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제인에어(상) 지은이 : 샤로트 브론테 ----- 차 례 ----- 작가소개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작가소개 1816년 4월 21일, 영구 요크셔 주(州) 웨스트 라이딩에서 탄생 1824년 처 웨스트 머런드의 코원 브리지라는 기숙 학교에 들어감. 이곳이 <제인 에어>의 로우드 학원의 모델이 됨. 1835년 로헤드 기숙 학교의 교사로 부임함. 1841년 화이트 집안에 잠시 가정교사로 들어감. - 1846년 5월, 필명을 남자 이름으로 하여 세 자매의 시집 <커러와 엘리스와 액튼의 시집>을 자비로 출판. 1847년 8월, <제인 에어>를 완성함. 10월 '커러 벨' 이란 이름으로 스미스 엘더 사에서 출판되자마자, 여러 잡지로부터 극찬을 받음. 1857년 처녀작 <교수>가 사후 출판됨. 얼마 후 개스켈 부인의 <샬로트 브론테의 생애>가 출판됨. 1860년 샬로트의 단편 <엠마>가 발표됨. 1 그날 오전, 우리는 낙엽 쌓인 관목 숲을 한 시간 가량 걸었다. 먹장 구름이 하늘 가득 몰려와 있었던 탓에 산책다운 산책이 될 수는 없었다. 나는 날씨가 추운 날 오후의 산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저녁 찬 바람은 손발을 얼얼하게 할 만큼 매웠다. 더구나 유모 벳시의 잔소리를 들어 기분이 언짢을 때나, 리드 가의 아이들, 일라이자나 존, 조지아나에 비교해서 내가 훨씬 약했고, 그래서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허무감을 안고 돌아올 때였다. 이들 세 아이는 지금 객실에서 어머니와 놀고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편안히 앉아 있는 리드 부인의 모습이 더 없이 행복해 보였다. 부인은 나를 이 행복에서 제외해 버린 것이다. 그녀의 말을 들어 보면 이러했다. 너를 멀리하는 일은 무척 괴롭다. 네가 진정으로 사람을 잘 사귀고, 아이다운 성질이 되려고 애쓰고, 그리고 또 좀더 명랑하고 솔직한 행동을 보여줄 때까지는, 아무런 부족없이 행복하게 지내는 아이들과 함께 있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객실 곁에 붙어 있는, 아침 식사하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되도록이면 책상에서 그림이 많이 그려진 비위크의 '영국의 조류사'를 뽑아 들고 창틀에 올라 터키 사람처럼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리고 빨갛고 두꺼운 커튼을 당기니 그 안은 좋은 은신처가 되었다. 내용은 별로 흥미가 없었지만 그래도 첫 부분에는 아이들 마음에도 무심히 지나칠 수 없는 곳이 있었다. 그것은 해조가 잘 오는 장소, 해조 외에는 아무 것도 살고 있지 않는, '외로운 바위 산골'인 노르웨이 남쪽에서 '북쪽 곶'까지, 수많은 섬들이 흩어져 있는 해안에 관련된 얘기였다. 그 광막한 북극 지대와, 인적 드문 적막하고 처량한 나라들 - 쓸쓸한 바닷가에 버려진 작은 배와 침몰되는 난파선을 구름 사이로 냉담하게 바라보는 푸른 달 같은 것이 내 가슴에 깊은 의미로 새겨졌다. 조용한 교회의 묘지, 그곳의 입구에 우뚝 선 두 그루의 나무, 낮은 지평선, 막 떠오른 초승달 - 이러한 정경에 얽힌 정서가 어떤 것이었는지, 나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어느 그림에도 각자 이야기가 있었다. 나의 미숙한 이해력이나 불완전한 감수성으로는 수수께끼만 같아 모르는 점이 있긴 했지만, 그보다는 더 깊은 흥미가 많았다. "어이, 새침데기!" 존 리드의 큰 소리가 들렸지만, 난 가만히 있었다. 문이 열렸다. 방안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얘가 어디로 갔을까?" 존은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편은 아니니까 그 뿐이라면 발견되지 않았겠지만, 일라이자가 잠깐 목을 들이밀더니 말했다. "아이, 틀림없이 커튼 뒤에 있어요." 순간 나는 방으로 나서고 말았다. 나는 존 리드에게 끌려나올 것만 같아 몸이 떨렸던 것이다. "무슨 일이야?' 나는 몹시 주저하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도련님. 이렇게 말해." 이것이 대답이었다. "어이, 이리 잠깐 와." 존 리드는 나보다 네 살이나 위인 열네 살 먹은 소년이었다. 나이 치고는 덩치가 컸고, 뼈대도 튼튼했고, 검은데다 혈색이 나쁜 피부, 우둔한 눈과 코, 거기에다 손발이 컸다. 그는 어머니와 누이에게도 그리 깊은 애정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내게만은 어찌된 일인지 특별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끊임없이 나를 꾸짖고, 짓궂게 굴었다. 존의 명령에 굴복하는 버릇이 있는 나는 그의 의자 곁으로 갔다. 한 3분쯤은 내게 긴 혀를 내어 보이더니 느닷없이 내리쳤다. "아까, 엄마에게 말대답한 벌이야." 하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커튼 뒤에 몰래 숨은 벌과, 지금 건방지게 군 행동도 함께 받는거야, 이 생쥐 새끼야. 커튼 뒤에서 읽던 책을 이리 내놔 봐." 나는 창틀로 가서 책을 가져 왔다. "내 책장에 손대면 안 되는 것 알지? 이 책장은 내 것이란 말야. 넌 한푼도 없는 식객이라고 엄마가 그랬어. 너의 아버지가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죽었으니까. 너 같은 건 비렁뱅이질을 하는 게 당연하고, 우리같이 신분이 좋은 아이들과 함께 살고, 우리들과 같은 것을 먹고, 우리 엄마가 사 준 옷을 입고 똑같이 지낼 필요는 없어." 나는 처음에 존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손에 든 책을 내게로 던지려는 것을 본 순간, 나는 문득 비명을 지르고 옆으로 몸을 피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날아온 책에 맞아 쓰러지는 순간 문에 머리를 부딪쳐 깨지고 말았다. 몹시 아팠다. 난 그때 공포가 절정의 도를 넘어, 다른 감정이 그것을 대신했다. "심술꾸러기! 심술꾸러기!" 하고, 나는 말했다. "너는 살인자 같애! 노예 취급이야, 로마의 황제 같아!" "뭐, 뭐라고!" 존은 소리쳤다. "네가 그런 말을 내게 했겠다! 어이, 일라이자, 조지아나, 방금 이게 말한 것을 들었어? 엄마에게 모두 이를거야. 하지만 그 전에......" 그는 갑자기 내게로 덤벼들었다. 머리와 어깨를 그에게 붙잡힌 것을 나는 느꼈다. 나는 정신없이 반항했다. 존은 마치 날뛰는 폭군 같았고, 살인자 같았다. 나는 미치광이처럼 그와 다투었다. 나의 두 손이 무슨 짓을 했는지 확실한 기억은 없지만, 존은 나를, "이 생쥐! 생쥐!" 하고 큰소리로 욕을 했다. 그러나 순식간에 원군이 달려왔다. 일라이자와 조지아나가 2층으로 가 어머니에게 일러 바친 것이다. 부인은 벳시와 사호나 아보트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들은 우리들의 싸움을 말렸다. 여러 가지 소리가 들렸다. "어머나! 존 도련님에게 덤벼들다니, 난폭하기도 해라!" "이렇게 못돼먹은 아이를 본 적이 없어요!" 그 뒤로는 리드 부인이 단정적으로 말했다. "붉은 방으로 데려다가 가두어요." 네 개의 손이 나를 짓누르고, 나는 2층으로 떠밀려 내려왔다. 2 떠밀려 가는 도중에도 나는 계속 저항했다. 저항하는 노예가 다 그렇듯이 약이 올라 어떤 짓이라도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보트, 이 아이의 팔을 잡아 줘요. 마치 고양이 같다니까." "기가 막혀, 정말!" 사환은 소리쳤다. "아니 도련님에게 치고 덤비다니.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죠. 에어 아가씨, 당신의 은인인 도련님에게 덤비다니! 말하자면 당신의 주인이 아니에요?" "주인? 어째서 존이 내 주인이에요? 내가 하인인가요?" "아니, 당신은 하인보다도 못해요. 왜냐하면 당신은 그만한 노력을 하지 않으니까요. 자아, 여기에 앉아서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세요." 두 여자는 리드 부인이 명한 방에 나를 끌고 들어와, 의자 위에 밀었다. 벳시와 미스 아보트는 팔짱을 끼고 서서, 나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는 듯한 무서운 눈길로 노려보았다. "부인도 늘 말하지만, 얘는 말야, 성질이 아주 못됐어요." 아보트가 미운 듯이 말했다. "이만한 나이 또래의 아이로, 얘만큼 속임수가 많은 아인 처음 봤어요." 벳시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나를 보고 말했다. "저어, 아가씨. 당신은 부인의 신세를 지고 있는 몸이니까 잘 생각하지 않으면 안 돼요. 이 집의 아가씨들과 도련님을 동등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단 말예요. 부인이 자기 아이들과 같이 기르고 있는 것은 친절하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도 다 아가씨를 위해서예요." 부드러운 소리로 벳시는 다시 말했다. "신경질만 부리다가는 하느님이 혼내줄 거예요. 아이 무서워, 무서워! 자아, 벳시, 가요. 에어 아가씨, 혼자서 하느님께 용서의 기도를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뭣인가가 굴뚝으로 들어와서 당신을 데려가 버릴 거예요." 두 사람은 문을 닫고, 밖에서 잠그고는 가 버렸다. 이 붉은 방은, 사람이 자는 일도 거의 없는 빈 방이었다. 하지만, 이 방은 이 저택에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넓은 방이었다. 융단은 빨갛고, 벽은 핑크색이어서 침대 위의 새하얀 마르세이유 무명 덮개가 한결 눈이 부실 만큼 더욱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리드 부인의 남편이 죽은 지 9년이 된다.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방이었다. 이 방에 그의 유해가 안치되고 장의사에서 온 인부에 의해 그의 관이 들려 나간 곳도 바로 이 방이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신성한 두려움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 방에 발을 들여놓지 않게 했다. 잠시 후 나는 기운을 차리고 하녀들이 정말로 문을 잠그고 갔을까를 생각하며 걸어가 살펴보았다. 아아, 그런데 정말로 문은 어떤 무엇보다 육중하게 잠겨 있었다. 내가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가려면 거울 앞을 지나야만 했다. 아무리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나는 무엇엔가 이끌린 듯 거울 속을 들여다보고 말았다. 그 안, 깊은 공동의 세계는 현실 이상으로 추웠고, 어둡게 가라앉아 보였다. 그 암울한 세계에 하얀 얼굴과 손이 떠올라 나를 노려보는 이상한 아이, 다른 모든 것이 아닌 바로 요정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벳시가 저녁 식사 후에 해주는 얘기 속에 나오는 작은 도깨비처럼 보였다. 인적이 드문 황야, 뱀꼬리 고사리가 우거진 골짜기, 이런 곳을 지나는 길손의 눈앞에 갑자기 나타나는 도깨비 말이다. 이미 내게는 미신이 들씌워져 있었지만, 그것이 완전한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나의 피는 아직 불타고 있었다. 반항하는 노예로서의 격렬한 힘이 아직도 나를 강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왜 나는 항상 괴롭힘을 당하고, 꾸중을 듣고, 저주를 받아야만 하는 것일까? 어째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 누군가 한 사람쯤 내 편이 되어 주면 좋을 텐데. 고집 세고 건방진 일라이자는 모두에게 소중히 취급받는다. 응석받이에다가 성질이 나쁘고, 욕 잘하고, 건방진 조지아나는 모두가 귀여워한다. 그 귀여운 머리, 빨간 뺨, 금빛 곱슬 머리는 조지아나로 하여금 모두에게 기쁨을 주고, 어떤 잘못도 용서받게 하는 것 같다. 존이 비둘기의 목을 비틀든, 새끼 공작을 죽이든, 양을 몰아 내보내든, 온실의 포도를 따든, 아끼는 화초의 싹을 잘라도 누구 한 사람 방해하지 않는다. 존에게 얻어맞은 내 머리는 통증이 그치지 않았고, 피가 멎지 않았다. 나를 때린 존은 괜찮고, 반대로 거기에 저항한 나만이 모두로부터 비난받고 있는 것이다. "너무 해. 너무 해!" 고통에 자극된 나는 어린애 같지 않은 정신력이 나의 이성을 눈뜨게 했고 부르짖게 했다. 붉은 방에서 낮의 빛깔이 차츰 엷어져 갔다. 비는 끊임없이 계단의 창유리를 때렸고, 집 뒤 숲에서는 바람이 울고 있었다. 나는 차츰 돌처럼 몸이 식어 가자 용기도 그만큼 시들었다. 분노의 불이 차츰 사그라지자, 창백한 우울이 축축하게 걸렸다. 나는 문득 이상한 일을 생각했다. 만일 리드 씨가 살아 있다면 내게 친절히 해주겠지. 나는 그의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쨌든 그는 나의 외삼촌이었고 고아가 된 나를 맡아 준 사람이다. 그는 죽을 때, 리드 부인에게 나를 자기네 아이들처럼 양육하라고 당부한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흰 베드 위로 어둠이 깔린 벽 쪽을 바라보며, 죽은 사람이 이 세상에 다시 살아 온다는 얘기를 생각했다. 리드 씨의 망령이 누이동생의 아이를 맡아 학대하는 데 대해 고민하고, 그래서 내 앞에 모습을 나타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불현듯 했다. 그 순간 벽에 한줄기의 빛이 비쳤다. 아니, 덧문 사이로 흘러들은 달빛일까? 그렇지는 않았다. 달빛은 움직일 리가 없는데, 이 빛은 흔들흔들 움직이지 않는가. 빛은 천장으로 올라갔고, 나의 머리 위에서 흔들렸다. 나는 이 불빛이 영락없이 저 세상에서 온 무슨 환영의 전조처럼 생각되자 가슴이 뛰고, 머리가 타는 듯이 더워지고, 숨이 막힐 것만 같았으며,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문으로 달려가, 정신없이 문을 덜컹덜컹 흔들었다. 그러자 복도를 달려오는 발소리. 곧 문이 열리고, 벳시와 아보트가 들어왔다. "에어님, 왜 그러세요?" 벳시가 물었다. "아아, 무서워. 뭔가 빛나는 것이 보였어. 유령이 오는 줄 알았어." 그때, 나는 벳시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그녀도 그 손을 뿌리치려 하지 않았다. "얘는 무서우니까 괜히 소리만 크게 질렀어요." 아보트가 씹어 뱉듯이 말했다. "그게 무슨 버릇이야? 얘의 그러한 수법을 나는 알고 있어요." "도대체 무슨 소란이니?" 제3의 목소리가 건방지게 말했다. 리드 부인이 모자 끈을 흔들거리며 가운 자락을 끌고, 복도를 걸어왔다. "제인 아가씨가 너무 큰 소리를 지르기 때문에......" 벳시가 호소했다. "어떻게든지, 좀 꾸중을 해두면 괜찮아요." 부인의 대답은 그 뿐이었다. "나는 잔손질은 싫어서요, 특히 아이들에게 잔손질하는 것은......" "아주머니, 외아주머니, 부탁이에요! 용서해 주세요! 나, 죽겠어요. 만일에......" "가만 있어! 그처럼 시끄럽게 구는 것보다 더 싫은 것은 없어요." 리드 부인은 나를 갑자기 떠밀어 넣고, 다짜고짜 문을 잠가 버렸다. 복도를 사라져 가는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일련의 발작을 일으켰고 그 뒤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3 그 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뭔가 무서운 악몽을 꾸는 심정으로 눈을 떴고, 다만 검은 가로대를 거쳐 빨간 불꽃이 타고 있음을 보았다. 누군가가 나를 흔들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내 몸을 누군가가 안아 일으키듯 했고, 그러한 느낌은, 일찍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상냥함이었다. 사람의 팔에 머리를 얹고, 그것은 마치 베게에 기댄 것처럼 편한 기분이 되었다. 5분쯤 지났을까 혼미한 구름이 걷혔다. 나는 나의 침대에 눕혀졌고, 빨간 불꽃은 화덕에서 나오는 불빛임을 알 수 있었다. 밤이었다. 벳시가 대야를 들고 침대 곁에 서 있었고, 한 신사가 내 머리맡의 의자에 앉아서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약방집 주인 로이드씨로, 하인들이 병이 났을 때 리드 부인이 부르는 사람이었다. "내가 누군지 알겠어요?"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그의 이름을 대고 손을 내밀었다. 로이드 씨는 내 손을 잡고 웃는 얼굴로, '차츰 기운이 나는군요.' 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나를 다시 누이고, 벳시에게 오늘 밤은 편안히 잠들도록 해주라고 주의시켰다. 내일 다시 오겠다면서 그는 가고 말았다. 나는 슬펐다. 그가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 나는 진심으로 그를 의지했고, 백만 군사를 얻은 느낌이었기 때문에 그가 문을 닫고 가 버리자 온 방안이 갑자기 캄캄해진 느낌이었다.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아가씨, 잠들 것 같애요?" 상냥한 목소리로 벳시가 물었다. "물을 마시지 않겠어요? 아니면 뭘 좀 자시든지." "아니, 싫어요. 고마워요, 벳시." "그럼 나는 이만 자야 되겠어요. 벌써 열두 시가 넘었어요. 하지만 무슨 일이 있거든 깨워 주세요." 참으로 뜻밖의 상냥한 말이었다. 벳시는 나가더니 하녀 사라를 데리고 들어왔다. 혼자 내 곁에서 자기가 겁이 났던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침대에 같이 누워 한 30분 동안 소곤거리더니 이내 잠들고 말았다. 나는 잠들래야 잠들 수가 없었다. 촛불마저 꺼지고, 참으로 기분 나쁜 긴 밤이었다. 귀도, 눈도, 마음도 온통 공포에 젖어 있었다. 아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공포에. 이 붉은 방 사건 뒤에는 특별히 무거운 육체의 병은 없었다. 다음날 오전에 나는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숄을 뒤집어쓰고, 아이들 방의 화덕가에 앉았다. 아이들은 그들의 어머니와 함께 마차로 외출하고 없었다. 벳시만이 친절한 말로 나와 얘기했다. 이러한 상태는, 평소에 꾸중듣고 혹사당한 나에게 평화로운 낙원이었다. 오전중에 로이드 씨가 왔다. "아니, 벌써 일어났어요?' 하고 들어오면서 그는 말했다. "유모, 아가씨는 좀 어떠세요?' 벳시는 내가 꽤 건강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좀더 즐거워 보일 텐데. 이리 와요, 제인 아가씨. 당신의 이름은 확실히 제인지요?" "네, 제인 에어예요." 친절한 약제사는 나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내게는 그 눈이 몹시 날카롭게만 여겨졌다. 딱딱한 표정이었지만 사람을 좋아할 것 같았다. 그는 나를 들여다보면서 담배를 한 개 꺼냈다. 마침 하인들의 점심을 알리는 벨이 크게 울렸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유모, 당신을 부르는군요." 하고 그는 말했다. "갔다 오세요.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내가 제인 아가씨에게 얘기를 잘 해 드릴 테니까." 벳시는 가기 싫었지만 식사 시간이 엄하게 지켜지고 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일어서 나갔다. "어제는 왜 그렇게 기분이 나빴어요?" 벳시가 간 뒤에 로이드 씨가 물었다. "유령이 나오는 방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갇혀 있었어요." 로이드 씨가 미소 지으면서 동시에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유령이라고! 당신은 역시 어린아이군. 유령이 두려워요?" "리드 아저씨의 유령이니까 무서워요. 아저씨는 그 방에서 돌아가시고, 관도 그 방에 높여 있었어요. 불도 켜지 않고 그 방에 나 혼자만 가두다니, 잔혹해요. 나는 평생 이 일을 잊지 못할 거예요." "뭘, 그까짓 하찮은 일을 가지고, 그래 당신은 그 때문에 비참한 생각을 하고 있군? 지금은 대낮인데도 무서워요?" "아아뇨. 하지만 곧 밤이 오잖아요. 그리고 나는 불행해요. 다른 일로 무척 불행해요." "다른 건 뭐야? 그걸 좀 아저씨한테 얘기해 봐요." 이 질문에 나는 기분이 풀릴 때까지 자세하게 설명할 것을 얼마나 희망했던가! 하지만 그 답을 정리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던가! 그러나 서투르면서도 되도록이면 진실을 말하려고 애썼다. "중요한 것은 내게 부모도 형제도 없다는 거예요." "하지만 친절한 외숙모와 외사촌들이 있잖아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떠듬떠듬 얘기했다. "하지만 존 리드는 나를 때리고, 아주머니는 나를 붉은 방에 가두었어요." "게이트헤드 저택을 매우 아름다운 저택이라고 생각지 않으세요? 이런 훌륭한 저택에서 지내는 것을 고맙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하지만 여기는 내 집이 아니에요, 아저씨,. 아보트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여기서 살 권리가 하녀만큼도 없대요." "허어, 설마 당신은 이처럼 훌륭한 저택에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은 아니겠지요?" "다른 데라도 갈 곳만 있다면 나는 기꺼이 나가겠어요." "자아, 어떨까? 리드 부인 외에 당신은 친척이 있으세요?" "난 몰라요. 한 번은 리드 부인에게 물었더니 에어라는 성을 가진 가난하고 천한 친척이 혹시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주머니는 모른대요." "그런 친척이 있다면 그리고 가고 싶어요?" "아뇨, 나는 가난한 집 아이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당신의 그 친척은 그렇게 가난할까요? 노동자일까요?" "모르겠어요. 아주머니는 친척이 있다 해도 아마 거지같은 생활을 하고 있을 거래요. 나는 거지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학교에 가고 싶지는 않으세요?" 나는 학교가 어떤 곳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학교에 간다는 것은 무엇이든간에 전부를 바꾸어 버리는 일이었다. 그것은 긴 여행이며 게이트헤드에서 완전히 멀어지는 것, 새로운 생활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정말, 학교에라도 갔으면 좋겠어요." "그래, 그래. 앞일은 누구도 알지 못해." 로이드 씨는 일어나며 말했다. '얘는 환경을 바꿔 주는 것이 좋겠어.'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꽤 신경이 약해 있으니까.' 벳시가 들어왔다. 그리고 동시에 자갈길을 올라오는 마차 소리가 들렸다. "저건 부인이에요, 유모?" 하고, 로이드 씨가 물었다. "돌아가기 전에 잠깐 얘기할 게 있어요." 벳시는 그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그는 리드 부인에게 나를 학교에 보내도록 권할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 권유는 즉석에서 받아들여졌다. 왜냐하면 어느 날 밤 아보트가 벳시와 둘이서 바느질을 하다가, 내가 잠든 줄만 알고 다음과 같이 말했기 때문이다. "부인은 분명히 말했어요. 귀찮고, 몸도 약한 아이를 내보낼 수만 있다면 더 이상 기쁜 일은 없겠대요." 그때 미스 아보트가 벳시에게 한 얘기를 고려해 볼 때, 내가 처음 안 사실이 몇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가난한 성직자였다는 것과 나의 어머니는 상대방의 신분이 낮다는 주위 사람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아버지와 결혼한 것. 나의 외할아버지인 리드 노인은 어머니의 고집에 화를 내어 한푼도 재산을 주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결혼한 지 불과 1년 후에, 아버지는 공장가의 빈민굴을 돌아다니다가 때마침 유행했던 티푸스에 걸린 것이며 어머니도 아버지의 병에 감염되어 두 사람 다 세상을 뜨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4 11월, 12월, 1월도 거의 반은 지나갔다. 모두들 크리스마스와 신년은 게이트헤드에서 예년과 다름없이 즐겁게 보냈지만 물론 나는 여기서 제외되었다. 손님들이 돌아가기만을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했다. 나는 벳시가 계단을 오르는 발자국 소리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녀는 저녁 대신 포도빵이나 치즈 케이크를 가져와서, 내가 그것을 다 먹으면 이불을 덮어 주고 키스를 두 번 하고, "제인 아가씨 잘 주무세요." 하고는 갔다. 내 생각으로는 벳시 리라는 본래 착한 여자로, 모든 일에 눈치가 빨랐고 아름답기도 했다. 그녀는 늘씬했고 검은 머리, 검은 눈, 갸름한 얼굴에 혈색 좋은 피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다소 성급한 데가 있어서 주의나 정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는 여자였다. 그래도 나는 게이트헤드에서는 누구보다도 그녀가 좋았다. 1월 15일 아침 아홉 시경이었다. 벳시가 방으로 뛰어들어왔다. "제인 아가씨, 에이프런을 벗어요. 오늘 아침에는 손과 얼굴을 씻었나요?" "아직 안 씻었어, 벳시. 이제 겨우 청소가 끝난걸." 벳시는 나를 세면대로 데리고 가서 세수를 하게 한 뒤, 에이프런을 벗기고 나서 식당에서 부르고 있으니 내려가 보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이럭저럭 한 석 달 동안을 리드 부인에게 불려가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쭉 아이들 방에 있었기 때문에 식당도 객실에도 발을 들여놓기가 두려웠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 허리를 굽히고 얼굴을 들자, 거기에는 딱딱한 표정을 지은 까만 옷을 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리드 부인은 늘 그렇듯이 화덕가에 있었다.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하여 그리고 갔더니, 그녀는 다음과 같은 말로 나를 손님에게 소개했다. "얘가 당신에게 맡기려던 아이예요." 그는 내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얼굴을 돌려 회색 눈으로 나를 찬찬히 뜯어보더니 딱딱한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그만 아인데, 나이는?" "열 살이에요." "그렇게 됐어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하고 몇 분간 계속해서 나를 관찰했다. 이윽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이름이 뭐예요, 아가씨?" "제인 에어라고 해요." "흐음, 그럼 제인 에어, 당신은 착한 아이입니까?" 이 물음에는 긍정의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가만히 있었다. 리드 부인이 나를 대신해서 분명하게 머리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브로클 허스트 선생, 3주 전에 편지를 드렸듯이 이 아이는 내가 바라는 성격이나 기질을 갖고 있지 않아요.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애를 로우드 학교에 넣어, 선생님들 힘으로 감독을 잘해 주셨으면 해요. 특히 이 아이의 남을 속이는 나쁜 버릇을 고쳐 주신다면 정말 고맙겠어요. 제인, 네가 듣는 데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브로클 허스트 선생에게 그 나쁜 버릇을 보일까 봐 걱정이 되어서 그러는 거야." 이것만 보더라도 내가 리드부인을 싫어하고 두려워한 것 또한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잔혹하게 상처 입히는 것은 바로 그녀의 본성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손님 앞이라, 심장까지를 도려내는 심정을 꾹 참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보내려는 그 새로운 생활에서 진작의 내 희망을 말살하려는 것임을 느꼈다. 브로클 허스트 씨의 눈에 나는 차츰 교활하고 사악한 아이로 탈바꿈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무서운 일에서 구원될 방법이 내게 있었을까? "남을 속이는 것은 아주 나쁜 결점이에요." 브로클 허스트 씨는 말했다. "그것은 거짓말과 같은 거예요. 거짓말쟁이는 모두 불과 유황이 타는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리드 부인, 학교에서는 감독을 잘 하겠어요. 템플 선생을 비롯해서, 여러 선생님들에게 얘기를 잘 해놓겠어요." "제발, 이 아이의 장래를 위해 잘 교육시켜 주세요. 써먹을 수 있도록 언제까지나 겸손한 마음으로 있도록 기도하겠어요. 그리고 휴가 때는 학교에서 보내도록 해주세요." "부인의 방침 잘 알겠습니다. 겸양은 그리스도교의 미덕이고, 특히 로우드 학교 학생들에게 알맞는 미덕이기도 합니다. 나는 이 미덕에 특히 유의하도록 지시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잘됐군요. 온 영국을 다 찾아봐도 그처럼 제인 에어에게 어울리는 학교는 없을 거예요. 견실해야지요. 견실이 첫째예요." "견실이야말로 그리스찬의 첫째 의무예요. 로우드의 시설에 관계되는 모든 규칙에 그것이 나타나 있어요. 간소한 식사, 소박한 복장, 수식없는 설비, 근면한 습관, 이것이 학교와 학생들의 일상 생활이지요." "그럼, 되도록 빨리 보내도록 하지요. 내가 복잡한 책임을 빨리 벗기 위해서 그래요." "아, 그럼요. 그럼, 이만 나는 가 보겠습니다. 한두 주일 뒤에는 나도 브로클 허스트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친구가 그보다 빨리는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미스 템플에게 편지를 띄우지요. 입학에는 지장이 없을 거예요. 그럼 실례." 브로클 허스트 씨는 돌아갔고 리드 부인과 나만이 남았다. 몇 분간 침묵이 흘렀다. 부인은 바느질을 했고, 나는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리드 부인은 그때 서른 여섯이나 일곱 살이었다. 건강한 몸맵시였다. 실로 빈틈 없는 사람이어서 집안 일도, 소작 관계도 모두 자기가 처리해 갔다. 언제나 훌륭한 옷을 입었고, 또 아름다운 의상에 어울림직한 당당한 풍채를 잊지 않았다. 나는 리드 부인이 브로클 허스트 씨에게 나에 관해 얘기한 것들을 생각했다. 그 말들은 하나하나 나의 마음에 가시가 되어 고통을 주었다. 나는 지금 들은 말들을 한 마디, 한 마디 아프도록 다시 느끼고, 원망스러움이 마음속에 격하게 불타올랐다. 나는 말해야 했다. 나는 몹시 짓밟히고 있으니까, 복수를 해야 했다. 하지만 뭐라고 말할까? 앞에 있는 적에게 복수의 말을 하게 할, 어떤 힘이 내게 있는가? 나는 용기를 내어, 다음과 같은 노골적인 말을 힘껏 내뿜었다. "나는 남을 속이지 않아요. 만일 속이고 싶으면, 당신을 좋아한다고 했을 거예요. 하지만, 나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하겠어요. 나는 존 리드 말고는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요." 리드 부인은 손을 멈춘 채. 얼음 같은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무슨 얘기를 더할 작정이니?" 그녀는 마치 어른들과 싸울 때처럼 말했다. "당신이 내 부모가 아니어서 다행이고 그것이 무척 나는 기뻐요. 나는 살아 있는 한, 당신을 외숙모라고 부르지 않겠어요. 어른이 되어도 절대로 당신을 만나지 않겠어요. 만일 누군가가, 당신이 내게 무슨 짓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당신을 생각만 해도 기분이 나쁘고, 당신은 나를 비참하고, 참혹하게 대우했다고 말하겠어요." "어째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니, 제인?" "어째서라니요? 세상 사람들은 당신을 좋은 여자라고 생각하겠지만, 당신은 나쁜 사람이에요. 박정한 사람이에요. 당신이야말로 남을 속이고 있어요." 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나의 마음은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지금까지 느껴 본 적이 없는 자유롭고 승리에 찬 기분으로 들뜨기 시작했다. 리드 부인은 겁먹은 얼굴이 되었다. 바느질감이 무릎에서 떨어지고 두 손을 올리고, 몸을 앞뒤로 흔들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얼굴이 붉그락 푸르락거렸다. "제인, 너는 뭔가 착각을 하고 있군 그래. 안심해요, 나는 너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어." "아니, 달라요. 