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제인에어(하) 지은이 : 샤로트 브론테 ----- 차 례 ----- 작가소개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작가소개 1816년 4월 21일, 영구 요크셔 주(州) 웨스트 라이딩에서 탄생 1824년 처 웨스트 머런드의 코원 브리지라는 기숙 학교에 들어감. 이곳이 <제인 에어>의 로우드 학원의 모델이 됨. 1835년 로헤드 기숙 학교의 교사로 부임함. 1841년 화이트 집안에 잠시 가정교사로 들어감. - 1846년 5월, 필명을 남자 이름으로 하여 세 자매의 시집 <커러와 엘리스와 액튼의 시집>을 자비로 출판. 1847년 8월, <제인 에어>를 완성함. 10월 '커러 벨' 이란 이름으로 스미스 엘더 사에서 출판되자마자, 여러 잡지로부터 극찬을 받음. 1857년 처녀작 <교수>가 사후 출판됨. 얼마 후 개스켈 부인의 <샬로트 브론테의 생애>가 출판됨. 1860년 샬로트의 단편 <엠마>가 발표됨. 21 페어펙스 부인의 방에서 나를 만나겠다는 사람이 있다고 나를 부르러 온 것은 다음날 오후였다. 가 보니 거기에는 하인 같은 풍채의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검은 상복을 입고 있었고 손에 들고 있는 모자에도 상장이 감겨 있었다. "아가씨, 아마 나를 잊으셨겠지요." 그는 일어나 나를 맞으며 말했다. "나는 리븐이라고 합니다. 당신이 여덟 살인가 아홉살 때, 리드 부인의 마부가 되어, 지금도 거기 있습니다." "어머, 로버트! 오랜만이에요! 기억하구말구요. 어쩌다 나를 조지아나의 밤색 말에 태워 주신 적이 있었지요. 벳시는 잘 있어요? 당신은 벳시와 결혼하셨지요?" "네, 아가씨. 고맙습니다. 두 달 전에 또 어린 게 하나 태어났어요. 이젠 아이가 셋이지요. 에미도 아이들도 잘 있습니다." "그 댁의 여러분도 잘 있나요, 로버트?" "이거 별로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지 못해서, 아가씨. 요즈음은 계속 어려운 일만 생겨서......" 그의 상복에 눈을 주면서 나는 말했다. "누가 죽은 것은 아니겠지요?" 그도 상복을 보며 대답했다. "존 나으리가 런던 집에서 돌아가셨어요. 어제로 1주일이 됩니다." "존이?" "네, 나으리는 꽤 방탕한 생활을 했고, 지난 3년 동안은 묘한 일에 빠지기도 했지요. 그리고 무서운 죽음을 당했어요." "벳시로부터도 별로 행동이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 정도가 아니에요! 세상에서 가장 질이 나쁜 남녀와 친구가 되어, 몸도 재산도 엉망으로 만든 거예요. 빚 때문에 감옥까지 들어간 적이 있어요. 어머니가 두 번이나 구해 냈는데, 3주 전에는 게이트헤드로 와서 부인에게 남은 재산을 전부 달라고 했어요. 부인은 반대했지요. 런던으로 돌아갔는데, 그 다음에 온 것이 죽었다는 거예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무서운 소식이었다. 로버트 리븐은 다시 말을 계속했다. "부인도 요즈음은 건강이 좋지 않아요. 거기다 나으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 까무러치고 말았어요. 사흘 동안 말을 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부인이 당신 이름을 부르는 것을 벳시가 간신히 알아들은 것이 어제였어요. '제인을 불러요. 제인을 데리고 와요. 할 얘기가 있어요.' 라는 거예요. 일라이자님과 조오지아님에게 상의를 했지요. 아가씨들은 처음에는 상대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부인이 정신없이 '제인, 제인.' 했기 때문에 마침내 아가씨들도 승낙했어요. 그래서 제인님도 형편이 웬만하시면 내일 아침 일찍 가 주셨으면 해서요." "네, 가겠어요. 안 갈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가씨. 벳시도 당신이 꼭 올거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허락을 받아야 하겠지요?" "네, 지금 당장 얘기를 해 보겠어요." 그리고 그를 하인들이 묵는 곳으로 안내하고 나는 로체스타 씨를 찾아 나섰다. 페어펙스 부인의 말로는 잉그람 양과 당구를 치고 있을 거라고 했다. 나는 급히 당구실로 갔다. 로체스타 씨, 잉그람 씨, 이슈턴 자매 등이 모두 이 유희에 열중하고 있었다. 꽤 용기가 필요했지만, 난 잉그람 양 곁에 서 있는 주인에게로 다가갔다. 잉그람 양은 무시하는 듯한 눈길로 나를 보았다. 그 눈은 마치 이 여자가 무슨 일로 나타났을까? 하고 의심하는 듯했다. 내가 낮은 목소리로 "로체스타 씨." 하고 불렀을 때는 나더러 저리 가라고 명령하고 싶은 동작을 취했다. 그녀는 게임에 흥미가 있었으므로, 오만한 표정을 조금도 죽이지 않았다. "저 여자 당신에게 얘기가 있어요?" 하고 그녀는 로체스타 씨에게 물었다. 로체스타 씨는 '저 여자' 가 누군가 싶어 돌아보았다. 그는 기묘하게 찡그린 얼굴을 하고, 키를 집어던지고 나의 뒤를 따라 방을 나왔다. "왜 그래요, 제인?" 공부방에 들어와서 문을 닫고 기대어 서며 그는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한두 주간, 휴가를 얻을까 해서요." "무슨 일이에요? 어디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리드 부인과의 관계, 오랫동안 가지 않은 이유, 외사촌 오빠 존의 비참한 죽음과 외숙모의 병, 그 외숙모가 나를 만나고 싶어하고, 그래서 하인이 데리러 왔다는 얘기를 했다. "당신이 간다고 무슨 도움이 될까요? 거기다 그 부인은 당신을 쫓아내지 않았어요?" "네, 그래요. 하지만 그건 옛날 일이에요. 이제 나는 외숙모의 희망을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어요." "어느 정도 묵을 작정이세요?" "되도록이면 일찍 돌아오고 싶어요." "1주일 만에 오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약속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예요. 어긋날지도 모르니까요." "아무튼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와야 해요. 무슨 구실이 있더라도 그쪽에서 살면 안 돼요" "네, 절대로! 볼일이 끝나면 반드시 돌아오겠어요." 로체스타 씨는 생각에 잠겼다. "언제 가겠어요?" "내일 아침 일찍 떠나겠어요." "돈이 필요하겠군요. 돈 없이 여행을 한다는 것도 거짓말이고, 나는 아직 봉급을 주지 않았으니 돈이 없을 거야. 도대체 얼마나 있어요, 제인?" 웃으면서 그는 말했다. 나는 지갑을 꺼냈다. 빈약한 물건이었다. "5실링 있어요." 그는 나의 지갑을 빼앗아 돈을 손바닥 위에 쏟더니, 마치 그 가난함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이 쿡쿡 웃었다. 그는 자기의 지갑을 꺼냈다. 받을 돈은 15파운드 뿐이었다. 나는 곤란하다고 말했다. 그는 화를 냈지만 생각을 고쳐 먹은 듯했다. "좋아요. 지금은 다 드리지 않는 편이 좋겠지. 50파운드를 가져가면 석 달 동안은 오지 않을 테니까. 10파운드면 어때요?" "네, 충분해요. 하지만 그거면 5파운드를 덜 받게 돼요." "그러니까 그걸 가질러 돌아오세요." "로체스타님, 마침 이 기회에 다른 문제를 말씀드릴까 하는데요." "문제? 꼭 들어 봐야 되겠군요." "당신은 머지않아 결혼하게 된다고 친절하게 말씀하셨어요. 그렇게 되면 아델은 학교에 넣는 것이 좋겠지요. 당신도 그 필요성을 느끼고 계실 거예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의 신부가 그 아이를 학대할 위험이 있으니까. 그 의견에는 일리가 있어요. 암, 학교에 보내야 되겠지. 그리고 당신도 여기를 당장 나가서 악마에게로 갑니까?" "그건 곤란하지요. 하지만 어딘가에 일을 할 장소를 찾아야 되겠지요." "그게 당연하겠지." 그는 소리쳤다. 그는 잠시 후에 나를 불렀다. "제인." "네?" "한 가지만 약속해 주세요." "무슨 일이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약속을 드리지요." "광고를 내지 말 것. 일자리는 내게 맡겨 둘 것. 내가 적당한 자리를 찾아 드릴 테니까." "그럼 그 대신, 나와 아델을 신부가 이 집에 오기 전에 안전하게 밖으로 보내 주신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어요." "좋아요. 나는 맹세해요. 그럼, 저녁 식사 뒤에 응접실로 오시겠어요?" "안 돼요. 여행 준비를 해야 하니까요." "그럼 이것으로 당신과 나는 이별을 해야 되는 셈이군. 이별이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일까? 제인, 가르쳐 줘요. 나는 몰라요." "대개, '안녕' 이라든가, 또......" "자아, 그렇게 말해 줘요." "안녕히 계세요, 로체스타님." "잘 다녀와요, 에어 씨 - 결국 이것 뿐인가요?" "그럼요. 진정에서 나오는 말이란 하나 뿐이고, 그 어떤 말보다 호의를 갖고 말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뭔가 을씨년스러워, 안녕." '언제까지나 이렇게 문에 기대어 있을 것인가요?' 하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은 그가 일어나기 전에 나는 출발했다. 나는 5월 1일 오후 다섯 시에 게이트헤드의 문지기네 집까지 도착했다. 나는 저택으로 가기 전에 문지기네 집으로 들어갔다. 청결하고 정리가 잘 된 집이었다. 조각이 새겨진 창에는 하얀 커튼이 걸려 있고, 화덕에는 불이 잘 피고 있었다. 벳시는 화덕가에 앉아 갓 태어난 아기를 어르고, 로버트와 그의 누이는 얌전히 한쪽에서 놀고 있었다. "어머, 어머, 정말이지, 꼭 오실 줄 알았어요!" 내가 들어가자 벳시는 기뻐서 소리쳤다. "그런데 벳시." 하고 나는 그녀에게 키스를 하고 말했다. "리드 부인은 어때요? 아직은 괜찮지요?" "네, 아직은 괜찮아요. 의사도 앞으로 2주간은 견딜 거래요." "그 뒤에도 내 얘기를 하세요?" "오늘 아침에도 당신 얘기를 하고 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랬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고 있어요. 내가 갔을 때는 그랬어요. 대개 오후에는 혼수 상태에 빠지듯이 자고 있지만 여섯 시나 일곱 시 경에는 깨어나요. 여기서 한 시간 가량 쉬시다 같이 가 봐요."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하기로 했다. 마치 어렸을 때 잠자리를 보살펴 주듯이, 벳시는 내 여장을 풀어 주었다. 잡담을 하다 보니 한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벳시는 다시 내게 옷 입는 것을 도와 주었고, 그녀와 나는 저택을 향해 나섰다. 9년 전에 이 길을 내가 내려왔을 때도, 벳시와 함께였다. 1월의 짙은 안개가 낀 추운 아침 나는 절박하고 비참한 심정으로 - 세상에서도, 신에게서도 버림받은 기분으로 - 적의 있는 지붕 밑을 떠나 멀고 낯선 땅, 로우드의 춥고 추운 피난처로 향했던 것이다. 바로 지금 적의 있는 지붕이 다시 내 앞에 떠올랐다. "먼저 아침 식사실로 가세요." 벳시는 내 앞에 서서 가며 말했다. "아가씨들이 거기 있을 테니까요." 나는 그 방에 도착했다. 모든 가구가 떠났을 때의 브로클 허스트 씨에게 소개된 아침과 마찬가지로 그대로 있었다. 살아 있지 않은 물거품들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지만 생명 있는 사람들은 몰라보리 만큼 변해 있었다. 두 아가씨가 내 앞에 나타났다. 한 사람은 무척 키가 크고 여위고, 소박한 스커트, 검은 비단 드레스, 착 달라 붙게 빗은 머리, 극단적으로 금욕적인 느낌이었다. 그 갸름해진, 혈색이 좋지 않은 얼굴에서는 실로 옛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지만. 다른 한 사람은 물론 조지아나였다. 하지만 나의 기억에 남아 있는 그녀는 아니었다. 성숙하고 살집 좋은 납인형같이 하얀 젊은 여성으로, 아름답게 정리된 이목구비, 괴로워하는 듯한 푸른 눈, 곱슬거리는 노란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드레스도 검은 것이었지만 그 스타일은 언니와 많이 달랐고, 언니가 청교도처럼 보인다면, 이쪽은 사치한 느낌이었다. 내가 들어가자, 두 사람 다 일어나서 마중했고 냉정하게 인사했다. 그리고 둘 다 나를 에어 씨라고 불렀다. "리드 부인은 좀 어떠세요?" 하고 나는 조지아나의 얼굴을 보면서 물었다. "리드 부인? 아아, 그래! 엄마 얘기군요. 많이 약해졌어요. 오늘 밤은 당신을 만나 보지 못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당신이 2층으로 가셔서 내가 온 것을 얘기해 주면 고맙겠는데......" 하고 나는 말했다. 조지아나는 펄쩍 뛸 듯이 놀라며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밤에는 엄마가 귀찮게 구는 것을 싫어하니까......" 하고 일라이자가 말했다. 나는 금세 일어나서 보네트와 장갑을 집어 들고, 부엌으로 가 벳시를 보고 그 부탁을 했다. 그리고 다음 조치를 취했다. 나는 외숙모를 만나기 위해 백 마일이나 여행을 한 이상, 그녀가 좋아지거나, 아니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녀 곁에 있어야만 했다. 아가씨들의 거만함과 어리석음에 휘말릴 때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정부에게 얘기해서 내게 방을 한 칸 달라고 부탁하고, 아마 1,2 주간은 묵어야 될 거라고 말한 다음, 그 방으로 트렁크를 옮기게 하고, 뒤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 위에서 벳시와 만났다. "부인은 잠을 깼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당신이 왔다는 얘기는 했어요. 당신을 알아보시는지 잠시 같이 가 볼까요?" 내게 있어 그 방으로의 안내는 필요없었다. 옛날에는 꾸중을 듣기 위해 늘 불려 갔던 방이었다. 나는 벳시보다 먼저 가서 살짝 문을 열었다. 나는 침대로 다가가 커튼을 젖히고 높이 쌓인 베개 위를 보았다. 잊을 수도 없었던 리드 부인의 얼굴이었다. 나는 옛날의 이미지를 열심히 찾았다. 하지만 시간이 복수심을 부드럽게 하고, 반감을 진정시켜 준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미움으로 해서 이 부인과 헤어졌지만 지금은 그녀의 크나큰 고통에 대한 일종의 연민과 모든 박해를 용서하고 싶다는 소원 - 친구로서 화해하고 악수하고 싶다는 소원 외에 다른 아무런 마음 없이 돌아온 것이다. 그녀는 거기 있었다. 옛날 그대로의 무섭고 무자비한 얼굴! 그 날카로운 윤곽을 쫓는 나의 마음에 유년 시대의 두려움, 슬픈 추억 같은 것이 강하게 되살아 올 것인가! 나는 허리를 굽혀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녀는 나를 보았다. "니가 제인 에어니?" 하고 그녀는 말했다. "네, 외숙모님. 기분은 어떠셔요, 외숙모님?" 나는 일찍이 이 여자를 다시는 외숙모라고 부르지 않겠다고 맹세한 적이 있었다. 지금 그 맹세를 잊고 또 깨트리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닐 것이다. 나는 시트 밖으로 나와 있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리드 부인은 손을 놓고 내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듯이 오늘 밤은 유난히 따뜻하다고 말했다. 다시 그녀가 나를 보았을 때 그 눈길이 너무 냉정해서, 나에 대한 그녀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 또 변할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돌과 같이 차가운 눈, 상냥함을 모르고 눈물로써도 녹지 않을 그 눈으로 해서, 나는 그녀가 최후까지 나를 나쁘게 생각하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고통을 느꼈고, 다음에는 노여움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그런 것에 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 그녀의 성질과 의지, 이 두 가지가 어떻든간에 그녀의 여주인이 되어 줘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릴 때처럼 나는 눈물에 젖어 있었지만 나는 눈물을 안으로 삼켰다. "외숙모는 나를 부르셨어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서 이렇게 왔어요. 그러니까 당신의 병이 나을 때까지 여기 있을 작정이에요." "아아, 그래 줘! 우리 아이들은 만났니?" "네." "그럼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말해 줘. 오늘 밤은 너무 늦었고, 난 얘기도 할 수 없을 것 같애.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확실히 있기는 했어요. 잠깐만......" 그 놀란 듯한 눈길과 말투는 옛날에 그처럼 힘찼던 그녀의 육체가 어느 정도 쇠잔해졌는지를 알 수 있게 했다. "너는 제인 에어니?" "네, 저는 제인 에어예요." "난 그 아이 때문에 남이 곧이듣지 못할 만큼 애를 먹었지. 내 손에 남은 그 무거운 짐 - 그 알 수 없는 기질. 문득 화를 내고, 어린애 같지도 않고 남이 하는 일을 엿보기 때문에 나는 얼마나 싫어했는지 몰라! 한번은 나를 보고 마치 미치광이처럼 불평을 늘어놓았었어. 로우드에는 열병이 퍼져 많은 학생이 죽은 적이 있었는데도 그 아이는 죽지 않았어. 하지만 나는 죽었다고 말했어. 죽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당치도 않은 것을 희망했군요, 리드 부인. 어째서 그처럼 그 아이를 미워했지요?" "나는 그애의 어머니가 본래부터 싫었어. 내 남편의 유일한 동생으로, 남편도 몹시 동생을 사랑했지.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은 바보처럼 울었어. 후에 그 아이를 데려왔는데, 아이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미웠어. 약하고, 여위고, 울기만 하고! 남편은 그 아이를 우리 아이들과 친하게 하려고 무척 애썼어. 아이들은 싫어했지. 그래서 앓을 때는 늘 같이 데리고 잤고 숨을 거두기 한 시간 전에 나에게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시키기도 했어. 남편은 약한 사람인 반면에 존은 아버지를 닮지 않아서 나는 그애를 사랑하지. 아아, 그애가 편지로 내게 돈을 달라고 조르지 않는다면 말야! 난 그애를 만나면 부끄러워져." 그녀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난 이제 가는 게 좋겠어." 나는 침대 저쪽의 벳시에게 말했다. "네, 아가씨. 하지만 밤에는 늘 이렇게 혼잣말을 해요. 아침에는 훨씬 더 차분하시지요." 벳시가 진정제를 마시게 해주었다. 리드 부인은 곧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나오고 말았다. 다시 그녀와 얘기하기까지는 10일 이상이나 걸렸다. 그 동안, 나는 될 수 있는 한 조지아나와 일라이자를 잘 다루어 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녀들이 몹시 차갑고 상대해 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할 일이 없어 따분하게 보이지는 않으려고 애썼는데, 그림 도구를 가지고 온 것이 그 두 가지 목적에 닿았다. 어느 날 아침, 나는 하나의 얼굴을 스케치하는 데 몰두했다. 어떤 얼굴이 될지 신경 쓰지 않고 그려 나갔다. 잠시 후 종이 위에는 넓고 튀어 나온 이마와 모난 얼굴의 윤곽이 그려졌다. 그 모양이 마음에 들어 나의 손가락은 부지런히 눈과 코를 그려 갔다. 다른 것을 다 그리고, 이번에는 눈의 차례였다. 매우 주의해서 그려야 되기 때문에 그것을 맨 나중에 했던 것이다. 나는 눈을 크게 모양좋게 그렸다. 눈동자는 크고 빛나고 있었다. '잘됐어. 하지만 아직 멀었어.' 그림을 관찰하며 나는 생각했다. '힘과 정기가 아직 모자라.' 그래서 나는 음영을 짙게 하고, 명암을 더욱 밝게 했다. 지금 나는 어떤 가까운 사람의 얼굴을 내 눈앞에 두게 되었다. 이쯤 되면 두 처녀가 내게 등을 돌려봤자 아무 소용이 되지 않았다. 나는 말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이 닮은 얼굴에 미소짓고 있는 그림을 보았다. 나는 그 얼굴을 보며 만족하고 있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많이 분 날의 오후였다. 나는 문득 2층으로 올라가, 누구하나 돌보는 이 없이 빈사 상태에 있는 여인의 병문안을 할까 생각했다. 벳시는 충실했지만 자기 가족을 돌봐야 했기 때문에 가끔씩밖에 들를 수가 없었다. 병자는 조용히 누워 있었고 혼수 상태 같았다. 납빛의 얼굴은 베개 속에 가라앉아 있었고, 화덕의 불은 꺼져 있었다. 나는 연료를 넣고, 이불을 덮어 주고, 잠시 그녀를 들여다보다가 창가로 갔다. 빗발이 창을 후려치고, 바람이 미친 듯이 불었다. '여기 누워 있는 사람의 영혼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지금, 자기 집을 떠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이 영혼은 - 마지막으로 해방될 때 어디로 날아갈까?'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육체에서 떠난 영혼의 평등성에 대해 헬렌 번즈가 한 말을 나는 생각했다. 그때 연약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거기 누구니?" 리드 부인이 이때까지 며칠 동안 말도 하지 않은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곁으로 갔다. "저예요, 리드 외숙모님." "누구...... 저라니?" 이것이 그녀의 대답이었다. "당신은 누구지?" 놀랍고 괴로운 표정으로 나를 보면서, "당신은 내가 모르는 사람이군. 나를 외숙모라고 부르는 사람은 누굴까? 너는 기브슨 가의 사람은 아니겠지. 하지만 나는 너를 알고 있어요. 그 얼굴, 그 눈과 이마는 내 눈에 익숙해요. 너는 저...... 아니, 제인 에어를 닮았어!" 그래서 나는 공손히 내가 당사자임을 확인시키려 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비로소 나인 줄을 알았고, 나를 데려오기 위해 벳시가 남편을 보냈더라는 얘기를 했다. "나는 말야, 병이 아주 무거워졌어." 이윽고 그녀는 말했다. "나도 죽기 전에 마음을 평안히 하고 싶어. 건강할 때는 생각도 나지 않던 것이 지금의 나처럼 되고 보니 마음에 짐이 되니까. 간호사는 여기 있니? 아니면 방안에는 너 혼자 있니?" 나는 지금 둘만 있다고 얘기했다. "그래, 그런데 말야. 나는 너에게 두 번이나 심한 일을 했어. 그걸 후회하고 있어. 하나는 내 자식들과 마찬가지로 너를 키우겠다고 남편에게 맹세한 것을 깨뜨렸어. 또 하나는." 그녀는 거기서 말을 끊었다. 안색이 변하고 뭔가 내심으로 감정의 폭풍을 참는 듯했다. 아마 최후의 고통이 찾아온 것일까 "역시 나는 얘기를 다 해야 되겠어. 영원이 내 앞에까지 와 있어. 역시 얘기하는 게 좋겠어. 내 화장품 상자에서 편지를 꺼내 가져와, 저기 있을 테니까." 나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걸 읽어 봐." 그녀가 말했다. - 부인, 소생의 질녀 제인 에어의 주소와 그녀의 근황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근일 중에 그녀에게 편지를 해서 마데이라에서 면회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고 싶어요. 신의 은혜로 소생은 노력한 보람 있어 상당한 재산을 저축했습니다. 하지만 처자식도 없는 몸이라 생존 중에 그녀를 양녀로 삼고 죽을 때는 나의 온 재산을 그녀에게 주고 싶습니다. 우선은 부인의 건강...... 존 에어, 마데이라에서 -. 그것은 3년 전의 것이었다. "어째서 내게 이 소식을 보내지 않았을까요?" "그건 내가 너를 너무 싫어했기 때문에 네가 조금이라도 출세하는 게 싫었던 거야. 나는 네가 내게 복수해 올 것을 잊지 않았어요. 제인, 일단 네가 내게 덤벼들 때의 그 격한 분노, 나를 온 세계의 누구보다도 미워한다고 말했을 때의 어조, 나를 생각만 해도 속이 뒤집히고 내가 너를 몹시 학대했다고 말했을 대의 너의 어린애답지 않은 그 표정과 목소리, 그리고 네가 이렇게 덤벼들어 뱃속 독을 모두 뱉아 냈을 때의 내 심정도 잊을 수가 없어. 아아, 물을 좀 줘, 빨리!" "리드 부인." 나는 물을 주면서 말했다. "이제 그런 건 생각지 마시고 마음속에서 모두 풀어 버리세요. 내가 심하게 말씀드렸던 것을 잊어 주세요. 그때는 어렸으니까요. 9년이나 흘렀어요." 그녀는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물을 마시자 다시 말을 계속했다. "나는 잊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내가 먼저 복수를 한 거야. 네가 백부의 양녀가 되어 안락한 신분이 되는 것을 나는 견딜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너의 백부에게 편지를 썼지. 대단히 서운한 일이지만 제인 에어는 죽었습니다. 로우드에서 티프스에 걸려 죽었습니다, 하고. 자아, 이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편지를 써서 내가 한 말은 거짓말이라고 말해 줘. 되도록이면 빨리 내가 저지른 거짓을 폭로하는 게 좋아. 너는 나의 고통의 씨앗으로 태어났나 보지. 나의 마지막은 무서운 고통을 겪어야만 해." "제발 이제는 그 일을 생각지 마세요. 그리고 나를 친절한 마음으로 용서해 주세요. 어렸을 때도 당신만 그런 기분이었다면 나는 기꺼이 당신을 사랑했을 거예요. 나는 지금 진심으로 가까워지고 싶어요. 키스해 주세요, 외숙모님." 나는 뺨을 그녀의 입술 가까이로 가져갔다. 그녀는 닿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다시 물을 달라고만 했다. 물을 마시는 동안 그녀를 안아 일으키고, 그녀의 얼음처럼 차가운 손을 감싸쥐었다. 약한 손가락이 나를 거부했다. 흐릿한 눈이 나의 시선을 피했다. "그럼 나를 사랑하든 미워하든, 마음대로 하세요." 나는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진정으로 당신을 용서하고 있어요. 나머지는 신의 용서를 비세요. 그리고 편한 마음으로 임종을 맞이하세요." 가엾은 여자여! 그녀로서는 평소의 마음을 고쳐 먹으려 해도 이미 때가 늦은 것이었다. 간호사와 벳시가 들어왔다. 나는 반 시간쯤 더 거기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녀는 이미 인사 불성의 상태로 돌아가 다시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밤 열두 시에 그녀는 숨을 거두었다. 사람들은 다음날 아침에야 모든 것이 끝났음을 우리에게 알려 왔다. 그때는 이미 그녀가 관 속에 들어간 뒤였다. 그녀의 부싯돌 같은 눈은 차가운 눈시울에 덮여 있었다. 22 로체스타 씨로부터 1주일의 휴가밖에 얻지 않았지만 내가 게이트헤드를 떠날 때는 1개월이 지난 후였다. 장례식이 끝난 후 곧 돌아가고 싶었지만 조지아나가 자기가 런던으로 떠날 때까지는 있어 달라고 애원해 왔기 때문이었다. 간신히 조지아나가 떠나자 1주일간만 더 있어 달라고 일라이자가 또 부탁을 했다. 그래서 살림을 돌보기도 하고 손님을 접대하기도 했다. 어느 날 아침, 그녀는 이제 자유로이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다. "당신에게는 참으로 신세를 졌어요. 정말 고마워요! 당신은 인생을 살면서 자기가 할 일을 다하고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분이에요." 그리고 화제를 바꾸어, "나는 내일 대륙으로 떠나요. 리일 근처의 수도원에서 살게 돼요. 나는 아마 로마의 가르침을 가슴에 안고, 베일을 쓰게 될 거예요." 수도원 생활은 그녀에게 어울린다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틀림없이 당신에겐 도움이 될 거예요!" 돌아오는 여행은 따분했다. 나는 돌아가는 날짜를 페어펙스 부인에게 확실하게 알려 주지 않았다. 그것은 밀코트까지 마중 나오는 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어느 6월의 오후 여섯 시경, 손필드의 옛길을 아무도 모르게 걷기 시작했다. 이런 시각에는 들과 밭 사이로 난 길은 사람이 잘 다니지 않았다. 화창한 날씨였지만 밝게 빛나는 여름날로써는 아직은 저녁때라고 할 수 없었다. 나는 지금 손필드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거기 있을 것인가? 오래는 머물지 못할 것 같았다. 이것만은 확실했다. 집을 비운 사이에 생긴 일에 대해 나는 페어펙스 부인으로부터 중간 보고를 듣고 있었다. 파티는 끝났다. 로체스타 씨는 3주일 전에 런던으로 갔지만 2주일 후에는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부인은 그가 사륜 마차를 새로 사게 된 얘기를 하면서 아마 결혼 준비를 위해 런던으로 갔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었다. 그가 잉그람 양과 결혼한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부인이 써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은 다 그렇게 말했다. 내 눈으로 보아도 결혼이 임박해지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행선지가 차츰 가까워지는 것이 나는 기뻤다. 너무 기쁜 나머지 나는 일단 걸음을 멈추고, 이 기쁨은 무엇을 뜻하는가 가만히 자문해 보았다. 이제부터 가는 곳은 내 집도 아니고, 쉴 수 있는 곳도 아니며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곳도 아니었다. '물론 페어펙스 부인은 웃는 얼굴로 맞아 줄 거야.'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어린 아델은 손뼉을 치며 내게로 달려오겠지.' 하지만 청춘이란 것보다 더 한결같은 것이 있을까? 무경험일수록 맹목적인 것이 있을까? 이 두 가지가 다시 한번 로체스타 씨를 볼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쪽이 관심을 가져 준다는 것은 별도로 하고도 결국은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자아, 빨리 가자. 그분의 곁에 있는 동안은, 어차피 앞으로 몇 달, 아니 몇 주 후에는 영원히 헤어져야 하지 않는가?' 그러자 나는 새로이 움트는 고통을 필사적으로 억제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손필드의 목장에서도 사람들이 일을 마치고 쇠스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자아, 마침내 그때가 온 것이다. 앞으로 한두 개의 들판을 더 지나면 나는 도로를 가로질러 문까지 갈 수 있는 것이다. 아아, 생울타리에 피어난 장미의 아름다움! 하지만 나는 장미를 꺾을 시간이 없다. 빨리 저택에 가고 싶다. 나는 꽃 핀 가지가 오솔길 위로 뻗어 있는 키 큰 브라이아 나무 밑을 지나 돌계단이 있는 좁은 문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연필과 수첩을 들고 거기에 앉아 있는 로체스타 씨를 보았다. 뭔가를 쓰고 있었다. 아아, 유령은 아닌데도 나의 긴장된 기력은 한꺼번에 풀리고 만다. 나는 그를 만나면 이렇게 떨릴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의 앞에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꼼짝도 할 수 없다니. 이런 데서 볼썽사나운 꼴을 보일 수는 없다. 저택으로 가는 다른 길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모두 쓸데없는 일이었다. 그가 나를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야아!" 그는 소리치고 수첩과 연필을 옆으로 치웠다. "돌아왔군요! 자아, 이리로 오세요." 나는 그리로 가려고 생각했다. 내가 어떤 동작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지만 아주 침착하게 보이려고만 애썼다. 나는 베일을 썼고, 베일은 늘어져 있으므로 어떻게든 겸손한 태도를 취하려고 애썼다. "이게 제인 에어일까? 밀코트에서 걸어왔어요? 그래, 역시 당신다운 도박이야. 마차도 부르지 않고 마치 꿈이나 그림자처럼 황혼 속을 평민처럼 걸어오다니. 도대체 지난 한 달 동안 당신은 무얼 하고 있었습니까?" "외숙모 곁에 있었어요. 외숙모는 돌아가셨어요." "아니, 실로 제인다운 대답이군! 착한 천사여, 우리를 지키소서! 그녀는 저 세상에서 왔습니다. 죽은 자의 집에서 오직 혼자 어둠에 싸여 여기 와서 나를 만나고 있습니다. 당신이 실로 실체인지, 아니면 그림자인지를 알기 위해 손을 대면 어떡하시겠습니까? 요정아! 아니, 마계와의 경계에서 귀신 불이라도 잡는 게 낫겠지. 이 게으름뱅이! 엉터리 휴가를 즐기고!" 그는 한참 후에 어조를 바꾸어, "한 달 동안이나 나를 기다리게 했어요. 아마 나를 완전히 잊고 있었겠지요!" 주인과의 재회가 즐겁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말 몇 마디가 향유처럼 내 마음을 부드럽게 녹였다. 내가 그를 잊으려고 한 것이, 그에게 있어서 무슨 뜻이라도 있는 양 한 말, 그리고 그는 손필드를 나의 집이라고 말했다. 아아, 정말 나의 집이라면! 그는 울타리 문을 비켜서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굳이 그리고 지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런던에는 가시지 않았댔어요?" 하고 물어 보았다. "갔다왔지요. 당신은 천리안인가 보군요." "페어펙스 부인이 편지에 써 보냈어요." "내가 무엇을 하러 갔는지도 가르쳐 주셨습니까?" "그럼요. 누구든지 당신의 볼일은 알고 있으니까요." "제발 사륜 마차를 봐 주세요, 제인. 그리고 그것이 로체스타 부인에게 어울릴지 어떨지 말해 주세요. 당신은 요정이니까. 당신은 나를 미남으로 바꾸는 마법이나, 약 같은 거, 뭐 그런 것을 내게 줄 수 없습니까?" "그런 것은 마법의 힘으로는 안 돼요." 그리고 나는 마음속으로 살짝 말했다. '필요한 사랑은 사랑하는 눈으로 충분해요. 그런 눈에는 당신은 훌륭한 미남자고, 아니, 당신의 두려움에는 이 이상의 힘이 있어요.' 로체스타 씨는 일찍이 가끔 나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민감한 통찰력으로 나의 생각을 꿰뚫은 적이 있다. 지금의 경우도 나의 바보스런 대답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의 특징인 미소를 나에게 보여 주었다. "지나 가세요, 제인." 간신히 지나 갈 수 있는 틈을 내어 주며 그는 말했다. "집으로 오세요. 걸어서 지친 다리를 친구네 집에서 푹 쉬게 하세요." 그의 말을 듣자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울타리를 넘어 조용히 그와 헤어질 작정이었다. 하지만 어떤 충동이 나를 잡아당겼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아니, 나 아닌 다른 것이 나 대신 내 뜻에 반대하고 있다. '대단히 친절히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우선 로체스타 씨, 당신의 집으로 돌아오게 되어 이상할 정도로 기쁘군요. 그리고 당신이 계시는 곳은 어디든지 나의 집입니다. 나의 오직 유일한 집이에요.' 나는 그날 밤, 미래에 대해 단호히 눈을 감고 말았다. 이별이 가까워 졌다는 것, 슬픔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외면했다. 티 타임이 끝나고 페어펙스 부인이 뜨개질감을 찾아내자 나는 그녀 곁에 자리를 잡고, 아델은 방바닥에 앉은 채 내게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때 나는, 언제까지나 우리들이 헤어지지 않기를 말없이 빌었다. 우리들이 이렇게 하고 있을 때 로체스타 씨가 인기척도 없이 들어와서 우리들을 보았고, 우리들의 다정한 모습에 기쁨을 보였을 때 - "늙은이가 양녀가 돌아와 안심 되지요." 라고 말했을 때 - 나는 문득 그가 결혼한 뒤에도 우리들을 어딘가 그의 보호 밑에서 함께 살게 하고, 그의 몸에서 비치는 빛과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희망을 갖고 싶어졌다. 내가 손필드에 돌아온 2주간의 모호한 평온이 뒤에도 계속되었다. 주인의 결혼에 대해서는 아무런 얘기도 없고, 또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오직 한 가지, 나를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잉그람 파크의 왕복 여행이나 방문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내가 허락하지 않는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혼담은 깨졌다. 소문은 틀림없다. 나는 주인의 얼굴이 화가 난 얼굴인지 슬퍼하는 것인지 알려고 했지만, 그 당시만큼 밝고 명랑한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가 나를 이 무렵만큼 번번이 자기 곁으로 부른 것도 - 내가 또 그를 그처럼 사랑한 것도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23 한여름의 태양이 온 잉글랜드에 찬연히 빛나고 있었다. 맑은 하늘, 아름다운 햇살이 이처럼 오래 계속되고 있음을 본 일은, 파도에 둘러싸인 우리의 국토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건초는 이미 다 거두어지고, 도로는 하얗게 말라 갔다. 나무들은 지금이 한창이었고, 생울타리도, 숲도 잔뜩 우거져 목장의 밝은 풀빛과 대조적이었다. 한여름 밤, 한나절 동안 헤이렌에서 들딸기를 따다 지친 아델은 해가 지자 곧 자리에 누웠다. 나는 뜰로 나섰다. 그것은 24시간 중에도 가장 상쾌한 시각 - 해는 지고 안개가 서서히 피어오르는 들. 태양이 화려한 구름을 가라앉혀 간 자리, 한 개의 언덕 위에 한 점의 홍옥이 번쩍거렸고, 작열하는 화덕의 불꽃이 피자, 다시 높게, 그리고 연하게 하늘을 반쯤 가린, 엄숙한 자색이 퍼지고 있었다. 나는 돌을 깐 길 위를 조금 걸었다. 거기에 은근히 정든 향기 - 궐련의 - 가 어느 창에서 스며 나오고 있었다. 서재의 창이 반 쯤 열려 있었다. 그리고부터 나는 감시받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과수원으로 갔다. 이곳처럼 나를 독립시켜 주고, 에덴 동산을 닮은 곳은 없다. 월계수가 빙둘러 선 곳까지 오니 밑둥에는 벤치로 둘러싼 거대한 마로니에 나무가 있다. 거기서 나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또 다시 그 냄새 - 로체스타 씨의 담배 냄새가 났던 것이다. 그는 마침 내가 가려던 나무 숲으로 통하는 문을 들어서고 있는 참이었다. 나는 담쟁이 덩굴이 무성한 그늘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나무 열매와 꽃 따위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한 마리의 커다란 모기가 내 옆을 스쳐 날아 로체스타 씨의 발 밑, 풀 위에 앉았다. 그것을 보자 그는 가만히 허리를 굽혔다. 기회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내게서 등을 돌리고 그가 모기에게 정신을 팔고 있는 사이에 빠져 나가면 그는 미처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나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잔디 위를 걸었다. 그는 불과 2야드 떨어진 화단가에 있었다. 그는 완전히 모기에서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것 같았다. 달빛을 받아 그의 그림자가 화원 위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것을 밟고 넘으려는 순간 몸을 돌아보지도 않고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인, 이놈을 좀 봐요." 도대체 그의 그림자에는 감각이라도 달려 있는 것일까? 나는 조금도 소리를 내지 않았는데...... 나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곧 거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놈의 날개를 봐요." 그는 말했다. "이건 서인도의 곤충을 생각하게 하잖아. 영국에는 이렇게 크고 화려한 날개를 가진 놈이 별로 없어요. 어어, 날아간다." 모기는 너울너울 날아갔다. 나도 그의 곁을 얌전히 물러 가려고 했지만 로체스타 씨가 따라오며 말했다. "돌아갑시다. 이렇게 아름다운 밤에 집에 처박혀 있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오늘처럼 해가 지는 것과 달이 뜨는 것이 겹친 시각에 잠자는 것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나는 늦은 시간 어두운 과수원에서 로체스타 씨와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무언가 그럴 듯한 핑계를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로체스타 씨의 모습은 아주 침착하고 진실해 보였기 때문에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동요를 느끼고 있는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나는 물었다. "로체스타 씨, 전 다른 곳으로 옮겨 가야만 할까요? 손필드를 떠나서?" "달리 도리가 없죠, 제인. 안됐지만 떠나야만 할 거요." 이것은 정말 큰 타격이었다. 그러나 난 타격에 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로체스타 씨, 내게 떠나라는 명령을 해주세요" "그 명령은 이미 내려진 거나 다름없소. 난 오늘 밤에라도 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렇게나 빨리 결혼하시는 거예요?" "비로 맞혔소. 당신의 머리는 역시 예민하군." "이제 곧?" "그래요. 나의...... 아니, 에어 선생. 미스 잉그람을 나의 품으로 맞아들이는 게 나의 꿈이라고 얘기했던 일을 당신도 기억하겠지요. 그 커다란 여자를 안으려면 팔이 아프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처럼 멋진 여자를 안고 불평할 남자는 없을 거요. 제인! 당신은 얼굴을 돌리고 있는데 그 모기를 더 보고 싶은 게요? 내가 당신에게 기억해 달라는 것은, 내가 잉그람과 결혼할 경우 당신과 아델이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신중한 고용인의 입장으로써 퍽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오. 아델은 물론 학교에 넣고, 에어 선생, 당신은 새 직장을 가져야겠지요." "네, 곧 광고를 내겠어요. 그러니까......" 나는 새 직장이 나설 때까지 여기 있어도 괜찮겠지요, 하고 말하려고 했으나 목소리가 막히고 말았다. "한 달 안으로 난 결혼할 생각이오." 로체스타 씨는 말을 계속했다. "그러니 그 사이에 당신의 직장을 구해 보도록 하겠소." "고맙습니다. 염려해 주셔서......" "천만에, 당신처럼 책임과 의무를 다한 사람에겐 고용주로서 약간의 편의를 봐 드리는 게 당연한 일이겠지요. 실은 내 미래의 장모될 사람에게서 당신에게 적당한 일자리에 관해 들은 적이 있어요. 아일랜드 코노트의 어떤 명문 가의 다섯 따님에게 가정 교사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틀림없이 당신에겐 그곳의 일자리가 마음에 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참 먼 곳이군요." "뱃길이지만 당신같이 분별 있는 아가씨에겐 아무 지장이 없겠지요." "뱃길은 좋아요. 하지만 거리...... 바다는 내게는 장애물이에요." "무엇에 대한 장애물인가요, 제인?" "영국이에요. 그리고 손필드." "또......" "로체스타 씨에 대해서......" 나는 이 말을 내 의사를 무시하고 말했다. 동시에 내 자유 의사의 허락없이 눈물이 치솟았다. 그러나 나는 소리내어 울지는 않았다. 약간 흐느꼈을 뿐이다. 그리고 다소간 싸늘한 심정으로 나와 로체스타 씨의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돈, 계급, 습관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너무 멀어요." 나는 말했다. "그건 확실해. 그리고 당신이 가 버리면 우린 두 번 다시 못 만나겠지. 나는 아일랜드란 나라에 흥미가 없으니 그곳에 갈 일도 없어요. 제인, 우리는 사이가 좋았다고 생각지 않소?" "그랬어요." "사이가 좋은 사람들은 작별 전야를 함께 있고 싶어하는 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오. 여행과, 그리고 작별에 대한 일을 우리 삼십 분만 더 얘기합시다. 여기 마로니 나무가 있는 곳으로, 이젠 우리 둘이서 여기 와 앉을 일도 없을 테니 오늘 밤이나마 조용히 여기서 쉽시다." 그는 나를 앉게 하고 자기도 따라 앉았다. "아일랜드는 정말 먼 곳이에요, 제인. 그런 피로한 여행에 나의 조그만 친구를 보내는 것은 애처로워요. 그러나 달리 그 이상의 것을 해줄 수가 없소. 당신은 나와 어딘가 닮은 데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제인?" 나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가슴에 무엇인가가 꽉 차올랐다. "왜냐하면 말이지요." 