으로 내려가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저 샐리의 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대번에 그 목소리를 알 수 있었다. 침묵에 이어 이윽고 긴 한숨이 데이빗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그는 몇 번이고 그 괴이하게 지껄이고 있는 사연을 자세히 노려보았다. 제니의 숨결이 깃든 한줄한줄의 글을 고통스러우 면서도 연민에 차서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애정으로 바라보았다. "왜 진작 알려주지 않았 소?" 그는 드디어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무슨 소용이 있갰어요?" 샐리가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머뭇머뭇하다가 또 입을 열었다. "그래요 난, 챌터넘까지 가봤어요. 엑셀셔 호텔까 지. 제니는 틀림없이 2,3일간 그곳에 있었대요. 경마가 있는 주간 동안에. 그러나 그 귀부인 의 이름은 없었어요." "그래 나도 짐작할 만하군" 그는 침울하게 말했다. 그 날 밤 그는 난롯가에 앉았으나 테이블 위에 놓인 보고서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보고서를 드려다볼 수가 업성ㅆ다. 이상한 불안감이 그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밤이 이슥해서 그는 집 밖으로 나와 텅 빈 거리를 오래오래 걸었다. 그 해 이른 가을의 어느 안개 낀 저녁에 데이빗과 해리 뉴전트는 하원 의사당에서 나와 아 래쪽 돌층계 위에서 잡시 이야기를 나누며 서 있었다. 10주일 전에 왕응ㄴ 노동당 내각 알 현에거 칙언을 내렸다. 그때 노동당 내각 위원들은 황송한 얼굴들로 그 손에 입을 맞추었다. 대례복에 눈부신 정장용 삼각모자를 쓴 짐 더전은 10여 명의 사진기자들 앞에 아주 상냥한 태도로 서 있었다."금년에 법안이 실시 될까요? 그게 바로 내가 알고 싶은 겁니다." 목에 스 카프를 두르며 뉴전트가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ㄷ.데이빗은 자기의 기분을 상징하는듯한 희미한 안개 속으로 시선을 던졌다. 기다리던 롤스튼이 왔기 때문에 그들의 화제는 자연스레 바뀌었다. 세 사람이 함께 참석하 기로 된 주의 통제 연맹이 개최하는 회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빅토리아 가를 향해 안개 속을 걷기 시작했다. 데이빗은 끝까지 마음이 가벼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도 의기양양 하게 시작된 국회 회기가 이상하게도 계속 비효율적으로만 흐라고, 그전 회기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후 몇 주 동안 그의 생각은 슬리스케일로 특히 자기가 정의를 약속해썬 광부들에게로 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스스로 공약했고 당에서도 거당일치하여 공약했언 것이다. 그 공약이 그들에게 선거의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므로 국회의원들 자신에게 어떤 손해나 불이익이 온다 하더라도 국회를 떠날 곤경에 처하게 된다하고라도 그 공약은 반드시 이행되 어야만 하는 것이다. 데이빗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의원장 의사 진행이 되기 전에 이법안 이 노동당의 정책을 제시하는 것으로 의도된 것인지 아닌지를 먼저 알고 싶습니다. 좌익계 의원들 쪽에서 몇몇 의원들이 동조의 고함을 질렀다. 더전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데이빗을 상냥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데이빗의 분 노에 찬 음성도 질 수 없다는 듯 더욱 거세졌다. "아아니, 이거 원! 도대체 귀 의원이 원하 는 게 도대체 무었이오?" 차머즈 의원이 도무지 참지 못하겠다는 듯 거칠게 말을 꺼냈다. "본인이 바라는 바는 우리의 공약을 이행하고 당내 모든 사람의 양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수정된 법안을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이법안은 반드시 수정해서 제출되어야지 이대로는 안 됩니다. 만일 수정죈 법안이 정 부의 강력한 제지로 통과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법안 통과를 위하여 총력을 기울여야 하 며 마지막으로는 의회해산도 불사하면서 국민들의 편에 서서 싸워야 할 것입니다. 베빙튼의 냉소에 찬 음성이 더욱 분위기를 이상하게 끌고 갔다. 그러나 방안의 분위기는 아무 변동도 없었다 더전의 귀의원은 아마 적당한 시기에 그 수정 을 행할 기회를 갖게 되시기글 바라 마지않습니다 라는 냉소를 받았을 뿐이다. "다음 의제로 넘어갑시다" 라는 열성 의원들의 아우성에 따라 의사진행은 다시 제 궤도로 올라갔다. 아무도 데이빗을 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의사진행은 일사천리로 평화롭게 진 행되어나갔다. 12월의 아침은 몹시 추웠다. 아서는 넵튠 탄광으로 나가서 자기 사무실 안으 로 들어갔다. 여느 때보다 출근이 일렀기 때문에 조용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외투와 모자 를 걸고서는 달력을 쳐다보다가 얼른 한 장을 찢어냈다.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정말 그것은 중요한 것이었다. 이러한 역설적인 현실이 아서를 괴롭혔다. 이해받지 못하고 있고 선의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데 대한 분노로 마음이 터질 듯할 때가 맣았다. 그러므로 그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이 어려움은 지나가 버릴 순간적인 것이다. 이제 곧 이 저조함이 지나가면 상승의 때가 올 것이고 자신의 포부가 이루어질 승리의 순간이 오리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성적인 생각으로 볼 때 무모하기 짝이 없는 정력과 힘과 금전을 쏟아부었 다. 몰론 그도 탄광은 저당된 상태이고 은행신용대부는 끊어졌으며. 석탄 생산고는 20년 이 래 최저선에 머물고 있다는 현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느 이불황이 머지않아 좋 아지리라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 불황은 어떻게 해서든지 극복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니 더욱 악착같이 달라붙어 모든 것을 해나가자 그러면 만사는 순조롭게 되리라 그는 적어도 올 한 해 동안만 넘기면 되리라 고 생각했다. 은행에서 융자 거절을 당하리라는 것을 할면서도 이 한해 동안은 어떻게 꾸려 나갈 길이 있을것이라고 생각했고, 생각만이 아니라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계산을 해보았다. 지금 피요한 것은 최대의 절약을 위한 규모의 축소와 끈질긴 이내, 바로 그것이고 그는 해 낼 자신이 있었다. 그는 아서를 쳐다보며 망설이는 듯하더니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아서 는 몸을 책상에 그대로 기대고 서 있었다. 자기가 한 행동은 잘못이었다. 아주 큰 실수를 하 고 만 것이다. 불안과 긴장이 쌓이고 쌓여 결국 버트 윅스를 도화선으로 하여 걷잡을 수 없 이 터지고 만 것이다. 지금 허즈페드는 그 실수를 무마하려고 나간 것이다. 그는 불안한 마음으로 무사하기를 바 랐다. 그는 사무실밖에 붙어 있는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는 아침에 신 파라다이스 갱 안을 돌아볼 예정이었기 떼문에 갱내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는 갱내로 들어가기 위해 승강기에 발 을 들여놓으면서도 아까의 일이 잘 해결되기를 빌고 있었다. 그러나 무사할 수가 없었다. 버 트 윅스는 넘어졌다가 일어나자 자기 아버지가 일하고 있는 갱내로 들어갔다. 계단에 부딪 친 다리가 몹시 아팠다. 그 다리에 대한 생각을 할수록 통증이 더욱 심해지는 것 같았다. 그 는 다리를 절룩거리며 선로를 달려오는 탄차를 검사하고 있는 아버지에게로 갔다. 제이크 윅스는 절룩거리며 다가오는 아들을 보자마자 탄차들을 정지시키고는 아들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웬일이냐, 버트?" 버트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그는 사나운 눈길을 아들에게 돌렸다. "그치가 너에게 그런 짓 을 했다고! 가만 있을 수는 없지!" "그래요, 별일이 아니었는데도 사장은 나를 때려눕히고는발길질을 해대는 것이었어요. 사장 그치는 내가 넘어졌는데도 마구 발길로 찼다구요!" 제이크는 탄차들을 적고 있던 장부를 주섬주섬 저고리 호주머니에 구겨놓고는 가죽 허리끈 을 질끈 조여 맸다. "그치가 그랬다고... 우리에게 그따위 짓을 하고 무사히 넘어갈 수는 없 지!" 그는 다시 반복해서 말하며 상을 찡그린채 잠깐 생각했다. 버트가 갱내로 들어가기 전 에 호주머니에서 성냥 한두 개비를 꺼내놓는 것을 깜빡 잊어버렸다는 이유로 그랬더니, 그따위 육시랄 새 규정 때문에 그런 짓을 하다니. 누가 이런 일을 가만히 참고 있겠는가! 광부들의 탄량을 검사하는 사람인 자신으로서는 참고 넘어갈 일이 아닌 것이다. "따라와, 버 트." 낮은 음성으로 말한 제이크는 탄차들을 그대로 버려두고 병원으로 갔다. 그날 담당은 최근에 전임되온 신참으로 병원 근무 경력이 짧은 외과의 웨버였다. 제이크는 거만을 피우 며 의사에게 아들의 다리를 진찰케 했다. 제이크는 찰리 가울런이 한때 담당했던 의료 원호 위원회의 경리였다. 웨버 의사로서는 지금 제이크 윅스의 환심을 사두는 것이 아주 중요했 으므로 그는 버트의 다리를 신중하게 오랜 시간을 걸려 진찰했다. "다리가 부러졌수?" 제이 크가 물었다. 웨버는 그렇지는 않았으므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지금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현명하지 못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어떤 경우든 간에 확언한다는 것은 별로 이로울 것이 없음을 그 동안 경험을 통해서 배웠다. 더욱이 제 이크 윅스처럼 두려운 인물 앞에서는 더 신중해야 한다. "X레이를 찍어봐야겠군요." 제이크 윅스는 x레이라는 말에 아주 흡족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니까 하루 동안 입원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24시간 동안 침대에 누워 있는 것도 손해볼 일은 아니니까. 버트 안전을 위해선 적절한 진찰을 는 것이 좋아요. 어떻습니까?" 웨버 의사는 의미 있게 싱긋 웃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버트는 입원했고 제이크는 타인케슬 노동조합 지부장인 헤든에 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톰 헤든 지부장이십니 까? 전 제이크 윅스입니다. 넵튠 탄광의 탄량 검사계의 윅스. 지부장님, 저를 아시겠지요?" 헤든에게 말하는 제이크의 말씨는 웨버 의사에게 하던 것과는 전연 달랐다. "뭐라구?" 헤든 의 퉁명스러운 말소리가 전화기에서 울려왔다. "간단히 말해주게, 이 친구야. 온종일 자네 말만 듣고 있을 수는 없잖아. 무슨 이야긴가?" "내 자식놈 이야긴뎁쇼, 버트 그놈 말입니다. 폭행으로 피해를 입어 저희 이야기를 좀 들어주셔야겠는뎁쇼, 지부장님." 비위를 맞추듯 겸손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헤든은 그 전화기를 든 채 꼬박 5 분 동안이나 앉아 있었다. 손톱 끝을 물어뜯고서는 앞에 있는 종이 위에다가 마구 뱉으며그 는 이야기를 참을성 있게 듣더니 말했다. "알았어. 곧 그리로 간다니까. 곧 가겠네." 두 시간 후 아서가 파라다이스 갱구로부터 나와 승강기를 내려 마당으로 나왔을 때 헤든이 사무실 안에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rt을 보았다. 헤든을 바라본 아서는 우선 놀랐다. 헤든은 그가 방안으로 들어와도 마치 뿌리를 내린 것처럼 의자에 버티고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 는 것을 보았다. 헤든을 바라본 아서는 우선 놀랐다. 헤든은 그가 방안으로 들어와도 마치 부리를 내린 것처럼 의자에  티고 앉아 있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서는 화장실로 가서 세수를 했다. 물기를 닦으면서 다시 사무 실로 나왔지만 헤든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아서도 황급히 세수를 하는 바람에 수건에 온 통 검댕이 묻어나는 것을 보면서 오래도록 손을 닦고 있었다. 당황하고 있는 그는 손이라도 닦으면서 자신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는 자연스럽게 말을 하려고 노력하면서 입을 열었 다. "무슨 일로 오셨소, 헤든 지부장?" 책상에서 자를 집어 들고는 그것을 만지작거리던 헤든은 흘깃 그를 바라보았다. "다 알고 계실 텐데." "아, 윅스 때문에 오신 것이라면 난 할 말이 없소. 난 그 친구를 이미 규칙위반 으로 해고했으니까." "그래요?" "그치는 글로브 갱내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붙들렸소. 그곳에 폭발 가스가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화기엄금이라는 엄한 규칙을 세웠소, 난 이 탄광의 안전을 위해 많은 돈을 투자했소. 난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아니 어떤 사고라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온갖 힘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오." 헤든은 여전히 그 자를 쥐고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서두를 것이 없었으므로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머트 윅스는 입원 중이지." 아서는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구토증 이 일어났다. 손을 닦던 것을 멈추었다."입원했다구!" "그렇네. 그치에게 무슨 짓을 했지?" " 난 별로 심하게 한 것이 없소." "다리가 부 졌다는데?" "세상에...난 그를 심하게 때리지 않았소. 허즈페드가 증언해줄 거요. 바로 곁에 있었으니 까." "윅스는 내일 x레이 검사를 할 테니까. 그 결과를 보면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게 될 테지. 증인은 필요 없어. 웨버 의사가 잘 해줄 테니까. 난 지금 막 병원에서 오는 길이네." 아서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힘이 쭉 빠져 그 자리에 주저앉을 것 같았다. 그는 버 트가 문 밖에서 넘어진 것을 기억해냈다. "헤든 지부장,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요?" 헤든은 손에서 자를 내려놓았다. 헤든은 상냥함이나 우정 같은 것은 바랄 수도 없는 인물이다. 그는 자기 마음이 내키는 대로 일을 처리할 것이며, 또 그에게는 그런 권한이 주어져 있는 것이 다. "이봐, 배러스 사장, 솔직하게 말하겠소. 당신은 오늘 화가 나서 어떤 사람에게 폭행을 가했소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요.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또 다른 문제요. 당신 을 그를 때렸어. 당신은 그 친구의 다리를 분질러 놓았어. 이건 중대한 문제야. 해고를 하고, 다시 복직을 시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 당신은 운 나쁘게 훨씬 복잡한 형사법에 걸린 거지. 내 말을 가로막지 마. 난 지금 아주 중대한 말 을 하고 있는 거니까. 난 지금 당신의 그 육시랄 탄광의 광부들을 대표하고있는 거야. 만일 내가 손가락 하나만 까닥해도 그치들은 대번에 파업에 들어갈 거야." "그것이 그 사람들에 게 무슨 소득이 있소? 우리가 함께 살아 남기 위해선 일을 해야 하오. 그리고 그들고 일을 원하고 있소." "광부들은 하나로 뭉쳐 있어. 한 사람에게 한 것은 모든 이에게 한 것이나 마 찬가지거든. 난 이놈의 넵튠 탄광이 마음에 들지 않아. 침수 사건이 있었던 그때부터 이놈의 탄광은 내내 구린내만 풍겨왔거든. 난 어리석은 수작엔 절대 참지 않을 거야." 헤든의 격한 이야기가 아서의 가슴을 여지없이 찢어놓고 있었다. "내가 이 탄광에 얼마나 정성을 쏟아붓고 있는지를 알고 있소, 당신은? 도대체 원하는 것이 뭐요?" "아직은 그것을 알기엔 일러. 우린 오후 6시에 회관에서 집회를 열 거요. 지금 그 문제로 모두들 흥분하고 있고 아주 감정들이 사납소. 그래서 미리 경고해두는 거요. 조심하시오. 그러나 엎질러진 물 이니 빠져나오긴 어려울 거요. 당신은 아주 난처한 구렁천이에 빠져나오긴 어려울 거요. 당 신은 아주 난처한 구렁청이에 빠졌다는 것을 알고나 있으시오." 아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헤든의 위협에 온몸에 맥이 쑥 빠지면서 구토증이 일 었다. 물론 아서는 헤든이 광부들에게 파업을 선동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또 광부들은 어떻든 일을 할 욕심으로 그의 말을 따라 파업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처럼 최악의 궁 핍을 겪고 있는 가운데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행운아들인 것이다. 그는 냉 담한 태도로 일어서며 말했다. "당신 마음대로 해보시구려. 당신도 시끄러운 일은 싫어할 테 니까." 헤든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헤든은 주먹으로 책상을 치면서 흥분해서 소란을 떠는 사 람들에겐 익숙해 있었따. 분노와 고함, 욕설, 공갈, 협박 따위엔 아주 익숙한 사람이었따. 그 는 싸우는 것을 본업으로 삼고 있고, 또 그런 일을 하면서 월급을 타는 사람이어서 싸우는 것에는 아주 익숙해 있었다. 그런데 아서가 이처럼 무기력하게 체념의 상태로 대하는 것을 보니 오히려 그의 눈엔 연민의 빛이 떠올랐다. "나의 말은 이것뿐이오. 나중에 소식을 알려주겠소."그는 아까와는 다르게 약간 고개를 끄 덕여 보이고는 나가버렸다. 아서느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그는 반으로 접힌 채 자기 손에 들려 있는 타월을 내려다보더니 그것을 차근차근 접었다. 그는 반으로 접힌 채 자기 손에 들려 있는 타월을 내려다보더니 그것을 차근차근 접었다. 그는 화장실로 들어가 타월을 뜨거운 파이프 위에 얹었다가 그것이 그렇게 깨끗하지 않다는 것을 알자 둘둘 뭉쳐서 빈 욕탕 안에다 던져버렸다. 그는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 밤엔 목욕 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피곤했고, 몸이 늘어질 대로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속이 다시 메스꺼워졌다. 모든 게 어딘가 비현실적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마치 옷을 벗고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는 감수성이 에민하여 언제나 날카 로운 반응을 보이지만 일단 감정이 한번 그 에리한 어떤 지점을 지나쳐버리면 그때부터는 무감각 상태가 되어버리곤 했다. 지금이 바로 그 무감각 생태였다. 그는 하얀 에나멜 칠이 된 벽에 걸린 조그마한 네모꼴의 거울속에서 갑자기 자기 모습을 발견하였다. 서른 여섯이 라는 나이보다 열 살은 더 많아 보이는 초라한 남자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눈 언저리엔 주름이 잡혀 있고 머리털은 광택이 없을 뿐 아니라 대머리까지 벗겨지고 있었 다. 갑자기 자기가 왜 이렇게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밀려왔다. 자신이 현실적이지 못한 이상을 추구하며 정의라는 미친 ㅅ환상을 쫓아 누가 고맙다고 여겨주지도 않는 가운데 이 재미도 없는 탄광에 틀어박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속을 썩이고 있는 동 안, 다른 사람들은 돈이나 쓰며 인생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처음으로 그의 마음속에 자신은 정말 바보였따는 느낌이 들었다. 사무 실에 돌아와 그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거의 6시가 다 되었다. 그는 모자를 밖으로 나갔다. 그는 텅 빈 탄광 구내를 나와 카우펀 가를 걸어갔다. 물론 그 는 병원에 가서 윅스의 아들을 문병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후일로 미루었다. 이러 한 우유부단한 자세야말로 자기 성격의 약저인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는 어쩔 수가 없었다. 가로수 길을 걸어 올라가면서 그느 광부회관에서 높은 목소리들이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다. 그 목소리들은 먼 곳에서 들려오는 공허한, 자기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는 시끄러운 사건이 결코 발생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시국에 시끄러운 사건이 결코 발생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시국에 시끄러운 사건을 일으 킨다는 것은 다 같이 죽는 바보 같은 일인 것이다. 그러나 아서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다. 현실은 가끔가다가 논리에 역행할 때도 있다. 12월 14일 저녁의 사건은 반드시 아서의 판단이 틀렸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회관에서의 집회는 6시에 열렸으나 간단히 끝났다. 헤든이 그 집회는 간단히 끝내도록 유도를 했던 것이다. 헤든의 책략은 아주 명로했다. 그는 시끄러운 사건을 전혀 원하지 않았다. 현재 연맹의 고갈된 자금 사정은 시끄러운 사건이 발생할 때 지탱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 고 있었다. 그의 책략은 아서를 협박하여 24시간 동안이나마 그를 근심 걱정으로 몰아 넣었 다가 그 다음 어떤 조건을 내세워 흥정을 한다는 것이었다. 버트 윅스의 복직과 배상 그것 에 뭔가 더 보태져 들어오느 그러한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헤든은 어서 집에 돌아가 지독스레 땀이 많이 나는 발의 젖은 양말을 각아 신고, 저녁을 먹고 나서 난롯가 의자에 앉아 파이프 담배를 피우가 싶었다. 헤든은 과 거처럼 젊지도 않았고 야망도 죽었으며 젊은 시절의 증오심은 다만 마음속에서 끓어오를 뿐 이었다. 그의 책략은 아직도 아주 힘찬 데가 있긴 했지만, 그것은 헤든의 머리에 의하여 다 스려지기보다느 그의 다리에 의해서 좌우되는 일이 더 많았다. 그는 집회를 빨리 진행시키기 위해, 제이크 윅스를 윽박지르는 한편 해리오글의 간략하게 표현된 견해를 옹호하였다. 자신의 뜻대로 집회가 빨리 끝나자 타인캐슬 행 6시 45분 열차를 타려고 급히 그곳을 빠져나오던 그는 회관밖에 모여 선 군중들을 보고 약간아연해서 발을 멈추었다. 제기랄, 왜 이렇게들 많이 모여 있담! 그느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그곳에는 거의 500명 가량의 무리들이 모여서 서성대며 저희끼리 지껄여대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이 실업수당에 의지해서 사는 사람들이었다. 이 군중들과 마주친 헤든은 그들에게 한바탕 떠들어줘야 할 의무감을 느꼈다. 그는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머리를 앞으로 내밀고 는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들어보시오, 여러분. 우리는 막 집회를 열어 오늘 발생한 사 건을 논의했습니다. 우리는 조합원 중의 그 어떤 사람도 희생당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습 니다. 본인은 부당한 해고를 그냥 보고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정당한 의사 진 행에 따라 집회를 끝내고 이제 집으로 돌아갈 때입니다. 본인은 내일 다시 여기에 와서 교섭을 계속하기로 하겠습니다. 그것뿐입니다, 여러분." 그 느 말을 끝내고는 돌층게를 내려와 정거장 쪽으로 갔다. 그가 프리홀드가를 걸어갈 때 광부 들은 환호의 갈채로 그를 전송했다. 헤든은 이들의 희망의 상징이었다. 이들이 잘 알고 있는 환상적 희망, 즉 담배와 맥주와 따뜻한 침실과 좋은 의복과 그리고 믿을 수 있는 직업을 상 징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군중은 그에게 환호의 갈채를 보냈으나, 오늘의 그 갈채는 어딘가 맥빠진 기미가 느껴졌다. 불만과 불안이 느껴지는 그런 요소가 있었다. 헤든이 떠난 지 5분 후에제이크 윅 스가 회관에서 나왔다. 그도 역시 만족하지 못한 표정었다. 그는 점차로 기분이 몹시 나쁘다 는 표정으로 변하면서 돌층계를 내려왔다. 그는 그 집회의 결과에 대해 뭔가 더 알고 싶어 하느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그 중에 끼여 있던 잭 라디와 그의 무리들은 좀 심상치 않은 얼굴로 윅스를 바라보고 있었 다. 그 무리들은 대부분이 젊은 사람들이었다. 별로 말이 없었지만 모두 담배를 들고 있었 다. 그들의 얼굴은 모두 자포자기한, 될 대로 되라는 그런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특히 잭의 얼굴의 주름살들은 모두 아래로 힘없이 처져 있었고, 뺨 언저리와 관자놀이가 움푹 들어간 얼굴은 윗입술 구석에 누런 니코틴 물이 들어 있는 부분을 빼놓고는 모두 창백했다. 그러나 단호한 빛이 흐르로 있었다. "어떻게 됐나?" 잭은 앞쪽으로 어깨를 부딪치며 나와 큰 소리로 물었다. 제이크 윅스는 잭리디와 우드와 슬래터리와 차 리밍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모두 그에게 바싹 다가서 있었다. "이럴 수가 없 어! 