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의 믿음이야기 지은이:A.카뮈 외 출판사:푸른샘 어떤 손님 다뤼 선생은 이쪽을 향해 올라오는 두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말을 타고 한 사람은 걸어오고 있었는데, 그들은 아직 산 중턱에 자리잡은 학교로 통하는 험한 길에 이르 지는 못했다. 그들은 쓸쓸한 고원의 넓은 벌판에 깔린 돌부리를 피해 눈 내리는 길을 천천 히 걸어오는 길이었다. 말은 가끔 휘청거렸다. 코에서 내뿜는 입김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눈으로 볼 수는 있 었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그 지방 지리를 잘 아는 성싶었다. 그들은 며칠 전부터 수북 히 쌓인 눈 더미를 헤치며 줄곧 길을 더듬어 오는 것이었다. 다뤼는 그들이 삼십 분 이내로 언덕 위에 올라오지는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날씨는 쌀쌀했다. 그는 털 재킷을 입으려고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교실은 텅 비고 찬바람이 돌았다. 흑판 위에는 사흘 전부터 여러 가지 색깔의 분필로 그 려진 프랑스의 강 네 개가 항구로 흐르고 있었다. 8개월 동안이나 가뭄이 계속되더니, 10월 중순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눈이 마구 퍼부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원지대에 산재해 있는 마을에 사는 20여 명의 학생들은 학교에 오지도 못하고 날씨가 개이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뤼는 교실 곁에 있는 자기 방에만 불을 지피고 있었다. 동쪽 언덕을 향한 그의 방엔 창문 하나가 남쪽으로 향해 있는데, 그 창문에서 내다보면 학교는 고원의 남쪽으로 내뻗기 시작한 기슭에서 몇 킬로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맑은 날이 면 그 창문을 통해 황무지를 거느리고 여러 골짜기를 이룬 보랏빛 산봉우리들이 내다보였 다. 몸을 좀 녹인 다뤼는 조금 전에 두 사내를 발견한 창문으로 돌아왔다. 이젠 그들은 보이 지 않았다. 필경 그들은 험한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늘은 훤히 트이고 밤사이에 눈이 그쳤다. 희미한 햇살이 비쳐오며 날이 밝았다. 그러나 방안은 좀처럼 훤해지질 않았다. 오후 두 시나 되어야 겨우 낮이 된 듯 싶었다. 이중으로 된 교실 출입문을 마구 흔들어대던 눈보라 속에서 지내온 지난 사흘 동안, 그는 암탉들을 돌보거나 석탄을 가지러 갈 때 이외에는 밖에 나간 일이 없었다. 그는 자기 방에 서 지루한 시간을 보낸 것이다. 다행히 눈보라가 몰아치기 이틀 전에, 가까운 북쪽 마을의 화물차가 식량을 운반해 왔었다. 그 화물차는 48시간 후에나 다시 오게 될 것이다. 그 밖에 그의 조그마한 방에는, 당국에서 한해로 피해를 입은 학생들의 가족에게 분배해 주라고 보내온 밀가루 포대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가난했으므로 불행은 모든 사 람이 겪는 일이었다. 그는 날마다 하루치의 식량을 학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요새 사나운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람에 그들에게는 식량이 더욱 부족했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오늘 저녁엔 학생들의 부모님까지 몇 됫박의 밀 배금을 타러 학교에 찾아올 것이다. 그들은 돌아오는 수확기까지 연명해 가야만 할 처지에 있었다. 프랑스로부터 곡식을 실은 배가 어제 도착하였으니 가장 어려운 고비는 넘기게 된 셈이다. 그러나 그들은 누더기를 걸 치고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벌판을 헤매는 유령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점점 더 타 들어가는 고원지대, 말라붙은 땅덩이, 발밑에서 햇볕에 달구어진 돌들이 먼지처럼 부서지는 모습 등은 차마 잊을 수 없는 참상이었다. 양들은 수천 마리씩 때죽음을 하고, 사람들도 여기 저기서 몇몇이 숨을 거두었다. 이와 같은 참상을 바라보며 외딴 학교에서 수도사처럼 파묻혀서, 그가 가지고 있는 하찮 은 것과 따분한 인생에 만족하며 살아온 그는, 진 흙벽에 조그마한 송판과 생나무로 만든 선반, 그리고 매주 한 번씩 실어오는 음료수와 식량의 보급 속에서 스스로 장관이라도 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때에 오라는 비는 내리지 않고 멀쩡하던 날씨가 갑자기 눈을 쏟아낸 것이다. 아무도 막을 수 없고 사람의 힘으론 어찌할 수 없는, 그렇게 살기 힘든 고장이었다. 그런 고장에서 태어난 다뤼는 어디를 가나 귀양살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는 학교 앞 둑으로 나왔다. 그 두 사내는 이제 언덕 위에 이르렀다. 말을 탄 사람은 그와 알고 있는 늙은 헌병 바듀치였다. 헌병은 한 아랍인을 묶은 끈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 아랍인은 손이 묶인 채 고개를 숙이 고 헌병의 뒤를 묵묵히 따르고 있었다. 헌병은 다뤼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였지만, 아랍인을 감시하느라 다뤼가 인사하는 것도 몰 랐다. 그는 푸른색의 지에라바(회교도의 옷)를 입고, 두툼한 털 양말에 샌들을 신었으며, 머 리에는 좁고 짧은 때를 두르고 있었다. 그들은 가까이 다가왔다. 헌병은 뒤따라 걷는 아랍인이 힘에 겹지 않도록 천천히 말을 몰 고 있었다. 헌병은 목소리가 들릴 만한 곳에 이르자 소리쳤다. "엘 아뫼르에서 오는 길이오. 3킬로미터를 한 시간이나 걸려서 왔소." 다뤼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두꺼운 재킷을 입은 탓으로 키는 작고 어깨만 넓어 보 이는 다뤼는, 다만 그들이 올라오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랍인은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들어와서 좀 녹이시죠." 그들이 둑 위에 이르자 다뤼는 이렇게 말했다. 헌병은 노끈을 잡은 채 말에서 내려 위로 뻗친 콧수염을 벌름거리며 웃어 보였다. 햇볕에 그을린 이마 밑의 움푹 파인 새카만 눈과, 주름살에 둘러싸인 입은 조심스럽고 착실한 인상 을 주었다. 헌병은 말을 헛간에 매어두고, 학교에서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에게로 돌아왔다. 다뤼는 그들을 자기 방으로 안내했다. "교실에다 불을 때도록 하죠. 거기가 더 편할 테니까."하고 헌병은 말했다. 다뤼가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왔을 때, 헌병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는 아랍인을 묶은 노끈을 풀어 주었다. 그러나 손은 묶인 채 난로 앞에 쭈그리고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 다. 처음에 다뤼는 흑인같이 크고 두툼하며 반질반질한 아랍인의 입술만이 눈에 띄었으나, 자 세히 보니 코는 날이 서고 새까만 눈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집 세게 생긴 이마가 머리띠 밑으로 드러나 보이고, 거무죽죽하고 추위에 여윈 듯한 얼굴에는 불안감과 반항심이 뒤섞여 있었다. 그런 그가 다뤼를 뚫어지게 바라보자 가슴은 뜨끔했다. "옆방으로 가시죠. 차를 끓여 드릴 테니." 다뤼가 그렇게 말하자, "고맙소. 이게 무슨 고생이람! 어서 그만 둬야지."하고 헌병은 그렇게 말하며 아랍인을 불 렀다. "너, 이리 와!" 아랍인은 묶인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교실로 들어섰다. 다뤼는 차와 의자를 가지고 왔다. 헌병은 맨 앞의 학생용 책상 위에 걸터앉고, 아랍인은 창문과 테이블 사이에 놓인 난로 앞 교단에 기대어 쭈그리고 있었다. 다뤼는 그 앞에 찻잔을 내밀려다가 묶인 손목을 보고 주저했다. "풀어도 괜찮지요?" "풀어야지. 데리고 오느라고 그런 거니까...."하면서 헌병은 일어섰다. 다뤼는 찻잔을 마룻바닥에 놓고 아랍인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아랍인은 강렬한 눈으로 말없이 보고만 있었다. 밧줄이 풀리자 그는 부어오른 손목을 마주 비비고 나서 찻잔을 들고 죽죽 들이마시는 것이었다. "어디로 가시죠?"하고 다뤼가 입을 열었다. 헌병은 찻잔에서 콧수염을 꺼내더니 "겨우 여기까지 왔지요."하는 것이었다. "그럼 당신들 여기서 잘 작정이세요?" "아니, 나는 엘 아뫼르로 돌아갈 테니 당신이 이 자를 탱귀로 좀 데려다 주슈. 합동 수사 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헌병은 다뤼에게 다정한 미소를 던졌다. "무슨 말씀이죠? 사람을 놀리는 겁니까?" "천만에, 나는 명령을 받았소." "명령요? 나는...." 다뤼는 주춤했다. 그는 늙은 코르시카 영감을 괴롭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내 직책이 아니지 않소?" "거 무슨 소리요? 전시에는 무슨 일이든 해야 하요!" "그렇다면 선전포고를 할 때까지 기다리지요." 헌병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소. 그러나 명령을 받았고. 당신과도 관계가 있지. 새로운 폭동이 일어날 모양인지 공 기가 심상치 않아요. 우리는 어떤 의미에선 동원된 거나 마찬가지라오." 다뤼는 여전히 완강하게 버티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당신을 좋아하오, 내 심정을 좀 알아 줘야지. 엘 아뫼르에는 헌병이 모두 열두 사람뿐인데, 꽤 넓은 지역을 순찰해야 해요. 그러므로 부득이 돌아가야 하오. 이 자를 당신에게 맡기고 곧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소. 이 자를 거기 둘 수는 없거든. 마을사 람들은 이 자를 구출하려고 법석들이니까. 내인 해지기 전까지 당신이 이 자를 탱귀까지 데 리고 가야 되오. 당신 같은 장정에게는 이십 킬로미터쯤은 문제가 아닐 테니까. 데리고 가기 만 하면 일은 끝나는 거요. 그리고 돌아와서 학생들과 다시 재미있는 나날을 보내면 되지 않소." 벽 뒤에서 말이 재채기를 하며 발굽으로 땅을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뤼는 창밖을 내 다보았다. 하늘은 말끔히 갰다. 눈에 덮인 고원 위에 햇살이 퍼지고 있었다. 눈이 모두 녹으 면 태양은 다시 대지 위를 지배할 것이며, 돌밭을 태워버릴 것이다. 하늘은 변함없이 인적을 찾아보기 힘든 적막한 대지 위에 건조한 햇볕을 내려쬐일 것이다 . "그렇지만...."하고 다뤼는 헌병에게 돌아서며 말했다. "대체 이 자가 무슨 짓을 했나요?"그는 헌병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말을 계속했다. "이 자는 불어를 아나요?" "한 마디도 못하오. 우리는 이 자를 한달 전부터 찾아다녔는데, 한 패거리들이 숨겨 주었 소. 이 자는 자기 사촌형을 죽였다오." "우리의 적인가요?" "그렇지야 않을 테지. 그러나 혹시 모르겠소." "왜 죽였을까요?" "잘은 모르지만 집안 싸움을 했던가 보오. 서로 곡식을 빌려주거나 했던 모양인데 아무튼 낫으로 염소를 죽이듯이 자기 사촌을 푹 찔러 죽였단 말이오." 헌병이 자기 목에 칼을 찌르는 시늉을 하자 아랍인은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뤼는 그 사내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지닌 악독과 증오와 피비린내 나는 미친 짓에 대 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난로 위에 올려놓은 주전자의 차가 끓어올랐다. 헌병에게 한잔 더 권하고 머뭇거리다가 아랍인에게도 다시 따라 주었다. 아랍인은 벌컥벌컥 마셔버렸 다. 다뤼는 아립인이 팔을 올렸을 때 옷깃이 벌어진 사이로 그의 메마른 가슴을 보았다. "고맙소. 그럼 나는 가겠소."헌병은 말했다. 그는 일어서서 아랍인에게 다가가면서 호주머니에서 노끈 하나를 꺼내었다. "어떻게 하시려구요?"다뤼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헌병은 난처한 표정으로 노끈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잖았요?" 늙은 헌병은 머뭇거리며, "좋도록 하시오. 물론 무기는 갖고 있겠죠?" "엽총이 있어요." "어디 있소?" "고리짝 속에요." "머리맡에 놓고 자도록 해요." "그건 왜요? 난 전혀 두렵지 않은데요." "당치 않은 소리 마시오. 만일 그들이 들고일어나면 꼼짝 못하고 일을 당하는 거요. 우리 는 모두 같은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문제없어요. 나는 그들이 밀어닥치는 것을 살필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까요." 헌병이 웃기 시작하자 콧수염이 이내 하얀 이빨을 덮어버렸다. "시간이 있다구? 그래 내가 하려는 말이 바로 그거요. 당신은 좀 비정상이야. 그래서 당신 을 좋아하지. 우리 아들놈도 그랬지."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 권총을 빼서 테이블 위에 놓았다. "갖고 있어요. 난 여기서 엘 아뫼르까지 가는 데 두 자루의 총은 필요 없소." 권총은 검은 테이블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헌병이 다뤼에게로 돌아섰을 때, 가죽 냄새 와 말 냄새가 동시에 풍겨 왔다. "바듀치 씨!" 갑자기 다뤼가말했다. "이런 일은 마땅치가 않아요. 나는 그를 연행하지 않겠어요. 당신과 싸우는 한이 있더라고 그 짓은 못해요." 노헌병은 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하고 그는 말했다. "하긴 나도 이 자를 노끈으로 묶기 싫고. 이 짓을 여러 해 해오지만 아직도 이런 일에 익 숙하지 못할 뿐 아니라 부끄럼을 느낄 때도 있소. 그러나 그냥 놔둘 수도 없는 일 아니겠 소." "여하튼 나는 연행하지 못하겠어요."다뤼는 되풀이해 말했다. "이건 명령이요. 거듭 말하지만 복종해야 하오." "내가 한말을 부대에 가서 이야기하시죠. 나는 그를 연행하지 못하겠어요." 헌병은 무슨 궁리를 하는 눈치였다. "천만에, 나는 돌아가서 아무 소리도 않겠소. 만일 당신이 우릴 저버릴 생각이라면 좋을 대로하시오. 난 당신을 고발할 생각은 없으니, 나는 죄수를 전달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대로 했을 뿐이오. 당신은 서류에 서명을 해야 되오." "필요 없어요. 난 당신이 죄인을 맡긴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나를 힘들게 하지 좀 마시오. 당신의 본심은 잘 알고 있소 만 당신은 이 고장 사람이고, 우리는 같은 부류가 아니겠소. 어쨌든 서명은 해야 하오.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다뤼는 서랍을 열고 사각형의 조그마한 잉크병과, 그가 펜습자로 쓸 때 사용하는 세르장 마조르 상표의 촉이 달린 빨간 펜대를 꺼내어 서명을 하였다. 헌병은 서명한 종이를 소중하게 접어서 지갑 속에 넣고 문 앞으로 걸어갔다. "바래다 드리죠."하고 다뤼가 말했다. "그런 친절을 베풀 필요는 없소. 나를 힘들게 할 때는 어제고...." 헌병은 옆에 앉아 있는 아랍인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서글픈 얼굴을 하고 코를 훌쩍이며 문 앞으로 돌아섰다. "잘 있으시오!" 한 마디 던지고 그가 밖으로 나가자 문 닫히는 소리가 나고, 창문 너머로 그의 모습이 어 른거리더니 이내 발자국 소리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뒤켠에서는 말이 서성거리고 암탉들이 놀라 도망쳤다. 잠시 후에 헌병은 말고삐를 잡고 창문 앞을 지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언덕을 향해 말과 함께 사라졌다. 이어서 커다란 돌들이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뤼는 죄수에게로 돌아왔다. 죄수는 몸을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눈을 잠시도 그에게 떼지 않았다. 다뤼는 아랍어로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자기 방 문지방을 넘어서다 말고, 마음을 돌 이켜 테이블에 놓여 있는 권총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돌아보지도 않고 자기 방 으로 가버렸다. 그는 한 동안 소파 위에 누워서 저물어 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정적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 다. 그것은 전쟁이 끝나고 그가 다시 이곳에 와서 지내던 처음 며칠 동안 그의 마음을 괴롭 히던 바로 그 정적이었다. 그때 그는 사막으로부터 그 고원을 갈라놓은 산줄기 밑의 조그마한 마을에서 일자리를 구 했던 것이다. 그 고장에서는 북쪽은 초록빛과 검정빛, 남쪽은 다홍색이거나 자색의 벽돌이 여름의 경계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는 같은 고원의 좀 더 북쪽지방으로 보직을 받았다. 처음에는 돌밖에 눈에 띄지 않는 그 고장에서 고독과 정적으로 인하여 몹시 괴로웠다. 간혹 눈에 띄는 밭고랑 같은 것은 그에게 농사는 연상시켰으나, 그것은 다만 건축에 쓸 돌을 파내느라고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고랑이었다. 여기서는 밭은 간 다기보다는 돌을 주워 내기 위해 땅을 파는 것이었다. 옛날에는 구덩이 속에서 흙부스러기를 긁어내어 초라한 정 원에 거름으로 사용한 적도 있었다. 아마도 그 고장의 4분의 3은 돌이 차지하고 있을 것이 다. 그러한 곳에도 도시가 생겨났다가 사나운 햇볕에 타서 사라지곤 하였다. 사람들은 그런 데서도 서로 사랑하기도 하고 헐뜯기도 하며 죽어갔던 것이다. 사막에서는 자기나 아랍인 죄수나 보잘 것 없기로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 막을 떠나서는 살 길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교실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아랍인은 도망칠 수 있었을 것이고, 자기는 아무 결단을 내릴 필요도 없이 혼자 남게 되리라는 생각이 떠오 르자 마음이 후련해져 스스로도 놀랐다. 그러나 죄수는 도망치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는 테 이블과 난로 사이에서 다리를 펴고 잠들어 있었다. 좀 심술궂어 보이는 두터운 입술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리 와요!:"하고 다뤼는 그에게 말했다. 아랍인은 일어나서 그의 뒤를 따라왔다. 다뤼는 방안에 들어서자 창문 곁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그는 다뤼를 쳐다보면서 의자에 앉았다. "배 고파요?" "네"하고 죄수가 대답했다. 다뤼는 두 벌의 식기를 꺼내었다. 밀가루와 기름을 접시에 개어서 과자 반죽을 하여 가스 풍로에 불을 붙였다. 과자가 익는 동안에 헛간으로 치즈, 계란, 대추 그리고 분유를 가지러 갔다. 과자가 다 익 자 그것을 식히려고 창가에 갖다 놓았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계란을 부쳤다. 그러는 동 안에 오른쪽 호주머니에서는 권총이 덜거덕거렸다. 그러자 그는 접시를 놓고 교실로 가서 권총을 테이블 서랍속에 넣어 두었다. 그가 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캄캄한 밤이 되었다. 그는 등불을 켜고 아랍인에게 음식을 권했다. "드시오." 아랍인은 과자조각을 재빨리 입에 가져가더니 잠시 머뭇거렸다. "선생은 안 드십니까?" "당신이 먹은 다음에 먹을 거요." 아랍인은 두꺼울 입술을 벌리고 약간 주저하다가 무슨 결심이라도 한 듯이 과자를 깨물었 다. 식사가 끝나자 아랍인은 교사게게 물었다. "선생님이 심판관이십니까?" "아니요. 나는 당신을 내일까지 보호하는 것 뿐이요." "선생님은 왜 나 같은 사람과 같이 식사를 하세요?" "배가 고프니까 먹지요." 그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다뤼는 밖으로 나갔다. 그는 헛간에서 간이 침대 하나를 들고 와서 자기 침대와 수직으로 테이블과 난로 사이에 놓았다. 그리고 한 구석에 세워두고 서류 선반으로 쓰던 트렁크에서 두장의 담요를 꺼내 침 대 위에 깔았다. 별로 할 일도 없는 그는 자기 침대에 걸터 앉았다. 그가 할 일이란 그 사내를 바라보는 것 뿐이었다. 그는 분노로 가득찼을 때의 그 사내의 표정을 상상하면서 그 얼굴을 바라보았 지만, 다만 가무잡잡하게 빛나는 사내의 눈과 동물적인 입술이 유난히 눈에 띌 따름이었다. "왜 사촌형을 죽였어요?" 그는 사내가 놀랄 만큼 적의를 품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놈이 도망치기에 뒤쫓아가서 해치웠지요." 그는 얼굴을 쳐들면서 말했다. 그들은 둘 다 일종의 불쾌한 의문에 사로잡혔다. "이제 저는 어떻게 되나요?" "불안한가요?" 사내는 시선을 돌리면서 몸을 웅크렸다. "후회하나요?" 아랍인을 입을 벌린 채 그를 쳐다보았다. 아마도 말 뜻을 잘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뤼는 마음이 초조해졌다. 두 침대를 놓고, 큼직한 몸뚱이를 눕힐 생각을 하니 어쩐지 마음 이 꺼림칙했다. "이것이 당신 침대요. 어서 주무시오." 그는 자기 감정을 억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랍인이 조용히 말했다. "선생님!" 다뤼는 그를 쳐다보았다. "헌병이 내일 또 오나요?" "나는 잘 모르겠소." "선생님도 우리와 함께 가나요?" "모르겠는데, 왜 묻지요?" 죄수는 창문 쪽으로 발을 두고 담요 위에 누웠다. 등불이 그의 눈으로 곧장 비추므로 그 는 눈을 감아버렸다. "왜 물어요?" 다뤼는 침대 앞에 서서 다시 물었다. 아랍인은 눈이 아플 정도로 밝은 불빛 아래서 눈을 껌벅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다뤼를 쳐다보았다. "선생님도 함께 가 주세요."하고 그는 말했다. 다뤼는 그날 밤 뜬 눈으로 새웠다. 그는 옷을 홀딱 벗고 침대에 누웠다. 그렇게 습관이 되 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알몸이 되자 불안한 생각이 들어 옷을 다시 입으려고 했 지만, 마음을 돌이켜 그냥 있었다. 남들도 그렇게 하고 자는 것을 보았으며, 만일 필요할 때 엔 언제든지 한방에 때려눕히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는 침대 위에서 그 사내를 관찰할 수 있었다. 사내는 밝은 불빛 아래 천장을 향해 조용 히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다뤼가 불을 끄자 어둠이 한숨에 얼어붙는 것 같았다. 별도없는 하늘이 고요히 움직이는 것이 내다보이는 창가에서, 밤은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었다. 다뤼는 자기 앞에 누워 있는 몸뚱이를 곧 알아볼수 있었다. 아랍인은 몸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지만 눈은 뜬 모양이었다. 학교 주위를 산들바람이 불고 있었다. 아마도 그 바람이 구름을 몰아내면 내일 아침에는 밝은 햇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바람이 점차 기세를 울렸다. 암탉들이 소란을 부리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아랍인은 다뤼 쪽으로 등을 돌리고 모로 누워 있었다. 그는 끙끙거리는 것 같았다. 그리하 여 점점 세차게, 그리고 규칙적으로 변해가는 그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뤼는 그 숨소 리가 너무나 분명히 들려오기 때문에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 그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일년 전부터 혼자 자던 자기 방에, 딴 사람이 잔다는 것이 어쩐지 부자연스러웠다. 자기자 거부한 일종의 우애를 그 사내는 그에게 강요했기 때문에 그는 괴로웠다. 병정이든 죄수이 든 간에 한 방을 쓰는 사람들은 마치 꿈속에서 알몸이 되어 사회적인 지위를 초월하여 영원 한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서 손을 마주 잡듯이 기이한 인연을 맺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다뤼는 몸을 움직였다. 그는 자기의 어리석은 짓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잠을 청하려고 하였다. 잠시 후에 아랍인은 몸을 약간 뒤척였다. 다뤼는 눈이 말똥거렸다. 죄수가 다시 몸을 움직 이자 다뤼는 더욱 긴장했다. 아랍인 죄수는 천천히 팔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것은 거의 몽유병자와 같은 동작이었다. 그는 몸을 돌리지 않고 침대 위에 우두커니 앉아서 귀를 기울 이고 있는 듯했다. 다뤼는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는 테이블 서랍속에 넣어둔 권총을 생각했 다. 곧 행동을 취하는 것이 좋을 듯 싶었다. 그는 사내를 감시하고 있었다. 죄수는 발을 바 닥에 내려놓더니 한참만에 천천히 일어섰다. 다뤼는 아랍인이 걷기 시작하자 그를 부르려고 하였다. 그는 자연스럽고 조용한 태도로 헛간으로 통하는 문을 향해 발을 옮겨 놓았다. 조심 스럽게 손잡이를 돌리고 문을 열어 놓은 채 밖으로 나갔다. 다뤼는 가만히 있었다. '도망쳤 군. 오히려 잘 됐어.'이렇게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도 그는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암탉들이 떠들지 않는 것을 보니 그는 반대 쪽 언덕에 있는 모양이었다. 어렴풋이 어디선 가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랍인이 돌아와서 슬그머니 문을 닫고 조용히 다시 침 대에 누웠을 때야 비로소 그 물 소리의 정체를 알아챘다. 다뤼는 그제서야 그에게로 등을 돌리고 잠이 들었다. 얼마뒤에 꿈속에서 학교 주변을 거니는 발길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꿈을 꾸고 있어, 꿈이야." 다뤼는 이렇게 잠꼬대를 하면서 자고 있었다. 그가 깨어났을 땐 하늘은 훤히 밝았다. 잘 들어맞지 않는 창문 틈으로 차고 맑은 공기가 스며들었다. 아랍인은 담요 속에서 입을 벌린 채 웅크리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다뤼가 흔들어 깨우자 그는 벌떡 일어나 미친듯한 눈초리로 다뤼를 쳐다보았다. 다뤼를 알아보지도 못한 듯 겁에 잔뜩 질린 얼굴로 쳐다보므로 다뤼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나요, 그렇게 무서워할 것 없어요. 아침을 먹어야지." 아랍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자고 대답했다. 그의 마음은 가라앉은 듯 싶었으나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커피가 끓자, 두 사람은 간이침대 위에 앉아서 과자를 씹으며 커피를 마셨다. 다뤼는 아랍 인을 뒷마루 지붕 밑으로 데리고 가서 세수를 하라고 수도를 가리켜 주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와 방안을 정리했다. 그리고 나서 교실을 지나 둑으로 나갔다. 푸른 하늘에는 벌써 해가 떠올라 신선한 햇살이 삭막한 고원을 비치고 있었다. 언덕에서 눈 군데군데 눈이 녹아내렸다. 돌들도 따뜻한 햇볕을 쪼이게 될 것이다. 다뤼는 둑 한쪽 끝에 쭈그리고 앉아서 삭막한 땅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헌병 생각을 하 고 있었다. 그는 헌병을 괴롭히더도 아랍인을 돌려 보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도 헌병의 작별인사가 그의 귓전을 울리고 있었다. 그는 까닭 보르게 공허하고 무기 력한 심정에 사로잡혔다. 그때 학교 저편에서 죄수의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다뤼는 그 소리 를 듣자 갑자기 화가 나서 돌을 집어던졌다. 돌을 쌩소리를 내면서 날아가 눈 위에 떨어졌 다. 아랍인의 어리석은 범죄가 그에게 반발을 일으키게 했다. 그러나 그를 경찰에 넘겨다 준 다는 것은 명예롭지 못한 일이었다. 그것은 생각만 해도 굴욕감으로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아랍인을 자기에게 보낸 동족과, 살인을 하고도 도망칠 줄 모르는 아랍인을 원망했다. 그는 일어나서 둑을 빙빙 돌다가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아랍인은 헛간 시멘트 바닥에 허리를 굽히고 두 손가락으로 이를 닦고 있었다. 다뤼는 그 것을 보고 있다가 이윽고, "이리 와요!"하고 말했다. 그는 앞장 서서 방안으로 들가 그는 재킷 위에다 사냥용 저고리 를 덧입고 군화를 신었다. 그리고 아랍인이 벙거지를 쓰고 샌들을 신는 것을 기다렸다. 그들은 학교 앞을 지나자, 다뤼는 아랍인에게 출구를 가리키며, "가시오!"하고 말했다. 아랍인은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나도 같이 갈까?" 다뤼가 물었다. 아랍인은 밖으로 나갔다. 다뤼는 방에 들어가서 바스켓과 대추 그리고 설 탕을 싸들었다. 그는 교실을 나서기 전에 테이블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문지방을 넘어서자 문을 닫아 걸었다. "이리로 가야 해요."하고 다뤼는 말했다. 그는 죄수더러 뒤따르라 하고 동쪽을 향해 걸어 갔다. 얼마 가지 못했을떄 학교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되돌아와서 교사 주위를 살폈으나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아랍인은 영문 모를 그의 거동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갑시다."하고 그가 말했다. 그들은 한 시간쯤 걸은 후에 석회암으로 된 산 밑에서 쉬었다. 눈은 점점 빨리 녹기 시작 했다. 태양은 곧 진탕물을 빨아올려 삽시간에 고원지대를 말라붙에 하고, 바람이 일기 시작 하였다. 그들이 다시 출발했을 때 흙이 발밑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때때로 새소리가 공 간을 뚫고 들려왔다. 그들은 심호흡을 하며 신선한 공기와 햇볕을 들이마셨다. 푸른 하늘 아래, 이제는 거의 황금빛이 된 낯익은 대자연의 품에 안겨 생기가 솟아올랐다. 그들은 남쪽을 향해 다시 한 시간쯤 걸어갔다. 드디어 부서지기 쉬운 바위로 된 평탄한 언 덕에 이르렀다. 거기서부터 고원은 두 갈래로 갈라져있었다. 동쪽으로는 메마른 몇 그루의 나무가 보이는 평원으로 내려가게 되었고, 남쪽으로는 기복이 심한 바윗돌로 뒤덮인 벌판으 로 뻗어 있었다. 다뤼는 그에게 보따리를 내밀었다. "받아둬요. 대추하고 빵하고 사탕이요. 이틀은 먹을 거요. 자, 여기 돈 백 프랑도." 아랍인은 보따리와 돈을 받아들었다. 그러나 그는 받아든 것을 어찌할지 몰라 어물어물 하고 있었다. "보시오." 다뤼는 동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가 탱귀로 가는 길이요. 두 시간만 더 걸어가면 되오. 거리에서 헌병들이 당신을 기 다리고 있을 것이오." 아랍인은 여전히 보따리와 돈을 두 손에 든 채,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뤼는 그의 팔을 잡아 끌고 남쪽으로 몸을 돌리게 하였다. 그들이 서 있던 높은 지대 밑 에 보일락말락 하는 길이 있었다. "이게 고원을 횡단하는 길이요. 여기서 하루만 더 걸으면, 초원과 목자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오. 그들은 그들 나름의 법도에 따라 당신을 숨겨 줄 거요." 아랍인은 다뤼에게로 돌아섰다. 그의 얼굴에는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선생님!"하고 그가 입을 열었다. 다뤼는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아니오, 아무말도 마시오. 자, 나는 그만 가 보겠소." 그는 돌아섰다. 학교쪽으로 두어 걸음 옮겨놓다가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아랍인을 되돌아본후 발길을 재 촉했다. 한동안 그는 차가운 땅 위에 힘차게 들리는 자기 발걸음 소리 밖에는 듣지 못했다. 그는 말없이 걸어가다가 얼마 후에 뒤를 돌아다 보았다. 아랍인은 여전히 언덕 위에 서서 팔을 아래로 내리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뤼는 목이 조여드는 것 같아 무어라고 한 마디 투덜거리고 손을 내저으며 발길을 재촉 했다. 그가 다시 멈추어 서서 돌아보았을 때 아랍인은 이미 가버리고, 언덕에는 아무도 보이 지 않았다. 다뤼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하늘에 높이 솟은 해는 그의 이마 위를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 다. 그는 처음에는 머뭇거리다가 결심이라도 한 듯 길을 되돌아갔다. 언덕에 이르렀을 때 온 몸에 땀이 비오듯 했다. 그는 언덕을 바삐 기어오르느라고 숨을 헐떡거렸다. 바위로 뒤덮은 벌판이 남쪽으로 훤히 내다보였다. 그리고 동쪽 평원에서는 벌써 아지랑이 가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그 엷은 안개 속에서 감옥으로 가는 길을 천천히 걷고 있는 아랍 인을 발견하자 다뤼는 가슴이 뭉클했다. 그는 이윽고 교실 창문 앞에 서서 고원 위로 신선한 햇살이 출렁이는 것을 무심히 바라보 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 있는 칠판에는 프랑스의 강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가운데 서툰 백묵글씨 로 너는 우리 형을 끌고 갔다. 두고 보자. 라고 씌어 있었다. 다뤼는 하늘을 보고, 고원을 본 다음, 바다가 있는 곳까지 뻗고 있는 저 너머 눈이 모자라 는 먼 땅을 바라보았다. 그가 그토록 사랑한 넓은 허허벌판에 그는 혼자 서 있었다. 알베르 카뮈 (1913-1960) 프랑스의 소설가이며 극작가.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 때 아 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빈민가에서 소년시절을 보내고 고학으로 대학을 다녔다. 그는 세상의 근원적인 부조리에 저항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이방인으로 명성을 날리고, 1957년 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작품으로 페스트, 시지프의 신화, 전락등이 있다. 머슴과 빈 북 에밀리안은 주인집에서 살고 있는 머슴이었다. 그는 어느 날 일터로 가는 길에 목장을 지 나게 되었다. 발검음을 옮기다가 느닷없이 개구리 한 마리가 눈 앞에 튀어나와 하마터면 밟 을 뻔했다. 그는 가까스로 개구리를 피해서 지나갔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 렸다. "에밀리안 씨!" 그가 뒤돌아보니 거기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다. "에밀리안 씨, 왜 결혼을 안 하세요?" "나 같은 가난뱅이한테 누가 시집이나 오겠어요?" 그러자 처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세요? 그럼 저를 아내로 맞으시면 어때요." 에밀리안은 몹시 기뻤다. "거 고마운 말씀이지만 살아갈 일이 큰 걱정이랍니다." "별 걱정을 다 하시네요. 사람이 잠을 적게 자고 부지런히 일을 하면, 먹고 입는 걱정은 안해도 될 거예요." "하긴 그렇지요! 그럼 좋습니다.그런데 어디서 살까요?" "도시로 가십시다." 그리하여 그들 남녀는 도시로 나왔다. 그녀는 변두리에 조그마한 집을 마련하고 그와 신 혼 살림을 차렸다. 하루는 임금님이 거리를 자나가게 되었다. 그들의 집은 길가에 있었으므로 그녀는 임금님 을 보려고 밖으로 나갔다. 임금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저 여자는 어디 출신일까?" 그녀의 미모에 반한 임금은 마차를 세우고 에밀리안의 아내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농부 에밀리안의 아내입니다." 그녀가 대답했다. "너같은 미인이 어떻게 농부의 아내가 되었느냐? 너는 왕비가 되고 싶지 않느냐?"하고 임 금이 물었다. "네, 말씀은 감사합니다마는 저는 농부의 아내로서 만족합니다."하고 그녀는 대답했다. 임금은 얼마 동안 그녀와 이야기를 나눈 후에 궁전으로 마차를 몰았다.임금은 궁전에 돌 아와서도 에밀리안의 아내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밤을 새워가면서 어떻게 하면 에밀 리안의 아내를 빼앗아 올 수 있을까 하는 궁리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끝내 묘안이 떠오 르지 않았다. 생각다 못해 임금은 신하들을 불러 좋은 방법을 모색하도록 분부했다. 이윽고 신하들이 입을 열었다. "먼저 에밀리안을 머슴으로 궁전에 불러들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옵니다. 그런 연후에 저희들이 놈을 학대해 죽게 만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과부가 되어 마음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임금은 이 진언을 받아들여 에밀리안에게 사람을 보내어 아내와 함께 궁전에 와서 봉사하 라고 분부하였다. 신하가 에밀리안에게 찾아와서 임금의 명령을 전했다. 그러자 그의 아내는 입을 열었다. "제 염려는 말고 가보세요. 낮에만 그곳에서 일하시고 밤에는 집에 돌아오시면 되잖아 요?" 에밀리안은 신하의 뒤를 따랐다. 궁전에 이르자 임금이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아내를 데리고 오지 않고 혼자만 왔느냐?" "집을 지키고 있는 아내를 무엇하러 데리고 옵니까?" 