그는 말을 계속했다. "나는 이따금 당신에 대해 이상한 마음이 들 때가 있어요. 특히, 지금처럼 바로 내 곁에 있을 때는 말이에요. 마치 내 왼쪽 갈빗대 밑에 끈이 하나 달려 있고, 또 당신의 오른쪽 갈비에도 끈이 달려 있어서 그 두 개가 서로 꼭 묶여져 있는 것만 같단 말이오. 그러니, 만일에 저 넓고 거친 해협이 우리 사이에 가로 놓이게 된다면 이 매어져 있는 끈은 그만 끊어져 버리고 마는 게 아닐까? 그러면 나는 체내에서 출혈을 일으켜 버릴 것만 같은 불안이 자꾸 생겨요. 분명 당신은 금새 나를 잊고 말 테지." "아니에요, 절대로! 잘 아시면서......" 나는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몸을 떨며 흐느껴 울었다. 겨우 입을 열었을 때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손필드에 오지 말았더라면 하는 깊은 후회와 한탄에 잠긴 말 뿐이었다. "여기를 떠나는 게 슬퍼서?" 마음속의 슬픔과 사랑으로 불러일으켜진 격정의 불길은 모든 것을 멋대로 하려고 마음껏 몸부림쳤다. 우월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극복하고, 살려고 버둥거리고, 그리고 마침내는 완전히 정복하여 - 아아, 말하는 권리를 주장했다. "떠나는 것이 슬퍼요. 손필드를 사랑하고 있어요. 이곳에서 만족하고 기쁨에 넘치는 생활을 나는 하고 있어요. 저는 짓밟히거나 돌멩이처럼 감정이 없어져 버리지도 않았어요. 존경하는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얘기를 했어요. 제가 가까워지고 싶던 분 - 독창적이며, 늠름하고 포용력이 있는 분과. 그래요, 당신을 알게 된 거예요. 당신으로부터, 기필코, 영원히 떠나야 한다는 것은 정말 슬프고 괴로운 일이에요. 하지만 죽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별을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어쩌면! 로체스타 씨, 당신이 분명히 그렇게 의도했어요." "어떤 형태로?" "미스 잉그람이라는 형태로, 고귀하고 아름다운 여성을 신부로 맞는다는 것으로써." "나의 신부? 어떤 신부 말입니까? 내겐 신부가 없어요." "하지만 이제부터 가지는 것이 아녜요?" "그건 옳아. 난 가지게 돼요." "그러니까 전 떠나야 하는 거예요. 당신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아니, 당신은 여기 있어야 해. 맹세코! 그리고 그 맹세를 지켜야만 해." "아녜요! 전 가야만 한다고 분명히 말하는 거예요." 나는 격정에 쫓기듯 큰 소리로 말했다. "당신에게 있어 이제 아무 의미가 없는 존재가 된 이상 나는 여기 있을 수가 없어요. 저를 감정이 없는 자동 인형으로 아세요? 감정이 없는 기계로? 입으로부터는 빵을, 손으로부터는 삶에 필요한 한 잔의 물을 빼앗기고도 더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가난하고, 신분도 낮고 또 못 생긴 조그만 여자라고 해서 저를 영혼도 감정도 없는 인간으로 아셨나요? 그렇다면 저를 잘못 아신 거예요. 제게도 당신 못잖은 영혼과 감정이 있어요. 만일 하느님께서 얼마간의 아름다움과 풍부한 재산을 베푸셨더라면, 제가 당신 곁을 떠나는 것을 괴로워하는 것처럼 당신 역시 저와 헤어지는 것을 괴로워하도록 해 주셨을 거예요. 저는 습관과 인습, 그리고 이 허물어지기 쉬운 육신을 통해서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저의 영혼이, 또 당신의 영혼이 말하고 있는 거예요. 마치 우리 두 사람이 무덤을 지나 하느님의 발밑에 평등하게 서 있는 것처럼. 그래요, 우리들은 평등합니다." "지금도 우리는 서로 평등해!" 하고 나를 두 팔로 끌어당겨 자기 가슴에 안고, 입술로 내 입술을 힘껏 누르며 그는 말했다. "이렇게 제인!" "그래요, 정말" 나는 대답했다. "그런데 그렇지가 못해요. 당신은 결혼할 분이 - 또는 결혼하지 않은 그......... 분, 당신보다 훨씬 못한 사람과 결혼하려는 분이니까, 당신은 조금도 공명을 느끼지 않으면서, 당신이 진정 사랑하고 있다고 믿어지지 않는 사람 - 아닌가요? 저는 당신이 그 사람을 비웃는 것을 똑똑히 보고 들었습니다. 전 그런 식의 결혼을 경멸하는 거예요. 그러니 제가 당신보다는 더욱 낫다고 생각돼요. 이젠 놔 주세요. 가도록 놓아 주세요." "제인, 조용히, 죽을 힘을 다해 자기 깃털에 상처를 입히는 미친 새처럼 제발 그렇게 몸부림치지 말아요." "전 새가 아녜요. 어떤 그물에도 유혹당하지 않아요. 전 독립된 사고를 가진 자유인이에요. 그 의사로써 판단하여 저는 당신과 헤어지려는 거예요." 나는 다시 한 번 자유로이 되려고 몸부림치고 그의 앞에 꼿꼿이 섰다. "그런 당신의 의사가 곧 당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거예요." 그는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나의 손을, 나의 마음을, 나의 전 재산의 반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당신은 연극을 하시는 거예요? 전 그런 짓은 비웃을 거예요." "나는 당신에게 일생 동안 내 옆에 있어 주기를 바라는 거요. 나의 신부로서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겁니다." "그 운명을 위해서라면 당신은 이미 선택하고 있는 것이니 그것을 꼭 지켜야만 하는 거예요." "제인, 잠깐만 조용히 해줄 수 없소? 당신은 너무 흥분하고 있어." 월계수가 둘러싸인 산책 길을 바람이 휘몰아치고, 마로니에 가지를 흔들었다. 어디서부턴가 나이팅게일의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는 다시금 눈물을 지었다. 로체스타 씨는 부드러우면서도 침통하게, 조용히 나를 지켜보고 앉아 있었다. 잠시의 침묵 후, 그가 입을 열었다. "내 곁으로 와 주시오, 제인. 그리고 마음을 터놓고 얘기해 봅시다." "저는 두 번 다시 당신 곁으로 가지 않아요. 이미 떨어져 나갔어요. 되돌아가지는 못할 거예요." "그러나 제인, 나는 아내로서 당신을 부르고 있는 거요. 내가 결혼을 생각한다면 상대는 오직 당신 뿐이오." 나는 그가 나를 조롱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이리로 와 줘요, 제인." "당신의 신부가 우리들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는 일어나서 내게 손을 대었다. "아니, 내 신부는 여기 있어." 다시금 나를 끌어당기며 그는 말했다. "왜냐면 나와 대등한, 나와 비슷한 사람이 여기 있으니. 제인, 나와 결혼해 주시겠소?" 나는 대답 없이 그의 손을 뿌리치고 몸부림쳤다. "나를 의심하는 겁니까, 제인?" "제, 그렇고말고요." "조금도 믿지 못하는 거요?" "털끝만치도요." "당신 눈엔 오로지 내가 거짓말쟁이로 보이는 거요?" 뜨거운 정열로 그는 물었다. "의심 많은 아가씨, 내 자세히 설명해 주리다. 나는 잉그람 양에게 아무런 애정도 갖고 있지 않아요. 그건 당신도 잘 아는 일이오. 그녀 역시 내게 아무런 애정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나는 퍽 애를 먹었소. 나는 나의 재산이 남들이 생각하는 액수의 삼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소문을 퍼뜨렸소. 그리고 그녀의 집엘 갔더니 역시 예상대로 그녀와 그녀의 모친은 냉대로써 나를 맞더군. 제인, 나는 잉그람 양과 결혼할 의사가 전혀 없소. 당신이라는, 거의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당신이라는 사람을 나는 내 몸처럼 사랑하오. 가난하고, 신분도 낮고, 잘 생기지 못한 조그맣고 평범한 사람에게, 나는 나를 남편으로 받아 달라는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아무리 제게!" 나는 소리쳤다. 그의 진지한 태도와 예의를 벗어난 말투를 나는 서서히 믿기 시작했다. "당신 외엔 친구도 하나 없고, 당신이 주는 돈 외엔 1실링도 가지지 않은 제게 말예요?" "그렇소, 당신에게요. 제인, 나는 나의 것으로써 완전한 나의 것으로 당신을 손에 넣고 싶소. 빨리 그렇게 한다고 대답해 주시오." "로체스타 씨, 당신의 얼굴을 보게 해주세요. 달이 있는 밝은 쪽으로 얼굴을 돌려 주세요." "왜?" "당신의 얼굴에서 마음을 읽겠어요. 저쪽을 봐 주세요." "자아, 실컷 보시오. 마음대로, 그리고 어서 읽어요. 나는 괴로우니까." 그의 얼굴은 빨갛고, 근육이 경련하고, 눈빛이 이상스레 빛나고 있었다. "오오, 제인! 당신은 나를 고문하는구려!" 그는 외쳤다. "그 꿰뚫는 듯한, 그러면서도 성실하고 부드러운 눈길로 당신은 나를 고문하는구려. 제인, 나를 에드워드라고 불러요. 이름을 불러요. 그리고 "에드워드, 당신과 결혼하겠어요"라고 빨리 말해 주시오." "진정이세요? 정말 저를 사랑하세요? 진심으로 아내가 되기를 원하세요?" "진심으로. 맹세하라면 맹세하겠소. 그럼 맹세하지." "그럼 로체스타 씨, 저는 당신과 결혼하겠습니다." "에드워드라 불러요. 나의 조그만 아내!" "사랑하는 에드워드!" "이리 와요, 이젠 아주 내 곁으로." 그는 뺨을 내 뺨에 비비면서 가만히 속삭였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오. 나도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겠소." "주여 용서하소서!" 얼마 후에 그는 덧붙였다. "인간의 간섭을 난 용서하지 않아, 나의 것인 이 사람을 나는 절대 놓치지 않는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아요. 내겐 방해할 친척도 없답니다." "없다고? 그것이 가장 고마운 일이지." 하고, 그는 말했다. 만일 나의 사랑이 모자랐다면 그때 그의 목소리나 안색이 격화된 것을 야만스럽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별이라는 악몽에서 이번에는 결혼이라는 낙원으로 초대되어, 나는 그처럼 풍부하게 넘쳐흐르는 샘물에서 행복 외에는 아무 것도 마시지 않았다. 그는 몇 번이고 거듭해 "행복해, 제인?" 하고 물었고 나는 몇 번이나 거듭해 '네' 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그는 중얼거렸다. "이것으로 보상된 거야. 내가 만난 이 사람, 친구도 재산도 없이 그나마 위안받을 곳도 없었어. 나는 이 사람을 아끼고 위로해 줄 거야. 나의 마음에 사랑이 없고, 나의 결의에 일관성이 없으리라는 것은 신의 심판장에서 보상되리라. 조물주는 나의 행동을 보고 계셔. 세상에서 뭐라고 비평하든 나는 태연하겠소." 그러나 이 밤에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 것일까? 하늘엔 달이 있으면서도 우리들의 주위는 매우 어두웠다. 곁에 있는 로체스타 씨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무얼까, 이 마로니에 나무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나무는 뒤틀리며 신음 소리를 냈다. 바람이 월계수나무 사이를 휩쓸며 쏴하고 우리들 머리 위로 불어왔다. "안으로 들어가요." 로체스타 씨가 말했다. "나는 날이 밝도록 여기서 당신과 둘이 앉아 있고 싶은데, 날씨가 변하니 말야." '저도 그래요.' 하고 나는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사실은 입 밖에 내서 말해도 상관없었지만 때마침 내가 보고 있던 구름 사이로 새파란 불꽃이 튀어나오면서, 동시에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그리고 바로 우리의 옆에서 우르르 쾅 하는 뇌성이 무섭게 났다. 나는 눈부신 그 빛을 피하여 로체스타 씨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을 뿐이었다.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그는 황급히 나를 길 위로 끌어올리고,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러나 문턱에 들어서기도 전에 우리들은 흠뻑 젖어 버렸다. 그가 홀에서 내 숄을 벗겨 주고 머리카락의 물방울을 털어 주고 있는데 페어펙트 부인이 방에서 나왔다. 우리들은 전혀 그녀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불이 켜졌다. 시계가 열두 시를 쳤다. "빨리 가서 젖은 옷을 벗어요." 그는 말했다. "잘자요, 사랑스러운 사람!" 그는 몇 번인지도 알 수 없게 내게 키스를 퍼부었다. 그의 포옹에서 풀려 나와 얼굴을 들자, 거기 미망인의 심각하고도 질린 듯한 얼굴 표정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나중에 설명하면 되겠지.'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침실에 들어오자, 그녀가 일시적이나마 그 광경을 곡해하지나 않나 하는 불안이 잠시 싹텄지만 환희가 곧 다른 감정을 없애 주었다. 바람 소리가 드높고, 천둥이 가까운 데서 몰아치고, 번갯불이 무섭게 번쩍였지만 나는 아무런 공포도 불안도 느끼지 않았다. 폭풍이 계속되는 동안 로체스타 씨는 세 번이나 내 방문 앞에 와서 기분이 어떤지를 물어 보았다. 그것은 매우 큰 위로였다. 무엇보다 내게 따뜻한 힘이 되었다. 다음날 아침, 내가 미처 일어나기도 전에 아델이 뛰어들어와서는, 과수원의 막다른 곳에 있는 커다란 마로니에 나무가 간밤의 천둥으로 해서 절반으로 쪼개졌다고 말해 주었다. 24 잠에서 깨어나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도 어젯밤의 일들은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로체스타 씨를 만나 다시 사랑의 맹세를 듣기까지 나는 아무래도 그 일을 실체로써 믿을 수가 없었다. 거울 속에 비친 나의 얼굴은 생기가 돋고 희망이 넘쳐흘러서인지 이제는 좀처럼 얼굴도 못생겨 보이지가 않았다. 서랍에 넣어 둔 깨끗하고 수수하고 가벼운 여름 드레스를 꺼내 입었다. 그 옷은 정말 다른 그 언제보다도 내게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왜냐면 나는 이토록 행복에 젖어서 옷을 입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에어 선생, 아침 식사예요." 하고 페어펙스 부인이 다소 슬퍼 보이는 얼굴을 하고 무거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러나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나는 그녀에게 아무 것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나나 그녀 역시, 로체스타 씨가 설명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식사가 끝나자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갔다. 아델이 공부방에서 나왔다. "공부 시간인데 어딜 가니?" "아저씨가 나더러 어린이 방에 있으랬어요." "어디 계시는뎨?" "여기." 나는 아델이 가리킨 공부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서 있었다. "자아, 내게 아침 인사를 해줘요." 나는 주저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인사의 말 따위나 악수가 아닌 따뜻한 포옹과 키스로 나를 반겼다. 나는 그에게서 사랑받고 애무받는 일이 자연스럽고, 또한 즐겁게 느껴졌다. "제인, 당신은 마치 꽃이 핀 것 같구려. 오늘 아침은 정말 아름다워요. 이젠 창백한 요정 같지가 않아. 이 보조개 패이는 뺨과 장미꽃처럼 귀여운 입술을 가진 아가씨, 아름답게 빛나는 블론드 머리칼과 맑디맑은 갈색의 눈을 가진 아가씨......" '하지만 나의 눈은 녹색이었다. 어찌된 걸까, 그를 위해서 나의 눈은 새로운 빛깔로 변하기라도 한 것일까.' "이것이 제인 에어의 모습이에요." "그래, 곧 4주가 지나면 제인 로체스타가 될 사람이야. 제인, 그 이상은 단 하루도 미룰 수가 없어요. 듣고 있어요?" 물론 나는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은 내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얼굴색이 빨개졌다가 다시 파래졌어. 왜 그러지?" "제게 어울리는 이름을 들었기 때문이에요." "아무렴, 나의 신부, 에어 로체스타!" "꿈만 같은 얘기예요. 이 세상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인간이 있다니. 오! 그런 행복이 오리라고 상상도 못했어요. 그건 한낮의 꿈이에요." "사실이오. 난 바로 오늘부터 반드시 실천할 것이오. 아침에 나는 런던의 은행에 편지를 띄워, 손필드 부인이 상속하기로 되어 있는 보석 전부를 보내 달라고 했소. 2,3일 안으로 그것을 전부 당신 무릎에 쏟아 놓겠소. 당신과 결혼하는 이상 귀족의 딸처럼 모든 특권과 배려를 쏟을 거요." "어머나, 그런 것에 마음 쓰시다니! 제인 에어에게 보석이라구요? 전 싫어요. 부자연스러워요. 제겐 보석이 없는 편이 훨씬 나아요." "나는 당신에게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레이스의 옷을, 그리고 머리엔 장미꽃을 꽂아 주겠소. 내가 제일 좋아하는 베일을 씌워 주겠소." "그렇게 하시면 전 제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게 돼요. 당신의 제인이 아니라, 광대옷을 입은 원숭이나 깃털에 장식을 단 새나 다름이 없게 돼요. 그리고 내가 당신을 아무리 사랑해도 잘 생겼다고 말하지 않아요. 그만큼 더욱 당신을 사랑해요. 제발 제게도 그렇게 대해 주세요." 그러나 그는 내 말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말했다. "오늘 당장 우리는 밀코트로 가서 옷을 사도록 하는 거야. 4주일 이내로 결혼한다고 내가 말했지요? 결혼식은 되도록이면 교회에서 조용히 하고 런던으로 떠나는 거요. 그곳에서 잠깐 머문 후,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여 주고 싶었던, 태양에 가까운 지방과 프랑스의 포도원이나 이탈리아의 평원을 여행하는 것이오. 그곳에서 당신은 갖가지 도회의 생활을 맛보면서, 자신의 참된 가치를 깨닫는 거야." "당신과 함께 정말 제가 여행을 하는 거예요?" "파리, 로마, 나폴리, 프로렌스, 베니스, 비엔나를...... 내가 돌아다녔던 곳은 당신에게 송두리째 보여줄 거요. 나의 말발굽 자리가 난 곳엔 어디든 당신의 가냘픈 발자국이 찍히게 할 거요.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증오와 분노만이 들끓어 거의 반 미치광이가 되어 유럽을 떠돌아다녔소.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나를 위로해 줄 천사와 함께 행복한 마음으로 다시 그곳을 찾아가는 거요." 나는 웃었다. "나는 천사가 아녜요. 또한 죽기까지 천사가 되고 싶지도 않아요. 전 단지 제인일 따름이에요. 로체스타 씨, 제게 하늘 나라에서의 일 같은 것을 기대하거나 강요하진 마세요. 저도 당신께 그런 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아요." "그럼 무엇을 기대합니까?" "당분간은 지금 그대로의 당신이겠지만 곧 냉정을 되찾으시겠지요. 그러고는 변덕스럽고 화도 잘 내고, 엄격해지셔서 전 당신의 비위 맞추기에 애쓰게 될 거예요. 그러나 저한테 아주 익숙해지면 아마 다시 한번 저를 좋아하실 거예요 - 좋아한다는 것이지 사랑하신다는 건 아녜요. 저의 예측으로는 당신의 사랑이 반 년이 못 가 증발해 버릴 것 같아요. 그러나 결국은 친구로서, 인생의 길동무로서, 전 제가 주인님께 싫증을 느끼게 할 마음은 없어요." "싫증을 느낀다고? 그리고 다시 당신을 좋아할 거라고? 나는 몇 번이라도 당신이 좋아질 거고 그리고 변함 없이 당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겠소." "그렇지만 당신은 곧 변덕이 생겨서....." "외모만으로 나를 대접하려는 여자들에게는 영혼도 애정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난 곧 악마가 돼요. 무미하고, 경박한, 우열, 비루, 옹고집을 내게 표현했을 때는 말이오. 그러나 해맑은 눈빛과 내부에 불을 품은 영혼, 차라리 휠지라도 부러지지 않는 풍부하면서도 유순하고 성실한 사람에겐 나는 언제나 친절하답니다." "당신은 그런 성격의 여성을 보았던가요? 사랑한 적이 있어요?" "지금, 사랑하고 있습니다." "아니, 절 알기 이전에 혹시 당신이 찾는 이상형에 맞는 여인과 실제로 가까워진 적 있었던가요?" "나는 지금껏 당신을 닮은 사람을 본 적이 없소, 제인. 당신은 나를 즐겁게 하면서도 나를 지배하오. 그 복종하는 듯한 착한 인상을 나는 좋아하오. 당신의 부드러운 손가락에 감기면 그것은 나의 팔을 통해 심장까지 전해오지. 나는 영향을 받고, 그리고 정복되오. 그러면서도 그 영향력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상쾌하고, 그 정복력은 여태껏 내가 얻은 그 어느 승리보다도 마력을 갖고 있소. 아니, 왜 웃지, 제인?" "저 큘레스나 삼손이 미녀를 당하지 못했던 일들을 생각했어요." "그래? 이 엉터리 요정아!" "아니, 지금 당신의 말씀은 그리 현명한 것이라 생각되지 않는군요. 제가 말한 삼손이 그리 현명한 행동을 하지 못했던 것처럼 이담에 제가 당신에게 별로 내키지 않는 부탁이라도 드린다면 뭐라고 대답을 하실까요?" "제인, 지금 부탁해 봐요. 나는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소." "그렇다면 정말 부탁을 드리겠어요. 벌써 부탁드릴 일이 생겼는 걸요." "말해 봐요. 당신의 웃는 얼굴을 보니, 난 말을 듣기 전부터 벌써 승낙해 버릴 것 같군. 그렇게 되면 나는 바보가 아닌가." "그럴 리가요. 제 부탁은 매우 사소한 거예요. 보석을 가져오시지 않을 것과 장미꽃을 머리에 꽂지 마실 것 이렇게 두 가지 뿐이에요." "그러면 순금으로 도금하는 편이 좋다는 말인가? 좋아요. 당신의 부탁은 당분간 듣도록 하지요. 은행에 보낸 편지 내용을 곧 취소하겠소. 그런데 제인, 당신은 아직 내게 요구한 게 없소. 뭐 다른 것을 좀 얘기해 봐요." "그렇다면 한 가지, 저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시겠어요?" 그는 당황한 것 같았다. "그게 뭐요 뭐?" 성급히 물었다. "호기심이란 원래 수상한 거야. 어떤 요구든 들어주겠다는 맹세를 하지 않아 정말 다행이군그래. 모르긴 해도 어떤 비밀에 대한 질문이겠지만 그보다는 내 재산의 절반을 달라는 편이 훨씬 좋겠어." "어머나! 절 땅덩어리에 투자를 해서 돈이나 벌려는 욕심쟁이 유대인 여자로 아세요? 그보다는 당신의 비밀을 모두 듣고 싶어요. 만일 당신이 마음속으로부터 저를 사랑하신다면 그 비밀로부터 저를 몰아내시지는 않겠지요?" "당신이 알아야 할 비밀은 뭐든 얘기하겠소. 그러나 쓸데없는 짐을 지려고는 하지는 말아요, 제인. 내 손바닥 위에서 당신이 이브와 꼭 같은 여자가 되게 할 수는 없어요." "왜 안 되나요? 당신은 설복당하고 정복당하는 일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를 말씀하셨잖아요. 그 고백을 기회로 재빨리 응석을 부리고 비위를 맞추고 조르기도 해서, 또 울거나 화를 내기도 해서 전 제 솜씨를 시험해 보고 싶어요." "그런 시험을 해보고 싶으면 해봐요. 그렇게 남의 약점을 찌르면 게임은 결국 끝이 나요." "어머, 그래요? 당신은 그렇게 쉽게 항복하나요? 왜 그렇게 갑자기 무서운 얼굴을 하세요? 눈썹이 손가락처럼 굵어졌어요. 언젠가 어떤 시에 '첩첩이 쌓인 어두운 천둥구름' 이라는 구절이 있었는 데 지금 당신 이마가 그래요. 결혼 후 당신 얼굴이 그래질까요?" "만일 당신의 그 얼굴이 결혼 후의 그 얼굴이라면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땅의 요정인가 하는 당신과 결혼할 생각은 버리겠소. 그런데 당신이 알고 싶은 것은 도대체 뭐란 말이오, 응?" "제가 묻고 싶은 것은 당신은 왜 잉그람 양과 결혼할 의사가 있는 듯이 보이려나 애쓰셨나 하는 거예요." "그것 뿐이라니 고마운 일이군." 그의 이마에서 어두운 그늘이 사라졌다. 그는 나를 내려다보고 미소짓고 머리를 쓰다듬고 마치 위험에서 모면한 듯한 기쁜 얼굴을 하였다. "제인, 내게 구혼을 한 건 당신이었소." "물론 저예요. 하지만 잉그람 양의 일은?" "그렇소. 내가 잉그람 양에게 구혼한 체한 것은, 내가 당신을 미친 듯이 사랑하는 것처럼 당신 역시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려는 거였소. 질투는 그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한 것으로 가장 효과가 있으리라 여겼소." "어머나, 그런 짓을 하다니, 부끄러워요. 명예롭지 못한 일이에요. 잉그람 양의 심정은 조금도 생각지 않았었군요." "그녀의 심정은 오직 프라이드라는 것에 집중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눌러 줄 필요가 있는 거지요. 제인, 당신은 질투했나요?" "그런 건 걱정 마세요. 그보다도 로체스타 씨, 당신의 그 희롱 탓으로 잉그람 양이 괴로워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으셨나요? 그분은 버림을 받고, 배반당했다고 생각지 않을까요?" "절대로! 그 반대예요. 내가 전에 얘기하지 않았소. 재정 곤란이라는 소문이 나가 내게 쏟았던 그녀의 정열은 꺼져 버렸습니다." "당신의 두뇌는 이상한 공작을 잘도 꾸미는군요. 다시 한 번 묻겠어요, 로체스타 씨. 저는 얼마 전까지 괴로워했던 그런 괴로움을 누군가에게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이 나에게 보장된 이 커다란 행복을 받아들여도 좋을까요?" "물론이지, 착한 아가씨. 당신처럼 순결한 사랑을 지닌 사람은 이 세상에 또 없을 거야. 나는 당신의 사랑을 믿어요. 그래서 자신 있게 말도 할 수 있는 거야." 나는 나의 어깨에 놓인 그의 손에 입을 맞췄다. 나는 이루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그를 사랑했다. 나 자신도 못 믿을 정도로. "졸림을 받는 건 즐거운 일이야. 다른 걸 더 요구해 봐요." 얼마 후에 그가 말했다. 나는 다시금 요구할 일을 생각해 냈다. "당신의 의향을 페어펙스 부인에게 전해 주세요. 어제 저녁에 그분은 우리가 함께 있는 걸 보고 놀라는 눈치였어요. 그런 분에게 오해를 받는 것이 저는 괴롭습니다." "방에 가서 모자를 쓰고 와요." 그는 말했다. "이제부터 밀코트에 갑시다. 당신이 준비할 동안 노부인께 양해를 얻어 두지요." "틀림없이 그분은 제가 저 자신이나 당신의 신분을 잊고 있다고 생각하실 거예요." "신분? 당신의 신분이라면 내 마음속에 있어. 그리고 당신을 경멸하는 놈의 모가지에 있단 말이오." 준비는 곧 끝났다. 나는 로체스타 씨가 페어펙스 부인 방을 나오는 소리를 듣고는 곧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정면의 하얀 벽을 바라보고 있는 노부인의 눈은, 차분한 마음씨의 주인이 생각지도 못한 사건으로 휘저어진 데 대한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나를 보자 일어서서 약간 어색한 웃음을 띠며 무언가 축하의 말 같은 것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미소는 사라지고 말은 꼬리가 잘렸다. "정말로 놀랐어요." 그녀는 말하기 시작했다.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미스 에어. 분명 꿈은 아니지요? 가끔 나는 깜박 잠이 들어서, 전혀 듣지도 않은 일들을 공상하는 때가 있어요. 아무튼 사실대로 말해줘요. 당신에게 로체스타 씨가 구혼을 한 건 사실인가요? 웃지는 말구요. 글쎄 주인님은 5분 전에 이리로 오셔서 한 달 내게 당신을 아내로 맞겠다는 군요." "로체스타 씨는 제게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러세요? 그래 당신은 그 말을 정말로 믿고 승낙하셨나요?"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찬찬히 관찰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강력한 매력을 어느 곳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내 머리론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군요."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이상, 의심 없는 사실이군요.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나로서는 알 길이 없어요. 결혼에 있어선 신분이나 재산이 대등해야 됨은 물론 또 당신들 두 분은 스무 살이라는 나이 차가 있잖아요. 말하자면 아버지뻘이죠." "그런 것은 걱정 마세요, 부인!" 나는 답답해서 소리쳤다. "로체스타 씨는 스물다섯 살 정도로 젊어 보이고 또 실제로도 그렇게 젊으세요." "당신과 결혼하려는 건 정말로 사랑하기 때문인가요?" 나는 그녀의 냉정함과 의심이 깊은 데 너무나 마음이 상해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당신을 슬프게 하는 건 안됐지만......" 하고 페어펙스 부인은 더 다그쳐 말했다. "당신은 너무 젊어서 남자라는 걸 몰라요. 그러니 조심해야지요. 왠지 이번 일엔 아무도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되는군요." "그렇다면, 내가 도깨비라도 된단 말씀이세요? 로체스타 씨가 제게 애정을 느끼는 건 있을 수 없는 얘기라는 말인가요?" "그런 말이 아녜요.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고 또 요즘 몰라 보게 아름다워졌어요. 그리고 로체스타 씨는 분명히 당신을 좋아하세요. 그것이 너무 눈에 뜨일 정도여서 나는 오히려 당신이 염려되었어요. 그리고 당신이 스스로 자제해 줬으면, 하고 바랐어요. 어젯밤, 집안을 모조리 뒤졌어도 두 분 다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열두 시가 되어서 당신과 주인님이 함께 들어오시겠지요." "이젠 그런 건 걱정 안 하셔도 좋아요." 나는 답답해서 말을 중단시키려고 했다. "아무 것도 잘못된 일은 없으니까요." "나는 끝까지 만사가 순조롭기를 바래요. 하지만 주인님 같은 신분의 사람이 가정 교사와 결혼한다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니 걱정이 돼요." 나는 그만 화가 치밀었다. 이때, 존이 와서 마차가 준비됐다고 알려왔다. 그러나 밀코트에서의 시간은 나를 다소 귀찮게 했다. 로체스타 씨는 나를 비단옷 가게로 데리고 가서 여러 벌의 옷을 고르게 했다. 내 부탁에 두 벌로 줄일 수 있었지만, 그는 이번엔 그 두 벌을 자기가 직접 고르겠노라고 나섰다. 그는 가장 화려한 자수정 색깔의 비단 드레스와 핑크색 사탱에 눈길을 주었다. 나는 다시 몇 번을 귀띔하여 그런 것은 골라 주어도 입을 용기가 없다고 말했다. 어쨌든 그는 굉장한 고집 불통이었기 때문에, 한참이나 애를 먹은 후에야 겨우 수수한 은회색의 비단과 검은색 사탱으로 바꿀 수 있었다. 그는 말했다. "오늘만은 당신의 말을 듣겠어. 하지만 나는 역시 눈부신 꽃밭 같은 당신이 보고 싶어요." 비단옷 가게에서 겨우 그를 끌어내고 다시 보석상에서 끌어냈을 때에야 나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가 물건을 많이 사면 살수록 나는 거북함을 느꼈다. 열이 오르는 것처럼 지쳐 버린 몸을 마차의 좌석에 묻고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문득 여태껏 까맣게 잊고 있던 한 가지 일이 생각났다. 나의 친척이 되는 존 에어가 리드 부인에게 보낸 편지, 그가 날 양녀로 하여 유산을 물려주고 싶어한다는 일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구원이야. 내가 아무리 보잘것없어도 자립은 할 수가 있잖아. 로체스타 씨에게 인형처럼 사치의 대상이나 되고, 황금빛이나 뒤집어쓰고 있는 제2의 다이에로는 되기 싫다. 마데이라에 편지를 써야지. 존 아저씨에게 결혼을 알리고, 그 상대를 알리는 거야. 만일 내가 언젠가는 상속할 재산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집을 간다면 지금 이분의 신세를 진다 해서 그리 큰 부담이 될 것은 없어.' 이런 생각이 어느 정도 위안을 주었고 나는 그날로 이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주인의 얼굴을 볼 용기가 생겼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는, 마치 즐겁고 기분이 좋은 회교도의 군주가 노예에게 황금이며 보석 따위를 줄 때의 그것과 같아 보였다. 나는 화가 나서, 쉴 새 없이 내 손을 찾아 더듬거리는 그의 손을 빨개질 정도로 꽉 붙잡아서 그의 쪽으로 휙 밀어붙였다. 그는 웃으면서 손을 비볐다. "어쨌거나 난 당신의 뜻대로야, 제인." "저는 다만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싶을 뿐예요. 복잡한 의무감은 싫은 거예요. 당신은 세린느 바렌에 대해서 말씀하신 걸 기억하세요? 다이아몬드나 캐시미어의 천을 준 걸 말예요. 저는 당신의 영국제 세린느 바렌이 되진 않아요. 전 아델의 가정 교사로 행동할 거예요. 다만 그것으로서 집과 식사와 또 연봉 30파운드의 급료를 벌겠어요. 그 돈으로 제 옷을 사고, 당신에게선......" "내게는......?" "당신의 마음을 받으면 그걸로 충분해요. 그 보답으론 제 마음을 드리니까요. 그걸로 빚은 상쇄되는 거예요." "흠, 그 냉정한 거만과, 순수한 자존심에 있어선 아마 아무도 당신을 당할 수 없겠소." 마차는 손필드에 가까워졌다. "오늘 나와 함께 식사합시다." "고맙지만 싫어요." "도대체 뭣 때문이오?" "결혼 때까지의 한 달 동안 저는 종전대로 생활하겠어요." "지금부터 가정 교사 일은 그만둬요." "어머나, 실례지만 그것도 사양하겠어요. 그것 역시 종전대로예요. 전 당신과 떨어져 생활하고, 다만 당신은 절 만나고 싶으면 예전처럼 저녁때 불러주시면 돼요." "아델의 말처럼 체면을 차리기 위해서? 자아, 들어 봐요. 지금은 당신이 도도하지만 당신은 머잖아 내 사람이야. 일단 내가 당신을 꼭 붙잡게 되면. 당신을 이렇게...... (그는 자기 시곗줄에 손을 대면서) 비끄러매겠소. 이 사랑스런 조그만 당신! 당신을 잃지 않도록 내 가슴에 항상 지니고 다니리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나를 마차에서 부축해 내렸다. 나는 그대로 2층으로 달아났다. 저녁때, 언제나처럼 그는 나를 불렀다. 내 맘속엔 이미 그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마주 앉아 이야기하지는 않을 결심이었다. 나는 그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기억했다.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대개 그런 것처럼 그는 노래 부르기를 좋아한다. 황혼과 함께 로맨스가 푸른 별들에 실려 유리창 너머로 빛나기 시작하자, 나는 피아노의 뚜껑을 열고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 달라고 청했다. 그는 나를 "변덕쟁이 마녀"라고 말하면서 노래는 다른 날에 하자고 했지만, 나는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라고 우겼다. "내 목소리를 좋아하오?" 그는 물었다. "더할 수 없이......" 그의 허영심을 부채질하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었지만 나는 오늘 밤만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제인, 그럼 당신이 반주를 해요." "좋아요." 하고 나는 피아노 앞에 앉았지만, "이 엉터리 아가씨야!" 하는 혹평을 받고 의자에서 쫓겨났다. '실은 그것이야말로 내가 원하던 바였지만' 그는 자기 손으로 반주를 시작했다. 나는 창가로 갔다. 그곳에 앉아서 희미한 나무숲과 잔디밭을 바라보는 동안에, 다음과 같은 노래가 상쾌한 리듬을 따라 밤공기 속에 메아리쳐 나갔다. 가슴 속 깊이 타오른다 가식 없는 사랑의 파란 불꽃은 이 몸의 곳곳을 굽이치면서 생명의 조수처럼 흘러내린다. 그대 만나는 날의 이 환희는 이별하는 그날의 비애라고 깨우치며 기다리는 이 애달픔 아아, 때로는 피도 얼어붙노라 사랑하는 그대의 아낌을 받음은 둘도 없는 행복이라 알고 있기에 오로지 사랑만을 좇고자 하는 앞 못 보는 한결같은 내 마음이여 그러나 우리들의 하늘 멀리로 가는 길 하나 없이 끊어져 버려 목숨도 위태로이 바다 가운데 갈 곳은 막막하고 파도는 드높아라 숲속과 들판을 헤매는 사이에 무서운 공포만 가득한 이 적막의 밤 이 세상의 약속과 지켜야 할 일 미움과 분노도 함께 얽히네 험준한 사랑의 언덕을 올라서 위험한 사랑의 늪지를 지나서 저주하고, 미워하고, 질시도 하나 나는 두렵지 않아 오직 가리라 내 가는 하늘은 무지개 다리 섬광처럼 그곳을 뛰어넘으면 보라, 하늘 높이 나의 꿈 그토록 찬연한 나의 꿈을 수심어린 구름의 멀리로부터 그대 미소짓는 아름다움이여 두려워 않으리, 이제 재앙도 이 세상 고뇌의 그 어떤 환영도 그대는 포근하고 엄숙하게 재게 주었노라 작고 하얀 손 맹세하였노라 하나가 되는 성스러운 인연으로 묶이어져서 이 목숨 다하도록, 아니 죽음에서도 맹세는 드높아라 입술 맞대고 사랑하는 그대의 입김을 받는 이 영혼, 그지없이 행복하여라 그는 일어나서 내게 가까이 왔다. 그의 눈은 독수리처럼 빛났고, 붉은 얼굴 가득히 부드러움과 정열이 넘쳐흘렀다. 나는 겁이 났다. 그러나 곧 기운이 솟았다. 정에 이끌린 장면이나 심한 애정의 표현은 삼가야 한다. 나는 그 두 가지 위험에 직면해 있었으므로 곧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그래서 그가 다가왔을 때 쌀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와 결혼하려는 거예요?" "나의 제인에게서의 그런 질문은 좀 우스운데......" "아니, 저로선 당연한 질문이에요. 왜냐하면 당신의 미래의 아내는 함께 죽어야 한다면서요? 그런 이교도적인 사상은 어찌된 일이에요? 전 당신과 함께 죽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그건 분명해요." "아아, 내가 가슴 깊이 원하고 바라는 건 당신과 함께 사는 것 뿐이야. 당신에게 죽음이 있어서야 될 말인가." "아녜요, 저 역시 때가 오면 죽어야 할 권리가 있어요. 다만 그때를 기다릴 뿐이지, 인도의 아내처럼 따라 죽는 것은 할 수 없어요." "그래. 내가 멋대로 가사를 바꾸어 노래한 것을 용서하시오. 그리고 용서의 표시로 화해의 키스를 해줄 순 없겠소?" "물론 해드리고 말고요." 그는 나를 '이 고집통' 이라고 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다른 여자라면 자기를 칭송하는 노래엔 뼈까지도 녹아 버릴 텐데." "네, 그래요. 전 고집통이에요. 부싯돌처럼 고집스러워서 이제부턴 그런 저를 자주 보실 거예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고는 한 달이 다 되기 전에, "제 성격의 거친 면을 보시면 당신의 약속이 얼마나 엄청난 실수였는지를 아실 거예요. 취소할 시간 여유가 충분할 적에 다시 한 번 고려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라고도 권해 보았다. "이봐요, 좀 이치에 닿는 말을 하구려." "원하신다면 더욱 침착해지겠어요. 하지만 이치에 닿는 말이라면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말하는 동안에 마침내 그는 화가 치밀어 방구석에 처박혀 버렸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처럼 존경하는 태도로, "안녕히 주무세요." 하고 옆문으로 해서 방을 나왔다. 나의 생각은 완전히 적중해서 그런 식의 그와의 대면이 약혼 기간 동안 쭉 계속되었다. 때문에 그는 기분이 언짢아 심통스런 얼굴을 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그것을 재미있어 하였다. 그의 말을 거역하거나 애먹이는 일은 반드시 그와 둘이 있을 때에만 했다. 어김없이 그는 저녁 일곱 시면 나를 부르러 사람을 보냈다. 하지만 예전처럼 그는 '귀여운 사람' 이니 '사랑하는 그대'니 라고 나를 부르지 않았다. 대신에 '건방진 인형' 이나 '심술맞은 요정', '무정한 사람' 이나 '못난이' 따위가 내게 붙여졌다. 또한 애무 대신에 얼굴을 찌푸렸고, 손을 잡는 대신에 팔을, 뺨에 키스하는 대신에 귀를 잡아당겼다. 나는 그것이 좋았다. 지금의 내게는 이런 난폭한 사랑의 표현도 부드러운 애무보다 더 나를 즐겁게 했다. 그리고 페어펙스 부인도 마침내는 나를 인정해 준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에 대해 품고 있었던 불안을 버렸다. 나는 현명하게 해낸 것이다. 25 어느덧 약혼 기간도 끝나 그 마지막 시간마저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눈앞에 다가온 결혼 날짜는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이미 준비가 완전히 갖추어져 있었다. 적어도 내게 남아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나의 짐들을 몇 개의 트렁크에 정리한 다음 밧줄로 묶어서 내 방의 바람벽에 일렬로 놓아 두었다. 내일 이맘 때면 이 트렁크는 멀리 런던으로 수송되어 가는 중이리라. 나도, 아니 미지의 제인 로체스타도 신의 양도 아래 런던으로 수송되어 가는 중이리라. 화장대 건너편의 옷장에는, 나의 검은 나사의 양복과 밀짚 모자 대신 로체스타 부인의 옷들이 들어 있다. 한 벌의 결혼 의상 - 지금 시간은 9시다 - 그 의상은 내 방의 어둠 속에 흡사 유령처럼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는 막연한 불안감으로 꽉 차 있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지만 누구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또 보지도 못했다. 일어난 것은 어젯밤이었다. 로체스타 씨는 집에 없었고 오늘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약간의 볼일로 30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그의 소유지를 돌아보러 간 것이다. 나는 그가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어서 마음의 짐을 벗고 싶었고, 나를 괴롭히고 있는 이 수수께끼의 해결을 구하고 싶었다. 방의 조그만 시계와 홀의 시계가 동시에 열 시를 알렸다. "왜 이렇게 늦을까, 달빛이 있으니 대문까지 나가 봐야지. 그분도 오실 때가 됐고, 마중을 나가면 마음이 좀 차분해질 거야." 하고 나는 생각했다. 바람이 울창하게 대문을 뒤덮은 거목들의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양쪽으로 난 길의 끄트머리는 고요했다. 좌우의 길을 살피고 있는 사이, 아이처럼 기다리다 지쳐 실망한 나머지 눈물이 뺨을 적셨다. 밤은 더욱 깊어져 매서운 바람과 함께 비가 뿌렸다. "빨리 오시면 좋을 텐데. 제발 빨리 와 주셨으면......" 나는 병적이랄만큼 심사가 어수선해져서 이렇게 외쳤다. 간밤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것이 불길한 전조야. 요즘은 너무도 행복했으니까 나의 행복은 그 정점을 지나 이젠 내리막에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 혼자 집에 갈 수는 없어.' 하고 생각했다. 이처럼 나쁜 날씨에 그는 혼자 밖에 있는 것이다. 화로 곁에서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기보다는 몸이 좀 피로해도 멀리까지 가서 그를 맞는 편이 낫다. 나는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4분의 1마일도 채 가기 전에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한 명의 기수가 전속력으로 말을 달려왔다. 한 마리의 개가 그 옆을 따랐다. 불길한 전조여, 물러나라...... 그는 로체스타 씨였다. 레스루아를 타고 파일로트와 더불어 그는 왔다. 그는 엷은 달빛으로 나를 보았다. 그는 모자를 벗어 머리 위로 흔들었다. 나는 달려가서 그를 맞았다. "자아!" 그는 안장에서 몸을 굽혀 손을 내밀었다. "혼자서는 곤란하지요. 내 발 위에 올라서서 두 손을 잡아요, 제인, 어서 올라오라니까!" 나는 시키는 대로 했다. 그를 만난 기쁨으로 해서 나는 날쌔게 올라탔다. 마음으로부터의 키스를 받고, 자랑스러운 승리감을 맛보았으나 나는 그것을 억눌렀다. 그는 기쁨을 감추고 내게 물었다. "그런데 제인, 이렇게 늦은 시간에 마중을 오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었소? 이런, 흠뻑 젖었군. 자, 내 외투를 써요. 아니 열도 있는 것 같군. 뺨과 손이 불처럼 뜨거워요. 정말 무슨 일이 있었소?" "아뇨, 이젠 두렵지도 불행하지도 않아요." "그럼 두렵고 불행했었나요?" "네, 하지만 천천히 얘기하겠어요. 필경 당신은 제가 두려워한 일을 웃으실 거예요." "내일이 지나면 웃을 거야. 하지만 당신이 아직 내 수중에 꽉 잡히질 않았으니 지금은 그럴 수도 없잖아. 지난 한 달 동안 당신은 미꾸라지처럼 미끄러웠고, 찔레꽃처럼 가시투성이였어. 가는 손만 내밀면 찔리는 거야. 이제 겨우 방황하는 염소 새끼를 품안에 안았나? 당신은 염소울에서 나와 양치기를 찾아 헤매었던 거요?" "당신을 기다렸지만, 하지만 뽐내면 싫어요. 어머, 벌써 손필드야. 이젠 내려 주세요." 그는 내 뒤를 따라 홀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서재에서 기다릴 테니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와 달라고 말했다. 그는 다시 층계를 오르는 나를 불러, 지체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로부터 5분 후, 나는 밤참을 들고 있는 그와 함께 앉아 있었다. "거기 앉아요, 제인." 