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쓰레기통에도 있다 지은이:알베르 까뮈 외 엮은이:원희석 차례 책을 엮으며 1부 이방인, 또는 한 사람의 행복한 남자-알베르 까뮈 인생은 살 만한 것이다-카네기 데일 행복, 그 가뭇한 향기-헤르만 헤세 행복의 정복-버트랜드 러셀 2부 자신이 바다라고 주장하는 파도가 있다면 그는 미친 것이다-라즈니쉬 행복에 대한 단장-알랭 아직도 행복은 가능한가-톨스토이 더 이상 장난할 시간이 없다-휴 프레이더 3부 행복이라는 말은 조심성 없는 표현이다-쇼펜하우어 순간적인 행복, 지복의 한 조각으로 충분하다-마르쿠제 이것이 행복이다-칼 힐티 책을 엮으며 행복은 내 안에 있는 지혜의 또다른 이름 행복이 너무 멀다. 아니, 어떻게 생겼었더라 싶을 정도로 행복이란 말이 새삼 낯설다. 전쟁과 테러, 살인과 폭력, 온갖 부정과 부패라는 어둡고 끔찍한 기사로 짓눌린 신문 한 장이 데려오는 아침, 그렇게 시작되는 일상에 달라붙어서 적당히 타협하고 거절하고 또 눈감았던 이야기들 속에 묻혀 버린 것일까? 교과서 식으로 얘기하자면 '모든 사람은 누구나 한결같이 행복을 추구하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은 도대체 왜 그렇게 혼란스러운 모양새로 흔들리고 있는 것일까? 이 세상 속에 행복이 아직도 가능한 것일까? 그러나 행복은 있다. 그 가능성의 여부에 상관없이 현존하는 진실한 행복이 내 마음 안에 이미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행복에 대해 그리 관대한 편이 아닌 세상에게 그래도 의연한 목소리로 할 말이 있다면 내 안의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 빛으로 채색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시인이라고 해서 불행을 이기는 뾰족한 수를 알고 있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곧잘 자신들의 불행에 관한 고민을 내게 털어 놓곤 한다. 어떤 원인으로 행복하지 않던 간에 그 사람들의 마지막 레파토리는 항상 똑같은 말로 끝이 난다. 왜 나는 남보다 불행한 것인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주제넘은 위로의 말이랍시고 건넸던 내 이야기가 그들에게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됐을지 모르겠으나, 행복에 관한 그들의 오류에 대해서는 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저마다의 고단한 삶에 지쳐 자기 안에 있는 행복에게 눈 한번 주지 않은 채 왜 불행하기만 한 거냐고 토로하는 나의 지친 이웃들에게 조금 더 자기 안으로 들어가 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어줍잖은 나의 시편들 역시 그런 무늬이기를 꿈꾸는 내가 시를 쓰는 마음으로 세계의 지성들이 쓴 행복론을 모아 엮은 것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조금 더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행복에 관한 이야기는 많다. 그러나 자기 안에 있는 행복을 지혜라는 또다른 이름으로 새로이 명명하고, 그 지혜 안에 절망까지 온전히 싸안아 세상을 슬기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행복 이야기는 흔치 않다. 여기에 내가 수록한 열한 편의 행복론은 그동안 내가 틈틈이 읽어 온 행복론들 중에 바로 그러한 목소리로 나를 적지 않게 감동시켰던 것들이며, 항상 만족하고자 하는 내 삶에 묻어 있는 값진 교훈들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든 인생은 단 한 번뿐인 소중한 기회이며 그 안에서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해 애쓰는 것은 결코 욕심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이 한 권의 책이 그 밉지 않은 각자의 욕심에 좀 더 충실해지기 위한 하나의 작은 지침서로 읽힐 수 있다면 이 책을 엮은이로서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험난한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아내야 할 우리의 건강한 삶과 용기에 곡진한 마음의 박수를 전한다. 1995년 6월 원희석 제 1 부 알베르 까뮈 이방인, 또는 한 사람의 행복한 남자 카네기 데일 인생은 살 만한 것이다 헤르만 헤세 행복, 그 가뭇한 향기 버트랜드 러셀 행복의 정복 이방인, 또는 한 사람의 행복한 남자 알베르 까뮈 프랑스 소설가이자 평론가. 알제리 대학에서 쟝 그르니에를 시상적 스승으로 만나 실존주의 철학과 문학에 심취. 1957년 노벨문학상 수상. 대표작 "이방인" "시지프스 신화" 등이 있음. 아침 열 시였다. 빠트리스 뫼르소는 규칙적인 걸음걸이로 자그르가 살고 있는 별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이 시각이면 간호사도 시장에 나가고 별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계절은 햇빛이 눈부신 4월이었고, 지금은 차갑고 아름다운 봄날 아침이었다. 그는 별장 출입문 앞에 멈춰 서서 장갑을 꺼내 끼었다. 그리고 자그르가 열쇠를 잠그지 않은 채 놓아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서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문을 노크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자그르는 어김없이 그곳에 있었다. 그는 안락의자에 등을 기댄 채 잘려진 두 다리 위에 무릎 덮개를 덮고 앉아 있었다. 그는 책을 읽고 있었다. 자그르는 조금도 놀란 빛이 없는 둥근 눈으로 다시 닫혀진 문 옆에, 이제 막 들어선 뫼르소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뫼르소는 벽난로 반대쪽에 있는 장롱 근처로 다가가서 불구자를 아랑곳하지 않고, 테이블 위에 가방을 올려놓았다. 그는 자신의 다리가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몸을 굽혀 장롱 문을 열었다. 흰색 천 위에 놓여 있는 권총은 마치 잘 가꾸어 손질한 고양이처럼 모든 곡선이 번쩍이고 있었다. 그 권총은 전과 다름없이 자그르의 유서 위에 놓여 있었다. 뫼르소는 왼손으로 그 유서를, 오른손으로 권총을 꺼내 쥐었다. 잠시 주춤하다 그는 권총을 왼팔 옆구리에 끼고는 유서를 읽었다. "제가 죽어 없어지는 것은 남아 있는 반쪽뿐입니다. 따라서 부디 저를 비난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저의 작은 금고에는 지금까지 저를 보살펴 준 사람들에게 지불하는 데 필요한 액수보다 훨씬 많은 돈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지불하고 남은 돈은 사형수들의 처우개선에 도움이 되도록 쓰여졌으면 합니다. 그러나 제가 너무 많은 요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뫼르소는 무표정한 태도로 유서를 다시 접었다. 뫼르소는 몸을 굽혀 금고 열쇠를 돌리고, 신문지로 싼 꾸러미 한 모퉁이로 가장자리만 보이는 몇 다발의 돈뭉치를 꺼냈다. 그리고 권총을 옆구리에 낀 채, 한 손으로 차곡차곡 들고 온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권총을 빼들며 불구자 앞으로 다가갔다. 자그르는 그때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자그르는 몸을 꼼짝도 않은 채, 이 4월 아침의 비인간적인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오른쪽 관자놀이를 겨냥하고 있는 총구를 직감하고 있으면서도, 눈길을 그리로 돌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지켜보던 빠트리스는 그의 눈에 눈물이 흠뻑 고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은 것은 자그르가 아닌 빠트리스 뫼르소였다. 그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방아쇠를 당겼다. 광장에 다다르자 그는 갑자기 한기를 느꼈고, 얇은 웃옷 밑으로 떨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그는 두 번 재채기를 했다. 그러자 골짜기는 비웃는 듯한 또렷한 메아리로 가득 차고, 수정같이 맑은 하늘은 그 메아리를 점점 더 높은 곳으로 띄워 보냈다. 파란 하늘에서는 수없이 많은 창백한 미소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인간이 유일하게 해야 할 일이란 살아야 하는 것이요, 행복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뫼르소가 처음 자그르를 만났을 때, 그는 몹시 조급해 하는 태도였다. 그러나 자그르는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연인이 당사자인 그 여자 앞에서 함께 만난다는 것으로 상상력에 미치는 거북살스러운 기분을 누그러뜨리려고 애를 썼다. 그러므로 그는 마르뜨를 '양갓집 아가씨'처럼 다루면서 크게 웃어 보임으로써 뫼르소에게 동류의식을 심어주려고 노력했다. 뫼르소는 계속 반발심을 느끼고 있었다. 마르뜨와 단 둘이 앉아 있을 기회가 오자마자 그는 노골적으로 그녀에게 실토했다. "나는 반편 같은 인간을 좋아하지 않아. 난 그 사람이 거북스러워. 기분 잡친단 말야. 게다가 허세까지 부리는 병신은 더욱 싫어." "오오, 이봐요. 들으면 어떻게 하려고..."라고 무슨 소린지도 다 알아듣지 못한 마르뜨가 말했다. 그러나 그후 자그르의 집에서 그를 처음 불쾌하게 했던 그 쾌활한 웃음소리가, 점점 뫼르소의 관심을 끌고 자그르에 대한 흥미를 느끼게 했다. 그래서 뫼르소의 내심에 품고 있던 숨기기 힘든 질투심도 자그르를 만나는 동안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가 자그르와 사귀기 시작할 시절의 이야기를 아주 순진한 마음으로 들려주는 마르뜨에게 그는 이렇게 충고했다.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마. 나는 이제 더 이상 두 다리 없는 그런 사람에게 질투심 같은 것을 느낄 수 없어. 설사 내가 두 사람의 관계를 상상하는 일이 있다 해도 그 사람은 너에게 달라붙은 커다란 벌레처럼 보일 뿐이야. 이제 알겠지? 그런 일은 배꼽을 쥐고 웃을 일밖에 되지 않아. 공연스레 열내는 일 없도록 해." 그 후 그는 혼자서 자그르의 집에 또 찾아갔다. 자그르는 수다스럽게 큰 소리고 지껄이고, 웃고, 그리고 침묵을 지키곤 했다. 뫼르소는 자그르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었다. 이 불구자에게서 받은 강렬한 인상은, 그가 말하기 전에 깊이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 나머지 것들은 억제된 정열, 그리고 이 우스꽝스러운 몸뚱이의 주인공에게 불어넣어 주는 강한 생명력이 뫼르소의 관심을 끌었고, 그의 내면세계에 무엇인가를 탄생시키기에 충분했다. 만일 그에게 좀더 허심탄회하게 대했더라면 그 무엇인가를 그는 우정이라고 단정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일요일의 오후, 유난히 말도 많이 하고 농담도 많이 지껄이고 나서 롤랑 자그르는 하얀 무릎 덮개를 걷어치운 채 벽난로가에서 커다란 안락의자에 앉아 침묵에 잠겨 있었다. 날씨는 우중충했고, 길 저쪽에서는 우유 배달차가 덜커덩거리며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비가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창문을 두드렸다. 벽난로가에 앉아 도자기처럼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는 사내, 그리고 방 안에 흐르는 고요함, 이 모든 것이 어떤 과거의 모습을 일깨워 주고 있었으며 그 과거의 침울하고 쓸쓸한 우울감은 마치 조금 전 빗물에 신발이 젖어 물이 스며들고 얇은 옷을 적셔 무릎이 시리는 것처럼, 뫼르소의 가슴 속을 파고들었다. 그의 바지 주름은 비에 젖어 이미 없어졌고, 그와 동시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자기에게 어울리는 세상 속에서 한결같이 이리저리 지니고 다니는 그 정열과 자신감도 한꺼번에 사라지고 말았다. "당신은 몹시 피곤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하고 자그르가 말했다. 뫼르소는 수치심 같은 것을 느끼며 다면, "네, 조금 심심하군요"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일어서서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면서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나는 결혼도 하고 싶고, 자살도 하고 싶고, 또 "일류스트라씨옹"(역주;당시의 유명한 삽화가 있는 잡지)지의 구독 예약도 하고 싶어요. 이런 것은 절망적인 몸부림이겠지요." 자그르는 미소를 지었다. "뫼르소, 당신은 가난하군요. 그것이 당신이 심심하게 지내는 원인의 절반이겠지요. 나머지 반은, 당신은 싫지만 자기의 가난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기인하고 있어요." 뫼르소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이란 육체의 욕구와 정신적 욕망 사이에서 그가 발휘할 수 있는 수단을 알고 있으며, 그 형편에 따라 언제든지 판단하는 법이지요. 당신은 지금 자기가 자신을 판단하는 중이요. 그것도 지독하게 말이요. 뫼르소, 당신은 서툴게 살고 있어요. 아주 거칠게." 이 계절에는 아직 철이른 파리 한 마리가 유리창에 부딪쳐 날개를 떨고 있었다. 자그르는 머뭇거리다가 다시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진지하게 말하는 게 싫어요. 그땐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꼭 하나밖에 없거든요. 즉, 자기의 인생을 정당화시켜야 할지 모르게 되어 버리지요." "저 역시 할 수 없습니다." 하고 뒤돌아보지도 않고 뫼르소가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자그르의 시원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고맙소. 당신은 아무런 환상도 나에게 남겨주지 않을 것 같소." 그는 어조를 바꾸었다. "그러나 당신이 냉혹하게 되는 것은 옳은 일이요. 하지만 당신에게 해 둘 말이 하나 있소." 그리고 자그르는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날 봐요. 나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용변을 보지요. 그리고 나서 사람들이 나를 씻겨주고 닦아줘야 하고. 나는 그 대가로 돈을 지불해 주고 있어요. 다행한 일은, 내가 이제 그만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생명을 단축하기 위한 짓을 나는 결코 할 수 없겠지. 지금보다 더 큰 불행이 닥쳐와도... 즉 내 눈이 멀거나 벙어리가 되어도, 아무튼 어떻게 돼도 상관없이 무엇이든 감수할 것이오. 만일 그 덕분으로 살아 있는 나 자신이 그 타오르고 있는 듯한 불꽃을 내 몸 속에서 느낄 수만 있다면, 나는 아직 불태울 수 있도록 해준 생명에 대해서 감사드릴 수 밖에 없다오." 자그르는 숨이 가빠서 몸을 뒤로 젖혔다. "그런데 뫼르소, 당신같이 신체가 건강한 사람이면, 당신은 산다는 것과 행복을 추구하는 일을 유일한 의무로 알아야 할 겁니다." "웃기지 마시오. 여덟 시간이나 사무실에 얽매어 일하고 있는데. 아, 내가 자유로운 몸이라면!" 하고 뫼르소는 말했다. 뫼르소는 이렇게 말하며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전에도 때때로 그랬듯이 희망이 되살아났고, 그러면서도 오늘 그 희망은 자기가 어떤 도움을 받고 있다고 느껴지는 것으로써 이전보다 더욱 강렬한 희망에 설레었다. 드디어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그 어떤 감정이 그에게서 우러나오고 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모든 것이 내 앞에 활짝 열려 있었어요. 사람들은 나의 생활이나 나의 미래에 관해서 말해 주고 있었어요. 저는 그저 네, 네, 했지요. 물론 그들이 말한 대로 착실히 해나갔지요. 그러나 웬걸. 이젠 모든 희망이 어설프게 되어 버렸지요. 나 자신의 개성을 죽이도록 노력하는 일, 그것만이 나의 관심사가 되고 있습니다. 역으로 행복해지려 하지 않고 그 반대를 추구하게 된 거죠. 설명이 잘 안 된 것 같습니다만, 이해하시겠지요? 자그르씨." "이해하고 말고요." 하고 상대가 말했다. "아직까지도, 만일 내게 시간이 있다 해도... 나는 될 대로 되라고 내버려 두겠어요. 만일 그 이상 내 신상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 해도, 그것은 모두 저 작은 조약돌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같은 것이겠지요. 빗물은 돌을 씻겨줄 것이고,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이미 아주 훌륭한 일입니다. 언젠가 또다시 조약돌은 뙤약볕에 불타게 되겠지요. 나는 언제나 행복은 마치 이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불구자는 흥미있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하나의 육체는 언제나 그것에 합당한 이상을 가지게 마련이요. 말하자면 그 조약돌의 이상이라고 하는 것을 유지해 가려면 신에 가까운 육체가 필요한 것이지요. 당신은 행운아요. 자기 육체의 한계를 아는 것, 그건 진정한 심리학자이지요. 한편으로 보면 그와 같은 일들은 중대한 것이 아니지요. 우리들은 우리 자신이 인간답게 살 시간을 못 가졌어요. 우리들에겐 다만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간밖에 없어요. 그러나 당신의 그 개성을 잃어버린다는 생각을 나에게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없을까요?" "양해해 주십시오, 자그르씨. 저는 꽤 오래 전부터 어떤 종류의 일에 대해선 말할 수 없게 되어 있어요. 내 인생과 그것이 품는 남모르는 색깔의 배합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 자신도 마음속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합니다. 마치 지금 이 하늘처럼. 그것은 동시에 비도 되고 태양이 되기도 하여 정오이면서 한밤중 같은 것이지요. 아하, 자그르씨! 나는 동시에 그 모든 것이라는 느낌입니다. 당신도 그것이 나라고 분간 할 수 없는 순간이 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극단적인 불행과 한계가 없는 행복에 사는 나에게 무어라 할지 모르겠군요." "그럼 당신은 동시에 여러 개의 무대에서 연극을 하고 있는 격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서툰 솜씨는 아니지요." 하며 뫼르소는 흥분조로 말했다. "나는 생계를 꾸려가야 합니다. 나의 직업이, 남들에게 참고 견디어 주는 그 여덟 시간이 나를 그르치고 있어요. 나는 내가 어느 정도의 생활까지 다다르게 될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인생을 경험으로 허비할 수는 없습니다. 저 자신이 제 인생의 경험이 될 겁니다. 이제는 행동한다는 것이나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괴로운 것은 바로 살아간다는 것이며, 또한 사람들이 투철해야 하고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정도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 겁니다." "그렇군요. 그러나 당신은 일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을 거요."라고 자그르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반항하는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게 나쁜 점이지요." 자그르는 침묵을 지켰다. 비는 서서히 그치고 있었다.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자그르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많은 고통을 받아들이고 있네요." 그리고 뫼르소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놀라서 말을 뚝 끊었다. 뫼르소는 어둠 속에서 격한 어조로 말했다. "비록 사랑을 받고 있다 해도, 그것으로 나를 속박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확인한 걸요. 당신도 언젠가는 홀로 있게 될 거요. 그것이 전부요. 자, 앉아서 내 얘길 들어요. 당신 이야기에 내가 충격을 받았어요. 그것은 인간으로의 내 경험이 지금까지 나에게 가르쳐 준 모든 것을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이요. 당신의 육체 때문일지도 모르겠죠. 당신의 육체야말로 당신에게 그와 같은 모든 것을 가르쳐 준 겁니다. 오늘 나는 당신에게 마음을 툭 터놓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구려." 뫼르소는 천천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넓은 하늘을 마주 보며, 자그르의 기이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확실한 것은" 하며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돈이 없으면 누구든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전부입니다. 나는 사물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내가 한 가지 느낀 것은, 어느 엘리트 중에는 행복해지는데 돈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스노비즘(속물근성)이 있어요. 그것은 바보스러우며, 원시적이고 그리고 어느 정도 비겁하기까지 해요, 뫼르소? 잘 태어난 사람에게는 행복하게 된다는 것이 복잡한 게 아녜요. 모두 자기의 운명을 찾아 나서면 되는 것이지요. 그것만은 가짜 위인들처럼 체념하려는 의도가 아닌, 행복해지기 위한 의지만 있으면 얻어지는 거죠. 다만, 행복하려면 시간이 필요해요. 많은 시간이죠. 행복은 또한 길고 오랜 인내에서 오는 겁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인생을 허비하고 있어요. 실은 돈으로 시간을 사야 하는데 말예요. 바로 그 문제가 내가 지금껏 관심을 기울인 단 하나의 문제였지요. 이것은 정확하고, 명백한 사실입니다." 자그르는 거기서 말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뫼르소는 집요하게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동안 길거리와 들판에서 나는 소리가 좀더 분명하게 들려왔다. 자그르는 서둘지 않고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잘 알고 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에 대해선 아무런 분별력이 없다는 것을. 그러나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돈을 가졌다는 것은 시간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확신하고 있어요. 시간은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살 수 있어요. 부자거나 부자가 되는 것은,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을 만할 때 시간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빠뜨리스를 바라보았다. "뫼르소, 나는 스물 다섯 살 때 행복에 대한 감각과 행복을 향한 의지, 행복하게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있는 어떠한 사람도 부자가 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이미 이해하고 있었어요. 행복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 속에서도 가장 고귀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어요. 내가 생각하는 바로는 모든 것은 그와 같은 필요에 따라 정당화된다고 봅니다. 다만 거기에 순수한 마음이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러면서 자그르는 벽난로와 접해 있는 조그만 장롱을 열고, 열쇠가 달린 커다란 갈색 강철 금고를 가리켰다. 금고 위에는 하얀 편지와 검은색의 큰 권총이 놓여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는 뫼르소에게, 자그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자기의 육체를 앗아간 그 비극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날이면, 그는 자기 앞에 그 편지를 꺼내 놓곤 하는데, 그 편지에는 날짜는 없고 죽고 싶다는 그의 심정이 담겨져 있었다. 자그르는 책상 위에 권총을 꺼내 놓고, 손에 쥐어 보고, 총구를 이마에 갖다 대고는 관자놀이에서 빙글빙글 돌리기도 하고, 또 차가운 총신으로 뺨의 열기를 식혀 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방아쇠 고리를 손가락으로 건드려 보기도 하고, 안전장치를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편지에 날짜를 쓰고 방아쇠를 잡아당기기만 하면 된다고 느끼는 것으로, 또한 죽음이 어처구니없이 쉽다는 것을 인정하는 활기찬 그의 상상력은 그에게 있어서 생명의 부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공포감 속에서 또렷하게 되살리고 있었다. "분명 나는 인생을 실패했어요. 하지만 나는 정당했어요. 행복을 위하여 모든 것을 아끼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것은, 어리석음과 폭력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항하는 길이었지요. 뫼르소, 우리 문명의 모든 비열함과 잔혹함은 행복한 백성에겐 역사가 없다고 하는 그 어리석은 원리에 측정되는 것이죠." 불구자는 긴 이야기에 지쳐, 남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그것을 확신하고 싶은 거요. 나는 돈이 행복을 만들어 낸다는 식으로 말하고 싶지 않아요. 다만 나는, 어떤 계층에게 있어서는 행복하게 되는 것은 '시간을 가졌다는 조건'으로 가능한 일이고, 돈을 가졌다는 것은 그 사람을 돈에서 해방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비극적으로나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다만 행복뿐이오. 그걸 잊지 말아요, 뫼르소. 당신에겐 순수한 마음이 있어요. 그걸 생각해 봐요." 뫼르소는 졸음에 휘말려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밤의 깊은 심장으로부터, 그를 향해 손짓하는 소리와 침묵이 한꺼번에 솟아 올라오고 있었다. 지금까지 졸음에 눈 붙이고 잠자고 있던 세계의 한 끝에서 한 척의 배가 사람들에게 떠나가자고, 그리고 다시 새 출발하라고 오래오래 외쳐 대고 있었다. 그 다음날, 뫼르소는 자그르를 죽였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오후 내내 잠을 잤다. 그는 열이 나서 잠을 깼다. 그리고 저녁에도 여전히 누워서 동네 의사를 불러오게 했는데, 의사는 그에게 감기약을 처방해 주었다. 며칠이 지나자 모든 것이 정리 되었다. 신문에도 났고 조사도 받았다. 모든 것은 자그르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고 있었다. 일주일 후 뫼르소는 베르사유로 가는 배에 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프랑스에서 요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타향에서 사는 고독이란 그에게는 단지 불안이 쌓여 이루어지는 행복이라고 생각되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 속에서 왠지 막연한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누군가 친구라도 있어 두 팔을 크게 벌려 그를 맞이하여 준다면, 눈물이 쏟아지기에 충분했으리라. 그러나 그 눈물은 그가 내던져져서, 사랑 부재의 세계에 접한 경계선까지만 와서는 멈춰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 손과 손가락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어린애 같은 여러 가지 욕망이 그의 마음 속에 솟아올아왔다. 그것이야말로 태양과 여자들로 가득 찬 도시, 녹색 저녁이 오면 모든 상처를 아물게 해주는 도시, 그와 같은 도시를 향한 향수임이 분명했다. 그는 제네바를 거쳐 알제리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사람들이 중대한 결심을 한다든가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도박을 걸기 전에 고독을 필요로 하듯이, 고독과 이국에서 무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생활에 진저리가 난 뫼르소는 자기의 유희를 개시하기 전에, 우정과 실리 속으로 자기를 끄어들여 안정을 맛봐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런데 뫼르소는 비엔나를 떠난 후 단 한번도, 자기 손으로 죽인 자그르를 생각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그는 어린이나 천재, 무고한 사람만이 지니고 있는 망각의 기능을 자신에게서 발견하게 되었다. 죄책감 없이 기쁨에 들떠 있는 그는 이제 자신이 행복하기에 적절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디어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 집은 언덕 맨 꼭대기에 매달리듯 세워져 있어서 항만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빠트리스와 까트린느는 테라스의 햇볕을 받으며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태양의 맛을 핥아 봐" 하며 빠트리스는 한 팔을 내밀어 까트린느에게 권한다. 그녀는 그 팔의 살갗을 핥아 본다. "그럼 내 팔의 햇볕 맛도" 하며 그녀가 팔을 내민다. 그도 핥아 본다. 동네에서는 이 집을 '세 여학생의 집'이라고 부르고, 로즈, 끌레르, 까트린느, 그리고 가르손은 그 집을 '세계를 바라보는 집'이라고 부르고 있다. 여기서는, 세계는 하나의 역할 수행하는 인물이 되어 우리들이 누구에게서보다 기꺼이 충고를 받아들이고, 균형이 사랑을 말살시키지 않는 그런 사람 중의 하나가 되어 있다. 그들은 세계를 증인으로 삼고 있다. "나와 세계는 너희들에게 동의하지 않는다."라며 빠트리스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그렇게 말하곤 했다. 까트린느에게는 벌거벗는다는 것이 편견은 떨쳐 버린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세계 앞에서 난 옷을 벗어 봤어." "알겠어, 여자들이란 원래 자기들의 감각보다는 관념을 더 좋아하게 되러 있으니까." 뫼르소가 경멸조로 말한다. 그러면 까트린느는 펄쩍 뛴다. "이 계집애가 바로 자연아란 말야." 하고 끌레르가 계속 먹어 가며 말한다. 그러고 나서 모두 일광욕을 하러 가서는 아무 말 없이 시간을 보낸다. 인간은 인간의 힘을 약화시켜 버린다. 그러나 세계는 그 힘을 그대로 간직한다. 로즈, 끌레르, 까트린느, 그리고 빠트리스는 그들 집의 창가에서 다양한 영상과 외관 속에 살면서, 자기들 사이를 연결시키고 있는 어떤 형태의 유희에 동의하고 있고 부드러운 애정에 부응하도록 우정 속에서 히히덕거린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과 바다의 너울거리는 춤을 바라보며 자신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자기들 운명의 은밀한 색깔의 배합을 또다시 발견하고, 그들 자신의 가장 내밀하고 깊숙한 것과 결국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루는 바다 위에서 시작되어 언덕 너머에서 저물러 간다. 왜냐하면, 하늘은 바다에서 언덕으로 향하는 하나의 길밖에 열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계는 결코 한 가지 밖에 이야기하지 않는다. 세계는 흥미를 끌게 했다가는 곧 싫증나게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은 반복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정복하고, 그 끈기의 칭찬에 얻어걸리는 기회가 언제나 찾아오게 마련이다. 이와 같이 웃음과 소박한 활동으로 이루어지며 사치한 천으로 짜여진 '세계를 바라보는 집'의 나날은, 별들이 총총이 들어찬 밤하늘을 바라보는 테라스에서 끝나게 된다. 아직 날이 채 밝기 전인 이른 새벽에 뫼르소의 자동차는 헤드라이트를 켜고 해변가를 달리고 있었다. 그는 좀더 속력을 내서 차를 달리게 했고, 새벽도 빨리 지나고 아침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자동차는 길에서 클랙슨을 울리고 또 다른 구릉을 향해, 그리고 언제나 변함없는 바다를 향해 출발하는 것이었다. 그보다 한 달 전에. 뫼르소는 '세계를 바라보는 집'에 자기가 떠날 것을 알려주었다. 그는 우선 여행을 떠났다가 후에 알제시 교외에 정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몇 주일이 지나 그는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이번 여행이 이제부터 다른 생활을 그에게 상징적으로 보여 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알제시에 돌아오자 그는 우선 자기 생활의 외면적인 무대에 뛰어올랐다. 사업은 그럭저럭 잘 되어 갔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체면만 보여주면 그것으로 족했던 것이다. 나태와 비열함이 나머지 일을 맡게 된다. 값싸게 털어놓을 수 있는 두세 마디 말만 주고받으면 자립을 누릴 수 있는 대가를 얻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뫼르소는 류씨엔느의 운명에 걸려들게 되었다. 그가 알제시를 떠나기로 작정했던 날, 그는 그녀에게 함께 살자고 했고, 그가 그녀를 필요로 할 때만 자기 집에 와서 동거하자고 제의했다. 그녀는 뫼르소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일주일 후 그는 그녀를 아내로 삼아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류씨엔느는 그동안 푸른 바다에 나가 파도를 가르며 노젓기 위해 오렌지색 카누를 샀다. 출발 전날, 그는 '세계를 바라보는 집'에다 떠나는 것을 알리고 호텔에서 혼자 하룻밤을 잤다. 빠트리스는 가방 고리를 잠그고 난 뒤 두 팔로 창문 기둥을 잡고 빠져들 듯이, 구상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떠올리고 있었다. "왜 떠나려고 하는지 알 수 없군요. 이곳 생활이 행복하다면서요" 하고 까트린느가 그에게 말했다. "여기 있으면 나는 여러 사람의 사랑을 받게 될 거야, 까트린느. 그렇게 되면 나는 행복해질 수 없을 거야." "내가 바라는 것은..." 하고 그녀가 말을 꺼냈으나, 거기서 그치고 그녀는 빠트리스를 바라보았다. "까트린느, 절대로 단념해선 안 되. 너는 자신 속에 많은 것을 간직하고 있어. 그리고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고귀한 것은 행복에 대한 감각이야. 너는 오로지 남자에게만 기대를 걸어선 안 돼. 그것 때문에 많은 여자들이 자신에게 속고 있어. 하지만 너는 너 자신에게 기대를 걸어야 해." "나는 신세 한탄을 하는 게 아니에요, 뫼르소. 지금 중요한 것은 단 한 가지뿐이에요. 몸조심해요." "뫼르소는 그때 자기의 확신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가를 느꼈다. 그의 심정은 이상하게도 메말라 있었다. "너는 지금 그런 말을 해선 안 되는 건데..." 뫼르소는 두 시간도 채 못 되어 슈누아가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그는 기분 내키는 대로 한가하게 살았으며, 고작 그를 도와주는 일꾼들과 만나거나, 카페 주인과 잡담을 나누는 게 전부였다. 누구와도 만나지 않겠다는 이 순간이, 또한 내일이 그에게는 무섭고 갑갑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원했던 것이 아니었는가 하고 자신에게 설득하는 것이었다. 어느날 저녁, 그는 류씨엔느에게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편지를 쓰고 자기가 그처럼 많은 기대를 걸고 있던 그 고독과 관계를 끊었다. 편지를 부치고 나서 그는 남모르는 수치심에 휩싸였다. 그러나 류씨엔느가 도착하게 되었을 땐 그런 수치감도, 곁에 있는 한 사람의 존재와 또한 그 곁에 있는 존재가 가져다주는 안일한 생활을 또다시 맛보는 것으로써, 어떤 바보스럽고 성급한 기쁨에 빠져들면서 그 기쁨에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하여 인간 속으로 도피해 버린 뫼르소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은밀한 공포로부터 벗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겨우 이틀이 못 가서 이번에는 류씨엔느가 싫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런 계기를 만난 듯이, 그녀는 곁에서 함께 살아도 되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때 그들은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으며 뫼르소는 접시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빠트리스는 괴로움과 함께, 이제 막 지나가 버린 며칠이 이처럼 마음속에 역겨움을 남겨주던 일은 이전엔 결코 없었다고 느꼈다. "류씨엔느, 너는 아름다워."라고 뫼르소가 말했다. "나는 그것보다 더 앞을 내다보지는 않아. 나는 너에게 그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있어. 우리 두 사람에게는 그것이면 충분해." 그는 그녀에게도 다가가서 그녀의 목덜미에 손을 얹었다. "내 말을 믿어 주기 바래. 커다란 고민도 없을 뿐더러 대단한 원한도 없어. 위대한 생각이란 또 뭐란 말이야. 모든 것은 잊혀지고 마는 거야, 위대한 사랑까지도. 따라서 인생에 있어서 슬프고도 우리를 흥분시키는 것은 바로 그런 점 때문이야. 요컨대 어떤 종류의 사물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만 남아. 그래서 때로는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 문제로 제기되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인생에 있어서 위대한 사랑을 겪거나 불행한 정열을 간직한다는 것도 결국 좋은 일이야. 그런 것은 적어도 우리들을 짓누르는 그 이유 없는 절망에 대해 하나의 알리바이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지." 그녀는 갑자기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당신은 행복하지 않네요."라고 했다. "나는 곧 행복해질 거야." 하고 격한 어조로 뫼르소가 말했다. "난 행복해져야 해. 이 밤과 이 바다, 그리고 내 손에 있는 이 목덜미에서." 행복에는 하나의 선택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 선택 내부에는 일치된 명확한 의지가 있는 것이다. 그는 '체념의 의지가 아닌 행복을 위한 의지에 의해서'라는 자그르의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뫼르소는 슈누아로 가는 자동차 안에서, 바다의 활기와 갑자기 나타나는 둔덕을 보며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커다란 침묵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되기를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고 있는 것을 마음 속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그를 부끄럽게 만들었던 정신이 해이했던 나날들에 대해 그는 그런 날들이 위험했었지만 필요한 날들이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파멸할 수 없었는지도 모르고, 그러므로 자신에 대한 유일한 정당성을 저버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어떻든 모든 상황에 적응했어야만 했다. 그는 초인간적인 행복을 꿈꾸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루하루가 그리는 곡선을 넘어서는 영원을 넘보지 않았다. 행복이란 인간적인 것이고, 영원은 일상적인 것이다. 요는 하루하루의 리듬을 우리들의 희망의 곡선에 맞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을 그날 그날의 리듬에 순응하도록 하고 자신을 낮출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예술에 있어서도 정지할 줄 알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한도에 이르러서는 조각에 더 이상 손을 대어서는 안 되는 순간과 시기가 항상 닥쳐오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순간이 되면 지성에 대한 의지가 투시라고 하는 가장 섬세한 수단보다도 예술가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행복 속에서 하나의 삶을 완성하려면 최소한의 지성이 필요하다. 지성이 없는 사람은 노력에 의해 그것을 획득해야 하는 것이다. 1월에는 편도나무꽃이 피고 3월에는 배, 복숭아, 사과나무들이 꽃으로 뒤덮인다. 6월이면 풍성한 수확과 더불어 햇복숭아가 과일가게에 진열되기 시작한다. 세찬 비바람이 9월에서 11월까지 대지를 씻어낸다. 연말이 되자 땅 위에서는 이미 보리가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그 무렵 뫼르소는 처음으로 병석에 누웠다. 늑막염이 발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달 동안 방에 처박혀 있어야 했다. 그가 병석에서 일어났을 때는 슈누아의 맨 끝 비탈에 꽃이 만발한 나무들이 무성하고, 꽃구름이 바다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자기의 인생이 한없이 멀게 느껴지는 이 시각에 그는 홀로 자기 자신에게도 초연하게 되어 자기가 바라고 있는 것에 드디어 도착한 것 같은, 그리고 또한 지금 그를 가득 채워주고 있는 마음의 평화는 자기 자신을 끈기 있게 방임한 데서 생겨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와 같은 자기 방임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그가 한결같이 추구해 온 것이었으며, 분노하지도 않고 그를 부인하던 이 정성어린 세계의 도움을 받아, 이제 겨우 그것에 도착한 것이었다. 세계에서의 그의 지난날의 여러 발자취, 행복을 향한 그의 욕구, 골수와 두개골이 드러난 자그르의 무서운 상처, '세계를 바라보는 집'의 감미롭고 은밀한 시간, 그의 연인, 그의 희망과 신봉하는 신들, 이와 같은 모든 것들이 지금 그의 앞에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뚜렷한 이유도 없이 특별히 선택한 하나의 이야기와도 같이 꾸밈없이 은근한 친근감을 느끼게 해주는 이야기로써, 마음 속 제일 깊숙한 곳을 어루만져 주고 또한 그곳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을 주는, 필경 다른 사람이 쓴 이야기책처럼, 마음에 드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의식하면서도 자신이 낯선 것처럼 느껴지고, 정에 탐닉하면서도 무관심한 채 자신의 삶 자체와 운명이 이미 거기서 막을 내려 앞으로는 그와 같은 행복에 만족하고, 그 무서운 진실을 감당하는 데 자기의 모든 노력을 쏟아야 할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 그가 해야 할 일은 뜨거운 바다 속에 빠져서 자기 자신을 내버리고 새로운 자기를 발견해야 하며, 달과 물 속을 헤엄쳐 자기 속에 남아 있는 과거를 잠재우고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행복의 노래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었다. 그가 무의식 중에도 바라고 있던 것은 혈기와 건강함이 충만 되어 있는 생명을 갖고 죽음과 대결한다는 것이었다. 결코 그는 이미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죽음을 맞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싶었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부엌에 가스불이 아직도 켜져 있다는 생각이 났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다'라고 되뇌이고 있었다. 정신의 각성 또한 오랜 인내였다. 무엇이든지 얻어지고 자기 것으로 할 수 있었다. 그는 주먹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두드렸다. 인간을 결코 강하게 태어나지도 않았고, 약하게 그리고 의지적으로 태어난 것도 아니다. 요는 강해져야 하고 현명해져야 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울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몸이 아픈 데서 오는 불가사의한 무기력이라고 해야 할지, 어쩐지 이상하게 마음이 약해져서 그는 어린애처럼 말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름다움과 행복이 절망으로부터 그 모습을 드러내 주었고, 빠트리스는 거기서 일종의 덧없는 영원을 발견해내고 있었다. 그는 그와 같은 것으로부터 떠나고 싶지 않았고, 또한 그러한 이미지가 그가 죽어 사라진 후에도 계속되길 바라지 않았다. 반항과 연민에 가득 차 창문 쪽을 바라보고 있던 자그르의 얼굴이 머리에 떠올랐다. 세계가 부르는 소리는 분명 죽음에 대한 그의 공포를 완화시키고 있었으며, 동시에 그에게 모든 생존의 이유였던 것에서만 죽음의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하는 확신을 주고 있었다. 그가 눈을 뜨자 한낮이 되었고, 작은 새와 벌레들이 더위 속에서 울고 있었다. 그는 류씨엔느가 바로 이날 오게 되어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밤이 시작되었다. 여러 가지 환상들이 떠올랐다. 몇 마리의 커다란 환상적 동물이 사막과 같은 황폐한 데서 머리를 흔들기도 했다. 뫼르소는 고열 속에서 그와 같은 환상을 조용히 뿌리치고 있었다. 그는 다만 피어린 우정을 가지고 자그르의 모습만은 떠오르는 대로 그냥 놔두었다. 그에게 죽음을 주었던 자신이 이제는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그르가 그때 그러했던 것처럼 자기가 지금 자신의 인생을 향해 명확하게 바라봐야 할 것은 한 사람의 인생, 그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인생의 초기에 그렇듯이 그가 자기 속에 품고 있던 여러 가지 인간상 중에서 도대체 어느 것이 자기였던가 하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인간 속에서 운명이 만들어내는 이와 같은 선택을, 그는 의지와 용기를 가지고 실천하고 있었다. 바로 그 점에서 살아가는 행복과 죽은 행복의 모든 것이 있었다. 그 죽음을 그는 짐승의 공포로 이제까지 바라보고 있었으며, 죽음을 겁낸다는 것은 바로 그 탄생을 두려워한다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죽음의 공포는 인간 속에서 생동하고 있는 것에 대한 끝없는 집착을 정당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들의 삶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경쟁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과 무력함을 두려워하고, 또한 삶을 과시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이 관여하지 않던 삶에 죽음이 가져다 주는 심판 때문에 충분하게 살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죽음은 갈증을 가라앉히려고 애쓰는 여행자에게서 영원히 물을 빼앗아 버리는 손길과도 같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죽음이란 반항을 향해 미소지어 보내는 것과 같이, 감사함에 미소지으며 재워 없애려고 부정하는 숙명적이고도 부드러운 행위였다. 그는 침대 위에 앉아 침대밑 탁자에 팔을 올려놓고, 머리를 파묻고 하루 낮과 밤을 지냈다. 드러누워서는 호흡을 할 수 없었다. 그의 옆에 류씨엔느가 앉아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뫼르소는 가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기가 죽은 뒤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는 첫 남자가 그녀를 흐느적거리게 만드는 것을 상상하고 있었다. 몸과 마음을 그 사나이 가슴에다 파묻고 그녀가 자기에게 바쳤던 그 몸을 바쳐 버리겠지. 그리고 반쯤 열린 그녀의 따뜻한 입술이 주는 열기 열기 속에서 세상은 변함없이 계속되어 가겠지. 병든 고양이와도 같은 그의 시선이 유리창에 가 닿아 있었다. 그는 숨을 쉬고 류씨엔느 쪽으로 돌아앉았다. "괜찮아요?"하고 류씨엔느가 꺼져 가는 소리로 말했다. "그래." 이때 그는 두 팔로 다시 어둠을 향해 몸을 돌려 앉으려 했다. 자기의 힘과 저하의 한계에 다다르자 그는 비로소 내부적으로 자그르와 일체가 되어 갔다. 그는 그처럼 멀게 느끼고 있던 그 남자에게 우정에 찬 격렬한 사랑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남자를 죽이는 것으로써 자기와 그를 영원히 결합시켰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치 삶과 죽음이 뒤섞인 맛과 같이 보였던 눈물이 이제 자기에게서 무겁게 뚝뚝 떨어지는 것은 그들 모두에게 고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오르는 열이 그러한 사실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최후의 순간까지 의식을 차리고 두 눈을 크게 뜬 채 죽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자랑스러운 확신이 이제 그를 도와주고 있었다. 자그르도 역시 그날 두 눈을 뜨고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인생에 있어서 자신의 몫을 누리지 못한 사나이의 최후의 나약함이었다. 그러나 빠트리스는 그런 허약함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았다. 그의 육체의 한계점의 불과 몇 센티미터 앞에서, 언제든지 정지해 버릴 그의 뜨거운 혈기의 맥박 속에서, 그는 아직도 그 나약함이 자기의 것은 아니겠지 하는 생각을 새삼 되새기고 있었다. 왜냐하면, 자기는 자기의 임무를 이행했고 오로지 행복해야 한다는 인간의 유일한 의무룰 이행했고 오로지 행복해야 한다는 인간의 유일한 의무를 완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분명 얼마 남아 있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시간이란 사건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시간은 기껏해야 장애물이 되거나, 아니면 그런 때의 시간은 이미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장애를 타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자신 속에 잉태한 몸 한의 형제가 두살이건 스무 살이 되었건, 이미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행복이란 그가 존재했던 그 자체이기도 했다. 류씨엔느가 일어서서 뫼르소의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려간 모포를 덮어 주었다. 그는 그 손길 아래서 몸을 떨었다. 그가 자그르의 별장 근처 작은 광장에서 재채기를 하던 그날부터 이 시각까지 그의 육체는 그에게 충실히 봉사해 주었고, 그를 세상을 향해 개방시켜 주었다. 그와 동시에 그가 타고난 인생과 다른 고유한 삶을 살아 온 것이다. 의식하고 있는 것은 기만하지 않고, 비겁하지 않고--다만 일대 일로 자기 육신과 마주보고--죽음을 향해 두 눈을 바로 뜨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한 자기 할 일이 문제였다. 사랑도, 배경 장식도,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있는 것은 고독과 행복의 무한한 사막일 뿐, 거기서 뫼르소는 마지막 카드놀이를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 숨이 꺼져 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숨쉬는 동작에 따라 가슴 속 여러 군데서 녹슬어 사그라지는 소리가 났다. 그는 자기 장딴지가 몹시 차가워지고 손이 무감각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밝아오기 시작한 그 아침은 새들과 신선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태양이 성큼성큼 떠올라 대번에 지평선 위로 올라섰다. 한낮이 되어 바람이 잦았다. 하루는 마치 잘 익은 과일처럼 무르익어 있었으며, 급작스럽게 울기 시작한 매미의 합창 속에서 걸쭉한 과즙처럼 흘러내렸다. 뫼르소는 그의 침대에서 이러한 충격을 선물로 받았다. 그리고 그는 바다를 향해 두 눈을 뜨고, 한없이 크고 넓은 곡선을 그리면서 강렬하게 빛나며 신들의 미소로 넘쳐흐르고 있는 바다를 보았다. 그는 갑자기 그가 침대에 앉아 있다는 것과, 류씨엔느의 얼굴이 바로 그의 얼굴 가까이 있다는 것에 마음이 쏠렸다. 마치 자기 속에서 조약돌 같은 덩어리가 복부로부터 올라오듯 천천히 위로 이동하여 목구멍에 걸려 있었다. 그는 호흡이 가능한 순간만을 이용하여 점점 빨리 숨을 쉬고 있었다. 그 덩어리는 여전히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류씨엔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경련하지도 않고 미소지었다. 그 미소 또한 그녀의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침대 위에 털썩 쓰러졌다. 그는 류씨엔느의 부푼 입술을 보며, 그녀의 뒤에 펼쳐진 대지의 미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한결같이 같은 시선, 전과 다름없는 욕망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앞으로 1분, 나머지 1초 하며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올라오던 것이 멈췄다. 그리하여 그는 조약돌 속의 조약돌이 되어 마음은 기쁨에 젖으면서 그 부동의 세계의 진실로 돌아갔다. 인생은 살 만한 것이다 카네기 데일 미국의 교육가. 대학 졸업 이후 세일즈맨을 비롯해 수많은 작업을 전전하다 마침내 변론교사로 성공한 인간관계 전문가. 주요 저서로 아이아코카 비롯해서 코카 콜라, 코닥, 포드 등 미국 내 1천여 대기업에 큰 영향을 준 "인생지침서"가 있음. 마음을 다스려라 우리들은 이 세상의 시작을 커다란 울음으로 대신한다.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서 인생을 출발하는 것이다. 기분 좋게 웃는가 하면, 갑자기 앙앙 울어대는 짓을 되풀이한다. 그리고는 역시 불안정한 시기인 어린이 시절에 돌입한다. 어린이들은 복잡한 경제적, 정서적, 사회적인 상황에 아직 스스로 대처할 수 없기 때문에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다음의 사춘기는 더더욱 불안정하다. 나는 어린아이일까, 어른일까? 섹스란 무엇일까?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누구한테 물어 보면 알 수 있게 될까? 이런 끝없는 의문 속에서 불안정한 삶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성인기에는 수많은 새로운 문제에 부닥침으로써 더욱더 불안정하게 된다. 배우자를 선택하는 결혼 문제에서부터 애를 갖는 일, 성생활에 대한 결정, 직업의 선택, 그리고 직장에서의 문제뿐만 아니라 생명보험이라든가 휴가지를 결정하는 일 등, 책임 있는 성인이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갈등은 무수히 많다. 은퇴 후의 생활에도 역시 문제가 있다. 모든 일에 있어서 게을러지기가 일쑤이고, 죽음의 공포에 떨기도 한다. 우리들은 언제나 우리의 삶이 비극으로 전개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산다. 실직됨으로써 생활에 곤란을 받게 되지는 않을까? 가족 중의 누가 나쁜 상황에 처하지는 않을까? 이와 같은 뜻하지 않은 재난은 모래 속에 머리를 틀어박고 숨어 살지 않는 한, 언제 현실로 일어나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에 대한 이러한 걱정은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일까? 대답은 매우 간단하다. 살아 있는 동안은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생활하고, 더 나은 생활을 추구하면서 부단히 노력하면 된다. 다시 말해 건강한 자아상을 확립해 나가는 것이다. 건강한 자아상은 우리들이 안정감을 갖는 데 크나큰 도움을 준다. 