당신은 브로클 허스트 선생에게, 내가 성질이 나쁘고 남을 속이는 버릇이 있다고 말했어요. 그러니까 나는 로우드의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이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나를 학대했는지 모두 가르쳐 주겠어요." "제인, 너는 그런 일에 대해 잘 모르는 거야. 아이들은 결점을 고치지 않으면......" "속이는 것은 내 결점이 아니에요!" 나는 난폭하게 큰 소리를 쳤다. "정말, 하루라도 널 빨리 학교로 보내야겠다." 리드 부인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바느질감을 주워 들고는 분주히 방을 나가고 말았다. 나는 혼자 남았다, 승리자로서. 이것은 나의 최초의 승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흉폭한 기쁨은 나의 띄는 맥박이 가라앉는 것과 마찬가지로 빨리 식었다. 나는 복수의 맛을 처음으로 맛봤다. 향기 좋은 술을 마신 것처럼 뜨겁고 짜릿하니 기분이 좋았다. 그 뒷맛은 피냄새가 나고, 녹을 핥는 것 같은, 독을 마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러한 난폭한 언동보다는 좀더 나은 자기 능력을 과시하고 싶었고, 캄캄한 분노의 세계보다는 다소 부드러운 기분을 맛보고 싶었다. 나는 식당의 유리 문을 열고 나갔다. 정원수만이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대지는 태양에도 바람에도 수그러들지 않는 한기만이 가득했다. 나는 안쪽 나무 숲으로 걸어갔다. 춥고 흐린 하늘만이 무겁게 대지를 누르고 있었다. 하늘에서 가끔씩 눈이 흩날려 언 오솔길이나 잿빛 초원에는 그대로 떨어져 녹지 않고 있었다. 나는 거기에 서 있었고 실로 비참한 아이였다. 순간 나를 부르는 맑은 목소리를 들었다. "제인 아가씨! 어디 계세요? 점심이에요!" 벳시였다. 그의 가벼운 발걸음이 오솔길을 따라왔다. "참, 고집도 세셔. 그렇게 불렀는데도 왜 오지 않았어요?" 나는 벳시의 두 손을 잡고, "벳시, 꾸짖으면 싫어요." 평소의 나보다는 훨씬 솔직한 이 행동이 그녀의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당신은 참 이상한 아이군요, 제인 아가씨. 괜히 혼자 돌아다니는 게 좋은가 봐요. 그래서 학교에 가기로 한 거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엾은 벳시하고 헤어지는 게 슬프지 않으세요?" "벳시는 나 같은 것 걱정해 주지 않아요. 언제나 나를 꾸짖는 걸요." "무슨 소리예요! 자아, 빨리 와요. 좋은 것을 가르쳐 주겠어요." "좋은 일이 나한테 있겠어요, 벳시." "어째서 그런 말을 하나요? 아무튼 부인과 아가씨들과 존 도련님은 오후에 외출하니까 당신은 나와 함께 차를 마시는 거예요. 당신에게는 케이크를 구워 주도록 부탁해 보겠어요. 그 뒤에 내가 아가씨의 서랍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 드릴 거예요. 이제 곧 당신의 짐을 꾸려야 하니까. 부인은 하루나 이틀 후에 당신을 떠나 보낸다니까, 당신이 가져가고 싶은 장난감을 골라요." "벳시, 내가 떠날 때까지는 꾸짖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네, 약속하지요. 하지만 좋은 아가씨가 되어서 나를 두려워하지 말아야지요. 나는 아가씨를 싫어하지는 않아요. 당신이 좋아요."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아." "그럼 나와 작별하는 것이 기쁘세요?" "그럴 리야 있겠어요, 벳시. 사실은 지금 와서 생각하니 슬픈 것 같아요." "지금 와서 생각하니 슬픈 것 같다구요? 참 솔직하게 말씀하시는군요. 지금 내가 키스해 달라고 부탁을 해도 듣지 않겠어요? 하고 싶지 않다고 대답하겠지요?" "기꺼이 키스하겠어요. 머리를 숙여요." 벳시는 허리를 굽혔고, 우리들은 서로 포옹했다. 나는 완전히 위로를 받았고, 그녀의 뒤를 쫓아 집으로 들어갔다. 그날 오후는 조용하고 평화롭게 지나갔다. 밤이 되자 벳시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주었다. 나에게도 인생이 아름답게 빛날 때가 있었다. 5 1월 19일 아침, 다섯 시가 채 되기도 전에 벳시가 촛불을 들고 내 방으로 왔다. 나는 30분쯤 전에 일어나 얼굴을 씻고 창으로 스며드는 달빛을 받으며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나는 그날 오전 여섯 시에 집 앞을 지나는 역마차를 타고 게이트헤드를 떠나게 되어 있었다. 일어난 것은 벳시 혼자였다. 나는 식사도 별로 할 수 없었다. 벳시는 비스킷을 몇 개 싸서 나의 가방에 넣어 주었다. 그리고 내가 겨울 외투를 입고, 보네트를 쓰는 것을 도와 주었다. 그러고는 자기도 숄을 뒤집어쓰고 나와 함께 방을 나섰다. "안녕, 게이트헤드!" 홀을 지나 현관으로 나왔을 때, 나는 소리쳤다. 달이 기울자 주위는 캄캄했다. 벳시가 호롱을 들고 있었다. 나의 트렁크는 끈으로 묶어 문 앞에 놓여져 있었다. 이윽고 시계가 여섯 시를 알리자 멀리서 마차 바퀴 소리가 들려 왔다. 네 필의 말이 끄는 마차가 문 앞에 멎었다. 차장과 마부가 빨리빨리, 하고 크게 소리쳤다. 내 트렁크는 마차에 실렸고 나는 벳시의 목에 키스를 했다. "부탁해요. 조심해 주세요." 나를 차 안으로 안아올리는 차장에게 벳시가 소리쳤다. 문이 닫히자 "오케이!" 하고 부르짖는 소리가 나고, 이내 마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나는 벳시와 게이트헤드를 작별했다. 미지의 나라, 먼 신비의 나라로 (그때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운반되어 갔다. 이 여행에 관해 특별한 기억이 나에게는 별로 없다. 알고 있는 것은 몇백 마일인지 알 수 없는 먼 길을 여행하였고, 그래서 몹시 지루했다는 것 뿐이었다. 마차는 몇 개의 읍을 지나고 그 중의 하나인 대단히 큰 읍에 정차했다. 승객은 내려 식사를 했다. 오후에는 비도 내리고 안개도 끼었다. 황혼 무렵에 어느 골짜기의 어두운 가로수 길을 내려갔고, 밤이 되자 나는 나무 사이를 세차게 부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잠이 들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갑자기 마차는 멈추는 바람에 나는 눈을 떴다. 역마차의 문이 열리고, 하녀 같은 여자가 거기에 서 있었다. 그 얼굴과 복장을 나는 램프 빛으로 보았다. "제인 에어라는 여자 아이가 있습니까?" 하고 그녀가 물었다. 나는 "네." 하고 대답했고 곧 차에서 내렸다. 트렁크도 내려졌고 마차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눈앞에 담이 보였고, 거기에 문이 열려 있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나는 안내인을 따라 문으로 들어갔다. 나는 젖은 자갈 길을 지나 현관으로 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하녀는 나를 난로가 있는 따뜻한 방으로 데리고 가서, 나만 혼자 두고 나가 버렸다. 내가 언 손을 불에 쪼이고 있는데, 두 사람이 들어왔다. 먼저 들어온 사람은 검은 머리, 검은 눈, 하얀 피부, 넓은 이마를 한 키가 큰 부인이었다. 얼굴은 장중했고 모습은 단정했다. "혼자 지내기에는 너무 어린 것 같군." 이렇게 말하고 부인은 촛불을 테이블에 놓았다. 그녀는 잠시 동안 주의 깊게 나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말했다. "곧 자게 하는 게 좋겠지요. 침대로 데리고 가기 전에 뭔가 저녁을 먹도록 해주세요, 미스 밀러." 그러고 나서 부인은 인지로 나의 볼을 상냥하게 흔들며, "착한 아이가 되세요!" 하고 말했다. 그리고 미스 밀러에게 나를 딸려 보냈다. 그 숙녀는 스물아홉쯤 되어 보였다. 하지만 나와 같이 방을 나온 쪽은 그보다 몇 살 적어 보였다. 처음 여자는 목소리에서나 태도에서나 나를 감복시켰다. 하지만 미스 밀러는 훨씬 평범했다. 그녀는 언제나 많은 일을 맡아 처리하듯이 걸음걸이도 동작도 몹시 바빠 보였다. 나는 그녀를 따라 정리가 잘 되어 있지 않은 건물 안을 걸어갔다. 이윽고, 좁다란 방으로 들어가자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떠들고 있었다. 거기에는 커다란 소나무 테이블이 두 줄로 놓여 있고, 양 끝에 촛불이 한 개씩 켜져 있었고, 그것을 둘러 싼 벤치에는 아홉이나 열 살 남짓한 나이에서 스무 살 정도까지의 소녀들이 앉아 있었다. 그녀들은 헤일 수 없이 많은 것 같았지만 사실은 80명을 넘지 못했다. 학생들은 전부 기묘한 모양의 털옷을 똑같이 입고 있었고, 긴 삼베로 된 앞치마를 걸치고 있었다. 지금은 자습 시간으로, 모두 내일 학과의 예습을 하고 있었다. 밀러는 문 가까운 의자에 나를 앉개 한 뒤, 방의 위쪽으로 가서 소리쳤다. "반장, 교과서를 모아서 치워요!" 네 사람의 키 큰 소녀가 각기 다른 테이블로 가서 책을 거두어 치웠다. 밀러 다시 명령했다. "반장, 저녁 식사를 가져와요!" 키 큰 소녀들은 나가 각기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식사가 모두에게 분배되었다. 물을 마시고 싶은 사람은 한 잔씩 마셨다. 컵은 공용이었다. 내 차례가 와서 물을 마시기는 했지만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때 그것이 엷게 썬, 귀리로 만든 케이크란 것을 알았다. 식사가 끝나고 밀러가 기도를 하고, 학생들은 두 줄로 서서 2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지쳐서 침실이 어떤 곳인지 알지도 못했다. 어렴풋이 안 것은 교실처럼 좁다란 방이라는 것뿐이었고 그날 밤만은 밀러와 같은 침대에서 자게 되었다. 그녀는 내가 옷 벗는 것을 도와 주었고, 눕자마자 하나 뿐인 촛불은 꺼졌다. 침묵과 암흑 속에서 나는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요란한 종이 울리고 있었다. 소녀들은 일어나 옷을 입고 있었다. 날이 아직 밝지 않았기 때문에 방안에 한두 개의 촛불이 켜져 있었다. 날씨는 몹시 추웠고, 나는 떨면서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세면기가 나기를 기다려 세수를 했지만 방 한가운데의 세면대는 6명에 하나 꼴밖에 되자 않았으므로 여간해서 차례가 오지 않았다. 다시 종이 울리자, 두 줄로 서서 계단을 내려가 불이 켜진 춥고 어둑한 교실로 들어갔다. 밀러가 기도를 인도했다. "각 학급별로 서세요!" 그렇게 몇 분 동안 시끄러웠고, 그것이 끝나자 학생들은 네 개의 책상과 네 개의 의자 앞에 반원을 그리고 섰다. 다시 멀리서 종이 울렸다. 세 사람의 숙녀가 실내로 들어와서 각기 테이블 앞의 자리에 앉았다. 그 자리 주위에는 어린 소녀들만이 모여 있었는데 나는 이 최하급으로 불리어가 맨 끝자리에 겨우 앉았다. 하루의 일과가 시작된 것이었다. 기도가 행해지고, 성서를 읽고, 이것이 끝날 무렵쯤에야 날이 완전히 밝았다. 피로를 모르는 듯한 종이 네번째 울렸다. 각 반은 식사를 하기 위해 다른 방으로 옮겨 갔다. 그때 나는 얼마나 기뻐했던가! 전날, 너무도 먹지 않았기 때문에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었다. 식당은 음산했다. 두 개의 긴 테이블 위에 뭔가 뜨거운 것이 김을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역겨운 냄새가 소녀들의 코에 맡아졌을 때, 그들의 얼굴이 일제히 불만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을 나는 보았다. 굶주림 때문에 정신이 아득했던 나는 맛도 느끼지 못하고 퍼먹었지만, 차츰 배고픔이 사라져 가자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식사임을 알았다. 탄 죽 냄새와 썩은 감자 냄새가 섞여 굶주린 난민이라 할지라도 속이 뒤집힐 지경의 음식이었다. 소녀들은 어떻게든지 먹어 보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아침 식사는 먹지 않은 채 끝나고 말았다. 이 요리에 대한 감사의 기도가 울려지고 찬송가가 불리워지고, 일동은 식당을 나와 교실로 향했다. 학과가 시작되기까지는 15분쯤의 여유가 있었는데 그 동안 교실 안은 굉장히 소란했다. 이야기의 주제는 전부 아침 식사에 관한 것이었으며 불평을 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가엾은 소녀들! 종이 아홉 시를 알렸다. 밀러가 "착석!" 하고 소리쳤다. 규율의 힘은 강했다. 5분도 되기 전에 흩어졌던 집단은 질서 정연하게 열을 지어 섰고, 꽤 조용해졌다. 선생들도 종전의 자리에 앉았지만 모두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80명의 소녀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자세를 바르게 하고 있었다. 꾸밈없는 머리를 모두 얼굴 뒤로 쓸어넘기고, 컬을 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갈색 제복은 딱딱한 깃으로 목을 감싸고, 삼베 호주머니가 상의 앞에 붙어 있었다. 또 모두가 털로 짠 스타킹에다 놋쇠로 잠그는 시골식 신을 신고 있었다. 나는 그 소녀들을 보고 있었지만, 선생들도 함께 관찰했다. 내가 좋아할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뚱뚱한 선생은 천박해 보였고, 피부가 검은 선생은 고집스러워 보였다. 외국인은 냉정할 것 같았고, 밀러는 얼굴이 검붉고, 여위고, 일을 너무 해서 지친 듯이 보였다. 이때, 학교 안의 전원이 마치 하나의 용수철이 퉁기듯이 일제히 일어섰다. 웬일일까? 아무런 구령도 없었는데...... 나는 당황했다. 그리고 생각해 볼 틈도 없이 전원은 다시 착석했고 모두의 시선은 한군데로 집중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간밤에 나는 맞이해 준 그 숙녀가 있었다. 지금, 낮의 밝은 빛으로 본 그녀는 키가 크고, 아름답고, 훌륭한 몸 맵시를 하고 있었다. 갈색 눈은 자애의 빛으로 가득했고, 아름답게 그어진 긴 눈썹은 하얀 넓은 이마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아름다운 용모, 혈색은 창백했지만 맑았다. 그리고 당당한 그 기품, 몸차림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마리아 템플, 나중에 내가 교회당으로 가지고 간 기도서에 쓰인 그녀의 이름이었다. 로우드 학교의 교장은 두 개의 지구의가 놓인 테이블 앞에 앉아 상급생들에게 지리 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하급반은 각기 다른 선생들을 따라 역사, 문법 등을 배웠다. 기타 여러 가지 공부가 계속되었고, 마침내 시계는 열두 시를 쳤다. 교장 선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분에게 한 가지 말할 게 있습니다." 교장은 말을 계속했다. "오늘 아침은 여러분이 먹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꽤 배가 고플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여러분에게 빵과 치즈를 점심으로 준비하도록 지시해 두었습니다." 선생들이 놀란 눈으로 교장을 보았다. "이것은 내가 책임지고 결정한 일입니다." 이 말은 선생들에 대한 설명인 듯, 얘기가 끝나자 바로 나가 버렸다. 빵과 치즈는 곧 분배되었고, 학생들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다. 그 뒤에, "교정으로!" 하는 명령이 내렸다. 각기 캘리코트로 만든 끈이 달린 초라한 밀짚 모자를 쓰고 잿빛 두꺼운 나사 외투를 입었다. 나도 준비를 하고, 사람들의 흐름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교정은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바깥 경치는 보이지 않았다. 넓은 보도가 몇 개의 작은 화단으로 구분된 중앙부를 빙 둘러 놓여 있었다. 이 꽃밭은 학생들이 가꾸는 것으로, 어느 것에나 주인이 있었다. 꽃이 피는 계절에는 다소 아름답겠지만 지금은 1월말이라 갈색의 마른 잎사귀 뿐이었다. 그곳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며 나는 몸을 떨었다. 바깥 운동을 하기에는 괜찮은 날씨였다. 몸이 건강한 소녀들은 뛰어다니며 놀았지만 약한 아이들은 베란다 밑에 모여 추위를 피하고 있었다. 소녀들 가운데는, 짙은 안개가 몸에 스미는 추위를 못 이겨 마른기침을 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나는 수도원을 닮은 정원과 큰 건물의 교사를 둘러보았다. 그 반은 꺼멓게 헐었고, 또 다른 반은 새로운 교실과 숙사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새로운 부분에는 창이 많이 달려 있는 게 꼭 교회당 같은 느낌을 주었다. 현관 위의 돌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건물이 기원한 로우드 공공 단체는 본 주에 사는 브로클 허스트 홀의 나오미 브로클 허스트가 재건하다.> 이와 같이 너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빛나게 하라. 그들에게 너희가 좋은 일을 보이고 하늘에 계시는 너의 아버지를 믿게 하라. 마태복음 5장 16절. 나는 이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었으나, 그 뜻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아까 들었던 그 기침 소리가 바로 뒤에서 다시 났기 때문에 돌아보았다. 가까운 돌 벤치에 앉아 있는 한 소녀가 열심히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얘, 저 현관 위에 쓴 글자의 뜻을 가르쳐 주지 않겠니? 로우드 공공 단체란 무슨 뜻이야?" "네가 와서 살게 된 이 집을 말하는 거야." "어째서 그것을 공공 단체라고 하지? 여기는 학교와 다른 점이라도 있어?" "여기는 자선 학교야. 너도, 나도, 그리고 다른 아이들도 모두 자선을 받고 있는 거야. 너도 고아지? 어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셨니?" "두 분 다 내가 알기도 전에 죽었어." "여기 아이들은 모두 양친이나 어느 한쪽 부모가 죽은 거야. 그러니까 여기는 고아를 교육하는 공공 단체라고 말하는 거야." "나오미 브로클 허스트란 사람은 어떤 사람이니?" "저 돌에 새긴 대로 이 건물의 새 부분을 세운 여자. 그분의 아들이 감독하고 지시하는 거야." "그럼, 이 학교는 아까 빵과 치즈를 준 그 선생님 것이 아니구나." "템플 선생? 그래, 아니야.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그 사람은 여기서 살고 있니?" "아니, 2마일 더 떨어진 큰 저택에서." "아무튼 템플 선생이 제일 좋지, 안 그래?" "템플 선생님은 대단히 좋은 분이고, 현명해. 그분은 다름 선생님과는 달라요. 뭐든지 잘 아시니까." "너는 여기 온 지 오래 됐니?" "2년 됐어." "너도 고아니?" "엄마가 돌아가셨어." "여기 있는 것이 행복하니?" "너는 별걸 다 묻는구나. 묻는대로 다 대답해 줬으니 이젠 됐지. 나는 책을 읽고 싶어." 그러나 마침 점심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일동은 다시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사는 상한 감자와 상한 듯한 고기를 섞어 찐 것이었다. 이 요리가 각자에게 꽤 많이 배당되었다. 오후에 눈에 띈 일은 한 가지 뿐이었다. 베란다에서 나와 얘기한 소녀가 역사 시간에 스캐처드 선생으로부터 꾸중을 듣고, 자리에서 쫓겨나 교실 중앙에서 벌을 섰다. 나는 그녀가 대단히 슬프고,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그녀는 울지도 않았고, 얼굴도 붉히지 않았다. 침울하기는 했지만 침착하게 모두의 시선 속에 서 있었다. 오후 다섯 시가 되자 우리들은 또 식사를 했다. 작은 컵에 커피 한 잔과 검은 빵 한 조각이었다. 그 뒤 30분을 쉬고, 이어서 자습, 그리고 물 한 잔과 귀리 케이크, 기도, 취침. 이것이 내가 로우드에서 겪은 첫날이었다. 6 다음날도 전날과 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물이 꽁꽁 얼어 있었던 탓에, 이 날 아침에는 세수를 할 수 없었다. 나는 너무 추워서 꼭 죽을 것만 같았다. 겨우겨우 아침 식사는 마쳤지만 그나마 죽이 타지 않아 다행이었다. 질은 간신히 먹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양은 적었다. 특히, 내것이 더 작게 느껴졌다. 하다 못해 배만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그날 나는 제4반에 편입되어 정규 학과와 일을 지시 받았다. 오후 세 시경에 스미스 선생이 2야드쯤 되는 모슬린 조각을 내게 주고 그 가장자리를 감치라고 지시했다. 그 시간에는 대부분의 학생이 바느질을 했지만, 한 반만은 스캐처드 선생의 의자 가에 모여 영국 역사를 낭독하고 있었다. 그 속에는 내가 베란다에서 알게 된 소녀도 끼어 있었다. 스캐처드 선생은 끊임없이 그녀를 눈의 가시처럼 대했다. 선생님은 계속 다음과 같은 어조로 그녀에게 말했다. "번즈 (이것이 그녀의 이름인 듯했고, 이곳 소녀들은 다른 학교의 남학생처럼 성만 불리고 있었다), 너는 발을 굽히고 서 있구나. 당장 발끝을 펴요." "번즈, 뭐야, 턱을 내밀고, 보기 싫게. 뒤로 물러나요." "번즈, 머리를 똑바로 들어요. 몇 번이나 주의를 해야 알겠어요. 내 앞에서는 그런 태도, 용납할 수 없어요." 등등. 1장을 두 번 읽자 책을 덮고, 학생들은 질문을 받았다. 대개의 학생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조그마한 문제라도 번즈에게 오면 영락없이 대답했다. 그녀의 기억력은 학과의 내용을 모두 기억하는지, 막히는 일 없이 즉석에서 대답했다. 스미스 선생님이 실을 감겠다고, 나더러 타래를 좀 쥐어 달라기에 나의 주의는 그녀에게서 옮겨졌다. 하지만 내가 내 자리로 다시 돌아갔을 때, 스캐처드 선생은 번즈에게 뭔가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번즈는 교과서를 챙겨 들고 조그만 방으로 들어가더니 곧, 다발로 묵은 자잘한 나뭇가지를 들고 들어왔다. 이 불길한 도구를 그녀는 정중하게 선생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조용히 자기의 비나포아의 끈을 풀었다. 그러자 선생은 그 잔가지로, 갑자기 번즈의 발목을 열 번 이상이나 후려쳤다. 그렇지만 번즈의 눈에서는 한방울의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이 광경을 보고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분노로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바느질하던 손을 멈추고 있었지만, 번즈의 수심에 찬 표정은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고집이 센 녀석이군!" 스캐처드 선생은 소리쳤다. "너의 그 타락한 성격은 도저히 고쳐지지 않는 것일까? 이 매를 저리 가져가요." 번즈는 명령대로 했다. 그녀가 교과서를 두는 방에서 나왔을 때, 나는 가까이서 그녀를 보았다. 마침 손수건을 호주머니에 넣으려고 하는 참이었지만 한줄기 눈물자국이 그 여윈 뺨에 반짝이고 있었다. 저녁때의 놀이 시간이야말로 로우드에서는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스캐처드 선생이 번즈를 때린 날 저녁때 나는 벤치를 뛰어넘고 테이블 밑을 기어 난로 옆으로 갔다. 번즈가 난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희미한 불빛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는 주위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다. "전번의 그 책이니?" 나는 뒤에서 그녀에게 말했다. "응." 하고, 번즈는 대답했다. "이제 막 다 읽었어." 나는 기뻤다. 그녀의 곁에 앉았다. "너의 이름은 뭐니?" "헬렌이야." "멀리서 왔니?" "북쪽에서 왔어. 스코틀랜드 경계야." "빨리 로우드에서 나가고 싶지?" "아니, 왜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교육을 받기 위해 로우드에 들어온 거야. 그 목적을 이룰 때까지는 나가도 소용이 없어." "하지만 스캐처드 선생은 너를 그처럼 괴롭히잖아." "괴롭혀? 그런 일은 없어. 선생은 엄격해. 나의 결점을 싫어하시는 것 뿐이야." "내가 너라면 그 선생님을 싫어할 거야. 반항할 거야. 만일 그 회초리로 나를 때리면 나는 빼앗아 버리겠어. 그리고 보는 데서 회초리를 불질러 버릴 거야." "너는 아마 그러지는 않겠지만 만일 한다고 하면 브로클 허스트 씨가 학교에서 너를 쫓아 버릴 거야. 그렇게 되면 너의 친척은 아마 슬퍼하겠지. 자기와 관계 있는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것 같은 짓을 하기보다는, 괴로움을 참는 편이 좋아. 성서에도 악을 대할 때는 선으로 하라고 하셨잖아." "하지만, 회초리로 얻어맞거나, 모두가 보는 앞에서 교실 복판에 세워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야. 거기다 너는 크잖아. 나는 너보다 훨씬 작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애." "그래도 피할 수가 없을 때는 참는 것이 임무이지. 참는 것을 요구받는 것인 자기 운명인데도 그것을 참지 못한다면 약한 사람이야. 즉 어리석은 인간이 하는 짓이야." 이 말은 내게 있어서는 경이였다. 나는 이 인내에 대한 설명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헬렌 번즈가 눈에 보이지 않는 지혜의 빛으로 사물을 직시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너는 결점이 있다지만 그게 도대체 뭐니?" "겉으로만 판단하지 말고 냉철하게 자세히 봐. 나는 스캐처드 선생님의 말대로 방종해. 나는 물건을 제대로 챙길 줄 몰라. 그리고 언제나 규칙을 잊어버려. 이런 일들이 선생님의 눈에 거슬리는 거야." "템플 선생도 스캐처드 선생처럼 너에게 엄격하니?" 템플 선생이란 말을 듣자 그녀의 우울했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템플 선생님은 참으로 좋은 분이야. 누구에게나 엄격히 하기가 곤란한가 봐. 선생님은 나의 잘못도 아시고, 상냥하게 주의해 주셔. 그리고 조금이라도 칭찬받을 일이 있으며 아낌없이 칭찬해 주시는 거야. 나의 결점 중에서도 칭찬받을 일이 있으면 아낌없이 칭찬해 주시는 거야. 나의 결점 중에서도 한 가지는, 그 선생님이 그처럼 조용히 올바르게 가르쳐 주는 데도 결점을 고칠 수 없는 거야. 선생님의 칭찬은 나로서는 대단히 중요하지만, 앞일을 생각할 정도의 자극이 되어 주지는 못해요." "이상한데......" 하고, 내가 말했다. "조심한다는 것은 무척 쉬운 일인데." "너에게는 쉽겠지. 오늘 아침에도 네가 수업을 받는 것을 보니 밀러 선생님이 학과를 설명하고 너에게 질문을 하는 동안, 너는 조금도 마음이 흩어지지 않았어. 하지만 나는 계속 다른 것만 생각해. 스캐처드 선생의 얘기를 들으면서도, 결국은 무슨 소린지 꿈 같은 생각이 들 때가 많아." "하지만 오늘은 잘 대답하던데." "그건 우연이야. 오늘 배운 곳은 전에 내가 흥미를 가졌던 부분이었어." "템플 선생에게 배워도 너는 역시 다른 걸 생각하겠구나?" "아니, 그렇지는 않아. 템플 선생님은 대개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새로운 것을 얘기해. 그분이 사용하는 언어는 어쩐지 내게 딱 맞는 것 같고, 얘기해 주는 것도 마침 내가 알고자 한 그런 것일 때가 많아." "그래! 그럼 템플 선생님의 시간에는, 너는 좋은 학생이니?" "그래, 그것도 내가 그렇게 되려고 한 게 아닌데 말야. 나는 조금도 힘을 들이지 않아. 내 멋대로 하는데도 그래. 그런 학생은 특별히 칭찬받을 건덕지도 없는데......" "아니, 참으로 훌륭해. 너는 너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는 잘하고 있는 거야.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때리거나 하면 이쪽도 당연히 흥분하지. 상대가 나를 다시는 때리지 못하도록 호되게 때려 주는 거야." "너도 좀더 크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다만 그랬으면 좋겠어. 지금은 어리고, 교육이 모자라니까 도리가 없지 뭐." "하지만 나는 이런 생각이 들어, 헬렌. 내가 아무리 마음에 들려고 애를 써도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나도 그를 미워해. 벌을 받을 이유도 없는데 벌을 받으면 저항해야 된다고 생각해." "이교도나 야만인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어. 하지만 크리스찬이나 문명국의 국민은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아." "글쎄, 나는 잘 모르겠어." "신약 성서를 읽어 봐.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과 하신 일을 잘 생각해 봐. 그리스도의 말을 규칙으로 삼고 그리스도가 행함을 본보기로 삼아봐." "그리스도가 뭐라고 하셨는데?"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 너희를 미워하고 너희를 천하게 부르는 자에게 선을 행하라." "그런 나는 리드 부인을 사랑해야겠구나. 그렇지만 그렇게는 못해. 존 리드를 축복해야 되겠지만 그것도 불가능해." 이번에는 헬렌 번즈가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나는 주저없이 나의 괴로운 생각, 원한 같은 것을 내 나름대로 털어놓았다. 흥분하면 신랄해지고 혹독해지는 나는, 내가 느낀 그대로 마구 지껄였다. 헬렌은 끝까지 참고 들어주었다. 나중에 그녀가 뭐라고 말해 주길 기대하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없었다. 나는 기다리다 못해 물었다. "리드 부인은 대단히 박정하고 나쁜 사람이잖니?' "그분이 너에게 불친절했던 것은 확실해. 그 이유는 스캐처드 선생이 내 성격을 좋아하지 않듯이, 너의 성질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분이 한 말이나 행동을 너는 어쩌면 그렇게도 자세하게 기억하지? 그분의 부당한 대우가 너의 마음에 특별히 깊은 인상을 주었나 봐. 인생은 짧으니까, 나는 미움이나 증오를 언제까지 마음에 담아 둘 틈이 없을 것 같애.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누구나 결점을 갖고 살고 있어. 하지만 타락하기 쉬운 육체를 벗어 던짐으로써 그러한 결점을 벗을 날이 곧 올 것이라 믿어. 타락이나 죄는 이 귀찮은 육체의 뼈대와 함께 우리들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영혼의 불꽃만이 남게 되지. 조물주가 만들 때 인간에게 불어 놓은 순수 그대로를 가진 생명과 사상의 불멸의 원리, 그것만이 남게 돼. 그것에 대해 누구로부터 배운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든 얘기한 적이 없지만 나는 이 믿음을 기꺼이 지키고 있어.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희망의 손길을 뻗치고, '영원'을, 공포도 지옥의 심연도 아닌 하나의 안식, 다시 말해 멋진 삶의 터전으로 삼는 거야. 또한 이 믿음 덕분에 나는 죄인과 그 죄를 확실히 구분할 수가 있어. 나는 진심으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아. 나는 희망을 잃지 않고, 조용한 마음으로 살 수 있어." 헬렌의 표정을 보면 이미 나와 얘기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명상을 위해, 많은 시간이 허락되지는 않았다. 반장이 곁으로 와서 강한 캄바란드 사투리로 말했기 때문이다. "헬렌 번즈, 빨리 서랍을 챙기고 바느질감을 정돈해 두지 않으면 스캐처드 선생님께 보고할 테다." 헬렌은 대답도 않고 주저없이 반장의 지시에 따랐다. 7 로우드 생활을 시작한 최초의 4년 반은 마치 한 시대가 흐른 것처럼 내게는 길게 느껴졌다. 새로운 규칙과 익숙지 못한 학과에 적응하느라 애를 먹은 시기였다. 1월, 2월, 그리고 3월에 접어들어도 두껍게 쌓인 눈과 그것이 녹으면서 길이 질척거려 교회에 가는 것 외엔 바깥으로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제한된 생활 속에서 우리들은 매일 한 시간씩을 밖에서 지내야만 했다. 해가 지면, 동상 때문에 발이 타는 듯이 아팠고 아침은 아침대로 가죽 신발이 터질 정도로 발이 부어올랐다. 그 당시 아픈 발을 신발에 쑤셔 넣을 때의 고통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또 한 가지 잊을 수 없었던 것은 우리가 먹는 음식의 양이 적은 것이었다. 한창 자라는 아이들의 식욕에 비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음식은, 약자나 병자가 간신히 목숨을 유지해 갈 수 있는 정도의 것이었다. 겨울 내내 일요일이 제일 괴로운 날이었다. 우리들은 학교 후원자가 봉직하고 있는 브로클브리지 교회까지 2마일이나 되는 길을 걸어가야만 했다. 싸늘한 고기와 빵 조각이 예배 중간에 공급되었다. 오후에 예배가 끝나면 우리는 살을 에이는 듯한 차가운 바람을 견디며 돌아와야 했다. 나는 템플 선생님이 우리들을 기운나게 하려고 마치 '씩씩한 병사처럼' 행진시키기 위해 스스로 앞장 서서 걷던 모습을 기억할 수 있다. 