나는 그의 곁에 앉기는 했지만 아무 것도 먹지 않겠다고 말했다. "왜? 여행 생각 때문에? 런던에 갈 일을 생각하니 식욕이 없나?" "오늘 밤은, 바로 전의 일까지도 확실치 못해요. 내가 뭘 생각하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인생 자체가 현실 같지가 않은 걸요." "나 아닌 다른 것이 그렇단 거지? 나는 확실해. 자, 만져 봐요." "아녜요. 당신이야말로 제일 확실치 않아요. 환상에 불과할 뿐이에요." 그는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이것이 환상이라는 거야?" "네, 만져 봐도 역시!"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그 손을 내게서 밀어냈다. "식사는 끝나셨나요?" "응." 나는 벨을 눌러 상을 치우게 했다. 우리는 다시금 둘이 되었다. 나는 주인의 무릎 앞 낮은 의자에 앉았다. "벌써 열두 시가 다 됐군요." 나는 말했다. "응, 하지만 잊으면 안 돼요, 제인. 당신은 결혼식 전날 밤엔 나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했소." "네, 약속은 지켜요. 적어도 한두 시간은 말예요. 아직 졸립지도 않는 걸요." "내일은 교회에서 돌아와 곧 손필드를 떠나야 합니다." "네, 좋아요." "그 좋아요란 말과 함께 당신은 야릇한 미소를 보이는군. 두 볼은 상기되어 있고 눈의 빛깔도 이상해. 어디 아픈 곳은 없소?"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아요." "아니, 그건 무슨 뜻이오? 어떤 기분인지를 말해 봐요." "말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아요. 어떤 말라도 이 기분은 모르실 거예요. 지금 이 시간이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았으면 해요. 다음엔 어떤 운명이 기다릴지 모르잖아요." "새로운 일들에 대해 불안한 거요?" "아뇨." "당신의 태도는 참으로 애매하군, 제인. 당신의 슬픈 듯한, 그러면서도 배짱스런 표정과 목소리가 말야. 왜 그러는지 설명해 줘요." "그렇다면 들어 주세요." 열두 시를 쳤다. 작은 시계가 여린 멜로디를 마치고, 큰 시계의 목쉰 듯한 떨리는 소리가 끝났을 때 나는 말하기 시작했다. "어제는 몹시 바빴어요. 그 쉴 새 없이 바쁜 중에 저는 매우 행복했구요. 당신의 말씀처럼 새로운 시작에 대한 공포 따위는 하나도 없었어요. 저는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과 함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다는 것이 참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움직이지 마세요, 절 침착하게 얘기하게 해주세요. 만사는 우리를 위해 좋게만 되어 간다고 생각했어요. 바람도 없는 좋은 날씨였고,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 세상을 쓸쓸한 황야라고 말하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었어요. 해질 무렵 전 집으로 들어갔지요. 소피가 2층에 와서 결혼 의상이 도착되었다고 알려 주었어요. 그 옷 밑에, 당신이 보내신 선물 상자가 있었어요. 왕자나 귀족이 쓰는 듯한 런던에서 주문해 온 그 사치스런 베일 말예요. 아마 보석은 싫다니까 보석 대신 값비싼 물건을 슬쩍 바꿔 놓으신 거겠죠. 저는 제가 준비한, 수가 없는 사각 비단 레이스를 선보일 생각이었는데...... 재산도 용모도 집도 없이 시집가는 여자에겐 그걸로 족하다고 여쭐 마음이었어요. 그때의 당신 얼굴까지 저는 그려보았답니다. 성급한 평민적인 대답, 재산이나 신분 같은 것과 결혼하여 재산을 늘린다든가 높은 자리를 구하는 따위의 필요가 내겐 조금도 없다고 거만하게 거절하는 말소리가 꼭 들리는 것만 같았답니다. "잘도 내 마음을 아는군, 이 마녀 같으니!" 로체스타 씨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당신은 그 베일 속에서 뭘 발견하기라도 한 거요? 독약이나 칼이라도 본 것처럼 몹시 슬픈 얼굴이군그래." "아녜요, 그건 너무도 좋은 옷감이었고 전 페어펙스 로체스타 씨의 자부만을 보았어요. 그런데 해가 지자 바람이 부는 거예요. 지금처럼 야단스런 이런 바람이 아니고, 놀라거나 신음하는 듯한 기분 나쁜 느낌의 바람이었어요. 나는 자리에 누웠지만 잘 수가 없었어요. 어쩐지 불안하고 괴로운 느낌이었어요. 잠깐 눈을 붙이면, 꿈속에서조차 어둡고 음울한 바람이 계속되는 거였어요. 당신 곁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나중엔 어딘지 알 수 없는 꼬부랑 길을 가고 있었어요. 아주 깜깜한 데다가 비가 오는데, 제가 웬 갓난아기를 업고 가는 거였어요. 아이는 내 젖은 팔 속에서 울고 있는 거예요. 당신이 그 길 훨씬 앞쪽에서 걷고 있다고 생각해서, 난 기다려 달라고 정신없이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부탁했답니다. 당신은 멀리멀리 자꾸만 가 버렸어요." "그래서 그 꿈 때문에 당신이 언짢은 건가? 내가 이렇게 곁에 있는데도? 이 신경질적인 철부지야! 당신은 나를 사랑한다고 했지? "당신을 사랑하므로 함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 것은 참 멋질 거라고 생각했어요."라고, 자, 날 사랑해? 제인, 다시 말해 봐요." "사랑하고 있어요. 이 가슴 하나 가득히 사랑하고 있어요." 잠시 침묵한 후에 그가 말했다. "왜 그럴까? 이상하게 그 말이 내 가슴을 아프게 찌르니. 제인, 심술스런 얼굴을 해 봐요. 어떻게 되면 되는지 당신이 잘 아는 얼굴로 제인, 내가 싫다고 해 봐요. 날 놀려 주고 화나게 해 봐. 다 좋지만 날 감동시키는 일만은 하지 말아. 난 슬픈 것보다는 오히려 화나게 하는 편이 좋아." "이 이야기만 끝나면 원하는 대로 할께요. 우선은 끝까지 들어 주세요." "뭐야, 난 그게 끝인 줄 알았잖아. 그 꿈 때문에 당신이 우울한 줄 알았지."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 또 뭐요?" "또 다른 꿈을 꾸었어요. 손필드가 형편없는 폐허가 되어 박쥐나 부엉이의 소굴이 된 꿈을요. 저 쓸모 없는 바람벽만 높다랗게 남아 그것도 금방 허물어질 것 같았어요. 달밤에 저는 풀이 무성한 대지를 헤맸어요. 숄을 쓰고 또 작은 아이를 안고 있었어요. 먼 곳으로부터 말발굽 소리가 들려서 분명히 당신일 거라고 생각했지요. 당신은 벌써 수년간 외국에 가 계셨던 거예요. 전 벽을 타고 올라가 당신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발밑에서 돌이 허물어져 붙잡고 있던 담쟁이 덩굴이 느슨해졌어요. 그래도 전 산꼭대기까지 올라갔지요. 하얀 길 위에 하나의 점처럼 당신이 보였고, 그것은 점점 작아졌어요. 당신은 길을 꺾어 들었어요.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보려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는데 그만 벽이 무너져 전 중심을 잃고 떨어졌어요. 그러곤 깨어났지요." "제인, 그것으로 끝이야?" "여태까진 서론에 불과해요. 이야긴 지금부터니까요. 눈을 떴어요. 눈앞이 밝았으므로 난 벌써 날이 밝았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게 아녜요, 그건 촛불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난 '소피가 들어 왔군' 하고 생각했지요. 화장대에 불이 높여 있고, 잠들기 전 웨딩드레스와 베일을 넣어 두었던 반침의 문이 열려 있었어요. 그곳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저는 '소피, 뭘 하지?' 하고 물었습니다. 대답이 없었어요. 대신 사람의 그림자가 반침 속에서 나와서는 촛불을 높이 쳐들고 옷걸이에 걸려 있는 옷을 보고 있는 거예요. '소피!' 하고 또 불렀지만 그림자는 그대로 잠자코 있었어요. 전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아 몸을 앞으로 굽혔어요. 처음엔 놀라고 당황했으나, 곧 그대로 피가 몸 속에서 얼어붙는 듯했어요. 로체스타 씨, 소피가 아니었어요. 리어도 아니고 페어펙스 부인도 아니고, 또 그래요. 확실히 그레이스 풀도 아니었어요." "그 중의 누구일 거야." 주인이 가로막았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고 절대로 전 보장해요. 그 인간은 손필드 저택의 울 안에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어요. 그 키하며 얼굴 윤곽도." "그것을 말해 봐요, 제인." "키가 상당히 컸고 몸집도 그랬어요. 숱 많은 검은 머리가 어깨 위까지 내려왔고 옷차림은 잘 몰라요. 아무튼 흰 옷이었는데 그것이 가운인지 이불 홑청인지 수의인지는 알 수 없는 긴 옷이었어요." "그 여자 얼굴은 보았어요?" "처음엔 못 봤어요. 그녀는 제 베일을 벗겨 들고 그것을 높이 쳐들었어요.한참을 보고 있더니 이번엔 그걸 자기 머리에 뒤집어쓰고는 거울 쪽으로 향했습니다. 그 순간에 어두운 거울 안에 아주 뚜렷하게 여자의 얼굴이 비쳤어요." "어떤 얼굴이었어요?" "무서운, 몸서리쳐지는! 전 아직 그런 얼굴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어요. 야만스러웠어요. 핏발이 선 초점 없는 눈동자, 꺼멓게 부은 듯한 얼굴의 윤곽을 난 잊을 수 없어요!" "귀신은 낯색이 퍼렇지, 제인." "그 귀신은 보라색이었어요. 입술은 부어올라 거무스레했구요. 이마엔 주름이 지고 핏발선 눈 위로 꺼먼 눈썹이 치켜떠져 있었어요. 그것이 제게 무엇을 연상하게 했는지 아세요?" "말해 봐요." "추악한 도이치의 요물 흡혈귀에요!" "오오, 그래 그놈은 뭘 한 거요?" "그는 자기 머리에서 베일을 벗더니 그것을 둘로 찢어 버렸어요. 그리곤 마구 발로 짓밟았어요." "그리고......?" "그러고는 창의 커튼 사이로 밖을 내다보았어요. 아마 날이 새는 것을 안 모양이에요. 그는 촛불을 들고 문 쪽으로 걸어가다 저의 침대 옆에 발을 멈추고는 불 같은 눈으로 저를 노려보았습니다. 촛불을 제 얼굴 가까이 대고서는 제 눈 아래에서 꺼 버렸어요. 그 여자의 무서운 얼굴이 바로 위에서 불탄다고 느꼈을 땐 전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어요. 이 세상에서 꼭 두 번째이지요. 공포로 해서 제가 정신을 잃은 건." "정신을 차렸을 때 누가 곁에 있던가요?" "아무도 없었어요. 날은 완전히 밝았지요. 머리와 얼굴을 씻고 물을 좀 마셨더니 기분이 나아졌지만 기운은 없었어요. 전 당신 외에는 이 얘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로체스타 씨, 그 여자는 누구예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요?" "너무 강한 자극을 받은 당신의 뇌가 만들어 낸 거야. 당신은 각별히 다뤄져야 하겠군. 나는 더욱 당신을 잘 보살피지 않으면 안 되겠어." "아닙니다. 제 신경이 만들어 낸 환상이 아니에요. 그것은 현실이었어요." "그렇다면 그 전에 꾼 꿈도 현실인가요? 손필드 저택이 폐허란 말이오? 봐요, 우리들이 떨어질 수 없도록 벌써 오늘이 시작되고 있어요. 일단 맺어진 후엔 그런 심리적인 괴사는 다시는 없을 거요, 제인." "심리적인 괴사라고요? 그렇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그렇다고 믿고 싶어요, 지금이야말로 - 왜냐하면 당신조차 그 무서운 사건에 대한 설명을 제게 해주실 수 없기 때문이에요." "내가 설명할 수 없는 이상 제인, 그것은 분명 현실이 아닌 거요." "저도 아침에 깨어났을 때, 그런 희망을 갖고 방안을 살펴보았어요. 하지만 제 희망을 배반하고, 양탄자 위엔 아래에서 위까지 찢기운 베일이 떨어져 있었는 걸요." 내가 빠르게 숨을 몰아 쉬자, 그는 숨이 막힐 정도로 나를 꼭 끌어안았다. 잠시 후 그는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럼 제인, 내 속 시원히 설명하리다. 그것은 현실과 꿈이 반반씩 얽힌 거야. 어떤 여자 - 당신 방에 들어 온 그 여자는 분명 그레이스 풀이었어. 그 여자가 내게 한 것, 그리고 메이슨에게 한 걸 생각해 봐요. 비몽사몽간에 당신은 그 여자가 들어온 걸 보았고, 하는 짓을 보았어. 하지만 당신은 꿈에 들떠 정신이 몽롱했기 때문에 그 여자를 전혀 다른 악귀의 모습으로 본 거야. 길게 흐트러진 머리, 부어오른 거무죽죽한 얼굴, 유난히 큰 키 - 그런 것은 몽매간에 상상이 만들어 낸 것이었소. 베일을 찢은 괘씸한 행위는 물론 현실이지. 그것은 그레이스 풀의 짓이야. 왜 내가 그녀를 집에 두는지 당신은 묻고 싶겠지만 결혼 후에 내 꼭 설명해 주리다. 지금은 안 돼요. 자, 이제 납득이 가오? 내 수수께끼에 대한 해석을 믿을 수 있겠소?" 나는 생각했다. 사실, 이것은 유일의 가능한 해석이었다. 만족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그렇게 보이려고 노력했다. 마음이 좀 가라앉자 나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그를 쳐다봤다. 벌써 한 시가 지나 있어서 나는 그 곁을 떠나려 했다. "소피는 어린이 방에서 아델과 함께 자는 거요?" "네." "그럼 당신도 아델의 침대에서 함께 자도록 해요. 당신이 이야기한 사건이 당신을 신경과민으로 만든 것은 이상할 게 없어. 난 당신을 혼자 재우고 싶지 않으니까. 자아, 그애 방으로 간다고 약속을 해요." "네, 약속 하겠어요." "그리고 문을 꼭 잠그도록 해요. 2층에 가거든 내일 아침에 일찍 깨워 달라고 소피에게 말해요. 여덟 시 전에 당신은 옷을 입고 식사를 해야 해요. 이젠 침울한 생각은 버리고 근심도 멀리 쫓아 버려요, 제인. 바람 소리가 이제 자고 있군, 유리창을 두들기던 빗소리도 없지 않나. 와 봐요." 아름다운 밤이었다. 하늘의 밤쯤은 맑게 개어 구름 한 점 없었다. "그런데......" 하고 그는 나의 눈 속을 들여다보았다. "제인, 기분이 어때?" "아름답고 고요한 밤이에요. 제 기분도 퍽 좋아졌어요." "오늘 밤은 이별이나 슬픈 꿈은 꾸지 말아요. 행복한 사랑과 축복된 결혼의 꿈만을 꾸어요." 이 말은 반쯤 들어맞았다. 확실히 난 슬픈 꿈을 꾸지 않았다. 그리고 기쁜 꿈도 꾸지 않았다. 왜냐하면 난 전혀 잘 수 없었기 때문이다. 26 일곱 시에 소피가 옷 입는 것을 거들어 주러 왔다. 그 일은 꽤 시간이 걸렸다. "제인!" 하고 그가 불렀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아래층으로 갔다. 그는 계단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오래 걸려요, 기다리기 답답하니까 열이 오르잖아, 서둘러요." 그는 나를 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발끝서부터 머리끝까지 자세히 살펴보고는, "백합처럼 아름답다. 내 삶의 자랑, 내 눈의 기쁨!" 하고 칭찬하며 식사 시간은 10분이라고 했다. 그가 벨을 누르자 요즘 새로 고용한 하인 한 사람이 들어왔다. "존은 마차 준비를 하고 있나?" "네, 하고 있습니다." "짐은 모두 아래로 내려갔는가?" "지금, 나르는 중입니다." "자네는 교회로 가서 목사님과 서기가 대기하고 있는지 어쩐지를 좀 봐 주고 오게." 교회는 손필드 저택의 바로 대문 앞에 있었으므로 하인은 곧 돌아왔다. "우드 목사님은 제구실에서 하얀 법의로 갈아입고 계셨습니다." "마차는?" "지금 말을 매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돌아오면 곧 떠날 수 있게 준비해 놔야 하네." "네, 잘 알았습니다." "제인, 이젠 떠나도 되지?" 나는 일어섰다. 신랑 신부에게 들러리도, 참가할 친척도 없었다. 오직 우리 둘 뿐이었다. 홀을 지날 때 페어펙스 부인이 거기 서 있었다. 나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나의 손은 그의 억센 손에 잡혀 있었고, 그는 도저히 내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서둘러 걸었다. 함께 걸어가는 동안 나는 그가 무서운 눈길로 쏘아보는 것이 무엇인지 그 정체를 알고 싶었다. 그가 부딪치고 싸우고 있는 무서운 힘을 가진 사상이 과연 무엇인지, 나도 체험해 보고 싶었다. 교회의 쪽문께에서 그는 걸음을 멈췄다. 내가 숨이 차 하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내가 너무 사랑하는 까닭에 심한 짓을 하고 있는 걸까? 잠깐 내게 기대어 쉬어요, 제인." 지금도 나는 그때의 일을 기억한다. 눈앞에 우뚝 서 있는 회색빛 교회의 탑 주위를 날고 있는 한 마리의 땅까마귀를. 그리고 멀리 보이는 하늘이 한 폭의 그림처럼 붉게 타던 일, 그리고 푸른 풀로 뒤덮인 몇 개의 무덤이 있던 것도 기억한다. 그와 함께 걸어갈 때 나지막한 무덤의 이끼 덮인 비석에 새겨진 글자들을 읽고 있던 낯선 두 사나이를 나는 기억한다. 그들은 우리를 보자 황급히 교회 뒤쪽으로 돌아갔다. 나는 이 두사람이, 옆에 있는 복도의 문으로 들어와서 우리의 결혼식에 참례할 모양이라는 것을 알았다. 로체스타 씨는 그들을 보지 못했다. 그들이 내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 그 순간에 내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을 것이다. - 이마에 식은땀이 배고, 또 뺨과 입술이 식어 버린 걸 내 자신이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곧 기운을 되찾았고, 그는 부드럽게 나를 도와서 교회의 현관 앞으로 안내해 갔다. 우리는 조용하고 소박한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하얀 옷을 입은 목사가 낮은 제단에 서 있었으며 옆에는 서기가 있었다. 구석 쪽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만이 움직이고 있을 뿐 실내는 매우 조용했다. 내 추측이 들어맞은 것이다. 낯선 사내들은 우리보다 먼저 몰래 들어와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제단의 난간 옆에 섰다. 조용히 발소리가 울렸으므로 내가 그의 어깨 너머로 돌아보았을 때 낯선 두 사람 중의 하나가 제안 앞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식이 시작되었다. 결혼 의사 표시가 끝나자 목사는 한 걸음 앞에 나서서 로체스타 씨에게로 다소 몸을 기울이고 말을 이었다. "나 그대들 양인에게 요구하고 명하니, 만일 그대들 누구든지 이 결혼이 합법적인 결합이 되지 않는 어떤 장애물이 있음을 알진대 이를 감추지 말고, 만인의 가슴속 비밀이 벗겨지는 무서운 심판날에 대답하듯이 지금 여기서 고백할지어다. 하느님의 말씀에 거역하고 짝을 맺은 인연은 하느님의 섭리로 결합된 것이 아니라, 그 결합은 불법임을 알지어다." 관례대로 여기서 그는 말을 끊었다. 이 선고 이후의 침묵이 대답으로써 깨어지는 일은 아마 백 년에 한 번도 없으리라. 그러므로 기도서에서 눈길을 들지도 않고 다만 잠시 숨을 바꿔 쉬었을 뿐인 목사는 다음 순서인, '그대는 이 여인을 아내로 삼겠는가?'를 묻기 위해 이미 손은 로체스타 씨를 향하고 입술을 벌려졌다. 이때였다. 잠시의 틈을 비집고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 결혼은 중지해야 합니다. 장애가 있음을 제가 단언합니다." 목사는 얼굴을 들어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고 놀라 입을 벌렸다. 서기도, 마찬가지였다. 발 밑에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로체스타 씨가 약간 몸을 기우뚱거렸다. 그러고는 다시 단단히 버티고 서더니 "식을 계속 하십시오." 하고 말했다. 그의 굵고도 낮은 목소리에 장내는 깊이 침묵했다. 이윽고 우드 목사가 입을 열었다. "지금의 발언에 대한 조사가 행해져 진위가 밝혀지기까지는 이 식은 중단돼야 합니다." "결혼식은 전혀 무효입니다." 뒤의 목소리가 덧붙였다. "저는 이 진술을 입증할 용의가 있습니다. 이 결혼은 성립될 수 없는 장애가 있습니다." 우드 목사는 난처한 듯 물었다. "그 장애란 무엇입니까? 아마도 제거할 수 있는 거겠지요?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이오?" "아니오. 성립되지 못한다고 저는 말했습니다. 더구나 깊이 생각한 끝에 한 말입니다." 그는 앞으로 걸어나와 난간에 기대어 섰다. "장애란 이전에 행한 결혼이 지금도 존재하는 까닭입니다. 로체스타 씨에게는 생존한 아내가 있습니다." 나의 신경은 이 낮은 목소리로 하여금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그 어떠한 천둥 소리에도 떨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전율했다. 나의 피는 어떠한 서리나 불에도 당할 수 없을 정도의 곤두서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러나 나의 정신은 말짱했다. 졸도할 염려는 없었다. 나는 로체스타 씨를 보았다. 그리고 그도 내 얼굴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빛을 잃어 마치 바윗돌과도 같았다. 눈은 불꽃이며 부싯돌이었다. 그는 아무 것도 부인하지 않고 무시하려고 하는 듯했다. 말도 않고, 미소도 없이, 나를 사람으로도 여기지 않는 듯이 다만 팔로 내 허리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요?" 그는 물었다. "나의 이름은 브리그스로 런던에 살고 있는 변호사입니다." "그래서 내게 처를 하나 떠맡기러 온 것이오?" "저는 당신의 부인이 생존하고 있다는 걸 확인시키려는 것 뿐입니다. 당신이 인정하지 않으려 해도 법은 그것을 인정합니다." "그럼 내 처에 대한 설명을 해 보시오. 그녀의 이름과 부모와 주소에 대해서!" "좋습니다." 브리그스 씨는 침착하게 주머니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어 읽어 내려갔다. "본인은 아래 사실을 입증합니다. 즉, 지금부터 15년 전 영국 XX주 XX현 손필드 홀 및 휘인디인 마노어의 에드워드 페어펙스 로체스타는 상인 조나스 메이슨과 앙토와네트의 딸인 본인의 누이동생 바사 앙토와네트 메이슨과 자메이카국 스패니쉬 타운 XX교회에서 결혼하였음. 동 교회의 등록원본에 결혼 기록이 있으며, 그 사본을 본인은 소유함. 서명자, 리처드 메이슨." "그것이 만일 거짓이 아니라면 내가 기혼자라는 것을 증명하겠지만, 그러나 여자가 살아 있다는 것을 뭘로 입증하시오?" "그 부인은 석 달 전까지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할 증인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증언은 당신도 항변할 수 없을 겁니다." "그 사람을 불러요. 불러 올 수 없거든, 썩 꺼져 버리란 말이야!" "그렇다면 좋아요. 자, 메이슨 씨, 이쪽으로 나와 주시오." 로체스타 씨는 그 이름을 듣자 이를 악물었다. 뒤쪽으로 피해 있던 제2의 낯선 사나이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렇다, 바로 메이슨이었다. 로체스타 씨는 그를 노려보았다. 이때껏 까만빛이던 그의 눈동자가 황갈색으로 변해 흰자위는 빨갛게 충혈되었고 얼굴도 빨갛게 변했다. 그는 억새 보이는 팔을 쳐들었다. "오오, 살려 줘!" 메이슨이 겁먹은 가냘픈 목소리로 외쳤다. 다시금 경멸이 로체스타 씨를 냉정하게 만들어 격정은 사라졌다. "자넨 뭘 말하려는 건가?" 하고 그는 물었을 뿐이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대답이 메이슨이 창백한 입술에서 신음처럼 새어나왔다. "대답을 분명히 못하는 걸 보니 악마에게 홀리기라도 했나?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거야?" "제발! 제발 로체스타 씨, 신성한 장소라는 것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고는 메이슨을 향해 목사는 물었다. "이분의 부인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입니까?" "자, 용기를 내서 말해요." 하고 변호사가 격려했다. "부인은 지금 손필드 저택에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나의 누이동생으로 지난 3월에 만나 보았어요." 메이슨은 다소 불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필드 저택에!" 목사가 소리쳤다. "그럴 리가 있나! 난 이곳에 오래 살고 있었지만 손필드 저택에 로체스타 부인이 살고 있다는 소린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나는 로체스타 씨의 입술이 괴로움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중얼거렸다. "그렇고말고. 난 아무도 모르게 주의를 해왔다. 적어도 그것이 그런 이름으로 알려지지 않도록......" 그러고는 골몰히 생각에 잠겨서 약 10분 동안을 스스로의 가슴에 묻고 대답한 뒤, 마침내 결정한 것을 입 밖에 내는 듯했다. "좋아, 총알을 내쏘듯 모든 걸 다 얘기하겠소. 우드, 책을 덮고 그 법의도 벗으시오. 그리고 존 그린 (서기), 오늘 이 결혼식은 중지요, 돌아가 줘요." 서기는 그 말을 따랐다. 로체스타 씨는 대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중 결혼이란 확실히 치욕스런 말이야. 그러나 난 중혼자가 되려고 했다. 그런데 운명이 막고 있소. 아니 신의 섭리가 날 방해하여, 여러분은 지금의 나를 마치 악마와도 같으리라고 생각할 것이오. 여기 계신 목사님은 신의 가장 엄숙한 심판, 즉 그 영겁의 불이며 죽지 않는 구더기의 고통을 받아 마땅한 자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지당한 말씀이오. 여러분! 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이 변호사의 의뢰인의 발언은 사실입니다. 나는 기혼자이고 내가 결혼한 여자도 생존합니다. 우드 목사, 당신도 저 집에는 미치광이가 있어, 감시와 보호를 받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을 거요. 지금에야 말하지만, 그것이야말로 15년 전에 결혼한 나의 처라오. 이름은 바사 메이슨, 지금 여기서 몸을 떨며 새파란 얼굴로 씩씩한 남자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여러분에게 극명하게 보여 준 이분의 누이동생이오. 딕! 정신차려. 날 겁낼 건 없어. 자네를 때릴 바엔 차라리 그녀를 때리는 게 낫지. 바사 메이슨은 광인의 집, 3대에 걸쳐서 백치며 미치광이가 난 집에서 태어났소. 서인도 섬 태생인 그녀의 모친이 광인인데다 술주정뱅이였고, 바사는 마치 효도라도 하는 양 이 두 가지 점까지도 어머니를 꼭 닮았지. 나는 실로 매력 있는 신부를 - 순결, 총명, 겸양의 미덕을 지닌 반려를 가졌던 셈이오.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아아, 마치 천국과도 같은, 여러분은 평생 동안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경험을 나는 했소. 이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겠지요. 브리그스, 우드, 메이슨, 자 직접 집으로 초대를 할 테니까 우셔서 풀 부인의 환자, 즉 나의 처를 봐 주십시오. 내가 속아서 결혼을 한 인간이 어떤 종류의 생물인지 보고, 내가 계약을 깨뜨리고 적어도 인간다운 동정을 구할 권리가 있었는지 어떤 한지를 가늠해 보시오. 그리고 이 아가씨는......" 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우드, 당신처럼 이 추악한 비밀은 전혀 몰랐다오. 모든 것이 공정하고 합법적인 것으로만 믿었소. 거짓 결혼인 줄은 꿈에도 몰랐던 거요. 자, 오세요. 내가 안내를 하리다." 그는 날 꼭 끌어당기며 교회를 나섰다. 세 사람의 신사가 뒤를 따랐다. 저택 문 앞에는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를 다시 넣어요, 존." 로체스타 씨는 냉정하게 말했다. "오늘은 필요 없어." 우리가 들어가자 페어펙스 부인, 소피, 아델과 리어 등이 축하를 하려고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는 소리쳤다. "가까이 오지 마. 축하 따윈 필요 없어, 15년쯤 늦어진 거야!" 그는 아직도 나의 손을 붙잡고 신사들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며 거침없이 3층으로 가는 계단을 올랐다. "여기는 자네도 알고 있지? 메이슨." 하고 그는 말했다. "여기서 자네는 그것한테 물어뜯기고 칼을 맞지 않았나!" 문 하나가 나타나고 그는 그것을 열었다. 창이라곤 하나도 없는 방 속에, 높고 튼튼한 철망에 둘러싸여 난로가 불타고 있었고, 천장으로부터는 등잔이 쇠줄에 매어져 있었다. 불 위에 몸을 굽히고 무언가를 냄비에 끓이고 있는 그레이스 풀의 모습이 보였다. 방의 깊숙한 한 구석에는 짐승인지 사람인지 분간할 수 없는 하나의 그림자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것은 네 발 걸음으로 기어다니는 모양으로, 무슨 희귀한 야수처럼 할퀴고 또 킁킁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옷을 입었으며, 꽤 숱이 많은 검고 말총처럼 흐트러진 머리로 얼굴이 가려져 있었다. "안녕하시오? 풀 부인." 로체스타 씨가 말했다. "별일 없지요? 환자는 좀 어떤가요?" "감사합니다. 그저 그런 정도예요." 그녀는 대답을 하며 끓고 있는 음식을 조심스레 난롯가의 선반 위에 놓았다. "다소 덤비긴 했지만 심한 편은 아니었어요." 그의 호의적인 보고를 뒤엎듯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옷을 입은 하이에나는 벌떡 일어섰다. "오오, 주인님, 당신을 알아보았어요, 위험해요!" 그레이스는 소리쳤다. "아주 잠깐 동안이야, 그레이스. 잠깐만 그대로 둬요." "제발 조심해 주세요. 조심을!" 미친 사람은 울부짖었다.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젖히고 그는 방문자를 난폭하게 노려보았다. 풀 부인이 앞을 막았다. "비켜요." 부인을 밀어내며 로체스타 씨는 말했다. "지금 칼을 가지진 않았겠지? 나는 염려 없어요." "무엇을 갖고 있는지 알 수도 없어요. 얼마나 교활한지, 어떤 음흉한 흉계를 가졌는지도 알 재간이 없구요." "나가는 게 낫겠어." 하고 메이슨이 속삭였다. "꺼져 버려?" 하고 로체스타 씨가 대답했다. "위험해요!" 그레이스의 외침에 세 사람의 신사는 약속이나 한 듯 물러섰다. 로체스타 씨가 나를 뒤로 밀쳤다. 광인은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어 그의 목에 달라붙어 물어뜯으려고 했다. 두 사람은 다투었다. 여자는 남편만큼이나 키가 컸고, 살이 쪘다. 건강해 뵈는 로체스타 씨도 몇 번이나 목을 졸리울 뻔했다. 단번의 일격으로써 그는 그녀를 처치할 수도 있었으나 때리려고는 하지 않았다. 다만 운신할 수 없도록 붙들려고 했다. 겨우 그는 여자의 두 팔을 잡아, 그레이스 풀이 내미는 끈으로 여자를 묶어 옆에 있는 의자에 비끄러매었다. 그 사이에도 여자는 처절한 고함 소리를 내지르며 죽을 힘으로 뛰어오르곤 하였다. "저것이 나의 아냅니다." 로체스타 씨는 사람들 쪽으로 돌아오자 처량하고도 쓸쓸한 미소로 그들을 보았다.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우리 부부의 포옹이오. 그리고 이쪽 (내 어깨에 그의 손을 얹고), 이 젊디젊은 아가씨가...... 이토록 냉엄하게 지옥의 입구에 서서, 악마의 광란을 보고 있는 이 아가씨야말로 내가 원했던 사람이오. 저 붉은 곰 같은 눈과 이 맑은 눈동자를 비교해 보시오. 저 가면과 이 얼굴을...... 저 꼬락서니와 이 모습을, 다음에 복음의 설교와 법률가인 두 분이 나를 심판해 주시오." 우리는 모두 그곳에서 나왔다. 로체스타 씨는 그레이스 풀에게 뒷처리를 지시하는 데 시간이 약간 걸렸다. "아가씨." 계단을 내려오며 변호사는 내게 말했다. "모든 비난으로부터 몸을 지키게 되어 참 다행이오. 이 소식을 들으면 당신 아저씨도 퍽 기뻐하실 거요. 만일 마데이라로 메이슨 씨가 돌아가기까지 아저씨가 살아계시면 말이오." "아저씨라니 무슨 말씀예요, 당신은 아저씨를 아세요?" "메이슨 씨가 알지요. 에어 씨는 벌써 몇 년 동안이나 환샬의 메이슨 씨 가게와 거래를 트고 있었지요. 당신이 로체스타 씨와 결혼한다는 편지를 보냈을 때, 휴양차 마데이라에 체류하고 있던 메이슨 씨는 우연히 아저씨와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지요. 에어 씨는 메이슨 씨와 로체스타 씨가 서로 아는 사이라는 것을 아시고는 그 편지에 관한 것을 얘기했습니다. 그러자 메이슨 씨는 놀랍고 걱정스런 마음에 그간의 실정을 아저씨에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좀 안된 말씀입니다만, 아저씨는 지금 병상에 계신데 회복되기는 어려울 거예요. 그래서 에어 씨는 메이슨 씨에게 늦지 않도록 이 결혼을 중지시켜 달라고 부탁한 거지요. 아저씨는 나의 조력을 얻도록 메이슨 씨에게 권했습니다. 나는 신속한 조처를 취하도록 노력했고, 아무튼 때를 놓치지 않게 되어 퍽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아가씨께서도 저와 생각이 같을 줄 압니다만, 만일 마데이라에 가도 아저씨가 살아계시다는 보장만 있으면 지금 메이슨 씨와 함께 그곳으로 가기를 권하겠습니다만, 그러나 하여튼 사정이 이러니 에어 씨에 대한 소식을 듣기까지는 영국에 계시는 것이 좋겠지요. 그런데 아직 여기 더 머물러야 할 용건이 남았나요?" 하고 그는 메이슨 씨에게 물어 보았다. "아니, 없습니다. 이젠 돌아가야죠." 하고 상대방은 대답했다. 그리고 작별 인사를 위해 로체스타 씨를 기다리지도 않고 곧장 문으로 나가 버렸다. 목사는 아직 그의 거만한 교인에게 훈계나 질책의 말을 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으므로 뒤에 남았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반쯤 열린 문에 서서, 목사가 돌아가는 발소리를 들었다. 모두가 돌아가자 나는 방에 틀어박혀 고리를 채우고 나서 우는 일도, 비탄에 잠기는 일도 없이 - 그러기에는 너무 침착한 마음으로 결혼 예복을 벗고, 다시는 입을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아사 가운을 꺼내 입었다. 나는 의자에 앉았다. 지치고 피로했다. 테이블에 두 팔을 얹고, 그 속에 얼굴을 묻고 생각을 더듬어 보았다.나는 언제나처럼, 별로 눈에 뜨이는 변화도 없이 보통때처럼 그대로 내 방에 있었건만 어제의 제인 에어는 어디에 있는가? 그녀의 생활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 앞날은 어떻게 되는가? 제인 에어, 열렬한 기대로 가슴 부풀던 여자 - 막 신부가 되려던 여자 - 이제 그녀는 다시금 차갑고 고독한 여자로 돌아갔다. 생활은 더욱 비참하고 앞날은 황량해졌다. 희망은 모두 사라졌다 - 나는 나의 사랑을 바라보았다. 아아, 사랑은 이미 그로부터 뒤돌아서 있었다. 성실은 시들고 신뢰는 무너진 것이리라! 로체스타 씨는 이미 내게 있어 그 전의 그가 아니었다. 내가 생각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그를 배반자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는 결백한 진실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이제 그의 곁을 떠나야만 한다. 그것은 너무나 명백한 일이었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어디로 가야 하나!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이 일시적인 정열이었을 뿐 진실이 아니었던가. 아아, 눈이 먼, 나약한 행동 뿐인 제인 에어여!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어둠이 소용돌이쳐 갖가지 상념이 검은 탁류처럼 내게 밀려들었다. 스스로 절망하고 긴장이 풀리고 기진한 나머지, 나는 큰 강가의 모래펄에 누워 있는 느낌이었다. 먼 산에서 홍수가 일어나 내게 거센 물결이 닥쳐오는 듯했다. 일어설 의지도, 피할 기운도 없이 나는 오직 죽기를 원하며 넋을 잃고 누워 있었다. 27 오후가 되어서야 나는 머리를 들고 사방을 둘러보며 내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어떡하면 좋을까?' 그런데 그 대답은 곧 '손필드를 떠나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무서워서 귀를 막았다. 그런 말은 지금의 나로선 견뎌 낼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로체스타 씨의 신부가 아닌 것은 내 슬픔 중에선 가장 작은 부분입니다. 그 황홀한 꿈에서 깨어, 그것은 공허하고 무의미하기 그지없는 것이라는 것도 나는 참을 수 있고 이겨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망설임 없이 이 자리에서 그분 곁을 떠나는 것만은 할 수 없어요. 도저히 견딜 수 없어요.' 그러나 내 마음속의 목소리는, 너는 꼭 그렇게 하리라고 예언했다. 나는 이 결의와 싸웠다. 폭군처럼 드세어진 양심은 정열의 목덜미를 쥐고, '나는 무쇠 같은 팔로 널 끝없는 고통의 수렁에 빠뜨릴 테야.' 하고 으르렁대는 것이었다. "그럼 나를 데려가 줘요!" 나는 소리쳤다. "아니, 넌 네 힘으로 가야 해. 누구의 도움도 받지 말고, 스스로의 힘으로 바른쪽 눈을 도려내고 바른팔을 잘라야 한다. 그리고 심장을 제물로 삼고 네 자신이 사제가 되어야 하는 거야." 공포에 휩싸여서 나는 갑자기 일어섰다. 똑바로 서자 머릿속이 아찔했다. 흥분과 공복 탓이었다. 생각해 보니 아무 것도 먹지 않았던 것이다. 마음속으로부터 다시금 이상한 아픔이 전해졌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처박혀 있는데도, 사람을 보내지도 않고 아래로 내려오라는 연락도 없는 건 무슨 심사일까? "행운을 놓쳐 버린 자는 벗에게도 버림받는다." 라고 나는 중얼거리면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데 무엇엔가 걸렸다. 머릿속이 흐리고 손발에 기운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바로 서지도 못하고 넘어졌다. 그러나 마룻바닥이 아니라 내밀어진 팔에 붙들렸다. 내 방의 문 앞에다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 있던 로체스타 씨의 팔이었다. "이제야 나왔군. 난 여기서 오랫동안 당신을 기다리고 귀기울이고 있었어. 어쩌면 그토록 움직이는 기색도, 울음 소리 하나 들리지 않던지. 마치 죽음과 같은 정적이야. 5분만 더 지체했다면 나는 이 문을 뜯어냈을 거요. 흠흠, 당신은 역시 날 피하고 있군. 아니, 조금도 울지 않았어. 얼굴이 창백하고 눈도 빛도 없지만 눈물 자국은 없어. 그러는 당신의 가슴엔 피눈물이 흐르고 있겠지, 제인! 어째 한마디의 나무람도 없소? 뭐라도 좋으니, 내게 한바탕 퍼부어 봐요. 당신은 그저 내가 앉힌 장소에서 그대로 내 얼굴만 지친 시선으로 바라보는 거요? 제인, 난 당신을 괴롭힐 생각이 아니었어. 어느 사람에게 자기 딸처럼 사랑했던 한 마리 암양이 있었다고 합시다. 자기 빵을 먹이고, 자기 컵으로 물을 먹이고, 자기 품속에 껴안고 자던 양을, 만일에 그가 실수로 도살장에서 죽이게 되었다 하더라도 지금 내가 한탄하는 만큼의 슬픔은 느끼지 않았을 것이오. 날 용서해 주오." 기꺼이 나는 그때, 그 자리에서 그를 용서했다. 그의 동공에 서린 회한을 보았고, 어조에도 절실한 동정이 담겼으며 사나이다운 기백이 넘쳐흐르는 그의 표정이며 태도에는 나에 대한 변함 없는 애정으로 가득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모든 것을 용서했다. "나를 악당이라고 생각하겠지, 제인?" "네, 그래요." "그렇다면 용서 없이, 사정 볼 것 없이 매섭게 말을 해요." "말할 수 없어요. 피곤하고 기분이 나빠요. 물을 좀 주세요." 그는 몸이 떨릴 것 같은 한숨을 쉬고 나를 안고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는 내 입술에 포도주를 갖다 대었다. 나는 그것을 마시고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가 권하는 음식을 먹고 곧 기운이 났다. 그는 서재에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만일 지금 그다지 큰 고통을 느끼지 않고 죽을 수 있다면 행복한 일이다.' 라고. "기분이 어때요, 제인?" "좋아졌어요. 곧 기운이 날 거예요." "포도주를 한 잔 더 마시도록 해요." 나는 시키는 대로 따랐다. 그런 후에 그는 컵을 테이블 위에 놓고, 내 앞에 서서 나를 보았다. 갑자기 어떤 격한 감정이 치솟았는지 그는 뜻도 모를 고함을 치며 외면해 버렸다. 그러고는 빠른 걸음으로 방구석까지 갔다 되돌아와서는 키스라도 할 듯이 얼굴을 잡아 끌어당겼다. 그러나 애무는 이제 우리에겐 금지된 것, 나는 얼굴을 돌리고 그를 밀어냈다. "아니, 왠일이오? 오, 바사 메이슨의 남편에게 키스할 수 없다는 건가?" "뭐라 하셔도 제가 들어설 여지나 권리가 이젠 없어요." "어째서야, 제인? 당신에게 말을 시키지 말고 내가 해볼까? 내겐 이미 아내가 있으니까,라고 말하고 싶은 거지, 그렇지?" "네."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나라는 인간에 대해 묘한 생각을 가지고 있군그래. 속이 검은 바람둥이, 비열한 탕아라고 말이야. 그래서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고 있는 거지? 말해 봐야 모든 게 쓸데 없다고 말이야." "저는 당신을 거역하는 행동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하고 나는 말했다. 내 말소리가 퍽 가냘프게 들렸기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말수를 줄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말하는 뜻에서가 아니라, 내 생각으로는 당신은 나를 파멸로 이끌 계획을 꾸미고 있어요. 당신은 나를 선의로 기혼자라고 했소. 아내가 있다고 해서 나를 피하고, 또 멀어지려고 하오. 당신은 내 키스를 거절했소. 당신은 나를 완전히 타인으로 만들려 하고 있소. 오직 아델의 가정 교사로서 이 지분 밑에 머물려는 거지요, 그렇지?" 나는 목소리를 가라앉혀 분명하게 말했다. "내 주위는 달라졌어요. 나도 달라져야만 해요. 의심해 볼 여지도 없이 아델에게는 이제 새 가정 교사를 구해 주어야만 해요." "아니, 아델은 이제 학교로 가요, 그것은 이미 정해진 일이야. 그리고 제인, 난 당신을 이곳에 두고 싶지 않으며, 또한 나도 여기 있고 싶지 않아요. 당신을 손필드 저택에 데려온 것부터가 잘못이었소. 나는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우리 집 괴물에 대해선 일체 비밀로 붙여 둘 것을 당부해 두었었소. 이유는 단지 그런 일이 주위에 알려지면 아델을 위해 가정 교사들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염려했기 때문이오. 그러나 이젠 손필드 저택을 아주 닫아 버리겠어요. 현관에 못을 치고, 아래층의 문들엔 판대기를 쳐 버리겠소. 풀 부인에겐 연봉 2백 파운드를 주어 당신이 말하는 소위 내 아내, 그 악귀와 함께 여기서 살도록 하겠소. 그녀는 돈 때문이라도 잘 돌봐 줄 것이고, 또한 그린스비 수용소에서 간호사로 있는 그레이스의 아들도 부르겠소." "당신은....." 하고 나는 말을 막았다. "불행한 그 사람에게 너무 심하시군요. 그 사람이 미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요!" "제인,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당신은 나를 오해하고 있군. 내가 그녀가 미쳤기 때문에 미워한다고 생각하는 거요? 그럼 마찬가지로 당신이 미쳤다면 내가 미워할 줄로." "그렇게 생각해요." "그건 잘못이야, 제인. 당신은 나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고, 내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모르고 있소. 당신의 살 속에 있는 세포 하나일지라도 그것은 나의 그것과 똑같을 정도로 내겐 귀중하고, 또 사랑하오. 어떤 괴로움이나 아픔을 받더라도 당신의 마음은 내 보배요. 그것이 설혹 잘못되었을 때라도 마찬가지요. 아니, 난 손필드로부터 떠나는 얘기를 하고 있었지. 모든 준비는 다 갖춰져 있소, 제인. 내일 출발합시다. 이 지붕 아래서 하룻밤만 더 참으면 돼요. 날이 새면 이 비참과 공포를 우리는 영구히 벗어나는 것이오. 갈 곳은 이미 정해져 있소." "아델도 함께 데려가 주세요." 하고 나는 말을 가로막았다. "당신의 좋은 말동무가 될 거예요." "그건 무슨 뜻이오? 아델은 학교에 보낸다고 했는데, 왜 내 말벗으로 아델을 말하는 거지?" "당신은 숨어 살겠다고 했어요. 숨어 사는 것은 고독한 일이에요. 당신에겐 갑갑한 일이에요." "고독이라니?" 하고 그는 답답한 듯이 소리쳤다. "나는 설명을 들어야겠어. 왜 이상한 표정을 짓지? 당신이야말로 나와 함께 고독해지는 거요, 내 말뜻을 알았소?"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가 흥분한 탓에, 무언의 반대를 나타내는 것만으로도 적지않은 용기가 필요했다. 그때까지 그는 빠른 걸음으로 방안을 서성댔는데 갑자기 날개라도 돋힌 것처럼 서 버리더니 오랫동안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서 얼굴을 돌리고 되도록 침착하고 흩어지지 않은 태도를 취하려고 노력했다. "자, 제인의 버릇인 비꼬기의 시작인가?" 그는 내가 짐작한 것보다는 좀 누그러진 어조로,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마침내 애를 태우고 화나게 하여 끝도 없는 고생을 시킬 생각이구려? 자, 내 말을 이해해 주겠소?" 그는 몸을 굽혀 내 귀에 입술을 대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난 어떤 난폭한 짓이라도 할 것 같소." 