인간은 어느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 그것은 신이 정한 법칙이며, 그것에 대해서는 달리 손을 쓸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죽을 것이 두렵고 짜증나니까 우울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웃으면서 즐겁게 살 것인가? 아마도 거의 누구나 이 물음에 후자의 대답을 택할 것이다. 그런데 즐겁게 사는 것도 여러 가지다. 즐겁게 산다고 해서,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까 되는 대로 죽겠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매사에 최대한 노력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으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이 옳고 바람직한 삶의 태도일까? 경험해 본 사람이면 주구나 후자라고 대답할 것이다. 즐거운 일이라고 해서,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파티를 즐기고, 놀러만 다닌다면 어떨까? 과연 우리는 그렇게 살다 죽을 때 뿌듯한 인생, 즐거운 인생을 살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대답은 물론 "아니다"이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해냈을 때 보람된 성취감을 맛보게 되며, 부차적으로 경제적인 윤택함도 같이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항상 일해야 하며 항상 어려운 일에만 매달리라는 것은 아니다. 푸르른 나무들도 바라보면서, 아름다운 꽃의 향기를 맡고, 맛있는 음식을 즐기기도 하면서 일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더욱 윤택해질 것이다. 개는 인간에게 최고의 벗이라고 흔히 말한다, 나는 이 머저리 같은 격언을 그냥 받아들이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개를 매우 좋아하지만, 개라는 동물은 길을 잘 들려 놓지 않으면 절대로 좋은 벗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가장 좋은 벗은 누구인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을 훌륭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만족을 얻게 되겠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쓸모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당신의 친구인 존이나 톰이나 엘리스나 엘리너는 당신에게 정말 가치 있는 친구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당신을 좋아하고 위기에 빠진 당신을 구출해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당신의 인생을 대신 살아 줄 수는 없다. 어떤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그들은 당신에게 중요한 조언을 해주거나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해결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그 주인공은 당신이며 책임져야 하는 것도 당신인 것이다. 그들은 당신의 기쁨이나 슬픔을 나누어 가질 수는 있겠지만 절대로 당신만큼은 가질 수 없을 것이며, 당신이 직업을 선택하는 데 조언을 해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실패에 대한 책임까지는 져주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최고의 벗인 자신을 잘 가꾸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상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확립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아상이 확고해야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안정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자신을 호감이 가는 바람직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거나 자기 자신의 모습에 만족을 얻을 수 있다면, 당신은 안정감을 갖고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써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문제라든가, 당신의 희망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당신은 자신을 지탱해 낼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은 매일같이 수염을 깎거나, 입술 연지를 바르고, 이를 닦고, 얼굴을 씻으면서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볼 기회가 하루에도 몇 번씩 있을 것이다. 이 때 거울은 깨진 것이든 흐린 것이든, 큰것이든 값싼 것이든 상관이 없다. 당신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기만 하면 된다. 우선 당신의 얼굴을 차분히 보아라. 바쁜 일이 당신 뒤에 산더미같이 쌓여 있다 하더라도, 거울 앞에 잠시 우두커니 서서 당신의 몸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우스운 일이라고 무시하지 말라. 머리를 빗는다든지 손을 씻은 다음, 길게도 말고 딱 3분 동안이면 된다. 당신은 거울 속의 당신을 보면서 당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만일 당신이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처음에 당신은 아마도 거울 속에서 당신을 위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웃어른일 수도 있고, 당신을 제치려고 하는 경쟁 상대, 또는 주차 위반 같은 사소한 교통법 위반 때문에 당신에게 죄의식을 느끼게 하는 경찰관의 얼굴일 수도 있다. 그것은 당신이 공포나 불안이나 절망 때문에 자아상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횟수가 늘어갈수록 당신은 거울 속에 나타난 당신의 모습 안에 자리하고 있는 당신의 참모습을 점차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해두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이것은 자기애를 키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그것은 자기 도취 강화에서 지나지 않는 것이고, 그것은 자기를 상처 내게 하는 일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거울 속의 당신을 향해 "나는 완전하고, 다른 사람보다 훌륭하다"고 들려주어서는 안 된다. 그런 행동은 당신 자신을 삐뚤어지게 만들어, 남으로부터 비웃음을 살 뿐이다. 이 경면주시는 구조수술의 하나로서, 이것저것 정신없는 생활의 흐름 속에서 당신의 육체상을 구출하는 방법이다. 당신은 육체상을 되찾음으로써 당신의 정서상을 소생케 하고, 그것들을 현실적으로 연결시킴으로써 당신 자기의 합성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당신은 창조적 생활을 통해 당신 자신이라든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여 자기 도취와 정반대되는 것에도 빠져서는 안 된다. 즉, 파괴적인 자기 비판에 빠져들어가선 안 된다는 것이다. 당신의 생김새는 당신을 완전히 만족시키지는 못하겠지만, 완전함 같은 것은 기대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경면주시의 목적은 자기 발견, 혹은 자기 재발견이다. 짓누르는 불안과 긴장으로부터 당신을 해방시키고 유아적인 공포를 떨쳐버린 다음, 당신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는 것이다. 당신의 얼굴이 비록 경험 많고 성공한 사람의 얼굴이 아닐지라도, 그렇게 함으로써 성공으로 가는 길 위에 첫발을 내디디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거울에 비친 당신의 얼굴 뒤에 있는 인간을 보고, 그의 진면목을 간파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생동감 있는 당신의 상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구 궤도에 쏘아 올려진 우주비행기는 며칠이고 계속해서 지구의 둘레를 돌고 있다. 그런 것처럼, 당신의 생활 궤도는 자아상의 인력에 묶여 있다. 그래서 당신이 새로운 사람들과 접하게 된다든지 새로운 상황 속에 빠져 위험해졌다 하더라도, 당신의 자아상이 강력하다면 그곳은 당신의 집같이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자아상이 빈약한 것이라면, 당신은 사람들의 의견에 그저 순응만 하게 됨으로써 맥없이 물러서게 될 것이다. 당신은 하나의 우주이다. 그리고 당신의 마음은 '내우주'이다. 이 내우주를 탐험하고 파악해야 하는 것은 당연히 당신의 임무이다. 그것은 당신 자신을 현실적이고 육체적이며 정서적으로 응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이제까지 실생활에서 가졌던 성공의 체험을 꺼내어, 그것이 당신 몸과 마음의 일부가 될 때까지 수없이 되풀이하여 회상하는 일이다. 매일 당신의 몸을 바라보고,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당신의 자아상을 강화시킴으로써, 향상 마음속의 '내우주'를 강화하는 데 힘써야 한다. 당신은 10부터 0까지 거꾸로 센 다음, 당신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이렇게 물어보라. " o o o씨, 오늘은 기분이 어떻습니까?" 당신은 과거로 되돌아가면 안 된다. 특히 당신의 과거의 실수라든가 실패를 자꾸 떠올리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그런 과거는 가차없이 잘라서 시간의 궤도에 던져 버리도록 하라.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당신은 자신에게 이렇게 타일러라. "전진하자. 소극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질질 끌려다니는 바보짓은 안 할 것이다." 이렇게 매일 거울 앞에서 몇 분 동안 자기 자신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계속한다면, 당신은 풍요로운 생활을 가꾸는 데 필요한 자아상을 키워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신념을 가져라 여러분에게 묻는다 "우리나라는 온갖 기회가 넘쳐 흐르는 나라인가? 이 나라에서는 누구든 능력과 지구력만 가지고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가?" 그러면 여러분은 입을 모아 "물론" 하고 대답할 것이다. 글로 쓴다면 끝에다 "!"표를 붙이지 않으면 안 될 만큼 큰소리로 말이다. 그러나 당신이 실직중인데다가 돈도 한 푼 없고, 새로운 일자리를 얻을 희망 또한 전혀 없는 처지에 있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그래도 당신은 그런 씩씩한 신념을 바꾸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 신념에 의해서 행동할 수 있겠는가? 다음 이야기는 그런 사람에 관한 것이다. 미국 미주리 주의 인디펜던스에 사는 레로나드 A. 트렌처드는 1928년에 돌아가신 부친으로부터 10만 달러 상당의 유산을 상속 받았다. 그런데 겨우 1년이 지난 뒤, 그는 한 푼도 없는 파산 상태에 처하고 말았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을까? "제 아버지는 부자셨습니다. 그리고 인자하셨죠. 아버지는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아버지 수표를 사용하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벌써 그때부터 언제든지 돈이 필요할 때마다 아버지의 거래은행 구좌 수표에 서명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고, 일리노이 주립대학에 다닐 즈음에는 말할 것도 없었죠. 저는 돈이라는 것의 가치는 물론이고, 제 손으로 어떻게 벌어야 하는 지도 알지 못한 채 어물어물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제가 알고 있었던 것은 아버지 은행 구좌의 수표에 서명하는 것뿐이었죠. 그런데 아버지는 미주리 주의 렉싱턴 부근에 있는 제법 넓은 토지를 저에게 남겨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땅에 농사를 지으며 살기로 했습니다." 그는 서툴게나마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때 무서운 불경기가 전국을 휩쓸었다. 그래서 그는 큰 적자를 보았다. 갈수록 빚이 늘어만 갔다. 그는 토지의 일부를 저당 잡혀 밀린 빚을 갚고 수표 구좌의 예금을 보충했다. 그러나 농사일은 갈수록 실패만 거듭했고, 그는 저당 잡힌 토지를 아주 헐값에 팔아 넘겼다. 그 돈은 밀린 빚을 겨우 갚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일은 그 뒤로도 되풀이됐다. 돈이 필요해질 때마다 그는 이것저것을 저당 잡히든가 팔아 치워서 급한 불을 껐다. 그렇게 그는 아버지가 남겨 준 유산으로 살았다. 드디어 최후 심판의 날이 찾아왔다. 그에게는 이제 돈도, 팔아 치울 토지도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생명을 유지하려면, 일자리를 얻으러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그건 그가 그때까지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잡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수표에 서명하는 습관'이라는, 지금껏 그가 의지하고 있던 낡은 지팡이가 뚝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때 그는 자신이 처한 곤경에 대해서, 그리고 그때까지 자기가 어떤 신념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던가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평소에 미국에 대해서 이렇게 입버릇처럼 말해 왔던 것이다. "성공을 목표로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미국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기회가 주어진 나라다," 그런 신념으로 그는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불경기가 계속되고 있어서 일자리는 쉽사리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몇 가지 유리한 점이 있었다. 그는 건강하며, 대학 교육을 받았고, 실무 훈련도 몇 가지 받았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에게는 그때까지의 실패에서 얻은 경험과 지식을 몸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을 가엾게 여기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즉시 행동에 옮기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활과 사물에 대하여 생각하는 방법을 완전히 새로 정리하여 고쳤다. 그는 어떤 일이든 해낼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자리를 찾아내는 일은 무척 어려워서 그는 깊은 실망에 빠져들곤 했다. 그러나 실망이 그를 무너뜨리려고 할 때마다 그는 마음 속에서 피어오르는 의구심과 공포를 굳은 신념으로써 극복하려고 애썼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에게 길이 열린다'는 신념! 적당히 단념해 버리고 싶은 그를 다져 준 것은 바로 그 신념이었다. 결국 그의 신념이 옳았다는 게 증명되었다. 그는 캔자스시티의 유니언 금융회사에 취직할 수가 있었다. 거기서 그는 4년 동안 아주 유쾌하게 일했다. 그후, 그는 사직하고 첫사랑의 상대에 다시 대들기로 했다. 그것은 땅과 농사일이었다. 그는 새로운 각오를 다지고 농사일에 달라붙었다. 이번에는 모든 일이 잘 되어 갔다. 그는 서서히 신용이 늘어감에 따라 사업을 확장하기로 하고 농장을 좋은 값으로 팔아 넘겼다. 그리고 다른 일에도 손을 뻗쳐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다. 빚을 다 갚고 잃었던 재산도 다시 찾았다.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일들이 벌어졌죠. 저는 확실히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제 노력은 헛되지 않았고, 이제는 그동안의 실패와 성공을 통해 얻은 교훈 덕분에 다시는 실패하지 않을 능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의 노력으로 돈을 되찾았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 고통의 세월을 통해서 두 아들 녀석들에게 물려줄 더욱 귀중한 것, 말하자면 어떤 커다란 진리를 배운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신념을 갖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트렌처드 씨의 이야기는 무책임하고 응석받이로 자라난 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 주는 아주 좋은 예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자각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신념을 행동으로 옮길 수만 있다면 우리는 정신적으로 놀랄 만한 성장을 이룩할 수가 있는 것이다. "365일을 어떻게 살 것인가"의 저자 존 A. 신드라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은 뭐든지 스스로 배워서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어떤 것에 대해 신념을 갖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인간적인 성숙을 꾀하기에 부족하다. 용기를 신념으로 삼고 있는 것이 겁장이보다는 낫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막상 어떤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꽁지를 빼고 달아나 버렸다면 그까짓 신념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신념이라는 것은 그 위에 자신의 생활과 행동을 쌓아 올리지 않으면 아무런 값어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는 자기 신념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곤 한다. 언젠가 어떤 부인이 내게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었다. 어떤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셈을 치렀는데, 점원으로부터 거스름돈 50센트를 더 받은 적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웃고 있었다. 그래서 돌려주었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불쾌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돌려주긴 왜 돌려줘요? 그 쪽에서 잘못한 거지, 내가 더 달라고 한 건 아니잖아요? 자기 멋대로 틀렸으니까, 그건 틀린 사람 책임이죠. 계산이 그렇게 되었기에 망정이지, 잘못했더라면 내가 손해볼 수도 있었던 일이잖아요?" 아마도 더 이상 추궁을 했더라면 그녀는 몹시 화를 내든가 창피를 느꼈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런 결과를 즐기고 있는 듯했다. 그것은 아주 미인인 데다가 선한 용모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부정직하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내가 아는 어떤 회사에서는 경리사원 선발시 면접을 할 때 심리학자를 참석시킨다. 성격과 성실도를 시험하려는 것인데, 심리학자는 선발 대상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다. "당신을 영화광이라고 칩시다. 그래서 극장에 갔는데, 표를 구입하지 않고도 공짜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럴 때,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물론 이런 질문에는 맹점이 있다. 거의 누구나 그런 기회에 부닥치면 움켜잡게 되는 것이 상식인데, 그런 질문에 어느 누가 "잡겠다"라고 대답하겠는가? 그러나 어쨌든 이 질문에는, 작은 일에서 부정직한 사람은 벌을 안 받을 수도 있다는 승산만 서면 틀림없이 큰일에서도 부정을 저지를 것이라는 확신이 담겨 있다. 신념은 그 사람의 행동을 통해 명확히 나타난다. 예수는 "그 열매로 나무를 알 수 있느니라" 하셨다. 그렇다. 중요한 것은 행위이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이는 사상이라 하더라도 그것에 맞춰 살지 않는다면 어떠한 이득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우리의 열매는 시고, 생활은 위선에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일단 강한 신념을 가지고 확고한 신조를 세웠으면 거기에 따라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에 모든 일은 기한이 있고, 이뤄지는 때가 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로울 때가 있다." 아름답고 슬기로움이 넘치는 이 말에 나는 이렇게 덧붙인다. "생각할 때가 있고 행동할 때가 있다." 행동할 때가 오면 절대 망설이지 말라. 주춤거리지 말고, 핑계를 대지 말라. 허리띠를 졸라매고 단숨에 전진해야 하는 것이다. 언젠가 나는 미국 서부 쪽으로 강연을 간 적이 있다. 그때 샌디에이고에서 샌프란시스코 행 비행기를 탔을 때였다. 나는 86세의 노부인과 나란히 앉게 되었고, 그녀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녀는 영국 태생인데, 얘기 그ㅌ에 그녀가 캘리포니아의 패서디나 부근에 영국계 노인들을 위하여 "노인의 집"을 마련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녀는 86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명예회장으로서 매일 "노인의 집"을 방문하여 봉사한다고 했다. "나는 하루하루가 너무 바빠." "연세가 많으신데, 힘든 적은 없으십니까?" "나이 같은 것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아요. 나는 나 스스로 즐기고 있는 거지. 그저 마음을 쓴다면, 매일매일을 굉장히 좋은 날로 만들려고 하는 것뿐이라우." "그래서 그렇게 젊어 보이시는군요?" "재미있게 살아서 그럴 게야. 나는 하루하루가 여간 재미나는 게 아니거든."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빛은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뒤, 나는 샌이데이고로 돌아가기 위하여 비행기를 탔다. 도중에서 비행기는 샌타바버라에 착륙했는데, 거기에서 10대 초반의 애들 50명 정도가 배행기에 올라탔다. 그들을 인솔하는 어른들이 몇 명 있어서 알아보니, 그들은 가출을 했거나 경미한 범죄를 범한 9세에서 15세까지의 청소년들로서 현재 보호감독하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 중에 한 소년이 내 옆좌석에 앉았다. 12세 정도로 보이는 그애의 눈은 지나온 과거를 말해 주듯 총기가 없어 보였다. 눈동자는 불안에 떨며 쉴새없이 움직이고 있었고, 두 눈은 어두운 그림자에 싸여 있는 듯했다. 소년은 비행 도중 내내 몸을 돌려 말없이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비행기가 샌디에이고 상고에 도착해서 착륙 준비를 시작했을 때, 혼자말처럼 이렇게 내뱉었다. "와, 사람들이 되게 많다! 꼭 벌레 같네." 그게 하늘로부터 관찰한 그 애의 감상이었다. 나는 그 소년의 말에 이상스럽게 가슴이 떨렸다. 다른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더라면 아마도 안 그랬을 것이었다. 그런데 침울한 눈을 보이고 있던 소년의 입으로부터 그런 말이 나오다니... 나는 사람들을 벌레에 비유한 그 소년이 측은해졌다. 그에게 딴 사람들은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소년의 자아상은 너무나 나약한 것이었다. 산다는 것 자체가 그 애에게는 쓸데없는 짓인지도 몰랐다. 나는 그 감독 교사들이 소년을 잘 이끌어 줄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리고 소년이 자기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성향을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충심으로 빌었다. 나는 86세 고령의 노부인과 12세 소년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 많은 쪽의 적극성과 어린 소년의 무기력함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거기에서 나는 사람들의 기력을 떨어뜨리는 것은 나이가 아니라 정서적 장애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신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는가? 또 어떤 것은 할 수 있고 어떤 것은 할 줄 모르는 사람인지 알고 있는가? 그것을 잘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생활에 반영하는 것은 더더욱 중대한 일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에 따라 향상의 기회가 올 수도 있고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자아상은, 당신이 일을 즐겁게 하거나 여가를 유쾌하게 보낼 수 있도록 힘을 빌려 준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당신의 행동에 자신감을 갖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즐거워지면 당신의 자기 평가는 높아진다. 당신의 최고의 상태에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당신의 모습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건설적인 자아상을 갖고 있는 사람은 유쾌한 생활 조성을 위해 일부러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런 건전한 자아상을 유지만 할 수 있다면, 그에게 생활은 그 자체가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떠한 고통이나 고난에도 꺾이지 않는다. 극복의 차원을 넘어서 그것까지 즐기는 차원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자아상은 더욱 강화된다. 끊임없이 전진하고, 자신의 한계를 파악하여 자아상 강화에 힘쓰면서 무슨 일이나 즐겁게 붙들고 해나간다면 그는 어떠한 난관도 뚫고 나갈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교훈이 필요하다. 매일매일 목표를 가져라. 현실로부터 절대로 도피하지 말라. 행복, 그 가뭇한 향기 헤르만 헤세 독일의 시인이자 소설가. 독학으로 문학에 입문하여 22세 때 처녀 시집 출간 1946년 노벨문학상 수상. 대표작 "지와 사랑" "데미안" 등이 있음. 신이 생각한 인간, 문학이나 지혜가 몇 천년을 걸쳐 이해해온 인간은, 사물이 쓸모 없는 경우에도 아름다움을 해석하는 기관을 가지고 그것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지도록 만들어졌다. 미에 대한 인간의 기쁨에는 언제나 정신과 감각이 동등한 정도로 관여하고 있다. 인간이 삶의 역경과 위험 한가운데에서도 그러한 것을 즐길 줄 아는 한, 즉 자연이나 회화 속의 색채의 어우러짐, 폭풍우나 바다 소리 속에서 들려 오는 외침 또는 인간이 만든 음악 같은 것을 즐길 줄 알고, 이해나 어려움의 표면 깊은 곳에서 세상을 전체로 바라보거나 느낄 줄 아는 한, 또는 막 태어난 강아지의 감동적인 눈길에서 시인의 비극에 이르기까지 서로 연관이 있고 무한히 풍부한 연대성. 상응. 유사. 반영 등이 존재하고 있어 끊임없이 흐르는 그 언어들에서 기쁨과 지혜, 농담과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그 같은 전체로서 세상을 바라보고 느낄 수 있는 한--그것을 할 줄 아는 한, 인간은 자기라는 것에 달라붙는 의문을 가지고 자신의 존재에 되풀이해 의미를 부여할 수가 있으리라. 진실의 인간, 건전하고 불구가 아닌 인간에게 있어서는, 세계와 신은 끊임없이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기적에 의해 실증되어진다. 즉 저녁이 되면 시원해지고, 노동의 시간이 끝난다는 것 외에 저녁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가 다시 장미빛에서 보라빛으로 매혹적이며 거침없이 옮겨져 간다고 하는 현상이 있다는 것, 꽃받침 속의 수술의 질서 같은 것, 작은 판자쪽으로 만들어진 바이올린 같은 것, 음계와 같은 것, 언어처럼 실로 불가해하고 미묘하고 자연과 정신에서 태어난 것, 이성적인 동시에 초이성적이며 어린애다운 것이 있다는 것, 세상의 아름다움, 신기함, 수수께끼, 그리고 무릇 인간적인 일체의 것이 모면할 수 없는 연약함, 질병, 위험 따위를 내몰고 방지하지는 못하더라도 영원불변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는 것 -- 이와 같은 것이 세계를, 그 사도며 제자가 되는 우리들에게 있어 지상의 가장 신비적이며 존경할 값어치가 되는 현상의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각 민족 혹은 각 문화 협동체가 내력에 상응하는 동시에 아직 표명되지 않은 목표에 소용되도록 언어를 만들어낸 것만은 아니다. 또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언어를 배우고 찬탄하고 냉소하지만, 결국 완전히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도 사실은 아니다. 아니, 각 개인에게 있어서도 아직 언어가 없는 원시세계나 궁극에 이르기까지 기계화되어 버린, 때문에 다시 언어가 없어진 현실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 한, 언어는 인격적인 재산인 것이다. 언어에 대한 감수성을 지닌 사람, 지리멸렬해지지 않은 건전한 인간에게 있어서는 예외없이 말과 글, 자모나 형태, 문장 구성의 가능성 같은 것은 그 사람 나름의 특수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모든 진실한 언어는 그것을 알도록 그것을 가지고 태어난 모든 사람에 의해 완전히 개인적으로 감동되고 체험되어지는 것이다. 본인이 그것을 도무지 자각하지 못할 경우에도 거의 모든 인간은 대체로 언어감각을 지닌 한, 어떤 종류의 말이나 음이나 모음 또는 자모의 순서에 대해 독특한 나름의 취향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이 어느 특정의 시인을 특별히 좋아하거나 거부하는 경우, 거기에는 그 시인의 언어 취미라든가 청각이 독자의 그것과 비슷하거나 무연한 것도 관계가 있는 것이다. 예컨대 나는, 수십 년 동안 사랑을 해오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많은 시구를 들어, 그 의미나 지혜, 경험이나 선의나 위대함 같은 내용으로 해서가 아니라 단지 특정한 운이나 흔해빠진 형태에서 리듬이 독특하게 변해 있는 것으로 하여,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언어는, 화가에게 있어 팔레트 위의 물감이 의미해 주는 그것과도 같은 것이다. 언어는 무수히 많다. 그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언어들이 발생한다. 하지만 참다운 언어는 그리 많지 않다. 나는 70년 동안에 새로운 언어가 발생하는 것을 체험하지 못했다. 그림물감도 그 농담과 혼합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아무렇게나 얼마든지 있는 것은 아니다. 언어 가운데에는 말하는 사람 모두에게 있어 좋아하는 말, 익숙하지 않은 말, 특별히 끌리는 말, 피하는 말이 있다. 천번을 써도 못다 쓰는 일상어도 있거니와 아무리 사랑하고 있다 해도 신중히 다루어 장중한 것에 걸맞는 말이 있고, 드물긴 하지만 특별히 가려서 입에 올리거나 글로 써야 하는 다른 종류의 장중한 언어도 있다. 나에게 있어서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바로 그러한 것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그러니까 내가 언제나 사랑해 오고 반갑게 들어온 하나의 단어다. 그 뜻을 놓고는 얼마든지 논의하고 그 이유를 달아볼 수 있겠지만, 어쨌든 이 단어는 아름다운 것, 좋은 것, 바람직한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 단어의 울림도 그에 걸맞는다고 나는 생각해 왔다. 이 단어는 짧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우리만큼 무겁고 충실한 것, 황금을 연상케 하는 데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충실하고도 아주 묵직할 뿐만 아니라, 이 말에는 확실히 광채도 서려 있었다. 구름 속의 전광처럼, 짧은 스펠링 속에 광채가 깃들어 있다. 짧은 엮음은 잠깐 쉬고, ck에서 딱 잘라 간결하게 끝난다. 웃지 않고는, 또는 울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말, 근원적인 매력과 감성이 넘치는 언어였다. 이것을 옳게 느껴 보고 싶을 땐, 이 황금의 언어 곁에다 나중에 만들어진 천박하고 피로한 니켈이나 구리 같은 단어--예를 들어 소여라든가 이용이라는 단어--를 배열해 보면 모든 게 명확하게 드러난다. 의심할 것도 없이 그것은 사전이나 교실에서 나온 단어는 아니었다. 고안되고 전화되거나 합성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이루어져 있었고 완전하였다. 햇빛이나 꽃처럼 하늘과 땅에서 온 것이다. 그러한 언어가 있었음은 얼마나 행복하며 가슴 벅찬 일이던가! 그런 언어를 갖지 못하고 살아가거나 생각하는 것은 시들어 메말라 가는 일이리라. 빵과 포도주가 없는, 웃음과 음악이 없는 삶과 같은 것이리라. 이런 면을 향해서, 즉 자연의 감각적인 면을 향해서 행복이라는 말에 대한 나의 관계는 조금도 발전하거나 변화되지 않았다. 이 언어는 언제나와 다름없이 오늘날에도 짧고 무겁게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나는 소년시절에 이 말을 사랑했듯이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 이 불가사의한 상징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이 짧고 묵직한 언어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이에 대한 나의 의견이나 생각은 여러 형태의 발전을 체험하고, 훨씬 훗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하나의 명백한 결론에 도달했다. 내 생에 절반을 훨씬 넘어설 때까지, 뭇 사람들의 입에 올려질 때에 행복은 확실히 어떤 적극적인 절대 가치의 것을 의미하고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평범한 것을 뜻하고 있음을, 나는 검토도 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행복'이라고 할 때는, 좋은 가문, 좋은 교육, 좋은 경력, 좋은 결혼생활, 가문과 가정의 번영, 뭇 사람으로부터 받는 신망, 많은 돈이 들어 있는 지갑, 재물이 가득 찬 금고 등이 떠올랐다. 나도 모든 사람들과 똑같았다. 어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었듯이, 행복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고 생각되었다. 세계사에서도 행복이란 것을 말했다. 행복한 민족과 행복한 시대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으로 미루어 봐도, 우리들 자신이 매우 '행복한' 시대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들은 긴 평화와 드넓은 거주권과 아주 편안하고 쾌적한 행복에, 마치 따뜻한 탕 속에 들어앉아 있듯이 젖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이 행복은 너무도 당연한 것 것이라고 여겼다. 겉보기에 지극히 즐겁고 쾌적하며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던 우리 젊은이들은 웬만큼 자각을 지녔다 하면 우쭐해지며 회의적인 기분이 되어 죽음과 퇴폐, 정신의 천박함을 거의 장난 삼아 가지고 놀기가 일쑤였다. 그리고 15세기의 피렌체나 페리클레스의 아테네 등 기타 옛 시대는 행복한 시대라고 떠들어대고는 했다. 우리는 역사책을 읽고 쇼펜하우어를 읽기 시작하였으며, 최고급의 표현이나 미사여구에 대해서는 전에 없이 불신감을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정신적으로 완화되고 상대화된 풍토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그러면서도 역시 부담감 없이 행복이라는 단어에 부딪치거나 하면, 그것은 옛날처럼 변함없이 충실한 황금의 음향을 울려 최고로 가치 있는 것을 상기시키고는 했다. 단순한 소인배들은 인생에서 보편적으로 일컫는 재화를 행복이라 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이따금 생각했다. 이에 반해 우리는 이 말을 들으면 차라리 영혼의 지혜나 초월이나 인내, 그리고 확신 따위를 생각했다. 그것들은 우리를 기쁘게 해주는 아름다운 것의 전부였지만, '행복'과 같이 근본적이며 충실하고 깊은 명칭의 값어치가 있지는 못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나의 개인적인 생활은 더욱 앞질러 나아가,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한 생활과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이른바 행복을 겨냥하는 노력도 거기에 끼어들 여지나 의미가 없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때때로 격정이 일 때, 나는 아마도 이 태도를 운명을 사랑하는 마음이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결국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던 과열된 성장의 상태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격정으로 치닫는 일이 없었다. 비격정적인 쇼펜하우어의 욕망없는 사랑도 이미 나의 무조건적인 이상일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된 것은, 중국 달인들의 생활이나 장자의 비유를 잉태시킨 지반이 된 지혜,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으며 조심성 있고 언제나 약간은 조소적이랄 수도 있는 지혜에 탐닉된 다음부터의 일이다. 이제 군소리는 그만두기로 하자. 나는 비교적 확고한 단언을 내릴 참이다. 먼저 지엽적으로 흐르지 않기 위해, 행복이라는 말속에는 오늘의 나에게 있어 어떤 내용과 의미가 담겨 있는가, 그것을 다른 말로 평이하게 설명해 보기로 한다. 나는 오늘날 행복을 통해 온전히 객관적인 것을 이해하고 있다. 즉 전체 그 자체, 몰시각적인 존재, 세상의 영원한 음악, 뭇 사람들이 천구의 조화 내지는 신의 미소라 일컫고 있는 것 등을 이해한다. 이 정수, 이 무한한 음악, 이 넘쳐 울리며 황금빛으로 빛나는 영원은 순수하고 완전한 현재일 뿐, 시간도 역사도 이전도 이후도 그 안에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인간과 그 세대와 민족과 국가는 일어나고 번영하고 그러다가 그림자와 허무 속으로 스러져 없어지지만, 세계의 얼굴은 영원히 빛나며 미소짓는다. 인생은 영원을 향해 음악을 울리고, 영원 속에서 춤을 춘다. 우리네 무상의 존재, 위험 속에 처해진 존재,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들에게 더욱 주어질지도 모르는 기쁨과 위로와 웃음은, 그곳으로부터의 광휘 고 빛에 충만한 눈이며 음악으로 가득 찬 귀인 것이다. 언젠가 전설적인 '행복한' 인간이 실제로 있었다 해도--시새움으로 가득 채워진 행운아나 태양의 아들이나 세계의 지배자도 때로는 화려하고도 아름다운 시간, 또는 순간에 어쩌다가 큰 빛에 비쳐졌다 할지라도--하지만 그들은 다른 행복은 체험하지 못했고, 다른 기쁨은 맛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완전한 현재 속에서 숨쉬고 있는 것, 천구의 합창 속에서 같이 노래하는 것, 세계의 윤무 속에서 함께 춤추는 것, 신의 영원한 웃음 속에서 함께 웃는 것, 그것이야말로 행복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단 한 번, 아니 몇 번만 체험했다. 그러나 그것을 체험한 사람은, 단순히 한 순간만 행복했던 것이 아니라 몰시간적인 기쁨의 광휘나 여운의 그 무엇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의 세상에 사랑하는 이가 가져온 사랑, 예술가가 가져온 기분 전환의 유쾌한 모든 것들, 그리고 몇 세기 뒤에도 최초의 날처럼 밝게 빛나고 있을 그 모든 것들은 바로 거기서 오는 것이다. 나의 경우, 행복이란 언어는 내 생애를 거치는 동안에 이처럼 포괄적으로 우주의 크기 만한 신성한 의미에 도달했다. 나는 여기서 언어학을 강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역사의 일편을 말해 주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사람들 것을, 그리고 사람들이 말하거나 글로 쓰는 경우 행복이라는 언어에 이같은 큰 의미를 달도록 하라고 다그칠 생각이 결코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 둘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는, 이 은혜롭고 짧은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단어 안에 내가 어린시절부터 그 울림을 듣고 느껴온 모든 것들이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그 느낌은 어린시절에 더 강하고 분명했다. 그 감각적인 성질이나 단어의 속삭임에 대한 모든 감각의 응답은 더 강하고 높았다. 하지만 이 단어 자체가 그토록 깊이 또 근원적으로 세계를 감싸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면, 영원한 현재라든가 황금의 흔적(골트문트), 불멸의 웃음(황야의 이리)따위의 나의 상념은 결코 이 단어를 거쳐서 결정되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이 든 사람들이 언제,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나 강하게 행복을 느꼈는가를 알아볼 때는, 뭐니뭐니해도 유년시절을 떠올려 그것을 찾게 된다.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행복을 체험하는 데는 무엇보다도 시간에 구애받지 않아야 함과 동시에 공포나 희망의 지배를 받지 않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대개가 나이와 더불어 그와 같은 힘을 잃어 가기 때문이다. 나도 영원히 빛나는 현재와 신의 미소에 잠겨 있었던 순간을 돌아볼 때면, 그때마다 유년시절로 돌아가곤 한다. 그리고는 거기서 이러한 종류의 가장 귀중한 수확을 가장 많이 찾아내는 것이다. 확실히 기뻤던 청년시절은 그 이상으로 눈부시게 다채로우며 화려하게 꾸며져 있고, 영롱한 채광으로 비쳐져 있다. 거기에는 유년시절의 기쁘던 순간 이상으로 정신이 관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더욱 깊이 알고 보면,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라기보다는 기분 전환이며 흥미로움이었다. 익살스런 기지가 번들이고 재기가 넘쳐흘렀다. 여러 가지 신나는 기분 전환도 했다. 더없이 정다운, 젊은날의 친구들과 어울려 지낸 날을 나는 기억한다. 그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한 친구가 호메로스의 큰 웃음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하고 갸우뚱거렸다. 나는 정확하게 육각운에 따라 억양을 붙인 리드미컬하게 큰 웃음으로 그들에게 대답했다. 모두들 크게 웃으며 기쁨의 술잔을 부딪쳤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순간은 후일 음미해 보니 아주 시시했다. 그런 것은 다 아름답고 재미있고 감미로웠지만 행복은 아니었던 거이다. 이와 같은 검토를 충분히 긴 시간을 두고 계속해 보면, 행복은 역시 유년시절에만 체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행복을 체험한 때나 그 순간을 다시 찾아내기는 너무도 어려웠다. 왜냐하면 이 경우, 유년시절의 범위에서도 훗날에 음미해 보니 그 광휘가 반드시 진짜는 아니었고, 황금도 반드시 순금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심하게 말한다면, 지극히 적은 체험밖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그것도 물론 그려낼 수 있는 정경이거나 이야기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항은 아니었다. 그러한 체험을 좇다 보면 그것들은 어느새 슬며시 몸을 돌려 피해 버렸다. 그런 회상이 떠오르면, 우선 그것은 몇 주일이나 몇 날 또는 적어도 하루의 일처럼 생각되었다. 예를 들면, 크리스마스나 생일날이나 휴가 첫날 따위처럼--그렇지만 어린시절의 하루를 기억 속에 재현시키는 데는 무수한 정경을 필요로 한다. 단 하루를 위해서나 반나절을 위해서도 기억력을 충분한 양의 정경을 모으기가 어려울 것이다. 몇 날, 몇 시간, 아니면 고작 몇 분 동안의 체험이긴 하지만, 나는 행복을 몇 번이고 체험했다. 그 뒤에, 나이가 들고서도 나는 여러 순간 행복에 가까이 다가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인생의 초기에 만났던 여러 종류의 행복들을 되살리며 음미해 볼 적마다, 그 가운데서 유독 하나만이 또렷이 남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의 학생시절의 일이다. 그러나 그 행복과의 만남의 독특한 점, 순수한 점, 근본적인 것, 신화적인 것, 조용히 웃으면서 우주와 일체가 되어 있는 상태, 시간과 희망과 공포로부터 절대적으로 놓여 있는 자유의 상태, 완전히 현재인 상태 그것은 결코 오래 지속되어지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 열 살의 씩씩한 소년이었던 나는 확실히 여느 때와는 달리 굉장히 기쁘고 즐겁게 상쾌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그것이 나를 내부의 태양처럼 속속들이 비춰 주었다. 소년이 막 깊은 잠에서 깨어난 순간에 무슨 새로운 것, 멋있는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아름다운 생활 전체가 지금 바야흐로, 이 새아침에 가치와 의미를 남김없이 획득하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어제 일도 오늘 일도 모두 잊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나는 행복한 오늘에 감싸여 포근하게 정화되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상쾌하게, 감각과 영혼에 의해, 호기심이나 변명도 없이 감지되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내 몸 전체에 스며드는 황홀함이었다. 아침이었다. 높은 창을 통해, 이웃집의 기다란 지붕 너머로 투명한 담청색으로 밝게 펼쳐져 있는 하늘이 보였다. 하늘도 행복에 가득하여 뭔가 특별한 일을 꾸미고 있는 듯이, 그 때문에 고운 옷을 갈아입기라도 한 듯이 보였다. 나의 잠자리 속에서는 넓은 세상도 그 이상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지붕도, 짙은 적갈색으로 된 기와의 권태롭고 살풍경한 지붕도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가파르고 그늘진 경사면에 온갖 색깔들이 아련하게 어려 있었다. 지붕에 뚫린 단 한 장의 파아란 광창이 붉은 점토의 기왓장 사이에서 숨을 쉬면서, 고요하게 찬란히 빛나는 아침 하늘의 일부를 비추려고 기꺼이 노력하고 있었다. 하늘, 울퉁불퉁해 보이는 지붕의 모서리, 나란히 늘어선 갈색의 기왓장, 공기처럼 엷은 단 한 장의 물빛 광창 등이 서로 아름답고 즐겁게 화합해 있는 듯이 보였다. 이 특별한 아침 한때에 그들은 명랑하게 서로 웃으며 서로 착한 마음으로 대할 생각밖에는 안 하고 있는 듯했다. 하늘의 파아란 색, 기와의 갈색, 유리창의 푸른색 등은 한마음으로 한 몸이 되어 함께 어우러져 노닐고 있었다. 모두 즐거워 보였다.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유희에 함께 어우러지며, 그들처럼 아침의 광휘와 쾌감에 젖는 느낌을 안아 보는 것은 참으로 멋있고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잠의 포근한 여운과 함께 시작되는 아침을 즐기면서 누워 있었다. 하나의 아름다운 영원이었다. 일생 동안에 이때를 제외하고도 똑같은, 혹은 유사한 행복이라도 맛본 일 일이 있었던가, 어쨌거나 행복이 이때만큼 깊고 보다 현실적이었던 적은 없었다. 세상은 질서다. 이 행복이 100초 동안 이어졌는지 혹은 10분 동안 이어졌는지--하여튼 그것은 시간 밖에, 그러니까 시간의 질서 밖에 있었으므로 다른 모든 진짜 행복과 완전히 닮아 있었다. 마치 팔랑팔랑 날고 있는 얼룩 나비가 다른 것과 완전히 유사한 것처럼 말이다--그것은 잠시였다. 시간에 씻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60년이 더 지난 오늘날에도 나를 불러 끌어당김으로써, 내가 피로한 눈과 아픈 손가락으로 거기에 호소하고 미소를 보내며 그것을 묘사해 내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게 하기에 충분할 만큼 깊은 영원이었다. 그 행복은 내 신변의 사물들과 내 존재의 조화 및 어떠한 변화나 상승도 원치 않는 바랄 것 없는 유쾌한 즐거움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집 안은 아직 고요했다. 밖에서도 소리는 들려 오지 않았다. 이 고요함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일어나 학교에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일상적 의무에의 경고가 내 상쾌한 기분을 흐트러뜨렸을 것이다. 하지만 틀림없이 그때는 낮도 밤도 아니었다. 달콤한 빛과 웃음띤 하늘색이 있었지만, 현관의 돌마루 위를 하녀가 부지런히 오가거나, 방문을 여닫는 소리가 나거나, 빵집 아이가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지도 않았다. 그 자체로 충족되어 있었다. 그것은 나를 온전히 감싸안아 들이고 있었으므로, 나에게 있어서도 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고, 기상이나 학교, 절반쯤만 끝낸 숙제, 못다 외운 단어, 상쾌하게 환기된 식당에서의 부산한 아침식사 따위도 생각하지 못했다. 행복의 영속은 이때 역설적이게도 아름다운 것의 증대, 기쁨의 증가와 과잉에 의해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하고 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내 속에, 환하고 조용한 아침 세계가 들어와 나를 감싸안고 있는 동안에, 멀리서 뭔가 심상치 않은 것, 찬란한 것, 극도로 밝은 것이 황금처럼 승리를 뽐내며 정적을 뚫고 다가왔다. 그것은 가슴이 터질 듯한 기쁨과 마음을 진작시키며 깨어나게 하는 감미로움에 넘쳐 있었다. 나팔 소리였다. 이제 비로소 완전히 잠이 깨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부드러운 이불을 냉큼 걷어차 버리고 있는 사이에, 그 울림은 이미 두 갈래로 그리고 다시 여러 갈래로 증폭되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연주하면서 골목을 행진해 가는 마을의 음악대였다. 그것은 울려 퍼지는, 아름다움에 넘치는, 진짜 신기한, 가슴 뛰놀게 하는 일이었으므로 어린애의 마음이 내 몸 속에서 미소짓는 것과 동시에 흐느껴 울었다. 그 은혜로운 한때의 행복이나 매력도 이 자극적이고 짜릿하게 감미로운 소리 속으로 흘러들어, 불러내는 소리에 깨어나 다시 어렴풋한 시간 속으로 되돌아와서는 넘쳐흐르는 듯했다. 그 순간, 나는 축제의 기쁨에 몸을 떨었다. 자리를 박차고 문으로 달려나가 옆방으로 뛰어들어갔다. 그곳은 창으로 밖이 내다보였기 때문이다. 환희와 호기심과 보고 싶은 욕망의 도취 속에서 나는 열린 창틀에 올라앉아, 다가오는 음악의 자랑스럽게 높아져 가고 있는 진동을 울렁이는 가슴으로 들으며, 이웃의 집들과 길이 잠에서 깨어나 활기를 띠며 얼굴과 모습, 소리로 가득 차 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에 나는 또 잠과 낮 사이의 상쾌한 상태에 있는 동안에는 깡그리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들을 남김없이 의식했다. 오늘은 진짜 학교수업이 없고, 대축제일이었다는 것--임금님의 생신이었던 것 같다--행렬과 깃발과 음악 등의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즐거운 일들이 여러 가지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알게 됨과 동시에 나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일상을 지배하는 법칙 아래 놓여졌다. 금속의 울림소리에 눈을 뜨고 깨어난 그들은 여느 날이 아니라 축제일이었지만, 이 불가사의한 아침의 독특한 아름다움이며 신성함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잔잔하고 아름다운 기적이 사라지고 난 바로 그 자리에는, 시간과 세계와 일상생활의 물결이 서로 부딪치고 있었다. 당신은 행복한가 느닷없이 비눗방울처럼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내게 떠오른다. 당신은 정말 행복한가? 물론이다. 하지만... 기다려 보라. 아니다. 실제로는 그렇게 행복하지 않다. 우선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행복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한마디로 무의미한 것이다. 그것은 다른 많은 생활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 가장 기뻤던 날들은 언제였을까? 나에게 있어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언제였을까? 나에게 가장 기뻤던 날! 나는 웃지 않을 수 없다. 순수하고 소중한 내 기억 속에는 수백 가지 이상의 것들이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은 티없이 맑고 원만한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들 하나 하나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소중하게 아름답고 그 어떤 것도 다른 것들을 닮지 않은 빛깔 안에 기분 좋게 물들어 있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태양들이 나를 그을리게 했으며, 얼마나 많은 냇가와 강들이 나를 시원하게 했던가. 얼마나 많은 길이 나를 따라다녔으며, 얼마나 많은 개천이 나를 살포시 적셔 놓았던가! 나는 얼마나 많은 시선들을 파란 하늘과 생기 넘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의 시선 안에 주었으며, 얼마나 많은 동물들을 좋아했으며 또 나를 유혹했던가! 이러한 순간들 중에서 그 어떤 것도 아름답지 않은 것은 없다. 또한 내가 술잔을 천천히 비우면서 음악의 선율 속에 사랑스런 기억들을 그리고 있는 현재 이 순간 역시 나는 매우 행복하다. 나는 계속 꿈을 꾸어야겠다. 경험의 바다로부터 다른 모습들이 떠오르는 것을 보라. 슬픔의 시간들, 비애의 나날들, 수치와 후회의 나날들, 패배와 죽음에 인접하여 백발이 되어 가는 순간들. 나는 내 최초의 사랑에 배신당하여 고통 속에서 헤매이던 그날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본다. 우편배달부가 찾아와서 저 멀리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전해 주고 돌아갔던 그날, 나의 죽마고우가 술에 취해서 내게 욕을 퍼붓던 그 밤, 시와 정열적인 글씨가 노트에 넘치는 반면 빵 하나를 사기 위한 몇 페니의 돈을 어떻게 구해야 할지를 몰랐던 굴욕의 날들, 내 사랑하는 친구가 고통스러워할 때 그 곁에서 같이 고통스러워하면서 도울 수도 위로할 수도 진정시킬 수도 없었던 그 많은 시간들을 나는 다시 되돌아본다. 그리고 나를 지배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던 부유한 대중들 앞에서 경멸적인 말을 듣고는 경련을 일으키며 쥐었던 내 주먹을 숨겨야만 했었던 순간들, 불면의 밤을 뒤척이며 무엇 때문에 내가 삶을 계속해야 하는지를 몰라했던 그 모든 밤들, 내가 여관집 식탁에서 함께 웃고 익살을 떨고 즐거워했던 반면에 내 마음 속에서는 비참하고 슬픈 기분이 들었던 그 모든 밤들, 또한 가망없는 사랑을 하던 때, 시작한 일이 또다시 실패로 돌아가고, 이상을 잃고 하나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 때마다 불신하고 자기 조소를 하던 그 순간 순간들... 이 많은 기억들 중에서 나는 어떤 시간을 기억하고 싶어하고, 어떤 것을 삭제하고, 그리고 잊어 버리고 싶어할까? 