가엾게도 다른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용기를 줄 엄두도 내지 못하고 모두들 의기 소침해 있었다. 나는 브로클 허스트 씨가 학교에 온 데 대해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여기에 도착한 후, 한 달간 다른 지방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침내 오고 만 것이다. 어느 날 오후, 내가 손에 석판을 들고 긴 나눗셈을 풀려고 애쓰고 있을 때 문득 창 밖을 지나가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 여윈 사람의 윤곽을 알아차렸다. 선생을 포함한 전 학생이 기립한 사이로 그는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서, 마찬가지로 기립해 있는 템플 선생 곁에 섰다. 그는, 게이트헤드의 화덕가 융단 위에 불길하게 눈썹을 찡그리고 섰던 검은 기둥 같은 모습 그대로였다. 외투의 깃까지 단추를 잠그고 전보다도 더욱 길고, 가늘고 딱딱해 보였다. 나에게는 그를 무서워할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나의 성벽, 다시 말해 리드 부인이 말한 배신적인 힌트를 잊을 수가 있을까. 템플 선생을 비롯해 다른 모든 선생에게 나의 사악한 성질을 알리겠다고 한 브로클 허스트 씨의 약속을 말이다. 그는 템플 선생에게 뭔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나는 불안에 가슴을 떨면서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의 얘기는 우선 나를 구해 주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한 개 이상의 긴 바늘을 주지 말 것과, 털실 스타킹을 기워서 신도록 하고 깃을 1주에 두 개 이상 쓰지 못하도록 하라는 자잘한 얘기들 뿐이었다. "템플 선생, 내가 한 가지 놀란 게 있어요. 빵과 치즈가 1주에 두 번 이상이나 전교생에게 주어졌다면서요? 규정을 조사해 봐도 그런 식사를 주라는 조항은 씌어 있지 않았어요. 이러한 개혁은 어떤 분이 어떤 권한으로 지시한 것일까요?" "그것은 제 책임으로 행해진 것입니다." 하고, 템플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아침 식사가 너무도 좋지 않아 학생들은 전부 먹지 못했어요. 그래서 나는 점심까지 기다리게 할 수가 없었어요." "선생님, 잠깐 실례합니다만, 우리 학교의 소녀들을 훈육하는 이상, 나의 방침은, 사치와 방종케 키우는 것이 아니라 극기 정신을 함양하는 데 있다는 것을 아시지요? 식사가 한 번 잘못 되었다 해서,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보다 맛있는 것을 먹일 필요는 없어요. 이것은 육체를 사랑하고, 본교의 목적을 잃게 되는 일이에요. 사람은 빵만 가지고 사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거예요. '너희가 만일 나를 위해 굶주린다면 너희들은 행복하리라' 고 말씀하신 이 존귀한 말씀을 인용할 절호의 기회겠지요. 오오, 마담, 이 아이들은 입에 탄 죽 대신 빵과 치즈를 주었을 때, 당신은 실로 그들의 천박한 육체를 도왔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불멸의 영혼을 굶주리게 한다는 사실을 몰랐나요!" 브로클 허스트 씨는 여기서 한숨 돌렸다. 아마 극단적으로 감정이 끓어 올랐을 것이다. 처음에 템플 선생은 교주가 얘기를 시작할 때 고개를 떨구고 있었지만, 지금은 바짝 들고 앞을 바라보았고, 천성이 대리석 같은 그 얼굴은 더욱 돌처럼 차갑고 미동도 없는 냉정함이 엿보였다. 그 사이에 브로클 허스트 씨는 두 손을 뒷짐지고, 난로 앞에 서서 엄숙히 전교생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그의 눈이 무슨 충격이라도 받은 듯이 격하게 껌벅거리다가 옆을 돌아보며 이제까지보다 더 엄한 어조로 얘기했다. "템플 선생, 저건 뭡니까? 저, 머리를 곱슬곱슬하게 한 소녀는. 저, 빨강 머리의 컬한 - 선생님, 저 컬한 것은." "줄리아 시반이에요." 극히 부드럽게 템플 선생은 대답했다. "줄리아 시반이라고? 마담! 그 줄리아가, 아니, 누구든 간에 어째서 머리를 퍼머를 했지요? 본교의 규칙과 방침을 무시하고, 어째서 저애는 저렇게도 당당히 속세의 방법을 따르게 되었는지 - 이 복음을 가르치는 자선 학교에서 머리를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줄리아의 머리는 본래부터 곱슬머리에요." 더욱 냉정히 템플 선생은 대답했다. "본래부터? 흐음, 하지만 우리들은 자연에 예속되어서는 안 돼요. 나는 본교 학생들을 신의 은총 밑에 두고 싶어요. 저 애의 머리는 박박 깎는 게 좋겠어요. 내일 내가 이발사를 보내겠어요. 제 1열의 학생 전원에게 일어나서 벽 쪽을 향하라고 명해 주세요." 템플 선생은 문득 입술에 떠오르는 미소를 지우려는 듯이 손수건으로 입을 가렸다. 하지만 선생은 명령을 내렸고, 학생들은 일어서서 벽을 향해 돌아섰다. 그는 5분간이나 신중히 관찰하고 나서 선고했다. 그것은 마치 조종처럼 울렸다. "저렇게 땋은 머리는 전부 잘라 버려!" 템플 선생은 이의 있는 얼굴을 했다. "마담, 나의 사명은 소녀들의 육체적 욕구를 억제하는 데 있어요. 머리를 땋거나 비싼 옷을 입는 대신 부끄러움과 절제를 가르치려는 게 내 신조예요, 지금 여기 있는 소녀들은 모두 머리를 땋고 있는데, 이거야말로 허영심을 땋은 것이 아니겠어요. 그리고 그만큼 시간도 낭비고, 또......" 브로클 허스트 씨의 연설은 여기서 방해를 받았다. 내 손에서 석판이 떨어져 소리를 내었고, 모든 눈이 내게로 쏠리고 말았다. 이제는 끝장이라고 생각한 나는 깨어진 석판을 줍기 위해 몸을 굽히면서 최악의 경우에 대처할 용기를 쥐어짰다. 올 것이 오고 만 것이다. "버르장머리 없이!" 하고 브로클 허스트 씨는 일갈했으나 곧, "오! 신입생이구나. 저 아이에 대해 얘기한다는 게 깜빡 잊을 뻔했어. 그 석판을 깬 학생, 앞으로 나와요!" 하고 소리쳤다. 나는 내 힘으로 움직일 수가 없을 정도로 전신이 마비 상태였다. 내 옆에 있던 키 큰 소녀 둘이 나를 일으켜 세우고, 무서운 심판관 앞으로 밀어냈다. 템플 선생이 상냥하게 나를 부축하여 데리고 갔는데, 그때 나는 선생님이 작은 소리로 격려해 주는 말을 들었다. "겁내지 않아도 돼요. 제인, 잘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벌을 받지는 않을 거야." 템플 선생의 상냥한 말은 나의 심장에 단검처럼 꽂혔다. 앞으로 1분만 지나면 템플 선생도 나를 위선자로써 경멸할 거야 하고 나는 생각했다. 순간 리드와 브로클 허스트 일당에 대한 분노가 가슴에 치밀었다. 나는 헬렌 번즈가 아니었다. "그 의자를 이리 가져와." 하고, 브로클 허스트 씨가 무척 높은 의자를 가리켰다. 거기 앉았던 반장이 의자를 갖다 놓았다. "그 아이를 거기에 앉혀요." 누가 나를 앉혔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자세한 일을 기억할 상황이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내가 브로클 허스트 씨의 코 높이까지 들어올려졌다는 것이며, 그가 내게서 1야드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 뿐이었다. 브로클 허스트 씨가 헛기침을 했다. "템플 선생님, 그리고 교사 여러분, 아울러 학생 여러분, 이 아이가 보입니까? 이 아이가 아직 어리다는 것은 보는 바와 같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보통 아이들과 같습니다. 신은 자비롭게도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이 아이에게도 주셨습니다. 악마가 진작부터 이 아이를 발견하리라고는 누가 생각하였겠습니까? 이것은 슬프고,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아기양이어야 할 이 아이가 실로 놀랍게도 몰래 숨어 들어온 이방인이란 사실을 알려야 하는 것이 내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소녀를 경계해야 합니다. 이 아이의 본을 배워서는 안 됩니다. 필요하다면 이 아이와 사귀지도 말고, 놀지도 말며 따돌려 버리는 게 좋겠습니다. 선생님들은 이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마십시오. 이 아이의 행동에 주의하고, 말을 음미하고, 이 아이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육체를 벌 주세요. 이 아이는 그리스도교의 나라에 태어났으면서도 이교의 아이 못지 않은 거짓말쟁이에요. 나는 이런 사실을 이 아이의 은인으로부터 들었어요. 대단히 자비로운 그 숙녀는 고아가 된 아이를 친자식처럼 길렀지만 이 아이는 그 은혜를 몰랐어요. 그래서 우리 학교로 보내진 것이에요. 여러 선생님, 그리고 교장 선생님, 부탁인데 이 아이로 하여금 주위의 학생들이 물들지 않도록 해주세요." 연설을 마치자 브로클 허스트 씨는 긴 외투의 맨 위의 단추를 잠그고, 템플 선생에게 인사를 하고 유유히 방을 나갔다. 문께에서 돌아보며 나의 재판관은 다시 말했다. "그 아이는 앞으로 30분 그대로 거기 세워 두세요. 그리고 오늘 하루, 누구든 그 애하고 말을 하지 않도록." 이리하여 나는 의자 위에 그대로 서 있었다. 교실 한복판에서 벌을 서는 것조차 부끄럽다고 말한 내가 지금 오욕의 대좌 위에 서 있게 된 것이다. 그때의 나의 심정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아이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목이 막혀 숨이 넘어 갈 것만 같았다. 이때 한 소녀가 내 곁을 지나가면서 나를 쳐다봤다. 이상한 눈빛이 그 눈에서 빛났다. 이 새로운 감정이 나를 얼마나 용기 있게 하였던가! 나는 병적인 감정을 억제하고, 의자 위에 똑바로 서 있었다. 헬렌 번즈는 스미스 선생에게 재봉에 대해 뭔가 질문을 하고 돌아가면서 또 나를 보고 웃었다. 아아, 그 웃음! 나는 지금도 그 웃음을 잊지 않고 있으며, 그거야말로 구원된 지성, 실로 용기있는 웃음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8 그렇게 30분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섯 시가 되었다. 학과는 끝났고 모두들 식당으로 가 버렸다. 나는 의자에서 내려왔다. 나는 마루 구석에 가서 앉았다. 그때까지 나를 지탱해온 마력은 약해지고 마침내 울음이 터져 나왔다. 눈물이 마루를 적셨다. 로우드에서 착한 아이가 되자,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나는 그동안 생각해 왔었다. 많은 사람과 친해지고, 존경과 사랑도 받고 싶었다. 나는 눈에 보이게 진보했었다. 나는 마침 그날 클래스의 제일 높은 자리로 오른 것이다. 밀러 선생님은 열심히 나를 칭찬해 주셨고, 템플 선생님도 칭찬의 미소를 보여 주셨다. 내가 만일 앞으로 두 달만 이토록 진보한다면 선생님이 스스로 그림과 프랑스어를 가르쳐 주겠다고 약속해 주셨다. 나는 학생들과도 잘 사귀었다. 그런데 오늘 이토록 슬픈 일이 생기다니, 죽고만 싶었다. 한동안 흐느껴 울고 있자니 누군가가 내 곁에 다가왔다. 헬렌 번즈가 커피와 빵을 가지고 온 것이다. "자아, 뭐라도 먹어야지."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어서 소리내어 울었다. 헬렌은 내 곁에 앉아 두 팔로 무릎을 싸 안고, 머리를 무릎 위에 얹고, 말없이 나는 보고 있었다. 마침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헬렌, 너는 어째서 모두가 거짓말쟁이라 생각하는 나에게 오는 거니?" "모두라고? 얘, 그건 아니야. 아마 학교에서 너를 경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많은 사람들이 너를 가엾다고 생각할 거야." "브로클 허스트 씨가 그런 말을 했는데도 너는 어째서 나를 가엾다고 생각하지?" "그 사람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아. 만일 그가 너를 치켜세우기라도 했다면 말은 않지만 모두들 너를 무시하겠지. 하지만 그 반대이므로 너에게 동정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제인......" 하고, 말하다가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뭐야, 헬렌?" 내 손을 그녀에게 쥐어 주면서 물었다. 그녀는 내 손을 쓸어 주면서 말을 계속했다. "만일 세상 사람들이 너를 나쁜 아이라도 믿어도, 너의 양심만 그렇지 않다면 그것으로 좋은 거야."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너무 약해. 남이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면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아. 모두에게 미움을 받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잠깐만, 제인. 너는 인간의 사랑을 너무 크게 생각하는 거야. 너무 감정적이야. 너의 육체를 만드시고, 그것에 생명을 주신 하느님만은 인간보다 더한 사랑을 너에게 주시고 있는 거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심령의 왕국이 있는 거야. 그리고 하느님은 육체에서 심령이 분리되었을 때, 상을 내리시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들의 생은 빨리 끝나야 하고 죽음이야말로 행복과 영광의 입구가 되는 거야. 슬픔이나 괴로움에 져서는 안될 거야." 나는 가만히 있었다. 헬렌이 나의 마음을 가라앉게 해 준 것이다. 하지만 헬렌이 가져다 준 그 고요함에는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 이야기를 끝내자 그녀는 다소 호흡이 빨라졌고, 가벼운 기침을 했다. 헬렌은 나를 자기 쪽으로 끌어 당겨, 그대로 말없이 앉아 있었다. 어느새 달이 떠 있었다. 그 달빛이 누군가 다가오는 사람을 비쳤다. 헬렌과 나는 그것이 템플 선생님임을 알아차렸다. "너를 찾으러 왔어요, 제인 에어." 하고, 템플 선생님이 말했다. "내 방으로 와요, 헬렌 번즈도 같이 와요." 선생의 방에는 따뜻하게 불이 피워져 있었고 무척 기분이 좋아 보이는 방이었다. 템플 선생은 헬렌 번즈에게 의자에 앉으라고 권하고, 선생도 의자에 앉아 나를 불렀다. "이제 다 끝났니?" 나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울 만큼 실컷 울어서 슬픔은 잊었어요? 아니, 잊을 것 같지는 않아요." "어째서?" "나는 잘못이 없어요. 하지만 선생님도 다른 사람들도 지금은 나를 나쁜 아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제인, 잘 들어봐. 우리들은 네가 어떤 아이인지 알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너를 보는 거야." 하고, 선생은 나를 감싸 안았다. "너의 은인이란 사람은 어떤 사람이니?' "리드 부인이예요. 저의 외숙모예요. 외삼촌이 돌아가실 때, 나를 부인에게 부탁했지요." "그럼, 부인 스스로 너를 맡은 게 아니었구나?" "네. 그분은 나를 기르기가 싫었어요. 하지만 외숙은 부인으로 하여금 나를 기르겠다는 약속을 하게 했어요." "제인, 잘 들어. 재주껏 너를 변호해 봐요. 다만 쓸데없이 과장해서는 안돼요." 나는 되도록이면 소극적으로, 되도록이면 정확하게 얘기했다. 그리고 로이드 씨에 대한 얘기도 했다. 그것은 도저히 잊어버릴 수 없는 저 붉은 방에 대해서 얘기하기 위해서였다. 이 얘기를 할 때 나는 흥분한 나머지 다소 마음이 격했다.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얘기는 끝이 났다. 템플 선생은 몇 분 동안 말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로이드 씨에 대해서는 나도 약간 알고 있어요. 내가 그 사람에게 편지를 쓰겠어요. 그분의 회답이 너의 얘기와 일치한다면 너는 결백해지는 거예요. 이미 나는 결백하다고 믿지만 말야." 선생은 나에게 키스하고, 이번에는 헬렌 번즈와 얘기를 시작했다. "헬렌, 오늘 밤은 기분이 어떻니? 오늘도 기침이 많이 났어?" "그렇지는 않았어요." "가슴이 아픈 것은?" "좀 덜한 것 같았어요." 선생은 헬렌의 맥을 짚어 보았다. 선생님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스스로 마음을 달래듯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아, 그건 그렇고, 너희들은 오늘 밤 내 손님으로 왔으니까 대접을 해야지." 벨을 눌러 하녀에게 3인분의 차를 가져오라고 했다. 곧바로 차를 가져왔다. 그 찻잔의 아름다움! 하지만 토스트는 슬프게도 너무 작았다. 템플 선생님도 눈치를 채셨다. "바바라, 버터 바른 빵을 좀더 가져올 수 없니? 세 사람 몫으로는 너무 작아요." 바바라는 나갔다가 곧 들어와서 말했다. "템플 선생님, 하이덴 부인은 평소의 분량대로 다 드렸다는데요." 하이덴 부인은 브로클 허스트 씨 편이었다. "아, 그럼 됐어." 템플 선생은 대답했다. 하녀가 나가자 선생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마침 잘됐어. 오늘 밤은 내 손으로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할 수 있어요." 헬렌과 나를 테이블 곁으로 부르고, 차와 한 조각의 얇은 토스트를 놓고, 서랍을 열더니 커다란 케이크를 꺼냈다. "돌아갈 때, 선물로 주려고 했지만 토스트가 너무 작으니까 지금 이걸 들어요." 선생은 케이크를 잘랐다. 우리들은 그날 밤, 얼마나 맛있게 그것을 먹었는지 모른다. 선생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우리들을 난로 앞으로 앉히고 헬렌과 얘기를 시작했다. 헬렌 번즈는 실로 나를 놀라게 했다. 두 사람은 내가 처음 듣는 얘기를 했다. 지나간 사람들이나 시대에 대해, 멀리 있는 나라들에 대해, 발견되고 또는 추정되고 있는 자연의 비밀에 대해...... 두 사람은 실로 많은 책을 읽은 모양이었다. 그 풍부한 지식! 이윽고 취침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조금도 늦어서는 안 된다. 템플 선생은 우리들을 가슴에 끌어안으며 말했다. "하느님의 은총이 이 아이들에게!" 선생은 헬렌을 나보다 오래 안고 있었다. 선생의 시선이 간 것도 헬렌의 뒷모습이었다. 두 번이나 슬픈 듯 한숨을 쉰 것도,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은 것도 헬렌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1주일 후, 템플 교장은 로이드 씨로부터 회답을 받았다. 그는 내 얘기를 확증해 준 듯했다. 템플 선생은 전교생을 모아 놓고, 제인 에어에 대한 혐의를 조사한 결과 그녀는 결백하다는 것을 단언한다고 발표했다. 선생들은 나와 악수를 했고, 키스를 해주었고, 학생들도 기쁨에 술렁거렸다. 이리하여, 나는 그 순간부터 새로운 기분으로 공부를 하고, 어떤 곤란에도 지지 않고 나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공부를 잘했고, 노력함에 따라 성적도 쑥쑥 올라갔다. 수 주일 후에는 프랑스어와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게이트헤드의 그 사치스런 생활을 부자유한 로우드의 생활과 바꾸고 싶지 않았다. 9 하지만 로우드의 부자유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봄이 왔다. 운동장에서 노는 시간도 견딜만 했다. 목요일 오후는 휴무였으므로 산책을 나가면 길바닥이나 담 밑에는 매우 사랑스럽고 예쁜 꽃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리고 4월은 곧 아름다운 5월로 바뀌었다. 가득히 펼쳐진 초록색, 가득한 꽃들, 느릅나무와 떡갈나무는 해골 같은 모습에서 당당하고도 위엄에 찬 생명을 회복했다. 숲에서는 갖가지의 식물이 풍성하게 자라고, 야생의 앵초가 흐드러지게 피는 곳에서는 이상한 빛을 발했다. 나는 녹음이 우거진 숲속에서 말할 수 없이 황홀한 빛을 발하고 있음을 본 적이 있다. 나는 이 아름다움을 거의 혼자서 마음껏 즐겼다. 이 이상한 자유와 열락에 빠진 하나의 원인을 지금 여기서 말하려고 한다. 로우드의 숲은 안개가 많았고, 이 안개는 전염병의 원인이었다. 봄이 되자 이 고아원에 티푸스가 유행한 것이다. 그리고 5월이 되기 전에 학원은 마치 병원으로 바뀌어 버린 듯했다. 80명의 소녀들 중 45명이 한꺼번에 걸렸다. 병에 걸리지 않은 학생에게는 거의 무제한으로 자유가 용납되었고 이러한 학생을 감시하거나 억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템플 교장은 병실에서 살았고, 또 교사들은 건강한 학생들을 맡아 줄 친척이나 친구들을 수소문했다. 그리고 이러한 학생들을 출발시키기 위해 선생들은 바빴다. 전염병이 이처럼 로우드에 깔려 있어 죽음의 그늘은 차츰 짙어 갔다. 참담과 공포가 지배했고, 모든 방과 복도마다 병원 특유의 냄새가 진동했다. 이런 와중에서 7월의 햇살은 언덕을 비롯해 숲 위에 밝게 내리쪼이고 있었다. 학교 뜰에도 꽃으로 장식되었다. 이러한 향기로운 꽃들도 가끔 관 속에 넣어지는 외에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하지만 나나 병에 걸리지 않은 다른 아이들은 이 지방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즐겼다. 집시처럼 아침부터 밤까지 헤맸다. 식사를 하는 사람의 수효가 줄고, 병자는 별로 먹지 않기 때문에 우리들의 아침 식사는 다소 풍족했고, 흔히 점심을 지을 시간이 없을 때는 커다랗게 자른 파이나 두터운 빵과 치즈를 주었다. 우리들은 그걸 들고 숲으로 가서 각자 좋은 장소를 골라 멋진 식사를 했다. 그 동안 헬렌 번즈는 어디 있을까? 어째서 나는 이 자유롭고 행복한 나날을 그녀와 함께 보내지 않았던가? 헬렌은 앓고 있었다. 몇 주일 전부터 그녀는 2층의 어느 방으로 옮겨져서 내 눈에는 띄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티푸스가 아니라 폐병이었다. 나는 그때 무지했기 때문에 폐병이란 간호만 잘 하면 틀림없이 좋아질 수 있는 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6월의 어느 날, 나는 늦게까지 숲속에 머문 적이 있었는데, 학교로 돌아온 것은 달이 뜬 후였다. 한 마리의 말이 교정 입구에 매여 있었다. 그 말은 의사의 것이었다. 나는 숲에서 캐어 온 몇 그루의 풀을 내 화단에 심으려다 문득 뜻밖의 일이 생각났다. "이렇게 좋은 철에 앉아서 죽어가는 사람은 얼마나 슬플까! 이 세상은 이처럼 즐거운데 - 여기서 불리워져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가야 한다는 것은 무척 괴로운 일일 거야." 이 때 나는 처음으로 천국과 지옥에 대해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마침 현관이 열리고 의사 베이드 선생이 나왔다. 한 사람의 간호사가 따르고 있었다. 선생이 말을 타고 가 버리자 간호사가 문을 닫으려 했다. 나는 그녀 곁으로 달려갔다. "베이드 선생님은 헬렌을 보러 오셨어요?" "음." "그래, 선생님은 뭐라고 하셨어요?" "이제 여기서 오래 있지는 못할 거라고 했어요." 이 말을 내가 어제 들었다면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가려느니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의 뜻을 순간적으로 알아차렸다. 헬렌은 이제 이 세상에 얼마 있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공포에 가슴이 저리고 슬픔으로 몹시 떨렸다. 나는 꼭 헬렌을 만나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가 어느 방에 누워 있는지를 물어 보았다. "템플 선생님의 방이야." 하고, 간호사는 대답했다. 소등 뒤 두 시간이 되었을까? 아마 열한 시가 가까웠을 것이다. 나는 잠들 수가 없었다. 몰래 일어나 잠옷 위에 웃옷을 걸치고 맨발로 침실을 기어 나갔다. 하나의 계단을 내려 아래층을 통과하고, 두 개의 문을 지나 간신히 또 하나의 계단에 도착했다. 그것을 오르자 정면에 템플 선생의 방이 있었다. 방문을 조금 열려 있었는데, 환기를 위해 그렇게 한 것 같았다. 나는 문을 밀치고 헬렌을 찾았다. 템플 선생의 침대 곁에 흰 커튼으로 반이 가려져 있는 곳에 조그만 침대가 놓여 있었다. 헬렌의 얼굴은 커튼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뜰에서 나와 얘기했던 간호사는 안락 의자에 앉은 채 자고 있었다. "헬렌!" 하고, 나는 커튼 밖에서 속삭였다. "안 자니?" 그녀는 스스로 커튼을 젖혔다. 그녀의 표정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불안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머, 제인, 너였지?" 평상시의 상냥한 목소리였다. 나는 생각했다. "헬렌은 죽지 않아. 모두가 착각을 하고 있어. 만일 죽는다면 이렇게 침착할 수도 없고, 얘기도 못할 거야." 나는 침대로 가서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녀의 이마는 차가웠고, 손도 목도 야위어 있었지만 그녀는 전과 마찬가지로 미소지었다. "어떻게 여기에 왔니, 제인? 벌써 열한 시가 넘었어." "너를 만나러 왔어. 네가 몹시 아프다길래 잠을 잘 수가 없었어." "그럼 나한테 이별하러 왔구나. 마침 시간이 맞았어요." "어디 가니, 헬렌? 집으로 가니?" "응, 나의 영원한 집, 최후의 집으로." "싫어, 싫어, 헬렌!" 나는 슬픔 때문에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제인, 너 맨발이구나. 이리 올라 와, 이불을 덮어요." 나는 그렇게 했다. 그녀는 나를 안았고, 나도 그녀를 감싸 안았다. 오랜 침묵 뒤에 그녀는 다시 속삭였다. "나는 참 행복해, 제인, 그러니까 내가 죽었다는 말을 듣더라도 슬퍼하지 말아. 우리들은 언젠가 죽어야 하고, 내 병은 괴롭지가 않아. 내 마음은 평안해. 나를 아깝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고...... 아버지가 계시지만 재혼을 했으니까 그리 슬퍼하지도 않을 거야." "하지만 넌 어디로 가려는 거지? 그걸 알고 있어?" "믿고 있는 거야. 나에게는 신앙이 있어. 그래서 나는 하느님 곁으로 가는 거야." "하느님은 어디 계셔? 하느님이란 어떤 분이야?" "나를 만드신 분, 그리고 너도...... 하느님은 자기가 지으신 것을 멸하지는 않아요. 나는 뭐든지 하느님의 힘에 맡기고 있어요." "헬렌, 너는 정말 천국이 있다고 생각하니?" "반드시 있다고 생각해. 하느님은 신이야. 나는 하느님은 사랑하고, 하느님도 나를 사랑하셔." "그럼, 내가 죽으면 너를 만날 수 있니?" "너도 마찬가지로 행복한 나라로 올 거야. 역시 전능하신 하느님이 맞이해 주실 거야." 나는 헬렌에게 바짝 안겼다. 헬렌은 이제까지보다 더 사랑스러웠고, 그녀를 잃어버리기가 싫었다. 이윽고 그녀는 더없이 아름다운 어조로 말했다. "아아, 나 참 기분이 좋아. 어째 잠이 올 것 같애. 하지만 제인, 어디 가면 안돼! 네가 곁에 있어 주었으면 해." "오래오래 같이 있을 게, 헬렌. 누가 와도 나를 데려가지 못해." "너 따뜻하니?" "음." "잘 자, 제인." "잘 자, 헬렌." 내가 눈을 떴을 때는 낮이었다. 간호사가 나를 안고 기숙사 쪽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몰래 헬렌에게 간 것으로 꾸중듣지는 않았다. 그때는 내가 여러 가지로 물어도 아무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한 이틀 뒤에 나는 비로소 사정을 알았다. 템플 선생이 새벽에 자기 방으로 돌아와 보니 내가 헬렌과 같이 자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얼굴을 헬렌의 어깨에 얹고 그녀의 목을 안고 있었다고 한다. 나는 자고 있었고, 헬렌은 - 죽어 있었다. 헬렌의 무덤은 브로클브리지 교회의 묘지에 있다. 그녀가 죽은 지 15년, 거기에는 풀이 우거진 둥근 무덤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잿빛 대리석이 그 자리를 말해 주고, 묘석에는 그녀의 이름과 '나는 다시 살아난다' 라는 뜻의 라틴어가 새겨져 있다. 10 티프스는 로우드에 많은 참화를 가져다 주고 차츰 물러가기 시작했다. 병의 원인이 조사되고, 차츰 여러 가지의 사실이 세상에 드러나자 문제는 극에 달했다. 그 소재지가 건강상 좋지 않았다는 점, 식량의 질과 양, 요리에 쓰이는 염분에 함유된 더러운 물, 학생들의 초라한 옷과 설비 이 모든 것이 폭로되고, 브로클 허스트 씨에게는 굴욕적인 결과가 되었지만 학원으로서는 좋은 결과가 되었다. 이 지방의 몇몇 부유하고 인정 많은 사람들이 보다 좋은 장소에 좋은 건물을 세우기 위해 기부했으며 규칙이 새로 만들어지고, 의식주가 재건되었다. 나는 이 개혁 뒤에도 이 구내에 머물렀고 8년이나 더 있었다. 6년간은 학생으로서, 2년간은 교사로서였다. 템플 선생은 이러한 여러 가지 변화 속에서도 쭉 교장 자리에 계속 있었다. 선생은 나를 위해 어머니가 되고, 가정 교사도 되고, 나중에는 친구가 되어 주셨다. 나는 선생의 성격 일부를, 또 선생의 많은 습관을 흡수했다. 조화된 사상, 제어된 감정도 갖게 되었으며 나는 진심으로 의무와 질서에 따랐다. 나는 내 자신이 만족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리고 평소 내 자신의 눈에도 잘 훈련된 소극적인 성격처럼 보였다. 하지만 운명은 나와 템플 선생 사이에 파고 들었다. 템플 선생은 성직자와 결혼하여 먼 나라로 떠나게 된 것이다. 나는 선생이 결혼식을 마치고 역마차에 오르는 것을 전송했다. 언덕을 넘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고는 돌아와,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보냈다. 해가 지고도 시간이 꽤 흐른 뒤에 제2의 발견에 나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지금 나는 본래의 나로 돌아갔고 옛날의 격정적인 가슴 설렘을 느꼈다. 이것이 나의 발견이었다. 지금 나는 현실은 매우 넓다는 것, 가지가지의 희망이나 불안의 영역, 감동과 흥분의 영역이 그 넓이 속으로 돌진하고 인생의 참다운 지식을 그 위험 속에서 찾으려 하는, 용기 있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창가로 가서 밖을 보았다. 나의 눈은 멀리에 있는 푸른 산을 향했다. 내가 넘고 싶은 것은 그것이었다. 나는 산협으로 사라져 간 하얀 길을 보았다. 나는 저 길을 새롭게 더듬어 가고 싶었다. 나는 그 길로 역마차를 타고 온 뒤 한 번도 로우드를 떠난 적이 없다. 리드 부인은 한 번도 나를 게이트헤드에 불러 주지 않았다. 학교의 규칙, 학교의 의무, 학교의 습관, 사고 방식, 목소리도, 얼굴도, 말도, 복장도, 기호도 모두 학교의 것이었고, 그것이 현실에 대한 나의 지식의 전부였다.그리고 지금 나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단 한 나절에 8년간이나 길들여 온 일과에 싫증을 느끼고 말았다. 나는 변화와 자극을 마음속으로 원했다. 나는 거의 자포 자기적으로 소리쳤다. '새롭게 봉사할 자리를 내게 주소서!' '새로운 봉사! 여기에 뭔가가 있어.' 그날 밤 나는 침대 속에서 생각했다. '그래, 알고 있어. 누구에게든 봉사해도 좋을 거야. 나는 여기서 8년 간이나 봉사했어. 내가 희망하는 것은 지금 다른 데로 가는 거야. 이건 실행되지 않을까? 그래, 신문에 광고를 내 보자. 광고문과 요금을 신문사 편집장에게 보내자. 이것을 기회 있는 대로, 로우톤의 우체국에 넣는다. 내 주소를 로우톤 우편국으로 하고, 이름을 J.E 라고 한다. 1주일이 지나면 가서 물어 본다. 한 통의 편지라도 오면 그것에 의해 행동한다.' 나는 이런 계획을 밤에 두 번, 세 번 생각했다. 그리고 만족하여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광고문을 써서 봉투에 넣었다. '교수에 경험있는 젊은 여자 - 14세 이하의 자녀 있는 가정을 원함 (나는 겨우 열여덟이었으므로 이 이상의 학생은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본인은 정규적인 영국의 보통 교육 과정에다 프랑스어, 미술, 음악을 가르칠 자격이 있음.' 그날 오후 2마일의 길을 걸어 로우톤 우체국에 가서 부쳤다. 그리고 1주일을 기다리는 것은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상의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 주도 끝이 와서, 나는 우체국으로 가 보았다. 코안경을 씨고, 검은 장갑을 낀 노부인이 사무를 보고 있었다. 'J.E라는 익명으로 편지 온 게 없나요?' 하고 물었다. 노부인은 안경 너머로 나를 보더니, 서랍을 열고 오랫동안 뒤적였다. 너무 오래 걸렸기 때문에 나는 희망이 사라질 정도였다. 그녀는 한 통의 편지를 들고는 5분간이나 들여다보다가 다시 한 번 의심스런 눈길로 나를 보면서 카운터 너머로 그걸 내밀었다. '한 통 뿐이에요?' 하고 나는 물었다. '이것 뿐이에요.' 그녀는 대답했다. 나는 그것을 호주머니에 넣고 돌아왔다. 그 사이에 가지가지의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밀린 일들을 다 끝내고 침실로 돌아와서야 겨우 편지를 꺼내 읽었다. '신문 광고를 내신 J.E 씨가 그만한 학식을 갖고 계시고, 인물과 기능에 대해 만족할 만한 증명서를 보내 주신다면 10세 미만의 소녀 1명에 대한 교사 자리를 제공하고 싶습니다. 봉급은 1년에 30파운드입니다. J.E 씨가 증명서, 이름, 주소 등을 보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주, 밀코트 근교 손필드에서 페어펙스 부인' 나는 오랫동안 이 편지를 점검했다. 