그의 목소리는 쉰 듯했다. 그의 표정은 이제는 더는 억제할 길 없는 광기어린 방종에 막 뛰어들려는 사나이의 바로 그것이었다. "앉으세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언제까지라도 얘기해 드릴 테니까요. 이치에 닿건 닿지 않건 당신이 말씀하고 싶은 것은 모두 들을 께요." 그는 앉았으나 이야기할 기회는 잡을 수 없었다. 나는 그때까지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차라리 눈물을 흘리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만일 눈물이 그를 당황하게 한다면 그것도 괜찮다. 나는 그제서야 마음껏 울었다. 이윽고 그는 이제 그만 울라고 부탁해 왔다. 나는 당신이 앞뒤를 분별할 수 없는 동안에는 절대 그칠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내가 화를 낸 게 아냐, 제인. 이 모든 게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오. 자아, 이제 그만 눈물을 거둬요." 그의 기분이 가라앉자 내 마음도 약간 누그러졌다. 그러자 그는 자꾸 그의 얼굴을 내 어깨에 묻으려고 했다. 내가 피하자 이번엔 나를 자기 쪽으로 잡아 끌었다. 안 된다. "제인! 제인!" 하고 그는 절절이 슬픔에 젖은 소리로 말했다. "그럼 당신은 날 사랑하고 있지 않소?" "전 어느 때보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 마음을 나타내서도, 그 마음에 빠져서도 안 되겠지요. 또한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도 이제 마지막이에요." "마지막이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제인! 함께 살며 매일 얼굴을 대하고, 더군다나 지금도 날 사랑하면서, 어떻게 내게 쌀쌀하게 굴 수 있다는 거요?" "네, 그렇게 저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길을 하나예요. 하지만 그걸 말하면 당신은 틀림없이 화를 내겠지요?" "오오, 말을 해요. 만일 내가 화를 내면 당신은 또 울잖아." "로체스타 씨, 전 당신 곁을 떠나야만 해요." "얼마나, 제인! 5분이나 10분간? 머리를 빗을 정도야?" "전 아델과 손필드와도 이별해야 합니다. 평생 당신과도 헤어져야 해요. 전 낯선 고장의 낯선 사람들 틈에서 새 출발을 해야만 해요." "물론 그렇게 해야 한다고 나는 말했소. 나와 헤어진다는 그따위 헛소리는 듣지 않은 걸로 하지. 말하자면 별개의 내가 된다는 의미지? 새 출발은 당연한 소리야. 당신은 나의 아내가 되는 거요. 난 결혼한 사람이 아니니까. 당신은 로체스타 부인이고, 실질적으로나 명목상으로 난 내가 살아 있는 한 당신만을 지키겠소. 우리는 남프랑스 지중해 연안에 있는 흰 색의 별장으로 가서 더할 나위 없이 안전하고 깨끗한 생활을 합시다. 당신을 내가 그릇된 길로 이끈다거나, 당신을 첩으로 만든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마오. 아니, 왜 고개를 흔드는 거요? 잘 분별해 주구려, 제인. 그렇지 않으면 난 다시금 앞뒤를 가리지 못하게 되니까." 그의 목소리와 손이 떨렸고, 커다랗게 콧구멍도 벌름거려졌으며 눈도 불타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로체스타 씨, 당신의 부인은 살아 있어요. 스스로 인정했잖아요. 당신의 원대로 내가 함께 살면 그것은 첩이 아니고 무엇인가요? 부인하셔도 그것은 궤변에 불과해요." "제인, 나는 성질이 온순하지 못해, 그걸 잊었나? 조심해요!" 그의 뺨이며 입술에는 핏기가 가시고 점차 흑빛으로 변했다. 나는 어쩌면 좋을지 몰랐다. 그에게 반항을 해서 이렇게 화나게 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그렇다고 내가 양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인간이 궁지에 몰렸을 때, 본능적으로 하는 일을 했다. 인간보다 높은 것에 도움을 청했다. "하느님, 도와 주세요!" 하는 말이 내게서 튀어나왔다. "어리석게도!" 느닷없이 그가 소리쳤다. "난 기혼자가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왜 그 이유를 말하지 않았던 걸까? 내가 모든 사실을 설명하면 제인은 이해해 줄 것이다. 자아, 그 손을 잡게 해줘요. 그러면 난 단 몇 마디 말로써 진상을 얘기하겠소. 들어 주겠소?" "네, 저는 몇 시간이라도 듣겠어요." "아니, 몇 분으로 충분해. 제인, 당신은 내게 형이 하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페어펙스 부인한테서 들은 기억이 있어요." "우리 아버지가 치사스럽게 욕심 많은, 돈에 집착하는 인간이라는 말도 들었나요?" "그런 말도 들은 것 같아요." "제인, 아버지는 그런 인간으로 재산 전부를 형인 로울란드에게 남겨 주려고 결심했었소. 그러면서 그는 또 하나의 핏줄이 가난뱅이가 되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었소. 결국 부자와 결혼시킴으로써 재산을 만들어 주기로 결심했지. 이윽고 마땅한 상대를 아버지는 찾아냈소. 그것이 바로 서인도의 농장 주인이자 상인으로서 아버지의 오랜 친구인 메이슨이지. 그의 재산이 막대하다는 것과 그에게 아들과 딸이 각각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메이슨 씨로부터 그 딸에게는 3만 파운드의 지참금을 줄 거라는 소리를 듣고 그는 흡족했던 거요. 대학을 나오자마자 나는 미리부터 구혼해 두었던 그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자메이카로 떠나게 되었소. 지참금 얘기는 없이 아버지는 다만 그녀의 미모는 스패니쉬 타운의 자랑거리라고만 내게 말했던 거요. 과연 그랬소. 그녀는 브란쉬 잉그람과 같은 타입의 키도 크고 살갗이 거무스레한 미인이었소. 그녀의 양친도 명문의 자제라는 나를 놓치고 싶지 않아, 화려하게 단장한 그녀를 각처의 야회 때마다 내 눈에 띄게 했소. 난 그녀와 둘이서 만난 일이나 얘기해 본 일이 거의 없소. 그녀는 내게 애교를 부리고 내게 환심을 사기 위해 갖은 교태와 재능을 보여 주었소. 사내들은 전부가 그녀를 숭배하는 것 같았고 날 부러워하는 것 같았소. 나는 관능을 자극받고 눈이 어두워졌소. 무지하고 세상을 모르는 철부지였기 때문에 나는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소. 그래서 앞뒤 분별없이 결혼이 성립되고 만 거요. 아아, 그 행동을 생각하면, 나는 자신에 대한 아무런 존경도 갖지 못하오. 자신을 경멸하는 괴로움으로 여지없이 짓밟히오. 나는 그녀를 조금도 사랑하고 있지 않았소. 존중도 하지 않았소. 이건 진심이오. 아니, 그녀의 인간됨도 모르고 나는 결혼하고 만 거요. 그녀의 어머니를 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소. 다만 죽은 거라고 생각했었지. 신혼 여행이 끝나자 모든 게 밝혀졌소. 모친은 정신 병자로 병원에 있었던 거요. 사내 동생도 있는데, 그것은 완전 백치에다 벙어리였소. 당신이 만나 본 오빠라는 자도 - 그들 가족은 모두 싫지만 난 그자는 미워할 수 없소. 왜냐하면 그자의 약한 마음 속엔 얼마간의 애정이 있어서 비참한 누이동생을 염려했고, 또 전에는 내게도 개처럼 충실한 애착을 지녔다오 - 모르긴 해도 그 역시 언젠가는 같은 상태가 되겠지요. 나의 아버지나 형은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다만 3만 파운드의 돈 때문에 나를 괴롭혔던 것이오. 참 대단한 착상이었소. 그러나 숨겼다는 배신 행위가 아니라면, 나는 그런 사정으로 해서 아내를 책망할 자료는 아니라고 생각했소. 성격의 차이, 취미가 불쾌한 것, 사고 방식이 속되고 좁아서 단 하룻밤도, 하루 중의 한 시간도 그녀와는 유쾌한 대화를 나눌 수 없었소. 하인들은 그녀가 난폭하고 잔소리가 심하기 때문에 배알이 꼬여서 한 사람도 붙어 있질 않았소. 나는 평온하고 가정다운 가정은 가질 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소. 그래도 나는 자신을 억제하고 있었소. 제인, 나는 사소하고 비열한 얘기로 당신을 괴롭히고 싶진 않소. 말하고 싶은 것은 단 몇 마디예요. 나는 그 여자와 4년 동안을 같이 살았지만, 그 4년 동안 그녀가 얼마나 나를 괴롭혔는지 - 그녀의 성격은 무서울 정도로 급성장했소. 바사 메이슨 - 수치를 모르는 모친의 피를 이어받은 그녀는 술고래에다 부정한 아내를 가진 사람이 겪어야 할 갖은 더럽고 굴욕적인 고뇌 속으로 나를 처박았소. 그러는 동안 나의 형이 죽었소. 4년째의 마지막에는 아버지도 죽었소. 그래서 나는 충분한 부자가 되었지만 한편으론 더욱 참담한 가난뱅이였소. 가장 추악하고 불순하고, 저열한 인간이 나와 묶여져, 법률에서건 사회에서건 나의 반신으로 불리워지는 거요. 더욱 어떤 법적 수속으로도 끓어 버릴 수 없는 관계요. 왜냐하면 의사들이 그녀의 정신 이상을 알고 있으니 말이오. 그녀의 난행은 정신 이상의 씨를 더 빨리 키우고 있었소. 제인, 이 이야기가 언짢소? 기분이 나쁜 것 같군. 나머지는 다음날에 할까?" "아녜요, 지금 하세요. 참 안된 일이군요. 당신은 불행하신 분이군요." "제인, 연민이라는 것은 받는 사람에 따라선 그것을 그자의 면상에 도로 던져 주고 싶은 것이라오. 하지만 당신의 연민은 그와는 달라. 제인, 당신의 연민은 사랑을 잉태한 모성이오. 그 고민은 심적인 정열을 낳기 위한 진통이오. 나는 기꺼이 그것을 받겠소, 제인." "이야기를 계속하세요. 그분이 미친 것을 알았을 때의 당신 심정을요." "제인, 나는 절망의 극한까지 도달했소. 나와 그 심연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오직 조금 남아 있는 한 가닥 자존심 뿐이었소. 세상 사람들은 나를 음산하고 불명예스러운 눈으로 보았소. 그러나 나는 내 자신의 눈으로부터 더러움 없는 자가 되려고 결심하였소. 그녀가 살아 있는 한에는 나는 다른 아내를 구할 수도 없다는 것을 잘 알았소. 나보다 다섯 살이 위인 그녀는 정신이 허약한 반면에 육체는 몹시 건강해서 내가 죽기 전까지는 살아 있으리라는 것도 알았소. 그래서 내 나이 스물여섯에 나는 이미 모든 희망을 잃었소. 어느 날 밤 나는 그녀의 고함 소리에 눈을 떴소. 그녀는 정신 이상 선고를 받은 후엔 쭉 감금되어 있었소. 불처럼 무더운 밤, 흔히 서인도에는 태풍이 오기 전의 날씨가 바로 그렇지요. 나는 다시 잠들 수 없어서 창문을 열었소. 지진처럼 우람한 파도 소리가 침실에까지 들려서, 검은 구름이 그 위를 뒤덮고 있었소. 달을 뜨거운 포탄처럼 커다랗고 빨갛게 파도 속으로 잠기려 하고 있었소. 이런 광경에 가뜩이나 감격해 있는데 저 광인이 계속 내지르는 저주의 말이 귓속 깊이까지 울려 오고, 그녀는 악마처럼 증오를 담은 목소리를 내질러 그 속에는 두고도 분명하게 들리고 있었소. '이런 생활은 지옥이다.' 하고 마침내 나는 말했소. '이것은 지옥의 공기야, 지옥에서의 고함 소리이다! 할 수만 있다면, 내게는 이런 생활로부터 탈출할 권리도 있다!' 나는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탄환을 장진한 피스톨이 들어 있는 트렁크를 열었소. 자살하려 했던 것이오. 그러나 그 생각은 일순간에 사라졌소. 나는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자살의 의사와 계획을 품게 한 극단의 절망의 위기는 곧 사라졌소.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부터 불어온 상쾌한 바람이 열린 창으로 쏟아져 들어왔소. 드디어 태풍이 시작돼 억수 같은 비와 천둥, 번갯불로 대기는 깨끗해졌소. 그때 나는 한 가지 결심을 굳게 하고 마음속으로 맹세했소. 나는 이렇게 생각했소. 제인, 들어 봐요. 왜냐하면 이것은 그때 내 마음을 위로해 주고 가야 할 올바른 길을 가르쳐 준 참된 '지혜'니까 말이오. 유럽으로부터의 상쾌한 바람은 다시 생기를 되찾은 나무의 잎사귀에서 속삭이고 있었고, 대서양은 그 찬란한 해방의 파도 소리를 들려 주었소. '희망'이 되살아났소. '재생'의 기능도 느꼈소. 나는 정원 끝의 꽃으로 덮인 아치를 통해 바다를 보았소. 하늘보다도 푸른 바다, 그 저쪽에는 밝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앞날이 내 앞에 환히 내다보였소. 희망이 '가라!' 하고 소리쳤소. '유럽에서 살도록 해라. 어떤 오욕적인 이름이 네게 붙여졌어도, 어떤 추악함이 네게 있어도 그곳에선 너를 알지 못한다. 너는 그 미친 여자를 영국으로 데려가, 그에 알맞는 간호와 경계 밑에 손필드 저택에 감금해 둔다. 그리고 네 마음에 맞는 여행을 즐기며 새로운 인연의 여자를 만나는 것이다. 그토록 오랜 고통과 불명예를 준, 너의 청춘을 무참히 짓밟은 여자는 너의 아내가 아니다. 너 또한 그 여자의 남편이 아니다. 그 여자에게 적절한 보호책을 세워 준다면 너는 하늘과 인간의 도리, 그 어느 쪽에도 부끄럽지 않은 처사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여자의 신분, 여자와 너와의 관계를 세상으로부터 매장해 버리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고백할 필요는 없다. 여자는 안전한 생활을 하게 꾸며 주고 그리고 그 곁을 떠나는 것이다.' 나는 여자를 영국으로, 이곳 손필드로 데려왔소. 그리고 사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그린스비 수용소에서 그레이스 풀을 간호인으로 고용하게 된 거요. 나는 그레이스와 커터 (메이슨이 칼에 찔린 날 상처를 치료하던 그 남자인데) 에게만 사실을 얘기했소. 그레이스는 훌륭한 간호사였소. 때로는 감시가 소홀하고 또 속임수에 넘어가기도 했었소. 어쩌다가 졸기라도 할 때면 영락없이 그녀는 그 기회를 타곤 하는 거요. 언젠가 그녀가 당신의 결혼 의상에만 화풀이한 것을 나는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오. 내 목덜미에 억세게 달라붙은 그녀의 검붉은 얼굴이 내 귀여운 비둘기장 같은 보금자리에 나타나다니 생각만 해도......" "그래서요?" 하고 나는 이야기를 제자리로 상기시켰다. "그녀를 여기 두고 당신은 무얼 했나요? 어디에 있었어요?" "나는 도깨비불이 되었다오, 제인. 그래서 3월달의 메마른 바람처럼 닥치는 대로 방황했다오. 대륙으로 가서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전전하였소. 단지 선량하고 총명한 여자를 발견해 낼 그 한 가지 소망을 품고 말이오. 손필드의 그 여자와는 정반대 되는 여성을 찾아서 말이오." "그래도 결혼할 수는 없었지요?" "결혼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소. 나는 당신을 속였지만 그게 본의는 아니었소. 사실을 솔직히 얘기하고 구혼할 마음이었소. 나의 사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여성이 없으리라고는 난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소." "네, 그래서요?" "당신의 '네, 그래서요?' 란 무슨 뜻이오? 당신과 얘기를 하면 나는 말을 잘 듣게 되어 한없이 얘기하게 되니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일인데 말이오." "무슨 뜻이라뇨? 그저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는지 어쩐지, 구혼을 했는지 어쩐지, 그녀가 뭐라고 대답을 했는지, 다만 그것을 물었을 뿐인데요?"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는지 어쩐지, 구혼을 했는지 어쩐지에 대해선 말할 수 있지만 그녀가 뭐라고 대답을 했는지는 이제부터 운명의 책 속에 기록되어질 일이라오. 10년이란 세월 동안을 나는 이 나라의 서울에서 저 나라의 서울로 부평초처럼 떠다녔소. 어느 때는 성 페테부르크에서, 대개는 파리에서 보냈소. 또 때로는 로마, 나폴리, 플로렌스에서, 많은 재산과 전통 있는 가문 덕분에 나는 폭넓은 교제를 가졌소. 어떠한 사교계도 나를 거부하지는 않았소.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도이치의 귀족의 영양, 양가의 숙녀 중에서 나는 이상의 연인을 찾았소. 그러나 이상의 연인은 없었소. 다만 내게 맞는 여성, 그 서인도 태생의 여인과는 정반대 되는 여자를 찾는 것임에도 찾을 수 없었소. 실망이 겹쳐서 마침내 나는 유흥에 빠졌소. 그러나 음탕은 아니야, 나는 그런 것은 싫어했고 지금도 싫어 하오. 그래도 혼자 살 수는 없어서 나는 정부를 구했지. 세린느 바렌 - 그러나 이것이 나를 없애 버리고 싶은 소행 중의 하나가 되었소. 그 여자의 일은 당신도 잘 알고 있으니 그만두리다. 그 여자 다음에 사귄 여자가 둘이 있소. 이탈리아인 쟈친타와 도이치의 클라라요. 둘다 이름난 미인이었지만 난 곧 싫증이 났소. 한 여자는 게으르고 난폭했으며, 클라라는 아둔하여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소. 나는 적당히 장사 밑천을 대주고 그녀로부터 풀려 나왔소. 아니, 당신 얼굴이 왜 그렇지? 나를 별로 탐탁히 여기지 않는 눈치군. 당신은 날 박정한 바람둥이로 생각하고 있구려, 그렇지?" "네, 당신이 다른 때처럼 좋게 생각되진 않아요. 그런 생활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으셨어요? 이 여자에서 저 여자로 전전하는 생활을 당연지사처럼 말씀하시네요." "물론 잘못된 생활이었소. 좋아하지도 않았소. 나는 그때 그녀들과 어울리던 기억들이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소." 나는 그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의 결론을 얻었다. 즉, 내가 만일 자제력을 잃고, 이제껏 갖가지 가르침을 잊고 유혹에 끌려 이들 가엾은 여자들의 뒤를 잇는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지금 그가 하고 있는 것처럼 추억도 모독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제인, 왜 그 다음을 묻지 않소? 얘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꽤 심각한 얼굴이구려. 또 날 비난하고 있어. 그걸 알겠어. 아무튼 나는 정월에 여자들과의 인연을 깨끗이 끊고, 모든 여성들에 대한 혐오감을 느끼며 가사 일로 영국으로 돌아왔소. 그 얼어붙듯이 추운 겨울 오후, 나는 말을 달려 손필드 저택이 보이는 곳까지 왔어요. 혐오스러웠오. 평화, 안식, 기쁨, 난 이미 이 고장에서 그러한 것들을 기대하지 않았소. 그런데 헤이 렌의 계단 위에 앉아 있는 어떤 조그만 그림자가 에스루아가 사고를 일으켰을 때 조용히 내게로 다가와 도와 주겠다고 자청을 한 거요. 마치 어린애처럼 가냘픈 아가씨. 마친 홍방울 새가 그 여린 날개로 나를 싣고 가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소. 나는 무뚝뚝했지만 그래도 도움이 필요했고, 결국은 그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지. 그런데 내가 그 가냘픈 어깨에 손을 댄 순간 무언가 신선하고 새롭고 충일된 느낌이 내게로 스며들었소. 그 조그만 요정이 언덕 밑의 내 저택을 빌려 살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은 참 다행이었소. 몰랐더라면 그녀가, 어두운 생나무 저 너머로 사라지는 것에 참 이상스런 미련을 남겼을 거요. 그 후에도 나는 오랫동안 당신에게 쌀쌀했소. 처음의 얼마간, 나는 이 아름다운 꽃을 꺾으면 곧 색과 향이 바래어 청초한 매력도 사라지리라는 불안에 싸여 있었소. 그것이 한순간 피고 마는 꽃이 아니라, 견고한 보석에 새겨진 변치 않는 꽃이라는 것을 나는 몰랐소. 또한 나는 내가 당신을 멀리하면 당신이 내 쪽으로 쫓아오지 않을까 알고 싶었소. 그러나 당신은 쫓아오지는 않았어.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하고 또 내 일을 생각하고 있는지 어쩐지도 좀체로 알 수가 없었소. 난 당신을 주의해 보았소. 말을 시켜 보니, 당신의 눈에는 기쁨이 스쳤고 당신의 태도에도 친밀감이 깃들어 있었어요. 그리하여 내가 마음으로부터 호의를 당신에게 내보였을 때 당신의 얼굴에 나타난 아름답고 명랑하고 행복한 듯한 표정은 당신을 껴안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은 충동을 불러일으켰소." "그만, 이제 그때의 얘기는 그만하세요." 나는 흐르는 눈물을 필사적으로 닦아냈다. "그래, 그만둡시다." 그는 대답했다. "과거의 추억을 뒤집을 것은 없지, 현재가 보다 분명하고 밝은 이상은 말야." 나는 이 열띤 말에 몸을 떨었다. "이제 당신도 사태를 분명히 알았겠지? 말할 수 없이 참담함 속에서 청춘을 보내고, 암담한 고독 속에서 장년을 맞고,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난 진실되게 사랑할 수 있는 것을 찾았다오. 바로 당신을. 내겐 이미 아내가 있다고 말해야 그건 조롱에 불과하오. 내가 가진 건 저주받은 악귀 뿐이라는 것을 당신도 알지 않소? 당신을 속인 결과가 된 것을 난 부끄럽게 생각하지만, 그 비밀을 고백하기 전 난 당신의 고귀하고도 관대한 마음에 호소했어야 할 일인데 말이야. 사실 그대로 나의 고뇌에 찬 생활을 고백하고, 보다 높고 의의 있는 생활에 대한 목마른 염원을 당신에게 호소하여 거부할 수 없는 열의를 당신에게 보내 줬어야 옳았소. 그리하여 비로소 진실된 사랑의 맹세를 하는 동시에 당신의 진실을 원하는 것이 순서였소. 제인, 지금 그것을 나에게 주시오." 한순간 침묵이 흘렀다. "왜 말이 없소, 제인?" 나는 무서운 시련을 맛보고 있었다. 불붙는 무쇠처럼 억센 손이 나의 내장을 움켜잡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불타는 지옥. 나는 몸을 뒤틀며 괴로워했다. 그 공포의 한순간, 나의 괴로운 대답의 의무는 단 한 마디의 말로 압축되어 있었다. '헤어져라!'라고. "제인, 내가 뭘 바라는지 잘 알고 있지 않나. '전 당신 거예요, 에드워드' 라고 한마디만 말해요." "로체스타 씨, 전 당신 것이 아니에요." 오랜 침묵 후에, "제인!" 하고 너무나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가 입을 열었다. 까닭 모를 불길한 공포가 슬픔에 찬 나를 돌덩어리처럼 싸늘해지게 만들었다 - 왜냐하면 그 조용한 말소리는 바야흐로 뛰어들려는 사자의 허덕임이었으니. "제인, 그렇다면 당신과 나는 이 세상에서 서로 각각 다른 길로 가야 한다는 건가?" "네." "아아, 제인, 그건 너무해! 날 사랑해서 안 될 일이라도 있나?" "당신의 말을 따르는 것은 잘못이에요." 그의 얼굴에 눈썹이 치떠지고 난폭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각오하고 있었다. "잠깐만 제인, 잠시라도 좋으니 당신이 떠난 후의 내 생활을 한 번 상상해 봐요, 무엇이 남겠소? 당신과 함께 내 모든 행복이 박탈당하고, 아내라는 그 미치광이가 3층에 있을 뿐이야. 그곳에 묻혀 있는 시체와 나와는 뭐 별다를 게 있소? 그렇게 되면 나는 어쩌라는 거요, 제인? 한 사람의 길동무 - 그 작은 희망을 이제 어디서 구한단 말이오?" "제가 하는 것처럼 하세요. 하느님과 자신을 믿으세요. 천국을 믿는 거예요.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날 것을 믿는 거예요." "그럼 아무래도 승낙할 수 없다는 말이오?" "네." "그렇다면 사랑과 더러움이 없는 생활을 나로부터 빼앗으려는 건가? 또 다시 흙탕물 같은 정욕, 더러운 악행을 팔러 다니라고 나를 내던지는 거군요?" "제가 좋아라고 이 운명을 택하는 줄 아세요, 로체스타 씨, 당신에게 그걸 강요하는 건 아녜요. 우리들은 누구나가 시련과 싸우고 극복해 나가도록 생을 타고난 거예요. 그러니 저도 당신도 그걸 따라야지요. 제가 당신을 잊기도 전에 당신은 저를 잊으실 거예요." 나는 싸웠다. 나의 표정을 살피고 있던 로체스타 씨는 나의 뚜렷한 생각을 확립시키고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노여움은 절정에 닿았다. 뒷일은 어쨌건 그것에 몸을 내맡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주저없이 내게로 다가와 팔을 붙든 후, 사정없이 나의 허리를 낚아챘다. "아아, 이처럼 연약하면서도 이처럼 굳센 것이 또 있을까. 나의 손아귀 속에서는 여린 갈대처럼 약하기만 한 게!" 이를 악물고 그는 나를 힘껏 껴안고 마구 흔들어 대었다. "나의 두 손가락으로 꺾여질 이 몸뚱아리, 하지만 굽히고 부수고 꺾어 봐서 그게 무슨 소용이람? 이 눈을 봐라, 필사적인 각오로써 대담하고 겁이 없이 용기 이상의 것으로 나를 보면서 엄연한 승리에 차 내게 반항하고 있다. 이 겉 껍데기를 허물어 봐야 무슨 소용인가. 이 눈을 떠라, 겁을 모르는 아름다운 것에는 내 손도 미치지 못한다. 당신의 마음에 상관없이 당신을 잡아 본들 당신은 향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아아, 제인, 내게로 와 주구려." 그렇게 말하며 그는 움켜 쥐고 있던 나를 풀어 놓고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난폭한 강요보다 거절하기가 더욱 어려운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의 격정에 휘말리지 않았다. 나는 문 있는 곳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가는 건가, 제인?" "네, 그래요." "와 주지 않겠소? 나를 위로하거나 도와 주지 않겠소? 내 무한한 사랑과 애타는 괴로움, 미친 듯한 내 염원이 당신에겐 아무렇지도 않소?" 아아, 무한한 비애가 담겨진 그 목소리, 말로는 다하지 못할 그 애수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해야 하는 괴로움. "전 가야 해요." "알았어, 그렇다면 가요. 하지만 잊지는 알아요. 이처럼 괴로워하는 나를 두고 당신이 가는 것을 말이오. 당신 방에 돌아가면 내가 얘기한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오. 내 생각을 해보고 괴로움을 알아 줘요." 그는 돌아서서 소파에 몸을 던지고 얼굴을 묻어 버렸다. "오오, 제인! 내 희망, 나의 사랑, 내 생명이여!" 그는 오열을 참아내지 못했다. 길고도 강한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그때 문께까지 와 있었다. 그러나 곧 되돌아갔다. 물러섰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금도 주저없이 나는 그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 쿠션에 묻은 얼굴을 내게로 돌려 그 눈에 입을 맞추었다. 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소중하신 저의 주인님! 하느님의 축복이 있으시길......" 나는 말했다. "하느님은 모든 재난과 과실에서 당신을 구원하십니다. 당신을 인도하시고 위안을 주시며, 이제껏 제게 베푸신 친절에 대한 보다 훌륭한 보답을 주십니다." "보답으로라면 당신의 사랑이야. 그것이 없으면 내 가슴은 찢어진다. 그러나 제인은 내게 반드시 사랑을 줄 거야, 숭고하게, 아낌 없이." 그의 얼굴에는 핏기가 돌았고, 눈은 빛났다. 그는 벌떡 일어나 두 팔을 내게로 벌렸다. 그러나 나는 포옹을 피하여 밖으로 나와 버렸다. "안녕히 계세요." 그의 곁을 떠날 때 나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영원히, 안녕히 계세요." 그날 밤, 나는 잘 생각이 아니었으나 자리에 눕자 곧 꿈에 떨어졌다. 나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저 게이트헤드의 붉은 방에 나는 누워 있었다. 달은 일찍이 구름 사이를 헤집고 나온, 그 어느 달과도 닮지 않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구름 사이로 흰 옷을 입은 사람이 언제까지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나의 마음에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먼 목소리는 내 마음 가까이에서 속삭이고 있었다. "내 딸아, 유혹에서 피하라!" "그렇게 하겠어요. 어머니." 대답과 함께 이 황홀한 꿈에서 깨어나자 7월의 밤은 어느 새 훤히 거두어져 있었다. '과히 이른 시간은 아니야. 이제부터 내겐 할 일이 있지 않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복, 반지 등의 짐을 꾸렸다. 며칠 전에 로체스타 씨가 준 진주 목걸이만은 뒤로 남겨 두었다.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그것은 환상 속에 사라진, 로체스타 씨의 신부 것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나는 내가 가진 전부의 돈인 20실링을 주머니에 넣고, 방을 나왔다. "안녕히 계세요, 페어펙스 부인!" 그녀의 방 앞을 지날 때 나는 낮은 소리로 인사를 전했다. "잘 있어요, 아델." 어린이 방 쪽으로 눈을 주고 나는 말했다. 로체스타 씨의 방을 나는 그대로 지나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문 앞에서 심장이 얼어붙는 듯하여 그대로 계속 걸을 수도 없었다. 방 주인은 완전히 침착성을 잃고 이쪽 벽에서 저쪽으로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잠시 서 있는 동안에도 한숨 소리는 계속 흘러나왔다. 가엾은 주인님, 애가 타서 잠도 들지 못하고, 저렇게 날이 밝기만을 기다리다가 아침이면 나를 찾으시겠지. 나는 발견되지 않는다. 당신은 버림받았구나. 사랑의 거부에 당신은 자포 자기하고 괴로워하리라. 그것도 나는 생각했다. 손이 저절로 손잡이로 갔다. 그러나 나는 다시금 그 손을 거둬들이고 복도를 살그머니 걸어나갔다. 소리도 내지 않고 문을 닫고 희미한 새벽녘의 뒷마당으로 나는 발을 내딛었다. 나는 마침내 쪽문을 통하여 손필드 저택의 밖으로 나왔다. 밭을 지나 생나무 울타리를 따라 걷는 사이에 어느덧 아침해가 솟았다. 나는 쓸쓸한 도피행과 끝도 없는 방황을 생각하고, 그리고 뒤에 두고 온 사람의 이름을 가슴 쓰리게 생각했다. 생각 않을 수도 없었다. 나는 솟아오르는 해를 보며 그분의 일과 그 방 안의 일들을 생각했다. '전 여기 남겠어요. 당신 것이에요.' 라고 말할 날이 빨리 오기를 기원하며. 나는 그의 것이고 싶었다. 되돌아가고 싶었다. 아직은 늦지 않았다. 집을 나온 것을 아무도 모르니만큼 지금이라면 아직 이별의 상처는 남기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이 미웠다. 주인님을 괴롭히고 상처를 준 여자. 그리고 버리고 오다니, 내 자신의 눈에 내가 밉게 비쳤다. 그래도 뒤를 돌아볼 수는 없었다. 한 발자국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혼자 터덜터덜 걸어가며 나는 울었다. 내부로부터 마음의 아픔이 내비쳐 손발 끝까지 고통스러워 나는 죽는 거야, 여기서 - 이러한 불안을, 아니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나는 곧 일어났다. 조금 기어서 몸을 세웠다. 아무튼 어떻게 해서건 나는 역마차가 다니는 큰길로 나가야 했던 것이다. 28 이틀이 지났다. 여름날의 저녁 무렵, 마부는 나를 위트크로스라는 곳에 내려 주었다. 더 이상 갈 수 있도록 지불할 돈이 내게는 없었던 것이다. 단 1실링도...... 마차는 벌써 1마일이나 앞서 가 버리고 말았다. 혼자가 되어 우두커니 서 있던 나는, 이때 마차의 선반 위에 내 보따리를 그냥 두고 내린 것을 알았다. 이제야말로 나는 글자 그대로 무일푼의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위트크로스는 거리도 마을의 이름도 아니었다. 다만 네 갈래의 길이 마주치는 곳에 서 있는 하나의 표지판에 불과했다. 그것은 멀리서나 혹은 어둠 속에서도 잘 볼 수 있도록 흰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 꼭대기에 팔을 벌리고 이 있는 네 개의 방향 표지를 보고, 여기서부터 제일 가까운 곳은 10마일이나 되고 먼 곳은 20마일이나 된다는 것을 알았다. 전후 어느 쪽을 살펴보아도 그저 드넓은 히드의 벌판이었으며, 발 밑 계곡 멀리로는 잇단 산등성이만이 보였다. 희끄무레하고 널따른 길은 동서 남북으로 뻗쳐져 있건만, 통행인의 그림자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다. 길만을 제외하고는 히드는 어디에고 잔뜩 우거져 있었다. 나는 히드의 초원을 똑바로 걸어서, 갈색의 초원 지대가 움푹 패신 아주 후미진 곳으로 갔다. 히드의 무성한 덩굴이 무릎까지 덮였다. 그늘진 구석에 이끼가 끼어 거무스레한 커다란 화강암의 바위가 보였다. 나는 그리고 가서 바위 밑에 걸터앉았다. 이제 어쩌면 좋을까, 어디로 가야 하나. 스스로 그런 막막한 질문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히드를 만져 보았다. 건조되어 아직 태양열로 따뜻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벼랑 위로 별 하나가 정다운 빛을 던지고 있었다. 나는 아직 빵 한 조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점심때 어느 거리에서, 마지막 하나 남은 동전으로 산 먹다 남은 롤빵이었다. 나는 히드의 여기저기에 무르익은 귤나무 열매가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한 웅큼 따서 빵과 함께 먹자 충분하지는 못하나마 허기는 면할 수 있었다. 식사를 끝낸 후 나는 저녁 기도를 올리고 잠자리를 물색했다. 드러누우면 반은 히드 속에 묻힌다. 이렇게 해서 잠자리를 얻은 나는 적어도 날이 밝기까지는 추위를 모르고 잤다. 나의 휴식은 더없이 고요한 것이었으리라. 가슴의 슬픔이 이를 방해했다. 로체스타 씨와 그의 운명을 생각하면 내 가슴은 떨렸고, 뼈아픈 연민으로 또한 쉼 없는 동경으로 그를 그리워했다. 양쪽 날개를 잃은 새처럼 움직일 기력도 없으면서, 마음은 그래도 오로지 그를 갈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마음의 가책에 지쳐, 나는 일어나서 무릎을 꿇었다. 밤이 되어 별이 떴다. 고요한 밤이었다. 불안을 느끼기엔 너무나도 고요한...... 나는 로체스타 씨를 위해 기도했다. '신은 스스로 창조하신 것을 구원하신다.' 라는 확신이 솟아 점차로 강해졌다. 나는 감사의 기도를 했다. 로체스타 씨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신이 창조하신 그분은 신이 구원하신다. 나는 다시금 언덕에 누워 깊은 잠에 떨어짐으로써 슬픔을 잊었다. 다음날 아침, 길게 땅 위에 덮였던 아침 그늘이 걷히고, 태양이 땅과 하늘 사이에 가득했다. 나는 눈을 뜨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어쩌면 이렇게도 고요한, 그리고 더운, 청명한 날씨일까? 황야는 황금의 사막 그대로였다. 눈에 비친 것이 햇빛이었다. 일어나서 내가 누웠던 곳을 돌아본 후 나는 걷기 시작했다. 나는 참으로 오랫동안 걸어 이제는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정도로 걸었다. 근처의 바위 위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몸도 마음도 잦아드는 무감각 상태에 내맡기고 있었다. 나는 언뜻 종소리를 들었다. 오오, 교회 종소리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눈을 돌리니 로맨틱해 뵈는 언덕 사이로 조그만 마을과 교회의 뾰족탑이 보였다. 오른쪽의 계곡으로는 목장과 숲이 보였다. 그 사이로 흐르고 있는 조그만 냇물이 보였고, 한 대의 짐짝 마차가 언덕을 오르는 게 보였고, 두 마리의 암소를 끌고 가는 사람들도 보였다. 나는 어느 틈에 사람들이 일하는 근처로 와 있었다. 나는 어떻게든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살아가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고, 힘껏 일해야만 한다. 오후 두 시쯤 마을에 당도하니, 눈에 띄는 것이 창가에 빵과자를 진열한 조그만 상점이었다. 나는 빵과자가 먹고 싶었다. 그것을 하나만 먹으면 기운을 차릴 듯 싶었다. 내게 돈이 될 만한 것이 없을까 생각했지만, 내게 있는 건 목에 감은 비단 수건과 장갑 뿐이었다. 과연 그것을 받아 줄까? 나는 생각했다. 지금 나는 곤궁에 처해 있다. 살아갈 수 없는, 의지까지도 없는 사람의 입장에 있다. 친구도, 돈도 없다.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 어디로 가서 무얼 부탁해야 할까? 나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가 하나 있다가, 내 옷차림이 단정한 것을 보고 정중하게 내 앞에 와 섰다. 나는 물었다. "이 근처에 가정부가 필요한 집이 없을까요?" "글쎄요, 저는 몰라요." 훌륭한 손님인 줄 알았던 기대가 엇갈리는 바람에 여자는 멍청해졌다. 나는 가게에서 나왔다. 나는 좌우를 둘러보며 거리를 걸어갔다. 한 집도 들어갈 적당한 구실이 생기지 않았다. 나는 좁은 골목의 안쪽에 정원이 아름답게 가꾸어진, 깨끗하고 조그만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꽃이 아름답게 활짝 피어 있었다. 하얀 문으로 다가서서 노크를 하니 온순하고 소박해 보이는 부인이 나와 문을 열었다. 희망을 잃어서 숨마저 끊길 듯한 목소리가 되어, "댁에 가정부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으니, "필요 없어요." 하고 부인이 잘라 말했다. "저희 집엔 가정부를 두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좋으니 제가 할 일이 없을까요? 다른 지방 사람이라, 이곳 사정을 잘 모릅니다. 무슨 일이라도 할 테니......" "안됐지만 생각나는 곳이 없군요." 하고 부인은 말하면서, 열었던 문을 닫아 버렸다. 나는 쫓겨난 것이다. 버림받고 굶주린 개처럼 이렇게 헤매어 다니는 사이 날이 어두워졌다. 어떤 들판을 넘어서자 교회의 첨탑이 보였다. 나는 그리로 발길을 옮겼다. 교회당 옆쪽의 정원 한복판에 작은 집 한 채가 있었다. 아마도 목사관이리라. 이곳이라면 나도 뭔가 의논할 권리가 있는 듯도 생각됐다. 나는 용기를 내어 그 집의 부엌문을 두드렸다. 할머니가 나와 문을 열었다. 나는 그 할머니에게 여기가 어딘지를 묻고 목사관임을 확인했다. "목사님은 계세요?" "지금 출타중이신데요." "곧 돌아오시겠지요?" "글쎄요, 곧은 안 돌아오세요." "멀리 가셨어요?" "그리 멀진 않지만, 3마일은 돼요. 부친이 별세하셔서 마쉬엔드로 가셨으니까 약 3주일은 지체하실 거예요." 나는 이 할머니에게 내 사정을 얘기하고 먹을 것을 구할 수는 없었다. 아직까지는 차마 거지 노릇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지친 몸을 끌며 그곳을 떠났다. 다시 한 번 나는 손수건을 꺼냈다. 그 조그만 빵과자를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아까의 가게로 찾아가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의 여자 외에 다른 사람이 있었으나 용기를 내었다. "이 손수건 대신 빵을 하나 얻을 수 없을까요?" 여자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여태 그런 장사는 해본 적이 없어요. 게다가 당신이 어디서 그 손수건을 얻었는지 알 게 뭐예요." "그럼 이 장갑으로도 안 될까요?" "필요 없어요. 그따위 물건이 무슨 소용이라구!" 해가 질 녘에 나는 마침내 어떤 농가에서 구걸을 했다. 한 조각의 빵을 얻어 가지고 나는 길가에 앉아 그것을 먹었다. 그날 밤은 숲속에서 잤다. 비가 왔다. 다음날도 주린 배를 견디지 못한 나는 어떤 집에서 식어빠진 죽을 돼지 먹이통에 넣는 것을 보고 그것을 달래서 얻어먹었다. "이젠 내 힘도 끝이야."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지금 나와 언덕 사이로는 어두워진 불모의 땅이 약간 있을 뿐이다. "그래, 이런 사람이 많이 다니는 거리에서 죽기보다는 차라리 언덕에서 죽자." 나의 눈은 황막한 황야의 끝가는 곳에 멎어 있었다. 그때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번쩍이는 불꽃을 나는 보았다. "아마 도깨비불이겠지." 하고 나는 그것이 곧 꺼지리라고 생각했으나, 불빛은 언제까지나 그곳에서 반짝이는 채로였다. '집이 있는 걸까? 하지만 난 도저히 저곳까지 갈 수가 없다. 혹 갈 수 있더라도 쫓겨나고야 말 걸 뭐.'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 자리에 쓰러져 얼마간은 움직이지도 않았다. 비가 심해지면서 속옷까지도 젖었다. 비여, 얼마든지 올 테면 와라. 나는 이제 그것을 느끼지도 못하게 되니. 그렇지만 살아 있는 나의 육체는 역시 추위에 떨고 있었다. 이윽고 나는 일어섰다. 불빛은 빗발 속에 희미하나마 반짝이면서 아직 그곳에 있었다. 나는 지친 다리를 끌고 천천히 불빛을 향해 걸어갔다. 습지를 건너서자 불빛은 나무들이 무성한 언덕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가까이 가자, 건물 모퉁이에 창을 통해 그 불빛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곳을 통해 집안 광경을 살펴보았다. 깨끗한 모랫빛 마루가 깔린 방안에 호두나무로 만든 찬장, 괘종시계, 흰색 테이블과 의자 몇 개, 촛불은 그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촛불 곁에는 좀 촌스러우면서도 적당히 어울리는 한 사람의 노파가 양말을 뜨고 있었다. 그리고 난롯가에는 그곳에서 배어 나오는 장미색의 평화와 온기에 싸여 두 아가씨가 각각 의자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크레이프와 봄바지인 검은 상복 차림이었는데, 그 검은 색상 탓에 드러난 살결이 무척 희게 보였다. 한 아가씨의 무릎에는 커다랗고 늙은 포인터 개가 머리를 올려놓고 있었고, 한 아가씨는 검은 고양이를 안고 있었다. 두 사람을 살펴보건대 상당히 교양 있고 우아해 보였다. "그런데 다이아나." 하고 책을 읽고 있던 한 사람이 말했다. "프란츠와 늙은 다니엘은 밤에 함께 있었어. 그런데 프란츠가 무서운 꿈에서 깨어 그 얘기를 하는 거야, 좀 들어 봐." 그러고는 어떤 문장을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프랑스 어도, 라틴어도 아니었다. 어느 나라 말인지조차도 몰랐다. "참 용감하지." 읽고 나서 그녀가 말했다. "참 멋있어." 다른 아가씨는 불빛을 응시하며 지금 읽어 준 글귀를 입 속으로 되뇌었다. "세인트 존은 언제나 돌아오지?" 다이아나라고 불리운 아가씨가 말했다. "지금 열 시니까 곧 오겠지." 그녀는 허리춤에서 조그만 금시계를 꺼내보곤, "굉장한 비야. 한나, 객실의 불 좀 봐 줘요." 하고 말했다. 노파는 일어섰다. 그녀는 안쪽으로 가 난롯불을 휘젓고 돌아와 말했다. "아가씨, 이제 저쪽 방으로 가는 건 괴롭구먼요. 구석에 놓인 빈 의자를 보긴 퍽 쓸쓸해요." 그러고는 그녀는 앞치마로 눈물을 닦았다. 이제껏 엄숙한 표정으로 있었던 두 아가씨의 얼굴도 함께 흐려졌다. "하지만 이제야말로 좋은 곳으로 가신 것이니......" 하고 노파는 말을 이었다. "이 세상으로 다시 와 주십사고 원하는 것은 안 되겠지요. 정말 그처럼 편안하게 임종하신 분도 없을 거예요." 시계가 열 시를 쳤다. "밤참을 좀 드셔야지요?" 한나가 말했다. "세인트 존 님도 돌아오시면 시장하실 거예요." 그리고 그녀는 곧 식사 준비를 했다. 아가씨들이 일어섰다. 아마 안방으로 가려나 보았다. 그 순간 나의 입장을 그녀들과 비교하니 더욱 절실하게 비참함을 느꼈다. 겨우겨우 노크를 해보았지만, 그러면서도 재워 달라는 것은 망상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요?" 노파가 문을 열고, 손에 든 촛불로 나를 의심쩍게 바라보고는 놀란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씨들을 뵙고 싶은데요." 하고 나는 대답했다. "얘기가 있으면 내게 해요. 어디서 왔수?" "길을 가던 사람이에요." "늦은 시간인데......? 그런데 무슨 볼일이에요?" "아무 곳이라도 좋으니 하룻밤만 재워 주세요. 그리고 먹을 것을 좀 나눠 주실 수 없을까요?" 그녀의 얼굴은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그것은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바다. "먹을 것은 좀 줄 수도 있지만." 잠깐 사이를 두어 그녀는 말했다. "떠돌이를 재울 수가 없지요. 잘못 찾아왔어요." "제발 아가씨들에게 부탁 좀 해주세요." "안돼요. 그럴 수 없어요. 도대체 지금이 몇 신데 이 근처를 헤매 다닌단 말이오?" "하지만 제발 아가씨들에게......" "아니 이런 억지가 어디 있나! 안 된다고 그러지 않았소! 빨리 가 줘요." "여기서 쫓아내면 이제 전 죽어요." "죽는다고? 아무래도 무슨 꿍꿍이 속이 있는 게야. 이런 시간에 남의 집 근처를 헤매 다니고 말이야. 이 근처에 혹시 한 패거리들이 숨어 있는 게 아니우? 그렇담 가서 말해 줘요. 이 집엔 여자들만 있는 게 아니고 남자도 있고 총도 있다고 말이야." 이렇게 말하고는 이 충직스런 고집쟁이 할머니는 탕! 하고 문을 닫고 빗장을 질러 버렸다. 아아, 극도의 고통이 밀려왔다. 더할 나위 없는 절망의 아픔이 내 전신을 물어뜯었다. 난 한 발자국도 떼어놓을 기력이 없었다. 빗물이 흥건한 섬돌 위에 쓰러져 나는 신음했다. 마지막 순간이라는 그 공포감이 엄습해 왔다. 그러나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젠 죽는 수밖에 없어. 신을 믿는 거야. 반항 없이 신의 뜻을 따르는 거야." 이러한 말을 나는 입 밖에 내어 말했다. 그리고 모든 불행은 가슴 속에 눌러 두기로 했다. "인간은 모두가 죽게 마련이다." 하나의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렸다. "그러나 당신이 만약 먹지 못해 죽는다면, 그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운명은 아니지." "당신은 누구예요? 아니, 무엇입니까?" 