아무것도, 그 어떤 것 하나도 그럴 수 없다. 가장 괴로웠던 시간도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시간 속에서 나를 찾아온 수백 가지의 기억들을 꿈을 꾸듯이 굽어본다. 그토록 많은 낮과 밤, 그 많은 시간들, 이 모든 것들은 어디에 있을까? 수천 번의 낮과 수천 번의 밤들, 수 백만 번의 순간들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 내겐 그것들이 더 이상 생각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결코 눈뜨지 않고 그리고 더 이상 생각나지 않는 과거의 일이 되어 돌이킬 수 없이 지나가 버린 것이다. 그리고 오늘 저녁은 어디에서 머물게 될까? 그것은 언제 다시 한번 깨어나서 내 마음에 명료하게, 그리고 애타게 갈망하던 과거의 그 시절을 생각나게 할까? 나는 지난 과거가 죽었기에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오늘 일을 하지 않아 나를 고생시켰더라면, 이 현재의 오늘은 틀림없이 바닥이 없는 암울한 날들로 가라앉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에 대해서 더 이상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것이다. 열심히 삶을 향해 돌진하지 않은 사람은 추억거리를 위한 방법으로 우선 모든 예술 속에 때맞춰 자신을 숙련시키는 것이 좋다. 즐기는 힘과 기억하는 힘은 서로서로 의존하고 있다. 즐긴다는 것은 하나의 열매로부터 그것의 달콤함을 남김없이 빼앗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억한다는 것은 언젠가 한번 즐겼던 것을 자신의 손안에 꽉 쥐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항상 마음 속에 더욱 순수하게 넣어 두는 것이다. 우리 개개인은 이미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행하고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어린시절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거기에 환상이 되어 버린 추억들을 푸른 하늘에 황홀하게 펼쳐 보며, 수천 가지의 아름다운 추억을 마로 표현할 수 없는 쾌감과 뒤섞어 보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지난날들의 즐거움을 되돌아본다는 것은 그때의 즐거움을 다시 즐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즐거움 하나하나를 행복의 상징으로, 동경의 목표로, 그리고 낙원으로 승화시킬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우리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가르쳐 준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삶의 기쁨과 따뜻함과 광채를 압축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모든 새로운 날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고자 할 것이다. 그들은 마찬가지로 어떤 큰 고통을 더욱 분명히 그리고 진지하게 맛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두운 날을 회상하는 것 또한 아름답고 성스러운 소유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삶이란 의미 없고 잔인하고 어리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려하다. 그것은 사람을 웃음거리로 삼지는 않지만(왜냐하면 정신적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지렁이나 파리 같은 것이 아닌 바로 사람에게 간섭한다. 인생이 자연의 변덕이며 잔인한 유희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너무 집착하므로 생각 그것이 곧 착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 인간들은 삶을 새나 개미의 생존보다도 더욱 힘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더 편리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삶의 잔인성과 죽음의 불가피성을 만나는 것으로 비로소 우리들 마음 속에 절망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자연의 무의미함, 혹은 자연의 모든 잔인성을 마음 속에 받아들이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이러한 잔혹한 무의미함에 스스로 맞서 하나의 의미가 되도록 복종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것,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다. 우리는 바로 이 점을 기억해야 한다. 행복의 정복 버트랜드 러셀 영국의 철학가이며 수학자. 시인이며 사회사상가이기도 함. 1950년 노벨문학상 수상. 주요 저서로 "라이프니츠의 철학" "수학의 원리" 등이 있음.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동물의 경우는 몸에 탈이 없고 먹을 것만 넉넉하면 행복하다. 인간은 저마다 행복해야 하지만,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가 못하다. 만일 당신이 불행한 사람이라면, 그 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곧 인정할 것이다. 친구들 중에 다행히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되는지 한번 생각해 보라. 그들을 살펴본 연후에, 인간의 얼굴빛을 읽는 법을 배우라. 그리하여 하루하루 당신과 만나는 사람들의 기분을 잘 살펴 보라. "내가 만나는 얼굴마다 피곤한 그림자와 슬픔의 빛이 서려 있노라" 이것은 블레이크의 시구이다. 불행의 종류는 여러 가지이다. 우리는 세상 곳곳에서 불행을 만나게 마련이다. 우리가 대도시 뉴욕에 살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사람들이 한참 일에 바쁠 때, 분주한 사거리나 주말의 밤 거리, 저녁 댄스 파티에 나가 보라. 주위의 낯선 사람들을 각각 유심히 바라보면, 얼굴에 저마다 수심이 끼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인류 역사의 어느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지금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즉 우리들 가운데서 현명한 자는, 지난날의 여러 가지 경험을 다 겪어 온 나머지, 인생은 결국 살아갈 만한 보람이 없다고 느끼게 되었으며, 불행의 원인을 우주의 본질에 돌리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인생관을 갖고 있는 자는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지식인이 마땅히 지녀야 할 이성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더욱 우스꽝스럽다. 그들이 자기의 불행을 자랑하는 것을 볼 때, 보통 사람의 안목으로서는 그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불행을 즐기는 자는 이미 불행한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단순한 견해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갖는 우월감과 사고방식에는 물론 어느 정도의 보수가 따르지만, 그것으로써 쾌락의 손실을 충분히 보상한다고 볼 수는 없다. 나는 불행 속에 결코 커다란 합리성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현명한 사람은 환경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행복을 누릴 것이다. 그리고 우주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큰 괴로움을 준다면, 그는 그 대신 다른 것을 생각할 것이다. 이론은 어쨌든, 이성이 결코 행복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점을 나는 독자들에게 납득시키고자 한다. 자기의 불행을 모조리 우주관에 돌리는 사람은, 말에게 거꾸로 수레를 메우는 것과 같다. 그런데 진상은 이러하다. 그들은 자기를 의식하지 못한 어떤 이유로 자기 자신도 불행한 것이다. 그리고 이 불행 때문에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를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죠세프 우드 크러취는 "현대의 기질"이라는 책에서, 내가 사람들을 위해 생각해 보려는 내용을 논한 적이 있다. 그리고 몇 세대 전에 바이런도 그러한 의미의 말을 한 적이 있다. 후세대를 위하여 "전도서"의 작가는 이것을 기록해 놓았다. "우리는 패배하였다. 이 우주의 대자연 속에는 우리가 몸 붙일 곳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인간임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동무로 사느니 인간으로 죽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바이런은 이렇게 말했다. "인생이 줄 수 있는 기쁨은, 인생이 빼앗아 버리는 기쁨과 견줄 수 없다. 옛 사색의 광채가 감정의 둔한 부패로 말미암아 사그러질 때." "전도서"의 저자는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살아 있는 생명보다 이미 죽어 버린 생명을 더욱 찬미하는 것은 실로 이 때문이다. 이 세상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하늘 아래서 일어나는 악한 현상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살아 있는 생명보다 낫고 죽은 생명보다 낫도다." 이 세 사람의 염세주의자는 인생의 모든 쾌락을 검토한 연후에, 이런 어두운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크러취는 뉴욕의 상류 지식층으로 살았었다. 그리고 바이런은 다다넬스 해협을 건너 무수한 연애 사건을 경험했다. 또한 "전도서"의 저자는 여러 가지 쾌락을 맛본 인간이었다. 술과 노래와 그 밖의 모든 쾌락을 경험했다. 그는 자기 집에 연못을 파고, 슬하에 남녀 하인을 무수히 거느리고 살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호화로운 환경 속에서도 그는 자기의 지혜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허무함을 알게 되었다. 지혜까지도 허무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지혜를 가졌으며, 우매한 것과 미친 것을 분간하는 판단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영혼에 괴로움울 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많은 지혜에는 많은 슬픔이 따르기 때문이다. 또한 지식이 많으면 슬픔도 따라서 많아지는 것이다." 그의 지혜는 그를 무던히 괴롭혔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 지혜를 없애 버리려고 부질없이 애를 썼다. "내가 내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할 터이니 너는 쾌락을 느끼라고 하였지만 이것 역시 헛된 일이로다." 그러나 그의 지혜는 여전히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때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우매한 자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던 것처럼 나한테도 그런 일이 있었다. 나는 어찌하여 지혜로운 자가 되었는가. 그때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이것도 또한 허망한 거이다. 그러므로 나는 인생을 미워한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나에게는 모두 다 슬픔이다. 모든 것이 허무하여 영혼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현대인이 고대의 작품을 읽지 않는 것은, 문학가에게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현대인들이 고대의 작품을 탐독하면, 현대의 작가들이 글을 쓴다는 것은 모두가 부질없는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전도서"의 사상은 지혜로운 자가 지녀야 할 하나밖에 없는 이론이 아님을 우리가 해명할 수 있다면, 같은 감정을 표현한 후세의 작품 때문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논할 때, 우리는 감정과 이성의 표현을 반드시 구별해야 한다. 감정을 논리로 다룰 수는 없다. 어떤 좋은 일이 생기거나 또 육체에 변화가 일어나야만, 감정에 변동이 생긴다. 그러므로 이론이 기분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나는 여러 번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것을 느꼈었다. 내가 이러한 감정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어떤 철학의 힘이 아니라 단호한 행동의 덕택이었다. 만일 당신의 아들에게 병이 났다고 생각해 보라. 당신은 불안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생명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뒤로 미루고 우선 어린애의 건강을 회복해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부자들이 모든 것이 공허하다거나 허망하다고 느낄 때가 더러 있을 터이지만, 만일 그들이 재물을 잃게 된다면 결코 공허니 허무니 하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감정은 자연적인 욕구를 쉽사리 충족시키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동물도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생존 경쟁에 적응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사색가가 재산이 많아 자기의 모든 만족을 손쉽게 충족시키게 되면, 생활에서 애써 노력하는 경향이 없어지기 때문에, 행복의 본질적인 요소를 상실하게 된다. 또한 적은 욕망을 쉽게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흔히 욕망의 실현이 행복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게 마련이다. 만일 그가 철학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것이다.--인간 생활의 본질은 비참하기 짝이 없다. 왜? 자기가 바라는 것을 다 소유하고 있는 사람까지도 불행하므로. 그러나 당신이 원하는 것을 더러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이것이 행복에 없어서는 안 될 조건임을 당신은 잊고 있는 것이다. 기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전도서"에는 다음과 같은 지혜의 말이 기록되어 있다. "모든 강물은 바다를 향하여 흘러가지만, 바다를 채우지는 못한다. 세상에 새로운 것이란 하나도 없다. 지나간 과거를 누가 다 기억할 수 있으랴. 나는 세상에서 행한 모든 일을 혐오하였다. 이것은 내 뒤에 올 자에게 그것을 물려주려 함이다." 이러한 의미의 내용을 현대 철학자의 말로 표현하면 아마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인간은 끊임없이 노력을 하고 만물은 쉬지 않고 움직인다. 뒤에 오는 새 것은, 앞서 간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지만, 영구불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 인간은 죽어 가지만, 그 후계자는 그의 노력의 성과를 거두어들인다. 강물은 바다로 흘러가지만, 그 물은 거기에 머물러 있지 못한다. 인간과 사물은 목적과 종말이 없는 둥근 원과 같이, 날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한없이 생사를 되풀이하지만, 결국 아무런 발전도 성과도 없다. 만일 물이 현명하다면, 현재 있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솔로몬에게 지혜가 있었더라면, 아들이 그 열매를 즐기는 과일 나무를 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견지에서 보면, 만물은 모두 변하는 것이다. 세상에 새 것이 없다고? 마천루는 어떠한가? 비행기나 정치가의 방송연설은 어떠한가? 솔로몬이 여기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있었는가?(주-솔로몬이 이 "전도서"를 쓴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해 두는 것이 편하다) 만일, 솔로몬이, 쉬바 여왕이 그의 영토를 돌아다니면서 신하들에게 한 연설을 라디오로 듣는다면, 메마른 숲과 풀밭에서 자기를 위로했을 것이다. 만일 솔로몬의 공보 비서가 궁전의 건축이나, 무수히 처첩과의 재미나, 또는 솔로몬과 회담하여 여러 현자들이 실패한 이야기 등에 대한 신문 논평을 일일이 보고하여 주어도 세상에 새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기야 이런 것쯤으로 그의 염세주의가 시정될 리 만무하지만, 여기에 대하여 새로운 표현을 했을 것이다. 현대에 대한 크로취의 불평중 하나는 세상에 새로운 것이 너무나 많은 점이었다. 새로운 것이 있어도 괴롭고 없어도 괴롭다면, 새로운 것이 어찌 절망의 원인 될 수 있겠는가. 모든 강물은 바다로 흘러 들어가지만 바다는 차지 않으며, 강물은 흘러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만일 이것이 염세주의의 원리라면, 여행은 조금도 재미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 여름이 되면 피서지에 갔다가, 이윽고는 본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온다. 그렇다고 해서 여름에 피서지에 가는 것을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을까. 만일 강물에 감정이 있다면, 쉘리의 "구름"처럼 모험적인 여행을 즐길 것이다. 자기 후계자에게 여러 가지로 물려주는 괴로움만 해도 두 가지 견지에서 생각해 볼 수가 있다. 그것은 물려받은 자의 처지에서 보면, 분명히 나쁜 일이라고 볼 수가 없다. 그리고 만물이 유전한다는 사실은 원래가 염세주의의 토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악을 물려받으면 염세주의의 이유도 될 터이지만, 선을 물려받는다면 낙천주의의 이유가 될 것이다. 무엇이나 한 부분이 가치가 없다면 전체가 무가치하다. 인생을 저속한 연극의 논리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행복한 최후를 갖기 위해 남녀 주인공이 비참한 불행을 겪게 되는 것이 연극이다. 내가 살아서 행복한 인생을 보내고, 또 아들은 뒤를 이어서 번영하고, 그 손자는 아들의 뒤를 잇고 -- 여기에 무슨 비극이 있다는 것인가? 도리어 내가 영원히 생존한다면, 인생은 한결 무미건조해 질 것이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인생은 영원히 새로운 것이다. 인간은 행복할 수 있는가? 무릇 행복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물론 이 두 가지 행복 사이게 중간 단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는 두 종류를 구별해 보면 분명한 것과 가상적인 것, 동물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감정적인 것과 이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을 택해야 할까? 여기게 대한 해답은 다음에 입증해야 할 명제에 따라서 결정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 명제를 입증하지 않고 다만 서술만 하고자 한다. 이 두 가지 행복의 다른 점을 간결하게 설명하자면 이러하다. 하나는 모든 인간에게 열려 있는 행복이요, 또 하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자에게만 열려 있는 행복이요. 나는 일찍이 소년시절에, 행복에 도취된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는 우물을 파는 일이 직업이었다. 키가 몹시 크고 근육이 매우 탄탄하였다. 그는 책도 읽을 줄 모르고 글도 쓸 줄 몰랐었다. 그는 1855년 국회의원의 투표권을 받고 나서 비로소 그러한 제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가 지닌 행복은 지성에서 오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자연의 법칙에 대한 신앙, 인류의 완전성, 사회적인 복리의 공동 소유,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마지막 승리, 그리고 지식인들이 인생을 향락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신념--이러한 것들이 그의 행복의 원천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육체적인 용맹, 적당한 노동, 바위로 된 커다란 장벽의 정복--이러한 것이 그의 행복의 원천이었다. 나의 정원사의 행복도 이와 비슷했다. 그는 토끼 사냥을 즐겼었다. 그는 마치 런던 경찰국이 공산당에 대해 말하듯이 토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토끼라는 놈은 음흉하기 짝이 없고, 계략이 풍부하며, 잔인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토끼와 같은 교활한 지혜가 아니고서는 당해 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의 정원사는 마치 밤중에 죽으면 아침에 되살아나는 야생의 곰을 부질없이 진종일 쫓아다니는 발할라의 영웅들처럼 되살아날 길이 없는 토끼들을 신이 나서 죽여 버리는 것이었다. 그는 칠십이 넘은 늙은이였지만, 종일 걸어다니고 16마일이나 되는 산길을 자전거를 타고 일터에 다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쁨의 샘은 마르는 법이 없었다. 그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그 토끼'들이었다. 그런데 우리 지성인은 이와 같이 단순한 기쁨을 느낄 수 없다. 대관절 토끼와 같은 조그마한 동물을 상대로 무슨 기쁨을 느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런 이야기를 해본댔자 별로 신통할 것이 없다. 토끼는 황열병의 병균보다 덩치가 훨씬 더 크다. 그러나 두뇌가 우수한 사람은 토끼보다도 황열병균과 싸울 때 행복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최고의 지식인들도 감정적인 내용에 치중하여 생각해 본다면, 나의 정원사의 같은 기쁨을 누릴 수가 있다. 단지 이러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행동에 대해서만 교육에서 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성공의 기쁨을 누리고자 하면 당연히 여러 가지 애로가 따르게 마련이다. 나중에 가서는 성공의 탑을 쌓아 올리고야 말지만, 처음에는 도저히 성공할 가망이 없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자기의 능력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것이 행복의 원천이 되는 것은 주로 이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사람은 언제나 성공하고, 자기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사람은 번번이 실패하고 놀라게 되는 것이다. 성공을 거둔 자의 놀라움은 행복에서 오는 놀라움이요, 실패한 자의 놀라움은 불행에서 오는 놀라움이다. 그러므로 교만하지 않다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라고 하겠다. 물론 너무 소심하여 아무 일도 감히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아도 탈이지만. 오늘의 지식계급에서 가장 행복한 인간은 과학자이다. 그들 가운에서도 뛰어난 자들은 대개가 감정이 단순하다. 그리하여 자기의 연구나 과업에서 깊은 만족을 느끼므로 식사를 해도 즐겁고 결혼생활도 행복하다. 예술가나 문학가는 결혼생활이 불행한 것을 예사로 생각하지만, 과학자들은 대체로 옛 그대로의 가정의 행복을 달게 받아들인다. 단순한 감정은 어려움에 부딪치지 않는 법이다. 복잡한 감정은 마치 강물에서 이는 거품과 같다. 고요히 흘러가던 강물이 어떤 장애물에 걸리면 거품이 인다. 생명력이 방해를 당하지 않는 이상 표면에 물결이 일지 않는다. 그리고 그 힘은 보는 눈을 갖지 못한 자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다. 과학자의 생활 속에서의 행복의 모든 조건이 이루어진다. 그들은 자기 능력을 최대한으로 이용한다. 그리하여 자기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 대중에게도 소중한 성과를 이루어 놓는다. 심지어 사회 대중이 과학이 무엇인지 전혀 모를 경우에도 그러하다. 이런 점에서 과학자는 예술가보다 행복하다. 대중이 그림이나 시를 이해하지 못할 때, 저것은 나쁜 그림이요, 나쁜 시라고 단정해 버린다. 대중이 상대성 원리를 이해하지 못할 때는(정당하게도) 교육이 불충분하다고 단정한다. 그러므로 최대의 화가가 아틀리에에서 굶어죽는 경우가 있어도, 아인슈타인은 온 세상에서 존경을 받는다. 화가는 불행해도 아인슈타인은 행복하다. 사회 대중의 의혹을 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생활에서 참된 행복을 찾을 수는 없다. 골방 속에 들어앉아서 냉정한 바깥 세상을 잊어버린다면 별문제이지만. 그런데 과학자는 동료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므로 골방 속에 들어앉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는 이와 반대로 남에게 멸시를 당하느냐, 혹은 남을 멸시하느냐의 두 가지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하는 괴로운 입장에 서게 된다. 그의 재능이 일류에 속한다면 이러한 불행 가운데서 어느 하나를 당하여, 자기의 재능을 나타내면 전자의 불행을 초래하고 재능을 나타내지 않는다면 후자의 불행을 초래할 것이다. 이것은 언제 어디서나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줄리우스 2세는 미켈란젤로를 학대했는지 모르지만, 미켈란젤로가 결코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인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늘의 백만장자들은 예술가가 죽은 연후에 그들에게 돈을 뿌리지만, 예술가의 작품이 자기 사업만큼 위대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대체로 예술가가 과학자보다 행복하지 못한다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유럽의 지식 청년들에게서 때때로 찾아볼 수 있는 냉소적인 태도는 쾌락과 무기력을 결합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인간은 무기력하면 당연히 세상에서 아무 일도 할 가치가 없다고 느끼게 마련이며, 한편 쾌락은 이러한 감정의 괴로움을 감당케 한다. 오늘날 동양의 대학생들은 서구 대학생들과는 달리 사회의 여론을 상당히 수입을 올릴 기회가 훨씬 적다. 동양의 청년들은 유능하며 또한 향락에 빠지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서 냉소자가 되지 않고, 개혁자나 혁명가가 된다. 개혁자나 혁명가가 누리는 행복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전개에 의하여 결정된다. 그들이 설령 박해를 당하더라도 향락을 일삼는 냉소가보다는 진정한 행복을 느낀다. 나는 우리 학교를 찾아온 중국 청년 한 사람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는 고국에 돌아가면 중국의 반동지역에 학교를 하나 세우겠다고 했다. 그는 결국 자기 모가지가 달아날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내가 몹시 부러워할 만큼 아늑한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이런 야심적인 행복만이 유일한 행복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행복은 사실상 극히 소수의 사람에게만 허용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비범한 넓은 시야와 일종의 어떤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뛰어난 과학자만이 연구생활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어떤 주장을 펴나가는 데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비단 지도자적인 입장에 있는 정치가만이 아니다. 세상에서 찬양 받을 것을 원치 않고 자기가 타고난 능력을 발휘하는 것만으로 만족을 느낄 수 있다면--어떤 특기를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연구 생활에서 오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두 다리를 쓸 수 없게 되었지만 일생 동안 참된 행복의 길을 걸어간 사람을 알고 있다. 그는 장미꽃을 좀먹는 해충에 대하여 연구를 발표하여 다섯 권의 책을 발간했다. 거기에 그의 행복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내가 보기에는 그 방면의 권위자였다. 나는 패각학자를 몇 사람 알고 있다. 나는 조개껍질의 연구가 그들에게 만족감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식자공 한 사람을 알고 있다. 예술적인 활자를 발명하기에 전력을 다하는 사람들이 저마다 그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그는 남의 존경을 받는 기쁨보다 자기 기술을 발휘하여 얻는 기쁨에서 더욱 큰 행복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 기쁨은 마치 무용가가 무용을 하면서 느끼는 기쁨과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행복의 원천은 어떤 주의를 신봉하는 것이다. 그것은 피압박 민족의 혁명가나 사회주의자, 또는 민주주의자와 같은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겸손한 신념도 가리킨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영국 사람은 이스라엘의 잃어진 10부족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거의가 행복했지만, 에피렘의 유일한 부족이라고 믿는 사람은 무척 불행했다. 나는 독자들에게 이런 신념을 갖도록 권고하려는 것은 아니다. 허위적인 신념 위에서는 도저히 행복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독자들에게 인간은 '밤이나 도토리를 먹고도 살 수가 있다'는 신념을 갖기를 권고할 수 없다. 허무 맹랑하지 않은 어떤 뚜렷한 목표에 대하여 참으로 관심을 갖는 사람은 한가한 시간을 보내기 위한 일거리를 갖는 것이요, 또 인생의 허무감에 대한 좋은 해독제를 갖게 되는 것이다. 유흥이나 오락은 대체로 행복의 근본적인 원천이 되지 못하며, 현실을 도식하는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참된 행복은 무엇보다도 인간과 사물에 대하여 호의적인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정다운 관심을 일종의 애정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욕심이 많으며 소유욕이 강하여 언제나 커다란 반응을 요구하는 그러한 애정은 아니다. 이런 애정은 오히려 불행의 원인이 되기 쉽다. 행복을 증진시키는 애정은, 즐겨 남을 관찰하여 각자의 특징과 장점을 기뻐하며 자기와 접촉하는 사람의 이득과 즐거움을 증진시키려고는 할망정, 상대방을 지배하여 엄청난 칭찬을 받으려는 욕심은 부리지 않는다. 대인관계에서 이러한 태도를 갖는 사람은 행복의 원천이 되며, 그 보상으로서 따뜻한 대접을 받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는 분노를 살 만한 인물도 그에게는 중요한 흥미의 대상이 된다. 남이 아무리 기를 써도 되지 않는 일을 그는 손쉽게 이루어 놓는다. 그는 스스로' 행복하고 또 남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 이처럼 남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으므로 그는 더욱 행복하다. 그러나 모든 것은 진실해야 한다. 행복의 꽃은 의무감에서 비롯되는 자기 희생으로는 피어나지 않는다. 의무감이란 일을 해 나가는 데는 필요하지만, 대인관계에 있어서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인간은 저마다 남의 호감을 사려고 한다. 그런데 누구나 억지로 상대방을 인정하기를 원치 않는다. 애쓰지 않고 자연히 여러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 행복의 커다란 원천이 된다. 나는 앞의 글에서 '사물에 대한 정다운 흥미'에 대하여 이야기했지만 이 말은 어쩌면 무리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독자들은 사물에 대해서는 친애한 감정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지질학자가 바위를 대할 때나 고고학자가 유적에 접할 때 느끼는 흥미는 우정과 비슷한 데가 있다. 우리의 대인관계나 대사회적인 태도의 윤리는 마땅히 이래야 하는 거이다. 우리는 사물에 대해 정다운 관심보다 절대적인 감정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거미를 싫어하여, 거미들이 적은 데서 살려는 마음에서 거미의 습성에 관한 여러 가지 사실을 수집해 볼 것이다. 이러한 관심은 지질학자가 바위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만족감을 줄 수는 없다. 사물에 대한 관심은 인간에 대한 관심보다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행복의 요소로서 그 가치가 적지만 역시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세계는 넓고 인간의 힘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의 모든 행복이 개인적인 환경에 국한된다면, 인생이 줄 수 있는 이상의 것을 인생에게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요구가 너무 크면 그 만족은 적은 법이다. '토렌트의 회의'니 '전체의 역사'니 하는 문제에 참된 흥미를 느낌으로써 인생의 고민을 잊을 수 있는 사람은 비인간세계에서 돌아올 때, 자기 자신의 고민을 가장 슬기롭게 처리할 수 있는 침착성과 휴식을 얻은 셈이며, 또한 당분간이나마 참된 행복을 그동안에 경험한 셈이다. 행복의 비결은 이렇다. 즉 당신이 흥미를 느끼는 세계를 될 수 있는 대로 넓히라. 당신이 대하는 인간과 사물에 가급적 적대감을 품지 말고 애정을 가지라. 행복한 인간이란 흡사 건전한 식욕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과 같다. 그리고 식욕과 인생의 관계는 흥미와 인생의 관계와 같다. 식사를 귀찮게 여기는 사람은 바이런과 같은 불행에 빠진 사람이다. 또한 의무감에서 식사를 하는 병자는 금욕주의자와 비슷하며, 대식가는 방탄한 자와 같고, 식도락가는 인생의 즐거움의 절반은 아름답지 못하다고 비난하는 탐미주의자와 같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타입 중에서, 아마도 대식가만 제외하고는 저마다 건전한 식욕을 가진 사람을 멸시하며 자기가 격이 더 높은 듯이 생각한다. 그들은 환멸의 높은 자리에서 인생을 내려다보고, 이러한 사람을 단순한 인간들이라고 비웃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태도를 찬성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에는 모든 환멸을 일조의 병이다. A는 딸기를 좋아하지만, B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자. 이 경우에 후작 나을 것이 무엇인가? 인간을 떠나서 추상적으로 딸기가 좋다든가, 혹은 좋지 않다든가 하는 문제를 해명할 수는 없다. 다만 좋아하는 인간에게는 좋고 싫어하는 인간에게는 좋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좋아하는 사람은 싫어하는 사람이 갖지 못하는 기쁨을 하나 더 갖고 있는 것이다. 작은 일에 대하여 진리인 것은 큰 일에 대하여 진리이다. 흥미 분야가 넓어질수록 행복을 누릴 기회가 많아지며, 운명의 지배를 적게 받기 마련이다. 하나를 잃어 버리면 다른 것으로 대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모든 일에 대하여 한결같이 흥미를 느끼기에는 너무나 짧다. 그러나 하루하루를 충당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일에 되도록 흥미를 느끼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는 자칫하면 눈을 내부로 돌리기 쉽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눈앞에 전개되는 세계의 천태만상을 외면하고 내부의 공허를 들여다보는 병에 걸리기 쉽다. 이러한 내향적인 병폐에서 비롯되는 불행에 마치 위대한 무엇이라도 있는 듯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옛날에 소시지를 만드는 기계가 두 대 있었다. 그 기계의 구조는 묘하게 되어 있어서, 돼지에게서 바로 맛좋은 소시지가 되어 나오는 것이었다. 한 기계는 돼지에 대한 흥미를 갖고 많은 소시지를 만들었다. 다른 기계가 말하였다. "그까짓 돼지가 대관절 대체 뭐란 말이나, 내 기계는 어느 돼지보다도 훨씬 재미있고 놀랍다." 이 기계는 돼지를 외면하고 몸소 자기 내부의 됨됨이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돼지고기가 들어오지 않게 되자, 기계의 내부는 기능을 중지했다. 기계는 연구를 거듭할수록 자기 자신이 어리석은 것 같았다. 맛좋은 소시지를 만들어 내던 기계가 움직이지 않게 된 것이다. 이 기계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제2의 기계는, 말하자면 흥미를 잃어버린 인간과 같으며, 제1의 기계는 흥미진진한 인간과 같다. 인간의 정신은 정묘한 기계처럼 여러 가지 재료로 신기하게 훌륭한 제품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외부에서 재료가 제공되지 않으면 기계는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 그런데 정신은 이 소세지 제조기와 달라소 자기 자신의 힘으로 재료를 취해야 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사건들은 우리의 흥미를 통해 경험된다. 만일 사물이 우리의 흥미를 끌지 못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창조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흥미가 내부에 향한 사람은 주목할 만한 대상을 좀처럼 찾아내지 못한다. 그러나 주의력이 외부로 향한 사람이 가끔 자기 자신을 반성해 볼 때, 다채롭고 흥미 있는 여러 가지 요소가 서로 분리되었다가 다시금 결합하여 아름답고 재미있는 세계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흥미의 세계는 한정이 없다. 샬록 홈스는 행길에 떨어진 모자를 집어들고 살펴본 결과, 그 모자의 임자는 술로 가산을 탕진하고 아내는 그에게 정나미가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연한 일이 이와 같은 흥미 있는 세계를 안겨 주는 사람에게는 인생이 지루할 까닭이 없다. 일찍이 톨스토이가 새로운 생활에 들어가기 이전에 청년시절에 전재에서 세운 공로로 용사의 훈장을 탄 일이 있지만, 장기에 도취되어 그 수여식에 참석 못한 일이 있었다. 훈장을 타건 말건 그런 문제는 톨스토이의 안중에 없었기 때문에, 이것으로 톨스토이를 탓할 수는 없지만, 그만 못한 자가 그런 행동을 했다면 필경 어리석은 자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자기가 하는 일이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세계가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쉽다. 그런 것을 알아서 무엇하느냐 하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대답이 준비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에게 필요한 활동과 모순되지 않는 올바른 세계관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머물러 있는 시간은 그다지 긴 것이 아니다. 그리고 신비스러운 이 지구와, 이 지구가 우주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하여,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알아두어야 할 것은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설사 불완전한 지식일지라도, 그 자식을 얻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치 극장에 가서 연극을 보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세계는 슬픈 일, 우스운 일, 용감한 일, 기이한 일, 놀라운 일 등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세계의 삼라만상에 대하여 흥미를 느낄 수 없는 사람은 인생의 소중한 특권을 하나 포기하는 셈이다. 조화를 이룬 감정은 매우 귀중한 것이다. 그것은 위로의 힘이 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괜히 흥분하기 쉽고 긴장하기가 쉽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작은 한 구석을 차지하고 삶에서 죽음에 이르는 짧은 기간에 부당하게 당한 인상을 받기 쉽다. 자기를 소중한 존재라고 흥분하며 과대평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일은 열심히 하게 될는지는 모르지만 잘하지는 못할 것이다. 높은 목적을 향해 나가는 작은 일들은 저속한 목적을 이루려는 큰 일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그러나 활동적인 생활만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은 나와 견해가 다를 것이다. 사업밖에 모르는 사람들은 언제나 광신에 빠질 우려가 있다. 광신은 본래 인생의 여러 가지 목적을 다 저버리고, 오직 한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언제나 물불울 헤아리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광신적인 태도를 예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약은, 인간의 생명과 그리고 인간이 이 우주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똑바로 아는 것밖에 없다. 교육이 단지 어떤 기술을 배우는 것으로 격하된 결과, 세계를 공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정신의 시야를 넓히려고 하지 않는 것이 현대의 고등교육이 지닌 또 하나의 결함이다. 예를 들어 정당 싸움에서 자기 당이 승리하기 위해 애쓴다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 투쟁의 과정에서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세상에 대한 증오심과, 폭력과, 의혹을 조장하는 방법도 사양치 않는다. 그리하여 외국 국민을 욕되게 해서까지 승리를 얻기 위한 가장 가까운 방도를 찾는 경우도 있다. 보는 눈이 현재에만 국한되어 있거나 무조건 능률만 올리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불미스러운 방법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당장은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머지 않아 반드시 실패하고 말 것이다. 눈앞의 실리만을 추구하는 태도를 초월하여 원대한 그리고 서서히 발전하는 목표를 가질 때, 당신은 한 사람의 고독한 존재가 아니라, 인류를 문명생활로 이끌어 가는 대행렬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인생관을 지니고 살아갈 때, 당신은 인생의 어떤 길을 걸어가든지 깊은 행복을 느낄 것이다. 인간이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모든 시대의 위대한 것과의 정신적인 교섭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한 개인의 죽음은 작은 사건에 불과하다. 고등교육을 내 이상대로 재건하는 힘이 있다면, 나는 낡은 전통적인 종교 대신에, 다른 것--종교하고 부를 수 없는--을 대치하고 싶다. 그것은 오직 실제적인 현실에 관심을 집중시키기 때문에 결코 종교는 아니다. 또한 낡은 전통적인 종교는 젊은이들에게는 거의 매력을 상실하고 대체로 지능이나 정신이 몽롱한 사람에게나 작용을 한다. 나는 청년들에게 우리의 과거를 분명히 알리는 동시에 인류의 미래는 과거보다 무한히 길다는 것을 잘 인식시키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한없이 작다는 것과, 이 지구의 생명은 한낱 순간적인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하는 교육을 실시하고자 한다. 개인의 존재가 보잘것없음을 강조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청년들의 가슴 속에 개인의 위대성을 느끼게 하고 또한 일월성신의 대우주 속에 똑같은 가치를 지닌 존재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한다. 일찍이 철인 스피노자는 인간의 자유와 부자유에 대하여 서술한 적이 있다. 그의 표현 방식과 술어가 난해하여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그 사상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사상과 그의 철학은 근본 문제에 있어서는 비슷하다. 정신의 위대성에 대하여 잠시라도 그리고 조금이라도 느낀 사람이라면, 사소한 불행에 시달림을 받고 어떤 운명이 닥칠지 몰라 두려워하는 비천한 이기주의적인 인간으로 전락되면 도저히 행복할 수가 없는 것이다.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세계의 곳곳에서 불어닥치는 자유의 바람을 들이마신다. 그는 인간의 힘이 닿는 데까지, 자기와 인생과 세계를 바라볼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생명이 보잘것없고, 순간적임을 깨닫는 동시에, 한편 개인의 정신 속에는 우주가 지니고 있는 모든 가치가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 세계를 비칠 수 있는 자는, 그것이 어느 의미에서 세계만큼 크다는 것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 자기를 환경의 노예로 만드는 공포에서 벗어날 때 커다란 기쁨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외면적인' 생활은 모든 우여곡절과 성쇠가 거듭되지만 깊은 정신 속에서는 언제나 행복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중용은 재미없는 주장이다. 나는 젊었을 때 조소와 의분을 금할 수 없는 심정으로 이 이론을 반대한 적이 있다. 나는 그 당시에 영웅적인 극단주의를 좋아했던 것이다. 진리는 반드시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실은 그것을 지지할 만한 증거가 별로 충분치 않은데도 재미있다고 해서 신봉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 이야기하는 중용도 재미없는 이론일지 모르지만, 여러 모로 비추어볼 때 하나의 진리임에 틀림이 없다. 적어도 노력과 체념에 관한 한 우리는 반드시 중용을 지켜야 한다. 이 두 가지 이론이 모두가 극단적인 지지자를 갖고 있다. 다시 말하면, 체념의 이론은 성자나 신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이요, 노력의 이론은 능률을 강조하는 전문가나 남성적인 기독교인들이 주로 강조하는 것이다. 노력과 체념은 서로 상반되지만, 각자 진리의 일면을 갖고 있다. 그러나 결코 전체는 아니다. 행복은 무르익은 과일처럼 복된 환경에 의해 입 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여기에 예외에 속하는 경우가 간혹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이 글의 제목을 "The Conquest of Happiness ; 행복의 정복"이라고 붙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피할 길 없는 불행과 심신의 여러 가지 질병과 투쟁 및 빈곤, 그리고 죄악의 충만한 이 세상에서 행복한 인간이 되려면 누구나 다 함께 당하는 여러 가지 불행의 원인과 과감히 싸울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기는 별로 힘을 들이지 않고서도 행복을 찾아내는 사람도 더러 있기는 하다. 천성이 선량하고 충분한 재산을 물려받은 데다가 튼튼한 몸에 훌륭한 취미까지 겸한 사람은 일생을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은 어찌하여 남들이 그렇게 아우성을 치는지 의아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이 넉넉하지 못하거나, 천성이 그리 선량하지 못하거나, 혹은 불행한 정열을 소유했거나 하여 조용히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은 권태로워서 견디지 못한다. 건강은 아무도 보장할 수 없는 선물이다. 또한 결혼도 반드시 행복의 원인이 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행복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성취이다. 여기에 도달하려면 내면적 그리고 외면적인 노력이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내면적인 노력에는 반드시 체념의 노력이 곁들어야 하므로 여기서는 단지 외면적인 노력만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살기 위해 일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 노력이 필요한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인도의 승려들은 신도의 공양으로 수고를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지만, 서구 사회에서는 이러한 방법으로 수입을 얻는 것을 옳게 생각하지 않는다. 서구는 인도의 건조한 열대지방과는 달라서, 겨울에 따뜻한 방에서 일하는 것보다 밖에 나가서 놀기를 좋아할 정도로 게으른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서구 세계에서는 체념만으로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서구 세계에서는 체념만으로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 서양 사람들은 대체로 일에 성공을 거두는 데서 만족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단지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어떤 직업, 예컨대 과학 연구에 있어서는 큰 수입이 없는 사람도 성공에 대한 만족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직업에 있어서 수입의 다과가 성공의 기준이 된다. 여기에 체념의 윤리가 필요하게 된다. 왜냐하면 서로 생존경쟁을 해야 하는 사회이므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식을 훌륭히 기르는 데 필요한 노력의 양은 명확하므로, 아무도 그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체념의 윤리를 숭상하는 나라와 그리고 그릇된 영적인 인생관을 갖고 있는 사회는 사망률이 높다. 의학, 정신위생학, 방부제, 영양 등은 현실적인 관심이 없이는 발전할 수 없다. 그것은 지식과 정력을 물질적인 세계에 쏟기 마련이다. 물질은 인간의 환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먼지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자기 어린애를 싱겁게 죽이는 경우도 있다. 인간이 모든 사회적인 활동을 하게 되는 동기는 목적으로 재물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 한 어떤 권력에 대한 욕구이다. 남의 비참한 모습을 보았을 때 일어나는 순수한 이타적인 동기에서 행동하는 사람은, 그 참상을 덮어 줄 수 있는 힘을 원한다. 권력에 대하여 전혀 무관심한 사람은 자기 이웃 사람에게도 무관심하다. 그러므로 어떤 권력 의욕은 훌륭한 사회를 이룩할 수 있는 인간의 한 도구로 인정해야 한다. 권력에 대한 욕구는 이것이 훼방을 당하지 않는 한, 노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유럽인의 논리로 보면 당연하지만, 이른바 '동방의 지혜'를 좋게 생각하는 서구 사람들도 있다. 동양인들이 그것을 포기하려고 할 때 이들에게는 나의 주장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말한 보람이 있게 된다. 행복을 정복하는데 있어서, 체념이 할 일은 따로 있는 것이다. 그것은 노력이 지닌 역할만큼이나 소중하다. 이 세상에서 이로운 일의 절반은 해로운 일과 싸우는 데서 생긴다. 여러 가지 사실을 알기 위해 소비하는 시간은 낭비가 아니다. 그후의 일은 정력에 대한 자극제로써 언제나 이기심을 팽창시켜야 하는 자들이 만드는 일보다 해가 훨씬 적다. 자기 자신의 진실을 용감하게 들여다보려는 태도에는, 어떤 체념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체념은 처음에는 괴로울지 모르지만, 결국에 가서는 하나의 진실로 유일한 방패가 되는 것이다. 결코 믿을 수 없는 일을 언제까지나 믿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피곤하고 화가 치미는 것은 없다. 이러한 노력은 버리는 것이, 확고한 행복을 얻는 필수조건이 된다. 행복은 분명히 일부는 외면적인 환경에 달려 있고, 일부는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 나는 역기서 자기 자신에 달려 있는 행복에 대해서 말했다. 이 부분의 행복에 대한 비결은 매우 간단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 종교적인 신조가 없으면 행복을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불행한 자들은 슬픔의 원인은 매우 복잡하며, 거기에는 많은 지적인 요소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것이 행 . 불행의 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신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불행한 자는 대체로 갖고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각자가 행복과 불행을 자기 신조에 돌릴 것이다. 그러나 참된 원인은 다른 데 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행복을 누리려면 물질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것은 간단하다--음식, 집, 건강, 사랑, 사업의 성공, 세상 사람들의 존경 등등. 어떤 사람에게는 부성애가 필요하다. 이런 것이 없어도 행복한 자는 특수한 인간이다. 그러나 이런 것을 즐기고 계획적인 노력에 의해 이를 얻을 수 있는 경우라도 여전히 불행한 인간은 심리적인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 감옥 속에서 행복을 찾는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자기 자신 속에 몰아넣은 정념이야말로 가장 고약한 감옥을 만드는 것이다. 이런 정념 가운데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은 공포, 질투, 죄의식, 자기 찬미이다. 이런 정념에 사로잡힐 경우에 우리의 욕구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만 쏠리게 된다. 여기서는 외부적인 세계에 대하여 참된 관심을 갖지 않고, 오직 외부적인 세계가 우리를 해치거나, 또 우리의 이기주의를 만족시킬 수 없는 데 대해서만 관심을 가질 따름이다. 인생의 다양성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을 따뜻한 옷에 감싸려고 하는 것은 주로 공포 때문이다. 가시에 의해 그 옷이 찢기고 그 구멍에 찬바람이 스며든다. 따뜻한 옷에 싸여 성장한 사람은 찬바람을 맞고 성장한 사람보다 당하는 고통이 크다. 그리고 언제나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사람은 마음 속으로는 자기의 더러운 몰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혹시 어떤 불행한 일이 일어나, 자기의 허위가 드러나지 않을까 하여 언제나 불안에 싸여 살아간다. 