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페스트, 이방인 저자-역자 : 알베르 카뮈 -방곤 출 판 사 : 범우사 출판 년도 : 1998년 초 록 : 범우 비평 세계 문학선 30-1 페스트, 이방인 지은이: 알베르 카뮈 출판사: 범우사 봉사자: 한양대학교 정혁, 김종근 페스트 1 이 기록의 주제가 되는 이상한 사건들은, 194x년 오랑(알제리 서북부의 오랑 주 북부의 주도)에서 일어났다. 일반적인 의견으로는, 보통 경우에서 좀 벗어나는 사건치고는, 그 장소 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랑은 언뜻보기에는, 사실 평범한 도시고 알제리 해안에 있는 프랑스의 도청 소재지라는 것 외에 특별한 도시는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도시 자체는 볼품없다. 겉으로는 조용한 모습이기 때문에 세계 각지에 있 는 수많은 상업도시와 이 도시를 구분하려면 어느 정도 사간이 필요하다. 가령, 비둘기도 없 고 나무도 없으며, 공원도 없는 도시, 거기서는 새들이 날개치는 소리도, 나뭇잎이 부스럭거 리는 소리도 없는, 한마디로 말해 중성지대인 그 도시를 어떻게 설명하면 상상이 될까? 여 기서는 계절의 변화도 하늘을 보고 분간한다. 봄이 오는 것도 공기가 달라진 것에 의해서 또는 어린 장사치들이 교외에서 가지고 오는 꽃광주리에 의해서 알아볼 수 있을 뿐이다. 말 하자면 봄은 시장에서 매매되는 물건과도 같은 것이다. 여름에는 태양이 모든 것을 태울 듯 이 지나치게 내리쬐어 집들은 건조해지고 벽들은 뿌연 잿빛으로 변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덧문을 닫고 그 그늘에서 지낼 수밖에 없다. 가을에는 이와 반대로 진흙의 홍수다. 겨울이 되어야 겨우 좋은 날씨를 볼 수 있다. 어떤 도시와 사귀기 위한 편리한 방법은 거기서 사람들이 어떻게 일을 하고 있으며, 어떻 게 사랑하고 있으며,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가를 알아보는 일이다. 우리의 이 자그만 도시는 기후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모든 것이 동시에 열광적이고도 무심하게 일어난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심심해서 습관을 붙여보려고 그런 데에 열중하는 것이다. 우리들 시민들은 일을 많이 하는데, 언제나 그것은 부자가 되려는 욕심에서 하는 일이다. 그들은 특히 상업에 관심 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 자신의 말을 빌리면, 사업하는 데 우선 관심이 있는 것 이다. 물론 그들은 단순한 기쁨에 대한 취미도 없지 않아서 여자와 영화와 해수욕을 좋아한 다. 그러나 대단히 절제를 잘하기 때문에 그런 즐거움은 토요일이나 일요일로 보류해두고, 다른 요일에는 돈을 많이 벌려고 애쓴다. 저녁 때 그들은 일이 끝날 무렵, 일정한 시간에 카 페에 모여 앉았다가 늘 같은 거리를 거닐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기 집의 발코니에서 쉰다. 아주 젊은 패들의 욕망이 거칠고 단순한 데 비해서, 나이가 든 패들의 장난이란 공 굴리기 모임이나 친목회의 회식이나 카드 노름에 돈을 듬뿍 거는 모임의 선을 넘지는 않는다. 아마 사람들은 그것이 우리들이 사는 도시에서만 특별하게 그런 것이 아니라 현대인은 누 구나 마찬가지라고 말할 것이다. 아마도 오늘날 사람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고, 그 다 음에는 살기 위한 나머지 시간을 카드놀이나, 카페에서, 그리고 잡담으로 소비하고 있는 것 으로 보는 것보다 자연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도시들이나 나라에서는 사람 들이 가끔 다른 것에 대한 의혹을 갖지만 대체로 그런 것이 그들의 생활에 변화를 주지 않 는다. 다만 그런 의혹을 가졌을 뿐이고, 그만큼 늘 득을 보고 있는 셈이다. 그와 반대로 오 랑은 분명히 의혹이 없는 도시, 즉 완전히 현대적인 도시다. 그러므로 우리 고장에서는 사람 들이 사랑하는 방식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남자들과 여자들은 성관계라는 행위를 통해서 서로를 물어 뜯거나, 그렇지 않으면 두 사람만의 오랜 습관 속에 얽매이게 된다. 그 양극단 사이에는 중용이라고는 흔히 없다. 그것도 역시 특이한 것은 못된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오랑에서도 시간과 반성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알지도 못한 채 사랑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 도시에서 더 특이한 것은, 죽음에 이르러서 직면하는 어려움이다. 그런데 어려움이라 는 것은 적당한 말은 못되고, 더 정확히 말해서 불편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병이 들 면 즐거운 것이라고는 결코 없지만, 어떤 도시나 나라에서는 병중에라도 의지할 것이 있고, 거기에는 어쨌든간에 그럭저럭 견디어 나갈 수도 있다. 병자란 부드러움을 필요로 하며 그 무엇에 의지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오랑에서는 극단적인 기후라든가, 거래하는 사업의 중요성이라든가, 장식의 무의미함이라든가, 황혼의 덧없음이라든가, 쾌락의 성질이라든가 하는 그 모든 것이 건강을 필요로 한다. 병자는 여기에서는 아주 고독하다. 더 위로 빠지직 소리가 날 정도로 수백 개의 벽돌 뒤에 있는 덫에 걸려서 다 죽어가는 사람을 상상해보라. 그러는 동안에 바로, 많은 주민들은 전화로 또는 카페에서 어음이니 선하증권이 니, 할인이니 하는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다. 비록 현대라도, 그 죽음이 그런 무미건조한 고 장에 그렇게 들이닥칠 때, 불편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사람은 이해할 것이다. 이상은 우리의 거리에 대한 충분한 개념을 설명해준다. 그렇지만 조금도 과장해서는 안될 것이다. 강조해야 할 것은 이 도시와 생활의 평범한 모습이다. 그러나 사람은 습관만 들이면 그날그날을 거뜬히 보낼 수가 있다. 그런 습관만 들이면 그날그날을 거뜬히 보낼 수가 있다. 그런 습관만 들이면 우리들의 도시는 살기 좋은 곳이기에 모든 것이 안성마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각도에서 보면 아마도 삶이란 그다지 보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고장에서는 무질서라는 것은 모른다. 그리고 솔직하고 동정심이 많고 활동적인 우리 주민들은 늘 점잖은 느낌을 여행객들의 마음속에 남겨주었었다. 경치도 좋지 않고, 초목도 없고 영혼도 없는 이 거리는 마침내 아늑하게 보여 결국 거기서 잠들어버린다. 그러나 그 도시가 완전한 선을 이룬 만 앞에서 반짝이는 언덕에 둘러싸여, 헐벗은 평원 한복판에 우뚝 서서 비길 데 없는 경치와 접하고 있다는 것을 덧붙여두는 것이 공평하리라. 다만 이 도시 가 그 만을 등지고 서 있어서 바다가 보이지 않아 언제든지 거기에 가야만 볼 수 있다는 점 이 유감이다. 여기까지 말하면, 그해 봄에 사건들이 생겨서, 그것들이 내가 여기서 그 기록을 만들려고 뜻을 품은 - 우린 나중에야 알았지만 - 한 편의 중대사건들의 첫 신호가 되리라는 것을 이 곳 시민들이 꿈에도 생각 못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갈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이 어떤 이 에게는 아주 당연해 보일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반대로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일 지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기록하는 사람이 그러한 모순을 헤아릴 수는 없다. 그의 임무는 사실 그런 일이 있고, 생겨났고, 한 민중 전체의 생활에 관계되고, 따라서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의 진실성을 자기들의 마음속에서 인정해줄 수 있는 1000명의 목격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 단지 '이런 일이 생겼더라'고 말하는 것뿐인 것이다. 그것뿐인가. 때가 오면 언제든 인정받게 되겠지만 그 필자가 우연한 사정으로 얼마만큼의 진술 내용을 수집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더라면, 그리고 또 사물의 힘으로 그가 이야기하 려고 하는 모든 일에 휩쓸리지 않았던들, 이런 종류의 일에 어울릴만한 명분도 서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로 하여금 역사가의 역할을 하도록 허용하는 까닭이다. 물론 역사가 라면, 그가 비록 본직이 아닌 경우라도 항상 자료는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의 필 자도 자신의 자료를 가지고 있다. 우선 자기가 경험한 것과, 다른 사람이 경험한 것 - 왜냐 하면 그의 직분 때문에 이 기록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이 털어놓는 이야기를 모두 수집해야 했기 때문에 -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침내 그의 수중에 들어오고야만 서류들이다. 그가 좋다 고 판단할 때는 거기서 잘라내 그것들을 마음껏 이용할 생각이다. 그는 또한...그러나 이제는 아마도 설명이나 머리말은 그만두고 본 이야기를 시작할 때인 것 같다. 처음 며칠 동안의 경위는 좀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4월 16일 아침, 의사 베르나르 리외는 자기의 진찰실에서 나오다가 층계참 한복판에서 죽 어 있는 쥐 한 마리를 보았다. 그 즉시에는 무심하게 그 짐승을 발로 걷어치우고 층계를 내 려왔다. 그러나 거리에 나왔을 때 '쥐가 나올 곳이 못 되는데...' 하는 생각이 떠올라서, 그 길로 발길을 돌려 수위에게 그것을 알려주었다. 늙은 미셸씨의 반응을 보고, 리외는 자기의 발견이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을 더한층 느꼈다. 죽은 쥐가 있다는 것이 수위에게는 창피한 일이었지만 그에게는 괴상하게 보였다. 어쨌든 수위의 처지도 명백했는데, 집안에 쥐는 없었 다는 것이다. 의사가, 위층의 층계참에 쥐가 있는데 아마도 죽은 것 같다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미셸 씨의 신념은 확고부동했다. 집안에는 쥐가 없다는 것이었고, 그렇다면 누가 밖에 서 가지고 들어왔을 것이며, 요컨대 무슨 장난이라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에도, 베르나르 리외가 아파트 복도에 서서 자기 방으로 올라가기 전에 열쇠를 찾고 있었는데, 그때 그는 복도의 어둠침침한 저 구석에서 털이 젖은 커다란 쥐 한 마리가 비틀거리며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그 짐승은 멈춰서서 몸의 균형을 잡으려는 듯이 보였고, 의사에게로 달려오다가 다시 멈추고는 작은 소리를 지르며 제자리에서 맴돌다가 마침내는 주둥이를 벌리고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말았다. 의사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가 자기 방으 로 올라갔다. 그는 쥐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쥐가 토해낸 피를 본 순간 그는 다시 그의 근심이 생각났다. 그 다음날은 병든 지 일년이 되어가는 자기 아내가 어느 산속에 있는 요 양소로 떠나는 날이다. 아내는 그가 하라는 대로 침실에 누워 있었다. 아내는 장소를 옮기는 데서 오는 피로에 대비하고 있었다. 아내는 웃고 있었다. "기분이 참 좋아요." 아내는 말했다. 의사는 침대머리의 등잔 불빛을 받으면서 자기에게로 돌리고 있는 아내의 얼굴을 보고 있 었다. 나이 서른에 병색이 뚜렷한 아내의 얼굴이 리외에게는 그래도 여전히 젊은 시절의 얼 굴로 보였다. 아마 다른 것을 전부 쫓아버리는 그 웃는 모습 때문일지도 모른다. "웬만하거든 자요." 그가 말했다. "간호원이 11시에 올거야. 12시 기차를 탈 수 있도록 당 신을 데려다주겠소." 그는 약간 땀이 난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아내의 웃는 얼굴이 방문까지 그를 바래다주었 다. 그 이튿날인 4월 17일 8시에, 수위는 지나가던 의사를 붙들고 어떤 짓궂은 장난꾼들이 죽 은 쥐 세 마리를 복도 한복판에다 갖다놓았다고 푸념을 했다. 쥐들이 피투성이인 것을 보니 틀림없이 큰 덫으로 잡은 모양이었다. 수위는 쥐의 발목을 붙잡고 얼마 동안 문지방에 서서 그 범인들이 빈정거리러 나타나지나 않을까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 그놈들, 기어코 잡아야지." 미셸 씨가 말했다. 불안해진 리외는 그의 환자들 중에서 제일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시 변두리 지역부터 회 진을 시작하였다. 그 지역에서는 쓰레기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은 바람에, 그가 탄 자동차는 곧고 먼지투성이인 그 동네의 길을 따라가며 인도가에다 내놓은 쓰레기통을 스치며 지나갔 다. 이렇게 천천히 달리고 있던 어느 거리에서, 의사는 야채 찌꺼기며 더러운 걸레조각 위에 팽개쳐진 쥐를 10여 마리나 보았다. 그가 제일 먼저 찾아간 환자는 거리로 면한 침실 겸 식당으로 쓰는 방에 누워 있었다. 그 는 얼굴이 무뚝뚝하고 움푹 패인 늙은 스페인 사람이었다. 그는 이불 위에 콩이 가득 담긴 냄비를 놓아두고 있었다. 의사가 들어갔을 때 늙은 천식 환자는 침대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르렁거리는 숨결을 다시 진정시켜보려고 몸을 뒤로 젖히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세숫대야 를 가지고 왔다. "그런데, 선생님." 주사를 놓는 동안에 그가 말했다. "그놈들이 나오는 걸 보셨어요?" "정말이에요." 그의 아내가 말했다. "이웃집에서는 세 마리나 쓸어냈대요." 노인은 두 손을 비비면서 말했다. "그렇고 말고. 쓰레기통마다 보이거든. 배가 고파서 그럴겁니다!" 리외는 온 동네가 쥐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왕진을 마치고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선생님께 전보가 왔습니다. 저 위에 갖다놓았습니다." 미셸 씨가 말했다. 의사는 혹시 또 쥐를 보았느냐고 물었다. "아! 천만에요." 수위가 말했다. "내가 지키고 있는데 그놈들이 감히 갖다놓겠어요?" 전보 내용은 그 이튿날 그의 어머니가 오신다는 것이었다. 며느리가 병으로 집을 비우는 동안 대신 아들의 집안일을 돌보러 온다는 것이었다. 의사가 방으로 들어갔을 때, 간호원은 이미 와 있었다. 리외는 아내가 일어서서 정장을 입고 분까지 바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는 아내에게 웃어 보였다. "좋아, 참 좋아." 그가 말했다. 잠시 후에 그는 역에서 침대차에다 아내의 자리를 잡아주었다. 아내는 차 안을 둘러보았 다. "우리 형편으로는 너무 비싸지 않아요?" "쓸 때는 써야지." 리외가 말했다. "쥐 이야기는 대체 뭐예요?" "나도 모르겠어. 심상치는 않은 일이지만 그럭저럭 지나가겠지." 그러고는 빠르게 용서하라고 말하고, 좀더 잘 돌봤어야 했는데 너무나 소홀히했다고 말했 다. 아내는 그런 말은 하지 말라는 듯이 고개를 휘저었다. 그러나 리외는 덧붙여 말했다. "당신이 돌아올 때에는 모든 것이 잘 되어갈거요. 우리는 새출발하는 거야." "그래요." 아내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새출발을 해요." 잠시 후에 그녀는 등을 돌리고 유리창 밖을 내다보았다. 플랫폼에서는 사람들이 급히 서 두르고 서로 부딪치고 야단들이었다. 칙칙 하는 기관차의 소리가 그들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리외는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아내가 돌아다보았을 때 그는 아내의 얼굴이 눈물에 젖은 것 을 보았다. "그러면 못써요."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눈물 젖은 얼굴에 약간 찡그린 미소가 다시 떠올랐다. 아내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자, 가봐요, 모든 일이 잘 될거야." 그는 아내를 껴안아주고 플랫폼으로 내려왔는데 유리창 너머로 아내의 웃는 얼굴밖에는 볼 수 없었다. "제발 몸조심해요." 그가 말했다. 그러나 아내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리외는 출구 근처의 플랫폼에서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오는 예심판사인 오통 씨와 마주 쳤다. 리외는 그에게 여행을 가느냐고 물어보았다. 키가 후리후리하고 머리카락이 검은 오통 씨는, 어떻게 보면 옛날 사교계에서 지냈던 인물 비슷했고 또 어떻게 보면 장의사의 일꾼 비슷했는데, 상냥한 목소리로 그러나 짧게 대답했다. "내 본가에 인사하러 갔던 아내를 기다립니다." 기관차가 기적을 울렸다. "쥐들이..."판사가 말했다. 리외는 기차 쪽으로 발을 옮겼다가 다시 출구 쪽으로 돌아섰다. "네, 아무 일도 없겠죠." 그가 말했다. 그때 그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단지 죽은 쥐가 가득 찬 궤짝 하나를 겨드랑에 낀 역원 이 지나간 사실뿐이었다. 바로 그날 오후, 리외가 진찰을 시작할 무렵에 어던 사람이 그를 찾아왔는데, 그는 신문기 자며 아침에 한 번 다녀갔다는 것이었다. 그의 이름이 레이몽 랑베르였다. 키가 작달막하고 어깨가 옹골진데다가 얼굴이 결단성 있게 생겼고 눈이 맑고 총명해 보였다. 랑베르는 스로 츠 복식으로 지은 옷을 입고 있었고, 생활도 여유가 있어 보였다. 그는 대뜸 용건부터 말했 다. 그는 파리에 있는 어떤 큰 신문에 싣기 위해 아랍인들의 생활 상태를 취재하고 있는데, 그들의 보건 상태에 관한 기삿거리를 제공해달라는 것이었다. 리외는 보건 상태가 좋지 못 하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그는 신문기자가 진실을 말할 수 있는지 알고 싶다고 말했다. "물론입니다." 랑베르는 대답했다. "내 말은, 철저히 고발하실 수 있는가를 알고 싶다는 말입니다." "철저하게는 못합니다. 그것은 말씀해두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그 고발 이라는 것이 근거가 없는 것 같은데요." 리외는 부드러운 말투로, 사실 그런 고발이란 근거가 없는 것이겠으나, 그런 질문을 함으 로써 자기는 랑베르의 증언이 기탄없는 것인지 아닌지를 알고자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나는 기탄없는 증언 이외에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의 증언을 위해서 기삿거리 를 제공할 수는 없습니다." "그야말로 생쥐스트(L.D.de Saint-Just, 1767-94. 프랑스 혁명 때의 자코뱅당 중심 세력의 투사.) 같은 말투군요." 웃으면서 신문기자가 말했다. 리외는 언성을 높이지 않고 그런 것은 자기는 모르겠으나 자신은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진저리를 치지만 그래도 인류에 대한 관심은 가지고 있으며, 내딴에는 정의롭지 않은 것과 타협을 거부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하는 말이라고 대답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일어서며 말했다. 의사는 그를 문까지 바래다주면서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랑베르는 약이 오른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그가 말했다. 의사는 그와 악수를 하고, 지금 이 도시에서 수많은 죽은 쥐가 발견되는데 흥미있는 통신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 그래요." 랑베르가 외쳤다. "그것 아주 흥미있는데요." 의사는 오후 5시에 다시 왕진을 가려고 밖으로 나가는 길에 계단에서 젊고 육중한 몸에, 얼굴이 두툼하면서 우락부락하게 생긴데다가, 눈썹이 짙은 어떤 남자 옆을 지나갔다. 리외는 그 남자를 가끔 그 건물 맨 꼭대기 층에 살고 있는 스페인 댄서들의 집에서 만난 일이 있었 다. 장 타루는 담배를 피우면서 자기 발밑, 계단에서 뻗어 죽어가는 쥐의 마지막 경련을 들 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흐리멍텅한 눈을 치뜨고 침착한 눈길로 의사를 보고 인사를 하고는, 쥐들이 나타난 것은 좀 희한한 일이라고 덧붙여 말했다. "그렇죠." 리외가 말했다. "결국은 난처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선생님, 어떤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런 일을 난생 처음 봅니다. 그뿐이죠. 그러나 나는 좀 흥미있는 일이라고 봅니다. 그러문요. 아주 흥미있습니 다." 타루는 손으로 자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고는, 이제는 움직이지 않는 쥐를 보고 있 다가 리외를 보고 웃었다. "그러나 결국, 선생님, 이런 것은 특히 수위가 걱정할 일이지요." 바로 그때, 의사는 아파트 앞 현관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평소에는 혈색이 좋던 얼굴에 피로한 기색이 돌고 있는 수위를 발견했다. "네, 압니다." 또 나타났다고 눈짓으로 말하는 리외에게 미셸 씨는 말했다. "이제는 두 마리, 세 마리씩 나타나는군요. 그러나 다른 집들도 마찬가지예요." 그는 기운이 없고 근심스러운 눈치였다. 그는 기계적인 동작으로 목덜미를 비볐다. 리외가 그에게 몸은 괜찮으냐고 물어보았다. 수위는, 물론 좋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다만 여 느 때 같지는 않았다. 내심으로는 속을 태운 탓인 것 같았다. 그 쥐라는 놈들이 그에게 타격 을 주었던 것이며, 그놈들만 없어지면 모든 것이 나아질 것이었다. 그러나 이튿날인 4월 18일 아침에 역에 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돌아온 리외는, 미셸 씨의 얼굴이 좀더 수척해진 것을 보았다. 지하실에서부터 다락방에 이르기까지 계단이라는 계단 은 10마리 정도의 쥐가 죽어 나자빠져 있었다. 집집마다 쓰레기통에는 쥐가 가득 찼다. 의사 의 어머니는 그런 말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말했다. "그런 일도 있지." 그녀는 검고 부드러운 눈에 은발의 키가 작은 부인이었다. "너를 보니 반갑구나, 베르나르야." 어머니는 말했다. "쥐 같은 것에 신경쓸 것 없다." 그는 동감했다. 아닌게 아니라 어머니하고라면 모든 것이 잘 될 것 같았다. 그래도 리외는 시의 쥐 피해 대책과에 전화를 걸었다. 그 과장을 그는 알고 있다. 리외는 과장에게 많은 쥐들이 밖으로 나와서 죽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느냐고 물었다. 메르시에 과장 은 들었을 뿐만 아니라 부둣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자기 청사에서만 해도 50여 마리나 쓸어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과연 그것이 중대한 문제인지 판단을 못 내리고 있었다. 리외도 그러한 판단은 내릴 수가 없었으나, 쥐 피해 대책과에서 나서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 다. "그렇구말구." 메르시에가 말했다. "지시가 있어야지. 만약 자네가 정말 그럴 필요가 있 다고 생각한다면, 지시를 내리도록 노력하겠네." "필요하지, 물론." 리외가 말했다. 그의 가정부가 조금 전에 와서 자기 남편이 일하는 큰 공장에서는 죽은 쥐를 수백 마리를 쓸어냈다고 말했다. 어쨌든 우리 시민들이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부터다. 그도 그럴 것이, 18일부 터 공장들이며 창고에서 수백 마리의 쥐 시체를 쓸어냈으니 말이다. 어떤 때는 죽어가는데 너무 오랫동안 고통스러워하는 짐승들의 숨을 끊어주기도 했다. 그런데도 변두리 지대부터 시 중심지까지 리외가 지나 다니는 곳이나 시민들이 모여 있는 곳마다, 쥐들이 쓰레기통에 서나 하수도 속에서 길게 늘어서서 쌓여 있는 판이었다. 석간 신문은 그날부터 이 사건들을 도맡아서, 과연 시청에서는 행동을 개시할 용의가 있는가 없는가, 또 이 구역질나는 피해로 부터 시민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 어떠한 긴급대책을 가지고 있는가를 추궁했다. 시로서 는 아무런 준비나 대책도 없었지만 그 문제를 토의하기 위하여 회의를 열기로 했다. 매일 아침 새벽에 죽은 쥐들을 모으라는 지시가 쥐 피해 대책과에 내려왔다. 다 모아놓으면 대책 과에서 차 두 대가 와서 그것들을 화장장으로 운반해다가 태워버리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며칠 동안 계속해서 사태는 더 심각해졌다. 죽은 쥐의 수효는 늘어나기만 했고, 수 거되는 양은 매일 아침 더 많아졌다. 나흘째 되는 날부터 쥐들은 떼를 지어서 거리에 나와 죽었다. 집 구석진 곳이나 지하실, 지하 창고, 수챗구멍으로부터 쥐들은 휘청거리면서 줄을 지어 올라와 햇빛을 보고 비틀거리며, 제자리에서 맴돌다가 사람들 곁에 와서 죽는 것이었 다. 밤에는 복도나 골목길에서, 마지막으로 아우성치는 작은 소리가 역력하게 들리곤 했다. 아침마다 변두리 지역에서는 뾰족한 콧등에 덕지덕지 피를 묻히고, 어떤 놈은 퉁퉁 부어서 썩어가고, 어떤 놈은 빳빳이 굳은 몸에 아직도 수염만은 뻣뻣한 채로 개천에까지 즐비하게 나자빠져 있었다. 시내에서조차도, 층계참이나 안마당에서 떼를 지어 죽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것들은 또 시청 홀에서, 학교 체육관에서, 때로는 카페의 테라스에서 딴 놈들과 떨어져서 혼자 죽어 있기도 했다. 시민들은 가장 왕래가 많은 장소에서 그것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질색하곤 했다. 사열식 광장이며, 큰길이며, 프롱 드 메르의 산책길에서도 여기저 기 쥐들로 더럽혀졌다. 시가지는 새벽에 그 쥐들을 깨끗이 치워버리지만, 다시 조금씩 그것 들이 나타나서 해지기 전에 벌써 수두룩해진다. 밤에 길을 산책하는 사람이 죽은지 얼마 되 지 않은 뒤 시체의 탄력 있는 덩어리를 발로 밟는 일도 있었다. 마치 그 광경은 우리들의 집에 서 있는 바로 그 땅이 속으로 썩은 고름을 짜내고, 여태까지 그 내부에서 썩고 있던 응어리와 나쁜 피를 쏟아내기 시작한 것처럼 여태껏 그렇게도 조용하다가 며칠 동안에 발칵 뒤집힌 이 조그만 도시의 당황한 모습을 상상만이라도 해보라. 분위기가 심각해져 랑스도크 통신지사(정보, 자료수집, 모든 문제에 대한 모든 정보의 수 집을 담당하는)가 무료 정보제공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25일 하루 동안에 6,231마리의 쥐를 모아 태워버렸다고 방송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들의 도시가 매일같이 보고 있는 광경에 대해서 명백한 의의를 제시해주었던 그 숫자가 혼란을 더 악화시켰다. 그때가지만 해도 사 람들은 좀 구역질이 나는 사건이라고 불평을 하는 정도였다. 이제 와서는 아직도 그 전모를 명백히 밝히지도 못하고 있는 그 현상에는 무엇인지 겁나는 점이 있었다. 단지 그 천식 환 자 스페인 영감만은, 여전히 손을 비벼대면서 노망이 들은 것처럼 "나온다, 나와."하며 좋은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4월 28일에 랑스도코 통신사는 약 8,000마리라는 집계를 발표함으로써 시내의 불 안은 그 절정에 달했다. 사람들은 근본적인 대책을 요구했고 당국을 비난했으며, 해변에 집 을 가지고 있는 일부 사람들은 이미 거기로 피해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튿날 통신사는, 그 현상이 갑자기 멈췄고, 쥐 피해 대책과에서 죽은 쥐를 무시해도 좋을 만한 숫 자밖에는 수집하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바로 그날 12씨쯤 의사 리외가 자기 잡 앞에서 차를 세웠을 때, 길 막다른 곳에서 수위가 고개를 숙이고 팔다리를 뻣뻣이 벌리고 마치 인형 같은 자세를 하고 간신히 걸어오 는 것을 보았다. 그 노인은 의사도 아는 어떤 신부의 팔을 잡고 있었다. 파늘부 신부였다. 그는 박학하고 열렬한 예수회파 신부였는데, 리외도 전에 가끔 만난 일이 있었으며, 우리 도 시에서는 종교 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들에게까지도 대단히 존경받고 있었다. 리외는 그들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미셸 영감은 눈을 반짝거리며 색색 숨을 쉬고 있었다. 영감은 몸이 찌뿌드드 해서 바람을 쐬려고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목과 겨드랑이와 사타구니가 몹 시 아파서 견디다 못해 도중에 돌아와야 했으므로 파늘부 신부에게 부축해달라고 부탁해야 만 했다. "종기가 터지나봐요."그가 말했다. "아주 혼났습니다." 리외는 자동차의 창문으로 팔을 내밀어서 미셸 영감이 내민 목밑을 손가락으로 만져보았 다. 일종의 나무마디 같은 것이 엉겨 있었다. "가서 누우십시오. 체온도 재보세요. 오후에 가서 보아드릴테니." 수위가 돌아가자 리외는 파늘부 신부에게 쥐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아!" 신부가 말했다. "아미 유행병일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 둥근 안경 너머로 눈웃을 을 지어 보였다. 리외가 점심을 먹고 나서 아내가 잘 도착했다는 내용의 전보를 다시 읽고 있을 때 전화 벨이 울렸다. 전에 치료해준 적이 있는 시청에 다니는 사람에게서 온 전화였다. 오랫동안 대 동맥협착증으로 고생한 사람인데 가난했기 때문에 리외는 무료로 그를 치료해준 일이 있었 다. "네, 저를 기럭하시는군요. 그런데 이번엔 다른 사람 때문입니다. 빨리 좀 와주세요, 제 이 웃에 일이났습니다." 그가 말했다. 숨가쁜 목소리였다. 리외는 수위 생각을 했으나 나중에 보러가기로 마음 먹었다. 몇 분 후 에 그는 변두리 구역에 있는 페데르브 가의 나지막한 집의 문을 들어섰다. 서늘하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계단의 중간쯤에서 마중하러 내려온 서기인 조제프 그랑을 만났다. 그의 나이 는 쉰 살 정도로 길게 턱까지 내려오는 콧수염을 길렀고, 어깨는 좁고 팔다리는 빼빼 말랐 다. "좀 나아가는군요." 그가 리외에게로 다가오면서 말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꼭 죽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코를 풀었다. 마지막 층인 3층에서 왼쪽 문에 선 리외는 붉은 분필 로 쓴 <들어오시오. 나는 목매달았소.>라는 글씨를 읽었다. 그들은 들어갔다. 테이블은 한구석에 치워놓고, 뒤집힌 의자 위로 천장에서부터 동아줄이 늘어져 있었다. 그러나 동아줄에는 아무것도 매달려 있지 않았다. "마침 알맞게 내가 와서 풀어주었지요." 가장 단순한 말을 하면서도 늘 말을 골라서 하는 듯이 보이는 그랑이 그렇게 말했다. "내가 막 외출을 하려는 그때 이상한 소리를 들었어요. 저 글씨를 보았을 때, 뭐랄까요, 저는 장난인 줄만 알았거든요. 그런데 저 사람이 괴상한 신음 소리를 내더군요. 말하자면 기 분 나쁜 소리랄까요." 그는 자기의 머리를 긁거 있었다. "내 생각으로는,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았어요. 물론 들어가 봤죠." 그들은 문을 하나 밀어서 열고, 밝기는 하지만 살림살이가 초라한 방의 문턱에 섰다. 얼굴 이 둥글고 작달막한 남자가 구리로 만든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그는 숨을 가쁘게 쉬고 잇 다가 충혈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의사가 멈칫 섰다. 그가 호흡하는 사이사이에 쥐 우 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방구석에는 아무것도 움직이는 것이 없었다. 리외는 침대 쪽으로 갔다. 그 남자는 그다지 높은 곳에서 갑자기 떨어짐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척추골은 다치지 않은 것 같았다. 물론 호흡곤란 증상은 약간 있었지만 X레이는 찍을 필요는 없었다. 리외는 강심제 주사를 한 대 놓고 며칠내로 회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사내는 숨찬 모소리로 말했다. 리외가 경찰서에 알렸느냐고 그랑에게 묻자 그 서기는 낭패한 태도로 말했다. "아뇨, 오! 아닙니다. 내 생각에 보다 급한 것은..." "물론 그렇겠죠." 리외가 말을 가로막았다. "그럼 내가 신고를 하겠어요." 그러나 그때 환자가 몸을 움직이더니 침대 위에 일어나서 아무렇지도 않으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항의조로 말했다. "진정하세요." 리외가 말했다. "뭐, 대수로운 일도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그리고 나는 신고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아! 사내가 뒤로 나자빠져 흐느껴 울었다. 조금 전부터 콧수염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그랑 이 환자 곁으로 왔다. "자, 코타르 씨." 그가 말했다. "생각 좀 해보시오. 누구나 의사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법이요. 이를테면 만 약 또 그짓을 할 생각을 하는 경우..." 그러나 코타르는 눈물 어린 목소리로 다시는 그런 짓을 안 할 것이고, 그것은 다만 순간 적인 발작으로 그랬던 것이니, 자기로서는 가만히 내버려두기만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리 외는 처방을 썼다. "알았습니다." 리외가 말했다. "그 일은 그대로 둡시다. 2, 3일 후에 다시 오겠어요. 그러 나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시오." 리외는 층계참에서 그랑에게 자기로서는 신고를 해야만 하겠으나, 그 대신 경찰서장에게 그에 대한 조사는 이틀 후에나 해달라고 부탁하겠다고 말했다. "오늘 밤에는 좀 지켜야 하는데요. 그 사람 가족은 있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어쨋든 나라도 지키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저 사람을 잘 모릅니다. 말하자면 잘 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서로 도와야 지요." 리외는 그 집 복도에서 기계적으로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이 동네에서는 쥐들이 완전히 없어졌느냐고 물었다. 서기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사실 그런 이야기를 듣기는 했으나 그 는 동네 소문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걱정이 있어서 그렇답니다." 그가 말했다. 리외는 그때 이미 그랑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아내에게 편지를 쓰기 전에 수위를 보아 줄 일이 급했던 것이다. 석간의 신문의 가두판매원들이 쥐들의 침해는 완전히 중지되었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러 나 리외는 환자가 상반신을 침대 밖으로 내밀고, 한 손은 배에 또 한 손은 목덜미에 대고 몹시 고통스러워하면서 불그스름한 담즙을 오물통에 토하는 것을 보았다. 오랫동안 애쓰다 가,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 되어서 그는 다시 누웠다. 체온이 39도 5분이었으며, 목의 림프 샘과 사지가 부어올랐고, 옆구리에 거무스름한 반점 두 개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이제 그는 뱃석이 아프다고 끙끙거렸다. "막 쑤시네." 그가 말했다. "고놈들이 콕콕 쑤셔." 숯검정처럼 된 입에서는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머리가 아파서 눈물이 글썽글썽한 두 눈 을 의사에게로 돌렸다. 수위 아내가 아무 말없는 리외를 불안한 듯 보고 있었다. "선생님, 대체 왜 그럴까요?" 그 여자가 말했다. "여러 가지로 볼 수 있는데요. 그러나 아직 명확한 증세는 알 수 없습니다. 오늘 저녁까지 식사를 하지 말고 청정제를 쓰십시오. 물을 많이 마시도록 하구요." 마침 수위는 목이 말라붙을 지경이었다. 리외는 집으로 돌아와서 리샤르라는, 시내에서 가장 유력한 의사들 중의 한 사람에게 전 화를 걸었다. "아뇨." 리샤르가 말했다. "특별한 일이라곤 전혀 없는데요." "국부적으로 병발하는 염증과 함께 열이 일어나는 환자는 없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몹시 염증이 심한 림프샘 환자가 두 사람 있었어요." "비정상적이던가요?" "저어 정상적이라면, 글쎄요..." 리샤르가 말했다. 수위는 그날 저녁에 줄곧 헛소리를 했고, 열은 40도나 올라서 쥐타령만 하고 있었다. 리외 는 심농가진 치료를 해보았다. 테레빈 주사의 타는 듯한 통증에 수위는 소리쳤다. "아! 망할것들 같으니!" 림프샘은 아직 부어 있었고 딱딱한 것이 만져졌다. 수위 아내는 넋을 잃고 있었다. "밤새 지키십시오." 리외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거든 나를 부르시오." 그 이튿날인 4월 30일은 벌써 훈훈한 산들바람이 푸르고 눅눅한 하늘에서 불고 있었다. 산들바람은 가장 먼 교외로부터 오는 꽃 향기를 날라다주었다. 거리에서 들리는 아침의 소 음은 여느 때보다 더 활발하고 더 즐거워 보였다. 한 주일 동안 겪었던 그 무거운 걱정에서 벗어나 이 조그만 우리의 도시에서 그날이야말로 봄날다웠다. 리외 자신도 아내의 편지를 받고 안심이 되어서, 아주 경쾌한 마음으로 수위가 있는 방으로 내려갔다. 그의 체온은 아침 에 38도로 내려갔다. 쇠약해진 환자가 침대에 누운 채 웃고 있었다. "괜찮을 것 같군요, 그렇죠? 선생님." 수위 아내가 말했다. "더 두고 봐야죠." 그러나 12시쯤 열은 대번에 40도까지 올라갔다. 환자는 끊임없이 헛소리를 했고 구토가 다시 시작되었다. 목의 림프샘이 닿기만 해도 아파서 수위는 될 수 있는 대로 목을 몸과 멀 리 떼어놓으려고 하는 듯이 보였다. 그의 아내는 침대 발치에 앉아서 두 손을 이불 위에 놓 고 환자의 두 발을 살그머니 누르고 있었다. 그녀는 리외를 보고 있었다. "부인." 리외가 말했다. "격리시켜서 특수 치료를 해야만 합니다. 내가 병원에 전화를 걸겠으니 그급차로 운반합 시다." 두 시간 후, 구급차 안에서 리외와 수위 아내는 환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헤갈이 된 환 자의 입 속에서 몇 마디 말이 간헐적으로 새어 나왔다. "쥐들!" 이렇게 그는 외쳤다. 밀랍 같은 입술은 푸르죽죽했고, 속눈썹은 무겁게 아래고 처지고, 숨은 단속적으로 짧아졌으며, 림프샘 때문에 살이 헤갈이 되었다. 몸 위에 이부자리를 덮고 싶은 듯, 아니면 땅 밑에서 들 리는 그 무엇이 쉴새없이 그를 부르기나 하듯이 자리 속 깊이 몸을 쪼그리고, 보이지 않는 무게에 눌려서 숨이 막히는 듯했다. 수위 아내가 울고 있었다. "이제는 가망이 없나요? 선생님." "죽었습니다." 리외가 말했다. 수위의 죽음은 어처구니 없는 징조들로 가득 찬 어떤 기간에 종지부를 찍었고, 초기의 놀 라움이 조금씩 낭패감으로 변해간 비교적 더 어려운 기간이 시작되는 것을 표시했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우리 시민들은, 차차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리의 그 조그만 도식가 하필 쥐 가 한데로 나와서 죽고, 수위가 괴상한 병으로 죽는 그러한 도시로 큭별히 지정되었다고는 결코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그런 점으로 보아서 시민들은 결국 잘못 생각했고, 그들의 생각 은 고쳐야 할 것이었다. 모든 일이 거기서만 끝났더라도 아마 그 일은 습관 속에 파묻혀버 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 중에서 그 밖에도 몇몇 사람, 그것도 반드시 수위나 가 난뱅이가 아닌 사람들까지도 미셸 씨가 먼저 밟은 길을 따라가야만 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공포가 그리고 공포와 함께 반성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사건들을 자세히 이야기하기 전에, 필자는 여태까지 적어온 기간에 대 해서 다른 또 하나의 목격자의 이야기를 밝히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의 처 음에서 이미 나왔던 일이 있는 장 타루는 수주일 전에 오랑에 자리 잡고 그때부터 번화가에 있는 호텔에 살고 있었다. 분명히 그는 여러 가지 수완으로 제법 넉넉하게 살고 있는 듯했 다. 그러나 그의 얼굴이 오랑 시에서 조금씩 익어가고 있었지만, 그가 어디서 온 사람인지, 왜 온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공개장소에서 사람들은 그를 보았다. 봄이 되면서부터 바닷가에서 대개는 즐겁게 수영을 하고 있는 타루를 볼 수 있었다. 호인이며 항 상 웃는 낯인 그는 정상적인 오락이라면 거기에 빠지지는 않으면서도 무엇이나 좋아하는 듯 이 보였다. 사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의 유일한 습관이라고는 우리 도시에 살고 있는 수 많은 스페인 댄서와 악사들 집에 열심히 드나들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어쨌든 그의 수첩에도 그 곤란한 기간에 관한 일종의 기록을 꾸미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보잘것없는 일만을 다루기 위한 계획인 듯이 보이는 특이한 것이었다. 언뜻 보기 에는, 타루가 망원경을 거꾸로 들고 사람이나 사물을 보려고 애썼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이다. 전반적인 혼란 속에서 그는 결국 사건이 없는데도 얘기꾼이 되려고 애썼던 것이다. 우 리는 아마도 그 계획을 한심하게 여기고 그의 마음이 메마른 것이 아닌가 의심할 수 있으리 라. 그러나 그 기간에 관한 기록으로서, 그 수첩이 제 2차적인 상세한 자료를 무수히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으며, 그 사소한 자료들이 제각기 중요성을 가지고 있고 그 해괴함조차 이 흥미있는 인물을 경솔히 판단하기를 주저하게 할 것이다. 장 타루가 적은 초기의 기록들은 그가 오랑에 도착한 날부터 시작되어 있다. 그 기록들은 처음부터, 도시 자체가 그렇게도 추한 곳에 왔다는 점에 대한 묘한 만족감을 보여준다. 시청 을 장식하고 있는 두 마리의 청동 사장상에 대한 자세한 묘사와, 나무들이 없는 점, 볼품없 는 집들, 도시의 부조리한 면에 대해 호의를 갖고 관찰한 것을 거기에서 읽을 수 있다. 타루 는 또한 설명도 붙이지 않은 채 전차나 거리에서 얻어들은 대화도 거기에 적어놓았다. 다만 좀 후에가서, 캉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에 관한 그 대화들 중에 하나에는 예외로 주를 붙였 다. 타루는 전차 차장 두 사람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것이었다. "자네두 캉을 잘 알지 왜." 그 중의 한 사람이 말했다. "캉? 키가 크고 콧수염이 검게 난 사람말이야." "그래, 바로 그렇군." "그런데, 그 사람이 죽었어." "저런! 그게 언젠가?" "그 쥐 소동이 난 다음이지." "허 참! 그래 왜 죽었지?" "모르지. 열병이래. 게다가 그 사람 몸두 튼튼하지는 못했어. 팔밑에 종기가 났었는데 그 만 견디지 못했던 모양이야." "그래두 보기에는 여는 사람처럼 괜찮아 보였는데." "천만에. 그는 폐가 약했었지. 그러면서도 계속 남성 성가대에서 나팔을 불었어. 오랫동안 나팔을 불어서는 안되지." 이런 몇몇 가지를 지적한 다음, 타루는 왜 캉은 가장 뻔한 자신의 이익에 상반되는 성가 대에 들어갔으며, 주일 행렬에 자기의 생명을 걸도록 그를 이끈 깊은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던졌다. 이어서 타루는 자기의 창문과 마주보고 있는 발코니에서 가끔 일어나는 광경에 좋은 인상 을 받은 듯했다. 사실 그의 방은 좁은 골목으로 나 있었는데, 벽 밑의 그늘에서 고양이들이 낮잠을 자고 잇었다. 그러나 매일 점심을 먹은 후 도시 전체가 더위 속에서 꾸벅거리며 조 는 시간이면 길 건너편 발코니 위에 자그마한 노인이 나타난다. 빗질을 얌전히 한 흰머리에 군복 같은 옷을 입고 단정하고 꼿꼿한 그 노인은 근엄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비야, 나비야." 하고 고양이들을 부른다. 아직 몸은 움직이지도 않은 채 졸려서 뿌옇게 된 눈을 치 켜뜬다. 노인은 거리에다가 종이쪽지를 찢어서 뿌린다. 그러면 고양이들은 그 흰나비처럼 보 이는 종이에 끌려서 맨 마지막 종이 조각들을 향해, 주춤거리면서도 한 발을 내밀며 길 한 복판으로 걸어나온다. 그러면 그 작은 노인은 고양이 위에다가 힘껏 가래침을 탁 뱉고는 가 래침이 목표물에 맞으면 그는 웃어대는 것이었다. 결국 타루는 그 도시의 외관, 경기, 심지어는 쾌락까지도 상거래의 필요에 의해서 좌우되 고 있는 듯이 보이는 그 상업도시로서의 성격에 완전히 매혹된 모양이었다. 그 특이성(이것 은 그 수첩 속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다)은 타루의 칭찬의 대상이었고, 그의 찬사로 가득 찬 고찰 중의 하나는 '마침내!'라는 감탄문으로 끝나 있기까지 했다. 그것은 그 시기에 여행 자들의 기록이 개인적인 성격을 띤 유일한 구절이었다. 그 말의 뜻과 성실성을 판단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죽은 쥐 한 마리의 발견이 호텔의 회계원으로 하여금 장부의 한 줄을 잘못 적게 했다는 것을 자세하게 기록한 다음에, 타루는 여느 때보다 좀 굵은 글씨로 다음과 같 이 덧붙여 놓았다. <물음 -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답 - 시간이 길 다는 것을 느낄 것. 방법 - 치과 병원 대합실의 불편한 의자에 앉아서 한나절을 보낼 것. 일요일 오후를 자기 방 밖의 발코니에서 보낼 것.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하는 강연을 들을 것. 기장 길고 가장 불편한 기차 여정을 골라서, 물론 서서 여행할 것. 극장 매표구 앞 에 줄을 지은 뒤에 서서 기다리다가 표는 사지 말 것 등등...> 그러나 그 언어 혹은 사색의 탈선에 뒤이어서 수첩에는 우리들 도시의 전차, 그 조각배 같은 형태, 그것들의 빛깔, 시종 일관한 불결함에 대한 자세한 묘사로 시작해서, 아무 설명도 될 수 없는 '그것은 주목할 만 한 일이다'라는 구절로 그의 관찰이 끝난 글이 적혀 있었다. 어쨌든 쥐 사건에 대해서 타루가 적어놓은 것은 다음과 같다. <오늘 맞은편 집의 작은 늙은이는 실망했다. 고양이들이 없어졌다. 거리에서 수없이 발견 되는 죽은 쥐들에게서 자극을 받고, 고양이들은 정말 사라져버렸다. 내가 보기에 고양이들이 죽은 쥐들을 먹는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내 집의 고양이들이 그것을 싫어하던 생각이 난다. 여전히 그놈들은 지하실에서 달음질치고 있을 테니, 그 노인은 실망하고 있는 것이다. 빗질 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풀이 좀 죽은 듯하다. 어딘지 불안하게 보인다. 잠시 후에 그는 들 어가버렸다. 그러나 다시 한번 허공에다 가래침을 뱉았다.> <시내에서 오늘 전차 한 대가 가다가 멈췄다. 어떻게 거기에 기어 들어갔는지 모르지만 쥐 한 마리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부인들이 두어 명 내려버렸다. 사람들은 쥐를 밖으로 내던졌다. 전차는 다시 떠났다.> <호텔에서 야경원이 - 그는 믿음직한 사람이다 - 자기는 그 모든 쥐들로 해서 어떤 불행 한 일이 생기리라고 짐작한다고 내게 말했다. "쥐들이 배에서 사라질 때..." 나는 그에게, 배 에서는 그런 일이 있는 것이 사실이나 도회지에서 그런 일이 증명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확신은 움직일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당신 생각으로는 우리 가 눈앞에 두고 있는 불행은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 그는 모른다는 것이었다. 불행이라는 것 을 예측하기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진이 일어나 불행하게 되더라도 자기는 놀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것도 가능하다고 인정했더니, 그것이 불안하지 않느냐 고 내게 물었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이렇게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것은 마음의 평화를 얻는 일이지요." 그는 나를 완전히 이해했다.> <호텔 식당에 아주 재미있는 한 가족이 아버지는 아주 말랐는데 시꺼먼 옷을 입고 빳빳 한 칼라를 달고 있었다. 머리 한가운데는 벗어지고, 양쪽에 백발이 한움큼씩 있다. 작은 눈은 둥글고 엄하게 보였 고, 코는 홀쭉하며, 입은 한일자로 다물고 있는 그런 모습이 마치 길을 잘 들인 올빼미 같은 인상을 준다. 그는 언제나 앞장서서 식당 문 앞에 나타나서, 비켜서고는 까만 생쥐처럼 차린 자기 아내를 통과시키고, 다음에 재주가 많은 개처럼 옷을 입혀놓은 어린 아들과 딸을 뒤에 끌고 들어온다. 자기 식탁에 가서 그는 아내가 앉기를 기다렸다가 자기도 앉는다. 그러면 그 두 강아지들도 마침내 각기 의자에 새들처럼 걸터앉을 수 있다. 그는 아내와 애들에게도 존 댓말을 하는데 아내에게는 예의바르게 핀잔을 주고 자식들에게는 냉랭한 잔소리를 한다. "니콜, 그대는 너무 밉살스럽군요." 그러면 어린 딸아이는 눈물을 글썽거린다.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 어린 아이놈이 쥐 이야기를 듣고는 야단 법석을 떨었다. 그는 식탁 앞에서 한마디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식사할 때 쥐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필리프, 앞으로 그런 말 해서는 안돼요." "아버지 말씀이 옳아." 까만 생쥐가 말한다. 두 강아지들은 밥그릇에 코를 박았고, 올빼미 씨는 별로 아무 뜻도 없는 고갯짓으로 감사 하다는 시늉을 했다.> <그런 훌륭한 본보기도 있기는 했지만, 시내에서는 쥐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신문도 거 기에 휩쓸렸다. 지방 소식란은 여느 때는 다채로웠던 것이 이제는 시청에 대한 비난 기사로 완전히 지면이 꽉 차게 되었다. '우리 시회 의원들은 쥐 시체들이 야기시킬지도 모를 위험 을 생각해본 일이 있는가?' 호텔 지배인은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 한 난처해서 그러는 것이다. 점잖은 호텔 엘리베이터 속에서 쥐가 발견된다는 사실이 그에 게는 말도 안 되는 것이다. 그를 위로하려고 나는 그에게 "그러나 모두들 그 지경인걸요."라 고 말했다. "바로 그 말씀입니다." 그는 나에게 대답했다. "우리가 이제는 남들처럼 되었으니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차차 불안을 느끼게 된 그 돌발적인 고열의 첫 케이스들을 나에게 말해준 사 람이 바로 그 지배인이다. 자기네 호텔의 하녀 하나가 그 열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전염성은 아닙니다." 이렇게 그는 황급히 밝혔다. 나는 그에게 그런 것은 피장파장이라고 말했다. "아! 알겠습니다. 선생님은 제 생각과 같군요. 선생님은 운명론자예요." 나는 그 비슷한 말을 꺼낸 일도 없으며, 게다가 나는 운명론자가 아니다. 나는 그에게 그 렇지 않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 무렵부터 타루의 수첩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미 불안의 대상이 되어 있는 원인불명의 열병에 대해서 좀 자세하게 말해주고 있다. 그 작은 노인은 쥐가 자취를 감추게 되자 마침 내 고양이들을 다시 보게 되었고, 그 가래침 사격을 꾸준히 되풀이하게 된 것을 특기하면서, 타루는 그 열병에 걸린 환자의 수가 이미 10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고, 그 대부분이 사망했 다는 것을 덧붙이고 있었다. 하나의 참고 자료가 된다는 구실로, 타루가 묘사한 의사 리외의 모습을 여기에 다시 적어 두어도 괜찮으리라. 필자의 판단으로는 제법 성실하게 본 표현이다. <서른 다섯 살쯤 돼 보인다. 중키. 어깨가 떡 벌어졌다. 직사각형의 얼굴, 검고 곧은 두 눈. 그러나 양쪽 턱뼈는 불룩하게 두드러져 있다. 콧대가 곧게 서 있다. 아주 짧게 깎은 검 은 머리. 대개는 두툼한 입술을 다물고 있는 활처럼 흰 입. 어딘지 시칠리아 농부 같은 인상 을 주는데 그것은 햇볕에 그을은 피부와 검은 털, 늘 짙은 그러나 그에게는 잘 어울리는 양 복 빛깔 때문이다. 그는 걸음이 빠르다. 그는 일정한 속도로 보도를 따라 내려간다. 그러나 세 번이면 두 번 은 껑충 뛰어서 반대편 보도로 올라간다. 그는 자동차의 핸들을 잡고도 방심하기가 일쑤여 서, 흔히 길모퉁이를 꾸부러지고 난 후인데도 방향 신호기를 올린 채로 있다. 모자는 안 쓰 고, 산전 수전 다 겪은 태도다.> 타루의 숫자는 정확했다. 의사 리외는 그것에 대해서 좀 알고 있었다. 수위의 시체를 격리 시킨 다음, 그는 리샤르에게 사타구니에 생기는 열병에 관해서 물어보기 위하여 전화를 걸 었다. "전혀 모르겠다는데요."라고 리샤르가 대답했다. "둘이 죽었는데, 하나는 48시간만에 죽었 고 하나는 사흘만에 죽었어요. 나중 사람은 그날 아침만 해도 회복기에 들어간 것 같아서 가만 놓아두었었죠." "또 다른 환자가 있거든 알려주세요." 리외가 말했다. 그는 다시 몇몇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조사해본 결과 그는 며칠 동안에 약 20 여 건의 유사 증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의 전부가 죽었다. 그래서 그는 오랑 시 의사회의 간사인 리샤르에게 새로운 환자의 격리를 요구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어떻게 할 방도가 없습니다." 리샤르가 말했다. "도청의 조치가 필요합니다. 그건 그렇고, 전염성이라는 말은 어디서 들었습니까?" "어디서 들은 것은 아니지만 나타나는 증세가 불안스럽습니다." 그래도 리샤르는 '자기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단정하고 있었다. 자기로서 할 수 있는 모 든 것은 지사에게 그 말을 전할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고 있는 동안에 날시는 악화되어가고 있었다. 수위가 죽은 다 음날은 짙은 안개가 하늘을 뒤덮었다. 억수같은 소나기가 이 도시에 퍼붓더니 그 갑작스러 운 폭우에 이어서 푹푹 찌는 더위가 계속되었다. 바다조차도 그 짙은 푸른 빛을 잃고, 안개 가 짙은 하늘 아래서 눈이 아프도록 은빛 또는 무쇠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이러한 봄의 습기 섞인 더위보다는 여름의 혹서가 더 낫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언덕 위에서 나선계단식 으로 건설된, 바다와는 거의 등지고 있는 이 도시는 우울한 혼수상태가 지배하고 있었다. 개 흙을 바른 기나긴 벽의 한복판에서, 먼지가 첩첩이 쌓인 진열장이 있는 거리거리에서, 더러 운 황색의 전차 속에서, 사람들은 왠지 하늘 속에 감금당한 죄수 같은 느낌을 갖는 것이었 다. 단지 리외의 그 늙은 환자만은 천식이 떨어져서 그러한 날씨를 즐기고 있었다. "푹푹 찌는군. 기관지에는 좋은 날씨야." 사실 푹푹 찌고 있었다. 그 열병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았다. 도시 전체가 열병에 걸려 있었으며, 그것은 적어도 코타르의 자살미수 현장검증에 입회하기 위해서 페데르브 가에 갔 던 날 아침에 리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따라다니던 인상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인상이 그에게는 부당한 것같이 보였다. 그는 그러한 것을 신경과민과 자기가 부심하고 있는 여러 가지 선입견 탓으로 돌리고 우선 머릿속이나 정리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을 시인했다. 그가 갔을 때 경감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랑이 층계참에서 기다리고 있기에 방문을 열어 놓은 채 둘이서 그랑의 방으로 들어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이 시청 직원은 방을 두 개 쓰고 있었는데 가구가 대단히 단출했다.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두어 권의 사전이 꽂혀 있는 책장 과 칠판 하나뿐이었는데, 그 위에는 반쯤 지워졌으나 아직 '꽃이 풍성한 오솔길들'이라는 말 이 씌어 있었다. 그랑의 말에 의하면, 코타르는 밤에 잘 잤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침에 깨 어나면서부터 골치가 아프다면서 아무런 반응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랑은 피곤 하고 신경이 예민해진 듯이 보였고 방안을 이리저리 거닐다가 탁자 위에 있는 사본이 가득 차 있는 커다란 서류철을 펼쳤다 덮었다 했다. 그러면서도 의사에게 자기는 코타르를 잘 모르지만 계산은 좀 있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코타르는 좀 괴상한 사람이고 그랑과의 관계는 오랫동안 계단에서 인사나 주고받는데 그쳤 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꼭 두 번 그 사람하고 이야기를 해봤어요. 며칠 전에 나는 집에 가지고 오는 분필 통을 층계참에서 엎어버렸지요. 그때 코타르가 층계참으로 나오더니 줍는 것을 도와주었어 요. 그는 그 가지각색의 분필을 무엇에 쓰느냐고 내게 물어보더군요." 그래서 그랑은 라틴어를 다시 해볼까 한다고 설명해주었는데, 중학교를 마친 후론 라틴어 가 알쏭달쏭해졌다는 것이다. "그럼요." 그는 의사에게 말했다. "프랑스어의 뜻을 더 정확히 알려면 라틴어를 공부하는 게 좋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요." 그는 칠판에다가 라틴어를 썼다. 그는 동사의 변화와 활용에 따라 변화하는 부분은 푸른 분필로 반복해서 써봤다는 것이다. "코타르가 잘 알아들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그는 흥미가 생긴 모양이어서, 붉은 분필 을 하나 달라고 하더군요. 나는 좀 놀랐지만, 어쨌든... 그런데 그것이 그런 일에 사용될 줄 은 나는 예측하지도 못했어요." 리외는 두 번째 대화는 어떤 것이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경감이 서기를 데리고 와서, 우 선 그랑의 진술을 듣겠다고 말했다. 의사는 그랑이 코타르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그를 ' 그 절망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에 주의가 끌렸다. 심지어 어떤 때는 '숙명적인 결론'이라는 표현도 썼다. 그들은 자살의 동기에 관해 토론했 는데, 그랑은 어휘의 선택에 조바심을 냈다. 마침내 '마음의 슬픔'이라는 말로 낙착되었다. 경감은 코타르의 태도에서 '그의 결심'이라고 자기가 이름붙인 것에 대해서 예측할 수 있 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느냐고 물었다. "어제 내 방문들 두드리더니," 그랑이 말했다. "성냥을 빌려달라더군요. 그래서 통째로 주 었지요. 그는 이웃간이 돼서... 운운하며 미안해하더군요. 그러고는 꼭 돌려주겠노라고 다짐 을 하길래, 나는 괜찮다고 말했죠." 경감은 코타르가 좀 수상해 보이지 않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수상하게 보인 점은 자꾸만 말을 걸려고 하는 눈치였어요. 그러나 나는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었지요." 그랑은 리외를 돌아다보며 당황한 태도로 덧붙였다. "아주 사소한 일이죠." 경감은 어쨌든 환자를 보자고 했다. 그러나 리외는 이 방문에 대해서 코타르로 하여금 마 음의 준비를 시켜두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리외가 방에 들어갔을 때, 코타르는 뿌연 회색 프란넬 잠옷만 입은 채로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서 불안한 표정으로 문쪽을 보고 있었다. "경찰이군요, 네?" "그렇소." 리외가 말했다. "하지만 염려할 것 없소. 두서너 가지 형식적인 심문만 끝나면 더 이상 귀찮은 일은 없을거요." 그러나 코타르는 그런 것 다 소용없는 짓이라며, 자기는 경찰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대답 했다. 리외는 화를 냈다. "나도 경찰은 싫소. 문제는 그들의 물음에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대답하는 것이오. 그래 야 한 번만으로 끝나니 말이오. 코타르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리외는 문쪽을 향했다. 그러나 그 작은 사나이는 다시 리 외를 부르고 리외가 침대 가까이 오자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환자를, 그것도 목매단 사람을 건드리지는 않겠죠? 그렇죠, 선생님?" 리외는 잠시 그를 보고 있다가 이윽고 그런 종류의 걱정은 문제도 되지 않는 것이고, 또 한 자기는 환자를 보호하려고 와 있는 것이라고 그를 안심시켰다. 코타르는 좀 마음을 놓는 듯싶었다. 리외는 경감을 들어오게 했다. 코타르에게 그랑이 한 증언을 읽어주고, 그에게 그의 행위의 동기를 밝힐 수 있느냐고 물 었다. 그는 경감을 보지도 않고 "마음의 슬픔, 다만 그것뿐이예요."라고만 대답했다. 경감은 또 그런 짓을 다시 할 것이냐고 추궁했다. 코타르는 흥분해서 그럴 생각은 없고 다만 가만 히 놔두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주의해두겠지만." 경감이 좀 화난 투로 말했다. "바로 지금 사람들을 귀찮게 하는 것은 당신이오." 그러나 리외의 눈짓을 보고 그쯤 해두었다. "글쎄말이죠." 방에서 나오면서 경감은 한숨을 쉬었다. "그 열병이 생긴 후로는 할 일이 태산 같은데..." 그는 의사에게 혹시 사태가 중대한 것이냐고 물었다. 리외는 전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날씨 때문입니다. 그뿐이죠." 경감이 결론을 내렸다. 아마도 날씨 때문일지도 몰랐다. 하루 해가 높아짐에 따라서 모든 것이 손에 쩍쩍 들러붙 는 것 같았다. 리외는 한 집 한 집 왕진할 때마다 불안이 커지는 것을 느꼈다. 바로 그날 저 녁, 교외에 있는 그 늙은 환자의 이웃사람 하나가 사타구니를 누르고 헛소리를 하면서 구역 질을 했다. 램프샘의 응어리들은 수위의 것보다 더 컸다. 응어리 중의 하나는 곪기 시작하고 있었고, 이내 썩은 과일처럼 짝 갈라졌다. 자기 집에 돌아온 리외는 도청의 의약품 저장소에 전화를 걸었다. 그날의 임상일지에는 다만 '부정적인 회답'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그런데 이 미 비슷한 증세 때문에 왕진을 청하러온 사람들이 있었다. 곪은 것을 째야만 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메스를 두 번 놀려서 열십자로 째니, 응어리에서는 피가 섞인 고름이 흘러 나왔다. 환자들은 피투성이가 되었고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러나 배와 다리에 종기가 생기고 어떤 림프샘은 고름이 멎고 붓기 시작했다. 대개의 경우 환자는 지독한 악취를 풍기며 죽었 다. 쥐 사건에 대해 그처럼 떠들어대던 신문이 이제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것은 쥐들은 눈 에 띄는 거리에서 죽었고, 사람들은 방안에서 죽었으니 당연하다고나 할까. 어쨌든 신문이라 는 것들은 거리에서 일어나는 일에만 관심을 둔다. 그러나 도청과 시청은 불안을 느끼기 시 작하고 있었다. 의사들이 제각기 두서너 건을 알고 있을 때만 해도 누구 하나 움직이려 들 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합계만 내면 충분했다. 합계를 내보니 놀랄 만했다. 불과 며칠 동안 에 사망 건수가 곱절이 되었고, 그 해괴한 병을 다루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틀림없는 유행병이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바로 그 무렵에, 리외와 같은 의사지만 훨씬 나이가 많은 카 스텔이라는 사람이 리외를 만나러 왔다. "물론" 그는 리외에게 말했다. "당신이 무엇인지 알겠죠, 리외?" "분석 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결과를 알지. 그러니 분석할 필요도 없단 말이오. 나는 중국에서 얼마 동안 지냈고 20년 전에 파리에서도 몇몇 경우를 겪었소. 그렇다고 그것에다 감히 병명을 당장에 붙일 수 없었소. 여론이란 신성한 것이오. 경거망동은 금물이오. 특히 중요한 문제죠. 게다가 동료의 한 사람의 말처럼, '그럴 리가 있나. 그것이 서양에서 없어졌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데 ' 라는 거요. 과연 그렇소.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소. 죽은 사람만을 제외하곤 말이 오. 자, 리외, 당신도 이것이 무엇인지 나만큼 알고 있을 거요." 리외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멀리 만 끝에서 굷어 오그라진 낭떠러지의 바위 등성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푸르기는 하지만 탁한 광채를 띄고 있는 하늘에서 정오가 훨씬 지나감에 따라서 점점 그 광채는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그렇죠, 카스텔. 전혀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페스트 같습니다." 리외가 말했 다. 카스텔이 일어서서 문쪽으로 갔다. "사람들이 우리 보고 뭐라고 할지 알고 있겠죠." 그 늙은 의사가 말했다. "기후가 온화한 나라에서는 얼마 전에 없어졌소'라고 그럴 거요." "없어지다니 무슨 뜻입니까?" 어깨를 으쓱 올리면서 리외가 되물었다. "그렇소. 그러니 잊지 마시오. 파리에서도 약 20년 전 일이니까요." "좋습니다. 그때보다는 더 심하지 않기나 바랍시다. 그러나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페스트'라는 말이 이제 막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베르나르 리외가 그의 사무 실 창가에 앉아 있는 데까지 이 이야기가 진행되었는데 필자가 그 의사의 의아심과 놀라움 을 해명하도록 허락해주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뉘앙스를 지닌 채 그가 보인 반응 은 우리 대부분의 시민들의 반응이기 때문이다. 사실 재난이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로 닥쳐 오는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머리 위에 떨어질 때에는 여간해서 믿기 어려운 것이 된다. 이 세상에는 전쟁 만큼이나 페스트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페스트나 전쟁이 일어났을 때, 사 람들은 언제나 아무 대책이 없었다. 따라서 그의 망설임도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 또한 그가 불안과 신념 사이에서 엉거주춤하고 있었던 것도 그렇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전쟁이 일어 나려고 하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오래 가지는 않겠지.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야." 전쟁이라는 것이 확실히 너무나 어리석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래 가지 말란 법은 없다. 어리석은 일이 항상 악착같다. 만약 사람들이 늘 자기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시민들은 모든 사람들처럼 자신들만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휴머니스트들이었다. 즉 그들은 재난을 믿지 않고 있었다. 재난 은 인간의 한계에 맞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난이 비현실적인 것이고 곧 지나가 버리는 악몽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재난은 항상 사라져버리지는 않는다. 악몽에서 악몽 으로 이어지며 사라져버리는 것은 인간들이고, 첫째로 휴머니스트들이 사라져버린다. 왜냐하 면 그들은 제 몸을 보살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시민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못이 많 아서가 아니다. 그들은 겸손할 줄을 몰랐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것이 그들에게 는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재난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추측하 고 있던 것이다. 그들은 사업을 계속했고, 여행 떠날 준비를 했고, 제각기 의견을 말하고 있 었다. 미래라든가, 여행이라든가, 토론 같은 것을 말살하는 페스트를 어떻게 그들이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자유롭다고 믿고 있었다. 재난이 있는 한 아무도 자유로울 수는 없 을 것이다. 그래서 의사 리외가 자기 친구에게서 여기저기에서 발생한 여러 명의 환자들이 아무 예고 도 없이 방금 페스트로 죽었다는 것을 듣고 나서도 위험은 그에게는 여전히 비현실적인 것 으로 여겨졌다. 다만 의사이기 때문에 고통에 대한 어떤 개념을 품게 되고, 상상력도 좀더 풍부한 법이다. 변함없는 거리를 창문 밖으로 내다보면서, 의사는 이른바 미래에 대한 가벼 운 구토증이 마음속에 생기는 것을 느꼈지만 대수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 병에 관해서 알고 있는 바를 머릿속에서 종합해보려고 애썼다. 숫자들이 그의 기억 속에서 뱅뱅 돌았다. 그리고 그는 역사상으로 알려진 약 30회에 걸친 대대적인 페스트가 약 1억의 인명을 빼앗아 갔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1억의 사망자란 무엇일까? 전쟁을 겪을 때, 하나의 사망자 가 지닌 의미를 아는 일은 드물다. 그리고 인간의 죽음이란 죽는 것을 누가 보았을 경우에 만 의미를 갖는 것이므로 긴 역사를 통하여 내려오면서 뿌려진 1억의 시체라는 것은 상상 속의 한 줄기 연기에 불과한 것이다. 의사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일어난 페스트의 기억을 더 듬었다. 프로코프에 의하면 하루 동안에 1만 명의 희생자가 났다는 것이다. 1만 명의 희생자 라면 커다란 영화관 관중의 다섯 배다.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알기 쉬울 것이다. 다섯 군데 극장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모아서 그들을 시가지의 광장으로 끌고 가서, 무더기로 그들을 죽여버린다면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 이름 모를 시체더미 위에 낯익은 사람들의 얼굴을 올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실현 불가능한 이야기일 뿐 만 아니라, 누가 1만 명씩이나 남의 얼굴을 알고 있단 말인가? 게다가 프로코프 같은 사람 들은 수를 헤아릴 줄 몰랐다. 분명한 일이다. 광둥에서는 50년 전에, 4만 마리의 쥐가 페스 트로 죽고 난 뒤에 주민들이 그 재앙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1871년에는 쥐를 헤아리는 방법이 없었다. 모두들 대충 계산했기 때문에 오차가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 도 쥐 한 마리의 길이를 30센티미터라고 한다면, 4만 마리를 잇대어 늘어놓고... 그러나 의사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돼가는 대로 보고만 있었으나 그래서는 안될 것 같았다. 몇 가지 증세만 가지고 전염병이라고는 할 수 없으니, 조심하기만 하면 충분하리라. 마비와 쇠약, 눈의 충혈, 지저분한 입, 두통, 가래톳, 심한 갈증, 정신착란, 전신반점, 내부적 인 장애, 그리고 마침내는..., 자기가 알고 있는 그런 것들로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어떤 구절이 리외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증세가 열거되어 있는 의학개론서 맨 마 지막에 적혀 있는 구절이었다. '맥박이 미약해지고, 하찮은 동작을 하다가 숨이 끊어진다' 그 렇다. 그런 증세 끝에 마침내는, 실오라기에 매달리게 되고, 그 사 분의 삼 정도의 사람들은 - 이것은 정확한 숫자였다 - 자기들의 죽음을 재촉하는 알 수 없는 동작을 하려고 제법 애 쓰는 것이었다. 의사는 여전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유리창 저편에는 신선한 하늘이 있었고, 이쪽편에 는 페스트란 말이 아직도 방안에서 쨍쨍 울리고 있었다. 그 말에는 과학이 거기에 적용시키 려고 하는 사실만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맘때면 적당하게 활기를 띠어 요란하 기보다는 차라리 윙윙거리며, 만약 인간이 동시에 행복과 침울을 누릴 수 있다면 결국 행복 하다 할 수 있는, 그 누렇고 뿌연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보통이 아닌 환상의 행렬이 거기 에는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도 평화롭고 그렇게도 무관심한 평온 상태는 그 옛날의 재난들 을 거의 힘도 안 들이고 없애버리고 있었다. 페스트에 휩쓸려서 새 한 마리 볼 수 없게 된 아테네. 말없는 빈사 상태의 환자가 들끓는 중국의 도시들. 썩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시체들 을 구덩이 속에 처넣고 있는 마르세이유의 복역수들. 페스트의 무서운 바람을 막기 위한 프 로방스 지방의 거대한 토벽의 건축. 자파와 그 도시의 끔찍스러운 거지들. 콘스탄티노플 병 원의 땅에 납작하게 깔려 있는 축축하고 썩어가는 침대들. 음울한 페스트와 창궐 기간중에 볼 수 있는 갈고랑이로 끌려나오는 환자들과 마스크를 한 의사들의 대혼란. 밀라노의 공동 묘지에서 있었던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간의 성교. 공포에 질린 런던의 시체 운반자들. 그리 고 도처에서 끊임없는 아우성으로 가득찬 낮과 밤. 아니다. 그 모든 것이 그 한나절의 평화 를 말소시켜버리기에는 미력했었다. 유리창 너머에서 보이지 않지만 전차의 종소리가 문득 울려서 순식간에 그 잔인성과 괴로움을 반증해주었다. 바다만은 바둑무늬처럼 맞닿아 있는 충충한 건물들이 끝나는 곳에서 불안한 것과 결코 안정되지 못한 것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 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의사 리외는 만 쪽을 바라보면서, 뤼크레스가 말한 바 있는, 페스트에 휩쓸린 아테네 사람들이 바다 앞에 세워놓았다는 그 화장터를 생각했다. 사람들은 거기에 시체를 옮겨놓았는데, 장소가 비좁아서 생존자들은 자기들과 가까운 사람들을 거기 에 놓으려고 서로 횃불을 가지고 때리고 싸웠으며, 자기들의 시체를 버리고 가기 싫어서 피 를 흘리며 다투었다는 것이다. 고요하고 어둠침침한 바다 앞에서 시뻘겋게 타오르는 화장터 와, 불꽃이 반짝이는 어둠 속에서의 횃불 싸움, 그리고 침착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하늘을 향 해서 솟아오르는 독기에 찬 짙은 연기, 이러한 것들을 누구나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두려 운 것은... 그러나 이러한 망상이 이성 앞에서는 지속되지 못했다. '페스트'라는 말이 입 밖에 나온 것도 사실이고, 바로 그 순간에도 재난이 두서너 명의 희생자를 괴롭히고 쓰러뜨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로 멈추어버릴 수도 있는 일이다. 해야 할 일은, 인정해 야 할 것은 명백히 인정하고 결국에는 쓸데없는 공포감을 쫓아버리고, 적당한 대책을 강구 하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페스트는 확산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페스트라고 생각되지 않았던 탓이거나 또는 그렇게 생각되었더라도 잘못이었을 것이니 말이다. 만약 페스트가 멎 는다면 그것은 가장 가능성 있는 일이지만 모든 일은 잘 될 것이다. 반대의 경우에는 페스 트가 어떤 것인지를, 그리고 그것에 먼저 대비하고 그것과 싸워서 이기는 방법이 없는가를 사람들은 알게 될 것이다. 의사는 창문을 열었다. 도시의 소움이 쏟아지듯 크게 들려왔다. 이웃에 있는 공장에서 짤 막하게 반복되는 기계톱 소리가 들려왔다. 리외는 기운을 냈다. 매일매일의 노동, 거기에야 말로 확실성이 있었다. 나머지는 무의미한 실오라기나 동작에 얽매어 있어, 거기에서 어물거 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자기의 직책을 충실히 해 나가는 일이다. 의사 리외가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조제프 그랑의 방문을 알려왔다. 시청 직원으로 그가 맡은 일이 여러 가지이기는 하지만, 그는 정기적으로 통계국이라든가 호적 사무를 보 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사망자의 집계를 내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일을 좋아하는 성 격이어서 통계사본 한 장을 리외에게 갖다주기로 했던 것이다. 의사는 그랑이 자기 이웃인 코타르와 함께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 시 직원은 종이 한 장을 쥐고 흔들었다. "숫자가 불어나고 있어요, 선생님." 이렇게 그는 말을 꺼냈다. "48시간 동안에 11명꼴로 죽어가고 있 습니다." 리외는 코타르에게 인사를 하고 좀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그랑은 코타르가 의사에게 감사 를 드리고, 자기 때문에 폐가 된 것을 사죄하기를 고집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리외는 통계표 를 보고 있었다. "자," 리외가 말했다. "이제는 아마도 이 질병을 제 이름대로 불러야만 될 것 같군요. 여 태까지 우리는 발버둥만 치고 있었어요. 어쨌든 나하고 같이 나가시죠. 연구소에 가는 길이 니까요." "네, 그러지요." 그랑이 의사 뒤를 따라서 계단을 내려오면서 말했다. "무엇이고간에 제 이름으로 불러야죠. 대체 그 병명이 뭡니까?"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설사 아시더라도 이롭지 못할 것이니까요." "거 보세요." 그 서기는 웃었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들은 사열식광장으로 향했다. 코타르는 내내 말이 없었다. 길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 지방의 그 짧은 황혼은 벌써 밤에 밀려서 물러 나갔고, 샛별이 아직도 선명하게 보이는 수평선에 나타나고 있었다. 잠시 후, 거리거리에 높다랗게 가로등이 켜져서 온 하늘이 어우러진 듯하고,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소리가 한 층 높아진 듯했다. "용서하십시오." 사열식광장의 한모퉁이에서 그랑이 말했다. "전차를 타야겠습니다. 내 저 녁 시간은 신성 불가침하답니다. 우리 고향에서 말하듯이, '결코 다음날로 미루지 말고...'이 니까요." 리외는 이미 그랑의 그런 버릇을 알고 있었다. 몽텔리마 출생인 그는 자기 고향의 격언들 을 끄집어내는 버릇이 있었고, 거기에다 '꿈같은 날씨'라든가, '선경같은 불빛들'과 같이 아 무 데서도 쓰지 않는 저속한 문구들을 덧붙이는 버릇이 있었다. "아!" 코타르가 말했다. "정말 그래요. 저녁 먹은 다음에는 아무도 저 사람을 위해서 일한 다고 말했다. "아!" 하고 리외는 마지못해서 말했다. "그래 잘되어가나요?" "일을 한 지 수년이 되니까 아무래도 진척은 되지요. 그래도 어떤 의미에서는 전혀 발전 이 없기도 해요." "아니, 결국 무슨 일인데요?" 리외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그랑은 자기의 커다란 두 귀까지 둥근 모자를 다시 눌러 쓰면서 빠른 말투로 말했다. 그 래서 리외는 그가 개성이 강하다는 것을 아주 막연하게나마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 서기는 이미 그들에게서 멀어졌으며, 마르느 가의 무화과나무 밑을 총총걸음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연구소의 문턱에서 코타르는 한번 찾아보고 말씀을 들어보았으면 한다고 리외에게 말했다.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통계표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리외는, 그에게 진찰 시간에 오 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다시 생각을 바꾸어서 자기가 그 이튿날 그 동네에 갈 일이 있으니 오후 늦게 들르겠다고 말했다. 코타르와 헤어지면서 의사는 자기가 그랑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페스트 의 한복판에 있는 그랑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것도 대단치 않을지 모르는 페스트가 아니라, 역사에 남는 대대적인 페스트의 한복판에 있는 그랑을 말이다. '그런 경우에도, 모면할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지' 그는 페스트가 허약한 체질을 가진 사람은 가만 두고, 특히 건장 한 체질을 가진 사람을 쓰러뜨린다는 기록을 읽은 생각이 났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을 계속 한 끝에 리외는 그랑에게서 어떤 신비스러운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첫눈에 조제프 그랑은 사실 그 행동거지가 시청의 하급 서기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후리후리하고 마른 몸에다, 옷이 커야 오래 입는다는 착각에선지 언제나 지나치게 큰 것을 골라서 산 옷을 너펄너펄 걸치고 있었다. 아래 잇몸에는 대부분 이가 그대로 있었지만, 그대 신 위의 잇몸에는 하나도 없었다. 웃을 때 윗 입술이 유난히 말려 올라가서 마치 무슨 유령 의 입 같았다. 이런 모습에 신학교 학생 같은 몸가짐이며, 벽에 착 붙어 걸어가서 문안으로 살짝 들어가버리는 솜씨며, 지하실과 연기 냄새를 풍기고 무의미한 온갖 표정을 짓는 그런 것들을 보면, 시내의 목욕탕 요금을 검토한다든가, 젊은 상관에게 줄 오물 청소의 새 세법에 관한 보고 자료를 수집하는 사람처럼 보여, 사무 책상 앞이 아닌 다른 곳에서 그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거의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시인하게 되리라. 아무 선입견 없는 생각으로 보 더라도, 그는 일당 62프랑 30상팀을 받는 시청의 임시 보조 서기의, 화려하지 못하면서도 불 가결한 직책을 수행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듯이 보였다. 그 일당 이야기는 그랑의 말인데, 사실 사령장의 '자격'란에 기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22 년 전에 대학을 졸업하고 돈이 없어서 더 이상 공부는 할 수 없고 해서 그 직책을 수락했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 단시일내에 '정식 발령'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암시로 그에게 희망을 갖 도록 만들었다는 것도 그 자신의 이야기다. 다만 우리의 시 행정상의 여러 가지 미묘한 문 제를 처리하는 데 있어 얼마 동안 그의 능력을 시험해보자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틀림없 이 넉넉하게 살 수 있게 될 기안자 자리에 올라갈 수 있다는 확언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야심 때문에 움직이는 조제프 그랑은 아니라고 그는 우울한 미소를 띠면서 장담했다. 그러 나 정직한 방법으로 생활의 경제적인 문제를 보장 받는 전망, 그럼으로 해서 자기가 즐겨 하는 일에 유감없이 골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몹시 동경하는 것이다. 그가 자기에게 마련된 자리를 받아들였던 것은 바로 영예로운 이유에서였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어떤 이상에 대한 충실성에서였다. 그러나 임시직으로 일한 지 어느덧 오랜 시일이 되었다. 물가는 어처구니없는 비율로 올 라갔는데, 그랑의 봉급은 몇 차례에 걸쳐서 전반적인 인상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보잘것없었다. 그는 리외에게 그것을 하소연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문제를 생각하지 않았 다. 그랑의 특이한 점이랄까, 혹은 적어도 그의 특징의 하나가 바로 그런 데에 있었다. 사실 그는 떳떳하게 권리라고까지는 내세울 수 없지만, 적어도 그가 받은 확약을 주장할 수는 없 었다. 그러나 우선, 자기를 채용해준 국장은 오래전에 죽었고, 피채용자인 자기부터가 약속 을 받은 정확한 조항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어쨌든 무엇보다도 문제는 조제프 그랑은 자기 가 할말을 생각해낼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한 특징이야말로 리외의 눈에도 띄었듯이, 우리의 시민 그랑의 면모를 가장 잘 나타 내고 있는 바로 그 점이었다. 또 바로 그 점 때문에, 그가 생각하고 있는 요구서를 써보낸다 든가, 또는 경우에 따라서 필요한 운동을 한다든가 하는 일을 늘 망설이게 되는 것이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늘 확고한 자신이 없는 '권리'라는 말이라든가, 자기의 몫을 요구 하 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좀 당돌한 성격을 띠어서 자기가 차지하고 있는 직무의 그 겸손성 과 거의 양립할 수 없는 '약속'이라는 말 같은 것을 특히 사용해서는 안될 것같이 느낀다 는 것이었다. 한편 '호의', '운동', '감사' 같은 용어들은 자기의 인격적인 위엄과 양립할 수 없 다 고 생각되어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처럼 적합한 용어가 생각이 나지 않아, 우리들 의 그 시민은 나이가 지긋이 들 때까지 자기의 애매한 직책을 계속해왔던 것이다. 게다가 이것도 그가 늘 의사 리외에게 하는 말이었는데, 그는 어쨌든 자기의 재력에 따라서 아쉬운 것을 감당해 나가기에 충분하므로 뭐니뭐니해도 자기의 물질적인 생활은 보장되어 있다는 것을 습관에 의해서 알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시장이 즐겨 쓰는 말들 중의 하나에 대 해 정당성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시장은 우리 도시의 유력한 실업가인데, 그는 결국에는(그 리고 시장은 자기 이론의 온 중량을 지니고 있는 그 말에다 힘을 주었다), 지금까지 여태껏 배가 고파서 죽은 사람은 본 적이 없다고 강력히 단언했다. 어쨌든간에 사실 조제프 그랑이 영위하고 있었던 거의 회의적인 생활은, 마침내는 이런 계통의 모든 근심에서 그를 해방시 켜주었다. 그는 여전히 자기가 할말을 찾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생활은 모범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이 도시에서도 보기 드문, 항상 자기의 선한 감정에 대해서 용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속해 있었다. 자기에 관해서 실토한 극히 많지 않은 일이, 사실 오늘날 사람들이 감히 고백하지 못하는 선의와 정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친척이며, 2년에 한 번 씩 프랑스로 찾아가서 만나곤 하는 자기 조카들과 누이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시인하면서 도 조금도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그가 아직 젊었을 때 죽은 부모를 생각하면 서러워진다고 했다. 오후 5시쯤에 자기가 사는 동네의 어떤 종이 울리는 소리를 듣는 것이 무엇보다도 좋 다는 것을 시인했다. 그러나 그렇게도 단순한 감정을 표현하는 사소한 말에도 무척 애를 썼 다. 결국에는 그가 힘들어 하는 것이 그의 가장 큰 근심거리였다. "아! 선생님." 하고 그는 말했다. "마음 먹은 것을 시원하게 말할 수 있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는 리외를 만날 적마다 그런 말을 하곤 했다. 그날 저녁, 의사는 그 서기가 가는 것을 보고 문득 그랑이 하려던 말을 이해했다. 그는 아 마 책을 한 권, 그렇지 않으면 그와 비슷한 것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연구소까지 가서도 그 사실은 리외를 안심시키는 것이었다. 그 느낌이 어리석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명예로 운 습성에 열중하고 있는 겸손한 관리들을 볼 수 있는 그런 도시에 페스트가 퍼지리라고 믿 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페스트의 도가니 속에서 그러한 습성이 도사 리고 앉을 여유를 상상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그는 실제로 페스트는 우리 시민들 사이에서 는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튿날, 당치도 않다는 말을 들어가면서도 고집한 덕분으로 리외는 도청에 보건위원회 를 소집하는데 성공했다. "시민들이 불안해하는 것은 사실이죠." 리샤르가 시인했다. "게다가 모든 것이 쓸데없는 말 때문에 과장되고 있어요. 지사가 나보고 '웬만하면 빨 리 서두릅시다. 그러나 말이 안 나게 해야지요' 그러더군요. 어쨌든 지사도 공연히 들끓는 거라 고 속으로는 생각하고 있죠." 베르나르 리외는 군청으로 가려고 카스텔을 자기 차에 태웠다. 그가 리외에게 말했다. "군청에는 혈청이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까?" "압니다. 의약품 저장소에 전화를 해보았어요. 소장은 대경실색을 하더군요. 파리에서 가 져오도록 해야만 되겠어요."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미 전보는 쳤는데요." 리외가 대답했다. 지사는 친절했으나 안절부절 못했다. "시작합시다 여러분." 그가 말했다. "사태를 요약해서 말씀드릴까요?" 리샤르는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의사들도 사태는 알고 있었다. 다만 어떤 조치를 취할지를 알아내는 것이 문제였다. "문제는" 카스텔 노인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페스트냐 아니냐를 아는 일입니다." 두세 명의 의사들이 탄성을 올렸다. 딴 사람들은 주저하는 듯이 보였다. 지사는 펄쩍 뛰더 니 반사적으로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마치 그 어처구니없는 말이 복도로 새어나가는 것을 그 문이 잘 막고 있는가를 확인하려는 듯이 말이다. 리샤르가 자기 의견으로는 흥분에 빠져 서는 안된다고 단언했다. 문제는 사타구니에 나타나는 열병이며, 가설이라는 것은 과학에서 나 생활에서나 항상 위험한 것이라는 요지였다. 카스텔 노인은 그 누런 콧수염을 말없이 빨 고 있다가 그 맑은 눈을 리외에게로 치켜올렸다. 그러고는 호의에 가득 찬 눈길을 참석한 사람들에게 돌리고, 자기는 그것이 페스트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물론 공공연하게 인정이 되는 마당에는 무자비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단언했다. 그는 자기 동료 들이 꽁무니를 빼는 것도 사실은 그런 점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안 심하도록 페스트가 아니라고 인정하고도 싶었다. 지사는 흥분해서 어쨌든 그것은 좋은 연구 방법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중요한 것은" 하고 카스텔이 말했다. "연구 방법이 좋으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방법 이 무엇을 우리에게 생각게 하느냐입니다." 리외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의견을 물었다. "장티푸스와 같은 열병이지만, 가래톳과 구토증이 따르고 있습니다. 저는 가래톳 수술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으로 분석시험을 요청했는데, 거기에 대해서 연구소에서는 굵직 한 페스트 균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완전무결한 결과를 말씀드리면 그래도 그 균의 어떤 특수한 변화들이 과거의 기록과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리샤르는 그것이 주저의 여지를 허용한다고 강조하고, 적어도 수일 전부터 시작한 일련의 분석시험의 통계 결과를 기다릴 필요가 있다고도 말했다. "어떤 세균이" 하고 잠시 잠잠하던 끝에 리외가 말했다. "사흘 동안에 비장의 크기를 네 배로 만들고 장간막의 림프샘에 오렌지만한 크기와 죽처럼 밀도가 낮은 상태를 만들었다면 그야말로 주저해서는 안됩니다. 전염 지역은 점점 더 확대되어가고 있습니다. 병세가 전염하 고 있는 형편을 보아서는 만약 확대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면, 2개월 이내에 온 도시의 반수 이상이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것을 페스트라고 부르건 전염성 열병이 라고 부르건 그런 것은 거의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시민들의 반수가 죽는 것 을 막아내는 일입니다." 리샤르는, 무엇이고 어두운 면으로만 보아서는 안되며 게다가 자기 환자들의 가족이 아직 무사한 것을 보면 전염성도 확실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죽었습니다."라고 리외는 다짐하듯 말했다. "그리고 물론 전염성이 절대적은 아니지요. 그렇지 않으면 끝없이 수학적 벼락 같은 인구의 감소가 생길겁니다. 적 어도 어두운 면을 보자는 것이 아니라 예방조치를 취하자는 것이지요." 그래도 리샤르는, 그 병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병 자체가 수그러들지 않는 한 법률에 규정 된 대로 엄중한 예방조치를 취해야만 하는데 그러자면 문제가 바로 페스트라는 것을 공식적 이 아닌 이상 신중한 고려를 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이 사태의 결론을 내리려고 하 였다. "문제는" 리외가 고집했다. "법률에 규정된 조치가 중대하냐 아니냐가 아니라, 이 도시 인 구의 반이 죽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 조치가 필요하냐 아니냐를 알자는 것입니다. 그 밖의 일은 행정적인 문제인데 마침 현행 제도에는 그런 문제를 조절하기 위해 지사라는 것 이 있습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지사가 말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그것은 페스트라는 유행병이 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해주실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시인하지 않더라도" 리외가 말했다. "역시 그것은 시민의 반수를 죽일 위험성이 있습니다." 리샤르는 짜증이 좀 나서 말을 가로챘다. "사실은 저 친구는 페스트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까 들은 병발증상의 설명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요." 리외가 자기는 병발증상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본 대로를 말했던 것이라고 대답했 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가래톳과 반점과 헛소리를 하게 하고 열 때문에 48시간내에 죽어 버리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대체 리샤르 씨는 이 유행병이 엄중한 조치 없이도 수그러든다 고 주장할 만한 책임을 질 수 있다는 말인가? 하고 따졌다. 리샤르는 주저하다가 리외를 보고 말했다. "솔직하게 당신 생각을 말해주세요. 당신은 그것이 페스트라는 확신을 가지고 계십니까?" "질문을 잘못 하셨군요. 어휘 같은 것이 문제가 아니고 시간이 문제입니다." "선생의 생각은 결국" 지사가 말했다. "비록 페스트가 아니라도, 페스트가 발생했을 때에 취하는 예방조치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로군요." "기어코 무슨 의견을 말하라고 하시면 사실 제 의견은 그런 것입니다." 의사들은 서로 의논을 했다. 마침내 리샤르가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치 그 병이 페스트인 것처럼 행동을 하는 책임을 져야 됩니다." 그 표현은 열렬한 동의를 얻었다. "그것도 역시 당신의 의견이시죠? 동업자 양반." 하고 리샤르가 물었다. "표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리외는 말했다. "다만 우리는 시민의 반수의 생명이 위 태하지 않은 듯이 행동해서는 안된다는 것만은 말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머지않아서 그렇게 될 테니까요." 모두들 얼굴을 찌푸린 가운데 리외는 물러나왔다. 잠시 후 프라이팬의 기름 냄새와 오줌 냄새가 나는 변두리 동네에서 사타구니가 피투성이인, 죽을 듯이 소리치는 어떤 여자가 그 를 바라보고 있었다. 회의가 있은 다음날, 열병은 좀더 발전했다. 그것은 신문에도 났으나 평범한 논조였다. 거 기에 대해서 약간의 시사를 던졌을 뿐이니 말이다. 어쨌든 그 다음다음날 리외는 군청에서 시내의 가장 으슥한 골목골목에 재빨리 붙여놓은 작고 흰 벽보를 볼 수가 있었다. 그 벽보 를 보고, 당국이 사태를 바르게 보고 있다는 증거를 끌어내기는 어려웠다. 조치는 대단한 것 이 아니었고, 여론을 불안하게 하지 않으려는 의도로 무척 애를 쓴 모양이었다. 포고문의 머 리말은 실제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즉, 아직 전염병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는 그 악성 열병이 오랑 시에서 몇 건 발생했다. 그 증상들이 현실적으로 염려할 만큼 특징이 나타나 있지는 않으며, 또 시민들이 침착성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믿는다. 그런데도 불구하 고, 전 시민의 이해를 구하면서 신중을 기하기 위해 지사는 몇 가지 예방적인 조치를 하기 로 한 것이다. 시민들이 깊은 관심과 성의를 다하면 그 조치들은 모두 유행병의 위협을 철 저히 저지시킬 방법들이다. 그러므로 지사는, 시민 여러분이 지사 자신의 개인적인 노력에 대해서 가장 헌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한다는 요지였다. 이어서 벽보에는 총체적인 조치사항이 적혀 있었다. 그중에는 하수구에 독가스를 주입하 여 과학적으로 쥐를 처치하는 방법이라든가, 음료수 사용에 대한 엄격한 경계라든가 하는 조항이 있었다. 시민들에게 극도의 청결을 요구하고, 벼룩이 있는 사람들은 시립병원에 출두 하라고까지 되어 있었다. 한편 의사의 진단이 내려졌을 경우, 가족들은 의무적으로 신고를 해야 하며, 그 환자들을 병원의 특별 병실에다 격리하는데 동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병 실들은 또한 입원 기간중 단시일내에 최대의 완치의 가능성이 있도록 설비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었다. 몇 가지 부기조항에는 환자의 방과 환자 운반용차의 의무적인 소독을 명하고 있 었다. 나머지는 환자 근처 사람들에게 위생에 주의하도록 권고하는데 그치고 있었다. 의사 리외는 벽보에서 홱 몸을 돌리고 자기 진료실 쪽으로 길을 걸어갔다. 조제프 그랑이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보고서 또 두 팔을 들었다. "네." 리외가 말했다. "숫자가 증가하고 있지요, 압니다." 그 전날 밤에 시내에서 10여 명의 환자가 쓰러져 죽었던 것이다. 의사는 그랑에게 자기는 코타르를 방문할 생각이니 저녁때나 만나자고 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랑이 말했다. "잘 좀 봐주세요. 사람이 많이 변했으니까요." "그래 어떻게 변했나요?" "아주 붙임성이 좋아졌습니다." "전에는 그렇지 못했었나요?" 그랑은 주저했다. 코타르가 붙임성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런 표현이 정확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는 늘 틀어박혀서 말이 없는, 어딘지 산돼지 같은 모습을 가진 사나이였 다. 그의 방, 싸구려 식당, 그리고 제법 신비스럽게 생각되는 그의 외출, 그것이 코타르의 생 활의 전부였다. 표면적으로는 포도주와 리큐르의 판매 대리인이었다. 이따끔씩 그의 고객인 듯한 사람이 두서너 명 찾아오는 일이 있었다. 저녁때, 가끔 자기 집 맞은편에 있는 영화관 에 가곤 했다. 그 시청 서기는 코타르가 갱 영화를 즐겨 보러간다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다. 언제나 그 판매 대리인은 고독하고 의심이 많았다. 그런 모든 것이, 그랑에 의하면 많이 변했다는 것이다. "뭐라구 말할 수는 없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는 사람들과 타협을 하려고 애쓴달까, 모든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것 같습니다. 그는 나한테 말도 자주 걸고, 같이 나가자 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디 번번이 거절할 수도 없더군요. 게다가 나도 그에게 흥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자면 내가 그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니 말입니다." 그때의 자살미수 사건 이후로 아무도 코타르를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거리에서나, 도매 상에서나, 그는 동정을 받으려고 줄곧 애썼다. 식료품 상인들과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공손한 사람도 없었고, 담배 가게 여주인의 이야기를 그렇게 흥미진진하게 듣는 사람도 없었다. "그 담배 가게 여자는" 그랑이 설명했다. "그야말로 진짜 여우지요. 코타르에게 그 말을 해주었지만, 그는 내가 잘못 봤다고 대답하면서 그 여자도 알아주어야 할 장점이 있다는군 요." 더구나 두서너 차례, 코타르는 시내의 호화로운 레스토랑이며 카페에 데리고 간 일이 있 었다. 사실 그는 그런 곳에 자주 출입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 데서는 기분이 좋더군요"라고 그는 말했다. "게다가 손님들이 다 좋은 사람들이구 요." 그랑은 그가 특별히 좋은 대우를 받는 것을 발견했는데, 알고 보니 그가 놓고 가는 막대 한 팁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코타르는 그 종업원들이 그 대가로 자기에게 베풀어주는 친절 에 매우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날 레스토랑 지배인이 그의 배웅을 나와서 그가 외투 입는 것을 거들어주었을 때 코타르가 그랑에게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 "참 좋은 친구지요. 그만하면 증인이 되어줄 수 있는데." "증인이라니, 무슨 증인을요?" 코타르는 주저했었다. "아니! 그저 내가 나쁜 놈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 외에 그는 기분이 돌변하는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식료품 가게 주인이 좀 덜 친절했다 고 그는 엄청나게 골이 나서 집에 돌아왔었다. "다른 놈들하고 가깝게 지낸단 말이야, 망할 자식 같으니." 이렇게 뇌까리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뇨?" "아무 놈들하고나 말입니다." 그랑은 그 담배 가게 여주인 있는 데서 묘한 장면을 본 적도 있었다. 한참 신바람이 나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는데, 그 여자가 알제리에서 떠들석한 최근의 어떤 체포사건 이야기 를 했다. 그것은 어느 무역회사의 젊은 직원이 바닷가에서 어떤 아랍인을 죽인 사건이었다. "그런 상놈들을 다 감옥에 집어넣으면 정직한 사람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을거예요." 여 주인은 말했었다. 그러나 이렇다는 말 한 마디 안 하고 갑자기 흥분해서 가게 밖으로 뛰어나가버리는 코타 르를 보고는 그 여자는 말을 중단해야 했다. 그랑과 여주인은 멍하니 그저 보고만 있었다는 것이다. 후에, 그랑은 그 밖에도 코타르의 성격의 또 다른 변화를 리외에게 알려주었다. 코타르는 늘 매우 자유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즐겨 쓰는 '약자는 항상 강자에게 먹히 게 마련이다'라는 문구가 그것을 잘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는 오랑의 온건파 신 문밖에는 사보지 않게 되었고, 게다가 그것을 공공 장소에서 읽고 있는 것이 어딘지 우쭐해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또한 병석에서 일어난 지 며칠 안돼서 그는 우체국에 가 려던 참인 그랑에게, 멀리 떨어져 사는 자기 누이동생에게 매달 보내는 100프랑짜리 우편환 을 좀 부쳐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랑이 막 가려던 순간 코타르가 말했다. "200프랑만 보내주세요. 그러면 그 애는 놀랄거예요. 내가 제 생각은 도무지 안해 주는 줄 알고 있어요. 그러나 사실은 나는 그애를 사랑하고 있어요." 마침내 그는 그랑과 묘한 대화를 한 일이 있었다. 그랑은 자기가 저녁마다 붙들고 있는 시시한 일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있는 코타르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았어요, 책을 쓰시는군요." 코타르가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도 괜찮지만, 그것보다는 더 복잡합니다!" "아!" 코타르가 외쳤다. "나도 그런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랑이 놀란 표정을 하자 코타르는 예술가만 되면 모든 일이 잘 될 것 같다고 얼버무렸 다. "왜요?" 하고 그랑이 물었다. "그건 예술가는 다른 사람보다 더 권한이 있으니 말입니다. 누구든지 아는 일이죠. 예술가 에게는 여러 가지가 허용되어 있어요." "하기야" 벽보가 나붙은 날 아침에 리외는 그랑에게 이렇게 말했다. "쥐 사건 때문에 머 리가 돈 모양이군요. 그런 사람이 많으니까, 그저 그렇겠죠. 그렇지 않으면 열병이 무서운거 예요." 그랑이 대답했다.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선생님. 내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쥐 청소차가 엔진 소리를 요란하게 내면서 창문 앞을 지나갔다. 리외는 말소리가 그랑에 게 들릴 수 있을 때까지 입을 다물었다가 무심히 서기의 생각을 물어보았다. 그는 정색을 하고 리외를 보고 있었다. "그는, 무엇엔가 가책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의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 경관 말마따나 서둘러야 할 일이 태산 같았다. 리외는 오후에 카스텔과 상담을 했다. 혈청은 도착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리외가 물었다. "혈청이 쓸모가 있을까요? 그 균은 이상한데요." "오!" 카스텔이 말했다. "나는 선생처럼 생각하지 않아요. 그놈들은 언제나 색다른 점이 있는 법이오. 그러나 결국에는 마찬가지지만." "선생은 그렇다고 가정하시는 데 불과합니다. 사실은 우리가 그 모든 것을 모르고 있는거 예요." "물론 가상하는거죠.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정도로 그치고 있는 걸요." 온종일 의사는 페스트 생각을 할 때마다 매번 일어나는 가벼운 현기증이 더 심해지는 것 을 느꼈다. 나중에는 자기가 겁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 어앉은 카페에 두 번이나 들어갔다. 그도 역시 코타르처럼 인간적인 훈훈한 공기가 필요했 던 것이다. 리외는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바람에 자기가 그 판매대리인 을 방문하겠다고 약속한 일이 생각났다. 저녁때 의사가 코타르를 찾아갔을 때 그는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식탁 위에는 탐정소설 한 권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저녁이 깊어져 점점 어두워지는 속에서는 책 읽기란 어려운 일이었음이 분명했다. 차라리 코타르는 조금 전까지도 어둠침침한 속에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었을 것이다. 리외가 몸은 괜찮냐고 물어보았다. 코타르는 앉으면서 몸은 괜찮고 이제는 아무도 자기에게 참견하는 사람이 없다는 확신만 얻을 수 있으면 더 좋아질 것이라고 중얼 거렸다. 리외는 인간이란 항상 혼자서만 살 수 없다는 것을 깨우쳐주었다. "오! 그런게 아닙니다. 제 말씀은 남을 귀찮게 하도록 참견을 하는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리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제 얘기는 아닙니다만, 잘 좀 들어보십시오. 저는 이런 소설을 읽고 있었어요. 한 불행한 사나이가 어느 날 아침에 갑자기 체포당했습니다. 남이 그의 일에 참견하고 있었는데도 그 는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관청에서는 그의 이야기가 나와서 카드에 이름이 실렸어요. 그것 을 정당하다고 생각하세요? 한 인간에 대해서 그런 짓을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경우에 따라 다르지요." 리외가 말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 절대로 그럴 권리가 없 지요. 그러나 그런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너무 오랫동안 집안에 있는 것은 좋지 못 합니다. 외출도 해야죠." 코타르는 화가 난 모양으로 자기는 그저 그 모양으로 살고 있으며, 만약 필요하다면 온 동네 사람들을 자기의 증인으로 세울 수 있다고 말했다. 다른 동네에도 얼마든지 친하게 지 내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리고 씨를 아십니까? 건축가 말이에요. 그 사람도 제 친구입니다." 방안에는 어둠이 짙어졌다. 이 교외의 거리들이 활기를 띠고, 가볍게 한시름 놓는 감탄 소 리가 저 밖에서 불이 들어오는 순간에 들려왔다. 리외는 발코니로 나갔다. 코타르도 그 뒤를 따랐다. 주위의 온 동네로부터, 우리의 시에서 매일 저녁 그렇듯 산뜻한 미풍이, 웅성대는 소리와 불고기 냄새와 떠들썩한 청년들에게 점령된 거리에서 점차로 부풀어가는 즐겁고도 향기로운 자유의 숨결을 실어오고 있었다. 밤, 보이지 않는 선박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고동 소리, 바다와 줄지어가는 군중들로부터 올라오는 웅성거리는 소리, 리외가 잘 알고 있고 전 에는 좋아했던 그 시각이, 오늘은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 때문에 무겁게 내리누르는 것 같 았다. "불을 켤까요?" 코타르가 말했다. 불이 들어오자 그 작은 사나이는 눈을 깜박거리며 의사를 보았다. "저, 선생님, 만약 제가 병이 들면 선생님 병원에 입원시켜주시겠어요.?" "물론이지요." 그러자 코타르는 진료소나 병원에 입원한 사람을 체포한 전례가 있느냐고 물었다. 리외는 그런 일도 있었지만 모든 것은 병세 여하에 달렸다고 대답했다. "저는, 선생님을 믿습니다." 코타르가 말했다. 그러다가 그는 시내까지 차를 태워줄 수 있느냐고 의사에게 물었다. 도심지에 다다르니 거리에는 이미 사람들이 드물었고 불도 많이 꺼져 있었다. 아이들은 아직도 문 앞에서 놀고 있었다. 코타르의 부탁으로 의사는 아이들이 몰려 있는 앞에 차를 세웠다.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돌차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서 검은 머리 가 착 달라붙고, 빗질은 잘했으나 얼굴에는 때가 묻은 한 아이가 두려운 눈초리로 리외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의사는 눈길을 돌렸다. 코타르는 인도 위에 서서 의사의 손을 잡았 다. 그 판매대리인은 목이 쉬어 가까스로 나오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두서너 번 그는 자기 뒤를 돌아다보았다. "사람들이 유행병 이야기를 하던데요. 그것이 정말인가요, 선생님?" "사람들은 늘 그렇지요. 당연한 일입니다."라고 리외가 말했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리고 10여 명만 죽게 되면 이 세상도 마지막이라고 야단들이에요. 