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내려다본다. 지은이 : A.J 크로닌 출판사 : 성바오로 출판사 1 마사가 눈을 떴을 때 밖은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이었다. 밖은 지 독하게 추웠다. 북해를 가로질러 불어오는 바람은 모든 것을 얼려버릴 듯이 갈 라진 벽 틈으로 매섭게 밀려들어왔다. 방이 두 개 딸린 이 집은 오래 전에 땅이 내려앉는 바람에 여기저기 벽에 틈이 나 있었다. 멀리서 파도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올 뿐 아직 모든 것이 잠들어 있었다. 마사는 부엌 침대에 죽은 듯이 조용히 누워 로버트의 몸에 닿지 않도록 몸을 꼿꼿이 하고 있었다. 어김없이 밝아오는 새로운 아침, 그녀는 남편 때문에 느껴 야 하는 괴로움을 가까스로 억누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그녀는 힘을 내어 일어났다. 돌바닥에 맨발을 내려 딛자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이 전해져 왔다. 그녀는 마 흔이 채 안 된 강인한 여성이 지닌 활기넘치는 동작으로 재빨리 옷을 주워 입었 다. 서둘러 옷을 입은 탓에 다 입고 나자 숨이 가빴다. 이젠 배고프다는 생각조 차 들지 않았다. 미칠 듯 배가 고픈 느낌도 며칠전 부터 없어지고 대신에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죽을 것같이 아팠다. 설거지 통 쪽으로 몸을 무겁게 움직여 가 서 수도 꼭지를 틀었다. 수도 파이프가 얼어붙어 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순간 멍해져 못이 박힌 손으로 불러오른 아랫배를 지긋이 누른 채 서 있었다. 그러다가 아직 새벽 기운이 가시지 않은 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바로 눈 밑에 광부들의 주택이 줄줄이 열을 짓고 있었다. 그 오른쪽으로 슬리스케일 시가 보이고, 한줄기 차가운 빛과 훨씬 더 차가울 듯한 바다가 보였다. 왼쪽으로 는 넵튠 17호 탄광 반출탑의 머리 부분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창백한 동녘 하늘을 등지고 선 교수대처럼 도시와 항만과 바다를 위압하는 모습 으로 서 있었다. 마사의 이마에는 주름살이 깊이 팼다. 벌써 석달째 파업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녀는 창문가에 서서 비참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몸을 돌려 불을 지피 기 시작했다. 불을 붙이는 건 힘이 들었다. 땔감은 고작 어제 샘이 주워온 젖은 뗏목 조각과 휴이가 탄광 끝에서 가지고 온 분탄 뿐이었다. 마사는 늘 질 좋은 석탄을 써왔고 진짜 석탄선에서 때는 석탄불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놈의 분탄가루로 불을 피워야 한다는 게 여간 고역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마 침내 불을 피웠다. 뒷문으로 나가 빗물통 속에 새로 언 얼음을 마치 화가난 사 람처럼 주먹으로 때려 깨뜨려서는 주전자에 채워가지고 들어와 불위에 앉았다. 주전자의 얼음을 데우는 데는 시간이 오래 결렸다. 물이 끓자 그녀는 컵에다 물을 따라 불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컵을 감싸쥐고 천천히 한 모금씩 마셨다. 끓는 물이 그녀를 안온하게 해서 납덩이 같던 몸이 나른해왔 다. 물은 차처럼 맛있지는 않았다. 아니, 아니 전혀 차맛과는 달랐다. 그러나 맛 을 모르면서도 맛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듯했다. 생나무에 붙어 타오르는 불 꽃은, 그녀가 불쏘시개로 찢어 쓰다가 점토로 만든 난롯가 탁자위에 올려놓은, 헌 신문지 조각을 환히 비추었다. "케어 하디 씨는 하원에서 북부지방 주민들의 빈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 하므로, 교육전문가들이 빈손한 가정의 아동 급식을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할 방 법을 제기할 것인지 여부를 행정부에 질의 했다. 이에 행정부는 빈곤 아동의 급 식을 위한 권한을 전문가들에게 부여할 의도가 없음을 밝혔다." 여전히 뜨거운 물을 홀짝거리면서 그녀는 무심히 오래된 신문기사를 읽어내려 갔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여윈 그녀의 얼굴엔 아무런 반응도 일지 않았다. 관심 도 분노의 빛도 없었다. 마치 죽음처럼 헤아릴 수 없는 무표정이었다. 급작스레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 그가 깨었던 것이다. 옆으로 누워 손 바닥으로 턱을 괴고 여느 때처럼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번에 그에 대한 분 노들이 파도처럼 마음속에 밀어닥쳤다. 그에 대한 온갖 것, 하나도 빠뜨리지 않 고 모든 것들이. 바로 그때 그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자신이 두려워 기 침을 그때까지 참고 있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아주 고통스러운 기침 은 아니었지만 습관처럼 목구멍 속에서 뱉어내는 밭은기침. 그 기침은 로버트에 게서 떼어놓을 수 없는 그 자신의 모습과도 같았다. 기침을 하면 그의 입안엔 가래가 가득 찼다. 그는 팔꿈치로 몸을 일으켜 티트-비츠 지방 신문을 네모나게 오려 가래를 뱉었다. 마사가 감자를 깎는 헌 칼로 그는 그 신문지를 조심스럽게 잘라두었다. 그는 신문지 잘라놓은 것들을 많이 보관하고 있었고, 절대로 신문지 가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그는 자그마하고 네모진 신문지 조각에다 가 래를 뱉어 그 결과를 자세히 살핀 다음, 잘 싸서 태워버렸다... 일종의 낙천주의 적 기분을 가지고 그것을 태워버리는 것이었다. 밤에 잠자리에 들었을 때에는 침대 모서리에다 조그맣게 돌돌 뭉쳐 떨어뜨렸다가 일어나면 주워서 태워버렸 다. 마사는 로버트와 그 분신 같은 기침조타 갑자기 미워졌으나, 일어서서 컵에다 뜨거운 물을 따라 그에게 주었다. 그는 그것을 받았다. 날이 좀더 훤해 졌지만 시간은 알 수 없었다. 탁상시계가 제일 먼저 전당포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 시계는 그녀의 아버지가 볼링경기에서 상으로 탄 사원 모양의 대리석 시계였다. -아버지는 훌륭한 사나이였다. 더욱이 볼링경기에서는 누구도 그를 당해낼 수 없었다.!- 그녀는 일곱 시쯤 되었다고 생각이 들자 데이 빗이 양말을 목도리 대신에 목에 감고, 이젠 자기 것이 되어버린 남자용 모자를 눌러 쓴 후 다 낡은 흑색 외투를 걸쳐 입었다. 그 외투는 그래도 뭔가 멋스러운 데가 있었다. 그녀는 결코 달랑 숄만 걸치고 다니는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누가 뭐라해도 그녀는 품위가 있는 고상한 여자였고 또 그러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평생 동안 품위를 잃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남편을 쳐다보지도 않고 아무 말 없이 앞문으로 나왔다. 바람에 몸을 움츠리며 그녀는 카우펀 가의 시내로 나가는 가파를 비탈길을 내려갔다. 바깥은 더 추웠다 지독한 추위였다. 산꼭대기 달동네엔 사람 그림자 하나 없이 호젓했 다. 그녀는 '어서 오십쇼' 주점을 지나갔다. 미드리그도 지나갔다. 지난번 토론모 임 때 뱉어놓은 침 자국이 지저분하게 얼어붙은 채 있는 썰렁한 회관 계단을 지 나쳤다. 벽에는 백묵으로 '3시에 총회' 라고 씌어 있었다. 탄량검사원 찰리 가울 런이 그렇게 써놓은 것이었다. 그 몸뚱이만 큰 허풍쟁이 술고래가. 그녀는 몸을 떨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더 이상 빨리 걸을 수가 없었다. 뱃속의 아기가 살아 있음을 알리려는 듯 꼬무락거리며 무겁게 그녀를 잡아당기 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이럴 때 이 꼬락서니람!' 다 자란 아들이 셋이나 되고 막내동이 데이빗이 열다섯 살을 바라보는데 그만 잘못 걸려든 것이다. 그 녀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새로운 분노가 다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역시 이것도 그 인간 때문이다. 술에 취해 돌아와선 말도 않고 고집스레 그녀를 제멋대로 한 결과다. 시내에 있는 대부분의 상점들이 닫혀 있었다. 많은 상점들이 문조차 열려고 하지 않았다. 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상점까지도 문을 열지 않았다. 그 상점에서 는 외상거래를 너무 무리하게 했기 때문에 그 한도액이 바닥 나 있는 형편이었 다. 그러나 오늘은 그것이 아무 상관 없었다. 그녀의 지갑 속엔 기적처럼 붉은 빛이 나는 2페니 동전 한 닢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한 돈이면 왠만한 것 은 살 수 있는 것이다. 마스터즈 상점도 역시 문을 열지 않았다. 이틀 전부터 문 을 닫아버렸는데 상점은 저당물로 꽉 차 있는 형편이었다.(물론 그 저당물 속에 는 그녀의 물건도 있다.) 머치슨의 가게도 돕스의 가게도, 또 베이트의 가게도 다 문을 열지 않았다. 다들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화를 입지 않을까 해서 모두 자라목처럼 움츠리고 눈치만 보는 형편이었다. 그녀는 길모퉁이를 돌아 램 가로 들어서 래미지의 가게 맞은편에서 길을 건너 푸주간 쪽을 향하여, 스커트 골목길을 걸어 내려갔다. 푸줏간이 가까워지자 그녀 의 얼굴이 밝아졌다. 흡이 셔츠바람에 가죽 앞치마를 두른 채 콘크리트 마당을 쓸고 있었다. "오늘 아침엔 뭣이 좀 있수, 흡?" 그녀는 조용히 말하고 나서 그가 쳐다볼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그녀 가 온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고개도 들지 않았다. 그는 빗자루를 놓더니 솔에 물을 묻혀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뻘건 그의 팔뚝에서 김이 무럭무럭 솟았다. 그 녀는 조용히 더 기다렸다. 흡은 그녀를 냉대하지 않는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안다. "조금 남겨둔 게 없수, 흡?" 무리하게 많은 것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아무도 사가지 않을, 부스러기로 내 던져버리는 허파 조각이나 내장 따위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윽고 그는 닦는 것을 멈추었지만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머리를 흔들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없다우... 어젯밤 소를 잡기니 했는데 이번엔 래미지가 한 조 각도 남기지 않고 몽땅 다 싣고 가버렸다우. 내가 고기 부스러기들을 사람들에 게 준다는 걸 들은 모양인지... 얼마나 사납게 굴던지 잘못했다간 내 대가리까지 잘라가 버릴 뻔했다니까!" 그녀는 실망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밝아졌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흡은 다 시 솔로 바닥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곳을 빠져나와 처음에는 천천히 걷더니 갑자기 걸음이 빨라졌다. 이번에는 부두 쪽이었다. 그러나 바닷바람에 날 리는 외투자락을 여며 잡던 그녀의 얼굴에는 더 깊은 실망감이 가득 찼다. 고깃 배에라도 사정을 해서 청어 한 마리라도 얻을까 했는데, 날씨가 나빠서인지 뭉 툭한 방파제 뒤에는 배들이 굵다란 밧줄에 묶여 있었고 어망은 손도 대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그녀는 눈을 들어 지저분하게 거품을 내뿜는 바다 쪽을 바라보 았다. 배라고는 한척도 문데 띄지 않았다. 마사는 천천히 다시 걷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자갈길 위로 는 마차들이 덜커덕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베들 가에 있는 학교에서 근무하는 하크니스가 지나갔다. 키가 작은 그는 뾰족한 턱수염에 금테 안경을 끼고 푹신 한 외투를 입고 있었다. 어망 공장의 여공들이 급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 녀를 보자 하나같이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물론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 서가 아니다. 다만 그의 행색만 보아도 달동네, 즉 대단한 소란을 피워 이 석달 동안 이곳에 근심의 그림자를 드리우게 하는 그 동네에서 온 사람임을 안 것이 다. 산등성이를 올라가기 시작하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티즈데일 빵집 밖에는 마 차 한 대가 서서 배달할 빵을 싣고 있었다. 이 집의 아들인 댄 티즈데일이 한쪽 팔에 막 구워낸 빵이 가득 든 큰 광주리를 안고 나와 마차에 올려놓았다. 빵에 서는 뜨거운 김과 함께 구수한 냄새가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마사는 자기도 모 르게 마차 앞에 멈춰 섰다. 그녀의 입 안에는 군침이 참을 수 없이 가득 고이고 어서 이곳을 지나가자는 생각과는 달리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댄이 두려운 눈빛으로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재빨리 빵덩어리 하나를 집어 그녀 의 옆구리에 찔러넣어 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카우펀 로를 계속 올라가 시 배스터플 가 안으로 들어서는 그녀의 눈앞이 침침해졌다. 눈물이 솟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전부터 댄을 귀여워하고 있었다. 그는 반나절만 넵튠 탄광에 서 일하고 있었으나 파업이 일어나고 부터는 아버지를 도와 빵가게에서 일하고 있는 좋은 아이다. 막내아들 데이빗과도 알고 지내는 사이인 듯했다. 언덕길을 다 올라온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자기 집 문에 손을 얹었다. "킨치네의 엘리스가 충혈병에 걸렸대." 이웃집의 한나 브레이스가 집안으로 막 들어가려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마 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주일 내내 달동네 아이들은 계속해서 폐렴으로 쓰러 졌다. "나중에 들르겠다고 말해줘, 킨치부인에게." 그녀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식구들은 모두 일어나 있었다. 식구라야 네 사람, 남편 로버트와 세 아들이 난롯가에 둘러앉아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녀의 시선은 큰아들 샘에세 맨 먼저 갔다. 샘은 엄마를 보며 늘 하던대로 빙그레 웃 어 보였다. 그럴때면 튀어나온 이마 때문에 움푹 들어가 보이는 푸른 눈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된다. 그는 이제 겨우 열아홉 살이지만 넵튠 탄광에서는 알아주는 광부고, 엄마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다. "자, 보라구." 샘이 데이빗에게 눈을 찌긋해 보였다. "우리 어머니께서 뭘 가져오셨는지..." 데이빗은 구석 자리에서 얌전하게 빙긋 웃었다. 몸이 가냘프고 얼굴빛이 창백 해 보이나 어딘가 강직한 느낌을 주는 소년이다. 데이빗이 난로 위로 몸을 굽히 자 몹시 여윈 어깨뼈가 쑥 앞으로 튀어나와 애처로운 느낌을 주었지만 크고 검 은 그의 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다. 열네 살인 그도 석탄을 운반하는 말몰이꾼 으로 매일 9시간씩 지하 탄층에서 땅 위까지 말을 몰아야 하는 힘든 일을 해내 고 있다. "내 계획을 아무래도 바꿔야겠다. 난 지금 이사 직전의 주인공역을 해야 하는 연극을 준비 중이었거든." 어떤 곤경에 처해도 유머를 잃지 않는 샘은 싱글거리며 말을 이었다. "2주일 동안에 80킬로의 몸무게를 반으로 싹 줄여버리는 '뚱보 부인의 미용법' 을 목하 사용 중이어서 큰 효과를 거우고 있는데, 사랑하는 어머니께서 저렇게 큰 빵덩이를 가지고 오셨으니 난 정말 재수가 없는 놈이라니까! 안그러니, 휴 이?" 마사의 검은 눈썹은 찌푸린 채였지만 입가에는 엷은 웃음기가 번지고 있었다. " 넌 참 어쩔 수 없구나, 아직도 우스갯소리를 할 기운이 있다니... 자, 어서들 가까이 와요." 그녀가 빵을 썰기 시작하자 식구들은 모두 흐뭇한 얼굴로 그녀의 모습을 바라 보았다. 휴이까지도 자기의 낡은 축구화에 헝겊 조각을 대고 깁던 손을 멈추고 쳐다보았다. 휴이를 축구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휴이는 대단한 축구광이었다. 열일곱 살인 그는 넵튠 탄광의 파라다이스 갱구에서 석탄 운반차 를 밀지 않을 때는 슬리스케일 지방 축구팀의 센터 포드로 뛰면서 세상 일을 모 조리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휴이는 샘의 농담을 들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 았다. 휴이는 거의 말이 없었다. 아버지를 닮은 것 같은데 조금 더한 듯싶었다. 그런 휴이도 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샘이 벌떡 일어나더니 접시를 아버지 앞부터 놓기 시작했다. 로버트는 빵 조 각을 집어 들다가 마사를 바라보았다. "이거 극빈자 급식소에서 가지고 온 거요? 그렇다면 나는 안 먹겠소." 마사가 그를 빤히 바라다보았다. 그가 아까보다는 좀 낮은 목소리로 다시 말 했다. "이 빵을 극빈자 급식소에서 가져온 거냐고 묻고 있지 않소?" 그녀는 남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자기네의 저금마저도 파업하는 데에 밀 어 넣어 버린 그의 정신 나간 짓을 다시 떠올렸다. 그녀는 목소리를 억지로 밀 어내듯 힘들게 말했다. "아니니까 걱정말고 먹기나 해요." 샘이 큰소리로 말참견을 했다. "도대체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이에요? 지금 이판에 와서..." 그는 여전히 밝은 얼굴로 시선을 돌리다가 아버지의 눈과 부딪쳤다. "아버지, 제발 그런 얼굴 좀 하지 마세요. 이제 일이 잘 풀리겠죠... 난 누구를 탓하고 싶지 않아요. 다만 일을 하고 싶을 뿐이죠. 이렇게 빈둥빈둥 앉아서 논다 는 것이 정말 미치겠어요. 더군다나 엄마가 빵을 얻어오기를 기다리면서 말예 요." 그는 데이빗에게로 몸을 돌렸다. "자, 백작님. 이 발수건처럼 커다란 빵을 들어보시지... 제발 가만히 앉아있지만 말고 빨리 좀 먹었으면 좋겠어. 안 먹을 거라면 다 던져버리던지..." "제발 조용히 좀 해라. 식탁에서 그렇게 떠들지 말라고 몇번이나 이야기 해야 알아듣겠니?" 마사는 화가 난 것처럼 말했지만 그에게 가장 큰 빵 조각을 집어주었다. 그리 고 다른 식구들에게도 모두 짚어주고 자기는 가장 작은 것을 집어 들었다. 2 오전 10시. 데이빗은 모자를 들고 살짝 집을 빠져나와 시내로 가는 잉커먼의 울퉁불퉁한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슬리스케일에 있는 광부들의 집은 크림 전쟁 의 영광된 승리를 기억케 해주는 굉장한 이름들이 붙여져 있었다. 데이빗이 살 고 있는 맨 꼭대기 집들은 잉커만이라 불렸고, 그 다음줄의 집들이 앨머, 그 아 래가 시배스터플, 조가 살고 있는 맨 아래쪽이 밸러클라버다. 데이빗은 지금 조 의 집으로 가고 있었다. 조가 외출하려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바람이 잠들자 뜻밖이다. 싶게 해가 빛났다. 너무 오래간만의 햇빛이어서 눈이 부셨다. 겨울이면 며칠씩이고 진짜 해를 못 볼때가 많아 이렇게 환한 햇빛이 오 히려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아침에 갱 속으로 들어갈 때는 아직 날이 밝지 않았고 저녁에 갱 속에서 나올 떼에는 벌써 날이 저물어 사방은 새카만 어둠뿐 인 것이다. 오늘은 춥긴 하지만 오랜만에 날씨가 좋아 신기하게도 그의 몸에 밝은 빛을 퍼부어주니, 아버지가 윈즈백 강에 낚시질하러 갈 때 따라갔던 행복했던 어린시 절이 떠올랐다. 어둠과 갱 속의 시커먼 탄가루와는 너무나 다른 푸른 개암나무 숲, 맑은 물 위의 잔물결.... "이것 봐, 아빠. 벌써 꽃이 피었어!" 일찍이 꽃 피는 프리뮬러가 눈에 띄었을 때 그는 흥분해서 아버지의 팔을 흔 들며 외치지 않았던가! 그는 밸러크라버 거리 모퉁이를 돌았다. 다른 거리들과 마찬가지로 이 거리도 500미터도 안 될 정도로 짧았다. 그리고 그 거리 위로는 시커먼 석탄가루에 찌 들은 더러운 벽돌집들이 뻗어 있었다. 최근에 갈라진 벽 틈을 때우느라고 하얀 색깔의 페인트를 곳곳에 칠해놓아 더 흉해 보였다. 네모진 굴뚝들로 온전한 것 이 없이 여기저기 부서지고 울퉁불퉁한 것이 마치 술주정뱅이가 겨우 서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고, 긴 지붕의 선은 땅이 내려앉은 까닭에 파도치는 물결처럼 구불구불해 보였다. 마당은 썩은 철길의 침목과 부러진 갱목, 녹슨 함석판 따위 로 둘러친 담으로 막혀 있고, 그 뒤에는 광석 찌꺼기와 탄광에서 끌려나온 페물 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또 마당마다 변소로 사용하는 쇠통들이 긴 지붕들 의 행렬 사이사이마다 마치 보초막 처럼 서 있었다. 그 행렬 끝에는 앙상한 철 길이 있고 그 옆 빈 터에는 각 집에서 세워놓은 헛간들이 뒤죽박죽으로 서 있었 다. 넵튠17호 갱은 바로 그 한복판에 있었다. 뒤에 있는 언덕모양의 우중충한 스 누크 산은 온통 황무지로, 100년 전의 옛 넵튠에서 거대한 채굴이 이루어졌던 자리가 이제는 흉하게 입을 벌린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다 탄광과 연관이 있는 것 뿐이었다. 멀리 보이는 평지의 배경도 온통 탄광 굴 뚝과 갱에서 나온 석탄더미, 탄광의 반출탑 따위로 가득 차 있었다. 황량하고 더 러움뿐인 풍경속에서 푸른색과 진분홍색으로 펄럭이는 선명한 색채의 빨래들은 이 더러움을 더욱 두드러지게 해줄 뿐이었다. 아름다움이나 신선함이란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데이빗은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고 또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더 욱더 싫어지기만 했다. 등과 등을 맞붙이고 있는 초라한 집들의 긴 행렬 위에는 허탈과 패배의 공기가 무겁게 짖누르고 있었다. 그 사이로 슬로거 리밍, 키커 하 우, 봅 오글 등이 축 늘어진 모습으로 벽을 등지고 쭈그리고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 광부들은 틈만 나면 노름판 부터 벌이는 유명한 도박꾼들이 지만 지 금은 별수 없이 저 모양들인 것이었다. 파라다이스 갱구에서 첫 교대팀인 봅 오 글이 데이빗을 보자 고개를 끄덕여 아는 척을 했다. 그는 휘핏종 강아지의 좁은 이마를 쓰다듬어 주면서 심심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그 옆에서 슬로거 리밍이 입을 열었다. "넌 재미있게 지내겠구나, 불쌍한 녀석아!" 데이빗은 그저 웃기만 했다. 다른 사람들의 탐색하는 듯한 눈길이 따갑게 느껴졌다. 그 눈길에는 자기네들 을 이 꼴로 만든 그의 아버지 로버트에게 보내는 원망까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 소년도 그들과 똑같이 너덜너덜한 작업복에 시꺼먼 목수건을 둘렀고, 신발을 전당포에 보내버려 무거운 탄광용 나막신에 깎을 때가 지난 덥수룩한 머리를 하 고 있었다. 가느다란 팔목에 억센 일로 마디가 불거진 손을 늘어뜨린 모습은 마 치 중병을 앓고 난 환자 같아 보였다. 데이빗은 그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끼고 더욱 턱을 앞으로 힘있게 내밀면 서 천천히 걸었다. 조의 집은 19호 건물 안에 있었다. 19호 문턱 바로 위엔 '쾌 속 자전거 대여점:장의사:하숙방 있음'이라고 삐뚤삐뚤하게 쓴 간판이 붙어 있었 다. 데이빗은 안으로 들어갔다. 조와 그의 아버지 찰리 가울런은 마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차가운 고기찜이 가득담겨 있는 투박한 접시 하나가 나무 식탁 위에 놓여 있고 그 옆엔 갈색 주 전자가 있었다. 구멍을 뚫은 우유 깡통과 아무렇게나 썬 빵도 보였다. 식탁 위는 말할 수 없이 지저분 했다. 아니 식탁뿐 아니라 집 전체가 지저분했다. 수직 사 닥다리로 연결된 방 두 개에는 여기저기 내던져진 옷가지들과 씻지 않고 놓아둔 접시더미며 맥주, 고기 기름 ,땀 냄새까지 겹쳐 그야말로 구토증이 날 지경이었 다. 그런데도 활활 타는 난로의 빛과 듬뿍 놓여진 음식 때문인지 마음엔 오히려 푸근한 안락함이 느껴졌다. "어이구, 이 녀석, 오랜만이구나!" 찰리 가울런은 아직도 잠옷 바람이었다. 뚱뚱한 배 위로 바지 멜빵이 다룽거 리고 실내용 슬리퍼를 구겨 신은 채, 입 속으로 고기를 부지런히 집어넣던 그는 나이프를 쥔 커다란 혈색 좋은 손을 흔들며 기분이 좋은 듯 사람 좋은 웃음을 웃어 보였다. 찰리는 늘 기분이 좋았다. 탄량 검사원인 거구의 찰리 가울런만큼 다정스러운, 아니 허물없이 붙임성 있는 사람을 만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 다. 동료들과도 잘 어울렸고 사장 배러스와도 아주 죽이 잘 맞았다. 그는 무슨 일이든지 기꺼이 했다. 3년 전에 아내가 세상을 떴기 때문에 집안 일부터 시작 해서 토끼 밀렵이나 코우켓 섬에서 하는 연어 밀어에 이르기까지 못 하는 것이 없었다. 데이빗은 앉아서 그들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맛있게 먹어댔다. 조의 잘생긴 턱은 규칙적으로 움직였고, 찰리는 고기찜에 푸짐하게 엉겨붙은 육 즙까지 두터운 입술로 소리를 내며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데이빗의 입안에는 군침이 마구 고여들었다. 식사를 거의 마쳐가던 찰리가 그 제야 생각 난 듯이 고기를 자르던 칼질을 멈추었다. "너, 이 남은 거라도 먹지 않겠니?" 데이빗은 완강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내부에서 어떤 강한 힘이 그로 하여 금 거절할 수 있게 했다. "아침을 먹었어요." "아, 그래... 다행이구나. 요즘 같은 형편에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니." 찰리의 작은 눈이 그의 크고 붉은 얼굴 위에서 의심스러운 빛을 띄우고 있었 다. 하지만 그는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이렇게 쫄딱 망하고 있는 것을 네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 하신다던?" "전 아무것도 몰라요." 찰리는 나이프를 입술로 깨끗이 빨더니 그것을 식탁 위에 놓으며 만족스러운 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거야. 난 이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았어. 해든도 같은 생각이야. 아무도 이렇게 되길 원한 사람은 없었지. 우리의 작업 장비 문제와 톤 당 임금을 반 페니 올리는 문제 따위로 싸움을 만들다니... 난 처음부터 부당한 짓이라고 말했어." 데이빗은 찰리를 바라보았다. 찰리는 동료들의 채탄량 검사원이면서 조합지부 의 임원이었고, 타인캐슬에서 온 노조 대표인 헤든 씨와는 배짱이 잘 맞는다는 소리를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찰리 자신도 이번 일이 장비 문제나 반 페니의 임금을 올리는 것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데이빗은 낮은 목소 리로 말했다. "스커퍼 플래츠에서 물이 많이 나온다던 데요?" "물이라!" 찰리는 빙그레 웃었다. 그것은 무엇이든 다 알고 있다는 여유 있는 미소였다. 그라 하는 일은 갱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탄차가 삐걱거리며 갱 구로 올라올 때 땅 위에서 그것들을 검사하는 걸로 그의 일은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떤 정보든지 훤히 다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파라다이스 갱은 물에 잠겨 있지, 거기서 물이 나오기 시작한 건 옛날부터였 지. 그리고 스커퍼 플래츠도 다른 곳과 별다르지 않다는 건 다 아는 일이었어. 그리고 너의 아버진 물 한방울 같은 것에 겁낼 사람이 아니지. 그건 너도 잘 알 잖니?" 찰리의 빙글거리는 미소를 바라보면서 데이빗은 분노로 온몸이 꼿꼿이 굳어지 는 것 같았다. 그는 화를 내듯 말했다. "아버진 물 속에서 25년간 일해왔어요. 새삼스럽게 물을 겁낼 까닭이 없어요." "맞다, 맞아. 너도 그걸 아는구나. 너는 네 아버지 편을 들어야지. 암 그렇구말 구. 네가 안 그런 다면 네 아버진 퍽 섭섭하실 게다. 나도 너를 조금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도 옳은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아는 놈이니까." 그는 크게 방귀를 한바탕 뀌고 나서 난롯가에 있는 의자로 비틀비틀 다가갔 다. 하품을 한 번 하더니 팔다리를 쭈욱 뻗친다음, 시커먼 담뱃대에 가루담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조와 데이빗은 밖으로 나왔다. "우리 아버진 파라다이스 갱 속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니까 그렇게 말한 거야." 조는 대문을 소리나게 닫고 나더니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저 노인네요 물구덩이에서 하루종일 서 있는 다면 말이 달라질 거야." "갱내에 물이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너는 알겠지?" 물이 차갑다는 것이 문 제가 아니잖아? 우리 아버지의 본래 뜻이 뭔지 너는 알겠지?" "알아, 알아. 귀가 따갑도록 들었으니까. 다른 아이들도 다 알아. 너의 아버지 의 머리 속에는 플래츠 일만 꽉 차 있어. 그리고 뭣이든 다 안다고 생각하고 있 지!" 데이빗은 갑자기 화가 치밀어 외치듯이 말했다. "다 알고 있고말고. 우리 아버진 이번 일을 장난삼아 시작한 게 아니야." "그걸 누가 모르겠지... 다만 아이들 중에는 그저 재미로 시작한 사람도 있다는 거지. 그 아이들은 물 속에서 일하는 게 넌더리가 나서 파업에 좋다구나 하고 앞장 선 거야. 지금쯤은 그 일이라도 하지 않을 때 어떤 맛을 봐야 한다는 것을 잘 깨달았지만. 아마 그치들은 일은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쓸개까지 다 내놓 으려고 할걸. 플래츠에 물이 천장까지 찬다해도 아무소리도 안하고 들어갈 게 뻔해." "그렇겠구나! 그런 아이들이야 다시 일하라고 내버려두지 뭐." 조가 불만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치들이 일을 시작하든지 말든지 우리는 시 대회까지 기다려 보는거야. 난 아주 이 탄갱이라는데가 넌더리가 난다. 기회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빠져나가고 싶어. 평생 이따위 검은 탄가루나 만지면서 묻혀 있고 싶지는 않아." 데이빗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인생이 자신의 뜻과는 반대로만 나가 는 듯했다. 견딜 수 없이 화가 나고 그도 넵튠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조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랐다. 그는 조가 도망을 쳤다가 로덤 순경에게 붙들려와 자 기 아버지에게 지독하게 매 맞던 꼴을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들은 말없이 걸었다. 조는 약간 뻐기는 자세로 몸을 흔들어대면서 양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걸었다. 그는 몸집이 큰 건장한 청년으로 데이빗보다 두 살 이 더 많았다. 떡벌어진 어깨, 쪽 곧은 등과 숱이 많은 검은 곱슬머리에 작고 재 빨라보이는 갈색 눈의 조는 누구에게라도 호감을 주는 미남이었다. 그런데 그러 한 사실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이 그의 몸 구석구석에서 훤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재미를 보려면 우선 돈이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돈벌기란 애시당초 글러먹 었다구. 더구나 큰돈은 죽었다가 깨어난다 해도 만져볼 수 없을걸. 난 바로 그렇 게 큰 돈을 벌기 위해 어디론가 가려고 해. 꼭 가고 말 거야. 넌 운이 좋아. 좋 은 아버지를 만나서 대학에 꼭 보내준다는 보장을 받고 있으니... 너의 아버지는 아무튼 보통사람이 아냐. 너는 아마 타인 캐슬에 가겠지? 나 같은 놈은 스스로 앞길을 뚫는 거야. 그로 남보다 먼저 뛰어가는 거야. 세상에는 의외로 먼저 차지 한 놈이 주인이 될 수 있는 행운이 많이 깔려 있거든. 난 꼭 하고 말 거야. 나중 에 두고 보자고...." 그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웃으며 데이빗의 등을 정답게 두드렸다. 이러 때 그는 마치 딴 사람이 된 것처럼 상냥하고 친절하게 느껴졌다. "자, 보트쪽으로 가자, 데이빗. 뭔가 잡히면 좋겠는데...." 어느새 부두거리를 지나서 바닷가에 다다른 그들은 안벽을 넘어 아래쪽의 거 친 모래사장으로 나아갔다. 잡초와 소금기에 절여진 등심초에 뒤덮인 높다란 모 래 언덕이 그들 뒤로 길게 뻗어 있었다. 데이빗은 이 모래언덕을 좋아했다. 해가 긴 여름에 일이 일찍 끝나는 토요일이면 아버지는 동료들과 함께 주점으로 한잔 하러 가버리고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나면, 데이빗은 혼자서 등심초에 둘러싸여 종달새 노래에 귀를 기울이다가는 읽고 있던 책에서 눈을 돌려 푸른 하늘에 까 만 점처럼 치솟는 새를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그는 지금도 그 모래 언덕에 가서 드러눕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의 머리가 다시 핑 하고 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까 아침에 너무 급히 삼켰던 두꺼운 빵 조각이 그의 위 속에 납덩이 처럼 뭉쳐 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벌써 방파제 쪽으로 가고 있는 조를 급히 따 라갔다. 그들은 방파제를 기어올라 항만에 이르렀다. 탄광촌 아이들 몇이서 거품투성 이 썰물 속에서 석탄을 건져 올리고 있었다. 구멍을 가득 뚫은 낡은 양동이를 장대 끝에 매달아 운반 작업 중인 거룻배에서 떨어진 석탄덩어리를 건져 올렸 다. 2주일 마다 탄광에서 배급받던 석탄을 파업으로 받지 못하게되자 땔감이 떨 어져 이렇게 해서라도 땔감을 구할 수밖에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한편에선 진 흙 속을 긁어 휘젓고 있는 이들도 보였다. 조는 그들을 멸시하는 눈초리로 바라 보았다. 그는 두 다리를 떡 벌리고 두손은 여전히 바지 주머니에 찌를 채로 서 있었다. 그는 사실 그 사람들을 멸시했다. 그의 집 지하실에는 갱구에서 훔쳐온 질 좋은 석탄이 가득했다. 그는 저탄장에서 최고로 좋은 것만 골라서 훔쳐다가 쌓아놓았다. 기분 좋게 불러 있는 위장을 채워준 음식들도 그의 아버지 찰 리가 재주껏 구해온 것들이었다. 중요한 것은 요령있게 사는 것이다. 어떠한 방법으로 든 필요한 물건들을 차지하는 것, 이것이 그의 유일한 생활철학이면 생활방식 이었다. 그 어떤 물건이 스스로 동정심이 생겨나 양동이 속으로 훌쩍 굴러들어 와 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에 빠져 어물쩡 대면서 추위와 배고픔에 마냥 떨고 서 있기만 해서는 안 된다. "조, 어떻게 왔니?" 파라다이스 갱구의 통풍구를 담당하고 있는 약간 모자라 보이는 네드 소프틀 리가 비위를 맞추듯 소리쳐 물었다. 그의 긴 코는 빨갰으며, 작고 빈약한 몸뚱이 도 추워서 경련을 일으키는 사람처럼 떨고 있었다. 그는 다시 억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담배 한 대 있니, 조? 담배 생각이 나서 죽겠어." "담배가 어딨어? 제기랄, 재수없게..." 조는 그렇게 말하면서 귀 뒤에서 담배 한 가치를 빼내어 불을 붙여 입에 물었 다. "요것이 내 마지막 담배라구...." 그렇게 말하던 조는 네드가 등을 돌리자 싱긋 웃었다. 주머니 속에는 아직도 뜯지 않은 새 담배 한갑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때 네드가 소리를 질렀다. 울음 소리에 가까운 비명이었다. 네드는 살을 애는 듯한 바람 속에서 3시간이나 걸려 석탄을 건져 올려 이제 막 자루를 겨우 다 채워 집으로 메고 갈 찬이었다. 그런 데 제이크 윅스가 바로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나이는 겨우 열일곱살이지만 몸집이 크고 힘이 세어 이 동네에서는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무서운 존재인 제이크 윅스는 네드의 석탄 자루가 채워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네드의 석탄자루를 뺏어 든 그는 건드리는 사람은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사나운 눈초리 로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유유히 언덕을 내려가는 것이었다. 아이들 가운데에서 허탈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네드가 미치광이 처럼 소 리쳐 울면서 석탄 도둑을 따라가고 있는 뒤에서 용기도 힘도 없는 아이들은 웃 음으로 자신들의 무색함을 씻어버리려는 듯 했다. 그 중에서도 조의 웃음소리가 가장 컸다. 그러나 데이빗은 웃지 않았다. 그의 얼굴빛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저 자식이 석탄을 무사히 가져갈 수는 없으걸! 저건 소프틀리의 석탄이야! 지 금까지 몸이 얼음덩어리가 되면서 힘들게 건져 올린 거라구!" " 저 친구를 누가 말릴 수 있을까? 그 멋있는 광경을 보여줄 사람이 어디 있 어야 말이지... 아이고 저 네드의 쌍통 좀 보라고... 소리치고 울면 누가 돌려준 대? 참 볼만하군!" 조는 웃느라고 숨이 막힐지경이었다. 그러나 윅스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석탄 자루를 가볍게 맨 채 데이빗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두 주먹을 불끈 쥔 한 아이가 그 뻔뻔스러운 무법자의 앞을 가로막았 다. 데이빗이었다. 제이크 윅스는 이 갑작스러운 방해물에 놀라 걸음을 멈추었 다. "넌 누구야? 나를 막으면 도대체 어쩌겠다는 거야?" "그 석탄은 네드 것이야. 네가 그런 방법으로 석탄을 가로챌 수는 없을걸!" 제이크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래서? 어떤 놈이 날 못 가게 하겠다는 거야?" "내가!" 데이빗이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아이들의 웃음이 그치고 일순 침묵이 감돌았 다. 제이크는 조심스레 자루를 내려놓았다. "바로 너란 말이지...?" "그래, 나야." 데이빗은 분명하게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그는 분노와 긴장으로 곧 쓰러져 버릴 것처럼 어지러웠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이런 기회를 기다려 왔는지도 모 른다. 제이크 윅스는 몸집만 어른처럼 보일 뿐 아니라 행동도 그랬다. 누구에게 나 욕지거리를 해대고 담배를 피우고 술까지 마셨다. 그는 데이빗보다 키도 30 센티는 더 컸고, 그만큼 체중도 훨씬 더 나가리라는 것은 겉보기에도 분명했다. 그렇지만 데이빗에게 그런 것은 아무 상관도 없었다. 윅스가 소프리를 괴롭히는 것을 이번에야말로 끝장 내줘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펄펄 끓어 올랐다. 윅스는 기분 나빠 보이는 웃음을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이 장애물을 넘어뜨려 봐라." 윅스는 조롱하는 몸짓으로 두 주먹을 불쑥 데이빗 앞으로 내밀었다. 이것은 옛부터 싸움을 걸때면 흔히 하는 말과 몸짓이었다. 데이빗은 헝클어진 담황색 머리카락에 싸인 제이크 윅스의 여드름투성이 얼굴을 한번 쳐다보았다. 모든 것 이 선명하고 똑똑했다. 그는 제이크의 깨끗지 못한 피부에 돋은 여드름과 왼쪽 눈꺼풀에 난 조그만 다래끼까지 볼 수 있었다. 다음순간 그는 번개처럼 제이크 의 주먹을 때려 떨어뜨리고는 오른쪽 주먹으로 그의 코를 세차게 바수어버렸다. 멋진 일격이었다. 제이크의 코는 눈에 뜨일 만큼 납작해진 채 피를 줄줄이 쏟 기 시작했다. 구경하던 아이들 가운데에서 함성이 울렸고 짜릿한 흥분이 데이빗 의 등뼈를 꿰뚫었다. 제이크는 한 발 물러서서 고개를 흔들더니 두 팔을 도리깨 처럼 내흔들며 사납게 덤벼들었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가 날카롭게 경고하는 고함을 내질렀다. "도망가자! 웹트 아저씨야!"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리던 데이빗은 그만 관자놀이에 정면으로 제이크의 주먹 을 맞았다. 갑자기 주위의 광경이 희미해졌다. 수직의 탄갱 구멍으로 사정없이 떨어져가는 느낌이 들더니 급작스러운 어둠이 그를 덮치며 귓속이 윙하고 크게 울렸다. 그는 기절해버렸다. 구경하던 아이들은 쓰러진 데이빗을 힐끗 바라보고는 급히 흩어져 버렸다. 네 드 소프틀리마저 도망 쳤다. 자기의 석탄 자루를 메고 가는 것은 잊지 않은 채. 웹트가 다가왔다. 그는 모래사장 위로 멀리서부터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는 것을 보며 해변을 따라 산책하는 중이었다. 예수 웹트는 바다를 매우 좋아했다. 그는 넵튠 탄광에서 10일간의 휴가를 얻어, 그가 가장 좋아하는 성서구절, "예수 님은 이 세상의 죄를 탄식해 우셨도다."를 새긴 판자 조각을 앞뒤에 매달고 휘들 리 만의 바닷가를 조용히 오르내리며 그 휴가를 다 보내고 있었다. 그의 작은 집 바깥에도 이와 똑같은 성서 구절이 금문자로 씌어져 있었다. 그래서 그의 진 짜 이름은 클램 디커리지만 마을 사람들에게는 웹트(탄식하며 울었다는 뜻), 또 는 예수 웹트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웹트는 광부였지만 광산촌 달동네에 살지 않았다. 그의 아내인 스잔 디커리가 램 로 끝에서 조그마한 머턴 파이 가게를 하고 있어 그들 부부는 그 가게 위층 에서 살았다. 스잔은 남편보다도 더욱 격한 성서 구절을 좋아했다. "네 하느님과 만날 채비를 하여라." 라는 구절인데, 그녀는 그 구절을 파이를 넣어주는 종이 봉투마다 인쇄를 해두었다. "디커리 파이를 먹으면서 너희 하느님과 만날채비를 하라." 는 익살맞은 유행 어가 널리 퍼져 있었다. 어쨌든 그 집 파이는 맛이 아주 좋았다. 그러므로 데이 빗은 그 집 파이를 좋아했고, 클램 디커리 씨도 좋아했다. 웹트는 온건하지만 열 성적인 신자였고 성실한 태도도 한결같았다. 데이빗이 정신을 차려 눈을 뜨니, 웹트가 그의 뺨을 때리면서 근심스러운 얼 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내가 정신을 잃었었나봐요...." 에이빗은 몸을 움직여 일어나려 했으나 어지러워 잠시 그대로 있었다. 웹트는 싸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조용한 음성으로 이렇게 물었다. "너, 밥 먹은 지가 언제냐?" "오늘 아침밥을 먹었는에요." "그래? 어디 일어날 수 있겠니?" 데이빗은 웹트의 한 팔을 붙잡고 겨우 일어섰다. 웹트가 어두운 표정으로 그 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진실을 꿰뚫어 보는 날카로움이 있었다. 그가 말했다. "네가 약한 것은 먹지를 못해서야. 자, 같이 우리집으로 가자." 데이빗과 그는 나란히 모래사장을 걸어나와 램 로의 그의 집으로 갔다. 데이 빗은 부엌 식탁에 앉혀졌다. 그곳은 '부엌 예배'를 여는 곳이기도 했다. 사방 벽 에는 성서를 주제로 한 강렬한 색채의 그림들이 난로의 불빛을 받아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 나팔소리가 울릴 때', '최후의 심판', '넓은 문과 좁은 문' 등의 그림 속에는 남녀의 구별이 없는 무수한 천사들이 금발과 휜 옷에 싸인채 황금 나팔소리에 맞추어 하늘을 비상하고 있었다. 그 천사들 위로는 황금 햇살 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어둠도 있었다. 주랑의 폐허 사이에는 암 흑의 야수들이 으르렁거리며, 지옥의 구렁텅이 앞에서 떨고 있는 수많은 유목민 무리를 위협하고 있었다. 벽난로 선반에는 끈으로 매달아놓은 마른 약초와 해초들이 디룽거리고 있었 다. 웹트는 약초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철이 되면 울타리나 바위 사이 에서 그것들을 열심히 채집했다. 지금도 그는 난로위의 작은 토기 주전자를 올 려놓고 카밀레 꽃 약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차가 끓자 그는 우선 한 잔을 따라 서 데이빗에게 주고는 아무 말도 없이 방을 나갔다. 데이빗은 뜨거운 차를 마셨다. 맛은 썼지만 향기가 아주 좋았다. 차 기운이 온 몸에 돌자 마음까지 평안해 지는 느낌이었다. 흥분이 가라앉자 잊고 있었던 시 장기가 거세게 일어났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웹트가 다시 들어왔고 그의 아내 도 뒤따라 들어왔다. 이상하리만큼 웹트와 비슷해 보이는 그녀는 키가 작고 깔 끔한 얼굴에 늘 까만 옷을 입고 있었다. 행동이 조심스러우며 침착한 그녀는 지 나치게 진지한 느낌을 주는 조용한 여자였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데이빗 앞 에 접시 하나를 놓았다. 접시 위에는 갓 구운 머턴 파이 두 개가 놓여져 있었다. 그녀가 청색 에나멜 주전자를 기울여 뜨거운 육수를 파이 위에 부었다. "천천히 먹어라." 그녀가 비로소 입을 떼었다. 그녀는 다시 남편이 서 있는 쪽으로 물러섰다. 잠 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먹기 시작하는 데이빗을 부부는 조용히 바라보았 다. 파이는 맛있었다. 진한 육수의 풍미가 파이의 맛을 더해주었다. 데이빗은 파이 하나를 재빨리 먹어치우고 눈을 치켜들다가 자기를 그윽히 내려다보는 부부의 애정 어린 시선과 부딪쳤다. 웹트는 낮은 목소리로 성서 구절을 중얼거렸다. "내가 너희와 너희의 어린 것들을 양육하리라. 그리고 그는 그들을 위안하고 친절한 말을 주었느니라." 데이빗은 고마운 마음을 미소로 보여주려 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친절을 받게 된 감격스러움이 미소보다는 뜨거운 눈물을 고이게 만들었다. 그는 마음으 로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격한 감정이 그에게 몰아 쳤다. 지난 3개월 동안 그가 겪은 일과 모든 사람들이 겪은 일들의 기억이, 갑작 스럽게 닥쳐온 생활고, 전당포에다 집에 있는 값나갈 물건이다. 싶은 것은 하나 씩 하나씩 다 잡혀야 했던 일, 그의 부모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암투, 특히 엄 마의 분노와 아버지의 옹고집, 이 모든 것은 너무나 두려운 일이었다. 그는 이제 열네 살의 한창 먹을 나이다. 그런데 어제는 하루 종일 먹으것 이라고는 리들 네 농장에서 뽑아온 홍당무 한 개뿐이었다. 한창 인생의 아름다운 꿈을 꿀 나이 에 그는 마치 짐승처럼 밭으로 나가, 배고픔을 면하려고 홍당무 한 개를 뽑아야 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갑작스럽게 격한 열망이 마음속에서 치솟았다. 이같은 모든 일을 막을 수 있는 그 뭔가... 그 뭔가... 그뭔가를 해야 한다는 열망이 치솟았다. 인류를 발전시키고 치유하는 일을, 그는 그러한 일을 기어코 해내야 한다고 마 음속으로 다짐했다. 한 방울의 눈물이 그의 눈에서 뚝 떨어져 머턴 파이의 육수 에 섞였다. 사방 벽에서는 천사들이 그들의 나팔을 불어댔다. 데이빗은 부끄러워 얼른 고개를 숙였다. 3 1시 반. 법산저택에서는 점심식사가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다. 하얀 리넨 천이 덮인 테이블 밑으로 진홍색의 엑스민스터 양탄자가 깔린 화려한 방이다. 짧은 바지에 목이 긴 구두를 신은 아서는 식탁에 앉은 채 시선을 줄곧 자기 아버지에 게 쏟고 있었다. 감출수록 짙어지는 긴장감이 식사시간 내내 분위기를 경직시켜, 그는 기분이 아주 우울해졌다. 기분이 나빠지면 늘 그러하듯 식욕이 싹 없어져 먹는 척하는 것만도 몹시 힘들었다. 그는 광부들이 오늘 모임을 갖기로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모임이, 아버지의 탄광에서 정직하고 충실하게 있어야 할 광부들이 일터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이 무서운 파업을 계속할 것인가를 정하 는 아주 중요한 것임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들 때문에 그의 어린 마음속엔 불안스런 전율이 일고 있었으나 그의 눈은 아버지에 대한 충성으로 불 탔다. 그는 모임이 있을 타인캐슬로 가는 아버지가 자기에게도 함께 가자는 말을 해 주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그는 아버지가 마부 바틀리에게 이륜마차를 준비하라 는 말을 하던 아침 10시부터 지금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여느 때처럼 함께 가자 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타인캐슬에 있는 토드의 집으로 가는 아버지를 따 라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서에게는 매우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식탁에선 아버지를 중심으로 해서 조용한 대화가 계속되고 있었다. 파업이 일 어난 때부터 지금까지 사뭇 이같은 조용한 대화가 이어져 왔다. 또 파업과는 아 무 관련이 없는 것이도록 서로가 애쓰고 있었기 때문에, 합창단의 다음 공연은 아마도 '메시아'일 것이라든가, 어머니가 새로 복용하기 시작한 이번약은 효염이 있다든가, 또는 할머니 묘소의 꽃은 언제나 언제나 싱싱하다든가 하는 내용의 맥 빠진 것들이었다. 리처드 배러스는 원래가 조용한 사람이었다. 일처리에 있어 서도 충동적이거나 흥분하는 일이 없었다. 언제나 놀라운 자제력으로 침착한 모 습이었다. 그는 지금도 식탁 머리에 쇠붙이처럼 단단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넵 튠 탄광에서 일어난 3개월 동안의 파업 따위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그는 커다란 의자에 단정한 자세로 앉아서 치즈, 직접 재배한 미나리, 비스킷 등 을 먹었다. 식사는 늘 소박했는데 특히 점심은 모두 채소류였다. 그리고 식사도 질서 있게 하는 것을 좋아해서 잘게 썬 쇠고기 수프, 차가운 햄, 머턴 요리라는 식사 순서를 어기는 일이 없었다. 그는 허례 허식을 경멸하는 움직이며 튼튼한 이로 미나리를 씹고 있으면서도 음식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잘 드 러내고 있었다. 그는 체격이 크지는 않았지만 가슴은 넓고 굵은 팔뚝에 손도 큰 편이었다. 목이 좀 짧아 억센 느낌을 주는 큰 머리통이 가슴께에 푹 파묻혀 줌 답답함을 주는 인상이었다. 철회색의 짧은 머리카락에 광대뼈가 두드러져 보이 는 얼굴은 날카로운 눈빛 때문인지 전체 윤곽이 뚜렸했다. 게다가 표정이 부드 럽지 못하여 억세고 단단한 북쪽 '스코틀랜드인' 의 인상을 많이 풍기고 있었다. 그는 또한 굳은 신념과 건전한 신앙의 소유자로 주일을 잘 지키고, 저녁이면 온 식구가 다 모여 꼭 저녁 기도를 드리도록 하였다. 그때마다 근엄한 음성으로 성 서 낭독하는 것을 빼놓지 않기 때문에 아서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일도 가끔 있었다. 젊을 때에는 찬송가 작곡도 했노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비싼 값 으로 식당에 사들여 놓은 노란 색깔의 커다란 미국산 오르간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정신의 청렴 결백한 빛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었다. 자식들 중 에서 아서는 아버지의 그러한 빛을 가장 많이 느끼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를 지 나칠 정도로 사랑했다. 아서에게 아버지는 하느님처럼 빛나는 존재였다. "자아, 아서, 푸딩을 먹어야지...." 캐리 고모의 부드러운 말에 겨우 정신을 차린 그는 자신의 접시를 내려다 보 았다. 과자 부스러기와 음식이 탄 찌거기로 만든 '성조지 푸딩' 이라고 이름 붙 인 이것은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칭찬을 기 다리는 마음으로 급하게 입에 퍼넣었다. 이미 먹기를끝낸 힐다는 우울한 얼굴로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반면에 그레이스는 생글거리며 자기만의 비밀 스럽고 행복한 느낌을 즐기고 있었다. "차 마실 시간엔 돌아오시죠, 리처드 오라버니?" 캐리 고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음! 5시에." "알겠어요, 오라버니." "해리어트에게 무슨 부탁할 일이 없는지 물어봐." "네." 캐리 고모는 온순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는 리처드에게 기쁘게 순종하였고, 그러한 순종의 표시로 머리를 한쪽으로만 수그려왔기 때문에 그녀의 머리는 한 쪽으로 기울어져 모였다. 그녀는 리처드에게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또 무엇에든 순종해왔지만 특히 자기 운명에 대하여서는 더욱 순종적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있었다. 캐럴라인 윈들리스 고모라는 자기 위치를. 그녀는 그 지 방 명문인 노덤블런드 가문 출신이었다. 그러나 늘 겸손했고, 리처드와는 의매를 맺은 관계일 뿐이나 이 사실도 절대로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전 중에는 아 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살림을 돌봐주고, 꼼짝 못하고 누워있는 해리어트의 수발을 들어주고, 꽃을 가꾸고, 양말을 깁고, 목도리를 짜며, 식구들의 빨랫감을 찾아내어 세탁하게 하고, 조금도 쉬는 일 없이 부지런하게 이 모든 일을 다 해 내는 것이다. 5년 전에 이 집 주부 해리어트가 병석에 눕자 그때부터 케리 고모 는 법산저택으로 들어와 살며 집안일을 돌봐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 전에도 해 리어트가 해산할 때면 맡아놓고 집안일을 해주었기 때문에 이런 일은 자연스러 웠다. 나이는 마흔, 몸이 뚱뚱해지기 시작했고 약간 창백하면서 통통한 얼굴에, 근심이 있는 듯 상을 찌푸려 주름이 잡혀버린 이마로는 늘 잿빛 머리칼 몇가닥 이 흘러내려와 있는 그녀는 결코 가만히 있을 때가 없었다. 한가할 때면 뜨개질 거리라도 손에 들고 있어야 하는 그녀는 고집이 있어 자기주장을 할 때도 있으 나, 남에게 의존해 사는 인생임을 절대도 잊지 않아 남을 괴롭게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기 방에서 차 끓이는 도구와 비스킷을 따로 놓아두고는 식구들이 모두 모여 앉아 환담을 나눈다든지 하면 살그머니 방을 빠져나가곤 했다. 별 필요가 없는 존재임을 별안간 느꼈다는 듯이. 그녀는 집안 아랫사람들에게 일을 시킬 때는 근엄한 얼굴로 명령을 하곤 했으나 는 그들을 한 식구처럼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그녀는 개인 소득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옷은 한결같이 잿빛 색깔이 었고 돈을 쓰는 일이 없었다. 젊었을 때 마차 사고를 당해 다리를 약간 절룩거 렸는데 그것 때문인지 결혼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또한 빠뜨리지 않는 일은 밤 마다 뜨거운 물로 목욕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이상한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좀 우스운 것으로 목욕탕에서 리처드와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생 각이었다. 그래서 가끔 꿈까지 꾸곤 하는데 그런 날 아침은 식은땀을 흘려 기운 이 더 없곤 했다. 리처드 배러스는 식탁을 둘러보았다. 모두 식사를 끝내고 있었다. "비스킷 하나 더 먹겠니, 아서?" 그는 작달막한 유리병의 은제뚜껑 위에 손을 얹은 채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 다. "이제 그만 하겠어요, 아빠." 아서는 정이 듬뿍 담긴 음성으로 온순히 말했다. 리처드는 컵에다 물을 따라 그것을 잠시 들고 있었다. 그 물은 그가 들고있기 때문에 더 맑은 것 같았고 더 차가와 보였다. 그는 천천히 물을 마셨다. 리처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아서는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왜 아버지는 자기를 타인케슬에 대리고 가려하지 않는 것일까? 아버지는 가장 오랜 친구 애덤 토드에게 무슨 용간이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자기는 해티와 따로 놀면 된다. 아서는 터질 듯한 가슴을 억누르며 식탁에서 일 어나 캐리 고모가 늘 문간이라고 부르는 현관 홀을 왔다갔다 하며 그래도 혹시 나 하는 희망을 가져보았다. 힐다는 곧장 2층으로 올라가더니 책을 한 권 들고 는 자기 방 쪽으로 걸어갔다. 힐다와 아서 사이엔 아무런 느낌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누나 쪽으로는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너무 퉁명스럽고 너무 쉽게 화를 내 고 터무니없는 일에 열정을 기울이곤 하여 가끔 주위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녀 는 늘 자기 내부에서 어떤 싸움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 대 해서는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는 듯 했다.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인데 파업이 일 어나기 직전에 갑자기 머리를 틀어 올려 아주 어른처럼 변해서 아서와는 더욱 멀어져 버렸다. 그는 힐다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예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올리 브 색 거친 피부에 늘 어두운 표정은 젊은 아가씨다운 매력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레이스가 손에 사과 하나를 들고 내려오다가 아서를 보자 귀엽게 웃었다. "오빠, 조랑말 있는 데에 데려다줘." 그레애스는 이제 열한 살로 아서보다 한 살 적을 뿐인데 키는 훨씬 작았다. 그는 그레이스의 행복한 모습이 늘 부러웠다. 그레이스는 얼굴도 예쁘고 사랑스 러웠지만 늘 행복해 보이는 웃음이 흘러 넘치는 푸른 눈, 환하게 밝은 표정으로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았다. 성격이 아주 괴팍한 힐다까지도 그레이스 앞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몹시 화를 냈다가도 용서를 청하며 그레시스를 꼭 안 아주는 모습을 그도 여러번 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차림새만은 누구를 닮았는지 는 단 정치 못했다. 지금도 그녀의 보드라운 머리 위에는 낡아빠진 빗이 아무렇게나 꽂혀 있어 자그마한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보일 정도였다. 아서는 잠시 생각했다. 그레이스와 함께 갈 것인가, 아니면 거절할 것인가? 가 고 싶기도 하고 또 가기 싫기도 했다. 그에게는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 는 고통 스러웠다. 이런 작은 일 앞에서도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그는 고개 를 흔들었다. "혼자 가. 너도 이젠 어린아이가 아니잖아. 나는 파업이 걱정스러워." "그래?" 그레이스는 이해가 안된다는 듯이 오빠의 어른스러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서는 다정스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조랑말이 사과 먹는 것을 보는 즐거움 을 스스로 거절하고 나이 공연히 슬퍼졌다. 그레이스가 밖으로 나가버리자 그는 다시 집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 였다. 드디어 아버지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납작한 가죽 가방을 팔에 끼고 있 었다. 아버지는 아서는 안중에도 없는 듯 쳐다보지도 않고 문 밖으로 나가더니 이륜마차에 로로 곧장 떠나버렸다. 아서는 몹시 부끄러웠다. 실망감으로 마음이 그대로 부서져 버리는 것 같았다. 토드의 집에 가지 못한다는 것이 그렇게 섭섭할 수가 없었다. 토드의 집에 가면 예쁜 해티를 만날 수 있다. 해티는 토드의 딸이다. 명주실 처럼 곱고 긴 머리칼 을 가진 그 아이는 응석받이여서 가끔 아서에게도 매달려 비싼 초콜릿을 사달라 고 졸라대곤 하는데 그때마다 그는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는 해티를 좋 아했다. 이다음에 크면 꼭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는 해티의 오빠 앨른 토드도 좋았고, 그가 농담조로 토드 영감이라고 부르곤 하는 그의 아 버지 토드씨도 좋았다. 그는 멋대로 자라 담배진이 묻어 있는 턱수염에다 눈가 엔 조그만한 노란 반점이 있는데 그에게서는 정향나무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은 이렇게 사랑하는 그네들을 만날 수 없 다는 것보다는 아버지에게서 철저히 무시당했다는 느낌이었다. 자기는 눈에 띌 만한 사람이 못 된다는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그는 자신이 나이에 비해 키도 작고 힘도 세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캐리 고모도 몇번이나 "아서는 너무 허약해!" 라고 했다. 힐다는 해러기트의 학교에 다니고 있고 그레이스도 곧 갈 것이다. 그러나 아서에게는 학교가 그렇게 매력 있는 곳이 못 되었다. 그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그것은 집으로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는 것에도 이유가 있지만, 자신이 부끄러움을 많이 타고 늘 혼자라는 것을 너무 예민하게 느끼는 것이 사 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하는 요인임을 자신도 안다. 얼굴 살결이 유난히 고운 그는 얼굴이 조금만 빨개져도 금세 드러난다. 그럴 때 마다 그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 되곤 했다. 그의 유일한 희망은 때가 되면 넵튠 탄광에서 아버지를 도아드리는 것이다. 열여섯 살이 되면 실무를 배우고 일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 다음엔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하고 졸업장을 받게 되리라. 그러고 나면 아버지와도 동료가 되어 일할 가슴 벅찬 그날이 오리라. 아, 그때야 말로 나라는 존재의 가치를 마음껏 발휘해 볼 수 있으리라!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얼른 눈물을 닦아내며 현관을 나섰다. 아무데도 갈 곳이 없었다. 대문 밖으로는 집에 딸린 대지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 한복판에는 러버넘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손질이 잘 된 잔디밭이 있고, 그 너머로 울타리를 친 목장이 비스듬히 모래 언덕 쪽으로 이어져 있다. 그 양쪽에 는 나무들이 줄지어 서서 눈에 거슬리는 풍경들을 모두 막아주고 있었다. 이 집 은 슬리스케일 시 근교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시커먼 굴뚝들과 지저분한 탄광이 뻔히 보이는데도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을 준다. 멋진 석조 건물로 이루어진 저택은 앞에 정원이 펼쳐져 있고, 조지 왕조풍의 주랑식 현관과 후에 덧붙여서 지은 건물이 뒤편의 큰 온실과 이어져 있었다. 저택 앞면은 깨끗이 담 을 잘라낸 담쟁이 덩굴로 뒤덮여 있었다. 리처드는 과시하는 것을 아주 싫어해 서 모든 것이 수수하고 눈에 확 띄지는 않았지만 흠잡을 데 없이 질서정연했다. 말끔히 깎인 잔디, 꼭 칼로 잘라낸 듯이 반듯한 잔디밭과 그 옆으로 길게 뻗어 있는 붉은 빛의 차도엔 잡초하는 돋아나 있지 않았다. 대문과 끝이 뾰족한 말뚝 울타리, 유리창과 온실엔 전부 최고급품인 하얀 페인트가 듬뿍 칠해져 있었다. 모두가 리처드가 좋아하는 취향대로 꾸며진 것이다. 그리고 일꾼은 바틀리 한 사람만을 두고 있었지만, 넵튠 탄광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나으리 일을 도 와드리기 위해서' 즐겨 찾아왔기 때문에 일손은 부족하지 않았다. 아서는 슬픔이 가득한 얼굴로 그 상쾌한 경치를 훑보았다. 그레이스에게 가볼 까? 처음에는 가보려고 생각했다가 곧 생각을 바꾸어 집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그는 멍하니 벽에 걸린 그림들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소중하게 여기는 그 그 림들은 해마다 한 장씩, 때로는 두 장씩 타인캐슬의 화상인 비센트를 통해서 사 들인 것들로 아버지에게서 슬쩍 들은 것이지만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거액을 치 른 것들이었다. 아서는 아버지의 이런 면도 좋아하고 있었다. 그림을 택하는 취 향까지도 마음에 들었다. 아서의 눈에는 그 그림들이 정말 아름다웠다. 커다란 화폭에 담긴 강렬한 색채들은 그의 마음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스톤, 오차드슨, 와츠, 리튼, 홀먼헌트 드의 그림들인데 그 중에서도 홀먼 헌트의 그림 이 가장 시선을 끌었다. 아버지의 말씀으로는 이 화가들이 지금은 별로 유명하 지 않지만 앞으로는 대단한 명성을 얻을 것이라는 거였다. 아서는 '정원의 연인 들' 이라는 그림 앞에서 제일 오래 머물었다. 이 그림은 너무나 환상적이어서 보 고 있노라면 야릇한 통증과 함께 열망이 가슴속에 꽉 차오르는 것을 느끼곤 했 다. 아서는 미간을 찌푸린 채 천천히 홀 안을 걸었다. 그는 생각을 좀 하고 싶었 다. 토드 집으로 떠나는 아버지를 그토록 심각하게 만든 골칫거리인 파업에 대 해 자신도 깊이 생각하고 나름대로 결론을 얻고 싶었다. 그는 복도를 따라 걷다 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문을 잠드고 나니 겨우 마음이 안정되는 듯 싶었다. 그곳 이 어느 곳보다 안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화장실은 그의 피난처였다. 거기는 아무도 그를 방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곳 에서 그는 걱정거리를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공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화장실은 공상하기에 가장 알맞는 장소였다. 화장실은 이상하게도 교회의 좌석 사이의 통로를 떠올리게 했다. 이곳은 천장이 높아 교회의 분위기를 연상케 하 는 데다 니스 칠한 벽지가 조그마한 고딕풍의 아치 무늬로 되어 있기 때문이었 다 그는 화장실에 있으면 '정원의 연인들'을 볼때와 똑같은 기분이 되는 것이었 다. 아서는 니스가 칠해진 타원형 변기 뚜껑을 닫은 위에 두 손으로 턱을 고인채 앉았다. 그는 갑자기 불안과 긴장의 격통을 느꼈다. 누구에겐가 위로를 받고 싶 어 눈을 꽉 감았다. 가끔씩 그에게 일어나는 그 열병 같은 정열로 주님에게 기 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파업이 오늘로 끝장이 나고 모든 광부들이 저희 아버지를 위해 일터를 돌아 보며, 그들이 자기네의 잘못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사랑하는 주님, 주님께서도 저희 아버지가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를 잘 알고 계시다는 것을 압니다. 저는 아 버지를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그리고 저는 주님도 사랑합니다. 광부들이 아버지처럼 올바를 일을 하게 해주시고, 더 이상 파업을 하지 않게 해주시고, 하 루 빨리 넵튠 탄광에서 아버지와 함께 일하게 되도록 해주십시오. 예수님 이름 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4 리처드 배러스는 5시에 돌아왔다. 현관으로 들어서던 그는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암스트롱과 허즈페드를 보았다. 그는 조금도 서둘지 않고 침착한 태도로 약간 상을 찌푸린 특유의 냉정한 표정을 지은 채 들어오다가, 두 개의 홑으자에 나란히 앉아 말없이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들을 보았다. 캐리 고모는 탐탁 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거기에 들여 놓았다. 사실 넵튠 탄광의 감독인 조지 암스 트롱은 보통 때 같으면 당연히 응접실로 갔을 것이었다. 그러나 허즈페드는 지 금은 부감독이지만 얼마 전까지 십장이었고 또 광부들과 함께 어울려 일하던 사 람이었다. 지금도 더러운 장화와 젖은 반바지에 지팡이와 가죽 모자를 쓴 지저 분한 광부의 꼴로 온 것이다. 그런 그를 리처드의 방으로 들여보내 방을 더럽힌 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캐리 고모는 그 두 사람을 현관 객 실에 그대로 앉혀두는 절충안을 생각해냈던 것이다. 두 사람을 보고서도 리처드의 얼굴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그들이 올 것을 예상한 것이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희미한 빛이 빛나는가 싶다가 금세 사라졌다. 암스트롱과 허즈페드는 일어섰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어떻게 됐나?" "좋은 방향으로 처리됐습니다요." 리처드는 그 소식을 들으면서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암스트롱의 약간 흥분된 음성이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오히려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자기 내심을 감추고 그들과 사이를 둔 채 그대로 꼿꼿이 서 있었다. 마침내 그 가 몸을 움직이더니 손짓을 하며 식당으로 먼저 들어갔다. 그는 미소 짓는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바로크 풍으로 조각한 네덜란드 원산의 커다란 떡갈나무제 장 식장 쪽으로 가서 두 개의 유리잔을 꺼내 위스키를 따르더니, 초인종을 눌러 자 기가 마실 차를 가져오게 했다. 세 사람은 선 채로 그것을 마셨다. 허지페드는 단번에 술잔을 비웠고 암스 트롱도 서둘러 술잔을 비우려 애썼다. 암스트롱은 신경질적인 사람으로 언제나 조바심을 치고 있는 인상을 풍겼다. 그는 무슨 일에나 애를 태우고 사소한 일에 도 당황하며 걸핏하면 화를 냈다. 그러나 어딘가 잡아 늘어뜨린 것 같은 얼굴에 눈 밑에는 처진 살이 붙어 있는 그는 시내에서 인기가 높았다. 그는 멋진 저음 으로 노래를 잘 불러 석공조합 주최의 노래 경연대회에도 출전해서 광부들의 사 기를 북돋아주곤 했기 때문이다. 중간키에 대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하는 그는 아 이가 다섯이나 되는 대가족의 가장으로 짐이 무거웠으므로 가장 두려워하는 것 이 실직이었다. 그는 지금도 신경질적으로 떨리는 두 손을 어색하게 맞잡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사건이 이렇게 끝났다고 해서 저는 조금도 섭섭하지 않습니다요, 사장 님. 어디까지나 어리석은 일이었으니까요. 우리 모두가 다 상당히 고생했습니다. 이런 3개월을 다시 겪느니보다는 오히려 전 1년을 곱쟁이로 일하는 것을 택하겠 습니다요." 배러스는 그 모든 말을 무시해버렸다. 그는 말했다. "어떻게 끝이 났는가?" "회관에서 대회를 가졌습니다. 펜윅이 말했지만 그놈의 말에 아무도 귀를 기울 이지 않았습니다. 다음엔 가울런, 탄량 검사원인 찰리 가울런 아시지요? 그치가 일어서서 다시 일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고 했습지요. 그러고서 헤든이 사람들 에게 거침없이 말을 해댔습니다. 타인캐슬에서 특별히 파견된 사람이라 그런지 말을 우물대지 않던데요. 정말입니다, 사장님. 모두가 노동조합의 지지 없이는 이렇게 나올 권리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노동조합 총 연맹에서는 이 모 든 일과 관련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장님 앞이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그쪽 사람들은 이번 파업이 어처구니없는 얼간이들의 모임이라고 했습죠. 헤든 은 놈들이 제멋대로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해 아주 색다른 말을 했습니다. 그러고 는 투표를 했습니다. 일을 시작하자는 찬성표가 800이 조금 넘었고, 반대표는 일 곱 표였습니다." 거기서 잠깐 이야기가 멈추자 배러스는 답답한 듯 재촉했다. "그리고 그 다음엔?" "모두들 사무실로 왔습죠. 헤든, 가울런, 오글, 하우에 디닐 등 많은 사람들이 함께들 왔습니다만 좀 움츠러든 맥 빠진 표정들이었습니다. 그치들이 모두 사장 님을 만나겠다는 거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사장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장님 께선 모두 다시 일하러 들어가기 전까지는 아무도 만나 주시지 않으신다고 하셨 노라고. 그랬더니 가울런이 한바탕 떠들어대더군요. 그치는 술주정뱅이긴 하지만 나쁜 놈은 아니지요. 여하튼 광부들이 패배한 것이 분명해졌노라고 떠들었지요. 그 다음엔 헤든이 노동조합의 인기를 끌기 위해 늘 하던 식으로 입을 열었는데, 의회의 해리 뉴전트 의원에게 이 사건을 가지고 가겠다고 하면서 횡설수설하더 군요. 하지만 그건 자신의 체면을 세우기 위한 것일 뿐이었지요. 간단히 말해서 모두 세게 한방 얻어맞은 꼴이 되었고 내일 교대 조부터 일을 하러 들어가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장님을 만나서 답변을 듣고 6시까지 알 려주겠다고 했습니다." 리처드는 그제야 차를 다 마셨다. "그러면 작업을 시작하겠다는 거군, 알겠네." 그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내색하지 않은 채 이러한 사태가 흥미로운 듯 관 망하는 모습을 보일 뿐이었다. 3개월 전에 그는 파슨즈 회사와 코크스 용석탄 계약을 맺었다. 이 계약은 이익이 많은 만큼 채결하는 데도 힘이 들었다. 그는 겨우 계약을 끝내자 작업을 시작했다. 파라다이스 탄광의 스커퍼 플래츠갱구를 파 들어가, 넵튠 탄광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코크스 석탄의 암맥을 파기 시작했 다. 그런데 광부들이 사장인 그를 무시하고, 더군다나 노동조합까지 무시하고 탄 광에서 걸어나와 버린 것이다. 큰 이익을 가져다주었을 그 계약서도 계약 권을 상실하여 휴지로 변했고, 그는 이 파업 때문에 2만 파운드의 손해를 보았다. 그런데 지금 그의 입술에 떠오른 차가운 미소는, 정말 재미있구나! 하는 것만 같았다. 암스트롱이 말했다. "그럼 제가 공고를 붙일까요, 사장님?" 리처드는 입술을 꽉 다물고 필요 이상의 아첨을 보이는 암스트롱에게 경멸의 시선을 던졌다. "그러지." 그의 대답은 냉정하면서도 엄격했다. "내일부터 작업에 들어가도록 하게." 암스트롱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는 재빨리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러나 좀 둔한 편인 허지페드는 모자를 양손으로 연신 비틀며 서 있었다. 그는 길쭉한 윗입술에 엷은 황색의 얼굴에다 몸집이 커서 보기만 해도 몹시 둔한 인 상을 주는 사람이었는데 겨우 용기를 낸 듯 입을 열었다. "펜윅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치도 일을 시켜야 할까요?" 배러스가 말했다. "그건 펜윅에게 달려 있지." 허지페드는 다시 입술을 들썩거리더니 겨우 목소리를 끌어내었다. "저... 그러면 다른 펌프는 어떻게 합니까?" 리처드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다른 펌프라니? 무슨 얘긴가?" "그놈들이 파업을 일으키던 그날 사장님이 말씀하신 그 배수 펌프지요. 그놈만 있으면 스커퍼 플래츠의 많은 물을 뺄 수 있을 겁니다. 제 말씀은 그걸 빨리 사 용하면 할수록 진창에 물이 덜해서 일하는 데 서 있기가...." 얼음처럼 차가운 리처드의 목소리가 그의 이야기를 도중에서 끊어버렸다. "내가 스커퍼 플래츠 갱구를 계속 판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자네에게 퍽 미안 한걸. 그 코크스 석탄은 다른 계약 때까지 그대로 내버려두기로 했다네." 입을 꾹 다물어 버린 허지페드의 누런 얼굴이 시뻘개졌다. "그럼 이야기를 끝내세. 나는 모두가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되는 것을 나보다는 여러분들 자신을 위해서 기쁘게 여기고 있네. 그걸 모두에게 알려주기 바라네. 마을 전체가 모두 그렇게 불필요한 고생을 했다는 것은 지긋지긋한 일이 아닌 가?" "꼭 알리겠습니다요, 사장님." 암스트롱이 충성이 넘치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배러스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암스트롱과 허지페드는 이제 더 이상 이야기할 것도 없었으므로 서둘러 그 집을 나왔다. 배러스는 난로를 등지고 서서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위스키 병을 장 식장에다 넣고, 쟁반 위에 떨어진 설탕 두 덩어리를 주워 설탕 병에 도로 넣었 다. 그는 지저분한 것을 보거나 설탕 한 덩어리라도 낭비하는 것을 보면 기분이 상했다. 그의 집에서는 무엇 하나라도 낭비해서는 안 되었다. 그는 그런 것을 보 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특히 사소한 일일수록 그는 더욱 엄격했다. 성냥도 인색할 정도로 아꼈다. 연필도 몽당연필이 되도록 끝까지 썼고, 필요 없는 등불 은 꼭 끄도록 규칙을 세웠다. 쓰다 남은 비누 조각도 새 비누에 뭉쳐 넣어 사용 했고, 뜨거운 물도 아껴 써야 했으며 난롯불마저 적은 양의 석탄 찌꺼기만을 쓰 도록 했다. 그릇이 깨지는 소리라도 들리면 그는 머리로 피가 몰릴 정도로 흥 분했다. 그가 높이 사는 캐리 고모의 장점은 엄격하게 집안살림을 운영하는 것 이었다. 그는 조용히 서서 희고 잘 손질된 자기 두 손을 조사하듯 살폈다. 그런 뒤 문 을 열고 천천히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아서를 보지 못했다. 아서는 불안스런 얼굴로 어두컴컴한 현관 홀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배러스는 아내의 방 으로 들어갔다. "해리어트!" "네, 당신이세요!" 아내는 등뒤에 베개가 세 개씩이나 놓인 침대에 앉아 레이스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세 개의 베개를 놓아두고 있는 까닭은 그렇게 하면 병에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레이스 뜨개질도 그녀의 새로 바뀐 주치의인 젊은 루이스 박사가 뜨개질이 그녀의 신경에 좋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뜨개질 하던 손을 멈추고 눈을 들어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짙은 흑색 눈썹 아래 눈자위 바로 밑 피부 색깔이 진한 갈색으로 변색되어 있어 첫눈에도 노이 로제 환자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늘 그렇듯이 미안하다는 미소를 띠우며 흙빛 얼굴에 그나마 생기를 주고 있는 윤기 있는 검은머리를 쓸어 올렸다. "당신, 언짢아하시지 마세요. 오늘도 나 머리가 너무 아팠어요. 그래서 캐럴라 인에게 오후 내내 머리를 문지르게 했지 뭐예요." 그녀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괴로워하는 환자의 미소, 만성적인 환자가 짓는 그런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등이 아프네, 위장병이네, 신경통이네 하면서 언제나 고통을 호소했다. 때로는 견딜 수 없는 두통 때문에 어쩔 줄을 모르나 아무 약도 소용없고 캐럴라인이 머리를 부드럽게 문질러주는 것만이 그 통증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캐리 고모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녀만이 할 수 있 는 특유의 몸짓으로 해리어트의 머리를 어루만지듯 문질러주면 그녀는 착한 아 이처럼 통증을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해리어트의 이러한 갖가지 증상의 원인은 아직도 찾아내지 못했다. 아무 원인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지금까지 슬리스케일의 의사들 중에서도 이름을 떨치는 리들, 스코트, 프럭토 등이 모두 손을 들어버리게 했다. 그리고 자연요법, 약초 사용, 전기물리요법까지 온갖 치 료를 다 받아보았다. 어떤 치료법도 처음에는 놀랄 만한 효력을 나타냈다. 그래 서 드디어 '명의'를 만났다고 감탄하지만 얼마 못 가 그 효능은 그만 사그라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병에 관계된다고 생각되는 책이라는 책은 다 모아들여 열심히 읽었다. 물론 아무 소득은 없었다. 소득이 있을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해리어트의 탓도 아니었다. 해리어트는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누구나 놀랄 정도로 온갖 정성을 다 쏟았 다. 안 먹어본 약이 없을 정도로 약이란 약은 다 먹어보았다. 그녀의 방에는 몇 십 개도 넘는 약병이 가득했다. 강장제, 진정제, 완화제, 바르는 약, 이름도 알 수 없는 온갖 약제들이 방안의 사방 벽을 채우다시피 늘어서 있었다. 그것은 해리 어트가 지난 5년 동안 그녀를 위해 처방되었던 약병을 하나도 버리지 않은 때문 이기도 했다. 어떤 약은 단 한 모금만 마신 것도 있다. 해리어트는 약을 먹은 경 험이 많아 한 모금만 먹어봐도 "이 약은 빨리 없애요, 이건 효험이 없다는 걸 나 는 알아요." 하고 말할 정도였다. 그렇게 되면 그 약병은 선반으로 올라가야 했 다. 그의 증세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해리어트는 매우 참을성이 많았다. 아무 불평 없이 침대에 얌전히 누워 답답함과 지루함을 이겨내고 있었다. 그리 고 식사도 아주 잘했다. 때로는 놀랄 정도로 많이 먹었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또 하나의 골칫거리였다. 아마 틀림없이 위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았는데, 심한 방귀 가 그녀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까지도 잘 참아내었고 그녀는 누 구에게나 상냥했다. 원래 온순하며 동정심이 많은 그는 오랜 투병생활에도 그 착한 심성을 잃지 않았다. 남편에게는 더욱더 다정한 아내로서 대했고 늘 온화 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뚱뚱했으나 살결이 희고 고와 고결하게 보였고, 사실 신앙심도 깊었다. 배러스는 멀리 떨어져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새로운 사람을 보는 것처럼 뚫어지게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젠 두통이 멈췄소?" "네, 괜찮아진 것 같아요.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지만...캐럴라인이 제 머리를 문지른 후 루이스 의사가 준 그 쥐오줌풀 뿌리로 만든 물약을 조금 뿌리도록 했 어요. 그것이 효험이 있나봐요." "타인캐슬에 갔던 길에 포도를 좀 가져왔어야 했는데, 깜박 잊었소." "여보, 말만이라도 고마워요." 리처드는 포도를 가지고 오는 일을 자주 잊어버렸다. 그러나 가지고 오겠다는 생각만은 거짓이 아니었다. "당신 물론 토드 집에 다녀오셨겠죠?" "그의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자기의 수수께끼를 풀려고 애쓰고 있는 아서가 그 표정을 보았더라면 좋을 뻔했다. "음, 갔었지. 모두 평안하더군. 헤티는 전보다 더 예쁘게 보였고 제 생일 때문 에 아주 정신이 없더군. 다음 주에 열세 살이 되거든." 그는 말을 끊고 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파업이 풀렸어. 광부들이 내주부터 일을 시작할 거야." 그녀의 작은 입이 크게 딱 벌어졌다. 그녀는 한 손을 플란넬 잠옷에 싸인 가 슴에다 보호하듯 갖다 댔다. "어머, 여보. 너무 기뻐요. 왜 진작 저에게 얘기해주지 않으셨어요?" 정말 잘 됐어요. 이젠 안심이에요." 그는 문을 반쯤 연 채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말했다. "이따 밤에 다시 올게." "알겠어요, 여보." 해리어트는 여전히 즐거움이 감도는 얼굴로 연수정 장식이 붙은 은제 연필을 꺼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단정하게 써내려 갔다. "리처드가 기쁜 소식을 전하 자 가슴이 크게 고동 쳤다는 것을 루이스 선생님께 이야기하는 것을 잊지말 것." 그녀는 쓰기를 멈추고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크게"라는 말 밑에다 밑줄을 그었 다. 그러고는 다시 뜨개질 감을 집어들고 평온스레 뜨개질을 시작했다. 5 암스트롱과 허즈페드는 그 저택의 흰 대문을 나와 키가 큰 너도밤나무 가로수 거리로 들어섰다. 이 길은 이 지방에서 '수문곡(水門谷)으로 알려진 곳이며 헤들 리 로와 시내로 통하는 길이었다. 그들은 서로 조금 거리를 둔 채 말없이 걸어 갔다. 그들은 서로 좋아하지 않는 사이였기 때문에 사실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허즈페드가 사장으로부터 냉대를 받은 것이 영 불괘한지 먼저 웅얼거리는 소리 로 내뱉듯이 말했다. "사장은 가끔 사람을 먼지 취급한단 말야. 냉정하기 짝이 없다 그 말이지. 난 그 사람을 모르겠어. 사장이란 사람 속을 암만 해도 알 수 없다니까." 암스트롱은 어둠 속에서 혼자 빙그레 웃었다. 그는 허지페드를 무식한 인간 허섭스레기라고 은근히 무시하고 있었다. 그는 그저 우직한 끈기로 겨우겨우 이 만큼 성공한 것뿐이다. 그래서 암스트롱은 평소에도 일을 우격다짐으로 해내는 그에게 화를 잘 냈고, 이상하게 모욕감을 느끼기도 했다. 따라서 그가 냉대를 받 는 것을 바라보는 게 유쾌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는 이해를 못 하는 척했다. "제기랄, 말한 그대로지." 허지페드는 여전히 부루퉁한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사장님은 자신이 하는 일을 잘 알고 있다네." "그렇겠지. 자신의 일은 자기가 잘 알고 있겠지. 아따, 자기 일을 모를 바보가 이 세상에 있겠나! 사장은 우리에게 인정을 베풀 생각이 없는 거야. 사장 자신은 그렇게 완전 무결하지만 자비심은 눈곱만큼도 없다 이거지. 자네도 그 이야기를 들었지?" 그는 걸음을 멈추더니 배러스의 말을 흉내냈다. "뭐, '마을 전체가 모두 불필요한 고생을 했어.' 제기랄, 세상에 정말로 재미있 는 일이지." "아닐세, 그게 아니야." 암스트롱이 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사장은 진심으로 한 말일세." "개똥같은 진심이 다 있네! 사장은 슬리스케일에서 제일 가는 노랭이라니까. 그런데 말은 그럴싸하다 이거지. 사장은 계약이 무효가 되니까 화가 나 속이 활 활 탄 거야. 기왕 내뱉은 말이니까 한마디만 더 하겠네. 우리가 스키퍼플래츠 갱 구에서 나오게 된다는 건 정말 기쁜 일이네. 내가 입 뚜껑을 딱 닫고 있었지만, 그놈의 구덩이에서 솟는 지독한 물에 대해선 나도 펜윅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 었다네." 암스트롱은 허지페드에게 날카롭고도 비난에 찬 눈길을 던졌다. "이 사람아, 그렇게 말하면 쫓겨나."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가 허지페드가 다시 부루퉁하게 입을 열었다. "어찌 되었건 거긴 진흙탕 같은 곳이라니까." 그러나 암스트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말없이 헤들리 로를 내려 가 탄광촌 마을을 지나 카우펀 로로 접어들었다. 모퉁이에 가까이 오자, '어서 오십쇼' 주점에서 흘러나오는 번쩍이는 불빛과 떠들썩한 목소리에 끌리듯 이 두 사람 다 머리를 돌렸다. 암스트롱은 화제를 바꾸어야 한다는 분명한 책임감에서 말을 꺼냈다. "오늘밤엔 만원이구먼." "그렇군. 꽉 찼네 그려." 허지페드는 여전히 부루퉁한 채 대답했다. "어무어, 그치가 또다시 외상 술을 팔기 시작한 거로군. 장사를 걷어치운 것이 이제 2주째 됐나본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들은 게시판에 공고를 붙이기 위해 걸어갔다. 6 '어서 오십쇼' 주점은 그전보다 더 떠들썩했다. 술집은 질식할 정도로 담배연 기가 꽉 차고, 밝은 불빛에 맥주 냄새가 소용돌이쳤다. 버트 어무어는 셔츠바람 으로 계산대 뒤에 서 있었고, 그의 뒤쪽 벽에는 백묵으로 손님의 이름과 술잔 수를 적은 큰 슬레이트 판이 매달려 있었다. 버트는 빈틈없는 자였다. 지난 2주 일 동안 그는 아무리 면전에서 욕을 하고 또 사정을 해도 외상은 일체 거절했 다. 그러나 이제 급료일인 토요일이 다시 부활된 것이 확실하게 되자 그는 당장 술집을 다시 열었다. 계산은 물론 외상이었다. "이 술잔에도 부어줘. 버트, 이 친구야." 찰리 가울런이 자기 술잔을 쾅 치며 한 잔 더 따르라고 소리쳤다. 찰리는 술 에 취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진짜 술에 취한 적이 없었다. 그가 스폰지처럼 술에 흠뻑 젖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송아지 고기처럼 창백한 얼굴이 된 적은 있 었지만 아무도 그가 술에 취해 정신을 잃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의 주변에는 기분 좋게 술에 취해 있는 얼굴들이 보였다. 탤리 브라운, 리디 영감, 슬로거 리 밍 등인데 슬로거(권투의 강자라는 별명) 녀석은 심하게 술에 취해 있었다. 성질 이 난폭하기 짝이 없는 그는 권투선수일 때 얻어맞아 오묵하게 들어간 붉은 얼 굴에 납작한 코, 한쪽 귀는 청백(靑白)의 콜리 꽃같이 되어 있었다. 젊었을 때 권투선수였던 그는 '소년 광부로서 경탄할 만한 인물'이라는 매력적인 타이틀을 내걸고 성제임스 회관에서 시합을 할 정도로 유능한 자질을 보였으나 술과 무질 서한 생활로 자신을 망쳤다. 경탄할 만한 인물도 아무것도 아닌 술꾼으로 전락 해버린 그는 얻어맞아 찌그러진 볼썽 사나운 얼굴을 한 채 탄광으로 돌아왔다. 술집에서 언제나 사회자 노릇을 맡아 하는 찰리 가울런이 다시 테이블을 두드 렸다. 좌중의 흥이 부족한 듯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이 주점의 옛분위 기, 기분 좋고 허물없는 분위기가 다시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우리는 지난 3개월 동안 많은 것을 참아왔다. 자아, 자, 이 친구들아. 우린 기 가 죽어서는 안 돼. 즐겁지 않는 자는 살 수가 없는 거야." 그의 돼지 같은 작은 눈이 좌중 위에서 번쩍이면서 언제나처럼 시끄럽게 맞장 구를 쳐줄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들 너무나 힘을 잃고 지쳐버려 맞 장구를 칠 흥이 나지 않았다. 그때 그는 로버트 펜윅의 시선이 자기에게 조소하 듯 박혀 있는 것을 보았다. 로버트는 언제나 자기 자리인 계산대 옆의 구석에 서서 쉬지 않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마치 그는 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흥미가 없다는 태도였다. 가울런은 자기의 술잔을 치켜들었다. "마셔, 로버트. 오늘밤엔 마음껏 마셔보자고. 내일이면 세상이 다 술에 빠져버 릴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로버트는 먼 세계에 있는 것처럼 가울런의 기분 좋게 취한 얼굴을 멍 하니 건너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두르지 말게. 우리 모두가 푹 젖을 날이 가까웠으니까." 좌중이 와-하고 소리쳤다. "그런 상판때기 좀 집어치워, 로버트." "이 친구들아, 조용히 해. 너희들이 할 말은 회합 때 따 해버렸잖아." "그런 소리는 3개월 동안 귀가 따갑도록 들었으니 이제 그만 좀 해." 로버트의 얼굴에는 엷게 안개 같은 슬픔과 피로감이 어렸다. 그는 서글픈 눈 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좋아, 이 새끼들아! 멋대로 해보라구! 난 이제부터 입 다물고 있을 테니까." 가울런이 교활한 얼굴로 싱긋 웃었다. "파라다이스 갱구 속에 내려가는 것이 무섭다고 왜 말하지 못하나?" 그러자 슬로거 리밍이 다시 소리쳤다. "가울런, 그 상판때기 집어치우지 못해! 네놈은 꼭 수다 떠는 아줌마 꼴이라 구. 로버트는 자, 내 짝패다. 알았니! 저치는 땅도 잘 파고, 진흙을 파헤치는 것 도 잘하지. 네놈이 네 자식새끼에 대해 알고 있는 것보다도 더 잘 그 망할 놈의 갱 속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야. 안 그래?" 사람들은 조용해지면서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모두 숨을 죽였다. 그러나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찰리는 절대로 싸움을 한 적이 없 었다. 그는 다만 얼큰하게 술에 취해서 헤벌쭉 웃고만 있었다. 긴장감은 그만 시 시하게 풀어지고 말았다. 그때 문이 화닥닥 열렸다. 윌 킨치였다. 그는 주점 안으로 들어와 팔꿈치로 옆 사람을 밀어내며 계산대 쪽으로 다가갔다. "한 잔만 줘, 버트, 제발. 한잔 해야겠어." 사람들의 관심이 이번에는 윌에게로 집중되었다. "아니, 왜 그러나! 무슨 일이 생겼어, 윌?" 윌은 길고 뻣뻣한 머리칼을 이마에서 뒤로 쓸어 넘기며 술잔을 꼭 쥐고는 부 들부들 떨면서 사람들을 향했다. "일이 생겼지." 그는 마치 입에서 먼지를 씻어내듯 침을 탁 뱉었다. "우리 집 앨리스가 심하게 앓고 있어. 폐렴에 걸린 거지. 그런데 여편네는 그 아이에게 송아지 무릎뼈를 곤 국물을 한 모금만 먹이고 싶어했다네. 그래서 난 래미지 집으로 뛰어갔지. 약 15분 전에 말일세. 래미지는 배때기를 내밀고 계산 대에 기댄 채 서 있더군. '래미지 아저씨!' 나는 아주 공손히 말했다네. '심하게 앓고 있는 내 어린것을 위해서 송아지 무릎뼈 한 동강이만 줄 수 있겠소? 틀림 없이 급료날인 토요일에 갚으리다.'" 여기까지 말을 하다가 윌의 입술이 파랗게 되었다. 그는 온몸을 벌벌 떨었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말일세, 그 새끼는 나를 아래위로 한참 훑어보더니, '자네에게 줄 무릎 뼈는 없네.' 이렇게 말을 하더군. '원 세상에, 그러지 마시고 래미지 아저씨...' 난 화가 발칵 났지만 참으면서 다시 사정했지. '제발 뼈 부스러기라도 좀 주시오. 탄광 폐쇄도 이제 끝났고 토요일만 되면 그때는 내 목을 빼서라도 틀림없이 갚 을 테니까.'" 그는 잠깐 숨을 돌리고는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새끼가 이제는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그저 그 괴상한 표정으로 나를 바 라볼 뿐이었어. 그러더니 마치 개새끼에게나 하듯이 이렇게 말하는 거야. '아무 것도 못 준다니까. 갈비 뼈다귀 하나도 줄 게 없어. 네놈은 이 마을의 망신거리 야. 네놈뿐이 아니지. 네놈의 패거리 모두가 그래. 네놈들은 아무 소득도 없는 파업을 벌여놓고는 선량한 사람들에게 동정을 구한다 이거지. 집어던져 쫓아버 리기 전에 어서 이 가게에서 썩 꺼져버려!'" 그는 다시 숨을 돌리더니 힘없이 말을 끝맺었다. "그래서 나는 나와버렸다네." 윌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 사람들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가 말을 다 끝냈는데도 침묵은 여전했다. 봅 오글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제기랄! 그건 너무했군." 그 다음엔 슬로거가 꼿꼿한 자세로 벌떡 일어섰다. "너무한 정도가 아냐."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아직도 더 참고만 있을 텐가!" 모두가 한꺼번에 이야기를 시작했다. 술집은 와글와글했다. 슬로거는 술에 취 해 비틀거렸으나 좌중을 어깨로 밀어내며 중앙으로 나섰다. "나는 이런 식으로 가만히 누워 있지는 못하겠어. 나는 나 혼자서라도 그 호로 새끼 같은 래미지놈을 만나야겠네. 이리 와, 윌. 자네 어린것에게 제일 좋은 고 기를 갖다주도록 해줄게. 무릎뼈의 너절한 살점 끄트머리가 아니고 말야." 그는 윌 킨치를 다정스럽게 잡고는 문 쪽으로 데리고 갔다. 다른 사람들도 소 용돌이치는 물결처럼 그 두 사람을 에워싼 채 뒤따랐다. 술집은 순식간에 텅 비 고 말았다.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제 시간이 다 됐습니다. 여러분!" 하고 주인이 떠둘어대도 꿈쩍도 안해 문 을 닫으려면 애를 먹어야 하는데, 지금은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것이다. 로버트 는 그들을 다시 기다려야 할지 어쩔지 몰라 멍청하게 서 있는 어무어를 슬픔과 환멸에 찬 눈으로 그윽히 쳐다보더니 술 한 잔을 입 안으로 털어넣고는 바람처 럼 나가버렸다. 밖에는 수십 명의 젊은이들과 부근의 깡패와 건달패들이 한데 휩쓸리어 그 수 효가 더욱 불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이유도 전혀 모르는 채 흥분과 소란 속에서 싸움이 벌어질 기미를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슬로거가 큰 몸을 으쓱거리며 앞장서 가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덩어리가 되어 카우펀 가를 휩쓸며 내려갔다. 조 가울런이 무슨 속셈인지 그 무리를 헤치며 한가운데로 들 어섰다. 모퉁이를 돌아 램 가를 지나 래미지의 집에 도착했으나 이미 불은 꺼져 있고 가게는 닫혀 있었다. 차가운 쇠창살 덧문의 현관과 그 위에 '제임스 래미지 정육 점'이라는 간판만이 보일 뿐이었다. 때려부술 창문하나 보이질 않았다. 슬로거는 고함을 한번 냅다 질렀다. 그러자 술기운이 그의 혈관 속으로 퍼져 들어가 급작스럽게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렇다. 절 대로 실망할 필요가 없었다. 그곳에는 다른 상점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래미지의 가게 이웃에는 덧문이 없는 베이츠, 머치슨 등 면허 독점의 식료품 가게들이 있 었다. 그 가게들은 나무판자로 창살을 댔고, 문에는 맹꽁이 자물쇠를 채워놓았을 뿐이었다. 슬로거는 또 한 번 고함을 질렀다. "이렇게 질 수는 없어! 이 집 대신에 머치슨의 상점을 해치워 버리자!" 그는 문을 향해 돌진해서 육중한 다리를 번쩍 치켜들더니 자물쇠를 세게 차 단번에 망가뜨렸다. 동시에 누군가가 사람들 뒤에서 벽돌을 한 장 집어던지니 가게 유리창이 박살났다. 그것이 계기가 되었다. 유리가 와장창 부서지는 것이 약탈의 신호가 되었다. 그들은 문 쪽으로 와르르 밀려가 그 문을 때려부수고 상점 안으로 성난 파도 처럼 밀려들어갔다. 그들은 대부분이 술에 취해 있었고, 모두 몇 주일째 제대로 된 음식맛을 보지 못했다. 탤리 브라운은 햄을 한 덩어리 움켜잡더니 겨드랑이 에 끼었다. 리디 영감은 과일 통조림을 몇 개 잡았다. 슬로거는 킨치의 딸 앨리 스에게 가졌던 감상적인 동정심 따윈 싹 잊어버리고 맥주통 마개를 때려부쉈다. 부둣가에서 돌아오던 몇몇 아낙네들이 그 소란에 이끌려 모여들더니, 사내들 뒤 에서 밀고 들어와 손에 닿는 대로 무엇이든 쑤셔넣기 시작했다. 절인 생선, 소 스, 비누, 무엇이든 좀 좋다 싶은 건 모두 옷 속으로 집어넣었다. 아낙네들은 모 두 겁먹은 표정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정신없이 물건들을 집어 숄 아래에다 감추기에 바빴다. 바깥의 가로등이 차갑고 밝은 빛을 그들에게 던지고 있었다. 돈 궤짝을 생각해낸 것은 조 가울런이었다. 조에겐 음식같은 것은 필요 없었 다. 그는 늘 잘 먹었기 때문에 그런 것보다는 돈이 더 필요했다. 그는 팔과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면서 밀어닥치는 사내들의 다리 사이를 헤치 며 계산대 뒤로 기어들어갔다. 예상대로 그곳에 현금 상자가 있었다. 자물쇠가 채워있지 않았다! 늙은 머치슨이 부주의하게 그냥 가버린 것을 기뻐하면서 한 손을 미끄러운 돈 사발에다 집어넣어 그 속의 은전을 움켜잡았다. 한 움큼이 잡 혔다. 그는 그것을 호주머니 속에 슬쩍 집어넣었다. 그런 다음 일어서서 문을 빠 져나와 재빨리 도망쳤다. 조가 상점에서 나올 때 로버트가 안으로 들어왔다. 문턱에 멈추어 선 그의 긴 장한 얼굴 표정이 점차 절망으로 바뀌어갔다. "이 사람들이 뭘 하고 있는 거야?" 그의 어조는 탄식에 가까웠다. 이 어이없는 사태 앞에서 그는 망연자실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들이야! 정신을 차리라구!" 아무도 그를 돌아다보지 않았다.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만두라니까 이 병신들아, 너희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도둑 질이라구! 도둑질! 도둑놈을 동정할 사람들이 있을 줄 알아? 제발 그만들 두게, 그만들 두라니까?" 그러나 아무도 그의 절규에 가까운 외침을 듣는 사람은 없었다. 순간 로버트 는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지면서 사람들 속으로 헤치고 들어가려 했다. 그 순간 뒤에서 강렬한 빛이 비쳐 왔다. 휙 돌아서자 정면으로 빛을 받았다. 경찰이었다. 부두 구역을 담당하는 로덤 순경과 역파출소에서 나온 신임경사였다. "펜윅!" 로덤은 대번에 알아보고 로버트의 어깨를 붙들었다. 밝은 빛과 고함소리가 들리자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더 큰 고함소리가 났다. "경찰이닷! 도망쳐라, 모두들. 순경이닷!" 그러자 엉망으로 뒤엉켰던 사람들이 문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로덤과 경사는 아예 그들을 막을 생각이 없는 듯 멍청히 서 있었다. 오히려 그 떼거리들이 지 나가도록 길을 비켜주며 내버려두었다. 로버트만을 단단히 붙들고 있던 로덤 순 경은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 한 사람 또 있습니다, 경사님." 로덤은 갑작스럽게 득의에 차서 소리쳤다. 폐허처럼 어지러워진 상점 한가운 데 맥주통에 걸터앉은 슬로거 리밍이 건들건들 몸을 흔들고 있었다. 기분 좋은 듯 손가락으로 술통 마개의 구멍을 막고 있는 그는 주위의 일 같은 것은 안중에 없는 행복한 모습이었다. 경사는 천천히 슬로거와 상점을, 그 다음에는 로버트를 바라봤다. "이건 중대한 사건이다. 네가 펜윅이지? 이번 파업을 시작한 주모자지?" 로버트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말했다. "난 아무 짓도 안 했소." "물론 넌 아무 짓도 하지 않았겠지." 경사가 빈정거렸다. 로버트는 설명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갑자기 그 모든 것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는 슬로거와 함 께 유치장으로 순순히 끌려갔다. 7 닷새 후 오후 4시경, 조 가울런은 타인캐슬의 스코츠드 로를 따라 '셋방'이라 고 써붙인 유리창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걷고 있었다. 북쪽 지방의 멋스런 도 시 타인캐슬은 활기와 소음과 발랄한 잿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덜컹거리는 전 차소리와 사람들의 발자국소리, 조선소에서 울려퍼지는 해머 소리가 그를 아늑 히 휘말아 들이고 있었다. 조의 눈은 항상 그의 고향에서 불과 2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타인캐슬 쪽으로 향해 있었다. 그곳은 미래의 성공과 모험의 장소 였던 것이다. 조의 모습은 멋있었다. 곱슬머리를 얌전히 빗어 넘겼고, 눈이 부시 도록 반짝이는 구두와 경쾌한 차림새가 잘 어울렸다. 그러나 그는 지금 빈털터 리였다. 집에서 도망을 칠 때 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던 머치슨의 돈 궤짝에서 훔친 2파운드 상당의 은화는 생각보다 너무나 쉽게 사라져버렸다. 물론 그 동안 한껏 기분을 내기는 했다. 엠파이어 음악당에서 일반석에 앉아 음악감상도 해봤 고, 로우의 술집 등 평소에 궁금하게 여기던 여러 곳을 두루 구경도 했다. 맥주 와 담배, 매혹적인 푸른색 우편엽서를 사기도 했다. 결국 그의 마지막 6펜스는 세탁 비용과 구두 닦는 값으로 써버리고 이제 아담한 하숙을 구하고 있는 참이 었다. 그는 스코츠드 로를 내려가 우시장(牛市場)의 넓은 쇠창살 울타리와 컴버런드 공작의 저택을 지나 플러머 가와 엘스윅 동부 고갯마루도 지났다. 찌푸린 날씨 였지만 따뜻한 바람이 불어 거리는 쾌적했다. 아래쪽의 철로에서 진입해 들어오 는 열차가 거창한 기적소리를 내자, 타인 강에서 밧줄에 끌려 바다로 나가는 기 선의 둔탁한 기적소리가 대답이라도 하듯 길게 울려 퍼졌다. 조는 이 모든 것이 그저 경쾌해 보였고, 자신을 축복해주는 손길 같았다. 세상이 마치 자기 발 밑에 놓인 축구공과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무엇이라도 가능할 것 같은 자신감이 넘 쳐 흘렀다. 조는 플러머 가를 지나 '하숙. 침대 있음. 남자에 한함'이라는 간판이 붙은 집 앞에서 발을 멈췄다. 그는 잠깐 동안 그 집을 바라보며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곱슬머리를 가볍게 내흔들고는 계속해서 어슬렁거리며 걸어갔다. 조금 후에 뒤 에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던 한 아가씨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스치면서 지났 다. 순간 조의 눈이 빛났다. 그의 온몸은 굳어졌다. 그녀는 정말로 깔끔하고 귀 여운 아가씨였다. 쭉 뻗은 다리와 가냘픈 몸매를 지닌 그녀는 마치 여왕처럼 머 리를 치켜들고 걸어가고 있었다. 조는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녀는 경쾌한 걸음으로 길을 건너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더니 스코츠드의 117 번지 A호의 집 안으로 쑥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얼이 빠진 조는 발걸음을 멈 춘 채 마른 입술에 침을 축였다. 그런데 스코츠드 로 117번지 A호의 창문에는 '셋방'이라고 쓴 종이가 붙어 있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이젠 된 거야!" 조는 환호성을 올렸다. 그는 윗저고리의 단추를 채우고 서슴없이 길을 건너 그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문간에 나온 사람은 바로 그 소녀였다. 지금은 모자를 벗고 있어서 더욱 다정 한 느낌이 들고 한층 예뻐 보였다. 열여섯쯤 되어 보이는데 조그마한 코에 맑은 잿빛 눈과 백랍같이 새하얀 얼굴은 방금 길을 걸어온 탓인지 싱싱한 생기가 감 돌았다. 그녀의 귀는 매우 작았고, 양 옆에 딱 붙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입이 제 일 예뻤다. 그녀의 입은 큰 편으로 진한 빨간색은 아니었지만 윗입술의 매혹적 인 얇은 피막이 매우 보드라워 보였다. "무슨 일이신가요?" 그녀는 날카롭게 물었다. 조는 겸손한 미소를 띠며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모 자를 벗어 두 손에 들었다. 이 정도면 조보다 더 소박한 인간성을 내보일 사람 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지금 그는 그것을 계산하면서 하나하나 자신의 행동을 연출해 나갔다. "실례합니다, 아가씨. 하숙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그녀는 미소를 보여주지 않았다. 불쾌하다는 듯 그를 훑어보았다. 이 제니 선 리라는 아가씨는 어미니가 하숙을 치는 것을 싫어하고 있었다. 하숙이라는 것은 천하게 여겼고, 제니는 천하다는 것을 가장 끔찍한 것, 죄악이라고까지 생각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그녀는 팔장을 끼더니 약간 거만하게 말했다. "하여간 들어오시긴 하세요." 그녀가 재빨리 몸을 돌리는 뒤를 따라 그는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집 안 에 비둘기가 있는 듯한 냄새와 소리를 느꼈다. 구구 구구 구구! 그는 눈을 들었 다. 비둘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2층 계단 중간에 있는 욕실 문이 활짝 열 려 있어, 줄에 널린 세탁물이 보였다. 길고 검은 양말과 흰 옷가지 몇 벌이었다. 조는 그 세탁물이 이 아가씨 것임을 느꼈으나 얼른 점잖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 는 활짝 열린 그 문을 보자 얼굴이 새빨개졌고 말투가 더 퉁명스러워졌다. "자, 이 방이에요. 이렇게 으슥한 골방인데도 괜찮으시다면…." 방은 좁고 몹시 더러웠다. 한번 슬쩍 둘러보기만 해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곳을 거쳐갔는지 금방 알 수 있는 형편없는 방인데다, 안에 말털을 넣은 낡은 의자, 싸구려 잡지, 휘들리 만의 토산물, 비둘기의 모이자루 따위가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어 더 불쾌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청색 체크 무늬의 두 마리 전서(傳 書) 비둘기가 벽난로 선반 위에 근엄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또 누군가가 있었다. 벌겋게 타는 난로 옆에서 삐걱거리는 의자에 점잖게 앉아 몸을 흔들며 무슨 책인가 읽고 있는 여자였다. 그녀는 눈이 크고 숱이 많은 머리칼을 머리 꼭대기에다 둘둘 말아 올린, 게으르고 깨끗지 못한 인상을 풍기는 사람이었다. 소녀는 그 여인에게 소리를 지르다시피 말했다. "엄마, 방이 필요하다고 온 분이에요." 이 말로 그녀는 자신이 할 일은 끝났다는 듯이 낡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더니 잡지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선리 부인은 기분이 좋은 듯이 의자를 계속 흔들어댔다. 최후의 심판과 같은 대소동이라도 일어나기 전까지는 움직이고 싶지 않다는 듯 편안한고 태평스러운 얼굴이었다. 애더 선리는 언제나 신발을 벗는다든가, 콜셋을 늦춘다든가, 빵반죽 에 넣을 소다를 조금 먹어 방귀를 뀐다든가, 차를 한 잔 마시거나 또는 조금 앉 아 쉰다든가, 주전자 물이 끓을 때까지 신문을 읽는다든가 하면서 되도록 편안 하게 생활하였다. 덕택에 애더는 지나칠 정도로 살이 쪘고, 다정스러운 얼굴은 꿈이라도 꾸고 있는 듯 늘 멍한 표정만 보이는 게으름뱅이였다. 때로는 남편에 게 바가지를 긁는 일도 있지만 대개는 그저 태평스럽게 살고 있었다. 그녀는 자 가가 젊었을 때 훌륭한 저택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고 항상 주장했다. 그녀는 상 당히 낭만적이며 초승달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미신을 믿는 탓에 초록빛 옷을 절대로 입지 않았고, 사다리 밑으로는 지나가지 않았으며, 쏟아진 소금은 왼쪽 어깨 너머로 내버렸다. 그녀는 재미있는 소설, 특히 살갗이 검은 얌 전한 여인이 결국에는 '남자를 얻게 된다'는 종류의 소설을 좋아했다. 그녀는 부 자가 되고 싶어했다. 오행 희시(五行戱詩)를 지어 현상에 응모해서 막대한 상금 을 타리라는 희망을 항상 갖고 있었다. 그녀는 흔히 어처구니없는 착상을 하기 때문에 가족들은 '엄마의 머리가 변덕의 파도를 탔다.'며 그 착상들을 비꼬곤 했 는데, 이를테면 방의 벽지를 바꿔버린다든가, 소파 커버를 멋있는 핑크색 벨벳 천으로 새로 한다든가, 목욕탕에 에나멜을 다시 칠한다든가, 또는 시골로 내려가 서 살겠다든가, 호텔이나 리본 상점을 개시해보겠다든가, 또는 소설을 한번 써보 겠다는 등등의 착상들이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이른바 문학에 천부적 소질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다만 그 멋있는 착상이 하나도 결실을 맺은 적 이 없었다. 그녀는 흔들의자에서 멀리 떨어지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편 앨프는 가끔 온화한 말로 "여보, 당신은 약간 이상한 데가 있어!" 하고 말하곤 했지만 그뿐이었다. "아, 그래요!" 그녀는 그제야 겨우 사태를 알아차린 듯 생기 있게 말했다. "난 또 클럽의 사람이 오신 줄 알았지."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그녀는 "그러나까, 방을 구하시려는 것이군요?" 하면서 조를 바라다보았다. "네, 아주머니, 그렇습니다." "우리는 젊은 분 한 분만 세들일 작정이에요." 애더는 처음 사람들을 만날 때 항상 조금 뽐내는 체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를 못했다. "먼저 사람은 일 주일 전에 나가버렸어요. 댁은 역시 하숙을 원하시나요?" "네, 아주머니, 수고스럽지만 않으시다면." "우리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셔야 해요. 우리는 모두 여섯 식구예요. 나와 주인 과 저기 있는 제니와. 저 애는 슬래터리 상점에 다니고 있어요. 그리고 필리스, 클래리스, 샐리인데 샐리는 우리 집 막내지요." 말을 끝낸 그녀는 이번에는 그를 자세히 살펴보며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어디 출신인가요?" 조는 눈길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사실은 재미로 아름다운 아가씨 뒤를 따라와 장난으로 말을 걸어본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고 보니 그냥 되돌아 나갈 수는 없게 된 것이다. 제니는 정말 아름다운 아가씨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도 대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한단 말인가! 멋있는 거짓말을 꾸며댈 수도 었겠지만 금세 탄로날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들고 올 짐도, 또 선금을 치 를 돈 한 푼도 없는 형편이다. 젠장! 그는 식은 땀을 흘렸다. 절망스러웠다. 그 순간 갑자기 하나의 영감이 떠올랐다. 사실 그대로 말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아, 바로 그것이다. 그는 환해진 얼굴로 애더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정직한 사람이 부끄러운 사실을 고백할 때 흔히 쓰는 수줍음이 넘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주머니, 정직하게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아주머니의 선한 모습을 뵈니 말씀 드릴 용기가 생겼습니다만, 전 집을 몰래 도망 쳐 나온 길입니다." "아니, 그럴 수가 있어요?" 그녀의 손에서 잡지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흔들의자의 동작도 멈췄다. 제니의 무관심하던 시선도 일순간에 호기심으로 가득 차서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 다. "전 불행한 사람입니다. 더 이상 고생을 참아낼 수가 없었던 겁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탄광의 파업 소식을 알고 계시겠지만 먹을 것이 없어서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학대를 견뎌낼 재주가 없었습니다. 아버 지는 가죽혁대로 일어날 수도 없을 정도로 저를 때리는 겁니다. 이유도 없지요." 조의 눈에는 억제된 슬픔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는 두여인의 감정 변화를 예 민하게 살피면서 낮은 소리로 한숨을 내뱉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거로군...." 애더의 인정 어린 말에 맞추어 조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해서 중 요한 첫 대면의 인사가 멋있게 이루어졌다. 애더는 이 잘생긴 청년에 대해 뜨거운 동정심이 솟아나는 것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 그렇게 고생을 하다니...그러나 방값이라는 현실적 인 문제가 떠오르니 뜨겁게 솟구치던 동정심이 금새 가라앉아 버렸다. 더군다나 그 방세는 샐리의 음악공부를 위한 중요한 것이다. 애더는 다시 의자를 흔들기 시작했다. 애더 선리는 게을렀지만 둔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하나...형편은 딱하지만 당신을 그냥 받아드릴 수는 없는 일 이에요. 직업이라도 있어야지요. 아, 이렇게 하면 좋겠군요. 아까도 우리 집주인 이 얘기하던데, 이곳 밀링튼 얘로우 주물공장에서 사람을 찾고 있대요. 플래트 골목 쪽에 있으니 어서 가보세요. 그리고 잘 되시거든 다시 찾아오세요. 잘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찾으시도록 하구요." "알겠습니다, 아주머니." 조는 그 집을 나올 때까지 성실한 태도를 조심스럽게 지켰다. 그러나 밖으로 나오자마자 너무 좋아서 공이 튕기듯 팔딱팔딱 뛰면서 길을 건넜다. 그러고는 골목을 기웃거리다가 지나가는 아이의 손목을 덥썩 쥐었다. "잠깐, 말 좀 물어보자. 밀링튼 얘로우 주물공장으로 가는 길이 도대체 어디 붙었냐?" 그는 아이가 가르쳐준 얘로우까지 계속해서 달렸다. 가깝지 않은 거리였다. 주 물공장에 도착해서는 노동으로 단련된 팔뚝을 내보이면서 되는대로 거짓말을 늘 어놓았다. 그러나 그럴 필요도 없었다. 공장에서는 일손이 급했으므로 그는 운 좋게 주급 25실링의 조건으로 연철공 조수로 채용되었다. 