새끼는 모든 걸 미지근하게 만들어놓고는 가버렸어." 그느 흥분된 목소리로 집회의 내용 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보조금에 대해서도 그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거지?" 해리 킨치 가 군중의 가장자리에서 소리쳤다. "개새끼, 아무 말도 없었어." 제이크가 대답했다. 무리 사이에 처절한 침묵이 흘렀다. 실업수당은 그 달초에 이미 더 깍였 고, 임시 보조금도 중단된 상태였다. 잭은 단호한 얼굴빛을 한 채 윅스를 노려보았다. 그 냉 엄한 얼굴빛에는 뭔가 무서운 기가 감돌았다. 그는 딱딱하고도 도발적인 어조로 물었다. "동 맹파업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나?" "그런 건 입 밖에도 내지 않더군. 그 새끼, 마음이 약해졌 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해!" 제이크가 분노로 거품을 내씹으며 말했다. "아 무것도 하지 않으려 한다구?" 잭이 그 말을 되받더니 싱긋 웃으며 군중을 둘러보았다. "좋 아, 그럼 우리가 뭔가 하는 거야. 그래, 우리가 한번 더 시위를 해보자구." 우드가 말했다. "시위라구!" 잭이 달갑지 않은 어조로 말하자 그것으로 시위라느 말은 쑥 들어가 버렸다. 그 주간에 이미 시위는 한바탕 했던 것이다. 실업자들은 붉은기를 들고 스누크가지 행진을 했고, 그 곁에는 기마경찰까지 따르고 연설 도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점잖은 시위여서 아무 충돌 없이 만사가 멋있게 끝났다. 아아, 잭의 생각은 그런 것이 아니고 좀더 격렬한, 속이 후련해질 수 있는 것을 바라고 있 었다. 그따위 시위는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보다는 모두에게 짜릿한 자극을 줄 수 있는 것 을 원하고 있었다. 그의 온몸은 어떤 행동을 갈구하고 있었다. 잭은 윅스의 아들이 해고당했 다는 것을 구실로 헤든이 파업을 단행할 것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파업은 집단 행동으로 누구도 함부로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두세 명이, 아니 이삼백 명이 탄광을 고만두어 버린다고 해도 그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러 나 모든 사람이 뜻을 같이 해서 한꺼번에 고만두어 버린다면 그때는 문제가 달라진다. 그것 은 넵튠의 파멸을 의미하며, 그 새끼들에게 속시원한 본때를 보여주는 것이 된다. 그런데 왜 이 파업을 들먹이지 않았을까. 잭의 이마가 마치 통증이라도 느낀 듯 주름살투성이가 되었다. 그는 갑자기 외치듯이 말했 다. "집회는 아무 소용도 없었어. 다른 집회를 열어야 해. 우린 뭔가 해야 한다. 야, 담배 한 대 주겠니?" 우드가 재빨리 담배를 한 대 내주었다. 이 담배는 우드가 자동 판매기에서 슬 쩍빼낸 것이다. 슬래터리가 손으로 바람을 막으며 성냥을 그어 내밀었다. 잭은 뼈다귀 같은 창백한 얼굴을 약간 기울여 불을 막으며 성냥을 그어 내밀었다. 잭은 뼈다귀 같은 창백한 얼굴을 약간 기울여 불을 붙이기가 바쁘게 깊이 담배를 빨아드렸다. 그러다가 그느 주위의 군중들을 바라보며 소리를 높였다. "여러분, 들으시오. 8시에 군중대회를 열겠습니다. 알겠습 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시오. 8시에 군중대회가 있다고." 그 말은 삽시간에 전해졌 다. 그러자 제이크 윅스가 좀 걱정스럽다는 듯 반대했다. "잭, 위험한 일은 하지 말자. 너, 몸 조심해." "야, 무슨 그따위 소리야! 오기 싫거든 집구석 에 틀어박혀 있으려무나. 아니면 버트가 있는 병원에나 가 있으렴." 잭은 열을 올리며 소리 를 쳤다. 그러자 제이크의 투박한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나 그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잭에게는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 언제나 더 나았기 때문이다. "자, 가자. 밤새도록 여기 있 을 셈은 아니겠지?" 잭이 절룩거리며 앞장을 서서 '어서 오십쇼' 술집으로 가는 길인 카우펀 가를 내려갔다. 잭은 술집의 회전문을 어깨로 밀고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문을 밀며 안으로 들 어갔다. 술집은 이미 만원이었다. 버트 어무어는 카운터 뒤에 서 있었다. 술집 주인 버트는 그렇게 카운터 뒤에 서서 꽤 많은 세월을 살아왔따. 그는 거기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똑같 은 자리에 늘 서 있었다. 구리빛 얼굴에 머리털은 늘 짧게 손질되어 있었다. 앞머리가 마치 소가 혓바닥으로 핥아 올린 것처럼 딱 붙어 있는 것도 언제나 한결같았다. "어, 버트." 잭은 정답게 인사하고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친구들,오늘은 뭘 마실래?" 사람 들이 마시고 싶은 것들을 말하자 버트는 술을 따라주었다. 아무도 돈을 내는 사람은 없었다. 버트는 좀 기분이 언짢은 듯한 표정으로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득 부어, 버트." 잭이 말했다. 버트는 감정을 누르는 듯 얼굴빛이 더욱 구리빛으로 변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술을 따랐다. 버트 어무어는 카운터 뒤에서 오랜 세월을 서서 지내는 동안, 술을 가득 채워서 따라야 할 때와 미소를 지울 때,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할 때를 잘 터득하고 있었다. 술장사라고 하는 것은 묘한 직업이다. 버트는 잭 리디나 그의 패거리와 잘 지내는 것이자신에게 이익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지나쳤어. 윅스의 아들 버트의 일 말이야. 내가 보아도 그건 안 될 일이야." 버트가 무슨 이야기라도 하고 싶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잭은 아무 말이 없었으나 그 곁에 있던 차 리밍이 점잖게 몸을 내밀었다. "자네가 어떻게 그걸 다 아나?" 버트는 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즉각적인 판단을 하면서 차의 얼굴을 흘깃 바라보았다. 차는 꼭 자기 아버지를 닮았다. 차는 전쟁에 출전하였고, 그래서 좀 안목이 넓어졌다는 것 외에는 슬로거 리밍을 꼭 닮고 있었다. 차는 전쟁에서 훈장까지 받았지만 그것이 살아가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는 지난주 스누크에서의 시위 때 그 훈장을 거리에 돌아 다니는 개의 꼬리에다 매달아 주 었다. 그것을 경찰이 보았다면 교도소로 끌려갈 짓이었지만 그는 두려운 것이 없었다. 버트 는 위스키 병을 집어넣으려고 손을 내밀었으나 그 전에 잭이 병을 번쩍들고는 구석의 테이 블로 가버렸다. 패거리는 모두 그 테이블로 몰려갔다. 그 테이블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으나 그들은 순순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잭과 그의 패거리 는 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버트는 그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카운터 위를 훔치면서 그는 그들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 병을 결국 다 비우고 말았다. 그들이 거기에 앉아 있는 동안 그들 둘레에는 사 람들이 점점 늘어 애기에 귀를 기울이다가는 떠들어대면서 술을 마시곤 했다. 소음은 자꾸 높아져 그들은 서로 무슨 이야길 떠드는지도 모르는 채 사납고 열띤 분위기로 휘말려 들고 있었다. 그들은 주로 윅스 아들의 이야기, 헤든의 소극적인 태도, 보조금의 중단, 새로 나타 날 탄광 법안에 대한 그들의 희망 따위를 떠들고 있었다. 잭 리디를 빼놓고는 모두가 떠들 어댔다. 잭은 굳어버린 사람처럼 자기 앞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는 술이 취하지 않았다. 그것은 좋지 못한 일이었다. 그의 입술은 꽉 다물어져 있었다. 잭이라 는 인간의 인생은 참담한 것이라는 주형으로 그 형태가 꽉 짜여진 듯 변할 수가 없느 것 같 았다. 그의 가슴속엔 괴로운 일들 뿐이며, 그의 시선은 고통스러운 세계를 바라보아야만 했 다. 그날의 재난사고가 잭을 이렇게 만들었다. 그리고 전쟁, 종전, 빈궁과 실업수당의 비참함, 쑤시는 듯한 마음의 괴로움과 이럭저럭 변 통하며 살아가는 모습, 이제는 전당포에 모든 것을 다 잡혀버렸다. 궁핍의 무거움, 그것은 영혼을 참담하게 눌러버리고 숨을 막히게 하는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모두가 지껄 이고 있는 것을 보는 그의 마음은 더욱 절망으로 어두워 가기만 했다. 모두들 다 큰소리를 치고 있지만 허풍뿐이다. 8시에 집회를 연댔자 결국 마찬가지일 것이다. 말이 또 오가겠지만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아무 소용도 없는, 아무 방향도 잡을 수 없는 공허한 이아기들인 것이다. 아무희망도 가질 수 없는 무거운 절망이 그를 짓눌렀다. 바로 그 때에 문이 확 열리며 해리 킨치가 술집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해리는 ㅇ날 자기 딸에게 주 기 위한 고기 한 조각을 얻으려고 래미지의 정육점에 갔다가 거적을 당하고 역시 이'어서 오십쇼'로 뛰어들어왔던 바로 그 윌 킨치의 조카였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전연 닮지 않았 다. 해리는 윌보다 정치에 괸해 아는 것이 훨씬 많았다. 해리는 손에 아거스지 오후판을 들 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동안 서 있다가 외쳤다. "신문에 났다. 이 친구들 아, 드디어 신문에 보도됐다. 놈들이 우리를 팔아 넘겼다. 놈들이 우리에게 사기를 쳤다." 깨 지듯 터져나오는 킨치의 목소리에 모두의 눈이 그에게로 쏠렸다. "뭐가 어째? 무었이 어떠 헤 됐다는 거냐, 해리?" 슬래터리가 투박한 목소리로 물었다. 해리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신문에 났단 말이다... 그 새 법안이 ... 근래에 없던 큰 사기행위다. 우리에겐 아무 런 이득도 없다, 이 친구들아. 단 하나도 말이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죽음 같은 침묵이 방 안을 뒤덮었다. 그들은 모두가 다 자기네에게 무엇이 있었는지를 알고 있었고, 그 방 안 의 모든 사람의 희망은 그 법안에 집중되고 있던 참이었다. 잭 리디가 제일 먼저 몸을 움직 였다. "제기랄, 그 신문 이리 줘." 그는 신문을 뺏어 펼쳐 들었다. 모두가 모여들어 어깨 너머로, 머리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모았다. 신문에는 2단 기사로 공역 배신의 보도가 실려 있었다. "제기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그때 차 리밍이 긴장한 얼굴에 분노를 보이며 벌떡 일어났다. "이건 너무하다. 이건 참을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이야기를 시작하여 술집은 떠나갈 듯앴다. 신문은 이 사람 손에서 저 사람 손으로 건너갔다. 잭 리디가 일어났다. 냉정하고 침착한 얼굴이었따.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그는 기 회를 찾은 것이다. 그의 눈빛은 이제 죽어 있지 않았다. 활활 불타고 있었다. "위스키 한 잔 더 줘. 빨리, 빨 리." 그는 위스키를 꿀꺽꿀꺽 삼키더니 군중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소리를 질렀다. "난 회관 으로 간다. 오고 싶은 사람은 따라오라." 굉장한 아우성 소리가 일어났다. 그들은 모두 다 그의 뒤를 따라갔다. 무리를 이룬 그들은 잭을 선두로 술집을 나와 카우펀 가의 험악한 어 둠 속을 지나 회관 쪽으로 몰려 다. 회관 밖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넵튠에서 해고당한 젊은이들이었다. 달동네로 번개처럼 전달된 그 소식을 듣고 희망을 잃은 채 절망의 극한에 도달한 사람들이었다. 잭이 회관 돌층계 위로 뛰어 올 라가 군중들을 바라보며 섰다. 회관 문 바로 위게 달린 전구가 마치 딱딱한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노란 배처럼 불거져 나와 있었고, 그 전구에서 비쳐나오는 빛이 잭의 얼굴 위로 쏟 아지고 있었다. 거리는 컴컴했다. 가로등이 조그마한 웅덩이 모양으로 창백한 빛을 던지고 있을뿐이어 . 잭은 어둠 속에 서 있는 군중들을 잠시 바라보며 서 있었다. 위스키를 마신 취기가 그의 처 참한 마음속에 불을 질러주고 있었다. 그의 온몸이 원한에 사무친 처참함으로 떨려왔다. 그는 중대한 순간이 닥쳐오고 있다는 것 을 느꼈다. 그토록 괴로워하고, 구것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할 수 있는 그러한 순간 이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여러분," 그는 소리쳤다. "우리는 막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사기를 당했습니다. 그 새기들은 헤든이 한 것처럼 우리에게 바람을 맞혔습니다. 그 새끼들은 언제나처럼 우리에게 역습의 농간을 부렸습니다. 공약한 그 모든 것을 또 발로 뭉 개버린 것입니다." 그는 헐떡이는 듯한 괴로운 숨을 내쉬며 번쩍이는 눈으로 군중들을 둘러보았다. "그 새끼 들은 우리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아 무도 우리를 도돠줄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도. 내 말이 들립니까? 아무도 없다 이겁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모든 것을 해나 가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 지독한 시궁창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오오, 하느님께 나는 묻고 싶습니다. 그 새끼들은 돈을 벌어 자가용을 타고 다니 고, 멋있는 저택에다 바닥엔 융단을 깔고 사는데 우리는 이 모양입니다. 우리는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합니다. 여러분, 난롯불도 입을 옷도 자식들에게 신길 신발도 없습니다. 조금만 잘못하면 우리는 일자리에서 목이 달아납니다! 목이 달아나 빵과 마가린 으로 연명을 하며, 처자식에게 그것마저 충분히 먹일 것이 없다니! 돈이 없어 그렇다고 하 지 마십시오. 이 나라에는 지금 돈이 숨통이 막힐 정도로 꽉 차 있습니다. 은행엔 돈이 쌓여 터져나갈 판입니다. 수백 수천만 파운드의 돈이 식량이 없어서 그렇다고 말하지 맙시다. 지 금은 잡은 고기를 다시 바다에 던져 넣는 형편이며, 커피와 보리는 태워 없애는 중이고, 돼 지는 죽여서 썩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당하다면 여러분, 전 능하신 하느님의 벌을 받아 나는 죽어도 좋습니다." 여기서 다시 흐느껴 우는 듯한 숨을 내 쉬다가 그는 더 높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지독한 재난이 일어나 100명이라는 사람들을 죽였을 때 우리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전쟁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살해되었을 때 도 우리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전쟁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살해되었을 때도 우리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이름을 걸고 말씀드립니다만 이젠 그걸 알 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그 새끼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어야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뭔가를 하 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호소하는데 우리는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다 면 우리는 한평생을 지옥에서 썩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높아지다 못하여 이 제는 사납고 미친 듯한 아우성으로 바뀌었다. "난 가를 할 작정입니다. 여러분, 따르고 싶 은 사람은 따라오십시오. 나는 바로 이 순간부터 시작할 작정입니다. 나는 내 두 형제가 파묻혀 죽은 텝튠 탄광에 가 서 본때를 보여줄 작정입니다. 여러분, 나는 내가 받은 것에 대해 조금이나마 보복을 해볼 작정입니다. 여러분, 나하고 함께 갈 것입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까?" 커다란 외침소리가 무리들로부너 울려왔다. 리디의 말에 불이 붙은 그들은 그가 돌층계를 뛰어내리자 그를 호 위하듯 둘러싸고 한덩어리가 되어 거리로 쏟아져 나갔다. 몇몇은 겁에 질려 달동네로 사라져버렸지만 100여 명의 사람들이 잭과 합류했다. 그들은 넵튠 탄광을 향하여 모두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20여년 전 래미지의 가게 쪽으로 밀려 가던 군중과 꼭같았다. 그러나 그때보다 인원수가 훨씬 더 맣았다. 탄광이란 레미지의 가게 보다도 더 매력적인 곳이다. 탄광은 이들의 소란과 분노가 집중되는 중심부요 초점인 것이 다. 탄광은 그들의 생활의 무대이며 투기장인 것이다. 생사와 노동과 돈과 피땀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두운 무대, 그 어두운 투기장의 검은 먼지 속에 뒤어켜 있는 것이다. 군중은 잭 리디를 선두로 하여 탄광 구내로 쏟아져 들어갔다. 탄 광 구내는 조용했다. 사무실들은 닫혀 있었으며, 갱구는 커다란 빈 무덤의 입구처럼 텅빈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지금은 야간 교대반이 없기 때문에 갱내에는 사람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안전 경비계의 펌프계원들이 그곳에 있긴 했다. 두 사람의 펌프계 직원은 탈의실 뒤의 기관실 안에 있었다. 조 데이비스와 휴골튼이었다. 군중은 데이비스와 골튼이 있는 기관실 쪽으로 흘러갔다. 골튼이 그들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다.기관실의 참문 하나가 반쯤 열려 열가와 기름의 뜨거운 냄새를 빼내고 있었다. 짧은 잿빗 구레나룻을 기른 늙은 골튼이 그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군중들은 어느새 기관실을 둘러싸고 있었다. 100여명의 무리들이 기관실의 높은 창문 안 의 골튼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뭐냐?" 골튼이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잭 리디가 말했다. "이리 나와. 우리는 당신이 이리 나오기를 바라는 거야." "뭣 때문에?" 잭이 무시무시한 소리로 다시 말했다. "이리 나와. 이리 나와야 다치지 않을 거란 말이지." 그 대답을 들은 골튼은 머리를 안으로 집어넣고 창문을 쾅 닫아버렸다. 약 10초 가량의 침묵이 흐르는 동안 양수 엔진이 느릿느릿 물을 퍼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차 리밍이 소리를 지르며 벽돌 한 장을 던졌다. 창문이 산산 조각나면서 그 부서지는소리가 양수 엔진의 덜커덩덜커덩 하는 소리를 짓눌렀다. 일은 터졌다. 잭 리디가 기관실의 계단을 달려 올라가자, 리밍과 10여명의 다른 무리들이 그의 뒤 를 따라 뛰어 올라갔다. 그들은 기관실 문 안으로 멀리들어갔다. 환히 불이 켜져 있는 기관실은 매우 더웠고, 기름내 나는 열기와 진동음으로 가득 차 있었 다. "도대체 무슨 짓들이야!" 조 데이비스가 항의조로 물었다. 마흔 살쯤 돼보이는 그는 청색 작럽복에 소매를 걷어올리고 걸레 조각을 목에 감고 있었다. 경석과 파라핀으로 동 파이프를 닦고 있던 참이었다. 잭 리디는 모자 차양 아래로 조 데이 비스를 바라보며 급하게 말했다. "당신 두 살람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어. 밖으로 나가주 기만 하면 돼. 알았지?" "쓸데없느 소리 말아." 조 데이비스의 대답에 잭이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조 데이비스를 꿇어지게 바 라보며 발했다. "밖으로 나가라고 한 번 더 말한다. 모두가 그러기를 바라고 있어." "모두가 누군데?" 그때 잭이 조에게 달려들어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두 사람은 모두 사람이 바라보는 가운데 한동안 부등켜 안고 뒹굴었다. 두사람이 싸우다가 그만 파라핀통을 엎어버렸다. 커다란 깡통에서 훌러내린 파라핀이 쇠창살을 타고 내려와 헌 걸레 조각들이 든 상자 속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그것을 본 사람은 슬래터리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싸움을 구경하느라고 경황이 없었다. 그때 슬래터리는 담배 꽁초를 입에서 빼 걸레 조각에다 휙 던졌다. 담배 꽁초는 그 걸레 조각 상자의 한복판에 떨어졌다. 슬래터리 외에는 아무도 그 꽁초가 떨어지는 것을 보지 못 했다. 그 순간 데이비스가 미끄러져 잭의 아래로 깔렸다. 군중들이 왁 앞으로 덤벼들었다. 그들은 데이비스를 잡아끌고는 골튼과 함께 기관실 밖으로 아내어 버렸다. 그 후 사건은 눈 깜짝할 사이에 터졌다. 누구의 탓이라고도 볼 수 없는 불가항력의 일이었다. 그들 모두가 한 짓이었다. 흩어져 있 는 연장들, 스패너, 무거운 쇠망치, 경석의 깡통까지 천천히 움직이는 피스톤의 덩어리 속으 로 내저져졌다. 그 중에서도 쇠망치의 위력은 대단했다. 쇠망치가 피스톤 꼭지를 때리며 다 시 튀어나오다가 실린더의 중요한 부분을 깨뜨리며 베어링 속으로 요란스럽게 떨어져 들어 갔다. 그러자 무서운 맷돌질 소리와 함께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부드러운 유동음 속에 단조롭게 움직이던 기계가 뒤틀리면서 기관실 전체의 기초까지 흔들 리는 듯한 굉장한 소리와 함께 딱 멈추어버렸다. 그때 슬래터리가 마치 대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고함을 질렀다. "불이야, 야단 났다! 저길 봐. 불이 붙었다." 군중들은 불길이 춤을 추는 걸레 조각 상자를 바라보고 또 쥐죽은 듯 조용한 양수 펌프 엠 진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문 쪽으로 나아가 . 공포에 질려 앞을 다투어 문을 통해 튀어나왔 다. 잭 리디는 맨 되에 남았다. 잭은 언제나 지혜로왔다. 그는 기름드럼통 쪽으로 다가가 그 주둥이를 비틀었다. 한동안 그 는 기름이 시커멓게 흘러내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무섭도록 창백했고 냉냉했다. 어떤 비장한 승리감마저 엿보이고 있었다. 그는 결굴 하고야만 것이다. 기어코 해내고 만 것 이다. 그는 잽싸게 문 밖으로 걸어나와 문을 탁 닫아버렸다, 바깥으로 나온 그들은 구내 마 당에 덩어리져 서 있었다. 처음엔 불 이 없고 다만 두꺼운 연기의 두루마리만 치솟았다. 그러나 곧 불꽃이 치솟았 다. 거대한 불길의 혓바닥이 널름거리며 모든 것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들의 생사를 걸었던 투기장에 서서, 위로 치켜 올린 그들의 얼굴을 비추어주는 불길 앞에서 약간 뒤를 물러섰다. 뜨거운 열기과 바람이 밤의 차가움을 뚫고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그때 불길이 동력 기계가 있는 건물의 지붕 쪽으로 치솟아 올라가자 지붕의 슬레이트칸이 펑 하고 터지기 시작했다.슬레이트가 펑펑 터지는광경은 굉장했다. 마치콩알이 튀듯 슬레이 트들이 튀어올랐다가는 아름다운 불길의 곡선을 그으면서 마구 T쏟아져 내려와서는 콘크리 트로 다져진 구내 마당 위에서 부서지는 것이었다. 군중은 더 멀리 후퇴해서 사무실의 벽에 기대서야 할 정도로 밀려갔다가 카우펀 가로 나갔다. 그때에야 그들은 튼과 조 데이비스 를놓아주었다. 이젠 관찮다.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골튼은 사무실 본부안으로 달려들어가 전화 쪽으로 뛰었다. 또 한 번 슬레이트의 일제 사격이 쏟아져 내리면서 팸프실 에도 불이 어 따닥따닥하는 소리를 내며 타 들어갔다. 골튼은 미친 듯이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는 아서에게, 암스트롱에게, 소방서에 사 방으로 전화를 걸었다. 타인캐슬의 광산 조합 사무소에도 전화를 했다. 그는 이 비상사태에 도움이 될만한 이 고장의 모든 사람들에게 다 알리도록 교환대에 부탁을 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려고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가 문을 나와 구내 마당으로 갈 때, 빨갛게 단슬레이트가 아슬아슬하게 떨어져 내렸다. 그것이 사무실 바닥 위에서 박살이 나면서 파편들은 기분이 좋은 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중의 하나가 곧장 후지통 속으로 들어갔다. 기다렸다는 듯이 사무실에도 불이 붙기 시작했 다. 모든 것은 아주 순식간에 발생한 일이었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탄광 구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조감독인 퍼브즈, 해리 오글, 직원들, 고참 광부들도 보였다. 그때에야 경찰이 도착했다. 경사 로덤과 10여 명의 경관이 연달아 왔다. 골튼은 경관들과 조감독, 직원들과 합류하여 조 데이브스가 이미 호스를 풀어놓은 안전실로 함께 달려갔다. 그들은 호스를 소화전에 연결하였다. 데이비스가 마개 나사를 비틀었다. 그러나 호스는 벌떡 튀면서 바닥을 차고 일어서더니 여기저기의 구멍에서 물을 뿜어댔다. 누군가가 호스를 쓰지 못하도록 깊게 째놓은 것이었다. 호스는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었다. 아서와 암스트롱이 동시에 도착했다. 아서는 골튼이 전화를 걸었을 때 방에 서 책을 읽고 있었다. 