뜻하지 않은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랐다. 아무런 희망도 가지지 않은 채 나는 물었다. 가까운 곳에 그림자 같은 게 보였다. 이런 어둠과 나의 약해진 시력으로는 그것이 무슨 그림자인지 도저히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 그림자가 요란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세인트 존님이세요?" 한나가 소리쳤다. "그래요, 빨리 문을 열어요!" "네, 네. 비를 맞아 추우시지요? 정말 고약한 밤이에요. 게다가 이 근처는 좀 수상해요. 좀 전에 여자 거지가 왔는데요. 아니, 아직도 안 갔어? 당신은 글쎄, 여기서 자다니. 이봐, 일어나요. 빨리 가라고 했잖아!" "조용해요, 한나. 이 여자에겐 무슨 사정이 있는 모양이니 좀 들어야겠소. 아가씨, 아무튼 일어나요. 어서 집으로 들어갑시다." 마지막 힘을 다해 나는 그의 말을 따랐다. 나는 밝고 깨끗한 부엌, 그 난로 곁에 섰다. 심한 구역질을 느꼈다. 두 명의 아가씨와 세인트 존, 그리고 노파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인트 존, 이 사람은 누구야?" 한 아가씨가 물었다. "나도 몰라. 문간에 쓰러져 있더군." "얼굴색이 말이 아녜요." 한나가 말했다. "퍼렇지. 죽음의 색이야. 쓰러지겠다, 좀 앉게 합시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나는 쓰러졌다. 의자가 나를 받쳤다. 말할 힘은 없었지만 의식은 좀 있었다. "물을 먹으면 좀 낫겠지, 한나.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 야위었을까. 피골이 상접하고 핏기는 전혀 없어요." "유령 같애." "병자일까? 굶어서 그런가?" "배가 고플 거야. 한나, 그거 우유지요? 빵도 약간 가져다 줘요." 다이아나가 빵을 좀 뜯어서 우유에 적셔 입에 넣어 주었다. 동정어린 그녀의 얼굴이 바로 내 얼굴 위에 있었다. 그녀의 말에는 그지없이 향기롭고 선량한 마음씨가 넘쳐흘렀다. "먹어 봐요." "그래요, 어서 먹어요." 메어리도 부드럽게 권유했다. 그녀는 나의 젖은 모자를 벗기고 머리를 들어 주었다. 나는 주는 것을 입에 넣었다. 처음에는 기운 없이, 나중에는 정신 없이 그것을 먹었다. "처음엔 많이 먹이면 안 돼, 그만 줘요." 그들의 오빠가 이렇게 말하고 우유와 빵 접시를 빼앗았다. "조금만 더 먹여요. 저렇게 먹고 싶어하는데......" "지금은 안돼. 이제 말은 좀 할 수 있을 거야. 이름을 물어 봐요." 나는 좀 기운이 났으므로 대답했다. "제인 엘리오트예요." 나는 나의 정체를 감추려고 가명을 쓰기로 했다. "주소를 말해 봐요. 아는 사람은......" 나는 잠자코 있었다. "누구 아는 사람을 불러다 드릴까요?" 나는 머리를 저었다. "자기 일에 대해 설명은 할 수 없어요?" 어쩐 일인지, 이 집에 들어서서 이 집 식구들과 마주 앉아 있는 사이에 나는 이미 떠돌이도, 넓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거지 꼴은 그만두자. 나의 원 위치로 돌아가자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자세히 말할 수 없어요." "그럼 무엇을 해드릴까요?" "아무 것도 없어요." 나의 체력으로는 이렇게 짧은 말만을 할 수 있었다. 다이아나가 되물었다. "그럼 당신은 아무 것도 필요한 게 없다는 거예요? 비가 퍼붓는 이 밤에 다시 황야로 나가겠다는 건가요?" 나는 그녀를 보았다. 힘과 선의가 가득한 그 얼굴을, 그리고 용기를 얻었다. 그녀의 동정어린 눈길에 미소를 짓고 나는 말했다. "여러분을 전 믿어요. 만약 제가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라 해도, 오늘 밤은 이 난로 곁에서 절 내쫓지야 않겠지요. 부디 생각대로 저를 처리해 주세요. 다만 긴 이야기만은 시키지 말아 주세요. 숨이 차고, 경련이 일어난답니다." 세 사람은 내 모양을 보고 아무 말도 없었다. "한나." 세인트 존이 말했다. "지금은 이대로 말을 시키지 말고 두어요. 10분 후에 나머지 빵과 우유를 먹이고, 그리고 메어리와 다이아나는 저리로 가자. 좀 의논을 해야겠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갔다. 곧 형제 중의 한 사람이 왔으나 난 그녀가 동생인지 언니인지 알 수 없었다. 난로의 온기로 해서 기분 좋은 잠이 스며 들었다. 낮은 목소리로 그녀는 한나에게 무언가는 지시했다. 이윽고 노파의 부축에 의해 나는 계단을 올라갔으며, 흠뻑 젖은 의복을 벗고 따뜻하고 마른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하느님께 감사하고, 곤한 피로 속에서 불타는 감사와 기쁨을 맛보며 깊은 잠에 빠져 들어갔다. 29 그로부터 사흘간을 나는 밤낮을 거의 분간하지 못하고 지냈다. 사흘 후에 나는 많이 회복되었고, 나흘째에는 침대 위에 일어나 앉게 되었다. 점심 나절에 한나가 죽과 버터를 바르지 않은 토스트를 가져와서 나는 맛있게 그것을 먹었다. 깨끗이 세탁되어진 나의 옷이 바로 침대 곁의 의자 위에 놓여 있었다. 이미 습지의 흔적 따위나 비에 젖어 구질구질했던 주름살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가지런해진 나의 비단 웃옷은 벽에 걸려 있었다. 양말과 구두까지 청결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게다가 방에는 세면 도구와 솔과 빗이 있었으므로 나는 천천히 몸단장을 했다. 몹시 살이 빠져서 옷이 헐렁했지만 숄로 그것을 감출 수 있었다. 단정하고 깨끗한 몸차림으로 조심스럽게 돌층계를 내려가서, 천장이 낮은 복도를 통해 부엌으로 내려갔다. 한나가 빵을 굽고 있었다. 처음에는 내게 무뚝뚝하고 쌀쌀하게 굴었지만 점차로 친절해져서 지금은, 단정한 내 모습을 보자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저런, 일어났군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이젠 괜찮아요? 뭣하거든 거기 난롯가의 내 의자에 앉구려. 그런데 당신은 여기 오기 전엔 구걸을 하고 다녔수?" 순간, 나는 입술을 물었다. 그러나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그때의 나는 사실 거지 이상의 꼴이었을 테니. 나는 조용히 대답을 했지만, 그 대답은 어쩔 수 없이 불쾌한 어조였다. "절 거지로 아셨으면 잘못이에요. 전 할머니가 이 댁 아가씨들처럼 거지는 아녜요." 잠깐 침묵한 후에 할머니가 말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아가씨는 공부했수?" "네, 상당히." "학교는 못 다녔지요?" "전 8년이나 학교에 있었어요." 할머니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렇다면 왜 돈을 벌지 않지요?" "지금까지 내 힘으로 벌며 살아왔는 걸요. 이제부터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거예요. 어머, 그 구즈베리는 뭘 하시려구요?" 나는 그녀가 과일이 든 바구니를 가지고 온 것을 보고 그렇게 말했다. "파이를 만들 거라우." "이리 주세요. 제가 벗겨 볼까요." 그녀는 바구니와 함께 내 무릎에 깔 수건을 가지고 왔다. "옷을 버리면 안 되지요. 손을 보니 당신은 막일은 하지 않은 손이에요. 손을 보면 알 수 있지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바느질을 했을까?" "아니, 바느질쟁이가 아녜요. 더 이상 제 신변을 묻지 마세요. 그보다 이 댁 이름은요?" "'마쉬 엔드', 혹은 '무아 하우스'라고들 부른다우." "이 댁의 주인은 세인트 존 님이에요?" "아니오, 그분은 잠시 다니러 온 사람일 뿐이죠. 모튼의 교구(敎區) 안에서 거처하고 계세요." "저쪽 마을 말인가요?" "그렇다우." "뭘 하시는데요?" "목사님이죠." 나는 그 목사관을 찾아간 때의 일을 상기했다. "그럼 이곳엔 그분의 아버님이 계셨군요." "그랬었지요." "아버님은 돌아가셨나요?" "3주일 전에 그만 뇌출혈로......" "어머닌요?" "마나님은 돌아가신 지 오래됐지요." "그럼 할머니는 이 댁에 오래 계셨어요?" "거의 30년은 됐으니까요. 저 세 사람은 내가 다 키웠는 걸요." "그것으로서 할머니는 좋은 분인 걸 알겠군요. 절 거지라고 하셨지만, 훌륭한 분이라고 칭찬해 드리고 싶어요." 그녀는 다시금 놀랐다. "내가 그만 잘못 알았어요. 이 근처엔 수상한 자들이 자주 나타나서요." "그래도 전 심하다고 생각했어요." 하고 나는 대꾸했다. "그 이유는요, 나를 재워 주지 않거나 좀도둑으로 여겨서가 아녜요. 집 없고 돈 없는 사람이라 업신여긴 탓이에요. 옛날에도, 또 지금은 돈 없으면서도 훌륭했던 사람은 많잖아요. 만일 할머니가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가난한 사람을 죄인처럼 여겨선 안 돼요." "앞으론 삼가고 조심할께요." 하고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세인트 존님도 그러셨어요. 내가 잘못했지요. 지금은 당신을 전혀 그렇게 생각지 않는답니다. 당신은 정말 기품있는 아가씨예요." "고마워요. 용서해 드릴께요. 자, 악수합시다." 그녀는 내게 꺼칠꺼칠한 가루 투성이 손을 내밀었다. 어색함이 없어진 진실한 미소가 소박한 얼굴을 밝게 해주었다. 그것으로써 나와 그녀와 사이에 놓여 있던 경계심이 말끔히 사라지고 믿음 깊은 친구가 되었다. 한나는 겉보기처럼 이야기를 좋아하였다. 내가 과일을 벗기고 그녀가 가루를 반죽하는 동안, 쉴 새 없이 돌아가신 주인과 마나님, 또 '자제분들' 이라고 그녀가 일컫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돌아간 리버즈 씨는 평범한 신사였으나, 이 지방에서는 가장 오래된 가문의 출신이었다고 했다. 그는 마수 엔드를 짓고 내내 그것을 소유했으며, 모튼 교회의 예배당에 비치되어 있는 등록부에도 나와 있듯이, 헨리왕 시대에는 명사로 활약했다. 또 부인은 굉장한 독서가로 풍부한 학식을 가졌으며 자녀들은 모두 이 어머니를 닮은 것 같다고 했다. 이 지방에서는 '자제분들'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고, 그 세 사람은 말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독학'을 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 년전 리버즈 씨가 친구의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막대한 재산을 날리고, 아이들에게 분배할 유산도 남기지 못했다. 때문에 세인트 존은 대학으로 가서 목사직에 나섰고, 아가씨들은 학교를 나오자 가정 교사를 지망하는 등 자기 손으로 빵을 벌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다같이 이 마쉬 엔드나 모튼 일대의 자연경관에 대단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런던이나, 그 밖의 도회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세 사람은 마음이 잘 맞았고 사이가 좋았다. 정말 이렇게 화평하고 우애가 있는 가정도 다시 없을 것이다. 내가 구즈베리를 다 벗겼을 때, 세 사람이 산책을 마치고 돌아왔다. 세인트 존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지나쳤으나, 아가씨들은 다같이 걸음을 멈췄다. 메어리는 내가 아래층으로 내려올 정도로 좋아져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다이아나는 내 손을 잡고 머리를 흔들었다. "괜찮다고 할 때까지 더 있지 그랬어요. 아직 안색도 안 좋고, 또 이렇게 여위어서......" 다이아나의 목소리는 마치 비둘기 소리처럼 부드럽게 내 귀에 울렸다. 나는 그녀의 시선에 맞부딪치는 것이 퍽 즐거웠다. 그녀의 용모는 무엇이나 내게 매력이 넘쳐 보였다. 메어리 역시 총명하고 아름다운 얼굴이었으나, 다이아나만큼은 가까이하기 어려운 무엇이 있었다. 다이아나는 얼굴이나 말하는 태도에 일종의 위엄과 의자가 꽉 차 있다. 내 성격으로는, 그녀처럼 의지 있는 사람에게 복종하고 내 양심과 자존심이 허락하는 한에서 그 의사를 따르는 것은 오히려 기분 좋은 일이었다. "여기는 당신이 있을 곳이 아녜요, 저리로 갑시다." 하고 말하면서, 그녀는 나를 일으켜 세워 객실로 데려갔다. "자 여기 앉아요. 우리가 모자를 벗고 차를 가져올 테니까." 세인트 존과 나만을 남겨 두고 둘은 나가 버렸다. 세인트 존은 신문인지 책인지를 들고 나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나는 방안을 둘러 본 후 이 방의 주인공을 관찰했다. 이 방은 좀 작은 듯했으며 비품이나 장식은 깨끗했다. 내 마음에 꼭 들었다. 몇 세대에 걸친 남녀들의 초상화가 벽에 걸려 있었으며, 여분의 장식으로는 사이드 테이블 위에 놓인 한 쌍의 바늘 상자와 여자용 책상 뿐으로, 현대식 가구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벽에 걸린 하나의 초상화처럼 세인트 존은 움직임이 없었다. 책에 눈을 둔 채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를 잘 관찰할 수 있었다. 그는 스물여덟이나 서른 살 정도로 보였으며, 남의 눈을 끌 정도로 늘씬하고 잘생겼다. 날이 선 고전적이 코와 아테네 인과 흡사한 단정한 입과 턱의 윤곽은 실로 그리스 사람 그대로라고 말해도 좋았다. 영국인이면서도 그처럼 고대 민족의 전형을 꼭 닮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의 눈은 크고 파랬으며 갈색의 속눈썹을 가지고 있었다. 상앗빛의 넓은 이마에는 몇 가닥 금발의 고수머리가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었다. 그는 지금 내 앞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있지만 그 코나 입, 이마 언저리에는 일종의 초조감과 강렬한 기상이 감춰져 있는 듯했다. 다이아나는 바쁘게 방을 들락거리며 차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윽고 가마솥의 제일 위에서 굽혀진 과자를 가지고 왔다. "자, 들어 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퍽 배고팠지요? 죽 이외에는 아침부터 아무 것도 들지 않았다면서요?" 나는 사양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부터 나의 식욕은 왕성해졌다. 리버즈 씨는 책을 놓고, 테이블에 와 앉아서 그림처럼 파란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배가 고프시군요?" 하고 그는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간단히 묻는 말에는 간단하고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이 내 성격이었으므로, 나는 본능적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열이 좀 있길래 사흘 동안 단식을 시켰던 거지요. 처음부터 심한 공복을 채우는 것은 위험합니다. 이제는 상관 없겠지만, 과식은 하지 마세요." "이제 신세를 질 일도 오래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아주 체면도 모르는, 건방진 대답을 했다. "그렇겠지요." 하고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보호자 되는 분께 연락을 취해 보도록 할까요? 집에 돌아갈 수 있도록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저는 그럴 수 없답니다. 저는 집도 보호자도 없으니까요." 세 사람은 놀라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 의심하는 빛은 없었으나 단지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그럼, 당신은 여태까지의 당신의 환경과 깨끗이 손을 끊었다는 뜻입니까?" "네, 전 살아 있는 그 누구와도 아무 관계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영국의 그 어느 지붕 아래에도 제가 들어설 곳은 없습니다." "당신의 나이로는 참 드문 일이군요." 그때, 나는 그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내 손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곧 그의 다음 말로 해서 나의 의문은 풀렸다. "당신은 아직 결혼 경험이 없군요. 미혼입니까?" 다이아나가 웃었다. "존, 이분은 이제 열예닐곱 정도인 걸요." "전 곧 열아홉이 됩니다. 말씀하신 대로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구요." 나의 얼굴은 불타듯이 달아올랐다. 결혼이라는 단어가 내 가슴을 찌르고 괴로운 추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나는 괴로운 나머지 그만 눈물을 머금었다. "여기에 오기 전엔 어디에 있었나요?" 그가 물었다. "제가 있었던 곳이나 그곳 사람들에 대해선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하고 나는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당신의 과거를 전혀 알지 못하고는 아무 것도 도울 수가 없잖아요? 아무 도움이 필요치 않나요?" "필요합니다. 만일 여기에 진정한 자선가가 있어서 제게 할 일은 주시고, 그로해서 최소한의 보수를 얻을 수만 있다면, 더없이 기쁜 일이겠습니다." "내가 과연 당신이 말하는 자선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의 절실한 문제라면 물론 도움을 사양치는 않겠습니다. 우선 당신은 어떤 경험이 있으며,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이야기해 보세요." "리버즈님." 하고 나는 그가 나를 바라보는 것처럼 똑바로 그를 쳐다보고 한결같은 어조로 말했다. "저는 목사님과 두 아가씨께 더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남이 이웃에 베풀 수 있는 최대의 도움보다 훨씬 높은 사랑으로써 저를 죽음으로부터 구해 주셨습니다. 이 헤아릴 수 없는 은혜로써 목사님이 저의 비밀을 알고자 하심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저는 저의 방랑에 대한 사정을 자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평온을 저버리지 않을 한도 내에서 - 그리고 다른 분들의 처지에 폐가 되지 않을 범위에서. 저의 아버지도 목사였는데, 양친은 모두 제가 어려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아가 된 저는 남의 집에 기식하며 자선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지요. 그곳에서 6년 간을 학생으로, 2년 간은 교사로 생활했습니다. 저 로우드 고야 양육원 말입니다. 혹시 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경영자는 로버트 브로클......" "브로클 허스트 씨라면 알고 있지요. 학교도 본 일이 있어요." "꼭 1년 전, 전 가정 교사 자리가 있었기 때문에 로우드 학교를 떠나왔습니다. 그리고 비교적 평온하게 지내왔지요. 그런데 이곳에 오기 바로 나흘 전에, 어떤 사정이 생겨 그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 사정을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저 쓸데없는, 위험한, 몽상에 불과한 얘기와 같으니까요. 하지만 남의 비난을 받을 일은 아니랍니다. 여기 계시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저는 부정한 죄명으로부터는 자유입니다. 전 타격을 받았어요. 당분간은 이런 상태가 계속되겠지요.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을 것과 매우 다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그만 보따리 외에는 아무 것도 소지하지 않았으며, 경황이 없었던 탓에 그 보따리마저 위트크로스까지 타고 온 마차에 그냥 두고 내렸습니다. 그러고는 무일푼으로 이 근처를 헤매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틀 밤을 한데서 자고, 인가의 처마 밑을 전전하면서 말입니다. 그 동안 먹을 것을 입에 대기란 꼭 두 번이었습니다. 굶주림과 절망과 피로로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는데 리버즈님, 당신이 굶어 죽으면 안 된다고 하시고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저는 몽매간에도 이곳 아가씨들의 지극한 보살핌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전 태산 같은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만 해 두세요, 정말 무리예요." 내가 한숨 돌리자 다이아나가 말했다. "엘리오트 양, 흥분하면 해로워요. 자 여기 앉아요, 이 소파에." "동생들은 당신 시중 들기를 좋아하는군." 하고 세인트 존이 말했다. "마치 얼어서 죽어가는 새가 바람에 밀려 창문으로 기어들어온 것을 기꺼이 돌봐 주고 아껴 주는 것처럼 말예요. 그럼 나의 할 일은 이제부터 당신에게 자활의 길을 마련해 드리는 거겠지요. 하지만, 알고 계십시오. 제 힘이 미치는 곳이라면 극히 한정되어 있습니다. 나는 일개 시골 목사일 뿐으로, 도움도 극히 미소한 것들입니다. 만약 당신이 보잘것 없는 생활 (구약 스가랴 4장 10절) 을 멸시할 셈이면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것을 찾아보셔야겠지요." "전 양재사나 침모, 또 필요하면 식모나 아이 보는 일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좋습니다." 하고 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런 결심이라면 기회 닿는 대로 내 힘껏 도와 드리겠습니다." 그는 나로 해서 중단된 독서를 시작했다. 나는 내 침대로 돌아갔다. 지금의 내 체력이 미치는 한에서는 너무 많이 이야기했고, 또 오래 일어나 있었던 것이다. 30 무아 하우스의 사람들은 사귀면 사귈수록 좋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다이아나와 메어리의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관계하였다. 이 두 사람과의 관계는 내가 처음 맛보는, 마음의 상처가 아무는 듯한 기쁨을 주었다. 취미나 감정, 사상의 일치에서 오는 즐거운 공감대가 있었다. 나는 그녀들이 흥미있어 하는 책을 읽고, 그녀들이 즐기는 것을 즐겼으며 그녀들이 인정하는 사상을 존중했다. 그들은 이 저택을 사랑했다. 낮은 지붕의 무너져 가는 벽에 들창이 있고, 노목과 회색의 오랜 건물에 강렬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저택의 대문을 나서면 사방으로 펼쳐져 있는 보라색의 무아, 그 계곡을 사랑했다. 고사리가 잔뜩 핀 둑 사이로 꼬불꼬불 나 있는 계곡이 히드가 무성한 목장 사이로 지난다. 그리고 그 목장에는 이끼처럼 부드러운 새끼들을 거느린 양떼들이 언제나 풀을 뜯고 있었다. 이러한 정경을 그녀들은 사랑했는데 그것은 각별한 애착이었다. 나는 그 기분을 알 수 있었으며 그에 못지 않게 진심으로 공감을 느꼈다. 이 지방의 특별한 매력을 나는 이해했다. 나는 그 적요에 깃든 깨끗함을 느꼈다. 집안에서도 우리는 같은 마음으로 연결돼 있었다. 그들 자매는 나보다도 교양이 높았으며 훨씬 열렬한 독서가였다. 그러나 나도 그들 수준에 부지런히 따라갔다. 나는 다이아나가 내게 도이치 어를 가르쳐 준다고 했을 때 몹시 기뻤다. 또한 그들은 내가 그림을 좋아하는 것을 알자, 그들의 연필이며 그림 도구를 내게 빌려 주었다. 이리하여 나는 즐겁고 친숙한 나날을 보냈다. 마치 몇 날은 몇 시간처럼, 그리고 몇 주일은 몇 날처럼 지나갔다. 한편, 세인트 존 씨와는 좀처럼 가까워지기 어려웠다. 그가 그다지 집에 있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교구 안에 생기는 병자나 빈민들을 찾아가는 데 시간의 대부분을 할애하였다. 그리고 그 일은 날씨가 아주 좋지 않은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또 그와 가까이하기 어려운 것으로 빨리 타인과 융화하지 못하는 무언가 마음의 구애를 느끼는 듯한 음울한 그의 성격 탓도 있었다. 흔히 저녁 무렵이면, 그는 창가에 턱을 고이고 앉아 나로서는 알지 못할 어떤 상념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 상념이 그의 마음을 물결치게 한다는 것은, 초점없는 그의 눈동자가 끊임없이 번뜩이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었다. 한 달이 지났다. 두 자매는 곧 무아 하우스를 떠나 영국 남부의 화려한 대도시에 가정 교사로 떠날 예정이었다. 세인트 존 씨는 아직 나의 일자리에 대한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나는 일자리를 찾아야 할 절박한 심정에 놓이게 되었다. 어느 날 아침, 나는 그와 단둘이 된 기회를 타서 막 물어 보려고 했을 때, 뜻밖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네. 혹시 제가 할 일을 알아보셨나 해서요." "3주일쯤 전에, 나는 당신의 할 일을 찾아, 아니 계획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곳에서 매우 즐거운 듯했고 동생들도 당신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애들이 마쉬 엔드를 떠난 연후에 이 계획을 얘기할 생각이었습니다. 동생들이 떠나면 나는 한나와 함께 모튼의 목사관으로 떠나고, 이 고옥은 문을 닫아 두겠습니다. "목사님, 그 계획하신 일거리란 제가 우물쭈물해서 놓쳐 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 그럴 염려는 없어요.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은 내 마음에 달려 있고 단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신 마음에 달렸으니까요. 다만 나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인지라, 당신에게도 그런 일자리밖에 구해 줄 수가 없군요. 내가 보기엔, 당신의 생활 환경은 세련되고, 취미도 물질보다는 정신에 있고, 당신의 교우 관계는 교양이 있는 분이라 여겨진 터라 그 일자리라는 것이 품위를 떨어뜨린다고 생각될지도 모르는 터이기에, 그러나 내 의견으로는 남을 돕는 직업은 결코 품위를 잃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내가 제공하는 일자리를 반드시 맡아 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범위가 좋은, 변화가 없는 시골의 목사직에 만족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당신도 그 일자리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겠지요. 당신의 성격은 나와 거의 비슷하니 말이오. 내용이 좀 다를지로 모르지만, 당신은 한곳에 머무를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소." "좀더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나는 재촉했다. "그럼 그 보잘것없는 일자리에 대해 말해 주지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난 자유의 몸이 되었기 때문에 모튼에는 오래 있지 않을 생각입니다. 길어야 1년 이내에 나는 이곳을 떠날 예정입니다. 그러나 있는 동안만은 이 지방의 발전과 개선에 힘을 기울여야겠지요. 3년 전에 내가 처음 여기 왔을 때, 학교는 커녕 가난한 사람들의 아이들은 발전의 희망을 모두 박탈당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우선 남자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는데 이번엔 여자들을 위한 학교를 세워야 하는 문제예요. 집도 하나 얻어 두었습니다. 그것은 선생을 위한 방 두 개가 달린 집이지요. 선생님의 급료는 1년에 30파운드로써, 그 집에는 우리 교구에서 오직 한 사람의 부호인 얼리바 씨의 외동딸인 얼리바 양이 간소한 가구도 마련해 두었습니다. 얼리바 씨는 저 골짜기에 보이는 바늘 제조 공장과 주철 공장의 주인되십니다. 또 얼리바 양은 아이들로 인해 선생님이 분주하실 것을 염려해서, 가사 일을 돌볼 아이를 고아원에서 하나 데려오겠답니다. 그 아이의 교육비나 옷값 등은 그녀가 부담합니다. 어때요, 해볼 의향이 있으신지요?" 그는 다소 성급히 내게 물었다. 아마 내게서 무뚝뚝하거나 혹은 경멸섞인 거절의 대답이 나오리라 예상했던 모양이었다. 사실 그것은 그리 탐탁한 자리는 아니었으나 나는 우선 몸을 숨길 안전한 은신처를 찾아야 했다. 또한 그것은 마땅히 몸을 돌보지 않고 뛰어야 할 일자리였다. 부유한 집의 가정 교사 자리보다는 독립된 직업이 되리라. 불명예스럽거나 쓸모 없는 일도 아니고 더욱이 정신의 타락을 뜻하는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결심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리버즈님. 힘껏 일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내가 의도하는 바를 알고 있습니까, 엘리오트 양." 하고 그는 말했다. "마을의 국민 학교는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의 아이들입니다. 기껏해야 농사꾼의 딸이나 판잣집에 사는 아이들 뿐으로 뜨개질이나, 재봉, 읽기, 습자, 산수 등등을 당신이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당신의 관심사인 교양, 정서, 취미는 어떡하지요?" "소용에 닿기까지는 잠시 미뤄 두어야겠지요." "그렇다면 당신은 맡으려는 임무에 대해 잘 알고 있겠군요?" "네, 확실히." 그러자 그는 나의 뜻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이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그럼 언제부터 착수하겠습니까?" "내일 그 집으로 가겠어요. 공부는 내주부터 시작하기로 하고......"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그는 일어나서 방 안을 이리저리 거닐었다. 그리고 걸음을 멈추더니, 나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세요, 리버즈님?" 하고 나는 물었다. "당신은 모튼에 오래 있을 것 같지가 않군요. 확실히 그렇게 보여요." "그건 또 무슨 이유예요? 말씀해 주세요." "당신의 눈이 그래요. 단조롭고 평범한 생활에 만족할 눈이 아녜요." "전 야심가가 아닌 걸요?" 야심가란 말을 듣자 그는 무척 놀랐다. "아니, 당신은 야심이란 말을 했습니까? 누가 야심을 가졌나요? 난 경험이 있습니다만, 당신이 어떻게 그것을 아셨지요?" "전 제 말을 했을 뿐인데요." "흠, 당신이 야심가가 아니라면......" 그는 말을 중단했다. "네?" "피가 끓는다고 말하고 싶었을 테지요. 다만 그런 말은 오해를 사고 기분 나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내 의도는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사랑과 연민의 정이 당신에겐 다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격으로는, 고독에 젖고 자극없는 일을 하면서 오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고 그는 더욱 어조를 높였다. "마치 하느님이 베풀어 주신 본성에 어긋나게, 내가 자기 재능을 무시하면서 이 고장에 기꺼이 안주 못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내가 얼마나 자기 모순이 심한 자일까요? 보잘것없는 운명에 이기라고 설교를 하면서도 하느님에 대한 봉사에는 초동이나 물 긷기조차도 숭고한 직분이라고 말하는 내가, 하느님에 순종하는 목사인 내가 바야흐로 정신이 뒤집힐 듯한 초조함에 쫓기다니. 어떻든 간에 성격과 주의는 반드시 일치시켜야만 하는 거예요." 그는 곧 방에서 나갔다. 나는 이 얼마 안 되는 시간에 지난 한 달보다 더 많은 그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존재는 역시 내게 있어서 수수께끼로 남았다. 다이아나와 메어리는 이 집을 떠날 날짜가 다가옴에 따라 우수에 잠기고 더욱 말수가 적어졌다. 이 이별은 세인트 존에 있어서는 몇 년이 될지, 아니 영원한 이별이 될는지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먼 곳으로 선교사가 되어 갈 결심이었기 때문에 이제 새삼 그 결심을 변경시킬 수는 없었다. 또 그의 단호한 이 결심을 뒤엎는 것은 두 동생들의 양심이 허락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결의는 기독교도로서 매우 숭고했으며 또 정당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잃고, 또 집과 오빠를 떠나 보내게 될 그들 자매에게, 다시 그들의 아저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소식이 전해졌다. 세 사람은 그 일을 매우 불행스럽게 생각했다. 아니, 아저씨가 죽은 것보다는 그 사후에 걸고 있는 기대가 무너져 버린 것이다. 안방에서 두 동생에게 그 소식이 담긴 편지를 읽어 준 리버즈 목사는 말없이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잠시 동안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다가 다이아나가 내게로 얼굴을 돌렸다. "제인, 우리들이 좀 이상스러워 뵈지?" 그녀는 말했다. "더군다나 그 분을 잃는 것엔 슬픈 빛도 없으니 우리를 냉정하다고 생각지 않아? 하지만 우린 아저씨를 본 적이 없어요. 아저씨는 어머니의 오빠인데, 아주 오래전에 그만 아버지와 의가 상하고 말았어요. 아저씨의 권유대로 투기 사업에 돈을 밀어 넣고는 그만 아버지는 고스란히 잃었거든요? 그 책임 전가 때문에 의가 상한 채로 오늘까지 이른 거예요. 그 후 아저씨는 일이 잘 돼서 2만 파운드란 재산을 만들었어요. 또 아저씨는 가족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 셋과 또 한 사람, 우리만큼 가까운 사람이 있을 뿐예요. 그런데 아저씨는 그 친척에게 모든 유산을 남긴 거예요. 아버지는 그 아저씨가 돌아가시면 속죄의 뜻으로라도 그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 줄 거라고 하셨는데, 다만 우리 앞으로는 조상(弔喪)의 반지를 세 개 살 비용으로 30기니를 주었다는 거예요. 하기야 모든 건 아저씨의 자유겠지만 그 소식은 낙심 천만이었어요. 우리는 적어도 천 파운드씩은 갖게 될 줄 알았거든요. 더군다나 오빠에게 그런 돈이 주어졌다면 얼마나 요긴하게 쓰여질까요? 대단히 유익한 사회 사업도 벌일 수 있을 텐데......" 이런 설명이 있은 후, 그 일은 우리 사이에 다시는 언급되지 않았다. 다음날, 나는 마쉬 엔드를 떠나 모튼을 향했다. 또 다음날엔 다이아나와 메어리가 멀리 떠나갔다. 1주일 후에는 리버즈 씨와 한나가 목사관으로 오고 그 고옥은 마침내 굳고 쓸쓸하게 닫혀졌다. 31 나의 집 - 겨우 내게도 집이 생겼다. 조그만 오두막집이다. 하얗게 칠해진 벽과, 마룻바닥에 모래를 깐 조그만 방과, 테이블과 의자 네 개, 괘종시계, 모두 합해 세 개의 크고 작은 접시와 델프드 산의 찻잔과 찬장이 있었다. 그 위에는 이 주방과 똑같은 크기의 침실이 있었다. 마을의 국민 학교도 곧 문을 열었다. 나의 학생은 스무 명. 그러나 이 중 읽을 줄 아는 학생은 세 명이고, 쓸 줄 알고 산수를 하는 아이는 하나도 없다. 지방 사투리가 심하고 무지, 무례, 게다가 난폭하여 손을 슬 수가 없는 아이도 있지만, 소박하고 진보하려는 기대에 불타는 아이도 있었다. 몸에 걸친 옷은 낡았지만 가문있는 집 아이들의 천성보다 농사꾼의 아이들이 못하다는 법이 없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천성 그대로의 보배, 환경이 좋은 아이들과 똑같은 그 무엇이 이들 속에도 있는 것이다. 바로 내가 할 일은 그 보배를 찾아내어 닦고 광채를 발하게 해주는 일이다. 될수록 나는 성실하고 적극적으로 학교 일을 돌보았다. 나의 말과 규칙이나 교육 방침이 다소 놀라게는 했지만 곧 그들의 우둔한 얼굴이나 촌스런 태도 속에 반응이 나타났다. 그들 대부분은 온순하고 귀여웠으며, 개중에는 아주 민감한 지혜에 눈뜬 소녀도 있었다. 또한 우수한 능력도 엿보였고, 뛰어난 천성을 지니고 있어 나는 그들에게 호의와 존경으로써 대했다. 아이들은 기꺼이 공부를 따라왔다. 단정한 몸차림으로 규칙에 벗어나지 않았다. 그들의 진보는 놀라워서 나는 행복에 겨웁기까지 했다. 또한 우수한 아이들은 나를 따랐고, 나도 그들을 사랑했다. 이미 나이가 찬 처녀도 있어서 그들은 벌써 쓰기와 읽기, 재봉도 배웠기 때문에 나는 문법이나 지리, 역사와 초보와 약간 수준 높은 바느질을 가르쳤다. 나는 그녀들에게 지식욕과 향상하려는 그들의 의지와 정신을 발견하고, 벌써 몇 차례나 그녀들의 집에서 기분 좋은 저녁을 보냈다. 나는 그녀들의 가정에서도 환대받았다. 그 진실하고 소박한 보답에 마음을 쓰기란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한 마음씀이 그들에게는 처음으로 겪는 일인 모양으로 대단히들 좋아했다. 그것은 또한 그들에게도 유익하게 작용하였다. 좋은 대접을 받으면 그런 대접에 어울리는 점잖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나는 어느덧 이 근처에서 환영받는 인물이 되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친근한 미소로 나를 대했고, 밖에 나가면 여기저기에서 인사했다. 세인트 존 씨는 개교식 날 저녁에 동생들로부터 받은 그림 도구 일체를 내게로 가지고 왔다. 그때, 나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마치 하나의 환영과 같은 아름다운 여성을 보았다. 리버즈 씨의 바로 옆에 젊고 아리따운 아가씨가 저물어가는 황혼 녘의 하늘을 배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복스럽고, 그러면서도 세련된 그녀는 리버즈의 애견인 카루로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가 베일을 뒤로 젖히면서 얼굴을 들었는데 그때의 모습은 실로 꽃다운 얼굴이었다. 알비온의 온화한 풍토가 빚어낸 그지없이 아름다운 용모란 이것이 아닐까? 오오, 무한한 매력, 탓할 곳이 없다! 그 아가씨는 단아하고도 섬세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마치 그린 것처럼 크고 까만 눈에 깊은 그늘을 주는 속눈썹과 또 눈썹은 선명했으며 매끄러운 흰 이마에 뺨은 계란형으로, 미라고 할 만한 조건은 모두 갖춰져 있는 듯했다. 그 기막힌 예술품에 나는 감탄하고, 또 찬미했다. 그녀도 역시 자연의 창조물인 것이다. "로자몬드 얼리버 양입니다." 하고 제인트 존 씨가 말했다. "리버즈 선생이 학교를 열고, 또 여자 선생님이 오셨다는 얘기를 아버지가 하시더군요. 그래서 만나 보려고 온 거예요. 모튼이 마음에 드시나요." 그녀의 말투나 태도에는 아직 어린 티가 배어 있었다. 그러나 선의에 찬 소박함이 있었다. 자연의 미와 재력을 겸비한 여성, 그녀에겐 어떤 행운의 별이 따르고 있는 걸까? "좋아질 것 같아요. 그럴 만한 이유도 있구요." "아이들은 생각하신 만큼 열심이던가요?" "네, 물론이죠." "하녀 엘리스 무드는요?" "내 말을 잘 따라 주어서 제게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저도 가끔 와서 선생님을 도와 드리겠어요." 하고 그녀는 덧붙였다. "이따금 방문하는 것은 내게 기분 전환이 될 거예요. 나는 변화 있는 생활을 좋아하니까요." 이번에 그녀는 옆에 말없이 서 있는 세인트 존 씨에게 말을 걸었다. "요즈음은 통 베일장에 안 오신다고 아버지가 그러시던데요? 오늘 밤은 아버지 혼자 계세요. 몸이 좀 불편하신 것 같던데 함께 가 뵙지 않으시겠어요?" "얼리버 선생님을 찾아보기엔 적절한 시간이 못 됩니다." 하고 세인트 존 씨가 대답했다. "적절한 시간이 못 된다구요? 어머나, 지금이야말로 아버지는 말동무가 있었으면 하실 텐데요. 공장 문이 닫히면 아버지는 볼일도 없어요. 자, 리버즈 씨, 같이 가시는 거죠? 왜 그렇게 망설이고 또 침울해 하세요?" "오늘 밤은 안 되겠습니다, 로자몬드 양.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세인트 존 씨는 마치 자동 인형처럼 말했다. 이처럼 거절하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그만이 아는 것이었다. "좋아요. 그처럼 고집하시니 이만 저는 돌아가야겠어요. 이슬도 내리고 하니, 언제까지 기다릴 수는 없는 걸요. 안녕!" 그녀가 손을 내밀자, 그는 잠깐 손을 대다가, "안녕히!" 하고 마치 메아리처럼 낮고도 공허한 목소리로 반복해 말했다. 그녀는 돌아서다가 곧 다시 되돌아왔다. "어디 편찮으신지요?" 하고 그녀는 물었다. 이 물음은 지당했다. 세인트 존의 얼굴은 그녀의 드레스처럼 창백했다. "아주 건강합니다." 하고 그는 잘라 말했다. 그러고 잠깐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집을 나섰다. 그들은 서로 다른 길을 갔다. 그녀는 두 번이나 뒤돌아보았지만, 그는 똑바로 들판을 가로질러 갔다. 타인의 고뇌와 자기 희생의 이 모습은, 타인의 고민은 아랑곳없이 자기의 고민만을 염두해 두고 있는 나의 생각을 빼앗아 가고 말았다. 다이아나 리버즈는 오빠에 대해서 '죽음처럼 굳건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은 정확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32 약속대로 얼리버 양은 종종 학교에 들렀는데 그녀는 언제나 승마 도중에 오기 때문에 제복을 입고 말을 탄 하인을 데리고, 망아지를 타고 학교의 입구로 천천히 달려오곤 하였다. 보라색의 승마복, 두 볼을 스쳐 어깨에서 물결치는 고수머리 위에 까만 비로드의 아마존 모자를 쓴 그녀의 놀랍도록 아름다운 모습은 좀처럼 다른 사람들에겐 상상이 안 가는 모습이었다. 그런 눈부신 차림으로 그녀는 흙내가 물씬한 교실로 들어와 아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녀가 오는 것은 언제나 리버즈 씨가 담당하는 교리 문답 시간으로, 이 여성 방문자의 눈은 젊은 목사님의 심장을 이미 날카롭게 꿰뚫은 모양이었다. 그는 그녀를 보지 않고서도 그의 본능은 그녀를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녀도 자기의 매력을 알고 있다. 그녀가 나가 버리면 세인트 존씨의 마음은 아마도 그녀를 뒤따라가, 전세계를 버리고라도 후회없이 그녀를 되찾아올 마음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천국에 이르는 한 가닥의 길을 그로 인해 포기하지는 않았다. 진정한 낙원으로 이르는 한 조각 희망을 그녀의 사랑과 바꾸려 하지는 않았다. 얼리버 양은 내가 숙식하는 방에도 자주 들렀다. 어느 날 그녀는 내가 그린 그림을 발견하고는 놀랍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어머나, 이걸 당신이 그렸어요? 정말 굉장해요. S거리의 제일가는 학교 선생님보다 더 잘 그렸어요. 아버지께 보여 드리고 싶어요. 제 초상화를 그려 주실 수는 없어요?" "네, 그려 드리지요." 하고 나는 대답했다. 나는 이처럼 완벽하게 아름다운 모델을 만난 것에 완전히 흥분했다. 나는 질이 좋은 두꺼운 종이를 꺼내 정성을 다해 데생을 했다. 그리고 시간이 늦었으므로 다음날에 또 와 줄 것을 부탁했다. 그녀는 내가 그림을 그린다고 부친께 전한 모양인지, 다음날에는 얼리버 씨가 딸과 함께 나를 방문했다. 키가 크고, 머리가 히끗히끗한 점잖은 사람으로 내게는 더없이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딸의 초상이 마음에 들었는지 꼭 완성시켜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일은 베일장으로 와서 하루를 천천히 지내라고 초대해 주었다. 내가 있는 동안, 로자몬드는 기분이 좋아서 떠들어댔다. 그녀의 부친은 차를 마시며, 모튼 학교에서의 나의 근무 태도를 몹시 칭찬했다. 그는 리버즈 가나 리버즈 씨에 대해서도 대단한 존경을 품고 있었다. 그처럼 훌륭하고 재능 있는 청년이 선교사로서 떠나는 것은 참 딱한 일이라고 말했다. 왜 귀중한 일생을 그곳에 버리려 하는 것인가를 그는 말했다. 그것만으로도, 로자몬드의 부친은 딸과 세인트 존과의 결혼을 방해하지 않을 생각인 것은 확실했다. 얼리버 씨는 분명 재산보다는 리버즈의 가문이나 성직을 더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11월 5일, 이날은 휴일이었다. 집안 청소를 끝내자, 나의 하녀는 1페니를 받고 좋아라고 돌아갔다. 나는 이제 오후 시간을 내 맘대로 지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몇 페이지인가 되는 도이치 어의 번역을 한 시간 동안 했다. 그리고 로자몬드 양의 초상화에 마지막 손질을 하느라 한참 정신이 팔려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나고, 곧 세인트 존 씨가 모습을 나타냈다. "휴일을 어떻게 지내시나 해서 들렀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설마 여러 가지 생각으로 우울증에 빠져 있는 건 아니겠지요? 아, 좋습니다. 그림을 그리시는 동안은 쓸쓸하지 않을 테니까. 여태껏은 잘 참았지만, 아직도 난 미덥지가 않군요. 밤에 읽으시라고 책을 한 권 가져왔어요." 