문체는 고풍하고, 정확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중로의 부인 같았다. 이 정도면 우선 됐다 싶었다. 나는, 나이를 다소 먹은 부인의 집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페어펙스 부인! 차양 달린 모자를 쓰고 검은 가운을 입고 있는 부인을 나는 상상했다. 손필드! 이건 틀림없이 그녀의 집 이름일 것이다. 밀코트라면 나는 본 적이 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곳보다도 오히려 런던에 70 마일이나 더 가깝다. 나는 활기차고 변화가 있는 지방으로 가고 싶었다. 다음날부터 나는 새로운 행동을 시작해야만 했다. 교장 선생은 고맙게도 자기가 앞장서서 그 일을 봐 주겠다고 말했다. 다음날 한 통의 편지를 리드 부인에게 보냈고, 그 회답은 제인이 좋을 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자기가 제인에 대해 일체 관계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내가 자신의 생활 조건을 좋게 하는 것이라면 무방하다는 정식 허가가 나왔다. 그리고 학원의 감독자들이 서명한 자격 증명서를 한 달쯤 뒤에 받아 그 사본을 페어펙스 부인에게 보냈다. 부인은 이것으로 만족했는지 2주일 후에 오라는 회답을 보내왔다. 준비때문에 2주가 바쁘게 지나갔다. 나는 부자유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리 많은 옷도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 8년 전에 게이트헤드에서 갖고 온 트렁크로 충분했다. 마지막 날, 일을 다 끝내고 좀 쉬려고 했지만 쉴 수가 없었다. 나는 흥분하고 있었다. 내 생애의 한 시가 오늘 밤으로 끝나고, 새로운 시기가 내일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복도에서 유령처럼 헤매는 듯한 사환이 불렀다. "선생님, 아래층에서 누가 만나고 싶대요.'" '틀림없이 배달꾼일 거야.' 이렇게 생각한 나는 그대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거실 앞을 지나는데, 거기서 뛰어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외출복을 입을 하녀 같은 할멈, 하지만 아직은 젊은 여자였다. 검은 머리, 검은 눈, 그리고 혈색 좋은 매우 고운 여자였다. "절 모르시겠어요?" 하며 미소지었다. 다음 순간 나는 정신없이 그녀를 끌어안고, "벳시! 벳시!" 하며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는 반은 웃고, 반은 울었다. 우리는 객실로 들어갔다. 난로 곁에 한 세 살쯤된 남자 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가 우리 얘에요." 벳시가 말했다. "아, 그럼 시집 갔구나. 벳시!" "네, 5년이나 되었어요. 저기 있는 보비 말고 여자 애가 또 하나 있고, 세례명을 제인이라 했어요." "그럼 게이트헤드에는 살고 있지 않아요?" "문지기네 집에 있어요. 문지기 할아범이 다른 데로 가셨어요." "그래, 그곳은 다들 어떻게 지내요? 모두다 얘기해 줘요, 벳시. 우선 먼저 앉아요. 그리고 보비, 너 이리 올래?" 하지만 보비는 자기 엄마 곁으로 가고 말았다. "제인 아가씨, 당신은 별로 키도 크지 않고 살도 찌지 않으셨군요. 학교에서 별로 잘해 주지 않았는가 보죠? 일라이자 아가씨는 당신보다 어깨 위쯤 더 커요." "조지아나는 미인이 됐죠, 벳시?" "네, 아름다워요. 어느 귀족과 연애를 했어요. 하지만 저쪽 가족들이 반대를 해서 파혼이 됐지만." "존 리드는 어때요?" "대학에 가서 뭔가, 낙제를 하셨다나? 누구도 별로 상대하지 않아요. 부인은 보기에는 건강하지만 마음은 별로 편치 않아요. 존 도령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요. 무척 돈이 헤퍼요." "그분이 벳시를 이리로 보냈어?" "어이구, 천만에요. 나는 오래 전부터 당신을 만나고 싶었는데, 다른 데로 가신다길래 그렇게 되면 만나 뵐 수도 없을 것 같아서 이렇게 달려온 거예요." "나를 만나서 실망하지 않았어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럴 리야 있겠어요? 당신은 퍽 은근하고 귀부인 같아요. 나도 그저 그 정도로만 희망을 갖고 있었지요. 어렸을 때부터 아가씨는 별로 이쁘지는 않았으니까요." 나는 벳시의 솔직한 대답에 미소지었다. 하지만 이 말은 태연히 들을 수만도 없었다. 18세나 되고 보면, 아름답지 못하다는 말은 결코 반가운 일이 못 되었다. "하지만 아가씨는 재주가 있죠? 피아노 칠 줄 아세요?" 벳시는 위로하듯이 말했다. "음, 조금은 해요." 그 방에는 피아노가 있었다. 벳시는 한 곡 쳐달라고 졸랐다. 나는 왈츠를 한두 곡 쳤다. 벳시는 감동했다. "그림도 그리세요?" "저기 벽장 위에 있는 것이 내 그림이예요." "어머나, 아가씨! 일라이자 아가씨의 그림 선생보다 더 잘 그렸네요. 그리고 프랑스 어도 알아요?" "음, 읽을 수도, 말할 수도 있어요." "훌륭한 귀부인이네요. 제인 아가씨, 난 이렇게 되리라 믿고 있었어요. 아가씨에게 물어 볼 게 하나 있어요. 아가씨, 친척분이 뭔가 편지를 보내지 않았나요?' "아니, 한 번도 없었어요." "그래요? 한 7년 전 일인데, 에어라는 신사 분이 게이트헤드로 오셔서 당신을 만나고 싶다고 했어요. 부인이 당신은 50 마일이나 떨어진 학교에 가 있다고 하니까, 그분은 하루 이틀 뒤면 배로 런던을 떠난다면서 학교까지는 갈 수 없다고 말했어요. 무척 신사다웠고, 아버지와 형제간이었나 봐요." "그래서, 바로 가 버렸어?" "네. 부인은 딱딱하게 대하고 교활한 장사꾼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우리 로버트의 생각으로는 포도주 상인일 거라고 했어요." "아마 그렇겠지." 하고 나는 대답했다. "포도주 상인의 점원일지도 모르지." 벳시는 나와 한 시간 동안 옛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그녀는 돌아가야만 했다. 나는 그 이튿날 아침, 로우톤에서 마차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 그녀를 만났다. 우리들은 브로클 허스트 암즈의 입구에서 헤어져 그녀는 게이트헤드로 가는 마차를 타러 갔고, 나는 밀코트 교외에서 새로운 근무, 즐거운 근무, 즐거운 생활을 생각하며 마차를 탔던 것이다. 11 밀코트의 조지 여관은 여인숙다운 방이었다. 머프와 양산을 테이블 위에 그대로 놓고, 나는 지금 10월의 바깥 바람을 16시간이나 쏘이며 왔으므로 언 손과 몸을 녹이고 있었다. 내가 로우톤을 출발한 것은 오전 네 시였고, 밀코트의 큰 시계는 지금 막 여덟 시를 치고 있었다. 급사가 와서 말했다. "당신이 에어 아가씨라고 하는 분입니까?" "네." "누군가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머프와 양산을 손에 들고 출구로 나가 보니 열린 문 한쪽으로 한 남자가 서 있고, 거리에는 램프 불빛을 받아, 희미하게 보이는 마차가 있었다. "이게 당신 짐인가요?" 나를 보자 그 남자가 입구의 복도에 놓여 있는 나의 트렁크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래요." 남자는 트렁크를 마차 위로 들어올렸다. 그것을 일종의 상자 모양을 한 마차였다. 나는 거기에 탔고, 손필드까지는 앞으로 어느 정도 걸리느냐고 물었다. "6마일 밖에 안 돼요. 도착하기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밖에 걸리지 않아요." 남자는 문을 닫고 바깥의 마부석으로 갔다. 이 긴 여행도 마침내 종점에 다 와 가는구나 생각하니 기뻤다. 길은 험했고, 밤 안개가 짙게 내렸다. 마부는 말을 천천히 몰고 있었다. 한 시간 반이라고 했지만 이미 두 시간도 넘었을 것만 같았다. 잠시 후에 남자가 말했다 "손필드까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요." 나는 밖을 내다보았다. 마차는 교회 바로 옆을 지나고 있었다. 마을이나, 아니면 조그만 인가임직한 등불이 산 중턱에 좁은 은하처럼 보였다. 한 10분 지나서 마부는 뛰어내려 두 쪽으로 된 문을 열었고, 마차는 그 사이로 지나 갔다. 뒤에서 문 닫는 소리가 났다. 커튼이 있는 창에서 촛불 빛이 흘러나오는 외에는 사방은 캄캄했다. 마차가 현관에 닿자 하녀 하나가 문을 열었다. 나는 내려서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하녀의 뒤를 따라, 사방으로 높은 창이 달린 홀을 지나 어느 방으로 갔다. 그 방의 촛불과 난로 불빛은 갑자기 캄캄하게 느꼈으나 두 시간 동안이나 내 눈은 어둠에 익숙해 있던 터라 간신히 눈이 정상으로 되돌아 왔다. 안정되고 느낌이 좋은 방이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그곳에는 활활 타는 난로, 둥근 테이블,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미망인 모자를 쓴 대단히 청초한 조그만 부인이, 비단 가운에다 순백 모슬린 앞치마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상상 이상으로 자상한 모습이었다. 부인은 뜨개질을 하다가 내가 들어가자 일어나 맞아 주었다. "아이구, 어서 오세요! 피곤하시지요? 이리, 불 가까이 오세요." 부인은 자기의 의자로 나를 초대했고, 나는 숄을 벗고 보네트의 끈을 풀었다. 나는 황송하여 제발 그러지 말라고 부탁했다. "아니, 그냥 두다니, 추위에 손이 얼었을 텐데요, 리어야, 니이가스 술을 데운 것하고, 샌드위치를 조금 가져와요. 창고 열쇠는 여기 있어요." 부인은 주부답게 열쇠를 꺼내어 하녀에게 주었다. "짐은 당신의 방으로 가져다 두지요." 그녀는 부지런히 방을 나갔다. 그녀는 마치 나를 손님처럼 접대했다. 설마 이런 대우를 받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미리부터 좋아할 필요는 없었다. 부인이 돌아와서, 리어가 가져 온 음식을 내게 권했다. 나는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는 그녀의 그러한 태도에 당황했다. 그러나 부인은 특별히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태도는 없었고, 나는 그러한 호의를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페어펙스 아가씨는 오늘 밤 뵐 수 있을까요?" 하고 나는 물었다. "페어펙스 아가씨? 아아, 발란스 아가씨 말이군요. 당신의 학생은 발란스란 이름이에요." "어머나! 그럼 그분은 댁의 아가씨가 아니에요?" "네, 내게는 가족이 없어요." 그럼 발란스와 어떻게 되느냐고 캐묻고 싶었지만 실례가 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 애는 혼자 있기가 너무 쓸쓸해 했는데 이제는 나와 둘이 있으니 좋겠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나는 이 노숙녀에게 따뜻한 기분이 생겼다. "하지만 오늘 밤은 벌써 열두 시가 되었어요." 하고 부인은 말했다. "진종일 여행을 하셨으니까 무척 피곤하실 거예요. 침실로 안내하지요. 바로 내 방 옆이에요. 좁은 방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마음에 드실 거예요." 난 그녀의 마음가짐에 감사했다. 부인은 촛불을 들고 나가는 그 뒤를 따라 거실을 나섰다. 계단의 손잡이도, 발판의 판자도 떡갈나무고, 창도 높았다. 침실로 통하는 복도는 보통 집보다는 오히려 교회 같았다, 큰 집의 썰렁한 기분을 약간 느끼게 했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작은 방으로 인도되자, 나는 이 방안이 극히 흔한 현대식 가구로 장식되어 있음을 보고 몹시 기뻤다. 비로소 나는 심신이 피로했던 하루가 끝나고, 이제 휴식의 항구에 도착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감사하는 마음이 솟구쳐 마루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그날 밤 나는 아무런 걱정도 없이 깊이 잠들 수 있었다. 눈을 뜨니 해는 이미 높이 솟아 있었다. 햇살이 밝게 물빛 커튼 사이로 비쳐 들고, 로우드의 환경과는 전혀 다른 벽지와 융단을 보자 나의 마음은 금새 부풀어올랐다. 나는 일어나 꼼꼼하게 몸차림을 했다. 나는 내 자신이 조금밖에 갖고 있지 않는 아름다움이지만 남의 눈에 띄고 싶었다. 나는 때로 그다지 예쁘지 않은 자신의 용모를 슬퍼하기도 했고, 이처럼 조그맣고 안색도 창백하고, 눈 코가 예쁘지 않아 운이 좋을 리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어째서 나는 이러한 희망을 가슴에 품기도 하고, 또 절망하기도 하는 것일까? 이것은 아무래도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꼼꼼히 머리를 빗고, 검은 상의를 입고, 하얀 레이스의 깃을 달면 페어펙스 부인 앞에 나가도 그리 흉스럽지 않을 것이며, 나의 새로운 학생이 달아나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융단을 깐 긴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 홀로 나섰다. 거기서 나는 오래된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유리가 끼워진 현관 문은 열려 있었다. 나는 밖으로 나가 신선한 가을 아침을 만끽했다. 막 떠오른 태양이 아직은 푸른 기가 남아 있는 갈색으로 물든 숲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잔디 위를 걸으면서 저택의 정면을 바라보았다. 3층 건물로 크기는 하지만 그다지 화려하지는 않았다. 저택의 잿빛 정면은 갈가마귀가 사는 숲을 배경으로 우뚝 솟아 있었다. 갈가마귀들이 시끄럽게 울어대며 날아와 뜰의 잔디를 지나 저편으로 넓게 펼쳐진 목장으로 내려앉았다. 목장에도 공이가 생긴 우람한 떡갈나무 같은 굵은 산사자 나무가 주욱 서 있어서, 첫눈에 이 집의 이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저쪽에는 언덕이 있었는데, 조용하고 쓸쓸한 언덕으로, 번화한 밀코트 지방에 이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한 것이었다. 그 언덕은 마치 이 손필드를 감싸고 있는 듯이 보였다. 언덕 중턱에 작은 부락의 지붕들이 나무 사이로 보였다. 이 지방의 교회가 손필드 가까이에 있었고, 그 낡은 탑 꼭대기가 저택과 문 사이의 언덕에 위치해 보였다. 그때 페어펙스 부인이 문 앞에 나타났다. "아니, 벌써 일어났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부인에게로 다가가 상냥한 키스와 악수를 받았다. "어때요, 마음에 드세요?" 하고 그녀는 물었다. 나는 대단히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하지만 로체스타님이 오셔서 쭉 계실지 안 계실지 걱정이에요. 큰 집에는 역시 주인이 필요하니까요." "로체스타?" 하고 나는 소리쳤다. "그분이 누구예요?" "손필드의 주인이에요." 하고 부인은 조용히 말했다. "주인이 로체스타님이란 것을 모르셨나요?" "난 손필드가 당신 것인 줄만 알고 있었어요." 하고 나는 대답했다. "뭐, 내 것이라구? 아이구, 나는 그저 관리인에 불과해요. 나는 로체스타 가의 외가뻘로 먼 친척이 되지요. 저기 저 교회가 남편 것이었어요. 로체스타님의 어머님은 페어펙스가 출신이에요. 나는 나 자신을 극히 평범한 가정부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럼, 그 조그만 아가씨는? 나의 학생은?" "그 아이는 로체스타님이 부모 대신 돌보는 아이로, 주인이 내게 가정교사를 한 사람 고용하랬어요. 그애를 여기서 키우기로 한 거죠. 아아, 저기 오고 있군요." 그제서야 간신히 수수께끼가 풀렸다. 부드럽고 상냥한 미망인은 이 집의 영부인이 아니라 나와 같은 고용인이었다. 이 새로운 사실을 생각하고 있는데, 한 여자 아이가 할머니와 함께 잔디밭을 건너왔다. 바로 내가 가르칠 학생이었다. 일곱여덟 살은 되었을까? 눈 코가 조그맣고 갸름한 몸에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뭉실뭉실한 머리가 허리께까지 늘어져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델라 아가씨?" 하고, 페어펙스 부인이 말했다. "자아, 아가씨에게 공부를 가르쳐 줄 분이에요, 인사드려요." "이 분이 나를 가르칠 선생이야?" 그녀는 나를 가리키면서, 프랑스 어로 할머니에게 얘기했다. 할머니도 프랑스 어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요, 아가씨." "이분들은 외국 분들이에요?" 나는 두 사람의 프랑스 어에 놀라 물었다. "할머니는 외국인이고, 아델라는 대륙에서 태어나 6개월 전까지는 그쪽에 있었어요. 처음 이리로 왔을 대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어요. 요즘에서야 겨우 조금씩 하지만 대개가 프랑스 말이어서 우리들은 알아듣지 못해요. 하지만 당신은 아마 알아들으실 거예요." 나는 프랑스 어를 어느 정도는 알았으므로 아델라와의 대화에서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녀는 내가 가정 교사임을 알자 다가와서 악수했다. 아침 식사를 위해 함께 집안으로 들어가며 몇 마디 프랑스 어로 말했다. 그녀는 처음엔 짧게 대답했지만 식탁에 앉은 뒤에는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어머!" 하고 그녀는 프랑스 어로 말했다. "선생님은 로체스타 아저씨처럼 말을 잘 하네요. 소피도 기뻐하겠어요. 마담 페어펙스는 전부 영어만 써요. 소피와 나는 바다를 건너왔어요. 연기가 엄청나게 나는 배였는데 어찌나 속이 메스꺼웠는지. 선생님의 이름은?" "에어 - 제인 에어라고 해요." "예일? 어머, 난, 안 되네. 그런데 말야, 우리들은 새벽에 컴컴한 큰 도시에 닿았어요. 그리고 마차를 타고 무척 아름다운 집으로 갔어요. 호텔이란 곳이에요. 거기서 1주일간 묵었어요. 나무도 많고, 새도 많고, 아이들도 많았어요. 나는 새에게 빵을 던져 주었어요." "아델." 하고 나는 물었다. "너는 그 아름다운 곳에 있을 때, 누구하고 같이 있었지?" "옛날에는 엄마와...... 하지만 지금은 마리아한테로 가 버렸어요. 나에게 노래와 춤과 시를 낭독하는 것을 가르쳐 주었어요. 많은 아저씨들이 엄마에게 왔어요. 나는 모두가 보는 데서 춤도 추고, 무릎에 안겨서 노래하기도 했어요. 나는 노래가 참 좋아요. 선생님에게도 노래 불러 드릴까요?" 나는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녀는 내 무릎에 안겨 조그만 손을 포개더니, 눈은 천장을 보며 오페라의 한 절을 불렀다. 그것은 남자에게 버림받은 여자의 노래였다. 대단히 악취미를 노린 것이었다. 아델은 그 소곡을 꽤 멋지게 불렀다. 그것이 끝나자 나의 무릎에서 뛰어내렸다. "이번에는 춤춰 볼까요?" "아니, 됐어. 그런데 엄마가 가고 나서는 누구와 같이 있었지?" "마담 프레데릭과 그녀의 남편이에요. 하지만 친척도 아니었고, 집은 가난했어요. 로체스타 아저씨가 영국에 가서 같이 살자고 말했어요. 난 그렇게 하기로 했어요. 나는 전부터 아저씨를 알고 있었고, 언제나 상냥했고, 좋은 옷과 장난감을 주셨어요." 아침 식사 후, 아델과 나는 서재로 갔다. 책장은 모두 잠겨 있고 하나만 열려 있었는데, 거기에 초등 과정에 필요한 책, 가벼운 소설, 시, 전기, 여행기, 기사 이야기 같은 책들이 있었다. 가정 교사가 읽을 것으로는 충분하다고 로체스타 씨는 생각했던 모양이다. 사실 나는 만족스러웠다. 피아노도 있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이젤도 놓여 있고, 지구의도 있었다. 내가 가르칠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솔직한 성격이란 것을 알았다. 그녀는 올바른 습관을 몸에 붙이지 않고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이 아이를 속박하는 것은 현명한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을 했다. 여러 가지 얘기를 하다가 점심때가 되어서야 할머니에게로 돌려보냈다. 2층으로 가는 도중에 페어펙스 부인이 나를 불렀기 때문에 문이 열려 있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 방은 넓고 중후한 느낌이었다. "어머, 참 좋은 방이네요" 하고 나는 방을 돌아보며 감탄의 말을 했다. 하다못해 이것의 반만큼 훌륭한 방도 나는 본 적이 없다. "여기는 식당이에요. 바람과 햇살이 좀 들어올까 해서 문을 열었어요. 좀처럼 쓰지 않아서 축축하거든요. 저쪽 방은 마치 동굴 같아요." 부인은 커다란 아치를 가리켰다. 커튼이 쳐져 있었다. 넓은 계단을 두개 올라가서 둘러보니, 마치 요정의 나라처럼 생각되었다. 하지만 이건 단순한 객실에 불과했고, 안쪽에는 부인실이 따로 있었다. "페어펙스 부인, 어째서 이 방을 이처럼 아름답게 정리하세요?" 하고 나는 물었다. "먼지 하나 없어요. 거기다 즈크의 커버도 없고, 공기만 축축하지 않다면 매일 쓰던 방 같아요." "그건 말예요, 에어 씨, 로체스타님은 가끔 오시지만 언제나 갑자기 와서 우리가 놀라서 치우거나 하는 걸 싫어하세요. 그래서 언제나 이렇게 준비를 해 두지요." "로체스타 씨는 까다로운 분이세요?" "특별히 그런 것도 아니지만, 하여간에 신사로서의 취미와 습관을 가진 분이라, 거기에 맞는 대우를 바라는 거지요." "하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볼 때 간단히 말한다면 어떤 성격이세요?" "별로 얘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성격이야 무던하지요. 그러나 보통 분과는 조금 달라요. 언제나 여행을 하시고, 세상 물정을 많이 보시니까 아마도 현명하겠지요." 이상이 페어펙스 부인으로부터 들은 주인에 대한 얘기의 전부였다. 신사고 지주고,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 이상 물어 보지도 않았고, 의심해 보지도 않았다. 내가 그 정체를 알려고 자세하게 질문하는 것을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식당을 나서자 이번엔 저택 안을 안내해 주었다. 사실상 모두가 질서 정연했고, 훌륭했다. 3층의 방 몇 개는 어두웠고, 천장이 낮았지만 그 고풍함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하녀들이 여기서 기숙하나요?" 하고 나는 물었다. "아니, 그 사람들은 뒤쪽에 있는 보다 작은 방이에요. 아무도 여기서는 자지 않아요. 만일 손필드에 유령이 있다면 아마 이곳일 거라고들 말하지요. 듣고 보니 나도 그렇게 생각되더군요. "그럼 여기는 유령이 없어요?" "네, 들어 본 적도 없어요." 하고 웃으며 부인은 말했다. "어머, 페어펙스 부인, 어딜 가세요?" "옥상에 가요. 거기는 경치가 훌륭해요." 부인의 뒤를 따라 나는 좁은 계단을 올라 옥상으로 나섰다. 내려올 때는 페어펙스 부인은 문을 닫느라 시간이 걸렸다. 나는 손으로 더듬어 출구를 찾아 좁은 계단을 먼저 내려왔다. 3층의 앞뒤 방 사이의 긴 복도에서 나는 주저했다. 좁고, 어둡고, 멀리 정면에 조그만 창이 하나 있을 뿐 복도 양쪽에 작고 검은 문이 있는 방이 주루룩 있어, 마치 '푸른 수염의 성'에 나오는 회장 같았다. 발소리를 죽여 조용한 곳을 걸어가자니까, 뜻밖의 소리가 났다. 웃음 소리였다. 확실했다. 부자연스럽고 음산하고, 기묘한 웃음 소리였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 소리는 차츰 약해지더니 다시 훨씬 높아졌다. 처음에는 확실하게 들렸지만 극히 낮았다. 웃음 소리는 마치 조용한 방 하나하나에 메아리치듯이 요란한 울림을 남기고 사라져 갔다. 그 소리 나는 곳이 어느 방인지 나는 알 수 있었다. "페어펙스 부인!" 하고 나는 큰 소리로 불렀다. 부인이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저 큰 웃음 소리를 들었어요? 누구예요, 저건?" "아마, 하녀겠지요." 하고 부인은 대답했다. "아마, 그레이스 풀일 거예요." "들으셨어요?" 하고 나는 다시 물었다. "네, 확실히 들었어요, 어느 방에선가 바느질을 하고 있을 거예요." 낮고 똑똑한 웃음 소리가 또 한 번 들리고, 묘한 중얼거림으로 끝났다. "그레이스!" 하고 페어펙스 부인이 소리쳤다. 나는 그레이스란 인간이 대답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웃음 소리는 내가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는 비참하고도 괴상했다. 그것이 낮이 아니고 공포를 더욱 자아낼 시간과 장소였다면 나는 틀림없이 유령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태는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란 것을 곧 알게 되었다. 바로 곁의 문이 열리고 하녀 하나가 나타났다. 건장한 체격의 각이 진 못생긴 얼굴과 빨간머리, 설흔이나 마흔은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그레이스, 너무 수선스러워요." 하고 부인은 말했다. "시킨 대로 잘해 줘야지!" 그레이스는 말없이 무릎을 굽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 사람은 바느질도 하고 리어의 일을 돕기도 해요." 부인은 계속해서 말했다. "여러 가지 점에서 일을 잘 하죠. 전혀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래층에서는 그 동안 식사 준비가 다 되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12 조용한 손필드의 첫인상이 나에게 행복을 약속해 주는 듯했다. 평온한 나의 생활은 거기에 사는 사람들과 친숙해진 뒤에도 배신당하는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학생은 밝고, 응석둥이고, 더러는 고집이 세긴 하지만 솔직하고 가르치기 쉬운 아이였다. 재능도 취미도 특별한 데가 없는 아이였지만, 또 수준 이하로 떨어지는 결점도 악습도 없었다. 나는 가끔 혼자서 저택 안을 산책했고, 문 곁으로 내려가서 큰길을 바라보곤 했다. 또 계단을 올라 지붕 위로 나서서 먼 들판, 언덕, 희미한 지평선을 황홀하게 바라보곤 했다. 들은 적은 있지만, 아직까지 본 적이 없는 미지의 세계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가지까지 보고 싶었다. 나는 여기서 사귄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 가지가지 성격의 사람들과 교제하고 싶었다. 나를 불평가라고 할지 모르지만, 내 성격에는 뭔가가 움직여서 그치지 않는 것이 때론 내 마음을 괴롭게 했다. 이럴 때 도움이 되는 것은 3층의 복도를 헤매고 그 침묵과 적막에 젖는 일이었다. 내가 이렇게 고독에 젖어 있을 때, 그레이스 풀의 웃음 소리 - 처음 들으면 소름이 끼치지만 그 낮은 웃음 소리를 듣는 것도 익숙해져 이젠 이상하지 않았다. 또 그 웃음 소리보다도 더 괴상한, 그녀의 중얼거림을 듣기도 했다. 그레이스의 수선스런 음향이 계속 들려 오는 때도 있었지만 침묵하는 때도 있었다. 나는 가끔 접시나 쟁반을 들고 방을 나와 부엌으로 내려가는 그녀의 모습을 볼 때도 있었다. 그러면 그녀는 언제나 대개는 검은 맥주병을 기고 돌아오곤 했다. 그 모습을 보면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에 대한 호기심이 대단히 약해지고 만다. 요컨대 까다로운 얼굴, 딱딱한 표정 어디에도 흥미를 끌 만한 점이 없다. 10월, 11월, 12월이 지나가고 1월의 어느 날 오후, 페어펙스 부인이 아델의 학과는 쉬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아델이 감기에 걸렸다는 것이다. 아델도 그렇게 해주기를 바랐고, 나도 다소 융통성이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쾌히 승낙했다. 추위는 대단했지만 맑고 고요한 날이었다. 마침 페어펙스 부인이 편지를 다 써서 부치기만 하면 된다길래 나는 헤이까지 가서 그것을 부치고 오겠다고 했다. 나는 망토를 입고, 보네트를 썼다. 헤이까지의 거리는 2마일로, 겨울 오후의 산책으로는 좀 힘들었다. 대지는 얼어붙었고, 걷는 사람은 나 혼자 뿐이었다. 나는 몸이 더워질 때까지 부지런히 걷기도 하고 힘들면 천천히 걸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끔 떠오르는 즐거운 생각에 잠기면서 말이다. 교회의 종이 세 시를 쳤다. 그 시각은 미묘한 시각이었다. 기울어지는 창백한 태양과 멀리서 다가오는 황혼을 알리는 한때였다. 나는 손필드에서 거의 1마일쯤 되는 거리의 들길을 걸었는데 여기서 잠시 나는 풀밭으로 내려가는 계단 위에 앉았다. 길바닥의 가득한 얼음, 추위는 심했지만 나는 망토를 두르고 머프에 손을 넣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은 길이 얼었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눈이 녹은 물이 넘쳐 흐른 시내였다. 내가 앉아 있는 곳에서 손필드가 내려다보였다. 회색 건물이 골짜기에서 한결 뛰어나 보이고, 그 숲과 까치들이 사는 숲이 서쪽으로 솟아 있었다. 하늘에는 달이 떠 있었다. 달빛은 거의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 헤이까지 비추고 있었다. 거기까지는 아직 1마일이나 남았지만 깊은 고요 속에서 생명의 고동을 나는 들을 수 있었다. 갑자기 먼 저쪽에서 거친 울음 소리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팍팍 하는 금속성의 발자국 소리도 들렸다. 이 수선스런 소리는 길을 따라 다가오고 있었다. 말이 오고 있는 것이다. 꼬불꼬불한 들길은 어둠에 싸여 아직 그 모습을 감추고 있지만, 소리는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막 일어나려 하였으나 길이 몹시 좁기 때문에 말을 지나 보내기 위해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말이 다가와 연한 어둠 속에서 차츰 뚜렷하게 그 모습이 드러났을 때, 나는 '가트랏쉬' 라는 북부 영국의 유령이 나오는 셋시의 이야기를 생각했다. 그것은 커다란 개 모양을 하고 있었고, 쓸쓸한 밤길에 출몰하여 마치 지금 다가오는 말처럼 지나가는 나그네를 습격한다는 것이었다. 말은 상당히 가까이 왔지만 아직 보이지는 않았다. 그때, 생울타리 밑을 스치는 소리가 나더니 커다란 개가 뛰쳐나왔다. 그 개는 희고 검은 털빛으로 해서 확실하게 보였다. 그놈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곁을 후닥닥 지나갔다. 그 뒤를 말이 따르고 있었다. 키가 큰 남자가 타고 있었다. 그는 지나갔고 나도 걷기 시작했다. 두세 걸음 가서 나는 돌아보았다. 미끄러지는 소리와 '쳇, 이게 뭐야!' 하는 소리가 나의 주의를 끈 것이다. 사람과 말이 쓰러져 있었다. 유리처럼 깔린 얼음 위에 미끄러진 것이다. 개는 다시 돌아와 큰 소리로 짖어댔다. 그러고는 사람과 말 주위를 빙빙 돌아가 내게로 달려왔다. 나는 개를 따라갔다. 길손은 말 밑에서 다리를 빼려고 애쓰고 있었다. "다치지는 않으셨어요?" 그는 무엇이라고 투덜댔지만 확실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뭔가 도와 드릴까요?" 하고 나는 물었다. "옆으로 비켜 있어요." 나는 그의 말대로 한쪽으로 비켰다. 개가 짖어대고, 괴로움에 신음하는 소리와 말이 버둥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에게서 몇 야드쯤 떨어져 있었다. 말은 일어났고, 개는 꾸중을 듣고 조용해졌다. 길손은 다리를 만져 상처가 있나 없나를 살폈다. 조금 아픈듯이 내가 앉았던 계단까지 절며 와 앉았다. "만일 사람이 필요하다면 손필드나 헤이에서 누군가 불러올까요?" "고마워요. 하지만 조금 삐었을 뿐이니까." 하며 일어나 다리를 시험해 보다가 그는 크게 "욱!" 하고 소리쳤다. 아직은 초저녁이라고 또 달빛까지 더해져서 그를 볼 수 있었다. 중키에 가슴이 넓은 남자였다. 눈 코는 엄격해 보였고, 나는 그에게 별로 공포도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았다. 다만 이 길손의 딱딱하고 거친 태도가 나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당신이 말을 타고 떠나시는 걸 봐야 안심이 될 것 같아요. 이 쓸쓸한 길에 이런 시간에 당신을 그냥 둘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는 비로소 나를 보았다. 그때까지도 그는 나를 보지 않은 것이다. "당신이야말로 집에 빨리 가야겠지요." 하고 그는 말했다. "이 근처에서 사신다면 어디서 왔지요?" "바로 이 아래서요. 달이 있으니까 조금도 무섭지 않아요. 뭣하면 기꺼이 헤이까지 갔다 오겠어요. 실은 거기까지 편지 부치러 가는 길이에요." "바로 이 아래? 저 회색 집입니까?" 그는 손필드 저택을 가리켰다.' "네." "저건 누구네 집이지요?" "로체스타 씨의 집입니다." "로체스타 씨를 잘 아세요?" "아니 아직 만난 적이 없어요." "당신은 물론 그 집의 하녀는 아닐 것이고, 그렇다면......" 하고 말을 흐리면서 나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나는 가정 교사에요." 하고 나는 그의 생각을 도와 주었다. "아, 가정 교사!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어! 가정 교사입니까?" 그러고는 다시 나를 찬찬히 훑어봤다. 그는 계단에서 일어나 걸으려 했지만 몹시 아픈 듯 얼굴을 찡그렸다. "누군가를 좀 불러다 주시겠어요?" 하고 그는 말했다. "만일 그렇다면 잠깐 손을 빌려 주세요." "네, 알았습니다." "말을 이리로 데려와요, 무섭지는 않지요?" 아무도 없다면 나는 말을 무서워했겠지만 그가 있으니까 그렇지는 않았다. 나는 머프를 계단 위에 올려 놓고 말에게로 다가가 고삐를 잡으려고 했지만, 고집이 센 말이라 여간해서 잡히지를 않았다. 