암스트놀은 막 자려고 하는 판이었다. 그들은 안전실 밖에있는 군중들 속을 뚫고 달 려 들어왔다. 춤추는 불꽃의 명암이 그들에게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속에서 두 사람은 잠시 서서 뭔가 급하게 의논을 했다. 아서는 전화를 걸려고 사무실 쪽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드디어 슬 리스케일 소방차가 도착했다. 캠하우가 호스를 연결했다. 가느다란 물줄기가 불길 속으로 떨 어져 들어갔다. 또 다른 호스가 연결되어 두 번째의 물이 솟아올랐다. 그러나 그 솟아오르는 물은 너무도 가늘고 빈약했다. 그러나 이 두 개의 호스가 소방서에서 갖고 있는 것의 전부였다. 사태는 더욱더 무섭게 그리고 빨리 확대되어갔다. 더 심한 혼란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머리를 숙이 며 구내 마당을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대들보가 무너져 내리고 빨갛게 단 벽돌이 튀었다. 불길은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나무, 벽돌 조각, 돌, 쇠붙이, 그 모든 것을 다 삼켰다. 커다란 폭음소리가 가끔 일어났고, 그 소리는 마치 바다에서 들려오는 포성처럼 시내를 뒤흔들었다. 카우펀 가는 사람들로 꽉 차 모두가 구경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헤든이 탄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갱 밖의 건 물의 반이 불타고 있었다. 그는 역에서부터 대낮처럼 환한 불빛 속을 군중을 헤치며 달려왔 다. 그가 구내에 들어가려고 애를 쓰고 있었을 때 합동 채탄소의 소방차 두 대가 종을 울리 며 거리를 달려왔다. 그는 몸을 날려 소방차 뒤에 올라타 겨우 넵튠 탄광 구내로 들어갔다. 동력소 건물은 이미 불타 사라졌고 안전실도 램프실도 양수장도 다 타버리고 없었다. 새로 거세게 불어닥친 바람이 사무실의 망가진 박공벽 아래의 불길에 부채질을 하고 있었 다. 화기의 열은 무서울 정도였다. 헤든은 웃옷을 벗어 젖히고 합동 채탄소의 소방수들과 합 류했다. 호스가 연달아 그 힘찬 물줄기를 타오르는 갱구 위로 뿜어올렸다. 수증기가 연기 속 에서 끓어올라 장막처럼 펼쳐졌다가는 서서히 사라졌다. 사닥다리가 여기저기에 놓여졌다. 소방수들이 그것을 타고 올라가 불길을 잡으려 땀투성이가 되어 애를 썼다. 그렇게 밤이 지 나갔다. 먼동이 텄을 때는 불이 다 꺼지고 연기만 피어올랐다. 아침의 차가운 빛에 화재의 현장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페허처럼 황량하고 참혹한 모습이었다. 사닥다리에 몸을 기댄 채 아서 는 타버린 갱구를 바라보았다.갱내는 더욱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의 가슴에서 한숨이 터져나 왔다. 별안간 그는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들었다. 헤든이었다. "자, 암스트롱. 새 양 수기를 빨리 설치해야겠네." 암스트롱은 헤든을 바라보다가 새까맣게 탄 반출탑 쪽으로 다가갔다. 아서가 그곳 승강기 옆에 서 있었다. 갈라진 목소리로 암스트롱이 말했다. "새 펌프 장치를 들여놓도록 해야겠는 데요. 당장 타인캐슬로 전화를 해보는게 어떻겠습니까?" 아서는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그의 이마는 새카맣게 연기에 그을렸고 그의 눈은 독한 연기로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얼굴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해 보였다. "부탁이오." 그는 중얼거렸다. "부탁이오. 나를 내버려두 시오." "넵튠 탄광 보강 계획 P호"라고 시작한 그의 일기 속의 새롭고도 힘찬 각서와 소설책 여백 속에다 확실히 곱셈까지 해둔 복잡한 숫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처드는 모든 것이 미심 쩍었다. 매일 정오가 되면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잔디밭 끝으로 내려가 앙상한 나무 곁을 지 나서 말을 매어두는 마당의 새하얀 문에 몸을 기댔다. 넵튠의 반출탑 꼭대기를 바라볼 수 있는 이곳을 그는 '제1관측소'라고 명명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했다. 아주 이상했다. 반출탑 둘레에는 아무런 활동의 징후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수증기도 연기도 보이질 않았다. 권양 장치의 차륜은 돌고 있는 것일까? 그 는 더 잘 볼 수 있도록 떨리는 두 손을 둥글게 모아 눈에 대고 자세히 바라보았지만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상하다. 음, 아주 이상한걸."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정월 초순인 그날 그는 '제1관측소'에서 당황하면서도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집안으로 되돌아왔다. 뭔가 성가신 일이 생긴 것이다. 자기가 에언한 그런 시끄러 운 일이 생긴 것이라고 그는 느꼈다. 그는 사고가 일어날 것을 미리 에언했기 때문에 정말 그것이 들어맞았다는 것만으로 기분 이 매우 좋았다. 얼마안 있어 그놈들은 자기글 부를 것이다. 그 사고를 해결하기 위하여. 그 놈들이! 그러나 그토록 득의양양함에도 불구하고 몸이 떨리는 병든 노인임은 어쩔 수 없었 다. 그는 걷기다 매우 힘이 들었다. 캐리 고모마저도 최근에 와서는 가련한 리처드의 병세가 별로 진전이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는 잔디밭을 질러올 때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그의 걸음걸이는 더듬거리는 말씨와 꼭 같았다. 조금 달리는 듯 걷다가는 꼭쉬어야 했다. 휘청거리는 발을 겨우 옮기기 시작하여 빨리 걷 다가는 멈추고 하는 품이 꼭 말을 시작할 때 좀더 잘하려고 입술을 우물우물하는 것과 같았 다. 그러나 그렇게 힘이 드는데도 리처드는 어떤 일이 있어도 혼자서 걸었다. 캐리 고모의 거드는 팔도 의심이 되어 거절했다. 방해와 감시와 위협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 다. 그는 모든 것에서 자신을 지킬 핑요가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란 스스로를 돌보아야 한다. 잔디밭을 지나 그는 현관 옆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서 있는 캐리 고모의 슬프고도 애정에 찬 눈을 피해, 비틀거리며 거실의 프랑스식 유리창 쪽으로 돌아갔다. 그는 밑바닥의 좁다랗개ㅔ 턱이 진 곳에 아주 조심스레 발을 들어올려서는 그 프랑스식 창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는 끽연실로 들어가 글을 쓰기 위해 의자에 몸을 앉혔다. 의자에 몸을 앉히는 방법도 특이했다. 의자에다 먼저 등을 정확히 대고 그 다음은 몸을 쾅 떨어뜨리게 하는 것이었다. 자리에 앉은 그는 떨리는 손으로 글씨를 썼다. "'제1관측소'에서 의 기록.12.15*3.14. 오늘은 전혀 연기가 나지 않음. 나쁜 징조임. 주범자는 나타나지 않았으 나 분쟁 발생을 확신할 수 있음 넵튠 탄광 방위를 위해 나를 불러내 주길 매일 기다리고 있음. 의심스런 점이 있음. 힐다와 티즈테일이라는 사나이가 이곳에 와 있다는 것에 대하여 나는 아직도 불안을 느끼고 있음. 왜? 이에 대한 해답은 곧 분규의 실마리를 드러내 줄지도 모르겠음. 그리고 앤이 없어진 이래 사람들의 출입이 많아지고 있음. 무엇보다도 나는 내 자신을 보호하며 만반의 준비를 하고 대기하고 있어야 하겠음." 어떤 소리가 들리자 그는 기록을 그만두고 슬그머니 눈길을 돌려보았다. 캐리 고모가 들어 왔던 것이다. 캐럴라인은 언제나 저렇게 들어오는 것이다. 왜 저 여자는 나를 혼자 내버력 두지 않을까?" 그는 수첩을 조심스럽게 닫아버리고는 화가 난 표정으로 의자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낮잠을 주무시지 않으시겠어요, 리처드 오라버니?" "자고 싶지 않아." "좋아요. 그럼 그대로 계세요." 캐리 고모는 강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느 때의 슬프고도 애정에 찬 시선으로 리처드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 언저리가 빨갛게 부어 있었다. 캐리 고모의 가슴은 리처드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 찼다. 불쌍하고 그리운 리처드, 그가 이 현실을 모른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그러나 만일 그가 알게 된다면 더욱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캐 리 고모는 그것을 생각만 해도 견딜 수가 없었다. "물어볼 말이 있는데, 캐럴라인." 둔하고 도 의심에 찬 시선이 살살 꾀는 듯한 교활한 빛을 보이기 시작했다. "말해줘, 캐럴라인. 텝 튠에서 모두들 뭘 하고 있는 거지?" "어머나, 아무 일도 없어오, 오라버니." 그녀는 말을 더듬거렸다. "나는 내 재산을 보호할 의무가 있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돌봐야 해. 나처럼 쓸데 없는 간섭을 받고 있는 사람은 더 그런 거야. 알겠지. 캐럴라인."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캐 리 고모는 애원하듯 다시 말했다. "오라버니, 이제 좀 주무셔야 해요." 루이스 의사는 리처드가 좀더 잠을 자야 한다고 언제나 주장했지만 리처드는 낮에는 잠을 가려고 하지 않았다. 캐리 고모는 피처드가 잠을 좀더 잔다면 그의 이상해긴 머리도 나아갈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피처드가 말했다. "힐다는 왜 여기에 와 있나?" 캐리 고모는 눈물에 젖은 맑은 눈빛으로 미소를 지었다. "오라버니를 뵈러 왔죠. 그리고 아서를 만나려구요. 그레이스도 올는지 모르겠어요...또 아기 를 갖게 됐다는군요. 기억나시죠, 리처드 오라버니? 다 말씀드렸던 것인데요." "왜 그 모든 자들이 집으로 늘 오고 있는가?" 눈에는 눈물이 어리고 있으나 미소를 잃지 않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단호했다. 어떤 사람 이라 해도 그녀로부터 사실을 캐내지는 못할 것이다. "아니, 어떤 사람들 말이에요, 오라버니? 자아, 어서 한숨 주무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그는 눈을 번쩍이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의 분노가 무서울 정도로 치솟으려 하다가 갑자 기 사그라져 버리고 그 대신 어리등절한 표정이 돼버렸다. 그의 분노가 무서울 정도로 치솟으려 하다가 갑자기 사그라져 버리고 그 대신 어리둥절한 표정이 왜버렸다. 그의 어두운 눈빛이 힘없이 돌려졌다. 수첩을 들고 있는 손이 덜덜 떨고 있었다. 가끔 이런 식으로 그의 두 손과 다리가 뒤틀릴 때가 있었다. 그것은 저류 때문이었 다. 그는 소리를 질렀다. "전류가 또 왔어...전기야." 캐리 고모는 의자에서 그를 일으켜 2층으로 부축해 침실로 데리고 갔다. 옷을 벗기고 그를 침대에 눕혔다. 몸시 지친 모습인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 되어 있었다. 그는 즉시 잠이 들어 코를 골았다. 두 시간 후 눈을 뜬 그는 상쾌한 기분을 느꼈다. 완전히 원기를 되찾은 기분이 었다. 정신이 맑았고 전신에도 새로운 힘이 넘쳤다. 그는 빵과 밀크를 맛있게 먹었다. 상당 히 많은 분량을 먹어치웠다. 그는 혓바닥으로 그륵 밑까지 핥아 먹었다. 그렇게 할 때 훨씬 더 맛이 있는 것 같았다. 전류 때문에 두틀리는 것 같던 손도 말짱했 다. 그는 캐리 고모가 방 밖으로 나갔는지를 살폈다. 그는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며 따뜻한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창문턱에서 쇠파리가 윙윙대며 날고 있었다. 그의 머리 속에서도 여러 생각들이 윙윙 소리를 내며 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상쾌했다. 정상적으로 모든 기능이 되 돌아온 기분이었다. 온갖 계획과 추측들이 그의 마음속에서 번득이기 시작했다. 그 모든 생 각 뒤에는 희미한 환상처럼 결혼식의 모습이 떠올랐다. 점점 크게 울려 퍼지는 오르간의 음 악을 따라 걸어 들어오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굉장한 미인인 그 아가씨가 자기를 사모하여 결혼식을 올린다는 것이었다. 그때 자동차가 도착하는 소리가 그의 환각을 방해했다 그는 팔꿈치를 괴고 몸을 일으켜 귀를 기울였다. 그 러고는 번개 같은 직감으로 사람들이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갑자기 그의 얼굴은 즐거움 과 생기로 넘쳤다. 이제야말로 그의 기회가 온 것이다. 이렇게 힘이 넘치고 전류의 위협도 없는 이때 한바탕 해볼 기회가 온 것이다. 그는 일어났다. 일어나는 일은 그다지 쉽지 않았다. 움직인다는 것은 복잡한 여러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하 는 귀찮은 것이었다. 그는 팔꿈치에 몸을 기대면서 침대에서 바닥으로 굴렀다. 그는 혹시 자 기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지 않았을까 해서 잠시 조용히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서 창가로 다가가 창 밖을 내다보았다. 차는 두 대나 와 있었다. 그것이 그를 흥분케 했다. 그는 기분이 좋아서 껄걸 웃고 싶을 정 도였다. 창문턱에 몸을 기대며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것이 제일 힘드는 일이었지만 드디어 일어섰다. 그는 잠옷을 입기 시작했다. 잠옷을 입는 데 꼬박 5분이 걸렸다. 뻣뻣해진 두 팡를 움직이기 어려워 잠옷의 앞뒤를 바꿔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흘러내리지 않도 록 내복 위로 잠옷 끈을 단단히 맸다. 그는 신발은 신지 않았다.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그는 잠옷에 양말을 신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의기양양하게 방을 나와 계단을 내 려가기 시작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방법도 특이했다. 난간은 소용이 없었다. 난간은 도리어 방해가 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계단의 맨 꼭대기에 아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갑작스레 다 리를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다리가 털썩거리면서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 이었다. 그러면 다리가 털석거리면서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 다리를 바라보거나 다리에 대하여 생각을 하거나 하는 일이 절대로 엇어야 한다는 것이 역 시 중요했다. 리처드는 이런 식으로 해서 현관 홀까지 내려갔다. 무사히 내려온 것에 흡족해 하면서 홀 중간에 서서는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모두 식당에 있었다. 그는 그들의 음성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문 앞에 바짝 귀를 대던 리처드는 타일을 깐 홀 바닥위에 무릎을 꿇고 열쇠 구멍에다 눈을 가져다 댔다. 그는 그것을 '제2관측소'라고 했다. 드디어 리처드는 모든 걸 보고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식당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 었다. 그들은 모두 식당 테이블에 들러앉아 있었다. 변호사 배너먼 씨가 위쪽에 앉아 있고, 아서는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캐리 고모와 힐다도 있었고 애덤토드도 있었는데 그의 앞에는 많은 서류가 놓여 있었다. 아서 앞에도 역시 서류들이 놓여져 있었다. 배너먼 씨가 말을 하고 있었다. "내 생각에 그건 좋은 제안입니다." 배너먼 씨가 힘을 주며 말하자 아서가 성급히 말했다. "그건 제안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그건 모욕적이고 비열한 이야깁니다." 리처드는 아서의 말에서 좋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므로 더 기분이 좋아졌다. 리처드는 속으로 낄낄 웃었다. 배너먼 시는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없는 서류를 들 취보는 척했다. 얼굴이 핼슥했고 몸도 몹시 말라 보이는 그느 지금의 자리가 편치 못해서인 지 자꾸 목의 칼라 근처를 만지작거리고 마른 기침을 했다. 그느 넓은 흑색 리본이 달린 외 알 안경을 다시 고쳐 쓰면서 아서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되풀이해서 말씀드립니다마는 우리가 받은 유일한 제안이지요. 그리고 아주 실제적입니 다."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애덤 토드가 말했다. "갱내의 물을 빼낼 수는 없을까? 갱 밖의 시설도 재건할 방법이 없을까?" "누가 투자를 합 니까?" 아서가 소리쳤다. "이미 그건 다 의논이 되어 있는 일인데요." 배너먼 씨가 아서를 안 보는 체하면서도 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 참 딱하군." 풀기 없는 어조로 말하던 토드가 갑자기 머리를 쳐들었 다. "그 그림들은 어떨까? 자네 아버님 소장품들 말이야. 그것들 꽤 고가일 텐데..." 아서가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웃었다. "벌써 빈센트의 아들에게 값을 매겨보게 했었죠. 그는 웃기 만 했어요. 그런 그림들을 이제는 살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다 휴지 쪼가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때 힐다가 결연히 말 했다. "아서는 이제 더 이상 이 일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되겠어요. 아서에게 이 무거운 짐을 벗겨줄 방법이 그렇게도 없을까요?" 아서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는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감싸며 무겁게 말했다. "고마워, 힐 다 누나. 그러나 난 누나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 내가 어쩔 수 없는 난장판을 만들어 버렸다는걸 인정하고 깨끗이 물러나야겠지. 나는 정당하고 최선이라고 생각한 것을 했을 뿐 이야.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여러분은 만일 아버지가 여기에 계셨더라면 이런 일이 절 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신가요?" 문 밖 리처드의 얼굴에 만족감이 넘쳤다. 물론 그는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 만 무슨 사고가 발생했고, 저들이 그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자기를 우너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서는 다시 말을 시작했다. 몹시 무거운 어조였다. "난 언제나 정의를 갈구 해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정의를 이런 식으로 얻게 되다니! 우리는 광부들을 착취했고 탄광 침수로 많은 목숨을 잃게 했습니다. 나는 속죄으 마음으로 광부들을 위햐여 온갖 것을 다 해주려고 했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고 오히려 불을 지르고 나 를 완전히 매장하고 말았습니다." "어머나, 아서.그런 식으로 말을 하지 말아요." 캐리 고모가 갑자기 우는 소리를 하며 덜덜 떨리는 손을 아서에게 내밀었다. "미안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 사태를 정직하게 보고 싶습니다." "사업 이야기만 하도록 제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배너먼 씨가 아무 감동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럼 말씀해보시지요. 어서 그 제안이라는 것을 말씀하셔서 이 지겨운 일을 결판 내어 봅 시다." 아서가 거칠게 말했다. "그게 좋겠습니다!" 배너먼 씨가 말했다. 힐다가 도중에 끼여들었다. "그 제안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죠? 배너먼 씨?" 배너먼 씨가 그의 외알 안경을 고쳐 쓰면서 힐다를 바라보았다. "그럼 다시 한번 명백히 말해보겠습니다. 우리는 뒤죽박죽이 된 탄광과 물속에 잠겨버린 작업장과 다 타버린 반출탑이라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넵튠을, 조업 중지 를 하고 있는 기업 전체를 몽땅, 기계류도 저탄도 통 조각까지, 갱 안을 뒤덮고 있는 물까지 도 몽땅 사들이겠다는 좋은 제안을 해온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서가 신랄하게 말했으나 무감동한 배너먼 씨의 말이 곧 뒤따랐다. "시기가, 참으로 이 시기가 우리를 꼼짝 못 하게 막고 있는 겁니다. 이 특수한 사정을고려해야 합니다." 힐다가 말했다. "우리가 그 제안을 수락했다고 가정한다면..." 배너먼 씨는 말을 주저했다. 그는 외 알 안경을 벗고 그것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되면," 그가 힘들게 말했다. "우리로서 는 완전히 채무에서 벗어나는 것이 되지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서는, 그러니까 사실대로 말한다면, 아서는 경비 지출에 있어 너무 경솔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나 있는 그 채무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힐다는 배너먼 씨를 불쾌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우리'라는 표현히 특히 힐다를 분노 케 했다. 왜냐하면 배너먼 씨는 조금도 개입되어 있지 않았고 또 그에게는 아무런 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힐다는 불쾌한 어조를 감추지 않았다. "그 제안자에게 돈을 좀더 내놓으라고는 할 수 없나요?" "그 사람들은 빈틈이 없는 사람들 입니다. 이 제안이 그들의 마지막 것입니다." 배너먼 씨가 대답했다. 그러자 아서가 신음하듯 중얽렸다. "그건 날강도나 마찬가지야." " 도대체 그사람들이 누구예요?" 힐다가 물었다. 배너먼 씨는 아주 묘하게 손을 놀려 안경을 다시 끼었다. "모슨 가울런 상 사입니다. 좀더 분명히 말하면 조 가울런 씨죠!" 침묵이 흘렀다. 아서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힐다를 건너다보았다. 그리고 빈정거리는 목소 리로 말했다. "그 친구 누님도 알고 있잖아요? 그레인저 가의 새로운 회사 건물을 전부 까만 대리석으로 지은 작자 말이야. 대지만 4만 파운드라더군. 그자가 바로 넵튠에서 탄차를 끌던 조 가울런 이지." " 그것은 아주 오래 전 일입니다." 배너먼 씨가 정정하듯 말했다. 자기 앞에 있는 편지지에 인쇄된 명의를 자세히 살펴보더니 선언하듯 단호하게 말했다. "모슨 가울런 상사는 현재 북부 철강 주식회사, 합동 놋쇠 주조회사, 타인사이드 상공회사, 북부 증권 주식회사, 거기다 러스포드 항공회사의 관리권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또다시 침 묵이 흘렀다. 애덤 토드는 매우 불쾌한 표정이었다. 그는 정향의 그 좋은 맛까지 잃어버렸다 는 찌푸린 얼굴로 그것을 씹고 있었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그는 불안스레 자리를 옮겨 앉으며 말했다. "난 넵ㄴ에 있는 탄질을 다 알고 있지. 놀랄 만 한 훌륭한 탄질이지. 그것은 언제나 배러스의 넵튠이었으니까. 어떤 다른 방책이 없을까?" " 선생께서는 무슨 좋은 생각을 갖고 계신지요?" 배너먼 씨가 점잖게 물었다. "만일 있으시다 면 저희들에게도 좀 말씀해주십시오." " 그 가울런이라는 자에게 한번 가보는 게 어떨까?" 토드가 아서를 향하여 말했다. "그를 한번 만나는 거야. 그와 직접 흥정을 하는 거지. 그 사람에게 현금을 받고 팔지는 않겠다고 해보게. 그 사람과 공동운영을 한다는 약속으로 중역의 자리 하나를 달란다든가 주를 받는 다든가, 이렇게 말이야. 가울런과 접촉을 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아서의 얼굴이 천천히 붉어지며 노기를 띠었다. "그건 아주 멋있는 생각입니다만 토드 아저씨, 불행하게도 그건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제 가 얘기해봤습니다." 그는 좌중을 바라보다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치듯이 말했다. "이틀 전에 전 가울런에게 갔습니다. 그놈의 신축회사라는 곳을. 참, 기가 막혀서! 한번 그 회사를 구경해보시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우람한 청동 문에다, 태나다 대리석에, 티프 목재에, 융단 을 깐 엘리베이터, 대단했습니다. 어쨌든 전 그에게 저 자신을 팔아 넘기려고 했습니다. 그가 어떤 인간인지 아시죠? 그치 는 경기가 좋을 때 주주들을 속여먹었습니다. 그는 평생 단 하루도 정직한 일을 한 일이 없 는 인간입니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은 부정한 수단으로 벌어들인 것뿐이죠. 자기 고용인의 피 땀을 짠다든가, 또는 부정입찰, 어마어마한 군수품의 사취 같은 것이었죠. 그러나 난 그 모 든 것을 다 모른 척하고 내 영혼을 팔아 넘기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는 몸을 떨면서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다가 "이런 말씀을 드리니 웃으시겠죠. 