당 면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닐 텐데요." 엔진이 우르렁거리는 있었다. 리외는 기아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진중 하고 침착한 태도로 자기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는 어린이를 보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그 아이는 입을 있는대로 벌리고 웃었다. "그러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대체 무엇인가요?" 그 아이를 보고 웃어주면서 의사가 물 었다. 코타르는 갑자기 자동차 문을 열고 슬픔과 분노에 가득 찬 소리를 외치고는 달아나버렸 다. "지진입니다. 진짜 지진 말이에요!" 지진은 일어나지도 않았고, 그 이튿날은 리외가 시내를 사방으로 쫓아다니면서 환자들의 가족들과 담판을 하고 환자 자신들과 옥신각신하는 동안에 한나절이 다 지나가고 말았다. 지금까지 리외가 자기 직업을 그렇게 힘겹게 여긴 일은 결코 없었다. 그 전까지는 환자들이 자기 일의 힘을 덜어주었고 그들은 몸을 완전히 그에게 맡겼었다. 처음으로 의사는 환자들 의 증세를 숨기려고 들며, 일종의 불신에서 오는 놀라움으로 병 속에 깊이 피해 있는 듯이 느껴졌다. 그것은 대단히 서투른 하나의 투쟁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10시쯤 마지막 왕진에 서 돌아오는 길에 그 늙은 천식 환자 집 앞에 차를 세웠을 때, 리외는 좌석에서 몸을 일으 키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그는 어두운 거리를 보면서 또 캄캄한 하늘에서 나타났다가 사라 지는 별들을 쳐다보면서 머뭇거렸다. 그 늙은 천식환자는 자기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아 있었다. 호흡이 전보다 나아진 것 같았 고, 냄비에 담긴 콩을 골라서 다른 냄비로 옮겨 담고 있었다. 그는 반가운 얼굴로 의사를 맞 이했다. "그런데 선생님, 콜레라라는 것이 사실인가요?" "어디서 그런 말을 들으셨어요?" "신문에서도 그러구, 라디오에서도 그러더군요." "아녜요, 콜레라가 아닙니다." "아무튼" 하고 그 노인은 몹시 흥분해서 말했다. "건강한 사람들도 걸린다던데요!" "그런 건 믿지 마세요." 하고 의사는 말했다. 그는 노인에 대한 진찰을 마치고 그 보잘것없는 식당 한복판에 앉아 있었다. 그렇다. 그는 겁이 났다. 바로 이 교외에서도, 이튿날 아침에는 10여 명의 환자들이 가래톳 때문에 허리를 구부리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겨우 두서너 건만이 절개수 술에서 효과를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곧바로 입원해야 한다. 그는 가난 뱅이들에게 병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의사들의 실험 재료가 되기는 싫어요." 라고 어떤 환자의 아내가 그에게 말한 일이 있다. 그 환자는 의사들의 실험 대상이 된 것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었다. 그뿐이다. 결정된 조치들은 불충분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아주 뻔한 일이었다. '특수 시설을 갖춘' 병실에 대해서 리외는 잘 알고 있다. 허둥지둥 입원환자들 을 이동시킨 뒤 창들을 밀폐하고 그 주위에 위생 차단선을 쳐놓은 두 개의 분관이었다. 전염병 이 스스로 사라지지 않는 한 당국이 생각해낸 조치로는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도 저녁때 공식발표를 보면 여전히 낙관적이었다. 그 이튿날 랑스도크 통신사는, 당국 의 조치는 순조롭게 시달되었으며 이미 30여 명의 환자들이 신고를 해왔다고 보도했다. 카 스텔이 리외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분관에는 수용력이 얼마나 되나요?" "80명입니다." "시내에는 환자가 물론 30명 이상이겠죠?" "겁이 나서 신고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고, 나머지 대부분은 미처 겨를이 없을 겁니다." "매장하는 데는 감시를 안하나요?" "안합니다. 리샤르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말뿐이 아니고 완전한 조치가 필요하며 유행병에 대해서 정말 완전한 방벽을 쳐야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그랬더니 뭐랍디까?" "자기는 권한이 없다고 하더군요. 내 생각에는 자꾸 심해질 것 같아요." 사흘 동안에 과연 두 채의 분관은 가득 찼다. 리샤르는 당국이 어느 학교를 접수해서 임 시 병실을 만들 예정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리외는 왁친을 기다리면서 가래톳 수술을 하고 있었다. 카스텔은 싸 두었던 책을 다시 펼쳐 보느라고 오랫동안 도서관에 처박히곤 했 다. "쥐들은 페스트 아니면 그것과 대단히 흡사한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결론지었 다. "그 쥐들이 수만 마리의 벼룩을 퍼뜨려 놓아서 지체하지 않고 그것을 막지 않으면 그 벼룩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병균을 전염시킬 것입니다." 리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무렵에 날씨는 자리가 잡힌 듯이 보였다. 태양은 소나기가 계속 내려서 생긴 웅덩이의 물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노란 광선이 넘쳐흐르는 아름다운 푸른 하늘, 고개를 들기 시작한 더위 속에서 윙윙거리는 비행기들, 계절의 온갖 양상이 청량하게 지속되고 있었다. 그래도 나흘 동안에 열병은 네 단계로 놀랄 만큼 증가했다. 사망자가 16명에서 24명, 28명, 32명이 되었던 것이다. 나흘째 되는 날엔 어떤 유치원을 임시 병원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는 사 실이 알려졌다. 그때까지 농담으로 돌림으로써 불안을 숨겨왔던 시민들은 더 한층 낙심해서 묵묵히 거리를 걷고 있었다. 리외는 지사에게 전화를 걸기로 결심했다. "이번 조치로는 불충분합니다." "숫자를 보고받았는데요, 과연 우려할 만한 숫자입니다." 지사가 말했다. "우려 정도가 아닙니다. 아주 명백합니다." "총독부에 지시를 요청하겠습니다." 리외는 카스텔 앞에서 전화를 끊었다. "지시를 기다리다니! 무슨 방도를 생각해야 할텐데." "그래 혈청은 어떻게 됐나요?" "이번 주 안으로 올 것입니다." 군청에서는 리샤르를 통해서 명령을 촉구하기 위해서 식민지의 수도에 보낼 보고서 작성 을 리외에게 의뢰해왔다. 리외는 거기에다 임상적인 상세한 숫자를 기재했다. 바로 그날 약 40명의 사망자가 생겼다. 지사는 자기 말대로 자신의 책임하에 당장 그 다음날부터 이미 공 표한 조치를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의무적인 신고와 격리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환자가 생긴 집들은 폐쇄되고 소독되었으며 가족들은 40일 정도의 안전 격리에 응해야 되고, 매장은 근 일 밝혀질 조건하에서 시에서 시행하기로 되었다. 하루가 지나서 혈청이 비행기로 도착되었 다. 현재 치료중인 환자들에게는 충분했다. 만약 전염병이 더 퍼진다면 부족한 숫자였다. 리 외가 친 전보에 구급용 저장품은 이미 절품되어 새로 제조에 착수했다는 대답이 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봄은 부근에 잇는 모든 교외로부터 시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수천 송 이의 장미꽃들이 인도를 따라서 늘어서 있는 꽃 장수들의 바구니 속에서 시들어가고 있었으 며, 그 달콤한 향기가 온 시가에 감돌고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대단한 것이라고는 없었 다. 출퇴근 시간에 전차는 여전히 만원이었고, 낮에는 지저분한 채 비어 있었다. 타루는 그 작달막한 노인을 관찰하고 있었는데 그 노인은 여전히 고양이들에게 가래침을 뱉고 있었다. 그랑은 그의 신비한 일을 하기 위해서 저녁마다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코타르는 빙빙 돌아 다녔고, 예심판사인 오통 씨는 여전히 그의 애완 동물을 끌고 다녔다. 그 늙은 천식 환자는 콩을 옮겨 담고 있었고, 침착하고 호기심을 지닌 신문기자 랑베르도 때때로 볼 수 있었다. 저녁때면 늘 똑같은 군중들이 거리거리에 가득 찼고, 영화관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짓고 모 여들었다. 아닌게 아니라 전염병이 수그러져 가는 듯싶었다. 며칠 동안에 불과 10여 명밖에 는 사망자가 없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병세는 급격히 퍼지기 시작했다. 사망자의 수가 다시 30여 명이 되던 날, 베르나르 리외는 지사가 "그들이 두려워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지사가 내민 관용전보를 보고 있었다. 전보에는 '페스트 사태를 선포하고 시를 폐쇄하라'고 적혀 있었다. 2 그때부터 페스트는 우리들 전체의 관심사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여태까지는 그 이상 한 사건들이 빚어놓은 놀라움과 불안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각자가 자기의 직장에서 그럭 저럭 일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시가 폐쇄되자 그들은 모두(필자 자신도 그러했지만) 독안에 든 쥐가 되었으며, 거기서 그냥 견딜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가령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같은 개인적인 감정이 처음 몇 주일째부터 갑자기 모든 사람들의 감정이 되었고, 공포 와 더불어 그 오랜 격리생활의 중요한 고통거리가 되었다. 시를 폐쇄함으로써 생긴 가장 중요한 결과들 중의 하나는, 사실 그럴 줄은 꿈에도 모르고 당하게 된 돌발적인 이별이었다. 어머니들과 자식들, 부부들, 애인들, 그들은 며칠 전에 그저 잠시동안 이별이라고 생각했다. 이 도시의 역의 플랫폼에서 몇 마디 부탁 말을 남기고는 서 로 키스를 주고받았으며, 며칠 혹은 몇 주일 후에는 다시 보게 되리라는 확신을 가졌었고,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서, 그 작별에 대해 과히 낙심하지도 않고 자기들의 일을 보고 있었던 그들이 대번에 호소할 길도 없이 서로 멀리 떨어져 만나지 도 못하고 편지 왕래도 끊기고야 말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폐쇄는 도지사의 명령이 공포되 기 몇 시간 전에 실시되었는데 당연한 일이지만 이러한 경우 특별한 예외를 고려해주는 것 도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이 질병의 무지막지한 침범은, 그 첫 결과로서 우리 시 민들로 하여금 마치 개인적인 감정이 없는 사람들처럼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명령이 실시된지 처음 몇 시간 동안, 군청은 항의하는 사람들로 골치를 앓았다. 그 들은 전화로 혹은 관리들 곁에서 한결같이 절실하고 또 동시에 한결같이 고려 불가능한 사 정들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사실 우리가 타협의 여지가 없는 형편에 놓여 있으며, '타협'이 라 든가, '특전'이라든가, '예외'라든가 하는 말이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어버렸다는 사 실을 납득하기까지에는 며칠이 걸렸다. 우리는 편지를 쓴다는 사소한 기쁨마저 거부당했다. 사실 한편으로 이 도시는 보통 통신 방법으로는 나머지 다른 지역과 연락을 가질 수 없게 되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편지가 전염 의 매개물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각종 우편 통신의 교환을 금지하는 새로운 명령이 내렸던 것이다. 초기에는 몇몇 특권층들은 시 입구에서 보초병들과 접촉해서 그들로 하여금 외부로 가는 편지를 통과시킬 수도 있었다. 아직 이 유행병의 초기에 보초병들이 동정에서 생기는 충동에 꺾이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될 시기에는 그래도 괜찮았다. 그러나 얼마 안 지나서 바로 그 보초병들도 사태의 중대성을 충분히 납득하게 되자 그런 행동의 결과가 어 디까지 파급될지 예측할 수도 없는 그런 일에 대한 책임을 지기를 거부했다. 시외전화가 초 기에는 허가되었는데, 공중전화 박스와 회선도 몹시 혼잡해졌기 때문에 며칠 동안 전적으로 중지되었다가 결국은 사망이나 출산, 결혼 같은 긴급한 일에만 엄격히 제한을 가해서 허용 되었다. 그러니 전보가 우리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해와 감정과 혈육으로 맺어졌던 사람들 이 이제는 겨우 열 마디의 전문의 대문자 속에서 그 옛날의 감정의 표시를 더듬어보게끔 되 었다. 그리고 사실 전보에서 쓸 수 있는 문구들은 곧 밑바닥이 드러나기 때문에 오랫동안의 공동 생활이라든가, 고통스러운 애욕 같은 것들이, '잘 있소, 당신을 생각하며. 사랑하오' 같 은 상투적인 문구의 정기적인 교환으로 급속히 축소되고 말았다. 우리들 중의 몇몇은 그래도 악착같이 편지를 써서 외부와 통신을 하려고 끊임없이 여러 수단을 궁리해보았으나, 결국은 실없는 짓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비록 우리가 생각 해낸 방법 중의 몇 가지가 성공했다 하더라도 답장을 받을 길이 없으니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를 수밖에 없었다. 몇 주일 동안, 우리들은 같은 편지를 줄곧 쓰고 또 쓰고, 똑같은 정보, 똑같은 정보, 똑같은 호소를 베끼게끔 되었으며, 심지어 얼마 후에는 우리의 마음에서 피가 되어 줄줄 흐르던 말들이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들은 기계적으로 그것들 을 베끼고, 그 뜻이 줄어버린 말들을 가지고 우리의 고달픈 생활의 표적을 나타내보려고 애 쓰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 이룩되지 못하는 악착같은 독백이나 벽에다 대고 주고받 는 그 무정한 대화보다는, 전보의 판에 박은 듯한 호소가 차라리 낫게 여겨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서, 아무도 이 도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사람들은 전염병이 발생하기 전에 시외로 나갔던 사람들의 귀가는 허락되는지 알아보려는 생각을 했 다. 며칠 동안 고려한 뒤에 군청은 그럴 수 있다는 답변을 했다. 며칠 동안 고려한 뒤에 군 청은 그럴 수 있다는 답변을 했다. 다만 복귀자는 어떤 경우에도 다시 시에서 나갈 수가 없 으며, 돌아오는 것은 자유지만 다시 나가지는 못한다는 것을 명백히했다. 그런데도 역시, 수 는 적지만 몇몇 가정에서는 사태를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고 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욕망이 모든 조심성보다 앞서게 되어 가족에게 이 기회를 이용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아주 일찍 이 페스트의 포로가 되어 버렸던 사람들은 자기네 가족을 몰아넣게 될 위험을 깨닫고 이별 을 참아내기로 결심했다. 질병이 가장 위급할 때, 인간적인 감정이 고문당하는 듯한 죽음의 공포보다 더 강했던 예는 한 건을 제외하고는 볼 수가 없었다. 그것은 흔히 우리가 예상하 듯 고통을 초월해서 사랑만을 서로 나누는 여인들의 경우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오래전 에 결혼해서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늙은 의사 카스텔과 그 부인의 경우였다. 카스텔 부 인은 그 전염병이 생기기 며칠 전에 이웃 도시에 갔었다. 그 가정은 모범적인 행복의 예를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그러한 가정도 아니었다. 필자는 모든 가능성으로 보아서 그 부 부는 여태껏 자기들의 결혼이 만족스러운 것이라는 확신조차 없이 살아왔다고 말함 자신이 있다. 그러나 그 갑작스럽고 질질 끄는 그 별거생활이 그들로 하여금 서로 떨어져선 살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하였고, 갑자기 드러난 그 진실을 보고 페스트 같은 것은 하찮게 보였 다. 그것은 하나의 예외였다. 대부분의 경우 별거상태는 분명히 그 전염병이 끝나야만 비로소 끝날 모양이었다. 그래서 우리들 전체에게 있어서 우리들의 생활을 이루고 있던 감정, 더구 나 우리가 잘 알고있다고 생각했던 감정(오랑 시민들은 이미 말한 바 있듯이 단순한 정열의 소유자들이다.)에 하나의 새로운 면모가 생겨났다. 배우자를 가장 끔찍하게 믿어오던 남편들 이나 애인들이 질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랑에 너무 소홀하다는 것을 스 스로 인정하고 있었던 남자들이 다시 성실해졌다. 어머니들과 살면서 거의 어머니와 마주보 지도 않고 무관심하게 살던 아들들이, 그들의 기억 속에 머무르고 있는 어머니 얼굴의 주름 살 하나에 자기들의 모든 불안과 후회를 의지하고 있었다. 그 느닷없이 닥친 잇닿은 자리도 없고 뚜렷한 앞날도 보이지 않는 그 급작스러운 이별은, 우리들의 하루하루를 차지한 채 아 직도 그렇게 가까우면서 그렇게 머나먼 그 현실의 추억에 옴짝달싹할 길 없이 그저 수수방 관하게 만들어놓았다. 사실 우리는 이중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첫째로 우리 자신의 고통과 집에 없는 사람들, 즉 자식이며, 아내며, 애인을 생각하는 고통이었다. 어쨌든 다른 경우라면 우리 시민들은 좀더 외부적이고 적극적인 생활 속에서 배출구를 발 견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동시에 페스트는 시민들을 한가롭게 만들었고 그 침울한 시대 를 쳇바퀴 돌 듯 빙빙 돌게 만들었으며, 그리고 대개의 경우는 그렇게도 작은 도시니만큼 그 길은 틀림없이 그전에 이제는 곁에 없는 사람과 돌아다니던 길들이었으니 말이다. 이처럼 페스트가 우리 시민들에게 가져온 최초의 것은 격리생활이었다. 그래서 필자가 느 꼈던 것이 동시에 수많은 우리 시민들이 느꼈던 것인 만큼 필자 자신이 그때에 느낀 것을 모든 사람의 이름으로 여기에 쓸 수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격리생활의 감정이 야말로 우리들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있었던 구덩이였고, 과거로 되돌아가려고 하거나 또는 반대로 시간의 걸음을 재촉한다든가 하는 구체적인 감정이었으며, 어리석은 욕망이었으며, 추억에 대한 불타는 듯한 화살들이었다. 만약 이따금 우리가 상상이 뻗어가는 대로 맡겨 돌 아오는 사람이 울리는 초인종 소리라든가, 계단을 올라오는 귀에 익은 발소리를 심심풀이로 기다려본다고 하자. 만약 그 순간에 기차의 운행이 정지되었다는 것을 잊어버리기로 했다고 하자. 만약 어느 때 저녁 급행 열차를 탄 여행객이 우리 동네에 도착했음직한 시간에 우리 집에 머무를 수 있도록 준비를 해놓고 있다고 가정하자. 물론 이런 놀이가 오래 갈 리는 없 다. 반드시 기차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확실해질 순간은 드디어 오고 말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우리의 이별 상태는 계속될 운명에 있으며, 시간과 더불어 해결을 보도록 노력해 야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때부터 우리는 결국 우리의 감금 상태를 다시 인정하고, 과 거 일에만 정신을 쓰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 중의 몇몇이 미래에 살고 싶다는 유혹을 갖는 일이 있어도, 그들은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상상이라는 것이 마침내는 그들에게 쓰 라린 상처만 남길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되도록 빨리 그런 유혹을 내던져버리는 것이었다. 특히 우리 시민들 모두는 이별의 기간을 계산하는 그런 습관을 공공연하게 서둘러 떨쳐버 리고 말았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가장 비관적인 사람들이, 예를 들어 이별 기간 을 6개월로 생각하고 그들이 앞으로 닥쳐올 그 6개월 동안의 모든 고초를 미리 다 겪을 대 로 겪고 나서, 가까스로 그러한 시련을 견디도록 용기를 북돋아서, 그토록 오랜 시일 동안 계속된 고통에도 꺾이지 않고 버티기 위해 마지막 힘을 다하고 있을 때 때로는 우연히 만난 친구라든가, 신문의 전망이라든가, 근거 없는 의혹이라든가, 혹은 불현듯이 생기는 통찰이라 든가 하는 것이 결국은 그 전염병이 6개월 이상 어쩌면 일년, 또는 그 이상 갈 지도 모른다 는 생각을 일으키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그들의 용기, 의지 그리고 인내의 붕괴는 너무도 갑작스러워서 그들에게는 영원히 그 구덩이에서 다시 기어나올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해방의 기한 을 결코 생각하지 않고, 이제는 더 이상 미래를 바라보지도 않고, 항상 말하자면 두 눈을 내 리깔려고 무척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그러한 조심, 그러한 고통을 숨기려 는, 그리고 투쟁을 거부하기 위하여 경계심을 단념하는 그러한 방법은 그다지 그 보람을 얻 지 못했다. 그들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라도 원치 않았던 그러한 붕괴를 모면하는 동시에 앞으로 있을 재회의 연상 속에서 페스트를 잊을 수 있다는, 결국 자주 가질 수 있는 그 순 간을 사실상 빼앗기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그 심연과 정상의 중간 거리에 좌초해서, 산다기보다는 차라리 둥둥 떠돌아다니듯이 기약 없는 그날그날과 메마른 추억 속에 내던져 져서, 스스로의 고통의 대지 속에 뿌리 박기를 수락함으로써만 힘을 얻을 수 있는 방황하는 망령이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아무 소용도 없는 기억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모든 죄수들과 모든 유형 수들의 깊은 고통을 맛보고 있었다. 그들이 끊임없는 되풀이 생각하곤 하는 그 과거조차도 후회의 쓴맛 밖에는 없었다. 사실 그들은 자기들이 기다리고 있는 그 남자, 또는 그 여자와 아직 할 수 있을 때 하지 못했던 것을 애석해하는 모든 것을 덧붙여보려고 했었을 것이다. 또한 자기들의 감금생활의 모든 환경, 비교적 즐거운 환경에서조차도 그들은 현재 자기 곁 에 있지 않은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상태로서는 그런 일로 만족할 수가 없었 던 것이다. 자기 자신들이 처한 현실에 진저리가 나고, 과거의 원수가 되어, 미래를 박탈당 한 우리들은, 마치 인간의 정의와 증오가 철창 속으로 몰아넣어버린 사람들과 꼭 같았다. 결 국 그 견딜 수 없는 휴가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상상을 통해서 다시 기차를 달리게 하고, 악착같이 침묵하고 있는 초인종이 연달아 울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시간을 메우는 길 이었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귀양살이기는 했지만 대개의 경우 그것은 자기 집에서의 유배였다. 그리고 필자는 모든 사람들과 같은 귀양살이 밖에는 모르지만, 이와 반대로 가령 신문기자 랑베르나 그 밖의 사람들 같은 경우를 잊어서는 안된다. 페스트의 내습을 받고 이 도시에 억류된 여행자로서, 그들은 사람들을 만나볼 수 없는 동시에 자기들의 고장과 멀리 떨어지 게 된 사실로서 이별의 고통은 더 확대되었던 것이다. 전반적인 귀양살이 속에서도 그들은 특히 괴로운 유형수였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처럼 시간 그 자체에 부추김을 당해 자극받 지만, 그들은 공간에도 역시 얽매여 있었으며, 그들에게 페스트에 휩쓸린 그 객지와, 잃어버 린 조국을 갈라놓은 그 벽과 쉴새없이 부닥치곤 했었다. 먼지 투성이의 시가지에서 종일토 록 헤매고 있는 모습이 아마도 바로 그들일 것이었다. 그들은 묵묵히 자기들만이 아는 저녁 과 자기들 고장의 아침을 회상하고 있었다. 제비들이 나는 모습이며, 저녁때의 이슬 한 방울 이며, 또는 태양이 간혹 쓸쓸한 거리에 질 때의 야릇한 광선들처럼, 채 헤아릴 수 없는 여러 가지 징조와 난처한 소식으로 그들의 불안은 커 가고 있었다. 항상 모든 것으로부터 구원해 줄 수 있는 그 외계에 대해서 그들은 눈을 감고, 그 어떤 광선과 두서너 개의 언덕과 마음 에 드는 나무와, 여자들의 얼굴이 그들에게 대치될 수 없는 풍토를 이루고 있는 땅에 대해 서 너무나도 생생한 공상을 쓰다듬으며 전력을 다해서 그 땅의 모습을 좇기를 단념하지 않 고 있었다. 끝으로 가장 흥미가 있고, 또 필자가 아마도 이야기하기에 가장 좋은 처지에 있는 애인들 에 관해서 명확하게 이야기한다면 그들은 다른 많은 고민들 때문에 괴로워했는데, 그 중의 하나로 후회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때의 형편이 사실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감정을 일 종의 열광 비슷한 객관성을 가지고 고찰할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회에 그들 자신의 실수들이 그들 보기에 뚜렷하지 않은 것이란 거의 드물었다. 그들은 지금 자기 곁에 없는 이의 행동을 정확히 상상하기가 곤란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을 계기로 해서 그 런 기회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하는 이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를 모르 는 것을 섭섭해했다. 그들은 그런 것을 물어보는 것을 게을리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 서 자기 애인의 소일 방법이 모든 기쁨의 원천이 아닌 것처럼 가장했던 여러 가지의 경솔함 을 스스로 책망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그들은 자기들의 사랑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그것의 불완전했던 점을 검토하기란 쉬운 일이었다. 여느 때 같으면, 우리들은 누구나 의식 적이건 무의식적이건간에, 이 세상에서 보다 나아질 수 없는 사랑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 우리들의 사랑이 평범하다는 것도 다소나마 침착한 태도로 인정했던 것이 다. 그러나 추억이란 더 까다로운 것이다. 그리고 극히 당연한 결과지만 외부로부터 우리에 게 달려들어온 도시를 맹타했던 그 불행은, 우리가 격분할 수도 있던 그 부당한 고통을 우 리에게 끼치는 데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가 괴로워하 도록 만들었으며 그 고통을 감수하도록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다른 곳으로 관 심을 돌리고, 노름판을 파장시키는 질병의 상투적인 수단이었다. 이처럼 우리는, 각자가 그날그날을 하늘과 마주보고 고독하게 살아가는 것을 감수해야만 했다. 결국에 가서는 사람들의 성격을 단련시킬 수 있었던 그 전반적인 포기 상태는 그대로 사람들을 경박하게 만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서 몇몇 시민들은 태양과 비에 좌우 되는 또 하나의 노예 상태에 빠져버렸다. 그들은 생전 처음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날씨에 반응을 나타내는 것처럽 보였다. 그들은 그저 황금빛 햇빛이 보이기만 해도 희희낙락했으며, 반대로 비오는 날이면 그들의 얼굴과 생각은 두꺼운 베일에 싸이는 것이었다. 몇 주일 전만 해도 그들은 그러한 약점이나 철없는 노예 근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세 계 앞에 자리잡은 사람들의 존재와 마주서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렇게 된 순간부터는, 그들은 분명히 하늘의 변덕에 좌우되게 되었다. 즉 그들은 까닭없이 고민하고 까닭없이 희 망을 품게 되었다. 그러한 극도의 고독 속에서, 결국 아무도 이웃의 도움은 바랄 수 없이 각자가 혼자서 근 심해야만 했다. 만약 우리들 중의 누가 우연히 자기의 내심을 털어놓거나, 어떤 감정을 말한 다 해도 그 사람이 얻을 수 있는 대답은 어떤 종류건간에 대개는 불쾌감을 주는 대답이었 다. 그래서 그 사람은 상대방과 자기와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 는 것이었다. 반대로 상대방은 습관적인 감동이라든가 시장에서 팔고 있는 듯한 괴로움이라 든가 다발로 엮은 멜랑콜리 같은 것처럼 언제나 빗나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단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침묵을 참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남들이 정말 마음에 서 우러나오는 말을 쓸 줄 모르는 이상, 자기들도 차라리 시장에 굴러 다니는 말을 쓰고, 그 들도 역시 습관적인 말투로 단순한 이야기 책이나, 잡지나, 일간 신문의 기사, 혹은 그 비슷 한 말투로 이야기하고 마는 것이었다. 거기에서도 가장 절실한 슬픔이, 흔히 회화의 평범한 방식으로 표현되기가 일쑤였다. 오직 그 대가로서, 페스트의 포로들은 주위의 동정이나 듣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그 고뇌가 아무리 쓰라린 것이었다 하더라도, 텅 비었 으면서도 무거운 그 마음이 아무리 지니기에 무겁다 하더라도, 그 유형수들은 페스트의 제 1기에서는 특권층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시민들이 냉정을 잃기 시작했을 바로 그 순간부터 그들의 생각은 완전히 자기들이 기다리는 사람에게로만 쏠리고 말았다. 전반적인 낙담 속에서 사람의 에고이즘이 그들을 감싸주었고, 또 페스트에 대한 생각을 하기는 했지 만 그것은 결국 페스트로 인해서 자기들이 영원히 이별하게 될까 염려될 때뿐이었다. 이처 럼 그들은 전염병으로 시달리는 마음속까지, 냉정으로 간주하려고 노력할 만큼 하나의 건전 한 심심풀이를 끌어들였던 것이다. 절망은 그들을 낭패로부터 건져주었고, 그들의 불행은 좋 은 점도 있었다. 예를 들면, 그들 중의 누가 병으로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대개의 경우는 그 사람이 그것을 깨달을 시간의 여유도 없었다. 어떤 유령을 상대로 계속해온, 긴 내면의 대화에서 끌려나오자, 아무런 변천의 여유도 없이 흙의 가장 짙은 침묵 속으로 내던져졌었 다. 그는 전혀 시간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 시민들이 그 급작스러운 귀양살이와 타협해보려고 노력하는 동안에 페스트는 시 입 구마다 보초병을 서게 했고, 오랑을 향해서 항해중이던 선박들의 방향을 돌리게 했다. 시 폐 쇄 이후로 한 대의 차량도 시내에 들어온 일이 없었다. 그날부터 자동차들은 시내에서 맴돌 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신작로의 높은 곳에서 바라다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항구에도 이상한 사태가 전개되고 있었다. 그곳을 연안의 매우 번화한 항구로 만들어준 종래의 활기 는 갑자기 사라지고 없었다. 검역중인 선박들이 아직도 거기에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부 두에는 장치를 풀어놓은 커다란 기중기들, 뒤집어놓은 소하물 운반차, 묵묵히 쌓여 있는 술 통이며 부대 같은 것들이 무역도 역시 페스트로 죽어버렸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한 낯선 광경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민들은 자기들에게 닥쳐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별이라든가 공포라든가 하는 공통된 감정은 있 었지만, 사람들은 개인적인 관심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 아무도 그 질병 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은 자기들의 습관을 혼란스럽게 한다든가, 자 기들의 이해관계에 영향이 미친다든가 하는 점에 대해서 특히 예민했다. 그래서 그들은 애 도 태우고 화도 내고 했지만, 그런 것은 결코 페스트와 맞설 수 있는 감정은 되지 못했다. 그들의 최초의 반응은 예를 들어서 행정 당국을 비난하는 일이었다. 신문에 반영된 '강구 된 조치 완화를 고려할 수는 없을까?' 라는 비판에 대한 지사의 답변은 자뭇 예상 외의 것이었 다. 여태껏 신문들이나 랑스도크 통신사는 병세에 관한 통계의 공식발표를 하지 못했었다. 지사는 매일매일 통신사에 통지해주면서, 매주 그것을 보도해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그래도 역시, 일반 시민의 반응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 페스트가 발생한 지 삼 주일만에 302명의 사망자가 났다는 보도는 상상하기에 그리 중대한 일은 아니었다. 한편 생각하면, 그 모두가 아마 페스트로 죽은 것은 아닐 것이었다. 또 한편, 아무도 여느 때 그 도시에서 한 주에 몇 사람이 죽었는지를 아는 사람이라곤 없었다. 20만의 인구가 있었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그 사망률이 정상적인 것인지 아닌지를 몰랐다. 비록 그런 종류의 정확한 내용이란, 뚜렷한 이해관계가 거기에 드러나 있을 때에도 결코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못하 는 성질의 것이었다. 대중들은 말하자면 비교의 기준이 부족했었던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 난 뒤에야 겨우 그동안 사망수의 증가가 확실해짐에 따라서 여론도 진실을 깨닫게 된 것이 다. 다섯째 주에는 321명, 여섯째 주에는 325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그 증가율이 적어도 사 태를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별로 큰 힘은 되지 못했고, 시민들은 그 불안의 한복판에서도 그것은 아마 유감스러운 변사에는 틀림없지만 그래도 결국은 일시적인 것이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거리를 헤매거나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있곤 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 들은 비겁하지는 않았고, 한탄보다는 농담을 더 많이 주고받았으며, 일시적인 것이 분명한 그 불연속선을 기분좋게 받아들이자는 그런 눈치였다. 외면적으로는 평온했다. 그러나 월말 이 가까워지자, 그리고 좀더 나아가서 얘기하겠지만, 기도 주간이 거의 가까워지자 더 심각 한 변화가 우리 시의 모습을 변형시켰다. 지사는 무엇보다도 먼저 차량 운행과 식량 보급에 관한 조치를 취했다. 식량 보급은 제한되고, 가솔린은 배급제로 되었다. 심지어 절전까지도 실시되었다. 생활필수품만은 육로 또는 공로로 오랑에 반입되었다. 그처럼 점차로 차량의 운 행은 줄어들어 드디어는 거의 전무상태가 되었고, 사치품 가게들은 나날이 문을 닫게 되었 고, 다른 가게들도 진열상에 절품되었다는 쪽지를 붙이게 되었지만, 각 가게의 문 앞에는 손 님들이 줄을 지어 늘어서 있었다. 이처럼 오랑 시는 이상한 모습을 띠었다. 보행자들의 수는 현저하게 늘었으며, 더구나 낮의 한산한 시간에도 가게의 휴업이나 몇몇 회사들의 휴무로 할 일이 없어진 사람들이 거리와 카페에 득실거리고 있었다. 우선은 실업은 아니었고 휴가 였다. 그래서 오랑 시는, 예를 들어서 오후 3시경에 그리고 맑은 하늘 밑에서 공개적인 시위 행렬의 통과를 돕기 위해서 교통을 차단하고 가게의 문을 닫고 또 시민들이 그 기쁨을 나누 기 위해서 축제를 올리고 있는 도시와도 같은 인상을 주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영화관들은 그 전반적인 휴일을 이용해서 큰돈을 벌었다. 그러나 도내에 들어오고 있었던 필름배급은 중단되었다. 이 주일째에는 영화관들은 상영 프로를 서로 교환 하고, 또 얼마 후에는 마침내 영화관마다 늘 같은 영화를 그대로 상영하게 되었다. 그래도 영화관들의 수입은 줄어들지 않았다. 끝으로 카페들은 포도주와 알코올 음료의 매매가 수위를 차지하고 있어, 한 도시로서 축 적되었던 상당한 수량의 재고품 덕분으로 그들 역시 손님들의 수요를 충당시킬 수 있었다. 사실을 말하면 사람들은 마시기도 많이 마셨다. 어느 카페에서 '순수한 술은 세균을 죽인다' 는 종이쪽지를 써 붙였기 때문에 술이 전염병을 예방해준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이미 상식이 되어 오던 터라 그런 생각은 사람들의 뇌리에 박히고 말았다. 매일 밤 2시쯤 되면 카페에서 쏟아져 나오는 상당히 많은 수의 주정꾼들이 거리마다 가득 차게 되었고 거리에서 낙관적인 얘기들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이 모든 변화들은 어떤 의미에서 너무나 유난했고 또 너무나 재빨리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것이 정상적이고 지속성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결 과로 우리는 개인적 감정들을 제일의 관심사로 여겼다. 시 입구가 폐쇄된 이틀 후, 의사 리외는 병원에서 나오는 길에 코타르를 만났는데, 그는 리외에게 아주 만족해 보이는 얼굴을 했다. 리외는 그에게 안색이 좋다고 축하해주었다. "암요. 요새는 아주 건강이 좋습니다."라고 그 작은 사내가 말했다. "그런데 선생님, 그 놈 의 페스트가, 거참! 점점 심각하게 되어가는데요." 의사는 그 사실을 시인했다. 그랬더니 코타르는 일종의 유쾌한 어조로 단정을 내렸다. "이제와서 가라앉을 리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될 걸요." 그들은 잠시 함께 걸어갔다. 코타르는 자기 동네의 어떤 큰 식료품상이 비싸게 팔아먹을 생각으로 식용품들을 매점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을 병원으로 데려가려고 사람들이 왔다가 침대 밑에서 그 깡통들을 발견했다는 얘기를 했다. "그 친구는 병원에서 죽었지요. 페스트에 걸려들면 밑천도 못 건지죠." 이처럼 코타르는 사실과 거짓말을 섞어서 유행병에 관한 이야 기를 많이 했다. 예를 들면 시가 중심지에서, 어느 날 아침에 페스트의 증세가 나타난 어떤 남자가 병 때문에 머리가 이상해져서 밖으로 뛰쳐나가 처음 만나는 여자에게 달려들어 그 여자를 꽉 껴안으면서 자기는 페스트에 걸렸다고 외치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믄요!" 그러한 단정을 내리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상냥한 어조로 코타르는 덧붙였다. "우리는 모두 미쳐버리고 말거예요. 틀림없어요." 또 바로 그날 오후에, 조제프 그랑이 마침내 자기의 개인적인 비밀 이야기를 의사 리외에 게 털어놓았다. 그는 사무실 책상 위에 있는 리외 부인의 사진을 보고 의사를 바라보았다. 리외는 자기 아내가 시외의 어떤 곳에서 요양중이라고 말해주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랑은 말했다. "차라리 다행입니다." 의사는 어떤 의미에서는 다행일지도 모르며 아내의 쾌유를 희 망할 뿐이라고 대답했다. "아! 그랑이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그러고는 리외가 그를 알게 된 후 처음으로 그는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했다. 여전히 용어의 선택을 하기는 했지만 그가 하고 있는 이야기를 오래전부터 생각해두거나 한 것처럼 그때그때에 적합한 말들을 찾아서 썼다. 그는 이웃에 사는 처녀와 아주 일찍 결혼했다. 공부를 집어치우고 취직하게 된 것도 바로 결혼을 하기 위해서였다. 쟌느도 그도 전혀 자기 동네에서 나가본 일이 없었다. 그는 쟌느를 만나러 그 집을 찾아가곤 했었고, 쟌느의 부모는 그 말없고 서투른 구혼자를 약간 이웃곤 했다. 그 여자의 아버지는 역부였다. 일이 없을 때에는 창 옆 한구석에 앉아 큼직한 두 손을 허벅다리에 얹고 생각에 잠긴 채 거리에서 움직이는 물체들을 바라보곤 했다. 어머니는 언 제나 늘 살림에 매달려 있었고, 쟌느가 어머니를 도왔다. 그 여자는 어찌나 가냘프든지 그랑 은 그 여자가 길을 건너가는 것을 볼 때는 아슬아슬해서 볼 수가 없었다. 그럴 때면 차량들 이 주책없이 많아 보였다. 어느날, 크리스마스 선물을 파는 가게 앞에서 진열장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었던 쟌느는 "참 아름답기도 해라!" 하면서 그랑에게 몸을 기댔다. 그는 그 여자 의 손목을 꼭 쥐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의 결혼은 결정되었다. 나머지 이야기는 그랑에 의하면 대단히 단순한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 즉 결혼하 고, 계속해서 조금은 사랑하고, 그리고 일을 한다. 사랑한다는 것을 잊을 만큼 일을 한다. 쟌 느도 그랑이 받은 그 국장의 약속이 이행되지 않은 탓으로 일을 해야만 했다. 그 대목에서 그랑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행하려면 어느 정도 상상력이 필요했다. 피곤한 탓도 있고 해 서 그는 무심한 사람이 되었고, 점점 말이 적어졌고, 젊은 아내가 자기는 사랑을 받고 있다 는 생각을 갖을 수 없게까지 되었다. 일하는 남자, 가난, 천천히 막혀가는 장래, 식탁 주위를 저물어가는 저녁때의 침묵, 그러한 세계에 정열이라는 것이 파고들 여지란 없다. 아마 쟌느 는 고민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 여자는 머물러 있었다. 사람은 고통을 고통인지도 모르고 오 랫동안 괴로워하는 일이 흔히 있는 법이니 말이다. 몇 해가 지났다. 그 후 그 여자는 떠나고 말았다. 물론 그 여자가 말없이 떠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당신을 무척 사랑했어요. 그렇지 만 이제는 나도 피곤해요... 떠나는 것이 행복하지는 않지만 새출발을 하기 위해서는 행복하 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이것이 대략 그 여자가 그랑에게 써 보낸 편지의 내용 이었다. 이번에는 조제프 그랑이 고민했다. 리외가 그에게 일깨워주었듯이 그도 역시 새출발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이 없었다. 다만 그는 아내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편지나 한 장 써 보내서 변명을 해보고 싶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어렵군요." 그가 말했다. "그런 생각을 한 지는 오래 됩니다. 서로 사랑했을 때에는 말을 안해도 서로 이해를 했어요. 그러 나 사람이란 늘 사랑하지는 못하죠. 적당한 시기에 아내를 붙들어둘 수 있는 좋은 말들을 생각해냈어야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랑은 체크 무늬가 새겨진 손수건 비슷한 헝 겊에다가 코를 풀었다. 그러고는 콧수염을 닦았다. 리외는 그를 바라보았다. "실례했습니다, 선생님." 그렇게 그 늙은이는 말했다. "하지만 뭐랄까요?... 나는 선생님을 믿습니다. 선생님과는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감동을 받거든요." 확실히 그랑은 페스트와는 천 리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관심이 없었다. 그날 저녁 리외는 아내에게, 시가 폐쇄되었으나 자기는 잘 있으니, 당신은 계속 몸조리를 잘하고 그리고 당신을 생각하고 있노라는 전보를 쳤다. 시가 폐쇄된 지 삼 주일 후에, 리외는 병원에서 나오다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젊은 남 자를 만났다.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하고 그 젊은이는 말했다. 리외는 아는 것 같기도 했지만 머뭇거렸다. "이런 일이 있기 전에 왔었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습니다. "아랍인들의 생활 상태에 관한 말씀을 들어보려고 했지요. 제 이름은 레이몽 랑베르입니 다." "아! 그렇군요." 리외가 말했다. "그러면, 이제는 특종 기삿거리를 얻으셨군요." 그 사나이는 초조해 보였다.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의사 리외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 러 왔다고 했다. "죄송합니다." 그는 덧붙였다. "그러나 이 도시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고, 우리 신문사의 특파원은 불행하게도 멍텅구리예요." 리외는 중심지에 있는 진료소까지 같이 걸어가자고 권했다. 거기에 몇 마디 전할 말이 있 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흑인가의 골목길을 걸어내려왔다. 저녁 때가 가까워오고 있었으나, 예전 이맘 때쯤은 그렇게도 떠들썩하던 온 시가 이상하게도 적적해 보였다. 나팔 소리만이 서너 차례 아직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는 하늘에서 군인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체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 틈에 깎아 세운 듯한 거리거리를 따라 무어식 가옥들의 푸른 벽, 붉은 벽, 자주 벽들 사이로 걸어가면서, 랑베르는 몹시 흥분해서 말하고 있었다. 그 는 파리에 아내를 두고 온 것이었다. 사실 아내는 아니었지만 아내나 마찬가지였다. 시가 폐 쇄되자 그는 곧 아내에게 전보를 쳤다. 처음에는 그저 일시적인 일이려니 하고 편지 왕래나 할 방도를 궁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랑에 있는 그의 동료들은 어절수가 없다고 말했고, 우 체국에서는 상대를 하지 않았으며, 도청의 한 서기는 그에게 코방귀를 뀌었다. 마침내 그는 2시간이나 줄을 서서 기다린 끝에 '만사 순조로움. 곧 만나리다'라고 쓴 전보를 한 장 접수 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문득 얼마 동안 그 사태가 계속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소개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직업 상 여러 가지 편의가 있다.) 도청의 비서실장과 접촉할 수가 있었는데, 그에게 자기는 오랑 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거기에 머물러 있을 일도 없고, 우연히 자기는 거기에 있게 되 었으므로 혹 일단 나가서 격리 기간을 겪는 한이 있더라도 어쨌든 퇴거를 허가해주는 일이 정당하다고 말했던 것이다. 비서실장은 이에 대해서 잘 알아듣겠으나 예외를 만들 수는 없 으니 두고 보겠지만 사태가 중대하니 만큼 어떤 결정도 내릴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는 것이 다. "그러나 어쨌든" 랑베르는 말했다. "이 도시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아마 그렇겠죠. 그러나 어쨌든 전염병이 오래 계속하지 않기를 피차에 바랄 뿐입니다." 결국에 그는 랑베르를 위로하면서, 오랑에서 흥미있는 기삿거리를 얻게 될지도 모르는 일 이고 무슨 일이건간에 잘 살펴보면 좋은 면이 반드시 있는 법이라고 말해주었다. 랑베르는 어깨를 으쓱 치켜올렸다. 그들은 시가 중심지에 도착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선생님. 내가 기사나 쓰려고 세상에 나온 것은 아닙니다. 아마 어떤 여자하고 살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 것 같습니다. 그것도 당연한 이야기 아닙니까." 어쨌든 일리가 있는 이야기라고 리외는 말앴다. 중심지의 큰 거리에도 여느 때처럼 군중들은 없었다. 몇몇 통행인들이 먼 집을 향해서 서 둘러 가고 있었다. 아무도 웃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그날 발표된 랑스도크 통신사의 보도 가 가져온 결과라고 리외는 생각했다. 24시간이 지나면 우리 시민들은 다시 희망을 품기 시 작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당일에는 숫자가 아직 너무나 뚜렷하게 기억 속에 박혔던 것이다. "나와 그 여자는" 하고 랑베르는 갑자기 말했다. "만난 지가 얼마 안 되고, 서로 잘 이해 하고 있었던 탓입니다." 리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루하겠습니다만" 랑베르가 말을 이었다. "단지 선생님께, 내가 그 고약한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증명서를 한 장 써주실 수 없는지를 여쭈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렇 게 해주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리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리 사이에 뛰어든 사내 아이를 안아서 사뿐 일으켜주었 다. 두 사람은 다시 발걸음을 옮겨서 사열식 광장까지 도착했다. 무화과 가지들과 종려수 가 지들이 먼지가 묻어서 더러워진 '공화국의 여신'상을 가운데 놓고, 먼지를 푹 뒤집어쓰고 조 용히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그 기념상 밑에서 멈추었다. 리외는 신 위에 덮인 뿌연 회 같은 먼지를 한쪽씩 발로 땅을 차서 털어냈다. 그는 랑베르를 바라보았다. 펠트 모자를 약간 뒤로 젖혀 쓰고, 넥타이 밑의 와이셔츠 단추가 떨어지고, 수염도 제대로 깍지 못한 그 신문기자의 모습은 무뚝뚝하고 심술꾸러기 같았다. "심정은 이해합니다." 마침내 리외가 말했다. "그러나 선생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나는 그 증명서를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나는 선생이 병에 걸렸는지 걸리지 않았 는지 모를뿐더러 비록 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내 진찰실을 나가는 순간부터 도청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선생에게 전염이 안 된다고 증명할 수 없으니까요. 게다가 비록..." "게다가 비록요?" 랑베르가 말했다. "게다가 비록 내가 그 증명서를 써드린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겁니다." "왜요?" "왜냐하면 이 도시에는 선생과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수천 명이 있는데도 그 사람들 을 내보내주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페스트에 안 걸린 사람들도요?" "그것은 충분한 이유가 못됩니다. 참 어리석은 이야기지요, 나도 잘 압니다. 그러나 그것 은 모든 사람들에 관한 문제입니다. 사실을 그대로 감수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 고장 사람이 아닌데요!" "지금부터 유감입니다만, 선생은 이 고장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신문기자는 흥분했다. "그것은 정말 인도적인 문제입니다. 서로 잘 이해하고 살고 있는 두 사람에게 그런 따위 의 이별이 어떤 것인지를 아마 선생님께서는 이해하지 못하실겁니다." 리외는 곧 대답하자 않았다. 그러다가 그는 자기는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모든 힘을 다 해서, 그는 랑베르가 아내가 다시 만나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들 결합하게 되기를 원하지만, 포고와 법률이 있고 페스트가 있으니, 자신의 역할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완수하 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니지요." 입맛이 쓰다는 듯이 랑베르가 말했다. "선생님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말씀은 이성에서 나오는 말씀이지요. 선생님은 추상적이십니다." 의사는 공화국의 여신상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자기의 말이 이성에서 나오는 것인지를 어떤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자기는 자명한 이치에서 나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며, 그 양자 가 아무래도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신문기자는 자기의 넥타이를 고쳐 맸다. "그러면, 달리 어떻게 해보란 말씀이신가요? 하지만." 그는 덤벼들 듯이 말을 이었다. "나 는 이 도시에서 나가고 말 것입니다." 의사는 역시 그이 심정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런 일은 자기와는 무관하다고 말했다. "왜요, 관게가 있구말구요." 갑자기 울화가 치밀어서 랑베르가 외쳤다. "내가 선생님을 찾 아온 것도 이번에 취해진 결정에 선생님의 역할이 크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한 건쯤이야, 스스로 만들어놓으신 일인 만큼 좀 손을 써주실 수 있다고 생각 했어요. 그러나 선생님은 마이동풍이시더군요. 남의 일은 생각해본 일이 없으시군요. 생이별 한 사람 생각은 해보지도 않으셨어요." 리외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것들을 고려해보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아! 알겠어요." 랑베르가 말했다. "사회의 복지를 위해서라고 말씀하시려는 거이죠. 그러 나 사호의 복지란 개개인의 행복으로 성립되는 것입니다." "글세." 의사는 방심상태에서 깨어난 듯이 말했다. "그럴수도 있고 또 다를 수도 있어요. 속단해선 안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화내시는 것은 온당치가 못합니다. 만약 선생님이 이 일 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면 나는 정말로 기쁘겠습니다. 단지 나로서는 직무상 해서는 안될 일 이 있으니까요." 참지 못해서 랑베르는 고개를 휘저었다. "그래요, 화를 낸 것은 잘못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시간을 너무 끌어서 죄송합니다." 리외는 앞으로 자기가 하는 일을 그에게 알려줄 것이고, 자기를 원망하지 말라고 당부했 다. 자기들이 서로 일치할 수 있는 면이 확실히 있다는 것이었다. 랑베르는 갑자기 어색해진 모양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얼마 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네, 제 자신이나 선생님이 말 씀하신 것을 보아서는 뭣하지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는 망설이며 말했다. "그러나 선생님이 하시는 일을 찬성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펠트 모자를 이마 아래까지 푹 눌러 쓰고 총총걸음으로 가버렸다. 리외는 장 타루가 묵고 있는 호텔로 그가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잠시 후 의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 신문기자의 행복에 대한 조바심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비난은 정당한가? "선생님은 추상적입니다." 페스트가 더욱 성해서, 일주일에 환자 수가 500명에 이르고 있는 병원에서 보낸 그날이 정말로 추상적이었을까? 그렇다면 불 행 속에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추상이 우리를 죽이기 시작할 때, 우리 는 그 추상에 대해서 정신을 바싹 차려야 한다. 그런데 리외는 그것이 가장 쉬운 일이 아니 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예를 들어서, 그가 책임을 맡고 있는 그 임시병원(이젠는 셋 이 되었다)을 관리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진찰실이 마주보이는 방에다가 접수실 을 하나 꾸미게 했다. 땅을 파서 크레졸 용액의 웅덩이를 만들고, 그 가운데에는 벽돌로 작 은 섬을 만들어 놓았다. 환자는 그 섬으로 운반되어 재빨리 옷을 벗기면 옷은 물속에 떨어 지는 것이었다. 부득이 어떤 환자는 리외에게로 넘어왔다가 다음에 병실로 운반되는 것이었 다. 부득이 어떤 학교의 실내 체육관까지 이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모두 침대가 500 개지만 거의 전부가 차 있었다. 리외 자신의 지휘하에 진행되는 아침의 환자 접수가 끝난 다음, 환자들은 왁친을 맞고 가래톳을 짼 다음에, 리외는 다시 통계를 검토하고는 오후의 진 찰을 위해서 자기 병원으로 돌아오고 밤이 늦어서야 집에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 전날 밤에 도, 리외의 어머니는 며느리에게서 온 전보를 아들에게 건네주다가 그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네, 떨리는군요." 그는 말했다. "그러나 차고 견디는 동안에 좀 마음이 진정되겠죠." 그는 튼튼하고 강단이 있었다. 그래서 사실 아직 그는 피곤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예를 들 면, 왕진 같은 것은 지긋지긋했다. 전염성 열병이라는 진단을 내리는 것은 즉시로 그 환자를 끄려가게 만드는 일이 되었다. 그럴때면 정말 추상과 곤란이 시작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환 자의 가족들은 환자가 완치되거나 죽기 전에는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말 이다. "한번 봐주세요, 선생님!" 타루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일하고 있는 청소부의 어머니인 로레 부인이 그렇게 말했다.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물론 의사는 동정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전화를 걸어야만 했다. 이내 구급차의 사이렌이 울 리는 것이다. 초기에는 이웃 사람들이 창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후에는 부리나케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면 싸움과 눈물과 설복과 결국 추상이 시작되는 것이다. 열과 불안으로 과열된 아파트 속에서 여러 가지 난장판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병자는 끌려갔다. 그때서야 리 외는 그 자리를 뜰 수 있었다. 처음 몇 번은 전화를 거는 데 그치고, 구급차를 기다리지 않고 다른 환자들에게로 달려가 곤 했다. 그러나 가족들이 이제는 그 결과가 뻔한 이별보다는 차라리 페스트와 마주앉아 있 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문을 닫아걸어 버리는 것이었다. 아우성을 치고, 명령이 내려지고, 경찰이 개입하고, 그런 연후에는 무력으로 환자를 탈취하고 만다. 초기 몇 주일 동안 리외는 앰뷸런스가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부터는 의사 한 명에 감독관이 한 사람 씩 자진해서 따르기로 되어 이 환자 저 환자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매일 저녁이 로렌 부인집에 들어간 날 저녁과 비슷했다. 부채와 조화를 장식해 놓은 조그만 아파 트의 방에 들어갔을 때 리외는 마중을 나와 이그러진 미소를 지으면서 환자의 어머니가 하 는 말을 들었다. "설마 요새 떠도는 열병은 아니겠지요." 그래서 그는 홑이불과 속옷을 들치고 배와 넓적다리에 있는 붉은 반점과 부어오른 림프샘 들을 들여다보았다. 그 어머니는 자기 딸의 두 다리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참지 못하고 소리 를 질렀다. 매일 저녁 어머니들은 죽음의 여러 가지 징후를 띤 노출된 배를 앞에다 놓고 넋 을 잃은 모습으로 그렇게 소리쳤고, 매일 저녁 사람들의 팔이 리외의 팔을 붙들고 늘어져 쓸데없는 말들, 약속들, 그리고 눈물을 퍼부었고, 매일 저녁 구급차의 사이렌은 모든 고통과 마찬가지로 공허한 감정의 발작을 일으켰다. 그리고 언제나 비슷한 저녁의 연속을 오래 겪 고 나자, 리외는 끝없이 되살아나는 비슷한 광경의 기나긴 연속 이외에는 아무 것도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 페스트는 마치 추상처럼 단조로웠다. 아마도 단 한가지만은 달라졌을 지도 모르는데 그것은 리외 자신이었다. 그는 그날 저녁 공화국의 여신상 아래서 랑베르가 들어간 호텔 문을 바라보면서 오직 마음속에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벅찬 무관심을 의식하며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황혼이 깃들이면 매일같이 온 시민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와 길거리를 빙빙 도는 그 기진 맥진한 몇 주일이 지나간 후, 리외는 이제는 동정심과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 다. 동정이 아무 소용이 없을 때는 동정하는 것도 피곤해지는 법이다. 그리고 자기 마음이 점점 닫혀져 가는 것을 느끼고, 의사는 온몸이 으스러지는 듯한 그날그날의 유일한 위안만 을 찾았다. 그는 자기의 임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수월해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 기 때문에 그는 그러한 나날을 기뻐했다. 그의 어머니가 새벽 2시에 아들을 맞아들이면서 자기를 바라보는 그의 공허한 눈길을 섭섭해할 때, 그녀는 리외가 그때 받을 수 있는 유일 한 위안을 그야말로 한탄하는 것이었다. 추상과 싸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추상을 닮을 필 요가 있다. 그러나 어떻게 랑베르가 그것을 느낄 수가 있었을까? 랑베르가 알고 있는 추상 은 자기의 행복과 상반되는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사실 리외는 그 신문기자가 어떤 의미에 서는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추상이라는 것이 행복보다 더 강렬하게 나타날 수도 있으며, 그런 경우에는, 그리고 그런 경우에만 추상을 고려에 넣어야 된다는 것 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랑베르에게도 닥쳐오고 말 것이었고, 리외는 그 후 랑베르에 게서 들은 고백에 의해서 자세하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처럼 리외는 꾸준히 그리고 새로운 각도에서 그 기나긴 기간에 걸쳐 우리 도시의 전생활을 이루었던 개개인의 행복과 추상과의 그 우울한 투쟁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추상을 보고 있는 곳에서,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보고 있었다. 페스 트의 첫달이 다 지나갈 무렵에 사실 병세의 현저한 재연과 미셸 영감이 처음 발병했을 때 있었던 예수회파인 파늘루 신부의 열렬한 설교로 암담했었다. 파늘루 신부는 '오랑 지리 학 회' 회보에 자주 기고를 해서 이미 그 이름이 알려졌는데, 그의 금석문사의 고증은 권위 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근대 개인주의에 관한 일련의 강연회를 통해서 어떤 전문가의 강연회 보다도 더 많은 청중을 모은 일이 있었다. 그는 그 강연에서 근대의 방종이나 지난 세기들 의 몽매주의와도 다 거리가 먼, 일종의 까다로운 기독교의 열렬한 옹호자가 되었다. 그때 그 는 청중들에게 엄연한 진실을 아낌없이 털어놓았다. 그런데 그달 무렵에, 우리 시의 성당 고위층에서는 집단 기도주간을 개최함으로써 그들의 독특한 방법으로 페스트와 싸우기로 결정했다. 대중의 신앙심의 표시는 일요일에 페스트에 걸렸던 성 루가에게 드리는 장엄한 미사로써 끝내기로 되어 있었다. 그 기회에 파늘루 신부 는 설교를 해달라고 부탁받았던 것이다. 약 이 주일 전부터 파늘루 신부는 그의 서열로 보 아서 과분한 지위를 차지하게 해준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프리카 교회에 대한 연구를 포기 했었다. 성미가 급하고 열정적인 그는 위촉받은 그 사명을 굳은 결의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 설교가 있기 훨씬 전부터 시내에는 벌써 소문이 퍼져서 그 시기에 그것 나름으로 중요한 날짜를 역사에 기록해놓았다. 기도 주간에는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었다. 그것은 여느 때 오랑시민들이 특별히 신앙심이 두터워서가 아니다. 예를 들면, 일요일 아침엔 해수욕이 미사에 대해서는 심각한 경쟁 대상 이다. 그것은 또한 돌발적인 개종이 그들에게 계시를 준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시 가 폐쇄되고 항구는 차단되어 해수욕이 불가능해진 탓과, 또 한편으로는 갑자기 닥쳐오는 여러 가지 우발사건들을 속으로는 아직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분명히 어떤 변화가 생긴 것만 은 절실히 느끼고 있는 아주 특이한 정신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질병이 곧 가라앉을 것이고, 가족들과 함께 무사히 모면하리라고 희망을 걸고 있었 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런 조바심도 느끼지 않고 있었다. 페스트가 그들에게는 어느 날엔가 는 가버릴 불쾌한 방문자로밖에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온 것이니까 말이다. 겁은 났지만 절망은 하지 않고 페스트가 그들의 생활의 형태처럼 보이게까지 되고, 또 그때까지 이끌어올 수 있던 생활을 잊어버리고 말 그 시기는 아직 아니었다. 요컨대 그 들은 기대를 품고 있었다. 종교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다른 문제들에 관해서와 마찬가지로 페스트는 그들로 하여금 야릇한 정신상태를 부여했다. 그것은 열성과도 거리가 멀고, 무관심 과도 거리가 먼 '객관성'이라는 말로 충분히 정의할 수 있는 정신상태였다. 기도 주간에 참 가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예를 들어서 리외 앞에서, "어쨌든 해가 되지는 않을 테니까요."라 고 말한 신자들 중의 한 사람의 말을 대부분이 구실로 삼고 있었을 것이다. 타루 자신도 자 기 수첩에 이런 경우에는 중국인들의 페스트의 정령 앞에 가서 북을 두드린다는 말을 쓴 다 음에 과연 실제로 북이 각종 예방조치 보다도 나은 효력을 발휘하는지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었다. 그는 다만 그 문제를 해결하자면 우선 페스트의 정령의 존 재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될 것인데 그 점에 관한 우리들의 무지는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의견을 말살시켜버린다고만 덧붙이고 있었다. 어쨌든 우리 시의 성당은 기도 주간 내내 신자들로 거의 가득찼다. 처음 며칠 동안 많은 시민들이 성당 문 앞에 늘어서 있는 종려나무와 석류나무 숲에 아직도 늘어서서 거리에까지 물밀리듯 흘러 나오는 온갖 축원과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차츰차츰 그 청중들은 성당으로 들어가서 덩달아 청충들의 답창에 어색한 목소리로 섞여 들었다. 그래서 일요일에는 상당수의 군중이 앞뜰과 마지막 층계에 넘쳐흘러 제단 앞에까지 밀려들었다. 그 전날부터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밖에 서 있 는 사람들은 우산을 펼쳐 들고 있었으며 항로와 축축한 옷에서 나오는 냄새가 성당 안에 감 돌았다. 그때 파늘루 신부가 설교단에 올라갔다. 그는 키는 중키지만 체격은 딱 바라졌다. 그가 큰 두 손으로 나무틀을 붙들고 설교단의 가장자리에 기대어 섰을 때, 사람들으 눈에는 철테 안경 밑의 그 불그레한 두 볼이 두 개의 붉은 얼룩처럼 올라앉은 두텁고 시커먼 하나의 물체로밖에는 안 보였다. 그는 멀리까지 울 리는 힘차고 정열적인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여러분, 여러분은 불행을 겪고 계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그 불행을 겪는 것이 당연합니다'라고 격렬하게 딱 자르듯이 청 중에게 한 마디를 퍼부었을 때 일종의 소용돌이가 앞뜰의 군중에까지 흩어졌다. 논리적으로 그 다음 말은 그 비장한 전체와 일치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연설이 더 계속 되었을 때 비로소 시민들은 신부가 교묘한 웅변술을 가지고 그 설교 전체의 테마를 마치 한 대 후려치듯이 단숨에 쏟아놓은 것임을 알아차렸다. 사실 파늘루 신부는 그 말 다음에 이집 트에서 있었던 페스트에 관한 '출애굽기'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 재난이 처음으로 역사상에 나타났을 때, 그것은 신의 원수들을 쳐부수기 위해서였습니다. 파라옹 왕 은 영원의 뜻을 거역하고 있었는데 페스트가 그를 굴복시켰습니다. 모든 역사의 태초부터 신의 재난은 오만한 자들과 눈먼 자들을 그 발 아래에 꿇어앉혔습니다. 이 점을 생각하시고 무릎을 꿇으시오." 밖에서는 비가 더 심하게 퍼붓고 완전한 침묵 가운데에서 나온 그 마지막 구절은 유리창 에 부딪치는 빗소리 때문에 더한층 심각하게 들려 강하게 울려서 몇몇 청중들은 잠깐 머뭇 거리다가 의자에서 미끄러져 내려와서 기도대 위에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 본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차례차례로, 간혹 가다가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날 뿐, 다른 소리라고는 없이 모든 청중들이 이내 무릎을 꿇었다. 그때 파늘루가 몸을 다시 일으키 고 깊게 숨을 쉬며 점점 더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오늘날 페스트가 여러분에게 개입하 게 된 것은 반성의 시기가 왔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사람들은 조금도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 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악한 사람들이 떠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주라는 커다란 광 속에 서, 무자비한 재난은 짚과 곡식알을 가리기 위해서 인류라는 보리를 타작할 것입니다. 보리 알 보다는 짚이 더 많은 것이며, 선민들보다는 버림받은 사람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불행은 신이 원하신 것은 아닙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이 세상은 성스러운 자비 위에서 안식하고 있었습니다. 회개하는 것으로써 충분했고 모든 것은 용서되었습니다. 그리고 회개 라면 모든 사람이 든든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때가 오면 사람들은 틀림없이 회개해야겠다 고 느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까지의 가장 손쉬운 길은 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요, 남은 것은 자비로 해결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것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습 니다. 참으로 오랫동안 이 시의 사람들 위에 그 연민의 낯을 보여주시던 신도, 기다리시기에 진력이 나고 그 영원의 기대에서 실망하여 마침내 오랫동안 페스트의 암흑 속에 빠지고야 말았습니다!" 장내에서 어떤 사람이 마치 성난 말처럼 재채기를 했다. 잠깐 멈추었다가 신부는 더 낮은 목소리로 계속했다. "'황금전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롬바르디아의 홈베르트 왕 때에, 이탈리아는 페스트로 인해 황폐화되었는데, 어찌나 극렬했던지 살아남은 사람들이 죽은 사 람들을 매장하기가 어려웠으며, 그 페스트는 특히 로마와 파비아에서 기승을 떨쳤습니다. 그 리고 한 선의 천사가 나타나서 악의 천사에게 명령을 내리면 산돼지 사냥에 쓰는 창을 가진 악의 천사는 집집마다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두드린 수효대로 그 집에서는 사망자 가 났다고 합니다." 파늘루는 여기서 그 짤막한 두 팔을 성당 앞뜰 쪽으로 마치 비에 맞아 펄럭거리는 휘장 뒤의 그 어떤 것을 가리키듯이 뻗쳤다. "여러분" 하고 그는 힘차게 말했다. "바로 그 죽음의 사냥이 오늘날 우리 시의 거리거리에 달리고 있습니다. 그를 보십시오, 루시페르(로마의 신, 마왕의 이름)처럼 아름답고 악처럼 찬란한 그 천사를 보십시오. 여러분의 집 지붕 위에 서 서 오른손에 든 창을 머리 높이까지 쳐들고, 왼손으로 여러분의 집들 중 하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아마도 그의 손가락이 당신의 문을 향해 뻗쳐, 창으로 대문을 두 드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또 이 순간에 여러분의 집에 들어간 페스트가 당신들의 방에 들 어가서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페스트는 참을성 있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마치 이 세 상의 질서 그 자체처럼 태연자약하게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뻗칠 그 손은 어떠한 지상의 힘 도, 저 공허한 인간의 지식조차도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것을 피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아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고통의 피비린내 나는 보리타작 마당에서 두들겨 맞아 여러 분은 짚과 함께 버림받을 것입니다." 여기서 신부는 더한층 풍부한 내용을 그리며 재난의 비장한 이미지를 전개했다. 그는 거 대한 나무토막이 시의 하늘에서 소용돌이치다가 닥치는 대로 후려갈기고, 피투성이가 되어 다시 솟아올라가 마침내 '진리의 수확을 준비하는 파종을 위하여' 인류의 피와 고통을 뿌 리 는 광경을 상기시켰다. 그 긴 연설이 끝나자 파늘루 신부의 머리카락은 이마 위로 내려왔고 설교대에까지 전달될 정도로 온몸을 떨면서 말을 멈추었다가 더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꾸짖는 목소리로 말을 이 었다. "그렇습니다. 반성할 시기가 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일에 하느님을 찾아뵙기만 하면 나머지는 자유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서너 번 무릎을 꿇는 것이 여러분의 그 죄스러운 무관심을 충분히 보상시켜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흐지부지한 존 재는 아닙니다. 그러한 가끔 찾아뵙는 관계로는 하느님의 넘쳐흐르는 애정에 흡족하지는 못 했습니다. 하느님은 여러분을 더 오래 보고 싶어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사랑하시 는 방식이며 그리고 사실을 말하자면 그것만이 사랑하는 유일의 길입니다. 이리하여 여러분 이 찾아뵙기를 기다리다가 지치신 하느님은 인류가 역사를 가진 이후 죄많은 모든 도시를 방문했듯이 여러분에게 그 재난으로 하여금 찾아들게 하신 것입니다. 카인과 그 자식들이, 대홍수 이전의 사람들이,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이, 파라옹과 욥, 그리고 또한 모든 저주받 은 사람들이 그것을 알았듯이 이제 여러분은 죄가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도시가 여러분과 재난을 벽으로 둘러싸고 가두어버린 그날부터 여러분은 그들이 모두 그 러했듯이, 하나의 새로운 눈을 가지고 모든 존재들과 사물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 러분은 이제야 그리고 마침내 근본적인 것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습기찬 바람이 본당까지 불어 들어오고 있었으며, 큰 촛불이 쪼그라들면서 한쪽으 로 쏠렸다. 촛농의 짙은 냄새와 기침 소리와 어떤 사람의 재채기 소리가 파늘루 신부에게까 지 들려왔다. 신부는 높이 평가를 받은 바 있는 그 교묘한 말솜씨로 다시 자기의 논조로 돌 아와서 조용히 말을 이었다. "여러분 중의 대다수는, 그러면 내가 어떠한 결론에 도달하는가 를 궁금해하실 줄 압니다. 나는 여러분을 진리로 이끌어가고 싶으며, 여러 가지 말을 해왔지 만 여러분이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싶습니다. 충고라든가 우애의 손길이 여러 분을 선으로 밀어주는 수단이었던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오늘날 진리란 하나의 명령입니 다. 그리고 구원으로 가는 길은 그 길을 여러분에게 제시하고, 여러분을 그곳으로 밀어주는 붉은 창입니다. 여러분, 바로 여기에 만물에다가 선과 악, 분노와 연민, 페스트의 구원을 마 련하신 성스러운 자비가 마침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괴롭히고 있는 그 재화 가 도리어 여러분을 향상시키고 여러분에게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아비시니아의 기독교도들은 페스트 속에서 영생에 다다를 수 있는 성스러 운 유효한 방법을 보았습니다.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은 확실한 죽음을 얻기 위해서 일부 러 페스트 환자들의 홑이불을 몸에 감곤 했습니다. 아마도 구원에 대한 그러한 광태는 그리 탐탁스러운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거기에는 그야말로 오만에 가까운 유감스러운 조급성 이 나타나 보입니다. 하느님보다 더 서둘러서는 안되며 안쨌든 하느님이 이룩해놓으신 영구 한 질서에 박차를 가한다는 것은 이단으로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러한 예 는 나름대로의 교훈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더욱 총명한 정신에 비추어서, 그것은 모 든 고민 속에 가로놓인 저 영생의 황홀한 빛을 보여주는 가치만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 빛 은 해방으로 가는 황혼의 길을 비추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조금도 실수없게 악을 선으로 바꾸어넣으시는 성스러운 뜻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아직 죽음과 고뇌와 아우성의 진행을 통해서, 그 빛은 우리들을 본질적인 정적으로 이끌어가며, 모든 생활의 원칙으로 이 끌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광대무변한 위안입니다. 나는 그것을 여러분에게 알선해줌으로써 여러분이 이 자리에서 응징의 말을 듣고 가시는 데에 그치지 않고, 여러분 을 진정시키는 말도 잘 듣고 가주시기 바랍니다." 파늘루 신부의 말은 끝난 것 같았다. 밖에서는 비가 그쳤다. 물기와 햇빛이 뒤섞인 하늘은 한결 더 젊은 빛을 광장에다 쏟고 있었다. 거리로부터 사람들의 말소리와 차 지나가는 소리 와 깨어난 도시의 온갖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청중들은 소리를 죽이고 자리를 뜨면서 조 심스럽게 소지품들을 챙겼다. 그러나 신부는 다시 말을 계속하여 페스트가 본래 신에게서 온 것이라는 것과, 그 재화의 징벌적인 성격을 밝힌 이상 자기로서 할말은 끝났으며, 그처럼 비극적인 제목을 다루면서 장소에 어울리지도 않는 웅변으로 끝을 맺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 다. 그가 보기에 모든 일이 청중 전체에게 명백해진 것 같았다. 그는 다만 마르세이유에 대 대적으로 페스트가 유행했을 때, 그 기록자 마티외 마레가 그렇게 구원도 희망도 없이 살다 니 지옥에 빠진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한탄했던 사실에만 언급했다. 아니! 마티외 마레도 소 경이었단 말이다! 그렇기는커녕 파늘루 신부는 단 한 번도 오늘날처럼 모든 사람에게 베풀 어진 신의 구원과 기독교적 희망을 느껴본 일이 없었는데 말이다. 그는 우리 시민들이 매일 같이 겪고 있는 참상과 죽어가는 사람들의 아우성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말이요, 또한 사랑 의 유일한 말을 하늘에 대고 외치기를 모든 희망보다도 더 원하고 있었다. 나머지 일은 신 이 하신다는 것이다. 그 설교가 우리 시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어떤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예심 판사 인 오통 씨는 의사 리외에게 자기가 파늘루 신부의 논조를 '절대로 반박할 수 없는' 것으 로 생각한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명백한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 었다. 다만 그 설교는 그때까지 막연했던 어떤 생각, 즉 자기들은 미지의 어떤 죄악 때문에 상상도 할 수 없는 감금 상태의 선고를 받았다는 생각을 절실히 느끼게 했다. 그리고 그대 로 자기네들의 보잘것없는 생활을 계속해가며 그 유폐생활에 적응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 던 반면에,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그때부터 그 감옥에서 탈출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외부와 차단당한다는 것을 그저 자기네들의 몇 가지 습관을 깨뜨리게 할 정도의 임시적인 불편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알고 감수했던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여름 의 푹푹 찌는 하늘에 덮여서 일종의 격리 상태를 의식하게 되자, 그들은 막연하게나마 그 징역살이가 자기네들의 전생활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저녁때가 되면 냉기와 더불 어 되살아나는 정력이 그들을 간혹 절망적인 행동으로 몰아넣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고 그것이 우연의 일치였던 아니건간에 그 일요일날부터 우리 시에 는 제법 전반적이고도 제법 심각한 일종의 공포가 생겨 혹시나 우리 시민들이 자기네들의 처지에 대한 의식을 정말 망각하지는 않나 하는 의심까지 품게 하였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 시의 분위기는 약간 변화하기는 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변화가 분위기에서 온 것인지 마음속에서 온 것인지 그것이 문제였다. 설교가 있은 지 불과 며칠 후에 교외 쪽으로 가면서 그 일에 관해서 논평을 하고 있었던 리외는, 어둠 속에서 그들 앞에서 제자리걸음만 하며 건들거리고 있는 어떤 남자와 부딪쳤 다. 그때 날이 갈수록 늦게 켜지던 우리 시의 가로등이 갑자기 켜졌다. 그들 뒤쪽에 높이 달 린 전등이 켜지면서 눈을 감고 소리없이 웃고 있는 한 남자가 갑자기 드러났다. 말없이 웃 고 있는 일그러진 그 허여멀건한 얼굴에는 굵은 땀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지나갔다. "미친 사람이죠." 그랑이 말했다. 리외는 그랑을 끌고 가려고 그의 팔을 잡았을 때 그가 히스테릭하게 떨고 있는 것을 느꼈 다. "이제 머지 않아서 우리 마을에는 미친 사람밖에는 안 보이게 될 거예요." 리외가 말했다. 피곤한 탓도 있어서 그는 목이 말라왔다. "뭣 좀 마십시다." 그들이 들어간 조그만 카페에는 카운터 위에 켜놓은 전등 하나만이 실내를 밝히고 있었는 데, 거기서 사람들은 뚜렷한 이유도 없이 불그스름하고 답답한 분위기에 잠겨 나지막한 목 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카운터에 자리를 잡자, 그랑은 놀랍게도 술 한잔 청해서 단숨 에 마시고 나서 자기는 술이 꽤 세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밖으로 나왔을 때 리외는 밤이 신 음 소리로 가득차 있는 듯싶었다. 가로등 위의 컴컴한 하늘에서 들리는 휘파람 소리는 자기 에게 보이지 않는 재앙이 뜨거운 공기를 줄기차게 휘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그랑은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할 일이 있죠." "그렇소." 리외가 말했다. "천만다행입니다." 그러고는 그 휘파람 소리를 듣지 않기로 결심하고 그는 그랑에게 그 일에 만족을 느끼고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글쎄요, 잘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한참 걸리나요?" 그랑은 생기가 도는 모양인지 알코올의 뜨거운 냄새가 목소리에 섞여 나왔다.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죠. 선생님.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어둠 속에서 리외는 그가 두 팔을 휘두르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랑은 무슨 말을 할 준비 를 하고 있는 듯이 보이더니 별안간 술술 풀어놓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말이죠, 선생님, 원고가 출판사로 넘어가는 날 그 출판업자가 그것을 읽고 나서 일어서며 자기네 사원들에게 '여러분 모자를 벗으시오!'라고 하는 일입니다." 그런 난데없는 장담에 리외는 깜짝 놀랐다. 그랑은 모자 벗는 시늉을 하는 모양으로 한 손은 머리로 가져갔다가 팔을 수평으로 뻗었다. 저 높은 곳에서 이상한 휘파람 소리가 더 세차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럼요." 그랑이 말했다. "작품이 완전무결해야 합니다." 비록 문단의 관례에 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지만, 그래도 리외는 일이 뭐 그렇게 간 단하게 되어나갈 것 같지는 않았고, 예를 들어서 출판업자들도 사무실에서 모자를 쓰고 있 지 않을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리외는 입을 다물 었다. 그는 본의는 아니지만 페스트의 신비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랑이 사는 동 네가 가까워지고 있었는데 그 지대는 좀 높았기 때문에 가벼운 산들바람이 그들을 선선하게 해주었고, 또한 그것은 시내의 온갖 소음을 없애주고 있었다. 그동안 그랑은 여전히 계속 말 했지만 리외는 그 호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단지 문제의 작품은 이 미 굉장한 페이지 수에 달했지만 그것을 완전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저자가 한 고생은 몹 시 괴로운 것이었다는 것만은 이해했다. "며칠 저녁, 몇 주일을 단어 하나 때문에... 그리고, 때로는 단순한 접속사 하나 때문에." 거기에서 그랑은 말을 멈추고 의사의 외투 단추를 잡 았다. 말이 떠듬떠듬 그 고르지 못한 잇새로 새어 나왔다. "글쎄 생각 좀 해보세요, 선생님. 엄밀하게 말해서, '그러나'와 '그리고' 중에서 어느 것 을 택하느냐는 퍽 쉬운 편입니다. 그런데 '그리고'와 '그 다음에'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느 냐 가 되면 벌써 까다로워집니다. '그 다음에'와 '이어서'가 되면 더 곤란해집니다. 그러나 분 명 히 가장 곤란한 것은 '그리고'를 쓸 필요가 있느냐를 결정하는 일이죠." "그렇군요, 알겠어요." 리외가 말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랑은 당황한 것 같았고 다시 본래의 자기로 돌아갔다. "용서하십시오." 그는 빠른 어조로 말했다. "오늘 저녁엔 어떻게 된 셈인지 나도 모르겠어 요!" 리외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자기는 그를 도와주고 싶으며, 그의 이야기가 매 우 재미있다고 말했다. 그랑은 좀 기분이 명랑해진 모양으로, 집 앞에 왔을 때 좀 망설이다 가 좀 들렀다 가면 어떻겠냐고 의사에게 말했다. 리외는 그러기로 했다. 식당에 들어간 그랑은 현미경으로나 알아볼 수 있는 글씨로 삭제한 부분이 많이 있는 종 잇장이 가득히 놓인 탁자 위에 리외를 앉게 했다. "네, 바로 이것이죠." 그랑은 의아해하는 리외에게 말했다. "그런데 뭘 좀 마시겠습니까? 술이 좀 있어요." 그랑도 역시 그 모든 종잇장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의 손은 거역할 수 없는 힘에 끌리 듯이 그 중의 한 장을 집어들고, 갓도 안 씌운 전등 앞에 대고 비춰 보았다. 종이가 그의 손 에서 떨리고 있었다. 리외는 그 서기의 이마가 땀으로 촉촉한 것을 보았다. "앉으세요." 그가 말했다. "좀 읽어주시죠." 그랑은 리외를 보더니 고마워하는 고마워하는 듯이 웃었다. "네." 그가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군요." 그는 여전히 그 종잇장을 바라보면서, 잠시 기다리다가 앉았다. 그와 동시에 리외는 윙윙 거리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시내에서 그 재앙 소리에 대답하는 것 같았다. 그는 바로 그 순간에 자기 발밑에 전개되고 있는 그 도시와 그 도시가 형성하고 있는 폐쇄된 세 계와, 그리고 그 도시가 어둠 속에서 질식하고 있는 무시무시한 아우성 소리를 엄청나게도 날카롭게 느끼고 있었다. 그랑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5월 어느 아름다운 아침에, 어느 우아한 말타는 여인이 훌륭한 밤색 암말을 타고 불로뉴 숲의 꽃이 만발한 오솔길을 달 리고 있었다." 다시 조용해졌다. 그러자 고통에 휩싸인 도시의 분명치 않은 소리가 또 들려왔다. 그랑은 종잇장을 놓고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눈을 치켜떴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리외는 처음을 들으니 다음이 어떻게 되나 궁금해진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랑은 신바람 이 나서 그것은 잘못 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손바닥으로 원고를 쳤다. "이것은 그 대충뿐입니다. 내가 상상하고 있는 장면을 완전한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할 때, 나의 문장이 걸어서 산책할 때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하는 보조와 딱 들어맞는 문장이 되는 날에는 보다 알기 쉽고, 특히 처음부터 환상이 환상이니 만큼, 아마도 '모자를 벗으시 오!' 하는 소리가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아직도 할 일은 많다고 했다. 그 문장을 지금 그대로 내놓을 생각은 전혀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때로는 그 문장이 만족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것이 아직도 사실과 완전한 일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 어떤 의미에서는 문장도 안이한 점이 있고, 또 아주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역시 상투적인 문장에 가까운 것도 사실이기 때문 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것이 그랑의 말의 내용이었는데, 그때 창밑에서 사람들이 뛰 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외는 일어섰다. "어떤 것을 만드는지 두고 보세요." 그랑이 말했다. 그리고 창문쪽으로 몸을 돌리고 덧붙 였다. "이런 일이 다 가라앉을 때쯤 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급히 뛰어가는 요란한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리외는 벌써 계단을 다 내려왔는데, 그가 거리로 들어서자 두 사나이가 그의 앞을 지나갔다. 분명히 그들은 입구를 향해서 걸어 가고 있었다. 시민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사실 더위와 페스트의 도가니에서 이성을 잃고, 어 느 틈에 폭력으로 흘러서 관문 감시의 눈을 속여서 시외로 도망쳐보려고 애썼던 것이다. 랑베르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도 역시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공포 분위기에서 벗어나 려고 - 반드시 더 좋은 성과를 거둔 것은 아니었지만 - 훨씬 더 끈기 있고 교묘하게 노력 하고 있었다. 처음에 랑베르는 합법적인 공작을 진행시켰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는 언제나 끈기가 결국 모든 것을 이겨낸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또 어떤 관점에서는 꾀를 짜내야 하 는 것이 그의 직업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수많은 관리들과 인사들을 찾아가 보았는데, 그 들은 모두가 어느 때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유능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문제에 관한 한 능력도 그들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대개가 그들은 은행이라든가 수출이라든가 또는 아그룸(오렌지, 시트룸, 귤 같은 과실의 총칭)이라든가 또는 포도주의 거래라든가 하는 것에 관해서는 아주 정확하고도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수송이라든가 보험에 관한 문제에서는 확실한 증서나 뚜렷한 선의를 계산에 넣지 않고서도 절대로 확실한 지식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모든 사람들에게서 가장 뚜렷한 것은 그 선의였다. 그러나 페스트 문제에 관해서는 그들의 지식은 거의 전무 상태였다. 그런데도 랑베르는 기회 있을 때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 앞에서 자기 사정을 하소연했 다. 그의 주장의 결론은 여전히 자기는 우리의 도시와 무관한 사람이며, 따라서 자기의 경우 는 특별한 검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체로 그 신문기자가 만나본 사람들은 쉽게 그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경우가 몇몇 사람들의 처지와 같은 성질의 것이며, 그가 상상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특수한 사정은 못된다고 설명하기가 일쑤였다. 거기에 대해서 랑베르는 그것이 자기의 주장의 근본을 조금도 변화시킬 순 없다고 대답했다. 사람들은 그 에게, 혼란을 무릎쓰고 그에게만 특전을 베푼다면 전례가 생겨 어떤 특혜조치도 허용하지 않고 있는 현 행정상 규정이 흔들려 어떤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했다. 랑베르가 의사 리 외에게 제시한 분류에 의하면 그러한 종류의 이론을 가진 사람들은 형식주의자의 범주에 속 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도 있는 한편, 말 잘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청원자인 랑베르에게 이런 상태는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을 시켜놓고, 빨리 결정해달라고 하면 그들은 문 제가 다만 일시적인 괴로움에 불과한 것이라고 결정을 내려버림으로써 랑베르를 위로하려 드는 것이었다. 또 그 중에는 도도한 사람들도 있어서 찾아가면 사정의 요점을 적어놓고 가 라고 말하면서 그런 사정에 대해서 규정을 만들어보겠노라고 통고하곤 했다. 시시한 친구들 은 숙박권을 내주겠다는 둥, 값이 싼 하숙집을 알선해주겠다는 등의 말을 하곤 했다. 차근차 근한 사람들은 카드에다 기입하여 잘 분류해두는 것이었고, 일에 몰린 사람들은 두 팔을 들 었고, 귀찮아하는 사람들은 외면했다. 끝으로 가장 수가 많은 전통주의자들은 랑베르에게 다 른 기관을 알려주기도 하고, 혹은 다른 행동을 취해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신문기자는 여기저기 찾아다니느라고 기진맥진하기에 이르렀으며, 면세된 국채신청 권유 며, 식민지 군의 입대 광고판 앞의 인조가죽 의자에 앉아 기다리기도 하고, 혹은 사무원들 역시 기껏 문서정리함이나 서류함 같은 무성의한 대답이나 해주는 사무실들을 드나들다보니 시청이니 군청이니 하는 곳이 어떤 것인지 하나의 정확한 관념을 얻게 되었다. 랑베르가 입 맛이 쓴 모양으로 리외에게 말했듯이, 그러고 다니는 통에 이득이라고는 사태가 진정 어떻 게 되어가는지 모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페스트가 어느 정도 진전되고 있는지 실상 그는 몰 랐던 것이다. 온 시 전체가 당하고 있는 그 형편에서는 하루하루 지나갈 때마다 각자는 만 약 죽지만 않는다면 시련의 종말에 그만큼 가까워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리 외도 그 점은 사실임을 인정치 않을 수 없었지만 역시 그것은 약간 지나친 일반론이라고 생 각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땐가, 랑베르는 희망을 품었었다. 군청에서 기입되지 않은 조사표를 보내오고 거기에 정확하게 기입해내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조사란에는 신분, 가족 환경, 과거와 현재의 수입, 그리고 이력 같은 것이 있었다. 그는 그것이 원주소로 송환될 수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조사라는 인상을 받았다. 어떤 기관에서 들은 - 막연하기는 하지만 - 정보에 의하면 그것은 더 확실해졌다. 그러나 몇 가지 자세한 조사를 해서 그 조사서를 보내온 사무실을 찾아내는 데 성공을 했는데 거기서는 그 조사는 만일의 경우를 위해서 접수된 것이라는 이 야기였다. "무슨 만일의 경우입니까?" 랑베르가 물었다. 그랬더니 그것은 만약 그가 페스트에 걸려 사망하는 경우, 한편으로는 가족에게 통지할 수 있기 위해서고, 또 한편으로는 병원의 비용을 시의 예산에 책정할 것인가, 또는 그의 친 척들에게 부담시켜도 좋은가를 알자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분명히 그것은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 사람과 완전히 절연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사회가 그들 일을 걱정해주고 있 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위안은 될 수 없었다. 보다 주목할 만한 것은, 그리고 결국 랑베르도 주의하게 된 것은 바로 재앙의 도가니에서도 어떤 기관이 여전히 그 사무를 보고 있으며 또 그것이 그 사무를 위해서 설치된 기관이라는 이유만으로 가끔 고위 당국에서도 모르는 동안에 다시 다른 시기에 자발적 방책을 세워간다는 그 움직임이었다. 그 후의 기간 동안은 랑베르에게는 가장 안이하기도 하고 동시에 가장 곤란하기도 한 기 간이었다. 그것은 마비된 기간이었다. 그는 모든 기관을 찾아다니고 별의별 방법을 다 썼는 데 그 방면의 해결할 길은 당분간 막힌 상태였다. 그래서 이 카페 저 카페로 헤매고 다녔다. 아침에는 어느 테라스에 앉아서 미지근한 맥주 한잔을 앞에 놓고, 병이 가까운 시일내에 끝 나리라는 무슨 징조라도 찾아볼까 하는 희망을 품고 신문을 읽었고, 길 가는 사람들의 얼굴 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그 서글픈 표정에 그만 눈을 돌려, 이미 백번째나 맞은편에 있는 여 러 가게들의 간판이나, 이제는 어디에 가도 마실 수 없게 되어버린 이름난 아페리티프 광고 따위를 읽은 다음에, 그는 몸을 일으켜서 시내의 누런 거리거리를 정처 없이 걸어다녔다. 쓸 쓸한 산책에서 카페로, 카페에서 식당으로 옮겨다니다보면 저녁때가 되곤 했다. 어느 날 저 녁 때, 리외는 어느 까페의 문 앞에서 랑베르가 들어갈까말까 망설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바로 상부의 명령으로 전등을 가능한 한 늦게까지 켜지 않고 있는 시각이었다. 황혼 은 마치 회색 물결처럼 방안으로 스며들고 있었고, 장밋빛 황혼은 유리창에 반사되고 있었 으며, 식탁의 대리석은 스며드는 어둠 속에서 무기력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랑베르는 쓸쓸한 실내 한가운데서 짝을 잃은 유령처럼 보였다. 리외는 바로 그가 체념하고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 도시에 감금된 모든 죄수들이 허탈감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 으며, 그 해방을 재촉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인가 해야만 했었다. 리외는 돌아섰다. 랑베르는 또한 정거장에서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곤 했다. 플랫폼에 접근하는 것은 금지되 어 있었다. 그러나 밖으로 나 있는 대합실 문은 열려 있어 몹시 더운 날이면 때로는 거지들 이 몰려들어 시원한 그늘을 즐기곤 했다. 랑베르는 거기에 가서 옛날 시간표라든가 가래침 을 뱉지 말라는 푯말이라든가, 열차내의 공안 규칙 따위를 읽어보곤 했다. 그러다가 그는 한 모퉁이에 자리잡고 앉는다. 실내는 어둠침침했다. 낡은 무쇠 난로 하나가 구식 살수기를 본 뜬 팔각 울타리 안에 벌써 몇 달째 싸늘하게 놓여 있었다. 벽에는 광고가 서너 장 붙어 있 었는데 방돌이나 칸느에서의 즐거운 생활을 선전하고 있었다. 여기서 랑베르는 빈곤의 바닥 에서 볼 수 있는 그 무시무시한 일종의 자유의 감촉을 느끼곤 했다. 그 당시 그로서 견디기 가장 힘들었던 이미지의 하나는, 적어도 리외에게 그가 말한 바에 의하면 파리에 대한 것이 었다. 낡은 석조 건물들과 물의 풍경, 궁전의 비둘기들, 북부의 팡테옹 역 근처의 쓸쓸한 구 역, 그리고 자기가 그렇게까지 사랑하고 있었던 것을 몰랐던 그 도시의 몇몇 장소가 랑베르 를 붙들고 늘어져서 어쩔줄 모르게 하는 것이었다. 리외는 그가 그런 이미지를 그의 사랑의 이미지와 동일시하고 있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리고 랑베르가 그에게 자기는 새벽 4시에 일 어나서 자기가 살던 도시 생각을 하기를 좋아한다고 리외에게 말한 날, 의사는 이내 그가 두고 온 여자를 생각하기 좋아하는 것이라고 자기 경험에 비추어서 해석해버렸다. 그것은 사실 그가 그 여자를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새벽 4시, 보통 사람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비록 보람없는 밤이었다 하더라도 그때는 모두들 잠들어 있는 시간이다. 그렇다, 그 시간에 는 모두들 잠을 잔다. 그리고 또 그 시간은 마음이 편안한 시간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사랑 하는 사람을 그지없이 소유하고 있다거나, 또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 오며, 다시 만나는 날가 지 사랑하는 사람을 결코 깨우지 않을, 꿈도 없는 깊은 잠 속에 빠뜨려 놓을 수 있었으면 하는, 애처로운 애정의 거창한 욕망이기 때문이다. 설교가 있은 후 얼마 안 가서 더위가 시작되었다. 6월말이 되었던 것이다. 그 주일의 설교 일을 인상깊게 만들어주었던 뒤늦은 비가 내린 다음날에는 여름이 대번에 하늘과 집 위에 퍼졌다. 뜨거운 강풍이 먼저 일더니 하루 종일 불어 벽이란 벽들을 말려놓았다. 날씨가 안정 되었다. 더위와 햇빛의 끊임없는 물결이 하루 종일 시가에 넘쳐 흘렀다. 아케이드가 있는 거 리들과 아파트 밖에서는 시내에 가장 눈부신 반사 속에 있지 않은 곳이란 하나도 없었다. 태양은 우리 시민들을 거리의 구석구석까지 뒤쫓아서, 멈추어 서기만 하면 내리쬐는 것이었 다. 그 첫더위가, 매주 700에 가까운 희생자 수의 상승과 일치했기 때문에 일종의 낙심이 우 리 시를 휘어잡았다. 교외의 평탄한 거리거리와 테라스 사이에 있는 풀이 꺾였고, 주민들이 항상 문앞에 나와서 살던 그런 동네까지도 문이란 문은 모두 닫히고 덧문들이 첩첩이 잠겨 있어서 어떻게 페스트나 태양을 막으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몇몇 집에서는 신 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전에는 그런 일이 생기면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서서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 흔히 눈에 띄었었다. 그러나 그렇게 오랜 시일을 두고 시달린 뒤라 사람들마다 심장이 굳어버린 듯했으며, 모두들 마치 그런 것은 인간의 선천적인 언어 라는 듯이 그 곁을 걸어다니고 그 곁에서 살고 있었다. 시 입구에서 일어난 소동은, 그 소동 에 헌병들이 무기를 사용해야만 했었는데, 일종의 어수선한 동요를 자아냈다. 부상자가 생긴 것도 확실했는데 그러나 시내에서는 사망자가 났다는 말이 돌았으며 더위와 공포로 모든 것 이 과장되었다. 어쨌든 불만이 커가고 있었던 것과, 당국에서도 최악의 경우를 두려워해서 시민들이 그 재화 밑에서 억눌려 있다가 반항에 휩쓸리게 될 경우에 취할 조치를 신중하게 강구했었던 것은 사실이다. 신문에는 도시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는 포고문이 거듭 발 표되고, 위반자를 엄벌에 처한다는 위협을 하고 있었다. 순찰대가 시내를 돌고 있었다. 흔히 쓸쓸하고 확확 달아오르는 포도 위에 말굽 소리를 울리며 기마순찰대가 닫힌 창문들이 늘어 선 사이로 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순찰대가 지나가고 나면 수상하고 무거운 침묵이 무시 무시한 시가지를 다시 내리누르는 것이었다. 가끔씩 최근에 내려진 명령으로 벼룩을 전파시 킬 위험성이 있는 개와 고양이들을 쏘아 죽이는 특별임무를 맡은 부대의 발포 소리가 들려 오곤 했다. 그 메마른 포성은 시내의 긴장된 분위기를 조성했다. 더위와 침묵 속에서 그리고 시민들의 겁 먹은 마음속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모든 것이 더 욱 중대하게 생각되었다.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하늘의 빛깔이나 흙 냄새가 처음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느껴졌다. 여름이 정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 두들 더위가 전염병을 더 성하게 할 것이라고 겁을 먹고 있었다. 저녁 하늘의 제비 울음 소 리도 더 높은 곳에서 가냘프게 들렸다. 그것은, 우리 고장에서는 지평선이 멀어지는 6월의 황혼과는 이미 어울리지 않는 울음 소리였다. 시장의 꽃들도 봉오리가 아니라 활짝 피어 있 었고 아침에 다 팔리고 나면, 그 잎들이 먼지가 켜켜이 앉은 거리에 뒤덮였다. 수천 가지 꽃 속에 시달릴 대로 시달려, 이제는 페스트와 더위와의 이중의 압력에 차차로 짓눌려 오그라 져 들고 있다는 것이 눈에 띄었다. 모든 시민들에게 있어서 그 여름 하늘, 먼지와 권태의 빛 깔로 창백해지고 있던 그 거리거리는, 매일 시의 공기를 무겁게 만들고 있던 100여 구의 시 체와 똑같은 무시무시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줄기찬 태양, 잠과 휴가의 맛을 지닌 그 시간시간이, 이제는 전같이 물과 살의 향연을 유발시키지는 않았다. 반대로 그것들은 밀폐되 고 고요한 도시에서 공허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것들은 행복한 계절들의 그 구리빛 같은 광 채를 잃어버렸다. 페스트의 태양이 모든 빛깔을 삼켜버렸으며, 온갖 기쁨을 쫓아버렸던 것이 다. 그 질병이 가져온 엄청난 혁명 중의 하나는 그것이었다. 모든 시민들은 여느 때면 경쾌한 기분으로 여름을 맞이했었다. 그때면 도시는 바다를 향해서 열리고 젊은이들을 해변으로 쏟 아놓았다. 그와 반대로 이번 여름에는 가까운 바다가 막히고, 육체는 이미 그 기쁨을 누릴 권리가 없었다. 그러한 조건 밑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역시 타루가 그 당시의 우 리들의 생활을 충실하게 묘사해주고 있다. 그는 물론 페스트가 진행되는 경로를 더듬어 갔 으며, 그 병의 첫 고비는 라디오가 매주 몇백 명의 사망자 수 보도를 집어치우고 92명, 107 명, 120명이라는 보도를 하기에 이르렀을 때를 계기로 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신문 과 당국은 페스트에 관해서 가장 교묘한 재주를 부리고 있다. 그들은 130이 910에 비해서 큰 수가 아니라는 점에서, 페스트로부터 득점을 빼앗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는 또한 그 병의 비장한, 또는 연극 비슷한 일면도 상기시켰다. 예를 들면 덧문이 닫힌 인기척 없는 어 떤 동네에서 갑자기 머리 위의 창문을 열어젖히고 큰소리로 두 번 외치더니, 짙은 그늘에 잠긴 방에다 다시 덧문을 닫아 걸고 말았다는 어떤 여자의 이야기같은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는 박하정제가 약방에서 동이 났는데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갑작스런 전염에 대비해 그것을 빨아먹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자기가 좋아하는 인물들도 묘사하고 있었다. 그는 앞서 나온 고양이 장난을 하 는 그 작달막한 노인도 역시 비극 속에 살고 있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실 어느 날 아침에 총 소리가 몇 방 났는데 타루가 묘사했듯이, 가래침 같은 납덩어리 몇 개가 대부분 의 고양이들을 죽여 나머지 겁먹은 고양이들이 그 거리를 떠나고 말았다. 바로 그날, 그 작 달막한 노인은 습관대로 그 시간에 발코니에 나타났는데, 깜짝 놀라서 몸을 굽히고 길 저 끝까지 살펴보더니 더 기다리기를 단념해버렸다. 그는 손으로 발코니 난간을 찰싹찰싹쳤다. 그는 또 기다리다가 종잇조각을 갈기갈기 찢다가 다시 나왔다가 잠시 후에 화가 나서 창문 을 닫아버리고 들어가고 말았다. 그 후 며칠 동안 같은 장면이 되풀이되었다. 그러나 노인의 표정에서 슬픔과 혼란의 기색이 저점 뚜렷하게 엿보였다. 한 주일 만에, 타루는 매일처럼 나 타나는 그 늙은이의 모습을 기다렸으나 허사였다. 창문들은 잘 이해할 수 있는 슬픔 속에 굳게 닫힌 채로 있었다. '페스트 기간중에는 고양이에게 침을 뱉지 말 것' 이것이 타루의 수 첩속에 적힌 결론이었다. 한편, 타루는 저녁에 돌아올 때는 으레 홀에서 왔다갔다 거닐고 있는 야경원의 침울한 얼 굴과 마주치곤 했다. 그 친구는 누구를 만나건 자기는 이번 일을 알고 있었다고 뇌까리는 것이었다. 타루는 그의 예견을 인정하고 그러나 그때 지진 운운하던 그의 말을 상기시키자 그 늙은 야경원은 타루에게 대답했다. "아! 정말 지진이기나 했던들 말입니다! 한번 와르르 흔들리면서 그저 말없이,...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숫자를 세어보면 그것으로 끝나고 말 죠. 그러나 이런 망할놈의 병은! 걸리지 않은 사람까지도, 마음에 걸려 있단 말입니다." 지배인의 걱정도 그보다 덜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여행자들도 시를 떠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가 시 폐쇄령이 내리자 호텔에 묶이게 되었다. 그러나 차츰 전염병이 오래 끄는 동안에 많은 사람들은 친구 집에 기숙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호텔의 모 든 방이 가득찼던 바로 똑같은 이유로 방들에 그때부터 텅텅 비게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도시에는 새 손님이라고는 더 이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루는 계속해서 극소수 의 숙박자의 한 사람이었는데 지배인은 틈만 있으면 자기는 최후의 손님까지 기분좋게 대접 할 마음이 없었던들 벌써 오래전에 호텔 문을 닫았을 것이라고 번번이 늘어놓았다. 그는 자 주 타루에게 그 병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대략 짐작해보라고 청했다. "내가 듣기에는" 타루는 말했다. "이런 종류의 병은 추위와는 상극이랍니다." 지배인은 미칠 지경이었다. "아 니, 여기서는 실제로 추위가 없는데요, 선생님, 어쨌든 아직 몇 달 더 있어야겠군요." 그는 또한 한참 동안 여행자가 이 시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으리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 놈의 페스트가 여행 취미를 파멸시켰다. 잠깐 동안 보이지 않던 부엉이 신사 오통 씨가 식당에 나타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유식한 개와 같은 그의 두 아들만 데리고 왔다. 소문에 의하면 아내는 친정 어머니를 간호했고 다 음에는 그 장례식에 참여하고 나서 지금은 격리시간을 치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땅치 않습니다." 