우리가 자기 본위의 욕심에 사로잡히는 폐단의 하나는, 인생에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점이다. 자기만을 아끼는 자는 애정이 혼란 되어 있다는 비난을 사지 않지만, 헌신의 대상이 언제나 같으므로 결국은 참을 수 없는 권태에 빠지게 마련이다. 죄의식으로 하여 시달림을 받는 사람은 특수한 자애심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이 광대한 우주에서 자기의 덕행만이 가장 중대하게 보인다. 이런 특수한 자기 집념을 권장한 것은 어떤 전통적인 종교의 커다란 결점이다. 행복한 사람은 개관적으로 살아가고 자유로운 애정과 광범위한 흥미를 갖고 이를 통하여 자기의 행복을 소유하는 자요, 자기가 남에게 흥미와 애정이 대상이 되어 행복을 느끼는 자이다. 남의 사랑을 받는 것은 행복의 커다란 원인이 된다. 그러나 대체로 애정을 요구하는 자는 사랑을 받지 못하는 법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남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남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다.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처럼, 이해타산에서 사랑을 베푸는 것은 하나의 넌센스이다. 자기 세계에만 몰두하는 병폐를 극복하면, 어떤 객관적 흥미가 마음 속에 솟아나는가는 당신의 성격과 외부적인 환경의 작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우표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면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미리 말할 필요는 없다. 우선 우표수집에 착수해 보라. 그렇게 하면 그것이 시시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당신이 참으로 흥미를 느끼는 일만이 실제로 행복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안에 빠져 들어가지 않게 될 때, 진정한 흥미가 우러난다고 믿어도 무방하다. 행복한 생활은 선한 생활과 닮은 데가 많다. 전문적으로 도덕을 숭상하는 자들은, 자기 부정을 중요하게 생각함으로써 잘못된 주장을 내세우게 되었다. 의식적인 자기 부정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아에 전념하도록 하고, 자기가 무엇을 희생하였는가를 기억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때때로 직접적인 목적 달성에 실패하고 또 거의 언제나 구극적인 목적 달성에 실패하게 된다. 우리에게 긴요한 것은 자기 부정이 아니라, 관심을 외부로 돌리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자발적으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자기 덕을 추구하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이 의식적인 자기 부정에서 이룰 수 있는 행동과 마찬가지의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한 쾌락주의자 즉 행복을 선이라고 생각하는 견지에서 이 글을 썼다. 그런데 쾌락주의자의 입장에서 훌륭하다고 보는 행동은 진정한 도덕가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행동과 대동소이하다. 물론 도덕가들이 저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신 상태보다 행동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행동이 인간에게 주는 영향은 그때 그때의 정신상태에 의해서 상당히 다르게 된다. 물에 빠진 어린 이를 보고 곧 건져내야겠다는 충동에서 그 아이를 건져내는 것은 하나의 선행이다. 만일 반대로 "불쌍한 자를 구제하는 것은 선행이다. 나는 선한 인간이 되고 싶다. 그러므로 나는 이 어린애를 건져내야겠다"고 말한다면, 그는 전보다도 더 악한 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내가 주장하는 생활태도와 전통적인 도덕가들이 주장하는 생활 태도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예컨대 전통적인 도덕가들은 사랑은 이기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의 말이 어느 의미에서는 옳다. 다시 말하자면, 어느 한도까지는 이기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의 성공과 행복은 서로 연관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만일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에게 청혼을 할 경우에, 그 여자의 행복을 절실히 바라는 동시에 그 여자는 자기에게 희생적으로 대해 줄 것이라고 기대할 때, 그 여자가 이에 만족을 느낄 수 있을지는 의심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물론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것이 당연하지만, 결코 우리 자신의 행복과 바꾸어서는 안 된다. 자기와 외부 세계와의 대립은 자기 부정의 우리 속에 내포되어 있지만, 우리가 남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갖는 순간에 그 대립은 없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관심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빌리어드의 공처럼 충돌하는 것밖에는 다른 실체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서로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 생명의 긴 물줄기의 한 부분으로 느끼게 된다. 인간은 피차에 통일을 상실하고, 분열될 경우에 모든 불행이 일어난다. 그리고 의식적인 정신과 무의식적인 정신의 협력이 부족할 경우에 자아의 분열이 생기는 것이다. 객관적 세계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힘으로 자기 자신과 사회가 피차에 결합되지 못하면 그 통일은 상실하고 만다. 행복한 인간은 자기와 사회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괴로워하는 일이 없다. 그의 인격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도 분열되지 않으며, 세계에 대하여도 대립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을 '우주의 시민'이라고 생각하고, 우주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마음껏 향락하며, 자기들 뒤에 오는 생명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함으로써 죽음에 대하여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다. 이처럼 생명의 큰 물줄기와 본능적으로 깊이 결합될 경우에, 우리는 가장 큰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제 2 부 라즈니쉬 자신이 바다라고 주장하는 파도가 있다면 그는 미친 것이다 알랭 행복에 대한 단장 톨스토이 아직도 행복은 가능한가 휴 프레이더 더 이상 장난할 시간이 없다 자신이 바다라고 주장하는 파도가 있다면 그는 미친 것이다 오쇼 라즈니쉬 영혼의 스승이라 불리우는 인도 태생의 종교적 사상가. 21세 때 얻은 깨달음으로 아쉬람을 열어 철학을 전파하고 있음. 주요 저서에 "죽음의 예술" "영혼의 철학" "신비주의자의 노래" 등이 있음. 왜 나는 아직도 행복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그대가 여전히 행복을 좇고 있기 때문이다. 행복은 결코 추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하나의 부산물이며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만일 행복을 목표로 삼는다면 그대는 결코 행복을 얻지 못하고 항상 놓치고 말 것이다. 행복은 조용히 다가온다. 마치 휘파람처럼, 그대의 그림자처럼 살며시 다가오는 것이다. 그대가 어떤 것에 완전히 몰두하여 행복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을 때 행복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대가 행복을 생각할 때 행복은 그대 곁에 없다. 행복은 참으로 교만하다. 그대가 행복을 찾으려고 주위를 돌아보면 행복은 곧 사라져 버린다. 그대가 '나는 행복한가, 행복하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기 시작할 때, 그대는 결코 행복하지 않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법이다. 행복한 사람이 어떻게 행복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겠는가? 오로지 불행한 사람만이 불행에 대해 생각하고, 행복을 생각함으로써 그는 더욱 불행해지는 것이다.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작은 강아지가 자신의 꼬리를 뒤쫓고 있는 것을 본 어미 개가 강아지에게 물었다. "너는 왜 그렇게 네 꼬리를 쫓고 있니?" 그러자 강아지가 말했다. "나는 나 이전의 어떠한 개도 해결하지 못한 우주의 온갖 문제들을 해결했어요. 그래서 나는 개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은 행복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 행복은 바로 내 꼬리에 있음을 알았어요. 그래서 나는 내 꼬리를 뒤쫓고 있는 거예요. 내가 꼬리를 잡을 때, 나는 행복해질 거예요." 어미 개가 말했다. "나도 내 나름의 방법대로 우주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왔고, 몇 가지 견해를 갖게 되었단다. 나 역시 개에게는 행복이 좋은 것이며 그 행복은 내 꼬리에 있다고 판단했단다. 그러나 내가 내 자신의 일에 열중할 때, 그 꼬리는 자연히 나를 따라오기 때문에 그것을 뒤쫓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단다." 이 늙은 개의 생각에 귀를 기울어라. 그대는 개가 행복할 때 꼬리를 흔드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따라서 개들은 자연히 행복이 꼬리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개들은 꼬리를 쫓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대는 그대 자신의 꼬리를 쫓을 수가 없다. 그대가 뛰면 꼬리도 따라서 뛴다. 그대가 더 높이 뛰면 꼬리는 더울 더 높이 뛴다. 그리고 결국 그대는 미쳐 버리고 말 것이다. 실제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것은 아루프의 질문이다. 늙은 개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 그대가 자신의 일에 열중할 때, 행복은 자연히 뒤따라올 거이다. 이 한 가지 사실만은 꼭 알아야 한다. 이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대가 하고 있는 일에 몰두하라, 그것이 위대한 일인지 아닌지 생각지 말라. 방을 청소할 때는 완전히 거기에 몰두하고, 요리할 때는 거기에만 열중하며, 세탁을 할 때에도 세탁에만 몰두하라. 그대가 자신의 행동에 완전히 몰두할 때 에고는 사라진다. 그때는 에고가 존재할 공간이 모두 사라진다. 에고가 존재하자 않는 그 순간 바로 행복이 존재하는 것이다. 에고는 불행하며, 무에고는 행복이다. 에고는 그대가 분열될 때에만 존재한다. 그대가 조화로운 상태에 있을 때, 에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춤을 출 때 그대가 춤 자체가 되어 버린다면 에고는 사라진다. 노래를 부를 때 그대가 노래 자체가 되어 버린다면 에고가 사라지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을 때 그대가 무위 자체가 되어 버린다면 에고는 사라진다. 행동을 하든 하지 않든 한 가지만은 명심하라. 즉 그것이 무엇이든 거기에 몰두하라. 그대가 아침 산책을 나갈 때는 완전히 거기에 몰두하라. 그대 자신에 관한 모든 것, 행복에 관한 모든 것, 건강에 관한 모든 것, 대기 중의 산소, 모든 주의사항, 그대가 아침 산책의 아름다운 경험에 관해 읽었던 모든 것들, 그리고 그밖의 다른 모든 것들을 잊어 버리라. 그저 걷기만 하라, 그러면 어느날 갑자기 그대는 자신이 완전히 행복에 도달해 있고 행복이 그대를 초대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때 그대는 행복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고 그것이 자신의 곁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행복과의 접촉은 끊어지고 그대의 행복은 사라지고 말 것 것이다. 그대가 들어올 때 행복은 사라지고 그대가 나갈 때 행복은 들어온다. 그대는 행복과 함께 있을 수 없다. 아루프와 행복은 결코 같은 방에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대 자신을 잃기 시작하라. 아루프, 그대는 너무도 열심히 행복을 추구하고, 끊임없이 행복에 대해 생각해 왔음이 틀림없고,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계획했음에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는 결코 행복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대가 지나치게 행복을 추구한다면 그대에게 있어서 행복은 지옥이 되고 말 것이다. 만일 그대가 행복에 관한 것을 모두 잊는다면, 행복은 극히 자연스럽게 그대에게 다가올 것이다. 자의식은 결코 행복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대를 하늘처럼 광대하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그대에게 행복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러므로 행복의 기술은 망각의 기술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순간에도 거기에 대한--어떻게 망각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행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등에 대한--계획을 세우지 않도록 명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똑같은 함정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결코 '어떻게'의 문제가 아니다. 그대는 단순히 그것을 하기만 하면 된다. 그것은 내일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당장 행하도록 하라. 아루프, 내 말을 들어라. 그대가 내 말을 듣는 바로 이 순간, 내 말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려 하지 말라. 그것을 이해하려 하지도 말라. 아무런 계획도 세우려 하지 말라 그것을 이해하려 하지도 말라. 아무런 계획도 세우려 하지 말라. 그저 듣기만 하라. 나와 함께 있기만 하라. 그러면 그 순간 행복은 그대 곁에 있다. 그대가 아무런 자아도 없이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어떻게 행복을 놓칠 수가 있겠는가? 자신을 망각하고 조용히 뭔가에 몰두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말은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다. 만일 그대가 내 말에, 나의 존재에 몰두할 수 없다면, 그대는 다른 어떤 것에도 몰두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내 말을 듣기만 하라.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하라. 한 나이 많은 랍비가 사람들에게 "죽기 전에 회개하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랍비여, 우리는 우리가 죽는 날을 알지 못하나이다"하고 사람들은 말했다. "그렇다면 오늘, 지금 당장 회개하라." 모른다고 해서 뒤로 미루지 말라. 내일, 아니 다음 순간 그대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그대의 유일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그대가 가진 유일한 순간이며, 여기야말로 그대의 유일한 장소이다. 나는 그대에게 준비하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도의 전체적인 메세지는 '그대는 이미 그 자체로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대가 이 순간을 즐기기 시작할 때, 행복은 그대를 따라오게 될 것이다. 행복은 꼬리에 있기 때문에 항상 그대를 따라온다. 그대가 자신의 일에 몰두할 때, 꼬리는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다. 그대는 자녀의 삶에 대해 간섭하고, 그대의 아내의 삶에 대해 간섭하며, 남편과 형제와 친구와 연인의 삶을 간섭한다. 자신이 간섭을 함으로써 그들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그대는 그들을 불구로 만들고 있다. 그대의 간섭은 선인들이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들은 그것을 참으로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그것을 뱀에게 신발을 신기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대는 돕고 있고, 대단히 힘든 노력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며 위대한 일, 뱀에게 신발을 신기는 일을 하고 있으며, '뱀이 신발 없이 어떻게 걸을 수 있는가? 길도 험하고 가시들도 많아 신발이 없어 걷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일 거야. 삶은 가시들로 가득 차 있으므로 뱀에게 신발을 신겨 뱀을 도와야 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대는 결국 뱀을 죽이고 말 것이다. 인간을 도우려는 모든 노력들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개선하려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도 개선시키려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의 질병이 다른 사람들을 계속 뒤덮는다. 그러나 그대가 자신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중단하고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아무런 불평도 인색함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그대가 있는 그대로의 그대 자신을 사랑한다면, 모든 간섭은 사라진다. 그대가 몸이 아파서 의사를 부를 때 의사가 온다. 그런데 의사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그대는 더 이상 아프지 않다. 의사는 그대에게 어떠한 약도 주지 않았다. 다만 그의 존재, 관심, 사랑만을 보여 주었을 뿐이다. 그는 그대의 이마를 짚어 보고 맥을 짚어 볼 뿐이다. 그런데 그대는 갑자기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낀다. 그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고, 약도 주지 않았고, 진찰조차 하지 않았다. 그 의사가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라면 그가 진찰을 하기도 전에 병의 50퍼센트가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나머지 50퍼센트에 대해 그는 뭔가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이 인간을 치료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치료하는 주체는 항상 신이다. 인간은 다만 치유 에너지의 통로일 뿐이다. 인간의 치료가 유효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랑을 아는 사람들 서너 명이 서로 손을 잡고 환자 주위에 앉아 노래를 부르고 찬송을 한다면, 환자는 갑자기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도대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일까? 사랑을 아는 이 사람들은 신의 도구, 도를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된다. 그의 에너지는 항상 그의 내부에 있었다. 다만 그가 그 에너지와의 접촉을 상실했을 뿐이다. 내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는 곧잘 다리를 주무르게 하시곤 했다. 그는 옆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나 불러 다리를 주무르게 하셨다. 그분은 나이가 매우 많아 아무에게나 항상 "내 다리를 좀 주물러 주지 않겠니?"하고 말씀하시곤 했다. 나는 "네"하고 대답하고 다리를 주물러 드리기도 하고 때로는 "싫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왜, 무슨 일이 있니? 너는 곧잘 내 다리를 주물러 주지 않니? 내 다리를 너만큼 사랑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왜 가끔 싫다고 대답하지?" "내가 싫다고 대답할 때는 그것이 의무이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것이 책임일 때 나는 기꺼이 주물러 드려요." "그 둘이 어떻게 다르지?" 할아버지께서 물으셨다. "내가 사랑을 느낄 때, 할아버지의 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싶을 때,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해요.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형식적인 것이라고 느낄 때, 할아버지가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내가 해야 한다고 느낄 때, 아이들이 밖에서 놀며 나를 부르고 있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여기에 없어요. 그때 나는 할아버지 곁에 있지 않아요.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가 마사지를 원할 때 이따금 싫다고 말하기도 하고 때로는 '할아버지, 다리 주물러 드릴까요? 나는 지금 할아버지 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싶어요. 허락해 주세요.'라고 말하기도 하는 거예요." 그대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그대의 감정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행하라. 결코 그대의 가슴을 억압하지 말라. 마음은 사회의 부산물이므로 결코 마음에 따라 행동하지 말라. 그것은 그대의 진실이 아니다. 그대의 진실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움직이고 행하라. 결코 어떤 원리나 예절, 행동 페턴, 그리고 소위 말하는 공자의 '군자도'에 따라 행동하지 말라. 군자인 체하지 말라. 인간이면 그것으로 족하다. 또한 여자면 그것으로 족하다. 이따금 그대는 뭔가가 하고 싶어질 것이다. 하라! 거기에 그대의 가슴을 열어라. 그것은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다. 이따금 그대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라. 그 점을 명백히 밝혀라. 결코 그것을 감출 필요는 없다. 왜 인간은 기존의 것에 집착하고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는가? 거기에는 당연한 한 가지 이유가 있다. 우리는 기존의 것에 대해서는 효율적이며 새로운 것에 대해서는 서투르기 때문이다. 기존의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지만 새로운 것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배워야 한다. 새로운 것을 대할 때 그대는 자신의 무지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나 기존의 것에 대해서는 그대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대는 뭔가를 계속 반복해 왔고, 이제 그것을 기계적으로 할 수 있어 어떠한 의식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반면 새로운 것을 대할 때 그대는 항상 주의하고 의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이 잘못되고 말 것이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운전을 처음 배울 때 그대는 매우 주의한다. 그러나 운전을 다 배우고 나면 그대는 주의를 게을리 한다. 노래를 부르고, 라디오를 듣고, 친구와 이야기하고, 온갖 잡념을 떠올리며 기계적으로 마치 로보트처럼 운전을 계속한다. 이제 그대는 필요하지 않다. 기존의 것은 기계적이 되고 습관이 된다. 새로운 것에 대해 두려움이 따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 때문에 어린이들만이 쉽게 배울 수 있다. 나이를 먹어 갈수록 그대는 새로운 것을 배우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늙은 개에게 새로운 기술을 가르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낡은 기술들만을 계속 반복할 것이다. 나는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영어를 못하는 한 외교관이 미국 국회에 참석했다가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식당으로 가서 줄을 섰다. 그때 그는 앞에 있던 사람이 애플 파이와 커피를 주문하는 것을 듣고 자기도 애플 파이와 커피를 주문했다. 그리고 그는 2주 내내 애플 파이와 커피만을 주문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다른 것을 주문하고 싶어 다른 사람이 햄 샌드위치를 주문하는 것을 주의 깊게 듣고 자기도 햄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햄 샌드위치." 그는 카운터 맨에게 주문했다. "흰빵으로 할까요, 흑빵으로 할까요?" 카운터 맨이 물었다. "햄 샌드위치." 외교관은 반복해서 말했다. "흰빵입니까, 흑빵입니까?" "햄 샌드위치." 마침내 카운터 맨은 화가 나서 외교관의 코앞에 주먹을 들이대며 소리쳤다. "이것 봐요. 흰빵을 먹겠소?" "그냥 애플 파이와 커피를 주시오." 외교관은 대답했다. 누가 그처럼 골치 아픈 일을 자청하겠는가? 새로운 것은 위험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존의 것에 집착한다. 그러나 기존의 것에만 집착한다면 그대는 전혀 삶을 영위한다고 할 수 없다. 그대는 다만 명목상으로만 살고 있을 뿐이다. 삶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때만 가능하다. 삶은 신선해야 한다. 결코 아는 자가 되지 말고 언제까지나 배우는 자가 되라. 마음의 문을 닫지 말고 항상 열어 두도록 하라. 항상 무지하라. 축적된 지식을 던져 버리라. 자동적으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매일 그리고 매순간마다 그대가 알고 있는 것부터 벗어나 다시 어린애가 되도록 하라. 어린애처럼 순진해지는 것이 충만하게 사는 길이다. 나는 결코 학자도 아니고 학자들도 존경하지도 않는다. 언젠가 나는 E.Y.하버그의 아름다운 시를 읽고 있었다. 그 중 몇 귀절은 너무나도 감명 깊었다. 그 시의 일부를 명상해 보라. 시는 나와 같은 바보들이 짓지. 하지만 나무는 신만이 만들 수 있다네. 그리고 나무를 만드는 신만이 나와 같은 바보를 만든다네. 그러나 나와 같은 바보만이 나무를 만드는 신을 만들 수 있지. 나는 너무도 무식하다. 그러나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나는 내 자신을 개선할 어떠한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다. 만일 그대가 이따금 어색한 처지에 놓인다면,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브하그완은 이렇게 하라고 했는데 이건 옳지 않아"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대의 문제이다. 그대의 스승에게 헛점이 있을 때 그대는 약간 당혹감을 느끼고 그대의 에고가 상처받는다. 나에 관한 한 나는 실로 완벽하다. 그리고 나는 그대를 위해 계속 문제를 제기할 것이고, 그대는 해답을 발견한다. 항상 뭔가를 고안하고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하라. 내가 많은 것을 생각해 낼 수 있는데, 그대라고 왜 할 수 없겠는가? 그대는 내 말에서 어떤 비밀스러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늘 쉬운 일이다. 그대가 다른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없을 때, 항상 거기에 있는 은밀하고 신비스러운 의미를 발견하도록 노력하라. 이것은 꼭 필요한 것이다. 한 멋쟁이 신사가 불쌍한 거지에게 5달러 짜리 지폐를 주며 말했다. "자 이걸 받아. 이 돈이면 배를 채우고 술도 한두 잔 할 수 있을 거야." 그러자 그 거지는 곧바로 토니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생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만찬을 먹고 포도주도 한 병 마신 뒤 웨이터인 루이지에게 팁까지 주었다. "오, 정말 행복한 세상이야!" 멋쟁이 신사가 말했다. "모두들 행복해. 불쌍한 거지는 배불리 먹었고, 토니는 매상을 올렸고, 웨이터는 팁을 받았으니까. 그러면 나는... 나도 행복해. 그 지폐는 위조지폐였으니까." 결국 모든 사람이 행복해졌다. 몇 장의 위조지폐를 만들어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라.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다. 지나치게 사실에 집착하지 말라. 사실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허구일 뿐이다. 명심하라. 모든 것이 허구이다. 심지어는 여기에 있는 나와 그대의 존재마저도 엄청난 허구이다. 실제로는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로지 진리만이 존재할 뿐이다. 발생한 것은 모두가 허구이다. 존재하는 것은 존재할 뿐이므로 역사도 마찬가지로 허구이다. 실제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신은 역사도, 전기물도 가지고 있지 않다. 신은 다만 존재 할 뿐이며 과거도 미래도 없다. 행복에 대한 단장 알랭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평론가. 본명은 Emile Auguste Chartier.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헤겔, 루소 등의 사상을 훌륭하게 발전시킨 사상가로 언급되나 평생을 고교교사로 생활함. 주요 저서로 "행복에 대한 단장" 등이 있음. 슬픈 마리 주기적인 우울증에 관하여, 특히 어떤 심리학 교수가 진료소에서 발견한 저 슬픈 마리와 즐거운 마리에 대하여 반성해 보는 것도 흥미 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이야기는 벌써 잊어 버렸지만 보존해 둘 만한 가치가 있다. 이 아가씨는 시계처럼 정확하여 한 주일 동안은 즐거워하고, 다음 한 주일 동안은 슬퍼하는 것이었다. 즐거워할 때에는 모든 일이 잘 되었다. 비오는 날도 활짝 개인 날고 마찬가지로 좋아하고, 사소한 우정의 표시도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애정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면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불쾌한 감정이 일어나는 법이 없었다. 그녀의 보잘것없는 생각도, 마치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아름다운 꽃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권장하고 싶은 상태였다. 현자도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항아리에 두 개의 손잡이가 있는 것처럼, 어떠한 일에나 두 가지 면이 있다. 나쁘다고 생각하면 언제나 나쁘게 보인다. 좋다고 생각하면 언제나 좋게 보인다. 행복하려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한 주일 후에는 모든 기분이 변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맥이 풀렸다. 무슨 일에 대해서나 흥미를 가질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시들했다. 이미 행복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애정도 믿지 않았다. 자기는 아무에게도 사랑을 받은 적이 없다고 불평하고, 그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를 우매하고 못난 여자라고 단정했다. 자기의 이러한 병을 생각하고는 그 병을 더치게 했다. 그리고 이 사실에 대해서는 자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일종의 무서운 방법으로 조금씩 자살을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당신이 나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고요? 그렇지만 나는 당신의 연극에 넘어가지 않아요."하고 그녀는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이었다. 칭찬을 받고 나서는 놀린다고 생각하고, 친절한 대답을 들으면 모욕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비밀은 엉큼한 흉계였다. 불행한 자에게는 아무리 좋은 일도 시시하게 보이므로, 이와 같이 상상에서 오는 마음의 병은 치료 할 길이 없다. 행복을 얻으려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의지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 심리학 교수는 용감한 자를 위해 더욱 무서운 교훈, 더욱 두려운 시련을 발견했다. 이런 인간의 주기적인 심리활동에 대해 많은 관찰과 측정을 하는 동안에, 하루는 혈구를 입방체로 세어 보았다. 그러자 분명한 법칙이 나타났다. 기쁨을 느끼는 기간의 마지막 무렵에는 다시 많아지는 것이었다. 혈구의 다과--이것이 저 상상에서 오는 환각의 원인이었다. 이리하여 의사는 그녀의 까다로운 불평에 대하여 "안심하세요, 내일이면 행복하게 돼요."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말을 조금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를 사실상 슬프게만 생각하려고 드는 친구가, 이에 대하여 나에게 말했다. "뻔하지 않는가. 우리로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네. 생각만으로 혈구를 만들어 낼 수는 없네. 그러니 어떠한 철학도 소용없네. 이 커다란 세계는 여름과 겨울, 비오는 날과 개인 날--이렇게 그 법칙에 따라서 우리에게 기쁨과 슬픔을 줄 걸세. 행복하게 되려는 나의 욕구는 산책하고 싶다는 욕구와 다를 것이 없네. 내가 저 골짜기에 비가 오도록 할 수는 없으니 말일세. 그리고 내가 내 마음속에 울적한 벌레를 기르는 것도 아니네. 나는 그것을 참고 있네. 그리고 내가 참고 있음을 알고 있네. 이건 좋은 위로가 되네!"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엄격한 판단이나 슬픈 예언이나 쓰라린 추억을 되짚어 보면, 자기의 슬픔을 잘 알 수가 있다. 이를테면 슬픔을 맛보는 격이다. 그리고 슬픔 속에 혈구가 문제된다는 것을 잘 알게 되면, 자기의 판단 같은 것은 문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슬픔을 몸 안에 처넣으면, 그것은 아무런 가식도 없는 한갖 피로나 또는 병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에게 기만을 당하느니, 차라리 위병을 앓는 편이 낫지 않을까? 감정이 날카로운 자는 이론도 진정제도 함께 배격한다. 내가 말하는 이 방법을 사용하면 동시에 두 가지의 치료법에 길이 열리는 것이니 주목할 만한 일이 아닌가. 신경쇠약 이즈음과 같은 우기에 남자의 기분은--여자의 기분도 그렇지만--날씨처럼 변덕스럽다. 학식도 많고 분별력도 있는 친구가 어제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쩐지 요즈음은 기분이 개이지 않네 그려. 일이나 트럼프를 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기쁜가 하면 금세 슬퍼지고 슬픈가 하면 곧 기뻐지면서, 이렇게 고양이 눈동자보다 더 빨리 기분이 변하네. 그 원인이란 다름이 아니고 편지를 써야 한다거나, 전차 시간을 놓친다거나, 외투가 너무 무겁다거나 하는 정도일세. 그런데 그 때문에 진짜 불행이라도 당한 것처럼 생각되네. 사리를 가려 그까짓 일은 아무래도 무방하다고 타일러도 막무가내일세. 나의 판단력은 젖은 대고처럼 전혀 쓸모가 없네. 결국 나는 스스로 신경쇠약이라고 진단을 내려 버렸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뭐 크게 떠들 것 없이 사물을 잘 이해하도록 하세. 누구나 자네와 같은 입장에 있네. 다만 자네는 불행에 대해 날카로운 센스를 갖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네. 지나치게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왜 기뻐지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하는가를 따지려고 하네 그려. 자네가 언제나 초조감을 느끼는 것은 자네의 기쁨이나 슬픔이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원인에서는 얼른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일세. 실은 행복이나 불행에 원인이란 있을 수 없네. 모든 것이 우리의 육신과 그 작용에 달려 있네. 아무리 건장한 체격도 대개는 식사, 보행, 주의력, 독서, 날씨 등의 형편에 따라서 날마다 긴장에서 침체로, 침체에서 긴장으로 옮아가는 걸세. 자네 기분은 그것에 의해 마치 파도 위에 떠 있는 배처럼 올라갔다 가라앉았다 하네. 그런 것은 대개 보잘것없는 걸세. 무슨 일이나 손에 잡고 있으면 조금도 마음에 걸리지 않는데, 그것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 여유가 생겨 곰곰이 생각하면 곧 자질구레한 그 이유라는 것이 나타나는 법이라네. 그런데 자네들은 그것이 결과인데도 원인이라고 생각하네. 민감한 사람은, 슬프거나 즐겁거나 반드시 그 이유를 생각해 낸다네. 그리하여 하나의 이유가 두 개의 목적에 유용할 수도 있네. 몸이 약했던 파스칼은 별의 수가 많아서 무서워졌네. 그가 별을 쳐다보면서 숭고한 전율을 느낀 것은 무의식중에 창가에서 추위에 떨었기 때문일 걸세. 대담한 시인이라면 여자친구나 되는 듯 이 별과 이야기를 주고받았을 걸세. 그리고 두 사람 다 별이 총총한 하늘에 대해 엄청난 말을 할 테지. 문제도 되지 않는 엄청난 말을 스피노자는 말했네. 인간이 정념을 갖지 않은 적이 없지만, 현명한 자들은 마음속에 오묘한 사상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에 비하면 정념은 보잘것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고. 스피노자의 어려운 논리를 따르지 않더라도 그의 본을 받아, 음악이나 그림이나 재미있는 이야기와 같은 행복을 담뿍 간직할 수가 있네. 이에 비하면 우리의 우수와 같은 것은 눈에 차지 않을 걸세. 사교가는 약간의 의무감에 의해 자기의 분노를 잊을 수 있네. 우리는 알차고 유용한 일이나 책이나 친구들을 좀더 이용하지 않고 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걸세. 아무튼 가치 있는 것에 여전히 별로 흥미를 찾지 않는 것은 아마도 일반적인 그리고 중대한 결과를 가져오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네. 우리는 그런 가치 있는 것에 기대를 거네. 마땅히 바랄 것이 무엇임을 알고 이를 바라는 것도 때로는 훌륭한 일이라네." 불쾌감 격분한 어조대로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할퀴는 것이 가장 좋다. 그것은 스스로 자기의 불행을 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자기 자신에게 복수를 하는 셈이다. 아이들은 처음에 이런 수법을 곧잘 쓴다. 자기가 우는 것에 골을 내어 더욱 극성스럽게 운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괴롭힘으로써 더욱 고약해지는 사람이 있다. 자기가 고약한 자가 되기 때문에, 남도 고약해지게 하는 것이다. 그는 책을 읽어도 잘 알 수 없어, 자기가 생각해도 창피한 일이므로, 다시는 책을 읽지 않으려고 맹세한다. 쓸데없이 고집을 부린다. 계속해서 기침을 한다. 기억 속에서도 모욕을 찾아낸다. 스스로 모가 난다. 확신도 없이 해보고 나서 실패하고는 한번 해볼만 했는데 이것도 운수 소관이지 하고 말한다. 도처에 찌푸린 얼굴을 해보이며 사람을 싫어한다. 남에게 불쾌한 인상을 주면서 남들이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의아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억지로 잠을 잔다. 아무리 큰 기쁨일지라도 일단 의심을 해본다. 만사가 다 귀찮다는 표정으로 사사건건 반대를 한다. 그는 불쾌로써 불쾌를 조성한다. 그리하여 이런 입장에서 자기 자신을 판단한다. "나는 소견이 좁고 인색하다. 기억력도 쇠퇴되고 어느 새 나이도 먹어 버렸다." 그는 일부러 불쾌한 얼굴을 하고 거울에 비쳐 본다. 이러한 것들이 불쾌감의 함정인 것이다. 나는 "살을 에는 듯한 추위로군. 그러나 건강에는 이것이 제일이야." 하고 말하는 사람을 경멸할 수 없다. 우리가 이 이상 더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바람이 북동쪽에서 불어올 때, 손을 비비는 것은 이중으로 좋은 일이다. 이 경우에 본능은 지혜만큼이나 가치가 있으며, 육체의 반응은 우리에게 기쁨을 표출한다. 추위에 대항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으니, 그것은 추위에 만족하는 일이다. 그리고 기쁨을 달관한 스피노자투로 말하자면, "내가 만족을 느끼고 있는 것은 따스해졌기 때문이 아니다. 만족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따스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기쁨을 찾기 어려우면, 우선 기쁨을 축적할 일이다. 즉 그것을 손에 넣기 전에 고맙다고 해야 한다. 희망은, 희망한 이유가 이루어지게 하고, 좋은 징조는 실물을 나타나게 하기 때문이다. "까마귀가 우는 소리도 당신의 기분 여하에 따라서 행복이 될 수 있다"라고 에피크테토스는 말했다. 불쾌한 사람을 만나면 웃어 보일 일이다. 그리고 잠을 자고 싶으면 잘 수 있다고 확신해야 한다. 누구에게나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자기 자신인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일종의 미치광이에 대해 말해 왔다. 그러나 미치광이란 우리들의 오류가 확대된 것에 불과하다. 단지 잠깐 나타나 보일 따름인 불쾌한 동작 속에도 박해에 대한 집념이 응축되어 나타나 있다. 나는 이러한 광기가 우리들의 반응을 지배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상해에 기인함을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초조해 한다는 것은, 자기 무덤을 판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다만 미치광이들 속에서, 우리들의 교훈이 되는 것을 찾아볼 뿐이다. 이 경우에 그것은 확대경을 통한 것처럼 커 보이는 저 두려운 오류이다. 이 가련한 인간들은 자문자답을 한다. 그들은 혼자서 비극을 연출하고 있다. 이것은 반드시 효과를 나타내는 마법의 주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까닭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헤라클레스 인간이 곤란을 헤치고 나가는 데 힘이 되는 것은 자기의 의지뿐이라는 것은, 종교나 기적이나 불행과 함께 옛날부터 있는 관념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본질상 의지 자체와 동시에 언급될 수 있는 관념이기도 하다. 의지의 힘은 결과에 의해 입증되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스는 자기를 노예로 간주하게 될 때까지 스스로 이러한 입증을 해 보여주었다. 그는 자기가 노예라고 믿었을 때에는 부질없이 살아가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는 편을 택했던 것이다. 이 옛이야기는 매우 아름답다. 나는 아이들에게 외부에서 오는 압력을 이겨내는 법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 헤라클레스의 사적을 암송시키고 싶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산다는 것이며, 이와 다른 태도는 비겁하기 짝이 없고 단지 죽음을 연장하고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나는 삶을 극복해 가면서 스스로 반성하고, 그릇된 길에 접어든 골목에서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며, 자기의 잘못을 찾아 진심으로 자기 자신을 책망하는 소년을 좋아한다. 그러나 주위의 사물이나 사람들 가운데서, 언제나 무슨 트집을 찾아내는 인간의 탈을 쓴 자동기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런 사람들에게서는 기쁨을 찾아볼 수 없다. 주위의 사물이나 사람들은 이 불행한 인간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의 생각은 추운 겨울날의 나무 잎사귀처럼, 바람에 불려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나는 자기의 외부에 불평을 하는 사람들이 결코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데 비하여, 자기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나는 바보였어..." 하고 뉘우치는 사람들은 자기의 경험을 소화하여, 굳세고 쾌활한 얼굴을 하고 있음을 보고 감탄하게 된다. 경험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마음을 무겁게 하고 또 하나는 가볍게 한다. 침울한 사냥꾼은 토끼를 놓치고는 "내 운수니까 할 수 없지"하고 말을 잇는다. "이런 꼴은 나만 당하지." 그러나 쾌활한 사냥꾼은 토끼가 날쌔게 줄행랑을 치는 모습을 보고 감탄한다. 그는 토끼의 천직은 인간의 찌개 냄비에 고기를 제공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속담에는 사나이다운 지혜가 많다. 나의 할머니는 언제나 "제비는 구워진 새가 되어 땅에 떨어지지는 않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의미심장한 말이다. 잠자리를 마련했기 때문에 잠들 수가 있는 것이다. 바보는 "내가 음악을 좋아하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말한다. 그러나 우선 음악을 해볼 일이다. 처음부터 음악을 좋아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우리의 뜻에 어긋나 있다. 아니 모든 사물은 우리에게 무관심하여 문제시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대지의 표면은 인간의 활동이 없으면 가시밭과 질병으로 뒤덮일 것이다. 적도 아니지만 동지도 아니다. 인간의 편의 되는 것은, 인간의 활동뿐이다. 그러나 공포를 자아내는 것은 희망이다. 그러므로 우연한 성공을 거두는 것은 몹시 상서롭지 못한 실마리가 된다. 신을 축복하는 자가 이윽고 신을 저주하게 된다. 그러한 태도는 신혼부부가 한동안 구청장이나 교회의 문지기를 좋아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교회의 사환이 식이 끝난 후에 어떤 표정을 하고 촛불을 껐는지 보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어느 날 향수를 파는 소녀가 미소를 짓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녀는 가게의 문을 닫으면서 동시에 미소를 그쳤다. 가게의 큰문을 닫는 상인의 모습도 볼만한 일이다. 알 수 없는 사물--인간도 포함하여--이 그 고유의 법칙을 우리에게 표시하자마자 (인간은 그 법칙에 좇아서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일에 착수한다. 그러나 어떤 존재가 우리에게 호의를 약속하자마자 우리는 인식을 박탈당하고 희망밖에는 의지할 것이 없어진다. 모든 존재는 그 전조나 반영에 있어서보다 막후의 풍부한 생활이 더 아름답고 친근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정력적인 사람들은 곤경과 변화를 사랑한다. 평화는 여러 가지 힘 사이에 존재한다. 느릅나무 나무를 좋아하는 한 사나이가 나와 함께 정원을 거닐면서 이렇게 말했다. "잎이 돋아나기 시작했어요. 얼마 안 가서 느릅나무에 작은 송충이가 붙어서 잎사귀를 모두 먹어 버릴 테지요. 그렇게 되면 나무는 폐를 떼어낸 것처럼 결단이 나요. 질식하지 않으려고 새로운 잎사귀가 나와서, 이를테면 봄을 두 번 맞이하는 격이 되지요. 그래서 나무는 기진맥진하게 되니, 2__3년 후에는 새잎이 돋아나지 못하고 죽어 버릴 거요." 그는 100년이나 묵은 느릅나무를 가리키며, 이처럼 그 나무가 오래지 않아 죽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쓸어 버려야죠. 그까짓 송충이쯤 맥을 못 쓸 테니까요. 한 마리 죽일 수 있다면, 백 마리나 천 마리도 죽일 수 있을 테죠." 그는 말했다. "천 마리 정도의 송충이는 문제가 아니지요. 그러나 몇 백만 마리나 되거든요.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나요." 나는 말했다. "그러나 당신은 돈이 많지 않소? 돈만 있으면 사람을 살 수 있을 텐데 뭐가 문제요? 열 사람의 안부가 열흘만 일하면 송충이쯤 몇 마리라도 퇴치시킬 수 있을 거요. 이렇게 아름다운 느릅나무를 살리기 위해서는 2 - 3백 프랑쯤 던진들 어떻소?" "돈이야 있지요. 그런데 일손이 모자라고... 저 높은 나뭇가지를 다 어떻게 한담? 선정할 줄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할 텐데. 이 근처에는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두 사람뿐이오." "두 사람이라도 족해요. 그 두 사람에게 높은 나뭇가지를 맡겨요. 그리고 별로 익숙하지 못한 다른 사람에게는 사닥다리를 쓰도록 해요. 나무 전부를 다 소생시킬 수 없을지라도, 적어도 두세 대는 건질 수 있을 거요." 그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용기가 나지 않는군요. 내가 할 일은 따로 있을 것 같소. 그놈의 송충이들이 보기 싫어 잠깐 여기를 떠야겠소" 나는 대답했다. "상상력의 힘이란 무서운 거요. 당신은 싸우기도 전에 이미 지고 있소. 손이 미치는 데까지 있는 힘을 다해야 하오. 일이 귀찮고 인간이 연약한 것을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못하오. 그러므로 우선 행동해 보고 나서 자기 행위에 대해 생각해 볼 일이오. 석공을 봐요. 잠자코 연장을 놀리고 있소. 큰 돌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소. 그러나 머지않아 집이 서고 계단에서는 아이들이 뛰놀게 되어요. 나는 언젠가 한 직공이 두께가 15센티나 되는 강철에 구멍을 뚫기 위해 손잡이가 구부러진 줄칼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감탄했소. 그는 연신 휘파람을 불면서 연장을 돌리고 있었소. 먼지처럼 부서진 강철의 부스러기가 휘날리고 있었소. 나는 대담한 이 사나이에게 경탄하였소. 벌써 10년 전 일이오. 그는 이 구멍을 뚫고, 그 밖에도 강철에 많은 구멍을 뚫을 거요. 송충이는 당신에게 교훈을 주고 있소. 느릅나무에 비교하면 송충이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오. 그러나 조금씩 깎아 먹고 있는 동안에 산 전체를 결단내는 거요. 작은 힘이나마 의지하고 벌레에 대해서는 벌레가 된 심정으로 싸워야 하오. 무수한 원인이 당신의 편이 되어 있소. 그렇지 않다면 느릅나무는 벌써 없어졌을 거요. 운명이란 변화무쌍한 것이오. 손가락 끝을 약간 움직이기만 해도 새로운 세계가 나타날 수 있소. 아무리 작은 노력이라도 무한한 성과를 가져올 수 있구요. 이 느릅나무를 심은 사람들은 인생이 짧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을 거요. 당신도 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다만 자기 발 밑만을 주의하고 대담하게 행동을 개시해요. 그렇게 되면 느릅나무도 살릴 수 있을 거요." 행동 경쟁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고생이 막심하다. 공치기를 하는 사람도 그렇고 권투를 하는 사람도 그렇다. 책을 보면 인간은 쾌락을 구한다고 쓰여 있지만 이것은 분명치 않다. 오히려 고통을 구하고 고통을 사랑하는 듯이 보인다. 늙은 디오게네스는 "가장 좋은 것은 고통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그런 사람은 자기가 구하는 고통 속에서 쾌락을 발견한다고 말할 터이지만, 그것은 억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이 발견하는 것은 쾌락이 아니라 행복일 것이다. 그런데 쾌락과 행복은 속박과 자유가 다른 것처럼 매우 다른 것이다. 인간은 행동하기를 원하되 복종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자진하여 그토록 고생하는 사람들도 강제 노동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자기 자신에게 닥쳐올 불행을 좋아할 사람도 없고, 궁핍을 느끼기를 좋아할 사람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자유롭게 고생하는 일이라면 곧 만족을 느낀다. 나는 지금 이러한 한담을 쓰고 있다. 붓대로 밥을 먹어야 하는 저술가라면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에게도 강제를 받지 않는다. 자진하여 하는 일은 즐겁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행복하다. 권투선수도 남에게 얻어 맞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진하여 얻어맞는 것은 좋아한다. 우리 자신의 뜻에 좇아서 싸울 때에는 어려운 승리보다 더 즐거운 것은 없다. 사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힘뿐이다. 헤라클레스는 괴물을 찾아내어 이를 분쇄함으로써 자기의 힘을 자신에게 입증했다. 그러나 사랑에 빠지자마자, 그는 자신의 노예 상태와 쾌락의 힘을 느끼게 되었다. 인간은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환락에서 서글픔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구두쇠는 많은 쾌락을 희생시킨다. 그리고 첫째로 쾌락에 대해 승리함으로써, 그리고 거기서 힘을 축적함으로써 커다란 행복감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는 이 힘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얻고 싶은 것이다. 유산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 만일 구두쇠라면, 그는 더욱 비참한 수전노이다. 왜냐하면 무릇 행복이란 본질적으로 포에지이며, 포에지는 행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선반으로부터 떨어지는 떡덩이와 같은 행복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법이다. 행복을 자기 힘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아이들은 우리들의 정원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모래산이나 밀짚 같은 것으로 스스로 훌륭한 정원을 만든다. 자기 스스로 수집하지 않은 수집가를 생각할 수 있을까? 전쟁을 하는 재미는 전쟁을 하는 데 있다. 무장을 하자마자 각자는 분명히 자유를 갖게 된다. 그리하여 병사들은 강제로 싸우게 하는 사령부 같은 것은 염두에도 두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의 자유를 느끼자마자 새로운 생활 속에 뛰어들어가 거기서 취미를 발견하게 된다. 죽음은 무서워할 필요도 있지만, 동시에 죽음을 기다리고 나중에는 죽음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죽음에 선수를 써서, 이를테면 격투장 안에 죽음을 불러들이는 자는 자기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병사들은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 죽음을 찾아나서는 편이 훨씬 쉽다는 것을 저마다 잘 알고 있다. 