그놈은 마치 쥐를 다루는 고양이 같은 얼굴로 나룰 눌렸습니다. 그놈은 우리 두 사람의 생각이 약간 다르다는 것 이외엔 자기는 매우 영 광스럽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더군요. 그는 러스포드에 있는 새로운 비행기 제 작소에 관한 이야기로 화제를 끌고 가서, 몇 백대의 비행기를 만들어 유럽의 여러 나라에 팔겠다는 둥 지껄여대더군요. 비행기는 어떤 다른 무기보다도 더욱 큰 위력이 있으니까. 러 스포드 항공회사의 미래는양양한 것이라는 둥 거창스레 말하더군요. 그치는 이쪽 이야기에서 힌트를 보이다가 또 저쪽 이야기에서 약속을 해주는 척하며 조금 씩 조금씩 나를 이야기 속으로 끌고 들어가서는 결국은 내가 갖고 있던 모든 생각을 다 털 어 없애도록 할 작정이었어요. 결국 그치는 내 마음속을 완전히 홀랑 벗겨놓고는 나를보고 비웃듯이 넵튠의 조감독 자리를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한 번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는 아주 긴 침묵이었다. 댄 티즈데일이 갑자기 몸을 움직이면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의 혈 색 좋은 얼굴이 분노로 덜리고 있었다. "그런 모욕을 당하다니. 그만 모든 걸 다 팽개쳐버리지 그래, 아서. 우리에게로 오면 어때? 돈벌이는 할 수 없지 만. 우리들은 그런 것이 필요치 안하요. 돈 같은 것은 없어도 충분히 행복하다 이거죠. 그보 다 더욱 중요한 것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이건 모두 그레이스가 내게 가르쳐준 것이지만 건 강, 신선한 공기 속에서 일을 하는 것, 그리고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을 바라보는 것. 우리에게로 오세요. 아서, 우리와 함께 새 출발을 합시다." "얼마나 보기 좋은 꼴일까! 병아리들 가운데 있는 내가." 아서가 비관적으로 중얼거렸다. 배너먼은 또 한 번 지루하다는 얼굴을 의도적으로 지어 보였다. "자.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은지 앞으로의 방향을 지시해주십시오." "팔아 넘기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아서는 이미 모든 일이 다 끝났다는 듯이 벌떡 일어났다. "이 법산저택도 넘겨주시오. 가울런은 이 집도 원하고 있더군요. 그 사람에게 몽땅 넘겨주도록 하시오, 그리고 나를 조 감독으로 써달라고 해주시오. 난 무슨 일이든 할 테니까. 문 밖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리처드 배러스는 일을 딱 벌리고 말았다. 리처드의 얼굴빛은 매우 상기되고 머리 속은 부글 부글 꿇어오르기 시작했다. 방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명확한 추측을 할 수는 없었으나 둔하게 돌아가는 머리 속에서 지금 넵튠에 어떤 사건이 있으며, 자기만이 그것을 재조정할 수 있다고 느꼈다. 그런데 저들은 모두가 자기를, 불가능을 극복해낼 수 있는 자신의 존재를 깜박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멋있는 이야기다. 그는 현관 홀의 타일을 깐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듯이 거칠게 뒤로 물러앉았다. 안에서도 더 이상 이야기가 없었고 자기 몸도 조금 피로했 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좀더 편안한 자세로 생각을 더 깊이 하고 싶었다. 그가 그렇게 웅크 리고 있을 때 갑자기 식당 문이 열리며 모두가 밖으로 나왔다. 그 갑작스러운 일에 리처드 는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넘어지는 바람에 잠옷이 훌렁 벗겨지며 그의 여윈 정강이랑, 속옷 따위가 지저분하게 드러났다. 한 인간의 가엾고 추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리처드는 그러한 것을 개의치 않았다. 그는 현관 홀의 차가운 타일 위에 앉아 매 우 교활한 웃음을 지으며 웃었다. 그는 조소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놀라 멍하니 서 있는 가운데 힐다가 앞으로 달려들며 소리쳤다. "아, 가엾은 아빠!" 티즈데일과 힐다가 그를 일으켜 세워 2층 그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배너먼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어깨를 실룩해 보이고는 형식적인 작별 인사를 아서에게 했다. 아서는 그대로 현관에 남아 있었다. 그의 눈은 애덤 토드의 노란 빛이 진한 눈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았다. 토드는 사실상 지나간 그 오랜 동안 시류에 역류하지 말라고 그에게 사정까지 한 사람이었 다. 아서는 갑작스레 말했다. "타인캐슬로 갑시다. 토드 아저씨, 난 술이라도 마셔야겠어요." 그 후 며칠동안, 리처드는 아주 저조한 상태로 누워 있었다. 그는 수첩에 "제 2관측소에서 의 발견"이라고 기입한 그 사건 후에 힐다는 그가 이제는 너무 허약해졌으니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한다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그 말을 듣고 리처드는 깜짝 놀랐다. 침실에 누워 있 어서는 작업을 지휘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 다. 캐리 고모가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지 다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였다. 그의 모든 생각은 자 기의 소유인 넵튠 탄광을 위한 새로운 창의에 집중되었다. 그날 금요일 오전 중에도 그는 자기의 아이디어에 너무도 흥분하고 있어서 자기 자신을 가눌 수가 없었다. 방안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그의 머리속에서는 연방 망치질을 해대고, 큰북의 가죽처럼 팽팽하게 긴장되 었다. 전류가 또 흘러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가만히 누워서 그 전류가 자기 몸에서 떠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그가 정신을 되찾았을 때 아서가 자기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괜찮으세요, 아버지?" 아서는 슬픔에 지친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으나 그의 내부에는 아무 느낌도 없었다. 아버지의 멍청이 같으면서도 교활한, 그 핏발 선 눈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감득할 수 없었 다. "아버지께 말씀드릴 것이 있어요, 아버지, 제 말씀 알아들으시겠어요?" 알아들으시겠어 요라니! 그 불손한 언사가 리처드ㄹ 머리에 다시 피를 끓어 오르게 했다. 그는 더욱 자기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지금은 안된다." "아버지께 사태를 똑바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러는 것이 아버지 마음도 편하게 해드릴 겁니다. 아버지께선 불안하시고 너무 흥분한 상태 예요, 그것이 아버지의 건강을 더 나쁘게 하고 있어요" "난 건강하다. 지금까지 이처럼 좋은 때가 없었다." 리처드가 노기 찬 어조로 말했다. "아 버지, 지금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아서는 임박한 집안의 붕괴를 될 수 있는 대로 부드럽게 말하려고 숨을 내쉬었다. "이 법산저택을 팔고 좀더 작은 집으로 이사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죠. 아시다시피....." "지금은 아무 말도 말아." 리처드가 말을 가로막았다. "내 일은 어떨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무 말도 듣고 싶지가 않아. 나중에 해라. 나는 너의 말을 듣 고 싶지가 않아. 지금은 안 돼." 그는 의자에 등을 젖히고 눈을 딱 감고 앉아서 아서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아서는 결국 포기하고 방을 나갔다. 리처드는 아서와 말하는 것 조차 싫었다. 정말 싫었다! 넵튠의 쇄신 계획이 완성되었을 때, 그는 아서에게 그 계획대로 행할 것을 명령할 것이다. 그는 번쩍 눈을 떴다. 그의 열기에찬 시선이 천장을 향하고 있었 따. 그게 무엇이었던가?아아, 이제 생각이 났다. 멍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서 사라졌다. 그의 둔탁한 눈에는 눈물이 번쩍였다. 왜 자기는 그러한 생각을 진작 하지를 못했을까? 왜 하지 못했을까, 왜? 탄광은 자기 소유가 아닌가! 그의 생각은 아주 훌륭한 것이었다. 아주 멋있는 확기에 넘친 아이디어였다. 자기가 넵튠에 직접 나가 그들이 한 것들을 모두 백지로 돌려버리는 것이다. 왜 지금까지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조바심과 흥분으로 몸을 떨면서 그는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마침 아무도 없었다. 식구들은 걱정에 싸여 다른 것을 생각할 여우가 없었다. 그는 홀 안으로 살금살금 기어들어가 산고모자를 찾아 머리에 ㄴㄹ러 섰다. 그의 머리는 오랫동 안 깎지않았기 때문에 산고모자 뒤로 길게 빠져 나왔다. 그러나 리처드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살그머니 현관문을 빠져나와 돌층계 위에서 몸의 균형을 잡으며 섰다. 차도가 열려진 대문과함께 그의 윅에 펼쳐졌고,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힐다와 루이스 의사가 가지 못 하도록 엄중히 금한 위험한 곳이었다. 사실 자신의 생각으로도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리처드는 그러한 것을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이 해야할 일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므로 우물쭈물해서는 안 되었다. 그는 돌층계와 차도를 비틀거리며 내려가 드디어 밖으로 나섰다.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그는 너무 흥분이 되어 비틀거리다가 하마터면 스러질 뻔했다. 그러 나 비틀거린다는 거이 무슨 문제인가. 이제 곧 그런 것도 없어 지게 될 것이다. 머리 속의 망치질도, 전류가 몸으로 흐르는 일도, 그리고 자기 몰래 계획되고 있는 그 모든 무서운 일 도 이제 곧 다 무산되고 말 것이다. 그는 슬루스 모래 언던 꼬대기를 향하여 걸어갔다. 그는 넵튠으로 가는 넓은 길을 일부러 피했다.그 길에는 틀림없이 누군가가 있어 방해를 놓을 것이개 때문이었다. 그 길은 안 되지, 안 돼! 자기는 그들보다 더 지혜롭다는 것을 보 여주게 될 것이다. 그는 길을 멀리 돌아서 갔다. 그는 슬루스 모래 언덕을 보여주게 될 것이 다. 그느 길을 멀리 돌아서 갔다. 그는 슬루스 모래 언덕의 숲을 끼고 돌아 들판과 스누크를 지나 넵튠의 뒤쪽으로 들어가는 길로 가기로 한 것이다. 그는 자기의 반격이 아주 멋있다는 것에 대해 희열을 느꼈다. 멋있다, 멋있어! 그러나 비가 많이 온 뒤였기에 길은 지흙밭어럼 질어 걷기가 힘들었다. 차가 지나간 바퀴 자국엔 커다란 웅덩이들이 파여 있어 리처드는 물 과 진흙에 범벅이 되어 철벅거리며 갔다. 드디어 슬루스 모래 언덕의 꼭대기에 있는 나지막한 목책까지 도착했다. 목책 앞에서 그는 발을 멈추었다. 그 목책은 생각지 못했던 장애물이었다. 그 목책을 꼭 넘어가야 하는데 그것 은 50센티 가량의 높이였다. 그는 기껏해야 20센티 정도밖에 다리를 쳐들 수가 없었다. 리처 드는 이 난관이 생각보다 몹시 어렵다는 것을 깨닫자 눈에 눈물이 솟으면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목책은 그 음모의 한 부분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을 굴복시켜야 한다. 분노로 몸 을 사시나무 떨 듯하면서 리처드는 두 팔을 치켜들어 목책으로 기어올랐다. 목책의 뾰족한 나무들이 뱃가죽을 찔러댔으나 그느 마치 헤엄을 치듯 두팔을 허우적거리면서 땅 위로 몸을 내던져 버렸다. 온몸이 얼얼했지만 그는 자신이 그 목책을 무사히 넘어섰다는 것이 신기하 기만 했다. 그는 얼굴과 머리를 흙탕물의 웅덩이에 쑤셔박은 채숨을 헐떡이면서도 기뻤다. 그러나 눈알이 핑핑 돌기 시작했다. 머리는 망치로 내리치는 듯하고 온몸을 뒤틀리게 하는 그 전류가 다시 엄습해오는 것이다. 그는 거기에 그런 모양으로 아주 오래 누워 있었다. 머 리 속에서 무엇이 터져버린 듯 몹시 무거웠는데 그 찬물 속에 담그고 있으니 시원했기 때문 이다. 그는 다시 일어났다. 팔굼치로, 무릎으로 죽을 힘을 다해서 일어섰다. 땅이 약간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그리로 모자도 없어져 버렸다. 그의 얼굴과 옷과 두 손은 완전히 진흙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러나 염려할 것은 없다.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는 넵튠까지 가야 했다. 걷는다는 것이 이젠 그다지 쉽지 않다는 느낌이 왔다. 그의 머리 속의 망치질은 점점 더 느려졌다. 그의 몸은 생각과는 달리 그 자리에서 움직이 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걸음이 점점 더 느려진다는 것이 화가나기 시작했다. 그느 넵튠탄광에서 발생하고 있는 대재난을 막기 위하여 어떻게든 빨리 도착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몸은 움직여지질 않으니 그는 것만 같았다. 그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는 금세 억수같이 휘몰아치는 소나기로 변했다. 건센 비가 그의 몸과 맨머리 위로 사정없이 쏟아져 내렸다. 머리카락은 빗물에 찰싹 달라붙었고, 눈으로는 진흙물이 흘러들어 앞을 볼 수가 없 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 모든 분노도 그에게서 씻겨 내려가고 말았다. 그는 거세게 쏟아지는 비를 흠뻑 맞으며 목석처럼 서 있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울면서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를 썼다. 스누크 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달동네 집들의 맨 끝에 '채탄부 휴게소' 하나가 있었다. 수잔 미첼이 라는 과부가 경영하고 있는 다 찌그러져 가는 집으로 그곳은 스누크 근처의 가난한 광부들 만 드나드는 곳이었다. 리처드는 그 집을 발견하자 우선 비를 피해야 했으므로 바람에 떠밀 리는 것처럼 안으로 들어섰다. 돌바닥 위에 빗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비틀거리는 그는 마치 늙은 술주정꾼처럼 보였다. 그 술집에는 두 사람만이 있었다. 노동자가 분명해 보이는 두 사 람은 빈 맥주 잔을 옆에 놓은 채 서양 장기를 두고 있었다. 노동자가 분명해 보이는 두 사람은 빈 맥주 잔을 옆에 놓은 채 서양 장기를 두고 있었다. 그들은 리처드를 노려보다가 껄껄대고 웃었다. 다행히 그들은 리처드를 알지 못했다. 다만 한 잔 들이키려고 온 늙은 주정뱅이라고 생각했다. 그 중 한 사람이 상대방에게 눈을 꿈벅 해 보이더니 리처드에게 말을 걸었다. "여어, 친구, 결혼식에라도다녀오는 모양이군."리처드 가 그들을 바라보았다. 몸을 흔들거리며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그들을 몹시 재미있게 해주 었다. 그들은 홀이 떠나가도록 웃었다. 다른 사나이가 말했다. "염려 말게 이 사람, 우리도 다 즐거운 일을 맛본 사람들이니까." 그 중의 한 사람이 일어나 리처드의 어깨를 붙들고는 창가의 나무 의자 족으로 밀고 잤다. 리처드는 그 의자에 쓰러지듯이 주저앉았다. 그는 자기 가 어디에 있는지, 자기를 노려보고 있는 이 두 사나이가 누구인지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려고 무감각한 손으로 호주머니를 뒤졌다. 손수건을 꺼냈을 때 은화 한 닢이 묻어 나와 돌바닥 위에 굴러 떨어졌다. 반 크라운 짜리였다. 두 번째 사나이가 그 은화를 주워 들고 그것에 침을 탁뱉더니 이빨을 들어내고 웃었다. "에, 영감, 영감이 최고야. 아주 그만인걸. 이거면 한 잔쯤은 마실 수 있어. 우리 같이 한 잔씩 마시는 게 어때?" 리처드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했다. 두 번째 사나이가 카운터 앞으로 가더니 탕탕 두드렸다. "술 좀 줘, 한 사람 앞에 한 잔씩이다." 그가 소리쳤 다. 뒤쪽에서 여자가 나왔다. 빼빼 마르고 얼굴이 까무잡잡한 여자였다. 그녀는 위스키를 석 잔 따랐다. 석 잔째를 따르면서 리처드를 이상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 다. "마시지 않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은데." 첫 번째 사나이가 말했다. "월 잔 더 한다구 나 쁠 선 없어." 두 번째 사나이가 리처드에게 다다왔다. "자아, 이 사람아, 술을 마셔." 리처드 는 그 사나이가 주는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셔버렸다. 위스키는 그의 숨을 돌리게 해주었다. 뱃속이 금세 따뜻해오면서 머리 속에서 망치질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넵튠 탄광에 대 한 생각도 다시 떠올랐다. 그는 비가 그쳤다는 것을 알았다. 두 사나이가 그를 뚫어지게 바 라보았다. 그는 그 사나이들이 겁이 났다. 그는 자신이 넵튠 탄광의 소유주이고 권위와 재산 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해내자 빨리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여기를 어서 벗어나 넵튠 탄광으로 가야 된다고 생각한 그는 의자에서 어렵게 일어나 문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사나이들의 웃음소리가 그의 뒤에서 일어났다. 리처드가 '채탄 부 휴게소'에서 나왔을 때 비가 멈춘 하늘에 구름이 흩어지고 있었다. 밝은 태양이 스누크의 무럭무럭 김을 뿜는 황야에 비치고 있어 그 빛 때문에 다시 눈이 아프기 시작했다. 눈을 잘 뜰수 없으면서도 그느 넵튠의 반출탑이 천국의 영광을 나타내듯 번쩍이며 솟아 있는 것을 바라볼 수 있었다. 텝튠 탄광, 자기의 것인 텝튠 탄강, 자기의 것인 넵튠 탄광, 리처드 배러 스의 넵튠 탄광이 보였다. 그는 다시 걸었다. 스누크를 건너가는 길은 지독하게 험한 길이었 다. 리처드는 자기가 걷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구덩이 천지인 험한 길에서 몇 번을 넘어졌는지 모른다. 그의 몸은 점점 부자유스러워지고 그의 뜻대로 잘 움직여지지를 않았다. 그는 엉금엉금 기었다. 마치 이상한 양서동물처럼 허 우적거리며 나아갔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이미 느끼지 못했다. 그는 쓰러졌다가 다 시 일어나고 또 쓰러졌지만 그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의 육체도 두뇌도 다 죽어 있었다. 다 만 그의 정신만이 목적을 향해 가고 있었다. 녑튠, 넵튠 탄광, 넵튠의 그 우뚝 솟아 있는 반 출탑의 영광이 그의 정신을 끌어당기고 지탱시켜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넵튠 탄광에 도착하지는 못했다. 스누크를 반쯤 건너가다가 쓰러진 채 다시 일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진흙덩어리 밑에 깔린 그의 얼굴은 잿빛으로 변했다. 입술은 시퍼렇게 죽었고 숨결은 코고 는 소리처럼 불규칙하였다 이제는 전류도 느껴지지 않았다. 전류가 사라지자 그의 몸은 흐 늘흐늘해졌으나 머리 속의 망치질은 조금씩 더 심해 지는 것이 머리를 부수어버리려는 듯했 다. 그는 일어나려고 했으나 그때 머리 속의 망치질이 최후의 일격을 보냈다. 그는 앞으로 고개를 툭 떨어뜨리고는 다시는 움직이지 못해따. 마지막 석양빛이 시커멓게 타버린 반출탑과 그의 식어버린 몸뚱이 위에 아름답게 쏟아졌다. 그의 생명 없는 한 손은 앞으로 쭉 뻗쳐진 채 한웅큼의 흙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탄광 법안의 제 3독회를 하는 날이었다. 그 법안은 이제 '보고 단계'에 올랐지만 야당의 수 정안을 받아들이고 있는 중으로, 그날은 케스튼 구의 의원인 세인트 클레어 분의 명의로 된 수정안을 검토했다. 세인트 클레어 분의원은 법률에 대한 놀랄 만큼 정확한 지식으로, 제 7 조 3행의 '임명된'이라는 말 앞에 '정당히'라는 말을 삽입해야 한다는 이의를 정식으로 제출 했다. 그래서 3시간 이상이나 이 애매한 어휘에 관하여 얼빠진 논쟁이 벌어져 정부 및 야당 내의 정부 추종자들이 이 법안을 칭찬할 충분한 기회를 제공했다.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데이빗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토론에 귀를 기울였다. 정부측의 의원들이 한 사람씩 차례로 일어나 정부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또 정부가 현재 벌이고 있는 일과 비상한 노력 따위를 예를 들어 설명했다. 데이빗은 읨분에 불터면서 그냥 귀를 기울이기만 했다. 더전, 베빙튼, 홈 그리고 클렉호언 등의 연설은 한결같이 타협과 지연 작전을 쓰는 것 뿐이었다. 그 동안의 경험으로 노련해진 그의 귀는 그 번드르한 말 속에 숨겨진 굴절까지 다 알아들을수 있었다. 그들의 말 속에서 변명과 어떻게 해서든지 새로운 방향으로만 끌어가려는 얄팍한 수작들을 너무나 쉽게 간파할 수 있었다. 냉정한 표정 속에 분노를 깊이 숨기고 있는 데이빗은 의장 의 시선을 잡을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발언을 해야만 했다. 이러한 배신 앞에서 수동적으로 앉아만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 까지 자기 인생을 바치면서 일하고 싸워온 것이 바로 이러한 것을 위해서였던가? 지난 몇 년 동안 자기가 투쟁해 온 것들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울랐다. 노동연맹 사무실에서 초라하 게 첫걸음을 떼어놓던일, 혼탁한 지방의회와 벌여온 투쟁, 모든 힘을 다 쏟아 그야말로 약전 고투를 해왔다. 그런데 결과는 무엇인가! 지금 이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법안, 모든 공약을 뒤엎어 버리는 종이쪽지에 지나지 않는, 정의를 노리개처럼 만든 이 법령이 지금까지의 투 쟁의 마지막 결과롤 남는다면 과연 무슨 목적을 위해 싸워온 것이라는 말인가! 그는 결연한 자세로 머리를 꼿꼿이 치켜들고는 연설의 때를 기다리고 있는 의원들을 노려 보았다. 지금 등단한 사람은 스톤 의원이었다. 급진파로 출발하여 얼마 전에 노동당으로 전 향했던 자로 전시엔 보수당의 보호를 받으며 화려한 전성기를 누렸던 늙은 여우 같은 자였 다. 정치적 궤변의 대가인 교활한 스톤은 다음 기회에 작위를 받을 부푼 희망에서 그 법안 을 극구 찬양하고 있었다. 평생을 두고 스톤은 귀족의 신분이 되기를 갈구해왔다. 그런데 지금 마치 달콤한 포도 송이 처럼 작위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그의 코앞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그는 그 달콤한 향기에 벌써부터 도취되어 미사여구의 화려한 연설을 사방으로 뿌려대고 있었다. 그의 논지는 광부 신분의 숭고함이라는 것으로, 이 법안에 대한 광부들의 어떤 반론이나 불만도 미리 막아버 리려고 그들을 한껏 추켜올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누가 감히 영국의 광 부들 가슴속에 불충의 그림자가 지금이라도 숨겨져 있다고 선언할 수 있겠습니까? 이 점에 관해서는 카나븐지구 의우너의 시적인 표현보다 더 적절한 것은 없습니다. 본인은 지금 그 잊을 수 없는 글을 인용해보겠습니다." 그는 입술을 동그랗게 벌리고는 그 문제의 시를 암 송했는데 부당한 아첨으로 가득 찬 그 내용은 듣고 있기만 해도 얼굴이 붉어지려고 했다. 데이빗은 몸이 비틀리는 것을 겨우 참으며 마음속에서 신음소리를 냈다. 제기랄, 이러한 것 들이 얼마나 오랬동안 계속되어야 할까. 그느 얼마 전 넵튠 탄광을 불태워버렸던 그 무서운 사건을 회상했다. 그 자체는 용서하기 어려운 미친 짓이었지만 그것은 자기들의 운명에 대 한 반항이 극단적으로 표현된 것이었다. 위선에 찬 말들이 교활한 스톤의 입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져 나옴에 따라 그의 가슴에서는 더욱 격렬하게 울분이 복받치고 있었다. 옆 좌석에서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리고 있는 뉴전트 를 힐끗 바라보았다. 뉴전트도 그와 똑같은 것을 공감하고 있었지만 그러난 뉴전트는 일종 의 숙명론자였다. 그는 기질적으로 어떤 것도 쉽사리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 그러 므로 불가피한 일 앞머리를 숙이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으나 데이빗은 머리를 숙일 수 가 없었다. 절대로, 절대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발언을 해야만 했다. 그느 격렬한 감정을 누르려고 애썼다. 냉정이 필요했다. 침착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용기있게 나서자고 생각했 다. 스톤이 겨우 결론에 도달하여 만면에 미소를 띠우면서 장내를 둘럼보며 자리로 돌아와 서 앉았을 때 데이빗은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긴장으로 온몸이 뻣뻣해졌다. 의 장을 정면으로 쏘아보며, 가슴속으로 천천히 그리고 통증을 느낄 정도로 밀려들어오는 거창 한 결의의 파도 속에서 자기의 몸 속을 흘러가느 긴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필사의 노력으 로 자기의 평생을 건 그 목적을 이 법안과 대결시켜야 한다고 다시 굳게 결심했다. 다시 한 번 긴 숨을 쉬었다.