이렇게 지배인은 타루에게 말했다. "격리기간이건 아니건 그 여자는 의심스러웠어요. 결국 저 사람들 모두 의심스러워요." 타루는 그에게, 그런 의미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의심스러워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배 인은 그 점에 대해서는 아주 치밀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아닙니다. 선생님, 선생님이나 나는 의심스러울 데가 없지만 그네들은 그렇지 않거든요." 그러나 오통 씨는 그렇다고 달라지지는 않았고 이번에 이 페스트도 그에게는 별수가 없었 다. 그는 여전한 태도로 식당 안에 들어와서 자기 애들을 앞에 앉히고 자기도 앉아서, 여전 히 점잖고 꾸짖는 말투로 아이들을 다루고 있었다. 다만 어린 아들만은 얼굴이 달라졌다. 제 누이처럼 검은 옷을 입고 마치 자기 아버지의 작은 그림자처럼 보였다. 오통 씨를 좋아하지 않는 야경원이 타루에게 이렇게 말한 일이 있었다. "허! 저 사람은 옷을 입은 채 거꾸러질거예요. 그러면 옷을 갈아입을 필요도 없죠. 곧장 가면 되니까요." 파늘루 신부의 설교에 관한 이야기도 적혀 있었는데, 다만 이러한 주가 적혀 있었다. '나 는 그 측은한 열정을 이해한다. 재난의 시초와 그것이 끝났을 때, 사람들은 으레 다소의 수 식어를 가하는 법이다. 첫째 경우에는 습관이 아직 상실되지 않았고, 두 번째 경우에는 습관 이 이미 회복되어 있다. 불행의 순간에서야말로 사람들은 진실에, 즉 침묵에 익숙할 따름이 다. 기다려보자.' 끝으로 타루는 의사 리외와 긴 대화를 했다고 적어놓고, 거기에 대해서 그는 다만 그 대 화가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만 썼다. 거기에 덧붙여서 리외의 어머니의 맑은 갈색 눈동자 에 대해 언급하고, 그처럼 착한 마음이 드러나고 있는 눈초리는 언제나 페스트를 이겨내리 라고 리외의 어머니에 대한 묘한 단언을 내린 다음에, 끝으로 리외가 돌보고 있는 천식을 앓는 노인에 대해서 상당히 긴 구절을 할애하고 있었다. 그는 의사와 환담을 한 다음날에 함께 그 노인을 보러 갔었다. 노인은 비웃는 태도로 두 손을 비비면서 타루를 맞았다. 그는 두부콩 냄비 두 개를 밑에 놓고 베개에 기대서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아! 또 한 분이 오 셨군요." 타루를 보더니 그렇게 노인은 말했다. "세상이 거꾸로 됐소. 환자보다도 의사가 더 많다니. 빨리빨리 죽어가는군요. 그렇죠? 신부 말이 옳아요, 다 그래 싸지요." 그 다음날 타 루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다시 찾아갔다. 그의 수첩에 기록된 것을 믿는다면, 그 천식을 앓는 노인은 잡화장사꾼이었는데, 쉰 살에 그 장사도 집어치운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의 천식은 그래도 서서 견딜 수도 있는 것이었다. 소액의 연금 덕분으로 일흔 다섯이 되는 오늘날까지 거뜬하게 살아왔던 것이다. 그는 시계 만 보면 못 참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사실 집안을 뒤져보아도 시계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시계는" 그는 말했다. "비싸기만 하고 어리석은 물건이죠." 그는 시간을, 특히 그에게는 유 일한 중대한 식사 시간을, 눈을 떴을 때 한쪽에 놓인 완두콩이 가득 차 있는 두 개의 냄비 로 짐작하였다. 그는 언제나 변함없이 열심히 규칙적으로 콩을 하나씩하나씩 다른 냄비에 옮겨 담았다. 이처럼 그는 냄비로 측정되는 하루 속에서 자기의 지표를 찾는 것이었다. "냄 비를 열다섯 번 채울 때마다 한 끼를 먹어야죠. 아주 간단합니다." 그는 말했다. 그런데 그의 마누라의 말을 믿는다면, 그는 아주 젊어서부터 그러한 기질을 보였다는 것 이다. 사실 아무것도 그의 흥미를 끌어본 게 없었다. 일도, 친구도, 카페도, 음악도, 여자도, 산책도 다 그랬다. 결코 자기가 사는 도시에서 밖으로 나가본 일이 없었다. 다만 언젠가 집 안일로 알제리에 갈 일이 생겨서, 오랑 바로 옆 정거장까지 갔는데 더 이상 모험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첫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은거생활에 놀란 표정을 한 타루에게, 그는 종교에 의하면 한 인간의 전반생 은 상승이고 그 후반생은 하강이며, 하강기에 있어서 인간의 하루하루는 이미 그의 것이 아 니라 언제 빼앗길지도 모르는 일이므로 전혀 행동을 취하지 않는 것이 바로 최선의 길이라 고 대강 설명했던 것이다. 게다가 모순도 두려워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에 타루에게 신은 확실히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존재한다면 신부라는 것은 필요없다고 말을 했으니 말 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 표시한 몇 가지 그의 생각을 듣고 타루는 그 철학이 그가 속해 있 는 교구의 빈번한 기부금 모집에서 생긴 그의 기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노인에 대한 인상에 결정적 영향을 준 말은 노인의 절실한 소원 때문이 었는데, 그 노인이 말을 들어주는 상대 앞에서 여러 번 되풀이했다. 즉 그 소원이란 늙도록 살다가 죽는 것이었다. "그는 성인일가?" 타루는 자문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다, 성덕이라는 것이 습관의 총체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타루는 페스트에 휩쓸린 우리의 도시의 어떤 날에 대해 꽤 자세한 묘사를 했는데, 거기서 이번 여름 동안 우리 시민들의 관심사와 생활에 대한 하나의 정확한 생각을 얻을 수가 있었다. '주정꾼들 이외에는 아무도 웃는 사람들이라고는 없다.'고 타루는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너무 웃는다.' 그러고는 그날의 묘사를 시작했다. <새벽이면 산들바람이 아직 쓸쓸한 거리를 스쳐간다. 밤의 죽음과 낮의 고뇌와의 어중간 한 사이에 있는 그 시간에는 페스트도 잠시 기세를 멈추고 숨을 돌리는 듯싶었다. 가게란 가게는 문이 닫혀 있다. 그러나 그 중 몇몇 상점에는 '페스트로 인해 폐점'이라는 푯말이 나 붙어, 다른 가게들과는 달리 곧 개점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신문 파는 사람들이 졸고 있어서 아직 새로운 소식을 외쳐대지는 않지만, 그 대신 길모퉁이에 등을 기 대고 몽유병 환자 같은 몸짓으로 신문을 가로등 앞에 벌려 놓고 있다. 이제 곧 첫 전차 소 리에 잠이 깨어 그들은 거리거리로 흩어져서, '페스트'라는 글자가 커다랗게 눈에 띄는 신문 지들을 팔 끝으로 휘젓고 다닐 것이다. '페스트는 가을까지 끌 것인가?' 'B교수가 부정적 으로 대답' '사망자 124명, 페스트 발생 94일째의 현재 집계'> <점점 심각해진 용지난 때문에 어떤 간행물들은 부득이 지면을 줄이지 않을 수 없었는데 도 불구하고, 또 '병역시보'라는 또 하나의 신문이 창간되었다. 그 신문은 '병세의 진행 또 는 그 쇠퇴에 관해 시민들에게 보도를 하고, 병의 진도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증언을 제 공하며, 유명 무명을 불문하고, 재난과 투쟁할 의욕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지상을 통해서 격 려하고, 주민의 사기를 북돋우며, 당국의 지시를 전달하는, 즉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를 엄 습한 불행과 효과적으로 싸워 나가기 위해 모든 사람의 선의를 집중시키는 것'을 사명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신문은 페스트 예방에 확실한 효력을 발휘하는 새로운 약품 들을 광고하는 데에 급속도로 한정되고 말았다.> <아침 6시경, 그 모든 신문들은 개점하기 한 시간 전부터 가게 앞에 늘어서 있는 행렬 속 에서 팔리기 시작하여 교외 방면에서부터 만원이 되어 들어오는 전차들 속에서 팔린다. 전 차가 유일한 교통기관이 된 탓으로 승강구의 계단, 바깥 손잡이에 이르기까지 차가 터지도 록 싣고 가까스로 달리고 있다. 신기한 일은 그런 중에도 승객들은 가능한 한 서로간의 전 염을 피하려고 서로 등을 대고 있는 것이다. 정류장에서마다 전차가 남녀 승객을 더미로 쏟 아놓으면 그들은 급히 흩어져 혼자가 된다. 기분이 좀 나쁘다 해서 싸움이 빈번히 벌어지곤 하는데 그런 기분은 만성이 되고 말았다.> <첫 전차들이 지나간 후 도시는 차츰차츰 잠에서 깨어나 일찍 문을 여는 맥주 집들이, '커피 매진' 설탕 지참' 등이 씌어진 쪽지가 붙은 카운터가 보이도록 문을 연다. 그러고 나 서 가게들이 열리면 거리가 활기를 띤다. 동시에 햇빛이 솟아오르고, 더위가 차츰차츰 7월의 하 늘을 뿌우옇게 만든다. 그 시간이 바로 아무 할 일 없는 사람들이 한길에 나가보는 시간인 것이다. 대부분은 자기네들의 사치를 늘어놓음으로써 페스트를 털어버리는 것을 일삼고 있 었다. 매일 11시경에 여러 중심가에는 청춘 남녀들의 행렬이 밀려나와 커다란 불행의 와중 에서도 솟아나는 삶에 대한 열정을 거기에서 느꼈다. 질병이 확대되면 도덕도 역시 허물어 질 것이다. 우리는 무덤 근처에서 벌어진 그 밀라노의 축제를 다시 보게 될 지경에 이를 것 이다.> <정오가 되면 식당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만원이 된다. 이내 자리를 못잡은 사람들이 떼 를 지어서 문 앞에 모인다. 태양은 극도로 다다른 더위로 그 빛을 잃는다. 식사를 하려는 사 람들은 햇볕으로 바짝바짝 타는 길가에서, 커다란 회전 커튼의 그늘 속에서 차례를 기다리 고 있다. 식당에 몰려드는 것은 대개가 양식 문제가 간단히 해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당 에도 전염에 대한 불안은 여전히 남게 된다. 동거자들은 자기네 식기를 깨끗하게 닦느라고 시간을 많이 소비한다. 얼마 전만 해도 몇몇 식당에서는 '우리 식당에서는 식기를 끓는 물 에 소독합니다.'라는 광고를 붙였었다. 그러나 차차 그들은 모든 광고를 중지했다. 손님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손님들은 돈을 흥청망청 쓴다. 최고급 또는 최고급 이라고 여겨지는 술, 가장 비싼 안주, 그렇게 시작해서 걷잡을 수 없는 경주가 벌어진다. 또 어떤 식당에서 한 손님이 속이 불편해서 얼굴이 새파랗게 되어, 일어서서 비틀거리며 급히 문쪽으로 나간 탓으로 그 곳이 발칵 뒤집힌 일도 있었다. > <2시경이 되면, 이 도시는 차츰차츰 비어간다. 그 시간이야말로 침묵과 먼지와 햇볕과 페 스트가 거리에서 서로 만나는 시각이다. 잿빛의 커다란 집들을 따라 끊임없이 더위는 달음 질친다. 오랜 감금의 시간이다. 그 시간은 인구가 많고 시끄러운 도시에 벌겋게 불붙는 저녁 때가 되어야 끝난다. 더위가 시작도니 초기의 며칠 동안, 가끔 그리고 왜 그런지 모르게 저 녁대는 쓸쓸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선선한 기운이 돌기만 해도 희망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종 의 안도감을 갖다 준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거리로 나가서 지껄이기에 열중하거나, 싸우 거나, 혹은 정염에 불타는 눈초리를 한다. 거리는 7워르이 붉은 하늘 아래 쌍쌍의 남녀들과 아우성 소리로 가득 차서 숨가쁜 밤을 향해 표류한다. 매일 저녁 한길에서 펠트 모자에 나 비 넥타이를 맨 노인이 군중들 틈으로 뚫고 다니며,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그에게로 오라." 하고 되풀이 소리쳤으나 귀기울이는 사람들은 없었다. 아무런 소용도 없이 모든 사람들은 그와 반대로 잘 알 수 없는 그 무엇, 아마도 신보다 더 긴요한 모양인 그 무엇을 향해서 발 길을 재촉했다. 그들이 초기에 이번 질병도 다른 질병과 같은 것일 거라고 생각했었을 때에 는 종교도 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 은 향락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낮에 사람들 얼굴에 그려져 있었던 그 모든 고 뇌가 스스로 풀어져, 뜨겁고 먼지투성이의 황혼 속에서 일종의 흉포한 흥분, 모든 민중을 열 로 들뜨게 하는 서투른 자유에 낙착하고 만다.> <그리고 나도 그들과 마찬가지다. 그래 어쨌단 말이냐! 나 같은 인간에게는 죽음쯤은 아 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옳다는 하나의 사건에 불과하다.> 타루가 자기의 수기에서 말하고 있는 면담은 타루 자신이 요청했던 것이었다. 리외가 그 를 기다리고 있었던 날 저녁때, 의사는 자기 어머니가 식당 한구석에서 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집안 일을 다 끝내면 바로 거기서 나머지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 다. 그녀는 두 손을 포개어 무릎에 얹고 기다리고 있었다. 리외는 어머니가 기다리는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자기가 나타나면 어머니의 얼굴에 어떤 변 화가 생기는 것이었다. 근면한 일생이 그 얼굴에 침묵을 새겨 놓았던 모든 것이 그때면 생 기를 띠는 듯싶었다. 그러고는 그녀는 다시 침묵에 잠기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그녀는 창너 머로 이제는 쓸쓸해진 거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밤의 불빛은 삼분의 이는 줄어들었다. 띄엄 띄엄 아주 약한 전등 하나가 그 도시의 어둠 속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전기 제한은 페스트가 기승을 부릴 동안 내내 할 모양이지?" 리외 어머니가 말했다. "아마 그럴거예요." "겨울까지 계속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되면 서글플거야." "그럼요." 리외가 말했다. 그는 어머니의 시선이 자기 이마에 와 닿는 것을 보았다. 그는 늘 며칠 동안의 불안과 과 로로 인해서 자기 얼굴이 여윈 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은 일이 잘 안됐니?" 리외 어머니가 물었다. "아! 늘 그래요." 늘 그렇다. 파리에서 보내온 새 혈청이 처음 것보다 효력이 덜한 듯 싶었으며, 통계 숫자 가 상승하고 있었다. 예방 혈청이 이미 감염된 가족들 이외의 사람들에게 접종할 가능성은 여전히 없었다. 그 사용을 일반화하자면 대량생산이 필요했다. 가래톳은 대부분이 굳어지는 계절이라도 만났는지 칼로 째기가 어려웠으며, 환자들을 몹시 괴롭혔다. 그 전날 밤부터 그 병의 새로운 형을 보여주는 케이스가 둘이나 생겼다. 이제 페스트는 폐장성이 되었던 것이 다. 바로 그날 어느 회의에서 기진 맥진한 의사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지사 앞에서 페장 페스트인 경우에는 입에서 입으로 옮는 전염을 막기 위해서 새로운 조치를 요구하는 승낙을 받았던 것이다. 늘 그렇듯이 여전히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어머니를 보았다. 갈색의 아름다운 시선이 리외의 마음속에 애정에 넘쳤던 지난 시 간을 연상시켰다. "무서우세요, 어머니?" "내 나이가 되면, 별로 무서운 게 없단다." "해는 길고, 저는 여기에 붙어 있을 틈이 없으니 말입니다." "네가 꼭 돌아올 줄 알고 있으니 기다리는 것쯤은 괜찮다. 그리고 네가 집에 없으면 나는 네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단다. 무슨 소식이라도 있니?" "네, 다 잘되고 있어요. 최근의 전보를 보면요. 그러나 저를 안심시키려는 것인 줄은 알고 있어요." 문에서 초인종이 울렸다. 의사는 어머니에게 미소를 짓고 문을 열러 갔다. 침침한 층계참 에 타루가 회색옷을 입은 커다란 곰처럼 서 있었다. 리외는 방문객을 책상 앞에 앉게 했다. 그 자신은 안락의자 뒤에 그냥 서 있었다. 그들은 전등이 하나밖에는 켜져 있지 않은 방에 서 사무 책상 너머로 마주보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하고" 타루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리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보름이나 한 달 후에, 선생은 이곳에서 아무 쓸모가 없게 되실 겁니다. 선생은 사태에 뒤 떨어져 계십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리외가 말했다. "보건위생과의 조직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선생은 사람과 시간이 부족해요." 리외는 또 한 번 그것이 사실임을 인정했다. "나는 군에서 일반 구조 작업에 튼튼한 남자들을 강제로 참가시키기 위해서 일종의 민간 봉사대를 조직할 계획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러나 이미 불만이 커져서 지사가 주저하고 있습니다." "왜 의용대의 모집을 요청하지 않나요?" "요청했지요. 그러나 결과가 신통치 않군요." "사람들은 확신도 없이 당국에 요청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상상력입 니다. 그들은 결코 재난의 정도에 보조를 맞출 줄을 몰라요. 그래서 그들이 상상해낸 치료제 가 겨우 두통 감기약 정도거든요. 만약 그들에게 맡겨두었다가는 그들은 죽고 말거예요. 우 리도 함께 죽는 것이죠." "그럴 수도 있죠." 하고 리외가 말했다. "다만 말씀드려야 할 것은 그래도 그들은 죄수들 을 쓸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험한 일 같은 데에 말입니다." "그것은 일반인이 했으면 더 좋겠는데요."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나 왜 이런 것이 문제가 됐나요?" "나는 사형선고가 두렵습니다." 리외는 타루를 보았다. "그래서요?" 그는 물었다. "그래서 나는 지원 보건대를 조직하기 위한 안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 일을 제게 맡겨주 시고 당국은 빼기로 합시다. 게다가 당국은 할 일이 태산 같습니다. 여기저기 친구들이 있으 니 우선 그들이 중심이 되어주겠죠. 그리고 나도 물론 거기에 참가하려고 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리외가 말했다. "반갑게 받아들이다뿐이겠습니까. 더구나 이러한 일에는 협조가 필요합니다. 그 착상을 군에서 수락하도록 책임을 지겠습니다. 게다가 도에서는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닙니다. 그러나..." 리외는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이런 일은 생명이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요. 그러니 좌우간 이 단 알려드려야지요. 잘 생각해보셨나요?" 타루는 잿빛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파늘루의 설교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선생님?" 자연스럽게 질문이 나왔고 리외도 자연스럽게 거기에 대답했다. "나는 너무나 병원 안에서만 살아서 단체 처벌 같은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 독교 신자들은 현실적으로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가끔 그런 말을 하더군요. 보기보다는 좋은 사람들이죠." "그래도 선생님은 파늘루처럼 페스트에도 좋은 점이 있고 그것은 사람을 각성시키고 사람 으로 하여금 무언가 생각하게끔 한다고 생각하고 계시겠죠." 리외는 답답해서 머리를 흔들었다. "이 세상의 모든 병이 그렇죠.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불행 중에서 진실인 것은 페스트에 서도 역시 진실입니다. 허기야 몇몇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구실도 할테죠. 그러나 병이 가 져오는 비참과 고통을 볼 때, 페스트에 대해서 체념한다는 것은 미친 사람이거나 눈먼 사람 이거나 비겁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리외는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타루는 그를 진정시키려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좋습니다." 어깨를 으쓱하면서 리외가 말했다. "그런데 아까 그 대답을 안하셨습니다. 잘 생각해보셨나요?" 타루는 안락의자에서 좀 편안하게 고쳐 앉아 머리를 불빛 속으로 내밀었다. "선생님은 신을 믿으시나요?" 질문은 역시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리외가 망설였다.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나는 어둠 속에 있고, 거기서 밝게 보 려고 애쓴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특이하게 보이지 않게 된 것이 벌써 오래 됩니다." "그 점이 파늘루와 다른 점이 아닌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파틀루는 학자입니다. 그는 사람이 죽는 것을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진리 운운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아무리 시시한 시골 신부라도 자기 교구 사람들과 접촉이 잦고, 임종하는 사람의 숨소리를 들어본 사람이면 나처럼 생각할 겁 니다. 그는 참변의 훌륭한 이유를 밝히기 전에 우선 치료부터 할 겁니다." 리외가 일어섰다. 지금 그의 얼굴은 어둠 속에 들어가 있었다. "그만해둡시다." 그가 말했다. "대답도 하지 않으려고 하니." 타루는 의자에서 몸을 움직이지도 않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대답삼아 질문이나 하나 할까요?" 이번에는 의사가 미소를 지었다. "수수께끼를 좋아하시는군요." 그가 말했다. "자, 해보시죠." "선생님 자신은 신도 믿지 않으시면서 그렇게까지 헌신적이십니까? 선생님의 답변이 제가 대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타루가 말했다. 어둠 속에서 얼굴을 내밀지도 않고 의사는 이미 대답을 했다고 말했다. 만약 자기가 전능 한 신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자기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것을 단념하고 그런 수고는 신에게 맡겨버리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심지어 자기는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파 늘루까지도, 아무도 그런 식으로 신을 믿는 사람은 없는데, 그 이유는 전적으로 자기를 신에 게 내맡기는 사람은 없으며, 적어도 그 점에 있어서는 그대로의 세계와 투쟁함으로써 진리 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 타루가 말했다." 그러면 선생님은 선생님의 직업을 그렇게 보고 계시는군요?" "대개는 그렇습니다." 의사는 밝은 쪽으로 다시 몸을 내밀면서 말했다. 타루는 낮은 소리로 휘파람을 불었다. 그래서 의사는 그를 보았다. "그럼요." 그는 말했다. "아마 자존심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시겠죠. 그러나 나는 필요한 정 도의 자존심밖에는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앞으로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이 모든 일 이 끝난 다음에는 무엇이 올지 나는 모릅니다. 당장에는 환자들이 있으니 그들을 고쳐주어 야 합니다. 그 다음에 그들은 반성할 것이고, 또 나도 반성할 것입니다. 나는 힘이 미치는 데까지 그들을 보호해줍니다. 그뿐이지요." "무엇에 대해서 말입니까?" 리외는 창문 쪽으로 돌아섰다. 그는 멀리 지평선이 더한층 어두워진 곳에 있는 바다를 생 각하고 있었다. 그는 피로를 느꼈으나, 동시에 그 이상하면서도 우애를 느끼는 그 사나이에 게 좀더 마음을 털어놓겠다는 갑작스럽고도 불합리한 욕구를 느꼈다. "거기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습니다, 타루. 정말 아는 바가 없어요. 내가 이 직업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나는 말하자면 막연하게 택했지요. 직업이 필요했었고, 다른 직업이나 마찬 가지로 수수한 직업이었고, 젊은 사람이 한번 해보려고 마음 먹는 직업의 하나였기 때문이 죠. 아마 그것이 나 같은 노동자의 자식으로서는 특이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 릅니다. 그래서 죽는 장면을 보아야만 했지요. 죽기를 싫어하는 순간에. '싫어!'하고 외치 는 것을 들은 일이 있나요? 나는 있어요. 그래서 나는 그런 것에 익숙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때는 나도 젊었었고 내 혐오같은 세계의 질서 그 자체로 쏠리고 있다고 생각 했었죠. 그때부터 나는 더욱 겸허한 성격이 되었어요. 다만 죽는 것을 보는 것에는 여전히 서툴렀죠.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결국..." 리외는 입을 다물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입안에 침이 마른 듯싶었다. "결국은?" 타루가 부드럽게 말했다. "결국..." 의사는 말을 잇다가 조심스럽게 타루를 보면서 또 주저했다. "당신 같은 사람이 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떠세요? 그러나 세계의 질서는 죽음에 좌우되는 것이니 만큼 아마 신으로서는 사람들이 자기를 믿어주지 않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렇게 말없이 하늘을 우러러볼 것 없이 있는 힘을 다해서 죽음과 싸우기를 더 바랄지도 모릅니다." "네." 타루가 끄덕거렸다.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승리는 언제나 일시적인 것 입니다. 그뿐이죠." 리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언제나 그것을 나도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싸움을 멈추어야 할 이유는 못 됩니다." "그야 못 되지요. 그러나 이 페스트가 선생님에게는 어떠한 것인지 상상이 됩니다." "알아요." 리외가 말했다. "끊임없는 패배지요." 타루는 얼마 동안 의사를 보고 있다가 일어서서 육중한 걸음으로 문까지 갔다. 리외도 그 의 뒤를 따랐다. 의사는 곧 그의 곁으로 갔는데, 그때 자기 발등을 보고 있는 듯하던 타루가 리외에게 말했다. "그 모든 것을 누가 가르쳐주었나요, 선생님?" 대답이 즉각적으로 나왔다. "가난입니다." 리외는 자기 사무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와서 자기도 교외에 있는 환자 한 사람을 보러가 기 위해서 내려가는 길이라고 타루에게 말했다. 타루가 같이가자고 청해서, 의사도 그러자고 했다. 복도 끝에서 그들은 리외 어머니를 만났다. 의사는 타루를 소개했다. "친구입니다." 그가 말했다. "오!" 리외 어머니가 말했다. "이렇게 알게 돼서 참 반가워요." 리외 어머니와 헤어지면서 타루는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의사는 층계참에서 자동 스위치를 켜려고 애썼으나 헛수고였다.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계단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 다. 의사는 그것이 혹 새로운 절전 조치인가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벌써 얼마 전부터 집에 서나 거리에서나 모든 것이 뒤틀려가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수위들이, 그리고 우리 일반 시민들이 이제는 아무 것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된 데서 오는 것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사는 더 이상 생각해볼 시간이 없었다. 뒤에서 타루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 다. "한마디만 더 하겠어요, 선생님. 혹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실지 몰라도 말씀드리겠는데, 선생님은 전적으로 옳으십니다." 리외는 어둠 속에서 혼자 어깨를 으쓱 치켜올렸다. "나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런데 당신은 대체 무엇을 알고 계신지요?" "아!" 하고 타루는 태연하게 말했다. "이제는 별로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의사는 발을 멈추었고, 그 뒤에 있던 타루는 층계에서 발이 미끄러졌다. 타루는 리외의 어 깨를 붙들고 몸을 바로잡았다. "인생을 다 안다고 생각하십니까?" 리외가 물었다. 대답은 여전히 침착한 목소리로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네." 그들이 길로 나왔을 때 밤은 제법 깊었다. 아마 11시쯤이었다. 시내는 조용했고 그저 희미 하게 바스락거리는 소리만이 가득 차 있었다. 아주 먼 곳에서 앰뷸런스 소리가 들려왔다. 그 들은 차에 올라탔다. 리외는 시동을 걸었다. "내일 병원에 오셔서 예방주사를 맞으셔야 합니다." 의사가 말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그리고 그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거기서 벗어나려면 삼분의 이의 기회 밖에는 없다는 것 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계산은 무의미합니다. 선생님. 다 아시는 것 아닙니까. 100년 전에, 페르시아의 어느 도시에서 페스트가 유행해서 모든 시민을 죽게 했지만, 시체 염하는 사람만은 살았습니다. 매일같이 자기 일을 멈추지 않고 해왔는데도요." "그는 삼분의 이의 기회를 가졌었던 것이죠, 그뿐입니다." 하고 갑자기 가는 목소리로 리 외가 말했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해서는 배울 것이 아직도 태산 같군요." 이윽고 그들은 교외로 들어서고 있었다. 헤드 라이트가 쓸쓸한 거리를 밝게 비추었다. 그 들은 멈추었다. 리외는 자동차 앞에서 타루에게 들어가겠느냐고 물었다. 타루는 그러겠다고 말했다. 하늘의 반사광이 그들의 얼굴을 비추었다. 리외는 갑자기 정답게 웃었다. "그런데 타루." 그가 말했다. "뭣 때문에 이런 일에 발벗고 나서는 겁니까?" "나도 모르죠. 아마 나의 도의감 때문인가봅니다." "그래 어떤 도의감인데요?" "이해하자는 겁니다." 타루는 집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래서 그들이 그 천식 환자 노인집에 들어설 때까지 리 외는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타루는 그 이튿날부터 일에 착수해서 우선 제 1진을 모았는데 계속 여러 진이 편성될 모 양이었다. 필자는 그래도 이 보건대를 실제 이상으로 중요시할 생각은 없다. 아마도 우리 시민 대부 분이 자기의 역할을 과장하고 싶은 유혹에 넘어갈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필자는 차라리 아 름다운 행위에다 너무나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한다는 것은, 결국에 가서는 악에게 간접적이 며 강력한 찬사를 바치게 되는 것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아름다운 행위가 그렇게도 많은 가치를 갖는 것은 그 행위들이 아주 드문 것이고, 악의와 무관심이 인간 행 위에서 훨씬 더 빈번한 원동력이기 때문이라는 말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니 말이다. 그런 것은 필자가 공감할 수 없는 생각이다. 세계의 악은 대개가 무지에서 오는 것 이며, 또 선의도 총명한 지혜 없이는 악의와 마찬가지로 많은 피해를 입히는 수가 있는 법 이다. 인간은 악하다기 보다는 차라리 선량하며, 사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들은 다소 무지한 법이고, 그것은 곧 미덕이나 또는 악덕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가장 구 원받을 수 없는 악덕은 스스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고, 그럼으로써 스스로 사람을 죽 이는 권리를 인정하는 따위의 무지의 악덕인 것이다. 살인자의 넋은 맹목이며, 가능한 한의 통찰력이 없고서는 참된 선도 아름다운 사랑도 없는 법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타루 덕택으로 실현을 본 우리의 보건대는, 객관적인 만족감으 로써 판단되어야 한다. 바로 그런 이유로 해서, 필자는 그 의지와 영웅심에 대해 너무나 웅 변적인 타령꾼이 될 생각은 없고, 거기에 적당한 중요성만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당 시 페스트로 말미암아 모든 시민들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절실하게 만들어놓은 데 대 해서는 역사가 노릇을 계속하기로 했다. 보건대에 헌신한 사람들은 사실 그 일을 하는데 그 렇게까지 큰 보람을 느꼈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이 해야 할 유일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런 결단을 내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그때 처지로는 믿을 수 없는 일 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조직은 우리 시민들이 페스트 속에 더 깊게 파고드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며, 시민들로 하여금 부분적이나마 질병이 퍼지고 있으니 그것과 싸우기 위해서 필요 한 일을 해야 된다는 것을 납득시켰다. 이처럼 페스트가 몇몇 사람들의 의무가 되었기 때문 에 페스트는 그 본연의 모습, 즉 모든 사람의 일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교사가 둘에 둘을 보태면 넷이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고 그에게 축복을 보내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아마도 그가 훌륭한 직업을 선택 했다는 점에서 그를 축복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타루와 그 외의 사람들이 차라리 둘에 둘을 보태면 넷이 된다는 것을 증명하고, 그 반대의 것을 억눌러버린 것은 가상할 일이라고 해두 자. 그러나 또한 그러한 선의는 그들에게 있어서 그 교사와 같은 마음을 가진 모든 사람과 공통된다는 것을 말해두자.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인간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생각보다는 수 가 많으며, 적어도 이것은 필자의 신념이다. 하기야 필자는 자기가 반박을 받을 여지가 있다 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즉 그 사람들은 생명을 내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상에는, 둘에 둘을 보태면 넷이 된다고 감히 주장할 수 있는 사람에게도 죽음의 벌을 받는 시간이 반드시 오는 법이다. 교사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문제는, 어떤 보상 또는 벌이 그 추론을 기다리고 있는가를 아는 일이 아니다. 문제는 둘에 둘을 보태면 과연 넷이 되느 냐 안 되느냐에 있다. 그 당시 자기네의 생명을 내걸고 있었던 사람들로 말하더라도 그들은 그들이 페스트 속에 있느냐 없느냐, 그것과 싸워야 하느냐 아니냐를 결정해야만 했었다. 그 무렵의 수많은 새로운 모랄리스트들은, 아무것도 소용없고 무릎을 꿇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돌아다녔다. 타루도 리외와 그들의 친구들도, 이러쿵저러쿵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론은 항상 뻔한 것이었는데 결국 이러이러한 방법으로 싸워야 한다는 것이지 무릎 을 꿇어서는 안된다는 결론이었다. 모든 문제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죽 는다든가, 결정적인 이별을 겪는 것을 막아주는 데에 있었다. 그럴려면 유일한 방법은 페스 트와 싸워야만 했다. 그 진리는 찬사를 받을 만하지는 못했다. 다만 당연한 귀착점이었다. 바로 그런 이유로 해서 늙은 카스텔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가지고 현장에서 혈청 을 제조하는 데 자기의 온 신념과 정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리외와 그 는 그 도시를 휩쓸고 있는 바로 그 세균을 배양해서 만든 혈청이 외부에서 가져온 것보다 더 직접적인 효과가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왜냐하면 그 세균들은 종래의 분류에서 본 페스 트 균과는 약간 달랐기 때문이다. 카스텔은 자기의 최초의 혈청이 꽤 빨리 완성되기를 바라 고 있었다. 또한 그런 이유로, 영웅적인 점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그랑이 보건대의 서기 비슷한 역할 을 맡아보기로 작정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타루가 조직한 보건대 중의 일부는 사실 인구 가 조밀한 지역의 예방 보조 작업에 헌신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지역에 필요한 위생 상태를 이룩하려고 애썼으며 미처 소독하지 못한 헛간이라든가 지하실의 수를 조사했다. 다 른 부대는 의사의 호별 왕진을 돕거나 페스트 환자의 운반을 확보했고, 나중에는 심지어 전 문요원이 없는 경우 환자나 사망자의 운반차를 운전하곤 했다. 이 모든 일은 등록이나 통계 를 필요로 했던 일이었는데 그랑이 그것을 맡아서 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리외나 타루 이상으로 그랑이야말로 그러한 위생대의 일에 활기를 주 었던 그 조용한 미덕의 사실상의 대표자였다고 필자는 평가한다. 그는 자기가 지니고 있었 던 선의를 가지고 거리낌 없이 자기가 맡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는 다만 자질구레한 일에 도움이 되기를 원했을 따름이다. 그 외의 일을 하기에는 그는 너무나 늙었다. 오후 6시부터 8시까지 그는 시간을 낼 수 있었다. 그래서 뜨거운 마음으로 리외가 그에게 감사의 뜻을 표 시했을 때 그는 놀라서 말했다. "가장 어려운 일도 아닌걸요. 페스트가 생겼으니 막아야 하 죠. 이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아! 만사가 이렇게 단순했으면 좋으련만!" 그러고는 자기의 문 장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것이었다. 가금 저녁때 그 통계 카드의 일이 끝나면 리외는 그랑 과 이야기를 하곤 했다. 결국에 가서는 타루도 그 대화에 끼게 되었는데 그랑은 점차 기쁜 얼굴로 그 두 동지들에게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 페스트의 도가니에서 그랑이 꾸준히 계속 하고 있는 그 일을 흥미있게 따라가고 있었다. 그들 역시 결국에는 거기에서 일종의 편안한 마음을 찾게 되었다. "그 말타는 여인은 어떻게 되었나요?" 하고 타루가 가끔 물어보았다. 그러면 그랑은 변함 없는 어조로 "달리고 있어요. 달리는거죠."라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어느 날 저녁때 그랑은 자기의 그 말 타는 여인에 대한 '맵시 있는'이라는 형용사를 결정적으로 포 기하고 앞으로는 '날씬한'으로 바꾸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것이 더 구체적입니다." 그는 덧붙여 말했다. 언젠가 한번은 그 두 청중에게 다음과 같이 수식어 그 첫 구절을 읽어주었 다. "5월의 어느 아름다운 아침에, 어느 날씬한 여인이 훌륭한 밤색털 암말을 타고, 불로뉴 숲의 꽃이 만발한 오솔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렇죠?" 그랑은 말했다. "그 여인이 더 역력하게 보이죠. 그리고 나는 '5월의 어느 날 아침'이 더 나은 것 같아요. 왜냐 하면 '5월달'이라고 하면 문장이 좀 처집니다." 다음에 그는 '훌륭한'이라는 형용사에 대단히 사로잡혀 있는 듯이 보였다. 그의 말로는 그 것으로는 별 맛이 없어서, 자기가 상상하고 있는 으리으리한 암말을 대번에 사진으로 찍은 듯이 느껴질 용어를 찾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기름진'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 다. 구체적이기는 하나 좀 멸시조라는 것이다. '윤기가 도는'에 한때 마음이 끌렸으나 리듬이 적 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느 날 저녁때 그는 의기양양하게 '한 검은 밤색털의 암말'이라는 말을 생각해냈다고 말했다. 검은 빛깔은 역시 그의 말에 의하면 은근히 맵시 있는 것을 가 리킨다는 것이었다. "그건 안돼요." 리외가 말했다. "아니 왜요?" "'밤색털의'라는 말이 말의 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빛깔을 말하는 것이니까요." "무슨 빛깔을요?" "아니, 어쨌든 검은 빛이 아닌 빛깔을 말하죠!" 그랑은 아주 풀이 죽어 있었다. "감사합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선생님이 계셔서 다행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어려운 일 이군요." "'굉장한'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그랑은 그를 보았다. 그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렇군요." 그가 말했다. "그래요!" 그러나 차츰 얼굴에 미소가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그 후 얼마만에, 그는 '꽃이 만발한'이란 말에 골치를 앓는다고 고백했다. 그는 오랑과 몽 텔리마르밖에는 아는 고장이 없었기 때문에 가끔 두 친구에게 불로뉴 숲속의 오솔길에는 어 떠한 모양으로 꽃이 만발해 있는가를 물어보기도 했다. 정확하게 말해서 불로뉴 숲이 리외 나 타루에게 그런 인상을 준 일은 없었지만 그 서기의 확신이 그들을 동요시켰던 것이다. 그는 자기들이 거기에 대해서 확실한 것을 모르는 것이 놀라웠다. '볼 줄 아는 예술가뿐이 다.' 그러나 한번은 그가 몹시 흥분해 있는 것을 리외는 보았다. 그는 '꽃이 만발한'을, '꽃 이 가득 찬'으로 바꿔놓았던 것이다. 그는 손을 비벼댔다. "마침내 훤히 보입니다. 냄시가 납니다. 모자를 벗어주십시오. 여러분!" 그는 의기양양하게 자기의 글을 읽었다. "5월 어느 아름다운 아침에, 한 날씬한 여인이 굉장한 밤색털의 암말에 몸을 싣고 꽃이 가득 찬 불로 뉴 숲의 오솔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큰소리로 읽다보니, 끝 구절에 제 2격이 세 번이 나 귀에 거슬려 그랑은 약간 말을 더듬거렸다. 그는 맥이 풀려서 주저앉았다. 그러다가 그는 의사에게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는 생각을 좀 해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바로 그 무렵에, 그는 직장에서 정신나간 사람 같은 증세를 가끔 보 여서 시에서는 감소된 인원을 가지고 태산같은 일거리를 앞에 놓고 있을 때였으니 만큼 모 두 유감스럽게 여겼다. 그가 속해 있는 과에서는 그것 때문에 두통거리가 생겼다. 그래서 국 장이 그를 호되게 야단치며 일정한 직책을 완수하도록 봉급을 주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면 서, 그야말로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아마" 국장이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담당사무 외에 보건대에 지원해서 일하고 있다는데 그것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오. 내 게 관계가 있는 것은 당신이 맡은 일이오. 그리고 이 가혹한 정세하에서 당신이 이바지할 수 있는 첫째 가는 방법은 맡은 일을 잘하는 것이오. 그렇지 않다면, 다른 것은 다 소용이 없어지는거요." "그의 말이 옳습니다." 그랑은 리외에게 말했다. "그래요, 그가 옳아요." 의사는 긍정했다. "그러나 나는 정신이 멍해서 내 글의 끝을 어떻게 맺을지를 모르겠어요." 그는 '불로뉴의'를 없애버릴 생각을 했다. 누구나 알 수 있으려니 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숲의'라는 구절이 '꽃이'에 걸리는 것처럼 되는데, 그것은 실제로는 '오솔길' 에 걸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숲'의 위치가 수식어와 명사 사이를 무작정 갈라놓고 있는 감 이 있어 살에 가시가 박힌 듯 느껴졌었다. 어느 날 저녁때에는 그가 리외보다 더 피곤해 보 일 정도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 그는 완전히 정신이 팔려 있는 그 연구 때문에 피로해했다. 그러나 그는 꾸준히 보건대가 필요로 하는 총계와 통계를 해냈다. 꾸준히 매일 저녁 그는 카드를 정리하고, 거기 에 곡선 도표를 첨부해서 될 수 있는 대로 정확한 표를 제출하려고 온 심혈을 기울이고 있 었다. 제법 빈번하게 병원으로 리외를 만나러 가서, 어떤 사무실이건 혹은 진료실이건간에 그는 리외에게 책상 하나를 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마치 시청의 자기 책상에 앉듯이 자리 잡고 앉아서, 소독약과 그리고 병 자체에서 풍겨나오는 냄새로 텁텁한 공기 속에서 잉크를 말리려고 서류의 종잇장을 흔들곤 했다. 그때 그는 말타는 여인 생각도 잊어버리고 필요한 일만 해내려고 고지식하게 애쓰고 있었다. 그렇다. 인간은 소위 영웅이라는 것의 전례와 본보기를 세워놓고 싶어한다는 것이 사실이 라면, 이 이야기 속에 한 사람 그런 존재가 꼭 필요하다면 필자는 바로 이 보잘것없고 존재 도 없는 그 영웅, 몸에 지닌 것이라고는 약간의 고운 마음씨와 표면적으로는 우스꽝스러운 이상밖에는 없는 그 영웅을 여기에 내놓는다. 그렇게 하면, 진리는 진리 본연의 것이라는 것 을 둘과 둘의 보태기는 넷이라는 합계를, 그리고 영웅주의는 제 2위라는 본래의 자기 위치, 즉 행복에 대한 강력한 욕구의 바로 다음에 놓이되 결코 그 앞에 놓일 수는 없는 그의 위치 를 찾게 될 것이다. 또 그렇게 하면, 이 기록도 자기의 성격, 즉 선량한 감정, 말하자면 두드 러지게 약하지도 않고, 또 흥행물처럼 야비하게 선정적도 아닌 감정을 가지고 이루어진 기 록으로서의 성격을 찾게 될 것이다. 이것은 적어도 외면 세계가 페스트에 감염된 이 도시로 보내오는 호소와 격려를, 혹은 신 문에서 읽고 혹은 라디오를 들을 때의 의사 리외의 의견이었다. 공로 또는 육로로 보내오는 구호물자와 함께 매일 저녁 전파를 타고, 혹은 신문에 실려 동정에 찬 또는 찬양의 논평들 이 앞으로 고립되게 된 도시에 쏠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서사시 또는 상품 수여식의 연설 투가 의사의 몸을 들끓게 했다. 물론 그러한 따뜻한 마음씨가 가장이 아닌 것은 알고 있었 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자기를 인류에 연결시켜놓는 그 무엇을 표현하고자 할 때에 쓰는 상투적인 언어로 표현될 수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그런 언어는 페스트의 도가니 속에서, 예 를 들면 그랑 같은 사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도저히 이해할 줄 모르는 까닭에 그랑이 기 울이는 매일매일의 자질구레한 노력에는 알맞지 않는 것이었다. 때로 자정이 돼서, 이미 적적해진 시가의 깊은 침묵 속에서 너무나 짧은 잠이나마 자보려 고 잠자리에 드는 순간, 리외는 라디오 스위치를 돌려보곤 했다. 그러면 세계 방방곡곡으로 부터 수천 킬로미터 너머로 얼굴은 모르지만 우애에 찬 음성들이 자기들에게도 연대 책임이 있다고 말하려는 어색한 노력을 하며, 실상 그 말을 하면서도 동시에 자기 눈으로 볼 수 없 는 고통은 모든 사람이 참되게 나눈다는 것이 지도깋 무력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었 다. '오랑! 오랑!' 바다를 건너오는 호소도 아무 소용없고, 리외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들어 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윽고 웅변투로 열이 올라서, 그랑과 그 웅변가를 더 낯설게 만드는 그 중요한 차이점을 더욱 뚜렷하게 들추어내는 것이었다. '오랑! 그렇지! 오랑! 천 만에' 이렇게 리외는 생각했다. '함께 사랑하든가, 함께 죽든가, 그 밖에 다른 방법은 없지. 그들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으니.' 그런데 페스트가 절정에 이르러 그 재난이 이 도시에 덤벼들어서 결정적으로 점령해버리 고 있는 힘을 다 하고 있는 동안의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꼭 적어둘 것이 남아 있는데 그 것은 가령 랑베르 같은 마지막으로 남은 개개인이, 다시 자기의 행복을 찾고 또 그들이 모 든 타격과 맞서서 지키고 있는 그들 자신의 몫을 페스트에서 구해내려는 절망적이고도 지리 하고 꾸준한 노력들이다. 그것은 바로 그들을 위협하고 있는 굴복을 거부하려는 그네들 자 신의 방식이었으며, 또 비록 그 거부가 표면적으로는 또 하나의 거부 만큼 효과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필자의 의견으로는 그것도 그것대로의 의의가 충분히 있고, 또 그 허영과 심지 어는 내포하고 있는 여러 가지의 모순 속에서 그 당시 우리들 각자의 마음속에 자랑스럽게 깃들이고 있었던 것을 증명해주기도 했다는 것이다. 랑베르는 페스트에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합법적인 수단으로는 그 도 시를 빠져나갈 수 없다는 확증을 얻었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써보기로 결심했다고 그는 리 외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그 신문기자는 카페의 급사부터 손대기 시작했다. 카페의 급사란 언 제나 모든 일에 환한 법이다. 그러나 처음에 그가 물어본 몇몇 급사들은 그런 종류의 일을 계획하기 위해서 마련된 극히 엄중한 처벌을 특히 잘 알고 있었다. 한 번은 그가 선동자로 오해받은 일까지 있었다. 그는 할 수 없이 리외 집에 가서 코타르를 만나서 일을 좀 진행시 켰다. 그날 리외와 코타르는 그 신문기자가 관청이라는 관청을 다 돌아다녔으나 허탕을 친 이야기를 또 하고 있었던 것이다. 며칠 후, 코타르는 거기에서 랑베르를 만나자 그 즈음에는 누구하고 만날 때에도 그렇게 하는 담담한 태도로 그를 대했다. "여전히 아무 진척이 없으시오?" 하고 코타르는 물었던 것이다. "아뇨, 전혀 없어요?" "관청에다가 기대할 수는 없지요. 그들은 도대체 이해해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정말 그래요. 그러나 다른 궁리를 하고 있는데 어렵군요." "아! 알겠습니다." 코타르가 말했다. 그는 어떤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놀라고 있는 랑베르에게, 자기는 오래전부터 오랑 의 모든 카페에 단골로 다니고 있으며, 거기에는 친구들이 많이 있고, 그런 종류의 공작을 일삼고 있는 한 조직체가 있는 것을 알아냈다고 말했다. 사실 코타르는 그때부터 씀씀이가 수입보다 많아져서 배급물자의 밀매업에 한몫 끼고 있었다. 그처럼 그는 끊임없이 값이 올 라가는 담배와 값싼 술을 넘기곤 했다. 그래서 마침내 그는 약간의 재산을 모으고 있는 중 이었다. "확실한가요?" 랑베르가 물었다. "그러문요. 나에게 권하는 사람이 있었는걸요." "그런데 이용을 하지 않았단 말이죠?" "의심하지 마세요." 하고 코타르는 호인 같은 태도로 말했다. "나로 말하자면 떠날 의향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지 않았어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요." 그는 말없이 있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보지 않으시겠어요!" "아마 나하고는 상관이 없는 일 같은데요."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당신과 관계가 없지요. 그러나 또 다른 의미로는... 어쨌든 단 한 가지 뻔한 일은 우리들의 페스트를 맞게 된 날부터 나는 여기가 더 살기가 좋아졌습니다." 랑베르는 말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그 조직체하고는 어떻게 연락할 수 있을까요?" "아!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죠. 나만 따라오세요." 코타르는 말했다. 오후 4시였다. 답답한 하늘 아래서 우리 시는 지글지글 익어가고 있었다. 가게라는 가게들 은 모두가 셰이드(회전 커텐)를 내리고 있었다. 차도는 쓸쓸했다. 코타르와 랑베르는 아케이 드가 늘어선 길을 향해 오랫동안 말없이 걸어갔다. 페스트가 눈에 띄지 않는 몇몇 시간 중 의 한순간이었다. 그 침묵, 그 색채와 움직임의 죽음은 재난의 침묵과 죽음인 동시에 여름의 침묵과 죽음일 수도 있었다. 주위의 공기가 위협 때문에 그렇게 답답한지, 또는 먼지나 푹푹 찌는 더위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페스트를 찾아내려면 관찰하고 깊이 생각해보지 않으 면 안되었다. 왜냐하면 페스트의 징후는 음성적인 징후로밖에는 표면화되지 않고 있었기 때 문이다. 페스트와 친분을 맺고 있었던 코타르는 랑베르에게 여느 때 같으면 복도의 문 앞에 배를 땅에 붙이고 엎드려 일 것 같지 않는 바람기를 찾으로 헐떡거리는 개들이 보이지 않는 다든가 하는 일을 상기시켰다. 그들은 팔미에 거리로 가로 접어들어서 사열식 광장을 횡단하여 해군 구를 향해서 내려갔 다. 왼편으로 초록색 칠을 한 카페가 하나 있었는데 노란 천의 셰이드를 비스듬히 쳐놓고 있었다. 들어가면서 코타르와 랑베르는 이마의 땀을 씻었다. 그들은 초록색의 철판으로 만든 테이블 앞의 접었다 폈다 하는 정원용 의자에 앉았다. 홀은 텅텅 비어 있다. 파리들이 공중 에서 우박처럼 들끓고 있었다. 흔들거리는 카운터 위에 놓인 새장 안에는 털이 몽땅 빠져버 린 앵무새 한 마리가 홰 위에 힘없이 앉아 있었다. 전쟁의 장면을 그린 낡은 그림들이 벽에 걸려 있었는데 때가 끼고 얼기설기한 거미줄이 덮여 있었다. 모든 철판 테이블 위에, 그리고 랑베르가 앉아 있는 테이블 위에까지도 닭똥이 말라붙어 있었다. 침침한 한구석에서 바스락 소리가 나더니 아주 커다란 수탉 한 마리가 껑충껑충 튀어나오기 전까지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때 더위가 심해지는 것 같았다. 코타르는 웃옷을 벗고 철판 테이블을 두드렸다. 작달막 한 한 남자가 하얗고 기다란 앞치마를 두르고 안에서 나왔다. 멀리서 코타르를 보자 인사를 하고, 발길로 수탉을 한 대 걷어차서 쫓아버리고 가까이 오더니 수탉이 꽥꽥거리건 말건 무 엇을 주문하겠느냐고 물었다. 코타르는 백포도주를 청하고 나서 가르시아라는 사람에 대해 서 물었다. 그 남자의 말로는 그 사람이 그 카페에 오지 않은 지 벌써 며칠이 된다는 것이 었다. "오늘 저녁에 올 것 같소?" "글쎄요!" 하고 급사가 말했다. "그 사람 속셈까지는 모르겠는데요. 아니 선생님은 그 분 의 시간을 잘 알고 계시지 않던가요?" "알기는 하지만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지. 다만 소개해줄 분이 한 분 계셔서 그러는데." 급사는 앞치마 끝자락으로 땀에 젖은 손을 닦고 있었다. "아하! 선생님두 그 일을 하시는군요?" "그럼." 하고 코타르가 말했다. 그 땅딸보는 코를 훌쩍거렸다. "그러면 오늘 저녁에 오십시오. 제가 그 사람에게 애를 보내겠습니다." 밖으로 나오면서 랑베르는 그 일이라는 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물론 밀수죠. 그들이 상품들을 시문으로 통과시킵니다. 그래서 아주 비싼 값으로 팔지 요." "그렇군요." 하고 랑베르가 말했다. "서로 짜고 하는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저녁때, 그 셰이드는 걷히고, 앵무새는 자기 새장 속에서 재잘거리고, 철판 테이블은 셔츠 바람의 남자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모자를 뒤로 젖혀 쓰고, 새까맣게 그을은 가슴팍이 드러날 정도로 흰 와이셔츠를 활짝 젖히고 있었는데 코타르가 들어오자 벌떡 일어섰다. 단정하고 햇볕에 그을 은 얼굴, 검고 작은 눈, 흰 이빨, 반지를 두서너 개 끼고 있었는데 아마 나이는 서른쯤 되어 보였다. "재미 좋으슈." 하고 그가 말했다. "카운터에서 한잔 하시죠." 그들은 말없이 석 잔씩을 마셨다. "나갈까요?" 가르시아가 말했다. 그들은 항구 쪽으로 내려갔다. 그러자 가르시아가 무슨 이야기냐고 물었다. 코타르는 그에 게 랑베르를 소개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나가는 문제가 목적이라고 말했다. 가르시아는 담배를 피우면서 곧장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랑베르를 '그'라고 부르면서 질문을 했다. 마치 랑베르가 눈에 띄지도 않는 것 같았다. "무엇 때문이지요?" 그가 말했다. "프랑스에 아내가 있어." "아하!" 그리고 좀 있더니, "그 사람 뭘 하나요?" "신문기자." "말이 많은 직업인데." 랑베르는 잠자코 있었다. "내 친구지." 코타르가 말했다. 그들은 아무 말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부둣가까지 왔는데, 그 통로에는 커다란 철조망을 쳐 놓아서 통행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까지 냄새가 풍겨오는 정어리 프라 이를 팔고 있는 자그마한 간이식당 쪽으로 향했다. "아무튼." 가르시아가 결론을 내렸다. "나는 거기엔 관련이 없고 라울이 그 일을 보고 있 지. 그러니 내가 그를 찾아보겠어. 쉽지는 않을 텐데." "아! 그럼 그는 숨어 다니나?" 가르시아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식당 근처에서 발을 멈추고 처음으로 랑베르에게 얼굴을 돌렸다. "모레, 11시에 저 꼭대기 세관 건물 모퉁이에서 만납시다." 그는 가려는 폼이었다. 그러나 그는 두 사람에게로 다시 돌아섰다. "비용이 들텐데." 하고 그는 말했다. 다짐을 주는 것이었다. "물론이죠." 하며 랑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에 신문기자는 코타르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아, 천만에!" 기분이 좋아서 그는 대답했다. "도와드리는 것이 즐겁습니다. 게다가 선생은 신문기자니까 어느 날이고간에 그 값을 해주시겠죠." 랑베르와 코타르는 그 도시의 꼭대기로 뻗어 있는 그늘도 없는 한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세관 건물의 일부분은 병원으로 변해 있었다. 그런데 그 커다란 문 앞에 사람들이 서 있었 다. 그 사람들은 허락되지 않는 면회를 혹시나 하는 심정에서, 또한 한두 시간 후에는 무효 가 되어버릴 정보를 얻어볼까 해서 모인 사람들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사람들이 모임으로써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러한 점에 대한 고려가 가르시아와 랑베르와의 회합 장소로 선 택되는데 무관하진 않았다고 추측할 만했다. "이상하군요."라고 코타르가 말했다. "그렇게 나가시려고 고집하시니, 어쨌든 모든 것이 참 재미있습니다." "나는 안 그런데요." 랑베르가 대답했다. "아! 물론, 위험한 일도 겪기는 하죠. 그러나 어쨌든 페스트가 만연하기 전에도 복잡한 네 거리를 건너갈 때에는 이만큼 위험했으니까요." 그때 리외의 자동차가 그들이 서 있는 곳까지 와서 섰다. 타루가 운전을 하고 있었고 리 외는 반쯤 졸고 있는 것 같았다. 리외는 깨어나서 서로를 인사시켰다. "우리는 알고 있어요." 타루가 말했다. "같은 호텔에 묶어 있는걸요." 그는 랑베르에게 시내까지 태워다주겠다고 말했다.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약속이 있어 요." 리외가 랑베르를 보았다. "그러시다고 들었죠." "아!" 하고 코타르가 놀라서 말했다. "선생님은 알고 계셨나요?" "저기 예심판사가 옵니다." 타루는 코타르를 보면서 말했다. 코타르는 안색이 변했다. 오통 씨가 정말 길을 걸어 내려오고 있었는데 힘차고 정확한 걸 음걸이로 그들을 향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그들 앞을 지나가면서 자기 모자를 벗었다. "안녕하십니까, 판사님!" 타루가 말했다. 판사는 차 안의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뒤에 물러나 있는 코타르와 랑베르를 보고 정중 하게 고개를 숙였다. 타루는 그 연금 생활자와 신문기자를 소개했다. 판사는 하늘을 잠깐 바 라보다가 한숨을 쉬면서 참 고약한 시기라고 말했다. "제가 듣기에 타루 씨께서는 예방 조치 실시에 전력하고 계시다던데요. 저로서는 뭐라고 찬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의사 선생께서 보시기에는 병이 더 퍼질 것 같습니까?" 리외는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판사는 하나님의 의도는 측량할 수 없 는 것이니 만큼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중얼거렸다. 타루는 이번 사건 때문에 일이 바빠졌느 냐고 물었다. "도리어 그 반댑니다. 우리가 보통 법이라고 부르는 사건은 줄어들었습니다. 제가 심리하 게 된 것이라고는 이번 새 조치에 따르는 중대 범법자들분입니다. 옛날에는 이렇게 법이 잘 지켜진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판사는 여태까지의 꿈꾸는 듯한 태도에서 벗어났다. 허공에 매달려 있었던 시선도 바꾸면 서 말했다. "새 조치가 무슨 일을 했나요?" 하고 그는 말했다. "문제는 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처벌 에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저 자가 원수 제 1호야." 판사가 떠나자 코타르가 말했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리외와 코타르는 가르시아가 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아무 신호도 없이 그들에 게로 가까이 와서, 인사도 없이 "기다려." 라고 말했다. 그들 둘레에서는 군중들이 - 여자가 대부분이었지만 - 입을 딱 다문 채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들은 거의 전부가 바구니를 들고 있었는데 그 속의 음식을 혹시나 앓고 있는 친척에게 전할 길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을 갖고 있었으며, 더 어리석은 일은 그 음식이 앓 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정문에는 무장한 파수병 이 지키고 있었고, 때때로 야릇한 외침 소리가 정문과 병동 사이에 있는 마당 너머로 들려 왔다. 그러면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서 불안스러운 얼굴들이 병실 쪽을 돌아다보는 것이었다. 세 사나이들이 그 광경을 보고 있는데, 등뒤에서 "안녕하십니까."라는 분명하고 위엄 있는 소리가 들려 그들은 고개를 돌렸다. 더운데도 불구하고 라울은 단정하게 옷을 입고 있었다. 키가 크고 건장하게 생긴 그는 짙은 색 옷을 입고 차양이 위로 둥글게 올라간 소프트 모자 를 쓰고 있었다. 갈색 눈에 꽉 다문 입을 가진 라울은 빠르고 정확하게 말했다. "시내로 내려갑시다." 그가 말했다. "가르시아, 자네는 가보게나." 가르시아는 담배를 하나 피워물고 가버렸다. 그들은 가운데 서서 걸어가는 라울의 걸음걸 이에 맞추어서 빠른 속도를 걸어갔다. "가르시아한테 이야기는 들었죠." 그는 말했다. "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어쨌든 1만 프랑 은 들여야 할 겁니다." 랑베르는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내일 나하고 점심을 하시죠. 마린느 가의 스페인 식당에서요." 랑베르가 알았다고 말하자 라울은 그의 손을 잡고 처음으로 웃었다. 그가 간 후에 코타르 가 자기는 못가겠다고 말했다. 자기는 다음날 시간이 없으며 게다가 이제는 랑베르 혼자만 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그 이튿날 신문기자가 스페인 식당으로 들어갔을 때, 모두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 집중됐 다. 노랗고 햇볕에 바짝 마른 어떤 길 아래에 있는 그 어둠침침한 지하실에는 남자 손님밖 에는 드나들지 않았으며, 그것도 대부분은 스페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안쪽의 식탁에 자리 잡고 앉은 라울이 신문기자에게 손짓을 하고 랑베르가 그쪽으로 방향을 돌리자, 사람들의 호기심은 사라져서 다들 먹고 있던 접시로 얼굴을 돌렸다. 라울 곁에는 수염이 텁수룩한 마 르고 키 큰 사나이가 앉아 있었는데, 그는 어깨가 엄청나게 넓고 말상인 데다가 머리 숱이 적었다. 시커먼 털로 덮인 길고 가느다란 그의 두 팔이 걷어올린 그의 와이셔츠 소매 아래 로 비어져 나와 있었다. 랑베르를 소개 받았을 때, 그 친구는 세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이름은 들을 수도 없었으며, 라울은 '우리 친구'라고만 그에게 말했다. "우리 친구가 선생을 도울 수 있을 것 같답니다. 그는 선생을..." 라울이 말을 중단했다. 웨이트레스가 랑베르에게 주문을 받으려고 왔던 것이다. "이 친구가 선생을 우리 친구 중의 두 사람과 연락을 갖게 해드릴 것인데 그 친구들이 우 리가 매수해놓은 보초병들에게 선생을 소개해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 죠. 보초들이 알아서 절호의 시기를 판단합니다. 가장 간단하기는 그중에 입구 근처에 사는 보초병 집에 가서 며칠 밤을 묵는 것이죠. 그러나 그 전에 우리 친구가 필요한 접촉을 시켜 드릴 것입니다. 모든 일이 잘되면 이 친구에게 비용을 주면 됩니다." 그의 친구는 또 한 번 그 말 같은 얼굴을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손으로는 토마토 와 고추 샐러드를 쉬지 않고 다지면서 꾸역꾸역 먹고 있었다. 그러더니 어딘지 스페인 사투 리가 섞인 억양으로 말했다. 그는 랑베르에게 모레 아침 8시에 성당 정문 앞에서 만나자고 제안을 했다. "또 이틀이군요." 하고 랑베르가 다짐을 했다.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렇죠." 라울이 말했다. "그 친구들을 찾아야 해요." 그 말상 녀석이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랑베르는 맥이 풀려서 그러마고 했다. 나머지 식사 시간은 이야기 거리를 찾다보니 다 지나가버렸다. 그러나 그 말상 녀석이 축구선수라 는 것을 랑베르가 알았을 때 모든 일이 쉬워졌다. 그도 역시 그 운동을 많이 했던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선수권, 영국 직업 선수단의 실력, W형 전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식 사가 끝날 무렵 그 말상 녀석은 아주 신이 나서 랑베르에게 말까지 놓으면서 팀에게는 센터 하프만큼 화려한 위치는 없다는 것을 납득시키려고 했다. "자네도 알겠지만." 하고 그는 말 했다. "센터 하프는 그야말로 선수들에게 그 역할을 배당하는 사람이란 말이야. 역할을 배당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축구라는 거지." 랑베르는 비록 자기는 항상 센터 포드를 보아왔지만 그의 의견과는 같았다. 그 토론은 라디오 소리 때문에 비로소 중단되었는데 라디오는 우선 감상적인 멜로디를 은은하게 되풀이하더니, 그 전날 페스트 희생자는 137명이라고 보도했다. 듣고 있는 사람들 중에 반응을 나타내고 이는 하나도 없었다. 그 말상을 한 사나이는 어깨 를 으쓱 올리고 일어났다. 라울과 랑베르도 그를 따라 일어났다. 헤어지면서 그 센터 하프는 랑베르의 손을 힘있게 쥐었다. "내 이름은 곤잘레스야." 그가 말했다. 그 후 이틀 동안이 랑베르에게는 무한히 길게 생각되었다. 그는 리외의 집에 찾아가서 자 기 일의 진행을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어떤 집에 왕진을 가는 리외를 따라갔다. 그 는 페스트의 징후가 있는 환자가 기다리는 집 문 앞에서 으사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복도에 서는 사람들이 뛰어가는 소리와 발소리가 들려왔다. 으사가 왔다고 가족에게 알리는 것이었 다. "타루가 늦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하고 리외가 중얼거렸다. 그는 피로해 보였다. "전염병이 너무 악화되고 있나요?" 랑베르가 물었다. 리외는 그렇지도 않으며, 통계 곡선의 상승도가 도리어 좀 덜 급격해졌다고 말했다. 다만 페스트와 대항하기 위한 능력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물자가 모자랍니다." 그는 말했다. "세계 어느 나라 군대에서도 물자의 부족을 대개는 사 람으로 보충하고 있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도 부족합니다." "외부에서 의사들과 보건 관계 요원이 왔는데도요?" "그렇습니다." 리외가 말했다. "의사 10명을 포함해서 100여 명의 인원이 왔어요. 보기에 는 많습니다. 그런데 그 인원은 현재 q여세에 겨우 충족할까 말까입니다. 병이 더 퍼지면 그것으로는 불충분합니다." 리외는 안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랑베르를 보고 웃었다. "그렇습니다. 선생님도 빨리 성공하셔야지요." 랑베르의 얼굴에 어두운 빛이 한줄기 스쳐갔다. "아시겠지만." 하고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때문에 떠나려는 것은 아닙니다." 리외는 그것을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랑베르는 계속했다. "나는 비겁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대부분의 경우는 말입니다. 그것을 증명할 기회는 있었어요. 단지 도저히 배겨내지 못할 생각이 몇 가지 있어요." 의사는 그를 정면으로 보았다. "부인을 다시 만나시겠죠." 하고 그는 말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상태가 계속될 것이고, 그러는 동안에 그 여자가 늙을 것 이라는 생각을 하면 견딜 수가 없어요. 나이가 서른이면 사람은 늙기 시작하는 것이니 무엇 이고 이용해야지요. 제 말씀 이해하실지 모르겠어요." 리외가 자기도 이해할 것 없다고 중얼거리고 있을 때 타루가 신바람이 나서 왔다. "지금 막 파늘루 신부에게 우리 일을 같이 하자고 부탁하러 오는 기이에요." "그래서요?" 하고 의사가 물었다. "그는 생각하더니 그러마고 하더군요." "그것 참 기쁜 일이군요." 하고 의사는 말했다. "그가 자기 설교보다는 나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기쁘군요." "사람이라는 게 다 그렇습니다." 하고 타루는 말했다. "다만 그들에게 기회를 주어야 합니 다." 그는 웃으면서 리외를 보고 눈을 깜박거렸다. "그것이 인생에 있어서 내가 할 일입니다.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 말입니다." "실례하겠습니다." 랑베르가 말했다. "저는 가봐야겠습니다." 약속한 목요일, 랑베르는 성당 정문 아래로 갔다. 8시 5분 전이었다. 공기는 아직도 제법 신선했다. 하늘에는 희고 둥근 작은 구름들이 떠다니고 있었는데, 이제 곧 더위가 치솟으면 대번에 그것을 삼켜버릴 것이었다. 아련한 습기의 냄새가 아직도 잔디밭에서 올라오고 있었 짐나 잔디밭은 보송보송했다. 동쪽에 있는 집들 뒤에서 태양은 광장을 장식하고 있는, 전신 에 금도금을 한 잔 다르크의 투구만을 비추고 있었다. 어디선지 8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 려왔다. 랑베르는 쓸쓸한 정문 아래에서 몇 걸음 내디뎠다. 어렴풋이 성가의 멜로디가 지하 실 창고의 묵은 향로 냄새를 싣고 성당 안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갑자기 노랫소리가 그쳤다. 10여 명의 조그만 검은 그림자들이 성당에서 나오더니 시가 쪽으로 총총히 걸어갔다. 랑베 르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또 다른 그림자들이 큰 계단을 거술러 올라가 정문 쪽으로 걸어 오고 있었다. 그는 담배를 하나 피워 물었다. 그러고는 장소가 장소니만큼 담배를 피워서는 안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8시 15분에 성당의 오르간은 은은하게 연주되기 시작했다. 랑베르는 어둠침침한 천장 밑 으로 들어섰다. 잠시 있다가 그는 본당에 자기보다 먼저 들어가 있는 자그마한 그림자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그림자들은 한군데에 모여 시내의 어느 아틀리에에서 제작된 성 로크 상 임시 제단 앞에 앉아 있었다. 무릎을 꿇은 그들은 더 한층 오그라들어 보였으며, 회색 벽 화 속에 번져들어 마치 엉겨져 찰싹 붙은 몇몇 그늘의 덩어리처럼 주위의 안개보다 약간 짙 게 드문드문 여기저기에 떠 있었다. 그 모습들 위로 오르간의 끝없는 변주곡이 울려오고 있 었다. 랑베르가 나왔을 때 곤잘레스는 벌써 계단을 내려가서 시내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자네가 가버린 줄 알았지." 그는 신문기자에게 말했다. "당연한 일이니까." 그는 다른 곳에 또 약속을 한 것이 있었는데, 거기서 멀지 않은 곳이고 8시 10분 전에 만 나기로 되어서 기다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20분을 기다리게 해놓고도 나타나지 않더 라고 변명을 했다. "무슨 사고가 생긴거야, 분명해. 우리가 하는 이런 일에는 늘 뜻대로는 안되지." 그는 이튿날 같은 시각에 전몰용사 기념비 앞에서 만나자고 다시 약속을 했다. 랑베르는 웃으면서 모자를 뒤로 젖혀 넘겼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네." 곤잘레스는 웃으면서 말했다. "생각좀 해보게. 손을 맞추어 야 하고, 밀려오고 패스도 해야지. 한 골 넣자면 말이야." "그야 물론이지." 랑베르는 말했다. "그러나 시합은 1시간 30분밖에는 안 걸리지." 오랑의 전몰용사 기념비는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에 있었는데 그것은 항구 가 내려다 보이는 낭떠러지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끼고 도는 일종의 산책도로였다. 그 이 튿날 랑베르는 약속한 시간보다 일찍 와서 명예의 전사자 명단을 차근차근히 읽고 있었다. 몇 분 후에 두 사나이가 다가와서 무심하게 그를 보고 있더니 산책도로의 난간에 가서 팔꿈 치를 괴고, 텅 빈 쓸쓸한 항구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둘 다 키가 비슷했고 둘 다 짙푸른 바지에다가 소매가 짧은 수부 자켓을 입고 있었다. 랑베르는 약간 멀리 가서 한 벤치에 걸 터앉아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 사람들이 스무 살이 넘어 보이지는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곤잘레스가 변명을 하면서 자기에게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저기 우리 친구들이 와 있네." 그는 이렇게 말하고 그 두 젊은이에게로 그를 끌고 가더 니, 이름이 마르셀과 루이라고 소개했다. 마주보니 그들은 닮은 데가 많았다. 그래서 랑베르 는 아마 형제인가보다고 생각했다. "자아." 하고 곤잘레스는 말했다. "이제 인사도 끝났으니 일을 추진해야지." 그래서 마르셀인지 루이인지가, 자기네들의 경비 당번은 이틀 후에 시작해서 일주일 계속 하니 가장 편리한 날을 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넷이서 서쪽 문을 지키는데 다른 두 사람은 직업군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을 한편으로 끌어넣을 생각은 없다면서 그들은 믿을 수도 없거니와 비용이 더 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날 저녁에는 그들은 잘 아는 바의 뒷방에 가서 밤을 새우는 일도 있다는 것이었다. 마르셀인지 루이인지는 그런 이야기를 하 면서 랑베르에게 문 가까이 있는 자기네들 집에 와서 묵다가, 자기들이 부르는 것을 기다리 라는 제안을 했다. 그렇게 되면 통과는 아주 쉽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빨리 서둘러야 할 것이 얼마 전부터 시 밖에다가 이중의 감시소를 설치한다는 말이 돌고 있다는 것이었다. 랑베르는 그 말에 찬성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담배 몇 개비를 꺼내 그들에게 권했다. 둘 중에 아직 입을 열지 않았던 청년이 곤잘레스에게 QLDYDANS제가 해결됐는지 선금을 좀 받을 수 있는지를 물었다. "아냐." 곤잘레스가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우린 다 친구니까. 비용은 출발할 때 다 치 르기로 하세." 다시 한번 만나기로 했다. 곤잘레스는 이틀 후 스페인 식당에서 저녁을 먹자고 제의했다. 거기서 곧장 그 보초병들 집에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첫날밤은 내가 동행해주지." 그는 랑베르에게 말했다. 그 이튿날 랑베르는 자기 방으로 올라가는 길에 호텔 층계에서 타루를 만났다. "리외를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같이 가실까요?" 타루가 말했다. "폐가 될 것 같군요." 좀 멈칫거리다가 랑베르는 말했다. "그렇지 않을걸요. 그 분이 선생 이야기를 여러 번 하더군요." 신문기자는 생각해보았다. "그러면" 하고 그는 말했다. "저녁 식사가 끝난 다음에 시간이 있거든 밤이 늦더라도 호 텔로 바로 두 분이 오십시오." "그분 형편이 어떨는지요. 페스트의 형편에도 달려 있구요." 타루가 말했다. 밤 11시에 리외와 타루가 작고 좁은 바로 들어왔다. 30명 가량의 손님들이 팔꿈치를 괴고 큰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페스트가 휩쓴 도시의 침묵 속에서 나타난 두 사람은 귀가 좀 먹먹해서 발을 멈추었다. 그들은 알코올 음료가 아직도 있는 것을 보고 그 법석을 짐작했다. 랑베르는 카운터 끝에 있다가 그들에게 의자에 앉은 채로 손짓했다. 두 사람은 그의 양쪽에 섰다. 타루는 시치미를 떼고 옆에 있는 사람을 밀어붙였다. "술을 마셔도 괜찮겠지요?" "그럼요, 괜찮고 말고요." 타루가 말했다. 리외는 자기 잔에서 나는 매콤한 풀 냄새를 코로 맡아보았다. 그러한 소란 속에서는 이야 기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랑베르는 무엇보다도 술 마시기에 정신이 팔린 것 같았다. 의사 는 아직 그가 취했는지를 판단하기는 어려웠다. 그들이 앉은 좁은 구석 한 끝에 있는 두 개 의 테이블 중 하나에는, 어떤 해군 장교가 양팔에 여자를 하나씩 끼고, 얼굴이 새발갛게 달 은 뚱뚱보에게 카이로에서 유행했던 당시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수용소가 있었지." 그는 말했다. "원주민들을 위해 수용소를 짓고, 천막을 치고, 환자를 수용하고, 온 둘레에 보초선 을 치고 말일세. 가족들이 몰래 재래 약품을 가지고 들어오면 총을 쏘았단 말이야. 참 가혹 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것이 옳았어." 또 한 테이블에는 멋쟁이 청년들이 앉아 있었는데, 주고받는 이야기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말소리가, 쨍쨍 울려오는 축음기에서 쏟아져 나 오는 '세인트 제임스 인퍼머리'의 곡 속에 휩쓸렸다. "잘 됩니까?" 목소리를 높여 리외가 말했다. "잘 되어갑니다." 랑베르가 말했다. "아마 일주일 안으로 될 겁니다." "유감이군요." 타루가 외쳤다. "왜요?" 타루는 리외를 보았다. "아!"하고 리외는 말했다. "타루의 말은 여기 계시면 우리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것입니 다. 그러나 나로서는 떠나시려는 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타루는 한 잔씩 더 청했다. 랑베르는 자기가 앉았던 의자에서 내려와 처음으로 타루를 정 면으로 보았다. "제가 무엇에 도움이 됩니까?" "글세." 타루는 자기 술잔으로 손을 천천히 내밀면서 말했다. 우리 보건대 일에 말입니 다." 랑베르는 다시 그의 습관인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가서 다시 자기 의자에 앉았다. "그러한 단체가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지 않으시나요?" 막 잔을 비운 타루는 이렇게 말하 고 랑베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대단히 유익합니다." 신문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술을 마셨다. 리외는 그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제는 정말 완전히 취했구나 하고 그는 생 각했다. 그 이튿날, 랑베르가 두 번째로 그 스페인 식당에 들어갔을 때 그는 조그맣게 무리를 지 은 사람들을 헤치고 지나갔는데 그들은 입구까지 의자를 끌어내다가 앉아서 겨우 더위가 고 개를 숙이기 시작하는 초록빛과 황금빛의 저녁때를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매콤한 냄새가 나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식당 내부는 거의 비어 있었다. 랑베르는 안쪽 식탁에 가서 앉 았다. 거기는 그가 처음으로 곤잘레스를 만난 테이블이었다. 그는 웨이트레스에게 사람을 기 다린다고 말했다. 7시 30분이었다. 차츰 남자들이 식당 안으로 들어와서 자리르 잡고 앉았 다. 음식이 나오고, 둥그런 천장 밑에는 식기 소리와 귀가 멍멍하도록 주고받는 이야기 소리 가 넘쳐흘렀다. 8시가 되었는데도 랑베르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불이 켜졌다. 새 손님 들이 자리에 와서 앉았다. 그는 식사를 주문했다. 8시 30분에, 그는 곤잘레스도 그 두 젊은 이도 오지 않은 채 식사를 끝마쳤다. 그는 담배를 여러 대 피웠다. 식당 안은 서서히 비기 시작했다. 밖은 이내 어두워지고 있었다. 따뜻한 바람이 바다에서 불어와 창문 커튼을 가볍 게 들먹거렸다. 9시가 되었을 때 랑베르는 실내가 텅 비고 웨이트레스가 놀라서 그를 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계산을 하고 나왔다. 식당 정면에 카페 문이 하나 열려 있었다. 랑베르는 카운터에 걸터앉아서 식당 입구를 감시하고 있었다. 9시 30분에, 그는 주소도 모르 는 곤잘레스를 다시 만날 궁리를 하면서 호텔로 돌아왔다. 여태껏 밟아온 절차를 다시 밟아 야 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바로 그때, 그가 리외에게 나중에 한 말이지만 그는 앰뷸런스가 지나가는 어두운 밤 속에 서 자기와 아내를 갈라놓은 벽으로부터 어떤 출구를 찾기에 열중하던 나머지 그동안 줄곧 아내 생각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 또한 모든 길이 다시 꽉 막 히고 보니 욕망의 한복판에 다시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으며, 그것이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고통의 폭발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 혹독한 불길에서 벗어나려고 호텔 쪽으로 달음질을 치기 시작했지만 그 불길은 그래도 그를 따라다니면서 그의 관자놀이를 쑤셔댔다. 그 이튿날 아주 일찍, 그래도 그는 리외를 만나러 와서 코타르를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 느냐고 물었다. "제게 남은 일이라고는 다시 그 순서를 따라가는 것뿐입니다." 그는 말했다. "내일 저녁대 오시지요." 리외가 말했다. "타루가 코타르를 불러 달라더군요. 왜 그러는지 는 모르겠어요. 그는 10시에 오기로 되어 있어요. 10시 반쯤 오시죠." 코타르가 그 이튿날 의사 집에 왔을 때, 타루하고 리외는 리외의 담당 구역내에서 일어난 예기치 않게 완치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열에 하납니다. 재수가 좋았죠." 타루는 말했다. "아! 그것은" 코타르가 말했다. "그것은 페스트가 아니었어요." 두 사람은 확실히 그 병은 페스트였다고 단언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나은 것을 보니 말이에요. 나보다 더 잘 아시겠지만 페스트라면 용서 가 없죠." "대개는 그렇죠." 리외가 말했다. "그러나 좀더 꾸준히 하다보면 놀라운 일도 있습니다." 코타르는 웃고 있었다. "그럴 것 같지 않은데요. 오늘 저녁 숫자 발표를 들으셨어요?" 호의에 찬 시선으로 그 연금 생활자를 보고 있던 타루가 숫자는 알고 있으며 사태는 중대 하지만 그것은 더한층 특별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니! 벌써 그런 조치는 취하고 계시면서." "그래요, 그렇지만 각자가 스스로 그 조치를 해야죠." 코타르는 무슨 말인지 몰라서 타루를 보고 있었다. 타루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아무 일 도 안 하고 있으며, 페스트는 각자의 문제며, 각자가 자기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고 말했 다. 보건대의 문은 개방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 좋은 생각입니다." 코타르는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소용없을 겁니다. 페스트 가 너무나 억세니 말씀이에요." "두고 보아야 압니다." 타루는 끈기 있는 어조로 말했다. "우리의 할 일을 다하고 나서 말 이죠." 그동안에 리외는 자기 책상에서 카드를 다시 베끼고 있었다. 타루는 의자 위에서 동요하 고 있는 그 연금 생활자를 여전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우리와 협조하지 않으세요, 코타르 씨?" 코타르는 불쾌하다는 태도로 의자에서 일어나 자기의 둥근 모자를 손에 들었다. "그것은 내 직업이 아닙니다." 그러고는 시비조로 말했다. "뿐만 아니라, 페스트 난리 속에서 나는 더 좋은걸요. 그런데 왜 내가 그것을 멈추게 하는 데 뛰어들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요." 타루는 갑자기 진실을 알기라도 한다는 듯이 이마를 탁 치면서 말했다. "아! 그랬군요, 난 잊었었습니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체포되셨을텐데." 코타르는 펄쩍 뛰더니 넘어질 듯이 의자를 꽉 쥐었다. 리외는 쓰기를 멈추고 신중하고도 흥미있는 태도로 그를 바라보았다. "누가 그래요?" 그 연금 생활자가 외쳤다. 타루는 놀라서 말했다. "아니 당신이 그러시구, 좌우간 의사 선생하고 나하고는 그렇게 알고 있는데요." 그러자 코타르가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렸 다. "그렇게 흥분하지 마세요." 타루가 덧붙여 말했다. "의사 선생이나 나나 당신을 고발할 사 람은 아닙니다. 당신의 사건은 우리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경찰을 결코 좋 아하지 않으니까요. 자, 앉으시죠." 그 연금 생활자는 자기 의자를 보다가 한참 주저한 끝에 앉았다. 한참만에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것은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하고 그는 인정했다. "그것이 다시 튀어나왔죠. 나는 다 잊혀졌거니 했었고, 그러나 어떤 놈이 찔렀죠. 그들은 나를 호출하더니 조사가 끝날 때까지 늘 대기하고 있으라더군요. 그래서 결국 체포되고 말 것이라는 것을 알았죠." "큰 죄인가요?" 타루가 물었다. "하기야 말하기에 달려 있어요. 하여간 살인은 아닙니다." "금고형쯤인가요? 혹은 징역인가요?" 코타르는 몹시 풀이 죽어 보였다. "금고형이겠죠, 재수가 좋으면..." 그러나 잠시 후에 그는 다시 핏대를 올리며 말했다. "과실이었어요. 누구나 과실은 범하는 법이죠. 생각만 해도 못 견딜 노릇이에요. 그것 때 문에 잡혀가서 집과 생활과 모든 친지들과 헤어져야 하다니." "아하!" 타루가 물었다. "목맬 생각을 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군요?" "네, 어리석은 짓이죠, 물론." 리외는 처음으로 입을 열고 코타르에게 자기는 그의 불안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모든 것 이 잘될 것 같다고 말했다. "아! 당장에는 두려울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은 나는 알고 있죠." "아마" 타루가 말했다. "우리 보건대에는 안 들어오실 작정이시군요." 두 손으로 자기 모자를 뺑뺑 돌리고 있었던 코타르는 자신 없는 시선으로 타루를 쳐다보 았다. "나를 원망하지 마세요." "물론 안하죠. 허나 적어도" 타루는 웃으면서 말했다. "자발적으로 병균을 전파시키거나 하는 짓은 말아주세요." 코타르는 자기가 페스트를 원한 것이 아니고, 페스트는 스스로 생겨났고, 당장에는 그 덕 분에 자기 일이 잘되고 있지만, 그것이 제 탓은 아니라고 항의를 했다. 그리고 랑베르가 문 앞에까지 왔을 때 그 연금 생활자는 목소리에 있는 힘을 다해서 이렇게 덧붙였다. "게다가 당신들은 아무 결과를 얻지 못하시리라는 것이 내 의견입니다." 랑베르는 코타르가 곤잘레스의 주소를 모른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작은 카페로 돌아가 볼 길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튿날 거기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그리고 리외가 소식 을 알고 싶다는 뜻을 표시하기에 랑베르는 주말에 밤 몇 시가 되든 자기 방으로 타루와 함 께 와달라고 초대를 했다. 아침이 되자 코타르와 랑베르는 그 작은 카페에 가서, 저녁때 무슨 지장이 있으면 내일 기다리고 있도록 가르시아에게 전갈을 남겨 두었다. 그날 저녁 그들은 가르시아를 기다렸으 나 허사였다. 그 다음날 가르시아가 와 있었다. 그는 말없이 랑베르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알지 못하는 일이지만 그래도 자기가 아는 바로는 호별 검사를 실시하기 위해서 구역마다 24시간 통행이 차단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곤잘레스와 그 두 젊은이가 차단선을 넘지 못 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다시 한 번 그들 을 라울과 연락시켜주는 것이었는데 그것도 물론 그 다음다음날 안으로는 어렵다는 것이었 다. "아마" 랑베르가 말했다. "아주 처음부터 재출발을 해야 할 것 같군요." 그 다음다음날, 어느 길모퉁이에서 라울은 가르시아의 추측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래 동 네의 교통이 차단되었다는 것이었다. 다시 곤잘레스와 접선을 해야만 했었다. 이틀 후 랑베 르는 그 축구 선수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참 바보 같은 이야기지." 곤잘레스가 말했다. "서로 다시 만날 방법을 약속해놓을걸." 랑베르의 의견도 마찬가지였다. "내일 아침 우리 녀석들한테나 가보세. 가서 일을 조정해보도록 하지." 그 이튿날 녀석들은 집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정오에 리세 광장에서 만나자고 전갈 을 해놓았다. 그리고 랑베르가 돌아왔을 때의 표정은 오후에 타루가 만났을 때 깜짝 놀랄 정도였다. "잘 안되나요?" 타루가 그에게 물었다.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랑베르는 말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초대를 변경했다. "오늘 저녁에 와주세요." 그날 저녁 두 사나이가 랑베르의 방에 들어갔을 때 그는 누워 있었다. 그는 일어서서 미 리 준비해두었던 술잔 두 개에 술을 따랐다. 리외는 자기 잔을 받으면서 그에게 일은 잘되 어가느냐고 물었다. 신문기자는 완전히 한 바퀴 돌아서 제자리에 돌아왔으며, 머지 않아서 최후의 약속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술을 마시고 나서 덧붙여 말했다. "물론 그들은 오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단정을 내릴 필요는 없죠." 타루는 말했다. "아직 이해를 못하신 모양인데." 랑베르는 어깨를 으쓱 올리면서 대답했다. "무엇을요?" "페스트말입니다." "아하!" 하고 리외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아직 잘 이해를 못하고 계셔요. 그것은 재발하게 마련입니다." 랑베르는 방 한구석으로 가서 조그만 축음기의 뚜껑을 열었다. "그것은 무슨 곡입니까? 듣던 곡인데요." 타루가 물었다. 랑베르는 그것이 '세인트 제임스 인퍼머리'라고 대답했다. 곡이 반쯤 돌아갔을 때, 멀리서 총 소리가 두 번 들려왔다. "개 아니면 탈주자로군." 하고 타루가 말했다. 잠시 후 레코드가 끝나자 앰뷸런스 소리가 뚜렷하게 들리고 소리가 커지면서 호텔 방의 창밑을 지나 점점 작아지더니 마침내 아주 그쳤다. "이 레코드는 재미없어요." 랑베르가 말했다. "게다가 오늘 열 번이나 들었으니 그럴 수밖 에." "그 곡이 그렇게 좋으세요?" "아니요. 이것밖에는 없어서요." 그리고 잠시 후에 말했다. "그것은 재발하게 마련입니다." 그는 리외에게 보건대 일은 어떻게 되어 가느냐고 물었다. 다섯 개 반이 현재 활동하고 있으나 몇 반을 더 조직했으면 했다. 신문기자는 자기 침대 위에 앉아서 손톱 손질에 몰두 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리외는 침대가에 웅크리고 있는 그 짤막하고 힘있게 생긴 그의 윤 곽을 살피고 있었다. 문득 그는 랑베르가 자기를 보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그런데 선생님." 그가 말했다. "저는 그 조직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보았습니다. 비록 제 가 가입은 안 하고 있지만, 그것은 제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일 같으면 저 는 아직도 제 몸을 바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스페인 전쟁에 종군한 일도 있습니다." "어떤 편으로요?" 타루가 물었다. "진 편이죠. 그러나 그 후 나는 좀 생각한 바가 있어요." "무슨 생각이죠?" 타루가 물었다. "용기라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지금 나는 인간이 위대한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인간이 위대한 감정을 가질 수 없다면, 그 사람에게는 흥미가 없습니다." "인간은 모든 능력을 가진 것 같습니다." 타루가 말했다. "천만에요. 인간은 오랫동안 고통을 받거나, 오랫동안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 간은 가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는 두 사람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이것 봐요, 타루, 당신은 사랑을 위해서 죽을 수 있습니까?" "모르겠어요.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을 것 같군요." "바로 그것이죠. 그런데 당신은 하나의 관념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습니다. 눈에 뻔히 보 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떤 관념 때문에 죽는 것은 지긋지긋합니다. 나는 영웅주의를 믿지 않 습니다. 나는 그것이 쉬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은 파괴적인 것이라고 배웠습니 다. 내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살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죽는 일입 니다." 리외는 신문기자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줄곧 그를 바라보면서 그는 부드럽게 말 했다. "인간은 하나의 관념이 아닙니다, 랑베르." 랑베르는 침대에서 펄쩍 뛰어 일어났다. 얼굴은 흥분해서 시뻘개졌다. "관념이죠. 아주 짧은 관념이죠. 인간이 사랑에서 돌아서는 그 순간부터 그랬죠. 그런데 바로 우리들은 사랑이 불가능해졌지요. 단념하십시오, 선생님.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기다 립시다. 그리고 정말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영웅적인 연극을 부리지 말고 전반적인 해방을 기다립시다. 저는 그 이상 더 나가지 않겠어요." 리외는 갑자기 피로를 느낀 듯이 일어섰다. "옳은 말씀이에요, 랑베르. 아주 옳아요.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금 하시려는 일에 서 마음을 돌려놓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나로서는 정당하고도 좋은 일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역시 이것만은 말해두어야 합니다. 즉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성실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 만한 생각일지도 모르나 페스트와 싸우 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성실성이 대체 무엇이지요?" 하고 랑베르는 돌연 신중한 태도로 물었다. "일반적으로는 모르겠지만, 내 경우로 말하면 그것은 내 직책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아!" 하고 랑베르는 화가 나서 말했다. "나는 어떤 것이 내 직책인지를 모르겠어요. 아마 사랑을 택한 것이 정말 잘못일지도 모르겠어요." 리외는 그를 마주보았다. "아닙니다." 이렇게 그는 힘차게 말했다. "조금도 잘못한 것은 없습니다." 랑베르는 생각에 잠긴 듯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분께서는 아마 그런 일을 해서 조금도 손해보실 것이 없을 겁니다. 유리한 편에 서는 것은 쉬운 일이니까요." 리외는 자기 잔을 비웠다. "자" 하고 그가 말했다. "우리는 볼일이 있어서요." 그는 나갔다. 타루도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그러나 막 나가려는 순간에 생각난 듯이 신문기자에게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리외의 부인이 여기서 수백 킬로 떨어진 요양소에 있는 것을 아시는지요?" 랑베르는 놀랍다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타루는 벌써 나가버렸다. 이튿날 꼭두새벽에 랑베르는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를 떠날 방법을 찾을 때까지 함께 일하도록 해주시겠습니까?" 잠시 수화기에서 말이 없더니, 이어서 말이 들려왔다. "좋아요, 랑베르, 감사합니다." 3 이렇게 해서 매주 계속해서 그 페스트의 포로들은 저마다 발버둥을 쳤다. 그리고 랑베르 같이 그들 중의 몇몇은 아직 자유인처럼 행동하고 있으며 아직도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생 각하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실상 8월 중순경에는 페스트가 모든 것을 뒤덮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때는 이미 개인적인 운명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었고, 다만 페스트라는 집단적 인 사실과 모든 사람들이 같이 당한 여러 가지 감정밖에는 없었다. 가장 뚜렷했던 것은 이 별과 귀양살이의 감정이었다. 거기에는 공포와 반항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필자는 그 더위와 질병의 절정에서, 전반적인 수법으로, 그리고 그 표본을 내세우는 의미에서 생존한 우리 시민들의 난폭함, 사망자의 매장, 이별한 애인들의 괴로움 같은 것을 묘사하는 것이 적 합하다고 생각한다. 그해 중간쯤, 페스트에 휩싸인 도시에 여러 날 동안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특히 오랑 시 민들이 두려워하는 것인데 그 이유는, 이 시가 세워진 언덕 위에서 바람은 아무런 자연적인 방해도 받지 않고 또 아주 맹렬한 기세로 거리거리에 불어닥치기 때문이었다. 몇 달 동안 비 한 방울 시가에 내리지 않아 시원하게 해주지 못했던 후의 일이라 도시는 뿌연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람으로 해서 누덕누덕 벗겨졌다. 이처럼 바람은 먼지와 종잇 조각을 물결처럼 일게 해서 전보다 적어진 산책객들의 다리를 때렸다. 그들은 앞으로 몸을 굽히고, 손수건이나 손으로 입을 가리고 서둘러 길을 지나갔다. 저녁때, 여태까지는 매일 이 것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그 하루를 되도록 길게 끌어보려고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 있었으며, 이제는 자기들 집으로 또는 카페로 걸음을 재촉하는 몇몇 떼를 볼 수 있을 뿐이 었는데, 심지어 며칠 동안은 이 계절에는 훨씬 더 일찍 찾아드는 황혼이 깃들일 무렵 거리 들은 쓸쓸해지고, 바람만이 계속 울음 소리를 거기에 쏟아놓는 것이었다. 물결이 높아진, 여 전히 보이지 않는 바다로부터 일종의 해초와 소금 냄새가 넘쳐흐르는 그 쓸쓸한 도시는 바 람의 외침으로 쨍쨍 울려가며 마치 불행한 하나의 도시인 양 신음하고 있었다. 여태껏 페스트는 도심지보다는 인구 밀도가 크고 살기가 불편한 외곽 지대에서 더 많은 희생자를 냈었다. 그러나 페스트는 돌연 관공서 지역에도 접근해서 자리를 잡은 듯싶었다. 주민들은 바람이 병의 씨를 날라온 것이라고 원망하고 있었다. "바람이 망쳐버렸다."고 호텔 의 지배인은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쨌든간에 중앙 지대의 사람들은 밤중에 그것도 더 잦 게 페스트의 음울하고도 힘없는 호소를 창밑에서 울리고 가는 앰뷸런스의 윙윙거리는 소리 를 바로 걸어서 들어야 할 차례가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같은 시내에서도 특히 심한 구역을 격리시켜, 불가피한 직무 요원 이외에는 출입을 금지 하기로 했다. 그때까지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그러한 조치가 특별히 자기네들에게만 취 해진 일종의 약자에 대한 학대처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 그들은 대조적으로 다른 지역의 주민들을 마치 자유민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그 대신 다른 지역 사 람들은 곤란한 순간에 부닥쳐도 다른 사람들이 그래도 자기들보다 더 자유가 없다는 것을 연상하고는 하나의 위안을 삼는 것이었다. '나보다 더 부자유한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그 무렵에 가질 수 있는 유일의 희망을 주는 말이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특히 서쪽 근처 별장 지역에 다시 화재가 빈발하는 일이 생겼다. 조사 결과, 예방 격리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초상을 치른 불행에 눈이 뒤짚혀서, 페스트를 태워 죽 여버린다는 환상으로 자기네 집에다가 불을 지르곤 했던 것이다. 하도 자주 그런 일이 벌어 졌는데 그것이 맹렬한 바람으로 인해 그 지역 일대를 끊임없는 위험 속에 몰아넣고 있어 그 러한 짓을 말리느라고 무척 애를 먹었다. 당국에서 실시하는 가옥 소독만으로 모든 전염의 위험을 몰아내는데 충분하다는 것을 아무리 증명해주어도 소용이 없어서, 마침내는 그 죄없 는 방화자들에 대해서 극히 엄한 형벌을 공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아마도 그 불행 한 사람들을 겁나게 만드는 것은 투옥된다는 관념이 아니라 모든 시민들에게 공통된 확신, 즉 시의 감옥에서 나타나는 극도의 사망률의 결과로 투옥형은 결국 사형과 같다는 확신이었 다. 물론 그 신념은 전혀 근거없는 것도 아니었다. 분명한 이유에서긴 하지만 페스트는 병정 이라든가, 수도승이라든가 죄수들처럼 단체생활에 젖은 사람들에 대해서 특별히 혹독한 것 같았다. 왜냐하면 어떤 종류의 피검자들은 격리 상태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감옥이란 하나의 공동사회고 또 그것을 잘 증명하는 것으로서, 우리 시의 감옥에서는 간수들도 죄수에 못지 않게 그 병으로 희생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페스트라는 높은 위치에서 보면, 형무소장에서 말단 죄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은 복역수였으며, 아마 처음으로 절대적인 정의가 감옥 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국은 그러한 평등화 상태에 계급성을 부여하려고, 직무 수행중에 순직한 간수들에게 훈 장을 수여하려는 생각을 품었으나 허사였다. 계엄령이 선포되어 있었고, 또 어떤 각도에서 보면 그 간수들은 동원된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사후 추증으로 전공기장을 주었다. 그 에 대해 죄수들이야 아무런 항의를 하지 않았지만, 그 관계의 각 방면에서는 그 일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대중의 머릿속에 유감스러운 혼동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는 정당한 이유 를 상기시켰다. 당국은 그들의 요구를 정당하다고 보고, 가장 간단한 방법은 간수들에게 방 역공로장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처음 사람들에게는 이미 과오가 행해졌으니 그 들에게서 훈장을 반환시킨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군 관계자들은 여전히 자 기네들의 견해를 고집했다. 또 한편 방역공로장으로 말하면, 질병의 유행기에 그런 훈장 하 나 받아 보았댔자 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전공기장 수여로 얻을 수 있던 정신적인 효 과를 일으키지 못하는 불편한 점이 있었다. 즉 모든 사람들에게 불만족이었다. 게다가 형무 당국은 교회측이나 그보다는 차이가 훨씬 덜 나지만, 군 당국과 똑같은 조처 는 취할 수가 없었다. 사실 시내에 있는 단 두 개의 수도원의 수도승들은 신앙심이 두터운 가정에 임시로 분산 숙박을 하도록 조치가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능할 때마다 소규모 의 부대들이 병영에서 분리되어 학교나 공공건물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처럼 겉으로는 시민 들에게 포위된 연대책임을 강요하고 있었던 질병은, 동시에 전통적인 결합을 파괴하고 개인 개인으로 하여금 그들의 고독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것은 혼란을 야기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모든 상황에다가 설상가상으로 바람까지 불어서, 모든 사람들의 정신에다 불을 붙 여 놓았다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시의 문들은 밤에 몇번씩이나, 그것도 이번에는 무장한 작은 그룹에게 습격을 받았다. 사격전이 벌어졌고, 부상자가 생겼고, 도망자도 생겼다. 감시 소들이 강화되어 그러한 시도는 이내 중지되었다. 그러한 거사는 그래도 시내에 일종의 혁 명의 기운을 북돋아주어 그것으로 인하여 몇 건의 폭력사건을 야기시켰다. 보건상의 이유로 폐쇄되었거나 화재를 입은 집들이 약탈을 당했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러한 행위가 계획적인 것이었다고 추측하기는 어려웠다. 대개의 경우 그것은 여태껏 점잖았던 사람들이 돌발적인 기회에 비난을 받을 만한 일을 저질렀으며, 그런 행위는 이내 다른 사람들이 흉내를 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극한 슬픔에 빠진 집 주인을 앞에 놓은 채 아직도 불길에 싸여 있 는 집으로 뛰어드는 미치광이도 있었다. 집 주인이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 구경꾼들도 그놈 들이 하는 짓을 본땄고, 그래서 그 어두운 거리에는 꺼져가는 불길과 어깨에 걸머진 물건 또는 가구들로 해서, 일그러진 그림자 떼가 사방으로 도망치는 것을 타는 불빛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한 부수적인 사건들로 말미암아서 당국은 부득불 폐스트령을 계엄령과 동일하게 다루 어서 거기에 입각한 규칙을 적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절도범 두 명이 총살되었다. 그러나 이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렇게도 사망자가 많 은 판에 그 두 사형수는 거의 눈에 뜨이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그것은 마치 바다에 떨어뜨 린 물 한 방울과 같았다. 그리고 사실 그와 비슷한 광경이, 상당히 자주 당국의 단속을 어디 바람이 부느냐 하는 식으로 반복되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듯싶은 유일한 조치는 등화관제 제도였다. 11시부터 완전한 암흑 속에 잠겨버린 시가는 마치 돌덩어리처럼 되어버 렸다. 달이 비치는 하늘 아래, 시가는 집들의 흰 벽과 한 그루 나무의 검은 그림자도, 한 사람의 발자취도, 개 한 마리 짖는 소리도 없는 쭉 뻗은 거리들을 즐비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 적 막한 대도시는 그때 이미 한낱 무력하고 육중한 정육면체의 덩어리일 뿐, 다만 그 사이로 잊혀진 자선가들이며, 또는 영원히 청동 속에 휩쓸리고 만 그 옛날의 위인들만이 돌이나 쇠 로 만든 그 인공의 얼굴을 가지고, 한때는 인간이었던 것들의 몰락한 모습을 일깨워주려 하 고 있었다. 그 속된 우상들은 답답한 하늘 아래 숨을 거둔 네거리에 군림하고 있었는데, 그 투박스럽고 무감각한 작자들은 우리가 발들여놓은 요지부동의 시대, 또는 적어도 그 마지막 질서, 페스트와 돌덩어리와 밤으로 해서 모든 음성이 침묵으로 돌아갔을 무렵의 지하 묘지 의 질서를 제법 잘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밤은 또한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도 있었으며, 매장에 관해서 떠도는 전설과 같은 진실은 우리 시민들을 안심시킬 만한 것이 못 되었다. 매장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필자로서 는 민망스럽기 짝이 없다. 그 점에 관해서 필자를 나무랄 수 있다는 것도 잘 느끼고 있지만 필자의 유일한 변명은 그 기간 내내 매장이 그치지 않았다는 것과, 또 매장에 대한 걱정은 모든 시민들에게 불가피한 일이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로, 어떤 의미에서는 필자도 역시 불가 피했었다는 점이다. 어쨌든 이것은 필자가 그런 종류의 의식에 취미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 다. 도리어 반대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사회, 그 중의 한 예를 들면, 해수욕 같은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결국 해수욕은 금지되었고,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사회는 날마다 죽은 사람들의 사회에 양보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판이었다. 그것은 자명한 노릇이었다. 물론 그 죽음의 사회를 보지 않고 눈을 가리고, 그것을 거부하려고 애쓸 수도 있었지만, 자 명한 일이란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어서 모든 것을 앗아가고야 마는 법이다. 예를 들어 여 러분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매장해야 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그 매장을 거부하겠는가? 그런데 초기에 우리의 장례식의 특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신속성이었다! 모든 형식은 간소화되었으며 일반적인 경향의 장례식은 폐지되었다. 환자들은 가족과 헤어진 채 로 죽었으며 밤샘은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결국 저녁나절에 죽은 사람은 송장 혼자 밤을 넘 기고, 낮에 죽은 사람은 지체없이 매장되었다. 물론 가족에게 통보는 하지만, 해보았댔자 대 부분의 경우는 그 가족도 만약 병자 곁에서 살았던 사람들일 경우에는 예방 격리를 당하고 있었던 터라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가족이 그 고인과 함께 지내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들 은 지정된 시각, 즉 목욕도 끝나고 입관되어 묘지로 떠나려는 시각에나 참여하는 것이었다. 가령 그러한 절차가, 리외가 종사하고 있는 그 임시 병원에서 행해졌다고 하자. 그 학교는 본관 뒤에 출입문이 하나 있었다. 복도로 면해 있는 커다란 헛간에는 관들이 들어 있었다. 바로 그 복도에 놓여 있는 관 하나를 가족들은 보게 된다. 이내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것은, 즉 일련의 서류에 호주의 서명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끝나면 시체를 자동차에 싣는데 그 자동차는 트럭을 사용할 때도 있고, 대형 구급차를 개조한 것을 사용할 때도 있다. 