길손을 잠시 기다리다가 내 꼴을 보고는 마침내 웃고 말았다. "과연." 하고 그는 말했다. "산을 마호메드에게 가까이 하기는 어렵지만 당신은 가능할 것 같아 우선 이리로 오세요." 나는 그리로 갔다. "실례지만." 하고 그가 말했다. "당신의 도움을 받아야만 할 것 같애." 그는 무거운 손을 나의 어깨에 걸치고 내게 기대듯 하여 말이 있는 곳까지 다리를 절며 갔다. 고삐가 잡히자 그것을 당겨 안장에 올라앉았다. 하지만 그때, 그는 몹시 얼굴을 찡그렸다. 삔 다리가 아팠던 것이다. 그는 꽉 물었던 아랫입술을 다소 늦추면서 말했다. "고마워요. 그럼 급히 편지를 부치고 빨리 돌아와요." 그러고는 말을 몰아 달려가 버렸다. 개가 그 뒤를 따랐다. 나는 머프를 손에 들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갑자기 사건이 일어났고 그리고 끝이 났다. 하나, 그리 중대하지도 않고, 소설적이지도 않았으며 흥미를 끌지도 못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나는 헤이에 닿아 편지를 부치고도 그의 얼굴이 아직 나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언덕을 내려 집으로 가는 도중에도 그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다시 그 장소까지 왔을 때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말발굽 소리가 다시 들리지나 않나 귀를 기울였다. 1마일이나 떨어진 손필드 주위의 숲에 술렁이는 바람 소리만이 들려 올 뿐이었다. 저택 정면의 창에는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나는 급히 걸음을 옮겼다. 나는 문 앞에서 주저했다. 창이 닫혀 있으니 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시계가 울리고 있었다. 나는 옆문으로 해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밝은 불빛이 홀과 계단 아래를 훤히 비추고 있었다. 식당의 문은 열려 있었고 난로를 활활 타고 있었다. 불빛 사이로 사람들이 보이고, 씩씩한 목소리가 들려 오고, 아델이 뭐라고 말한 순간 문이 닫혔다. 나는 급히 페어펙스 부인의 방으로 갔으나 난로에 불은 피워 있었지만 촛불은 켜져 있지 않았고 부인도 없었다. 융단 위에 좀전에 길에서 본 것과 똑같은 개가 엎드려 불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혹시나 싶어 '파일로트' 하고 불러보았다. 개는 일어나 내게로 와서 냄새를 맡았다. 쓰다듬어 주니까 꼬리를 흔들기는 했지만 나는 아무래도 으스스했다. 나는 촛불이 필요했기 때문에 벨을 울렸다. 또 방문객에 대해서도 물어 보고 싶기도 했다. 리어가 곧장 왔다. "이 개는 웬 거예요?" "나으리가 오셨어요. 로체스타 씨가 방금 왔어요." "어머, 그래?" "모두 식당에 있어요. 존은 의사를 데리러 갔어요. 말이 굴러서 발목을 삐었어요." "말은 헤이 렌에서 굴렀어요?" "네, 언덕을 내려오다 얼음에 미끄러졌나 봐요." "그래요? 촛불을 주지 않겠어요?" 리어는 촛불을 가져다 주었고, 나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2층으로 갔다. 13 로체스타 씨는 의사의 지시대로, 그날 밤은 일찍 잔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그가 아래로 내려온 것은 사무를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몇 사람의 소작인이 그와 얘기를 하기 위해 와 있었다. 아델과 나는 서재를 비워 줘야만 했다. 2층의 한 방에 불을 피워 주었기 때문에 나는 그리로 책을 옮기고, 잠깐 동안 쓸 공부방으로써 준비를 했다. 손필드 저택은 분위기가 바뀌었다. 거기는 이제 교회처럼 조용한 곳이 아니다. 문을 노크하는 소리, 벨 소리, 복도를 걷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아래층에서는 여러 가지 음조가 들려 왔다. 주인이 있는 집이 된 것이다. 아델은 그날은 공부를 하려 하지 않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로체스타 씨를 보려고 몸둘 바를 몰랐다. 그 행동이 너무 심하게 굴었기 때문에 나는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화를 내어 말했다. 그래도 그녀는 계속 로체스타 씨에게 말을 붙여, 내게는 어떤 선물을 사 왔느냐고 다그쳤다. 어젯밤에 로체스타 씨는 밀코트에서 집에 도착하면 그 안에는 그녀가 좋아할 조그만 상자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아델은 프랑스 말로 말했다. "그건 꼭 내게 선물을 주겠다는 말씀일 거야. 그리고 선생님에게도...... 무슈는 선생님 얘기를 물었어요. 이름이 뭐냐고 묻고, 조그맣고 여위고, 안색이 창백한 사람이 아니냐고 물었어요. 나는 그렇다고 했어요. 사실인 걸 뭐 안 그래요, 선생님?' 나는 아델과 같이 페어펙스 부인의 방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는 눈이 내렸기 때문에 우리들은 공부방에만 있었다. 해가 지고, 공부가 끝나자 아델은 당장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내가 혼자 있을 때 페어펙스 부인이 들어왔다. "로체스타 씨가 저녁에 객실에서 당신과 아델에게 차를 대접하겠대요." 하고 말했다. "낮에는 바빠서 당신을 못 만난 거래요." "시간은요?" 하고 나는 물었다. "네, 여섯 시예요. 시골에 오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생활을 해요. 당신도 옷을 갈아입는 게 좋겠군요. 내가 함께 가서 고리쇠를 걸어 드리지요. 촛대가 여기 있어요." "꼭 갈아입어야만 할까요?" "그럼요. 로체스타 씨가 오셨을 때는 나도 밤에 옷을 갈아입어요." 어쩐지 지나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검은 비단의 프록으로 바꿔 입었다. "브로치가 필요해요." 하고 부인이 말했다. 나는 템플 선생에게서 이별의 선물로 받은 진주가 박힌 것을 달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남과 교제해 보지 못한 나로서는 처음으로 커튼이 쳐진, 아치의 안쪽에 있는 다분히 귀족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방으로 들어갔다. 파일로트는 누워 있었다. 그 곁에 아델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로체스타 씨는 두 발을 쿠션 위에 얹고 있었다. 그는 아델과 개를 보고 있었다. 굵게 튀어나온 눈썹, 모난 얼굴, 검은 머리, 이 사람은 확실히 내가 편지를 부치러 갈 때 만난 그 사람이었다. 결단력이 강할 것 같은, 잘 생겼다기보다는 성격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코, 성질이 급해 보이는 벌름한 콧구멍, 냉혹해 보이는 입모습, 턱 - 체격도 외투를 벗은 지금은 얼굴과 마찬가지로 건강했다. 로체스타 씨는 부인과 내가 들어가는 것을 알았지만 돌아보지도 않았다. "에어 씨를 데리고 왔어요." 하고 언제나처럼 상냥한 어조로 부인이 말했다. "에어 씨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해주세요." 하고 그는 말했다. 그 태도는 대단히 거만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완전히 마음이 안정되어 자리에 앉았다. 한치의 틈도 없이 정중한 영접을 받았더라면 나는 오히려 당황했을 지도 모른다. 내가 먼저 품위 있는 인사를 할 것 같지도 않았으므로 더욱 그랬다. 이러한 심술궂은 그의 태도에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 뒤에, 그는 얘기하지도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진종일 볼일이 많으셔서 피로하시지요. 또 그렇게 다치셨으니 몹시 아프시지요." 하고 말했다. "마담, 차를 마시고 싶어요." 그의 대답은 이 뿐이었다. 부인은 급히 벨을 눌렀다. 찻잔이 금세 나왔고, 부인은 그것을 요령 있게 스푼과 기타 도구들을 탁자 위에 준비했다. 나와 아델은 식탁에 앉았지만 주인은 의자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로체스타님의 컵은 당신이 드리지 않겠어요?" 하고 부인이 내게 말했다. "아델은 쏟아서 안 돼요." 나는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로체스타 씨가 내 손에서 컵을 받아들 때, 아델이 나를 위해 선물을 조를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했는지 소리를 높여 말했다. "아저씨, 아저씨의 작은 상자 속에 선생님에게 드릴 선물도 있지요?" "누가 그래?" 하고 그는 거칠게 말했다. "에어 씨, 당신은 선물을 기대하세요? 선물 받기를 좋아하십니까?" 지금 내가 처음으로 내가 보는, 어둡고, 칼날 같은 눈길로 나의 얼굴을 살폈다. "글쎄, 잘 모르겠어요, 로체스타 씨. 받아 본 경험이 별로 없어서요. 선물이란 것은 보통 즐거운 것이라고들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누구든지 그렇게 생각하지. 하지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그건 좀 생각을 해봐야만 대답을 드리겠어요. 한마디로 선물이라 하지만 여러 가지 뜻이 있잖아요? 이걸 모두 생각해 보지 않고는 말씀드릴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에어 씨, 과연 당신은 아델처럼 철이 없지는 않군요. 멀리 돌려서 이쪽을 탐색하는군요." "거기에 대해서는 나는 아델만큼 자신이 없어요. 아델은 어려서부터 친해 왔잖아요. 하지만 나는 지금 처음 뵙는 터고, 사례를 받을 만한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말하기가 곤란해요." "뭐, 그리 겸손하지 않아도 좋아요. 나는 아델을 보고 선생님의 힘이 보통이 아니란 걸 알았어요. 얘는 그리 머리도 좋지 않고 특별한 능력도 없어요. 그런데도 짧은 시간에 많이 나아졌어요." "로체스타 씨, 나는 이제 선물을 받았어요. 고마워요. 교사들이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선물을 주신 거예요. 학생의 진보를 칭찬해 주신다는 것은......" "흐음!" 하고 로체스타 씨는 말없이 차를 마셨다. "이 집에 산 지 석 달 째가 되나요?" "네." "그럼, 그 전에는?" "로우드 학교에 있었어요." "음, 그래. 자선 사업의...... 거기에는 어느 정도 있었어요?" "8년 있었습니다." "8년! 당신은 대단히 끈기가 있는가 보군. 그런 곳에는 8년의 반만 있어도 누구든 싫증이 날 텐데. 하여간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도 세속적이 아닌 얼굴을 하고 있지? 어젯밤에 헤이 렌에서 당신이 내게로 올 때, 나는 요정 얘기를 생각했고 당신이 말에게 마법을 걸지 않았나 물어 보려고 했지. 지금도 기분이 이상해. 그래, 양친은 어떤 분이지?' "모두 안 계십니다." "처음부터 안 계셨을지도 모르지. 그래, 그 계단에 앉아 친구를 기다렸어요?" "누구 얘기를 하시지요, 로체스타 씨?" "푸른 옷을 입은 사람들 말야. 그들이 나오기에는 안성맞춤인 달밤이었어. 그 돌바닥에 얼음을 얼게 한 것도 당신 짓이라면, 나는 당신들의 영토에 침범한 게 되겠지?" 나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푸른 옷을 입은 사람들은 백 년 전에나 살고 있었어요. 그러니 지금 헤이 렌 근처에 나타나지 않겠지요." "그러면." 하고 로체스타 씨는 얘기를 본래대로 되돌려 말했다. "부모님은 안 계셔도 친척은 계시겠지?" "아니, 형제도, 자매도. 숙부모도 안 계시고 집도 없어요." "그럼 이리로 올 때 추천은 누가 했어요?" "내가 광고를 내었더니 페어펙스 부인이 그걸 보시고 편지를 주셨어요." "네, 그래요." 하고 선량한 부인이 끼어들었다. "그래서 나는 하느님의 인도로 착한 사람을 선택하게 된 것을 매일 감사 드리고 있어요." "당신의 추천은 필요없어요. 나는 스스로 판단하겠어요. 이 사람은 첫째 내 말을 넘어뜨린 사람이야." "아이구,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다리를 삔 인사를 나는 이 사람에게 해야겠어요." 미망인은 난감한 얼굴을 했다. "에어 씨, 당신은 도시에서 산 적이 있습니까?" "아니, 없습니다." "별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나요?" "로우드의 학생들이나 선생 외엔 그 누구하고도 교제가 없었어요." "로우드의 관리자는 브로클 허스트라는 목사지요?" "네." "그럼 당신도 그 사람을 존경했겠군요." "아니, 그렇지 않아요." "그래요? 냉혹한 사람이군, 당신은! 흐음, 제자가 스승을 숭배하지 않다니." "나는 브로클 허스트 선생님이 싫어요. 나 뿐만이 아니에요. 그분은 너무 까다롭고, 잔소리가 심했어요. 그분이 식량을 관리할 때는 우리들은 굶어 죽을 것만 같았어요. 갑작스런 죽음이나 신의 심판 같은, 무서워서 잠이 오지 않을 얘기만 들려 주곤 했어요." "로우드에는 몇 살 때 갔지요?" "열 살 때였어요." "그리고 8년간을 거기 있었다. 그러면 지금은 열여덟 살이군. 산술은 필요한 거야. 산술을 이용하지 않으면 당신의 나이는 짐작을 못하겠어. 로우드에서는 무엇을 배웠어요? 피아노는 칠 줄 아세요?" "조금은." "물론이겠지. 흔히 그렇게 말하니까. 서재로 가요. 문은 열어 놓고, 어느 곡이든 쳐 보세요." 그의 지시를 따라 나는 서재로 갔다. "됐어요!" 하고 몇 분 후에 그가 소리쳤다. "과연 조금은 치는군. 보통은 돼." 나는 피아노를 닫고 객실로 돌아왔다. 로체스타 시는 질문을 계속했다. "아델이 아침에 당신이 그린 거라면서 스케치를 두세 장 갖고 왔더군. 그걸 당신 혼자의 손으로 그렸는지, 아니면 선생님한테 도움을 받았는지......?" "아니, 그렇지는 않아요!" "하하! 자존심이 상하셨나 봐. 좋아요, 확실히 자작이라고 보증할 자신이 있거든 화판을 가져와요. 다만 자신이 없으면 단언하지 말아요. 엉터리 그림을 나는 당장 알아보니까." "네. 말씀드리지 않을 테니까 스스로 판단해 주세요." 나는 서재에서 화판을 들고 왔다. 그는 한 장 한 장을 세심하게 살피고 그중 석 장을 별도로 골라 내였다. "다시 거기에 앉아 내 질문에 대답해 주세요. 나는 이 그림이 한 사람의 손으로 그려졌다고 믿어요. 그 손은 당신의 손이었습니까?" "네." "그럼 언제 이걸 다 그릴 시간이 있었지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텐데." "로우드에서 받은 마지막 휴가에 이걸 그렸어요." "그림 제목은 어디서 입수했지요?" "내가 생각했어요." "그 머릿속에는 이와 같은 재료가 더 들어 있나요?" "있을 것 같아요. 어쩌면 더 좋은 것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는 그림을 다시 훑어보았다. 그 그림은 수채화였다. 첫째 그림은 납처럼 무거운 구름이 파도치는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이었다. 한줄기 빛이 반은 가라앉은 돛대를 비추고, 그 돛대에 검고 큰 사다새가 그 입술에 보석을 수놓은 황금 팔찌를 물고 앉아 있었다. 이 팔찌야말로 내 화필이 허락하는 한 가장 빛나고 아름답게 그렸다. 아래의 푸른 바다에 한 시체가 보이고, 사지 중에서 확실히 보이는 것은 여성다워 보이는 한쪽 팔 뿐이었다. 둘째 그림은 앞 경치에 언덕의 어둑한 정상만 보이고, 황혼 같은 암청색 구름이 펼쳐진 그 하늘에 한 여성의 반신이 떠 보이는 것이었다. 희미한 이마에 별의 쪽두리를 쓰고 얼굴은 안개에 싸인 듯이 희미하게 보였고, 눈동자는 어둡고 현란했으며 머리카락은 몽롱히, 구름처럼 공중에 나부끼고 있었다. 목에는 달빛 같은 푸른 빛이 돌고, 그처럼 약한 빛은 이 환상의 샛별을 바라보는 여인을 두드러져 보이게 한 엷은 구름에도 살짝 비치고 있었다. 셋째 그림은 극지의 겨울 하늘에 솟아 있는 빙상 꼭대기였다. 창을 늘어놓은 듯한 오로라가 수평선을 따라 하늘에 빛나고 있었다. 그것을 원경으로 두고 전경에는 하나의 목, 거대한 목이 빙산에 기대어 있고, 여윈 두 손은 이마 밑에서 마주 쥐어 이마를 바치고 얼굴 아래에는 검은 베일이 씌워져 있었다. 한쪽 눈만이 희미하게 응고한 의안 같은, 절망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텅빈 표정을 하고 있었다. 검은 터번의 주름 사이로 한줄기 하얀 불꽃이 빛나고 거기에는 푸르게 빛나는 많은 보석이 수놓여 있었다. "이 그림을 그릴 때 당신은 행복했습니까?" 잠시 후 로체스타가 물었다. "정신이 없었어요. 난 참으로 행복했어요. 거기 있는 그림들을 그릴 때는 미처 기억하지 못한 강한 기쁨을 느꼈어요." "흐음, 하지만 내가 볼 때는, 당신은 이러한 기묘한 색깔을 뒤섞거나 하면서 일종의 화가다운 꿈의 나라로 젖어 든 것 같애. 날마다 오랜 시간을 여기에 소비했습니까?" "휴가였으니까, 달리 아무 것도 할 게 없었어요. 아침부터 정오까지 그리고, 또 정오부터 밤까지 그렸어요." "그렇게 열심히 한 결과, 스스로는 만족했어요?" "만족이 뭐예요. 머리로 생각한 것을 손으로 나타내는 일이란 너무 어려워서 굉장히 괴로웠어요. 어느 그림도 상상했던 것을 그대로 표현하는 능력이 내게는 전혀 없었으니까요." "전혀 그렇지는 않아요. 당신의 사상의 그림자만은 이 그림에 나타나 있어요.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에요. 그런데 이 그림들은 소녀의 것으로 보기는 좀 특이해. 당신 사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요정적인 데가 있어. 이 샛별의 눈은 틀림없이 꿈에 본 것이겠지. 어째서 이처럼 맑은데 조금도 빛나지 않는 눈을 만들 수 있었을까. 위에 있는 별이 눈빛을 억제하기 때문인가? 거기다 또 바람을 그리는 것을 당신은 누구에게 배웠지? 하늘과 언덕에는 질풍이 무섭게 불고 있어. 당신은 어디서 타르모스 산을 보았지요? 이건 타르모스 산이야. 자아, 이제 이 그림들을 가져 가세요." 내가 아직 화판의 끈을 묶기도 전에 그는 회중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아홉 시군. 에어 씨, 아델을 이렇게 늦게까지 두면 어떡해요? 재우세요." 아델은 방을 나가기 전에 그에게 키스했다. 그 애무를 참고 받기는 했지만 그는 파일로트가 그렇게 한 것만큼도 기뻐하지 않는 듯했다. "자아, 여러분 잘 쉬어요." 그는 우리에게 빨리 나가라는 신호처럼 손을 흔들어 보였다. "로체스타 씨는 보통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셨지만......" 하고 나는 아델을 재우고 난 뒤 다시 페어펙스 부인의 방에서 이렇게 말했다. "네, 처음 만난 분들은 모두 그렇게 말해요. 그건 몹시 고민스런 일이 있기 때문에 마음의 조화를 잡지 못해서 그런가 봐요." "무슨 고민인데요?" "돌아가신 형님과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봐요." "형님이라구요?" "네, 로체스타 씨는 이 저택의 주인이 된 지 9년밖에 되지 않아요. 로울드란 로체스타 씨는 에드워드 씨에게 별로 옳지 못한 짓을 하셨나 봐요. 아버지는 돈만 알아서, 대대로 물려받은 영지를 하나로 뭉쳐 유산하고자 했어요. 하지만 에드워드 씨에게는 혈통을 더럽히지 않을 만큼의 재산을 갖게 하고 싶어했어요. 그래서 성년이 되자 곧 어떤 조치를 취했는데, 그게 대단히 잘못된 일이었나 봐요. 아버지와 형이 짜고, 동생에게 재산을 만들어 주기 위해 당사자로서는 무척 괴로운 입장으로 몰아넣고 말았어요. 그 입장이 어떤 것인지 나는 잘 모르지만 에드워드 씨는 몹시 괴로워 했지요. 본래가 그린 관대한 분은 아니니까 집안과 인연도 끊어버리고 객지에만 돌아다녔어요. 형이 유언도 없이 죽고, 저분이 이곳의 영주가 된 후에도 손필드에 보름을 묵지 않아요. 사실 오래된 땅을 싫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요." "왜 여기를 싫어하지요?" "아마 음산해서 그렇겠지요." 나는 부인이 이 얘기를 그만 했으면 하는 눈치였으므로, 그만두기로 했다. 14 그 뒤 수일간을 나는 거의 로체스타를 만나지 못했다. 아델조차도 그에게 불려 가지 않았다. 오전에는 일로 바빴고, 오후에는 밀코트나 근처의 신사들이 찾아왔고, 밤에는 밤대로 그들과 만찬을 했다. 말을 타도 될 만큼 다리가 좋아지자 계속 외출이었다. 그러고 돌아오는 것은 한밤이었다. 어느 날 만찬이 있을 때, 그는 나의 화판을 가질러 보냈다. 아마, 그림을 자랑하려는가 보았다. 신사들은 일찍 돌아가고, 그는 벨을 눌러 우리들을 모두 아래로 불렀다. 나는 아델의 머리를 깨끗이 빗겨 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계단을 내려갔다. 아델은 그 '귀여운 상자' 가 도착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우리들이 식당으로 들어가자 테이블 위에는 정말 그 종이상자가 놓여 있었다. 아젤은 "내 상자! 내 상자!" 하고 소리치며 달려 갔다. "음, 너의 상자가 왔어요. 자아, 파리 아가씨, 그걸 가지고 저리 가서 혼자 놀아요." 하는 로체스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델은 이미 그 보물을 안고, 소파로 가서 끈을 풀기에 정신이 없었다. 끈을 풀자 안에 든 은빛 포장지를 집어 들고 이렇게 소리쳤다. "어머나, 어쩜 이렇게 멋질까!" 그러고는 황홀한 듯이 들여다보았다. "에어 선생은 어디 있어요?" 하고 그는 허리를 들고 내가 아직도 서 있는 문 쪽을 보았다. "여어! 이리 오시오. 이리 와서 앉으시오." 그는 자기 가까이로 의자를 당겨 놓았다. "그렇게 멀리 의자를 가져가선 안 돼요. 내가 지정한 곳에 앉아주세요. 그런데 우리 집 할멈은 어디 갔어. 그 사람을 푸대접해서는 안 되지. 피는 물보다 진하니까." 그는 벨을 눌러 페어펙스 부인을 불렀다. "안녕하세요, 부인. 당신의 자비심이 필요해요, 나는 아델에게 선물을 주었는데, 그애의 말동무가 좀 되어 줘요. 그것이 무엇보다도 자비로운 일이에요." 아델은 부인을 보자 소파로 끌고 가 사기 그릇, 상아 세공 같은 것들을 무릎 가득히 펼쳐 놓고 실로 수상쩍은 영어로 설명을 해댔다. "자아, 이젠 선량한 주인 역할을 다한 셈이에요." 하고 로체스타는 말했다. "손님을 즐겁게만 해주면, 나도 자신의 즐거움에 젖을 수가 있어요. 에어 선생, 의자를 좀 더 앞으로 아니, 그래도 멀어요. 나는 이 푹신한 의자에서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당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나는 움직이기가 싫어요." 나는 다소 그늘진 곳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로체스타의 지시는 실로 명확했으므로 곧 그대로 했다. 로체스타 씨는 전과는 인상이 달라 보였다. 입 모습은 웃고 있고 눈은 빛나고 있었다. 그것이 포도주를 마신 탓인지도 모르지만 식사 뒤의 풍요한 기분이 감도는 것 같았다.그는 잠시 동안 불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그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까, 그는 갑자기 이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관찰하는군요, 에어 선생, 나를 호남자로 생각하시오?" 하고, 그는 말했다. 만일 생각해 볼 틈이 있었다면 나는 적당한 대답을 했을지 모르지만, 대답은 금세 나의 입에서 새어 나오고 말았다. "아뇨." "야아, 그래요? 당신도 좀 이상한 사람이군. 엄숙하고 소박하고, 확실히 어딘가 달라보여요. 그리고 질문을 받으면, 무례하지는 않지만 뜻밖의 대답을 하니까요. 그런데 그건 무슨 뜻이지요?" "대답을 잘못 드렸어요. 용서해 주세요." "나의 어디에서 결점을 발견했지요? 나는 모든 게 만족스러운데......" "로체스타 씨! 제발 부탁이니까 아까 드린 내 대답을 취소케 해주세요. 모난 말은 하지 않을 셈이었는데, 그만......" "아무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당신은 그 책임을 져야 해요. 우선 나를 비판하는 것, 나의 이마가 마음에 안 드시오?" 그는 지적인 앞 이마를 내밀었다. 그러나 온화한 자비의 상은 의외로 보이지 않았다. "자아, 선생, 나는 어리석은 자일까요?" "아니에요. 제가 그 대답을 드리기 전에, 당신은 박애주의잡니까? 하고 묻는다면 아마 무례하다고 생각하시겠지요?" "어이쿠, 또 당했어! 머리를 쓰다듬는 척하면서 나이프로 쿡 찔렀어. 물론 나는 박애주의자도 아니지요. 하지만 보통 양심은 갖고 있었어요. 그리고 옛날에는 이래봬도 꽤나 소박한 마음을 갖고 있었어요. 아직도 성장시키지 못한 것, 미완성의 것, 불행한 것에 마음이 끌렸어요. 그러나 운명은 그 뒤 나를 괴롭혔고, 지금은 고무공처럼 딱딱하게 강인하게 되어 있어요. 하지만 한두 군데 물이 스며들 틈이 있고, 중심에는 지각도 남아 있어요. 여기에 희망을 걸 수는 없나요?" "어떤 희망이에요?" "탄력 고무에서 인간이 회귀(回歸)하는 전신(轉身)의 최후예요." 이 이상한 질문에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꽤 곤란한 것 같군요, 에어 선생. 내가 호남자가 아니듯이 당신도 미인은 아닌데, 그 난처해 하는 모습은 당신에게 잘 어울려요. 하여간, 나는 선생과 오늘 밤, 얘기를 많이 하고 싶군요." 그는 일어나 대리석의 맨틀피스에 기대어 섰다. 그의 가슴은 팔다리의 길이에 비해 넓었다. 그의 풍채 속에는 자랑스러움이 있었고, 보통 사람과는 다른 오만한 힘이 어딘가에 숨어 있었다. "오늘 밤은 얘기를 많이 하고 싶어요. 그래서 당신을 불렀어요. 처음에 이리로 불렀을 때는 나를 꽤 괴롭혔지요? 그 뒤 당신을 거의 잊고 있었어요. 오늘 밤은 서로 마음을 탁 터놓고 얘기를 해서, 당신을 좀더 알고 싶어요. 자아, 얘기해 주세요." 나는 얘기 대신 미소를 지었지만, 그것은 만족도, 유순한 것도 아니었다. "이 사람이 다만 얘기에 지나지 않은 얘기,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정도를 기대한다면, 그건 상대를 잘못 본 것이겠지." 하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기분이 상하셨나? 음, 나는 다짜고짜로 묻기만 했으니까. 아무튼 용서하세요. 사실 나는 당신을 손 아랫사람으로 취급할 생각은 없어요. 나와 당신의 나이는 20년의 차이가 있고, 경험은 1세기의 차이가 있어요. 내가 당신에게 느끼는 우월감은 단지 그것 뿐이에요. 잠시 나와 얘기를 나누고, 그리고 나를 위로해 달라는 것은 이 우월의 소치에 의한 권리예요." 나는 그의 겸양에 대해 전혀 무감각하지는 않았고, 또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내 힘으로 될 수 있는 것은 기꺼이 해 드리겠어요. 하지만 어떤 얘기가 좋을지 전혀 알 수가 없어요. 뭔가 물어 보세요. 성의껏 대답해 드리겠어요." "그럼 우선 지금 말한 이유로, 내가 다소 건방지고 무례한, 때로는 강제적인 태도를 취해도 당신은 인정해 주시겠습니까?" "네, 좋을 대로 생각하세요." "그건 옳은 대답이 못돼요. 확실히 대답해 줘요." "나는 당신이 나보다 나이가 많다거나, 세상을 널리 아는 것만으로 나에게 명령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자신의 경험과 연륜을 어떻게 이용하느냐 하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흐음, 한 대 딱하고 쳤군요! 하지만 당신은 나의 명령적이 어조에 화를 내거나 하지 말고, 또 때로는 나의 명령에 복종해야 돼요. 어때요?" 나는 웃었다. 로체스타 씨야말로 이상한 사람이다. 나는 명령을 받기 위해 1년에 30파운드의 돈을 그로부터 받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잊고 있지나 않을까? "나는 급료를 받고 있는 졸개가 명령을 받고 화를 낼까봐 물어 보는 주인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급료를 받고 있는 졸개? 당신이 내 졸개라구? 어이구, 그걸 잊고 있었어. 그럼 그 금전상의 입장에서 내가 다소 거만하게 구는 것을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고 당신이 잊고 있었던 입장, 고용인이 자기를 즐거이 받드는 것을 옳지 않느냐 하는 점이라면 마음껏 그렇게 하세요." "그럼 세속적인 인사나 형식을 떠나도 되겠군요." "나는 약식과 무례를 혼동하지는 않아요. 약식은 나의 취향에 맞지만 무례는 자유의 몸이 인상, 가령 급료 이상으로 볼 때도 용납할 수 없어요." "흐음, 당신의 대답에 찬성이오. 솔직해서 좋아요. 한 3천 명의 가정 교사 중에서 지금 당신처럼 대답할 사람은 아마 세 사람밖에 되지 못할 거요. 듣기 좋으라고 하는 칭찬이 아니에요. 대개 다른 사람과 다른 형태의 인간이라 해도 그리 자랑할 것은 못돼요. 자연 그대로의 것이니까. 내가 아는 한 당신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뛰어났을지도 모르고, 또 고칠 수 없는 결점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거야, 당신도 그럴지 모르지요."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내 눈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내 속마음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요. 당신 생각대로 난 결점이 많지요. 내게도 좋지 않은 행위나 타락한 생활이 있어요. 스물한 살 때 나는 인생의 진로를 그르쳤어요. 그 뒤 바른 항로로 접어든 적이 없어요. 그렇지만 않았다면 나도 당신처럼 선량하고 총명하고 때 없는 몸이 되었을지도 몰아요. 조용한 마음, 맑은 양심을 갖고 있는 당신이 부러워요. 오욕과 죄없는 기억은 하늘의 보배예요. 청정 무구한 생명의 샘이에요. 그렇지요?" "열 여덟 살 때의 당신의 추억은 어떤 것일까요?" "대단히 좋았지요. 자연은 나를 착한 인간으로 기르려 했던 것 같아요. 나는 악당이 아니에요. 나는 타고 난 성격에서보다도 오히려 환경 탓으로 하찮은 도락에 식상하고 있어요. 이런 말을 당신에게 하는 것은 이상하지만 잘 기억해 두세요. 당신은 앞으로 어느새 남의 하찮은 얘기를 잘 듣게끔 될 테니까요." "어째서 그런 걸 다 아세요?" "난 다 알 수 있어요. 당신은 내가 역경에 빠지지 않고, 의연했어야 옳다고 하시겠지요? 운명이 나를 괴롭혔을 때 나는 지혜가 부족했어요. 에어 선생, 후회는 생명의 독이에요."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나는 당신의 마음을 전혀 모르겠어요. 더 얘기를 할 수가 없군요. 나의 이해력이 부족하니까요. 한 가지 이해하는 것은, 나쁜 기억을 가지는 것은 영원한 해독이란 말씀이었어요. 만일 당신이 오늘부터 그러실 마음만 계시다면 2,3 년 안에 새로운 기억을 많이 가지실 수 있을 거예요." "정말 옳은 말이에요! 에어 선생, 나는 지금 실로 열심히 지옥으로 가는 길에 돌을 깔고 있어요." "네에?" "부싯돌처럼 불이 잘 붙는 참한 돌을 깔고 있는 중이에요. 확실히 나의 상태도 한번 면목을 일신하게 되겠지요." "보다 좋은 것으로요?" "그렇지요. 당신은 나를 의심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자신을 의심하지 않아요. 자신의 지망이 무엇인지, 그 동기가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까요. 지금 여기서 목적도 동기도 바른 법률, 일찍이 메디아인이나 페르시아인이 만든 것과 같은 변하지 않는 입법을 하는 거예요." "정당함을 인정받고자 새로운 법률이 필요하다면 결코 그것은 정당하다고 말할 수 없어요." "정당해요, 에어 선생. 전례 없는 사정을 꿰어 맞추자면 역시 전례 없는 법률이 필요해요." "인간이 이런 잘못을 범하기 쉬운 것은, 전혀 신에게 맡겨진 힘을 마음대로 쓸 수 없기 때문이에요." "그 힘이란?" "이상한, 법으로도 인정할 수 없는, 말하자면 신이 옳지 않다고 하는 힘이에요." "'옳지 않다, 그래, 당신이 말한 바로 그 말 대로야." "그럼, 그 행위가 제발 옳기를......" 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세요?" "아델을 재우러...... 이미 잘 시간이 지났어요." "걱정 없어요. 잠깐 기다려 주세요. 아까 그애는 상자 속에서 핑크색 옷을 꺼냈어요. 바로 입어 봐야지 하고 방을 뛰쳐나갔어요. 지금 그 옷을 입고 이리로 올 거예요. 내 말이 맞나 안 맞나 두고 보세요." 곧 홀을 급히 걸어오는 아델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지금 그가 말한 대로 옷을 갈아입고 방으로 들어왔다. 짧고 주름 잡힌 스커트에 장미빛 새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이마에는 장미꽃 관을 쓰고 비단 양말을 신고 조그만 흰 샌달을 신고 있었다. "이 로브, 나한테 어울려?" 깡총깡총 뛰면서 그녀는 물었다. "그리고 이 신발은? 양말은? 춤출 테니까 잠깐 기다려요." 옷자락을 펄럭이며 방을 가로질러 로체스타 씨 곁으로 왔다. 그 앞에서 발끝으로 가볍게 한 바퀴 돌고 무릎을 꿇고 말했다. "아저씨의 호의에 천만 번 감사드립니다." 그러고는 일어나며 다시 말했다. "엄마도 늘 이렇게 했어요?" "확실히 그랬어." 하고 그가 대답했다. "저런 식으로 저애의 어머니는 내 영국제 바지 주머니에서 잉글랜드 금화를 빼내어 갔어요. 나도 철이 없었지요. 옛날에 나의 뺨을 물들였던 청춘의 색깔은, 지금 당신을 싱싱하게 보여 주는 그 인생의 봄빛에 못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내 청춘은 이미 가 버렸어요. 나의 손에 저 프랑스의 작은 꽃을 남긴 채 더러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그 꽃도 버리고 싶어져요. 특히 지금처럼 기교적인 동작을 보여 주면 더욱 그래요. 나는 오히려, 하나의 선행을 쌓음으로써 그 동안의 여러 가지의 죄가 사해진다는 카톨릭의 가르침을 본받아 저애를 기르고 있는 거예요. 