탄광에 비하면 급료도 좋은 편이고 일도 차차 배우면 힘들 것이 없었다. 그리고 제니, 제니, 제니와 한 집에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발걸음도 가볍게 스코츠드 로로 돌아왔다.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모든 것을 잘 해내야 한다고 자신에게 단단히 일렀다. 그 집에서는 식구들이 모두 모여서 저녁식사를 끝내가고 있었다. 애더는 식탁 의 윗자리에 힘겹게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제니가 앉아 있었다. 그 다음에는 세 사람의 여동생들이 앉아 있었다. 어머니와 꼭 닮은 필리스는 금발에 기운이 없어 보이는 열세 살짜리였고, 머리칼이 까맣고 다리가 긴 클래리는 열한 살이 조금 지난 아이였는데 제니의 초콜릿 상자 속에서 꺼낸 새빨간 리본을 머리에 매고 있었다. 열 살인 막내딸 샐리는 조금 남다른 데가 있는 아이였다. 적의에 찬 검은 눈으로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버릇이 있었다. 식탁 맨끝에는 애더 의 남편인 앨프레드가 앉아 있었다. 네 딸의 아버지고 집안의 가장이었지만 축 늘어진 어깨와 드문드문 적황색의 염소 수염이 돋아 나 있는, 별로 눈에 띠지 않는 안색이 나쁜 사나이였다. 거기다 급성 경직증으로 목덜미는 굳어 있었고 칼라도 없는 옷에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고 있었는데, 그것도 병인 것 같았다. 앨 프는 페인트공 이었다. 이 타인캐슬의 집집마다 다니며 페인트를 칠하는 동안 상당량의 납독을 마신 탓으로 그는 폐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가 마신 납독은 얼굴을 창백하게 만들고 위장에 오는 갖가지의 통증과 아울러 잇몸에까지 희미 한 청색 줄무늬가 나타나게 했다. 그러나 목에 생긴 급성 경직증은 페인트칠을 하는 일 때문에 나타난 게 아니고 비둘기 때문이었다. 앨프는 비둘기를 무척 좋 아해 기르고 있었다. 그는 모든 정열을 푸르고 붉은 체크 무늬 비둘기와 전서 비둘기에게 쏟았다. 그 가운데에서도 영광스럽게 입상까지 했던 전서 비둘기에 게는 더욱 지극했다. 전서 비둘기를 날려보내고 비둘기가 창공을 날아다니는 것 을 보고 있는 동안, 앨프의 목은 이같이 괴상하게 굳어진 모양이 되고 말았다. 조는 식구들을 둘러보며 기쁨에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주물공장에 취직이 되었습니다. 내일부터 출근입니다. 주급 25실링을 받기로 했지요." 제니는 아까의 일은 모두 잊어버렸다는 듯 차가운 표정으로 쳐다보지도 않았 으나 애더만은 기쁜 표정으로 그를 맞아주었다. "그것 봐요. 내가 그러지 않습디까? 하숙비는 일 주일에 15실링이면 돼요. 그 러니 10 실링은 고스란히 남는 거예요. 그것도 당분간이예요. 왜냐하면 급료는 또 오를 테니까요. 연철공은 수입이 좋거든요" 그녀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살짝 하품을 하고 나서, 지저분한 식탁을 대강 치워 자리 하나를 마련했다. "이리 앉으세요. 클래리, 컵 하나와 접시 좀 가져올래? 그리고 심부름 좀 해주 렴. 그레슬리 아줌마 가게에 달려가서 3페니짜리 옥수수가 든 햄을 사가지고 오 너라. 아줌마가 저울에 달 때 저울눈을 잘 들여다보는 것 잊지 말고. 첫 식탁이 니까 더 잘해 드려야지 않겠니? 여보, 이 청년이 저 골방에 새를 들게 된 조 가 울런 씨예요." 앨프는 홍차에다 담갔던 마지막 빵을 천천히 씹다가 조에게 고개를 끄덕해 보 였다. 간략한 인사였으나 그 모습에서는 환영한다는 친절한 마음이 느껴졌다. 클 래리는 새로 씻은 컵과 접시를 가지고 들어오며 문을 조심성 없이 쾅 닫았다. 잉크색 같은 차가 부어지고 옥수수가 박힌 햄이 빵 반 개와 함께 나오자 앨프는 점잖게 겨자병을 밀어 보내주었다. 조는 제니 옆 말털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 옆에 있게 되도록 자신이 얼 마나 멋지게 일처리를 해냈는가 생각하니 마치 술취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녀는 멋있었다. 이렇게 쉽게, 이렇게 빨리 자기의 바람이 이루어졌던 때는 지금 까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그들 가족의 마음을 사로잡고 기쁘게 해줄 계획을 마음속에 세웠다. 물론 제니를 그렇게 하려는 것은 아니다. 추호도 그런것은 아 니다. 조는 그보다 더 좋은 몇 가지의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미소지었다. 그 의 확 트인 선량한 마음을 보여주는 미소를. 그는 이야기도 꽤 많이 했다. 상냥 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면서 그의 과거와 연결시킨 일화도 그럴듯하게 꾸며 댔다. 그는 애더를 추켜올렸고 아이들에겐 농담을 걸면서 웃겼다. 그는 언젠가 소년 금주대(禁酒隊) 주최의 연예회에서 들은 멋있는 옛날 이야기까지 해주었다. 그는 소년 금주대 같은 것엔 가입하진 않았지만 연예회가 열리기 전날 밤에 그 모임에 입회해서 그 다음날 아침엔 이미 그 경건한 운동에서 탈퇴했던 것이다. 그가 한 이야기는 매우 효과가 있었다. 다만 샐리는 여전히 경멸하는 듯한 태도 였고, 제니도 그 오만한 태도로 미루어 조금도 감동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재미있어 했고, 애더는 두 손으로 뚱뚱한 옆배를 누르며 깔깔거리며 웃어대느라고 머리에 잔뜩 꽂혀 있던 머리핀을 떨어 뜨리기까지 했다. "그래서 보운즈는 청미래덩굴 속에서 수레국화를 발견했단 말인가...아이, 차암, 가울런 씨도...." "아, 참, 저를 조라고 불러주세요, 선리 부인. 저를 가족처럼 대해주십시오, 아 주머니." 조는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것이 아주 쉬운 일로 여겨졌다. 그리고 그 런 생각은 그로 하여금 다시 술취한 듯한 흥분을 느끼게 했다. 바로 이런 식으 로 하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것은 손아귀에 꽉 움켜쥐고 얼마든지 기름을 짜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미 그런 일에 착수했으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니 모든 것을 다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는 다만 기다리는 것이 필요할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앨프는 조에게 비둘기 모이를 먹이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두 사람은 마 당으로 나갔다. 진주빛 비둘기가 부리로 날개를 다듬으며, 앨프가 손수 만든 비 둘기 집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넣었다 하면서 묘하게 곡식의 낟알을 쪼아먹었다. 자기 아내 앞에서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아무런 말도 없고 유순하던 그였지 만, 일단 그녀 앞을 떠나면 금새 영웅같은 기분이 드는 모양이었다. 비둘기만이 아니고 맥주나 애국주의, 그리고 더비의 스피어민트에 대한 예상 등에 대해서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는 듯 열심히 이야기하였다. 그는 조에게 호감을 느낀 듯 다 정하게 담배를 권했다. 그러나 조는 제니 옆으로 가고 싶은 마음에 안달이 나고 속이 탔다. 담배를 다 피웠을 때 그는 구실을 만들어 집 안으로 얼른 들어와 버 렸다. 제니는 뒷방에 혼자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아까 보던 그 잡지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조는 용기를 내었다. "제가 쓸 방이 어딘지 안내해주시겠습니까?" 그녀는 우아한 모습으로 얼굴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보고 있는 잡 지를 놓고 싶은 생각이 없는 듯 쌀쌀하게 말했다. "누군가 안내할 사람이 올 테니까 조금 기다리시죠." "아, 그렇군요." 그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은 휴일이나 다름없는 날인데...산보 같은 것도 나가지 않으시군요."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끈기 있게 다시 말했다. "어떤 상점에서 일하신다고 하셨나요?" 그는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일하고 있다는 슬래터리 상점을. 그 상점이 그레인저 가에 있는 윈도가 화려한 부인복점이라는 것까지 기억에 떠올렸다. 그녀는 약간 귀찮아하는 표정으로 그러나 예의상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는 듯 이 말했다. "제가 어디에 다니든 댁이 무슨 상관이 있나요?" 그러고는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듯 책을 덮으며 야 무지게 말을 이었다. "그건 댁과 상관없는 일이니 더 이상 묻지 마세요. 그리고 일한다는 그 표현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해두겠는데요... 나는 물건을 파는 일을 하는게 아녜요. 그런 말이나 표현은 아주 천한 것이고, 난 그런 고상하지 못한 말은 아주 싫어해요. 나는 슬래터리 상점의 부인 모자부에 근무하고 있어요. 아주 고상한 직업이예요. 난 무엇이든 천하고 저질스러운 것은 아주 혐오해요. 더럽고 냄새나는 일을 하 는 남자를 특히 제일 싫어한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해요." 그러더니 이번에는 잡지를 들어 얼굴을 가려버리는 것이었다. 조는 심한 모욕 을 당한 것이 분명했으나 그저 턱을 한번 문지르는 것으로 끝내고는 집요한 시 선을 그녀에게서 떼지 않았다. '뭐 더러운 일을 하는 남자를 싫어한다고? 웃기지 마! 얼마 안가서 넌 분명히 나를 좋아하게 될 테니까!' 8 마사가 가장 견디지 못하는 것이 모욕을 당하는 것이었다. 평생동안 그런 일 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 했었다. 꿈에도. 그것은 너무나 끔찍한 일이 었다. 부엌에서 일을 하는 동안 감자를 포크로 찍어 맛보기도 하고 냄비 뚜껑을 열고 스튜가 잘 익었는가를 보면서 그녀는 그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사 레드패드 라는 사람이 이런 일에 부닥치게 되었다는 생각과 헛되게 싸우며 마음속에서 그 생각을 몰아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실제로 레드패드 집안은 대대로 의젓 한 가문으로서, 점잖은 감리교회 신자들로 이루어진 광부들이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4대 선조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샅샅이 훑어보았지만 그의 가계에는 오점 하나 찾을 수 없었다. 집안 사람들은 모두가 훌륭한 광부로 일했고 점잖게 살았 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그녀는 이제 레드패드 집안 사람이 아니고 펜윅의 아내였다. 그런데 로버트 펜윅이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녀의 얼굴이 실룩하면서 경련을 일으켰다. 교도소가 다 뭐란 말인가. 그때의 광경을 생각만 해도 마음에서는 새로운 분노의 불길이 다시 타오르는 것이었다. 그때 로버트는 리밍과 함께 피고석에 서 있었다. 하고많은 사람 가운데 하필이 면 리밍과 함께일 게 뭐란 말인가? 배심석에는 제임스 래미지가 거칠고 뻘건 얼 굴로 마구 뽐내면서, 워낙 점잖은 말이란 걸 알지도 해본 적도 없는 그인지라 생각나는 대로 지껄여대고 있었다. 그녀는 법정에 누가 오라고 한 것도 아니었 지만 가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재판에 참석해서 모든 것 을 보고 들었다. 벌금 없는 3주일의 실형이었다. 그녀는 로버트가 선고를 받았을 때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녀는 죽었으면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자존 심이 그녀를 지탱해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무서운 3주동안의 나날들을 자존심으 로 버텼다. 오늘 오후 슬로거 리밍의 아내가 시내에서 전갈을 가지고 와, 앨머 길모퉁이에서 자신을 기다렸다가 동정 어린 목소리로 남편들이 토요일에 출감한 다고 말해줬을 때도 그녀를 쓰러지지 않도록 붙들어준 것은 자존심이었다. 그녀 들의 남편들이 출감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샘이 제일 먼저 자신을 위해서 전당포에서 찾아온 그 대리석 시계를 바라봤다. 그녀는 난로 앞에다 함석 목욕통을 꺼내놓고 세탁장에서 뜨거운 물을 가지고 와 채웠다. 그녀는 쇠솥을 이용해 물을 퍼냈으므로 그 무서운 것을 들고 왔다갔다하자니 몹시 힘이 들었다. 요즘 그녀는 정말 기분이 좋지 못했다. 그녀 는 자기가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지금도 자기 몸이 몹시 허약해 져서 휘청거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통증이었다. 옆구리가 결리는 것을 가라 앉히려고 한동안 일을 멈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음의 걱정 때문에 더 그렇다 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원래 튼튼한 그녀는 뱃속의 아기가 살아 있다는 징후를 보이기만 해준대도 훨씬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았다. 그러나 태동이 전혀 없었고 다만 질질 끌리는 듯한 무거움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시계가 5시를 쳤다. 그러자 곧 피곤에 지친 사람들의 느릿한 발자국소리가 탄광촌 달동네를 울리기 시작했다. 이 탄층에서 저 탄층으로, 9시간 동안 일을 한 사람들이 이제 무거운 걸음걸이로 이 높은 달동네로 올라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일은 이미 그 들의 뼛골 속까지 파고든 훌륭하고도 떳떳한 일이었다. 그녀의 젊고 튼튼한 아 들들도 그 일을 천직으로 알고 일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그 외의 다른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녀가 생각에 빠져 있는데 문이 열리며 세 아이가 들어왔다. 휴이, 데이빗, 마지막으로 샘이 들어왔다. 그는 엄마가 불쏘시개로 쓸, 톱으로 자른 나무토막들 을 겨드랑이에 끼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샘, 언제나 엄마 생각을 해주는 아이. 그녀는 가슴속에 웅크린 냉기가 가시고 정다움의 따뜻한 훈기가 갑자기 확 일어 남을 느꼈다. 그녀는 갑자기 샘을 얼싸안고 엉엉 울고 싶었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이 며칠 동안 집안 분위기는 무거 웠다. 마사의 기분이 무거우니 아이들에게도 사나웠고 매사가 순조롭지 못했다. 그녀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이 자기의 얼굴 표정을 살피고 있다 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감정이 솟구치면 어 쩔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 돌아왔습니다." 샘이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얼굴에 땀이 흘러 검은 석탄가루가 과자가루 처럼 엉겨붙은 사이로 이를 하얗게 드러내며 유쾌한 듯 웃었다. 이 고장에서는 대개 어머니를 '어메'라고 부르는데, 샘이 자기를 어메라고 하 지 않고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목욕물 이 준비되어 있는 목욕통 쪽으로 고개만 까닥이고는 몸을 되돌려 식탁을 차렸 다. 방안에 어머니가 있었지만 세 아이들은 신발부터 누더기 같은 작업복까지 모두 벗어버렸다. 옷들은 물과 땀과 석탄가루로 완전히 젖어 있었다. 완전히 벌거숭이 가 된 세 아들들은 김이 솟는 조그마한 목욕통속에서 선 채로 몸을 씻었다. 몸 을 돌릴 만한 여지도 없는 목욕통이지만 언제나 그들은 정답게 목욕을 했다. 그 러나 오늘밤엔 소리 없이 끝냈다. 농담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샘조차도 오늘 은 조용했다. 다른 때보다 더 무거운 어머니의 표정때문이었다. 그들은 점잖게 옷을 입고 저녁상 앞에 앉았다. 맛있는 양파 스튜와 밀가루를 묻힌 감자가 곁들 여진 훌륭한 저녁식사였다. 마사의 음식 솜씨는 언제나 좋았다. 그녀는 남자들에 게 맛있는 음식이 얼마나 행복을 주는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그 몸 서리 나는 파업도 끝나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녀는 별로 먹 고 싶은 생각이 없어 차만 조금 마셨다. 그런데 차마저도 잘 넘어가 주지를 않 았다. 갑작스러운 통증이 등에서 시작하여 가슴 쪽으로 이어지며 숨이 콱콱 막 혀왔다. 그러다가도 또 거짓말처럼 말짱해졌다. 아이들은 저녁식사를 빨리 끝냈다. 데이빗이 제일 먼저 일어나 자기 책이 놓 여 있는 구석으로 갔다. 그는 난롯가에 놓인 낮은 걸상에 앉더니, 연필을 들고 무릎에 공책을 펴놓았다. 데이빗은 지금 라틴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 공부도 로버트 때문에 시작된 것이었다. 로버트는 데이빗이 내년 장학금 시험에 붙기만 하면 대학에 보낸다는 계획이었다. 로버트는 총명한 데이빗만은 공부를 해서 이 탄광촌을 벗어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준비로 베들 가의 야간 학교에 근무하는 카마이클 선생에게 데이빗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대로 광부 집안에서 태어나 이 직업에 대한 자부심마저 갖고 있는 마사는 로버트의 이러한 생각도 탐탁치 못했다. 계급의식이 철저한 그녀는 자기네 같은 부류의 인간들이 학문을 한다는 것을 멸시했고, 공부를 해도 별로 뾰족한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휴이가 일어나더니 세탁장으로 들어가 망치 하나와 구두 만드는 틀, 낡은 축 구화, 구두에 박는 못들을 가지고 나왔다. 그는 이 방 안에서 가장 구석진 안쪽 으로 들어가 웅크리고 앉아 아직 물기가 덜 말라 번들거리는 머리를 무릎 사이 로 구겨 박듯이 하고는, 그 낡은 구두에 징을 박기 시작했다. 그는 지난주 토요 일에 자신의 급료 가운데에서 6펜스를 제하고 내놓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어머니는 짐작했다. 축구공일 것이었다. 그는 단순히 축구를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렇다. 휴이는 단순히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휴이는 대 스타가 되고 싶은 것이다. 최우수 선수로 선발되어 큰 리그전을 뛰며 주당 6파 운드를 받는 스타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휴이의 유일한 비밀이고 야심이 었다. 그래서 그는 담배도 안 피우고, 일요일날 한 컵의 맥주를 즐기는 기쁨에서 도 빠지고 젊은 아가씨들과 사귀는 것도 삼갔다. 휴이에게 눈독을 들이는 아가 씨들도 꽤 있었지만 그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마사도 알고 있었 다. 그는 장래 축구선수로 대성하기 위한 준비로 달리기 연습을 줄기차게 하고 있었다. 피곤하건 피곤하지 않건 간에 그는 달리기 연습을 빼놓는 일이 없었다. 그는 오늘밤에도 신발수선이 끝나면 밖으로 뛰쳐나갈 것이 분명했다. 마사의 이마에 주름살이 더 깊어졌다. 휴이의 이러한 생활방식을 나쁘다고 보 지는 않는다. 다만 휴이에게서도 결국 스타가 되기를 바라는 그 이면에 탄광을 떠나고 싶어하는 강한 의지를 발견하기 때문에 한심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현실 적인 그녀는 휴이의 꿈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휴이의 지나친 열중과 몰입이 그녀를 걱정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마사의 시선은 샘에게로 향했다. 그는 아직 식탁에 앉은 채 포크로 식탁 위에 다가 무늬 같은 것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의 시선을 의식한 듯 겁먹은 얼굴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 어슬렁거리더 니 설거지대 위에 있는 조그맣고 네모난 거울 앞으로 갔다. 그리고 에나멜 칠을 한 비눗갑 뒤에 언제나 놓아두는 빗을 들고 물에 적셔서 조심스럽게 머리를 빗 어 넘겼다. 그러고 나서 그는 난롯가의 가로대에 걸어둔 깨끗한 칼라를 집어 들 었다. 마사가 아까막 풀을 먹여 다림질해 두었던 그 칼라를 달고, 넥타이도 다시 잘 메고 몸맵시를 단정히 했다. 그는 일부러 휘파람을 불며 모자를 쓰고 어머니 쪽은 못 본 체하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샘!" 문을 반쯤 나서려던 샘은 마치 총을 맞은 사람처럼 휙 돌아섰다. "어디 가니, 샘 ?" "그냥, 심심하니까 나가는 거죠, 뭐." 그는 미소를 띠어 보였지만, 그녀는 그것으로 기분이 부드러워지지 않았다. "나간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런데 어디로 갈 셈이냐?" "그냥 나가보는 거죠, 뭐." "부둣가 거리로 간다는 말이지?" 그는 돌아서서 어머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빨개지며 고집스런 모습으로 변했다. "그래요. 그 부둣가 거리로 갈 거예요, 어머니. 뭐 더 이야기해야 할게 있나 요?" 그녀는 자신의 생각이 맞다는 걸 알자 더 마음이 뒤틀렸다. 그곳에는 애니 메 이서 집이 있고 샘은 애니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마사는 메이서네 사람들을 아 주 싫어했다. 낭비벽이 심한 그 집 아버지로부터 난폭한 아들 플러그 메이서까 지 그 집안 식구들은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리밍 집안과 같은 부 류의 인간들로서 전혀 존경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광부도 아니고 불안정한 삶을 살고 있는 어부들로서 다른 사회에 속하는 인간들이었다. "낭비가 심하면 늘 가난뱅이일 수밖에 없지!"라고 마사가 말하는 걸 보여주듯이 그들은 한 달은 아주 사치스럽게 살다가도 그 다음달은 배나 어망까지 모두 저 당 잡히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애니는 나무랄 데 없는 아이였다. 동네에 서도 예의바른 소녀라고 칭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마사가 보기에 자기 아들 샘과는 어울리지 않는 아이였다. 가정의 혈통부터 다를 뿐 아니라 애니는 한길에서 생선장사를 하는가 하면 경기가 나쁜 해에는 야머스에 가서 청어 내장 을 빼는 일까지 했다. 자기의 귀여운 아들 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언젠가는 넵 튠 탄광에서 제일 가는 채탄부가 될 텐데...청어 내장이나 빼내는 계집아이와 결 혼하게 되다니, 천만에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밤엔 안 나가는 게 좋겠구나." "안 돼요, 어머니. 플러그 메이서와 밖에서 만나기로 이미 약속을 했어요. 물론 애니도 함께 올 거예요." "난 약속 따위는 모르겠다. 다만 오늘밤에는 나가지 말아달라는 것뿐이지." 마사는 정면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의 눈빛에 서 뜻밖에도 단호한 표정을 보았다. "애니가 기다리고 있어요, 어머니. 오늘밤에는 꼭 나가야 해요." 그는 나가면서 아주 조용히 문을 닫았다. 마사는 몸이 굳어진 사람처럼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샘은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마치 아들이 자기 얼굴을 후려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데이빗과 휴이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한 그녀는 자신을 억누르기 위하여 애를 썼다. 그녀는 일어서서 떨리는 손으로 식탁을 치 우고 그릇을 씻었다. 데이빗이 다가왔다. "엄마, 내가 설거지를 할까요?" 그녀는 말없이 머리만 내젓고는 혼자서 그릇을 닦아 챙겨 넣고 바느질감을 가 지고 의자에 앉았다. 겨우 바늘귀에다 실을 꿰었다. 그녀는 샘의 낡은 작업복 셔 츠를 집어 들었다. 그 옷은 너무도 누덕누덕 기워서 본래 천인 플란넬 바탕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낡은 셔츠를 바라보니 그녀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샘에게 너무 심하게 대했다는 후회 때문이었다. 더욱이 자기가 올바르게 대하지 못했으며 나쁜 쪽은 샘이 아니고 자기라는 걸 갑자기 느꼈다. 그러한 생 각이 그녀의 온 몸에서 뼛속까지 사무쳐오는 듯했다. 자기가 잘만 다루었다면 샘은 자기를 위해 무슨 일이든지, 정말 무슨 일이든지 다 해줄 아이였다. 눈물 때문에 흐려진 눈으로 셔츠를 집으려고 하는데 급작스레 다시 등의 통증 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통증이 너무 심해서 무엇으로 푹푹 쑤시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그녀는 '바로 이것이구나' 하고 느꼈다. 역시 예감대로였다. 통증은 사라 졌다가 다시 계속되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일어나서 부엌의 뒷문으로 해 서 밖으로 나갔다. 변소로 들어갔다. 그렇다. 역시 틀림이 없었다. 그녀는 변소에서 나와 한동안 나지막한 울타리에 기대 선 채 한 손으로 불룩 한 배를 잡고 고요한 밤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남편이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데 이렇게 되다니, 이처럼 창피스런 일이 있을까. 그리고 다 자란 아들들 앞에서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주위에 깔린 어둠처럼 아무도 알 수 없게 된다면, 하고 그 녀는 얼핏 생각했다. 스코트 의사도, 산파 리디 부인도 부르고 싶지 않았다. 로 버트가 미쳐서 저축했던 돈도 다 파업 자금으로 집어넣어 버려 이젠 돈도 없다. 그리고 빚을 지고 있는 형편인데 또 돈 드는 일을 할 수도 없다. 대번에 그녀는 마음을 다지며 결심했다. 그녀는 조용히 집안으로 들어왔다. "데이빗! 브레이스 부인에게 달려가서 빨리 좀 와달라고 해라." 데이빗은 깜짝 놀라며 어머니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언제나 아버 지 편인 데이빗은 어머니에 대해서는 좀 무관심한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 어머 니의 표정에는 그를 감동시키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녀는 다정스레 말했다. "염려 마라, 데이빗. 몸이 좀 불편할 뿐이야." 그가 뛰어나가자 그녀는 리넨 천을 넣어두고 상자 쪽으로 가서 자물쇠를 열었 다. 그러고는 힘들게 몸을 움직여 사다리를 올라가 2층 아들들의 방으로 갔다. 옆집의 브레이스 아주머니가 곧 달려왔다. 그녀는 뚱뚱해서 늘 숨이 가쁘게 쉬었으나 친절한 사람이었다. 뚱뚱한 모습이 꼭 임신한 여자처럼 보이나 본인의 말대로 탈장이었다. 남편인 해리는 크리스마스 때마다 탈장대를 사주겠다고 충 실하게 약속을 했지만, 지금까지 그 약속을 지킨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매 일 밤 자기 전에 그 불룩한 덩어리를 조심스레 잘 눌러서 제자리로 보내곤 하지 만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면 그것은 다시 불룩 나오곤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 제 탈장에 대해서 거의 애착하는 마음까지 갖게 되었고, 동네 사람들에게는 좋 은 화젯거리가 되어주곤 했다. 마치 날씨 이야기를 하듯이 자기의 탈장에 대해 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달려오느라고 더 숨이 가빠진 브레이스 아주머니는 2층으로 향한 사다리를 천천히 기어오르더니 방안으로 사라졌다. 데이빗과 휴이는 부엌에 앉아 있었다. 휴이는 그의 신발 수선을 중단하고는 신문을 열심히 읽는 체했다. 데이빗도 책을 들고 앉았으나 글씨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2층에서 소리 없이 전개되고 있는 일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찬 그들은 가끔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그들 눈에는 이상한 부끄러움이 서려 있었다. 브레이스 아주머니가 돌아다니는 무거운 발걸음 소리 외에는 침실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단 한 번 아주머니가 뜨거운 물이 담긴 솥을 달라고 아래층을 향해 소리쳐서 얼른 가져다주었으나 꼭 닫힌 문을 보았을 뿐이다. 샘은 10시에 돌아왔다.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는 틀림없이 무서운 꾸 지람을 들을 것을 생각하여 미리부터 긴장한 모습이었다. 걸핏하면 얼굴을 붉히 는 그인지라 그는 동생들의 이야기를 듣자, 이번에도 얼굴이 빨개지면서 자신의 무딤을 후회하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샘은 너무 마음이 고왔다. 그는 눈물이 글 썽이는 눈으로 천장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불쌍한 어머니!" 11시 20분 전, 브레이스 아주머니가 조그마한 신문지 뭉텅이를 들고 내려왔다. 그녀는 슬픔과 분노가 뒤엉킨 얼굴이었다. 설거지통에 피 묻은 손을 씻고 나더 니 냉수를 한 잔 마셨다. 그리고 샘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쁜 계집아인데 죽어 있었어. 사산인 거야. 이미 죽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어. 누구라도 마찬가지 였을거야. 아이는 내일 묻어야지...엄마에게 뜨 거운 코코아 한 잔을 갖다 드려라. 엄마의 건강은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차차 좋아질 테니까. 난 아저씨가 교대 조로 지금 들어가야 할 시간이라 빨리 가봐야겠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미소를 한번 띠어 보이고는 급히 밖으로 나갔다. 샘은 코코아를 만들어 위층으로 가지고 올라갔다. 그는 약 10분 정도 있다가 내려왔는데 얼굴이 흙빛으로 질린 채 이마에서는 비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사랑의 기쁨을 즐기다가 갑자기 죽음의 세계로 떨어진 기분이어서 도대체 어리 둥절하기만 했다. 데이빗이 형이 무엇인가 말해주기를 기다리는 얼굴로 쳐다보 고 있었다. 어머니는 편안하고 아무 일도 없다고 말해주기를 안타깝게 기다리는 얼굴이었지만 샘은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듯 눈길을 피했다. "당분간 여기서 자야겠다. 어머니 형편이 좋아질 때까지... 자 어서 자자." 이렇게 말한 샘은 먼저 자리에 누워버렸다. 다음날인 화요일 데이빗은 다른 두 형제보다 일찍 탄광에서 돌아왔다. 재수가 좋아서 탄차를 타고서 갱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는 어둠침침한 부엌으로 들 어갔다가 조리대 위에 놓여 있는 물체를 보았다. 죽은 아기의 시체였다. 그는 다 가가서 이상야릇한 공포와 경외심이 엇갈리는 마음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시 체는 아주 작았다. 두 손은 수련 꽃잎 정도의 크기였다. 가느다란 손가락엔 아직 손톱도 없었다. 얼굴도 그의 손바닥 안에 들어갈 정도였다. 말라빠진, 그러나 대 리석처럼 새하얀 모습은 이목구비가 정연했다. 파랗게 질린 입술은 죽은 것을 이상스레 생각하고 있는 듯 열려 있었다. 어머니를 간호해주러 아침부터 와 있 던 브레이스 아주머니가 친절하게 아기의 입관 준비를 해주었다. 그녀는 진짜 전문가다운 솜씨로 시체의 입과 콧구멍에 솜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아주 자랑스 러운 일이나 하고 있는 것처럼 등뒤에 서있는 데이빗에게 큰 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정말 잘생긴 아기야. 네 엄마는 아기를 쳐다보려고도 안 했어. 당연하지, 아이 구 불쌍한 것!" 데이빗은 그녀의 말이 들리지도 않았다. 속에서 거센 분노가 솟구쳐 올라오는 것을 겨우 참고 있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왜 엄마는 임신부로서 요구되는 영양 섭취와 건강 관리를 할 수 없었단 말인가? 왜 이 아기는 살아서 미소를 띠 며 젖을 빨지 못하는가? 그러한 의문들이 마음을 아프게 했고, 통렬한 분노를 일으켰다. 그러면서 웹트가 자기에게 먹을 것을 주었던 그때처럼 자기 존재의 내부에서 강한 충동이 깊고 고통스럽게 밀려왔다. 그는 다시 한번 자기 스스로 에게, 무엇이라고 뚜렷이 말은 할 수는 없지만 모든 정열을 다해서 맹세했다. 무 엇인가 해야겠다고... 무엇인가 꼭 해야겠다고.... 그러나 그는 그것이 무엇이며 또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멸시받고 무시당하는 불쌍한 인간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자신 안에 서 뚜렷이 느꼈다. 샘과 휴이가 함께 들어왔다. 그들도 그 아기를 바라봤다. 그들은 옷도 갈아입 지 못한 채 작업복 차림으로 브레이스 아주머니가 준비해놓은 기름에 튀긴 베이 컨을 먹었다. 맛이 달랐다. 감자는 덩어리져 있었고 여느 때처럼 구수한 맛을 찾 을 수 없었다. 목욕할 물도 충분치 못했다. 부엌은 난장판이었고 모든 것이 지저 분했다. 그들은 어머니의 존재와 그 편안함이 어떤 것인가를 새삼스럽게 느꼈다. 2층에 올라갔다 온 샘은 동생들의 얼굴을 슬쩍 훔쳐봤다. 그리고 어색한 목소 리로 말했다. "어머니는 장례 예절 따위는 필요 없다고 하셨다.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만 안 됐어. 어머니 얘기로는 돈 드는 일은 하지 않으시겠다는 거야." "하지만 형,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브레이스 아주머니에게 부탁해 보는 것이 좋겠어." 데이빗의 말에 따라 브레이스 아주머니가 마사를 설득하도록 불려왔다. 그러 나 그것도 소용이 없었다. 마사는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쇳덩이처럼 단 단하고 인정이라곤 조금도 느낄 수 없는 사람처럼 그저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원하지 않았던 아이, 그리고 이제는 아무것도 필요 없는 그 핏덩어리에게 새삼 무엇을 해준단 말인가! 또 장례식이라는 것이 꼭 법으로 요구되고 있는 것도 아 니다. 손재주가 좋은 휴이가 탄광에서 판자 조각을 얻어가다 관을 짰다. 그 관속에 깨끗한 백지를 깔고 아기 시체를 넣은 뒤 뚜껑을 닫고 그 위에 못질을 했다. 목요일 밤늦게 샘이 그 관을 메고 혼자 밖으로 나갔다. 그는 휴이와 데이빗이 함께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밖은 어둡고 바람이 세게 불고 있었다. 두 사람 은 그가 돌아올 때까지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샘은 돌아와서 간단히 얘기 해주었다. 애니의 큰오빠인 플러그 메이서에게 5실링을 빌려, 공동묘지 관리인 게디즈에게 주고 묘지 구석에다 그 아기를 묻도록 했다는 것이다. 데이빗은 자 주 그 작은 무덤을 생각했다. 그 무덤이 어느 곳인지 전혀 알 수 없었으나 빈민 묘지는 아니라고 샘이 말했기 때문에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금요일이 지나고 토요일이 왔다. 로버트가 석방되는 날이었다. 마사가 그 사건 을 치른 것은 월요일 밤이었으므로 마사도 일어날 수 있었다. 그녀는 일어나서 그가, 로버트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렸다. 로버트는 8시에 돌아왔다. 마사는 부엌에 혼자 있었으나 그가 너무도 조용히 들어왔기 때문에 그녀는 알아채질 못했다. 기침소리에 겨우 그녀는 그가 돌아왔 다는 걸 알았다. 난로 곁에서 몸을 굽히고 있던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은 서로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아무런 원망의 빛도 없이 담담했 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 어두운 분노가 타오르고 있는 걸 감출 수는 없었다. 둘 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소파 위에 모자를 던지고 지친 사람처럼 식 탁 앞에 앉았다. 그녀는 재빨리 화덕으로 가서 그가 오면 주려고 준비한 따끈따 끈한 음식들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로버트는 먹기 시작하였다. 가끔 그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봤다. 바라보는 그 눈빛에는 용서를 구하는 빛이 가득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요, 여보?" 순간 그녀는 새삼스러운 노여움으로 몸을 떨었다. "'여보'라고 부르지 말아요." 그는 흠칫 놀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제사 무슨 일이 있 었는지 알 것 같았다. 예감했던 불안이 날카로운 통증처럼 마음속을 꿰뚫고 지 나갔다. "아기는 뭐였소?" 그녀는 그가 늘 딸을 하나 원하던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더욱 괴롭히고 마음을 상하게 해주고 싶었다. 차가운 목소리로 똑똑히 말해주었다. "예쁜 딸이었다우. 나오자마자 땅속으로 들어가 버렸지만...." "그렇게 되었군. 고생이 많았소, 여보." 그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녀는 그의 음성이 부드럽고 다정할수록 더욱 강 한 분노가 치솟았다. 아무말도 없이 그녀는 식탁을 치우기 시작했으나 거친 그 녀의 손길에서 분노가 드러나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앞에 차를 내놓았다. 그러 면서 날카롭게 말했다. "내가 당신을 안 이후 해왔던 고생에 대해서 이젠 정말 진저리가 나요!" 그는 평화롭게 살고 싶었다. 그 동안 너무 몸과 마음이 시달렸다. 그런데 그녀 는 조금도 자기를 이해해주지 않으려 든다. 아, 가만히만 있어준대도 얼마나 좋 을까! 그도 견딜 수 없어 한마디했다. "그렇게 된 건 나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놈들 은 나를 잡아넣은 거요. 당신만은 나를 이해하리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겠어요?" 그녀는 허리에 한 손을 얹고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놈들은 파업 때문에 내게 칼을 꽂은 거야. 당신이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 데...." "어련하시겠수." 그녀는 노여움에 찬 싸늘한 비웃음을 날리며 말했다. 그녀의 비웃음이 로버트 의 피곤한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했단 말인가? 그 인간들 을 탄광 밖으로 끌고 나와 파업으로 이끈 것은 그 형편없는 스커퍼 플래츠 갱구 에서 일하는 것을 도와주려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새끼들은 자기를 웃음거리 로 만들고, 자기에게 침을 뱉었을 뿐 아니라 무고한 자기를 감옥으로까지 내몰 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지금까지 참아왔던 자기 운명에 대한 분노와 지 금 자기 앞에 서서 자기를 비웃는 여자에 대한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 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번쩍 치켜들어 그녀의 뺨을 때렸다. 마사는 물러서지 않 고 그 일격을 그대로 받았다. 그리고 말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내가 바랐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구요." 그는 마사보다 더 창백해진 얼굴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뱃속에서부터 울려 나오는 심한 기침이었다. 온몸이 찢어지는 것 만 같았다. 발작하듯 쏟아내던 기침이 겨우 멎었다. 머리를 숙이고 패잔병처럼 앉아 있던 그는 이윽고 일어나 옷을 벗고 부엌에 있는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로버트는 7시에 눈을 떴지만 오전 내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마 사는 일찍 일어나 교회에 갔다. 그녀는 베들 가 교인들의 경멸과 동정의 눈초리 를 모르는 체하고 교회로 들어갔다. 그녀의 내심에는 이렇게 함으로서 남편이 돌아왔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속셈이 있었다. 점심식사 때는 집안 분위기가 더욱 나빴다. 아들들은 부모의 노골적인 불화를 느끼자 식사들도 제대로 하지 않고 일어서 버렸다. 온 집안이 무거웠다. 식사 후에 로버트는 탄광으로 내려갔다. 그는 자신의 일자리가 없어졌으리라 고 생각했다. 그러나 파면은 아니었다. 그렇게 된 것은 광부대표 헤든과 노동조 합의 해리 뉴전트와의 우정 때문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를 파면시키면 노동조합이 가만있지 않을 것을 두려워해서 그를 살려둔 것이다. 그는 집으로 다시 돌아와 난롯가에 앉아 신문을 읽다가 말없이 잠자리에 들었 다. 다음날 아침 기상 나팔소리를 듣자 잠을 깬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갱 속으 로 내려가 일을 했다. 온종일 내내 마사는 가라앉지 않는 원통한 마음과 분노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 편의 귀가를 기다렸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그에게 앙갚음을 해야 한다는 소리 가 사그라질 줄을 몰랐다. 그녀는 화난 눈초리로 몇번이고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광부들의 무거운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문이 열리며 그가 들어 왔다. 온몸이 흠뻑 젖어 있는 그는 몹시 지쳐 보였다. 그걸 보자 어떻게 하면 그 를 깊이 상처내는 말을 해서 그를 화나게 만들까 하던 생각이 단번에 사라져버 렸다. "일하기가 더 힘듭디까?"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먼저 묻고 말았다. 그는 식탁에 기대어 기침을 참으면 서 겨우 대답했다. "새끼들은 트집만 잡으려 드는 거야. 나는 블랙 리스트에 올라버렸거든... 그러 니 제일 나쁜 장소만 걸리게 마련이지. 암반 밑에서 내내 물 속에서 배를 깔고 일해야 했다구." 이번에는 그가 가엾다는 생각이 그녀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 고통과 함께 이 미 다 사그라졌다고 생각했던 어떤 뜨거운 감정이 그녀의 내부로부터 솟구쳐왔 다. 그녀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로버트, 가만히 있어요. 내가 옷을 벗겨줄게요." 마사는 그의 더러워진 젖은 옷을 벗겨주고, 더운 물로 몸을 씻는 것을 도와주 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9 데이빗은 땅 밑 약 150미터, 주갱도(主坑道)에서 3.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곳은 파라다이스 탄광 안의 파라다이스 믹슨이라는 곳으로 넵 튠 탄광 안에서 가장 낮은 밑바닥이었다. 그곳에서 60미터 위에는 또 다른 갱구 인 제5갱구가 있다. 그는 시계가 없었지만 점심시간이 된 것을 알았으므로 조랑 말 디크 옆 승강구에 서 있었다. 그곳은 그가 운반해온 탄차들이 자동 운반기에 연결되어, 파라다이스 운반로를 통해 밖으로 끌려나가도록 기계장치가 되어 있 었다. 그는 탤리 브라운이 빈 탄차를 내리고 탄가루가 채워진 탄차를 연결시키 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파라다이스 갱구는 아주 싫었지만 그 승강구만큼은 좋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마차를 몰고 달려와 그 승강구에 도착하면 시원한 바 람이 맞아주었고, 머리를 부딪힐 염려도 없이 꼿꼿하게 바로 설 수가 있었다. 데이빗은 오늘 특히 기분이 좋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이 그가 이곳에서 일 하는 마지막 날이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도 이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운 좋 게 이곳을 빠져나갈 수가 있다니.... 그는 유난히 탄광을 싫어했다. 어떤 젊은이들은 탄광일을 좋아해서 열심히 일 에 달라붙어 지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조건 이 일이 싫었다. 아마 그의 상상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갱 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이 조그만 구멍 속에 갖혀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에 떨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 불안을 떨 쳐버리기 위해서 그는, 장학금을 꼭 탈 수 있도록 하라고 늘 용기를 주는 국민 학교 때 선생님 카마이클이 가르켜준 방법을 떠올리곤 했다. 그는 땅속 깊이 내 려가면서 불안할 때는 태양이 빛나고 바람이 불며, 온갖 새들이 지저귀는 땅 위 의 아름다움 풍경을 생각하면서 두려움을 잊으라고 했다. 그는 그 동안 이 일에 지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싸웠다. 지쳐서 될 대로 되라 는 식으로 이 일 속에 파묻히게 되지 않도록 그는 완강히 버텨왔다. 이런 곳에 평생을 묻혀버리게 된다면 죽어버리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는 자신을 채찍질해왔다. 그러므로 이곳을 떠나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몰랐다. 이 탄광이라는 곳은 누구든지 잡히지만 하면 꼼짝하지 못하게 된다는 어리석은 생각 때문에 그는 더욱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에 사로잡혀 있었다. 고참 광부들이 농담으로 한 말을 그는 믿고 있었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 데이빗은 혼자 웃었다. '그건 농담이었어. 그래, 농담을 하는 것을 나는 정말로 알아들었던 거야.' 탤리가 빈 탄차를 다 바꾸었다. 데이빗은 넉 대를 한 줄로 연결하고는 그 한 칸에 뛰어올랐다. 조랑말 딕크에게 신호를 보내고는 캄캄한 경사를 내려가기 시 작했다. 속력을 내자 탄차는 요란스럽게 덜커덩거리며 철길 위를 달렸다. 데이빗 은 탄차를 빨리 모는 것이 자랑이었다. 파라다이스 탄광 마차 운반부 중에서 그 가 가장 빨리 탄차를 몰았다. 이제는 탄차끼리 서로 부딪히는 소리에도 익숙해 져서 그 요란한 소음도 아무렇지 않았다. 다만 그가 염려하는 것은 탄차가 탈선 했을 때의 어려움이었다. 그 무거운 탄차를 다시 철길 위에 올려놓으려면 거의 죽을 지경으로 지쳐버리곤 했다. 그는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면서 목을 움츠려야 할 때와 커브 반대쪽으로 체중 을 기울여야 하는 때를 다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몸의 평형을 취하고 차를 조 종하면서 놀랄 만한 속력으로 쏜살같이 내려갔다. 그것은 몹시 위험하고 무모한 짓이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빨리 차를 몰아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나 주의를 주 었지만 데이빗은 그 아슬아슬한 느낌이 좋았다. 그는 운반부들이 모여있는 곳에 이르러 멋있게 한 번 덜커덩하는 소리를 내고는 탄차를 멈추었다. 바로 그곳에서는 데이빗이 생각했던 대로 네드 소프틀리와 톰 리디가 비상구 안에 웅크리고 앉아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이 녀석 왔구나. 어서 와서 점심 먹어라." 톰이 입 속 가득 빵과 치즈를 문 채 소리쳤다. 그리고 비상구 안쪽으로 몸을 움직여 그가 앉을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데이빗은 톰을 좋아했다. 몸집이 크고 사람 좋게 생긴 그는 조 대신에 저탄장에서 온 청년이었다. 조가 아무 말도 없 이 없어진 뒤로 데이빗은 가끔 '조는 어디로 갔을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 까?' 하고 생각은 했지만 섭섭하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그것은 톰 리디 를 더 좋아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톰은 조보다 훨씬 더 기분 좋게 탈선 한 탄차를 도와주었고 쓸데없는 소리를 별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데이빗은 이 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오늘만은 갱 속으로 들어가야 해, 톰." 데이빗은 오늘은 아버지와 함께 도시락을 먹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탄을 캐는 현장으로 가는 경사길은 천장이 아주 얕아 머리를 깊숙이 숙여야 했다. 또 어둡 기는 왜 그렇게 어두운지 그을음이 심한 작은 등불을 들고 가기가 너무 힘든데 다가 바닥은 물이 고여 있어 물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단단한 현무암에 몇 번 이나 머리를 부딪쳤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채탄장에 겨우 도착했을 때 아버지와 슬로거는 아직도 톰과 네드가 곧 담으러 올 석탄을 캐내고 있었다. 신발에다 작업복 바지만 입고 웃통을 벗어젖힌 두 사 람은 석탄 가장자리의 탄주(炭柱)를 파내는 중이었다. 데이빗은 이곳이 아주 지 독한 곳으로 일하기가 가장 힘든 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물기가 없는 곳을 골라 그곳에 앉아 두 사람이 일을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 로버트는 탄괴(炭 塊) 아래에서 몸을 옆으로 틀어 이제 끄집어 내려도 될 석탄덩어리에 끌을 대어 찍고 있었다. 그는 몹시 숨이 차 보였고, 온몸에서는 땀이 비오듯 흐르고 있었 다. 완전히 기운이 빠진 모습이었다. 몸을 움직일 틈도 없었다. 천장이 너무 낮 고 곧 암반이 내려앉아 그를 깔아 뭉갤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그는 경험과 놀 랄 만한 기술로 끈덕지게 일을 했다. 슬로거도 마찬가지였다. 커다란 털투성이의 몸뚱이에 목이 굵은 그는 로버트 옆에 서면 꼭 거인 같아 보 였다. 그는 한마디 말도 없이 난폭하게 줄곧 담배를 씹고 있어 침을 연신 뱉어 내면서 석탄을 팠다. 데이빗은 슬로거가 아버지를 도와 무거운 곡괭이를 들거나 힘드는 일은 모두 자기가 하는 것을 보아왔던 터라 언제나 고마움에 가슴이 뻐 근했다. 주먹으로 맞아 찌부러진 슬로거의 얼굴에는 땀이 비오듯 했다. 이제 그 에게서는 왕년의 '소년 갱부의 경이'라 할 수 있는 모습은 아무데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드디어 그들은 일에서 손을 떼고 땀을 셔츠에다 닦더니 그 셔츠를 어깨에 늘 어뜨리며 다가와서 앉았다. "어, 데이빗 왔구나!" 로버트는 아들을 보자 기쁜 듯 웃었다. 해리 브레이스와 봅 오글이 다른 구멍에서 나와 그들과 합세했다. 형 휴이도 말없이 뒤따라 왔다. 그들은 모두 도시락을 꺼내 먹기 시작했다. 데이빗은 오전 내내 힘겨운 운반일은 한 후라 차가운 베이컨을 넣은 빵이 아 주 맛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입맛이 없는 듯 빵은 놓아둔 채 병에서 찬물만을 몇 잔이고 따라 마시는 것이었다. 그의 도시락에는 파이도 들어 있었다. 로버트 와 마사는 다시 사이가 좋아져 그녀는 있는 정성을 다해 도시락 준비를 해주었 다. 그러나 로버트는 그 파이의 반을 슬로거에게 주었다. 시장하지 않다는 것이 었다. "이 일은 계속하노라면 누구든지 식욕을 잃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구...." 브레이스가 로버트의 채탄 굴진장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정말 힘드는 자리지." "대가리를 집어넣을 곳도 없다구." 슬로거가 맞장구를 치며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파이를 씹었다. 슬로거의 아내 는 언제나 빵에다 육수를 묻혀서는 아무렇게나 도시락을 싸주었다. 그래서 그는 파이를 먹으며 "이 파이는 정말 맛이 좋네." 하고 감탄을 연발하였다. "철벅거려서 말이야." 오글이 말을 계속했다. "온통 물바다야. 천장에서까지 물이 막 쏟아지는 판이라니까." 침묵이 흘렀다. 다만 통풍 펌프의 바람구멍을 통해 들려오는 공기소리가 침묵 을 깰 뿐이었다. 이 공기소리는 훨씬 아래에 있는 숨통 구멍을 통해 빨아 당겨 지는 콸콸거리는 물소리에 섞여 울려왔다. 그들은 거의 그 소리를 주의해서 듣 고 있진 않았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무의식적으로 이 공기소리를 통해서 통풍 펌프가 고장 없이 운전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해리 브레이스가 로버트 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여기는 스커퍼 갱구만큼 철벅대지는 않아." "그래." 로버트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가 그 진창에서 나올 수 있었던 건 잘한 일이야." "해리, 이 사람아. 정 몸이 찬 게 싫거든 마누라한테 덥혀달라면 될 거 아냐?" 슬로거의 말에 모두 다 웃었다. 자기 말에 사람들이 웃는 것이 신이 나서 슬 로거는 데이빗이 옆구리를 쿡 찔렀다. "너는 머리가 좋은 아이니까 내 젖은 등가죽을 좀 어떻게 해줄 수 없겠니?" "냅다 차 던져버리면 되잖아요." 데이빗이 가볍게 받아넘겼다. 더 큰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슬로거는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다. 희미한 불빛 속에서 웃고 있는 그 모습은 마치 커다란 마귀처 럼 보였다. "좋은 놈이야! 좋은 놈이야! 네 말대로 하면 정말 몸이 따뜻해지겠구나." 그는 데이빗에게 맞장구를 치며 성치 못한 눈 흰자위를 번득거리며 데이빗을 흘겨보았다. "소문에 듣자니 네놈은 대가리가 좋아서 드디어 배들리 대학에 가서 타인캐슬 의 모든 교수님들을 가르치게 된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냐?" 데이빗이 얼른 말을 바로잡았다. "그 사람들이 저를 가르치는 거예요, 슬로거 아저씨." "그런데 넌 왜 그곳으로 가는 거냐?" 슬로거는 로버트에게는 한 눈을 껌벅여 보이면서 다정하게 물었다. "너도 나처럼 멋있는 얼굴 모습을 하고 있는데, 당당한 광부로 자랄 마음이 없 냐? 휘들리 은행에다가 돈도 저금하면서 말이다." 이번엔 로버트가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얘는, 내가 '이곳'을 나가도록 해서 가는 거요." 그의 말이 너무 강하게 들렸기 때문에 다시 입을 여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이 녀석은 좋은 기회를 얻었지. 열심히 공부를 했기 때문에 장학금을 받게 된 거라오. 월요일엔 타인캐슬로 가 있을 거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언제나 말이 없던 휴이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나도 한번 타인캐슬까지 가보고 싶어. 축구 연맹의 정식 시합을 구경하고 싶 어 죽을 지경이거든." 휴이의 목소리에 담겨 있는 안타까움을 알아차린 슬로거가 다시 웃으며 휴이 의 등을 쳤다. "걱정 말아, 이 녀석. 너도 언젠가는 연맹 팀의 선수가 될 것이니까. 나는 너의 시합을 봐왔기 때문에 네 솜씨를 잘 알고 있어. 그리고 타인캐슬 팀 주장이 너 를 만나려고 요다음 슬리스케일 시합에 온다는 소문을 들었다니까." 휴이의 더럽혀진 얼굴이 빨개졌다. 슬로거가 놀리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농담을 하 더라도 속으로 자기는 기필코 거기까지 갈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본때를 보여줄 것이었다. 기필코! 바로 그때 브레이스가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어 경사진 길 쪽으로 한쪽 귀를 기울였다. "이봐." 그가 소리쳤다. "저 펌프가 왜 저러지?" 슬로거는 파이를 씹던 입을 멈추었고 모두들 아주 조용히 앉아서 암흑 속으로 귀를 기울였다. 통풍 펌프의 울림소리가 멎어 있었다. 아주 잠시 동안 아무도 말 을 하지 않았다. 데이빗은 차가운 얼음 한 조각이 갑자기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 는 듯한 느낌에 몸을 떨었다. "제기랄!" 슬로거가 거칠게 소리를 질렀다. "모두 들어봐! 펌프란 놈이 멈춰버렸어." 아직 파라다이스 갱구에서 일을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은 오글이 일어서서 배 수구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 황급히 외쳤다. "물이 점점 더 불어나고 있어. 물이 많아지고 있는 거야. 여기 좀 봐!"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배수구 속으로 팔을 집어넣어 물을 휘젓다가 겁먹은 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반장을 부르는 게 좋겠어." "잠깐만!" 로버트가 날카롭게 명령하는 듯한 말투로 그를 제지시켰다. 그러고는 이치를 따지는 듯한 어조로 덧붙여 말했다. "어린애처럼 밖으로 달려나가지 말아. 디닝은 제자리에 있도록 놔두는 게 좋 아. 잠깐만 기다려! 물 퍼내는 펌프에 고장이 난 일은 한 번도 없었어. 그러니까 이 펌프도 별로 큰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 거야. 진흙 같은 것이 구멍을 메워버 린 것뿐일지도 몰라. 내가 직접 보고 오겠어." 그는 조용히 침착한 자세로 일어나서 언덕길을 내려갔다. 다른 사람들은 입도 벙긋하지 않고 기다렸다. 5분쯤 지나서 물길이 좋아진 물 주둥이가 천천히 물을 당기는 소리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펌프에서 쿨쿨 하며 목구멍을 울리는 듯한 울림소리가 되돌아왔다. 사람들을 꽉 조이고 있던 긴장감이 풀렸다. 데이빗의 가 슴속엔 아버지의 현명함과 재치에 대한 존경심이 넘칠 듯 밀려왔다. "나 같은 것은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다니까...." 오글이 한숨을 쉬자 슬로거가 그에게 농을 걸었다. "넌 모르지? 로버트 펜윅이 함께 있으면 걱정할 일이 없다는 걸...자아, 어서 탄차에 석탄이나 실어라. 이런 곳에 하루 종일 앉아 있어봐야 좋을 일은 하나도 없으니까." 그는 일어서서 다시 셔츠를 벗어던졌다. 브레이스, 휴이, 오글이 자기 자리들 로 다시 돌아갔다. 데이빗은 탄차 쪽으로 걷기 시작하다가 갱구를 내려오고 있 는 아버지와 마주쳤다. "빨리도 고쳤네, 로버트. 오글 새끼, 하마터면 우리들 위로 바위가 무너져 내렸 다고 떠들어대며 뛰어나갈 뻔했다니까." 슬로거가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떠들었다. 그러나 로버트는 웃지 않았다. 그는 핼쓱해진 얼굴로 셔츠를 벗어던졌다. 셔츠는 물웅덩이 속으로 빠져버렸다. 그들은 다시 곡괭이를 휘둘러 석탄을 파내기 시작했다. 그들의 온몸에는 다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탄가루가 살갗에 찐득하게 달라붙었다. 땅 밑 약 92미터, 수갱(竪坑)에서 3킬로미터나 떨어진 이곳. 천장에서는 습기가 서서히 배어나와 끊임없이 빗물처럼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규칙적인 펌프 소리가 그 모든 것을 눌러버리듯 울려 퍼지고 있었다. 10 데이빗은 오후반과 교대를 끝내자 조랑말을 마구간으로 데리고 가서 말이 편 하게 쉬도록 보살펴주었다. 이 일이 가장 귀찮은 일이었다. 이것이 귀찮을 거라 는 것은 이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느꼈지만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일이 많았 고, 어떻게 된 게 익숙해져도 귀찮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데이빗은 조랑말의 목을 쓰다듬어 주었다. 조랑말 딕크는 긴 대가리를 돌려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데이빗을 바라보는 듯하더니 그의 저고리 주머니에다 코를 문질렀다. 데이빗은 가끔 자기 도시락에서 빵 조각이나 비스킷 같은 것을 남겨 두었다가 딕크에게 주곤 했었기에 지금도 딕크는 무엇을 줄 것인지 기다리는 눈 치였다. 데이빗은 사실 오늘은 더욱 특별한 것을 준비해왔다. 그는 치즈 한 덩어 리를 꺼냈다. 딕크는 치즈라면 사족을 못 쓴다. 데이빗은 치즈를 조그맣게 잘라 손바닥에 얹어서는 조랑말에게 먹이면서 딕크뿐만 아니라 자기에게도 이 즐거움 이 오래가도록 했다. 그의 손 위에 얹힌 조랑말의 콧잔등에서 젖은 벨벳 같은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가 목구멍으로 뭉클한 것이 밀려왔다. 그는 젖은 손을 천천히 저고리 깃에 닦고는 딕크에게 이별의 마지막 눈길을 던지고 나서 재빨리 나왔다. 그는 본갱도(本坑道) 바깥쪽으로 걸어 내려와 지난해에 낙반 사고로 해로우어 네일 및 앨른 프레스튼 형제 세 사람이 죽었던 장소를 지나쳤다. 그 세 사람의 시체를 파낼 때 데이빗도 그곳에 있었다. 그들은 모두 무참하게도 납작 짓눌려 있었다. 가슴에는 구멍이 뻥 뚫린 채로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고 진흙이 입에 가득 차 있었다. 데이빗은 그 낙반 사고를 절대 잊지 않았다. 그는 그 장소를 지 나갈 때마다 자기는 겁먹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이겠다는 완강한 결심으로 더욱 천천히 걸었다. 가는 도중에 그는 톰 리디와 그의 동생 잭, 소프틀리, 오글, 슬로거의 아들인 차 리밍과 댄 티즈데일 등 여러 소년들과 만나 함께 걸었다. 그들은 수갱 밑바 닥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승강기를 타고 갱구로 올라가려고, 서로 떠밀리면서도 인내롭게 기다리고 서 있었다. 한 대뿐인 승강기는 한번에 열두 명밖에 태우지 못했다. 게다가 파라다이스 갱구의 승강기는 위층에 있는 글로브 갱구와 제 5갱구의 사람들까지 운반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데이빗은 소란스러운 톰 리디와 스프틀리 옆에서 떨어져 웹트 바로 곁에 꼭 끼듯 서 있었다. 웹트가 진지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넌 대학으로 가겠구나, 타인캐슬로 말이다." 데이빗은 머리를 끄덕였다. 사실 그에게는 그것이 너무도 엄청나서 진짜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지난 6개월 동안 밤이면 졸린 눈을 비벼가며 공부를 하면 서 카마이클 선생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때가 되어 타인캐슬 장학 시험이 공 고되자 응시했고, 기적처럼 합격이 된 것이다. 그런 과정을 지내오느라고 그는 사실 몹시 지쳐 있었고 아직도 걱정거리가 남아 있는 상태였다. 장학금을 받아 공부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와 탄광에 그대로 남아 다른 형제들과 함께 훌륭한 광 부가 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와의 사이에 아직 냉전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아 버지와 똑같이 고집을 부리고 있는 어머니는 그가 곧 타인캐슬로 떠난다고 하는 데도 입을 옷 준비도 해주지 않고 이 일에 대해서는 일체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타인캐슬에 가면 조심해야 한다. 너는 지금 황야로 떠나가는 거야. 거기는 낮 에도 캄캄한 밤과 같은 곳이지. 자아, 받아라...." 그는 윗저고리 호주머니에서 탄가루가 묻어 새카맣게 때가 낀 얇은 소책자를 꺼내었다. "이 속에서 너는 의지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있을 거야. 나에게는 이것보다 더 좋은 친구가 없었단다." 데이빗은 얼굴을 붉히면서 그 소책자를 받았다. 그 책을 갖고 싶은 생각은 조 금도 없었지만 웹트의 호의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느꼈다. 그는 그곳에서 책 을 펼쳤지만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는 잘 보이지가 않았다. 그래서 건성으로 넘 겨가는데 갑자기 불빛이 흔들리며 이런 구절이 그의 눈 속으로 튀어 들어왔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 길 수는 없습니다." 웹트는 강렬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 어깨 너머로 톰 리디가 킥킥거리 며 속삭였다. "3시에 있는 경마 복권이라도 주웠니?" 주위에 섰던 사람들이 갑자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승강기가 쾅쾅거리며 내 려왔던 것이다. 등뒤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다 타야 돼. 다 올라서란 말이야!" 와르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언제나 이 모양으로 자리다툼을 해서 서로 먼저 오르려고 야단들이었다. 데이빗은 사람들 사이에 끼여 승강기 안으로 들어섰다. 승강기는 위쪽으로 위쪽으로 마치 거인이 손아귀에 움켜쥐어 끌어올려지는 것처 럼 올라갔다. 그러다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횡목이 들려지면서 마치 한덩어리 로 용접된 것 같은 사람들이 맑고 쨍쨍한 한낮의 햇빛 속으로 쏟아져 나왔다. 데이빗은 그 사람들과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구내를 가로질러 급료를 타려고 현장사무소 앞에 줄을 서 있는 사람들 틈에 끼여 섰다. 상쾌한 6월의 한낮이었 다. 반출탑과 저탄장, 회전하는 활차, 연기를 내뿜는 배기 굴뚝 등의 딱딱한 윤 곽이 한낮의 나른한 풍경 속에서 다소 부드럽게 보였다. 이 광산을 떠나기로 한 날치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었다. 행렬은 느릿느릿 앞으로 움직였다. 데이빗은 아버지가 승강기에서 나오는 것 을 보았다. 아버지는 기다란 행렬의 맨 끝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때 사장의 이륜마차가 구내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급료 지불일인 토요일이 되면 사장의 마차가 이곳에 나타나는 것은 하나의 관례였다. 리처드 배러스는 급료봉투를 받 기 위해 줄을 서 있는 광부들 앞을 지나가는 것을 행사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 다. 마차는 누런 색 바퀴를 햇빛에 번쩍거리며 멋있게 한 바퀴 휙 돌아 사무소의 반대쪽에 멈추었다. 리처드 배러스는 꼿꼿한 자세로 마차에서 내려 사무실 정문 안으로 사라졌다. 비틀리는 말 머리 앞에 서 있었다. 그 두 사람 사이에 앉아 있 던 아서 배러스는 그대로 마차 안에 남았다. 데이빗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면서 멀리서부터 아서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이유없이 아서에 대한 묘한 동정심을 느끼고 있었다. 서로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그가 아서에게 동정심을 갖는다는 것은 좀 우스운 일이었다. 아서는 나이에 비해 몸집이 자그마하고 부드러운 금발이었다. 지금도 연약한 소년처럼 금발을 바람에 날리며 혼자 동그마니 마차 속에 앉아 있는 모습이 매우 쓸쓸해 보였다. 아서는 천성적으로 보호 본능을 일으키게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의 얼굴 표정은 몹시 심각해 보였다. 데이빗은 자기가 아서 배러스를 측은하게 여 기고 있음을 느끼자 하마터면 큰 소리로 웃을 뻔했다. 그의 순번이 다가왔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 회계원 페티트가 창구에서 내밀어 주는 급료 봉투를 받았다. 그러고는 문 앞으로 가 어슬렁거리며 아버지를 기다 렸다. 기둥에 몸을 기대고 섰는데 애니 메이서가 그 앞을 지나가다가 그를 보자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말을 걸어올 때까지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녀는 지금도 웃기만 할 뿐이었으나 속으로는 데이빗이 먼저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 았다. "애니, 혼자 왔어요?" 그는 정답게 말했다. 그는 애니 메이서가 좋았다. 형이 이 여자를 좋아하는 마 음을 그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허영심이 없는 가정적인 소박한 아가씨 였다. 그녀를 볼 때마다 그는 은빛 나는 작고 싱싱한 청어를 떠올렸다. 애니는 몸집이 작지도 않았고 전혀 청어와는 닮은 데가 없는데도 말이다. "오늘은 이곳을 떠나는 날이야. 넵튠 탄광과는 이제 다 끝났어. ...물, 진흙, 조 랑말, 탄차...이 모든 것을 이제 떠나는 거야. 조금도 섭섭하진 않아."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띤 채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녀는 거리를 한번 둘러보더니 다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까딱해 보이고는 걸어 가 버렸다. 그는 더 기분이 좋아졌다. 고개를 돌려 아버지 쪽을 바라봤다. 아버 지는 아직도 창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페티트는 오늘따라 더 시간을 끄는 것 같았다. 그는 다시 기둥에 몸을 기대고 그것을 발뒤꿈치로 차면서 서 있었다. 데이빗은 갑자기 자기를 지켜보는 시선을 느꼈다. 사장인 리처드 배러스가 감 독관 암스트롱을 대동하고 마차 앞에 서 있었다. 아마 돌아가려는 모양인 듯 싶 었는데, 그 두 사람이 나란히 선 채 똑바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데이빗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꼿꼿이 세웠다. 그리고 이편에서도 그들을 쏘아보았다. 탄광 을 그만두는 자기는 이제와서 무서워할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잠시 두 사 람은 뭔가 이야길 하더니 곧 암스트롱이 조심스러운 미소를 띠면서 손을 들어 그에게 오라는 표시를 해 보였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네가 배들리의 장학금을 타게 됐다구?" 데이빗은 배러스가 지금 아주 기분이 좋은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 나 그 작고 냉정한 눈은 여전히 상대방을 날카롭게 관찰하고 있었다. 배러스는 말을 계속했다. "네가 합격했다는 것은 우리 마을의 영광이기도 하니 나도 아주 기쁘구나. 그 래, 이제 배들리에 가면 무슨 공부를 할 셈이냐?" "문학사의 학위를 받으려고 합니다." "음... 문학사를. 광산학이 아니란 말이지. 그건 왜인가?" 데이빗은 저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거센 반항심이 거세게 솟구치는 걸 느꼈다. 배러스의 말투가 그의 반항심을 더욱 충동질했다. "그건 제가 이 일에는 흥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차가운 돌 위를 굴러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배러스에겐 아무 런 상관도 없는 듯했다. 그는 그의 느낌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다시 말했다. "정말로 아무 흥미가 없다는 말인가?" "네, 흥미가 없다기보다 저는 땅 밑에 있다는 것이 싫습니다." "아, 그것이 싫다고...." 배러스는 무관심하게 말을 되받았다. "그래서 선생으로 나가겠다는 건가?" 이 사람은 벌써 암스트롱에게 이야기를 다 들은 것이 분명했다. 데이빗은 자 신의 약점을 보여준 듯한 모욕감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서 도리어 자신의 속 마음을 더욱 드러내고 말았다. "아닙니다. 나는 선생으로 멈추지 않을 겁니다." 그러자 곧 후회감이 등허리를 훑고 지나갔다. 광부의 더러운 작업복 차림으로 서 있는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마차 안에 귀공자처럼 앉아 있는 아서가 흥미로 운 듯 내다보고 있는 것이 더욱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완강 하게 버티고 선 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배러스 사장이 더 무엇을 물어온 다면 분명하게 자신의 포부를 말해줄 참이었다. 그러나 배러스는 그 어떤 일에 대해서든 호기심을 품거나 적의를 느끼는 일이 없는 듯했다. 그는 데이빗의 말을 못 들었다는 태도로 갑자기 훈시를 시작했다. "교육이란 훌륭한 일이다. 나는 그 누구도 방해하진 않는다. 배들리에서 학업 을 마치면 내게 알리도록 해라. 나는 교육위원이다! 이곳의 어떤 학교에도 너를 취직시켜줄 수가 있다. 국민학교 선생 자리는 언제나 있으니까." 도수 높은 안경 너머로 빛나는 그의 눈은 데이빗을 보고 있지 않은 듯했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크고 하얀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더니 은화를 한 움큼 꺼 냈다. 그 가운데서 2실링 6펜스짜리 은화를 한 닢 집어들고 마음속으로 무게를 가늠해보는 것 같더니만 다시 놓고서 대신에 2실링짜리를 가려냈다. "옛다, 한 플로린이다." 그는 조용하면서도 당당하게 말하며 그것을 이별을 선물로 주었다. 데이빗은 멍한 얼굴로 그 동전을 받았다. 그가 손에다 그것을 들고 있는 동안 배러스는 마차에 올라 자리에 앉았다. 그는 아서가 정다운 미소를 자기에게 보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드디어 마차가 떠나갔다. 데이빗은 소리내 웃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자 웹트가 준 소책자의 글귀 가 떠올랐다. "여러분은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 그는 그 구절을 마음속 에서 몇 번이고 반복했다. '여러분은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과....' 그 글귀는 흥미로웠다. 그렇다, 그것은 아주 흥미로운 것이었다. 갑자기 그는 발길을 돌려 이번에는 아버지가 있는 구내 출입문 쪽으로 갔다. 그는 아버지가 그 광경을 모두 다 보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의 눈에는 분노 가 타오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화난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지 그의 얼굴을 피 해 땅만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그곳을 걸어나와 카우펀 가로 올라갔다. 그들은 계속 침묵을 지켰다. 길에서 스위 메서와 만났다. 로버트는 그 에게 다정하게 웃어 보이며 말을 걸었다. 그는 금발에 매우 잘생겼으며 파라다 이스 갱구 위층 글로브에서 채탄 작업을 하는 유쾌한 청년이었다. 스위의 본 이 름은 오스웨이 메서였다. 그의 아버지는 원래 오스트리아 사람으로 20년 전에 귀화하여 슬리스케일에 정착했고, 지금은 램 로에서 이발사 노릇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동네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다. 아들은 탄광에서 즐거이 탄차에 석탄을 퍼 담고, 아버지는 가게에서 친절하게 손님 턱에다 비누거품을 칠했다. 로버트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태평한 얼굴로 그 청년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 서 그가 다른 길로 들어서자 등뒤에 대고 소리쳤다. "네 아버지께 말씀드려라. 다른 날처럼 4시에 가겠다고...." 그러나 스위가 가버리자 로버트의 얼굴은 다시 굳어졌다. 그의 표정은 마치 뼈 위에 피부가 달라붙어 그대로 수축된 듯 싶었다. 카우펀 가를 다 지나왔을 때 로버트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이 멈춰 선 반대쪽에는 옛날 소 외양간의 뒷 마당으로 가장 지저분한 곳이어서 누구나 싫어하는 곳이었다. 거기는 썩은 지푸 라기, 오물의 냄새와 쇠똥덩이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그는 데이빗을 정면으로 바 라보았다. "그치가 너한테 준 게 뭐냐?" "2실링짜리 동전이예요." 데이빗은 아직도 창피스러움을 느껴 손바닥에다 꼭 쥐고 있었던 동전을 아버 지에게 보였다. 로버트는 그 동전을 집어들고 이리저리 보더니 갑자기 그것을 내던졌다. "자아!" 그는 노기가 가득한 소리로 외쳤다. "자아! 잘 보란 말이다!" 그의 손을 떠나 플로린 동전은 쇠똥더미 한복판에 보기 좋게 떨어졌다. 11 밀링튼 사교 클럽의 밤, 축제가 벌어지는 멋진 밤이 돌아왔다. 플래트 가에서 샛길을 빠져나와 막다른 골목에 자리잡은 밀링튼 공장은 한 200명 가량의 종업 원을 거느린, 비록 규모는 작지만 아주 인상적인 공장이었다. 특히 흐릿한 3월의 오후에 바라보면 더욱 그러했다. 쇠를 녹이는 용광로 굴뚝에서는 붉은 불꽃의 혓바닥과 진한 연기의 구름떼가 위로 치솟았다. 그럴 때에는 용광로에서 쇳물 국자(녹은 쇳물을 퍼내는 장치)까지 녹아 흘러드는 쇳물에서 나오는 뜨거운 백 열의 흐름 때문에, 우중충한 하늘은 구리빛으로 타는 듯 보이는 것이었다. 또 그 녹은 쇳물이 주형(鑄型)에 흘러들 때면 공장 바닥에서 솟는 강한 자극성의 증기 는 숨이 막힐 것같이 지독했다. 무거운 망치소리, 철을 주물할 때 가장자리를 마 무르는 공원의 끌에서 나오는 울림소리, 빙빙 도는 벨트와 톱니바퀴에서 나는 회오리바람 소리, 선반(旋盤)과 금속 절삭 기계에서 나는 귀를 찌르는 듯한 소 리, 금속을 먹어 들어가는 톱의 진동소리 등 공장 안은 소음으로 귀청이 떨어질 것 같았고, 열려있는 문들에서 무럭무럭 솟아나오는 수증기 사이로는 맹렬한 열 기 때문에 웃통을 벗어 젖힌 공원들의 희미한 모습이 보였다. 이 공장에서 만드는 주요 제품은 주로 광산용 기구로 철제 탄차, 견인기, 지주 (支柱), 단단하고 무거운 U자형의 연결고리, 못 등으로 시장 경쟁이 심한 제품들 이었다. 그래서 이 공장은 독립된 기업이라기보다는 오래된 회사들과 옛부터 맺 어온 밀접한 관계 속에서 경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밀링튼 공장은 설립된 지 오래된 회사여서 여러 가지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전통 가운데 하나 가 바로 이 사교 클럽이었다. 밀링톤 사교 클럽은 1870년대에 이 회사 원로인 웨슬리 밀링튼이 창립한 것으 로 공장 노동자와 그 가족들에게 폭넓은 참여의 기회를 주고 있었다. 클럽은 문 예부, 관광부, 암실을 따로 갖춘 사진부, 체육부 등 모두 네 부문으로 나눠져 있 었다. 그러나 이 사교 클럽의 행사 내용 가운데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댄스 파 티였다. 이 클럽의 창립 이래 계속되어온 파티는 올해도 어김없이 오드펠로 회 관에서 열리고 있었다. 3월 23일 금요일, 오늘밤이 바로 그 즐겁고 유쾌한 날이었다. 그런데도 조는 뭔가 침울한 생각에 잠겨 공장에서 일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조 도 그 파티에 참석할 것이다. 그는 이미 그 클럽에서 첫째 가는 인기를 누리는 권투 클럽의 신입회원이 되었고, 당구 클럽에서도 초심자들 가운데서는 손꼽히 는 선수후보였다. 조는 지난 8개월 동안 상당히 일을 열심히 했고, 건강도 더 좋 아져서 양 어깨에는 두툼한 근육이 붙었다. 그리고 조 자신의 말에 의하면 친구 도 아주 많이 생겼다. 사실 조는 대단한 사교가였다. 누구든지 구별 없이 등을 정답게 두드리며 "재미가 어때, 이 사람아!"하고 너스레를 떨거나 언제나 웃는 얼굴로, 그것도 사나이다운 멋진 웃음으로 악수를 한번 힘주어 함으로써 모두 그의 친구가 되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야기도 잘하는데 그의 이야기 안에서 그는 언제나 영웅이 되었고, 사랑 이야기가 빠지는 일이 없었다. 공장 안 에서는 포터필드 감독에서부터 스탠리 밀링튼 사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를 좋 아하고 호의를 보이는 듯했다. 제니만은 예외였지만. 제니! 조는 육교를 건너면서 제니와의 관계를 냉정히 평가해 보았다. 그녀는 이 파티에 자기와 함께 가겠다고 약속했다. 확실히 그렇게 약속했다. 그런데 여 전히 둘 사이는 별 의미가 없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8개월 동안 그 가 제니와 얼마만큼 친한 사이가 되었는가? 아무리 떠벌리기를 좋아하는 그지만 이 일에 대해서만은 별로 이렇다 하고 내놓고 이야기할 게 없는 것이다. 외출을 좋아하는 그녀를 자주 밖으로 데리고 나왔으며, 그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돈도 많이 썼다. 그렇게 힘들게 번 돈을 정말 물쓰듯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무 엇을 받았던가? 몇 차례의 키스, 그것도 마지못해 마치 거지에게 선심 쓰듯 하 는 냉랭한 것뿐이었다. 그는 우울한 표정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제니를 쌀쌀하게 대할 궁리 도 해보았고, 단념해버리자는 결심도 해보았다. 그러나 어떤 것도 실패였다. 그 는 그녀를 떠날 수가 없었다. 첫 번부터 어찌된 일인지 그는 너무 깊이 빠져버 린 것이었다. 제니란 여자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여자였다. 어떤 때는 참을 수 없도록 오만 불손하다가도 애교를 담뿍 담아 꿀처럼 달콤하게 다가와서 그를 정신없게 만드 는 것이었다. 새로 맞춘 청색 서지 양복에다 그녀가 권해서 산 중산모로 성장을 하고 나서면 그녀는 그럴 수 없이 다정스럽게 굴었다. 그러나 어쩌다가 무명 작 업복 차림으로 마주치기라도 하면 전연 모르는 사람처럼 인사도 하지 않고 가버 리는 것이었다. 그럴 때 그녀의 눈초리는 얼마나 차가운지 온몸이 꽁꽁 얼어붙 는 느낌이었다. 함께 외출을 할 때에도 그녀는 완전히 두 얼굴의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엠파이어 극장의 상등석에라도 앉게 되면 그녀는 기분이 좋아서 생글거리며 손을 잡는 것도 허락했다. 그러나 어두운 성곽 근처를 거닌다든지 커피를 파는 노점 따위를 기웃거리면 그렇게 매몰차고 쌀쌀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는 레나드 같은 고급 다방으로 가야 했다. 그녀 는 항상 자기 분수 이상의 것을 원했고, 보다 더 좋은 것만을 원했다. 그녀는 자 기 가족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아 잔소리가 심했다. 자기 자신은 굉장히 품위가 있는 체했으나 사실은 시시한 잡지에서 얻은 유행에 관한 소식이나 옷 모양에 관한 것, 손을 하얗게 가꾸는 법, 계란 흰자위를 물에 섞어 머리칼에 윤기를 내 는 법 정도를 아는 것뿐이면서도, 아버지나 동생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못마땅하 게 여기며 주의를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 자신도 이렇게 세련되고 품위가 있는 체하는 면에 대해서는 절대로 동감이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이런 숙녀인 체하는 면을 더욱 높이 보고 사실 그 녀를 대단한 숙녀로 여겨 존경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숙녀라고 해도 이 이상 더 참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오늘밤이야말로 결단을 내든가, 도대체 왜 그런 모양으로 자신을 멀리하는지 알아내야 한다고 마음을 단단히 굳히면서 스코츠드 로 117번지 A호의 정문 계단을 올라갔다. 그는 뒷방으로 들어가 시계를 보는 순간 자기가 늦었다는 것을 알았다. 제니 는 이미 옷을 다 차려 입고 2층에서 기다리고 있는 상태고, 아이들은 다 놀러 나갔는지 보이지 않는데 샐리 혼자서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선리 부인이 두 통이 난다며 객실에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조는 몹시 시장기를 느껴 훈제한 연어에 새로 구운 빵을 정신없이 먹고 나서는 차를 마시면서야 겨우 주위를 돌 아보았다. "아버진 어디 계시지?" "버밍엄에 가셨어요. 내일 사용해야 한다고 전서 비둘기를 다 가지고 가셨어 요." 조는 포크를 입에 문 채 잠시 생각했다. 그러니까 앨프는 토요일에 열릴 전서 비둘기 대회에 가서 내일까지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재수가 좋게 생겼는걸! 조가 여전히 포크를 입에 문 채 빙글거리고 있자 샐리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한마디했다. "포크는 씹어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녜요. 먹는다고 해도 폴카를 출 때 뱃속에 서 소리가 나면 안 될테니까 얌전히 식탁 위에 놓아두세요." 샐리의 가시가 있는 말에 조는 얼굴을 찌푸려 보였다. 샐리가 자기를 싫어한 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이 건방진 계집애 를 참아주면서 자기 편을 만들려고 해를 써도 소용이 없었다. 그것만 아니라 샐 리 앞에 설 때마다 그녀의 검은 눈이 자기의 마음속까지 꿰뚫어보는 것 같은 영 편안치 못한 기분까지 느끼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아주 뽐내면서 신나는 이야 기를 하는데 갑자기 그녀가 높은 소리로 웃어대는 바람에 이야기가 중단되고 그 만 당황해서 쩔쩔 매곤 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가 얼굴을 찌뿌리는 것을 보자 샐리는 자기 말이 효과가 있었음을 알고 득의에 찬 미소를 띠었다. 샐리의 눈이 다시 번쩍였다. 아직 열한 살밖에 안 되었지만 그녀의 감성은 예민했고 날카로웠다. 특히 그녀의 희극적인 독설은 재치가 번득였다. "조는 누구보다도 훌륭한 춤을 출 것같이 보여요. 특히 발이 크니까 어떤 스텝 도 자유로울 거예요. 선리 양? 네에, 조. 아니 가울런 씨. 함부로 이름을 불러 죄 송해요. 한번 춰볼까요, 네? 자아, 춤을 춥시다. 아, 가울런 씨! 음악이 너무너무 감미로워요. 그렇게 느끼지 마세요? 아얏! 내 티눈을 밟았잖아? 거지같은 것이. 아파 죽겠단 말야!" 그녀는 얼굴을 찌푸린 채 커다란 검은 눈을 굴리면서 제니와 조의 음성을 흉 내내며 춤추는 장면을 우스꽝스럽게 연출해내었다. 게다가 제니의 째지는 듯한 목소리를 내가며 그 모습까지 따라해 보이는 데는 웃음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 다. "얼음 드릴까요, 네? 아니면 소 내장을 잡수시겠어요? 아주 맛있게 보이는데 요. 오, 선리 양, 오늘은 멋있는 곱슬머리시군요." 그녀는 잠시 말을 끊고 2층을 가리켜 보였다. "선리 양께선 지금 2층에서 머리를 곱슬곱슬하게 지지고 있는 중이세요. 제니 아가씨는 잘 때에 빨래집게로 코를 집고 주무시는 희생도 마다 않는 멋쟁이세 요. 지금도 벌써 한 시간 전부터 머리를 지지느라고 정신이 없으시답니다. 부인 모자점에서 돌아오자마자부터지요. 부인 모자점이라고 하지만 거기서 모자나 판 다고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아시겠어요? 모자 판매는 허드렛일을 하는 하녀나 하는 거예요. 그건 천한 일이니까요. 그래서 나에게도 다리미를 덥히라는 등 많 은 일을 시키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집안을 위하는 일이라고 내 뺨을 때리곤 하 지요. 조에게도 막 덤벼들 거예요. 조심하시라구요. 당한 뒤에 치료보다는 예방 이 훨씬 지혜로운 거니까요. 아시겠어요?" "얘야, 제발 조용히 해다오! 제발.... 건방진 선머슴애 같은 네가 언제 여자다워 질지 참 걱정이다!" 그도 지지 않고 마주 쏘아주며 식탁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그녀는 갑자기 목소리를 바꿔 숙녀티를 내며 말했다. "나는 '얘'가 아니라 '매기'라는 이름이 있으니까 매기라고 불러주세요, 가울런 씨. 여자다워지는 건 가울런 씨가 착해질 때 나도 노력해볼게요. 그런데 그 아름 다운 눈으로 왜 그렇게 나쁜 생각만 하죠? 벌써 나가려고 하는 거예요? 조금만 더 기다려요.... 노래 하나 불러줄게요. 가울런 씨, 아주 짧은 노래라구." 그녀는 그의 앞을 가로막더니 제니가 피아노 앞에 서서 아주 부끄러워하며 괴 상한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보세요, 귀여운 팬지꽃을 정원 한 구석에서 자라고 있는 그가 문을 쾅 닫고 나가버리자 샐리는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그녀는 소파 에 곤두박질 치며 배를 잡고 웃어대다가는 소파의 스프링을 쾅쾅 치기까지 했 다. 조는 2층으로 올라가 면도를 하고 어떤 날보다도 정성스럽게 얼굴을 씻었다. 그러고는 외출용으로 언제나 잘 모셔놓고 있는 청색 서지 양복을 입었다. 거기 에다 산뜻한 초록색 넥타이를 매고 나서 번쩍거리는 갈색 구두의 끈을 단단히 잡아맸다. 준비를 끝낸 그는 현관 홀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드디어 그녀가 모 습을 나타냈을 때 그는 정신이 아찔할 정도였다. 화가 나던 것도 단번에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핑크색 드레스에 하얀 벨벳 구두, 하늘거리는 순백의 레이스로 짠 숄-지금 한창 유행하는 매혹의 숄로 알려진 바로 그 숄이다.-을 머리 위부터 두르고 있었다. 꽃잎처럼 화사한 얼굴에 차갑게 빛나는 잿빛눈이 얼굴을 더 돋 보이게 했다. 그녀는 향기가 짙은 구향정을 품위있게 물고 있었다. "야아! 제니, 정말 근사해!" 그러나 그의 찬사는 별로 감동도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 위에 외투를 걸치 더니 현관 열쇠를 외투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녀는 조의 갈색 구두를 보더니 입술이 비쭉 내밀었다. "조, 내가 며칠 전부터 댄스용 구두를 사라고 했잖아요?" "이번 파티에선 모두 이런 구두를 신는다고 했어. 내가 다 알아봤다구."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내가 모르는 줄 알고.... 이따위 촌스런 구두로 누굴 망신시키려는 건지. 그런데 마차는 불렀어요?" "마차라니!" 조의 입이 딱 벌어졌다. 이 여자는 자기를 백만장자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 는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전차를 탈 생각이야." 그러자 그녀의 눈빛이 얼음처럼 싸늘하게 변했다. "좋아! 나를 그 정도로만 생각한단 말이지. 마차를 탈 정도는 못 된다는 거지." 그때 2층 계단 쪽에서 애더가 소리를 질렀다. "두 사람 다 늦지 않도록 해요. 난 두통약을 먹어서 지금부터 잘 테니까." "그런 걱정은 말아요, 엄마. 절대로 늦을 일은 없을 테니까." 제니는 발끈한 얼굴로 대답을 하고는 먼저 현관을 나섰다. 그들은 전차를 탔 는데 그날 따라 전차는 만원이었다. 제니는 더 화가 났다. 전차에서 내려 오드펠 로 회관 앞까지 오면서도 제니는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회관에 들어서니 이미 파티는 시작되고 있었다. 이 파티는 가족끼리 모이므로 격식보다는 친숙한 분위기에서 친목을 우선으로 하는 행사였다. 회관 한쪽 끝에는 저녁식사를 할 수 있도록 여러 개의 식탁이 자리잡고 있었고, 그 위에는 케이크, 샌드위치, 비스킷, 과일, 젤리, 작고 단단한 씨가 많은 오렌지, 담홍색의 콜라병들, 차와 커피를 담은 두 개의 커다란 주석 주전자 등이 잔뜩 차려져 있었다. 다른 한쪽 끝에 두 그루의 잎이 넓은 란(蘭)과 종려수에 둘러싸인 높은 단상에는 오케스트라가 자리잡고 있었다. 대규모 오케 스트라로서 마음껏 두들겨댈 수 있는 완벽한 오케스타라용 드럼까지 갖춰져 있 고, 프랭크 맥가비가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프랭크보다 더 훌륭하게 '떨림소리 '를 집어넣어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박자는 어떠한가! 프랭크가 연주하는 박자에 스텝을 잘못 딛는 일이라곤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은 정말 멋진 것이었다. 마치 쇠망치로 쾅쾅 두드리는 것같이 '라 드 디이, 라 드 디이' 하고 울려퍼지는 소리는 오드펠로 회관 마룻바닥을 그대로 들어올렸다가 또 저 밑으로 내려가게 만드는 듯했다. 처음 만난 이들도 모두 친구 같았고 분위기는 편안하고 자유로웠다. 벽에는 프랭크 맥가비의 누이동생이 아름다운 필체로 댄스의 순서와 번호를 표시해서 붙여 놓았기 때문에 실없이 연필로 댄스 순서를 적는 카드를 만들 필요도 없었 다. '1. 왈츠-기쁨의 밤 2.원 스텝-그대와 함께 곤돌라에 타고' 등등이었다. 짝을 이룬 수많은 사람들이 그 진행표 주위에 모여 킬킬거리며 목을 길게 빼거나 서 로 팔짱을 끼었다. 향수와 땀으로 뒤범벅을 이룬 사람들 속에서 "헤이, 벨라. 군 대식 투 스텝 할 수 있어?" 하고 소리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서 파 트너를 서로 골라잡는 것이다. 어떤 날쌘 젊은 청년이 가루를 뿌린 마룻바닥을 멋지게 미끄러져 돌면서 곧바로 연인의 가슴으로 뛰어드는 모습도 보였다. 그런 가 하면 "야, 란서즈 곡이다. 너 잘 추지? 자아, 함께 춤추자." 하면서 젊은이들 은 신나게 돌아갔다. 제니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한 번 훑어봤다. 싸구려 음료수, 김이 서린 벽에 다가 풀로 대충 붙여놓은 프로그램, 빨강 파랑 초록색 따위의 야한 싸구려 복장 들, 사회자인 마이크 맥케너 노인의 그 우스꽝스러운 옷차림 등을 보았다. 그녀 는 많은 사람들이 장갑이 없었고 야회용 신발도 신지 않은 것을 보았다. 조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주물공장 숙련공들의 나이 지긋한 뚱 뚱한 부인들은 구석에 앉아 정답게 이야기들을 하고 있고, 아이들은 홀 안을 마 구 뛰어다니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도 없었다. 제니는 이런 모든 것 들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그러고는 그 예쁘장한 코를 위쪽으로 치켜 올렸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풍경인데요...." 그녀는 경멸에 찬 얼굴을 조에게 돌렸다. "아니, 왜 그래?" 조가 멍청하게 입을 딱 벌렸다. 그러자 그녀는 그를 물어뜯을 것처럼 말했다. "모든 것이 마음에 안 든다구! 하나같이 시시껄렁하고 천박해!" "우리 춤을 추자. 그러면 기분이 좋아질 테니까...." 조는 어떻게든 그녀의 비위를 맞추려고 살살 달랬다. 그녀는 거만하게 머리를 치켜세웠다. "좋아요. 이왕 왔으니 춤이라도 추어야지.... 어차피 티켓도 샀으니까." 그들은 춤을 추었다. 그러나 제니는 쌀쌀하게 몸을 움츠렸고, 주위에서는 즐겁 게 손뼉을 치며 발을 구르고 높은 목소리들로 떠들어댔지만 그녀는 딱딱한 표정 을 풀지 않았다. "저건 누구지?" 그들이 투 스텝으로 문 앞을 스쳐 지나갈 때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조는 그녀의 눈을 뒤쫓았다. "잭 린치, 우리 공장의 대장공이지. 제니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흥!" 제니는 꺼리낌 없이 비웃는 소리를 냈다. "동물원에나 어울릴 모습인걸!" 그녀는 더욱 기분이 나빠지는 듯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고상한 자기가 영 형 편없는 자리에 잘못 온 것이라고 여겨지니 여간 속이 상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제니가 잘못 생각한 것이었다. 밤이 깊어감에 따라 차츰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이 클럽의 일반 회원인 노동자들뿐 아니라 지위가 높 은 설계실 기사들, 회계를 맡고 있는 어빙 씨 부부, 출납계의 모건, 가장 나이가 많은 공장 감독 클레그 씨 등이 점잖은 차림으로 들어들 오기 시작하자 제니는 한결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그녀는 비로소 조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좀 분위기가 잡히는 것 같네." 그녀가 이 말을 하는 순간 문이 휙 열리며 스탠리 밀링튼 씨가 도착했다. 바 로 그 사람, 우리들의 스탠리 씨가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그는 멋있는 연미복차 림에 힘찬 모습으로 곁에는 아름다운 약혼자를 대동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제니 도 강한 호기심을 보이며 그 멋진 두 남녀가 나이든 회원들과 인사를 나누며 악 수하는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저 여자가 바로 라우라 토드예요." 제니는 숨을 죽이고 속삭이듯 말했다. "아버지가 그로트 마켓의 광산기사라고 했어요. 나는 저 여자를 여러 번 봤어 요. 저 사람들은 바로 지난 8월에 약혼을 했어요. 쿠리어 신문에 난 걸 봤다구 요." 조는 그녀의 열성스런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타인캐슬 상류 사교계에 대 한 제니의 불타는 듯한 관심, 최근에 있었던 아주 상세한 일까지도 낱낱이 알고 있다는 것에 기쁨을 느끼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조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그러 나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조에게 더없이 상냥했다. "자, 우리 다시 춤춰요." 그녀는 이번에는 조에게 다정하게 안겨 돌아가면서도 시선은 줄곧 밀링튼과 토드 양 뒤를 쫓고 있었다. "저 여자 드레스 멋있지요? 아마 보우너 살롱에서 직접 맞춰 입은 것이 분명 해요." 보우너 의상실에서 맞춘 옷이라고 하면 물론 타인캐슬에서는 최신 유행품에 속했다. "그리고 저 레이스 좀 봐... 저 봐, 어머나...." 장내에는 활기가 점점 더 넘쳐흘렀다. 북소리가 울리고 프랭크 맥가비의 연주 가 한층 더 맹렬한 떨림 곡으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댄스의 템포는 빨라졌고 열 정으로 넘쳤다. 사람들은 스탠리 씨가 일부러 "시간을 내서 왔다."고 말했기 때 문에 더 기뻤다. 거기다가 라우라 양까지 함께 와주었으니! 스탠리 밀링튼은 얘 로우에선 매우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몇 년 전에 죽었는데, 그 때 스탠리는 아직 센트 비드 학교에 다니고 있는 열일곱의 애숭이 소년이었지만 황급히 공장으로 돌아와서 헨리 클레그 노인 아래서 실무를 배워야 했다. 이제 스물다섯이 된 스탠리는 공장의 총지휘를 했고, 특히 정의롭게 하기 위하여 지 극히 열심이었다. 스탠리가 마음이 바른 사람이라는 것에는 누구나 다 동의했다. 그것도 다 '일류학교'에 다닌 덕분이었다. 50년 전 스코틀랜드 비국교도(非國敎徒) 가운데 돈 많은 상인 집단에 의해 창 설된 세인트 비드 학교는 짧은 기간 동안 순수 공립학교의 전통을 확립했던 것 이다. 학생으로 구성된 규율부, 장학 제도, 단체정신, 경쾌한 교가 등 탄탄한 기 반 위에서 학교는 명문으로 급성장했다. 이것은 초대 교장 풀러 박사가 영국의 유서 깊은 모든 학교들을 순방해서 마치 곤충 채집망으로 능숙하게 곤충을 잡듯 이 각각의 학교에서 우수한 전통들을 고르고 골라 갖춰놓은 덕분이었다. 세인트 비드 학교에서는 스포츠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교복 색은 자주색, 진홍색, 황금 색 세 가지인데 이 가운데서 자유롭게 골라 입을 수 있었다. 모교를 열렬히 사 랑하고 있던 스탠리는 자연스럽게 그 색깔들에까지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보통 때도 이 멋진 색인 자주, 진홍, 황금색으로 타이, 커프스 버튼, 바지 멜빵과 양말 대님을 할 정도였다. 그뿐 아니라 세인트 비드 학교가 언제나 주창해온 스포츠 정신에 대해서도 열렬한 지지자였다. 이 파티에 참석하고 있는 이유도 그 스포츠 정신의 발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올바른 사람이 되기를 원했고 훌륭하고 올바른 일이라면 다 하려고 애썼다. 그러므로 그는 이 자리에 와서도 지극히 다정스럽게 심한 노동으로 나무토막처럼 굳어버린 손들을 일일이 잡아주었으며, 라우라와 왈츠를 추는 중간 중간에 나이 든 공원들의 몸집이 큰 마누라들과도 즐거이 춤을 춰주었다. 밤이 깊어감에 따라 스탠리와 라우라 토드가 들어오면서부터 보여주었던 제니 의 밝은 미소도 점점 굳어졌다. 제니는 어떻게 해서라도 토드 양의 눈에 띄려고 조바심을 쳐대면서 스탠리로부터는 춤 요청을 받고 싶어 안달을 했으나,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녀는 또 새초롬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잭린치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줄곧 따라다니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잭은 별로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운이 나쁘게 술이 취한 상태였으나 잭 이 술을 좋아한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었다. 오늘밤도 회관을 들락날락 하면서 바로 옆집인 술집에 가서 홀짝홀짝 마신 술이 잭을 취하게 한 것이다. 여느 때 같으면 회관 입구에 서서 음악에 맞추어 흥겹게 고개나 까닥이다가 안 짱다리를 흔들거리며 집으로 돌아가 얌전히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 늘밤에는 잭에게 악의 천사가 아주 가까이 날아든 모양이었다. 저녁식사에 앞선 마지막 춤에서 잭이 넥타이를 바로 고치더니 제니에게 으스 대며 다가왔다. "자아, 한 번 추시겠습니까? 아가씨." 그러더니 그는 타인캐슬의 말투로 말을 이었다. "당신하고 나하고 한 번 멋지게 돌아보는 거야." 제니는 일부러 고개를 돌려 건너편을 보고 있었다. 옆에 앉은 조가 말했다. "그만둬, 잭. 미스 선리는 나하고만 춤을 추겠대." 잭의 다리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도 한 번 춤을 추고 싶은걸." 그는 여성에 대한 최대의 경의를 보이며 팔을 내밀었다. 잭에게는 악의라곤 조금도 없었다. 비틀거리다가 그의 큰 손이 그만 잘못해서 제니의 어깨를 잡아 버렸다. 제니는 째지는 듯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조가 벌떡 일어서며 잭의 턱 에다 정확하게 주먹을 한 대 먹였다. 잭은 그대로 마룻바닥에 뻗어버렸다. 대소 동이 일어났다. "무슨 일이 생겼소?" 스탠리가 사람들 속을 헤치며 왔다. 조는 가슴을 쑥 내민 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떨고 서 있는 제니의 어깨를 안고 있다가 스탠리를 보자 좀 찔리는 얼굴 이 되었다. "아니 무슨 일이오? 왜 이런 일이 생겼소?" 스탠리가 쓰러져 있는 잭을 보며 힐책조로 묻자 조는 겁이 났으나 겸손한 태 도로 재빨리 대답했다. "이 사람이 술에 취했습니다, 사장님. 술에 취한 사람이 있으면 언제나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게 말하는 조 자신도 지난 토요일 린치와 함께 엉망으로 술이 취해서 엠 파이어 바에서 쫓겨났었지만 이 순간에는 그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 니 지금은 그런 지난 일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이 사람이 술에 취해서 제 친구에게 손을 댔습니다, 사장님. 저는 이 아가씨 를 보호했을 뿐입니다." 스탠리는 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남녀를 훑어봤다. 체격이 좋은 미남 청년과 곤경에 처한 미녀, 바닥에 뻗어버린 이 취한이 어떤 실례를 범했을지 보지않아 도 뻔했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술이 취했다! 그건 참 유감스러운 일이군. 술 취한 사람이 이곳을 드나들 수 없다는 것은 다 아는 일인데.... 여러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지금 공장 가족들끼리 점잖게 우애를 나누며 즐겁게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을 명심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 사람을 어서 밖으로 데리고 나가게. 자네에게 맡기겠어, 클레그 씨. 그리고 내일 내 사무실로 오도록 그 사람에게 말해주게. 결말을 낼 테니까." 술주정꾼이 된 잭 린치는 밖으로 내보내졌다. 그는 다음날 해고될 것이다. 스 탠리는 다시 조와 제니 쪽을 보며 그들의 황송해하는 미소에 답하는 미소를 띠 었다. "이제 별일 없겠지. 이름이 조 가울런이라고 했나? 잘 알고 있소. 공장 식구는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 없으니까. 당신의 아가씨도 소개해주겠소? 안녕하십니 까? 선리 양. 괜찮으시다면 춤을 한 번 같이 추실까요? 그 사소한 일은 빨리 잊 어버리십시오. 조에게는 나의 아가씨를 소개하지요." 이렇게 해서 제니는 스탠리와, 아주 예의 바른 자세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춤을 추게 되었다. 조도 미스 토드와 춤을 추었는데, 그녀는 관심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며 놀리듯 말했다. "멋있는 펀치였어요. 저는요, 자신을 보호할 줄 아는 사람을 좋아해요." 그녀의 생글거리는 웃음의 뜻을 몰라 조는 불안한 마음으로 그녀의 진의를 살 폈다. 그녀는 그것이 더욱 재이있다는 듯 그의 얼굴을 살피며 다시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갑자기 금주 회원이 된 것 같은 얼굴은 하지 마세요. 전연 어 울리지 않으니까요." 스탠리와 미스 토드, 제니와 조는 함께 만찬을 들었다. 제니는 하늘에라도 오 른 기분이었다. 그녀는 애교스럽게 생글생글 웃으면서 검은 눈썹을 매혹적으로 내리 깔곤 했다. 그녀는 젤리를 포크로 먹었으며, 음식들을 접시에 조금씩 남기 는 것을 잊지 않았다. 라루라 토드가 오렌지를 손으로 집어들고 조심성 없게 입 으로 깨물었을 때 그녀는 속으로 몹시 놀랐다. 그러나 그녀가 더욱 놀란 것은 라우라가 태연스레 스탠리의 손수건을 빌렸을 때였다. 제니에게는 이 모든 순간 순간이 꿈을 꾸는 것 같기만 했다. 파티가 끝났을 때 그러한 기분은 절정에 달 했다. 조가 돌아가는 길에는 마차를 불렀기 때문이다. 제니는 옷자락을 펄럭이며 들뜬 마음으로 마차에 올랐다. 장례식과 결혼식 등 여러 용도에 쓰이는 이 마차 는 그 동안 창고에 박혀 있었는지 좌석에는 푸른 곰팡이가 피었고, 습기 찬 냄 새가 불쾌했지만 흥분한 제니에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숄에 달 린 작은 털방울들을 흔들어대며 계속 지껄였다. "조, 아주 그만이었어. 난 당신이 밀링튼 사장님을 그렇게 잘 알고 있는 줄 전 연 몰랐어요. 왜 얘기하지 않았어요? 사장님은 정말 멋진 분이었어요. 그 아가씨 도 미인은 아니지만 취미가 고상해서 우리와 좀 통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였어 요. 그 여자가 입은 드레스 보셨어요? 그 옷이 얼마나 비싼지 상상도 못 할 거 예요.... 그런데 식사 예절은 별로였어요. 글쎄 오렌지를 그냥 깨물어 먹더라구요. 그리고 그 손수건은...난 그 순간 아찔하더라구요. 난 죽어도 그런 짓은 안 할 거 예요! 죽어도.... 귀부인답지 못하게 그게 무슨 짓이에요! 조, 내말 듣고 있어요?" 조는 이야기를 다 듣고 있노라고 부드럽게 대답해주었다. 어두운 마차 속에 그녀와 단둘이 있으니 오랫동안 그녀에게 품고 있었던 욕망이 격렬히 타올라 그 는 정신이 얼떨떨할 지경이었다. 더욱이 그녀와 춤을 추면서 내내 그녀를 품 안 에 안았었기 때문에 욕망은 더욱 불타 올랐다. 그는 그녀가 눈치 채지 못하게 조금씩 몸을 움직여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거는 조심스럽게 팔을 뻗쳐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언젠가 나도 그녀의 드레스와 같은 것을 맞출 거야. 진짜 새틴에 진짜 레이스 가 달린 옷을 나도 입고 말 거야. 그 여자는 멋을 아는 사람이었어. 유행이 뭔지 아는 사람이더라구...." 그는 부드럽게 그녀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 다. "제니! 이젠 그런 이야기는 그만둬. 제니는 그런 옷을 입지 않아도 얼마나 아 름다운지 몰라. 그 여자와는 비교할 수도 없지. 난 제니만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구!" 그녀는 기분이 좋아서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이 드레스는 2파운드 4실링이 들었을 뿐이라구요. 의상실도 웰든이라는 아주 평범한 곳이고...." "아아! 제니는 너무나 놀랍다니까! 아, 아름다운 제니!"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를 깊이 껴안았다. 그러자 그녀가 날카롭게 소 리쳤다. "안 돼, 조! 이거 놓지 못하겠어?" "제니, 걱정 마. 해롭게 하지 않을 테니까, 제니. 어서 얌전히 있어!" "안 돼, 조! 어서 놓아줘!"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잖아.... 제니, 사랑해! 아, 제니." 조는 사랑에 능숙한 남자였다. 제니처럼 허영심 많은 여자를 다루는 데에 서 투를 수가 없었다. 제니는 그의 달콤한 말과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손길에 이끌 려들면서도 소리쳤다. "아, 안 된다니까. 제발 놓아줘요...." 그때 마차가 멈추는 기색이었다. 집 앞에 도착한 것이다. 조는 할 수 없이 벌 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제니의 목에서 떼었다. 그는 신사답게 먼저 마차에서 내 려 그녀의 손을 잡아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녀 뒤를 따라 현관 돌층계를 올라가면서도 그의 채워지지 못한 욕망은 계속 끓어올랐다. 열쇠를 꺼 내서 문을 여느라고 그녀가 허리를 굽혔을 때 바로 그의 코앞에 보이는 탄력이 넘치는 그녀의 몸은 더욱 그의 욕망을 부채질했다. 그는 오늘 밤 그녀의 아버지 앨프가 없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그녀도 오늘 밤에는 그대로 잠자리로 가는 것이 싫은 것 같았다. 부엌으로 들 어가 불을 켠 그녀는 다정하게 말했다. "뜨거운 것 한 잔 드려요, 조?" 조는 자신의 욕망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퉁명스레 말했다. "제니는 나를 놀리고 있어. 나를 조금도 좋아하지 않으면서 이용만 할 뿐야. 지금 난 아무것도 마시고 싶지 않아. 제니와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야. 자, 이 리 와서 좀 앉아봐." 그녀는 좀 망설이는 눈치였다. 그녀로서는 조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되어 미안 스럽기도 했고, 오늘 밤 조는 어느 때보다도 멋있어 보였다. 그리고 사실 그녀를 위해서 얼마나 정성을 쏟아주었는가. 갑자기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는 그 의 곁으로 얌전히 다가갔다. 그가 다가가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사정없이 껴안았다. 그녀가 몸부 림 쳤으나 그것은 그를 더욱 난폭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이상한 황홀감을 느꼈 으나 한편으로 몹시 겁이 나기도 했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나 그녀는 그의 힘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난로 안의 불이 다 꺼져가고 있었다. 조의 곁에서 겨우 울음을 그친 그녀는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조 사랑해요. 꼭 안아줘요. 더 꼭...지금 몹시 추워요." 제기랄! 조는 속으로 혀를 차며 어서 이 불편한 자리를 떠났으면 좋겠다는 생 각을 하면서 제니를 바라보았다. 눈물에 얼룩진 창백한 제니에게서는 고개를 치 켜들며 잘난 체하던 기색은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자기 아버지가 기 르고 있는 어린 비둘기처럼 가련하고 애처롭게 보일 뿐이었다. 그는 돌연히, 그 렇다. 돌연히 그녀를 걷어차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것을 겨우 눌렀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도 말했듯이 조의 진짜 첫사랑이었으나, 그의 정열은 스스로도 놀 랄 정도로 빨리 식어버렸다. 12 법산저택에는 토요일 밤이면 늘 정해진 행사가 있었다. 저녁식사가 끝나면 힐 다는 아버지에게 오르간 연주를 들려주었다. 그래서 오늘 밤, 1909년 11월의 마 지막 토요일 밤 8시 힐다가 헨델의 '수상(水上)의 음악' 제1악장을 치고 있는 동 안 배러스는 의자에 앉아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사 실 힐다는 아버지에게 오르간 연주를 들려주는 걸 좋아하지 않았으나 힐다가 거 절한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다. 힐다의 오르간 연주는 배러스의 규칙적인 생 활의 일부였다. 리처드 배러스는 일과를 아주 정확히 지켰다. 그렇다고 해서 배러스를 습관적 으로만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는 원리원칙을 중요시하는 성실한 사람으로 그의 생활 근저에는 항상 원칙을 따른다는 기본적인 자세가 있었다. 그는 또한 도덕적인 인물이었다. 의지가 약한 인간을 가장 경멸하는 그는 자신 의 삶에 있어서 철저했다. 이를테면 그는 자기의 부인 해리어트가 환자지만 그 녀 외의 어떠한 여성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인간들의 천한 탐욕 을 경멸했다. 미식, 폭음, 지나친 수면, 사치, 호색 등 인간의 모든 탐닉에 대해 그는 구역질을 느낄 정도로 혐오했다. 검소한 음식을 즐기는 그는 음료는 물을 마실 뿐이고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옷에 대해서도 허영심이 없는 그는 몇 벌 안 되는 옷으로 멋을 부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물론 그에게도 자랑거리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조상 대대로 이미 100년에 걸쳐 경영해온 넵튠 탄광의 주인으로 가업을 잇고 있다는 것에 대해 그는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배러스 가문에서 광산업을 시 작한 것은 1805년 피터 배러스 때부터였다. 그는 스누크에서 지금은 넵튠 구광 이 된 제1수갱을 파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자그마한 탄광을 물려받은 그의 아들 윌리엄은 자기 대에서 제2, 제3의 수갱을 팠다. 리처드의 아버지 피터 윌리엄은 제4수갱을 파기 시작했다. 그것은 빈틈 없는 판단에 따른 거대한 공사 였고 리처드는 바로 거기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었던 것이다. 이렇게 빈틈없고 냉철한 조상들의 노력으로 가문의 이름을 날리고 부를 축적할 수 있었음에 대해 리처드는 깊이 감사하고 있었다. 또한 그도 빈틈 없음과 냉철함, 그리고 어려운 거래를 성공리에 처리하는 능력을 지녔고, 이것은 자기 선조들의 소질을 이어받 아 발전시킨 것이었다. 그는 사회적으로 공공연하게 자기의 야망을 드러내는 걸 꺼렸다. 사람들과 대 화를 나눌 때, 주(州) 유력인사의 이름이라도 나오면, 배러스는 조용히 "그런데 그 사람 재산이 얼마나 된다고 하던가?" 하고 점잖게 물어보지만 그것은 단지 주변 사람들의 재정적 지위가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넌지시 언급하는 것에 지나 지 않았다. 그는 은행가와 변호사로부터 존경을 받는 인물이지만 신사인 척하는 그런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신사인 체한다는 말조차 싫어했다. 아내 해리어트 윈들리스는 이 고장 명문 집안 출신이었다. 그러나 가문이 뛰어나서 해리어트와 결혼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해리어트를 자기 아내로 맞아 들이기 위해서 어떤 책략도 쓰지 않았다. 그는 정열적인 사랑이라든가 하는 것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해리어트와의 결혼에 있어서 사랑이 뒤따랐다는 것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하자면 그는 지독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이 지독하다는 것에 는 정적이면서도 냉철함이 뒤따르고 있어 그것을 장점처럼 드러내주는 것이었 다. 그에게서는 광폭한 면이나 격렬한 정열, 불 같은 감정의 소용돌이를 전혀 찾 아볼 수 없었다. 그는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는 건 물리치고 맞는 것만을 재빨리 받아들였다. 