궁전에서는 에밀리안에게 두 사람의 몫의 일을 시켰다. 그는 말없이 일을 시작했고 저녁 때에는 일을 모두 끝마쳤다. 그러자 시종은 다음 날에는 네 사람 몫의 일을 맡겼다. 일을 마친 에밀리안은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깨끗이 정돈이 되어 있고, 아내는 저녁준비를 해 놓고 식탁 옆에 앉아 바느질을 하며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난로불을 활활 지펴 놓고 에밀리안을 맞아들였다. 그녀는 일에 지친 남편에 게 음식을 권하면서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물었다. "일이 이만저만 힘들지 않아요!"하고 그는 말을 계속했다. "이렇게 과중한 일을 하다가는 필경 쓰러지고 말 거요." "그래요? 그렇다고 너무 염려하지는 마세요. 그리고 어떻게 해야 일을 제대로 끝낼 수 있 을까 신경 쓸 것도 없어요. 부지런히 일을 하노라면 끝마치게 될 거예요." 아내의 위로를 듣고 에밀리안은 잠들었다. 이튿늘 아침이 되자 그는 또 다시 궁전으로 들 어가 곁눈질 한 번 팔지 않고 묵묵히 일을 했다. 그리하여 하루의 일을 무난히 끝마치고 어 둡기 전에 집에 돌아오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에밀리안의 일거리는 많아졌다. 그러나 그는 시간 안에 일을 끝마치고 밤이면 집에 돌아와 쉴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이 하여 1주일이 지 났다. 궁중에서는 어떤 일을 시켜도 에밀리안을 골탕먹일수 없게 되자, 이번에는 힘든 일을 시켰다. 그러나 그것도 별로 소득이 없었다. 에밀리안은 목수일, 석공일 또는 지붕고치는 일 까지도 무난히 해치우고 밤이면 아내에게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어느덧 2주일이 지났다. 임 금은 신하들을 불러 책망했다. "나는 너희들을 그냥 둘 수 없다. 벌써 2주일이 지났는데 무엇들을 하고 있느냐? 에밀리 안을 혹사하여 죽여 버리겠다고 큰 소리를 치더니 놈은 날마다 밤이면 콧노래를 부르며 돌 아가니 대체 나를 놀리는 거냐?" 신하들은 부지런히 변명을 늘어 놓았다. "저희들은 그놈을 호되게 부려서 못견디게 하려고 했사오나 무슨 일이나 척척 해냅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고 순식간에 해치웁니다. 놈은 어떤 인간인지 지칠 줄을 모릅니다. 그런 까닭에 생각다 못해 이번에는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을 시켰습니다. 하오나 그것마저 무난히 해치웠습니다. 무슨 일을 맡기든지 거침없이 해치우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어떤 마술을 쓰 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옵니다. 그런 까닭에 이번에는 아무래도 해낼 수 없는 일을 맡겨 보 려고 생각합니다. 다름 아니오라 하루에 큰 교회당을 지으라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에밀리안 에게 하루 동안에 궁전 앞에 큰 교회당을 지으라고 분부하십시오. 그리하여 놈이 그것을 해 내지 못할 때에는 명령을 어긴 죄로 목을 자르면 될 것입니다." 임금은 사람을 시켜 에밀리안을 불러들였다. "여봐라, 명심해서 듣거라!" 임금은 말을 계속했다. "너는 이 궁전 앞에 커다란 교회당을 지어야 해. 내일 밤까지 일을 마치면 많은 상을 줄 테지만 마치지 못할 경우에는 처형을 당할 것이다." 에밀리안은 임금의 명령을 받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이젠 죽었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오자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우리는 아무래도 이곳에서 도망쳐야겠소. 그렇지 않으면 죄도 없이 목숨을 빼앗기 게 생겼소." "뭐라구요? 왜 그렇게 겁을 먹고 계셔요?" 아내는 말을 이었다. "도망갈 필요는 없어요." "글세 겁을 먹지 않게 생겼나 생각해봐요. 나더러 내일 하루동안에 큰 교회당을 지으라는 거요. 그리고 그것을 끝내지 못하면 목을 자르겠다나? 그러니 별 수 있소? 도망치는 수밖 에...." 그러나 아내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임금에게는 많은 병정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어디를 가든 잡히지 않을 수 없지요. 도망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우리는 힘이 닿는 데까지 임금의 명령에 따라야 해요." "그렇지만 생각해 보구려.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어서 식사나 마치고 한잠 푹 주무세요. 그리고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세요. 그러면 일은 잘 되어 갈 거예요." 그는 아내의 말을 듣고 잠자리에 누웠다. 이튿날 아침 아내는 그를 일찍 깨웠다. "어서 궁궐로 나가세요. 그리고 부지런히 일을 하세요. 못과 망치가 있어요. 나가 보시면 당신이 할 일은 거의 다되어 있을 거예요." 에밀리안이 궁전 앞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커다란 교회당이 거의 세워져 있었다. 에밀리 안은 여기 저기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저녁 때에는 일을 무난히 마치게 되었다. 임금이 잠을 깨어 궁전에서 광장을 바라보니, 거기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교회당이 서 있 고 에밀리안은 여기 저기 못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임금은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임금 에게는 교회당은 필요치 않았고, 에밀리안을 처형하고 그의 아내를 빼앗으려던 구실이 없어 진 것이다. 그렇게 되자 인금은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임금은 다시 신하들을 불렀다. "에밀리안은 또 일을 거뜬히 해치웠다. 그러니 놈의 목을 벨 구실을 어디서 찾는단 말이 냐? 그런즉 너희들은 다른 묘안을 궁리해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너희들의 목을 먼저 베 어 버릴 테다." 신하들은 궁리 끝에 궁전 주위에 배가 지나다닐 수 있는 강을 파도록 에밀리안에게 분부 하도록 진언했다. 임금은 에밀리안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 "너 하루에 망루를 세울 수 있겠지? 이런 일쯤 아무 것도 아닐 테니, 내일 중으로 일을 마쳐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네 놈의 목을 벨 테다." 에밀리안은 더욱 놀라서 기가 죽었다. "왜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계셔요?"하고 아내가 물었다. "임금이 새로 어려운 분부라도 내렸나요?" 에밀리안은 자초지종을 아내에게 이야기했다. "이번엔 도리가 없소. 도망치도록 합시다." 아내가 말했다. "임금의 병정들이 얼마나 많은데 도망을 쳐요? 어딜 가나 곧 붙잡히고 말 거예요. 그러니 분부대로 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고 무슨 힘으로 분부대로 이행한단 말이요?" "그리 겁낼 건 없어요. 저녁이나 드시고 푹 주무세요. 내일 아침에는 일이 무사히 되게끔 할 테니까요." 에밀리안은 아내의 말대로 한 잠 푹 잤다. 날이 밝자 아내가 흔들어 깨웠다. "궁궐로 가세요. 준비가 다 되었어요. 다만 궁궐 앞에 있는 강가 근처에 쌓인 흙을 삽으로 평평하게 다지기만 하면 돼요." 에밀리안은 거리로 나섰다. 어느 새 궁궐 주변에는 강이 파져 있고, 큰 배도 오가고 있었 다. 그리고 궁궐 앞 한켠에 흙더미가 쌓여있고 강 옆이 좀 허술했다. 그러므로 그는 그곳을 삽으로 파서 정리하기 시작했다. 임금이 잠에서 깨어보니 어제까지 없던 강이 생기고 배도 왕래하고 있었다. 그리고 곁에 서 에밀리안이 삽으로 땅을 고르게 하고 있었다. 임금은 매우 놀랐다. 강에서 배가 오가는 모습을 보고도 임금은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불만스러웠다. '놈은 못하는 일이 없나 보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을꼬?' 임금은 이렇게 생각하고 신하들을 불러 말했다. "여봐라! 에밀리안을 기어코 골탕 먹여야겠는데 무슨 좋은 방도가 없겠느냐? 우리가 아무 리 지혜를 짜내어 골려주려고 해도 놈은 척척 감당해 내니. 그 년을 뺏아 오기는 다틀렸다!" 신하들은 머리를 짜낸 끝에 임금에게 한 가지 계략을 진언했다. "에밀리안더러 어딘가에 가서 어떤 알 수 없는 물건을 가져 오라고 분부를 내리십시오. 그렇게 되면 놈은 꼼짝 못하고 걸려들 것입니다. 놈이 어디에 가든 잘못 갔다고 트집을 잡 으시고, 어떤 물건을 가져오든지 임금님께서 원한 것이 아니라고 우기시면 됩니다. 그렇게 해서 놈의 목을 자르고 그 아내를 빼앗아 오십시오." 임금은 매우 기뻐하였다. "음, 거 참 좋은 생각이로구나." 임금은 에밀리안을 불러 분부를 내렸다. "어디 가서 어떤 알 수 없는 물건을 가져오도록 해라. 만약 내 분부를 어기면 네 목을 자 를 테다." 에밀리안은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임금의 분부에 대해 말했다. 아내는 심각한 얼굴을 하 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것은 필경...."하고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당신을 기어코 해치려고 신하들이 흉계를 꾸며 임금에게 말했나 보군요. 이번에는 조심 하셔야 해요." 그녀는 한 동안 골똘히 생각한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거리가 좀 멀어서 수고스러울 테지만 어떤 병정의 어머니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세요. 그리고 그 노파가 뭘 줄 테니 갖고 궁궐로 가세요. 저도 그리로 가겠어요. 이렇게 된 이상 저도 이제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군요. 꼼짝 못하고 붙들려 가게 생겼어요. 그렇지만 오래 붙잡혀 있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도 그 노파가 시키는 대로만 해 주신다면 저를 곧 구 해낼 수 있을 거예요." 아내는 남편에게 떠날 준비를 시키고 자루 하나와 방추를 내주었다. "이걸 노파에게 주세요. 그러면 노파는 당신이 제 남편인줄 알게 될 거예요." 그녀는 남편에게 길을 가르쳐 주었다. 에밀리안은 길을 떠났다. 거리를 지나 한참 갔더니 병정들이 훈련은 하고 있었다. 이윽고 병정들이 훈련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자, 에밀리안은 가까이 다가가서 말을 건넸다. "여보시오. 어딘가에 가서 알 수 없는 물건을 가져오려면 어떻게 하면 좋지요?"하고 묻자, 병정들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누구한테 그런 부탁을 받았소?"하고 그중 한 병정이 대답했다. "실은...." 병정은 말을 계속했다. "우리도 어딘지 모르는 곳을 향해 진군하고 있소. 그러니 좀처럼 목적지에 닿을 수 없소. 그리고 우리도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물건을 찾고 있는데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소. 그러니 당신에게 뭐라고 일러줄 수 있겠소?" 에밀리안은 병정들과 함께 한동안 휴식을 취하고 나서 다시 길을 떠났다. 그는 얼마 후, 어느 숲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움막이 있고, 그 안에 병정의 어머니가 꿇어앉아 눈물을 흘리 면서 베를 짜고 있었다. 노파는 베를 짜면서 눈물로 손끝을 적셨다. 그녀는 에밀리안을 보고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어떻게 여기까지 왔소?" 에밀리안은 노파에게 방추를 꺼내 보이고 아내가 자기를 그곳으로 보낸 사연을 이야기했 다. 그러자 노파는 싱글벙글하면서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에밀리안은 지금까지 겪은 일을 상세히 말했다. 즉 아내와 결혼하게 된 동기며, 도시로 이사한 일, 임금에게 불려가서 여러 가지 어려운 분부를 받아 왔다는 사실, 망루를 세우고 배가 다니는 강을 판 일이며, 임금이 어딘가에 가서 알 수 없는 물건을 찾아 오라는 명령을 한 경위를 이야기했다. 노파는 이야 기를 끝까지 듣고 나서 울음을 그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드디어 때가 된 모양이군." 이어 노파는 에밀리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과히 염려할 것 없어요. 이리로 와요. 뭐 좀 먹어야지." 에밀리안이 식사를 마치자 노파 는 그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일러주었다. "여기 이 실뭉치를 굴려서 그 뒤를 따라가야 해요. 한참 따라가면 바닷가에 이르게 될 거 요. 바닷가 근처에는 큰 거리가 있는데, 그 맨 끝에 있는 집에 가서 하룻밤 묵어 가겠다고 부탁해요. 그 때 당신에게 요긴한 것이 눈에 띌 거요." "그렇지만 할머니,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이 자기 부모의 말보다도 그 물건의 말을 더 잘 들으면, 그것이 바로 당신이 찾는 것인 줄 알아야 해요. 그걸 임금에게 갖고 가란 말이오. 임금은 그런 걸 누가 갖고 오 라더냐고 시치미를 뗄 거요. 그 때 당신은 그렇다면 두들겨 부숴 버리겠다고 말을 하고서, 그것을 강기슭에 갖고 가 부숴서 물 속에 처넣으시오. 그렇게 하면 당신의 아내도 도로 찾 아올 수 있고, 또 내 눈물고 말릴 수 있을 거요." 에밀리안은 노파와 헤어졌다. 그는 밖으로 나와 실뭉치를 굴렸다. 그것은 줄곧 굴러 드디 어 바닷가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과연 큰 도시가 있고, 그 맨 끝에 높다란 집이 한 채 있었 다. 에밀리안은 그 집에서 하룻밤 묵게 해 달라고 간청을 했다. 주인은 쾌히 승낙하여 그는 곧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주인이 벌써 일어나 아들을 깨우고 장작을 가져오라고 이르 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아직 일러요."하고 아들이 말했다. "서두를 것 없잖아요." 그러자 어머니가 난로가에서 말했다. "어서 갖다 와라. 아버지는 뼈가 쑤셔서 그러시는 거야. 아버지께서 장작을 나르시는 걸 봐야 하겠니. 조금도 이르지 않다." 그러나 아들은 몇 마디 중얼거리더니 다시금 자리에 누워버렸다. 그러자 별안간 길가에서 사나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들은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섰다. 그는 급히 옷을 주워 입고 거리 를 향해 뛰쳐나갔다. 에밀리안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 뒤를 좇았다. 그것은 무슨 소리였 을까. 아들에게 부모의 말보다도 더 위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그는 그것을 알아보고 싶었다. 에밀리안의 눈에는 배에 무엇인가 움켜안고 쾅쾅 두드리면서 거리를 걷고 있는 웬 남자가 보였다. 사나운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남자였다. 그리고 그 소리가 아들을 순종케 했던 것이다. 에밀리안은 그곳으로 급히 뛰어가서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작은 대야처럼 둥글 고 양쪽에 가죽을 씌운 물건이었다. 그는 물었다. "이게 뭡니까?" "북이요." 하고 남자가 대답했다. "그럼 속은 비었겠군요." "그럼요." 사내가 대답했다. 에밀리안은 매우 놀랐다. 그는 그 북을 자기에게 팔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내는 좀체로 승 낙하지 않았다. 에밀리안은 단념하고 북을 치며 가는 사내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그는 하루 종일 따라다녔다. 이윽고 그는 남자가 누워서 잠자는 틈에 몰래 그 북을 훔쳐 가지고 도망 쳤다. 그는 쏜살같이 달음질쳐 자기가 살던 마을에 이르렀다. 아내는 집에 없었다. 그가 집을 비 운 다음날 임금이 궁궐로 데려간 것이다. 에밀리안은 곧 궁궐로 달려가 관리들에게 외쳤다. "나는 어딘가에 가서 알 수 없는 물건을 가지고 돌아왔소." 관리들은 임금에게 이 말을 전했다. 임금은 에밀리안에게 내일 다시 오라고 일렀다. "저가 오늘 온 것은...."하고 그는 말했다. "임금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찾아 왔기 때문입니다.그러니까 어서 임금님께 이것을 전해 주십시오. 임금님께서 속히 이곳까지 나오시도록 말씀드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직접 들어가 뵙겠습니다." 이윽고 임금이 나타났다. "너는 그 사이 어디 갔었느냐?" 임금이물었다. 에밀리안은 바른 대로 대답을 하였다. "당치도 않은 곳에 갔구나."하고 임금은 말을 계속했다. "그래 무엇을 갖고 왔느냐?" 에밀리안은 임금에게 북을 보이려고 했으나 임금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래요?"하고 에밀리안은 말했다. "그럼 두들겨 부숴 버려야지. 쳇, 악마에게나 넘겨 줘야 겠다." 에밀리안은 북을 어깨에 매고 둥둥치며 궁궐을 떠났다. 그때였다. 임금의 군인들이 에밀리 안의 뒤를 따라 나서면서 에밀리안에게 경례를 부치며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임금은 창문을 통해 이 광경을 바라보고 병정들에게 에밀리안의 뒤를 따라가서는 안된다 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들은 임금의 만류는 귀 밖으로 흘려버리고 저마다 에밀리안을 따라 나섰다. 임금은 마침내 에밀리안에게 아내를 돌려줄 터이니 그 대신 북을 자기 손에 넘겨달 라고 말했다. "그건 안됩니다." 에밀리안은 딱 잘라 말했다. "저는 이 북을 두드려 강물에 던지라는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에밀리안은 계속 북을 치면서 강가에 이르렀다. 병정들도 뒤좇아 왔다. 에밀리안은 강가 언덕으로 올라가 북을 부숴 버린 후 그 부스러기들을 모조리 강물에 던져 버렸다. 그러자 병정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 버렸다. 에밀리안은 아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 임금도 그를 괴롭히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내외는 아무런 걱정없이 행복한 나날 을 보냈다. 레흐 톨스토이(1828-1910) 러시아의 작가이며 사상가.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 적인 문호이다. 백작의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친척집에서 자랐다. 대학에 진학했으나 싫증을 느껴 고향에 가서 농촌운동을 했다. 대표작으로는 불후의 명작 전쟁과 평화와 부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바보이반 등이 있다. 탕자 돌아오다 나만이 아는 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들려 주신 비유 의 말씀을 여기에 그려 놓았다. 마치 옛날 세 개의 연속된 화폭 속에 각기 그림을 그려넣듯 이 말이다. 나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강한 영감을 도외시하고서 하느님과 내 자신의 승리에 관해 서는 증명하지 않으련다. 그러나 만약 독자들이 내게서 어떤 동정심 같은 것을 요구 한다면, 그들은 내 그림 속에서 그것을 찾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마치 그림 한 귀퉁이에 적혀 있는 기증자처럼 탕자와 단짝이 되어 그와 미소를 나누 면서도 한편 눈물젖은 얼굴로 무릎을 꿇고 있으니 말이다. 집을 나가 오랜 세월을 보낸 후에야 탕자는 자기가 찾던 행복을 끝내 발견 할 수 없고, 또한 자신이 누리던 향략마저 오랳동안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탕자는 배고픔으로 밑바닥을 헤매며, 허망한 꿈으로 지친 자신에게 심한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아버지의 모습이며, 어머니가 허리를 굽혀 바라보시던 널찍한 자기 침실이며,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정원과 언제나 울타리 밖으로 뛰쳐나오고 싶어했던 집, 그리고 분배 받지 못한 몫의 재산이 아직도 자신에게로 귀속되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을 조금도 정이 가 지않는 인색한 형 등을 하나하나 회상해 보는 것이었다. 그는 생각했다. 내가 죽었을 것이라고 믿고 계실 아버지는, 나를 보시게 되면 지난 날의 내 허물을 개의치 않으시고 매우 기뻐하실 것이다. 먼지 투성이가 된 머리를 숙이고 초라한 몰골로 아버지 앞에 다가가 허리를 굽혀 절을 하면서, '아버님, 제가 하느님과 아버님께 진정으로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하고 사죄를 한다면 아 마도 아버지께서는 나를 잡아 일으키시면서, '얘야, 어서 집으로 들어가자!'하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탕자 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굴뚝에서 연기가 오르는 자기 집 지붕을 알아 볼 수 있을 만한 저녁 때쯤 언덕배기 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초라한 모습을 조금이라도 숨겨 보려는 생각으로 어둠의 장막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아버지의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저절로 무릎이 꿇렸다. 그리고 땅바닥에 쓰러져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자기가 그분의 아들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아버지를 치욕스럽게 만 든 것이 부끄러워 낯이 뜨거워졌다. 그는 몹시 배가 고팠다. 그러나 낡아빠진 외투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것이라곤 지난 날 자기가 돌봐 주던 돼지 먹이인 도토리 한 줌 밖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 집에서는 분주히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현관 앞 돌층계로 어머니가 나오 시는 모습이 똑똑히 시야에 들어오자, 그는 더 이상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을 수 없어서 언덕을 내려가 뜰안으로 들어섰다. 자기가 그리던 개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마구 짖어댔 다. 탕자는 하인들에게 말이라도 붙여보려고 했지만, 의심많은 그들은 슬슬 피하며 안으로 들 어갔다. 드디어 주인이 나타났다. 주인은 방탕한 자기 아들을 대뜸 알아 보았다. 주인은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주인은 두 팔을 벌려 반갑게 아들을 맞았다. 아들은 그제서야 그 앞에 다가가 무릎을 꿇 었다. 한 팔로 얼굴을 가리고 오른손은 치켜들고 아버지께 용서를 청했다. "아버지! 하느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감히 아버지를 부를 수조차 없는 불초 죄인 이오니 이제는 아들로 생각지 마시고 머슴으로나마 써 주십시오." 아버지는 아들을 얼싸안았다. "내 아들아! 네가 내게로 돌아온 오늘이야말로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날이다!" 아버지는 기쁨에 넘쳐 눈물을 흘렸다. 아들의 이마에 입맞추고 있던 아버지는 고개를 들 어 하인들에게 일렀다. "어서 들어가 장 속에 넣어 둔 가장 좋은 옷을 가져 오너라. 그리고 내 아들의 발에 신발 을 신겨 주고 손가락엔 값진 반지를 끼워 주어라. 그리고 외양간에 가서 살찐 송아지를 잡 고 잔치 준비를 하여라.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내 아들이 살아 돌아 왔으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느냐" 아버지는 감격에 겨워 몸소 달려나갔다. 이 기쁜 소식을 그 자신이 직접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여보, 죽었다고 슬퍼하던 아들이 다시 돌아왔구려!" 기쁨에 겨운 그의 목소리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만찬에 참석한 사람들은 하다못해 하인들까지도 마치 축제와 같이 기쁨에 들떠 있었다. 그런데 그 중에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앉아 있는 이가 한 사람 있었다. 그는 바로 그의 형이었다. 천성이 옹졸한 그는 아버지의 분부로 다 같이 식탁에 앉았지만, 마음이 몹시 불편했던 것 이다. '한 번도 부모님의 뜻을 거스른 일이 없는 자기 자신보다 무엇 때문에 저런 죄인에게 훨 씬 더 큰 영광과 환대를 베푼 단 말인가?' 부모님과 다른 사람들을 의식해서 마지못해 만찬에 참석은 하였지만, 내일 부모님께서 동 생을 꾸짖을 때 자기도 그를 엄격하게 훈계해야겠다고 마음 속으로 단단히 다짐했다. 바람 한 점 일이 않는 밤에 횃불은 활활 타올라 하늘 높이 치솟았다. 성대한 만찬을 마치 고 온 집안 식구들은 환희에 지쳐서 차례차례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탕자의 방 옆방에 있는 그의 어린 동생은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한 채 온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고 있었다. 아버지의 책망 주님! 마치 어린 아이와 같이 눈물을 흘리며, 오늘도 당신 앞에 무릎을 꿇었나이다. 제가 당신의 비유를 회상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여기 다시 옮겨 놓는 것은, 당신의 탕자를 통해 저는 제 자신을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비탄의 구렁텅이 속에서도 당신의 말씀을 부르짖게 하는 당신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집에서는 많은 일꾼들에게도 풍성한 음식이 마련되어 있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 다니! 탕자는 아버지의 힘찬 포옹을 상상해 보았다.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이 그의 마음을 적셔 주었다. 그는 집에서 지내던 지난 날의 갖가지 일, 슬프고, 기뻤던 수많은 일들을 상상 해 보았다. 어느 하나도 부족함이 없었고, 어느 것 하나도 옳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는 언 덕을 넘어서서 자신이 떠나왔던 푸른 지붕을 보았을 때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할 수 없었 다. 나는 무엇 때문에 곧 집으로 달려 들어가지 않고 망설이고 있었는가? 집에서는 모두 기다 릴 텐데, 살찐 송아지가 눈에 띄었다. 그걸 잡아서 음식을 장만할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다. 잠깐만 기다려라 탕자! 나는 너를 염려하고 있다. 너 는 먼저 이튿날 아침식사가 끝난 다음 아버지께서 너에게 하신 말씀을 나에게 전해다오. '아버지! 비록 큰 아들이 자기의 의견을 아버지께 강요할지라도 형의 입을 통해서라도 종 종 아버지의 음성을 듣게해 주소서!' "얘야, 너는 왜 내 곁을 떠났니?" "저는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어디에나 계신 줄 압니다. 저는 아버지를 외면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괜한 말은 그만 두기로 하자. 나는 너에게 주려고 집 한채를 마련해 두었다. 그 집은 물 론 너를 위해 지은 집이었어. 너의 영혼이 안식을 취할 수 있도록, 그리고 네 영혼이 분수에 맞도록 아늑하고 편리하게 말이다.그리고 네가 일자리를 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여러 세대가 일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상속자인 너는 무슨 까닭에 그 집에서 도망쳤느냐?" "그 집은 저를 가둬 놓았기 때문이었어요. 그 집은 아버지의 집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 집은 너를 위해 내가 지은 것이야. 지은 사람은 바로 네 애비다." "아버지께선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형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아버지 께서는 이 땅이나 집, 그 밖의 모든 것을 손수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그 집은 비록 아버지의 이름으로 되어 있지만, 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이 지었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사람에겐 자기의 머리를 쉬게 할 수 있는 집이 필요한거야. 너는 너무 교만하구나! 너는 바람이 몰아치는 들판에서 잠잘수 있다고 생각하니?" "꼭 그렇게 생각하실 것만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들판에서 자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야 다르지. 그렇지만 너는 가난한 게 아니었잖니? 이 세상엔 부귀를 내 동댕이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너를 누구보다도 부유하게 해 주지 않았니?" "아버지, 저는 집을 나설 때 제가 지니고 갈 수 있는 재물을 모조리 갖고 갔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지 않아요? 제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없는 재산이 제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너는 네가 지니고 간 재물을 모조리 낭비해 버렸지!" "저는 아버지의 황금을 쾌락으로 바꾸고, 아버지의 교훈을 환상으로 바꾸었으며, 저의 순 수성을 운율로, 또한 저의 적극성을 욕망으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소박한 네 애비가 네 속에 넣어 준 수많은 덕성은 그런 것이 아니었을 텐데." "새로운 정열이 제 마음에 불을 붙였으므로 저는 더욱 아름답게 불태우려고 했던 것입니 다." "성스러운 벌판에 모세가 발견한 순수한 불꽃은 광채를 발했지만, 무엇 하나 태워 버리지 는 않았다는 것을 회고해 보려무나." "저는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리는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나는 너에게 갈증난 목을 축여 주는 사랑을 가르쳐 주련다. 나의 아들아! 집을 나간 너는 그 동안에 무엇을 얻었단 말이냐?" "쾌락의 기억 뿐입니다." "빈곤은 쾌락의 뒤를 좇게 마련이란다." "아버지, 저는 그 빈곤 속에서 비로소 아버지가 곁에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빈곤이 네 발걸음을 이 애비에게로 돌리게 했단 말이냐?" "모르겠습니다. 저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저는 메마른 황야에서 배고픔과 목마름을 가장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너의 빈곤이 너로 하여금 부귀의 가치를 깨닫게 했나 보구나." "아닙니다.아버지 제 말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저의 마음은 갖가지 시련으로 텅 비게 되 자 사랑이 담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모든 재물을 낭비하여 열정을 사들였습니다." "그래, 내 곁을 떠나 있으니 행복하더냐?" "저는 아버지 곁을 떠나 와 있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네 발걸음을 집으로 돌리게 한 것은 무엇이란 말이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게으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게으름이라고? 대체 너는 무슨 소리를 하고 있니? 사랑으로 말미암아 돌아 온 게 아니란 말이냐?" "아버지, 아까도 제가 말씀드린 바와 마찬가지로 저는 메마른 황야에서 아버지를 가장 사 랑했습니다. 저는 날마다 먹을 것을 찾아 헤매기에 기진맥진했습니다. 적어도 집에서는 배불 리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요." "그래, 그건 사실이야. 집에서는 하인들이 무엇이나 필요한 것은 마련해 줄 테니까? 그러 고 보면 너를 집으로 돌아오게 한 것은 기근이었구나!" "뿐만 아니라 공포와 질병에 시달리기도 했으니까요! 저는 음식으로 말미암아 건강을 해 쳤습니다.저는 나무 열매와 들판의 메뚜기와 벌꿀로 연명을 해 나갔어요. 고생을 해보려는 의욕이 저의 열정을 불붙여 주었지만, 차츰 그것도 저의 체력이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추운 밤이면 제 침대 위에 포근한 이불로 덮힌 따뜻한 침실이 생각났습니다. 먹을 것을 못 얻어 끼니를 거를 때면, 집에서는 남아 돌 정도로 풍성한 음식들이 저의 공복을 채워 주던 일을 회상했습니다. 저는 드디어 무릎을 꿇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빈곤과 기근과 싸울 만한 힘과 용기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어제의 살찐 송아지는 네 구미를 돋구었겠구나." 탕자는 몸을 내던져 얼굴을 땅바닥에 대고 흐느껴우는 것이었다. "아버지! 아직도 저의 입속에는 제 양식으로 삼고 있던 달콤한 도토리의 향긋한 맛이 남 아 있습니다.어떠한 음식도 도토리의 그 맛을 능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못난 자식!" 아버지는 아들을 잡아 일으키며 말을 계속했다. "내 말이 너무 심했던 모양이구나. 네 형이 그러기를 바라더구나. 지금 여기서는 네 형이 모든 것을 도맡아 하고 있다. 그리고 나더러 너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한 것도 바로 네 형이 란다. 이 집 밖에서는 절대로 너에게 구원이 있을 수 없다고 하더구나. 내 이야기를 들어 보 아라. 그렇지만 너를 낳은 사람은 아니다.나는 네 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무엇이 너를 길거리로 몰아냈는가를 말이야. 나는 네가 지쳐 돌아오기를 몹시 기다렸다. 만일 내가 와주 기를 바랐다면.... 나는 곳 네게로 달려갔을 것이다." "아버지! 그렇다면 저는 돌아오지 않고도 아버지를 뵐 수 있을 뻔했군요?" "그러나 네 몸이 쇠약해졌으니 너는 집에 돌아오기를 참 잘했다. 이제 그만 물러가거라. 네 방으로 돌아가거라. 오늘은 그만 가서 푹 쉬어라. 그리고 내일은 형의 이야기를 들어 봐 라!" 형의 책망 탕자는 불손한 태도로 형을 대하려고 했다. "형님!" 그는 입을 열었다. "우리는 전혀 닮지 않았습니다.형님 비슷한 곳이라곤 거의 없거든요." 형이 대답했다. "그건 네 잘못이다!" "그것이 어째 제 잘못입니까?" "나는 언제나 규범 속에서 살아왔다. 규범에서 벗어난 행동은 반드시 오만의 열매를 맺거 나 오만의 꼬토리가 되게 마련이다." "그러면 저에게는 허물을 빼놓으면 아무것도 없단 말씀인가요?" "너는 규범 속에 꼭 맞는 것만이 미덕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밖의 모든 관습은 억제해야 한다."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억지로 몰아내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형 님의 주장은 역시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것이죠." "너더러 억지로 몰아내라는 것은 아니다. 내 말의 뜻은 되도록 줄이면 좋다는 것이다." "형님 말뜻을 잘 알겠습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 제 미덕을 줄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너의 미덕을 값지게 본 거야. 너는 너의 미덕을 과시해야 해. 내 말 을 명심해라. 내가 너에게 말하는 것은 너 자신을 위축시키라는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을 발 전시키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양한 소질을 갖고 있는 너는 정신과 육체의 반항적 요소 가 마치 교향악과 같이 조화를 이루게 되고, 너의 단점은 너의 장점을 길러줄 뿐아니라, 너 의 선량한 기질을 순종의 미덕으로 드러내게 될 것이다." "제가 찾아 헤맨 것도, 그리고 황야에서 발견한 것도 역시 제 자신의 발전이었습니다. 아 마 형님이 하시는 말씀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내가 너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별로 심한 말씀은 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너에게 하신 말씀을 나도 대충 짐작은 한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말씀은 언제 나 현실성이 희박하고 막연하거든. 게다가 아버지는 이제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하지 못하시지.