친척들은 아직 운영이 허가되어 있는 택시를 하나 얻어타고 전속력으로 변두리 길을 달려서 묘지에 도착한다. 묘지 입구에서 헌병이 차를 정지시키고, 그것이 없으 면 우리 시민들의 마지막 거처라고 부르는 것도 얻을 수 없는 공식 통행증에다 고무도장을 한 번 찍어주고 옆으로 비켜선다. 그러면 차는, 수많은 구덩이가 메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어떤 네모진 터 앞에 도착한다. 신부 한 명이 시체를 맞이한다. 성당 안에서는 장례식을 올 리는 것이 금지되어 잇기 때문이다. 기도를 올리는 동안에 관이 밧줄에 감겨 끌려 미끌어지 면서 구덩이 밑바닥에 털썩 놓이면 신부가 관수기를 흔드는데 벌써 첫 흙이 관뚜껑 위에 튄 다. 구급차는 소독약의 살포를 받기 위해선 한 걸음 앞서 떠나버리고, 삽으로 찍어 던지는 진흙 소리가 차차로 나직하게 울려퍼지는 동안 가족들은 택시 안으로 들어가버린다. 15분 후면 가족들은 제 집에 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모든 일은 정말 최대한의 속도와 최소한의 위험성을 가지고 이루어진다. 그 리고 아마도 최소한 초기에는 가족들의 자연적 감정으로 이것을 섭섭하게 생각한 것이 분명 하다. 그러나 페스트 유행 기간중에 그러한 생각은 염두에도 둘 수가 없었다. 즉 모든 것을 실용성을 위해서 희생시켰던 것이다. 게다가 비록 처음에는 시민들의 정신 상태도, 격식대로 묻히고 싶다는 욕망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이상으로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행 사를 괴롭게 여기기도 했지만, 그 얼마 후에는 다행히도 식량 보급문제가 미묘하게 되어서 주민들의 관심은 보다 더 직접적인 관심사로 쏠리게 되었다. 먹기 위해서 줄을 서야 하고, 수속을 밟아야 하고, 서식을 갖추어야 하는 데 골몰해서, 사람들은 자기네 주위에서 어떻게 들 죽어가고 있는지, 또는 앞으로 자기네들이 어떻게 죽어갈는지를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고역이었던 그러한 물질적인 곤란이 나중에는 하나의 혜택이 되어버렸 다. 그리고 만약 질병이 이미 우리가 본 것처럼 만연되지 않았더라면 모든 것이 잘 되었을 것이다. 점차로 관들이 귀해지고, 수의를 만들 옷감도 묘자리도 귀해졌으니 말이다. 무슨 수가 있 어야만 했다. 가장 간단한 것은 역시 실용적이라는 이유에서였지만 장례식을 합동으로 하고 혹 필요에 따라서는 묘지가 병원과의 사이를 여러 번 왕래하는 길이었다. 그래서 리외의 경 우에는 병원에서는 그 당시 관을 다섯 개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이 다 차면 앰뷸런스가 싣 고 간다. 묘지에 가서 관이 비어지고, 무쇠빛의 시체들은 들 것 위에 실려 그런 데에 쓰려고 지은 헛간 속에서 기다리는 것이었다. 관들엔 소독약을 뿌려서 다시 병원으로 운반된다. 그 리고 이러한 작업이 필요한 횟수대로 되풀이되는 것이다. 그 방식은 무척 잘 되어 있어서 지사는 만족을 표명했다. 심지어는 리외에게, 그것은 옛적의 페스트 기록에서 볼 수 있는 것 과 같은, 흑인들이 끌고 가는 시체 운반차보다 어쨌든 낫다고 말했다. "그렇습니다." 리외는 말했다. "매장은 매일반입니다만, 우리들은 카드를 작성하고 있지요. 그러니 발전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한 행정면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 형식이 내포하게 된 그 불쾌한 성격 때문에, 도청 은 그 친척들을 장례식에서 멀리해야만 했다. 다만 묘지 입구에까지 가는 것을 허용하고 있 었지만 그나마도 공식적인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최종 의식에 관해서 사정이 좀 달라졌 기 때문이었다. 묘지 맨 끝에 있는 유향수로 뒤덮인 맨송맨송한 터에는 엄청나게 큰 구덩이 가 두 개 파여져 있었다. 남자용 구덩이와 여자용 구덩이였다. 그 점에서 보면, 행정 당국은 예의를 존중해주었던 것이나 그것이 그 뒤에 여러 가지 사태의 압력으로 급기야는 그 마지 막 수치심까지 잃어 체면이고 무엇이고 가리지 않고, 뒤범벅으로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포 개어서 묻어버리게 되었다. 다행히도 그런 극도의 혼란은 그 재앙의 최종 시기에 있었을 뿐 이었다. 지금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이 시기에는 구덩이가 구별되어 있었고, 도청에서는 그 점을 몹시 중요시하고 있었다. 그 구덩이 밑바닥마다 아주 두껍게 입혀 놓은 생석회가 김을 뿜으며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앰뷸런스의 왕복이 다 끝나면 줄을 지어서 들것들이 운반되 어, 벌거벗은, 약간 비틀어진 시체들이 거의 나란히 붙어서 구덩이 밑바닥으로 미끄러져 내 려가고, 그 순간 그것들은 생석회에 이어서 흙으로 덮인다. 그러나 그것도 다음에 들어올 구 덩이 손님을 위해서 일정한 위치까지 덮고 만다. 다음날 친척들은 한 서류에 서명을 하도록 호출되는데, 그것은 가령 사람과 개와의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확 인이 언제나 가능했다. 그런 모든 작업을 하려면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 수는 언제나 아슬아슬한 상태에 있었다. 처음에는 정식으로 채용되었고, 나중에는 임시로 채용되었던 위생 직원과 묘 파는 인부들은 페스트로 많이 죽었다. 아무리 조심을 해도 아무때고 전염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가장 놀라운 것은, 질병의 전기간을 통해서 그런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사람의 손이 결코 모자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위기는 페스트가 그 절정에 도달하기 직전에 있었 다. 그때 의사 리외의 불안은 심각했었다. 간부들도 그러했고, 또 그가 말하는 인부들도 그 러했고, 사람 손이 충분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페스트가 전시를 휩쓸게 되었던 시기부터는 그 격렬함 자체가 아주 편리한 결과를 가져왔다. 왜냐하면 페스트는 모든 경제 생활을 파괴 했고 상당수의 실업자를 내게 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간부층의 충원 대상은 안 되었지만, 막일에 있어서는 그것이 차라리 일을 쉽게 만들었다. 그 시기부터는 사실 곤궁 이 공포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을 늘 볼 수가 있었고, 일은 위험성의 정도에 따라서 임금을 지불하게 마련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보건과에서는 취직 희망자의 리스트를 마련해 놓을 수가 있었고, 그래서 어디서 결원이 생기자마자 그 리스트의 첫머리에 있는 사람들에 게 통지를 하곤 했는데, 그 사람들은 그동안에 자기 자신들이 결원이 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출두하게 마련이었다. 동시에 유기 또는 무기수를 이용하기를 오래 꺼려 했었던 지 사도 그러한 막다른 골목까지 가는 것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실업자가 있는 동안은 기다 려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럭저럭 8월말까지 우리 시민들은 마지막 거처로 단정까지는 못하나, 적어도 행 정당국 스스로 자기들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는 의식을 가질 수 있기에 충분한 질서를 가지 고 이끌어갈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 후의 일을 좀 미리 말하는 것이 되겠지만, 마침내 쓰지 않을 수 없던 최후의 수단에 대해 언급해야겠다. 8월로 접어들자 사실상 페스트가 그 정도 의 선을 유지하고 있던 평행선에서, 희생자의 증가는 이 시의 조그만 묘지가 제공할 수 있 는 가능한 선을 훨씬 초과하고 있었다. 담 한쪽을 헐어서 시체들을 위해 그 옆 터를 마련해 보았자, 이내 다른 방도를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밤에 매장을 하기로 결정했는데 그것은 확실히 약간의 문제를 덜어주었다. 앰뷸런스에 점점 더 많은 시체를 포개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규칙을 위반해서, 변두리 지대에서는 등화관제 시간 이후에도 볼 수 있 는, 밤 늦게 다니는 산책자들(또는 직책상 그렇게 되는 사람들)은 때때로 길쭉한 백색 앰뷸 런스 몇 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는 것을 만나곤 했다. 시체들은 서 둘러서 구덩이 속에 내던져졌다. 석회를 뜬 삽이 시체의 얼굴을 짓이기고, 이어서 이제는 점 점 더 깊게 패어진 구덩이 속에 이름도 모르게 묻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좀더 지난 후에는 또 다른 곳을 물색해서 더욱 확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현지 사령으로 영대묘지의 소유권이 소멸되어 발굴된 유골을 전부 화장터로 보냈다. 이윽고 페스 트 사망자들까지도 화장장으로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시문 밖에 있는 예 전의 화장장을 이용해야만 했다. 경비 초소는 더 멀리 이동을 시키고, 시청 직원 하나가 예 전에는 해안선을 따라 운행되었다가 폐쇄된 전동차를 이용하도록 건의함으로써 당국의 일은 훨씬 수월해졌다. 그 결과로 유람차와 전기기관차의 좌석을 뜯어내어, 내부를 개조하고 또 선로를 화장장까지 돌게 해서 화장장이 하나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래서 여름 내내, 또 가을 빗속에서도 매일 밤중을 이용해서, 승객 없는 괴상한 전차의 행렬이 덜거덕거리면서 해안선을 따라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시민들도 마침내는 그 내막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순찰대가 해안 도로에 접근을 금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몇 몇 그룹의 사람들이 해면으로 솟아나온 바위들 틈에 끼여 있다가 전차가 지나갈 때면 유람 차 안에 꽃을 던지곤 했다. 그럴 때, 전차는 꽃과 시체를 싣고 여름밤 속을 더욱 흔들거리고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아무튼 처음 얼마 동안은, 아침이 되면 시의 동쪽 방면에 메슥메슥한 짙은 안개가 떠돌았 다. 의사들은 누구나, 그 김은 불쾌하기는 하지만 사람 몸에는 조금도 해롭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그 동네 주민들은, 그렇게 해서 페스트가 하늘로부터 자기네들에게 달려 드는 것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그 동네에서 떠나버리겠다고 위협을 하는 통에, 부득이 복잡 한 도관수송장치를 해서 그 김을 다른 곳으로 뽑은 뒤에야 주민들은 가라앉았다. 바람이 몹 시 부는 날에만은 동쪽 지역에서 어렴풋이 풍겨오는 냄새가, 그들로 하여금 어느새 새로운 질서 속에 자리잡았으며, 또 페스트의 불길이 매일 저녁 자기들이 바치는 공물을 집어 삼키 고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회상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 질병이 가져온 극단적 결과였다. 그러나 질병이 그 후 더 치열해지지 않은 것 은 다행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각 기관의 활동이나 도청의 처리 능력이나, 또 화장장의 소화 능력이 부족하게 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리외는 그렇게 되면 시체를 바다로 내던져버리든가 하는 절망적 해결방법이 예상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는 파란 물 위에 그 시체들이 뿜는 징그러운 거품을 쉽게 상상하기도 했다. 또 그는 만약 통계가 계속해서 상승한다면 어떠한 조직도, 그것이 아무리 우수한 조직이라 해도 거기에 견딜 수가 없을 것이고, 도청이라는 것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첩첩이 죽어 쌓여서 거리에서 썩을 것이고, 또 공공의 광장에서는 죽어가는 사람들이 당연한 증오심과 어리석은 희망에 뒤섞여서 살아 남은 사람들에게 매달리는 꼴을 보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그러한 종류의 자명한 일 또는 걱정이 우리 시민들의 마음속에 귀양살이와 같은 격리 상태의 감정을 길러주고 있었다. 그 점에 관해서 예를 들어, 믿음직스러운 영웅이라든 가, 빛나는 어떤 행동이라든가, 옛날 이야기에서 보는 것과 비슷한, 정말 구경거리가 될 만 한 가치가 있는 것을 여기에서 하나둘 이야기할 수가 없는 것이 얼마나 유감된 일인가를 필 자는 잘 알고 있다. 그것에는 재난처럼 보잘것없는 구경거리는 없으며, 그 오랜 기간으로 말 미암아 무시무시한 불행은 단조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런 나날을 겪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는, 페스트가 성행하는 그 무시무시한 나날들은 거창하고 잔인한 커다란 불길 같은 것이 아 니라 차라리 그것은 지나는 곳마다 모든 것을 짓이겨버리는 끊임없는 그 발자취 같았다. 아니다. 페스트에는 그 병이 유행하던 초기에 의사 리외를 성가시게 따라다니던, 그처럼 사람을 흥분시키는 굉장한 이미지와 동일시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은 무엇보 다도 용의주도하고도 빈틈없는, 잘 짜여진 하나의 행정사무였다. 그렇기 때문에 한마디 덧붙 여 말하자면, 조금도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 필자는 객관성이라는 것을 고집해왔다. 필자는 이야기를 다소 일관성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한 기본적인 필요사항 외에 덧붙이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객관성 자체가 필자로 하여금 이렇게 말하도록 명령한다. 즉 그 시 기의 커다란 고통, 가장 심각한 동시에 가장 보편적인 고통은 그것이 이별의 감정이었다 할 지라도, 그리고 페스트의 그 단계에 있어서의 새로운 기록을 해놓는다는 것이 양심적으로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 고통 자체만 하더라도 그 당시에는 그 비장감을 상실하고 있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우리 시민들, 적어도 그 이별로 말미암아서 가장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 러한 정세에 길이 들어버렸을까? 그것을 긍정한다는 것은 전혀 옳지 못한 일일 것이다. 페 스트의 초기에는 잃어버린 사람에 대한 생각이 역력해서 애달팠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그 얼굴, 그 웃음, 지나고 나니 행복했었다고 생각되는 그런 날들이 생생하게 생각이 나지만, 그런 것을 다시 그려보고 있는 바로 그 시각에, 또한 그 후로 그렇게도 먼 곳이 된 그 장소 에서, 상대방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상상하기란 대단히 힘들었다. 요컨대 그 시기에 그들 은 기억력은 있었지만 상상력은 부족했었다. 페스트의 제 2단계에서는 그들은 기억력조차도 상실하고 말았다. 그 얼굴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결국은 같은 이야기지만 그 얼굴에서 살 이 없어지고, 그 얼굴을 자기들의 내부에서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처음 몇 주 동 안, 자기들의 사랑에 관한 것들 속에서 이제는 기껏해야 유령하고나 상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슬퍼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그 후 그들은 추억을 통해서 간직되어온 최고의 얼굴빛마 저 잊어버림으로써, 그 유령의 살이 더욱 깎이고 말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길 고 긴 이별을 치르던 끝에, 그들은 마침내 둘이서 누리던 그 달콤했던 사랑도 상상할 수 없 었으며, 또 언제든지 그들이 손을 얹어놓을 수 있었던 상대가 어떻게 자기 곁에 살고 있었 던가를 상상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한 점에서 보아, 그들은 날이 갈수록 더욱 위력을 발휘하는 페스트의 지배 속에 끌려 들어갔던 것이다. 우리 고장에서는 이제는 아무도 거창한 감정을 품은 이는 없게 되었다. 모 든 사람들은 단조로운 감정만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젠 끝날 때가 되었는데" 하고 우 리 시민들은 말하곤 했다. 왜냐하면 재난의 기간중 집단적인 고통의 종말을 바라는 것은 당 연한 일이었고, 또 사실 그들은 그것이 끝나기를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든 말들은 초기에는 열정이나 안타까운 감정은 없고, 다만 우리에게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는, 그리고 빈약한 모종의 이성에서 나오는 것들이었다. 처음 몇 주일간의 그 사나운 발악이 지 나면 실망이 뒤를 이었는데, 그것을 체념으로 보는 것은 잘못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역시 일 종의 일시적인 동의라고 할 수 있었다. 우리 시민들은 보조를 맞추었고 흔히 사람들이 말하듯이 거기에 적응하고 있었는데, 그것 은 그럴 수밖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에게는 아직 불행과 고통의 태도가 있었지 만, 그 기미를 느끼지는 않게 되었다. 또한 예를 들어서 의사 리외는, 바로 그것이야말로 불 행이며 또 절망에 젖어버린다는 것은 절망 그 자체보다 더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에는 이별을 당한 사람들도 실제로 불행하지는 않았는데, 그들의 괴로움에는 이제 막 꺼 져간 광명의 자취가 남아 있었다. 이제는 길모퉁이에서, 카페나 친구네 집에서 침착하고 무 관심하고 고달픈 눈을 하고 있는 이별당한 사람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들 때문에 도시가 마치 하나의 대합실 같았다.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들조차, 그들은 자기의 직책을 페스트와 꼭 같은 태도로 소심하고 조심스럽게 해나가는 것이었다. 모두들 겸손해졌다. 처음으로 그들 이별당한 사람들도 거리낌없이 헤어져 있는 사람 이야기도 하고, 제 삼자 같은 말투를 쓰기 도 하고, 자기들의 이별 상태를 질병의 통계와 같은 각도에서 검토해보기까지 되었다. 그때 까지는 자기들의 고통을 억지로 집단적인 불행과 떼어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을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어졌다. 기억도 없고 또 희망도 없이 그들은 현재 속에 머무르고 있었다. 사실,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현재로 되어 있었다. 또 꼭 말해두어야 할 것은, 페스트 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연애의 능력과 우정의 능력조차도 빼앗아 가버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연애를 하려면 약간의 미래가 요구되는 것인데, 우리에게는 이미 순간순간 이외에는 아무것 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무엇 하나도 절대적인 것은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이별당한 사람들이 이러한 상태 가 되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모두가 같은 시각에 거기에 도달했던 것은 아니고, 또한 일단 그 새로운 태도 속에 자리를 잡았다가도 번개같은 생각이나, 미련이나, 급격한 각성 등이 그 인내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을 더 젊고 더 괴로운 감정으로 이끌어갔다는 것을 덧붙여두어야 겠다. 페스트가 끝난 다음에 실행할 계획들을 사람들이 짜던 방식의 시기가 있었던 것도 불 가피했다. 예기치도 않고, 그리고 일종의 은총의 결과로서, 목적이 없는 질투로 혈안이 되는 것을 느끼는 것도 불가피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갑자기 그것을 인식하게 되어, 어떤 요일이 면 그 마비상태에서 벗어나곤 했는데 그것은 자연적으로 일요일이거나 토요일 오후였다. 왜 냐하면 그런 날은 지금은 없는 사람과 같이 지내던 시절에는 무슨 일이건 했던 일종의 관습 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렇지 않으면, 매일 해질 무렵에 그들을 사로잡는 우울증이 항상 분명한 것은 아니나마, 기억력이 되살아날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그들에게 주는 일도 있었다. 저녁때 그 시간, 그것은 신자들에게는 반성의 시간이었는데, 그 시간은 반성할 것이 라고는 공허밖에 없는 죄수나 유형수인 사람들에게는 괴로웠다. 그 시간이 그들을 잠시 엉 거주춤하게 만들었다가, 다음에 그들은 무력 상태로 돌아가서 페스트 속에 갇혀버리는 것이 었다. 이미 사람들은, 그것이 결국 그들이 가진 가장 개인적인 것을 단념하는 데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페스트의 초기에 그들은 남이 보면 하등의 존재를 느낄 수는 없지만, 자기들로서는 너무나도 중요한 자질구레한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데에 놀랐다. 또 그렇게 해서 개인 생 활이라는 것을 체험했는데, 이제는 그와 반대로 남들이 흥미를 갖는 것밖에는 흥미를 갖지 않고, 일반적인 개념만을 갖게 되었으며, 그들의 사랑조차도 그들 눈에 가장 추상적인 모습 으로 비치게까지 되었다. 그들은 때때로 이제는 잠이 든 동안만 희망이라는 것을 갖게 되었 고, 혹 '그놈의 가랫톳 같으니, 좀 끝장이 났으면!' 하고 생각할 정도로 페스트에 매인 몸이 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은 이미 잠들어 있었으며, 그동안 내내 하나의 긴 잠에 불과했 다. 시가는 눈 뜨고 잠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는데, 그들이 실제로 그 운명에서 벗어나는 것 은 이따금 밤중에 겉으로는 아물어 보이는 상처가 또다시 갑작스럽게 되살아나는 그 순간뿐 이었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 일종의 방심 상태로 그 악이 오른 상처의 부근을 어루만지면서 갑자기 다시 생생해진 그들의 고민과, 또 그것과 더불어 그들의 사랑이 혼비백산한 얼굴을, 한 줄기 섬광 속에서 다시 보는 것이었다. 아침이 되면 그들은 다시 재난 속으로, 즉 일상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별당한 사람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가를 사람들은 말할 수 있으리라. 허기야 그것은 간단한 일이다. 그들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굳이 말한다면, 그들은 모든 사람들과 같은 모습, 즉 극히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도시의 침착한 성격과 유치한 흥분과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겉으로는 냉정한 모습을 막상 취하면서도 비판적 감각의 외모는 상실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서, 그들 중의 가장 총명한 사람들까지도 모든 사 람들과 마찬가지로 신문지상이나 라디오 방송에서 페스트의 급속한 종말을 믿을 만한 이유 를 찾는 듯한 눈치를 볼 수 있었으며, 허황한 희망을 품는다는 것을 완연하게 볼 수 있었고, 또 어떤 신문기자가 권태증이 나서 하품을 하면서 되는대로 써놓은 논설을 읽고, 근거 없는 공포를 느끼는 모습도 볼 수가 있었다. 그 밖에 그들은 맥주를 마시거나 병자를 돌보거나 꾀를 부리지 않으면, 뼈가 으스러지게 일을 했다. 카드를 정리하는 사람도 있고, 레코드를 트는 사람도 있어, 그런 식으로밖에는 구별할 만한 점도 갖고 있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그 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것은 자기가 사는 옷이나 식료 품의 질을 더 이상 따지려고 들지 않는 그 태도에서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대 충대충 받아들였다. 결국 그 이별당한 사람들은, 초기에 그들을 보호해주고 있었던 그 야릇한 특권을 잃어버 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사랑의 에고이즘과 거기서 끄집어내고 있었던 혜택을 상실하 고 말았던 것이다. 적어도 이제는 사태가 명백해졌고, 재난은 모든 사람과 관계가 있었다. 우리들은 모두가 시 문에서 울리는 총 소리며, 우리들의 삶 또는 죽음을 구별짓는 고무도장 소리의 한가운데에서 화재와 카드, 공포와 절차 속에서 굴욕적이지만 등록된 죽음이 약속되 어, 무시무시한 연기와 침착하게 울리는 앰뷸런스 소리 속에서 우리는 똑같은 유배의 빵으 로 요기를 하며 무의식중에 어처구니없는 똑같은 재회와 평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의 사랑은 아마도 여전히 거기에 있었지만 그러나 다만 그것은 무용지물이어서 지니 고 다니기에만 무겁고, 우리의 마음속에서 생기를 잃어 마치 죄악이나 판결과도 같이 불모 의 존재였다. 그 사랑은 이미 장래가 없는 인내에 불과했고 좌절된 기대에 불과했다. 그런 점에서 시민들 중의 어떤 사람의 태도는, 시내 곳곳의 식료품 가게 앞에서 보는 그 긴 행렬 을 연상케 했다. 그것은 끝이 없으면서도 착각도 없는, 똑같은 체념과 똑같은 참을성이었다. 다만 이별에 관해서는 그 감정을 천 배 이상의 단위로 끌어올려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또 하나의 굶주림, 모든 것을 집어삼켜버릴 수 있는 굶주림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이 시의 이별당한 사람들이 처하고 있던 정신 상태에 대해서 정확한 개념 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 혹시 있다면, 다시 한 번 저 영원히 되풀이되는 황금색이며 먼지 자 욱한 저녁이 나무도 없는 시가지에 내리덮고 한편에서는 남자들과 여자들이 거리마다 쏟아 져 나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상하게도 그때 아직 햇빛을 받고 있는 테라스 쪽으로 올라오고 있는 것은 으레 도시의 언어로 되어 있는 차량과 기계 소리들 이 없어진 결과 둔탁한 발자국 소리와 목소리가 빚어내는 거대한 소음이었다. 그것은 무겁 게 내리누르고 있는 하늘에서 윙윙거리는 재난의 아우성 소리로 리듬이 맞추어진 수천의 구 두창들이 미끄러져 가는 소리였으며, 차츰차츰 온 시가를 충만시키고 있는 끝없고 숨막히는 발버둥 소리,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서 당시에 사랑을 대신하고 있었던 맹목적인 집념에게 저녁마다 가장 충실하고 가장 음울한 자기 목소리를 덧붙여주고 있었던 그지없고 숨막히는 발버둥 소리였기 때문이다. 4 9월과 10월 두 달 동안 페스트는 도시 전체를 발밑에 꿇어앉혔다. 본래가 발버둥칠 수밖 에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수십만의 인간들이 끝없는 매주매주 동안 여전히 발버둥만 치고 있었다. 안개와 더위와 비가 연달아서 하늘에 충만했다. 찌르레기와 지빠귀새의 고요한 대열 이 남쪽에서 찾아와서 하늘 높이 지나갔다. 그러나 파늘루가 말하는 색색거리면서 집들 위 를 돌아 다니는 이상한 나뭇조각인 그 재앙이 그 새들을 얼씬 못하게 하는 탓인지 도시의 둘레만 빙빙돌고 있었다. 10월초에는, 억수 같은 소나기가 내려 거리를 깨끗이 쓸었다. 그리 고 내내 그 거대한 발버둥 이외에 더 중요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 리외와 그의 친구들은 얼마나 자기네들이 피로해 있는가를 발견했다. 사실 보건대의 사람들은 더 이상 그 피로를 소화할 수 없게 되었다. 의사 리외는 자기 친구들과 자기 자신 에게 이상한 무관심한 태도가 늘어나는 것을 관찰함으로써 그것을 깨달았다. 예를 들어서, 여태껏 페스트에 관한 모든 뉴스에 대해서 그렇게도 깊은 관심을 보여주었던 그 사람들이 이제는 아무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랑베르는 어마 전부터 자기가 있는 호텔에 설치된 예방 격리소의 관리를 임시로 맡고 있었는데 자기가 담당하고 있었던 사람들의 수효 를 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고안한 즉각적 퇴거 절차에 대한 가장 자세한 사항까지도 잘 알고 있었다. 예방 격리자들에 대한 혈청 효과에 관한 통계는 그의 기억 속에 명백히 새겨 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페스트 희생자의 주간 숫자를 말할 수는 없었고, 실제 페스트가 기 승을 부리고 있는지 후퇴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머지않아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밤낮으로 자기네들 일에 열중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신문도 읽지 않고 라디오도 듣지 않았다. 그리고 혹 누가 어떤 결과를 알려주려고 하면, 거기에 흥미가 끌리는 척하면서도 실 제로는 넋을 잃은 무관심한 태도로 듣고 있으며, 그것은 고역에 지칠 대로 지쳐서 그저 매 일매일의 자기 근무에 과오나 없으면 그만으로 여겨 결정적인 작전도, 휴전의 날도 더 이상 바라지 않게 된 큰 전쟁의 전투원에게서 상상할 수 있는 무관심이었다. 페스트 때문에 계속 통계업무를 하고 있던 그랑은, 아마 그 전반적인 결과를 지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피로에 대해서 눈에 뜨일 만큼 강단이 있는 타루나 랑베르나 리외와는 반대 로 그의 건강은 좋지 못했다. 그런데 그는 시청 보조직원의 직책과 리외의 사무실 서기로서 의 일과 자기 자신의 밤일을 겸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두어 가지의 고정 관념, 즉 페스 트가 물러간 다음에 적어도 일주일 동안 완전한 휴가를 얻어 가지고, 자기가 한번 본격적으 로 해보려는 일에 대한 생각으로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계속적인 기진맥진 상태에 있는 것 을 볼 수가 있었다. 그는 또한 갑자기 감상적이 되는 일도 있었다. 그럴 때면, 그는 자청해 서 리외에게 쟌느 이야기를 했고, 지금 바로 이 순간에 그 여자는 어디에 있을지, 또 신문을 보면서 혹 자기 생각을 하고 있을지를 자문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그랑을 상대로 리외는 어 느 날 극히 평범한 말투로, 여태껏 하지 않았던 자기 아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자신에게 놀 랐다. 늘 안심시키려고 하는 내용의 아내의 전보를 어느 정도 믿어야 할지 자신이 없어서, 그는 아내가 요양하고 있는 요양소의 주임 의사에게 전보를 쳐보기로 결심을 했다. 회답으 로 그는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통지와, 병세의 악화를 막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보겠다는 약 속을 받았다. 그는 그러한 소식을 혼자서만 알고 있었는데 피곤한 탓으로 그랬는지 모르지 만, 어떻게 해서 자기가 그랑에게 실토를 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 서기는 쟌 느 이야기를 하고 난 다음에, 그의 아내에 대해서 물어보기에 리외는 대답했던 것이다. "아 시겠지만" 하고 그랑이 말했다. "요새는 그런 병도 금방 낫는다고 하더군요." 리외는 거기에 동의하면서, 자기가 아내의 병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다만 별거 상태가 너무 오래 끌게 되어서 지금 아내는 정말 외로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입을 다물 었고, 그랑의 물음에 대해서도 마지못한 태도로만 대답했을 따름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형편이었다. 타루가 가장 잘 참고 있었지만 그의 수첩은 그의 호기심 도 그 깊이에는 조금도 줄어든 것이 없으나 그 폭이 좁아진 것을 보여주었다. 그 기간내내, 사실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코타르에게밖에는 흥미가 없어 보였다. 호텔이 에방 격리소로 변조된 후부터 와서 살게 된 리외의 집에서, 저녁때 그랑에게 의사가 결과들을 발표해도 그 는 거의 듣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화제를 곧 일반적으로 그의 관심을 끌고 있는 시민 생 활의 사소한 일로 돌리곤 했다. 카스텔로 말하면, 그가 리외에게 혈청이 다 준비되었다고 알리러 왔던 날, 그리고 첫 시험 을 마침 새로 병원에 데려온, 리외가 보기에는 증상이 절망적이었던 오통 씨의 어린 아들에 게 실시해보기로 결정한 다음, 리외가 그 노인에게 최근의 통계를 알려주고 있었는데, 그때 상대방은 안락의자에 푹 파묻혀서 깊이 자고 있었다. 그리고 여느 때 같으면, 어딘지 부드러 운 맛과 아이로니로 해서 영원한 청춘을 간직하고 있었던 그 얼굴이, 갑자기 버림받은 듯 반쯤 벌어진 두 입술 사이로 침이 한 줄기 흘러내려 피로와 노쇠를 드러내고 있었다. 리외 는 목이 죄어오는 듯한 것을 느꼈다. 그렇게 약해진 자기 마음을 보고 리외는 자기가 얼마나 피곤한가를 판단할 수 있었다. 그 의 감수성은 걷잡을 수 없었다. 대개의 경우는 엉겨서 딱딱해지고 메말라 있던 감수성이 때 때로, 억제할 수 없는 감동 속으로 리외를 몰아넣곤 했다. 그의 유일한 방비는 그 경화상태 속으로 피신하여, 자신의 내부에 형성되고 있는 그 매듭을 단단히 도로 졸라매는 길이었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것만이 견뎌 나가기에 가장 좋은 방법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외에는 그 는 환상을 많이 가지고 있지도 않았으며, 또 피로 때문에 아직도 가지고 있었던 환상마저 빼앗겨버렸다. 왜냐하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그 기간 내내 자기의 역할이 병을 고치는 것 이 이미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의 역할은 진단하는 일이었다. 발견하 고, 보고, 기입하고, 등록하고, 다음에 선고를 내리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아내라는 사람들 은 그의 손목을 잡고 울고불고 하는 것이었다. "선생님, 저 사람 좀 살려주세요!" 그러나 그 는 살려주기 위해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격리를 명령하기 위해서 거기에 있었던 것이 다. 그때 사람들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는 그 증오심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참 인 정이 없어요." 하고 누가 어느 날 그에게 말했다. 천만에, 그는 그만큼 인정은 있었다. 그 인 정으로 해서 그는 매일 스무 시간을, 살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이 죽어가는 광경을 보고 참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 인정으로 해서 그는 매일 같은 일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꼭 그만큼의 인정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니 그 정도의 인정이 어떻게 사람을 살려주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 나날이 자기가 베풀고 있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 지시를 내리는 일이었다. 물론, 그런 것은 사람의 직업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도대체 그 공포에 휩쓸리고 많은 사람이 죽은 그 군중 틈에서, 어느 누가 인간의 직업을 수행할 여유가 있단 말인가? 피곤한 것이 차라리 행복한 일이었다. 만약 리외가 더 힘이 있었다면, 도처에 퍼져 있는 그 죽음의 냄새가 그를 감상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4시간밖에는 잠을 못 잤을 때 감상적일 수는 없다. 사물들이 있는 그대로 눈에 뜨인다. 즉 정의의 눈으로, 끔찍하고 바보같은 정의 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즉 선고를 받은 사람들도 역시 그것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페스트 이전에는 그는 구세주 같은 대접을 받았다. 알약 세 개와 주사 한 대 로 모든 것은 잘되었으며, 사람들은 그 팔을 잡고 복도로 부축되었다. 그것은 기분 좋은 일 이었지만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이제는 그와 반대로 그는 군인과 같이 가서 개머리판으로 문을 두드려야 가족들은 문열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리외를, 그리고 인류 전체를 자 기네들과 함께 죽음으로 끌고 들어가고 싶었을 것이다. 아! 인간은 인간 없이 지낼 수는 없 고, 자기도 이제는 그들 불행한 사람들과 다름없는 맨주먹의 신세고, 그들 곁을 떠나고 나면 가슴속에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는 떨리는 동정심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이 과연 사실이 었다. 적어도 그것은 그 끊임없는 여러 주일 동안, 의사 리외가 자기의 생이별 상태에 관한 생 각을 하면서 마음이 동요하고 있는 그런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그의 친구들 얼굴 에서도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는 그런 생각들이었다. 그러나 재난에 대한 그 투쟁을 계속 하고 있는 사람들을 차츰차츰 정복하고 있는 기진맥진한 상태의 위험한 결과는 외부의 사건 이며, 타인의 정서 같은 데에 대한 무관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것은 그들이 끌 려들어가고 있는 무성의 속에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시 절대로 불가결한 것이 아닌 동작, 또 그 동작들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처럼 그 사람들은, 점점 더 빈번하게 자기들 자신이 규정해놓은 위생 규칙을 소홀히하고, 자기 자신들의 몸에 실시 하기로 되어 있었던 수많은 소독을 잊고, 때로는 전염에 대한 예방 조치를 취하지 않고, 폐 장 페스트에 걸린 환자들 곁에까지 달려가게끔 되었다. 왜냐하면 들어가기 직전에 자기가 감연된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떤 장소까지 되돌아가서 필요한 소 독약을 몸에 뿌린다든가 하는 일은 첫째로 귀찮기 짝없는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것 이야말로 정말 위험한 일이었다. 그 이유는 페스트와의 투쟁이 그렇게 되면 도리어 사람들 을 가장 페스트에 걸리기 쉽게 해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들은 결국 요행을 바라고 있었는 데 요행이란 누구의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 도시에서, 지치거나 낙심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활 기에 넘치고 만족한 태도였다. 그는 바로 코타르였다. 그는 늘 다른 사람들과 접촉을 하면서 도 여전히 혼자 있었다. 그는 타루가 하는 일에 지장이 없는 한은 타루를 만나보기로 했는 데, 한편 그것은 타루가 자기의 사건을 잘 알고 있었던 탓도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타루가 그 자그마한 연금 생활자를 언제나 변함없이 상냥스러운 태도로 대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것은 끝없이 계속된 기적이기도 했지만, 타루는 자기가 기울이고 있는 노고에도 불구하고 항상 친절하고 조심성 있게 굴었던 것이다. 어느 날 저녁에는,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피곤할 때라도 그는 이튿날이 되면 새 기운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 사람하고는" 코타르가 랑베르 에게 말했다. "말이 통해요. 워낙 남자다운 남자니까요. 그는 언제나 이해가 깊어요." 바로 그런 이유로 해서 그 시기의 타루의 수기는 차츰차츰 코타르라는 인물에게 집중되었 다. 타루는 코타르가 자기에게 고백한 그대로의 이야기, 또는 자기의 해석을 붙인 이야기를 가지고 코타르의 반응과 고찰에 관한 일람표를 만들려고 했다. '코타르와 페스트와의 관계' 라는 표제 아래 그 일람표는 그 수첩의 몇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필자는 그것을 여기 에 요약해서 소개하는 것이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키가 작은 연금 생활자에 대한 타루의 총체적인 의견은 다음과 같은 판단으로 요약되고 있다. '그는 성장하고 있는 인물이 다.' 어쨌든 겉으로 볼 때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의미에서 그는 성장하고 있었다. 그는 사건 들이 돌아가는 형편에 대해서 불평이 없었다. 그는 가끔 타루 앞에서 다음과 같은 주석을 붙여서 자기 생각의 밑바닥에 있는 것을 표현하곤 했다. "물론 더 나아지지는 않죠. 그러나 최소한 모든 사람들이 걸려든거죠." 타루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위협을 받고 있지만, 그러나 그는 다른 사라들과 함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내가 단언하지만, 그는 자기가 페스트에 걸릴 수 있는 것을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그는 이런 생각, 아주 어리석은 생각도 아 니지만, 어떤 큰 병 또는 심각한 번민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그와 동시에 다른 모든 병과 번민이 면제된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는 성싶었다. "이런 것에 주의해본 일이 있으세요?"라 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사람은 여러 가지 병을 겹쳐서 앓을 수 없다는 것을요? 가령 선생 이 중대한 암이라든가 심한 폐병이라든가 하는 위중하고도 불치의 병을 앓는다고 가정해봅 시다. 선생은 절대로 페스트나 장티푸스에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안될 말입니다. 게다가 이것은 더 광범위한 것인데 왜냐하면 암 환자가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을 보신 적이 없으실테니까 말이에요." 정말이건 거짓말이건간에 그런 생각이 코타르의 생각을 아주 명랑 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가 원하지 않는 단 한 가지 일은 다른 사람들과 헤어져 있는 일 이다. 그는 혼자서 죄수가 되어 있느니 보다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갇혀 있는 편을 더 좋아 한다. 페스트와 함께 있으면, 비밀리에 조사받고, 서류고, 카드고, 수수께끼 같은 심리고, 눈 앞에 닥친 체포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알기 쉽게 말하면 이제는 경찰도 없고, 묵은 혹은 새로운 범죄도 없고 죄인이라는 것도 없다. 다만 특사 중에서도 가장 자유 재량의 특사를 기다리고 있는 죄수들뿐이며, 그둘 중에서도 가장 자유 재량의 특사를 기다리고 있는 죄숟 들뿐이며, 그들 중에는 경찰관들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 그처럼 역시 타루의 주석에 의하 면 코타르는 시미들이 나타내보이고 있는 번민과 혼란의 징조를, "자꾸 말해보세요 나는 먼 저 다 겪고 있으니까요."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너그럽고 이해성 있는 만족감을 고찰하 기 위한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결국 올바른 양심을 갖는 것 이라고 아무리 내가 말해도, 그는 악의 있는 눈초리로 나를 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 점에 있어서는 아무도 남과 같이 지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고는 "염려마세요, 내가 장담하죠. 모든 사람들을 함께 잡아두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에게 페스트를 안기는 것 입니다. 선생 주위를 좀 보세요." 그런데 사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현재의 생활의 그에게는 얼마나 편안하게 생각되는지 하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왜 그가 한때 자기 의 것이었던 여러 가지 반응을 재빨리 알아보지 못하는가? 세상 사람을 전부 자기 편으로 만들어보려고 누구나 애쓰는 그 노력, 길 잃은 행인에게 간혹 길을 일러줄 때에 사람들이 베푸는 친절과, 때로는 그들이 던지는 불쾌한 기분, 고급 식당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모습, 거기에 들어가서 노닥거리는 그들의 만족, 매일같이 영화관 앞에 줄을 짓고 서서 모든 연에 장에서 댄스 홀에 이르기까지 만원을 이루고, 밀려오는 조수처럼 모든 공개 장소마다 퍼지 는 무질서한 혼잡, 모든 접촉에 대해서 느끼는 뜨악한 태도,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람들 을 다른 사람에게로, 팔꿈치에게로, 이성을 이성에게로 밀어가는 인간적인 체온에 대한 이끌 림, 코타르는 그 모든 것을 그들보다 먼저 알았던 것이다. 그것은 명백한 일이다. 여자만은 예외였는데, 그것은 그 얼굴로야.. 그리고 내 생각에는, 그가 막 여자들 있는 곳에 갈 준비가 다 된 것같이 느꼈을 때, 그는 후에 혹 자기에게 끼칠지도 모르는 나쁜 취미를 갖게 될까봐 단념하는 것이었으리라.> <결국 페스트는 그에게서 성과를 얻은 것이다. 페스트는 고독하면서도 고독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을 공범자로 삼는다. 왜냐하면 분명히 그는 하나의 공범자이며, 그것도 즐겨 그러 기를 원하는 공범자기 때문이다. 그는 눈에 띄는 모든 것, 즉 여러 가지 미신, 당치도 않은 두려움, 그 불안한 넋들의 감수성, 되도록이면 페스트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결 국에는 그 이야기를 입밖에 내게 되는 버릇, 그 병이 두통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안 다음부 터 머리가 뜨끔하기만 해도 미친 사람처럼 되고 새파랗게 질리는 버릇, 그리고 초조하고, 예 민하고, 요컨대 불안정한, 망각을 모욕으로 변형시키고, 짧은 바지의 단추 하나를 잃어버린 것을 애달파하는 그들의 감수성, 그 모든 것의 공범자인 것이다.> 타루는 자주 저녁때 코타르하고 외출하는 일이 생기곤 했다. 이어서 그는 자기 수첩 속에 서, 그들이 땅거미가 떠돌 때, 혹은 밤중에, 컴컴한 군중들 속에 섞여서 어깨를 나란히하고, 이따금 전등 하나가 간신히 비쳐주는 희고도 검은 무리 속에 휩쓸려, 페스트의 냉기를 막아 주는 뜨거운 환락을 찾아가는 그 인간들 떼와 몰려 다니는 모습을 적어넣었다. 코타르가 수 개월 전에 공공 장소에서 찾고 있던 것, 즉 사치와 여유 있는 생활 그것은 그의 꿈이면서도 만족감을 느낄 만큼 맛보지 못했던 것, 다시 말하면 자유 방종한 향락을 이제 주민 전체가 추구하고 있는 터였다. 걷잡을 수 없이 물가가 뛰어올라가고 있었지만 그때만큼 돈을 낭비 한 적은 없었으며, 또 생활필수품이 부족했던 대부분의 경우에, 그때처럼 사치품이 많이 소 비된 적은 없었다. 사람들은 실업 상태에 불과했던 그 시간적 여유에서 오는 모든 장난들이 배가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타루와 코타르는 가끔 꽤 오랫동안 한 쌍의 남녀 뒤를 따라 가보는 일이 있었는데, 전에는 자기들의 관계를 감추려고 애썼던 그들이 이제는 서로 꼭 얼 싸안고, 악착같이 거리거리를 걸어다니며, 위대한 열정에서 오는 다소 굳어 있는 듯한 방식 으로, 자기네들 주위의 군중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었다. 코타르는 감동하여 "아! 참 젊 은이들이로구나!"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큰 소리로 이야기를 했고, 집단적 흥 분과 그들 주위에서 뿌려지는 왕족들이 주는 것과 같은 훌륭한 팁과 눈앞에 전개되는 정사 속에서 명랑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타루가 보기에 코타르의 태도에는 거의 악의가 없었던 것 같다. "난 그런 것을 이 미 다 겪었지."라고 말하는 그의 말투는, 승리감보다 차라리 불행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마 내 생각에' 이렇게 타루는 언급하였다. <그는 하늘과 시의 벽 사이에 갇혀 있는 그 사람들 을 사랑하게 되기 시작한 것이다. 예를 들어서 그는 그 사람들에게 할 수만 있는 일이라면, 그것이 그리 무서운 것이 못된다는 것을 설명해주고 싶었으리라. "저 소리들이 들리시죠." 이렇게 그는 나에게 강조했다. "페스트가 가고 나면 나는 이것을 하리라, 페스트가 가고 나 면 나는 저것을 하리라 하는 소리 말입니다... 그들은 가만히 있지 않고 생활을 망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들은 어떤 것이 자기들에게 이롭다는 것까지 모르고 있거든요. 아, 그래 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어요? 내가 체포되고 나면 이것을 하겠다고요? 체포는 하나의 시작이지 끝이 아닙니다. 반면에 페스트는... 내 생각을 말할까요? 그들은 돼가는 대로 놓아 두지 않으니까 불행한 것이에요. 그리고 내가 말하는 것은 다 근거가 있지요."> 타루는 덧붙여 써 나갔다. <그의 말에는 사실 근거가 있다. 그는 오랑 시민들의 모습을 가차없이 비판하고 있다. 주민들은 자기들을 서로 가깝게 만들어주는 따뜻한 것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자기들을 서로 멀게 만드는 경계심 때문에 그런 요구에 감히 자신을 내맡기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웃 사람을 믿을 수 없다는 것, 모르는 동안에 페 스트에 걸릴 수 있고,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병균이 전염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코타르처럼 자기가 사실은 사귀고 싶은 모든 사람들이, 혹 밀고자일 수 도 있다고 생각하며 지내던 사람이나 그런 감정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페스트가 가까운 시일내에 그들 어깨에 손을 얹어놓을 수도 있고, 은근히 페스트가 덤벼들 채비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었다. 가능한 한 그 는 공포 속에서도 마으미 편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들을 저희들보다 먼저 맛보았으니 만큼 내 생각으로는 그는 이 불안의 잔인한 맛을 완전히 그들과 함께 느끼지는 못할 것 같 다. 요컨대, 아직은 페스트로 죽지는 않고 있는 우리들 전부와 같이, 그는 자기의 자유와 생 명이 매일매일 파괴 전야에 있음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그러나 그 자신도 공포 속에서 산 일이 있는 만큼,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이 공포를 맛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더 정확 하게 말하면, 그 공포도 그렇게 되면 다만 자기 혼자서 당하던 때보다는 덜 힘에 겨운 것 같았다. 이 점이 그의 잘못이며, 또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다. 그러나 결 국, 그런 의미에서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우리가 이해하고자 애써 볼 가치가 있는 것이 다.> 결국 타루의 수기는, 코타르에게나 페스트에 걸린 사람들에게는 동시에 일어난 아주 이상 한 의식을 또렷이 해주는 하나의 이야기로 끝나고 있다. 그 이야기는 그 시기의 곤란한 분 위기를 거의 그대로 보충해주고 있는데 필자가 그것을 중요시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들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를 상연하고 있는 시립 극장에 갔었다. 코타르가 타루를 초대했던 것이다. 페스트가 시작되던 봄에 이 도시로 공연을 하러 왔던 극단이 관계하고 있 었다. 병으로 오도가도 못하게 된 그 극단은 부득이 오페라 극장측과 협정을 맺고 매주 한 번씩 그 공연을 되풀이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래서 몇 달 전부터 금요일마다 이 시의 시립 극장에서는 오르페우스의 음률적인 함숨과 에이리디케의 힘없는 호소 소리가 울려나오고 있 었다. 그러나 그 흥행은 여전히 최고의 인기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매번 막대한 수입을 올리 고 있었다. 밀려오고 있는 사람들은 혹시나 입장을 못할까봐 애쓰고 있었다. 무대 전면의 눈 부신 조명 아래서 조용히 악사들이 악기를 조율하고 있는 동안에, 사람들의 그림자가 빤히 보이게 드러나 사람들이 이 줄에서 저 줄로 옮겨가고 상냥스럽게 허리를 굽히곤 하는 것이 보였다. 점잖은 대화의 나지막한 소음 속에서, 사람들은 몇 시간 전에 시의 캄캄한 거리에서 는 갖지 못했던 마음의 안정을 회복하였다. 정장 차림이 페스트를 쫓아버렸던 것이다. 제 1막이 끝날 때까지 내내, 오르페우스는 아무 사고없이 하소연을 했고 튜닉을 입은 여 자들이 오르페우스의 불행을 설명했고 경가극으로 사랑의 노래가 불려졌다. 장내는 정중한 열기를 띠고 거기에 반응을 보였다. 오르페우스가 제 2막의 노래 곡조에서, 악보에는 표시도 없는 떨리는 소리를 섞어서, 약간 지나친 비장미를 가지고 지옥을 향해서 자기의 눈물에 감 동하도록 호소한 것도 거의 눈치채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 여자에게서 풍겨나온 떨 리는 몸짓이, 가장 주의력이 뛰어나는 사람들에게도 그 가수의 연기를 더욱 빛나게 하는 하 나의 형식적인 결과로 보였다. 제 3막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와의 대 이중창(즉 에우리디케가 사랑하는 애인에게서 떠나게 되는 순간이다)이 시작되자, 일종의 놀라움이 장내를 휩쓸었다. 그런데 그 가수는 마 치 관중의 동요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또는 더욱 정확하게 말해서 아래층 일반 좌석 에서 올라오는 웅성대는 소리가 자기가 예감하고 있던 것에 확신을 주기라도 한 것처럼, 그 는 그 순간을 택해서 고대 의상을 입고 그로테스크한 몸짓으로 무대 앞으로 걸어오더니 목 가적인 무대장치 한복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 무대장치는 어느 정도 시대착오적이긴 했지만, 관중들이 보기에는 그때 처음으로 그리고 그 무서운 방식으로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동시에 오케스트라가 딱 멈추고 일반석의 관중들은 일어서서 천천히 장내 에서 물러나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조용하게, 마치 사람들이 교회당에서 에배가 끝나고 나오듯, 혹은 시체실에서 나오듯, 여자들은 치마를 여미고 고개를 숙인 채로, 남자들 은 동반한 여인들의 팔꿈치를 잡고 보조 의자에 걸리지 않도록 하면서 퇴장했다. 그러나 점 차로 동작이 급해지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고함 소리로 변하고, 군중은 출구로 몰려 거기서 서둘러대고, 마침내는 소리치면서 밀고 밀리고 했다. 코타르와 타루는 일어선 채로 자기네 생활 그 자체와도 같은 광경들을 눈앞에 보면서 외로이 서 있었다. 무대 위에는 페스트가 관절을 못 쓰는 광대로 분장하고 있었으며, 그리고 관람석에는 좌석의 붉은 의자 커버 위에 다 잊어버리고 간 부채며, 질질 늘어진 레이스 같은 것들이 아무 쓸모없게 된 모든 사치품 으로 남아 있었다. 랑베르는 9월 초순 동안 리외 곁에서 열심히 일을 했다. 단지 남자 고등학교 앞에서 곤잘 레스와 그 두 청년을 만나기로 되어 있던 날에 하루 휴가를 얻었다. 그날 정오에 곤잘레스와 그 신문기자는 웃으면서 다가오는 그 두 녀석을 보았다. 그들은 전번에는 운이 나빴지만 그런 것은 각오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쨌든 그 주일은 그들의 경비 근무 당번이 아니었다. 다음 주일까지 참아야만 했다. 그때 다시 시작해보자는 것이었다. 랑 베르는 바로 그러자고 말했다. 곤잘레스는 그러면 다음 월요일에 만날 약속을 하자고 제안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랑베르가 마르셀과 루이 집에 옮겨가기로 했다. "자네하고 나하고 약 속을 하지. 혹 내가 안 오거든 자네가 곧장 저 애들 집에 찾아가게나. 어디 사는지 가르쳐줄 테니 말이야." 그러나 마르셀인지 루이인지가 그때 가장 간단한 것은 즉시로 그 친구를 데 리고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까다로운 사람만 아니라면 네 사람 먹을 것은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그도 다 이해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곤잘레스는 그것 참 좋은 생각이라고 말했 다. 그래서 그들은 항구 쪽으로 내려갔다. 마르셀과 루이는 마린느 가 맨 끝에, 해안에 도로 쪽으로 난 시문 바로 옆에 살고 있었다. 두꺼운 벽에다가 창에는 페인트칠을 한 나무 덧문이 달려 있고 아무 장식도 없는 어둠침침 한 방들이 있는 스페인 식의 집이었다. 그 청년들의 어머니가 쌀밥을 대접했다. 그 어머니라 는 사람은 웃는 낯의 주름살이 많은 스페인 여자였다. 곤잘레스는 깜짝 놀랐다. 시내에는 벌 써 쌀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문에서 적당히 하고 있죠." 마르셀이 말했다. 랑베르는 먹고 마셨다. 그리고 곤잘레스는 그가 진국 같은 친구라고 말했다. 그동안에 신문기자는 앞으로 한 주일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생각밖에는 없었다. 실상은 두 주일을 기다려야만 했다. 경비 당번 차례는 사람의 수를 줄이기 위해서 보름씩 교대를 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랑베르는 보름 동안 몸을 아끼지 않고 쉴 사이 도 없이, 어떤 의미에서는 눈을 딱 감고 새벽부터 밤까지 일을 했다. 밤 늦게 그는 잠자리에 들었고 곤드라져서 잠이 들었다. 한가하게 지내다가 갑자기 그 고달픈 고역으로 바뀐 바람 에 그는 거의 꿈도 힘도 없는 사람이 되었다. 머지않은 자기의 탈출이야기도 거의 입밖에 내지 않았다. 단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일이 있다. 즉 한 주일이 지났을 때 그는 처음으로 그 전날 밤에 취했었다는 이야기를 리외에게 했다. 바에서 나왔을 때, 그는 문득 자기의 사타구 니가 부어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겨드랑이가 아프고 두 팔을 놀리기가 어려웠다. 그는 페스트라고 생각했다. 그때 그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반응은, 그도 리외와 함께 온당치 않 은 짓이라는 것을 인정했지만, 시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뛰어올라갔다. 그 언덕은 좁은 장소 로 거기서도 역시 바다가 보이지는 않지만 하늘이 좀더 잘 보였는데, 거기서 그는 시의 벽 너머로 큰소리로 자기 아내 이름을 불렀다. 자기 집으로 돌아와서 자기 몸에 아무런 감염 증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그 갑작스러운 발작이 자랑스럽지 못했다는 것을 느꼈다 고 말했다. 사람은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리외가 말했다. "어쨌든" 하고 그는 말했다. "그런 짓을 하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죠." "오늘 아침에 오통 씨가 나보고 당신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더군요." 갑자기 리외는 랑베 르가 막 가려고 할 때 그렇게 말했다. "그는 나보고 혹 당신을 아느냐고 물었어요. 그러면서 좀 그에게 충고를 해달라고 하면서 밀수패들하고자주 접촉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빨리 서둘러야 한다는 말입니다." "고맙습니다." 리외의 손을 잡으면서 랑베르가 말했다. 문 앞에서 그는 갑자기 몸을 돌렸다. 리외는 페스트가 발생한 후 처음으로 그가 웃는 것 을 보았다. "그런데 왜 선생께서는 내가 떠나는 것을 말리지 않으시나요? 말릴 길이 여러 가지 있는 데요." 리외는 버릇처럼 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것은 랑베르의 문제이고, 랑베 르는 행복을 택한 것이고, 자기는 그것을 반대할 뚜렷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고, 그 문제에 관해서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판단하기가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왜, 그런 지경인데 날보고 빨리 서두르라고 하시나요?" 이번에는 리외가 웃었다. "아마, 나도 역시 행복을 위해서 무엇이고 해주고 싶기 때문이겠죠." 그 이튿날 그들은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함께 일을 했다. 다음 주에 랑베르는 마침내 그 자그만 스페인식 집으로 이사를 했다. 거실에 그의 침대가 놓여졌 다. 젊은이들은 식사를 하러 돌아오는 일도 없었고, 또 되도록 밖에 나가지 말아달라는 당부 를 받았기 때문에 그는 대개의 경우 그 거실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그 늙은 어머니와 이야 기를 하기도 했다. 그 여자는 몸이 마르고 활동적이었는데, 검은 옷을 입고 갈색의 주름살이 많은 얼굴에다가 머리카락은 희고 깨끗했다. 맘이 없는 그 여자는 랑베르를 바라 볼 때면 두 눈에 미소를 가득 담을 뿐이었다. 언젠가는 그 여자가 랑베르에게, 부인에게 페스트를 옮겨갈까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 의 생각은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경우란 극히 드문 것이고, 그 반면에 그 도시에 남아 있으면 그들은 영원히 헤어지게 될 위험성이 있을 거라고 말했다. "상냥하신 분이시죠?" 웃으면서 그 여자는 말했다. "퍽 상냥하죠." "예뻐요?" "그런 것 같아요." "아!" 하고 그 여자는 말했다. "그래서 그러시는군요." 랑베르는 돌이켜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그래서 그러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꼭 그것 때문만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느님을 믿지 않으시나요?" 매일 아침 미사에 나가는 그 여자가 물었다. 랑베르가 믿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말했더니, 또 한 번 그 여자는 바로 그렇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가서 만나셔야겠군요. 잘 생각하셨어요. 그렇지 않으면 무엇을 바라보고 사시겠어요?" 랑베르는 나머지 시간 동안에 아무 장식도 없는 회를 바른 벽 둘레를 빙빙 돌면서 벽에 못으로 박아놓은 부채들을 어루만지거나, 테이블보 끝에 달린 털 수실을 헤아려보곤 했다. 저녁때가 되면 젊은 이들이 돌아오곤 했다. 그들은 아직 기회가 안됐다고 말할 뿐, 그다지 말은 많지 않았다. 저녁 식사가 끝난 다음 마르셀은 기타를 쳤고, 그들은 증류주를 마시곤 했다. 랑베르는 생각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수요일에 마르셀이 "내일 저녁, 자정으로 결정이 됐소. 준비를 다 해놓으시지요."라고 말 하면서 들어왔다. 그들과 함께 근무하는 두 사람 중 하나는 페스트에 걸렸고, 여느때 그하고 한방을 쓰고 있었던 또 한 사람도 격리중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2, 3일간은 마르셀과 루이 둘만 있을 것이라고 했다. 밤 사이에 그들은 마지막으로 자세한 일들을 준비해놓을 작정이 었다. 이튿날이면 그것은 가능할 것이었다. 랑베르가 고맙다고 말했다. "기쁘세요?" 그들의 어머니가 물었다. 그는 기쁘다고 대답했으나 생각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이튿날은 흐린 하늘 아래서 축축하고 숨막힐 듯한 더운 날씨였다. 페스트에 대한 소식은 나빴다. 그 스페인 여자는 그래도 여전히 명랑했다. "이 세상에는 죄악이 있어요." 그 여자 가 말했다. "그러니 당연하지!" 랑베르도 마르셀이나 루이처럼 웃통을 벗어젖히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짓을 해도 어깻쭉지와 가슴팍에 땀이 줄줄 흘렀다. 덧문을 닫은 어둠침침한 속 에서 그렇게 하고 있으니 상반신이 거무스름하고 번들번들해 보였다. 랑베르는 말없이 방안 을 빙빙 돌았다. 오후 4시가 되자 그는 갑자기 옷을 입더니 외출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조심해요." 마르셀이 말했다. "자정이니까, 준비는 다 되었어." 랑베르는 의사 집으로 갔다. 리외의 어머니는 랑베르에게 높은 지대의 병원에 가면 리외 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초소 앞에는 여전히 군중들이 서성대고 있었다. "서 있지 말아요!" 경관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제자리에 서서 빙빙 돌고 있었 다. "기다려야 소용없다니까요." 땀이 웃옷에까지 밴 경관이 말했다. 다른 사람들 생각도 마 찬가지였다. 그래도 그들은 살인적인 더위를 무릅쓰고 기다리고 있었다. 랑베르가 경관에게 통행증을 내보여주었더니, 경관은 그에게 타루의 사무실을 가리켜주었다. 사무실 문이 마당 쪽으로 나 있었다. 그는 사무실에서 나오는 파늘루 신부와 마주쳤다. 약품과 눅눅한 이불 냄새가 나는 흰 칠을 한 더러운 방에서 타루는 검은 색 테이블 건너 편에 앉아 셔츠 소매를 걷어올린 채 팔뚝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아직 있었군요." 그가 말했다. "네, 리외한테 이야기할 것이 있어서요." "그는 병실에 있어요. 그러나 리외에게까지 가지 않고 될 일이면 좋겠는데요." 랑베르는 타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타루는 살이 빠져 있었다. 피로한 나머지 두 눈과 얼굴 꼴이 못 쓰게 되었다. 그의 튼튼한 두 어깨는 둥그렇게 오그라들어 있었다. 노크 소리가 나 더니 흰 마스크를 한 간호원이 한 명 들어왔다. 그는 타루의 사무책상 위에 한 묶음의 카드 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마스크 때문에 코가 막힌 목소리로 단지 "여섯입니다."라고만 말하고 나가버렸다. 타루는 신문기자를 보았다. 그리고 그 카드를 부채 모양으로 펴들어 그에게 보 여주었다. "근사한 카드죠? 그런데 그게 아니죠. 사망자지요. 밤 사이에 생긴 사망자의 카드지요." 그의 이마에는 주름살이 잡혔다. 그는 카드 묶음을 다시 간추렸다. "우리에게 남은 일은 하나밖에 없어요. 그것은 장부를 만드는 것입니다." 타루가 테이블에 한 손을 짚고 있었다. "곧 떠나시겠어요?" "오늘 밤 자정에 떠납니다." 타루는 자기도 기쁘다며, 랑베르에게 몸조심하라고 말했다. "진심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타루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 나이가 되면, 싫어도 진심으로 말하지 않을 수 없죠.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피 곤합니다." "타루" 하고 신문기자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의사 선생을 만나고 싶습니다." "압니다. 그는 나보다 더 인간적이지요. 갑시다." "그게 아닙니다." 가까스로 랑베르가 말했다. 그리고 말을 멈췄다. 타루가 그를 보았다. 그러더니 문득 그를 보고 웃었다. 그들은 벽에 밝은 초록색으로 페인트칠이 되어 있는, 마치 수족관처럼 햇빛이 떠돌고 있 는 복도를 따라서 걸어갔다. 뒤에 이상한 그림자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이는 유리가 박 힌 겹문에 다다르기 조금 전에, 타루는 사방을 미닫이로 막은 좁은 방으로 랑베르를 들어가 게 했다. 그는 그 미닫이 중의 하나를 열고, 소독기에서 흡수성 가제로 만든 마스크 두 개를 꺼내서 랑베르에게 그것을 내밀며 쓰라고 말했다. 신문기자는 그것이 무엇에 쓸모가 있느냐 고 물었다. 랑베르는 아무 소용도 없지만, 타인에게 믿음성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유리문을 밀었다. 아주 넓은 방이었는데 계절에 관계없이 창문들은 첩첩이 닫혀 있었다. 벽 위쪽에서 환기장치가 윙윙거리고 있었는데, 그 프로펠러가 두 줄로 놓인 회색 침 대 위에서 찌는 듯한 뿌연 공기를 휘젓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둔하고 날카로운 신음 소리가 들려와서, 하나의 단조로운 비명을 빚어놓고 있을 따름이었다. 흰 옷을 입은 남자들이 철창 으로 된 벽에 높이 달린 구멍에서 흘러 들어오는 따가운 햇볕 속에서 천천히 오가고 있었 다. 랑베르는 그 방의 숨막힐 듯한 더위 속에서 기분이 언짢아서, 신음 소리를 내고 있는 어 떤 물체 위에 허리를 굽히고 있는 리외를 가까스로 알아보았다. 의사는 두 간호사가 침대 양쪽으로 활짝 벌려 꽉 누르고 있는 환자의 사타구니를 째고 있었다. 그는 몸을 돌려 수술 도구를 조수 하나가 내미는 쟁반에다 놓고, 잠시 우두커니 서서 붕대를 감기 시작한 그 남 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로운 일은 있나요?" 그는 가까이 간 타루에게 말했다. "파늘루가 예방 격리소의 자리를 랑베르로 대신하겠다고 승낙했어요. 그는 벌써 일을 많 이 했어요. 남은 일은 랑베르를 제외하고 제삼 검역반을 다시 조직하는 것이지요." 리외는 고개짓을 하면서 찬성했다. "카스텔이 첫 제품을 완성했어요. 시험해보자더군요." "아!" 하고 리외가 말했다. "그거 잘되었군요." "그리고 여기 랑베르가 와 있어요." 리외가 돌아다보았다. 그는 마스크 너머로 신문기자를 보면서 눈을 찌푸렸다. "이런 데서 뭘 하시오?" 그가 말했다. "다른 곳에 가 있어야 하지 않아요." 타루가 오늘 밤 자정으로 결정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예정대로라면"이라고 덧붙였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이야기할 때마다 가제 마스크가 불룩해졌고, 입 근처가 축축해졌다. 그래서 마치 조각품들끼리의 대화처럼 어딘지 비현실적인 대화를 주고받는 것 같았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랑베르가 말했다. "괜찮으시면 같이 나가시죠. 타루 사무실에서 기다려주세요." 잠시 후, 랑베르하고 리외는 의사 자동차 뒤에 자리를 잡았다. 타루가 운전을 했다. "휘발유가 떨어졌어요." 발동을 걸면서 타루가 말했다. "내일은 걸어다녀야겠어요." "선생님." 랑베르가 말을 꺼냈다. "나는 떠나지 않겠어요.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있겠어 요." 타루는 몸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운전하고 있었다. 리외는 너무 피로해서 몸 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럼 부인은요?" 그는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랑베르는 또 한 번 생각해보았는데, 자기 생각에는 변함은 없지만 그래도 자기가 떠나버 리면 부끄러운 짓을 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남겨두고 온 그 여자를 사 랑하는 데도 거북해질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리외는 똑바로 일어나 앉아 무뚝뚝한 목 소리로,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행복을 택하는 것이 부끄러울 게 무어냐고 말했다. "그렇습니다." 랑베르는 말했다. "그러나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요." 그때까지 한마디도 없었던 타루는 고개도 안 돌리고, 만약 랑베르가 남들과 불행을 같이 나눌 생각이라면 행복을 위한 시간은 결코 못 얻게 되고 말 것이니 어느 한쪽을 택해야 된 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게 아닙니다." 랑베르가 말했다. "나는 늘 이 도시와는 남이고, 여러분과는 아무 상관 이 없다고 생각해왔어요. 그러나 이제는 볼 대로 다 보고 나니, 내가 싫건 좋건간에 이 고장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이 사건은 우리들 전체에게 관계되는 것이지요."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랑베르는 초조한 모양이었다. "아니, 잘 알고 게시잖아요! 그렇지 않고서야 그 병원에서 무엇을 하시자는거예요. 그래 당신들은 선택해서 그러시는건가요. 글쎄 행복도 단념하구요?" 타루도 리외도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침묵이 오래 계속된 채로 그들은 리외의 집 앞까지 왔다. 그런데 랑베르는 다시 더 힘을 주면서 아까 그 질문을 되풀이했다. 그러자 오직 리외 만이 그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그는 가까스로 일어섰다. "미안합니다, 랑베르." 하고 그가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모르겠어요. 원하신다면 우 리하고 같이 남아 계시지요." 자동차가 기우뚱하는 바람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앞을 보면서 몸을 바로잡았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서 돌아설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지요. 그러면서 나 역시 왜 그러는지도 모르면서 거기서 돌아서고 있죠." 그는 등받이에 다시 몸을 푹 기댔다. "그것은 하나의 사실입니다. 그뿐이죠." 하고 그는 지쳐서 말했다. "그것ㅇ느 그대로 귀담 아두고 거기서 결과나 끌어내봅시다." "무슨 결과를요?" 랑베르가 물었다. "아!" 리외가 말했다. "우리는 한꺼번에 병을 고치고, 알고 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 되도록 빨리 고치기나 합시다. 그것이 가장 급합니다." 자정이 돼서, 타루하고 리외는 랑베르에게 그가 검역을 책임지기로 한 동네의 지도를 그 려주고 있었다. 그때 타루가 자기 손목시계를 보았다. 고개를 들다가 그는 랑베르와 시선이 마주쳤다. "기별을 했나요?" 신문기자는 눈을 돌렸다. "한마디 전했어요."하고 그는 힘들여 말했다. "여러분을 만나러 오기 전에요." 카스텔의 혈청이 실험된 것은 10월 하순이었다. 실상 그것은 리외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또다시 실패하는 경우에는 시는 페스트의 변덕에 시달려 다시 몇 달을 더 두고 질병을 끌게 되거나, 혹은 저절로 사라지거나 양단간에 페스트에 좌우될 것이라는 것을 의사는 확신하고 있었다. 카스텔이 리외를 방문한 바로 그 이튿날에도 오통씨의 아들이 병이 들어서, 온 가족 이 예방 격리소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어머니는 얼마전에 격리소에서 나왔던 터라 또다시 혼자 있게 되었다. 소정의 규정을 준수하는 판사는, 자기 아들의 몸에서 병의 증세를 발견하자마자 리외를 불렀던 것이다. 리외가 왔을 때, 그 아이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침대의 발치에 서 있었다. 어린 딸은 멀리 떼어놓고 있었다. 어린애는 힘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진 찰을 받을 때에도 가만히 있었다. 의사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판사의 시선과 그의 뒤에 서 손수건을 입에 대고 휘둥그래진 눈으로 의사의 일거일동을 주시하고 있는 어머니의 창백 한 얼굴과 마주쳤다. "역시 그거죠?" 판사는 냉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군요." 리외는 다시 어린애를 보면서 대답했다. 어머니는 두 눈이 커졌다. 그러나 그 여자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판사도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윽고 더 나지막한 어조로, "그러면! 선생님, 규정대로 해야겠군요." 하고 말했다. 리외는 여전히 입에 손수건을 대고 있는 어머니를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곧 됩니다. 전화만 걸면요." 주저하면서 리외는 말했다. 오통 씨는 안내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의사는 그의 아내에게로 몸을 돌렸다. "안됐습니다. 부인께서는 준비 좀 하셔야 할 겁니다. 준비할 것을 알고 계실 테니까요." "네." 하고 그 여자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말했다. "그렇잖아도 하려던 참이에요." 그렇게 헤어지기 전에, 리외는 혹 무엇이고 필요한 것이 없느냐고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 다. 그 여자는 여전히 묵묵히 그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판사가 외면을 했다. 예방 격리는 애당초에는 단순한 형식에 불과했던 것이, 리외와 랑베르에 의해 아주 엄격 하게 조직화되어 있었다. 특히 그들은 한 가족을 한 명 한 명, 반드시 따로따로 격리하는 것 을 주장했던 것이다. 만약 그 가족 중의 한 명이 모르는 사이에 전염이 되었다 해도, 발병의 기회를 증가시켜서는 안되었던 것이다. 리외는 그러한 취지를 판사에게 설명을 했더니 판사 는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판사와 그 아내가 서로 마주보는 눈치로 미루어 리외는 그 이별이 그들에게 얼마나 타격을 주는가를 느꼈다. 오통 부인과 어린 딸은 랑베르가 관리 하는 격리 호텔에 수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예심 판사에게는, 현 당국이 도로과에서 빌 린 천막들을 이용해서 시립 운동장에 시설중인 격리 수용소 아니면 이미 자리가 없었다. 리 외가 그 사실을 말하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나 오통 씨는 규칙은 누구에게나 오직 하나며, 그것에 복종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어린애는 임시 병원에 이송되어 침대 10개가 설비되어 있는 옛날의 교실에 수용되었다. 약 20시간이 지나자, 리외는 아주 절망적인 케이스라고 판단을 내렸다. 그 작은 몸은 아무런 반항도 못하고 병독에 침식되어가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그러나 거의 드러나 보이지 않는 작은 가래톳들이, 가냘픈 사지의 마디마디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미 진 싸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리외는 카스텔의 혈청을 그 어린애에게 시험해볼 생각을 한 것이다. 바로 그날 저녁, 그들은 저녁 식사가 끝나고 오랜 시간에 걸쳐 접종을 실시했지만, 단 한 번의 반응도 그 어 린애에게서 얻을 수가 없었다. 그 이튿날 새벽에 그 결정적인 실험을 판단하기 위해서 모두 들 그 어린애 곁으로 몰려들었다. 어린애는 마비 상태에서 벗어나 이불 속에서 경련적으로 딩굴고 있었다. 의사 카스텔 그 리고 타루는 새벽 4시부터 그 아이 곁에 서서 시시각각으로 병세의 진행 또는 정지를 살피 고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는 타루가 육중한 몸을 약간 꾸부정히 하고 서 있었다. 침대 발치 에 서 있는 리외 곁에 앉은 카스텔은 표면적으로는 아주 침착한 태도로 오래 된 책을 잃고 있었다. 차츰 햇볕이 그 옛날의 교실 안으로 퍼져감에 따라서 다른 사람들도 왔다. 먼저 파 늘루가 와서 침대 저편에 자리를 잡고 타루와 마주보며 벽에 기대어 섰다. 고통스러운 표정 이 그의 얼굴에 엿보였고, 몸을 바쳐 일해온 지난 며칠 동안의 피로가 그 충혈된 이마에 주 름살을 잡아놓고 있었다. 이번에는 조제프 그랑이 왔다. 7시였는데, 그 서기는 숨이 차 헐떡 거리면서 늦게 와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잠깐밖에는 머물러 있을 수가 없는데 혹 무슨 확실 한 것을 알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리외는 아무 말없이 어린애를 가리켰다. 아이는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눈을 딱 감고, 힘껏 이를 악물고, 몸은 꼼짝도 안하고, 베갯잇도 씌우지 않은 베개를 베고 좌우로 고개를 움직이고 있었다. 마침내 날이 밝아서, 방 안쪽 깊숙이 그대로 제자리에 걸려 있는 흑판에 옛날에 써놓았던 방정식의 자국을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무렵 랑 베르가 왔다. 그는 옆 침대 발치에 등을 기대고 담배갑을 꺼냈다. 그러나 어린애를 한 번 거 들떠보고 나서 그는 담배갑을 도로 호주머니 속에 넣었다. 카스텔은 여전히 앉은 채로 안경 너머로 리외를 보고 있었다. "애 아버지의 소식은 들으셨나요?" "아뇨." 리외가 말했다. "그는 격리 수용소에 있는걸요." 의사는 아이가 신음하고 있는 침대의 나무를 힘껏 움켜쥐고 있었다. 그는 그 어린 환자에 게서 눈을 돌리지 않고 있었는데, 어린애는 갑자기 몸이 빳빳해지면서 이를 다시 악물고, 몸 을 약간 구부리며 사지를 떨었다. 군용모포 아래의 벌거벗은 작은 몸에서 털실 냄새와 찝찔 한 땀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아이는 차츰차츰 축 늘어져서 팔 다리를 침대 한가운데로 모 으더니 여전히 눈을 감고 숨소리를 죽인 채로 있었는데 숨이 더 가빠진 듯싶었다. 리외는 타루의 시선과 마주쳤다. 타루는 외면을 했다. 몇 달 전부터 무서운 병은 사람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애들이 죽는 것을 이미 보아 왔다. 그러나 그날 아침과 같이, 그렇게 시시각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광경을 지켜본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물론 그 죄없는 어린애들에게 가해지는 고통이 있는 그 대로, 즉 하나의 분노로 보이지 않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전까지는, 어떤 의미에 서 추상적인 격분을 느끼고 있었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죄없는 어린이가 그렇게도 임종의 고통을 오래 겪는 것을 정면으로 바라본 일이 결코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린애는 마치 위를 누가 잡아 할퀴기라도 하는 듯이 가냘프게 신음을 하며 다시 몸뚱이 를 꺽었다. 아이는 한참동안 그처럼 몸을 꾸부리고, 마치 그의 연약한 뼈대가 휘몰아치는 페 스트의 바람에 꺽이고, 되풀이하는 열풍에 삐걱거리듯 오들오들 떨면서 경련적으로 헐떡거 리고 있었다. 그 발작이 지나가자, 몸이 약간 풀리고 열이 가시는 듯이 보였고, 헐떡거리면 서 축축하고 독기 있는 모래 사장에 내던져진 듯싶었는데 조금 편안해진 모습이 이미 죽은 것처럼 보였다. 타오르는 듯한 열의 물결이 세 차례나 밀려와서 몸이 약간 위로 치켜 올라 가는 것 같더니 아이는 바싹 오그라들어서, 타오르는 불꽃의 도가니 속에서 침대 밑바닥에 파묻혀, 이불을 팽개치면서 미친 듯이 고개를 휘저었다. 뜨거운 속눈썹에서 솟아나오는 구슬 같은 눈물이 납 빛깔이 된 얼굴 위에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는 그 발작이 끝나 자 기진맥진해서 뼈가 드러나 보이는 두 다리와 48시간 만에 살이 완전히 빠진 두 팔을 오 그라뜨리면서 흩어진 침대 속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것 같은 괴상한 자세가 되었다. 타루는 몸을 굽히고 그의 두둑한 손으로 눈물과 땀으로 흠뻑 젖은 그 조그만 얼굴을 닦아 주었다. 카스텔은 얼마전부터 책을 덮고 환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 으나, 그 말을 끝낼 때까지 기침을 억제하지 못했다. 목소리가 갑자기 고르지 않았기 때문이 었다. "아침에 병세가 약해지지 않았어요, 리외?" 리외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아이는 보통 사람들보다 더 오래 저항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파늘루는 벽에 기대어 어딘지 맥이 풀린 듯이 보였는데 그때 들릴까말까한 목소리 로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죽는 거라면, 남보다 더 고생을 하는 셈이지." 리외가 불현듯이 그에게로 몸을 돌리고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그는 그만두었는데 자 신을 억제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러고는 다시 시선을 아이에게로 돌렸다. 햇볕은 방안에 넘쳐 흘렀다. 다른 다섯 개의 침대 위에서는 무슨 덩어리들이 꿈틀거리며 신음하고 있었는데 타협이나 되어 있는 듯이 조심조심 그 상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단 한 사람, 방 저 끝에서 고함을 치고 있는 환자만이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 고통 보다는 차라리 놀라움을 나타내는듯한 짤막짤막한 탄성을 올리고 있었다. 마치 환자들 자신에게까 지도 그것은 초기의 공포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이제는 병을 앓는 그들의 태도에는 일종의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다. 단지 어린애만이 온갖 힘을 다해서 발버둥치고 있었다. 리외는 가 끔씩 별로 그럴 필요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자기의 무력한 교착 상태를 벗어나 기 위해서 어린애의 맥박을 짚어보곤 했는데, 눈을 감으면 그 요란한 맥박이 자기 자신의 피의 요동과 뒤섞이는 것을 느꼈다. 그때 그는 그 사형 당하는 어린애와 한몸이 되고 있었 으며, 아직 성한 자기의 온갖 힘을 다해서 그 애를 부축해주려고 애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일치되었다가 두 사람의 심장은 고동이 서로 일치하지 않게 되어 어린애는 그에 게서 빠져나가는 것이었고, 그의 노력은 허공 속에서 무너지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는 그 가 느다란 손목을 놓고 자기 자리로 돌아오곤 하는 것이었다. 회칠을 한 벽을 따라서 햇볕은 장밋빛에서 노란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유리창 뒤에서는 푹푹 찌는 아침 나절이 바스락거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랑이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하고 가버리는 것을 아무도 들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모두들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는데 약간 진정된 것 같았다. 마치 짐승의 발톱처럼 되어버린 두 손이 침대 옆구리를 가볍게 긁적거리고 있었다. 그 손이 다시 올라가서 무릎 근처의 이불을 긁다가, 갑 자기 아이는 두 다리를 꺾고 넓적다리를 배 근처에 갖다대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는 이 제 처음으로 눈을 뜨고 앞에 서 있는 리외를 보았다. 이제는 잿빛의 찰흑처럼 응고된 그 얼 굴의 오목한 곳에서 입이 벌어졌다. 그러더니 거의 즉시로 한 마디의 비명, 호흡에 따른 억 양조차 거의 갑자기 단조로운 어색한 항의로 방안을 채우는, 그리고 마치 모든 인간에게서 동시에 나오는 것 같은 비인간적인 비명이 나왔다. 리외는 이를 악물고 타루는 고개를 돌렸 다. 랑베르는 카스텔 곁의 침대에 가까이 갔고, 카스텔은 무릎 위에 펼쳐져 있던 책을 덮었 다. 파늘루는 병 때문에 까맣게 탄 입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외침은 나이에 상관없이 누 구라도 내지를 비명이었다. 그러고는 슬며시 무릎을 꿇더니, 다소 숨이 찬 그러나 그칠 기색 도 없는 그 이름 모를 비명 틈에서도 역력히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하 는 것을 아무도 부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이시여, 이 어린이를 구해주소서." 그러나 어린애는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고, 주변에서는 환자들이 들먹거렸다. 아까부터 줄 곧 방 맨 끝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던 그 환자는 앓는 소리의 리듬을 더 빨리해서 마침내 는 그도 역시 정말 비명을 지르게 되었고, 한편 다른 환자들도 점점 큰소리로 신음했다. 밀 물 같은 흐느낌이 방안에 밀려들어 파늘루의 기도 소리를 뒤덮어버렸고, 리외는 침애 모서 리에 매달린 채, 피로와 혐오에 취한 듯이 두 눈을 감았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타루가 곁에 와 있었다. "나는 가봐야겠어요. 더 참을 수가 없어요." 리외가 말했다. 그러나 갑자기 다른 환자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때 의사는 어린애의 비명이 약해진 것을 알아차렸다. 점점 더 약해지더니 급기야는 멎어버렸다. 주위에서 앓는 소리들이 나지막하게 이제 막 끝난 그 싸움이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싸움은 끝난 것이었 으니 말이다. 카스텔은 침대 저쪽으로 가더니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했다. 아이는 입을 벌린 채 흐트러진 이불의 푹 패인 속에서 단번에 오그라들어서 얼굴에는 눈물 자국을 남긴 채로 누워 있었다. 파늘루가 침대에 가까이 가서 강복식 동작을 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성의를 다시 가다 듬고 가운데 통로를 지나서 나가버렸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나요?" 타루가 카스텔에게 물었다. 늙은 의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그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어쨌든 오래 견디기는 했어요." 그러나 리외는 이미 방에서 나가고 있었는데, 그 걸음걸이는 너무 빨랐고, 파늘루 곁을 스 쳐 지나갈 때 파늘루가 그를 붙잡으려고 팔을 내밀었을 정도로 심상치 않은 태도였다. "여보세요, 선생님." 그가 말했다. 리외는 여전히 화가 난 태도로 몸을 돌리더니 격렬한 어조로 내뱉았다. "허! 적어도 그 애는 죄가 없습니다. 당신도 그것은 알고 계실겁니다!" 그러더니 그는 몸을 돌려 파늘루보다 먼저 방문을 지나 학교 안쪽으로 갔다. 그는 양쪽에 먼지가 수북하게 앉은 두 그루의 나무가 있는 벤치 위에 앉아서 벌써 눈속에까지 흘러들어 오는 땀을 씻었다. 그는 가슴을 짓누르는 세찬 응어리를 풀어버리기 위해서 아직도 더 소리 를 치고 싶었다. 더위가 무화과 나뭇가지 사이로 서서히 내리쬐고 있었다. 아침 나절의 푸른 하늘에는 이내 허여멀건 한 구름이 뒤덮여 대기를 더 숨막히게 만들어놓고 있었다. 리외는 벤치 위에 몸을 털썩 기댔다. 그는 나뭇가지들과 하늘을 바라보며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피로를 조금씩 풀었다. "왜 나한테 그렇게 화를 내며 말씀을 하셨죠?" 하는 소리가 그의 뒤에서 들렸다. "나 역 시 그 광경은 참을 수 없는 것이었어요." 리외는 파늘루를 돌아다보았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가 말했다. "용서하세요. 피곤해서 그만 어리석은 짓을 했습니다. 그 리고 이 도시에서 나는 반항심을 느낄 때가 가끔 있습니다." "이해합니다." 파늘루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마도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리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가능한 한 모든 힘과 정열을 기울여서 파늘루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신부님. 당신은 사랑이라는 것을 달리 생각하고 있어요. 어린애들까지도 주리 를 트는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는 말했다. 파늘루의 얼굴에는 당황한 그림자가 스쳤다. "아니! 선생님, 이제야 나는 은총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는 서글프게 말했다. 그러나 리외는 다시 벤취 위에 몸을 기댔다. 그는 다시 밀려오는 피로 속에서 좀더 부드 럽게 말했다. "나는 그런 것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잘 알고 있지요. 그러나 그런 문제를 당신하고 토 론하고 싶지는 않아요. 우리는 모독이니 기도니 하는 것을 초월해서, 우리를 결합시켜주고 잇는 그 무엇을 위해서 함께 일을 하고 있어요. 그것만이 중요합니다." 파늘루가 리외의 곁에 와서 앉았다. 그는 감동한 모양이었다. "당신도 역시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리외는 웃는 낯을 하려고 노력했다. "인류의 구원이란 나에게는 너무나 벅찹니다. 나는 그렇게까지 원대한 포부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내게 관심이 있는 것은 인류의 건강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간강이지요." 파늘루는 망설였다. "선생님." 하고 그가 말했다. 그러나 그는 말을 그쳤다. 그의 이마에도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가 "안녕히 계세요." 하고 중얼거리고 일어섰을 때 그의 눈은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가 가려고 했을 때 생각에 잠겨 있던 리외도 일어서서 그에게로 한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다시 사과합니다. 다시는 그렇게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겠습니다." 그는 말했다. 파늘루는 손을 내밀고 서글프게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당신을 납득시키지 못했지요." "그야 뭐 어떻습니까? 내가 증오하는 것은 죽음과 불행입니다. 그것은 당신도 잘 알고 계 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원하시든 원하지 않든간에 우리는 함게 그것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 고 그것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리외가 말했다. 리외는 파늘루의 손을 잡았다. "그렇잖아요?" 이렇게 그는 파늘루를 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말했다. "하나님조차도 이 제는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파늘루는 보건대에 들어온 이후로 병원과 페스트가 들끓는 장소를 떠나본 일이 없었다. 그는 구호대원들 틈에서 마땅히 자기가 차지해야만 된다고 생각되는 자리, 즉 최전선에 나 섰던 것이다. 죽는 광경도 보아야 했다. 그런데 비록 원칙적으로는 혈청에 의해서 안전이 보 장되어 있기는 했지만, 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한 우려도 역시 아주 멀어진 것은 아니었다. 겉으로는 그는 언제나 냉정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 어린애가 죽어가는 것을 오랫동안 보고 있었던 그날부터 변한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 긴장감이 드러나 보였다. 그리 고 그가 리외에게 웃으면서, 자기는 지금 '사제는 의사의 진찰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테마 로 짧은 논문을 쓰고 있다고 말한 날, 의사는 그것이 파늘루가 단순히 하는 말 같지가 않고 좀더 심각한 그 무엇을 의미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의사가 그 논문의 내용을 알고 싶 다는 희망을 표시했을 때 파늘루는 자기가 남자들만이 모이는 장소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는 데 그 기회에 자기는 적어도 몇 가지의 자기 견해를 제시할 작정이라고 말했다. "선생님도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테마에 관심이 있으실 테니까요." 신부는 어느 심한 바람이 부는 날에 그의 두 번째의 설교를 택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청 중은 첫 번 설교 때보다도 적었다. 그것은 그런 종류의 광경이 우리 시민들에게는 더 이상 신기한 매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도시 전체가 겪고 있는 그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 속에서는, '신기함'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그 뜻을 상실하고 있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 들은 그들이 종교상의 의무를 완전히 저버리거나 또는 그런 것을 어떤 철저한 비도덕적인 생활에다 뜯어 맞춰놓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일상적인 실천의 상황을 도저히 말도 안될 미신 으로 대치해버렸던 것이다. 그들은 미사에 나가느니 보다는 차라리 마스코트가 되는 메달이 라든가, 성 로크의 부적 같은 것을 즐겨 몸에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예로서, 시민들이 예언하는 것을 맹목적으로 즐겨왔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봄이 되 자, 사실 사람들은 시시각각으로 병의 종말을 기다렸다. 그러면서도 아무도 다른 사람에게 질병이 얼마나 계속될지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병이 더 이상 오래 가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날이 지남에 따라서 그 불행이 정말 끝이 없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동시에 페스트의 종말이 라는 것이 모든 희망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옛날의 마술사들이나 가톨릭 교회의 성자들에 의한 여러 가지 예언이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넘어다녔다. 시중의 인쇄업자들은 이 러한 취향을 미끼로 해서 큰 재미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재빠르게 눈치채고, 떠돌고 있는 책 들을 대량으로 찍어내어 뿌렸다. 그들은 공중의 흥미가 식을 줄 모르는 것을 보고, 시립도서 관들을 이용해서 야사 중에서 딸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모든 증언을 찾아내서 그것들을 시내 에 퍼뜨려놓았다. 역사 자체가 예언에 대해서 충분히 씌어 있지 않을 때에는 기자들에게 주 문했는데 그들 역시 그 점에 관한 한 과거 몇 세기에 있었던 솜씨에 못지않은 재주를 보여 주었다. 그러한 예언들 중의 어떤 것들은 심지어 신문의 한 난에 실리기도 했는데, 그것들은 건강 했던 시기에 거기에 실렸던 달콤한 이야기들보다도 더 열심히 읽혔다. 그러한 예언들 중의 어떤 것은, 그 해의 기원 면 수나, 사망자 수, 페스트 아래에서 지나간 달 수 같은 것들을 가산한 괴상한 계산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또 어떤 것은 역사상의 대대적인 페스트와 비교 를 하고, 거기에서 비슷한 점(예언에서는 그것을 불변의 사실이라고 부르고 있었다)을 따서, 그것들 역시 전자에 못지않은 괴상한 계산을 해가지고, 거기서 현재의 시련에 관한 교훈을 끌어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흥미를 가장 끈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묵시록의 어투로 알려주는 일련의 사건들이었는데, 그 하나하나를 이 순간에 겪고 있는 사건으로 볼 수도 있었고, 또한 그 복잡성에서 여러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한 것들이었다. 노스트라다무스 와 성 오딜이 매일처럼 들먹거리고 또 번번이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모든 예언에서 공통되는 것은 결국에 가서는 사람들을 안심시켜주는 것이었다. 다만 페스트만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러므로 그러한 미신이 우리 시민들에게는 종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바로 그렇 기 때문에 파늘루의 설교도 사분의 삼밖에는 청중이 차지 않은 성당에서 개최되었다. 설교 날 저녁에 리외가 갔을 때, 성당 입구의 대문짝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청중들 틈에서 술 술 불어대고 있었다. 그는 싸늘하고 고요한 성당 안에 남자들만 있는 청중들 한가운데에 자 리를 잡고 앉아서 신부가 설교대 위로 올라간 것을 보았던 것이다. 신부는 첫 번째보다 부 드럽고 신중한 말투로 이야기를 했고, 또 몇 번씩이나 청중들은 그의 말씨에서 일종의 주저 하는 빛을 발견했다. 더 이상한 것은 그가 이제는 '여러분'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들'이라는 말을 쓰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차츰차츰 굳어져 갔다. 그는 먼저 여러 달 전부터 페스트가 우리들 사이에 존재해왔으며, 지금 그것이 우리들의 식탁 또는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맡에 앉고, 우 리들의 바로 곁을 따라다니며, 직장에서 우리가 가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그렇게도 여 러 번 보게 되었는데, 지금이야말로 그것이 끊임없이 말해주고 있는, 그리고 처음에는 놀라 서 우리가 잘 알아듣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것을, 아마도 더한층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 을 것이라는 말로써 설교를 시작했다. 전번에 같은 자리에서 파늘루 신부가 이미 설교한 것 은 진실이었다. 아니 적어도 진실이라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러나 아마도 또한 우리들 모두가 그러한 경험이 있듯이 자기는 그 생각을 할 때마다 자기 가슴을 치기까지 했으나 아 무 자비심도 없이 그 설교를 생각해냈고 설교를 했던 것이다. 그래도 일이란 무슨 일에 있 어서든 언제나 취할 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장 잔인한 시련이 역시 기독교인에게는 이 득이 되는 법이다. 그러니 기독교가 정말 당면한 문제에서 추구할 것은 그 이득이며, 그 이 득은 어떤 점에 있는 것이며, 어떻게 해서 발견할 것인가를 아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 리외의 주위에서는 사람들이 자기가 앉은 벤치의 팔걸이에 팔을 얹고 편안하게 앉아 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가죽을 댄 문 한 짝이 가볍게 덜거덕거렸다. 어떤 사람이 일어나서 그것을 붙잡았다. 리외는 그러한 동요에 마음이 쏠려서, 다시 설교를 계속하는 파늘루의 말 을 거의 듣지 않고 있었다. 그의 설교의 요점은 대략 페스트로 인해서 생기는 광경을 해석 하려 해서는 안되고, 거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을 배우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리외가 막연하게나마 이해한 것은, 신부가 페스트에 관해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의 관심이 집중된 것은 파늘루가 세상에는 하느님과 비교해서 설명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고 단언했을 때였다. 물론 선과 악이 있고, 또 대체로는 그 두 가지 사이의 구별은 쉽사리 해석이 된다. 그러나 악의 내부 세계에서 곤란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서 겉으 로 필요한 악과 불필요한 악이 있다. 지옥에 빠진 돈 후안과 어린애의 죽음이 있다. 탕아가 벼락을 맞아서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어린애가 고통을 받는 것은 이해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사실, 어린애의 고통과 그 고통에 따르는 혐오, 그리고 거기에서 찾아내야 할 여러 가지 이유보다 더 중요한 일은 이 땅 위에 아무것도 없다. 나머지 인간 생활에서는, 신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용이하게 해주시며, 따라서 거기까지의 사이에는 종교의 공덕은 별로 없었다. 거기서는 신은 반대로 우리를 담 밑으로 몰아넣고 계시다. 우리는 그러한 담 밑에서의 죽음의 그늘을 헤치고 우리의 이득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파늘루 신부는 그 담을 넘을 수 있게 해주는 손쉬운 우선권을 얻는 것조차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기는 그 어린애를 기다리고 있는 구원의 환희가 능히 그 고통을 보상해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쉬 운 일이겠으나 그러한 사실은 거기에 대해서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사실 영 원의 기쁨이 순간적인 인간의 고통에 보답해줄 수 있다는 것을 누가 감히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소리를 하는 자는 몸소 육체와 영혼의 고통을 맛본 주님을 섬기고 잇는 기독 교인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으리라. 아니다, 신부, 그는 담 밑에 머물러 있을 것이며, 십자 가가 상징하고 있는 그 능지처참의 형을 충실하게 본받아서, 어린애의 죽음을 마주보고 있 을 작정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오늘 자기의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서슴지 않 고 이렇게 말하리라는 것이었다. "여러분, 때는 왔습니다. 모든 것을 믿거나, 모든 것을 부정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중의 대체 누가 감히 모든 것을 부정할 수 있을까요?" 리외가 신부는 이단과 나란히 서서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려는 순간, 신부는 벌써 힘차게 말을 이어서 그 명령, 그 무조건의 요구야말로 기독교인이 받는 이득이라고 강조하 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기독교인의 덕성이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신부는 자기가 이제 말 하려는 덕성에 어떤 것은 과격한 것이 있어, 그것이 좀더 관대하고 좀더 고전적인 도덕에 젖어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페스트 시대의 종교는 여느 때의 종교와 같은 것일 수는 없으며, 비록 하느님은 행복의 시대에서는 사람들 에게 영혼의 안식과 향략을 허용하고 심지어는 바라기까지 하시겠지만, 극도의 불행 속에서 는 그 영혼이 과격하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것이었다. 신은 오늘날 스스로 창조하신 인간에 게 은총을 베풀어 그들이 '전체' 또는 '무'라는 가장 위대한 덕을 다시 찾아서 실천해야 할 만큼 큰 불행 속에 그들을 빠뜨려놓았다는 것이다. 어떤 버릇없는 저술가가 이미 수세기 전에, 연옥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함으 로써 교회의 비밀을 폭로할 것이라고 주장한 일이 있었다. 그는 그렇게 말함으로써 어중간 한 상황이라는 것은 없으며, '천당'과 '지옥'밖에는 없으며, 사람은 자기가 선택한 것에 의해 서 구원을 받거나 저주를 받는 길밖에는 없다는 것을 암시했다. 파늘루 생각에는 그것은 방 종한 영혼의 품에서만 생길 수 있는 하나의 이단이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연옥은 역시 존 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연옥이라는 것은 별로 기대해선 안될 시대, 작은 죄를 운운할 수 없는 시대가 간혹 있는 모양이어서 모든 죄는 죽음을 의미하며, 모든 무관심은 죄스러운 일이고, 전체 아니면 무라는 것이었다. 파늘루는 말을 그쳤다. 그래서 리외는 그때 밖에서 더욱 심해진 바람이 문짝을 흔들어대 는 것을 더 잘 들을 수 있었다. 바로 그때 신부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즉 자기가 말하는 전 적인 복종이라는 덕성은 보통 해석하듯이 좁은 의미로 보아서는 안되며, 그것은 속된 체념 도 아니고, 까다로운 겸손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복종이지만 복종하는 사람이 동의하 는 복종이다. 과연 어린애의 고통은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굴욕적인 일이다. 그러나 바 로 그러한 이유로 그 속에 완전히 몰입해야 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파늘루는 자 기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표현하기가 어렵다고 청중들에게 거듭 이야기하면서, 신이 원하기 때문에 그것을 원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독교인은 아무런 거리낌 이 없어질 것이며, 모든 출구가 닫힌 상태에서 본질적인 선택의 근처로 갈 수 잇을 거이다. 그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지경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모든 것을 믿는 쪽을 택할 것이다. 그 리고 이 순간에도 여러 교회에서 용감한 부인네들이 환부에 생기는 가래톳은 육체가 그 병 을 물리치는 자연요법이라는 깨우침을 받고, "주여 우리 자식에게도 그 가래톳을 베풀어주 소서."라고 기도하듯, 기독교인은 신의 성스러운 의지에, 비록 그것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일 지라도 자신을 내 맡길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안다. 그러나 이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라는 말을 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닥쳐온 그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의 핵심을 향해 서, 바로 우리의 선택을 위해 뛰어들어야만 한다. 어린애들의 고통은 우리들의 쓴 빵이다. 그러나 그 빵 없이는 우리들의 영혼은 정신적인 굶주림으로 없어지고 말 것이다. 여기서 파늘루 신부가 말을 멈출 때마다 나지막한 탄식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그때 불 현 듯이 그 설교자는 청중들을 대신해서 묻는투로, 그러면 결국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하 고 힘있게 말을 이었다. 자기는 잘 느기고 있는데, 사람들은 숙명론이라는 무서운 말을 입에 담으려 할 것이다. 다만 자기에게 '능동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이는 것을 허용해준다면 그 말 에 대해서 양보하지 않겠다. 물론, 그리고 다시 한 번 전에 이야기했던 아비시니아의 기도교 인들의 흉내를 내서는 안될 것이다. 