리처드는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 비밀주의도 확실히 그의 성격 중의 하 나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흔히 볼 수 없는 음험한 빛을 띠고 있으며, 그래서 인지 남이 알려고 하는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하여 누가 가까이 보고 싶어하기라 도 할라치면 어떤 친밀한 관계도 단절시켜버리는 무서운 비밀주의였다. 그는 '내 자신은 내 자신일 뿐이므로 누구도 관계 없고 상관할 것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의 본심은 '나는 내 자신을 지배할 수 있지만 내가 아닌 그 누구도 나를 지배할 수 없다.' 라는 굳센 신조를 지니고 있는 모양이었 다. 이 모든 것이 정적이고 냉철한 성격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리처드의 성격의 모든 면이 이런 유별난 북쪽 특유의 형태일 뿐이라 고 단정해서는 안된다. 리처드에게는 극히 개성적인 또 다른 특징이 있었다. 그 는 오르간을 좋아했고 헨델의 음악, 그 중에서도 특히 '메시아'를 애호했다. 예술 에 대한 그의 열의는 그 저택의 벽에 걸려 있는 값비싼 그림에서 보여지고 있 듯이, 건전하면서도 이미 유명해진 작품들이 그것을 입증해준다. 또한 단란한 가 정에 대한 열렬한 바람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그의 뿌리 깊은 결벽성과 꼼꼼함 도 그러했고, 또 결국 그의 탐욕도 그러한 종류인 것이다. 바로 여기에 리처드의 영혼에 감추어진 의향, 이 인물의 핵심이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소유물인 탄광, 저택, 그리고 재산 등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을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이는 곧 그가 낭비를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것을 설 명해주고 있다. 그러한 영향은 우선 캐리 고모에게 '무엇이든 내버리는 것은 도 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되게 했다. 캐리 고모는 자신만 아니라 누구든 물건 을 버리지 못하게 했는데, 배러스는 그것에 아주 만족하고 있었다. 그것은 배러 스 자신도 일찍이 물건을 아무렇게나 내버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신문, 서류, 영수증, 거래상의 기록 등 모든 것이 정연히 구분되어 배러스의 잠가진 책상 속 에 넣어져 있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에게는 일종의 종교와 같은 것이었다. 즉 최고의 규범이라고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이는 그가 헨델을 애호하는 것 과 일맥 상통하는 데가 있었다. 헨델처럼 인상파적인 폭과 깊이와 일종의 불가 해한 종교적인 것이 있었지만, 그 근본은 단순한 탐욕이었다. 왜냐하면 배러스의 영혼이 갖는 비밀스럽고도 탐욕스런 정열이란 사실로 돈에 대한 애착이었기 때 문이다. 그는 교묘하게 그것을 은폐했다. 자기 자신마저 속이는 것이었지만 결국 그는 돈을 숭배했다. 그는 자기의 부(富), 자기 자신의 재산이 보여주는 빛나는 장관을 망므속에 끌어안아 그것을 조금씩 키워왔던 것이다. 힐다가 헨델의 연주를 끝냈다. 마침내 '수상의 음악'을 끝냈다. 여느 때 같으면 악보를 피아노용의 긴의자에다 다시 놓고 곧장 2층으로 가버렸을 것이었다. 그 러나 오늘 밤 힐다는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그녀는 건반 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라르고'도 좋아하세요, 아빠?" 라르고는 배러스가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그 어느 곡보다도 그에게 감명을 주는 곡이었다. 그녀는 그 곡을 천천히 그리고 당당한 리듬으로 연주했다. 침묵 이 흘렀다. 그는 이마에 손을 댄 채로 말했다. "고맙다, 힐다."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테이블 반대쪽에 섰다. 그녀는 늘 하는 것처럼 누구 도 가까이 오는 것을 막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론 몹시 떨고 있 었다. 그녀는 겨우 입을 떼었다. "아빠!" "왜 그러냐, 힐다!" 그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부드러웠다. 그녀는 긴 한숨을 쉬었다. 이 몇 주일 동안 그녀는 이런 한숨을 몇 번이나 쉬었던가? 그러나 지금은 결심한 것을 말해 야 할 때이다.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아빠, 이제 저도 스무 살이 되어가요. 학교를 졸업한 뒤 집안에만 있는 것이 2년이나 됐어요. 그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어요. 이제는 이렇게 사는 것 에 지쳤어요. 난 뭔가를 하고 싶어요. 아빠, 제발 제가 무슨 일이든지 하게 해주 세요. 밖에 나가도록 해주세요. 네, 아빠!" "뭔가 하고 싶다고...?" "네, 그래요. 무엇이라도 배우고 싶어요. 아무 일이라도 하고 싶어요." 힐다는 간청하는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어떤 일을?" "어떤 것이라도 좋아요. 아버지의 비서도 좋구요. 간호사, 아니면 의학공부를 하고 싶어요. 내가 제일 원하는 것은 시실 그거예요." 그는 빈정거리는 얼굴로 재미있다는 듯이 딸을 건너다보았다. "결혼은 어떻겠니?"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전 절대로 결혼은 안 해요. 결혼은 말만 들어도 싫어요. 전 못생겼기 때문에 결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요." "너 신문을 읽은 모양이구나." 그의 얼굴빛이 달라졌지만 목소리만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그러자 그녀의 혈 색 나쁜 얼굴이 빨개졌다. 그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날 아침 신문 을 읽었다. 전날 각의(閣議)를 개최 중이던 다우닝 가를 여성 참정권자들이 습격 했는데, 그 중 몇 사람의 여성들이 바로 하원을 습격하려던 폭력사건이 발생했 던 것이다. 그 기사는 사실 힐다를 흥분시켰다. "습격 계획이라.... 하원 습격, 사전 계획!" 그는 미친 짓도 이만저만 아니라는 듯 비웃는 어조로 신문의 표제를 읽었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왕 시작한 것을 어떻게든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 다. "아빠. 저 의학공부를 허락해주세요. 전 의사가 되고 싶어요." "안 돼! 힐다, 너는 안 돼!" "전 가고 싶어요. 보내주세요, 아빠!" "안 된다니까!" "아빠, 제발 부탁이에요!" 그녀의 음성은 필사적이었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흘렀다. 그녀의 얼굴빛이 흙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는 천장을 바라보며 무엇인가 골똘 히 생각하는 듯했다. 이렇게 1분 가량 지났다. 이윽고 힐다가 먼저 돌아서서 방 을 나가버렸다. 그는 힐다가 가버린 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힐다는 범할 수 없는 관 습을 깨뜨리고 만 것이다. 그는 이제 힐다에 대해서 마음을 닫아버렸다. 그는 약 반시간 가량 더 앉았다가 일어나서 조심스럽게 가스를 끄고 2층 서재 로 올라갔다. 그는 힐다가 토요일 밤에 오르간을 연주해주고 나면 언제나 자기 서재로 올라갔다. 넓고 아늑한 서재에는 두꺼운 카펫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커 다란 책상, 창문들을 덮은 암홍색 커튼, 그리고 넵튠 탄광의 사진 몇장이 벽에 걸려 있었다. 배러스는 책상 앞에 앉아 열쇠 꾸러미를 꺼내, 세심한 주의를 기울 여 그 중 하나를 골랐다. 그런 뒤 위에서 중간쯤의 서랍을 열었다. 거기서 그는 장부 세 권을 꺼내서는 익숙한 솜씨로 그것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장부는 그가 투자한 자본의 목록으로 배러스 자신의 깨끗한 필체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무표정한 얼굴로 봐나가다가 곧 만족스러우면서 도 무엇이라고 할 수 없는 미소를 입술에 머금었다. 그는 펜을 들어 잉크를 묻 히지 않은 펜 끝이 숫자들의 각 행들 위에서 가볍게 달리게 했다. 갑자기 그는 손을 멈추고 깊이 생각을 하더니, '제1연합 탄광'의 갱구를 팔아 넘길 결심을 했 다. 그곳은 최근 들어 채탄의 최절정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수익상태에 관한 비밀 보고는 그와 정반대의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좋다. 그것을 팔 것이 다. 그는 자신의 빈틈 없는 돈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본능에 감탄하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한 번도 실수를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또 왜 자기가 실수 를 할 필요가 있는가? 이 작은 장부 속에 기록한 모든 유가 증권은 사실상 다시 없이 확실한 보증이 붙은 확고 부동한 것들이었다. 또 한 번 그는 재빨리 계산 을 해봤다. 그 총액은 그를 기쁘게 했다. 그 다음에 그는 두 번째 장부로 눈을 옮겼다. 이 두 번째 장부에는 슬리스케 일과 그 지역에 있는 자기가 소유한 가옥 목록이 적혀 있었다. 광산촌 달동네의 대부분도 배러스의 소유였다. 정육점 주인 래미지가 밸러클라버 로의 반을 소유 하고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몹시 못마땅했다. 타인캐슬에는 일 주일마다 세를 받게 되는 좋은 아파트가 몇 동 있었다. 이 아파트는 강가에 위치해 있었고, 매 주 세든 사람에게서 돈을 거두는데, 그것은 여간 수지 맞는 장사가 아니었다. 이 아프트의 실제적인 업무는 그의 변호사인 배너먼이 조용히 분별있게 처리하고 있었다. 그는 이 아파트를 운영하는 방법, 즉 자기 자신이 만든 그 아이디어를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경비문제에 관해서 배너먼에게 이야기할 내용을 종이에 적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좀 긴장이 풀린 기분에서 어루만지듯 그는 세 번째 장부를 자기 앞에 끌어당겼다. 거기에는 자기가 그림값으로 지불한 금액의 목록이 기록 되어 있었다. 그는 그 장부를 앞에 두고 깊이 생각했다. 그림들에 실제로 지불한 2만 파운드라는 큰 재산을 생각해본다는 것 또한 그를 즐겁게 해주는 일어었다. 생각해보면, 그것 역시 상당한 투자였다. 그 그림들은 그의 집 벽에 걸려 있고 그 가치는 재미를 볼 만하게 올라가 있고, 티티안과 렘브란트처럼 진귀하고 연 대가 오래된 것들이 자꾸 불어나고 있지만...그는 이제 더는 사들이지 않을 것이 다. 그렇다. 예술에 대한 자기의 경의를 이미 다 지불한 것이다. 그만하면 족했 다. 시계를 바라봤다. 시간이 너무 오래 되었으므로 그는 혀를 찼다. 그는 조심스 레 그 장부들을 집어넣고 가운데 서랍을 다시 채웠다. 그리고 침실로 올라갔다. 그는 다시 시계를 꺼내 밥을 주었다. 그리고 침대 옆에 있는 유리물병에서 물 을 한 잔 따라 마신 후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의 힘차면서 조용한 동작은 뺄 수 없는 일련의 어떤 동작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 동작 하나하나에는 각기의 신 중한 자기 이해가 얽혀 있었다. 그 하얗고 힘센 두 손이 동작들 자체가 가진 말 없는 순서를 대변해주었다. '이런 식으로...이렇게...그 최선의 방법은 이런 식으로 하는것,...내게는 이런 식이 제일 좋은 것...다른 방법도 있기야 하겠지...그러나 이 방법이 내게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내게는....' 하는 듯했다. 침실의 희미한 불 빛 속에서 손이 상징하는 것들은 이상하게도 위협적인 데가 있었다. 이윽고 배 러스는 준비가 끝났다. 그는 암갈색 잠옷으로 갈아 입었다. 그는 잠시 동안 서서 손가락으로 자기 턱을 쓰다듬더니 차분히 복도를 걸어갔다. 힐다는 어두운 자기 방에 앉아서 아버지가 옆에 있는 어머니 방으로 들어가는 무거운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 꼈다. 그녀는 괴로운 표정으로 두 귀를 막으려고 애썼으나 막을 수가 없었다. 박 자국 소리가 난 뒤에 소곤거리는 목소리. 육중하고도 조심스런 삐걱거리는 소리. 힐다의 온몸이 떨렸다. 역겨움의 고뇌에 싸이며 그녀는 기다렸다. 그 소리가 시 작되었다. 13 조는 소코츠드 로에 있는 거실에서 빈둥거리며 식탁 옆에 앉아, 고스포드 공 원의 경마에 관한 생글러 기수장(騎手長)의 예상 기사를 큰 소리로 읽고 있는 앨프 선리에 대해서는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조는 앨프와 오늘 오후 에 그 경마시합에 가기로 했지만, 그의 뚱한 표정과 기수장의 정보에 대한 달갑 지 않은 얼굴로 보아 오늘 경마에 대한 예상이 별로인 모양이었다. 조는 점심을 먹은 뒤라 식곤증을 느끼며 두 다리를 창문턱에다 얹고는 생각에 빠져들고 있었 다. "조사 자료에 의거하여 나는 확신을 가지고 켈 경의 말 네스필드가 엘든 배 (杯)의 주인이 될 거슬 보증하는 바이며, 훈련이 잘 된 세 살짜리의 말을 오늘의 선마(選馬)로 삼는다." 졸음을 불러오는 앨프의 단조로운 음성을 들으며 조는 새삼스럽게 방 주위를 둘러보며 혀를 찼다. "제기랄, 욕지기가 솟는 곳이구먼! 꼭 굴 속 같은 집구석이라니까!" 그런데 이런 곳에서 3년 이상을 참고 살아왔다는 것이 참으로 가상했다. 정확 하게 말하면 거의 4년에 가까운 세월이다. 얼마나 더 이 집에 달라붙어 있을 작 정인가? 자기도 모를 일이었다. 세월이 자기도 모르게 흘러가 버리고, 해변에 잘 못 올라온 고래처럼 이런 곳에 그대로 남겨지다니. 자신이 지녔던 야심은 어디 로 갔단 말인가. 평생을 여기에서 이렇게 주저앉아 있을 작정인가? 잘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자기의 삶이란 것이 좋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4년이 란 세월 동안 밀링튼 공장에서 일을 열심히 해왔다. 그렇다. 아주 잘.... 그러나 아주 잘이라고 하는 것이 충분한 것은 못 된다. 더욱이 조 가울런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랬다. 그는 주당 3파운드를 받으면서 쇠의 제련을 하고 있었다. 이제 나 이가 스물둘인 그에게 그런 보수는 꽤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는 인기 가 있었다. 이 인기에 대한 생각을 하면 우울한 기분에 약간 희미한 즐거움의 빛이 새어든다. 그는 놀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다른 젊은이와 비교하다니, 천 만에 말씀이다! 밀링튼 사장도 역시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 사장은 일을 하는 그의 앞을 지나갈 때면 발을 멈추고 말을 걸곤 했다. 그러나 그가 바라는 좀 더 결정적인 것은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육시랄!" 하고 조는 쌍소리를 내뱉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전에는 한 벌밖에 없던 옷이 이제는 세 벌, 갈색 구두가 세 켤레 그리고 수도 셀 수 없이 많은 넥타이. 호주머니 속에는 늘 잔돈푼이 있고, 체격도 더 좋아지고 세인트 제임스 회관에서 권투시합에도 나갔었다. 이 시내에서 그가 모르는 곳은 없었다. 약간의 요령도 익혔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육시랄,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는 여 전히 철공장 노동자일 뿐이지, 뽐내며 여기저기 돌아다닐 처지가 못 되는 것이 다. 그리고 더욱이 제니와 떳떳치 못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조는 괴롭게 몸을 꿈틀거렸다. 제니는 그를 너무 사랑하며 그에게만 매달리려 고 해서 그를 더욱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보다 더 재수 없는 일 이 어디 있을까! 처음에는 물론 자신의 허영심이 많은 작용을 했다. 제니와 함께 가슴을 쫙 펴고는 중산모를 뒤통수에 붙이고, 빨간 구두로 거리를 경쾌하게 걸 어다닐 때 물론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기분이 좋기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이제 제니에게 신 물이 났다. 아니, 아직까지 그 정도는 아니다. 아직 그녀는 품에 안으면 나긋나 긋한 것이 사랑스럽긴 하다. 그러나 그것은...이제는 별 흥미가 없는 일이다. 아 무 저항 없이 품에 안기곤 하는 제니, 사랑 받지 못할까봐 안간힘을 쓰는 제니 는 이제 그에게는 아무 정열도 일으키지 않는다. 결혼할 생각 같은 것도 전연 없었다. 제니가 아닌 다른 여자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는 어떤 여자에게 일생을 묶인 채 산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나는 일이었다. 그에게는 그런 생각 이 조금도 없었다. 그는 오직 출세하고 싶은 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는 재산을 갖 고 싶었다. 겉만 번지르르한 것이 아니 진짜 황금을 갖고 싶었다. 그는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제니는 자기 인생에서 너무 무거운 짐이다. 자기 인생을 바라지 않는 방향으로 바꾸어놓는 장애물이다. 오늘 오후만 하더라도 그 녀의 아버지와 고스포드에 가는데 그녀에게 그냥 집에 남아 있으라고 말을 하자 마자 그녀는 눈물을 철철 흘리며 울어대는 것이었다. 그래서 데리고 가겠노라는 약속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약속을 하고 나서야 그녀는 가까스로 울음을 진정했다. 그녀는 지금 2층으로 옷을 입으러 갔다. "에이, 제엔장!" 조는 자기 앞에 있는 의자를 갑자기 발로 차버렸다. 앨프는 깜 짝 놀라 신문 읽기를 멈추고 조를 쳐다보았다. "내 신문 읽는 소리를 듣지 않았구나." "그 자식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헛소리만 하고 있는 거예요. 그 녀석 기껏 한다 는 것이 말 주둥이만 보고 겨우 힌트를 얻는 것뿐이라구요. 그러니 무슨 믿을 만한 것이 나오겠어요? 디크 조비에게 가서 정보를 얻어야겠어요. 그 자식은 내 친구지만 그래도 뭘 좀 알고 지껄인다구요." "자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경마 이야기는 10분 전에 끝났고 지금은 블리어로가 발명한 비행기 기사를 읽고 있는 중이었네. 작년에 도버 해협을 날 은 그 친구 말일세." 그러자 조는 당황하며 불쑥 말했다. "그런 지랄 같은 비행기는 나도 언젠가 한 기단(機團) 쯤 갖게 될 테니 두고 봐요." 앨프는 신문 너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지, 어디 두고 보세나." 그의 음성에는 강한 조소가 섞여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제니가 들어왔다. 조는 심술궂은 얼굴로 쳐다봤다. "이제 겨우 준비가 끝났나보군." "응, 늦어서 미안해요." 그녀는 아주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상하게도 제니는 울고 나면 더 팔팔 해지고 명랑했는데 지금도 바로 그랬다. "내 새 모자 어때요?" 그녀는 그를 놀리듯이 머리를 그에게로 내밀었다. "아주 멋있죠?" 조는 마음이 침울해 죽을 지경이었지만 예쁘다는 말에는 동조하지 않을 수 없 었다. 화사한 색깔의 새 모자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해 주었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순결을 잃은 다음에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큰 소리로 웃어대며 그들을 재촉했다. "어서 가요, 사람을 기다리게 하지 말라구요. 늦겠어요." "사람을 기다리게 하다니!" 조가 기가 막혀 화를 내려하자 앨프가 그를 말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가게, 여자들이란 다 그렇다네!" 세 사람은 고스포드 공원으로 가는 전차에 올랐다. 두 남자 사이에 앉은 제니 는 여전히 기쁜 표정이었다. 전차는 노드 로를 계속 덜컹거리며 굴러갔다. "오늘은 나도 돈을 좀 벌고 싶어." 그녀는 핸드백을 톡톡 치면서 조에게 자신이 있다는 듯이 말했다. "너만 그런 게 아니라구." 조는 거칠게 대꾸했다. 그들은 2실링짜리 관람석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혼잡한 정도는 아니었고 알 맞게 좌석이 차 있었다. 그녀는 기뻐했다. 밝은 초록색으로 단장한 경주로를 배 경으로 서 있는 각양 각색의 기수들, 윤기가 흐르는 멋있는 말들, 커다란 푸른빛 황금빛 우산 아래서 마권계원들이 지르는 고함소리, 관람석 사람들의 움직임과 활기와 흥분, 최신 유행의 옷차림들,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는 잔디밭에 보이 는 명사들. "저기 좀 봐요, 조. 저기...." 그녀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그의 한팔을 꽉 잡았다. "켈 경이 나오셨어! 정말 멋진 신사야!" 영국 스포츠의 대부이며 스코틀랜드 북부지방의 백만장자인 지주 켈 경은 혈 색이 좋은 얼굴에 구레나룻을 기른 멋진 모습으로 키가 작은 기수와 이야기를 하며 서 있었다. 조는 질투가 나는 얼굴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만일 네스필드가 승리한다면 제깐놈도 진퇴양난일 거야." 그는 디크 조비를 찾으러 사람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디크를 찾 는 데 많은 고생을 했다. 디크는 10실링짜리 좌석에 있었기 때문이다. 조는 간신 히 디크를 난간으로 불러냈다. "실례를 끼쳐 죄송합니다." 조는 다정하면서도 예의 바르게 말을 시작했다. "혹시 어떤 예상이라도 갖고 계시나 해서요. 전 괜찮습니다. 전 절대로 돈을 많이 걸지 않으니까요. 다만 제가 젊은 여성과 아버지까지 모시고 왔기 때문에... 제가 사귀는 아가씨죠.... 경마에서 조금이라도 딴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디크 조비는 난간을 깔끔한 검은 구두 끝으로 탁탁 차면서 결코 시선을 주지 는 않았다. 몹시 약아 보였으며 결코 좋은 정보를 제공해줄 위인은 아닌 것 같 았다. 마권 중매인이라는 작자들은 본디 살이 뚱뚱하게 찌고, 시뻘건 얼굴에 커 다란 시가를 입 한쪽에 문 채로 떠들어대는 그런 패들인 것이 보통인데, 타인캐 슬의 디크 조비에게서는 그런 빛을 전연 차자볼 수 없었다. 디크는 마권 중매인 이, 그것도 아주 대규모로 하는 마권 중매인이었다. 빅 마켓에 사무실이 있으며, 가톨릭 성당 길 건너의 얘로우 거리에도 분점을 갖고 있었다. 그러한 디크는 가 장 순한 시가 담배를 피웠으며 마시는 것도 탄산수였다. 성격이 조용하며 상냥 한 그는 옷은 수수하게 입었으나 멋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절대로 욕지거리 를 내뱉는 법이 없고 큰 소리를 지르는 법도 없었다. 그리고 지방 경마장인 고 스포드 공원 이외에는 어떤 경마장에도 절대로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많은 친 구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에 따르면 디크는 1년에 한 번씩 고스포드에 가서 벌이 를 한다는 것이었다. "무슨 예상하는 것이 없습니까, 조비 씨? 그 아가씨에게 알려줄 만한...." 디크는 조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는 조의 말투가 마음에 들었다. 그는 조가 세인트 제임스 회관에서 권투를 하는 것도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조가 왠지 '호 감이 가는 청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드디어 디크는 입을 열었다. "마지막 경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그러죠, 조비 씨." "마지막엔 아가씨에게 작은 것을 사도록 해요. 많이 사면 안 된다는 걸 알려줘 요. 그냥 재미로 2실링 6펜스어치만 사라고 해." "알겠습니다, 조비 씨." "물론 결과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그렇겠죠, 조비 씨. 그런데 네스필드라고 생각하십니까?" 디크는 머리를 내저었다. "그 말은 가망이 없어. 자네 애인에게 핑크버드에게 2실링 6펜스만 걸라고 해. 꼭 2실링 6펜스야, 알았지. 그것도 다만 재미로 하는 거야." 디크 조비는 미소를 보이며 끄덕끄덕하고는 조용히 가버렸다. 의기 양양해진 조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군중을 헤치면서 앨프와 제니 쪽으로 돌아왔다. "조, 어디 갔다 오는 거예요? 벌써 첫 번 경마는 끝났잖아요. 나는 아직도 돈 을 걸지 못했는데." 제니가 잔소리를 했지만 이제 기분이 좋아진 그는 그녀에게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마음대로 사라고 했다. 그는 그녀와 앨프가 서로 자기네의 예상을 논의 하는 동안 가만히 듣기만 했다. 제니는 이름이 예쁜 말이나 색깔이 가장 멋있는 말이나 또는 어떤 특별한 귀족의 소유인 듯한 말에 돈을 걸려고 했다. 조는 그 저 싱글싱글거리면서 그들의 의견을 따라 원하는 대로 표를 사다주었다. 그러나 실패의 연속이었다. 네 번을 실패하자 제니는 풀이 꺾여서 화를 냈다. "아니, 이건 너무하잖아?" 그러나 제니는 째째한 사람이 아니었다. 또 반 크라운짜리 쯤은 아무렇게 생 각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오직 이기고 싶은 일념에서 안간힘을 썼지만 행운은 오지 않았다. 앨프는 오직 생글러 기수장의 말을 고집스레 따랐지만 딱 한 번 승산이 있을 뻔한 것 외에는 하나도 들어맞지 않았다. 그러나 신념을 갖고 말했다. "네스필드에게 걸어서 몽땅 되찾자꾸나. 그 말은 오늘의 이를테면 중장급(中將 級) 예상마니까." 조는 앨프가 답답하기 짝이 없게도 네스필드를 지적해서 경마권을 사겠다고 하는 것을 들으면서 내심으로 기분이 좋았다. 제니는 다시 출마표(出馬表)를 꼼 꼼이 보기 시작했다. "난 아빠가 말하는 그 기수장 영감 말을 그다지 믿을 수가 없어요, 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아무도 장담할 수는 없어. 그렇지만 그 말은 켈 경의 소유일걸. 그렇지?" "아, 맞아. 그걸 잠깐 잊었었어. 그래, 난 네스필드에게 걸겠어." "핑크버드는 어때?" 조는 그냥 한 번 말해본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런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어." 앨프가 즉각 대답하자 제니도 머리를 흔들었다. "어머나, 조, 조심해요. 난 켈 경의 말로 결정했어요." "좋아! 각자 좋은 대로 하는 거야! 난 핑크버드에게 걸겠어." 조는 벌떡 일어났다. 그는 대담하게 자기가 가졌던 돈 4파운드를 몽땅 걸었다. 그 말은 마권의 비율도 5였다가 별안간 3으로 떨어졌다. 시간이 되었다. 말들은 출발선을 떠났다. 그는 일어서서 난간을 꽉 붙잡고 무리를 이룬 말들이 커브를 질풍처럼 도는 것을 바라보았다. 더 빨리 뛰어라, 더 빨리. 그는 손에 땀을 쥐며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 되었다. 숨을 헐떡이며 말들이 직선 코스에 들어서서 결 승점으로 다가오는 것을 그는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윽고 그는 환호성을 질렀 다. 핑크버드가 말 두 마리의 몸뚱이 길이를 합친 만큼의 거리로 앞서 골인한 것이다. 번호가 계시되자마자 그는 상금을 받아 5파운드짜리 지폐 넉 장을 자기 안주 머니에 챙겨 넣고, 1파운드 금화 4개를 조끼 호주머니에 밀어넣은 다음 저고리 단추를 채우고 모자를 다시 한 번 잘 고쳐 쓰더니 으쓱거리며 제니에게 돌아왔 다. "어머, 조." 제니는 거의 울상이 되어 조를 바라보았다. "그래, 내가 말할 때 왜 그걸 안 샀어?" 그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내 예상을 받아들였으면 아주 좋았을걸. 나는 한 보따리 벌었어. 그리고 내가 너한테 말해주지 않았다고 앙탈을 부리지는 말어. 나는 그 말에 건다고 분명히 말했으니까. 난 처음부터 핑크버드뿐이었어." 그는 두 사람을 이겼다는 기쁨에 하늘에라도 오른 듯 기뻤다. 제니의 화가나 창백해진 얼굴을 볼수록 더욱더 즐거운 웃음이 터져나왔다. "제니, 그런 것가지고 울고불고 하지 마. 오늘 밤엔 내가 한 턱 낼게. 한바탕 신나게 놀아보자구." 그 두사람은 출구를 나오면서 요령 있게 앨프를 따돌렸다. 앨프는 생글러 기 수장을 저주하는 것에만 너무 열중한 나머지 그들이 자기를 따돌리는 줄도 모르 고 있었다. 그 두사름은 6시 조금 지나서 타인캐슬에 도착해서는 헤이 마켓 안으로 들어 갔다. 조의 우울은 이제 깨끗이 사라졌다. 제니에게도 다정하게 대하며 그녀가 팔짱을 끼는 것도 허락했다. 그들이 노덤블런드 가 모퉁이를 돌았을 때 조는 갑 자기 걸음을 멈추며 놀랐다. "아니, 저 친구가 이곳에 웬일이지.... 이런 곳에 있을 까닭이 없는데!" 이렇게 중얼거리던 그는 급히 뛰어가며 소리를 질렀다. "야, 데이빗! 데이빗 펜윅, 이 자식아." 데이빗이 걸음을 멈추며 돌아서다가 그도 마주 소리를 쳤다. "아니, 조 아냐? 너를 여기서 만나다니.... 야, 조!" "맞아, 바로 조야! 타인캐슬에 조 가울런은 바로 나 한 사람이지 누가 또 있겠 니!" 두 사람은 서로 부등켜 안으로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그러더니 조는 아주 점 잖게 두 사람을 서로 소개하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선리 양이야. 어여쁜 내 친구지. 이쪽은 데이빗, 이 조는 유일한 옛 친구이고." 데이빗은 제니를 바라봤다. 그는 그녀의 맑고 깊은 눈을 똑바로 들여다봤다. 그녀의 미소를 보면서 자기도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에 찬탄의 빛이 감돌았 다. 두 사람은 매우 정중하게 악수를 나눴다. "제니와 나는 뭘 좀 먹으려고 막 나온 길이야." 조는 이런 경우라면 틀림없이 자기가 책임질 상황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 다. "잘 만났어. 같이 가서 식사를 하자. 뭐가 먹고 싶은지 말해, 데이빗." "좋아." 데이빗도 환한 얼굴로 웃었다. "여긴 넌 가 근처야. 록하트 음식점으로 들어가자." 조는 픽 웃었다. "록하트라고. 얘가 록하트라고 하는 것을 들었겠지?" 그는 제니를 보고 웃었다. "뭐가 잘못됐어? 거긴 기분 좋은 곳이야. 내가 저녁마다 코코아를 마시러 자 주 가는 곳이지." "코코아를?" 조는 신음소리까지 내며 옆에 있는 가로등 기둥에다 몸을 기대었다. "이 친구는 우리를 진짜 금주회원으로 취급하는 것인가?" "조, 그러지 말아요." 제니가 곤란해하는 데이빗을 감싸며 말했다. 조는 겨우 정신이 돌아온다는 듯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해가지고는 데이빗의 등을 두들겼다. "이봐, 이 친구야. 넌 지금 탄광에 있는 것이 아니야. 넌 지금 조 가울런씨와 함께 있는 거란 말이야. 그리고 가울런 씨가 한턱 내겠다는 것이야. 그러니까 입 다물고 따라와." 조는 앞장 서서 노덤블런드 가를 내려가 퍼시 그릴로 갔다. 데이빗과 제니는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가 식탁에 앉았다. 조의 과시는 대단했다. 그는 자기 집에나 온 듯이 뽐냈다. 그 동안 그는 제니와 함께 자주 이곳에 왔었 던 것이다. 이곳은 장소가 좁았으나 금칠을 해서 번쩍거리는 물건과 샹들리에 장식이 화려한 곳으로 피시 보울츠로 알려진 술집의 별관 격인 곳이었다. 웨이 터가 다가왔다. "너희들은 뭘 할래? 난 위스키. 그리고 제니는 포도주로 할까? 데이빗 너는? 지금은 말조심해. 코코아니 뭐니 하지 말란 말야." 데이빗은 미소를 지으면서 이런 땐 맥주가 좋겠다고 말했다. 술이 도착하자 조는 고급스런 음식을 주문했다. 갈비, 소시지, 감자튀김을 주문하고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느긋하게 앉아 데이빗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데이빗은 훌쩍 키도 크고 어른스러워졌다. 그러자 그는 호기심이 갑작스럽게 밀려와 급히 물었다. "지금 무슨 일을 하지? 데이빗, 너도 많이 변했구나." 데이빗은 확실히 많이 변했다. 그는 이제 스물한 살이었지만 창백한 얼굴과 부드러운 검은 머리털 때문에 약간 나이가 더 들어보였다. 그의 이마는 준수했 고 턱은 예전처럼 여전히 단단해 보였다. "별로 이야기할 것도 없어, 조." "그러지 말고, 자, 말해 봐." 조는 마치 자기가 데이빗의 후견인이나 되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그러니까...." 데이빗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난 3년 동안은 그에게 매우 힘들었다. 그 힘든 세월이 그의 얼굴에서 영원히 그 소년다운 앳된 표정을 앗아가 버렸던 것이다. 그는 1년에 60파운드의 장학금을 받기로 하고 배들리 대학에 진학해서 빅 램프 반대편에 있는 웨스트 힐에서 하숙을 했다. 그런데 그 장학금만으로 산다는 것 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고 집에서 부쳐주는 돈도 가끔 오지 않는 때가 있었다. 아버지가 2개월 동안이나 일을 못 하고 누워 있었던 때도 있어서 그때마다 데이 빗은 궁지에 빠져 허덕여야 했다. 어떤 때는 저녁밥 값 6펜스를 벌기 위해 중앙 역에서 가방을 운반하는 일도 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의 불타는 정열은 그런 것들을 쉽게 견딜 수 있게 해주었다. 그 정열은 자기의 무지에 대한 발견에서부터 비롯되었 다. 배들리 대학에서 지낸 처음 1개월 동안 그는 자기가 매우 운이 좋은, 단지 어리숙한 소년 광부였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그러한 경험 때문에 데이빗은 더욱더 무언가를 알고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결심을 다 졌다. 그는 독서를 시작했다. 학과 책뿐이 아니라 보다 넓은 분야에 걸쳐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는 진보적 사회주의 단체인 페이비언 협 회에 가입했고, 6펜스를 아끼고 모아 교학곡 연주회의 3등석에서 베토벤과 바하 를 알게 되었다. 또 타인캐슬 시립 미술관을 방황하며 휘슬러와 드가의 아름다 움과 고고히 빛나는 마네의 작품도 거기서 발견했다. 그러한 일은 쉬운 것이 아 니었다. 그것은 사실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었다. 이러한 환경은 그에게 괴로움 을 주었고 더욱 고독에 빠져들게 하였다. 그는 너무 가난했고 초라했으며, 자존 심이 너무 강해 많은 친구들도 사귀지 못했다. 친구가 그리웠으나 친구들이 오 기만을 기다렸다. 그 다음에 그는 선생 노릇을 하기 시작해 더욱 빈한한 구역들인 새틀리, 위튼, 헤버언 등지로 나가서 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물론 그는 자기의 이상에서 보면 그런 직업이 좋은 것이었지만 그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빈민지역에 사는 얼굴이 창백하고 영양실조에 걸린 어린이들은 무섭도록 그의 마음을 괴롭혔다. 그는 아이들에게 신발과 옷과 음식을 주고 싶었다. 그 아이들의 어리고 미숙한 머리 속에 구구단 따위를 집어넣어 주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는 그 어 린이들이 이해도 할 수 없는 10행 시들을 외우지 못한다고해서, 또한 꽃을 피우 지 못한 채 죽은 리시대스(밀튼 시의 주인공)를 알지 못한다고 꾸중을 하는 대 신에, 어린이들을 마차에 싣고 원즈벡으로 가서 햇빛 아래 맘껏 놀게 놔두고 싶 었다. 그의 가슴은 비참한 어린이들 때문에 가끔 피가 거꾸로 솟는 아픔을 느꼈 다. 그는 자신이야말로 교단에서 소용없는 사람이여 장래에도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교편생활은 다만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 이며, 자기는 점차 거기서 나와 훨씬 활동적이고 훨씬 전투적인 다른 곳으로 가 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는 내년엔 꼭 학사 학위를 따서 더 진학을 해야 만 하는 것이다. 데이빗은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에 진지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아니 이거 원! 지금까지 나만 이야길 하고 있었군. 네가 이 슬프고 구질구 질한 이야길 해달라고 한 탓이야...." 그러나 제니는 그 이야기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녀는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어머나! 이렇게 훌륭한 분을 만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제니는 포도주로 상기된 두뺨이 더 붉어지면서 반짝이는 눈빛을 그에게 던졌 다. 데이빗은 얼굴을 찌푸린 채 그녀를 바라봤다. "훌륭하다니요! 놀리지 마십시오, 제니 양." 결코 놀리는 말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 전에 한 번도 대학생, 그것도 배들리 대학의 진짜 학생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배들리 대학생은 제니가 지금까지 부 러움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상류층의 사람들이었다. 물론 데이빗은 멋을 부릴 대 로 부린 조에 비하면 초라해 보였지만 그러나 어딘가 매력이 있는 청년이었다. 제니는 자기가 바라던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요 즘에 와서 조가 자기를 귀찮게 여기고 있음을 아는 제니는 조에게 질투를 느끼 게 하는 것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제니는 귀엽게 웃으며 데이빗에게 소곤거 렸다. "공부하고 계신 그 책들을 생각만 해도 저는 현기증이 나려고 해요. 그런데 학 사 학위까지 받으신다니! 저는 너무 놀랍기만 해요." "학위를 따면 어떤 너절한 학교에서 가난한 학생들이나 가르치게 되겠지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으시나보죠?"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선생님, 그게 얼마나 존경스러운 일인데요...." 그가 미소를 띤 채로 고개를 저으며 해명을 하려고 할 때 주문했던 음식들이 왔기 때문에 이야기가 끊어졌다. 조는 깊은 생각에 잠기면서 음식을 나눠놓았다. 처음엔 데이빗의 이야기를 들으며 질투가 솟구쳤지만 참고 이야기를 들었다. 그 러면서 기회를 봐서 그를 비웃어주면서 콧대를 완전히 꺽어버려야겠다고 생각했 다. 그러다가 그는 데이빗이 제니를 바라보는 눈매를 보았다. 바로 그때 조에게 아주 멋있는, 정말 멋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데이빗에게 접시를 주었다. "데이빗, 많이 먹어. 정말 반갑다." "고마워, 조." 데이빗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지난 몇 주 동안 몹시 굶주려왔기 때문에 푸짐 한 음식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조는 제니에게도 예의 바르게 대하면서 포도주를 한 잔 더 주문했다. "아까 무슨 말을 하다 말았지, 데이빗? 교사 같은 것보다도 더 좋은 것을 해보 겠다는 말 같았는데...." 조가 다정하게 묻자 데이빗은 그런 뜻이 아니라는 듯 머리를 내저었다. "너한테는 재미가 있을 만한 이야기가 못 돼, 조." "아니, 그렇지 않아. 그렇지, 제니? 다시 계속해봐, 데이빗." 조의 목소리는 진짜 흥미가 있는 듯한 진지한 어조였다. 데이빗은 조와 제니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진정으로 관심이 있는 듯한 조의 얼굴과 제니의 빛나는 눈매에 그는 힘을 얻어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런 거야, 말을 한다면. 내가 술이 취했거나 또는 학자연하는 인간이라고 생 각하지 말아. 그렇다고 시립 정신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안 되네. 나 학사 학위를 따면 잠시 동안 더 선생 노릇을 해야 할 거야. 그것은 다 만 호구지책에 불과해. 난 선생이 되려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니까. 난 본디 선생 을 할 자질이 없어. 너무 성급하다고 할까. 하여튼 나는 싸우려고 공부하는 거 야. 솔직히 말해서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따로 있어. 나는 나 자신과 같은 사람 들, 즉 전에 함께 탄광에서 일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뭔가를 하고 싶어. 조, 그 탄관 일이 어떤 건지 넌 알고 있지. 넵튠 탄광을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둘이 다 그 탄광 속에서 일해왔었지. 그곳이 우리 아버지에게 무슨 짓을 했는냐 하는 것 을 너는 알고 있어. 넌 그 상황이 어떤 건지 알고 있단 말이야. 그리고 급료라는 것도. 난 그러한 사태를 개선하는 일에, 그 사람들을 보다 잘 살게 하는 일에 도 움이 되고자 하는 거야." 조는 생각했다. 이 친구는 미쳤다. 이젠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 했다. 그러나 그는 점잖게 말했다. "계속해봐, 데이빗. 그건 그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되는군." 데이빗은 그 소리에 더욱 열을 올려 이런 소리까지 했다. "아니야, 조. 넌 내가 엉뚱한 소릴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어. 그러나 만일 내가 광부들의 역사-그래 다만 60년 내지 70년 전의 노들벌린드에서 시작 된 광부의 역사를 한번 들어본다면 아마 너도 내 말 뜻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거 야. 그 사람들은 그 뭔가, 봉건제도 아래서 일했었어. 그들은 야만인...부랑자 같 은 취급을 받았던 거야. 그들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지. 그리고 그들은 공부를 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어. 무서울 정도의생활상태였지. 불완전한 통풍장 치, 광산주들이 폭발 가스에 대한 예방 조치를 취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사 고는 빈번히 발생했었지. 여자들과 게다가 여섯 살짜리 어린이까지 갱 속에 내 려가 일을 해도 좋다고 허용했었어. 여섯 살짜리 어린이도, 알겠나! 아이들은 지 하에서 하루에 18시간 동안 계속 일을 했어. 어른 광부들은 노예처럼 집어넣어 졌어. 식료품 임금제의 가게도 도처에 있었고 그건 보통 감독의 친척들이 경영 했지. 광부들은 이 가게에서 강제로 식료품을 사게 되어 있었어. 그래서 급료는 그 외상 지불조로 몰수되고 말았던 것이지..." 갑자기 그는 말을 뚝 끊고 어색한 듯이 제니 쪽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런 이야긴 댁에겐 아마 재미가 없으실 겁니다. 난 바보같이 이런 이야기로 댁을 괴롭히기만 하는군요." "안 그래요, 정말이에요." 그녀는 매우 감탄한 듯이 말했다. "그런 온갖 것을 다 알고 계시다니 정말 굉장히 훌륭하세요." "계속해, 데이빗." 조는 상냥하게 재촉을 하고는 포도주를 한 잔 더 가져오라고 신호를 했다. "계속하라니까." 그러나 데이빗은 결연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난 페이비언 협회에서 마련할 토론을 위해서 이 모든 이야기를 간직해둘 작 정이야. 말 많은 인간이 진짜로 힘을 발휘하는 것은 바로 그런 때니까. 무슨 말 을 하는지 뜻은 알 수 있을 거야. 아까 내가 말했던 그 시대 이후로 노동조건도 개선되어왔고, 현재는 그때에 비하여 어느 정도 많은 발전도 했지. 그러나 아직 충분하게 발전해온 것은 아니야. 아직도 어떤 탄광에서는 비인도적인 행위가 행 해지고 있으니까. 임금은 형편이 없고 너무도 많은 사고가 발생한단 말이야. 그 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런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하거든. 언젠가 나는 전차 속에서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을 들었지. 그는 그때 신문을 읽고 있었어. 그의 친 구가 그에게 무슨 기사를 읽느냐고 묻더군. 그러자 신문을 읽던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어.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어떤 탄광에서 사고가 또 일어났다는 것뿐 이야....' 난 그의 어깨 너머로 신문기사를 보고, 노팅검탄광의 폭발사고로 15명이 죽었다는 것을 알았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제니의 눈에는 동정심으로 눈물이 글썽했다. 제니는 포도 주를 커다란 잔으로 석 잔이나 마셨기 때문에 그녀의 모든 정서가 아름다운 반 응을 일으켰다. 그녀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인생의 즐거움을 이야기하면서 마구 웃고 싶기도 했고, 아니면 죽음의 비애를 생각하고 마구 울고 싶기도 했다. 그녀 는 포도주를 귀부인이 마시는 음료라고 생각했다. 역시 그것도 술이지만 그것은 다른 술과 달리 매우 세련되게 빚은 술이라고 생각하였다. 조가 침묵을 깼다. "데이빗, 굉장한 성공을 할 것 같다." 그는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넌 나보다 훨씬 앞서 있는 거야. 내가 숙련공 노릇을 하고 있는 동안 넌 국회 의원이 된 거야." "바보같은 소리말아." 데이빗은 짧게 말했다. 그러나 제니는 다 들었다. 데이빗에 대한 호기심이 더 욱 커졌다. 그녀는 정말로 그에게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새침한 눈길이 한층 빛났고 점점 더 깊어졌다. 그녀의 눈은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녀는 자신이 조의 애를 태우기 위해서 데이빗을 희롱하고 있다는 것은 물론 처음부터 의식하 고 있었다. 활 하나에 두 개의 활시위를 가져본다는 것도 재미있다고 생각되었 다. 그들은 좀더 가벼운 이야기들을 계속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조가 해온 일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10시까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모든 일이 즐겁고 정겨웠다. 그러다가 데이빗이 시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크, 야단났군! 난 공부해야 할 시간이야." 데이빗이 황급히 일어났다. "가지 말아요. 아직 초저녁인걸...." 제니가 반대했다. "가고 싶지는 않지만 꼭 가야 합니다. 정말 가야 합니다. 난 월요일에 역사 시 험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화요일에 만나자, 데이빗. 그리고 그때에는 이렇게 쉽게 보내주지 않을 거야." 조가 기운차게 말했다. 파티는 끝났다. 제니는 소위 '몸치장'을 하러 물러갔다. 조는 5파운드짜리 지폐를 꺼내 계산을 치렀다. 바깥에 나와 제니를 기다리고 있 는 동안 조는 갑자기 이쑤시개를 깨물고 있던 동작을 멈추었다. "꽤 귀여운 아이지, 데이빗." "정말이야. 너의 취미에 놀랐어." "내 취미라고!" 조는 진심으로 웃었다. "넌 모든 걸 잘못 알고 있어, 이 친구야. 우리는 서로 친구 사이란 말이야. 제 니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없다니까." "정말이니?" 데이빗은 갑자기 관심을 가지고 물어왔다. "그럼, 정말이다마다!" 조는 더 다정한 미소를 머금었다. "네가 그렇게 엉뚱한 오해를 한다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는걸." 제니가 그들 곁으로 왔다. 셋이서 나란히 걸어 콜링우드 가 모퉁이까지 왔다. 거기서 데이빗은 헤어져 서문로(西門路)로 가야 했다. "잊어버리지 말아. 틀림없이 화요일 밤이다." 조가 크게 소리쳤다. 정다운 작별의 악수가 오갔다. 제니의 손을 꽉 잡았을 때 신비스러운 감촉에 데입시은 몸을 떨었다. 데이빗은 허공을 걷듯 걸어서 돌아와 자기의 초라한 방으로 들러갔다. 미네의 '프랑스 혁명사'를 책상 위에 세워놓고 나서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정말 멋있는 일이다. 이렇게 뜻밖에 조를 만날 수 있었다니, 하고 그는 생각했 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는 사 실이었다. 그러나 타인캐슬은 그만큼 큰 곳이고, 조가 말했듯이 그 속에서 조 가 울런은 단 한 사람뿐이니까라고 그는 생각했다. 데이빗은 자신이 조에 대하여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미네의 책 을 읽어나가는데 책장 위에 떠오르는 얼굴은 조가 아니었다. 그것은 미소를 머 금은 제니의 얼굴이었다. 14 데이빗은 그 다음 화요일에 스코츠드 로 117번 A호를 방문했다. 그날 저녁을 손꼽아 기다려온 데이빗은 밀링튼 공장에서 일하는 조의 귀가 시간이 야간 근무 때문에 늦어진다는 것이 몹시 유감스러웠다. 그러나 그것은 할 수 없는 노릇이 었다. 안타깝게도 조는 야간 근무를 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데이빗은 매우 재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과 사귀는 기회가 좀처럼 없는 데이빗이 었지만 사 실 그의 본성은 사교적이었다. 선리 집안 사람들은 데이빗에 대해 제니에게서 미리 이야기를 들었지만, 처음에는 의심스러운 듯 그를 대했다. 그들은 아주 높 은 분이 오는 줄로만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곧 분위기는 풀렸고 저녁식사가 시 작되자 모두 즐거워했다. 선리 부인은 한때 무기력했던 상태를 훌훌 털고 레어 비트(치즈를 녹여 뿌린 토스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샐리의 말에 따르면 선리 부 인의 레어비트는 특별한 손님이 왔을 때 만드는 음식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앨 프는 두 개의 찻숟가락과 후추통을 사용하여 자기만의 독특한 비둘기집 건조법 을 설명해 보였다. 그는 이 방법으로 한 밑천 톡톡히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새 로 맞춘 드레스를 입은 제니는 손수 차를 따랐다. 부엌에서 너무 힘을 뺀 선리 부인은 차를 따를 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데이빗은 제니에게서 눈을 땔 수가 없었다. 지저분하고 정돈되지 않은 방안에 서 그녀는 꽃처럼 아름답게 보였다. 타인캐슬에 있는 오랜 세월 동안에 그는 거 의 여자에게 말을 걸어본 적이 없었다. 물론 슬리스케일에서도 그랬는데 광산촌 달동네에서는 전통적으로 알려져 있는 '함께 나들이 하기'의 연령에 미치지 못했 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니는 그에게 너무나 매혹적인 최초의 여인이었다. 반쯤 열린 뒤방 창을 통해 따뜻한 공기가 흘러들어왔다. 그 공기는 1만 개나 되는 굴뚝에서 쏟아내는 연기 기운이 섞인 탁한 것이었지만 데이빗에게는 봄의 향기와도 같았다. 그는 제니를 바라보며 그녀가 미소짓기를 기다렸다. 보드라운 그녀의 입술은 마치 막 벌어지려는 꽃봉오리와 같았다. 찻잔을 건네주던 그녀의 손가락이 닿았을 때 그는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내부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제니는 자기의 아름다움이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잘 알았으므로 아주 의 기양양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그 의기양양함 때문에 더욱 빛났다. 그러나 데이 빗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손가락이 서로 닿았을 때도 무심 했다. 제니는 조를 사랑하고 있었다. 처음엔 조를 경멸했다. 그의 행동이 고상하지 못하고 난폭하며 그녀의 표현대 로 '그가 너절한 노동을 한다'는 사실 때문에 제니는 조를 경멸했다. 그런데 이 제는 그 모든 것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바로 그 난폭한 사 건이 있고 난 후 일어났다. 제니는 평탄치 못할 자신의 장래를 예감하면서도, 내 부 깊은 곳에서는 자기를 정복한 그 무자비한 행동에 대한 무의식적인 사랑을 떨쳐버릴 수 없는 운명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제니는 이 새로운 이성인 데이 빗의 출현이 몹시 기뻤다. 이러한 기미를 알게 된다면 그녀를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되겠다는 걸 조에게 '가르쳐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저녁식사가 끝나자 앨프는 음악을 듣자고 했다. 모두들 거실로 들어갔다. 바깥 은 북적거리던 거리의 활기가 차분하게 가라앉고 있었고, 집안은 상쾌하고 시원 한 공기가 감돌았다. 샐리가 피아노를 치는 곁에서 제니는 '포니타'와 '아름다운 마리, 내 곁에 오라'를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고 약간 힘겨운 소리였지만 아름다운 피아노 반주와 어울려 감동을 주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마리'가 끝나 자 다시 노래 하나를 더 부르고 싶어했다. 그러나 앨프는 클래리와 필리스의 떠 들썩한 요청을 받아들여 샐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극성스럽게 떠들기 시작했 다. "샐리가 애들 중에서 최고요." 앨프는 데이빗에게 귓속말을 했다. "저 애가 노래를 시작하기만 하면 재미있는 걸 구경하게 될 거요. 저 앤 대단 한 희극배우거든. 저 애하고 나는 매주 엠파이어 극장엘 가고 있어요." "자, 해봐, 샐리." 클래리가 간청했다. "'농부 재크 아저씨'를 해봐." 필리스도 재촉했다. "그래 샐리, 어서 해봐라. 그리고 '플로리 포드'도 불러다오." 그러나 샐리는 피아노 앞에 그대로 앉은 채 고개를 흔들다가 데이빗을 머리로 가리키며 말했다. "기분이 내키지 않아. 저 분은 제니 노래만 듣고 싶은 거야. 내 노랜 흥미가 없는 걸 뭐...." 옆에서 제니가 우쭐해져 웃으며 말했다. "넌 네 노래 주가를 올리고 싶어서 그렇지? 난 다 안다구...." 샐리는 대번에 발끈해졌다. "그러면 좋아요. 아름다운 마리 선리 양, 살살 달래지 않아도 노래 부르겠어." 그녀는 피아노 앞에 앉은 채로 자세를 바로 고쳤다. 샐리는 나이가 열다섯이 나 되었지만 아직도 키가 작고 몸매도 볼품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 뭔 가, 사람의 마음을 꽉 잡아 황홀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이제 자그마한 그녀 는 바짝 긴장하였다. 미간을 찌푸린 그 예쁘지 못한 조그마한 얼굴에는 억제할 수 없는 조소의 빛이 흘렀다. 그녀는 쉰 듯한 기괴한 목소리로 말했다. "특별히 요청을 받아들여" 그녀는 완전히 목소리를 바꾸어 "또 다른 선리 양 이 '몰리 오 모르간'을 부르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고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 다. 노래는 멋있었다. 아주 멋있었다. 요즘 유행하는 그저 그런 노래에 불과했지만 샐 리가 부르니 뭔가 특별한 맛이 있었다. 그녀가 완전히 풍자적으로 고쳐서 익 살스럽게 불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가성으로 노래를 부르다가 갑자기 열정을 다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이를테면 몰리에게 버림받은 연인들의 비극을 노래 한 대목에서는 거의 우는 듯한 목소리로 노래 불렀다. 손풍금을 손에 든 몰리 오, 모르간 '에이레' 태생인 에이탈리아 아가씨 이 노래는 아일랜드 태생, 즉 에이레 태생인 이탈리아 국적의 아가씨를 노래 한 것으로 노래의 운율을 맞추기 위해서 '이탈리아'를 '에이탈리아'라고 일부러 의음화하고 있었다. 어쨌든 샐리는 제니가 나중에 뭐라고 자기의 행동을 질시할 것인가 하는 따위 는 다 잊어버린 채, 노래의 마지막 소절에서는 거리낄 것 없이 원숭이 흉내까지 내버렸다. 몰리 오 모르간을 오르간으로 반주하면서는 그것이 어울린다고 사람 들이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제니를 뺀 모든 사람들이 다 배꼽이 빠지게 웃어댔다. 그러나 샐리는 둘러앉 은 사람들이 웃음에서 정신을 되찾을 여유도 주지 않고, 재빨리 '나는 길모퉁이 에 서 있었죠'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제 원숭이 흉내는 그만두고 '농부 재크 아저씨'를 흉내냈다. 그녀는 순무마냥 동작이 게을러 빠진, 마을 술집의 벽 에 기대선 모습이 되었다.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머리에 얹힌 지푸라기까 지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군복 입은 놈이 내게 와 소리쳤네. 어떻게 군에 들어왔나? 나는 대꾸했어. 내가 서 있는데...구석에...길거리의 시끄러울 만큼 앨프는 박수를 보냈다. 샐리는 짓궂게 옆눈으로 그를 보며 웃 었다. 그녀는 윙크를 하고는 다시 여성다운 모습으로 돌아와서 '이프 아이 애디 아이'를 노래했다. 그녀는 가슴을 쑥 내밀고 성량이 풍부하고 깊이 있는 목소리 로 노래하며 몸을 우아하게 흔들었다. 풀로리 포드가 노래한 것인데 샐리의 음 성이나 몸짓은 그대로 플로리 포드를 보는 것 같았다. 즐거워 노래해도 행복해 노래해도 이렇지 않았네. 이프 아이 애디 아이 아이 그녀는 갑자기 노래 부르는 걸 멈추었다. 그리고 의자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더 니 빙글 한 바퀴 몸을 돌려 좌중을 마주보고는 생긋 웃었다. "엉터리 노래였어. 토피(설탕, 버터 따위로 만든 과자) 한 조각의 값어치도 안 되는 노래였어요. 그럼 난 익은 토마토가 날아오기 전에 퇴장하겠어요." 그녀는 코를 괴상하게 찌푸려 보이더니 방에서 살짝 나가버렸다. 나중에 제니 는 샐리의 괴상한 행동을 데이빗에게 사과했다. "그 아이를 용서하세요. 그 애는 가끔 그렇게 이상해져요. 성질도 괴팍하구요. 정말 미안해요!" 하면서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좀 바보 같은 이야기지만 그 애는 저를 질투하는 것 같아요."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요? 샐리는 아직 어리지 않습니까?" 데이빗이 미소를 짓자 제니는 오만한 얼굴로 머리를 흔들었다. "샐리는 열여섯 살이 되어간다구요. 그 애는 누가 저에게 관심을 갖는 걸 보면 아주 싫어하거든요. 제가 곤란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런 일은 제니가 아니라 누구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장미꽃을 향기가 너무 진하다고, 혹은 백합이 순결하다고 탓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데이빗은 그날 밤 그녀의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더욱 짙게 느끼면서 집으로 돌 아갔다. 그 다음부터 그는 규칙적으로 방문하기 시작했고 저녁에 잠깐 들리기도 했다. 가끔 그는 조와 만나기도 했으나 그런 일은 별로 흔하지 않았다. 조는 공 장 근무가 바빠서 거의 집에 있을 시간이 없는 듯했다. 그래서 데이빗은 제니와 함께 외출할 기회까지 갖게 되었다. 함께 소풍을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제 니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은 애스튼 산엘 올라가고, 리들까지 걷기도 하고, 에즈먼드 모래 언덕까지 피크닉을 갔으나 사실상 제니의 성미에 맞지 않 았다. 그녀는 조와 함께 퍼시 그릴과 영화관과 캐릭 레스토랑 따위에 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제니에겐 '어디에 간다' 하는 것은 호화로운 그릴이나 바에 가 서 즐기고 돈을 쓰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녀도 데이빗이 가난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지루하고 어색한 외출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이상한 점도 있지만 데이빗이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그를 좋아했다. 에즈먼드 모래 언덕에 함께 갔던 오후 같은 때는 그녀로서는 정 말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애즈먼드에 가는 것을 그다지 기뻐하지 않았다. 그곳은 볼 것 없는 재 미없는 곳으로 하찮은 인간들이나 놀러 가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화려하게 주말 을 즐길 여유가 없는 가난한 여점원들이 애인과 오는 곳으로밖에는 생각되지 않 아 조금도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데이빗의 간청을 물리칠 수 없어 할 수 없이 따라나선 것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제비집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길을 빙 돌아가기까지 하면 서 열심히 물었다. "제비집 본 적이 있어요, 제니?" 그녀는 머리를 내저었다. "난 여계 꼭 한 번 와봤어요. 그것도 아주 어렸을 때..., 그래서 아무 기억도 없 어요." 그는 매우 놀라는 눈치였다. "안타깝군요. 정말 멋있는 곳인데.... 난 매주 이곳에 옵니다. 이곳은 인간의 영 혼처럼 올 때마다 새로운 걸 느끼게 해줍니다. 때로는 어둡고 우울하고 그러다 가도 또 이렇게 햇빛이 가득히 빛나기도 하고, 좀 보세요, 저 제비집들을! 오두 막집 처마 밑에, 얼마나 정다워 보입니까!" 그녀는 아주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는 벽에다 발라 붙인 진흙 덩어리로만 보일 뿐이었다. 그녀는 당황스럽고 화가 났으나 꾹 참고 그를 따라 석남(石楠)꽃이 핀 샛길로 해서 폭포 쪽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조그마한 아 치 형의 돌다리 위에 섰다. "이 밤나무들 좀 봐요, 제니. 하늘로 손들을 벌리고 있는 모양 같지 않아요? 그리고 저 돌 위의 이끼들, 또 저쪽의 물방앗간, 얼마나 멋있는 풍경입니까? 코 로의 초기 작품을 보는 느낌입니다." 그는 행복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빨간 타일 지붕과 목제 물방아 바퀴를 멍 하니 바라보았다. 지저분한 색깔의 인동덩굴에 뒤덮인 낡은 집, 아무리 보아도 조금도 쓸모가 없는 폐허일 뿐이었다. 그녀는 전보다 더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 다. 그들은 상당히 오랫동안 걸었다. 새 구두를 신은 제니는 발이 몹시 붓고 아 팠다. 그녀에게는 아무 느낌이 없는 풀과 나무와 하늘 그리고 물소리와 새소리 만이 있는 권태롭고 피곤하고 따분한 하루였다. 그리고 점심이라고 준비한 축축 한 계란 샌드위치 몇 개와 두 개의 카나리아산 바나나는 그녀의 기분을 더욱 비 참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크고도 달콤한 자메이카산 바나나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만 데이빗도, 자기 자신도, 조도, 그녀의 멋 있는 새 구두까지도 모든 것에 화가 났다. 갑자기 한 잔의 따뜻한 차가, 한 잔의 포도주가 못 견디게 마시고 싶었다. 그녀는 더 참을 수 없어 고함이 터지려고 했다. 그때 데이빗을 보았다. 그녀는 어이가 없어 그만 고함 대신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정말 깔깔대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얼굴빛은 너무도 행복했고 너 무도 황홀한 애정으로 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지나치게 진지한 표정은 그 녀에게 다만 웃음이 터지게 할 뿐이었다. 데이빗은 영문도 모른 채 따라 웃으며 제니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제니?" "모르겠어요. 그냥 웃음이 나와요. 아! 우스워서 죽겠어요." 그녀는 눈물까지 흘려가면서 발작을 일으킨 것처럼 웃어댔다. 귀부인이 슬래 터리 상점의 화장실에다 깜박 잊어버리고 놓아두고 간 것 같은 손수건으로 눈물 을 닦아내면서 겨우 그녀의 발작은 진정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기분은 놀라우리 만치 명랑해졌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 그 비참했던 마음을 까맣게 잊고 데이빗 에게 다정하게 팔을 잡힌 채 걸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부은 발이 견딜 수 없으 므로 피곤하다는 이유로 예정보다 훨씬 빨리 그 괴상한 피크닉을 끝내 버렸다. 데이빗은 몹시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으나 그 모든 것 을 거절하고 그녀는 재빨리 전차에 올라타 버렸다. 토요일 저녁 거리는 활기로 넘치고 있었다. 제니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조와 함께 즐기러 나가곤 하던 바로 그 시간이었다. 그녀는 어둡게 가라앉으려 는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조와 복도에서 부딪 쳤다. 조는 제니가 가장 좋아하는 차림인 멋진 외출복으로 정장을 하고 있었다. 제니는 기쁨으로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 일 주일 동안 조를 못 본 척했던 것은 다 잊어버렸다. "어머, 조. 어디 가요?" "응, 나가는 길야." 조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 그래요, 그럼 같이 나가요. 나 지금 정말 괴상한 곳에 갔다 오는 길예요. 정말 우스워 죽을 뻔했다니까...." 그녀는 다정한 눈빛으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그녀 에게 의심스러운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그런 낌새를 느낀 제니는 조금 더 그에 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조, 오늘 저녁 데리고 가줘요." 그녀의 눈빛과 음성은 여간 유혹적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오늘 오후 난 몹시 언짢았어요. 조, 너무 오랫동안 만나지 못 해서 사실 쓸쓸했어. 오늘 밤 우리 다시 유쾌하게 지내봐요, 응? 신나는 곳으로 날 데리고 가줘요." 조는 확실히 당황하고 있었다. 잠깐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망설이는 눈치 가 보였다. 그러나 그는 거칠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안 돼." 그는 몹시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지금 바빠. 너하고 한가하게 놀 시간은 없어. 날 귀찮게 하지 마." 그는 그의 팔에 매달려 있는 그녀를 밀어버리고는 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녀는 잠시 멍한 얼굴로 벽에 기대섰다. 뭐가 뭔지 혼란해져서 생각을 할 수 가 없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모욕감이 그리고 분노가 서서히 뜨거운 불길 처럼 치밀어 올라왔다. '그가 거절한 것이다. 조가 제니를...그것도 아주 거칠게. 모든 자존심도 다 내 던지고 그렇게 부탁했는데 그는 밀쳐버리고 가버렸다....' 이렇게 모욕을 당한 것은 평생에 처음이었다. 그녀는 파랗게 얼어버린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당장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자신을 꾹 눌렀다. 필사적인 힘으로 자신을 억제했다. 분노로 몸부림 쳐봐야 자신의 상처만 커진다는 것을 우둔한 그녀도 알고 있었다. 얼마 동안 눈을 감고 이제는 완전히 어두워져 버린 복도 벽에 기대서 있던 그녀는 이윽고 몸을 추스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에다 모자와 장갑을 벗어던지고서 그녀는 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흔들의 자에 기대앉아 있던 애더가 읽던 잡지를 내리며 그녀를 불쾌한 듯이 바라봤다. "어디 갔다 왔니?" 애더의 음성은 차갑고 날카로웠다. "밖에." "흥...그 펜윅이란 젊은 아이와 함께 였겠지?" "맞아요." 제니의 음성은 조용하고 침착했다. "데이빗 펜윅과 피크닉을 갔었죠. 유쾌한 오후였어요. 정말 멋있었어요. 아름다 운 꽃과 새들. 그 사람, 정말 훌륭한 남자예요." 애더의 가슴이 불룩해지면서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렇게도 좋아졌니, 그 사람이?" "그럼요." 제니는 차를 만들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이는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 가장 멋있고 훌륭한 사람이예요. 난 그이에게 반했다우." 그녀는 가벼운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애더는 더 이상 그런 그녀의 모습 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다. "내 앞에서 콧노래 같은 건 부르지 마라." 그녀는 분노를 누르는 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난 네가 하는 꼴을 정말 못 보겠구나. 잘 들어두어라. 너는 아무래도 큰 잘못 을 저지르고 있는 거야. 조를 생각해봐라. 지금까지 4년 동안이나 네 뒤를 쫓아 다니며 네가 하자는 대로 다 해주었잖니? 그런데 이젠 또 펜윅이란 말이냐? 조 는 도대체 어떻게 할 셈이냐?" 제니는 아무 말도 없이 얌전하게 차를 마셨다. 이윽고 찻잔을 내려놓은 그녀 는 픽 웃었다. "난 조 가울런 같은 사람은 생각해본 일이 없어요. 사실 조는 내 눈짓 한 번이 면 내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우. 그렇지만 마음에 없는 짓을 난 할 수도 없고 또 하지도 않을 거야." "아 그랬구나, 이 버릇 없는 아가씨야. 조는 이제 부족하다 이거지...학교 선생 님이 나타났으니까. 너 정말 보통이 아니구나. 우리 집안엔 그런 사람이 없었다. 아니 어떻게 생각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니? 의리고 동정이고 없이 그저 저 좋은 대로 하면 그만이란 거지...그런데 너 잘 알아두어라 넌 이제 조를 잃어버리는 거다. 내 말 알아들었니?" "엄마, 나 다시 한번 분명히 말해두는데 조 같은 사람 필요없다니까. 내 일만 해도 바쁜데 왜 조까지 생각해야 해요. 필요 없어요." 선리 부인은 다시 발끈 화를 내었다. "그래, 너에겐 상관이 없겠지. 방금 조와 만났어. 그는 어쩔 줄을 모르더라. 네 일에다가 회사일까지 겹쳐서 죽을 지경인가 보더라.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네가 그럴 줄은 몰랐다는 거야. 너무 매정하고 너무 지독하다고 원망이 대단했어. 당 연하지...누가 가만히 참겠니? 회사도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떠나겠대. 네가 너무 한 거야. 넌 한 사람의 앞길을 망쳐놓은 거야. 아빠에게 다 일러바치고 싶은 걸 내가 얼마나 참았는지 아니? 너 정말 조심해야 한다. 정말 조심해라." 애더는 말을 끊더니 휙 잡지를 다시 들었다. 그녀는 이제 자기의 할 말을 다 했으니, 자기 의무를 다했으니, 제니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든지 그것은 상관 없다는 마음이었다. 제니는 차를 다 마시고 나서도 여전히 오만한 미소를 띤 채 잠시 앉아 있었 다. 모자와 장갑을 집어 들었을 때도 여전히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천 천히 방을 나와 2충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나 자기 침실에 들어서자 그녀의 미소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갑자기 거두어가 버린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낡은 리놀륨 방 깔개 한복판에 외 롭게 섰다. 그녀의 모자와 장갑이 힘없이 방바닥에 떨어졌다. 그녀는 흑! 하고 흐느끼며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녀의 절망은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 이었다. 그녀는 마치 가슴이 터져버린 것처럼 울고 또 울었다. 바로 그때 개인적인 아주 중요한 용건으로 디크 조비를 만나기 위해 빅 마켓 을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던 조는 즐거운 듯이 혼자 중얼거렸다. "일이 착착 진행되는구나! 아주 멋있게 착착 진행돼 가는구나." 15 열흘 후 오전 일찍이 조는 공장 사무실에 나타나 스탠리 사장에게 면회를 청 했다. "아아니, 조, 웬일인가?" 스탠리는 옛날 식의 높은 창이 달린 방 안 한복판에 놓여진 책상에서 눈을 들 었다. 그 책상 위세는 서류와 장부, 청사진 등이 가득 놓여 있었다. 밤색 벽에는 공장 공원들이 친목회나 피크닉에서 찍은 사진들과 기중기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커다란 주물(鑄物)의 사진 등으로 뒤덮여 있었다. 조는 정중히 말했다. "작별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스탠리 사장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이 사람, 갑자기 무슨 이야긴가? 너무 뜻밖인데...." 조는 좀더 의젓한 자세로 가슴을 쫙 폈다. "개인적인 사정입니다. 지금까지 저도 참 만족했습니다. 공장 일이 싫어져서 떠나는 건 아닙니다. 순전히 개인적인 문제로... 사장님은 다 잘 아시니까 숨기지 않겠습니다만 제니와의 일이 좀 이상하게 되어서...." "무슨 말인가, 조!" 스탠리 사장은 더욱 열을 띠었다. "설마...." 스탠리 사장은 최근에 라우라와 결혼했다. 아직 낭만적인 신혼 기분에 젖어 있는 그는 어느 때보다도 남의 불행에 민감했고, 특히 사랑의 문제에 대해서는 더했다. "설마 그 여자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아니겠지?" 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 떠나고 싶습니다. 더 이상 이 고장에 머물고 싶지 않습니다. 어서 가야겠 습니다." 밀링튼은 눈길을 돌렸다. '운이 나쁜 사나이군. 그런데도 이렇게 씩씩하고 태 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니!' 조에게 시간 여유를 주기 위해 그는 파이프에 천천 히 담배를 담기 시작했다. "유감스럽군, 조." 그러나 여성에 대한 기사도 정신이 뛰어난 그는 제니를 비난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자네를 잃게 되니 이중으로 유감스럽군. 사실 나는 오랫동안 은근히 자네를 생각하고 있었지. 자네의 앞길을 열어주고 승진을 시키려고 생각하고 있었네." '제기랄, 그런 생각이 있었다면 왜 진작 그렇게 해주질 않았담!' 조는 속이 쓰 렸지만 겉으로는 감사한 듯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고맙습니다, 사장님." 그러자 향기 짙은 담배연기 저편에서 사장은 좀더 감동적인 음성으로 말을 계 속했다. "난 자네 같은 스타일을 좋아하지. 조, 자네는 내가 함께 일하고 싶은 타입의 청년이었어. 솔직하고 예의 바르며, 요즘엔 교육이란 별 문제가 되지 않아. 중 요한 것은 인간 그 자체이지. 나는 자네에게 기회를 주려 했었다네." 오랫동안 말이 없다가 다시, "그러나 나는 현재 자네를 설득할 생각은 없네. 인간이 빵을 원하는데 돌멩이를 준다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니까. 자네 같은 입장이라면 나도 아마 그렇게 할거네. 자, 잘 떠나게. 그리고 모든 것을 잊 게." 그는 손에 파이프를 쥐고는, 라우라와 자기가 얼마나 행복한가 그리고 그것은 가여운 조와는 얼마나 다른 상황인가 하는 것을 갑자기 가슴 깊이 느꼈다. "그러나 내가 한 말을 잊지 말게. 나는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이네. 혹시 그리 고 언제라도 되돌아오고 싶으면 돌아오게. 자네를 기다리는 좋은 일이 있을 테 니까. 알겠나, 조?" "네, 사장님." 조는 아주 사나이답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밀링튼은 일어서서 입에서 파이프를 빼며 손을 내밀어 불길한 운명과 맞서고 있는 손을 꼭 잡았다. "잘 가오,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오." 그들은 악수를 나누었다. 조는 돌아서 나왔다. 그는 플래트 가를 바삐 걸어 전차를 탔다. 마음은 더욱 성급해졌다. 스코츠드 로에서 내려 117번 A호 집으 로 들어가서 2층으로 올라간 그는 짐을 꾸렸다. 그는 제니의 사진이 든 액자에 손이 닿았을 때 한동안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그러나 싱긋 웃고는 그 사진을 빼내고 액자를 짐에다 쌌다. 액자는 은 으로 만든 고급품이었다. 불룩한 가방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현관 홀에다가 거칠게 가방을 내려놓 은 그는 뒷방으로 들어갔다. 애더가 여느 때처럼 흔들의자에 않아 있었는데, 그 녀가 말하는 이른바 '오전 휴식'을 취하는 때였으나 그 너절한 모습은 보는 이에 게 몹시 불쾌감을 주었다. "안녕히 계십시오, 선리 부인." "뭐라고!" 애더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짐을 쌌습니다." 조는 간단히 말했다. "직업도 잃고 제니와도 끝장이고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군요, 가겠습니다." "그렇지만 조...." 애더는 숨이 가빠왔다. "설마 진정이 아니겠지?" "아니 진정입니다." 조는 이제 쓸쓸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런 표정을 짓다가는 간곡한 만류로 붙 잡힐 위험이 크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모욕을 당한, 그래서 냉혹한 마음으 로 이미 모든 것을 결정한 단호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감격을 잘 하는 애더는 그의 그러한 태도를 추호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난 알고 있었어."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제니가 하는 짓을 다 알고 있었다우. 당신이 참지 못할 것이라고 제니에게도 말해줬어요. 제니가 나빴어. 어디까지나 제니가 잘못한 거야." "잘못한 정도가 아닙니다." 조는 딱딱하게 굳은 태도로 말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실직까지 했다니, 정말 조, 미안해요. 이건 너무 심해요. 도대체 앞으로 어떡할 작정이우?" "직업을 구해야지요." 조는 결연히 말했다. "그러나 그것도 타인캐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찾을 계획입니다." "그렇지만, 조... 괜찮다면." "안 됩니다...." 조는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싫습니다. 아무것도 싫습니다. 괴로워할 대로 괴로워했어요. 이제는 그만입니 다. 나는 가장 친한 친구에게 배신당한 거예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데이빗은 조의 계획에 걸려든 운이 나쁜 친구였다. 데이빗이 아니었더라 면 조는 결코 이렇게 쉽사리 문제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모로 봐 서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지금 이렇게 말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영리함에 대해 새삼스럽게 탄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자기는 영리했다. 제니를 떼어버리고 이 집 식구들마저 이렇게 무릎을 꿇게 하고 떠나는 일이 너무나 멋 있게 느껴졌다. "그러나 기억해두실 것은 나는 결코 원한을 품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리 부인."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제니에게 제가 용서한다고 전해주십시오. 그리고 모든 식구들에게 안녕히 계 시라고 전해주십시오. 전 식구들과 만날 면목이 없습니다. 지금은 마음이 뒤죽박 죽이라 서요." 애더는 그를 그대로 떠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마음이 뒤죽박죽이 된 것 은 오히려 그녀 쪽이었다. 그러나 이 상처 입은 사나이에게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조는 이 집에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집을 떠나갔다. 매우 예 의 바르게 그리고 자신의 신상에는 한 점의 오점도 남기지 않았다. 그날 저녁 제니는 늦게 돌아왔다. 그날은 여름 대매출이 끝나는 마지막 금요 일이라 몹시 바빠서 8시도 15분이나 지나서야 돌아왔다. 애더가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구실을 만들어 클래리와 필리스를 외출하게 했다. 그리고 앨프와 샐리도 엠파이어 극장에 가게 해서 겨우 혼자 남 을 수 있었다. "제니, 할 말이 있다." 뭔가 심상치 않은 것이 엄마의 목소리에 담겨 있음을 즉각적으로 느꼈다. 그 러나 제니는 너무 피곤해서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오늘따라 그녀는 기분도 언짢아, 하루가 죽을 것같이 지루하고 역겨웠다. "그 슬래터리 상점 말예요," 그녀는 의자에 몸을 던지듯이 주저앉았다. "난 이제 싫증이 났어요. 열 시간을 죽도록 서 있어야 한다는 거 인젠 정말 견 딜 수가 없는 일이에요. 다리도 퉁퉁 붓고, 더 있다간 병신이 돼버릴 거야. 지금 까진 그래도 고상한 직업이라고 생각했지만 무슨 희망이 있을까! 전보다 더 나 빠요. 요즘의 손님이라는 여자들은 사납기만 하다니까." "조가 떠나버렸다." 선리 부인은 심술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떠났다구?" 제니가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 "아까 아침에 떠났다! 아주 떠나버린 거야." 제니는 겨우 사태를 짐작했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이 완전히 혈색을 잃고 말 았다. 그녀는 퉁퉁 부은 다리를 어루만지던 손을 멈추었다. 그녀의 잿빛 눈은 겁 에 질려 빛을 잃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나 차 좀 줘, 엄마." 그녀는 이상하게 갈라진 음성을 말했다. "엄마, 제발 부탁이에요. 차만 주고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애더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막 쏟아내려던 비난의 말들을 꿀꺽 삼 켜버렸다. 그녀는 자기 딸 제니를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순간에는 제니가 하자는 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고 제니에게 차를 따 라주었다. 제니는 아주 천천히 차를 마셨다. 저녁도 먹지 못한 빈속에 훈훈한 온 기가 퍼져갔다. 차를 다 마시고 나서 그녀는 어머니 쪽을 향했다. "엄마, 난 엄마가 하려는 말을 다 알고 있어요. 내가 조에게 심하게 대했다는 둥 뭐 그런 말이겠죠. 듣지 않아도 다 알아요. 그러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엄마가 걱정하지 않도록 내가 처리할 테니까. 아셨죠! 나가서 잘게요." 그녀는 어머니를 놔두고 지친 모습으로 2층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갑자기 더 피곤을 느꼈다. '아, 이럴 때 포도주 한 잔만 마신다면, 아니 두 잔 정도만 마신 다면 아주 힘이 날 텐데....' 그녀는 마구 옷을 벗어 던졌다. 의자 위에, 방바닥에 널려진 옷들을 본 척도 않고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방을 같이 사용하는 클래리 가 없어서 자기를 귀찮게 하지 않는 것이 고마웠다. 침대에 엎드려서 어둠 속을 응시하며 다시 천천히 생각을 했다. 이번에는 히스테리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눈물의 홍수도 일지 않았고 그녀는 완전히 침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침 착함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조가 자기를 저버렸다는 사실은 아무리 태연하게 받아들인다 해도 무서운 타 격이었다. 그녀의 자존심을 형편없이 짓밟아버린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그리고 슬래터리 상점의 일도 이제는 정말 견딜 수 없었다. 몇 시간이고 선 채로 옷감 을 펼치고 잘라야 하고 형편없는 여자 손님에게도 정중히 서비스를 해주는 일들 이 이젠 역겹도록 싫었다. 그리고 오늘은 더욱더 슬래터리에서 보낸 6년이라는 세월이 몸서리치고 싶을 정도로 괴롭기만 했다. 그리고 그곳을 그만 두어야 한 다는 단호한 결심이 서도록 재촉하였다. 그녀는 자기 집안에 대해서도 역시 구역질이 났다. 식구가 많고 언제나 지저 분한 집. 이제는 자기 소유의 집, 자기 자신의 물건을 갖고 싶었다. 그러나 만일 이 바람을 전혀 이루지 못하게 된다면? 가령 평생 동안 슬래터리 상점에 근무하 며 스코츠도 로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면? 바로 여기에 제니가 느끼는 돌연한 공 포의 원인이 있었다. 조를 통해 그것들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하나의 기회를 상 실한 것이 다른 기회도 모두 상실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그녀는 이런 생각에 쫓기면서도 어느새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뜨 자 몸과 마음이 상쾌함을 느꼈다. 토요일은 오전 중에 일이 끝났다. 그녀는 1시 에 집으로 돌아와 재빨리 점심을 먹고 옷을 갈아입으려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 녀는 세심하게 신경을 써서 엷은 핑크 빛으로 테를 두른 진주 빛이 나는 가장 우아한 옷을 골랐다.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만족을 느끼며 거실로 내려와 데이빗을 기다렸다. 2시 반에 만나기로 약속이 돼 있었다. 데이빗은 상기된 얼굴로 달려왔다. 그의 표정을 보자 그녀는 더욱 안심이 되었다. 그는 보기만 해도 사랑에 폭 빠져 있 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손수 문을 열어주자 그는 막대기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린 채 불길 같은 눈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제니." 그는 속삭였다. "당신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그를 거실로 안내하며 그녀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동안 들어본 적이 없는 고상한 찬사가 사실 기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들고 온 바보스런 선물에 그녀 는 다시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초콜릿도 아닉소 캔디나 향수도 아니었다. 아 무짝에도 쓸모 없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시장의 손수레에서 2펜스면 살 작은 꽃 다발이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지금은 그런 것을 상관할 때가 아니었다. 그녀 는 미소를 지었다. "만나 뵈니 정말 기뻐요, 데이빗. 게다가 이렇게 예쁜 꽃까지." "특별한 것은 못 되지만 향기가 아름답습니다. 제니, 이 꽃을 자세히 보세요. 꽃잎에 마치 안개 같은 것이 끼어 있는 듯한데... 그것은 당신 눈자위에 보이는 아름다운 그늘과 꼭 같습니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처럼 고상한 사랑의 표현은 그녀를 당 황케 할뿐이었다. '아마 시께나 읽은 모양이지!' 당황한 가운데서도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이 치밀어 올랐으나 그녀는 더욱 순진한 미소를 띠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소중한 선물이라도 되는 듯 꽃을 든 채 긴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그 러나 사실 그녀는 오늘 아무리 해도 기운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나 좋아하던 번화한 거리 산책도 내키지 않았다. 그도 그녀 옆에 예의 바르게 걸터앉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도 자신의 부자연스러움을 느꼈는지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지금 기념사진이라도 찍으려는 것 같군요." "무슨 말씀이세요?" 그녀는 그를 바라보다가 또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봐요, 제니. 나는 지금까지 당신보다 더 순수한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고요한 수도원에서 방금 빠져나온 듯한 청정한 모습.... 스티븐 필리스의 시에 자 주 나오는... 그 사람 시를 읽어본 일이 있습니까?" 그녀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오늘 그녀의 진주빛 옷은 창백한 안색을 더 욱 두드러지게 했다. 몹시 보드라워 보이는 하얀 얼굴에 꽃을 들고 있는 모습은 수도자와 같은 기품을 풍기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말이 무얼 뜻하는지 그저 어리벙벙할 뿐이었다. '순수? 이 남자가 지금 나를 놀리는 것일 까?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이 사람은 지금 도취되어 있는 게 틀림없다.' 그녀 는 겨우 입을 열었다. "저를 놀리시는 건 아니시겠죠, 전 요 며칠 동안 기분이 아주 좋지 못했어요." "아아! 제니." 그는 금세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변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다 말해주세요, 무슨 일입니까?"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가느다란 꽃 한 송이를 빼들었다. "식구들이 저를 좋아하지 않아요, 모두가.... 그리고 조도.... 그 사람, 가버렸어 요." "조가 갔다니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가다니요? 왜 갔습니까?" 그녀는 슬픈 표정으로 꽃잎을 뜯어버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 질투를 한 거예요. 있을 수가 없대요. 그러니까 이유는... 정말 이유 를 아시고 싶어하시니까 말씀드리지만 결국은 제가 그이보다 당신을 더 좋아한 다는 그것 때문이에요." "그렇지만 제니...." 그는 너무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그것이... 저도 조한테 듣긴 했지만 뭔가... 결국 조가 당신을 좋아 했다는 뜻입니까?" "그런 이야기 그만두세요. 이젠 정말 듣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떨리는 음성이었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정말 이젠 지겨워요. 집안 식구들은 사뭇 그 얘기뿐이에요. 모두 저를 책망하 는 거예요...."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간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다보았다. "그렇지만 데이빗, 정말 전 어쩔 수 없었어요. 제가 어떻게 하겠어요?" 너무나 뚜렷한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그의 심장은 터질 것처럼 고동을 치기 시작했다. '그녀가 나를 더 좋아했던 것이다! 그녀는 지금 나를 데이빗이라고 불 렀다.' 그는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 밤처럼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그녀를 사랑한다는 인식만이 아픔처럼 밀려왔다. 자기 자신마저 소멸되는 순간이었다. 이 세상에는 제니만이 있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 이다. 언제까지나 영원히. 자기가 존재하는 한 또한 제니가 있을 것이다. 이처럼 마음을 황홀케 해주는 제니만이 있을 것이다. 그녀는 기뻐 노래하는 한 마리의 종달새, 갓 피어난 꽃봉오리! 이 세상의 어떤 아름다움이나 향기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고운 제니! 이제까지 고이 간직해오던 데이빗의 청순한 청춘의 열정과 영혼의 굶주림이 거세게 그녀를 열망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 쪽으로 몸을 굽혔다. 그녀는 물러앉았다. "제니." 그는 두근대는 가슴을 누르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 말은 당신이 나를 좋아한다는 뜻입니까?" "네, 데이빗." "제니!" 그는 더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난 처음부터 이렇게 되리라고 예감했습니다. 제니, 진정 나를 사랑합니까?" 그녀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그는 그녀를 포옹했다. 그리고 긴 키스를 했다. 그의 평생에 있어 이때의 키스처럼 황홀함을 느낀 적은 다시없었 다. 그의 키스는 부드럽고 경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어색하게 포옹하는 그의 모습은 경험이 없는 그의 미숙한 젊음을 그대로 드러내주었다. 제니에겐 차라리 괴로운 순간이었다. 그녀는 그의 경건한 몸짓 속에 들어 있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느꼈다. 제니의 뺨으론 그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제니... 당신 울고 있군. 나를 사랑한다면서... 제니, 울지 말아요. 잘못된 것이 있으면 어서 말해줘요." "진정으로 사랑해요, 데이빗. 정말이에요." 그녀는 소곤거렸다. "저에건 당신밖에 없어요. 저를 버리지 마세요. 끝까지 사랑해주세요. 그리고 어서 저를 이곳에서 데리고 가주세요. 이곳은 정말 지긋지긋해요. 모두가 저를 미워하고 사납게만 대한답니다. 전 이제 지쳤어요. 그 기성복점에서 일해야 하는 매일매일도 정말 이제는 견딜 수가 없답니다. 데이빗, 저를 이 괴로움에서 구해 주세요.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요. 우리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요. 아! 나는 행 복하고 싶어요. 데이빗, 당신은 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요. 그렇죠! 아, 데이 빗." 애원이 담긴 제니의 달콤한 음성은 그를 황홀한 꿈의 세계로 이끌어가기에 충 분했다. "결혼합시다, 제니.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당신을 데리고 갈 테니 걱정 말아 요. 이제 학위를 따고 직장만 구하면 언제든지 당신을 데려가겠소." 그러나 그녀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어쩌면, 데이빗. 저보고 언제까지나 기다리라는 이야기군요. 1년이나 2년을... 당신은 나를 버려두고 대학엘 간다는 거죠.... 아니 어떻게 제가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릴 수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난 이곳에 하루도 더 있을 수가 없단 말예요. 데이빗, 지금은 취직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흐느껴 울었다. 슬퍼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의 마음을 터 지게 하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자기 어깨에 기대게 하며 우선 울음 을 그치도록 부드럽게 달랬다. "제니, 진정해요. 어서 울음을 그쳐요. 절대로 오래 걸리진 않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원한다면 당장 취직할 길은 없는 것도 아니에요. 난 교사 자격증이 있으 니까 어렵진 않아요. 대학을 2년만 다니면 그 자격은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거니 까. 그렇지만 지금 내가 받으려는 문학사의 영광에 비하면 그런 자격증 따위는 너무 비참한 거지요.... 하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취직을 하겠어요." "아-고마워요, 데이빗. 정말 취직을 하시는 거죠, 저를 위해서. 정말 전 행복해 요, 데이빗." 그녀는 눈물을 쏟아지는 얼굴을 그의 품안에 묻었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애원 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데이빗, 그러면 어떻게 시작하실 거예요?" "글쎄." 그는 그녀의 눈물 어린 뺨을 쓰다듬다가 결연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방법이 있소. 내 고향의 유지에게 편지를 내는 거요.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는 배러스라는 사람에게 시골 교사 자리를 부탁한다면 아마 가능할거요. 그런데 이봐요...." "아! 알아요, 데이빗." 그녀는 눈물을 삼켰다. "문학사 학위를 받으셔야 한다는 이야기죠. 당신 마음 잘 알겠어요. 그렇지만 그 일은 조금 나중에 하시면 안 될까요? 먼저 우리의 행복한 보금자리를 꾸민 뒤에 당신은 공부를 시작하는 거예요. 우리의 작은 집을 가진 뒤에. 당신은 밤이 깊도록 열심히 공부하고 난 당신 옆에서 얌전히 앉아 기다릴게요. 그런 밤은 얼 마나 멋진 일이에요, 데이빗? 아! 나는 정말 행복해요." 행복에 넘친 그녀의 표정은 그를 감동시켰다. 데이빗도 어서 그 꿈처럼 행복 한 미래를 그의 두 손안에 갖고 싶었다. 제니, 그녀보다 몇 배나 더 강하게. 그 는 애정이 넘치는 시선으로 그녀를 감싸듯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제니, 우리는 현실적이어야 해요...." 그녀 눈에는 아직도 눈물이 그득했지만 제니는 활짝 웃었다. "데이빗, 데이빗...이제 그만두세요. 더 이상 다른 얘긴 듣고 싶지 않아요. 이 행복을 깊이깊이 누리고 싶어요. 모처럼 얻은 이 행복을 깨뜨리지 마세요. 데이 빗, 부탁해요." 말이 끝나자 그녀는 발딱 일어나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자, 데이빗. 어서 일어나세요. 우리 산책을 나가요. 당신이 좋아하는 그 에즈 면드 모래 언덕에 다시 한 번 데리고 가주세요. 나도 그곳이 너무나 인상적이었 어요. 그 나무들, 그 옛스런 물방아... 우리 그곳에 앉아서 우리의 행복한 장래를 얘기하기로 해요. 배러스라는 분에게 편지를 쓴다는 당신의 계획은 정말 멋있을 것 같군요. 그 분은 당신 같은 재주꾼을 결코 모른 척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죠, 데이빗?" 눈물을 흘리고 난 뒤라 더 맑게 반짝이는 매혹적인 눈빛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는 그녀는 자신에 찬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재빨리 그에게 다정 한 키스를 하고는 옷을 갈아입으러 달려나갔다. 그는 바보처럼 빙글거리며 방 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 공중에 붕 떠 있는 기 분이었다. 황홀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약간 난처해지는 느 낌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제니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꿈만 같은 사 실 앞에서는 아무것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녀는 그를 사랑한다. 사랑의 환희 가 전류처럼 온몸을 떨리게 했다. 그리고 제니와 함께 하는 행복한 미래가 양양 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그녀는 기다려줄 것이다.... 아직 스물두살 밖에 되지 않 은 나로서는 사실 모든 것이 너무 이르니까.... 그녀는 틀림없이 기다려줄 것이 다. 자신은 어떤 일이 있어도 문학사 학위를 받아야 한다. 그녀도 이러한 마음을 이해해주리라. 지금은 아니지만 곧 이해할 때가 올 것이다. 그때 방문이 활짝 열리며 샐리가 들어왔다. 그녀는 그를 보자 멈칫했다. "여기 계시는 줄 몰랐어요. 난 음악을 들으러 온 것뿐예요." 그녀는 화가 난 듯 얼굴을 찌푸렸다. 데이빗은 지금 너무 행복했기 때문에 그 녀의 찌푸린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사실 그녀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의 앞에서 는 언제나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억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의 말은 퉁명 스러웠고 냉소적인 표정을 지었다. 무슨 원한이라도 맺힌 사람 같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를 일부러 화나게 하고 불쾌하게 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녀의 언니와 결혼을 해야 하니 지금처럼 그녀에게 무심할 수 없다고 생각되었 다. 좀더 친해질 필요가 있었다. "샐리, 나만 보면 화가 치미는 얼굴이군. 나를 왜 싫어하지? 오늘은 그 이유를 알아야겠는걸." 그녀는 좀 놀란 듯 그를 흘깃 바라보았다. 낡은 청색 운동복을 입고 있는 그 녀는 나이보다 언제나 어려 보였다. 거의 머리 손질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도 여자다워 보이지 않았다. "싫어하지 않아요." 의외로 조용한 음성이었다. 여느 때의 심술궂음이나 건방진 표정이 없었다. 진 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왜 화를 낼까? 난 샐리의 온순한 얼굴을 가끔이라도 보고 싶은데."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너무 진지한 표정이어서 데이 빗은 좀 어색해졌다. "난 일부러 달콤한 표정을 지어 보일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두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녀는 정말 화가 난 것처럼 눈길을 내리깔더니 방밖으로 휙 나가버렸다. 샐 리와 엇바뀌듯이 제니가 들어왔다. 마치 헤엄을 치는 사람처럼 유연한 동작으로. "그 계집애 또 뭐라고 지껄였어요? 예의는 뒀다가 언제 쓰려는 건지...." 그녀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이제는 그가 완전히 자기 소유라는 듯 자연스럽게 다가와 그의 팔짱을 꼈다. "자아, 어서 나가요. 우리의 행복한 이야기를 더 하고 싶어서 마음이 터질 것 같아요." 그녀의 얼굴에서는 이제 조금도 어두운 구석을 찾아볼 수 없었다. 조금 전에 울었던 그녀의 표정은 마치 거짓말처럼 환해져 있었다. 마치 한 마리의 작은 새 와 같았다. 그것은 제니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약혼자, 그렇다. 단순한 남자 친구가 아닌 당당한 약혼자, 그것도 고상한 직업인 교사 자격증을 가진 약 혼자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당장 슬래터리 상점은 그만둘 것이다. 아니꼽던 주인 앞에다 사표를 내던지고 돌아서 나오는 기분은 어떨까? 그리고 어깨를 펴고 스코츠드 로를 활보할 것이다. 물론 데이빗과 함께. 어서 결혼을 해 서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났다. 자 기를 멸시하던 그 사람들에게 맺히고 맺혔던 원한을 풀어보리라. 신문에 커다랗 게 결혼 광고를 내고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릴 것이다. 그런데 무슨 옷을 입어야 하나? 늘 꿈을 꾸어오던 바로 그날인데. 최고로 멋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 최고로 멋있는... 멋있는... 멋있는 것을 어서 구해야 한다. 데이빗은 그날 산책에서 돌아오자 오직 제니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배러스에 게 편지를 썼다. 일 주일 후에 답장을 받았는데 슬리스케일의 신 베들 가 국민 학교에 교사 자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의 이성과 그녀에 대한 열정적 인 사랑 사이에 끼어 생전 처음 심각한 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그의 부모와 자 신의 장래가 무서운 괴물처럼 그를 덮쳐 눌렀다. 오직 절망뿐이었다. 그러나 이 편지를 본 제니는 펄쩍 뛰면서 그의 목에 매달려왔다. "아아, 데이빗." 그녀는 감격을 누르지 못해 다시 흐느껴 울었다. "얼마나 멋진 일이에요. 난 당신의 실력을 믿었어요. 제 현명한 도움으로 당신 은 훌륭한 교사가 되신 거예요. 아, 정말 기뻐요." 그녀의 열렬한 포옹과 키스는 놀랍게도 그 괴물 같던 절망의 감정을 한순간에 없애버렸다. 부모에 대한 면구스러움도 사라져버렸다. 지금 그의 앞에는 그를 사 랑하는 아름다운 제니와 그녀의 감격스러운 표현처럼 너무나 멋있는 미래가 있 을 뿐이었다. 16 그날 아침 아서는 이상한 기쁨 속에서 눈을 떴다. 아직 전보가 아버지에게 도 착하기 전이었지만 아서는 행복한 예감으로 가슴이 꽉 차오는 것이었다. 눈을 뜨자 열려진 창으로 보이는 네모진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인생이란 매우 값진 것이며, 햇볕과 힘과 희망으로 충만한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새로운 느낌이 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 잠을 깨는 일이란 드물었다. 어떤 때는 햇빛이 전혀 보 이지 않는 무거운 암흑만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서 강하게 느껴지는 결함과 거기에서 오는 피할 수 없는 절망감 때문이었다. 그것은 날카 로운 칼끝처럼 섬세한 그의 마음을 찔러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그런데 오늘은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 산다는 것이 멋진 일로만 여겨졌다. 이 것은 그의 비참한 절망감처럼 역시 설명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제 받게 될 전보나 아니면 오후에 헤티를 만나게 되리라는 예감이 작용한 까닭인지도 모 른다. 아니면 자기 자신의 성장에 대한 확실한 인식에서 오는 기쁨 같은 것인지 도 모른다. 그는 깍지 낀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누운 채 이제 건장해진 18세 로서의 몸을 느꼈다. 그와 함께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딸기를 먹지 않 았다.'는 것이었다. 의미 없는 단순한 일 같지만 아서에게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가 그토록 좋아하는 딸기를 먹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을 극복했다는 환희를 동 반하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어제 저녁 식탁에서였다. 캐리 고모는 여느 때처럼 머리를 갸우뚱한 채 입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대며 밭에서 딴 탐스런 딸기를 접 시에 담고 있었다. 배러스의 지나치게 검소한 식탁에서는 이것은 분에 넘치는 사치였다. 더욱이 크림까지 곁들인 딸기라니! 그래서 캐리 고모는 사실 크림보다 더 좋아하는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마터면 노란 크림이 든 은그릇을 식탁에 올려놓는 걸 잊을 뻔했다. "이건 아서 몫이다." 캐리 고모는 의미 있는 눈짓을 하면서 확실히 다른 접시보다 더 많은 딸기와 크림이 담긴 접시를 아서 앞에 놓아주려고 했다. 그때 아서는 재빨리 외치다시 피 하면서 그 접시를 거절했다. "캐리 고모님, 오늘은 딸기가 먹고 싶지 않습니다. 그만두겠어요." "웬일이냐? 항상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지금 너에겐 신선한 과일이 필 요한 나이야. 그러니 어서 먹어라." 캐리 고모는 꽤나 당황했다. "아서야, 어디 몸이라도 불편하니?" 아서는 아버지의 초연한 눈길을 의식하자 좀더 의젓한 자세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고모님. 몸이 불편하다니요? 이렇게 건강한데... 다만 딸기가 먹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저도 이젠 어른이니까요." 그는 자랑스럽게 웃어 보였지만 입안에는 비참하게도 침이 고였다. 그러나 그 는 유유한 자세로 식구들이 유난히 탐스러워 보이는 딸기를 천천히 먹는 것을 구경하였다. 이것은 이제부터 그가 하려는 커다란 일의 시초에 불과했다. 성서에 서도 자주 나오듯이 아주 위대한 일의 첫걸음이었다. 그러므로 아주 사소해 보 이는 것이지만 자신이 그 일을 해낼 수 있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어느 날 어머니 방 앞을 지나다가 얼핏 들은 어머니의 한탄을 그는 지난 8개 월 동안 잊어버린 일이 없었다. "아서가 좀더 남자다웠으면 좋겠어요. 왜 남자들처럼 굳세지 못한지 정말 걱정 스러워요." 그는 불행했다. 말할 수 없이 비참했다. 그러나 이제 이 행동으로 그것은 충분 히 보상되었다. 자신도 굳센 의지의 소유자임을 온 가족 앞에서 보였던 것이다.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던 비참한 기분도 깨끗이 사라졌다. 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침대에 드러누워서 공상 따위를 하다니, 남자답 지 못한 것이다. 활짝 열린 창문 앞에서 힘차게 체조를 하고는 목욕탕으로 뛰어 가 찬물을 뒤집어썼다. 너무 이르고 쌀쌀한 아침이어서 얼음같이 찬물이란 표현 을 정말 글자 그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미 준비되어 있는 더운물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추위에 마비된 뻣뻣한 몸 으로 방에 들어와서는 맞은편 벽에 붙어 있는 표어를 경건한 표정으로 바라보았 다. '나는 하겠노라' 그리고 그 아래로 '모든 사람을 정면으로 똑바로 바라보라'는 말을 입 속으로 여러 번 외우면서 천천히 옷을 입었다. 구두도 신었다. 평소에는 신지 않던 몹시 무거워 보이는 구두였다. 이유가 있었다. 그는 오늘 처음으로 갱 내에 들어가 볼 결심을 세운 것이다. 책상 서랍을 열고 작은 책을 꺼냈다. 빨간 표지 위로 '자의식의 치료'라는 제 목이 눈에 띄었다. 그는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진지한 얼굴로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의 마음이 가장 맑을 때라고 씌어진 대로, 아침식사 전에 이 책을 한 장(章)씩 읽었다. 그는 자기 침실에서 독서하는 것을 좋아했다. 침실 에서는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 작은 빨간 책들은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감추어둔 것이었다. 책에 마음을 집중시키고 있었지만 집안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 었다. 캐리 고모가 어머니 방을 걸어다니는 느릿한 움직임과 그레이스의 웃음소 리, 욕실로 달려가는 소리, 바로 머리 위에서는 힐다가 침대에서 투덜대며 일어 나서 기분 나쁜 듯이 방바닥을 쓰는 소리, 그의 아버지는 한 시간 전에 일어났 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도 아버지의 일과 가운데 하나로서, 그 규칙은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함이 없어 아무도 이상하다고 의문을 갖지 않는 일상적인 일이었 다. 아서는 잠시 다음 구절에서 읽기를 멈추었다. "인간의 의지는 한 인간의 운명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의 운명까지도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일을 행하거나 아니면 행하는 것을 삼가거나 그 양단간의 한 가지를 결정하는 마음의 능력, 그러니까 두 갈래의 길에서 어느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느냐 또는 추구해 가느냐 하는 것을 결정 짓는 그 능력은 자기 자신의 인생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의 인생에까지도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 이 하나만의 이유에서라도 인간은 의지를 함양해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끼치는 영향 때문만이 아니라 멀리 타인들에게까지 미치는 결과 때문 에도 그렇게 해야 한다. 아서는 강해지고 싶었다. 자제와 결단과 자기 자신의 정 복을 소유하고 싶었다. 그는 자기가 태어나면서부터 지녀온 결점인 부끄러움과 어줍음과 남 앞에서는 뒷걸음치는 경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칠 수 없는 것은 공상을 하는 버릇이었다. 대개의 사람들처럼 그도 상상의 문을 통하여 인생의 험한 현실로부터 도피하 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한 공상은 얼마나 멋있는 것인가! 그는 넵 튠 탄광에서 뭔가 엄청나게 영웅적인 행동을 하는 공상을 그 얼마나 자주 했던 가.... 또 물에 빠진 어린이라든가 급행열차에 치일 뻔한 어린이를 구출하고는 자 기 이름도 밝히지 않고 사라졌다가 나중에야 그 사실이 알려져 열광하는 군중의 어깨에 높이 얹혀지는 자신의 모습이라든가, 여성을 괴롭히는 치한을 때려눕히 거나 연단에 서서 웅변으로 무수한 청중을 매료시키는 것... 또 어느 유명한 만 찬회에 헤티 토드를 파트너로 데리고 나가 유유히 그리고 재기 발랄하게 즉석 연설을 함으로써 그녀와 참석한 모든 사람들을 황홀케 하는 것 등에 대한 공상 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아아, 공상의 눈부신 기적은 끝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공상을 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공상들을 멀리 뿌 리쳐 버리고 이제는 강해지고 싶었다. 그것도 아주 특별히 강해지고 싶었다. 이 제 열 아홉 살이 다 되어간다. 일년만 지나면 채광기술 공부도 끝이 날 것이다. 인생이란... 아아, 그렇다. 이제는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며, 용기를 가지고 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용기와 결단. '나는 해나갈 것이다.' 아서는 책을 덮고 벽에 붙어 있는 표어를 열심히 바라보며 단호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눈을 꼭 감고 몇 번이고 나는 해나간다는 그 말을 중얼거렸다. 마치 자기 영혼 안에 그 말들이 지워지지 않게 새겨ㄴ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해나갈 것이다. 나는 해나갈 것이다....' 이윽고 그는 아침식사를 하러 아 래층으로 내려갔다. 다른 식구들보다 반시간 앞서서 아침식사를 하는 아버지는 거의 식사를 끝내 고 있었다. 그는 무릎에 신문을 얹고 생각에 잠긴 채 마지막 커피 잔을 드는 중 이었다. 그는 아서의 아침 인사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그 끄덕임 속에 는 위압이나, 가끔 아서의 뼛골까지 사무치곤 하던 서릿발같은 냉랭함이 전혀 없었다. 오늘 아침 아버지의 모습에는 관대한 평온함이 넘쳤다. 그러한 모습은 아서에게 하나의 애무처럼 느껴졌고, 그가 해보겠다던 그 열성을 격려해주고 인 정해주며 아서를 독립된 인격체로 높여주는 느낌까지 들게 했다. 아서는 행복감 에 젖어 미소를 띠며 자기 아버지의 시선을 자랑스럽게 의식하면서 계란을 열심 히 까기 시작했다. "내 생각엔 말이다, 아서." 갑작스럽게 배러스가 말했다. "우리에게 오늘 재미있는 뉴스가 있지 싶다." "그러세요, 아버지?" "새로운 계약이 하나 성사될 것 같다." "그래서요, 아버지?" 아서는 얼굴에 홍조를 띠며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그 우리라는 말이 아주 기 분 좋았다. 아버지가 이제는 자기를 동등한 입장에서 대해주는 것이며, 광산의 공동 경영자로 간주하는 데서 비롯된 말이 분명했다. "일급 계약이라 할 수 있지. P.W사와 하는 거다." "아, 정말 굉장한 거군요." "너도 기쁘냐?" 