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아버지의 입을 빌리곤 하지. 그렇지만 나는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 하인들 곁에서 아버지의 뜻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오직 나 뿐이란 말이다. 또한 아버지를 이해하려면 마땅히 내 말을 들 어야 한다." "나는 형이 없을 때도 아버지의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너로선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너는 아버지의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를 이해하거나 아버지의 말씀을 알아듣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아 버지를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아버지의 사랑 아래 한 가족이 되기 위해서는 말 이다." "아버지의 집 안에서 말씀이군요?"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를 아버지 집으로 불러 들인 거야. 너는 그것을 잘 알고 있을 게 아니냐? 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것을 보더라도 말이다. 어서 말해 보아라. 너로 하여금 집 을 나서게 한 것은 대체 무엇이었더냐?" "저는 아버지의 품안이 세상의 전부일 수는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그리고 제 자신은 형님이 바라는 그러한 인간은 못 됩니다. 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땅, 다 른 경작지와 마음대로 뛰어다닐 수 있는 아직 인간의 흔적이 미치지 않은 거리를 머리 속에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으로 달려가는 또 다른 제 자신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집을 뛰쳐 나간 것입니다." "만약 내가 너처럼 이 집을 버리고 나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한번 상상해 봐라. 아마 도 하인들과 도둑들이 우리 재산을 모조리 약탈해 갔을 것이다." "저는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그와는 전혀 다른 재물을 동경하고 있었으니까 요." " "너의 태도는 너무도 무례하구나. 얘야! 무질서는 이미 과거의 것이 되어 버렸단다. 너는 아직도 인간이 어떠한 혼란속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구나. 그렇다면 너 는 먼저 그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이 혼란 속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단다. 성령이 인간 을 끌어 올리지 않으면 인간은 성령에 눌리어 다시 혼란 속으로 빠지게 마련이다. 자기 자 신을 혼란 속에 빠뜨리고 나서 성령을 깨닫게 되어서는 안 된다. 너를 구성하고 있는 갖가 지 요소들이 혼란한 상태로 돌아가려면 너는 이에 동의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궁지게 빠져 봐야해. 그러나 인간을 이 상태에 동화시키려면 많은 시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너는 미처 깨 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너는 주어진 여건을 붙잡고 매달려야 해. 네가 지닌 것을 놓치지 말고 꼭 붙잡아야 한다고 성령은 경고하셨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아무도 너의왕 관을 빼앗아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네가 지니고 있는 것은 너의 왕관이며, 그것은 동시에 다른 사람이나 너 자신에게 미치는 왕권이라고 할 수 있지. 찬탈자는 너의 왕관을 노리고 있다. 그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네 주위와 네 마음 속을 배 회하고 있단다. 얘야! 힘껏 움켜 잡아 절대로 놓치지 말아라!" "저는 이미 오래 전에 손에 쥐고 있던 닻줄을 놓아 버렸습니다. 이젠 나의 재산은 없으니 까요." "아니다. 할 수 있다. 내가 힘이 되어 줄 테니까. 네가 집을 떠난 사이 나는 네 재산을 지 켜왔단다." "저도 성서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그러나 형님은 그 구절을 모조리 인용하지는 않았 습니다." "그래, 그것은 계속되었지. 승리한 자를 나는 내 성전의 기둥으로 삼을 것이며, 그는 다시 는 그곳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는 다시는 그곳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라는 구절은 저를 두려움에 떨게 합니 다." 탕자가 계속 말을 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그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면." "너는 그곳을 벗어나기는 했지만 그것에 만족하지 않는구나. 아직도 그곳을 동경하고 있 으니 말이다." "그럴지도 모르죠, 그러나 그것은 이미 제가 돌아 온 것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너는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데 어디 간들 만족할 수 있겠니? 너의 재물이 있는 곳은 오직 여기 뿐이잖겠니?" "형님이 재산을 지켜준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네가 낭비하지 않은 재산, 즉 우리 공동의 소유인 토지말이다." "그럼 제 개인의 소유는 아무 것도 없단 말입니까?" "그게 아니라, 아버지께서 너에게 주실 지도 모르는 특별한 몫이 있다." "제가 바라는 것은 바로 그것 뿐입니다. 저는 그 이상 바라지 않겠습니다." "주제넘은 녀석! 네 의견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것은 우리 형제 중에 가장 운 좋은 사람 의 몫이 될 것이다. 너에게 미리 밝혀 두지만 그것은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제각기 분배받은 재산은 이미 너를 파멸로 몰아넣었으니 말이야. 너는 그 재산을 얼마 못가 탕진해 버렸잖니." "그 밖의 것은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너는 그것을 찾게 된 것 아니냐? 오늘을 이쯤해 두자. 어서 안에 들어가 푹 쉬 어라."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저는 몹시 지쳤으니까요." "너의 피곤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 그럼 어서 쉬어라. 내일은 아마 어머님께서 말씀하실 것이다." 어머니와의 대화 "얘야! 네 형의말을 들으면 너는 아직도 반항적이라는데, 우리 좀더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 놓을 수 없겠니? 어미의 발 밑에 엎드려 어미 무릎에 이마를 파묻고, 반항하는 너의 목덜미 를 쓰다듬는 어미의 손길을 느끼고 너는 어떠한 심정이 되었느냐? 너는 어쩌자고 그와 같이 오랫동안 이 어미를 버려 두었니? 그리고 눈물로 나의 질문에 대답하는구나. 무엇 때문에 이제야 눈물을 흘리니. 얘야! 이 어미에게로 돌아온 지금에 와서는 너를 기다리느라고 나의 눈물을 흐르다 못해 메말라 버렸다." "어머님께서는 저 같은 자식을 기다리고 계셨군요!" "네게 돌아오기를 잠신들 고대하지 않은 때가 있었겠니? 밤마다 잠들기 전이면 나는 생각 했었다. 오늘 밤에 그 애가 돌아오면 문이나 열 줄 아는지? 그런저런 생각으로 좀체로 잠들 지 못했다. 또한 아침에 눈을 뜨면 날마다 그 애가 오늘은 돌아올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리고는 기도를 드렸지. 나는 이처럼 날마다 기도를 올렸으니 네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 있었겠니!" "어미니의 기도가 제 마음을 돌이켜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나를 비웃지는 말아라." "어머니, 저는 겸허한 마음으로 어머니께 돌아왔습니다. 보세요. 저는 깊숙이 고개를 숙이 고 있습니다.어머니 곁에 와 있으니 이제야 제가 집을 나간 까닭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 다." "또 다시 집을 떠나지는 않겠지?" "다시는 떠날 수 없습니다." "대체 무엇이 너를 집 밖으로 몰아내더냐?" "어머니, 그런 생각을 다시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저를.... 그저 제 자신이 뛰쳐 나갔습니다." "그래 우리에게서 뛰쳐 나간면 행복할 것 같더냐?" "저는 행복을 찾아 나선 것은 아닙니다." "그럼 무엇을 찾고 있었단 말이냐?" "저는.... 또 다른 제 자신을 찾아서...." "너는 부모의 자식이며 형제 중의 하나가 아니더냐?" "저는 형제를 닮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 두지요. 저는 지금 돌아와 있으니까요." "그야 그렇지. 그러나 좀더 이야기를 하자꾸나. 너는 다른 형제들과 전혀 다르다고만 생각 해서는 못쓴다." "이제부터 저는 가족들과 닮도록 애쓰겠습니다." "너는 마침 체념하듯이 말하는구나." "같지 않다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괴로운 일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의 여정은 저를 녹 초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너는 정말 몹시 늙었구나!" "고생을 많이 했으니까요." "딱두하지! 틀림없이 너의 잠자리나 식탁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을 거야." "저는 닥치는 대로 먹었습니다.때로는 익지 않은 과일이나 상한 과일도 상관하지 않았어 요." "그래 시장한 것밖에는 괴로운 일이 없더냐" "한낮의 뜨거운 햇볕이며, 밤중의 차가운 바람, 발이 푹푹 빠지는 사막의 모래밭, 두 발을 피 투성이가 되게 하는 가시덤불, 이런 것들도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보다 도 형님에겐 말하지 않았습니다만, 저는 머슴 노릇도 했습니다." "어찌하여 그런 것을 숨겼느냐?" "어느 날 저를 혹사하는 질이 나쁜 주인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저의 자존심을 극도로 자 극하고, 먹을 것마저주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생각했습니다. 머슴으로 살 바에야 차 라리.... 저는 꿈속에서 집을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저는집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탕자가 다시 고개를 숙이자 어머니는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젠 어떻게 할 셈이냐?" "이미 어머님께 할씀들린 바와 같이, 될 수 있는 대로 형제들 간에 화목하고, 우리의 재산 을 관리하면서 형님처럼 아내를 맞이하여 살겠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아마 누군가 점을 찍어둔 모양이구나?" "아닙니다. 어머니께서 골라 주신다면 어떤 여자라도 좋습니다. 어머니께서 형님에게 하신 것처럼 어머니 의사에 전적으로 맡기겠습니다." "나는 네 마음에 드는 여자를 골라 주고 싶다." "상관 없습니다. 저의 마음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저는 지난 날의 자만심을 일체 버리기로 했습니다. 모든 것을 어머니 뜻대로 하세요. 저는 그저 어머니 말씀을 따르겠습니다.그리고 장차 저의 아이들고 저와 마찬가지로 순종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저의 결심은 헛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너의 결심이 헛되지 않다고 나는 믿고 있단다. 그런데 얘야, 네가 해야할 일이 하나 있구 나. 보살펴 주어야 할 일이." "어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누구를 말씀하시죠?" "네 동생 말이다. 네가 집을 떠날 때 열 살도 채 안된, 너는 통 관심도 두지 않았던 그 애 말이다. 그런데 그 애가...." "어머니, 어서 말씀하세요. 무엇을 염려하십니까?" "아마 그 애를 보면 마치 너를 보는 것 같을 것이다.그 애는 지금 네가 집을 나서기 전의 모습과 꼭 같으니라." "저하고 같다구요?" "집을 나서지 전의 너하고 말이야. 지금의 네가 아니라...." "그 애도 다시 저처럼 되겠지요." "당장 마음을 되돌리게 해야 한다. 그 애와 말해 보렴. 아마 너의 말은 귀담아 들을 거다. 여행 중에 겪은 일들을 낱나이 이야기해 주려무나. 너처럼 쓸데 없는 고생은 하지 않도록 말이다." "어머니는 동생에 대해 무엇 때문에 그처럼 염려를 하고 계십니까? 단순히 외양만 보시고 서!" "아니다. 너와 그 애는 닮은 점이 많단다. 지금 그 애를 염려하는 것은, 너에게는 애초부 터 신경을 쓰지 않았던 일들이 그 애에겐 걱정이 되는구나. 그 애는 책을 너무 많이 읽는다. 그러나 언제나 좋은 책들만 읽는다고는 할 수 없거든." "그럼 그뿐인가요?" "그 앤 종종 동산의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간단다. 너도 알겠지만 그곳에서는 온 장안이 다 내려다 보이지." "저도 기억이 나는군요, 어머니 그리고 또...." "그 애는 집에 있는 것 못지않게 곧잘 농장으로 나간다." "거기서무얼 하지요?" "나쁜 짓이야 안하지. 그렇지만 그 애가 찾아가는 사람은 소작인들이 아니고 우리와는 질 이 다른 불량배들이 아니겠니! 더구나 이 지방 사람도 아닌데다 그중 한 사람은 그애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는 모양이야." "네, 돼지치는 사람을 말씀하시는 군요." "그래, 맞았다. 너도 그 사람을 알고 있구나!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네 동생은 저녁마다 그를 따라 돼지 우리로 나간단다. 그리고 식사 때나 되어야 간신히 돌아와서는 식사도 제대 로 하지 않거든. 더구나 옷에선 역한 냄새가 코를 찌르지. 타일러도 소용 없고 야단치면 반 항한단다. 하루는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이른 새벽에 그 녀석을 좇아 글세 문간까지 나가지 않겠니! 돼지 먹이를 주려고 돼지를 몰고 나가는 시간에 말이다." "그 애도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요?" "너도 그것을 알고 있지 않았니? 그 애도 어느 때인가 달아날 거다. 나는 그걸 확신하고 있단다. 언젠가는 그 애가 뛰쳐나갈 것이라는 것을...." "아니예요, 제가 그 애에게 타이르지요. 어머니, 염려 마세요." "네 말이라면 그 애도 귀담아 들으리라는 것을 나도 안다. 그 애가 네가 돌아온 첫날 저 녁에 너를 얼마나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너도 알겠지. 그리고 네가 입고 있던 그 누 더기 옷은 얼마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는지! 잠시 후 네 아버지는 너에게 비단 옷을 입혀 주었지. 나는 그 애가 네가 입은 그 두 가지 옷을 혼동하지나 않을까 걱정했단다. 그리고 지 금은 그 애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그 누더기 옷이 아닌가 생각되는 구나. 그러나 지금은 이런 생각도 우습게 여겨진단다. 얘야, 만약 네가 그와 같이 비참한 꼴이 될 것을 미리 알았 더라면 너는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을 지도 모르지. 안 그러니!" "어머니! 제가 어머니 곁을 어떻게 떠날 수 있었는지, 저 자신도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럼 모든 이야기를 그 애에게 들려주려무나." "네, 내일 저녁엔 그 애에게 모든 이야길 들려 주겠어요. 어머니 이젠 졸음이 오는군요. 제 이마에 키스해 주세요. 마치 제가 어려서 잠들어 있을 때 하시던 것처럼 말예요." "돌아가 자려무나, 나는 너희들을 위해 기도를 드려야겠다." 동생과의 대화 탕자는 손에 램프를 들고 그의 방 곁에 있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넓은 방으로 들어가, 침 대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동생은 얼굴을 벽쪽으로 돌리고 누워 있었다. 그는 나직한 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그 애가 잠들어 있다면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너와 이야기를 하고 싶구나!" "누가 못하게 합니까?" "나는 네가 잠든 줄 알았지." "잠들어야만 꿈을 꿀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꿈을 꾸고 있던 모양이군. 그래 어떤 꿈을 꾸었지?" "형과는 상관 없는 거요! 꿈을 꾸고 있는 나 자신도 이해 할 수 없는 걸 형이 어떻게 설 명할 수 있겠소?" "그래, 꿈들이 매우 흐릿한 모양이구나.그래도 내게 이야기해 준다면 나대로 성명해 볼텐 데!" "형은 자기 꿈이나 가꾸세요, 내 꿈은 내버려 두고요. 그것이 더 자유롭지 뭐예요! 형은 여기 뭣하러 왔어요? 남의 잠이나 훼방놓자는 겁니까?" "너는 지금 잠자고 있는 게 아니잖니? 나는 너와 이야기를 하러 온 거야." "저에게 할 이야기가 있나요?" "없다. 네가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내가 감히 무슨 말을 하겠니?" "그럼 잘 가세요." 탕자는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방 안을 희미하게 비치는 램프를 땅바닥에 내려놓았 다. 그는 되돌아와 침대가에 앉아서, 어둠 속에 돌아누운 아우의이마를 한 참 동안 쓰다듬고 있었다. "나도 형에게 대들긴 했지만, 너는 지난 날 내가 형님에게 한 것보다 더 거칠게 대하는구 나." 그는 벌떡 일어났다. "어서 말해 봐요. 형을 제게 보낸 것을 큰형이지요?" "아니야, 큰형이 아니고 어머니란다." "그러면 그렇지. 형이 자진해서 올 리가 있나." "그렇지만 나는 친구로서 온 거란다." 그는 침대 위로 몸을 일으키고는 탕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우리 집에 제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 "나는 큰형님을 오해하고 있구나." "큰형님 이야기는 제발 입 밖에도 내지 마세요. 나는 그를 싫어할 뿐 아니라.... 울화가 치 밀어 못견디겠어요. 제가 형에게 불손하게 군 것도 바로 큰형 때문이에요." "그건 무슨 까닭이지?" "형은 아무 것도 모를 거예요." "그렇더래도 말해보렴." 탕자는 동생을 얼싸안고 달래었다. 그는 형에게 몸을 맡기고 가만히 있었다. "형이 돌아오던 날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어요. 밤새도록 곰곰히 생각했지요. 저는 또 다 른 형님이 한 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어요. 우리 집 마당 앞에서 사람들의 열과 속에 걸 어가는 형님을 보았을 때, 내 가슴이 얼마나 부풀고 심하게 고동쳤는지 모를 거예요." "나는 그 때 누더기 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래요. 저는 형님을 보았지요. 그렇지만 형님은 영광에 들려 싸여 있었어요. 그리고 저 는 아버지가 하시는 것을 보았어요. 아버지는 형님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셨어요. 큰형도 갖지 못한 반지를요. 형의 문제를 저는 아무에게도 물어보고 싶지 않았어요. 저는 단지 형님 이 멀리서 왔다는 것만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식탁에 둘러앉았을 때 형님의 시선은." "너도 그 만찬에 참석했구나!" "그러고 보니 형님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군요. 식사를 하는 동안 형님은 먼 산만 바 라보고 있었지요. 그리고 이튿날 저녁에 형님은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고 계셨지요. 그것도 좋았어요. 그러나 그 다음날 저녁에는...." "어서 마저 말해 보려무나." "형은 저에게 단 한 마디라도 정다운 말을 건넬 줄 알았었는데!" "그래, 너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그럼,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그날 저녁에 큰형과 그렇게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면 저는 큰형을 이처럼 미워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도대체 형님들은 무슨 이야기를 그처럼 오래 했지요? 큰형과 공통점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형에게 관심이 많았는에요." "나는 큰형님께 큰 과오를 범했다." "설마 그럴리가요?"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께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내가 집에서 도망쳤다는 사실을 너는 알겠지?" "그럼요, 알고 있어요. 벌써 오래 전 일이었지요. 그렇잖아요?" "내가 아마 네 나이 때쯤이었지." "형님이 과오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가리키나요?" "그렇지. 그건 나의 과오인 동시에 죄였어." "형님은 집을 나설 때 나쁜 짓을 한다고 생각했나요?" "아니야, 나는 떠나는 것을 일종의의무로 생각했단다." "그럼 그 후에 어떤 일이 있어났어요? 그 때 형님이 옳다고 생각하던 것이 틀렸다는 말이 군요." "나는 몹시 고생을 했단다." "그렇다면 형님이 잘못이라고 말하게 된 것은 고생 때문이었군요." "아니야, 반드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그건 나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지." "그럼 전에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나요?" "안 한 것은 아니지. 그렇지만 나의 박약한 이성은 욕망을 따르게 되었지." "그렇다면 형님은 고통에 못이겨 돌아온 것이군요...."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이를테면 체념을 한 것이지." "그렇다면 형님은 새 사람이 되려던 것을 포기한 것이군요." "나의 자존심이 그것을 만류했다." 소년은 잠시 동안 말이 없다가 갑자기 흐느껴 울었다. "형님! 저는 형님이 집을 떠날 때와 똑같은 심정일 거예요. 어서 말씀하세요. 형님은 도중 에서 실망밖에 얻지 못했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바깥 세상은 여기와 다르다고 생각한 것은 모두 망상에 지나지 않았나요? 제 마음 속에 그리고 있는 갖가지 일들을 모두 부질없는 생 각이란 말예요? 어서 말씀해 주세요. 형님은 방황하던 길가에서 어떤 절망적인 사건에 부딪 쳤나요? 형님을 되돌아 오게 한 원인은 무엇이었나요?" "나는 내가 찾고 있던 자유를 잃어버리고 말았단다. 그리고 나는 남에게 매인 몸이 되어 남을 섬겨야 했지." "저도 여기서 매인 몸이나 다름 없어요." "하긴 그렇지! 그렇지만 질이 나쁜 주인을 섬겨야만 한다. 여기서 네가 섬기는 사람은 부 모님들 뿐이잖니?" "살아가기 위해 남을 섬긴다는 것은, 적어도 노예생활을 선택하는 자유나마 있잖아요." "나도 그걸 원했다. 그리하여 나는 내 몸을 내맡겼지. 마치 암당나귀를 따라가는 사도 바 울과 같이 욕망의 뒤를 좇아 나섰지. 그러나 왕국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내 기대 는 터무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내가 다다른 곳엔 비극만이 있었어. 그렇지만...." "형님은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니었나요?" "나는 똑바로 앞만 보고 나갔다." "그렇다면 왕이 없는 영토와 숱한 왕국들이 기다리고 있었을 게 아녜요?" "누가 너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든?" "저는 그렇게 알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그걸 느끼기도 하죠. 저는 미치 그 영토를 지배 한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건방진 녀석!" "그건 큰형이 형님한테 한 말이죠. 형님은 왜 내게 그런 말을 하시죠? 형님은 그 정도의 자존심도 간직하고 계시지 못한가요? 그렇다면 형님은 되돌아 오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되었더라면 나는 너를 알 수 없었을 게다." "아녜요, 그렇지 않아요. 그곳에서 제가 형님을 만나게 되면 형님은 제가 동생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거예요. 그리고 제가 집을 따나는 것은 형님을 찾으러 나선 것이나 마찬가지구 요." "네가 집을 떠난다고?" "형님은 그걸 모르셨나요? 저에게 집을 나설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 주실 분은 형님이실 텐데요." "나는 네가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겠다. 그렇다고 너더러 집을 떠나라는 것은 아니다." "안됩니다.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형님은 그런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예요. 형님은 정 복자의 대망을 품고 떠난거죠, 그렇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노예생활을 더욱 뼈 아프게 생각했지." "그렇다면 형님은 무엇 때문에 굴복하셨죠? 형님은 그토록 지쳤던가요?" "아냐. 그 정도까진 아니다. 그런데 나는 회의를 느끼게 되었단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나는 모든 것에 회의를 갖게 되었단다. 하다못해 내 자신까지도. 그래서 걸음을 멈추고 아무 데나 몸을 의지하고 싶었지.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나에게 안락을 약속하던 주인의 유 혹에 넘어가기도 했다. 결국 이제서야 그것들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았다." 탕자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가렸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나는 오랫동안 황무지를 방황했다." "황야인가요?" "반드시 황야만도 아니었다." "도대체 형님은 거기서 무엇을 찾았어요?" "이제는 나 자신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침대에서 일어나세요. 그리고 제 머리맡에 있는 책상 위 찢어진 책 위에 있는 것을 보세 요." "벌어진 석류가 하나 있구나." "돼지치는 사람이 사흘 동안이나 보이지 않더니 어제 저녁에 그것을 갖다 주었어요." "그렇지, 저건 야생 석류아." "저도 알아요. 지독하게 쓰지요, 그렇지만 목이 마르면 마구 깨물 것도 같아요." "너도 이제는 말이 통할 것 같구나. 황야에서 내가 찾고 있던 것은 바로 그와 같은 목마 름이었다." "달지도 않은 이 열매는 갈증을 추겨주겠지요?" "그렇지는 않단다. 그것은 더욱 갈증나게 만들지." "형님의 석류를 어디서 딸 수 있는지도 아시겠군요?" "아무도 보살피는 이가 없는 작은 과수원이지. 울타리가 없어서 황야인지 과수원인지 분 간할 수도 없는 곳이란다. 시냇물이 흐르고 반쯤 익은 열매들이 여기저기 매달려 있었지." "무슨 열매들이에요?" "우리집 뜰에 있는 과일 나무와 같은 것들이지만 모두 야생식물이지. 그날은 몹시 더웠단 다." "제 이야기좀 들어 보세요. 제가 오늘 저녁 왜 형님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아세요? 저는 이 밤이 새기 전 떠나려는 거예요. 이 밤이 밝아 사방이 희끄므레하게 되면.... 저는 조용히 길을 나서려고 해요. 오늘밤은 신도 벗지 않았어요." "뭐라고? 나도 이루지 못한 것을 네가 이루어 보겠다는 거냐?" "형님은 제게 길을 가르쳐 주었어요. 그리고 저는 형님을 생각하면서 이겨 나갈 거예요." "나는 너에게 감탄했다. 그러나 너는 나를 잊어야 한다. 너는 무엇을 갖고 나서니?" "동생인 내가 유산분배에 한 몫 낄 수 없다는 건 잘 아실 것 아녜요? 저는 맨주먹으로 떠 납니다." "그게 도리어 낫지." "그런데 창가에서 무얼 바라보고 계세요?" "우리의 조상들이 누워 계신 정원을...." "형님!" 소년은 침대에서 일어나 탕자의 목을 얼싸안았다. 그의 팔은 그의 목소리처럼 부드러웠다. "저와 함께 떠나세요." "나는 그대로 내버려 둬라! 나는 남아서 어머니를 위로해 드려야 한단다. 그리고 내가 없 으므로 너는 더욱 용감해질거다. 이제 시간이 되었다. 사방이 밝아오는구나. 이젠 소리를 내 지 말거라. 얘, 이리 안겨다오. 나의 모든 희망을 걸머지고 가는 아우야, 용기를 갖고 우리는 잊어버려라. 나도 잊어버리련다. 부디 돌아오는 일이 없도록 조용히 걸음을 옳겨라. 내가 등 을 밝혀 주겠다." "대문까지 바래다 주세요." "현관 층계를 조심해야 해...." 앙드레 지드(1869-1951) 프랑스의 소설가이며 비평가. 파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11때 아버지를 여읜 후부터 학교생활을 싫어해 가정교사 맡에서 공부를 했다. 젊어서부터 문학을 좋아해서 상징시인인 말라르메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22세때 폐결핵으로 북아프리카 여행을 떠났는데 거기에서 장렬한 태양과 개방된 욕망을 구가하고, 주민들의 소박한 생활을 몸소 겪고 돌아와 지상의 양식등의소설을 섰다. 그 후 소설 외에도 시, 희곡, 평론 등 모든 문학 분야에 작품을 남겨 문학과 사상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표작으로 좁은문, 전원교양곡등이 있으며, 1947년 노 벨문학상을 받았다. 노끈 마침 그날이 장날이었으므로 고데르빌주변 길은 모두 이 마을을 향해 가는 농부들과 그 아낙네들로 가득차있었다. 사내들은 어깨에 짊어진 삽과 쟁기 맨 모습에서 보듯이, 모진 노동으로 뒤틀린 긴 다리를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온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면서 느릿느릿 걸어갔다. 그 모습 은 꽤 무거운 모양으로 왼쪽 어깨를 약간 올리고 몸을 뒤로 짖히고 있었다. 그리고 두 다리 는 계속되는 고된 농사일로 비틀거리는 것이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푸른 셔츠는 풀을 빳빳이 먹여 마치 왁스를 칠한 것처럼 번쩍이고, 깃 과 소매부리는 흰 실로 수를 놓았느나 뼈만 앙상한 가슴팍은 불룩하게 바람이 들어차 공중 에 떠도는 풍선처럼 보였다. 그 셔츠 밖으로 머리가 불쑥나와 있고, 또 팔다리가 삐져 나와 있었다. 이들 가운데서 몇 사람은 암소와 송아지를 끌고 갔는데, 어떤 아낙은 소의 꽁무니를 따라가면서 걸음을 재촉하기 위해 잎사귀가 달린 나뭇가지로 소의 잔등을 때리곤 하는 것이 었다. 그 아낙들팔에 걸친 커다란 바구니 한 쪽에서는 병아리의 머리가 삐져 나오고, 다른 쪽에서는 오리 모가지가 불쑥 나오곤 했다. 그들은 남편에 비하여 종종걸음으로 쫓아갔다. 깡마르고 꼿꼿한 허리통에는 폭이 좁은 옷감을 감고, 밋밋한 젖가슴에는 핀을 꽂고 머리에 는 흰 수건을 둘러 머리카락 위로 여미고, 그위에 모자를 덮어쓰고 있었다. 그때 짐마차가 흔들리며 지나갔다. 마차에 나란히 앉은 두 사내와 안으로 깊숙이 들어 앉 은 여자는 그 심한 흔들림을 조금이라도 적게 하려고 차체를 꼭 붙잡고 있었다. 고데르빌 광장에는 사람과 짐승들이 뒤섞여 큰 혼잡을 일으키고 있었다. 황소의 뿔이나 기다란 깃이 달린 부유한 농부들의 높지막한 모자와, 촌 아낙네들이 모자가 붐비는 사람들 위로 솟아 있었다. 그들의 거칠고 소란스러우며 찢어지는 듯한 말소리는 언제나 귀가 아팠 다. 그리고 때로는 어떤 시골뜨기의 억센 가슴에서 자기딴에는 통쾌함을 금치 못해 터져나 오는 웃음소리나, 어느 집 담벼락에 매어놓은 암소가 길게 뽑아젖히는 울음소리에 휩쓸리곤 했다. 어디를 가나 외양간 냄새, 우유 냄새, 거름 냄새, 꼴풀 냄새, 땀 냄새 등이 코를 찔렀다. 그리고 땅에 묻혀 살아가는이 농부들에게는 사람 냄새와 짐승 냄새가 뒤섞인 독특한 악취가 풍겨와 기분을 잡치는 것이었다. 브레오테에 사는 오슈코른 영감은 방금 이 고데르빌에 이르러 막 광장을 향해 가다가 조 그마한 노끈 오라기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영감은 진짜 노르망디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지독한 노랭이로 조금이라도 쓸모 있는 것 이라면 무엇이고 주워 모아도는 것이었다. 그가 신경통으로 아픈 허리를 억지로 구부려, 땅 바닥에 떨어진 그 하찮은 노끈을 집어서 정성스럽게 집으려고 할 때, 말랑댕 영감이 눈에 띄었다. 그는 마구 수선업자로 자기 집 문턱에 서서 오슈코른 영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은 전에 서로 거래가 있었으나 어떤 일로 심하게 다툰 후, 오늘까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오슈코른 영감은 자기가 이처럼 쇠통 말똥이 묻은 노끈 오라기를 줍는 모양을 원수 에게 보여 주었다는 생각에서 적잖이 수치심을 느꼈다. 그는 자기가 주운 물건을 얼른 셔츠 속에 감추었다가 슬그머니 바지 주머니에 넣고, 찾는 물건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처럼 한참 땅바닥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쑥 내밀고 아픈허리를 이끌며 장터를 향해 가벼렸다. 그는 곳곳에서 흥정을 하느라고 시끄럽게 떠들며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으로 곧 사라져 버렸다. 농부들은 암소 등을 쓰다듬으며 혹시 남에게 속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었다. 혹시 무슨 속임수라도 있지 않나, 또 자기가 사려는 소에게 무슨 흠잡을 데나 없나 해서였따. 아낙네들은 저마다 큼지막한 바구니를 발밑에 놓고, 그 속에 들어 있는 닭이며 오리를 끄 집어 내었다. 그러면 다리가 묶인 머리끝이 빨간 달과 오리들은 땅바닥에 쓰러져 눈을 두리 번 거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손님이 부르는 가격을 듣고 나서, 무표정하고 냉정한 태도로 자기가 받을 값을 말 했다. 그러다가 상대가 제시한 가격에라도 팔기를 결심하고 천천히 물러가는 손님의 등 뒤 에 대고 큰 소리를 지르곤 했다. "그렇게 합죠. 그렇게 드리죠!" 이윽고 한낮의 종소리가 정오를 알리며,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도 주막으로 흩어져 들 어가곤 하였다. 주르댕네 주막에는 커다란 방 안에 손님들이 가득차고, 넓은 마당에는 짐수레, 이륜마차, 포장마차, 작은 짐마차 등 여러 종류의 마차들로 붐볐다. 그 많은 마차들 중에는 진흙이 묻 은 것, 뒤틀린 것, 그리고 수레채가 마치 팔을 벌린 것처럼 하늘로 추켜 올랐거나, 코를 땅 바닥에 박고 꽁무니가 공중에 치솟듯 땜질한 것도 있었다. 식탁에 마주앉은 손님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다란 벽난로에서는 시뻘건 불길이 활활 타 오르고, 오른편에 줄지어 앉은 손님들의 잔등에 더운 기운을 끼얹고 있었다. 닭고기, 비둘기 고기, 양의 넓적다리 고기가 꿰어 있는 세 꼬챙이가 불 위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고, 구워진 고기와 덜 구워진 껍질에서 흘러내리는 국물의 구수한 냄새가 난로 가에서 풍겨나와 군침이 돌게 했다. 농부들 가운데서도 돈푼이나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음식점과 마구 장사를 하는 이 주르댕 네서 식사를 했다. 접시들이 누런 사이다 잔과 함께 금새 비곤했다. 그 사람들은 저마다 물 건을 사고 판 이야기를 좀더 건조해야 한다고 했다. 이 때 별안간 집앞 마당에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방안에 있던 손님들은 몇몇 무관심한 사 람들을 제외하고는,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과 들창가로 달려갔다. 그들은 입에 아직도 음식을 가득 넣고 손수건을 손에 쥐고 있었다. 북소리가 그치더니 뜰안의 사내는 허겁지겁 이렇게 외쳐대는 것이었다. "고델르빌 읍에 사시는 여러분에게 알려 드립니다. 특히 이 장터에 계신 분들게 알려드립 니다. 오늘 아침 아홉시에서 열시 사이에 베즈빌 노상에서 까만 가죽지갑 하나를 잃어버렸 는데, 그 속에는 5백 프랑의 돈과 서류들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주운 사람은 즉시 읍사무소 나 만느빌에 사는 포르트네 울브레크 씨 댁으로 곧 돌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는 분에게는 20프랑의 보상금을 드린다고 합니다." 그리고나서 그 사람은 가버렸다. 먼데서 다시 한번 같은 북소리와 그 사람의 목소리가 희 미하게 들려왔다. 그러자 사람들은 울브레크 씨가 그 지갑을 찾게 될 것이라거니 아니라거니 하며, 이 일에 대해 말이 분분하였다. 그러는 가운데서 식사는 끝났다. 사람들이 커피 잔은 비우고 있을 때, 헌병대장이 문간에 나타났다. "여기 브레오테에 사는 오슈코른 씨가 있소?" 그러자 식탁 저쪽 끝에 낮아 있던 오슈코른이 대답했다. "예, 접니다." 헌병대장이 말했다. "오슈코른 씨, 미안하지만 나와 같이 읍사무소까지 가 주시겠습니까? 읍장께서 당신에게 하실 말씀이 있답니다." 