심지어는 기독교인들이 의료진을 향해서 입었던 옷을 집어던지며, 신이 내리신 그 병에 대항하려는 그 불신자들에게 페스트를 주십사고 기도하기 위해서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고함을 치던 페르시아의 페스트 환자들의 흉내를 내도 안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지난 세기의 질병 중에 혹 병균이 잠복하고 있을 수도 있는 축축하고 따뜻한 입과 입의 접촉을 피하게 하기 위하여, 핀셋으로 성체 빵을 집어서 성체 배수를 시 켜주던 카이로의 승려들 흉내를 내어서도 안된다. 페르시아의 페스트 환자들이나 그 승려들 은 똑같은 죄를 짓고 있었다. 왜냐하면, 페르시아 환자들은 어린애들의 고통같은 것을 생각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카이로의 승려들은 그와 반대로 고통에 대한 극히 인간적인 염려가 지나쳤기 때문이다. 두 경우가 다 문제의 핵심을 벗어난 것이었다. 모두들 하나님의 목소리 에 대해서 귀머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파늘루가 상기시키고자 하는 또 다른 예들 이 있었다. 만dir 마르세이유의 대대적인 페스트 기록을 믿는다면, 메르시 파 수도원의 81명 의 수도승들 중에서 4명만이 겨우 열병에서 살아 남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4명 중에서 세명은 도망을 쳤다. 이처럼 기록의 필자는 말했을 뿐, 그 이상을 적는 것은 그들의 직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파늘루 신부의 생각은 그것을 읽으면서 전적으로 79구의 시체를 목격하고, 특히 3명의 동료들이 도망쳤는데도 불구하고 혼자 남게된 수도승에게 집중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부는 설교대를 주먹으로 두드리면서 소리쳤다. "여러분, 우리는 남아 있는 한 사람 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한 사회가 재난의 무질서 속에서 세워지는 총명한 질서를 거부하라는 것은 아니 다. 꿇어앉아서 모든 것을 포기해야 된다고 하는 저 모랄리스트들의 말을 들어서는 안된다. 다만 어둠 속을 어느 정도 맹목적으로 전진을 시작해야만 하고 선을 행하도록 노력해야 한 다. 그러나 그밖의 것들에 대해서는, 어린애의 죽음까지도 신의 뜻에 맡기고, 행여 개인의 힘에 의존해볼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파늘루 신부는, 마르세이유의 페스트 유행 중의 벨쥐스 주교의 고귀한 모습을 상 기시켰다. 주교는 질병이 끝나갈 무렵에 자기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먹을 것을 준비해서 벽을 높이 쌓고 집에 틀어박혔다. 그런데 그를 우상화하고 있었던 주민들은 오랜 고통에 지친 감정의 반발로 주교에 대해서 분개하고, 주교에게도 전염을 시키기 위해 서 그의 집 둘레에 시체를 쌓아올렸고, 더 확실하게 죽게 하기 위해 담 안으로 시체들을 던 져넣기도 했다. 이처럼 주교는 최후의 약한 마음에서, 자기는 죽음의 세계와 동떨어져 있다 고 생각했는데 죽은 사람들이 하늘로부터 그의 머리 위로 떨어졌던 것이다. 우리들의 경우 도 그와 같이 페스트에는 동떨어진 섬이라고는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아니다, 중 간이라는 것은 없다. 스캔들도 용인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을 혐오하든가 그렇지 않 으면 사랑하든가 둘 중에서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체 누가 감히 신에 대한 증 오를 택할 것인가? "여러분" 하고 마침내 파늘루는 결론을 짓겠다는 어조로 말했다. "신에 대한 사랑은 힘드 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전적인 포기와 자기의 인격의 멸시를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만이 어린애의 고통과 죽음을 해소시킬 수 잇습니다. 어쨌든 그 사람만이 그것을 필 요한 것으로 만들어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 이 내가 여러분과 같이 하고자 하는 교훈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내가 여러분과 같이 하 고자 하는 교훈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들 보기에는 잔인하지만, 신이 보기에는 결정 적인 신앙인데 우리는 저기에 가까이 가야만 합니다. 우리는 무서운 이미지와 어깨를 겨루 어야만 합니다. 그 꼭대기에서 모든 것이 서로 융합하고, 모든 것이 동등하게 되어 자명한 불의로부터 진리가 솟아나올 것입니다. 이처럼 프랑스 남부 지방에 있던 수많은 교회에선, 페스트로 쓰러진 사람들이 벌써 수세기 전부터 깔아놓은 돌 밑에서 잠자고 그리고 승려들은 그들의 무덤 위에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들이 선포하는 정신은 어린애들의 몫이 섞인 죽음의 그 재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리외가 밖으로 나왔을 때, 비스듬히 열린 문틈으로 모진 바람이 불어 들어와서 신자들의 얼굴을 정면으로 후려갈겼다. 그 바람은 비냄새와 젖은 포도 향기를 실어다가 성당 안에 불 어넣었다. 그래서 신자들은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거리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의사 리 외 앞에는, 그때 막 나온 어떤 늙은 신부와 젊은 부제가 모자를 날릴까봐 애를 쓰고 있었다 나이가 더 든 쪽은 쉬지 않고 그 설교에 주석을 붙이고 있었다. 그는 파늘루의 웅변에 경의 를 표시했지만, 그래도 파늘루가 표명한 몇 가지의 대담한 생각을 불안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는 그 설교에는 힘보다도 불안이 엿보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파늘루의 연령쯤 되고 보면, 일개 신부가 불안해질 필요가 없었다. 그 젊은 부제는 바람 때문에 고개를 숙이 고 있었는데 자기는 늘 파늘루 신부집을 드나들고 있어서 신부의 사상적인 발전을 잘 알고 있고, 그의 논문은 앞으로 더한층 대담한 것이 될 것이며, 아마도 출판 허가를 얻지 못하게 되리라고 단정했다. "대체 어떤 사상인가요?" 하고 늙은 신부가 물었다. 그들은 성당 앞뜰에 서 있었는데,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어 젊은 부제는 말을 중단하곤 했다. 겨우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다만 이렇게 말했다. "신부가 의사의 진찰을 받는다면 그것은 모순이라는거죠." 타루는 리외에게서 파늘루의 연설 내용을 듣자, 전쟁으로 눈을 잃은 어떤 청년의 얼굴을 보고, 자기는 전쟁중에 신앙을 잃은 한 신부를 안다고 말했다. "파늘루의 말이 옳죠."라고 타루가 말했다. "죄 없는 사람이 눈을 잃게 될 때, 한 기독교 인으로서는 의당 신앙을 잃거나, 눈이 빠지는 것을 용납해야지요. 파늘루는 신앙을 잃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니 그는 갈 데까지 가겠지요. 그가 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그것이죠." 이러한 타루의 관찰이 그 뒤에 일어난, 그리고 그때의 파늘루의 행동이 주위 사람들에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인상을 준 불행한 사건들을 밝혀주는 데 얼마간의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앞으로 각자가 판단해주기를 바란다. 그 설교가 있은 지 며칠 후, 파늘루는 마침 이사하느라 바빴다. 그 당시 시내에는 병세가 진전되어 끊임없이 이사가 성행했다. 그리고 타루가 호텔을 떠나서 리외의 집에 와야만 했 듯이, 신부도 역시 교단에서 배당해주었던 아파트를 떠나, 아직 페스트에 걸리지 않은 성당 에 나오고 있는 어떤 늙은 부인 집에 가서 살아야만 했다. 신부는 이사를 하는 동안에 자기 의 피로와 불안이 커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마침내 그는 자기가 묵는 집 여주인의 존경 을 잃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부인이 자기에게 성 오딜의 예언이 용하다고 열렬히 떠벌리는 이야기를 듣고, 신부는 아마도 피로의 탓이었겠지만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지만 초조 한 빛을 보였던 것이다. 그는 그 후 온갖 애를 써가면서, 하다 못해 호의적인 중립이라도 얻 어볼까 애썼으나 되지 않았다. 그는 나쁜 인상을 주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저녁때마다, 편물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린 자기 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는 홀에 앉아 있는 여주인의 등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고, 그 부인이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쌀쌀하게 "안녕히 주무세요, 신부님"이라고 하는 말의 여운을 가지고 돌아와야만 했다. 바로 그러한 어느 날 저녁 누우려고 하는 순간, 머리가 쑤셔대고, 벌써 며칠 전부터 나기 시작했던 미열의 거센 물결이 손목과 관자놀이로부터 터져나오려는 것을 느꼈다. 그 후에 일어난 일은, 그 집 여주인의 이야기로 겨우 알 수 있었다. 아침에 그 여자는 습 관대로 매우 일찍 일어났다. 그런데 일어날 시간이 지나도 신부가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볼 수가 없어, 놀라서 한참 생각한 끝에 그의 방문을 두드려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녀가 방문을 열자 신부는 밤새 잠을 못 잔 채 아직도 자리에 누워 있었다. 그는 가슴이 답답해서 애쓰고 있었으며, 여느 때보다 눈이 더 충혈되어 있었다. 부인의 말로는, 자기가 공손하게 의사를 부르자고 제안했는데, 어찌나 맹렬하게 핀잔을 들었는지 그것을 참으로 섭섭하게 여겼다. 그 여자는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신부는 잠시 후에 벨을 눌러서 부인을 불렀다. 그는 자 기가 아까 몹시 화냈던 것을 사과하고, 자기는 페스트에 걸린 것은 아니며, 그런 증세는 조 금도 없고, 일시적인 피로에서 온 것이라고 말했다. 늙은 부인은 점잖게, 자기가 그런 제안 을 한 것은 그런 종류의 불안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자기는 하느님이 주관하는 자기 몸의 안전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으나, 다만 자기에게도 부분적으로나마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 는 신부님의 건강을 생각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신부는 더 이상 말이 없기에, 그 여주인의 말을 믿자면, 자기의 의무를 다하려는 욕망에서 의사를 부르자고 다시 한 번 그에 게 제안을 했던 것이다. 신부는 또 한 번 거절했는데, 그 늙은 부인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알 수 있었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알 수 없는 일로 보였는데, 신부는 진찰이라는 것이 자신의 사상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진찰을 거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열이 심해서 그 손님의 생각이 어지러운 거라고 결론을 짓고,, 약 한 첩을 달여다주고 말았던 것이다. 그 사태에서 생겨나는 여러 가지 의무를 아주 정확하게 완수하겠다고 늘 명심하고 있었던 그 여자는, 두 시간마다 규칙적으로 환자의 방에 들어가 보았다. 부인에게 가장 충격을 준 것은 끊임없는 흥분에 들떠 신부가 그날을 꼬박 보낸 사실이었다. 그는 이불을 어 치웠다가 다시 끌어당겼다가 하면서, 줄곧 손은 자기의 축축한 이마에 갖다대고, 가끔 몸을 일으키고, 마치 짜내듯 숨을 쉬고 비틀어진 듯한 기침을 하려고 애쓰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는 마치 목구멍 속의 솜방망이를 뽑아버리지 못해서 질식해버릴 것 같았다. 그러한 발작을 몇 번 하 고 나면 그는 기진맥진해져 뒤로 나자빠졌다. 그는 마침내 다시 몸을 반쯤 일으키고, 잠시 동안 조금 전보다 더 꼿꼿한 자세로 정면을 응시했다. 그래도 그 늙은 부인은 그 환자의 기 분을 거스를까봐 의사를 부르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겉보기로는 굉장했지만 단순한 열병 의 발작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부인은 오후에 신부에게 가서 말을 걸어보았는데 몇 마디 횡설수설하는 소리밖엔 느 들을 수가 없었다. 부인은 또 한 번 의사를 부르자는 제안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그때 신 부는 몸을 일으키고, 반은 숨이 막혀 애쓰면서도 자기는 의사를 원치 않는다고 분명히 말했 다. 그제서야 부인은 이튿날 아침까지 기다려 보아서 그래도 신부의 나아지지 않으면 랑스 도크 통신사에서 라디오를 통해 하루에도 여러 번씩 되풀이하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항상 자기 의무에 충실한 그 부인은, 밤중에도 자기 집 손님을 찾아가서 밤을 새우고 돌보아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저녁때 약을 한 첩 새로 달여다주고 나니 좀 눕 고 싶었다. 그러던 것이 그 이튿날 새벽에야 겨우 잠이 깨었다. 그 여자는 신부의 방으로 달 려갔다. 신부는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전날 밤엔 열로 벌겋던 얼굴이 이젠 납 빛깔이 되 었는데, 얼굴 모양이 아직도 말짱해선지 더욱 창백해 보였다. 신부는 침대 위에 걸려 있는 여러 가지 빛깔의 진주가 달린 샹들리에를 응시하고 있었다. 부인이 들어가자 신부는 고개 를 그쪽으로 돌렸다. 그 여주인의 말에 의하면, 그때 그의 모습은 밤새 병과 싸워서 온몸의 힘이 빠져 움직일 수가 없는 것같아 보였다는 것이다. 그 여자는 그에게 좀 어떠냐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신부는 부인의 주의를 끌 만캄 이상하게도 무관심한 투의 목소리로, 병세가 더하나 의사를 부를 필요는 없고 다만 모든 것을 규칙대로 해 나가기 위해서 자기를 병원으 로 운반하면 된다고만 말했다. 노부인은 질겁을 하고 전화 있는 데로 달려갔다. 정오에 리외가 왔다. 여주인의 이야기를 듣더니, 그는 파늘루의 말이 옳았고, 아마 때가 늦었을 거라고 대답했다. 신부는 여전히 무관심한 태도로 그를 맞았다. 리외가 진찰을 하고 놀란 것은, 다만 목이 붓고 호흡이 곤란할 뿐 선페스트 또는 폐페스트의 중요한 증세는 하 나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맥이 몹시 약했고 전반적인 증세도 극히 위험해서 거의 가망이 없었다. "페스트의 중요한 증세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파늘루에게 말했다. "그러나 사실은 의 심스러운 점도 있으니 격리해야겠습니다." 신부는 예의상 그러는 듯이 야릇한 미소를 지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리외는 전화 를 걸러 나갔다가 되돌아왔다. 그는 신부를 보았다. "내가 곁에 있겠습니다."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신부는 생기가 도는 듯이 보였고, 일종의 정열이 되살아나는 듯한 눈길로 의사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가까스로 한마디 한마디 이어 가면서, 슬픈지 어떤지 모를 말로 "감사합니다. 그러나 성직자는 친구가 없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신에게 맡겼으니까요."라고 했다. 그는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는 십자가를 달라고 했다. 그러고는 십자가에 손을 쥐어지자 그것을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파늘루는 병원에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자기 몸에 가해지는 치료에 대해서 마치 물건 처럼 자기를 내맡기고 있었지만 십자가는 끝내 놓지 않았다. 그래도 신부의 증세는 여전히 애매했다. 리외의 머릿속에서 의문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페스트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 도 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페스트는 진찰을 당황하게 만드는 것을 재미로 여기고 있는 듯싶었다. 그러나 파늘루의 경우 그러한 불확실성도 과히 중요한 점이 못된다는 것을 그 후 의 경과에서 나타냈다. 열이 높아졌다. 기침 소리는 점점 더 쇠어지고, 온종일 환자를 못살게 굴었다. 신부는 마 침내 저녁에 그의 숨을 틀어막고 있었던 그 솜뭉치를 토해냈다. 그것은 새빨간 것이었다. 파 늘루는 열의 상태에서도 무관심한 눈빛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아침에, 침대 밖으로 몸을 반쯤 떨어뜨리고 죽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을 때, 그 눈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 다. 그의 카드에는 이렇게 적혀졌다. '병명 미상' 그 해의 만성절은 다른 때와는 달랐다. 날씨는 제철에 알맞았다. 날씨는 갑자기 변해서, 늦더위가 별안간 선선한 날씨에 자리를 물려 주고 말았던 것이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찬바 람이 잇달아서 불고 있었다. 큼직한 구름들이 지평선 이쪽에서 저쪽으로 몰려 달리고, 집들 을 그늘로 덮고, 그것들이 지나가면 11월 하늘의 싸늘하고 노란 햇빛이 다시 그 집들 위를 비추었다. 처음으로 레인 코트가 등장했다. 그런데 고무를 입혀서 번쩍거리는 수많은 천이 눈에 띄었다. 사실 신문들은 200년 전에 남 프랑스 지방에 대규모의 페스트가 유행했을 때, 의사들이 스스로의 예방을 위해서 기름을 먹인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을 보도한 일이 있었 다. 가게들은 그것을 이용해서 유행에 뒤떨어진 팔다 남은 재고품들을 방출했는데, 시민 각 자는 그것으로라도 위안을 얻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계절적인 징후도 묘지들이 버려진 것을 잊게 할 수는 없었다. 예년 같으 면, 전차들은 국화꽃의 은은한 향기로 가득 찼고, 부인네들이 줄지어 그들의 친척이 묻혀 있 는 무덤에 꽃을 꽂으로 가곤 했었다. 그 날은 사람들이 고인 곁에 가서, 몇 달 동안 그들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에 대해 용서받으려고 하는 날이었다. 그러나 이 해에는 아무도 죽은 이 를 생각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확실히 이미 지나치게 그들은 죽은 사람들 생각을 했다. 그러 니 더 이상 약간의 후회와 감상에 젖는 심정으로 그들을 찾아보는 것은 문제도 되지 않았 다. 죽은 사람은 이미 일년에 하루씩 사람들이 변명을 하러가는 존재가 아니었다. 누구를 막 론하고 잊어버리고 싶어하는 침입자들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 해의 초혼제도 이를테면 슬쩍 넘어가고 말았다. 코타르에 의하면, 타루는 그 사람의 언사가 점점 야유적으로 되어가는 것 을 알아챘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매일매일이 초혼제였다. 그런데 실상 페스트의 불꽃은 화장터의 화덕에서 매일같이 신바람이 나서 타고 있었다. 하루하루 사망자의 수가 증가하지는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페스트는 이제 그 정점에 편안히 자리잡고 앉아서, 자기의 살인 일과를 착실히 관리하는 정확한 규율성을 보이고 있 었다. 원칙적으로는 그리고 당국자들의 의견으로는, 그것은 좋은 징조라는 것이었다. 페스트 진전의 그래프는 끊임없는 상승과 이어서 긴 평형 상태를 보여줌으로써, 예를 들어 의사 리 외 같은 이에게는 완전히 믿음직한 현상으로 보였던 것이다. "좋아, 훌륭한 그래프야."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병세가 소위 평형선에 도달한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앞으로 병세는 약 해질 것이다. 그는 그 실적을 카스텔의 새로운 혈청의 덕으로 돌렸다. 그런데 사실 그 혈청 은 예기치 않았던 성공을 몇 건 거두었다. 늙은 카스텔은 거기에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은 페스트 역사상에는 예측할 수 없는 반전들이 있어서 앞을 내다볼 수는 없는 것이라고 보 고 있었다. 도청은 오래전부터 민심에 안정을 가져오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페스트는 거기에 대해서 그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도청은 그 문제에 대한 의사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 의 사들의 회합을 열기로 제안했는데, 그때 의사 리샤르가 역시 페스트로 더구나 병세가 평행 선일 때 사망하고 말았다. 행정 당국은 충격적인 그러나 아무튼 어쩔 수 없는 그 상황 앞에서, 처음의 낙관론을 받 아들였던 입장에서 모순적인 비관론으로 돌아섰다. 카스텔로 말하면, 그는 자기의 혈청을 가 능한 한 정성을 들여서 만들기로 했다. 어쨌든 이제는 병원이나 검역소로 개조되지 않은 공 공 장소란 하나도 없었는데, 그래도 아직 도청만은 삼가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모일 장 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로, 그리고 이 시기에 페스트가 비교적 안정된 상태에 있었는데도, 리외가 계획했던 조직은 조금도 뒤늦은 것은 아니었다. 기진맥진하도록 노력을 쏟았던 의사들이나 조수들은, 그 이상의 노력을 상상해볼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규칙적으 로, 이렇게 말해도 괜찮다면, 그 초인적인 일을 계속해야먄 했었다. 이미 나타난 폐장성 전 염병은 마치 바람이 사람들의 가슴속에 불을 붙여놓고 부채질을 하듯이 시 곳곳에서 만연되 고 있었다. 환자들은 피를 토하며 훨씬 더 빨리 죽어갔다. 전염성은 그 새로운 병태와 더불 어 더 커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사실 그 점에 관해서 전문가들의 의견은 항상 모순적이었 다. 그래도 더욱 안전을 기하기 위해서 보건 관계자들은 여전히 소독된 가제 마스크를 사용 했다. 얼핏 보면 병세는 확대될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선페스트가 감소되어갔기 때문에 통 계는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시간이 감에 따라 식량보급 곤란이 증대해 갔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불안한 문제 들이 있었다. 게다가 투기가 성행해서 여느 시장에 없는 가장 긴요한 생활 필수품들이 터무 니없는 가격으로 팔렸다. 따라서 빈곤한 가정은 무척 괴로운 처지에 서게 되었지만, 반면에 부유한 가정들은 거의 없는 것이라곤 없었다. 페스트가 그 역할에서 보여준 것 같은 효과적 인 공평성으로 말미암아 시민들간에 평등이 강화될 수도 있었을 것인데, 페스트는 오히려 인간의 에고이즘으로 마음속에 불공평의 감정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어주었다. 물론 완전무 결한 평등만은 남아 있었지만 그런 평등은 아무도 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굶주림에 시달 리는 빈곤한 사람들은 더한층 향수를 가지고 생활이 자유롭고 빵값도 비싸지 않은 이웃 도 시와 이웃 시골을 생각했다. 대체로 이치에 닿지도 않은 이야기지만, 자기들에게 충분히 식 량을 충당해주지 못할 바에는 자기들을 떠날 수 있게 해주어야 할 것 아니냐는 것이 그들의 심정이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의 구호가 퍼져서, 그것이 때때로, 또 어떤 때는 지사가 지 나가는 길에 외쳐지기도 했다. '빵을 달라, 그렇지 않으면 공기를 달라' 이 풍자적인 문구는 몇몇 데모의 단서가 되었는데, 데모는 곧 진압되었지만 그 중대성은 누가 보기에도 소홀히 생각할 수는 없었다. 물론 신문들은 그들이 수락한 바 있는 절대적인 낙관론의 수칙에 순종하고 있었다. 신문 에 의하면 정세의 현저한 특징은 시민들에게서 볼 수 있는 '냉철과 침착의 감동적인 실례'였 다. 그러나 꽉 갇혀 있는 한 도시에서, 그리고 거기서는 무엇이고 비밀이 될 수 없는 그 도 시에서는, 아무도 도청이 제시하는 '실례'에 속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문제가 된 그 냉철 이나 침착이라는 것에 대해서 정확한 개념을 얻자면, 당국에 의해서 마련된 예방 격리 수용 소 중의 한 군데에 들어가보는 것으로 충분했다. 마침 필자는 다른 곳에 볼일이 있어서 그 러한 곳들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로 여기에 타루의 목격담을 인용하는 길밖 에 없다. 사실 타루는 그의 수첩에다가 시립 운동장에 설치된 수용소에 랑베르와 함께 갔던 이야기 를 적어놓았다. 운동장은 시문 근처에 있었으며, 한쪽은 전차가 다니는 거리에 또 한쪽은 그 도시가 건설된 고원 끝까지 뻗은 공터에 면하고 있었다. 원래 높은 콘크리트 담이 둘러싸여 있었다. 그래서 탈주를 막기 위해서는, 네 군데의 출입구에 보초병을 세워두는 것으로 충분 했다. 동시에 그 담은 외부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격리를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성가시게 구 는 것도 방지하고 있었다. 그 대신 수용된 사람들은, 하루 종일 보이지도 않고 지나가는 전 차 소리를 들어야 했고, 또 전차와 더불어 더욱 코지는 소란한 소리를 듣고 관공서의 출퇴 근 시간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그들은 이와 같이 자기들이 밀려난 그 생활이 그들과 몇 미 터 떨어진 곳에서 계속되고 있고, 콘크리트 담은 비록 서로 다른 유성에서 살고 있더라도 서로 그처럼 멀리 떨어질 수 없을 만큼, 두 세계를 갈라놓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했다. 타루와 랑베르가 운동장으로 가려고 택한 날은 어느 일요일 오후였다. 그들은 축구 선수 인 곤잘레스와 같이 갔는데, 랑베르가 그를 찾아내서 마침내는 수용소의 교대 감시를 승낙 했던 것이다. 랑베르는 수용소의 관리인에게 그를 소개해야만 했다. 곤잘레스는 그 두 사람 과 만났을 때, 그 두 사람에게 페스트가 발병하기 전 같으면 시합을 시작하려고 유니폼을 입을 시간이라는 말을 했었다. 경기장을 빼앗기고 만 지금에 와서는, 그것은 이미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곤잘레스는 완전히 한가해진 것을 느낀 모양이었고, 또 그렇게 보였 다. 바로 그런 이유도 있고 해서, 그는 그 감시를 주말에만 한다는 조건으로 받아들였던 것 이다. 하늘은 어느 정도 흐려 있었다. 곤잘레스는 코를 벌름거리면서 시합하기에는 비도 안 오고 덥지도 않은 날씨가 썩 좋은 날씨라고 섭섭한 듯이 말했다. 그는 탈의실의 도찰제 냄 새며, 무너질 듯한 관람석이며, 엷은 황갈색 땅위에 산뜻한 빛깔의 팬츠며, 바짝 마른 목구 멍을 시원한 수천 개의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쉬는 시간에 마시는 레몬 주스 같은 것을 있는 대로 다 떠올렸다. 그 밖에 타루가 적어놓은 것은, 교외의 몹시 패인 거리들을 걸어가 는 동안에, 줄곧 그 선수는 돌만 보면 발길로 차곤 했다. 그는 돌멩이들을 똑바로 하수구로 집어넣으려고 애썼는데 성공하면 '일 대 영'이라고 말했다. 그는 담배를 피우고 나면, 그 꽁 초를 앞으로 탁 내뱉고 떨어지는 것을 발길로 찼다. 운동장 근처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서 공을 보내자, 곤잘레스는 공을 향해 달려가서 정확하게 그것을 차서 아이들에게 돌려보냈다. 마침내 그들은 운동장에 들어갔다. 관람석은 사람들롸 꽉 차 있었다. 그러나 마당에는 수 백 개의 붉은 천막이 뒤덮여 있었고, 그 내부에 있는 침구라든가 보따리 같은 것이 멀리서 도 보였다. 관람석은 몹시 덥거나 비가 오는 날에 수용자들이 피신할 수 있도록 그냥 두었 다. 다만 해가 지면 그들은 천막 속으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관람석 아래에는 새로 설치된 샤워실이나 예전의 선수용 탈의실을 개조한 사무실과 병실들이 있었다. 수용자의 대부분은 관람석에 모여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터치 라인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 은 자기네 천막 입구에 쭈그리고 있거나, 모든 것을 애매한 시선으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관람석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털썩 주저앉아서 무엇인가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 사람들은 낮에는 무엇을 하나요?" 타루는 랑베르에게 물었다. "아무것도 안 합니다." 거의 전부가 사실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 빈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거대한 인간의 집단 은 신기할 만큼 조용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여기서, 글세 서로의 말소리도 안 들릴 지경이었어요." 랑베르가 말했 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점점 말이 적어지더군요." 타루의 기록을 믿는다면, 타루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있었다. 초기에 그들은 천막 속 에 겹겹이 싸인 채 파리가 날아 다니는 소리나 듣고 있지 않으면 몸이나 긁적거리기에 바쁘 고, 혹은 자신의 이야기를 상냥하게 들어줄 사람이 있을 때에는 자기들의 분노나 공포에 대 해 떠들어댔다. 그러나 수용소가 초만원을 이루게 된 후부터는, 상냥하게 말을 들어줄 사람 이 점점 적어졌다. 그래서 결국은 입을 다물고 서로 경계를 할 수밖에는 없게 되었다. 사실 거기에는 일종의 경계심 같은 것이 잿빛의 그러면서도 빛나는 하늘로부터 붉은 천막들 위로 내리누르고 있었다. 그렇다, 그들은 모두가 경계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타인과 격리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전혀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의 이유를 찾고, 두려워하고 있는 사 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타루가 본 사람은 하나하나가 흐리멍덩한 눈을 하고 있었으며, 모 두가 자기들의 생활을 이룩하고 있던 것들과의 전반적인 이별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 그 리고 항상 죽음만을 생각하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것 이었다. 그들은 휴가중이었다. '그러나 가장 나쁜 것은' 이렇게 타루는 쓰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잊혀진 사람들이라는 사실과, 그들 역시 그것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들을 아는 사 람들도 다른 생각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 생각을 잊고 있었는데 그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로 말하면, 그들 역시 그들을 거기서 끌어내기 위 한 운동이나 계획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 생각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출소시킬 생 각을 하는 나머지, 그들은 끌어내야 할 사람 생각은 이미 잊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역시 당 연한 일이다. 그래서 결국에 가서는 비록 불행의 가장 난처한 경우라 할지라도, 어떤 사람을 정말로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을 정말로 생 각한다는 것, 그것은 시시각각으로 아무것에도 마음이 팔라지 않고, 살림 걱정도 안 하고, 날아 다니는 파리도 안 보이고, 밥도 안 먹고, 가려움도 안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리라든가 가려움이라든가 하는 것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래서 인생은 살기가 어려운 것이 다. 그런데 그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들에게로 돌아온 소장이, 오통 씨가 그들을 만나고 싶어한다고 전했다. 소장은 곤잘레스 를 그의 사무실로 안내해주고 나서 그들을 관람석으로 데리고 갔다. 혼자서 멀리 떨어져 앉 아 있던 오통 씨가 관람석에서 그들을 맞기 위해서 일어섰다. 그는 여전히 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고, 같은 하이 칼라를 달고 있었다. 타루는 다만 관자놀이 근처의 머리털 뭉치가 훨씬 더 위로 솟았고 한쪽 구두 끈이 풀려 있는 것을 보았다. 판사는 피곤한 모양이었고, 말 하는 동안에 단 한 번도 상대방을 보지 않았다. 그는 그들에게 만나게 되어서 대단히 기쁘 며 리외 의사에게 여러 가지 신세를 졌으니 감사하다고 전해달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잠자코 있었다. "바라건대" 얼마만에 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쟈크가 너무 고생이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 습니다." 타루는 그가 자기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는 것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무 엇이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해가 지평선으로 내려갔는데, 양쪽에 낀 구름 사이로 그 빛이 비스듬히 관람석에 비춰서 그 세 사람의 얼굴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닙니다." 타루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고생은 하지 않았어요." 그들이 가버리자, 판사는 햇살을 여전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곤잘레스에게 잘 있으라는 말을 하러 갔다. 그는 잠시 교대표를 들여다보고 있었 다. 축구 선수는 그들의 손을 잡으면서 웃었다. "적어도 탈의실만은 도로 찾았죠." 그는 말했다. "어쨌든 됐어요." 잠시 후, 소장이 타루와 랑베르를 배웅해주었을 때 관람석에서 엄청나게 큰 우박이 떨어 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에전에 좋았던 시절에는 시합 결과를 알린다든가, 팀을 소 개하는 데 사용되었던 확성기가 코먹은 소리로, 수용자들은 각자의 천막으로 들어가서 저녁 식사 배급을 받으라고 방송했다. 사람들은 관람석을 빠져나와 신발을 직직 끌면서 천막 속 으로 들어갔다.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갔을 때, 조그만 전기 자동차 두 대가 천막 사이로 커 다란 냄비를 싣고 다녔다. 사람들은 팔을 내밀어서 국자 두 개를 그 냄비에 넣었다가 두 개 의 밥그릇에 떠 담았다. 차는 다시 움직였다. 다음 텐트에서도 같은 일을 되풀이했다. "과학적이군요." 타루가 소장에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소장은 그들의 손을 잡으면서 만족스럽게 대답했다. "상당히 과학적입니다." 황혼이 깃들이고 있었고 하늘은 활짝 개었다. 부드럽고 신선한 햇빛이 수용소를 비추었다. 저녁의 평화 속에서, 스푼과 젖ㅂ시 부딪는 소리가 도처에서 일어났다. 박쥐들이 천막 위에 서 푸드득거리더니 갑자기 사라졌다. 전차 한 대가 벽 건너편에서 레일 위를 지나가느라고 삐걱거렸다. "판사가 가엾군." 문턱을 넘어서면서 타루가 중얼거렸다. "뭣 좀 해줘야겠는데. 그러나 판 사를 어떻게 돕지?" 시내에는 이같은 수용소가 몇 군데 더 있었는데, 필자는 신중을 기하기 위해 직접적인 정 보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할 수가 없다. 그러나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수용소의 존재라든가, 거기서 나는 사람 냄새라든가, 황혼 속에서 들리는 확성기의 우렁우렁 울리는 소리라든가, 담에 배인 신비, 누구나가 질색할 것 같은 장소에 대한 공포 같은 것들이 우리 시민들의 사기를 무겁게 억누르고 있으며, 모든 사람의 혼란과 불안감에 더욱 박차를 가했 다는 일이다. 행정 당국과의 분규와 알력이 몇 곱절이 되었다. 11월 하순이 되자 아침에는 기온이 대단히 차가웠다. 억수같은 비가 몇 차례 퍼부어서 아 스팔트 길을 철썩철썩 씻어내리고, 하늘을 맑게 만들고, 반짝이는 거리 위에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보여주었다. 힘 없는 태양이 매일 아침, 시가지 위에 번득거리는 냉랭한 햇살을 퍼뜨리고 있었다. 저녁때가 되면, 반대로 공기는 다시 훈훈해지곤 했다. 바로 그런 때를 골 라서 타루는 의사 리외에게 자기의 내력을 조금씩 이야기했다. 타루는 어느 날 10시경에, 지리하고 고달픈 하루를 보내고 나서 그 천식을 앓는 영감 집 에 저녁 왕진을 가는 리외를 따라갔다. 낡은 동네의 집들 위에서 하늘이 부드럽게 반짝이고 있었다. 산들바람이 어두운 네거리에서 소리없이 불고 있었다. 고요한 거리를 지나온 두 남 자는 노인의 수다 때문에 정신을 빼앗겼다. 노인은 그들에게 이런 일을 알려주었다. 즉 못마 땅한 것이 있는데, 수지 맞는 것은 언제나 그놈이 그놈이고, 너무 자주 위험한 일을 하면 결 국에 가서는 망하고 마는 법이고, 아마도 - 여기서 그는 손을 비볐다 - 무슨 소동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의사가 치료를 하고 있는 중에도 노인은 여러 가지 일에 대해서 설명을 늘어놓았다. 위층에 사는 사람이 걸어 다니는 소리가 들려왔다. 늙은 마누라는 타루가 궁금해하는 것 을 알아차리고 이웃집 여자들이 테라스에 나와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들은 동시에 그 위에서 보면 전망이 좋고, 집들의 테라스가 흔히 한쪽이 통해 있어서, 그 동네 여자들은 제 집에서 나올 필요도 없이 남의 집을 방문할 수 있다는 것도 설명했다. "그렇습니다." 노인이 말했다. "올라가 보세요. 거기는 공기도 좋답니다." 테라스에는 아무도 없었고, 의자만이 세 개 놓여 있었다. 한쪽으로는 테라스가 줄지어 보 였으며 그 끝에 컴컴하고 울룩불룩한 덩어리가 비스듬히 기대고 있었는데, 그것이 첫 번째 언덕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몇몇 거리와 보이지 않는 항구 너머로 시야가 멀리 수평선까지 뻗었는데, 거기서는 하늘과 바다가 서로 어울려 어렴풋이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그들이 낭떠러지라고 알고 있는 그 너머에서는, 어디서 비치는 건지 모를 한줄기 불빛이 규칙적으로 깜박이고 있었다. 지난 봄부터 등대가 다른 항구로 항로를 돌리는 선박 들을 위해 계속 회전하고 있었다. 바람에 쓸리고 닦인 하늘에서는 맑은 별들이 반짝이고, 등 대의 머나먼 불빛이 가끔씩 별빛과 부딪쳐 순간적으로 회색으로 빛나곤 했다. 미풍이 향료 와 돌의 향기를 실어왔다. 주위는 완전한 침묵에 잠겼다. "좋군요." 앉으면서 리외가 말했다. "페스트가 미치지 못한 곳 같군요." 타루는 그에게 등을 보인 채 바다를 보고 있었다. "네." 얼마 후에 그가 말했다. "좋군요." 그는 의사 곁에 와 앉아서 유심히 그를 보았다. 불빛이 하늘에서 세 번 깜박였다. 길 안쪽 에서 깊숙한 곳에서 접시 부딪는 소리가 그들에게까지 들려왔다. 집안에서 문이 삐걱거렸다. "리외." 타루는 아주 자연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한 번도 알려고 하지 않으셨지요? 나한테 우정을 갖고 계십니까?" "네." 리외가 말했다. "당신에게 우정을 가지고 있지요. 그러나 여태까지 그런 것을 표시 할 시간이 없었죠." "좋습니다,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그럼 이 시간을 우정의 시간으로 삼기로 할까요?" 대답을 대신해서 리외가 그에게 웃어 보였다. "자, 그럼..." 멀리서 어떤 거리에선가 자동차 한 대가 축축히 젖은 아스팔트 위를 아까부터 달리고 있 는 모양이었다. 자동차가 멀어지자, 그 뒤로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 소리들이 멀리서 터져나 와 침묵을 깨뜨렸다. 그 다음에 그 침묵은 하늘과 별과의 온 무게를 가지고, 그 두 사람 위 에서 다시금 내리눌렀다. 타루는 일어서서, 여전히 의자에 몸을 푹 묻고 있는 리외의 맞은편 난간 위에 걸터앉았다. 그의 모습은 하늘에 새겨놓은 듯한 육중한 덩어리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래 이야기를 했다. 그가 한 이야기를 대강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간단히 말하자면 리외, 나는 이 도시하고 유행병을 알게 되기 훨씬 전부터 페스트로 고 생했었죠. 그것은 말하자면, 나도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그러나 세상에는 그런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상태에서 좋다고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또 그런 것을 알면서도 거기서 어떻게든지 빠져나가 보려는 사람들이 있어요. 나는 빠져나가려고 했어요. 젊었을 때, 나는 결백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죠. 말하자면 전혀 생각이라고는 하지 않 았던 것이죠. 나는 끙끙 앓는 성질도 아니었고, 사회의 진출도 적당하게 되었어요. 모든 것 이 순조로웠죠. 머리도 괜찮았고, 여자들도 잘 따랐으니까요. 간혹 불안감이 생기기도 했지 만 그것은 이내 가시고 마는 불안이었어요. 어느 날, 나는 반성하기 시작했어요. 이제는... 미리 말씀드리지만 나는 선생님처럼 가난하지는 않았었죠. 우리 아버지는 검찰차장으로 계셨는데 그만 하면 좋은 자리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본시가 호인이어서 그런 티도 볼 수 없었어요. 어머니는 단순하고 겸손했어요. 나는 늘 어머니를 사랑해왔지요. 그러나 그 이야 기는 안하는 편이 더 좋겠어요. 어쨌든 아버지는 나를 애지중지 하셨어요. 그래서 나를 이해 하려고 애쓰셨다고까지 나는 생각하고 있어요. 밖에서는 바람도 꽤 피우신 모양인데, 이제는 다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에 대해 조금도 분개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아버지로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남 못할 노릇은 하지 않으셨으니까요. 간단히 말 하면, 그렇게 특출한 인물도 아니었고 돌아가신 지금 비록 성인처럼 살지도 않았지만, 악인 으로 일생을 산 것도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어요. 그는 중용을 지켰어요. 그뿐이죠. 그리고 그런 타입의 사람에게 사람들은 적당한 애정, 오래 유지해갈 수 있는 애정을 느낍니 다. 그래도 아버지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커다란 '섹스 여행 안내' 책을 그의 머리맡 에 두고 읽었습니다. 그렇다고 별로 여행을 자주 가시는 것도 아니고, 다만 휴가 때 땅이 조 금 있는 브르타뉴에나 가보실 정도였어요. 그러나 그는 파리 - 베르린 선의 열차 발착 시간 이라든가, 리용에서 바르샤바까지 가려면 중계시간이 어떻다든가, 이 수도에서 저 수도까지 는 몇 킬로라든가, 모두 다 알고 계셨어요. 브리앙송에서 샤모닉스까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말하실 수 있으세요? 역장이라도 그런 물음에는 쩔쩔 맬 것입니다. 아버지는 안 그러셨어요. 거의 매일 저녁, 그 점에 대한 지식을 풍부히 하려고 공부를 하셨고, 아주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계셨어요. 나도 재미를 단단히 붙여서, 자주 아버지에게 질문을 해보곤 했어요. 그러 고는 아버지의 대답을 섹스에서 찾아보고, 그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좋아했어요. 그런 자질구레한 일로 우리 부자간의 정은 매우 두터워졌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아버지를 위해서 아주 성의있게 평가를 하는 청중의 하나가 되어 드렸기 때문입니다. 나로서는 철도 에 관해서 뛰어나다는 것도, 다른 어떤 것에 뛰어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러다가는 아버지를 너무나 대단한 인물로 만들까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아 버지는 내게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뿐이니까요. 기껏해야 나에게 어떤 기회를 만들어주신 것뿐입니다. 내가 일곱 살 때, 아버지는 날더러 자신의 논고를 들으러 오라고 하셨어요. 사 건은 중죄 재판소에서 공판을 받는 어느 중대 사건이었는데, 아버지는 필자 자신의 가장 훌 륭한 모습이 그날 나타날 것으로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그는 또한 젊은 사람의 상상력을 자 극시키기에 적합한 그러한 의식을 통해, 나도 자기가 택한 생애로 들어가게 하려는 생각이 었다고 믿습니다. 나는 승낙했죠. 아버지도 기뻐하실 테고, 또 가족들 사이에서만 하시던 것 과는 다른 역할을 하시는 것을 보기 위해서였죠. 그 이상은 아무 생각도 없었어요. 법정에서 일어난 일은 7월 14일의 사열식이라든가, 어떤 상품 수여식 같은 것과 마찬가지로 늘 자연 스럽고도 불가피한 것으로 보였지요. 극히 추상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그리 어 색하지도 않았어요. 그러나 그날 내가 간직하고 있던 이미지는 유일하게 죄인의 이미지뿐이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이 사실 죄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무엇이었는가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글나 그 빨간 머리털을 한 가엾은 남자는 모든 것을 인정하기로 결심했고, 자기가 한 일과 이제 자기에게 가해질 일에 정말 겁을 먹고 있는 눈치여서 얼마 후에는 나는 그 사람만 보 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치 너무 강한 햇빛에 겁이 난 올빼미처럼 보였습니다. 넥타이의 매듭 도 와이셔츠의 칼라 여민 곳에 똑바로 놓여 있지 않았어요. 그는 오른손의 손톱을 깨물고 있었어요... 내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그는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때까지 '피고'라는 편리한 개념을 통해서 밖에는 그를 생각지 않았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 어요. 그때 내가 아버지 생각을 잊고 있었다고 말할 순 없지만, 무엇인지 내 배를 꽉 졸라매 고 있는 통에 그 형사 피고인에게 쏠린 주의 외에는 아무것에도 신경쓰지 못했어요. 거의 아무것도 귀에 들리지 않았어요. 나는 사람들이 그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느끼고, 물결처럼 밀려오는 굉장한 본능이 일종의 완고하고 맹목적인 태도로 그 남자의 편 을 들고 있었습니다. 내가 정신을 다시 차린 것은 아버지의 논고가 시작되었을 때입니다. 붉은 옷을 입은 호인도 못되고 다정한 사람도 못되는 아버지의 입에서는, 굉장한 말들이 마치 뱀새끼들처럼 튀어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아버지가 사회의 이름 아래 그 남자 의 죽음을 요구하는 것, 그리고 심지어는 그 남자의 목을 자르라고 요구하는 것을 알았어요. 사실 아버지는 이렇게만 말했어요. '그 머리는 마땅히 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 차 이가 대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그게 그거죠. 결국은 아버지가 그 머리를 차지하셨 으니까요. 다만 그때 하수인이 아버지가 아닐 따름이지요. 그리고 그 후, 나는 특히 이 사건 만은 결론이 날 때까지 방청을 했는데, 나는 그 불안한 남자에 관해서 아버지는 도저히 느 껴 보지도 못한 아찔할 정도의 친밀감을 느꼈어요. 그래도 아버지는 관례에 의해서 사람들 이 정중하게 소위 임종이라고 부르는 것에도 참석했을 것입니다. 그 임종이야말로 가장 비 열한 살인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때부터 나는 '섹스 여행 안내'만 보아도 구역질이 날 만큼 지긋지긋해졌습니다. 그때부 터 나는 법이니 사형선고니 형의 집행 같은 것에 혐오감 섞인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리 고 내가 아찔했던 것은 아버지가 벌써 몇 차례나 그러한 살인 현장에 입회했으며, 그가 아 침 일찍 일어나는 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그 런 경우엔 자명종을 틀어놓곤 했습니다. 나는 감히 그런 말을 어머니에게 하진 못했지만 열 심히 관찰했어요. 그래서 내가 알아낸 것은 그 부부 사이에는 이제는 아무것도 없고, 어머니 는 그저 체념의 생활을 하고 계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 것으로 어머니를 용서해줄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내가 그런 말을 사용했었죠. 후에 안 일이지만 어머니는 용서받아야 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결혼할 때까지 내내 가난에 쪼들렸고 가난이 그 여인에 게 체념을 가르쳐주었던 것입니다. 아마 선생은 내가 곧 집에서 뛰쳐나왔다고 말하기를 기대하고 계시겠지만 아닙니다. 나는 그대로 몇 달, 아마도 거의 일년은 집에 머물러 있었죠. 그러나 내 마음은 병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아버지는 일찍 일어나야겠으니 자명종을 가져오라고 말했어요. 나는 그날 밤, 한잠도 못 잤습니다. 그 이튿날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 나는 집을 나와 버렸습니다. 바로 말 씀드리자면 아버지가 나를 찾게 했죠.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보러 갔어요. 가서 아무런 해명 도 안하고 냉정하게, 만약 나를 강제로 돌아오게 하면 자살해버리겠다고 말했어요. 결국 그 는 승낙했어요. 아버지는 본래 성격이 온순한 편이었거든요. 그리고 제손으로 벌어먹는다는 어리석은 짓에 대해서(아버지는 나의 행동을 그렇게 해석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 오해를 전 혀 풀어드리지 않았지요.) 수만 가지 주의를 주고,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을 꾹 참더군 요. 그 후, 그 후래야 아주 오랜 후의 일이지만 나는 정기적으로 어머니를 만나러 집에 들르 곤 했는데, 그때 아버지도 뵈었지요. 그런 관계만으로 그는 만족하신 것 같았어요. 나로서는 별로 아버지에게 원한을 품고 있지는 않았고, 다만 약간 마음이 쓸쓸했을 뿐이었어요. 아버 지가 돌아가시자 나는 어머니하고 같이 살았는데, 이번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으면 지 금도 모시고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이 이야기를 길게 한 것은,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는 좀더 빨리 하겠어요. 나는 열여덟 살에 그 안락한 생활에서 벗어나자, 가난의 맛을 알았습니다. 나는 먹고 살기 위해서 별별 짓을 다 했습니다. 그런 일에 그다지 실패한 적은 없었죠. 그러 나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사형선고였습니다. 나는 그 붉은 머리카락을 한 올빼미하고 결말 을 지어보고 싶었죠. 그래서 결과적으로 나는 소위 정치 운동을 했어요. 나는 페스트 환자가 되고 싶지 않았어요. 그뿐이죠. 내가 살고 있는 사회는 사형 선고라는 기반 위에 서 있으니, 그것과 투쟁함으로써 살인 행위와 싸우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그렇게 믿었고 다른 사람들 도 그렇게 말했고 그리고 결국 대체로 그것은 진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하고 함께 일을 시작했어요. 나는 그 일을 오래 했고, 유럽의 여러 나라 중에서 내가 투쟁을 하지 않은 곳이라곤 없습니다. 이제 다른 이야기로 들어가겠어요. 물론 우리들도 역시 때에 따라서는 선고를 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런 몇몇 사람의 죽음은, 더 이상 아무도 사람을 죽이지 않은 세계로 이끌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도 진실이었으나, 어쨌든 나는 아마도 그런 종류의 진실을 품을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확실한 것은 내가 주저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올빼미 생각을 했었고 언제나 계속할 것 같았어요. 내 가 사형 집행을 구경한 그날까지(그것은 헝가리에서의 일이었어요), 그리고 어린애였던 나를 휘어잡은 바로 그 현기증이 어른이 된 나의 눈을 캄캄하게 만들었어요. 혹시 사람을 총살하는 것을 보신 일이 있으신가요? 못 보셨죠, 물론. 그것은 대개가 초대 해서 보여주게 되어 있고, 보여줄 사람은 미리 선정되어 있으니까요. 그런 결과로 선생님 같 은 분들의 지식은 그림이나 책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눈가림, 말뚝, 그리고 멀리 서 있는 병 사들. 암 보지 못했을 겁니다. 수형자가 두 걸음만 앞으로 나가면, 가슴에 총부리가 닿는 것 을 아시나요?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사격수들이 심장 근처를 집중사격하면, 저마다 굵직 한 탄환들이 한데 뭉쳐서 주먹이라도 들어갈 만한 구멍을 뚫어놓는 것을 아시나요? 선생님 은 모르실 겁니다. 그런 것들은 사람들이 이야기하지 않는 하찮은 일들이니까요. 인간의 잠 이라는 것은 페스트 환자들이 생각하는 생명보다도 더 신성한 것입니다. 선량한 사람들이 잠자는 것을 막아서는 안됩니다. 그럴려면 어느 정도의 악취미가 필요한 것인데, 취미란 고 집을 부리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아는 일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무렵 부터 잠을 잘 자지 못했습니다. 악취미가 입 속에서 가시지 않았고, 여전히 고집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늘 그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그래도 나의 온 정신을 기울여 그야말로 페스트와 내가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 고 있었던 그 오랜 세월을 두고, 내가 페스트에 걸리지 않았던 일이 결코 없다는 것을 깨달 았습니다. 나는 내가 간접적으로 수천 명의 인간의 죽음에 동의했다는 것, 숙명적으로 그러 한 죽음을 가져오게 했던 그런 행위나 원칙들을 선이라고 인정함으로써 그러한 죽음을 야기 시키기조차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것으로 속을 썩이는 것 같지 않았 고, 적어도 자발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결코 없었습니다. 나는 목구멍이 착 달라 붙는 것을 느꼈어요. 나는 그들과 같이 있으면서도 외로웠어요. 내가 나의 불안감을 표시하 려고 하면 그들은 나에게, 지금이 어떤 시기인가를 잘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었고, 흔 히 감동적인 이유들을 내세워 아무리 해도 알아먹을 수 없는 것을 나로 하여금 삼켜버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저 거물급의 페스트 환자들, 붉은 제복을 입은 사람들도 역 시 자기네대로의 훌륭한 이유가 있는 것이고, 만약 내가 불가항력이라는 이유와 사소한 페 스트 환자들이 주장하는 요구를 용인한다면, 거물급들의 그런 것들도 물리칠 수 있게 될 것 이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붉은 제복에게 옳다고 하는 그런 태도가 곧 그들에게 형의 선고를 일임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한 번만 양보한다면 멈출 필요가 없다고요. 아마 역사는 내 생각을 정당화해 준 모양입니다. 오늘날 많이 죽이는 자가 승리하는 모양이니 말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살인 에 열중해 있습니다. 그 이외에는 별 도리가 없는 일이지만요. 내가 할 일은 어쨌든 이치를 따지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 붉은 머리털을 한 올빼미, 페스트균이 전염된 더러운 입이 쇠사슬에 매인 어떤 남자를 향해서 너는 죽는다고 선고를 내리고, 그러면 그 남자는 여러 날 밤을 고뇌 속에 보내다가 두 눈을 뜬 채로 살해 당할 그 날을 기다리게 해놓은 다음에, 결국 그가 죽는 모든 일을 마련해놓는 그러한 더러 운 사건들이었습니다. 내가 할 일은 가슴에 뚫리는 저 구멍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곤 했어요. 그동안에 그리고 최소한 내가 아는 한은, 그 진저리나는 도살 행위에 대해 서 단 하나라도 오직 하나라도 이치를 부여한다는 것은 절대로 거부하겠다고요. 그렇습니다. 나는 더 확실한 것을 알게 될 때까지는 그 완고한 맹목적인 태도를 택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아무리 간접적이 었더라도, 또 아무리 선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더라도, 나 역시 살인자축에 끼여들었다는 것이 죽도록 부끄러웠습니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내가 알게 된 것은, 단지 다른 사람들 보다 뛰어난 사람들조차도 오늘날에는 그들이 살고 있는 논리 속에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 에, 사람을 죽게 하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우리는 이 세상에서 몸 하나 까딱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여전히 부끄러웠으며, 우리들은 모두가 페스트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오 늘날도 그 평화를 찾아서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누구에게나 철천지원수가 되지 않으려고 애 쓰고 있습니다. 나는 다만 이제 다시는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도록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 나가야 하며, 그것만이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바랄 수 있도록 해주거나, 그렇지 않으면 떳 떳한 죽음을 바랄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을 편안하게 만 들어주는 것이며, 비록 인간을 구원해줄 수까지는 없더라도 최소한 그들에게 되도록 해를 덜 끼치며 때로는 약간의 선까지도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나는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간에, 좋은 이유에서건 나쁜 이유에서건, 사람을 죽게 만든다거나 또는 죽게 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또한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이번 이 유행병에서 배운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있다면 여러분 축에 끼여서 그 병과 싸워야 한다는 것을 배웠을 뿐입니다.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그렇습니다, 리외. 아시다시피 나는 인생의 모든 것을 알고 있지요.) 사람은 제각기 자 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늘 스스로를 살피고 있어야지, 자칫하면 잠시 마음을 놓고 있는 동안에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병균을 옮겨주고 맙니다. 자연스러운 것, 그것 은 병균입니다. 나머지, 즉 건강이라든가 완전함이라든가 순결성이라도 좋지만, 어쨌든 그런 것은 의지의 결과며, 결코 멈추어서는 안될 의지의 결과입니다. 훌륭한 사람, 즉 거의 누구에게도 병균을 감염시키지 않는 사람이란, 될 수 있는 대로 마 음의 긴장을 풀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코 긴장을 풀지 않기 위해서는 그만한 의지와 긴장이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리외. 페스트 환자가 된다는 것은 피곤한 일 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피곤해하지요. 왜냐하면 오늘날 모든 사람이 다 소는 페스트 환자이니까요. 그러나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고 애쓰는 몇몇 사람들이, 죽 음 이외에는 그들을 해방시켜주지 못하는 극도의 피로를 체험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 입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내가 이 세계 자체에 대해서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 죽이는 것을 단념 한 그 순간부터 나는 결정적으로 추방을 당한 인물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다른 사람들입니다. 나는 또한 내가 그 사람들을 표면적으로 비판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정당한 살인자가 될 자격이 나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월 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본래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되기를 쾌히 동의하고 겸손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지상에도 재난과 희생자들이 있고, 가능한 한은 재난의 편을 들기를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아마 좀 단순하다고 보실지도 모릅니다. 단순한 지 어떤지 나는 잘 모르지만,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 가 지 이론을 들어서 머리가 돌아버릴 뻔했는데, 그 이론들은 다른 사람들의 머리를 돌게 만들 어서 그들로 하여금 살인 행위에 동의하도록 만들어버렸어요. 그래서 인간의 모든 불행은 그들이 분명한 언어를 쓰지 않는 데서 온다는 것을 나는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분명히 말하고 분명하게 행동함으로써 정도를 걸어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따라서 나는 재난과 희생 자가 있다고 말할 뿐, 그 이상은 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말을 함으로써, 비록 내 자 신이 재난이 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적어도 나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는 죄없는 살인자가 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그리 큰 야심은 아닙니다. 물론 제삼의 카테고리, 즉 진정한 의사로서의 카테고리가 필요하겠지만 그러나 이런 것은 그리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더구나 그것은 아마도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희생자들 축에 끼여서 그 피해를 되도록 한정시키려는 것입니다. 희생자들의 틈에서 적어도 나는 어떻게 하면 제삼의 카테고리, 즉 마음의 평화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탐구할 수도 있습니다." 타루는 이야기를 맺으면서, 다리 한쪽을 휘저으며 발로 테라스 바닥을 두드렸다. 잠시 침 묵한 끝에 의사는 약간 몸을 일으키고 타루에게 마음의 평화에 도달하기 위해서 걸어야 할 길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야 공감이라는 것이죠." 멀리서 구급차의 고동 소리가 두 번 울렸다. 조금 아까 어렴풋했던 그 아우성 소리가 시 의 경계선 근처의 돌이 많은 언덕 위로 몰려 들었다. 동시에 무슨 폭발 소리 같은 것이 들 려왔다. 그러다가 다시 조용해졌다. 리외는 등대가 두 번 깜박거리는 것을 보았다. 산들바람 이 좀 강해지는 것 같더니, 이와 때를 같이 해서 바람이 바다로부터 소금냄새를 실어왔다. 낭떠러지에 부딪치는 파도의 둔한 숨결이 뚜렷이 들렸다. "결국" 하고 솔직한 말투로 타루가 말했다. "내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성인이 되는가를 아는 일입니다." "그러나 신은 안 믿으시면서." "물론입니다. 신이 없어도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있는가가 오늘날 내가 알고 싶은 단 하나 의 구체적인 문제입니다." 갑자기 아까부터 떠들어대던 곳에서 큰 불빛이 나타나더니 바람에 실려 어렴풋한 고함 소 리가 그 두 사람에게까지 들려왔다. 불빛은 곧 침침해지고, 멀리 테라스 끝에서 불그스름한 빛만 남았다. 바람이 멎은 동안에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뚜렷하게 들려오다가, 이어서 사격 소리와 군중의 아우성 소리가 났다. 타루는 일어서서 듣고 있었다. 그 이상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또 시문에서 싸움이 붙었군요." "이제는 끝났습니다." 리외가 말했다. 타루는 아직 절대로 끝나지 않았으며 순서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아직도 희생자가 날 것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럴지도 모르죠." 의사가 대답했다. "그러나 이봐요, 나는 성인들보다는 패배자들에게 더 연대 책임을 느낍니다. 아마 나는 영웅주의라든가 덕서 같은 것에는 아마 취미가 없는 것 같아요.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인간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죠, 우리는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어요. 그러나 내가 야심이 좀더 크지 않다는 것이 지요." 리외는 타루가 농담을 하는 줄 알고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어렴 풋한 빛 속에서, 그의 얼굴에는 어떤 비애와 진지한 모습이 서려 있었다.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리외는 피부에 미지근한 바람의 감촉을 느꼈다. 타루는 몸을 움직였다. "우리가 우정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아시는지요?" 그가 물었다. "글세." 리외가 말했다. "해수욕을 하는거죠. 미래의 성인일지라도 그것은 훌륭한 쾌락입니다." 리외는 웃었다. "우리는 통행증을 가지고 방파제까지는 갈 수 있어요. 결국은 페스트 속에서만 살아야 한 다니 너무 바보 같아요. 물론 인간은 희생자를 위해서 싸워야만 하죠. 그러나 다른 편에서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게 되고 만다면, 투쟁은 해서 뭣하겠어요?" "그럼요." 리외가 말했다. "자, 갑시다." 잠시 후, 자동차는 항구의 철조망 옆에 와서 멈추었다.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우유빛 하 늘이 도처에 엷은 그늘을 내려뜨리고 있었다. 그들 뒤에서 시가가 층계를 이루고 있었고, 거 기서 불어오는 후끈하고 불쾌한 입김이 그들을 점점 더 바다 쪽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그들 이 신분증을 보초에게 보이자 보초는 오랫동안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그들은 통과해서 큰 통들이 뒤덮인 둑 너머로, 포도주와 생선 냄새가 나는 속을 뚫고 방파제로 갔다. 거기에 이 르기 전에 해초 냄새가 바다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바다는 방파제의 커다란 축대 밑에서 부드럽게 철썩거리고 있었는데 그들이 그 위를 기어 올라갔을 때, 벨벳처럼 짙고 등불처럼 부드럽고 매끈해 보이는 바다가 보였다. 그들은 바다 한복판을 향해서 뻗은 바윗돌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파도가 부풀어올랐다가 다시 서서 히 주저앉곤 했다. 바다의 고요한 숨결을 따라 물 위로 기름을 바른 것처럼 반사가 일어났 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들 앞에 밤은 무한히 가로놓여 있었다. 손가락 밑에 있는 바윗돌의 울퉁불퉁한 모습을 어루만지고 있었던 리외는 이상한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타루를 바라 보면서 자기 친구의 침착하고 신중한 얼굴에서 그는 아무것도 잊지 않고 있는 행복감을 엿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옷을 벗었다. 리외가 먼저 물에 몸을 담갔다. 처음에는 차갑던 물이, 다시 떠올랐 을 때는 미지근한 것 같았다. 몇 번 평형을 하고 나니, 그날 저녁 바다는 여러 달을 두고 쌓 이고 쌓였던 대지의 열을 휩싸 가을 바다의 온도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규칙적으로 헤엄을 쳤다. 발을 풍덩거릴 때마다 그의 뒤에는 하얀 물거품이 남고, 물은 두 팔에서 흘러내려 다리에 가서 철썩이곤 했다. 무겁게 풍덩하는 소리로, 타루가 뛰어든 것을 알았다. 리외는 뒤로 드러누워 움직이지 않고 달과 별들로 가득 찬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쉬었다. 그러자 점점 뚜렷하게 밤의 침묵과 고요 속에서, 신기하게도 물 튀기는 소리가 뚜렷이 들렸다. 타루가 가까이 오자, 그의 숨소리까지 들렸다. 리외는 몸을 뒤집고 자기 친구와 나란히 같은 리듬으로 헤엄을 쳤다. 타루는 그보다 더 힘차게 헤엄쳐 갔다. 그 래서 그는 속력을 내야 했다. 몇 분 동안 그들은 같은 리듬과 같은 힘으로 단 둘이서 세상 을 멀리 떠나, 마침내 시와 페스트에게서도 해방이 되어 전진했다. 리외가 먼저 멈췄다. 그 리고 그들은 천천히 되돌아왔다. 다만 도중에 한 번 그들은 얼음처럼 찬 물결을 만났다. 그 들은 둘이서 아무 말도 없이 바다의 기습에 몰려서 서둘러 헤엄쳤다. 다시 옷을 주워입은 그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그들은 똑같은 심 정이었고, 그날밤은 달콤한 추억이 되어 남았다. 멀리 페스트의 보초병을 보았을 때 리외는 타루도 역시 자기처럼 페스트가 조금 아까 우리들을 잊었었는데 이제 또다시 시작이라는 것 을 속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말 다시 시작해야만 했고, 페스트는 누구든지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지는 않았다. 12월 달 내내 페스트는 우리 시민들의 가슴을 불태우고, 화장터 화덕에 불을 지피게 하고, 맨손을 쥔 허깨비 같은 사람들로 수용소를 가득차게 만들었고, 어쨌든 멈출줄 모르고 그 끈기 있는 걸음으로 전진했다. 당국은 날씨가 추우면 그 진전이 정지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반 대로 페스트는 며칠 동안 계속된 겨울의 첫추위에도 물러가지 않고 견디어 나갔다. 더 기다 려야만 했다. 그러나 사람이란 기다리다 지치면 기다리지 않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우리들 의 도시 전체는 미래 없이 살고 있었다. 의사 역시 그가 가졌던 평화와 우정의 미래가 없었다. 병원이 또 하나 생겨서 이제 리외 는 환자들하고밖에는 사람을 접촉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페스트는 점점 폐장성으로 변해갔고, 환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의사에게 협조하는 눈치를 보였다. 그들은 초기의 허탈과 광태에 빠지지 않고 자기들의 이익에 관해서 좀더 올바른 생각을 갖게 된 듯싶었으며, 자기들을 위해서 가장 이로울 수 있는 것을 스스로 요구하게 되었다. 그들은 줄곧 마실 것을 요구했으며, 모두들 따뜻한 것을 원했다. 의사로서 피로하기는 마찬 가지였지만 그래도 그러는 편이 덜 고독했다. 12월말쯤에 리외는 아직도 수용소에 있었던 예심판사 오통 씨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았는 데, 그의 격리 기간이 지났는데도 당국은 자기의 입소 날짜를 모르고 있어서 자기를 아직도 수용소에 억류해두고 있다는 사연이었다. 얼마 전에 수용소에서 나온 그의 아내가 도청에 항의를 했는데 거기서는 비웃음을 받았으며, 절대로 착오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더라는 것 이었다. 리외는 랑베르로 하여금 교섭을 부탁했다. 결국 며칠 후에 오통 씨가 출소했다. 실 제로 오류가 있었던 것이다. 리외는 무척 화가 났다. 그러나 오통 씨는 그동안에 여윈 몸으 로 힘없이 손을 들고는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어가면서 누구에게나 실수는 있을 수 있다 고 말했다. 의사는 다만 어딘지 좀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판사님? 서류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요." 리외가 말했다. "글쎄요, 휴가를 얻을까 합니다." "정말, 좀 쉬셔야죠." "그것이 아닙니다. 나는 다시 수용소로 돌아갈까 합니다." 리외는 놀랐다. "아니, 어제 나오시는 길인데!" "잘못 말씀드렸군요. 수용소에는 자원 사무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판사는 그의 둥근 눈을 굴리며, 한쪽 머리카락을 꼭꼭 눌러서 모양을 바로 잡았다. "말하자면, 나도 그런 일을 하려구요. 게다가 어리석은 이야기 같지만, 내 어린놈하구 갈 라졌다는 마음도 덜 들테구요." 리외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 딱딱하고 멋없는 눈에 갑자기 부드러움이 깃들었다느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두 눈은 더 흐려졌으며 그 금속과 같은 맑음을 잃었다. "원하신다면 내가 알선해드리겠습니다." 리외가 말했다. 의사는 정말 그를 알선해주었고, 페스트에 휩쓸린 그 시의 생활은 크리스마스까지 그 상 태가 지속되었다. 타루는 여전히 그 효과적인 침착성을 가는 곳마다 끌고 다녔다. 랑베르는 리외에게, 그 두 젊은 보초들 덕분으로 자기 아내와 비밀 서신왕래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이 야기를 했다. 가끔 가다가 아내의 편지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리외에게도 그 방법을 이 용하라고 권했다. 그래서 리외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는 몇 달만에 처음으로 편지를 썼으 나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아주 잊어버린 말도 있었다. 편지는 발송됐다. 답장 오는 것이 늦었다. 한편 코타르는 장사가 잘 되었고, 그의 조촐한 투기들이 그를 부자로 만들었다. 그 랑은 그 기간중에 별로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 해의 크리스마스는 복음서의 명절이라기 보다 차라리 지옥의 명절이었다. 텅 비고 불 이 꺼진 가게들, 진열장 속에 있는 모형 초콜릿이나 빈 상자들, 음울한 얼굴들을 실은 전차 들, 어느 것도 과거의 크리스카스를 연상시키는 것이라곤 없었다. 전 같으면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모두 한테 모여서 지내던 그 명절도, 이제는 때가 꾀죄죄한 가게 내실에서, 특권층 이 금력으로 장만하는 고독하고도 부끄러운 몇 가지 즐거움 이외에는 있을 수가 없었다. 성 당들은 감사의 기도보다는 차라리 애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음침하고 얼어붙은 시내에서는, 아이들 몇이 무엇이 두려운지도 모르고 뛰놀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감히 그 아이들에게 인류의 고통처럼 나이를 먹었으면서도, 젊은 희망처럼 싱싱한 선물을 가득 실은 그 옛날의 신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제는 아주 늙고 아주 음울한 희망, 심지어 사람들로 하여금 가만히 죽지도 못하게 하는, 단순히 삶에 대한 애착에 불과한 그런 희망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 전날 밤, 그랑은 약속 시간을 어겼다. 불안해진 리외는 새벽 일찍 그의 집에 갔으나 그 를 만나지 못했다. 모두들 경계심을 가졌다. 랑베르가 11시경에 병원에 와서, 자기는 그랑이 얼굴이 초췌해서 거리를 헤매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내 놓치고 말았다는 것을 리외에게 알려주었다. 의사와 타루는 차를 타고 그를 찾으러 나갔다. 정오 때의 그 냉랭한 시각에 리외는 멀리 그랑이 괴상하게 나무를 깎아서 만든 장난감들 로 가득 찬 진열장 앞에 바싹 달라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늙은 서기의 얼굴에는 그지없 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눈물이 리외의 마음을 뒤집어놓았다. 왜냐하면 그 는 그 눈물의 원인을 알고 있었고 자기 자신 역시 목구멍에 슬픔이 치받치고 있었기 때문이 었다. 리외도 역시 크리스마스 날, 어느 가게 앞에서 그 불행한 사나이의 약혼과 그 남자에 게로 기대면서, 기쁘다고 말하던 쟌느의 모습이 머리에 떠올랐다. 머나먼 그 세월 속에서부 터 되살아난 것이었다. 분명히 그랬다. 리외는 울고 있는 그 노인이 방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도 그 노인과 마찬가지로, 사랑 없는 이 세계는 마치 죽 은 세계와 마찬가지며 언제고 반드시 감옥이며, 일이며, 용기 같은 것들에 지쳐서 한 인간의 얼굴과 애정에 황홀해진 마음을 요구할 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랑은 유리에 비친 리외를 보았다. 여전히 울면서 돌아서서 유리에 등을 기대고, 리외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아! 선생님, 아! 선생님." 그가 말했다. 리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슬픔은 리외 자신의 슬픔 이었고, 그때 그의 마음을 뒤틀고 있는 것은 모든 인간이 같이 나누고 있는 고통과 마주섰 을 때 인간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무한한 분노였다. "그렇습니다, 그랑." 그가 말했다. "그 여자에게 편지 쓸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잘 알도록... 그래서 후회없이 행복하게 살도 록..." 리외는 거의 강제로 그랑을 앞세우며 걸었다. 그랑은 끌려가듯이 걸어가면서 여전히 중얼 거렸다. "너무 오래 계속돼요. 될 대로 되라는 생각이 들어요. 할 수 없죠. 아! 선생님! 나는 이렇 게 침착해 보입니다. 그러나 다만 정상적이기 위해서만도 막대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힘이 듭니다." 그는 사지를 부들부들 떨면서, 미친 사람 같은 눈이 되어 말을 멈추었다. 리외는 그의 손 을 잡았다. 손이 화끈거렸다. "돌아가야지요." 그러나 그랑은 그에게서 도망쳐서 몇 발자국을 뛰어가더니 멈춰서서 두 팔을 벌리고 앞뒤 로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제자리에게 빙돌더니 차디찬 보도 위에 쓰러졌다. 얼굴은 여 전히 흘러내리는 눈물로 지저분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멀리서 바라보고는 멈춰 서서 감히 다가오지 못했다. 리외는 그 노인을 두 팔로 부축했다. 그랑은 그의 침대에 뉘어졌는데 호흡이 곤란했다. 페에 감염이 되었다. 리외는 생각에 잠 겨 있었다. 그랑에게는 가족이 없었다. 그를 이송해서 무엇하랴? 타루하고 둘이 돌보아주면 되겠지... 그랑은 살빛이 파리해지고 눈에서는 광채가 사라진 채, 베개에 머리를 푹 박고 있었다. 그 는 타루가 궤짝 부스러기로 벽난로에 지펴놓은 가느다란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나 빠지는군요." 그는 말했다. 그가 말을 할 때마다 폐 속에서 빠지직거리는 소리가 나곤 했다. 리외는 그에게 말을 하지 말도록 타이르고 자기는 가보겠다고 말했다. 야릇한 미소가 환자 의 얼굴에 떠오르더니 미소와 함께 일종의 애정이 드러나 보였다. 그는 가까스로 눈을 깜박 거렸다. "만약 내가 이 지경에서 벗어나면 감사를 드려야지요, 선생님!" 그러나 그 즉시로 그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리외와 타루가 서너 시간 후에 다시 와 보니, 환자는 침대에서 반쯤 몸을 일으키고 있었 다. 리외는 그의 얼굴에서 그의 몸을 불태우고 있는 병세의 진전을 보고 덜컥 겁이 났다. 그 러나 환자는 훨씬 정신이 또렷해져서, 그들에게 이상스럽게도 허전한 목소리로 서랍에 넣어 둔 원고를 갖다달라고 부탁했다. 타루가 그 종이 다발을 갖다주자, 그는 그것들을 보지도 않 고 꼭 껴안았다가, 그것들을 의사에게로 내밀면서 자기에게 읽어달라는 몸짓을 했다. 그것은 50여 페이지 남짓한 원고였다. 리외는 그것을 뒤적거려 보았는데, 그 종이 다발이 전부 동일 한 문장을 수없이 다시 베끼고 고치고 가필 또는 삭제한 것들이 적혀 있는 데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끊임없이 5월달이니, 승마의 여인이니, 숲의 지금길이니 하는 말들이 있고, 여 러 가지 방법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그 작품은 또한 여러 가지 설명이 적혀 있었다. 어떤 때 는 엄청나게 긴 것이 있는가 하면 고쳐 쓴 글들이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페이지 끝에는, 정 성 들인 글씨로 아직 잉크빛도 새롭게 '나의 사랑스러운 쟌느, 오늘은 크리스마스요...' 그 위 에 공들여서 새로 쓴 앞서 그 문장의 마지막 구절이 적혀 있었다. "읽어주세요."라고 그랑이 말했다. 그래서 리외는 그것을 읽었다. "5월의 어느 아름다운 아침에, 날씬한 승마의 여인이 눈부신 밤색 말에 타고, 꽃이 만발한 사이를 뚫고 숲의 지름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것이던가요?" 하고 열기를 띤 목소리로 노인은 말했다. 리외는 노인에게 시선을 들지 않았다. "아!" 노인은 흥분해서 말했다. "알겠어. 아름다운, 아름다운, 그것이 딱 들어맞지 않는 말 이로군." 리외는 이불 위에 놓인 그의 손을 잡았다. "놔 두세요, 선생님, 난 이제 시간이 없을 겁니다..." 그의 가슴이 가까스로 부풀어 오르더니, 그는 별안간 소리를 질렀다. "그것을 태워버리세요!" 의사는 망설였다. 그러나 그랑이 하도 무서운 말투로, 그리고 하도 괴로운 목소리로 그 명 령을 되풀이하는 바람에, 리외는 거의 꺼져 가는 불속에 그 종이들을 던졌다. 방안은 밝아지 고, 잠시나마 그 열이 방을 훈훈하게 만들었다. 의사가 환자에게로 돌아왔을 때, 환자는 등 을 돌리고 누워 있었는데, 그의 얼굴은 거의 벽에 닿을 지경이었다. 타루는 마치 그런 광경 과는 아랑곳 없다는 듯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리외는 혈청 주사를 끝낸 다음에 타루에 게 그랑이 밤을 넘기지 못하겠다고 말하자, 타루는 자기가 남아 있겠다고 자청했다. 의사는 승낙했다. 밤새도록 그랑이 죽으려고 하고 있다는 생각이 리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튿날 아침에, 리외는 그랑이 침대 위에서 일어나 앉아서 타루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 았다. 열은 내렸다. 그는 다만 전반적인 쇠약 증세를 보일 뿐이었다. "아! 선생님." 그가 말했다. "내 잘못이었어요. 하지만 다시 시작해야지요. 다 외고 있죠. 두고 보세요." "기다려봅시다." 리외가 타루에게 말했다. 그러나 정오 때가 되어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저녁때는 그랑은 살아났다고 보아도 괜 찮았다. 리외는 그 회생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거의 같은 시기에 리외에게 환자가 한 사람 왔는데, 리외는 그 환자의 병세는 절 망적이라고 보고, 오자마자 병원으로 격리시켜버렸다. 그 여자는 완전히 혼수상태였고, 페장 페스트의 모든 증세를 다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열이 내려버렸다. 의사는 그 때도 역시 그랑의 경우나 마찬가지로, 아침 나절의 병세 완화 현상이라고 생각했는데, 경험 에 의하면 그것은 나쁜 증세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낮이 되어도 열이 올라가지 않 았다. 저녁때 겨우 2, 3분 올라갔을 뿐이고, 이튿날 아침에는 열은 가셨다. 처녀는 쇠약하긴 했지만, 침대에 누워서 자유롭게 호흡을 하고 있었다. 리외는 타루에게, 그 여자는 모든 법 칙을 깨뜨리고 살아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주일 동안에 리외의 관할 구역에서 그와 같은 사례가 네 건이나 생겼다. 같은 주말에 그 늙은 천식 환자는, 몹시 흥분해서 리외와 타루를 맞이했다. "됐어요." 하고 그는 말했다. "그놈이 또 나와요." "누가요?" "아아니! 쥐말이죠!" 4월달 이후로 죽은 쥐는 한 마리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면 다시 시작된다는 것인가요?" 타루는 리외에게 말했다. 노인은 손을 비비고 있었다. "놈들이 뛰어 다니는 것을 보세요. 참 반갑군요." 그는 산 쥐 두 마리가 거리로 난 문으로부터 자기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이웃 사람들의 말로는, 그들 집에서도 그놈들이 다시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서까래 에서, 몇 달을 두고 잊었던 바스락 소리가 다시 들려오고 있었다. 리외는 매주 초에 실시되 는 총괄적 통계의 발표를 기다렸다. 통계는 병세의 후퇴를 표시하고 있었다. 5 그렇게 갑작스러운 병세의 후퇴가 비록 예기치 않았던 일이기는 했지만, 우리 시민들은 선뜻 기뻐하지를 않았다. 여태껏 치른 몇 달 동안이 해방에 대한 그들의 욕망을 증가시키기 는 했지만, 그들에게 조심성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었고, 질병이 쉽게 끝난다는 생각을 점점 덜하게 길들여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새로운 사실은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따 라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입밖에 내지는 않지만 커다란 희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나 머지 모든 일은 제 2차적인 것으로 되고 말았다. 페스트의 새 환자들은 그 어처구니없는 사 실 앞에서는 거의 중요성이 없었다. 통계 숫자가 내려가고 있었다. 건강의 시대가 공공연하 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은연중에 기다리고 있었던 태도 중의 하나는, 우리 시민들 이 그때부터는 비록 무관심한 태도이기는 했지만, 즐겨 페스트가 가고 난 후에는 생활을 어 떻게 다시 짜 나갈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했으니 말이다. 모든 사람들은, 과거의 생활의 온갖 편의는 대번에 회복될 수는 없으며, 파괴하기란 건설 보다 훨씬 쉽다는 생각에 거의 일치하고 있었다. 다만 사람들은 식량 보급만은 좀 개선될 것이며, 또 그렇게 되면 가장 긴박한 근심은 덜 수 있으리라고 보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러한 미온적인 고찰 아래에는 동시에 무지각한 희망이 전개되고 있었으며, 그것이 시민들 의 의식에도 간혹 떠오를 때가 있어서 그럴 때면 그들은 부랴부랴 아무리 생각해도 해방은 오늘 내일에 있을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 페스트는 오늘 내일로 끝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의당 사람들이 기 대해서 마땅할 만한 시기 보다는 더 빨리 약화되고 있었다. 1월 초순 동안은 추위가 보통 아니게 억척을 떨며 버티고 있어서, 시의 하늘 위에 그대로 얼어붙은 성싶었다. 그러면서도 그때만큼 하늘이 푸르렀던 적은 없었다. 며칠 동안을 두고 내내 싸늘하게 활짝 개인 찬란한 하늘에서 끊임없이 햇빛이 온 시에 넘쳐흘렀다. 페스트는 그 깨끗해진 대기 속에서 삼 주일 동안 계속적인 하강 상태에 있었다. 페스트가 만들어내고 있었던 시체 수가 점점 적어지면 서 쇠퇴해가는 듯싶었다. 페스트는 단시일간에, 수개월간 축적해놓았던 힘을 거의 전부 잃고 있었다. 그랑이나 리외가 돌보았던 그 처녀처럼 완전히 지명된 미끼를 놓쳐버린다든가, 또 어떤 동네에서는 2, 3일간 병세가 기를 쓰다가 완전히 사라진다든가, 월요일에는 희생자의 수를 부쩍 늘려 놓았다가 수요일에는 거의 환자 전부를 살려준다든가 하는 꼴을 보면, 마치 페스트는 피로와 싫증으로 맥이 풀려,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력과 동시에 그의 힘의 바탕이 었던 그 수학적이며 절대적인 유효성마저 상실하고 말았다고 할 수 있었다. 카스텔의 혈청 은 갑자기 여태껏 거둘 수 없었던 성공을 여러 차례 거두었다. 전에는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했던 의사들의 몇 가지 조치가 갑자기 확실한 효과를 올리는 성싶었다. 이번에는 페스트 가 몰리게 되고, 그것의 갑작스러운 약화가 여태껏 그것에 대해서 겨누어졌던 무딘 칼날에 힘을 준 것처럼 보였다. 가끔식 병세가 완강해져서, 일종의 맹목적인 반항으로 완쾌하리라고 기대되었던 환자를 3, 4명 앗아가곤 했을 뿐이다. 그들은 페스트에 운이 나쁜 사람, 희망이 가득찼을 때 살해당한 사람들이다. 격리 수용소에서 나온 오통 판사가 바로 그런 경우였는 데 타루는 그에 대해서 운이 나빴다고 말했지만, 그 말이 판사의 죽음을 생각해서 하는 말 인지, 판사가 살았을 때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서 감염은 각 분야에서 쇠퇴하고 혈청의 발표는 처음에는 은연중 에 작은 희망이나 줄 따름이었으나 마침내 사람들의 머릿속에 승리가 확보되고, 병은 그 진 지를 포기하고 말았다는 확신을 공고히 해주게까지 되었다. 사실 그것이 승리인지 무엇인지 는 결정 짓기가 어려웠다. 사람들은 다만, 병은 마치 들이닥쳤을 때처럼 사라지려는 것 같다 는 것을 확인하려 했다. 병에 대한 전략을 바꾼 것은 아니었다. 어제까지는 효과가 없었던 것이 오늘은 뚜렷이 효과를 나타냈다. 다만 병이 제풀에 쇠퇴해버렸거나, 아  제 목적을 전 부 달성했으니까 물러가는 것이려니 하는 인상을 가질 따름이었다. 말하자면 제구실을 다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내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고 말해도 좋았다. 낮에는 언제나 조용한 거리거리가 저녁때가 되면 늘 같은 군중, 이제는 다만 대부분이 코트와 숄을 걸친 군중들로 가득찼다. 영화관과 카페는 여전히 번잡했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보면 사람들의 얼굴에는 긴장이 풀리고, 간혹 웃음을 머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는, 여태까지 누구 한 사람 거리에서 웃는 이가 없었던 것을 확인하는 기회였다. 사실 몇 달 전부터 시를 에워싸고 있었던 투명치 못한 베일에 조그만 구멍이 나서, 사람들은 제각기 월요일마다 라 디오 보도를 통해서 그 구멍이 자꾸 커져가고 있으며, 결국에 가서는 숨을 쉴 수 있게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던 것이다. 그것은 아직 극히 부정적인 안도감이었는데, 솔 직하게 표현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전 같으면, 기차가 떠났다든지 배가 들어왔다든지 또 는 자동차의 운행이 다시 허가될 것 같다는 것을 어딘지 못 미더운 마음 없이는 들을 수 없 었을 것이다. 그러한 사실들이 1월 중순쯤에 보도되었더라면, 차라리 아무런 놀라움도 일으 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소한 뉘앙스는 사실상 시민들의 희망의 과정에 있어 서 굉장한 진전을 거두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가장 보잘것없는 희망이 나마 주민들에게 희망이란 것이 가능하게 된 그때부터는 페스트의 실질적인 지배는 끝났다 고 말할 수 있다. 1월 내내, 우리 시민들이 모순된 행동을 하고 있었다는 것도 거짓 아닌 사실이다. 정확히 말해서 그들은 흥분과 피곤의 교차점에 서 있었다. 그처럼 통계가 가장 긍정적인 결과를 보 여주고 있는 바로 그 무렵에, 새로운 몇 건의 탈주 계획이 기록에 오르는 일까지 생겼다. 그 것은 당국을 크게 놀라게 했음은 물론 감시소들까지도 놀라게 했다. 탈주의 대부분이 성공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시기에 탈주하는 사람들은 본능적인 감정대로 움직인 것 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페스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심각한 회의주의가 뿌리박혔다. 희망이라 는 것이 그들에게 뿌리를 내릴 수가 없었다. 페스트의 사태가 끝난 그때에도 그들은 여전히 페스트의 기준을 따라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사건에 뒤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특히 그때까지 자기네가 사랑하는 사람과 생이별을 당한 채 살아왔던 사람들 중 에서 많이 볼 수 있었는데 그들은 오랜 세월에 걸친 감금과 실망을 겪어온 끝에, 그렇게 일 어나는 희망의 바람이 어떤 열망과 초조에 불을 질러놓은 나머지, 그만 자기들의 모든 자제 력을 잃게 하고 말았던 것이다. 목표물을 그렇게 가까이에 두고 혹시 죽거나, 그리운 사람과 다시 못 만나게 되어, 그 오랜 고생이 아무 보람도 얻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 고 그들은 일종의 낭패감에 사로잡혔다. 몇 달 동안 암담한 심정으로 감옥과 귀양살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꾸준히 기다렸는데도, 최초의 희망은 공포나 절망이 깎아낼 수 없었던 것 을 능히 파괴해놓기에 충분했다. 그들 페스트의 걸음걸이를 끝까지 따라갈 수가 없어 그것 보다 앞서려고 미친 사람들처럼 서둘러댔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같은 시기에 낙관적인 징후가 몇 가지 나타났다. 그래서 물가의 현저한 하락 을 기록하게 되었던 것이다. 순수한 경제적 견지에서 보면 그러한 동태는 설명할 길이 없었 다. 곤란한 사정은 늘 같은 것이었고, 검역 절차는 시문에서 계속되고 있었으며, 식량 보급 이 개선되려면 아직도 까마득했다. 그러한 동향은 페스트의 쇠퇴가 도처에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듯한, 순전히 정신적인 현상이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전에는 집단생활을 하다가 질 병 때문에 떨어져 살게 되었던 사람들 사이에 낙관주의가 깃들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시내 의 두 개의 수도원들은 재건되기 시작했고, 공동 생활도 다시 할 수 있게 되었다. 군대의 경 우도 마찬가지로 텅 비어 있던 병사로 군인들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상적인 주둔 상태로 복귀한 것이다. 이러한 사소한 일들이 커다란 징후들이었다. 주민들은 그렇게 은근히 흥분 속에서 1월 25일까지 살았다. 그 주일에 통계는 몹시 낮아 졌으므로, 도청은 의사회의의 자문을 거쳐서 질병은 퇴치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발표 했다. 발표문에서 덧붙여 말하기를 반드시 시민의 찬동을 얻으리라고 기대되는 신중한 취지 에서, 시문은 향후 이 주일간 폐쇄 상태를 유지할 것이며 예방 조치는 1개월간 유지될 것인 데 그 기간중에 위험이 재발할 듯한 징후가 조금이라도 보일 경우에는 현상유지는 계속될 것이며, 조치들은 소급해서 강화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그 추가 발표문을 형식적인 항목으로 생각하는 데 의견들이 일치했다. 그래서 1월 25일 저녁에는 기쁨이 넘친 흥분이 시가를 가득 채웠다. 지사는 일반적인 기쁨에 협력하기 위해서 건강 지대에 등화관 제를 철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우리 시민들은 차고 맑은 하늘 아래에서 불이 켜진 거리거 리에 떼를 지어 요란스럽게 웃으면서 흩어져 나왔다. 물론 많은 집들은 덧문을 닫은 채로 놓아두었고, 다른 사람들의 외침 소리가 밤새도록 가 득 찬 소란 속에서 고요히 지낸 가족들도 있었다. 그러나 상중에 있는 사람들이나 다른 가 족이 목숨을 빼앗기는 것을 보는 두려움은 마침내 사라졌다는 것과 자기 자신의 몸보전이라 는 감정이 이제 위기를 면하게 되었다는 것들에 안도감은 역시 뿌리깊은 것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기쁨과는 무관한 가족들도 있었는데 그것은 논의할 여지도 없이 바로 그 순간에 병원에서 페스트와 싸우고 있는 가족이나 또 에방 격리소나 자기 집에서, 재난이 다른 사람 들에게서 손을 뗀 것과 같이 자기들에게서 정말 재난이 떠나버리기를 바라고 있었던 가족들 이었다. 그 가족들도 확실히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들은 그것을 예 비로 간직해두었고, 정말 그 권리를 얻게 될 때까지는 그것을 끌어내기를 스스로 금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뇌와 기쁨의 중간 거리에서 그러한 기대를 하고 그렇게 묵묵히 밤을 밝히 자니 모두들 기뻐하는 그 속에서 더욱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예외들이 다른 사람들의 만족에서 그 어떤 것도 앗아간 것은 없었다. 페스 트는 아직 끝나지는 않은 것 같다. 페스트가 끝났다는 증거가 나타나야만 했다. 그러나 이미 모든 사람들의 머릿 속에서는, 이미 몇 주일 전에 끝없이 철로 위로 기적 소리를 내면서 기 차가 지나가고, 햇빛으로 반짝이는 바다 위로 배가 출렁거리면서 항해하고 있었다. 이튿날에 는 사람들의 마음은 진정될 것이고 의혹이 되살아날 것이었다. 그러나 당장에는, 도시 전체 가 돌로 뿌리를 박고 서 있던 어둡고 움직이지 않고 꽉 잠겨 있는 장소에서 흔들리더니 생 존자를 싣고 전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날 저녁, 타루와 리외도, 랑베르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군중 틈에 섞여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들 역시 땅에 발이 닿지 않는 것 같은 기 분을 느꼈다. 신작로에서 벗어난 지 오래 되었는데, 타루와 리외는 아직도 그 기쁨의 소리가 그들 뒤를 따라오고 있는 것을 들었고, 심지어는 쓸쓸한 거리에서 덧문이 닫힌 창문들을 따 라 걸어가고 있을 때에도 그 소리는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너무 피로해서, 그 덧 문들 뒤에서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그 괴로움을, 좀 멀기는 하지만 거리거리를 메우고 있는 기쁨과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었다. 다가오고 있는 해방은 웃음과 눈물이 뒤섞인 모습을 하 고 있었다. 웅성대는 소리가 더 크고 즐겁게 들리자 타루가 걸음을 멈추었다. 어둠침침한 보도 위에 어떤 물체 하나가 가볍게 달음질쳤다. 고양이였다. 지난 봄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고 양이는 잠시 동안 길 한복판에 서서 망설이다가, 한쪽 발을 딛고 그 발로 제빨리 제 오른쪽 귀를 문지르고는, 조용히 다시 달음질쳐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타루는 웃었다. 그 작달 막한 노인도 역시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페스트가 말없이 그것이 나왔던 알 수 없는 야수의 굴로 다시 기어들어갈 무렵, 시내에 적어도 한 사람만은 그 퇴각에 당황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타루의 수첩에 적힌 사실 을 믿는다면 그것은 코타르였다. 사실을 말하면, 그 수첩은 통계 숫자가 하강하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매우 이상하게 되어 가고 있다. 피로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수첩에 쓰인 글씨가 엉망으로 적혀 있었고, 화 제가 너무나 빈번히 이리저리 비약되어 있다. 게다가, 처음으로 그 수첩은 객관성이 결여되 고 개인적인 관찰이 주입되어 있다. 그래서 코타르의 경우에 관한 상당히 긴 대목 도중에, 그 고양이와 희롱하는 늙은이에 대한 짧은 보고가 섞여 있다. 타루의 말을 믿는다면, 페스트 는 그 늙은이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을 조금도 앗아가지는 못했으며, 질병이 생긴 후에도, 그 전에 그의 흥미를 끌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로 흥미를 끌고 있던 인물이며, 또 타루 자신 이 호의 그 자체가 원인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불행하게도 더 이상은 흥미를 끌 수 없게 된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다시 그 노인을 보려고 했었으니 말이다. 그 1월 25일 저녁 며칠 후 에, 그는 그 좁은 길의 한모퉁이에 자리잡고 서 있었다. 고양이들은 약속을 충실히 지켜 그 곳에 모여서 따뜻한 햇볕에 몸을 쬐고 있었다. 그러나 여느 때의 그 시간이 되어도 덧문들 은 굳게 닫힌 채로 있었다. 타루는 그 후 며칠이 지나도 결코 그것이 열린 것을 보지 못했 다. 그는 호기심에 가득 찬 결론을 내려, 그 노인이 배알이 꼴렸거나 죽었거나 한 것이며, 만약 배알이 꼴렸다면, 그것은 노인이 자기가 옳은데 페스트가 못된 짓을 한 것이라고 생각 한 것이겠고, 만약 죽었다면 그 노인에 관해서도 천식병 노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가 과 연 성인이었던가 어떠했던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적어놓았다. 타루는 그 노인을 성인 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노인의 경우에는 그 어떤 '깨우침'이라는 것이 있다 고 평가하고 있었다. 그 수첩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마도 우리는 성덕 가까이까지밖 에는 갈 수 없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겸손하고 자비스러운 어떤 악마주의에 만족해야만 할 것이다.> 여전히 코타르에 관한 관찰 가운데, 수첩에는 또한 흔히 분산되어 있는 수많은 관찰이 발 견되는데, 그중의 어떤 것들은 의사 리외의 어머니를 묘사한 것들이다. 한 집에 살고 있었던 관계로 리외 어머니와 타루간에 있었던 얼마간의 대화와 그 늙은 부인의 태도, 미소, 페스트 에 대한 관찰들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타루는 특히 리외 어머니의 양순함, 모든 것을 단 순한 말로 표현하는 그 솜씨, 고요한 거리로 난 창문을 특히 좋아해서 저녁때가 되면 그 창 앞에서 약간 몸을 펴고 두 손을 가만히 놓고 주의 깊은 시선으로, 황혼이 방안으로 스며들 어 부인의 자태를 잿빛 광선 속에서 하나의 검은 그림자로 만들고, 그 잿빛의 광선이 차차 짙어져서 그 움직이지 않는 그림자를 녹여버릴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 방에서 방으 로 갈 때의 날쌘 동작, 타루 앞에서는 한 번도 분명한 증거를 나타낸 적이 없기는 하나, 부 인의 행동이나 언사에서 그런 빛을 구분할 수 있는 선량함, 끝으로 타루에 의하면, 부인은 언제나 생각하지 않고서도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며, 그처럼 고요하게 어둠 속에서 묻혀 있으면서도 그 어떤 광선, 심지어는 그것이 페스트의 광선이었더라도, 다 어깨를 겨누어 나 갈 수 있는 사실 같은 것을 특히 강조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타루의 글씨는 꺾인 듯한 이상한 증세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 뒤에 계속되는 몇 줄을 읽기가 어려웠고, 또 그 꺾인 듯 한 사실의 새로운 증거를 제시하기 위해서 그 마지막 말들은 처음으로 개인적인 것들이었 다. <내 어머니가 역시 그러했다. 나는 바로 그런 어머니의 양순함을 좋아했고, 어머니야말 로 내가 늘 한편이 되고 싶었던 그런 여자였다. 8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할 수는 없다. 그저 여느 때보다 더 눈에 안 띄게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내가 뒤를 돌아다보았을 때 어머니는 이미 거기에 안 계셨다.> 그러나 코타르 이야기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코타르는 통계숫자가 하강하기 시작한 후로, 이 핑계 저 핑계를 해가며 리외를 여러 차례 방문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는 리외에게 질병 진행의 예상을 알아보았다. "그래 이렇게 갑자기, 아무 예고도 없이 질병이 끝날 것 같습니 까?" 그는 그 점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다. 적어도 그는 회의적이라고 공언했다. 그러나 자꾸 되풀이해서 물어보는 것이, 그다지 확신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 같았다. 1월 중순에는 리외 는 상당히 낙관적인 태도로 대답을 했다. 그런데 번번이 그 대답들이 코타르를 기쁘게 해주 기는커녕, 여러 가지 반응을 일으켰는데 때에 따라서 다르기는 하지만 기분 나빠하거나 실 망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 후에는, 의사가 그에게 통계에 나타난 환영할 만한 증세에도 불구 하고 아직 승리를 외치거나 할 단계는 못된다고 말하게끔 되었다. "다시 말하면." 코타르가 말했다. "알 수 없다는 것인가요? 오늘 내일로 다시 터질 수도 있다는 말씀이군요?" "네, 퇴치될 가능성이 있듯이 말이죠." 모든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는 그 불확실성이 분명히 코타르의 마음을 풀어주었다. 그래 서 타루는 그가 보는 데서, 자기 동네의 상인들에게 리외의 의견을 널리 선전하려고 애썼다. 사실 그것은 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초기의 승리의 열광이 사라지자 많은 사 람들의 머릿속에는 의심이 되살아나서, 도청의 발표로 흥분된 마음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 기 때문이었다. 코타르는 그러한 불안을 보고서 안심했다. 또 전처럼 낙심도 했었다. "그러 문요." 그는 타루에게 말했다. "결국은 시문이 열리고 말테죠. 그러면 두고 보세요, 나같은 건 모두들 녹게 내버려 둘 겁니다." 1월 25일까지는 사람들은 그의 정신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며칠을 두고 그렇게도 오랫동안 동네 사람들이며 친지들과 타협을 하려고 애써 오던 그가, 완전히 그들 과 사이가 틀어지고 말았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 당시 그는 이 세상과 아주 절연된 듯 싶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야만인처럼 생활하기 시작했다. 다시는 그를 식당에서도, 극장에서 도, 그가 좋아했던 카페에서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그는 질병이 유행하기 전의 절제있고 오붓한 생활로 되돌아갈 수 없는 성싶었다. 그는 자기 아파트에 완전히 틀어 박혀 살고 있었는데 식사는 근처 식당에서 시켜다 먹곤 했다. 다만 저녁때면, 그는 숨어다니 듯이 외출을 해서, 필요한 물건들을 사 가지고는 가게에서 나와 사람 없는 거리로 뛰어들어 가곤 했다. 타루가 그를 만났지만, 그는 한두 마디밖에는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사 교적이 되어 페스트에 관해서 수다를 떨고, 남의 의견에 장단을 맞추고, 저녁마다 상냥스럽 게 군중들 틈에 끼여서 휩쓸려 다니는 그를 볼 수 있었다. 도청의 발표가 있던 날, 코타르는 완전히 행방을 감추었다. 타루는 이틀 후에, 거리를 헤매고 있는 그를 만났다. 코타르는 그 에게 교외까지 같이 가달라고 부탁했다. 특별히 그날 낮에 피로했던 타루는 어물어물했다. 그러나 코타르는 졸라댔다. 그는 몹시 흥분했던지 허둥지둥 몸짓을 해가며 큰소리로 떠들어 댔다. 그는 타루에게, 정말 도청의 발표가 페스트의 종말을 짓는 것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 었다. 물론 타루는 행정적이 발표 그 자체게 재난을 멈추게 하는 데 충분하지는 않다고 생 각하지만, 그래도 불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질병이 끝나간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렇죠." 코타르가 말했다. "불의의 경우를 제외하고 그렇죠. 그런데 불의의 경우는 언제 나 있는 법이죠." 타루는 그뿐 아니라 시문 개방까지 두 주일간의 기간을 둠으로써 도에서도 어느 정도 불 의의 경우에 대비하고 있다는 점을 일깨워주었다. "참 잘했어요." 여전히 우울하고 흥분한 어조로 코타르가 말했다. "다 되어가는 꼴들이 헛 탕으로 그칠 것 같으니 말입니다." 타루는 그럴 수도 있다고 보고 있었지만, 역시 머지않아서 열릴 시문과 정상적인 생활로 의 복귀를 생각해두는 것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두죠." 코타르가 말했다. "그러나 정상적인 생활로의 복귀란 무엇을 의미하시 는지요?" "영화관에 새 필름이 오는 것입니다." 웃으면서 타루가 말했다. 그러나 코타르는 웃지 않았다. 그는 페스트가 그 도시에 아무 변화도 일으키지 않을 것이 며, 모든 것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시작될 수 있을지를 알고 싶어했다. 타루는 페 스트가 그 도시를 변화시킬 수도 있고 시키지 않을 수도 있으며, 물론 시민들의 가장 강한 욕망은 현재도, 또 앞으로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 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생가지 않을 테지만,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비록 충분한 의지를 갖고 서라도 모든 것을 잊을 수는 없는 일이며, 페스트는 적어도 사람들의 마음속에라도 그 흔적 을 남길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 키가 작은 연금 생활자는 분명히 잘라 말하기를, 자기는 마음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으며, 근심거리 중에서는 마음 걱정은 맨 마지막 근심이 라고 말했다. 자기가 관심이 있는 것은, 혹시 조직 자체가 변화하지 않을 것인가 또는 예를 들어서, 모든 기관이 과거와 같은 기능을 발휘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라고 했다. 그래 서 타루는 거기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했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질병 기간중에 엉 망이 된 그러한 기관들이 다시 움직이려면 애로가 많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새로운 문제들 이 수없이 생김으로써 적어도 옛날 기관들의 재편성이 필요해질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고 말했다. "아!" 하고 코타르가 말했다. "그럴 수가 있겠군요. 사실, 모두들 일을 다시 시작해야 되겠 죠." 그 두 산책객은 코타르의 집 앞까지 다다랐다. 코타르는 신바람이 나서 낙관적인 생각을 하려고 애썼다. 그는 무에서 출발하기 위해서 과거를 청산하고, 다시 새로 시작하는 도시를 상상하고 있었다. "그럼요." 타루가 말했다. "어쨌든 당신 형편도 잘 될거예요. 어떤 의미로는 새생활이 시 작되는 것이니까요." 그들은 문 앞까지 와서 악수를 했다. "옳은 말씀입니다." 코타르는 점점 더 흥분해서 그렇게 말했다. "무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죠." 