또한 인간은 시간이 가져다 주는 운명보다도 자기 손으로 만들어 나가는 운명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전쟁 속에는 포에지가 있어, 그 때문에 사람들은 벌써 적까지도 미워하지 않게 된다. 전쟁이나 모든 정념을 올바로 이해하게 하는 것은 이 자유의 도취이다. 페스트는 강제된 것이지만, 전쟁은 도박처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신중한 것만으로는 충분한 평화가 보장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정의에 대한 사랑으로써, 평화를 참아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정의를 만들어 내는 것이 다리나 터널을 만드는 것보다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평화가 있다면 오직 그 때문이다. 행동하는 자 나의 취미에서 본다면 치안국장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그는 언제나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조건하에서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때는 불이다, 어느 때는 수해다, 어느 때는 사태다, 압사다 하고 사건이 연달아 일어난다. 이어서 진흙 구덩이다, 먼지 투성이다, 병이다, 가난이다, 또 때로는 싸움이다, 경우에는 따라서는 열광이다. 이 행복한 사람은 끊임없이 분명한 행동을 필요로 하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 일반적인 규칙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종이 부스러기 같은 서류도 필요없다. 그런 것은 이른바 관리들에게 맡겨 둔다. 그는 지각과 행동 자체이다. 이 지각과 행동이라는 두 개의 수문이 열릴 때 생명의 강은 인간의 마음을 가벼운 날개처럼 운반해 간다. 거기에 유희의 비밀이 있다. 트럼프 놀이를 한다. 그것은 생명을 지각에서 행동에로 옮기는 것이다. 축구를 한다. 더욱 좋은 일이다. 예견할 수 없는 새로운 소재 위에, 재빨리 어떤 행동을 실행하는 것--이것이 인간의 생활을 크게 충족시켜 준다. 그리고 보면 도대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시간을 회한을 삼켜 버린다. 사람들은 흔히 도적이나 강도의 정신생활은 어떤 것일까? 하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는 그들에게는 정신생활 같은 것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무엇을 노리고 있던가,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자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능력은 자기의 발 밑과 손톱을 살피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러므로 형벌의 관념이나 그밖의 어떠한 관념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다. 이 눈멀고 귀먹은 기계는 무섭기 짝이 없다. 그러나 누구에게 있어서도 행위는 의식을 지워 버린다. 이 에누리없는 폭력은 나무꾼의 도끼의 일격과 통하는 데가 있다. 정치가의 태도에는 그다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결국 그러한 면이 발견되는 경우가 가끔 있다. 도끼처럼 탄탄한고 둔감한 인간을 보더라도, 그 인간이 그다지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별로 무섭지는 않을 것이다. 힘은 동정심을 갖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동정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투쟁인가? 인간이 행동 속에 깊이 빠지려는 것이다. 인간의 사상이란 발차하면 어두워지는 전차의 전등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깊은 사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거기서 놀랄 만한 행동의 힘이 나온다. 그 힘은 마음의 등불을 지워 버리기 때문에 좋도록 자기를 합리화한다. 이에 의하여 많은 비천한 정념--우울병, 염세관 혹은 음모, 위선, 원한, 또는 공상적인 사랑이라든지, 닳고닳은 악덕이라든지, 온갖 반성에 의해 생기는 보잘것없는 정념들이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행동의 흐름 속에서 정의도 또한 사라져 버린다. 치안국장은 수해나 화재와 싸우는 것과 같은 수법으로 폭동과 싸운다. 폭동도 또한 자기의 등불을 꺼버린다. 흉포하기 짝이 없는 암흑이다. 그 때문에 곤봉으로 고문을 하는 형리가 있는가 하면, 고백을 청취하는 재판관도 있었던 것이다. 의자에 묶여서 숨이 끊어지는 고통을 맛보고, 노의 움직임에 따라 거기서 죽어간 조향수가 있는가 하면, 그들은 몽둥이로 때리는 자들도 있었던 것이다. 몽둥이질을 하는 자들은 몽둥이 이외의 것은 생각지 않았다. 어떤 야만 상태라도, 일단 이루어지면 그것은 계속될 것이다. 치안국장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나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무위는 모든 약덕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든 미덕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임금님의 권태 생활의 다소 고생이 되더라도 너무 평탄한 길은 걷지 않는 것이 좋다. 임금님들이 만사가 생각대로 되는 것이라면 참 가엾은 존재라고 하겠다. 그리고 신이 어디엔가 있다면 신경쇠약에 걸려 있을 것이다. 옛날에는 신들도 나그네의 차림을 하고, 사람들의 문을 노크하러 왔다고 한다. 아마도 시장가나 갈증이나 애정을 느끼는 일에 다소의 행복을 맛보기로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들이 자기의 전능의 힘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그러한 것은 아무짝에도 못 쓴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시간과 공간까지도 폐지하고, 자기의 욕심을 눌러 없애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요컨대 그는 권태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후부터 그는 목을 매든가 물 속에 몸을 던지거나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수면의 숲 속에 있는 미인처럼 잠들고 있었을 것이다. 행복이란 분명히 자기 자신에 대해 눈뜨게 하는 불안이나 정념, 또한 어느 정도의 고통을 언제나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의 세계보다 상상력에 의한 편이 더욱 행복한 경우가 많다. 이것은 실제의 행복을 손에 넣으면 이 이상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주저앉아 버리기 때문이다. 재물에는 두 가지가 있다. 주저앉게 하는 재물은 인간을 권태롭게 만든다. 마음을 즐겁게 하는 재물을 다시 계획이나 일을 요구한다. 그것은 농부가 몹시 갖고 싶어하다가 겨우 소유한 밭과도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쉬고 있는 힘이 아니라 행동하고 있는 힘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은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이미 만들어진 행복을 갖고 가보라. 그는 병자처럼 고개를 흔들 것이다. 음악을 듣는 것보다 자기가 직접 음악을 하는 것을 더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어려운 것이란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중에 어떤 애로가 있을 적마다 그것은 피를 끊게 하고 정열을 불타게 한다.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라면 누가 올림픽의 월계관을 탐낼 것인가? 그런 것은 아무도 탐내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질 우려가 없다면, 누가 트럼프 놀이를 하려고 하겠는가? 여기서 신하들과 트럼프 놀이를 하는 늙은 임금이 있다고 하자. 임금은 놀이에 지면 화를 낸다. 신하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신하들이 트럼프 놀이를 하는 방법을 잘 깨치고 나서는 왕은 결코 지는 법이 없다. 그러자 이번에는 왕이 트럼프를 내던지고 만다. 왕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을 탄다. 사냥하러 가는 것이다. 그러자 그것은 어디까지나 임금의 사냥이다. 짐승들이 저절로 임금의 발 밑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사슴도 역시 신하이다. 나는 많은 임금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작은 왕국의 작은 임금들이다. 너무 귀여움을 받고, 아첨을 당하고, 금이야 옥이야 하고 자라난 가정의 임금님들이다. 그들에게는 무엇이건 갖고 싶다고 생각할 틈이 없다. 조심스러운 눈이 그들의 생각을 벌써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작은 쥬피터 (그리스 신화의 올림푸스 신족의 왕. 제우스의 라틴어 이름)들은, 무슨 일을 해서든지 화를 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방해물을 생각해 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욕망을 만들어 냈다. 그리하여 정월달의 태양처럼 마음이 변했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고집을 부렸다. 그리고 너무나 권태로워 죽어 버리지 않고 있다면, 여러분들에게 이런 펑탄한 왕국을 지배할 것을 명령하지 않기를 바란다. 험준한 산길을 통해 인도해 주기를 바란다. 우물과 같은 눈과, 쇠 침대와 같은 이마를 갖고, 행길에서 자기 귀의 그림자를 보았다고 해서 즉시 멈춰 서는 그런 안다루시(스페인 남부지방의 이름)의 좋은 당나귀를 길동무로 삼아 주지 않기를 바란다. 아리스토텔레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진하여 하는 것이 기분이 좋아지는 기본이 된다. 그러나 사탕은 입 속에서 녹이기만 하면, 별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맛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와 같은 방법으로 행복을 맛보려고 하다가 실패하는 것이다. 음악을 듣기만 하고, 자기가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별로 재미가 없다. 그러므로 어떤 현명한 사람은 음악을 귀로 맛보는 것이 아니라 목으로 맛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름다운 그림에서 느끼는 즐거움까지도 자기 자신이 끄적끄적 그려본다던가, 그림을 수집하지 않으면 과히 보람이 없는 휴식의 즐거움에 지나지 않는다. 즐거움은 단지 받아들이는 데 있지 않고 탐구하고 정복하는데 있다. 사람들은 연극을 보러 가지만 그들은 실지로 말하는 것 이상으로 권태로워 한다. 그렇다면 자기 스스로 제작해 볼 일이다. 적어도 자기 스스로 출연해 볼 필요가 있다. 출연도 일종의 제작이다. 누구나 사교계의 희극을 상기할 터이지만, 거기서는 배우가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나는 인형 연극에 대해서만 생각하던 행복한 몇 주일을 상기한다. 그러나 미리 말해 두거니와, 나는 조그마한 나이프로 나무 뿌리에 고리대금업자나 군인이나, 처녀나 노파를 아로새기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들은 거기에 옷을 입혔다. 나는 구경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비평은 그들에게 맡겨 버렸다. 그런 것은 보잘것없는 즐거움이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이라고 그들이 스스로 생각해 냈다는 점에서 역시 즐거운 것이다. 우리는 행복해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사람들은 언제나 행복이 자기를 피한다고 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서 얻은 행복에 대한 말이라면 사실이다. 얻은 행복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가 손수 만드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가 손수 만드는 행복은 절대로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 그것은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인간은 언제나 배워야 하는 것이다. 알면 알수록 더욱 더 많이 배우게 된다. 여기서 라틴어 학자들의 즐거움도 우러난다. 라틴어 학자들이 누리는 그러한 즐거움에는 끝이 없다. 학식이 진전함에 따라서 즐거움이 증가한다. 음악가의 즐거움도 마찬가지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은 놀랄 만한 말을 했다. 즉 참도니 음악가란 음악을 즐기는 사람이며, 참된 정치가란 정치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즐거움은 힘의 표시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이 말은 우리를 이론 밖으로 끌어내는 언어의 완벽성으로 하여 높이 울려 온다. 몇 번이나 무시를 당했지만 끄덕하지 않는 이 놀라운 천재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 점을 잘 생각해야 할 것이다. 어떤 행동에 있어서나 참된 진보의 표시는 사람들이 거기서 느낄 수 있는 쾌락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일만이 유일하고 충분한 즐거움이다. 나는 여기서 힘의 결과인 동시에 힘의 원천이기도 한 자유로운 일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억지로 참을 것이 아니라 행동할지어다. 석공들이 열심히 자기의 조그마한 집을 만드는 것을 누구나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돌 하나하나를 고르고 있는 것을 잘 보아야 한다. 이러한 즐거움은 또한 어떤 직업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직공은 언제나 생각해 내고 배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직공이 자기가 만들 물건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고, 자기가 만든 물건을 소유하지도 않으면 배우기 위해 별로 애쓰지도 않고, 언제나 같은 일을 되풀이하게 되면, 기계적인 행동이 권태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큰 혼란도 가져온다. 이와는 반대로 일의 연관성이라든가, 오늘의 농작물이 내일의 수확을 약속하는 것이 농부들의 행복을 자아낸다. 나는 물론 자유롭게 자립하고 있는 농부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많은 수고가 따라야 하는 이러한 행복에 대해 사람들은 저마다 크게 반대한다. 그나마 언제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는 행복을 누리고 싶다는 얕은 생각에서 그러는 것이다. 디오게네스가 말한 바와 같이, 괴로움이 오히려 나은 것이다. 그러나 정신은 이 모순을 짊어지려고 하지 않는다. 정신은 이 모순을 극복해야 한다. 거듭 말하거니와 우리는 고통의 반사인 쾌락을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다. 과장된 말 가끔 길가에서 햇볕을 쪼이거나 발길을 질질 끌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깨비 같은 인간을 만나게 된다. 이처럼 늙어빠지고 당장 죽을 것만 같은 사람을 보면, 처음에는 어떤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렇게 말하면서 도망친다. "저 도깨비 같은 늙은이는 왜 진작 죽지 않은 걸까?" 그러나 본인은 역시 살고 싶은 것이다. 햇볕을 쪼이고 있는 것이다. 죽고 싶지 않은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우리들의 사고에 있어서의 어려운 길이다. 반성은 대체로 여기서 걸려 넘어지고 상처를 받아 초조해지며, 오류의 기로 접어든다. 이러한 일은 흔히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광경을 목격한 후에 조심스럽게 올바른 길을 찾고 있을 때, 나는 한 사람의 친구를 만났다. 그는 눈에 노기를 띠고 말도 변변히 못하면서 덜덜 떨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큰소리로 말했다. "모든 일이 비참하기 짝이 없네. 건강한 친구들은 병이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네. 매우 두려워하고 있네. 그리하여 자기 공포 이외에는 아무것도 잃지 않으려고 하네. 공포를 남김없이 씹어 보고 있는 것일세. 저 병신들을 보게. 그들은 죽는 편이 훨씬 나을 걸세. 그런데 결코 죽음을 택하지 않네. 죽음을 저만치 밀어 버리고 있는 걸세. 그리고 이 공포가 병을 더욱 더치게 하네. 자네는 살아가기가 이렇게 괴로운데 어찌하여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하고 말하네. 그러나 죽음과 공포를 동시에 미워할 수는 없네. 우리는 이렇게 하여 죽어가는 것일세." 그가 말한 것은 그에게는 어디까지나 분명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려고 들면,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다. 불행해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려운 일은 행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행복해지려고 노력하지 않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와 반대이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를 잡을 수 없다. 나에게도 이 소란스러운 웅변을 경계해야 할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밝은 척하는 그릇된 빛으로 나를 기만한다. 자기가 구제할 길이 없는 불행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스스로 몇 번이나 한탄했는지 모른다. 왜? 아마도 현혹되었던가, 지쳐 있었던가, 혹은 하늘의 구름에 그늘진 한 여자의 눈 때문이었으리라. 그것은 또 고작해야 어떤 하찮은 생각 때문이거나 어딘가 기분이 나빴던 때문이거나, 얼굴 표정이나 말투에서 미루어 보아 허영심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이런 기괴한 어리석음이 있는 것이다. 1년만 지나고 보면 태연스럽게 웃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즉 눈물, 흐느낌, 위장, 심장, 배, 결렬한 동작, 근육의 경직 등이 추리 가운데 들어오면, 정념은 우리를 기만한다고. 단순한 사람은 몇 번이나 거기에 걸려든다. 그러나 나는 이 그릇된 빛은 오래지 않아서 곧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그것을 곧 없애 버리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떠들어대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나는 내 목소리가 나에게 얼마나 강한 영향을 주는가를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자기 자신에 대해 희극배우로서가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또한 병이나 죽음은 누구에게나 흔히 있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여기 거역하는 것은 인간답지 않은 그릇된 태도임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참된 인간적인 태도는 어떤 방식으로나 반드시 인간인 자기와 자연의 추세에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분노를 키우고 분노에 키워지는 불평 불만 속에 뛰어드는 경솔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야말로 지옥 가운데서 빙빙 도는 격이다. 그러나 악마는 곧 나 자신이며, 갈퀴를 들고 있는 것도 나 자신이다. 너 자신을 알라! 나는 어제 이런 광고를 읽었다. '위대한 비결, 인생에 성공하고, 인심을 움직여서 이를 유리하게 이용하는 정확한 방법. 문제는 누구든지 갖고 있는 생명의 액체에 있다. 다만 그 사용법을 아는 것은 유명한 X선생이다. 10프랑으로 교수함, 앞으로 사업에 성공 못하는 사람은, 10프랑의 돈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운운...' 이것을 실은 신문사는 무료로 광고를 내주었을 리가 만무한 즉, 자액의 상인인 성공의 선생에게는 손님이 꽤 있었던가 보다. 나는 이 선생은 분명히 본인이 자부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용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액체의 이야기는 덮어 두더라도, 그는 대체 어떤 수작을 하는 것일까? 만일 그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확신을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대견하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손님들은 전에는 태산처럼 꿈쩍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비겁함은 커다란 장애이며, 그리고 유일한 장애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아마도 무의식중에, 손님들에게 주의, 반성, 질서, 방법 등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할 것이다. 이른바 액체의 방사와 같은 것도 누구에게나 혹은 어떤 사물을 강하게 상상하는 것이리라. 선생은 점차로 손님들을 유도하여 그들의 주의를 집중할 수 있게 될 때까지 끌고 갈 것이다. 다만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돈을 벌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이 방법에 의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일--즉 자기의 과거, 실패, 피로, 뱃속의 형편 등을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곧 그때까지 시시로 증가하고 있던 무거운 짐에서 해방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욕설을 퍼붓는 것으로 자기의 생활을 낭비하고 있는 것일까. 둘째로 그들은 자기가 원하고 있는 것, 주위의 상황이나 사람들의 일을 진지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생각하게 되어 흔히 꿈속에서 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함께 뒤범벅이 되거나 혼합되어 버리는 일이 없게 된다. 그후에 성공이 찾아오는 것은 뜻밖의 일이 아니다. 그 선생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우연한 일을 나는 문제시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와 반대되는 우연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 일반적으로 누구나 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 때문에 자기를 그르치는 것이다. 인간은 시종일관하는 존재가 아니다. 보통 동지보다 적을 애써 기르고 있는 것이다. 저 사나이는 나에게 악의를 품고 있다고 당신은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상대편은, 그런 것은 벌써 옛날에 잊어버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조금도 그것을 잊지 않고 있다. 다만 당신의 얼굴 색으로 그에게 그의 의무를 생각나게 할 뿐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 외에는 거의 적이 없다. 그는 그릇된 판단이나, 기우나, 절망이나, 자기에 대한 비과학적인 언사 등을 하여 자기의 가장 큰 적이 되어 있다. 어떤 사람에게 다만 "당신의 운명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10프랑 정도의 가치는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시대에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델포이(고대 그리스의 도시. 아폴론의 신전이 있었다)에 아폴로의 예고를 받아 모든 일에 조언을 하고 돈을 받는 일종의 무녀가 있었다. 신은 우리들의 자액의 상인보다 정직하여 그 비결을 신전의 정면 바람벽에 써 붙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일이 자기에게 유리한지 불리한지 알려고 자기 운명에 대해 물으러 왔을 때에는, 신전에 들어가기 전에 만인에게 가치 있는 다음과 같은 심원한 신탁을 읽을 수 있었다. 즉, '너 자신을 알라!' 우정 우정에는 놀라운 기쁨이 깃들어 있다. 기쁨이 전염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면, 이것은 곧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있는 것이 친구에게 조금이라도 기쁨을 준다면, 그 기쁨을 복 이번에는 내가 기쁨을 느낀다. 이와 같이 각자가 남에게 주는 기쁨은 그 본인에게로 되돌아온다. 동시에 기쁨의 보물 창고가 개방되어 두사람 다 이렇게 생각한다--나는 내 마음속에 행복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을 별로 유용하게 사용하지 못했다. 기쁨의 원천이 마음속에 있음을 인정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 무슨 일에 대해서나 불만스러워 억지로 웃기 위해 서로 접촉하는 사람들처럼 서글픈 것은 없다. 그러나 만족을 느끼고 있는 사람도 혼자 있으면, 이윽고 자기를 만족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즉 그의 기쁨은 곧 잠들어 버린다. 그리하여 일종의 백치 상태, 무감각 상태에 도달한다. 내부의 감정은 외부의 운동을 필요로 한다. 만일 어떤 폭군이 권력을 존중할 것을 가르치려고 나를 투옥시킨다면, 나는 날마다 혼자서 웃는 것으로 건강법을 삼을 것이다. 나는 발을 훈련하는 것처럼 나의 기쁨을 훈련시킬 것이다. 여기에 한 묶음의 죽은 나뭇가지가 있다고 하자. 그것은 외관상 흙덩이처럼 생기가 없다. 그대로 버려 두면 나중에는 흙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 나뭇가지는, 태양에서 받아들인 열을 갖고 있는 것이다. 성냥개비라도 켜 대어 보라. 당장 불탈 것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단지 문을 흔들어서 죄수의 잠을 깨우기만 하면 족한 것이다. 이와 같이 기쁨을 눈뜨게 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계기가 필요하다. 갓난아기가 처음 웃을 때에, 그 웃음은 어떤 의사 표시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을 느껴서 웃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웃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먹는 일이 즐거운 것처럼, 웃는 일이 즐거운 것이다. 그러나 우선 먹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웃음에 대해서만 진실인 것은 아니다.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일기 위해서도 말을 필요로 한다. 인간은 혼자 있는 한, 자기 자신일 수가 없다. 어리석은 모럴리스트들은 사랑이란 자기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너무나 단순한 견해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빠져나갈수록 더욱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자기가 살고 있다는 것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된다. 그대의 나무를 구렁텅이 속에서 그대로 썩혀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승리 인간은 행복을 찾기 시작하자마자, 이것을 발견할 수 없는 운명에 빠져 버린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하다. 행복이란 쇼윈도 속의 물건처럼, 우리가 선택하여 돈을 내고 집으로 갖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행복은, 당신이 그것을 손에 갖고 있지 못하면 행복할 수가 없다. 만일 당신의 이것을 외부 세계에서 찾으면, 결코 아무것도 행복한 모습을 취하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행복에 대해서는 추리할 수도 예견할 수도 없다. 그것은 지금 현재 갖고 있어야 한다. 행복이 미래 속에 있는 것처럼 여겨질 때에는 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이미 행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곧 행복을 의미한다. 시인들은 흔히 사물을 설명하는 방법이 서툴다. 나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음절이나 운율을 맞추는 일에만 너무 고심하기 때문에 진부한 말밖에는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행복은 먼 미래에 있는 한 아름답게 빛나고 있지만, 그것을 잡아 보면 조금도 좋은 것이 못 된다고. 마치 무지개를 잡거나 샘물을 바닥에 붓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조잡한 표현이다. 행복을 좇아가는 것은 말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행복을 자기 주위에서 찾는 사람들을 특히 서글프게 하는 것은, 그들이 조금도 행복을 원할 엄두가 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트럼프 놀이를 하는 것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은 내가 트럼프 놀이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권투나 검술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음악도 마찬가지로, 우선 처음에 어느 정도의 곤란을 극복한 사람에게만 그 즐거움을 주게 마련이다. 독서도 마찬가지이다. 발자크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처음에는 지루하기 때문이다. 게으른 독자의 태도를 보면 매우 재미있다. 소리 내며 페이지를 들쳐 본다. 몇 줄 읽다가 책을 던져 버린다. 독서의 행복은 예견하기 어려운 것으로 경험을 쌓은 독서가들까지도 스스로 놀랄 정도이다. 학문은 멀리서 바라보면 조금도 즐겁지 않다. 그러므로 그 안으로 걸어서 들어가야 한다. 처음에는 강제가 필요하며 곤란이 필요하다. 규칙적인 노력과 승리에 계속되는 승리--이것이야말로 분명한 행복의 공식이다. 그리고 트럼프 놀이나 음악이나 전쟁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여럿이 행동하는 경우에 행복은 생기를 띤다. 그러나 행동, 노력, 승리하고 하는 같은 마크를 언제나 갖고 있는 고독한 행복도 있다. 예컨대 수전노나 수집가의 행복이 이와 흡사하다. 그리고 이 양자는 서로 닮아 있다. 수전노가 옛 금화를 탐낼 때 특히 그렇지만, 탐욕이 악덕으로 간주되는 데 반하여 칠보나 상아나 그림이나 진본 같은 것을 유리창 속에 진열하는 사람이 도리어 치하를 받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책을 더럽힐까 봐 읽지 않는 책의 수집가가 있는데, 금화를 다른 즐거움과 바꾸려고 하지 않는 책의 수집가가 있는데, 금화를 다른 즐거움과 바꾸려고 하지 않는 수전노는 사람들이 조소한다. 사실은 이런 행복도 다른 모든 행복과 마찬가지로 멀리서는 맛볼 수가 없는 것이다. 우표 수집을 좋아하는 것은 우표 수집가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 영문을 알 수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권투를 좋아하는 것은 권투선수이고 사냥을 좋아하는 것은 사냥꾼이며, 정치를 좋아하는 것은 정치가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행동에 있어서만 행복한 것이다. 즉 인간은 자기가 자기에게 부여하는 규율에 의해서만 행복한 것이다. 요컨대 축구 경기의 경우나 학문 연구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 수련을 받아들이는 데서 행복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임무는 멀리서 보면 재미가 없다. 뿐만 아니라 불쾌감을 느끼게까지 한다. 행복이란 칭찬을 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오는 칭찬인 것이다. 행복해지기를 원하고 이를 위해 애쓸 필요가 있다. 다만 행복이 들어올 수 있는 문을 열어 놓기만 하고 방관자의 태도에 머물러 있으면, 그것은 서글픈 일이다. 도시 사람들에게 시골이 즐거운 것은 시골에 직접 가기 때문이다. 행동은 욕구를 수반한다. 우리는 몸소 행하지 않는 것을 바랄 수 없으며, 고립무원의 기대는 언제나 서글픈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가 남에게 꾸어준 것과 같은 행복을 기다리고 있으면 사생활은 언제나 비참한 것이다. 누구나 가정의 폭군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기주의자는 자기 행복으로써 주위 사람들을 지배하는 법률로 삼는 것이라고 생각할 터이지만, 그것은 너무나 단순한 생각이다. 사물은 결코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이기주의자가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것은 행복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살려고 하지 죽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며,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다. 만일 각자가 재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고, 장작을 때기만 해도 그 사회는 훨씬 살기 좋아질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마침 비가 오고 있다. 지붕 위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무수한 작은 도랑들이 지절댄다. 공기는 씻겨서 걸러진 것 같다. 구름은 아름답게 뜯어 놓은 솜을 닮았다. 이런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말한다. 비는 추수를 모두 망쳐 놓는다고. 또 다른 사람은 말한다. 만물이 흙탕으로 더렵혀진다고. 그리고 제삼의 사람은 말한다. 풀밭 위에 앉는 것은 매우 유쾌한 일인데 하고. 물론이다. 그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당신이 불평을 터뜨려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불평하는 그 비는 집안에까지 나를 쫓아온다. 그러므로 비가 올 때야말로 명랑한 얼굴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일기가 나쁠 때에는 즐거운 얼굴을 할 일이다. 불행해지고 불만스러워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즐겁게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왕자처럼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된다. 행복을 상품처럼 여기거나 무게를 달아보는 눈초리는, 모든 것에 권태의 빛을 던지게 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모든 선물을 경멸하는 일종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행복은 보기만 해도 아름다운 것이다. 어린애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서 노는 데 열중한다. 자기를 위해 남들이 놀아 주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물론 어린이들도 화가 나면 얼굴 표정이 변한다. 그것은 어떠한 기쁨도 거절하는 얼굴이다. 다행히 이들은 곧 잊어버린다. 그러나 절대로 화낸 얼굴을 바꾸지 않는 어른들을 누구나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거기는 그럴 듯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나도 잘 안다. 행복하게 된다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 대한 투쟁이다. 이 투쟁에서 지는 경우도 있다. 극복할 수 없는 사건이나 스토아주의의 초심자들에게는 당해 낼 수 없는 불행이 있다. 그러나 있는 힘을 다해서 싸운 연후가 아니면 결코 패배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아마도 가장 분명한 의무일 것이다. 특히 나에게 분명한 것은 행복해지려고 원하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비관주의는 기분에 속하고, 낙관주의는 의지에 속한다. 본질적으로 유쾌하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기분이란 언제나 언짢은 법이다. 그리고 모든 행복은 의지와 자제로 되어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변명은 노예이다. 아직도 행복은 가능한가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더불어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 문호. 엄격한 그리스도교의 금욕주의에 바탕한 톨스토이이즘으로 유명한 사상가이기도 함. 대표작 "전쟁과 평화""안나 카레리나" "부활" 등이 있음. 모든 사람은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의 행복만을 위해서 살고 있다. 매일 자신의 행복에 대한 희구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살아 있다고 느끼지 못할 것이다. 산다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행복을 바라고 행복을 얻는다는 것은 산다는 것, 바로 그 자체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 속에서, 개인으로서의 자기 안에서만 생명을 느끼는 존재이다. 따라서 사람은 우선 자기가 희구하는 행복이란 자기 개인의 행복에 지나지 않는다고 상상한다. 사람은 우선 자기만이 살고 있고, 자신만이 참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여러 존재의 생명은 자기 자신의 생명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상상한다. 즉 생명에 유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이다. 자기를 둘러싼 다른 여러 존재의 생명은 자기의 생존 조건의 하나라고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보통의 인간이 타인의 재난을 바라지 않는 것은 단지 남의 오뇌를 바라보는 것이 자기의 행복을 해치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 동시에 남의 행복을 희망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 자신의 행복을 바라는 경우와는 전혀 다르다. 즉 남의 행복을 희망하고 그 사람을 위해서 행복한 생활을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남의 행복이 자기 자신의 행복을 증진시켜 주기 때문에 그것을 희망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하고 없어서는 안 될 것은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느껴지는 생명의 행복, 즉 자기 일신의 행복뿐이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의 행복을 얻으려고 노력하면서 그 행복이 다른 여러 존재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곧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다른 존재를 관찰하고 연구하면, 그들 모두가--사람뿐만 아니라 동물까지도--생명에 대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또한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의 작은 행복을 위해서라면 모든 다른 존재의 훨씬 큰 행복이나 생명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빼앗아 버리려 마음먹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고, 그것을 깨닫는 동시에 아무래도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즉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그런데 그는 그것이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단 하나나 열 개의 존재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수없이 생존하는 온갖 존재는 각자가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시시각각 자기 일신의 생명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근절시키려고 노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이것을 알면 그 사람은 자기에게 있어서 생명을 이해하는 유일한 이정표가 되고 있는 자기 일신의 행복이라는 것이 그냥 쉽사리 손에 들어오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확실히 제3자에 의하여 빼앗기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오래 살면 살수록 이런 생각은 경험에 의하여 더욱더 강하게 각인 된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다. 가령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무런 걱정도 없고, 다른 개성을 상대로 훌륭히 싸울 수 있는 유리한 조건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이성과 경험은 지체없이 다음의 사실을 보여줄 것이다. 즉 사람이 개인의 쾌락이라는 형식으로 인생에서 빼앗아 오는 이러한 행복의 유사품은 참된 행복이 아니라 언제나 쾌락과 떼어놓을 수 없는 고뇌의 더욱 절실한 체험을 제공하기 위해 주어진 행복의 견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은 오래 살면 살수록 쾌락이 차츰 줄어들고, 권태와 포만, 노고와 고뇌가 더욱더 늘어가는 것을 명료하게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아직 그것뿐만 아니다. 자기 힘의 쇠약과 건강의 쇠퇴함을 느끼기 시작하든지, 사람들의 질병, 노쇠, 죽음 따위를 보든지 하면 그 사람은 이제까지 참되고 충실한 생명이 있는 것으로 느끼고 있던 자기 자신의 존재조차도 한 순간 한 순간, 일거수 일투족이 쇠약으로, 노쇠로, 사멸로 접근해 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또 자기의 생명이 서로 싸우는 다른 존재에 의하여 파괴당하는 것 같은 수많은 사건을 만나거나 고통을 증가하는 것 같은 경우를 만나는 것 말고도 생명 그 자체의 본질상 언제나 죽음을 향하여 다가가고 있다는 것, 즉 개인의 생명과 더불어 어떠한 행복의 가능성도 용인되지 않는 상태로 차츰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은 또한 자기 자신, 자기 인격(즉 거기에서만 그가 생명을 느끼고 있는 것)이 싸우면 안 되는 상대와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온 세계를 상대로 언제나 고통으로 끝나기 마련인 쾌락을 추구하며 저지할 수 없는 생명을 저지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또 그 자신, 그 자신의 인격(즉 그가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서 행복과 생명을 희망하는 것 그 자체)이 행복이나 생명을 가질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가 얻기를 바라는 것, 즉 행복과 생명은 그가 느끼지도 못하고 느낄 수도 없는 존재--그 실재에 관하여 알 수도 없고 또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 그와 전혀 관계가 없는 존재--그러한 존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자기에게 있어서 이것만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 자기 생각으로 이것만이 참으로 살아 있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 이것만이 그는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필요하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으며, 살아 있는 것으로 느껴지지도 않는 것, 즉 언제나 싸움이 끊이지 않고 변화하는 여러 존재의 이 온 세계, 이것이야말로 참된 생명이고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따라서 사람에 의하여 유일한 것이라고 느껴지고 또한 사람의 모든 활동의 원동력이 되는 생명이라는 것은 사실 있을 수 없는 기만적인 존재이며, 그의 밖에 있으면서 그가 사랑하지도 않고 느끼지도 않으며,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생명이야말로 유일한 참된 생명이라 할 수 있다. 우리들은 생명의 느낌을 사람으로서의 존재 속에서 관찰하고 시간 속에서 이를 연구함으로써, 참된 생명이라는 것은 마치 곡식의 낟알 속에 보존되어 있는 것같이 언제나 사람 안에 보존되어 있다가 때가 오면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동물적 개성이 사람을 자기 자신의 행복 쪽으로 계속 끌고 가는 데 반하여 이성적 의식은 개인적 행복이 불가능함을 알려 주고 다른 행복을 가르쳐 준다. 거기에 참된 생명의 발현이 있다. 사람은 먼 저편에 나타난 행복에 눈을 주지만 그것을 볼 수 있는 힘은 없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이 행복을 믿지 않고 개인적 행복 쪽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이성적 의식은 개인적 행복의 불가능을 나타내는 경우에 이르면 참으로 명확하고 또한 단정적이 된다. 그리하여 사람은 다시 개인적 행복을 부정하고 자신에게 제시되고 있는 이 새로운 행복을 응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성적 행복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개인적 행복은 완전히 버림받게 되고, 개인적 존재를 계속해 나가기가 불가능하게 된다. 이리하여 사람의 마음 속에서 이성적 의식과 동물적 존재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성립된다. 그리고 사람은 참된 인간 생활을 향하여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동물적 개성과 이성적 의식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 사람의 참된 생활은 동물적 개성의 행복을 부정했을 때에 비로소 개시된다. 그리고 동물적 개성의 행복에 대한 부정은 이성적 의식이 눈을 떴을 때 시작된다. 그러면 이성적 의식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요한 복음"에 의하면 '로고스',즉 '말씀'(로고스란 이성, 예지, 말씀이라는 뜻이다)이란 뜻이 맨 처음이었고, 만물이 그 속에 있으며 그것을 통하여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성은 다른 모든 것을 정의하고, 다른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정의될 수 없다는 말로 시작된다. 이성은 정의될 수 없다. 또 우리는 이것을 정의 내릴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이성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성밖에 알고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서로 접촉하는 경우, 우선 다른 그 어느 것보다도 훨씬 많이 우리들 일동에게 보편적인 이 이성의 평등한 필요성을 믿는다. 이성이야말로 살아 있는 우리들을 하나로 결부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기초라고 우리는 확신한다. 우리는 이성을 무엇보다도 정확하게, 무엇보다도 빨리 알아 낸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만 그러한 것들이 분명히 우리가 알고 있는 이성의 법칙과 합치한다는 것을 알 때에 비로소 아는 것이 된다. 우리는 이성을 알고 있다. 아니, 알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성을 알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이성이야말로 이성적 존재--즉 인간--가 생활함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법칙이기 때문이다. 이성은 인간에게 있어서 생활의 기준이 되는 법칙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동물의 경우, 동물이 자라나고 번식하기 위해서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법칙과 아주 똑같은 법칙이고 식물의 경우, 나무나 풀이 자라나서 꽃을 피우기 위해서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법칙과 똑같은 법칙이다. 흔히 있을 수 있는 그릇된 생각은 우리들 자신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들의 눈에 비치기만 하는 우리들의 동물적 육체의 자기 법칙에 대한 종속이 인생인 양 생각하는 점에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이성적 의식에 결부되어 있는 우리들의 동물적 육체에 관한 한, 이 법칙은 식물이나 결정체나 천체에서 행해지고 있는 경우와 마찬가지고 전혀 무의식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우리들의 생명에 관한 법칙은 우리가 어디서도 보지 못하고 또 볼 수도 없는 법칙이다. 그것은 어쩌면 성취될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우리의 손에 의해 착착 실행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 이 법칙을 실행하고 동물적 육체를 이성의 법칙에 종속시키는 것, 거기에 우리의 참된 생활이 있다. 우리들의 행복과 인생이 우리들의 동물적 개성을 이성의 법칙에 종속시키는 데 있는 것이라는 이 한 가지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들의 동물적 개성의 행복이나 존재를 인생의 전부로 보고 우리들 앞에 놓인 인생의 일을 거절한다면, 우리들은 참된 행복과 참된 인생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내몰고, 우리와 전혀 무관하게 행하게 되므로 우리의 인생일 수 없는 외적인 동물적 활동의 존재를 그 대신 받드는 것이 된다. 인생은 행복에 대한 희구이다. 행복에 대한 희구가 곧 인생이다. 모든 사람이 언제나 인생을 이렇게 해석해 왔고 앞으로도 역시 이렇게 해석해 나갈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생활은 사람으로서의 참된 행복의 희구, 곧 인생의 참된 생활인 것이다. 그러나 대중--사색하지 않는 사람들--은 인간의 행복을 자기의 동물적 개성의 행복에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동물은 자기의 육체만을 위해서 살 수가 있다. 그 무엇도 동물이 그와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동물은 개체로서의 자신을 만족시켜 무의식적으로 자기 종족에 대하여 봉사하며 자기의 개성을 망각한다. 그러나 이성을 가진 사람은 자기의 육체만을 위해서 살 수가 없다. 만일 사람이 개성으로서의 자기만의 행복을 희구하고, 개성으로서의 자신만을 사랑할 마음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도 또한 다른 동물이 알지 못하듯이 다른 여러 존재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일시적이나마 행복에 대한 희구가 동물적 자아의 요구에 대한 만족을 목적으로 하는 것같이 여겨질 때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잘못이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의 동물적 자아 속에서 일어난 일을 이성적 의식의 활동 목적으로 인정하는 데서 생긴다. 즉 사람이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꿈에서 본 것에 의하여 지도를 받으며 행동하는 경우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셈이다. 세상의 보통 사람들은 개인의 행복을 부정하는 것이 인간의 위대한 행위이고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인의 행복을 버리는 것은 미덕도 아니고 위대한 행위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 생활의 불가피한 조건일 따름이다. 사람은 자신을 전세계로부터 완전히 떨어진 한 개인으로서 의식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도 역시 전세계로부터 떨어진 개인으로 인정하고 상호간의 관계도 인정하며, 자기 개인의 행복에 대한 덧없음을 인정하면서 오로지 이성적 의식을 만족시킬 수 있는 행복만을 진실한 행복으로 인정한다. 동물에 있어서는 개인의 행복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이 행복에 거슬리는 행위는 삶의 부정이다. 그러나 인간에 있어서는 완전히 정반대이다. 한 개인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행하여지는 인간의 활동이야말로 인간 생활의 철저한 부정이다. 생존은 비참하고 유한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이성적 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동물에게 있어서는 개성으로서의 행복과 자기로부터 발생하는 그 개성으로서의 존속이 생활의 최고 목적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개성은 생존의 한 단계에서 지나지 않고, 그 단계에서 자기의 개인적 행복과 일치하지 않는 인생의 참도니 행복이 그에게 계시된다. 그릇된 세속적 가르침에 중독된 사람에게는 자기에게나 남들에게나 자연스럽게 찾아볼 수 있는 동물적 개성의 요구가 간단명료한 듯이 보이지만, 그와는 달리 새롭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이성적 의식의 요구는 전자와 완전히 상반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의 만족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의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복잡하고도 애매한 것같이 여겨진다. 뚜렷이 눈에 보이는 인생관을 버리고, 볼 수도 없는 의식에 몸을 맡긴다는 것은 무섭기도 하거니와 기분도 나쁘다. 그것은 마치 갓난아기가 자기 출생을 느낄 수 있다면 태어날 때에 두렵고 불안한 느낌, 그것과도 같으리라. 그러나 눈에 보이는 인생관은 죽음으로 인도하는 데 반하여 볼 수 없는 의식만이 생명을 준다는 것이 명료할 때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생활에의 첫발과 인간의 생활은 마굿간에서 주인에게 끌려나와 마구가 채워지는 말에게 일어나는 일과 똑같다. 마굿간에서 끌려나온 말은 바깥의 빛을 보고 자유로운 기분을 느낀다. 그리하여 말은 그 자유 속에 참된 생활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곧 수레를 끌게 마련이다. 말은 자기 등에 실린 짐의 무게를 느낀다. 따라서 만일 이 말이 자유롭게 달리는 것을 자기의 참된 생활로 생각한다면 마구 몸부림치고 마구 쓰러지며 때로는 죽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죽지 않는다면 이러한 처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다음 두 가지밖에 없다. 즉 무거운 짐을 그대고 끌고 가면서 짐의 무게를 그다지 느끼지 않고 끌고 가는 것이 괴롭기는커녕 오히려 즐겁다는 것을 발견하든지, 아니면 끝까지 고집을 부리다가 주인에 의해 방앗간으로 끌려가 밧줄에 벽에 꽁꽁 묶여 수레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면 괴로워하면서 암흑 속의 한 곳을 계속 걷는 것이다. 