배러스는 애정이 깃들었지만 조금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이지요, 아버지." 배러스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우리의 코크스 탄이다. 나는 그 탄층에 다시는 손을 대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내세우는 가격이 알맞다면 내주부터 그곳에서 작업 을 시작해야겠다. 스커퍼 플래츠의 탄층을 파 들어가는 거다." "언제 확실한 계약을 하게 되나요, 아버지." "오늘 아침." 하고 배러스는 대답했다. 그러고는 마치 아서의 단도직입적인 질 문에 갑자기 화가 치밀기라도 한 듯, 지금까지의 너그럽던 태도를 바꾸어 말했 다. 그는 신문을 집어 들더니 그 뒤에서 명령적인 어조로 말했다. "9시 정각에 떠날 준비를 해둬라. 기다리는 건 질색이라는 거 알고 있겠지." 아서는 기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계란을 재빨리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갑 자기 하나의 생각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스커퍼 플래츠! 그는 황급히 눈을 들 어 신문으로 가려진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는 물어보고 싶었다... 반드시 알고 싶었다. 그러나 물어봐도 되는지, 혹시 물어보면 안 되는 일일지도 몰라 망 설이는데 캐리 고모가 그레이스와 힐다를 데리고 들어왔다. 캐리 고모는 마치 자기의 의치를 갈아 끼우듯이, 매일 아침 하나의 규칙처럼 즐거운 표정을 하는 데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간밤에 아주 잘 주무셨단다."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아서에게 말을 건넸다. 그것은 리처드 배러스에게 하는 보고이지만 캐리 고모는 그에게 대놓고 말하는 것보다 이것이 더 낫다는 걸 알 고 있었다. 캐리 고모는 항상 간접적으로 모든 일을 처리했으며, 이것은 자기 자 신뿐만 아니라 이 가정의 평화까지 보호해주었다. 그러나 아서는 그 말을 듣지 못한 채 토스트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의 마 음은 스커퍼 플레츠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이제 별로 기쁘지도 않았 다. 오히려 어떤 불안으로 마음이 뒤숭숭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줄곧 눈길을 음 식 접시에만 쏟고 있었다. 아침 나절에 그 좋던 기분은 천천히 사라졌고 걱정과 불안으로 울고 싶을 정도였다. 왜 늘 이 모양일까, 황홀할 정도로 상쾌한 마음이 왜 이처럼 갑작스레 무거운 절망으로 변해버려야 하는 걸까? 그는 그레이스가 행복한 얼굴로 빵에 마멀레이드를 찍어 먹는 것을 부러운 눈 으로 바라보았다. 그레이스는 언제나 변함없었다. 열여섯 살이 된 지금도 그녀 는, 둘이서 조랑말 복서의 등에서 곧잘 떨어졌던 지난날이 너무나 또렷이 기억 나도록, 여전히 귀엽고 행복스러우며 편안한 모습이었다. 천성적으로 불안이나 걱정을 모르는 성격인지도 모른다. 어제도 그녀가 댄 티즈데일과 즐겁고 다정스 럽게 커다랗고 빨간 사과를 깨물면서 가로수 길을 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다음 달에는 해러기트의 신부(新婦)수업 학교에 가야 하는 그녀가 대낮에 시내에서 사과를 깨물고 있는 걸로 봐서 틀림없이 댄이 그녀에게 사과를 주었을 것이다. 만일 캐리 고모가 그레이스의 그런 모습을 보았더라면 틀림없이 큰 소동이 일어 났을 것이었다. 그레이스는 자기를 쳐다보는 오빠의 시선과 마주치자 얼른 미소를 지으며 입 을 벌렸다. 그러나 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다만 입을 벌려 보였을 뿐 이었지만 그는 그녀의 말뜻을 알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여전히 오빠를 유쾌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해티!"라고 소리 없이 말하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생각에 잠 긴 그를 보기만 하면 해티 토드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추측했다. 그는 아니라는 뜻으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것이 그레이스에겐 더욱 재미있 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장난기로 반짝이는 눈을 하고는 킬킬거리며 웃기 시작했 다. 그녀의 입 안에는 불행하게도 빵이 잔뜩 들어 있었기 때문에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그레이스는 갑자기 빵 조각들을 뱉어내며 목이 메어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머나." 가까스로 숨을 헐떡이며 그녀는 변명을 했다. "뭔가 잘못 들어갔어." 힐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빨리 커피를 마셔. 그리고 다음부터는 그런 바보 같은 짓은 말아요." 그레이스는 순순히 커피를 마셨다. 힐다는 그녀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꼿꼿하 게 앉아서 여전히 잔뜩 찌푸린 얼굴로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그녀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넌 결코 얌전히 행동하는 것을 배우지 못할 것 같구나." 날카로운 음성이어서 한 대 때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서는 그렇게 느꼈다. 그러나 아서는 힐다가 그레이스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 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좀 묘한 것이었다! 그렇다. 그레이스에 대한 힐다의 애정은 항상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평범한 것이 아닌, 사랑과 질책이 같이 섞여 있는 것이었다. 아 주 치밀하게 세세히 보살펴주고 생각해주다가도 갑자기 화를 냈다가 또 금세 가 라앉은 좀 변덕스러운 것이었다. 힐다는 그레이스가 자기와 함께 있기를 원했다. 힐다는 그레이스가 자기를 좋아하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다 주고 싶어했 다. 그러면서도 힐다는 자기를 좋아하도록 해줄 애정의 표시 같은 것은 조금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힐다는 그러한 것을 몹시 싫어하고 경멸했다. 아서는 다시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생각을 바꾸어야 함을 느꼈다. 자기를 불안하게 만드는 이런 생각들은 그가 시정해야 할 또 하나의 결 점인, 무슨 일이든 너무 지나치게 캐어 들어가서 몰두해버리는 경향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와 대화가 끝난 이래 지나치게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건 아닐까? 그는 커피를 다 마시고, 냅킨을 상아환(象牙環)에 말아 끼우고, 아버지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탄광으로 가는 도중에 물어보기로 하자... 그렇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올 때 묻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드디어 배러스는 신문 읽는 것을 끝냈다. 그는 읽은 신문을 그냥 옆에 두는 것이 아니라, 깨끗이 손질된 하얀 손으로 구겨진 주름까지 잘 편 뒤에 단정히 접어서는 한마디 말도 없이 캐리 고모에게 건네주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바꾸로 나가자마자 제일 먼저 신문을 집어 드는 사람은 힐 다였다. 배러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건방진 태도를 모른 척하고 있었 다. 5분 후에 두 사람은 마차를 타고 탄광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아서는 용기를 내서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다. 그 말들이 열 번도 더 그리고 열 가지도 넘게 다 른 방법으로 혀끝까지 나왔다. "그런데, 아버지...." 라고 말할까, 또는 그냥"아버지, 아버지 생각으로는...." 이 렇게 말을 시작할까. 아니, 아마도 "얼핏 생각이 났는데요, 아버지...." 하는 것이 훨씬 말을 꺼내는 방법으로써 알맞지 않을까 하고, 말을 시작하는 방법과 말을 연결하는 순서들이 그가 선택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상상 속에서 자기 자신의 말하는 모습을 보고 또 말의 내용들을 들어봤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매우 괴로웠다. 그런데 다행스럽게 아버지가 먼저 이 야기를 시작했다. 아서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몇 년 전에 스커퍼 플래츠에서 작은 문제가 있었지, 기억 나니?" "네, 아버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서는 자기 옆에 똑바로 침착하게 앉아 있는 아버지를 힐끔 훔쳐봤다. "불쾌한 사건이었지! 나는 그런 사건을 원하지 않았다. 누가 시끄러운 것을 원 하겠니? 그렇지만 그 사건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 아주 값비 싼 대가를 치르게 했다." 그는 천천히 이야기의 끝을 맺으려 했다. 그것으로 그 문제마저 조용히 과거 의 기록 속으로 집어넣겠다는 태도였다. "인생이란 때때로 힘이 드는 것이다, 아서. 그리고 어떤 사건에 직면했을 때 필요한 건 자기 입장을 지켜낸다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나 이번엔 아무런 사건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아버지?" "문제 없어. 광부들은 지난번 일로 충분한 교훈을 얻었으니까 경솔하게 또 그 런 짓을 되풀이하지는 않을 게다." 그의 냉정한 음성은 확신에 차 있었다. "스커퍼 플래츠는 물이 많은 갱구가 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문제로 말 한다면 믹슨과 파라다이스 갱구도 마찬가지야. 광부들은 이미 그곳에서 충분한 경험을 쌓았을 테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을 테고... 그들은 물구덩이 속에서 하 는 작업에 완전히 익숙해 있으니까." 아버지의 말은 모두 옳았다. 간단명료하면서도 많은 의미를 함축한 아버지의 이 야기는 아서가 다시 평화와 기쁨을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아서는 한 시간 가량 자신을 괴롭히던 막연한 불안과 공포를 싹 지워버릴 수 있었다. 마치 작은 모래성이 힘차게 밀려오는 조수 때문에 대번에 사라져버리는 것과 같았다. 그의 마음은 감사함으로 가득 찼다. 자신에게는 이처럼 침착하고, 냉정하게 모든 일을 처리하는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며 그는 묵묵히 앉아 있었다. 이제 아무 걱정이 없었다. 그는 아침에 가졌던 밝은 마음으로 완전히 되돌아왔다. 그들은 경쾌한 마음으로 캬우펀 가를 마차로 달려 탄광 구내로 들어가 곧장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암스트롱이 엄지손가락으로 창틀을 톡톡 치며 그들을 기다리고 서 있다가 배러스가 들어서자 재빨리 몸을 돌려 다가왔다. "전보가 왔습니다, 사장님." 그는 전보의 내용을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책상 위를 가리켰다. 배러 스는 책상에서 오렌지 색깔의 종이쪽지를 집어 천천히 봉한 것을 뜯었다. "음, 됐군. 우리가 원하던 가격을 수락했구먼." "그럼 월요일에 플래츠에서 작업이 시작됩니까?" 암스트롱의 말에 배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암스트롱은 한쪽 손등으로 자기 입술을 툭툭쳤다. 깊은 생각에 잠겨 지금 자기의 행동을 전연 느끼지 못하는 모 습이었다. 갑작스레 전화가 울렸다. 암스트롱은 재빨리 책상으로 다가가 귀에다 수화기를 가져다 대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는 잠시 듣고 있다가 배러스를 힐끔 건너다보았다. "타인캐슬의 토드 씹니다. 오늘 아침에 벌써 두 번이나 전화를 걸었습니다." 배러스는 암스트롱으로부터 수화기를 받았다. "네, 리처드 배러스 올시다.... 음, 토드, 다행히 해결이 났네." 그는 말을 뚝 끊고 있다가 목소리를 바꾸어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말아, 토드. 그래, 물론이지. 뭐? 물론이라고 했네." 또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동안 배러스의 이마에는 그 낯익은 성급한 주름이 잡혔다. "그래, 좋다고 난 말했어." 목소리가 초조해졌다. "이 사람, 무슨 쓸데없는 소리! 단연코 그렇게 생각하지. 전화로는 안 돼. 뭐?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고 봐. 그래. 오늘 오후에 내가 타인캐슬에 가게 될 거야. 어디라고? 자네 집에서? 그게 뭔데? 소화불량이라고? 아니, 아니...." 배러스의 목소리에는 빈정대는 어조가 점점 더 강해졌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신경질적으로 사무실을 둘러보다가 갑자기 아서를 보고 그에게 딱 멈추더니 조 소 섞인 말투로 계속 이야기했다. "...자네 간이 또 그렇단 말인가? 불쌍한 친구군! 뭘 잘못 먹어 그렇겠지. 그래, 자네가 몸이 좋지 않으니까 내가 자네를 찾아가는 게 좋겠군. 그러나 자네가 하 는 말은 심각하게 듣지 않겠네. 그래 절대로 듣지 않을 거야. 이봐, 아서를 데리 고 가겠네. 헤티에게 아서를 기다리라고 해주게나." 그는 갑자기 전화를 탁 끊고, 잠깐 선 채로 별시의 미소를 띠다가 아서에게 말했다. "우리 오늘 오후엔 토드 집을 방문하도록 하자. 그 사람 아마 또다시 음식을 함부로 먹은 모양이다.... 그렇게 절망한 듯한 음성은 처음이다." 그는 자기로선 높은 웃음소리에 해당할 만한 짙은 미소를 지으면서 돌아서 나 가려고 했다. 암스트롱이 배러스의 말에 덩달아 웃으며 사무실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두 사람은 함께 탄과 구내의 마당으로 나갔다. 아서는 복잡하고도 약간 묘한 생각에 잠기며 사무실 안에 남아 있었다. 물론 그 는 토드가 무분별하게 먹었다는 것이 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술을 조 용하게 끊임없이 마시기 때문에 자주 황달에 걸려 자리에 눕곤 했다. 그러나 이 러한 발작은 별로 중태가 아니어서 주위에서도 그저 한 번씩 치르는 행사처럼 여기고 있었으나, 아서는 그런 증세를 알게 될 때마다 고통을 느꼈다. 그는 애덤 토드를 좋아했다. 인생의 패배자처럼 슬프게 보이는 토드지만, 젊었을 때에는 불 같은 정열과 날카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니코틴과 알콜에 젖어 병색이 완연한 몸집이 작고 뚱해 보이는 지금의 토드에게서 젊은 시절의 패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실 그는 누구보다도 패기만만하고 전도가 양양한 청년이었다. 리처드 배러스와 함께 타인캐슬 메인에서 견습공 생활을 하던 청년시절에는 토드도 매 우 원기왕성한 청년으로서 자신이 그리는 빛나는 장래를 바라보며 열의에 넘쳤 다. 그런데 세월이 그를 짓밟고 흘러간 것이다. 그의 부인은 아기를 낳다가 죽었 다. 그리고 노드 헤튼 사건이라는 중대 사건에서 브리그즈 헤튼회사의 증인으로 법정에 섰다가 그 사건이 회사측의 패소로 끝나자, 그의 명성도 떨어지고 세력 도 쇠퇴해졌다. 그는 자기 자신의 결단을 스스로 불신하게 되었고 그의 사업도 점점 기울기 시작했다. 성장한 자식들은 그로부터 멀어져갔다. 특히 그가 사랑하 던 라우라가 지금은 결혼해버렸다. 앨런은 회사의 중흥보다는 향락만을 쫓았고, 헤티도 노는 것과 자기 자신의 일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다. 토드는 점점 자기 자신 속으로 숨어들어 카운티 클럽 이외에는 외출하는 것을 중지했다. 카운티 클럽에서도 그는 고독했다. 밤마다 8시에서 11시까지 그는 정해진 자리에 앉아 서 묵묵히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남의 이야기나 듣다가 가끔 한마디씩 내 뱉는 것이 고작이었다. 마치 삶의 마지막길에 도달하여, 환멸과 비애만을 안겨주 는 세상을 체념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 주는 듯했다. 아서는 그날 아침따라 왜 그런지 더욱 토드 노인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 다. 오후 3시가 되어 아버지와 함께 타인캐슬의 대학로를 걸어 토드네 집으로 갈 때, 그는 이상하면서도 설명할 수 없는 기대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러한 느 낌은 토드와 자기가 묘하게 서로 이어진 듯한 정신적인 유대감을 동반한 것이었 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새 로운 감정이었다. 배러스가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곧 문이 열렸다. 토드가 몸소 그들을 맞아들였 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형식을 차린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아주 싫어했 다. 그는 낡은 짙은 갈색의 잠옷에 뒤꿈치가 닳은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아니-," 배러스는 토드를 옆눈으로 흘끔거리며 말했다. "자네 누워 있는 게 아니었군." "그럼, 그럼, 아무렇지도 않아." 토드는 늘 하듯이 정맥이 드러나 보이는 코끝에 걸린 금테 안경을 치켜 올렸 지만 안경은 곧바로 다시 내려왔다. "좀 오한이 드는 것뿐이야. 한 이틀 비가 오는 것처럼 그러다가 마는 거지." "그럴 테지." 배러스는 부드럽게 맞장구를 쳤다. 토드가 황달을 늘 오한으로 돌리는 것이 배러스에게는 우스운 일이었지만 그 는 그런 표정을 나타내지는 않았다. 그는 이 옛친구에게 농담을 할 때도 겸허하 고 부드러운 태도를 잊지 않았다. 그는 또한 좁고 지저분한 홀 한가운데에 때묻 은 잠옷을 입고 있는 이 병들고 불행한 친구에 비해 놀라운 성공을 누리고 있 는 자신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 홀의 밤색 벽지나 묵직한 우산세우는 대 (臺), 손때가 묻은 떡갈나무제(製)의 청우계(晴雨計)등은 사업을 그만둔 이 병자 의 슬픔을 나타내 주는 것 같았다. "난 자네에게 할 말이 있었어, 리처드 자네에게 말야." 토드는 자기 슬리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뭔가 주저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럴 거라고 나도 생각했네." "아침부터 전화를 걸어서 혹 언짢지 않았나?" "아니, 토드 이 사람아, 별소릴 다 하네. 내가 왜?" 리처드의 겸허하고 관대한 태도는 더욱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토드의 주저함 은 반사적으로 더 심해졌다. "자네에게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 그의 목소리는 거의 변명조였다. "그럴테지." "그럼," 토드는 말을 잠시 멈추더니, "뒷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겠어. 거기엔 난로가 있다네. 난 좀 오한이 들어서, 빈혈인 것 같아."라고 이어서 말했다. 또다시 그는 말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뭔가 염려하는 것 같은 걱정스런 표정 으로 아서를 건너다보았다. "아마 넌 헤티에게 올라가고 싶겠지, 아서. 지금 라우라가 와 있단다. 걔들은 2 층 응접실에 있어." 아서는 금세 얼굴이 빨개졌다. 그 이야기는 그를 흥분하게 했다. 토드는 자기 아버지와 의논할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를 어른으로 인 정해서 그들의 대화에 끼워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지금 그는 자기가 제외되고 있다는 것, 더욱이 여자들과 어울리도록 불명예스럽게 제외당하고 있음을 알았 다. 그는 극도로 모욕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은체함으로써 그 모욕감을 감추려 했다. "네, 올라가겠습니다." 그는 억지로 미소를 띠며 태연하게 말했다. 토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넌 다 알고 있지, 아서." 배러스는 비판적이면서도 관대한 눈길을 아서에게 돌렸다. "난 오래 있지 않겠다." 그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5시 10분발 기차로 돌아가야 할 테니까." 그러고는 토드를 따라 뒷방으로 갔다. 아서는 홀에 남았다. 그의 뺨은 억지로 띤 미소 때문에 아직도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새삼스레 자기가 가볍게 대접받 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언제나 그런 식의 기분이 들었다. 무심한 말 한마 디에도 팩하고 화를 냈다가는 금세 사그라져 버리거나 지나치게 부끄러워 하였 다. 자신의 그런 성격에 대한 일종의 심각한 고뇌가 그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토 드가 아버지에게 무슨 용건이 있을까 하는 심술궂고 화가 치미는 호기심으로 마 음이 뒤숭숭했다. 토드는 돈을 빌리고 싶어하는 걸까, 아니면 무엇일까? 왜 토드 는 그렇게도 불안한 표정이며, 아버지는 어째서 그렇게도 경멸적이며 호연한 자 세일까? 쑤시는 듯한 분노의 물결이 아서를 휩쓸었을 때, 갑작스레 그는 머리를 쳐들었다. 헤티가 2층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아서!" 헤티는 급히 내려오며 소리쳤다. "네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어. 도대체 왜 큰 소리로 불러주지 않았니?" 그녀는 그에게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당장 어떤 마술에라도 걸린 듯이 그 의 기분이 싹 바뀌었다. 그는 헤티 앞에서 기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고, 자기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느꼈다. 그렇게 되고 싶은 것은 그의 성격 탓이 아 니었다. 그 모든 것은 따돌림당한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잘 있었어, 헤티?" 그는 팔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녀가 지금 외출복을 입고 있다 는 것을 알아채고는 "헤티, 외출하려는 거야?"하고 물었다. 그녀는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미소를 지었다. 헤티는 부끄러움이란 것을 몰랐다. "라우라를 데려다줄 참이었어. 라우라는 빨리 돌아가야 한대."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는 약간 뽐내는 얼굴을 했다. "난 오늘 오후 내내 시집간 부자 언니를 상대하느라고 애를 먹었다구. 그렇지 만 아서, 언니를 얼른 보내고 돌아와서 차 끓여줄게." "딜리 다방에 같이 가서 차를 마실래?" 그가 좀 들뜬 마음으로 말하자 그녀는 이 뜻밖의 초대에 손뼉을 치며 기뻐했 다. "멋있어, 아서. 멋있어!" 그는 그녀를 자세히 바라보며 머리를 틀어 올린 후로 정말 예뻐졌다고 생각했 다. 이제 열여덟 살인데도 훨씬 더 성숙한 아가씨로 보였다. 사실 헤티는 예쁘지 는 않았다. 뼈마디가 잘고 손목이 가늘며 손도 작았다. 그녀의 눈은 크고 초록빛 이며 별 특징이 없는 코에다 살갗도 창백했다. 다만 그 머리칼만은 보드라운 금 발로 새하얀 좁은 이마 위에서 매력적으로 불룩하게 부풀어 있는 것이, 그녀의 평범한 얼굴에 생기를 주고 있었다. 또 자세히 보면 그녀의 눈도 아름답다는 것 을 느끼게 된다. 언제나 젖은 듯 윤기가 감도는 눈은 때로는 까맣게 보이기도 했고, 그럴 때 이 커다란 검은 눈동자는 보드라운 금발과 함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이것이 헤티의 신비였다. 결코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침착하고 활발한 거 동, 털이 보드라운 고양이 새끼처럼 짜증을 내는 듯하면서도 호소하는 듯한 느 낌은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녀는 아서에게 호소하는 듯한 미소를 보내며, 응석을 피우는 어린아이처럼 말을 했다. "야! 아서가 헤티를 딜리 다방에 데리고 가는 거예요. 헤티는 딜리 다방에 가 는 것을 아주 좋아해요." "나하고 같이 가는 것이 좋다는 건가?" 아서도 명랑하게 응수했다. "응!" 그녀는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서와 헤티는 딜리 다방에서 재미있게 노는 거예요. 여기서보다 아주 재미있 게."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마지막의 '여기'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헤티는 자기 집 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대학가 15번지에 있는 고가(古家)인 그 집은 시대에 뒤떨어진 고리타분한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어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 밝고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자고 그녀는 계속 아버지를 졸라대고 있었다. "네가 좋아하는 건 커피 에클레르야.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지?" 그녀는 그를 향해 콧등을 찡그려 보였다. 아주 귀여운 태도였다. "아서가 정말로 헤티에게 커피 에클레르를 사주는 거예요? 헤티는 커피 에클 레르를 아주 좋아한답니다." 그때 경고하는 듯한 기침소리가 났다. 두 사람은 얼른 몸을 돌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라우라가 홀에 내려와 있었다. 그녀는 이 젊은이들과는 전연 상관없다는 새침힌 표정으로 열심히 장갑을 끼고 있는 중이었다. 헤티의 표정이 금세 달라졌다. 점잖은 얼굴로 라우라를 힐책하듯 말했다. "어쩌면 사람을 그토록 놀라게 하우, 라우라 언니! 들어올 때는 발자국 소리쯤 은 내야 할 게 아냐?" "기침을 했잖아!" 라우라는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막 재채기를 하려는 참 이었단다." "시치미를 떼긴...." 헤티는 화가 난 듯 언니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라우라는 계 속 장갑을 끼면서 조롱하듯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미인이었다. 어두운 곤색 드레스가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아서는 라우라가 스탠리 밀링튼과 결혼한 이래 별로 그녀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웬일인지 이유는 확실 하지 않지만 그는 라우라와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러나 헤티는 아 주 달랐다. 그녀는 귀여운데다가 꾸밈이 없었다. 투명할 만큼! 그 대신에 라우라는 언제나 그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특히 그녀의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언행, 감정을 나타내는 일이 없는 그 차가움, 그녀의 창백한 얼굴은 뭔가를 조심스레 감추고 있는 긴장감과 함께 타인을 감시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이런 것들이 그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그럼, 어서 가요." 헤티는 여전히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라우라의 조용함과 조금도 빈틈이 없는 태도가 그녀를 더욱 화나게 한 것 같았다. "온종일 여기 서 있을 작정이유? 아서가 딜리 다방에 데리고 가준다고 했어." 가벼운 미소가 라우라의 입술에 떠올랐다.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이 문을 열고 거리로 나섰을 때 아서는 황급히 화제를 바꾸었다. "스탠리 씨는 안녕하십니까?" "네, 잘 계세요." 라우라는 차분히 대답했다. "아마 오늘 오후에는 골프를 칠 거예요." 그들은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그레인저 가의 모퉁이에 이르렀다. 거기까 지 와서야 라우라는 경쾌한 얼굴로 작별 인사를 했다. 그녀는 새로운 옷을 맞추 러 가기 위해 보너와 만날 약속이 되어 있었다. "언니는 옷이라면 아주 미치지." 헤티는 라우라가 가버리자 시원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딜리 다방 쪽으로 걸어 가면서 헤티는 아서의 팔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언니가 그처럼 사치스럽지 않다면 내게 좀더 잘해줄 수 있을 텐데." "그게 무슨 뜻이지, 헤티?" "그러니까 말야, 언니는 내 옷값과 용돈 모두 합쳐서 한 달에 5파운드밖에 안 준다는 거지." 그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라우라가 너에게 용돈을 준다구? 그건 보통 일이 아니잖아! 라우라가 참 착 하구나!" "그렇게 생각해주니 다행이야." 헤티는 심술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한 것을 후회하는 눈치였 다. "좌우간 언니는 그런 것쯤은 가볍게 해줄 만한 여유가 있으니까. 시집을 잘 갔 잖아!"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난 라우라를 잘 알 수가 없어." 아서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당연하지." 헤티는 다시 밝게 웃었다. "언니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할 말이 많지만 그만두겠어.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이 야." 그녀는 말을 끊더니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나는 언니를 닮지 않아서 다행이야. 우리 이제 다른 이야기 하자." 그들은 딜리 다방으로 들어갔다. 그들을 맞이하는 안온하고도 유쾌한 음악에 마음이 금세 포근해졌다. 헤티는 아주 밝은 얼굴이 되었다. 오후 차 마실 시간이 어서 다방 안은 붐볐다. 딜리 다방은 타인캐슬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다방으로 이름 나 있었다. 멋쟁이들이 드나드는 곳! 이 말은 쿠리어 신문의 공고란에 사용 되는 자랑스러운 선전문구였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음악이 몇그루의 종려나 무 뒤에서 은은히 울려나오가 있었다. 일본 냄새가 풍기는 설리번풍으로 만들어 진 홀 안으로 들어서자 기쁜 목소리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두사람은 대나무로 된 테이블에 앉았다. 아서가 차를 주문했다. "굉장히 멋있는 곳인데." 붐비는 방 안에서 눈에 띄는 친구들에게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까닥여 보이는 헤티 쪽으로 몸을 내밀며 아서가 말했다. 사실 딜리 다방의 오후 티타임 시간에 는 단골 손님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타인캐슬의 젊은 세대들인 그들은 부유한 의사나 변호사, 시내 상인들의 자녀로서, 지방 도시의 이른바 무슨 대단한 존재 나 되는 양 유행을 따르는 일종의 귀족계급이었다. 헤티는 이와같이 잘난 체하 는 조그마한 소사회에서는 멋쟁이로 행세했다. 그녀는 정말로 인기가 있었다. 토 드 노인은 그다지 사업이 번창하지 못한 광산기자에 불과했지만, 헤티는 귀여움 을 받았다. 그녀는 사교성이 많으면서도 예의 바른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예 쁜 헤티에게는 좋은 신랑감이 나타날 거라고 칭찬하는 사람들은 그녀가 아서 배 러스와 함께 나타나면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천천히 차를 마셨다. "앨른이 저기 와 있네." 그녀는 즐거운 표정으로 오빠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디크 퍼브즈와 노매드의 럭비 풋볼 선수들하고 같이 있는데 우리가 그쪽으로 갈까?" 아서는 체면상 앨른 쪽을 바라봤다. 지금쯤 사무소에 있어야 할 앨른이었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젊은이들과 함께 빈둥거리며 아무 할 일도 없는 사람처럼 한가롭게 앉아서 담배연기를 내뿜고 있는 것이다. "저 사람들을 방해하지 말자, 헤티."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끼리가 더 좋잖아." 헤티는 자기에게로 향하는 찬사의 눈초리들을 모르는 척했지만 마음은 즐겁고 눈은 빛났다. "저 퍼브즈라는 사람, 너무 잘 생겼지?" 헤티의 눈이 감탄으로 빛났다. "저치 멍청이가 틀림없어." 아서는 곱슬머리를 양쪽으로 갈라 붙인 잘생긴 청년을 멀리서 노려보며 말했 다. "어머, 그렇지 않아, 아서. 저 사람이 얼마나 멋있는데.... 춤도 기가 막히게 잘 춘다구." "저런 인간은 공연히 우쭐대고 멋만 부리는 건달일 뿐야." 질투심을 겨우 누르며 그는 탁자 아래로 헤티의 손을 잡았다. "헤티, 저런 사람을 좋아하는 거야? 나보다 저 사람이 더 좋다는 거야?" "그걸 말이라고 해? 바보같이...." 헤티는 가볍게 책망하며 아서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사람은 구질구질한 은행원에 지나지 않아. 크게 되기에는 이미 싹이 노란 사람이야." 헤티는 의미 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난 꼭 대단한 사람이 될 거야, 헤티." 아서는 심각한 얼굴로 선언했다. "그래야지. 아서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야." "내가 아버지와 함께 일할 때까지 기다려줘... 이제 두고 보라구." 그는 미래로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흥분하여 상기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헤 티가 자기의 성공을 능력보다는 그저 당연한 일로 여기는 것이 불만이었지만 그 것은 사실이기도 했다. "우리는 오늘 새로운 계약을 또 하나 체결했어. P.W회사와지. 굉장히 유리한 계약이야. 이제 두고 보란 말야." 그녀는 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더 부자가 된다는 거야?" 그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뿐이 아니지, 헤티. 그것은...응, 우선은 모든 것을 다 아버지와 공동으로 해서 대대로 배러스 집안 사람들이 해왔던 방식대로 넵튠 탄광을 확장시키는 일 에 전념하고 있지만, 내 능력이 좀더 커지면 나는 독립할 거야. 훌륭하게 말야. 헤티, 난 이런 생각만 하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어서 빨리 그 찬란한 미래가 왔으면 좋겠어." 그는 완전히 도취되어 불타는 듯한 눈으로 헤티를 바라보았다. "정말 멋있는 일이야. 아서, 꼭 그렇게 될 때가 오리라고 나도 믿어." 그녀도 공감하는 미소를 띠며 그를 믿음직스럽게 쳐다보았다. 헤티는 그 순간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깊이 느꼈다. 뺨에 엷은 홍조를 띠면서 흥분한 아서 의 열정적인 모습은 반짝이는 눈에서 솟는 열기와 함께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강렬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아서는 결코 잘생긴 편이 아니었다. 유감스럽지만 헤티는 그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여자처럼 기다란 속눈썹, 창백한 얼굴과 섬세한 턱 모양은 지나치게 예민한 그의 감수성을 그대로 나타내어 불안감을 주고 있었 다. 남자다운 기상이란 조금도 없는 그는 디크 퍼브즈와 같은 사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연약하고 섬세하였다. 그러나 그의 뒤에는 넵튠 탄광과 막대한 재산 이 그를 굳건하게 지탱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귀 공자다움 품위를 지니고 있었다. 헤티는 그것이 좋았다. 그녀는 탁자 아래로 그 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나는 오늘 아주 행복해." 그는 열정적으로 말했다. "왜 그런지 모르겠어." "그래?" "아니, 난 알아. 내가 왜 행복한지...." 두 사람은 큰 소리로 웃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은 그를 더욱 황홀하게 해주었 다. "헤티도 행복해?" "그럼 물론이지." 탁자 아래의 작고 부드러운 그녀의 손에서 오는 촉감은 그의 심장까지 파고들 었다. 그들은 마치 약속을 하는 것처럼 손을 힘주어 잡았다. 헤티와 자기의 미래 에 대한 황홀한 생각에 그는 무엇엔가 취해버린 사람처럼 머리가 멍해졌다. 그 멍해진 머리로 그는 더욱 대담한 이야기를 해버렸다. "이봐, 헤티. 나는 오랫동안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우리 약혼하지 않을래?" 그녀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의 손을 가볍게 누르면서 오히려 웃기까지 했다. "아서, 너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가 다시 창백해졌다. 그는 다시 힘을 주어 말했다.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지는 잘 알고 있겠지, 헤티. 난 언제나 같은 마음이야. 우리의 어린 시절, 법산의 우리 집에서 우리가 어떻게 놀았는지 다시 생각해봐. 너는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야. 아버지는 곧 나를 공 동 경영자로 인정해 주실 것이니까.... 지금은 이런 문제를 생각해봐도 좋을 때라 고 생각해."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일관성이 없이 뒤죽박죽이라는 것을 느끼자 얼굴을 붉 였다. 헤티는 재빨리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그녀는 전에도 결혼 신청을 받은 적이 있었다. 무도회에서 춤을 추다가 잠시 멈추고 서 있을 때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장난처럼 결혼 신청을 받는 것은 흔하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것은 그 런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진짜인 것이다. 그러자 빈틈없는 그녀 의 생각이 서둘지는 말자고 마음속에서 경고해오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서와 약 혼을 성급하게 함으로써 주위에서 받게 될 시샘이나 악의에 찬 빈정거림을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또한 결혼이라는 울타리 속에 자기를 가두어 두기 전에 좀더 여유롭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아서, 네가 정말 좋아." 그녀는 눈을 내리깔며 다시 소곤거렸다. "아서만한 사람을 난 아직 못 보았어. 내가 아서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잘 알 고 있지? 난 아서가 정말 좋아. 그렇지만 내 생각에 우리는 아직 어리다고 봐. 더구나 세상에 공식적으로 알리는 일에 대해서는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우리가 서로를 이렇게 좋아하고 있으니 지금은 그것으로 좋은 것 같아. 안 그래, 아서?" "알았어. 넌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 거지?" 그는 열정적으로 말했다. "그렇다니까. 내 마음 다 알잖아." 커다란 기쁨이, 세상을 온통 다 손에 넣은 것 같은 자신감이 그의 마음을 가 득 채웠다. 쉽게 격해지는 그의 감정은 또 눈물까지 글썽거리게 말들었다. 그는 행복했다. 그는 성숙한 사내다운 자부심을 느꼈다.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무릎을 꿇고 감사하고 싶 을 정도였다. 두 사람은 말을 잃은 채 마주 앉아 있었다. "그럼...." 하면서 헤티가 먼저 일어났다. "이제 가봐야겠어. 아버지가 어떤지 걱정스러워." 아서는 자기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5시 20분 전이네. 나도 5시 10분에 아버지와 만나 기차를 타야 돼." "정거장까지 데려다줄게." 아서는 대답 대신 부드러운 미소를 그녀에게 보냈다. 따뜻한 애정을 보여주는 그녀에 대한 사람이 더욱 불타 올라 진정하기가 어려웠다. 다방을 나오다기 그 들은 앨른이 앉아 있는 탁자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게으르고 난폭한 면도 있 었지만 몸집이 큰 그는 언제나 호인다운 미소를 띠고 있는 착한 사람이었다. 사 실 남을 해칠 마음 같은 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노던 노매드의 축구선수로서 국토방위 의용군에도 참가하고 있는 그는 술집 아가씨들에게도 인기있는 남자였 다. 그는 떠들썩한 자기 패거리들과 노닥거리고 있다가 이 젊은 한 쌍이 다가가 자 놀려대기 시작했다. 보통때 아서는 이렇게 놀려대는 걸 싫어했다. 그런데 오 늘 오후는 달랐다. 그는 조금도 부끄러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태연히 응수했다. 그의 내부에 꽉 차 있는 행복감이 그를 자신만만하게 만들어준 것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를 불안하고 우울하고 권태롭게 만들던 열등의식에서 벗어나서 사 소한 일들은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릴 수 있는 새로운 자기가 되었음을 깊이 느 꼈다. 퍼브지가 헤티에게 의미 깊은 미소를 보내며 장난을 거는 기미를 느꼈으 나 그것도 아무렇지 않게 무시해버릴 수 있었다. 그는 오히려 기발한 농담으로 좌중을 한바탕 웃기고는 담배에 불을 붙인다음 태연스레 헤티를 데리고 거리로 나왔다. 그들은 중앙역 쪽으로 걸어갔다. 아서는 화려한 주인공 역할을 끝낸 배 어처럼 전에 없는 자신만만한 뜨거운 감격으로 마음이 흠뻑 젖고 있었다. 그렇 다. 자기가 멋있게 해냈던 것이다. 그는 헤티도 자기가 이런 모습으로 살아나가 기를 바란다는 것을 알았다. 말을 더듬거리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감에 넘 치는 확신을 가진 태도로 해나가도록 말이다. 그들은 정거장 안으로 들어가 함께 플랫폼으로 갔다. 아직 시간이 일러 기차 는 들어오지 않았고 아버지도 보이지 않았다. 헤티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서. 난 지금까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 중이야. 무슨 일로 네 아 버지가 우리 아버지를 만나러 오셨을까?" 그는 뜻밖의 질문에 당황해서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상하게 생각돼."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 아빠는 몸이 안 좋으시면 누구도 만나는 것을 싫어하시거든. 그런데 오 늘 아침에는 세번이나 슬리스케일로 전화를 했단 말이야. 왜 그랬을까?" "글쎄...." 그도 우물거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나도 좀 이상스럽게 여기고 있던 중이야." 그는 잠시 말문을 닫았다가 "내가 아버지에게 물어볼게." 했다. 그녀는 웃으며 그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런 걸 뭘 물어봐. 필요없어. 그렇게 심각한 표정 하지 말아요. 지금 우리에 게 그럼 것이 무슨 상관야!" 17 그날 오후 4시 반에 데이빗은 베들 가의 국민학교에서 거리로 나왔다. 사람들 은 옛날에 폐교된 학교와 구별하기 위해 이 학교를 신 베들 가 국민학교라고 불 렀다. 학교는 베들 가의 높은 지대에 자리한 공지에 세워진 아직도 번쩍이는 적 갈색 벽돌로 된 건물이었다. 6개월 전에 문을 열 이 학교는 사실상 주내(州內)의 교육위원들의 전반적인 이동을 가져왔으며 새로운 교사도 한사람 필요했기 때문 에 데이빗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건물은 두 동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한쪽 건 물의 회색 돌로된 푯말에 '남자부'라고 크게 새겨져 있었다. 다른 쪽 건물에도 역시 똑같은 큰 글씨로 '여자부'라고 새겨져 있었다. 뾰족한 끝이 밖으로 휘게 된 담벼락 못이 달린 위협적인 울타리로 갈라놓은 곳에는 남학생과 여학생들이 각기 사용하는 아치형의 교문이 있었다. 건물 내부는 흰타일을 많이 사용하였고 복도에서는 늘 소독약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그것 때문인지 멋 없는 건물 전체 는 커다란 공중변소를 연상시켰다. 데이빗은 바람이 거세게 부는 거리를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학교를 조금이 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추운 오후였다. 외투가 없었기 때문에 강한 바람은 사정없이 옷 속까지 파고들었다. 그는 옷긴을 치켜세운 채 바쁘게 걸어갔다. 갑자기 그는 자기의 급한 걸음을 느끼자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아직도 자기가 결혼을 했고 베들 가 국민학교 교사라는 생각에 익숙하지 못했다. 그는 스트로더 교장이 말하듯 예의범절을 배울 필요가 있는 것 같았다. 그는 6개월 전에 제니와 결혼해서 모래 언덕 뒤의 조그마한 집에 그들의 보금 자리를 꾸몄다.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어려움도 있었다. 우선 제니가 말하는 것과 '꼭 맞는' 집을 찾아낸다는 것은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광산촌의 달동네로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제니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광부들이 사는 동 네로는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래서 데이빗은 당분간은 자기 부모들과 떨어져 시내에서 사는 것이 현명하겠다고 느꼈다. 그의 결혼에 대한 부모의 반 대도 피할 수 없었다. 그들은 마음에 맞는 집을 찾아 돌아다녔다. 제니는 셋방이 라면 가구가 붙어 있건 붙어 있지 않건 간에 무조건 싫어했다. 드디어 그들은 램 가 옆의 외딴집을 찾아냈다. 현관의 칠이 벗겨지고 낡긴 했으나 독채였고 일 주일에 10실링으로 값도 적당했다. 그 집은 웹트의 아내 것으로 오랫동안 비워 두었던 터라 습기가 많고 음침했다. 게다가 고작 연봉 70파운드를 받고 있는 데 이빗에게는 벅차기도 했다. 그러나 첫눈에 홀딱 빠져버린 제니를 실망시키고 싶 지가 않아서 그 집으로 정했다. 집이 제법 아담한데다가 작지만 정원까지 있었 기 때문이었다. 제니는 정원이 꼭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집이 품위가 있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제니는 손수 정원을 가꾸어보겠다고 했다. 집에 들여놓은 가구에 대해서도 제니는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조금은 피곤한 빛이 없이 명랑한 얼굴로 불평 한마디, 짜증 한 번 내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인 내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으나 일종의 타협이 필요했다. 두 사람은 겨우 타협을 보아 부엌, 객실, 손님용 침실에는 외상으로 가구를 들여놓기로 하고 침실에는 옻칠한 호두나무제 침대를 사기로 해서 제니의 자존심을 살려주었다. 그리고 방 들은 곧 사라사 무명천과 모슬린 천으로 만든 커튼, 거기다가 호화스런 레니스 가 달린 꽃병 받침 등으로 장식되었다. 데이빗은 행복했다.... 이 모래 언덕 뒤편에 있는 집에 산다는 것은 매우 행복 한 일이었다. 지난 6개월이라는 세월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그 들은 신혼여행까지 다녀왔다. 데이빗은 신혼여행을 갔던 컬러코츠에서의 그 축 복받은 7일 동안의 즐거움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물론 그는 신혼여행 같 은 것은 생각지도 않았다. 그러나 제니는 로맨틱한 전통데 대해서는 대단한 흥 미를 갖고 있어 언제나 고집을 피어 자기 뜻대로 하였다. 그리고 제니는 15파운 드나 되는 뜻밖의 돈을 내놓았다. 그 돈은 슬래터리 부인복 상점에서 6년 동안 일한 것을 저금한 그녀의 유일한 재산이었다. 그녀는 그 돈을 그에게 주었다. 그 리고 그를 설득하여 초라한 잿빛 양복을 벗어버리고 새 양복을 사 입도록 했다. 그녀가 부리는 억지나 고집은 대단했지만 다행히도 아주 단순해서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느끼지 않게 했다. 제니는 관대했다. 특히 돈 문제에 대해서는 두 번을 생각하는 법이 없었다. 결국 제니의 돈으로 새 양복을 사 입었고 멋진 신혼여행 도 했다. 그리고 또 하나 잊지 못할 일이 있었다. 결혼식이었다. 데이빗은 결혼식 때 여간 혼이 나지 않았다. 미리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플러머 가 교회에 마련된 식장에서는 제니가 부자연스럽게 딱딱해져서 식이 어색해졌는가 하면, 스코츠도 로에서 있었던 호화스런 파티가 진행되는 동 안에는 선리 가(家)와 펜윅 가의 팽팽한 대립으로 그들의 기분은 완전히 망쳐버 렸다. 그러나 컬러코츠에서 보낸 신혼여생 일 주일은 그러한 모든것을 다 보상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제니는 매우 멋진 여자였다. 깜짝 놀랄 정도로 정열적이 기도 했다. 그는 그녀가 겁낼 줄 알았는 데 그 반대로 그가 압도당하고 말았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그녀는 정말 마음으로부터 그를 사랑했다. 그는 물론 불행했던 그녀의 지난 일들을 알게 되었다. 그 괴롭고도 달콤한 첫날밤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 흐느끼면서 모든 것을 그에게 고백했다. 그는 정말 듣고 싶지 않았으므로 비참한 기분으로 제발 그만두기를 바랐지만 그녀는 끝까지 이야기했 다. "무지막지한 깡패의 꼬임에 순진했던 제가 넘어갔던 거예요. 전 겨우 열여섯 살이었거든요. 무서워서 엄마에게도 알리지 못했어요. 이 몇 년동안 얼마나 괴로 웠는지 몰라요. 용서해주시는 거죠, 데이빗? 저를 야단치지 않으시는거죠?" 몹시 흐느끼는 사랑스러운 그녀를 데이빗은 꽉 껴안아 주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이제 그의 사랑에는 연민까지 곁들여 더욱 강건해졌다. '가엾은 제니, 불쌍한 나의 사랑하는 제니....'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그들은 곧장 슬리스케일로 왔다. 그리고 신 베들 가 국 민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슬픈 일이지만 그의 행운은 막히고 말았다. 그는 교사생활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 평소부터 그는 가르친다는 것이 자 기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너무 충동적이고 지나치 게 일의 결과에 몰두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세상을 개혁하려고 했다. 너무 커다 란 이상을 지녔다. 그러므로 잉크투성이의 더럽고도 무관심한 눈빛의 아홉 살짜 리 남녀 어린이들로 가득 찬 3학년 A반을 맡아야 하는 자기 인생의 출발이 너 무 기막히게 느껴졌다. 그는 수업시간의 종소리와 호루라기와 회초리에 묶여 지 내는 아이들을 방 안이 그득하도록 꽉 채우는 교육제도에 화를 내면서 매일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3학년 B반 담임인 미스 밈즈가 피아노로 치는 '대행진곡'이나 얇은 칸 막이를 통해 하루에도 50번 이상 들려오는 그녀의 "자아-여러분."하는 짜증스러 운 소리도 역시 인내하면서 지내야 했다. 교생 시절에 했던 것처럼 전과목을 완 전히 바꾸어버릴 수도 없었다. 순회 수업 관찰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쓸데없 는 관료적인 제도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헤이스팅즈의 전쟁이나 케이프 타운의 위도나, 각국의 수도 이름과 무슨 년대 같은 것을 앵무새처럼 노래로 만들어 외 우거나 딱딱하고 까다로운 크라운 리더 책 따위가 아닌, 한스 안델센의 동화책 을 사용해서 어린이들의 눈을 뜨게해주고 그들의 명멸하는 흥미를 불러일으켜 주어 기억력보다는 그들의 두뇌를 자극시키는 새로운 방법같은 건 전혀 손댈 수 도 없는 분야였다. 몇 번이나 이러한 새로운 교육방법의 탁월한 효과를 역설하 며 시도해보았으나 그때마다 싸늘한 냉대로 외면당했을 뿐이었다. 시간이 갈수 록, 매일 매순간마다 그는 자기가 이러한 환경에는 맞지 않는 인간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교무실 안에서도 그런 기분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언제나 이방 인 같은 느낌이 들었으며, 사실 동료들과 가까이 지낼 수가 없었다. 미스 밈즈도 왜 그런지 점점 더 싸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또 교장인 스트로더 도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스트로더는 뒤러 대학 출신의 문학석사로서 점잖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보기와는 달리 잔소리가 많고 고루한 관료 정신으로 꽉 막힌 사나이였다. 그는 언제나 검은 양복을 입었고 숱 이 많은 검은 턱수염 때문인지 엄격한 군인 같은 모습이었다. 구 베들 가 국민 학교의 교감선생이었던 관계로 데이빗에 관한 것이라면 가족이나 그의 성격까지 도 다 알고 있는 처지였다. 교장은 데이빗이 탄광의 노동자 출신인데다가 문학 사 학위도 없는 자라고 해서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그는 이러한 데이빗이 자기 학교의 교사로 오게 된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니 불행한 일로까지 여겼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기 기분을 경멸과 가혹한 태도로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카마 이클 선생이 교장이라면 모든 사정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카마이클은 교장 직을 신청하긴 했지만 아직 그 후보자 축에도 들어가 있지 못한 형편이었다. 그 는 아무 세력도 없었다. 게다가 한 번은 아니꼬운 일이 일어나자 윌링튼 마을에 있는 국민학교로 전임해가 버렸다. 그는 가끔 데이빗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어 꼭 한번 찾아오라든가, 주말에는 꼭 놀러오라는 등의 다정한 이야기를 해왔지만 편지의 대부분은 실망한 인간의 하소연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데이빗은 비관하지 않았다. 그는 젊고 열정적이며 어떻게 해서라도 출 세를 하겠다고 단단히 결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칼날 같은 바람에 휩싸여 램 가의 모퉁이를 돌 때마다, 자기는 이따위 국민학교를 빨리 그만두고 스트로 더 같은 인간 쓰레기와도 어서 인연을 끊어버리고 새롭고 멋진 사회로 들어가야 한다고 몇 번이고 굳은 다짐을 하였다. 기회는 꼭 올 것이다. 그러면 그때는 절 대로 그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램 가를 걸어오던 그는 도중에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 래 미지였다. 정육점 주인이며 학교 후원회의 부회장이고 장래 이 읍의 읍장감으로 물망에 올라 있는 제임스 래미지였다. 데이빗은 그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고개를 숙이고 정중히 인사를 했다. 그러나 래미지는 전혀 모르는 체하고 지나 가 버렸다. 밑으로 내리깐 그의 눈이 마치 데이빗 같은 인간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그를 무관심하게 훑어보았을 뿐이었다. 데이빗은 분노로 얼굴이 시뻘개졌다.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또 한 놈의 적 이 생겼구나. 힘든 하루를 끝내고 피곤이 겹친 때라 이 모욕은 더욱 깊은 상처 를 주었다. 그러나 집 안에 들어선 그는 그것을 머리 속에서 깨끗이 씻어내버렸 다. 그는 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경쾌하게 제니를 불렀다. 그녀는 처음 보는 화려한 분홍색 블라우스를 입고 이제 막 새로 빗은 듯한 머 리 모양을 하고 나타났다. "아아니, 제니, 마치 여왕 같구려!" 제니는 멋지게 포즈를 취해 보였으나 데이빗을 곁에 오지 못하게 했다. "제발 내 새 블라우스를 구겨놓지 말아요, 바깥양반!" 그녀는 최근에 와서 그를 '바깥양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말은 별로 기 분 좋게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주의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 당장 그렇게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 스스로 그런 말을 하지 않 게 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제니의 허리를 감싸안고 열려 있는 문으 로 따뜻한 불이 보이는 부엌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안 돼요. 거긴 싫어요. 둘이서 기껏 부엌 같은 곳에 있다니... 정말 당신은 멋 이 없어요." "제니, 부엌이 얼마나 따뜻하고 기분이 좋은지 봐요. 부엌의 불 앞에 앉아있을 때의 그 기분을 당신은 모르는 거야." "알고 싶지도 않아요, 난. 나쁜 바깥양반 같으니! 벌써 잊었군요. 가난뱅이 들 이나 하는 짓은 하지 말자고 한 약속을. 현관 쪽 거실에 점잖게 앉아서 쉬는 거 예요. 부엌 구석에 앉는다는 건 이만저만 천한 일이 아녜요." 그녀는 열을 내며 앞장을 서서 거실로 갔다. 거기에는 방금 피운 난롯불이 가 물가물 연기를 내고 있었다. "자, 차를 가지고 올 때까지 거기 앉아 계세요." "정말 어이없군. 그런 짓은 하지 말아요, 제니...." 그녀는 데이빗의 만류를 들은 둥 만 둥 하고는 억지로 앉혀놓고 수선을 떨며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5분도 채 안 되어 차를 들고 들어 왔다. 처음엔 찻잔을 얹는 쟁반, 그 다음에는 니켈로 만든 케이크 접시-그 접시는 손님들이 가까운 시일 안에 이 집을 찾아오리라는 예상에서 최근에 싸게 사들인 것들이다.- 그리 고 마지막으로 일본제 종이 냅킨까지 두 장 들고 왔다. "자, 가만히 계세요, 바깥양반." 어리둥절해서 뭔가 말을 하려는 그의 말문을 그녀는 또다시 막아버렸다. 그리 고 별로 뜨겁지도 않은 차를 한 잔 따라주고는 예의 바르게 종이 냅킨을 건네준 다음, 케이크 접시를 그의 팔꿈치 옆에다 놓았다. 그녀는 마치 차 마시는 소꿉놀 이라도 하고 있는 어린 계집아이 같았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제니!" 그는 약간 노기 띤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오? 나는 배가 고프단 말이오. 맛있는 밥에, 구운 청어 라든가 계란이라든가 아니면 웹트네의 머턴 파이라도 있으면 좋겠구려." "자, 데이빗, 그 심술궂은 소릴랑 그만두세요. 난 그런 식으로 천하게 자라지 않았다는 거 아시면서 그러세요. 그리고 성급히 굴지 좀 말아요. 점잖게 차를 드 시고 케이크를 잡수시는 거예요. 우리도 곧 손님을 초대할 작정인데 미리 연습 을 해두고 싶어요.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자, 이 시드 케이크 드세요. 머치슨 에서 사온 거예요." 그는 분노를 눌렀다. 울컥 솟구치려는 감정을 억지로 누르며 맛없는 차를 마 시고 머치슨의 축축한 시드 케이크와 또 사온 것이 분명한 얇다란 빵에다 역시 사가지고 온 잼을 발라 먹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탄광에서 일하던 시절, 지금 보다 훨씬 수입은 적었지만 어머니가 언제나 만들어주었던 그때의 그 저녁식사 를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먹고 싶은 만큼 잘라 먹을 수 있는 집에서 만든 커다란 빵, 버터, 치즈 그리고 손수 만든 흑딸기 잼이 든 커다란 항아리. 가게에 서 파는 잼이나 케이크 따위는 마사네 집에서는 눈에 띄지도 않았다. 그러나 순 간적인 회상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환상에 사로잡힌 자기의 그 불성실한 마음을 자책하며 제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상냥한 미소를 지 었다. "제니, 당신은 정말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데가 있어. 난 번번이 놀라지 않 을 수가 없다구." "어머나, 제가요. 제가 정말 그래요? 당신, 이제 마음이 좀 풀어진 모양이군요. 그런데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별것 아니야, 제니." "당신은 항상 별것이 아니군요!" "그런데, 제니...." "왜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천천히 파이프에 담배를 담았다. 자기의 발버둥이나 좌절 따위의 재미없 는 이야기를 그녀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 중에는 그런 이야기 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제니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교장이 칭찬해준다든가, 당장 승진을 할 만한 혁혁한 일을 했다든가 하는 그런 빛나는 성공담만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기분을 뒤엎고 싶지가 않았다. 그렇다 고 해서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뒤, 그녀가 가벼운 어조 로 또 다른 위험한 화제로 이야기를 바꾸어나갔다. "그럼 말이에요, 아서 배러스에 대한 결심은 섰나요?" "글쎄... 그를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를 않아...." "하지만 좋은 기회잖아요. 배러스 사장님이 직접 부탁을 한 것인데...." 그녀는 금세 불만스런 얼굴을 했다. "난 배러스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지가 않아. 난 그런 인간이 싫어. 내가 그 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것만 해도 난 후회하고 있어. 그런 사람에게 취직 부탁을 해서 빚을 졌다는 것이 생각만 해도 기분이 나쁘다구." "데이빗, 당신은 바보예요. 굉장한 세력가인 사람이 자기 아들의 가정교사를 해달라고 부탁을 해온 이 좋은 기회에 무슨 쓸데없는 생각이 그렇게 많아요?" "난 그런 걸 좋은 기회라고 보질 않아. 그 사람은 이 일을 통해서 자기가 자비 스럽다는 것을 믿도록 하려는 속셈을 가진 것에 불과해." "도대체 그 사람은 누구에게 자기의 자비심을 믿게 하고 싶은 거예요?" 그는 아주 신랄하게 대답했다. "자기 자신에게지!"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배러 스는 지난번 토요일 카우펀 가에서 데이빗을 만나자, 후견인 같은 태도로 그를 불러 세워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물론 자비를 베푸는 사람 특유의 고자세로. 그 러더니 일 주일에 사흘을 법산 자기 집에 와서 아서의 수학공부를 가르쳐주지 않겠느냐고 했다. 아서는 사실 수학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최초로 시험을 치 르기 전에 개인교수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당신, 지금 자신이 얼마나 정신 빠진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요?" 그녀는 무슨 말을 더 할 듯하더니 발끈한 얼굴로 찻잔을 거칠게 챙겨 들고는 방 밖으로 휙 나가버렸다. 새로 피운 난로의 장작불과 신제품 목제 가구가 있는 그 조그마한 방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데이빗이 일어나 책상 위에 책을 꺼내놓고는 부지깽이로 난롯불을 휘저었다. 그는 분발했다. 배러스의 문제에 대해서는 눈을 딱 감아버리 기로 하고 앉아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자기가 정한 계획표대로 공부가 진행 되지 않아 걱정이었다. 어찌 된 셈인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공부할 여가가 없 었다. 교사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이 들었다. 집에 돌아오면 너무 피 곤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가 더 많았다. 밤에도 역시 피곤했다. 또한 공연 스레 마음까지 흩어져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입술을 깨물며 두 손으로 머리를 휩 싸고 20세기 초의 프랑스 외교관인 쥐스랑이 저술한 책에 정신을 집중시켰다. 이 빌어먹을 놈의 문학사 학위를 따려면 무조건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공부하는 것만이 성공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제니와 자기 자신의 인생을 높이 기 위해서는 더욱 그러했다. 그는 반시간쯤 아주 잘, 아무런 방해도 없이 공부를 했다. 그때 제니가 살금살금 들어와서 그의 의자 손잡이를 오똑하니 앉았다. 그 녀는 자기가 화냈던 것을 후회하며 고양이 새끼처럼 수줍어했다. "여보오."그녀는 한 팔로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화내서 미안해요. 정말이에요. 온종일 혼자 집을 지키면서 당신만 기다리다보 니까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거예요." 그는 반쯤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가슴에 뺨을 문질렀다. 그러나 그의 눈은 여 전히 책 위에 쏠려 있었다. "잘 알고 있어, 당신이 혼자 있으니 얼마나 쓸쓸한지. 그러니까 아무 걱정 말 아요." 그녀는 그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유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지루해요. 데이빗, 나는 하루 종일 이야기할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구요. 가게의 머치슨 할아버지 또 명주 옷감값을 물어보기 위해서 가게집 여자 한 사 람하고, 아, 참, 현관에 와서 뭘 물어보던 한 두어 사람하고 말한 것 외에는 말 이에요. 데이빗, 어때요, 오늘 밤 우리 밖으로 나가서 기분을 풀면? 난 지금 아 주 우울하다구요." "아, 제니, 난 공부해야 돼.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 그의 눈은 여전히 책 위에 있었다. "아이 참... 당신은 이따위 따분한 책에만 매달려 있으면서 싫증이 나지도 않아 요? 여보, 오늘 밤만 쉬도록 해요. 다른 날 더 열심히 하구요...." "제니, 제발... 이 공부는 아주 중요한 문제야. 그러니 좀 참아요!" "그렇지 않아요. 당신이 생각만 있다면 얼마든지 쉴 수 있어요." 어린아이처럼 고집을 피우는 그녀가 정말 딱하게 생각되어 그는 측은한 눈으 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니, 도대체 어디를 가고 싶다는 거야? 바깥은 춥고 비가 오고 있어. 이런 날 밖에 나가 뭘 하겠다는 거야?" 그러자 그녀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녀는 이미 면밀한 계획을 짜놓고 있었 던 것이다. "기차를 타고 타인캐슬에 가는 거예요. 6시 10분 기차가 있어요. 엘른 홀에서 멋진 음악회가 있대요. 신문에서 봤는데 휘들리 만(灣) 연예단에서 출연한대요. 겨울이면 정기적으로 열리는 음악횐데 콜린 러브리도 출연해요. 그 사람 아주 멋있는 테너 가수잖아요.... 두 사람의 입장권이 겨우 1실링 3펜스니 별로 돈도 많이 안 들고. 여보, 이 좋은 기회를 놓쳐버릴 생각은 없으시겠죠? 내가 하루 종 일 얼마나 울적하게 지냈는지 아세요? 나도 좀 즐거워지고 싶다구요, 여보."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도 고루한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공 부를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너무 깊이 느끼고 있었다. 또한 밖에는 비가 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음악회 같은 것에는 아무 매력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자 갑자기 그야말로 굉장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봐, 제니! 이렇게 하면 어때! 당신이 말한 것처럼 오늘밤은 쉬겠어. 난 지금 빨리 뛰어가서 샘과 휴이를 데려오겠어. 그래서 함께 불을 활활 타오르게 하고 뜨거운 냄비 요리를 만들어 먹으면서 트럼프 놀이를 하는 거야. 당신이 말하는 연예인들도 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냐. 샘이 얼마나 재주가 많은 사람인지 당 신은 아직 몰라. 그 형은 밤새도록 우리를 웃겨대고도 끄떡도 않을걸!" 그는 자기가 그야말로 좋은 생각을 해냈다는 만족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 실 지금까지 가족과 너무 소원하게 지내고 있다는 자책감도 있었다. 그는 그전 처럼 자기 형제들과 한덩어리가 되고 싶었는데 지금이야말로 냉담한 관계를 깨 뜨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제니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졌다. 그녀는 쌀 쌀맞게 말했다. "싫어요. 난 당신 가족들이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걸 다 알고 있어요. 그 런데 여기로 불러들였다가 또 이러니 저러니 뒷소리하는 걸 듣고 싶지 않아요."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는 입술을 꽉 물었다. 그는 지금 이 여자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이런 밤에 타인캐슬 을 가자고 졸라대는 것 자체가 얼마나 당치 않는 소린가! 그때 그는 그녀의 눈 에서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효과는 적중했다. 그는 그녀가 괴 로워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그대로 놓아둘 수 없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책을 덮고 일어섰다. "좋아, 제니. 음악회에 가자." 그녀는 펄쩍 뛰어 일어나면서 그에게 매달려 키스를 했다. "당신은 역시 멋있는 분이에요! 아, 좋아라!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녀가 2층에 올라간 동안 그는 부엌에 들어가 빵 한 조각과 치즈를 썰었다. 그는 그것을 천천히 씹으면서 난롯불을 바라보았다. 제니는 아마 며칠 전부터 이 음악회에 자기를 끌고 갈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빵을 다 먹고 났을 때 뒷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깜짝 놀라며 문을 열었다. "아아니, 샘 형 아니예요? 정말 오래간만이예요!" 그는 기뻐서 소리쳤다. 샘은 창백한 얼굴로 싱글거리면서 부엌 안으로 구르듯 이 들어섰다. "애니하고 마침 지나가는 길이라서 그냥 들어와 본 거야." "잘 왔어요, 형. 그런데 애니는 어디 있어요?" 샘은 어둠이 깔린 바깥쪽으로 머리를 내밀어서 둘러보았다. 애니는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애니는 자기를 반겨줄지 어떨지 잘 몰랐고, 그런 처지에 놓인 자기 입장을 아는 사람이었다. 데이빗은 이 모든 걸 이해했으므로 큰 소리로 외 쳤다. "당장 들어오라고 해요. 바보같이 혼자만 들어오다니, 어서 빨리 데리고 들어 와요!" 히죽이 웃는 샘의 입이 더 크게 벌어졌다. 그때 제니가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방으로 들어왔다. 문 쪽으로 가던 샘이 멈칫거리며 제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상냥한 미소를 띠며 그에게 다가갔다. "정말 잘 오셨어요." 그녀는 더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마침 데이빗과 함께 외출하려는 참이었는데...." "형은 우리가 보고 싶어 잠깐 들른 거야. 애니도 함께 왔다고.... 애니, 어서 들 어와요." 데이빗이 끼여들자 제니의 눈썹이 신경질적으로 치솟다가 다시 제자리를 잡았 다. 그녀는 데이빗의 말은 못 들은 척 샘을 향해 생긋 매력적인 웃음을 지었다. "정말 안 됐군요. 정말 유감이에요. 이렇게 막 나가려는데 오시게 되다니.... 우 리는 타인캐슬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약속이 돼 있어서 꼭 가야 하는데, 어쩌지 요?" 샘은 웃는 모습을 바꾸지 않으면서 제니를 향해 말했다. "아아, 괜찮아요.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우리가 꼭 용건이 있어서 온 것도 아니고 또 약속을 한 것도 아니니까 미안할 것도 없어요." "아니 그럴 수는 없어. 애니를 데리고 들어와요. 함께 차를 마시면서 얘기를 하자구요." 데이빗이 만류하자 제니는 걱정스러운 빛을 띠고 시계를 바라봤다. 샘은 벌써 문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걱정 말라니까, 데이빗. 우린 너희의 외출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우린 계속해 서 산책을 하면 되니까. 잘 있어요, 두 사람 다." 샘은 끝까지 히죽이는 웃음을 띠고 있었으나 그 웃음 밑엔 심하게 상한 기분 이 깔려 있다는 걸 데이빗은 알았다. 밖으로 나간 형은 애니에게 분명히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가자, 애니. 우리는 저런 인간들과는 신분이 다르다는 걸 알아야지. 데이빗이 선생이 되더니만 너무 뽐내는구나." 데이빗이 아픈 마음으로 주춤거리는 사이에 샘은 가버렸다. 그들은 6시 10분 차를 탔지만 완행이어서 몹시 붐비는 데다가 정거장마다 멈추면서 천천히 움직 였다. 엘든 홀에 도착했을 때에는 일반석은 이미 매진되어 비싼 입장권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공연은 3시간이나 걸리는 대형 쇼였다. 제니는 감탄하며 몇 번 이고 박수를 치며 감동의 한숨을 쉬었지만 데이빗의 쓰라린 마음은 풀리지가 않 아 그저 삭막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게다가 그 음악회라는 것이 4류급의 저질 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의 마음은 겉돌 뿐이었다. 눈앞에 덮어두고 온 책들이 어른거리는가 하면 가로수 길을 팔을 끼고 어정어정 걸어가는 샘과 애니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다. 연주회가 끝나고 홀에서 걸어나오는데 제니가 그의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막차 시간까지는 아직도 1시간이나 있어요, 데이빗. 그 차를 타기로 해요. 굉 장히 빠른 찬데 슬리스케일까지 직행이에요. 그러니 지금은 퍼시 그릴에 가서 뭘 좀 먹어요. 조는 늘 그곳에 날 데리고 갔다구요. 정거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들은 퍼시에 가서 포도주를 한잔씩 주문했다. 제니는 이곳에 다시 온 것이 몹시 기쁜 모양이었다. 낯이 익은 사람들과 아는 체를 하고 웨이터들에게 농담 을 붙이며 킥킥거리며 웃곤 했다. 포도주는 데이빗의 기분도 풀어주었다. 그의 눈에도 홀 안의 윤곽이 흐릿해 보이고 주위 색깔들도 장미빛으로 자주 바뀌곤 하면서 마음이 푸근해졌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제니를 건너다보았다. "당신은 정말 말릴 수 없는 장난꾸러기야. 이 불쌍한 남자를 어쩌면 그렇게 꼼 짝 못 하게 만들 수가 있어? 난 아무래도 아서의 가정교사 자리를 받아들여야 하겠어. 그래야 당신이 기뻐할 테니까...." "어머! 정말 잘 생각하셨어요. 정말 현명한 결정이에요. 내가 좋아하는게 문제 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을 똑바로 살아가는 길이라구요." 그녀의 눈이 기쁨으로 넘쳤다. 그녀는 포도주를 한 잔 더 주문하며 그를 사랑 이 넘치는 눈으로 바라보며 몸을 기대왔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그곳에서 너무 시간을 끌어버려 기차를 타기 위해서는 정신없이 뛰어야 했다. 그들은 어린아이 들처럼 킬킬거리며 기차 뒤꽁무니에 겨우 올라탔다. 시간이 늦어서인지 객실 안에는 둘 뿐이었다. 앞으로 30분 동안은 단 둘이 달 리는 기차 안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그녀에게 야릇한 흥분을 일으켰다. 그녀 는 색다른 장소를 좋아했다. 조와 함께였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눈을 빛 내며 데이빗 곁에 바싹 다가앉았다. "데이빗, 당신은 정말 좋은 분이에요. 데이빗, 사랑해요! 덧문을 내려요.... 그럼 더 아늑해질 거예요..., 데이빗." 그는 품안으로 파고들어 오는 그녀를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을 꼭 감은 채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덧문을 다 내려요.... 아, 데이빗, 사랑해요!" 그녀는 소곤거렸다. 그녀의 숨결에는 진한 포도주향이 묻어나왔다. 그녀의 육 체는 보드라웠고 매우 따뜻했다. "안돼, 제니.... 조금 기다려, 제니...." 그는 일어서서 덧문들을 다 내렸다. 기차가 약간 덜커덩거렸다. 철로 위에 무 엇이 있었는지 크게 아래위로 흔들렸다. "여보, 너무 멋있지요!" 그녀는 조금 뒤에 데이빗에게 안긴 채 곧 잠이 들었다. 데이빗은 조금 불편한 자세를 느끼면서도 몸을 움직이지 않은 채 앞을 노려보았다. 열차 안은 담배 냄 새, 포도주 냄새 그리고 기관차 엔진의 매캐한 냄새가 꽉 차 있었다. 바닥에는 누군가가 내버린 오렌지 껍질이 뒹굴고 있었다. 차창 밖은 칠흙처럼 어두웠다. 바람이 거세게 불고 굵은 빗방울이 차창을 때렸다. 열차는 와르릉 대며 계속 달 렸다. 18 4월 초순, 데이빗은 법산저택에서 아서 배러스의 가정교사를 시작한 지 석달 이 다 되었을 때 그는 아버지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약 7년 전에 폐렴 으로 죽은 앨리스의 동생 리 킨치가 어느 날 아침 신 베들 가 국민학교로 그 편 지를 가지고 왔다. "사랑하는 데이빗에게. 토요일에 송어 낚시를 갈 작정이다. 원즈벡으로 오너 라." 쪽지는 낡은 봉투 안쪽에다 복사용 연필로 서툴게 쓴 것이었다. 데이빗은 깊이 감동하였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원즈벡 개울로 자신을 데리고 가던 그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여전히 함께 낚시하러 가기를 바라고 있다! 그렇 게 생각하니 그는 매우 행복했다. 로버트는 결핵성 늑막염이 악화되어 10일간이 나 탄광 근무를 쉬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다만 '염증'이라고 가볍게 넘겨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일어나서 돌아다녀도 좋을 정도로 나아졌다. 이번 토요일은 그가 쉬는 마지막 날이었다. 아버지의 마음속에서 우러난 생각을 전해온 화해의 표시 기도 했다. 웅성거리는 교실의 교탁 앞에 선 데이빗의 머리 속에는 지난 3개월 동안의 일 들이 전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가 가고 싶지 않으면서도 법산에 간 까닭은 제 니가 자꾸 졸라댔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여분의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 다. 그러나 이 문제로 아버지는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다. 데이빗으로서도 지금 까지 자기의 생활과는 거의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해온 배러스의 가족들과 이렇게까지 친숙해진 사실이 거짓말처럼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를테면 캐리 고 모만 해도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매우 호기심을 가지고 걱정도 해주곤 했지만, 데이빗을 바라보는 눈이 고운 것만은 아니었다. 진흙 묻은 구두를 신고 집안으 로 들어오는 사람들이나, 등심 쇠고기 값을 너무 많이 요구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푸줏간의 래미지가 내미는 계산서를 바라보는 눈초리와 비슷하다고 할까. 근시 인 그녀의 눈은 상당 기간 동안 그러한 걱정스런 불신의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표정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캐리 고모의 눈에서 사라졌다. 결국 데이빗이 마음에 든 캐리 고모는 아서와 데이빗이 공부를 다 끝마치는 9시 경이면 공부방으로 뜨거운 밀크와 비스킷을 가지고 방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 음엔 그녀도 그를 진흙 구두를 신고 들어오는 사람으로, 더 심하게는 그 구두에 묻은 진흙 정도로 취급했으나 그는 전혀 그런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는 그것을 힐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표현일 뿐이라고 당장에 간 파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힐다는 그의 흥미를 끌었다. 그녀는 벌써 스 물넷이지만 여전히 사람들을 멀리했고, 입고 있는 어두운 빛깔의 옷처럼 아무런 꾸밈도 없는 모습을 지닌 채 갈수록 더욱더 자기 안으로 움츠러들고 있었다. 그 러나 그는 힐다가 속 없는 대다수의 여인들과는 어딘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속 없는 여자들은 보통 잘못 판단한 자기 망상에 사로잡혀 화려하게 차려 입거나 자기를 가장 아름답게 보이려고 죽도록 애를 쓰곤 한다. 주로 거울 앞에 붙어 살면서 끝까지 거짓됨으로 자기 자신을 속이려 한다. 그러나 힐다는 처음부터 자기를 인정하고 있었다. 오히려 자신을 인정하는 게 너무 극단으로 기울어져 자기는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추물이므로 누구와 가까이한다거나 친하게 지내보 려는 욕망을 아예 포기해버린 상태였다. 힐다가 내면의 갈들이 심한 사람이라는 것은 금세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아버 지의 강한 점과 어머니의 약한 점이 그녀의 내면에서 싸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 른다. 데이빗이 보기에 힐다는 항상 이 두 개의 요소가 억지로 결합된 듯 보였 다. 그것은 마치 원하지 않은 태아 시절부터 자기 자신과 싸우게 되어 드디어 격렬한 불화의 상태에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과도 같았다. 힐다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사이에 차츰 자신의 본 연의 상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해러기트의 학교에 가서 집에 없는 그레이스를 매우 그리워하였다. 그녀는 늘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무도 그 애를 가르칠 수 없을 거야. 그 앤 아주 바보라니까!" 또 편지를 받아 읽으면서 "그 앤 철자법도 아직 몰라."라고 말했지만 힐다가 그레이스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감출 수는 없었다. 3월 12일자 여러 신문 엔 런던의 웨스트 엔드에서 여성 참정권론자들이 조직한 폭력적 시위의 기사로 가득 차 있었다. 모든 주요 거리의 창문이 부서졌고 팽커스트 부인을 포함한 수 백 명이 체포되었다. 힐다는 흥분했다. 그날 밤 그녀는 완전히 자기를 잊고 당당 히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자기도 그러한 운동에 가담하여 뭔가를 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여성에게 가해지고 있는 압박을 제거하기 위해선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는 각오였다. 아르메니아의 여인들과 백인의 노예 매매를 예로 들어 말할 때 그녀의 눈에서는 불꽃이 튕겨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는 오만했고 당당했다. 남성이라고? 물론 그녀는 남성을 아주 혐오했다! 증오하고 혐오했다. 따라서 그 런 토론엔 자신 있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자기 나름대로 입센의 [인형의 집]을 다 암기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녀의 갈등의식과 못생긴 외모와 그녀의 정신적 불균형에서 비롯된 또 다른 증세였다. 힐다의 남성에 대한 혐오감은 자기 아버지에게 그 근원이 있는 것이 확실했 다. 비록 그녀가 공공연하게 사실을 이야기한 적은 없었지만 그녀에게 아버지는 남성이었으며, 남근적(男根的) 상징을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그녀의 모든 바람이 아버지로 인해 보이지 않게 억눌리는 상태는 그녀를 더욱 사납게 반항하도록 했 으며, 그녀의 억압상태를 확대시키고 심화시켰던 것이다. 그녀는 법산저택에서, 그리고 슬리스케일에서 도망쳐 스스로 독립하여 일하고 싶어했다. 자기와 동성 인 여성들 속에만 있게 되면 무슨 일을 하든, 또 어디를 가든 상관없다고 생각 하였다. 그녀는 그 뭔가를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처럼 타오르는 모든 바람은 아버지의 조용한 무관심 속에서 계속 무참하게 좌절되고 말았다. 아버지는 그녀 를 비웃고 무뚝뚝한 말 한마디로 그녀 스스로 자신이 바보라고 생각도록 만들었 다. 그녀는 집을 뛰쳐나가 싸워보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그녀는 집 안에 머물고 있었고, 그런 싸움은 그녀의 내면에서만 일어날 뿐이었다. 힐다는 모든 걸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무엇을 기다린다는 것인가? 데이빗은 힐다를 통해서 배러스라는 인물의 일면을 알게 되었다. 또한 아서를 통해서는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었다. 데이빗은 법산에서는 배러스와 만나지 못 했다. 배러스는 보통 사람은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고귀한 사람처럼 처신하고 있 었다. 그러므로 아서의 이야기를 통해서만 그를 알 수 있었는데, 아서는 아버지 에 대해서 늘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마다 흥분했고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데이빗도 아서를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아서에 대한 감정에는 맨 처음 탄광 구내 마당에서 높은 이륜마차에 앉아 있던 아서를 봤을 때 느꼈던 그 연민의 정 이 깃들어 있었다. 아서는 매우 열심히 배우려고 했다. 감탄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마음이 너무 약했다. 그는 자기가 사용하는 연필 종류까지도 H로 할 것인 지 HB로 할 것인지 망설일 정도였다. 그러나 어떤 것에 대해 재빠르게 결단을 내려주면 몹시 고맙게 받아들였다. 진심으로 그런 것 같았다. 그는 모든 것을 마 음속으로 걱정하는 너무나 소심한 성격으로 감수성도 지나쳤다. 데이빗은 자주 아서에게 농담을 걸어 지나친 부끄러움을 없애주려고 여러번 시도해보았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아서는 농담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었다. 데이빗은 아서의 어머니에 관해서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밤, 캐리 고모가 공 부하는 방으로 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위엄있게 말했다. "이 댁 안주인이신 배러스 부인께서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해리어트 배러스는 베개에 등을 기댄 채 아서에 대하여 물었다. 물론 아서에 대한 데이빗의 의견을 묻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아서는 매우 걱정스러운 존재였 고 엄마로서 큰 책임을 느끼고 있는 듯, 의견을 묻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염려가 담겨 있었다. "정말 큰 책임이지요."라고 말한 그녀는 작은 침실용 탁자 위에 놓인 병을 집 어달라고 부탁했다. "바로 거기 팔꿈치 옆에 있는 그 병 좀 이리 주세요." 캐럴 라인이 너무 바빠 그녀의 머리를 문질러주지 못할 때 그녀의 두통을 가라앉혀 주는 약이었다. "그래요, 그 거예요."하고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만일 아서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아서의 아버지는 굉장히 실망할 거예요." 그러면서 그녀는 캐리 고모가 데이빗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하면서 아서가 사회에 나가서도 잘 이겨낼 수 있도록, 데이빗이 아서의 성격 형성에 좋은 영향 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러고는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심각한 얼굴로 심리요법을 믿고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최근에 심리요법을 해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다만 한 가지 곤란 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요법을 실행하려면 침대 방향을 북쪽으로 돌려 놓아야 하는데, 지금 이 방에서는 창문과 가스 스토브의 위치 때문에 그것이 불 가능했다. 그녀는 가스 스토브 없이는 지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데이빗이 머리 가 좋으니까, 침대를 서북 방향으로 놓아도 심리요법의 효과에는 변함이 없다고 생각하는지, 혹시 또 다른 방법이 있을지 그것을 열심히 묻는 것이었다. 제니는 데이빗이 법산저택에서 그만큼 좋은 인사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아주 기 뻐했다. 그녀는 그가 배러스가 사람들과 친숙하게 지내게 된 것이 그저 기쁜 것 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사교계에 대한 욕망을 데이빗에게 대신 시킴으로써 그 기쁨을 맛보려 했다. 제니는 밤에 그가 귀가하면 그날 있었던 일을 모조리 이야 기해달라고 데이빗을 졸라댔다. 그러고는 배러스 그 분이 정말 그런 말을 했는 지, 또는 비스킷을 모두 돌려가며 먹게 하는지 아니면 쟁반 위에다 비스킷 통을 그냥 놔두는지 등을 열심히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힐다가 데이빗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얘기는 아무렇지도 않아다. 그녀는 데이빗 에 대해선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또 힐다라는 여자가 자기와 비교할 수 도 없는 아주 못생긴 여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법산저택에 대한 제니의 반응은 데이빗의 흥미를 돋우었다. 그는 자주 그녀를 놀려주기 위해 일부러 사건을 과장하거나 꾸며대기도 했다. 그러나 제니는 쉽게 속아넘어가지 않았다. 제니는 허영이 많긴 했지만 어리석지는 않았고, 역시 제니 였기 때문이었다. 데이빗은 제니와 사는 동안 제니의 인간됨에 대해서 알게 되지 않을 수 없었 다. 자신이 이제야 제니라는 여자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는 것이 좀 이상하게 여겨지긴 했지만, 결혼하기 전에는 그녀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당시에 제니는 그의 사랑이 만들어낸 환영이었고, 꽃이었고, 향기로운 봄바람 바로 그 자체였다. 이제 그는 제니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었다. 화려한 옷을 좋아하고 오 락을 즐기는 제니, 포도주를 좋아하고 번잡한 거리를 쏘다니기를 좋아하는 제니 는 얼마나 호들갑스럽게 잘 놀라고 정열적인지 모른다. 또 큰 모욕을 용케 참아 내는가 하면 조그만 일에도 엉엉 울어대어 그를 얼마나 당황케 했던가! 갑작스 럽게 정열적인 사랑을 보이면서 애무를 바라는 제니는 말도 안 되는 고집과 억 지로 그를 수없이 곤란으로 밀어넣고도 천연덕스럽게 애교를 떨어대는 어처구니 없는 제니였다. 그러나 그는 제니를 사랑했다. 그는 자신이 결코 그녀를 사랑하는 것을 그만 두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격렬한 다툼을 피할 수는 없었다. 제니도 고집이 셌지만 그도 고집불통이었다. 그는 제니가 제멋대로 하는 것을 그대로 놓아두지 않았다. 포도주 마시는 것에 대해서는 특히 그랬다. 퍼시 그릴 에서 그녀가 포도주를 지나치게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집안에서까 지도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많이 싸워야 했다. 제니는 화를 내며 눈물을 흘리곤 했지만 그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들의 싸움의 원인은 또한 그의 학위문제였다. 물론 제니도 그가 문학사학위 를 받는 것을 바랐다. 그녀의 허영심은 그것을 미칠 정도로 바랐다. 그녀는 그 학위를 받음으로써 스트로더 부인과 또 다른 몇몇 부인들에게 평소에 당했던 원 한을 풀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그에게 공부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었 다. 그를 혼자 놓아두지 않았다. 무릎에 올라앉아 목에 매달리거나 손을 좀 베었 다고 호들갑을 떨며 붕대를 감아달라는 등 해서 그의 귀중한 밤 시간을 모두 빼 앗아버리는 것이었다. 데이빗은 벌써 그 시험을 6개월이나 연장시켰는데, 이제는 법산저택의 가정교사까지 하고 있으니 또 연장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 다. 어느날 그는 이러한 실망을 견딜 수 없어서 카마이클 선생이 살고 있는 월링 튼으로 자전거로 달려갔다. 월링튼 학교 교정에 들어서자 그는 마음에 평화를 느꼈다. 카마이클 선생은 여전히 친절했다. 그는 종종 그곳에서 주말을 보내며 공부에 대한 현명한 조언을 받곤 했다. 제니와 데이빗을 다투게 하는 것에는 가족문제도 있었다. 결혼 때문에 가족과 의 사이에 만들어진 소원함은 데이빗을 몹시 괴롭혔다. 물로 광산촌의 잉커먼 달동네 집과 램 소로(小路)의 집 사이에 일정한 왕래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데이빗이 원하는 상태가 아니었다. 제니는 고집을 부리고 어머니는 냉담했으며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샘과 휴이도 마음이 편안치 못해 보였다. 또한 제니가 마 치 후견인이나 된 듯 가족들을 대하는 모습은 그를 더욱 화나게 했다. 그러나 가족들이 떠나고 나면 그녀가 다시 사랑스러워지곤 하는 것이었다. 그의 결혼이 부모님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 마사는 첫눈에 제 니가 데이빗에게는 전연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데이빗이 탄광을 떠날 때부터 이미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임을 알았다. 그런데 이 갑작스러운 결혼이야말로 그녀가 예상했던 좋지 않은 일을 입증해주는 것이었다. 로버트의 태도는 달랐다. 그는 침묵 속으로 후퇴해버렸다. 그는 제니에게 언제 나 친절했다. 때로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친절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애를 쓰 고는 있지만 그 모든 노력에는 비애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데이빗에게 큰 희 망을 품고 있었다. 그는 데이빗이 앞으로 할 모든 일에 커다란 기대를 품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데이빗의 미래에 자기의 모든 인생을 걸었다. 그런데 데이 빗은 스물한 살에 보잘것없는 상점 여점원 따위와 결혼을 해버린 것이다. 이것 이 로버트가 가슴속에 아무도 모르게 묻어두고 있는 생각이었다. 데이빗도 그러한 아버지에게서 비애를 느꼈다. 그런 생각은 그의 심정을 매우 괴롭혔다. 그는 밤이면 뜬눈으로 지새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는 자기 가 결혼을 한 것과 배러스 씨에게 부탁을 해서 취직자리를 구한 것, 법산에서 아서 배러스의 가정교사 노릇을 하는 것에 모두 크게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그 런데도 아버지는 자기에게 쪽지를 보내서 원즈벡으로 낚시를 하러 가자고 제안 을 해온 것이었다. 데이빗은 어딘가 죄스러운 마음을 느끼며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는 시끄러 운 아이들을 조용히 하도록 했다. 그러고는 급히 해리가 가지고 갈 수 있도록 아버지의 전갈에 대한 짧은 답장을 썼다. 그러고 나서 수업을 시작했다. 그 주일 내내 그는 토요일을 목마르게 기다렸다. 그는 옛날에는 그 지방 사람 들의 말처럼 '낚시의 영웅'이었지만 최근엔 낚시하러 갈 기회가 거의 없었다. 봄 은 다시 이 세상에 돌아왔다. 지금쯤 원즈벡 계곡은 아주 멋있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진정으로 그곳에 가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토요일이 왔다. 낚시하기에는 아주 좋은 날씨였다. 따뜻했고 햇빛은 구름사이 에서 빛나고 부드러운 서풍이 불고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제니에게 아침 차 를 끓여주면서 잼 샌드위치를 준비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열 살 되던 해 생일 날에 아버지가 사준 녹나무로 만든 그 조그마한 낚시대를 조사해봤다. 이것을 사기 위하여 웨스트 가에 있는 매리어트 상점에 갔던 때를 그는 회상했다. 그 낚시대를 시험해보니 그것은 아직도 잘 휘어지며 옛날과 다름없이 쓸만했다. 그 는 부드럽게 휘파람을 불며 장화를 신었다. 제니는 그가 떠날 때에도 여전히 침 대 속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는 잉커먼 로를 다라 달동네로 올라가-이 부드러운 봄의 아침이 그에게 묘 한 느낌을 주었다. - 집으로 들어갔다. 샘과 휴이는 둘이 다 탄광에 일하러 가고 없었고, 어머니가 식탁 앞에 서서 얇은 두 가닥의 노끈과 파라핀 종이로 로봇의 도시락을 싸서 묶고 있었다. 마사는 그 두 가닥의 노끈과 파라핀 종이를 마치 보물이나 되는 것처럼 간직해두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를 바라보자 고개는 끄 덕였지만 그녀의 입술이 불만스레 휘었다. 그는 어머니가 아직도 자기를 용서하 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너 얼굴빛이 좋지 않구나." 그녀는 음울한 눈으로 그를 꿰뚫듯이 바라보았다. "아주 건강한데요, 어머니." 그는 웃으며 말했으나 그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는 이 몇 달 동안 몹시 기 운이 빠지는 듯한 느낌으로 살아왔다. "네 얼굴은 꼭 백지장 같아. 그런데도 건강하다구...?" "얼굴 색깔은 어쩔 수가 없잖아요? 난 아주 건강하다구요." "네가 아무리 그래도 탄광에서 얌전히 일할 때보다 아주 못해 보여." 어머니의 말에 그는 화가 치밀었지만 꾹 참으면서 화제를 돌렸다. "아버진 어디 계세요?" "낚시밥을 구하러 나가셨다. 넌 뭐가 급해서 그렇게 들썩거리냐? 나하고 이야 기하는 거도 귀찮은 모양이구나." 그는 말없이 앉아서 어머니가 도시락 끈을 나비 모양으로 단단히 묶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기술적으로 매듭이 하나도 없이 묶었는데 아버지는 아마 이 노끈을 다시 가지고 올 것이다. 어머니는 조금도 늙지 않았다. 그녀의 커다랗 고 탄탄한 몸은 빈틈을 보이지 않은 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늘 부지런히 움직이는 탓일까 어머니에게는 군살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네 점심 도시락은 어딨냐?" "호주머니 속에 있어요, 어머니." "어디 좀 보자." 그는 못 들은 척했다. 그러나 그녀는 손을 내밀고 되풀이해 말했다. "보자니까 그러는구나." "보시지 않아도 돼요, 어머니. 든든히 먹을 수 있도록 잘 준비했다구요." 손을 내민 채로 그녀의 얼굴이 딱딱히 굳어지고 있었다. "내 말을 우습게 아는구나. 넌 지금 나를 무시하려는 거야." "어머니,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어머니를 무시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요? 다만 이런 사소한 일로 어머니가 신경을 쓰게 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에요." 그도 볼멘 소리를 하면서 하는 수 없다는 듯이 호주머니에서 종이 봉투를 끄 집어냈다. 그녀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종이 봉투를 열었다. 거기에는 데이빗이 급하게 마련한 잼을 발랐을 뿐인 굳은 빵 세 덩이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조용 히 그 봉투를 옆으로 밀어놓았다. "내가 만든 빵과 푸딩을 대신 가져가도록 해라." 크고 묵직해 보이는 보따리를 그에게 내어주는 그녀의 눈길은 어느새 부드럽 게 풀려 있었다. "자, 받으렴. 아버지와 둘이 먹어도 아마 남을 게다." 그는 그 꾸러미에서 제니를 비난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느꼈으므로 가만히 있 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 제니에게도 기회를 한번 주세요. 한 번이라도 만나보시면 어때요? 어 머니는 제니에게 노여움만 가지고 계신데 만나서 깊이 이야기라도 해보시면 달 라지실 거라구요." "그래? 한데 그 아이가 나를 만나고 싶어하던?" "어머니가 그런 기회를 만들지 않으니까 그렇죠? 어머니, 그 사람에게도 따뜻 하게 대해줘 보세요. 그 사람도 아주 외롭다구요. 어머니가 좀더 다정하게 해주 세요." "그러니까, 내가 그 아이에게 더 잘해줘야 한다는 것이구나, 네 생각은?" 그녀는 말문을 닫았다. 노여움이 서서히 그녀의 온몸을 휩싸며 숨통을 막아왔 다. 그녀의 가슴 깊이 쌓여 있던 해묵은 노여움까지 솟구쳐 올라와 그녀의 이성 을 흐리게 했다. 좀처럼 쓰지 않던 쌍스러운 말이 쏟아져 나왔다. "그년이 쓸쓸하다고? 젊은 서방을 끼고 있으면서도 쓸쓸하다 이 말이지! 알토 란 같은 집에다 돈 잘 벌어오는 서방에다가 갖출 것 다 갖추고 살면서도 쓸쓸하 고 외롭다고? 나 같은 사람도 있는데.... 난 쓸쓸할래야 쓸쓸할 새도 없어! 그런 데 그년은 늘 쏘다니며 제깐년이 높은 신분의 어른들 흉내만 내고 다니느라고 바쁘다보니 쓸쓸하기도 하겠지...누가 그런 정신 빠진 년을 찾아가 주겠니? 내가 너라면 말이다, 머치슨 네에서 그렇게 포도주를 사다가 퍼마시도록 놓아두지는 않을 게다. 어떻게든 요절을 내도 내지!" "아니, 어머니!" 그는 얼굴이 햐얗게 질려 벌떡 일어섰다.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가 있어요!" 두 사람이 분노로 타오르며 서로 마주 쳐다보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로버트 가 들어왔다. 그는 한눈에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을 짐작했다. "응, 일찍 왔구나." 그의 목소리는 아주 온화했다. "나는 준비가 다 됐다. 데이빗, 너도 더 다른 준비가 필요 없겠지? 어머니와 이야기할 것이 더 있다면 나중에 돌아와서 하도록 하자꾸나." 데이빗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터져나오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화가 치밀 어 타는 듯한 눈을 내리감아 눈빛도 감추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군요, 아버지." 두 사람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카우펀 가를 내려가면서 아버지는 전에 없이 많은 이야기를 했다. 낚시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스피트에 있는 골분(骨紛) 공 장에서 아주 통통한 지렁이를 구했고, 거기다 미들리그에서 미끼로는 그만인 줄 지렁이도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바람이 부는 방향이 좋으니 오늘은 낚시 가 잘 되겠다면서 티즈데일의 우편 배달차에 같이 타고 갈 수 있도록 주선까지 해두었다는 것이다. 그 우편마차는 아버지가 몸이 안 좋아 아들이 탄광일을 쉬 는 토요일은 틈타서 대신 일하고 있었다. 그 얌전한 댄이 모어패드에서 3킬로미 터 나 되는 에이버리 농장까지 그들을 데려다준다는 것이었다. 데이빗은 아버지의 이러한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려 애를 썼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아버지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머니의 이야기를 계속 붙들고 있었다. 티즈 데일의 가게 앞까지 와서 아버지가 댄과 잠깐 이야기를 하는 동안 한쪽에서 있 던 그는, 자기가 그렇게 화가 나고 마음이 아팠던 것은 어머니의 말 자체보다 그 말 뒤에 감춰진 진실이 그를 물고 늘어졌기 때문임을 알았다. 마차 준비가 끝나자 댄이 먼저 올라갔다. 뒤따라 로버트와 데이빗이 올라타자 마차는 꽉 차버렸다.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교외로 나오자 댄은 다정스레 이 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두 사람을 먼저 에이버리까지 태워다주고 우편물 배달 은 돌아오는 길에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기도 낚시에 동행하고 싶은 마 음이 간절하다는 말도 했다. 그는 낚시를 좋아했지만 기회가 별로 없었다. 시골 을 사랑하는 그는 농부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그 구질구질한 탄광 밑이 아닌 탁 트인 하늘 아래서 팔다리를 마음대로 움직이며 일하고 싶다는 것이었 다. 그러나 언제 그 꿈이 이루어지겠는가? 그는 우리의 팔자가 다 그렇지 않느 냐고 하면서 자기의 마음을 털어놓은 것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마차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우중충한 탄광 굴뚝과 저탄소가 있는 지저분한 평지를 지나 진초록의 나뭇잎과 새로 돋은 연푸른 풀들로 뒤덮인 신세계 같은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마치 하느님이 간밤에 창조해서 내려보내 준 것 같은 그곳은 아직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아 전혀 더럽혀지지 않은 세계처럼 보였다. 수천 송이의 노란 민들레꽃이 피어 있는 아름다운 들판이 나타나 특히 눈길을 끌었다. 데이 빗도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니 마음이 그지없이 기뻐졌다. 그는 힘이 솟아났다. "히야, 멋진데!" 그는 댄을 바라보며 외쳤다. 댄도 마주 보며 웃었다. "민들레 밭은 정말 멋있어. 소가 민들레를 먹으면 우유 맛이 좋대." 잠시 침묵이 흘렀다. 댄이 데이빗을 유심히 보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너, 법산저택에 가는 거 재미가 어때?" "나쁘지 않아, 댄. 뭐 그 정도면 재미가 있다고 해야겠지." 말을 끝내면서 댄을 바라보던 데이빗은 그가 좀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걸 느꼈 다. "다행이다. 넌 그 집 사람들을 다 잘 알겠구나. 그레이스도 만났겠지, 그렇지?" 그레이스의 이름을 입에 담은 댄의 표정에는 뭔가 존경스러운 것에라도 닿는 듯한 느낌이 지나갔다. 그는 마치 주님의 성체라도 모시는 듯한 얼굴로 침을 꿀 꺽 삼켰다. 그러나 데이빗은 그러한 댄의 태도를 알아채지 못했다. 데이빗은 고 개를 내저었다. "그레이스는 만나지 못했어. 그 애는 지금 집에 없어. 해러기트에서 공부 중이 야." "그렇지." 댄은 말의 귀가 춤을 추듯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애는 해러기트에 있지." 잠시 말이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었다. 이윽고 댄 티즈데일이 한숨을 쉬었다. "그레이스는 아주 멋있는 아이야!" 그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의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아주 무거운 한숨 이었다. 그 한숨에는 그리움이 가득 배어 있었다. 거의 8년 동안 그의 가슴속에 비밀스럽게 감추어져 있는 잊을 수 없는 그리움이었다. 마차가 에이버리 농장에 가까이 왔으므로 댄은 길 끝에다 마차를 세웠다. 로 버트와 데이빗이 내렸다. 두 사람은 댄에게 다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들판 을 건너 언즈벡으로 걸어갔다. 그들은 얼마 걷지 않아 개울가에 도착했다. 물이 많아 물빛이 시퍼렇게 보였다. 로버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다리를 건너가겠다. 너는 여기서 시작해보렴.... 여기가 제일 잘 낚이는 장소란다. 자리를 옮겨가면서 해야 할 테니 내 쪽으로 오도록 해라. 만나게 될 때 점심을 먹도록 하자." 그는 혼자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둑을 따라 걸어갔다. 데이빗은 천천히 낚시할 준비를 했다. 별로 기분이 내키지 않는 얼굴로 낚시 줄을 달았다. 녹색 지렁이, 인공적인 갈색이 도는 낚시밥, 그리고 파란 거미를 낚시줄 끝에 차근차근 매달았다. 낚시대를 한바탕 휘둘러 던지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흥분의 떨림이 온몸을 감돌았다. 그것은 옛날을 되살려주는 그리움 같은 것이기도 했다. 낚시대를 손에 쥔 그는 물가로 다가가서 햇빛에 뜨겁게 달궈진 넓적한 돌 위에 앉아 몸을 균형을 잡았다. 송어 한 마리가 소리도 없이 개울 한 복판에 떠올랐다. 데이빗은 송어의 물 마시는 희미한 소리가 뼛골 안으로 찡하 고 울려 퍼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몇 년이고 술을 보지도 못한 술고래 가 술병 따는 소리를 듣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낚시에 몰두하기 시작했 다. 그는 고기가 낚일 만한 곳마다 낚시줄을 던지며 상류로 올라갔다. 해가 구름 뒤에서 나타나 그를 따뜻하고 밝은 빛으로 함빡 젖게 해주었다. 흐르는 물소리 가 그의 귓전으로 잦아들었다. 잔잔하게 흐르는 물의 끊임없는 소리가 그의 마 음을 편안히 젖어들게 했다. 그는 송어를 다섯 마리나 낚았고 그 중에서 가장 큰 놈은 적어도 무게가 1파운드는 될 듯싶었다. 그러나 다리 옆에서 아버지와 만났을 때 아버지가 자기보다 훨씬 많이 낚은 것을 보았다. 열두 마리의 송어가 풀밭에 일렬로 놓여 있었고 아버지는 그 옆에서 담배를 피우며 팔베개를 베고 누워 있었다. 그는 벌써 한 시간도 전에 열두 마리를 낚아놓고 쉬고 있는 것이 었다. 시계는 벌써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데이빗은 몹시 배가 고팠으므로 어머니 가 꼼꼼이 묶어놓은 끈을 급하게 풀러 종이를 폈다. 차가운 베이컨 샌드위치, 푹 삶은 계란, 두껍게 자른 송아지 고기 파이, 그리고 어머니가 늘 자랑하는 솜씨로 만들어진 나무딸기 잼이 든 카스테라, 거기다가 우유까지 한 병 곁에 있었는데 아버지가 어느 틈에 물에다 차게 식혀놓은 것이었다. 로버트는 대부분의 만성 결핵환자들과는 달리 대체로 거의 식욕을 느끼지 못 했다. 오늘도 이렇게 맛있는 점심이었는데도 그는 별로 손을 대지 않았다. 그는 담배만이 제일이라는 듯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데이빗은 아버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전보다 많이 여윈 것을 보니 결핵이 더 심해진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 너무 조금만 잡수시네요? 그렇게만 잡수시면서 어떻게 견디세요?" "난 괜찮다, 데이빗." 로버트는 웃어 보였다. 사실 그는 자기 병에 대하여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다. 기침도 진땀도 가래도 모두 너무 오래 되어 이제는 자기 몸의 일부분처럼 느껴 졌다. 그는 이런 것들은 언젠가 나을 것이라고 믿고 있어서 조금도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도 데이빗에게 웃어 보이면서 파이프로 자기 가슴을 툭툭 쳐 보였다. "걱정할 것 없다, 이 병이 내 목숨을 뺏지는 못할 테니까." 데이빗도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두 사람은 드러누운 채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하늘을 흘러가는 흰구름을 바라보았다. 주위에서는 풀과 앵초와 담배연기와 낚 시밥 봉지에 아직 남아있는 줄무늬 지렁이의 냄새가 났다. 건강한 냄새였다. 들 판과 목장과 나무들뿐으로 집은 한 채도 보이지 않았다. 새끼양들이 태어나는 철이라 여기저기서 양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모든 것이 조용했다. 움직 이고 있는 것이라고는 흰구름 떼와 풀을 뜯고 있는 양들뿐이었다. 풀을 뜯고 있 는 어미양들 사이에서 새끼양들은 뒷발을 쫙 뻗친 채 열심히 젖을 빨아대고 있 었다. 그것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푸른 하늘과 하얀 양 떼들과 풀밭.... 그 위에 누운 그들은 아름다운 자연에 취한 듯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로버트는 데이빗이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늘 궁금했다. 그가 보기에 데 이빗은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데이빗에게 직접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데이빗을 야단치고 제니와 같은 여자를 만난 것을 한탄할 수 도 없었다. 그는 공기 속에 살아 움직이는 봄의 숨결을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데이빗은 제니라는 여자를 알면서도 결혼을 한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 이렇 게 불행한 얼굴을 하고 있을 리가 없다. 이 아이는 너무 젊어 아무것도 모르고 제니를 택했고,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채 지금 돈 때문에, 학위 때문에 고된 선생 노릇을 하면서 또 배러스 네 가정교사 노릇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함께 고생을 하며 자란 형제들을 잊은 것일까, 어떤 이야기도 다 털어놓던 아버 지도 잊어버린 것일까?' 그는 어느새 기도하는 마음으로 돌아가 있었다. 데이빗 은 뭔가 큰 일을 할 아이라는 것을 깊이 느끼고 있는 그는 어서 데이빗이 이러 한 환경에서 벗어나 성공하기를 하느님께 간절히 비는 마음이 되었다. 데이빗은 뭔가 커다란 것을 이룰 것임에 틀림없다. '아아, 제발 하느님,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러나 로버트는 이런 생각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그보다 더 시급하고 염려스러운 일들이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갑자기 데이빗이 몸을 일으켰다. "아버지,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뭔가 걱정거리가 있으신 거죠?" "아아, 모르겠다, 데이빗. 지금 이곳은 얼마나 아름다우냐!" 그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뱉어내듯 말했다. "스커퍼 플래츠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말이다!" 