그런데 복도의 어두운 곳에서 두 남자가 나타났다. 타루는 자기 곁에 있는 사람이, 저 작 자들이 뭣 때문에 왔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겨를도 없었다. 사복을 한 관리들 처럼 보이는 그 작자들은, 과연 코다르에게 당신이 틀림없이 코타르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코타르는 일종의 무딘 고함을 지르면서 몸을 홱 돌려, 그 자들이나 타루가 그야말로 꼼짝할 틈도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놀라움이 가라앉자, 타루는 그 두 남자에게 왜 그러느 냐고 물었다. 그들은 공손하고 친절한 태도로 조사할 일이 있어서 그런다고 말하고 태연스 럽게 코타르가 간 방향으로 걸어갔다. 집에 돌아와서 그 장면을 적어놓고는, 곧(글씨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자기의 피로감 을 기록해두었다. 그는 덧붙여서 자기는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그렇다고 해서 마음의 준비 없이 지내는 것은 옳지 못하다가 쓴 다음, 과연 자기에게는 정말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가를 자문했다. 맨 끝으로 그는 인간이 비겁해지는 시각이 낮이거나 밤이거나 늘 한때 있는 법이며 자기가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 시각이라고 대답해놓고는, 그것으로 타루의 수첩은 끝나 있었다. 그 다음날, 시문들이 열리기 며칠 전에 의사 리외는 기다리는 전보가 와 있지나 않을까 해서 정오쯤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매일매일이 역시 페스트가 맹위를 떨치던 때나 마찬 가지로 고단했지만, 결정적인 해방의 기대가 그의 피로감을 쫓아버렸다. 이제 그는 희망을 품고 있었고, 또 희망을 품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항상 마음을 긴장시키고 굳어진 채 살 수 는 없는 법이다. 투쟁을 위해서 엮어놓았던 힘을 솟아오르는 감정 속에서 마침내 풀어간다 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만약 고대하던 전보가 역시 반가운 것이라면, 리외는 새출발 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모두들 새출발을 해야 된다는 의견이었다. 그는 수위 실 앞을 지나갔다. 새로 온 수위가 유리창에 얼굴을 바싹 대고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리외 는 계단을 올라가면서 피로와 가난으로 파리해진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렇다, 그 추상이 끝나면 새출발을 할 것이다. 그리고 조금만 재수가 좋으면... 그러나 마 침 그때 그는 자기 방문을 열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그를 마중 나와서 타루가 앓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났으나 외출할 수가 없어 지금 막 누웠다는 것이었다. 리외 어머니 는 불안해했다. "아마 대단한 것은 아니겠죠." 아들이 말했다. 타루는 다리를 쭉 뻗고 누워 있었다. 그의 머리는 베개 속에 푹 파묻히고, 튼튼한 가슴이 두꺼운 이불 밑에 드러나 보였다. 열이 있었고, 머리가 아파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는 리 외에게 증세가 확실치는 않지만 페스트 증세 같기도 하다고 말했다. "아니, 아직 뚜렷한 것이 없어요." 그를 진찰하고 나서 리외가 말했다. 그러나 타루는 갈증으로 괴로워했다. 복도에서 의사는 어머니에게 아마도 페스트의 시초 같다고 말했다. "오!" 어머니는 말했다. "그럴 리가, 지금 와서!" 그리고 곧 이어서 말했다. "그냥 집에서 간호하자." 리외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저는 그럴 권리가 없어요." 그가 말했다. "그렇지만 시문도 개방될 것입니다. 아마 이것 이 처음으로 제가 저를 위해서 행사하는 권리일거예요, 어머니만 안 계시다면요." "베르나르야." 어머니가 말했다. "우리 둘 다 집에 있게 해주렴. 예방 주사 맞은 지도 얼 마 안 되는데." 의사는 - 타루도 그랬지만 - 아마 피곤했기 때문에 자기가 마지막 혈청 주사를 빼먹었고, 몇 가지 주의를 잊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리외는 이미 자기의 진료실에 가 있었다. 그가 방으로 돌아왔을 때, 타루는 그가 혈청의 커다란 앰플을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 역시 그랬군요." 그가 말했다. "아니오, 어쨌든 예방삼아서 하는거예요." 타루는 대답 대신에 말없이 팔을 내밀었고, 자기가 다른 환자들에게 놓아준 일이 있던 그 기다란 주사를 맞았다. "오늘 저녁때 봅시다." 리외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타루를 정면으로 보았다. "격리는 어떻게 하나요, 리외?" "페스트인지 아닌지도 전혀 확실치 않은걸요." 타루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혈청 주사를 놓아주면서 격리지시를 내리지 않는 것은 처음 봤는데요." 리외는 얼굴을 돌렸다. "어머니하고 내가 간호하겠어요. 여기가 더 나을 겁니다." 타루가 입을 다물었다. 앰플을 정리하고 있던 의사는, 그가 무슨 말을 꺼내기만 하면 돌아 서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침대 쪽으로 갔다. 환자는 그를 보고 있었다. 환자의 얼굴은 피곤해 보였으나 그의 잿빛 두 눈은 침착했다. 리외가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될 수 있으면 잠을 자 두세요. 곧 돌아올테니." 문 앞에까지 왔을 때 타루가 그를 불렀다. 그는 타루 쪽을 보았다. 그러나 타루는 하려던 말을 할까말까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았다. "리외" 마침내 그느 또박또박 말을 꺼냈다. "사실대로 말해주세요. 그럴 필요가 있어요." "약속하죠." 타루는 그 두툼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싸워보겠어요. 그러나 지는 판이면 깨끗하게 최후를 장식하고 싶습니다." 리외는 머리를 숙이고 어깨를 잡았다. "아닙니다." 리외가 말했다. "성자가 되려면 살아야 살아야 하죠. 싸우십시오." 낮의 혹독했던 추위는 좀 풀렸지만, 그 대신 오후에는 우박이 섞인 소나기가 억세게 퍼부 었다. 저녁때에는 하늘이 좀 개인 듯하더니 추위는 더 뼈에 저리게 심해졌다. 리외는 어두워 서야 집에 돌아왔다. 그는 코트도 벗지 않고 친구 방으로 들어갔다. 리외 어머니는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타루는 꼼짝달싹도 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열 때문에 허옇게 된 그의 입술이 그가 아직도 계속해서 병과 싸우고 있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어때요?" 의사가 물었다. 타루는 침대 밖으로 그 두툼한 어깨를 약간 드러냈다. "그런데." 그는 말했다. "내가 지겠는데요." 의사는 그에게로 몸을 굽혔다. 끓는 듯이 뜨거운 피부 밑에서 림프샘들이 비비꼬이고 있 었고, 그의 가슴은 숨어 있는 대장간에서 쇳소리가 나듯 온갖 소리를 내고 있었다. 타루는 이상하게도 두 갈래의 증세를 나타내고 있었다. 리외는 일어서면서 혈청이 아직 효험을 나 타낼 겨를이 없었다고 말했다. 타루는 뭐라고 몇 마디 하려고 했으나 그의 목구멍에서 솟아 오르는 열이 그의 말을 삼켜버렸다. 리외와 그의 어머니는 저녁을 먹고 나서 환자 곁에 와서 앉았다. 타루에게 밤은 싸움 속 에서 시작되었고, 리외는 페스트와의 그 고달픈 투쟁이 새벽녘까지 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타루의 건강한 두 어깨와 넓은 가슴은 그의 최선의 무기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차라 리 아까 리외가 바늘 끝으로 뽑아냈던 그 피, 그리고 그 핏속의 영혼 보다도 더 내면적인, 어떤 과학의 힘으로도 밝힐 수 없는 그것이야말로 최선의 무기였다. 그리고 그로서는 자기 친구가 싸우고 있는 것을 그저 보고만 있어야 했다. 그가 해보려고 하는 일, 가령 화농을 촉 진시켜야 한다든가 강심제를 주사해야 한다든가 하는 일은 몇 달을 두고 실패를 거듭했기 때문에 그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그는 알고 있었다. 사실상 그의 유일한 임무란, 너무나도 흔히 일어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요행의 기회를 만들어주는 일이었다. 그 요행이라는 것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리외는 자기를 당황하게 만드는 페스트와 맞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페스트는 자기에 대항해서 세워진 전략들을 곯려주기 위해서 열중하고 있었으며, 예 기치 않았던 곳에 나타나는가 하면, 벌써 뿌리를 내린 듯싶었던 장소에서 사라져버리는 것 이었다. 한 번 더 페스트는 사람을 놀라게 하려고 열중하고 있었다. 타루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페스트와 싸우고 있었다. 밤새도록 단 한 번도 고통의 엄습에 동요하지 않고, 다만 그 육중한 몸과 철저한 침묵으로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말 을 안했고, 말하자면 그의 독특한 방법으로 더 이상 다른 데다가 방심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리외는 싸움의 경과를 다만 친구의 눈으로밖에 더듬어 볼 수가 없었다. 떴 다 감았다 하는 그 눈, 눈망울에 찰싹 달라붙는가 하면, 반대로 축 늘어지곤 하는 눈시울, 그 무엇을 보다가 리외와 그의 어머니에게로 옮겨지는 시선 같은 것으로 말이다. 의사가 그 시선과 마주칠 때마다 타루는 억지로 웃으려고 애썼다. 한순간 거리에서 급히 뛰어가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발자국 소리는 마치 멀리서 들려오 는 윙윙 소리에 쫓기는 것 같더니, 그 윙윙 소리는 차츰차츰 가까워져서 마침내 좍좍 쏟아 지는 소리가 거리에 가득 찼다. 비가 또 오기 시작했던 것이며, 이내 우박이 섞여서 포도 위 에 따다닥 소리를 내며 쏟아졌다. 창문 앞에서 커다란 휘장들이 물결치듯 휘날렸다. 방안의 그늘에서 비에 잠시 정신이 팔렸던 리외는, 침대 테이블에 놓인 전등 불빛에 비치는 타루를 다시 살펴보았다. 리외의 어머니는 뜨개질을 하면서 때때로 고개를 들어 유심히 환자를 보 았다. 의사는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보았다. 비가 멈추자 방안의 침묵은 더욱 짙어가 고, 단지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의 말없는 소음만이 더해가고 있었다. 수면 부족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의사는, 그 침묵의 한계선에서 질병 유행중 내내 그를 따라다녔던 그 부드럽고 규칙적인 색색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눈짓을 하고 눕도록 권했다. 어머니는 고갯짓으로 괜찮다고 했다. 그러고는 어머니는 눈을 빛내더니 바늘 끝으로 뜨개질 코를 조심스럽게 헤아렸다. 리외는 일어서서 환자에게 물을 먹이고 돌아와서 앉았다. 행인들은 비가 그친 틈을 타서, 바삐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발걸음 소리가 줄어 들더니 멀어져 갔다. 의사는 처음으로 밤늦게까지 산책객들이 가득 차고, 앰뷸런스의 고동 소리가 들리지 않는 그 밤이 옛날의 밤과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페스트에서 해방 된 밤이었다. 그리고 추위와 광선과 그리고 군중에게 쫓긴 질병이 시내의 어둡고 으슥한 곳 에서 빠져나와 그 따뜻한 방안을 피해서 타루의 맥 없는 몸에 최종적인 공격을 하려는 것 같았다. 재난은 더 이상 그 도시의 하늘에 달라붙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방안의 무거운 공 기 속에서 조용히 색색거리고 있었다. 리외가 몇 시간 전부터 듣고 있던 그것이 바로 그 소 리였다. 거기서도 페스트가 멈추고, 거기에서 페스트가 패배를 선언하는 것을 기다려야만 했 다. 리외는 동이 트기 조금 전에 어머니에게 몸을 굽히면서 말했다. "8시에 저하고 교대하시게 어머님은 주무셔야죠. 주무시기 전에 소독을 하세요." 리외 어머니는 일어나서 뜨개질하던 것을 챙기고 침대 쪽으로 가까이 갔다. 타루는 벌써 얼마 전부터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단단한 이마 위에는 땀이 흘러서 머리털이 엉겨붙어 있 었다. 리외 어머니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환자는 눈을 떴다. 부드러운 얼굴이 자기를 굽 어보고 있는 것을 보고, 물결치듯 넘치는 열에 시달리면서도 미소가 다시 그 얼굴에 떠올랐 다. 그러나 눈이 이내 감기고 말았다. 리외는 혼자 남게 되자, 방금 어머니가 앉아 있었던 안락의자에 가서 앉았다. 거리는 잠잠했고 절벽 같은 침묵이 가득 차 있었다. 아침의 싸늘한 기운이 방안에 감돌기 시작하고 있었다. 의사는 깜박 잠이 들었다. 그러나 새벽의 첫 자동차 소리가 그를 잠에서 끌어냈다. 그는 소스라쳐 놀라 타루를 보았다. 병세가 좀 가라앉았는지 환자는 잠자코 있었다. 마차의 나무 와 쇠로 된 바퀴는, 아직 멀리서 구르고 있었다. 창밖에는 아직도 밤의 어둠이 남아 있었다. 타루는 의사가 침대 가까이 갔을 때, 무표정한 눈으로 마치 잠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은 듯 그를 보고 있었다. "잠이 들었었죠, 그렇죠?" 리외가 물었다. "네." "숨쉬는 것은 좀 편하세요?" "네 좀.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리외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잠시 후에 말했다. "아뇨, 타루, 아무 의미도 없죠. 아침의 병세 완화를 나만큼 잘 알고 계시잖아요." 타루가 끄덕거렸다. "고맙습니다." 그는 말했다. "그래도 정확히 말해주세요." 리외는 침대 발치에 앉아 있었다. 그는 바로 곁에서 죽은 사람처럼 길고 딱딱해진 환자의 다리를 느꼈다. 타루의 숨소리는 더 거칠어졌다. "열이 또 나는 모양이에요, 그렇죠, 리외?" 그는 숨가쁜 목소리로 말했다. "네, 그러나 정오쯤에는 결말이 나겠죠." 타루는 눈을 감았다. 자기의 힘을 가다듬는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 피로의 표정이 뚜렷이 나타났다. 그의 몸 깊숙한 어느 곳에서, 이미 꿈틀거리기 시작한 열이 오르기를 그는 기다리 고 있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그의 시선은 흐리멍텅했다. 자기 곁에 구부리고 있는 리외를 보고서야 겨우 생기가 돌았다. "물을 마셔요." 리외가 말했다. 그는 물을 마시고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지루하군요." 그는 말했다. 리외가 그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타루는 시선을 돌리고 더 이상 아무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자 갑자기 내부에 있는 무슨 둑이라도 무너진 듯이, 그의 이마에까지 열이 퍼져 올랐다. 타루의 시선이 의사에게로 돌아왔을 때, 의사는 긴장한 얼굴로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 다. 타루도 또 웃어 보이려고 애를 썼으나, 웃음은 딱 붙은 턱과 뿌우연 거품으로 범벅한 듯 한 입술 아래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굳어진 얼굴에서도 두 눈은 온통 용기로 빛나 고 있었다. 리외 어머니가 7시에 방안에 들어왔다. 의사는 자기 사무실로 나와서 병원에 전화를 걸고, 자기의 대리 근무자를 부탁했다. 그는 또 자기의 진찰은 연기하기로 하고, 자기 진찰실의 긴 의자 뒤에 잠시 드러누웠다. 그러나 이내 그는 일어나서 그 방으로 돌아왔다. 타루는 리외 어머니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는 자기 의자에 앉아서, 두 손을 무릎에 얹고 있는 조그마한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하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부인은 입술에 손 가락을 대고 일어나서 머리맡의 전등을 껐다. 그러나 커튼 뒤에서 햇살이 급속도로 스며들 기 시작했고, 그리고 잠시 후에 환자의 얼굴 모습이 어둠 속에서 떠올랐을 때, 부인은 환자 가 여전히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리외 어머니는 그에게로 몸을 굽혀 베개를 고쳐주고, 일어서면서 축축하고 꼬인 그의 머리카락 위에 잠시 손을 얹었다. 그때 리외 어머 니는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자기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이제 모든 것이 잘됐다고 말하 는 소리를 들었다. 다시 리외 어머니가 앉았을 때, 타루는 눈을 감고 있었는데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으면서도 그 기진맥진한 얼굴은 다시 웃음을 띤 것처럼 보였다. 정오때 열은 절정에 달했다. 일종의 내장성 기침이 환자의 몸을 흔들어, 환자는 피를 토하 기 시작했다. 림프샘은 더 이상 부어오르지 않았다. 여전히 관절의 오금마다 나사처럼 박혀 서, 리외는 절개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단정했다. 타루는 열과 기침에 시달리면서도 아직도 간간이 자기의 친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윽고 눈을 뜨는 횟수가 적어졌다. 그리고 그때 엉망이 된 그의 얼굴을 햇빛이 비출 때마다 더 창백해졌다. 경련이 몸을 뒤흔들어놓는 그 폭풍에는 불꽃의 발산이 점점 드물어가고, 타루는 그 폭풍우 속으로 서서히 표류해가고 있 었다. 리외 앞에는 이미 웃음을 잃고, 벌써 무기력한 하나의 얼굴밖에는 없었다. 그에게 그 렇게도 친근했던 그 인간의 모습이, 지금 창 끝으로 찔려 초인간적인 악으로 불살라져, 하늘 에서 오는 증오에 찬 온갖 바람에 시달려 자기 눈앞에서 페스트의 물결 속에 빠져들고 있었 고, 그 난파에 대해서 그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빈 손과 뒤틀리는 마음으로 무기도 의지도 없이, 강가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는 정말 무력함을 한탄하는 눈물이 앞을 가려, 리외는 타루가 갑자기 벽 쪽으로 돌아누워 마치 몸 한구석에서 가장 긴요한 어떤 줄이 하나 끊어지거나 한 것처럼 힘 없는 비명을 울 리며 숨을 모으는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후의 밤은 투쟁이 아니라 침묵의 밤이었다. 세계에서 단절된 그 방에서 이제는 옷을 가지런히 입은 시체 위에서 리외는 벌써 여러 날 밤 전에, 페스트가 아래에서 서성대는 테 라스 위에서, 시문 습격에 뒤이어서 생겼던 그 정적이 떠도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때에도 이미 죽게 내버려두고 온 사람들의 침대에서 들려오는 그 침묵을 생각했다. 그것은 어디서 나 똑같은 휴식이었으며, 똑같이 장엄한 소리였고, 전투 끝에 언제나 오는 똑같은 진정 상태 였다. 그것은 패배의 침묵이었다. 그러나 당장 자기 친구를 둘러싸고 있는 침묵으로 말하면, 그것은 하도 진하고 페스트에서 해방된 시기와 거리들의 침묵과 그렇게도 긴밀하게 일치하 고 있었기 때문에 리외는, 정말 이번에는 결정적인 패배, 전쟁을 종식시키고 또한 평화 그 자체를 고칠 길 없는 고통으로 만드는 그 패배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결국에는 타루가 평화를 다시 발견했는지 어떤지를 의사는 몰랐다. 그러나 적어도 그때, 그는 자기 자신에게 는 결코 평화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 또 아들을 빼앗긴 어머니라든가, 친구의 시체를 묻어본 사람에게 있어서 휴전이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밖은 여전히 추운 밤이었고 맑고 찬 하늘에는 별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어둠침침한 방 에서 유리창을 얼리는 추위와, 북극의 밤에서부터 오는 창백한 거대한 호흡을 느낄 수 있었 다. 침대 곁에는 리외 어머니가 늘 낯익은 그 자세로 오른쪽 머리맡에 놓인 전등의 불빛을 받아가면서 앉아 있었다. 리외는 불빛에서 멀리 떨어진 방 한가운데 놓인 안락의자에 앉아 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번번이 그 생각을 뿌리치곤 했다. 저녁이 되자 통행인들의 발자국 소리가 추운 밤에 역력히 울렸다. "할 일을 다 했니?" 리외 어머니가 물었다. "네, 전화를 걸었어요." 그래서 두 사람은 다시 조용히 밤샘을 시작했다. 리외 어머니는 이따금 자기 아들을 바라 보았다. 어머니의 시선과 마주치면 그는 웃어 보였다. 밤의 정다운 소음이 거리에서 연거푸 들려왔다. 비록 허가는 아직 나지 않았지만 많은 차량들이 다시 운행되고 있었다. 차들은 빠 른 속도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곤 했다. 목소리들,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 다시 침묵, 말 굽 소리, 커브를 도는 두 대의 전차가 삐걱거리는 소리, 분명치 않은 웅성대는 소리, 그리고 다시 밤의 숨소리. "베르나르야." "네." "고단하지 않으냐?" "아뇨." 그때 그는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자기를 사랑하는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또, 한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님을, 적어도 사랑이라는 것이 자신 의 표현을 발견하는 데 충분히 강력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와 그는 언제나 침묵 속에서 서로 사랑할 것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 혹은 그는 - 일생 동안 자기네들의 애정을 고백하지도 못한 채 죽을 것이다. 역시 마찬가지로, 그는 타루 와 다정하게 지내왔는데도 그는 그날 저녁에, 그들의 우정이 정말 우정답게 표현도 못한 채 죽어갔던 것이다. 타루는 자기 말마따나 내기에 졌던 것이다. 그러나 리외도 이긴 것이 무엇 이었던가? 단지 그저 페스트를 겪었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추억을 가졌다는 것, 우정을 알 게 되었고, 언젠가는 그것에 대한 추억이 되살아날 것이라는 것만이 그가 승리한 점이었다. 인간이 페스트와 그리고 인생의 노름에서 이길 수 있는 모든 것이란 그것에 대한 체험과 기 억이었다. 타루는 아마 그것을 가지고 내기에 이기는 것이라고 불렀던 모양이다! 또다시 자동차가 한 대 지나갔는데, 리외 어머니는 의자 위에서 약간 움직였다. 리외가 어 머니를 보고 웃었다. 그 여자는 아들에게 자기는 피곤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이어서 말했다. "너 산으로 휴양 좀 가야겠구나, 거기 말이다." "그럴까봐요." 그래, 그는 휴양을 갈 예정이었다. 가구말구. 그 김에 추억도 될 것이었다. 그러나 내기에 이긴다는 것, 그것이 결국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단지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추억에 남 는 것만을 가지고 살아갈 뿐 희망하는 것은 다 잃어야 되니 그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타루 는 아마도 그렇게 살아왔던 모양이며, 환상 없는 생활이란 얼마나 메마른 생활인가를 잘 의 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희망 없이는 마음의 평화는 있을 수 없는 법이다. 그런데 아무도 단 죄할 권리를 인간에게 주지 않았던 타루, 그러면서도 누구나 단죄 행위를 면치 못하며, 심지 어는 희생자가 때로는 사형집행인 노릇을 하게 됨을 알고 있던 타루는 분열과 모순 속에서 살아왔던 것이며 희망이라곤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성덕을 원하고 인간에 대한 봉사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았던 것일까? 사실 리외는 아무것도 몰랐고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자기가 앞으로 간직할 타루의 이미지는 자기 자동차의 핸들을 덥석 잡고 운전하고 있는 한 남자의 이미지거나 이제는 움직이지 않고 뻗어 있는 그 두툼한 육체에 대한 이미지 리라. 삶의 체온과 죽음의 이미지, 그것이 바로 체험이었던 것이다. 그 다음날 아침에, 의사 리외가 담담한 심정으로 자기 아내의 부고를 받은 것도 아마 그 런 이유에서였으리라. 그는 자기 사무실에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뛰다시피 그에게 전보 한 장을 갖다주고는 배달부에게 팁을 주려고 다시 나갔었다. 어머니가 돌아왔을 때, 아들은 전 보를 펼쳐들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창 너머로 항구 위에 밝아오는 웅장한 아침 경치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베르나르야." 리외 어머니가 말했다. 의사는 물끄러미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무슨 전보냐?" 어머니는 물었다. "그렇게 됐군요." 의사는 솔직히 얘기했다. "일주일 전이군요. 리외 어머니는 창으로 얼굴 을 돌렸다. 의사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어머니보고 울지 말라고 하고, 이렇 게 될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다만 그런 말을 하면서도, 그의 고통이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몇 달 전부터 그리고 이틀 전 부터 계속되고 있었던 똑같은 괴로움이었다. 시문은 2월의 어느 아름다운 날 아침에, 민중들과 라디오와 도청의 발표문의 축복을 받으 면서 마침내 열렸다. 그러므로 필자가 할 일은 시문을 개방하는 기쁜 순간의 기록자가 되는 일이다. 필자 자신은 거기에 전적으로 뒤섞일 자유가 없었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음에 도 불구하고 말이다. 밤낮으로 성대한 축하 행사가 마련되었다. 동시에 기차는 역에서 연기를 뿜고 시작했고, 한편 머나먼 바다에서 온 배들이 벌써 이 항구로 뱃머리를 돌렸고, 제각기 그날이 이별을 애닳아하던 모든 사람들의 위대한 재회의 날이라는 것을 상징하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 시민들 중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만성이 되었던 그 이별의 감정이 어떻게 되 었는가 하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낮 동안에 우리 시에 들어온 열차도 시에서 나간 열차들에 못지 않게 많은 승객을 싣고 있었다. 모두들 이 주일간의 유예 기간중에 그 날을 위해서 좌석을 예약해놓고는 마지막 순간에 가서 도청의 결정이 변경되지 않을까 겁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시에 접근해오고 있었던 여행객들 중에는 자신들의 불안을 완전히 버 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개가 자기와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 들의 소식은 알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이나 시 자체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전혀 몰랐고, 시 는 아마도 무서운 꼴이 되었으리라고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기간중 내 내 정열에 불타 보지 않던 사람들의 경우에만은 진실이었다. 정열에 불타고 있던 사람들은 사실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변한 것이라고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즉 귀양살이의 몇 달 동안, 될 수 있으면 그대로 밀치고 나 가서 재촉해보고 싶었던 그 시간, 이미 눈에 우리의 시가 보이는 그 시각에도 그 역시 더 서둘러대려고 열중했던 그 시간, 그것을 그들은 기차가 정차 전에 브레이크를 걸기 시작하 자마자 이번에는 반대로 속도를 늦추고 그대로 정차하기를 원했다. 그들이 사랑을 잃고 지 낸 그 몇 달 동안의 막연하고도 동시에 날카로운 그들의 감정이, 기쁨의 시간을 기다리는 시간보다 곱절은 더디 흘러가야 할 것이라는 것과 같은 일종의 보상을 막연하게나마 요구하 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랑베르의 아내는 벌써 몇 주일 전부터 그 소식을 듣고 필요 한 절차를 밟아 도착했는데 그러한 랑베르처럼 방안이나 플랫폼에서 기다리는 사람들도, 똑 같은 초조감과 똑같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왜냐하면 페스트가 몇 달 동안이나 계속됨으로 써 추상화되었던 그 사랑, 또는 그 애정을 한때 그것의 의지가 되었던 육체적인 존재와 대 립시키는 장면을 랑베르처럼 가슴을 떨며 기다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는 질병의 초기에 단숨에 시를 탈출해서 사랑하는 그 사람을 만나서 날아가고 싶었던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는 변했다. 페스트는 그의 마음속에 방심이라는 것을 불어넣어주었던 것이다. 그 는 그 방심을 전력을 다해서 부정하려 했지만, 그것은 그래도 마치 무딘 근심과도 같이 그 의 마음속에 계속되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페스트가 너무나 별안간에 끝난 것 같은 생 각이 들어서 그는 얼떨떨했다. 행복은 전속력으로 다가오고 있었고, 사건은 기대하고 있는 것보다 더 빨리 진행되고 있었다. 랑베르는 자기 일들은 모든 것이 대번에 복구될 것이고, 기쁨은 맛을 즐겨볼 수도 없는 일종의 불길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모든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의식적인 점에서 그와 같았는데 그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이 각자의 개인 생활을 다시 시작하고 있 었던 그 플랫폼에서 그들은 아직 자기들의 공통성을 느끼면서 서로 눈짓과 미소를 교환하였 다. 그러나 기차의 연기를 보자마자, 그들의 귀양살이의 감정은 혼잡하고 귀가 막힐 듯한 기 쁨 아래에서 갑자기 꺼져버렸다. 기차가 멈춰섰을 때, 대개는 같은 플랫폼에서 시작했던 그 무한히 길었던 이별은, 각자의 팔이 이미 산 모습조차 아물아물하게 되어 있던 그 몸과 몸 위로 기쁨이 넘쳐 탐욕스럽게 휘감길 때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랑베르는 그 생생한 모습 이 자기에게로 달려오는 것을 볼 겨를도 없이, 그 여자는 벌써 그의 품안에 뛰어들어 있었 다. 그래서 덥석 껴안고, 그 정다운 머리카락밖에는 보이지 않는 그녀의 머리를 꼭 껴안고, 현재의 행복에서 오는 것인지, 또는 너무도 오랫동안 억눌려 있었던 고통에서 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지금 자기의 어깨에 파묻고 있는 그 얼굴이 과연 자기가 그렇게 꿈에도 잊지 못한 얼굴인지, 그렇지 않으면 반대로 아주 다른 사람의 얼굴인지, 그것 을 확인해볼 수 없다는 데에 적어도 안심하고 있었다. 나중에 가서야 자기의 의심이 참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만은 그도 자기 주위 사람들처럼 페스트가 오든지 가든지, 사람 마음에는 조금도 변할 것이 없다고 믿고 싶었다. 서로들 꼭 껴안고 나머지 세계는 돌아보지 않고 겉으로는 페스트에 승리한 듯한 얼굴로, 모든 비참도 그리고 역시 한 기차를 타고 왔지만 아무도 마중 나온 사람이 없어 오랫동안의 무소식이 이미 그들 마음속에 빚어놓았던 근심의 확증을 집에 가서 잡게 될 것을 결심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을 잊은 듯이 모두들 집으로 돌아갔다. 그 잊혀진 사람들, 이제 동반자라고 는 아주 새로운 고통밖에는 없게 된 사람들, 또 그 순간 사라져간 사람의 추억에 골몰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정은 전혀 달랐고, 이별의 감정은 그때야말로 절정이었다. 이름도 없는 구덩이에 허망하게 묻혀 있거나, 또는 잿속에서 녹아 없어진 사람과 더불어, 모든 기쁨을 잃 어버린 어머니들, 배우자들, 애인들에게 여전히 페스트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누가 그 외로운 사람들을 생각해주었을까? 정오때가 되면, 태양은 아침부터 대기 속에서 싸우고 있던 찬바람을 정복하고, 부동의 햇볕의 끊임없는 물결을 온 시가에 퍼붓고 있었다. 낮은 정지되어 있었다. 언덕 꼭대기에 있는 요새의 대포들은 움직이지 않는 하늘에 끊임없이 포성을 울리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밖으로 나와서 고통의 시기가 종말을 고하고 망각의 시기는 아직 시작도 되지 않고 있는 그 벅찬 순간을 축복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광장마다 모여서 춤을 추고 있었다. 교통량은 현저하게 증가되고 자동차들은 점 점 수가 늘어나 사람들이 거리거리를 간신히 통과하고 있었다. 시내의 모든 종들이 오후 내 내 힘차게 울렸다. 푸르른 황금빛의 하늘을 종소리가 가득 채워 놓았다. 교회에서는 감사 기 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오락 장소마다 터질 듯한 성황을 이루었으며, 카페들은 앞으로의 걱정을 떨쳐내고 마지막 남은 술을 있는 대로 내놓았다. 카페들의 카운터 앞에는 일률적으로 흥분한 사람들의 떼가 밀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구경 거리가 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부둥켜 안고 있는 쌍들도 있었다. 모두들 소리치거나 웃고 있었다. 저 마다 자기의 영혼을 위축시키며 살았던 지난 몇 달 동안에 쌓아두었던 생명의 축적을 그들 은 마치 자기들의 생존 기념일인 양 그 날을 즐기고 있었다. 이튿날이 되면, 본래의 생활이 그 자체의 조심성을 가지고 시작될 것이다. 그 순간에는 근본이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 서로 팔꿈치를 비벼대면서 친교를 맺었다. 죽음이 닥쳐와도 사실상 실현되지 못했던 평등이, 해방 의 기쁨 속에서 적어도 몇 시간 동안은 그것을 확립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평범하고 행복한 만족감이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았다. 오후 늦게 랑베르처 럼 나란히 거리거리에 넘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침착한 태도로 속으로만 더 아기자기한 행복을 감추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수많은 남녀의 쌍과 수많은 가족들도 겉으로는 그저 평화스러운 산책객들로만 보였다. 그러나 사실 그 대부분은 그들이 고민을 겪었던 이곳저곳 을 찾아 미묘한 순례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새로 온 사람들에게 페스트의 뚜렷한 또는 숨 어 있는 징조, 그 역사의 발자취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어떤 사람들은 안내자의 역할을 하 고, 많은 일을 목격한 사람, 페스트와 함께 지낸 사람의 역할을 하는 데 만족했고, 아무런 공포감도 일으키지 않은 채로 그 위험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러한 즐거움은 비난거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소름끼치는 것이어서, 어떤 애인은 추억의 달콤 한 불안에 빠져 동반자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바로 여기였어. 당신이 보고 싶었는데 당신은 없었지." 그 열정의 편력자들은 그 소란 속 을 걸어가면서 그 속에서 속삭임과 비밀 이야기로 작은 섬을 이루고 있었다. 네거리의 오케 스트라단 보다도 정말 해방을 알리는 것은 바로 그들이었다. 왜냐하면 말없이 꼭 붙어서 황 홀한 얼굴로 걸어가는 그들은 이 소란한 속에서 행복한 시간이 다시 돌아왔으며 페스트는 끝나 공포의 시기는 이미 지났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들은 우리가 한때 경험했던 저 얼빠진 세계, 사람 하나 죽는 것쯤은 파리 목숨 끊는 거나 마찬가지로 예사인 그 무지한 세 계를 겪었고, 저 뚜렷했던 야만스러운 미치광이 짓, 현재의 일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무시 무시한 자유를 수반하고 있는 감금 상태, 제 손에 죽어 넘어지지 않은 모든 것들을 아연 실 색하게 하던 저 죽음의 냄새, 이런 것들을 침착하게 부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매일매일 일부의 사람들은 화장터 아궁이에서 이글거리는 연기가 되어서 증발해버리고, 한 편 나머지 사람들은 무력함과 공포의 쇠사슬에 묶여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그 어리석 은 민중이었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것이 그 날 오후 늦게 교외 쪽으로 가기 위해 교회의 종소리와 음악 소리, 귀가 멍멍해질 정도의 아우성 속을 혼자 걸어가고 있는 리외의 눈에 띈 광경이었다. 그의 임무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환자에게는 휴가라는 것이 없으니 말이다. 도시 위로 내리쬐는 화창한 햇볕 속에서 옛날과 다름없는 불고기 냄새와 아니스 주 냄새가 피어올랐다. 그 주위에서 즐 거운 얼굴을 한 사람들이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남자들과 여자들이 서로 불붙은 듯이 화끈 달은 얼굴을 하고, 욕정의 모든 흥분과 외침 소리에 떨면서 부둥켜안고 있었다. 그렇 다, 페스트는 공포와 더불어 끝났으며, 그처럼 꼬인 팔들은 사실 페스트가 그 깊은 의미에서 귀양살이었던 동시에 이별이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리외는 처음으로 몇 달 동안을 두고 행인들의 얼굴에서 엿볼 수 있었던 그 가족적인 모습 에 이름을 붙일 수가 있었다. 이제 그는 주위를 둘러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비참과 곤궁을 겪으면서 페스트의 종말을 맞아 그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해온 역할, 머나 먼 조국을 떠나온 그 얼굴에, 이제는 그 복장에 드러나 있었다. 그들은 페스트가 시문을 폐 쇄시킨 그 순간부터 오직 이별 상태 속에서 살아왔으며, 모든 것을 잊게 해주는 인간적인 체온에서 저지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도는 다르지만 도시의 구석구석에서, 그 남자들과 여 자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성질이 다르고, 그러면서도 모든 사람들에게 대부분은 곁에 있지 않은 사람을 향해서, 한 육체의 온도를, 애정을, 혹은 습관을 전력을 다해서 외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흔히 자기도 모르는중에 인간들과의 우정의 밖에 있다는 것, 편지라든가, 기 차라든가, 배라든가 하는 어떤 우정 수단을 통해서, 남들과 어우러져 볼 수 있는 처지도 못 된다는 것을 괴롭게 여기고 있었다. 그밖의 더 수가 적은 몇몇 사람들은, 가령 아마 타루 같 은 사람들은 자기들도 뚜렷이 정의를 내릴 수 있으면서도 정말로 바람직한 선인가도 싶은 그 어떤 것과의 결합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달리 부를 말을 찾지 못해 그 들은 때로 그것을 평화라고 부르기도 했다. 리외는 계속해서 걷고 있었다. 그가 걸어나감에 따라 군중들의 수가 많아지고 야단 법석 하는 꼴이 더 심해져서 그가 가려는 교외가 자꾸 그만큼씩 뒷걸음을 치는 것 같았다. 그는 차츰차츰 그 으르렁대는 커다란 집단과 융합되어감으로써 적어도 그 중의 일부는 자기 자신 의 고함 소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다, 모든 사람들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하나같 이 괴로운 휴가, 어쩔 도리가 없는 귀양살이, 영원히 면할 수 없는 갈증에 다 같이 고생을 했던 것이다. 그 산더미처럼 쌓였던 시체들,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 흔히 운명이라고 불려 온 경고, 악착같이 발버둥치던 공포에 대한 반항, 그 모든 것들 틈에서도 하나의 거창한 기 운이 그치지 않고 뛰어다녔고, 그 공포에 싸여 있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내려 그들의 진정한 조국을 다시 찾아야 한다고 말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모두에게 진정한 조국은 그 질식 해 있는 시가의 담 너머에 있었다. 언덕들 위의 그 향기로운 덤불 속에, 바다와 자유로운 나 라와 사랑의 무게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조국을 향해서 그 행복을 향해서 돌아가 고 싶었으며, 그 밖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등을 돌리고 있었다. 리외는 그 귀양살이와 그 결합에 대한 욕구 속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했 다. 그는 사방에서 밀리고 말을 걸어오는 틈에서 여전히 걸음을 계속해서 차츰차츰 복잡한 거리를 빠져나오는 동안 그런 것에 의의가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일 이 못되며, 차라리 사람들의 희망이 무슨 대답을 얻게 되었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 각했다. 그는 이제 어떤 대답이 나올 것인지를 알고 있었는데 그가 거의 인적도 없는 교외로 접어 들었을 때, 더욱 그것을 뚜렷이 알 수 있었다. 자기 자신이라는 보잘것없는 것에 집착해서 다만 자기의 사랑의 보금자리로 돌아갈 것이나 바라고 있던 사람들은 간혹 그 보람을 찾았 다. 물론 그 중의 몇몇은 기다리고 있던 사람을 빼앗기고 쓸쓸하게 시가를 쏘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조차도 이중의 이별을 당하지 않게 된 것도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 형편 이었던 것이, 가령 어떤 사람들은 그 질병 이전에 자기네의 사랑을 이루어놓지 못한 채 여 러 해 동안 이루어질 수 없는 결합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다가 마침내 서로 사랑의 적이 되었 다. 그런 사람들은 리외와 마찬가지로 경솔하게도 시간을 믿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영원히 헤 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의사가 바로 그날 아침에 헤어질 때, 그에게 "용기를 내시오. 지금이야말로 정말 정신을 차려야 할 때요."라고 말해준 랑베르, 그 랑베르 같은 사람들은 이제는 잃어버렸다고 믿었던 사람을 서슴지 않고 다시 찾았던 것이다. 적어도 그들은 당분간 행복할 것이다. 이제 그들은 인간이 언제나 욕구를 느끼며 가끔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 간의 애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대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고 자기로서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지향하 고 있던 사람들은 결국에는 대답을 얻지 못했다. 타루는 그가 말하는 그 어려운 마음의 평 화라는 것에 도달한 듯싶었지만, 그러나 그는 그것을 죽음 속에서 그것이 이미 그에게는 아 무런 소용이 없어지고 만 때에 가서 겨우 발견했던 것이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 즉 리외가 집집마다 문 앞에서 기울어가는 햇볕을 쬐며, 서로 힘껏 껴안은 채 정신없이 서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이 바라던 것을 손에 넣었다면 그것은 그들이 자기들 힘으로 얻을 수 있 는 것만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리외는 그랑과 코타르가 사는 거리로 접어들었을 때, 적어도 가끔씩 기쁨이 생겨서 인간과 인간의 무서운 사랑만으로 사람들에게 충분한 보 람을 주는 것은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기록도 끝이 가까워졌다. 베르나르 리외는 자기가 이 기록의 필자라는 것을 고백할 시 기다. 그러나 이 기록의 마지막 사건을 서술하기 전에 그는 적어도 자기의 당돌한 짓을 변 명하고, 또 자기가 객관적인 증인의 어조를 취하려고 애썼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페스트가 성하던 동안 내내, 그는 직책상 시민 대부분을 만나보았고, 따라서 그들은 감정을 알아볼 수 있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보고 들은 바를 보고하기에는 적절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되도록 그것을 신중한 태도로 하려고 들었다. 그는 대체로 어디까지나 자기가 볼 수 있었던 것 이상의 일들을 보고하지 않도록, 그리고 페스트와 함께 지내온 사 람들에게도 결국은 그들에게 뿌리박지 못한 사상은 그들에게 부여하지 않도록, 또 요행이나 불행으로 말미암아 작자의 손에 들어온 텍스트만을 이용하도록 주의했던 것이다. 일종의 범죄 사건이 생겼을 때 그는 증인으로 불려나간 적이 있는데, 그는 선의의 증인다 운 일종의 조심성 있는 태도를 지켰다. 그러나 동시에 정직한 마음의 법을 따라서 그는 단 호하게 희생자의 편을 들어서, 시민들과 더불어 그들이 서로 다 갖고 있는 유일한 확실한 것, 즉 사랑과 고통과 귀양살이를 맛보려고 했다. 그처럼 시민들의 불안이라면 그 어떤 것도 그가 같이 겪지 않은 것이라고는 없고, 어떠한 상황이라도 그의 것이 아닌 것이라고는 없었 다. 그는 성실한 증인이 되기 위해서 특히 조서, 자료, 소문 같은 것들을 보고해야 했다. 그러 나 그가 개인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 즉 자신의 기대라든가, 자신의 시련이라든가 하는 것 에는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혹 그런 것을 이용하는 일이 있었다면, 그것은 다만 시민들을 이해하거나, 또는 이해시켜보려는 의도에서 그랬던 것이고, 대개의 경우 그것은 그들이 어렴 풋이 느끼고 있던 것에다 명확한 형태를 부여해보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 그 이성적인 노력 이 그로서는 한 번도 힘들지는 않았다. 수천 명의 페스트 환자의 목소리에 자기의 고백을 직접 섞어보려는 유혹이 생겼을 때, 그는 자기의 괴로움 중에서 그 어느 것 하나도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괴로움이 아닌 것이 없으며, 슬픔이 하도 커서 고독한 그런 세계에서는 그런 고백은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에서 참았던 것이다. 확실히 모든 사람에 관한 이야 기를 해야만 했었다. 그러나 시민들 중 적어도 한 사람만은 의사로서도 좋게 말해줄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타루가 리외에게 이렇게 말한 일이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의 유일한 진짜 죄악은 아이들이나 어른들을 죽여버리는 것에 대해서 속으로 옳 다고 긍정한 점입니다. 그 외의 것은 나도 이해가 가요. 나는 그 외의 것을 용서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이 기록이 그 무지한 마음을 가졌던 사람, 즉 고독한 마음을 가졌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끝난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축하 행사로 요란한 큰 거리를 빠져나와 그랑과 코타르가 살고 있는 거리로 접어들었을 때, 의사 리외는 마침 경찰관들이 쳐놓은 바리케이드에 길이 막혔다. 생각도 못했던 일이다. 축하하는 요란한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통에 이 동네는 더 조용한 것 같았고, 그래서 그 는 거리가 조용해서 인기척도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신분증을 내보였다. "안됩니다. 선생님." 경찰관이 말했다. "미친 놈이 군중에게 총을 쏩니다. 잠깐 여기에 좀 계십시오. 수고를 끼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어요." 그때 리외는 그랑이 자기 쪽으로 오는 것을 보았다. 그랑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 람들이 가지 못하게 해서 보니까 자기 집에서 누가 총을 쏘더라는 것이다. 멀리 싸늘해진 태양의 마지막 빛을 받아 공간이 생겨 맞은편 보도에까지 뻗어 있었다. 그 길 한가운데에는 모자 하나와 더럽혀진 헝겊 조각이 뚜렷하게 보였다. 리외와 그랑은 아주 저 멀리 길 저편 에서 자기들을 막은 선과 나란히 있는 다른 한 개의 경찰의 바리케이드와 그 등뒤를 빠른 걸음걸이로 오가는 몇몇 동네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아파트 맞은편 건물 문 앞에 권총을 겨누고 있는 경찰관들도 보였다. 아파트 덧문은 모두 닫혀 있었다. 그러나 삼층 에서만은 덧문 하나가 반쯤 떨어져서 매달려 있었다. 거리는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시내 중 심지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가 단편적으로 들려올 뿐이었다. 그때 그 집 맞은편 어떤 건물에서 권총 소리가 두 방 울리더니, 아까 그 떨어질 듯한 덧 문에서 쪼가리가 몇 개 떨어져 나갔다. 그러더니 다시 조용해졌다. 멀리서 보는 탓과 그리고 낮의 소란스러움이 끝난 다음이어서 리외에게는 좀 비현실적으로 여겨졌다. "코타르의 방 창문이에요." 갑자기 몹시 흥분해서 그랑이 말했다. "아니, 코타르는 달아났 는데." "왜 총을 쏘나요?" 리외는 경관에게 물었다. "그를 유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필요한 도구를 싣고 오는 자동차를 기다리고 있는 중입 니다. 저 집 문으로 들어가려고만 하면 쏘아대니 말입니다. 경관이 한 명 맞았습니다." "그는 왜 쏘는 걸까요?"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거리에서 즐겁게 떠들고 있었어요. 처음에는 사람들도 영문을 몰랐 어요. 두 번째 총 소리가 나자 아우성이 일어났고, 부상자가 생기고, 모두들 도망쳤죠. 미친 놈이겠죠, 뭐!" 다시 조용해지자, 일분 일분이 지루했다. 문득 거리 저편에서 리외로서는 오래간만에 처음 보는 개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더러운 스파니엘 종으로 아마도 그동안 주인이 숨겨두었던 모양이다. 그놈이 벽을 따라서 뛰어오고 있었다. 개는 문 앞에까지 와서 멈칫거리다가 엉덩 이를 땅에 대고 앉더니 뒤로 벌렁 나자빠져서 벼룩을 잡기 시작했다. 경찰관들이 휘파람을 불어서 개를 불렀다. 개는 고개를 들더니 천천히 발을 옮겨서 길을 건너가 모자의 냄새를 맡았다. 바로 그때, 삼층에서 총 소리가 났다. 개는 얇은 헝겊 조각처럼 뒤집혀 격렬하게 네 발을 휘젓다가 한동안 부들부들 떨면서 마침내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맞은편 문 에서 대여섯 발의 총성이 나 덧문이 더 부서졌다. 그리고다시 조용해졌다. 태양이 약간 기울 어져서 코타르의 창 가까이까지 그늘이 드리워졌다. 의사가 서 있는 뒤쪽 한길에서 브레이 크 소리가 낮게 울렸다. "왔군." 경찰관이 말했다. 경찰관들이 그들 등뒤에서 밧줄과 사다리 한 개, 기름먹인 천으로 싼 길쭉한 보따리 두 개를 가지고 나타났다. 그들은 그랑의 집 맞은 편 집들 옆으로 난 길로 들어갔다. 잠시 후 에, 그 집들의 문 앞에 일종의 동요가 일어난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동요가 느껴졌다. 사람 들은 기다렸다. 개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거무스름한 액체 속에 잠겨 있었다. 갑자기 경관들이 점령한 집들의 창으로부터 기관총이 퍼붓기 시작했다. 기관총을 계속 쏘 자 지금까지 과녁이었던 그 덧문은 산산이 부서지고 그 뒤에 검은 표면이 노출되었지만, 리 외와 그랑이 서 있는 곳에서는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 총성이 멎자, 또 다른 기관총 이 좀더 멀리 떨어진 집, 다른 각도에서 울렸다. 총알은 아마 창의 어느 쪽을 뚫고 들어간 모양으로, 그 중 한 방에서 벽돌 하나가 파편이 되어 날아간다. 바로 그때, 경관 세 명이 달 음박질로 길을 건너가서 아파트 문으로 빨려들 듯이 들어갔다. 그 뒤에 또 세 명이 급히 뛰 어들어갔고 기관총 소리는 멎었다. 집안에서 아득히 총성이 두 번 울렸다. 그러자 무슨 소란 한 소리가 나더니, 집안으로부터 셔츠 바람의 작달막한 남자가 연방 소리소리 지르면서 끌 려 나온다기보다는 안겨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기적이 일어난 듯이 거리의 덧문이라는 덧 문들이 전부 열리고 창문마다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한편 수많은 사람들이 집 집에서 몰려나와 바리케이드 앞에서 승강이를 하고 있었다. 잠시 길 복판에, 그제야 발을 땅 에 붙이고 두 팔은 뒤로 비틀어 경찰관이 잡고 있는 그 작달막한 사나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뭐라고 고함쳤다. 경관 하나가 그에게로 가서 천천히 아주 쥐어박으려는 듯이 주먹으 로 힘껏 때렸다. "코타르로군요." 그랑이 중얼거렸다. "미쳤나봐요." 코타르는 쓰러졌다. 경찰관이 땅 위에 쓰러진 몸뚱이를 힘껏 발길질을 했다. 그러자 사람 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의사와 그의 늙은 친구에게로 몰려들었다. "길을 비키시오!" 경찰관이 말했다. 리외는 그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가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랑과 의사는 해가 지는 황혼 속에서 그 자리를 떴다. 마치 그 사건이 그 동네의 잠자고 있는 마비 상태를 흔들어 깨우기라도 한 것처럼 그 외진 거리에서도 다시 기쁨에 찬 군중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충만하고 있었다. 그랑은 집 아래에서 의사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는 일을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올라가려던 순간 그는 리외에게 자기는 쟌느에게 편지를 썼으 며 지금 아주 마음이 기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그 사연을 다시 외었다. "형용사들은 전 부 없앴어요." 그가 말했다. 그러고는 짖궂은 미소를 지으며 그는 모자를 벗어들고 의식에서 하는 듯한 절을 했다. 그 러나 리외는 코타르를 생각하고 있었다. 코타르의 얼굴을 후려갈기는 그 주먹다짐 소리가 그 천식 환자 영감 집에 가는 도중 내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아마도 죄 지은 사람 생각 을 하는 것은 죽은 사람 생각을 하는 것보다도 더 괴로운 일인 모양이다. 리외가 그 늙은 병자 집에 갔을 때 벌써 하늘에는 밤이 완전히 뒤덮여 있었다. 방안에서 는 어렴풋이 자유스럽게 애기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영감은 여전히 기분이 좋아서 콩 옮겨담 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기뻐하는 것도 당연하지." 그가 말했다. "세상 살려면 다 필요한 거지요. 그러데 선생님 의 친구 말씀입니다. 어떻게 됐어요?" 총 소리가 몇 번 그들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평화로운 소리였다. 애들이 화 약을 터뜨리고 있는 것이었다. "죽었습니다." 의사는 쿨쿨대는 가슴에 청진기를 대면서 그렇게 말했다. "아!" 그 영감은 좀 기가 막힌다느 듯한 소리를 냈다. "페스트로 죽었지요." 리외가 덧붙였다. "그렇군요." 잠시 후에 노인이 말했다. "제일 좋은 사람들이 가버리는군요. 그것이 인생이 죠. 허지만 그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알고 있는 분이었죠."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청진기를 접어넣으면서 리외가 말했다. "괜히 해보는 말이에요. 그 분은 무슨 말을 해도 무의미한 말은 안해요. 어쨌든 나는 그 분이 좋았어요. 그저 그랬죠. 다른 사람들은 '페스트입니다. 페스트를 이겨냈습니다.'고들 말 하죠. 좀 더하다간 훈장이라도 달랄 판이죠. 그러나 페스트가 대체 뭡니까? 인생, 그뿐이죠." "찜질을 규칙적으로 하십시오." "아! 염려 마세요. 나는 아직 멀었습니다. 나는 다 죽는 것을 보고 죽을 거예요. 나는 어떻 게 해야 살아나는지 안단 말입니다." 멀리서 으르렁대는 소리가 그의 말에 대답하는 듯이 들려왔다. 의사는 방 한복판에 멈춰 섰다. "테라스로 좀 나가 보면 안될까요?" "천만에요. 그 위에 가서 그들을 좀 보시겠다는거죠, 그렇죠? 좋을 대로 하세요.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그런걸요." 리외는 계단 쪽으로 갔다. "여보세요, 선생님. 페스트로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기념비를 세운다는 게 정말인가요?" "신문에 그렇게 났더군요. 돌 아니면 동판으로요." "내 생각이 맞았어. 그리고 연설들을 하겠죠." 노인은 목이 비틀리는 소리를 내며 웃어댔다. "여기 앉아서도 뻔히 들리죠. '세상 떠난 사람들은...' 그 다음에는 처먹는거죠." 리외는 벌써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싸늘한 하늘이 집들 위에서 반짝이고, 언덕 기슭에 는 별들이 부싯돌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그날 밤은, 그가 타루와 더불어 페스트를 잊어보려 고 그 테라스 위에 왔을 때와 별로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그 날은 그때보다 훨씬 바다 소 리가 요란스럽게 절벽 아래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공기는 가을의 미지근한 바람이 날아오던 찝찔한 맛이 없어지고, 가볍고 상쾌했다. 그 동안에도 시내에서 들려오는 웅성대는 탁한 소 리가 테라스 밑에서 들려왔다. 그러나 그 밤은 해방의 밤이지 반항의 밤은 아니었다. 멀리서 검붉은 불빛이 조명이 찬란한 신작로와 광장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제 해방된 밤에 욕망은 아무런 구속도 없게 되었고 그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리외에게까지 들렸다. 어둠침침한 항구로부터 공식적인 축하의 첫 불꽃이 피어올랐다. 온 도시는 함성을 길게 울리며 그것을 찬양했다. 코타르나 타루도, 리외가 사랑했으나 잃고만 남자들과 여자들도, 죽은 사람이건 범죄자건 모두가 잊혀졌다. 노인 말이 옳았다. 인간들은 늘 그게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힘, 그들의 허물 없는 점이며, 거기서야말로 모든 슬픔을 넘어서, 리 외는 자기가 그들과 손잡고 있음을 느끼고 있는 터였다. 여러 가지 빛깔의 불꽃들이 점점 많이 하늘로 떠오름에 따라 거리의 함성이 점점 더 테라스 가까이까지 밀려오는 것을 느끼 면서 리외는 이야기를 쓰기로 결심했다.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사람들 틈에 끼지 않기 위해서, 페스트에 휩쓸려간 사람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가해진 부정의 와 폭행의 최소한 추억만이라도 남겨놓기 위해서, 그리고 재난 속에서 배운 것, 즉 인간에게 는 경멸당할 것들보다는 더 많은 찬양받을 것들이 있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해두기 위해 서 말이다. 그러나 그래도 그는 이 기록이 결정적인 승리의 기록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 만 이 기록은 공포와 그 공포가 가지고 있는 악착같은 무기에 대해서 수행해 나가야 했던 것, 그리고 아마 모든 사람들, 성인은 될 수 없고 재난을 받아들이는 것은 거부하면서도 역 시 의사가 되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개인적인 분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수행 해 나가야 할 것에 대한 증언이 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시내에서 올라오는 경쾌한 환호성을 들으면서, 사실 리외는 그 기쁨이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기쁨에 잠겨 있는 군중이 모르고 있는 사실, 즉 페스트 균은 결코 죽거나 사라지지 않으며, 수십년간 가구나 속옷들 갈피에서 잠자고 있 을 수가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헌 종이 같은 것들 틈에서 꾸준히 기다리고 있으며, 따라서 아마도 언젠가는 인간에게 불행과 교훈을 갖다 주기 위해서, 페스 트가 또다시 저 쥐들을 깨워 어떤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방인(제1부) 1 오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가 온 것이다. '모친 별세, 명일 장례' 이것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양 로원은 알제리에서 약 20킬로미터쯤 떨어진 마랑고에 있다. 2시에 버스를 타면 해지기 전에 도착할 것이다. 그러면 밤샘할 수도 있고 내일 저녁에는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사장 에게 이틀간 휴가를 청했다. 사장은 이유가 이유이니 만큼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못마 땅해하는 눈치였다. 나는 이런 말까지 했다. "그건 제 탓이 아닙니다" 사장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때에야 나는 그런 소리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결국 나는 변명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가 나에게 조문이라도 해주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 아마 모레, 내가 복상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무슨 말이 있겠지. 지금은 어쩐지 어머니가 죽지 않 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장례식이 지난 다음에는 기정사실이 되어 모든 것은 보다 공적인 격식을 갖추게 될 것이다. 2시에 버스를 탔다. 날씨가 몹시 더웠다. 나는 늘 하는 버릇대로 셀레스트네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레스토랑 사람들은 모두 나를 측은하게 여겨 슬퍼해주었고, 셀레스트는 나에 게 "어머니란 하나밖에 없는 것이니 오죽하겠나!"라고 말했다. 내가 나올 때는 모두들 문 앞 까지 바래다주었다. 나는 좀 허둥거렸다. 왜냐하면 도중에서야 생각이 나서 엠마뉴엘의 집에 들러 검은 넥타이와 완장을 빌려야 했기 때문이다. 엠마뉴엘은 몇 달 전에 그의 아저씨를 잃었다. 나는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뛰어갔다. 이렇게 서두르고, 달음박질을 치고, 버스에 흔들 리고, 게다가 가솔린 냄새, 하늘과 길 위에 반사하는 빛, 그러한 모든 것 때문에 아마 나는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버스 속에서 거의 내내 잤다. 눈을 떴을 때는 어떤 군인이 어깨 에 기대어 있었는데, 그는 나에게 웃어 보이며 먼데서 오느냐고 물었다. 나는 더 말하기가 싫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양로원은 마을에서 2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다. 나는 걸어서 갔다. 곧 어머니를 보려고 했으나 수위는 먼저 원장을 만나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원장은 바빠서 조금 기다려야 했다. 그동안 수위는 줄곧 이야기를 했다. 이윽고 나는 원장을 만났다. 원장은 나를 자기 사무실로 맞아들였다. 레종 도뇌르 훈장을 달았는데 키가 작은 노인이었다. 그는 맑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내가 내민 손을 붙들고 하도 오랫동안 놓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어떻 게 손을 거두어야 할지 매우 난처했다. 원장은 서류를 뒤적이고 나서 말했다. "뫼르소 부인 은 3년 전에 이곳에 들어왔습니다.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당신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그가 나를 나무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정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나의 말을 가로막고 이렇게 말했다. "변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당신 어머니의 서류를 읽어보았는데 어머님을 부양하실 수가 없더군요. 어머님을 돌보아줄 사람이 필요했겠지만 당신의 월급은 적었지요. 어쨌든 어머님께서는 여기 계셔서 더 행복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원장님" 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덧붙여 말했다. "어머님에게는 같은 연배의 친구들이 계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지나간 옛날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젊으니까 당신과 함께 살면 아무래도 적적해하셨을 것입니 다." "어머님에게는 같은 연배의 친구들이 계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지나간 옛날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젊으니까 당신과 함께 살면 아무래도 적적해하셨을 것입니 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집에 있었을 때 어머니는 아무 말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하며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양로원으로 들어가고 난 처음 며칠 동안은 가끔 우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타성 때문이었다. 몇 달 후에 양로원에서 모셔오겠다고 했더라도 역시 타성 때문에 울었을 것이다. 마지막 해에 내가 별로 양로원에 가지 않은 것은 그러한 이유도 약간 있었 다. 그것은 또 일요일을 허비해야 하고, 버스 정류장까지 가서 차표를 사 가지고 두 시간 동 안이나 여행을 해야 하는 것이 귀찮기 때문이기도 했다. 원장은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나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랬더니 그는 이렇 게 말했다. "물론 어머니를 보고 싶으실 테지요."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일어섰다. 그 랬더니 그는 문쪽으로 갔다. 계단으로 나서며 그는 설명했다. "시체는 조그만 빈소로 옮겨놓 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원내에서 사망자가 생길 때마다 다른 사람들은 2, 3일 동안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거북한 일이 많답니다." 우리 는 안마당을 지나갔는데 거기에는 늙은 사람들이 많이 보이고, 두세 명씩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지나갈 때에는 잠시 말이 없다가 지나간 뒤에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 다. 마치 앵무새들이 재잘거리는 소리와 같았다. 어느 작은 건물의 문 앞에 와서 원장은 나 를 두고 가버렸다. "그럼 나는 가겠습니다. 뫼르소 씨,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사무실로 오십시오. 장례식은 아침 10시로 정해져 있습니다. 밤샘하실 것을 생각해서 그렇게 정한 것 입니다. 끝으로 한 말씀 드리겠는데 어머님께서는 가끔 친구분들에게 장례식은 종교장으로 해주었으면 하는 희망을 말씀하셨던 모양입니다. 종교장에 필요한 모든 준비는 해놓았습니 다. 미리 알려드립니다." 나는 원장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어머니는 무신론자는 아니었지 만 생전에 종교를 생각한 적은 없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하얗게 회칠을 하고 천장에 유리창이 달린 매우 밝은 방이었다. 의 자 몇 개와 X자 모양의 틀들이 놓여 있었다. 방 한가운데 있는 두 개의 틀 위에는 뚜껑이 덮인 관이 가로놓여 있었다. 호두기름을 칠한 널빤지 위에 대충 박은 번쩍거리는 나사못만 이 드러나 보였다. 관 옆에는 흰 가운을 입고 머리에 짙은 빛깔의 스카프를 쓴 간호원이 있 었다. 그때 수위가 내 뒤로 들어왔다. 뛰어온 모양이었다. 그는 좀 더듬거리며 말했다. "입관 을 했습니다만 보실 수 있도록 뚜껑을 열어드려야죠." 그러면서 관으로 가까이 가려기에 나 는 그를 제지했다. 그는 말했다. "안 보시렵니까?" "그만 두겠습니다"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도 입을 다물어버렸다. 나는 그런 소리는 하지 않았어야 할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 난처했다. 조금 후에 그는 나를 쳐다보고 물었다. "왜 보 고 싶지 않으십니까?" 나무라는 말투는 아니었고 그저 이유를 알아보려는 것 같았다. "글세, 모르겠습니다" 나는 말했다. 그러자 그는 흰 수염을 비비꼬면서 나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하긴 그러실 겁니다." 푸르고 맑은 그의 눈은 아름다웠으며 얼굴빛은 조금 붉었다. 그는 나 에게 의자를 권하고 자기도 내 뒤에 조금 떨어져서 앉았다. 간호원이 일어서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수위가 나에게 말했다. "종기가 나서 저렇답니다."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채 지 못하고 간호원을 쳐다보았다. 간호원은 눈밑을 붕대로 감고 있었는데 붕대를 머리까지 둘러쌌다. 코끝 언저리에도 붕대가 감겨 붕대가 평평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흰 붕대만이 보였다. 간호원이 가버리자 수위는 말했다. "저도 가보겠습니다." 내가 어떤 몸짓을 했는지 모르지 만 그는 자리에서 일어선 채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내 등뒤에 서 있는 것이 나로서는 거북 했다. 방안에는 저녁이 가까운 오후의 아름다운 빛이 가득 차 있었다. 말벌 두 마리가 그림 유리창에 부딪치며 윙윙거렸다. 나는 졸음이 왔다. 수위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나는 말 했다. "여기 오신 지 오래 되십니까?" "5년 됐습니다." 하고 그는 얼른 대답했다. 마치 처음부터 그 물음을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그리고 그는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마랑고 양로원에서 그가 수위로 일생을 끝마치게 될 것이라고 말했더라면, 아마 그는 매우 놀랐을 것이다. 그의 나이는 예순 살이며 파리 태생이라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그의 이야기를 가로막고 말했다. "그래요? 이 고장 사 람이 아니시군요." 그러고는 그가 나를 원장실로 안내하기 전에 어머니 이야기를 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산이 없는 평지에서는, 더구나 이 지방은 몹시 더워 속히 매 장해야 한다고 했다. 그가 파리에 살았었고, 파리는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한 것도 그 때였다. 파리에서는 시체는 사흘이고 나흘이고 두는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서둘러야 한다. 실감날 겨를도 없이 곧 영구차 뒤를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그의 아내가 말했다. "여보, 그만 둬요. 그런 이야기는 이분에게 할 게 아니에요." 영감은 낯을 붉히고 사과했다. 나는 그들의 대화에 끼여들어, "아니요, 괜찮습니다." 하고 말했다. 수위의 이야기는 그럴듯 하고 재미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수위는 조그만 빈소에서 그가 양로원에 극빈자의 자격으로 들어왔다는 말을 했다. 그는 건강하여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수위 자리를 자원했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당신도 역시 재원자냐고 물었더니 그는 아니라고 했다. 나는 그가 재원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 '그네 들' 또 혹은 어쩌다가는 '늙은이들'이라는 말투를 쓰는 것을 듣고 놀랐다. 재원자 중에는 그 보다 나이가 많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물론 그들과는 같지 않다. 그는 수위 니까 어느 정도 그들에 대해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간호원이 들어왔다. 갑자기 땅거미가 내렸다. 곧 이어 유리창 위에 밤이 짙어갔다. 수위가 전등 스위치를 올렸을 때 갑자기 쏟아지는 불빛 때문에 나는 앞이 캄캄하도록 눈이 부셨다. 그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오라고 권했다. 내가 먹고 싶지 않다고 했더니 그는 밀 크커피를 한 잔 가져오겠다고 말했다. 밀크커피를 매우 좋아하는 나는 가져오라고 했다. 조 금 뒤에 그는 쟁반을 하나 들고 돌아왔다. 나는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마시고 나니 담배가 피우고 싶었으나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 담배를 피워도 좋은지 어떨지 몰라 주저했다. 생각 해보니 조금도 꺼릴 이유는 없었다. 나는 수위에게 담배 한 대를 권하고 둘이서 함께 피웠 다. 잠시 후 그는 말했다. "어머니의 친구들도 밤샘하러올 겁니다. 관습이 그러니까요. 의자와 커피를 가져와야겠습니다." 나는 전등 두 개 중 하나를 끌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흰 벽에 반사되는 불빛이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다. 수위는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전기가설이 그렇 게 되어 있어서, 다 켜든지 아주 꺼버리든지 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더 이 상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는 나갔다가 들어와서 의자들을 늘어놓고 한 의자 위에다가 커피 주전자와 그 둘레에 찻잔을 두 개 놓았다. 그러고 나서 어머니 쪽으로 가서 나와 마주앉았 다. 간호원도 방구석에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으 나 팔을 놀리는 것으로 보아 뜨개질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방안은 훈훈했 고 커피를 마셔선지 덥게 느껴졌다. 열린 창문으로 그윽한 밤의 꽃 향기가 들어왔다. 나는 좀 졸았던 모양이다. 무엇인가 스치는 소리에 눈을 떴다. 눈을 감았던 탓으로 방안의 흰빛은 더욱 눈부셨다. 내 앞에는 그림자 하나 없었고 모서리 하나하나 곡선 하나하나가 눈에 아프게 새겨질 정도로 뚜렷이 드러나 보였다. 그때 어머니의 친구들이 들어왔다. 모두 10명이었는데 그들은 아무 말없이 그 눈부신 빛 속으로 살며시 걸어들어왔다. 그들은 의자 하나 삐걱거리지 않고 앉았 다. 나는 그때 그들을 본 것처럼 사람을 자세히 본 적은 예전에 없었다. 그들의 얼굴, 옷차 림의 사소한 모양 하나까지도 내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도 말이 없어 이 세상 사람 들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여자들은 거의 모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는데 허리에 졸라맨 끈이 불룩 나온 배를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나는 그때처럼 늙은 여자들의 배가 얼마나 커질 수 있는 것인가를 목격한 일이 없었다. 남자들은 거의 모두 몹시 여위고 지팡이를 짚 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을 보고 놀란 것은 눈은 보이지 않고 다만 주름살 한가운데에서 희 미한 빛만이 보였다. 그들이 앉았을 때 거의 모두가 나를 바라보며 머리를 흔들었는데 이가 빠져 입술이 입속으로 오그라들었는데 그것이 내게 대한 인사인지 혹은 그들의 버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에게 인사를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들이 모두 수위를 둘러싸고 나와 마주앉아서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는 것을 내가 본 것은 바로 그때였다. 한순간 나는 그들이 나를 심판하기 위하여 거기에 와서 앉아 있다는 어처구니 없는 인상을 받았다. 잠시 후 한 여자가 울기 시작했다. 둘째 줄에 앉은 여자였는데 앞에 앉은 다른 여자에게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한결같이 짧은 소리로 우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언제까지나 그녀가 울음을 그치지 않을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도 않은 듯했다. 그들은 맥없이 침울한 낯으로 묵묵히 앉아 있었다. 모두들 관이라든지 지팡이라든지 무엇을 들여다 보고 있었으며 그저 그 한 가지만을 보고 있었다. 여자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고 있는 여자가 나에게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매우 이상했다. 나는 그 울음 소리가 듣기 싫었다. 그렇다고 그런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수위는 그 여자에게로 고개를 숙이고 무 슨 말을 했으나, 그녀는 머리를 흔들고 뭐라고 중얼거리고는 다시 아까와 같은 템포로 계속 울었다. 수위가 그때 내 곁으로 와서 앉았다. 잠시 아무 말없이 있더니, 내 얼굴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저 사람은 어머니와 매우 가깝게 지냈답니다. 어머니는 원내에서 그녀의 유일 한 벗이었는데 이제는 그야말로 혼자가 됐다는군요." 우리들은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여자의 한숨과 흐느낌은 차츰 사이가 떴다. 그녀는 몹시 훌쩍거리더니 마침내 울음을 그쳤다. 졸음은 오지 않았으나 나는 고단하고 허리가 아팠다. 오직 대면하고 있기가 거북한 그 모든 사람들의 침묵이 있을 뿐이었다. 다만 때때로 이상한 소리가 들렸는데 나는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알고 보니 그것은 그중 의 어떤 늙은이들이 볼의 안쪽을 빨아서 내는 야릇한 입 소리였다. 그들 자신은 그런 소리 가 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제각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앞에 누 워 있는 그 사자는 그들의 눈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인상까지 나는 받았다. 그러나 지 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잘못된 느낌이었다. 우리들은 모두 수위가 따라준 커피를 마셨다. 그러고는 무슨 일이 있었던지 모르겠다. 밤 이 계속되었다. 어느 순간 눈을 떴을 때 노인들은 모두 쭈그린 채 잠이 들어 있었는데 한 사람만은 지팡이를 그러쥔 손등 위에 턱을 괴고 마치 내가 깨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나는 허리가 점점 심하게 아파서 눈을 떴다. 유리창 위로는 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조금 뒤에 노인 한 사람이 잠이 깨 어 기침을 했다. 그는 체크 무늬의 커다란 손수건에 침을 뱉고 있었는데 객담을 할 적마다 그것은 토한다기 보다는 마치 잡아뽑는 듯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깨웠고, 수위는 갈 시간 이 되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들은 일어섰다. 피곤한 밤샘 탓으로 그들의 얼굴은 부옇게 보였 다. 매우 놀라운 일이었지만 방문을 나서면서 그들은 모두 내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 마 치 서로 이야기를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은 그날 밤이 우리의 친밀감을 두텁게 할 수 있었다 는 것처럼. 나는 피곤했다. 수위가 자기 방으로 안내해주어 나는 간단히 세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밀크커피를 마셨는데 매우 맛이 좋았다. 밖으로 나왔을 때는 해가 높이 떠 있었다. 바다와 마랑고 사이에 있는 언덕들 위로 하늘 가득히 붉은 빛이 퍼지고 있었다. 언덕 위로 부는 바 람은 소금 냄새를 실어오고 있었다. 아름다운 하루가 시작되려는 것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야외에 가본 일이 없었으므로, 어머니만 아니면 산책하기 얼마나 즐거울까 하는 생각이 들 었다. 그러나 나는 마당의 플라타너스 나무 밑에서 기다렸다. 신선한 흙냄새를 들이마셨고 이제 는 졸립지 않았다. 회사의 동료들 생각이 났다. 바로 이 시간에 그들은 일터로 가려고 일어 날 것이다. 나에게는 언제나 그것이 가장 어려운 시간이다. 나는 그러한 것을 좀더 생각하는 데 건물 안에서 울린 종소리에 주의가 끌렸다. 창문 위에서 한동안 소란한 소리가 나더니 다시 잠잠해졌다. 해는 좀더 높이 떠올랐다. 햇빛이 내 발을 쬐기 시작했다. 수위가 마당을 건너와서 원장이 나를 부른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원장실로 갔다. 원장이 시키는 대로 여러 가지 서류에다 서명을 했다. 나는 그가 줄무늬 있는 바지에 검은 웃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 았다. 그는 전화기를 손에 들고 나에게 말했다. "장의사 사람들이 조금 전에 왔습니다. 관을 닫아야겠습니다만 그 전에 한 번 더 어머님 을 보시겠습니까?" 나는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원장은 수화기에다 대고 목소리를 낮추어 서 명령했다. "피자크, 인부들에게 일을 하라고 말하게" 그러고는 장례식에 참석하겠다기에 나는 그에게 고맙다고 했다. 그는 자기 책상 뒤에 걸 터앉아 짧은 다리를 포갰다. 우리 두 사람 외에 당번 간호원도 참석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덧붙여 말했다. 원칙적으로 재원자들은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고 밤샘만 시킨다는 것이었다. "그건 인정에 관한 문제입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특별히 어머니와 절 친한 친구였던 토마 페레라는 노인에게 장지까지 따라가는 것을 허락했다고 한다. 그때 원 장은 빙그레 웃고 나서 말했다. "그야 좀 어린애 같은 감정이지요. 그와 어머님은 떨어져 있 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원내에서 놀리느라고 페레에게 '당신의 약혼자로군'하면 그는 웃 곤 했어요. 그렇게 말해주는 것이 그들에게 좋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뫼르소 부인이 세상 을 떠난 것을 그는 몹시 슬퍼합니다. 그래서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했지요. 그러나 왕 진 의사의 권고에 따라 어젯밤에 밤샘만은 금했습니다." 우리들은 꽤 오랫동안 말없이 있었다. 원장은 일어서서 사무실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문득 그가 말했다. "마랑고 신부님이 벌써 오시는군요." 마을에 있는 교회까지 가려면 적어도 45분은 걸릴 것이라고 그는 알려주었다. 우리는 내 려갔다. 빈소가 있는 건물 앞에는 신부와 두 명의 어린 복사가 있었다. 한 아이는 향로를 들 고 있었는데 신부는 은줄의 길이를 조절하려고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우리가 앞으로 가자 신부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나를 '아들'이라고 부르면서 몇 마디 말을 건네고 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뒤를 따랐다. 방안에는 나사못이 박힌 관과 인부 네 사람이 있었다. 영구차가 길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원장의 말과 기도를 시작하는 신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나서는 모든 것이 매우 빨리 진행되었다. 인부들은 큰 보자기를 들고 관 앞으로 나섰고 신부와 그를 뒤따르는 어린이들 과 원장과 나는 밖으로 나왔다. 내가 모르는 한 부인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뫼르소 씨입니 다." 원장이 말했다. 나는 그 부인의 이름을 알아듣지 못했고, 다만 그녀가 당번 간호원임을 알았을 뿐이다. 그녀는 웃는 기색도 없이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길쭉한 얼굴을 숙였다. 그리 고 우리들은 시체가 지나갈 수 있도록 나란히 비켜섰다. 우리는 인부들을 따라 양로원을 나 왔다. 문 앞에 영구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란 모양에 니스칠을 해서 번쩍거리는 것이 필 통을 연상시켰다. 영구차 앞에는 장례를 진행하는 사람이 서 있었는데 그는 괴상한 옷차림 을 한 키가 작은 사나이였다. 그리고 행색이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노인 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가 페레 씨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위가 둥글고 태가 넓은 소프트 모자를 썼으며, 구 두를 휘감은 듯한 바지를 입고 커다란 흰 칼라가 달린 셔츠에 지나치게 작은 검은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검은 점이 박힌 코밑에서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극히 가느다란 머리카락은 축 늘어져 가장자리가 못생긴 야릇한 귀밑으로 흘러내려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선지피처럼 새 빨간 귀가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다. 장례지휘자가 우리들에게 자리를 정해주었다. 신부가 앞장을 서고 영구차 둘레로 인부 네 사람이 서고 그 뒤로 원장과 나, 끝으로 당번 간호원과 페레 씨가 따르기로 되었다. 하늘에는 벌써 햇빛이 가득히 퍼져 있었다. 햇빛은 땅 위로 무겁게 내리쬐기 시작했고 더 위는 어느덧 심해졌다. 길을 떠나기 전에 왜 우리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모르겠 다. 검은 옷을 입은 나는 더웠다. 모자를 썼던 노인은 모자를 벗었다. 고개를 돌리고 그를 보니 원장이 내게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머니와 페레 씨는 저녁마다 간호원과 함 께 마을까지 산책을 나갔었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주위의 벌판을 바라보았다. 하늘 가까이 언덕에까지 줄지어 선 삼나무 숲이며, 검붉고 푸른 땅, 드믄드믄 있는 그린 듯한 집들을 통 해, 나는 어머니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없이 서글픈 휴식시간과도 같았을 것이다. 오늘 대기에 넘치고 있는 햇빛으로 말미암아 떠는 듯 어른거리는 풍경은 보기에도 허탈하고 답답했다. 우리는 길을 떠났다. 그때 나는 페레가 약간 다리를 전다는 것을 알았다. 영구차의 속도가 점점 빨라져서 영감은 뒤떨어졌다. 영구차 곁을 따라가던 인부 한 사람도 지금은 뒤에 처져 서 나와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태양이 하늘로 그렇게 빨리 떠오르는 것을 보고 놀 랐다. 벌써 오래전부터 벌판에는 윙윙거리는 벌레 소리와 바스락거리는 풀잎 소리가 소란스 럽게 들리고 있었다. 뺨 위로 땀이 흘러내렸다. 나는 모자를 가지고 있지 않아 손수건으로 부채질을 했다. 옆에서 걸어가던 인부가 그때 나에게 뭐라고 말을 했으나 듣지 못했다. 그러 면서 그 인부는 오른손으로 모자 가장자리를 치켜올리고 왼손에 들고 있던 손수건으로 이마 를 닦았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뭐라구요?" 그는 하늘을 가리키며 되풀이 말했다. "무던히 도 내리쬔다구요." 나는 "네"하고 말했다. 조금 뒤에 그는 다시 물었다. "어머님이 돌아가셨어요?" 나는 또 "네" 하고 대답했다. "연 세가 많으셨습니까?" "꽤 많았습니다" 정확한 나이를 몰라서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는 말이 없었다. 뒤돌아보았더니 영감이 뒤에서 한 50미터나 떨어져서 따 라오고 있었다. 그는 모자를 벗어 들고 팔을 휘저으며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나는 눈을 돌려 원장을 보았다. 그는 필요없는 몸짓을 전혀 하지 않고 매우 점잖게 걷고 있었다. 이마 위에는 땀이 몇 방울 흐르고 있었으나 그걸 닦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내 생각에는 행렬이 좀 빠른 것 같았다. 주위에는 한결같이 햇빛을 머금어 눈부시게 빛나 는 별관만 보일 뿐,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은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자 새로 포장한 길을 지나게 되었다. 뜨거운 햇볕에 아스팔트가 녹아 발이 빠져들어가서는 번쩍거리는 바닥 에 자국이 났다. 영구차 위로 드러나 보이는 운전사의 가죽 모자는 마치 검은 역청 속에 넣 어서 이긴 것 같았다. 푸르고 흰 하늘과 그 단조로운 빛깔들, 끈적거리는 갈라진 아스팔트의 검은 빛깔, 거무스름한 상복 빛깔, 니스칠한 영구차의 까만 빛깔들 사이에서 머리가 혼란해 졌다. 햇빛, 가죽 냄새, 영구차에서 풍기는 말똥 냄새, 니스 냄새, 향 냄새, 잠 못 이루었던 밤이 가져오는 피로, 그러한 모든 것 때문에 눈과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는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다보았다. 구름처럼 드리운 무더운 공기 속으로 페레 영감이 까마득하게 멀리 나타났다 다시 사라졌다. 찾아보니, 길을 벗어나서 벌판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길이 좀더 가서 구부러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페레가 그 지방을 잘 아니까 우리들을 따라 오려고 지름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길이 구부러진 곳에 이르렀을 때, 그는 우리들을 따라왔다. 그러고는 또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벌판을 가로질러 갔고 그러기를 여러 차례 나 했다. 나는 관자놀이에서 피가 뛰는 것을 느꼈다. 그 다음으로는 모든 것이 하도 빠르고 순조롭고 또 자연스럽게 진행되었으므로 나의 기억 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단지 한 가지 기억에 남은 것은 마을 어귀에서 당번 간호원 이 나에게 한 말이었다.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야릇한 목소리, 아름답고 떠는 듯한 목소리 로 그녀는 말했다. "천천히 가면 더위를 먹을 염려가 있고 너무 빨리 가도 땀이 나서 교회 에 들어가면 오한이 납니다." 그건 사실이었다. 그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밖에 그 날 의 몇 가지 광경이 머릿속에 남아 있다. 가령 페레가 마지막으로 마을 근처에서 우리들을 따라왔을 때의 그 얼굴. 어쩌지 못하는 듯한 슬픔의 눈물이 그의 뺨 위에서 번뜩이고 있었 다. 그러나 주름살 때문에 흘러내리는 눈물이 보이지 않았다. 눈물은 맺혔다가 그 쭈그러진 얼굴 위에 물칠해놓은 것 같았다. 그 밖에 생각나는 것으로는 교회와 보도 위에 서 있던 마 을 사람들, 묘지 무덤 위의 제라늄, 페레의 기절(마치 인형이 해체되어 쓰러지듯 했다), 어머 니의 관 위로 떨어진 붉은 흙, 그 속에 섞이던 흰 나무뿌리, 또 사람들의 목소리, 어느 카페 앞에서 기다리던 일, 끊임없는 엔진 소리, 버스가 마침내 빛나는 알제리 시가지에 다다라서 이제는 실컷 잠잘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때의 나의 기쁨, 그러한 것들이다. 2 잠이 깨자 나는 이틀 동안 휴가를 신청했을 때 왜 사장의 기색이 좋지 않았는지 그 까닭 을 알 수 있었다. 오늘이 바로 토요일인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그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러한 생각이 들었다. 사장은 자연히 내가 일요일까지 나흘 동안 쉬게 될 것을 생각했을 것이므로 그것이 그의 마음에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어머 니의 장례식을 오늘 하지 않고 어저께 한 것은 내 탓이 아니었고, 또 한편으로는 어차피 나 는 토요일과 일요일은 쉬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장의 심경을 이해할 수 없는 바도 아니다. 어제 하루 일로 피곤했기 때문에 일어나기가 괴로웠다. 수염을 깍으면서 오늘은 무엇을 할까 생각한 끝에 해수욕을 하러 가기로 했다. 항구에 있는 해수욕장으로 가려고 나는 전차 를 탔다. 거기서 즉시 바닷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젊은이들이 많았다. 전에 우리 회사의 타 이피스트로 있었던 마리 카르도나를 거기서 만났다. 당시 나는 그녀에게 마음이 있었다. 그 녀 역시 그런 것 같았다. 그러나 얼마 뒤에 그녀는 회사를 그만두어 우리는 만날 기회를 갖 지 못했다. 나는 그녀가 부표 위로 오르는 것을 거들어주었는데 그러면서 내 손이 그녀의 가슴에 가 닿았다. 그녀가 부표 위에서 배를 깔고 엎드렸을 때도 나는 그냥 물속에 있었다. 그녀는 내쪽으로 몸을 돌렸다. 머리카락이 눈 밑으로 흐트러졌는데 그녀는 웃고 있었다. 나 는 부표 위에 있는 그녀의 곁으로 올라갔다. 왜 그런지 그저 좋았고 희롱을 하는 것처럼 나 는 머리를 뒤로 젖혀 그녀의 배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기에 나는 그대 로 그렇게 하고 있었다. 온 하늘이 나의 눈 속에 들어왔다. 푸른 하늘은 황금빛이 돌고 있었 다. 목덜미 밑에서 마리의 배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내게 느껴졌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 렇게 부표 위에서 어렴풋이 잠이 들어 있었다. 햇볕이 너무 뜨거워지자 마리가 물 속으로 뛰어들어 나도 따라 들어갔다. 나는 그녀의 곁으로 가서 팔로 허리를 감고 같이 헤엄을 쳤 다. 마리는 줄곧 웃고 있었다. 물가로 나와 우리들이 몸을 말리고 있을 동안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당신보다도 내가 더 검은데요." 나는 그녀에게 저녁에 영화구경을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웃으면서 페르낭델이 주연한 영화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들이 옷을 다 입었을 때 내가 검은 넥타이를 매고 있는 것을 보고 마리는 매우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상 중이냐고 물었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대답했다. 언제 그렇게 되었는가 알고 싶어하 기에 나는 "어제" 라고 대답했다. 그런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할까 했으나 그런 소리를 사장 에게도 한 일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고 그만 두었다. 그런 말을 해보았자 무의미한 일이었다. 어차피 말이란 좀 틀어지게 마련이다. 마리는 저녁에는 모든 일을 다 잊어버렸다. 영화는 때때로 웃기기는 했지만 너무나 싱거웠다. 마리는 다리를 내 다리에 기대고 있었 다. 나는 그녀의 젖가슴을 어루만졌다. 영화가 끝날 무렵 키스를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영 화관을 나와 그녀는 내 집으로 왔다. 내가 눈을 떴을 때 마리는 가고 없었다. 그녀는 아주머니한테 가야 한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날이 일요일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기분이 얹짢았다. 그래서 나는 자리 속에서 몸을 뒤치락거리며 마리의 머리카락이 남겨두고 간 소금 냄새를 길다란 베게 속에서 찾아보 려고 했다. 그러고는 10시까지 잤다. 그러고 나서 침대에 누운 채 담배를 피우면서 12시까지 있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셀레스트네 레스토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싶지 않았다. 레스토랑 사람들이 던절 여러 가지 질문에 대꾸하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나는 달걀을 부쳐도 빵도 없 이 접시에다 입을 대고 먹었다. 빵이 없는 걸 알면서도 사러 내려가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고 나니 심심해서 집안을 서성거렸다. 어머니가 있을 때는 알맞은 아파트였다. 그러나 지금 내게 너무 커서 식당의 테이블을 내 방으로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방 만 사용한다. 약간 찌그러진 의자들과 유리가 누렇게 된 옷장과 화장대와 그리고 구리 침대 사이에서 살고 있을 뿐이다. 그 외에는 모두 버려둔 채로 있다. 조금 뒤에 나는 할 일이 없 어서 묵은 신문을 한 장 들고 읽었다. 류센 향염 광고를 오려서 재미있는 기사들을 모아두 는 공책에다 그것을 붙였다. 나는 또 손을 씻고는 발코니에 나가 앉았다. 내 방은 교외의 한길로 향하고 있다. 오후의 날씨는 아름다웠다. 그러나 길은 끈적거렸고 행인들은 적었으나 빨리 걷고 있었다. 먼저 산책가는 가족들이 지나갔다. 바지가 무릎 밑까 지 내려와 덮인 해군복을 입고, 풀기를 먹인 옷 때문에 두 소년은 거북해 보였다. 다음으로 는 커다란 리본을 달고 칠피구두를 신은 소녀와 그 뒤로 자줏빛 옷을 입은 뚱뚱한 어머니 와, 후리후리한 키의 남자로 얼굴만은 나도 알고 있는 그의 아버지가 따랐다. 그는 나비 모 양의 끈이 달린 밀짚 모자를 쓰고 손에는 단장을 짚고 있었다. 그의 아내와 함께 그를 보면 서 사람들이 왜 그를 보고 신수가 훤한 사람이라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조금 뒤에 교외의 젊은이들이 지나갔다. 모두들 머리에는 기름을 바르고, 붉은 넥타이에 몸에 꼭 맞는 웃옷에 는 수를 놓은 장식 손수건을 꽂고 코가 네모진 구두를 신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시내로 영 화구경을 가는 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일찍 길을 떠나 소 리 높여 웃으면서 전차를 타고 서둘러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지나간 뒤에 길에는 점점 인기척이 없어졌다. 아마 어디에서나 구경이 시작된 모 양이었다. 이제 길에는 가게를 보는 주인들과 고양이들이 있을 뿐이었다. 길가에 늘어선 가 로수 위로 보이는 하늘은 맑았으나 빛이 쏟아지지는 않았다. 맞은편 인도 위에는 담뱃가게 주인이 의자를 거꾸로 타고 앉아 등받이 위에 두팔을 괴고 있었다. 조금 전에는 터질 듯이 들어찼던 전차들도 지금은 거의 비었다. 담뱃가게 주인 옆에 있는 조그만 카페 '피에로'에서 는 보이가 텅 빈 가게 안을 쓸고 있었다. 정말 일요일이었다. 나도 의자를 돌려서 담뱃가게 주인처럼 놓았다. 그것이 더 편하게 생각됐기 때문이다. 나 는 담배를 두 대 피우고 나서 방안으로 들어가 초콜렛을 한 조각 가지고 창 앞으로 돌아와 먹었다. 점점 어두워져서 여름 소나기가 올 것 같았다. 그러나 하늘은 다시 차차 개었다. 그 래도 구름이 지나가며 길 위에 비를 예고하는 듯한 빛을 남겨 놓아 거리는 어스름했다. 나 는 오랫동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5시에 전차들이 요란하게 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발판이며 난간에까지 매달린 구경꾼들이 야외 경기장에서 싣고 오는 것이었다. 그 다음 전차는 운동선수들을 싣고 왔는데 손에 든 보스턴백으로 미루어 그들이 운동선수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고함을 지르며, 그들의 팀 은 결코 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있는 힘을 다해 소리 높이 노래를 불렀다. 몇몇 사람은 나에 게 손짓을 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우리가 이겼어!" 하고 나에게 소리치기까지 했다. 그래 서 나는 머리를 끄덕여 그러냐는 표시를 했다. 그때부터 버스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해는 조금 더 기울어졌다. 저녁이 되면서 지붕들 위에서 하늘은 불그스름해지고 시가지는 활기를 띠었다. 행인들은 점점 늘어났다. 사람들 속에서도 그 기품 있는 신사가 눈에 띄었 다. 어린애들은 울거나 손목을 잡혀 끌려오고 있었다. 뒤이어 영화관에서 구경꾼들이 왁 쏟 아져 나왔다. 구경꾼들 가운데 젊은이들은 여느 때보다 대담한 몸짓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활극영화를 구경하고 나오는 것이로구나 생각했다. 시내 영화관으로부터 돌아오는 사 람들은 조금 뒤에 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까보다 좀 신중해 보였다. 아직도 웃고는 있었으 나 이따금 그랬을 뿐, 피로해 보이고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그들은 맞은편 인도 위 를 서성거렸다. 모자를 쓰지 않은 이 동네의 젊은 여자들이 서로 팔장을 끼고 걸어왔다. 젊 은이들이 나란히 서서 그녀들과 마주 지나치며 희롱을 하자, 여자들은 고개를 돌리고 웃었 다. 그중 내가 아는 몇몇 여자들은 나에게 손짓을 했다. 그때 갑자기 가로등이 켜지며, 어둠 속에 떠오르던 첫별들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그처럼 사람들과 빛깔이 바뀌는 인도를 바라보고 있으니 눈이 피로했다. 가로등은 눅진한 보도를 비추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전차들은 반짝거리는 머리카락, 웃음띤 얼굴, 혹은 은팔목 시계 에서 반짝거리는 빛을 반사시켰다. 조금 뒤에 전차들의 간격이 점점 뜸해지고, 밤이 나무들 과 가로등 위에 이미 드러워짐에 따라 거리는 차츰 텅 비어 갔다. 다시 쓸쓸해진 길을 고양 이가 천천히 건너가는 시각이 되었다. 그때야 나는 저녁을 먹어야 할 것을 생각했다. 오랫동 안 의자 등받이에 턱을 괴고 있었기 때문에 목이 좀 아팠다. 나는 빵과 젤리를 사 가지고 올라와서 요리를 해서 서서 먹었다. 다시 창 앞으로 가서 담배를 한 대 피우려고 했으나 바 람이 차가워 좀 싸늘했다. 나는 창문을 닫고 방안으로 들어오며 거울 속으로 알코올 램프와 빵조각이 놓여 있는 테이블 한끝을 보았다. 그때 나에겐 일요일이 또 하루 지나갔고 어머니 의 장례식도 이제는 끝나고, 내일은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고, 그러니 결국 달라진 것은 아 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3 오늘 나는 회사에서 일을 많이 했다. 사장은 친절했다. 그는 나에게 너무 피곤하지 않으냐 고 물었고, 어머니의 나이를 알고 싶어했다. 나는 틀리게 대답하지 않으려고, "한 60정도"라 고 말했다. 왜 그런지 알 수는 없었으나 사장은 한시름 덜었다는 듯한, 그리고 그건 이미 지 나간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눈치였다. 나의 사무책상 위에는 선하증권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는데 일일이 읽어보아야만 했다. 점심을 먹으러 회사를 나오기 전에 나는 손을 씻었다. 정오의 이 시간을 나는 좋아한다. 저 녁때에는 수건이 눅눅해져서 불쾌하다. 온종일 같은 수건을 쓰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느 날 나는 그러한 이야기를 사장에게 한 일이 있었다. 사장의 대답은 그도 그것 을 유감스럽게 생각은 하지만 그러나 그건 지엽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나는 평소보다 조금 늦은 12시 30분에 운송과에 근무하는 엠마누엘과 함께 회사를 나왔다. 회사는 바다로 향해 있어서 우리들은 잠시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항구에 머물러 있는 화물선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화물 자동차 한 대가 쇠사슬 소리와 엔진 소리를 요란스럽게 내면서 달려왔다. 엠마누엘이 나에게 저기에 탈까!" 하고 물었다. 그래서 나도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자동차 가 우리들을 지나쳐버리자 우리는 뒤를 따라 달려갔다.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다 만 기중기, 또 다른 기계들, 수평선 위에서 춤추는 돛대 옆을 지나치는 선체들 가운데서 그 저 막 달리는 육체의 약동을 느낄 뿐이었다. 내가 먼저 매달려 가면서 뛰어올라탔다. 그러고 는 엠마누엘이 올라오는 것을 거들어주었다. 우리들은 숨이 찼다. 자동차는 부두의 고르지 못한 보도 위로 먼지가 자욱한 햇빛 속을 흔들거리며 달렸다. 엠마누엘은 허리가 끊어지게 웃었다. 우리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셀레스트네 레스토랑에 이르렀다. 흰 수염을 기른 셀레스트 는 뚱뚱한 배에다 앞치마를 두르고 변함없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나에게 "많이 상심했지?" 하고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대답하고, 배가 고프다고 말했다. 나는 얼른 먹고 나서 커피를 마셨다.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와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셨던 탓으로 잠깐 잠이 들었다. 잠이 깨니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늦어서 전차를 타러 뛰어갔다. 오후 내내 일을 했다. 회사 안은 몹시 더웠다. 저녁에 퇴근하면서 부둣가를 따라 천천히 걸어 돌아올 때는 유쾌했다. 하늘은 푸르고 마음은 즐거웠다. 그러나 나는 삶은 감자 음식을 준비하려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컴컴한 계단을 올라가다가 나와 같은 층에 사는 살라마노 영감과 부딪쳤다. 영감은 개를 데리고 있었다. 8년 번부터 영감과 개는 늘 함께 보인다. 그 스파니엘종 개는 내가 알기에는 피부병을 앓아 털이 거의 다 빠지고 온몸이 반점과 누르스름한 부스럼 투성이었다. 그 개와 단둘이 조그만 방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탓인지 살라마노 영감은 개와 모습이 비슷했다. 그 의 얼굴에는 불그스름한 딱지가 있고 누런 털이 성기게 났다. 개는 구부정한 걸음걸이와 앞 으로 내민 주둥이, 처진 목이 주인을 닮았다. 그들은 아무래도 한족속 같은데 서로 미워한 다. 하루에 두 번씩 11시와 6시에 영감은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선다. 8년 전부터 그들은 한 번도 산책길을 바꿔본 적이 없다. 언제나 리용 가에서 개가 늙은이를 끌고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기어코 살라마노 영감의 발부리가 땅에 부딪혀버리고 만다. 그러면 영감은 개를 때리고 욕지거리를 하는 것이다. 개는 무서워서 설설 기며 끌려간다. 이번에는 영감이 개를 끌고 갈 차례다. 개가 잊어버렸다가 다시금 앞서서 주인을 끌고, 그러면 또 매를 맞고 욕을 먹는다. 그때는 둘이 다 멈춰서서 개는 공포에 떨며, 주인은 화가 나서 서로 노려본다. 매일 처럼 그 모양이다. 개가 오줌을 싸고 싶어할 때면 영감은 시간을 주지 않고 끌어당겨 개는 오줌방울을 찔끔찔끔 흘리면서 따라간다. 어쩌다가 개가 방안에서 오줌을 싸면 또 매를 맞 는다. 그러기를 이제는 8년이나 한 것이다. 셀레스트는 늘 하는 말이 "가엾다"고 하지만 사 실은 아무도 영문을 모른다. 내가 계단에서 그를 만났을 때, 살라마노는 개에게 욕지거리를 퍼붓고 있었다. "빌어먹을! 망할 자식!" 야단을 치고 개는 끙끙거렸다. 나는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했으나, 영감은 그냥 욕지거리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개가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대답이 없었다. 영감은 다만 "빌어먹을! 망할 자식!" 하고 말할 뿐이 었다. 그는 개에게 몸을 굽히고 있었는데 목걸이의 무엇인가를 고쳐주고 있었다. 나는 목소 리를 높여서 말해보았다. 그때야 그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복받치는 역정을 억지로 삼키 는 듯이, "아직도 안 가고 있군" 하고 대꾸했다. 그러고는 개를 잡아끌고 가버렸다. 개는 네 발로 끌려가면서 끙끙거렸다. 바로 그때, 나와 같은 층에 사는 또 한 명의 다른 이웃 사람이 들어왔다. 동네에서는 그가 여자들을 뜯어먹고 산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는 "창고감독" 이라고 대답한다. 대체로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가끔 그는 나에게 말도 걸고, 또 내가 그의 말을 들어주는 탓으로 내 방에 잠깐 들어와 있을 때도 있다. 그의 이야 기를 나는 재미있다고 생각하다. 그리고 그와 말을 하지 않을 하등의 이유도 없다. 그의 이 름은 레이몽 생테스라고 하는데 키가 퍽 작고 어깨가 바라졌으며 코는 마치 권투 선수 코 같다. 옷차림은 언제나 말쑥하다. 그도 역시 살라마노의 이야기를 하며 "참 가엾기 짝이 없 어요!" 하고 말했다. 그 꼴을 보면 넌더리가 나지 않느냐고 묻기에 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 했다. 우리들의 계단을 다 올라와서 막 헤어지려고 할 때, 그는 나에게 말했다. "저희 집에 소시 지와 술이 있는데 같이 좀 들지 않겠어요? 나는 그러면 음식을 준비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 라 생각되어 승낙했다. 그도 역시 방은 하나밖에 없고 창문 없는 부엌만을 쓰고 있었다. 그 의 침대 위에는 희불그름한 석고로 만든 천사와, 운동선수들의 사진과, 여자의 나체 사진이 두서너 장 걸려 있었다. 방안은 더럽고 침대는 어질러져 있었다. 그는 먼저 석유램프를 켠 다음 호주머니에서 몹시 헐름한 붕대 하나를 꺼내어 오른손을 싸맸다. 내가 그에게 손을 다 쳤느냐고 물었더니 어떤 녀석이 시비를 걸어서 그 녀석과 싸움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건 말입니다. 뫼르소 씨" 하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내가 마음이 악해서가 아니라 성 미가 급해섭니다. 그 녀석이 나에게 하는 말이, '사나이라면 전차에서 내려라' 그러지 않겠어 요. 나는 '괜한 쓸데없는 소리 말아' 하고 말했지요. 녀석이 나더러 사나이답지 못하다고 하 잖아요. 그래서 나는 내려가서 말했어요. '듣기 싫어. 잔소리 말아. 그렇지 않으면 본때를 보 여줄테니' '본때는 무슨 본때야' 하고 녀석은 대꾸를 하더군요. 그래서 한 대 갈겼지요. 그랬 더니 나자빠지길래 일으켜주려니까 녀석은 땅에 자빠져서 발길질을 합디다. 