언젠가는 그 얘기도 다 해 드리지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15 로체스타는 나중에 이 일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 주었다. 어느 날 그는 뜰에서 나와 아델을 만났다. 그는 나에게 아델이 노는 동안 가까운 곳을 함께 산책하지 않겠냐고 권했다. 나는 그의 권유로 너도밤나무가 늘어 선 오솔길을 걸었다. 그가 일찍이 '커다란 정열'을 쏟았던 프랑스의 오페라 댄서인, 세리느 발란스의 딸이 바로 아델이라고 말했다. 이 '커다란 정열'에 대해 세리느는 그 이상의 정열로 그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추남이긴 했지만 진실로 세리느의 우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에어 씨, 프랑스의 선녀가 영국의 추남을 사랑한대서, 나는 무척 들떠 있었지요. 호화로운 호텔 생활에 하인이다, 마차다, 다이아몬드다, 의상이다 해서 해 달라는 대로 다 해주었어요. 나는 어느 날 밤, 갑자기 그녀를 찾아갔지요. 그녀는 나가고 없었습니다. 무더운 밤이었어요. 나는 피로해서 그녀의 방에서 잠시 쉬었습니다. 방에는 향수 냄새가 가득했습니다. 나는 가슴이 답답하여 창을 열고 발코니로 나갔어요. 마침 달밤이었고, 가스등이 켜지고, 바람도 없는 고요한 밤이었습니다. 나는 담배를 피워 물었지요." 그는 실지로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그 연기가 흐린 날씨의 공기 속으로 향기를 풍겼다.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에어 씨, 나는 화려한 거리를, 가까운 극장으로 가는 마차의 행렬을 보고 있었어요. 그것은 그 중에 두 마리가 끄는, 아주 화려한 마차의 행렬을 보고 있었어요. 그것은 내가 세리느에게 사 준거지요. 마차가 호텔 현관에 멎자, 나의 정부가 마차에서 내렸어요. 나는 자칫 발코니에서 몸을 내밀고 '나의 천사여!' 하고 소리칠 뻔했어요. 그런데 그녀의 뒤를 따라 한 남자가 내렸어요. 그리고 호텔 안으로 들어왔어요. 나는 발코니에 가만히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틀림없이 들어오겠지. 기다려 보자.' 그래서 창을 조금 열고 실내를 엿볼 수 있을 만큼 커튼을 젖혔어요. 두 사람은 거실로 들어왔어요. 세리느의 하인이 와서 램프에 불을 켰고, 두 사람의 모습은 내 눈에 똑똑히 보였어요. 두 사람은 망토를 벗었어요. 그것도 내가 사 준 거지요. 장교 제복을 입을 남자가 내 눈앞에 있었어요. 그는 젊은 자작(子嚼)이었고, 방탕자였습니다. 그는 여자에게는 사족을 못쓰는 실로 형편없는 놈이라, 순간 내게는 질투의 불꽃이 타올랐어요. 이런 하찮은 남자 때문에 나를 배신할 여자라면 내가 사랑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두 사람은 뭔가 지껄이기 시작했는데 우연히 내 명함이 한 장 테이블 위에 놓여 있어서 내가 그들의 입에 오르게 된 거예요. 두 사람은 나를 마구 깎아 내리더군요. 특히 세리느는 나의 용모, 풍채를 말했는데, 말하자면 불구자라는 거예요. 그럼에도 평소에는 나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으니까요. 그 점이 당신과 판이하게 다른 거예요. 두 번째 당신을 만났을 때 당신은 나를 호남자가 아니라고 첫마디에 대답을 했지요? 그때 나는 양쪽을 서로 비교해 보고 감동했어요. 그리고......" 이때, 아델이 달려와서 말했다. "아저씨, 존이 그러는데, 지배인이 뵙고 싶대요." "그래, 그럼 얘기를 줄이지. 나는 창을 열고 두 사람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어요. 그리고 나의 보호 아래 두었던 세리느를 놔주고 호텔을 나가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당좌수표가 든 지갑을 그대로 주고는 아무리 울고 불고, 몸부림을 치고 슬피 호소하고 항의해도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어요. 자작에게는 브로뉴의 숲에서 만나자고 했어요. 다음날 아침 그와 결투를 하게 되었고 가엾은 병아리의 한팔에 총알을 쏘아 주고는 그들과 영영 헤어졌지요. 하지만, 완전한 이별은 되지 못했어요. 세리느는 6개월 전부터 아델을 배고 있었어요. 세리느는 그게 내 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저애의 얼굴은 나를 닮은 데가 하나도 없지만 수년 뒤, 그녀는 저애를 버리고 음악간지, 가순지를 따라 이탈리아로 가고 말았어요. 아델 쪽에서 내게 부양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인정하지 않아요. 하지만 저애가 몹시 곤란한 처지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이리로 데려왔어요. 그리고 당신을 고용한 거지요. 이 이야기를 당신이 듣고 나면 그애에 대한 장래의 생각을 좀 달리 하겠지요. 곧 새로운 일터를 찾거나 하지는 않겠지요, 네?" "아니, 아델은 어머니의 잘못에도, 또 당신의 잘못에도 전혀 상관이 없어요. 나는 그애를 사랑해요. 엄마에게는 버림받고 당신은 자식 대우도 해주지 않잖아요. 이제까지보다 더 그애를 사랑하겠어요. 마치 나를 친구처럼 따르는 고아보다도, 가정 교사를 귀찮은 존재로 아는 부잣집 딸이 좋다고나 하겠어요?' "과연 당신다운 생각이군. 자아, 들어갑시다. 추워졌어요." 하지만 나는 아델과 잠시 더 놀아 주었다. 집안으로 들어오자 나는 그녀의 모자와 외투를 벗기고 안아 주었다. 그날 밤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서 나를 대하는 주인의 태도를 생각해 보았다. 그가 나를 다소 존중하고 거기에 응한 신뢰감을 보여 주는 것은 곧 내가 사려 깊다는 점일 것이다. 나는 그의 방해물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지금 거만한 태도로 보이지 않았고, 어디서 만나도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나는 실로 그를 기쁘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았다. 저녁 식사 후에 나누는 환담도 내게는 유용했고, 그도 또한 즐거움을 발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태도가 너무 솔직해서 나는 딱딱하고 지루하게 느끼지는 않았다. 동시에 조리 있고 친절하게 나를 대해 주었고, 그것이 나의 마음을 끌었다. 때로는 주인이 아니라 육친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녀린 초승달 같은 나의 운명이 차츰 보름달처럼 커 가는 듯했다. 생활의 공백이 메워지고 몸도 훨씬 튼튼해지고, 살도 찌고, 힘이 생겼다. 로체스타 씨의 얼굴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보고 싶은 것으로 변형하고 말았다. 그가 방에 있다는 것은 어떤 따뜻한 불보다도 좋았다. 그러나 나는 그의 결점 또한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종종 그런 결점을 내게 보여 주었는데, 그는 무엇보다도 속된 것을 아주 싫어하고 그러한 것에는 거만하고 가혹했다. 또 그는 화를 잘 냈다. 이유도 없이 격노했다. 하지만, 그것은 가혹한 운명의 장난에서 오는 것 같았다. 내가 보기에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행복한 운명의 별 아래 놓인 사람들보다 더 선량한 성격과 고매한 정신, 청결한 지향(志向)이 그에게는 있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하든 그의 슬픔을 함께 슬퍼하고, 그리하여 그의 괴로움을 덜어 주고 싶었다. 나는 촛불을 끄고 자리에 들었지만 깊이 잠들지는 못했다. 아무튼, 뭔가 음산하고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이 계속 들렸고, 잠은 완전히 깨고 말았다. 그 소리는 나의 방 바로 위에서 난 것 같았다. 촛불을 켜 두었으면 좋았을걸, 하고 생각했다. 깜깜한 어둠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몹시 겁이 났다. 일어나 앉아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을 다시 청했지만 심장이 뛰고 침착성을 잃고 말았다. 그때 뭔가가 침실 문에 부딪쳤다. 마치 방 밖의 복도에서 손으로 더듬는 것 같았다. "누구예요?" 하고 나는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나는 소름이 끼쳤다. 정적은 신경을 가라앉혔다. 집안이 본래대로 조용해지자 나는 다시 자려고 했다. 하지만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 나는 간신히 잠을 청해 막 꿈길로 접어들려고 했을 때, 뼈까지 시려오는 갑작스런 사건에 놀라 잠은 다시 달아나고 말았다. 악마의 웃음 - 낮고, 음산하고, 그러면서도 귀를 찌르는 웃음 소리가 바로 내 방 앞에서 울려오는 것 같았다. 일어나 어둠 속을 응시하자니까, 그 웃음 소리는 다시 들렸다. 나는 문고리를 걸었다. 그러고는, "누구에요! 거기 있는 사람은?" 하고, 소리쳤다. 뭔가가 으릉거리고 신음했다. 이윽고 3층 계단 쪽으로 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계단의 문이 열리고, 닫히고, 사방은 다시 고요해졌다. '그레이스 풀일까? 그 사람이 악마에 홀린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혼자 이렇게 있을 수만도 없어서 페어펙스 부인에게 가려고 부지런히 상의와 숄을 걸치고 나서 문고리를 벗기고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문 밖의 복도 바닥에 촛불이 높여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주위가 연기로 뒤덥여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이 푸른 연기가 나는지 좌우를 둘러보았다. 어디서 뭔가가 몹시 타는 냄새가 났다. 뭔가, 끼익하고 뒤틀리는 소리도 났다.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그것은 로체스타 씨의 방이었고, 거기서 연기가 펑펑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순간, 그 방으로 뛰어들었다. 불꽃은 침대가에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커튼이 타고 있었다. 불꽃과 연기 속에, 로체스타 씨는 꼼짝도 않고 잠들어 있었다. "일어나세요!" 하고 나는 소리를 질렀다. 그의 몸을 마구 흔들었지만 뭔가 중얼중얼하고는 몸을 뒤척였을 뿐이었다. 그는 연기에 취해 정신을 잃고 있었다. 순간의 여유도 없었다. 시트에 불이 붙었다. 나는 세면대의 물통으로 달려갔다. 두어 개의 그릇에 물은 가득히 담겨 있었다. 나는 그 중의 하나를 끌어안고 침대와 사람에게 좌악 부었다. 그러고 내 방으로 달려가 대야를 가져와서 다시 침대에 부었다. 실로 신의 도움으로 침대를 태우려던 불길을 잡을 수가 있었다. 픽픽하고 불이 꺼지는 소리, 대야가 깨지는 소리, 그리고 내가 퍼부은 물 때문에 마침내 로체스타 씨는 눈을 떴다. 주위는 캄캄했지만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을 알 수 있었다. "뭐야, 홍수야?" 하고 그는 소리쳤다. "아뇨." 하고 나는 대답했다. "불이 났어요. 일어나세요. 지금 막 몸에 붙은 불을 끈 참이에요. 등불을 갖고 오겠어요." "아니, 제인 에어 아냐? 나를 도대체 어떡할 셈이야! 마녀! 마법 할망구! 나를 물에라도 처넣을 작정인가?" "제발 일어나 주세요. 지금 촛불을 갖고 올께요. 누군가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어요. 빨리 조사하는 것이 중요해요." "자아, 일어났어요. 하지만 촛불을 가져오는 것은 일러요. 옷을 갈아 입을 때까지 2분쯤 기다리세요. 자아 됐어요. 빨리 불을 가져와요." 나는 뛰어가, 아직 복도에 놓여 있는 촛불을 들고 왔다. 그는 그것을 받아 침대를 조사했다. 새까맣게 탄 자국에 시트는 흠뻑 젖었고, 침대 가의 융단은 물에 뜰 정도였다. "웬일이지? 누가 그랬을까?"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내가 겪은 모든 얘기를 다 해주었다. 그는 자세히 듣고 있었지만 놀랍다는 기색보다 수심이 얼굴에 떠올랐고, 얘기가 끝나도 가만히 있었다. "페어펙스 부인을 부를까요?"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요. 가만히 계세요. 아아, 숄을 하고 있군. 그래도 춥거든 저기 있는 내 망토를 쓰고 있어요. 아니, 내가 입혀 드릴까요? 자아, 의자에 앉으세요. 잠시 동안만 당신은 여기 가만 있어요. 내가 올 때까지 생쥐처럼 가만히 있어요. 다른 사람을 부르면 안 돼요." 그는 나갔다. 그는 발소리를 죽이고, 계단을 올라갔다. 나는 어둠 속에 혼자 남았다. 귀를 기울여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았다. 나는 피로했고, 망토를 뒤집어써도 추웠다. 로체스타 씨의 명령을 어기고 내 방으로 가려던 참에 복도를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창백하고, 대단히 침울한 표정으로 그는 돌아왔다. "모든 진상을 확인했어요." 그는 세면대 위에 촛불을 놓고 말했다.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야." "어떻게 된 일이에요?" 그는 말없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4,5 분 뒤에 다소 이상한 어조로 내게 물었다. "가만 있자, 당신이 침실 문을 열었을 때, 뭔가를 보았다고 했죠?" "아니, 복도에 촛대가 놓여 있을 뿐이었어요." "하지만 이상한 웃음 소리를 들었다고 했잖소? 전에도 그런 웃음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네, 바느질을 하는 여자로 그레이스 풀이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그렇게 웃어요. 괴상한 사람이에요" "그래요. 그레이스 풀의 짓이에요. 정말 이상해요. 깊이 생각해 봐야겠어요. 아무튼 오늘 밤의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나와 당신 뿐이에요. 이 방의 형편은 내가 적당히 처리할 테니까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마세요. 자아, 이제 가서 주무세요. 나는 아침까지 서재의 소파에서 자겠어요. 벌써 네 시가 되어 가는군. 여섯 시면 하인들이 일어나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하고 나는 걸음을 옮겨 놓았다. "아니, 나를 이대로 그냥 내버려 두고 갑니까? 그렇게 쉽게......" "가도 좋다고 하시고선......" "하지만 이별의 인사는 있어야지요. 당신은 나의 생명의 은인이에요. 그런데도 마치 낯 모르는 길손처럼 가 버리다니, 그건 안 돼요. 하다못해 악수라도 하게 해주세요." 그는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았다. 처음에는 한 손으로, 다음에는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당신에게서 이 막대한 부채를 진 것이 나는 기뻐요. 이것으로 내가 할 말은 끝이에요. 다른 사람 같으면 모르지만 당신은 달라요. 당신에게 은혜를 입는다는 것은 조금도 짐이 되지 않아요, 제인 - ." 그는 말을 끊고, 나를 바라보았다. 거의 나오던 말이 입술 위에서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이런 때는 부채도, 은혜도 짐스러운 것도 아무 것도 없어요." "나도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하고 그가 말했다. "언제, 어느 때, 어떤 방법으로든지 당신은 틀림없이 나의 도움이 될 거라고,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 나는 당신의 눈에서 그걸 읽었어요. 참으로 이상해. 그럼, 나의 소중한 수호신, 편히 쉬세요!" 그 목소리에는 이상하게도 힘이 들어 있었고, 얼굴은 빛났다. "우연히 잠을 깨서, 참으로 다행이에요." 하고 나는 가려고 했다. "아니, 정말 갑니까?" "추워요." "추워? 무리도 아니지. 물 속에다 세워 두었으니까. 그럼 가 보세요, 제인." 그러나 그는 나의 손을 놓아 주지 않았고, 나도 매정하게 뿌리칠 수가 없었다. 나는 묘한 생각이 났다. "어머, 페어펙스 부인이 일어나는가 봐요." "그래요? 그럼 가 보세요." 그가 손을 놓아 주었기에 나는 그곳을 떠났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왔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창이 희뿌연히 밝아 올 때까지 출렁이는 바다 위에 있는 것 같았다. 수심의 파도는 기쁨의 바다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비판이 오히려 정열적으로 만들었다. 흥분 때문에 나는 한숨도 못자고, 날이 새자마자 일어나고 말았다. 16 다음날 아침, 나는 로체스타 씨의 얼굴이 보고 싶기도 하고, 또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오전에는 별일없이 지나갔다. 다만 아침 식사 바로 뒤에 로체스타 씨의 거실 바로 근처에 페어펙스 부인, 리어, 요리사들의 떠드는 소리가 들렸을 뿐이었다. "침대 안에서 나으리가 그래도 움직이게 된 것이 참으로 다행이야." "그러니까 한밤중에 불을 켜 두는 것은 위험하댔잖아요!" "물통을 쉽게 찾은 걸 보니 그래도 정신이 있었나 봐." "하지만 왜 사람들을 깨우지 않았을까?" "서재의 소파에서, 어쨌든 감기에 걸리지 않았으니 다행이야......" 낮에 점심을 먹으러 아래로 내려갔을 때, 열려진 창문으로 방안이 깨끗이 정돈된 것이 보였다. 다만 창의 커튼이 벗겨진 것만이 달랐다. 리어가 창틀로 올라가 연기로 그을려진 유리를 닦고 있었다. 그 일이 도대체 어떻게 설명되었을까 생각하며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리어 외에, 또 다른 한 사람이 침대에 걸터앉아 커튼을 꿰매고 있었다. 그가 그레이스 풀이었다. 살인 미수의 여자, 피해자가 쫓아와 자기 방에서 그 범행을 실토케 했던 여자의 창백하고 자포자기한 표정은, 이마에도 평범한 눈이나 코에서도 전혀 볼 수 없었다. 나는 아연하고 당황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하고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차가운 태도로 인사하고 바느질을 계속했다. "어디 시험을 해 보자. 이 사람은 느낌이 없는 것일까? 전혀 믿을 수 없어." 하고 나는 생각했다. "안녕, 그레이스." 하고 나는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까 모두 떠드는 것 같던데." "어젯밤에 나으리가 촛불을 켜 놓고 자다가 커튼을 태웠을 뿐이에요. 이불과 침대에 붙기 전에 껐대요." "묘한 일도 있구나!" 나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나는 이상한 웃음 소리를 들었어요." 하고 창문을 닦고 있는 리어에게 들리지 않도록 말했다. "나는 처음에 파일로트가 아닌가 생각했어요. 하지만 파일로트가 웃을 수는 없잖아요. 틀림없이 웃음 소리를 들었어요. 참으로 묘한 웃음 소리였어요." 그녀는 실을 한 개 새로 뽑아 주의깊게 납칠을 하고, 능숙한 솜씨로 바늘에 꿰었다. 그리고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급할 때, 나으리가 웃지는 않았을 거예요. 선생님은 꿈을 꾸셨나 봐요." "아니, 나는 꿈을 꾸지 않았어요." 나는 속이 욱하고 치밀었다. 그녀는 나를 보았다. 탐색하는 듯한 눈길이었다. "웃음 소리를 들었다고 나으리에게 얘기했어요?" 하고 그녀는 물었다. "아직 그럴 틈이 없었어요." "문을 열고 복도를 보려고는 하지 않았어요?" 내가 그녀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어떤 일을 꾸밀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오히려 문고리를 잠그고 말았어요." "그럼 매일 밤 자기 전에 문고리를 걸지 않으셨어요?" "이제까지는 잊고 있었어요, 또 그럴 필요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적어도 이 손필드에서는 말이에요. 하지만 이제는 자기 전에 모두 잠궈야겠어요." "그럼요, 그게 좋아요. 이곳은 조용한 곳이고, 도둑이 들었다는 얘기도 들어 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나는 조심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선생님, 하느님도 재앙을 막는 일은 도와주지 못하니까요. 잘 분별해서 재앙에서 몸을 지켰을 때는 은총을 주시지만......" 나는 이 기적에도 가까운 냉정함과 위선을 눈앞에 하고 아연 실색할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 쿡이 와서 페어펙스 부인이 기다린다고 말했다. 나는 그 방을 나오고 말았다. 점심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그레이스 풀에 대해 생각하느라 부인의 얘기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손필드에서의 그녀의 지위에 대해서 생각했다. 주인은 어젯밤, 그녀가 범인이라고 단언하지 않았는가? 어떤 비밀스런 이유로 주인은 그레이스를 고소하지 않는 것일까? 또 어째서 내게도 함구령을 내렸을까?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다. 만일 그레이스가 젊고 아름다운 여자였다면 로체스타 씨가 그녀를 위해 그렇게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같은 얼굴로는 도저히 무리였다. 하지만 일찍이 철모른 장난으로 그녀를 건드리고, 그녀는 이 한때의 장난이 가져다 준 권리를 유효하게 이용하여 로체스타 씨에게 했다면......? 그레이스 풀에 대한 이런 나의 생각을 급히 떨어 버리려고 했다. 저녁때가 되자, 아델은 소피와 놀기 위해 아이들 방으로 갔다. 페어펙스 부인이 차를 준비해 놓고 기다린다고 리어가 전해 주었다. 나는 즐거움을 느끼며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방을 나섰다. 그것은 다소라도 로체스타 씨와 가까이 있을 수 있다는 의미도 되었다. "아아, 차를 드시고 싶을 때일 것 같아서......" 하고 선량한 부인은 말했다. "점심을 안 드시더군요. 기분이 좋지 않나 생각했어요. 얼굴이 붉은 것을 보니 열이라도 있는 건 아닌가요?" "어머, 난 기운이 좋아요. 이렇게 몸이 좋은 게 이상할 정도예요." "그럼 많이 드셔서 건강하다는 증거를 보이세요." "요기를 다 끝낼 때까지, 차를 좀 따라 주세요." 뜨개질을 끝내자 그녀는 일어나 차양을 내렸다. "오늘 밤은 맑군요." 창 너머로 시선을 보내면서 부인은 말했다. "별은 뜨지 않았지만 로체스타 씨의 여행에는 아주 좋아요." "여행이라고요? 나는 전혀 몰랐어요." "어머, 아침 먹고 바로 떠났어요. 밀코트와는 반대쪽인, 10마일쯤 떨어진 리즈의 이유슈턴 씨 댁으로 갔어요. 그곳에서 파티가 열리는데 잉그람 경, 조지랑 씨, 덴트 대령 등이 모인대요." "오늘 밤에 돌아오세요?" '아니, 내일도 못 오실 거예요. 아마 한 1주일 동안은 거기 묵을 거예요. 그런 곳에는 누구든 잘 어울리는 사람이 한 사람쯤은 필요한데, 로체스타 씨는 사교계에서도 인기가 대단하고 또 적격이지요. 부인들도 굉장하지요. 그분이 설마 그럴까 하시겠지만, 학식 있고, 재능 있고, 부자고, 가문이 좋은 덕분에 용모의 단점은 아무 것도 안 되지요." "리즈에 부인들도 있어요?" "이슈턴 부인과 세 딸, 참으로 아름답지요. 그리고 대단히 아름다운 남작의 딸, 브란쉬 잉그람 씨와 메어리 잉그람 씨. 6,7년 전에 여기서 크리스마스 무도회를 열었었는데, 일류 엘리트들만 한 50명 모였지요. 잉그람 가의 딸이 그날 밤의 최고 미인이었지요." "그래, 그분들을 보니 어때요?" "키가 원칠하고, 매끄러운 어깨, 아름다운 가슴, 품위 있는 목, 맑은 올리브 색의 얼굴, 기품 있는 눈, 코, 그리고 호박색 스카프가 어깨에서 가슴까지 늘어지고, 그것을 한쪽에서 묶은 끝이 무릎까지 내려와 있었어요." "그 아름다운 아가씨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나요?" "네, 그런가 봐요. 재산은 오라버니가 전부 차지해서 큰 재산은 없나 봐요." "하지만 그녀에게 반한 부자나 귀족의 신사들이 많겠지요. 가령 로체스타 씨는 이미 40이고, 그분은 이제 스물다섯 살이니까." "그건 별것이 아니에요. 그보다 더한 예도 많으니까요." "글쎄요." "하지만 로체스타 씨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아요. 어머, 당신은 아무 것도 들지 않는군요. 차만 마시고......" "아니, 목이 말라서요. 차를 한 잔 더 주시겠어요." 나는 다시 혼자가 되어 새롭게 얻어 들은 소식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나의 감정을 생각하고, 덧없이 고향의 광야를 헤매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난 마음을 추스려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가려고 애썼다. 제인 에어 같은 커다란 바보는 일찍이 이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다. '네가 로체스타 씨의 마음에 들었다고? 그분을 기쁘게 할 힘이 있다고? 너의 바보 같은 생각에는 속이 메스꺼워져. 어쩌면 그런 생각을 했을까? 가엾은 도요새여! 너의 신분을 생각하고, 좀더 현명해 질 수는 없니? 부끄러움을 알아요. 결혼할 생각도 없는 손위 사람으로부터 달콤한 말을 들었다 해서, 그게 여자에게 좋은 것은 못 돼. 몰래 사랑을 불태우는 것은 얼빠진 여자나 하는 짓이야. 너는 천애 고독한, 가난하고 예쁘지도 않은 한낱 가정 교사가 아닌가? 자아, 그림을 그리자. 페어펙스 부인이 묘사해 보인 브란쉬 잉그람 아가씨의 초상을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그리는 거야. 그리고 재능있는 명문의 딸 '브란쉬 아가씨' 라는 제목을 붙이는 거야. 그 뒤에 로체스타 씨가 생각나면 그 그림을 꺼내어 보는 게 좋겠지.' 이런 작정을 하자 마음이 안정되어 잠이 들었다. 그 뒤 나는 이것을 실천에 옮겼다. 두 주일이 되지 않아서 상상하고 그렸던 브란쉬 잉그람의 초상화는 완성이 되었다. 그것은 대단히 아름다운 얼굴이었고 나의 초상화와 비교해 보면 하늘과 땅 같은 차이였다. 결국 이 일은 나를 위해 도움이 되었다. 나는 그 그림을 그리기 위해 손과 머리를 썼고, 나의 상상대로 강한 인상을 그릴 수 있었다. 17 로체스타 씨의 소식은 열흘이 지나도록 없었다. 페어펙스 부인의 말을 빌리면 가령 막바로 대륙으로 건너갔다 해도 별로 놀랄 일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전에도 이번처럼 오랫동안 집을 비운 적이 있다고 했다. 나는 오한과 실망을 느꼈다. 하지만 기운을 되찾고 설레는 마음을 달래었다. '너하고는 관계가 없는 일이 아니냐? 따뜻한 대우에 오히려 감사해야지. 그분을 너의 슬픔이나 기쁨, 기타 섬세한 감정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돼요. 너에게도 자존심이 있지 않니?' 나는 일을 조용히 처리하며 하루하루 보냈다. 그가 집을 비운 지 2주일이 넘어서, 페어펙스 부인에게 한 통의 편지가 왔다. "주인한테서 왔어요." 하고 부인이 말했다. 그녀가 봉투를 뜯고 내용을 읽는 동안, 나는 계속 커피를 마셨다. "자아, 이 집도 이제는 꽤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 오랫동안은 아니겠지만." 부인은 아직도 안경을 쓰고 편지를 든 채 말했다. 이에 대한 설명을 부인에게 요구할까 말까 하고 생각하는 사이에 나는 아델의 앞치마 끈을 묶어 주었고 컵에 우유를 따라 주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자연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로체스타 씨가 쉽게 돌아오지는 않겠지요?" "아니, 바로 와요. 사흘 안으로 - 라고 씌어 있으니까 목요일에 오겠지요. 하지만 혼자 오시는 게 아니에요. 그쪽에서 훌륭한 분들을 많이 데리고 온대요. 좋은 침실을 하나 남김 없이 준비해 두라는군요. 귀부인들은 하녀를 데리고 올 것이고, 남자들은 하인을 데리고 올 테니까 온 집안이 북적거리겠지요." 부인은 식사도 별로 하지 않고, 일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예언대로 사흘 동안은 대단히 바빴다. 임시로 고용한 세 사람의 여자가 닦고, 쓸고, 페인트칠을 하고, 그야말로 법석이었다. 이러한 소란 속을 아델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며 뛰어다녔다. 공부는 쉬고 있었다. 페어펙스 부인으로부터 억지로 일을 도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나는 저장실에서 요리사들의 심부름을 한 덕분에 치즈, 케이크나 프랑스식 파이를 만드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손님들은 목요일 오후, 여섯 시에 만찬을 할 수 있도록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 동안 나는 괴상한 상념에 시달릴 시간이 없었고, 누구 못지않게 명랑하고 활발하게 일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레이스 풀을 볼 때마다 가끔씩 불안이나 어두운 상념의 세계로 던져졌다. 그는 하루에 단 한 시간만 아래에 내려와 있고, 나머지 시간은 전부 3층에 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상한 것은, 이 집 사람들은 나 말고는 누구도 그녀에게 신경 쓰지를 않는 일이었다. 오직 한번, 리어가 임시로 고용한 청소부와 이야기하는 것을 엿들은 적이 있었다. 리어가 뭔가 내게 들리지 않는 말을 한 데 대해 청소부는 말했던 것이다. "급료가 대단히 좋군요, 그 사람." "그럼요. 나도 그렇게 받으면 좋기는 하겠지만, 뭐 그렇지 않다 해서 불평할 처지도 아니에요. 손필드는 째째한 곳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누구도 풀의 5분의 1도 못 받아요. 그래, 그 여자는 저축이 꽤 되겠지요. 월급날에는 매번 밀코트의 은행에 가요. 하지만 그 사람은 이제 여기에 정이 들었고, 몸도 건강하고 하니까 그 일을 그만 두기는 아직 이를 거예요." "아무튼 용하게도 맞는 사람이군." "그야 뭐, 자기 일은 척척 해내요." 리어가 의미 있게 대답했다. "누구도 그 사람과 같은 월급을 받는다해도 대신은 그렇게는 못해요." "그렇겠지! 그런데 나으리는 도대체......" 하고 상대방은 맞장구를 치려 했으나 나를 본 리어가 팔꿈치로 상대방을 쿡쿡 찔렀다. "저 사람은 몰라요?" 하고 여자가 낮은 소리로 말하는 것이 들렸다. 얘기는 여기서 끊어졌다. 손필드에는 하나의 비밀이 틀림없이 있다. 그 비밀은 나에게 특별하게 알려지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 뿐이었다. 목요일이 왔다. 가구는 닦여지고, 꽃병에는 꽃이 꽂혔다. 오후가 되자 페어펙스 부인은 까만 가운에다 장갑을 끼고 금시계를 차고 성장 차림이었다. 아델도 옷을 갈아입었다. 나만은 공부방이라는 나의 신성한 밀실에서 불려 나가지 않았다. 따뜻하고 맑은 봄 날씨였다. 3월말이나 4월초인데도 여름이 온 것처럼 대지는 빛나고 있었다. 나는 공부방을 활짝 열어 두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꽤 늦군요." 하고 페어펙스 부인이 들어왔다. "벌써 여섯 시가 지났는 데요. 존에게 문까지 나가보라고 시켰어요. 거기라면 밀코트 방향이 멀리까지 보이니까요." 그러면서 부인은 창가로 갔다. "어머, 존이 왔어요! 존, 오시더냐?" "네, 모두 오세요. 10분만 지나면 여기 닿을 거예요." 아델이 창으로 달려갔다. 나도 따라 갔다. 커튼 그늘에 가려 밖에서는 내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조심해서 섰다. 존이 말한 10분이라는 시간은 대단히 긴 것처럼 느껴졌지만 마침내 마차 소리가 들렸다. 네 명의 말 탄 사람이 앞서 달려오고, 그 뒤를 두 대의 포장 마차가 따르고 있었다. 말을 탄 네 사람 중 둘은 젊고 발랄한 신사였고 그 뒤를 이어 로체스타 씨와 파일로트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로체스타 씨와 나란히 한 귀부인이 같은 속도로 말을 몰고 있었다. "잉그람 아가씨!" 하고 페어펙스 부인은 소리치며 급히 계단 아래로 뛰어내려갔다. 아델이 자꾸만 내려가겠다는 것을 나는 무릎에 안고 확실히 부르기 전에는 멋대로 내려가서는 안 된다고 타일렀다. 아델은 울었다. 하지만 내가 엄격한 얼굴을 보이니까 도리 없이 눈물을 닦았다. 홀은 밝게 술렁거렸다. 신사들의 굵은 목소리와 숙녀들의 맑은 목소리가 뒤섞여 들려 왔다. 더욱 확실한 웃음 소리는 주인인 로체스타 씨의 낭랑한 음성이었다. 이윽고 가벼운 발소리가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지나 밝은 웃음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그리고 조용해졌다. "옷을 갈아입나 봐." 아델은 귀를 기울이고 하나하나의 순간을 포착해 가다가 프랑스 말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배 고프지 않니, 아델?" "고파요, 선생님. 식사한 지 벌써 대여섯 시간은 됐어요." "그래? 그럼 손님들이 방이 있는 동안에 내가 내려가서 먹을 것을 가져 올께." 나는 조심스럽게 방을 나와 주방으로 내려가는 뒷 계단으로 갔다. 