농부는 놀라 당황하면서 그 작은 술잔을 단숨에 들이키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아침보다 허리를 더 구부렸다. 이렇게 쉬고 난 뒤에는 발을 내딛기가 어려웠다. 그는 발길을 옮기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요, 나." 그는 헌병대장을 따라갔다. 읍장은 안락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 마을의 공중인이기도 했다. 몸집이 뚱뚱하고 근엄하며 말씨고 거창한 사내였다. "오슈코른 씨, 당신이 오늘 아침에 베즈빌 거리에서 만느빌에 사는 울브레크 씨가 잃어버 린 집갑을 주울 때 본 사람이 있습니까?"하고 그는 물었다. 이 시골 영감은 깜짝 놀라 읍장을 쳐다보았다. 그는 그 까닭을 알 수 없었으나, 아무튼 그 런 의심을 자기가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지레 겁을 먹었다. "제가요? 제가 그 집갑을 주웠다고요?" "네, 바로 댁에서요." "정말이지, 전 그런 일은 전혀 몰라요." "본 사람이 있어요." "저를 보았다고요? 그 사람이 도대체 누구요?" "마구상을 하는 말랑댕 씨요." 그러자 영감은 불현 듯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읍장은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이 게다. 그 는 화가 치밀어 핏대를 올리며 대답했다. "아, 그 놈이 저를 보았다굽쇼. 그 고얀 놈이! 실은 제가 노끈 오라기를 줍는 것을 보고 하는 수작이에요. 자, 이겁니다. 읍장님!" 그는 주머니 속을 더듬어 조그마한 노끈 오라기 하나를 꺼내었다. 그러나 읍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영감님, 속이지 마세요. 그 믿음직스런 말랑댕 씨가 그래 그 노끈을 지갑으로 잘못 보았 겠어요?" 농부는 화가 치밀어 손을 번쩍 쳐들고 자기의 결백을 입증하겨고 침을 한번 뱉고 나고 말 했다. "그렇지만 저 시퍼런 하늘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읍장님. 저의 양심과 하느님의 이름으로 거듭 말씀드립니다." 읍장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 물건을 줍고 나서 혹시 그 진흙 속에 지갑에 들어 있던 돈이 몇 푼 빠지지 않 았나 해서 한참 두리번거리며 찾은 일까지 다 알고 있는데도 그러세요?" 영감은 편으로는 화가 치밀고, 다른 한편으로는 겁이 나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맙소사. 이아구 어쩌면 그 따위로 입을 놀릴 수 있을까! 생사람을 잡을 소리를! 어쩌면 그 따위로...." 그가 아무리 자기 결백을 내세워도 곧이 듣는 사람은 아무 없었다. 마침내 그는 말랑댕씨와 맞대면을 하게 되었다. 말랑댕씨는 끝까지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들은 한 시간 동안이나 서로 옥신각신했다. 오슈코른 영감은 자진하여 몸수색을 받았으나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읍장은 매우 난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기가 검사와 의논해서 다시 통지하겠다고 말하 곤 그대로 돌려보냈다. 이 소식은 금새 사방에 퍼졌다. 영감은 읍사무소는 나서자마자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혹은 호기심에서, 혹은 빈정대는 마음에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들에게서는 영감의 봉변에 대하여 분개하는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노끈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믿어 주지않고 일소에 부쳤다.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붙잡고 영문을 물었다. 그 리고 그도 아는 사람을 만나면 붙들고 그 이야기를 되풀이하며, 자기 호주머니까지 뒤집어 보였다. 자기가 아무 것도 갖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였다. 사람들은 그에게 말하 는 것이었다. "늙은 여우 같으니, 그만 가요!" 그는 화가 치밀어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전혀 믿어 주지 않았 으므로 화도 나고 서글픈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그는 달리 뾰족한 수가 없어 만나는 사 람마다 같은 말은 되풀이하곤 하였다. 밤이 되어 집에 돌아가야 했으므로, 그는 이웃사람 셋과 함께 길을 떠났다. 그는 그들에게 자기가 노끈 오라기를 주웠던 자리를 가리켜 주기까지 하며, 줄곧 자기가 당한 그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저녁에 그는 브레오테 마을을 한 바퀴돌았다.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 주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자기 말을 곧이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그 일로 밤새도록 끙끙 앓았다. 이튿날 오후 한 시쯤 되어 브르통 씨네 농장에 일꾼으로 있는 농부 마리우스 포멜이 그 지갑과 그 속에 든 물건을 만느빌 울브레크 씨에게 돌려 주었다. 그 사내는 자기가 한길에서 그 지갑을 주웠다고 했다. 그러나 글을 읽을 줄 모르므로 그 것을 그냥 집에 갖고 가서 주인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이 소문이 곧 그 근방에 퍼졌다. 오슈코른 영감도 그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즉시로 동네를 한바퀴 돌면서 이제는 완전히 해결을 본 그 이야기를 지껄이는 것이었다. 그는 승리 감으로 인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내가 불쾌한 것을 그 사건 자체가 아니야. 알겠나? 그런게 아니라 그 멀쩡한 거짓말 때 문이야. 거짓말로 인해서 남에게 비난을 받는 것처럼 불쾌한 일은 없거든." 그는 하루 종일 그 말을 하며 돌아다녔다. 한길에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도 그 이야기를 하고, 술집에서 술꾼들을 붙들고도 그 이야기를 했다. 주일 날에는 교회에서 나오는 사람들 을 붙들고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전혀 얼굴을 모르는 사람까지 세워놓고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그의 마음도 어지간히 가라 앉았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편 어 쩐지 마음 한 구석이 꺼림칙했다. 자기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은 저마다 비웃을지언정, 아무 도 곧이 듣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 등 뒤에 대고 이러쿵 저러쿵 수근거리는 것 같았다. 그는 다음 월요일에 고데르빌 장터를 향해 다시 길을 떠났다.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말랑댕이 문간에 서서 자기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웃고 있었다. 왜 웃을까? 그는 크리크토에 사는 한 농부를 만나 그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런데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농부는 아랫배를 탁치면서 "이 여우 같은 영감쟁이야!"하고는 등을 돌리고 가버렸다. 오슈코른 영감은 어처구니가 없고 점점 불안해졌다. 왜 사람들은 자기를 보고 교활한 여 우라고 할까? 그는 주르댕네 주막에 들어가서 식탁에 앉자마자 다시금 그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러자 롱빌리에서 사는 마구 상인이 그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래!그래! 이 늙은 것아! 나도 알아. 그 노끈 이야기 말이지!" 오슈코른은 중얼거렸다. "아무튼 그 돈지갑은 찾게 되었다네." 그러자 상대방은 이렇게 코대답을 했다. "잠자코 있어. 이 사람아! 그야 그 물건을 주운 사람하고 그것을 갖다 준 사람하고 얼마든 지 다를 수 있지 않겠나. 어쨌든 자네도 그 일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나." 농부는 기가 막혔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남들은 자기가 남을 시 켜서 그 돈지갑을 갖다 준 줄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사람이 자기의 공모자라고 단정하고 자기를 비꼬는구나 싶었다. 그는 이에 대하여 항의하려고 했다. 그러나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비웃을 뿐이었다. 그는 식사도 제대로 미치지 못하고 사람들이 비웃는 가운데 주막을 나오고 말았다.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창피하고 분해 견딜 수가 없었다. 하도 억울하고 화가 치밀어 눈앞 이 캄캄하고 목이 조이는 것 같았다. 그는 낙심천만이었다. 어떠한 노력으로도 사람들의 비 난을 변호할 수 없었으므로 그 사건이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큰 소리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는 온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교활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이상 결백을 입증할 도리는 전 혀 없었다. 그는 자기에 대한 혐의가 너무나 부당하였으므로 가슴이 터질 듯했다. 그런 까닭에 다시금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 이야기는 날마다 조금씩 길어져 가고, 번번히 새로운 이유를 덧붙여 더욱 열렬히 항의하고, 더욱 엄속한게 하 늘에 맹세하고 결백을 주장했다. 그는 혼자 있을 때면 몇 시간이고 말할 줄걸리를 미리 생 각하곤 했다. 그의 마음은 온통 그 노끈 이야기에 쏠려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변호가 더욱 복잡해지고, 그 증거가 더욱 확실할수록 그를 더욱 믿어 주지 않았다. '그거 다 거짓말쟁이의 변명에 지나지 않네.' 하고 사람들은 그의 등 뒤에서 수근거렸다. 그는 그때마다 몸에서 피가 말라 들어가는 것 같았다. 자기의 결백을 끝까지 내세우려는 헛된 노력으로 인해 몸만 쇠약해질 뿐이었다. 그는 날이 갈수록 현저하게 몸이 야위어 갔다. 그리고 이제는 장난꾸러기들이 심심풀이로 그 늙은이에게 노끈 이야기를 시키곤 했다. 마 치 일선에서 돌아온 군인에게 전투 이야기를 시키는 격이었다. 그는 마침내 깊이 가라앉은 마음마저 허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섣달 그믐께 결국 자리에 누워버렸다. 그리하여 정월 초순에 죽어버렸다. 그는 숨을 거두는 괴로움 속에서도 이렇게 헛소리를 되뇌이며 자기 결백을 주장하였다. "그건 조그마한 노끈 오라기인뎁쇼.... 조그마한 노끈 오라기예요.... 보십시오, 여기 있어요. 읍장 나으리!" 모파상(1850-1893) 프랑스의 극작가이며 소설가. 노르망디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때부터 플로베르에게서 문학 지도를 받았다. 그는 뛰어난 기교와 정확한 필치로 10여년의 작품활동 기간에 300여편의 작 품을 남겼다. 단편소설의 완성자로 일컬어지는 그는, 자연주의적 수법으로 인생을 사실 그대 로 묘사하고 있는데, 대표작으로는 여자의 일생, 목걸이, 달빛등이 있다. 만물박사 나는 맥스 켈라다와 만나기 전부터 그가 싫었다. 이제 막 전쟁이 끝났으므로 대서양을 횡 단하는 정기 여객선은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선실을 얻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으므로 선원 들이 정해 주는대로 견뎌야만 했다. 독방을 얻는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나는 다 행히 침대가 두 개만 놓인 방을 하나 배당받았다. 그러나 나와 함께 같은 방에 묵게 될 손님의 이름을 들었을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이름은 선실 창이 닫혀 밤 공기가 전혀 통하지 않는 것처럼 답답한 인상을 주었다. 두 주일 동안이나 낯선 사람과 함께 같은 방을 쓴다는 것은 불쾌한 일이었다. 더욱이 그 승객 의 이름이 스미스나 브라운이었던들 덜 실망했을 것이다. 나는 배에 올랐을 때, 켈라다 씨의 짐이 우리 방에 운반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 는 그 짐짝들은 거들떠 보기도 싫었다. 그의 여행가방에는 많은 꼬리표가 달려 있었으며, 옷 이 들어 있는 그의 트렁크는 무척 육중했다. 그는 세면도구를 풀어 놓았다. 나는 세면대 위 에 있는 향수며 샴푸, 그리고 윤기가 흐르는 머릿기름 등을 보고 그가 코티 회사의 고급 화 장품을 애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금으로 그 이름의 머리글자를 새긴 켈라다 씨 의 솔들은 솔질보다 문지르는데 사용하는편이 더 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도저히 그를 좋아할 수 없었다. 나는 흡연실에 들어가 트럼프 카드 한 몫을 가져와 트럼프 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누가 내게 바싹 다가와서 당신의 이름이 아무개라고 생각하는데 맞느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저는 켈라다라고 합니다."하고 그는 번쩍거리는 이빨을 드러내어 웃으며 자기 소개를했 다. "아, 그렇습니까. 우리는 같은 방에 묵게 되었군요!" "네, 참 다행입니다. 어떤 사람과 같은 방에 들지 모르는 판에, 나는 당신이 영국인이라고 하길래 퍽 기뻤습니다. 나는 해외에 나가 있을 때 우리 영국 사람들은 피차에 친절하게 지 내야 한다고 믿고 있어요. 내 말 뜻을 아시겠지요!" 나는 눈만 껌뻑거렸다. "당신도 영국 사람입니까?"하고 내가 물었다. "물론이죠. 설마 내가 미국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을텐데요? 나는 진짜 영국 사람입니다." 켈라다 씨는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호주머니에서 여권을 꺼내 내 코밑에 대고 가볍게 흔 들어 보였다. 나는 조지 왕의 백성들 중에는 별 사람이 다 있구나 싶었다. 켈라다 씨는 두툼한 매부리 코와 유난히 반짝이는 커다란 눈을 갖고 있으며 살결은 검은 편이었다. 키가 작으나 단단한 몸집인 그는 수염을 깨끗이 깎고, 길고 까만 머리는 윤기가 흐흐며 곱슬곱슬했다. 그는 사투 리가 섞인 영어를 유창하게 말했으며 제스처도 풍부했다. 나는 그의 영국 여권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라면, 그가 영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날씨보다 더 푸른 하늘 아래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을 드시겠어요?" 그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금주령이 내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배에서 는 술 한 방울도 구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목이 마르지 않을 경우에는 진저 엘이나 레몬주스와 같은 것은 별로 생각이 없었다. 그는 나에게 동양적인 의미심장한 미소 를 던졌다. "위스키 소다든지 물 타지 않은 마티니든지 말씀만 하시오." 그는 바지 양쪽 뒷주머니에서 병을 하나씩 꺼내어 앞에 있는 테이블 위에 놓았다. 나는 마티니를 마시기로 했다. 그는 웨이터를 불러 큰 컵 하나와 유리컵 두 개를 가져오게 하였 다. "아주 멋진 칵테일이군요."하고 나는 말했다. "아직 얼마든지 있습니다. 혹시 이 배에서 친구가 생기면 그분에게 이 세상의 온갖 술을 다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시오." 그는 말이 많았다.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에 대하여 이야기하는가 하면 연극과 영화에 대해 서도 떠들어대고 정치문제도 말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애국적인 사람이었다. 영국 국기는 인상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그 깃발을 알렉산드 리아나 베이루트에서 온 신사들이 흔들어댈 때에는 좀 위엄을 잃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버릇없는 친구였다. 그가 초면인 나에게 말할 때는 내 이름에 '미스터'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이 당연할 것이지만, 그는 내 마음을 편하게 하려고 해서 그랬는지 그러질 않았다. 나는 여러 가지로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옆에 앉았을 때 나는 혼자 갖고 놀던 카드 를 옆에 밀어 놓았다. 그러나 처음 만난 사람치고는 이야기가 상당히 오래 계속되었다고 생 각하도 나는 카드놀이를 계속했다. "3을 4에 놓으시오."하고 그가 말했다. 트럼프를 할 때 자기가 젖힌 카드를 보기 전에 다른 사람이 어디 놓으라고 이르는 것보다 화가 나는 일이 없다. "나온다!나온다! 잭에다 10을 놓으시오."하고 그는 소리쳤다. 나는 분노와 증오를 느끼면서 카드놀이를 마쳤다. 그러자 그가 트럼프를 잡았다. "당신은 카드 속임수를 좋아하시오?" "아뇨, 그런 건 질색입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럼 이거 한 가지만 가르쳐 드리지요." 그는 나한테 세 가지를 가르쳐 주었다. 그쯤해서 나는 그에게 식당에 가겠다고 말했다. "아, 그건 걱정 마세요."하고 그는 말했다. "벌써 당신의 자리를 잡아 놓았어요. 우리는 같은 방에 있으니까, 식탁도 같이 앉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나는 그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그는 나와 같은 방을 쓰고, 하루 세 끼를 같은 식탁 에서 먹을뿐더러, 갑판 위를 거닐 때에도 언제나 내 뒤를 따라 다니는 것이었다. 그를 따돌 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남하고 어울릴 때 그렇듯이, 남도 자기와 만나는 것을 즐겁게 생각하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는 방문한 자신을 아래층으로 몰아내고 문을 콱 닫아버려도, 아마 자기 가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사람을 잘 사귀었다. 그리하여 사흘 후에는 배 안에 있는 사람들과 다 아는 사이가 되었다. 또 그는 무슨 일이나 도맡아 했다. 그는 내기를 주관하고 경매를 처리했다. 놀이에 서 상으로 줄 돈을 거두기도 하고 또 고리던지기와 골프를 주관하기도 했으며, 음악회나 가 장무도회를 열기도 했다. 그는 언제, 어느 곳에나 얼굴을 내밀곤 하였다. 그리하여 배에서 가장 미움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그를 드러내놓고 만물박사라고 불렀다. 그는 그것을 칭찬하는 말로 간주했다. 그가 정말 밉게 보이는 것은 식사 때였다. 그는 우리를 거의 한 시간 동안이나 자기 세계에서 놀 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쾌활하고, 수다스럽고, 논쟁하기를 좋아했다. 다른 누구보다도 아는 체를 했고, 자기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면 자존심을 상했다. 그는 별로 대단치 않는 화제도 상대방이 자기 견해를 납득할 때까지는 멈추지않았다. 그는 자기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는 생각은 도무지 하지 않았으며, 자기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우리는 의무실의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만약 거기 램지씨가 동석하지 않았던들, 그는 이 번에도 제 세상처럼 떠들어댔을 것이다. 의사는 그런 것에 둔한 사람이고 나는 나대로 무관 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램지 씨도 그 사람 만큼이나 독선적이어서, 동부 지중해 연안 출신 으로 보이는 켈라다 씨의 자신만만한 태도가 아니꼬와 두 사람은 끊임없이 신랄한 논쟁을 벌였다. 램지 씨는 미국 영사관 직원으로 근무하며, 일본 고베에 파견되어 있었다. 그는 탄탄한 피 부 아래 비계살이 찐 뚱뚱한 미국 중서부 출신의 사내로, 그 살이 기성복 밖으로 드러나 보 였다. 그는 아내를 데리러 뉴욕에 갔다가 근무지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의 아내는 본국에서 1 년 동안 혼자 있었다. 그녀는 몸집이 작고 예쁘장하게 생긴 귀여운 여인으로, 명랑하고 유머 를 즐길 줄 아는 여자였다. 영사관에서 나오는 봉급이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언제나 수수한 옷차림이었으나 옷입을 줄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하면서도 남에게 돋보이는 매 력이 있었다. 나는 그녀가 여자들의 눈에는 보통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요즘의 여성들에게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을 갖고 있음을 알았다. 그녀를 보면 누구나 정숙하다는 인상을 받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정숙함은 그녀의 코트에 단 꽃 한 송이라도 아름답게 보이게 했다. 어느 날 저녁 식사 때 우연히 진주 이야기가 화제로 올랐다. 신문에서 일본 사람들이 만 들고 있는 깜찍한 양식 진주에 대해 서로 떠들고 있었지만, 그중에 의사는 그 양식 진주가 진짜 천연 진주의 가치를 떨어뜨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식 진주는 품질이 매우 좋았다. 아마도 머지않아 그것은 천연 진주에 버금갈 것 이다. 이런 문제로 말을 하고 있었는데, 켈라다 씨는 그의 버릇대로 이 새로운 화제에 끼어 들었다. 그리하여 진주에 대해 아는 것을 모조리 우리에게 털어놓았다. 램지 씨는 진주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있는 것 같지 않았지만, 동부 지중해 연안 출신 에게 대들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잠시 후에 열띤 논쟁을 벌였다. 나는 전 에도 켈라다 씨가 정열적이고 말을 잘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때처럼 열렬하고 언변 이 좋은 줄은 미처 몰랐다. 드디어 그는 램지 씨가 한 말이 자기를 크게 자극했던지 손으로 테이블을 꽝 치면서 외쳤다. "여보시오. 나는 적어도 내가 말하는 것에 대하여는 분명히 알고 있소. 나는 일본에 진주 사업을 시작하러 가는 길이오. 나는 그 무역을 하고 있소. 그리고 진주에 관련된 무역에 종 사하는 사람이라면 저마다 지금, 내가 당신에게 한 말을 긍정할 거요. 나는 세상에서 으뜸가 는 진주는 다 알고 있소. 따라서 내가 모르는 진주라면 알만한 가치도 없는 거요." 이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소식이었다. 켈라다 씨는 그처럼 수다스러우면서도 아직 아무한 테도 자기의 직업을 밝힌 벅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가 막연히 어떤 장사 속으로 일본에 간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좌중을 둘러보았다. "나같은 전문가가 분간할 수 없는 양식 진주는 만들어 질수 없어요." 그는 램지 부인의 목걸이를 가리키면서 말을 계속했다. "램지 부인, 당신이 목에 건 그 목걸이는 앞으로는 절대로 지금보다 값이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이것은 내가 보장합니다." 램지 부인은 수줍은 듯이 약간 얼굴을 붉히며 목걸이를 옷 속에 집어넣었다. 램지 씨는 몸을 굽혀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는 가느다란 미소가 떠올랐다. "집 사람의 목걸이는 꽤 예쁘지요?" "나는 곧 진짜 진주라는 걸 알아차렸어요." 켈라다 씨가 말했다. "이건 물론 제가 산 물건은 아니에요. 하지만 얼마나 줬을 것 같아요?" "원산지에서는 1만 5천 달러쯤 나갈 거요. 그렇지만 뉴욕 5번가에서 산 거라면 3만 달러 이상 주었다고 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 거요." 램지 씨는 쓴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집 사람의 저 목걸이를 뉴욕을 떠나기 전에 백화점에서 18달러를 주고 샀다면 놀 라시겠죠?" 켈라다 씨는 얼굴을 붉혔다. "농담 말아요. 그것은 진짜일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본 것 중에서 그만한 크기에서 는 최고품이에요." "우리 내기를 할까요? 나는 그것이 가짜라는데 대해 백달러를 걸겠어요." "그래, 내기를 합시다." "아니, 여보! 뻔한 걸 가지고 무슨 내기를 한단 말이에요." 램지 부인이 말했다.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은근히 남편을 나무라는 듯했다. "뭐? 쉽게 돈 벌 기회가 생겼는데 이걸 바보처럼 놓칠 수 있겠어?" "그렇지만 어떻게 그걸 입증할 수 있어요?" 하고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켈라다 씨의 말이 틀리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건 제말밖에 없잖아요." "그 목걸이를 어디 좀 봅시다. 만일 그것이 가짜라면 곧 알려 드리지요. 나는 백 달러쯤 잃어도 좋아요." 켈라다 씨가 말했다. "여보, 목걸이를 저분에게 보여 주구려." 램지 부인은 한동안 망설였다. 그녀는 고리에 손을 가져갔다. "고리가 잘 떨어지지 않는군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켈라다 씨는 제가 하는 말을 그대로 믿으셔야 해요." 나는 갑자기 무슨 불상사라고 일어날 것 같은 의혹을 느꼈으나 별로 할 말이 떠오르지 않 았다. 램지 씨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내가 풀어 주지." 그는 목걸이를 풀어서 켈라다 씨에게 넘겨 주었다. 켈라다 씨는 호주머니에서 확대경을 꺼내어 세밀히 검사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의 검고 미끈한 얼굴에 승리의 미소가 감돌았다. 그는 목걸이를 돌려 주었다. 그는 입을 막 떼려고 하는 찰나에 램지 부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이 휘둥그래 지며 두려운 얼굴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절망적인 애원의 빛이 서려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뚜렷하게 보였다. 나는 그녀의 남편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이상스러웠다. 켈라다 씨는 입을 딱 벌린 채 말을 못했다. 그는 얼굴이 새빨갛게 되었다. 그는 그것을 억 제하려고 무척 애쓰고 있었다. "내가 잘못 봤어요."하고 그는 말했다. "그것은 멋짐 위조품이오. 확대경으로 보았더니 그걸 곧 알 수 있었어요. 역시 18달러짜리 가 맞아요." 그는 지갑에서 잠자코 백 달러의 지폐를 꺼내어 램지 씨에게 넘겨 주었다. "아마 이번 일은 당신에게 다시는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행동하지 말라는 교훈이 되었을 거요."하고 램지 씨는 지폐를 받으면서 말했다. 그 이야기는 그런 따위의 다른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이 온 배 안에 퍼졌다. 그는 그날 저 녁에 적지 않은 조롱을 받았다. 만물박사가 꼬리를 잡혔으니 재미있는 웃음거기가 아닐 수 없었다. 램지 부인은 머리가 아프다고 말하면서 자기 선실로 가버렸다. 이튿날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 면도를 할 때, 켈라다 씨는 담배를 피우면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문틈으로 갑자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편지가 눈에 띄었다. 나는 문을 열고 내다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편지를 집어 보았더니 굵은 글씨로 이름이 뚜렷이 적혀 있었 다. 나는 편지를 켈라다 씨에게 넘겨 주었다. "누가 보낸 걸까?" 그는 편지를 뜯었다. "아!" 그는 봉투에서 편지 대신 백 달러의 지폐를 꺼내었다. 그는 나를 보고 얼굴을 붉히더니 봉투를 박박 찢어 나에게 주었다. "이걸 선창 밖으로 좀 버려 주시오." 나는 그가 시키는대로 봉투를 버린 후, 웃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남에게 바보로 보이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거요." 그가 말했다. "그 진주는 진짜인가요?" "만약 나에게 그렇게 아름다운 아내만 있다면, 내가 고베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1년씩이 나 뉴욕에서 혼자 지내게 하지는 않았을 거요."하고 그가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켈라다 씨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는 지갑을 꺼내어 조심스럽게 백 달러의 지폐를 집어 넣었다. 모옴(1874-1965) 영국의 소설가이며 극작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롭게 자라면서 의학 공부를 했으나, 1897년에 첫소설 램버스 라이자를 써서 주목을 끌면서 작가가 되었다. 날카로운 필체와 기 지로 인간의 심리를 묘사한 그의 소설은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명성을 떨쳤다. 대표작으 로 소설에 인간의 굴레, 달관 6펜스, 면도날. 희곡으로 훌륭한 사람들등이 있다. 정조 공증인 루반체프의 아내는 이웃 별장에 피서를 온 변호사 일리인과 함께 숲속 길을 조용 히 거닐고 있었다. 그녀는 스물 다섯쯤 된 젊고 아름다운 여자로, 이름은 소피아 페트로브나 라고 하였다. 저녁 다섯 시 무렵이었다. 숲길 위 하늘에는 흰구름이 솜처럼 깔려 있고, 구름 사이로 군데군데 파란 하늘이 엿보였다. 그리고 어떤 구름은 높은 노송 가지 끝에 걸린 것 처럼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날은 고요하고 무더웠다. 숲길 앞은 나지막한 철길 둑이 가로놓여 있었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총을 든 보초가 그 길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제방 뒤에는 녹슨 지붕에 여섯 개의 첨탑이 솟 아 있는 커다란 교회가 보였다. "이곳에서 당신을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소피아 페트로브나는 눈을 아래로 내려깐 채 파라솔 끝으로 길가에 떨어진 나무 잎사귀를 쿡쿡 찌르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어쨌든 당신을 만나게 된 것을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모든 것을 솔 직히 털어놓고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이반 미하일로비치 씨, 당신이 저를 정말 사 랑하고 존중하신다면 제발 앞으로는 제 뒤를 쫓지 말아 주세요! 당신은 제 뒤를 그림자 처 럼 따라다니면서 언제나 이상한 눈초리로 저를 바라보시며 사랑을 고백하시고, 또 이상한 편지도 보내시고....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하실 작정이세요? 어쩌자고 그러시는 거예요?" 일리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소피아 페트로브나는 몇 발짝 더 걸어가서 다시 말을 계속했다. "우리가 알게 된지도 어느덧 5년이나 되었지만, 당신은 지난 몇 주 동안에 아주 다른 사 람처럼 변해 버렸어요. 저는 당신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러는 일리인을 흘깃 곁눈질 해 보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솜처럼 흰 구름을 멍하 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듣기 싫은 말을 억지로 참아가며 들어야 할 때 느끼는 일종의 혐오감과 허탈감이 교차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당신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시다니 놀라운 일이에요." 하고 루반체프 부인은 어깨를 치 켜올리면서 말을 계속했다. "당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얼마나 파렴치한 것인가를 아셔야 해요. 저는 남편과 딸이 있 는 몸이에요. 그리고 남편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어요. 당신은 그런 것들을 일체 무시하나 요? 게다가 당신은 저와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는 처지라 가정생활에 대한 저의 자세며, 가 정윤리에 대한 저의 태도를 잘 알고 계시지 않나요?" 일리인은 화가 나는 듯이 헛기침을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정윤리라...."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오, 하느님 맙소사!" "그래요! 저는 남편을 사랑하고 존경해요. 그리고 한 가정의 평화를 무엇보다도 소중히 생 각하고 있어요. 남편 안드레이와 딸을 불행하게 하느니 차라리 제가 죽어버리는 것이 나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저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마세요. 그리고 전과 같이 좋은 친구가 되 어 주시구요. 제발 당신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그 한숨과 탄식을 버리세요. 자, 이것으로 모든 것은 해결되고 끝이 났어요. 앞으로는 다시 입밖에 내지 말기로 해요. 이젠 다른 이야 기나 합시다." 소피아 페트로브나는 그의 얼굴을 다시 한번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멍하니 하늘 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화가 몹시 치미는 듯 떨리는 입술을 지 긋이 깨물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화를 내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 창백한 얼굴빛은 은근히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화만 내지 마시고 친구가 되어 주세요, 네?" 그녀는 다정스럽게 말했다. "아시겠지요? 그럼 우리 악수해요." 일리인은 그녀의 포동포동한 작은 손을 꽉 잡고 천천히 자기 입술로 가져갔다. "저는 철없는 어린애가 아닙니다."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저는 사랑하는 여자와 친구가 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요." "이제 그만! 모든 것은 다 끝났어요. 우리가 어느새 벤치까지 왔군요. 자 여기 앉으세 요...." 그녀는 가장 복잡하고 괴로운 문제를 매듭진 뒤였으므로 조용히 안식에 젖어 있었다. 그 리고 일리인의 얼굴을 쳐다볼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그녀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자기 를 사랑하는 남자를 정복하였을 때 느끼는 여자의 우월감으로 만족스러웠다. 그녀는 씩씩하 고 남자다운 얼굴에, 큼직하고 시커먼 턱수염을 기른 이 억세고 건장한 사내가, 대사라고까 지 이름난 총명하고 교양있는 남자가 자기 옆에 앉아서 순순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을 보 자, 어쩐지 마음이 흐뭇했다. 두 사람은 잠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아직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았고 또 끝나지도 않었어요!" 하고 일리인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마치 무슨 기도문이라도 읽어내리듯이 나는 남편을 사랑하고 존경한다느니, 가정 의 윤리가 어떻다느니 하고 말하지만, 그런건 당신이 말하기 전부터 이미 잘 알고 있어요. 오히려 제가 그 이상의 말을 당신에게 해 드릴 수도 있을 겁니다.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저 의 행동이 도리에 어긋난 짓이라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그런 이야기를 되풀이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런 입에 발린 소리로 동정을 하느니 차 라리 제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해 주세요." "벌써 여러 차례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이곳을 떠나시라고요." "당신도 아시다시피 지금까지 다섯 번이나 당신 곁을 떠나 보았지만, 번번히 도중에서 되 돌아오곤 했어요. 