데이빗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지금 일하시는 곳이 바로 그곳이군요!" 그렇단다. 우리는 결국 스커퍼 플래츠로 갔다. 벌써 석 달 전부터 그 탄층을 파내기 시작했다. "역시 그렇게 됐군요...." "어쩔 수 없었어." "물이 나오죠?" "나오다말다! 내가 파들어 가는 곳은 거의 어깨까지 물이 차오르곤 한단다. 그 래서 지난주에는 병이 나고 만 거야." 로버트는 담배연기를 뿜었다. 데이빗은 갑자기 힘이 빠졌다. "아버지는 바로 그곳에 들어가지 않게 하려고 그렇게 싸우지 않으셨어요?" "그랬었지...하지만 우리는 이길 수가 없었어. 배러스는, 그 뱀같이 교활한 자는 다시 새롭게 계약을 맺어 우리를 그곳으로 내모는 데 성공했지. 그렇지만 데이 빗, 인생이란 꼭 수레바퀴 같단다. 오래 살다보면 지나갔던 일이 또 돌아오게 마 련이란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로버트가 말을 이었다. "내가 방금 한 말, 알아듣겠니? 난 물 같은 건 상관하지 않는다. 난 언제나 물 구덩이 속에서 일을 해왔고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더 지독한 곳에서 일해왔으니 까. 내가 걱정하는 것은 폐갱 속에 있는 물이다. 이봐라, 데이빗, 그건 이런 거란 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손으로 풀밭에 그림을 그려가며 위험한 이유를 설명 하기 시작했다. "여기가 탄층이다. 대탄층이란 말이다. 그것이 장벽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건 말하자면 정남북으로 뻗어 있는 함몰탄층(함정 비슷하게 되어 파묻힌 탄층)이지. 바로 그 탄층 반대쪽이 옛날에 석탄을 파던 곳으로, 결국 그곳은 스누크 탄갱에 서 계속 뻗어나온 옛날 넵튠 탄광이 무너져 내린 온갖 찌꺼기들이 묻힌 폐갱이 란 말이다. 그런데 그 밑부분이 온통 물로 가득 차 있다는 게 문제다. 그곳엔 물 이 고여 있단 말이다. 물이 가득한 물통같이 되어 있는 거야. 그런데 말이다, 그 탄층의 또 다른 쪽, 그러니까 서쪽 편이 바로 우리가 지금 일하고 있는 스커퍼 플래츠라는 곳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지금 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그 탄층에서 탄을 한 꺼풀씩 벗겨내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물을 가로막고 있 는 그 장벽을 자꾸 약하게 허물고 있는 거지." 그는 다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데이빗이 말했다. "저는 이미 그 탄층은 어떤 것이라도 다 막을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길 들었어 요. 그 탄층 자체가 천연적인 장벽이 된다고요." "그렇게 이야기했겠지." 로버트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물이 흥건한 폐갱을 너무 가까이까지 파 들어간다면 과 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단다. 천연적인 장벽이 점점 얇아질 때 생길 일이란 하나뿐이다." 로버트는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차분히 이론을 세워가면서 말을 했다. 예전에 보여주었던 그의 신랄한 태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 회사측에서도 지금 자기네가 하고 있는 일을 알고 있겠지요. 폐갱 가까이까지 가 있는지 아닌지를 그들도 알 거예요. 평면도가 있을 테니까 요." 로버트는 머리를 가로저였다. "회사에 넵튠 폐광의 평면도 같은 게 있을 까닭이 없다." "그럴 리가 없어요, 회사에 있을 거예요. 아버지, 제닝즈 감독을 찾아가 보세 요."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니?" 로버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도 어쩔 도리가 없을 게다. 그 사람이라고 해서 있지도 않은 법을 들 고 나설 수가 있겠니? 1872년 이전에 폐광이 된 광산에 대한 보호법은 아무것도 없단다. 그리고 이 넵튠 탄광은 그보다 훨씬 전에 폐광이 되었거든. 그 당시는 평면도를 보관해두는 규정이 없었다. 그러니 평면도가 있다 해도 지금은 없앴을 거다. 또 그 폐광 속에 찬 물이 지금 파고 있는 탄층의 바로 맞은편에 있을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1킬로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을는지도 모르는 거지." 그는 이런 문제는 이제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하품을 하고 나서는 데이빗에게 미소를 보내며 덧붙여 말했다. "1킬로미터 밖으로 떨어져 있다면 좋겠는데...." "그렇지만 아버지...." 데이빗은 아버지의 태도가 염려스러워 말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로버트는 마치 숙명론자가 된 것 같았다.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짙은 체념의 빛이 보였다. 로버트는 두려움에 찬 아들의 표정을 보고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다, 난 이런 일로 다시 떠들어대고 싶지는 않다. 어느 한 놈 나를 알아주 는 놈이 없어. 젊은 놈들은 더 철이 없어. 지난번만 하더라도 그치들이 들고 일 어나려다가 말았지. 난 상관하지 않는다. ...골치 아플 필요가 없는 일이야. 난 그 렇게 살기로 했다." 그는 말을 뚝 끊고 하늘을 쳐다봤다. "내주 일요일에도 이곳에 올 생각이다. 너도 함께 오자꾸나. 원즈벡에 오기에 는 일 년 중에서 요즘이 가장 좋은 때란다." 그는 기침을 했다. 부드러우면서도 귀를 울리는 그 특유의 기침이었다. 데이빗 이 걱정스럽게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좀더 자주 일을 쉬도록 하세요. 기침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요." 로버트는 빙그레 웃었다. "이제 서서히 은퇴할 때도 됐지." 그는 파이프로 자기 가슴을 쳤다. "그러나 걱정할 건 없다, 이런 기침은. 이놈의 기침과 나는 이제 다정한 사이 가 되어버렸지. 이놈이 나를 죽이진 못해." 데이빗은 더욱 불안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요즘 들어 흥분하기를 잘하는 그는 이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분노로 온몸이 떨렸 다. 아버지의 기침, 그러면서도 쾌활한 모습. 점점 위험 수위가 높아지는 스커퍼 플래츠에서 비참한 노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그 태도에 데 이빗의 분노는 커다란 슬픔으로 바뀌었다. 만일 플래츠 탄광에 진짜로 큰 위험 이 있다고 가상해본다면? 데이빗의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갑자기 그는 결심했다. '스커퍼 플래츠에 관하여 배러스에게 말해야겠다. 이번 주에 그를 만나자.' 이렇 게 결심하자 그의 마음은 훨씬 가벼워졌다. 19 그 동안 조는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그러한 세 월을 '굉장히 즐거운 시절', 또는 '이것이 바로 인생이다.'라는 식으로 자주 말하 곤 했다. 특히 그는 새로이 자리잡은 십헤드라는 곳을 좋아했다. 그곳에는 좋은 술집도 많고 당구장과 댄스 홀까지 있고 토요일 밤마다 권투시함도 즐길 수 있 는 곳이었다. 그는 그러한 환경과 그의 하숙집과 근무처가 몹시 마음에 들었다. 파운틴 호텔 건너편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근무처에는 전화, 의자 두 개, 발을 얹는 것 대신 쓰는 탁자 하나, 금고 하나, 경마 일정표 등이 완전하게 갖춰져 있 었다. 그리고 벽에는 잭 존슨으로부터 베스터 빅토리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람이 찍은 경주마들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는 새로 맞춰 입은 엷은 갈색 양복과 조끼 맨 윗주머니에 늘어뜨린 새로 산 회중시계 줄도 마음에 들었다. 그는 또 자기 손톱도 마음에 들었다. 모자를 머리 뒤쪽에다 삐딱하게 얹고 탁자 위에다 다리를 올려놓고 칼로 손질한 손톱이었다. 그리고 새로 생긴 영화관 매표소에서 일하는 눈에 번쩍 뜨이도록 화려한 아가씨와 친하게 된 것도 여간 기분 좋은 일 이 아니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현재 그가 하고 있는 일이란 여간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아주 단순하고 쉬운 일이었다. 전표와 현금을 모아, 전표는 전화 로 타인캐슬의 디크 조비에게 보고하고, 현금은 토요일 밤에 디크 자신이 수금 하러 올 때까지 보관해두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디크는 일찍이 그를 십 헤드에 지점을 개설하는 바로 그런 일에 안성맞춤인 젊은이라고 생각해왔던 것 이다. 뛰어난 사교술을 지니고 있고 솔직하고 성실하며, 손님과 잘 어울리는 조 는 경찰도 능숙하게 구워삶아 일을 재깍재깍 시원스럽게 해치울 수 있다고 믿었 다. 디크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계산기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한테 어떤 일 이 떨어질 때까지 사무실에 멍청히 앉아 있는 그런 부류의 사무원 따위는 질색 이었다. 디크는 장래성이 있고 정직하면서도 실제로 수완이 있고 머리가 잘 돌 아가는 젊은이를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디크가 잘못 계산할 것일까? 조는 사무실 벽에 붙어 있는, 뱀장어 눈 을 닮은 아프리카 카피르족이 프랑스 권투를 하는 것 같은 딱딱한 자세를 취하 고 있는 여자 그림 앞에서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현실적 수완 에 능하고, 약삭빠르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젊은이...조는 과연 실제적인 수완이 능숙한 것일까? 조는 생각할수록 웃음이 터져나올 지경이었다. 일이 너무 쉬웠 다. 너무도 손쉽게 돈이 굴러 들어오는 판이었다. 앞만 번지르르하게 해놓고 있 으면 되었다. 상대가 자기를 해치기 전에 상대를 먼저 해치우면 되는 것이었다. 그는 물고 있던 이쑤시개를 다른 쪽으로 바꾸어 물고서, 한 손을 안주머니 속에 집어넣어 얼룩무늬 표지의 얄팍한 수첩을 꺼냈다. 이 수첩도 조를 즐겁게 해주 는 것이었다. 그 수첩에는 빨간 줄이 인쇄되어 있는데 그 빨간 줄 사이엔 그의 예금액이 표시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십헤드 브라운 7번지, 조 가울런 씨, 2백 2파운드 10실링 6펜스. 총액'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이 수첩은 조가 상당히 성 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조는 수화기 를 들었다. "여보세요! 네에, 그렇습니다. 카 씨, 알겠습니다. 2시 30분, 슬라이더에 10실 링, 4시의 블랙 버드엔 얼마든지 좋으시다 이 말씀이시군요. 꼭 맞춰질 겁니다, 카 씨." '카라는 사람은 뱅크 거리에 있는 약방 주인이지, 아마' 하고 조는 생각했다. 재미있는 것은 전혀 마권 따위에는 흥미가 없을 듯한 사람들이 의외로 마권을 많이 산다는 것이었다. 카도 약장사 외에는 전혀 다른 생각이 없을 것 같은 인 간이다. 일요일마다 아내와 함께 교회에 가면서도 매주 두 번씩 정규적으로 10 실링씩의 마권을 샀다. 그리고 그 마권은 꼭 들어맞았다. 종종 큰 돈을 버는 수 도 있었다. 우승한 마권을 맞추는 사람들은 대개 먼저 알 수 있다. 그들은 신중 하면서도 도박의 재주가 있고 맞춰도 그것을 떠들어대지 않았다. 그리고 잃는 사람 역시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를테면 지난달에 십헤드에 온 트레시라는 젊은 이가 있는데, 이 친구는 태어나면서부터 도박에서는 잃게 되어 있는 사람 같았 다. 멍청이 같은 얼굴 가득 그렇게 씌어 있었다. 트레시는 마키 당구장에서 당구 시합을 하다가 알게 되었는데 경마에서 꼴찌를 한 샐리 슬로퍼에다가 1파운드를 건 이래로, 조는 그 트레시의 마권을 떠맡아왔다. 트레시는 빼빼 마른 몸에다 턱 이 뾰족하여 보기에도 엉성한 인간으로, 싸구려 담배 우드바인을 피우면서 곧잘 갤갤 웃어 누구에게나 쉽게 놀림감이 되어버리는 그런 친구였다. 그리고 우드바 인 같은 싸구려 담배를 피우면서도 트레시는 경마에 걸 돈을 가지고 있었다. 이 번 달에도 대뜸 20파운드를 걸어서 눈 깜짝할 사이에 몽땅 잃고 말았다. 애송이 트레시는 이제 조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그러게 잘못 알면 곤란하지.' 하고 조는 생각했다. 또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조라는 사람이 아무리 막돼먹은 사람이라고 해도 전화를 받을 때만큼은 아주 예의 발랐다. 사대방이 누구냐에 따라서 변하기는 하지만 아첨할 필요가 있을 때 말고는 점잖게 표준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번 전화는 사업관계가 아니었으 므로 그는 히죽거리며 의자에 벌렁 눕듯이 몸을 기댔다. 영화관 매표소의 그 금 발 미인이 지배인이 없는 틈을 타 전화를 건 것이었다. "오, 미니! 내가 누군 줄 알았어? 응, 오랜만이군. 뭐라고? 뭘 가르쳐달라고... 하하하! 아니, 미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3시의 경마권이라고...무슨 경마 든지 다 좋다 이 말씀이라고? 아니, 미니, 날 누군 줄 아는 거야? 내가 공짜로 그런 일급 기밀을 누설할 작자처럼 보여? 아니, 이건 그냥 해본 소리고...네가 펄 화이트 같은 미인이라고 해도 경마 예상은 못 가려쳐줘! 미니, 내가 전부터 말했 잖아...뭣이 어떻다구!...." 그는 입을 벌린 채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리며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그러다 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사정이 달라지지, 미니. 내가 늘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 말이야. 미 니, 그것 때문에 화낸 것은 바로 당신이었잖아...뭐 나였다구? 미니, 물론 당신이 마음을 고쳐 먹었다면 확실한 마권을 사게 해줄 수도 있지." 조는 득의만만한 얼굴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게 다 맡기라구, 미니. 물론 확실하지. 당신에겐 그런 재능이 있다고 내가 항상 말했잖아, 미니. 오는 정이 있으면 가는 정도 있는 법이지. 하지만 만일 나 를 등쳐 먹겠다는 속셈이라면 그땐 가만 안 둘...아, 알았어. 믿지 못하는 게 아 니라...미니, 그럼 오늘 밤 11시 그곳에서 꼭 만나. 틀림없이 갈게. 마권에서 번 돈도 가지고 갈게!" 조는 기분 좋아 싱글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그가 늘 말해왔듯이 이런 게 바로 그가 일을 처리하는 식이었다. 모하메트 산 쪽으로 오게 하는 것은 학교의 교과 서에서 있듯이 변함이 없는 것이었다. 그는 만족감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는 일어나서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그러나 당치 않는 말이었다. 그는 이제 이 런 감정쯤은 다스릴 줄 알게 되었다. 세상사에 익숙한 점잖은 인간이 된 것이다. 냉정하게 한두 가지 일쯤은 예사로 해내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침착한 마음 으로 이쑤시개를 조끼 주머니에 넣고는 익숙한 솜씨로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일 을 시작했다. 그는 우선 오전 전표들을 모두 다 꺼냈다. 전표 한 장 한 장을 전문가처럼 세 밀히 검토하고 비교해보고는 그것을 옆에다 쌓아올렸다. 전표는 두 종류로 나뉘 어 쌓였다. 큰 전표 더미는 이길 가능성이 있는 것들이었고 다른 쪽에는 3장의 전표밖에 없는데 이 3장은 어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헛탕칠 마권이라는 것 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트레시는 조교(調敎)도 하지 않은, 늙어서 호흡 기를 절개해 금속 호흡기관을 박아 넣은 조정마 수국 호(水菊號)에 다가 3파운 드라는 돈을-그로서는 가장 무모한 투기-걸고 있었다. 조는 마음속으로 승산에 관한 계산을 하면서 마련한 트레시를 빈정대며 웃고는, "숫자에는 전혀 머리를 쓰지 못하는 위인이라니까, 정말." 하고 중얼거리면서 트레시의 전표를 발기발기 찢어버렸다. 다른 두 장의 전표는 풀브룩 호와 스위트 오브 호에 거는 거였는데, 그것도 역시 찢어버렸다. 그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시계를 바라보았다. 1시 반이 었다. 이젠 더 이상 신청은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기분 좋게 수화기를 들고는 잠시 교환수를 희롱하다가 타인캐슬에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디크 조비 사장님이시군요! 전 조입니다. 오늘은 꽤 매상이 오른 날입니다. 하, 하, 하! 그렇습니다, 사장님. 준비되셨지요? 자, 사장님, 읽어나가겠 습니다...." 조는 찢지 않고 다른 무더기에 쌓아둔 전표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민첩하고 명확하게 그리고 낭랑한 목소리로 다 읽어주고는 "네에, 이게 답니다, 사장님. 네 뭐라구요? 틀립없냐구요? 걱정 마십시오, 사장님. 제가 언제 실수하 는 거 보셨나요? 네에, 이것이 전부입니다, 디크 사장님. 네, 네, 사장님. 네, 네, 안녕히 계세요.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조는 수화기를 탁 하고 기분 좋게 놓고 일어섰다. 벽에 붙은 그림 속의 여자 에게 윙크를 보내고서 모자를 삐뚜름하게 쓰고는, 사무실 자물쇠를 채우고 밖으 로 나갔다. 그는 번화한 거리를 가로질러 파운틴 호텔로 들어갔다. 홀 안을 휘둘 러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하는 그를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를...조 가울런을...마권 중매인...대 조 가울런을.... 그는 비프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크고 두꺼우면서 국물이 질벅거리는 비프 스 테이크는 그가 제일 좋아하는 요리였다. 그는 그 고기에다 양파와 포테이토 칩 을 곁들여 먹으면서 맥주도 한 잔 들이켰다. 조는 식도락가였다. 음식이란건 어 떻게 먹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다 먹고 나서는 스틸튼 치 즈와 두루마리 빵을 먹었다. 그 스틸튼은 맛이 아주 그만이었다.... 정말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맛이었다.... 2년 전만 하더라도 그는 스틸튼이라는 이름조차 들 어본 일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점점 위로 위로 세상 꼭대기로 성공해 올 라가는 중이었다.... 이것이 그라는 인간...조 가울런이었다. 오후는 더 느긋하게 보냈다. 그는 파운틴 호텔 사장 잭 프레스튼과 가벼운 이 야기를 나누었다. 잭은 좋은 사나이였다. 그는 마키 당구장으로 어슬렁가리며 내 려가는 스누커 게임을 두어 판 가량했다. 트레시는 거기에 오지 않았다. 그곳에 트레시가 오지 않았다는 것은 조금 이상했지만 걱정할 것이 없었다. 트레시의 3 파운드가 조의 안주머니에 안전하게 들어 있으니까. 스누커를 하고 난 다음 조는 내친 걸음에 컬리가 경영하는 체육관 쪽으로 갔 다. 인간이란 훈련이 되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못 쓰는 법! 어떤 향락의 재미도 못 보는 것! 그런데 자기는 어떤가? 이따 밤 11시에 미니를 만난다는 것을 생각 해내자, '모든 사소한 일까지도 다 잘 되어가는구나!' 하고 감탄하면서 솟구치는 기쁨을 눌렀다. 체육관에서 조는 철봉을 하고 혼자서 권투연습을 하고 나서 컬리를 상대로 슬 슬 3라운드의 연습경기를 했다. 그는 흠뻑 땀을 뺐기 때문에 목욕탕에 들어가서 오래도록 뜨겁게 몸을 담갔다. 그러고 나서 컬리에게 안마를 하도록 했다. 컬리 는 힘이 별로 없었다. "이 친구야, 좀 세게 문지르라구! 뭣 때문에 비싼 돈을 내는 줄 알아?" 그는 어디까지나 돈을 낸 고객이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든 간에 컬리로부터 자기가 내놓은 돈의 값어치를 빼내야 하는 것이다. 컬리 새끼, 3라운드째에 내 귀를 상당히 세게 때렸겠다. 커다란 물개처럼 시뻘겋게 번들거리는 몸을 탁자에 서 끌어내린 조는 옷장으로 가서 조심스레 옷을 입었다. 컬리에게 반 크라운의 은화를 던져준 그는 밖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나왔다. 5시, 사무실에 돌아가기에 꼭 알맞은 시간이었다. 그는 광장에서 마지막 판의 석간을 사들고 자신만만하면서도 조용한 눈으로 경마에 관한 기사를 들여다보았 다. 예상한 대로 수국 호의 이름은 아무 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풀브룩 호는 6마 리의 경주에서 4등이었고 스위트 오브 호도 역시 뛰기는 했다. 조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신문을 접었다. 거리를 가로질러 사무실로 들어가는 그의 걸음걸이 는 여는 때보다 더 위풍이 당당했다. 책상 앞에서 조는 그날의 계산서를 살피고 나서 수화기를 들어 타인캐슬을 불 어냈다. "여보세요, 디크 조비 사장님 계십니까? 여보세요...뭐라구요? 조비 사장님께서 일찍 퇴근하셨다구요...아아, 그럼, 좋습니다. 내일 아침에 다시 걸지요." '그러니까 디크가 일찍 퇴근했다 이 말이지. 틀림없이 오늘은 별로 신통한 것 이 없었던 모양이구나.' 조는 여전히 유쾌한 기분으로 휘파람을 불면서 넥타이를 고쳐 맸다. 그때 문이 열리며 디크 조비가 방으로 들어섰다. "아니, 어서 오십쇼, 디크 사장님. 이거 반갑습니다...일부러 예까지 오실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습니다." "닥쳐, 가울런. 거기 앉아." 디크 조비는 웃지도 않고 의자를 가리켰다. 조는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디크 사장님, 저,...." 조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말을 더듬었다. 디크 조비 뒤를 따라 애송이 트 레시가 들어왔고, 그 뒤로 이 집의 벽만큼이나 튼튼해 보이는 거대한 사나이들 이 사나운 눈빛으로 따라들어왔기 때문이다. 트레시는 여느 때의 바보 같은 표 정과는 다른 얼굴로 우드바인을 입에 문 채 사납게 조를 노려보았다. "가울런." 조비가 말했다. "네놈은 더럽고 썩어 빠진 사기꾼 새끼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장님, 전 지금 막 타인캐슬에 전화를 걸어 아까 빠뜨렸 던 것을 다시 말씀드리려던 참입니다. 바로 이 사람이 건...." 그는 트레시를 기리키면서 언성을 높였다. "진심입니다, 사장님. 깜빡 잊었던 걸 겨우 알아채서 방금 전화를 걸었습니다." "닥쳐, 가울런. 네놈이 나를 속인 것은 오늘만이 아니야. 한 달 동안 트레시는 네놈의 손을 통해서 마권을 샀어. 그래서 35파운드나 손해를 보았지만 내 손에 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았어." "이 새끼가 그런 소리를 지껄이던가요? 이 더러운 거짓말쟁이가? 그런 말을 믿으시면 곤란합니다. 디크 사장님, 모두 거짓말입니다." "닥쳐, 가울런." 조비는 이젠 귀찮다는 듯이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트레시는 우리 사람이야. 내 지점을 한 달간씩 돌면서 너에게 한 것과 같은 일을 하는 것이 그의 직업이야. 네놈은 나를 속였어.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줄 아나, 이 바보 멍청이 같으니! 난 다 알고 있었어. 네놈이 좋은 기회는 다 이 용해서 네 주머니를 두둑히 하는 걸. 이젠 파면이야, 얼간이 같은 새끼!" 끝장이 났다고 생각하니 화가 벌컥 치밀었다. 그는 소리질렀다. "조심하쇼, 누구에게 함부로 얼간이라고 하는 거야! 나는 말야...." 그러나 말문이 꽉 막혀버렸다. 일대일이라면 조비에게 멋있는 한 방을 먹여줄 텐데, 상대는 더럽게도 셋이나 되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좋았다. 다른 일은 다 빈틈 없이 해놓았다. 그러니 트집 잡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따로 모아놓은 돈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는 온몸이 얼어버렸다. 왜냐하면 조비가 손짓을 하 면서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이 새끼의 몸을 뒤져라, 짐." 기분 나쁜 눈빛의 짐은 마치 벽이라도 뚫고 들어갈 듯한 자세로 그에게 다가 왔다. '아아, 안 되겠다! 이 새끼가 내 돈을 다 뺏을 것이 분명하다.' 순간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온몸을 휩쓸었다. '제기랄! 그렇게 쉽게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왕이면...' 그는 몸을 굽히는 척하다가 짐의 턱에다 일격을 가했다. 그러나 짐 은 끄떡도 없었다. 짐은 머리로 받을 양으로 돌진해왔다. 서로 치고받고 소동이 3분 정도 지속되자 사무실은 난장판이 되었다. 그러나 곧 결판이 났다. 조는 바닥에 길게 뻗어버렸다. 짐이 그를 엎어버리더니 허리를 타고 앉아 그의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는 정신이 들었으나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다.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5파운드의 지폐 몇 장과 얼룩 무 늬 은행통장이 책상 위에 놓였다. 디크 조비가 그 지폐를 자기 주머니로 쑤셔넣고 통장을 펼쳤다. 조가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그건 안 됩니다. 그건 제가 어렵게 모은 제 돈입니다." 조비는 시계에 눈을 주더니 급히 수화기를 들어 은행 지점장을 불렀다. "시간이 지났는데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만 매우 중대한 사건이어서...가울런 군 이 예금을 급히 찾아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저는 타인캐슬의 디크 조비입니다. 네, 네, 디크 조비...가울런 군의 예금을 좀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아 그 렇습니까? 대단히 고맙습니다. 네, 네, 당장 가겠습니다. 여러 가지로 대단히 감 사합니다." "안 갈테다! 죽어도 안 갈 거야!" 조는 돼지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자, 1분 동안 여유를 줄 테니 결정을 해. 안 가면 경찰을 부를 테니까." 조는 은행으로 갔다. 침묵을 지키는 네 사람의 기이한 행렬이 은행으로 갔다 가 다시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돈을 모두 내놔!" "제발 부탁입니다. 이 가운데에서 제 돈도 들어 있습니다." "모두 내놓으라니까!" 조는 겁에 질려 소중하고도 소중한 200파운드, 그의 전재산을 다 건네주고 말 았다. "부탁입니다, 조비 사장님." 조의 비굴한 애원에 문 쪽으로 가던 디크 조비가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에는 말할 수 없는 경멸의 빛을 흘렀다. 디크는 호주머니에서 1파운드 짜리 은화 하나를 집어내어 조에게 던졌다. "자, 모자라도 사려무나." 그는 짐과 트레시를 데리고 나가버렸다. 약 10분 가량 조는 눈물이 흐르는 대로 놔둔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윽고 그는 일어서서 1파운드짜리 은화를 주워 들었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방 안의 물건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증오에 불타서 손에 잡히는 대 로 부수고 던져버렸다. 그러고는 벽에다 휘갈겨 써댔다. 디크 조비에 대한 온갖 욕을 다 써댔지만 분이 풀릴 수는 없었다. 그는 창문턱에 걸터앉아 자기의 총재 산을 다시 점검해보았다. 호주머니의 잔돈까지 합쳐서 꼭 30실링이었다. 30실링. 은화 30개! 그는 폐허가 돼버린 사무실을 빠져나와 곧장 파운틴 호텔로 갔다. 10실링은 조끼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나머지 돈으로 술을 마셨다. 10시 반까지 술을 마셔 댔지만 기분이 좋아지진 않았다. 그는 일어서서 비틀거리며 영화관 쪽으로 갔다. 11시가 되자 미니가 나왔다. 물들인 금발에 가슴이 크고 금니가 반짝이는 그녀 는 겉으로만 보아도 닳고 닳은 매춘부임에 틀림없었다. 조는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세웠다. 미니를 가슴에 안고는 그녀를 자세히 들 어다보았다. "자아, 가자, 미니." 그는 거칠게 말했다. "네가 번 돈 10실링이 여기 있다. 내일 가져다줄 돈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지만 자, 받아." "당신은 신사가 아냐. 당신이 원하는 것은 뻔하다구...." 조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잡아끌었다. 조는 그날 밤 모자는 사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밤 덕택으로 그는 후에 많은 것을 사야만 했다. 20 가로수 길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세차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매연 때문에 그을음투성이인 가지로부터 더러운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서있는 나 무들은 절망과 슬픔에 젖어 울고 있는 여인처럼 처량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흠 뻑 젖은 도로를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는 데이빗은 슬피 우는 것 같은 그 나무들 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뭔가 심각한 생각에 잠 긴 표정이었다. 그는 법산저택의 정문 안으로 들어가 초인종을 누르고 잠깐 기 다렸다. 문이 열리며 나온 사람은 가정부 앤이 아니고 힐다 배러스였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자 뜻밖이라는 듯 얼굴을 붉혔다. "일찍 오셨네요! 너무 빨리 오셨어요. 아서는 아빠와 함께 서재에 있는데." 그는 현관에 들어서자 젖은 외투를 털었다. "아버님을 뵙고 싶어 일부러 일찍 온 겁니다." "아빠를요?" 그녀는 좀 의외라는 듯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중대한 일인 것 같군요." "그렇게 보입니까?" "네. 아주 대단한 일인 것 같은 감이 드는데요." 그는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서 비웃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아 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는 힐다를 좋아하고 있었다. 늘 비웃음 같은 것을 얼 굴에 내보이고 있는 그녀는 누구에게든지 퉁명스러웠지만 그것은 오히려 거짓이 없다는 것으로 보여서 호감이 가는 것이었다. 말이 끊어졌다. 그녀는 데이빗의 깊은 생각을 알고 싶었지만 그 이상 캐묻지 않았다. 냉담한 얼굴로, 아니 귀찮다 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두 사람 다 서재에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럼 올라가도 좋습니까?" 그녀는 대답 대신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가 힐다의 거무스레한 눈이 자 기에게 쏟아지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그녀는 몸을 돌려 가버렸다. 그는 2층계단 을 올라가기 전에 잠시 선 채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2층으로 올라가 서재의 문 을 조심스럽게 두드리고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방은 밝았다. 이미 불이 켜져 있었고 난로에도 장작불이 타고 있었다. 배러스 는 책상 앞에 앉아 있고 아서는 바로 그 앞의 난로 옆에 서 있었다. 데이빗이 들어가자 아서는 여는 때와 마찬가지로 다정하게 웃는 얼굴을 보였지만, 배러스 는 그다지 진심에서 우러나서 맞이해주는 것 같지 않았다. 배러스는 가죽의자를 빙 돌려 데이빗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가?" 데이빗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잠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는 배러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리처드 배러스는 자기 의자에 뒤로 기대 앉았다. 그는 사실 매우 기분이 좋았다. 오후에 타인캐슬 시장한테서 편지를 받 았는데, 시장은 시의 왕립병원 증축 건설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달라는 간청을 적어 보냈던 것이다. 배러스는 이미 판사직을 맡고 있으며, 지방 교육위원회의 위원장직을 3년이나 해왔는데 또 이런 청원이 온 것이다. 이것은 마치 살찐 매 스 티프 맹견이 고기가 듬뿍 붙은 뼈다귀가 얻어걸릴 기회를 냄새 맡은 것과 같 다고 할까. 하여튼 작위가 좀더 가까이 굴러들어온 것 같아서 그는 기분이 대단 히 좋았다. 그는 아름답고 정확한 필적으로-법산저택에는 타이프라이터 같은 기 계는 없었다.- 사연이 구구한 승낙의 답장을 작성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편안히 앉아 있는 그의 자세에는 인생이란 어쨌든 즐거운 것이다라는 감각 적인 만족스러움이 흐르고 있었다. "할 이야기라니, 뭔가?" 배러스는 물으면서 데이빗의 시선이 아서에게 향해진 것을 보자 성급하게 덧 붙였다. "어서 말해보게. 아서도 장래를 위해서 들어두는 것이 좋겠지." 데이빗은 마음을 정하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마치 재판관 같은 위엄을 보 이는 배러스 앞에 서자 지금부터 자기가 말을 하려는 것 따위는 갑자기 뭔가 주 제넘은, 아주 어리석은 일같이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미 배러스에게 이야기하기 로 그의 마음은 정해졌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 결심히 흔들려서는 안 된다. "파라다이스에서 시작한 이번 일에 대한 겁니다만," 하고 그는 배러스에게 말 을 꺼낼 틈을 주지 않고 빠른 속도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물론 저 같은 사람이 이러쿵저러쿵할 권리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전 이제 넵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아버지와 두 형들이 거기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 아버지의 일은 잘 아시고 계실 겁니다. 벌써 30년이나 탄광에서 일해왔고 함부로 소란을 피울 분은 아닙니다. 사장님이 새 계약을 체 결하시고 그 탄광의 장벽에서 탄을 캐내기 시작한 이래, 아버지는 침수 소동이 또 일어나지 않을까 하고 큰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배러스는 여전히 재판관 같은 냉엄한 눈으로 데이빗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네 아버지가 파라다이스에서 일하고 싶지 않다면 그만두면 되는 걸세. 아마 7년 전에도 이와 똑같은 비상식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었더랬지. 자네 아버지는 언제나 사고의 장본인이었어." 데이빗은 피가 머리끝까지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조용히 말을 계속했다. "아버지뿐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폐갱에서 너무 가깝 다고 모두 말하고 있습니다. 넵튠 구갱에는 물이 꽉 차 있다는 걸 다 알고 있으 니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될지 모두 알고 있을 것 아닌가." 배러스는 얼음같이 차갑게 말했다. "모두 그만둬 줬으면 더 좋겠군." "그럴 수가 없잖습니까. 모두들 먹고 사는 것을 생각해야 하니까요. 거의 모두 가 먹여 살려야 할 가족들이 있습니다." 배러스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그렇다면 헤든에게 가면 될 게 아닌가? 그 사나이는 그 때문에 있는 것이니 까.... 모두가 그에게 돈을 지불하여 그 위험물을 찾아내도록 하고 있는 줄 아네. 그리고 이런일은 자네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구먼." 갑자기 분위기가 긴장되었기 ㄸ문에 아서는 차츰 불안해지면서 데이빗으로부 터 자기 아버지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서는 복잡한 사건을 싫어했다. 그 어떤 것 이든 소동이 일어나는 것은 그에겐 굉장한 괴로움이었다. 데이빗은 배러스의 얼 굴에 시선을 그대로 못 박고 있었다. 안색은 창백해졌지만 의연한 결의와 자제 력을 잃지 않은 엄숙한 표정이었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 사람들의 말에도 한번 귀를 기울여주십사하 는 것입니다." 배러스는 짧게 껄껄 웃었다. "과연 그렇겠군." 그는 칼로 살을 베는 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자네는 내가 여기 이렇게 앉아서 내 고용인이 나에게 내 사업에 대 해 강의하도록 해라, 이 말이군." "아무것도 못 해주시겠다는 뜻입니까?" "절대로 안 되네!" 데이빗은 입술을 깨물며 온몸이 분노로 들끓는 것을 억제했다. 그는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만일 제가 드린 말씀을 정당히 받아주시지 않는다면 이 이상 더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겠습니다. 물론 저는 이런 말씀을 드릴 자격은 없습니다." 그는 배러스가 무엇인가 더 말해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잠깐 기다렸으나 잠 잠함 속에 곧 발길을 돌려 조용히 방에서 물러나왔다. 아서는 그의 뒤를 쫓아가지 않았다. 침묵이 오래 계속되었다. 이윽고 눈길을 방바닥에 떨어뜨리며 겁을 집어먹은 채 아서는 말했다. "데이빗이 무슨 악의가 있어서 말씀드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데이빗 펜윅은 좋은 사람입니다." 배러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서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는 벌써 몇 번이고 냉수마찰도 해왔고, 빨간 소책자의 내용도 거의 암송하고 있지만 아직도 그는 툭하면 얼굴이 빨개지곤 했다. 그러나 그는 필사적인 용기를 내어 말을 계속했 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전 도저히 잊지 못하겠어요, 그 사람이 한 말을. 사실은 오늘 파라다이스 갱에서 괴 상한 일이 일어났지요. 스커퍼 갱구의 펌프가 오후의 교대시간에 가동하지 않았 어요." "그래서?" "그쪽으로 굉장히 물이 불어나고 있다는 거지요." "그렇겠지." 배러스는 지금까지 쓰던 펜을 들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아서는 입을 다물었 다. 자기가 지금 보고한 것도 아버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임을 느꼈기 때문 이다. 아버지는 아직도 위엄이 넘치는 재판관 같은 태도를 하고 있었다. 아서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에도 스커퍼 플래츠에 점점 더 물이 불어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실 제로 파고 있는 석탄덩어리가 마치 뒤에서 밀리듯이 탄층으로부터 떨어져 나오 는 상탭니다. 그래서 저도 아버지께 그것을 알려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는 데...." "알려드리고 싶다고...." 배러스는 자심의 불쾌함을 겨우 누르며 그 말을 되받았다. 그리고 몹시 빈정 대는 투로 말했다. "그래, 물론 너에게 감사해야겠다. 넌 암스트롱보다 16시간이나 더 먼저 사태 를 예견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주 고맙구나." 아서는 아주 기분을 상해서 우울한 눈길을 아래로 내리깔고 융단 깔개의 무늬 를 ㅎ어보았다. "넵튠 구갱의 평면도가 있다면 좋겠는데요, 아버지. 그렇기만 하면 모든 게 다 확실해질 테니까요. 옛날 평면도를 보관해두지 않았다는 것은 아주 잘못한 일인 것 같아요." "너의 판단은 좀 시간이 늦은 감이 드는구나, 아서. 네가 만일 80년 전에 태어 났더라면 틀림없이 산업계에 커다란 혁명을 일으켰을 텐데." 다시 침묵이 흘렀다. 배러스는 책상 위의 쓰다 만 편지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그것을 손에 들고 읽기 시작했다. 그는 편지의 문장들이 몹시 마음에 든다는 듯 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다시 쓰다가, 아직도 문 앞에 서 있는 아서를 의식하고 새삼스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봤다. "네가 넵튠 탄광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나도 매우 만족스럽게 생각한 다. 더군다나 그 경영에 관해서 너의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더 기쁜 일이 다, 미숙하긴 하다만. 앞으로 몇 년이 지나면 틀림없이 너는 탄광 경영에 너서야 할 것이다. 물론 나도 같이 말이다!" 배러스가 만일 웃을 줄 아는 인간이라면 여기서 크게 웃어야 했을 것이나 여 유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그는 그대로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너는 원칙적인 것 이외에는 상관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자 아, 이제 그 펜윅이라는 사람을 찾아서 너의 그 텅 빈 머리에다가 삼각함수라도 집어넣거라." 아서가 당황한 얼굴로 급히 밖으로 나가자 배러스는 다시 승낙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어디까지 썼더라. 뭐라고 쓰려고 했었지? 아, 이제 좋은 문구가 떠오르는 구 나.' 그는 탄탄한 필체로 찬찬히 써나가기 시작했다. "소생으로서는...." 21 세월은 빨리도 흘러 몇 개월이 후딱 지나가고 다시 겨울이 다가왔다. 데이빗 이 배러스와 만나서 이야기했던 그 괴로운 기억도 상당히 희미해져 갔다. 그러 면서도 그 생각만 하면 그는 몸서리를 쳤다. 자기는 바보, 주제넘은 바보였던 것 이다. 스커퍼 플래츠에서는 여전히 작업이 계속되고 있었다. 계약대로 새해에는 일이 끝날 것이다. 그가 법산저택에서 가정교사 노릇을 하는 것도 끝이 났다. 아 서는 우수한 성적으로 면허장을 받았고 또한 댄 티즈데일도 그 자격을 따게 되 었다. 데이빗은 이제 격렬한 노여움과 비슷한 기분으로 자신의 공부에 몰두하고 있 었다. 마지막 학위시험은 12월 14일이 예정일이지만, 죽는 한이 있어도 이번 시 험에서 학위를 딸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그 자신이, 연기에 또 연기를 해 온 것이 이제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싫었다. 제니의 달콤한 말에는 귀를 틀어막 고 통신교육 과정을 마지막 한 단어까지 머리 속에 집어넣으려 애썼다. 매월 둘 째 주말에는 윌링튼의 카마이클 선생에게로 가서 지도를 받았다. 그도 이 정도 면 문제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다만 문제는 자신을 갖는 일이었다. 제니는 데이빗이 그녀를 쓸쓸하게 그냥 내버려두었기 때문에 불쌍하게도 몸집 마저 작어져 버린 듯했다. 그녀는 '방문객'도 없고 친구들도 없다고 불평을 늘어 놓으면서 이야기 상대를 찾아다녔다. 웹트 부인하고도 가깝게 지냈다. 웹트 부인 은 집세를 받으러 오는 것이었지만 말할 것도 없이 이 집 '방문객' 가운데 한 사 람임엔 틀림없었다. 웹트 부인이 교회 집회에 제니를 데리고 갈 만큼 모든 일이 잘 되어갔다. 제 니는 교회에 매우 흥미를 느끼고 있는 듯했지만, 데이빗은 제니에게서 모든 것 이 아주 촌스럽다는 말을 들은 것 외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낼 도리가 없 었다. 마지막 수단으로 제니는 친정 식구들을 생각해냈다. 친정 식구 가운데 누군가 가 이곳에 와서 함께 지내면 틀림없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면 누구 를 부르는 게 좋을 것인가? 지금 같은 상황이면 어머니는 안 된다. 나날이 뚱뚱 해지기만 하는 어머니는 몸도 무거울 테고 이곳에 와서 지내게 되면 온 집안이 온통 짓눌려 숨이 막힐 것만 같을 것이다. 필리스와 클래리는 못 올게 뻔했다. 이제 둘이 다 슬래터리 상점에서 근무하고 있기 때문에 빠져나올 수가 없을 것 이고,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설사 여가가 생겨 이곳에 온다고 하더라도 항상 비둘기가 졸졸 따라다니니 그것도 안 될 일이고! 이러다가는 언젠가 아버지 자 신마저 비둘기가 되고 말 것 같다. 남은 사람은 샐리였다. 샐리는 슬래터리에서 일하고 있지 않았다. 샐리는 신바 람이 나서 타인캐슬의 전화국에 근무하기 시작했다. 만일 샐리가 아직도 그대로 전화국에 근무하고 있었다면 지금쯤은 만사가 순조로웠을 것이다. 타인캐슬 전 화국은 여러 가지로 유리한 점이 있었고 거기서 하는 일은 깨끗하고 품위도 있 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아버지는 샐리에게 연극적 재능이 있다는 생각을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샐리를 뮤직 홀에 데리고 가거 나, 바리에테 스타들 흉내를 내라고 자꾸 부축일 뿐만 아니라 탭 댄스 연습을 하러 보내기도 하는 등 언제나 바보 같은 짓만 했다. 게다가 그것만으로도 만족 하지 못했는지 샐리를 토요일 밤마다 엠파이어 극장에서 열리는 '아마추어 연예 대회'에 나가도록 설득했던 것이다. 이 아마추어 연예대회는 아주 수준이 낮은 대회로 어중이떠중이가 다 출연하는 판이었다. 더욱 슬픈 일은 샐리가 이 아마추어 연예대회에서 우승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일등을 했을 뿐만 아니라 저급한 관객들을 깜짝 놀라게 했기 때문에, 극장 지배 인은 그 다음 일 주일 동안 그녀에게 출연을 제의하고 계약까지 했다. 그주 마 지막 날에 샐리는 페인 굴드 북부 순회 서커스단에서 6주간의 순회공연 출연신 청을 받아들였다. '왜 샐리는 그런 신청을 받아들이는 바보스런 짓을 했을까?' 하고 제니는 한탄 했다. 결국 샐리는 여러 가지 유리한 점이 많은 품위 있는 전화국을 그만두고 6 주간의 순회공연에 나가게 됐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장이 났 다. 그 다음으로는 아무런 출연 교섭이 없었으므로 그녀는 마냥 기다리면서 허 송 세월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샐리는 이제 직장을 잃은 지 4개월째였다. 가엾게도 전화국 쪽에서는 샐리같 은 사람은 두 번 다시 돌아다보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전화국은 품위 있는 곳 이므로 한 번 잘못 보이고 나면 절대로 복직을 시키지 않았다. 그렇다. '그건 제 손가락 제가 깨문 격이다! 가엾은 샐리!' 제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그렇긴 하지만 샐리가 이곳에 와서 같이 지내는 일은 괜찮은 일일 것 같았다. 게다가 불쌍한 여동생을 위하는 것이기도 했다. 제니는 자신이 은혜를 베푼다는 자기 만족감에 넘쳐 더 이상 생각해볼 것 없이 그렇게 하기로 결정을 했다. 이렇게 해서 11월의 셋째 주쯤 해서 슬리스케일에 도착한 샐리는 언니 제 니에게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제니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하며 그리운 샐리 를 껴안았다. "어머나, 이게 누구냐! 넌 옛날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구나!" 제니는 같은 말을 연발하면서 몹시 신이 나 했다. 깔깔대고 웃기도 하다가 새 가구로 꾸며좋은 손님용 침실을 보여주기도 하고, 뜨거운 물과 깨끗한 수건을 가지고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가는 재미있다는 듯이 샐리의 모자를 써보고는 "어 머나, 꼭 맞네, 그렇지? 꼭 맞지?" 하며 수다를 떨었다. 데이빗도 기뻐했다. 그는 이처럼 행복스러워 보이고 흥분한 제니의 모습을 아주 오랜만에 보았기 때문이 었다. 그러나 이런 시끌벅적한 분위기도 싱거울 정도로 이내 사그라져 버렸다. 제니 는 곧 2층 샐리의 방에 뛰어올라가는 것에 싫증을 냈고 함께 웃어젖히는 것도 시들해졌다. 제니에게 더없이 귀한 손님이었던 귀여운 샐리의 가치는 금세 바닥 을 드러냈고 신선함도 다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저 애도 이제 변했어, 데이빗. 저 애도 예전 같지가 않아요. 그래서 나도 저 애를 옛날처럼 대해줄 수가 없어요...." 일 주일이 지났을 무렵 제니는 슬픈 듯이 말했다. 그러나 데이빗은 샐리가 전 보다 순해졌고 더 성숙했다는 것 외에는 별로 달라진 걸 발견하지 못했다. 아마 도 제니가 너무 감정을 많이 쏟는 바람에 오히려 샐리 쪽에서 경계를 해야 했는 지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샐리는 자기가 이제 여기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 고 침울해졌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좌우간 샐리는 얌전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전에는 보지 못했던 깊은 생각이 담겨 있어 보였다. 그녀는 심부름을 하고 집안일도 돕는 등 모든 것을 잘하고 또 도움이 될 수 있 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마음을 열지는 못했다. 제니의 수다는 그녀를 더욱 안으 로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물론 샐리도 한 두어 번 소박한 부엌 조리대에 앉아서 따뜻한 난롯불을 쪼이면서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 놓기도 했다. 페인 굴 드 서커스단을 따라 여행했던 이야기며, 여관 안주인이나 지배인 이야기도 하고 분장실에는 늘 벌레투성이였다는 것, 자신이 미숙하고 당당하지 못해 공연에 실 패했던 이야기까지 숨김없이 말했다. 그녀는 '척'하는 것이 전혀 없었다. 예전에 도 남의 흉내를 잘 내는 샐리였지만 이제는 자기 자신의 겪은 일도 멋지게 흉내 를 내는 것이었다. 그녀 자신에게는 매우 부끄러운 이야기가 틀림없었지만 십헤 드에서 공연 후 관객에게 얼마나 야유를 받았느냐 하는 이야기를 가장 재미있게 했다. 제니는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샐리는 전혀 괴로운 표정 하나 없이 그런 이야기를 즐겁게 했다. 그녀는 자기 일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화장도 하지 않고, 입는 옷도 몇 벌밖에 없었으나 옷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 었다. 그녀는 언제나 한 벌뿐인 다갈색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샐리는 옷을 한 벌 사면 그 옷이 다 헤질 때가 되어야 또 다른 옷을 사는 식이었다. 그래서인지 변변한 나들이옷도 없을뿐 아니라 나들이 모자도 없었고, 예쁘고 고급스런 속옷 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검소하게 서지 스커트에 굽 낮은 힐을 신고 있을 뿐이 었다. 그녀는 몸집이 작은 데다가 땅딸막한 키에 얼굴이 조금도 예뻐지지 않았 다. 데이빗은 샐리 덕분에 매우 유쾌했지만 점점 심해지는 제니의 가혹한 태도 때 문에 다시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12월 초하루였을 것이다. 그가 학교에서 돌아오니 제니가 다소 흥분한 얼굴로 그를 반겨 맞았다. "잘 아는 사람이 슬리스케일에서 왔어요, 누군지 아시겠어요?" 그녀는 만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러자 옆에서 데이빗의 차를 준비하고 있던 샐리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버펄로 빌이 왔어요." 그러자 제니가 그녀의 말을 막았다. "넌 가만히 있어. 데이빗, 아마 상상도 못할 거예요. 조예요, 조가 왔다구요!" "조라니? 조 가울런이 돌아왔어?" 데이빗이 놀라서 소리치자 제니는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어요! 조 가울런이 아주 기가 막힌 멋쟁이가 되어 왔다구요! 경기가 아주 좋은 모양이예요. 교회네 가다가 만났는데 난 너무 놀라서 기절할 뻔했다구요. 물론 모르는 체하려고 했지요. 그라 우리 집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취한 태도는 그리 유쾌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가 얼마나 공손하게 인사를 하며 말을 거는지 난 지난 일 따위는 모두 용서해버리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 사람, 굉장히 훌륭한 사람으로 변했어요." 샐리가 언니를 향해 말했다. "형부 차 드시는데 냉육을 곁들여 드릴까?" 제니가 몹시 들뜬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지금은 그냥 차만 드려. 고기는 저녁식사 때 내놓을 거야. 조를 저녁식 사에 초대했거든. 데이빗, 당신도 그 사람을 만나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옛 친구잖아요!" "물론이지!" 데이빗이 어정쩡하게 대답하자 제니는 새초롬해지면서 말했다. "내가 괜히 수선을 피우는 게 아니예요. 난 그 사람에게 우리도 이렇게 살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거예요. 우리의 이 아늑하고 평화로운 집을, 멋있는 식 사를 준비해서 조에게 자랑하고 싶은 거예요. 다만 오늘 식탁에 커다란 생선을 올릴 수 없어서 유감이군요. 그런 생선이 있다면 새로 산 상아로 된 나이프를 내놓을 수가 있을텐데, 그렇지만 괜찮아요. 웹트 아주머니에게 다른 나이프를 빌 리면 되니까요. 이 정도만으로도 우리가 옛날과는 다르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수선을 피우고 싶다면 일류 식당에서 주방장을 부르시지 그래?" 샐리가 비꼬자 제니는 금세 화가 나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지금까지 즐거움으 로 들떴던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 "은혜도 모르는 막돼먹은 애 같으니! 그렇게 내 비위를 건드리려거든 아주 여 길 떠나주면 좋겠어. 난 지금까지 그래도 너에게 하느라고 했어. 그런데 넌 버릇 없는 말이나 하고...아니 저녁식사에 옛 친구를 초대하는 것이 뭐가 못마땅하다 는 거야. 그러려면 제발 가줘." "못 갈 것도 없지." 샐리도 지지 않고 코방퀴를 뀌며 차를 가지로 부엌으로 갔다. 조는 7시경에 왔다. 그는 엷은 다갈색 양복의 회중시계를 늘어뜨리고, 특히 눈 에 띄는 중산모를 쓰고 있었다. 그는 제니의 말대로 겸손하고 친절한 태도로 인 사를 했다. 데이빗이 염려하고 있었던 것처럼 괜히 큰 소리로 떠든다거나 누굴 놀려대는 일은 없었다. 사실 조는 어쩔 도리가 없어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외 모는 번듯했지만 속으로는 완전히 풀이 죽어 있었다. 있는 그대로 말한다면 실 업자였다. 그는 마음속으로 밀링튼은 승진시켜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 언약을 어떻게 잊겠는가. 그렇다. 밀링튼으로 가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그러나 아직은 안 된다. 지금은 안 된다. 뭔가 조에게는 염려스러운 것이 따로 있어서 그와 같은 결정을 실행할 수가 없었다. 조는 좀 염려스러운 점이 있었다. 아아, 인간이란 그 얼마나 바보스런 존재인가. 그가 걱정하는 일은 별로 대수롭지 않 은 일일 수도 있다. 아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 불안과 초조감은 오히려 조에게 어딘가 차분한 덕성이 풍겨나오는 것같이 보이게 했다. 그리고 늙은 아버지를 만난 조는 사실 스스로에 대해서 부끄러움 을 느꼈기 때문에 더 이상 떠벌이며 떠들어댈 용기도 없었다. 그는 옛 소꿉동무 인 데이빗을 만나니 기뻤고 또 깊이 감동도 했다. 그것은 매우 감격스런 장면이 었다. 조는 제니에게도 매우 겸손하게 대하며 무언가를 사과하는 듯한 태도로 행동 을 조심했다. 그는 집안의 가구들을 대단히 칭찬했다. 그리고 식탁에 차려진 음 식들, 사실 별것도 아닌 냉육과 완두콩 요리에 대해서도 감탄을 하며 많이 먹었 다. 또한 제니의 성숙함과 주부로서의 안정된 변모에 대해서도 매우 감탄한 모 양이었다. "아주 근사해!" 그는 몇 번이고 이 말을 되풀이했다. "스코츠드 시대와는 비교가 안 되는군!" 물론 나아진 건 이들뿐이 아니라 조 자신도 포함되었다. 그의 태도는 정중했 고 예의 발랐다. 이 모든 것이 제니에게는 모두 꿈같이 달콤하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교양이 풍기는 점잖은 태도마저도 잊어버리고 예전처럼 돌아갈 위험을 내보이곤 했다. 제니는 하여간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고 흥이 나 있었다. 그것은 조가 제 니에게 관심을 보이며 여러 가지 물어보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절대로 그런 것 은 아니었다! 조는 최근에 여자와 어울릴 여유가 거의 없었으나, 제니에 대한 그 의 관심은 단순한 친구로서였고 예의 바른 것이었다. 조는 다만 데이빗에게만 이것 저것 질문을 던지고 흥미를 보이며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데이빗이 앞으 로 2주일 안에 학위 시험을 친다는 것은 굉장한 소식이었고, 주말에 카마이클 선생에게 공부하러 간다는 것도 다시없이 현명한 생각이라고 칭찬했다. "옛날부터 너는 정말 머리가 좋은 놈이었으니까. 응, 그렇지, 데이빗?" 조와 데이빗은 식후에도 오래도록 이야기를 했다. 제니는 내내 들락날락하면 서 즐겁게 콧노래를 부르며 가끔 두 사람의 기분이 어떤지를 물어보곤 했다. 샐 리는 화를 꾹 참으며 부엌에서 설거지를 했다. "다시 자네를 만나서 즐거웠어." 조가 일어나가 데이빗이 마지막으로 다시 말했다. "이 친구야,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지." 조도 맞받아 말하면서 크게 웃었다. "정말 이렇게 기쁜 일은 없어. 난 한 두어 주 동안 이곳에 있을 작정이야. 우 리 서로 자구 만나자. 그건 그렇고 우리 잠깐 저기까지 걸어가지 않겠나? 응, 나 가자고. 아직 밤이 깊지도 앉았어. 그런데 말이야...." 조는 골목길을 나가다가 말을 멈추고 회중시계를 만지작거리면서 즐거움이 가 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군, 데이빗. 사실은 오늘 오후 아버지에게 가지고 있던 돈을 몽땅 털어 드렸더니 돈이 한 푼도 없어. 오랜만에 아버지를 만나서 마음이 관대해진 모양이야. 2파운드만 빌려줄 수 없겠나? 은행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만이야. 겨우 2파운드네. 괜찮겠지...?" "2파운드라고...조?" 데이빗이 깜짝 놀라며 조를 바라보았다. "왜? 곤란하면 그냥 두 개나." 조의 얼굴에서 금세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기분이 몹시 상하고 화까지 난 모 습이었다. 그 기름기가 도는 얼굴에는 우정도 예의도 다 짓밟혔다는 불쾌감이 역력하게 나타나 있었다. "싫다면 관두게...난 뭐 괜찮으니까...다른 친구를 찾으면 될 테니까." "아니, 조...." 데이빗은 조의 상처 입은 듯한 표정을 보자 가슴이 쓰렸다. 갑자기 자신이 몹 시 째째하고 지독한 인간처럼 느껴졌다. 그는 침실 장롱 서랍에다 넣어둔 10파 운드를 떠올렸다. 그 돈은 시험 비용을 위해 모아둔 것으로 절약에 절약을 거듭 해서 겨우 마련한 돈이었다. 그는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좋아! 빌려주겠어. 조, 가지말고 잠깐만 기다려." 그는 집안으로 들어가 2층으로 뛰어올라가 3파운드를 꺼내왔다. 그 돈을 받아 드는 조의 얼굴에 친구에 대한 믿음이 담긴 따뜻한 표정이 되살아왔다. 그는 곧 싱글벙글 웃기 시작했다. "너라면 옛날 친구에게 호의를 베풀어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어. 이번 주말까지 야, 알았지?" 조는 애정이 넘치는 얼굴로 인사를 하고는 급히 사라졌다. 데이빗은 돌아서 카우펀 가를 걷기 시작했다. 오늘밤은 아버지를 만나러 가기 로 했는데 좀 늦은 것이다. 시계가 벌써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조 때문에 생 각보다 시간이 늦고 말았다. 시간이 늦으면 어머니는 싫은 얼굴을 보인다. 자기 를 덜 생각하는 증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베들 가를 지나 지름길로 갈 작정으로 프리홀드 가를 걸어가다가 휴이가 짧은 바지 바람으로 깜깜한 어둠 속 에서 숨을 헐떡이며 거리를 달려가는 것을 보았다. 데이빗이 큰 소리로 형을 불 렀다. "휴이 형! 휴이 형!" 휴이는 마치 날아가듯 급히 뛰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휴이가 겨우 알아들 은 듯 뛰는 것을 멈추더니 길 이쪽으로 건너왔다. 벌써 5킬로미터나 뛰었으면서 도 느긋하게 숨을 내쉬던 그는 자기를 부르는 사람이 데이빗인 것을 알자 "여 어!"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갑자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데이빗, 너구나!" 데이빗은 형의 팔을 떼어냈다. "왜 이래, 형?" 그러자 형은 다시 펄쩍펄쩍 뛰며 큰 소리로 말했다. "왔어, 데이빗. 드디어 왔다니까. 알겠니? 오늘 오후 편지가 왔단 말이야. 탄광 에서 돌아와 보니까 와 있는 거야, 초청 편지가. 데이빗, 멋있지 않니!" "초청 편지라니? 무슨 얘기야, 형?" 데이빗은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데이빗은 이런 모습의 형을 지금까지 본 적 이 없었다. 휴이를 처음 본 사람이라면 술에 취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휴 이는 취해 있었다. 환희에 취해 있었다. "타인캐슬의 선수로 와달라는 초청장이지! 어때, 믿어지니? 그 사람들이 지난 번 토요일에 열렸던 시합을 보고 갔단 말이야. 이쪽에선 전혀 모르는 일이었어. 내가 세 골이나 넣었거든...내가 헤드 트릭(한 사람이 세 번 득점하기)을 했다는 이 말씀이야. 데이빗...그래서 이번 토요일에 세이트 제임스 공원에서 시합에 출 전하기 않겠느냐는 거야. 어때, 야! 근사하지! 그 시합에서 잘만 뛰면 본 계약을 하게 되는 거라구. 데이빗...유나이티드 팀과 계약하게 되는 거라구. 데이빗, 유나 이티드란 말이야!" 휴이의 목소리는 감격으로 떨리고 있었다. 데이빗은 이해할 수 있었다. 드디어 여기까지 온 것이다. 형이 바라고 갈망하 던, 게다가 불가능한 꿈으로만 생각했던 것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휴이는 엄격 한 생활로 자신을 단련하여 드디어 바라던 목표를 이룬 것이었다. 토요일 밤마 다 램 가에서 그에게 그렇게도 유혹을 해대던 여자들에게 눈도 돌리지 않고 굳 게 자신을 지켜나간 것이 이로써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갑자기 데이빗은 넘치 는 행복을 느끼며 형에게 축복의 손을 내밀었다. "정말 기뻐, 형." 자신이 느끼는 커다란 기쁨을 나타내기에는 이 말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새삼 스럽게 느꼈다. 휴이가 계속 말했다. "그들은 벌써 몇 달 동안 내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거야. 전에도 내가 그런 말을 했잖아?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나도 모르겠군. 하지만 한가지 만은 확실하다. 나는 이번 토요일에 목숨을 걸고 시합을 한다는 거지. 응, 데이 빗, 얼마나 멋있냐!" 그는 황홀한 마지막 말로 인해서 겨우 제정신이 든 모양이었다. 얼굴을 붉히 며 데이빗을 훔쳐봤다. "내가 오늘밤은 너무 수다스러웠다. 이렇게 흥분을 하고 있으니 할 수 없는 노 릇이지." 하고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러다가 다시 말했다. "너도 시합에 와주겠지, 데이빗?" "가고말고, 형. 가서 목이 터지도록 응원할게." 휴이는 싱긋 웃었다. 그것은 언제나와 같은 수줍은 미소였다. "샘도 올 거야. 내가 여섯 골을 넣지 못하면 내 목을 비틀겠대!" 휴이는 예전부터 하던 버릇대로 선 채로 조금 발뒤꿈치를 들면서 균형을 잡기 위해 몸을 흔들다가 또 말했다. "난 감기에 안 걸리도록 조심하고 있어. 여기서 기회를 놓치고 싶지가 않기 때 문이야, 데이빗." "잘 가, 휴이 형." 다시 뛰기 시작한 휴이는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데이빗은 가슴에 뭔가 따뜻한 온기 같은 것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 지도 건강해 보여서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보니 샐리가 혼자서 난 롯가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매우 작았고 외로워 보였다. 형 휴이의 기쁨에 찬 모습을 보고 온 그인지라 그녀의 쓸쓸한 모습이 더욱 마음에 걸렸다. "언니는 어딨지?" "잠들었어요!" "아, 그래." 그는 실망한 태도로 입을 다물었다. 지금 당장 데이빗은 형에 대한 기쁜 소식 을 제니에게 전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샐리에게 이야 기하기 시작했다. 그가 이야기하는 동안 그녀의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한 쪽 손 으로 뺨을 가린 채 그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어때, 아주 멋진 일이지?" 그는 말을 맺었다. "물론 형이 얻은 것이 별 것 아니라고 할지라도 말이야...그러나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 형은 굉장히 노력해왔거든." 샐리는 한숨을 쉬었다. 조금도 기쁘지 않은 얼굴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래요, 바라던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죠." 그는 그녀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 있었어?" "아무것도 아니예요." "아무것도 아닌 얼굴이 아닌데...화가 난 얼굴인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난 아무래도 모자라는 사람인가봐요. 조금 전까지 언니와 싸웠어요." 그는 급히 눈길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무슨 일로 다투었어?" "하찮은 일이었어요. 뭐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요, 난 사실 처음부터 이런 일 이 생기리라고 생각했었어요. 난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내일 아침 살짝 가버 리려던 참이었는데...공연히 이야기를 시작했군요." "간다고, 내일?" "네에, 갈 거예요. 벌써 갔어야 하는 건데...아버지가 보고 싶어요. 아버지는 아 무 권한도 없고 몸에서도 비둘기 냄새만 풍기지만 그래도 난 아버지가 제일 좋 아요." "왜 싸웠는지 알고 싶은데...." "모르는 게 더 좋을 거예요." 샐리의 단호한 말에 약간 당황한 그는 급히 시선을 돌렸다. "샐리가 이렇게 떠나는 것은 반갑지 않군! 가지 않으면 안 될까?" "아니, 가야 해요. 사실 입을 옷 같은 것도 갖고 오지 않았고...." 그녀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가 싶더니 그것은 금세 울음으로 변해버렸다. 데이빗이 더욱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데 다행이 울음은 곧 그쳤다. "미안해요, 제정신이 아닌가봐요. 프리마돈나가 되려고 하다가 그 꿈이 깨진 다음부터 전 좀 이상해졌나봐요. 감정 조절이 어려운 거예요. 동정 같은건 하지 마세요. 그래도 한번 무대에 서본 것이 안 한 것보다 훨씬 좋으니까요. 아, 이제 기분이 훨씬 좋아졌어요. 이제 가서 자야겠어요." "그렇지만 내가 미안해지는 걸." "아무 말도 마세요. 지금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 마 세요. 그보다는 자신의 일을 걱정하고 불쌍하다는 것을 느껴야 할 거예요." "그건 무슨 소리지? 내 자신을 불쌍한 줄 알라는 소린가?" "아무것도 아니예요." 그녀는 일어섰다. "그런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예요. 내일 아침에 이야기하죠, 뭐." 그녀는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는 잠자리로 가버렸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그 는 샐리를 만나지 못했다. 그녀는 아침 일찍 일어나 7시 기차로 떠나버렸다. 그 날 하루 종일 데이빗은 샐리가 마음에 걸렸다. 학교에서 돌아와서 제니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제니는 유쾌하게 웃어댔다. "그 애는 질투를 하고 있는 거예요. 틀림없이 질투를 하는 거라구요." 그는 기분이 상해서 반박을 했다. "천만에,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구. 아주 심각했어." 그녀는 생글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애는 그전부터 당신에게 마음이 있었던 거예요. 스코츠드에 있을 때도 그 랬더랬어요. 당신이 나한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을 보는 게 싫은 거예요. 그리고 지금은 그게 더욱더 심하게 된 거예요." 그녀는 말을 멈추고 그에게 미소를 보냈다. "당신은 지금도 나에게 친절하게 해주시잖아요, 그렇죠, 여보?" 그는 미묘한 고통의 빛을 띤 채 제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정말 사랑해, 제니. 당신이 결점투성이 인간이라는 것을 나는 알아. 그 것도 나도 마찬가지야. 때때로 당신은 내가 싫어하는 것을 말하고 또 행동하는 데...그런 때는 정말 참을 수가 없어. 그러나 이것도 나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는 일이야. 당신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그가 하는 말 따위는 잘 들으려고도 않고 그저 칭찬으로만 받아들여 행복하게 미소 지었다. "당신은 참 이상한 분이예요." 그녀는 장난스럽게 눈을 살짝 흘겨 보이며 말했다. 그러고는 읽고 있던 소설 책을 다시 집어 드는 것이었다. 그는 제니를 향한 자기의 감정을 분석해본 적이 없었다. 어떠한 것이라도 그 대로 단순히 받아들이곤 하였다. 그러나 샐리가 그렇게 떠나고 난 이틀 후인 금 요일에 그의 마음을 묘하게 뒤흔들어 놓는 사건이 발생했다. 보통 그는 4시 전에는 학교의 문을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이날은 스트로더 교장이 3시에 그의 교실로 대신 수업을 하러 왔다. 일주일에 한 번씩 금요일 이 시간에는 수업의 진도 상황을 조사하고, 담임교사 앞에서 권위적이고도 신랄한 수업 비판을 하려고 학급마다 대신 수업을 하러 들어오는 것이 스트로더 교장의 습관이었다. 데이빗이 본격적으로 학위 시험 공부에 들어간 후부터 스트로더 교 장은 그전보다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상냥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기분 좋게 데이 빗에게 퇴근해도 좋다고 말했다. 데이빗은 교문을 나왔다. 그리고 우선 핸즈 메서 이발관에 이발을 하러 갔다. 카이젤 수염을 위로 치켜 올린 뚱뚱하고도 유순해 보이며 언제나 싱글벙글 웃는 핸즈가 머리를 깎고 있는 동안, 데이빗은 지금 막 넵튠 탄광에서 나와 이발관 안쪽에서 수염을 깎고 있는 스위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스위는 명랑하게 가 벼운 농담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스위는 언제나 유쾌하고 가벼운 농담이라면 얼 마든지 해대는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수염을 깎는 중에도 쉬지 않고 이야 기하며 부질없는 농담까지 해대면서도 면도를 할 때 얼굴 하나 베는 일이 없었 다. 데이빗은 그러한 스위와 이야기를 하고 나니 기분이 가벼워졌다. 그러나 그 기분은 30분도 채 안 돼 깨지고 말았다. 그는 언제나4시 15분에 지비에 돌아오 는데 그날 집에 도착한 것은 3시 30분이었다. 모래 언덕 뒤쪽 오솔길을 지나오 는데 자기 집에서 나오는 조 가울런과 마주치게 되었다. 데이빗은 발을 멈추었다. 그는 못이라도 박힌 듯이 서 있었다. 조와는 돈을 빌 려준 이래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런 조가 마치 자기 집에서 나오는 것처럼 익숙하게 대문을 나오는 것을 보고 데이빗은 매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 은 좀 어색한 느낌이었다. 조 역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자 더욱 이 상한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밤에 여기에 지팡이를 놔두고 간 것 같아서 들렀네." 조는 데이빗의 얼굴은 보지도 않고 다른 곳만 바라보면서 말도 안 되는 변명 을 중얼거렸다. "자네가 지팡이를 갖고 있는 것은 못 본 것 같은데." 조는 거리의 이곳 저곳에 눈길을 보내며 소리를 내어 웃었다. 아마 그 길거리 부근에 지팡이가 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지팡이는 분명히 가지고 있었어. 등나무 지팡이인데 나는 언제나 가지고 다니 거든. 그걸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이거 야단났는 걸." 조는 그런 말을 중얼거리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해 보이고는 허둥지둥 사라 져버렸다. 데이빗은 생각에 잠기며 그 오솔길을 올라가 집으로 들어갔다. "제니, 조가 왜 왔었지?" "조가!" 힐끔 그를 바라보는 제니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지금 막 만났지...집에서 나오는 것을." 그녀는 몹시 당황한 것을 감출 길이 없자 갑자기 화를 발끈 냈다. "당신이 조를 만났으면 만났지 나와 무슨 상관이라는 거예요? 내가 조를 지키 는 사람인가요? 조가 지나는 길이라고 잠깐 들렸더라구요. 왜 나를 그렇게 노려 보는 거예요?"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는 얼른 얼굴을 돌려버렸다. 어째서 제니는 지팡이에 관한 말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일까? "아무것도 아니란 게 무슨 말이예요?" 그녀는 몹시 기분이 상했다는 듯 날카롭게 말했다. 그는 창 밖으로 눈을 돌렸 다. 조 녀석은 왜 내가 학교에 가고 없을 때 찾아왔을까? 도대체 무엇 때문일 까? 엉뚱한 때에 조가 방문했다는 것, 조의 그 초조하던 태도, 허둥지둥 가버리 던 모습, 그 모든 것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그는 그 이유가 머리에 떠올랐다. 조 는 자기한테 3파운드를 빌려갔으면서도 아직 그것을 갚을 수가 없기 때문인 것 이다. 금세 얼굴이 밝아진 데이빗은 제니 쪽을 바라봤다. "조는 지팡이를 찾으러 왔었지...그렇지?" "그래요." 그녀는 갑자기 격한 몸짓으로 그의 품안으로 뛰어들며 소리쳤다. "지팡이를 찾으러 왔던 거예요. 도대체 그가 무슨 용건으로 왔다고 생각했나 요?" 그는 제니의 아름답고 부드러운 머리를 어루만지며 그녀의 마음을 달래주었 다. "미안해, 제니. 다만 나는 그 녀석이 마치 자기 집처럼 여기서 나오는 것을 봤 기 ㄸ문에 아주 야릇한 기분이 들었던 거야." "어머나, 여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그녀는 울면서 말했다. 자기가 무엇을 말했다는 것인가? 데이빗은 웃음 띤 얼 굴로 그녀의 새하얗고 보드라운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응석을 부리듯 말했다. "당신 나한테 화난 거 아니죠, 데이빗?" 도대체 왜 자기가 그녀에게 화를 낸단 말인가? "천만에, 그럴 리가, 여보." 그녀는 마음이 놓였는지 눈물에 젖은 그 맑고 깨끗한 두 눈을 치켜 떴다. 그 리고 그녀는 그에게 키스를 했다. 그녀는 그날뿐만 아니라 이튿날까지도 지나칠 정도로 친절했다. 다음날은 토요일이었는데도 그녀는 전에 없이 일찍 일어나 데 이빗에게 아침 차를 끓여주었다. 또 그날 오후에는 그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전거를 타고 카마이클 선생에게 공부하러 가는 것을 배웅나와서는 그의 목덜 미에 매달려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제니는 마지막 포옹까지 하고 나서 가까스로 그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데이빗이 자기를 사람하고 있다는 것과 자기 스스로에 대한 만족감, 또 눈앞에 펼쳐질 자유스러운 긴 주말을 생각하니 즐거워져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면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그녀도 그날 밤 저녁식사에 조를 부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꿈에 도 그런 생각이 없었는데, 낯짝 두껍게도 슬쩍 찾아왔던 조가 그런 말을 먼저 꺼낸 것이다. 옛날 이야기나 나누기 위해서라고 조는 말했지만, 어떻게 그럴 수 가 있겠는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데이빗에게는 굳이 조의 그러한 뻔뻔스러 움을 알릴 필요가 없었기에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쓸데없는 이야 기를 해서 데이빗의 착한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또 두 사 람은 옛 친구가 아닌가! 친구 사이를 깨뜨릴 필요가 있겠는가! 그날 오후 그녀는 시내에 나가 산보를 즐겼다. 머치슨 상점 앞에서 발을 멈춘 그녀는 이것 저것 생각하는 듯한 모습으로 서 있다가 '그래, 그것이 집에 있으면 요긴하게 쓰이겠지.' 하고 마음을 결정하고는,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환 자용이라고 하면서 포도주 한 병을 품위 있게 주문하고 오늘 저녁까지 틀림없이 집으로 배달해달라고 머치슨에게 부탁했다. 데이빗이 자기가 술을 마시는 걸 좋 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제니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제니는 데이빗이 요즘 자주 엉뚱한 소리만 하고 있는 데다 어쨌든 오늘은 집에 없으니까 이런 걸 절대로 알 아채지는 못할 것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또 속담에도 있는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을 정말 좋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제니는 엷은 웃음을 띠며 집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잡지책에 나와 있는 그대로 귀 뒤쪽에다 향수를 바르고 아름답게 치장을 했다. 제니는 비록 자기 혼자일때도 치장을 해서 예쁘게 보이 려고 하였다. 7시가 되자 조가 현관에 나타났다. 초인종 소리에 제니는 나갔다. "어머나, 기가 막혀. 그만큼 얘기했는데...." 제니가 화가 난 것처럼 외쳤다. "아, 아, 왜 이래, 제니." 조는 비위를 맞추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옛 친구에게 그렇게 냉정하면 못써요." "아유, 엉큼해라. 당신 같은 사람 절대로 우리 집에 못 들어와요." 그러나 그는 집안으로 아무 문제없이 들어왔다. 그리고 밤이 깊도록 그녀는 그를 돌려보내는 것을 잊은 듯했다. 그녀는 술이 취해 얼굴은 빨개졌고 몸이 흐 트러진 채로, 약간 겁이 나는 듯하면서도 연신 키득거리며 웃었다. 결국 환자용 이라고 샀던 포도주 한 병이 다 동이 나버렸다. 22 그 다음날은 12월 7일, 일요일이었다. 리디 형제의 맏형 잭 리디와 단짝인 차 리밍은 스커퍼 플래츠 탄광에서 시간외 근무를 했다. P.W회사와의 계약을 환수 하려고 그들은 일을 두 배로 하고 있었다. 로버트도 같은 작업 고대반으로 갱도 훨씬 안쪽의 경사진 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 곳은 작업조건이 아주 나쁜 장소였다. 리디와 리밍이 굴진 작업을 하는 곳은 갱 밑바닥에서 약 3.5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여기보다는 작업조건이 좋았다. 교대시간인 5시가 되자 그들 작 업조는 작업을 중지하고 갱 밖으로 나왔다. 리디와 차 리밍은 커다란 석탄 덩어 리를 아직 파내지 않고 굴진의 벽면에 남겨두고 갱을 나왔다. 이 석탄덩어리를 파내면 탄차로 대여섯 대 분량의 질 좋은 석탄이 나오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 면 내일 아침 탄갱에 들어가서 해야 할 일이 훨씬 수월해질 것이었다. 아주 기분이 좋아진 잭 리디와 차 리밍은 '어서 오십쇼' 주점에 한 잔 하러 들 어갔다. 잭이 약간의 돈을 가지고 있었다. 일요일 밤이었지만 좀 과하게 마신 두 사람은 상당히 취기가 올라 있었다. 두 사람은 기분 좋게 어깨동무를 하고 노 래를 부르며 비틀비틀 달동네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집에 도착해 잠이 들었다. 두 사람은 다 다음날 아침 늦잠을 잤으나 그들은 자신들이 늦잠을 잔 것이 얼마 나 고마운 일인지를 알지 못했다. 2지구 갱의 검사주임인 디닝은 월요일 새벽3시 반, 파라다이스 갱구에 들어가 작업장 검사를 했다. 그는 언제나 아침 교대반 광부들이 갱에 들어가기 전에 갱 내 검사를 끝내기로 했던 것이다. 스틱을 손에 들고 머리를 숙인 채 디닝은 믹 슨과 스커퍼 플래츠의 탄층 두 곳을 열심히 조사하고 다녔다. 아무 곳에도 이상 이 없어 보여 디닝은 스커퍼의 삭도에 있는 자기 근무 구멍으로 돌아와서 규정 대로 보고서를 작성했다. 아침 교대반 광부들이 곧 갱도로 들어왔다. 모두 합해서 105명으로 어른 87명 에 아이들이 18명이었다. 그 중에서 봅 오글과 텔리 브라운이 삭도에 있는 디닝 에게로 갔다. "잭과 차가 늦잠을 자는 바람에 근무에 못 들어왔어." 봅 오글이 말했다. "망할놈의 새끼들!" 디닝은 화를 냈다. "탤리와 내가 그쪽에서 굴진 작업을 해도 좋겠나?" 봅이 말했다. "우리가 작업하는 데는 굉장히 지독한 곳이라서 말이야." "망할놈의 새끼들!" 하며 디닝은 "그렇게 해, 그럼." 하고 대답했다. 오글과 브라운은 다른 광부들과 함께 삭도를 걸어갔다. 거기에는 로버트, 휴 이, 글로거 리밍, 해리 브레이스, 스위 메서, 톰 리디, 네드 소프틀리, 예수웹트 등이 있었다. 또 툼 리디의 동생으로 이번주에 처음으로 정식 입갱한 열다섯 살 짜리 소년 패트도 뒤따라 가고 있었다. 로버트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몸도 가뿐했고 힘이 넘치는 듯 했다. 푹 잤기 때문에 기침도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그는 이 몇 개월을 보내는 동안에, 침수의 두려움도 근거 없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에 완전히 안심하고 있었다. 지하 200미터 주갱에서 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1미터가 조금 넘는 높이의 어둡고 경사진 갱도를 걸어가면서 그는 리디 집안의 막내동생인 패트가 자기 옆 에 있는 것을 느꼈다. "헤이, 페트." 그는 소년의 겁이 난 듯한 얼굴을 보자 농담을 던졌다. "여기는 말이다, 휴일에 놀러오면 좋을 곳이란다." 패트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면서 '스웰리' 라고 불리는 침하지점을 지나서, 안 쪽 깊숙이 있는 자기들에게 맡겨진 굴진 장소로 슬로거와 함께 나아갔다. 이 굴 진 장소는 요 몇주 동안 어느때 보다도 아주 건조했다. 오글과 브라운은 훨씬 더 바깥 굴진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들은 잭과 차가 어 제 남겨둔 석탄덩어리를 발견했다. 그들은 작업을 시작해 그 석탄덩어리 표면에 2미터 가량 폭파 구멍을 파고 나서, 쑥 내민 오른쪽에도 똑같은 깊이의 구멍을 팠다. 5시 15분 전, 검사주임인 디닝이 왔다. 그는 폭약을 거기다 짚어넣고 불을 붙였다. 여덟 탄차 분의 석탄이 무너져 내렸다. 디닝은 폭파가 잘 되어 탄갱 벽면의 탄층선 쪽이 똑바로 잘려진 부분을 보았 다. "멋지게 됐어!" 그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스커퍼의 삭도 쪽에 있는 근무 구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후 10분쯤 지나 손수레 차 담당인 톰 리디가 뛰어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오글이 좀 와달라고 합니다. 아까 폭파했던 구멍에서 물이 나온다고 하더군 요." 디닝은 잠깐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잡소리들을 하고 있구먼." 톰 리디와 디닝은 굴진 장소로 왔다. 디닝은 자세히 탄층면을 조사했다. 아까 자기가 폭파한 두 개의 구멍 한 복판 근처에서 가느다란 물줄기가 졸졸졸 흘러 내리고 있었다. 별로 큰 압력을 가진 물 같지는 않았다. 디닝은 물에서 나는 냄 새를 맡아봤다. 숨이 콱 막히는 나쁜 냄새가 났다. 유독 가스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메케한 냄새였다. 그는 그것이 새로운 탄층에서 나오는 물이 아 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아주 기분이 나쁜 징후라고 생각했다. "제기랄, 네놈들이 만든 구멍이야. 어떻게 해서든지 물을 처리해." 오글, 브라운, 톰 리디는 그 벽에다 철판을 대서 물이 배수로의 낮은 쪽 벽으 로 흘러내리도록 하였다. 바로 그때, 톰 리디와 함께 스커퍼 플래츠에서 손수레 를 밀고 있는 조디 디닝이 지나갔다. "야, 조디." 디닝이 외쳤다. 디닝은 악의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덮어놓고 욕설을 내뱉 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자기 아들 앞에서는 전혀 그런 천박한 말을 하지 않았다. 디닝은 조디를 데리고 자신이 일하는 구멍으로 들어갔다. 급히 돌아가면서 내 선 전화가 있다는 걸 생각해냈다. 그러나 전화가 있는 곳까지는 약간 거리가 있 었고, 아직 시간이 일러서 부감독인 허즈페드가 갱 밖 사무실에 출근해 있지 않 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디닝은 판단력이 좀 부족했다. 자기가 일하는 구 멍에 돌아온 그는 복사용 연필 동강 하나를 꺼내서 두 통의 편지를 썼다. 그는 이따금 연필 끝에 침을 묻히면 열심히 써 내려갔다. 디닝이 쓴 첫 번째 편지는 다음과 같았다. "부감독 윌리엄 허즈페드님께 스커퍼 제6번 갱에서 갈려나온 지갱에 물구멍이 생겼습니다. 경사로에는 장화 가 빠질 정도로 많은 물이 나와서 운반로까지 넘쳐오는 통에 이제는 펌프의 조 작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저는 파라다이스 삭도 안 제 근무처나 아니면 믹슨 제 2번지 갱에 있겠습니다. 추서. 침수의 위험이 대단히 큽니다. H.디닝 드림." 그리고 또 다른 편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스커퍼 제6번 지갱에서 물이 터졌음. 프랭크 군, 자네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 해 파라다이스의 다른 입갱자들에게 경고해주기를 바람. 이상. H.디닝." 디닝은 자기 아들을 돌아다봤다. 그는 원래 행동이 느리고 생각하는 것도 느 린데다 말하는 것까지 느렸다. 그러나 지금은 여느 때보다는 훨씬 말이 빨라졌 다. "조디, 넌 소방계의 프랭크 로건에게 달려가서 이 편지를 전해라. 그리고 이 편지는 갱 밖의 부감독님 집에 전해라. 빨리 뛰어가 조디. 알겠나, 뛰어가라." 조디는 두 통의 편지를 가지고 나섰다. 그는 급히 뛰었다. 갱이 갈라지는 곳 까지 와서 전행계를 찾았지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 조디는 쿵! 하는 희 미한 울림소리를 들었고, 공기가 역류하기 시작했다는 걸 느꼈다. 조디는 스커퍼 플래츠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빨리 갱 밖으로 뛰쳐나오고 싶 었지만, 아버지가 시킨 일을 생각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파라 다이스 운반로 한복판으로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석탄을 가득 실은 넉 대의 탄차가 연결 고리가 끊긴 채 어둠속에 서 마구 돌진해왔다. 탄차는 훨씬 위쪽에서부터 무서운 힘으로 내려왔다. 조디는 고함을 지르며 옆으로 펄쩍 뛰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탄차 행렬은 연달아 그 를 깔아뭉개면 거의 20미터나 끌고 돌진하다가 갈기갈기 찢긴 그의 몸뚱이를 레 일 위에다 팽개쳤다. 그러고도 탄차행렬은 으르릉거리며 계속 달렸다. 디닝은 아들을 보낸 다음 자기는 할 일을 다했다는 안도감에서 잠시 그 자리 에 서 있었다. 그러다가 쿵! 하는 커다란 소리를 들었다. 이 소리는 아까 조디도 들은 소리였지만 디닝이 더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크게 들려왔던 것이다. 그 순간 디닝은 돌같이 굳어져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무슨 일 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처럼 갑작스레, 아니 이처럼 무서운 일이 닥쳐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직감적으로 그 소리가 물 이 터져 나오는 소리라는 걸 알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플래츠 속으로 들어갔지 만 10미터도 채 못 가서 물이 자기쪽으로 무섭게 밀려오는 것을 봤다. 물은 천 정까지 가득 채울 만큼 엄청난 양으로 무서운 소리를 내면서 밀어닥쳤다. 물 속 에는 오글과 브라운 외에도 열 사람 가량의 몸뚱이가 떠 있었다. 물보다 더 먼 저 밀려온 가스 때문에 그의 램프 불이 꺼지고 말았다. 물이 거세게 흘러오는 소리로 가득한 암흑 속에서 약 2초 가량의 사이에 디닝은 생각했다. 제기랄! 그 래도 조디를 갱 밖으로 내보내서 천만 다행이구나! 그러나 이미 그의 아들 조디 는 죽어있었다. 그 순간 물은 디닝을 휩싸안았다. 그는 저항하듯 버둥거리며 헤 엄을 치려고 애썼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물이 가득 넘쳐 흐르는 스커퍼의 삭도 에는 디닝을 포함한 열네 사람의 익사체가 떠올랐다. 파라다이스 갱구의 소방계원 프랭크 로건은 디닝의 편지를 받지 못했다. 편지 는 완전히 잘려진 조디의 손아귀 속에 꽉 움켜쥐어진 채 피투성이가 되어 암흑 속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프랭크도 그 쿵! 하는 희미한 울림소리를 들었 고, 곧바로 무릎 깊이로 차오르는 물이 경사로에서 흘러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편지는 받지 못했지만 그도 물구멍이 터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가까이에는 열다섯 명의 광부들이 작업중이었다. 그는 우선 그들 중 두사람 에게 당장 통풍 구를 통해서 파라다이스 갱구의 하층 작업장에 있는 광부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 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나머지 열세 사람에게는 2킬로미터 위쪽에 있는 수갱까 지 도망치라고 소리질렀다. 로건 자신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았다. 파라다이스 갱구에서 가장 아래쪽에 있는 작업장이 스커퍼라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그 어 느 곳보다도 먼저 그쪽에 물이 범람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되 돌아서서 그곳에서 일하는 광부들에게 경고를 하려고 내려갔다. 그가 출발도 하 기 전에 그들은 이미 다 익사하고 말았음을 알리 없었다. 또한 프랭크 로건도 다시는 살아서 모습을 나타내지 못했다. 소방계원 프랭크 로건이 탄갱 밖으로 내보낸 열세 사람은 애틀러스 수평갱도 에 도착했다. 여기까지 온 그들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의논을 하기 시작했다. 애틀러스는 파라다이스와 바로 그 위의 탄층인 글로브 콜을 연결하는 갱도였다. 의논한 결과, 위에 있는 탄층 쪽이 물이 덜 찰 것 같으므로 글로브콜을 통해서 수갱으로 나가는 편이 안전하리라고 결정했다. 그래서 그들은 글로브콜 쪽으로 수평갱도를 따라 올라갔다. 여기서 그들은 대운반로에서 일하고 있던 몇 명의 벽돌공들과 부딪쳤다. 이들은 물구멍이 터진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벽돌공들은 서로 의논을 하면서 잠깐들 지껄이다가 귀를 기울이곤 하면서 전전 긍긍한 채 갱 밖으로 나가야 하는지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하는지를 결정하지 못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도 갱 밖으로 나가기로 결정했다. 애틀러 스 수평갱도로 올라온 열세 사람과 합세해서 한덩어리가 된 벽돌공들도 수갱 쪽 으로 나아갔다. 그 3분쯤 후에 거대한 물줄기는 파라다이스 운반로까지 내려와 애틀러스 수평 갱도를 집어삼키고 글로브 콜의 대운반로로 밀어닥쳤다. 모두 그 물소리를 듣자 일제히 뛰기 시작했다. 이 길은 잘 닦아 놓아서 천정도 높고 바닥도 단단하게 다져져 있었다. 또 그들은 모두가 젊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빨리 뛸 수가 있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처럼 빨리 뛴 일은 여태껏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물의 속력은 대단히 빨랐고 그 기세는 무시무시했다. 그것은 마치 야 수처럼 사납게 그들을 추격해 아침에 밀려들어오는 바닷물처럼 빠른 속도로 달 려들어 곧바로 그들을 덮쳤다. 1분 전 까지만 해도 물 한방울 없었던 글로브콜 이었건만 한순간에 사람들을 말끔히 씻어가 버렸다. 계속 휩쓸고 밀려든 물은 수갱에 도달하여서는 거대한 폭포가 되어 밑으로 떨 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글로브 콜에서 떨어지는 물이 파라다이스 갱 밑 바닥에 있던 물과 합류했다. 가까스로 갱 밑바닥으로 도망쳤던 많은 광부들 머 리 위로 역류를 이룬 물이 소용돌이치면 밀어닥쳤고, 일순간에 그들을 집어삼켰 다. 그리하여 물은 마구간 주위에 거품을 뿜으며 덤벼들어 그곳에도 가득 차버 렸다. 그 마구간에는 아직도 조랑말 네 마리가 살아 남아 있었다. 니거, 키디, 우오 리어, 진저는 모두 공포로 힝힝 울어댔다. 우오리어는 물을 박차고 뛰쳐나갔으나 다시 미친 듯이 날뛰며 마구간으로 되돌아왔다. 우오리어는 이사하기전에 목뼈 를 거의 다 부러뜨렸으나 다른 조랑말들은 물이 머리 위에 차오를 때까지 그냥 선 채로 힝힝 하고 자꾸 울기만 했다. 벌써 이때는 두 개의 주요 수갱에도 다 물이 차올라 글로브도 파라다이스도 모두 봉쇄되었고, 갱 밖에서 작업장으로 접 근할 길이 모두 막히고 말았다. 이 갑작스러운 재난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물이 터진 그때부터 15분이 채 못 돼서 이미 89명이 물에 익사하거나 부상당했고 일부는 유독 가스에 질식해서 죽 어버렸다. 로버트는 그 쿵! 하는 소리를 이미 들었고, 또 50초 가량 후에는 공기의 역류 도 느꼈다. 그는 대번에 알았다. 그는 속으로 말했다. '왔다! 바로 그것이다.' 그 의 옆에서 굴진 작업 중이던 슬로거 리밍이 천천히 무릎을 일으켰다. "들었지, 저 소리, 로버트?" 슬로거는 멍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로버트를 돌아다보며 그의 말 을 기다렸다. 로버트는 재빨리 말했다. "모두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에 있게.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말이야." 그는 굴진 장소를 기어나와 경사로를 거쳐 스커퍼의 삭도롤 들어갔다. 그러고 는 앞으로 달려갔으나 삭도로 흘러드는 물소리가 귀를 꿰뚫을 뿐이었다. 그는 물을 차던지면서 장화에서 무릎, 무릎에서 허리까지 차츰 깊어지는 물 속을 걸 어나갔다. 그는 스커퍼의 삭도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침하 지점인 스웰리 부근 까지 왔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 그는 갑자기 발 디딜 곳을 잃어버리고 스웰리 에 쑥 빠져버렸다. 그러나 곧 물위로 둥둥 떠올라 현무암 천장에 머리를 부딪쳤 다. 그는 두 손으로 천장을 잡고 발로 물을 차면서 자기가 왔던 장소로 헤엄쳐 나왔다. 그러고는 자기 키가 닿는 곳까지 와 되돌아 건너 물이 얕은 곳으로 나 오자 추워서 몸을 덜덜 떨었다. 이로써 그는 사태를 확실하게 파악하였다. 물은 스웰리의 천장까지 꽉 채우고도 45미터가 넘는 물이 벽을 이뤄 삭도를 틀어막고 있었다. 스웰리의 교차점에서 천장까지 물범벅이 되어 막혀버린 것이었다. 물이 차가웠으므로 로버트는 기침이 나왔다. 그는 기침을 하면서 한동안 그곳 에 서 있다가 아까 왔던 경사로 쪽으로 돌아가던 중 소년 패트 리디와 부딪쳤 다. 패트는 겁에 질려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아저씨?" "아무것도 아니다 패트." 로버트는 대답하면서 그의 손을 잡았다. "나하고 함께 가자." 로버트와 패트가 경사로의 꼭대기까지 와서 보니 살아 남은 사람들이 슬로거 를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모두 열 사람으로 그 중에는 휴이, 해리 브레이스, 톰 리디, 네드 소프틀리, 스위 메서와 예수 웹트가 섞여 있었다. 그들은 로버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아무도 사태를 알고 있지 못했으나 그들이 넵튠 탄광의 유일한 생존자 들이었다. "그래, 어떻게 된 거야, 로버트" 슬로거는 가까이 다가오는 로버트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그는 로버트를 뚫어 지게 바라보았다. "이쪽은 어떠냐, 슬로거?" 로버트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자기가 말하려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고 절대로 안심해도 좋다고 느낄 수 있게 하려고 애썼다. 그는 웃옷의 물을 짰다. "누가 구멍을 내서 스웰리로 물이 흘러든 거야. 그렇지만 말이야. 이곳은 높으 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어. 아무튼 나가는 길을 찾아서 밖으로 나가야 해." 그들은 말이 없었다. 그들은 왜 자기네가 말이 없는지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 러자 톰 리디가 물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스웰리를 통해서 나갈 수가 없는 거군요?" 슬로거가 사납게 그에게 소리쳤다. "닥쳐, 이 병신아, 말을 하라고 할 때까진." 로버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말을 계속했다. "그러니까, 우리 이렇게 하자. 통풍구를 통해서 글로브 까지 가자. 그곳에서 갱 밖으로 나가는 거다." 로버트는 선두에 서서 패트 리디를 바로 자기 뒤에 바짝 세우고서 통풍구 안 으로 길을 안내했다. 톰 리디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톰은 수 영선수였다. 그는 물 속이든 물 위든 간에 헤엄쳐 갈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스 웰리를 건널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스웰리만 통과하면 갱 밖으로 수월하 게 나갈 수 있고, 갱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구조대를 데리고 와서 자기가 바보 가 아니란 걸 슬로거에게 보여주고 말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톰은 모두가 다 가버릴 때까지 뒤에서 어물어물하고 있었다. 그리고 경사로를 달려 내려와서 신 을 벗어던지고 크게 한 번 호흡을 들이킨 다음 스웰리를 향해 물 속으로 풍덩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는 단숨에 스웰리를 헤엄쳐 건넜다. 그러나 톰은 스웰리의 앞쪽에 다시 2.5킬로미터 가량 물이 범람해 있다는 사실을 생각에 넣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다른 반대편에서 터져드는 거센 물결에 휘말려 들어가 버렸다. 톰 은 확실히 갱 밖으로 나갔다. 그 15분쯤후 그의 시체는 범람한 수갱 밑바닥에 생긴 진흙 연못 속으로 서서히 맨돌면서 흘러들어갔다. 로버트는 앞장서서 통풍구를 기어가며 일행을 이끌었다. 그는 이제 자기 일행 이 글로브 가까이까지 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 갑자기 마치 살짝 입 김으로 불어서 끈 것처럼 그의 램프 불이 꺼지면서 그와 동시에 패트가 질식해 서 자기 옆에서 조용히 쓰러졌다. 이번엔 물이 아니고 유독 가스였던 것이다. "후퇴!" 로버트가 외쳤다. "가스다! 모두 뒤로 물러나!" 일행은 약 40미터쯤 뒤로 물러난 뒤 그곳에서 패트가 숨을 되돌리도록 했다. 로버트는 패트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면서 머리를 짜내었다. 글로브 맨 안쪽 막다른 곳에도 틀림없이 광부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윽고 그가 말했 다. "누가 나하고 글로브까지 같이 한번 가볼 사람 없나?" 아무도 대답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유독 가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 고 지금 역시 그것에 당하고 왔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글로 브를 돌파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휴이가 말했다. "갈 수가 없잖아요, 아버지. 그쪽은 유독 가스로 차 있잖아요." 지금까지 말 한마디 없었던 예수 웹트가 입을 열었다. "내가 가지." 그는 로버트가 그곳에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구출하려고 그런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는 용감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이 로 버트와 함께 갈 것을 명령했다. 로버트와 웹트는 통풍구로 되돌아가서 글로브 갱구로 기어갔다. 두 사람 다 웃옷을 벗어 그것을 얼굴에 감았다. 그것은 예전부 터 사용해온 예방조치로서 그다지 큰 도움이 되는 방법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똑같이 배를 바닥에 딱 붙이고 기어갔다. 웹트는 겁에 질려 있으면서도 마음속 으로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를 그치지 않았다. 유독가스, 일명 악취 가스는 폐갱에서 나온 물에서 밀려나온 일산화탄소 가스 로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았다. 로버트와 웹트가 글로브에 들어 갔을 때 가스는 아주 희박해 졌다. 두 사람 다 머리가 띵했고 잠이 오는 듯 했 지만 그래도 앞으로 나아갈 수는 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얼마 전까지 지독한 유 독 가스로 꽉 차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들은 가스에 취해 죽은 네 사람을 발견 했다. 그들은 모두 죽어 있었다. 로버트와 웹트는 그들을 끌어냈다. 두 사람이 글로브까지 들어온 것은 바로 이들 때문이었다. 그들을 끌고 되돌아오기는 했지만 누구도 이들 네 사람들 되 살려낼 수는 없었다. 네 구의 시체를 보는 순간 패트는 지금까지 죽은 사람을 보지 못했던 탓에 악!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나 좀 살려주세요. 무서워 죽겠어요. 왜 여기 있어야 하는 거예요? 우리 톰 형은 어디 갔어요?" 그는 엉엉 울어댔다. 웹트가 말했다. "울지 마라, 패트, 하느님은 우리들 모두를 지켜주실 게다." 예수 웹트가 이 말을 하자 모두는 뭔가 가슴 가득히 울려 퍼지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침묵이 흘렀다. 로버트는 선 채로 생각에 잠겼다. 그의 얼굴은 불안에 가득 차 있었다. 만일 글로브에 가스가 차 있다면 틀림없이 물도 차 있을 것이 었다. 폐갱에서 나오는 유독 가스는 갱도를 넘쳐 흐르는 물이 뒤에서 밀지만 않 는 다면 위층까지 올라올 리가 없었다. 광부들은 먼저 물 때문에 나아갈 길을 뺏겼고 그 다음에는 단번에 가스에 질식된 것이었다. 그렇다, 글로브도 막혀 있 는 것이다. '그쪽으로는 도망칠 길이 없다.' 그는 결론을 내렸다. 바로 그때 로버 트는 스커퍼 플래츠 저쪽 가장자리에 전화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이제 글로브 안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어, 이사람들아 거기도 물과 가스로 꽉 차 있다. 스커퍼로 되돌아가서 갱 밖에다 전화를 걸어보자." 전화라는 말을 듣자 그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참, 잘 생각해냈어, 로버트." 슬로거가 감격해서 소리를 질렀다. 전화를 걸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통풍구로 되돌아가야 하는 괴로운 마음이 모두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그들은 다시 뒤로 물러나고 있다는 생각도, 또 함정에 빠져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그들 의 머리 속에는 전화에 대한 기대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스커퍼 플래츠에 다시 들어간 로버트의 표정은 전보다 더욱 어두웠다. 그는 이제 정말로 걱정스런 표정을 짖고 있었다. 플래츠의 물이 전보다 더 불었 고, 지금도 빠른 속도로 불어나고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물이 터져 들어와서 갱목이 씻겨 내려갔고 스웰리 저편 천장이 지주를 잃고 무너져 내려 주 도로로 나갈 물이 출구를 잃는 바람에, 그 물이 몽땅 그들 쪽으로 역류해 오고 있는 것 이었다. 이제는 모든 탈출로가 꽉 막혀버렸고, 스커퍼 플래츠의 이 막다른 곳에 서 탈출할 시간은 그들에게 아마도 15분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기다려들, 여기서." 로버트가 말했다. 그러고는 혼자 전화기 쪽으로 가서 거칠게 작은 손잡이를 돌려 수화기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히 질리고 있었다. '아아, 과연 통화가 될까...' 그는 생각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의 목소리가,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인간의 목소리가 깜깜한 무덤 속같 은 이곳에서 물범벅이 된 전화선에 필사의 희망을 걸고서 3킬로가 넘게 떨어진 갱 밖으로 전달되어 나갔다. 그 소리에 곧바로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로버트는 하마터면 까무라칠 뻔했다. 그것은 배러스의 목소리로 그는 사무실 에서 계속 이쪽을 불러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로버트는 열병에 걸린 사람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펜윅입니다. 스커퍼 플래츠의 전화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구멍은 스웰리 저 쪽에서 터져 천장까지 꽉 찼습니다. 그쪽에서는 천장이 무너져 내려앉았습니다. 나 말고도 아홉 사람이 여기에 갇혀 있습니다. 어쩌면 좋겠습니까?" 대답은 아주 딱딱하고 간결한 말투로 전해왔다. "통풍구를 따라 글로브로 나오라." "이미 통풍구로 나갈려 해봤습니다." "뭐라고!" "글로브는 유독 가스와 물로 꽉 차 있습니다." 침묵, 마치 30년은 될 법한 죽음 같이 괴로움이 담긴 30초, 바로 그때 로버트 의 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책상을 향해 앉아 있던 배러스가 발길로 문을 닫았으리라. 땅 위 저쪽에 멀리멀리 떨어져 있는 사무실 문이 닫히는 소리 를 듣는 다는 것은 실로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괴상한 기분이었다. "펜윅, 내 얘기를 들어라!" 배러스는 이번엔 말이 빨라지면서 한마디 한마디가 정확하고 날카로웠다. "예전의 스커퍼 홀 수갱으로 가라. 이쪽으로는 나올 수 없다. 수갱은 두 개가 다 물로 막혀 있다. 옛날 작업장으로, 스커퍼 홀 수갱으로 가면 된단 말이다. "예전의 스커퍼 홀 수갱이라니요?" 도대체 배러스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경사로를 똑바로 올라가면 된다." 배러스는 아까와 똑같이 단호하고도 정확한 어조로 계속 말했다. "동쪽 꼭대기에 있는 목조 댐을 지나가라. 배수로 위쪽에 있다. 그러면 넵튠폐 갱의 위층으로 나가게 될 거다. 물은 겁내지 말고, 물은 밑바닥 탄층에만 있을 뿐이다. 그 길을 따라가라. 그 길은 끝까지 본도니까 샛길이나 우묵한 곳으로 접 어들지 말도록. 똑바로 동쪽을 향해서 1.5킬로미터 정도를 나아가면 예전 스커퍼 홀 수갱과 만나게 될 것이다!" '제기랄!' 하고 로버트는 생각했다. '저 작자는 예전 작업장 위치를 다 알고 있 었다. 그가 알고 있다니, 그 작자가 알고 있다니...' 로버트의 이마에 땀이 배어 올랐다. 육시랄 놈 같으니, 저자는 전부터 내내 그 모든걸 다 알고 있었던 것이 다. "내 말 들리나?" 배러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멀리서 들려왔다. "구조대가 당신들을 거기서 기다린다. 들리나, 내말이?" "네에!" 로버트는 고함을 질렀다. 바로 그때 밀어닥친 격류로 인해 전화선이 끊겨 수 화기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의 손에서 떨어진 수화기는 그 대로 다룽거리며 흔들렸다. 하느님 맙소사! 그는 다시 생각했다. 등골이 오싹하 면서 전신의 힘이 쑥 빠졌다. "빨리, 아버지." 휴이가 달려와서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빨리, 빨리요, 아버지. 물이 넘쳐서 우리 쪽으로 오고 있어요." 오버트는 뒤로 돌아섰다. 물 속을 첨벙첨벙 기어서 다른 사람들 쪽으로 돌아 왔다. 그는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고함을 질렀다. "우리들은 이제부터 폐갱으로 간다, 알겠나? 다른 방법이 없다." 로버트는 맨 앞에서 여태껏 누구 하나 가보려고 생각조차 못 했던 막다른 기 로 몸을 잔뜩 구부린 채 비탈진 경사를 올라갔다. 과연 그곳에는 예전 목조댐이 있었다. 댐이라기 보다는 7센티 두께의 두꺼운 판자를 약 50센티 간격으로 쭉 세워놓고 그 사이에 점토를 다져 넣은 구조물이었다. 슬로거가 약 2분동안 발길 로 그것들을 차 던져 길을 만들어냈다. 일행은 예전 넵튠작업장의 폐갱으로 들 어갔다. 폐갱은 추울 뿐 아니라 괴상한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유독 가스가 그 근처 에 있긴 했지만 그 냄새는 가스가 아니라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 는 냄새였다. 이곳이 폐갱이 된 지는 이미 8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로버트의 길 안내를 받으며 그들은 희망을 품고 앞으로 나아갔다. 거기는 건 조했고 그들은 물과 이미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아, 아, 가까스로 물에서 도망쳐 나온 것이다. 일행 중 여섯 사람은 아직도 불이 켜진 램프를 가지고 있었고, 해 리 브레이스는 호주머니에 갱 안에서 쓰는 초를 세 자루나 가지고 있었다. 그래 서 그들은 길을 잘 볼 수가 있었다. 곤란한 일은 전혀 없었다. 길은 본도 하나뿐 으로 동쪽으로 똑바로 뻗어 있었다. 그들은 약 500미터쯤 그 괘도를 따라갔다. 그러자 거기서 길은 막혀 있었다. 그들 앞에 천장이 무너져 내려 있었다. "걱정 말아, 이사람들아." 슬로거가 외쳤다. "자갈 부스러기일 뿐이다. 곧 뚫고 나가게 되네." 그는 저고리를 벗어 휙 집어던지고 가죽 혁대를 꽉 졸라맸다. 그러고는 앞장 서서 그 무너져 내릴 돌더미에 대들었다. 아무도 연자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연장은커녕 도시락 보따리도 약 통도 모두 다 1킬로미터 저쪽 물 속에다 버리고 왔던 것이다. 그들은 맨손으로 흙을 파고 또 파낸 흙에서 돌맹이 부스러기를 가려냈다. 두 사람이 한 조가 되 어 일을 했고 슬로거는 두 사람 몫을 했다. 자신들이 얼마나 오래 일을 했는지 아무도 몰랐다. 너무도 열심히 일을 했기 때문에 시간도 잊어버리고 손에서 피 가 흐르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정확히 7시간을 계속 일했고, 무너져 내 린 돌무더기를 거의 15미터나 뚫고 나온 것이였다. 슬로거가 맨 먼저 나갔다. "만세!" 하고 외친 슬로거는 패트 라디를 끌어냈다. 그들은 모두 기어나와서 금세 서 로 지껄여대고 깔깔대고 웃으며 의기양양해 했다. 무너진 돌더미를 뚫고 나왔다 는 사실 자체가 놀랄만한 일이었다. 그들은 마치 어린애들처럼 마구 웃어댔다. 그러나 거기서 50미터를 앞으로 더 나아간 그들은 웃음을 그치고 말았다. 거 기에는 또 하나의 무너진 바윗돌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돌맹이 조각들이 아니었다. 다이아몬드 드릴이 아니고서는 그 어떤 걸로도 뚫을 수 없는 단단한 현무암이 버티고 있었다. 나갈 길이라곤 단지 이 길밖에 없는데 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단애라는 표현에 꼭 알맞는 두껍고 단단한 현무암. 그런데 그들은 모두 맨손이었다. 그것도 피가 맺힌, 얼음같이 차갑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아." 로버트가 일부러 힘있게 말했다. "어쨌든 예까지 왔으니까 스커퍼 홀까진 그다지 멀지 않다는 아야기일세. 그들 은 지금쯤 우리를 구하러 오고 있을 거야. 조만간 그들은 틀림없이 여기까지 올 거야. 우리 앉아서 기다리기로 하세들. 편안히 앉아 신호나 하고 있자고, 기운을 내고." 그들은 모두 앉았다. 무너진 바위 가까이에 웅크리고 앉은 해리 브레이스는 무거운 현무암 덩어리 하나를 집어들고는 구조대가 듣도록 북이라도 치는 듯이 바위 표면을 때려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끔 길게 큰 고함을 질렀다. 그들은 스커퍼 홀 탄광에서 약 400미터쯤 떨어진, 버려진 폐갱의 안쪽 깊숙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신호도 보내고 소리도 높이 지르며, 그들은 거기서 기 다렸다. 23 그날 아침 6시가 조금 안 됐을 때 리처드 배러스는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 리에 눈을 떴다. 그 노크 소리는 아까부터 줄곧 들려온 듯했다. 그는 소리를 질 렀다. "누구야?" 겁에 질린 캐리 고모의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렸다. "죄송하지만 리처드 오라버님, 부감독이 탄광에서 오셨어요. 꼭 뵙겠다는군요." 캐리 고모는 자기로서는 도저히 허즈페드가 한 이야기를 그대로 옮길 용기가 없었다. 그토록 무서운 이야기는 허즈페즈가 직접 리처드에게 말하는 게 좋겠다 고 생각했다. 리처드는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어쨌든 일어날 때가 되기도 했 던 것이다. "허즈페드." 그는 허즈페드가 옷차림도 엉망이고 매우 당황한 표정임을 보았다. 허즈페드 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주수갱 양쪽에서 모두 물이 나옵니다, 사장님. 갱도가 몽땅 물에 잠겨버렸습 니다. 제5지층에서 아래로는 승강기를 내릴 수도 없습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알았네." 그 소리는 아무 느낌도 담기지 않아 마치 기계에서 나오는 소리 같았다. "바로 앞 교대조 사람들이 몽땅 글로브 콜과 파라다이스에 들어간 후였습니 다." 평소엔 둔하고 느린 허즈페드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광부들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갱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 니다." 배러스는 허즈페드를 바라보았다. "갱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몇 명인가?" "어른과 아이를 합쳐서 100명 가량입니다만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그 정도일 겁니다. 저는 일어난 지 아직 5분도 채 안 됐습니다. 일이 터진 걸 램프계에서 한 사람이 알려줬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급히 암스트롱 감독에게 보내고 저 는 이쪽으로 달려온 겁니다." 