그는 한 권의 시집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나는 그 '마 미온'에 정신이 팔렸다. 세인트 존 씨는 허리를 굽히면서 나의 그림을 보았다. 그러자 그의 큰 키가 놀라움으로 해서 뒤로 휘었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나의 시선을 피했지만 나는 그의 가슴속을 알았다. 분명히 그때만은 일시적이나마 내가 그보다 나은 위치에 있음을 느꼈다. 나는 그 순간, 될 수 있으면 그를 도우려고, "그 초상화 어때요? 닮았나요?" 하고 나는 주저없이 물었다. "닮다니요? 누굴 말입니까? 난 잘 보지 않아서......" "아녜요, 잘 보셨어요." 내가 갑자기 대담하게 말했기 때문에 그는 더욱 놀라 자빠질 정도였다. 나는 다시 말했다. "목사님은 꽤 천천히 보였어요. 뭣하면 한 번 더 보세요." 나는 일어나서 그림을 건넸다. "참, 잘 그렸어요. 매우 부드럽게 맑은 색채예요. 데셍도 먹 아름답고 정확하군요." "네, 말씀하신 대로예요. 그런데, 닮았지 않아요? 누군가를?" 잠시 주저하다가 마침내 그는 말했다. "얼리버 양 말입니까?" "물론이에요. 잘 맞히신 상으로 이것과 똑같은 것을 한 장 드릴까요? 갖고 싶으시다면 곧 착수해 보겠어요. 하지만 목사님께서 부질없는 짓이라고 여기신다면, 저도 시간과 정력을 소비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는 말없이 그 그림을 응시했다. 그럴수록 그는 그 그림을 갖고 싶은 욕망이 강해지는 듯했다. "꼭 같아."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눈이 살았어. 색채도 표정도 모두가! 미소짓고 있군." 확실히 로자몬드는 그를 좋아하고 있으며, 그녀의 부친도 이 결합에 이의는 없다. 그것을 아는 만큼 나는 세인트 존 씨만큼은 필사적이 못되더라도 두 사람의 결혼을 추진시키는 데 전혀 무관심할 수가 없었다. 그가 만약 얼리버 씨의 재산을 상속받는다면 굳이 먼 나라로 가서 재능을 썩힐 필요도 없다. 그 재산을 여기서 얼마든지 사회 사업을 벌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말했다. "제가 만일 목사님이라면 이 그림의 원형을 즉각 손 안에 넣겠어요." 그는 의자에 앉아 그림을 눈앞의 테이블에 놓고, 두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정신없이 보고 있었다. 그는 나의 실례되는 말에 화를 내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오히려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에 기뻐하는 눈치였다. "기분은 목사님을 좋아해요." 나는 그의 의자 뒤에 서서 말했다. "그분의 부친도 목사님을 존경하세요. 게다가 그분, 얼마나 귀여우세요? 다소 경망되기도 하지만 염려 없어요. 목사님은 두 사람 몫의 분별을 가지고 계시니까요. 두 분은 서로가 잘 어울려요." "그녀가 날 분명히 좋아합니까?" 하고 그는 물었다. "틀림없어요. 누구보다도 목사님을 따르던 걸요. 항상 목사님의 얘기만 하고 있어요. 그리고 언제나 목사님에 관한 얘기만 듣고 싶어해요."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군요. 정말 유쾌해요. 한 15분쯤 더 얘기해 주세요." 그리고 그는 시간을 재기 위하여 시계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제가 얘기할 동안 목사님께선 그걸 부인하실 건덕지나 찾으신다면, 아무리 얘기해야 헛수고예요." "호오, 대단하시군. 그렇지만 보시다시피입니다. 나는 성문을 열어 놓았고 마음도 활짝 열었습니다. 지금 나의 마음속에는 속인의 애정이 부글부글 끓고 있습니다. 나의 눈에는 베일장의 객실에서, 나의 신부인 로자몬드 얼리버 양의 발 아래 아무렇게나 누워 있는 내 모습이 보입니다. 잠깐, 아, 기다려 줘요. 내 마음은 환희로 찼고, 마치 꿈 속만 같아...... 아까 말한 시간이 올 때까지 가만히 있게 해주십시오." 나는 그의 말에 따랐다. 시계의 분침 소리와 그의 낮고도 거친 숨소리가 계속되는 동안 나는 말없이 서 있었다. 이윽고 15분이 지나자 그는 시계를 들고, 그림은 밑에 놓은 후 일어서서 난롯가로 갔다. "그런데......" 하고 그는 말했다. "착란과 망상의 짧은 시간은 지났습니다. 베개는 불꽃처럼 타고 화환 속에 독사가 있었습니다. 술은 혀끝을 마비시키는 향락의 맛, 그녀의 맹세는 거짓, 그녀의 제의는 허언인 것을 나는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알았어요."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아, 참 이상하지요. 나는 이처럼 열중했고, 첫사랑의 격정에 깊이 휘말려 그녀를 사랑하는데도 동시에 나는 분명히 의식하고 있어요 - 그녀는 내게 어울리는 아내가 아니라고. 열두 달의 꿈처럼 달콤한 꿈 다음에 얻는 것은 앞날의 긴 회한 뿐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어요." "정말 이상하군요!" 하고 나는 나도 모르게 외쳤다. 그는 상관하지 않고 계속했다. "내 마음은 한편으론 그녀의 매력을 충분히 느끼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녀의 결함이 깊이 뇌리에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녀는 도저히 내 생애의 이상에 공명할 수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로자몬드는 수난자가 될까요? 고행자가 될까요? 여사도가 될 수 있을까요?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목사님은 선교사가 안 돼도 좋잖아요? 계획을 중단하면요." "중단하다니요! 나의 천직, 그 성스러운 의무를 그만두라구요? 속박을 자유로, 미신을 종교로, 지옥의 공포를 천국의 희망으로 바꿔 주려는 그러한 맹세를 말입니까? 그것은 내 육체의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거예요. 그거야말로 내 일생 일대의 욕망인 것입니다." 잠시 침묵한 후에 나는 겨우 말했다. "그렇지만 사실 목사님도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망설이고 계시잖아요. 전보다 야위시고, 그리고 교실에 얼리버 양이 들어오면 목사님은 언제나 몸을 떨며 얼굴이 빨개져요." 다시금 그는 놀란 빛이었다. 감히 여자가 남자에게 서슴없이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당신은 기습적으로 나의 비밀을 들춰내고 마는군요." 하고 그는 말했다. "난 지금 발가벗긴 알몸뚱이 그대로 당신 수중에 들어 있습니다. 나라는 인간은 한 껍질 벗기면 상처투성입니다. 박정하고 냉혹한 한 야심가에 지나지 않아요. 모든 감정 중에서, 다만 자연의 애정만이 영구적으로 나를 지배합니다. 하지만 나를 좌우하는 것은 감정보다도 이성이지요. 나의 야심은 거의 끝이 없어요 - 남보다 한 발자국 앞서고 남보다 더 많은 것을 하고 싶은 욕망. 나는 인내와 불굴, 근면, 재능을 존중해요. 그것은 인간이 위대한 목표를 향해 전진할 수단이기도 하며 또한 나는 당신의 생존의 진로를 매우 흥미깊게 보고 있습니다. 당신은 근면한, 질서를 사랑하는 적극적인 여성의 전형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여태까지 당신이 걸어온 길에 동정을 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목사님은 자신을 이교도의 철학자처럼 표현하시는군요." "아니, 아니에요. 내겐 신앙이 있고, 난 복음을 믿지요. 또 그만큼의 나와 이교도의 철학자 사이에 있는 셈이지요." 하고 그는 계속 말했다. "1년 전, 나는 형언할 수 없는 불행으로 고통스러웠습니다. 목사직을 택한 내 자신에 회의를 느끼기도 했고 목사가 아닌 직업 - 정치가를 동경하고, 군인의 명예에 마음이 끌리기도 했어요. 명성에 눈멀어 권력에 아첨하는 속인 근성이 나라는 부목사의 하얀 법의 아래서 물결치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암흑 같은 싸움 속에서 한 가닥 빛이 보이고, 비로소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나는 마침내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 결심 이후에 나의 마음은 돌변해서, 자연 발생적인 사랑의 싹으로 박애라는 울창한 밀림을 육성하였습니다. 왜소한 자신을 위해, 권력과 명예를 바라는 욕망으로부터 주의 왕국을 넓히는 야심 - 십자가의 깃발 밑에 승리를 바라는 야심을 종교로써 형성한 것입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테이블 위에 놓인 모자를 집어 들며 다시 한 번 초상화를 보았다. "아아, 이 순수한 아름다움!"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이 세상의 장미'란 이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을 목사님께도 한 장 드릴까요?" "필요 없어요, 그게 무슨 소용이 됩니까?" 그는 그림 위에, 화면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손 밑에 깔고 그러고는 얇은 종이를 덮었다. 그 하얀 종이 위에서 새삼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게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그곳에 끌려들어, 느닷없이 그것을 들어 세밀히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의아한 얼굴로 나를 돌아다보았다. 번개처럼 빠르게 그의 시선은 내 얼굴이며 몸 구석구석을 훑어 지나갔다. 그의 입술은 말을 하려는 듯 보였으나 그는 그것을 삼켰고, 난 마침내 그 의도를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 일도 아닙니다." 짧은 대답과 함께, 그가 얇은 종이를 원위치로 돌려 놓으면서 그 끝을 아주 조금 찢어 장갑 속에 넣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는 급하게 눈 인사를 보내고는, "안녕히 계세요." 하고 사라져 갔다. 나는 종이를 살폈다. 그러나 색깔을 알아보기 위해서 붓으로 여기저기 물감을 묻혀 놓았을 뿐, 아무 곳에도 이상한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33 세인트 존 씨가 돌아간 후로 눈이 계속 내렸다. 밤새 눈보라가 휘몰아 치더니, 다음날엔 살을 에이는 듯한 지독한 눈보라가 앞을 가로막았다. 저녁까지 계속된 눈 때문에 골짜기엔 사람도 다닐 수 없었다. 나는 덧문을 내리고 밖에서부터 눈이 들이치지 못하도록 가마니로 막고는 마구 불을 지폈다. 그러고는 모든 소리를 삼켜 버리는 폭풍에 귀 기울이면서 한 시간 동안 난롯가에 앉아 있었다. 이윽고, 나는 촛불을 켜고 '마 미온'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의 운율에 어느덧 폭풍 소리를 잊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바람에 문이 흔들린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빗장이 벗겨지고 울부짖는 듯한 어두운 눈보라 속에서 뛰어들어온 것은 세인트 존 리버즈였다. 커다란 그의 몸을 감싼 외투는 고드럼처럼 하얗게 되어 있었다. 이런 밤, 더군다가 길이 막힌 골짜기를 더듬어 누가 찾아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어머나,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웬일이세요?" 하고 나는 물었다. "아니, 아무 일도 없습니다. 꽤 놀라시는군요? 제인." 하고 그는 대답했다. 그는 외투를 벗고, 걷어찬 가마니를 제자리에 돌려 놓은 후 발에 덮힌 눈을 털었다. "깨끗한 마루를 더럽혔지요? 오늘 밤만은 용서하십시오." 하고 그는 말하며 불 곁으로 다가왔다. "여기까지 오느라 혼났습니다. 눈이 허리까지 쌓였더군요. 다행이 눈이 아직도 부드러웠지만." "그런데 무슨 볼일이라도?" 하고 나는 그만 말해 버렸다. "손님한테 그런 질문을 너무하잖소. 그러나 굳이 대답하자면, 난 잠시 당신과 얘기가 하고 싶었답니다." 그는 의자에 앉았다. 나는 어제의 그의 거동이 생각나서, 어쩌면 그의 머리가 약간 돌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돌았다면, 이건 또 지나치게 침착하고 냉정한 미치광이가 아닐 수 없다. 젖은 머리의 눈을 털어 내고 하얀 얼굴을 난로에 가까이하고 있는 것을 보면, 흡사 그는 하나의 대리석 조각품 같았다. 나는 그가 이해할 만한 말을 내게 해줄까 싶어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손을 턱에, 손가락은 입에 대고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손가락이 얼굴처럼 야위어 있는 것이 내 마음을 어둡게 했다. 이야기가 하고 싶다고 말한 그는 언제까지나 입을 열 기색이 아니었다. '그럼 좋아요.'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댔다. '말하기 싫으면 그냥 그렇게 계세요. 난 책이나 계속 읽을 거예요.' 나는 촛불의 심지를 자르고 다시 책을 손에 들었다. 그러자 이윽고 그가 몸을 움직였으므로 나의 눈도 그를 따랐다. 그러나 그는 모로코 가죽의 수첩을 꺼내어, 그 속에서 편지를 찾아 묵묵히 그것을 읽었다. 그러고는 전대로 접어 넣고 다시 명상에 잠겼다. 괘종시계가 여덟 번을 울렸다. 그 소리에 그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잠깐 책을 놓고 이리 와 주세요."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의혹에 가득찬 채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당신이 꼭 들어야 할 얘기가 있소. 미리 얘기하지만 그 내용은 다소 진부한 데가 있을지도 모르오. 하지만 진부한 얘기도 새 사람의 입을 통하면 어느 정도 싱싱한 맛이 담기게 마련이오. 그런데 나중에는 참신하건 진부하건, 어쨌든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지금부터 20년 전, 어느 가난한 부목사와 문벌 있는 따님이 서로 사랑하여, 두 사람은 주위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결혼에 이르렀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채 못 되어 이 철없는 부부는 둘다 죽어 버리고, 뒤에 딸 아이를 하나 남겨 놓았습니다. 이 아이는 태어나자 곧 자선 시설에 맡겨졌는데, 자선원에서는 이 의지할 데 없는 고아를 부유한 어머니 쪽의 친척에게 보내 버렸습니다. 바로 외삼촌댁인, 이름을 밝혀도 좋겠지요 - 게이트헤드의 리드 부인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아니, 왜 놀라십니까? 그 부인은 10년 동안 이 아이를 키웠지만, 그 후엔 그 아이를 로우드 학원으로 보냈습니다. 잘 아시지요? 당신이 오래 있었다는 그 학교 말이에요. 그 학교에서 그녀 생활은 모범적이었답니다. 그래서 당신처럼 그녀도 학교에서 선생이 되었고, 그 지방을 떠나 로체스타라고 하는 사람의 보호 밑에 있는 아이의 가정 교사로 가게 된 것입니다." "목사님!" 나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당신 가문은 잘 알아요." 하고 그는 말했다. "잠깐만 참으세요, 이제 거의 끝나 가니 끝까지 들어주세요. 나는 로체스타 씨의 인간됨은 전혀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는 이 젊은 아가씨에게 정식 청혼을 했고, 드디어 결혼하려는 마당에 그 아가씨는 그에게 미친, 그러나 살아 있는 아내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마침 어떤 사건이 생겨서 그 가정 교사의 존재를 확인해야만 했을 때, 그는 비로소 그녀가 없어진 것을 알았습니다. 언제, 어디로, 어떻게 사라졌을까요? 그러나 한밤에 손필드 저택을 빠져 나간 그녀를 찾는 일은 허탕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지방에도 구석구석 수사해 봤지만 전혀 그녀의 소식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사태는 그녀를 찾아야만 하도록 진전되고 있습니다. 모든 신문에 광고가 나고, 내게도 브리그즈라는 변호사로부터 상세한 내용이 담긴 편지가 와 있습니다. 참 이상스러운 얘기지요?" "그럼, 한 가지만 가르쳐 주세요. 그토록 잘 아시니 반드시 내게 가르쳐 주실 수 있을 거예요. 로체스타 씨는요? 어디서 어떻게 하고 계신가요? 그분은 안녕히 계신가요?" "저는 로체스타 씨에 대해서는 전혀 몰라요. 지금 말한 편지에도 그에 대해선 아무 것도 씌워 있지 않아요. 그보다 오히려 그 가정 교사의 이름 - 그리고 그녀가 정체를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을 당신은 들어야 하겠지요." "그럼 손필드 저택엔 아무도 가지 않았어요? 로체스타 씨를 만난 사람은 없는 거예요?" "아마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분께 편지로 문의했겠지요." "물론입니다." "그래서 회답은 어땠습니까? 그걸 누가 가졌어요?" "브리그즈 씨에 의하면 그 편지는 부인의 필적으로 '앨리스 페어펙스'로 서명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등골이 오싹해지고 가슴이 마구 떨려 왔다. 그렇다면 내가 제일 두려워했던 일이 의심할 여지도 없이 일어난 것이다, 그는 대륙의 어딘가로 고삐 끊어진 절망의 말에 매어져 헤매 다니는 것일 게다. 극심한 고통에서 헤어날 마취제로써 그는 무엇을 구할까? 나는 차마 그 대답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가엾은 나의 주인님...... 세인트 존이 말했다. "당신 입으로 그 가정 교사의 이름을 대지 않으니, 이젠 내 입으로 말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잠깐만, 자아,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아까의 수첩을 꺼내어 조심스레 펼쳤다. 그 사이에서 급하게 찢기운 종이 조각이 나왔다. 나는 그 종이의 종류와 하늘색, 주홍색 등등의 물감 무늬로써 그것이 곧 그 뜯어낸 초상화의 커버인 것을 알았다. 그는 일어나서 그것을 내 눈앞에 내밀었다. 분명한 내 필적으로 '제인 에어' 라는 이름이 인디언 잉크로 씌어져 있었다. 아마도 그림에 정신이 팔려 무심히 내 사인을 적었던 것이리라. "브리그즈 씨는 내게 제인 에어라는 사람에 관해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당신은 이제 거짓은 버리고 당신 이름을 시인하겠지요?" "네, 네, 하지만 브리그즈 씨는 어디 계세요? 목사님보다도 로체스타 씨 일을 더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그는 런던에 있습니다. 그가 로체스타 씨의 일을 알고 있는지 어쩐지는 나는 모르겠어요.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니까요. 당신은 딴 곳으로만 흘러가서 본 이야기는 잊고 있군요. 브리그즈가 왜 당신을 찾는지, 무슨 용무가 있는지, 당신은 알고 싶지 않은가요?" "그래요, 무슨 일 때문인가요?" "당신의 아저씨인 마데이라의 에어 씨가 돌아가셨다는 것, 그가 전 재산을 당신에게 남겼기 때문에 이제 당신은 부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려는 거지요. 그 뿐 다른 일은 없습니다." "제가 부자가 됐다구요?" "네, 당신은 부자입니다. 막대한 재산의 상속자가 됐어요." 두 사람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 지금, 새로운 카드가 한 장 젖혀졌다. 빈곤의 최하 바닥으로부터 부의 절정으로 올라선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 - 정말 훤해질 만큼 - 뿐만 아니다. 말로만 들었던, 나의 오직 하나였던 혈육은 죽어 버렸다. 내게도 아저씨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후 나는 언젠가는 그를 만난다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마저 이제는 허망한 꿈이 되었고 대신에 재산이 내게 남겨졌다. 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은혜인가! 자립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좋은 일이다. 이 희망은 내 가슴을 부풀어오르게 했다. "겨우 양미간이 펴졌군요? 이번엔 당신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를 물어야지요?" "얼마나 되는데요?" "아마 2만 파운드라고 하지요. 뭐 대단하지는 않습니다." "2만 파운드라구요?" 나는 숨이 막혔다. 기껏해야 4,5천 파운드일 꺼라고 생각했었다. 내 모양을 보고, 이때껏 웃어본 일이 없는 세인트 존 씨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야말로......" 하고 그는 말했다. "당신이 만약 살인죄를 범하고, 이제 그 범죄를 폭로당했다 해도 더 이상 놀란 얼굴은 안 될 겁니다." "하지만 액수가 너무 큰 걸요. 잘못된 게 아닐까요?" "잘못은 없을 겁니다." "숫자의 잘못 말예요. 2천 파운드가......" "숫자가 아녜요. 글자로 2만 파운드라고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나는 다시 한 번, 한 사람 몫도 못 먹는 사람이 백 사람 몫의 음식이 놓여 있는 테이블 앞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리버즈 씨는 일어서서 외투를 입었다. "이렇게 눈보라가 심하지만 않다면 혼자서 쓸쓸해할 당신을 위해 한나라도 보내 줄 텐데. 멍하니 있는 당신을 혼자 두긴 안됐지만 그래도 가야겠지요. 자, 그럼 안녕히......" 그가 문고리를 잡았다. 내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나는 소리쳤다. "왜요?" "전 브리그즈 씨가 왜 목사님께 문의해 온 건지를 알고 싶어요. 브리그즈 씨는 목사님의 친지인가요? 어떻게 시골 목사님에게 그런 것을 부탁했을까요?" "하지만 난 목사예요." 그는 말했다. "때로는 묘한 일에도 관계하는 게 목사라는 직업이지요." 다시 한 번 빗장 소리가 났다. "아녜요, 그걸로는 납득할 수가 없어요!" 하고 나는 외쳤다. 사실 그 석연찮은 변명은, 나를 납득시키기보다는 오히려 호기심어린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이 얘기에서 제일 이상한 것이 바로 그 점이에요." 하고 나는 덧붙였다. "그걸 솔직히 얘기해 주세요." "후에 내가 기회를 봐서......" "안 돼요, 오늘 밤, 지금 당장 해주세요!" 나는 그가 돌아보는 틈을 타, 문을 막아 섰다. 그는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시원하게 말씀하시기 전까진 보내 드리지 않아요." 하고 나는 말했다. "지금은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해야 돼요, 지금 해주셔야 해요." "다이아나와 메어리를 통해 알려 드리면 좋을 텐데." 그러나 그의 반대는 나의 열의에 더욱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그 갈증을 덜어 달라고 나는 한사코 보채었다. "내가 좀처럼 남의 말에 굴하지 않는 고집쟁이란 걸 잘 아시잖습니까?" "그런 말로 넘어가지는 않아요. 저도 마찬가지의 여자인 걸요." "그렇다면 나는 얼음덩어리요. 어떠한 열정으로도 녹을 수는 없소." "만일, 모래를 깔아 둔 제 부엌을 더럽힌 죄에 대한 속죄의 마음이 있으시다면, 목사님은 꼭 이유를 말씀해 주셔야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항복이오. 할 수 없군."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당신 열에 녹은 게 아니고, 끈기에 항복한 거요. 빗방울은 마침내 큰 바위에 구멍을 뚫지요. 그리고 이것은 언젠가 당신도 알게 될 얘기니까. 제인 에어, 그렇지요? 당신 이름은?" "그렇지만, 그 이야기라면 벌써 끝났잖아요." "그러나 당신은 내가 당신과 같은 성이라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군요. 내가 세인트 존 에어 리버즈라는 걸." "어머나, 조금도 몰랐어요. 그러고 보니 목사님 책에 적혀 있는 이름 첫 글자가 E어요. 그런데도 나는 그 글자가 뭘 뜻하는지 전혀 의식도 하지 못한 채였군요. 그렇다면 도대체 그것은......" 말을 하다 말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가슴에 떠오른 하나의 상념, 그것이 선명한 형태로써 흔들일 수 없는 구체성을 띠어 왔지만 나는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세인트 존이 그것을 설명하기 이전에 나의 본능은 그 전말을 이미 깨달았다. "우리 어머니는 에어라는 이름입니다. 어머니에겐 두 형제가 있었는데, 목사였던 한 사람은 게이트헤드의 제인 리드와 결혼했고, 한 분은 마데이라의 아저씨 존 에어입니다. 우리는 지난 8월, 에어 씨의 변호사인 브리그즈 씨로부터 아저씨의 사망을 통지받았습니다. 그리고 아저씨가 전 재산을 아저씨의 동생의 딸인 제인 에어에게 남긴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우리 아버지와 이 아저씨는 평소에 감정이 안 좋았으므로, 아저씨는 우리를 전혀 무시한 거지요. 또 몇 주일 전에 브리그즈 씨는 행방이 묘연한 유산 상속자에 대하여 알아볼 도리가 없겠는가는 편지로 물어 왔습니다. 나는 우연히도 종이 위에 갈겨 쓴 몇 글자로 해서 그 사람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제 그만하면 다 아시겠지요." 그렇게 말하고 그는 나가 버리려고 했으나 나는 문을 막아서서 그를 보내지 않았다. "아니, 제게도 얘기를 시켜 주세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이 모자를 손에 들고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말했다. "그럼 목사님의 어머니는 제 아버지의 누님이시군요?" "그렇습니다." "그럼 제겐 고모님이구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의 아저씨 존은 목사님의 아저씨도 되고요. 목사님과 다이아나와 메어리는 존 아저씨의 여동생의 아이고, 전 존 아저씨의 남동생의 아이로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그럼 목사님 남매는 저와는 이종사촌이 되고, 우리 피의 절반씩은 같은 근본에서 나온 것이 되네요?" "그렇소, 우리는 사촌간이니까." 나는 그를 보았다. 오빠를, 이제 남에게 내세워 자랑할 수 있는 오빠를 찾아낸 것이다. 또한 내가 젖은 섬돌에 몸을 내던지고, 그 무아 하우스의 낮은 부엌 창문으로 들여다본 두 자매는 나와 핏줄이 통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현관에 쓰러져 죽어가는 나를 구해 주었던 그 위엄에 찬 젊은 신사도 결국은 나의 형제였다. 정말 의지할 데 없는 고아에게 얼마나 큰 기적인가! 이야말로 황금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 마음으로부터의 양식이 아닐 수 없다. 더없이 소중하고, 밝고 마음이 풍요해지는 애정의 원천이다. 그야말로 춤을 추며 기뻐할, 은혜로운 축복이 아닌가! 나는 예기치 않았던 이 현실에 펄쩍 뛰며 외쳤다. "아아, 기뻐요! 정말 기뻐!" 세인트 존 씨는 미소지었다. "부자가 된 사실에는 이마를 짚고, 대수롭지도 않은 일에는 기뻐 날뛰니......" "어머나, 대수롭잖다니요. 그야 목사님은 두 여동생이 있으니 사촌 따윈 아무 것도 아니겠죠. 그러나 제겐 반쪽만큼의 살붙이도 없었어요. 그런데 난데없이 세 사람의 친척이 나의 시계에 등장한 거예요. 이것이 나는 말할 수 없이 기뻐요." 나는 성급히 방 안을 서성였다. 갑자기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엇갈렸다. 나는 멈춰 서서 하얀 벽을 응시했다. 그것은 비상하는 별로 감싸인 하늘처럼 보여서 - 별의 하나하나는 나의 기쁨을 축복해 주었다. 내 생명의 은인들을 나는 오늘까지 말없이 사랑했지만, 이제 다시금 그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얻은 재산과 자립은 또한 그들의 것이기도 하다. 2만 파운드를 4등분하는 것이다. 5천 파운드, 그걸로 충분하고, 오히려 내겐 과분할 지경이다. 서로의 행복을 위해 공정히 하자. 지금 그것은 보통의 유산이 아니다 - 그것은 목숨과 기쁨의 선물인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잠겨 있는 내 모습이 어땠을지는 나도 모른다. 그러나 내 뒤로 리버즈 씨가 다가와서, "제발 침착해 줘요." 라고 말하며 나를 의자에 앉히려고 했다.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금 방 안을 서성거렸다. 이윽고 나는 입을 열었다. "날이 밝는 대로 편지를 내서, 메어리와 다이아나를 오게 해주세요. 다이아나는 언젠가 1천 파운드만 있으면 부자라고 했지요. 5천 파운드면 딱 알맞을 거예요." "당신은 너무 열에 들떴군. 내가 너무 갑작스런 말들을 해서 아마 머리가 혼돈된 것인가 보오." "리버즈님, 더 이상 저를 초조하게 만들지 마세요. 전 이성을 잃지 않았어요. 목사님이 오해하고 계신 거예요. 아니, 혹은 일부러 그러시는 건가요?" "좀더 설명해 주지 않겠소?" "무얼 말예요? 설명이 필요 있나요? 그 2만 파운드는 아저씨의 조카 넷이 공평히 분배하는 거예요. 그럼 5천 파운드씩이 되는 걸 목사님도 아시지요? 그만큼의 재산이 생겼다는 걸 여동생에게 편지로 알려 달라는 거예요." "당신에게 재산이 생겼다는 얘기겠지요?" "전 욕심꾸러기가 아녜요. 악마처럼 은혜를 모르지도 않아요. 그리고 이젠 저도 가정과 가족을 가질 거예요. 전 무아 하우스가 좋아요. 그래서 그곳에서 살 생각입니다. 게다가 사랑하는 다이아나와 메어리, 나는 이 사람들과 평생을 같이 살겠어요. 사실 2만 파운드는 법률상으로는 저의 소유겠지요. 그러나 정당하게 하기 위해 난 이 방법을 택한 거예요. 말하자면 저의 절대적인 여분을 가져 달라는 것, 더 길게 말할 것 없이 찬성하세요. 부탁이에요. 난 이미 결정했으니까요." "당신은 흥분해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심인지 어쩐지는 며칠 더 생각해 봐야 알겠지요." "아아, 목사님의 의심이 저의 성의에 대해서라면 안심이에요. 그렇다면 이 결정의 정당성은 인정하시는 거죠?" "일종의 정당성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습관에는 어긋나는 일이지요. 재산은 당신의 것이 분명하고, 자기 손으로 그 돈을 번 아저씨가 그것을 누구에게 주든 그것은 자유이니까요. 결국 그것은 당신의 것이 되었습니다." "나로서는......" 하고 나는 말했다. "이것은 양심이며 곧 감정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저의 감정에 맡기고 따라 주세요." "지금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지요." 하고 세인트 존 씨는 말했다. "당신은 재산을 갖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통 모르니 말예요. 2만 파운드는 엄청난 거지요. 그로 해서 어떤 사회적 지위가 약속될 지도 모르고, 또 장래에 어떤 운명이 전개될지도 모르지요. 거기까지는 당신도 생각지 못했겠지요. 게다가......" "그렇다면 목사님은......" 하고 나는 말을 막았다. "제가 가지고 있는 동기간에 대한 애정을 거부하려는 건가요? 여동생으로서 받아들이고, 그렇게 인정하길 꺼리시는 거예요?" "제인, 나는 기꺼이 당신의 오빠가 되겠습니다. 동생들도 언니가 되어 줄 것입니다. 당신의 정당한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조건에서." "오빠라구요? 내게서 백 리나 저만큼 계신 오빠? 언니요? 남들과 땀을 흘려 일하고 있는 언니! 동생인 나는 부자이고, 그것도 제 손으로 번 것도 아녜요. 가질 자격도 없는 나란 소유자의 주머니엔 황금이 가득하고 당신들은 무일푼의 가난. 그야말로 대단한 평등과 형제애로군요! 어쩌면 그리 부러운 애정일까요!" "하지만 제인, 당신이 원하는 그 가족적인 애정, 가정의 행복은 다른 길로도 얻을 수 있습니다. 결혼하는 거지요." "결혼요? 당치도 않은 말씀이에요. 저는 결혼하지 않겠어요. 적어도 사랑 때문에 나와 결혼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나는 자신을 금전의 투기 대상으로 삼고 싶지 않아요. 핏줄이 통하고, 깊은 공감을 가질 수 있는 사람과 가까이 살고 싶어요. 다시 한 번 저의 오빠가 되어 주신다고 말씀해 주세요. 그 말을 들으면 기쁘고 행복해지는 것 같아요. 다시 한 번 그렇게 말씀해 주세요." "나는 자신 있게 말하리다. 나는 여태껏 동생들에게 사랑으로 대해 왔소. 그만한 가치가 있는 동생들에 대한 존경, 동생들의 재능에 대한 찬미의 마음으로 둘을 사랑했소. 또한 당신도 신념과 뛰어난 두뇌가 있소. 당신의 취미며 성격은 다이아나와 메어리에 뒤지지 않소. 당신은 항상 나의 기분을 좋게 해주었소. 벌써 나는 당신과의 대화로써 몇 번이나 마음의 위안을 받았는지 모르오. 그러므로 나는 이미 세 번째의 여동생을 맞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소." "고맙습니다. 그 말만으로 오늘 밤은 매우 만족한 기분이에요. 이젠 돌아가셔도 좋아요. 더 이상 여기에 계시면, 목사님의 깊은 사려 때문에 내 가슴이 다시 답답해지니까요." "학교 일은 이제부터 어쩔 생각입니까, 미스 에어? 폐쇄합니까?" "아니에요, 후임자가 나서기까지는 계속 제가 맡아 볼 거예요." 이 대답에 그는 머리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유산에 관한 일 처리를 나의 결심대로 하기는 퍽 힘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내 주장을 한치도 꺽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산을 정당히 분배하자는 내 마음이 진실임을 인식한 그들도 내심으로 나의 의도가 옳다는 것을 느꼈으며 만약에 그들이 내 입장이었더라도 나와 꼭 같이 처리했을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사촌들은 드디어 내 뜻에 따랐다. 그리하여 드디어 조정 재판을 걸었고, 판사로 임명된 얼리바 씨와 또 한 사람의 변호사가 내 의견에 찬동함으로써 나는 겨우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양도 증명에 따라 세인트 존과 다이아나, 메어리와 나는 각각 꽤 많은 재산을 분배해 가졌다. 34 크리스마스가 되어서야 겨우 모든 일은 끝났다. 이젠 축제의 계절이다. 이곳을 이별하기란 마음 섭섭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학교를 폐쇄했다. 많은 학생들이 나를 따르고 있어서 가슴이 뭉클했다. 그들은 헤어지는 마당에도 변함없이 솔직하고 깊은 애정을 보여 주었다.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한 그들의 마음속에 내 모습이 뚜렷이 새겨진 것을 보고 나는 감격했다. 이후에도 매주 한 시간씩 수업하기로 약속해 주었다. 나는 학교 열쇠를 리버즈 씨에게 맡겼다. 그리고 목사관에 있는 한나를 데리고 무아 하우스로 가, 다이아나와 메어리를 맞을 준비를 했다. 나는 행복감에 사로잡혀 정신없이 일했다. 한나도 또한 열심히 했다. 집에는 장난감이 엎어진 듯 분주했다. 솔질을 하고, 먼지를 털고, 닦고, 요리를 하는 등 내가 쾌활하게 일하는 것을 보고 한나는 매우 좋아했다. 사실 뒤죽박죽이 된 속에서 하루하루 질서가 잡혀져 가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었다. 며칠 전 나는 가구를 구입하러 거리로 나갔다. 집안을 나의 생각대로 장식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터라 그것에 쓸 비용을 사촌 오빠가 내게 주었다. 만사는 내 생각대로인 것이다. 거실과 침실은 그대로 두었다. 다이아나와 메어리는 현대식으로 변모한 방보다는, 이전의 순수한 테이블이나 의자에 더 애착을 가지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나의 취미의 일면을 그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는 약간의 새로운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짙은 색의 새 양탄자와 새로 맞춘 커버, 거울, 화장대 위에 놓은 화장 상자 등을 주문해 왔다. 모두가 화려한 대신에 신선미가 감도는 것들이었다. 객실은 구석의 마호가니의 가구와 진홍의 커튼으로 면목을 일신했다. 마침내 목요일이 되었다. 사촌들이 도착할 날짜인 것이다. 채 어둡기 전에 부엌은 말끔히 정돈되었으며 방마다 빨갛게 불이 지펴졌다. 한나와 나는 옷을 갈아입고 기다렸다. 부엌에서 차를 마시면서 먹을 과자를 준비하고 있을 때, 첫번째로 세인트 존이 모습을 나타냈다. 난롯가로 와 서서 그는 말했다. "어때요? 집안 일엔 만족했나요?" 나는 대답 대신 집안을 손질한 솜씨를 구경해 달라고 그에게 말했다. 나는 그의 앞에 서서 한 바퀴 집안을 돌았다. 그런데 그는 방 안을 약간 들여다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짧은 시일에 이만큼 손질하느라 퍽 애썼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집안이 전보다 달라져서 새롭다거나 살맛이 있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그의 침묵에 나는 아주 실망하여 혹시나 내가 그의 옛 추억에 관한 곳을 잘못 손질하지나 않았나 싶었다. 나는 약간 풀이 죽어서 그것을 물어 보았다. "절대 그렇지 않아요. 추억거리는 모두 잘 보존되어 있군요." 하고 그는 말했다. "사실, 그 점에 대해선 칭찬해 드리고 싶어요. 이 방의 배치에 대해서도 얼마나 신경을 쓰고 시간을 소비했는지 잘 알겠군요. 그런데 그 책은 어디 있습니까?" 내가 책장을 가리키자, 그는 그것을 꺼내 가지고 창가로 가서 읽기 시작했다. 나는 갑자기 깨달았다.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좋은 남편이 될 수 없다. 그의 아내가 되는 일은 지극히 힘들 것이라고...... 나는 그의 얼리버 양에 대한 사랑의 성질을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그가 말했던 것처럼 단지 감각적인 사랑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평온한 가정 생활을 마다하는 것도 무리는 아냐. 그가 선교사가 되고자 한 것은 매우 현명한 처사였어.' 라고 나는 생각했다. "도착하셨어요! 아가씨들이 오셨어요!" 하고 안방 문을 열고 한나가 소리쳤다. 동시에 늙은 카루로가 짖어댔다. 나는 뛰어나갔다. 마부가 막 마차의 문을 여는 참이었다. 다음 순간, 나의 얼굴은 모자 챙 밑에 부드럽게 흐르는 메어리의 머리에 닿고 다이아나의 굽슬거리는 앞머리에도 닿았다. 그녀들은 즐겁게 웃으며 나와 한나에게 키스를 했다. 기뻐 날뛰는 카루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들은 안부를 묻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서릿발 같은 저녁 공기에 파랬던 그녀들의 안색은 이내 활활 타오르는 난롯불에 조금씩 녹아갔다. 마부와 한나가 짐을 나르는 동안 두 사람은 세인트 존에 대해서 물었다. 그때 마침 안방에서 그가 나왔다. 동생들은 그의 목에 매달렸다. 그는 조용히 동생들에게 키스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오느라 수고했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잠시 동생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더니, 나중에 안방에서 다시 보자면서 도망치듯이 나가 버렸다. 나는 2층으로 가기 위해 두 사람의 촛대에 불을 켰다. 두 사람은 나의 뒤를 따랐다. 그녀들은 새 커버나 양탄자, 채색이 잘된 꽃병들로 방 안이 새로워진 것을 보고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치하를 했다. 나의 실내 장식 솜씨가 그들의 취미에 맞고 나의 노동이 그녀들의 귀향에 한 가닥 색채를 더한 것을 알고 나는 만족했다. 그날 밤은 즐거웠다. 그녀들의 기쁨에 넘친 말은 세인트 존의 침묵을 보충하고도 남았다. 마음껏 우리는 대화했다. 세인트 존은 동생들과의 재회는 기뻐했지만, 그녀들의 정열, 터질 듯한 환희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그녀들의 귀향은 기뻤으면서도 그로 인한 환희의 소동이며, 어지러운 대화 같은 것에는 다소 역겨워하고 있었다. 그는 좀더 차분한 벗을 원했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티 타임이 끝나고 한 시간쯤 후, 누군가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4마일이나 떨어진 농가의 청년이 임종을 앞둔 모친을 위해 목사님을 부르러 온 것이다. 세인트 존은 아무 소리 없이 외투를 입었다. 그는 정각 아홉 시에 나갔는데 한밤중이 돼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대단히 지치고 배가 고팠던 모양이었지만, 오히려 그리고 가기 전보다 행복해 보였다. 할 바를 다했고, 노력으로써 자기를 이겨낸 데 대하여 그는 만족하고 있었다. 우리들 세 여자에게는 더없이 즐거운, 또한 세인트 존에게 무척 불쾌했던 모양인 크리스마스 주간이 끝났다. 우리들은 다시금 평화롭고 조용한, 전처럼의 규칙적인 공부 습관으로 돌아갔다. 세인트 존도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는 우리와 같은 방에서 몇 시간씩 같이 있을 때도 있었다. 메어리는 그림을 그렸다. 다이아나는 감탄스럽게도 전부터의 계획대로 백과사전의 통독에 착수했다. 나는 도이치 어에 몰두했다. 한편, 세인트 존은 그의 진로에 있어서 절대 빠뜨릴 수 없는 동양의 언어를 배우고 있었다. 어느 날 오후 나는 쉬르레드를 읽고 세인트 존은 까다로워 보이는 동양의 책을 읽고 있었는데, 문득 내가 그의 쪽을 바라다보니 그의 푸른 눈이 나를 가만히 주시하고 있었다. 얼마 동안이나 그는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일까? "제인, 뭘 하고 있소?" "도이치 어 공부예요." "그런 건 집어치우고, 제인, 인도 어 공부를 해주지 않겠소?" "진심으로 그런 말씀을 하는 게 아니죠?" "진심입니다. 꼭 그렇게 해줘요. 이유는......" 그는 설명했다. 인도 어는 공부해 나갈수록 자꾸 앞 부분의 기억이 흐려지기만 한다. 그래서 기초가 되는 부분을 되풀이해서 머리에 넣도록 공부하려면 학생을 두는 편이 좋다. 학생을 동생으로 하지 않고 나로 정한 것은, 그 셋 중에 내가 제일 인내심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부탁을 들어 줄까? 그의 출발까지는 앞으로 석달도 채 못 되니, 만일 희생을 감수한대도 그다지 오랜 시일은 아니다. 세인트 존은 그리 간단하게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고통이나 즐거움이나 그의 가슴에 새겨지기만 하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승낙했다. 나는 그가 극히 인내력이 있고 관대하면서도 엄한 선생인 것을 깨달았다. 그는 내게서 많은 학습 성과를 기대했다. 그리고 내가 그 기대에 보답하면 그의 독특한 표현으로 칭찬을 해주었다. 그는 점점 내 마음의 자유까지도 침범하여 어떤 권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의 칭찬과 주시는 냉담한 무시보다도 더 괴로웠다.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의 불안이 나를 병들게 하여 나는 일순간에 행복을 빼앗긴 것만 같았다. 아마도 사람들은 내가 이같은 환경과 운명의 변화로써, 로체스타 씨에 대한 일을 잊어버렸는가도 의심스러워할 것이다. 유산 문제로 브리그즈 씨와 서신 왕래를 했을 때, 나는 로체스타 씨에 대하여 이모저모를 물었으나 그는 아무 것도 알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페어펙스 부인에게로 편지를 내었으나 2주일이 지나도록 회답이 없었다. 두 달이 지날 때까지 회답이 없자 나의 놀라움은 심한 불안감으로 바뀌었다. 나는 다시 한 번 편지를 썼다. 역시 무소식인 채로 반 년의 세월이 흘렀다. 희망은 마침내 빛을 잃었고 나의 세계는 온통 암흑이었다. 나의 주변이 아름다운 봄으로 채색되었어도 나는 그것을 즐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세인트 존은 인도 어를 더욱 열심히 해주도록 요구했고, 하루바삐 그것을 통달하도록 재촉했다. 나는 백치처럼 그의 말을 따를 뿐 반대할 만한 기력조차도 잃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음울한 기분으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뼈를 깎는 것 같은 절망이 나의 온몸을 차지하였다. 그날 아침, 한나가 내게 편지가 왔다고 알려 주었다. 나는 목을 길게 뽑고 기다리던 편지인가 싶어, 바쁘게 그것을 가지러 갔다. 그러나 그것은 사무적인 내용이 담겼을 뿐 브리그즈 씨로부터의 편지였다. 나는 너무나도 기대에 어긋나자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인도의 사자생(寫字生)이 쓴 글씨며, 갈겨 쓴 장식 문자의 비유 반대말 같은 것을 보고 있는 동안에 다시금 눈물이 흘렀다. 세인트 존이 다가와서 소리내어 읽으라고 말했다. 