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는 천천히 침착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성 실성이, 앞선 연설자의 심한 과장과 허풍에 질려 있었던 청중들의 주의를 당장 그에게로 집 중시킬 수가 있었다. "본인은 오늘 오후 내내 여러 의원님들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본인도 이 법안에 대해서 여러 의원님들과 그 기쁨을 나누어 갖고 싶다고 충심으로 바라는 마음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그는 다시 긴 숨을 내쉰 다음 입을 열었다. "그 러나 본인은 바로 조금 전에 발언하신 의원께서 그토록 시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해주신 광부 들의 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본인이 몇 번에 걸쳐 우리 나라 탄광 지대의 궁핍상태에 관하여 여러부느이 주의를 환기시킨 것을 기억하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 다. 본인은 누차 본인의 선거구를 뒤덮고 있는 그 무서운 절망을 여러분께서 직접 확인해주 십사 하고 초대했었습니다.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나이들,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진 여인들, 굶주림의 흔적이 깊게 새겨져 있는 어린아이들을 직쩝 만나보시도록 해드리려고 그랬던 것 입니다. 만일 존경하는 의우너들께서 아무리 분주하셔도 시간을 할애하여 그곳을 찾아가 주 셨더라면, 그들이 처한 비참한 현실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존재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제 그 무거운 짐은 약한 자와 어린이들에게 더욱 가중되어가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의원들 여러분께서는 혹시 본인이 과 대한 감상적 언어를 남용하고 있다고 생각하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분들에게 저는 본인 선거구의 학교 보건원의 보고서를 한번 읽어봐 주시기를 청합니다. 옷이 없고 기아에 허덕이는 어린이들, 신발조차 없는 이 어린이들은 영양 부족으로 평균 체중에 훨씬 미달디   열등아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영양 부족! 아마도 존경하는 의원들께서는 이 완곡한 표 현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최근 국회의 개회에 있어, 우리는 온갖 호 화로움을 다한 성대한 모임을 할 기회를 여러 번 가졌고, 아마 대개는 이런 것이 우리의 현 실이라고 기뻐하며 안심하고 계실지도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단 1초간이라도, 이 나라의 위대 함과 화려함 속에 숨어 있는 빈곤과 비참과 결핍을 떠올려보신 분이 계십니까? 아마도 본인 은 지금 이 자리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처절한 분노가 이제는 목소 리를 통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본인은 존경스런 어떤 의원이 발언대에서 말씀하시기를, 국회에서 '모자를 돌려 돈을 거두어' 그러한 탄광지구의 괴로움을 덜어주고자 말씀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뻔뻔스런 언사를 감히 할 수가 있습니까? 피폐의 극에 달했다고 할지언정 그 사람들은 여러분의 자선행위를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우너하고 있는 것은 정의입니다! 그리고 본 법안이야말로 그들에게 정의를 자져다 주기 위한 것이 아 닙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는 엇을 하고 있는 겁니까? 의원 여러분께서는 석탄산업이 본질적으로 모든 산업과 다르다는 것을 똑똑히 알고 계시는지요? 이것은 다른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석탄을 채굴하는 단순한 과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나라의 번영 도상에 있는 산업에 대한 원료를 공급하는 기초산업입니다. 그런데 이 유일 무이하고도 중요한 상 품을 생산해내는 일에 생명의 위험까지 내걸고 있는 사람들은, 이 의사당 안의 어떤 의원이 피우는 궐련 값도 되지 못하는 노임을 받는 빈곤과 비참 속에 버려져 있는 것입니다. 존경 하는 의원 여러분 중 한 살람이라도 이 부당하고도 위선적인 법안이 종국에 가서는 이 산업 을 구출할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계십니까? 만일 믿고 계신다면 본인은 감히 그분에게 앞 으로 나와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나라 현재의 석탄산업 조직은 제멋대로 성 장한 것으로, 그것은 경제적 우너인의 결과가 아닌 역사적 개인적인 원인에 의한 것입니다.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그것은 가계 혈통적 견지에서 계획된 것입니다. 존경하는 의원들께서는 우리 나라가 석탄엔 아무런 국가적 통제도 행하지 아니한 유일한 중요 석탄 생산국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고 계시는지요? 국회의 두 개의 위원회에선 국가가 현대 과학의 기초위에서서 이 탄전을 재조직하기 위해서 결단코 탄광의 국유화를 공약했습 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공약을 수행하려 하는 것입니까? 재래의 경쟁 제도를 통하여 맹 목적으로 판로를 찾게 하고, 생산 제한법을 두어 시장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산 을 위축시키고, 국가의 보조에 의하여 탄광폐쇄가 계속되도록 함으로써 몇 백 몇 천 명의 노동자들이 길거리를 방황케하는 이러한 혼란을 내버려두면서 어떻게 공약을 수행하려는 것입니까? 본인은 의원 여러분에게 경고합니다. 이러한 방법이 이 현실을 얼마 동안은 지탱 시켜나가겠지만, 그 결과는 노동자들의 걷잡을 수 없는 파멸과 국가 전채의 몰락을 가져울 것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석탄산업에 새롱누 생기를 부여 하기 위하여 광부들의 혈관에서 이 이상 더 피를 짜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말라 비틀어 진 혈관에서는 이제 한 방울의 피도 나올 것이 없습니다. 본인에 바로 앞서 발언하신 존경 하는 의원께서는 우리가 평생 번영과 평화 속에 살려면 독일 군인들을 죽이기만 하면 된다 고 과거에 항상 말씀하시고 계셨습니다만, 그렇게 해서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탄광지 여에서는 여전히 형편없는 노임과 기아상태가 계속될 뿐입니다. 우리들이 온정과 사랑으로 그들을 돌보아주어야 합니다. 탄광지역을 이 비참한 상황 속에 그냥 버려둔다는 것은 바로 그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잠깐 쉬면서 숨을 돌리고 난 그의 어조는 애원하는 설득조로 바 뀌었다. "이번에 제안된 법안은 그 근본에 있어 대합동기업과의 경쟁에 직면한 개인 경영 탄광의 파산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 자체가 산업의 국유화를 결정적으로 웅변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국회는 지금까지의 낭비를 막고 최고 능률을 올리면서, 우너가와 판매가를 낮추는 동시에 소비를 촉진하기 위한 석탄의 대규모적인 국유화 계획을 준비해왔다는 사실에 대하여 눈을 감고 있 어서는 안 되는 것입낟. 어떻게 해서 우리 나라의 노동당 정부는 허무한 자본가들의 합동만 을 지원해주고 전체적인 통합은 무시하는 것입니까? 왜 정부 당국은 대담하게 말을하지 못 합니까? '우리는 전 보수당 정구너의 잔재물인 혼란을 단호히 일소하고, 혼란에 빠진 제도를 영원히 끝맺으려는 것이다. 국민의 이익을 위하여 석탄산업을 정부 당국이 인수하여 우리 나라의 복지를 위해 경영코자 하는 것이다.'라고. " 데이빗의 탄우너하는 목소리는 정열과 사랑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본인은 본 국회에 명예와 양심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호소합니다. 본인의 제안을 잘 검토해주십시오. 그리고 가부를 결정하기 전에 본인은 현 정부의 각료를 겸한 동료 제윌에에 특히 호소합니다. 여러 분을 본 국회에 자신들의 대표로 보낸 유권자들의 바람을 제발 배반하지 말아달라는 것입니 다. 본인은 여러분들께서 자신의 입장을 재고하시어, 이 비현실적인 법안 대신 여러분의 공 약을 수행하는 공명정대한 국유화 법안을 제출할 것을 간청하는 바입니다. 또 우리가 이 하 원에서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했을 경우, 하원을 해산하고 국민의 총의를 묻는 단호한 태도로 나아갈 것을 재차 부탁드립니다." 데이빗이 자기 자리에 앉았을 때 죽음과 같은 침 묵이 흘렀다. 그것은 어려운 결정을 앞에 두고 있을 때의 긴장된 침묵이었다. 장내는 숙연하 고 깊은 감명에 휩싸여 있었다. 그때 베빙튼이 냉랭하고도 초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슬리스케일 출신 의원 께서는 현 정부가 개 사육의 허가를 내주듯 그렇게 간단히 탄광을 국유화할수 있다고 믿으 시는 모양이군요." 그러자 의우너들 사이에서 비웃음이 담긴 말들이 속삭임으로 번져갔다. 그러자 배질 이스트먼 의원의 그 역사적인 조롱이 튀어나왔다. 그 의원은 여러 주의 합동 투표에서 선출된 젊은 보수당 의원이었다. 그는 의원들의 발언 때 연관되는 동물의 음성을 흉내내어 느닷없이 장내를 웃음바다로 만들어버리는 소질이 있 었다. 지금도 개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몽롱한 오수에 잠겨있던 그가 눈을 번쩍 뜨며 놀란 사냥개가 짖어대는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순간 장내는 깜짝 놀라 숨을 죽이는 듯하다가 이 윽고 킬킬대는 소리가 번져가더니 그 소리는 긴장을 일시에 무너뜨리며 커다란 웃음소리로 변해 의사당 안을 휩쓸어버렸다. 누구도 예측 못 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때를 기다리던 몇몇 의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형식적인 질문을 하고는 곧 찬반의 투표를 하기 위하여 로비로 쏟아져 들어갔을 때 데이빗은 아무도 모르게 의사당 밖으로 나왔다. 그느 성제임스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무슨 정해진 약속 장소에라도 가는 듯이 그는 머리를 약간 앞으로 내밀고 눈으로는 앞에 길게 뻗어 있는 길을 바라보면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그는 자기가 공원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지금 그의 의식 안에 는 패배당했다는 쓰라림만이 가득했다. 굴욕감이나 억울함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커다란 슬픔이 그를 짓눌렀다. 베빙튼의 그 마지막 빈정거림도 그에겐 아무런 고통을 주지 않았다. 이스트먼의 그 조롱과 의사당 전체의 비웃음에 대해서도 전혀 아무런 우너한을 느끼지 않았 다. 그 슬픔은 결코 자기 자신에 대한 슬픔이 아니었다. 그는 해군성의 아치 앞에서 공원을 빠져나왔다. 그것도 어떤 목적에서가 아니라 산책길의 끝까지 왔으므로 무의식적으로 걸음 을 되돌려버렸을 뿐이었다. 거리로 나오자 혼잡한 도시의 소음이 그의 슬픔 속을 뚫고 들어 왔다. 그는 한동안 서서 바쁘게 돌아가도 있는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결처럼 밀리고 있 는 남녀들, 택시와 버스와 고급 승용차들도 바쁘게 떠밀려 가고 있었다. 그 차량들은 조금이 라도 빨리 가려고 악착같이 달리며 클랙슨들을 울려대고 있었다. 그 모습들을 바라보는 동 안 그의 슬픔에는 괴로움이 겹쳐졌다. 그 미친 듯 복잡한 거리가 그에게는 인간들의 이기적 인 삶의 모습, 일방통행으로만 내달으려는 욕심의 상징으로 보여졌다. 사람들은 옆을 바라보 는 일이라곤 없이 제일 앞서려는 욕심으로만 가득해서 같은 방향으로, 각자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종종걸음을 치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 다. 그들의 얼굴은 바로 그 얼굴 뒤에 숨어 있는 자기만의 삶에 몰구되어 그 외의 다른 것 에는 무관심하기 까이 없었다. 그리고 그 각자의 얼굴엔 묘한 집착이 떠올라 있었다. 이 사람은 돈 때문에,각기 열중하여 있는 것이다. 첫 번째 사람은 그날 오후 주식 거래소에 서 그 누군가로부터 50파운드를 받아내어 기분이 좋았다. 두 번째 사람은 속으로 새우와 고 기 파이와 아스파라거스를 공상하며, 그 중 어느 것이 가장 맛있을까 한느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세 번째의 사람은 지난밤의 저녁식사 때 의미 있는 미소를 보내던 친구의 아내를 유혹할 기회는 없을까 하고 열심히 머리를 짜내고 있는 중이다. 이 거대한, 눈이 펑펑 도는 삶의 물결 속에서 각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하여, 자 기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그러니까 자기만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이다. 각 사람들은 자신만을 의식하고 있고, 타인들이나 그들의 삶은 자신을 위해 있다는 착각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타인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자기인 것이다. 자기, 즉 자기 자신이라는 인간만이 문제인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의 삶은 자신의 행복에 영향을 끼칠 때에만 문제 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행복과,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는 다른 인간들의 행복과 삶을 희생시 키고 속이고 편최하고 송두리째 박멸 한다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런 생각들이 데이빗을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그는 그런 생각과 그 미친 듯이 빙빙 돌아 가느 교통의 혼잡으로부터 도망치듯 급히 돌아서서 걸어갔다. 팬튼 가 모퉁이에서 몇 사람 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네 명이 함께 몰려 있는 그들이 광부들이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 이마가 맞닿을 정도로 몸을 굽히고 마주 서서 노래를 부르로 있었다. 모두 젊은 사람들이었고 웰즈어로 노래들을 하는 것을 보아 웰즈 지방의 광부들로 끼니에 궁한 끝에 거리로 나온 것이다. 그들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런던의 부와 사치가 그들 옆을 지나가도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그 중 한 사나이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그는 수염이 단정했으며 입고 있는 옷도 초라하고 구색이 맞지는 않았지만 깨끗했다. 그 모 습들은 마치 빠져들기를 기다리고 있는 심연으로부터 자기 자신들을 지키려고 버둥거리는 모습과 같았다. 데이빗은 그의 깨끗한 얼굴 위에 탄광에서 입은 상처임이 분명한 청색 자국 이 있는 것 볼 수 있었다. 데이빗은 그 상자 속에 1실링을 넣었다. 그 젊은이는 슬픔이 담긴 표정으로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데이빗은 생각했다. 이 1실링이 지난 5년 동안의 자신의 모 든 노력과 투쟁과 연설보다 더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고. 그는 천천히 피커딜리 지하철 쪽으로 걸어갔다. 길을 건너 지하철에 올라탔다. 맞은편 자리 에 앉은 사람은 노동자로 보였는데 신문을 읽고 있었다. 데이빗의 발언이 실린 신문이었다. 그 사나이는 신문을 펼쳐 들고 기사를 자세히 읽고 있었다. 데이빗은 자신의 연설을 그 사 나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묻지 않았다. 데이 빗은 배터시 정거장에서 내려 즐라운트 가 쪽 으로 걸어갔다. 집으로 들어가자 심한 피곤이 느껴졌다. 그는 쉴 수 있는 집이 있다는 안도감을 느깨며 밝은 카펫이 깔린 2층 계단을 올 라갔다. 그러나 반도 채 목 올라갔을 때 터커 부인이 그를 불러 세웠다. 그년느 아래츤ㅇ 거 실의 열린 문 안에서 말했다. "배러스 선생님이 아주 여러 차레 전화를 하셨어요. 직접 말씀 하실 일이 있으신가봐요." "고맙습니다, 터거 부인." "들어오시는 대로 언제든지 전화해주십 사고 하셨어요." "네에, 알았습니다." 그는 힐다가 위로 전화를 했으려니 생각했다. 고맙기는 하지만 그녀의 위안을 받고 싶은 기분도 일지 않았다. 그러나 터커 부인이 자꾸 재촉을 했 다. "의원님이 들어오시는 즉시 전화 거시도록 해드리겠다고 배러스 선생님에게 약속을 했 답니다." "아아, 그러세요." 그느 할 수 없이 바로 자기 뒤 중간 계단에 있는 전화 쪽으로 몸을돌렸다. 힐다의 전화번호를 돌리자 터커 부인은 안심했다는 듯이 문을 닫았다. 힐다에게 전화가 연결되는 시간이 좀 오래 걸렸다. 그러나 연결이 되어 신호가 가자마자 곧 힐다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힐다는 전화기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여보세요, 힐다. 나 데이빗입니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탁하고 피곤하게 울려 나오는 것을 느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데이빗, 겨우 연락이 되는군요. 지금까지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그래요?" "지금 곧 만나고 싶어요, 당장." 그는 주저했다. "미안해요, 힐다. 난 좀 피곤해서 말입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아녜요, 아주 중대한 일 이에요, 지금 곧 만나야 해요." 그녀가 그의 말을 막으며 단호하게 나왔다. 잠깐 말이 끊어졌다. "무슨 일입니까?" "전화로 는 말할 수가 없어요. 당신의 부인에 대한 일이라구요." "뭐라고!" "부인의 일이라니까요." 그는 순간적으로 피곤도 절망감도 그 어떤 것도 다 잊었다. "제니 문제라고, 세상에..."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자 전화 저쪽에서 힐다가 대답해왔다. "그래요." 그가 갑자기 전화에다 대고 약을 쓰기 시작했다. "제니를 만났군요. 그 여자가 어디 있습니까? 말해줘요, 힐다. 제니가 있는 곳을 알았습니까?" "잘 알고 있어요." 힐다의 차분한 대답에 그의 가슴은 터질 것처럼 울렁거렸다. "어디 있나요, 제니가 어디 있습니까?" "어서 이곳으로 오세요, 아 니면 제가 그곳으로 가든지요, 전화로는 말할 수 없어요." "알겠소, 알겠소. 곧 그리로 가겠 소." 그는 성급하게 말하고는 그처럼 천천히 올라왔던 계단을 달음질쳐 내려갔다. 그는 불 가에서 지나가는 택실를 잡아 힐다의 아파트로 달려갔다. 7분도 안 되어 그는 힐 다의 집 벨을 눌렀다. 가정부가 외출 중이어서 힐다가 문을 열러 나왔다. 그는 모든 그리움 과 궁금중을 겨우 누르면서 힐다를 바라보며 그녀의 얼굴빛을 살폈다. "지, 그런데..." 그는 제니의 모습을 찾았다. 그는 제니가 힐다의 아파트에 있을 것이라고는 믿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힐다가 자기를 아파트에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힐다가 자기를 아파트로 오라고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힐다는 창백한 얼굴로 머리를 흔들었다. 강이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좋은 방으로 그를 데리고 들어가는 그녀의 얼굴은 슬퍼 보이기까 지 했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지도 않고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된 거요? 뭐 잘못된 일은 없 겠지요?" 그녀는 오늘도 수수한 검정색 옷을 입고 있었다. 창백한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리며 힐다는 오는 따라 더욱 조용했다. 무릎 위에 아름다운 흰 손을 모은 채 대이빗을 오 라고 한 것도 잊어버린 것처럼 앉아 있었다. 그녀는 말하기를 두려와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 다. 사실 그녀는 두려웠다. "제니가 병원으로 찾아왔어요." "병이 났던가요?" 그의 얼굴 위로 금세 근심의 빛이 덮였다. "네, 아파요." "입원했나요?" "네,입원했어요." 침묵이 흘렀다. 기쁨이 컸던 만큼 고통과 괴로움도 컸다. 그의 목구멍에 무슨 덩어리 같은 것이 솟구첬다. "어떻게 됐어요? 제니가 많이 아픕니까?" "그래요, 좀 심해요." 그녀는 아주 무거운 병인가요?" "그래요. 아주...내장 전체가 다 나빠졌어요. 그래요..." 데이빗은 힐다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의 눈에는 힐다가 아닌 제니가 보였다. 가엾고 귀여 운 제니가 보였다. 마음속은 걱정스러움과 감당할 수 없는 애정으로 터질 것 같았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지금 병원으로 가보겠소. 만날 수 없는 것은 아니겠지요, 같이 가주시겠소 아니면 나 혼자 갈까요?" "잠깐." 그는 문 쪽으로 가다가 발을 멈추었다. 이제는 그녀의 입술까지도 창백해졌다. 그녀는 몹시 나처한 표정이었다. "난 제니를 성엘리사벳 병원에 입원시킬 수가 없었어요. 물론 나는 최선을 다했지만 할 수 없었어요. 다른 병원에다 입원시킬 수밖에 없었어요...우선 말이죠." "어느 병원입니까?" 그녀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 사람은 결국 알게 될 것이다. 금세 알게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캐넌 가의 성병 전문 병원이에요." 처음엔 그는 이해를 못 했다. 그는 힐다의 난처한 얼굴을 놓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 나 그렇게 바라보는 것은 불과 몇 초 동안이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고함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나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어요." 힐다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괴로운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 잔인 한 것 같아 그만 눈길을 돌리고 말았다. 그녀는 바로 에서 넘실거리며 흘러가는 강물 쪽 으로 트인 창 밖을 내다보았다. 강물은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방 안에도 침묵이 흘렀다. 방 안의 침묵은 오래 오래 계속되었다. 이윽고 데이빗이 입을 열였다. "면회가 될 수 있을까?" "그럼요. 내가 주선해드릴게요. 지금 전화를 걸어볼게요." 그녀는 여전히 먼 곳에 눈을 두 고 말을 머뭇거리다가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아니면 내가 같이 가줄까요?" "아니 좋아요, 힐다. 나 혼자 가보겠어요." 그녀가 전화를 걸어 당직 의사에게 부탁을 하고 있는 동안 그는 멍하니 서 있었다. 면회가 가능하다고 그녀가 말하자 그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데이빗은 실신을 할 것만 같았다. 그는 스러지려는 몸을 아파트 들레에 쳐진 철책에 기댔다. 그는 혹시 힐다 가 창문에서 내다보고 있지는 않을까 해서 몸을 바로 세우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그 아 파트의 맨 아래층 방에서 노랬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는 내 마음의 기쁨'이라는 노래였다. 그 는 점심을 먹은 이래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생각이 났다. 뭘 좀 먹는 게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병원에서 쓰러지는 소동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그는 차가운 철책을 놓고 강변로를 따라 걷다가 간단한 음료를 파는 곳을 찾았다. 커피를 파는 곳이 있었다.택시 기사들이 모이는허름한 가게였다. 준인 아가씨는 데이빗이 틀림없이 아픈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가 말도 하지 않았는데 따끈한 커피와 샌드위치를 날라다주었다. "얼마죠?" "5펜스" 데이빗이 커피를 마시고 샌드위치를 먹는 동안 아까 들었던 노래가 계속 그의 머리 속을 울리고 있었다. 성병 전문병원. 그곳은 그 커피저멩서 그다지 멀지 않았다. 그러나 택시를 불러 탔다. 차 안에는 노란색의 조화가 스테인레스 꽃병에 꽂혀 있었는데 담배연기와 엷은 향료의 냄새가 감돌고 있어, 노란 조화가 향료와 담배 냄새를 토해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 다. 캐넌 가의 그 병우너 수위는 안경을 낀 노인이었다. 나이가 많아서인지 동작이 몹시 느 렸고, 힐다가 전화를 걸어놓았는데도 면회하기까지는 상당히 시간이 걸렸다. 데이빗은 노인 이 전화로 병실에 연락을 취하고 있는 동안 수위실 밖에서 기다렸다. 붉은 색과 푸른 색의 장기판 무늬고 된 모자이크 바닥은 먼지가 쌓이는 것을 막으려 함인지 벽 쪽으로는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바닥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천천히 올라가 그를 병실 앞에 내려놓아 주었다. 자기의 아내제니가 이 병실 안에 있는 것이다. 그의 심장이 터져버릴 듯이 심하게 뛰었다. 간호사의 뒤를 따라 병실 안 으로 들어섰다. 