리처드는 그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정확히 6분 뒤 두 사람은 탄광구내에 와 있었다. 램프계의 지미와 갱외감독, 부감독, 기계계의 커즌즈가 겁에 질린 채 함 께 서 있었다. 배러스가 도착하자 갱외 감독이 말했다. "암스트롱 감독이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권양 기계실로 들어갔습니다." 배러스가 허즈패드를 향해 말했다. "이리 오라고 하게." 허즈페드는 권양 기계실을 향해 계단을 급히 달려 올라갔다. 그 사이에 배러 스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난로 위 벽에 걸린 둥근 시계가 6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배러스가 아무도 없는 그 방에 들어갔을 때 갱내 직통전화가 울렸다. 그 는 즉시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본연의 딱딱한 소리로 말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대답을 한 것은 스커퍼 플래츠에 있는 로버트 팬윅이었다. 이야기 도중에 전 화가 끊겨 수화기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자, 배러스는 멍청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그는 가슴을 쫙 펴고 침착성을 잃지 않았다. 곧 암스트롱과 허즈페드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자, 얘기해봐, 암스트롱." 배러스는 명령을 하듯 말했다. "자네가 들은 얘기를 다 말해주게." 너무나 긴장하여 암스트롱은 더듬거리며 겨우 말했다. 암스트롱은 2분 가량 이야기를 하였다. 그는 이야기하는 동안 내내 이 보고가 끝남과 동시에 자기 목 도 날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한쪽 눈 밑 피부가 실룩거리기 시작하는 바람에 그 는 손을 들어 그것을 눌렀다. "알았어." 배러스는 말했다. 그러다 갑작스레 "제닝즈 씨에세 전화를 걸어." 하고 명령했다. "그쪽으로 솔 피킹즈를 파견했습니다, 사장님. 제일 먼저 그 일부터 했습니다. 이제 곧 오실 겁니다." "그거 잘했군." 배러스는 다시 새로운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의 지휘는 완벽했다. 놀랍도 록 냉정하고 침착하게 사태를 수습해 나가는 배러스 사장의 모습에 암스트롱과 허즈패드도 차츰 침착성을 되찾았다. 특히 암스트롱이 그러했다. 배러스가 계속 말했다. "암스트롱, 빨리 전화하게. 타인캐슬의 리거 앤드 헷스톡 회사와 시튼의 T.S.R 핸더슨 회사, 합동 탄광, 호튼 철공회사에 각각 전화하게. 특히 프러버트씨의 부 친을 이리 오시도록 부탁해. 내 인사말을 먼저 전하고 나서 이 사건을 알리도록 해. 그리고 모든 지원을 부탁하도록 해. 알겠나? 가능한 지원은 무엇이든 다 해 달라고 부탁하게. 헤드기어(머리 보호용 헬멧 또는 덮게), 펌프, 전기 기구 같은 것이 무한정 필요할 테니 잘 말하게. 특히 타인캐슬에는 증기 권양기를 부탁해. 합동 탄광에는 가능한 많은 구조대를 보내달라고 하게, 지금 당장이야, 알겠나, 암스트롱." 암스트롱은 자기 사무실에 있는 전화기 앞으로 달려갔다. 배러스는 허즈패드 를 돌아보았다. "자네는 사람을 10명쯤 데리고 옛날 스커퍼 수갱으로 가서 조사를 하고 오도 록 해. 될 수 있는 대로 빠르고 정확하게 수갱의 상태를 자세히 조사하는 거야. 그러고는 빨리 내게로 오게." 허즈페드가 나가자 광산 검사관인 제닝즈가 들어왔다. 몸이 땅딸막하고 얼굴 색이 붉은 그는 원기왕성환 데다 성격도 단호했다. 제닝즈는 구구한 설명 같은 것은 딱 질색이었다. 그는 억지는 쓰지 않지만 자기 주장에 대해서는 강경했다. 그러면서도 부드럽고 친절하여 많은 사람이 그를 좋아했다. 그는 지금 목덜미에 커다란 종기가 돋아 있었다. "아얏!" 그가 의자에 털썩 앉다가 소리쳤다. "이놈이 굉장히 아프군.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배러스씨?" 배러스가 사건을 말하기 시작하자 그는 종기 따위는 까맣게 잊었다. 그의 표 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세상에! 이럴 수가!" 침묵이 흘렀다. 배러스가 냉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갱구를 검사해 주시겠소?" "무슨 일이든지 시작해봅시다!" 제닝즈가 벌떡 일어났다. 배러스의 안내로 두 사람은 함께 갱구를 둘러보았다. 펌프는 모두 완전히 사용이 불가능하게 되어버렸고, 양쪽 수갱 모두2미터 깊이 의 물에 잠겨 있었다. 두 사람은 사람은 사무실로 다시 돌아왔다. 제닝즈가 성급 한 어조로 떠들기 시작했다. "곧바로 수갱에서 물을 퍼낼 임시 펌프를 설치해야 합니다. 그러나 저만큼 물 이 찼으니 글쎄요,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요..." 해러스는 꾹 참고 귀를 기울였다. 제닝즈가 말을 다 끝낼 때까지 내버려두었 다. 그러나 제닝즈가 말을 다 마치자 배러스는 제닝즈의 이야기 따위는 상관없 다는 듯 전혀 다른 의견을 내 놓았다. "이 수갱에서 물을 빼는 작업은 꽤 시일이 걸릴거요. 그러므로 다른 방법을 찾 아야지요. 우리는 지금 걸어서 갈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 스커퍼 홀로 들어가 보려고 해요. 그렇게 하는 편이 훨씬 현실적이고 가능한 방법이기 때문이오, 곧 허즈페드가 예전 스커퍼 수갱을 살펴보고 올겁니다. 가능하다고 보여지면 당장 그리고 들어가려는 거지요." 제닝즈는 불쾌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자기보다 훨씬 지혜롭고 침착한 거동에 압도당한 그는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의견이 묵살된 것에 기분이 나빠지자 잊고 있었던 종기가 다시 쑤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편 배러스의 너 무도 침착하고 정확한 구조 계획은 감탄할 만한 것이어서 그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군! 그것이 가장 빠른 방법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평면도가 없이 어떻 게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해야 하오." 배러스는 더욱 강경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해보는 도리밖에 없지요!" 제닝즈는 한숨을 쉬며 다시 한 발 물러섰다. "그렇지만 평면도만 있었으면 이런 참사는 피할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때 사 람들은 그렇게 밥통들이었을까!" 그는 투덜거리며 목의 심한 통증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아아 참, 이런 종기까지 나서 사람을 괴롭히는군. 난 이 종기 때문에 별 약을 다 먹었지만 소용이 없는 거예요, 얼마나 짜증스러운지..." 제닝즈가 아주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종기를 싸맨 붕대를 다시 고쳐 매고 있는 데 허즈페드가 들어왔다. 그는 급히 말했다.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사장님. 그런데 그다지 망가지지 않아서 들어가기가 별로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앞에 있는 지저분한 쓰레기들을 치워 버린다면... 유독 가스도 있는 것 같았습니다만 그리 대단해 보이진 않았습니다. 기중기로 한 사람을 내려보내 봤는데, 물론 가스에 지친 모습으로 올라왔습니다 만 질식할 정도는 아닌 것이 분명했습니다. 어서 속히 쓰레기와 유독 가스를 없 애버린다면 일은 어려울 것 같지 않습니다." 배러스가 말했다. "수고했네, 허즈페드. 그럼 당장 스커퍼 홀로 가세." 배러스는 냉철한 판단력과 과단성 있는 지휘로 그들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함이 없이 그를 따랐다. 그는 당황하지 않았고, 결코 두려움 을 내보이지 않았으므로 다른 이들까지도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그는 절대적인 존재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들이 막 사무실을 나왔을 때 스코트 의사와 공동 경영자인 젊은 의사 루이 스가 급히 마당을 들어서고 있었다. "방금 들었습니다... 어떤 부인이 해산을 하는 바람에 지난밤을 꼬박 새웠습니 다만 제가 할 일은 없습니까?" 의사는 기대감이 어린 표정을 지으며 이들을 바라보았다. 탄광의 참사 현장에 서 극적인 영웅행위를 해내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 다.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는 그는 이상과 정열이 참을 수 없이 마음을 들끓게 하는 모양이었다. 슬리스케일에서는 모두들 그를 젊은 루이스 선생님이라고 불 렀다. 제닝즈는 이 젊은 의사 선생을 뒤에서 걷어차고 싶었다. 그는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면서 가까스로 분노를 눌렀다. 그러나 배러스는 다정스레 말했다. "매우 고맙습니다. 루이스 선생. 아마 부탁드릴 일이 생길 겁니다. 사무실에서 기다려주십시오. 솔 피킹즈가 뜨거운 코코아라도 대접해드릴 겁니다. 나중에 수 고를 끼칠지도 모르니까요." 젊은 루이스 선생은 기뻐하면서 사무실로 들어갔다. 배러스, 제닝즈, 암스트롱 그리고 허즈페드는 옛 스커퍼 홀 수갱으로 갔다. 겨우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매우 추운 날씨였다. 구름이 꽉 낀 하늘에서 가는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제1 구조대는 25명이었다. 그들은 모두 묵묵히 걸었다. 몹시 걷기가 힘든 길이었다. 이윽고 흩날리는 눈발이 그들을 몽땅 휩싸서 감추어버렸다. 이 소식이 온 시내에 퍼지기 시작했다. 강산촌 달동네 마을 집집마다 문들이 모두 열리며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그들은 카우펀 가를 달려 내려갔다. 사람들은 점점 더 불어났다. 그들은 마치 뛰지 않으면 안 될 일이라도 생긴 듯이 드리고 탄광이 그들을 갑자기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듯이 탄광을 향해 뛰어갔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마사는 이 소식을 브레이스 부인한테 들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그녀의 머 리 속에는 감사한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하느님 덕분에 샘은 갱에 들어가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가슴을 움켜잡고 샘을 깨웠다. 외투를 걸친 그녀는 샘과 함께 탄광 쪽을 향해서 달렸다. 핸즈 메서 노인도 뛰어가고 있었다. 핸즈는 새벽 손님의 수염을 깎고 있을 때 소식을 들었다. 달려가고 있는 그의 왼손에는 비누 거품이 잔뜩 묻은 솔이 그대로 들려 있었다. 데이빗은 자전거로 시내에 들어왔다가 이 소식을 들었다. 그는 단숨에 탄광을 향해 방향을 바꿨다. 슬로거의 아내는 침대 속에서 들었고 아들인 차는 '어서 오 십쇼' 주점의 옆문 쪽에 있다가 소식을 들었다. 수잔 웹트는 아침 기도중에 들었 다. 산파인 리디 부인은 젊은 루이스 선생과 임산부 곁에 있다가 들었다. 그녀의 장남인 잭 리디는 술을 마시러 술집으로 가는 도중에 들었다. 그는 차 리밍과 같이 탄광으로 뛰었다. 네드 소프틀러의 어머니는 세탁소에 가는 도중에 들었다. 톰 오글은 화장실 안에 있다가 그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톰 오글은 바지 단추 를 채우면서 뛰었다. 순식간에 500여명의 남녀가 탄광 구내를 꽉 메우고 그 바깥에는 더 많은 사람 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말없이 서 있었다. 여자들은 대부분 숄만 둘렀고 남자들은 외투도 입지 않은 채 몰려 서 있었다. 마치 그들은 흰 눈밭을 배경으 로 한 까만 섬처럼 보였다. 또한 그들은 합창단 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노 래를 부르지 않는 침묵의 합창단들... 그들은 모두가 눈이 내리는 하늘 밑에서 묵묵히 죽음과 같은 침묵을 지키며 서 있었다. 배러스와 재닝즈와 암스트롱이 스누크를 되건너서 구내로 돌아온 시간이 정각 9시였다. 하늘에선 눈이 마구 퍼붓고 있었다. "구내의 문을 닫게 할까요?" "놔둬!" 재러스는 그의 먼 곳을 보는 듯한 눈길으로 모인 사람들을 확인하듯이 바라보 았다. "구내에 불을 피워라. 큰 모닥불을 한 복판에 피워. 저렇게들 서 있다간 모두 얼어버릴 테니." 모닥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찰리 가울런, 제이크 윅스, 갱외감독이 합세해서 갱목을 산더미처럼 가지고 와서 불위에다 얹었다. 불길이 한창 피어올랐을 때 최초의 구조 지원대가 시튼 탄광에서 달려왔다. 그 구조대는 당장 스커퍼 홀 쪽 으로 향했다. 그 다음에 타인캐슬의 광산기계 회사가 트럭 3대에 기구를 싣고 왔다. 암스트롱은 전화 옆에 서 있었다. 배러스와 재닝즈는 스커퍼 홀로 되돌아 갔다. 유독 가스 때문에 갱 안으로 못 들어갔지만 가스는 곧 없어질 거라고 하 였다. 벌써 그들은 헤드기어를 꺼내고 권양기, 통풍기 등을 가설하기 시작했다. 11시에 아서 배러스가 왔다. 주말을 타인캐슬의 토드 집에서 보내고 있던 아 서는 10시 45분 열차로 막 도착한 것이었다. 그는 몹시 흥분한 상태로 사무실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아버지! 너무 끔찍한 일입니다." 배러스는 천천히 돌아다보았다. "그렇다, 아주 큰일이다." "제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무슨일이든지 하겠습니다." 배러스는 무거운 눈빛으로 자기 아들을 바라보았다. "이것도 다 하느님의 뜻이다, 아서." 아서는 괴로움에 가득 찬 표정으로 처음 보는 사람처럼 아버지를 자세히 바라 보았다. "하느님의 뜻" 아서는 이상한 목소리로 되풀이했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바로 그때 암스트롱이 뛰어들어왔다. "합동 탄광에서 펌프 두 대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지금쯤은 벌써 이리로 오고 있는 중일 겁니다. 또 신식 터번 펌프 한 대가 호튼에서 오고 있습니다. 프러버 트 씨 말씀이 어떤 수고라도 다 해주시겠답니다." "수고했어, 암스트롱." 배러스는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솔 피킹즈 노인이 다리를 절룩거리며 커다란 그릇에 뜨거운 코코아를 들고 들 어올 때까지 그 방에는 긴장된 침묵이 계속되고 있었다. 나이가 일흔이 넘은 솔 노인은 한쪽 다리가 의족이었지만 매우 기민하게 움직였다. 비록 절룰거리면서 갱 밖에서 일하고 있는 그였으나 코코아 타는 솜씨는 훌륭했다. 아서와 암스트 롱은 코코아 그릇을 손에 들었다. 배러스는 거절했다. 아서와 암스트롱이 똑같이 배러스에게 코코아를 권했다. 암스트롱은 시장해서는 아무일도 못 한다고 덧붙 혔다. 그러나 배러스는 거절했다. 그는 이제 약간 기분이 나아진 것 같았다. 솔 피킹즈가 말했다. "젊은 루이스 선생이 아직도 자기가 여기에서 필요한지 알아보라고 했는뎁쇼. 그대로 기다리고 계셔야 한다면 이 코코아를 가져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젊은 루이스 선생은 이미 코코아를 네 잔이나 마신 뒤라서 처음에는 달리 그의 영웅주의 도 이젠 약간 맥이 빠져 있었다. 그는 점잖은 체면에 화장 실이 어디 있느냐고 자꾸 물어봐야 했던 것이다. 배러스는 암스트롱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요 며칠동안 시내의 의사 선생들이 산 사람씩 와 있으면 좋겠네. 교대로 와주 었으면 좋겠어." "그 참 좋은 생각이십니다, 사장님." 암스트롱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는 다시 전화를 걸려고 황급히 나갔다. "아버지,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했습니까? 전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아서는 여전히 긴장된 목소리였다. "지금은 안 돼." 배러스가 대답했다. 아서는 고개를 돌려 차갑게 얼어붙은 유리창에다 이마를 갖다 대었다. 아버지의 말투는 그로 하여금 아무 소리도 못 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때 소방대장 에버니저 캠하우가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다. 그는 정복으로 갈 아입고 있었다. 밝은 빨간색 술과 여덟 개의 금빛 구리 단추가 나란히 달린 옷 이었다. 그 단추는 그의 부인이 자 닦아놓아 번쩍번쩍 윤이 나고 있었다. 소방대 장은 키가 작고 뚱뚱하며 대머리라서 모습이 마치 지구의 같았다. 그는 어릴 때 부터 제복 입는 것을 좋아했다. 어린 시절에 소년단에 가입해 약상자 같은 모자 를 썼던 일을 비롯해서 현재는 소방대장과 악대대장을 겸하고 있었다. 트라이앵 글을 포함한 네 종류의 악기를 다룰 줄 알았고, 주 화초 품평회에서는 해마다 사향연리초를 출품해서 상을 탔다. 그가 지난 5년 동안에 소방대장으로서 진화 작업을 한 것은 폐쇄된 양조장에서 일어난 미미한 화재뿐이었다. "무엇이든 도와 드리겠습니다. 배러스 사장님. 대원들은 마당에 대기시켜 두었 습니다. 그들은 모두 응급 치료의 면허를 갖고 있는 유능한 사람들입니다. 명령 만 내려주십시오, 사장님." 배러스는 소방대장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솔 피킹즈가 그에게 남은 코코 아잔을 건네주자 그는 그것을 받아 마신 후 나갔다. 소방대장이 마당으로 나갔 을 때, 그의 차림새가 너무도 어마어마하고 훌륭하게 보였으므로 타인캐슬에서 막 달려온 신문기자 두 사람이 당장에 사진을 한 장씩 찍었다. 그 사진은 다음 날 아침 '타인캐슬 아거스'지에 제재되었다. 대장은 그것을 오려서 간직해 두었 다. 전보, 전화로 구조를 돕겠다는 지원 신청이 쇄도했다. 호튼 철공회사의 프러버 트 씨도 몸소 나타났고, 합동 탄광에서는 다시 구조대 세 팀이 더 왔다. 오후 3시가 조금 못 되어 배러스와 아서는 본래의 스커퍼 홀 수갱을 떠받치는 작업을 조사하러 갔다. 수갱은 눈에 뒤덮혀 찬바람에 씻기운 야트막한 산과 함 몰지 투성이인 스누크라는 황량한 황무지 한 귀퉁이에 있었다. 이곳은 사람들에 게 사고가 잦은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탄광 부내 마당에는 모닥불이 피워져 있 는데도 구내에 남아있는 사람은 거의 없고 모두가 스누크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헤드기어를 쓰고 있는 기계공들의 뒤에 선 채 기웃거렸다. 배러스와 아서가 가 까이 가자 군중은 묵묵히 길을 비켰다. 그러나 한 무리의 사람들은 길을 비켜주 지 않았다. 아서가 데이빗을 본 것은 바로 그때였다. 데이빗은 그 무리 가운데 가장 앞쪽에 서 있었다. 잭 리디, 차 리밍, 톰 오글 도 그 무리 속에 끼여 있었다. 데이빗은 배러스가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 다. 그는 한기와 마음속에 감춰진 긴장감으로 인해 얼굴 전체가 일그러져 눈을 아래로 내리 깔았다. 그러자 데이빗이 입을 열었다. "이 사람들이 배러스 씨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답니다." "그래?" "갱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다 써주실 수 있는 지 알고 싶어합니다." "벌써 그렇게 진행되고 있는 걸로 아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배러스가 눈을 들었다. "묻고 싶은 게 그것 뿐인가?" "지금은 그런 것 같습니다." 데이빗이 무겁게 대답했다. 그때 톰 오글이 사나운 기세로 앞으로 나섰다. "무슨 말이 그래? 지금 무얼 하고 있다는 거야?" 그는 배러스에게 호통을 쳤다. 그는 이성을 잃고 있었다. 아까는 스커퍼 홀수 갱 안으로 뛰어들려고 하는 것을 겨우 붙들었다. "왜 그들을 구해내지 않는거야? 이따위 임시 변통의 장비를 비치해서 무슨 소 용이 있어? 내 아들 봅 오글이 갱 속에 갇혀 있어. 왜 갱 속에 사람들을 내려보 내서 내 아들을 데려오지 않는 거야?" "현재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고 있네." 배러스는 여전히 권위를 잃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 "난 네놈의 직원이 아니야. 왜 내 앞에서 위세를 떨어!" 톰 오글이 물어뜯을 기세로 말을 하더니 갑자기 배러스의 얼굴을 정통으로 후 려쳤다. 아서가 몸을 떨었다. 찰리 가울런과 다른 사람들이 버둥거리며 소리치는 톰 오글을 잡아 끌었다. 배러스는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는 톰의 주먹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내부에서 그 주먹질을 만족스럽게 받아 들이는 일종의 쾌감을 느끼며 일격을 받았다. 그는 침착하게 수갱 쪽으로 걸어가 이곳에도 모닥불을 피우라고 지시한 후 기계 설치작업을 감독하기 위해 그대로 머물렀다. 그는 그날 온종일 탄광에 남아 있었다. 스커퍼 홀 수갱에 증기 권양기, 송풍기 가 설치되어 갱 속의 유독가스가 모두 없어질 때까지 그는 버티고 서 있었다. 구조대가 들어가 폐갱으로 가는 길을 만들기 위해 퇴적물을 치우는 일을 시작할 때까지도 그는 거기 남아 있었다. 또한 17번의 양쪽 주수갱에 신신 펌프가 설치 되어 한 쪽에서는 주권양기가 1분 동안에 250갤런의 물을 퍼올리고, 다른 한쪽 의 터번 펌프는 통풍구로부터 1분 동안에 450갤런의 물을 퍼낼 때까지 그는 줄 곧 그곳에 있었다. 저녁 늦게야 배러스는 혼자서 법산저택으로 걸어 돌아갔다. 그는 피곤함도 느 끼지 못했고, 더욱이 시장기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육체적 무기력과 그 특유의 정신적 희열 사이를 왔다갔다 했다. 그에게는 이미 자기 자신이 없었다. 지금 자 기가 처한 모든 일이 환상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는 마치 사형선고를 받고 그 판결을 조용히 듣고 있는 인간 같았다. 왜 그런지 확실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어나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다는 신념만은 여전히 털끝만큼도 흔들리 지 않았다. 캐리 고모가 신경을 써서 그를 위해 수프를 준비했다. 캐리 고모는 배러스가 고생한 날은 무엇보다도 쇠꼬리 수프를 즐겨 먹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수프와 닭 날개 고기와 또 가장 좋아하는 블루 채더 치즈를 먹었다. 그러나 겨 우 입에 음식을 대는 정도로 수프만을 다 먹을 뿐이었다. 그는 자기 등뒤에서 후들후들 떨면서 시중을 들고 있는 캐리 고모를 한 번도 돌아다보지도 않았다. 고모의 존재 같은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식탁의 맞은편에 힐다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열망이 넘치는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도 돕게 해주세요, 아버지. 어떤 일이든 시켜주세요. 제발 부탁이에요. 아버 지, 무슨 일이든 다 할게요." 힐다는 엄청난 사건이 터졌는데 어떤 일도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 미칠것만 같았다. 배러스는 침울한 눈빛으로 비로소 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대답했 다. "네가 할 일이 뭐가 있을 수 있겠니?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고 있다. 여자인 네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힐다를 남겨둔 채 방을 나갔다. 그는 계단을 올라가 2층 아내 방으로 들 어갔다. 아내에게도 아서에게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오." 그러고는 다른 때보다 훨씬 더 굳어진 모습으로 옷을 입은 채 침대에 누웠다. 4시간 가량 지나자 그는 다시 탄광에 나가 급히 스커퍼 홀 수갱으로 향했다. 그 는 파라다이스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스커퍼 홀에서 들어가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수갱을 내려갔다. 스커퍼 홀 수갱 안에서는 릴레이식으로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주도로에 쌓 인 퇴적물을 한 시간에 2미터씩 없앨 정도로 굉장히 빠르게 작업을 했다. 예상 했던 것보다도 퇴적물은 훨씬 많았으나 릴레이식 작업은 물결이 일 듯 서로 힘 을 북돋아가면서 계속 진행되었다. 사람들이 퇴적물 속으로 뛰어드는 그 모습에 는 처절한 데가 있으면서도 한편 체념적이기도 했다. 퇴적물 속으로 뚫고 들어 가는 그 작업 과정은 사실 사람의 힘으로는 너무 벅찬 것이었다. 작업단 제1대 가 그 굴속에서 비틀거리고 나오면 대비하고 있던 제2대가 뛰어들어가는 식이었 다. "이 길은 똑바로 서쪽을 향하고 있는데요." 제닌즈가 배러스에게 말했다. "이 길을 따라가면 목표지점에 가까이 다다르게 될까요?" "네." 배러스는 짧게 대답했다. "곧 이 작업도 일단락 될 겁니다." 제닝즈가 다시 말했다. "네." 배러스가 다시 대답했다. 릴레이 작업은 24시간이 걸려서 옛 주도로에 쌓인 퇴적물을 거의 45미터나 치 워나갔다. 그리하여 그들은 퇴적물이 없는 깨끗한 길을 통해 텅텅 빈 페갱안으 로 뚫고 들어갔다. 환성이 소리 높이 울렸다. 그 환성은 수갱위로 올라와 갱 밖 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을 감동에 떨게 하였다. 그러나 두 번째의 환성은 울 리지 않았다. 그 주도로는 퇴적물 바로 그 너머 웅덩이 속으로 뻗어 들어갔는데 그 웅덩이에는 물이 가득해서 통행이 불가능했다. 칼라도 넥타이도 하지 않은 초라한 모습으로 탄진을 뒤집어쓴 채 낡은 명주 머플러로 부어오른 목을 둘둘 감고 있던 재닝즈가 배러스를 바라보았다. "이것 참 야단났는데." 그는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평면도만 있었더라면 사전에 미리 알았을 텐데." 배러스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조용히 서 있었다. "평면도가 저 웅덩이를 없애주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려움은 각오한 겁 니다. 폭파시켜서 웅덩이로 새 길을 뚫어야지요." 이 말엔 뭔가 엄숙하고도 불굴의 의지 같은게 담겨 있어서 재닝즈는 다시 감 동하였다. "정말 그렇겠습니다!"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재닝즈의 말이었다. "바로 그런 기백이 필요합니다. 자아, 그러면 이리 와서 저놈의 천장을 무너뜨 리자." 천장 폭파가 시작되었다. 웅덩이를 메우고 그 위로 길을 내기 위하여 쇳덩이 같이 단단한 현무암을 폭파하기 시작했다. 드릴에 공기를 공급할 공기 압축기가 설치되었다. 가장 정교한 다이아몬드 드릴이 사용되었다. 암흑과 먼지와 강한 폭 약의 냄새 속에서 진행되는 작업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그것은 모두 미쳐버린 듯 무모하고 광폭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배러스만은 냉정을 유지했다. 냉정할 뿐 아니라 속을 헤아리기도 어려운 태도로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런 모습 의 배러스는 이 일의 원동력이었다. 그 후 꼬박 18시간을 그는 스커퍼 홀에서 떠나지 않았다. 6시간쯤 쉬고 나서 원기를 다시 회복한 제닝즈는 애원하듯 말했다. "제발 눈을 조금 붙이세요, 배러스 사장님. 이러다간 쓰러지십니다." 프러버트, 암스트롱, 거기다 광산국의 고급 관리들까지 모두 권유했다. 이제 할 수 있는 데까지 일을 한 셈이었다. 웅덩이를 메우는 데도 적어도 닷새는 걸 릴 것이니 그때까지 좀 쉬라는 말들이었다. 아서도 부탁했다. "주무세요, 제발 아버지..." 그러나 배러스는 가끔 사무실 의자에 앉아 30분 정도 꾸벅거릴 뿐이었다. 그 렇게 하면서 그는 나흘 동안을 자기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 다음날 그는 걸 어서 귀가했다. 날씨는 여전히 고추처럼 매웠고 새로 내린 눈이 땅위를 덮었다. 그 눈은 얼마나 새하얀가! 그는 생각에 잠긴 듯 카우펀 가를 걸어갔다. 그러나 사실 그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건이 있은 이래 그는 스스로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의식 밑바닥에서 그의 마음은 언제까지나 초연했다. 오로지 탄광 사고 구출작업에만 몰두하면서 다른 생각은 미뤄왔던 것이었다. 차가운 외면을 내보 이는 그의 겉모습 뒤에는 힘찬 정신이 강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는 그 흐름을 의식하지 못했으나 그 흐름은 끊임없이 그를 움직이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지나 다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집들도 문들이 모두 닫혀 있었 다. 문들 닫은 상점들도 많았다. 탄광촌 달동네에는 소리 없는 슬픔의 그림자가 깔려 있었다. 그것은 절망의 정적이었다. 달동네 양쪽 끝에서 두 여인이 마주 다 가오고 있었다. 그들 두 사람은 친구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서로 외면하고 지나 쳐버렸다.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다. 정적. 그 두 여인의 발자국 소리마저 쌓 인 눈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집 안에도 똑같은 침묵이 있었다. 갱에 파묻힌 사 람들이 있는 집에서는 그들이 살아 돌아올 때를 위하여 아침식사를 식탁에 차려 놓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의 습관이었다. 밤이 되어도 덧문을 내리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잉커만 거리 234번지에서는 마사가 새로운 고기 파이를 한창 만 들고 있었다. 로버트와 휴이 두 사람 다 뜨끈뜨끈한 고기 파이를 매우 좋아했다. 샘과 데이빗은 어머니를 바라보지 않고 그냥 묵묵히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이 다 스커퍼 홀에서 돌아온 참이었다. 그들 둘은 거기서 많은 일을 거들었다. 데이빗 은 꼬박 나흘 동안을 학교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그는 학교 일도, 시험치는 일 도, 그리고 제니의 일도 다 잊어버렸다. 그는 말없이 두손에 얼굴을 파묻고 앉아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또 자기 자신의 괴로운 심정 속에 잠기곤 했다. 스커퍼 홀에서 한바탕 소란을 치른 다음이었기 때문에 이처럼 차가운 거리의 분위기는 배러스의 마음에 충격을 주었다. 그는 걸어가면서 가슴속으로부터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그 한숨을 의식하지는 못했다. 그것만 아니라 다른 아무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그는 법산저택으로 들어갔다. 그 앞으로 엄청난 우편물이 와 있었다. 칭송, 애도, 동정의 편지와 슬리스케일 출신의 대의원 스테플튼으로 부터 온 전보, 넵튠 탄광 채굴권 소유자인 켈 경이 보낸 전보 그리고 타인케슬 시장의 전보도 있었다. 시장에게서 온 전보에는 "갱에 갇힌 광부들에 대한 귀하의 영웅적 노력에 대 해 우리는 최고의 찬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음. 귀하의 노력이 성공하기를 하느 님께 기도하고 있음." 이라고 씌여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통은 은총이 넘치는 조의가 담긴 왕실에서 보낸 메시지였다. 그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천천히 생각하며 읽었다. 재미있는 일이로다! 그는 어떤 고무관 제조업자 아내로부터 온 편지도 자세히 읽었다. 거기에는 갱에 갇힌 광 부들에게 뜨거운 수프를 넣어줄 수 있게 자기 남편이 제조한 고무관 450미터를, 아니 그 이상-이 말에는 밑줄이 쳐져 있었다.-을 무료로-여기에도 밑줄이 쳐져 있었다.-제공하겠다고 씌어 있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는 웃지 않았 다. 그는 다음날 새벽에 다시 탄광으로 돌아갔다. 주수갱의 물 빼내기가 잘 되어 수위가 낮아져서 잠수부가 충분히 내려갈 만 했다. 잠수부들은 갱 속으로 내려 가 최대 수심 6미터가 넘는 물과 싸워야만 했다. 그들은 싸울 수 있을 때까지 싸우면서 글로브와 파라다이스 갱도를 따라 함몰된 곳까지 나아갔다. 그리고 철 저히 수색했다. 그러나 배러스는 이 수색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임을 누구보 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 잠수부가 발견한 것은 72명의 익사체뿐이었다. 잠수부들은 되돌아왔다. 그들은 산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보고했다. 그들은 갱 안의 물을 완전히 빼자면 적어도 앞으로 1개월은 걸릴 거라고 보고했다. 그 리고 그들은 시체 인양 작업을 시작했다. 한꺼번에 새끼에다 묶은 익사체가 다 룽거리며 그들이 다시는 볼 수 없던 광산 밖 대낮의 환한 밝음 속으로 끌어올려 졌다. 이제는 스커퍼 홀을 통해서 현장에 접근하는 일에 모든 장이와 수단이 집중되 었다. 자신의 운명을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광부들이 지금 폐갱 안에 갇혀 있을 것이다. 이것은 거의 확실한 사실이었다. 재난이 발생한 이래 벌써 열흘이 지났 지만 아직도 그들이 살아 있을지도 오르는 일이었다. 다시 웅덩이를 메우는 작 업이 두 배의 속도로 미친 듯 진행되었다. 사람들은 온 힘을 다 쏟았다. 폭파가 시작된 지 6일째에 마지막 폭파가 있자 구조대는 웅덩이를 넘어 그 안쪽의 기로 들어설 수 있었다. 구조대는 완전히 기진맥진 했지만 그래도 기쁨에 넘쳐 앞으 로 밀고 나갔다. 그러나 서쪽으로 60발자국도 못 가서 다시 또다시 완전히 내려 앉은 현무암 더미에 부딪쳤다. 그들은 절망하여 주저앉았다. "아아, 하느님 맙소사!" 제닝즈가 신음소리를 냈다. "이놈이 아마 800미터 정도는 계속될 게야. 매몰된 사람들에게는 아무래도 못 가겠군. 이제 만사가 끝장이다." 극도로 힘이 빠진 절망상태에서 그는 현무암 암벽에 기대서서 얼굴을 팔에다 파묻었다. "계속해야 해." 배러스가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래, 계속해서 나가는 거다." 24 맨 처음 해리 브레이스가 죽었다. 해리는 심장이 약했다. 게다가 플래트에서 물에 빠진 것이 나이도 젊지 않은 그에게는 치명적이었던 게 분명했다. 우연히 싸늘하게 식은 해리의 얼굴에 손이 닿은 네드 소프틀리가 해리가 죽었다고 외칠 때까지 아무도 그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알지 못했다. 사실 그가 죽은 것은 사고가 난 뒤 사흘째 되던 밤이었다.(물론 그들에게는 언제나 밤뿐이었지만) 램 프 불은 벌써 다 타버리고 갱 안에서 쓰는 초도 다 써버렸다. 로버트가 만일의 경우를 위하여 보관해둔 한 자루의 초밖에 없었다. 암흑이라는 것도 그다지 나 쁘지는 않았다. 암흑은 오히려 그들을 감싸주었고 동료 의식으로 서로를 이어주 어 다정한 느낌을 갖게 했다. 그들은 모두 10명이었다. 로버트, 휴이, 슬로거, 패트 리디, 예수 웹트, 스위 메 서, 네드 소프틀리, 해리 브레이스 그리고 베네트와 세드 콜더라는 두 사람이었 다. 첫 날은 신호를 보내며 하루를 보냈다. 주로 타타...타타...타타타타탁... 하고 몇 번이고 바위벽을 쳐댔다. 타타...타타...타타타타탁...하는 소리는 마치 토인들이 두드리는 북소리 같았다. 신호를 보내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것은 그 끝없는 암 흑 속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알리는 유일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간혹 자기들처럼 갱에 파묻힌 수십명의 사람들이 구조대에게 신호를 부내서 구출된 사례도 있지 않았던가! 타타...타타타타탁... 그들은 교대로 돌을 두드렸다. 그러나 그렇게 신호 를 보낸 지 이틀째가 되었을 때 갑자기 슬로거가 소리쳤다. "그만 두드려라! 제발 그만둬. 이제 그 소리를 견딜 수가없어." 두드릴 차례이던 네드 소프틀리가 당장 두드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 소리가 멎자 그들 모두가 기분이 나아지는 듯했다. 한 시간 가량 그 작업은 중 단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신호를 계속 보내야 한다는 것에 합의 했고 슬로 거도 역시 동의했다. "스커퍼 홀을 통해서 오는 구조대는 지금쯤 우리들에게 아주 가까이 와 있음 에 틀림없다. 아아, 지금쯤은 소리쳐 부르면 들릴 정도까지 와 있을 것이 틀림없 다." 스위 메서가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네드가 또 시작했다. 타타...타타...타타타타 탁. 그러고 나서 얼마 안 되어 웹트가 최초로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다. 예수 웹트 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게쎄마니 동산에서 예수가 한 것처럼 열심히 정 열을 기울여 몇번이고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키가 작은 웹트는 과 묵하고 열성적인 사나이였다. 그는 팜플렛과 샌드위치맨이 사용하는 광고판 같 은 것으로밖에는 절대로 남에게 신앙을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웹트는 휘들 리 만이나 슬리스케일의 축구시합 때면 소란스러운 군중 틈에 끼여 예수의 비탄 을 알리는 광고판을 가슴과 등에 달고 서 있거나 아니면 천천히 걷곤 했다. 그 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조용하게 전도하는 사람이었다. 또 결 코 사악하거나 나쁜 것을 선전하는 선전가가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도 다른 사 람들에게 기도하는 걸 강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모하게도 지금까지 교회에 가본 일이 전혀 없는 로버트가 모든 사람에게 예배를 드리자고 말했다. 물론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웹트도 예배를 드리고 깊다는 생각을 하고 있 었다. 그러므로 그는 너무도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며 모든 예배 절차를 떠 맡 았다. 그는 우선 기도부터 시작했다. 그것은 입고 있는 옷을 찢거나 또는 카톨 릭교를 비난하는 내용따윈 하나도 없는 매우 훌륭한 기도였다. 그는 신실한 신 앙으로 가득 찬 긴 기도를 다음과 같이 끝맺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 우리를 여기서 구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을 받들어 기도드립니다. 아멘." 웹트는 요한복음 8장 12절의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 나를 따라오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오히려 생명의 빛을 얻을 것입니다." 라는 말씀을 주제로 간단 한 설교를 덧붙였다. 그것이 끝나자 모두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주소서'라는 찬송가를 불렀다.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 주여, 내 죄의 길에서 달려옵니다. 내 집을 찾아 나 이제 왔으니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주소서. 그 노래는 정적 속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곧 다시 침묵이 왔다. 그 누구도 그 러한 침묵을 깨뜨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조용히 앉아 있었다. 특히 슬 로거는 이를 악물고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참을 수가 없었다. "아아, 하느님." 슬로거는 신음소리를 냈다. "아아, 나의 주 예수님, 이 사람을 구해주십시오, 주여." 슬로거는 울기 시작했다. 슬로거는 다루기 힘든 인간이었지만 마음은 약했다.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싸안고 몸을 떨면서 눈물 없는 흐느낌을 터뜨렸다. 그의 격렬한 비탄은 더욱 불안을 돋우었다. 이때 그들은 벌써 기력도 모두 빠졌고 사 내의 체면으로도 며칠씩 굶은 배를 지탱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 다. 먹을 것도 없었고 천장에서 가끔 떨어지는 흙반죽이 된 물방울 외에는 물 한 모금도 없었다. 그 무서운 홍수를 피해 왔는데, 이제는 모두가 간신히 갈증을 풀 정도의 석탄 냄새가 나는 소금기 섞인 물 밖에 없다는 것은 참으로 묘한 일 이었다. 웹트는 슬로거 엎으로 가서 위로하기 시작했다. 슬로거를 위로할 수 있다는 것은 웹트에게 커다란 기쁨이었고 슬로거 역시 한참동안 기뻐했다. 그러는 사이에 몇 사람이 배가 고프다고 하기 시작했다. 가장 나이가 어린 패 트 리디가 제일 먼저 배고픔의 고통을 느꼈다. 로버트는 기침을 멎게 하는 엿사 탕 세 개를 호주머니 속에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 사탕 하나를 가만히 패트에 게 주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다시 하나를 주었다. 시간은 얼마만큼 지나갔을 까?...5분인지 그렇지 않으면 5일인지, 그것은 하느님만이 아시는 일이었다.! 두번 째 사탕을 다 빨고 난 다음 패트가 말했다. "맛있어요, 정말 맛있어요, 아저씨." 로버트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세번째 엿 사탕도 패트에게 주려고 하다가 이 것이 마지막이라는 묘한 기분이 들어서 그 생각을 바꾸었다. 좀더 있다가 줄 수 있도록 간직해둬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만일의 경우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보관해두려는 이같은 욕망에서 로버트는 마 지막 갱내용 초도 간직하고 있었다. 암흑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기분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 안 한복판에다가 조가말한 모닥불처럼 세워두었던 노란 촛불이 꺼 지고 난 후에는 어둠이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도 마지막 남은 초는 보관하 기로 했다. 암흑은 시간을 계산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들 가운데 시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로버트뿐이었다. 그러나 그 시계는 스웰리의 물 속에 들어갔을 때 멎고 말았다. 모두 시간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게 여겼지만 휴이가 특히 시간에 신경을 썼다. 휴이는 원래부터 말이 없었는데 지금은 더욱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낙반의 돌더미 앞에 주저앉은 이래 휴이는 거의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 았다. 그는 아버지 옆에 앉아 미간을 찌푸리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바로 이 혼자의 생각 때문에 그의 온몸은 긴장되어 있었다. 드디어 그는 나직한 목소 리로 말했다. "아버지, 우리가 여기에 온 지 얼마나 됐어요?" "글쎄다, 모르겠구나, 휴이." "하지만 아버지, 얼마쯤이라고 생각해요?" "이틀인지, 그렇지 않으면 사흘인지." "그렇다면 오늘이 무슨 요일일까요, 아버지?" "모르겠다, 아마 수요일일 게다." "수요일..." 휴이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딱딱한 벽에다 몸들 기댔다. '아직 수요일이라면 그다지 염려할 것은 없다. 앞으로도 꼭 사흘이 남았다. 시합까지는 사흘이 남아 있는 것이다. 나는 토요일까지는 여기서 나가야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꼭 나가 야 한다...' 갑자기 초조해진 휴이는 돌을 잡고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타타...타 타...타타타탁! 휴이가 신호 보내는 걸 멈추자 사방이 다시 고요해졌다. 네드 소프틀리가 몸 을 일으키려고 손을 뻗다가 해리 브래이스의 얼굴에 닿은 것이 바로 그때였다. 처음에 그는 해리가 잠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살그머니 만져보려 했다. 그때 그의 손가락이 죽은 채로 열려 있는 차가운 해리의 입 속으로 들어 갔던 것이다. 로버트가 초에다 불을 켰다. 과연 해리 브레이스는 죽어 있었다. 불쌍한 해리, 언제나 약속만 해놓고 자기 마누라에게 탈장대 하나 사주지 못했던 해리였다. 로버트와 슬로거가 해리를 안아 일으켰다. 그의 몸은 굉장히 무거웠다. 그렇지 않으면 두 사람의 힘이 다 빠져버린 것일까. 그들은 해리를 약30미터 가량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똑바로 눕힌 후 로버트가 해리의 손을 그의 작업복 위에다 서로 걸치게 얹고 눈을 감겨주었다. 웹트는 자고 있었다. 이 사흘 사이에 처음으로 잠이 들었기 때문에, 커다랗게 코고는 소리를 냈다. 로버트는 그를 깨우지 않았다. 그는 해리를 위해 죽은 이를 위한 기도를 바쳐주고 슬로거 와 함께 제자리로 돌아왔다. "3센티 정도만 타게 초를 켜놓자." 로버트가 말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일을 할 수 있도록." 패트 리디가 다시 조용히 울었다. 그는 죽은 시체를 이제 두번째로 본 것이었 다. 역시 그것은 아주 싫은 기억이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로버트가 말하면서 패트의 떨리는 어깨를 얼싸안았다. "너도 무엇인가를 하도록 일을 줄게. 이번엔 네가 신호를 해보는 게 어떨까?" 패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엄마한테 편지를 쓰고 싶어요." 그가 말하고는 왁 울음을 터뜨렸다. "아주 좋은 생각이다." 로버트가 진지하게 말했다. "너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도록 해라. 연필은 여기 있다. 누가 종이 없나?" 네드 소프틀리가 탄차의 숫자를 기입하는 수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로버트에게 건네주었다. 로버트는 폭이 좁은 두 장의 종이가 한 장처럼 이어진 것을 찢어내서 수첩의 표지 위에 얹어 연필과 함께 패트에게 주었다. 패트는 힘 이 났다. 그는 크고 둥근 글씨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어머니..." 거기서 그는 쓰는 걸 멈추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면서 방금 자기가 쓴 글 자를 읽었다. "어머니..." 여기서 또 그는 쓰는 걸 멈추었다. "어머니..." 그는 다시 읽어보더니 쓰는 것을 그만 두었다. 그리고는 정말로 울기 시작했 다. 그는 처량하게 울었다. 그는 이제 열다섯 살밖에 안 되었던 것이다. 초가 3센티가 다 차버렸을 때 패트는 겨우 울음을 멈추었다. 로버트는 수첩과 연필과 종이를 다시 받아 자기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느는 촛불을 껐다. 그런 다음 마치 보호하듯 자기의 왼팔로 패트를 안았다. 그의 따뜻한 팔 안에서 페트는 잠들었다. 로버트도 역시 꾸벅꾸벅 졸았다. 시간이 흘렀다. 눈을 떴을 때 침묵 속에서 끝 없는 어둠만이 그대로였다. 그는 한바탕 조용하고도 익숙한 기침을 길게 했다. 밖으로 나가게 되면 틀림없이 또 한 차례 병에 시달리겠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 다. 그러고는 자기의 가슴 언저리가 더욱 차가워지는 걸 느끼면서 이 증상도 더 욱 심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시간이 흘렀다. 틀림없이 지금쯤은 구조 대가 자기네 가까이까지 와 있을 것이다. 그렇다. 정말 지금쯤은 자기네 근처에 와 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휴이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오늘이 무슨 요일일까요?" "글쎄다, 모르겠구나." 로버트는 부드러우면서도 냉정한 어조로 말하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아버지... 무슨 요일일까요?" "글쎄, 알 수가 없구나, 휴이." 로버트는 이번에도 조용히 냉정을 잃지 않고 말하려 했으나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빠지고 지친 것이 드러났다. "그렇지만 아버지... 무슨 요일일까요? 시합이 있단 말씀입니다, 아버지. 유나이 티드, 아버지... 유나이티드, 아버지... 유나이티드 시합인데... 토요일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가야 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요... 무슨 일이 있어도요, 아버지." 과묵했던 휴이가 이제는 신경질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깜깜한 어둠속 에서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토요일까지는 나가야 한다.' 그는 토요일까지는 무 슨 일이 있어도 나가야 했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일요일 밤이었다. 슬로거가 깨어났다. 모두가 얼마쯤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유독 가스가 아직 근처에 남아 있거나 모두의 체력이 허약해진 탓인 것 같았다. 슬로거가 말했다. "아아, 참, 꿈을 다 꾸었다니까. 내 마누라가 안다면 참말로! 아아, 맥주 한잔 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난 이제 배고프지는 않아. 맥주만 마실 수 있다면 좋 겠어. 아아, 하느님.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하느님이 여기서 우리를 구 해내 주신다면 나는 이제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아 아, 하느님, 우리들을 여기서 구해주십시오. 하느님, 하느님, 제발." 그의 목소리는 고함소리로 바뀌어 크게 퍼지며 울렸다. 네드 소프틀리도 고함을 질렀다. 다른 몇 사람이 여기에 가담했다. "우리를 나가게 해달라! 나가게 해달라!" 웹트까지 자제력을 잃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높은 목소리로 하느님에게 외쳐 댔다. "아아, 주여, 저희를 구해내시는 것이 얼마나 오래 걸리겠나이까?" 그것은 마치 울에 갇힌 야수의 포효와 다름없었다. 베네트가 그 다음으로 죽었다. 다시 6시간 후에 세드 콜더가 그의 뒤를 따라 죽었다. 이 두사람은 근 14년 동안 일을 같이 한 짝패였다. 14년 동안 그들은 함 께 일했고, 함께 술을 마셨으며, 함께 볼링을 쳤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죽은 것 이다. 두 사람 중 베네트가 더 조용한 사람이었다. 세드 콜더는 기력이 빠지면서 사뭇 신음처럼 소리쳤다. "난 죽고 싶지 않다. 난 아직 젊단 말이다. 젊은 아내가 있다구. 난 죽고 싶지 않다." 그러면서 그는 죽어갔다. 그들 모두는 이제 힘이 빠져 베네트와 세드 콜더의 시체를 옮길 수도 없었다. 게다가 로버트의 호주머니 속에는 초 동강에 불을 붙일 성냥이 불과 두 개피밖 에 없었다. 그는 마지막 기침막이 엿사탕을 패트 리디에게 주었다. 스커퍼 홀에 서 구조대가 오는 것도 그리 멀지는 않을 것이다. 틀림없이 온다! '아아, 하느님, 그들이 빨리 오도록 해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온다 해도 소용이 없게 됩 니다!' 그들은 이제 거기에 누워 있을 뿐 움직일 힘조차 없이 약해졌다. 변소로 사용 했던 곳까지 기어갈 힘조차 없었다. 그들은 다만 누워 있을 뿐이었다. 로버트는 누운 채로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그는 각 사람의 임을 세번씩 불렀다. 세 번 불 러 대답이 없으면 그 사람은 끝장이 났다고 생각했다. 네드 소프틀리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도 해리 브래이스 처럼 조용히 죽어 갔음이 틀림없었다. 네드는 항상 좀 모자라 바보라는 별명이 있었지만 죽을때는 우는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조용히 죽었던 것이다. 그 다음에는 스위 메서가 죽 었다. 스위는 천박한 놈이었지만 이젠 그의 음담패설도 그의 죽음과 함께 영원 히 끝이 났다. 웹트가 미쳐버린 것은 스위가 죽고 난 후였다. 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 로 오랫동안 조용히 누워 있었으나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비록 깜깜한 어둠 속 이었지만 그들은 그가 미쳤다는 것을 느꼇다. 웹트는 말했다. "저기 보인다! 하느님 앞에 선 일곱 천사가 보인다! 나팔소리가 들린다. 저건 내게 보내는 게시다." 처음엔 모두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웹트는 계속했다. "저들이 나팔을 부는 소리가 들린다. 첫번째 천사께서 나팔을 불고 다음엔 파 가 섰인 함성소리가 일어나고 있다." 슬로거가 말했다. "아이 참, 이봐, 제발 입 좀 닥쳐." "그 다음엔 두번째 천사께서 나팔을 분다. 마치 불타는 커다란 산이 바다에 내 던져져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된 것 같다. 물이 없다. 형제들아, 피다. 우리를 여기에 데리고 온것은 물이 아니고 피다." 슬로거가 일어나서 또 말했다. "웹트, 제발 부탁이다. 난 이제 그 소리 참을 수가 없다니까." 웹트는 무엇엔가 도취된 목소리로 여전히 떠들었다. "세번째 천사가 나팔을 분다. 고뇌의 별이 떨어진다. 나의 형제들아, 예레미아 애가의 고초와 재난은 지상에 사는 우리 인간으 운명이로다. 우리들은 인간의 탐욕 때문에 박살이 나는구나. 이번에는 네번째 천사가 나팔을 불고 다섯번째 천사가 나팔을 분다. 밑바닥 없는 탄광 속으로 또 하나의 별이 떨어지는구나. 그 리고 탄광에서는 연기가 치솟는다. 아, 우리는 탄광 속에 있다. 나의 형제들아, 탄광의 공기는 연기로 인해 새까맣다. 하느님의 봉인이 우리의 이마에 찍혔다. 우리를 여기에 데리고 온 높은 곳에 있는 자들 위에 천벌이 내려올 것이로다. 나는 그것을 보도다. 내 형제들아, 내게는 하늘로부터 예언의 은혜가 주어졌도 다. 나는 파라다이스 탄광의 예언자다." 그제야 로버트도 웹트가 미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말했다. "이 사람아, 앉게." 그는 웹트를 살살 달랬다. "자, 자, 앉아, 앉아봐. 이제 얼마 안 있어 구조대가 우리에게 당도할 거야. 앉 아서 조용히 기다리세.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까." 웹트는 자꾸 계속했다. "그리고 여섯번째 천사가 나팔을 분다. 하느님 앞에 놓인 황금 제단의 뿔피리 에서 하나의 목소리가 울려나오는구나. 네 천사가 흩어져 난다. 이것은 인류의 삼분의 일을 연기와 유황으로 실육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재난에 서 죽음을 당하지 아니한 나머지 인간들이 자기네의 행업을 그만두지않고, 살인 과 요술과 간음행위와 도적질을 그치지 않는구나." 웹트의 목소리는 점점 더 높아지고 외침으로 바뀌어 사방에 울리면서 떨리는 소리로 퍼져 천장의 암반까지도 흔들어대는 것 같았다. 슬로거가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난 이제 더 이상 이걸 참을 수가 없다." 그는 웹트 쪽으로 더듬더듬 어둠을 헤치며 기어갔다. 웹트는 무시무시한 목소 리로 계속 외쳐댔다. "그러고는 일곱번째 천사가 나팔을 분다아..." 그러나 일곱번째 천사가 나팔을 다 불기도 전에 슬로거가 웹트의 발목을 확 잡아당겼다. 웹트는 신음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입곱번째 천사가 나팔을 분다. 난 그 모습이 보인다. 인간의 미친 마음과 탐 욕으로 이루어지는 천년의 세상이 내게는 눈에 보인다. 돈, 돈, 돈... 우리는 돈 때문에 짖눌려 잃게 살해를 당하고 있다. 내가 예언을 할 것이노라... 높은 자리 에 있는 놈들은 떨어지고... 물이 아닌 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자, 찬송가를 이리 주십시오. 그리고 찬송을 부릅시다. 사랑은 내 손을 잡아주시는 것, 오소서, 위대한 구세주, 오소서." 그의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질질 끌려가듯 자꾸 여운을 끌더니 신음소리로 변 하다가 그 다음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는 예언으로 인해서 완전히 기진 맥진해버렸던 것이다. 그는 다시 외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울었다. 그러다가 예수 웹트는 죽어버렸다. 시간이 흘렀다. 로버트는 패트 리디에게 물을 먹여주었다. 패트는 반쯤 의식이 없었다. 그는 로버트가 손으로 퍼준 석탄 냄새 나는 물을 다시 토해냈다. "아아, 하느님, 구조대가 빨리 도착하게 해주십시오." 슬로거가 헛소리처럼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구조대가 온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는 낙반의 바위 쪽으로 기어가서 신호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신호를 할 만한 힘도 다 빠져 그의 힘없는 손가락 사이에서 돌맹이가 떨어지고 말았다. 시간은 흘러갔다. 슬로거가 목쉰 목소리로 말했다. "하느님 맙소사, 이 사람, 로버트, 나 말이야, 술 한 잔만 할 수 있다면 뭣이든 지 다 주겠어." 그러고 나서 그는 옆으로 털썩 누워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다음엔 패트 리디가 죽었다. 그는 로버트의 평평한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로버트의 팔 안에서 숨이 끊어졌다. 그것은 마치 어머니 품에 안긴 갓난아기와 같은 모습이었다. 패트는 죽음이 가까워지자 중얼중얼 지껄였다. 그는 죽어가면 서 마지막으로 말했다. "자, 엄마,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해도 되겠지." 그 다음 다시 로버트는 차례로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러고나서 그는 말했다. "살아 남은 것은 너와 나 뿐이구나, 휴이." 휴이는 기계적으로 말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요, 아버지?" 그는 다시 그 말을 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했다. "물이 먹고 싶은데, 아버지. 그렇지만 귀찮아서..." 로버트는 휴이에게 기어가서 물을 먹여주었다. 휴이는 아버지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이제 다 끝장이군요, 아버지." 그는 말했다. 그는 아직도 시합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들은 내게 다시는 기회를 주지 않을 거예요." 로버트는 말했다. "그렇지 않다, 휴이." "나 정말 시합에 나가고 싶었어요, 아버지." "나도 안다, 휴이." 로버트는 살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했다. 아무리 귀를 곤두세워도 구조대가 오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구조대는 물이나 굉장한 천장 낙반과 같은 것 에 부닥쳤음이 틀림없었다. 그는 희망에서도 고뇌에서도 이제는 모든 걸 초월했 다. 살그머니 그는 패트 리디의 시체를 내려놓고 휴이의 어깨를 한 팔로 안았다. 그는 휴이에게 아마 충분한 정성을 다 쏟아주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휴이는 너 무도 로버트 자기를 닮았다. 너무도 과묵하고, 너무도 자제심이 많았던 휴이. 그 는 자기가 휴이를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음을 느꼈다. 그는 휴이에게 말을 하려 했으나 너무 힘이 들었다. 입에서 말이 잘 나오지를 않고 기침이 쏟아져 나왔다. 기침은 소금 맛이 났다. 시간이 흘러갔다. 마지막 희미한 한숨소리가 휴이의 몸에서 새어나왔다. 휴이 는 결국 출전하지 못하고 만 그 시합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죽어갔다. 그는 실 망 속에서 죽고 만 것이다. 시간은 다시 흘러갔다. 로버트는 휴이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서 해리에게 해준 것처럼 차가운 휴이의 손을 모아서 맞잡게 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힘이 다 빠져 버려 그렇게 해줄 수도 없었다. 이제 그는 기침을 할 힘조차 없었다. 그는 입 속 으로 기도문을 외웠다. 기침은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기도문은 바르게 외울 수 있었다. 로버트의 생각은 오락가락했다. 그는 자기가 마지막으로 죽는다는 게 이상스 러웠다. 폐병환자인 자기가 그렇게도 건강하던 많은 사람들보다 더 오래 버텼다 는 사실이 이상스러웠다. 그렇다. 그는 늘 기침 때문에 자기가 죽게 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되고 보니 정말 자기는 기침으 로 죽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시간과 장소에 대한 감각을 상실했다. 마음은 데이 빗과 함께 윈즈백에 낚시질을 하러 갔던 그때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귀여운 데 이빗이 처음으로 조그마한 반점이 있는 송어를 낚아 올리는 게 보이기도 했다. 아니, 데이빗. 참 예쁜 고기를 낚았구나! 시간은 흘러갔다. 로버트는 몸을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조그마한 초 토막에다가 불을 켰다. 그 초 토막을 사용하지 않고 놔두는 것은 아까운 일이라 고 생각했다. 아직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이상 어떻게 하더라도 암흑 속에서 죽 고 싶지는 않았다. 촛불은 그의 주위에 있는 죽은 자들의, 고요한 유령 같은 시체들 위에 한줄기 의 노란 불빛을 던졌다. 자기도 이제 곧 죽을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공포도 없었고 다른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최후로 데이빗에게 몇 자 적어서 남겨두 고 깊었다. 그는 연필과 종이를 손으로 더듬어 꺼냈다. 그는 괴로움 속에서도 열심히 생 각을 하다가 다음과 같이 써 내려갔다. "데이빗, 보아라. 이 아비의 시체가 발견되면 이 편지를 너는 보게 되겠지. 우 리는 최선을 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플래츠에서 물이 샜던 것이다. 가까스로 바깥으로 전화를 해서 배러스 사장이 우리에게 스커퍼 홀로 가라고 지시해주었 지만 이 천장의 낙반으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대단히 험한 낙반이다. 휴이 가 방금 죽었다. 아무 고통도 없이 숨을 거두었다. 너의 어머니에게 우리가 예배 를 드렸다고 말해다오. 데이빗아, 나는 네가 성공하기를 그리고 명성을 떨치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못난 아비로부터." 그는 잠시 자기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면서 생각을 했 다. 그러고는 뒷장에다가 덧붙여 썼다. "추신. 배러스 사장은 이 폐갱의 평면도를 틀림없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사장 의 지시는 정확했다." 그는 편지를 접어 속옷 밑의 말라빠진 그의 가슴 옆에다가 간직했다. 그는 천 장에서 무너져 내린 바다에 등을 기대고 마치 무슨 생각이라도 하는 듯이 웅크 리고 앉아 있었다. 형태도 없는 암흑의 줄기들이 그의 노리 속을 둥둥 떠다녔다. 그는 기침을 했다. 그의 익숙하고 정다운 기침, 자기 자신과도 같은 바로 그 기 침이었다. 이윽고 천천히 미끄러져 내린 그의 몸이 땅바닥에 쭉 뻗었다. 그는 마 치 무슨 항의라도 하듯이 두 팔을 쫙 뻗고 반듯하게 누웠다. 눈을 부릅뜬 채 죽 은 그는 자기 동료들 가운데에 누워 있었다. 촛불이 힘없이 촛농을 떨구다가 곧 꺼지고 말았다. 제2부 1 탄광 법령 제83조에 의해 소집된 마지막 심리는 넵튠 탄광 재난사건의 원인 및 상황 조사로 들어가 거의 폐회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램 가에 위치해 있는 시립회관은 숨이 막힐 정도로 사람들로 꽉 찼고, 바깥에도 군중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일종의 긴장감이, 납 테두리를 한 높은 유리창에 비쳐 드는 오후 의 햇빛과 함께, 사람의 숨결이 가득한 시립회관 안의 임시 법정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위원석에는 위원장인 왕실 고문 변호사 핸리 더러먼드가 앉아 기술고문 인 탄광 조사반 대리의 보좌를 받고 있었다. 법정 한 가운데에는 광산국을 대표해서 관구 검사관과 지방 검사관인 제닝즈 가 앉아 있었다. 왕실 고문 변호산인 린튼 로스코가 타인캐슬의 변호사 존 배너 먼의 위촉을 받아, 넵튠 탄광의 소유주인 리처드 배러스의 변호를 맡고 있었다. 영국 탄광 노동자 연맹의 대행인으로는 하원의원 해리 뉴전트 및 짐 더전 그리 고 슬리스케일 탄광 노동자 공제조합의 대행인으로 톰 헤든, 유족 대표는 타인 캐슬의 변호사 윌리암 스내그 씨였고, 석탄 채굴ㄹ 소유자 켈 경의 대리인으로 개스코인 대령이 심리의 진행을 주시하고 있었다. 정면의 좌석엔 배러스, 아서, 암스트롱, 허즈페드, 기타 넵튠 탄광의 간부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데이빗, 잭 리 디, 해리 오글 및 탄광촌 달동네에 사는 광부들 몇 명이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는 사망자들의 유족 되는 사람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들은 대개 여자들로 싸구려 상복을 입고 있었고 대부분 모자도 없이 숄만을 두르고 앉아 있었다. 그 들은 모두 법정에서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데다가 법정의 분위기에 눌려버려 얼이 빠진 얼굴들로 앉아 있었다. 법정에는 그 밖에 도 광부들과 시민들이 모여들어 발 들여놓을 틈도 없이 빽빽했다. 관례적인 공식절차에 따라 재난사건과 그에 대한 조사에는 일정한 기간이 정 해져 있었다. 현재 1914년 7월 27일부터 꼬박 6일간이나 법정을 계속 열어오는 중이었다. 장내는 사람들의 두런거리는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지금까지의 진행을 보면, 54명의 증인들이 두세 번씩 소환돼 심문을 받았는데, 1만 5천 번에 걸친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이 있었다. 물론 그 사이에는 분노와 설득과 반감에 찬 몇 십만 마디의 말들이 여기저기에서 마구 튀어나왔다. 완전히 흥분을 한 헤든 은 너무 장황하게 늘어놓다가 심한 주의를 받기도 했다. 사람 좋은 짐 더전은 어법에 맞지 않는 말을 하면서도 뉴전트의 냉철한 논법을 지지했다. 개스코인 대령은 측량상의 수준기표니 법령사항 및 지질학적인 탄층구조 같은 것에 관한 전문용어를 마구 써댔고, 린튼 로스코는 뛰어난 웅변으로 장내 사람들을 압도했 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나 폐회로 접어들고 있었다. 바로 그때 왕실 고문 변호사 린튼 로스코가 일어섰다. 그는 살이 찐 당당한 풍채였으며 강인한 턱, 긴 입술에 혈색은 포도주 색깔이었다. 그는 2시부터 줄곧 증인들의 재심을 하고 있 었지만,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이 연극무대 위에라도 서 있는 듯한 몸짓으로 위 원장 쪽을 향해 돌아섰다. 이윽고 말이 시작되었다. 위원장: 말씀하실 것이 있습니까, 로스코씨? 린튼:리처드 배러스 씨에 관한 질문입니다, 위원장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배러스 씨에게 질문을 하게 해주신다면 사건에 알맞는 결론을 내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원장:그렇다면 좋습니다, 로스코씨. 리처드 배러스가 호출되었다. 그는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서 증인석으로 갔다. 그는 증인석에 똑바로 서서 얼굴에 약간 홍조를 띠운 채, 어떤 질문에도 솔직하 게 대답을 하겠다는 듯이 겸손하고 열의에 찬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아서는 자 리에 앉은 채로 몸을 웅크리고 시선은 바닥에 떨어뜨린 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린튼:리처드 배러스 씨. 또다시 괴롭혀드려 죄송합니다만 본인은 명확히 해두 고 깊은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귀하는 넵튠 탄광의 소유주인 동시에 35년의 경험을 가진 광산기사라고 하신 것 같은데? 리처드:그렇습니다. 린튼: 그러시다면 확실히 귀하의 채광학에 관한 경험은 넓다고 볼 수 있겠죠? 리처드:네, 그렇게 보는 것이 당연합니다. 린튼:그렇다면 다시 한 가지 더 묻겠습니다. 배러스 씨(천천히), 귀하께서 그 광맥을 파나가기 시작했을 때, 예전 넵튠의 물이 나왔던 작업장에 근접해 있다 는 것을 전연 생각해보시지 않았던가요? 리처드: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린튼:단적으로 말해서 배러스 씨, 귀하께서 지하의 상황에 관하여 알 수 있게 되는 방법은 단 두 가지 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 하나는 내부를 뚫어보는 일이 고 다른 하나는 기록물에 의존하는 것, 간단히 말해서 평면도에 의존하는 길이 아닙니까? 리처드:지당한 말씀입니다. 린튼:(설득조로) 그러나 내부를 뚫는 일은 결국 뚫어본 곳만을 알 수 있을 뿐 일 겁니다. 그래서 큰 과실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사실 뚫는다는 것은 특별히 무엇을 알아내지 못하거나 전혀 알아내지 못하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리처드:이번 사건과 같은 경우에서는 그렇습니다. 린튼:과연 그렇겠습니다. 그러면 다른 방법에 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귀하 께서는 옛 넵튠 탄광의 작업장에 관한 기록물이나 평면도, 아니면 그 복사물을 가지고 계셨더랬습니까? 리처드:아니올시다. 린튼:그러한 평면도는 설사 전에 있었다 하더라도, 광산 사업 초기에 있어서는 기록물이라는 것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을 때였으므로 유실되었거나 아니 면 파기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이 귀하의 손에 들어온 적이 전혀 없었나 요? 리처드:전혀 없었습니다. 린튼:그렇다면 귀하께서는 그 절박스러운 위험에 관해서 전혀 아는 것이 없었 겠군요?(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그런데 논리와 이성에 비우어볼 때, 귀하도 이 불행한 조난자들과 마찬가지로 이 불상사의 희생자였다 하겠습니다.(위원장 쪽을 바라보며) 본인은 바로 이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 했던 것입니다. 이 이상 더 배러스 씨를 괴롭힐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위원장:감사합니다. 배러스 씨, 대단히 수고하셨습니다. 배러스는 만인이 눈길이 자기에게로 쏠려 있음이 당연하다는 듯 머리를 높이 치켜세우고 증인석에서 걸어 나왔다. 그러한 그의 태도에는 감동적인 면이 있었 으므로 법정 여기저기에서는 칭찬의 소곤거림과 탄성이 일어났다. 장내에는 리 처드에 대한 동정심으로 넘쳤다. 사문 위원회에서의 그의 태도도 호감을 사고 있었고, 구조 작업 중 분투하던 모습 때문에도 그는 사람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 고 있었다. 배러스가 아서의 옆 자리에 앉자 해리 뉴전트 의원이 조용이 일어섰다. 뉴전 트는 조용한 태도였지만 결의와 불굴의 투지로 넘치는 그의 기상은 기운차고 솔 직한 인상을 주었다. 큰 키에 약간 여윈 편인 그는 창백한 얼굴에 이마가 넓은 편이었는데 그 이마에는 숱이 적은 머리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호감이 가는 첫인상은 아니었지만 따뜻하고 침착한 성실성이 엿보여 결코 편견 같은 것에 치 우치지 않을 믿음직스러운 데가 있었다. 그는 5년 전에 에즐리의 타인사이드 시 에서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노동운동에 있어서는 신흥 세력으로 인정받고 있 는 그를 장래의 당 지도자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위원장을 향하여 약간 몸을 숙인 자세로 말을 시작했다. 해리:방금 린튼 로스코 변호사께서 증인에 대한 재심문을 하셨는데 본인도 위 원장의 허락을 얻어 데이빗 펜윅을 다시 증인석에 세우고자 합니다. 위원장: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허락합니다. 데이빗 펜윅의 이름이 불리워졌다. 데이빗은 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앞으로 나 갔다. 몹시 침통한 표정이엇다. 이 6일 동안 그는 증인석을 오르내리며 수없이 심문을 받는 가운데 은근한 협박과 조롱, 회유 등 여러가지 봉변을 당했다. 그러 나 굳건한 자세로 자신의 의사를 고집하였고 양보하는 일도 없었다. 그는 성서 위에 손을 놓고 맹세했다. 해리:한 번 더, 펜윅 씨, 이번 참사로 생명을 잃은 귀하의 아버지 로버트 팬윅 씨에 관해서 묻겠습니다. 데이빗:네. 해리:아버지께서 스커퍼 플래츠에서 작업 중에 물이 샐 가능성에 대하여 경고 를 했었다는 것을 귀하는 다시 증언할 수 있습니까? 데이빗:네. 아버지께서는 여러 번 그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해리:귀하에게? 데이빗:네.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해리:그런데 펜윅 씨, 귀하께서는 귀하의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에 어떤 중요성 이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데이비: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몹시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말씀드 린 바이지만 배러스 사장님에게 직접 말씀드리기까지 했습니다. 해리:귀하는 실제로 이 문제를 배러스 씨에게 말했던가요? 데이빗:네. 해리:그때 배러스 씨의 태도는? 데이빗:저의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여주시지 않았습니다. 린튼:(일어서면서) 위원장님, 이의 있습니다. 뉴전트 씨는 이 증인에 관해서 뿐 만 아니라 다른 증인들에 관해서도, 이문제의 취급 범위를 전적으로 벗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대로 방치하는 것을 본인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원장:로스코 씨, 만일 원하신다면 귀하께서도 이 증인을 반대심문할 기회가 충분히 있습니다.(뉴전트를 향하여)그러나 뉴전트 씨, 이 증인으로 부터는 이 이 상 더 알아볼 것이 없는 것 같군요. 해리:이 이상 더 말씀드릴 것은 없습니다. 위원장님, 다만 본인은 이 재난을 피할 수 있을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위원장님께서 다시 한 번 주지해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뉴전트는 앉았다. 그러자 린튼 로스코가 급히 일어서서 증인석을 떠나려는 데 이빗을 과장된 몸짓으로 제지했다. 린튼:잠깐만 실례합니다. 귀하의 아버지께서 그 말씀을 한 것은 어디서 입니 까? 데이빗:윈즈벡 시냇가에서였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낚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린튼:(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귀하의 아버지는 그 처럼 죽음을 두려워 하면서도 태연히 낚시를 즐겼는데 귀하는 우리가 그 사실을 믿으리라고 생각하 십니까?(냉소를 겨우 참는 듯한 얼굴로)펜윅 씨, 솔직하게 말해주십시오. 아버지 께서는 교육을 받으신 분입니까? 데이빗:저의 아버지께서는 지성을 갖추신 분이었습니다. 린튼:아니, 아니, 내가 질문한 범위 안에서 말씀해주십시오. 교육을 받으셨던가 라고 묻고 있습니다. 데이빗:그런 의미의 교육은 못 받으셨습니다. 린튼:그렇다면 귀하는 인정하고 깊지 않으시겠지만 귀하의 아버지께서는 교육 을 받지 않았다고 봐도 되겠군요. 이를테면 채광기술에 관해서는 어떤 과학적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않으셨겠죠? 그런가, 그렇지 않은가만 분명히 대답해주십시 오. 데이빗:그런 지식은 없으셨습니다. 린튼:귀하는 그런 지식을 가지고 계십니까? 데이빗:없습니다. 린튼:(냉소를 감추려 하지 않으면서)귀하는 교직생활을 하신다는데? 데이빗:본인이 교사라는 것과 넵튠 탄광의 참사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린튼: 그 질문이야 말로 본인이 귀하에게 드리고 깊은 것이올시다. 귀하는 문 학사 학위도 받지 못한 채 주립 국민학교의 초급교원 노릇을 하고 계십니다. 그 리고 채광학에 관해서는 완전히 무지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계십니다. 그 런데도. 데이빗:저는 ... 린튼:잠깐만.(테이블을 때리면서)귀하는 탄광 노동자들로부터 이 문제에 대해 어떤 행동을 취해달라는 권한을 부여받은 것입니까? 아니면 그렇지 않습니까? 데이빗:그렇지 않습니다. 린튼:그렇다면 배러스 씨가 귀하의 주제넘은 간섭을 무시해보라는 것 외에 그 어떤 태도를 취할 거라고 귀하는 기대했습니까? 데이빗:100여 명의 목숨을 구하려고 노력한 것이 주제넘은 짓이었습니까? 린튼:불손한 태도는 삼가해주십시오 데이빗:불손한 태도는 귀하만의 전매특허가 아니라고 봅니다. 위원장:(중간에 끼어들며) 린튼 로스코 씨,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증인으로부터는 이미 필요한 만큼 다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린튼:(한 손을 앞으로 내밀며) 그러나 위원장님. 위원장:리처드 배러스 씨께서는 가장 고결한 동기 이외에는 그 어떤 동기도 전혀 없었다는 덧을 본인이 아무런 편견 없이 선언함으로써 이 문제는 매듭이 지어질 것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린튼:(미소를 짓고 머리를 숙이며)깊이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위원장님. 위원장:더 말씀하시고 싶은 것이 있으신지요, 린튼 로스코 씨? 린튼:괜찮으시다면 사실을 간단히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재난사건에서 발 생한 논쟁점이 매우 명확했다는 것을 우리는 축하해야 할 것입니다. 옛 넵튠 탄 광 작업장을 명시한 평면도 또는 약도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의 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미 본인이 제시한 봐와 같이 구갱 작업장은 1808년에 폐쇄된 것이고, 1808년이라고 하면 채탄 폐쇄에 대처한 평면도의 보관과 그 보 고서의 제출을 요구하는 법령이 반포되기 훨씬 이전이었습니다. 또 아시다시피 기록의 보관뿐 아니라 대체적으로 광산업 그 자체가 극히 초보적인 단계에 있었 던 시대입니다. 따라서 굳이 말씀드리자면 책임 운운은 어불성설입니다. 리처드 배러스 씨는 만인에게 추앙을 받는 탄광 경영주이며, 스커퍼 플래츠에서의 작업 을 산업의 최선 최고의 관례에 따라 시행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는 긴박한 위험이 닥쳐오리라는 데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던 것입니다. 증인 펜윅 씨를 반대심문하는 동안에 뉴전트 씨가 그 재난사건에서 목숨을 잃 은 분들 중 어떤 사람이 스커퍼 플래츠 안으로 물이 흘러들 것이라는 자기네들 의 우려를 알렸었다는 증언이 나왔지만, 그것은 본인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위원장님께 요청하겠습니다만, 펜윅 씨가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그런 위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그 문제에 관해서, 그의 증언을 일단 고려한다 하더라 도, 그같은 터무니없는 진술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일임을 알아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기껏해야 그것은 우연히 주고받은 대화이며, 탄광의 책임잇는 모든 직 원들로 부터의 확실한 증언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그곳의 종업원 내지 주민들 중에서는 그와 같은 공포감 또는 의혹을 표명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 다. 증인 펜윅 씨는 지나치게 격한 태도로 지난 4월 13일 밤 리처드 배러스 씨와 의 상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원장님, 그 문제의 밤 펜윅이 제시한 그 무례하고도 불손한 교섭을 과연 중요하게 생각할 탄광주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이를테면 암스트롱 씨나 허즈페드 씨 또는 간부들처럼 책임있는 사람들이 그런 한 의문을 말했다고 한다면야 문제는 전혀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방면 에 전연 무지한 자가 아무런 사정도 모르면서 막연한 말로 갱내의 위험과 물과 습기에 대해 운운하기가 그게 말이 되겠습니까? 위원장님, 넵튠 탄광은 본래 습 기가 많은 탄광으로 물이 새어 어느정도 흐른다 해도 그것이 곧 물이 터지게 될 가능성을 제시해주는 것은 못 된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려서 위원장님, 탄광 관리 책임자는 당시의 작업 광부들이 물 에 잠긴 구작업장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하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충분히 단 언할 수 있습니다. 1872년 이전에 있는 법령상의 결함으로 인해 평면도라는 건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위원장님, 이 사건의 중요 실마 리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상으로 본인은 이 사건을 위원장님의 명석한 판단에 맡겨드리고자 합니다. 위원장:수고하셨습니다. 로스코 씨, 매우 명쾌하게 사건의 개요를 말씀해주셨 습니다. 그러면 뉴전트 씨, 귀하께서도 본인에게 진술하시고 깊은 말씀이 있으신 지 모르겠군요. 해리 뉴전트가 천천히 일어났다. 해리:위원장님, 본인은 현재로서는 별로 더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후일 하 원에서 습기가 많이 있는 탄광에 관한 법령에 대하여 총괄적인 질의를 할 작정 입니다. 본 건은 최초로 발생한 침수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필요한 평면도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수많은 인명 피해를 당하는 이와 똑같은 사건 들을 몇 번씩이나 경험해왔습니다. 그러므로 이 같은 문제가 얼마나 중대한 것 이냐 하는 점을 우리는 거듭 강조해야만 합니다. 탄광 내의 안전을 도모함에 있 어 이제야말로 무슨 수단을 강구해야만 합니다. 탄광주의 부주의로 발생하는 사 건은 우리들에겐 이미 상당히 낯익은 것들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벌써 폐갱당 한 작업장 근처에 갔을 경우, 특히 그 지층에 상당한 석탄이 있다는 것을 예상 한 경우라면 탄광주가 부주의 차원을 넘어서는 악질적인 짓까지도 할 수 있다고 본인은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사유재산 제도에서 오는 불가피한 폐해인 것입 니다. 우리나라 탄광의 경우, 상황이 좋은 해라 하더라도 1년 365일 동안 하루 평균4명이 목숨을 잃고 있는 꼴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위원장님. 매일 6 시간마다 한 사람이 생명을 잃고 있는 꼴이며, 매 12분 마다 한 사람이 부상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건에 있어서 우리는 너무 가혹하다는 비난을 받아 왔습니다. 본인은 이 사건과 같은 국부적 사건보다는 광산의 안전이라는 전반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탄광의 개선, 법령의 개혁을 세상에 호소하기 위해서는 이같은 사건을 내새우지 않을 수 없습 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이런 사건이 발생했을 때마다 고작해야 사회로부터 얄팍 한 동정이나 받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석탄 산업에 있어서 이른바 발전이라고 하는 것이 사상자의 수를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유재산 제도라 는 경재제도가 존재하고 있는 한 그와 같은 인간 생명의 손실이 계속되리라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 본인이 진술코 자 하는 모든 것입니다. 위원장:(서두르는 자세로)그럼 이것으로서 심리위원회의 폐회를 선언합니다. 그 동안 이 조사에 협력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 리고 또 유족들, 특히 그 유해를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열 분의 유족들에 대해 서는 심심한 조의를 표하고 깊습니다. 마지막으로 리처드 배러스 씨가 매몰된 사람들을 위하여 행한 그 영웅적 노력에 대하여 찬사를 보내며, 본인 앞에서 진 술한 증언에 따라 배러스 씨가 이 법정을 떠나심에 있어 그분의 인격엔 한 점의 오점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 명백하게 기록에 남겨놓으려고 합니다. 수군대는 소리와 긴장에서 해방된 커다란 한숨소리들이 법정을 더욱 소란스럽 게 만들었다. 위원장이 자리를 뜨자 장내는 의자들을 당기는 소리와 빠른 말소 리들로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위쪽에 있는 이중 출입문이 열리자 법정은 순식간 에 텅 비어버렸다. 배러스와 아서가 입구의 돌층계까지 왔을 때, 개스코인 대령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축하의 뜻을 표하기 위해 밀어닥쳤다. 어느 구석에서는 만세소리가 일 어났을 정도였다. 그들을 둘러싸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져서 좀처럼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힘찬 악수가 계속되었다. 배러스는 모자도 쓰지 않은 채 약간 상기 된 표정이었지만 꼿꼿한 자세로, 그 뒤에는 아직도 새파랗게 질려 있는 아서를 대동하고 돌층계 맨 꼭대기에 서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눈길로부터 조금도 비 켜 서려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이제는 혐의가 풀렸다는 안도감과 즐거움이 분명하게 넘쳐 흘 렀다. 그는 자기 앞에 내민 손은 누구의 손이든 상관없이 굳게 잡고 악수했다. 그의 감격은 악수를 나누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까지 전해졌다. 만세, 만 세 하는 소리가 전보다 좀더 높게 몇 번 일어났다. 감사를 표하면서 배러스는 천천히 돌층계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개스코인, 린튼 포스코, 배너만, 암스트롱, 제닝즈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서가 그의 뒤를 따랐다. 군중들은 이 당당한 일행 들 앞에서 경건하게 길을 열어주었다. 배러스는 여전히 모자를 쓰지 않은 머리를 높이 쳐들고 앞장서서 큰길을 건너 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시선은 열심히 아는 얼굴들을 찾아 인사에 답했으 며, 침착한 말을 한마디씩 던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군중들이 자기에게 호 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똑똑히 느꼈다. 자기는 한 점의 오점도 남기지 않고 법 정에서 나온 것이엇다. 말하자면 진흙탕에 던져졌으나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았 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매몰된 이들을 위하여 영웅적으로 분투한' 이라고 폐회 직전에 들은 그 말이 아직도 그의 귀에 쟁쟁하게 울리고 있었다. 법산저택으로 향하는 이 행렬은 마치 개선 행렬과도 같았다. 시립회관 안에는 데이빗이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서 바깥의 만세소리와 무거운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담냄새 절은 벽이랑 더러운 유리창에서 윙윙대는 파리들을 바라보고 있었 다. 그는 자신을 자제하려 애썼다. 아무리 떠들어도 소용없는 일, 어찌 할 도리 가 없는 것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어깨에 손을 대는 바람에 그는 천천히 돌아다보았다. 해리 뉴 전트가 바로 곁에 서 있었다. 그는 다정하게 말을 했다. "자아, 이제 다 끝났네." "네, 그렇습니다." 뉴전트는 데이빗의 무표정한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며 옆에 앉았다. "별 뾰족한 수를 기대하지도 않았겠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데이빗은 머리를 흔들었다. "전 정의를 기대했습니다. 그 사람은 당연히 책임 추궁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의당 처벌되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처벌은 커녕 도리어 모두가 그 사람에게 아첨을 하고 만세를 불러주기까지 했습니다." "그걸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선 안 되지." "전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필요가 어디 있습니 까? 저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건 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일입 니다." 가냘픈 미소가 뉴전트의 입술 위에 떠올랐다. 그것은 매우 따뜻한 미소였다. 심리위원회가 열리고 있는 동안 사뭇 그는 데이빗을 자세히 관찰했다. 그는 데 이빗에게 강하게 이끌리는 자신을 느꼈다. "그리 나쁜 결과는 아니었어." 그는 곰곰이 생각하면서 말을 계속했다. "이제 우리는 폐갱의 침수문제에 관해서 광산국에다 압력을 넣을 수가 있으니 까 말이야. 오랜 세월 동안 우리는 이 기회를 기다려왔다고나 할까. 그게 주요한 수확이라 할 수 있지, 자네도 그런 식으로 사태를 볼 수는 없나?" 데이빗은 패배로 인한 내면의 허탈감과 강인한 싸움을 벌이면서 머리를 치켜 들었다. "저도 그 점은 이해가 갑니다." 이렇게 중얼거리는 데이빗의 눈 속에 담긴 표정이 뉴전트의 평정한 마음을 갑 작스레 바꾸게 만들었다. 그는 데이빗의 어깨에 팔을 돌려 감았다. "자네 기분은 알겠지만 이봐, 마음을 상하진 말게. 자네는 멋있게 했단 말일세. 자네의 증언은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이상으로 효과가 있었던 거야." "전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고 싶었지만, 못했던 거지요. 지금까지 늘 뭘 해야겠다고 말해오면서도 말입니다." "아니, 자넨 하게 될 거야. 우선 자기 자신에게 기회를 주어야 해. 난 앞으로 계속해서 자네와 만나고 싶네. 지금부터의 일은 내가 생각해보지. 그러니까 그 동안에 자네는 힘을 내라 이 말일세." 그는 문 쪽으로 힐끗 눈길을 보내며 일어섰다. 문 쪽에는 헤든이 짐 더전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데이빗, 오늘 밤6시에 정거장으로 나오게. 자네에게 할 말이 있네." 그는 용기를 내라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해 보인 후 해든과 더전에게로 다가갔 다. 세 사람은 카우펀 가의 임시 사무소 쪽으로 걸어갔다. 데이빗도 자리에서 일어나 모자를 집어 들었다. 시립회관 밖으로 걸어나온 그 는 프리홀드 가로 내려갔다. 그는 몹시 피곤했다. 지금까지 지나치게 긴장한 가 운데 모든 힘을 심리위원회에 쏟아왔다. 이 6일 동안 학교도 가지 않았다. 그런 데 결과는 이 꼴이 되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자신도 다시 힘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깨를 오무렸다가 다시 힘을 주어 쭉 폈다. 패배했다는 느낌 속에 조 용히 머무를 만큼 한가한 시간이 못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 개인적인 원한을 푼다거나 분노를 할 때도 아니었다. 그는 사태를 좀더 냉정하게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리홀드 가를 지나 길을 건너서 램가로 들어섰다. 길의 반대편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래미지였다. 정육점 주인 래미지는 커다란 청백색의 앞치마를 그의 허리 한복판에 두르고 더러운 곤색 리넨 윗도리를 입고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도살장에서 일을 한 듯 양 손등에는 마르 핏자국이 점점이 묻어 있었다. 따뜻한 오후의 태양이 그의 주위에 빨간 이내를 이루고 있었다. "여봐, 펜윅, 잠깐만 나 좀 보자." 데이빗이 걸음을 멈추자 래미지는 가까이 다가왔다. 그 굵은 목이 답답한 듯 칼라의 단추를 끄르더니 두 손을 가죽 허리띠 속에다 찌르고는 몸을 뒤로 젖혀 데이빗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그래 이제 시립회관에서의 네 일은 끝난 거냐?" 그는 조롱하는 투로 말했다. "네가 으쓱거리는 것도 당연하겠지. 뭐니 뭐니 해도 너는 지난 일 주일 동안 슬리스케일의 명성을 올려주었으니까. 린튼 같은 작자와 토론을 하려 맞섰다니 너는 굉장한 변호사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겠지." 그의 빈정대는 어조는 더욱 심해졌다. 그는 심리위원회에서 일어났던 일의 자 세한 내용들을 다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내가 너의 입장이라면 그렇게 우쭐대진 않겠다. 아마 이번 일은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는 것도 곧 알게 되겠지만 말이다." 데이빗은 래미지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는 뭔가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래미지는 빈정대 는 말을 그만두고 협박조로 변하면서 이맛살을 험상궂게 찌푸렸다. "야, 이 자식아! 도대체 허락도 없이 6일간이나 학교를 결근하고 돌아다닌 것 은 누구를 믿고 하는 짓이냐? 그 학교가 네놈 것인 줄 아니?" "난 가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심리위원회에 갔던 겁니다." "무슨 이유가 있다는 거야? 원한을 풀러 갔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일인데. 네놈은 읍내의 고마운 어른에게 돌을 던지려 했던 거야. 너 같은 자격도 없는 놈에게 교사직을 알선해주신 은인에게 말이다. 네놈은 밥을 먹여준 것에 대한 은혜 갚음으로 돌아서서 손등을 깨무는 개새끼야. 그렇지만 말이다, 네놈은 곧 후회하게 될 게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데이빗은 간단히 말을 끝내고 걸어가려 했다. "잠깐만." 래미지가 소리를 질렀다. "아직 다 끝나지 않았어, 임마. 난 말야, 전부터 늘 네놈이 네 아버지와 똑같은 사고뭉치라고 생각해왔었지. 네놈은 썩어빠진 고약한 사회주의자에 불과해. 학교 에는 네놈 같은 선생이 필요 없다는 걸 보여주고 말겠다. 곧 목을 잘라버릴 거 야." 한동안 말이 끊어졌다. 데이빗은 래미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당신은 나를 내쫓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 이놈이, 그럴 수가 없다고? 정말 못 할 줄 알아?" 개가 짖는 것같이 거센 래미지의 목소리에는 승자의 오만함이 잔뜩 흐르고 있 었다. "우리는 어젯밤에 학무위원회를 개최했다. 거기서 네놈의 행동을 논의해 네놈 에게 사표를 받도록 만장일치로 합의했다는 사실을 알아둬야 할 게다." "뭣이라구요!" "이젠 다 끝장이 난 거야. 아침에 출근하면 스트로더 교장으로부터 멋있는 통 고를 받을걸. 교장은 학사 자격증을 가진 선생을 원한다 이 말씀이지. 네놈같은 반풍수의 광부 새끼는 필요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려줄 게다." 한참 동안 래미지는 데이빗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몹시 만족한 얼굴로 쇠가죽 같은 두꺼운 입술을 비쭉거리며 웃더니 푸줏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데이빗은 고개를 푹 숙이고 램 가를 따라 걸어갔다. 그는 집으로 들어가자 부 엌으로 가서 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제니는 타인캐슬의 친정에 가 있었다. 그 는 그녀에게 심리위원회의 일로 걱정을 시키지 않으려고 지난주에 그녀를 친정 으로 보냈던 것이다. 식탁 앞에 앉은 그는 차 마시는 것도 잊고 그저 찻잔을 휘 젓고만 있었다. 과연 그들은 래미지의 말처럼 파면을 결정했을까. 그는 래미지가 한 말이 결코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데 이빗은 북부의 교육자 연합회에 호소해서 싸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 슨 소용이 있을까? 그의 얼굴 표정이 굳어졌다. '아니다,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자.' 그는 6시에 뉴전트를 만나면 그 말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 다. 그는 이 막다른 골목에서 어떻게든 빠져나가고 깊었다. 그는 뭔가를 시작하 고 싶었다. 정말이지 그는 자기가 하는 일을 정당하게 인정받고 싶었고 단 한번 이라도 좋으니 진짜 무엇인가를 해보고 싶었다. 6시 15분 전, 그는 집을 나와 역으로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길을 가다가 몹시 소란한 소리에 부딪쳐 걸음을 멈추었다. 신문팔이 소년들이 떠들어대는 소리였 다. 그들은 호외를 흔들어대며 언덕길을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발을 멈추 고 그것을 한장 샀다. 지금까지 심리위원회가 그에게 안겨준 모든 일과 잠재되 어 있는 공포감이 다시 그의 마음을 휩싸고 돌았다. 호외 첫 장에는 다음과 같 은 내용이 커다란 활자로 찍혀 있었다. "영국의 최후 통첩 오늘밤이 시한." 2 1914년 9월 둘째주 토요일, 1시가 가까워오는 시각에 아서는 넵튠 탄광에서 법산저택으로 돌아왔다. 탄광에서는 다시 정상적으로 작업이 시작되어 그 제니 의 끔찍한 기억은 다 파묻히고 잊혀져 가는 듯 했다. 그러나 아서의 얼굴은 전 혀 흡족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지친 사람처럼 가로수가 늘어서 있는 거리를 걸어 올라갔다. 이윽고 법산의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그가 기대하고는 있었지만 들여놓는 게 어딘지 꺼림직했던 새 자동차가 서 있었다. 한 달 동안 교습을 받으려고 타인캐슬에 가 있었던 바클리가 새 자동차를 사서 몰고 온 것 이다. 자동차는 법산 저택의 정면 도로에 바짝 붙여 세워져 있었다. 최신형인 그 차는 전체가 부드러운 밤색 에나멜 칠이 되어 있고, 반짝거리는 구리 부속들이 달려 있었다. 배러스가 그 새 차 옆에 서 있었다. 아서가 지나가자 그가 소리를 질렀다. "봐라, 아서야. 드디어 차가 왔구나!" 아서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광부 작업복 차림이었다. 그는 무거운 기분으로 차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난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차가 꼭 필요했다." 배러스가 설명했다. "전에 이런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 정말 우습구나. 바틀리가 그러는데 아주 멋있게 달린다는구나. 오늘 밤 타인캐슬까지 시운전을 해보자꾸나." 아서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재빨리 입을 떼었다. "죄송합니다만... 전 못 가겠습니다." 배러스가 웃었다. 그 웃음소리도 새로 구입한 자동차처럼 새로웠다. "못 간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오늘 저녁은 토드네 식구들하고 함께 지내기 로 약속했다. 센트럴에서 모두 저녁 만찬을 하는거다." 아서는 차를 자세히 훑어보던 시선을 돌려 아버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 버지 배러스의 얼굴이 평온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감정을 누르고 있기 때문 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그의 눈과 입술은 전보다 더욱 활기가 넘쳤다. 도수 높은 안경뒤로 보이는 그의 작은 눈이 앞으로 더 불거진 듯했다. 그는 흥분해 있었다. 아마도 새로 들여와 저택 앞에 놓인 차가 그를 흥분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께서 센트럴에서 만찬회를 베푸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전 몰랐습니다." "그런 습관은 없다." 배러스는 갑자기 짜증스런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번은 특별한 경우야. 앨른이 자기 대대원들과 함께 전선으로 떠난다. 우리 모두는 그의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잇다. 거기다가 오랫동안 토드를 만나보지 못했고 해서 기회를 만들어본 것 뿐이다." 아서는 또 한동안 생각을 하다가 물었다. "탄광에서 재난사고가 있었던 뒤로 아버지께선 토드 아저씨를 만나지 못하셨 죠?" "그래, 못 만났지." 배러스는 짧게 대답했다. 한참동안 다시 침묵이 흘렀다. "아버지." 아서의 조용한 음성이 먼저 흘러나왔다. "아버지께서 토드 아저씨를 심리 위원회에 불러내서 아버지를 지지하도록 부 탁하지 않으셨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군요!" 배러스는 언짢은 표정으로 돌아다보았다. "지지하게 하다니! 그게 무슨 뜻이냐? 상당히 만족스러운 판결이 내렸는데 뭐 가 또 필요하다는 거냐?" "만족스러웠다구요?" "그럼, 그렇고 말고." 배러스는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서 차의 라디에이터에 묻 은 먼지를 가볍게 털었다. "타인캐슬에 가겠니, 안 가겠니?" "그럼, 가겠어요, 아버지." 다시 침묵이 흐르는 사이 시내에서 종소리가 울려왔다. 아서는 점심을 먹으려 고 아버지의 뒤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배러스의 발걸음이 전보다 약간 빨 라졌다. 최근에 와서 그는 아버지의 걸음걸이가 뭔가에 쫓리고 있다는 인상을 줄 만큼 활기차다는 것을 느꼈다. "아주 좋은 차더구만." 배러스는 식탁에서 캐리 고모 쪽을 바라다보면서 보고하듯이 말했다. "캐럴라인도 곧 한번 타보게 될 거야." 캐리 고모는 기뻐서 얼굴을 붉혔으나 그녀가 뭐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배러스 는 신문을 집어 들었다. 그 신문은 타인캐슬에서 가지고 온 특별판이었다. 신문 을 급하게 훑어보던 그는 만족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아하! 너희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뉴스가 있구나, 좋은 뉴스다." 그의 눈이 더욱 밖으로 튀어나와 보였다. "독일군 마르네 강에서 격퇴. 손해막 대. 사상자 수는 약4천 명으로 추정됨." 아서는 아버지가 4천 명의 사상자가 생겼다는 참담한 사실을 이상스럽게도 흥 미와 관심에 찬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야릇한 전율이 그의 몸 전체에 퍼졌다. "네, 그렇군요." 아서는 자연스럽지 못한 어조로 말했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군요. 4천 명이라니, 넵튠 탄광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 수의 약 40배가 되는 군요." 그 말 뒤에는 죽음과 같은 침묵이 뒤따랐다. 배러스는 신문을 밑으로 내리고 툭 불거진 눈을 아서에게 고정시켰다. 그리고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너는 정말 괴상하구나, 탄광에서 발생한 불행한 사태와 신문기사 내용을 연결 해 생각하다니. 앞으로 주의 하도록 해라. 이미 다 끝나서 잊어버려야 할 일을 자꾸 생각을 한다는 것은 어딘가 몸이 좋지 않다는 표시인지도 모른다. 넌 좀 현실적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넌 지금 우리가 국가적으로 긴박한 상태에 처해 있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모양이구나."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이렇게 말하고는 계속해서 신문을 읽었다. 식당 안은 또 다른 의미의 침묵이 흘렀다. 아서는 점심을 억지로 삼키다시피 하고는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침대 모서리에 걸터 앉아 침울하게 차밖을 내다보았다. 자신에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아버지가 한 말은 의심할 여지 없이 맞는 말이었다. 자기는 지금 병에 걸려있 다. 그것도 아주 무서운 병에, 그러나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105명이 라는 사람이 넵튠탄광에서 희생되었고 그는 그 희생자들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사람들은 자기와 한 동네에 살았고,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었던 사람들이며, 함께 이곳을 걸어다녔고, 일도 함께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는 그들을 잊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말한 살육, 이 무서운 살육 즉 총알과 포탄과 유산탄에 의해 수천명의 인명이 살상되었다는 사실은 마음의 상처를 더욱 크게만들 뿐이었다. 전쟁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것이 넵튠 탄광의 재난을 다시 기억 하게 해주고 더욱 심한 충격으로 다가오게 했다 그것은 새로운 충격을 주는, 아 니 그 재난과 똑같은 충겨을 주었다. 전쟁의 희생자들이 바로 탄광 희생자들 같 았다. 전쟁은 탄광의 재난이 더욱 확대된 것이었고, 갱이 물에 잠겨 더 심하게 범람을 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인간생활에서 귀중한 아름다운 이상을 파묻어 버린 늪지를 더 넓힌 것과 같은 일이었다. 아서는 불안스레 몸을 움직였다. 요즘 들어서는 자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무서웠다. 그는 자기 마음이 깨지기 쉬운 프라스크 같다고 생각했다. 그 속에 담 긴 무서운 생각들이 언제 어느 때에 혼합되어 갑작스레 폭발할지도 모르는 화학 약품처럼, 거품을 일으키며 동요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이러한 자신 내 면의 움직임에 저항할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려운 건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태도였다. 그는 아버지를 사랑했다. 그는 아버지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찬양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마치 신을 감시하듯이 자꾸만 아버지를 감시하고 비판하고 주의깊게 관찰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그자신도 신성치 못한 그 탐정 노릇을 그만두고 깊었으 나 왠지 그럴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도저히 그 짓을 그만두도록 내버려두질 않았다. 그는 아버지가 변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 서 그는 두려웠다. 그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벌렁 뒤로 누워서 눈을 감 았다. 그는 갑자기 피곤을 느껴 잠을 자야만 할 것 같았다. 눈을 떴을 때에는 오 후였다. 정신을 차리자 한숨을 내쉬고는 일어나서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6시에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현관 응접실에서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서가 가까이 가자 배러스는 자기의 시계를 무슨 의미가 있는 양 바라보았다. 최근에 배러스는 시계를 바라볼 때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그는 시계 뚜껑을 확 열고는 마치 시간에 쫓기는 사람처럼 그것을 보며 상을 찌푸리는 것이었다. 정 말 시간이라는 것이 이젠 배러스에게 새로운 의미를 갖게 하는 것만 같았다. 마 치 일 분 일 분을 허비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행동했다. "네가 늦지 않을까 하고 염려했다." 그러고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앞장을 서서 차 쪽으로 갔다. 아서는 아버지와 함께 차에 올랐다. 차가 타인캐슬 쪽으로 미끄러져 달리기 시작하자, 그는 우울한 기분이 약간 덜한 것 같았다. 이렇게 해서라도 나들이를 간다는 것은 오히려 기분 좋은 일이기도 했다. 그는 벌써 몇 년 동안 해티를 만 나지 못했다. 그녀를 만나게 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생각했던 대로 차는 멋있게 달렸다. 그는 차가 부드럽게 진동하며, 날듯이 달려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곁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배러스는 유쾌한 얼굴 표 정을 짓고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그것은 새로 산 장난감을 가지고 있는 어린애 같은 열중한 표정이었다. 그는 타인캐슬 시내로 들어섰다. 거리는 붐볐고 배러스를 즐겁게 하는 활기찬 소란스러움과 움직임으로 넘쳤다. 센트럴 호텔에 가 닿자 웨이터들이 달려나왔 다. 곧 지배인이 빠르게 걸어나와 정중하게 자동차 문을 열어주었다. 배러스는 그들 모두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웨이터들은 황송한 얼굴로 허리를 깊숙이 굽혀 인사했다. 두 사람은 라운지로 들어섰다. 거기도 길거리처럼 혼잡했고 어딘지 모르게 약 간 들떠 있었다. 사람들 가운데는 군복 차림이 많았다. 배러스는 감탄하면서 군 복 차림의 사람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때 해티가 라운지의 구석에서 즐거운 표정으로 그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그 녀가 있는 구석은 난롯가의 좋은 자리였다. 배러스와 아서가 다가가자 그녀의 오빠 앨른이 일어섰다. 배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버님은 안 나오신 모양이구나." 앨른은 미소를 지었다. 육군 중위의 군복 차림이 그에게 썩 잘 어울렸다. 그리 고 이미 술을 마신 듯 기분도 경쾌해 보였다. "아버님께선 예전에 앓으시던 그 병환이 또 도지셨습니다. 나와 뵙지 못해서 죄송스럽다는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배러스의 얼굴에는 실망하는 빛이 역력했다.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그러나 배러스는 재빨리 기분을 바꾸었다. 그는 헤티를 바라보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곧 그들은 만찬을 하러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레스토랑에서 배러스는 냅킨을 집어 들면서 방 안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식당 안은 사람들과 쾌적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카키색 군복 차림을 한 이들이 분위기를 더욱 밝게 해주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여긴 참 좋구나. 난 요즘에 좀 긴장을 느끼고 있어서 이런 곳에 와서 기분전 환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단다. 마음이 즐겁구나." "모든게 다 잘 처리되어서 다행스럽습니다." 앨른이 이렇게 말하며 무언가 알고 있다는 듯한 시선으로 배러스를 바라보았 다. 배러스는 짧게 대답했다. "고맙네." "사람들 중에는 마음이 삐뚤어진 자들이 정말 많으니까요." 앨른은 말을 이었다. "어떤 기회만 왔다 하면 사람들 마구 비틀어버리려 하는 자들이 정말 많습니 다. 전 그 해든이라는 작자를 알고 있습니다. 그 새낀 돼지와 같아요, 그자는 돼 지가 되기 위해서 급료를 받고 있는거나 마찬가지예요. 태어나면서 부터 돼지와 똑같은 놈이었거든요!" "앨른 오빠!" 해티가 입술을 쑥 내밀면서 간섭을 했다. "알고 있어, 헤티. 다 알아." 앨른은 여전히 들뜬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전 지금까지 많은 인간들을 접해왔는데요. 그런 놈들은 먼저 짓밟아야 합니 다. 그렇지 않으면 저쪽에서 짓밟아 오니까요. 그건 자기방어입니다." 아서는 가만히 자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옛날처럼 어딘가 차가워 보이는 표 정이 배러스의 얼굴에 되살아나 있었다. 그는 지금 하나의 새로운 상황에 자기 자신을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듯이 보였다. 화제를 돌리려는 것이 분명한 태도로 그는 말했다. "넌 월요일에 떠나는 거냐, 앨른?" "그렇습니다." "출정하는 것이 기쁘겠지?" "물론입니다." 앨른은 큰 소리로 동의를 표시했다. "마치 하늘에라도 오르는 기분입니다." 술 주문을 받는 웨이터가 다가왔다. 배러스가 빨간 표지의 메뉴를 들고 자세 히 술의 종류를 훑어갔다. 그러나 그는 메뉴를 따지며 살피는 것이 아니었다. 자 기 자신을 따지며 살피는 중이었다. 이윽고 그가 결정을 내렸다. "우리 조촐한 축하연을 벌이자. 오늘은 특별한 기회니까." 그는 샴페인을 주문했다. 해티는 기분이 좋은 듯 했다. 그녀는 언제나 배러스를 보면 다소 외경스러운 듯한 태도를 보였다. 배러스의 격식을 갖춘 예의 바른 태도에는 근접하기 어려 운 위엄이 있어 늘상 그녀에게 두려움을 주었다. 그러나 오늘 밤 그녀는 배러스 에게 놀랄 만한 다른 점이 있음을 발견했다. 오늘 그는 그녀가 신이 날 정도로 관대했다. 해티는 그를 바라보며 가장 아름다운, 가장 존경스러운 미소를 살짝 띠어 보였다. "이 술 맛있는데요." 그녀는 속삭였다. 그녀는 한 손으로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다른 한 손으로 는 가득 넘실거리는 술잔을 쥐고 있었다. 그녀는 아서를 바라보았다. "군복이 앨른 오빠한테 멋있게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서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앨른은 무엇을 입든지 멋있게 보이는걸." "어머나, 그렇진 않아요, 아서, 솔직히 말해서 앨른 오빠가 군복을 입으니까 훨 씬 돋보인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아서는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군." "이렇게 되면 답례할 인사말이 없어 곤란한걸." 앨른이 신이 나서 말했다. "네가 여군에 입대할 때까지 내 답례를 기다려 다오, 해티야. 그렇게 되면 내 가 할 말이 생기겠지." 해티는 또 한모금 샴페인을 마셨다. 그녀는 그 예쁜 머리를 갸우뚱하게 기울 인 채 생각에 잠겼다. "아서도 군복을 입는다면 아주 멋있을 거야." 아서는 마음이 금세 얼어붙는 듯한 섬짓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말했다. "어쨌든 난 군복은 절대 입지 않을 테니까." "아서는 몸이 늘씬해서 장교 혁대를 메기엔 아주 어울리는 체격이에요, 그리고 그 피부색에 카키색 군복을 입으면 너무 멋있을 거야." 모두들 아사를 바라보았다. 엘른이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아서. 