그래 무릎다짐 을 한 번 하고 두어 번 발길질을 했찌요. 녀석은 얼굴이 피투성이가 됐어요. 나는 그 녀석에 게 '그만큼 혼났으면 됐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런 말을 하면서 생테스는 붕대를 감고 있었다. 나는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싸움을 건 게 아니었어요. 그 녀석이 버릇없이 굴다가 그랬던 겁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정말 그렇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마침 나에게 그 사건에 관해서 충고를 청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나는 사나이다워서 세상 물정을 잘 알테니 자기를 도와줄 수 있겠느 냐면서 그렇게 되면 그는 나의 친구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나에게 자기와 친구가 되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그래도 좋다고 말했더니 그는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그는 소시지를 꺼내서 굽고, 컵, 접시, 스푼, 그리고 포도주 두 병을 늘어놓았다. 이 일을 하는 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고 나서 우리들은 자리를 잡고 앉았 다. 먹으면서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약간 망설이는 말투였다. "어떤 여자를 내 가 알게 되었는데... 이를테면 나의 정부였지요" 그와 싸움을 한 사나이는 그 여자의 오라비 라는 것이었다. 그가 여자의 살림을 대주었다는 말도 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으 나, 그는 곧 덧붙여 동네 사람들이 자기를 뭐라고 말하는지 알고 있지만 양심에 거리낄 것 은 조금도 없고 자기는 창고감독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내가 속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는 여자에게 생활비를 대주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손수 여자의 방세를 치러주고, 식사비로 하루에 20프랑씩 주고 있었다. "방세가 300프랑, 식비가 600프랑, 이따금 양말 한 켤레도 사 주니까 한 1,000프랑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년은 일도 하지 않고 내게 한다는 말이, 그것으 로는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을 뿐이어서 내가 대주는 것으로는 도저히 생활을 할 수 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그렇지만 나는 이렇게 말했어요. '왜 반나절이라도 일을 안 해? 그러 면 내 부담도 퍽 덜겠는데, 이 달에 소용될 것은 모두 사주었고 하루에 20프랑씩 용돈도 주 고 방세도 지불했잖아. 그런데 너는 오후에 친구들과 커피나 마셔대고 있어. 네 친구들에게 커피와 설탕을 내놓는 건 너지만, 돈은 내가 낸단 말야. 난 너에게 잘해주었는데 너는 내게 그렇질 못하단 말이야." 그래도 그년은 일을 하지 않고 생활할 수가 없다고 그냥 고집을 부 리고 있었어요. 그러던 끝에 내가 속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여자의 핸드백 속에서 복권 한 장을 발견했는데, 여자는 그것을 어떻게 샀는지 자기 에게 설명하지 않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조금 뒤에는 여자의 방에서 전당표 쪽지를 한 장 발견했는데 그걸 보면 팔찌 두 개를 잡힌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그는 그 팔 찌들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속고 있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어요. 그래서 그 여자와 관계를 끊었습니다. 그러나 먼저 그년을 때려주었지요. 그리고 사실대로 죄다 이야기를 했습니다. 네까짓 건 그걸 가지 고 노는 것밖엔 바라지 않는 년이라고 말해주었어요. '네가 내게서 받는 행복을 사람들이 부 러워하고 있는 것을 몰라. 좀 있으면 지난날의 행복을 알게 될 테니 두고 봐'" 그는 피가 나도록 여자를 때렸다고 했다. 그 전에는 여자를 때리는 일이란 없었다는 것이 다. "전혀 손을 안 댄 것은 아니지만, 말하자면 부드럽게 톡톡 건드리는 정도였어요. 그러면 그년은 소리를 지르곤 했지요. 나는 문을 닫아버리고 결국은 늘 마찬가지로 끝나곤 했어요. 그렇지만 이번엔 본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로서는 그년을 좀더 혼을 내줘야겠어요." 그러더니 그는 나에게 그렇기 때문에 충고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러고는 그을음이 나 는 램프의 심지를 조절하려고 일어섰다. 나는 줄곧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술을 거의 한 병이나 마셨기 때문에 관자놀이가 몹시 달아올랐다. 내 담배가 떨어져서 나는 레이몽의 담배를 피웠다. 마지막 전차들이 교외로 가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레이몽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를 난처하게 만드는 일은 '그가 아직도 그 여자와의 정사에 약간 미련을 갖고 있다'고 말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혼을 내주어야겠다는 것이었다. 먼저 그는 계집을 호텔로 데려다놓고 풍기 단속 순경을 불러다가 스캔들을 일으켜서 계집을 카드에 오르게 할 생각을 했었다. 그러고 나서 그의 친구인 난봉꾼들에게 이야기를 해봤지만 그들은 별로 좋은 방법 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사실 레이몽이 나에게 말한 것처럼 난봉꾼이란 위인들이 그런 것 하 나쯤 몰라서야 말도 안되었다. 레이몽이 그런 말을 하니까 그들은 여자의 '얼굴을 찢어버리 면 어떠냐'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좀더 잘 생각해봐야겠다 고 했다. 그러나 먼저 나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것을 물어보 기 전에 그 이야기를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했다. 나는 별로 생각하는 바도 없 지만 어쨌든 재미 있는 이야기라고 대답했다. 그가 자신이 속고 있었다고 생각하느냐고 묻 기에 생각을 해보니 과연 속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혼을 내주어야 하는데 그럴 경우 나 같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물음에 나는 어떻게 할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여자를 혼 내주겠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또 술을 마셨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 고 나서 자기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그는 여자에게 '발길로 차버리는 뜻의 그러나 동시에 여 자의 육욕을 도발시킬 만한 사연을 섞어서' 쓴 편지를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여자가 돌아오게 될 테니까 그때는 여자와 함께 잠자리에 들고는 '일이 바로 끝나갈 무렵에' 여자의 낯짝에다 침을 뱉어주고는 밖으로 내쫓아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정말 여자에게는 벌주는 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레이몽은 자기는 적당한 편지를 쓸 수가 없 을 것 같아서 편지를 꾸미는 것을 나에게 부탁할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니까 그는 나에게 지금 당장 그 편지를 쓰는 것은 귀찮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렇지도 않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술을 한 잔 마시고 일어서서 접시들과 먹다 남은 소시지를 옆으로 밀어놓았 다. 그러고는 탁자의 고무받이천을 정성스럽게 닦고 나서 나이트 테이블 서랍에서 원고지 한 장과 노란 봉투, 붉은 나무 철필과 보랏빛 잉크가 든 네모진 잉크병을 꺼냈다. 여자의 이 름을 들어보니 무어인이었다. 나는 편지를 썼다. 되는 대로 쓰기는 했지만 그래도 레이몽의 마음에 들도록 애썼다. 왜냐하면 나는 레이몽의 마음에 들지 않게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리를 높여 그것을 읽었다. 레이몽은 담배를 피우며 머리를 끄덕거리면서 듣고 있더니 다시 한번 읽어달라고 했다. 그는 매우 흡족해했다. "자네가 세상 물정에 밝다 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어" 하고 그는 말했다. 처음엔 그가 나에게 자네라고 말한 것을 무 심히 듣고 있었으나 "이제 자넨 내 친구야" 하고 그가 말했을 때에야 나는 비로소 그 말에 놀랐다. 그는 거듭 그렇게 말했고, 나는 "그야 그렇지" 하고 대답했다. 나로서는 그의 친구 라고 해도 무방한 일이었고, 그는 정말로 나와 친구가 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는 편지를 봉하고 우리는 남은 술을 마저 마셨다. 그러고는 잠시 서로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밖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하여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너무 늦었는데" 하고 나 는 말했다. 그는 시간이 빨리 지나가버린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어떤 의미로는 그렇다고도 할 수 있었다. 나는 졸음이 왔지만 일어서기가 거북했다. 내가 피곤하게 보였던지, 레이몽은 나에게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말했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나에게 어 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알았다는 이야기와 그러나 그것은 어차피 한 번은 당해야 할 일이라 는 말을 했다. 내 의견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일어섰다. 레이몽은 굳게 내 손을 움켜쥐고, 사나이끼리는 언제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방을 나서자 나는 문을 닫고 층계참 위 어둠 속에 잠시 서 있었다. 집안은 고 요하고, 계단 밑으로부터 우중충하고 습한 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귀밑의 핏줄이 뛰는 소 리밖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그냥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살라마노 영감 방에서 개가 끙끙거리는 소리가 나직이 들려왔다. 4 한 주일 동안 나는 줄곧 일을 많이 했다. 레이몽이 와서 그 편지를 보냈다고 말했다. 엠마 뉴엘과 함께 영화구경을 두 번 갔는데, 엠마뉴엘은 스크린 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무엇 인지 이해 못하는 때가 가끔 있다. 그러면 설명을 해주어야 한다. 어제는 토요일이라 약속대 로 마리가 찾아왔다. 나는 심한 성욕을 느꼈다. 마리가 붉고 흰 줄무늬 있는 아름다운 옷을 입고 가죽 샌들을 신고 있었기 때문이다. 탄력이 있어 보이는 젖가슴이 완연히 드러나 보이 고, 햇볕에 그을은 얼굴이 꽃처럼 아름다웠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알제리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바닷가로 갔다. 그곳은 사방이 바위가 솟고 기슭에는 갈대가 우거진 바닷가였 다. 4시의 태양은 그다지 뜨겁지는 않았으나 물은 미지근했고 길고 게으른 듯하게 퍼지는 물결이 나직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마리가 놀이를 하나 가르쳐주었다. 헤엄을 치며 파도가 치는 꼭대기에서 물을 들이마셔 입속에 거품을 가득 채운 다음, 똑바로 누워서 하늘을 향해 그것을 내뿜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물거품으로 만든 레이스가 되어서 공중으로 사라지기 도 하고, 미지근한 보슬비처럼 얼굴 위로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잠시 후에는 입 속이 짜 서 얼얼해졌다. 그러자 마리가 다가와 물속에서 나에게 달라붙었다. 마리는 자기의 입술을 내 입에 갖다댔다. 그녀의 혀가 내 입술에 산뜻하게 닿았다. 잠시동안 우리는 물속에서 뒹굴 었다. 바닷가로 나와서 옷을 갈아입을 때 마리는 빛나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키 스를 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러고는 급 히 버스를 잡아타고 돌아왔다. 우리는 방안으로 들어서자 곧 침대 위로 뛰어들었다. 나는 창 문을 열어놓았었다. 여름밤이 우리들의 검게 그을은 육체 위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어 참으로 유쾌했다. 오늘 아침, 마리는 그대로 머물러 있어서 나는 아침을 같이 먹자고 말해놓고 고기를 사러 내려갔다. 돌아오니, 레이몽의 방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뒤에는 살라마노 영감 이 개에게 욕지거리를 해대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계단 위에서 구두창 소리와 개 발톱 소리 가 나더니 "빌어먹을, 망할자식!"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거리로 나갔다. 영감 이야기 를 마리에게 해주었더니 마리는 웃었다. 마리는 내 파자마를 입고 소매를 걷어올리고 있었 다. 그녀가 웃었을 때 나는 또 성욕을 느꼈다. 조금 뒤에 마리는 나에게 자기를 사랑하느냐 고 물었다. 그런 것은 아무 쓸데 없는 말이지만 사랑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나는 대답 했다. 마리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침을 준비하면서 아무 이유도 없이 허리가 끊어 지게 웃기에 나는 또 키스를 했다. 바로 그때 레이몽의 방에서 말다툼하는 소리가 터져나왔 다. 먼저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리더니, 레이몽이 "네가 나를 골탕먹이려고 했지, 나를 골탕먹였어. 골탕먹이려다가 맛이 어떤가 좀 봐."하는 소리가 들렸다. 툭툭 무슨 소리가 나 고, 여자 비명 소리가 들렸는데 하도 처참한 소리여서 층계참에는 곧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마리와 나는 복도로 나갔다. 여자는 그냥 소리를 지르고 레이몽은 그냥 때리는 것이었다. 마 리는 사태가 험악하다고 말했으나,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에게 경찰을 불 러오라고 했으나, 나는 경찰이 싫다고 말했다. 그러나 3층에 사는 납땜쟁이와 함께 경찰 한 사람이 들어왔다. 경찰이 문을 두드렸으나 아무 대답도 없었다. 더 크게 두드리자 조금 있더 니 여자의 울음 소리가 들리고 레이몽이 문을 열었다. 그는 입에 담배를 물고 유순한 태도 였다. 여자가 문으로 뛰어나와 경찰에게 레이몽이 때렸다고 말했다. "이름이 뭐지?" 하고 경 찰이 물었다. 레이몽은 망설이고 나서 나를 쳐다보더니 담배를 입에 문 채 서 있었다. 그러 자 경찰은 두꺼운 손바닥으로 레이몽의 따귀를 힘껏 후려갈겼다. 레이몽은 안색이 변했으나 당장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공손한 목소리로 꽁초를 주워도 괜찮으냐고 물 었다. 경찰은 그러라고 하면서 "다음부터는 경찰이 웃음거리가 아니라는 걸 알도록 해."하고 덧붙여 말했다. 그동안 여자는 계속해서 울면서 "날 때렸어요. 아주 망나니에요." 하고 몇 번이나 말했다. "경찰관님" 하고 이번에는 레이몽이 말했다. "남자에게 망나니라는 말을 해 도 된다는 게 법률에 있습니까?" 경찰은 "잔소리 말아!" 하고 호통을 쳤다. 그러자 레이몽은 여자에게로 고개를 돌리고는 "가만 있어, 이년아, 다시 만나지 않을 줄 알아?" 하고 말했다. 경찰은 레이몽에게 잔소리를 그치라고 한 다음, 여자보고는 가라고 하고 레이몽은 방으로 가서 경찰서의 소환을 기다리라고 말했다. 그는 덧붙여서 레이몽에게 그렇게 몸이 떨리도록 술에 취했으면 부끄럽게 생각하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레이몽은 해명을 했다. "나리, 나는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나리 앞에 서 있으니 떨릴 뿐이죠. 별도리가 있습니 까?" 그는 문을 닫아버렸고 구경꾼들도 다 가버렸다. 마리와 나는 아침 준비를 끝마쳤으나, 그녀는 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해서 나 혼자서 거의 다 먹었다. 마리는 1시에 가 버리고 나는 잠깐 잠을 잤다. 3시경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레이몽이 들어왔다. 나는 누워 있었다. 레이몽은 내 침대가에 앉았다.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그의 일이 어찌되었는가 물었다. 그는 계획 대로 했는데 그년이 따귀를 때리기에 패준 것이라고 말했다. 그 뒤의 일은 내가 목격한 대 로였다. 나는 그에게, 이제는 여자가 혼이 났을 테니까 그것으로 만족하라고 말하자 그의 의 견도 역시 그렇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제아무리 경찰이 뭐라고 해보았댔자 계집이 당 한 꼴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는 또 자기는 경찰들의 심리를 알고 있는데 그 들을 대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고는 경찰이 따귀를 붙인 것에 그가 응수하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 다고 대답했고 도대체 경찰이란 것을 나는 싫어한다고 말했다. 레이몽은 매우 만족한 눈치 였다. 그가 함께 나가지 않겠느냐고 하기에 나는 일어나서 머리를 빗었다. 그때 그는 자기의 증인이 되어주어야 되겠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래도 좋았으나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 다. 레이몽에 의하면 여자가 그에게 버릇없이 굴었다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나 는 그의 증인이 되기를 승낙했다. 우리는 밖으로 나갔다. 레이몽이 권하여 브랜디를 마셨다. 그러고는 당구를 한 판 쳤는데 나는 잘 되지 않았다. 그 다음에는 창녀집에 가자고 했지만 나는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 까닭에 싫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천천히 집으로 돌아왔다. 레이몽은 여자를 혼내줄 수 있 어서 참으로 만족하게 여기고 있다는 말을 했다. 나에게는 그가 매우 다정스럽게 대해주는 것 같았고 그렇게 지내는 시간이 유쾌하게 여겨졌다. 멀리서 살라마노 영감이 흥분한 듯한 모양으로 문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가 니 그는 개를 데리고 있지 않았다. 그는 이리저리 사방을 둘러보더니 두서 없는 말을 중얼 거리며 컴컴한 복도를 들여다보고는 다시 그 충혈된 눈을 두리번거리며 길가를 훑어보는 것 이었다. 레이몽이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망할자식!" 하 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개가 어디 있느냐고 내가 물으니까 느닷없이 달아 났다고 대답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도 그 놈을 연병장 에 데리고 갔었지요. 노점들 근처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요. 나는 '탈주왕'이라는 간판이 붙은 것을 보려고 잠시 멈추었습니다. 보고나서 가려고 하니 그놈이 없어졌어요. 미리 좀 꽉 끼는 목걸이를 사주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 빌어먹을 자식이 그렇게 도망쳐버리라고 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레이몽이 개가 아마 길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르니까 그러면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고, 주인 을 찾아오기 위해서 수십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온 개가 있었다는 예까지 들어서 설명 을 했지만 영감의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잡혀버리고 말 것이오. 누가 그걸 갖다 길러준 다면 또 몰라도, 그럴 수도 없을걸. 그렇게 헌데투성이니까 어디 좋아할 사람이 있을라구? 경찰에게 잡히고 말 겁니다. 틀림없어요." 나는 그에게 경찰서의 계류장으로 가보는 것이 좋 겠다는 것과 벌금을 내면 개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영감은 돈을 많이 내야 되 냐고 물었으나 나는 알 리가 없다. 그러더니 영감은 성을 내며 "그 빌어먹을 자식 때문에 돈을 내다니. 아아, 죽어버리라지!" 하며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레이몽은 웃으며 집으로 들어섰다. 나도 그의 뒤를 따라 우리는 이층 층계참 위에서 헤어졌다. 조금 뒤에 영감의 발 소리가 나더니 내 방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 주니까, 그는 잠시 문간에 서 있다가 "용서하 십시오, 용서하세요." 하고 말했다. 안으로 들어오라고 권했으나, 그는 들어오려고 하지 않고 구두 끝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흠집투성이 손이 떨렸다. 얼굴을 숙인 채 그는 나에게 물었다. "개를 빼앗진 않겠지요, 뫼르소 씨. 돌려줄 테지요. 그렇지 않으면 난 어떻게 되겠어 요?" 나는 계류장에는 주인이 찾아갈 수 있도록 사흘 동안 개를 묶어두는데, 사흘이 지나면 적당히 처분해버린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아무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말했다. 그는 자기 방문을 닫았다. 영감이 자기 방안에서 왔다갔다하는 소 리가 들렸다. 그의 침대가 삐걱거렸다. 벽을 통해 들려오는 어렴풋한 야릇한 소리로 나는 그 가 울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왜 어머니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에는 일 찍 일어나야 했다.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 나는 저녁도 먹지 않고 잤다. 5 레이몽이 회사로 전화를 했다. 그의 친구의 한 사람이(그 친구에게 내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알제리 근처의 조그만 별장에서 일요일 하루를 지내는데 나를 초대한다는 말이었 다. 나는 그러고 싶지만 여자친구와 만날 약속이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레이몽은 그 여자 친구도 같이 오라는 것이었다. 그 친구의 부인은 남자들 가운데 여자라곤 자기 혼자뿐이기 때문에 매우 좋아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들에게 전화가 걸려오는 것을 사장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 는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그러나 레이몽은 조금 기다리라고 하더니 이런 초대는 저녁에라 도 전할 수 있지만, 그보다도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그런다고 했다. 그는 하루종일 옛날 정 부의 오빠가 섞인 아랍인 패에게 미행당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오늘 저녁 퇴근하는 길 에 집 근처에서 그놈들을 보거든 내게 좀 알려줘."하고 말했다. 나는 그러마고 대답했다. 조금 뒤에 사장이 나를 불렀다. 전화는 조 삼가고 좀더 열심히 일하라는 말이겠지 생각하 니 갑자기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아직 막연하지만 어 떤 계획에 대해서 나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는 다만 그 문제에 관해서 내 의견을 들어볼 생각이었다. 파리에다 출장소를 설치하여 현지에서 직접 큰 회사들과 거래하 려고 하는데 그리로 갈 생각은 없느냐고 내 의향을 타진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파리에서 생 활할 수 있을 것이고 일년에 얼마 동안은 여행을 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자넨 젊으 니까, 그런 생활이 자네 마음에 들 걸세." 나는 그렇기는 하지만 결국 이러나저러나 내게는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사장은 생활의 변화에 흥미를 느끼지 않느냐고 묻기에, 사람이란 생활 을 바꿀 수는 결코 없는 노릇이고, 어쨌든 어떤 생활이든지 다 그게 그거고, 또 나는 이곳에 서의 생활을 조금도 불만스럽게 생각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는 좋아하지 않는 눈치를 보 이며 하는 말이, 나는 대답을 한다는 것이 언제나 딴전이고, 나에게는 야심이 없어서 사업에 큰 지장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을 하려고 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사장의 비위를 거 스르고 싶지는 않았으나, 내 생활을 바꿔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봐도 나는 불행하진 않았다. 학생 때에는 그런 종류의 야심도 많이 있었지만 학업을 포기하 지 않을 수 없었을 때 그러한 것이 실제로는 아무런 중요성도 없다는 것을 나는 곧 깨달았 던 것이다. 저녁에 마리가 찾아와서 자기와 결혼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건 아무래도 좋 지만 마리가 원한다면 결혼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어떤지 알고 싶어했다. 나는 이미 한 번 말했던 것처럼 그건 아무 뜻도 없는 말이지만 아마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왜 나하고 결혼을 해요?" 하고 마리는 말 했다. 나는 그건 아무 중요성도 없는 것이지만 정 원한다면 결혼해도 좋다고 설명했다. 그리 고 결혼을 요구한 것은 그편이고 나는 승낙을 했을 뿐이다. 그때 마리는 "결혼은 중대한 일 이에요."라고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잠시 말없이 나 를 쳐다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자기처럼 관계를 가진 다른 여자가 같은 청혼을 해도 승 낙을 했을 것인가를 그녀는 알고 싶어했다. 나는 "물론"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마리는 자기 가 나를 사랑하는지 어떤지를 생각해보는 듯했으나, 나는 그 점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 길 이 없었다. 잠시 또 묵묵히 있다가 그녀는, 나를 이상한 사람이고 아마 그 때문에 자기는 나 를 사랑하지만 바로 그같은 이유로 내가 싫어질 때가 올지도 모른다고 했다. 더 할 말이 없 어 덤덤히 있으니까 마리는 웃으면서 내 팔을 붙들고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언제든지 그녀가 원하면 곧 결혼을 하자고 대답했다. 그리고 사장의 제안을 이야기해주니까 마리는 파리를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잠시 파리에서 살아본 일이 있다고 말했더니 어떻더 냐고 물었다. "더러워. 비둘기들이 많고 안뜰들은 어둡고 사람들은 모두 피부가 희지." 그러고 나서 우리들은 한길을 택하여 거리를 거닐었다. 여자들은 아름다웠다. 나는 마리에 게 그렇게 생각지 않느냐고 물었다. 마리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고 말했다. 잠시동안 우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그녀가 나와 함께 있어 주었으 면 싶어서, 셀레스트네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같이 먹으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마리는 그러 고 싶지만 볼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내 집 근처에서 나는 그녀에게 잘 가라고 인사를 했다. 그녀는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무슨 볼일이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아요?" 그것을 알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생각을 미처 못했을 뿐이었는데 마리는 그것을 나무라는 눈치 였다. 그러고는 어색한 내 표정을 보고 다시 웃더니 불쑥 앞으로 다가오며 나에게로 입술을 내밀었다. 나는 셀레스트네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막 먹기 시작했을 때 어떤 이상하고 키 작 은 여자가 들어와서 내 테이블에 앉아도 되느냐고 물었다. 물론 앉아도 좋다고 나는 말했다. 몸짓은 앙증스럽고, 사과 같은 얼굴에 눈이 빛나고 있었다. 자켓을 벗어버리고 열에 들뜬 듯 이 메뉴를 살펴보더니 셀레스트를 불러 곧 명확하고 빠른 목소리로 음식을 주문했다. 그러 고는 오르되브르를 기다리면서 핸드백을 열고 네모난 종이 한 장과 연필을 꺼내 미리 계산 을 하고는 지갑에서 팁까지 덧붙여 정확한 금액을 앞에 내놓았다. 오르되브르가 나오자 그 녀는 서둘러서 먹었따. 다음 요리를 기다리며 또 핸드백에서 파란 연필과 이 주일의 라디오 프로그램이 실려 있는 잡지를 꺼내 정성스럽게 하나씩 하나씩 거의 모든 방송에 표를 했다. 잡지는 12페이지나 되었으므로 그녀는 식사를 하는 동안 끝까지 세밀하게 그 일을 계속했 다. 내가 식사를 끝마쳤을 때도, 그녀는 여전히 열심히 표시를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일어 서서 꼭두각시 같은 몸짓으로 자켓을 입고 나가버렸다. 별로 할 일이 없었으므로, 나도 밖으 로 나가서 여자의 뒤를 잠시 따라갔다. 그녀는 보도 가장자리를 따라 믿을 수 없을 만큼 빠 른 속도와 정확한 걸음으로 옆으로 비키지도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으면서 제 갈 길만 가고 있었다. 마침내 나는 여자들 시야에서 놓쳐버려 갔던 길을 되돌아왔다. 이상한 여자라는 생 각이 들었지만 잊어버리고 말았다. 내 문 앞에 살라마노 영감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방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영감은, 개 보호 소에 가봤는데도 없으니 개는 결국 잃어버리고 만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그곳 사무원들은 아마 차에 치었을 거라고 말하더라는 것이었다. 경찰서측에서 그런 것도 모르냐고 하니까 매일처럼 있는 일이라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다고 대답하더라는 것이었다. 나는 살라마노 영감에게 다른 개를 기르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지만 영감은 그 개와 정이 들었다고 말했는 데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침대 위에 웅크리고, 살라마노는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노인은 나와 얼굴을 마주학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낡은 소프트를 쓴 채로였다. 누런 수염 밑으로 말을 씹어삼키듯이 중얼거렸다. 그와 대면하고 있기는 좀 거북했으나 그렇다고 별로 할 일 도 없었고 졸음도 오지 않았다. 무엇이든지 이야기하려고 나는 그의 개에 대해 물어보았다. 개를 기른 것은 그의 아내가 죽은 뒤부터라고 영감은 대답했다. 그는 꽤 늦게 결혼했다. 젊 었을 적에는 연극을 하고 싶어했다. 군에 있었을 때는 군인극 '보드빌'에 출연도 하곤 했다 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철도국에 근무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적으나마 지금은 연금을 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내와의 관계가 그리 행복하지는 못했으 나 대체로 보아 익숙하여 정이 들었던 편이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외로웠다. 그래서 개 한 마리를 작업장 동료에게 부탁해 아주 어린 놈을 얻어왔었다. 처음에는 우유를 먹여서 길렀다. 그러나 개의 수명은 사람의 수명보다 짧아 그들은 함께 늙게 된 것이다. "그 놈은 성미가 못되서 가끔 입에다 부리망을 씌우곤 했었지요." 하고 살라마노는 말했다. "그 렇지만 좋은 개였어요." 혈통이 좋은 개였다고 내가 말했더니 살라마노는 만족해했다. "게다 가," 하고 덧붙였다. "병에 걸리기 전에 보신 일이 없으시죠. 털이 정말 아름다웠어요." 개가 피부병에 걸린 다음부터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살라마노는 고약을 발라주었다. 그러나 그가 한 말에 의하면 사실은 노쇠한 것인데 노쇠란 고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때 내가 하품을 하자 노인은 가겠다고 말했다. 나는 좀더 있어도 괜찮다고 말하고, 개가 그렇게 된 것을 딱하게 생각한다고 했더니 그는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그 개를 귀여워했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불쌍한 어머니" 하고 말했다. 어머니 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 내가 매우 섭섭할 것이라고 그는 말했지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빠른 어조로 어색한 낯을 보이며, 동네에서는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낸 탓으로 나를 나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며 내가 어머니를 퍽 사랑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 때문에 내가 악평을 받고 있다는 것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나에게는 어머니를 돌보아드릴 만한 돈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양로원에 보낸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어머 니는 나와 할 말이 없어서 외롭고 적적해했는걸요."하고 덧붙였더니, 그는 "그럼요, 양로원 에선 친구라도 생기지요." 하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서 자려는 것이 었다. 이제 그의 생활은 변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그는 모르는 것 같았다. 그와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그는 슬그머니 나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내 손에 그의 피부가 비늘 처럼 느껴졌다. 그는 약간 웃어 보이고 방을 나서려다가 이렇게 말했다. "오늘밤은 개들이 제발 짖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 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늘 들어서요." 6 일요일은 좀처럼 잠에서 깨어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마리가 와서 내 이름을 부르고 흔 들어 깨워야만 했다. 우리는 일찍 해수욕을 하고 싶어서 아침도 먹지 않았다. 나는 속이 텅 빈 것 같고 머리가 조금 아팠다. 담배를 피워도 맛이 썼다. 마리는 나더러 '초상집에 간 사 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고 놀려댔다. 마리는 흰옷을 입고 머리카락을 풀어놓았다. 예쁘다 고 말하니까 그녀는 기뻐하며 웃었다. 내려오는 길에 우리는 레이몽의 방문을 두드렸다. 레이몽은 곧 내려온다고 대답했다. 길가 에 나서자 피로했던 탓과 또 덧문을 열어두지 않았던 탓으로 벌써 퍼질 대로 퍼진 햇볕이 마치 따귀를 때리듯 후려쳤다. 마리는 기뻐서 깡총거리며 날씨가 좋다고 몇 번이고 되풀이 하여 말했다. 나는 기분이 좀 나아졌고 배고프다는 것도 느꼈다. 그런 이야기를 마리에게 했 더니, 그녀는 우리들 두 사람의 수영복과 수건만 들어 있는 헝겊가방을 열어보였다. 기다리 는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레이몽이 그의 방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푸른 바지와 소 매가 짧은 흰 셔츠를 입고 있었다. 게다가 밀짚모자를 쓰고 있어서 마리는 우습다고 야단이 었다. 그의 팔목은 희었으나 시커먼 털로 덮여 있었다. 나는 그것이 좀 보기 싫었다. 그는 휘파람을 불면서 내려왔는데 아주 만족해하는 듯한 눈치였다. 레이몽은 나에게 "안녕한가" 하고 말한 다음, 마리를 "아가씨" 하고 불렀다. 그 전날 우리는 경찰서에 함께 갔었다. 나는 그 여자가 레이몽에게 버릇없이 굴었다고 증 언을 했다. 레이몽은 경고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내 진술을 트집잡는 사람은 없었다. 문 앞 에서 레이몽과 의논해서 우리는 버스를 타기로 결정했다. 바닷가는 그다지 멀지는 않았으나 그렇게 하면 더 빨리 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레이몽은 그의 친구도 우리가 일찍 오 는 것을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가 막 길을 떠나려던 참에 갑자기 레이몽이 맞은편을 보라는 시늉을 했다. 아랍인들 한 패가 담뱃가게 진열장에 기대어 서 있었다. 묵묵 히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마치 우리들을 돌이나 죽은 나무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는다 는 투였다. 레이몽이 왼편에서 두 번째 녀석이 그놈이라고 말해주었는데 그는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그렇지만 그건 이젠 끝나버린 이야기라고 덧붙였다. 마리는 영문을 몰라 무슨 일 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아랍인들이 레이몽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대답했다. 마리는 곧 출발하기를 원했다. 레이몽은 몸을 젖히고 서둘러야겠다고 말하면서 웃었다. 우리들은 조금 떨어진 정류장으로 갔다. 레이몽은 아랍인들은 따라오지 않는다고 내게 일 러주었다. 나는 돌아다보았다. 그들은 있던 자리에 그대로 서서 우리들이 떠나온 곳을 여전 히 무심한 태도로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버스에 올랐다. 레이몽은 아주 안심한 빛으로 마 리에게 줄곧 농담을 했다. 마리가 마음에 든 눈치였는데 마리는 거의 아무 대답도 하지 않 고 이따금 웃으면서 레이몽을 쳐다볼 뿐이었다. 우리는 알제리 교외에 내렸다. 바닷가는 정류장에서 멀지 않았다. 그러나 바다가 내려다 보이고 해변가로 경사진 언덕을 가로질러 가야 했다. 언덕에는 이미 새파래진 하늘을 향해 노르스름한 돌들과 하얀 수선화들로 뒤덮여 있었다. 마리는 헝겊가방을 휘둘러 꽃잎을 떨어 뜨리는 장난을 했다. 우리는 녹색이나 흰 울타리가 쳐진 작은 별장들이 늘어서 있는 사이를 걸어갔다. 어떤 별장은 베란다까지 위성류 속에 파묻히고, 어떤 것들은 바위 한가운데서 덩 그렇게 서 있었다. 언덕 끝에 이르기 전에 벌써 잠잠한 바다가 눈앞에 나타나고 멀리 맑은 물속에 조는 듯 육중한 곳이 내뻗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경쾌한 모터 소리가 고요한 대기 속 에서 우리가 있는 곳까지 들려왔다. 저 멀리 작은 트롤선 한 척이 반짝이는 바다 가운데로 서서히 미끄러지듯 가고 있었다. 마리는 붓꽃을 몇 송이 꺽었다. 바다로 내려가는 언덕길에 서 바라다보니 벌써 바닷가에는 수영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레이몽의 친구는 해변 기슭의 조그만 목조 별장에 살았다. 집은 바위를 등지고 있었는데 앞쪽 밑을 버틴 기둥들은 물속에 잠겨 있었다. 레이몽이 우리를 소개했다. 친구는 마송이라 고 하는데 덩치가 크고 어깨가 바라진 키가 큰 사람이었고, 동그랗고 예쁘장하게 생긴 파리 말씨를 쓰는 조그만 여자와 함께 있었다. 그는 곧 우리들에게 거리낌없이 편하게 있으라고 권하고, 바로 그날 아침에 낚아온 생선을 프라이한 것이 있다고 말했다. 내가 그의 집이 참 아담하다고 말했더니, 그는 토요일과 일요일, 그리고 휴일마다 그 별장에 와서 지낸다고 말 했다. "제 아내하고라면 누구든지 의좋게 지낼 수 있습니다." 하고 그는 덧붙였다. 그의 아 내는 마리와 웃고 있었다. 아마 그 때 처음으로 나는 마리와 결혼할 것을 진정으로 생각해 본 것 같다. 마송은 수영하러 가고 싶어 했으나, 그의 아내와 레이몽은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우리 셋이서만 바닷가로 내려갔다. 마리는 곧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마송과 나는 잠시동안 기다 렸다. 그는 천천히 말을 했는데 말끝마다 "그뿐만 아니라," 하고 덧붙이는 버릇이 있었다. 실제로 그의 이야기의 뜻에는 보충하는 것이 없을 때에도 그러는 버릇이 있었다. 마리에 관 해서는, "아주 그만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매력도 있고요." 하고 말했다. 이윽고 나는 햇볕 이 기분좋게 전신에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그것에 정신이 팔려서 그의 말버릇에는 신경 쓰 지 않았다. 발 밑에서 모래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물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을 좀더 참 았다가 나는 마송에게 "들어가볼까요?" 하고 말한 다음 뛰어들었다. 마송은 천천히 물속으 로 들어가 발이 땅에 닿지 않게 되어서야 몸을 던졌다. 그는 평영으로 헤엄쳤으나, 퍽 서툴 러서 나는 그를 남겨두고 마리에게로 쫓아갔다. 물은 차가웠고 헤엄을 치니 유쾌했다. 마리 와 함께 멀리 갔는데 우리는 몸짓과 만족감이 서로 일치하는 것을 느꼈다.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서 우리는 몸을 띄웠다. 하늘로 향한 얼굴 위로, 태양은 입으로 흘러 내리는 물의 장막을 걷어주었다. 마송이 모래사장으로 나가서 햇볕을 쬐려고 눕는 것이 보 였다. 그는 멀리서도 큼직하게 보였다. 마리는 나와 함께 헤엄을 치고 싶어했다. 나는 뒤로 돌아가 마리의 허리를 붙들고 마리가 팔을 놀려 앞으로 나가는 것을 발장구를 쳐서 도와주 었다. 고요한 아침에 철썩거리는 물소리가 우리가 지칠 때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마 리를 남겨두고 숨을 크게 쉬면서 규칙적으로 헤엄을 쳐서 돌아왔다. 물가로 올라와서 나는 마송 앞에 배를 깔고 엎드려 모래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기분이 괜찮군요." 하고 말했더니 그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다. 잠시 후에 마리가 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마리가 걸어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소금물에 젖은 몸은 미끈거려 보였으며 머리카락을 뒤로 묶어 버렸다. 마 리와 나는 나란히 누웠는데 그녀의 체온과 뜨거운 햇볕 때문에 나는 깜박 잠이 들었다. 마리가 나를 흔들어 깨우며 마송은 벌써 집으로 돌아갔고 이젠 점심을 먹어야 되지 않겠 느냐고 말했다. 나는 배가 고파 얼른 일어섰다. 그러나 마리는 아침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키스를 해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었고 나도 키스를 하고 싶었다. "물로 들어가 요." 하고 마리가 말했다. 우리는 뛰어가서 곧 잔물결 속에 드러누었다. 몇 번 팔을 저어 헤 엄쳐 가다가 마리는 나에게 달라붙었다. 그녀의 다리가 내 다리에 휘감기는 것을 느끼고 나 는 그녀에게 성욕을 느꼈다. 우리들이 돌아오자 마송이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배가 고프다 고 말했더니 마송은 곧 내가 자기의 마음에 들었다고 그의 아내에게 말했다. 빵은 맛있었고 나는 내 몫의 생선을 급히 먹었다. 다음으로는 고기와 튀긴 감자가 나왔다. 우리는 모두 아 무 말없이 먹었다. 마송은 자주 술을 마시고 나에게도 줄곧 따라 주었다. 커피를 가져왔을 때는 머리가 좀 무거웠다. 나는 담배도 많이 피웠다. 마송과 레이몽 그리고 나는 공동비용으 로 8월을 해변에서 함께 지낼 것을 의논했다. 마리가 갑자기 말했다. "지금 몇 신지 아세요? 11시 반이에요." 우리는 모두 놀랐다. 그러나 마송은 너무 일찍 식사를 했지만 배가 고플 때 가 결국 식사시간이니까 별로 이상할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마리가 왜 웃었는 지 나는 모른다. 아마 술을 좀 지나치게 마신 탓이었을 것이다. 그러더니 마송은 함께 바닷 가를 산책하지 않겠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제 아내는 점심을 먹은 뒤엔 반드시 낮잠을 자 는데 나는 그게 싫어요. 난 걸어야 합니다. 건강에는 그것이 좋다고 내가 늘 그럽니다만 어 쨌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밖에 없지요." 마리는 마송 부인을 거들어서 설거지를 하기 위해 남아 있겠다고 했다. 그러자면 남자들을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고 키가 작은 파리 여자 는 말했다. 우리는 셋이서 바닷가로 내려갔다. 햇볕은 거의 직각으로 모래 위에 쏟아져 내려서 바다 위에 반사하는 그 빛은 견디기 어려 울 지경이었다. 바닷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언덕을 따라 바다 위로 솟은 작은 별장들 안에서 는 접시며 포크, 스푼 따위가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땅에서 올라오는 돌의 열기로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처음에는 레이몽과 마송이 내가 모르는 일과 사람들 이야기를 했다. 그들이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라는 것과 한때 그들은 함께 산 일도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알 았다. 우리들은 물가로 가서 바다를 끼고 걸었다. 때때로 잔물결이 길게 밀려와서 우리들의 헝겊신발을 적시기도 했다. 나는 맨머리 위로 내리쬐는 태양 때문에 한 번쯤 잠이 들어 있 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때 레이몽이 마송에게 뭐라고 말했으나 나는 잘 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나는 바닷가 저편 끝 멀리서 푸른 작업복을 입은 아랍인 둘이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레이몽을 쳐다보니 그는 "그놈이야" 하고 말했다. 우리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송은 그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우리를 따라올 수 있었는지 이상하게 여겼다. 우리들이 해 수욕 가방을 가지고 버스를 타는 것을 그들이 보았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랍인들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는데 벌써 훨씬 거리가 가까워졌다. 우리들은 걸음을 달 리하지 않았다. 레이몽은 "싸움이 벌어지면 마송 자넨 둘째번 녀석을 맡아. 저 녀석은 내가 맡을 테니까. 뫼르소 자넨 또 다른 놈이 오면 맡게." 하고 말했다. 나는 "그러지." 하고 말했 다. 마송은 두 손을 주머니 속에 넣었다. 뜨겁게 단 모래가 지금 나에게는 붉게 보였다. 우 리는 일정한 걸음으로 아랍인들에게 걸어갔다. 그들과 우리들 사이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몇 걸음 되지 않은 간격을 두고 서로 가까워졌을 때 아랍인들이 멈춰섰다. 마송과 나는 걸 음을 늦추었다. 레이몽은 바로 그가 맡은 녀석에게로 갔다. 나는 그가 뭐라고 했는지는 못 들었으나 아랍인 녀석이 머리로 받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레이몽은 먼저 한 대 때려놓고 곧 마송을 불렀다. 마송은 미리 지목했던 녀석에게로 가서 힘껏 두 번 후려갈겼다. 상대편 녀석은 얼굴을 바닥에 처박고 물속에 나동그러졌다. 그는 잠시 그대로 있었는데 머리께로부 터 거품이 물위로 꿀럭거렸다. 그러는 동안에 레이몽이 또 갈겨서 그 아랍인 녀석은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다. 레이몽은 나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자식 꼬락서니 좀 봐." 하고 말 했다. 나는 "조심해, 그놈 칼을 가졌어!" 하고 말했으나 레이몽은 이미 팔을 찔리고 입을 찢 겼다. 마송은 후다닥 뛰어갔으나 또 다른 아랍인도 일어나서 칼을 가진 녀석 뒤로 가서 섰다. 우리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칼로 위협하면서 천천히 뒷걸음질쳐서 충분한 거리를 가지게 되자 부리나케 달아났다. 그동안 우리들은 태양 아래 못박힌 듯 우두커니 서 있었고 레이몽은 피가 흐르는 팔을 움켜쥐고 있었다. 마송이 얼른 일요일마다 언덕 별장으로 와서 지내는 의사가 있다고 말했다. 레이몽은 빨 리 가자고 했으나 말을 할 때마다 상처에서 흐르는 피가 입 속에서 거품을 일으켰다. 우리 는 그를 부축해 급히 별장으로 돌아왔다. 거기서 레이몽이 상처는 가벼우니까 의사에게 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마송과 함께 가기로 하고, 나는 남아서 여자들에게 사건 이야기를 해주었다. 마송 부인은 울고 있었고, 마리는 파랗게 질려 있었다. 나는 그녀들에게 설명을 하는 게 귀찮아져서 이야기를 그만두고 담배를 피우면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1시경에 레이몽이 마송과 함께 돌아왔다. 그는 팔에 붕대를 감고 입가에는 반창고를 붙이 고 있었다. 의사는 대수롭지 않다고 했으나 레이몽은 침울한 낯을 하고 있었다. 마송이 웃기 려고 애를 써봤지만 레이몽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바닷가로 내려간다고 하기에 어디로 가 느냐고 물었더니 바람을 쐬고 싶다고 대답했다. 마송과 나도 함께 가겠다고 하니까 레이몽 은 화를 내며 우리들에게 욕지거리를 했다. 그의 비위를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고 마송이 말 했으나 나는 그래도 그의 뒤를 따라갔다. 우리들은 오랫동안 해변을 거닐었다. 태양은 찍어누르는 듯했다. 햇빛은 모래와 바다 위에 부서져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레이몽이 가는 곳을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마 꼭 그렇지는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바닷가 끝까지 가서 우리는 커다란 바위 뒤에서 바 다로 향해 모래 사장으로 흐르고 있는 조그만 샘가에 이르렀다. 우리는 거기서 그 아랍인 둘을 다시 만났다. 그들은 기름이 밴 푸른 작업복을 입고 누워 있었다. 마음은 거의 가라앉 은 듯 아주 태연스러운 빛이었다. 레이몽을 찌른 녀석도 아무 말없이 레이몽을 바라보고 있 었다. 또 한 녀석은 조그만 갈대로 피리를 불고 있었는데 곁눈으로 우리들을 바라보며 그 악기로 낼 수 있는 세 가지 소리를 되풀이했다. 그동안 거기에는 다만 햇볕과 침묵, 그리고 졸졸 흐르는 샘물 소리와 피리의 세 가지 음 향이 들릴 뿐이었다. 그러자 레이몽이 권총 주머니에 손을 갔다댔으나 상대편은 움직이지 않고 둘은 서로 마주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피리를 불고 있는 녀석의 발가락이 몹시 벌어 진 것을 보았다. 레이몽은 상대편에게 눈을 떼지 않고 "쏘아버릴까!" 하고 물었다. 그만두라 고 하면 그는 제풀에 화를 내 기어코 쏘고야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저 "저 녀석은 아 직 아무 말도 없는데 이대로 쏘아버린다는 건 비겁할걸." 하고 말해주었다. 침묵과 무더운 햇볕 한가운데서 여전히 물과 피리의 호젓한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레이몽이, "그럼 저 녀 석에게 욕을 해야겠군. 그때 대꾸하면 쏘지." 하고 말했다. "그래, 하지만 녀석이 칼을 뽑지 않으면 쏠 수는 없을걸." 나는 대답했다. 레이몽은 좀 화를 내기 시작했는데 상대편은 여전 히 피리를 불고 있었고 둘 다 레이몽의 거동을 일일이 살피고 있었다. "안되겠어. 사나이답 게 맞상대를 해. 그리고 그 권총은 이리 줘. 만약에 다른 녀석이 뛰어들든지, 저 녀석이 칼 을 뽑든지 하면 내가 쏠 테니까." 레이몽이 권총을 나에게 주었을 때 그 위로 햇빛이 반사하여 번쩍거렸다. 그러나 우리들 은 마치 모든 것이 우리들의 주위를 둘러막은 듯이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우리들은 눈을 까딱도 하지 않고 서로 마주 노려보고 있었으며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바다와 모래와 태양, 피리 소리와 물소리로 인해 더욱 두드러진 이중의 침묵 가운데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권총을 쏠 수도 있고 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갑자기 아랍인들 이 뒷걸음질 하며 바위 뒤로 달아나버렸다. 레이몽과 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왔다. 레이몽은 기분이 좀 가라앉은 듯 집으로 돌아갈 버스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와 함께 별장까지 갔다. 레이몽이 나무층계를 올라가는 동안 나는 첫 계단 앞에 서 있었다. 햇볕으로 머리가 어지러운데다 그 나무층계를 올라가야 하며 다시 여자들과 대 면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맥이 풀렸던 것이다. 그러나 더위가 너무 심해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볕 아래 우두커니 서 있기도 괴로운 일이었다. 더구나 머무르거나 어디로 가버리거나 결 국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에 나는 바닷가 쪽으로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아까와 다름없이 붉은 햇살이 부서지고 있었다. 모래 위로 바다는 잔물결에 복받쳐 가쁜 숨결을 다하여 헐떡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바위 근처로 걸어갔는데, 뜨거운 햇빛 때문에 머리가 부풀어오르는 것 같았다. 더위 전체가 내 위를 억눌러 나의 걸음을 막았다. 그래서 얼굴 위에 무더운 바람이 와 닿을 때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주머니 속에 주먹을 불끈쥐고 태양과 태양이 쏟아부어주는 짙은 취기를 견디어내려고 전력을 다하여 몸을 버텼다. 모래나 흰 조개껍질이나 유릿조각에서 빛이 칼날처럼 번쩌거릴 때마다 턱은 경련을 일으켰다. 나는 오랫동안 걸었다. 햇볕과 바다의 포말로 눈부신 후광에 둘러싸인 거무스름한 바윗덩어리가 조그맣게 멀리 바라다 보였다. 나는 바위 뒤의 서늘한 샘을 생각했다. 나는 그 물의 속삭임을 다시 듣고 싶 었고, 태양과 더위와 싸우는 노력과 여자의 울음 소리를 피하고 싶었으며, 그리고 그늘과 휴 식을 그곳에서 찾고 싶었다. 그러나 가까이 갔을 때 나는 레이몽과 맞섰던 녀석이 다시 돌 아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혼자였다. 번 듯이 드러누워 있었는데 두 손을 턱밑에 괴고 얼굴만 바위 그늘 속에 넣고 전신은 햇볕을 받고 있었다. 푸른 작업복이 더위 속에서 김을 내고 있었다. 나는 좀 당황했다. 나로서는 그 사건은 이 미 끝난 것으로 믿었으므로 그 일은 생각지도 않고 그리로 왔던 것이었다. 그는 나를 보자 조금 몸을 쳐들어 올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물론 나도 웃옷 속에 들 어 있던 레이몽의 권총을 거머쥐었다. 그러더니 그는 다시 몸을 젖혀 누워버렸으나 주머니 에서 손을 빼지는 않았다. 나는 그에게 퍽 멀리, 10여 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한 절반감은 그의 눈꺼풀 사이로 이따금 그의 시선이 새어나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그의 모습이 타는 듯한 대기 속에서 나의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파도 소리는 정오 때 보다도 더욱 게으르고 더욱 가라앉았다. 그때나 다름없는 모래 위에 다름없는 태양, 다름없 는 빛이 그대로 여기에도 연장되고 있었다. 한낮은 벌써 두 시간 전부터 흐름을 멈추었고, 끓어오르는 금속 같은 태양에 닻을 내린 지도 두 시간이나 되었다. 수평선 위로 조그만 증 기선이 지나갔다. 내가 한눈에 그것을 검은 얼룩처럼 느낀 것은 아랍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 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뒤로 돌아서기만 하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햇볕에 떠는 해변 이 내 뒤를 압박하고 있었다. 나는 샘을 향해 몇 걸음 앞으로 갔다. 아랍인은 움직이지 않았 다. 그는 그래도 아직 내게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아마도 얼굴 위에 덮인 그늘 탓이었던 저 웃고 있는 듯했다. 나는 기다렸다. 뜨거운 태양이 내 뺨에 와 닿았고 땀방울이 눈썹에 맺 히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른 그날과 똑같은 태양이었다. 그날처럼 특 히 머리가 아프고 이마의 모든 혈관이 피부 밑에서 지끈거리고 있었다. 그 햇볕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여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는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며 한 걸음 몸을 옮 겨보았댔자 태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 걸음, 다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던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랍인이 몸을 일으키지는 않고 칼을 뽑아 서 태양에 비치며 나에게로 겨누었다. 빛이 강철 위에 반사하자 번쩍거리는 길쭉한 칼날이 내 이마에 와서 부딪히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눈썹에 맺혔던 땀이 한꺼번에 눈꺼풀 위 로 흘러내려 미지근하고 두꺼운 막으로 덮어버렸다. 눈물과 소금의 장막에 가려져 내 눈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마 위에 울리는 태양의 심벌즈 소리와, 칼로부터 여전히 내 앞으로 다가오는 칼날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그 타는 듯한 칼은 내 속눈썹을 찌르고 고통스러 운 눈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모든 것이 흔들린 것은. 바다는 무겁고 뜨거 운 바람을 실어왔다. 하늘은 활짝 열리며 불을 쏟는 듯했다. 나는 온몸이 긴장되여 권총을 힘있게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꺾였고 나는 권총자루의 미근한 배를 만졌다. 그리하여 짤막하 고도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나는 밤과 태양을 떨쳐버렸다. 한낮은 균형과 내가 행복을 느끼고 있던 바닷가의 특이한 침묵을 깨뜨린 것을 나는 느꼈다. 이어서 나는 그 굳어진 몸뚱어리에 다시 네 방을 쏘았다. 총탄은 보이지도 않게 깊이 박혔 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린 네 번의 노크 소리와도 같았다. 이방인(제2부) 1 나는 체포되자 여러 번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신원 확인을 위한 심문이어서 오래 게속되지는 않았다. 처음 경찰에서는 아무도 나의 사건에 흥미를 느끼는 것 같지 않았다. 그 런데 일주일 후에 에심판사는 유심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처음에는 다만 나의 이름과 주소와 직업, 출생 날짜와 장소를 물었을 따름이다. 그러고는 내가 변호사를 선임했는지 알 고 싶어했다. 나는 선임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변호사를 반드시 내세워야만 하느냐고 물었다. "왜 그러시오?" 하고 그는 물었다. 나는 내 사건은 매우 간단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대답했 다. 그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건 하나의 의견이지만 법률이라는 게 있어서 당신이 변호사를 택하지 않으면 우리들이 직권으로 임명할 것입니다" 나는 법 제도가 그러한 세부 적인 일가지 해주는 것은 매우 편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말을 판사에게 하니까 그도 내 말에 동의하고 법률은 참으로 잘 되어 있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처음에는 그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커튼을 둘러친 방에서 나를 맞아들 였는데 그의 테이블 위에 등불이 하나 놓여 있어, 그것은 내가 앉은 의자만을 비추고 있었 을 뿐 그는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그러한 묘사를 이전에 나는 책에서 읽은 일이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이 어린애 장난만 같았다. 나는 이야기가 끝난 뒤에 그를 살펴보았다. 그 얼굴 모 습이 단정했고 푸른 눈은 깊숙이 패였으며 키가 크고 회색 수염을 길게 길렀고 숱이 많은 머리카락이 거의 백발에 가까웠다. 그는 착실해 보였고, 입을 일그러뜨리는 신경질적인 버릇 이 있기는 했으나 어쨌든 호감을 가질 수 있을 듯이 보였다. 방을 나서면서 나는 그에게 손 을 내밀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이튿날 변호사 한 사람이 형무소로 찾아왔다. 키가 작고 똥똥했는데 머리를 정성스럽게 빗어 붙인 매우 젊은 사람이었다. 날씨가 더웠음에도 불구하고 - 나는 셔츠바람으로 있었다 - 검은 양복을 입었으며 빳빳한 칼라에 검고 흰 줄무늬가 있는 이상한 넥타이를 매고 있었 다. 겨드랑이에 끼고 들어온 가방을 내 침대 위에 놓고 나서, 그는 자기 소개를 하고 내 서 류를 검토해 보았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어렵긴 하지만 내가 그를 신뢰한다면 재판에 이길 것을 의심치 않는다고 했다. 내가 감사하다고 하니까, 그는 "문제의 요점으로 들어갑시다" 하고 말했다. 그는 침대 위에 앉은 다음 내 사생활에 관하여 여러 가지 정보를 수집했다고 말했다. 최 근 양로원에서 어머니가 사망한 사실을 알게 되어 마랑고로 조사를 갔었다는 것과 어머니 장례식 날 '내가 냉정한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을 예심판사들이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당신에게 이런 것을 묻는 것은 거북한 일이지만 이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내 가 거기에 답변을 할 수 없다면 그것은 기소의 중대한 논거가 될 것입니다." 하고 변호사는 말했다. 내가 그에게 협력해줄 것을 그는 요구했다. 그날 슬퍼했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이 질문에 나는 몹시 놀랐다. 만약에 내가 그런 질문을 해야만 할 처지라면 나는 매우 어색했 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나는 자문해보는 습관을 잃어버려서 정확한 사실을 이야기 할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물론 나는 어머니를 사랑했으나 그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건 전한 사람은 누구나 다소간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바라는 일이 있는 법이다. 그러자 변 호사는 내 말을 가로막았다. 매우 흥분한 것 같았다. 그런 말은 법정에서나 예심판사의 방에 서는 하지 말라고 내게 다짐했다. 그러나 나는 육체적 요구가 흔히 감정을 방해하는 성질이 있다고 그에게 설명해주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이 있던 날 나는 매우 피곤해서 잠이 왔었다. 그래서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머 니가 죽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변호사는 불만스러운 눈치였다.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하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그날 내가 자연적 감정을 억제했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건 사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는 내가 밉살스러운 듯이 이상스 러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양로원의 원장과 사무원들은 증인으로서 심문을 받을 것이오. 그러면 당신에게 퍽 불리한 결과가 될지도 모를 것이오." 하고 모질게 말했다. 그런 이야기가 내 사건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을 나는 지적했으나, 그는 다만 내가 재 판소와 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다는 것은 그만하면 뻔히 알 수 있겠다고만 대답했다. 그는 화가 난 태도로 나가버렸다. 나는 그를 좀더 머물게 하고, 그의 호감을 얻고 싶다는 설명을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것은 더 잘 변호해주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이를테면 자연 히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무엇보다도 내가 그의 처지를 어색하게 만들고 있 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좀 원망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다 른 사람들과 똑같다는 것, 조금도 틀림없이 똑같다는 것을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러한 모든 것은 결국 별로 효과도 없는 일어서서 나는 게으른 탓으로 그것을 단념하고 말았 다. 조금 뒤에 다시 예심판사 앞으로 끌려갔다. 오후 2시였는데 이번에는 그의 사무실은 엷은 커튼을 뚫고 새어드는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매우 무더웠다. 그는 나를 앉으라고 한 다음 퍽 정중하게 내 변호사는 '사고가 생겨서' 오지 못했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심 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되고, 변호사의 도움을 기다릴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혼자서 라도 대답할 수 있다고 말했더니, 그는 책상 위의 벨을 눌렀다. 젊은 서기가 와서 바로 내 등뒤에 자리잡고 앉았다. 우리들은 반듯이 안락의자에 푹 파묻혀 앉았다. 그러고는 심문이 시작되었다. 판사는 먼 저, 사람들은 내가 말이 적고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별 로 할 말이 없어서입니다. 그래서 말을 안 하는 겁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는 첫 심문 때처럼 빙그레 웃으면서 그건 참 당연한 이유라고 말한 다음, "그리고 그건 대수롭지 않은 일입니다." 하고 덧붙였다. 그는 입을 다물고 나를 보더니 갑자기 어깨를 으쓱하면서,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당신입니다." 하고 빠른 어조로 말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 수 없으므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어서 "당신의 행동에는 나로선 이해하기 곤 란한 점들이 있는데 당신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하고 말했다. 나는 모든 것은 간단한 일들뿐이라고 대답했다. 그날 사건을 이야기하라고 판사는 재촉했다. 나는 벌써 그에게 한번 이야기한 것을 다시 요약하여 되풀이했다. 레이몽, 바닷가, 해수욕, 싸움, 다시 바닷가, 조그만 샘, 태양, 다섯 방의 권총. 한 마디 할 때마다 그는 "네, 네." 하고 대답했다. 쓰러진 시체에까지 이야기가 미치자, 그는 "좋습니다." 하면서 내 이야 기를 확인했다. 나는 그처럼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것에 지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한 적 은 여태까지 없었던 것처럼 생각되었다. 잠시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그는 일어서서 나를 도와주겠다고 하면서, 나는 퍽 특이한 사 람이고, 하느님의 도움을 얻어 나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 나 먼저 그는 나에게 몇 가지 더 질문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어머니를 사랑 했느냐고 물었다. "네, 다른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로 사랑했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 러자 그때까지 규칙적으로 타이프를 치고 있던 서기가 키를 잘못 눌렀는지 당황해하더니 다 시 고쳤다. 여전히 명백하게 논리적이지 못한 판사가 이번엔 연달아서 권총을 다섯 방 쏘았 느냐고 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을 하고 나서, 처음 한 방 쏘고, 몇 초 후에 다시 네 방을 쏘 았다고 설명했다. "첫 방과 둘째 방 사이에 왜 사이를 두었습니까?" 하고 그는 물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붉은 바닷가가 눈앞에 나타나고 뜨거운 햇볕이 이마 위에 느껴졌다. 그러나 나 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뒤로 침묵이 계속되는 동안 판사는 흥분한 눈치였다. 의자 에 걸터앉아 머리를 벅벅 긁고 책상 위에 팔꿈치를 괜 다음, 야릇한 표정으로 나에게 약간 몸을 굽히면서 물었다. "왜, 왜 당신은 땅에 쓰러진 시체를 쏘았습니까?" 그 물음에도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판사는 두 손으로 이마를 짚고 목소리조차 약간 변해서 되물었다. "왜 그랬어요? 그것을 말해야 합니다. 왜 그랬습니까?' 나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그는 일어서서 사무실 한구석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서류함의 서랍을 열었다. 거기에서 은으로 만든 십자가를 꺼내 가지고 그것을 휘두르며 나에게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여느 때와는 아주 다른 거의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이것을, 이 사람을 압니까?" "물론 압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자 그는 흥분해서 빠른 어조로 자기는 하느님을 믿는 다는 것과, 하느님이 용서하지 않을 만큼 죄가 많은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 용서를 받으려면 사람은 뉘우치는 마음으로 어린애처럼 되어서 넋을 깨긋이 비워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의 신념을 말했다. 그는 몸을 책상 너머로 기울이고 십자가를 거의 내 머리 위에서 흔들어댔다. 사실 나는 그의 이론을 따르기가 매우 어려웠다. 첫째로 나는 몹시 더웠고, 그의 사무실에는 커다란 파리들이 있어서 그것들이 내 얼굴에 붙었기 때문이 고, 또 나는 그의 태도에 좀 겁이 나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판사의 하는 짓이 우스워 보였 다. 왜냐하면 결국 죄를 지은 사람은 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 가 대강 알아들은 것에 의하면, 그의 의견으로서는 내 고백에 오직 한 가지만 모호한 점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두 번째로 권총을 쏘기 전에 사이를 두었다는 사실이다. 그 밖의 다 른 것들은 잘 알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은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고집을 부리는 것은 잘못이고, 그 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나는 그에게 말할까 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말하려는 것을 가로막고, 다시 벌떡 일어나 나더러 하느님을 믿느냐 고 물으면서 훈계를 했다. 나는 믿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는 화가 나서 앉아 버렸다. 그럴 수는 없다고 하며, 누구나 비록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않고 외면하는 사람일지라도 하느님 을 믿는 법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그의 신념으로 만약 그것을 의심해야 한다면, 그의 생애는 무의미해지고 말 것이라는 것이었다. "내 생애가 무의미하게 되기를 당신은 바랍니까?" 하 고 그는 외쳤다. 내 생각으로는 그것은 나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어서 그에게 그렇다고 말했다. 그러나 책상 너머로 그는 벌써 그리스도 십자가상을 내 눈밑에 내밀고 터무니없는 말투로 소리를 질렀다. "나는 기독교 신자야. 나는 이분에게 그대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 고 있어, 어째서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괴로움을 당하셨다는 것을 믿지 않는단 말인 가?" 나는 그가 나에게 반말을 쓰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나는 이제는 진절머리가 났다. 더위는 더욱 심해졌다. 별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때 내가 늘 하는 것처럼 나는 그의 말을 수긍하는 체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는 승리한 듯이 "그 것 봐. 그래도 믿지 않아? 하느님께 마음을 바치겠지?" 하고 말했다. 물론 나는 다시 한 번 아니라고 했다. 그는 다시 안락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매우 피곤해 보였다. 잠시 그는 아무 말도 없었으나, 그동안에도 타이프는 대화를 따 르기를 멈추지 않고, 마지막 이야기를 계속해서 치고 있었다. 그는 나를 약간 슬픈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나서 "당신처럼 고집 센 사람은 처음 봅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내 앞 으로 온 죄인들은 이 고뇌의 형상을 보고는 모두 울었어요." 나는 그것은 바로 그들이 죄인 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대답하려 했다. 그러나 나도 그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그것은 나로서는 믿을 수 없는 생각이었다. 그때 판사가 일어섰다. 심문이 끝났다는 것을 의 미하는 듯했다. 그는 여전히 좀 피곤한 표정으로 내가 한 일을 후회하고 있느냐고 물을 뿐 이었다. 나는 생각을 하고 나서 진정 후회라기보다는 차라리 일종의 성가심을 느낀다고 대 답했다. 나는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날은 그것으로 그치고 이야기는 더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 뒤 나는 여러 번 예심판사를 만났다. 만날 때마다 나는 변호사와 동반했다. 이야기는 다만 나로 하여금 먼젓번에 한 나의 진술의 어떤 점을 좀더 자세히 말하게 하는 정도에 그 쳤다. 그렇지 않으면 판사는 내 변호사와 직무에 관한 토론을 했다. 그러나 사실 그때마다 그들은 나를 조금도 돌보지 않았다. 어쨌든 차츰차츰 심문의 방식이 달라졌다. 판사는 이미 나에게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고, 이를테면 그는 내 사건의 성격을 규정지은 모양이었다. 그 는 다시는 나에게 하느님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며, 먼젓번처럼 흥분한 그를 다시 볼 수도 없었다. 그 결과, 우리들의 대화는 점점 진지해졌다. 몇 번의 질문이 있고, 내 변호사와 좀 이야기를 하고 나면 심문은 끝나는 것이었다. 내 사건은, 판사 자신의 말에 의하면 착착 진 전되어가고 있었다. 어떤 때는 대화가 일반적인 범주에 들어가면 나도 거기에 가담했다. 나 는 그제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런 때에는 아무도 나에게 심하게 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규칙적이고 침착하게 꾸며져서, 나는 '가족들 사이에 끼여 있는 것 같 은' 어처구니없는 인상을 받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1개월 동안이나 계속된 예심을 치르 고 나서, 나는 이따금 판사가 그의 방문까지 나를 배웅하고 어깨를 두드리며, "오늘은 끝났습니 다. 무신자 선생." 하고 다정스럽게 이야기해주던 그 순간을 무엇보다도 즐겼다는 사실에 스 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판사의 방문을 나서면 나는 다시 헌병의 손에 맡겨졌다. 2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일들도 있었다. 형무소에 들어오고 나서 며칠이 지난 후 나는 나의 생애의 그 시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 그러한 혐오감에 대해서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사실, 처음에는 형무소에 있다는 실감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막연한 무슨 새로운 사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은 다만 마리의 처음이자 단 한번의 방문을 받은 다음부터였다. 마리의 편지를 받 은 날부터 - 내 아내가 아니라고 해서 이제는 면회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마리는 그 편지에 서 썼다 - 나는 내가 있는 감방이 내 집이고 내 생활은 그 속에 한정되어 있음을 느꼈다. 체포되던 날, 우선 나는 이미 여러 사람이 들어 있는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는데 대부분이 아랍인들이었다. 그들은 나를 보고 웃더니 무엇을 했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아랍인을 한 명 죽였다고 대답하니까, 그들은 잠잠해졌다. 이윽고 저녁의 장막이 내렸다. 그들은 누워서 잘 돗자리를 펴는 법을 설명해주었다. 한끝을 말아서 베개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밤새도 록 빈대가 얼굴 위를 기어다녔다. 며칠 후에 나는 독방으로 격리되어 판자 위에서 자게 되 었다. 변기와 쇠로 만든 대야가 있었다. 형무소는 도시 맨 꼭대기에 있었으므로 조그만 창문 으로 바다가 보였다. 어느 날 철창에 달라붙어 햇빛을 향해 얼굴을 내밀려는 바로 그때 간 수가 들어와서 면회하러 온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마리려니 하고 나는 생각했다. 과연 마리 였다. 면회실로 가기 위하여 긴 복도를 거쳐서 계단을 지나 마지막으로 다른 복도를 걸어갔다. 넓게 뚫린 창으로 빛이 들어오는 큰방에 들어섰다. 방은 세로로 막고 있는 커다란 두 개의 쇠창살에 의해 길게 나누어져 있었다. 쇠창살 사이에는 8미터 내지 10미터 가량 되는 간격 이 있어서 면회인과 죄수를 갈라놓고 있었다. 내 앞에 줄무늬가 있는 옷을 입고 햇볕에 얼 굴이 그을은 마리가 보였다. 내가 서 있는 쪽에는 죄수들이 10여 명 있었는데 대부분은 아 랍인들이었다. 마리는 무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2명의 여자 면회인 사이에 끼여 있었다. 하 나는 입술을 꼭 다물고 검은 옷을 입은 키가 자그마한 노파였고, 또 하나는 모자를 쓰지 않 은 뚱뚱한 여자였는데 손짓을 많이 하며 큰소리로 지껄이고 있었다. 쇠창살 사이의 거리 때 문에 면회인이나 죄수들은 큰 목소리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방안에 들어섰을 때 커다랗고 장식이 없는 벽 때문에 울리는 소란한 목소리와 하늘로부터 유리창 위에 쏟아져서 방안으로 퍼지는 거센 빛으로 말미암아 나는 얼떨떨했다. 내가 있는 감방은 보다 더 조용하 고 어두웠다. 그곳에 익숙하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마침내 나는 밝은 빛에 드러난 얼굴들을 똑똑히 볼 수 있게 되었다. 간수 한 사람이 쇠창살 사이의 복도 끝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대부분의 아랍인 죄수들과 그 가족들은 서로 마주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들 은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그처럼 소란스러운 가운데서도 나직이 말을 하며 서로 의사소 통을 했다. 아래로부터 울려오는 그들의 희미한 속삭임은 그들의 머리 위에서 교차하는 말 소리에 대하여 줄곧 일종의 저음부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마리에게로 다가가며 그러한 모 든 것을 순식간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마리는 벌써 쇠창살에 달라붙어서 있는 힘을 다해 웃 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했으나 그런 말을 그녀에게 하지는 못했다. "어떠세요?" 하고 마리는 큰소리로 말했다. "별일 없어." "불편하지는 않으세요? 뭐 필요한 건 없구요?" "아무것도 없어." 우리들은 말을 끊었다. 마리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뚱뚱한 여자는 내 옆의 사나이를 향해 서 울부짖고 있었다. 아마 그녀의 남편인 듯 솔직한 눈매를 가진 키가 큼직한 금발의 사나 이였다. 무슨 말인지 시작한 대화를 계속하고 있었다. "쟌느가 그를 돌보려고 하질 않아요." 하고 여자는 소리소리 지르고 있었다. "응, 그래?" 하고 사나이는 말했다. "당신이 나오면 그를 데려올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맡으려고 하지 않아요" 마리도 그때 레이몽이 안부를 전하더라고 소리를 질러서 나는 고맙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내 말은 "그 녀석은 잘 있나?" 하고 묻는 내 옆의 사나이는 목소리에 뒤덮여버리고 말았다. 그의 아내는 "더할 나위 없이 몸이 좋아졌다."고 말하면서 웃었다. 내 왼편에 있던, 손이 가 냘프고 키가 작은 청년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자그마한 노파와 마주서서 뚫어지게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더 관찰할 여유가 없었다.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마리 가 외쳤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 하고 대답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마리를 바라보고 옷 위 로 그녀의 어깨를 껴안고 싶었다. 나는 그 엷은 천에 욕정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 외에 무엇 에 희망을 가져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마리가 하고 싶은 말도 아마 그런 뜻이었으리라. 왜 냐하면 마리는 줄곧 웃음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나에게는 그녀의 반짝이는 치아와 눈 가에 잡히는 잔주름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마리는 다시 외쳤다. "나오시면 우리 결혼해요." "글세" 하고 나는 대답했으나 그것은 무엇이고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마리는 아주 빨리 그리고 여전히 높은 음성으로 정말이라고 하며 석방되면 또 해수욕을 하러 가자고 말 했다. 곁에 있던 여자도 고함을 지르며 사무실에 바구니를 맡겼다고 말하고 그 속에 넣은 것을 일일이 주워섬겼다. 돈이 많이 든 것이니 없어진 게 없나 검사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 이었다. 내 왼쪽에 있던 청년과 어머니는 여전히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아랍인들의 웅얼거 리는 소리는 우리들의 발밑에서 계속되고 있었따. 밖에서는 빛이 창문에 부딪혀 부풀어오르 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빛이 모든 사람들의 얼굴 위를 새로운 즙처럼 흘렀다. 나는 몸이 좀 피곤한 것 같아 밖으로 나오고 싶었다.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기분이 언짢 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마리를 좀더 보고 싶었다. 그 뒤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른다. 마리는 자기 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끊임없이 웃고 있었다. 속살거리는 소리, 외 치는 소리, 주고받는 이야기 소리가 서로 교차했다. 내 옆에서 서로 마주 바라보고 있던 젊 은이와 노파 두 사람만이 침묵의 고도를 이루고 있었다. 하나씩 하나씩 아랍인들이 끌려나 갔다. 맨앞 사람이 나가버리자 거의 모든 사람이 일시에 말을 끊었다. 키가 작은 노파가 쇠 창살로 다가섰다. 그와 동시에 간수가 그의 아들에게 몸짓을 했다. 청년이 "안녕히 가세요, 어머니." 하고 말하자, 노파는 두 쇠창살 사이로 손을 들이밀어 아들에게 천천히 손짓을 했 다. 노파가 나가자 남자 한 사람이 손에 모자를 들고 들어와서 자기 자리에 들어섰다. 그러자 죄수 한 사람이 끌려들어왔으며, 그들은 낮은 목소리로 열심히 이야기를 했다. 방안이 다시 조용해졌기 때문이었다. 내 오른쪽에 있던 사나이가 불려나갈 차례가 되자 그의 아내느 마 치 소리를 크게 지를 필요가 없어진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이 여전히 큰소리로 말했다. "건강에 주의하시고 조심하세요." 내 차례가 되었다. 마리는 키스하는 시늉을 했다. 나는 방 을 나서기 전에 돌아다보았다. 마리는 얼굴을 쇠창살에 비벼대고 여전히 일그러지고 굳어 보이는 미소를 띠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마리가 편지를 보낸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의 일이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던 일이 시작된 것은 그 때부터였다. 어쨌든 무엇이나 과장은 하지 말아야 하는 법인데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나에게는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형무소에 수감되어서 처음에 가장 괴로웠던 일은 내가 자유로운 사람이 갖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가령 바닷가로 가서 물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이 솟곤 했다. 발밑의 풀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 물속에 몸이 잠길 때의 촉감, 그리고 해방감 같은 것들을 상상할 때 갑자기 나는 감옥 담이 그 얼마나 답답하게 나를 둘러싸고 있는가를 느꼈다. 그것이 몇 달 동안 계속되었다. 그 다음에는 죄수 로서의 생각밖에 없었다. 나는 매일 안마당에서 산책을 하지 않으면 변호사의 방문을 기다 리곤 했다. 나머지 시간은 그럭저럭 보냈다. 그 당시 나는 만약 마른 나무 둥지 속에 들어가 살게 되어, 머리 위 하늘에 피는 꽃을 바라보는 것밖에 다른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게 된다 고 하더라도 차츰 그런 생활에 익숙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나는 지나가는 새들이 나 마주치는 구름들을 기다렸을 것이다. 마치 여기서 변호사의 야릇한 넥타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듯이. 또 저 바깥세상에서 마리의 육체를 껴안을 것을 기다리며 토요일까지 참고 지 내듯이, 그런데 결국 생각해보면 나는 마른 나무 둥지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보 다 더 불행한 사람들도 있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생각도 그랬다. 어머니는 늘 사람은 무엇에 나 결국은 익숙해지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보통 나는 그런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처음 몇 달 동안은 괴롭기는 했지만 바로 그것을 억제하려는 노력이 그 몇 달 동안을 지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예를 들어 여자 에 대한 욕망으로 고통스러웠다. 나는 젊었으니까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특별히 마리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여자, 여러 여자들, 내가 알았던 모든 여자들을 생각했기 때문 에, 나의 감방은 그들 여자들의 얼굴로 가득 들어차고 욕망으로 가득찼다. 한편으로는 그것 들을 내 마음을 어지럽게 했으나 또 한편으로는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나 는 마침내 식사시간에 취사장의 보이와 같이 오곤 하던 간수장의 동정을 얻게 되었다. 처음 여자 이야기를 한 것은 그였다. 다른 사람들도 첫째로 못견뎌 호소하는 것이 그것이라고 그 는 말했다. 나는 그에게 나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여서 그런 대우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신네들을 감옥에 가두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오." 하고 그는 말했 다. "아니, 그 때문이라니?" "아무렴, 자유라는 것, 그것을 당신네들에게서 빼앗는 거란 말이 오."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나는 그에게 동의를 표시하여, "참 그렇긴 해. 그렇지 않다면 징벌이라는 게 무엇이겠소?" 하고 말했다. "그렇고말고, 당신은 참 이해성이 많군 그래.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해요. 그렇지만 결국 그네들도 스스로 만족을 채우게 된 답니다." 또 담배도 고통거리였다. 형무소로 들어왔을 때 나는 허리띠, 구두끈, 넥타이, 그리고 주머 니에 지니고 있던 모든 것, 특히 담배를 빼앗겼다. 감방으로 옮겨와서 담배를 돌려달라고 해 보았지만 그것은 금지되어 있다는 것이다. 처음 며칠 동안은 매우 괴로웠다. 내가 가장 고통 을 당한 것은 아마 이것이었을 것이다. 침대 판자를 뜯어서 그 나뭇조각을 빨곤 했다. 온종 일 구역질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그것을 왜 빼앗아버리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뒤에 나는 그것도 징벌의 일부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때는 벌 써 담배를 피우지 않는 일에 익숙해져서 그것은 이미 나에게는 아무 징벌도 되지 못했다. 그러한 불편을 제외하면 나는 그다지 불행하지도 않았다. 거듭 말하자면 문제는 다만 시 간을 보내는 일이었다. 과거를 추억하는 것을 배운 때부터는 심심해서 못견디는 일은 없게 되었다. 이따금 나는 내 방을 생각했다. 그 한모퉁이에서 출발하여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출 발점으로 되돌아오는 것인데 그러면서 도중에 있는 것을 모두 머릿속으로 새겨보곤 했다. 처음에는 아주 빨리 끝났는데 그 뒤로 다시 되풀이할 때마다 조금씩 길어지는 것이었다. 왜 냐하면 있는 가구를 전부 하나씩 생각했고, 또 그 물건마다 그 세밀한 점들을 생각하고 그 러한 세밀한 점들, 조각이라든가, 흠이라든가, 이가 빠진 가장 자리라든가 그런 것들에 관해 서는 그 빛깔 또는 결 같은 것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나는 내 재산목록에 무엇 하나 빠짐없이 일람표를 만들도록 힘썼다. 그리하여 몇 주일 후에는 내 방안에 있는 것들을 따져보는 것만으로 여러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처럼 생각을 하면 할수록 나는 등한히 했던 것, 잊어버렸던 것들을 기억으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단 하루만 산 사 람이라도 감옥에서 100년쯤은 쉽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이라도 얼마든 지 추억할 거리가 있어 심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건 편리한 일이었다. 또 잠도 고통거리였다. 처음에는 밤에도 잘 수 없었고, 더군다나 낮에는 조금도 잘 수 없 었다. 차츰 밤에 자는데 익숙해졌으며 낮에도 잘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 수개월 동안은 하 루에 16시간 내지 18시간씩 잤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남는 것은 6시간이었는데 그것을 식사며, 대소변이며, 추억이며,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읽으면 되는 것이었다. 짚을 넣은 매트와 침대 판자 사이에서 사실 나는 한 장의 옛 신문을 발견했던 것이다. 천 에 들러붙어서 노랗게 빛이 바래고 앞뒤가 비쳐 보였다. 첫 대목은 없었으나 체코슬로바키 아에서 일어난 듯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어떤 사나이가 체코의 어떤 마을에서 돈벌이를 떠 났다가, 25년 후에 부자가 되어서 아내와 아이 하나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의 어머니는 그의 누이와 함께 고향에서 호텔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들을 놀라게 해주려고 사나이는 아내와 자식을 다른 여관에 남겨두고 어머니의 집으로 갔는데, 그가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그를 알 아보지 못했다. 장난을 할 셈으로 방을 하나 잡고 돈을 보여주었다. 밤중에 그의 어머니와 누이는 그를 망치로 때려죽이고 돈을 훔친 다음 시체를 강물 속에 던져버렸다. 아침이 되자, 사나이의 아내가 와서 그런 사실을 모르고 길손의 신분을 밝혔다. 어머니는 목을 매고, 누이 는 우물 속에 빠져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아마 수천 번 읽었을 것이다. 한 편으로는 그것은 사실 같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럴 법도 한 이야기였다. 어 쨌든 그런 결과에 대해서는 길손에게도 좀 책임이 있고 장난이란 함부로 할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처럼 잠을 자고, 지나간 일을 생각하고, 삼면기사를 읽는 동안 빛과 어둠은 바뀌고 시간 은 흘러갔다. 감옥에 있으면 시간 관념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나는 읽은 일이 있었지만, 그때 는 그러한 것이 별로 나에게는 의미를 갖지 못했었다. 한나절이 얼마나 길고 동시에 짧을 수 있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지내기는 물론 길지만, 하도 길게 늘어져서 하루하루는 넘치고 마는 것이었다. 세월은 그 속에서 이름을 잃어버린다. 어제 혹은 내일이라는 말만이 나에게는 의미를 잃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들어온 지 다섯 달이 지났다고 하는 말을 어느 날 간수로부터 들었을 때 나는 그의 말을 믿었으나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로서는 언제나 같은 날이 내 감방으로 밀려 오고, 언제나 같은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날 간수가 가버린 뒤에 나는 쇠로 만든 밥그릇 에 비친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내 모습은 아무리 웃으려고 해도 무뚝뚝한 채로 있는 듯 했다. 나는 빙그레 웃었으나 비춰진 얼굴은 여전히 무뚝뚝하고 슬픈 표정이었다. 날이 저물 어가고 있었다. 나에게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때였다. 형무소 아 래층의 여기저기에서 저녁의 소리가 침묵의 행렬을 지어 올라오는 그러한 때였다. 나는 천 장에 뚫린 창문으로 다가가서 마지막 빛 속에 내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무뚝뚝한 표 정이었지만 그다지 놀라울 것도 없었다. 나는 그때 사실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여러 달 전 이후 처음으로 나는 내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나 는 그것이 오래전부터 내 귀에 울리고 있던 소리임을 알아차리고 그동안 나는 혼자서 이야 기를 하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어머니의 장례식 날, 간호원이 했던 이야기를 생각했다. 정말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형무소 안의 저녁이 어떤 것인지는 상상 할 수도 없는 것이다. 3 결국 여름이 빨리 지나가고 다시 여름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첫더위가 심해짐에 따라 내게 무슨 새로운 일이 생기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내 사건은 중죄재판소의 맨 마 지막 회기에 심의될 에정으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 회기는 6월로 끝나는 것이었다. 변론이 시작되었을 때, 밖에서는 햇볕이 무르녹고 있었다. 변론은 2, 3일 이상은 끌지 않을 것이라 고 변호사는 확언했다. "그리고 당신의 사건이 이번 회기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니니 까 재판정에서도 서두를 겝니다. 뒤이어서 부모 살해사건을 심의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그 는 덧붙였다. 나는 아침 7시 30분에 불려나가 호송차로 재판소까지 이송되었다. 그리하여 헌병 두 사람 의 지시에 따라 어둠침침한 조그만 방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거기 앉아 기다렸는데 옆으로 문이 하나 있었다. 그 뒤에서는 말소리, 호명 소리, 의자 소리, 그리고 동네 축제 놀이에서 전주가 끝나고 춤을 출 수 있도록 방안을 정리할 때를 연상케 하는 소란한 소리가 들려왔 다. 재판이 열리기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헌병들은 말하고, 그들 중의 하나는 담배 한 대를 나에게 권했다. 나는 거절했다. 조금 뒤에 그가 나더라 "겁이 나느냐?"고 묻기에, 나는 아니 라고 대답했다. 어떤 의미로는, 재판 사건을 본다는 것이 흥미있는 일이기까지 했다. 나는 여태까지 그런 기회를 가져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야 볼 만하지. 그렇지만 나중엔 싫증이 나고 말아요." 하고 다른 헌병이 말했다. 이윽고 짧은 벨 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헌병들은 내 수갑을 풀어 주고 문을 열어 나를 피 고석으로 들여보냈다. 법정에는 사람들이 꽉 들어찼다. 커튼이 쳐져 있었으나, 햇빛이 여기 저기서 새어들어와 공기는 숨막힐 지경이었다. 유리창은 닫혀 있었다. 나는 의자에 걸터 앉 았고, 헌병들도 내 양쪽에 자리를 잡았다. 내 앞에 나란히 줄지어 있는 얼굴들이 눈에 띈 것 은 바로 그때였다.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배심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얼굴들을 구별할 수 있는 특징을 나는 말할 수가 없다. 내가 받은 인상은 다만 하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나는 전차 안의 좌석을 눈앞에 보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 그 이름모를 승객들이 웃음거리를 찾아보려고 새로 오르는 승객을 훑어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 배심원이 찾고 있던 것은 웃음거리가 아니라 죄였으니까. 다만 그 차이는 그다지 큰 것이 아니고, 어쨌든 내 머 리를 스친 것은 그러한 생각이었다. 나는 또 그 닫힌 방안에 들어찬 사람들 때문에 좀 어리둥절했다. 재판소 안을 둘러보았으 나 어느 얼굴 하나 식별할 수 없었다. 처음 나는 그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보려고 모여들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듯하다. 여태까지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 았던 것이다. 내가 그러한 법석거림의 원인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했다. "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까?" 하고 한 사람이 헌병에게 말하자 헌병은 심문 때문이라고 대 답하고, 배심원석 밑의 책상 옆에 자리잡은 한 패를 가리켰다. "저기들 와 있소." 하고 그는 말했다. "누구 말이오?" 하고 내가 묻자 "신문기자들 말이지." 하고 그는 대답했다. 헌병은 기자 한 사람을 알고 있어서, 그 기자가 그때 헌병을 보고 우리들에게로 걸어왔다. 꽤 나이 가 많아 보였는데 얼굴은 약간 찡그리고 있었으나 호감가는 남자였다. 그는 매우 다정스럽 게 헌병의 손을 잡았다. 그때 나는 마치 클럽에서 같은 또래의 사람들끼리 서로 만나서 즐 거워하듯, 모든 사람들이 서로 아는 얼굴을 찾아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보았다. 또 나는 어쩐지 침입자 같고, 필요없는 존재라는 기묘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신문기자는 웃음을 띠면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모든 것이 나에게 유리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내가 고맙다고 하자 "우리들은 당신의 사건을 좀 선전했습니다. 여름철은 신문으로서는 경기가 없는 때입니다. 기삿거리가 될 만한 것이라곤 당신의 사건하고 부모 살해사건밖엔 없어요." 하고 그는 덧붙였다. 그러고는 그가 방금 같이 앉아 있다가 온 그 사람들 가운데 뚱뚱한 두 더지처럼 생기고 큼직한 검은 테 안경을 쓴 키가 자그마한 사나이를 가리키며 '파리 신문' 의 특파원이라고 말했다. "당신 사건 때문에 온 것은 아니고 부모살해사건에 관한 보고를 하기 로 되어 있기 때문에 왔는데 당신의 사건도 기사로 만들어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 말에 대 해서도 나는 하마터면 고맙다고 할 뻔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스운 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 었다. 기자는 내게 다정스러운 손짓을 해보이고 가 버렸다. 우리는 또 몇 분 동안 더 기다렸 다. 내 변호사는 법복을 입고 여러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들어왔다. 그는 신문기자들에게로 가 서 악수를 했다. 그들은 농담을 하고 웃고 하며 아무 일도 없는 듯한 태도였는데 마침내 법 정 안에 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모두들 자기 자리에 앉았다. 내 변호사는 내게 와서 손을 잡고 흔들며 질문을 받으면 짤막하게 대답하고, 이쪽에서 먼저 뭐라고 말하지 말고, 그 밖의 일은 자기에게 맡기라고 일렀다. 왼쪽에서 의자를 뒤로 당기는 소리가 들리더니, 붉은 법복을 입고 코안경을 쓴,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사나이가 조심스럽게 옷을 당겨 올리면서 앉는 것이 보였다. 그가 검사였다. 서 기 한 사람이 개정을 알렸다. 동시에 커다란 선풍기 두 대가 부르릉거리기 시작했다. 판사 세 사람이 들어왔다. 둘은 검은 옷을 입고, 하나는 붉은 옷을 입었는데 서류를 가지고 들어 와서 실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단으로 빨리 걸어갔다. 붉은 옷을 입은 남자는 중앙 에 자리잡고 앉아서 법모를 자기 앞에 벗어놓고 벗겨진 대머리를 손수건으로 닦고 나서 재 판 개시를 선언했다. 신문기자들은 벌써 만년필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무심하고 비웃는 태도였다. 그러나 프란넬 옷을 입고 하늘색 넥타이를 맨 아주 젊은 청년 하나만이 만년필을 앞에 놓은 채 나를 바라다보고 있었다. 약간 균형이 잡히지 않는 듯한 그 얼굴에서 매우 맑은 두 눈밖 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 눈은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었는데, 이렇다 할 아무것도 표현하고 있지 않았다. 나 자신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야릇한 인상을 받았다. 아마도 그 때문 에, 그리고 또 내가 그곳의 풍습을 몰랐기 때문에, 나는 뒤이어 일어난 모든 일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 같다. 배심원들의 추첨과 변호사, 검사, 배심원에 대한 재판정의 질문 - 질 문을 받을 때마다 배심원의 머리들이 일제히 재판정석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 기소장의 빠 른 낭독 - 그 속에서 나는 지명들과 인명들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 그리고 다시 변호사에 대한 질문. 재판장은 증인 호출을 하겠다고 말했다. 서기는 이름을 불렀다. 그것은 내 주의를 끌었다. 여태까지 혼잡하던 방청객들 속에서, 한 사람씩 일어서서 옆문으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양로원 원장, 수위, 페레 영감, 레이몽, 마송, 살라마노, 마리. 마리는 나에게 살짝 근심스러운 시늉을 해보였다. 나는 그들이 여태까지 눈에 띄지 않았 던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끝으로 이름을 불린 셀레스트가 일어섰다. 그 의 곁에 언젠가 레스토랑에서 보았던 키가 자그마한 여자가 그 자켓을 입고 정확하고 결단 성 있는 그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뚫어지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재판 장이 또 이야기를 시작하여, 나는 생각해볼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했다. 정식변론이 이제부 터 시작될 것이라고 말하고 나서 방청인들에게 조용하기를 요청할 필요조차 없을 줄 안다고 말했다. 그는 사건의 변론을 공명 정대하게 진행시키는 것이 자기의 직분이며, 자기는 사건 을 객관적인 눈으로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배심원들의 결정은 정의의 정신에 입각하여 내 려져야 할 것이며, 어쨌든 조그만 사고라도 있으면 방청객들에게 퇴장을 명할 것이라고 말 했다. 더위는 점점 심해져서 방청객들이 신문으로 부채질하는 것이 보였다. 종이 구기는 소리가 잇달아 났다. 재판장이 손짓을 하자 서기가 짚으로 엮은 부채 세 개를 가져왔다. 세 사람의 판사가 그것으로 부채질을 했다. 곧 심문이 시작되었다. 재판장은 나에게 부드럽게, 다정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어조로 질 문을 했다. 다시 내 신분에 관해 질문을 했다. 나는 귀찮았으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잘못 알고 재판을 한다면 그건 너무나 중대한 일일 것 이기 때문이다. 그러더니 재판장이 내가 한 일을 얘기했는데 두서너 마디 하고는 줄곧 "그 렇지요?" 하고 내게 확인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변호사의 지시에 따라 "네, 그렇습니 다." 하고 대답했다. 재판장은 매우 세밀히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동 안 줄곧 신문기자들은 받아쓰고 있었다. 나는 젊은 기자와 그 키가 작고 꼭두각시 같은 여 자의 시선을 느꼈다. 전차 안의 좌석에 앉은 것 같이 사람들은 모두 재판장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는 기침을 하고 서류를 뒤지고 나서 부채질을 하며 내게로 몸을 돌렸다. 재판장은 나에게 겉으로는 내 사건과 아무 관계도 없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아마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진 문제를 심의해야겠다고 말했다. 또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려니 생각하고, 동시에 몹시도 그것이 나에게는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왜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냈느냐고 재판장이 물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부양할 돈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대답했 다. 그것은 나로선 마음아픈 일이었느냐고 묻기에, 어머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우리는 이 미 서로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었고, 또 누구에게도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으며, 그리고 우리는 각기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졌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재판장은 그 점에 관해서는 더 논의하지 않겠다고 말한 다음 검사에게 다른 질문이 없느냐고 물었다. 검사는 반쯤 나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는데, 그는 나를 보지 않고 재판장의 허락을 얻어, 내가 아랍인을 죽일 생각으로 혼자서 샘으로 되돌아갔는지 어떤지 알고 싶다고 말했다. "아 닙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다면 무기는 왜 가지고 있었으며, 그곳으로 바로 돌아간 이유는 무엇이오?" 