주방은 일하는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나는 그 사이를 뚫고 간신히 식료실에서 닭고기와 빵과 접시 두 개와 나이프와 포크를 챙겨 들고 2층으로 왔다. 복도에서 뒷문을 닫으려고 했을 때, 숙녀들은 웃고 떠들면서 막 방에서 나오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복도 끝의, 창 없는 어두운 곳에 숨었다. 먹을 것을 들고 오다 들키면 창피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방에서는 아름다운 숙녀가 성장을 하고, 밝고 가벼운 미소를 띠며 나타났다. 청아한 명문의 부인들의 한떼가 서서 움직이는 모습을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아델이 공부방의 문을 조금 열고 살짝 내다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머, 참 고운 분들이구나! 저런 부인들의 곁에 가면 얼마나 좋을까! 식사가 끝나면 아저씨는 우리를 아래로 불러 주실까?" 하고 영어로 말했다. "천만에요. 오늘 밤은 귀부인들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좋아요. 아마 내일이 되면 모두 만나 볼 수 있겠지. 자아, 요리를 가져왔어요." 아델은 배가 많이 고팠는지 정신 없이 먹었다. 이렇게 요리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행운이었다. 자칫하면 아델도 나도 저녁을 굶을 판이었다. 아래층 사람들은 너무 바빠 우리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아델에게 평소보다 훨씬 늦게 자는 것을 허락했다. 밤이 훨씬 깊어지자, 응접실에서 음악이 흘러 나왔다. 아델과 나는 2층 위에 앉아서 들었다. 누군가가 노래도 불렀다. 여자인데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여성이었다. 독창이 끝나자 2중창이 이어지고, 어느덧 나의 귀는 로체스타 씨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애쓰는 자신을 느꼈다. 시계가 열한 시를 쳤다. 아델은 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로 금세라도 눈을 감을 듯이 졸음에 겨워했다. 나는 그녀를 안아다 침대에 눕혔다. 한 시가 되어도 신사 숙녀들은 침실로 가지 않고 있었다. 다음날도 날씨는 좋았다. 그래서 그들은 오전 중에 어딘가로 들놀이를 나갔다. 갈 때도, 돌아왔을 때도 나는 지켜보고 있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잉그람 아가씨만이 오직 말을 타고 로체스타 씨와 나란히 행동했다. 나는 창에서 보고 있는 페어펙스 부인에게 말했다. "나, 저분을 보고 싶어요.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요." "오늘 밤에는 만나 볼 수 있을 거예요." 하고 페어펙스 부인은 대답했다. "나는 아델이 너무도 조르기에 로체스타 씨에게 얘기해 버렸어요. 그랬더니, '아아, 그래요! 그럼 만찬 뒤에 응접실로 불러요. 에어 선생도 같이......' 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어머, 하지만 그건 아마 동정에서 하신 말이겠지요. 나는 안 가도 될 거예요." "그런데요, 내가 에어 선생은 사람들을 만나기 싫어한다고 했더니 '무슨 소리야, 오지 않으면 내가 가서 팔을 잡고 끌어내겠다고 그래요.' 라고 말하잖아요." "그렇게까지 하실 것은 없는데, 피할 도리가 없다면 가겠지만 사실 마음 내키지는 않아요." "손님들 앞에 나가는 것은 별로 좋지 않지요. 숙녀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동안에 응접실로 들어가서 조용한 곳에 앉아 있다가 로체스타 씨가 나와서 당신을 보면 곧 나와 버려요.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마침내 응접실로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나는 한 번도 입지 않은 제일 훌륭한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빗고, 오직 하나 뿐인 장신구, 그 진주 브로치를 달은 것으로 족했다. 아델과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운이 좋게도 손님들이 식사를 하는 객실을 지나지 않고도 응접실로 들어가는 또 하나의 문이 있었다. 대리석 난로는 조용히 타고 있었고, 촛불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아치 앞에는 심홍빛 커튼이 쳐지고, 저쪽에서는 식사를 하는 손님들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델은 엄숙한 기분이 들었는지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가리킨 발판 위에 앉았다. 나는 창가로 물러나, 테이블 위에서 한 권의 책을 집어 읽으려 했지만 아델이 발판을 들고 내게로 다가와 무릎에 기댔다. "왜 그러니, 아델?" "이 멋진 꽃을 내가 한 송이만 가지면 안 될까요, 선생님? 그러면 나의 토아렛은 아주 좋아할 텐데." "아델은 그런 것만 생각하는 구나! 하지만 꽃은 가져도 좋아요." 나는 꽃병에서 장미를 한 송이 뽑아 그녀의 띠에 꽂아 주었다. 아델은 만족스러워했다. 이윽고 아치를 가렸던 커튼이 열리고, 식당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응접실 입구에 한떼의 숙녀들이 들어왔다. 그러고는 커튼이 다시 닫혔다. 부인들은 모두 8명이었지만 훨씬 더 많은 것같이 보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한두 사람은 답례를 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나를 힐끔 보았을 뿐이었다. 숙녀들은 여기 저기로 흩어졌다. 몇 명은 소파에 앉고, 몇 명은 테이블에서 꽃도 보고 책도 봤다. 또 다른 부인들은 난롯가에 주욱 둘러서기도 했다. 우선 이슈턴 부인과 그녀의 두 딸이 있었다. 부인은 확실히 미인이었다. 딸 중에 언니인 애미가 좀 조그맣고 소박한 얼굴에다 태도도 어린애 같았는데, 동생인 루이자는 언니와는 다르게 키가 크고, 우아하고,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레디 링은 40세 전후의 덩치 큰 여자였다. 대단히 거만해 보였다. 덴트 대령 부인은 이에 비하면 소박해 보였고, 귀족 같았다. 헌칠한 키, 평온한 얼굴에 금발이었다. 하지만 이들 중에서 제일 눈에 띄는 세 사람의 여성은 잉그람 경 미망인과 그녀의 두 딸, 브란쉬와 메어리였다. 세 사람 모두 키가 컸다. 미망인은 한 50세쯤 되어 보였는데 용모와 태도에는 역겨울 정도의 거만함이 엿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눈은 험악하고 냉혹했다. 나는 그녀의 눈에서 리드 부인을 생각했다. 브란쉬와 메어리는 마치 포플러처럼 곧은 큰 키였다. 메어리는 키가 큰 대신 몸이 가늘어 보였지만 브란쉬는 마치 다이아나 (여자 사냥꾼) 같은 체격이었다. 물론 나는 페어펙스 부인의 말대로 용모가 아름다운지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보았다. 그리고 내가 상상으로 그린 그림과도 닮았는지 알고 싶기도 했다. 또 세 번째는 로체스타 씨의 마음에 들지 안 들지를 보고 싶었다. 그녀의 자태는 실로 페어펙스 부인의 설명과 나의 상상과도 일치했다. 하지만 얼굴은 젊어서 주름이 없을 뿐, 어머니를 꼭 닮았다. 좁은 이마에다 그 거만성까지 닮았다. 메어리는 브란쉬에 비교하면 순진한 얼굴이었다. 눈과 코도 훨씬 부드러운 느낌이었으나, 살결을 희어서 생기가 없어 보였다. 얼굴은 표정이 없고 눈에는 빛이 없었다. 나는 과연 잉그람 아가씨가 로체스타 씨의 마음에 들었을까 생각했다. 나는 그의 여성미에 대한 기호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가 만일 위엄 있는 여자를 좋아한다면, 그녀야말로 실로 위엄의 전형이었다. 대개의 신사들이 이 아가씨에게 반하겠지. 또 로체스타 씨가 지금 그녀에게 반해 있음을 나는 알고 있지 않은가? 아델은 귀부인이 들어오자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크게 인사를 했다. "봉 쥬르 (여러분 안녕하세요)." 그러자 잉그람 아가씨는 그녀를 바보 취급하듯이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유우, 쬐그만 인형!" 레디 링이 말했다. "로체스타 씨가 돌보고 있다는 프랑스 태생의 조그만 아가씨가 바로 얜가 봐." 덴트 부인은 상냥하게 아델의 손을 잡고 키스했다. 애미와 루이자와 이슈턴 자매는 모두 소리쳤다. "어머, 귀여운 아가씨구나!" 그리고 두 사람이 아델을 소파에 부르자 그녀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앉아 프랑스 말과 더듬거리는 영어로 지껄여 댔다. 마침내 커피가 나오고 신사들도 나왔다. 나는 커튼 그늘에 반쯤 숨었다. 헨리 링과 프레데릭 링은 대단히 씩씩한 남성이었고, 덴트 대령은 군인다운 인물이었다. 이 지방의 장관이 이슈턴 씨는 신사다운 사람으로 머리는 하얗지만 검은 눈썹과 구레나룻이 인자한 아버지 같은 인상을 주었다. 잉그람 경은 누이들과 닮아 키가 컸다. 하지만 메어리와 마찬가지로 감정이 없는 편이었다. 로체스타 씨는 맨 뒤에 들어왔다. 나는 아치쪽을 보고 있지 않았지만 그가 들어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그를 도와 불을 껐던 날 밤, 그와 나는 손을 잡고 우리도 얼마나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가! 그런데도 지금의 나와는 얼마나 먼가! 그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방 저쪽에 자리 잡고 몇 명의 귀부인들과 얘기를 시작했지만 나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의 정신이 그 부인들에게 쏠리고 있었지만 나는 그를 몰래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반가웠다.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렸다.' 는 말은 옳은 말이다. 나의 주인의 핏기 없는 올리브 색 얼굴, 굵은 눈썹, 움푹한 눈, 엄격한 얼굴, 꽉 다문 무서운 입 모습 - 활력과 결단과 의지로 가득 찬 이러한 것들은, 보통은 아름답게 보이지 않지만 내게 있어서는 아름다움을 확실히 넘어서 나를 완전히 지배했고, 나의 감정을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힘을 잃게 했으며 그에게 완전히 예속시켜 버렸다. 나는 그를 생각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내게서 싹트는 사랑의 싹을 잘라 버리려고 참으로 얼마나 노력했던 것일까. 그런데도 다시 한 번 그를 본 순간, 나의 사랑의 싹은 더욱 무성하게 자라 돌아보지도 않는 그를 나로 하여금 사랑하게 만들고 말았다. 나는 손님들과 그를 비교해 보았다. 링 형제의 세련된 태도, 잉그람 경의 기품, 덴트 대령의 군인다움, 일련의 이러한 것이 그의 얼굴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로체스타 씨 외에 다른 사람의 풍채나 표정에도 나는 공명을 느끼지 못했다. '로체스타 씨는 저들과는 다르다. 저분은 나와 같아. 확실히 그래. 그런데 어째서 5,6 일 전에 나는 저 사람의 손에서 급료를 받는 외에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 생각했던가? 고용주 이상으로 그분을 생각하는 것을 자신에게 금했던 것일까? 그야말로 자신에 대한 모독이야! 내가 가진 선량하고 진실된 발랄한 감정을 충동적으로 그분에게 집중되어 있어. 나는 나의 감정을 숨겨야 돼. 희망을 죽이고 저분이 내게 마음이 끌릴 턱이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영구히 떨어져 있어야 함을 나는 계속 나 자신에게 타일러야 한다. 그런데도 나는 호흡하고, 생각하고, 저분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커피가 나오고 신사들이 나오고, 숙녀들은 종달새처럼 재잘대며 그들은 남녀 쌍쌍이 짝을 지어 웃고 떠들었다. 브란쉬 잉그람은 누구와 짝지을 것인가? 그녀는 누군가의 요구를 기다리고 있겠지. 지금 로체스타 씨는 난로 곁에 혼자 서 있었다. 브란쉬는 맨틀피스의 반대쪽에서 로체스타 씨와 마주 보고 있다. "로체스타 씨, 나는 당신이 아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어요." "네, 별로 좋아하지는 않아요." "그럼 어째서 조그만 인형을 돌보고 계세요? 학교에 보내 버리면 될텐데." "내 힘으로는 안 되는 일이에요. 학교는 비용이 드니까요." "어머, 하지만 가정 교사를 고용하고 있잖아요. 지금, 그애하고 같이 있었어요. 아, 저기 창가에 있군요. 물론 저분에게도 급료를 주시지요? 그렇다면 비용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 아니에요. 아니, 오히려 비싸게 들지 않나요?" "그 점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그는 별로 내키지 않는 듯이 똑바로 앞을 내다보며 말했다. "로체스타 씨는 경제나 상식을 전혀 생각지 않는군요. 가정 교사에 대해서는 우리 엄마에게 물어 보시면 잘 알아요. 우리들은 아마, 열두 사람은 고용했을 거예요. 반은 화가 나고, 반은 하찮고,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져요. 그렇죠, 엄마?" "가정 교사 얘기는 그만둬요. 듣기만 해도 속이 뒤틀려요." 잉그람 미망인이 말했다. "그들의 무능과 허식 때문에 나는 순교자 같은 고통을 맛봤어요. 이젠 필요 없게 됐으니 하느님께 감사 드릴 뿐예요." "가정 교사의 결점이란 어떤 거예요?" 하고 로체스타 씨가 큰소리로 질문했다. "나중에 당신한테만 얘기할께요." 실로 뜻있게 터번을 흔들며 그녀는 대답했다. "하지만 그러면 내 호기심이 만족하지 못해요." "브란쉬에게 물어 보세요. 걔가 나보다 가까이 있었으니까." "어머, 내게 뒤집어 씌우지 말아요. 나 같으면 한 마디로 결정해 버려요. 귀찮은 존재지. 나는 그들에게 별로 애를 먹지는 않았어요. 제일 재미있었던 것은 쥬벨 부인이었어요. 그 사람을 꼼짝 못할 입장에 몰아넣었을 때의 화난 모습이란 지금도 눈에 선해요. 나는 찻잔을 뒤엎고, 버터 바른 빵을 마구 짓찧고, 책을 천장으로 집어던지고, 자로 책상을 땅땅 치고, 젓가락으로 화덕을 후려치고, 실로 큰 소동이었지요. 엄마가 그런 내 행동을 보고 좋지 않은 경향이라고 생각하여 그녀를 집에서 쫓아내었어요. 그렇지요, 엄마?" "그래그래. 거기다 바이닝 선생과 미스 윌슨과의 연애 사건도 있지. 여자 가정 교사와 남자 선생의 수상쩍은 결합은 예의 바른 가정에서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요. 또 이유가 헤일 수 없을 만큼 많지요. 우선 첫째로......" "어머, 큰일났어! 그 이유를 다 얘기하는 것은 제발 그만둬요. 뭐 뻔한 거니까요." "그럼 다른 얘기로 옮기지요. 로체스타 씨, 나의 발언에 찬성해 주시겠습니까?" "네, 찬성하구말구요." "시놀 에드아르뜨, 당신이 오늘 밤 노래를 좀 해주세요." "명령이라면 하겠습니다." 그녀는 피아노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잉그람 아가씨는 자랑스런 태도로 순백의 의상을 여왕처럼 펼치고 피아노에 앉아 화려한 전주곡을 치기 시작했다. 이날 밤 그녀는 대단히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확실히 그녀는 자기를 화려하고 대담한 여성으로 남에게 보이려고 애썼다. "나는 요새 남성에게 오직 힘과 용맹심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남자들의 모토는 사냥하라, 쏴라, 그리고 싸워라 예요. 다른 것은 모두 가치가 없어요. 내가 만일 남자라면 그렇게 생각해요." 누구 한 사람도 말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녀는 한참 있다가 다시 말했다. "만일 결혼을 한다면 나의 남편은 경쟁 상대가 아니고, 나를 치켜 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여왕의 자리 가까이에 경쟁자가 있다는 것은 싫어요. 나는 절대의 순종을 요구하겠어요. 로체스타 씨, 자아, 노래를 하세요. 내가 반주를 할 테니까." "절대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즉석에서 대답했다. "여기 해적의 노래가 있어요. 내가 해적을 좋아하는 것, 아시겠지요? 정열을 다해 불러 주세요." 그녀는 활기찬 모습으로 반주를 시작했다. '빠져 나가려면 지금이 때야'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실내의 공기를 뒤흔드는 목소리가 나를 잡고 말았다. 풍요하고 힘찬 베이스, 거기다 그는 스스로의 감정을 넣어 그의 목소리는 귀로부터 마음으로 전달하고, 이상하게도 감격에 눈뜨게 했다. 나는 그의 노래가 다 끝나고 다시 장내가 시끄러워져서야 살짝 일어나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좁은 홀을 지날 때, 나는 풀려진 샌들 끈을 묶기 위해 계단 아래의 매트에 무릎을 꿇었다. 식당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한 사람의 신사가 나왔다. 내가 당황해서 일어났을 때는 이미 그가 내 앞에 와 있었다. 로체스타 씨였다. "안녕하세요?" "네, 덕분에." "내가 집을 비운 사이 뭘 하고 있었어요?" "평소와 마찬가지로 아델의 공부를 봐 주었어요." "그런데 어째서 얼굴 빛이 전만 못해요. 나는 첫눈에 그걸 알았어요. 왜 그렇지요?" "아무 것도 아니에요. 로체스타 씨." "감기라도 걸린 게 아닐까요?" "아아뇨." "응접실에 가서 기다리세요. 너무 일찍 돌아가요." "난, 피로해서." 그는 잠시 나를 살폈다. 그러고는, "다소 침울해 보이는군요. 무슨 일이에요, 얘기해 보세요." "아녜요. 침울해 뵈요. 조금만 얘기를 더 하면 울음을 터뜨릴 정도로 침울해요. 거 봐요, 벌써 눈물이 빛나고 있어요. 눈물이 마룻바닥에 떨어졌어요. 하지만 손님들이 있는 동안, 나는 매일 밤 당신이 응접실에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주세요. 나의 희망이에요. 자아, 가셔서, 소피아에게 아델을 데려가라고 해주세요. 편히 쉬세요, 나의......" 여기까지 말하고는 갑자기 입술을 깨물고 급히 내 곁을 떠났다. 18 손필드에는 즐거운 나날이 흘러갔다. 이 지붕 밑에서 보낸 처음 석 달 동안의 고요하고 단조롭고 쓸쓸했던 것과는 큰 차이일까! 이 집안에서 느꼈던 쓸쓸한 기분은 이제 완전히 사라지고 어두운 상념도 모두 잊혀졌다. 진종일 활기찬 움직임으로 가득했다. 나는 로체스타 씨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음을 누차 얘기해 왔다. 그가 나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귀부인들에게만 정신이 팔려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량 그가 머지않아 여기 있는 귀부인과 결혼할 것임을 느꼈다고 해도, 또 그의 사랑을 그녀가 모두 깨닫고 있다고 해도, 또 그의 그러한 태도에서 시간마다 구애의 태도가 보이고, 그것이 이쪽에서 사랑을 요구하기보다도 저쪽에서 요구하게끔 하는 그런 것이었지만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이러한 갖가지 사정에 비탄은 있었지만, 그 이상의 사랑을 식게 하는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질투하지 않는다. 미스 잉그람은 내가 질투를 느끼기에는 너무도 품위가 모자라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훌륭해 보였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용모와 뛰어난 예절은 있었지만 천성은 나면서부터 가난했고 마음은 거칠었다. 그 토양에서는 아무 것도 자발적으로 꽃피지 않았고, 스스로 익은 자연적인 그 신선함을 보여 주지도 않았다. 그녀는 선량하지도 않았고, 책에서 배운 사치한 문구를 흉내낼 뿐 독창력도 없었다. 그녀가 너무 자주 폭로한 것은 아델에 대한 그녀의 모멸과 반감만이 가득했다. 아델이 자칫 자기에게 다가서기라도 하면 무례한 말로 떠다 밀기도 하고, 방에서 나가라고 명령했다. 그녀는 실로 냉혹하고 신랄했다. 내가 느낀 것처럼 로체스타 씨도 그렇게 보고 있었다. 그의 명민함, 조심스러움이 자기 애인의 결점을 뚫어 보고, 그녀에 대한 그의 심중에 정열이 없다는 사실이 나의 마음을 부단히 괴롭히는 결과가 되었다. 그가 가문을 위해서, 또 정치적 이유에서, 말하자면 단지 그녀의 사회적 지위와 연고 등이 좋아서 그녀와 결혼하려는 것을 알았다. 그가 그녀에게 사랑을 주고 있지 않다는 것, 그녀의 성질이 이 귀한 보배를 그에게서 빼앗아 오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여기에 나의 신경이 자극되고, 울고, 웃게 되고 열이 식기 전에 오히려 높여 주는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그를 매혹할 힘이 없었던 것이다. 로체스타 씨를 유혹하려는 잉그람의 의도가 실패로 끝났음을 모르는 채 자기 만족에 들떠 있었다. 이러한 상태를 현실적으로 본다는 것은 끊임없이 정열을 쏟게 되고, 또 사정없이 그것을 억제당하기도 하는 일이었다. '저 아가씨는 그분에게 가까이 할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그분의 마음을 낚을 수 없는 걸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아아, 그녀는 본심에서 그를 좋아하지 않는지도 모르겠어. 만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흘겨 보거나, 난 척해 보이거나, 애교를 떨지 않을 거야. 지금도 그녀가 그렇게 재잘거리고 있는데도 저분은 계속 얼굴을 찡그리고 있어. 하지만 나는 저와는 정반대의 표정을 본 적이 있어. 그녀가 저분과 결혼한다면 어떻게 해서 저분을 기쁘게 할까? 나는 그것이 가능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꼭 되지 않을 일도 아니고, 그때는 저분의 아내되는 사람이 이 지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임에 틀림없어.' 나는 로체스타 씨가 이해와 인연으로 결혼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신분, 교육, 기타를 생각해 보면 적어도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밴 사고방식이나 주의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로체스타 씨도 잉그람 양을 비교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처럼 내게 생각되었다. 이 사람들의 계급이란 뻔한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이유로 해서 그들은 그러한 주의를 갖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런 점이 아니더라도 나는 나의 주인에 대해 극히 관대했다. 전에는 날카로운 눈으로 감시하고 있었던 그의 결점도 지금은 모두 잊게 되었다. 일찍이 나를 반발케 한 익살, 나를 놀라게 한 냉혹성 등이 고급 요리의 양념처럼 짜릿한 맛을 줄 뿐이었다. 실로 그것이 있기 때문에 더 맛을 돋우어 주는, 그런 것이다. 특히 아주 조금만 보여 주는, 저 막연한 표정은 늘 나를 겁나게 하고 움찔하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신경이 흔들리지 않았다. 다만 나는 어떻게 해서든 그 표정의 의미를 알려고 했고, 그래서 잉그람 양은 오히려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언젠가는 천천히 그 심연을 들여다보고, 그 비밀을 탐구하고, 성격을 분석하는 기회가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로체스타 씨와 잉그람 양이 이 파티의 생명이고 혼이었다. 만일 그가 이 방에 한 시간만 없으면 금세 손님들은 눈에 뜨이게 따분해 했고, 그가 돌아오면 다시 기운이 솟아 떠들곤 했다. 어느 날, 그가 사업 관계로 밀코트로 갔기 때문에, 저녁 늦게라야 돌아온다고 예상된 날이었다. 오후에는 비가 내렸다. 그래서 요즈음 헤이 저쪽의 공유지에 와 있는 집시의 캠프를 보러 가기로 한 안도 연기되고 말았다. 차츰 해가 기울고, 시계는 이미 만찬 때를 알렸다. 한 대의 마차가 자갈길을 지나 다가왔다. 역마차는 서고, 마부가 현관의 벨을 누르고, 여행복을 입은 신사 한 명이 마차에서 내렸다. 키가 크고 사치스런 몸차림을 한 남자였다. 그는 안으로 들어오자, 제일 연장자인 잉그람 부인에게 인사를 했다. "아마, 나는 잘못 찾아온 것 같습니다. 실례하지만 부인, 친구 로체스타 군은 외출중이라면서요? 하지만 나는 대단히 먼 데서 온 사람이고, 그래서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좀 기다렸으면 하는데요?" 참으로 인사성이 밝은 남자였다. 나이는 로체스타 씨와 비슷해 보였고, 피부색은 묘한 노란색을 띠었다. 그는 호남자로 보였지만, 얼굴을 자세히 보면 사람을 불쾌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눈은 크고 모양이 좋았지만 생명이 없이 공허해 보였다. 내가 이 남자를 다시 본 것은 만찬 후였다. 그때 그는 대단히 기분이 좋은 것 같았지만, 아까보다 더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잘생긴 데다 사람을 끄는 얼굴이기는 했지만 그는 극도로 나에게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그를 로체스타 씨와 비교해 보았다. 두 사람의 대조는 윤기 나는 거위와 무서운 독수리, 온순한 양과 그것을 지키는 날카로운 개와도 같았다. 그는 로체스타 씨와 오랜 친구라고 했지만 아마 두 사람은 좀 특별한 우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양극은 일치한다'는 속담이 꼭 맞는 예였다. 두세 사람의 신사가 그의 곁에 앉아 얘기하는 소리가 조금 떨어져 있는 나의 귀에까지 들렸다. 새로 온 손님의 이름은 메이슨이라고 했다. 그는 최근에 영국에 살았고, 그 전에는 어딘가 더운 나라에 있었다는 것도 알았다. 자메이카, 킹스턴, 스패니쉬 타운 같은 지명을 입에 올림에 따라 그가 서인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처음 로체스타 씨를 알게 된 것도 그쪽에서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적잖이 놀랐다. 나는 로체스타 씨가 여행가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처럼 멀리까지 나갔을 줄은 미처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이런 생각에 잠겼다가 어떤 사건 때문에 나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석탄을 날라온 사환이 이슈턴 씨의 의자 곁에서 뭔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이슈턴 씨와 덴트 대령이 말했다. "여러분, 집시의 캠프를 보러 가려 했지만 여기 있는 샘의 얘기로는 '번치 할멈' 이란 사람이 사환들의 방에 와서 여러분의 점을 쳐 주겠답니다. 어떠세요, 한 번 만나 보시겠어요?" "어머, 대령님!" 하고 레디 잉그람이 소리쳤다. "당신은 그런 천한 여자와 우리를 만나게 할 작정이세요? 쫓아 버려요, 당장." "네, 하지만 쫓을 수가 없어요." 하고 사환이 말했다. "그 사람은 화덕가에 앉아 모두를 만나기 전에는 절대로 움직이지 않겠대요." "어떤 여자예요?" 하고 이슈턴 자매가 물었다. "소름이 끼칠 만큼 보기 흉한 늙은이에요. 마치 항아리처럼 새까매요." "그럼 진짜 마법쟁이인가 봐!" 하고 프레데릭 링이 소리쳤다. "이리로 불러요!" "찬성." 하고 그의 동생도 옆에서 거들었다. "이런 재미있는 기회를 놓친다는 것은 아까워요." "나는 내 운명을 점치는 데 흥미를 느껴요. 샘, 그 할멈을 이리로 데리고 와요!" 피아노 앞에 있던 브란쉬가 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멈은 이리로 올 것 같지도 않아요." 하고 샘이 말했다. "점을 치고 싶은 분은 한 사람씩 할머니에게로 오라고 했어요." "서재로 들어가라고 그래요. 서재에는 불이 피워져 있어요?" "네. 하지만 할멈이 영 말을 듣지 않을 것 같아서......" "빨리 시키는 대로나 해요." 샘은 사라졌다. 의혹과 기대가 뒤엉켜 모두 흥분하고 있었다.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사환이 다시 나타났다. "누가 최초로 보게 될지 알고 싶답니다." 하고 샘이 말했다. "신사분들은 만나지 않겠대요." 그는 나오지 않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부인들도 젊고 미혼인 분만 만나겠대요." "아니, 그건 놀랐는데. 너무 사람을 고르잖아!" 헨리 링이 소리쳤다. 잉그람 양은 엄숙하게 일어섰다. "내가 맨 먼저 가 보겠어요." 그녀는 부하의 앞장에 서서 적진을 공격하러 가는 결사대의 대장 같은 태도로 문 밖으로 나갔다. 이윽고 그녀가 서재로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뒤에는 아주 조용해졌다. 잉그람 부인은 무척 초조한 듯이 손을 꽉 쥐었다. 메어리 양은 자기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애미와 루이자는 숨을 죽이고 낮게 웃었지만 다소 떨리는 것 같았다. 꽤 오래 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 15분쯤 지나자 겨우 잉그람 양이 돌아왔다. 일동의 시선은 그녀의 시선과 마주쳤고, 그리고 그녀는 차가운 거절의 표정으로 모두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동요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명랑하지도 않았다. 씁쓸한 걸음걸이로 자리에 가서 말없이 앉았다. "언니, 그 할멈이 뭐라고 말했어요?" 하고 메어리가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했어요? 어떤 기분이었어요? 진짜 점쟁이 같았어요?" 이슈턴 자매가 물었다. "아이구, 너무 서두르지 말아요. 여러분은 신기해 하고, 쉽게 믿고, 흥분하는군요. 내가 만난 사람은 돌아다니는 집시였어요. 그 할멈은 낡은 수상술을 실연해 보였고, 그들이 말할 만한 말을 내게 말했어요. 나의 호기심은 만족되었어요. 이젠 별 흥미가 없어요." 미스 잉그람 양은 한 권의 책을 들고 의자에 앉아, 그 이상은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나는 그로부터 반 시간 이상이나 그녀를 지켜봤지만 단 한 페이지도 읽지 않았고, 가끔 얼굴 빛이 평소보다 검어지고, 불만스럽고 낙담한 표정을 보였다. 그녀는 확실히 아무 것도 마음에 드는 말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말로는 무관심을 표명했지만 어떤 계시가 있었든 간에 그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뒤, 메어리 잉그람, 애미와 루이자 자매는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꼭 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 샘이 중간에서 몇 번이나 왔다갔다해서 겨우 세 사람이 한꺼번에 만나 보기로 허락이 났다. 약 20분 후에는 도어를 활짝 열고 마치 놀라서 반은 미친 사람처럼 홀로 들어왔다. "그 할멈 좋지 않은 사람이야!" 세 사람은 소리쳤다. "우리에게 너무 지나친 말을 했어요. 우리들의 일은 뭐든지 알고 있어요!" 그러고는 신사들이 준비해 주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할멈은 그녀들이 어렸을 때 한 말, 각기 갖고 있는 책이나 장식품을 말했다. 그리고 각기 친척에게서 받은 기념품도 맞췄을 뿐만 아니라 할멈은 그녀들의 마음속도 꿰뚫어 보고 각자의 귀에다 대고 그녀들이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을 대어 주고, 그녀들이 무엇을 제일 희망하는가도 일러 주었다. 신사들이 끝에 있는 두 가지 문제를 공개하라고 졸랐지만 그녀들은 얼굴을 붉히고, 떨고, 웃고, 대소동을 벌이면서 듣지 않았다. 이 소란 중에 샘이 내게로 왔다. "에어 씨, 집시 할멈의 말로는 이쪽 방에 아직 자기가 만나지 못한 처녀가 있다는 거예요. 모두 만나 보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대요. 아마 당신을 두고 하는 말 같아요. 달리 아무도 없어요. 뭐라고 대답해 줄까요?" "어머! 그래요? 가 보겠어요." 하고 나는 대답했다. 이제까지 완전히 흥분했던 호기심이 만족될 기회를 얻었으므로 나는 기뻤다. 몰래 방을 빠져 나왔다. 19 서재는 조용했고, 점쟁이는 난로 곁의 의자에 기분 좋게 앉아 있었다. 빨간 외투를 입고, 넓은 차양의 집시 모자를 손수건으로 묶고 있었다. 책상 위에 촛불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난로 불빛으로 기도서 같은, 작고 검은 책을 읽고 있었다. 이윽고 할멈은 책을 덮고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모자 차양이 처져 있어서 얼굴의 일부는 그늘져 있었지만 얼굴을 들었을 때 나는 거기서 이상한 얼굴을 봤다. 얼굴 전체가 갈색과 흑색으로 보였고, 턱 밑에 걸린 천 밑에서 헝클어진 머리가 내밀어져 있었으며, 그 흰 천은 뺨에서 입까지 반은 감추고 있었다. 