그런 복장을 한다면 모두 깜짝 놀랄 거야. 너도 군에 나가는 것이 더 좋지 않겠니?" 왜 그런지 이유도 없이 아서는 자기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의 신경이 너무 날카로워진 모양이었다. 그는 오늘밤의 모든 것이 비정상적이고 역겹게만 보였다. 왜 아버지는 여기까지 와서 이 혼잡한 호텔에 앉아 샴페인을 마시며 앨 른 토드의 허풍을 받아주고 계신걸까? 그리고 왜 이렇게 어색한 태도로 계신 걸 까? "너 내 날 듣고 있니, 아서?" 앨른이 말했다. "너는 나와 함께 무대에 서야만 한다는 이야기야." 아서는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그는 명랑하게 말을 하려고 애를 썼다. "나 없이도 연극은 잘 될거야. 기대하네, 앨른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런 무대 엔 별로 마음이 끌리지 않거든." "어머나, 아서!" 해티가 실망한 듯 소리쳤다. 그녀는 아사를 자신의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아서가 항상 멋있게 보이기를, 그녀의 말을 빌린다면 번쩍번쩍 빛나기를 원했다. 그런데 지금 아서가 하는 말은 아무리 관대하게 보아주어도 그다지 자 랑스러운 것이 못 되었다. 그녀는 활기차고 귀여운 얼굴이 매력에 넘치면서도 불만스러워 보이도록 찡그렸다. "그건 당치 않은 말이야, 아서. 아마 아사를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아서가 겁장이라고 오해할 거야." "바보 같은 소리 말아, 해티." 배러스가 너그럽게 말했다. "아서는 그런 걸 생각할 만한 시간적 여우가 없었을 뿐이다. 머지않아 아서가 가까운 모병 사무소로 달려가는 것을 보게 될 게다." "그러믄요, 저도 알고 있어요!" 해티는 그 꾸밈없는 눈길을 아래로 깔며 흥분된 모습으로 말했다. 그녀는 방 금 자기가 한 말을 약간 미안스럽게 생각했다. 아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음식 접시에 눈을 준 채 앉아 있었 다. 그는 샴페인을 사양했다. 디저트도 사양했다. 그는 자기가 끼지 않고도 서로 이야기를 나누도록 내버려 두었다. 라운지 끝에 있던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시작했다. 라운지 끝 쪽에는 사람들이 춤을 추도록 마련된 꽤 넓은 무대가 있었다. 오케스트라가 "영국 국가"를 아주 우렁차게 연주하자 모든 사람들이 의자소리를 요란스럽게 내며 일어섰다. 그리 고 국가 연주가 끝나자 소리 높여 외치는 만세소리가 오랫동안 계속해 장내를 울렸다. 오케스트라는 다시 나지막한 댄스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토요일 밤이면 늘 이 센트럴에서 무도회를 열었다. 해티는 아사를 건너다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들 두 사람은 춤을 잘 추었다. 그리고 똑같이 춤을 좋아했다. 해티는 자기와 아서가 함께 춤을 출 때 사람들이 정말 매력있는 한 쌍이라고 하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그녀는 아서가 자기에게 춤을 추자고 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묵묵하게 눈을 음식 접시에 고정시 킨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는 해티에게 춤을 추자고 청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가 뚱하고 있다는 것이 모두에게 알려지자, 언제나 남의 기분을 상 하게 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하는 앨른이 얼른 해티에게 손을 내밀었다. "해티야, 이 늙은 군마 같은 오라비와 함께라도 춤을 추어볼 생각이 있니?" 해티는 여느 때 보였던 쾌활한 태도 이상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앨른은 몸 이 굼떠 춤을 잘 추지 못했고 게다가 춤추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해티는 그 와 춤을 추는 걸 주저했으나 곧 기분이 좋은 척 일어섰다. 그들이 춤을 추고 있는 사이 배러스가 말했다. "해티, 저 애는 아주 예쁜 귀염둥이야. 예의가 바르면서도 활기가 넘치고." 그는 기분이 좋은 듯 했다. 만찬과 샴페인을 들자 더욱 마음이 평화로운 것 같았다. 아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한쪽 구석에서 해티와 앨른이 춤을 추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자신도 알 수 없는 기분을 억제하려고 무한이 해를 썼 다. 해티와 앨른이 자리로 돌아오자 그는 예의상 그녀에게 춤을 추자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속은 차가왔고 기분이 상해 있어 춤을 추자고 청 할 때에는 부드럽게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해티는 기쁘게 응했다. 해티의 춤은 아주 근사했다. 그의 품에 안긴 그녀는 보드라운 감촉을 주었다. 그녀 특유의 향수 냄새가 그 녀의 움직임에 따라서 그의 속으로 흘러들어오는 듯했다. 그는 그녀와의 춤이 너무도 근사했기 때문에 더 이상 춤을 추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춤 이 끝나자 두 사람은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해티는 얌전히 앉아서 음악에다 박자를 맞추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참을 수 없는지 입을 떼었다. 그녀는 쾌활하면서도 고뇌가 섞인 메혹적인 표정을 지으면 서 말했다. "오늘밤은 어느 분도 이제 더 이상 춤을 추지 않으실 모양이죠?" 아서가 재빨리 말했다. "난 피곤해."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느닷없이 배러스가 말했다. "해티야, 네가 괜찮다면 너와 한 곡 추고 싶은데 네 생각이 어떤지 모르겠구 나. 난 이런 신식 스텝은 전혀 밟을 줄 모른다만." 그녀는 의심스럽게, 아니 놀란 표정으로 그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아주 쉬운 스텝이에요." 그녀는 말했다. "그냥 걷기만 하시면 되는걸요." 배러스는 그의 얼굴에 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미소, 미연하면서도 어딘가 기분이 좋은 그러한 미소를 띠었다. "자아, 네가 겁을 내지 않는다면 좌우간 한번 춰보자." 그는 일어서서 그녀에게 팔을 내밀었다. 아서는 완전히 굳어진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아버지와 해 티가 라운지 맨 끝에서 아주 다정스럽게 안고 천천히 돌고 있는 모습을 뚫어지 게 바라보았다. 그의 아버지는 언제나 해티를 보호자처럼 초연한 태도로 대해왔 고, 해티는 늘 그에게 겁을 내면서도 존경스러운 태도로 대하였다. 그런데 지금 은 둘이 함께 춤을 추고있다. 아서는 해티의 미소를 머금고 있는 얼굴을 분명히 보았다. 그것은 아름답고도 교태가 흐르는 미소였고, 주위의 시선이 자기에게 집 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기분이 좋아진 여성 특유의 미소였다. 바로 그때 밖으로 나가자는 앨른의 목소리를 들은 아서는 기계적으로 일어나 서 앨른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앨른은 벌써 꽤 취해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화 장실에서 그는 아서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약간 다리를 비실거렸다. "너의 영감님이 오늘밤엔 아주 기분 좋게 한턱을 내는데, 아서.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이다. 이늙은 군마에게 굉장한 송별회를 해주셨어." 그가 양쪽 수도꼭지를 한꺼번에 틀어놓았기 때문에 물이 힘차게 세면대 안으 로 쏟아져 나왔다. 그는 다시 아서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은밀한 말투로 말했다. "이봐, 아서. 우리집 영감님은 말이야, 너의 영감님이 심리위원회에 와달라고 부탁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상당히 기분이 상해 계시단 말씀이야. 별 말씀은 하 지 않았지만 난 알고있지, 이 늙은 군마는 다 알고 있다 이 말씀이야, 아서." 아서는 불안한 표정으로 앨른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걱정할 것은 없다, 아서." 앨른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그를 믿고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 아서. 친구들 사이니까. 둘은 다 옛날부터 가장 친한 친구 사이란 말이야." 아서는 계속해서 앨른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는 말문이 막혀 있었다. 회의와 불안과 공포의 커다란 소용돌이가 그를 덮쳐왔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드디어 아서는 물었다. 갑자기 세면대가 넘쳐 흘렀다. 물이 바닥으로 콸콸 쏟아져 바닥 위로 흐르기 시작했다. 현기증을 일으킨 듯 아서의 눈이 그 범람하는 물 쪽을 향했다. '넵튠 탄광의 물도 바로 저렇게 넘쳐 흘렀는데. 탄광의 그 비비꼬인, 아무도 모르는 물길을 통 해 범람한 물은 광부들을 공포와 암흑 속에서 익사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의 온몸이 무슨 발작에라도 걸린 것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마음이 타 는 듯한 초조감 속에서 생각했다. '난 그 진상을 어떻게 해서라도 밝혀내야 한 다. 설령 그러다가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진상을 캐내고야 말 테다.' 3 아서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타인캐슬의 복잡한 거리를 벗어날 때까 지 기다렸다가, 캔튼과 슬리스케일 사이에 있는 곧게 뻗은 한적한 길에서 재빨 리 말을 꺼냈다. "드릴 말씀이 좀 있는데요, 아버지." 배러스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부드러운 쿠션에 몸을 기대고 구석 에 앉아 있었는데, 차 안은 어두컴컴해서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음, 해보렴." 그는 내키지 않는 말투로 대답했다. "무슨 말이냐?" 배러스의 말투는 힘이 없었지만 아서는 새로운 힘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 사고에 관한 것입니다." 배러스는 불쾌하다는, 아니 이제는 너무 지겹다는 몸짓으로 그를 돌아다보았 다. 아서는 그러한 아버지의 움직임을 보았다기 보다는 느꼈다. 침묵이 잠깐 흘 렀으나 배러스는 참을 수 없었는지 곧 말을 하기 시작했다. "넌 왜 자꾸 그 문제를 들춰내고 싶어하는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구나. 나는 좀 기분이 나쁘다. 모처럼 오늘 유쾌한 저녁을 보냈는데... 해티와 즐겁게 춤까지 추면서 말이다. 너도 춤을 잘 추더구나. 난 네가 춤 스텝을 그렇게 잘 밟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나는 지금 완전히 해결된 일로 인해 다시 괴로음을 받고 싶지가 않다." 아서는 불이 붙은 듯한 격한 목소리로 급히 대답했다. "전 아직 그걸 잊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배러스는 한동안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아서야, 이제 제발 그 일은 잊어버리게 해다오." 그는 솟구쳐 오르는 짜증을 억지로 누르는 말투로 말을 했다. 그의 음성에는 어울리지 않는 상냥함이 있었다.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는 걸 내가 미리 알지 못했다는 얘긴 아니다. 알고는 있었다. 알겠다. 바로 이점을 잘 알아듣고 너의 이성을 발휘해봐라. 넌 내 편이 아니냐? 나의 이익은 곧 너의 이익이다. 너도 이제 곧 스물두 살이 되고 앞으로 곧 넵튠 탄광의 공동 경영자가 될 사람이다. 이 전쟁이 끝나는 대로 난 그렇게 할 작정이다. 사람들은 이미 그 사고를 다 잊어버리고 있는데, 유독 너만이 그것 을 가지고 자꾸 입을 열고 있다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생각되지 않니?" 아서는 가슴이 답답해왔다. 넵튠 탄광에서 얻게 되는 이익을 새삼스럽게 다시 생각하게 하는 짓은 마치 아버지가 자기에게 뇌물을 주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 어서였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전 그걸 미친 짓으론 보지 않습니다. 전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 배러스는 자제력을 잃어버렸다. "진실을." 그는 외쳤다. "심리위원회가 열렸지 않았더냐? 11일간에 걸쳐 모든 것을 다 조사한 끝에 해 결된 일이야. 그리고 나의 무죄가 증명되지 않았느냐. 그것이 곧 내가 말하는 진 실이다. 그 이상 더 무엇을 알려고 하는 것이냐?" "위원회라고 하는 것을 관공서의 심리위원회였습니다. 그런 위원회에서는 진실 을 은폐하는 것이 매우 쉽습니다." "무슨 진실 말이냐?" 배러스는 갑자기 소리를 쳤다. "너 지금 정신이 나갔니?" 아서는 유리로 된 칸막이를 통하여 바로 앞에 자리잡고 있는 바틀리의 빳빳한 등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그 작업을 하는 동안 내내 아버지께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 것이 라고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우리는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 거다." 배러스는 화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는 누구나 다 그러한 것이다. 탄광에서는 늘 위험 뒤에 위험이 겹쳐 따르 는 것이고, 내일도 또 모래도 위험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런 위험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거야." 그러나 아서는 화제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 "애덤 토드가 아버지에게 그 탄층을 채굴하시기 전에 주의를 주지 않았습니 까?" 그는 무감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토드 아저씨를 만나러 가셨던 그날 일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분이 위 험하다고 아버지에게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그런데도 아버지께선 작업을 지속 시켰던 것입니다." "넌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하고 있구나." 배러스는 절규에 가까운 음성으로 소리쳤다. "어떠한 결정이든 그것은 모두 내가 내리는 것이다. 넵튠탄광은 내탄광이다. 그렇게 때문에 내가 생각한 대로 경영해야 한다. 어떤 인간도 간섭할 권리가 없 어. 나는 최선을 다해서 경영하고 있다." "최선이라니, 누구를 위해섭니까?" 배러스는 가까스로 꾹 참았다. "넌 넵튠 탄광을 자선사업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나는 이익을 올리고 싶을 뿐 이다." "바로 맞는 말씀입니다, 아버지." 아서는 억양도 없는 음울한 어조로 말했다. "아버지께선 이익을 올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막대한 이익을 올리고 싶 어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석탄 채굴을 시작하기 전에 넵튠 폐광의 작업장에서 폐수를 퍼내 버렸다면 위험 같은 것은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했 다면 옛 작업장의 배수에 필요한 비용이 아버지의 이익을 모두 집어삼켰을 것입 니다. 폐수를 퍼내는 데드는 비용에 그 돈을 모두 써버린다는 것은 아버지에겐 너무도 아까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선 그 폐수를 모르는 체 하시고 그 사람들을 위험속에 몰아 넣는 모험을 이판사판으로 한번 해보겠다고 결단하신 겁니다." "그만 닥쳐." 배러스가 거칠게 말했다. "나에 대해서 그따위 말을 함부로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스쳐가는 자동차 불빛이 잠깐 아버지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 눈은 노여움으로 불타고 있었다. 곧 다시 차 안은 깜깜해졌다. 아서는 몸을 떨면서 차 안의 좌석 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그의 입술은 핏기가 하나도 없었고 믿을 수 없을 정도 의 절망 속에서 온몸이 찢겨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말 속에서 묘한 불안감, 조바심 내며 회피하는 그 무언가가 있 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그것은 일종의 도피행위라는 인상이 막연하게 그의 가슴에 느껴졌다. 차가 법산저택의 차도에 가까워질 때까지 그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는 차에서 내린 아버지의 뒤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 두 사람은 천장이 높고 밝은 현관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치게 되었다. 2층으로 올라 가려고 조각상이 새겨진 손잡이 난간에 한쪽 손을 가져다 댄 배러스의 얼굴에는 이상한 표정이 떠올랐다. "요즘엔 넌 너무 말이 많아졌다. 지나치게 많아졌어. 기분 전환을 위해서 뭘 좀 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니?" "전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께 너머로 돌아보면서 배러스는 말했다. "국가를 위해서 전쟁에 나가보려는 생각은 없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머리를 되돌려 계단을 무겁게 걸어 올라갔다. 아서는 머리를 치켜들고 멀어져 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의 번쩍 치켜든 창백한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소멸해버린 것을 느꼈다. 그는 그 소멸의 잿더미 속에서 그 뭔가 불길하 고도 무서운 것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느꼈다. 4 바로 그 토요일 밤 샘은 애니 메이서와 함께 가로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벌써 몇 년을 두고 토요일 밤이면 샘과 애니는 이렇게 산책을 했다. 그것은 그 들 사랑의 일부분이었다. 토요일 밤7시경이 되면 샘과 애니는 방파제 거리의 모퉁이에서 만났다. 보통 애니가 먼저 와서 샘을 기다리고 샘은 언제나 늦게 왔다. 샘은 7시 19분이 되어 야 나타나곤 했다. 그는 멋진 청색 양복에 턱수염을 깨끗하게 면도하고 울툭불 툭한 이마 언저리를 번쩌이며 약속 장소로 왔다. "늦었어, 애니." 샘은 늘 이렇게 인사를 했다. 그는 자기가 늦은 것에 대하여 절대로 변명을 하지 않았다. 꿈에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만일 샘이 애니를 기다리게 한 것 에 대해 미안스럽게 생각해서 말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말 어색한 일일 것이라 고 애니도 느낄 정도였다. 그들은 이른바 '가로수 길 위쪽으로' 그들의 산보를 시작했다. 서로 팔짱을 끼 지도 않았다. 두 사람 사이의 사랑에는 손을 잡는다든가, 포옹을 한다든가 키스 하는 일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들의 가장 즐거운 애정의 표시는 아무것도 나타 내지 않는 바로 그것이었다 샘과 애니는 꾸준히 만나기만 하였다. 샘은 애니를 존경했다. 그도 길을 걷다가 어두운 곳에서 애니의 허리를 감싸 안은 적은 있었 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애니는 샘의 어머니가 자기들 사이를 반 대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또한 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도 알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들은 가로수 길을 산책한 뒤 읍내로 되돌아왔다. 돌아오면서 샘은 아는 얼굴이라도 만나면 "안녕하세요, 네드." "어 어, 톰이냐." 하면서 큰소리로 인사를 했다. 그들의 정해진 마지막 코스는 웹트 부인의 식당이었다. 낡은 초인종 소리가 정다운, 지금은 입구의 유리문 문턱도 일그러져 문을 열 때마다 덜커덕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는 그 파이 집으로 가는 것이었다. 가게 한구석에 서서 뜨거운 파이를 하나씩 먹고는 커다란 레모네이드 한병을 나눠 마시는 것이 고작이었다. 애니는 진정 에일이 더 좋지만 샘이 레모 네이드를 더 좋아하기 때문에 "물론, 레모네이드." 하고 자기가 먼저 말해버리곤 했다. 가끔가다가 샘의 채탄 성적이 좋아서 호주머니가 조금 두둑하면 파이를 두개씩 먹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웹트 부인이 만든 파이는 너무도 맛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애니는 사양을 했다. 애니는 예의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절대 로 하나 이상은 먹지 않았다. 샘이 두개째의 파이를 먹는 사이에 그녀는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고 나서 잠시 웹트 부인과 잡담을 나누다가 다시 천천히 방파제 에 오면, 그들은 작별 인사를 나누기 전에 한참동안 선 채로 번화한 토요일 밤 거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서로 헤어지면 샘은 탄광촌 달동네로 올라가면서 얼 마나 멋있는 밤이었는가 그리고 애니는 얼마나 멋있는 아가씨인가 또 그녀와 함 께 이렇게 나들이를 하는 자기는 얼마나 행복한가를 생각하였다. 그러나 오늘 밤 가로수 길을 걷고 있는 두 사람 사이가 보통 때와는 조금 다 른 것 같았다. 애니의 표정은 침울하게 가라앉았고 샘은 괴로운 얼굴로 열심히 자기의 입장을 설명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미안해, 애니." 그는 침울하게 발부리의 돌을 차며 말했다. "애니가 그처럼 기분이 상할 줄은 미처 몰랐어." 애니는 고개를 흔들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샘. 내가 그렇게 깊이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야. 아무 일도 없다니 까." 샘이 무슨 짓을 하던간에 애니는 괜찮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둠 속 가로수길 나무의 그늘에 가려 있는 그녀의 얼굴빛은 몹시 창백했다. 샘은 또 돌 하나를 찼다. "난 이제 탄광은 참을 수가 없게 됐어. 갱 안에서 아버지와 휴이가 죽었다는 것이 나로선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아버지와 휴이의 시체를 밖으로 꺼내기 전 에는 결코 그 생각이 바뀌지 않을 거야." "알아, 그 기분, 샘." "알아둘 것은, 탄광을 그만두고 싶은 것은 분명 아니라는 거야." 샘은 근심스럽게 계속해서 말했다. "난들 모두들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나팔소리와 깃발 흔드는 것(전쟁의 의미) 에 찬동한다는 것은 아니야. 난 그걸 탈출구로 삼고 있을 뿐이지. 어쨌든 나는 그놈의 탄광을 나와야 하니까 어느 곳이든 탄광보다야 낫겠지, 어느 곳이든 간 에." "그래요, 샘." 애니는 그를 안심시켰다. "무슨 뜻인지 알겠다니까." 샘처럼 자기 일을 사랑하고 게다가 탄광에서도 필요로 하는 훌륭한 광부가 그 재난사건만 없었더라면 전쟁 같은 데 참가하려 하진 않았을 거라고 애니는 확신 했다. 그러나 그런 걸 알고 있으면서도 애니가 슬픈 것은 모든 게 갈수록 샘의 마음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그를 가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아, 애니." 샘은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져 소리쳤다. "넵튠에서 그런 일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오늘도 교대시간 이 되어 나올 때 난 사뭇 그것만을 생각했어. 데이빗 일만 해도 그렇단 말이야. 데이빗이 당한 일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면 내가 이런 기분이 되는 것도 당연해. 데이빗이 지금 어떻게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만 해도 너무 마음이 아파." 그는 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 식으로 학교에서 파면 당하다니, 그건 너무하잖아. 래미지 그 새끼가 그 런거야. 그 새낀 전부터 우리집 사람들을 항상 적대시 해왔어. 생각을 할수록 너 무 비참한 일이야. 애니, 안그래?" "데이빗 같으면 다른 곳에 얼마든지 취직이 될거야, 샘." 그러나 샘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젠 학교 선생으로선 끝장이 난 거야. 그나마 그는 지금 해리 뉴전트의 도움 을 받고 있지만 말이야. 해리 그 사람은 데이빗을 보자마자 마음에 들었나봐. 어 떻게 되긴 하겠지만 지금은 너무 안됐어."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데이빗도 이제 전혀 딴사람 같아." 애니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저렇게 말하는 샘도 많이 변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가로수 길을 아무 말없이 걸었다. 벌써 제법 어두워졌지 만 법산저텍 옆을 지나칠 때, 구름 사이에서 나온 달이 웅장한 저택위에서 환하 게 빛나고 있었다. 그 저택 옆에 서 있는 키가 큰 너도밤나무 밑 하얀 대문 앞 에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함께 서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군복 차림의 청년이 고 다른 한 사람은 모자를 쓰지 않은 소녀였다. 샘은 가로수 길 끝까지 왔을 때 애니를 돌아다 보았다. "아까 그 사람들 누군지 봤지? 댄 티즈데일과 그레이스 배러스야." "응, 나도 봤어." "배러스 사장이 그 애들이 거기 있는 것을 봤더라면 아주 야단이 나겠지..?" "몹시 놀라겠지." "배러스 사장놈의 새끼!" 샘은 머리를 휙 돌리며 침을 탁 뱉었다. "그 새끼, 아주 멋지게 무죄로 방면됐어. 그렇지만 난 이제 그 새끼를 위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거야. 그 새끼가 내게 와서 사정을 해도 난 하지 않겠어." 둘은 웹트 부인의 상점까지 왔다. 애니는 꾹 참았지만 샘이 전쟁에 나간다고 생각하니 온몸이 점점 굳어졌다. 그러나 애니는 끝까지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평소와 같이 파이를 먹고 레모네이드도 마셨다. 그녀는 샘을 기쁘게 해주는 것 으로 만족했기 때문이었다. 방파제 거리의 모퉁이에서 발걸음을 멈추었을 때 샘은 여느 때처럼 미소를 지 으려 했으며 말했다. "애니, 슬퍼하지 마, 응! 탄광은 결국 내겐 별 신통한 곳이 못 돼. 틀림없이 전 쟁터가 좀더 나을 거야." "그렇겠지." 애니도 조용히 수긍했다. 그러나 가슴이 꽉 메이는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을 겨 우 누르며 말했다. "샘, 내일 또 만나고 싶어.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꼭 만나고 싶어." 샘은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다가섰다. "애니, 화나지 않았지? 화나지 않았다는 증거로 키스해줘." 애니는 샘에게 처음으로 키스를 했다. 그러고는 자기 눈에 고인 눈물을 샘이 볼까봐 급히 돌아섰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급히 걷기 시작했다. 샘도 달동네를 향해 천천히 올라갔다. 자기는 바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똑똑 히 느꼈다. 흥미도 없는 전쟁터에 애니와 직업까지 버리고 가버린다는 것은 정 말로 바보짓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재난이 자기를 바꿔 놓고 말았다. 그렇다. 그 재난은 데이빗을 변하게 한 것처럼 또 자기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어디를 가든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탄광에서 나와버리는 일, 그것만이 중요했다. 잉커먼의 집에는 어머니가 창가에 있는 등받이가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들어가자 어머니는 바로 일어나서 뜨거운 코 코아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에게 코코아를 따라주고는 난로 옆에 서서 두 손을 가슴 아래에서 맞잡은 채 그를 자세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약간 야윈 얼굴에 침울한 빛을 띄고 샘을 그저 가만히 바라다볼 뿐이었다. 한없는 애 정이 담긴 눈빛으로. "케이크 하나 잘라주랴?"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올려다보았다. 어머니도 변했다. 재난에 관해서는 이미 체념을 해버린 뒤였지만 탄광에는 항 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 매일매일 겪는 불안을 숙명으로 온순 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여인의 상징처럼 보였다. 넵튠의 재난은 마사에게도 그 흔적을 남겼다. 얼굴의 주름살이 더 깊어지고 뺨도 훨씬 훌쭉해졌다. 뒤로 모아 서 꽉 묶은 검은 머리카락에도 휜 머리가 묘한 무늬를 이루고 있었고, 이마에도 굵은 주름이 흠처럼 팼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도 건강했다. 그녀는 아직도 힘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어떤 힘든 일이라도 끄떡없이 해내고 있었다. 샘은 어머니게게도 그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싫었다. 그러나 다 른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말주변이 없는 그였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말이 튀어나 오고 말았다. "어머니, 나 지원했어요." 그녀의 얼굴빛이 금세 잿빛으로 변했다. 그러더니 곧 그녀의 흰머리처럼 하얗 게 변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목덜미에 갖다 대었다. "너, 설마." 하고 말이 끊겼으나 그녀는 간신히 쥐어짜 내는 목소리로 다시 말 을 이어나갔다. "네가 설마 군데에 들어간다는 것은 아니겠지?" 그녀의 눈빛이 공포에 휩싸였다. 그는 퉁명스러운 얼굴로 바로 군에 입대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 다. "제5푸질리어 연대예요. 탄광에서 제 연장들을 다 가지고 나왔어요. 부대는 월 요일에 진지로 출발합니다." "월요일에?" 그녀는 반신반의하며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거렸다. 그녀는 샘을 바라보면서 의자에 걸터앉았다. 여전히 한 손으로는 목덜미를 누 른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갑자기 아주 조그맣게 오그라드는 느 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활기차고 꿋꿋한 기상은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 아주 가련하게 쪼그라든 모습으로 멍하니 사랑하는 아들을 올려다 보았다. 그녀는 믿을 수 없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광부는 일선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쯤은 나도 안 다. 전쟁을 더 잘하기 위해서 광부들은 더 열심히 석탄을 캐내야 하니까... 더군 다나 너같이 유능한 사람은 갈 수 없는거야." 그는 어머니의 애원하는 듯한 눈길을 피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받아주었어요." 그 말은 마사의 희망을 깡그리 뭉개버렸다. 긴 침묵이 흘렀다. 거의 속삭이는 목소리로 그녀가 다시 물었다. "샘, 넌 어쩌자고 그런 짓을 했니? 아이고, 어쩌자고 그런 짓을 했니? 난 어떡 하면 좋으냐?"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마치 어머니의 애원의 눈길을 떨쳐버리려는 듯이, "저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이곳에서 빠져나가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었어요. 어머니도 아시죠? 전 정말 견딜 수가 없었어요. 저도 어쩔 수 없었던 거예요." 5 그 다음 주 화요일 저녁5시경, 데이빗은 아직 밝았지만 조용한 램 가 골목길 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좁은 현관에 멈춰 선 그의 첫 눈길은 제니가 언제나 그에게 온 우편물을 놓아두곤 하던 조그마한 상자로 향했다. 편지 한 통이 상자 안에 놓여있었다. 편지를 집어 든 데이빗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데이빗은 부엌으로 들어가서 작은 난로 옆에 주저앉아 목이 긴 구두를 벗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여전히 손에 쥔 편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니가 슬리퍼를 자기고 왔다. 이런 일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일로 제니 는 매우 달라졌다. 이제는 집안일도 걱정하고, 겁을 집어먹은 얼굴을 하고는 음 울하게 변해버린 데이빗에게 불평 한마디 없이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그는 그런 제니에게 그저 눈빛으로 인사를 했다. 너무 자주 술을 마셨고 그럴 때마다 잔소리를 해왔기 때문에 이젠 말하기도 귀찮아졌다. 그녀는 기분이 나빠 질 때, 아주 고금 딱 한 잔만 하는 거라고 변명을 했다. 그녀 말로는 그가 신 베 들 가 국민학교에서 파면당한 불명예스러운 일 때문에 자주 기분이 나빠진다는 것이었다. 그는 편지 봉투를 뜯어 천천히 신중하게 읽어나갔다. 다 일고 난 그는 편지를 무릎 위에 놓고 불빛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빛은 단호했다. 냉정하면서도 신중 하고 어딘가 엄격해 보이기까지 하는 표정이었다. 재난이 있은 이래 6개월이라 는 시간은 그를 10년은 더 나이 들어 보이게 만들었다. 제니는 바쁜 체하며 부엌을 왔다갔다하고 있었지만 편지 내용이 궁금해서 죽 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그의 모습을 곁눈으로 훔쳐보았다. 데이빗의 마음속에는 그녀가 알 수 없는 깊은 조류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무 엇일까? 그녀는 두려웠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위압감. 그녀는 조심스 레 입을 열었다. "편지 중요한 것이에요?" "뉴전트 한테서 온거야." 그녀는 더 자세히 이야기 해주기를 기다리며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제니의 얼굴이 신경질 적으로 변했다. 그 녀는 넵튠 탄광 재난사건 이후 갑자기 맺어진 데이빗과 해리의 우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기를 멀리 젖혀두고 무언가 두 사람만 통하는 그 깊은 친밀감이 불쾌할 뿐만 아니라 불안하기도 했다. 그녀의 비위를 맞춰주며 원하는 대로 해 주던 그 부드럽던 데이빗이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엄격한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 이 그녀는 불안하고 두렵게 만들었다. 그 모든 것이 해리 그 사람의 영향이라고 생각되자 그녀는 화가 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난 또 당신이 취직됐다는 소리인가 하고 좋아했죠... 이젠 나도 좀 지쳤어요. 남자가 하는 일도 없이 어정거리고 있으니 언제까지 기다리죠?" 그는 몸을 일으키면서 그녀는 흘낏 바라보았다. "취직이 됐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지난주에 내가 보낸 편재에 그가 답장을 해준 거니까. 해리는 지금 프랑스 기지에서 야전부대 위생병 노릇을 하고 있는 데... 제니, 나도 결심했어. 그와 함께 행동을 취하기로... 나도 떠나는 거야." 제니는 숨이 막힐 듯한 놀라움에 잠시 입을 열 수도 없었다. 그녀는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그대로 쓰러져 버릴 것 같았다. 요즘 자주 일어나곤 하는 구토증세 가 또 일어나려는 것 같았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비틀러렸다. 데이빗이 다가왔다. "진정해, 제니. 걱정할 일은 조금도 없으니까. 자, 자리에 앉읍시다." "왜 당신이 가야 하나요? 왜 여기를 떠나려는 거예요?" 그녀의 떨려나오는 음성은 곧바로 금방 고함으로 변할 것처럼 괴상했다. "뉴전트 같은 사람하고 갑자기 어울리더니 드디어 당치도 않은 일을 하려고 드는군요. 전쟁 같은 것엔 관심도 없던 당신이 왜 가야 하는지 어서 이유를 대 세요. 왜 가려는 거예요?" 그는 공포로 질려버린 그녀의 모습이 너무 불쌍했다. 요즘 그는 제니에 대한 애정이 이전과는 다르게 좀더 깊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더 욱 대답하기가 곤란했다. 사실 이러한 자기의 결심은 스스로에게도 뚜렷한 해답 을 줄 수 없는 예민한 것이었다. 애국심에서 우러나온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정치 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애초 관심도 없거니와 넵튠 탄광의 재난을 불러일으킨 경 제적인 문제와 결부되어 혐오증만을 일으키는 것 뿐이었다. 그 두가지 뒤에는 언제나 만족될 수 없는 권력과 소유욕이라는 본능적인 인간의 욕구가 도사리고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건 것에서 파생되어 나온 전쟁이라 는 흉물에 조금도 휘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비록 애국심 같은 것은 전혀 갖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마음은 무고한 많은 인간들이 이유 없이 피를 흘리고 죽어가야 하는 전쟁에서 비켜나 바깥에 서 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뉴전트와 동감하고 있는 점이었다. 전쟁을 원하진 않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전쟁에서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은 더 감당키 어려운 일이었다. 또 살육을 하 기 위해서만 전쟁에 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인간의 목숨을 구하기 위 해서 해야 할 일이 많을 것이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간에 인류가 고뇌에 찬 투 쟁 속에 갇혀 있는데 무관한 얼굴로 멀리서 편안히 서 있는다는것은 스스로를 사기꾼으로 선언하는 것 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넵튠 갱구에 서서 틀림 없이 재난이 덮칠 것을 예상하면서도, 지하 승강기를 타고 그 무서운 굴 속으로 내려가야 하는 광부들을 두고 자신만이 옆으로 비켜서서 "형제들이여, 그대들에 게 어떤 재앙도 오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같이 타지는 않겠다. 그러나 난 바란 다. 제발 무사하기를..." 이라는 식으로 비겁함과 불합리를 보이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 주어야 할까? 그는 손을 뻗어 제니의 창백한 뺨을 감싸쥐며 우울한 눈으로 그녀의 눈을 들 여다 보았다. "설명하기가 좀 어렵군. 제니, 내말을 잘 들어봐요. 언젠가 당신에게 말했지. 그 끔찍한 재난을 당하고 학교에서도 파면된 이후에 내가 결심한 것을 당신도 잊지 않았을 겨요. 난 학위도 교직도 다 포기하겠다고 했었지... 그 대신 탄광 노 동자 연맹에 들어가 그 약하고 무지한 사람들을 위해 끝까지 싸워보겠다고 한 결심을 난 이행해야만 해. 그렇지만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어. 기회를 기다려야 한단 말이지. 샘도 전장으로 떠났고, 뉴전트도 가 고... 나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거야. 제니, 내 말 알아듣겠어?" "아니, 안돼요. 싫어, 싫어요, 데이빗." 그녀는 그의 가슴으로 무너져 내리며 흐느껴 울었다. "가면 안돼요. 갈 수 없어요." 그는 눈을 들어 어두워가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예상했던 일이다. 제니의 반 대... 당연한 일이다. 가엾은 제니... "염려할 것 없어요. 난 괜찮을 거요. 자, 울지 말아요." 그는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사납게 먼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안 돼요, 당신은 갈 수 없어요. 이런 때 나를 혼자 두고 가버리다니..." 그녀는 데이빗이 떠나버리면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온몸이 떨렸왔다. "그렇지만 제니..." "안 돼요, 안 돼요. 하여튼 당신은 갈 수 없어요." 제니는 완전히 자제력을 잃어버린 듯 마구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당신이 하시는 일에는 나도 간섭할 권리가 있어요. 더 구나 일 때...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당신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는 야바예 요. 난 지금... 이제 우리는 아기를 갖게 된단 말예요..." 침묵이 흘렀다. 그녀의 말은 적중했다. 그는 지금까지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러나 언젠가는 있을 일이었다. 그의 마음은 태풍을 만난 것처 럼 흔들렸다. 데이빗의 마음의 변화를 알 수 없는 그녀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서럽게 울었다. 그것은 그녀가 화가 났을 때마다 쓰는 버릇이었다. 그러나 이 버릇은 언제나 데이빗을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지금도 데이빗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품에 안아주었다. "자, 제니. 제발 울음을 그쳐요. 그래야 내가 말을 할 수 있지. 제니, 내가 얼마 나 기쁜지 당신은 모를거요. 제니, 왜 진작 이야기 해주지 않았소? 왜 숨겨왔지? 이렇게 기쁜 일을... 난 이때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자, 울음을 그치고 같 이 기뻐하도록 합시다. 이 가쁜 일에 이렇게 울다니... 제니, 얼굴을 들어요." 제니는 그의 목에 매달리며 얼굴을 가슴에 묻고는 고개만 흔들었다. "그럼, 이제 사시지 않는 거죠? 날 버려두고 가지 않겠다고 어서 약속해요. 적 어도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만이라도... 데이빗 그렇게 하시는 거죠?" 그녀는 애처롭게 졸라댔다. "물론 가지 않겠소, 제니." 제니는 잠시 잠잠했다. 마치 커다란 기쁨을 음미나 하려는 듯이... 그녀는 고개 를 들려고 하다가 다시 그의 가슴에 기대며 속삭이듯 말했다. "약속해요?" "약속하지." 그는 그녀를 무릎 위에 올려 앉혔다. 그녀는 자신의 눈빛을 그가 읽어내는 것 이 두려운 듯 여전히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제니, 왜그래?"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어린아이처럼 울어대더니? 내가 기뻐할 것은 당신도 틀림없이 알고 있었을 텐데... 왜 숨겼어?" "당신이 꼭 하를 낼 것만 같았어요. 요즘 당신 주변에는 너무 걱정스러운 일이 많았고, 아니 그보다 당신이 너무 변했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무서워졌어요. 그 래서 말을 할 수 없었어요." 이제 그녀의 얼굴에는 창백했던 공포의 빛이 사라지고 보통 때 같은 얼굴빛으 로 돌아오긴 했으나 아직고 무엇인가 쭈뼛거리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미안하오, 난 당신을 무섭게 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소." "당신이 가시지만 않는다면 이젠 괜찮아요. 당신 아이를 낳을 때까지 내 곁에 있어주는 거죠?" 그는 고개를 뜨덕거렸다. 그러더니 얼굴을 똑바로 들게 하고는 그녀의 눈을 오랫동안 들여다 보았다. "제니, 당신이 무사할 때까지 군대에 대해선 생각도 하지 않겠어." 그는 좀더 엄숙한 눈빛으로 그녀의 눈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눈은 다시 두려 움으로 움츠러들었다. 가슴이 뜨끔해지고 너무 겁이 나서 다시 울음이 터질 지 경이었다. "그런데 제니, 당신도 한 가지 약속해줄 것이 있어. 이제부터 포도주 같은 것 은 절대 마시지 않는 거요. 할 수 있겠지, 제니?" 거절할 수도 불평할 수도 없었다. 이제 완전히 안심을 한 그녀는 다시 왁 하 고 울음을 터뜨렸다. "염려 말아요, 데이빗. 약속하겠어요. 착한 아이처럼 되겠어요. 당신은 이 세상 에서 가장 훌륭하고 착한 남편이에요. 그러나 난 바보고 멍청이고 나쁜 여자예 요. 데이빗, 용서하세요..." 데이빗은 새롭게 솟아나는 강한 애정으로 그녀를 힘껏 껴안았다. 지금까지 그 의 마음에 차 있던 괴로움과 암흑을 헤치고 한줄기 빛이 비쳐오기 시작했다. 죽 음을 딛고 일어선 끈질긴 새 생명의 탄생이 가져다주는 환희. 그것은 제니와 그 의 분신이며, 두 사람의 아름다운 사랑의 열매였다. 데이빗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저 행복했다. 그때 현관에서 초인종이 울렸다. 얼굴이 상기된 채 이제 모든 것에 안심을 하 게 되어 생글거리고 있던 제니가 머리를 번쩍 들었다. "누굴까?" 그녀의 얼굴에는 어린아이와 같은 호기심이 가득했다. 조금 전까지 보여주던 그 비탄에 잠긴 모습은 또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얼굴이었다. 사실 놀랍기도 했 다. 이런 시간에 이 집을 찾는 방문객이 있다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다 시 초인종이 울렸다. 그녀는 재빠르게 일어나 현관으로 나갔다. 그녀는 곧 돌아왔지만 흥분과 감동으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글쎄, 아서 배러스 씨예요. 사장님의 아드님이 못소 찾아오셨단 말예요. 데이 빗, 어서 객실로 가보세요. 당신을 만나러 왔대요." 데이빗의 얼굴은 어둡게 굳어지고 눈빛이 사나워졌다. "무슨 용건이래?" "물어보지 못했어요. 우리 집에 찾아온 것만 해도 큰 일인데 그런 걸 어떻게 물을 수가 있어요? 어서 나가보세요. 그런데 어떡하나? 객실은 아주 추운데..., 이럴 줄 알았으면 불이라도 피워놓은건데..." 그러나 데이빗은 어두운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높은 사람에 대한 실례 되는 일이나 교제할 기회를 갖게 된다거나 하는 따위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표정 이었다. 그는 천천히 문을 나갔다. 아서는 몹시 신경질 적인 모습으로 좁은 객실을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데이빗 이 들어서자 깜짝 놀라며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는 데이빗을 이상할 정도 로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언뜻 정신을 차린 듯 먼저 인사를 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방문이라 폐가 되지나 않았는지요?" 잠시 말을 끊었던 그는 "그렇지만 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는 흥분을 누그려고 애쓰며 권하지도 않았는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한손 으로 눈을 가렸다. "당신이 어떤 기분인지 난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나를 만나는 것을 거절한 다 해도 당신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난 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신 이 나를 어떻게 대하든 상관 없습니다. 난 만나고 싶었습니다. 난 처음부터 당신 을 좋아하고 존경했습니다. 데이빗, 나를 구출해줄 사람은 당신밖에 없습니다." 데이빗은 테이블 맞은편에 조용히 앉아 흥분돼서 떠드는 아사를 바라볼 뿐이 었다. 그것은 이상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고뇌에 찬 동요로 마음이 찢겨 어쩔줄 모르는 사람과 , 호연스러운 표정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자신을 억제하고 있는 사람 사이에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다. "무슨 용무십니까?" 데이빗의 음성은 조용했다. 아서는 갑자기 눈에서 손을 떼고는 데이빗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나는 사실을 알고 싶은 겁니다. 내가 원하는 건 사실입니다. 그것을 알기 전 에는 나는 안정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잠을 잘 수가 없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도 없습니다. 저희 아버님이 그 재난에 책임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이 알고싶은 겁니다. 확실히 알지 않고는 못 견디겠습니다. 제발 협조를 해주십시오." 데이빗은 다른 곳을 보려고 애썼다. 아사를 보고 있으면 언제나 느끼게 되는 그 묘한 연밈이 그를 약하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내가 무엇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나는 심리위원회에서 해야 할 말을 다 했습 니다. 그때 잘 듣지 못했던가요?" "심리위원회를 다시 한번 더 열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자 아서의 입에서는 괴상한 고함이 튀어나왔다. 처음에는 무슨 소린가 싶 을 정도로 비통한 절규였다. "정의를 위해서지요." 아서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누구나 다 알고 지켜야 하는 저의 때문입니다. 갑작스럽게 재난을 당한 그 많 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또 그들의 아내와 자식들, 그 가족들의 괴로움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아아, 생각만 해도 너무나 끔찍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무 서운 재난의 책임이 제 아버지에게 있다면... 그런데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감춰 지고 숨겨져서, 어느 누구도 알 수 없게 아주 덮어져 버린다면 그건 너무나 잔 인하고 무서운 일입니다. 책임이 있다면 책임을 져야 하지 않습니까?" 데이빗은 일어서서 창가로 갔다. 아서가 좀더 침착하게 자기 감정을 수습할 여유를 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처음엔 나도 그런 식으로 생각했어요. 아니 그 이상이었을 것이오. 증오... 무 서운 증오였어요. 그러나 나는 내 자신을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니었죠. 그런 감정이란 인간이면 누구나 다 갖는 공통된 감정입니다. 예 를 들어 누군가가 당신에게 폭탄을 던졌다면 당신은 무의식적으로 폭탄을 다시 집어 들고 상대방에게 던질 겁니다. 난 뉴전트 씨와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당신도 뉴전트 씨를 만났더라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걸 그 랬습니다. 그 사람은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가장 성실하고 건전한 정신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는 가까이 예를 들어 설명한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하 더군요, 폭탄을 되던졌다고 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맞는 이야깁니다. 문제는 그 작자가 폭탄을 던지게 만든 그 배후조직에 있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개인보다는 그 배후를 볼 필요가 있다고 하더군요. 넵튠탄광의 사고도 마찬가집 니다. 그 사고가 있도록 묵인된 탄광업의 배후에 거대하게 웅크리고 있는 결제 조직이야 말로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어떤 개인을 처벌하 고 그 책임을 추궁해봤자 별 소용이 없는 겁니다. 제 말의 뜻을 아시겠습니까? 간단히 말해 나무뿌리에 병의 원인이 있는데 가지를 자라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 는 이야깁니다." "그래서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까? 다 소용이 없으니까 그저 이대로 가만히 있겠다는 것입니까? 언제까지나 이대로?" 데이빗은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죠. 뭔가 하려고 합니다. 전쟁이 좀 잠잠해지면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무 엇이다 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한바탕 해볼 작정입니다. 꼭 할겁니다." 긴 침묵이 흘렀다. 아서는 여전히 침착하지 못했다. 불안하고 신경질적인 몸짓 으로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했다. 불안하고 신경질적인 몸짓으로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했다. 하얀 이마에는 땀방울 까지 솟고 있었다. "그러니까 결국에는 제게 협조할 수가 없다는 말씀이 되겠군요."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데이빗은 돌아가려고 일어선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서! 진정으로 부탁하는데 이젠 그만두십시오. 정말 소용없는 일입니다. 당 신은 어떤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것 같은데, 자신의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 해서도 잊어버리는 것이 제일입니다." 아서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는 데이빗의 손을 뿌리치듯 놓아버렸다. "나는 절대로 잊을 수가 없어요." 데이빗이 먼저 나가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밖에는 비가 뿌리고 있었다. 아서는 데이빗의 얼굴을 보지도 않은 채 인사말을 중얼거리고는 어두운 빗속으로 뛰쳐 나갔다. 데이빗은 잠시 동안 문 앞에 서서 옆길로 성급히 사라져가는 아서의 발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귀에는 좀더 굵은 빗소리만이 울려왔다. 6 아서는 7시가 지나서야 법산저택으로 돌아왔다. 가슴속에 이는 격동과 혼란을 식구들 앞에서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혼자 있고 싶었다. 그래 서 저녁식사가 다 끝났기를 바라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집안 식구들은 모두 식탁에 앉아 있었다. 배러스는 몹시 기분이 좋았다. 그는 타인캐슬에 들렀다가 또다시 승전보를 들 었던 것이다. 영국군은 9월 26일 서부전선 전투에서 불과 1만 5천 명의 희생으 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는 것이었다. '타인캐슬 아거스' 신문은 적군의 피해를 사상자 1만 9천명, 포로 7천 명, 노획한 포가 125문이라고 보도했다. '노던 스타' 지는 그것보다 약간 더 많아 사상자 2만 1천명, 포로 3천명이라고 보도했다. 대단히 만족한 배러스의 얼굴이 빛나고 있었다. 커틀릿을 먹으면서 그는 '노던 스타' 지에 실린 소식을 크게 소리내어 읽었다. 배러스는 지금까지 석간신문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타임즈' 하나만으로 만족하였는데, 최근엔 '아거스' 나 '스타'를 번갈아 보거나 그 두 개를 모두 읽었다. 그는 신문을 손에 든 채 식 탁에서 벌떡 일어나 벽 쪽으로 걸어갔다. 그 벽에는 연합군의 깃발을 사방에 꽂 아놓은 커다란 지도가 걸려 있었다. 배러스는 신문을 주의 깊게 보면서 자그마 한 영국 국기를 6개 정도 옮겨 꽃았다. 그는 작은 국기를 지도 위에서 전진시킨 것이다. 이러한 아버지를 본 아서는 무서운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 깃발을 옮겨 꽃고 있는 아버지를 보면서 전쟁의 후방에 있으면서 그 전쟁을 추진시키는 자가 아닌 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과 몇 백 미터의 부서진 참호를 탈취한 것에 환희를 느끼고 있는 배러스가 본질적으로는 수천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전쟁의 책임자 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그를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배러스는 깃발을 움직여 꽃는 것을 마치자, 지도를 열심히 조사했다. 그는 몹 시 행복했다. 그는 이미 6개의 위원회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북부 피난민 협회의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하루 종일 전화가 걸려왔다. 자동차는 타인캐슬을 오르내 리느라고 불이 날 정도였다. 제 5탄층과 글로브 갱구에서 무진장 채탄된 석탄은 한지가가 톤당 40실링이라는 전에 없이 높은 가격으로 날개가 돋힌 듯이 팔려 나갔다. 배러스는 식탁으로 되돌아왔다. 자리에 앉으려던 그는 집안 식구들 모두가 자 신을 전쟁에서 이겨 깃발을 옮겨 꽃는 장군처럼 여기고 있는지 알고 싶어 힐다 와 그레이스와 아사를 죽 둘러보았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자리에 앉아 신문을 들었다. 그는 요즘 와서 분명히 좀더 달라지고 있었다. 주위에 대해 지나치게 초연하여 정정해 보이던 그 태도가 사라진 대신에 침착감이 없고 열병 에라도 거린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것도 의사의 명령을 무시하고 억지로 일어나 돌아다니겠다고 우겨대는 열병 환자 같은 태도였다. 아니면 신진대사가 격화되 면서 모든 행동마저 격화된 그런 부자연스러운 태도 같기도 했다. 지금도 그의 관자놀이의 정맥은 불쑥 솟아올라 맥박이 뛰는 것이 보였다. 신문을 보면서 그 는 식탁을 두드리고 있었다. 완전히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그 소리는 마치 갱 안에서 신호를 하기 위해 두드려대는 소리와 같았다. 한동안 그 두드리는 소리만 들릴 뿐 모든 것이 조용했다. 갑자기 그 소리가 그쳤다. 배러스가 신문을 읽다가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멋있는 기사가 났다. 너희들도 다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는 힘찬 소리로 기사를 읽어나갔다. "켈 경, 런던 자택 임시병원으로 제공. 켈 경은 그의 거대한 저택을 부상병을 수용하는 임시병원으로 내놓기로 결정하고 개조 공사중이다. 이 개조 공사는 한 달 내에 완성될 예정이며, 이미 간호사 모집을 시작했다. 캘 경은 많은 이들이 간호사로 지원해 오기를 바라며 또한 가능한 한 북부지방 출신들이 많이 와주기 를 희망한다고 했다." 배러스는 읽는 걸 그치고 힐다와 그래이스 쪽을 바라다보았다. 전에 없이 부 드럽고 온화한 시선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어진 그의 말은 너무나 놀라운 것 이었다. 그들은 자기 귀를 의심해야 할 정도였다. 배러스가 "너희들도 지원하면 어떻겠니?" 하면서 그들의 의사를 물어왔던 것이다. 아서는 의자에 뿌리라도 박힌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가족의 튼튼한 지주인 아버지, 그 아버지는 암벽처럼 버티고 서서 지금까지 힐다의 모 든 소망이나 애원을 가차없이 짓밟아왔다. 그런데 지금 그는 너무나 갑작스럽게 문을 연 것이었다. 아서는 창백한 얼굴로 근심스러운 눈을 한 채 힐다를 바라보았다. 힐다는 보기 흉할 정도로 얼굴이 빨갛게 변해 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무슨 이 야기를 들었는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녀는 확인하듯이 조심스럽게 다시 물 었다. "아버지, 진정이신가요?" "내가 언제 거짓말을 하더냐, 난 진심으로 바란다." 힐다의 얼굴은 다시 창백하게 변했다. 그녀의 옆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열 심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레이스를 보았다. "그레이스도 함께 가는 거죠?" 그녀의 음성은 기쁨에 떨리고 있었다. "그게 더 좋겠지." 배러스는 만족한 얼굴로 다시 신문을 치켜들었다. 그것은 이야기가 끝났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힐다와 그레이스는 재빨리 서로의 시선을 주고받았다. 힐다가 다시 말했다. "언제쯤 출발하게 되나요, 아버지?" 배러스는 펼쳐진 신문 뒤에서 말했다. "곧 가게 될 게다. 내주쯤... 내일 타인캐슬에 가서 리치 시의원과 만나서 이야 기할 때 이 이야기도 해서 주선을 하도록 해야겠다." 그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좀더 엄숙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힐다와 그레이스만이라도 나라를 위해서 일을 하게 된다니 참 기쁘고 자랑스 럽구나." 꽉 쥐고 있는 아서의 손바닥에서 진땀이 솟아났다. 그는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이 방에서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접시 위에 눈을 던진 채 흥분을 하면 으레 일어나는 구토증이 또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힐다와 그레이스는 나가버렸다. 그들은 이 기적같이 놀라운 일을 서로 더 이 야기 해보기 위해 3층 계단을 급히 뛰어 올라갔다. 캐리 고모도 식탁을 떠나 어 머니를 돌보러 가버렸다. 결국 식탁에는 아버지와 아서만이 남았다. 그는 다시 한번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힘이 빠져버린 다리가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펼 쳐진 신문 뒤에서 자기 쪽으로 흘러오는 증오를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기다렸다. 예기한 대로 그의 아버지는 신문을 내려놓으면 말했다. "난 네 누이들이 나라에 봉사하려는 그 열성이 정말 기쁘다." 아서는 온몸이 더욱 굳어지는 것 같았다. 반대로 그의 내면에는 성난 파도와 같은 감정이 들끓어 옳았다. 그것은 일찍이 아버지 앞에 서면 늘 피어오르던 사 랑과 존경 그리고 자랑스러움이 아니라 공포와 의혹과 증오였다. 왜 이렇게 변 했을까? 그는 그 원인을 알 것도 같고 몰 것 같기도 했다. 하루 종일 긴장했던 뒤라 그의 사고력은 더욱 무디어지고 멍청하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반듯이 이야 기를 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어떤 이야기인지는 모른다. 그는 어떤 힘 에 떠밀리는 사람처럼 천천히 입을 열었다. "힐다와 그레이스가 얼마나 집을 나가고 싶어했는지 아세요?" 배러스의 이마에 보기 흉한 흉조가 떠올랐다. "글쎄다. 난 전연 생각도 못 해본 일이다만..." 아서의 입술이 경련이라도 일으킨 듯 떨렸다. 그러나 결심한 듯 이야기를 계 속했다. "그들은 이 집이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힐다 누나가 이 집을 싫어하기 시작 한 건 아주 옛날부터랍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레이스까지 그렇게 된 거예요. 넵 튠 탄광 사건 후부터 그들은 정말 집이 싫어진 거예요. 전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어요. 아버지가 아주 변하셨다고요. 힐다 누나는 아버지가 어떤 열기에 휩싸여 사시는 거라고 했어요." 배러스는 담담했다. 이마의 흉조도 어느샌가 사라졌다. 아서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그는 요즈음 와서 아주 손쉽게,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은 무엇이 든 멀리 밀어버리는 요령을 터득했다. 그런 소리는 듣지 않음으로 해서 막아버 리는 것이었다. 아서는 이러한 아버지에게 "나는 이 사람(그리스도)을 처형하는 데 아무 관계도 없노라." 고 손을 썼던 빌라도(그리스도를 처형할 당시 예루살렘 의 총독이었던 로마인)를 보는 것 같았다. 배러스는 잠자코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오히려 네가 걱정스럽다. 넌 너무 변했어." "변한 건 아버지랍니다." "네 걱정을 하는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까 저녁 때 해티를 만났어. 그 아이가 너 때문에 얼마나 슬퍼하고 걱정하는지 아니?" "해티와 저는 상관 없는 사람입니다." 아서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사납게 말했다. 배러스의 태도도 차갑고 엄해 졌다. "앨른은 십자훈장을 받았다. 그 뉴스를 듣고 해티가 달려왔던 거야." "앨른이 십자훈장을 받는 것이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지금 저에겐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배러스의 이마에 새로이 솟아난 얼룩점이 점차로 목 뒤에까지 번져갔다. 관자 놀이의 힘줄이 터져나올 것처럼 불끈 솟았다. 그러나 역시 배러스는 자제력이 많은 사람이었다. 다시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아직도 나라를 위해서 싸워볼 생각이 생기지 않았나보구나?"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터엔 나가지 않겠습니다. 전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습 니다. 이미 너무도 많은 살인행위가 있어왔으니까요. 넵튠 탄광에서 그 일을 멋 있게 시작했고 또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전 이제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아니 벌써 넌더리가 납니다. 더 이상하고 싶지 않단 말입니다." 그의 음성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전연 그의 음성 같지 않게 아주 힘차게 울려나왔다. "아십니까? 그런 일만 없었더라면 저도 다른 젊은이들처럼 기쁘게 총을 들고 전쟁터로 달려나갔을 겁니다. 멋진 군복을 입고 죽어야 할 인간들을 찾아 달려 갔을 겁니다. 그런데 그 사고 일어난 겁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아무 죄도 없 이 끔찍하게 죽어가는 것을 봤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생각할 사고력이 있기 때문에 전 이해할 수가 ㄱ는 겁니다. 생각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는 숨을 거칠게 쉬며 말을 끊었다. 숨이 막혀버릴 것 같아 더 이상 말을 계 속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아버지를 감히 바라보지 못했다. 그러나 자기를 바라보 고 있는 아버지의 강한 시선을 느꼈다. 길고 고통스러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배러스는 태연하게 언제나 하듯이 왼쪽 조끼의 윗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어 들여다보았다. 아서는 그 시계의 뚜껑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배러스는 타인캐 슬에 중요한 약속이 있었다. 회의를 열기 위해서 몇개의 위원회에서 그가 나타 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밤에 절대로 외출하는 일이 없었던 그였다. 조용한 집 안에서 헨델의 음악이나 들으면서 고요히 앉아 있기를 좋아하던 배러스, 초연한 얼굴로 그 많은 사람들을 넵튠 탄광의 죽음의 구덩이 속으로 몰아 넣었던 그가 이제는 사회 활동으로 바쁜 몸이 된 것이다. "너도 알겠지만..." 배러스는 식탁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넵튠 탄광에서 네가 꼭 필요한 건 아니다. 나 혼자서도 충분해. 그러니 잘 생 각해보도록 해라, 그 일을. 그러면 자기의 의무를 완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확실히 알게 될 테니까." 그가 나가고 방문이 조용히 닫혔다. 꼭2분 후 아서는 차도를 굴러가는 자동차 의 엔진 소리를 들었다. 아서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부에 숨어 있던 약한 마음이 그를 공포로 떨게 했 다. "아버진 그렇게는 할 수 없을 거야." 그는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아버진 그렇게는 할 수 없을 거야!" 빈 벽이 윙 하고 울렸다. 7 지난 9월 하순으로 접어들던 어느 이른 아침에 조 가울런은 슬리스케일을 슬 쩍 떠나버렸다. 왜 떠났는지 또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데 그 조가 놀랍게도 다시 얘로우로 돌아온 것이다. 지금 그는 아주 경쾌한 걸 음으로 플래트 골목길을 향해서 걷고있었다. 지혜로운 머리 속에는 앞으로의 계 획이 치밀하게 짜여 있었다. 가을날 아침의 습기찬 공기를 마셔가며 그 길을 따 라 걷는 그는 밀링튼 공장의 놀라운 발전을 바라보면서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높은 울타리 너머로 물결 모양의 긴 양철지붕 건물이 새로 세위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금 막 넓은 마당으로 굴러 들어온 트럭에서는 무거운 기계가 내려지 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조심조심하면서 울타리의 틈바구니로 안을 들여다보았 다. 굉장히 경기가 좋은 모양으로 모두 새로 도입한 신형 기계들이었다. 선반이 2대, 드릴이 1대, 새 주형들이 트레일러에서 인부들의 손으로 날라지고 있었다. 공장장 포터필드가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어빙은 서류뭉치를 움켜쥐 고 사무실에서 막 뛰어나오고 있었다. 조는 다시 한번 옷깃을 바로 하고는 사무 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대기실에서 다리가 뻣뻣해지도록 기다리고 서 있다가 가까스로 사장실로 들어오라는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그렇게 오래 기다려야 하는 것도, 마지못해 바라보는 풀러 과장의 귀찮아하는 눈길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의젓한 자 세로 안으로 들어갔다. "조 가울런입니다, 스탠리 사장님." 그는 활짝 웃었다. 정중하면서도 상대편의 마음을 탁 터놓게 하는 기분 좋은 미소였다. "기억을 못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사장님께선 제가 돌아오면 좋은 자리를 마련해주시겠노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기에..." 서류가 흩어져 있는 어수선한 책상 앞에 와이셔츠 바람으로 앉아 있던 스탠리 는 눈을 들어 조를 바라보았다. 스탠리는 그 동안 얼굴이 더 둥글어지고 대머리 가 벗겨지기 시작하였다. 무거워진 몸을 의자에 기대고 앉아 있는 그는 젊은 시 절의 활기가 사라진 대신 창백한 안색에 짜증스러운 빛이 드러나 있었다. 스탠 리는 상을 찌푸렸다. 그는 조를 재빨리 기억해내기는 했으나 좀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그는 당혹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그래, 가울런. 물론 기억하고 있네. 그런데 지금 일자리를 구하러 온건 가?" "그렇습니다, 사장님." 조는 다시 웃었다. 역시 거절할 수 없게 만드는 그런 미소여서 스탠리는 끌리 듯 함께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별로 나쁘지 않았습니다만 환경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겁니 다. 그리고 그 동안 저는 내내 사장님 옆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 었습니다." "알겠소. 그런데 이제는 이곳도 무척 달라졌다는 걸 이해해줘야겠소. 지금 우 리에겐 연철공은 사실 필요가 없어져서 좀 곤란한데... 아, 당신은 왜 군대에 갈 생각을 않고 있소?" 조의 밝은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이런 질문이 나오리라곤 전혀 예상을 못 했다. 군대 지원이란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다시 힘들 내었다. "전 두 번이나 자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번번히 퇴짜를 맞았습니다. 권투를 하 다가 무릎뼈를 다친 일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때문에 안된다는 거였습니다." 스탠리는 조가 거짓말을 한다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에 조에게 끌려든 사장은 다시 물었다. "그 동안 뭘 하고 있었나? 여기를 나간 지가 꽤 오래되었을 텐데." 조는 더욱 겸손하고 정중한 자세로 대답했다. "세필드의 건축 사업을 하는 곳에 좀 있었습니다. 현장 감독이었습니다. 한 30 명 거느리면서 일했지만 어쩐지 여기서처럼 신이 나지 않았습니다. 늘 이곳 생 각을 하고 있던 탓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다시 말이 끊겼다. 스탠리는 길다란 자를 손에 들고 무료한 듯 그것을 빙빙 돌렸다. 그는 사실 피곤하고 겹치는 일 속에서 짜증스럽기까지 했다. 이 젊은이 와의 면담도 어서 끝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냥 돌려보내기에는 좀 아쉬운 감이 들어서 머뭇거리던 그에게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아주 기발한 생각이었 다. 왜 그 생각을 미리 못 했을까? 그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 새삼스럽게 조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자기의 현명함과 과단성을 속으로 감탄하면서 너그러운 미소를 띠었다. "이 공장도 많이 변했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아나?" "아뇨, 잘 모르고 있습니다, 사장님." 스탠리는 피곤 속에서도 일종의 승리감 같을 것을 느끼며 손에 들고 있던 자 를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여기서는 지금 군수품을 만들고 있다네. 수류탄, 유산탄, 450그램 짜리 포탄." 이야기를 하면서 스탠리는 점점 더 유쾌해졌다. 밀링튼 공장이 드디어 대공장 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운 감격으로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얼마전까지 는 공장 운영이 점점 어려워지기만 했다. 이미 있었던 거래처들은 자주 끊어지 고 새로운 거래처를 뚫는 건 하늘에 별따기 였다. 그래서 공원들을 감원 시키고 아름다운 전통이었던 사교 모임도 연기되곤 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공장을 살펴 보려고 기를 쓰고 뛰는데도 공장이 폐쇄 직전에 이르도록 전망은 암담했다. 그런데 전쟁이 터진 것이다. 갑자기 클레그 노인이 헐떡거리며 스탠리를 찾아 왔다. 클래그라고 하면 오랜 천식병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으로 이제는 늙고 쪼 그라져 조금도 쓸모 없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뒷전으로 밀려나 있던 인물인데 신바람이 나서 뛰어와서는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단 한 가지, 그것도 아주 간단한 해결책이 있네. 군수품을 만드는 것이네. 이 제 전쟁이 터졌으니 아무리 병기창에서 부리나케 만든다고 해도 동이 날 걸세. 우리는 이 기회를 잡아야 하네. 스탠리군, 망설일 것 없네. 우린 계획만 바꾸면 다른건 문제될 것도 없잖은가... 생각해보게, 이대로 가다간 반년도 못 가서 분명 히 파산하네." 그들은 솔직하고 진지하게 그 문제에 관해서 좀더 궁리를 해보았다. 문제는 하나도 복잡할 것이 없었다. 공장 내부시설을 조금만 확장하면 급한대로 꾸려나 갈 수 있었다. 이미 주물공장도 마련되어 있었고 기계설비도 되어 있었다. 용광 로가 네 개에 용접로가 하나 있다. 물론 대형 군수품을 만드는 건 무리지만 유 산탄, 수류탄, 소구경 포탄 같은 작은 것을 전문으로 만들면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바로 이것이란 말이야. 우리의 이익도 올리면서 거기다가 전쟁에 이길 수 있 도록 할 수 있거든..." 이 마지막 말이 스탠리에게는 효과가 있었다. 그것은 스탠리의 애국심에 불을 붙이기에 충분했다. 그 일은 곧 결정을 보았고, 클래그의 의견대로 조금 남아 있 던 자본을 모두 투자하여 새로 여섯 개의 용광로를 설치하고 새로운 장비를 마 련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보다 더 쉽게, 더 많은 돈이 굴러 들어왔 다. 너무도 쉬워서 스탠리는 아연했다. 정부는 일은 부탁하는 즉시 착수금을 주 었다. 수류탄 50만개를 주문해서는 1만 개당 3찬 5백 파운드로 계약을 체결했다. 탄약의 수요는 날로 급증했다. 만들어도 만들어도 늘 부족했다. 스탠리의 손에는 계약서가 가득히 쥐어졌다. 현재 18파운드 유탄 주형과 대형선반을 설치 중이었 다. 이런 상황이었으므로 스탠리는 성공한 사람답게 여유만만한 미소를 띠고 조 를 내려다볼 수 있었고, 그것이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당신은 운이 좋은 것 같군. 사실 군대를 지원해 간 사람들이 많아서 손이 부 족했던 참이었소. 나는 입대하겠다는 사람은 걸대로 만류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좀 곤란한 때도 있단 말이오. 며칠전에 주물부 반장 휴즈가 입대를 해서 그 후 보자를 물색 중이었소. 클래가가 있지만 그 양반은 걱정스러울 정도로 쇠약해져 서 그런 일은 너무 무리거든. 공장에는 절대적으로 감독이 필요해요. 아무리 수 완이 좋은 나라고 해도 한꺼번에 세 곳의 일을 볼 수는 없으니까. 주당 6파운드 로 우선 한 달간은 시험 기간으로 하는 조건으로, 어떤가?" 조의 눈이 번들거렸다. 생각보다도 훨씬 좋은 조건이었다. 그는 만족스러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큰 소리로 대답했다. "해보겠습니다, 사장님. 그리고 제발 얼마만큼 일을 할 수가 있는가 잘 시험해 주십시오." 열정이 담긴 이 말이 스탠리 사장을 아주 흡족하게 했다. "그렇다면 나를 따라오게." 그는 일어섰다. "먼저 클레그 씨를 소개하지." 그들은 주물공장에서 새 주형의 설치를 지시하고 있는 클레그를 발견했다. 그 는 역시 너무 쇠약해보였다. 바짝 마른 몸으로 지팡이를 짚고 있었고, 백발로 변 한 수염은 지저분하게 얽혀 있었다. 그는 조를 기억하지 못했지만 스탠리 사장 의 소개를 받자 두말없이 그를 주물공장으로 안내했다. 조는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 일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두 여섯개의 용광로가 있었고 공정은 매우 간단한 것이었다. 무쇠를 납과 약간의 안티몬을 섞어 굳힌 후 밑에 서 열을 가하면서 주형 속으로 집어넣으면 되는 것이었다. 클레그 노인의 자세 한 설명을 반쯤 듣는 척 하면서 그의 눈은 바쁘게 공장안을 훑어보고 있었다. 3,40명의 공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용광로의 시뻘건 불빛을 받 으면서 석탄을 퍼넣거나 주형에다 쇳물을 붓거나, 아니면 아직 식지 않은 작은 파인애플 같은 수류탄을 운반차로 실어 나르는 일로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 다. "문제는 이 공원들을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이지." 스탠리 사장이 뒤에 섰다가 하는 말이었다. "생산량이 많고 적어지는 것은 말일세..." 조는 자신이 넘치는 음성으로 다 알고 있다는 듯 서슴없이 말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사장님. 힘껏 해보겠습니다." 스탠리 사장은 고개를 끄덕거려 보이곤 클레그 노인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조는 멋있게 자기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 밑에 사람을 두고 일을 시켜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자신은 언제나 윗사람 노릇에 적 합하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염려나 불안을 전혀 느껴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무엇이든지 주저함이 없이 시원스럽게 빨리 해치웠다. 일에다가 모 든 정력을 다 쏟았다. 혼합, 가열, 주형 등 모든 일에 대해서 칭찬이 아니면 농 담 섞인 욕지거리를 퍼붓곤 하면서 공장을 돌아다녔다. 한 달이 지났을 때 생산량이 현저한 증가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스탠리는 몹시 만족했다. 그는 자기의 과단성 있는 행동을 다시 한번 감격스럽게 되새기며, 조 에게 직접 칭찬을 해주고 정식사원으로 이름을 올리도록 계약을 했다. 조의 좋 은 점은 일을 하면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쏟는다는 것이었다. 스탠리가 어느 때 든지 불쑥 공장에 나타나 보아도 조는 일을 쉬고 있는 적이 없었다. 그는 사장 이 오기라도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일에 대한 자세한 보고를 해가면서 새로운 창안을 서슴없이 제안하기도 했다. 일은 더욱 잘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스탠리는 조를 신임하렸다. 실로 믿음직스럽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조는 밤에도 얌전하게 지냈다. 순간적이었지만 그는 다시 선리의 집에서 하숙 을 할까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곧 머리를 흔들었다. 조는 이전의 사람들과 다시 어울려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자기는 좋은 일자리를 찾았고 또 감독의 지 위에도 올라 있는 데다가 밀링튼 공장은 최대의 호황을 누리고 있어 주머니 사 정도 그만큼 좋아졌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어울릴 수 있는 새로운 친구들을 사 귀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포터필드의 추천을 받아 얘로 우의 비치 가 4번지에 잇는 방을 빌렸다. 안주인 콜러 부인은 점잖은 중년부인 으로 페뉴얼회 회원이었다. 다소 첫인상이 쌀쌀해 보이고 풍채가 당당한 그녀는 연령적으로도 존경을 받아야 할 나이였다. 집도 잘 꾸며놓았다. 조는 모든것이 마음에 들었고 만족스러웠다. 몇 개월이 흐르자 조는 좋은 기회를 잡기 위해 더욱더 마음을 쏟았다. 그가 주의해서 바라보는 인물은 기계실의 심 포터필드였다. 심은 몸집이 작고 과묵한 사람으로 안색이 늘 창백해 보였으나 건강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유달리 신앙심이 두텁고 잔소리가 많은 부인 때문에 우울해하는 것 같았다. 투 포환 경기에 종종 열을 올리는 그는 워낙 말이 없는 인간이라 '사색가' 라는 별 명이 붙어 있었다. 얘로우의 페이비언 협회 회원인 그는 칼 마르크스의 저서를 몇 번이고 애독하는 열성파였으나 공원들 사이에서는 별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 었다. 스탠리 사장도 그에 대해 '사회주의자' 가 아닌가 하는 의심속에서 좋지 않은 인상을 갖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친절한 사람이었고, 더욱이 조에게 는 7년전 밀링튼 공장에 처음으로 그를 받아들여 주었던 은인이었다. 그러므로 조와 심이 친밀한 사이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조는 토요일 오후면 자기가 좋아하는 놀이는 그만두고 심을 따라가 즐거이 투포환 게임에 끼여들곤 했다. 조는 심을 좋아하는 듯이 보였다. 늘 빙글거리며 그의 곁에 다가가고 있었 으나 실은 이 모든 것이 그의 치밀한 작전에 의한 연출이었다. 그는 심을 여러 모로 연구하여 그가 밀려나지 않을 수 없도록 올가미를 걸어놓은 것ㅇ. 심도 매 우 끈덕진 인간이었으므로 그것이 좀체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맥주도 하 지 않고 여자도 좋아하지 않았으며, 직장에서도 정직하여 작은 나사못 하나라도 거져가는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조도 그런 방법은 쓰지 않았다. 천천히 좋은 기 회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기회는 우연치 않게 그의 손 안으로 굴러 들어왔다. 어느 날 저녁 공장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밖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는데 어떤 낯 선 사나이가 그의 손에다 전단을 쥐어주곤 금세 플래트 골목으로 사라지는 것이 었다. 조는 가로등 아래에서 무심코 그 전단을 읽어보았다. 삐라에는 사외주의자 들이 늘상 떠들어대는 상투적인 말들이 빽빽하게 차 있었다. "동지여! 전세계의 노동자 동지여, 전쟁을 중단시키자! 전쟁 도발자들은 동지 들의 손에다 총을 쥐어주고 독일의 무고한 노동형제들을 죽이도록 우리를 전선 으로 내몰고 있다. 우리 모두 단결하여 이 악질적인 행위를 막아야한다. 최저임 금이라도 받기 위하여 우리가 파업을 했을 때 놈들은 우리들을 어떻게 대접했던 가? 놈들은 우리가 없이는 이 전쟁도 계속할 수가 없다. 즉시 전쟁을 분쇄하자. 독일의 노동자 동지들도 싸우기를 원하지 않는다. 전쟁 도발자들이 대포의 먹이 로서 우리를 내모는 것에 대항하여 싸우자. 병기공장의 노동자 동지여! 제조 연 장들을 때려부수라! 영국의 자본주의자들은 그들의 병기를 독일에 팔아넘기고 있다. 자본주의를 타도하자! 전쟁을 끝장내자! 동지들이여, 봉기하라!" 조는 픽 웃으면서 종이를 구겨 시궁창 속에 던지려다가 어떤 생각이 떠올랐 다. 그는 그 종이를 잘 접어 수첩 속에 끼웠다. 그리고 가벼운 걸음으로 하숙집 쪽으로 걸어갔다. 다음날 그는 더욱 친절한 얼굴로 기계실을 들랑거리더니 점심까지 심과 함께 있다가 사장실로 갔다. 그리고 상당히 오랫동안 스탠리 사장과 면담을 했다. 그날 저녁 6시 사이렌이 울렸다. 공원들이 서로 다투어 옷을 갈아입고는 문앞 으로 쏟아져 나왔다. 정문 앞에는 스탠리와 클레그, 조까지 버티고 서 있었다. 스탠리는 노기의 얼굴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심이 지나가려고 할 때 스탠리 가 그를 제지했다. "포터필드, 나 좀 보세. 자네가 지금까지 내 공장에서 선량한 사람들을 선동해 온 모양인데 오늘은 그냥 둘 수 없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심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앞서가던 이들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다보았다. "시치미를 떼도 소용없어. 난 모든 걸 다 알고 있으니까. 자네가 읽고있던 그 망할놈의 마르크스를 말이야. 처음부터 자네를 의심했어야 하는데 내가 사람이 너무 좋았던 거야." 스탠리의 음성은 말을 할수록 더욱 분노가 치미는지 사납게 떨리고 있어 무시 무시할 정도였다. 본시 창백한 안색은 불쌍할 정도로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는 손을 내저었다. "사장님, 저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정말이지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 단 말씀입니까?" "뻔뻔스럽게 끝까지 버틸 작정이군. 그럼 증거를 대겠다. 네가 불온한 전단을 뿌리고 다니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단 말이야. 그리고 지금 네 안주머니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가 보자." 스탠리 사장은 그의 양복 주머니에서 한 다발의 종이를 끄집어냈다. "봐, 이래도 뻗댈 텐가? 아무짓도 안 했다구? 이 악질적인 비방으로 가득찬 손동문을 봐. 이런 것을 내 신성한 공장 안에서 퍼트리다니! 즉시 파면이네. 회 계에 사서 돈을 타가게. 그리고 두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도 말게. 그 친독파 의 보기싫은 쌍통을 다시는 내밀지 말란 말이네." "그렇지만, 제 말씀을... 제 이야기도 좀 들어주십시오. 사장님!" 당황한 심은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며 외쳤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스탠리는 돌아서서 조와 클레그를 앞장세우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 다. 심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전단 한 장을 넋빠진 사람처럼 바라보다가 주워 들었다. 공장을 빠져나오려니까 문 밖에는 심상치 않아보이는 공원들 한무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 분노의 외침소리가 울렸다. "이 죽일놈의 친독파야! 이 새끼를 죽여라!" 성난 무리들이 심을 둘러쌌다. "놔주게. 왜들 이러나..." 그는 까만 구레나룻을 덜덜 떨며 애원했다. "난 아무짓도 안 했네. 정말 맹세하네." 그때 강철 볼트가 그의 귀로 날아들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는 두주먹을 불끈 쥐고 마구 휘둘렀다. 누군가가 그의 아랫도리를 세게 걷어찼다. 급소였다. 그는 눈앞에 불이 확 일어나는 것 같은 현기증을 느끼며 무릎을 털썩 꿇었다. "친독파! 더러운 돼지새끼! 매국노!" 외쳐대는 소리들이 검붉은 눈앞으로 왈칵 밀려오다가는 어슴프레 사라져 갔 다. 징을 밖은 투박한 구둣발이 그의 갈빗대를 걷어차는 통증을 느낀것이 마지 막이었다. 그는 캄캄한 암흑 속으로 굴러 떨어져버렸다. 그런데 용케도 죽지는 않았다. 으스러진 다리에 접골 부목을 대고 늑골에도 깁스를 한 지독한 중상이었으나 하여간 살아서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신세가 되었다. 3주째 접어들던 날 조가 어이없는 얼굴을 하고 문병을 왔다. "이것 참, 기가 막히는 일이군, 심!" 조는 곧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난 믿고 싶지가 않네. 그럴 수가 있나. 난 뭐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네. 게다가 공장에서는 자네의 후임을 나보고 맡으라고 하니 이게 무슨 일인가, 도대체. 심, 자네는 왜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했는가 말일세, 응?" 조는 돌아가면서 '얘로우 뉴스' 지의 "매국노에게 주는 영국 노동자들의 메시 지" 라는 기사의 스크랩을 일부러 두고갔다. 그 기사는 이렇게 끝나고 있었다. "조 가울런 씨는 밀링튼 군수공장의 주물부 및 기계부의 부장직을 겸임하게 되 었다." 심은 도수가 높은 안경알을 통해 그 가사를 무표정하게 읽고나서는 배갯 머리의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러곤 잘 이해하지도 못하는 마르크스의 난해한 저 서를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조에 대한 사장의 신임은 대단해졌다. 그에 따라 공장 내에서 그의 세력도 넓 어져 갔다. 문제의 월요일 아침이 다가왔다. 그날 스텐리는 몸이 좋지 않아 당분 간 나오지 못하겠다는 클레그의 전화를 받고 조금 언짢은 기분으로 출근을 했 다. 조가 벌써 사무실에 나와 있었다. 스텐리 사장과 장부를 대조해보기 위해 기 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스탠리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거창한 사업을 혼자 해나가야 하는 부담이 자 주 안겨다주는 우울함이었다. 그는 머풀러를 펄럭거리며 외투도 풀어헤친채 초 조한 얼굴로 사무실에 들어왔다. 외투를 벗기가 무섭게 그는 풀러에게 소리쳐 외계담당인 도비를 불러들이라고 명령했다. 그러고는 외투 주머니를 뒤적거리더 니 "제기랄." 하면서 조 쪽을 돌아다보았다. "부본(수표나 영수증을 떼어주고 남겨두는 책)을 깜박 잊고 나왔군." 잠깐 책상 앞에 앉더니 그가 말했다. "조, 미안하지만 차로 우리집에 좀 갔다오겠나? 라우라에게 말하면 찾아줄걸 세. 내 아내 말일세. 아니면 일하는 사람에게 아침식사를 하면서 식당에 놔둔 긴 봉투를 달라고 해요. 혹시 현관에 놓고 왔는지도 모르지만 자 빨리 갔다와요. 도 즈가 가기전에." 조는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차고로 가니 사장의 차는 아직도 엔진이 걸린 채로 서 있었다. 운전사 도즈에게 급히 차를 돌리라고 해서 차는 다시 힐톱을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날 아침은 차가운 겨울 날씨답게 하늘은 파랗게 얼어붙었고 공기는 맑고 상 쾌했다. 도즈와 나란히 운전대에 앉은 조가 창문을 조금 열어놓자 차가운 겨울 바람이 그의 건강한 얼굴을 더욱 아름답게 상기시켜주었다. 조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세상이 자기를 조금씩 인정해주기 시작하는 요즈음 그의 콧대는 높을대 로 높아져 있었다. 골프장이 내려다보이는 초 현대식의 밀링튼 저택은 공장에서 3.5킬로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잘 손질된 밀링튼 저택 뜰의 반원형 차도로 차가 굴러 들어가기가 바쁘게 조는 차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높은 돌계단을 뛰어올 라가 초인종을 눌렀다. 옷차림이 깨끗한 하녀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곧 다정 한 미소를 만면에 띠우며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조는 어떤 사람에게도 절대로 소홀히 대하는 일이 없었다. '공장에서 왔습니다. 사모님을 뵈어야 하겠는데요." 하녀는 그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그는 온도가 잘 조절된 훈훈한 방 안에 서서 기다렸다. 바로 옆에는 고급 소파가 앉아주기를 기다리는 듯 놓여 있었지만 서 있는 것이 더 좋을 거라는 판단을 내린 그는 정중한 태도로 서서 기다렸다. 쾌 적하고 가구도 고급이고 아주 고상한 그 방이 마음에 들었다. 역시 부잣집은 어 디가 달라도 다르다고 감탄하면서, 한쪽 벽에 걸려 있는 비싸 보이는 그림을 잘 이해한다는 듯한 얼굴로 열심히 바라보았다. 그때 라우라가 들어왔다. 새하얀 비둘기색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소리도 없 이 층계를 내려왔다. 그녀는 무관심한 눈길을 흘낏 한번 주고는 곧 먼곳을 바라 보면서 용건을 물었다. "무슨 일이죠?" 조는 가슴을 꽉 누르는 위압감에 자기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서류를 가지러 왔습니다. 사장님께서 깜박 잊고 식탁 위에 서류를 놔두셨다고 하셨는데요." "아, 그러세요-." 그녀는 노래라도 부르는 것처럼 말을 길게 빼면서 이번에는 조를 유심히 바라 보았다. 순간 조는 자가가 저울질 당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수치감에 머리카 락 끝까지 붉어지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 앞에서 이렇게 당황해 보기도 처음이 었다. 화가 났지만 꾹 참았다. 그러나 라우라는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시선을 거 두면서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몹시 귄태롭던 여인이 흥미 있는 물체를 앞 에 대했을 때 보이는 그런 미소였다. "어디선가 한번 만났던 것 같군요?" 그녀의 우아한 목소리가 다정하게 울려나왔다. "춤을 춘 일이 있었습니다. 사교 파티 때였죠. 아주 오래 된 얘깁니다." "아, 그랬군요. 이제 기억이 나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도 겨우 미소를 띠었다. 이제 근육이 좀 풀리고 팔다리도 자연스레 움직여주는 것 같았다. 그는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 했다. 거만하게 치켜진 라우라의 얼굴을 슬쩍 훔쳐보았다. "전 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저로서는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이었답니다." 그녀는 좀더 눈을 크게 떠서 그를 바라보았다. 활게에 찬 젊은이의 건강한 얼 굴이 짙은 곤색 양복과 잘 어울렸다. 빙긋이 웃을 때마다 드러나는 하얀 치아와 보기 좋게 물결치는 머리, 아니 무엇보다 좋은 것은 암갈색의 깊은 눈빛이었다. 상대편을 찌를 듯 바라보는 눈빛 앞에서 라우라는 거의 잊고 있었던 어떤 긴장 감이 팽팽히 되살아오는 것을 느꼈다. "저번에 주인이 댁의 말씀을 하셨어요. 일을 잘 하신다구요." 잠깐 사이를 둔 후 놀라는 듯한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그리고 그 젊은 아가씨에게 버림을 당하셨다던가... 실례했어요, 그 반대일지 도 모르는데..." 그녀는 생글거리며 조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다시 한번 심한 수치감에 고개를 숙여버렸다. "다 끝난 일입니다. 어떤 사정이었건 간에 쓸데없는 일이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럼 그 서류를 가져다 드리죠." 그녀는 문 쪽으로 가다가 걸음을 멈추며 처음에 보여주었던 경멸하는 듯한 시 선으로 그를 돌아다보았다. "아, 참 뭘 좀 드리는 걸 잊고 있었군요. 뭘 드시겠어요?" "별로 생각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일을 시작해야 하는 아침이라서요. 저는 하 루바삐 출세를 해야 할 사람이니까 조심해야죠." 그는 거침없이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말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호도나무 로 된 장식장을 열더니 그에게 위스키 소다를 한 잔 따라주었다. 그가 술잔을 들고 멍하니 서 있는 동안 그녀는 어느새 돌아와 서류를 건네주 었다. "그렇게도 출세가 하고 싶으세요?" "물론입니다." 그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침묵이 흐르는 사이 그녀는 아주 권태로운 표정이 되면서 활활 타고 있는 난 롯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안색도 나쁘고 눈 아래론 기미가 끼기 시작해 눈 밑이 어두워 보이는 데다가 눈빛도 맑지 못했 다. 머리도 흔한 흑발이어서 그녀의 모습은 어디 한 곳 눈에 드러나는 곳이 없었 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에게서는 매력이 풍겨나오고 있었다. 몸매도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한번 바라보면 시선을 돌릴 수 없도록 강한 끌림을 느끼게 하는 여자였다. 그 매력은 그녀가 입고 있는 옷과 정성들여 매만진 머리와 아름답게 손질된 손에서 풍겨나오는 것인지도 몰랐다. 조는 찬탄의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 보았다. 몹시 까다로운 여자일 거라는 느낌도 강했으나 그것마저 매력적으로 보 였다. '저 여자는 얼마나 아름다운 속옷을 입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자기도 모 르게 하던 조는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위스키도 다 마셔서 더 이상 머물 구실도 없었다. 그는 빈 술잔을 옆 테이블 위에 가만히 놓았다. "그럼, 전 공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었다. 난로에서 시선을 돌려 차갑고도 사람을 조소한 듯 한 빛을 띤 채 그를 다시 바라다보았다. 그러더니 차가워 보이는 손을 딱딱하게 내밀었다. 조는 점잖게 악수를 했다. 그녀의 손은 역시 잘 가꾼 손이었다. 그는 집 밖으로 급히 나왔다. 그는 심한 현기증을 느끼며 차에 올랐다. 라우라 밀링튼. 조금 전까지는 한번 생각해본 일도 없던 그 여자가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가까이 느껴지는지 어리둥 절했다. 그는 빙긋이 웃었다. 걷잡을 수 없는 기쁨이 솟구쳐 올랐다. 그는 냉랭 한 미소를 띠고 잇던 그녀의 시선 속에 숨겨진 자기에 대한 강렬한 관심을 느꼈 던 것이다. 미친 생각이고 지나친 판단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튼 라우라 밀 링튼은 조 가울런을 만났던 것을 잊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늘 자기가 막연히 상상해오던 일이었다. 돈이 많은 아름다운 귀부인이 연정을 고백해오는 상상을 그 얼마나 많이 해왔던가... 그런데 이 라우라 밀링튼이야말로 자기가 연출하고 싶어하던 각본에 그럴 수 없이 잘 들어맞는 인물이었다. 조는 여자를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라우라처럼 무엇엔가 갇힌 듯 억눌린 채 살아가는 여자의 심리란 뻔한 법이었다. 말할 수 없이 지루하고 귄태로운 것뿐이고 흥미를 끌 만한 일이 라곤 하나도 없는 그 무료한 상태. 무관심하게 보이던 라우라의 눈속에는 번쩍 이던 어떤 빛을 그는 보았다. 문득 자동차 안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몹시 답 답하게 느껴졌다. 그는 더욱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며칠이 조용히 지나갔다.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조의 기쁨과 희망, 자기만족 도 점점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그는 라우라가 자기에게 관심을 갖고 잇다는 어 떤 징후나 표시를 간절히 기다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당황하 며 자기가 착각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착각했다고 생각하자 세상이 모 두 어두워졌다. 공원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거리의 여자를 찾아갔다. 그러나 더 욱 불쾌해질 뿐 마음의 응어리는 풀리지 않았다. 깨끗이 잊어버리는 수밖에 없 었다. 밀링튼으로 온 지 3개월이 지났다. 하얗게 서리가 내린 어느 날 오후였다. 조 는 스탠리와 함께 흠집이 난 주형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라우 라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스탠리와 타인캐슬에 같이 갈 약속이 있 어 들린 것이었다. 보드라운 은빛 여우 모피 속에 파묻힌 그녀의 갸름한 얼굴은 아름다웠다. 그녀가 들어서는 것을 알았을 때 조의 마음은 벌써 평형을 잃었다. 가슴의 고동이 높아졌다. 스탠리는 짜증이 섞인 눈초리로 흘낏 쳐다보았다. 요즈 음 와서 스탠리는 화를 내는 일이 잦아졌다. 건강이 나빠지고 너무 피곤한 탓인 것 같았다. 지금도 스팀 난방이 잘 된 방 안에 앉아 있건만 그는 얼굴빛이 창백 하고 활기가 없었다. "너무 과로한 거야." 그는 곧잘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벌써 6 주째나 클레그가 자리를 비우고 잇기 때문이었다. 군수공장으로 바뀌고 나서부 터 가중되는 일이 원래 허약했던 그 노인에게 너무 힘겨웠던 것이다. 의사 말로 는 노인의 병이 상당히 오래갈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사실 나이가 나이니 만큼 그가 다시 회복해서 일어날 수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그건 스탠리에게는 큰 걱정거리였다. 클레그가 없이는 스탠리에게 공장 운영이 너무나 벅찼다. 스탠리 역시 최근 상당히 몸이 마르고 늘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매주마다 규칙적으로 하 던 골프도 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일에 얽메여 있었다. 지금도 사실 그는 라우라와 함께 타인캐슬에 간다는 것이 별로 즐겁지 못했 다. 타인캐슬 보다는 집으로 가서 조용히 쉬는 편이 훨씬 좋을 것 같았다. 그러 나 라우라를 실망시킬 순 없었다. 그녀가 외롭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남 편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곧 갈게, 라우라." 퉁명스럽게 말하던 그는 라우라가 조를 처음 만났던 일이 생각났다. 그는 자 리에서 일어났다. "당신 가울런 군을 기억하지? 조 가울런 말이야." 조는 눈을 바로 뜰 수가 없었다. 그는 형식적인 인사만을 겨우 하고는 황급히 서류들을 집어들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스탠리는 하품을 하면서 펜을 내던졌다. "정말 피곤하군, 라우라." 책상위에 널려 있던 서류들을 끌어모으면서 그는 또 투덜거렸다. "어젯밤에도 너무 술을 과하게 마셨나봐. 오늘 하루 종일 피곤이 풀리지 않는 거야. 젖은 걸레 조각처럼 후즐근하게 젖어 있는 기분이란 말야. 제기랄, 전에는 도무지 피곤이라는 걸 몰랐는데. 이건 원 골프도 한번 못 치고, 사는 제미가 있 어야 말이지. 정말 건강이 문제야. 좀 신경을 써야겠어. 아침마다 냉수마찰도 다 시 시작하고 술도 좀 조심하고, 내 자신을 생각해야지 안 되겠어. 시간의 여유도 좀 갖고 사는 것처럼 살아야겠어. 이건 뭐야, 밤낮 시간에 쫓기면서... 돈이 쏟아 져 들어온다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야. 클레그는 아직도 누워 있어. 가망이 없는 것 같아. 나도 더 기다려줄 인내도 없고 연금이나 줘서 내보내도록 하고 새 사 람을 물색해야겠어." "정말 그렇게 하세요. 당신에게는 새 사람이 필요해요." 창 밖을 멍하니 내려다보며 스탠리의 긴 푸념을 거의 듣지 않는 것처럼 보이 던 그녀의 대답이었다. "그런데 그게 어렵거든. 이공장 운영을 함께 해나갈 만한 믿을 수 었는 친구를 만난다는게 정말 어려워. 게다가 벌써 다 그럴듯한 직장을 갖고 있거나 아니면 도무 군대에 있단 말이야. 아무래도 구인광고라도 내야겠어. 그래서 어서 일을 수습해야지 정말 안 되겠어." 라우라는 부드러운 촉감을 즐기듯이 기다란 손가락으로 모피 목도리를 쓰다듬 다가 스탠리를 흘낏 바라보았다. "가울런은 어때요? 시켜볼 만한 사람이 아닐까요?" 아주 무심한 목소리였다. 스탠리는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다가 큰 소리로 웃어버렸다. "가울런이라, 여보. 조 가울런을 이 큰 공장 감독으로 세운다? 그건 당신이 공 장 일이라는 걸 전혀 모르니까 하는 소리야. 가울런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원이었어.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아, 그렇군요. 당신 말처럼 난 원래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니까 이런 소리도 할 수 있는 거겠죠." 라우라는 흥미 없다는 듯 문 쪽으로 돌아섰다. "더군다나 클레그가 하던 일이 여간 중책이 아니거든. 내가 없을 때는 모든 감 독을 다 해야 하는 거야. 가울런은 아무래도 어려울 거야. 당치도 않은 소리지." 그러면서도 그는 마음을 딱 결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턱을 문지르며 잠깐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가울런은 역시 특별한 친구야, 지혜롭고. 요 3개월 동안 그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나를 잘 도와주었어. 공원들 사이에도 인기가 있고, 빈틈없는 정 직한 사람이야. 포터필드에 대해서 이야기해준 것도 그 친구였어. 라우라, 가만 히 생각해보니 당신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군." 그녀는 장갑위로 찬 작은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여보, 이제 그런 이야긴 그만하세요. 시간이 늦었어요. 어서가요." "음, 그렇지만 잠깐만 들어봐.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만 된다면 내 어깨도 가벼 워지고 골치 아픈 일고 싹 줄어들 것이 분명해. 지금은 전쟁 중이니까 그런 파 격적인 일도 별로 이상할 것도 없을 거야. 밑바닥 인간이 출세할 수 있는 때도 바로 이런 떼겠지. 가울런에게 한번 맡겨보는 것도 정말 나쁠 것이 없지." "당신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시는 거죠, 뭐." "그래, 신중해야지. 하여간 이렇게 합시다 그 친구를 한번 저녁식사에 초대합 시다. 그래서 그 친구 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결정하는 거야. 참 좋은 생각이야, 정말." "좋도록 하세요. 그건 그렇고 지금 빨리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겠어요. 어서 차 를 타요,." 스탠리는 여전히 이마에 주름을 모은 채 골똘한 생각에 잠기면서도 순순히 외 투를 입고 모자를 썼다. 그리고 라우라 뒤를 따라 앞마당으로 나오다가 공장 쪽 을 향해서 큰 소리로 조를 불렀다. 조가 곧 다가왔다. 외투 주머니에 두 손을 찌그로 선 채 스탠리는 급히 말했 다. "조, 내가 잊은 것이 있었어. 우리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 어떨까 생각해왔는데 말이오, 내일쯤 어떨까? 선약이라도 있소? 아니면 우리 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합시다." 조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대답을 못 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선약은 없습니다만..." "그럼 됐군. 내가 또 잊어버릴지도 모르니 아주 시간을 정합시다. 내일 저녁 7 시 반, 괜찮겠소? 그럼 늦지 않도록 오시오." 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라우라의 검은 눈이 스탠리의 어깨 너머로 자기 를 보고 있음을 느꼈다. 두 사람은 차에 올라타고 가버렸다. 조는 두근거리는 가 슴을 누르며 그들의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었다. 너무 기뻐서 고함이라 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드디어 왔다! 드디어...! 결국은 자기의 예측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그날 저녁 하숙집으로 돌아갔으나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누구에겐가 이 신나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밖으로 나왔다. 전차에 올라 타인캐슬의 스코츠드 로로 갔다. 그는 지나가다가 잠시 들르는 것처럼 선리 씨 집이 대문을 두드렸다. 그들은 식사중이었다. 앨프렛, 애더, 클래리, 필리스-샐리는 프랑스 음악회에 나가서 집 에 없었다.- 그들이 너무 반갑게 맞아주었기 때문에 그의 기분은 더욱 좋았다. "아니, 정말 웬일이야, 이렇게 오래간만에 만나다니? 너무 반가워요." 애더는 이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그는 옛날에 그가 즐겨 앉던 난롯가 의자에 앉았다. 애더는 서둘러서 콜드햄 을 사오게 해서는 샌드위치를 만들어주었다. 조는 그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밀링튼 공장에서 자기가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 되 었는지, 워낙 말솜씨가 좋은 그인지라 식구들은 모두 정신없이 듣고 있었다. "그래서 내일 밤은 힐톱의 사장님 댁에서 배푸는 저녁 만찬에 초대를 받았습 니다." 그가 예상한 대로 그들은 모두 깜짝 놀라며 그의 행운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 냈다. 조는 원래부터 허풍이 많은 사람이었다. 특히 이렇게 선량한 사람들 앞에 있으면 어쩔 수 없이 그의 허풍은 좀더 심해졌다. 그는 이 세상에 자기 직업처 럼 고상하고 훌륭한 것은 다시 없는 양 떠들었다. 일선에 나가 있는 군인들을 위해 탄환과 포탄을 만들어주는 이들이 없다면 그들은 어떻게 싸울 수 있겠는 가? 군수공장은 더욱 발전해갈 것이다. 얘로우 언덕 꼭대기 공지인 위틀리에다 가 공장을 더 세울 것이다. 할 일이 너무나 많다. 그리고 새로운 공장이 세워지 면 여공도 모집할 것이다. 이것은 스탠리 사장이 런던에 다녀오면서 자기에게만 알려준 비밀이다. 조는 클래리와 필리스를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당신들도 그 공장으로 오는 것이 어떨까? 슬래터리 상점에서 받는 것보다 세 베쯤은 더 받을 게고, 일도 아주 쉬우니까." 애더는 곧 관심을 보였다. "그게 정말이에요. 조?" "그렇습니다. 틀림없다니까요." 애더는 흔들의자에 앉아 의자를 흔들면서 생각했다. 전쟁이 난 이래 타인캐슬 에도 차츰 불경기가 일기 시작했다. 특히 건축이나 도장업등은 특히 거의 일거 리가 없다시피 했고 클래리와 필리스도 빈둥거리는 날이 많았으며 그만큼 수입 도 줄어들었다. 애더는 지금 생활의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더 상세한 소식을 듣거든 알려줘요. 사실 요즈음 뭐든지 불경기라우. 조, 부탁 해요." 애더는 누구나 잘 믿는 성격이지만 특히 조에 대해서는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밤에는 더욱더 그가 마음에 들었다. 언제나 신사답고 솔직하고 의젓 했다. 애더는 조를 훌륭한 사윗감으로 점찍어 두고 있었다. 그런데 제니가 다 망 쳐버린 것이었다. 지금 이렇게 성공을 해서 훌륭한 젊은이가 되었고, 앞길은 더 욱 유망한 것을 생각하니 지나가 버린 일이지만 화가 났다. 식구들이 다 자리를 떠나고 방 안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애더는 처량한 얼굴로 조를 건너다보았다. "제니 소식은 들었수?" "네..." 조는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는 답배를 꺼내 급하게 불을 붙였다. 애더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앤 내달이 산달이라우. 아무래도 내가 가서 돌봐줘야 할 텐데. 산일이 섣 달 초순께쯤 될 텐데..." 조가 얼굴이 벌겋게 되며 갑자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담배연기에 목이 막 힌 것이다. 한동안 애를 쓰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식구가 더 불어나겠군요. 하여튼 좋은 일이죠." 애더가 서글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일인지 뭔지... 제니년도 불쌍하지. 배는 불러 만삭인데 그 신랑은 군에 입대하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니, 그 아이도 어지간히 복이 없지. 그 신랑이 학교 에서 파면당한 일도 알고 있수? 제니년은 제가 제 신세를 망친 거라니까. 난 처 음부터 그 결혼이 못 마땅했다우." 조는 다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세상 일이 다 그런 거 아닙니까? 어떻게 마음대로 할 수 있겠어요. 데이빗 일은 참 안됐지만..." 조는 얼버무렸다. 다행이 애더는 화제를 바꾸어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으므로 조의 얼굴은 다시 활기를 띠었다. 애더는 옛 친구라도 만난 듯이 하소연을 늘어 놓았다. 