그것은 우연이었다고 나는 대답했다. 검사는 딱딱한 어조로 "지금은 그 만하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고는 모든 것이 좀 애매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그 러나 잠시 의논을 하고 나서 재판정은 폐정을 선언하고, 오후에는 증인심문이 있을 것이라 고 말했다. 나는 생각을 해볼 겨를도 없었다. 끌려나와서 호송차에 실려 형무소로 돌아와서 점심을 먹었다. 매우 짧은 시간, 노곤해지려는 바로 그때 나는 다시 불려나갔다. 모든 것이 다시 시 작되어 나는 같은 방안에, 같은 얼굴들 앞에 앉게 되었다. 다만 더위가 훨씬 더 심해져서 마 치 기적이나 일어난 듯 모든 배심원들, 검사, 변호사, 그리고 몇몇 신문기자들까지도 밀짚부 채를 손에 들고 있었다. 젊은 기자와 자그마한 그 여자도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그 들은 부채질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없이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리고 양로원 원장의 이름이 불리는 것을 들었을 때에 야 비로소 그곳과 나 자신에 대한 의식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나에 대한 불평을 말하더냐는 질문에 원장은 그렇다고 대답하고, 그러나 친근자들에 대한 불평을 한다 는 것은 재원자들의 일종의 괴벽이라고 말했다. 내가 양로원에 보낸 것을 어머니가 못마땅 하게 여기고 있었느냐고 재판장이 따져 묻자 원장은 또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번에 는 아무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다. 또 다른 질문에 대해, 그는 장례식 날 내가 냉정한 것을 보고 놀랐다고 대답했다. 냉정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물으니까, 원장은 발끝을 내려다보 고 나서, 내가 어머니를 보려고 하지 않고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장례식이 끝난 뒤 에도 무덤 앞에서 묵도를 하지 않고 곧 물러났다고 말했다. 그를 놀라게 한 일이 또 하나 있었다. 장의사의 일꾼 한 사람에게 내가 어머니의 나이를 모르더란 말을 들었다는 것이었 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재판장은 위원장에게, 여태까지 한 말이 확실히 나에 관한 것이 틀 림없냐고 물었다. 원장이 그 질문의 뜻을 알아듣지 못한 것으로 안 재판장은 "법률상 그렇 게 하는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그리고 재판장이 차석검사에게 증인에 대한 질문이 없냐고 묻자, 검사는 "아, 없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고 외쳤다. 그 목소리가 하도 억세고, 나에게로 향한 그 승리의 표정을 지닌 눈초리가 하도 의기양양해서, 나는 여러 해 만에 처 음으로 울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모든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미워하는가 느낄 수 있었 기 때문이다. 배심원들과 내 변호사에게 질문이 없는가 묻고 나서, 재판장은 수위의 진술을 들었다. 그 에게도 다른 모든 증인들이나 마찬가지로 같은 격식의 절차가 되풀이되었다. 자리에 나와 서며 수위는 나를 바라보고 눈길을 돌렸다. 그는 질문에 대답했다. 내가 어머니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것, 담배를 피웠다는 것, 잠을 자고 밀크커피를 마셨다는 것을 말했다. 그때 나는 온 장내를 솟구치게 하는 그 무엇을 느끼고 새삼스럽게 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 달았다. 재판장은 수위에게 밀크커피 이야기와 담배 이야기를 한 번 더 시켰다. 차석검사는 조소의 빛을 띠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 내 변호사가 수위에게, 그도 나와 함께 담배를 피 우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이 질문을 듣자, 검사는 벌떡 일어서더니 "도대체 누가 죄인입니 까? 증언의 불리함을 은폐하기 위하여 죄과를 증인에게 뒤집어씌우는 방법은 언어도단입니 다. 아무래도 증언이 치명적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고 외쳤다. 그렇지만 재판장은 질문 에 대답하라고 수위에게 말했다. 영감은 당황한 빛으로 "제가 잘못했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저 분이 권하는 담배를 거절하기가 미안해서 그랬습죠." 하고 말했다. 끝으로 나에게 덧붙여 할 말이 없느냐고 묻기에, 나는 "없습니다. 다만 증인의 말이 옳다는 것을 말씀드립 니다. 내가 그에게 담배를 권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수위는 그때 약간의 놀라 움과 일종의 감사의 뜻이 포함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망설이더니 그는 밀크커 피를 권한 것은 자기였다고 말했다. 내 변호사는 의기양양해서 외치며, 배심원들은 그것을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검사는 우리들의 머리 위로 벼락 같은 소리를 질렀다. "물론 배심원들께서는 그것을 고려하실 겁니다. 그리고 배심원들께서는 아무 관게도 없는 사람으로서는 커피를 권할 수도 있었지만, 아들로서는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의 시체 앞에서 모름지기 그것을 사양해야 할 것이었다고 결론을 내릴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수위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토마 페레의 차례가 되었을 때는 서기가 그를 증언대까지 부축해야 했다. 그는 특히 어머니를 잘 알고 있었고, 나는 장례식 날 한 번 만났을 뿐이었다 고 말했다. 그는 그날 내가 무엇을 했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했다. "저는 그날 너무 슬퍼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가슴속의 슬픔 때문에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는 매우 슬픈 일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기절까지 했지요. 그래서 저분은 보질 못했습니다." 차석검사는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이라도 보았느냐고 물었다. 페레는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 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검사가 "배심원들께서는 이 점을 고려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말했 다. 그러나 내 변호사는 화를 내며 지나쳐 보일 만큼 큰소리로 페레에게, 내가 눈물을 흘리 지 않는 것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페레는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방청객들이 웃었다. 나의 변호사는 한쪽 소매를 걷어붙이면서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이 사건은 전부가 이 모양입니 다. 모든 것이 사실이라지만, 사실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검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기록 문서의 제목을 연필로 짚고 있었다. 5분 동안 쉬는 사이에 변호사는 모두 잘 되어 간다고 말했다. 휴식이 끝나자 피고측의 요 구로 출두한 셀레스트의 진술이 있었다. 내 처지를 변호하기 위해서였다. 셀레스트는 때때로 나에게 시선을 던지며 두 손으로 파나마 모자를 돌리고 있었다. 그는 새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은 가끔 일요일에 나와 함께 경마구경 갈 때 입던 것이었다. 그러나 칼라는 달 수가 없 었던지, 셔츠를 구리단추로 채웠을 따름이었다. 내가 그의 손님이었느냐고 하는 질문에 그 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또 친구이기도 합니다." 하고 말했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 음에 대하여, 나는 사나이라고 그는 대답했다. 사나이란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까, 그는 그것 이 무슨 뜻인지는 누구나 다 안다고 말했다. 내가 내성적인 성격이냐는 질문에는, 다만 나는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말했다. 내가 식비는 어김없이 치렀느냐고 차석검사가 묻자, 셀레스트는 웃고 나서 "그건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사사로운 일입니다." 하고 말했다. 다시 나의 범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자, 그는 증언대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할 말을 미리 준비한 것 같았다. "내 생각으로는 그건 하나의 불행입니다. 불행이 어떤 것인지 는 누구나 압니다. 불행이라는 건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확실히 내 생각으로는 그건 하나 의 불행입니다." 그는 더 계속하려고 했으나 재판장이 그만하면 좋다고 말하고 수고했다고 말했다. 셀레스트는 약간 당황했다. 그러나 그는 좀더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재판장은 짧 게 이야기하도록 요청했다. 셀레스트는 또다시 그것은 하나의 불행이라고 되풀이했다. 그러 니까 재판장은 "네, 그거은 알았어요. 그러나 우리의 할 일은 그러한 불행을 심판하는 것입 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말했다. 성의껏 했으나 그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셀레스트는 내게 고개를 돌렸다. 눈은 번쩍이고 입술은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좀더 나를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나에게 묻고 있는 듯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런 몸 짓도 하지 않았으나, 한 인간을 껴안고 싶은 마음이 우러난 것은 그때가 생전 처음이었다. 재판장은 증언대에서 물러가라고 그에게 명령했다. 셀레스트는 법정 좌석에 가서 앉았다. 나 머지 심문이 끝나도록 그는 우두커니 몸을 앞으로 약간 기울여 무릎에 팔꿈치를 괴고 파나 마 모자를 두 손으로 잡고 모든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마리가 들어왔다.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역시 아름다웠다. 그러나 머리카락을 풀어놓았을 때가 나는 더 좋았다. 내가 앉아 있는 곳에서도 그녀의 볼록한 젖가슴의 무게를 느낄 수 있 었다. 아랫입술이 조금 부푼 듯한 것도 여전했다. 매우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곧 그녀는 언 제부터 나를 알았느냐고 하는 질문을 받고 우리 회사에서 같이 일하던 시기를 말했다. 재판 장은 나와의 사이가 어떤 것인가를 알고 싶어했다. 마리는 친구라고 말했다. 또 다른 질문에 대하여, 나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대답했다. 서류를 뒤적이고 있던 검사 가, 갑자기 언제부터 우리들의 관계가 시작되었느냐고 물었다. 마리는 그 날짜를 말했다. 검 사는 태연한 기색으로, 그것은 어머니의 장례식이 있은 다음날인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러 고는 약간 비웃는 말투로, 그같은 미묘한 사정을 더 캐묻고 싶지는 않지만, 또 그녀의 염려 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러나 - 여기에서 그의 어조는 무뚝뚝했다 - 그는 자기의 의무상 부득이 에의를 초월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검사는 마리에게 나와 관계를 맺게 된 그날 하루의 일들을 요약해서 말하라고 했다. 마리는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았으나, 검사의 강권에 못 이겨 해수욕갔던 일, 영화구경갔던 일, 그리고 둘이서 나의 집으로 돌아온 일을 말했다. 차석검사는 예심에서 마리의 진술을 듣고, 그 날 영화의 프로그램을 조사해보았다고 말한 다음, 그날 무슨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는지 마리 자신의 입으로 말해주기 바란다고 덧 붙였다. 과연 마리는 거의 질린 목소리로, 그것은 '페르낭델'의 영화였다고 말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장내는 잠잠해졌다. 그러자 검사는 일어서서 심각하게 참으로 감동된 듯한 목 소리로, 나에게도 손가락질을 하면서 천천히 또박또박 끊어 말했다. "배심원 여러분, 어머니 가 사망한 바로 그 다음날에 이 사람은 해수욕을 하고, 부정한 관계를 맺고, 희극영화를 보 고 좋아한 것입니다. 더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여전히 조용한 가운데 검사는 말을 끝맺 었다. 갑자기 마리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것은 사실이 아니고, 사실인즉 사람 들이 억지로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 이야기를 시킨 것이다, 자기는 나를 잘 알고 있 으며 나는 아무것도 나쁜 일을 한 게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재판장이 손짓을 했고 서기가 그녀를 데려갔고 심문은 다시 게속되었다. 마송이 나서서 나는 얌전한 사람이며, '그뿐만 아 니라 성실한 사람이다'라고 말했으나, 거의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살라마노도 내 가 그의 개의 일로 퍽 친절했다는 것을 말하고, 나와 어머니에 관한 질문에 대하여 나는 어 머니에게 할말이 아무것도 없었고, 그 때문에 내가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낸 것이라고 대답 했으나 역시 들어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알아주셔야 합니다.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하 고 살라마노는 말했지만 알아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도 이끌려 나갔다. 뒤이어 레이몽의 차례가 되었다. 그가 마지막 증인이었다. 레이몽은 나에게 슬쩍 손짓을 해보이고 다짜고짜로 나에게는 죄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판정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재판장이 말했다. 재판장은 그에게, 질문을 기다려서 대답을 하라고 주의 를 주었다. 그와 피해자와 어떤 관계에 있었느냐 하는 질문이 있었다. 레이몽은 그 기회를 타서, 자기가 피해자의 누이의 뺨을 때린 다음부터 피해자가 미워하고 있던 것은 자기라고 말했다. 그러나 재판장은 피해자가 나를 미워할 이유가 없었는가고 물었다. 레이몽은 내가 바닷가에 같이 있었던 것은 우연의 결과였다고 대답했다. 검사는, 그러면 어째서 사건의 발 단이 된 그 편지가 내 손으로 씌어졌느냐고 물었다. 레이몽은 그것도 우연이었다고 대답했 다. 검사는 이 사건은 이미 여러 번 우연이 진상을 왜곡했다고 반박했다. 레이몽이 그의 정 부의 뺨을 때렸을 때 내가 말리지 않은 것도 우연인가, 내가 경찰서에 가서 증인이 되었던 것도 우연인가, 그때 내 증언이 순전히 호의적이었던 것도 우연인가 알고 싶다고 했다. 그는 끝으로 직업이 무엇이냐고 레이몽에게 물었다. '창고감독'이라고 레이몽이 대답하자 차석검 사는 배심원들에게 증인이 기둥서방 노릇을 업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공범자고 친구다. 그러므로 내 사건은 가장 천한 종류의 음란한 범죄 사건이며, 더욱이 피고는 흉악하기 짝없는 파렴치한이라는 것이었다. 레이몽이 변명을 하려 했고, 내 변호사도 항의했으나, 재판장은 검사의 이야기를 끝마치게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검사는 "나는 더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한 다음, 레이몽에게 "피고는 당 신의 친구였습니까?" 하고 물었다. 레이몽은 "그렇습니다. 나의 친구였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검사는 나에게 같은 질문을 하여 나는 레이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나에게 눈을 돌리 지 않았다. "나는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검사는 그때 배심원에게로 돌아서며 말했다. "어머니가 죽은 다음날 가장 수치스러운 정사에 몰두한 그 사람은 대수롭지도 않은 이유로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풍기 사건의 결말을 지으려고 살인을 한 것입니다." 검사는 이야기를 끝마치고 앉았다. 그러나 내 변호사는 참다못해, 두 팔을 높이 쳐들며 외 쳤다. 그 때문에 소매가 흘러내려, 풀먹인 셔츠의 주름이 드러나 보였다. "도대체 피고는 어 머니를 매장한 것 때문에 기소된 것입니까?" 방청객들이 웃었다. 그러나 검사는 다시 일어 서서 법복을 고쳐입고 나서 존경하는 변호인이 순진성을 갖지 않고서는 그 두 종류의 사실 사이에 근본적이고 감동적이며 본질적인 관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언명했다. "그렇습 니다." 하고 그는 힘차게 외쳤다. "범죄인의 마음을 가지고 자기의 어머니를 매장했으므로 나는 이 사람의 죄를 논고하는 것입니다." 그 논고는 방청객들로부터 커다란 효과를 거둔 듯했다. 변호사는 어깨를 으쓱해보이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러나 그 자신 동요된 빛을 보였고 사태는 나에게 결코 유리하지 못하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그러고는 모든 것이 빨리 진행되었다. 심문이 끝나고, 재판소에서 나와 차를 타러가면서, 나는 매우 짧은 동안 여름 저녁의 냄새와 빛을 느꼈다. 어두컴컴한 호송차 속에서 나는 내 가 좋아하던 어떤 도회지의 거리며, 이따금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던 어떤 시간의 귀에 익은 소리들을, 마치 자신의 피로한 마음속으로부터 찾아내듯이 하나씩 다시 들을 수 있었다. 이 미 더위가 수그러진 공중에서 들려오는 신문장수들의 고함 소리, 공원에서 마지막까지 놀던 새 소리, 샌드위치 장수의 부르짖음, 높은 시가지의 휘어진 길목에서 울리는 전차의 삑삑대 는 소리, 그리고 항구 위로 밤이 내릴 무렵, 하늘에 반향하는 어렴풋한 소리 - 그러한 모든 것이 나에게 소경의 길잡이같이 이루고 있었다. 그 길은 형무소로 들어오기 전에 내가 잘 알고 있던 것이었다. 그렇다, 그것은 이미 오랜 옛날, 내가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던 시간이 었다. 그러한 때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언제나 가볍고 꿈도 없는 수면이었다. 그러나 이 제는 무엇인가 달라진 것이 있었다. 왜냐하면, 내일을 기다리고 있었던 나는 나의 감방에 다 시 들어가게 된 까닭이다. 마치 여름 하늘 속에 그려진 낯익은 길이 죄없는 수면으로 이끌 어갈 수도 있고, 감옥으로 이끌어갈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4 피고석에서라도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언제나 흥미있는 일이다. 검사와 변호사 간의 토론이 있는 동안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많이 했다. 아마 내 범죄 이야기보다도 더 많 이 내 이야기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논고와 변론이 그다지 차이가 있었을 까? 변호사는 팔을 쳐들고 범죄를 인정하되 변명을 붙였고, 검사는 손가락질을 하며 죄를 고발하여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았을 따름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좀 난처한 일이 하나 있었 다. 나는 스스로의 생각에 정신이 팔려 있었으나 때로는 나도 한마디 하고 싶었다. 그러면 변호사는 "가만 있어요. 그래야 일이 잘 됩니다." 하고 말했다. 이를테면 사건이 나와는 아 무런 관계없이 다루어진 셈이었다. 나는 참여도 안 시키고 모든 것이 진행되었다. 내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은 채 내 운명이 결정되었다. 때때로 나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가로막고, 이렇 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도대체 누가 피고입니까? 피고라는 것은 중요합니다. 나에게는 할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해보면 아무 할 이야기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차지하는 흥미는 오래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어 검사의 변론도 나에게는 곧 싱거워졌다. 내 관심을 끌거나 흥미를 일으킨 것은 다만 단편적 인 말들, 몸짓들, 혹은 전체와는 동떨어진 한 토막의 변설, 그러한 것들이었다. 내가 옳게 이해한 것이라면, 검사의 생각의 요점은 내가 범죄를 미리 계획했다는 것이었 다. 적어도 그는 그것을 증명하려고 했으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을 증명하겠습니다. 그것을 나는 이중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는 명백한 사실에 비추어서, 둘째로는 이 악한 마음씨의 음흉한 심리 상태에 비추어서 증명할 수 있습니다." 검사는 어머니가 죽은 뒤의 사실들을 요약했다. 내가 냉담했다는 것, 어머니의 나이를 몰랐다는 것, 이튿날 여자와 함께 해수욕을 하러갔다는 것, 페르낭델의 영화구경을 하고, 끝으로 마리와 함께 집으로 돌 아왔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때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하기까지 퍽 시간이 걸렸다. 그가 '정부 ' 란 말을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마리였을 따름이다. 그리고 검사는 레이몽 이야기 를 했다. 사건을 보는 그의 방법은 여간 명석한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의 이야기 는 그럴 듯했다. 내가 레이몽과 합의하여 그의 정부를 꾀어내서 '성품이 횡포한' 사나이의 흉악한 행위에 맡기려고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 바닷가에서는 내가 레이몽의 적들에게 대들 었다는 것이다. 레이몽은 다쳤다. 나는 레이몽에게서 권총을 달래가지고 혼자서 그것을 사용 할 생각으로 되돌아갔다. 그래서 계획대로 아랍인을 쏘아죽인 것이다. 조금 기다렸다가 '일 이 잘 되었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다시 네 방의 총알을 태연자약하게, 말하자면 확실히 명 확 한 의식을 가지고 쏘았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습니다." 하고 검사는 말했다. "나는 여러분께 이 사람이 뻔히 알면서 살인을 하게 된 사건의 경위를 말씀드렸습니다. 나는 이 점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보통의 살인, 정상에 의하여 관대하게보아줄 수도 있는 그런 반사적 행동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 사람은 교양도 있습니다. 이 사람의 진술을 여러분도 들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는 대답할 줄도 알고 말의 뜻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행동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귀를 기울이고 있던 나는 나를 교양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보통 사 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능력이 어떻게 한 사람의 범인에게는 매우 불리한 조건이 되는 것인지 나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나를 놀라게 한 점은 그러한 점이었다. 그 뒤로 는 더 이상 검사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러한 말이 들려올 때까지. "후회하는 빛이라도 보였 습니까? 여러분, 조금도 없었습니다. 예심 때에도 이 사람은 자기의 가증스러운 범행을 뉘우 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고는 나에게로 돌아서서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계속 해서 열번을 토했는데, 사실 나는 그 이유를 잘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이야기가 옳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는 했다. 나는 내 행동을 그다지 뉘우치지는 않았찌만 그렇다고 그렇 게 노발대발한다는 것이 나는 놀라웠다. 그에게 나는 다정스럽게 거의 애정을 기울여 나로 서는 정말로 후회할 게 없다고 설명을 해주고 싶었다. 나는 항상 앞으로 나에게 일어날 일, 오늘의 일, 또는 내일의 일에 마음이 팔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물론 내 처지로서는 누구 에게도 그러한 투로 말할 수는 없었다. 나에게는 다정스러운 태도를 취하거나, 선의를 가질 권리가 없는 것이다. 검사가 다시 내 영혼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여 나는 귀를 기울였다. 검사는 내 영혼을 들여다보았으나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배심원들에게 말했다. 사 실 넋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도무지 없고, 인간다운 점이 조금도 없으며, 인간의 마음을 보전 하는 모든 도덕적 원리가 나와는 인연이 멀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하고 그는 계속해서 말 했다. "우리는 그것을 비난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가질 수 없는 것이 그에게 없다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법정에서는, 소극적인 관용의 의기는 그보다 더 어렵기는 하지만, 더 높은 의기로 바뀌어야 합니다. 특히 이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심리의 공허가 사회 전체를 삼켜버릴 수도 있는 심연이 되는 경우에는 더욱이 그러합니다." 그러고는 어머니에 대한 내 태도를 뇌까렸다. 변론중에 한 말을 그는 다시 되풀이했다. 그러 나 그것은 내 범죄를 이야기했을 때보다도 더 길었다. 너무나 길어서, 마침내 그날의 아침의 더위밖에는 아무것도 나는 느끼지 못했다. 잠시 후에 차석검사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매우 낮고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법정은 내일 가장 가증스러운 범죄, 부모를 살해 한 범행을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 잔학한 범죄는 상상조차 할 수 없 다는 것이었다. 그는 인간사회의 율범이 엄중한 처단을 내리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범행이 일으키는 전율감은 내 무감각에 대하여 느끼는 전율감보다는 차라리 덜하다는 것 을 서슴지 않고 말할 수 있다고 지껄였다. 또 그의 말에 의하면 정신적으로 어머니를 죽이 는 사람은 아버지를 자기의 손으로 죽이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로부터 말살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전자는 후자의 행위를 준비하는 것이며, 말하자면 그러한 행위를 예고하고 승인한다는 것이었다. "여러분, 나는 확신합니다." 하고 그는 언성을 높여서 덧붙 였다. "이 의자에 앉아 있는 이 사람은 이 법정이 내일 판결을 내리게 될 살인죄를 또다시 범할 것이라고 말해도 여러분은 내 생각이 지나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러므로 이 사람은 처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검사는 땀으로 번뜩이는 얼굴을 닦았다. 끝으로 그는 자기의 의무는 괴로운 것이지만 단호히 그것을 수행할 것이라고 말했 다. 나는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법칙을 무시하고 있으므로 사회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반응도 모르는 사람이므로 인정에 호소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 사람에 대해 사형을 요구합니다. 사형을 요구해도 내 마음은 가볍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짧지 않은 재직기간중, 나는 여러 번 사형을 요구한 일이 있었지만 오늘처럼 이 괴로 운 의무가 신성한 지상명령이란 의식과 흉악 이외에는 아무것도 엿볼 수 없는 한 사람의 얼 굴을 놓고 느끼는 전율감에 의해 보상을 받아 평온하고 명랑하게 된 적은 일찍이 없었기 때 문입니다." 검사가 자리에 앉자 상당히 오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더위와 놀라움으로 어리둥절했다. 재판장이 잔기침을 하고 나서 낮은 목소리로 덧붙여 할 말은 없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이야기하고 싶었으므로 일어서서 그저 생각나는 대로 아랍인을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말했다. 재판장은 그건 하나의 주장일 뿐이라고 말하고 아직 나의 변호 내용을 잘 알 수 없 으니 변호사의 말을 듣기 전에 내가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된 동기를 명확히 말해주면 좋겠다 고 말했다. 나는 빠른 어조로 말을 좀 뒤섞이며 내 자신이 우습게 보인다는 사실을 알면서 도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장내에는 웃음이 일었다. 내 변호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곧 이어 그는 발언의 지명을 받았으나 시간도 늦고 자기의 진술은 많은 시간이 걸 릴 것이므로 오후로 미루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법정은 거기에 동의했다. 오후에도 커다란 선풍기가 여전히 실내의 무더운 공기를 휘젓고, 배심원들의 가지각색의 조그만 부채들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변호사의 변론은 언제나 끝이 날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문득 나는 귀를 기울였다. "피고가 사람을 죽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고 그가 말했기 때문이다. 뒤이어 그는 그런 투로 이야기를 하며, 내 말을 할 적마다 '피 고'라고 했다. 나는 매우 놀랐다. 나는 헌병에게로 몸을 굽혀 그 이유를 물었다. 헌병은 가 만 있으라고 말하고 조금 있더니 "변호사들은 모두 그렇다."고 덧붙였다. 나로서는 그것은 또한 나를 사건으로부터 제쳐놓고, 나를 제로로 만들어버리는 것이고 이를테면 그가 내 신의 역 할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주의는 어느새 그 법정에서 매우 멀어져 있었다 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변호사는 우스워 보였다. 그는 빠른 어조로 내 가해행위를 변호하고 나서, 그도 역시 나의 영혼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그러나 검사에 비하여 그 솜씨가 훨씬 떨 어지는 것 같았다. "나도 역시 피고의 영혼을 들여다보았습니다만 탁월하신 검사의 의견과 는 반대로 나는 무엇인가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펼친 책을 읽듯 환히 볼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내가 성실한 인간이며 규칙적이고 근면하고, 일하고 있던 회사에 충실했으며, 모든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다른 사람의 불행을 동정하는 사람인 것을 읽었다는 것이었다. 그의 의견에 의함녀 나는 힘이 자라는 한 정성껏 오랫동안 어머니 를 부양한 모범적 아들이었다. 나중에 내가 내 능력으로는 시켜드릴 수 없는 안락한 생활을 양로원이 대신 늙은 어머니에게 시켜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는 것이다 "여러분, 그 양로 원에 관하여 이러니저러니 그렇게도 많은 논의가 있었다는 것을 나는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 합니다. 만일에 그러한 시설의 유익함과 고귀함의 증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라면 국가 자체 가 그런 시설을 보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그는 덧붙였 다. 다만 장례식에 관해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것이 그의 결론의 결함이라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러나 그러한 장광설들, 여러 날 동안 내 영혼에 관해 이야기를 한 그 한없이 긴 시간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이 빛깔 없는 물처럼 되어버려 그 속에서 현기증이 나는 느낌을 받았다. 끝으로 변호사가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 동안, 거리에서 들리는 아이스크림의 장수의 나 팔 소리가 다른 방들과 법정의 온 공간에 울려 퍼지며, 내 귀까지 울려온 것을 나는 기억하 고 있을 따름이다. 나는 이미 내 것이 아닌 생애, 그러나 거기서 내가 지극히 빈약하나마 집 요한 기쁨을 얻었던 생애의 추억에 사로잡혔다. 여름철의 냄새, 내가 좋아하던 거리, 어느 날 저녁의 하늘, 마리의 웃음과 옷차림. 그곳에서 내가 하고 있던 중요하지 않은 그 모든 것 에 대한 역증이 목구멍까지 치밀어올라 나는 다만 그것이 어서 끝나서 나의 감방으로 들어 가 잠잘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내 변호사가 끝으로 배심원들은 일시적 실수로 소행을 그르친 성실한 직업인을 사형에 처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외치고, 내가 이미 가장 확실한 벌 로써 영원한 뉘우침을 걸머지고 있는 범죄에 대하여 정상의 참작을 요구하는 것도 내 귀에 는 들리지 않았다. 법정은 심문을 중지하고 변호사는 피곤한 빛을 보이며 자리에 앉았다. 그 러나 그의 동료들이 달려와서 그의 손을 잡았다. "참 훌륭했어." 하는 말이 들렸고, 그 중의 한 사람은 내게 동조를 구하려는 듯이 "그렇지요?" 하고 말하기까지 했다. 나는 동의했으나 나의 찬사는 충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었다. 너무나 피곤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밖의 더위가 좀 가셨다. 한길에서 들려오는 소리들로 나는 저녁의 부드러움 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들은 모두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나 한 사람에 관계 되는 일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장내를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첫날과 똑같은 상태에 있었 다. 나는 회색 웃옷을 입은 신문기자, 그리고 꼭두각시 같은 여자와 눈길이 마주쳤다. 그것 이 재판중에 내가 한 번도 눈으로 마리를 찾아보지 않았다는 생각을 나에게 일으켜주었다. 나는 마리를 잊어버리지는 않았으나 할 일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마리는 셀레스트와 레 이몽 사이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이제야 끝났어요' 하는 듯이 나에게 조그맣게 손짓했 다. 얼굴에는 약간 근심 어린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마음이 닫혀 있음을 느끼며 그 의 미소에 답례조차 할 수 없었다. 공판이 재개되었다. 매우 빠른 어조로 배심원들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의 낭독이 있었다. '살인죄', '가해행위' 그러한 말들이 들렸다. 배심원들이 나가버리자, 나는 앞서 기다렸던 방 으로 끌려갔다. 내 변호사가 따라와서 매우 수다스럽게 여느 때보다도 더욱 자신 있고 다정 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므로 몇 년 동안의 금고나 혹은 징역을 치르면 그만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에 판결이 불리할 경우에는 파기할 수도 있느 냐고 나는 물었다. 그럴 수는 없다고 그는 대답했다. 배심원측의 악감정을 사지 않기 위해 서, 이편의 결론적 요구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전술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아 무 이유도 없이 판결을 파기하지는 못하는 법이라고 설명했다. 그것은 나에게도 납득이 되 어 그의 이론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따져보면,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숱한 서류가 쓸데없을 것이다. "어쨌든 상고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나 쁘지 않으리라고 확신합니다." 내 변호사는 말했다. 우리들은 매우 오랫동안, 아마 거의 4, 50분이나 기다렸다. 시간이 되자 종이 울렸다. 변호사는 "배심원측의 답신을 재판장이 읽습 니다. 당신은 판결을 언도할 때에야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하고 말하면서 나를 두고 가버 렸다.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계단을 뛰어가고 있었으나 멀고 가까움을 분간 할 수는 없었다. 그러자 법정으로부터 나직한 목소리로 무엇인지 읽는 것이 들렸다. 다시 종 이 울리고 피고석의 문이 열렸을 때, 나에게로 밀려온 것은 장내의 침묵, 그리고 그 젊은 신 문기자가 시선을 나에게서 돌리는 것을 보았을 때의 그 야릇한 느낌이었다. 나는 마리가 있 는 쪽을 보지 못했다. 시간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재판장이 이상스러운 말투로, 피고는 프랑스 국민의 이름으로 광장에서 목이 잘릴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 위에 나타난 감정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경이였다고 생각 된다. 헌병들은 나에게 친절했고, 변호사는 내 손목에 그의 손을 올려놓았다.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재판장이, 무엇이든지 덧붙여 말할 것은 없느냐고 묻기에 나 는 '없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나는 곧 끌려나왔다. 5 나는 형무소 소속 신부의 면회를 세 번째 거절했다. 그에게 말할 것도 없고 이야기하기도 싫어, 서둘러서 만나야 할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의 나의 관심거리는 메카닉한 것으로 부터 벗어나는 것, 불가피한 것으로부터 빠져나갈 길이 있을 수 있는가를 알아보는 일이다. 감방이 바뀌었다. 지금 이 감방에서는 반듯이 누우면 하늘이 보인다. 하늘밖엔 보이지 않는 다. 하늘 모습에서 낮이 밤으로 옮겨 가는 빛깔의 조락을 바라보는 것으로 하루하루가 지나 간다. 누워서 머리 밑에 손을 괴고 나는 기다린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으로서 그 무자비한 메카니즘으로부터 벗어난 예가, 처형되기 전에 종적을 감추었다든가 경계선을 돌파한 예가 있었을까 하고 나는 몇 번이나 자문해보았는지 모른다. 그럴 때마다 사형집행에 관한 이야 기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 후회되었다. 그러한 문제에는 언제나 관심을 가 져야 할 것이다. 어떤 일을 당하게 될는지 알 수 없지 않은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신문기사를 읽은 일이 있긴 하다. 그러나 특별한 저서들이 확실히 있었을 텐데, 나는 그것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호기심을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책들 속에 서라면 탈출에 관한 이야기도 찾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한 번쯤은, 바퀴가 멎어 그 거스를 수 없는 전락 속에서 우연과 행운이 한 번쯤은 무슨 변동을 일으킨 일이 있다는 것 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단 한 번만... 어느 의미로는 그것만으로 내게는 충분하리라고 생각 한다. 나머지는 내 마음으로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신문들은 흔히 사회에 대한 죄과를 운 운한다. 신문에 의하면 그것을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말은 상상력을 불러일 으켜주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탈출의 가능성, 무자비한 의식 밖으로의 도약, 희망의 무한한 기회를 주는 미친 듯한 질주였다. 물론 희망이라고 해도 길모퉁이에서 달리던 도중에 날아 오는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것뿐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러한 호사를 나에게 허 락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두가 나에게는 그것을 금지하고 메카닉한 것이 나를 다시 붙드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러한 턱도 없는 확실성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어쨌 든 그 확실성에 근거를 둔 판결과, 판결의 언도가 내려진 순간부터의 그 어쩔 수 없는 결말 사이에는 어처구니없는 불균형이 있었기 때문이다. 판결문이 5시가 아니라 8시에 낭독되었 다는 사실, 그 판결문이 전혀 다를 수도 있으리라는 사실, 그것이 속옷을 갈아입는 인간들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사실, 그것이 프랑스 국민 - 혹은 독일 국민, 중국 국민이든 - 이란 지 극히 모호한 관념에 의거하여 언도되었다는 사실, 그러한 모든 것은 그같은 결정으로부터 많은 준엄성을 제거하는 것으로 나에게는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 선고가 내려진 순간부터 그 결과는 내가 몸뚱이를 비벼대고 있던 그 담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확실하고 준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때, 나는 어머니에게서 들은 아버지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나는 아버지를 알지 못했 다. 아버지에 관하여 내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으로는 아마 어머니가 그때 이야기해준 것밖 에 없었다. 아버지는 어느 살인범의 사형집행을 보러갔었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러갈 생각 만 해도 아버지는 병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갔었고, 돌아오던 길에는 아침 먹은 것을 토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아버지가 좀 싫어졌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것이 지 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형집행보다 더 중대한 일은 없으며, 어떤 의미로는 그것이야말로 사람에게는 참으로 흥미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것을 어째서 나는 알 아차리지 못했을까. 만약에 내가 이 감옥으로부터 나가는 일이 있다면 나는 모든 사형집행 을 빠짐없이 보러가겠다. 그러한 가능성을 생각해보는 것은 잘못이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 면 어느 날 이른 아침 경계선 뒤에서, 말하자면 저 쪽에서 자유스러울 자기 자신을 생각할 때 구경하러 갔다가 토할 수 있을 것을 생각할 때 억눌렸던 기쁨의 물결이 가슴으로 복받쳐 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러한 가정에 이끌린다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 뒤로 곧 나는 너무나 추워 이불 밑에서 몸을 웅크리지 않을 수 없었 기 때문이다. 나는 참다못해 턱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러나 물론 언제나 이치에 맞는 생각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법률의 초안을 만들어 보는 때도 있었다. 형법 체계를 개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점은 사형선고를 받은 자에게 기 회를 준다는 것이었다. 천 번에 한 번쯤, 그것이면 여러 가지 일을 해결하기에 충분했다. 그 래서 그것을 먹으면 사형수가 - 나는 사형수라는 말을 생각했었다 - 열 번에 아홉 번 죽는 그런 화학약품의 배합을 고안해 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형자에게 그런 사실을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조건이었다. 왜냐하면 곰곰이 냉정하게 일을 생각해보면, 단두대의 칼날의 결함이라면 아무런 기회도, 절대로 아무런 기회도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결국 어쩔수없이 사형수의 죽음은 결정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확정된 조치고 기정사실이어서 그것을 취소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만약에 목이 잘 베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으면 다시 할 뿐이다. 그러므로 기막힌 일은 사형수로서는 기계가 아무 고장없이 움직여주기만 바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것이 결함이라고 나는 말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로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로는 그 훌륭한 조직의 모든 비결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나는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컨대 사형수는 정 신적으로 협력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것이 지장없이 진행된다는 것이 그에게도 이로 운 것이다. 나는 또한 그러한 문제에 관해서, 여태까지 정확하지 못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랫동안 나는 -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 단두대로 올라 가려면 계단을 밟고 교수대 위로 걸어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1789년의 대혁명, 다시 말하면 그러한 문제에 관해서 사람들이 가르쳐주고, 또 보여준 모든 것들 때문 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 소문이 자자했던 어느 사형집행이 있었을 때 신문에 실렸던 사진 한 장이 생각났다. 사실 그 기계는 땅바닥에 지극히 간단하게 놓여 있었고 생 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폭이 좁았다. 좀더 일찍이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스 러웠다. 사진에 나타난 그 기계는 무엇보다도 정밀한 제품답게 그 규모 있고 번쩍이는 모양 이 내 인상에 깊이 남았었다. 사람이란 모르는 것에 관해서는 과장된 생각을 품는 법이다. 그런데도 실상은 모든 것이 매우 간단하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계는 그쪽을 향해서 걸어가는 사람의 키만 하다. 마치 누구를 만나러가는 것처럼 가다가 기계와 마주치게 마련이다. 어떤 의미로는 그것도 또한 기가 막히는 노릇이다. 단두대로 올라간다면 하늘 속으로 승천을 하는 것이라는 방향으로 상상력이 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점에서도 메카닉한 것이 모든 것을 짓눌러버린다. 그저 좀 부끄러움을 느끼며 대단히 정확하게 목숨 이 슬그머니 끊어지는 것이다. 그 밖에 또 내 머리에서 줄곧 떠나지 않는 것이 두 가지 있었다. 새볔과 상소가 그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을 타일러 그러한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 며 거기에만 관심을 갖으려고 했다. 하늘은 초록빛으로 변했다. 저녁때가 된 것이다. 나는 생각의 방향을 돌리려고 더욱 애썼다. 나는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렇게도 오래 전부터 나를 따르던 그 소리가 멎을 때가 있으리라고는 아무리 해도 상상할 수 없었다. 나 는 진정한 상상력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래도 나는 이 심장의 고동이 내 머리에 울리지 않 게 될 순간을 생각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새벽녘 또는 상소라는 것이 있었기 때 문이다. 나는 마침내 내 마음을 억제하려 들지 않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이 오는 것은 새벽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결국 나는 밤마다 그 새벽을 기다 리며 지낸 셈이다. 갑자기 놀라는 것을 나는 언제나 싫어한다. 무슨 일이 생기든간에 마음의 준비를 해두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나는 마침내 낮 동안에 좀 자두었다가 밤에는 끝끝내 새벽빛이 천장 유리창 위에 훤히 밝아오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가장 괴로운 것은 그 들이 보통 그 일을 하러오는 때라는 것을 내가 알고 있던 그 분간키 어려운 시간이었다. 자 정이 지나면 나는 기다리면서 지켜본다. 내 귀가 그처럼 많은 소리, 그렇게도 조그만 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동안 발소리는 한 번도 듣지 않았으니 어지간히 나는 운수가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란 아주 불행하게 되는 법은 없는 거라고 어머니 는 말했다. 하늘이 빛을 띠어 새로운 하루가 내 감방으로 새어들 때 나는 어머니의 말이 옳 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발소리가 들려와서 내 심장이 터질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스락 소리만 나도 문으로 달려가서 판자에 귀를 대고 얼빠진 듯이 기다리면, 나중에는 내 자신의 숨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숨소리는 거칠기가 마치 허덕이는 개의 숨결과도 같아서 깜 짝 놀라는 일이 있었다. 결국 내 심장은 터지지 않고 다시 한 번 나는 24시간을 얻을 수 있 었다. 낮 동안에는 언제나 상소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이 상소에 대한 생각을 가장 적절하게 이용했다고 믿는다. 효과를 면밀히 따져보니 생각으로부터 최대의 능률을 얻도록 한 것이다. 나는 늘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곤 했다. 상소 각하가 그것이었다. '그땐 죽을 수밖에는 없다 '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죽을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러나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따. 결국 서른 살에 죽든지 예순 살에 죽든지 별로 다름이 없다는 것을 나도 모르지는 않는다. 그 어떤 경우든지 그 뒤엔 다른 남자들, 다른 여자들이 살아갈 것은 마찬 가지다. 그리고 수천 년 동안 그럴 것이다. 요컨대 그것은 지극히 명백한 일이었다. 지금이 나 20년 후나 나는 죽을 것이다. 그때 그러한 내 이론이 좀 거북한 것은 앞으로 20년 후의 생활을 생각할 때 내 마음속에 느껴지는 무서운 용솟음이었다. 그러나 20년 후에 어차피 그 러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내가 가지게 될 생각을 상상함으로써 그것도 눌러버리면 그만 이었다. 죽는 바에야 어떻게 죽든 언제 죽든 그런 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명백한 일이다. 그러므로 - 그리고 어려운 일은 이 '그러므로'라는 말이 표시하는 모든 추론을 시야에서 잃 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 그러므로 나는 내 상소의 각하를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두 번째 가정을 생각해볼 권리를 가질 수 있었는데 말하자면 나 자 신에게 그것을 용인하는 것이었다. 그 두 번째 가정은 무죄 석방이었다. 거북스러운 것은 턱 없는 기쁨으로 눈을 찌르는 그 피와 육신의 충동을 진정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던 일이다. 그 부르짖음을 억누르고 그것을 타일러야만 했다. 첫 번째 가정에 대해서 내 단념을 더욱 적절 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이 두 번째 가정에 대해서도 나는 태연스러워야만 했던 것이다. 그럴 수 있을 때에는 한 시간쯤 가라앉은 마음을 가질 수가 있었다. 그만하면 어쨌든 대단한 일 이었다. 그럴 무렵 나는 또다시 소속 신부의 면회를 거절했다. 나는 누워서 하늘이 황금빛으로 물 드는 것을 보며, 여름 저녁이 가까워짐을 알고 있었다. 바로 내 상소를 각하하고 난 참이라 나는 혈액의 파동이 규칙적으로 내 몸속을 순환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굳이 신 부를 만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마리를 생각했다. 퍽 오래전부 터 마리로부터 편지가 없었다. 그날저녁 나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아마 사형수의 정부라는 것에 그만 지쳐버렸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병이 났거나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서로 떨어져 있는 우리들의 두 육체밖에는 이제 우 리들을 연결시키고 서로 생각케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 어떻게 내가 그러한 사정을 알 수 있었을 것인가? 하긴 그때부터 이미 마리의 추억은 나에게는 아무런 흥미도 없었다. 죽었다면 마리에게 나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되 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내가 죽은 뒤에는 사람들이 나를 잊어버린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죽고 나면 사람들은 나와 아무 관계도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 일은 생각하기 괴로운 일이라고 할 수도 없다. 결국 무슨 생각이든지 사람이란 결국에는 익숙해지고 마는 법이다. 신부가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를 보자 나는 몸이 약간 떨렸다. 신부는 그것을 알 아차리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평소에는 다른 시간에 오지 않았느냐고 말했더니, 그는 이번 면회는 순전히 친구로서 온 것이고 내 상소와는 아무 관계도 없으며, 상소에 관 해서는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는 내 침대 위에 앉은 다음 나더러 가까이 오라고 권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매우 다정스러워 보였다. 잠시 동안 그는 앉아서 두 팔목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머리를 숙여 자기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손은 가냘팠는데 힘줄이 드러나 보였으며, 두 마리의 무슨 민첩한 짐승을 연상케 했다. 신부는 천천히 두 손을 비볐다. 그러고는 여전히 머리를 숙이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 다. 하도 오랫동안 그대로 있어서 나는 잠시 그를 잊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그는 머리를 쳐들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왜 내 면회를 거절하십니까?" 하 고 그는 말했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 점에 대해서 확신을 가질 수 있느냐 고 묻기에, 나는 그러한 것을 자문해볼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런 것은 내게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는 몸을 뒤로 젖히고 손을 펴 넓적다리에 대고 벽에 등을 기대었다. 그는 나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빛을 거의 보이지 않으면서 사람이 란 자기로서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할 때가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쳐다보고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 까?" 그럴 수도 있는 것이라고 나는 대답했다. 어쨌든 진정으로 내 관심을 끄는 것에 대해 서는 확신을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르겠으나, 내 관심을 끌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명백히 확 신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내 관심을 끌지 않는 것이 라고 했다. 그는 눈을 돌렸으나, 여전히 그 자세를 고치지 않고, 내가 절망한 나머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나는 절망한 것이 아니라고 그에게 설명했다. 다만 나는 두려울 뿐이 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하고 그는 말 했다. "당신과 같은 처지에 있던 사람으로서 내가 안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께로 돌아갔습니 다." 그것은 그들의 권리라고 나는 시인했다. 그것은 또한 그들이 그럴 만한 시간적 여유를 가졌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로 말하면 도움을 받기가 싫었고, 또 관심이 가지 않는 것에 관심을 기울일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그의 손은 역증이 난 듯한 시늉을 했으나, 곧 그는 몸을 일으키고 옷주름을 바로잡 았다. 그러고 나서 나를 '벗'이라고 부르며 이야기를 했다. 그가 그렇게 나에게 말하는 것 은 내가 사형선고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의견에 의하면 우리들은 모두 사형선고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말을 가로막고 그것은 사정이 다르고 또 어쨌든 그것이 위안이 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야 그렇지요." 그는 내 말에 동의했다. "그렇지만 당신은 오늘 죽지 않는다고 해도, 장차는 죽을 것입니다. 그때 똑같은 문제가 생 길 것이오. 그 무서운 시련을 당신은 어떻게 받을 것입니까?" 내가 지금 받고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나는 그 시련을 받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자, 그는 일어서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것은 내가 잘 알고 있는 장난 이었다. 나는 흔히 엠마뉴엘이나 셀레스트와 그 놀음을 했는데, 대개는 그들이 먼저 눈을 돌 려버리곤 했다. 신부도 그 장난을 알고 있다는 것을 나는 곧 알 수 있었다. 그의 눈길은 조 금도 떨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당신은 그럼 아무 희망도 없고, 죽으면 완전히 없어져버 린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하고 말할 때 그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그렇습 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머리를 숙이고 다시 걸터앉았다. 나를 불쌍히 여긴다고 그는 말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로 생각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만 그가 귀찮아지는 것 을 느꼈을 따름이다. 이번에는 내가 돌아서서 천장으로 난 창밑으로 갔다. 나는 어깨를 벽에 기대고 있었다. 귀담아듣지는 않았으나, 그가 또다시 나에게 뭐라고 묻는 것이 들려왔다. 그 는 불안하고 간곡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가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좀더 귀를 기울였다. 그는 그의 신념을 피력하여 내 상소는 수락될 것이지만, 그러나 나는 죄의 짐을 지고 있 으므로 그것을 씻어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의견에 의하면, 인간의 심판은 아무것도 아 니고 하느님의 심판이 전부라는 것이었다. 나에게 사형을 준 것은 인간의 심판이라고 지적 했더니, 그렇지만 그것으로는 내 죄가 씻긴 것이 아니라고 그는 대답했다. 죄가 무엇인지 나 는 모른다고 말했다. 내가 범인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나에게 가르쳐주었을 뿐이다. 나는 범 인으로 형벌을 받는 것이니 그 이상 더 내게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신부 는 다시 일어섰다. 워낙 좁은 감방이라 그가 움직이려고 해도 선택의 여지는 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앉아 있든지 일어서든지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땅바닥을 보고 있었다. 그는 한걸음 나에게로 다가서더니 더 앞으로 나설 용기가 없 는 듯이 멈춰섰다. 그러고는 창살 너머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의 생각은 잘못이 오." 하고 그는 말했다. "당신에게 그 이상 더 요구할 수가 있어요. 요구할 겁니다." "무엇을 요구한단 말입니까?" "보기를 요구할 것이오." "무엇을 봅니까?" 신부는 주위를 둘러보고 갑자기 지친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모든 돌들에는 괴로움 이 배어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압니다. 나는 고뇌없이 이것들을 바라본 적이 없습니다. 그 러나 나는 마음속 깊이, 당신들 중의 가장 비참한 사람들일지라도 이 돌들의 어둠으로부터 성스러운 얼굴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보기를 요구하는 것은 바로 그 얼굴입니다." 나는 좀 흥분했다. 여러 달 전부터 나는 그 벽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 세상에서 내가 그보다 더 잘 아는 것은 아무것도, 아무도 없었다. 오래전부터 나는 거기에 하나의 얼 굴을 찾아보려 했었다. 그러나 그 얼굴은 태양의 빛과 욕정의 불길을 가졌을 뿐이었다. 그것 은 마리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것을 찾으려 했었으나 허사였다. 이제는 그것도 지나 간 일이었다. 어쨌든 나는 그 축축한 돌에서 아무것도 솟아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신부는 어딘가 슬픈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지금 나는 벽에 등을 완전히 기대고 있었 으므로 빛이 내 이마 위로 흐르고 있었다. 그는 무어라고 몇 마디 말했으나 나는 듣지 못했 다. 그러더니 그는 매우 빠른 어조로 나를 껴안는 것을 허락해주겠느냐고 물었다. "싫습니 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는 돌아서서 벽으로 걸어가 천천히 거기에 손을 갖다대고 "그래 그렇게도 이 땅을 사랑하십니까?" 하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꽤 오랫동안 돌아서 있었다. 방안에 그가 있는 것이 마음에 언짢고 성가셨다. 그에게 혼자 있고 싶으니 가달라고 말하려는데, 그때 그는 다시 내게로 돌아서면서 갑자기 큰소리 로 외쳤다. "정말 나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도 다른 생애를 바란 적이 있으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야 있지만 그것은 부자가 된다든가, 헤엄을 빨리 칠 수 있게 된다든가, 더 잘생긴 입을 가지게 되는 것을 바라는 것이나 별다름이 없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것도 그와 같은 종류의 일이다. 그러나 그는 내 말을 가로막고 내세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 었다. 나는 "지금의 이 생애를 회상할 수 있는 그러한 생애"라고 외치고, 곧 이어서 이제 그 런 이야기는 더 듣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하느님 이야기를 하려고 했으나, 나는 그 에게로 다가서며 나에게는 남은 시간이 조금밖에 없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설명하 려 했다. 그는 화제를 바꾸려고, 왜 자기를 '나의 아버지(신부님)'라고 부르지 않고 '선생님 ' 이라고 부르냐고 물었다. 나는 화가 나서, 당신은 나의 아버지가 아니며, 다른 사람들과 마 찬가지라고 대답했다. "아닙니다, 나의 아들이여" 그는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고 말했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이 어두워서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당신을 위하여 기도를 드리리다." 그때 왜 그랬는지 몰라도 내 마음속에서 그 무엇이 터지고 말았다. 나는 있는 목청을 다 해 외치며, 그에게 욕설을 퍼붓고 기도는 그만두라고 말한 다음 사라지지 않으면 불살라 죽 여버리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신부복의 깃을 움켜잡았다. 기쁨과 분노가 섞인 용솟음과 함께 마음속을 송두리째 그에게 쏟아버렸다. 그는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그렇지 않고 뭐냐? 그러나 너의 신념이란 건 모두 여자의 머리카락만한 가치도 없다. 너는 죽은 사람 모 양으로 살고 있고,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없지 않느냐? 나는 보기에는 맨주먹 같 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다.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것은 너보다 더 강하다. 내 인ㅅ애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명확한 의식이 내게는 있다. 그렇다. 내게는 이 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로 굳게 붙들고 있다.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언제나 또 옳으리라. 나는 이처럼 살았 으니 또 다르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을 하고 저런 것을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마치 저 순간, 내 정당함이 인정될 저 새벽을 여태까지 기다리며 살아온 셈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그 까닭을 알고 있다. 너도 그 까닭을 알 고 있다. 내가 살아온 이 허망한 생애에선 미래의 구렁 속으로부터 항상 한줄기 어두운 바 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해들을 거쳐서 거슬러올라와 그 바람이 도중에 내가 살고 있던 때, 미래나 다름없이 현실적이라 할 수 없는 그때에 나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모두 아무 차이 도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는가? 너의 하느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생활, 사람들이 선택하는 숙명, 그런 것 이 무슨 중요성이 있다는 말인가? 단지 하나의 숙명이 나 자신을 사로잡고 나와 더불어 너 처럼 형제라고 하는 수많은 특권을 가진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이 아니냐? 누구나 다 특권을 가지고 있다. 특권을 가진 사람들밖에는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또한 장차 사형을 받을 것이다. 살인범으로 고발된 자가 어머니의 장례식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고 해서 사형을 받는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다는 말인가? 살라마노의 개나 그의 마누라나 그 가 치를 따지면 매한가지다. 꼭두각시 같은 그 자그마한 여자도, 마송과 결혼한 그 파리 여자 도, 또 나와 결혼하고 싶어하던 마리나 마찬가지로 죄인인 것이다. 셀레스트는 그 성품이 레 이몽보다 낫지만, 셀레스트나 마찬가지로 레이몽도 내 친구라고 해서 그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는가? 마리가 오늘 또 다른 한 사람의 뫼르소에게 입술을 내밀고 있다 한들 그것이 어떻 다는 말인가? 사형 선고를 받은 녀석, 이놈아! 너는 도대체 아느냐? 미래의 구렁 속으로부 터... 이 모든 것을 외치며, 나는 숨이 막혔다. 벌써 신부는 내 손에서 떼어지고 간수들이 나 를 흘겨보고 있었다. 그러나 신부는 그들을 진정시키고, 잠시 묵묵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괴어 있었다. 그는 돌아서서 가버렸다. 신부가 나가버린 뒤에 내 마음은 다시 가라앉았다. 나는 기운이 없어 자리 위에 몸을 던 졌다. 그러고는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눈을 뜨자 별들이 보였으니 말이다. 들판에 서 들려오는 소리들이 내가 있는 곳까지 들려왔다. 밤냄새, 흙냄새, 소금냄새가 관자놀이를 시원하게 해주었다. 잠든 여름의 그 희한한 평화가 조수처럼 내 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때 한 밤의 끝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에게는 영원히 관계없는 세계로의 출발을 알 리고 있는 것이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어머니를 생각했다. 만년에 왜 어머 니가 '약혼자'를 가졌었는지, 왜 생애를 다시 꾸며보는 놀이를 했는지 나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곳 생명들이 꺼져가는 그 양로원 근처에서도 저녁은 서글픈 휴식시간 같았다. 그 처럼 죽음 가까이서 어머니는 해방감을 느끼며,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마음이 생긴 것임에 틀림없었다. 아무도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내 괴로움을 씻어주고 희망을 안겨 준 것처럼, 나는 이 징후와 별들이 드리운 밤 앞에서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스러운 무 관심에 마음을 열었다. 그처럼 세계가 나와 다름없고 형제 같음을 느끼며 나는 행복했고, 지 금도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성취되고 내가 외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 위하여 나에 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증오의 함성을 울리며 나 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작품론 - 허망(부조리)의 철학 : 방 곤(경희대 교수) 태양이 작열하고 바다가 바라보이는 프랑스령 알제리의 몽도비라는 작은 도시의 빈민굴에 서 태어난, 후일의 노벨상 수상자 알베르 카뮈. 그의 아버지는 본래 알사스 출신의 광산 노 동자였고, 어머니는 전혀 교육을 받지 못한 스페인 계통 출신이었다. 친형이 하나 있었고, 외할머니와 다리가 불구인 통 만드는 직공인 외삼촌과 함께 살았다. 1913년 11월 7일에 출 생한 그가 젖도 채 떨어지기 전인 제 1차 세계대전 초기에 아버지는 마른 전투에서 전사한 다. 유년 시절부터 카뮈가 뼈저리게 느낀 것은 극심한 가난이었다. 그는 '반항적 인간 '(1947)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마르크스에게서 자유를 배우지 않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가난 속에서 자유 를 배웠다.' 세계대전의 북과 나팔소리, 그리고 빈곤의 비참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소년 카뮈는 오 메라가에 있는 국민학교를 마칠 무렵 그 학교 교사인 루이 제르망을 만나게 된다. 루이 제 르망은 이 병적으로 보이는 허약한 소년 카뮈에게 흥미를 갖고, 과외공부를 시켜 중학교 진 학을 위한 장학생 시험을 보게 한다. 이렇게 해서 어렵게 카뮈의 삶의 길이 정해지게 된다. 13세에 그는 앙드레 지드의 '위조지폐꾼'을, 14세에 앙리 드 몽테를랑의 '레 베스티에르' 와 앙드레 말로의 '동양의 유혹'을 탐독한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그는 평생의 스승이며 이해자인 장 그르니에를 만나게 된다. 훗날 사춘기의 카뮈에 관해 그르니에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내가 알제 고등학교 교수로 임명되었던 1930년에 졸업반(인문계) 학생이었던 그는 신학기 에 등교하는 학생들 틈에 끼여 있었다... 천성이 버릇없이 자란 것 같고 어딘지 다루기 어려운 학생 같아, 맨 앞줄에 앉혀놓고 특 별히 까다롭게 굴었던 모양이다. 얼마 안가서 그는 장기 결석을 한다. 걱정이 된 그르니에 교수는 카뮈가 사는 변두리 빈민굴의 그의 집을 찾아간다. 건강이 나쁘다는 이야기를 들었 기 때문이다. 방안에 앉아 있던 카뮈는 가까스로 나에게 인사를 했고, 그의 건강에 대해서 묻는 내 질 문에 짤막하고 퉁명스럽게 대답을 했다. ...말과 말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동행한 학생과 나 는 그 집에서 나왔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생각하니 마치 내가 사형수에게 그의 상소가 기각되었다고 선고하는 일을 맡은 검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17세의 카뮈는 폐결핵을 앓았다. 불결하고 가난한 자기 집에서는 도저히 요양하기 어렵다 고 느낀 그는 회의주의적인 성격의 소유자고 백정인 다른 삼촌 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것 은 끝내 그가 독립 생활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알제 대학 레이싱 축구 팀에서 선수로 활동하면서 고등학교 수업에는 전념하지 않았다. 1931년에 앙드레 드리쇼의 '고뇌'를 읽고, 그는 문필로 입신하겠다는 결심을 했고, 장 그 르니에의 '섬'을 읽고 난 후 그르니에를 평생의 스승으로 섬기게 된다. '섬'에서 그르니에는 아이러니컬하면서도 시적인 세계와 심각한 회의에 입각한 인간존재에 관한 문제를 제기했 다. 알제 대학 철학과를 중퇴한 카뮈는 1934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여 회교도를 대상으로 한 선전공작을 하지만, 1935년에 피에르 라발의 모스크바 방문을 계기로 탈당한다. 처녀작인 수필 '안과 밖'을 쓰기 시작했고 '노동극단'이라는 아마추어 극단을 조직하여 극운동에 열 중하면서도 그 이듬해에 플로티노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을 통해 본 헬레니즘과 기 독교의 관계를 쓴 '기독교와 신플라톤주의의 형이상학'이라는 졸업논문으로 학사학위를 딴 다. 그러나 재발한 폐결핵 때문에 그는 교수자격 획득을 위한 시험을 포기한다. 그동안에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 단편집 '벽' 등이 계속 발표되는데 이미 그때부터 카뮈는 사르 트르에게 반발을 느낀다. 1938년에 그는 희곡 '칼리귤라'를 썼고, 1939년에는 앙드레 말로와 만나게 된다. 1933년 에 결혼했으나 1년 후에 파경을 맞은 그는 1940년에 재혼하여 두 아들을 두지만, 같은 해 프랑스 총독부의 북아프리카 정책에 불만을 품고 군부와 불편한 관계가 되어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된다. 그동안 그는 여러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을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절박한 상태 가 그로 하여금 아프리카를 떠나는 결심을 하게 한다. 당시 '알제 레퓌블리캥'지의 주간이 었던 파스칼 피아의 소개로 '파리 스와르'지에 입사하게 되어, 그의 표현대로 '그 어둡고 습기에 찬 유럽으로...' 오게 된다. 이처럼 질병이라든지 박해와 같은 장애가 그에게는 다음 단계로의 도약의 계기가 되었다. 그가 남의 눈치를 보면서 자기 실력의 객관적 평가에 구 애받지 않고 자의대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그로서는 크게 잃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 는 강한 입장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부딪치는 현실을 해치우는 성격도 아니었다. 1940년 5월에 '이방인'을 탈고했는데 바로 5월 10일에는 독일군이 침입하여 파리가 점령 되자 '파리 스와르'지의 간부들과 클레르몽으로 피난하지만 그는 신문과 모든 관계를 끊고 집필에 전념한다. '시지프의 신화'의 제 1부에 착수했고, 이듬해 1941년 1월에는 알제리의 항구도시 오랑으로 돌아와 그곳 사립고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시지프의 신화'를 탈고한 다. 그는 멜빌의 '백경'에 크게 감명을 받고 '페스트'를 구상하게 된다. 오랑시가 바로 '페 스트'의 무대가 되었고, 바다와 사막 사이에 위치한 이 도시는 그의 사상의 바탕에 깔린 명암의 세계를 상징하는 적절한 배경이 된 것이다. 그는 M.L.N(북부해방운동)의 기관지 '콩바'지에 합류하여 거기서 다시 그르니에와 말로를 만나게 된다. 연합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하고 전쟁은 점점 가열해지면서 그는 조국이 해방 되기까지 부인과 만나지 못한 채 다시 폐질환이 악화되어 입원하게 된다. 1942년에 발간된 '이방인'에 이어 1943년에 '시지프의 신화', 희곡 '오해', '독일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가 출간되자 일약 허망의 작가로 불리게 된다. 같은 해 지하저항운동의 기관지의 하나인 '콩바' 의 편집진이 파리로 옮기자 카뮈도 파리로 진출하여, 그의 저서가 간행된 갈리마르 출판 사의 감수위원으로 일하며 앙드레 지드의 아파트에서 기거하면서 거기에서 루이 아라공과 재회한다. 1944년은 모두에게처럼 그에게도 기념할 만한 해였다. 파리가 그리고 조국이 해방되는 해 이기도 했고, 카뮈가 사르트르를 만난 해다. "아니다. 나는 실존주의자가 아니다. 사르트르와 나는 둘 다 두 사람의 이름이 늘 짝지어져서 거론되는 데에 놀랐다. 우리는 심지어 조그만 광고를 내서 우리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고, 서로간에 아무런 부담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 리자"고까지 생각했다고 한다('사르트르-카뮈의 논쟁'(1952년 8월)으로 두 사람 사이의 불화 가 표면화할 요소는 그때부터 이미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1944년 5월 8일 지드와 함께 조 국 해방의 소식을 듣는다. 이때부터 카뮈의 정치 활동이 활발해진다. 알제리의 세티프의 학 살, 8월 6일과 9일의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의 원자탄 투하 등은 그에게 인도적 측면에서의 반항과 의분으로 동분서주하게 만들었고, 9일에는 쌍둥이 남매 9장과 카트린느)를 얻는다. 그러한 와중에서 에베르토 극장에서 그의 희곡 '칼리귤라'가 상연되어 크게 성공을 거둔다. 1946년초, 처음으로 카뮈는 미국을 방문하여, 공안당국에 의해 푸대접을 받지만 대학생들에 게서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그 해에 가까스로 '페스트'를 탈고하지만 출판까지는 1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이 해에 경제적, 이념적 난관으로 '콩바'지는 해산된다. 프랑수와 모리악과 논쟁이 벌어져 사이가 멀어지고, 르네 샤르와 두터운 정분을 맺고, 사르트르, 말로, 케슬러, 스페르버와 정치토론에 참가하는 등 분주한 생활은 계속된다. 1947년 마다가스카르의 폭동 에 직면하여 집단적 억압에 대해 강력히 항의한다. "...사실은 명백하고 끔찍하다. 우리가 독 일인들을 비난했던 짓을, 바로 우리가 하고 있다"고 규탄한다. 프랑스의 연립내각에서 공산 당이 빠져나가고 R.P.F(프랑스 인민연합)가 형성되자 레이몽 알랭, 파스칼 피아 등은 거기에 합류하지만 끝내 카뮈는 불참한다. 정치에 전념하기에는 그에게는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더 할 일이 많았던 때문이었을까. 같은 해 6월 드디어 '페스트'가 출간되자마자, 즉각적인 성공을 거둔다. 많은 비평가들 이 '무신의 성성'으로 덕성의 면을 보인 카뮈를 호평한다. 이어서 '여름'(1947-48)이 발간 되고, '계엄령'을 장 루이 바로와 공동집필하지만 실패한다. 1950년에 그의 정치평론 '악튜 엘', 1952년 소설 '최초의 인간'(미완), 단편집 '적지와 왕국'이 나오자 같은 해 10월 프랑스 인으로서는 아홉번째로, 그리고 최연소자로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1953년에 나온 '악튜엘 2'에 이어 1958년에 '악튜엘 3'가 나오지만 주요 일간지는 이에 대해 냉담했다. 1959년 1월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의 각색을 하고 이의 연출을 맡았다. 그러면서 '최초의 인간'을 계속 집필하지만 탈고까지는 하지 못했다. 1960년 1월 4일, 미셸 갈리마르와 함께 탄 자동차 사고로 빌레블레뱅에서 파란 많은 영욕 의 일생을 마쳤다. 카뮈의 작품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사상은 허망 - 역자는 부조리라는 용어 대신 허망을 택했다 - 의 사상이다. '시지프의 신화'를 통해서나 '반항적 인간'을 통해서 그는 인간의 존재가 '인간조건'에 얽매여 있어 그곳에서 헤어나려는 끊임없는 노력(즉 반항)이며, 끝내 거기에서 뛰쳐나오지 못하는 허망한 존재며, 반항을 되풀이하는 희망 없어 보이는 존재면서, 바로 그 되풀이되는 노력이 인간의 삶이고 보람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최초에 '시지프의 신 화'가 세상에 나왔을 때, 그리고 '이방인'이 나왔을 때 비평가들이 그의 사상을 '절망'의 철 학이라고 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 이전에 그는 이미 '티파사의 결혼', '제미라의 바 람' 등의 시적 에세이들을 한데 묶어 '결혼'(1938)을 발표해 극히 일부 사람들에게서만 관 심을 끌었다. 이 무렵부터 그의 철학의 문제들이 제기되는데, 즉 '살려는' 육체의 요구와 ' 절대'를 희구하는 정신의 요구와의 대립 사이에 있는 '의식'은, '세계'에의 '존재'로서 '감각 '만을 의식할 때 '불안'에서 해방되며, 인간의 '위엄'은 모든 타협이나 위안을 거부하고 자 신의 숙명적 허방(부조리)을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희망이나 영원이나 신을 부정하는 데 있 다고 주장한다. 이때부터 이미 '이방인'이나 '페스트'에서 부연되는 존재의 근본적 허망과 이 허망의 세계 로부터 적극적인 반항 논리가 싹트고 있었다. '이방인'(1942)의 주인공 뫼르소는 영웅도 아니고 뚜렷한 개성의 소유자도 아니다. 어디 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회사원이다. 홀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내고 혼자 살면서, 생활에서 무슨 자극이나 희망도 없이 '그저' 살고 있다. 이 소설은 일인칭으로 씌어 있고, 주인공의 독백의 수기형식으로 전개된다. 알제리의 어느 해변도시에 있는 선박회사의 사무원인 뫼르 소의 어머니가 양로원에서 죽었다는데서부터 이 수기는 시작된다. 어머니의 죽음은 미리 예측했거나 기대했던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충격적이거나 크게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의 머리에는, 휴가를 얻을 때 주말이 겹쳐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 뻔한 사장의 얼굴이 먼 저 떠오른다. 판에 박은대로 주위 사람들의 위로의 말을 들으며 양로원까지의 장거리 버스 를 타지만 무슨 감회라든지 걱정은 없다. 어머니의 나이도 확실히 기억하지 못한다. 양로원 에서 밤샘을 하지만 눈물도 나지 않았고, 무료하고 단조로운 밤에 담배를 피웠고 양로원 수 위가 권하는 대로 밀크커피도 마신다. 요컨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 되리라. 아마도 사랑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무슨 중요성이 있는가. 죽음과 마찬가지로 '삶'이 무슨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인간의 주관적인 의지와는 무관하게 '삶' 자체는 근본적으로 그 앞에 '죽음'을 놓고 있다는 '모순 ', 그리고 이 모순 사이에 끼여서 내일에 대한 약속이나 희망없이 '그저' 살고 있는 인간에 게 한 사람의 죽음은 무슨 사건이 될 수 없는 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이 '모순'을 깨닫 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무의미한 '삶'이라는 것을 직시하고, 자칫 빠지기 쉬운 허식에 현혹 되는 것이 더 우스꽝스러운 삶이 아닐까. 장례식에서 돌아온 뫼르소는, 다음날 해수욕을 하러갔다가 전에 동료였던 마리를 만나 영 화관에 같이 가고, 그날밤 함께 지낸다. 그는 마리를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 잘 모른 다. 아마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뭐 그다지 중요한가. 같은 아파트에 레이 몽이라는 건달이 살고 있는데 뫼르소에게 친절하다. 굳이 피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레이 몽은 자기를 배반한 아랍 여자를 때려서 그 여자의 오빠와 그 패거리들이 그의 뒤를 밟고 있는 상황에서 뫼르소는 마리와 함께 레이몽의 권유로 해안에 있는 레이몽 친구의 별장에 놀러간다. 아랍인들이 레이몽을 습격하지만 뽑아든 권총을 보고 아랍인들은 도망친다. 뫼르 소는 레이몽에게 자신이 보관하겠다고 권총을 달라고 한 다음 상처가 난 레이몽을 의사에게 로 데려간다. 잠시 후에 해안에 산책을 나간 뫼르소는 다시 아랍인들 중의 한 사람과 만난 다. 그 녀석은 풀피리를 불고 있다가 뫼르소를 보고 칼을 뽑아든다. 뫼르소의 손도 주머니 속의 권총을 쥔다. 남국의 작열하는 태양이 해변의 모래사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뫼르소 의 양미간과 눈두덩에서 흐르는 땀이 그의 눈으로 흘러들어오고, 아랍인이 뽑아든 칼이 태 양광선에 반사한다. 숨막히는 순간, 모든 것이 정지했던 순간의 균형이 깨진다. 손에 쥐었던 총의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모든 것은 이때 시작된 것이다.' 아랍 녀석의 몸에 다시 네 방으 총알을 쏜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불행의 문을 두드린 네 번의 짤막한 소리와 같았 다.' 이상은 제 1부의 줄거리다. 카뮈는 1부 끝에서 아랍인에게 쏜 총알로 '모든 것이 시작되 었다'고 했고, 이어서 쏜 네 방의 총성은 뫼르소가 '불행의 문을 두드린 짤막한 네 번의 노 크 소리'로 뫼리소로 하여금 '시지프의 신화' 속의 허망의 영웅 시지프처럼 절대적인 고독 속에 내던져진 '이방인'이 된 것을 깨닫게 한다. 제 2부에서 뫼르소가 순수한 허망 속에서 선악을 넘어 그 허망을 직시하고, 그 허망을 몸소 살아 죽음을 눈앞에 두고 눈가림의 장식 에 현혹되지 않으려는 투쟁, 즉 '반항'의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제 1 부에서는 아직까지 인생의 무의미를 출발점으로 삼아 명석한 의식을 가지고 이 허망에 반항 한다는 경지에까지는 가 있지 않다. 살인자, 그것도 뉘우칠 줄 모르는 부도덕한 인간으로 사회적 제재를 받아 마땅하다고 생 각한다. 그의 행위에 대한 증인들이나 상황증거는 그에게는 불리한 것들뿐이다. '사회'는, 즉 '세상'은 그가 걸어온 '삶'과 '행위'에서 모든 '맥락'과 '의미'를 찾아내려고 애쓴다. 어머 니를 양로원에 보낸 일, 어머니의 주검 앞에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일, 그리고 태연 히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신일, 장례식에서 돌아온 직후 여자와 놀아나고, 건달과 사귀면 서 자기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인간을 죽였고, 그 시체에다 다시 총 네 방을 더 쏜 일. ...이 모든 사실들은 '윤리', '도덕' 그리고 인간의 '상식'에서 벗어난 짓으로 규탄받는다. 게다가 범행의 원인이 '태양 때문'이었다는 그의 진술은 더욱 세인이나 검사를 격분케 하지만, 그는 자신의 행위에 회한을 느끼기는커녕 권태감만 갖는다. 이러한 정황은 뫼르소 개인과는 관계 없이 그의 행위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저절로 일은 진전한다. 가장 뛰어난 해설로 알려진 사르트르의 '이방인 해설'에서 사르트르는 뫼르소를 '선악 을 구별하지 못하는 원시인'에 비유했지만, 사실 뫼르소는 삶을 사는 데 '편리한 모든 것 (허식, 아첨, 거짓말 따위)' 즉 모든 관습을 뿌리치고 살기를 택한 인간으로 허망한(부조리 한) 인간 전형임에는 틀림없다. 그를 다루는 검사는 그의 정신감정을 의뢰해서 정상인이 아 니라는 결과를 얻어보려고 하지만 뫼르소는 이를 거절한다. 처음 체포되었을 때, 뫼르소 자신이나 경찰관 그리고 검찰로 송치되고도 담당검사까지 이 사건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던 것이 점점 단순살인이 아닌 복잡한 사건의 양상을 띠게 되는 것을 보고 제일 놀란 것은 뫼르소 자신이다. 변호사 선정을 피고가 하지 않을 때에는 국선변호인이 붙게 된다는 것도 몰랐던 그다. '그런 데까지 법이 책임을 지다니 매우 편리하게 되어 있군요'라고 뫼르 소가 검사에게 말했더니, 검사는 '법은 아주 잘 되어 있다'고 대답하는 것만 보아도 뫼르소 가 그저 평범한 대중 속의 한 사람이라는 실감이 난다. 그러나 심문이 본론으로 들어가고, 범행동기에 대해서 심문을 받았을 때 그는 난처해진다. 자기도 뚜렷한 범행동기를 알 수 없 었기 때문이다. 검사는 십자가를 꺼내오고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상대방을 설복하려 했 지만 별로 신앙심도 없고 남의 일처럼 들리는 신의 은총이 정말 있는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 는 상태에서 피고와 검사간의 톱니바퀴는 자꾸 어긋나기만 한다. 마리와 레이몽이 면회를 온다. 뫼르소는 철창 너머에 있는 그들의 모습을 냉정하게 관찰 한다. 오히려 면회온 측이 동요하고 있다. 이 광경은 철창에 갇혀 있는 것이 마리와 레이몽 인지, 아니면 뫼르소인지를 분간할 수 없는 분위기다. 아마도 뫼르소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었 을지도 모른다. 첫째로 철창이라는 것 자체가 별 의미가 없고, 철창 밖에 있다는 그들에게도 눈에 보이지 않는 철창이 거미줄처럼 처져 있을 허망(부조리)에 가득 찬 사회에서 살고 있 으니 말이다. 형기를 마치고 나오면 결혼하자는 마리의 말에도 그는 냉담하다. 결혼이라는 것 자체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옥에 갇혔을 초기에 가장 괴로웠던 것은 여자에 대한 욕망, 금지된 흡연...등 바깥 세계 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충족되던 일에서 차단된 고통이다. 그러한 고통을 제외하면 뫼르소는 과히 불행하지 않았다. 문제는 어떻게 해서 시간을 죽이느냐였지만, 자기 방에 있었던 가구 를 하나하나 생각해보고, 방 한구석에서 출발해서 다른 한구석까지 면밀히 상상해보는 것으 로 시간을 극복할 수 있었고, 잠자는 것도 익숙해짐에 따라 하루에 16시간 이상을 잘 수 있 게 되었다. 감옥의 침대 속을 채웠던 신문 쪽지의 3면 기사를 수천 번 되풀이해서 읽는 것 도 시간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체코슬로바키아의 한 시골에서 일어났다는 3면 기사가 훗날 카뮈의 희곡 '오해'의 소재가 된다). 한여름이 지나가고 다음 여름이 다시 돌아오자 이 미결수는 드디어 중죄재판소에서 심리 하게 된다. 그는 평생 보지 못했던 소송을 보게 된 것을 흥미있게 기다린다. 신문기자가 인 터뷰를 하고, 국선 변호사가 들어오고, 검사가 입정한다. 판사 세 사람이 착석하자 심리가 시작된다. 뫼르소는 처음으로 무슨 연극을 보는 사람처럼 이런 광경을 면밀히 관찰하지만 줄거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증인 신문이 시작되어 양로원 원장과 수 위, 토마 페레 영감, 레이몽, 살라마노 영감, 마리 그리고 단골식당 주인 셀레스트가 호명된 다. 검사의 고발로 재판장이 어머니의 양로원행, 아랍인 살해의 의사가 있었는가의 여부, 왜 권총을 갖고 있었는가의 추궁에서 오전 공판은 끝난다. 오후에 들어가 다시 똑같은 문제의 추궁이 계속되는데 뫼르소가 어머니 나이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중요한 사안이 되 고, 불려나온 증인들의 증언마다 그에게는 치명적으로 불리한 것들이다. 이런 모든 절차가 의식처럼 전개되지만, "피고서에서도 내 일에 대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것은 역 시 재미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검사는 그의 유죄를 주장하면서 어떠한 변명도 무시한다. 가끔 오해를 시정하려고 하면 변호사까지도 말린다. 그의 '운명은' 그와 아무런 상의도 없이 '결정되어갔다'. 레이몽과 공모하여 '위계에 의한 살인'임이 검사의 말대로 확정되어가는 데 뫼르소도 역시 그러고 보니 그게 사실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일 - 살인 - 이 잘된 것 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다시 총알 네 방을 냉정하게 쏘았다는 것이다. 검사의 고발. "여기서 나는 여러분 앞에서 이 사람이 충분히 자기의 소행을 의식하면서 살인을 범하기에 이르기까지의 이 사건의 경위를 더듬어보았습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왜 냐하면 이것은 보통 살인, 정상을 참작할 수 잇는 순간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여러분, 이 사 람은 머리가 좋은 사람입니다. 그의 진술을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말의 가치를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 는지 모르고 행동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검사는 이어서 탄핵한다. "그가 뉘우치는 마음 조차 보인 일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없습니다. 여러분, 예심이 계속되는 동안 단 한 번 도 이 사람은 자기가 범한 가증할 만한 나쁜 행위로 마음이 흔들린 것 같지 않습니다." 뫼 르소는 답답하다. 검사의 말이 잘못된 것은 없는 것 같았지만, 너무 과장이 심하고, 너무 핏 대를 올리는 것처럼 느껴져서 정말 겸손하게 '거의 애정어린 마음으로' 검사에게 그는 무 슨 일이건 진심으로 후회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변호사는 피고가 정상적이고, 진지하고 참을성 있는 사무원, 직무에 충실하고 남의 어려움 에 동정할 줄 아는 사람이고, 오랫동안 어머니를 부양한 모범적인 아들이며, 어머니가 덜 고 생스러울 양로원에 입원시켜 더 쾌적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했다고 변호하지만, 장례식 날 에 보였던 그의 행위를 변호하지 않은 것이 뫼르소에게는 불만이라면 불만이다. 그러나 검 사의 논고나 변호사의 변호나 모든 것이 다 색 바랜 자기의 영혼을 보는 것 같았고 현기증 같은 것만 느낄 뿐이다. 오히려 법정 밖에서 들리는 아이스크림 장수의 호객하는 소리에 더 마음이 끌리고, 어서 형무소의 독방으로 되돌아가 잠이나 실컷 자고 싶다고 생각한다. 기존 사회의 모순에 찬 규제나 선입관 그리고 허식에 찬 고착관념 따위가 뫼르소에게는 본받아야 할 것만 같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한 허식을 대표하는 것 중의 하나가 종교다. 사형이 확 정된 죄수에게 신부가 찾아온다. 신부의 방문을 그는 여러 번 거절했었다. 그러나 그는 끈질 기게도 찾아와서 그를 회개시키려고 애쓴다. 뫼르소의 생각을 빌리면, 그는 자기가 지금 사 형수이기 때문에 찾아온 것이 아니고, 그의 눈에는 뫼르소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사형수로 보이는 것이다. 신을 빙자하는 권위의식이 그의 마음속에 오만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뫼르소 는 알고 있으며, 그가 모든 죄인을 가엾게 여기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알고 있다. 이러한 신부의 환각은 '페스트'에 나오는 파늘루 신부에게서도 볼 수 있다. 인간에게 닥치 는 재앙이 그들에게는 인간에게 공포감과 경각심을 일깨우는 좋은 기회며, 평소의 불신적인 태도를 꾸짖고 인간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비열한 행위로 '이방인'이나 '페스트'의 작가를 규정하는 것 같다. 여기에는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뫼르소를 설복시키려는 신 부는 '내세'의 삶을 희구하도록 강요한다. "나는 당신의 혈육과 같소. 다만 당신은 눈이 멀 어서 그것을 모르는 거지요. 나는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때, 뫼르소는 자기도 모르게 격앙해서 신부의 신부복을 움켜잡고 외친다. 그에게 욕을 퍼부으며, 나를 위해 기도하지 마 라. 지옥에서 불타버리는 것이 소멸하는 것보다 낫다. 너는 무슨 확신이 있는 것처럼 이야 기하고 있지만 너 자신이 살고 있다는 확신도 없이 죽은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지 않은가. 적어도 나는 나를 믿고 있으며, 모든 것에 확신을 갖고 있다. 나는 내 생활방식으로 살아 왔다. 또 다른 방법으로 살아갈 수도 있을지 모른다. 나는 저 어슴푸레한 새벽을 오래 기다려 온 것과 같다. 그 무엇도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았고 그 이유도 나는 알고 있다. 그 또한 그 이유를 알고 있다. 미지의 입김이 나에게 솟아오르고 있다. 어머니의 죽음이, 그리고 그의 신이, 사람들이 택하는 삶의 방식이나 선택하는 운명이 무엇이란 말인가. 오직 하나의 운명 이 나 자신을 선택하고, 나와 함께 수백만의 특권을 지닌 자를 선택하는 이상 그들과 함 께 나를 형제라고 부르지 마라. 나는 내 앞에 보이는 미래의 밑바닥에서 이렇게 외치면서 숨이 막혔다... 이 외침은 죽음과 대결하는 자로서 죽음을 겉으로만 상상하는 신부의 사고방 식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 즉 죽음은 죽는 자의 특권이며 다만 그는 자기의 처형의 날, 많은 관중이 모여 증오의 외침으로 그를 맞이해주기만을 희망한다. 그는 자기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 자기의 삶이 증명될 테니까. 이 마지막 외치을 보면, 그의 행동에 마치 깊은 사색과 굳은 신념이 뒷받침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는 점에서 어딘지 맥락이 위화감을 준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진정 부조 리(허망)한 인간의 전형으로 그려졌지만, 인생의 무의미함을 출발점으로 해서 명석한 의식을 가지고 이 무의미한 것에 반항한다는 경지에까지는 가지 않고 있는 인물로 그려져 있으므로 어딘지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러나 작가 카뮈의 저변에 깔 려 있는 반항의 의식 - 그것은 다음의 '페스트'에서 구체적인 형태로 가시화하지만 - 그 반 항의 의식이 작가의 사상의 연장이 될 것이라는 암시 또는 에고로 본다면, 크게 부자연하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로브그리예는 '이방인'을 '구토'와 더불어 현대인의 비극성을 그려 낸 놀랄 만한 작품이고 제 2차세계대전 이래 수십년간에 걸쳐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공언 하고 있는 만큼 그 농밀성에서 볼 때, 카뮈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는 느낌 을 주며,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의 주인공에서 자신의 고독한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에 이 작품은 현대에서 계속 빛을 발하고 숨쉬고 있는 것이 아닐까. '페스트'는 1947년, '이방인'이 발표된 5년 후, 알제리의 오랑에서 흑사병이 발생한다는 가공의 소설로서, 출간과 더불어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된 작품 이다. 페스트는 '전쟁'을 상징하며, 모든 '자유'가 제한되는 상황, 즉 감옥 속의 인간을 상 징하기도 한다. 주인공은 의사 리외지만 상황이 벌어지자 우연히 오랑시에 와서 머물고 있 었던 미스테리의 인물 타루는 의사인 리외의 또 하나의 분신을 보여주는 듯한 역할을 한다. 여기서는 모순에 찬 삶, 평온한 삶 위에 덮친 모순과 부조리(허망) 속에서, 그 상황을 직시 하고 사태에 환상이나 낙관적 기대를 걸지 않고 묵묵히 그 허망과 싸우는 즉 허망에 맞서서 대결하는 인간상을 그린 점으로 보아 '이방인'에서 연장된 카뮈의 철학의 전진적 이론이라 고 하겠다. 1951년에 발간된 그의 제 2의 철학평론집 '반항인'을 '페스트'의 연장선상에서 볼 때, 이 작품은 뫼르소적 인간상의 연장과 성장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죄를 범했건 말건 모든 사람이 사형선고를 받고 그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세계, 그것은 더 넓게 생각하면 우 주의 적의를 온몸에 받고 있는 인류에도 비교된다. 그러한 세계, 즉 인간조건에 얽매인 세계 에서 사람은 결코 남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고, 자기라는 내적인 고독 속에 추방되고 만다. 이것이 이 작품의 세계다. 다시 말하면 페스트는 인간존재의 허망이며, 이 작품의 세계가, 즉 '인간'의 세계인 것이다. 이 모순, 즉 허망에 대해 타협을 마다하고 맞서는 사람들, 체념 하지 않고 영원히 패배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 인간조건에 도전하는 모습, 이것이야말로 허 망의 영웅의 모습이며, 카뮈는 신이 없는 세계의 성자다운 모습을 그리려고 했던 것이다. 1943년부터 구상되고 집필된 이 작품이 1947년에 발표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 작품에서 나 치스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와 점령자에게 저항하는 저항운동자들의 모습을 보았다고 느꼈 다. 물론 이 작품이 단순한 정치적 저항문학이 아니고, 작가의 세계관이 묘사된 철학적 소설 임에 틀림없지만, 점령이나 저항이라는 상황적 사실이 이 작품의 구체적인 구성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작가 자신이 시인한 바 있다. 페스트가 발생한다. 현실을 인정하기를 항상 꺼려하는 사람이 많다. 사람들은 그것이 페스 트라는 것을 시인하려 들지 않는다. 그것이 어떤 병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그 병 이 유행한다면 어떻게 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떼 죽음을 하는 쥐, 하나하나 쓰러져가는 사람들을 보고 난 뒤에야 할 수 없이 그것이 페스트 라고 시인한다. 수천 마리, 그리고 수만 마리의 쥐가 죽어도, 인간은 자기의 목이나 겨드랑 이 그리고 사타구니에 가래톳이 서도 자기가 페스트에 걸렸다고 시인하기를 주저한다. 드디 어 시외로 통하는 모든 문이 닫히고, 외부와의 모든 연락이 두절된다. 오랑 시는 거대한 감 옥으로 변신한다. 시민들은 불안에 싸이고, 여기저기서 혼란과 이기주의와 자포자기와 허탈 이 난무한다. 그러한 와중에서 의사 리외를 중심으로 의료자원봉사대가 발대한다. 그랑 영감 과 타루가 그를 돕는다. 그랑 영감은 멀리 지나간 연인의 추억 속에서 사는 호인이고, 장 타 루는 사태가 나기 수주일 전에 어디서 왔는지 모르지만 오랑 시의 중심가의 호텔에 자리잡 고 있었고, 제법 여유가 있어 보였다. 이 기록(카뮈는 이 작품을 크로니크(연대기)라고 불렀다)은 대부분이 타루의 수첩을 참고 로 하고 있다. 그의 수첩에 묘사된 의사 리외의 모습은, "서른다섯 살쯤이고, 중키에다 어 깨가 딱 벌어졌다. 둥근 얼굴, 거무스름하고 똑바로 뜬 두 눈. 양쪽 턱뼈가 불룩 나와 있 고, 콧대가 서 있다. 아주 짧게 깎은 머리, 대개는 두꺼운 입술을 다물과 있는 활처럼 흰 입. 살결은 햇볕에 그을고, 머리는 검고, 늘 짙은 색 양복을 입고, 마치 시칠리아 계통의 농부 같은 인상에 늘 모자는 안 쓰고, 걸어가는 자세나 사람 대하는 태도가 산전수전 다 겪 은 모습"이다. 다음으로 흥미있는 인물은 취재차 이 도시에 왔다가 변을 당한 신문기자 랑 베르다. 그는 도시가 봉쇄되자 백방으로 거기서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리외가 사랑하는 아내와도 별거하면서 헌신적 노력을 하는 것을 알고 탈출을 단념한다. 코타르는 무슨 범행 때문에 경찰에 쫓기는 몸이다. 그에게 이번 사태는 오히려 행운처럼 느껴진다. 북새통에 그 에 대한 수사가 중단된다. 그에게 상황의 종식은 두렵다. 이러한 재앙이 더 계속되기를 바 란다. 가장 비통한 인물은 파늘루 신부다. 그는 평소 신앙심이 깊지 못한 사람이 많은 오랑 시에서도 제법 존경을 받는 신부지만, 페스트라는 재앙은 방종한 시민들을 신이 벌을 주기 위한 것이라며 불안에 떠는 시민을 모아놓고 호통을 친다. 마치 사형수('이방인'의 뫼르소) 앞에 나타나 신의 품에 안기기를 강요하는 신부의 모습과 같다. 그러나 신앙이 페스트를 물 리치지는 못한다. 의료자원봉사대의 조직도 사실은 타루의 의견에 의한 것이다. 그는 '신의 존재를 인정치 않은 성자'가 되고 싶다는 인물이고, 파늘루 신부는 신의 뜻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맹신하는 인물이다. 양자가 모두 인간구제에 헌신하지만 대립적, 대칭적 위치에 있다. 의사 리외나 타루는 질병과 싸우면서도 회의와 무기력에 빠진다. 너무나 병의 위력이 압 도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싸워야 한다. 다만 '죽기 싫은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그리고 '세계가 죽음으로 규정되는 이상 힘 있는 한까지 죽음과 싸우기 위 해서'며 '끝없는 패배가 싸움을 중단시키는 이유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싸우려는 것이다. 그들은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서 악 - 질병 - 과 싸운다. 이 병의 비참함은 드디어 파늘루 신부의 생각까지도 변하게 한다. 그는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지만 봉사대와 협력해서 방역 과 구호에 힘쓴다. 끝내 파늘루 신부 자신도 페스트에 희생된다. 이러한 사람들의 연대의식 이 깨어남에 힘입어, 자칫하면 실의에 빠지려는 절망감을 극복하고 리외는 용기를 얻어 끝 가지 밀고 나간다. 이 질병의 최후의 희생자로 타루가 쓰러진다. 페스트는 언제 그랬냐 싶 게 갑자기 물러간다. 오랑 시의 문이 크게 열리고, 시민들이 환호하고 삶의 기쁨을 만끽하 는 속에서 으사 리외는 이렇게 독백한다. "페스트 병균은 결코 죽지 않는다. 수십년간 가구 나 내복 속에서 잠자다가 다시 쥐들을 쑤석대고, 어떤 행복한 도시를 겨냥하는 날을 끈질기 게 기다리고 있다"고. 여기서 우리는 카뮈가 이 작품 첫머리에 인용한 다니엘 데 포의 말을 되새겨본다. "일종의 감금상태를 다른 종류의 그것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마치 무엇이든간 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으로 표현한다는 것처럼 합리적이다." 카뮈는 이 가공의 기록을 실제로 있는 기록, 아니 실제로 있을 법한 기록으로서 그려냈 고, 그 기록은 아마도 인류사회가 계속해서 존재하는 한 되풀이될 것이다. 질병은 물론 전 쟁, 억압, 독재, 차별, 빈곤, 기아... 이 모든 것은 이 지구의 곳곳에서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제 2차세계대전이 끝난 지 45년. 그동안 이 지구상에서 벌어진 페스트 에 비길 만한 사건은 열 손가락을 제곱할 만큼 많다. 아프리카의 독립투쟁과 종족간의 분 쟁, 비아푸라의 비극, 동구 제국들의 봉기와 탄압, 가깝게는 베트남전쟁, 그리고 러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족분쟁과 탄압, 세계의 경제와 생태계를 뒤집어엎을 만한 위 협이 되고도 남았던 걸프전쟁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남겨놓았다. 여기에 대해서 낙관론으로 일관하려는 층, 비관론에 빠져 자포자기하는 층, 그 기회를 이용해서 한몫 보려는 세력... 이와 같은 양상을 볼 때, '페스트'에서 묘사되고 있는 공포, 불안, 혼란, 체념, 자포자기, 에고이즘, 허탈... 등이 난무하고 있음을 새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스스로의 고 집과 편견으로 해서 스스로 멸망할 것인가. 아니면 영원할 것인가가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여러 가지 악과 싸워야 할 것인가. 의사 리외의 말처럼 "죽고 싶지 않은 인간이 죽 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싸워야 한다는 진리는 다시 한 번 증명된 것이 아닐 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