나는 읽으려 했지만 목소리는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다이아나는 응접실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었고, 메어리는 화단을 가꾸고 있었고, 안방에는 그와 나, 둘 뿐이다. 하늘은 끝없이 맑고, 햇빛도 찬란한 5월의 아름다운 하루. 존은 내 눈물을 보고도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고, 왜 우는지 묻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짧게 말했다. "제인,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좀 쉬어요." 얼마 후에 겨우 내가 울음을 그치자, 그는 뜻하지 않은 말을 했다. "제인, 나와 함께 산보하겠소?" "그럼, 다이아나와 메어리를 부를께요." "아니, 오늘은 우리 둘이만 갑시다. 준비하고 부엌문으로 나와요. 마쉬 글렌의 둑으로 가면 내 곧 뒤따라가겠소." 10분 후, 우리 둘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험한 골짜기의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오솔길을 벗어나면 아름다운 에메랄드 잔디 위에 별처럼 숱한 꽃들이 노란빛으로 펼쳐져 있었다. 골짜기는 오를수록 그곳에 솟아 있는 산의 중심부로 꼬불거리며 우리를 이끌어 가는 듯했다. "여기서 쉽시다." 산골짜기를 수비하는 일단의 병사와도 같은 바위 무더기 중, 유난히 솟아 있는 바위의 그늘 아래에서 그가 말했다. 바위 저쪽에는 골짜기가 한데 모여 폭포가 되어 낙하하고 있었다. 마치 온갖 산속의 고요가 응결되어진 양 산은 고독의 방패에 가려져 침묵의 집안을 사수하는 것같아 보였다. 나는 앉았고 세인트 존은 서 있었다. 그는 오솔길을 쳐다보고 또 골짜기를 굽어보며, 마치 이곳의 산령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눈은 이별을 고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나는 다시 한 번 만나게 되리라." 하고 그는 이어서 말했다. "갠지즈 강가의 꿈속에서, 더욱 먼 미래에 다시 만나리 - 우리에게 또 하나의 잠이 어두운 강변에 이 눈을 감게 했을 때!" 이상한 사람의 이상한 말! 조국 산하에 던지는 준열한 애국자의 사랑의 말! 그는 앉았다. 그리고 반 시간 동안이나 서로 말없이 있었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제인, 6주 내에 나는 출발합니다. 6월 20일에 떠나는 동인도 항로의 선실을 예약해 두었어요." "하느님이 보호하실 거예요. 목사님은 하느님의 일을 하시니까요."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렇지." 하고 그는 말했다. "그곳에 나의 환희와 영광이 있소. 나는 절대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신의 종이오. 나의 동무들이 다같이 이 깃발 아래 모여서 같은 계획에 참가하지 않는 게 나는 참 이상하오. 왜 그들은 정열에 불을 피우지 않을까?" "목사님 같은 힘은 누구에게나 있는 게 아니에요. 강한 자와 함께 약자가 행군하는 것 또한 어리석지요." "나는 약자의 말은 하지 않아요. 그들의 일은 생각지도 않아요. 오직 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힘과 인내를 가진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답니다." "그럼 그 임무에 적당한 사람들의 마음에 직접 물어야 할 일이지요." 세인트 존이 물었다. "그럼 제인, 당신의 마음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내 마음은 벙어리예요. 벙어리처럼 말이 없어요." 나는 놀랍고 섬뜩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당신의 마음을 대신해 내가 말해야겠군." 하고 분명하고 냉정한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 "제인, 나와 함께 인도로 갑시다. 나의 조수며 협조자, 즉 당신은 전도자의 아내가 되는 거예요." 순식간에 언덕이 높이 솟아올랐고 골짜기도 대지도 빙글빙글 도는 듯했다. 오오, 그것은 하늘로부터의 목소리인가? "세인트 존! 아아, 용서하세요, 나는 아무 자격이 없어요. 신은 절 부르지 않아요." 하고 나는 소리쳤다. 이쯤의 반격은 있으리라고 예상한 것인지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에, "제인, 겸손의 미덕은......" 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기독교도의 신앙의 근본인 것입니다. 그 신성한 임무를 감당 못하리라고 당신이 말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럼 누가 그 임무를 대신하겠소? 또 일찍이 그 부름을 받은 사람으로서 누가 그것을 충분히 수행했다고 자부할 수 있겠소? 자, 들어 봐요. 처음부터 나는 줄곧 당신을 관찰했소. 재능과 수완으로써 학생들을 장악하고, 또 그들의 존경을 받았소. 그리고 벼락 부자가 되었다는 소식에도 당신은 흔들리지 않았소. 금전도 아마 당신 앞에서는 권력을 잃었소. 당신은 재산을 4등분해서 그 한몫을 받았을 뿐이오. 그 정의에 따른 단호한 처사 속에서, 나는 당신이 희생을 위해 몸을 던지는 정열을 가진 것을 알았소. 또 당신은 나의 청을 받아들여 좋아하는 공부마저 버리고 내 연구에 함께 몰두해 주었소. 그때 순종의 미덕으로써 일관하여 어려운 고비를 넘기는 한결같은 끈기, 불굴의 정신, 그것이야말로 내가 찾고 동경하였던 것이오. 그것이야말로 나의 결함을 완전히 보충하고도 남을 것이오. 제인, 당신은 강직하고 충실하고 굳센 마음과 욕심이 없는 마음을 지녔소. 자신에 대한 불신은 버려요. 나는 진심으로 당신을 믿습니다. 인도 학교의 교사로서, 또한 인도 부인의 구원자로서, 당신의 협조는 내게 막대하고도 귀중한 힘을 주게 될 거요." 철의 장막은 온몸을 억죈다. 나를 함락시킬 말이 서서히, 그러나 확고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15분간의 여유를 구했다. "좋아요." 하고 그는 대답했다. 그는 일어나 오솔길의 끝으로 가서는 히드가 우거진 숲속에 몸을 던져 드러누웠다. '과연 나는 그의 일에 협력할 수 있을까? 그것은 확실하니까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만일 목숨만 부지된다면.'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인도의 뜨거운 태양 아래선 오래 살지도 못하겠지.' 그는 아마도 그런 것은 생각지 않았을 거야. 내가 죽음에 이르면, 그는 침착하고 성직자다운 태도로 나를 신의 앞으로 보낼 것이다. 뻔한 일이야. 영국을 버린다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그러면서 허망한 고국을 버린다는 것이다. 로체스타 씨는 이미 여기에 없으니. 그러나 만일 있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내게 무슨 소용이 될까? 나의 일은 그분 없이 해나갈 일이다. 잃어버린 보람을 찾아 새 출발을 할 일이란 영광에 찬 사람에게나 주어지는 일이 아니라면 신이 명하시는 일이 아닐까? 사랑을 짓밟히고 희망을 빼앗긴 자의 공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가장 적절한 일이 아닐까? 과연 '네.' 라고 대답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몸이 떨린다. 인도에 간다는 것은 나의 죽음을 재촉하는 듯한 앞일이 내 눈에 환히 내다보인다. 나는 손발이 닳도록 죽어라고 일함으로써 세인트 존을 만족시킬 것이다. 그는 절대로 날 사랑하지 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생각도 못했던 나의 정력과 재능을 칭찬할 것이다. 옳아! 나도 그처럼 몸을 돌보지 않고 일할 수는 있다. 그것으로써 그의 요구에 응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하나의 조건, 애정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 그의 아내가 되길 내게 요구하는 실로 무서운 조건이 있다. 그의 모든 사랑의 표현은 모두가 주위를 위해서 지불되는 희생의 일종이라는 의식을 내가 견딜 수가 있을까? 아니 그럴 수 없다. 그런 순교는 언어 도단이야. 절대로 그런 고난은 견디지 못해. 단, 아내가 아니고 여동생으로서라면 그와 함께 가도 좋다. 나는 언덕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일어나서 내게로 걸어왔다. "언제까지나 제가 자유의 몸이라면 함께 인도로 가겠습니다." "그 말은 석연치 않군요. 설명해 주시오." 하고 그는 말했다. "오늘까지 목사님은 제 사촌 오빠였고, 전 동생이었어요. 앞으로도 그러고 싶어요. 목사님과 전 결혼하지 않는 게 좋아요."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당신이 친동생이라면 문제가 있지만 그렇지가 않으니 우리는 결혼으로써 신성하고 견고한 결합을 해야 하오. 달리는 할 수 없어. 나는 협력자가 필요하오. 형제 아닌 아내로서, 내가 이 세상에서 지배할 수 있고 또 죽기까지 절대로 내 곁에서 떠나지 않을 유일한 협력자가 말이오!" 그의 말에 나는 소름이 끼쳤다. 뼛속까지 그의 억센 힘이 스며들어 손발이 가차없이 그에게 붙들린 것만 같았다. "저 말고 다른 분을 찾아 주세요, 목사님께 가장 적합한......" "그건 안 되오. 당신은 나와 함께 가겠다고 말했소. 잊지 말아요, 그 말을." "조건부로......" "좋아요, 근본적으로는 나와 같이 영국을 출발할 것이고 그 후의 일에 협력한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을 테니." "목사님이 바라신다면 저는 저의 활동력의 전부를 바치겠습니다. 목사님은 나 자신을 요구하는 건 아니잖아요." "아니, 그럴 순 없어요. 신은 반쪼가리의 제물로는 만족하지 않아요. 나는 신의 대리로서 몸과 마음이 제각기인 제물은 받을 수 없소. 신은 완전한 것을 원할 뿐이오." "아아, 신께 온 마음을 바치겠어요." 하고 나는 애원했다. "목사님껜 내 마음이 필요한 게 아녜요." 이 말의 어조와 그에 따른 감정에는 다소 비아냥거리는 빛이 스몄는지도 몰랐다. 나는 세인트 존이 두려웠던 것이다. 어디까지가 성인이고, 어디까지가 보통 사람인지 가늠할 수 없었던 내가, 이러한 말을 주고받는 동안에 그것을 표면으로 내다볼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성격의 진면목이 내 눈앞에 너무나 선명히 떠올랐다. 그는 과오를 범하기 쉬운 인물이다.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콧날이 선 그의 얼굴을 보면서, 나와 다름없는 불완전한 한 사나이가 내 발 밑에 앉아 있다고 의식했다. 준엄한 전제군주의 얼굴을 가지고 있던 베일은 벗겨졌다. 그의 내부에도 살아 있을 그러한 성격, 역시 그도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점에서 나는 용기를 내었다. 그는 나와 대등한 인간일 뿐이니 서로 의견이 대립한다 해서 나쁠 것은 없다. 나는 내가 정당하다는 것을 주장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나의 말이 끝날 때까지 그가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마음을 다져먹고 그를 쳐다봤다. 나는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는 놀랍고 의아한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어찌된 것일까? 나를 보고 비꼬는 것일까?' 하고 그 눈은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위엄에 찬 경직된 얼굴과 답답한 눈빛, 신중함으로써 빛나고는 있지만 결코 애정이 담겨 있지 않은 눈, 나는 늘씬한 그의 풍채를 보았다. 그리고 그의 아내가 된 나를 그려 보았다. 아아, 그러나 그것은 그의 부목사나 동료로서가 아니라면 절대 견딜 수 없다! 그의 몸을 등분해서, 기독교인 반신에게는 경의를 표하고 그렇지 않은 반신에는 눈을 감을 수도 있다. 나의 몸은 분명 쇠사슬에 매달리겠지만 그래도 영혼만은 안전할 테니. 그러나 만일 그의 아내가 된다면 항상 긴장된 마음으로 짐을 벗지 못하고, 타고난 정열에도 불도 붙이지 못한 채 다만 눈물 뿐, 일조차 허용되지 않으리라. 아아, 그런 일을 어찌 감당할 수 있으랴. "세인트 존." 여기까지 생각되자 나는 그를 불렀다. "네." 그는 쌀쌀하게 대답했다. "되풀이합니다만 저는 목사님 전도의 벗으로라면 기꺼이 따라 가겠습니다. 그러나 결혼은 안 돼요. 저는 목사님의 반신은 될 수 없어요." "아니, 당신은 나의 반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잖으면 모든 계획은 무효예요. 우리 둘이 가는 길에는 장애가 있어요. 그것을 타개해야만 하오. 당신이 나와 결혼해서 후회할 일이란 생기지 않을 거요. 그러니 믿고 나와 결혼해 주시오. 그러고 일단 결혼한 후에는 반드시 커다란 사랑이 싹틀 거라고 믿어요." "그런 사랑에 대한 목사님의 생각을 저는 경멸합니다." 일어나서 바위에 기대어 그의 앞에 섰을 때, 나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목사님이 약속하신 그러한 애정을 저는 경멸해요. 세인트 존! 그런 애정을 주신다는 목사님을 저는 경멸해요!" 그는 뚫어져라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아플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화가 난 것인지, 놀란 것인지, 또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자기 표정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으니까. "당신에게서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정말 몰랐군." 그는 말했다. "경멸받을 만한 말과 행동 같은 것을 나는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의 부드러운 어조는 내 가슴을 메이게 하고, 그 위품 있는 거동은 나를 위압했다. "용서해 주세요, 그만 실례되는 말을 해 버렸어요. 하지만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을 하게 한 건 목사님의 잘못이에요. 누구나가 성격이 서로 다르니만큼 생각 또한 다른 법인데, 목사님께서 언급해서는 안 될 문제를 말씀하셨으니까요." "지금은 이만 해 둡시다. 나는 내일 캠브리지로 출발합니다. 그곳의 친구들에게도 작별 인사를 해야 되기 때문에 한 2주일간 집을 비우게 될 거요. 그 동안 내가 말한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 줘요. 만일 그때도 같은 생각이라면 그것은 내게 대한 게 아니고 신께 대한 거절이라는 걸 염두에 두고......" 함께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그의 마음이 지금 나에 대해 어떤 기분일지를 잘 알았다. 당연히 복종하리라 여겼는데 뜻밖의 반항에 부딪친 전제 군주의 실망! 결국 그 한 사람의 사나이로서, 억지로라도 내가 굴복하기를 강요하려던 것이었다. 나의 고집은 끈질기게 맞서 앞으로도 더 생각해 보라는 오랜 여유를 준 것은 그나마 그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까닭이다. 35 그러나 그는 다음날 캠브리지로 떠나지 않았다. 그는 출발을 1주일 연기하고 그 동안 자기를 화나게 한 사람에 대해서 선량하긴 하나 엄격한, 양심적이면서도 단호한 소신을 굽히지 않는 남자가 어떤 것인지를 내게 보여 주었다. 적의가 있는 행동이나 말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지만, 그러면서도 눈 한번 깜박이는 사이에도 내가 눈 밖에 난 것을 나에게 인식시켜려고 했다. 그는 내가 자기를 경멸한다는 것을 용서했지만 그 말은 잊지 않았다. 그는 나와 이야기하길 꺼리지도 않았고, 오히려 종전대로 아침 공부를 하자고 자기 책상으로 나를 불렀다. 이러한 것은 내게 의지력을 요구하는 끈질긴 고통이었다. 그것은 타는듯한 노여움과 격한 슬픔과 고뇌를 누적시켜 나를 괴롭혔다. 그리하여 공부하고 있는 책상에 눈물을 떨구기도 했지만 그는 거기에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았다. 한편, 그는 친동생들에게는 더욱 친절하게 대함으로써, 마치 내가 따돌림을 당해 벌을 받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려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악의에서가 아니고 그의 사상이 그러한 것을 나는 잘 알았다. 출발 전날 밤, 그가 정원을 산책하고 있는 것을 본 나는, 비록 지금 그는 쌀쌀하게 굴지만 내 친척이고, 내 목숨을 구해 주기도 한 장본인이라는 것을 상기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그와의 우정을 되찾고자 나는 밖으로 나가 쪽문에 기대어 서있는 그에게 다가갔다. "세인트 존, 저는 슬퍼요. 아직 제게 화를 내고 계시니. 사이좋게 해요." "사이좋게 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조금도 마음을 열지 않고 그가 말했다. 그는 나를 의식하지 않는 듯 여전히 달이 뜨는 광경에 눈을 주고 있었다. "우린 이렇게 헤어져야 하나요, 세인트 존? 인도로 떠나실 때까지 이렇게 쌀쌀하게만 대하실 거예요?" "우리가 헤어진다고? 아니, 당신은 인도에 가는 게 아닌가?" "목사님과 결혼해야 한다면 저는 가지 않아요." "그럼, 당신은 나와 결혼하지 않을 생각이란 말이오? 언제까지나 그 고집을 부릴 참이오." 오오, 냉혹한 사람들이 그 칼날 같은 반문 속에 숨겨진 잔인성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누가 알 것인가? 그 노여움 속에는 마치 눈사태처럼 밀려오는 적의가 그 불쾌 속에 얼어붙은 바다조차 부숴 버릴 증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그 누가 알 것인가! "네, 세인트 존. 목사님과 결혼하지 않겠다는 저의 결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약속도 무시하고 끝내 인도로 가지 않겠다는 거군요? 그래요, 제인?" 오랜 침묵 끝에 그는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약속도 한 바 없으며 또한 아무런 계약도 맺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한 말들은 지금 너무도 엄격하게 이기적인 것이다. 나는 말했다. "인도에 모르는 사람과 함께 갈 의무는 없는 거지요. 하지만 나는 목사님을 흠모하고, 신뢰하고, 또한 동생으로서 사랑했기 때문에 함께 갈 생각이었습니다." "알겠소. 당신은 자기 몸을 염려했군." 하고 그는 입술을 실룩거리며 말했다. "네, 맞아요. 신은 목숨을 휴지처럼 여기라고 하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목사님이 시킨 대로 따르는 일은 마치 자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영국을 떠날 결심을 하기 전에 떠나는 것보다 머물러 있는 게 낫지 않은지를 더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그건 또 무슨 뜻이오?" "설명해 봐야 소용이 없지요. 그러나 한 가지만 말씀드리면, 제가 오래전부터 괴롭게 생각하고 있는 일에 대해, 어떻게 해서라도 의문을 풀기 전엔 아무 곳도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지 아는 압니다. 당신의 관심은 법에 어긋나며 신의 눈에는 신성한 것이 못됩니다. 오래전부터 당신은 그것을 알아야 했는데, 아직도 미련을 가졌다는 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당신은 로체스타 씨 일을 생각하는 거지요?" 그렇다. 나는 침묵으로써 긍정했다. "당신은 꼭 로체스타 씨를 찾을 마음입니까?" "그분이 어떻게 되었는지 저는 꼭 알아야겠어요." "그렇다면 나로서는 당신을 내 기도 속에서 생각할 밖예요. 그리고 진심으로 당신이 완전히 버림받은 인간이 되지 않기를 하느님께 기원할 뿐이오. 나는 당신이 신의 선택을 받은 인간이라는 것을 믿어 왔었소. 그러나 신은 인간의 눈과는 역시 달랐소. 하느님의 뜻은 이루어지리다." 라는 말을 던진 채 그는 쪽문으로 나가 골짜기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안방에 들어가자,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다이아나가 나의 어깨에 손을 얹고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나보다 훨씬 키가 컸다. "제인." 하고 그녀는 말했다. "세인트 존과 무슨 일이 있지? 훨씬 전부터 묻고 싶었지만 도무지 짐작이 안 가. 오빠는 보통 사람이 아니란 말야. 하지만 왜 그는 제인과 둘이서만 있으려고 하고, 늘 곁에 잡아두려 할까? 메어리와 나는 오빠가 제인과의 결혼을 원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래요. 내가 그의 아내가 되기를 바라고 계세요." 다이아나는 기쁜 듯이 손뼉을 쳤다. "역시 우리가 희망한 대로야. 그럼 제인, 결혼하는 거야? 그렇게 되면 세인트 존도 영국에서 살 거 아냐?" "어림도 없어요, 다이아나. 나더러 결혼하자는 건, 인도에서의 괴로운 일을 함께 할 협력자로서 필요할 뿐이예요." "어머, 기막혀라!" 그녀는 소리쳤다. "그 나라에 가면 제인은 석 달도 못 살아요. 그건 분명해. 가면 안돼! 간다고 승낙했나, 제인?" "나는 결혼은 싫다고 했어요." "그래서 오빠는 화를 냈어요?" "네, 대단히, 다시는 날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런 건 제정신이 아냐. 오빠의 구혼에 거절한 것은 참 잘했어요. 그렇다면 제인은 오빠를 사랑하고 있지 않은 거야?" "네, 남편으로서는." "그래도 오빠는 미남인 걸." "그러나 난 보는 바와 같이 못난이잖아요. 게다가 오빠는 털끝만큼도 날 사랑하지 않아요." "오빠가 제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어떻게 알지?" "그건 그의 말을 통해서지요. 그가 배우자를 원하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내 직무라고 몇 번이고 설명했어요. 나를 사랑으로써가 아닌 같이 일할 수 있는 여자로라고. 물론 그건 그래요. 하지만 내 이치대로라면, 사랑하는 것에 적합치 않다면 그것은 결혼하는 것에도 적합치 않은 거예요. 안 그래요, 다이아나? 상대방을 도구로밖에 생각지 않는 남자와 일생을 같이 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조차 없는 끔찍한 일이잖아요." "물론이야. 부자연스러운 일이야, 인정할 수 없어." "그러나 그분은 자신의 커다란 목적만 염두에 두고 계세요. 그 때문에 약하고 보잘것없는 것들의 감정이나 요구에는 동정이 없지요. 그러니 약자는 그분이 걷는 길 위에서 짓밟히지 않도록 가까이하지 않을 일이지요. 어머, 돌아오셨어. 난 저리 가겠어요." 그러나 저녁 식사 때, 나는 또 그와 얼굴을 마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그는 다른 때와 별다른 것 같지 않았다. 그는 내게 느꼈을 마음속의 분노를 신의 가호로 가라앉힌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나를 용서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는 묵시록의 제 21양을 저녁 기도 전의 성경 봉독으로 택했다. "이기는 자는 이것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희 하느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니,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와 불신하는 자와...... 등등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잠기라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니라." 이 구절은 이상한 전율을 느끼게 했다. 그 어조가 약간 변했기 때문에, 그 구절을 말할 때 그의 눈이 내게 향해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다음의 기도 때에도 그의 온 정신력이 기울어져서 그의 장렬한 열성이 눈뜨게 되었다. 그는 깊은 마음으로 정복하려는 마음을 굳게 하려고 기도했다. 마음 약한 자에게 힘을, 우리를 잃은 양에게 인도를, 이 현세와 육체의 유혹이 좁은 문에서 불러들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최후의 일각 안에 돌아오기를 기구했다. 나는 이 기도를 하는 그의 열성에 매우 놀랐다. 그것은 약해지기는 커녕 점점 더 강해져서 나는 감동하고 마침내는 두렵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는 자기 목적의 위대함과 선함을 진심으로 느끼고 있으며, 목적을 호소하는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이 들고 만다. 내일은 그가 일찍 출발하기로 되어 있으므로 기도가 끝나자 우리는 바로 헤어졌다. 다이아나와 메어리는 그에게 키스하고 방을 나갔다 - 내 생각에는 그가 낮은 소리로 그런 암시를 준 것이리라. 나는 손을 내밀어 즐거운 항해를 바란다고 악수를 했다. "고맙소, 제인. 그 동안 당신도 생각할 여유를 가지구려. 만일 내가 인간적인 자존심을 생각한다면 결혼 문제에 대해선 다시 말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나는 나의 임무에 귀기울이고, 나의 첫째 사업인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행한다는 목표를 잃지 않기로 하고 있소. 주는 오랜 고난을 이기셨소. 나도 그럴 작정이오." 이 마지막 말을 했을 때 그의 표정은 자기 여인을 대한 것이 아니라 마치 길 잃은 양을 불러들일 때의 목사의 눈빛이었다. 재능이 있는 인물은 숭고한 순간을 가지는 법이다. 그때 그들은 다른 사람을 정복하고 지배한다. 나는 그에 대한 존경을 느꼈다. 그 존경심을 너무도 커서, 그 힘에 의해 지금까지 피해오던 쪽으로 순식간에 되밀려 갔다. 거절은 어느새 잊혀졌고 공포가 조각 나고 저항하던 힘이 마비되었다. 불가능이라 생각했던 세인트 존과 나와의 결혼이 갑자기 가능으로 탈바꿈하려 했다. 돌풍 후 모든 것이 일변하듯, 종교가 부르고, 천사가 손짓하고, 신이 명하였다 - 생명은 한 권의 그림 동화처럼 말려 버리고 - 죽음의 문이 열려, 그 안쪽의 영원이 들여다보였다. 저 세상의 안정과 축복을 위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단시간에 희생되어도 좋으리라. 어두운 방에는 온갖 환영이 들어차 있다. "지금 결정할 수 있습니까?" 선교사는 물었다. 부드러운 어조로. 그는 다정하게 나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오오, 이 다정함! 그것은 폭력보다 더욱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한 가지만 확인할 수 있다면 결심할 수 있어요." 하고 나는 말했다. "말하자만 목사님과의 결혼이 신의 뜻이란 확신만 있다면 지금 여기서 결혼을 맹세할 수 있어요. 나중 일은 어떻든간에." "나의 기도는 이루어졌소!" 세인트 존은 소리쳤다. 마치 나를 차지한 듯이 그는 나의 머리 위에 힘있게 손을 얹었다. 거의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팔로 나를 감았다. 그것은 '거의'였다. 나는 그 차이를 안다. 사랑을 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나는 이미 느낀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도 그와 마찬가지로, 사랑의 문제보다는 의무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간절히 내가 옳은 일만을 하기 원했다. "아아, 나아갈 바를 가르쳐 주세요,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나는 하늘을 우러러 애원했다. 이처럼 전에 없이 마음이 흥분했던 때문이었을까? 의미 심장한 일이 일어났다. 집안이 아주 고요했다. 세인트 존과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이미 침실에 들어갔으리라. 한 자루 촛불만이 꺼질 듯 깜박이고 있었다. 방 안에는 달빛이 가득 찼고, 나의 심장은 격렬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그 고동 소리가 내게 들려오는 듯하더니 갑자기 그 심장이 뚝하고 형언할 수 없는 이상한 감각에 꿰뚫리는가 싶은 그 순간 어떤 전율이 전신에 퍼졌다. "무엇을 들었나요? 뭘 봤습니까?" 세인트 존이 물었다. 나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어디선가 부르짖는 듯한 목소리를 들었다. '제인! 제인!' 하는 소리를...... "오오, 하느님, 저것이 무엇일까요?" 나는 허덕였다. 나는 저것은 '어디일까요?' 하고 물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허공에서도, 지하에서도 아닌 것이다. 분명히 들었으나 어디서, 또한 어디로부터인지를 영원히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내가 잘 기억하는, 내가 그토록 사랑한 목소리, 바로 에드워드 페어펙스 로체스타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괴로움과 슬픔에 미친 요귀처럼 가슴을 찢을 듯이 부르고 있었다. "가겠어요!" 나는 소리쳤다. "기다리세요! 곧 가겠어요!" 나는 문께로 달려가 복도를 내다보았다. 어두웠다. 마당으로 달려나갔다. 아무도 없었다. "어디 계세요?" 나는 소리쳤다. 마쉬 글렌의 골짜기 이쪽 저쪽에서 메아리가 대답했다. "어디 계세요?" "사라져라, 미신! 이것은 너의 미신이 아니다. 너의 마술도 아니고, 자연의 짓이야. 자연이 눈을 떠서, 기적이 아닌 그녀의 최선이 다해진 것이다." 나는 세인트 존이 뒤따라와서 붙잡으려는 것을 뿌리쳤다. 이번에는 내가 위에 설 차례다. 나의 힘이 움직여서 마침내 발휘되었다. 나는 그에게 아무 것도 묻지 말아 달라고 했다. 내 곁을 떠나 달라고 말했다. 나는 혼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곧 내 말을 따랐다. 나는 2층의 내 방으로 돌아와 방문을 잠그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세인트 존과는 다른 기도였으나 그런 대로 효력은 있었다. 나는 성지의 아주 근처에까지 도달한 것에 만족하여 나의 영혼은 신의 발 아래 감사를 올렸다. 감사의 기도를 마치고, 나는 굳은 결의를 마음에 새긴 다음 자리에 누웠다. 아무런 공포도 없이 마음이 가벼워져서는, 오로지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다. 36 아침이 밝아 오자 나는 일어나, 잠시 옷장이며 선반이며 실내의 물건들을, 잠깐 집을 비울 동안의 뒤처리로써 정리했다. 유월의 시작임에도 불구하고 날씨는 추웠고, 비가 세차게 창문을 때렸다. 나는 현관문이 열리고 세인트 존이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창 너머로 그가 마당을 가로질러, 위트크로스 쪽으로 안개 자욱한 무아를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위트크로스에서 마차를 기다리는 것이다. '몇 시간 후면 나도 같은 길을 가는 거예요. 위트크로스에서 나도 마차를 타요. 영국을 영원히 떠나기 전에 찾아 봐야 할 사람이 있는 거예요.' 아침 식사까지는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아 있어서, 그 동안 나는 내가 들은 목소리를 떠올리고 어디서부터 들린 것인지를 생각해 봤지만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들린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것은 단지 환각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허나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계시에 가까웠다. "어쨌든......" 상상에서 깨어나 나는 말했다. '이제 곧 나는 어젯밤에 나를 부른 목소리의 주인공에 대해서 알게 되리라. 편지는 소용 없으니 이번엔 직접 찾아가는 거야.' 아침 식사 때 나는 다이아나와 메어리에게, 여행을 떠나기 때문에 사나흘 정도 집을 비울 것이라고 말했다. "혼자서?" "네, 전부터 마음에 걸리던 친구가 있어요. 만나지 못하면 소식이라도 알아 봐야겠어요." 천성이 착한 사촌들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다만 혼자 여행을 해도 자신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마음의 불안 외에는 아무 것도 염려될 것이 없으며, 그 불안도 곧 사라질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거리에 대해 또 캐묻거나 억측을 하지 않았으므로 의논은 간단했다. 나는 이 여행 계획에 대해 지금 당장은 얘기할 수 없다고 하자, 그 말만으로 그들은 다정스럽고 현명하게도 내 의사에 동의해 주었다. 같은 경우에 내가 그들의 행동의 자유를 인정하듯이, 그들은 나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다. 오후 3시에 나는 무아 하우스를 나와, 4시가 지나서 위트크로스의 표지 밑에서 먼 손필드까지 나를 실어다 줄 역마차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기척도 없는 쓸쓸하고 고요한 그 십자로에 드디어 멀리서 마차 소리가 들려 왔다. 그것은 꼭 1년전, 같은 장소에 나를 내려놓았던 바로 그 마차였다. 아아, 그때의 나는 얼마나 외로웠으며 희망도 목적도 없었던 신세였는가. 다시금 손필드로 가는 지금은 마치 제 집을 찾아가는 통신용 비둘기와도 같은 심정이었다. 그로부터 서른 여섯 시간 후인 이틀이 지난 목요일 아침에야 마차는 어느 길가 여관 앞에 멎었다. 흡사 그리운 추억의 편린처럼 녹색의 울타리에 널따란 논밭, 낮은 목장의 언덕들. 아아, 너무도 기억에 생생하다. "여기서 손필드까지는 얼마나 가야지요?" 나는 마부에게 물었다. "앞으로 2마일만 가면 됩니다." 여행은 끝났다 -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집은 내가 다시 오기까지 마부에게 맡겨 두고 나는 곧장 걸어갔다. 햇빛에 반사한 여관 간판은 '로체스타 아암즈'라고 씌어져 있었다. 내 마음은 뛰었다. 눈앞에 쪽문이 보였다. 그 저쪽으로 펼쳐진 들이야말로, 내가 손필드를 떠나던 날 정신없이 헤어나온 들판인 것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마음이 정해지기도 전에 나는 어느새 그 한가운데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빠른 걸음! 나중에는 달리기까지 했다. 낯익은 숲은 아직 보이지 않았으나, 마음은 점점 죄어들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낯익은 나무 사이로 뵈는 목장과 언덕들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마침내, 땅까마귀가 떼지어 있는 그 나무 숲이 저만큼에 떠올랐다. '까악 까악' 하는 울음 소리가 유난스럽게도 아침의 적막을 깨뜨리고 있다. 이상한 환희가 나를 채찍질하여 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처음에 보는 것은 정면에서가 아니면 안 돼.' 하고 나는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당당한 바람벽을 마주하면, 주인님의 방 창문이 보일 거야. 그 분은 일찍 일어나시니 거기에 서 계실지도 몰라. 아니면 과수원이나 마차길을 산책하실지도 모르고...... 아아, 한번만 보고 싶다. 다만 한순간이라도......' 나는 어느덧 과수원의 낮은 울타리를 따라 모퉁이를 돌고 있었다. 그곳에는 제각기 머리에 돌덩이를 인 문기둥이 양쪽으로 서 있고, 문은 목장을 향해 열려 있다. 한쪽의 문기둥 뒤에서 나는 저택의 정면을 보고자 조심스레 목을 내밀었다. 그렇게 하면 바람벽이며 창문, 현관 등을 한눈에 볼 수 있으므로, 어느 침실의 블라인드가 걷혀져 있는지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이 순간을 나의 마음을 비유한다면, 즉 이끼 낀 냇가에 잠들어 있는 애인을 본 연인이, 그를 깨우지 않고 그 아름다운 모습을 한눈에 보고자 한다.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그는 소리 없이 풀 위를 걸어가 그녀의 얼굴위에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 위에 덮인 얇은 베일을 벗긴다. 바야흐로 그의 눈은 미의 극치인 따뜻하고 꽃처럼 아름답고 평화스러운 얼굴을 보리라고 기대한다. 번갯불처럼 던지 그 일별! 그러나 지금 그 눈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소스라친다. 별안간에 미친 듯이, 방금까지는 손도 대지 않던 그 몸을 으스러지도록 두 팔을 껴안는다. 그는 애인이 잠든 줄 알았으나, 이미 그녀는 돌처럼 싸늘한 시체였다. 나는 호화로운 저택 쪽으로 조심스레 눈을 주었으나, 그곳엔 까맣게 타버린 폐허만 남아 있었다. 아아, 침실의 창가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기색은 없을까 싶어서 남몰래 엿보느라고 기둥 뒤에 숨어 있을 필요는 없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염려하거나, 마치 길에 인기척이 나지 않을까 염려할 필요는 없었다. 잔디며 뜰은 마구 짓밟혀 있었고, 출입구는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마치 지난날 내가 꿈에 본 것처럼 아주 높고 허물어져 가는 벽만이, 구멍으로 보임직한 창들을 몇개 달고 있을 뿐이었다. 지붕도, 바람벽도, 굴뚝도, 모두 허물어졌다. 그리고 주위는 죽음과도 같은 침묵, 쓸쓸한 폐허와 고요로 꽈 차 있었다. 내가 보낸 편지에 회답이 없었던 것도 이러고 보면 무리는 아니다. 큰 불에 불탄 자국. 도대체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어떠한 손실이 여기에 따랐을까? 누구의 짓일까? 무서운 의문이었다. 허물어진 벽과 폐허로 변한 내부를 잠시 살펴본 나는 이 재앙이 요즘의 일이 아닌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젖은 잡동사니 속에 봄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돌이며 무너진 대들보 사이에 잡초가 나 있었다. 그렇다면 아아! 이 폐허의 불행한 주인은 어디로 갔는가? 어느 나라로? 어떠한 운명 아래? 나의 눈은 대문 가까운 곳의 교회당 탑에 가 있었다. '저 좁은 대리석 집에 로체스타가 처마를 나란히 하고 있을까?' 이러한 의문에는 대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곧 길을 되돌아갔다. 모든 것은 여관집에 가 묻기로 하자. 손수 내 방으로 아침 식사를 가져온 주인에게 나는 물어 볼 것이 있다고 잠깐 앉아 주기를 부탁했다. 주인은 인품이 과히 떨어지지 않는 중년 남자였다. "주인님께선 손필드 저택을 아시나요?" 하고 나는 물었다. "알고말고요. 나는 그곳에서 지낸 적이 있답니다." "그러세요?" 나는 그를 본 일이 없으니 내가 없었던 때일 거라고 생각했다. "돌아가신 로체스타님의 하인장을 지냈었지요." "돌아가셨다고요?" 나는 숨을 헐떡이며 반문했다. "그럼 그분은 이미?" "내가 말씀드리는 것은 지금의 에드워드 아버님 이야깁니다." 하고 그가 설명했다. 나는 겨우 숨을 내쉬었다. 멈췄던 피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나의 로체스타 씨는 아직 살아계신 것이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로체스타님은 지금도 손필드에 계시나요?" 묻지 않아도 뻔했건만, 나는 어디 계신지를 직접 묻는 것을 삼갔다. "아닙니다, 손님. 거기엔 지금 아무도 살지 않아요. 아마 손님은 여기엔 처음인 모양이니 지난 가을의 일은 모르시겠군요. 손필드 저택은 지금 폐허랍니다. 바로 추수 무렵에 타 버렸지요. 정말 무서운 재앙이었습니다. 그처럼 훌륭한 집이 가구 하나 꺼내지 못한 채 폭삭 재가 되어 버렸지요. 화재는 한밤중에 일어나, 미처 소방차가 달려오기도 전에 건물은 화염 속에 휘말렸습지요. 나는 직접 보았습니다만, 정말 무서운 광경이었어요." "한밤중에!" 나는 중얼거렸다. 그렇다, 그것이 처음부터 손필드의 운명의 시간인 것이다. "불은 어디서 났는지 밝혀졌나요?" "모두 짐작들은 하고 있지요, 네, 알고 있어요." 그는 테이블 곁으로 바싹 다가 앉으며 낮게 말했다. "그곳엔 부인이...... 뭐랄까, 미친 사람이 갇혀 있었어요." "하긴 그런 소문을 들은 것도 같아요." "그런데 그건 벌써 몇 해째 극비에 붙여진 일이라, 그런 부인이 사실 있는지 어쩐지도 몰랐어요. 본 사람이 없으니 말이지요. 그런 부인이 저택에 있다는 소문만이 나돌았답니다. 그러니 어떤 신분이고 어떤 경위의 사람인지를 알 수 없었지요. 에드워드님이 외국에서 데려온 여자라는 사람도 있고, 첩이라는 사람도 있었지요. 그런데 바로 1년 전에 참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여기서 나는 내 이야기를 듣게 될 것 같아 두려웠다. 그래서 주인이 본 줄거리로 들어가도록 물었다. "그래서 그 여자분은?" "그 부인이 말입니다, 손님." 하고 그는 대답했다. "로체스타님의 부인으로 밝혀졌습니다. 우연한 일로 해서 알게 되었지만, 그 댁에 젊은 여자 가정 교사가 있었거든요. 로체스타님은 그분을 사랑......" "그렇지만 그 화재는?" 하고 나는 재촉했다. "그래서 에드워드님이 연애를 하셔서 - 로체스타님은 40 전후인데 그 여자는 채 20도 안 되었지요. 그 연배의 신사가 젊은 여자에게 반해서 그는 앞뒤도 분간 못하고 - 드디어 결혼까지 할 작정이었답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구요." 하고 나는 말했다. "저는 그럴 이유가 있기 때문에 우선 화재에 관한 것을 듣고 싶어요. 지금 말씀하진 정신 이상인 로체스타 부인과 화재는 무슨 관계가 있나요?" "바로 그렇습니다. 그 여자 외에 불을 낼 사람이 어디 있나요? 그 미치광이의 시중을 드는 풀이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일에 대해선 꽤 신용이 있고 쓸모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꼭 한 가지, 진을 몰래 숨겨 가지고 마시는 결점이 있었지요. 하긴 너무 신경 쓰는 일을 하니 그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아무튼 미치광이 여자는 교활했기 때문에 풀 부인이 진을 마시고 녹아 떨어지면 그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여자가 방을 빠져 나와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지요. 언젠가 한번은 주인님을 불에 태워 죽이려고 한 일도 있었다는 말도 있지요. 하여간 그날 밤에 그 미치광이는 우선 자기 옆방의 커튼에 불을 붙인 다음 2층에 있는 가정 교사의 방으로 갔습니다. 아마 그간 사정을 알고 그 여자를 원망하고 있었던가 봅니다. 그래서 그녀는 거기 침대에다 불을 붙였지만 다행히도 그곳엔 아무도 자고 있지 않았지요. 가정 교사는 벌써 두어 달 전에 달아나 버렸으니까요. 로체스타님은 마치 세상에서 제일가는 보물이라도 잃은 것처럼 팔방으로 수색을 했지만 결국은 헛수고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낙심한 나머지 성미가 매우 거칠게 변했어요. 본래는 매사에 신중하시던 분이었어요. 게다가 혼자 지내고 싶어서 가정부인 페어펙스 부인을 먼 친척 집에 보내 버렸습니다. 하긴 뒷처리에 신경을 써서 종신 연금을 부쳐 준 모양입니다만, 부인도 물론 받을 만한 자격은 있었지요. 로체스타님은 양녀인 아델 양도 학교에 넣어 버리고 다른 지주들과는 일체 손을 끊은 채 혼자 지냈습니다." "네? 그럼 그분은 영국을 떠나신 게 아닌가요?" "영국을요? 천만에요, 그분은 현관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오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밤에는 정신 병자처럼 - 물론 정신이 돈 것은 아닙니다만 - 뜰이나 과수원 속을 유령처럼 헤매어 다녔지요. 주인님은 그 가정교사인 작은 계집이 오기 전까진 참 씩씩하고 당당하고 두뇌도 명석한 신사였습니다. 술이나 경마나 도박도 즐기지 않고, 풍채는 별로 좋지 않았지만 그의 용기와 의기를 따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나는 그분을 어렸을 적부터 알고 있습니다만, 그 에어인가 하는 계집 따위는 저택에 오기 전에 바다에라도 빠져 버리는 게 나았을걸, 하고 몇 번씩이나 생각이 드는 걸요." "그런데 불이 났을 때 로체스타 씨는 집에 계셨었나요?" "그럼요, 그분은 이방 저방 다니며 하인들을 모두 깨우고 피신시켰지요. 그러고는 미치광이 부인을 구하려고 다시 불 속으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미치광이는 지붕 위 바람벽 옆에 서서 팔을 휘저으며 1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도 들릴 만큼 큰 소리로 고함을 치고 있었어요. 나는 이 눈과 귀로 똑똑히 보고 들었습니다만, 그는 굉장히 큰 여자로 길고 꺼먼 머리를 뒤집어쓰고 있었습니다. 그 머리는 불길에 휘날리자 흔들거렸습니다. 