저는 그 당시의 여행권을 보여 드릴 수도 있어요. 모두 소중히 간직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아무래도 당신 곁을 떠날 수는 없는가봐요. 그러면 그럴수록 괴로운 싸 움만 계속될 뿐이에요. 아무리 힘이 세고 용기가 있다해도 그건 아무 소용도 없어요. 인간이 자연의 힘에 항거할 수는 없으니까요. 아시겠어요? 자연에 항거할 수는 없는 거예요. 설사 제가 이 고장을 떠난다고 하더라도 자연의 힘은 제 옷자락을 놓아 주지 않아요. 저는 정말 저속하고 무기력한 존재인가봐요." 일리인은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자리에서 일어나 벤치옆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저는 개처럼 으르렁거려요!" 그는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저는 제 자신을 미워하고 멸시해요! 마치 불량소년처럼 남의 부인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바보같이 편지질이나 하고, 이게 무슨 꼴이에요.... 에잇!" 그는 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입속으로 이렇게 부르짖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당신도 정직하지 못합니다." 하고 그는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이 참으로 저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면 어찌하여 여기까지 나오셨어요? 무엇 때문에 나오신 거요? 저는 당신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직 '예스'냐 '노'냐 의 최종적인 답변만 을 원했어요. 그런데 당신이 결정적으로 답변해 주는 대신에 이렇게 나하고 만날 기회를 만 들어 번번히 똑같은 설교만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루반체프 부인은 깜짝 놀라면서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정숙한 부인이 갑자기 자기의 나 체를 드러내 보였을 때와 같은 수치심을 느꼈던 것이다. "당신은 마치 제가 당신을 희롱하고 있는 듯이 말하시는 군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저는 당신에게 언제나 분명한 대답을 해 왔어요. 그리고 오늘도 그것을 당신에게 거듭 부탁했던 거예요." "아니, 이런 일에 부탁은 또 뭡니까? 만약 당신이 '어디론가 가버지세요!'하고 잘라서 말하 신다면, 저는 벌써 여길 떠났을 거예요. 그러나 당신은 나에게 그런 말은 한 적이 없어요. 한 번도 분명한 대답을 해주지 않고 애매한 말만 해 왔어요. 아닌게 아니라 당신이 나를 희 롱하는 게 아닌지.... 혹은...." 일리인은 말끝을 흐리면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소피아 페트로브나는 처음부터 지금 까지 자기가 그에게 취해 온 행동을 곰곰히 돌이켜 보았다. 그녀는 자기 행동 뿐만 아니라 마음 속에서도 처음부터 그의 사랑을 거절해 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한편 그의 말에도 다소는 일리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 진실이 어떤 것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일리인에게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잠자코 있기도 뭐해서 어깨를 으쓱 치켜올리면서 말했다. "그럼 저한테도 책임이 있단 말씀이세요?" "당신이 성실치 못하다고 탓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고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연히 그렇게 말이 입밖으로 나왔을 뿐이지요.... 당신이 성실치 못하다는 것은 당연하고 도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만일 세상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갑자기 성실한 사람 이 되어버린다면, 세상은 온통 뒤죽박죽이 될 거예요." 소피아 페트로브나는 철학을 논할 처지가 못되었으나, 화제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온 것 이 기뻐서 이렇게 물었다. "그건 왜요?" "왜냐구요? 성실이란 야만인이나 짐승들에게만 필요한 것이니까요. 문명이 여자의 미덕과 같은 안일한 욕구를 들고 나온 이상, 성실이란 벌써 무용지물이 된 거예요." 일리인은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 지팡이로 모래를 쑤셔댔다. 루반체프 부인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거의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으나, 듣기가 싫진 않았다. 센스있는 사내가 자기처럼 평범한 여자에게 그런 현명한 말을 들려주는 것이 기쁘 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은 파리한 그 얼굴을 보는 것도 그 녀에게는 저으기 만족스러웠다. 그녀는 그 말을 잘 알아들 수는 없었지만, 지성인답게 큰 문 제를 척척 해결해 나가면서 결론으로 이끌고 가는 그의 멋진 대담성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 었다. 그녀는 남자에게 갑자기 마음이 끌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깜짝 놀랐다. "저는 무슨 말씀인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아요."라고 그녀는 다급히 말했다. "무엇 때문에 성실함에 관한 문제를 꺼내시는 거예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제발 앞 으로는 좋은 친구로 지내요. 그리하여 저를 더는 괴롭히지 말아 주세요. 부탁이에요." "알겠습니다.좀더 저 자신과 싸워 보죠!" 하고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힘껏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그렇지만 싸움의 결과는 예측할 수 없군요. 제 이마에 총알 을 박을지 아니면 주정뱅이가 되어 버릴지. 아무튼 좋은 결과는 바라기 어려울 겁니다. 모든 일에 한도가 있으니까요. 자연과의 투쟁도 마찬가지죠. 한 가지 묻겠는데요, 미칠 것 같은 심정과는 어떻게 싸워야 하죠? 가령 당신이 술에 취했다면 무슨 방법으로 그 흥분을 가라앉 힐 수 있을까요? 그리고 당신의 모습이 제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고 언제나 여기 이 소나무 처럼 눈 앞에 떠오른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말씀해 주세요. 저의 사랑과 희망이 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제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어떤 악마의 것이 되었을 때, 그 저주스러 운 불행에서 벗어나려면, 저는 어떤 일을 해야 합니까?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 랑하기 때문에 저는 정상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있어요. 사업도 버리고 하느님마저 잊어버렸 어요. 저는 지금까지 이 처럼 깊은 사랑을 느껴본 일이 없었어요!" 소피아 페트로브나는 결과가 이렇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일리인 으로부터 몸을 비키며 놀란 눈초리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눈물로 젖어 있었 고 입술은 바르르 떨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에 주리고 애원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는 자기 두 눈을 겁먹은 듯한 그녀의 커다란 두 눈 앞으로 가져가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당신은 이다지도 아름답습니까! 나는 지금 무척 괴롭습니다. 그러나 맹세하지요. 이렇게 괴로워 하면서도 당신의 눈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나는 한평생이라도 이렇게 앉아 있겠어요.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소피아 페트로브나는 갑자기 변한 그의 태도에 당황하여 그의 입을 봉할 수 있는 말을 고 르기에 급급했다. '이곳을 피해 버리자!' 하고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 러나 먼저 일리인이 그녀의 발 아래 무릎을 꿇었다. 그는 소피아의 무릎을 끌어안고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정열에 넘치는 목소리로 온갖 아름다운 말을 모조리 늘어놓았다. 그녀는 두려움과 혼란스러움으로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자기 두 무릎이 마치 따뜻한 목욕풀에 잠기기라도 한 것처럼 기분좋게 조여드는 것이었다. 위태로운 순간이었다. 그녀는 어떤 고약한 잔인함 같은 것을 느끼면서 자기 자신의 감각 속에서 고개 를 들고 있는 어떤 이상한 충동의 정체를 밝혀내려고 애를 썼다. 그녀는 정숙한 유부녀의 항거 대신에, 주정꾼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무기력과 나태와 공허감으로 가득차 있는 자 기 자신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그만 화가 났다. 단지 어느 마음 한 구석에서 '너는 왜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느냐?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앉아 있느냐'하고 능글맞게 놀려대 는 소리를 의식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무슨 적당한 이유라도 생각해 내려고 애쓰면서도, 어찌하여 거머리처럼 악착같이 달라붙는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하지 않았는지? 또 어찌하여 누가 보는 사람이 없을까하고 황급히 주위를 살펴보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소나무 숲과 구름 한점만이 두 사람 의 모습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상관에게 보고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뇌물을 받은 수 위 할아버지처럼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보초는 말뚝처럼 제방 위에 서 있었다. 벤치쪽을 유 심히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다. '볼테면 보라지!' 하고 소피아 페트로브나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저, 제 말 좀 들어 주세요!" 하고 그녀는 절망적인 어투로 말을 계속했다. "어쩌자고 이러시는 거예요? 앞으로 어떡하실 생각이세요?" "모르겠어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는 불쾌한 질문이 성가시기라도 한 듯이 손을 내 저으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목쉰 듯한 기차의 기적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나 들어온 이 싸늘한 음향이 그녀로 하여금 정신을 차리게 했다. "이럴 시간이 없어요. 저는 그만 가봐야 겠어요!" 하고 그녀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기차가 오고 있어요. 남편이 저 차로 올 거예요. 그분 점심을 차려 드려야 해요." 그녀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돌려 제방쪽으로 바라보았다. 기차자 지나갔다.기관차 뒤 에 화차들이 길게 달려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생각한 별장행 열차가 아니라 화물차였다. 길 다란 화차 행렬이 하얀 교회당을 배경으로 마치 인생의 하루 하루와도 같이 한 칸 한 칸 꼬 리를 물고 연달아 지나갔다. 그 화차의 행렬은 끝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윽고 그 행렬도 끝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차장이 타고 있는 등불이 켜진 마지막 차량이 숲 저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날쌔게 몸을 돌려 일리인을 돌아보지도 않고, 재 빨리 오솔길을 돌아갔다. 이제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온 것 같았다. 그녀는 일리인에 게서 당한 모욕보다 오히려 결단성이 없는 자기의 행동을 탓하고 싶었다. 정숙하고 순결하 다고 자부하던 자기 자신이 부꾸럽게도 다른 남자에게 무릎을 내맡겼다는 수치심 때문에 얼 굴이 화끈거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한시바삐 가족들이 있는 별장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변호사는 힘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오솔길에서 벗어나 좁다란 한길 로 접어들었을 때,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일리인의 무릎에 묻은 모래가 언뜻 눈에 띄었 다. 그녀는 제발 따라오지 말라고 손짓을 했다. 집에 돌아온 그녀는 자기방에서 잠자코 창문을 바라보기도 하고, 책상을 돌아보기도 했다. '이 망할 것!' 하고 그녀는 자기 자신을 책망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탓하면서 방금 일어난 모든 일을 곰곰히 되새겨 보았다. 그녀는 지금 까지 일리인의 사랑을 한결같이 거절해 오면서도,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히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가 자기 발밑에 몸을 던졌을 때 어떤 야릇한 기쁨마저 느끼지 않았던가? 그녀는 그 모든 일을 냉정히 돌이켜 보았다. 결국 숨이 막힐 듯한 수치감으로 하 여 자기 뺨을 힘껏 후려갈리고 싶은 충동을 억제 할 수 없었다. '가엾은 안드레이!' 그녀는 남편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될 수 있는대로 상냥한 얼굴을 하 려고 애를 썼다. '불쌍한 내 딸 바아랴! 너는 엄마가 어떤 여자인지 모르고 있을 테지. 나를 용서해다오! 나는 너를 사랑해.... 얼마나 끔찍이 사랑하고 있는지 몰라!' 그녀는 아직도 자기가 훌륭한 아내요, 어머니이며, 일리인에게 말한 바와 같이 가정의 윤 리를 짓밟을 정도까지 타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애써 자기 자신에게 입증하고 싶었다. 그래 서 부엌으로 달려가 아직 남편의 식사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보자 가정부를 마구 나무 랐다. 그녀는 피로와 공복에 지친 남편의 얼굴을 상기하고 가엾어 못 견디겠다는 듯이 손수 상을 보았다. 이것은 일찍이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그리고 딸 바아랴를 보자 두 손으로 안아올려 꼭 껴안았다. 그녀는 딸을 보기가 괴롭고 언짢았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머리에서 몰아내고 싶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얼마나 정직하고 선량하며, 또 훌륭한 사람인가를 딸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잠시 후에 남편이 집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녀의 짐짓 조작된 감정은 불안과 괴로움을 안겨 주었을 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녀는 마음이 괴로워 안절부절 못하며 창가에 앉아 있었다. 인간은 고통에 처해 있으면 올 바른 감정과 이성이 지배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마음속에 너 무나 많은 일들이 뒤엉킨 탓으로, 마치 하늘을 날아가는 참새떼를 헤아릴 수 없듯이 사리를 분간할 수 없는 혼란 속에 빠져버렸다. 그리하여 남편이 돌아온 것이 별로 반갑지 않고, 식 사를 하는 남편의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의 마음속에 남편에 대한 증오심 이 갑자기 싹트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배고팜과 피로가 겹친 남편은 미처 수프를 기다릴 사이도 없이 소시지부터 먹기 시작했 다. 그는 게걸스럽게 관자놀이를 실룩거리고 쩝쩝 입맛을 다시며 소시지를 먹고 있었다. '저런! 어쩌면 저렇게도 망칙스럽게 씹어먹고 있을까. 나는 저분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 지만....' 하고 그녀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감정의 혼란에 못지않게 이성에도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불쾌한 생각을 억누르 고 있을 때, 흔히 인생체험이 부족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녀는 애써 자기의 불행을 생각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애쓰면 애쓸수록 일리인의 얼굴이며, 그 무릎 위에 묻 어 있던 모래며, 솜 같은 뭉게구름이며, 기차의 모습들이 더욱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런데 나는 오늘 무엇하러 거기에 갔을까, 내가 잘못이지.' 그녀는 마음이 몹시 괴로웠 다. '나는 과연 내 몸을 책임질 수 없는 부정한 여자인가?' 그녀는 일이 더 커지기 전에 결 말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마지막 접시를 비울 때 모든 것을 남편에게 고백하고 위 험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그녀는 굳게 결심하고 있었다. "여보! 당신하고 신중히 의논할 일이 있어요." 그녀는 식사를 마치고 피로를 풀기 위해 한잠 자려고 코트와 장화를 벗는 남편에게 이렇 게 말했다. "뭔데?" "우리 이곳을 떠나도록 해요!" "아니! 가긴 어디로 간단 말이오? 도시로 돌아가기엔 아직 좀 이르고...." "그런게 아녜요. 여행을 갑시다. 어딘가로 떠나요." "여행을 한다...." 남편은 기지개를 펴며 중얼거렸다. "나도 가끔 그런 공상을 해 보지만 그럴 돈이 어디 있고. 또 사무실은 누구에게 맡기고!"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은 생활이 몹시 지루한 모양이구려. 정 소원이라면 혼자 가도록 하지!" 그녀는 그말에 동의했다. 그러자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리인이 마침 잘 됐다고 생각하여 자기와 같은 기차의 같은 칸에 타고 쫓아오지 않을 까....' 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식사는 배불리 하였으나 아직 피로가 풀리지 않은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줄이 죽죽 쳐진 양말을 신은 여자 발처럼 작은 남편의 발이 눈에 띄었 다. 양쪽 뒤꿈치가 모두 구멍이 나 있었다. 커튼 뒤에서는 벌이 유리창에 부딪치며 붕붕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양말 뒤꿈치의 실밥을 바라보기도 하고, 벌의 울음소리를 듣기도 하면서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자기 모습을 눈앞에 그려 보았다. '일리인은 밤낮 나와 마주 앉아서는 자기 자신의 무력함에 분개하기도 하고, 마음의 갈등 으로 인해 새파랗게 질리기도 하면서, 잠시도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불량학생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가 하면, 나를 나무라기도 하고 자기 머리칼을 쥐 어뜯기도 할 것이다. 그러다가 밤이 깊어 승객들이 잠들거나 차에서 내려 정거장으로 나가 는 틈을 타서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숲속의 벤치에서 하던 것처럼 내 무릎을 껴안을 것이 다!' 그녀는 이런 공상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렇지만 혼자서는 안 가겠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당신과 같이 가야 해요." "괜한 소리 말아요." 남편은 한숨을 내쉬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구 될법한 얘기나 하구려." '내 사정을 알아차린다면 저분도 함께 나설 것이다!'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쨌든 그녀는 일단 떠나기로 작정했다. 그러자 함정에서 빠져나온 사람처럼 기분이 홀가 분해졌다. 그리고 이성도 차츰 정상으로 돌아오고 마음도 즐거웠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일을 곰곰히 생각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어쨌든 이 고장을 떠나야 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어느새 남편은 잠들어 버렸다. 주위에는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응접실에 가서 피아노를 쳤다. 저녁 한때 창밖에서 떠드는 활기찬 소리며, 피아노의 멜로디보다 자기 자신 의 고통을 용케 감당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흐뭇하게 했다. '만일 다른 여자가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면 어찌할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그 여자는 틀림없이 그 어려운 고비를 극복하지 못하고 정열의 회오리 바람에 휘 말려 들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고 괴로워했을 뿐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는 위험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이러한 자기의 정숙함과 결단성에 스스로 감동되어 세 번이나 거울 앞에 가서 자 기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어둠이 짙어지기 시작하자 손님이 모여들었다. 남자들은 카드놀이를 하기 위해 식당에 자 리를 잡고, 부인들은 응접실과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맨 나중에 일리인이 찾아왔다. 슬픔 에 잠겨 침울해진 그의 얼굴은 병자처럼 헬쓱했다. 그는 소파의 한 끝에 잠자코 앉아 있었 다. 언제나 명랑하고 말하기를 좋아하던 그가 오늘따라 얼굴을 찌푸리고 눈두덩망 문지르고 있는 것이었다. 누가 말을 걸면 윗입술에만 억지로 미소를 짓고 귀찮은 듯이 퉁명스럽게 대 답하곤 했다. 그는 몇 차례 익살을 부렸으나 그것도 거칠고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소피아 페트로브나의 눈에는 그가 히스테리를 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녀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이 불행한 사내가 농담을 하고 있을 처지가 못되며, 커다란 고뇌로 인하여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 때문에 그는 출세와 귀중한 청춘을 허송하면서 나머지 재산을 별장에서 탕진하고 어머니와 동생들을 저버렸지만, 무엇 보다도 더 큰 문제는 자기 자신의 고통스러운 투쟁에서 완전히 패배했다는 사실이었다. 그 러므로 그녀는 인정상으로도 그에게 좀더 친절한 태도를 보여 주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 었다. 그녀는 그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녀가 만약 일리인에게 다가가서 '그래서는 안돼요!' 하고 한 마디 던졌던들 그는 그 목소리 속에서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어떤 위력을 느꼈을 것이 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지도 않고, 또 말도 건네지 않았다. 아니 그럴 생각조차 없 었다. 그녀에게 청춘의 사소한 이기심이 이밤처럼 대견스럽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그녀는 가엾은 일리인이 침통한 얼굴로, 바늘 방석에 앉은 것처럼 소파의 한 귀퉁이에 엉덩이를 올 려놓고 있는 것을 보고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편, 미칠 듯이 자기를 사랑하고 있 는 남자의 존재를 생각하자 자신의 육체적 매력과 승리감으로 하여 가슴이 뿌듯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청춘과 미모를 그리고 굳은 정조를 의식했다. 그리고 이곳을 떠나리 라고 마음 먹은 지금에 와서, 자기 자신에게 모든 자유를 허용해 버렸다. 그리하여 그녀는 교태를 부리고 끊임없이 깔깔대기도 하며, 자기 감정에 도취되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모 든 것이 즐겁고 유쾌했다. 숲속의 벤치 위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자기를 바라보던 보초의 눈 초리를 회상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었다. 손님들도, 일리인의 날카로운 익살도, 처음 보 는 그의 넥타이 핀도 모두가 우습기만 했다. 그 넥타이 핀은 눈에 다이어몬드가 박힌 붉은 뱀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뱀에게 입맞추고 싶을 정도로 그 넥타이 핀은 별나 보 였다. 그녀는 기분좋게 취한 듯한 얄궂은 흥분 속에서 감상에 젖어 로맨스를 노래했다. 그리고 마치 남의 슬픔을 빈정대기라도 하는 것처럼 잊어번린 희망이며, 흘러간 과거며, 인생의 황 혼을 읊은 구슬프고 우울한 노래를 불렀다. '황혼기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데....'하고 그녀 는 노래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인생의 황혼은 너무나 먼 거리에 있었다. '아무래도 내 마음속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나봐.' 하고 웃음을 머금고 노래를 부르는 동안에도 때때로 그런 생각을 했다. 열두 시가 되자 손님들은 하나 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일리인은 맨 나중에 집을 나섰다. 그녀에게는 아직도 그를 테라스의 맨 아래 층계까지 데려다 줄 수 있는 용기가 남아 있었 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는 말을 그에게 하고, 그 말이 어떤 파문을 던지는가 를 알아보고 싶었다. 달은 구름 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나 변호사의 외투자락과 테라스의 커튼이 바람에 나부 끼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그의 창백한 모습이며, 또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려 고 윗입술을 쭈삣거리고 있는 것까지도 알아볼 수 있었다. "소피아! 소중한 나의 사랑!" 그는 소피아가 무엇이라고 말하려는 것을 가로막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의 사랑, 나의 사랑!" 그는 갑자기 감상에 젖어 울먹이는 어조로 사랑의 말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그 말투는 점 점 부드러워지면서 드디어는 미치 아내나 애인을 대하기라고 하듯이 '너'라고 부르기까지 했 다. 그리고 그는 별안간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또 한 손으로는 그녀의 팔을 잡았 다. 이것은 그녀로서는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나의 보물, 나의 기쁨...." 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를 하며 속삭였다. "마음을 돌려서 지금 바로 나한테로 와 주시오!" 그녀는 그의 팔에서 빠져나와 분노에 가득찬 반항으로 얼굴을 쳐들었다. 그러나 분노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가 자랑해 오던 정숙함과 결백도, 판에 박힌 말을 지껄이는데 불과했다. 그것은 극히 평범하 여자들이 이런 경우에 흔히 내뱉는 그런 말이었다. "당신은 정신이 나갔군요!" "자, 갑시다.!" 하고 일리인은 말을 계속했다. "나는 저 숲속의 벤치 옆에서 당신도 나와 마찬가지로 무기력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 었어요. 소피아 당신도 나와 마찬가지로 괴로워하고 있지요?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있으면 서도 괜히 자기 양심에 대항하고 있는 겁니다...." 그녀가 자기에게서 떠나려는 것을 보자 그는 그녀의 레이스 소매를 붙잡고 급히 말했다. "오늘 아니면 내일이라도 당신은 반드시 사랑 앞에 수그러질 때가 올거요. 무엇 때문에 이처럼 시간을 끄는 겁니까? 사랑하는 나의 소피아, 결정은 이미 내려졌어요. 어찌하여 그 실천을 미루는 거요? 왜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요?" 소피아는 그의 팔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뛰어갔다. 응접실에 들어가서 그녀는 피아노의 뚜 껑을 닫고 악보의 표지를 들여다보다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서 있을 수도 생각 에 잠길 수도 없었다. 흥분과 분노로 인하여 나태와 우수가 뒤섞인 일종의 나약함만이 그녀 에게 남아 있었다. 그녀의 양심이 소근거렸다. '오늘 밤에 네가 취한 태도는 바람둥이 처녀들처럼 추악하기 짝이 없었다. 너는 방금 테라 스에서 다른 남자에게 포옹을 당하고 지금도 허리와 팔꿈치에 야릇한 감촉을 느끼고 있지 않느냐?' 응접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촛불 한 대가 껌벅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마치 무 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치럼 피아노 의자 위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자 심한 피로와 어둠을 틈타 억제할 수 없는 괴로운 정욕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뱀처럼 그녀의 사지와 영혼에 달라붙어 점점 세차게 조여드는 것이었다. 그것이 영혼에 달 라붙어 점저 세차게 조여드는 것이었다. 그것이 이제는 여느 때처럼 그녀를 위협하는 정도 가 아니라 정정당당히 그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녀는 일리인을 생각하면서 반 시간 동안이나 잠자코 앉아 있었다. 이윽고 힘없이 자리 에서 일어나 발길을 돌렸다. 남편은 벌써 자리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열어젖힌 창가에 앉아 서 타오르는 정념에 전신을 내맡겼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미 혼란이란 있을 수 없었다. 모 든 감정과 이성은 오직 하나의 분명한 목표를 향해 줄달음치고 있었다. 그녀는 싸우려고 했 으나 곧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적이 얼마나 억세고 완강한가를 그녀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런 적과 맞서서 싸우려 면 불굴의 정신과 힘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의 혈통과 교육과 생활은 그녀에게 싸워서 이길 만한 힘을 주지 못했다. '미친 년! 더러운 년! 너는 본래 그런 여자였구나!' 그녀는 자기 자신이 나약함을 저주했 다. 그녀의 정숙한 미덕은 무기력으로 말미암아 여지없이 모욕을 당하고 뒤흔들렸다. 그녀는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욕설을 총동원하여 자기 자신에게 뼈아프게 느끼는 것이었다. 그녀 는 자기가 결코 정숙한 여자가 못되며, 오늘까지 정조를 굳게 지켜온 것은 오직 그것을 깨 뜨릴 만한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의 하루 동안의 투쟁이 한 낱 우스꽝스러운 희극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싸워왔다고 하자 그것은 대체 어떤 성질의 싸움이었던가? 매춘부로 전락하는 여자 도 몸이 팔리기 전까지는 싸우기 마련이다. 그러다가 끝에 가서는 몸을 맡겨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가리켜 감히 싸움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마치 우유처럼 하루 사이에 썩어버 리는 주제에, 하루 사이에....' 그녀는 자기를 집에서 끌어내려는 것이 감정의 유혹이 아니고 일리인의 인격도 아니며, 오직 자기를 기다리는 일종의 관념적인 호기심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자신의 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별장에서 살고 있는 대부분의 유한 마담들도 실은 그런 과정을 통하여 정조를 깨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미를 잃은 새새끼처럼!' 누군가 문밖에서 목쉰 소리로 노래하고 있었다. '간다면 지금이다!'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자 그녀의 심장은 갑자기 세차게 뛰기 시작 했다. "안드레이!" 그녀는 큰 목소리로 남편을 불렀다. "제발 우리 함께 떠나도록 해요." "아니.... 원이면 혼자 가라고 아까 말하지 않았어!" "그렇지만...." 하고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만일 당신이 함께 가 주시지 않으면 당신은 저를 잃어버리게 될지도 몰라요. 저는 아마 다른 남자를 상랑하나봐요!" "뭐, 누구야?" 하고 남편이 물었다. "누구건 당신에게는 마찬가지가 아녜요?" 하고 그녀는 외쳤다. 남편은 자리에서 일어나자 두 다리를 침대 밑으로 늘어 뜨리고 놀란 얼굴로 아내를 바라 보았다. "허튼 소리 말아!" 하고 그는 하품을 했다. 그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한편 놀라는 눈치였다. 그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아내에게 몇 마디 대수롭지 않은 일을 이것 저것 묻고 나서, 가정에 대하여 그리고 부정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약 십분쯤 천천히 지껄이고는 다시 자리에 누워 버렸다. 그의 훈계는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이 세상에는 그 따위 견해가 수두룩한 것이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직접 그런 불행은 당해 보지 못한 사람들의 것이었다. 밤이 깊었는데도 밖에서는 별장 손님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녀는 어깨에 가벼운 코트를 걸치고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에게는 잠자고 있는 남편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 는 여유가 생겼다. "여보 주무세요? 저 산책하고 올께요.... 함께 가시지 않겠어요?" 이것은 그녀의 마지막 부탁이었다.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녀는 밖으로 나갔다. 서늘한 바 람이 불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바람도 어둠도 느낄 수 없었다. 다만 앞으로 앞으로 발길 을 옮길 따름이었다. 억제할 수 없는 어떤 힘이 그녀를 앞으로 떠밀고 있었다. 만일 발걸음 을 멈추기라도 하면 등을 떠밀어 줄 것만 같았다. '망할 년! 더러운 것 같으니!'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녀는 벌겋게 상기된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자기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조차 잊어버 리고 있었다. 그러나 수치심이나 이성과 공포를 훨씬 능가하는 강한 힘이 그녀를 자꾸 앞으 로 밀고 가는 것이었다. 안톤 체호프(1860-1904) 러시아의 극작가이며 소설가. 남러시아의 타간로그에서 잡화상의 아들로 태어나 의과대학 을 졸업하고 의사생활을 하면서 작품활동을 하였다. 그는 사회의 관습과 무지 등으로부터 오는 우수에 찬 어두운 사회 분위기를 섬세하게 그려 냈으며, 20여년 동안의 작가생활을 통 해 천여 편의 소설과 10여 편의 희곡을 남겼다. 대표작으로는 귀여운 여인, 결투, 갈매기 등 이 있다. 추수감사절의 두 신사 우리들에게 명절이라고 할 수 있는 날이 하루 있다. 