이 경우에도 말의 힘이 헛되이 소비되지는 않는다. 말은 마지못해 자기의 일을 수행하지만 이것에 대하여서도 법칙이 실행된다. 요컨대 말은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를 택할 것이다. 양자의 차이는 다만 전자가 자발적으로 일하는 것에 비해 후자는 괴로워하면서 마지못해 일하는 데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의 참된 생활을 이어 나가기 위해서는 개성의 행복을 거절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면, 개성이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것인가?" 자기의 동물적 존재를 인생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 개성적 의식이 참된 생활의 구현을 방해한다. 그러면 도대체 이 의식은 무엇 때문에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자기의 생명과 종족의 보존이라는 목적을 향하여 돌진하는 동물에게 있을 법한 꼭같은 질문으로 대답할 수 있다. "도대체" 하고 동물은 물을 것이다. "내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상대하여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이 물질, 이 기계적, 물리적, 화학적 그 밖의 여러 법칙이라는 것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인가? 만일 나의 사명이 동물 생활의 존재라 한다면, 내가 정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유형.무형의 장애물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인가?" 동물적 자아는 결코 장애물이 아니라, 인간의 참된 행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동물적 자아는 인간에게 있어서 그가 일을 하는 데 필요한 도구이다. 말하자면 인간에게 있어서 동물적 자아는 행복을 파고들기 위해서 이성적 존재에게 주어진 삽과도 같은 것이다. 즉 파는 사이에 날이 무디어져서 다시 갈고, 이리하여 소모시켜야 할 성질의 것이지 깨끗이 닦아 보관해 두어야 할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성장을 위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재능이지 보존을 위해서 주어진 헛된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목숨을 잃으면 얻으리라." 이성적 의식은 이 의식에 의해 계시되고 있는 참된 행복 속에서 자기의 참된 생명을 발견하기 위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 참된 행복--즉, 선--속에서 생명을 발견하는 사람은 생명을 지닐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고 좁게 구획된 동물적 자아의 행복 속에서 생명을 발견하는 사람은 그 사실만으로 생명을 잃고 마는 것이다. 개인적 행복을 희구하는 것을 인생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태양은 이미 생명이 싹트기 시작한 것에만 생명을 가져다 준다.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에도 생명이 왜 . 언제 . 어디서 싹트는가, 그것에 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오늘날까지 단 한 명도 없다.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다. 생명은 곧 생명이다. 모든 것의 근원이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그 발생 상태를 알 수 있겠는가? 인간에게 있어서 발생하고 멸망하는 것은 살아 있지 않은 것, 시간과 공간 속에 나타나는 것, 그것뿐이다. "나의 생활은 행복을 희구하는 일이다." 하고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말한다. "행복은 만인이 자기 자신보다 나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내 손안에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만물은 모두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있다. 따라서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나를 사랑하게 하려는 이 노력은 결국 헛수고이다. 헛수고이지만, 나는 달리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몇 세기가 지난 뒤 사람들은 발광체까지의 거리를 측정하고 그 무게를 추정하고 태양이나 별의 성분을 조사했으나, 개인적 행복의 요구와 이 행복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온 인류의 생활을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지고 5천년 이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미해결인 채로 남아 있다. 이성적 의식은 각 개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 당신은 행복을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사람이 그들 자신보다도 당신을 더 사랑할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말한 뒤에 이 이성적 의식은 사람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라고 가르쳐 준다. 따라서 이성적 의식에 의해서 사람들에게 계시된 유일한 행복은 같은 의식에 의하여 다시 덮여 가려지게 된다. 몇 세기가 또 흘러간다. 그러나 인생의 행복에 대한 수수께끼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인 채로 남아 있다. 그렇다고 하지만 이 수수께끼는 이미 아득한 옛날에 해결 지어진 것이다. 실제로 개인적 생존의 행복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로 그것은 개인적 행복을 희구하는 인간 상호간의 생존경쟁이다. 그러나 행복에 대한 불가능을 없애고 행복을 얻기 쉬운 것이 되도록 하려면, 자기의 개인적 행복에 대한 욕구를 다른 모든 존재의 행복에 대한 욕구로 바꿀 수 있음을 우리들 마음 속에서 승인하기만 하면 된다. '인생은 개인적 행복의 희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생관으로 세계를 볼 때 사람은 거기서 서로 멸망시키려는 불합리한 생존경쟁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그것과 전혀 다른 것을 발견하고자 한다면, 즉 생존경쟁의 우발적인 현상과 더불어 이들 존재의 끊임없는 상호부조--이것이 없이는 세계의 존재 그 자체를 생각할 수 없게 되어 버리는 상호부조를 발견하고자 한다면 자기의 생활이 다른 사람의 행복에 대한 희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개인적 생활을 참담하게 하고 인간의 행복을 불가능하게 하는 둘째 원인은 생명을 낭비하고 포만과 고뇌를 수반하는 외관상의 쾌락이다. 사람은 자시의 생활을 다른 사람의 행복에 대한 희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쾌락에 대한 환상과도 같은 갈망은 당장에 분쇄되고, 동물적 자아의 밑없는 독에 물을 채우기 위해서 쏟은 무익하고 괴로운 활동에 이성의 법칙과 완전히 일치하고, 다른 여러 존재의 생명을 유지하려는 그의 참된 행복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활동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생명의 활동을 멸망시키는 개인적 오뇌의 고민은 의심할 나위 없이 유익하고 가장 유쾌한 활동을 불러일으키는 다른 사람에 대한 동정의 감정으로 바뀔 것이다. 개인적 생활을 참담하게 하는 셋째 원인은 죽음의 공포이다. 우리들은 자기 생활의 참뜻을 자기의 동물적 자아의 행복에 대한 희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의 행복에 대한 희구에 있는 것으로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죽음이라는 괴물은 영원히 사람의 눈에서 사라져 버리게 될 것이다. 명심하라. 죽음의 공포는 육체의 죽음과 더불어 참된 생명의 행복도 상실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과 공포에서 비롯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만일 자기의 행복을 다른 여러 존재의 행복 속에서 상상할 수만 있다면, 즉 우리가 자기 자신보다도 다른 모든 존재를 더 사랑할 수만 있다면, 자기를 위해서만 살고 있는 사람이 생각하고 있듯이 죽음이 행복과 생명의 단절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여러 존재의 행복과 생명은 다른 여러 존재를 위해서 살고 있는 사람의 행복에 의해서 쉽사리 절멸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생명의 희생에 의하여 더욱더 향상되기도 하고 강화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릇된 생각에 빠진 사람의 의식은 흥분하여 이렇게 반박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삶의 거부이다. 자살과 다름없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이성적 의식은 "그런 것은 내가 알 바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내가 알기로는 인생이란 그와 같은 것이고 그 밖의 인생은 없다. 아니,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나는 그런 생활이야말로 인간에게 있어서나 온 세계에 있어서 참된 인생이며 행복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또 종전의 세계관에 따르면 나의 생활이나 모든 생물의 생활이 악이고 어리석은 것이었음에 반하여 이 생각에 따르면 나의 생활이나 모든 생물의 생활이 악이고 어리석은 것이었음에 반하여 이 생각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 심어진 이성적 법칙을 실현하는 것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또 나는 무한으로까지 증대될 수 있는 각 존재의 최대 행복은 모든 사람 각자에게 봉사하도록 하는 이 법칙 -- 모든 사람이 상부상조한다는 이 법칙--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이론으로서는 생각할 수 있는 법칙이지만, 실제로 행할 수 있는 법칙이 될 수 없다" 하고 그릇된 생각에 빠진 사람의 의식은 대답한다. "현재 다른 사람들은 그들 자신 이상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나도 자신 이상으로 그들을 사랑하거나 그들을 위해서 자신의 쾌락을 던져 버리고 고통에 몸을 맡길 수 없다. 나는 이성의 법칙 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신을 위해서 쾌락을 구하고, 자신을 위해서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리고 현재 인간들 사이에서는 생존경쟁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만일 나 혼자만이 싸우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나를 짓밟고 말 것이다. 가령 모든 사람의 최대 행복이 어떤 방법으로 상상 속에서 얻어진다 할지라도, 그런 것은 나에게는 아무래도 좋다. 현재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나 자신에 있어서의 실제적인 행복이다"라고 그릇된 의식은 말한다. 이성적 의식은 대답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당신이 쾌락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당신 스스로 구하지 않고 남들로부터 받았을 때에야 비로소 그것이 당신에게 있어서 행복이 될 것이라는 사실과, 당신 자신이 자기를 위해서 그 쾌락을 잡았을 때에는 현재와 같이 그것은 포만이 되고 고통의 원인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남이 현실의 고통에서 당신을 해방시켜 줄 때, 비로소 당신은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당신처럼 상상 속 고통의 공포 때문에 스스로 자기의 생명을 끊는 것 같은 짓을 되풀이하는 경우에는 단연코 그런 해방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알고 있다. 모든 사람이 나만을 사랑해 주고 나 또한 나 자신밖에 사랑하지 않는 생활,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쾌락을 얻고 고통과 죽음에서 나 혼자만이 벗어나기를 원하는 생활은 최대의 고통인 동시에 부단한 고통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또 나는 알고 있다. 아무리 애쓴다 하더라도 자기의 생명의 법칙과 일치된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행복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들의 생명의 법칙은 싸움이 아니라 그와 전혀 반대로 모든 생물간에서 이루어지는 상호부조인 것을. 그리고 우리들의 생명의 법칙은 싸움이 아니라 그와 전혀 반대로 모든 생물간에서 이루어지는 상호부조인 것을. "그러나 나는 개성으로서의 자기 속에만 생명이 있음을 알고 있다. 다른 모든 존재의 행복 속에 자기의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라고 그릇된 의식은 이야기한다. 이성적 의식은 대답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다만 이제까지 악하고 불합리하다고 밖에 여겨지지 않던 나의 생활과 세계의 생활이 지금은 내가 나 자신 속에서 인정하고 있는 동일한 이성의 법칙에 복종함으로써 동일한 행복을 희구하며 살고 있는 일개의 합리적인 완전체와 같이 여겨지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 다른 존재의 행복 속에서 자기의 행복을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남을 위해서 일하고 괴로워하는 가운데서 행복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릇된 의식이 강하게 반발한다. 그러나 한번 이 자비의 감정에 몸을 맡기기만 하면, 개인적 쾌락과 같은 것은 당장에 그 사람에게 있어서 아무런 뜻도 없게 되고, 그의 생활력은 남의 행복을 위한 노고와 고통으로 옮아가고 만다. 그리고 이 고통도 노고도 그에게 행복이 된다. 이성을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의 행복에 대한 희구를 억제하고 다른 존재의 행복에 대한 희구를 그것에 대치시키는 것의 가능성을 정신적으로 인정한다면, 자기의 생활은 이제까지의 어리석음과 비참함을 벗어 던진 합리적이고 행복한 것이 되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또한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존재 속에서 같은 생활관념을 인정하는 동시에 이제까지 광적이고 잔인한 것으로 여겨지던 온 세계, 온 인류의 생활이 갑자기 인간만이 희구할 수 있는 최고의 합리적인 행복의 원천이라는 것을 마찬가지로 인정할 수 있다. 즉 이제까지의 무의미하고 공허한 것이 그에게 있어서 합리적인 뜻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세계 인류의 생활 목적은 전세계 모든 존재의 끝없는 결합과 광명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는 전세계, 전인류의 생활이 결합과 광명화를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고, 이 결합과 광명화의 과정에서 우선 인간이, 그리고 모든 존재가 차츰 이성의 법칙에 따르는 동안 인생의 행복, 개인의 행복은 행복에 대한 희구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서의 법칙을 바탕으로 각자가 모든 사람의 행복을 희구함으로써 얻어진다는, 인간만이 이해할 수 있는 대진리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행복에 대한 희구를 억제하고 다른 존재의 행복에 대한 희구를 그것에 대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사람은 차츰 개성을 부정하는 정도를 배가시키고 활동의 목적을 자신으로부터 다른 존재로 이동시키는 것이 전인류와 인간에게 가장 가까운 온갖 생물의 진보의 운동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은 또한 인생의 발달은 세계 인류가 단지 이성에 따름으로써 적의와 불화에서 조화와 결합으로 차츰 다가가는 데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인류 가운데 후세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뛰어난 사람들은 타인의 행복을 위해서 자기의 존재를 희생시키는 모범을 보여주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오로지 이성의 요구에 의해서만 자기가 인정한 일들이 실제로 이 세상에서 행해지고 있고, 인류의 과거 생활에 의하여 증명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이것만이 아니다. 이성보다도, 역사보다도 더욱 강하고 더욱 큰 설득력을 가지고 이런 사실을 마치 다른 샘에서 흘러나온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가리켜 보이는 것이다. 다름이 아니라 그것은 이성이 그에게 가리켜 보이고 있고, 또 그의 마음속에서 사랑에 의하여 표출되는 활동으로, 단적으로 지고의 행복 그 자체로 직접 잡아 끌듯 끌어당기는 그의 마음의 희구이다. 사람의 삶은 행복에 대한 희구이고 그가 희구하는 대상은 반드시 그에게 주어진다. 인간이면서도 동물의 수준으로 타락했을 때에만 그는 죽음과 고통을 역력히 본다. 그리고 그때, 죽음과 고통은 괴물처럼 사방에서 그에게 소리를 질러 이성의 법칙을 좇은 사랑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인간적인 삶의 유일한 길로 그를 내몬다. 죽음과 고통은 자기의 삶의 법칙에 대한 인간의 침범에 지나지 않는다. 이 법칙을 좇아 사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나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행복에 대한 희구이고, 그가 희구하는 대상은 반드시 그에게 주어진다. 죽음이 될 수 없는 삶과, 악이 될 수 없는 행복이 바로 그것이다. 더 이상 장난할 시간이 없다 휴 프레이더 인간성 개발에 초점을 둔 책들로 유명한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주요 저서로 "나에게 쓰는 편지" "나는 대지를 만지고, 대지는 나를 만지고" "사랑과 용기에 대하여" 등이 있음. 행복해지기는 쉽다. 어려운 것은 우리 자신에게서 불행을 떠나 보내는 일이다. 우리는 모든 걸 다 쉽게 포기해도 불행만은 포기하지 못한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이성적이지 못하다. 하지만 행복을 등지는 것은 얼핏 보면 아주 당연한 일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불행에 관심을 기울이고, 더 구체적으로 불행을 지속시키는 생각의 근거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불행을 정당화하려는 이유들은 어떤 것일까? 이 세상을 행복한 마음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은 현실적인 것일까? 이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한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은 외면 할 수 없는 진리로 보인다. 지금까지 당신은 아마도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려는 생각은 하지도 않고 지내 왔을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우리가 무언가를 바라면 그것은 득이 되지 않고, 우리가 추구하던 일도 결국 해가 된다는 것이 세상 사는 이치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무언가를 끊임없이 기대하고 추구하는 일을 그만 둘 수는 없으리라.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들을 생각해 보자. 헛된 꿈, 크고 작은 부, 명예, 권력, 맛있는 음식, 강렬한 쾌락... 그 무엇이든 상관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그 결과는 한결같이 비참한 것이다. 그러면 욕심 없이 천천히 꾸준하게 노력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노력의 결실은, 비록 끈기 있게 애써서 얻었다 해도 결국 빼앗기고 만다는 것이 세상의 대체적인 이치이다.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었다. 그들 인생의 종착지에는 한결같이 상실과 외로움, 고통스런 죽음이 기다릴 뿐이라는 인식이 오랫동안 전해 내려 왔다. 어떻게 해야만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종말에서 진정으로 벗어날 수 있겠는가? 혹시 당신의 인생도 그런 종말을 맞으리라 예측하고 있진 않은가? 또한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긴 세월은 어떤가? 그 긴 시간들이 어김없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 마지막 장소는 과연 가치 있는 곳일까? 나이가 몇이든 여기 이 세상에서 보는 것 가운데 믿을 만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오늘 유치원의 놀이터에서 누군가가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해도 내일이면 다른 아이와 놀게 될 것이다. 부모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자식들을 돌보지 않고, 또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면 이번에는 자신의 부모를 버린다. 삶의 모든 여정에서 온갖 형태로 강자는 약자를 먹이로 삼는다. 자연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지만 모든 자연 현상은 자기 아닌 다른 것의 희생으로 이어져 간다. 물론 모든 현상이 절대적으로 이러한 법칙대로 움직이는 건 아니다. 그러나 몇몇 예외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세계의 본질임엔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행복해질 수 없는 이유는 세계의 이런 본질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자연히 떠오른다. 확실히 그런 것 같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만일 그밖의 다른 길이 있다고 우리가 그 다른 길을 택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일일까? 하루에도 수천 번씩 행복을 희구하는 우리의 마음은 이보다 훨씬 더 강한, 행복해질까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스러져 버린다. 아주 작은 활기조차 조금 오래 지속되었다 싶으면 두려움 때문에 제지하게 된다. 우리가 완전한 자유를 만끽하고, 샤워하며 노래 부르고, 남에게 들릴 만큼 큰 소리로 휘파람을 불게 되면 곧바로 해묵은 걱정이 스멀스멀 우리 속으로 스며든다. 우리의 변덕스러운 기분은 금세 의심에 사로잡혀 버린다. 거부할 수 없는 어떤 이유로, 도움을 받는다는 확신도 없이 우리는 다시 심각한 마음 상태로 되돌아가야 한다. 행복은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건강, 자식들과 그밖의 인생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이다. 나는 개개인의 마음 상태가 전체에게 끼치는 영향을 알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행복의 역할에 대한 내 의견을 알리는 것이다. 만일 행복에 관한 책을 찾아 공부하느라 애쓰는 독자가 있다면, 또 행복에 대해 생각할 형편이 아니어서 그런 책 얘기를 너무 불공평하고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 개인이 느끼고 있는 행복에 대한 생각이 그런 이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리라 생각한다. 나는 그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라고 권하고 싶다.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해답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공부 방법을 찾아 고심하는 것이 고심하지 않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낫다는 것이다. 행복한 생각의 효과를 진정으로 아는 이는 누구인가? 행복은 열린 마음에 다가서서 남몰래 용기를 불어넣고 희망을 준다는 말이 사실일까? 나는 그렇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내가 진정으로 사랑할 때 나와 같이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김없이 느낄 수 있고, 돈독해지는 가족 혹은 동료의식 속에서 진정한 힘은 부드러움이며, 그것이 담고 있는 메시지란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일 속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행복해지는 것이 좋을 뿐 아니라 정당하다고 믿는다. 나는 경험을 통해서 나 개인이 상냥해질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길은 바로 내가 행복해지는 것임을 안다. 지속적인 행복 영원한 행복은 없다는 믿음을 아주 폭넓고 깊게 뿌리 박혀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생은 냉혹한 현실일 뿐이다. 어떤 성스러운 종교학자가 나타난 영원한 행복을 설교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고 오히려 그를 사기꾼이나 허풍선이라고 생각한다. 왜 안 그러겠는가? 단 하루라도 '완전한 평화'를 체험해 본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일생 동안 완벽한 평화를 구가한다는 것은 엉터리이고 어리석은 일로 보인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지속적으로 행복해지는 일은 바라지도 않는다고들 한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재미있는 의문이 떠오른다. 이 글을 적당히 학구적인 분위기와 권위를 가지고 시작하기 위해 우선 행복의 정의를 내리는 편이 낫겠다. 미리엄 웹스터 Memiam--Webster 사전에는 행복의 지속성에 대해 이렇게 쓰려 있다. '상대적인 영원함으로 특징지어지는 평안한 상태... 그리고 이 상태를 지속시키려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바람이 특징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정의는 행복이 발생하는 '장소'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마음이 만족스러운 상태...' 사전이란 일상적으로 단어가 사용되는 용례를 알려줄 뿐이지만, 내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행운, 번성과 그밖의 세속적인 성공의 여러 형태를 행복의 근거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단어의 용법뿐만 아니라 어떻게 이 '마음의 만족'이 생기고 사라지는지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도 제시한다. 우리가 지속시키려는 흡족한 마음의 상태는 '아름다운' 느낌이지만 이것은 외부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는가 하는 데 달려 있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 아침인가! 얼마나 멋진 하루인가!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어 있구나." 그러나 우리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까? 우리는 더 좋은 차를 갖고 싶어한다. 하지만 더 좋은 차로 느껴지는 흡족함은 얼마나 오래 갈까? 더 좋은 집도 갖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 집이 언제까지 그렇게 좋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행복의 지속을 바라는 자연스런 소망'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행복은 지속되지 않는다고 믿는 사실이 신기하지 않은가?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살펴보면 지속되어 온 행복은 결국 불행의 주제가 되고 만다. '버팔로 모는 목동이 롤러 스케이트를 탈 수는 없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행복해 질 수 있다'는 노래 가사가 있다. 중요한 것은 행복해지려는 마음이다. 행복의 근거 행복을 자아내는 마음의 상태는 하루를 어수선하게 만드는 쓸데없는 일들을 가볍고 수월하게 스쳐지나갈 줄 아는 마음이다. 그것은 산들바람처럼 모든 것에 새롭게 생기를 불어넣고 아무것도 방해하지 않는다. 그것은 행복한 존재 그 자체이다. 이런 마음은 타인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그 무엇을 갖고 있다. 이에 반대되는 마음 상태란 끊임없이 온갖 일들에 얽히고 설켜 하루의 일을 엉망으로 만드는 마음이다. 불행한 마음은 무절제하고 흥분을 잘하며 무엇보다도 겁에 질려 있다. 마음의 일관성도 갖지 못하고, 내면의 평온한 지향점도 찾지 못하며 무슨 문제라도 일어나면 금방 나쁜 예감에 사로잡힌다. 마음은 충분히 다스릴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의 생각은 너무 혼란스럽고 상처받기 쉬워서 하루 내내 두꺼운 막으로 가리워진 상태로 사람들을 바라보며 지낸다. 그래서 우리는 사림들의 마음 속에 담겨 있는 진실한 생각을 알지 못한다.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 꼭 알아야 할 것은 마음의 본성이다. 예를 들어 갓난아기가 어린이들은 우리를 기쁘게 한다. 이것은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아이들 마음 속의 순진무구함을 바라보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옳고 그름의 판단을 유보한 시선으로 아이들을 봄으로써 금방 그 순수함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가치 있는 일들이 그러하듯이 결코 성급한 마음으로는 아이들을 기를 수 없다. 먼동이 트는 새벽의 침묵 속에 조용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우리는 땅이 눈뜨는 소리를 듣는다. 빛과 그림자가 변해 가는 신비로운 순간을 목격한다. 이것은 조금만 성급한 마음이 되어도 놓쳐 버리기 쉬운 은밀한 기쁨이다. 서두르면 불행해진다. 당신의 마음 속에 깃든 사랑의 마음은 아주 고요하다. 이것은 신체적으로 굼뜬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평화 속에서 움직임이 없는 상태이다. 그렇다고 아이들을 행동의 본보기로 삼는 것은 어리석다. 아이들은 세상에 나올 때 행복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제대로 갖추고 나온 게 아니지만 어쩌면 그런 것들을 다 갖추었다고 할 수도 있다. 아이들은 우리 어른이 잃어버린 특별한 힘, 특히 정신의 힘을 가지고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이들을 보면 지나칠 만큼 분주하고 온갖 것에 관심을 쏟으면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마음속에는 단 한 가지 목표만이 있어야 한다. 과거에 얽매일 이유가 없는 자유로운 아이들이 통찰력은 어른들을 가르치는데, 특별한 방법을 쓰는 것은 아니고 행동으로 직접 보여 준다. 아이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뚜렷한 한 가지 목적을 표현한다. 다섯 살 짜리 아이는 손가락을 이용해서 벽에 그림자로 형상을 만들지 못한다. 5개월 된 아기는 벽에 비친 그림자가 움직일 때마다 그것을 잡으려 애쓸 것이다. 하지만 두 아이 모두 손가락으로 노는 법을 안다는 것은 확실하다. 아이들은 확실히 결단력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것에 대해서 단 한 가지 결정을 내리기 때문이다. 두 아이는 다른 모든 아이들이 그렇듯 이 모든 것--테이블 세팅, 손님들, 음식--을 단일한 눈을 통해 파악했다. 거기에 있는 모든 것이 흥미로웠던 그는 즐겁게 놀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성숙해 감에 따라 이와 반대되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독립적이고 한정된 기능을 맡기 시작한다. 그날 저녁까지 리넨 냅킨은 단 한 가지 용도로밖에 쓰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밖에 다른 즐거움을 주진 못했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이 한계를 지운 잣대 안으로 어느새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을 가두어 버린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인 출세에 그다지 득이 되지 않는 사람들과는 친밀한 교제를 하려 하지 않는 분류의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인간관계란 이용하기 위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보는 것은 상당히 불행한 일이다. 이에 반해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는 사람들의 신체적 결함마저도 상당한 흥미와 기쁨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아이들은 아주 특별한 관심을 보이거나 또는 아주 무심하다. 이것은 불행에 대한 판단에서 비롯된 태도가 아니다. 나는 최근에 네 살 짜리 아이들 몇 명을 보았다. 그애들은 수영장에서 놀고 있었는데 보통은 자기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렸겠으나 내가 본 그날은 심한 다운증후군을 앓는 어른들 주위만 맴돌았다. 이 네 살바기 아이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다운증후군을 앓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노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나중에 그 애들이 재잘대는 소리를 듣고서 나는 그들이 어른들의 고통스러운 질병을 본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편견이 없고 객관적이기 때문에 수영장에 온 그들과 다른 사람들과의 다른 점을 아주 정확하게 보고 얘기한다. 하지만 그들의 얘기에는 대꾸를 하거나 비난할 만큼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이들은 아주 재미있게 놀았고, 아이들의 관심이란 오직 그 재미라는 것뿐이었다. 생각을 만드는 현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 다만 생각이 그렇게 만들 뿐이다.' 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 말인가? 이 말은 우리가 상황을 지배할 힘이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해도 생각만큼은 완벽하게 컨트롤 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행복의 열쇠는 마음을 좋은 생각으로 채운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이 훌륭하며 일어나는 일마다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질없다. 이것은 엄격하고 공정한 판단에 위배되는 것이 분명하므로 내면의 혼란만 일으킬 뿐이다. 생각이 그것을 그렇게 만든다. 생각이 세상에 옷을 입히는 것이다. 정작 세상은 의외로 우리의 행복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세상은 우리에게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조단은 태어난 지 다섯 달이 되자 유모차에 누워 있는 것보다 앉아 있는 걸 더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그 애를 보행기 위에 앉혀 놓았다. 물론 아이의 다리는 걷기에는 아직 약했다. 어느날 아내와 내가 부엌에 들어가 아이를 돌보지 못했을 때 친구가 현관에서 집안으로 막 들어오다 목욕탕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가 곧바로 목욕탕으로 달려가서 살펴보았다. 그리고 조단이 욕조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서 욕조의 바닥에서 천장까지 샅샅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살피는 걸 발견했다. 아마 조단은 바로 그 순간 걷기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을 것이다. 목욕탕의 욕조 속으로 그녀는 곧장 뛰어들어갔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녀는 물 아래 가라앉은 아이를 보자 기겁을 했다. 그녀는 아이를 끌어내고, 우리를 소리쳐 부르고, 우리가 아이의 젖은 몸을 닦아줄 동안 큰 소리로 야단을 쳤다. 나는 아이가 조금도 당황한 기색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우리는 조단이 울음을 터뜨릴 것이라 예상했으나 그는 끝내 울지 않았다. 게다가 보행기에 다시 옮겨 놓자 그는 재빨리 욕조 쪽으로 나아갔다. 우리는 황급히 안전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그 아이의 생각 속엔 수영을 하지 못하면서 물 속에 눕는 것은 '나쁘다'라는 선입견이 심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는 얼마 전까지 엄마의 자궁 속에 잠겨 있던 기억을 더듬으며 물 속에 눕는 느낌이 '좋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음이 분명하다. 아주 간단하게, 당신이 화를 내고 있는 동안은 행복해질 틈이 없다. 그러나 그 당시의 심정은 분노야말로 아주 중요하다고 믿는 상태이다. 분노가 우리의 가장 자연스런, 그리고 필요한 감정이기 때문에 셀 수 없이 많은 형태로 '화를 내는 일은 중요하다'는 단언이 이루어지는 걸 들어 왔다. 이 익숙해진 생각에 의문을 품지 않는 한 결코 하루 종일 평화롭게 보내는 일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화를 낼 합당한 이유는 언제나 마음 속에 떠오르는 법이므로 평화로워진다는 것은 부질없는 희망처럼 보일 것이다. 분노는 절대로 마음의 가장 밑바닥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위선적인 행위 없이도 충분히 사라질 수 있다. 당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바를 알게 되면 마음속에 자리한 가짜 열정과 해묵은 비통함의 흔적까지 말끔히 없애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리 그 기초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좀처럼 그들의 진실된 감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좀처럼 그들의 진실된 감정이 깃든 자리에 다가갈 수가 없다. 이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묻는 것으로 가능해진다. 첫번째 단계는 욕을 퍼붓는 것보다는 혼란스러운 느낌일 때가 훨씬 좋다. 당신의 몸이 나와 타인을 공격하는 욕망을 드러내도록 방관하지 말라. 당신이 침울해진 이유가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을 그만두게 되면 당신은 분명히 소중한 시간을 아낄 수 있다. 그러나 물론 그것 하나만으로 겉으로 드러나는 감정을 없애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아주 작은 분노라도 일어나면 당신은 즉시 마음을 바꾸어 이 분노를 가만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은 계속해서 분노야말로 자신의 진실된 느낌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분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신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알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 마음속에 감춰져 있는 위대하고 올바른 힘을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행복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생각에 쉽게 동의한다. 그러면서도 전혀 그렇게 살지는 못한다. 그 근거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드러나는 태도 속에서 분명히 찾을 수 있다. 우리는 그 증거를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행복이 마음의 문제라는 사실을 자꾸만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사소하고 진부한 사실 때문에 정말 가치 있고 소중한 것들을 잃어 버리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그래서 행복을 저지하는 데 전력투구한다. 모든 비평이 비평가를 공격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 아닌 다른 사람들이 보잘것 없게 보여야 자신이 더 훌륭하고 근사해 보인다고 믿는다. 자신의 결정적인 이미지를 자신에게서 찾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늘 자신을 버리고, 우리가 대상으로 삼는 사람에게 판단의 잣대를 들이댐으로써 그 비교를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형성하려 한다. 마음속에서 이러한 생각을 없애 버리는 일은 가능하다. 만일 타인과 비교해 자신을 평가하는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만족할 수 없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의견을 끊임없는 판단을 통해서 지속시킨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어느날 문득 우리가 타인을 공격하는 일을 잊어버리고 모든 이가 선량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상당히 오랫동안 우리는 조금이라도 함부로 다루어지면 상처받아 왔다는 생각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우리는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을 모두 들추어낼 수 있고 그들이 한 일, 그들이 게을리 한 일을 샅샅이 기억해낼 수 있다. 우리가 강조하려고 결정한 행위의 규칙이 다른 이에게보다 자신에게 더 쉬운 것이면 우리는 타인에게 겨누었던 공격의 총구를 돌려 우리 자신에게 향하도록 규칙 자체를 고친다. 이것을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 이라 부르고, 자기 외의 다른 이는 이보다 더 큰 잘못이 있다는 식으로 이 규칙을 자세히 살피게 된다. 사고방식의 전도로 공격해야 할 대상이 누가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불행한 경우 공격적인 생각은 한 가지의 분명한 요인이 된다. 비난의 표적이 우리 자신이든 타인이든 어떤 사물이든 상황이든 그 결과는 정신적인 상처로 남는다. 모든 생각은 돌고 돈다. 우리가 아무리 자책에서 벗어나려 해도 우리의 죄를 믿는 한 여전히 우리 마음에는 죄책감이 석연찮게 남아 있다. 내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죄책감은 자기 부정을 무의식적으로 행동화함으로써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게 우리가 아는 잘못을 알려준다고 해도 부정적인 생각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우리의 판단력은 환기시키면서 얻어지는 정의감과 약간의 신체적 마비증상을 제외하면 무력감일 뿐이다. 그 무력감은 이제 문제들이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서 우리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다른 이의 마음에까지 확산되었다는 느낌이다. 우리의 불행한 마음속으로 더 강한 자의식이 꾸역꾸역 밀려든다. 우리가 비난의 말을 입밖에 냄으로써 그 부정적인 인식을 꺼낸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바깥으로 표출한다고 해서 마음속의 부담감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그럴수록 그것은 더욱 강조되고 강화되어 마음속에 더 오래 남을 것이고, 이제는 그것으로 슬픔이 하나 더 느는 것이며, 슬픔과 짝을 이뤄 배신감까지 뒤따르게 된다. 우리는 비록 미약할지라도 다른 사람은 공격해 왔다. 그 사람 또한 우리처럼 열심히 노력했을 텐데 말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타인에 대한 적개심 없이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고 솔직해질 수 있다. 베개를 던지거나 소리를 지르고, 공기가 맑은 곳에서 산책하거나 운동을 함으로써 몸의 긴장을 풀고 머릿속을 말끔하게 하는 것이 내부의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일 수도 있다. 행동으로 옮기는 이러한 방법은 아무런 해가 없다. 왜냐하면 이런 방법은 다른 사람들을 동요시켜 문제를 복잡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을 이리저리 얽히게 만드는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워야 할 규칙이란 '비난하는 생각을 마음에 남겨두지 말아라, 즉 그 싹을 뽑고 마음에 난 상처를 한시바삐 어루만져주라'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에게도 아무런 손해를 입히지 않는다. 우리가 자신이나 타인을 진심으로 용서하는 마음이 되면 마음속에 암초처럼 남아 있던 불안들이 떠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지금 당장 실행하는 것이 좋다. 이유는 간단하다. 당신이 타인의 약점에 너무 오래 집착하다 보면 당신의 마음은 불행한 생각으로 점점 더 깊게 물들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응용하라고 제안한 것 중에 가장 어려운 부분은 '나쁜 생각을 자아내는 싹을 자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 제안을 실행하는 절차가 복잡하기 때문이 아니라 의외로 비난하는 버릇이 우리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탓이다. 나는 언젠가 아주 열심히 일하는 친구를 살펴본 적이 있다. 그녀는 몇 분이나 몇 시간 동안이 아니라 몇 달에 걸쳐서 지나칠 만큼 일을 해댔다. 일에 대한 지나친 열중은 그녀가 자신의 부모--수년 전에 돌아가시긴 했으나--를 조금씩 용서하게 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마흔이 되었을 즈음 그녀는 자신의 어린시절의 비통한 추억이 너무나 마음 속 깊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과 거친 관계를, 그것도 오래 지속시키지도 못하는 관계를 맺어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그후로 과거의 기억에 비추어 사람들을 판단하는 습관을 버리고 아버지의 행동을 기준으로 삼아 남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평가하는 버릇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녀는 일일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늘 공책을 가지고 다니면서 분노가 표출될 때의 모든 증세를 일일이 적는 것이었다--좌절감, 비난, 분노, 악의 등등--그녀는 하루를 마감하면서 자신이 적어 내려간 목록을 읽고 하나하나 마음으로 들여다보면서 자신을 화나게 했던 사람이나 상황에 대한 진정한 느낌이 어떤 것이었나 되새겨 보았다. 이렇게 6-7개월을 실행하자 그녀 내면에 아주 유쾌한 변화가 오기 시작했음을 물론, 난생 처음으로 새롭고 오래 지속될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친구처럼 꾸준히 노력하려 하지 않는다. 변화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다시 예전의 방식으로 도망치듯 되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친구는 자신 비통함의 찌꺼기를 계속 마음에 묻고 다니는 한, 조금이라도 타인을 향한 악의가 남아 있는 한, 인생의 기쁨이란 무너지기 쉬운 불안한 것이라는 인식을 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인간관계를 시작하자마자 그녀는 해묵은 분노가 아직도 조금은 남아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곧장 자신이 진실로 열망하는 것과 문득문득 나타나는 감정을 비교해 보았다. 그녀는 자신은 물론 그 누구에게도 해가 될 생각을 가슴속에 하나도 품지 않게 될 때까지 이 방법을 되풀이했다. 우리는 '잔인할 만큼' 정직해야 하며 심지어 신중히 거론되어야 할 것마저도 즉시 말해 버려 자신의 숨기고 싶은 비밀까지도 들추어내야 한다. 이에 반해 단순한 진실 속에 살게 되면 이렇게 매일매일 던지는 질문들이 자신의 포용성과 사랑을 구하는 것에 국한되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느낀 것을 곧이곧대로 말로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부정직하다는 것을 마음으로 알게 된다. 선택은 우리가 한다. 우리는 자신의 이해력과 선의를 살펴볼 수 있고 사랑의 마음으로 반응할 수도 있으며, 익숙한 자의식이 들추어내는 '잔인한 진실'을 대답할 수도 있다. 다수가 하는 선택에는 실수란 없다. 그리고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약간의 불안감과 걱정, 수치심, 오해를 느끼면서도 예기치 않은 인간관계에서 탈없이 견디는 이유가 된다. 우리의 진실된 시선은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우리의 전 생애를 쉽사리 평화로운 분위기로 변화시킬 수 있다. 비통에 젖어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변했다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일이다. 우리가 아침마다 하는 허드렛일, 직업, 벽에 못 박는 일, 아이 돌보기, 저녁에 하는 자질구레한 일들은 연민과 기대의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마지못해 하는 힘겨운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자질구레한 일들에서 인생의 고결한 면이 드러난다. 간단한 사실은, 부드러운 시선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세상을 더욱 부드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책 가운데 하나인 중국의 "역경"에서는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고요함은 산처럼 크다.' 자신과 타인을 안정된 마음으로 좋은 점만 보려고 노력하면 이제껏 느꼈던 부정적인 면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알게 된다. 그것은 태양이 떠오르면 가뭇없이 자취를 감추는 한갖 그늘에 불과하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 우리의 경험 속에 산재한 많은 단정하는 버릇, 동요, 쓸데없는 정신적인 흔들림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지나친 관심에서 초래된다. 평온해지기 위해 필요한 또 하나의 단어는 '현재'이다. 오직 현재만이 우리가 단단한 지반 위에 설 수 있도록 지켜 준다. 동시에 현재를 중시함으로써 더욱 폭넓은 시야를 얻게 된다. 즉 우리의 근심, 걱정을 사라지게 하는 곳도 바로 현재라는 공간이다. 어떤 사람이 일생 동안 어떤 것을 외면하며 보냈다면 그에겐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고 단정하기 쉽다. 이것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다. 그러나 당신이 설 자리가 아무리 오래된 전통 깊은 장소라 하더라도 그곳에 머무는 한 괴로울 것이다. 현재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가 멈춰서서 바라보는 것을 망설이는 모습에서 잘 나타난다. 이러한 태도로 우리는 늘 기회가 오면 주춤거리고, 반대로 도달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은 서둘러 쫓아다닌다. 정신적으로 우리는 지나친 기대감과 소심한 낙담 사이에서 갈피를 못잡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마치 해안에 부서지는 파도처럼 이룬 것 하나 없이 포말로 흩어져 되돌아가는 모습이다. 우리가 실행에 옮기는 행위란 희생, 수난의 형태이거나 아니면 결국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고 오랫동안 만족감도 주지 못하는 일들이다. 한 번 돌진하고는 곧 흔적없이 사라져 가는 식이다. 형태는 다양하게 변하지만 그 기본 양식은 한결같고 변화가 없다. 무엇이든 지금 현재에 머무는 편이 정신적으로 낫다. 우리는 평생 동안 똑같은 일에 대해 매번 같은 실수를 하면서도 그것을 절대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매번 사정을 설명하고 변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가슴에 묻어 두고 그 일에 집착 할 필요는 없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결코 다시는 똑같지 않을 것임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현재만이 실재한다는 사실은 얼마나 무해하고 순결한가? 우리의 삶은 현재라는 알려진 지점에서 생성된다. 이곳이 바로 시간의 방해를 벗어나서 실재로 들어가는 장소이다. 우리의 생각이 과거의 회한에 젖어 있고 미래의 설계에 빠져 있다면 우리는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거의 죽은 거나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죄는 아니지만 불행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우리가 실제로 사는 기간은 끊임없는 현재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삶의 질은 우리가 현재에 얼마나 잘 응답하는가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이를 알지 못한다. 잠시 동안 내가 아주 직설적이 되는 것을 허용해 주기 바란다. 나는 당신들에게 언제쯤 자신의 겉모습에 매달려 분투하는 일을 그만둘 거냐고 묻고 싶다. 언제 당신의 아이들과 즐겁게 놀아줄건가? 일생 동안 한번쯤 같이 술을 마시자고 제안해 본 친구라도 있는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다른 이에게서 이런 제안을 받아본 적도 별로 없을 것이다. 당신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산들바람의 숨결을 처음으로 느낀 때가 언제였나? 언제쯤이 되어야 당신은 음식 맛을 제대로 음미하며 식사할 수 있겠는가? 도대체 당신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당신이 미래에 대해서 발견할 수 있는 전부란, 미래는 여전히 미래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왜 당신은 아직도 맛난 음식을 생각하듯 그렇게 자꾸만 마음속에 미래를 되새기는가? 이러한 당신의 생활은 끊기 쉬운 습관은 아니다. 하지만 당신은 정말 가치 있는 모든 것을 잃어 버릴 생활태도를 끝내 버리지 못해 죽음의 순간이 다가와서야 왜 자신이 사랑하는 데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는지 안타까워지는 것이다. 우리에겐 더 이상 장난할 시간이 없다. 이제 죄책감과 의무감을 끊어 버리자. 노래를 부르자. 살아가야 할 삶과 즐겁게 지낼 사람들이 있다. 