그 때 로체스타님이 우리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천장을 통하여 지붕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바사!' 하고 부르며 그녀에게로 다가갔지요.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미치광이는 고함을 지르며 몸을 내던졌답니다. 번갯불처럼 돌바닥 위로 떨어져 버렸지요." "죽었어요?" "죽었냐구요? 아, 그럼요, 머리가 으스러져서 숨이 끊기고 말았습니다." "아이, 끔찍해!" "네 정말 무서운 광경이었답니다." 그는 몸서리를 쳤다. "그래서요?" 하고 나는 말을 재촉했다. "그리고 저택은 몽땅 타 버리고 지금은 바람벽만 남았지요." "또 죽은 사람은 없었어요?" "네, 차라리 그랬던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지만요."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가엾은 에드워드님! 그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요. 사람들은 그분이 이중 결혼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이라고 말들 하지만, 아무래도 저는 딱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살아계신다고 그랬잖아요!" 나는 외쳤다. "물론 살아계시지요. 그러나 차라리 돌아가는 게 나았다고들 말합니다." "왜요?" 나의 피는 금세 식었다. "장남이 되어 버렸어요. 에드워드님이 전혀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어요." 나는 더 끔찍한 일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가 미친 것이 아닐지. 나는 용기를 내어 사고의 원인을 물어 보았다. "그것은 그분의 용기 때문이에요. 혹은 마음이 너무 선량한 탓이기도 하구요. 주인님은 사람들이 모두 피신하기까지 집안에 있다가, 로체스타 부인이 뛰어내리자 제일 마지막에 계단을 내려오셨어요. 그때 건물이 무너졌지요. 대들보며 기둥 밑에서 겨우 구출은 됐지만 아주 크게 다쳤습니다. 대들보 하나는 몸을 지켜 주듯이 비스듬히 걸려 있었지만, 한 눈은 튀어나오고, 한쪽 팔이 으스러져서 외과 의사인 커터 씨는 그 자리에서 잘라 버려야 했습니다. 이제 의지할 사람도 없이 앞도 못보는......" "그러면 지금 그분은 어디 계세요? 어디에 사시나요?" "여기서 30마일쯤 떨어진 휘인디인이라는 농장에 있는 아주 쓸쓸한 별장에 사신답니다." "누군가 함께 있나요?" 나는 다그쳐 물었다. "존 할아범과 그 마누라요. 그 외엔 아무도 못 오게 하니까요. 아주 수척해 지셨다는군요." "여기서 탈 것이 있을까요?" "네, 깨끗한 마차가 있긴 합니다만." "그럼 곧 준비해 주세요. 오늘 저녁까지만 마부가 날 휘인디인에 도착하게 해준다면, 당신과 마부에겐 요금의 갑절을 지불해 드리겠어요." 37 아무런 장식도 없이 그저 낡고 휑뎅그렁한 휘인디인의 별장은 숲속에 묻혀 있었다. 사는 사람이나 가구도 없이, 주인이 사냥을 갔을 때를 위하여 겨우 방이 두어 개 준비되어 있을 뿐이었다. 음울한 하늘, 썰렁한 바람, 고즈넉히 배어드는 부슬비 속에서 우두워질 저녁 녘에서야 나는 그 집에 닿았다. 나는 약속한 갑절의 요금을 주고 마차와 마부를 돌려 보낸 후, 마지막 1마일은 걸어서 갔다. 거의 별장 부근까지 왔어도 별장은 무성하고, 어둡고,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숲에 가리워져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걷는 동안에 집이 나타났다. 저녁 풍경 속에서는 나무들과 거의 분간할 수도 없게 젖은 녹색을 한 집이 시야에 들어왔다. 로체스타 아암즈의 주인 말대로 '아주 쓸쓸한 곳'이었다. '여기에도 사람이 살고 있을까?' 나는 마음속으로 물었다. 좁은 현관문이 열리고 뭔가 사람 비슷한 것이 집에서 막 나오는 참이었다. 문은 천천히 열렸다. 하나의 그림자가 어둠 속으로 나와 계단 위에 섰다. 모자도 쓰지 않은 그 사나이는 비가 오는지 어쩐지를 알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알았다. 비록 어둠 속이긴 했지만 그야말로 나의 주인 에드워드 페어펙스 로체스타인 것을. 나는 발을 멈추고, 거의 숨이 막혀서 그를 지켜보았다. 풍채는 전과 다름없이 건강해 보이고 자세 역시 바르다. 머리를 까마귀처럼 까맣고, 얼굴도 축나 보이지 않는다. 이 1년 동안에 어떤 슬픔이 있었더라도 그의 건장한 체력과 왕성한 활력을 죽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용모엔 변화가 보인다. 무언가 근접할 수 없게 하는, 학대받은 울 속의 야수처럼 자포자기한 암울한 그 어두운 우수 속에서 느껴졌다. 잔인하게도 그 화마는 그의 황금색으로 빛나던 눈을 빼앗아가고 지금은 울 속에 갇힌 독수리 신세. 눈먼 삼손 같은 표정이 아마도 저렇지 않을까. 그는 층계 섬돌을 내려서서, 손으로 더듬으며 잔디로 왔다. 그것은 당당한 걸음걸이가 아니다. 그러다가 어디로 갈지 주저하듯이 걸음을 멈췄다. 모든 것이 그에게는 공허한 어둠 뿐인 것이다. 그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왼쪽 팔은 절단되어 소매로 가려져 있다) 손으로 만져 보아서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려는 모양이었다. 팔짱을 끼고 머리 위에 떨어지는 비 속에서 묵묵히 서 있던 그는, 이윽고 더듬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잠시 후 나는 다가가서 노크했다. 존의 마누라가 나왔다. "메어리." 나는 말했다. "안녕하셨어요?" 그녀는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꿈틀했다. "아니, 정말 당신이에요, 에어 선생? 여기에 이렇게 늦게?" 하고 말하는 그녀에게, 나는 그녀의 손을 잡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부엌으로 갔다. 거기엔 존이 활활 타는 불 앞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간의 경위를 대충 얘기로 듣고 로체스타 씨를 만나러 왔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존에게, 내가 마차를 내린 정거장까지 가서 트렁크를 찾아다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모자와 숄을 벗고 오늘 밤은 이 별장에서 묵어 가겠다고 메어리에게 말했다. 마침 그때 안방의 벨이 울렸다. 메어리는 다녀와서 물컵을 촛대와 함께 쟁반에 올려놓았다. "그것 나를 줘요. 내가 가지고 갈께요." 그녀로부터 쟁반을 받아들자 손이 떨렸다. 메어리가 나 대신 문을 열어 주고 들어가자 닫았다. 안방은 음침했다. 난로 안쪽에서 불은 아무렇게나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눈먼 주인은 맨틀피스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한쪽 벽가에 누워 있던 늙은 파일로트가, 실수로 밟힐까 봐 좀 떨어진 곳으로 가서 몸을 웅크렸다. 내가 들어가자 파일로트는 귀를 세우고 내게 덤벼들었기 때문에 나는 쟁반을 떨어뜨릴 뻔했다. 나는 쟁반을 테이블 위에 놓고, 개의 목을 쓸어 주며 '가만히 있어요.' 하고 낮게 말했다. 로체스타 씨는 무슨 일인가 싶어서 기계적으로 돌아보았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없으므로 한숨을 내쉬며 몸을 전대로 했다. "물을 가져와, 메어리." 그는 말했다. 나는 절반밖에 안 담은 물컵을 들고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파일로트가 다시금 흥분하여 내게로 왔다. "왜 그래?" 그가 물었다. "가만 앉아 있으라니까, 파일로트!" 나는 또 말했다. 그는 물을 입에 가져 가면서 귀를 기울였다. 물을 마시고 컵을 아래에 놓았다. "메어리, 거기 있는 거 너지?" "메어리는 부엌에 있어요." 나는 대답했다. "누구야, 그럼 넌 누구야?" 하고 물으면서, 역시 그 시력을 잃은 눈으로 그는 보려고 했지만 헛된 일이었다. "물을 더 가져올까요? 물의 절반이나 제가 엎질렀어요." 하고 나는 말했다. "도대체 누구야? 도대체 무슨 일이지? 누가 지껄이고 있는 거야?" "파일로트가 잘 알고 있고, 존과 메어리도 제가 여기 있는 걸 알고 있어요. 전 방금 도착했답니다." 나는 대답했다. "뭐라는 거야? 이건 또 무슨 망상이야? 나는 무슨 광기에라도 사로잡힌 것일까?" "망상이 아녜요. 광기도 아니에요." "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누구인가? 다만 목소리 뿐이고 게다가 보이질 않으니...... 그러나 네가 무엇이든 손에 잡혀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죽어 버린다!" 나는 더듬거리는 그의 손을 붙잡아 두 손으로 꼭 움켜잡았다. "오오, 그 사람의 손이다!" 그는 외쳤다. "이것은 그 사람의 조그맣고 가는 손이야. 그럼 손 말고도 또 있겠지?" 나는 팔을 붙들리고, 어깨를 - 목을 - 허리를 안기어 끌려갔다. "이건 제인이지? 분명 제인이야. 내 말이 맞지." "네, 맞아요. 그리고 이것은 제인의 목소리예요. 모두 여기 있어요, 제인의 마음까지. 아아, 하느님, 곁으로 이렇게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인 에어! 오오, 제인 에어다!" "나의 둘도 없는 주인님!" 나는 대답했다. "마침내 당신을 찾아서 돌아왔어요!" "정말이오? 살아 있소? 당신은 살아 있는 나의 제인인가?" "이렇게 만지고, 꼭 안고 계시잖아요. 시체도 아니고, 공기처럼 투명하지도 않아요." "사랑하는 제인! 살아 있다! 이건 틀림없는 당신의 손, 얼굴이오. 그러나 그토록 비참했던 내가 이렇게 행복해질 리는 없어. 꿈이야, 밤마다 똑같이 그 사람을 가슴에 껴안는 꿈. 꼭 이처럼 키스하고, 또 절대로 당신은 날 버리지 않으리라고 믿으면서......" "이제 절대로 당신의 곁에서 떠나지 않겠어요." "떠나지 않는다고? 환영이 그렇게 말하는가? 그러나 눈을 뜨면 그것은 늘 공허한 희롱이었다는 걸 난 알게 되지. 다정하고도 아름다운 꿈이여. 이제껏 그러했듯이 너는 다시 도망치고 말리라. 그러나 가기 전에 키스해 다오. 안아 다오, 제인." "자아, 이렇게요!" 나는 나의 입술을 이전의 빛났던, 그러나 지금은 빛을 잃은 그의 눈에 갖다 댔다. 이마의 머리를 쓸어올리고 그곳에 키스했다. 갑자기 그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이런 모든 것이 꿈이 아닌 것을 그제서야 그는 깨달은 듯했다. "제인이야! 그렇지? 그럼 당신은 정말 내게로 돌아왔소?" "네." "그럼 당신은 어느 벌판엔가 시체로 누워 있는 게 아니오? 집 없는 거지가 아니오?" "아니에요. 이제 저는 독립했어요." "독립? 그건 또 무슨 뜻이오, 제인?" "마데이라의 아저씨가 돌아가시면서 5천 파운드의 유산을 제게 물려주셨어요." "아아, 이건 꿈이 아니야! 현실이야!" 그는 소리쳤다. "이런 것은 꿈에선 볼 수 없어. 그리고 그 사람의 독특하고 상냥하면서 생동감 있는 목소리...... 내게 생명을 불어넣는 목소리다. 그래, 제인. 당신은 독립한 여자요? 부자인가?" "네, 아주 부자예요. 만일 제가 곁에 살아도 좋으시다면, 그리고 언제든지 당신이 친구가 필요하면 제 집으로 오실 수 있도록 이곳 바로 옆에다 저의 집을 짓겠어요." "하지만 제인, 당신이 부자이면 당연히 당신을 돌볼 친구도 있을 게 아니오?" "아니, 전 자유예요. 돈도 있지만 독립해 있다고도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내 곁에 있어 주겠단 말이오?" "물론이에요. 당신만 지장 없으시다면 전 당신의 이웃, 당신의 간호사, 가정부, 뭐라도 다 좋아요. 책도 읽어 드리고, 함께 산책도 하고, 곁에서 시중을 들며 당신의 눈과 손발이 되어 드리겠어요. 제가 있는 한은 이제 당신을 쓸쓸하지 않을 거예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신을 가다듬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이내 쑥스러워졌다. 실은 내게 그가 내가 아내되기를 원하고, 그것을 요구하리라는 생각에서 내가 미리 청한 것이다. 그런데도 그의 그런 기분은 조금도 엿보이지 않고 점점 얼굴색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나는 갑자기 내가 생각지도 못할 어리석은 짓을 했음을 깨달았다. 나는 슬쩍 그의 팔에서 풀려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더욱 나를 꼭 껴안았다. "안돼, 제인, 가면 안돼.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당신을 느끼고, 당신과 만난 행복을 맛보며 - 당신으로 인해 기쁨과 즐거움을 알았소. 나는 이 기쁨을 다시는 놓치지 않을 테야. 나의 영혼은 당신을 찾고 있소." "네, 저는 아까 말한 대로 당신 곁에 있겠어요." "하지만 당신은 언제까지나 간호사로 있을 수는 없잖아. 당신은 젊으니, 언젠간 결혼해야겠지." "결혼 같은 것은 생각하고 있지 않아요." "아니, 생각해야 돼. 만일 예전의 나라면 결혼을 생각하겠지. 그러나 눈먼 병신으로서는......" 그는 다시 어두운 얼굴이었다. 반대로 나는 전보다 쾌활한 용기를 되찾았다. 그의 말로써 장애가 무엇인지를 안 것이다. 나는 아까의 쑥스러움을 벗고 쾌활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은 누군가 당신을 이전의 당신으로 되돌려 놓아야 해요." 그의 자랄 대로 자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나는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마치 사자처럼 달라져 버렸어요. 머리는 독수리 날개 같아요. 손톱이 새 발톱같이 되었는지 어쩐지는 아직 못 보았지만 말예요." "이쪽 팔엔 손톱은 커녕 손도 없어." 그는 가슴께로부터 절단된 팔을 내게 보이며 말했다. "그저 끔찍히 뵈는 뭉뚱한 살덩어리일 뿐야." "애처로워요. 당신의 눈과 이마의 덴 자리를 보면요. 하지만 이상하지요. 그래도 나는 당신을 더 사랑하게 되어 정신을 차릴 수도 없을 것 같으니 말예요. 당신이 형편없는 여자라고 생각할 것 같은 막말을 하면 큰일이지요. 자아, 잠깐만 놓아 주세요. 불도 좀 보고 청소도 해야 하니까요. 불이 활짝 피면 알 수 있어요?" "알 수 있어. 오른쪽 눈에 흐릿하게 좀 붉은 안개 같은 게 보이니 말야." "촛대의 불은요?" "아주 흐린 뽀얗게 빛나는 구름처럼만......" "저녁 식사는 언제 하세요?" "저녁은 먹은 적이 없어." "그래도 오늘 저녁은 잡수세요. 전 배가 고파요. 당신도 그저 잊고 있을 뿐이에요." 메어리를 불러서 나는 다소나마 이 방을 기분 좋게 꾸미게 했다. 그리고 그가 즐길 듯한 식사 준비를 했다. 그의 곁에서 나는 마음 편히 있을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그에게 어울린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를 위로하고 또 용기를 주는 듯했다. 또한 그렇게 느끼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의 앞에서 나는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내앞에서는 그도 행복했다. 눈은 멀었어도 그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 찼고 희열로 이마는 밝게 빛났다. 얼굴의 윤곽도 부드럽고 따뜻해졌다. 식사 후, 그는 내게 여러 가지를 물어왔다. 어디에 있었으며 무엇을 했는지,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그러나 나는 부분적으로 간단한 대답만을 했다. 나의 당면한 임무는 그를 격려하는 일 뿐 깊은 이야기를 꺼내 쓸데없이 그의 격정의 마음을 일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기운을 차렸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어서, 잠시라도 대화가 끊기면 그는 침착성을 잃고 내 손을 찾으며 '제인.' 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당신은 어떻게 이런 어둡고 쓸쓸한 밤에 불쑥 이 고독한 난롯가로 올 수 있었을까?" "메어리 대신 쟁반을 가지고 들어올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지금 우리는 꿈처럼 즐거운 시간을 지내고 있소. 얼마나 내가 그 동안 희망도 멋도 없는 암흑 같은 시간을 지내 왔는지를 그 누가 알겠소? 밤낮을 모르며, 불이 없다면 춥다고, 먹을 것을 잊었을 때는 배고프다고 느낄 뿐인 하루하루,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슬픔과, 간혹 제인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미칠 것 같은 열망, 그래요! 당신을 한 번 껴안고 싶다는 욕망은 잃어 버린 시력을 되찾고픈 욕망보다도 더 컸었으니 말이오. 그런데 그 제인이 지금 여기서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으니 믿어지지 않아요." 이러한 그의 혼란스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평범하고 현실적인 대답만이 그의 마음엔 안정을 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의 눈썹에 손가락을 대고서, 그것이 불에 탔으니 전처럼 회복되는 약을 발라 주겠노라고 말했다. "친절한 요정 아가씨, 그러나 내게 아무리 잘해 줘도 다시 달아난다면 무슨 소용이오?" "빗은 있지요?" "뭘 하려고, 제인?" "이 헝클어진 머리를 빗겨 드리려구요. 이대로는 당신 얼굴이 무서워요." "기분이 나쁜가, 제인?" "네, 전처럼요." "흠, 여태껏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당신은 여전한 심술쟁이군." "그래도 나는 좋은 사람들 속에 있었어요. 당신보다 훨씬, 백 배나 더 좋은 사람들요. 당신은 난생 한 번도 갖지 못한 그런 고상하고 세련된 안목과 사상을 가진......" "도대체 어떤 놈들과 같이 있었지?" "오늘 밤만은 그런 말투는 안 돼요. 내일까지 기다려야 해요. 제 얘기를 반만 듣고 주무시면, 내일 아침에 마저 해드릴께요. 그건 그렇고, 그때는 내가 컵 하나를 갖고 나타나선 안 되겠지요? 구운 햄까지는 뭣하더라도 하다 못해 달걀이라도 가져와야겠지요?" "또 놀리는 건가, 수다쟁이 아가씨! 당신은 지난 열두 달 동안 전혀 느껴 보지 못한 기분을 내게 안겨 주는군." "네, 이로써 거뜬히 기분이 좋아지셨지요. 그럼 이만 실례합니다. 사흘이나 계속해서 여행을 했으니 저도 피곤해요. 안녕히 주무세요." "잠깐만, 제인. 한 가지만 묻겠는데, 당신이 있던 집엔 숙녀들만 있었겠지요?" 나는 웃으며 도망쳐 나와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좋은 생각이야. 얼마 동안을 초조해 함으로써 그분은 기분이 전환될 거야.' 라고 나는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그가 일어나 방마다 돌아다니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메어리가 꼭대기 방에서 내려오자마자, "미스 에어는 여기 있나?" 하고 물었다. "그리고 어느 방에 계시지? 그 방은 침침하지 않나? 일어나셨는지 보고 무슨 볼일이 없는지, 또 언제쯤 내려올지 물어 봐요." 아침 식사가 다 되었을 때쯤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내가 들어온 것을 그가 알아차리기 전에 그의 모양을 살펴보았다. 그는 자리에 앉은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으나 평온한 표정은 아니었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그의 남성적인 얼굴에는 지금 지울 수 없는 슬픔으로 해서 주름이 잡혀 있다. 그의 용모는 불이 켜지기를 기다리는 등불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날씨가 좋군요, 아주 밝아요. 비도 멎고 푸근해졌어요. 산책도 할 수 있겠어요." 이것만으로도 그의 얼굴에 불이 켜진 듯 환한 웃음이 되살아 났다. "오오, 역시 있었군, 나의 종달새! 이쪽으로 와요, 당신은 떠나지 않았군, 없어지지 않았어. 숲속의 당신 친구들은 아까부터 지저귀고 있었지. 그러나 그 소리는 내게 아무 흥미가 없었소.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 빛처럼 내가 느끼는 햇빛이란 제인이 있는 곳 외에는 어디에도 없어요." 나를 의지하는 이 고백의 말에 나는 눈물이 솟아올랐다. 횃대에 사슬로 매인 왕자 같은 독수리가 참새에게 자기 모이를 갖다 달라고 부탁하지 않을 수 없는 신세와 똑같지 않은 가. 그러나 나는 울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아침 식사 준비를 했다. 나는 음울한 숲 바깥의 밝은 들판으로 그를 데리고 가서 들의 푸르름이 얼마나 빛나는지, 화초며 생나무 울타리가 얼마나 생명력이 있는지를 그에게 들려 주었다. 사람 눈에 띄지 않는 아름다운 장소에서 마른 덩굴에 그가 걸터앉았을 때에는, 그의 무릎에 앉는 것도 사양하지 않았다. 떨어져 있기보다 가까이 있는 것이 서로가 행복한데, 왜 거절할 것인가. 우리의 곁에는 파일로트가 누워 있을 뿐 주위는 고요했다. 그가 나를 껴안으면서 갑자기 말했다. "무정하고 야속한 사람, 나를 버리고 가다니! 제인, 당신이 손필드를 도망친 것을 알았을 때의 내 마음, 당신의 방을 보고서 돈 한푼 없이, 또 돈이 될 만한 물건조차 챙기지 않고 간 것을 알았을 때의 내 마음이 어땠는지 알겠소?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오직 입은 옷 그 뿐인 무일푼이라. 자아, 그 후는 어떻게 되었소? 이야기해 봐요." 나는 재촉을 받으며 지난 1년 동안의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나 굶주리고 헤맨 사흘 동안의 이야기는 되도록 간단히 말했다. 너무 솔직하게 말하는 것은 그에게 고통을 줄 뿐, 내가 이야기한 일부만으로도 그의 성실한 마음은 나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로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는 생활에 대한 아무 계획도 없이 자기에게서 떠나 버린 것은 지나쳤다고 말했다. 이 냉혹스러운 사회에 당신을 그대로 내맡길 마음이라면, 차라리 자기 재산의 반을 주고 키스 한 번의 보답이 없어도 그편이 훨씬 나았다. 당신은 지금 내게 말하는 것보다 훨씬 큰 고통을 받았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아무튼 제 고통이 얼마나 되었든간에 그것은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어요."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이야기는 내가 무아 하우스에 들어가게 되고, 국민학교 선생이 된 것 등이 이어졌다. 유산을 상속하고 친척을 발견한 것도 마땅히 언급되었다. 그러자니 도중에 세인트 존의 이름이 자주 튀어나왔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 곧 그가 물었다. "세인트 존이란 사람은 당신의 사촌 오빠인가요?" "네." "그 사람 이야기를 당신은 자주 하는데 그는 좋았소?" "참 좋은 분이었어요.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좋은 사람? 그것은 훌륭하고 품행이 방정한 50 전후의 남자를 말하는 거요?" "세인트 존은 아직 스물 아홉인 걸요." "프랑스에서 말하는 '쥬느 앙꼬르 (풋내기)' 로군. '좋다'는 것은 그럼 미덕이 뛰어났다는 것보다 악덕은 범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피로를 모르는 적극적인 사람이었어요. 위대하고 숭고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두뇌는 아마 허약한 편이겠지?" "두뇌도 유연해요. 예민하지는 못했지만 건강한 편이라고 할 수 있지요." "교양은 더 말할 나위도 없는 사낸가?" "세인트 존은 완성된 깊은 학문의 소유자예요." "거동은 당신 취미에 맞지 않겠지? 까다롭고, 목사티가 나고?" "고동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온화하고 세련된 신사다운 태도였는 걸요." "풋내기 목사라면 목을 비끄러맨 것처럼 흰 헝겊을 두르고 바닥이 두터운 군화 같은 걸 신었겠지?" "세인트 존을 훌륭한 복장이었어요. 게다가 미남이고, 큰 키에 파란 눈과 흰 피부색을 가진 전형적인 그리스 사람이예요." "(옆을 향해서) 빌어먹을 녀석! (내게) 당신을 좋아했나, 제인?" "네, 로체스타 씨, 하지만 그 말은 아까도 물으셨어요." 나는 물론 나를 힐문하는 그의 의도가 질투에서 온 것임을 잘 알았다. 이 자극은 유익했다. 그의 우울한 가슴의 상처를 잠시 잊게 했으므로, 그러므로 나는 성급히 그 독사를 달래려고는 하지 않았다. "당신은 이제 더 이상 무릎에 앉아 있고 싶지 않겠지, 제인?" 이것은 예기치 않은 말이었으므로 나는 물었다. "그건 왜죠, 로체스타 씨?" "당신이 지금 그려 보인 초상은 좀 지나칠 정도로 압도적인 대조요. 당신은 하나의 우아한 아폴로 상을 묘사했고, 그것은 당신의 상상에 살아 있지 않소? 키가 크고 흰 피부에 파란 눈을 가진 그리스적인 프로필. 당신의 눈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벌칸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장간의 신으로 못생겼음) 이오. 검은 살결에 어깨가 넓은 대장장이에 어울리는 사나이. 게다가 이젠 눈먼 병신이란 것도 생각지 않으면 안 돼." "저는 지금껏 그것을 몰랐군요. 그러고 보니 정말 벌칸 비슷도 해요." "좋소, 그렇다면 언제든지 출발하시오. 그러나 가기 전에......" 하고 그는 앞서보다 더욱 힘있게 껴안으며 말했다. "단지 한두 마디만 더 이야기해 주시오." "어떤 것을요, 로체스타 씨?" 그래서 다음엔 반대 신문이 시작되었다. "세인트 존은 당신이 사촌 동생이라는 것을 알기 전에 모튼의 여선생이 되도록 해주었소?" "네." "당신은 학교 근처의 집에 살았다고 했는데 거기에도 왔었소?" "네, 때때로." "해가 진 후에도?" "한 번인가 두 번쯤." 잠시 침묵한 후에 그는 물었다. "사촌간인 것을 알고서 그들과 함께 있은 것은 몇 달이나 되오?" "다섯 달이었어요." "리버즈는 집안의 여인들과 지내는 시간이 많았소?" "네, 우리는 안방에서 함께 공부했었으니까요. 그는 창가에서, 우리는 방 가운데의 테이블을 사용했지요." "그는 공부에 열심했나요?" "네, 무척." "무엇을?" "인도 어요." "그는 당신에게 뭔가 가르치지는 않았소?" "인도 어를 약간." "리버즈가 당신에게 인도 어를?" "네, 그랬답니다." "그건 또 무슨 이유요? 당신에게 인도 어가 무슨 소용이 있다고." "그는 나를 인도로 데려가고 싶어했어요." "흐음, 그것이 문제의 핵심이군? 그는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했소?" "네, 제게 구혼을 했어요." "흥 괜한 소리야. 날 곯려 주려고 잘도 그런 소리를 하는군." "말하기는 죄송하지만 사실이에요. 세인트 존은 끈기 있게 되풀이해서, 당신과 같을 정도로 자기 의사를 관철시키려고 했어요." "제인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제발 가 주오. 도대체 얼마나 같은 말을 되풀이시킬 거요. 왜 이렇게 내 무릎에 앉아 있는 거요? 가란 말이오." "저는 있고 싶어요." "아냐. 있고 싶을 리가 없지, 제인. 당신 마음은 지금 나에게 있지가 않고 사촌인 세인트 존에게 가 있어. 아아, 방금까지만 해도 나는 제인이 오직 나 하나만의 것인 줄 알았건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은 몰랐소. 그러나 한탄해서 뭐 하겠소. 제인, 가서 리버즈와 결혼해요." "그러시다면 아무쪼록 저를 놓아 버리세요. 떠밀어 버리세요. 제 쪽에서 당신 곁을 떠날 마음은 없으니까요." "제인, 나는 지금도 당신의 목소리며 그 어투가 좋아요. 그 목소리는 너무도 거짓 없이 들려서 내게 새 희망을 안겨 줘요. 그 목소리를 듣노라면 나는 다시 1년 전의 나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오. 그러나 난 바보가 아니지. 가 주시오." "어디로 가라는 거예요?" "당신 자신의 길로 - 당신이 선택한 남편과 함께." "그건 누구를 말하는 거죠?" "그야 물론 세인트 존 리버즈이지." "그는 제 남편이 아니에요. 또 남편으로 맞고 싶지도 않아요.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뿐더러, 그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그가 내게 결혼하고자 한 것은 다만 내가 선교사의 아내로서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 사람은 분명히 선량하고 훌륭한 사람입니다만 내게는 더없이 냉엄한 사람이에요. 그의 곁에서 나는 행복해질 수 없어요. 내겐 조금도 애착을 갖고 있지를 않아요. 내게 대한 아무런 배려도 젊음조차도 인정하지 않아요. 다만 몇 가지 쓸모 있는 정신적 특징만을 인정하지요. 그런데도 저더러 그 사람에게 가 버리라고 말씀하세요?"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몸서리를 치면서, 본능적으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주인에게 매달렸다. 그는 웃었다. "뭐야, 제인? 그게 정말인가? 당신과 그의 관계는 그랬었소?" "절대로. 아아, 질투 따윈 할 게 못돼요. 저는 당신의 슬픔을 잊게 해주려고 좀 놀려댔을 뿐예요. 화내는 것이 한탄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에서요. 제 마음은 송두리째 당신 거예요. 로체스타 씨. 당신께 바친 것이었고, 운명이 당신에게서 나를 쫓아내어도 역시 당신 곁에 남는 거예요." 다시금 그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에게 위로를 준 것이다. "당신은 친구지간의 얘기를 했을 뿐이군, 제인?" "네, 친구 사이의." 나는 약간 망설였다. 왜냐하면 나는 친구 이상의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가 나를 도와 주었다. "그렇지, 제인, 난 아내가 필요해." "어머, 그러세요?" "왜? 뜻밖으로 들리오?" "물론이에요. 그런 말씀 한마디도 하시지 않았잖아요." "듣고 싶지 않은 뜻밖의 이야기요?" "누굴 선택하느냐에 따른 거지요." "제인 당신이 골라 줘. 나는 당신의 결정에 따를 테야." "그럼 말해 보세요,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성을." "나는, 말하겠어. 내가 제일 사랑하는 여성 - 제인, 나와 결혼해 주겠소?" "네, 하고말고요." "불쌍한 장님 - 손을 끌고 다니지 않으면 안 되는 사나이와?" "네." "불구자에다 당신보다 스무 살이나 위고, 당신이 시중을 들지 않으면 안 되는데도." "네, 그래요." "정말이오, 제인?" "네, 진정입니다." "오오, 사랑스러운 사람이여! 신이여, 나와 제인에게 축복과 보답을 주소서!" "로체스타 씨, 만일 내가 내 평생에 선한 일을 했다고 하면 - 만일 선한 생각을 가졌다고 하면 저는 이미 보답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아내가 되는 일이야말로 저로서는 이 지상 최고의 행복을 얻는 일이니까요." "그것은 당신의 희생 정신 때문에......" "희생요? 제가 무엇을 희생하나요? 굶주림에는 음식을, 기대에는 만족을 얻었어요.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입술을 대고 자기가 믿는 것 위에 안식의 특권을 얻는 일이 왜 희생이 되나요? 그렇다면 희생은 기쁜 것이네요." "그리고 나의 무력을 인내하는 거라오, 제인. 나의 결함에 눈을 감아야 한다오. 그런 고생을 할 수 있겠소?" "그런 것은 제겐 아무 것도 아녜요. 저로서는 당신의 도움이 될 현재가, 당신에 대한 사랑보다 훨씬 소중해요." "제인, 나는 여태껏 남의 도움을 받거나 인도되는 것이 싫었는데, 그러나 이제는 괜찮을 것 같소. 제인의 조그만 손가락에 내 손이 잡힌다는 건 참으로 즐거운 일이야. 제인은 내게 안성맞춤이야. 그러나 나는 당신의 마음에 들까?" "발끝에서 머리끝 모든 것이." "그렇다면 이제 망설일 건 없소. 우리 곧 결혼합시다." 그의 얼굴과 말에는 열의가 담겨졌다. 이전의 성급함이 다시 되살아 났다. "제인, 우리 당장에 하나가 돼야 하오. 이제 허가증이 필요하겠지? 그것으로 우리의 결혼은 성립하는 거야." "숲속을 거쳐서 집으로 돌아가요. 그쪽이 그늘이 지니까." 그는 내 말을 건성으로 지나치고 자시 의사만을 좇아갔다. "제인, 당신은 나를 신앙도 없는 불한당으로 알고 있군그래. 그러나 나는 현재, 대자대비로우신 신에 대한 감사로 가슴이 충만해 있소. 신은 인간보다 현명한 판결을 내려 주시기에 나는 과오를 범했소. 내 순진한 꽃을 밟을 뻔했어. 전능하신 신은 그 꽃을 내게서 빼앗아 갔소. 그래, 나는 그에 반항하여 하늘의 뜻을 저주하려 했으나, 신의 정의는 바른길에 있었던 거요. 재앙이 몸을 뒤덮고, 나는 죽음이 드리워진 골짜기를 지나 왔소. 신의 징벌은 절대적이었지. 나는 영원히 항거를 잃고 말았소, 제인. 나는 최근에 와서야 내 운명 속에 신의 손길을 인정하게끔 되었소. 회한과 참회를 경험하고, 조물주에 대한 반항 대신에 짧기는 하지만 진정어린 마음의 기도를 드리게 되었소. 며칠 전인가, 아니 날짜까지도 나는 기억하오. 나흘 전, 월요일 밤이었소. 이상이 들면서, 광기 대신에 비애가, 슬픔이, 시야를 덮은 어둠보다도 더욱 짙은 우울함으로, 문득 당신은 벌써 전에 죽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소. 아마 11시에서 12시 사이쯤 되었을 거요. 괴로운 잠자리에 들기 전 나는 신께 기구했소. '신이여, 원하시거든 이 목숨도 가져가시오. 그리고 내세로 날 데려다 주시오. 나는 거기서 제인을 다시 만날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하고. 나는 내 방의 창가에 앉아 있었소. 열려진 창문으로 상쾌하고 향기로운 밤공기가 스며들었지. 아주 안개처럼 엷은 빛으로 나는 달이 뜬 것을 알았소. 제인, 나는 당신을 만나고 싶었소. 영혼과 육식이 일치하여 당신을 그리고 있었소.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내 전부의 소망이 입 속에서 새어 나와 말이 된 거라오. '제인! 제인!' 하고." "그것을 소리내어 말씀하셨어요?" "그래요, 나는 정신 없이, 힘껏 그 말을 외쳤으니. 제인, 만일 누군가 들었다면 날 미쳤다고 했을 거요." "그것이 지난 월요일 밤 열두 시 가까운 때의 일이었다고요?" "응, 그러나 시간이 무슨 문제요. 그 다음이 이상한 거요. 당신은 날 미신가라 할 테지만,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지요. 내가 제인! 하고 외쳤을 때 어디서 들려 왔는지도 모르지만 하나의 목소리가 -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누구의 목소리인지 잘 알고 있소 - 대답할 것이오. '가겠어요! 기다려 주세요!' 하고. 그리고 잠시 후 바람결에 들려 온 말은 '어디 계세요.' 였소. 제인, 그것은 바로 당신의 목소리였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런 말이 내 마음에 새겨 놓은 심상을, 관념을 당신에게 말하리다. 하지만 내가 당신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실로 설명하기가 무척 어렵소. '어디 계세요?' 하는 말은 산속에서 한 것 같은 느낌이었소. 왜냐하면 골짜리로부터 메아리가 되어 말을 되풀이한 것을 나는 들었기 때문이오. 강한 바람이 내 눈썹을 서늘하고도 상쾌하게 불었던 듯도 생각되오. 어딘가 황야처럼 쓸쓸한 곳에서 우리 둘은 만나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그 시각에 당신은 잠들어 있었겠지, 제인? 또는 당신의 영혼이 내게로 와 나를 위로한 것인지도 모르지. 나는 분명히 당신 목소리를 들었으니 말이오. 이것은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것처럼 틀림없는 사실이야. 그건 당신의 목소리였어!" 아아, 그 월요일 밤에 나도 분명히 그 신비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들은 것은 바로 그의 소리에 답한 내 목소리인 것이다. 나는 로체스타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것에 대한 아무 것도 고백하지는 않았다. 이 우연의 일치에는, 사람 사이에 야기되고 토론되기에는 너무도 인간이 어리석고, 형언치 못할 무엇이 있는 것처럼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무언가를 얘기한다면, 틀림없이 내 말에 상대는 심각한 인상을 받으리라. 가뜩이나 상하기 쉬운 그 마음이 초자연적인 일로 해서 더욱 그래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나의 가슴속에 숨기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으로만 그쳤다. 나의 주인은 말을 계속했다. "어젯밤, 너무나 뜻밖에 당신이 내 앞에 와 섰을 때, 내게는 당신이 단지 목소리와 환영으로, 그 한밤중의 속삭임과 산울림이 사라진 것처럼 곧 침묵과 소멸 속에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소. 아아, 나는 신께 감사하오! 환영이 아닌 것을 알았소. 그래! 누구보다도 심께 감사드리오." 그는 나를 무릎에서 내려 일어나, 경건히 모자를 벗으며 보이지 않는 눈을 아래로 깔고 말없이 기도를 드렸다. 마지막 구절만이 들려 왔다. "조물주여, 감사합니다. 심판 때에도 신은 자비로 대하셨나이다. 구세주여, 간절히 비오니, 이제부터는 지금껏 살아 온 것보다 광명된 나날을 누릴 수 있도록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그러고 나서, 그는 손을 내밀어 거리낌없이 내게 안내를 부탁했다. 나는 그 사랑스러운 손을 잡아 입을 맞춘 다음 나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그보다 키가 작은 나는 그의 지팡이나 인도하는 손이 되기에 적합했다. 우리는 숲속 그늘로 들어가 집으로 향했다. 38 나는 그와 결혼했다. 그와 나와 목사와 서기, 네 사람만이 입회한 조용한 혼례였다. 교회에서 돌아와 내가 별장 저택으로 들어가자, 메어리는 점심 준비를 하고 존은 칼을 갈고 있었다. 나는 말했다. "메어리, 나는 오늘 아침 로체스타 씨와 결혼했어요." 메어리는 얼굴을 들고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난로에서 구워지고 있는 닭에 그녀는 국물을 끼얹고 있었는데, 그 국자는 허공에 있은 채 3분 동안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와 꼭같은 시간 동안 존의 칼도 숫돌 위에서 쉬고 있었다. 이윽고 메어리는 구워져 가는 고기 위에 머리를 숙이고 다만 이렇게 말했다. "네, 그러세요? 그것 참!" 존을 돌아보니, 그는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띠고 말했다. "메어리한테 나는 말하고 있었어요. 에드워드님이 어떻게 하실지를 나는 잘 알고 있었지요. 주인님은 오래 기다리시지는 못하셨을 거예요. 게다가 그것은 주인님을 위해 퍽 다행한 일이니, 반갑습니다. 에어님!" 그는 머리를 깊이 숙였다. "고마워요, 존. 로체스타 씨가 당신과 메어리에게 이것을 전해 주라고 하셨어요." 나는 그의 손에 5파운드짜리 지폐 한 장을 쥐어 주었다. 그리고 곧 부엌을 나왔다. 잠시 후에 내가 이 밀실 앞을 지날 때 두 사람의 말소리가 새어나왔다. "아무리 훌륭한 귀부인이라도 주인님께서는 저 사람만큼 더 좋은 사람은 아마 없을 거야. 굉장한 미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리 볼품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마음만은 극히 좋은 편이거든. 게다가 주인님껜 굉장한 미인으로 비쳐지는 모양이에요." 나는 무아 하우스와 캠브리지에 곧 이 소식을 적어서 편지를 내고, 또 이렇게 되기까지의 자세한 설명을 적었다. 다이아나와 메어리는 이 일에 무조건 찬동의 뜻을 표했다. 다이아나는 나에게 신혼 여행이 끝나기까지는 기다리겠지만, 그것이 끝나는 즉시로 만나러 오겠다고 전해 왔다. "그때까지 기다릴 것도 없다고 해요, 제인." 하고 로체스타 씨는 내가 편지를 읽어 주자 말했다. "우리의 신혼 여행은 일생을 두고 계속되는 거야. 그러니 기다리다가는 끝도 없다고." 세인트가 나의 편지에 회답을 주기는 6개월 후의 일이었다. 그는 로체스타 씨나 내 결혼에 대한 것은 조금도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그때 그의 편지는 아주 딱딱하긴 했으나 호의에 넘쳐 있었다. 그 이후도 그는 규칙적으로 내게 편지를 보내 왔다. 그는 나의 행복을 바라고, 내가 신이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세속에만 급급한 인간 중의 하나가 아님을 믿고 있었다. 아델을 맡긴 학교 규율은 그녀의 나이에 비해 너무도 엄격하고, 학과 역시 어렵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나는 다시 한 번 그녀를 집으로 데려와 가정 교사가 되어 볼 생각이었으나, 현실로 그것은 불가능했다. 나의 시간과 관심, 모든 것을 남편이 독점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규율이 조금은 덜한, 내가 가끔 찾아갈 수도 있고 때로는 아델을 집으로 데려올 수도 있는 그런 학교로 옮겼다. 그녀는 얼마 안 가서 새 학교에 정을 붙였으며, 공부에도 많은 진전을 보였다. 커 갈수록 건전한 영국적인 교육이 그녀의 프랑스적인 결함을 많이 교정하여, 졸업 후에는 내게 좋은 반려자가 되었다. 솔직하고 상냥한, 예의 바른 아가씨가 된 것이다. 나의 이야기는 드디어 막바지에 다다랐다. 결혼 생활의 경험에 대하여, 그리고 이야기 속에 가장 많이 나온 사람들의 운명에 대한 약간의 이야기로 끝을 맺고자 한다. 지금 나는 결혼 10년에 접어들었다. 나는 내가 더없이 행복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남편은 나의 생명이며, 나는 그의 생명이다. 나 이상으로 그의 곁에서 행복을 느끼며 살았던 여성은 없다. 남편의 뼈를 뼈로 삼고, 살을 살로 삼아서 나 이상으로 그에게 절대적인 여자는 없다. 우리는 결혼을 하고도 2년 동안 로체스타 씨를 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서로를 가깝게 느끼도록 만들어주었다. 그 즈음의 나는 현재도 그의 오른팔인 것처럼 내 눈은 그의 눈이었다. 글자 그대로, 그가 번번이 나를 그렇게 부른 것처럼 나는 그의 눈동자였다. 그는 나를 통해서 자연을 감상했고, 책을 보았으며 그러고 그를 위해서 외계를 보고, 나무며 강물, 구름, 햇빛의 모양 등을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나 주위의 기상을 말해 주었고, 그를 위해 책을 읽고 그가 가고 싶은 곳으로 인도했다. 그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내 시중을 받는 일에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내가 그를 그토록 사랑하고 있다는 것, 나의 뜻에 의한 시중을 받는 일이 나의 가장 큰 즐거움을 만족시킨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2년이 지난 어느 날 아침이었다. 그가 이르는 말대로 한 장의 편지를 쓰고 있는 내게로 다가와서 얼굴을 바짝 대고 말했다. "제인, 당신은 꽤 번쩍거리는 목걸이를 하고 있군요?" 나는 황금의 시곗줄을 걸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옷은 엷은 하늘색이야?" 그 말대로였다. 그의 한쪽 눈이 확실히 좀 나아지는 것 같다고 내게 말했다. 남편과 나는 런던으로 나왔다. 그는 이름 있는 안과 의사의 치료를 받은 끝에 결국 그 한쪽 눈의 시력을 되찾았다. 이제 그는 손을 잡지 않고도 걷게 되었고, 하늘도 이미 공백이 아니며, 대지도 이젠 공허가 아니었다. 우리의 첫아들을 처음으로 품에 안았을 때, 그 사내애는 이전의 그처럼 크고 반짝이는 까만 눈을 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다시금 진심으로 자비로우신 신이 심판을 늦춘 것임을 확인했다. 리버즈의 자매, 다이아나와 메어리도 제각기 결혼하였다. 다이아나는 해군 대위와, 그리고 메어리는 목사와. 두 사람은 모두 오빠의 대학 동창으로서 그 학식이나 신념은 그녀들과 맺어지기에 썩 잘 어울렸다. 1년에 한번씩 번갈아 그들은 우리를 만나러 오고, 우리도 그들을 방문하곤 한다. 세인트 존 리버즈는 영국을 떠나서 인도로 갔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그 길로 들어서서 어떠한 곤란과 위험에도 굽힐 줄 모르고, 오직 견고하고, 성실하게, 헌신적으로 정력과 열성과 진실을 다하여 인류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 그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결혼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자신은 이제까지 충분히 노고를 겪어 왔다. 그리고 그 노고도 끝에 다다랐다. 그의 빛나는 태양은 분주히 넘어가고 있다. 언젠가 나는 알지 못하는 사람이 쓴 편지에서, 하느님의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 마침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리리라 짐작하고 있다. 또한 이 때문에 무엇을 슬퍼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