폭이 좁은 대신 길이가 긴 방 안은 온통 하얗게 칠해진 탓인지 몹시 썰렁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양쪽으로 폭이 좁은 하얀 침대가 죽 놓여 있었다. 모든 것이 다 하얀 색 깔뿐이었다. 새하얀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들도 모두가 여자들 뿐이었다. '그대는 내 마음의 기쁨'이라는 노래가 여전히 그의 머리 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제니, 드디어 제니가 보였다. 그의 아내 제니가 제일 안쪽의 하얀 칸막이 뒤에 누워 있었다.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랑스 러운 아내 제니으 얼굴이 병실의 하얀색 사이에서 그의 눈에 띄자 가슴이 뒤엎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갑자기 질식할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지고 그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 다. "제니" 그가 소곤거리듯 불렀다. 병실 담당의 간호사가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두사람을 내버려두거 가버렸다. "당신이 오실줄 알았어요." 그녀는 놀라지도 않고 그 옛날에 익히 보아온 아양을 부리는 듯한 미소를 띠었다. 그의 가 슴이 다시 한번 무너져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침대 옆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눈이 그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다. 그 눈은 두들겨 맞 은 개의 눈과 똑같았다. 그녀의 뺨엔 붉은 모세혈관이 그물처럼 드러나 보였고 입술은 파리 했다 여전히 아름답고 별로 늙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자세히 바라보면 아름다움은 사 그러져 가고 있어, 마치 오랬동안 사용해서 이제는 내버리게 된 물것과 같은 처량한 모습이 었다. "당신이 오실 줄 알았다니까요. 내가 배러스 박사를 만나러 간다는 것ㄴ 좀 뭣했지만 병이 든 것 같은데 낯선 사람에게 보이는 것은 싫더군요. 그리고 난 힐다 배러스의 소문을 듣고 있었거든요, 슬리스케일에서는 그 사람과 제법 친했잖아요. 그리고...저어, 아아. 당신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었고..." 그는 그녀가 자기를 만난 것을 기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를 못견디게 하는 그런 격렬한 감정은 그녀에게서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동안의 자신에 대해 변명하고 싶은 듯한 간절한 표정과 단지 그를 만난 것이 기쁘다는 것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는 애를 써서 겨우 말했다. "여기 있는 것이 편안하오?"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옛날 같으면 이러한 자기의 입장을 어떤 식으로 말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고 약간 창피스러워진 듯했다. 그녀는 어색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요, 아 주 편안해요. 여기가 자선병원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간호사들이 아주 멋있어요. 정말 좋 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약간 쉬어 있었다. 얻어맞은 듯한 한쪽 눈이 유난히 더 검고, 다른 한쪽보다 더 커 보였다. "사안하다니 다행이오." "네, 전 병원 같은 곳엘 절대 찾아가는 일이 없었지만, 우리 아버지가 다리를 다치셨을 때 가 기억나는군요." 그년느 다시 그에게 미소를 보냈다. 몹시 마을을 아프게 하는 미소였다. 다시 그 두들겨 맞은 개와 같은 비굴한 표정이 나타났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 "편지라도 해줬더 라면, 제니!" "신문에서 당신에 관한 것 읽었어요. 난 당신의 기사를 아주 많이 읽었죠. 아시 겠어요, 여보?" 그녀의 목소리가 갑지기 활기를 띠었다. "길에서 당신이 내 옆을 스쳐갔던 것 아셨어요?스트랜드에서였죠. 당신은 아주 닿을 듯 말 듯 내 옆을 스쳐가셨어요." "왜 내 기 말을 하지 않았소?" "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다시 얼굴을 살짝 붉혔다. "어쩐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어요. 난 친구와 같이 있 었거든요." "알겠소." 말이 끊어졌다. 다시 어색해졌다. "내내 런던에 있었겠군." "맞아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난 왠지 런던이 아주 좋았어요. 특히 번화한 식당과 상점과 그런 것들요. 난, 잘 살고 있었어요. 아주 재미있게 살았어요. 난 당신이 내가 몹시 비참하게 살았으리라고 생각하시는 것이 싫어요. 전 재미있게 살았어요." 그년느 잠시 말을 멈추고 침대 옆에 놓인 컵을 잡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가 재빨리 그 컵을 집어 그녀에게 주었다. "컵이 너무 크죠? 꼭 차 항아리 같아요." "목이 마른 모양이군." "아니, 괜찮아요. 위 가 나빠서 그래요. 그러나 곧 회복될 거래요. 내가 어느정도 회복되면 배러스 박사가 수술을 하기로 되어 있어요." 그녀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렇다고 하더군." 그도 고개를 끄덕여주 었다. 그녀는 물컵을 건네주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의 눈 속에서 뭔가를 느낀 듯이 시선을 밑으로 떨구었다. 침묵이 흘렀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미안해요, ㄷ이빗. 당신을 제대로 대접해드리지 못했다면 용서해주세 요." 그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러다가 겨우 소곤대듯 말했 다. "빨리 병이 나아요. 제니. 내가 당신에게 원하는 건 그것뿐이오." 그녀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이 병원이 어떤 곳이라는 것을 당신 아시죠?" "음." 그는 고개 를 끄덕여 보였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수술하기 전까지만 이곳에 있을 거예요." "알 아, 제니." 또다시 침룩이 흘렀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녀가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베개에 얼 굴을 파묻고 소리를 죽여 울었다. 두들겨 맞은 것 간ㅌ은 그녀의 눈에서 한없이 눈물이 흘 러내렸다. "아아, 여보." 그녀는 헐떡이며 말했다. "난 당신을 바라보는 것조차 부끄러워요." 그때 간호사가 다가와 냉정히 말했다. "자아, 자아, 오늘 밤은 이 정도로 끝내는 것이 좋겠 군요." 그녀는 엄격한 얼굴로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섰다. "제니, 내일 또 오겠소." 그녀는 엄 격한 얼굴로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섰다. "제니, 내일 또 오겠소." 그년느 눈물 속에서 미소를 지었다. "네, 또 와주세요. 데이빗, 어서 가세요." 그는 일어났다가 다시 몸을 굽혀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간호사가 그를 회전문까지 따라나왔다. 그녀는 돌아서기 전에 비난하는 어조로 말했다. "알아두셔야 합니다. 이 병실에선 키스 같은 것은 서로에게 이롭지 못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대로 병원 밖으로 나왔다. 병원 밖의 거리에 서 떠돌이 악사가 손풍금으로 '그대는 내 마음의 기쁨'이라는 노래를 연주하고 있었다. 10시쯤 되어 캐럴라인 고모는 린든 플레이스의 자기방 창문으로 청명한 10월의 하늘을 내 다보았다. '가벼운 산책'을 하기에는 알맞은 날씨였다. 그녀에게는 나씨가 좋은 날이면 하루 에 두 번씩, 오전과 오후에 가벼운 산책을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이것이 런던에 살 고 있는 기쁨 가운데 제일 첫 번째것이기도 했다. 캐럴라인 고모도 런던에서 살게 된 것이 다. 멀리 있으면서 내내 그녀를 현혹시키고 위협해오던 대영제국의 거대한 중심지에 자기 자신이 살고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도 이상스러울 것은 없었다. 리처드는 죽고, 넵튠 탄광은 모슨 가울런 주식회사의 소유가 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출발하였다. 법산저택도 역시 넘어가 버렸다. 가울런 씨가 그 집을 원했기 때문이다. 소문에 의하면, 그 저택을 개축하고 정우너도 새로이 꾸미느라고 막대한 돈을 들였다는 것이다. 아 아, 슬픈 일이다. 아아, 슬픈 일이다. 캐럴라인 고모는 자기가 가꾸던 아스파라거스 바텡 낯 선 손들이 닿았으리라는 것을 생각만 해도 몸이 움츠러드는 기분이었다. 이러한 변화를 그 녀가 어떻게 견디면서 슬리스케일에 머물 수 있었겠는가? 뿐만 아니라 머물러달라는 부탁도 받지 못했던 것이다. 뚱하고 심술 사나운 사람으로 변해버린 아서는 그 탄광의 조감독으로 남았다. 허들리 가에 전세로 조그만 집을 얻긴 했으나 캐럴라인 고모는 그에게서 너무 심한 대접을 받았다. 그가 타인캐슬에서 만취가 되어 돌아와서는 그녀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마구 퍼붓던 날 밤의 두려움운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때 아서는 그녀에게 '혼자 아무 데로나 가서 살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가엾은 놈! 그놈은 자기의 말이 얼마나 이 고 모의 가슴을 도려내는 듯했는지를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염려할 것은 없다. 그녀로서 도 싫으면서 동정을 해주는 그러한 대접을 받기를 우너하지는 않았다. 또는 옛날의 품위를 유지하려고 우물쭈물하면서 살아가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녀는 아직 예순네 살일 뿐이다. 그리고 그녀는 연 120파운드의 수입도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나 혼자 살 뿐이다. 지성과 교양의 도시 런던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는가! 그년느 자기의 대담스러움에 놀라면서도 신중하게 여러 가지로 검토를 해보았다. 그녀가 런던에서 산다면, 최근 자기에게 다정해진 힐다와 가까이 있을 수 있다. 또 언제나 다정스러운 그레이스는 지금도 그렇게 단순하고 멋 같은 것은 부릴 생각도 없이 남편과 자식들과 함께 가난하지만 멋진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돈이나 물질적인 것은 전혀 염두에도 없이 주어진 것만으로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 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1년에 한 두어 달은 바넘에 가서 사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거기에 는 라우라도 있지 않은가. 라우라 밀링튼은 지난 몇 년 간을 내내 번만우드에서 자기 남편 을 간호하며 살고 있었다. 라우라도 꼭 찾아가 보자. 그러고 보니 영국 남부에서 새 생활을 시작하는 캐리 고모의 앞날은 새롭고 밝은 빛이 가득 비추고 있었다. 그녀의 지난 생애 30 년 동안이란 해리어트와 리처드의 병실에서만 살아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캐리고모도 아 마 마음속 어느 곳에서는 병실에서 더러운 시트를 갈아주는 것에 조금은 너더리를 내고 있 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마음이 끈 고장은 베이즈워터라는 곳이었다. 캐리 고모만큼 베이즈 워터의 영락을 알고 또 이해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녀가 자신도 영락을 맛본 사람이라는 의 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베이즈워터에 우아한 옛날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 은 그녀의 가슴에 감상적인 메아리를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즐겁게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 을 갖게 해주었다. 사실 린든플레이스는 그녀의 마음에 너무나 꼭 드는 곳이었다. 몹이면 나 무들의 초록빛이 오래 된 집들의 퇴색한 황색 페인트칠과 대조되어 더욱 우아하고 아름다웠 다. 그리고 거리의 끝에 교회가 있었는데, 그것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마음에 평화 로움을 안겨주었다 최근에 와서 캐리 고모는 훨씬 더 신앙이 깊어졌다. 성필립 교회의 매 일 미사에 규칙적으로 나가면서 열심히 기도했다. 기도하고 있는 그녀의 눈에서는 때로 너 무 감격한 나머지 눈물이 흐르기도 했다. 성필립 교회의 첨탑에서는 가끔 높고 맑은 종소리 가 울려나오기도 했다. 우유 소매상이 시내에서 즐거운 듯이 외치고 다니는 소리와 양고기 를 굽는 냄새는 그녀에게 살고 있다는 느낌을 생생히 해주고 있었다. 캐리 고모가 수소문을 잘해서 셋방을 얻은 키틴 즈 부인의 집, 104번지는 유난히 모양이 좋은 집이었다. 욕조는 비록 갈라지고 에나멜 칠을 찬 겅이 떨어지고 있는 중이긴 했지만 언제나 깨끗했고, 자동 온수장치가 되어 있어 2펜스 만 집어넣으면 뜨거운 물이 얼마든지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목욕탕 에서 세탁하는 일은 엄격히 금해져 있었다. 키틴즈부인 집에 세 들어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나이 지긋한 부인들이었는데, 단 한 사람만 예외로서 법과대학을 다니는 젊은 인도인 청년 이었다. 그러나 그 청년마저 비록 피부 색깔은 검지만 욕실을 아주 소심하다고 할 정도로 깨끗이 사용했다. 이처럼 모든 것이 자기에게는 다 알맞고 유쾌하다고 생각하면서 캐리 고모는 창문에서 눈 을 돌려 방 안을 훑어 보았다. 그 방 안에도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뿐이었다. 보물처럼 소중한 세간들이 둘러싸인 가운데에서 자신은 안락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평생 동안 자기 것은 어느 한 가지도 내버리지 않았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방은 그의 귀중하 고도 값비싼 물건들로 장식되어 있는 것이다. 테이블 위에는 해리어트가 40년 전에 스위스 의 루세를 여행길에서 사온 스위스 농가의 모형이 놓여 있었다. 정교한 조각이 정말 좋았고, 그 집 안에는 작은 암소들의 모형도 들어 있었다. 이것을 세인트 제임스의 고물시장에 내놓 으려 했던 때가 있었지만 그건 생각만 해도 끔찍스러운 일이었다. 또 대리석의 벽난로 장식 옆, 까만 초인종 손잡이에 매달려 디릉거리고 있는 세 장의 그림엽서도 있었다. 그것들은 아 서가 불로뉴에서 보내주었던 것인데, 그전에는 액자 속에다 끼워두었던 소중한 것이었다. 그 녀는 이 그림엽서들을 몹시 좋아하고 있었다. 색채가 아름다웠고, 또 아직도 그 뒷면에 붙여 진 채 있는 그 외국 우표가 언젠가는 값이 나갈지도 모르기 때문에 더 좋았다. 그리고 맞은 편 벽에는 그녀가 14년 전 해리어트에게 만들어주었던 나무에 새긴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 대가 이 세상에 처음으로 태어난 경하로운 날'이라고 시작되는 시도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그 그림도 얼마나 아름다운 지 모른다. 아아, 그녀도 한때는 이런 그림의 명인이라고 생각한 적 이 있었다. 그러한 모든 추억이 다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모든 소유물, 즉 그녀의 앨범, 고스 지방의 도기 세트, 법산저택의 공부방에 있었던 노란 색깔의 지구의, 그 옆에 언제나 함께 놓여 있었던 커다란 자색 조가비, 구멍 파는 노리개, 그 노리개의 유리구슬 하나는 아 서가 일곱 살 때 잃어버리고 말았지만, 아아, 그때 아서가 집어삼킨 것이 아닌가 하고 얼마 나 걱정을 했던가! 그리고 펜을 닦는 것을 겸한 흡수지와 궁실 안내도, 1907년의 지명사전 등 그 모든 것이 다 있었다. 그녀는 리처드가 죽기 얼마 전에 산 버들가지로 만든 파리채까 지도 다 보관하고 있었다. 이 단칸방에 캐리 고모의 지나온 생애의 흔적이 다 놓여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속에 있노라면 캐리 고모는 자기가 불행하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자기의 행복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고는 그 행복이 감사해서 하나하나 꼽아 보는 것이었다. 지금은 잠시 산보를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아아, 그렇고말고, 그녀는 작은 네모진 거울 앞에서 모자를 썼다. 그 모자는 7년 전에 산 것으로 지금은 많이 퇴색되고 깃 털도 힘이 없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아름다운 모자로서 다행히도 검정색이므로 어느 옷에나 잘 어울렸다. 장갑을 끼고 나서 그녀는 접혀진 우산을 마치 총을 끼듯 단단히 겨드랑이에 끼였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방을 한 바퀴 휘이 돌아보았다. 빵 반쪽과 작은 우유 주전자가 깔끔하게 선반 위에 놓여 있었고, 또 어제 먹다남은 토마토도 있었다. 코코아 깡통은 습기를 막기 위하여 뚜껑이 꼭 덮여 있었고 가스도 잘 잠겨 있었다. 창문은 공기가 통할 수 있도록 조금 열려 있고 성냥도 흩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다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흡족한 마음으로 그녀는 머리를 꼿꼿하게 치켜 세우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쇼 윈도를 기웃거리며 상점 안의 여러 가지 상품들을 보고 감탄하면서 린든 플레 이스에서 웨스트보언의 숲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웨스트보언 숲의 끝까지 다다르자 그 녀는 특별한 용무가 있다는 듯이 아주 익숙한 태도로 메리트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메리 트는 언제나 기분을 유쾌하게 해주는 곳으로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는 큰 백화점잉다. 그 곳에는 어떤 물건이든지 다 갖추어져 있어 구경을 하기에 안성마춤이었다. 약 30분 가량 캐 리 고모는 검은 구식 모자를 쓴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인 채 메리트 백화점의 그다지 비싸지 않은 물건들도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특히 고마웠다. 연금120파운드라는 그녀의 재정상태는 그다지 넉넉하다고는 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무모한 짓은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오늘 아침 그녀는 용단을 내렸다. 몇 주일 전부터 그녀는 편지 뜯는 칼에 눈독을 들이고 있 었다. 그것은 진짜 상아와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그 한쪽 끝은 앵무새 주둥이처럼 만 들어져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만들 수 있을까? 캐리 고모는 경탄했다. 아아, 정말 보물같은 편지칼인데 그 값이 단돈 9펜스가 아닌가. 그런데 지금 캐리 고모의 눈은 기쁨으로 더 휘둥 그레졌다. 그 편지칼에 '6펜스 반으로 할인' 한다는 작은 표찰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 은 다시 없는 기회라고 생각되었다. 캐리고모는 그 편지칼을 샀다. 그 칼이 초록색 포장지에 쌓여 초록색 끈으로 묶여지는 것을 보았다. 바로 그때 그녀는 편지칼을 힐다에게 주겠다고 결심을 했다. 그녀는 물건을 산 것이 기뻤다. 왜냐하면 가끔 메리트 백화점에서 뭘 산다는 것은 그녀로 서는 명예로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 캐리 고모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따. 안내 원 아가씬느 경마의 기수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 아가씨는 버튼을 눌러 캐리 고모를 옥상까지 데리고 올라갔다. "독서와 글쓰기와 쉴 수 있는 휴게실이 있는 곳입니다."라고 안내원 아가씨는 활발한 목소리리 외쳤다. 그 휴게실은 삼목으로 벽을 댄 아름다운 방으로 거울들이 걸려 있었고, 편안한 의자와 신문과 잡지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그 안에는 부인들 몇이 쉬고 있었다. 그 방은 무료였으므로 캐리 고모는 안심하고 들어갔다. 그녀와 비슷한 처지로 보이는 부인들이 신문을 읽고 있는 사이에서 캐리 고모도 신문을 읽 는 동안에 한시간이 지났다. 그들은 모두 구두쇠 기질의 여인들로서 옷차림도 거의 비슷했 고 무료 신문을 최대한 이용하고 있었다. 사실 신문들은 읽을 만한 뉴스로 가득했다. 온 나 라가 흥분의 소용돌이에 싸여 있었다. 맥도널드 씨가 국왕을 다시 배알했다는 것과 거국 내 각의 휼륭한 성명서와 앞으로 있을 선거에 관한 기사가 나와 있었다. 캐리 고모는 거국 내 각 정부의 대찬성자였다. 그것이 아주 '안전'한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었다. 아까 타고 왔던 바로 그 엘리베이터가 그녀를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다주었다. 같은 얼굴의 안내원 아가씨가 그녀를 보고 생긋 웃어 보였다. 그 아가씨는 인상이 좋고 얌전해 보였다. 캐리 고모는 그 아가씨가 좋은 자리로 승진할 것을 층심으로 빌었다. 눈동자도 근심에 차 있었다. 그것도 깊은 근심이었다. 마음 아픈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는 그런 표정이 었다. "바깥은 날씨가 참 좋아요. 비가 올 것 같았는데 그렇지는 않군요." "비는 오지 않을 거예요."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힐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캐리 고모가 말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갑자기 말이 끊어졌다. "난 공원을 지나왔단다. 공원이 지금 아주 아름답더구나." "그래요? 아, 정말 그렇겠군요. 지금이 제일 아름다운 때죠." "둥근 연못가에서 아주 귀여운 사내아이를 보았단다. 빨간 외투를 입고 있었어. 너도 한번 봤더라면 아주 좋았을 거야. 그 아기가 정말 귀엽더라." 캐리 고모는 몹시 애를 쓰며 방 안의 분위기를 즐겁게 하려고 했지만 힐다는 무관심하게 이야기를 흘려 듣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무슨 까닭일까 하고 생각하면서 그년느 데이빗을 바라보았다. 데이빗은 창가에서 뭔가 깊이 생각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서 좋지 못 한 일이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년느 좋지 못한 일에 대해서는 재빨리 알아내 는 감각이 있었다. 데이빗은 시계를 다시 바라보더니 벌떡 일어섰다. "정말 가봐야겠소. 3시에 다시 만납시다." 힐다에게 이렇게 말한 그는 캐리 고모와 악수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캐리 고모는 귀를 기울였다. 현관 홀에서 그가 무슨 이야기인가 힐다에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난 아쉽게도 그 말의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그들에 대해서 몹시 알고 싶었다. 호기심을 누를 수가 없었다. 힐다가 들어오자 그년느 물었다. "무슨 일이냐, 힐다? 그 사람이 무척 걱정하고 있는 것 같은데. 병원에 간다는 건 무슨 일 이니?" 처음엔느 못 들은 척하던 힐다는 캐리 고모의 호기심을 딱 잘라버리려는 듯이 쌀쌀하게 대 답했다. "그 사람의 부인이 병원에 있어요. 입원 중이에요. 오늘 오후에 수술을 할 거예요." "어머나!" 캐리 고모는 입을 막으며 눈을 둥그렇게 떴지만 둥그렇게 떴지만 궁금하던 것을 알아냈다 는 흡족함이 역력했다. 그날 오후 1시 반에 데이빗은 성엘리사벳 병원으로 갔다. 만족할 만한 혈액 검사의 결과 에 따라 제니가 그곳에 이미 이송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너무 이르다는 것을 알았지만 수술을 받게 될 제니를 생각하면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아내인 제니가 수 술을 받는 날인데! 그녀가 수술을 하기 전에 필요한 치료를 받고 있던 이 몇 개월 동안 그 는 가끔 제니에 대한 자기의 감정을 자문해보았다. 자기의 감정은 사랑이 아니었다. 그렇다. 그것은 사랑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이미 오랜 옛날에 죽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것은 커다란, 엄청난 감정이었다. 연민 잇앙의 그 무엇인 것이다. 그 동안 그녀가 살아온 내력을 아주 명백히 알게 되었다. 그녀는 이야기를 이것저것 한 토 막씩 끊어서 해주었고, 그것도 거짓말을 섞을 때가 많고 꾸며대느 것이었지만 가엾게도 사 실을 숨기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녀는 처음 런던으로 가서 어느 큰 백화점에 직잗을 얻었다. 그러나 그 일은 옛날 처녀 시절에 다니던 슬래터리 부인복 상점에서의 일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그리고 보수도 상상 외로 너무 적었다. 