자칭 미국인이 아닌, 진짜 미국사람들 은 모두 옛집으로 돌아가 소다로 부풀린 비스켓을 먹으면서, 어쩌면 펌프 소리가 전과 달리 현관에 저렇게도 가까이 들리나 하고 놀라는 날이다. 이 날을 축복하라. 루즈벨트 대통령이 주는 날이다. 청교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만 그 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잊었다. 아무튼 그들이 다시 상륙해 온다면 단호히 물리칠 자신이 있 다 플리머스록(1620년 청교도들이 상륙했다는 매사추세츠 주의 플리머스 항에 있는 바위; 미국의 원산지 닭을 의미하기도함) 그것은 꽤 귀에 익은 말이다. 칠면조 조합이 생긴 이래 많은 사람들은 닭을 먹게 되었다. 워싱턴에 있는 누군가가 추수 감사절 선포에 관한 정보를 그들에게 밀 누설하고 있나보다. 뉴욕에서는 추수감사절이 아주 제도화되어 있다. 11월 마지막 목요일은 일년 중의 유일한 날로, 그들은 항구 건너편에 있는 본토를 생각하는 날이기도 하다. 이 날은 순전히 미국적인 날이다. 그렇다, 오직 미국만 가진 명절이다. 이제는 이야기로 들어가서 대서양 이쪽에 살고 있는 미국의 전통이 영국의 그것보다 훨씬 빨리 성장해가는 것을 밝혀야 겠다. 그것은 우리가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기질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스터피 피트는 유니언 스퀘어 공원을 동쪽에서 들어가 오른편에서 세 번째 벤치에 가서 앉았다. 그는 벌써 9년 전부터 이 날 오후 1시간 되면, 여기에 와서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 때마다 찰스 디킨스의 작품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좋은 수가 생겼던 것이다. 말하자면 조끼 가 미어지고 온몸이 부풀어 오를 정도로 배불리 얻어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 스터피 피트가 해마다 찾아오던 그 장소에 온 것은 하나의 습관에서였다. 흔 히 자선가들이 생각하듯이 가난뱅이들이 생활에 쪼들린 나머지 해마다 그때가 되면 유난히 느끼는 심한 허기증 때문에 온 것은 결코 아니었다. 피트는 정말 배가 고파지는 않았다. 그는 진수성찬을 먹고 간신히 남은 힘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허덕허덕 걸어오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시든 열매 같은 눈두덩이에서는 개기름이 번 지르르 흐르고, 부숭부숭한 얼굴에서는 생기가 돌았으며, 연신 숨소리를 가르릉거렸다. 그리 고 기름진 고관 대작의 몸집처럼 칼라가 제대로 맞지 않았다. 일 주일 전에 친절한 구세군 아낙네가 달아 준 단추들은 마치 옥수수 튀듯 날아가 주위 땅바닥에 흩어졌다. 셔츠의 앞섶 이 벌어져 명치뼈가 드러나 보이므로 보기 흉했으나, 그로서는 부드러운 눈송이를 날라다 주는 11월의 찬바람도 그에겐 시원하고 고마울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진수성찬을 먹고 오히려 영양과다증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굴로 시작하여 건포도를 넣은 푸딩으로 끝난 식사는, 이세상 모든 구운 칠면조와 구운 감자, 치킨 샐러드, 호박 파이, 아이스크림 등 등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들이었다. 이렇게 먹고난 그는 목구멍 까지 가득차서 배부른 인간의 경멸스런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가 이런 대접을 받게 된 것은 저혀 뜻밖의 일이었다. 그가 5번가 입구에서 얼마 멀지 않은 커다란 어느 붉은 벽돌 집 앞을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이 집에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존중하는 두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이들은 심지어 뉴욕의 존재마저 인정치 않고, 추 수감사절이란 단지 워싱턴 스퀘어를 위해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 집의 오랜 풍속의 하나는, 이날 하인을 뒷문에 세워 두었다가, 정오를 친 뒤에 가장 먼저 그 앞을 지나가는 굶 주린 행인을 불러들여 차려 놓은 성찬을 대접하는 것이었다. 스터피 피트는 이날 공원으로 가는 길에 우연히 그곳으로 지나가다가 이집 하인들에게 끌려들어가 그 집의 전통을 지켜주 게 되었던 것이다. 스터피 피트는 한 10분쯤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다가, 다른 곳도 보고 싶은 생각이 들 었다. 그는 무척 힘들게 고개를 왼편으로 천천히 돌렸다. 그러자 그의 눈이 겁에 질린 채 휘 둥그레졌다. 숨이 콱 막히고 해진 신발을 신은 짧은 다리가 오금을 못펴고 자갈 위에서 버 둥거렸다. 그 늙은 신사가 44번가를 지나서 그가 앉아 있는 벤치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9년 동안 추수감사절만 되면 그 노신사는 이곳에 찾아와 스터피 피트를 만나는 것이 었다. 노신사는 이것을 하나의 전통으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9년 동안 해마다 추수감사절에 여기서 스터피를 만난면, 그를 식당에 데리고 가서 으레 그에게 많은 음식을 사 주고 그가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었다. 영국에서는 이런 일들을 무의식적으로 해마다 하 고 있지만, 그러나 역사가 짧은 이 나라에서 9년 동안이나 그렇게 했다면 결코 짧은 시간이 라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노신사는 미국의 성실한 애국자였으며, 미국의 전통을 세우는 데 있어서 선구자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자처했다. 무슨 일이든지 아름답게 보이려면 그 일을 한 번이라도 빼놓지 않고 오랫동안 계속해야 하는 법이다. 산업보험회사에서 매주 10센트씩 보험료를 거워들이는 것도 그렇고 또한 거리 를 날마다 청소하는 것도 그렇다. 노신사는 곧장 점잖게 그가 육성하고 있는 관습을 향해서 걸어왔다. 스터피가 해마다 이 날에 얻어먹은 것은, 옛날 영국의 대헌장이나 또는 아침에 잼을 먹는 풍습처럼 어떤 전국적 인 성격을 띤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첫걸음이었다. 이제는 거의 봉건제도처럼 굳어 있었다. 그것은 적어도 뉴욕, 아니 미국에서도 전통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 다. 노신사는 깡마르고 키가 큰 육십 노객이었다. 수수한 검정 옷차림에 콧등에 제대로 붙어 있지 않는 낡은 안경을 끼고 있었다. 머리칼은 지난해보다 더욱 희고 엉성해졌으며, 구부러 진 손잡이가 달린 매듭진 큰 단장에 더욱 몸을 의지하는 듯이 보였다. 이 낯익은 자선가가 다가왔을 때 스터피는 숨을 헐떡이며, 마치 주인 마나님의 꽁무니를 따라가던 살찐 강아지가 거리에서 으르렁대는 큰 개를 만난 것처럼 몸을 떨었다. 그는 마냥 아무데고 달아나 버리고 싶었지만, 비행선을 만들어낸 산토스 두먼트의 재주로도 그를 그 벤치에서 떠내지는 못했을 것이다.그러고 보니, 두 할머니의 하인들은 직책을 잘 완수한 셈 이다. "안녕하시오!" 하고 노신사는 말을 건네었따. "해가 또 바뀌어도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건강한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당신을 보니 퍽 반갑소. 우리에게 모처럼 추수감사절이 마련된 것도 그것을 축복하기 위한 거요. 그럼 가시 죠. 당신의 육체도 마음의 행복과 어울리도록 식사를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노신사가 지난 9년 동안이나 추수감사절 때마다 하는 말이었다. 그리하여 이 말 자체가 하나의 관습이 되어 있었다. 독립선언서 말고는 이 말과 비교할 만한 것은 없었다. 전에는 스터피의 귀에 늘 하나의 음악처럼 들렸다. 그러나 지금 그는 눈물겹도록 괴로운 표정으로 노신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부드러운 눈송이가 그 땀에 젖은 얼굴에 내리면 금 새 녹아버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노신사는 가볍게 몸을 떨면서 바람을 등지고 돌아서는 것 이었다. 스터피는 이 노신사가 언제나 왜 슬픈듯한 어투로 말하는지 궁금해었다. 대를 이을 아들 이 없는 것이 한이 되어 그러는 것을 그는 미처 몰랐다. 자기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아들이 대를 이어 스터피 앞에 자랑스럽고 늠름하게 나타나, '아버님의 뜻을 받들어....' 하고 말할 만한 아들이 부러웠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것은 하나의 관습으로 굳으리라고 생각되었 다. 그러나 이 노신사는 친척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다. 공원 동쪽의 조용한 거리 한 쪽에 있는 붉으스름한 옛 부잣집에서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다. 겨울이면 큰 트렁크만한 온실에서 푸셔 꽃을 기르고, 봄이면 부활제의 행렬에 끼어 돌아다녔다. 그리고 여름이면 뉴저지 주의 산 속 농가를 찾아가 등의자에 몸을 기댄 채로 언젠가는 발견하게 되리라는 진귀한 나비 우 르니토프레라 암프리시우스 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세월을 보내왔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스터피에게 한 상 듬뿍 차려서 선심을 썼다. 그것이 이 노신사의 연중행사 였다. 스터피는 몸이 달아오르고 자기 자신이 가엷은 절망감으로 잠시 노신사를 쳐다보았다. 노 신사의 눈은 적선하는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다. 얼굴에는 해마다 주름이 늘어가고 조그마한 검은 나비 넥타이는 여전히 단정히 매고, 새하얀 와이셔츠에 흰 콧수염 끝을 점잖게 감아 올리고 있었다. 이윽고 스터피는 냄비에서 콩이 끓는 소리를 냈다. 무슨 말을 할 참이었다. 노신사는 지난 날 아홉 번이나 이 소리를 들었으므로 그것은 초대에 응한다는 스터피의 다음과 같은 해묵 은 표현으로 해석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따라가지요. 대단히 고맙습니다. 저는 정말 배가 고픕니다. 선생님!" 그는 배가 너무 불러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만, 그 노인의 연중행사의 대상이 되고 있 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추수감사절에 갖는 그의 식욕은 결코 타고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관습적인 신성한 행위로 선취특권을 가지고 있는 노신사의 것이었다. 미국은 자유의 나라다. 그러나 전통을 세우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든지 되풀이되어야 한다. 다시 말 하면 반복하는 기계가 되어야 한다. 영웅이 되려면 반드시 쇠나 금붙이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 단지 은으로 도금한 쇠와 양철 무기만을 휘두르는 영웅도 있지 않은가! 노신사는 해마다 한 번씩 자기의 뒤를 따르는 이 사람을 남서쪽 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언제나 성찬을 대접하던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식당 사람들도 그들을 알아보았다. "저 영감님 또 오시네. 감사절마다 같은 거지에게 한턱내는 영감 말이야." 하고 한 웨이터가 말했다. 노신사는 식탁을 가운데 두고 앉아 진주처럼 빛나는 눈으로 장차 전통의 주춧돌이 될 스 터피를 바라보았다. 웨이터들은 명절 음식을 식탁 위에 가득 차려 놓았다. 그런데 스터피는 며칠동안 굶주린 사람처럼 한숨을 내쉬며,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불멸의 영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음식을 뭉턱뭉턱 잘라먹었다. 이보다 더 용감하게 적진을 향해 돌진한 영웅이 어디 있겠는가! 칠면조, 고기 덩어리, 수프, 채소, 파이 등이 앞에 놓이기가 무섭게 없어지곤 했다. 그는 식당에 들어올 때 이미 목구멍까지 꽉 차 있었으므로 음식 냄 새 조차 맡기가 괴로웠으나, 있는 힘을 다하여 손님의 체면을 유지했다. 노신사의 얼굴에는 자비로운 행복의 빛, 일찍이 아름다운 푸셔 꽃이나 진기한 나비에게서 얻는 것보다 더 행복 한 빛이 보였다. 스터피는 노인에게서 이러한 빛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한 시간이 지났다. 스터피는 전투에서 이기고 의자에 기대 앉았다. "고맙습니다, 정말 잘 먹었습니다." 하고 그는 구멍난 증기의 파이프처럼 말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쪽으로 향했다. 눈이 어지러웠다. 웨이터 하 나가 달려와 그를 팽이처럼 돌려세우며 출입문을 가리켰다. 노신사는 은전으로 1달러하고 30센트를 차근차근 세어놓고 웨이터에게 5센트짜리 백동전 세 닢을 팁으로 주었다. 두 사람은 해마다 그렇듯이 문 앞에서 헤어져 노신사는 남쪽으로, 스터피는 북쪽으로 향 했다. 스터피는 첫 번째길 모퉁이에 가서 잠시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는 올빼미가 날개를 치 듯이 누더기 옷을 펄럭거리더니 마치 더위를 먹은 말처럼 길바닥에 쓰러졌다. 구급차로 달려온 젊은 의사와 마부는 환자가 무겁다고 투덜거렸다. 술냄시가 나지 않으므 로 경찰의 순찰차에 실을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두 차례에 걸쳐 성대한 음식을 먹은 스터 피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 사람들은 그를 침대에 눕혀 놓고, 무슨 수술 환자 마냥 여기 저기 진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시간이 지나서 또 하나의 구급차가 노신사를 싣고 왔다. 의사들은 그를 다른 침대에 눕혀놓고 맹장염이라고 떠들어댔다. 노신사는 치료비를 낼 수 있을 듯이 보였기 때 문이다. 잠시 후 젊은 의사가 눈매가 예뻐서 좋아하는 간호사와 방금 들어온 두 환자에 대한 이야 기를 하고 있었다. "저기 누워 있는 노신사 말이야!" 하고 젊은 의사는 말했다. "굶어 죽어가는 환자란 말이오. 그야말로 긍지를 잃지 않은 지체 높은 가문 출신인가 봐 요.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는 군요." O. 헨리(1862-1910) 미국의 소설가. 본명은 윌리엄 시드니 포터이다.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 모를 여의고 힘들게 생활했다. 은행에 근무하던 중 공금횡령 혐의로 3년간 감옥생활을 하면 서 많은 단편을 썼으며, 감옥에서 나온 후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다채롭고 인간미 넘치는 수백 편의 작품을 썼는데, 마지막 잎새, 20년 후, 크리스마스 선물 등이 그 대표작이다. 밀회 시월 중순 어느 날 나는 자작나무 숲 속에 앉아 있었다. 아침부터 보슬비가 내리는가 싶 더니 때때로 따뜻한 햇빛이 비치기도 하는 매우 고르지 못한 날씨였다. 엷은 흰 구름이 하 늘을 온통 뒤덮는가 싶더니, 갑자기 군데군데 구름이 벗겨지며 맑게 갠 정다운 파란 하늘이 구름 사이로 간간히 비치기도 했다. 나는 나무 그늘에 앉아 주위를 바라보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 산들거리는 나뭇잎 소리만 들어도 계절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즐거운 듯 속삭이는 봄의 웃음소리 도 아니고, 부드러운 여름의 속삭임도 아니며, 불안한 늦가을의 싸늘한 외침도 아니었다. 들 릴락 말락한 마치 꿈 속에서 중얼거리는 소리와 같았다. 산들바람이 살며시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갔다. 비에 젖은 숲 속은, 구름 속의 태양이 드 러나고 가리워지는 데 따라서 끊임없이 변하고 있었다. 숲 속의 나무들은 번갈아 미소짓듯 이 찬란하게 비치고, 드문드문 서 있는 가느다란 자작 나무가 흰 명주처럼 반짝이기도 했다. 키가 크고 곱슬곱슬한 아름다운 양치풀 줄기는, 무르익은 포도알처럼 가을 햇빛으로 물들고 눈 앞에 뒤엉킨 채 투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러다가 주위는 갑자기 푸른 빛을 띠기도 했 다. 선명한 빛깔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하얀 자작나무가 빛을 잃은 채 싸늘하게 비치는 녹지 않은 겨울 눈처럼 하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속삭이듯 보슬비가 소리없이 내렸다. 자작나무 잎은 두드러지게 색이 변했지만 아 직은 푸른 편이었다. 여기 저기 서 있는 어린 자작나무는 온통 빨갛거나 노랗게 물들어 금 방 비에 씻긴 나뭇가지 사이로 반짝이며, 햇볕이 스며들 때 나뭇잎은 마치 줄타오르듯 아름 다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방은 잠잠했다. 때때로 사람을 비웃는 듯 박새소리가 쇠방 을처럼 울려 퍼졌다. 나는 이 자작나무 숲으로 오기 전에 개를 끌고 사시나무 숲을 지나 왔 다. 나는 사시나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연보라빛 줄기의 녹회색 금속성을 띤 나뭇 잎이, 높이 치솟아 흔들리는 부채처럼 너울너울 공중에 펼쳐 있는 모습도 싫거니와, 그 기다 란 줄기에 둥글고 지저분한 나뭇잎들이 멋없이 건들 건들 흔들리는 모습도 싫었다.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면, 낮은 관목 숲 속에 우뚝 솟아 나와 빨간 석양빛을 듬뿍 받으며, 뿌리에서 나무순까지 적황색으로 물들면서 반짝반짝 빛나는 여름날의 저녁이라든가, 바람 부는 맑은 날에 소란스럽게 너울거리며 나뭇잎들이 하나한 푸른 하늘과 이야기를 나눈 것같은 모습이 었다. 그것은 마치 나무에서 떨어져 멀리 날아가고 싶은 열망인 듯 싶었다. 어쨌든 나는 이 나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사시나무 숲에서는 걸음을 멈출 생각도 않고 자작나무 숲으로 찾아와서는 야트막하게 가지를 벌리고 있는, 그러므로 자연히 비를 피할 수 있는, 어느 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은 후 주위의 경치를 감상하면서 사 냥꾼만이 맛볼 수 있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꿈 속에 잦아들어 갔던 것이다. 내가 얼마 동안이나 잠을 잤는지 알 수 없었지만, 눈을 떴을 때는 수풀 속은 햇빛이 넘쳐 흘렸고, 나무들은 즐거운 듯 속삭이며 나뭇잎 사이로 파란 하늘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구름은 기쁨에 날뛰듯 자취를 감추고,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대기는 쌀쌀해서 오히려 사 람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곳은 온종일 곶은 날씨가 계속된 다음 맑게 개인 고요한 저녁 을 짐작케 해주는 장소인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금 사냥이나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때 느닷없이 움 직이지 않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시골 처녀였다. 그녀는 내게서 스무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생각에 잠긴 듯이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무릎 위에 얹고 앉아 있었다. 그녀 의 한쪽 손에는 두툼한 꽃다발이 안겨 있었으며, 그것은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조금씩 미 끄러져 바둑 무늬 치마 밑으로 흘러내렸다. 목과 손에 단추를 끼운 새하얀 루바슈카는 부드 러운 잔주름을 이루어 그녀의 몸을 감싸고, 목과 가슴에는 금빛 목걸이가 두 줄로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다. 단정히 빗어 넘긴 숱이 많은 아름다운 은색머리는, 상아처 럼 하얀 이먀 위로 깊숙이 동여맨 빨간 머리 띠 밑에 두 개의 반원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 녀의 피부는 매우 얇은 모양이어서 황금빛으로 그을려 있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불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러나 가늘고 아름다운 눈썹과 기다란 속눈썹만은 똑똑히 분간할 수 있었다. 그녀의 속눈썹은 젖어 있었 다. 한쪽 볼에서는 한 줄기 눈물이 파르스름한 입술까지 흘러내려 햇볕에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어느모로 보나 아름다웠다. 약간 크고 동그스름한 턱까지도 눈에 거슬리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의 마음을 끈 것은 그녀의 얼굴 표정이었다. 조금도 구김살이 없고 몹시 서글러 보였지만, 거기에는 갈피는 잡지 못하는 천진난만한 슬픔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투명하게 보이는 나무 그늘 에서 겁에 질린 사슴처럼 수정같이 맑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커다란 눈을 두리번 거리며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고 귀를 기울이다가 한숨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곤 했다. 그녀는 먼저보다 더 깊숙이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꽃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녀의 눈꺼풀 은 빨갛게 물들고 입은 바르르 떨렸다. 그녀가 속눈썹 밑으로 눈물을 흘리자 눈물 방울은 볼에 멎으며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이럭저럭 꽤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그녀는 꼼짝도 않고 앉아서 가끔 괴로운 듯이 손을 움직일 뿐, 여전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또 다시 숲 속에서 바스락 소리가 났다. 처녀는 안타까워했다. 바스락 소리가 계속되다가 뚜렷하고 믿음직스런 발걸음 소리로 변했다. 그녀는 몸을 꼿꼿이 세웠지만 불안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조심스런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숲 속에서 한 사내의 모습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뚫 어질 듯이 그를 바라보더니 얼굴을 붉히며 즐겁고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당황한 듯이 새파랗게 질리는 것이었다. 사내 가 그녀 곁에 다가와 발을 멈추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녀는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 었다. 나는 나무 밑에 앉아 호기심에 넘치는 눈초리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느 모로 보나 부유한 지주댁의 젊은 바람둥이 머슴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옷매무새는 몹시 화려하고 한 껏 멋을 부렸다. 필경 주인에게서 물려받은 듯한 짧은 외투를 입고 단추를 단정히 끼웠으며, 끝이 보라색으로 물든 장미빛 넥타이에 금테가 달린 검정 빌로드 모자를 눈썹 밑까지 내려 쓰고 있었다. 하얀 루바슈카는 정답게 두귀를 받쳐주는 듯하면서 깊숙이 볼 밑에 파고들고 풀이 빳빳한 소매는 빨간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손목을 온통 뒤덮고 있었지만, 그 손가락에는 물망초를 본뜬 터키 석으로 만든 가락지를 여러 개 끼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벌겋고 탱탱한 뻔뻔스러운 얼굴은 사내들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지만, 유 감스럽게도 여인들에게는 호감을 주는 얼굴이었다. 그는 초라한 자기 얼굴을 의젓하게 보이 려고 애쓰고 있었다. 본래 자그마한 잿빛 눈을 더 가늘게 뜨면서 상을 찌푸리기도 하고, 입 술을 실룩거리기도 하며 하품을 하기도 했다. 그는 탐탁치 않다는 듯이 거드름을 피우며 멋 있게 구부러진 붉은 관자놀이 털을 매만지기도 하고, 두툼한 윗입술 위로 늘어진 노란 콧수 염을 잡아당겨 보기도 하며, 한 마디로 말해서 눈을 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러 거드름을 부 리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시골 아가씨를 보자, 이와 같이 과장된 몸짓으로 두 손을 외투 주머니에 찌르고서 무관심한 듯이 처녀를 바라보며 땅위에 앉았다. "그래 잘 있었어?" 그는 딴전을 피우며 한쪽 다리를 흔들고 하품을 하면서 말을 계속했다. "오래 기다렸어?" 그녀는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네, 오래 되었어요. 빅토르 알레산드리치." 그녀는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그는 모자를 벗고 거의 눈썹 곁에서 자라기 시작한 곱슬 곱슬한 짙은 머리칼을 쓰다듬고 나서 거만하게 주위를 둘러본 후, 다시 모자를 써서 머리를 감추어 버렸다. "나는 깜빡 잊었었어. 게다가 비가 그렇게 쏟아지니!" 그는 다시 하품을 했다. "일이 태산같이 밀려 자칫하면 잔소리를 듣게 돼. 그건 그렇고 우린 내일 떠나게 되었어." "내일이라뇨?" 처녀는 이렇게 말하며 놀란 눈초리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래 내일.... 하지만 이러지마, 제발." 그녀가 몸을 떨며 말없이 고개를 숙인 것을 보자 그는 불쾌한 어조로 다급하게 말을 계속 했다. "제발 부탁이야, 아쿨리나 울지마.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을 너도 잘 알잖아?" 사내는 이렇게 말하며 뭉퉁한 콧등에 주름을 모았다. "그래도 운다면 난 갈 테야! 툭하면 훌쩍훌쩍 바보같이 운담!" "네, 울지 않겠어요." 아쿨리나는 꿀꺽꿀꺽 울음을 삼키며 재빨리 말했다. "정말 내일 떠나시는 거예요?" 그녀는 잠시 후에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젠 언제나 만나게 될까요, 백토르 알렉산드리치?" "만나게 될 거야, 내년 아니면 그 후년에라도.... 주인은 페테르부르그에서 일하기를 원하 는 것 같아." 그는 약간 코멘 소리로 무뚝뚝하게 말을 계속했다. "어쩌면 외국에 갈지도 몰라." "당신은 저를 잊어버릴 테지요." 아쿨리나는 서글픈 표정으로 말했다. "잊어버리다니, 난 잊지 않을 거야. 그런데 너도 좀 철이 나서 바보 짓은 말아야지. 아버 지 말씀고 잘 듣고.... 어쨌든 난 너를 잊지 않을 거야.... 잊지 않고 말구." 그는 이렇게 말하며 허리를 펴고 다시 하품을 했다. "저를 잊지 말아 주세요, 빅토르 알렉산드리치." 그녀는 애원하는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전 어쩌면 이렇게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세상의 모든 것이 당신을 위해 서만 있는 것 같아요. 당신은 아버지 말씀을 들으라고 하지만.... 제가 어떻게 아버지 말씀을 들을 수가 있겠어요?" "아니, 왜?" 그는 팔베개를 하고 누워 뱃 속에서 우러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당신도 잘 아시잖아요?" "아쿨리나, 나더 그렇게 바보는 아닌 줄 아는데." 사내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하지도 마. 난 너를 위해 그러는 거야. 너도 아주 촌뜨기는 아니 잖아. 네 어머니의 경우를 보더라도 농사꾼만은 아니었으니까. 어쨌든 넌 교육을 받지 못했 으니 남이 가르쳐 주면 그걸 잘 들어야 해." "어쨌든 무서운 걸요." "글쎄 실없는 소리 말아. 대체 무엇이 무섭단 말야. 그건 뭐지?" 처녀 곁으로 다가가며 그가 말했다. "꽃인가?" "네, 꽃이에요." 아쿨리나는 힘없이 대답했다. "들에서 모과잎을 따 왔어요." 그녀는 약간 생기있게 말을 했다. "이것은 송아지에게 먹이면 좋아요. 그리고 이것은 금잔화예요. 습진에 잘 듣는대요. 자, 보세요. 얼마나 예쁜 꽃이에요. 이것은 물망초고요. 이것은 향기나는 오랑캐꽃, 또 이것은 당 신 드리려고 뜯은 거에요. 드릴까요?" 그녀는 노란 모과잎 밑에서 가는 풀로 묶은 파란 들국화 다발을 꺼내면서 덧붙였다. 빅토르는 천천히 손을 뻗쳐 이것저것 냄새를 맡은 다음, 생각에 잠긴 듯한 거만한 표정으 로 하늘을 바라보며 꽃다발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아쿨리나는 사내를 물 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슬픈 눈초리 속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신처럼 숭배하고 복종 하겠다는 갸륵한 정성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작별한 사내를 무서워하면서도 슬금슬금 바 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사내는 술탄처럼 거드름을 부리며 드러누워,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길 을 외면한 채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짓누 르며 그 불그죽죽한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사람을 멸시하는 듯한 위장된 무표정 속에 서 자기 만족의 자만심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정열에 불타는 표정으로 숨김없이 자 기의 애절한 사랑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내는 꽃다발을 풀 위에 밀어놓고 외투 옆 주머니에서 청동 테를 두른 둥근 유리알을 꺼내어 한쪽 눈에 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눈썹을 지푸리고 볼과 코까지 움직여 가며 끼우려고 애섰지만, 안경은 빠져나와 손바닥에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건 뭐예요?" 아쿨리나가 놀라운 표정을 하고 입을 열었다. "외알 안경이야." "뭘 하는 거예요?" "더 똑똑히 볼 수 있지." 그것은 알만 있는 외짝 안경이었다. "어디 좀 보여 주세요." 빅토르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아쿨리나에게 안경을 건네었다. "깨면 안돼, 조심해." "걱정 마세요, 깨지 않을 테니." 아쿨리나는 조심스레 안경을 눈으로 가져갔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네요." 그녀는 천진하게 말했다. "눈을 가늘게 떠야 하는 거야." 마치 그는 학생을 가르치는 스승과 같은 어투로 말했다. 아쿨리나는 안경을 대고 있는 눈 을 가늘게 떴다. "아니, 그쪽이 아냐. 바보 같으니.... 이쪽이란 말야." 빅토르는 이렇게 외치면서 아쿨리나가 미처 안경을 고쳐 쥐기도 전에 빼앗아 버렸다. 아쿨리나는 얼굴을 붉히며 수줍은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나같은 사람이 가질 것은 못되는군요." 아쿨리나가 말했다. "물론이지!" 가엾은 아가씨는 입을 다물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빅토르 알렉산드리치, 당신이 떠나시면 전 어떻게 될까요?" 그녀가 입을 열었다. 빅토르는 옷자락으로 안경을 닦은 후 도로 외투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래, 그래" 마침내 사내는 입을 열었다. "얼마 동안은 괴롭겠지, 괴로울 거야." 빅토르는 안됐다는 듯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자 그녀는 어깨 위의 그의 손을 살 며시 잡고서 입을 맞추는 것이었다. "암, 그렇구 말구. 넌 정말 착한 아가씨야." 그는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계속 했다. "그렇지만 어떻게도 할 수 없잖아? 너도 잘 생각해 봐! 주인 나으리나 나나 여기 그대로 남아 있을 순 없잖아? 너도 알다시피 이제 곧 겨울이 될 거 아냐. 시골의 겨울이란 정말 견 딜 수 없거든. 그러나 페테르부르그라면 그렇지 않아! 그곳에 가면 모두 신기한 것 뿐이야. 아마 너 같은 시골뜨기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거야. 근사한 집이며 멋있는 거리, 교양있는 상류사회 사람들.... 정말 눈이 돌 지경이거든!" 아쿨리나는 어린애처럼 일을 벌리고 그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있었다. 빅토르는 땅바닥 에서 몸을 뒤채며 말을 계속했다. "네게 이런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내 말을 이해하지도 못할텐데 말야." "저두 알아요. 모두 알 수 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아쿨리나는 눈을 내리떴다. "그 전 같으면 당신도 그렇게 말하진 않으실 텐데, 빅토르 알렉산드리치."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말을 계속했다. "그 전이라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 전이라니!" 빅토르는 성난 어투로 말했다. 그들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이젠 그만 가봐야겠어." 빅토르는 일어서려고 팔꿈치를 세웠다.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아쿨리나는 애원하듯이 말했다. "무엇을 기다려? 작별 인사도 끝났는데." "잠깐만 기다리세요." 아쿨리나는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빅토르는 다시 벌렁 드러누우며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아쿨리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가 점점 흥분하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입술을 바르르 경련을 일으키 고 파리한 두 볼은 홍조를 띠었다." "빅토르 알렉산드리치." 그녀는 분명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당신은 너무해요, 너무 해." "뭐가 너무 해?" 사내는 미간을 찌푸리고 이렇게 말한 다음 약간 몸을 일으켜 세워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 렸다. "너무해요. 빅토르 알렉산드리치. 떠나는 마당에 단 한마디라도 좀 따뜻한 말을 해주시면 어때요? 단 한 마디라도. 의지할 데 없는 가엾은 저에게요." "아니 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 "몰라요. 그런 건 당신이 더 잘 아실 텐데요. 떠나는 마당에 한 마디쯤.... 내가 왜 이런 일 을 겪어야 한담?" "정말 넌 알 수 없구나. 날더러 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 "단 한 마디라도 좋으니...."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군."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땅에서 벌떡 일어섰다. "화낼 건 없잖아요. 빅토르 알렉산드리치." 그녀는 울먹이면서 대꾸를했다. "화난 건 아냐. 네가 바보 같은 소리만 하니까....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야? 그렇다고 난 너하고 결혼할 순 없잖아. 안 그래? 그런데 날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야? 무엇을?" 그는 얼굴을 들이대고 손가락질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그녀는 떨리는 두 손을 빅토르에게 내밀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저 작별하는 마당에 한 마디만이라도...." 아쿨리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했다. "또 눈물을 흘리는 군."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면서 말했다. "집에 남아 있는 제 심정을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저는 어떻게 되겠어요. 네? 마음에도 없는 사람에게 시집을 가야 할까요? 아아, 난 왜 이렇게 불행하죠?" "쓸데 없는 소리만 하는군!" 빅토르는 걸음을 옮기며 나직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단 한 마디. 한 마디쯤은 말해 줄 수 있을 텐데...." 그녀는 설움이 복받쳐 올라 말을 맺지 못했다. 그녀는 풀밭에 고개를 파묻고 애절하게 흐 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물결치듯이 온 몸을 들먹거렸다. 그녀의 오랫동안 참고 참아온 슬픔이 드디어 폭포처럼 터지고 만 것이다. 빅토르는 잠시 동안 아쿨리나를 내려다보고 있 었으나, 어깨를 흠칫하더니 곧 돌아서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아쿨리나는 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보고 깜짝 놀란 듯이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그를 뒤따르려고 했지만 다리가 휘 청거려 넘어지고 말았다. 