마음의 눈으로 보면 당신은 이 모든 자질구레함과 혼돈스러움을 벗어난 세상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늘 행복하게 사는 것은 정말 가능한 일이다. 어디 가능하기만 하겠는가? 그런 생각으로 인생을 시작해 보자. 우리는 여기서 당신이 인생에 가까이 가는 태도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당신은 여지껏 인생에 제대로 다가서지 못했다. 행복한 삶이 어디에 있는지 아직도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행복을 찾는가? 당신은 아직 제대로 묻지조차 못한 행복에 대해 수없이 추측해 본다. 당신은 지금 이러한 추측 속에서 살고 있다. 당신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거의 모든 것은 이 가정들에서 유래한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이 책이 다른 책과 다르다면, 당신은 한가지 사실을 꼭 이해해야 한다. 즉 과거에 당신이 살아왔던 일상적인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가려면 상당히 많은 노력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당신이 노력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완전히 자신을 바쳐 노력하기로 맹세했다면, 이 모든 것들은 차츰 놀랄 만큼 수월해질 것이다. 희생, 단조롭고 힘든 일, 퉁명스러움, 고통, 긴장은 당신이 애써야만 하는 노력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가입해야 할 단체도, 지지해야 할 강령도, 따라야 할 사람이나 책도, 돈을 줄 이유도 없다.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 순간에 내려야 한다. 결단은 이렇게 간단하다. '나는 시작하겠다.' 그러면 당신은 무얼 시작해야 하는가? 이제 당신은 친절해지도록 애써야만 한다. 친절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친절해지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 행복해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지만 투쟁할 필요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러면 그들은 현재에 마음을 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된다. 그리고 한동안은 마치 딴 사람이 된 듯이 행동한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변화된 모습을 쉽게 잃어 버리고 왜 그 자각이 희미해졌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게 된다. 당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내가 당신의 삶에 대해 얘기하는 바를 그냥 덧붙이는 말처럼 듣지 말라. 이것도 바로 당신의 삶이다. 행복, 친절, 평화라는 당신의 목표는 절대로 부차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당신은 자신의 삶을 평화롭게 만들려는 희망을 갖지 못한다. 또한 서두르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화를 내는 데 시간을 버린다. 조급함이나 성마름은 당신이 행복해질 기회를 얻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물론 당신은 실수를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실수를 할까 겁내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당신의 삶의 목적이 이제 마음 깊은 곳에 확고히 뿌리내리게 된다면, 혹시 잘못한 걸 알게 되더라도 틀림없이 문제 삼아야 할 한 가지 사실만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잘못된 것은 무엇인가? 말이란 아주 얄팍하다. 말이 실속 있게 되려면 경험이 필요하다. 지속적으로 노력하면 그런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어렴풋한 이해의 반짝임을 체험하지만 당신이 잊었던 새로운 행복감은 이제 다가올 것이다. 변화의 여행을 처음 시작할 때는 이러한 느낌이 흡사 마술에 걸린 것처럼 명멸할 것이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당신은 모든 사건과 상황이 각각 독립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서 마침내 분명한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행복해지는 것 외에 우리에게 올바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들은 나에게 잘 보이려고 얌전하게 행동할 필요가 없다. 나는 자유롭다.' 제 3 부 쇼펜하우어 행복이라는 말은 조심성 없는 표현이다 마르쿠제 순간적인 행복, 지복의 한 조각으로 충분하다 칼 힐티 이것이 행복이다! 행복이라는 말은 조심성 없는 표현이다 이투루 쇼펜하우어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 헤겔의 이성주의에 반대하여 의지의 형이상학설을 주장. 주요저서로 "의지와 이념의 세계" "도덕의 기초" 등이 있음. 세상의 행복이라는 것은 거기에 내재하는 오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나의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2권 제49장이 분명히 파헤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금 이 문제를 차분히 생각해 보는 데 있어, 나는 나의 철학이 지향하고 있는 그런 고도의 형이상학적, 윤리학적 입장에 굳이 서려고는 생각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글이 전개하려고 하는 해석은 이를테면 일종의 타협의 산물이다. 왜냐하면, 이 글은 세상의 일반적인 경험에 바탕을 두는 입장에 서 있고 이로 말미암아 생기는 잘못도 그대로 남겨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글이 해석상의 가치는 제한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쨌든 행복이라는 말은 조심성이 없는 표현이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완전한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여기서 다루는 주제가 끝없이 넓은 까닭도 있으나, 내가 이제까지 말해 온 것을 헛되이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나의 일관된 관점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모든 시대의 현자는 언제나 같은 말을 해왔고, 어리석은 자는 (그러니까 결국 모든 시대의 대다수 사람들은) 현자가 가르친 것과는 반대의 언제나 같은 행위를 해왔다. 앞으로도 역시 같은 상태가 계속될 것이다. 그리하여, 볼테르는 말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본 것과 같은 어리석고 질이 낮은 상태대로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인간의 행복,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는 우주의 모든 살아 있는 상태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은 분명히 그 사람 자신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기쁨이나 슬픔이 여기에 직접 나타난다. 즉, 가장 먼저 그 사람이 감각, 욕망, 그리고 사고의 결과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이에 반해, 그 사람의 외부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은 단순히 간접적인 영향을 줄 뿐이다. 그러므로 외부로부터의 움직임이나 그 관계가 같은 조건이라고 해도 사람에 따라서는 각기 다른 자극을 주어, 설령 같은 환경 아래 놓여져 있더라도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사람이 직접적으로 부딪치게 되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의 표상, 감정, 그리고 욕망의 움직임이며, 외부의 사물은 이러한 움직임이 그 사람 내부에서 일어나게 함으로써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먼저 각자가 그 세계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사람의 생각의 차이에 따라 세계는 가난하고, 답답하고, 평면적이며, 또는 풍성하고, 재미있고, 뜻깊은 것이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많은 사람이 타인의 생활 가운데서 재미있어 보이는 일을 부러워하고 있지만 오히려 다른 사람이 그러한 사실을 말할 때 그 일에 얼마나 흥미를 갖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이해력이야말로 부러워할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은, 기지가 뛰어난 사람이 그렇듯 흥미 있게 표현한 그와 같은 일이라 할지라도 평면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에 의해 포착되었을 때에는 너무나도 일상적인 세계의 한 점에 지나지 않는 사실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상이 명백하게 나타나는 것은 실제로 일어난 사실에 바탕을 두고 쓰여진 괴테나 바이런의 많은 시들 안에서다. 머리가 좋지 않은 독자는 그야말로 보잘것 없는 일상적인 사건에서 그렇듯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 낸 시인들의 상상력을 자신들의 것으로 하기 이전에 그들 시인들의 미적 감각을 부러워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을 것이다. 같은 물체를 보고도 우울증에 빠져 있는 사람은 비극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낙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흥미 있는 갈등을 느끼게 되고 점액질의 사람은 하찮은 것이라고 치부할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즉 모든 충실한 현재는 물 속의 산소와 수소처럼 아무리 양자가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을지라도 양자의 절반에서, 즉 주관과 객관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형성된다. 객관이 되는 절반이 완전히 같다고 해도 나머지 절반인 주관이 전혀 다른 경우, 또는 주관과 객관이 전도된 그 반대의 경우에도 현실은 전혀 다른 상태로 나타나게 된다. 객관이 되는 절반이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나머지 절반인 주관의 질이 좋지 않고 평면적인 것이라면 현실은 보기 흉할 뿐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고장이라고 해도 기후 조건이 좋지 않다거나 분위기가 형편없는 암실의 반사광으로 나타내져서는 아름답다고 생각되어지지 않는 것과 같은 사정에 처해지는 것이다. 이를 보다 분명히 구명해 보기로 하자. 잔디로 덮여 있는 야외 무대 위에서 어떤 배우는 왕후로, 다른 배우는 고문관으로, 또 어떤 배우는 하인, 병사, 장군 등으로 출연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구분으로 외적인 구분일 뿐이다. 그 내부, 이런 현상의 중핵에는 모든 점에 있어서 차이가 없는, 즉 고생이 끊일 사이가 없는 배우가 숨어 있는 것이다. 삶 그 자체도 이와 같다. 무대 위에서의 자위나 재산 정도의 구분을 통해 각자에게는 그 배역에 어울리는 동작, 즉 연기를 해야 하는 역할이 부여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행복이나 쾌감의 내적 구분은 이와 같은 지위나 재산 정도에 따른 구분과 일치될 수는 없다. 여기에도 고생이 끊일 날이 없는 어리석은 독백이 숨어 있는 것이다. 인간의 괴로움이나 고민의 빛깔은 분명히 그 소재면에서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형식적인 면에서는, 즉 본질적인 면에서는 누구나 거의 같다. 이러한 괴로움이나 고민은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결코 지위나 재산의 유무, 다시 말해서 출연하는 배우의 연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현재 갖고 있는 것, 사라져 가는 것은 모두 언제든지 직접적으로 의식의 흐름 속에 니타나는 것뿐이다. 따라서 의식의 상태가 우선 본질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의식 속에 펼쳐지는 갖가지 형상보다도 의식의 상태 바로 그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의 평면적인 의식 속에 나타나는 온갖 화려함이나 즐거움 같은 것은 불편한 감옥 속에서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의 의식보다 빈약하다.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에 있어서의 객관이 되는 절반은 운명의 수중에 놓여 있어 변하기 쉽다. 그러나 주관이 되는 절반은 우리 자신인 까닭에 본질적으로는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의 삶은 외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는 하나의 테마에 따르는 일련의 바리에이션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개성으로부터 탈출할 수는 없다. 이것은 일단 놓여진 환경하에서는 자연현상이 그 본성대로 변경을 허용하지 않는 방법에 따라 선정한 범위 내에서 그대로 엉거주춤하고 서 있는 동물의 상태와 같은 것이다. 인간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 사람의 개성에 따라 각자에게 주어지는 행복의 많고 적음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다. 특히, 사람의 정신력에는 한계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족스러울 만큼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은 분명히 정해져 있다. 그 사람의 정신력이 빈약하면 외부로부터의 모든 노력, 즉 인류나 행운이 그 사람을 위해 행해 온 모든 노력으로도 그 사람에게 평면적인 즐거움이나 쾌감 이상의 것을 안겨 줄 수 없다. 그 사람은 감각적인 기쁨이나 친밀하고 화기애애한 가정에서의 생활, 수준이 낮은 사교활동이나 속된 여자에 만족 할 수밖에 없다. 흔히 말하는 교양을 지니는 것도 전체적으로 볼 때 사람이 자리잡고 있는 범위를 다소 확대할 수 있다 해도, 그렇게 눈에 띄게 할 수는 없는 것처럼 외부에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장 고상하고 다양하며 거기에다 오래 지속되는 것은 정신적인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젊은 시절에는 이 문제에 대하여 그릇된 생각을 갖게 마련인데 그것도 그 무렵의 정신력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 생각해 보아도 우리가 누리고 있는 행복이라는 것이 그 얼마나 개성에 의존하고 있는가가 분명해진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 또는 다른 사람의 눈에 투영되는 우리의 모습에 의해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운명은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자기의 내부에, 비록 그것이 무형의 것이라 해도 재산을 지니고 있는 이상 우리는 운명에 의지하여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이에 비하여 어리석은 인간은 언제까지나 어리석을 인간이고, 평면적이고 우둔한 인간은 언제까지나 그대로일 뿐이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행복이나 즐거움에 있어서도 주관적인 것일 객관적인 것보다 훨씬 본질적인 것임은 '굶주림이 가장 좋은 요리인이다'라고 하는 격언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노인이 젊은이가 찬미하는 여신상을 무관심하게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하여, 천재나 성자의 생활 방법을 터득하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확충되고 있다. 특히, 건강하다는 것은 모든 외적 가치를 훨씬 뛰어 넘는 의의가 있다. 때문에 건강한 거지가 병든 왕보다 행복할 것이다. 완전한 건강과 신체 조직의 컨디션 조절로써 생긴 차분하고 명랑한 성격, 사물의 내부에까지 침투하여 이것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오성, 절도 있는 부드러운 의지, 바른 양심 등은 어떤 지위나 재산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값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기 자신만의 것, 즉 그 사람이 고독할 때 아무도 그 사람에게 무엇을 주거나 또는 그 사람으로부터 빼앗을 수 없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자기의 소유물이나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투영되는가 하는 것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 매우 고독한 처지에 놓이더라도 자기의 정신이나 상상력을 상대로 하여 이를 이겨낼 수 있는 반면, 어리석은 사람은 설령 사교다, 연극이나 영화감상이다, 여행이다 해서 연거푸 어떤 변화를 추구해도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는 무료함을 내부로부터 몰아낼 수가 없다. 선량하고 절도가 있고, 거기에다가 부드러운 성격을 지닌 사람은 불우한 환경에 처하더라도 이를 극복할 수 있으나, 탐욕스럽고 질투심이 강하고 악의에 찬 사람은 제 아무리 재산이 많다고 해도 이에 만족하지 못한다. 하물며, 이상할 정도로 정적이고 품위 있는 개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에게는 보통 사람이 정신없이 빠져들고 있는 즐거움의 거의 모두가 필요하지 않은 것일 뿐만 아니라, 귀찮고 신경질 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사치스러운 물건이 잘 팔리는 것을 보고 '내가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그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소'라고 말했다. 우리가 행복을 누리는 데 있어서 인격은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조건이며 본질적인 것이다. 그 까닭은, 인격은 언제나 모든 것에 우선해서 존재하며 또한 모든 상황에 걸쳐서 활동하며 나아가서 인격은 다른 두 항목의 재화, 즉 지위나 재산처럼 운명에 좌우되지 않으며 우리로부터 빼앗아 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인격의 가치는 다른 두 항목의 가치가 다분히 상대적인 것과는 달리 절대적이다. 이러한 사정에 비추어 볼 때 사람은 외부에서 어떤 힘이 작용되기는 힘든 존재인 것만은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인격의 범위 내에서 되도록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인격에 상응하는 노력을 쌓아 자기의 인격이 포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자신을 단련하여 다른 모든 조치를 가급적 피하며, 이것이라면 인격에 어울리는 정도의 지위, 직업 및 생활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다. 헤라클레스가 무색할 정도로 근육이 발달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만일 이 사람의 외부의 어떤 사정에 의해 자질구레한 데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수공업에 종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되거나, 이 사람으로서는 전혀 엉뚱한 도저히 무리라고 생각되는 고상한 연구나 두뇌 노동에 쫓겨 이 사람이 본디 지니고 있는 강인한 체력이나 완력을 쓸 수 없게 된다면, 이 사람은 평생 동안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이상으로 자신의 불행을 한탄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사람일 것이다. 어디에 내놓아도 부족함이 없는 지성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하찮은 일에 종사하거나, 그 사람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육체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까닭에 지성을 연마하는 것과 그것을 이용하는 것도 불가능한 그런 사람은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특히 젊은 사람들이 범하기 쉬운 사고의 오류, 다시 말해서 사실은 그렇지도 않으면서도 자신은 모든 면에 있어서 강하다고 생각하는 미망의 위험은 피해야 할 것이다. 재산의 첫째 항목이 다른 두 항목보다도 매우 중요하다고 하는 사실에 입각해서 생각해 볼 때 재산을 늘리는 것 이상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다. 그러나 평범한 의미에서의 재산도 그것이 지나치게 비대해지면 오히려 우리의 행복을 그르치는 결과를 낳는다. 때문에 돈이 많은 사람은 자기를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그들이 정신적인 일에 종사할 수 있을 정도의 정신을 단련시켜 오지 않았으며, 따라서 정신을 단련시키는 일에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두말 할 것도 없이 현실적인 자연스러운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이상의 재산의 축적은 우리의 쾌감을 상승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지 못한다. 오히려 지나친 재산의 축적은 비대해진 재산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뒤따를 수밖에 없는 각종 배려에 의해 쾌감의 상승 작용이 방해받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건전한 정신의 함양에 힘을 기울이기보다는 재산을 증식시키는 데 더 열심이다. 실제로는 정신을 함양하는 것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즉 소유물 보다 훨씬 더 행복에 기여하고 있건만... 많은 사람들이 마치 개미처럼 부지런히 움직이며,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재산을 늘리기 위해 쉬지 않고 활동하고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자기가 안을 수 있는 가시권내의 좁은 범위를 뛰어넘어 사물을 바르게 볼 수 없는 그들의 정신은 공허하며, 이는 결국 다른 사물 모두에 대해서도 감동할 수 없게 만든다. 인간의 최대의 낙인 정신적인 즐거움을 그들은 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감추어져 있는 것이야말로 그 사람이 행복을 누리는 데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 갖추어져 있는 것이란 보편적으로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분량에 지나지 않는다는, 단순한 그러한 이유에서 괴로움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사람의 대부분도 괴로움과의 싸움을 현재에도 하고 있는 사람과 비교해 볼 때 역시 불행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오락이라고 하는 사냥감을 향해 공통의 사냥이 행해지게 되는데, 그것도 우선은 여러 가지 종류의 놀이나 감각적 즐거움에서 비롯되어 드디어는 주색의 탐닉에 이르게 된다.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해온 좋은 가문의 아들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짧은 기간 동안에 탕진하고 만다. 이러한 낭비의 원인은 정신적인 빈곤과 공허함에서 생기는 것이다. 외면적으로는 풍요로우나 내면적으로는 빈곤한 채 세상에 보내어져, 외부로부터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 외면적인 풍요로써 내면적인 빈곤을 메꾸어 가려는 헛수고를 계속하는 청년들은, 마치 젊은 여성의 분비물로 스테미너를 강하게 하려고 눈물겨운 수고를 하고 있는 노인과 다를 바 없다. 이러한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면 결국 내면적인 빈곤이 외면적인 빈곤마저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 나는 젊었을 때 어쩌다가 낡고 오래된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책의 내용 가운데 '많이 웃는 사람은 행복하고 많이 우는 사람은 불행하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이 말은 그 표현이 너무 평범하고 속되어서 언뜻 생각하면 우리에게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렇지만, 나는 평범하면서도 속된 그 표현 속에 진리를 꿰뚫어보는 예지가 번뜩이고 있는 이 말을 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언제나 의식의 내부에 명랑함이 들어와 자리잡을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두어야 한다. 명랑함은 마음의 문에 빗장을 걸어두고 있을 때에는 절대로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러 가지 많은 생각 때문에 고민하는 것으로 향상을 기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확실한 결론에 도달하기 힘든 반면, 명랑함은 보다 확실하고 직접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수확이다. 명랑함만이 말하자면 행복의 진성화폐이고 그밖의 것은 단순한 은행권에 지나지 않는 가치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 까닭은, 명랑함만이 지금 이 순간에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랑함은 그 본질에 있어 두 가지 무한의 시간 사이에 존재하는 불가분의 '현재'라고 하는 형식 가운데에 놓여진 것으로서는 가장 값진 보물이다. 나무 같은 것이 부쩍부쩍 자라기 위해서는 바람에 흔들린 필요가 있다. 이러한 현상을 가장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는 라틴어의 다음 법칙은 매우 적절하다. '모든 운동은 그것이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그만큼 운동량은 더욱 많아진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행복이 그때그때의 기분과 건강상태에 따라 얼마나 좌우되느냐 하는 것은 같은 외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혹은 같은 사건에 접하게 되더라도 건강하고 평온한 때 받는 인상과 질병 때문에 마음이 우울할 때는 인상을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가 있다. 사물이 개관적인 기준에 따라 실제로는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 우리의 판단 기준, 즉 주관적인 기준에 따라 사물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느냐 하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도 하고 또는 불행하게도 한다. 에픽테토스는 이것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견해가 사람으로 하여금 망설이게 하는 것이다.' 우울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열 가지 계획 중 아홉 가지가 성공했다고 해도 성공한 쪽을 기뻐하지 않고, 실패한 한 가지 사실에 마음을 기울여 우울한 기분에 사로 잡힌다. 그런데 그 반대로 한 가지가 성공하고 나머지 아홉 가지가 실패했을 경우 명랑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한 가지만이라도 성공한 사실로써 마음을 위로하고 명랑한 마음을 가지려고 한다. 그러나 우울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사람, 즉 음울하고 화를 잘내는 성격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명랑하고 고민이 적은 사람에 비해, 분명히 머리 속으로 상상하고 있는 재난이나 괴로움에 직면했을 때는 참을성이 부족하겠지만 실제의 재난이나 괴로움 따위에 직면해서는 잘 견디어낼 수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물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언제나 최악의 사태를 두려워하여 그 언젠가 닥쳐올지도 모르는 사태에 대비하여 미리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는 까닭에, 사물을 언제나 긍정적으로 보고 밝은 전망만 세우고 있는 사람에 비해 오류를 범하는 일이 적기 때문이다. 어림잡아 행복의 두 가지 적은 괴로움과 무료함일 것이다. 이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우리가 두 적 가운데 한 쪽을 멀리 하는 일에 성공한다면 다른 한 쪽의 적에게도 다가가는 그 반대의 노력은 올바르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의 생활은 이 양자 사이에서 강약의 차이는 있겠지만 진동하고 있는 상태와 다름없다. 어째서 그러냐 하면, 두 적은 항상 대치해 있어 한 쪽이 외적 또는 객관적이면 다른 쪽은 내적 또는 주관적이라고 하는 대립과 항쟁의 맞물림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외적으로는 재난과 결핍이 고통을 낳으며, 이에 비해 안정과 풍요로움이 무료를 낳는다. 이에 따라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이 재난, 즉 고통과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는 데 대해 부유층 사람들은 언제나 거기에다가 실제로 그들의 투쟁의 대상, 즉 무료함을 자기들의 생활권 밖으로 몰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편 내적 또는 주관적 항쟁은 개개의 인간에게 있어서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에 대한 감수성이 대립관계를 이루고, 거기에다가 그 감수성은 그 사람의 정신력으로써 정해진다는 사실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즉 정신이 맑지 못한 사람은 감수성이 예민하지 못하여 외적인 자극에 둔감하며, 이런 사람은 각양각색의 괴로움이나 슬픔에 대한 반응도 약하다. 정신이 맑지 못하면 그것을 반증이나 하듯이 사람들의 얼굴에 그 내면이 공허하다는 징후가 뚜렷이 나타난다. 정신세계가 풍요로운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고통이 없고, 궁색하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되도록이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난 받지 않는 생활을 추구한다. 어디에도 매어 있지 않는 여가는, 그것을 분명히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는 한 인간생활의 꽃이다. 오히려 과일이라고 하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자기 자신의 내부에 어떤 올바른 것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짐스러워 숨이 막힐 정도로 권태로워 하고 있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일 뿐이며, 이들에게는 자유로운 여가도 결국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적은 양의 수입으로, 또는 수입 없이 견딜 수 있는 나라가 가장 살기 좋은 나라이듯이 자기의 내부에 재산을 충분히 저축하여 자기를 지키기 위하여 외부로부터 매우 적은 양의 유입 밖에는 필요로 하지 않는, 아니면 전혀 아무것도 들여오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그 까닭은 외부로부터 어떤 물건을 받아들이려면 비용도 많이 들 뿐만 아니라 그에 속박될 수도 있는 데다가 싫다는 감정에 사로잡힐 위험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부로부터 유입된 물건은 결국에 있어 자기 고장의 산물에 대한 일시적인 애용품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나 외부의 어떤 것에 대해서도 별로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는 매우 좁다. 결국 누구나 자기 한 사람에 국한시킬 수밖에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지금 어떤 사람이 혼자 있느냐 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순간적인 행복, 지복의 한 조각으로 충분하다 루드비히 마르쿠제 독일의 사상가이자 저술가. 부친이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망명생활을 했으나, 정형적인 저널리스트적 감각을 지닌 경쾌한 문체로 많은 저서를 남김. 대표작으로 "플라톤과 디오니시오스" "미국의 철학" "외설에 대하여" 등이 있음. 최초의 행복의 철학자 한스 최초의 행복에 관한 철학자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사람일까? 이 물음에 대답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그러나 성은 몰라도 이름만은 알고 있다. 한스, 보다 정확하게는 '행복한 한스'가 그의 이름이다. '행복한 한스'는 오래 전부터 독일에서 구전되어 온 옛날 이야기의 하나로, 야콥 그림과 빌헤름 그림 형제가 19세기 초에 수집 간행한 독일의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동화책"에 수록되어 있다. 영국의 시인 오든(1907__73)은 이 책의 동화들은 성서 다음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말해 왔다. 한스는 원래 철학자라고 불릴 만한 사람은 아니다. 그에 대해 알려진 한에서는 그는 평범한 기술자지만, 그렇다고 일을 하면서 철학을 하는 그런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그가 도제시절을 끝내고 어머니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겪는 모험, 이 모험이 그후의 모든 철학자의 행복에 대한 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한스는 체험을 통해 위대한 철학적 발견을 한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발견이었을까? 이 대답은 한스가 쓴 책이나 그가 한 말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여행 노정에 감추어져 있다. 한스는 7년 동안 일한 끝에 고향의 어머니에게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는 매우 건실했으므로 그의 스승은 많은 보수를 주었다. 스승은 한스에게 그의 머리통만한 금덩어리를 주었다. 한스는 이 보물을 보자기에 싸서 등에 짊어졌다. 그러자 그는 매우 행복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스는 금덩어리가 너무 무거워 귀찮아졌다. 그리고 이제는 금덩어리에서 기쁨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런데 마침 저쪽에서 말을 탄 사람이 왔다. 말은 얼마나 멋진가! 걷지 않아도 되지 않는가. 가만히 올라타고 있으면 데려다 주는 것이다. 뾰족한 돌에 발을 상하는 일도 없고 구두도 못쓰게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한스는 금덩어리와 말을 맞바꾸었다. 그러자 한스는 매우 매우 행복했다. 갑자기 악마가 그를 공격했다. 악마는 말에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말은 그를 떨어뜨렸다. 그래서 그는 말이 보기 싫어졌다. 그런데 마침 농부가 암소를 끌고 지나갔다. 암소는 얼마나 좋은가! 천천히 뒤따라가기만 하면 되고, 게다가 밀크나 버터나 치즈는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 한스는 말과 암소를 맞바꾸었다. 그러고 나니 한스는 더욱 행복했다. 낮이 되자 무척 더워졌다. 늪을 빠져나가는 길은 꼭 한 시간이 걸렸고 혀가 입천장에 말라붙었다. 이런 때를 암소를 끌고 가는 게 아닌가. 그래서 그는 소를 나무에 묶고 젖 밑에 그의 가죽모자를 놓았다. 그러나 젖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소는 몹시 화를 내고 뒷발로 그의 머리를 세게 걷어찼다. 한스는 소가 싫어졌다. 그런데 마침 이번에는 고깃간 주인이 돼지를 끌고 지나갔다. 돼지는 얼마나 좋은가! 돼지고기는 쇠고기보다 훨씬 맛있다. 게다가 순대는! 한스는 소와 돼지를 맞바꾸었다. 그러자 한스는 더욱 행복했다. 한스가 다음에 만난 사람은 일주일 동안 먹이를 잔뜩 먹인 매를 들고 가는 사람이었다. 이런! 매는 얼마나 멋진가! 게다가 이 매는 조금도 이상한 점이 없다. 그가 소와 바꾼 돼지는 지금 처음으로 듣는 이야기지만 이웃 마을의 이장집에서 훔친 거라고 하지 않는가. 그는 돼지가 싫어졌다. 그는 벌써부터 매고기구이와 그 기름과 좋은 쿠션을 만들 수 있는 그 흰털을 탐내고 있었다. 그는 시끄러운 돼지를 주고 매를 넘겨받았다. 그러자 그는 매우 행복했다. 마침내 한스는 고향 앞마을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그는 쾌활하게 가위를 갈고 있는 한 사내를 보게 된다. 이 사내는 참으로 유쾌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가위 가는 일보다 더 좋은 장사는 없기 때문이었다. 한스는 매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매와 숫돌 두개를 맞바꾸었다. 그러자 한스는 더욱더 행복했다. 걸음을 옮겨 놓을 때마다 숫돌의 무게는 더해 갔다. 한스는 피곤하고 목이 말랐다. 그는 숫돌이 매우 짐스러워졌다. 간신히 우물을 발견하고 숫돌을 우물가에 놓고 물을 먹으려고 몸을 굽혔다. 그런데 그가 몸을 움직이면서 조심하지 않았는지 숫돌이 우물 속으로 빠져 물 속에 가라앉았다. 그러자 그는 다시 행복했다. 그래서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행복의 눈물을 흘리면서 조물주에게 감사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나는 행운아야, 어려울 때마다 구원자가 나타나다니.' 마음도 가볍게 모든 걱정에서 해방되어 행복한 마음으로 그는 집에 닿았다. "행복한 한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프랑스 말 "Le Bonheur;행복" 요컨대 한스의 경험은 인간이면 누구나 언젠가는 겪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행복은 금덩어리나 돼지나 숫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많다. 그러나 어떠한 부라도 모든 면에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그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보라, 옷이다! 이것이 행복이다! 라고 말한다든가, 보라, 왕국이다! 이것이 행복이다! 라고 환성을 올릴 수는 없다. 어쩌면 그것은 나를 불행하게 만들지도 모르고, 부분적으로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만 나머지 부분에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할지 모른다. 다시 말하면 '행복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어떤 부를 가리키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한스의 위대한 경험이다. 한스의 여행을 계기로 분명해진 이 진리를 우리는 거듭하여 새롭게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행복이라는 것은 그 시대, 그 계급의 특징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매우 구체적인 관념 속에서 자라나기 때문이다. 행복은 때로는 마법사의 모습으로 구현되고, 때로는 카에사르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19세기에는 많은 사람들의 경우, 행복은 찬양 받는 거장이나 절대적인 지배력을 가진 로스차일드의 모습이었다. 현대의 행복은 소문이 파다한 범죄 조직의 보스라든가 영화 스타에 의해 대표된다. 이러한 행복의 구현에 대한 신앙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물론 한편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그 찬란한 빛은 사실은 속임수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학교에서 배운 이론 때문에 태양이 움직인다는 인상이 지워지지 않는 것처럼 속임수라는 것을 알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행복이 압도적인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광휘와 행복의 구별을 한스에게 가르쳐 준 그의 경험은 무의미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누구든 광휘를 동경하면서도 동시에 빛나는 것은 흔히 행복의 마네킹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마네킹은 몸에 걸친 옷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옷이 아니다. 타레이랑은 무수한 사람들이 행복의 구현자로 생각한 나폴레옹에 대해 "황제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라고 말했다. 광휘의 허망함을 체험한 사람은 한스만이 아니었다. 후에 불타라고 불린 인도의 왕자는 상상할 수도 없는 광휘를 버렸다. 그것이 그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톨스토이는 유력한 대지주, 찬양 받는 예술가라는 광휘를 포기했다. 그것이 그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시인을 행복을 노래해 왔다. 그러나 그때 그들의 방법은 인간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포기한 광휘를 노래하는 것이었다. 행복을 간접적으로 묘사하는 이 방법의 뛰어난 예가 있다. 모파상의 단펀소설 "르 보느와르"가 그것이다. 수잔느 드 슐몽은 프랑스 난시에서 태어난 젊고 아름답고 부유한 처녀였다. 그녀는 로트링겐의 귀족이었다. 아버지는 이 도시의 경기병 연대 연대장이었으며, 이 연대에는 수잔느가 미치도록 사랑하는 미남 하사관이 있었다. 온 나라의 의젓한 가문의 청년들이 그녀의 사랑을 애걸했다. 그러나 그녀는 농부의 아들인 그 미남 하사관과 손을 맞잡고 달아났다. 그녀의 부모는 그후로 딸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모파상이 수잔느 드 슐몽의 이야기를 하게 한 작중인물은 달아난 지 50년이 지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문명사회를 등진 코르시카에 살고 있었다. 그곳은 세계의 끝이라고 할 만한 미개지였다. 그녀가 사는 오두막집은 양쪽에서 바위가 불쑥 나온 좁고 어두운 산골짜기에 외롭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길다운 길도 없었고 먼 마을까지 나가지 않으면 여인숙도 없었다.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 무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이 황량한 토지에는 죽음의 발자국 소리마저 들리는 듯했다. 약간의 짚더미가 수잔느의 침대였다. 묽은 감자 수프가 그녀의 식사였다. 50년 전에 그녀가 난시에서 이곳까지 따라온 남편은 지금은 귀도 들리지 않는 82세의 노인이 되었다. 광휘의 그림자조차도 남지 않은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그녀는 50년이 지난 지금 "이분은 나를 정말로 행복하게 해주셨어요"(귀머거리 노인도 함께 있었으나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었다. 모파상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이 고백을 되풀이한다. "그는 그녀의 인생을 구석구석까지 행복으로 가득 채웠던 것이다." 그녀가 버린 찬란한 모든 것, 그녀가 조금도 불평을 하지 않는 주위의 황야를 생각하면, 이 행복이 얼마나 멋진 것인가를 짐작 할 수 있다. 행복은 그대 안에 있다 수잔느의 경우에는 백발 노인이기는 하지만 변함없는 행복의 구현자 애인이 있다. 그러나 숫돌까지 잃어버린 한스에게는 어디를 보아도 행복을 안겨 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만일 한스가 후에 여행에서 겪은 모험을 해석하려고 한다면 그가 빠져나오기 힘든 오류의 미궁에 빠질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만일 그가(만일의 경우의 이야기지만)그 동안에 너무 슬픈 시나 음울한 철학서적을 읽기라도 한다면 그는 언젠가는 반드시 다음과 같이 생각할 중대한 위험에 마주칠 것이다. '결국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참된 행복이다. 금덩어리가 차례차례 모양을 바꾸다가 마지막으로 숫돌이 우물 속으로 떨어질 때 나는 가장 행복했다'라고. 그러자 한스여, 이것은 진리가 아니다! 숫돌을 잃었을 때의 그대는 그보다 앞서서 금덩어리, 말, 돼지, 매, 숫돌을 차례로 빛나는 것이냐고 하는 남들의 말을 되풀이하지 말라. 어디까지나 자신의 경험에 충실하라. 그것이 최선이 방법이다. 그대는 그때 여행을 하며 변증법 철학의 과정을 경험한 것이다. 그리고 한 덩어리의 금이나 두 개의 숫돌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며, 심지어 불행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는 진리를 배운 것이다. 또한 그대는 외적으로 아무 이유가 없더라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다시 말하면 행복은 이것이나 저것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한스여, 그대는 이 점을 배운 것이다. 행복은 그대 안에 있다. 이것이 바로 그대가 여행에서 얻게 된 값진 교훈이다. 이렇게 해서 한스 이후로 모든 철학자가 이 교훈과 맞겨루게 되었다. 그 중에는 이 교훈을 과대평가하고 '그대의 마음속에서 생긴 것은 충실하고 강력하며 또한 성장하여 끝까지 따라다닌다' 고 믿은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만일 행복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면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충실하지도 않고 강력하지도 않으며 마지막까지 성장하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이 아닌가. 오늘 어떤 감정이 모든 것을 밀어내고 불쑥 떠오른다. 내일은 이 감정이 이집트의 미이라보다도 더 완전하게 죽어 버린다. 그래서 내일은 속속들이 찾아보아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이 감정은 부실하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행복도 이 감정 못지 않게 부실하다. 그렇다. 행복이 그대 안에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첫걸음이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다. 한스는 행복과 불행에 대해 중요한 경험을 한 발견자들의 정상에 설 만한 공적이 있다. 그러나 처음은 어디까지나 처음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행복할 때 나는 한스의 '행복은 그대 안에 있다'는 지혜에 찬성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행복을 찾아 방황하게 된다면 나는 우선 '나의 어디에 행복이 있는가?' 하는 문제에 부딪힐 것이다. 한스의 위대한 발견 뒤에 갑자기 미발견의 광대한 영역, 곧 자아가 예감되는 것이다. 그 안에 행복이 깃들어 있다는 신비로운 영역 '자아'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 왔다. 이 영역을 규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에 한없는 매력을 느낀 노자를 비롯하여 규명이 불가능한 것 속의 규명이 가능한 부분에 관심을 기울인 프로이트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2천년 동안에 걸쳐 위대한 심리학자들이 작성한 자아의 지도는 18세기 이전에 지구를 그린 지도와 흡사하다. 각 지도는 때로는 엉뚱할 만큼 비슷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영혼의 지도 대부분에는 지도 제작자가 여기에 구멍을 뚫으면 행복은 스스로 솟아 나온다고 생각한 곳에 표를 해 두었다. 그러나 자아의 지도가 일치하는 경우가 드문 것처럼, 사람들이 행복의 샘이라고 지정한 장소도 일치하는 경우가 드물다. 자아라는 거대한 세계의 어디에서 행복이 솟아 나오는가 하는 점에서 사람들의 의견은 천차만별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한스의 이야기도 대답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의 위대한 행복의 심취자 에피쿠로스는 이 문제에 그 나름으로 대답하려 했다. 에피쿠로스의 처방(명령과 금지) 성자 아우구스티누스와 성자가 아닌 마르크스의 찬양을 받은 이 고대의 계몽가는 행복의 십자군을 거느리고 있다. 그가 행복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각별히 권한 무기의 하나는 이성이었다. 다음과 같은 경우를 가정해 보자. 어떤 사람이 파티에 초대를 받았는데, 거기에 가면 매력적인 대화도 고급 술도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초대받은 사람은 고급 술이나 매력적인 대화에는 흥미가 없다고 하자. 또 한 가지 가정을 덧붙여서, 이 사람은 술을 마시면 쾌활해지는 것이 아니라 피곤을 느끼는 체질이어서 술을 마시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자. 이러한 경우, 대화를 위해서는 음주를 단념한다는 별로 달갑지 못한 체념이 강요된다. 에피큐리언의 행복은 이러한 금욕을 바탕으로 한다. 이것은 행복의 단념은 아니다. 보다 큰 행복을 위해 다른 행복을 단념하는 것이다. 가정한 이야기를 계속하기로 하자. 예의 파티에서 술을 단념한 에피큐리언의 옆에 역시 술을 마시지 않으면서 술을 못마시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이 사람은 예컨대 매력적인 대화를 즐기기 위해 음주를 단념한 것이 아니라 가정이나 종교시간에 음주는 죄악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는 경우였다. 술을 들지 않는 이 두 사람, 곧 행복을 위해 삼가하는 한 사람과 어떤 미신 때문에 들지 않는 또 한 사람은 두 사람 앞에 놓인 빈 술잔만을 본다면 비슷하다. 그러나 이와 같이 비슷하다고 하더라도 빈 술잔을 놓고 있는 두 사람의 단념의 의미는 다르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두 사람의 체념은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위대성은 체념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체념을 찬양하지는 않았다. 그는 행복을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위해 체념하는 것이다. 어떠한 쾌락, 어떠한 환희, 어떠한 행복이든 그 자체로서의 악이 아니다. 이것이 모든 에피큐리언의 기본 입장이다. 그리고 에피쿠로스가 위가 주는 행복을 찬양한 것은 당시 이미 이러한 행복을 대대적으로 부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청년이 에피쿠로스에게 "저는 방자한 성적 쾌락을 구하는 충동을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라고 고백했다. 이에 대해 에피쿠로스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과도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말하기 시작하지만, 이에 앞서 원칙적으로 상대의 말을 시인하는 놀라운 발언을 한다. 자네의 욕망에 따르라고... 물론 이 말에 이어 "그러나"라는 말이 나오고, 이 "그러나" 다음에 욕망에 따를 때 고려해야 될 사항이 길게 나열된다. 그렇지만 여기에 나오는 금지 일람표가 의미 있는 것은 쾌락, 기쁨, 행복을 초래하는 모든 것을 원칙적으로 시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절대적'인 미덕, 곧 행복에 앞서서 그 정당성이 증명되어야 하는 미덕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덕을 찬양하라'는 것은 '미덕이 행복에 기여한다면'이라는 단서가 붙을 때이고, '그렇지 않으면 손을 떼라'는 것이다. 이 스승의 문장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독창적인 문장(가장 오해받기 쉬운 것이기도 하지만)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방탕자의 쾌락이 그 사람을 고통과 공포로부터 벗어난 경지로 드높여 준다면(단지 이 경우뿐이지만)이러한 쾌락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미덕이란 모든 암초를 피해서 행복에의 길을 안전하고 확실하게 향해 하도록 할 임무가 있는 조타수에 지나지 않는다. 에피쿠로스는 '이성'이라는 조타수, '미덕'이라는 조타수에게는 매우 냉담했다. 어디를 향해 키를 돌리는가? 라는 것이 전부였다. 선을 향해서? "만일 미식이나 사랑이나 음악의 즐거움, 모든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을 바라볼 때의 가슴 설레임을 제외한다면, 나는 선이라고 부를 만한 일을 알지 못한다." 에피큐리언의 '미덕'이 갖는 행복이라는 독특한 향기는 언제나 기억하고 있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 현명하면서도 쾌활한 금욕주의자는 욕구의 재고 조사를 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아쉬운 생각 없이 단념할 수 있는 욕구와 단념할 수 없는 욕구를 알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분명해진 일은 '어떤 사람에게는 당연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는 욕망이 있다'는 것이었다. 무의미한 것으로서 고대의 주석자들은 왕권과 기념비에 대한 욕망을 들고 있다. 또한 에피쿠로스는 당연한 욕구를 불가결한 욕구와 자연적 욕구로 나누었다. 불가결한 욕구 중의 하나는 갈증이다. 분명히 당연하기는 하지만 불가결한 것은 아닌 욕구로서 에피쿠로스는 미식을 들었다. 오늘날이라면 이러한 심리학은 유치하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눈에는 유치하게 보이더라도 그 배후에는 커다란 성과를 약속하는 원리가 살아 있다. 다시 말하면 불행을 초래하는 충동 중에서 어느 것을 쉽게 제거할 수 있는가를 알기 위해 충동의 체계를 규명하는 원리이다. 이 충동의 심리학은 불구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복한 삶에의 의지를 가진 사람에 의해 탄생되었다. '무엇을 단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행복의 이론에서 항상 커다란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에피큐리언적인 체념과 행복을 적대시하는 부정론자 사이의 경계선은 언제나 명확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에는 세계 사상 매우 유명한 인물 디오게네스가 있었다. 그는 큰 통 속에서 살았다. 또한 그는 젊은 농부가 손으로 물을 떠 마시는 것을 보고 바가지를 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도대체 어떠한 이유로 이 괴상한 그리스 사람은 편안하지 못한 생활을 하게 되었는가? 제멋대로 사는 부랑자이고 문화의 경멸자라고 비난받은 디오게네스를 나는 오히려 궁전의 쾌적함과 결부된 온갖 번잡함에 진저리를 내는 섬세하고 다감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분명히 순수한 향락을 탐구하면서 큰 통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절조 높은 생활을! 