곧 제니에게 친구가 생겼다. 그리고 또 다른 친구도 생겼다. 그 친구들은 처음엔 모두 점잖은 신사들이다가 마지막에는 험상 은 마각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귀부인 을 돌봐주고 있었다는 옛날의 편지 사연은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년느 한 번도 영국 밖을 나가 본 적이 없었다. 제니는 왜 그토록 자신의 분수를 알지 못했을까? 그에게는 이해할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어린애같이 자기 자신을 자꾸 변명하려드는 어리석음에서 벗 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상처 입고 타락한 여인이었지만 그 죄는 자신의 탓이 아니라 는 것이었다. "남자들 때문이에요...모든 일이. 당신은 모르실 거예요. 다시는 사내라는 것들은 마나지 않 으려 했어요. 살아 있는 동안엔." 여전히 제니는 옛날과 같았다. 그가 병원에 꽃을 가져다 주었을 때 그녀는 매우 고마워했 다. 그것은 그녀가 꽃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자기는 그 병실에 입원한 그 어는 여인들보다도 한층 더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간호사에게 자랑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니가 간호사 에게 또 무슨 이야기를 꾸며댔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도 틀림없이 유치하고 로맨틱한 이야기를 꾸며댔을 것이다. 성엘리사벳 병원으로 옮기고,그가 응접실이 붙은 병실 을 주선해주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그가 얼마나 그녀를 높이 생각해주고 있느냐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새로 담당하게 된 간호사에게 좋은  랑거리가 되어줄 것이라고 믿었다. 병원에 입원하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로맨틱했다. 그녀의 행동은 그 럴 수가 있을까 할 만큼 어처구니가 없느 것이었다. 그년느 사나이란 짐승이라고 경멸의 말 을 하면서도 그에게 자기 손가방 속에서 립스틱을 꺼내주겠느냐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녀 는 손가방을 병실의 침대 밑 옷장에다 살짝 감추어두고 있었다. 그녀는 또 테이블 옆, 서랍 밑에 언제나 작은 손거울 하나를 감추어두고 있으면서 그를 만나게 될 때면 꼭 화장을 했 다. 거울은 절대로 병원에 가지고 오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제니는 거울을 보관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아름답게'보이려고 했다. 데이빗은 해안길을 따라 걸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는 모든 것이 잘 되기만을 바랐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그는 병원의 현관 아치 위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역시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그러나 병 원 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밖에서 기다리며 길에서 어슬렁거릴 수는 없었다. 그는 수위실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갔다. 제니가 수술을 받고 있는 수술실 옆의 썰렁한 기분이 드 는 천장 높은 복도에 서 있기로 했다. 수많은 방들이 그 복도의 양쪽에 줄지어 있엇다. 힐다의 방, 간호사 들의 방, 대기실. 그 중 에서도 유난히 크게 보이는 유리문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그것은 수술실이었다. 그는 수술 실의 하얀 젖빛 유리를 낀 두 개의 문을 바라보았다. 그 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생 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담당 간호사 클레그가 병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수술실 담당이 아니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왜 왔느냐는 듯 그를 바라 보더니 말했다. "너무 일찍 오셨어요. 이제 막 시작했는데." "네 알고 있어요. 그러나 빨리 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대기실로 들어가라는 말도 없이 가버렸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벽에 등을 기대고 혹시 누군가가 거기 있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할 것이 두려워 될 수 있는 대로 누네에 뜨이지 않게 서서 수술실의 젓빛 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을 바라보니 의사들의 그림자가 뚜렷하게 비치어. 자금 수술실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일이 다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는 군의 위생병으로 있었을 때 군 병원에서 수술을 도운 적 이 가끔 있었기 때문에 마치 자기가 수술실 안에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똑똑하고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수술실의 중앙에는 금속으로 만든 수술대가 있었다. 그것은 번쩍거리는 지레와 바퀴가 달 려 있어 자유 자재로 옮길 수 있게 되어 있다. 힐다는 이 번쩍거리는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 검은 손들은 젖어 있었고 미끈거렸다. 수술실 안은 매우 더웠으며 뜨거운 물이 끊는 소리와 수증기가 새는 로 약간 소란스러웠 다. 수술대의 베개 옆에는마취 담당이 금속으로 된 실린더와 빨간 고무 호스를 옆에 놓로 둥근 하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마취 담당 의사 역시 여자로서 아주 조용하면서도 지루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색깔이 있는 방부액의 큰 병들이 수술대 근처에 놓여져 있고, 증기 소독기에서 막 끄집어 낸 수술도구들이 쟁반 위에서 놓여 있었다. 그 수술도구들이 힐다에게 건네졌다. 힐다는 그 것들에겐 눈을 주지도 않고 다만 검은 고무 장갑을 낀 손을 내밀어 도구가 그 손 위에 놓여 지면 재빠르게 사용하기만 했다. 힐다는 수술대로 약간 몸을 굽힌 자세로 일을 하고 있었다.간호사들이 수술대 위의 것을 감추는 듯이 들여다보며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에 수술대 위의 것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무 너가 큰 비밀이기나 한 것처럼 그녀의 모듯것이 하얀 훗이불에 완전히 덮여 있었고, 여기저 기 하얀 타월로 덮여진 위에 클립이 끼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다만 한 곳만이 단정히 네모지게 노출되어 있었는데 그 네모진 부분은 선명한 황색빛으로 칠해져 있었기 때문에 하얀 타월에 대조되어 명확히 드러나 보였다. 피크르산 작용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바로 이 네모진 곳 안에서 모든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힐다의 고무 장갑을 낀 부드러운 손이 움직이고 있는 곳도 바로 그 네모진 곳이었다. 처음엔 절개를 했다. 그렇다 절개가 첫 순서이다. 뜨겁고 번쩍이는 랜싯이 선명한 황색 피 부에 천천히 단단한 선 하나를 긋자, 피부는 입술처럼 갈라지며 넓게 붉은 색깔의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그 미소 짓는 입술에서 붉은 색의 것이 가늘게 쭈욱 솟구쳐 올랐고, 힐다의 검은 두 손이 연방 움직이자 그 상처 주위에는 번쩍이는 핀셋이 놓여졌다. 다시 절개가 더욱 깊게, 상처의 붉은 입 안에서 아루어졌다. 그 상처는 이제 미소 짓는 것 이 아니라 입술을 활짝 벌린채 크게 웃는 모습이 되어버렸다. 힐다의 손 하나가 바로 그 상 처 안으로 들어갔다. 검고 번쩍이는 손이 마치 뱀의 검은 대가리처럼 작고 뾰족해지면서 상 처 속으로 깊이 고 들어갔다. 그것은 마치 붉은 색의 웃는 입이 뱀 대가리를 집어 삼키는 것 같았다. 그 이후에 더 많은 도구들이 사용되었고, 죽 늘어놓은 핏샛들이 하나하나 자꾸만 늘어갔다. 도구들은 서로 섞여서 복잡한 듯했지만 질서정연했다. 그것은 모두가 필요한 것이었고, 정밀 한 수학처럼 틀림없는 것이었다. 하얀 가제 마스크를 쓰고 있어 힐다의 얼굴은 잘 안 보였 지만, 눈은 볼 수 없었다. 그 눈빛은 강렬했다. 힐다의 손놀림은 바로 힐다의 그 강한 눈빛 의 투영이었고 그 손들 역시 냉혹하며 강철처럼 단단했다. 그렇게 강철처럼 단단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수술실에선 건강한 육체는 매력이 없다. 그러 나 병에 걸린 육체는 관심의 대상이 된다. 인간은 일단 수술실로 들어오게 되면 붉은 색칠 이 된 사물처럼 취급되어 그 밑바닥까지 다 보여주고 말게 되는 법이다. 꾸미거나 감추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망각이 너무도 빨리 오고 말리 때문이다. 지금도 깊은 망각 속에 묻혀진 채 공포나 두려움이 전혀 없이 피로 물든 하나의 사물처럼 놓여져 있는 것이다. 마치 미소 짓는 것처럼 벌려져 있던 상처는 봉합이 되었다. 힐다가 놀랄 만큼 정확하게 봉 합침을 집어넣어 상처의 입술을 가늘게 오무렸다. 이제 수술은 거의 끝나 마뮐되어 가는 순 간이다. 뜨거운 물이 끓어오르는 소리가 조금 낮아지고 방 안의 열기도 낮아졌다. 간호사들도 수술 대를 둘러싸고 있지 않았다. 그 중 한 사람이 마스크를 한 채로 기침을 했고 그래서 긴 침 묵이 깨졌다. 어떤 간호사는 피에 젖은 소독면을 세기 시작했다. 그는 간호사들이 중환자실 안으로 담가차를 끌고 들어가자 회전문이 닫히는 것을 바라보았 다. 이윽고 그는 돌아서서 힐다가 수술실의 경사진 곳을 내려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으 의 모습은 차갑고 초연했다. 별것이 아니었다는 그런 표정까지 보였다. 그녀는 갑자기 말했 다. "자, 끝났어요. 이제 부인은 괜찮을 거예요." 그는 그녀의 냉혹한 태도가 오히려 고마웠다. 친철했다면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 다. "면회는 언제 될 수 있나요?" "오늘 저녁에는 되겠지요. 그다지 심한 마취는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 "8시에는 면회할 수 있을 거예요." 그는 그녀의 여전히 차가운 태도가 다시 다행스럽다고 느꼈다. 수술실의 냉혹함과 차가움 이 아직도 그녀에게 남아 있어, 그녀의 말은 메스로 날카롭게 딱딱 잘라져 퉈어나오는 느낌 을 줬다. 그녀는 계속하고 싶지 않은 듯 했다. 인사도 없이 자기 방의 문을 확 열더니 들어 가 버렸다. 문은 그대로 열어 두었으나 그녀는 그를 잊어버린 듯이 보였다. 그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주었으면 싶소, 힐다." "고맙긴요." 그녀는 서류를 들고 보는 척했다. 냉혹한 표정 아래에서 그녀의 마음은 깊은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 이유는 데이빗에대한 자기 자신의 감정 때문이었다. 그 감정이란 사랑 같은 건 아니었다. 아아, 절대로. 그것은 그러한 것보다 훨씬 더 신비한 것이었다. 그는 그녀가 매력 은 느낀 유일한 남성이었다. 한때는 정말 하마터면 그와 사랑에 빠질 뻔했다. 있을 수 없는 일! 자기는 어떠한 남성도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남성과의 사랑은 실패하리라는 두려운 의식, 즉 자기는 그를 좋아할 뿐 그를 사랑할 수 없다는 마음이 그여인, 제니라는 여자를 ㄱ 그에게로 되돌려준다는 것을 더욱더 못 견디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몸을 돌렸다. 제니의 장례식을 끝낸 다음날 아침 8시 반에 데이빗은 슬리스케일 플랫폼을 빠져나와 피 터 윌슨의 마중을 받았다. 그 전날인 10월 15일은 온종일 분주하게 지나갔다. 가엾은 죽음의 뒷처리를 끝내고 제니의 유해를 땅에 묻고 그 무덤 위에 꽃다발을 놓아주고 돌아왔다. 도무 지 현실적인 지각을 할 수 없는 사이에 모든 슬픈 일들은 지나갔다. 그는 밤차로 런던을 떠 났기 때문에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는 피곤을 느끼지 않았다. 바다에서 불어 닥치는 칼날 같은 바람이 어떤 긴장감을 일으켜 힘이 솟게 해주었다. 그는 여행가방을 내려 놓고 윌슨과 악수를 했다. "오셨군요. 그리고 시간도 꼭 맞추셨군요." 인사를 하는 윌슨의 얼굴에는 늘 띠고 있던 호인다운 미소마저 보이지 않았다. ㄱ의 코밑 에 돋은 구레나룻 수염이 그의 마음에 있는 괴로움을 암시해주듯이 불아느세 실룩거렸다. "어제 회합ㅇ레 나오시지 못한 것 정말 유감입니다. 위원회는 백팔십도로 방향이 전환되었 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반대편에 서버린 판국입니다."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데이빗이 조용히 말했다. "아마 그게 이상할 겝니다. 의원님의 적수를 누구로 세웠는지 아십니까?" 윌슨은 잠시 말을 멈추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데이빗의 눈빛을 살피더니 격한 어조로 말 을 내뱉었다. "가울런입니다." 데이빗의 심장이 딱 멈추어버리는 듯했다. 그 이름만 들어도 온몸이 얼음처럼 굳어버리는 것이었다. "조 가울런이라구요!" 그는 억양이 없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긴장된 침ㅁ눅이 흘렀다. 윌슨은 불쾌한 미소를 지었 다. "어제 저녁의 일이었습니다. 그자는 지금 법산저택에 살고 있는데 호화판 생활이지요 그자 는 넵툰 탄광을 손아귀에 넣더니 지방의 명사가 되었습니다. 이제 다 결정이 되어버린 거예 요." 무거운 초조감이 데이빗에게 몰려왔다. 그는 그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 그 일은 너 무도 엉뚱한, 미치지 않았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짓거리였다. 그는 다시 물었다. "그레 정말이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사실입니다.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요." 그러나 데이빗은 그러한 씁쓸한 생각들은 툭툭 털어버리기로 했다.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 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의 유일한 해답은 조가 당선되지 않게 하는 일이다. '아아, 하느님, 제가 한 번만 더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이번선거에서 부디 조 가울런을 이 기도록 해주십시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하 던 무거운 책임을 통감했다. 그 다음날 10월 16일은 정식 지명일이었다. 그날 오전에 그는 가울런을 만났다. 공회당 앞 에서였다. 데이빗이 윌슨과 함께 서류를 제출하러 돌층계를 오르고 있는데 바로 그때 래미 지, 커놀리, 로우 목사 등의 선거 운동원과 수많은 후원자에 둘러싸인 채 조가 현관에서 내 려오고 있었다. "잘 만났네, 펜윅." 그는 외치듯이 말했다. "늦은 것보다는 이른 것이 더 낫지, 안 그래? 이 번엔 깨끗한 대결이 되기를 바라네. 나는 어디까지나 페어 플레이를 할 테니까. 무엇보다도 훌륭한 인물이 승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안그런가, 펜윅?" 조ㅢ 패거리에서는 그의 그러한 말을 찬탄하는 수순거림이 일어났다. 데이빗은 아주 냉정 한 얼굴이었으나 마음속은 구역질이 날 만큼 분노스러워 . "명심하게." 조는 말을 계속했다. "내 말은 바로 그거야. 영국적 스포츠멘쉽." 그는 스스로를 도덕의 방벽이라고 했다. 그러나 물론 어디까지나 인간적이며 사나이 중의 사나이라고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의 첫 연설은 신 베들가 국민학교에서 있었다. 그는 청중에게 국기를 존경해야 한다고 주장한 후에 군중들에게 의미 깊은 미소를 보내며 말했 다. "그리고 다음 고스포드 공원의 경마에서는 '레리오'라는 말에 돈을 걸어보십시오" '레리오'는 그의 말이었다. 그결과로 그의 마권의 주가는 갑자기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다. 그는 재산도 있고 사화적 지위도 있는 사람으로서의 위엄은 교묘하게 감추어버렸다. 그 대 신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겸손한 태도를 지어 보임으로써 완전히 그들을 녹여 버였다. "나는 여러분과 같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부르짖었다. "나는 입 속에다가 은 숟가락ㄷ을 물고 태어난 게 아닙니다. 별별 일을 다 하며 인생의 밑바닥 맛을 톡톡히 보면 서 자라난 사람입니다. 나는 싸워서 내 길을 개척했습니다. 나의 정책은 여러분 한사람 한사 람에게 모두 나와 같은 인생길을 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드리는 것입니다!" 데이빗은 반대파의 막강한 조직과 세력을 보았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결사적인 투자로 이에 맞서서 투쟁했다. 그러나 그의 힘은 조와 대항하기에는 너무나 비참한 것이었다. 어느 쪽을 돌아다보아도 조의 세력과 금력이 판을 치고 있었다. 그것들은 그의 활동 범위를 점점 좁히면서 숨통을 막으려 들었다. 그는 그럴수록 더욱 힘을 내었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역량과 정치적 기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굴하지 않고 싸웠다. 그러나 그가 싸우면 싸울수록 조의 역습도 더욱 농도가 어졌다. 데이빗의 연설을 방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몰려온 작자 들의 야유나 소란은 아주 공공연한 것이었다. 그 방해가 웬만한 것이라면 그도 그것을 조종 하여 가끔 자기의 이익이 되도록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소란은 법을 무시하고 도를 넘 어서고 있었다. 전 중량급 권투선수였다가 맬모 방파제에서 술집 바텐더를 하고 있는 피트 배넌이라는 놈이 주동이 되거 있는 그들은 선거 연설 때마다 꼭 나타나 연설장을 싸움터로 만들곤했다. 선거 사무장 윌슨이 분노를 참지 못하여 경찰에 적절한 보호를 요청했지만 그 의 항의는 쌀쌀한 반응으로 거절되었다. "그건 우리가 할 일이 아니오." 로덤은 뻔뻔스레 말했다. "그 배넌이라는 작자는 우리구역 에 살고 있는 자가 아니니 손을 댈 수가 없어요. 당신네들도 그 선거유세를 보호해줄 얜물 을 구하는 것이 어떻겠소?" 그런식의 깨끗한 선거전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미묘한 방향으로 발전했다. 그 다음 주의 화요일 아침 위원회 사무실로 가는 도중에 데이빗은 램 가의 끝에 있는 벽 위에 흰 페인트 로 지저분하게 갈겨쓴 낙서를 발견했다. "펜윅에게 그와 마누라 이야기를 물어보라." 그는 대번에 얼굴이 파랗게 질려 벽 앞으로 한 발 다가섰다. 그리고 그것을 지워보려고 했다. 그 러나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너무나 엄청나게 일이 번지고 있었다. 그 낙서는 사람의 사람의 눈에 잘 뜨일 만한 벽이나 집 모퉁이, 선로의 대피선이 있는 곳까지 퍼져 있었다. 데 이빗은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겨우 누르면서 램 가를 지나 집으로 들어왔다. 윌슨고 ㅏ해 리 오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다 그 낙서를 보고 달려온 것이었다 오글의 얼 굴은 분격으로 실룩거리고 있었다. 이건 너무 지나쳐, 데이빗." 그는 신음하듯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놈에게 가서 항의를 하자." "그놈은 모른다고 꼬리를 뺄 거요. 그 인간은 우리가 찾아가서 울며불며 사정을 하기를 기 다리겠지." 데이빗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보복을 하는 겨야. 우리도 수단을 써야지. 그놈에 대해 나도 할 말이 있 어. 오늘 밤 스누크에서 자네를 위한 지지연설을 할 때 나도 가만 있지 않겠어." "안 됩니다. 해리 형, 나는 절대로 보복은 하지 않겠습니다." 데이빗은 머리를 내저으며 강경하게 말했다. 사실 그는 이같이 조직적이고 부당한 횡포에 직면 하면서도 노여움이나 증오감은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내면적 삶이 더욱 강화되 는 것을 느꼈다. 이 내면의 새로운 삶은 종교적인 것이라고 설명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그 보다는 인간 실존에서 나오는 어떤 초연한 면이 있었다. 그는 순수한 동기야말로 유일한 기 준이며 영혼의 진실한 표현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인생 목적을 이처럼 완전 하게 드러내 주는 일을 수행하는 데는 악의라든가 증오심 같은 것이 일어날 여지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해리가 돌연한 피습을 받았다는 것은 데이빗에겐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해리는 슬리스 케일ㅏ에 단단한 기반을 잡고 있는 유명 인사였으므로 그의 지원은 큰 도움을 주어왔던 것 이다. 그런 데다가 노동당에 반발하는 반대의 물결은 큰 도움을 주어왔던 것이다. 그런 데다 가 노동당에 반발하는 반대의 물결이 일기 시작하여 절정에 달했다. 경제계의 대공황이 일 어나리라는 유언 비어가 나돌아 사람들에게 공포감까지 안겨주었다. 점점 가치가 떨어지고 있는 지폐로 급료를 받은 노동자들이 하루라도 먼저 식료품을 사려고 날뛰는 격앙된 만화들 이 신문에 자주 보도되면서 여론은 절박한 이 대변동을 현재 경제 조직의 결함이 아니라 노 동당의 책임이라고 지탄했다. 노동당원들에게 너의 돈을 빼앗기지 말라는 구호가 공공연하 게 떠돌았다. 문제는 '돈'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돈'을 지켜야 한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돈 을 지키고 돈을 보관하자. 이 신성한 돈을, 돈...돈을! 데이빗은 이 모든 사태에 절망하면서도 마지막까지 힘을 다 쏟아부었다. 10월 26일에 그는 첫 번째 당선에 주효했던 방법을 다시 사용하여 소형 트럭을 타고 시내를 돌았다. 그는 요 기도 간단히 하면서 온종일 거리에서 연설을 했다. 10시에 나프타 등불 밑에서 한 회관 앞 연설을 마지막으로 끝낸 그는 램 골목 안의 집으로 돌아와, 녹초가 된 몸을 침대 위에 던졌 다. 무엇을 생각할 사이도 없이 그는 곧 잠이 들고 말았다. 그 다음날이 투표일이었다. 오전 중의 보고에서는 투표율이 높다고 했다. 데이빗은 오전 중엔 내내 집에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의식적으로 결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자기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의 표면 밑에서는 희망과 공포가 엇갈려 싸웠다. 슬리스케일은 언제나 노동당의 안전한 지반이었고 광부들의 요새이기도 했다. 광부들은 그가 자기네를 위하여 일했고, 자기네를 위하여 투쟁해왔다는 것 을 알고 있었다. 만일 그가 낙선을 하더라도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 분명 그들은 그가 자신들을 위해 일을 하고 투쟁할 기회를 다시 부여해줄 것이다. 그는 가울런도 과소평가하 지 않았다. 즉 텝튠 탄광의 소유주로서의 가울런의 지위가 갖는 유리한 점은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 조의 수단을 가리지 않던 선거운동이 틀림없이 광부들의 공고한 단결을 분열 시켰으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자기 자신의 명성에 의심과 불신이 던져졌다는 사실 을 알고 있었다. 조가 행한 온갖 허위 선전, 그 어느 것보다도 그에게 손상을 입힌 제니에 대한 증오스러운 빈정거림을 생각하면, 데이빗은 가슴이 졸아드는 기분이었다.그는 무덤 속에 누운 제니의 모습을 버낵같이 떠올렸다. 그 환상과 함께 연민과 그리움이 큰 파도처럼 그에게 덮쳐오는 것이었다. 그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 승리를 하고자 했다. 그것은 악이 아닌 선을 증명하련느 노력이기도 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가 혁명을 두둔한다고 지탄했다. 그 는 혁명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가 요구하느 혁명은 인간 마음 속의 혁신이다. 비열과 잔인 과 사리사욕에서 탈피하여 인간의 영혼이 달성할 수 있는 최고의 헌신과 숭고성을 추구하는 그런 혁명이다. 그러한 것이 없이는 어떠한 변화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6시경에 데이빗은 해리 오글을 위문하러 밖으로 나갔다. 카우펀 가를 천천히 올라가던 그 는 프리홀드 가를 내려오는 사람을 발견했다. 아서 배러스였다. 서로 가까워질 때까지 아서 는 그를 못 본 체하고 지나치려는 것처럼 똑바로 걸어 . 그러나 아서는 걸음을 멈추었다. "난 당신에게 표를 던졌습니다." 아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몹시 쉰 듯했다. 얼굴도 혈색이 나쁘고 표정도 이상하게 일그러져 보였다. 그에게서 술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고맙소, 아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막았다. "난 아까까지 갱내에서 일하고 있었죠. 그런데 갱 밖으로 나오자 갑작스레 투표생각이 나 더군요." 