나는 보다 못해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는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가냘픈 비명을 지르고 황급히 나무 뒤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땅바닥에는 꽃잎들이 쓸쓸히 흩어져 있었다. 나는 잠시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이윽고 나는 꽃다발을 주워 들고 숲을 지나 벌판으로 나왔다. 푸른 하늘에 나직이 걸려있는 태양은 햇빛마저 파리하고 싸늘한 느낌이 감돌았다. 태양은 이미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푸른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는 것 같았다. 해가 질 시각도 불과 반 시간밖에 남지 않았지만, 이제야 저녁놀은 서쪽 하늘을 천천히 물들이고 있었다. 거센 바람이 추수를 끝낸 누런 밭두렁을 거쳐 정면으로 휘몰아왔다. 조그마한 가랑 잎 하나가 갑자기 공중으로 날아오르며 내 곁을 지나 한 길을 건너서 숲을 따라 날아가고 있었다. 들판에 병풍처럼 우거진 숲은 물결치듯 수선스럽게 뒤흔들면서 저녁놀을 받아 반짝 이며 물결치고 있었다. 나는 서글픈 생각이 들어 걸음을 멈추었다. 시들어가는 대자연의 서 글픈 미소 속에는 우울한 겨울의 공포가 스며들고 있는 것 같았다. 겁 많은 까마귀 한 마리 가 요란스럽게 날개를 펄럭이면서 머리 위로 날아 올라갔다. 까마귀는 고개를 돌려 힐끗 나 를 바라보더니, 날쌔게 하늘 높이 솟아올라 까악까악 우짖으며 숲 속으로 사라졌다. 정미소 에 수많은 비둘기 떼들이 날아와서는 나직히 떼를 지어 맴돌다가 들판으로 산산히 흩어졌 다. 이제는 가을빛이 완연했다. 빈 달구지를 끌고 벌거숭이 언덕을 지나는 소리가 요란스럽 게 들려왔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가련한 아쿨리나의 모습은 좀처럼 내 머리에서 사라지 지 않았다. 그녀의 들국화 꽃다발은 오래 전에 이미 시들었지만, 나는 그 꽃다발을 아직까지 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 투르게네프(1818-1883) 러시아의 작가.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페테르브르크 대학을 마치고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 을 공부했다. 1844년에 서사시 파리샤를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고, 여러 작품들을 모아 엮은 사냥꾼의 일기로 작가로서의 확고한 인정을 받았다. 러시아 사회의 현실과 문제점들을 주제 로 많은 작품을 발표했으며,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러시아의 3대 문호로 꼽힌다. 주요작품으로 루우딘, 그 전날밤, 아버지와 아들, 처녀집 등이 있다. 벽 우리는 흰 페인트가 칠해진 널찍한 방에 처박혔다. 햇살에 눈이 매우 따끔거렸다. 이윽고 한 테이블 건너에 네 사람의 사내가 보였다. 평복을 입은 시민들로 서류를 들여다 보고 있 었다. 다른 죄수들은 방 저편에 몰려 있었는데 그리고 가려면 방 한복판을 가로 질러 가야 만 했다. 그 죄수들 중에서 몇 사람의 얼굴은 알만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는 외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도 섞여 있었다. 내 앞에 앉은 사람들은 둥근 머리에 금발이었다. 그들은 서로 닮은 데가 있었는데 프랑스 사람 같았다. 그 중에서 어린 사내는 계속 바지를 치며올리고 있었다. 몹시 초조한 모양이었 다. 이런 상태가 세 시간쯤 계속되었으므로 나는 머리가 그만 멍멍해졌다. 방 안은 훈훈하여 오히려 아늑한 기분이었다. 24시간 동안이나 줄곧 떨면서 지냈기 때문이었다. 간수들은 죄수를 한 사람씩 테이블 앞으로 끌고 갔다. 그러면 그 네 사람의 사내들은 죄 수의 이름과 직업을 묻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때로는 '너는 군수 공장의 동맹파업게 가담했었지?' 또는 '9일 아침에 어디 있었느냐?' 하 고 묻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답을 들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아무튼 듣고 있는 기색은 없었 다. 그러고선 그들은 말없이 앞을 바라보다가 뭐라고 적어넣는 것이었다. 톰에게는 국제여단 에 가담한 것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그는 양복 웃저고리에서 서류가 발각되었으므로 부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후앙에게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가 이름을 대자 그들은 한참 뭐라 고 적어넣는 것이었다. "저의 형 호세가 무정부주의자 올시다." 하고 후앙은 말했다. "형은 여기 없어요. 그건 잘 아시잖아요. 저는 절대로 정치에 가담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후앙은 다시 말을 계속했다. "전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남이 저지른 일 때문에 희생을 당한다는 것은 억울한 일입니다." 그는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한 간수가 그의 말을 가로막고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이번에 는 내 차례였다. "네가 파블로 이비에타지?"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서류를 죽 훑어 보았다. "라몽 그리스는 어디 있어?" "저는 모릅니다." "너는 그자를 6일부터 19일까지 네 집에 숨겨 두었지?" "아니올시다." 그들은 뭐라고 적어 넣었다. 그러자 간수들은 나를 밖으로 데리고 갔다. 복도에서는 톰과 후앙이 두 사람의 간수 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톰이 한 간수에게 물었다. "어떻게 되는 겁니까?" "뭐가?" "아까 한 건 심문입니까, 판결입니까?" "판결이지." "그럼 우리를 어떻게 할 작정인가요?" 간수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감방에 가 있으면 알걸세." 감방은 병원 지하실이었다. 바람이 새어들어와 무척 추웠다. 우리는 지난 밤에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낮이라고 더 나을 것도 없었다. 나는 이 닷새 동안에 대사교관의 골방 속에서 보냈다. 그건 중세기에 지은 일종의 지하감옥이었다. 죄수는 많고 장소는 모자라 아무데고 잡아 넣었던 것이다. 나는 그 골방이 별로 부럽지 않았다. 춥지는 않았지만 혼자 갇혀 있었 기 때문이다. 혼자 있으면 마음이 초조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지하실에는 동료가 있다. 후앙은 입 을 다물고 있었다. 무섭기도 하고, 또 아직 나이가 어려서 할 말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톰 은 수다스럽고 스페인어도 곧잘 했다. 지하실에는 벤치 하나와 짚방석 네 개가 있었다. 우리는 간수들에게 끌려와 벤치에 앉아 서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톰이 입을 열었다. "이젠 볼장 다 봤어."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그런데 이 아이에게는 손을 대지 않을 걸세." 하고 나는 말 했다. "죄가 없잖아. 혁명투사의 동생이라는 약점 뿐이야." 하고 톰이 말했다. 나는 후앙을 쳐다보았다. 우리말을 듣고 있지도 않는 것같았다. 톰이 말을 계속했다. "놈들이 사라고스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길바닥에 눕히고 그 위로 트럭이 지나가게 했다지 뭐야. 다행히 도망쳐 온 어느 모로코 사람이 말해 줬어. 총알을 절약하기 위해 그랬 다는 거야." "그럼 휘발유는 절약 못했군 그래." 나는 톰이 얄미웠다. 그런 얘기는 입밖에 내지 말았어야 했다. "장교들이 두 손을 호주머니 속에 넣고 담배를 피우면서 한길에서 감시를 한다는 거야. 그런데 대번에 처치하는 줄 알아? 천만에, 때로는 한 시간 동안이나 신음하는 걸 그냥 내버 려둔다는 거야. 그 모로코인이 그러는데 처음에는 욕이 쏟아져 나올 것 같더라나." "여기서는 설마 그 따위 짓은 않겠지. 정말 탄약이 떨어지면 몰라도." 햇빛이 네 개의 환기창과 천장 왼쪽에 뚫어 놓은 둥근 구멍을 통해 비쳐왔다. 천장 구멍 은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보통 때는 그 뚜껑을 닫아 두었다가 석탄을 지하실에 내려 쏟을 때 그 구멍을 이용하던 것으로, 그 밑에는 석탄가루가 가득 쌓여 있었다. 석탄은 이 병원에 서 땔감으로 사용했으나, 전쟁이 일어나자 환자를 다른 곳으로 옮겼으므로 그냥 버려둔 모 양이었다. 천장 구멍에 뚜껑을 덮는 것을 잊어버리고 갔기 때문에 가끔 비가 들이치기도 했 다. 톰은 몸을 덜덜 떨었다. "제기랄, 몸이 마구 떨리는 군. 또 시작이야." 그는 일어나 체조를 하였다. 몸을 움직일 적마다 셔츠가 펄럭거려 털이 새까맣게 난 가슴 팍이 드러나 보였다. 그는 벌렁 드러누워 두 다리를 허공으로 뻗고 가위질을 하듯이 놀렸다. 커다란 엉덩이가 흔들렸다. 톰은 몸이 단단하였으나 지방이 너무 많았다. 나는 버터 덩어리 처럼 연한 이 살결에 금새 총알이나 칼끝이라도 푹 박힌다면 하고 상상해 보았다. 그것은 말랑깽이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주었다. 나는 춥지는 않았으나 어깨와 팔에 아무 감각도 없었다. 어딘가 허전하여 윗도리를 찾으 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문득 놈들이 내 윗도리를 돌려주지 않았음을 알았다. 놈들 은 우리 옷을 벗겨서 병정에게 주고 셔츠 밖에는 남겨 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겨우 삼 복더위에 입원 환자가 입는 모시 바지를 주었던 것이다. 이윽고 톰이 다시 일어나 숨을 헐떡이며 내 곁에 와서 앉았다. "몸이 좀 풀렸어?" "염병할 것! 뭐가 풀려, 숨만 더 가쁘지 뭐야." 소령 하나가 저녁 여덟 시 무렵에 졸병 두 명을 데리고 들어왔다. "저 셋은 이름이 뭐야?" "스타인보크와 이비에타, 그리고 미루벌입니다." 소령은 코안경을 쓰고 명부를 들여다 보았다. "스타인보크라....스타인보프.... 아 여기 있군. 넌 사형이야! 내일 아침에 총살이다." 소령은 다시 명부를 들여다보고 말했다. "다른 두 명도 마찬가지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전 아니올시다." 하고 후앙이 말했다. 소령은 놀라는 얼굴을 하고 후앙을 쳐다보았다. "이름이 뭐냐?" "여기 분명히 적혀 있어. 너도 사형이다." "전 아무 것도 한 게 없습니다." 소령은 어깨를 으쓱 치켜올리더니 톰과 나를 향해 돌아섰다. "너희들은 바스크 사람이지?" "바스크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는 의아스러운 눈치였다. "분명히 바스크 사람이 세 명 있다던데, 그러나 놈들을 찾느라고 시간을 허비할 건 없지. 물론 신부를 부를 필요도 없을테고." 우리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베르기 의사가 곧 올거야. 너희들과 하룻밤 함께 보내도록 허가를 받았으니까." 그는 거수 경례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내가 뭐랬어? 흉악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야." 톰이 말했다. "그래. 이 아이한테 무슨 짓들을 하려는 거야!" 나는 정의감에서 이렇게 말했지만 소년은 좋아하지 않았다. 너무 연약해 보이는 그는 공 포와 고뇌로 인해 얼굴이 일그러지고 눈과 코가 뒤틀려 있었다. 사흘 전만 하더라도 귀엽게 보이던 아이라 호감을 가질만도 하였지만, 지금은 늙은 호색한처럼 되어버렸다. 소년은 설사 이곳에서 석방되더라고 젊음을 되찾을 것 같지도 않았다. 좀 가엾게 여겨줄만도 했지만 나 는 본래 남을 동정하는 것이 싫었다. 그 소년은 보기가 무서울 정도로 얼굴도 손도 잿빛으로 변해버렸다. 소년은 다시 그 둥근 눈으로 방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톰은 서글서글한 성미라 소녀의 팔을 잡아 주려고 하였으 나, 그 소년은 얼굴을 찡그리면서 몸을 뿌리쳐 버렸다. "내버려 두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지 않은가." 하고 나는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톰은 마지못해 손을 놓았다. 그는 소년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이 처 한 공포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자네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있나?" 하고 그는 나에게 물어왔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팔월초 이후로 여섯사람이나 죽였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인식하려고도 하지 않았 다. 나도 아직은 죽음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그같은 상황을 자문해 보기도 하고, 우박처럼 쏟아지는 시뻘건 총탄이 내 육체를 뚫고 지나가는 모습을 그려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모두 실제가 아니었으므로 나는 태평이었다. 하룻밤 내내 생각해 볼 여 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톰이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를 흘깃 쳐다보니 역시 온몸이 잿빛이 되어 보기에 흉했다. 이젠 때가 되었나 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날이 어두워져서 환기창을 통과한 희미한 햇빛이 스며들어, 석탄더미가 하늘 아래 커다란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천장 구멍으로는 어느 새 별이 하나 보였다. 맑고 추운 밤 이 찾아올 것 같았다. 문이 열리더니 두 사람의 간수가 들어오고, 그 뒤를 따라 회색 제복을 입은 금발의 사내 가 들어섰다. 그는 우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의사입니다. 이 괴로운 처지에 있는 여러분들을 도와 드리려고 찾아왔어요." 부드럽고 품위있는 목소리였다. 나는 의사에게 물었다. "뭘 하시려는 거요?" "무엇이든지 도와 드리죠. 앞으로 남은 몇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괴로움을 덜어 드릴 수 있도록 힘써 보겠습니다." "왜 하필 당신이 우리한테 온 거요, 병원은 만원이 아니오?" "내가 파견된 것입니다." 의사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참, 담배를 피우고 싶겠군요." 그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궐련이 있어요, 그리고 여송연도 있구요." 그는 영국 담배와 스페인 여송연을 꺼내 주었다. 우리는 거절했다. 내가 그의 눈을 쏘아보자 그는 거북한 모양이었다. 나는 말했다. "당신은 동정심에서 우리를 찾아온 건 아니오. 나는 당신을 알고 있소. 내가 잡히던 날에 당신이 마당에서 파시스트와 함께 있는 걸 보았소." 나는 말을 더 계속하려고 하였느나 뜻밖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 의사의 존재에 대해 갑자기 무관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여느 때에는 남들과 마주 대하면 가만히 있는 성미 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얘기할 마음이 전혀 내키지 않았다. 나는 그만 어깨를 움찔하고 외면해 버렸다. 얼마 후에 고개를 돌렸더니, 그는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 보았다. 간수 들은 짚방석에 앉아 있었다. 키가 크고 수척한 페드로는 두 손의 엄지손가락을 돌리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잠을 쫓기 위해 가끔 머리를 흔들었다. "불을 켤까요?" 페드로가 불쑥 의사에게 물었다.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장승처럼 둔해 보였으나, 그다지 심술궂은 사람처럼 보이지 는 않았다 싸늘한 푸른 눈을 보니 상상력이 모자라는 것이 흠인 것처럼 보였다. 페드로는 밖에 나가 등잔을 들고 들어와서 밴치 한쪽에 놓았다. 불빛이 희미했으나 없는 것보다는 나 았다. 어젯밤에는 어둠 속에 우리를 내버려 두었던 것이다. 나는 한동안 등잔이 천장에 그리 는 원광을 바라보았다. 그 원광에 홀린 느낌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원 광은 사라지고 나는 어떤 육중한 압박을 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상 념도 두려움도 아니었다. 영문 모를 그 무엇이었다. 뺨이 화끈거리고 머릿속이 지끈거렸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두 사람의 동료를 바라보았다. 톰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어 살찐 흰 목덜미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후앙은 더욱 맥이 풀려 있었다. 그는 입을 떡 벌리고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의사는 소년의 옆에 가서 위로하듯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의사의 눈은 쌀쌀했다. 이윽고 그 베르기 의사의 손은 후앙의 팔을 따라 손목까지 죽 만져보는 것이었다. 후앙은 관심이 없다는 듯 의사가 하는대로 내버려 두었다. 의사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세 손가 락으로 소년의 손목을 잡고 약간 물러서면서 등을 돌렸다. 나는 몸을 뒤로 젖혔다. 의사는 소년의 손목을 잡고, 회중 시계를 꺼내어 들여다 보았다. 이윽고 그는 소년의 힘없는 손목을 놓고 벽에 기대어서서, 당장에 기록해 두어야 할 중대한 일이라도 생각난 듯이, 호주머니에 서 수첩을 꺼내 서너 줄 써 넣었다. 나는 화가 치밀었다. 만약 내 맥을 짚으로 오기만 하면 따귀를 갈겨 줄 것이라고 단단히 별렀다. 의사는 오지 않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마주 쏘아보았다. 그는 덤덤히 말을 걸었다. "여기 있으면 몸이 떨리지 않소?" 그는 추운 모양이었다. 얼굴이 푸르죽죽 했다. "춥지 않아요." 하고 나는 대답했다. 의사는 여전히 쌀쌀한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얼른 눈치를 채고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땀이 흘려내리고 있었다. 겨울 바람이 불어 오는 이 지하실에서 땀을 흘리다니. 손 가락으로 머리칼을 쓰다듬어 보았더니 역시 땀이 축축했다. 셔츠에도 땀이 배어 살결에 끈 적거렸다. 나는 한 시간 전부터 땀을 흘리고 있었는데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데 베르기 의사놈은 그것을 잘 관찰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내 뺨에서 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공포에 사로잡힌 현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자기는 추위를 느끼고 있으므로 정상적인 인 간이라고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나는 따귀를 후려갈기고 싶었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자 어느 새 수치심과 분노는 사라지고 감각을 잃은 채 벤치에 쓰러졌다. 나는 손수건으로 목을 닦았다. 이번에는 땀이 머리칼에서 목덜미로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곧 땀 씻기를 그만두었다. 씻어도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손수건은 벌써 짜낼 정도로 축축했으나 땀은 여전히 흘러내렸다. 엉덩이에서도 땀이 나서 젖은 바지가 벤치에 마구 들러붙었다. 후앙이 문득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의사죠?" "그렇고." "죽을 때 고통이.... 오래 계속되나요?" "뭘요.... 그렇지 않아요." 베르기인은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곧 끝나버려요." 그는 마치 진찰을 받으러 온 화자를 안심시키려는 듯 한 태도였다. "그런데 누가 그러는데요.... 두 번 쏘아야 할 경우도 간혹 있다지요." "더러 있지요." 하고 의사는 고개를 흔들며 계속했다. "처음 쏜 것이 급소에 맞지 않는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되면 총알을 재어 다시 쏘나요?" 소년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 동안이 꽤 거리겠군요." 그는 고통을 겪는 것이 몹시 두려운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그 생각만 하고 있는 것 같았 다. 땀이 나는 것은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석탄 가루가 쌓여 있는 곳으로 갔다. 톰은 나를 쏘아 보았다. 내 구두 소리가 귀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내 얼굴도 이 소년처럼 잿빛이 되어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 도 땀을 흘리고 있었다. 밤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그러나 이 어두운 구석에는 한 줄기의 빛도 스며들지 않았다. 북두칠성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보였다. 나는 그저께 대사교관의 지하실 감옥에서 큼직한 하늘 한 귀퉁이를 쳐다볼 수 있었다. 그 때는 매 시간 색다른 추억에 젖곤 했었다. 아침 나절 하늘이 푸르고 맑게 보일 때는 대서양 바닷가의 모래사장이 생각났으며, 한낮 에는 고너리와 올리브를 먹으면서 마티니를 마시던 시벨기아의 바가 생각났다. 그리고 오후 에 그늘이 지나면 투우장의 한 쪽은 햇빛에 반짝이고 다른 쪽에는 짙은 그늘이 번져가고 있 던 일이 생각났다. 이처럼 지상의 모든 것이 하늘에 되비치는 것을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 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리 쳐다보아도 하늘은 아무런 추억도 가져다 주지 못했다. 그 편이 오 히려 나을성 싶었다. 나는 톰의 곁에 가서 앉았다. 한참 시간이 흘렀다. 톰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라도 하고 있지 않으면 견딜 수 없으 리라. 그는 나한테 얘기를 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나를 쳐다보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는 이렇 게 잿빛이 되어 땀을 흘리고 있는 나를 바라보기가 무서웠을 것이다. 그도 같은 꼴이었다. 서로 마주 대하면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이상으로 미웠던 것이다. 톰은 살아 남을 베르기 의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네는 알겠나? 나는 알 수 없네." 나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베르기 의사를 노려보았다. "뭘 말인가? 뭘 안다는 것인가?"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텐데, 나는 무슨 까닭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네." 톰의 주위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풍겨왔다. 여느 때보다도 코가 예민해진 모양이었다. 나는 조롱하듯이 말했다. "곧 알게 될 걸세." "아무래도 석연치 않네." 그는 집요하게 말을 이끌었다. "용기를 내고 싶지만, 우선 알기라도 해야지.... 자, 들어 보게. 우리를 뜰안에 끌어 내겠지. 그리고는 우리 앞에 놈들이 죽 늘어설 거야. 몇 놈이나 될까?" "난들 어떻게 아나? 아마 다섯 명내지 여덟 명즘 되겠지. 그 이상은 아닐 걸세." "좋네. 그럼 여덟 명이라고 치세." "그들은 '겨누어 총!' 하는 호령이 내려지면 여덟 정의 소총이 우리를 향해 겨냥을 할 테 지. 나는 아마 벽 속이라도 들어가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걸세. 그래서 힘껏 벽을 밀겠지. 벽은 꼼짝도 하지 않을 거야. 무서운 꿈속에서처럼. 그런 것 쯤은 상상할 수가 있네. 내가 얼마나 확실히 상상하고 있는지 아나?" "그건 나도 상상할 수 있네." "굉장히 아플 거야. 놈들은 우리의 얼굴을 결단내려고 눈과 입을 겨눠소 쏠 거야." 그는 심술궂게 말을 계속했다. "난 벌써 상처가 난 것 같네. 한 시감 전부터 머리와 목이 아프단 말이야. 정말로 아픈 건 아닐세. 그렇지만 아픈 것보다 더 심한 고통이라네. 내일 아침에 당할 고통 말이네. 그런데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눈치를 보이고 싶지 않 았다. 내게도 온몸에 무수한 작은 생채기처럼 고통이 배어 있었다. 그것은 달랠 수도 없는 고통이었고 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다음에는 죽어버리는 거야." 나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는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면서도 베르기 의사를 여전히 바라보고 있었다. 의사는 그의 말을 귀밖으로 흘러 보내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자가 이곳에 무엇하러 왔는지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우리가 갖고 있는 관심 따위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는 신음하는 우리의 몸뚱이를 보러 온 것이다. "마치 악몽과도 같군." 톰이 말했다. "난 죽음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려고 하네. 그리하여 곧 알 수 있다는 기분이 들다가도 그것이 스르르 빠져 나가 이내 사라져 버린다 말이야. 죽은 뒤에는 아무 것도 없으려니 하 고 생각해 보는데, 고통과 총알과 총소리를 다시 생각하게 되네. 또 하나 이상한 점이 있네. 나는 내 시체를 볼 수 있단 말이야. 그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네. 나는 눈으로 그 시체를 보네. 형체는.... 아무 것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고 이 세상은 다른 인간들을 위해 계속되어 간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쳐야 해. 그러나 파블로, 인간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어 있지 않 네. 이건 사실이야. 나도 전에 무엇인가 기대하면서 하룻밤을 꼬박 새운 적이 있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네. 등뒤에서 갑자기 닥쳐오는 일이야, 우리는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갖출 수가 없네." "그 정도로 해두게. 고해성사라도 할 수 있도록 신부라고 불러올까?" 하고 내가 말했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예어자인 체하면서 나를 한결같은 목소리로 파 블로라고 부르고 싶어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그것이 못마땅했다. 그러나 아일랜드 사람 은 모두가 그런 모양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어쩐지 지린내가 풍겨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 게 되었다. 아무튼 톰에 대해서는 호감을 느낄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죽을 처지에 있다고 해서, 그에 게 호감을 가져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사정이 다를 수도 있는 것이다. 가령 라몽 그리스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나는 톰과 후앙의 사이에 끼어 고독하기만 했다. 차라리 그 편이 나았다. 라몽과 함께 있으면 괜히 친근해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지금 무서우리 만큼 냉혹하고 그래고 냉혹으로 일관하고 싶었다. 톰은 여전히 넋을 잃고 중얼대 었다. 생각을 쫓으려고 입을 놀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마치 전립선염에 걸린 늙은이처 럼 몸에서 지린내가 확 풍겨왔다. 나도 물론 생각은 그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말이 내 입에서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죽는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못된다. 죽음을 눈앞에 놓고 보니 저 삭탄더미도, 이 벤치 도, 페드로의 더러운 얼굴도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톰과 마참가지 생각을 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나는 5분쯤 사이를 두고 밤새도록 그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땀을 흘리면서 두려워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곁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얼굴에는 죽음이 깃들어 있 었다. 나는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24시간 동안 톰의 곁에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에게 말 을 걸고 하면서도 그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함께 죽는다는 이유로 톰은 내 손을 잡았다. "파블로, 정말 인간은 완전히 빈손으로 돌아갈까?" 나는 손을 빼면서 말했다. "자네 발밑에는 오줌이 고여 있고, 바지에서도 오줌이 뚝뚝 떨이지고 있네." "그럴 리가 있나." 그는 역정을 냈다. "오줌을 싸다니!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데...." 의사가 다가와서 친절하게 물었다. "괴로운가요?" 톰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의사는 묵묵히 오줌이 고인 곳을 바라보았다. "나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요. 그러나 무섭진 않아요. 네, 결단코 무섭진 않아요." 톰은 거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의사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톰은 일어나 한쪽 구석으로 오줌을 누러 갔다. 그는 바지 단 추를 끼우면서 돌아와 벤치에 앉아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의사는 수첩에 뭔가를 적어 넣었 다. 우리는 셋이서 의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살아있는 인간이라면 으레 그렇듯이, 이 지 하실에서 떨고 있는 것이다. 그는 선량하고 혈색이 좋은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의 몸 뚱아리조차 느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무튼 그 사람처럼 느낄 수는 없었다. 나는 바지 가 랑이를 만져보고 싶었느나, 용기가 나지 않아 단지 베르기인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두 다 리를 꾸부정하게 딛고 서서 자신의 육체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으며, 내일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피가 돌지 않는 세 그림자와 비슷했다. 우리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 리고 흡혈귀처럼 그의 생명을 빨고 있었다. 그는 후앙에게 다가갔다. 어떤 직업적인 목적에서 그의 목덜미에서 손이라도 얹으려는가? 아니면 가엾은 생각에서 그러는 것일까? 만일 동정심에서 나온 행동이라면, 그것은 하룻밤 사이에 오직 한 번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는 후앙의 머리와 목을 쓰다듬었다. 소년은 의사를 빤히 쳐다보면서 그가 하는대로 몸을 내맡기고 있더니, 문득 그의 손을 붙잡고 이상한 눈으 로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의사의 두 손도 결코 아름답지는 못했다. 나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잘 알고 있었다. 톰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사 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아버지와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잠시 후에 소년은 의사의 손을 물어 뜯으려고 하였다. 의사는 황급히 몸을 뿌리치고 비틀거리면서 벽까지 물러섰다. 그러나 그는 겁이 나는 얼굴을 하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우리가 자기와 같은 인간이 아님을 문득 깨달은 모양이었다. 나는 깔깔 웃었다. 간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또 다른 간수 는 눈을 뜬 채 잠들어 있었다. 나는 피로와 흥분을 느꼈다. 새벽에 닥칠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부 질없는 일이었고, 그런 생각을 해 본들 허전함만 더 느낄 따름이었다. 그래서 다른 일을 생 각하려고 하자, 내게 겨눠진 총구멍이 눈에 떠올랐다. 나는 스무 번이나 연이어 처형을 당한 기분이었다. 한 번은 정말 사형을 당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아마 한동안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놈들은 나를 벽으로 끌고 갔다. 나는 몸부림을 치면서 용서를 밀었다. 그때 나는 깜짝 놀 라 눈을 뜨고 의사를 바라보았다. 자는 동안에 헛소리나 히지 않았나 해서 걱정이 되었다. 의사는 수염을 쓰다듬고 있을 뿐, 눈치를 채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자려고만 하면 잠시 잘 수도 있을 것 같았다. 48시간 동안이나 눈 한 번 붙여 보지 못해 기진맥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 남아 있는 두 시간의 여생을 헛되이 보내 고 싶지 않았다. 잠들면 놈들은 새벽녘에 와서 나를 두들겨 깨울 것이다. 그러면 나는 졸리 운 얼굴을 하고 놈들의 뒤를 따라가서 영락없이 쓰러져 버릴 것이다. 그건 질색이다. 나는 동물처럼 죽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악몽에 시달리는 것이 싫었다. 나는 일어나 돌아다녔다. 그리고 기분 전환을 위해 내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추억이 뒤죽박죽되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름다운 추 억도 있고 흉칙한 추억도 있다. 아니 적어도 전에 나는 그렇게 말해 왔다. 거기에는 사람의 얼굴도 있고, 여러 가지 사건들도 있었다. 축제일에 발렌시아에서 투우의 뿔에 쓰러진 소년 투우사의 얼굴이며, 백부의 얼굴, 라몽 등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여러 가지 사건도 회 상되었다. 그해 석 달 동안 직장을 잃었던 일이며, 굶어서 죽을 뻔한 일 등. 그라나다에서 밤을 밝히던 일도 생각났다.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였다. 나는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도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을 생각하니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얼마나 행복과 여자와 자유를 갈망하였던가! 나는 스페인을 해방시키고 싶었다. 나 는 피 이 마르갈에 심취하여 무정부주의 운동에 가담해서 군중대회에 나가 연설을 했다. 나 는 마치 영원한 생명이라도 가진 자처럼, 모든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자신의 일생을 눈앞에 삼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이건 새 빨간 거짓이다.' 하고 생각했다. 내 생애는 이미 끝장이 났으니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내가 여자들과 어떻게 놀러 다니기도 하고 희롱하기도 했던가를 생각해 보았다. 미리부터 이렇게 죽을 줄 알았더라면 나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일생이 붙잡아 맨 자루속에 들어가 눈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모두가 마완 성품들이었다. 