조는 적당히 대답을 해주다가 기회를 봐서 일어났다. 애더는 그동안 외 로웠는데 오랜만에 속이 시원해졌다면서 조에게 자주 놀러오라고까지 했다. 조는 집 밖으로 나오자 고개를 흔들며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그때 슬리스케 일을 떠나온 것은 정말 일이었다. 하숙집으로 돌아와서도 여전히 기분이 좋았다. 주인 아주머니에게도 전에 없이 친정하게 인사를 했다. 조는 새삼스럽게 아주머 니가 늙었고 과년한 딸이 없는 것이 정말 축하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날이 왔다. 조는 만찬 약속만을 생각했다. 다른 생각은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없었다. 하루가 유난히 길고 지루했다. 겨우 일이 끝나자 그는 이발소에 들러 수염을 밀어버리고 새로 미리 손질도 했다. 하숙집에 돌아와서는 목욕을 하고 정성들여 손톱을 깎았다. 오늘밤은 자기 생애에서 최고로 단장을 해야 한 다고 생각했다. 옷장을 열어 소중하게 간직해두었던 외출복을 꺼냈다. 밝은 잿빛 에 가느다란 줄무늬가 쳐진 좀 야해 보이는 양복이었다. 사실은 뮤지컬 코미디 에 나온 주인공이 입었던 옷이 하도 멋있어 보여 흉내내어 맞춘 옷이었다. 욕심 같아서는 야회복을 입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그 옷이 아직 자기에게는 어울리 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참기로 했다. 그리고 이만한 차림으로도 예의에 어긋나지는 않는다는 자신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자기는 아직 젊고 잘 생긴 것이다. 기름을 흠뻑 발라 넘긴 머리를 몇 번이고 다시 빗고, 시계줄을 늘 어뜨린 위에다가 모조 진주로 된 넥타이핀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거울 앞에 서 번쩍거리는 자신의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정중하게 인사도 해보고 이런 초대를 받는 것쯤은 자기에게 보통일 뿐이라는 거만한 얼굴도 해보다간 통 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드디어 한몫 끼게 되었군. 조 가울런, 멋있게 해보는 거다. 항상 예의바르게 조심하면서 말이야. 모두 깜짝 놀라게 해주자, 응, 조 가울런." 근엄한 표정을 짓느라고 좀 굳어진 얼굴로 힐톱을 향해 가면서 그는 내내 인 사말을 연습하고 있었다. 누가 보았더라면 웃지 않을 수 없는 가관이었지만 그 는 너무 열중해서 그런 것을 생각할 여우도 없었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이미 낯이 익은 하녀 베시였다. 역시 응접실로 안내되었 다. 하연 팔뚝이 드러난 검은 야회복을 입은 라우라가 난로 앞에 서 있었다. 한 팔은 벽난로 위에 얹은 채 슬리퍼 한쪽을 불에 쪼이고 있었다. 아무 장식도 없 는 검은 옷은 오히려 그녀의 하얀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다. 더욱이 불 곁에 서 있어서 분홍빛으로 홍조가 오른 뺨과 불빛에 비치는 하얀 손, 깨끗이 손질된 손톱은 마치 잘 그려진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조는 또 숨이 막히는 것 같은 위압감과 감탄스런 느낌에 당황했다. 이런 여자는 처음이었다. 만날수록 신비스럽고 어떤 안타까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는 겨우 마음을 가 다듬어 인사를 했다. 그러나 아주 어색했다. 그렇게도 위풍당당하게 생각되었던 자신도 그녀의 창백하고 무관심한 표정 앞에서는 어찌할 수 없이 초라하게 움츠 러들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는 공연히 두 손을 맞비비다가 옷깃을 바로 잡고 넥타이도 만져보곤 했다. 미소를 지으려고 애썼다. "지독히 추운 날씹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아주 얼어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요?" 그녀는 쳐다보지도 않고 다른 쪽 슬리퍼를 불 앞으로 가져갔다. 그는 외면을 당한 씁쓸한 기분이 돼버렸다. 기분이 몹시 고조되었던 만큼 침 울한 느낌은 기운까지 빠져버리게 만들었다. 도대체 이 여자는 어떻게 생겨먹은 여잘까? 슬며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그리고 오늘은 얼마나 중요한 날인가,, 용기 를 내서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말 오늘밤의 초대에 대해선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게 는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스탠리 사장님께서 초대해주셨을 때 사실 저는 굉장히 놀랐습니다." 라우라는 예의 경멸하는 듯한 얼굴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번쩍이는 시계줄 부터 가짜가 분명해 보이는 커다란 진주 넥타이핀과 기름을 지나치게 발라 흘러 내릴 것처럼 보이는 머리까지,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앞에서 조는 마치 고문을 당하는 느낌이었다. 자신의 차림이 그렇게 우하고 너절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녀가 시선을 돌리자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다 시 불빛을 바라보았다. "사장님은 곧 내려오실 거예요." 아무 느낌이 없는 음성이었다. 그는 또 한번 계산이 빗나가 버린 허탈감에 잠 시 멍해졌다. 이 여자 앞에서는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지 방향조차 잡을 도리가 없었다. 겁을 집어먹은 그는 완전히 위축되어버렸다. 그녀는 진짜 숙녀였다. 고 상하고 우아했다. 그전에 제니가 숙녀랍시고 하던 행동들은 여기에 비하면 너무 나 유치하고 너절한 것들이었다. 그녀는 필요 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지나친 인 사도 하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노력을 해서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그 녀의 안에서 풍겨나오는 품위였다. 위미도 고상하고 옷이나 장신구에 대한 안목도 보통이 아니었다. 또한 어떤 것에 대해서도 초연하고 냉담하기까지 했다. 조에게는 이 차가움이 더할 수 없 는 매력으로 느껴졌다. 그 싸늘한 눈초리가 자기에게 돌려질 때 마음은 어쩔 수 없이 떨려오고,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되었다. 오만하고 까다 로웠다. 그러면서도 절대로 자기 고집을 내세우는 일이 없는 듯 했다. 자기 마음 에 들지 않는 것이면 간단히 손을 때버리고 경멸하는 듯 무관심한 얼굴로 돌아 서 버렸다. 초연한 자세로 내려다보며 비웃었다. 결코 패배나 좌절이 아니었다. 밖으로는 절대로 관습을 어긴다거나 생활 범주를 벗어나는 일 없는 조용한 성품 으로 보였지만, 내면에서는 판에 박힌 인생살이나 관습간은 것은 철저히 배격해 버리는 야성이 숨어 있는 강렬함도 느끼게 했다. 모든 사람들 무시하고 경멸하 고 있는 그녀는 자기 자신까지도 멸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스탠리가 들어왔다. 유쾌한 얼굴이었다. 조와 악수를 하고는 흉허물 없는 옛 친구라도 만난 듯 등을 정답게 두드렸다. 너무 굳어버려 멍청해진 조의 긴장감 을 풀어주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당신이 우리 집에 오니 모두 즐거워 보이는군, 가울런. 와주어서 정말 고맙소. 자, 마음을 풀어요. 서로 잘 아는 사이니 새삼 체면이다 뭐다 생각하지 말고 즐 겁게 지냅시다." 그는 벽난로를 등뒤로 하고 깔개 위에 두 다리를 벌리고 선 채 큰 소리로 말 했다. "그런데 라우라, 우리에게 마실 것 좀 갖다주지 않겠소? 럼주든 무엇이든 적당 한 걸로 말이오." 그들은 나란히 서서 드라이 마티니를 마셨다. 라우라는 한 잔만 마셨고, 조가 두 잔을 마시는 동안 스탠리는 세번째의 술잔을 비우면서 변명처럼 말했다. "난 요즘 술이 너무 과해졌어. 피로하니까 자꾸 마시게 되는데 사실 더 해롭 지." 그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술잔을 놓았다. "역시 운동을 해야겠어. 충분히 운동을 해서 어서 옛모습을 찾고 싶군. 아하! 세인트 비드 학창 시절처럼 몸을 단련시켜야지." 그는 힘차게 팔꿈치를 오무렸다 폈다 했다. 기운을 내기 위해서라고 말하며 결국 한 잔을 더해 기분이 좋을 정도로 술이 오른 스탠리는 저녁을 들기 위해 앞장서서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탁은 깔끔했다. 번쩍거리거나 유난스러운 것은 없었다. 그러면서도 있을 것 은 다 있었다. 식탁에 앉으면서 스탠리는 자기 건강 이야기를 다시 화제로 삼았 다. 냅킨을 펴면서 차게 요리한 닭을 보아도 별 식욕이 나질 않는 모양이었다. "건강이란 참 묘해. 이렇게 쉽사리 나빠지다니... 생각도 못 했거든. 책상 앞에 앉아서 돈을 버는 재미도 좋지만 그것도 다 건강하고 난 뒤의 이야기지, 다 소 용이 없어. 건강이 최고의 재산이야. 셰익스피어가 한 말이었지?" "애머슨이 아니었던가요?" 라우라는 차분한 음성으로 말하며 시선은 조를 향했다. 그러나 조는 대답대신 시선을 내리 깔았다. 독서라는 것을 해본 일이 없는 그로서는 끼어들 계제가 아 니라는 걸 느꼈다. 무득 하숙집에 있는 서가라는 것을 생각해ㅆ. 형편이 없는 프 랑스 설화집 한권이 있고, 제발 읽어보란 듯이 장식용 과일 유리상자 앞에 꽃인 콜러 부인의 셩경책이 한 귄 있을 뿐이었다. 조는 일요일 오후 신앙심이 다소 느껴질 때면 이 성경책을 몇 구절 읽을 때도 있었으나 모두 거짓말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난 군대에 입대하고 싶을 정도야." 스탠리의 불평이 계속되고 있었다. 머리가 둔한 사람에게서 잘 볼 수 있는 것 으로 그는 한 가지 일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좀처럼 빠져나오질 못했다.; "군대야말로 진짜로 몸을 단련할 수 있는 곳이지."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스탠리는 두루마리 빵을 잘게 잘랐다. 스탠리의 불평은 대머리가 벗겨지고 기력이 쇠퇴함을 은근히 느끼게 되는 중년 사나이가 흔히 갖 게 되는 불안감의 표출이었다. 특히 스탠리는 자신의 삶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 하고 불평을 터뜨리는 습관이 생겼는데 정도가 좀 심했다. 6개월 전에 그는 회 사가 문을 닫느냐 하는 문제 앞에서 전전긍긍하며,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까 하는 것에만 몰두하여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 문제가 풀리자 그는 또 새로운 문제를 들고 나와 여전히 불평을 해댔다. 스탠리는 자기 이야기를 혼자만 떠들어댔다. 라우라는 으례 그렇다는 듯 화제 를 돌리거나 끼어들 생각도 하지 않았다. 조는 다시 자신감이 서긴 했지만 스탠 리의 충동적인 다변 앞에서는 신중하게 동조하는 표현 외에는 입을 벌릴 수가 없었다. 지루했다. 특히 해본 일도 없는 브리지 놀이나 골프 이야기를 늘어놓으 면서 자세하게 그 게임 운영을 설명할 때는 좀 괴로울 정도였다. 조는 우연히 시선을 돌리다가 자기를 바라보는 라우라의 시선과 부딪쳤으나 역시 실망을 느 껴야 했다. 아무런 그림자도 느낄 수 없는 라우라의 메마른 눈빛 때문이었다. 조 가 또 하나 궁금해지는 것은 그녀가 스탠리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을까 하 는 것이었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이제 7년이 되었는데도 아이가 없었다. 그러나 라우라는 스탠리에게 다정했고, 그에게 늘 관심을 기울이고, 오늘 저녁 같은 이 주루한 대화도 이렇게 잘 견뎌내고 있다. 과연 그것이 진짜일까? 그녀는 아깝고 초연한 태도 속에 모든 걸 집어넣은 채 실제로 남앞에 자기를 조금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감정의 기복이 전혀 없는 냉정한 여성일까? 아니면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스탠리도 그녀의 매력에 완전히 사로잡혀 버렸었다. 결혼 당시 에는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그것은 라우라가 아니라 스탠리가 그만큼 나이 먹은 사업가로서 변모했다는 의미였다. 식사 후 후식이 끝나자 라우라는 식탁에서 일어나 나가버렸다. 조는 어색했지 만 얼른 일어나 그녀에게 문을 열어주는 친절을 베풀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스탠리는 담배를 집어 불을 붙이면서 조 앞으로 담배통을 밀었다. "담배 좀 피워보게. 흔치 않은 담배라네." 조는 황송스러운 얼굴로 담배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속으로 스탠 리의 안하무인격인 오만스러움에 이를 갈고 있었다. '이 거만한 새끼, 조금만 더 기다려라. 본때를 보여줄 때가 있을 테니까...' 그는 띠를 떼지도 않은채 궐련에 불을 붙였다. 좀 긴 침묵이 흐르는 동안 스탠리는 두다리를 쭉 뻗고 앉은 편안한 자세로 담 배를 피우며 조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가울런."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이 마음에 들었소." 조는 정중하게 앉아서 도대체 다음엔 무슨 말이 나올까 하고 이만저만 궁금한 것이 아니었지만 꾹 참고 기다렸다. "난 좀 남과는 다른 사람이오." 스탠리는 아주 다정한 태도로 자기의 흉금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식사전 에 칵테일에다가 독한 백포도주를 섞어 마셨기 때문에 쉽사리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기분이 되었다. "그러니까 사람만 분명하면 난 그가 어디출신이든, 무엇을 하던 사람이든 그런 건 전혀 상관을 않는 사람이오. 공작의 아들이든 청소부의 자식이든 관계가 없 는... 그러니까 사람이 정직하고 성실하다면 내겐 다 똑같다 이 말씀이지. 내 말 알아듣겠소?" "물론입니다. 너무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사장님." "그래서, 조." 밀링튼은 몸을 앞으로 내밀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알고 있다니 더 이야기를 계속하겠소. 난 지난 두어달 동안 당신을 상당히 세밀하게 관찰해왔고, 또 아주 만족하고 있소." 그는 잠시 말을 끊고 담배를 물었다가 다시 조를 자세히 훑어보았다. 다시 천 천히 입을 열었다. "클레그는 이제 끝장이야. 그래서 내겐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 클래그 대신 일 을 해줄 사람... 가울런, 당신, 새 공장에 지배인을 해볼 생각이 없소?" 조는 먼저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잘못 들은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았을 때는 기절을 할 지경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지배인이라구요..." 그는 작은 소리로 중얼댔다. "지배인이지. 그러니까 당신은 클래그가 하던 일을 맞는거요. 어때, 해보겠소?" 조는 정신을 차리 수가 없었다. 방 안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그는 무엇인지 있을 거라고 기대는 했지만 이건 너무 엄청난 것이었다. 아아, 이런 것이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을 못 했다. 그는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담배를 그만 접시위에 떨어뜨렸다. "그러나 사장님!" 그는 숨이 막혀 겨우 쥐어짜듯이 말했다. "그렇지만 사장님..." "아 괜찮아, 조. 너무 떨지 말고... 한번 해봐요. 너무 놀라게 했다면 미안하군. 하지만 지금은 전쟁 중이오 이런 때에는 뜻밖의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거지. 당 신은 곧 요령이 생길 거요.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리라고 믿소." 기쁨의 큰 물결이 조를 감쌌다. 클레그의 후임으로 자기가... 밀링튼 공장의 지 배인이다! "난 자네를 믿네. 나를 뒷받침해서 밀어주게. 모든 것을 자네에게 맡기네." 스탠리의 음성은 은근했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임을 조도 느꼈다. 바로 그때 응접실에서 전화가 울렸다. 조가 심각한 얼굴로 거창한 대답을 하 려는데 라우라가 들어왔다. "여보, 당신께 걸려온 전화예요. 젠킨즈 소령이에요." 스탠리는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갔다. 침묵이 흘렀다. 조는 돌아다보지 않았으나 라우라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 길이 자기 등뒤로 쏟아지고 있다는 것도 느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그의 가슴 은 또 쿵쿵거리고 뛰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 육체의 젊음과 활기를 가슴 뿌듯하 게 느꼈다. 그는 눈을 들어 너무나 가까이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시선을 피하면서 짤막하게 말했다. "가시기전에 응접실에서 커피를 드세요."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의 숨소리가 방 안에 가득 차는 것 같았다. 그 사이를 비집듯이 전화를 받는 스탠리의 커다란 목소리 가 울려왔다. 8 해산이 가까워오자 제니도 퍽 얌전해졌다. 아니 얌전해진 것은 그 전부터였다. 그러니까 데이빗에게 아기를 가졌다고 말했던 그 화요일 오후 이래 제니는 아주 많이 변했다. 물론 사소한 말다툼 같은 것은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것은 누구라 도 피할 수 없는 부득이한 경우였다. 어쨌든 그녀는 얌전하게 살았다. 단지 변덕 이 좀 심해져 가끔 엉뚱한 때에 갑자기 이상한 것이 먹고 싶어 못 견뎌하곤 했 다. 맛있는 것도 더욱 밝혔다. 매일 먹는 딱딱한 빵은 보기도 싫어하는 대신 생 강과자라든가 절인양파나 절인 청어를 얹은 토스트 같은 것을 미칠정도로 먹고 싶어했다. 친정 어머니 애더가 늘 주책없이 먹어대던 것을 보아온 제니는 이런 요구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 부끄럽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앞으로 태어날 귀여운 여자 이이에게 입힐 예쁜 옷을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자기는 여자 아이를 낳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모두 여 자 아이 옷만 만들었다. 그녀는 전부터 귀여운 계집아이에게 예쁜 옷을 입혀 기 르는 것이 꿈이었다. 사내아이는 아주 질색이었다. 왜 그런지 싫었다. 그녀는 밤 마다 데이빗과 난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서는 아기옷을 만들었다. 부지런히 육아 잡지를 들춰보며 옷본을 뜨고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는 마치 꿈을 꾸듯 앞으로 태어날 아기의 장래를 계획해 보았다. 여 배우를 만들까, 그것도 아주 유명한 여배우로. 아니면 성악가로 키운 게 훨씬 더 좋겠다. 그랜드 오페라에서 프리마돈나가 될 성악가로, 아기의 엄마가 재능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 재능이 아기 속에서 피어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 아이는 자라서 커빈트 가든 같은 곳에서 거듭 성공에 성공을 거두어 상류 사회에 발을 들여놓게 될 것 이고, 높은 지위의 남성들과 만나 꽃다발에 둘러싸이게 될 것이다. 제니 자신은 관람석에서 부드러운 눈길로 그 광경을 바라보며 흐뭇해 할 것이다. 딸의 성공 은 곧 자기 자신의 성공도 될 테니까. 가만히 생각해볼 때 자기도 기회만 있었 더라면 그렇게 성공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는 경우에는 유혹, 그것도 굉장한 유혹이 있으리라는 것을 생각해야 하리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는 공상의 방향을 바꾸었다. 이번에는 어 떤 수녀원이었다. 영국교회의 수녀원. 그 수녀원 안에 살고 있는 수녀. 가슴에 슬픔을 감춘 채 화려한 무대와 속세를 버린 얼굴빛이 창백하고 기도생활에만 충 실한 그러한 수녀를 상상했다. 그 수녀는 수녀원의 기다란 복도를 지나 어두컴 컴한 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미사가 시작되어 풍금이 울리면 그녀는 슬프고도 청순한 음성으로 노래한다. 제니는 이 환상이 너무도 달콤하고 절실해서 정말 눈물이 솟아나왔다. 그러나 이 슬프고 가련한 환상은 더욱 비극적인 비약을 했 다. 결국 귀여운 여자 아이는 태어나지 못한다. 프리마돈나도 수녀도 되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금세 자기 자신이 죽고 말 것 같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사실 자기가 아기를 낳을 만한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어이없는 일 같았다. 그 녀에게는 언제나 젊어서 죽을 것 같은 예감이 있었다. 슬래터리 상점의 모자부 에 근무하던 릴리블레즈를 기억해냈다. 그 소녀는 점을 잘 쳤다. 어느 날 제니는 자기가 데이빗의 품에 안겨 죽어가는 모습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데이빗이 슬픔 과 고뇌로 일그러진 얼굴을 하며 자기를 남겨두고 죽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모 습이 보였다. 침대 옆에는 백장미가 꽃힌 커다란 꽃병이 있고 항상 냉정한 의사 도 아주 침통한 얼굴로 뒤편에 서 있다. 제니는 정말로 울고 있었다. 눈물이 뺨으로 흘러내렸다. 고개를 들어 흘깃 바 라보던 데이빗이 놀란 눈으로 말했다. "아니, 제니. 왜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우며 고개를 흔들었다. "행복해서 그래요. 난 정말로 행복해요." 어느 날 제니는 고양이를 기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양이가 소리없이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가 다뜻한 햇볕 아래 소파 구석 같은 곳에서 잠들어 있는 모습 은 집안을 더욱 포근하게 꾸며줄 것 같아서였다. 그녀는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붙들고 고양이 새끼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육점 아들 해 리가 조그마한 고양이 새끼 한마리를 가져다 주었다. 그녀는 아주 기뻤다. 그런 데 머치슨 아주머니가 한 마리를 더 갖다주더니 다음날에 웹트 부인도 또 한마 리를 갖고 왔다. 제니는 벌써 고양이에 질려버렸지만 자기가 그처럼 간절히 부 탁한 것이므로 사양할 수도 없었다. 다른 사람이 또 갖고 올까봐 두려워했는데 다행이 더 나타나진 않았다. 다음부터는 부탁할 때 좀더 조심해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고양이 새끼란 좀 귀찮은 동물이었다. 세마리 씩이나 되니 집 안을 여간 더럽히는 것이 아니었다. 할 수 없이 두마리는 물에 던져버려야 했다. 마음이 언짢았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제일 예쁘고 귀여운 것 한 마리만 남겨 두고 이름을 붙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며칠 동안이나 애를 쓰다가 '프리티(예쁜 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음악공부도 다시 시작했다. 온종일 피아노 앞에 앉아 발성연습을 하고 는 자장가를 두 곡 배웠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의 예술적 재능을 좀더 닦고 싶 었다. 지금의 상태로는 몹시 불만스러웠다. 데이빗의 아내로서도 부족하므로 좀 더 재능을 걸고 닦아 지적인 인간이 되어야겠다는 욕심이 하루하루 커졌다. 그 녀는 데이빗과 동등한 입장에서 그가 관심을 갖고 있는 이야기를 막힘없이 나누 고 싶었다. 사회, 정치, 경제 등 그런 문제에 대해서 훤히 알아 토론다운 토론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데이빗의 책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지겨움을 참으 면서 좀 읽어나갔지만 그녀는 금방 자기가 아무리 책을 보아도 사상이나 지적 수준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독서는 그만두기로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머리가 그만큼 지혜롭지 못하지만 착한 사람은 될 수 있 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아, 그렇다. 그녀는 착한 사람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녀는 '행복한 가정에서의 명랑한 반시간' 이라는 제목의 책을 샀다. 그러고는 어 린이처럼 작게 소리를 내면서 그 책을 읽어나갔다. 어느 날 밤, 그 책을 읽고 있던 제니는 갑자기 읽기를 멈추고 눈물을 글썽이 며 데이빗을 간절히 바라보았다. "난 참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그렇지만 정말 나쁜 사람은 아녜요. 여보, 이 책 에 보면 사람은 모두 실수를 하지만 다시 그것을 고칠 수 있다고 하는군요. 나 나쁜사람 아니죠? 여보, 정말 나쁜사람 아니죠?" 참을성이 많은 데이빗은 그녀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몇 번이고 확인해 주었다. 그녀는 안도감이 도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큰소리로 말 하기 시작했다. "여보, 당신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분이에요. 이 세상에서 당신처럼 착한 사람은 다시는 없을 거예요." 제니는 꼭 어린아이 같았다. 특히 요즘 와서 더욱 어린이가 된 듯했다. 그런 사람이 아기를 낳으려 한다니 좀 우스운 일이었다. 그러나 데이빗은 그렇수록 그녀에게 부드럽게 대해주었다. 밤에 자다가도 그녀는 가끔 공연히 놀라고 겁을 내면서 그에게 매달렸다. 그녀의 불룩한 배와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생명을 느낄 때 그에겐 더욱 깊은 애정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는 한밤중에도 자꾸 무 언가 걱정하며 훌쩍대는 제니를 더욱 부드럽게 달래주었다. 조금도 귀찮거나 화 가 나지 않았다. 그는 제니에게 해산할 때는 자기 어머니 마사를 부르자고 했다. 집안일도 부 탁하고 간호도 해달라고 할 셈이었다. 유순해진 제니는 순순히 그의 말을 받아 들였다. 그러나 막상 일을 의논하러 마사가 왔을 때 데이빗은 이 두 여자의 화 해는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마사는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데이빗을 거리에서 만났을 때 화가 나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나로선 더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구나." 그녀의 음성은 아직도 분노로 떨고 있었다. "전혀 소용이 없는 일이야. 내가 하는건 다 언짢은 모양이더라. 그 애하고 만 나지 않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다. 난 그 애를 보기만 해도 화가 난다. 그애도 그런 모양이더라. 그러니 일은 다 끝난거지." 그녀는 데이빗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걸어가 버렸다. 친정어머니 애더가 선리가 타인캐슬에서 오도록 주선을 했다. 애더가 온 날은 비바람이 심하던 12월 2일 이었다. 데이빗이 정거장까지 나갔다. 그녀는 노란 옷 가방을 끈으로 단단히 묶어 들고 무거운 걸음으로 기차에서 내렸다. 애더의 기 분은 별로 좋아보이지 않았다. 데이빗도 마중도 별로 반가워하지 않으며 이곳에 온 것이 별로 기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말도 많이 하지 않았다. 냉담한 태 도는 집안 살림이 아직도 부족한 것이 많은 것을 보자 더 심해졌다. 그녀는 도 착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침대용 변기를 사오라고 데이빗을 내보냈다. 그녀의 수선스러움이나 떠들석함은 보통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가지 고 떠들어대고 불평을 했다. 제멋대로 게으르게 살던 편안한 자기 생활에서 끌 려나온 것이, 흔들의자에 앉아서 할일 없이 세월을 보내던 그 행복이 잠시 동안 이나마 깨어진 것이 그녀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녀에게는 움직이 는 것이 맞지 않는 듯 했다. 더구나 뚱뚱한 그녀로서는 움직인다는 그 자체가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제니에게는 정성을 쏟았다. 빠짐없이 준비를 다 해주려 고 서둘렀다. 그리고 "걱정마라, 얘야. 엄마가 옆에 있으니까 아무 걱정없다." 라 는 말을 수 없이 중얼거렸다. 그말 외에도 애더의 입은 항상 말을 하느라고 바빴다. 그녀는 어떤 작은 소식 하나 빠뜨리지 않고 제니에게 다 이야기 해주었다. 샐리는 또 갑작스럽게 쇼단 이 해체되었기 때문에 직장을 잃어 다시 일자리를 찾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샐리는 일자리를 찾는 데만 정신이 빠졌어. 집안일은 돌보지도 않고 아예 없 는 아이나 마찬가지지." 애더는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이군인 위문대가 편성된다고 해서 오라는 청탁은 있지만 그 자리는 돈 한 푼 받지 못하는 무료 봉사라는 것이다. 샐리는 무대에 서는 것으로 먹고 살 만한 능력도 없는 아인데 왜 일찌감치 때려치우지 못하고 그것에만 전적으로 매달려 미친 사람 같은 야망을 버리지 못하는지 모르 겠다고 한탄을 했다. "전화 교환원 자리를 버린 것부터가 잘못이었지, 이젠 다 때가 지난걸." 애더는 도착한 다음날 그녀는 제니와 부엌에 있었다. 애더는 제니에게 차를 만들어주면서 갑자기 생각이 난 것처럼 말했다. "참, 조가 우리집에 왔던 얘기를 안 했구나." 소파에 앉아 있던 제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면서 창백하게 변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제니는 싸늘한 음성으로 자르듯 말했다. "난 조 가울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아요. 난 그 사람을 잊어버렸어요." 애더는 김이 새지 않도록 보온 주전자의 뚜껑을 주의해서 닫으며 제니는 흘깃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사람이 왔던 걸 어떡하니. 기막히게 멋쟁이가 되어서 왔더구나. 네 가 보기만 했으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게 멋쟁이가 됐더란 말이다. 두 번인가 세 번쯤 더 왔었지. 네가 그 사람을 놓쳤다고 해서 그 사람을 헐뜯을 필요는 없 잖니? 제니야, 그건 어디까지나 너의 실수였으니까 네가 그 괴로움을 당해야지 별수 없는 거야.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야. 내가 본 중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다. 위틀리에 군수공장이 새로 서게 되는데 그곳에 필리스와 클래리를 취직시켜주겠 데. 그 사람은 지금 밀링튼 공장에서 대단한 출세를 하고 있단다." "조 가울런 얘기는 이제 그만 두세요. 정말 듣고 싶지 않다니까요." 제니는 낯이 새파랗게 변해서 소리지르다시피 말을 했다. "난 그 인간의 이름만 들어도 구역질이 날 정도예요. 엄마가 제일 좋다는 사람 이지만 정말 진절머리가 나요." 그러나 애더는 태연스러웠다. 테이블 앞에 앉아 따뜻한 보온 주전자 위에 두 손을 얹은 후 제니가 미치는 것을 보고 싶기라고 한 것처럼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사람이 어느정도 성공했는지 넌 상상도 못 할게다 지금은 시시한 감독 정 도가 아니라는 거야. 막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더 미끈해지고 얼마나 멋 쟁이가 되었는지 정말 굉장하더라. 글쎄 밀링튼 사장님댁에 만찬 초대를 받을 정도가 되었단다. 힐톱의 그 저택 말이다. 그래도 넌 네가 잘했다고 생각하겠지? 난 처음부터 그 사람만 마음에 들더라. 그런 사위를 보았다면 나도 이 고생 안 하고 얼마나 좋았을까." 제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두 주먹을 꼭 쥔 채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치듯 말했다. "엄마, 제발 그런 소리 말아요. 조와 데이빗을 똑같은 사람인 것처럼 비교해서 말하는 것은 제발 그만두세요. 천하에 건달인 조를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을 하 다니! 데이빗은 정말 훌륭한 사람이에요. 그따위 인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사 람이에요." 그녀는 애더를 노려보았으나 애더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흥, 네가 아무리 그래봤자 사실은 사실인 걸 어떡하니. 넌 조와는 전연 상관 도 없는 것처럼 시치미를 떼지만 옛 일을 생각해 봐라. 네가 그럴 수 있나." 제니의 시선이 힘없이 밑으로 떨어졌다. 그러고는 진저리를 치듯 몸을 떨며 입을 다물었다. 바로 그때 문이 열리며 데이빗이 들어왔다. 항만 사무소에 임시 직원 일자리 를 얻어 다니고 있는 중인데 이제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애더는 얼른 미소를 띠우며 데이빗을 바라보았다. 뭔가 미안했던 모양이었다. 그때 제니가 괴 로운 신음소리를 내며 옆구리를 움켜잡았다. "엄마, 배가 아파요." 그녀는 겨우 중얼거렸다. 애더는 미심쩍은 눈초리를 던지며 머뭇거렸다.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아직 일 주일이나 남았어." "아닌가봐, 엄마. 때가 됐나봐요. 이렇게 아픈걸." 제니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몸을 뒤틀었다. "아니, 이상하구나." 애더의 표정이 애처로운 빛을 띠며 제니 곁으로 다가갔다. "불쌍한 것!" 그녀는 끌어안아 제니의 허리에 한 손을 얹었다. 손으로 제니의 배를 만져보 던 애더는 "정말이구나. 괜찮다, 괜찮아." 하고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 고 이 모든 것이 데이빗의 탓이라는 듯 부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어서 의사를 불러오게. 시간이 급하게 됐어. 속히 다녀와요." 데이빗은 아무 말도 못한 채 제니를 한번 쳐다보고는 급히 밖으로 나왔다. 스 코트 의사를 부르러 갔다. 스코트 의사는 야간 진찰도 하니까 쉽게 와줄 것이었 다. 스코트는 나이가 지긋한 의사였다. 얼굴빛이 붉고 광대뼈가 심하게 드러난 무뚝뚝한 사람이지만 허튼 소리를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같은 이야기를 하려면 심하게 기침을 하면서 자주 침을 내뱉어 상대방을 곤란하게 만드는 버릇이 있는 그가 조금도 의사다워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언제나 승마용 바지에 긴 체크 무늬의 웃옷을 입고 있는데 그 주머니 속에는 가히 만물상이라고 할 정도 로 온갖 물건이 다 들어 있었다. 파이프, 환약, 쓰다 남은 붕대, 건포도, 체온계, 소독 한번 않은 휴대용 랜싯, 구겨진 손수건과 그것을 꺼낼 때마다 방 저쪽까지 날아가는 고무로 된 요도관등. 그러나 이렇게 지저분하고 괴상망측한 버릇을 가 졌지만 그는 우수한 의사였다. 그는 제니가 심한 산통을 겪고 있다고 데이빗이 아무리 조급하게 말해도 별로 서두르는 빛이 없었다. 기침을 하고 침을 뱉고 나서는 고개만 끄덕였다. "한 시간 안으로 왕진을 가도록 하겠어." 그렇게 말한 다음 열려진 문 앞에 서서 대기실 쪽으로 소리를 질렀다. "다음분." 데이빗은 스코트가 당장 떠날 기색을 보이지 않자 당황했다. 그러나 그대로 오는 수밖에 없었다. 제니도 애더도 2층 침실로 올라간 모양으로 아래층은 비어 있었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면서 스코트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스코트는 7시쯤 도착했다. 그러나 제니의 진통이 더욱 심해가는 것 같은데도 의사는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할 일이 없노라고 고개를 흔들며 의자에 주저앉아 버렸다. 초산은 시간이 걸린다는 애기를 데이빗도 얻어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도 제니의 신음소리를 듣고 앉았자니 견딜 수 없어 얼마나 걸리겠냐고 의사에게 물 었다. 난로 불빛만 멍하니 쳐다보던 의사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별로 오래가지는 않을걸세. 한 12시까지 기다리면 될까. 나도 바쁜 몸이니 12 시쯤 다시 오겠네." 12시까지 기다려야 한다니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제니의 진통 간격은 좁아지고 정도가 심해져갔다. 그녀의 체력으로는 그 진통을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화를 내고 신경질을 부리다가는 지쳐서 폭삭 까무라지 곤 했다. 침실 한구석에는 장식이 달린 아기 침대가 있었다. 평소 그렇게 애를 쓰며 단장해두었던 침실이 지금은 발들여놓을 틈도 없어 엉망으로 되어 버렸다. 애더가 주전자 물을 엎어 바닥은 다 젖어버린 데다가 고양이 새끼 프리티가 침 대 밑에 숨어 있다가 소리를 지르며 튀어나오는 바람에 제니도 애더도 모두 놀 라 한동안 몹시 소란스러웠다. 제니는 완전히 수세미처럼 구겨진 모습으로 늘어 져 버렸다. 그녀가 상상했던 낭만적인 점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죽을 것 같은 고 통만이 계속될 뿐이었다. 스코트 의사는 12시 정각이 되자 와주었다. 그는 두 말도 않고 2층으로 올라 갔다. 스코트가 문을 여는 사이로 애더와 목이 찢어져라 하고 외치는 제니의 고 함소리가 울려나오고 문이 닫히자 작아졌다. 더욱 심한 비명이 울려오고 스코트 의 무거운 구둣발소리가 난 듯 하더니 그 다음 조용해졌다. 데이빗은 불도 다 꺼진 난로 앞에 여전히 웅크리고 앉은 채 위층에 온신경을 쏟다가 자기도 모르게 긴 숨을 내쉬었다. 제니가 고통스러워 고함을 지를 때마 다 자기도 똑같은 고통을 느꼈다. 그러나 이제 평온해지니 그에게도 안도감이 찾아왔다. 그는 고통을 느끼는 인간을 보면 자기도 똑같은 고통을 축소해놓은 것같이 느껴져 그를 더욱 괴롭게 했다. 그는 그녀를 생각해 보았다. 이 몇 년 동 안 그들 사이는 평탄치 못했다. 더구나 그녀의 비열함이나 변덕서러움, 지나친 허영심, 이유 없이 화를 내곤 하던 경박함 때문에 얼마나 많은 말다툼을 했고 마음을 상했던가? 그러나 지금은 그 모든 것이 다 아름답게 여겨졌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라는 경이로움은 그 모든 것을 다 덮어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 리고 더욱이 이 생명은 지금 도처에서 처참한 전쟁으로 죽어가는 숱한 죽음을 대신해서 새로이 태어난 귀하고도 귀한 생명인 것이었다. 그리고 결코 잊을 수 없는 탄광 속에서 보았던 죽음의 모습들이 지금 이 순간에 뚜렷이 떠오르고 있 었다. 생명은 바로 그 죽음도 대신하고 있었다. 그도 곧 프랑스 전선으로 떠나게 되어 있었다. 노덤블런드 푸질리어 연대 소속 위생대 의 담가병으로 전선에 가 있는 뉴전트로부터 편지가 왔다. 그도 타인캐슬에 있는 같은 사령부에서 입대하 기로 되어 있으므로 역시 푸질리어 연대 소속으로 출정하게 될 것이다. 뉴전트 의 부대 가까이에 가게 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2층 방에서 신음소리가 한 번 다 나는 듯하더니 그 다음엔 노랫소리, 그것도 제니의 목소리가 분명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잠시 놀랐지만 그것이 사용 시 노래가 나오게 하는 마취제의 영향 때문이라는 것을 금방 깨닫고는 다시 기 다렸다. 이번에는 상당히 긴 정적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 때문에 그 정적이 깨어졌다. 그것은 지금까지 전혀 들어보지 못한 가느다란 것으로, 제 니도 애더도 그렇다고 의사의 소리도 아닌 아주 새로운 소리였다. 데이빗은 더 욱 긴장하며 귀를 기울였다. 아! 다시 들려왔다. 가느다란 피리소리를 닮은 그것 은 울음소리가 분명했다. 그 가늘면서도 힘찬 을음소리는 데이빗의 심장을 꿰뚫 었다. 혼돈 속에서 비쳐나온 새로운 여명과 같은 강렬한 빛을 보는 듯하다.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고개를 치켜든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러고 나서 반시간 후 스코트가 계단을 내려와 부엌으로 들어왔다. 그의 얼 굴에는 피로에 지친 퉁명스러운 빛이 보였지만 그것은 해산을 거들고 나서 흔히 과로와 허탈을 느끼는 의사들의 표정일 뿐이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아기를 볼 수 있었다. 코코아와 빵으로 아침식사를 간단히 하고 있느데 애더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아기를 안고 내려왔다. 아기는 막 목욕 을 끝내고 분가루를 뒤집어쓴 채 제니가 만든 거창한 레이스옷으로 폭 싸여져 있었다. 그러나 정작 아기는 매우 흉하고 볼품이 없었다. 검은 머리털에 눈과 코 는 몹시 작고 납작했다. 얼굴빛도 아주 창백해서 건강히지 못하다는걸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데이빗은 이 작고 보잘것없는 생명체에 이상스러울 정도로 깊은 애정을 느꼈다. 그는 코코아 잔을 내려놓고 아기를 무릎에 받아 안았다. 아 기는 너무 가벼워서 안은 것 같지도 않았지만 그 보드라운 감촉은 기분 좋은 것 이었다. "이제 그만 그만-." 애더는 아기를 뺏듯이 안아 올리며 가볍게 흔들었다. "네 아빠는 아직 너를 안을 줄도 모른단다." 그녀는 어떤 남자든지 아기를 안으면 아기에게 나쁜 일이 생긴다는 미신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데이빗의 무릎 위에서는 기분 좋게 잇던 아기가 애 더의 팔에 안기자 갑자기 울어대기 시작했다. 방을 나가도 여간해서는 그치지 않았다. 데이빗은 사무소에 나가서도 아기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 작고 못생긴 아기가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아기가 허약하다는 것은 숨길 수 없었다. 제니도 인정했지만 남 앞에서는 그 런 것을 부드럽게 넘기려고 애를 썼다. "가엾게도 이 아이는 좀 약하답니다. 의사 선생님도 세심하게 키우라고 말씀하 셨어요." 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애정이 넘치는 시선으로 아기를 바라보곤 했다. 스코트 의사는 아기의 살갗에 발라줄 연고와 먹일 가루약을 처방해주었다. 그 리고 꼭 모유를 먹여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제니는 잔소리를 하면서도 젖을 물렸다. 당시엔 고문을 당하는 것처럼 느껴져 평생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해산 의 기억이 희미해져 감에 따라 원기를 회복한 그녀는 아기의 이름을 데이빗이라 부르고 싶어했다. 데이빗에게도 아기가 아버지 이름을 이어받을 수 있게 해달라 고 은근히 졸랐다. 그러나 데이빗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로버트라는 이름을 생 각하고 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아들에게서 느끼고 싶은 마음이 었다. 제니는 데이빗 외에도 여러 가지 그럴듯한 이름들을 대었지만 결국 데이빗의 주장에 얌 전히 양보했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데이빗을 기쁘게 해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아기의 이름은 로버트로 결정되었다. 3주일이 지나갔다. 애더도 다시 타인캐슬로 돌아갔고 제니는 응접실까지 내려 와 소파에 앉아 쉴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로버트를 기르는 것은 역시 힘들어했다. 체력도 회복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도 어려움 은 더해갔다. 낭만적으로 상상해보았던 것과 현실은 아주 달랐다. 귀여운 아기는 매력적인 존재이기보다는 귀찮은 방해꾼이라는 것을 하루하루 더욱 심하게 느껴 야 했다. 그래서 제니는 피곤을 느낄 때면 로버트에게 약을 먹이고 목욕시키는 일을 데이빗에게 맡겼다. 데이빗은 그런 일을 기쁘게 했다. 그런데 제니는 데이 빗이 아기에게 관심을 쏟는 것이 이상하게도 화가났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예요? 로버트예요, 저예요?" 어떤날 밤은 이렇게 소리지르기도 했다. "이상한 걸 다 묻는군." 데이빗은 무심히 웃어 넘겼지만 제니는 그렇질 못했다.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는 온통 비누투성이를 해가지고 대야 물 속에서 로버트를 씻기는 데이빗 의 열성스러운 모습을 볼 때마다 그녀의 마음은 불만으로 가득 찼다. 정월달이 가까워짐에 따라 제니의 불만은 조금씩 더해갔다. 안정을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 는 일이 더 많아졌다. 데이빗이 어서 군데에 가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 또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공연히 걱정이 되고 불안스러워져서 쩔쩔 매기도 했다. 제니도 자신의 이런 상태가 걱정스러워 싸구려 소설이라도 읽으며 마음에 안정을 찾으려고 했다. 그녀는 어느 사이에 음악도 완전히 잊고 있었다. 피아노에 손을 대본 지도 오래되었고 자장가 한번 부르는 일이 없었다. 가끔 정 신 빠진 사람처럼 거울을 들여다보며 앉아 ㅇ는 일도 있었다. 얼굴과 몸이 망가 지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 모든 불만과 불안의 이유가 자 기에게는 친구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자기는 소외된 아름다운 인생을 그저 그렇게 보내고 있는 느낌이었다. 모든 것을 다 놓쳐버리고 있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것은 미칠 것처럼 안타까운 일이었다. 계속되는 나쁜 날 씨는 더욱 그녀를 답답하게 했다. 나들이 같은 것은 얼마든지 갈 수 있도록 몸 은 회복되었다. 그러나 비 오는 속을 돌아다닐 수도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로버 트에게 4시간마다 젖을 주어야 하므로 외출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러다 마침 비도 그치고 날씨도 좋아졌다. 제니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자 신을 느꼈다. 기분 전환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벌써 몇 년 동안 이렇게 꼼짝도 못 하고 살아온 느낌이 들었다. 타인캐슬에 가서 엄마라도 만나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2층으로 뛰어 올라가서 오래간 만에 나들이옷을 입고 내려왔다. 그때가 4시였다. 로버트에게 젖을 흠뻑 먹여 침 대에 눕혀놓자 곧 잠이 들었다. 8시까지 돌아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8 시까지 돌아오겠노라고 몇 자 적어놓고 나서 제니는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 다. 데이빗은 집으로 돌아와 제니의 편지를 보았다. 우선 외출을 할 수 있도록 제 니가 건강해진 것이 기뻤다. 그리고 로버트와 단둘이만 집에 있다는 것에 묘한 기쁨을 느꼈다. 로버트는 부엌 구석에 놓인 침대에서 잘 자고 있었다. 데이빗은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구두를 벗고 맨발로 집 안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즐거운 기분으로 차 를 만들어 마시고는 책을 들고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니체의 '선과 악의 피안' 이라는 책이었다. 요즘 그는 니체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은 니체보다 로버트 쪽에 더 관심이 있어 로버트쪽을 자주 바라다보았다. 7시 반이 되자 로버트가 잠에서 깼다. 젖이 먹고 싶은 시간이었으나 순한아기 는 반듯하게 누워 침대 장식을 바라보며 조용히 있어주었다. 반시간 동안이나 로버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엄지손가락을 빨아대며 잘 누워 있었다. 그러다 가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조용했던 만큼 울음소리가 더욱 거셌다. 데이 빗은 아기를 침대에서 일으켜 안아주었다. 잠시 울음을 그쳤다. 그러나 다시 울 기 시작했다. 시계는 8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제니가 기차를 놓쳤음에 틀림없 었다. 다음 기차는 10시가 되어야 도착된다! 데이빗은 당황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수단을 다해서 로버트가 울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흠뻑 젖어 있는 기저귀를 새것으로 갈아주었다. 그러자 로버트는 조금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데이빗이 안아 올리자 그의 머리를 움켜잡으며 달라붙었다. 그가 웃자 따라 웃기까지 했다. 바닥에 눕혀주니 사지를 버둥거리며 좋아했다. 아기는 이 몇 주일 동안 몰라볼 만큼 건강해졌다. 뺨에 살이 오르고 배꼽이 아프던 것 도 가라앉았고 코를 킹킹거리던 버릇도 없어졌다. 그러나 10시가 가까워지자 이 제는 기를 쓰고 울어대기 시작했다. 데이빗은 제니가 이렇게 늦는 것이 점점 화가 났다. 그러나 꾹 참고 별짓을 다하며 로버트를 달래고 있는데 그때 제니가 돌아왔다. 그녀는 굉장히 기분이 좋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클래리와 함께 영화 구경을 하고 포도주까지 한잔 하 고 오는 길이었다. 그녀는 홍조가 떠오른 얼굴로 문 앞에 서서 두사람을 내려다 보다가 참을 수 없다는 듯 큰 소리로 웃어댔다. 데이빗은 입술을 꽉 물었다. "뭐가 그렇게 우스워?" 그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날카로웠다 "미안해요, 정말. 그런데 참을 수가 없는걸요. 당신의 그런 모습을 보니 어떤 생각이 떠올라서 그래요."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아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저 농담을 했을 뿐이에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는 로버트를 안았다. "로버트가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 젖을 줄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생각이나 했어?" 화가 풀리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녀는 약간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아, 그렇군요. 우리 도련님 젖줄 시간이 지나버렸죠. 자, 잡수세요, 도련님. 엄 마도 그 시간을 잊지 않았다는 걸 우리 아가는 알지?" 그녀는 로버트를 안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포도주 두 잔에 그녀는 그렇 게 기분이 좋아진 것이었다. 데이빗은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아무 상관 없이 블라우스 앞을 헤치고 아기에게 젖을 물렸다. 로버트는 젖을 움켜쥐 고 힘차게 빨아들였다. 여전히 기분이 좋은 제니는 로버트를 내려다보며 몸을 흔들어댔다. 데이빗은 얼굴을 돌려버렸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비위가 상했다. 그는 난롯불 을 휘젓는 척하고 있다가 그녀 쪽으로 돌아섰다. "똑똑히 기억해둬." 그는 낮은 음성으로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며 천천히 말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 또 로버트를 혼자 내버려두고 나가는 일이 있어 선 안돼. 내가 없는 동안이라도 제발 부탁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으리라는 걸 당신도 아시면서." 그는 그 다음날 타인캐슬로 갔다. 그곳에서 곧 캐터릭 야영지로 이송되어 3개 월이 지난 4월 5일, 노덤블런드 푸질리어 연대 제5대대 소속 야전병원으로 배속 되어 프랑스로 떠났다. 9 1925년 9월의 둘째 일요일에 법산저택의 자갈이 차도 위로 헤티의 차가 신나 게 미끄러져 들어왔다. 아서는 두 손을 주머니에 찌른 채 식당 창가에 서서 차 에서 내리는 헤티를 바라보았다. 헤티는 카키색 군복을 입고 있었다. 현관으로 활발하게 걸어 들어오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아서는 오늘 헤티가 집으로 찾아온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캐리 고모와 그의 어머니도 이야기했고, 토요일의 점심식사 때 배러스까지 여느 때와 달리 의미 있는 미소를 띠며 아서에게 해티의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해티가 내일 우리 집에 차마시러 온다는 전갈을 해왔다. 특별히 하루 휴가를 얻었단다." 아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모두 다 자기를 바보 취급을 하는 것일까? 그런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의 '특별히'라는 말 속에는 기분 나쁜 조롱이 숨어 있는 게 분명했다. 최근 8개월 동안 헤티는 자주 법산저택에 드나들었다. 최초로 여성 의료대에 참가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인 해티는 지금 타인캐슬 본부인 w.v.r에서 중요 한 위원직을 맡고 있었다. 이 위원회는 비러스와도 관계가 있었으므로 헤티는 다분히 공적인 임무를 띠고 자주 오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 방문은 공식적인 것 이 아님을 아서도 잘 알고 있었다. 헤티는 근무를 떠나 오늘은 즐겁게 쉬기 위 하여 찾아온 것이었다. 식구들이 모두 그 사실을 자기에게 떠들어대는 것에 분 노를 느끼고 있는 그는 해티를 크게 비웃어주고 싶을 뿐이었다. 방으로 들어오던 그녀는 창가에 서 있는 그를 보자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 다. "어머,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녀의 음성은 기쁨으로 떨리기까지 했지만 아서는 미소를 보여주지 않았다. "음, 기다리고 있었지." 담담한 음성에 헤티는 좀 머쓱했지만 곧 차분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분들은 어디 계세요?" "어디론가 가버린 모양이야. 우리 두사람만 있도록 일부러 자리를 피한 게지." 그녀는 아서가 퉁명스러울수록 재미있다는 듯 깔깔거렸다. "마치 우리 둘만 남은 걸 화내고 있는 것 같네. 그렇지만 아닐 거야. 난 자기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거든. 그렇지, 아서? 자, 뭘 할까. 오늘은 오랜만에 갖는 즐거운 휴일이야. 좀 멋지게 지내고 싶어. 우리 뭘 할까? 산보하겠어?" 그는 얼굴을 붉히며 빤히 들여다보는 그녀의 눈길을 피했다. 그러나 곧 대답 했다. "좋아, 산보를 나가지." 그는 모자와 외투를 손에 들고 나왔다. 두 사람은 언제나 걷던 길을 따라 걷 기 시작했다. 오래간만이었다. 이 몇 개월 동안 두 사람은 이 길을 걸어볼 기회 를 갖지 못했다. 슬루이스 계곡을 따라가는 이 좁은 길은 가을을 맞아 온통 단 풍으로 물들어 여간 아름답지 않았다. 누렇게 시든 양치류들이 버석버석 소리를 내며 발에 밟히는 것도 기분이 좋았다. 그들은 말없이 걸었다. 그리고 그 계곡 끝까지 와서는 땅이 내려앉는 바람에 드러난 떡갈나무 뿌리 위에 나란히 걸터 앉았다. 언제나 이곳에 오면 걸터앉는 낯익은 자리였다. 멀리 눈 아래로는 일요 일의 한가로운 정적이 쌓인 시내가 보였고, 바다가 그 앞쪽으로 쭉 뻗어 수평선 까지 잇닿아 있었다. 햇빛을 받아 물결이 번쩍거렸다. 넵튠 탄광의 높다란 반출 탑은 바다와 하늘은 배경으로 검은 괴물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아서는 마치 교 수대처럼 흉칙하게 보이는 반출탑을 조용히 노려보고 있었다. 해티도 몸을 부드럽게 아서에게 기대면서 반출탑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서, 왜 그런 눈으로 보지?" "모르겠어." 그는 냉소를 띠었다. "경영은 잘 되고 석탄은 톤당 50실링에 팔리지." "그런데 뭐가 못마땅하다는 거야, 응? 아서, 듣고싶어. 요즘 왜그래?" 해티는 오랫동안 참아왔던 궁금증을 더 참을 수 없는지 성급하게 물었다. "아서는 요즘 많이 변했어. 왜 그래? 나한테라도 이야기하면 좋잖아. 내가 혹 시 도움이 될지 알아?" 그는 해티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밝은 한줄기 빛이 그에게로 옮겨 오는 것 같았다. 그는 갑자기 그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렇게 해서 지금 자기 영혼까지 갈래갈래 찢어놓고 있는 그 무서운 번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는 눈을 빛내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넵튠 탄광에서 있었던 그 사건을 난 잊을 수가 없어."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물었 다. "무엇 때문에?" "난 그 재난을 막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 해티는 머리가 아팠다. 지루한 그 문제가 또 나오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 밑바닥의 정체를 알아내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꾹 참으면서 우울하게 굳은 아서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무엇이 걱정이 되는거야? 아서, 모든건 밝혀졌잖아. 그런데 또 뭘 근심하는 거야. 어서 다 이야기해봐." 그는 여전히 씁씁할 미소로 그녀를 건너다 보았다. "그 사람들을, 뻔히 죽음의 위험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대로 방치했던거야. 난 그걸 알고있어. 그래서 괴로운거야. 해티, 날 이해하겠어?" 아서는 어두운 표정으로 헤티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고개를 흔 들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그녀에게 한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회 의가 느껴졌다. 이 여자는 절대로 자기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해티는 그의 마음속을 쥐어뜯고 있는 그 병적인 강박관념을 모두 이해하 기란 어려웠다. 그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너무 몰랐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는 예 민한 마음은 그의 아픔을 막연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깊은 어 둠 속으로 빠지는 긴장감을 느끼며 그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아서, 혹시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건 잊어버려요.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일 거 야. 지나가 버린 일이잖아. 이제와서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잖아. 그리고 아서, 요즘 전쟁터에선 수천, 수만 명이 한꺼번에 죽어가고 있어. 백 명쯤은 아무것도 아냐. 우리는 더 큰 불행에 부딪혀 있는 거야. 아서, 제발 과거만 보지 말고 현 실을 좀 바라봐요. 지금은 세계가 싸우고 있어. 서로 이유없이 죽이고 죽어가고 있어. 탄광의 그런 사건은 작은 불상사에 지나지 않는거야." "그렇지 않아. 그건 끔찍스러운 살인행위였어. 아무리 어떤 구실을 대도 빠져 나올 수 없는 집단살인이야. 전쟁터의 군인들처럼 그들도 이유 없이 죽어간거야. 그리고 지금도 죽어가고 있어. 끔찍스러운 살해가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되고 있 어. 전쟁처럼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이유로 말야. 전쟁과 똑같이 이유 없는 대 량학살일 뿐이야." 해티는 이 화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꼬불꼬불한 미로처럼 얽히고 설킨 아서 의 정신세계가 자신마저도 끌어들이려 검은 손을 벌리고 있는 느낌에 그녀는 고 개를 흔들었다. 좀 밝은 세계로 나가고 싶었다. 이렇게 자연은 아름답고 햇빛은 밝은데 그리고 우리들은 얼마나 아름다운 젊은이 들인가. 그런데 왜 이렇게 어 둡고 무거운 관념에 끈질기게 매달려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걸까. 그녀는 자 신이 아사를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는 실질적인 여자였다. 부질없는 관념에 사로잡혀 뼈를 깎는 괴로움에 짓눌려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아서도 끌어내고 싶었고 자신의 사랑은 능히 그러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다정한 눈길로 아사를 바라보았다. "아서, 오늘 정말 기뻐. 자기의 이야기를 솔직히 다 해줘서 내 마음도 가벼워 졌어. 나 요즘 좀 걱정스러웠어. 아사를 만날 때마다 내 마음이 얼마나 무거웠는 지 알아? 아서의 마음속에 그런 무거운 고민이 있는지는 모르고 난 나대로 고민 했어. 좀 의심스러웠거든..." 그녀는 웃었지만 아서의 눈길은 다시 퉁명스러워졌다. "뭐가 의심스러웠어?" "글ㅆ..."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난 아서가 입대하는 것이 싫어서 그렇게 우울하다고 생각했었어." "군대 이야기라면 다시 분명히 말해두겠어. 난 절대로 군인이 되지 않을 거야. 실망을 한대도 할 수 없어." 눌랍도록 강경한 대답에 해티는 당황했다. "아니, 난 출정하는 것을 겁내는 줄 알았다고 한것 뿐이었어." "무서워하는 것이 사실인지도 모르지. 난 말로만 큰소리 치는 형편없는 겁장인 지도 몰라." "아서, 제발 부탁해. 그 자학하는 말은 그만 좀 해. 난 실망시키지 말아줘. 아 니, 난 믿어. 용감한 사람들이 흔히 그런 관념에 잘 빠지나봐. 정말 그래. 앨른 오빠도 솔직히 이야기해줬는데, 참호에서 돌격을 해서 십자훈장을 타기 까지는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는 거야. 그러니까 생각만 할 게 아니라 실제적인 행동 이 필요한가봐. 아서, 그렇게 생각되지 않아?" 해티는 간절히 바라는 눈으로 아서의 굳은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티는 지치지 않았다. "자 내 말을 들어봐. 아서, 타인캐슬에서 보낸 그 주말 일 생각나? 우리가 약 혼 이야기를 했을 때 난 우리가 너무 어리다고 했었지?" "그랬지." "난 그날을 늘 기억하고 있어 .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날이라고 생각해." 그녀는 눈을 내리깔며 그의 손 위에 자기의 손을 얹었다. "그래서 난 지금 이렇게 생각해. 만일 아서가 군에 입대한다면 우리가 성숙했 다는 표시가 되지 않을까 하고 말이야." 아서는 몸이 빳빳하게 굳어왔다. 그가 두려워하고 불안을 느끼던 그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가증스러운 애정의 가면 아래서 강요당하고 있다는 느낌에 구토 가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이야기에 너무 열중하고 있는 해티는 이 급작 스러운 아서의 혐오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자기의 감정에 스스로 황홀해하 고 있었다. 스스로 불행해지려고 고집을 피우는 이 섬약한 남자를 위해서 자기 는 어떤 것이든 희생하겠다는 자아도취적인 황홀한 감정에 빠져 있었다. "아서, 내가 얼마나 자기를 좋아하는지 알고 있지..? 아주 어렸을 때부터였어. 우리 약혼해, 응? 그래서 우리의 아름다운 사랑이 결실을 맺도록 하는거야. 아 서, 아버지가 얼마나 걱정하고 계신지 알아? 아버지뿐이 아냐. 모든 식구들이 걱 정하고 있어. 나까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이제 그만 다 털어버리고 군대로 가는 거야. 그럼 주위는 휠씬 단순해지고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거야. 아서, 우리 함께 우리의 행복을 찾아, 응?" 그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부드러운 금발머리를 호 소하듯 흔들면서 가까이 바라보았을 때 그는 냉정하게 밀어냈다. "그야 틀림없이 행복하겠지. 나도 믿어. 그런데 난 불행히도 군에는 절대로 가 지 않겠다고 결심했어. 미안해." "아서, 진심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어." "진심이야. 맹세해도 좋아." 그녀는 몹시 당황했다. 당황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만큼 더욱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기 때문에 하지 않았으면 좋을 이야기까지 다 해버렸다. "아니, 그럴 수 없을 거야. 이건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야. 당국에서 곧 영장 이 발부될 거야. 난 다 알고 있어. 18세에서 41세까지 특별히 면제된 사람 이외 에는 다 가게 되어 있단 말이야. 자기도 면제될 순 없을 거야. 자기가 입대할 것 인지 아닌지는 아버지께 달린 문제거든. 아버지께선 꼭 보내고 싶은 생각이니까 틀림없어." "그럼 아버지 좋으신 대로 하도록 난 관여하지 않겠어. 아무튼 해티, 고마워. 모두 내 문제를 얼마나 걱정하고 있다는 걸 다 일러주었으니 말야. 이젠 나도 좋을 대로 해야지." "제발 부탁해요, 아서." 그녀는 다시 애원했다. "나를 위해서라도 제발 들어줘요." "난 갈 수 없어. 누가 뭐라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야." 너무나 단호한 어조였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졌다. 치욕감으로 떨 리는 것을 필사적으로 누르고 있었다. 이 굉장한 분노는 그 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기의 손을 빼내며 아프도록 주먹을 쥐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감정을 보인다는 것은 패배일 뿐이라고 그녀는 잠시 돌아서서 머리 를 매만지는 체 하며 격렬한 감정을 누르려 애썼다. 그녀는 천천히 이야기했다. "난 사실 놀랐어. 그렇다고 나를 이상하게 여기진 말아요. 난 아사를 너무 믿 었거든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해왔던 거야. 그런데 내 단 한번의 부탁을 거절했 어." "미안해, 해티." 그의 음성은 진심으로 떨고 있었다." "넌 말이지..." "듣기 싫어요. 난 내 일생에서 처음으로 모욕을 당한거야. 그것도 가장 사랑한 다고 믿고 있었던 사람에게서 난 더 참을 수는 없어 내가 자기에게 아양을 부렸 다고 으스대진 말아요. 난 당신 아버지를 위해서 한 것 뿐이니까. 당신 아버지는 정말 훌륭하셔요. 누구처럼 의지가 없는 인간은 절대로 아니예요. 물론 우리 사 이도 끝난거야. 난 이제 오히려 가볍고 유쾌해요. 그 무겁고 침울한 얼굴은 사실 너무 무거운 짐이었어." "나도 좋아." 아서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중얼거렸다. 아서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는 해티의 만족감은 좀전에 그에게 무릎을 꿇으려 했던 자신의 수치감을 보상해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끝까지 그를 뭉개버려 자기 앞에 무릎을 꿇게 하고 싶은 잔인한 감정이 끓어올랐다. "내 결론은 오직 하나뿐이야. 아서가 너무 궁금할 것 같아 말한다면 아서는 지 독한 겁장이일 뿐이라는 거야." 그의 얼굴빛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녀는 그가 고함이라도 지르기를 기다렸으 나 그는 끝까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녀가 먼저 그를 무시해버리는 태도롤 벌떡 일어났다 그도 뒤따라 일어섰다. 두 사람은 한마디의 말도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현관문 앞에 오자 예의 바르게 그녀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일단 집안으로 들어서자 그녀를 현관 홀에 버려둔 채 인사도 없이 2층 자기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그녀는 분노와 자 기 연민의 감정으로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그러나 울진 않았다. 결연한 표정으 로 고개를 꼿꼿이 든 채 색당으로 들어섰다. 식당에는 배러스가 앉아 있었다. 그는 혼자 앉아서 국기가 꽃힌 맞은편 벽 지 도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보자 반가운 듯 벌떡 일어났다. "야아, 해티. 즐거운 뉴스라도 있니?" 지금까지 참았던 감정이 이 친절하고 부드러운 얼굴을 보자 한꺼번에 터지고 말았다.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전, 정말 참을 수가 없어요. 지독한 모욕을 당했단 말예요." 그녀는 어리광이라도 부리듯 흐느껴 울었다. 배러스가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내려다보다가 너그러워진 아버지가된 기분으로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아 주었다. "아니, 내 귀여운 해티를 누가 이렇게 슬프게 만들었을까! 자, 그만 울음을 그 치고 이야기해봐요."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쓸어주며 더욱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그러나 그 녀는 자신의 패배를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단지 오랜 폭풍우 끝에 안식처를 찾 은 듯한 안도감에 힘껏 매달릴 뿐이었다. 해티는 배러스야말로 자기를 이해해주 는 따뜻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그의 힘찬 포오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고 기분이 좋았다. 지금까지 아서에게 받았던 그 완강한 고집과 거부에서 자기를 구출해주는 따뜻한 감정이 진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눈을 감은채 그 포근하고 아늑한 감정에 취한 새로운 행복감에 자신을 내맡겼다. 10 공장 지배인으로 임명된 그 다음 6개월 동안 조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아침 일찍 플래트 골목길을 나와서는 저녁 늦게야 돌아갔다. 언제나 그의 앞에 는 산더미 같은 일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는 또 지치지도 않고 그 일을 해나갔 다. 그의 힘은 무한한 것처럼 보였고 이것은 신임을 받는 데에 더욱 박차를 가 해주었다. 처음엔 그는 아주 신중했다. 사무과장 플러나 설계실장 어빙, 회계담 당 도비가 그의 승진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 빠른 그는 재빠르게 알아차렸다. 놀랄 수밖에 없는 갑작스러운 승진으로 27세의 젊은이가 갖게 된 권위를 불쾌하게 여기는 것이 그들로서는 너무도 당연했다. 그들은 나이 지긋하 고 착실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도비는 더했다. 그는 지독한 말라깽이에다 네모진 얼굴의 마치 계산기 같은 인물이었다. 코 끝에 늘 안경을 걸치고 있는 그는 목 사처럼 칼라가 높은 옷을 입고 세상 일이 모두 귀찮다는 듯 초처럼 시큼한 표정 을 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조는 요의주도 했다. 그는 어느 사람이라 도 휘어접아야 할 때가 온것을 알았다. 그는 성글하지 않게 천천히 밀링튼의 비 위를 맞추는 일을 계속했다. 조는 어떤 일이든 귀찮아하지 않았다. 특히 스탠리 밀링튼이 꺼려하는 사소한 일들까지 그는 즐겨 떠맡았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그의 직무범위를 넓혀나가 는 좋은 기회가 돼주는 것이기도 했다. 3월이 되자 그는 스탠리에게 새로운 제 안 하나를 지나가는 식으로 슬쩍 던져보았다. 매주 토요일마다 그 주의 업무 계 획을 함께 세워보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달 말이 되자 그는 6개의 용광로 증설을 강행했고 준비 작업엔 여공을 채용하도록 자기 소신을 관 철시켰다. 그는 기계실의 감독을 빅 올리브에게, 주조장은 샘 더블디 노인에게 맡겼다. 그들이야말로 그의 심복이었던 것이다. 4월에 클레그가 사망하자 조는 그의 장례식에 커다란 화환을 보냈다. 점차로 조는 밀링튼 사장과 어깨를 겨루게 되었다. 복잡한 업무 내용도 훤히 알게 되었다. 공장이 올리고 있는 수익의 규모를 알게 되자 조는 잠시 아연했다. 수류탄 한 개만 놓고 생각해도 정부는 개당 7실링 6펜스를 지불하는데 그 원가 는 7펜스 정도였다. 그런 것을 공장은 몇 만 개씩 생산하였다. 그는 너무나 엄청 나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젠 연봉이 750파운드나 되는 자기의 급 료가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되었다. 그는 계속해서 노력했다. 스 탠리와도 더욱 친해졌다. 사무실에서 함께 샌드위치와 맥주로 점심을 나누기도 하고 그가 자주 드나드는 카운티 클럽이나 센트럴 호텔의 로비에도 얼굴을 내밀 곤 했다. 지방 군수공장위원회의 첫 회의에도 조와 스탠리는 나란히 출석했다. 이것도 다 우연인 것처럼 이루어진 일이었다. 스탠리가 없을 때에는 조가 아주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앉곤했다. "그 일이라면 가울런 씨를 만나보시오." 이말은 짜증이 나도록 지루한 면담일 경우 스탠리가 하는 정해진 말이었다. 이렇게 해서 조는 중요한 사업상 접촉도 갖기 시작했다. 쇠나 납, 특히 안티몬이 값은 특히 톤당 25파운드라는 등귀 현상 을 나타냈다. 그리고 그 안티몬의 가격 건으로 처음으로 모슨과 회담을 했다. 짐 모슨은 관록이 있어 보이는 살찐 얼굴이 두 턱이 지고 몸집이 큰 사나이였 다. 그러나 몹시 지혜로운 눈빛을 하고 있는 그 사나이도 상당히 애매하게 오늘 의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에, 이 점이 조와 일맥상통하고 있어 그들은 쉽사리 의 기투합했다. 그는 곧잘 자기 직업을 상업 또는 청부업이라고 내세우길 좋아했다. 그리고 그 사업의 중심지는 맬모우 방파제에 있는 커다란 창고였다. 거기에는 지금은 자 지워져 알아보기 힘들지만 다음과 같은 간판이 걸려있었다. '짐 모슨. 철강 및 금속류, 중고 로프, 범포, 수모 및 수지, 고무 부스러기, 돈피, 수골, 걸 레, 기타 도매업 및 일반 청부 무역 거래'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거 활동하는 범 위는 더욱 넓었다. 신축하는 위틀리의 공장의 청부도 하고 타인캐슬 거래소에서 도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도 전쟁을 이용하고 있는 인물들 중의 하나였 다. 그는 돈이 많은 사람으로 이미 알려졌지만 그 재산은 날로 불어갔다. 모슨의 특수한 부업 가운데 하나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자 조는 바짝 흥미를 일으켰다. 그 내용이 자세히 알려짐에 따라 조는 모슨의 수완에 새삼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타인캐슬에서는 이미 종이가 부족해지기 시작하여 곤란을 당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 상황을 재빨리 포착한 모슨은 당장 어린 여자 아이들-맬모 우 빈민굴의 아이들을 고용해서 매일 새벽 5시 부터 읍내의 쓰레기통을 뒤져 헌 종이를 모으게 했다. 아이들이 휴지와 값이 꽤 나가는 보드 지를 모아오면 한 사람 앞에 주당 2실링 6펜스를 주었다. 그러면서 모슨은 그것도 여자 아이들에 게는 너무 많이 주는 편이라고 했다. 물론 모슨 편에서 보면 그것으로 인한 수 입이 굉장했다. 조는 그러한 아이디어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쓰레기 통에서 '돈 뭉치'를 만들어내는 이것은 얼마나 놀랄 만한 아이디어인가! 조는 처음부터 짐 모슨과 자기는 피를 나눈 형제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모슨에 게 교제를 청한 동기를 속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모슨 편에서도 자기와 같은 목적에서 접근해온 것이 아닌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안티몬에 관한 상담에서 처음으로 이야기가 있은 후 모슨은 조를 피터즈 플레이스에 있는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그 집은 크긴 했으나 몹시 지저분한 저택으로 저당잡힌 집을 유전(저 당물 찾는 권리를 상실케 하는것)시켜 차지한 집이었다. 집 안에는 둔중한 황색 가구들과 아무렇게나 깔린 카펫과 쓰레기 같은 물건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 집 에서 조는 모슨 부인을 만났다. 그녀는 나이가 지긋한 빈틈없어 보이는 여자였 다. 그녀는 한때 전당포를 경영한 적이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조는 이 모슨 부인에게 온 힘을 다 기울였다.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내내 즐거운 표정으로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집안일로 더럽혀진 그녀의 손에도 서슴지 않 고 입술을 대었다. 저녁식사에도 그 집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손님이나 주인이 다 힘께 후라이팬에서 직접 접시에 덜어 먹는 푸짐한 비프스테이크와 양파, 거 기에 곁들여 맥주를 마셨다. 저녁식사 후 모슨은 조에게 증권에 관한 예상을 살 짝 귀뜸해 주었다. 모슨은 넓다란 가죽 안락의자에 편안히 앉아서 조용히 이야 기를 했다. "맞아. 프랭크의 보통주를 조금 사두는게 좋을 거야. 전쟁 전에는 한푼의 값어 치도 없었지. 요즘은 그 회사가 형편없는 공장에서 곰팡이투성이인 비스킷을 마 들고 있어. 개에게나 먹일 수 있는 그런 과자지. 그렇지만 그 과자가 참호 속에 선 굉장히 맛있다. 이거야. 그 주가 지금 15퍼센트까지 배당금이 예견되고 있는 거야. 배당이 나오기 전에 사두는 게 좋을 거야." 조는 모슨의 이 지시에 따라 증거금(계약 이행의 확실함을 보증하기 위해서 담보로 하는 돈)을 넉넉히 투자하여 300파운드를 벌었다. 그는 더욱 모슨을 믿게 되어 미래를 함께 생각할 정도가 되었다. 이번 돈은 이제 출발일 뿐이었다. 전쟁 은 앞으로도 오래 계속될 것이고 이 전쟁은 그에게 손공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이렇게 멋진 전쟁은 그에겐 정말 고마운 선물이었다. 그는 이 전쟁이 영원히 계 속되었으면 하고 바랄 정도였다. 단 한 가지만이 조의 빛나는 장래를 막고있었다. 그것은 라우라였다. 조는 라 우라에 대하여 생각을 할 때에는 언제나-그것도 가끔이지만-그의 이마에 당혹감 과 실망의 주름살을 지었다. 그는 그녀의 기분을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그는 현재의 자기 지위가, 잘은 모르지만 라우라 덕분이라고 믿고 있었다. 사실은 그 지위 이상의 것을 그는 라우라에게 빚지고 있는 셈이었다. 그는 라우라로부터 여러가지 암시를 받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하면... 또는 저렇게 하면 그녀가 좋아할 것인가 하고 궁리를 하면서, 사태를 캐어내려고 애 를 썼지만 그녀는 여전히 멀리서 싸늘하게 웃고있는 종잡을 수 없는 신비로운 존재일 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무식했지만 무례한 짓은 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라우라의 아주 미세한 표정의 움직임 하나 하나에서 그녀가 싫어하는 것이 무엇 인지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차차 지나치게 머리 기름을 바른다든가 하는 일 이 없어졌고 갈색 구두는 갈색 옷에만 맞춰 입는 법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넥타이의 색깔도 야단스럽지 않은 것으로 바뀌었고, 회중시계 줄을 겉으로 늘어 뜨리는 버릇도 없어지고 도금한 번쩍거리는 반지나 진주 따위도 어느날 밤에 타 인 강 속에 내던졌다. 그 외에도 그의 사소한 일상생활 습관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라우라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향을 받아 변해갔다. 이를테면 힐톱의 저 택에서 목욕용 소금, 수정유리, 화장실용 암모니아, 수세미, 향수 스프레이 등이 갖추어진 목욕탕을 한번 본 후, 조는 곧장 약방에 가서 제일 먼저 칫솔을 샀다. 그러나 여전히 좋지 않은 것은 라우라가 조그만 틈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 었다. 그들은 자주 만났지만, 언제나 스탠리와 함께였다. 조는 한 번이라도 그녀 와 단둘이 있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기회를 자기가 먼저 만들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언제나 아무 진전도 없었다. 게다가 그는 완전한 확신도 없었기 때문에 더욱 용기를 낼 수 없었다. 그는 무서운 실수를 저질러 자기의 멋있는 지위와 찬란한 희망에 차 있는 장래까지 잃게 될 것이 두려웠다. 그는 아직 용기가 없 었다. 밤이면 그는 그녀의 환상을 그리며 시달려야 했지만 그것은 언제까지나 환상 으로만 남아 있을 모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은 견딜 수 없어 공중전화가 있는 곳까지 달려간 적이 있었다. 그는 심장을 두근걸리면서 그녀의 전화번호를 불러냈지만, 들려온 것은 스탠리의 목소리였다. 조는 식은땀이 흐르는 공포에 떨 며 수화기를 급히 놓고 도망치듯 자기 방으로 되돌아와 버렸다. 그에게 라우라는 알 수 없는 안타까운 신비로움, 그것이었다.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이경험의 것, 몹시도 알고 싶은 그 자체였다. 그녀는 하나의 수수께끼 같이 존재했다. 그는 그녀의 성격을 탐색해보려고 했다. 그리고 때로는 막연한 이해의 서광이 그에게 비쳐오는 듯도 했다. 그는 첫째로, 라우라는 스탠리의 감상벽, 불 평불만을 발작적으로 터뜨리는 버릇이라든지 그리고 최근에 와서 격렬해진 그의 애국주의 따위를 죽도록 싫어한다는 것쯤은 추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관 료적인 사고방식, 현실에 맞지 않는 높은 이상 그리고 스탠리가 아직도 어린애 같이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 등에도 싫증이 나서 남 모르게 고독한 눈물을 흘리 고 있으리라는 것 따위였다. 그런데도 라우라는 스탠리에 대해서 어떤 사랑스러 운 부인 못지않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그에게는 저주할 만큼 원 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조는 굉장한 자기망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멋있고 씩씩한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연 라우라가 그를 그런 식으로 보 고 있는 것일까? 라우라는 그에게 관심은 가지고 있는 것을 분명했다. 그녀는 그의 장례성을 인정했고 냉소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를 자주 주시해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 는 그의 품행이 단정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녀의 차가운 미소는 그가 아무리 성실한 인간인 척해 보이고, 높은 이상을 가진 듯 암시해 보여도 조금도 인정해주지 않고 있음을 나타냈다. 그래서 그는 역반응을 기대하 며 언젠가 차를 마실 때 천한 농담을 슬쩍 던져보았다. 스탠리는 미친듯이 크게 웃어 젖혔지만 라우라는 아주 무표정하고 냉담하게 얼굴빛이 바뀔 뿐이었다. 조 는 난생 처음으로 수치심을 느껴 얼굴을 붉혔다. 그 다음부터는 절대로 그런 천 한 짓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떤 형태의 여자라고 단정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여자였다. 현실문제에 대한 초연한 태도는 그녀의 괴팍한 인간성을 상당히 잘 보여주는 일면이었다. 얘로우에 있는 숙녀들은 모두 전쟁문제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여성 들의 군복 차림이 범람하고 무슨 단체와 위원회와 조합 등이 마치 유행처럼 생 겨났다. 타인캐슬에 있는 라우라의 여동생 해티도 카키색 군복 차림을 벗은 적 이 없었다. 그러나 라우라는 전혀 그런것과 상관없이 지냈다. 그녀는 새로 건립 된 위틀리의 군수공장에 있는 매점에만 겨우 갈 뿐이었다. 그녀가 조에게 빈정 대는 어조로 한 말에 의하면 짐승들이 먹이를 먹는 것을 보는 게 재미있어서라 는 것이었다. 그녀는 거기서 공장 노동자들에게 커피나 샌드위치를 파는 일에 봉사했으나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라우라의 자기방어는 너무나 완벽 하여 조가 아무리 허우적거려봐도 그녀의 신비로움만 더해가는 것 같았다. 6월이 왔다. 이와 같은 상황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 달16일, 스탠리는 조에 게 그의 생애에 있어 두번째의 충격적인 소식을 가져다주었다. 12시 15분이 지 났을 무렵 오전 내내 외출 중이었던 밀링튼이 조의 사무실 문으로 얼굴을 들이 밀며 말했다. "잠깐 만나고 싶은데 가울런, 내 사무실로 오시오." 스탠리의 어조에서 뭔가 중대한 일이 있는 기미를 느낀 조는 마음이 편치 못 했다. 약간 죄를 지은 듯한 느낌을 애써 누르면서 그는 일어나서 사장실로 들어 갔다. 스탠리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책상 위의 서류를 짜증스레 들춰보고 있 었다. 스탠리는 요즘 굉장히 불만스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함께 살아온 경험으로 말해본다면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의 정신은 진부했고 새로운 창의성이란 도무지 없는 인간으로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을 하는 것을 좋 아했다. 브리지와 골프를 즐기고 탐정소설 따위나 좋아하는 정도면서도, 한 사람 의 영국인이 다섯 명의 외국인보다 우수하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었다. 평화 시 대에 그는 자동차 전시회를 놓치지 않고 보는 습관이 있었다. 또 그는 지루하게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세인트 비 드 학교를 졸업하던 해 축구시합에서 기글즈윅 팀을 이겨냈던 상황을 몇 시간이 고 지껄여댔다. 이러한 모든 언행은 그의 지나친 불만과 감추어진 현실도피의 이상심리 상태를 보여주는 듯했다. 언제나 월요일 아침이면 더욱 의기소침한 모 습으로 사무실에 나왔다. 아아, 제기랄 또 이짓을 계속해야 하나, 하는 귀찮고 괴로워 보이는 모습으로. 사업은 번영의 절정에 도달하고 있었다. 그는 돈이 벌리는 것을 기뻐했다. 일 주일에 1천 파운드의 비율로 이익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실로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돈이 전부가 아니다.' 라는 것이었다. 그의 불 만은 군수성이 설립된 이래 더욱 심해졌다. 그 때부터 밀링튼 공장은 군사계획 의 일부가 되어 위틀리에 새로 세워진 허튼 자재공장의 하청공장이 되고 말았 다. 선구자로서의 일은 이제 끝이 났다. 모든 것은 통제되고 명령에 따르고 정부 행정기관에 의해서 결정이 되었다. 스탠리의 일은 거의 없어진 것이나 다름 없 었고, 일종의 휴식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불평스럽게 좀 편 히 쉬고 싶다고 자꾸 이야기했던 스탠리는 막상 그렇게 되고 보니 그것이 싫었 다. 스탠리는 점점 더 회의와 실망감에 빠져들었다. 특히 군악대가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군악대가 '티퍼레리' 나 '잘 있거라 조국이여' 같은 곡을 연주하며 시내 를 지나갈 때면 스탠리는 흥분한 얼굴로 몸을 꼿꼿하게 세우곤 했다. 그러나 군 악대의 음악소리가 사라져버리고 행진하는 군인들의 무거운 군화소리만이 온 거 리에 울릴 때면 그는 다시 그 권태로운 상태로 되돌아가 보라곤 했다. 계시되는 여러가지 공고들 또한 그를 괴롭혔다. 얘로우 읍은 특히 애국적인 열성이 넘치 는 곳이어서 모두들 징집에 잘도 응했다. 그래서 얘로우의 수많은 집들의 창은 "국왕과 국가를 위한 전쟁에 이 집에서는 한 사람이 출정합니다." 라는 패찰을 달고 있었다. 이 '한 사람' 이라는 말이 특히 그의 마음을 편치 못하게 했는데, 밀링튼은 언제나 자신이 특별히 큰 인물이라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큰 책임감을 느꼈다. 또한 벽에 붙은 포스터도 그를 괴롭히는 것 가운데 하나였다. 키처너 원소의 엄숙한 얼굴이 손가락을 쑥 내밀고 있는 그림이었는데, 이것을 볼 때마다 그는 돈만 벌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책망 같은 것을 느껴 두렵기까지 했다. 그래 서 그런 포스터 앞을 지나가려면 스탠리는 공연히 얼굴을 붉히며 죄지은 사람처 럼 급히 지나쳤다. 그는 파이프를 이빨ㄹ고 깨문 채 자기가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하고 걱정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스탠리가 드디어 결행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키처너 원수의 손가 락 때문이 아니고 세인트 비드 공립학교 동창회의 만찬 속상에서였다. 만찬회는 지난밤 타인캐슬의 '딜리즈 룸'에서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 밀링튼은 테이블 건 너로 조를 바라보며 장엄히 선언하였다. "조, 지금 프랑스에는 대사건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곳에 이렇게 있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 네겐 늘 의문이었네." 조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스탠리가 아티몬 계약에 대한 것을 알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뿐이었다. "자네가 꼭 알아둬야 할 것이 있네." 스탠리는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상한 고음이어서 몹시 불안하게 들렸 다. "난 군에 입대하기로 결심했네." 순간 강한 충격을 받아 모든것이 정지해버린 듯 침묵이 흘렀다. 그 충격은 너 무도 컸기 때문에 조는 완전히 제정신을 잃었다. 그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큰 소 리로 외쳤다. '그렇지만 사장님은 안 됩니다. 여긴 어떡하실 작정입니까?" "그건 나중에 얘기합시다." 스탠리는 그 이야기는 거기서 맺고 재빨리 자기의 말을 계속했다. "믿어주게. 난 가는 것일세. 지난밤 난 결정했다네. 지난밤의 만찬회에서, 제기 랄.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 만찬회를 꾹 참고 끝나쳤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상상 이 안 간단 말일세. 나 자신만 빼놓고 모두 군복 차림이었다네. 동창생이 모두 군복인데 나만 아니었단 말일세. 완전한 국외자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두들 나 를 바라보았네. 야, 군수 물자로 돈벌이하는 친구, 요즘 어때? 이런 식의 비꼬는 이야기를 던지면서 말이야. 동기 동창인 햄프슨은 진짜 부처 같은 모인데, 나 같 은 사람은 전혀 상대도 하지 않으려고 할 정도였어. 그 치 지금 소령인제 공립 학교 연대 소속이야. 그리고 로빈스라는 녀석이 있는데, 축구 후보선수도 되지 못했던 키가 작은 놈이야. 그런데 지금은 대위로 완장을 두개씩이나 팔뚝에 감 고 있더군, 난 이제 참을 수가 없어, 가울런. 입대하지 않고는 못 견디겠어." 조는 혼란스러운 생각을 정리하려고 떨리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그는 아 무래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이야말로 저절로 굴러 들어오 는 너무나 엄청난 행운이었다. "사장님은 현재 국가적인 중요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받아주지도 않 을 겁니다." "아니, 그건 걱정말게." 스탠리는 신이 나서 외치듯 말했다. "이 공장은 지금은 그냥 내버려둬도 해나갈 수 있어. 계약은 자동적이고 회계 는 도비가 하고 있고, 거기다 자네가 있잖나. 자네 같으면 뭣이든 다 알고 있으 니까, 조." 조는 급히 눈을 아래로 깔았다. "네, 그 말씀은 맞습니다만." 조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스탠리는 펄쩍 뛰듯 일어서더니 사장실을 왔다갔 다 걷기 시작했다. "난 별로 신앙심이 깊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내 자신도 알고 있지만 군에 입대할 결심을 하고 나서는 마음이 가뿐해진 기분이 든단 말이야. 영국을 위해 서 이바지한 성조지(영국의 수오성이 된 사람. 소아시아 왕족 출신으로서 서기 303년 순교했다고 전해진다.)의 정신은 지금까지도 살아 있거든. 아직도 그는 살 아 있는거야 절대로 죽지 않았지. 우리는 정의를 위하여. 싸우고 있는 거야. 요 즘과 같은 공습, 잠수함 공격 그리고 죄도 없는 여자들이 겁탈을 당하고, 병원이 폭격당하며, 갓난아기마저 살해되고 있는 시국에, 건전한 정신의 인간이라면 어 떻게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신문만 읽어도 제기랄, 사나이의 피가 끓어오르는 걸." "사장님의 그 기분은 알겠습니다." 조는 눈길을 마룻바닥에 던진 채로 말했다. "이건 마치 지옥입니다. 저도 무릎만 이렇지 않으면..." 그 무릎이라고 하는 것은 조가 커머셜 로드에 있는 무명 진료소를 찾아가 7실 링 6펜스를 내고 진단서를 받았을 때, 처음으로 발견한 병이었지만 세상이 온통 전쟁에 휘말리게 되자 조는 일부러 더욱 절룩거리며 지냈다. 그러나 스탠리는 방 안을 왔다갔다하면서 자기 자신의 생각에만 열중하여 그의 무릎 같은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난 장교로 임명될 거야. 세인트 비드 시대에 3년간 특수 부대에 입영했었지. 2,3주 있으면 준비가 다 되니까 공립학교 대대로 입대할 작정이야." 다시 침묵이 흘렀다. "알겠습니다." 조는 천천히 말하며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사모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아아, 물론, 그 사람은 내가 입대하는 걸 바라고 있지 않지." 스탠리는 소리를 내어 웃고는 조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힘을 내, 이 사람아. 자네가 나를 그토록 걱정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내가 군에 들어가기만 하면 이따위 낡아빠진 전쟁은 끝장이 날 거야." 그는 갑자기 말을 끊고 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 "난 지금부터 햄프슨 소령과 점심을 같이 해야 해. 약속을 했거든. 만일 3시까 지 내가 돌아오지 않거든 러틀리 씨에게 가서 그 마지막 수류탄 건을 이야기해 봐요. 존 러틀리 노인과는 약속이 되어 있으니까, 모든걸 그대로 그 사람에게 말 해주면 될 거요." "알겠습니다." 조는 슬픈 어조로 말했다. "꼭 가겠습니다." 조는 러틀리 공장에 가서 존 노인과 만나, 기포가 생긴 주물 건으로 골치 아 픈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편 스탠리는 흥분한 마음으로 햄프슨과 점심식사를 함 께 하러 달려갔다. 5시경 술을 몇 잔 들이켜 기분이 좋아진 스탠리는 클럽의 의 자에 버티고 앉아서, 햄프슨이 어느 술집에서 만난 아가씨 이야기를 들으며 배 꼽을 쥐고 웃고 있었다. 그때 조는 러틀리와 힘차고도 정중한 악수를 나누고 있 었다. 러틀리 노인은 '이놈이 상당히 자기 처지를 잘 분별할 줄 아는 녀석이구 나.' 하고 무뚝뚝한 얼굴을 한 채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 밤 조는 오늘의 일을 알리려고 모슨에게로 갔다. 조의 이야기를 듣는 동 안 모슨은 의자에 단단히 앉아 두 손을 꽉 쥐고 대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한 이마 에 주름을 모은 채, 세심히 조를 바라보며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음, 이건 도움이 되겠는걸." 그는 한참이나 지나서야 말했다. 조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싱긋 웃었다. "이 기회를 이용해서 멋있게 해나가야겠어, 조." 모슨은 감정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나서는, 안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 다. "여보, 조와 내게 스카치 한 병 갖다줘." 그들은 그 한병을 다 마셨지만, 한밤중 가까이가 되어 하숙집으로 걸어서 돌 아오는 조의 피를 뛰게 하는 흥분은 위스키 때문이 아니었다. 이제야 자기에게 도 기회가 왔다는 기분 즉 권력, 돈, 그 외 모든 것을 얻을 기회가 왔다는 느낌 에 그는 취하고 말았다. 드디어 자기도 짐이 말한 것처럼 완전히 정상 궤도 위 에 올라서기 시작한 것이다. 거물급과 어깨를 겨루게 된 것이다. 아아,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타인캐슬은 위대한 고장이다. 앞으로 곧 자기도 큰 재산을 가지 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춤을 추듯이 그의 온몸 구석구석까지 밀려 들었다. 큰 재산, 그것도 굉장한 재산을 갖게 될 것이다. 정말 멋있는 밤이다. 전 환하게 비 치고 있는 저 달을 보라 모두 이 조를 축복해주는 것 같지 않은가! 그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라우라를 생각했다. 그녀의 까다로운 취향과 그 녀의 싸늘한 매력을 생각하며 히죽이 웃었다. 그 다음날 아침 정각 9시에 출근한 그는 지난밤의 취기는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싱싱하고 태연스러웠다. 스탠리에게는 전보다 더욱 정중하게 대했다. 처 리해야 할 일들이 놀랄만큼 많이 쌓여 있었다. 조는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 두 해치웠다. 그 어느 것도 그는 놓치지 않았다. "참 놀라운 일꾼이야, 조." 두 시간 정도 열심히 둘이서 일을 하고 난 뒤에 스탠리는 하품을 하며 말했 다. "당신은 정말 굉장한 친구야. 세세한 곳까지 그토록 잘 볼 수 있다니, 정말 놀 랍네." 그는 기분이 좋아져 조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난 매우 고맙게 생각하네." 스탠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남은 일을 부탁하네. 난 햄프슨과 만날 약속이 있어 가보겠네." 스탠리의 모습이 활기차게 사무실 문에서 사라지자, 조의 얼굴은 갑자기 달라 졌다. 몇일이 지나갔다. 마지막 준비가 다 끝나고, 드디어 스탠리가 올더쇼트를 향하 여 출발하는 날 오후가 닥쳐왔다. 그는 얘로우에서 오는 느린 지방선 기차를 타 지 않고, 승환역인 카안튼까지 자동차로 가서 급행열차를 직접 타도록 주선을 했다. 그리고 특별한 호의를 배풀어 그는 조에게 라우라와 함께 역까지 전송을 나오라고 했다. 비가 오는 오후였다. 조는 힐톱으로 너무 일찍 갔기 때문에 라우라가 들어올 때까지 응접실에서 10분 가량 기다려야 했다. 그녀는 소박한 청색 옷에 검은 빛 이 나는 보드라운 모피 외투를 입고 있었다. 검은 모피의 광택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신비한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어 그의 가슴은 또 괴롭게 뛰기 시작했 다. 그녀를 보자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으나 그녀는 조금도 감정이 보이지 않는 담담한 얼굴로 창가로 천천히 걸어왔다. 침묵이 흘렀다. 그는 그녀를 자세 히 쳐다보았다. "사장님이 이렇게 떠나시니 퍽 섭섭합니다." 그는 인사 치례로 말했다. 그녀는 얼굴을 돌려, 언제나 그를 어리둥절하게 만 드는 이해할 수 없는 눈초리로 그를 자세히 훑어보기만 했다. 그녀는 아마 좀 슬프고 또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녀는 스탠리의 입대를 원하고 있지 않을 테니 까. 바로 그때 스탠리가 마치 훈장이라도 몇 개 탄 듯한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들 어왔다. 그는 즐거운 듯이 양손을 문질렀다. "좀 구질구질한 날이군. 그렇지만 날이 궂을수록 더 멋있는거지, 그렇지, 조? 하하... 그런데 이 부대에게 주는 럼주 배급은 어떻게 됐나, 라우라?" 라우라가 초인종을 누르자, 베시가 샌드위치와 홍차를 담은 쟁반을 가지고 들 어왔다. 스탠리는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그는 배시가 침울하다고 놀리며 웃기도 하고 스스로 위스키에 소다를 타서 마시고 샌드위치를 먹으며 이야기 했다. "맛이 좋은 샌드위치군. 라우라, 이제 한두 주만 있으면 나도 이런 맛있는 음 식을 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하게 될거야. 소포를 보내줘야 해, 라우라. 어젯 밤에도 누가 말했지만, 모두 고개를 빼고 소포를 기다린다고 하더군. 쇠고기와 플럼과 사과 같은 여러가지를 보내줘야 해." 스탠리는 웃었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플럼과 사과 따위를 얼굴을 붉히지 않 고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배언즈파더의 만화에서 본 것 같은 껄껄대는 웃음, 진짜 웃음을 웃을 수 있었다. 그는 다시 껄껄대며 말했다. "햄프슨 말이야. 그도 살짝 뺑소니치는 데는 선수지만..." 그는 한참 웃고나서 말했다. "아일랜드 스튜를 배급 통조림 깡통에 담는 연구를 했다는 거야. 졸병 중에는 굉장히 머리가 좋은 놈도 있는 모양이야. 나도 재수가 좋아야 할텐데. 이번 주의 '바이스탠더'를 봤나? 재미있어, 굉장히 재미있어!" 그리고 또 다시 애국자가 되기 시작했다. 그는 방 안을 왔다갔다 하면서 소령 으로 부터 들었다며 반격, 가스 마스크, 탄약 상자, 신호탄, 소총, 설사약, 영국 정신 등등의 이야기를 얼굴을 빛내면서 하는 것이었다. 스탠리가 지껄이고 있는 동안 라우라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수심이 깃든 그 녀의 옆얼굴은 창 밖에서 물방울을 떨구고 있는 윌계수 나무의 푸른 숲을 배경 으로 더욱 또렷이 드러나 보였다. 그녀는 스탠리가 지껄이는 애국주의에 충실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떠들던 스탠리가 갑자기 덜컹하고 술잔을 내려놓았다. "자, 이제 출발하는 게 좋겠군. 기차를 놓치면 안 되니까." 그리고 힐끗 창 밖을 바라보았다. "여보, 레인코트를 입는 게 좋겠어. 비가 많이 올 것 같은데." "내 염려는 마세요." 라우라가 대답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떠들썩했던 스탠리의 이야기들을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듯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그 완전무결한 태도는 스 탠리의 떠들썩한 야단법석을 휘어잡는 것 같았다. "당신 차에 실어야 할 것들 다 챙겼어요?" "물론." 스탠리는 문 쪽으로 앞장서서 나갔다. 그들은 차를 탔다. 그 차는 2년밖에 되지 않은 새 차였다. 스탠리가 스타터를 엄지손가락으로 누르고 기어를 넣자, 차는 가볍게 나가기 시작했다. 힐브라우의 교외에서 사뭇 오르막길을 지나 오똑하게 서 있는 별장들을 뒤로 한 넓은 전원의 벌판이 펼쳐진 길을 달렸다. 스탠리는 모퉁이마다 절환장치를 사용하며 피크닉이나 가는 것처럼 경쾌하게 차를 몰았다. "비행기 처럼 신나게 달리잖아." 그는 활기찬 어조로 말했다. "난 배행대에 들어갔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드는군 그래." "조심하십시요. 브레이크 거는 것 실수 않으시도록 말입니다. 조가 말했다. "길이 꽤 미그럽습니다." 스탠리는 다시 웃었다. 조는 뒷좌석에 혼자 앉아서 앞에 있는 라우라의 조용 한 옆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침착한 모습이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 다. 스탠리가 공연히 흥이 나서 차를 아무리 난폭하게 몰아도 라우라는 까딱도 하지 않았다. 그녀라고 하더라도 역시 보기 흉한 죽음을 당하고 싶지는 않을 텐 데 말이다. 어쨌든 조는 위험한 것은 딱 질색이었다. 자동차는 순식간에 고풍스런 성비드 성당 앞을 통과했다. 그 성당은 몇 개의 평평한 이끼가 덮인 묘석에 둘러싸인 채, 황야의 벌판 끝에 외롭게 서 있었다. 풍상에 시달린 잿빛을 띤 적적한 모습이 마음을 끄는 곳이기도 했다. "정말 멋있는 옛 건물이야." 스탠리는 턱으로 그쪽을 가르키며 말했다. "저곳에 들어가 본 적이 있나, 조?" "아니오." "멋있는 떡갈나무 좌석이 있어. 언제나 한번 자네도 가볼 필요가 있어." 차는 미끌어지듯 언덕길을 내려와 캐더 마을과 그 주변 농장을 몇 갠가 지나 갔다. 20분쯤 뒤에 그들은 칸튼 역에 도착했다. 기차가 연착한다고 했다. 그래서 스탠리는 수화물 점검을 마치고서 라우라와 함께 플랫폼을 천천히 거닐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조는 짐꾼과 이야기를 나누는 척 하면서 질투가 담긴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기랄, 하고 그는 생각했다. 역시 그여자는 자기 남편 에게 흠뻑 빠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날카로운 기적소리가 들리더니, 기차가 다가오는 우렁찬 소음이 들렸다. "열차가 도착했습니다요." 하고 짐꾼이 알려주었다. "4분밖에 연착하지 않았구먼." 스탠리가 다급히 조가 있는 쪽으로 왔다. "그럼, 조, 이제 정말 이별이로군. 그 짐은 일등칸 끽연실이야. 될수 있는대로 기관차 쪽으로 향하는 좌석이 좋겠군. 편지를 보내주게, 이사람아. 자네에게 난 모든 걸 맡기고 떠날 수 있어 정말 마음이 놓이네. 자네 같으면 모든 걸 다 잘 할 수 있을 거야." 그는 조와 악수를 나누었다. 조는 힘껏, 오래도록 손을 잡았다. 그러고 나서 스탠리는 라우라에게 이별의 키스를 한 후 자기 좌석을 찾아 차 안으로 들어갔 다. 그는 근본부터 감상적인 인간이지만, 정작 출발하는 순간이 다가오자 깊이 마음이 흔들이는 것 같았다. 그는 근본부터 감상적인 인간이지만, 이제야 자기가 전쟁터로 나가는 사람임을 처음으로 느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했지만 그 는 그것을 미소로 감추었다. "내 아내 좀 보살펴주게, 조." "염려 마십시오. 스탠리 사장님" "편지 잊지 말게." "걱정 마십시오." 잠깐 말이 끊어졌다. 기차는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 어색하게 끊어진 대화가 오랫동안 다시 이어지지 못했다. "비가 더 올 모양이군." 스탠리가 침묵이 어색한지 말했다. 다시 공허로운 침묵 가운데 기차가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탠리는 외쳤다. "자아, 이제 간다! 잘있어, 라우라. 잘 있게, 조." 열차는 움직이는 듯 하다가 다시 멈추었다. 스탠리는 철로 쪽을 바라보며 얼 굴을 찌푸렸다. "급수를 하고 있는 모양이군. 아직 2, 3분 더 있을 모양인가." 그러나 기차는 다시 움직여 이번엔 미끌어지듯 나아가다, 차츰 속력을 빨리 해 멀어졌다. "자, 안녕, 안녕." 이번에야말로 스탠리는 가버린 것이었다. 조와 라우라는 마지막 객차가 보이 지 않을 때까지 플랫폼에 서 있었다. 조는 힘차게 손을 흔들었으나 라우라는 전 혀 손을 흔들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느 때보다 더 안색이 창백했고 눈시 울도 좀 젓은 것 같았다. 그들은 묵묵히 자동차 쪽을 향했다. 그들이 정거장을 나와 자동차까지 왔을 때 다시 비가 오기 시작했다. 라우라 는 뒷좌석 쪽으로 갔지만 조가 근심스런 표정으로 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사모님, 거기선 비를 몽땅 맞으시겠습니다. 비가 보통 심하게 오는 게 아닙니 다." 그녀는 머뭇 거렸다. 그러다가 아무 말 없이 운전대 옆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행동은 자연스러웠다. 이번에는 조가 핸들을 잡았다. 그는 천천히 차를 몰았다. 비가 자동차 앞 유리를 흐리게 하기 때문이기도 했 지만, 그는 라루라와 같은 차에 탄 여행을 오래 끌기 위해서 더욱 천천히 차를 몰았다. 그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겸손하고 존경을 나타내는 신중한 것이었지만 라우라와 단둘이만 있다는 사실은 심장을 파멸시킬 것 처럼 그를 흥분시켰다. 스탠리가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떠나가, 점점 그 거리는 더욱 멀어만 가고 있었 다. 그런데 라우라는 자기와 함께 자동차 속 바로 옆에 있는 것이 아닌가. 조심 스럽게 그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근육 하나하나가 신경을 곤 두세우고 있었고 빈틈없는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서 두러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이럴 때 함부로 접근하는 따위는 다 다욱 안 될일이 다.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아마 몇 주일, 아니 몇 달 동안 전략을 짜서 천천히 그리고 아주 지독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가 자기 를 미워하고 있다는 이상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유감스럽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사모님께선 저를 그다지 달갑게 여기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대답이 없는 침묵뿐이었다. 그녀는 줄곧 길만 바라볼 뿐이었다. "난 별로 그런 것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한참 만에 대답했다. "네에, 알고 있습니다." 그는 씁씁하게 웃었다. "별 딴 뜻이 있어서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 생각에 사모님께서 처음 엔 저를 좀 도와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감사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런 데 요즘 사모님께서는...아, 잘 모르겠습니다..." "조금 더 빨리 차를 몰아주세요." 그녀는 그의 말은 무시하는 태도였다. "6시까지 비자 매점에 도착해야 되니까요." "네, 염려 마십시오," 그가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속력을 내자 비가 앞 유리창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전 다만 사모님께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뭣이든 시켜주시길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사장님도 떠나셨고, 훌륭한 사장님이셨죠." 그는 한숨을 쉬었다. "저에겐 많은 기회를 주신 분이니까, 전 사장님의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 겠습니다. 무엇이든."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비가 폭포같이 쏟아졌다. 그들은 이제 확 트인 벌판 을 달리고 있었다. 바람마저 심해졌다. 차는 얇은 뚜껑만으로 덮여 있고 양쪽은 툭 터져 있었기 때문에 장대 같은 빗줄기가 그대로 좌석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아아, 정말 좋지 않은 날씹지다. 사모님께서 흠뻑 젖으셨으니 야단 났습니다." 라우라는 모피 코트의 깃을 세웠다. "괜찮아요," "아니, 안 되겠습니다. 잠깐 차를 멈추어야겠습니다. 비를 피해야죠. 완전히 폭 포처럼 쏟아져 내리는군요." 실제로 굉장한 호우였다. 그래서 레인코트를 입지 않은 라우라는 다 젖었다. 그래도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조는 왼편으로 그 옛 성당을 확인하고는 차를 급히 그쪽으로 돌려 세웠다 "빨리, 안으로 들어갑시다. 정말 엄청나게 쏟아지는군요."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억지로 차에서 끌어내리 넓은 길을 건너 낡은 성당의 복도 안으로 들어섰다. "이 안으로 들어가시지 않으면 감기 드십니다. 자, 안으로 들어가세요." 두사람은 안으로 들어갔다 살을 에는 찬 바람을 맞고 난 다음이라 작은 상당 안은 따뜻하고 아늑했다. 그 안에는 초와 향의 냄새가 은은히 풍기고 있었다. 어둠침침한 사이로 희미하 게 제단이 보였고, 그 위에는 구리로 만든 커다란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두개의 구형 청동 꽃병에는 지낸 일요일 미사 때 쓰인 듯한 꽃이 꽂혀 있었다. 사방은 소리 하나 없이 고요해 어딘가 전혀 다른 별세계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납으로 올린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따뜻한 정적을 더욱 깊게 해주었다. 조는 호기심에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스탠리가 말한 육중한 조각이 새겨진 좌석을 주의해서 보며 통로를 걸어갔다. "좀 이상한 장소이지만 어쨌든 젖진 않으니 다행이군요." 그러고는 걱정스런 목소리로 "얼마 안 있어 지가 개일 겁니다. 바자회 시간 까 지는 모셔다드릴 테니까 걱정 마세요." 하고 말했다. 그가 돌아다보았다. 라우라는 좌석 하나에 기대어 서서 두 손을 맞잡고 덜덜 떨고 있었다. "아아, 이런." 그는 당황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래서 안으로 모신 겁니다. 코트가 흠뻑 젖었군요. 자, 벗으세요." "안 벗겠어요, 괜찮아요."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는 속을 예측하기 어려운 그녀의 내면에서 어 떤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막연히 느꼈다. "그래도 벗어야 합니다, 사모님." 그는 여전히 겸손하고 존경에 찬 태도로 그녀의 코트에 손을 댔다. "아니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그녀는 말을 더듬거렸다. "그것보다 난 이먼 곳이 싫어요. 이런 곳에 오지 않는 건데...비 같은 건..." 그녀는 말을 뚝 끊자 재빨리 코트를 벗었다. 그녀의 숨결이 고르지 못했다. 그 녀의 얇은 블라우스까지 흠뻑 젖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눈길을 따라 그녀는 점점 더 평정을 잃어갔다. 그녀는 이 눈은 겁에 질려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그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몸을 떨었다. 그 때에야 그는 비로소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숨막히는 듯 한 열기가 그의 전신을 휩쌌다. "라우라." 그는 그녀 곁으로 다가섰다. "안 돼요. 가까이 오지 마세요. 전 돌아가겠어요." 그렇게 말하고 있을 때 그의 팔이 그녀의 몸을 껴안았다. 그들의 입술이 서로 닿았다. 그녀가 얼마나 오래 전부터 조를 원하고 있었는지 좀더 분명히 알게 된 조에게는 사나운 물결처럼 기쁨이 덮쳐 들었다. 이 몇 개월 동안 그녀는 얼마나 처절히 남이 알 수 없는 싸움을 해왔던가. 두 사람의 포옹은 길었다. 교회당 안의 어둠이 빨갛게 물들며 이 두 사람을 감쌌다. 두 사람은 스탠리도, 엄청나게 쏟아지는 비도, 돌아가야 할 것도 모두 잊은 채 열기에 휘말려 언제까 지나 그대로 있었다.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 상이 그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 다.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