데이빗의 눈은 당혹과 연민의 정으로 가득 찼다. 그는 어색한 어조로 말했다. "난 당신의 지지를 기대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난 이제 아무것도 아닙니다. 빨간색도 파란색도 다른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신랄한 어조로 말했다. "어쨌든 그런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데이빗은 침묵 속에서 자기의 말이 아서의 마음을 아프게 했으리라 고 생각했다. 아서는 데이빗에게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무거운 눈을 치켜들어 보였다. "우습잖습니까?" 그가 말했다. "이렇게 끝장이 난다는 것이." 그는 말을 끝내자 아무런 표정도 없이 고개를 한번 끄덕하더니 몸을 돌려 가던길로 걸어가 버렸다. 데이빗은 계속 오글의 집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예기치 않았던 아서와의 만남이 새삼스럽게 감정을 끓어오르게 했다. 마음이 괴로웠다. 서로 별다른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 니었지만 그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아서가 가졌던 그 훌륭한 이 상들은 산산조각이 났고 그는 인생으로부터 물러난 인간, 소외된 인간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를 보면 그의 전체가 '나라는 인간은 괴로움만 당해왔다. 정말 오랬동안 괴로움 속에서 허 우적거리기만 했다. 그러나 이제 다시는 그런 괴로움에 빠지지 않겠다. 하고 말하는 듯했다. 전쟁은 끝나고 전화는 꺼졌다. 데이빗은 오글의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난 가지 모소하니까, 여기서 미리 축하을 함세, 그러나 유감인걸. 패배의 소식을 들었을 때의 가울건의 상판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말이야." 거리는 몹시 고요했고 반달이 밝게 비치고 있었다.공회당 가까이에 이르자 거리에 군중들 이 가득한 것을 보고 놀랐다. 그는 공회당 돌층계 쪽으로 약간 애를 먹으면서 군중을 뚫고 나아갔다. 겨우 안으로 들어가 로비에 있던 윌슨과 합류했다. 회의실 안에서는 개표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윌슨은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데이빗이 자기 옆에 오도록 자 리를 만들어주었다. 그는 피곤한 표정이었다. "반시간만 더 있으면 알게 될 거요." 로비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그때 밖에서 자동차의 틀랙슨 소리가 들려왔다. 곧 가울런 이 그의 지지자들을 대동하고 위세당당하게 들어왔다. 그의 선거 사무장인 스내그, 래미지, 커놀리, 보스톡,타인캐슬에서 온 그의 몇몇 친구들 그리고 마지막 시간을 더욱 빛내려는 의 미에선지 짐 모슨까지 함께 들이닥쳤다. 조는 러시아식의 모피로 깃을 단 외투를 입고 있었 다. 외투 단추가 풀어져 있어 그 안에 입고 있는 화려한 야회복이 보였다. 그는 자기 패거리 들과 막 저녁식사를 끝내고 오는 기이었다. 저녁식사는 호화판이었다. 식사 후에는 최고급의 브랜디가 나왔고 고급 시가까지 피우고 오는 길이었다. 그는 뽐내는 얼굴로 로비를 걸어나 와 자기 앞 군중들을 비집고 나오더니 회의실 밖 데이빗과 등을 지게 되는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를 지지하는 군중들이 대번에 그를 둘러싸 버렸다. 그리고 그들의 높은 웃음소 리와 이야기 소리가 그곳을 더욱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약 10분 후 러터 노인, 즉 의회 서기며 기록을 맡아보는 그가 손에 좋이를 쳐들고 방 밖으 로 나왔다. 즉시 소음이 뚝 끊어졌다. 러터는 자신이 아주 대단한 사람인 척하는 미소를 짓 고 있었다. 데이빗은 러터의 얼굴에 떠오른 그 미소를 보았을 때 이미 가슴이 쿵 하고 내려 앉은 소리를 들었다. 러터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면서 금테 안경 너머로 혼잡한 로비를 둘러 보고는 뭣인 척하는 태도로 입후보자의 이름을 불렀다. 조의 일행은 성급하게 러터를 뒤따라 이중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동시에 윌슨도 자 리에서 일어섰다. "갑시다." 그는 데이빗에게 말했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엔 불안이 깃들어 있었다. 데이빗은 일어나 군 중들과 섞인 채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질서도, 윗사람에 대한 대우도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긴장과 제멋대로의 흥분만이 넘쳤다. "여러분, 자, 여러분." 러터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입후보자들이 앞으로 나오시게 비켜 주십시오." 데이빗은 그 낯익은 쇠로 만들어진 계단을 올라가 위우너회 사무실을 지나 드디어 발코니 로 나갔다. 실내의 연기와 불빛에 피로했던 터라 싸늘한 밤공기가 퍽이나 고마웠다.그 아래, 공회당 앞의 광장은 어마어마한 군중들로 꽉 차 있었다. 창백한 반달이 넵튠 탄광의 반출탑 위에서 은빛 비늘 같은 빛을 바다 위로 던지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는 군중들로 부터는 서 로 예상하고 있는 것들을 주고받는 속삭임들이 잔잔한 물결처럼 흐르고 있었다. 발코니도 사람으로 가득 찼다. 데이빗은 떠밀려서 맨 구석에 서 있게 되었다. 역시 밀려서 가울런 옆에서 멀어진 래미지가 바로 그의 옆에 있었다.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 그의 얼굴은 데이빗을 정면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숱이 많은 잿빛 눈썹 밑에서 움푹 들어간 두 눈알이 흥분과 원한으로 번들거렸다. 데이빗이 패배하는 것을 꼭 보고야 말겠다는 일념이 그자의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 러터는 숨소리를 죽인 군중들을 향한 채, 한 손에 서류를 들고 발코니의 한복판에 서 있었 다. 전류가 흐르는 듯 짜릿한 죽음 같은 고요의 일순간이었다. 데이빗은 자기 형생에 이처럼 고통스럽고 이처럼 흥분되는 순간은 일찍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의 심장이 가슴속에서 튀 어나올 것처럼 사납게 뛰고 있었다. 이윽고 러터의 날카롭고도 높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조셉 가울런 8,852표, 데이빗 펜윅 7,490표." 뇌성 같은 환호성이 일어났다. 선두로 외치는 자는 바로 래미지였다."만세,만세!"래미지는 기쁨의 도가니 속에서 두 팡르 치켜들고 흔들면서 황소처럼 부르짖었다. 끝이 없는 듯한 만 세소리가 밤공기를 찢었다. 조의 지지자들은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축하의 인사와 환호로 그 는 짓눌려버릴 판국이었다. 데이빗은 차가운 난간을 꽉 움켜쥐고 자제할 힘을 잃지 않으려 고 안간힘을 썼다.패배, 패배, 패배! 그는 눈을 들어 미친 사람처럼 환호를 마구 터뜨리며 자기 쪽으로 몸을 굽혀오는 래미지를 보았다. "네놈은 끝장이야, 만사 끝장이다" "만사가 모두 끝난 것은 아니지." 데이빗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레 와 같은 만세소리 그리고 환호성, 조를 불러대 는 계속적인 목소리들, 조는 흥분된 군중의 격앙된 환호성에 취하여 난간 손잡이에 몸을 기 대고 있다가 발코니의 중앙으로 그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군중들 위에 탑처럼 높이 섰다. 달빛을 받아 시커멓게 보이는 육중한 몸은 갑자기 거인이 된 것처럼 더욱 커 보여 위협적이 기까지 했다. 창백한 얼굴의 군중들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 인간들은 이제 그의 발 아래 에 서 있는 어리석은 자들은 그의 밥이 될 것이다. 평화와 그리고 전쟁이 그의 요구에 응해 서 그를 이렇게 만들어준 것이다. 그에게는 돈이있다. 돈, 돈, 돈,...그리고 돈의 노예들아. 그 는 위선과 허위로 뭉쳐진 자신을 거리낌없이 드러내며 하늘쪽으로 두 팔을 높이 치켜 올리 고 드디어 입을 열었다. "친애하는 나의 친구 여러분..." 차가운 9월의 새벽 5시 날은 아직 밝지 않았고 아두운 바다로부터 불어닥치는 바람이 반 원의 하늘을 내달아 새벽 별들을 더욱 높이 반짝이도록 씻어주는 듯했다. 달동네의 광부들 마을은 아직 침묵으로 덮여 있었다. 그러나 그 침눅은 오래 갈 수없었다. 하나 브레이스의 집 창문에서 그 깊은 침묵과 어둠을 깨뜨려버리는 불빛이 빛났다. 그 불빛은 번쩍번쩍 흔들리는 듯 하더니 10분 후에 문이 열리 며 한나 노파가 집 밖으로 나왔다. 숄을 걸치고, 징이 박힌 장화에 추위를 막기 위해 갈색 기름종이로 안을 받친 페티코트를 여러 개 입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몹시 이상스러웠다. 남 자용 모자로 헝클어진 반백의 머리를 가리고는 빨간 플란넨 헝겊을 턱에서부터 귀까지 싸매 고 있었다. 한 손에는 긴 막대기 하나를 들고 있었다. 톰 콜더 영감이 늑막염으로 죽은 이 래, 한나는 달동네의 광부들이 새벽에 일하러 갈 때에 잠을 깨워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 래서 이 불경기 때에도 '부수입'을 가질 수 있으므로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탈장증 때문에 약간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잉커먼 가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거의 사람 같지도 않 은, 걸레뭉치 같은 모습의 그녀는 탄광의 새벽 교대반 광부들을 깨우기 위해 들고 있는 막 대기로 이집저집의 창문을 탁탁 두드리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23번지의 집은 창문을 두드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예날부터 지금까지 23번지의 집 사람들은 깨울 필요가 없었다. 한나는 떨리는 손으로 막대기를 들어올려 창문을 두드리면서 시배스터플 가 언덕길의 춥고 어두컴컴한 곳으로 사라져갔다. 23번지의 집 안에서는 마사가 불빛이 환한 부엌방에서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난롯불 은 이미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벽 쪽 오목한 곳에 놓였던 침대는 깨끗이 정리되었고 주전 자에서는 김이 펄펄 솟았고, 프라이팬에서는 소시지가 지글지글 익고있었다. 그녀는 식탁 위 에 청색 바둑 무늬의 상보를 재빠르레 깔고 음식 그릇을 올려놓았다. 그녀는 나이가 일흔 살인데 아직도 몸놀림이 가볍고 활발했다. 얼굴에는 결코 남에게 뒤지지 않는 다는 만족한 표정이 감돌고 있었다. 잉커먼 가의 낡은 집으로 돌아온 이래 그녀는 늘 이처럼 만족한 표 정을 하고 있었다. 이마에 음산한 주름을 모으고 있던 그 음울한 표정이 밝고 활기차게 바 뀐 것이다. 식탁위를 둘러보면서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는가를 확인하고 나서 그녀는 사발시계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 유명한 볼링 대회의 상품인 대리석 시계다. 그 시계는 5시 반을 가리키 고 있었다. 그녀는 털로 만들어진 슬리퍼를 신을 발을 가볍게 놀려 계단 세 개를 힘차게 올라가 2층 방을 향하여 소리를 질렀다. "데이빗! 5시 반이다. 데이빗." 그리고 한쪽 귀를 기울여 데이빗이 2층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기다렸다. 힘찬 발걸음 소리, 수돗물을 트는 소리 그리고 계속해서 몇 번이고 기침으 하느 소리까지도. 데이빗은 10분 후에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는 잠시 서서 난로에다 난로에다 찬 손을 쬐 고 나서는 식탁 앞에 앉았다. 그는 광부복을 입고 있었다. 마사는 금세음식을 날라왔다. 잘 구운 소시지, 집에서 만든 빵, 혀를 델 만큼 뜨거운 차였다. 데이빗이 식사하는 모습을 가만 히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차에다가 계핏가루를 좀 넣었다. 네 기침엔 그게 즉효야." "고맙습니다. 어머니." "너희 아버지도 그게 효험이 잇었던 게 생각난다. 내가 달여준 계피차가 효험이 있다고 네 아버지도 말했었지." "저도 생각나는군요,어머니." 그는 고개를 들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마사는 데이빗이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한는 듯했다. 데이빗은 어머니의 얼굴에 넘치고 있는 사랑에 당황하며 고갤르 돌렸다. 그는 이제 아무 가식도 없이 자기에 대한 사랑을 솔직히 보여주고 있는 어머니를 본 것이다. 감정을 감추려고 그는 식탁에 더욱 몸을 굽히고 뜨거운 차를 훌쩍이면서 마셨다. 그는 어머니가 왜 이처럼 애정에 찬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인지 물론 잘 알고 있었다. 자기가 드디어 탄광으로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다. 지난 10년 동안 , 공부를 하고 교사 노릇을 하던 때나 노동연맹 시 절, 아니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에도 어머니는 그에 대하여 마음을 닫고 있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넵튠 탄광으로 돌아온 지금, 어머니는 자기를 아버지를 계승한 진정한 아들로서, 그 니까 비로소 한 인간으로서 인정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 그가 탄광에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허세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무엇 이든지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직장을 구해야 했 고 그것도 빨리 구해야 했다. 그런데 취직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는 사실 놀랄 정도였다. 연맹 사무실에도 자리가 없었다. 운수노동조합의 반대로 그곳에서 일할 수가 없게 되었고 교사직도 학위를 따지못했기 때문에 그 길이 완전히 막혀 버렸다. 그는 하는 수 없이 갱으 로 되돌아와야 했다. 조감독실에서 일하는 아서 앞에 실직한 광부들 틈에 끼여 섰다가 다시 지하로 들어가게 해줄 것을 부탁했다. 불행은 그에게만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고난 속에서 직업ㅈ을 바꾸게 된 것은 유독 그에게만 한한 것이아니었다. 선거전에서의 노동당의 궤멸은 의원직을 빼앗긴 많은 입후보자들을 절망적인 처지로 몰아넣었다. 롤스톤 의원은 리 버풀의 선박소개 사무소에서 서기 노릇을 하게 되었고 본드 의원은 리즈에 있는 어느 사진 관의 조수로 취직했다. 데이비스, 호남자인 늙은 잭 데이비스 의원은 론다 극장에서 피아노 연주자가 되었다. 당을 배반한 자들과는 그 얼마나 처지가 다른가! 그는 더전, 차머즈, 베빙 튼 등 당을 배신한 몇몇 국회의원들을 생각하고 침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거국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노동당 신조의 바로 심장부를 도려내는 정책에 순순히 서명을 한 것이다. 특히 베빙튼은 모든 신문에 특종으로 사진까지 곁들여 실렸고, 지난주에는 모든 방송국에서 그의 연설이 전파에 실리기까지 했다. 그것은 진부한 언어들을 구사하여 대외 강경론을 조 심스럽게 펴나가는 위선에 찬 연설이었으나. 위기에 빠진 국가를 구제하려는 자로서 대환영 을 받고 있는 것이다. 데이빗은 의자를 뒤로 밀치고 일어나서 가스 레인지 위쪽의 행주걸이에 걸어둔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무거운 신발끈을 매고는 돌바닥위를 몇번 굴러보았다. 그동안에 마시는 그의 도시락을 기름종이로 깨끗이 싸고 물통에는 차를 가득 채워 단단히 마개를 막아놓았다. 지 금은 선 채로 커다란 빨간 사과를 스커트에다 대고 반질반질 윤이 날 때까지 문지르고 있는 참이었다. 그러다가 그것도 다른 것과 함께 도시락 통에다 넣고 나서그녀는 빙긋 웃었다. "넌, 옛날부터 사과라면 정신이 없었지. 제이빗. 어제 판매조합에 갔을 때 그 생각이 나서 샀단다." "맞아요, 어머니." 그도 역시 마사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녀의 애정이 넘치나  밝은 얼굴이 감탄스러우면서 도 우습기도 했다. "그때엔느 실컷 먹을 수가 없었죠." 약간 꾸짖은 듯이 그녀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러고 나서 말했다. "오늘 밤에 샘을 데리고 오는 것 잊지 말아라. 아침에 오얏케 ,를 구워놓을 작정이다." "그렇지만 어머니. 끼니 때마다 샘을 몰래 데리고 오면 애니의 마음이 어떻겠어요?" 데이빗의 말에 그녀의 눈길이 밑으로 떨어졌다. 그녀의 얼굴엔 이제 원한 같은 것이 없는 대신 곤혹의 빛이 떠올랐다. "정말 그렇긴 하다만 애니가 그러하다면 그 애도 오면 되잖겠니? 내 손자샘니 탄광에서 처 음으로 일을 하게 된 날인데. 오얏 케이크를 만들어주지 않을 수가 있겠니?" 그녀는 일부러 근엄한 듯한 태도를 지어 부드러운 감정을 감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굴 덧붙여 말을 했다. " 알겠니? 오늘은 애니도 데리고 오도록 해라." "알았습니다. 어머니." 그는 문 쪽으로 가면서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년느 문가지 따라나왔다. 자기 손으로 문을 열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녀의 습관처럼 되어버렸다. 데이빗에 대한 애정이 하루 하루 더 뚜거워져 그녀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아직도 밖은 어둡고 바람이 찼다. 그녀는 아들의 다녀오겠다는 마지막 인사에 천천히 머리를 끄덕여주고는 한 손을 입술에 대고 서서 아드이 잉커먼 가를 따라 내려가느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눈에 안 보일 때에야 비로소 그녀는 문을 닫고 부엌으로 들 어왔다. 아직 너무 이르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녀는 케이크 재료 밀가루와 마른 오얏을 아무도 알 수 없는 깊은 기쁨을 느끼면서 조리대위에 꺼내놓기 시작했다. 마음은 더욱 사랑 을 부풀었다. 그녀는 그러한 자기의 마음, 즉 그 행복을 감추려 했지만 그럴수록 행복한 표 정은 더욱 드러나는 것이었다. 달동네를 따라 데이빗은 걸어갔다. 이른 새벽의 얼어붙은 땅을 울리는 다른 사람들의 발걸 음 사이에서 그의 발걸음 소리도 울려왔다. 희미한 그림자들이 모두 덩어리가 되어 그와 함 께 움직이고 있었다. 서로 친근한 인사가 오가고 있었다. 어두워도 다 알아볼 수 있는 동료 들인 것이다. "어,네드." "톰." "어, 데이빗." 그러나 대개는 침묵이었다. 바람을 덜 맞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가는 그들에게서 하얀 입김이 차가운 공기 속에 솟아나오고, 여기저기 담배 의 빨간불빛이 별빛처럼 어른거렸다. 새벽의 미명을 밝고 가는 인간들의 행진인 것이다. 모 두 기운차 보였다. 넵튠 탄광으로 돌아온 이래 데이빗은 이 순간이면 언제나 짜릿학 ㅔ느끼는 무엇이 있었다. 싸움터에서 선봉이 되는 것은 아마 실패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자기는 이 광부들과 함께 전진해가고 있는 것이다. 자기는 자기 자신이나 이사람들을 배신하지 않았다. 이 사람들의 운명은 여전히 자기의 운명과 결속되어 있고, 이 사람들의 미래는 자기의 미래와 함께 연결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은 언제나 그에게 더욱 용기를 주었다. 아마도 언젠가는 새로 운 자유를 향하여 이렇게 터벅터벅 걸어가는 이 무리들을 위해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는 머리를 쳐들었다, 방파제 가의 맞은편에서 길을 건너 그는 어떤 집의 문을 노크했다. 그러고는 대답도 기다 리지 않고 문을 왈칵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이 집의 부엌방도 역시 불빛이 가득했다. 그리고 마지막 신발끈을 다 맨 샘이 방 한볼판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서 있었다. 애니는 화덕 그 늘에서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염려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사간을 꼭 맞추었구나, 샘." 데이빗이 경쾌하게 소리쳤다. "혹시 너를 침대에서 끌어내야 하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는데." 샘은 이빨을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흥분으로 열기를 띠고 있는 푸른 눈이 잠시 감겼다가 활짝 열렸다. 그는 열네 살이라는 나이에 비해서는 그다지 큰편은 아니었다. 탄광 지하로 처 음으로 일하러 간다는 설레임과 흥분이 온몸어디에든지 꽉 차 보였다. "저 애는 일하러 간다는 것 때문에 지난밤엔 거의 한잠도 자지 않았어요." 애니가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나까지 잠을 자지 못하게 성화를 부렸답니다." "샘, 아주 근사한 광부로 보이는데, 넌 나와 함께 통기구계에서 일할 거야. 보통 행운이 아 니지. 그렇지요, 애니?" "이 애를 잘 돌봐주세요. 데이빗. 정말 부탁입니다." "참, 엄마도, 난 어린애가 아녜요." "염려 말아요. 내가 잘 감시할 테니까." 데이빗은 안심하라는 듯 빙긋 웃어 보였다. 애니의 늘 참백하던 얼굴이 지금은 난로의 열 기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여전히 아름다웠다. 여전히 아름다웠다. 블라우스의 단추 하나 가 열려져 그녀의 부끄럽고 곧은 목덜미가 드러나 있었다. 그녀에게는 힘차고 굳세면서도 부드러운 데가 있었다, 셈을 처음으로 내보내는 데서 오는 불안감을 감추고 있어 그것이 더 욱 그녀를 젊고 연약해 보이게 했다. 갑자기 그의 가슴은 그녀에 대한 애정으로 흔들렸다. 얼마나 용감한 여인인가. 그리고 얼마나 정직하고 희생적인 여인인가! 그녀는 정말 아름다 운 사람이다. "그너데 애니. 어머니께서 애니와 샘을 초대하신답니다. 오늘 밤 집으로 오세요. 아마 대단 한 진수성찬이 나올 모양입니다." 데이빗이 별다른 말이 아니라는 듯이 나지막하게 말했으나 방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정말 저를 초대하셨어요." 한참 후에 그녀가 물었다. 그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녀의 얼굴에서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이 사라졌다. 그녀는 눈길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 는 그녀의 표정에서 드디어 어머니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가겠어요, 데이빗. 꼭 가겠어요." 이미 문 쪽으로 간 샘은 나가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그는 어서 나가자는 즛이 문의 손잡이 를 비틀고 있었다. 데이빗은 애니에게 급히 인사를 던지고는 샘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나란히 탄광 쪽으로 걸어갔다. 데이빗은 처음엔 아무 말이 없었다. 자기 자신의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방금 집에서 그들이 샘에 관해서 이것저것 이야기 를 하고 있을 땜 애니의 눈에 떠올랐던 표정이 이상스럽게도 그의 마음을 움지이게 했던 것 이다. 용기와 희망, 그렇다 용기와 희망이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반출탑 위로 열의에 찬, 그러면서도 좀 두려움을 느끼는 듯한 시선을 보내며 그가 대답했 다. "그리고 돌아온 땐 샘, 웹트 할머니 가게에서 파이하고 레모네이드를 한턱내기로 하지. 이 건 틀림없는 약속이다." "네에,좋아요." 그의 눈은 여전히 반출탑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약간 급한 어조 로 말했다. "갱 아래로 내려가면 굉장히 캄캄하겠지요? 아주 캄캄할 것 같은데 정말 그런가요?" 데이빗은 용기를 북돋아주어야 한다는 것을 느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꼭 그런 것도 아니야. 하지만 어쨋든 그런 것엔 곧 익숙해진단다." 두사람은 탄광 구내를 건너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승강기 쪽을 향하여 돌층계를 올라갔다. 데이빗은 샘을 꼭 붙들고 군중 사이를 뚫고 들어가 커다란 쇠냄비 같은 승강기 안으로 들어 섰다. 샘은 이제는 데이빗에게 딱 달라붙어서는 데이빗의 손을 더듬어 꼭 잡는 것이었다. "빨리 내려가나요?" 그는 목구멍에 무엇이 걸린 듯한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그다진 빠르진 않아." 데이빗이 소곤거려 주었다. "지금 숨을 크게 들이마셔 봐. 곧 내려가기 시작하면 아주 신난 단다." 침묵 속에서 철책 문이 쾅하고 닫혔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먼 곳에서 울려 오는 벨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광부들은 묵묵히 승강기 속에 한덩어리가 되어 서 있었다. 그 들 머리 위에는 탄광의 반출탑이 높이 소상 시내와 항구와 바다를 위압하고 있었고, 발 밑 으로는 무덤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지하의 암흑이 가로놓여 있었다. 승강기가 떨어져 내려 갔다. 그리고 그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가장 멀리서 반짝이는 별들을 향하여 솟는 하나의 커다란 한숨소리처럼 그 암흑에서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