나는 한동안 내 인생을 비판해 보려고 했다. 아름다운 일생이었다고 스스로 타일러 보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뭐라고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미완성품에 지나 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영원을 위한 수표를 끊으면서 일생을 보내 왔다.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몰랐다. 이제는 아무 미련도 없다. 하긴 미련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산더미 같이 있기는 있다. 망사리니아의 맛과 여름 카딕스 근처의 바닷물에서 즐기던 해수욕 등이 그것이다. 그 러나 죽음은 그 모든 매력을 앗아 가버린 것이다. 의사는 엉뚱한 생각을 하였다. "나는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유언이나 유물을 전해 드리겠어요. 군사정부 의 승인만 있다면...." 그러자 톰이 퉁명스럽게 말하였다. "내게는 아무 것도 없소." 나는 잠자코 있었다. 톰은 나를 이상스러운 눈으로 쳐다 보았다. "콘차에게 전할 말이라도 없나?" "없네." 나는 제법 친한 사이라도 되는 체하는 그의 태도가 못마땅했다. 어젯밤 그에게 콘차의 얘 기를 한 것이 잘못이었다. 그런 얘기는 참고 하지 말았어야 했다. 콘차와는 1년 동안 함께 지냈다. 나는 어제까지만 해도, 그 여자와 1분 동안이나마 만날 수 있다면 팔 하나쯤 도끼로 잘리더라도 무방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 얘기를 그에게 하였던 것이다.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만나고 싶지도 않고 또 전할 말도 없었다. 팔로 껴안고 싶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온몸이 잿빛이 되고 땀을 뻘 뻘 흘리고 있는 내 꼬락서니가 너무나 끔찍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여자의 육체를 보아 도 역시 무서운 생각이 들 것 같았다. 내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으면 그녀는 울부짖을 것이 다. 몇 달 동안은 살고 싶은 의욕조차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죽는 건 여기 있는 나 자신이 다. 나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눈을 생각해 보았다. 나를 지그시 바라볼 때면, 그 무엇이 내 속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끝장이 난 것이다. 아마 그녀가 느를 보려고 하여 도 시선이 얼어붙어 내가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고독하다. 톰도 고독하지만 사정이 나와는 다르다. 그는 말 탄 자세로 걸터앉아서 씁쓸하게 웃으면 서 벤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쩑지 미심쩍은 모양이었다. 그는 한 손으로 나무를 조심스레 만져보았다. 마치 무엇을 망가뜨리는 것이 두렵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다가 얼른 손을 떼고 부르르 떨었다. 내가 만약 톰이라면 그런 장난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도 아일랜드인의 수 작임이 분명했다. 그너나 나에게도 모든 물건이 이상하게 보이기는 했다. 물건들은 여느 때 보다 형태가 분명치 않고 밀도도 엷은 것 같았다. 벤치나 등불이나 석탄더미를 보기만 해도 내가 곧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물론 죽음을 분명히 목결할 수는 없지만, 내가 죽는 다는 것은 모든 사물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죽어가는 환자의 머리맡에서 나지막한 목소리 로 말하는 사람처럼, 물건들이 뒤로 물러나 멀리 얌전히 서 있는 꼴을 보더라도 죽음을 알 수가 있었다. 아까 톰이 벤치에서 만진 것은 실상 제 자신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아마 나는 현재와 같은 상태로는 설사 목숨을 살려 집으로 돌려보내준다고 하더라도 나는 냉담했을 것이다. 영원히 살 수 있다는 환상이 무너진 이상, 몇 시간을 더 살든 몇 해를 더 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애착을 느끼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을뿐더러 어느 의 미에서는 차라리 마음이 평온했다. 그러나 내 육체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무서운 평온이었다. 나는 그런 육체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다. 그러나 이미 그것은 나 자신은 아니었다. 육체는 혼자서 땀을 흘리고, 혼자서 부들부들 떨었다. 나로서는 이미 알 수 없는 육체일뿐 그것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알 아보려면 미치 남의 육체나 되는 것처럼 만져보고, 바라보아야 했다. 나는 때때로 몸에서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급히 아래로 나는 비행기를 탔을 때처럼 미끄러져 내리고 떨어져 내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심장의 고동 소리도 들려왔다. 그 러나 역시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은 육체에서 느끼는 모든 것이 이상하고 애매했다. 대체로 육체는 묵묵히 얌전을 빼고 있었다. 나는 나를 누르는 중압감 밖에는 느끼지 못했다. 마치 어떤 커다란 벌레라도 붙어 있는성 싶었다. 그리고 바지에 손을 대어보니 축축했다. 땀에 젖 었는지 오줌에 젖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조심스레 석탄 더미로 오줌을 누러 갔다. 의사는 시계를 꺼내 보았다. "세 시 반이군." 죽일 놈 같으니! 놈은 일부러 그런 말을 뇌까린 것이 분명했다. 톰이 벌떡 일어났다. 우리 는 아직도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생각을 미처 못했던 것이다. 밤은 어두운 덩어리처럼 우리 를 에워싸고 있었다. 밤이 언제 찾아왔는지 그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후앙이 울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는 두 손을 비비면서 애원하듯 큰 소리로 말하였다. "죽기 싫어! 죽기 싫어!" 그는 팔을 치켜들고 지하실로 뛰어다니다가 짚방석 위에 쓰러져 흐느껴 울었다. 톰은 침 울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 이제는 위로할 생각도 없었다. 그는 마치 고열의 힘으로 병 마와 싸우는 환자나 다름이 없었다. 그 열도 없게 되면 훨씰 위독할 것이다. 그는 울고 있었다. 자기 자신이 가엾은 생각이 든 것이다. 그는 죽음 자체를 생각하고 있 는게 아니다. 나 역시 한때나마 나 자신을 가엾게 생각하여 울고 싶었다. 그런데 실제는 그 와 반대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소년을 힐끗 바라보니 울며 들먹이는 작은 어깨가 눈에 띄었 다. 나는 갑자기 냉혹해졌다. 나는 타인은 물론 나 자신도 가엾게 여길 수가 없었다. 나는 마음 속으로 깨끗이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톰은 자리에서 일어나 둥근 천장 아래로 가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나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의사가 시간을 알려준 이후로는 시간이 한 방울 한 방울 흘러가는 것을 느끼 게 되었다. 아직 어둠컴컴하였다. 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려!" "응!" 놈들이 뜰안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뭣하러 왔을까? 설마 어두움 데서 총은 쏘지 못할 텐데." 이윽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나는 톰에게 말했다. "먼동이 트네." 페드로가 하품을 하면서 일어나 등불을 끄고 동료 간수에게 말했다. "추위가 지독하군." 지하실에 희미한 빛이 비치고, 멀리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시작이군." 하고 나는 톰에게 말했다. "뒤 뜰에서 해치우나 보네." 톰은 의사에게 담배를 한 대 달라고 했다. 나는 담배 생각도 없었다. 술도 마시고 싶지 않 았다. 놈들은 그때부터 계속해서 총을 쏘아댔다. "알겠나!" 톰이 말했다. 그는 다시 말을 계속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문쪽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문이 열리더니, 중 위가 네명의 졸병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톰은 담배를 떨어뜨렸다. "스타인 보크가 누구인가?" 톰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페드로가 그를 가리켰다. "후앙 미르발은?" "짚방석에 앉아 있는 놈입니다." "일어서!" 후앙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병정이 소년의 겨드랑이 밑에 손을 넣어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손을 빼자 곧 쓰러져 버렸다. 병정들은 망설였다. "이렇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놈은 처음 보겠다. 둘이서 들고 가. 현장에서 적당히 처리 할 테니까." 중위는 톰을 향해 말했다. "어서 가!" 톰은 두 병정 틈에 끼어 나갔다. 그 뒤를 다른 두 병정이 소년의 겨드랑이와 넓적다리를 들고 따라 나섰다. 소년은 기절한 것은 아니었다. 눈을 크게 뜨고 뺨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 다. 나도 따라 나서려고 하는데 중위가 길을 가로막았다. "네가 이비에타지?" "네." "넌 여기서 기다려! 나중에 부르러 올 테니까." 모두들 밖으로 나갔다. 의사와 두 사람의 간수도 나가고 혼자만 남게 되었다. 나는 곡절을 알 수가 없었다. 빨리 당했으면 싶었다. 거의 같은 간격을 두고 총질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번번이 몸소리를 쳤다. 고함을 치고 머리칼을 쥐어뜯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이를 악물고 호주머니 속에 두 손을 넣고 있 었다. 끝까지 깨끗이 감당하고 싶었다. 한 시간쯤 지나서 나를 데리러 왔다. 나는 여송연 냄 새가 나는 어느 2층 방으로 끌려갔다. 방안은 무더워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두 사람의 장 교가 안락의자에 앉아서 무릎 위에 서류를 올려놓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비에타지?" "네." "라몽 그리스는 어디 있나?" "모르겠습니다." 키가 작달막하고 뚱뚱한 사내가 나를 심문했다. 그는 코 안경을 쓰고 날카롭게 바라보았 다. "이리 와!" 나는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땅속으로 쳐넣기라도 하려는 듯이 사 납게 노려보면서 힘껏 팔뚝을 움켜 쥐었다. 나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위협하려는 연극 이었다. 그리고는 내 얼굴에 구린 입김을 내뿜었다. 우리는 한 동안 그냥 가만히 있었다. 나는 차라리 웃고 싶었다. 죽게된 인간을 제압하기에 는 그런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건 전혀 효과가 없었다. 그는 나를 와락 떠밀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지금 네가 죽느냐, 그놈이 죽느냐 하는 판이란 말이야. 그놈이 있는 곳만 알려 주면 네 목숨은 살려 줄 테다." 회초리를 순에 들고 장화를 신은 얼굴이 번드레한 두 사내도 역시 나중에는 죽어야 하는 인간이다. 나보다 좀 늦게 죽을지는 몰라도 그다지 오랜 뒤의 일은 아니다. 놈들이 하는 짓이라고는 서류를 뒤적이면서 명단을 찾느라고 애쓰며, 다른 사람을 못살게 굴어 감옥에 가두거나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자기 딴에는 스페인의 장래에 대해서나 그밖 의 다른 문제에 대하여 제나름의 견해를 갖고 있었다. 놈들의 자질구레한 행동을 보내 내 눈에는 불쾌하고 우습기 짝이 없었다. 미친 놈으로 보인 뿐이었다. 그 뚱뚱한 사내는 자기 장화를 채찍으로 때리면서 나를 여전히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일 부러 민첩하고 사나운 야수와 같은 태도를 취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어때, 바른대로 말해봐!"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나는 그가 마드리드에 있는 줄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른 장교는 피로한 듯 핏기 없는 손을 쳐들었다. 그런데 이 피로한 듯한 태도를 해 보이 는 것도 역시 까닭이 있는 것이었다. 나는 놈의 수작을 간파할 수 있었다. 그런 짓을 재미있 어 하는 인간이 있다니 어처구니 없는 노릇이었다. "15분 동안 여유를 줄 테니 잘 생각해 봐." 하고 그는 천천히 말했다. "이 자를 피복창고에 처넣었다가 15분 후에 다시 끌고와. 끝까지 부인하면 당장에 처치할 테다." 놈들은 연극을 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하룻밤을 새웠다. 그런데 놈들은 톰과 후앙을 총살하는 동안에 나를 한 시간이나 지하실에서 더 기다리게 했 다가 이번에는 피복창고 속에 가두는 것이다. 아마 미리 짜 놓은 짓이 분명했다. 놈들은 인 간이란 나약한 것이므로 타협하게 마련이라고 생각해 나를 그 지경에 몰아넣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잘못된 판단이었다. 나는 피복창고에 끌려가자 피로에 못이겨 의자에 앉아서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놈들이 제안한 것에 관해서는 아니었다. 나는 물론 그리스가 있는 곳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곳 이내에서 4킬로 쯤 떨어진 사촌의 집에 숨어 있는 것이다. 나는 고문을 당하지 않는 한 그가 숨어 있는 곳을 대 주지 않을 생 각이었다. 그것은 이미 마음속에 결정하고 있었으므로 더 생각해 볼 여지도 없었다. 다만 나 는 내가 뭣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나는 놈들에게 그리스를 넘겨 주 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그럴까? 나는 이미 그를 좋아하지도 않 았다. 그에 대한 우정은 날이 밝기 얼마 전에 콘차에 대한 사랑과 삶의 애착과 함께 사라져 버 렸다. 물론 아직도 그를 존경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 대신 죽으려는 것으 그 때문은 아니었다. 그의 목숨이 내 목숨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는 어떤 사람의 목숨도 가치가 없다. 한 인간을 벽에 세워 놓고, 그가 죽을 때까지 총을 쏘아댄다. 그것이 나든, 혹은 그리스이든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가 스페인을 위해 나보다 훨씬 유익한 인간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는 스페인도 무정부주의도 안중에 없다. 이제는 모든 것이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나는 아직 여기에 살아 있다. 그리고 그리스를 놈들 에게 넘겨주기만 하면 살아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거절하고 있다. 이것은 우스꽝스 런 하나의 고집에 불과했다. 나는 왜 이럴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 까닭 모를 유쾌한 기 분에 쌓이는 것이었다. 놈들은 나를 두 명의 장교 앞으로 끌고 갔다. 그때 발밑에서 쥐가 한 마리 튀어나왔다. 나 는 그게 재미있어 병정에게 말했다. "쥐 봤어요?"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우울한 얼굴을 하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나 는 웃고 싶었으나 한 번 웃으면 좀처럼 그칠 수 없을 것 같아서 참기로 하였다. 그 병정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나는 다시 말을 건넸다. "그 수염을 깎아버리는게 어때요?" 털투성이가 된 얼굴을 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우습게 보였다. 그는 나를 슬그머니 걷어찼 다. 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어때, 생각해 봤어?" 뚱뚱한 장교가 물었다. 나는 신기한 곤충이라도 바라보듯이 의아한 눈으로 장교를 쳐다보 면서 말했다. "네, 그 사람 숨은 데를 알고 있어요. 무덤 속이 아니면 무덤 파는 인부의 오두막에 숨어 있어요." 나는 놈들을 골려 주려고 하였다. 놈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분주히 서두는 꼴을 보고 싶었다. 과연 놈들은 벌떡 일어났다. "좋아, 모레스. 로페스 중위한테 가서 병사 15명을 보내라고 해." 이어서 그 뚱뚱한 장교는 나한테 말했다. "네가 사실대로 말했다면 약속을 지키지만, 거짓말을 했다면 단단히 각오해야 해." 나는 병정들의 감시를 받으면서 조용히 기다렸다. 놈들이 잠시 후에 어떤 낯짝을 하고 돌 아올까 하고 생각해 보니 절로 웃음이 터졌다. 머리가 멍청해지고 짖궂은 사람이 된 것같았 다. 나는 놈들이 묘석을 들어내고 무덤의 문을 일일이 열어보는 꼴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나는 마치 자기 자신이 딴 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현재의 처지를 생각해 보았다. 영웅이라도 되는 듯이 버티고 있는 포로, 심각한 얼굴에 콧수염을 기른 국민당원, 무덤 사 이를 뛰어 다니는 병정들, 모두가 배꼽을 잡을 지경이었다. 삼십분쯤 지나서 뚱뚱한 장교가 돌아왔다. 나를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리러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다른 놈들은 아직 묘지에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장교는 나를 바라보았다. 휘청거리는 기미는 전혀 찾아볼수 없었다. "이 자를 다른 놈들과 함께 큰 마당으로 끌고 가! 전쟁이 끝나면 정식으로 재판을 열어 죄상을 판결할 테니까." 나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럼, 나는 총살하지 않습니까?" "어쨌든 지금은 총살 안해. 나중 일은 난 몰라." 나는 여전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대체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는 대답 대신 어깨를 치켜올렸다. 병정들이 나를 데리고 갔다. 큰 마당에는 포로가 100 명쯤 모여 있었다. 여자도 있고, 아이도 있고, 노인도 몇 사람 보였다. 나는 한복판의 잔디밭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머리가 얼떨떨했다. 열 두시가 되자 식당에서 점심이 나왔다. 몇몇 사람이 나에게 말을 걸어 왔다. 아는 사람 같았으나 나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나는 자기 자 신이 어디 있는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저녁 때 새로 포로를 열 명쯤 끌고 왔다. 그 가운데는 빵가게를 하는 가르시아가 보였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자넨 운이 좋군. 자네가 살아 있어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네." "놈들이 날 총살한다고 하더니 생각이 달라진 모양이네. 무슨 영문인지 나도 모르겠어." "난 두 시에 붙잡혔네." "왜?" 가르시아는 정치에 관계하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알아? 놈들이 저희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모조리 잡아들이는 판이니까." 그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리스가 죽었다네." 나는 온몸이 떨려 왔다. "언제." "오늘 아침. 그 자도 어리석은 짓을 했지 뭔가. 화요일에 사촌과 언쟁을 하고 집을 나온게 탈이었네. 숨겨 줄 사람이 얼마든지 있지만 남의 신세를 지기가 싫다는 거야.... 이비에타의 집에 가서 숨어 있어도 좋겠지만 놈들에게 잡혀 갔으니, 묘지에나 가서 숨겠다고 하더니 그 만...." "뭐, 묘지에?" "그래, 그게 화근이었네. 놈들은 오늘 아침에 그리로 몰려갔지 뭔가, 그러니 잡힐밖에. 놈 들은 묘지 인부들의 오두막에서 그를 발견하게 된 걸세. 그래 그 자리에서 쏘아 죽였다네." "묘지에서...." 나는 사방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제정신이 들어서 보니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나는 눈물이 나도록 웃고 또 웃었다. 장 폴 사르트르(1905-1980)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소설가. 파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에콜 노르말 철학과를 수석 으로 졸업했다. 철학 논문 자아의 극복, 상상력으로 인정받은 뒤, 1938년에 소설 구토를 발 표하여 카뮈와 함께 대표적인 실존주의 문학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 후 장편소설 자유에의 길과 철학논문 존재와 무등을 발표함으로써 세계적인 철학가이자 문학가의 자리에 올랐다. 1964년에 노벨문학상이 주어졌으나 수상을 거절하였다. 그 밖의 주요 작품으로는 벽, 말, 더 러운 손 등이 있고, 평론으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등이있다. 사랑과 희생 누구나 자기의 예술을 사랑하게 되면 어떠한 희생이라도 아끼지 않는다. 이것이 나의 전 제였다. 그런데 다음 이야기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여, 이 전제가 잘못임을 밝혀 줄 것이 다. 이것은 필경 논리학상의 새로운 시도로, 중국 만리장성보다도 더 낡은 화술의 위태로운 줄타기일지도 모른다. 그림에 대한 뛰어난 재주를 타고난 조 라라비는, 예술에 대한 정열을 억제하면서 중서부 지방의 떡깔나무로 지은 아파트를 떠났다. 그는 여섯 살 때 어느 저명인사가 옆을 지나가고 있는 사이에 우물의 풍경을 그린 적이 있다. 그 후 이 그림을 액자에 넣어 약방에 걸어 놓았다. 옆에는 열매가 울퉁불퉁하게 돋아 난 옥수수 이삭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그는 스무 살 때 돈을 마련하기 위해 바람결에 넥타이를 날리면서 뉴욕으로 갔다. 델리아 카루서즈는 음악에 소질이 있다고 해서, 소나무가 우거진 남부 시골 마을에서 일 가 친척들이 돈을 모아 그녀를 북부 지방으로 유학을 시켰다. 그러나 친척들에게는 그녀의 앞날을 내다볼 선견지명은 없었다. 그 결과로 이런 이야기가 생긴 것이다. 조와 델리아는 그림이나 음악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득실거리고 있는 어느 아틀리에에서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명암법과 바그너 음악이나 렘브란트의 그림에 대한 논쟁과 장난감 이며 벽지, 쇼팽 그리고 우롱 차 등등에 대하여 논쟁이 그칠 새가 없었다. 조와 델리아는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아니 서로 미워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둘은 곧 바로 결혼했다. 앞에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이란 자기 예술을 사랑하게 되면 어떠한 희생도 아끼지 않는 법이니까. 이들 내외는 셋방을 얻어 가정을 꾸렸다. 허전하기 짝이 없는 셋방이었다. 그것은 마치 건 반의 왼쪽 끝이 갑자기 쿵하고 내려앉은 소리처럼 단조로웠지만, 둘은 서로 자기 예술을 사 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행복하기만 했다. 그러므로 나는 돈푼이나 있는 이 청년에게 이렇게 충고하려고 한다. 그대가 갖고 있는 것을 모두 팔아서 가난뱅이 문지기에게 주라. 너는 예술 이 있고 델리아가 있어 한 방에서 살고 있으니 말이다. 셋방살이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나의 주장을 인정 할 것이다. 행복한 가정은 옹색할수록 좋다. 예컨대 찬장이 당구대가 되고, 벽난로가 보트를 젓는 연습장이 되며, 책상이 침대가 되고, 세면대가 피아노의 구실을 해도 좋다. 그리고 바 람벽이 사방으로 기울어져도 무방하다. 그렇게 되면 너의 델리아는 더욱 정이 깊어질 것이 다. 그러나 만일 불행한 가정이라면 넓직하고 길죽한 것이 좋을 것이다. 골든 게이트로 들어 가서 모자는 핫테라스에 걸고, 목도리는 케이프 타운에 걸어 두고 라브라도르 해협 위에서 외출하는 것이 좋으리라. 조는 저 유명한 매지스터 학원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명성은 유명했다. 그분의 수업료는 굉장히 비싼 반면 실제로 가르치는 것은 매우 적었다. 이 비싸고 적은 것 이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이다. 한편 델리아는 로젠스톡 씨 밑에서 피아노를 공부하고 있었다. 그는 피아노의 키를 망가 뜨리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이들 내외는 돈이 있을 동안은 매우 행복했다. 이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여 기서 구태여 빈정대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목적은 뻔하기 때문이다. 조로 말하면 구렛나루가 길쭉하고 두둑한 돈 지갑을 갖고 있는 노신사들이, 그의 화실에 밀려들어 옥신 각신하며 그림을 사는 특권을 다툴 정도로 대가가 되어 만일 관람석에 빈 자리가 있을 경우 에는, 목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자기의 전용식당에서 새우 요리를 먹으면서 연주를 거절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이 비좁은 두 사람의 셋방살이에서 가장 즐거운 일은, 하루의 공부 를 마치고 늘어놓는 수다요, 즐거운 만찬과 가벼운 조반이요, 서로가 주고 받는 농담이었다. 주책없이 까불어대는 수다와 서로에 대한 격려가 나의 서툰 표현을 용서한다면, 밤 11시에 먹는 올리브와 치즈 샌드위치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들의 예술도 시들해졌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이런 일 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들에게는 나가는 것 뿐이요 들어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 다. 그러므로 매지스터 선생이나 로젠스톡 선생에게 바칠 수업료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인간 은 자기의 예술을 사랑할 때에는 어떠한 희생도 아끼지 않는 법이다. 델리아는 생계를 위해 음악 개인지도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며칠동안 문하생을 구하러 돌아다니더니 하루 는 의기양양해서 집에 돌아왔다. 그녀는 싱글벙글 하면서 말했다. "여보, 아이를 하나 찾아냈어요. 어쩌면 사람이 그렇게 좋을 수 있을까요. 71번가에 있는 유군대장 A.B.펑크니 장군의 따님이래요. 저택이 아주 으리으리 하더군요. 당신에게 그 집 현관을 보여 주고 싶을 정도예요. 당신이 이 집을 보면 비잔틴식 건물이라고 하실거예요. 내 부도 꽤 볼만해요. 전 여태까지 그런 집을 본 적이 없어요. 제가 가르칠 아이가 바로 그 집 따님 클레멘티나예요. 전 벌써 홀딱 반했어요. 몸에는 언제나 흰 옷을 걸친 상냥하고 말쑥한 아이에요. 이제 겨우 여덟이래요. 저는 한 주일에 세 번씩 가르치러 가기로 했는데 매번 5달 러씩 받기로 했어요.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수서너명 더 늘면 저도 로젠스톡 씨에게 배우러 갈 수 있을 테니까요. 이젠 됐어요. 저녁이나 먹읍시다." 조는 칼과 손도끼로 콩 통조림을 뜯고 있었다. ] "델리아, 당신은 그걸로 족할 테지만 난 어떡하나? 그래 당신을 돈벌이에 내보내는 주제 에 내가 예술을 운운할 수 있겠소? 말도 안 되지. 나도 신문팔이나 공사장 인부 노릇이라고 해야겠어요. 그렇게 하면 하루에 한두 달러라도 벌 수 있을 테지." 델리아는 남자의 목을 끌어안았다. "별 말씀을 다 하시네요. 당신은 공부를 계속하셔야죠. 전들 뭐 음악을 버리고 딴짓하는 건가요. 가르치면서 배우는 거지요. 음악과 담을 쌓는 건 아니예요. 게다가 1주일에 15달러 만 있으면 우리도 남부럽지 않게 잘 살 수 있어요. 당신은 매지스터 선생님 곁을 떠날 생각 은 꿈에도 하지 말아요." 조는 파란 야채접시에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남을 가르친다는 건 당신을 위해 좋은 일은 못돼. 그건 예술이 아니야. 그래도 그걸 더 하려고 들다니.... 당신은 정말 착하고 믿음직스럽구려." "누구나 자기 예술을 사랑하게 되면 어떠한 희생도 아끼지 않는 법이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내가 며칠 전에 공원에서 그린 스케치 말이야. 매지스터선생이 그 하늘이 잘 됐다고 칭 찬해 주더군 그래. 그리고 팅크 녀석이 내 스케치를 두어 장 진열장에 걸어 주겠다고 했어. 혹신 돈푼이나 있는 너그러운 바보의 눈에라도 띄면 팔릴지도 몰라요." 델리아는 상냥한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암, 팔리고 말고요. 자, 이제 우리는 핑크니 장군과 이 송아지 고기 로스트에 감사를 드 립시다." 그후 한 주일 동안 이들 내외는 일찍 조반을 먹었다. 조는 중앙공원에서 아침 풍경 스케 치를 열심히 하고, 델리아는 조에게 아침을 지어 주고 잔심부름도 해주며 칭찬과 키스도 잊 지 않고 꼭꼭 챙기고선 아침 일곱 시에 그를 밖으로 내보냈다. 조는 저녁 일곱 시 경이면 집에 돌아오곤 했다. 주말이 되자 델리아는 어깨를 으시대면서, 그러나 아주 피로한 듯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 녀는 가로 8자 세로 10자의 방 가운데 있는 가로 8인치 세로 10인치의 테이블 위에 5달러 짜리 지폐 석장을 내던지고 약간 지친 듯이 말했다. "그 클레멘티나가 때때로 사람의 속을 무던히 썩이는군요. 연습이 부족한 탓이에요. 몇 번 이고 같은 걸 되풀이해야 돼요. 입고 있는 옷은 언제나 흰 색깔이라 단조롭기 짝이 없어요. 그렇지만 핑크니 장군은 매우 친절한 분이에요. 저와 클레멘티나가 피아노를 치고 있으면 가끔 들여다 보셔요. 그인 홀아비래요. 알고 계시죠? 그리고 곁에서 염소수염 같은 흰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어때 이젠 여러 가지 소리를 낼수 있게 됐나?' 하고 묻지 않겠어요. 전 당신 에게 그 응접실 벽판이랑 그 아스트라간 모피 휘장을 보여 드리고 싶어요. 클레멘티나가 좀 더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그 애는 가끔 바튼 기침을 하거든요. 전 그애가 얼마나 좋은지 몰 라요. 온순하고 착하니까요. 그리고 핑키니 장군님의 아우는 볼리비아 공사를 지낸 분 이래 요." 조는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흉내를 내며 10달러와 5달러, 그리고 1달러짜리 지폐 3장을 호 주머니에서 꺼내어 델리아가 내놓은 돈 곁에 얹어 놓았다. "페어리아에서 온 신사분이 그 수채화를 사갔어." 하고 그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거짓말 마세요. 페어리아에서 오긴 누가 와요." "정말이라니까. 당신에게 그분을 보여 주고 싶었어. 양털 목도리를 하고 멋진 양복을 입고 있는 분이야. 그는 처음에 팅크의 진열장에서 그 스케치를 보고 풍찬줄 알았대나, 어쨌든 사 주었으니 다행이지 뭐야. 그리고 또 주문까지 했어. 라캐나와의 창고 유화를 부탁하는 거야. 고향에 갖고 가겠다더군. 그분은 음악교수래. 그러고 보니 당신은 나보다 더 예술과 인연이 있나보군." 델리아가 말했다. "당신이 그림공부를 꾸준히 계속하는 걸 보니 저는 정말 기뻐요. 당신은 반드시 성공하실 거예요. 자그만치 33달러나 되는 군요. 우린 여태까지 이렇게 많은 돈을 가져본 적이 없어 요. 오늘밤에는 굴 요리를 만들어 먹어요, 네?" "버섯을 곁들인 지느러미 살은 맛이 좋지. 오르되브르용 포크는 어디있소." 하고 조가 물었다. 토요일 저녁에는 조가 먼저 집에 돌아왔다. 그는 테이블 위에 18달러를 내놓고 까만 페인 트 같은 것이 덕지덕지 묻은 손을 씻었다. 반 시간쯤 지나 델리아가 돌아왔다. 그녀의 오른 손에 붕대가 흉하게 감겨 있었다. "웬일이야?" 하고 조가 물었다. 델리아는 웃어보였지만 별로 기쁜 표정은 아니었다. "글레멘티나가 수업이 끝나자 토끼 고기를 달라고 졸라대는 거예요. 참 이상한 애죠. 오후 다섯 시에 토끼 고기가 먹고 싶다니. 마침 장군이 옆에 계셨는데 그는 가정부가 안중에도 없는 듯 몸소 식탁용 퐁로를 가지러 가는 거예요. 저는 그 모습을 당신에게 보여 주고 싶더 군요. 클레멘티나는 오늘따라 마구 신경질을 부리는 거예요. 그래서 토끼 고기를 접시에 옮 길 때 그 지글지글 끓는 놈을 내 손등에 흠뻑 쏟았지 뭐예요. 얼마나 뜨거웠던지 혼났어요. 그애도 미안해서 쩔쩔매더군요. 그리고 핑크니 장군도요. 그는 미친 사람처럼 계단을 단숨에 뛰어 내려가 화부인지 지하실에서 일보는 사람인지 무작정 불러서 약방에 고약과 붕대를 사 러 보냈어요. 지금은 그다지 아프지 않아요." 조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고 붕대 밑에 있는 흰 끈 같은 것을 잡아 당기면서 뭐냐고 물 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고약이 묻어 있어요. 또 스케치를 팔았어요?"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돈을 보고 말했다. "그럼 팔고말고. 페어리아에서 온 그분에게 또 팔았어. 오늘 창고에 있는 그림을 넘겨 주 었지.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공원 그림과 허드슨강 풍경화를 부탁할 생각이래. 그런데 당신 손을 덴 게 몇시 쯤이지?" 델리아는 침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다섯 시쯤일 거예요. 다리미.... 아니 그 토끼 고기가 마침 다 익었거든요. 조, 당신은 그 때 핑크니 장군이...." "델리아, 이리 좀 앉아." 조는 이렇게 말하고 그녀를 침대 가까이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 곁에 앉아 두 팔로 그 녀의 어깨를 감쌌다. "델리아, 당신이 두 주일 동안에 뭘 했지?" 그녀는 잠시 사랑스러운 눈으로 핑크니 장군의 이야기를 꺼내며 자기 입장을 얼버무리려 고 했으나, 결국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면서 사실을 고백했다. "배울 아이는 못구했어요. 그렇다고 차마 당신의 공부를 중단하게 할 수는 없고 해서 23 번가에 있는 큰 세탁소에 가서 셔츠를 다리는 일을 맡았지요. 핑크니 장군과 클레멘티니나 이야기는 제가 적당히 꾸며낸 거예요. 당신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늘 오후에 세탁소의 한 여직공이 제 손등에 뜨거운 다리미를 잘못 놓았지 뭐예요. 전 집에 돌아오면서 토끼 고기 이야기를 꾸며 내느라고 온통 정신이 없었어요. 여보 화나셨어요? 그래도 제가 일자리를 구 하건 잘한 거예요. 그렇게 하지 않았어봐요. 아마 당신의 스케치도 페어리아에서 온 그분한 테 팔리지 않았을지 몰라요." "그분은 페어리아에서 온 게 아니야." 조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서 왔건 상관 없어요. 당신 어떻게 아셨어요? 저에게 키스해 주세요, 네. 제가 클레 멘티나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는 걸 어떻게 의심하게 되셨나요?" "난 지금까지 남을 의심할 줄 몰랐어. 그때만 해도 몰랐지. 오늘 오후에 2층에서 한 여자 종업원이 다리미에 데어 지난 두 주일 동안 그 세탁소에서 엔진에 석탄 피우는 일을 하고 있었거든." "그럼 당신은...." "페어리아에서 왔다는 내 손님과 당신의 핑크니 장군은 똑같은 예술적인 창작이야. 하긴 이건 그림도 음악도 아니지만 말이야."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 대고 씩 웃었다. 잠시후 조가 말했다. "누구든지 자기 예술을 사랑하게 되면 어떠한 희생이라도...." 그러자 델리아는 손가락으로 조의 입술을 막으며 말했다. "아니예요. 다만 누구나 사랑하고 있을 때에만 그런 거예요." O. 헨리(1862-1910) 미국의 소설가 본명은 윌리엄 시드니 포터이다.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 모를 여의고 힘들게 생활했다. 은행에 근무하던 중 공금횡령 혐의로 3년간 감옥생활을 하면 서 많은 단편을 썼으며, 감옥에서 나온 후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다채롭고 인간미 넘치는 수백 편의 작품을 썼는데, 마지막 잎새, 20년후, 크리스마스 선물 등이 그 대 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