섭생을 지켜라! 문화와 거리를 가져라! 에피쿠리언의 제3의 명령은 '숨어서 살아라!' 이다. 이것은 사회의 압박으로부터, 그러니까 사회의 칭찬으로부터도 그 오류로부터도 멀어지라는 것이다. 사회의 오류나 어리석음이나 비열한 거짓말이나 책이라는 형태로 그대들에게 밀려오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말라. 이러한 말은 가장 엄격한 은둔생활을 엿보게 하지 않는가? 이렇게 본다면 다시금 에피큐리언과 그 적들을 혼동하기 쉽다. 그들은 열광적으로 행복을 찬양하는 자와 음율하게 행복을 부정하는 자를 혼동할 만큼 서로 비슷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의 '숨어서 살아라'라는 말에서는 신랄함이나 반항적 은둔성은 볼 수 없으나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예컨대 고대 중국인이 생각한, 도시에 사는 것보다는 산 속에서 사는 것이 갖는 여덟 가지 장점과 같은 것이다. 이 장점은 어떤 것인가? 인습에 사로잡혀 필요가 전혀 없다. 쓸데없는 손님을 만나지 않아도 된다. 배신 잘하는 인간의 마음에 조심할 필요가 없다. 공인에 대한 쓸데없는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된다... 고대 중국의 에피쿠로스라고 해도 좋을 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이 '숨어서 살아라'는 먼 나라의 황량한 카르스트 고원에서 살면서 죽음을 선취하려고 한 중세의 수도자들의 은거와는 조금도 비슷하지 않은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숨어서 살았으나 그것은 삶을 끝까지 즐기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기 자신을 독방에 가두려고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에피큐리언의 동산의 은둔처는 인간 적대시의 본거지가 아니었다. 에피큐리언의 우정에 대한 열광은 '숨어서 살아라' 하는 것이 행복 없는 인간 세상을 싫어하는 것이 아님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 에피쿠로스의 말과 행동은 각별히 불안했던 시대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른바 격동의 시대에는 숨어서 사는 것이 특별한 매력을 가졌었다. 말하자면 알렉산드로스 같은 위대한 사람들이 역사책에 그 이름을 기록하는 시대에는 에피쿠로스 같은 언제나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운이 나쁘면 두 달마다 짐을 싸들고 피난을 가야 한다. 저 유명한 알렉산드로스의 대제국이 건설되었다가 붕괴되는 동안에 에피쿠로스는, 청년기에는 사모스로부터 아테네로, 아테네로부터 코로폰으로, 코로폰으로부터 레스포스 섬의 뮈틸레네로, 그리고 뮈틸레네로부터 소아시아의 란프사코스로 전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와 같이 끊임없는 이주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쨌든 이러한 이민이 세계사가 만들어지는 현장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지고 싶다는 갈망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역시 철학자인 제논은 마케도니아 왕의 측근이었다. 이 시대는 철학가 외교관이 되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이 점에서 그의 후예, 곧 "현세의 위대한 인간에게는 길을 양보해야 한다"고 말한 2천년 후의 에피큐리언인 니체와 입장이 같았다. 현자는 정치에 관계하거나 지배자가 될 생각은 하지 말라고 에피쿠로스는 말한다. 현자 에피쿠로스는 숨어서 행복하게 산 것이다. 행복한 사람, 불타 불행에 둘러싸인 불타의 여러 가지 호칭 중에 '행복한 자'라는 호칭이 있다. 무엇이 그를 행복하게 만들었는가? '구원의 지복을 즐기고' 있었을 때 그는 행복했다. 구원에는 무엇으로부터의 구원과 무엇을 위한 구원이라는 두 자기가 있다. 이러한 두 가지 구원이 불타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불타는 불행으로부터 구원되고 불행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다음에 비로소 길이 열린 그 무엇에로 구원된 것이다. 이 사람의 소극적인 행복은 처음에는 극단적인 불행으로 채색되어 있었으나 이때를 경계로 해서 그는 적극적인 행복에 둘러싸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고뇌와 오뇌의 소멸이라는 지복의 상태를 일생 동안 지복의 감정을 갖고 즐길 수는 없다. 소크라테스도 족쇄가 다리에 파고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는 단 하루도 행복하게 지내지 못했을 것이다. 앞에서 말한 이야기를 하고 30분쯤 후에 그는 행복한 다리 따위는 까맣게 잊었을 것이다. 행복한 불타가 구원의 지복을 향수 했다면 그는 무엇인가의 부재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현재 존재하기 때문에 지복을 느꼈을 것이다. 불타의 행복에 붙인 인도의 고유명사는 열반이다. 열반은 단지 무, 곧 모든 불행의 제거만이 아니라 동시에 확고하게 존재하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인간을 구원하고 더 나아가 충일을 느끼게 하는 특별한 행복이다. 이 충일에 이르는 구원은 하루를 보내고 등불을 끌 때, 그리고 충일을 왜곡하던 하루의 배경이 사라질 때, 많은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열반은 현세에 실존하는 자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비주의자들이 제가끔 다른 이름을 붙이고 있는 현세의 체험이다. 그러나 신비주의자의 체험인 열반에 신비적인 요소는 없다. 등산하는 사람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헐떡거리면서 산정에 설 때, 갑자기 강력한 숨결이 전신을 감싼다. 이 숨결은 별이나 만년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몸 안을 뚫고 지나간다. 그리고 그는 구원의 지복을 누리는 것이다. 이 지복한 감정에는 눈이나 귀나 코나 그밖의 무수한 감각이 받아들이는 모든 것이 관계된다. 이러한 구원은 산에 오르지 않더라도 경험할 수 있다. 꽃피는 들에 서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언덕의 능선에 시선을 돌린다. 그러면 구원의 행복이 바람이 되어 불어오는 것이다. 위대한 신비주의자들은 구원을 위해 산정이나 꽃피는 들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행복에의 비상을 훈련에 의해 터득하고 소도구 없이 성취한다. 그들은 위대한 시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내면에 삶의 충일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대지나 여러 감각은 스스로의 행복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행복을 불타는 터득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코끼리를 만지고 있는 장님과 같다. 한 사람은 머리를, 또 한 사람은 코를, 또 한사람은 꼬리를 만지며 "코끼리는 이런 거다" "아니야, 코끼리란 이런 거야"하고 싸움을 벌이는 장님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의해야 할 것은 불타는 코끼리의 외관에 대해서는 전혀 가르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이 중요한가? 코산계의 신사바나무 숲에 머물렀을 때, 불타는 나뭇잎 몇 개를 따서 들고 제자들에게 물었다.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이 나뭇잎과 이 숲 속에 있는 다른 나뭇잎과 어느 것이 많은가?" "스승이여, 스승께서 들고 계신 나뭇잎은 얼마 되지 않으므로 숲속의 나뭇잎이 더 많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이다. 내가 알고 여러분에게 전하지 않은 것이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보다 훨씬 많다. 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하지 않았는가? 전한다 하더라도 여러분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으며, 불성에의 전환을 촉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현세로부터의 이탈, 모든 쾌락의 망각, 덧없는 것의 소멸, 평화, 인식, 자각, 열반으로 이끌어 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전하지 않은 것이다." 불타는 위대한 계몽가였지 결코 인생에 등을 돌린 허무주의자는 아니었다. 행복한 자 불타는 발을 물에 담그고 추위에 떨고 있는 불행한 고행자들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개구리나 거북이, 물뱀이나 악어나 그밖의 수중동물은 모두 극락으로 갈 것이다!" 이 행복한 자는 모든 자기학대를 거부했다. 그것은 학대받는 피조물을 불행으로 이끌어 갈 뿐, 열반의 행복으로 인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는 에페쿠로스의 적이 아니었다. 그는 물론 행복에의 길의 개척자는 아니었다. 그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어떻게 하면 살아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는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단순한 순간적인 환상이 아닌 절대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삶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영속적 행복 속에서 살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열반의 상태가 인간 일생의 상태가 될 수 있는가? 이러한 역설은 불타가 단지 불행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복과 인생을 긍정했음을 보여 준다. 그는 유럽의 어느 누구보다도 수미일관하다. 곧, 그는 불행으로부터 현세의 삶의 영역을 제외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정합성을 유지하기 위한 희생도 하지 않았다. 그는 행복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행복의 추구에 열중하는 사람은 불타에게서 강력한 적을 발견하지 못한다. 불타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어둠에 이름을 붙일 용기가 없었던 많은 몽상가들보다 훨씬 친절한 우정의 얼굴이다. 불행한 여우 '행복'이라는 말을 듣고 떫은 듯이 낯을 찡그리고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행복의 경멸자는 아니다. 그렇긴 해도 행복을 중요시하지 않거나 나아가 이를 무시하는 사람들의 수는 상당하다. 또한 이러한 사람들이 배출되는 배경도 다양하다. 선천적인 행복불감증이라는 이상 증세가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자연이 행복을 위한 기관을 갖추지 못한 인간을 탄생시킬 가능성은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행복에 대한 냉담성은 자연의 장난이고 기형이다. 보다 확고한 기반 위에서 이야기를 계속한다면, 우선 이러한 냉담성은 그 사회에 불고 있는 차가운 바람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진리와 정의에 대한 불감증을 일으킨 것은 자연이 아니라 실증주의라는 사상적 풍토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진리나 정의는 그 내용이 무엇보다도 역사와 함께 변화하는 전통에 좌우되는 추상명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어떤 사람에게는 즐거운 모든 것, 예컨대 애플파이라든가, 핀으로 찌른 나비표본이라든가, 유명인과의 교제라든가, 우표수집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포괄하는 집합명사라고 생각한다. 현대의 사상적 풍토는 행복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데에는 별로 적합하지 않다. 게다가 아주 옛적부터 행복을 과소평가 하는 것이 때로는 매우 효과적임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발견을 한 것은 저 악명 높은 여우로, 그는 먹고 싶어 죽겠는데 입이 닿지 않는 포도를, 저것은 틀림없이 실 것이라고 단정해 버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스의 우화작가 이솝이 이야기하는 이 여우는 어느 더운 여름날, 과수원 근처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높은 가지에 매달린 잘 익은 포도송이 아래에 이른 여우는 이 포도라면 자기의 갈증을 말끔히 가시게 할 것이라고 환성을 올렸다. 그래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달려나가 훌쩍 뛰어올랐다. 그러나 포도에는 닿지 않았다. 여우는 여러 번 거듭해서 시도했다. 유혹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여우는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여우는 고개를 쳐들고 거만하게 코를 내밀고 점잖게 그 자리를 떠나면서 말했다. "저 포도는 틀림없이 실 거야." 이 이야기에 나오는 여우는 어떻게 해서든지 포도를 먹고 싶었다. 그 포도가 얼마나 단지 여우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우는 이 포도를 딸 수 없었다. 너무 높은 것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우는 딜레마에 빠졌다. 여우는 한편으로는 포도에 닿을 수 없었고, 또 한편으로는 포도 생각을 머리 속에서 털어 버릴 수가 없었다. 이때 여우는 탈출구가 하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탈출구란 욕망의 대상을 파괴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 방법은 두 가지, 곧 객관적인 방법과 주관적 방법이 있다. 즉, 포도를 실제로 흔적도 없이 으깨 버리는, 적어도 먹을 수 없게 만드는 방법과 포도는 그대로 놓아두지만 자기의 상상 속에서 말에 의해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포도가 이미 존재하자 않을 때에도, 내가 그것을 시다고 생각했을 때에도 포도는 이미 나의 마음을 끌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다시 말하면 손을 닿지 않는 포도를 으깨 버리는 행위에 악의의 기쁨, 위해를 가하는 기쁨의 가장 깊은 하나의 뿌리가 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에서 가장 대규모의 위해는 세계를 파멸시키는 것이리라. 언제나 되풀이하여 나타나는 세계 멸망의 표상은 아마도 행복을 거부하는 세계가 멸망하기를 바라는 소망일 것이다. 현대 심리학이 상당히 주목하는 파괴 충동은 어느 정도까지는 손이 닿지 않는 포도를 파괴해 버리려는 충동이다. 지금까지 어쩔 수 없는 체념을 충분히 보상할 만큼 만족스러운 파괴에 성공한 사람은 권좌에 있던 세계적으로 유명한 방화범들이었다. 그들만이 자기들을 만족시켜 주지 않는 세계를 불태워 버리는 것으로 마음이 가벼워질 수 있었다. 만일 네가 황제로 로마를 불타오르게 했다면, 그것은 다른 방법으로는 기독교를 처리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리라. 나치스는 처음부터 그들이 직면한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생각했더라도 아마 전쟁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제2의 기회는 독일이 세계를 제패하지 못할지는 모르더라도 이미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느 나라도 세계를 제패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히틀러 문학에서 볼 수 있는 세계 멸망의 풍조는 모든 것이 멸망하면 말할 것도 없이 독일인도 이미 존재하지 않겠지만 러시아나 영국, 미국 등 세계사적인 주역들도 이미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허무에 대한 쾌감이었다. 어떠한 혁명에서나 이러한 방화범들이 하나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그들에 의해 혁명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악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욕망은 갖고 있더라도 스케일이 작은 사람은 자기 손이 닿지 않는 것을 헐뜯고 단 포도송이를 시다고 말함으로써 만족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것만으로는 별로 소용이 없다. 자기보다 행복한 이웃이 단 포도를 먹고 입맛을 다시는 모양은 누구나 매일 보는 것이다. 이럴 때에 자기는 누릴 수 없는 것이라는 관념을 변함없이 견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개인적인 미망에 갇힌 광인은 불유쾌한 현실에 대해서는 안전하다. 그들에게는 이 현실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다 정상적인 사람은 집단적 광기에 의해 구제된다. 집단적 광기는 신학자나 철학자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들만이 광기를 진리고 드높이고 경험을 확고하게 제의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필요하면 언제든지 단 포도를 신포도로 바꾸어 놓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이렇게 함으로써 손도 대지 않고 그들은 유혹으로부터 그 매력을 박탈하고 만족할 수 없는 인간으로부터 어쩔 수 없는 체념이라는 괴로움을 빼앗아 갔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저 포도는 시다고 말한 여우는 인류에게 최대의 선행을 베푼 자들의 대열에 끼일 수 있겠다. 이 여우는 고전적인 '행복한 한스'와 함께 역시 고전적인 '불행한 여우'로서 기념비를 세울 만한 업적을 남긴 것이다. 그러나 이 여우의 정체는 반드시 선행자만은 아니다. 물론 이 여우는 많은 점에서 인생의 무거운 짐을 벗겨 주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본다면 인간으로 하여금 그 비참한 상태에 적응하게 한 것이다. 분명히 이 여우는 인간으로 하여금 크고 작은 무수한 어쩔 수 없는 체념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도 자신의 것이든 남의 것이든 무신경하게 만든 것이다. 이 여우는 사람들을 주어진 상황 속에 가둬 두고 동경을, 그리고 동경과 함께 모든 가능성을 축출한 것이다. 이 여우는 행복 부재의 상태를 고정시켰다. 그리고 신포도에 의해 비참한 체념의 고전적 존재가 되었다. 사실상 가장 열광적인 행복의 적은 이 여우에게 공감하는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행복에의 동경을 축출할 결심을 한 인간은 인생에 어떠한 가능성이 있는가를 생각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행복을 생각하면 불안해지는 것이다. 행복을 생각하면 행복이 없는 일상이 멋없어지고 게다가 일년에 몇 번밖에 없는 가난한 축제마저도 시시해지는 것이다. 또한 행복을 생각하면 자신의 운명에 대해 분개하는 사람도 있다. 요컨대 행복에 대해 사색하면 사람들은 그 나름의 가난과 결핍을 상기하게 되어 세계의 평화가 교란되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갖지 못한 자와 마찬가지로 많은 가진 자들도 행복에 대해 무한한 분노를 느낀다. 행복이 스크린에 비칠 때에는 누구나 재미있게 구경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은밀한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불안해 할 필요는 없다. 결국 영화에 지나지 않고 이것은 누구나가 승낙한 약속인 것이다. 게다가 영화관 안은 어둡다. 어두우면 아무도 자기를 보지 못한다. 진지한 인간과 행복의 관계는 비밀의 관계를 가질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사람은 행복을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처럼 다루는 것이다. 항상 변함이 없는 행복, 생애에 걸친 행복은 두 피안의 선취에만 있을 수 있다. 곧, 천국이든가 유토피아에만 존재할 수 있다. 탄식의 골짜기인 이 세상은 여러 가지 제도와 기구를 통과하는 오랜 행군이다. 영원한 행복, 지복 중의 지복은 하늘의 피안과 현세의 피안이라는 두 피안의 어느 쪽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눈으로 보아서는 인생에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종교의 창립자나 철학자는 매력적인 세계를 꾸며내기는 했으나, 이것은 가장 엄격한 형식을 갖춘 맹신에 지나지 않는다. 개별적인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지복은 순간적이고 매우 한정된 지복이다. 예컨대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 내 부모는 매년 우리를 북해로 데리고 갔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바닷가로 뛰어나가 지복의 감정에 사로잡혔다. 또 다른 순간적인 지복의 예를 든다면, "아이다"에서 지하실에 갇힌 사랑하는 두 사람이 부르는 마지막 듀엣을 들을 때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복 다음에는 전락(신비적 합일로부터의 전락이기도 하다)이 뒤따른다. 사랑의 예는 이 정도로 해 두자. 내가 차를 타고 가다가 헐리우드에서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졌을 때, 내 왼손은 가는 근육으로 간신히 붙어 있었다. 팔은 부목을 대어 버팀대 위에 올려 놓여졌다. 나에게는 마약의 일종인 판트폰이 투여되었다. 나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이때만큼 편안한 지복감을 강렬하게 느꼈을 때가 없다. 그런데 그후에 약효가 사라지는 전락의 시간이 닥쳤다. 나는 현대의 마약 상습자들도 그때의 나와 동일한 지복감을 맛보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이 전락도 이에 앞서는 지복감에 대응하리라. 나에게 내 인생의 경험을(애정만은 빼놓고) 요약하라고 한다면, 나는 인생에는 지복의 순간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고 말하겠다. 보호받는 생활 속의 행복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부질없는 노력이다. 인간은 이런 데서 의미를 발견할 수는 없다. 위대한 종교의 창립자나 철학자는 가끔 인간의 행복에 보호받는 생활을 덧붙였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으며 차츰 비참한 해석을 받게 되었다. 무의미한 인생을 보낼 수는 없다고 믿는 사람은 자살하는 길밖에 없다. 무의미란 언제까지나 보호해 줄 것이 없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순간적인 행복, 지복의 한 조각으로 충분한 것이다. 인간은 보다 겸손해지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행복이다 칼 힐티 현대의 예언자라고 불리워지는 스위스의 사상가이자 법학자. 이론보다는 인생을 관조하고 사색하는 생활 철학의 길을 열어 보임. 주요 저서로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병든 정신"등이 있음. 완성을 추구하는 충동으로 이 세상에서 완성이 이루어진 적은 없다. 그러나 완성을 추구하여 싸우는 영혼은 언제나 만족을 얻는다. 행복을 진실로 우리들이 모든 사상의 열쇠이다. 스스로 그것을 바라고, 개인의 노력으로 그것에 도달할 수 없을 때는 다수의 사람들과 공동으로 합심해서라도 추구하는 것이다. 행복은 학문의 탐구, 노력, 모든 국가적인 것, 또는 신앙적인 시설의 궁극적 거점이 되는 것이다. 인간들은 행복에 대해 제멋대로 해석을 하고 있지만 행복이야말로 인간 생활의 지상 목표인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어떻게 해서라도 행복하게 되고 싶은 것이다. 가장 엄격한 스토아주의일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단념함으로써 그들 유파대로의 행복을 얻으려고 하고 있으며, 극단적으로 이 세상살이의 속된 습성에서 탈피하려는 그리스도교인들까지도 별개의 생활 속에서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염세주의자들도 결국은 그들의 비밀스러운 자랑을 간직하는 행복을 느끼고 있다. 불교 신자들도 무, 즉 무의식 중에 행복을 찾고 있는 것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만큼은 이 세상에 만인 공통의 것은 없을 것이다. 미적 추구자나 또한 그들에게 위대한 모범을 보인 괴테도 이미 자기 생활과 작품에서 증명한 것처럼 이따금 물질적 향락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었다. 실로 그들의 새로운 유파는 사실은 미적이라고 할 수 없는 많은 것을 이론적으로 억지를 써서 미적이라고 주장하는 위험한 길을 더듬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행복을 추구하는 인사들에 대해서 우리들은 다만 실제로 그런 종류의 행복의 여러 가지 조건을 유례없이 풍부하게 갖추어 놓고 있었던 그들의 우상인 괴테의 말을 들어 볼 필요가 있다. "결국 우리들의 생활은 고생과 일 그것뿐이었다고 하겠다. 나의 75년간의 생활에서 진실로 즐거웠던 것은 겨우 4주일 동안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75년간 겨우 28일간의 행복인 것이다. 미적인 향락을 즐긴 사람들을 볼 때, 그야말로 빈궁생활에 허덕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참으로 고생만을 일삼던 정직한 날품팔이 노동자라도 한 평생을 끝마침에 있어서 그런 비참하고 가련한 증언을 남기지는 않았으리라. 자신의 소망을 그 상상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에 맞추어서 조정하는 법을, 인간은 나중에 가서야 저절로 경험에 의해 비로소 배우게 되는 것이다. 건강한 자연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느낌은 학자나 저술가, 또는 예술가들의 여름철에 지친 표정을 보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들에겐 항상 휴양이 필요하고, 더구나 그 휴양을 하기 위한 여행 중에 다른 일에 관해서는 무슨 이야기든 즐겁게 얘기를 하면서도, 그들의 인생 이론에 따른다면 그야말로 인간 최고의 기쁨이고 동시에 인류의 최대 보물인 자연으로 돌아가서의 핵심에 관해서는 조금도 언급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 어쨌든 자연으로 돌아가서 그 조용한 멋을 알고 소박한 생활을 사랑하는 취미의 시대가 지금 또다시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적당한 걱정거리, 그리고 그것에서 해방이 된다는 것, 그것이 인간의 행복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많은 경험을 쌓게 된 사람들의 말에 따른다면 인생에 있어서 진실로 견디기 어려운 것은 악천후의 어렵고 고통스런 나날의 연속이 아니라, 도리어 갈라질 듯한 초록의 하늘을 가리는 한 점의 구름도 찾을 수 없는 일상적 하루하루의 연속이다. 오늘날의 염세적인 기분의 원인은, 그 대부분이 '행복은 도망쳐 버리기 쉬운 것이어서 좀처럼 예기한 것과 같은 행복은 얻어지지 않는다'라고 하는 경험이 있다. 실제로 지금 도처에 퍼져 있는 염치없는 현실주의라는 것은 대개 그것에 의해서 행복하게 되리라는 확신의 결과가 아니라,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한 절망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더라도 아마 잘못은 아닐 것이다. 아무런 결과도 없는 일이나 소위 덕이라는 것도 영혼의 평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 아니고 공공의 사업이나 선행, 애국 또한 그 모두가 거짓을 담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거나 인생의 올바른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은 모두가 우선 일체의 우상을 팽개쳐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가문이라든가 처지, 습관 등에 의해서 얻은 편견을 모조리 버린다는 것이 진실된 행복에의 첫번째 관문인 것이다. 극히 드물게 볼 수 있는 행복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인 멕시코 국왕 막스처럼 '어떤 진리가 아닌 것, 혹은 편견을 버린다면 반드시 그 다음에는 행복감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라고 잘라 말하는 것은 정당한 판단이다. 그것은 또한 어두운 길에서 볼 수 있는 이정표이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들은 아마도 올바른 길을 찾아낼 수가 없을 것이다. 덕은 행복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청렴한 로베스피엘이 칭찬한 그런 우상을 버려라. 덕이라는 것은 인간의 자연 그대로의 마음 속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기 위해서 덕이라는 관념은 전혀 불필요한 것이며, 극히 부족한 두뇌로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허영심이 강한 사람들까지도 결국 자신에게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허영심이란 것은 대체적으로 자기의 가치에 대한 판단의 불확실성 때문에 생기는 것인 만큼 언제나 타인의 확인이 필요한 것이다. 언제나 자신의 의무에 충실한 사람의 부끄럽지 않은 양심은 부드러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베개와 같은 것이라는 속담이 있다. 우리들은 항상 그런 양심의 소유자에게 축복의 꽃다발을 보낼 준비를 하고 있지만, 아직은 그런 거룩한 분을 발견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단 하루만이라도 자신의 의무를 완전히 수행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랑, 사랑은 원래 신성의 일부이기에 인간의 마음에는 생길 수 없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을 가진 사람은 그것이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으리라. 인간의 마음속에 그려진 사랑의 희미한 그림자만으로 인간에게 행복을 줄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오직 이따금 있는 것이고, 또 항상 타인의 의지에 의해서 사랑을 되돌려 준다고 하는 매우 불확실한 전제 아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어린이, 아니 실로 동물의 새끼들마저도 사랑에 대한 본능을 가지고 있고 또 사랑에는 민감하다. 그러나 그들이 차츰 성장함에 따라서 모름지기 하나의 예외도 없이 환멸의 슬픔을 맛보게 되는 것만큼 비참한 것은 없다. 더구나 극히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행복의 근본적인 요소로써 '일'을 빼놓을 수는 없다. 일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 행복 중의 가장 큰 요소의 한 가지인 것이다. 인간이 행복하고 싶다면 한 주일에 엿새 동안에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기의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빵을 먹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성공의 두 가지 전제를 피하는 자는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이다. 일을 하지 않고는 실제에 있어서 이 세상에서의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 일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행복인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일이 행복을 반드시 수반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 또한 잘못이다. 인간의 공상이란 별난 이상을 안고 있다고 하는 것뿐만이 아니다. 아마 쉴 틈 없이 일하는 천국이나 지상낙원 따위를 상상할 수는 없으리라. 실제로 우리들은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 같다. 현명한 사람일수록 자기가 하는 일의 결점을 알고 있는 법이다. 그날 할 일을 마치고 나서 보라. 모든 일은 잘 되어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까지 한 사람도 없었다. 스스로 노동자라고 자랑하는 사람들까지도, 그러나 노동을 찬미하는 노래 그 이면에는 자신이나 타인이 일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하는 채찍질과 같은 촉진제가 숨겨져 있기 마련이다. 대개는 모두 가능하다면 정규적인 노동시간을 감축시킬 생각을 하고 있다. 만약 일을 한다는 것 그 자체가 본디 행복과 똑같은 의미라고 한다면 그들은 가능하다면 일하는 시간을 연장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자들 중에서도 가장 기묘한 것은 아마 행복을 염세주의자에서 찾으려고 하는 자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가장 비천한 인간도 아니다. 그들 중에는 대개 일종의 과대망상증 환자가 많다. 모든 일을 팽개쳐 버리고 자신을 포함해서 일체를 악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장엄하게 들릴 것이다. 그 악인 중에서도 스스로를 악인이라고 보고 그렇게 고백하는 자가 사실은 가장 선량한 사람이라고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타인이 악인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에 진정으로 만족감을 느낀다면, 그런 대로 그는 무엇인가 선량하고 올바른 통로에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영속적인 상태로서의 염세주의는 대개의 경우, 단지 찢어진 철학의 외투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고 그 찢어진 구멍에서는 인간의 허영심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대식가인 괴물을 언제나 양육하지 않고는 도저히 행복이라는 목표에 접근할 수 없다. 가장 불행한 자는 단지 어떤 종교적인 종파에 소속하는 것으로써 행복을 얻으려고 하면서 결국은 속았다고 느낌으로써 크게 실망하는 사람들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겔추어 교수는 그의 저서 중에서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 "대체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신앙인은 일주일에 한 번 최고의 은총을 얻기 위해 나가는 왕실 근무자가 있다. 즉 인간이 이따금 인류에게 봉사하면서 사회를 위해서 선행을 한다는 것은 남은 시간 즉, 여생을 안락하게 지내기 위한 이기심을 기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가 있고 나서부터 찾아 헤맨 행복의 길, 역사에서는 그것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은 대개가 스스로의 인생 경험에 의해서 많거나 혹은 적은 그것들을 알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인간은 그 길에서는 도저히 행복다운 행복을 찾아낼 수 없었다. 물론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성스러운 계단에 숨겨진 욕망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행복의 또 다른 조건 중에서 원리적인 세계 질서에 대한 굳은 신앙을 들 수 있겠다. 그런 질서 없이 세계는 단지 우연에 의해서 혹은 약자에 대해 그야말로 잔인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엄격한 자연법칙에 의해서 지배되고, 또 인간의 책략과 폭력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개인의 행복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세계 질서 속에서의 사람들은 폭력을 휘두르든가, 폭력을 참고 견디든가, 아니면 쇠토막이 되든가 쇠판이 되어 얻어맞는 역할을 하는 것밖에 다른 수가 없다. 그런 것들은 고상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어울리지 않는 비참한 상태임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엄밀히 말해서 인간은 이기주의자이거나, 혹은 위선자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철학에 대한 완전한 결론을 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불완전하지만 유일한, 구제의 방도는 총의 폭력으로 지배되는 세계국가의 건설인 것이고, 그것은 전세계의 소위 문화 국민을 포괄해서 최소한 그들 사이의 전쟁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황제시대의 로마제국, 또는 나폴레옹 1세의 주된 생각이 그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모든 국법 및 국제법을 그런 식으로 최후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생각이 이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사람들의 머리에 떠오르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인간을 개인적으로는 동물로, 정치적으로는 노예로 격하시키는 그런 인생관의 진리성은 약간만 고상한 사상의 소유자라면, 다만 그 마음 속 깊은 데서 치솟아 올라오는 감정적인 항의만으로도 그것을 부정할 것이 틀림없다. 설령 역사가 언제나 되풀이돼서 그 무가치성을 문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하더라도 윤리적인 세계 질서의 존재는 충분히 증명된 것이 아니므로 그런 인생관을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들은 단테의 신곡 중의 '지옥의 문'에 기록된 구절을 전해 줄 수밖에 없다. "우리들은 슬픔의 시가지 입구, 우리들은 영원한 고뇌에의 입구, 우리들은 멸망하는 겨레의 입구, 너희들이 여기에 들어가려면 일체의 소망을 버려라." 단테의 지옥에 표현되고 있는 여러 가지 묘사를 살펴보면 이 세상에서의 오늘날의 현실주의적인 인간의 생활과 비슷한 점을 많이 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19세기 독일의 시인인 가이벨의 시에 나타난 것과도 같다. "미소를 잊기 위해 /거기까지 내려가지 않아도 된다 /내가 노래하는 모든 고통 모든 고민 /공포와 아픔을 나는 이 세상에서 /이 프로레츠에서 찾았노라." 그것과는 달리, 윤리적인 세계질서를 수리화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행복에의 길은 바로 여기에 열려 있다! 그 이후는 마음 속 깊은 곳에 꿋꿋한 한 가지 신념이 자리를 잡게 되어 영원한 평화와 확신을 얻게 된다. 그런 것들은 밖에서 불어오는 폭풍우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오히려 더 그 힘이 증대되어 간다. 이전에는 오만하기도 했고 또 낙담할 때도 있었던 마음 그 자체가 지금은 굳게 뭉친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오직 매일 일어나는 일에서 빚어지는 감정적인 것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도록 노력하면 된다. 그리고 굳게 부동의 신념을 지니고 생활하면서 감정의 지배를 받지 않고 활동을 하는 생활에서 행복을 깨달으면서 매일 매일의 보수를 받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올바른 길이 생기는 법이다. 소위 믿음이 철저한 사람들에게 있는 결점은, 언제나 감정에 빠지기 쉬운 행동을 취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천성인 마음의 쾌락주의가 다만 경건한 체 겉치레의 옷을 입은 것뿐이고,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은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그러한 성스러운 마음의 뒷면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것은 때묻은 향악욕뿐. 다만 그런 것은 형체만 다소 다를 뿐인 것이다. 어쨌거나 이것은 사람이 항상 경건하게 모실 우상도 아니고, 그것으로 인해 자기 자신을 숭배하게끔 할 만한 우상 또한 아니다. 숭배해야 할 것은 오히려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건전한 생활이다. 올바르게 일을 해서 흘리는 땀이야말로 항상 새롭게 솟아나는 부단의 힘과 정신의 쾌활성을 갖게 하는 비밀이고 그런 것들이 모아짐으로써 진실된 행복감을 만들 수 있다. 실로 건강이라는 것도 최근의 의학에서의 연구 결과에서 알려진 것처럼, 본디 피할 수 없는 적에 대한 훌륭한 저항 방편인 것이다. 그러나 그 저항력에도 머지 않다 밝혀지겠지만 순수한 물질적인 성질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동시에 도덕적인 성질을 지닌 것이어서 여러 가지 도덕적인 속성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인간의 부단한 힘은 땀을 흘리고 일하는 데서 생겨난다. 요컨대 당신에게 힘이 있는 한 앞날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힘과 수명이 일치된다는 것이다. 그런 상태는 인간의 말년에 있어서 가장 희망적인 일이다. 윤리적인 세계 질서의 존재에 대한 확신, 그런 질서를 지키면서 일을 한다는 것, 그 두 가지는 내적으로 불가분의 것이다. 거기에다가 다음에 언급할 제3의 것을 첨가해서! 이 세 가지 이외의 모든 것은 대체로 부차적인 것인 만큼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사람들이 오직 진지하게 처신한다면 각 개인이 그들의 생활에 있어서 여러 모의 필요성에 자연스럽게 응해지는 것일 테니까. 이 세상에 있어서의 윤리적인 세계 질서의 실현은 인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은 개인과 가족에 의해서 이루어는 것이지 처음부터 단체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각 개인은 단체 속에서 그 자신의 위치를 차지하고 그 위치를 확보 해놓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럴 때에 태만한 태도는 용납되지 않는다. 단테의 작품이나 성서에서처럼 천지의 출현을 묘사하는 참으로 시적인 정경에서 천사는 그 모두가 활발하고 결단성이 빠르고 간결하게 말을 하는 것이다. 결코 감상적으로 넋두리를 하지 않는 것은 그야말로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인생에 있어서 항상 용기와 겸손한 태도를 지닐 필요가 있다. 그것은 약간은 이상하게 느껴지는 사도 바울의 말, '나는 약할 때 강하다'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그 중의 한가지만으로는 각 개인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기쁨은 자진해서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올바른 생활만 한다면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돈이 들지 않았는데 필요에 따라서 얻어지는 기쁨의 최상의 기쁨이다! 이것을 맛볼 수 있다면, 당신은 다만 두 가지 일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견뎌낼 수가 있으리라. 그 두 가지란 걱정거리와 죄를 짓는 일이다. 참다운 선이라는 것은 먼저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떠한 선도 처음부터 웃는 표정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올바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걸어갈 길은 모두가 이미 열려 있는 문을 통해서만 통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교제는 인생 경험이 원숙한 경지에 이른 당신에게 있어서도 역시 어려운 문제이고 또 생각할 여지가 있는 것이리라. 때문에 당신은 결코 타인을 미워해서도 안 된다. 또 쉽게 숭배해서도 안 된다. 그들의 의견이나 요구 판단 등을 지나치게 중시해도 안 된다. 그들을 심판해서도 안 되고 심판을 받아서도 안 된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이 세상에서 지나치게 많은 것을 기대해서도 안 되고 세상을 지나치게 겁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을 올바르게 보고, 선을 인정하고, 악은 무력한 것이며 영속성이 없고, 머지 않아 자멸하는 것이라고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와 함께 마지막으로 말해 두고 싶은 것으로 이 세상에서의 일을 그다지 중요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해두어야겠다. 당신들이 '오직 하늘에 머리를 두고' 살아가기만 한다면, 이 세상의 수많은 일들은 어떻게 되어 가거나 신경이 쓰이지 않게 된다. 중요한 일이 잘만 되어 간다면 사소한 일쯤은 중요시하지 않아도 된다. 대개는 사소한 일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특히 타인이나 타인의 판단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헛되이 괴로워하고 있는 자가 가장 훌륭하다고 인정되고 있는 부류도 많이 있다. 때문에 그들은 평상시의 일을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도 훨씬 어려운 것으로 만들고 있다. 소위 이러한 처세론은 그밖에도 얼마든지 더 첨가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이미 기술한 것처럼 본래 불필요한 것이다. 그 이유는 위에서 서술한 것과 같은 토대에서 오직 자연스럽게 더구나 각 개인의 필요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 소중한 것은 그 토대인 만큼, 그것이 없다면 모처럼의 처세론도 실행이 불가능하다. 당신들은 이 세상에서 일컫는 교훈 또는 그것에 관한 훌륭한 책들마저 그다지 중시하지를 않는다. 그러나 그런 교훈도 어떠한 신념에서 흘러나오는 것이고, 그런 신념은 또 어떤 인생관에서의 필연적인 사물인 만큼 그런 인생관이야말로 당신이 무엇보다도 먼저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교훈은 과연 그 말이 아름답고, 귀에 솔깃한 것이며 읽기에, 또는 카드에 썼을 때는 멋지게 보이지만,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격언 수집가를 위해서 그 이상의 재료를 제공하는 대신에 오히려 독자에게 또 한가지를 소중한 진리를 알려주고 싶다. 즉 불행한 인간의 생활에는 언제나 수반된다는 점이다. 약간은 역설적일지도 모르겠지만 불행은 행복을 위해서 필요하다. 사실상의 경험에서 나타나듯이 불행은 대개 피할 수 없는 끈이므로 당신들도 어떤 방편으로든지 반드시 그것과 타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생에 있어서 달관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운명과의 완전한 화해뿐이다. 그것은 저 '넘치는 흐름'과 같은 확실한 마음의 평화인 만큼 그리스도도 그의 제자들에게 이것만은 약속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그의 외면적으로 곤란하기 짝이 없던 마지막 대화에서 깊은 감정을 토로하면서 얘기한 것도 그러한 마음의 평화이다. 때문에 진실된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에는 외부의 사정 따위는 오로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무감각증을 터득해서 그러한 외부에서 새기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고, 그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다른 방법으로 유효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형제여, 다시 말하지만 인간이란 세상살이에서 괴로움이나 불행을 피할 수는 없다. 그것과 타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럴 경우 먼저 생각을 신중히 해야만 한다. 그 다음에는 일시적인 감정을 초월해서 부동의 신념을 가지는 거이다. 불행은 세 가지 목적이 있고, 동시에 세 가지 단계를 형성하고 있다. 첫째는 벌인데 그것은 여러 가지 행위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귀결이니 그런 행위 그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벌이 반드시 행위의 뒤를 따르는 것은 마치 논리적인 귀결이 논리적인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다음은 정화, 이것은 사람이 불행에 의해서 보다 충실하고 진지하게 되고, 진리에 대한 보다 커다란 감수성 때문에 성립하는 과정이다. 마지막 단계는 자기 시련과 강화이다. 이것은 자신의 능력과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함으로써 행해진다. 이러한 경험을 여러번 되풀이함으로써 비로소 당신은 자신 속에 올바른 용기를 솟아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만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겸손이다. 아직도 그 문을 열지 못하는가 언제나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무엇인가 조그만한 불안이 끝없이 신변을 감돌고 있다. 그리고 그런 현상은 노년기가 되면 그 사람의 인상에도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또 당연한 보상이라고 할까, 그들은 그 행복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하고 언제나 불안에 사로잡힌 심정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그 과정이 어떻든 그 자체가 부단한 행복으로 느낄 수 있는 바탕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속되는 고난은 인간을 무정하게 만든다. 때로는 본디 고결한 인사라도 지나치게 자주 고난에 직면했기 때문에 실제보다도 무정한 사람으로 보일 때가 있다. 굳은 인정의 연결도 불행한 삶에서 맺어진다. 인간이 서로 고난을 겪으면서 신의를 잃지 않는다면 어떤 장애에도 굴하지 않는 보배를 얻었다고 하겠다. 그 보배는 진실된 우정이다. 착한 사람은 행복해야만 되는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이 세상은 그렇게 움직이고 있지 않으니 그것은 확실히 수수께끼라 하겠고, 그 수수께끼가 실로 수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올바른 길을 가지 못하게 한다. "지난날은 신앙에 용맹스러웠던 예수의 증인, 가난한 근심과 위험 속을 헤매는 것을 사람들은 보았다. 이 세상에서는 적합하지 않은 귀인, 곤궁의 나날을 보냈다. 왕족 중의 왕, 그들 인간들은 십자가에 못박았다." 실제가 바로 그렇다. 하지만 친애하는 독자 여러분! 여러분은 그것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것에 대하여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각오를 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평생 행복을 발견할 수 없으리라. 행복은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사자인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그 광경을 보면 겁을 집어먹고 되돌아선다. 그리고는 오히려 행복에는 미치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손에 넣고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들은 경험에 의해서 이렇게 말할 수가 있다. 즉 향락을 탐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상상력은 현실을 훨씬 앞질러 가는 것, 상상력이 미리 그릴 수 있을 만큼 실제의 고통이 더 심했던 일은 절대로 없었다. 가장 심한 고통의 순간은 대개 고맙게도 감각이 둔해져서, 고통을 여러번 경험한 사람은 그 고통을 쉽게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누구라도 알고 있다. 그리고 첫째 불행은 그 다음에 닥친 불행을 견뎌내게 하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 고통은 '각각 멋진 행복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말해도 좋다. 고통에 대한 정신적인 싸움은 도리어 인간을 강건하게 만들어 주며, 정신적으로 아니 아마 육체적으로도 건강하게 해준다. 자기 자신을 어느 정도 가차없이 다루는 것, 즉 네가 좋아하건 싫어하건 너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일러 줄 수 있다는 것이 참다운 생활에는 진실로 필요하다. 진리에 대한 사랑과 정의에 대한 용기, 그것이 모름지기 진실된 교육의 기둥이다. 그것이 없다면 교육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사실 천국에 들어가는 것마저 힘이 필요하니, 용기 있게 힘을 쓰는 자, 그 사람은 들어갈 수 있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의 용기가 가장 필요한 것이다. 이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행복이란 하나님과 함께 있다. 그 영역에 도달할 수 있는 힘은 영혼의 소리인 용기이다. 이 세상에는 그 이상의 행복은 없는 것이다. 만약 그런 조짐을 지니지 않은 행복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갖고 싶지 않으리라." 이기심을 버리고, 영원을 파악해서, 사랑에 이끌려서 이 세상일을 단순한 수단이라고 보고 이것을 지배하라! 이것만이 이 세상에서 있을 수 있는 행복한 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행복은 한 가지 현실이며 한 가지 사실이기도 하다. 그밖의 모든 행복은 꿈처럼 상상으로 그린 그림이다. 이러한 꿈은 젊은 시절은 몰라도 나이를 먹으면 누구라도 꿈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한 행복은 또한 우리들이 끊임없이 자기의 능력이 미치는 대로 항상 자신을 격려하며, 강제로 요구하는 것에서는 얻어질 수 없다. 오히려 우리들이 다시 이러한 인생관을 신봉하고 단연코 이 인생관을 실행해서 다른 것은 돌아보지도 않는다면 그때 행복은 자연 우리들을 찾아오게 된다. 즉 내적인 흐름이라는 것이 이러한 것이고, 이 흐름은 나이를 먹을수록 차츰 강해져서 우리들 자신의 정신이 성숙한 다음에는 마지막으로 타인에게 흘러 그에게 나누어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생활이 어떠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하려면 반드시 그 목표에 도달하는 일이 필요하다. 또 실제로 우리들은 그것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결심하고 나서 맨 첫 단계를 정복했다면, 단테가 말한 것처럼 '올라간다'는 것에서 커다란 기쁨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정화의 산'의 기슭, 거기서 다시 올라가려고 할 때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어떤 댓가로 요구하는 대로 지불하겠다는 굳은 결심과 명백한 선언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들어가지 못한다. 그것보다 쉬운 길로 아직은 어느 누구도 행복에 도달한 사람이 없다. 일체를 버려라, 그러면 일체를 발견하리라! 이런 결심의 대가는 나중에 비로소, 그것도 조금씩 되돌려 받을 수 있다. 처음부터 당장 그 전액을 돌려 받는 자는 한 명도 없다. 괴테 역시 그의 풍부한 생활을 영위하는 동안에 과연 여러번 행복에 접근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렇게 말하리라. 우리들이 잘 살아야 칠십 년 혹은 건강한 사람도 고작 팔십 년이면 종말을 고하게 되지만, 그리고 그 한평생이 비록 괴롭고 고통스러웠고 또 노동으로 일관했지만 그래도 그것은 행복한 한평생이었다고. 이것이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