할멈은 대담하게 나를 응시했다. "흥, 당신도 점을 치고 싶은가?" 확실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할멈은 말했다. "나는 별로 점을 치고 싶지는 않아요, 할멈. 당신이 좋을 대로 하세요. 미리 말해 두지만 나는 별로 믿지 않으니까요." "흥, 건방진 아이군. 이 방 문지방을 넘어 설 때 발자국 소리로 그걸 알았지." "어머, 그래요? 꽤 귀가 날카롭군요." "날카롭지. 눈도 날카롭고 두뇌도 날카로워요. 당신 같은 손님을 대할 때는 더욱 그래요." 할멈은 짧고 검은 파이프를 꺼내어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잠시 피운 뒤 굽혔던 몸을 일으키고, 입술에서 파이프를 떼면서, 가만히 불을 바라보며 천천히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말했다. "당신은 추워하고 있어. 기분도 좋지 않아. 그리고 당신은 바보야." "증거를 보여 주세요." "좋아요. 가르쳐 드리지요. 당신은 추워요, 혼자니까. 당신 속에 불을 지를 사람이 없어요.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감정의 가장 좋은 것, 고귀한 것, 아름다운 것이 당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야. 당신은 바보야. 왜냐하면 괴로운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고귀하고 아름다운 감정을 갖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야. 또 당신을 기다리는 그 감정을 만나기 위해 한 발자국도 움직이려 하지 않으니까." "당신은 큰 저택에 고용되어 있는 고독한 처녀에게는 아마, 누구에게나 그런 말을 하겠지요." "아니, 당신은 모르지만 당신의 입장은 특별해요. 행복에 지극히 가까운 입장, 그래, 행복이 손에 잡힐 곳에 있어요. 재료는 모두 갖추어져 있어요. 모자라는 것은 재료를 조립할 움직임 뿐이야. 운명이 그 재료를 전부 흐트려 놓았어요. 한 번만 그것을 주워 모으면 행복한 결과가 되는 거야. 좀더 확실한 말을 듣고 싶거든 얼굴을 들어 봐요." 나는 그로부터 반야드 떨어져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할멈은 난로의 불빛을 더욱 강하게 했다. 그 불빛은 그녀의 얼굴을 더욱 어두운 그늘에 두고 나의 얼굴만을 비췄다. "당신이 오늘 밤 어떤 심정으로 내게 왔는지, 나로서는 풀 수가 없는데." 잠시 나를 보더니 그녀는 말했다. "저쪽 방에서 신분 좋은 사람들이 마치 환등의 그림자처럼 오락가락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는 동안 당신의 마음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걸 모르겠단 말이야. 저쪽 창가에 앉아서 그래, 지금 현재 당신의 눈앞에서 소파나 의자에 앉아 있는 남녀 중 적어도 호기심으로 언제나 지켜보는 사람이 하나쯤 있을 텐데?" "나는 여러 사람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해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만 관찰하지는 않았어요? 아니, 어쩌면 두 사람인가?" "네, 자주 그렇게 해요. 한 쌍의 동작이나 표정에서 하나의 이야기가 야기되고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것도 재미있어요." "어떤 이야기를 듣는 것이 재미있어요?" "어머, 그렇게 골라 가며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대개는 구애예요. 그리고 끝에 가서는 파국이 된 약속으로 되어 있지요. 결혼이라는." "그 단조로운 얘기가 재미있어요?" "솔직하게 말해서 별로 좋아하지는 않아요. 나에게는 조금도 흥미가 없으니까요." "조금도 흥미가 없어? 젊고, 건강하고, 남자를 끄는 매력이 있고, 신분과 재산을 타고 난 귀부인들이 웃으면서 당신의......" "저의...... 뭐예요?" "당신이 알고 있는...... 아마 적어도 미워하지 않는 신사의 눈앞에 보이는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가?" "나는 지금 보는 신사들을 알지 못해요. 한 번도 말을 해 보지도 않았어요." "여기서 제일 시끄럽게 오가는 중매 이야기는 로체스타 씨야. 그걸 당신은 몰라요?" "열심히 들어 주면 얘기하는 사람도 신이 나겠구나." 이 말을 나는 집시 할멈에게 한다기보다 나 자신을 향해 말했다. 이 할멈의 이상한 얘기, 목소리, 태도 등이 나를 꿈꾸듯이 만들고 말았다. "열심히 듣는다고 말했는가?" 할멈은 나의 말을 받아서, "그래, 로체스타 씨는 몇 시간이나 하찮은 말을 듣고 그 말에 감사하고 있는 듯이 보여요. 당신은 그걸 알았어요?" "감사라고요? 주인의 얼굴에 감사의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어요." "본 적이 없다고? 흠, 주인의 얼굴을 자세히도 보고 있군요. 그럼 감사가 아니고 무엇이었나?" "나는 여기에 점을 치러 왔지, 고백하러 온 건 아니에요. 로체스타 씨가 결혼한다는 것을 이미 모두 알고 있나요?" "알고 있지. 상대는 그 아름다운 잉그람 씨야." "가까운 시일 안에 하게 되나요?" "아마 누구든 그러리라고 생각하겠지. 그리고 그들은 틀림없이 행복한 한 쌍이 될 거야. 하기야 당신은 굳이 그걸 의심하고 있겠지만 말야. 그만한 용모, 품위 있고 재주 있는 귀부인을 남자가 사랑하지 않겠어? 거기다 여자도 남자를 사랑하고 있어요. 인품이나 용모에는 반하지 않더라도 남자의 지갑에야 반하겠지. 그 아가씨가 로체스타 가의 재산을 갖고 싶어하는 것도 내가 잘 알아요. 조금 전에 내가 그 처녀에게 말해 주었지만, 그때 그 처녀는 대단히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더군." "할머니, 나는 로체스타 씨의 재산 이야기를 들으러 온 게 아니에요. 점을 치러 왔어요. 그 얘기는 아무 것도 해주지 않는군요." "당신의 운명은 아직 확실하지 않은 데가 많아요. 당신의 얼굴을 보니 여기저기가 서로 맞지 않아요. 운명은 당신에게 행복을 할당하고 있어요. 나는 오늘 밤 여기 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이젠 당신이 손을 뻗어 그것을 가지면 되는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과연 그렇게 할지, 말지, 그걸 나는 모르겠어요. 자아, 다시 무릎을 꿇어 봐요." "너무 시간을 끌지는 마세요. 불에 델 것만 같아요." 나는 무릎을 꿇었다. 할멈은 내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하지 않고 의자의 등에 기댄 채 바라보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눈동자 속에 불꽃이 튀고 눈은 빛나고 있어. 상냥한 마음으로 가득찬 눈이야. 나의 혼잣말을 듣고 미소짓고 있어. 잘 감동하는 눈이야. 그 맑은 눈동자 속을 차례로 인상이 통과하고 있어. 웃지 않을 때는 눈에 슬픔이 깃들어. 눈썹 위에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울적함이 무겁게 누르고 있어. 이건 쓸쓸한 데서 오는 증거야. 긍지와 은근함이 나의 의견을 증명해 주고 있어. 대단히 좋은 눈이야. 그리고 그 다음에는 입인데, 가끔은 즐거워서 웃는 입이야. 머리로 생각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개할 의사가 있지만 마음으로 기억한 것은 되도록이면 잠자코 있겠군. 어때? 잘 움직이는, 자유로이 변화하는 입, 이 입을 영구히 고독한 침묵 속에 닫아 두려고 해도 무리일 거야. 잘 웃고, 상대에게 인간다운 애착을 갖게 하는 입이야. 이 또한 서로에게는 좋은 입이야. 자아, 그 다음에는 이만데, 지금 말한 행운의 적이 될 만한 것은 없군 그래. '나는 혼자서 살아갈 수 있다. 자존심이 나에게 그것을 요구한다면, 나는 행복을 사기 위해 영혼을 팔지는 않겠다. 내게는 타고난 내면의 보물이 있다. 이 보물은 바깥의 보물이 기쁨을 모두 잃는 한이 있더라도, 또는 내가 살 수 없는 비싼 값을 부르더라도, 나는 꿋꿋이 살아갈 수 있게 한다.'고 말야. 또 이마는 이렇게도 말하고 있군. '이성이 착실하므로 감정이 노출되거나 깊은 데로 빠지게는 하지 않는다. 격정은 이교도처럼 미쳐 날뛸지도 모르고, 욕망은 모든 헛된 소원을 꿈꿀지도 모르지만, 모든 이론에서 마지막 한 표를 던지는 것은 결단일 것이다. 폭풍, 지진, 맹화가 뒤덮여 온다 해도 나는 양심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것이다'라고 말야. 참으로 좋은 이마야. 그대의 선언은 참으로 훌륭한 거야. 나는 여러 가지 계획을 갖고 있고, 바른 계획이라는 자신도 있다 - 그 계획에는 양심의 요구도, 이성의 조언도 모두 포함되어 있어. 주어진 행복의 잔에 한 방울의 치욕, 일말의 회한이 검출된다면 청춘은 순식간에 퇴색하고, 뜨거운 피도 식을 것을 나는 알고 있어. 또 나는 희생, 비애, 붕괴를 바라지 않아. 나는 마르게 하지 않고 무성하게 하는 거야. 피눈물을, 아니, 소금기가 있는 눈물이더라도 짜내게 하지 않고 감사의 정을 사고 싶은 거야. 나의 수확은 미소 안에서, 애무 속에서, 환희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지껄였던 것 같아. 지금 이 순간을 '영원히' 끌 수만 있다면! 하지만 그것도 안 되겠지. 이제까지 나는 악착같이 자제를 해왔어. 이 이상 계속하려 해도 힘이 모자라는 것 같아. 일어서세요, 제인 에어. 돌아가세요. 연극은 끝났어."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눈을 뜨고 있었을까? 아니면 자고 있었을까?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일까? 할멈의 목소리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나는 보았다. 하지만 할멈은 더욱 얼굴을 가리며 나더러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녀의 손을 불꽃이 비추었다. 새끼 손가락에는 반지가 빛나고 있었고, 거기에는 내가 백 번이나 보아온 보석이 박혀 있었다. 나는 다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이제 그 얼굴은 나를 피하지 못했다. 보네트는 벗어 던지고, 손수건이 풀어지고 머리가 완전히 나타났다. "자아, 제인. 내가 누군지 알겠어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물었다. "어머, 어쩌면 그렇게도 묘한 일을 생각했어요?" "하지만 꽤 잘했지요? 안 그래요?" "다른 손님들한테는 잘한 것 같아요." "당신에게는 그렇지 않았어요?" "내게는 무의미한 말만 하시고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려고만 하셨어요. 좋지 않은 일이에요."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제인?" "잘 생각해 봐야 되겠어요. 내가 그리 형편없는 말을 지껄이지 않았다면 용서해 드리겠어요. 하지만 이건 좋은 일이 아니에요." "음! 하지만 당신은 실로 정확했어 - 실로 신중하고 실로 현명했어." 나는 내 행동을 돌이켜보고, 대개 그랬었다고 생각했다. 이건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면 나는 이 회견에 처음부터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집시의 점쟁이 여자가 내 일을 그리 쉽게 말할 턱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거기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또 얼굴을 감추려 하는데도 주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 속에서는 그레이스 풀 - 저 살아있는 수수께끼라고밖에 나에게는 생각되지 않는 그 여자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로체스타 씨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뭘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고 로체스타 씨가 말했다. "그 우울한 미소는 무슨 뜻입니까?" "깜짝 놀란 것과 내가 실패하지 않은 것을 기뻐하는 두 가지예요. 이제 여기서 나가도 될까요?" "아니, 조금만 더 있으세요. 그리고 응접실의 친구들이 뭘 하고 있는지 얘기해 주세요." "집시 얘기로 야단이에요. 아아, 로체스타 씨, 그보다도 아침에 집을 나간 뒤에 외국 손님이 찾아온 것을 아세요?" "외국? 아니 몰라요, 누굴까? 그 사람은 갔나요?" "아니, 옛날부터 당신을 안다면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어요." "괴상한 놈이군. 이름을 말했나요?" "메이슨이라고 했어요. 서인도에서 왔대요. 자메이카의 스패니쉬 타운에서." 로체스타 씨는 바로 내 곁에 서 있었다. 나의 손을 잡은 채로였다. 내가 얘기하는 동안에 그의 손은 경련했고, 미소는 얼어붙고, 숨이 막혀 버린 것 같았다. "메이슨! 서인도!" 마치 움직이는 인형이 말하는 듯한 어조였다. "메이슨! 서인도!" 하고 한 번 더 되풀이했다. 세 번째도 같은 말을 되풀이했지만, 그 사이에 안색이 보기 딱할 정도로 창백했다. 마치 자기를 잊어 버린 사람 같았다. "기분이 좋지 않으세요, 로체스타 씨?" "제인, 나는 당했어...... 나는 호되게 얻어맞은 거야, 제인!" 그는 비틀거렸다. "어머! 내 어깨에 기대세요." "제인, 나의 조그만 친구!" 그는 말했다. "나는 당신과 둘이서 아무도 오지 않을 섬에 가서 살았으면 싶어요. 그러면 고민도, 위험도, 무서운 생각도 내게서 제외되겠지." "뭔가 도와 드릴 것은 없을까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치겠어요." "제인, 도움이 필요할 때는 당신에게 부탁하겠어요. 그것만은 약속하겠어요." "고마워요. 어떡하면 좋을지 말해 주세요. 하는 데까지는 해보겠어요." "그럼 지금 식당에서 포도주를 한 잔 가져다 주세요. 아마 지금은 모두가 야식을 먹고 있을 거야. 메이슨이 뭘하고 있는지 좀 보고 오세요." 나는 거실로 갔다. 그의 말 대로 그들은 모두 야식을 먹기 위해 식당에 모여 있었다. 메이슨 씨는 난롯가에서 덴트 대령 부부와 얘기하고 있었고, 누구 못지 않게 명랑해 보였다. 나는 와인 글라스에 술을 따라 서재로 돌아왔다. 로체스타 씨는 다시 자신을 되찾은 듯했다. 그는 나의 손에서 글라스를 받았다. "고맙습니다. 당신의 건강을 축하하면서!" 그는 마시고 다시 글라스를 내게로 돌려주었다. "모두 뭘 하고 있던가요, 제인?" "웃고 떠들고 해요." "메이슨은?" "그분도 웃고 있어요." "내가 만일 그들에게로 간다고 가정하고, 그들이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보고, 냉소적으로 귓속말을 하며 하나 둘 우리 집을 떠나간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어요. 당신도 함께 나갑니까?" "그렇지는 않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로체스타 씨의 집에 있는 것이 오히려 재미있을 것 같아요." "나를 위로하겠어요?" "가능하면 당신을 위로해 드리겠어요." "하지만 나 때문에 세상의 비난을 받아도 괜찮다는 것입니까?" "나는 내 곁에 있는 가치 있는 벗 - 예를 들어 당신 같은 분을 위해서라면 문제 없어요." "자아, 그럼 다시 한번 식당으로 가 주세요. 그리고 메이슨 곁에 다가가 귓속말로 로체스타 씨가 만나고 싶어한다고 하세요. 그를 안내하고 나서 제인은 가서 쉬세요." "네, 알았습니다." 나는 명령대로 했다. 손님들은 내가 그들 사이를 똑바로 걸어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나는 메이슨 씨에게 가서 말을 전하고 그를 서재로 안내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오랜 뒤에, 내가 침대로 들어가 잠시 있자니까 손님들이 각기 침실로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로체스타 씨의 목소리도 들렸다. "여기야, 메이슨. 여기가 자네 방이야." 그의 목소리는 밝았다. 그 명랑한 어조가 나의 마음을 평안하게 했다. 나는 곧 잠이 들었다. 20 언제나 치던 커튼을 나는 잊고 있었고 블라인드를 내리는 것도 잊고 있었다. 밝은 보름달이 창으로 비쳐들어 나는 잠을 깼다. 나는 반쯤 일어나 커튼을 닫으려 했다. 아아, 저건 무슨 소린가! 대단히 무서운 비명 소리가 들린 것이다. 나의 맥박은 멎고, 심장은 뛰지 않았다. 커튼을 닫으려고 뻗었던 손도 공중에 그대로 있었다. 비명은 3층에서 들려 왔다. 내 침실의 바로 위였고 나는 지금 격투 소리를 들었다. 사생 결단을 하는 그런 격투였다. 이어서 반은 목이 막힌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살려 줘! 살려 줘!" 그러고는 비틀거리고 퉁탕거리는 소리가 확실하게 들렸다. "로체스타! 로체스타! 제발 좀 와 주게!" 어느 방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복도를 달려갔다. 아니, 돌진해 갔다. 위층에서는 여전히 발소리가 퉁탕거리더니, 뭔가가 쓰러졌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나는 다리가 떨렸지만 우선 몸차림을 하고, 침실에서 나왔다. 자던 사람들은 모두 깨어 있었다. 방마다 절규와 비명이 들렸다. 차례로 문이 열리고 모두 밖을 내다봤다. 복도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누군가가 울음을 터뜨렸고 누간가가 넘어졌다. 혼란은 수습할 여지도 없었다. "도대체 로체스타는 어디 있어?" 하고 소리친 것은 덴트 대령이었다. "여기예요! 여기예요!" 큰 소리로 대답이 들렸다. "여러분 침착하세요. 내가 지금 그리고 가겠어요." 복도 끝의 문이 열리고, 로체스타 씨가 촛불을 들고 내려왔다. 숙녀 가운데 한 사람이 그의 곁으로 달려왔다. 그녀는 그의 팔을 잡았다. 잉그람 양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무서운 일이 생긴 거예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말해 주세요! 아무리 불길한 일이라도, 지금 당장 우리들에게 알려 주세요!" "아무 것도 아냐! 아무 것도 아냐!" 그는 소리쳤다. "괜한 소란이었어요. 하녀 하나가 꿈을 꾸었어요. 그 뿐이에요. 아마 그 꿈을 유령으로 착각을 한 모양이에요. 그래서 발작을 일으켰지요. 자아, 여러분은 침실로 돌아가 주세요. 왜냐하면 나는 그 여자를 간호해 주어야 하니까요. 잉그람 양, 당신이 하찮은 일에 겁을 먹는 사람들보다 용기 있는 사람임을 보여 주세요." 이리하여 그는 일동을 침실로 돌려보냈다. 나는 돌아가라는 명령을 기다릴 것도 없이, 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도 모르게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나는 침대에 눕지는 않았다. 반대로 나는 신중히 옷을 입고 몸차림을 했다. 비명 뒤에 내가 들은 소음, 그리고 누군가가 지른 목소리는 아마 나 말고 다른 사람은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바로 내 방 위에서 난 것이기 때문이었다. 로체스타 씨의 설명은 단순히 손님들을 진정시키려는 것에 불과했다. 그 괴상한 비명, 격투, 그리고 구원을 청하는 소리에는 다시 다른 일이 계속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 시간쯤 뒤에 손필드 저택은 다시 사막처럼 조용해졌다. 신발을 벗으려고 몸을 숙이려 했을 때, 조심스럽고, 낮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이에요?" 하고 내가 물었다. "살짝 나와 주세요." 로체스타 씨의 목소리였다. 그는 촛불을 들고 복도에 서 있었다. "부탁이 있어요." 그는 말했다. "당신 방에 해면과 휘발성 소금이 있습니까?" 속삭이는 소리로 그는 물었다. "네, 있어요." "그걸 가지고 같이 좀 가요. 서둘지 말고, 소리나지 않도록." 방으로 돌아와 세면대 위의 해면과 서랍 속의 약용 소금을 찾아 그를 따라 3층 복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손에 열쇠를 갖고 있었다. 조그맣고 검은 문 앞으로 가서 열쇠를 구멍에 넣고 돌리려다가 잠깐 주저하고 내게 말했다. "당신은 피를 보아도 가슴이 울렁거리지 않으세요?" "그런 경험은 한번도 없지만 아마 괜찮을 거예요." "손을 잡게 해주세요. 기절을 하면 큰일이니까." 나는 그의 손에 손가락을 잡게 해주었다. "따뜻한 손이야." 그는 말했다. 그리고 열쇠를 돌리고 문을 열었다. 나는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방을 보았다. 페어펙스 부인이 집안을 안내해 주던 날이다. 전에는 감추어졌던 하나의 문이 열려 있고, 그 안쪽 방에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신음 소리와 무엇을 긁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로체스타 씨는 나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말한 후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그를 맞이한 것은 무서운 웃음 소리였다. 그레이스 풀의 악귀 같은 웃음이었다. 낮은 소리로 누군가가 로체스타 씨에게 얘기하는 게 들렸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뭔가 조치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쪽으로 나오자 문을 닫았다. "여기야, 제인!" 하고 그가 말했다. 나는, 커튼으로 이 방의 꽤 큰 부분을 감추고 있는 큰 침대 저쪽으로 돌아갔다. 침대 가까이에 안락 의자가 하나 있었고, 거기에 한 남자가 웃옷만 벗은 채 앉아 있었다. 머리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고 있었다. 창백한, 살아 있는 것 같지도 않은, 저 이국의 손님 메이슨이었다. 그의 한쪽 팔과 옆구리는 피로 엉겨 있었다. "촛불을 들어 주세요." 나는 그에게서 촛불을 받아 들었다. 그는 세면대에서 대야를 하나 들고 와서 내게 주었다. 나는 그걸 들고 있었다. 그는 솜을 물에 적셔서 시체 같은 얼굴을 적셨다. 다음에는 정신이 돌아오는 약병을 달래서 그것을 메이슨의 코에 댔다. 메이슨 씨는 금세 눈을 떴다. 그는 신음했다. 로체스타 씨가 이 상처 입은 남자의 셔츠를 찢었다. 팔과 어깨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주인은 계속 흘러내리는 피를 스폰지로 닦았다. "위험하잖아?" 메이슨 씨가 중얼거렸다. "쳇, 괜찮아. 다만 긁힌 상처야. 정신을 똑바로 차려. 이제 내가 가서 의사를 불러오겠어. 아침까지는 움직이게 되겠지. 제인!" 하고 이번에는 나를 불렀다. "네." "한 시간이나, 어쩌면 두 시간이 될지 모르지만 나는 당신을 이 방에 이 신사와 함께 남겨 두고 가야겠어요. 피가 다시 흐르거든 지금 내가 한 대로, 스폰지로 닦아 주세요. 이 남자가 기절을 하려고 하면 저 스탠드에 있는 컵의 물을 먹이고, 소금 냄새를 맡게 해주세요. 무슨 이유에서는, 당신은 이 남자와 말을 해서는 안 돼요. 그리고 어이, 리처드, 이 여자에게 말하면 자네 목숨이 위험하다는 점을 알게. 나는 그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 못져요." 그 가엾은 남자는 다시 신음했다. 로체스타 씨는 피투성이가 된 해면을 나의 손에 건네주었기 때문에 나는 그가 하던 대로 했다. 그는 잠시 동안 나를 지켜보다가, "잊으면 안 돼요. 전혀 말이 없어야 돼요." 하고 나가 버렸다. 열쇠가 울리는 소리와 멀리 사라지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침내 나는 이 3층의 이상한 방에 갇히게 되었다. 어둠은 나를 싸고 있다. 나의 눈과 손 아래에는 기분 나쁜 안색의 피투성이가 된 모습이 있었다. 살인 여자는 불과 하나의 문을 사이에 두고 나와 마주하고 있다. 그래 - 그걸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다른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그레이스 풀이 저 문을 박차고 나에게 달려들 것을 생각하니 무서워졌다. 하지만 나는 이 자리를 떠날 수는 없었다. 이 보기 싫은 얼굴 - 열리기를 금지당하고 있는 창백한 입술 - 날카로운 공포의 빛으로 빛나는 이 눈 - 이런 것들을 나는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다. 피와 물이 섞인 세면기에 몇 번이고 손을 적셔 흐르는 피를 닦아야만 했다. 심지를 자르지 않은 촛불이 내가 일하는 동안 자꾸 약해져서 내 주위가 차츰 어두워지고, 정면의 거대한 장롱 위에서 으스스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그대로 보고 있어야만 했다. 이러는 사이에도 나는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 저쪽에 숨어 있는 악마의 움직임에게까지 귀를 기울여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그날 내내 삐걱삐걱하고 마루를 밟는 발소리, 짧은 시간에 개처럼 으르렁거리는 소리, 거기다가 굵은 인간의 신음 소리를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 나름의 문제로 고민했다. 이 세상과는 떨어진 저택에 인간의 형태로 들어와 살고, 초목도 잠자는 깊은 밤에 더러는 불을 지르고, 어떤 때는 피를 보는,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이 수수께끼는 도대체 무엇일까? 보통 여자 같은 얼굴을 하고도 때로는 조소하는 요귀 같은, 때로는 살코기를 물어 뜯는 맹수 같은 소리를 내는 이 생물은 무엇일까? 그리고 지금 내 얼굴 아래에 있는 남자의 평범하고 얌전한 이국의 손님은 어쩌다 이 공포의 그물에 걸리게 된 것일까? 또 어째서 그 요귀는 그에게 덤벼들었을까? 또 침실에서 자고 있어야 할 이 시간에 어째서 그는 이 집, 이 방에 들어온 것이었을까? 나는 로체스타 씨가 그에게 2층 침실을 주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여기로 온 것일까? 어째서 그는 로체스타 씨가 강요하는 비밀에 대해 이처럼 조용히 순응하고 있는가? 어째서 또 로체스타 씨는 그것을 강요한 것일까? 또 메이슨 씨의 내방을 들었을 때 로체스타 씨의 낭패는 어디서 온 것일까? 이 무저항의 남자가 - 지금은 로체스타 씨의 말 한 마디로 아이를 다루듯 이 남자를 자유롭게 다루고 있는데 - 몇 시간 전에는 마치 떡갈나무에 떨어진 벼락처럼 그를 쭉 뻗게 했는데, 그것은 왜일까? 그리고 로체스타의 결연한 정신을 그토록 굴복시키고 강건한 육체를 그만큼 전율케 했다면, 그건 가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언제나 돌아오실까? 언제쯤......' 샐 것 같지도 않은 밤의 느릿한 행보를 따라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나는 몇 번째 메이슨 씨의 핏기없는 입술을 물로 적시고 정신이 돌아오는 소금을 제공했지만 별 효과가 없는 것 같았다. 몸의 고통인지, 빈혈인지, 아니면 모든 것들이 결합되어 있는지, 그는 쉽게 탈진 상태가 되었다. 나는 죽을까봐 겁이 났지만 그래도 그와 얘기해서는 안 되었다. 마침내 촛불이 꺼지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커튼 자락 끝에 희미한 잿빛을 발견했다. 새벽이 다가온 것이다. 파일로트가 짖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 왔다. 희망이 되살아 났다. 그리고 5분 후에는 문이 덜컥거렸다. 고작해야 두 시간 정도였겠지만 나는 몇 주간의 시간도 이보다 짧을 것 같았다. 로체스타 씨가 외과 의사와 함께 들어왔다. "자아, 커터, 잘 부탁하네." 하고 그는 외과의에게 말했다. "상처의 손질과 환자를 아래로 데리고 가는 것을 모두 30분 안으로 끝내야 해." "그런데 몸을 움직여도 괜찮을까요?" "그건 염려 말아. 상처가 크지 않아요. 자아, 시작해요." 로체스타 씨가 두꺼운 커튼을 들어 올리고, 삼베로 된 블라인드를 올리고 아침 햇빛을 최대한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는 메이슨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이 리처드, 기분은 어때." "결국 그녀에게 당했나 봐." 그는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농담 말고 용기를 내요! 커터, 아무 걱정도 없다는 것을 보증해 주게." "양심을 걸고 보증하겠어요." 붕대를 풀고 상처를 본 커터가 말했다. "아니 이건 어떻게 된 거야. 어깨의 살점이 떨어져 나갔어요. 이 상처는 칼에 의한 게 아니야. 여기에 이빨 자국이 있어!" "물어 뜯었어." 하고 메이슨이 중얼거렸다. "로체스타가 그녀에게서 단검을 빼앗자 호랑이처럼 나를 물고 늘어졌어." "나는 경고했었어." 로체스타가 말했다. "그녀 가까이 갈 때는 몸을 지킬 준비를 하라고 말했잖아. 자네는 혼이 났고, 내 말을 안 들은 탓으로 괴로움을 받게 됐으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자격이 없네. 커터, 서둘러야 해, 동이 트고 있어. 나는 이 사람을 보내야만 해요." "곧 끝나요. 이제 가슴만 보면 되요. 여기도 아마 물었겠죠." "그녀는 피를 빨았어. 심장이 바짝 마르도록 빨아 주겠다면서 말야." 하고 메이슨이 말했다. 나는 로체스타 씨가 떠는 것을 보았다. 혐오와 공포와 미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그의 얼굴은 마치 뒤틀리듯이 일그러졌다. "이 나라를 떠나면 잊게 되겠지. 스패니쉬 타운으로 돌아가거든, 그 여자는 죽었다고 생각해요. 아무튼 그 여자를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오늘 밤 일을 잊는 것은 불가능해." "그렇지 않아. 기운을 내. 이제 곧 자네를 깨끗이 낫게 해줄 테니까." 그러고 나서, 그는 돌아와서 처음으로 내게 말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내 방에 가서 경대 서랍을 열면 조그만 약병과 잔이 거기 있을 테니 그걸 빨리 가져다 줘요." 나는 뛰쳐나가 그것을 급히 가져왔다. "됐어. 자아, 의사 선생, 나는 내 책임 아래 투약하겠어요. 이 강심제는 로마에서, 어느 이탈리아 돌팔이 의사로부터 얻은 거예요. 에어, 물을 조금." 그가 잔을 내밀기에 세면대의 물병에서 반쯤 물을 따랐다. "됐어요. 이번엔 그 약병 주둥이를 조금 적셔 줘요." 나는 그렇게 해주었다. 그는 붉은색 액체를 열두 방울 잔에 부어 메이슨에게 주었다. "마셔요, 리처드. 심장이 강해져요, 한 시간쯤은 말야." 메이슨은 마셨다. 그의 치료도 끝났다. 로체스타 씨는 예의 물약을 마시게 하고 나서 3분 동안 그를 앉혀 두었다. 그 다음 그는 메이슨의 팔을 잡았다. "자아, 일어서 봐." 환자는 일어났다. "커터, 그쪽 겨드랑 밑을 안아 줘. 리처드, 걸어. 자아. 제인, 먼저 뒷계단으로 가 주세요. 옆 통로의 문을 열어 놓고 뒤뜰에서 기다리는 역마차의 마부에게 준비하라고 해주세요. 그리고 제인, 거기 누가 있거든 계단 아래까지 와서 기침을 해주세요." 그때는 이미 다섯 시 반이었지만, 부근은 아직 어두웠고 조용했다. 나는 옆 통로의 문을 소리가 나지 않도록 열었다. 뒤뜰은 조용했지만 문은 크게 열려 있었고 마부는 바로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마부에게로 달려가 신사들이 온다고 말했다. 그리고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조용했다. 신사들이 나타났다. 메이슨은 꽤 편히 걷고 있는 듯했다. 이륜마차 안으로 그는 올라갔고 이어서 커터가 탔다. "잘 부탁하네." 로체스타 씨가 의사에게 말했다. "기운이 날 때까지 자네가 좀 맡아 주게. 나도 한 이틀 뒤에는 보러 갈 테니까. 자아, 잘 가." "페어펙스, 그애를 잘 좀 돌봐 줘. 되도록 상냥하란 말이야." 그리고 메이슨은 말을 맺지 못하고 눈물에 젖었다.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하지. 이제가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네." 이 말을 하고 로체스타 씨는 마차의 문을 닫았고 마차는 달려갔다. 로체스타 씨는 뒤뜰의 무거운 문을 닫고 고리를 걸었다. 그러고는 과수원과 경계되어 있는 담의 출구 쪽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볼일이 끝났다 싶어 집을 향해 걸었다. 그때 나는 다시, "제인!" 하고 그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출구의 문을 열고 거기에 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시원한 곳으로 가지 않겠어요." 하고 말했다. "저 집은 감옥에 불과해요.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제게는 훌륭한 저택으로 보입니다만." "세상 모르는 마법에 걸려 당신의 눈은 흐려 있어요. 베일을 통해 보고 있는 거예요. 금박은 흙이고 비단 차양은 거미집이란 것을 당신을 몰라요. 그런데 여기는 (들어선 숲속을 가리키며) 모두가 진실이에요. 감미롭고 청정해요." 그는 가장자리에 회양목이 나란히 심어진 보도를 천천히 걸었다. 보도의 한쪽에는 사과, 배, 버찌 등의 과수가 있고, 다른 한쪽의 화단에는 앵초, 삼색제비꽃, 그 밖의 여러 가지 화초가 4월의 이슬비와 맑은 날씨가 교대로 계속된 후인 아름다운 봄 아침에 신선한 호흡을 하고 있었다. 태양은 지금 동쪽 하늘에 떠올라, 그 빛이 이슬 머금은 꽃송이와 과일나무 위로 비추었고, 그 아래의 조용한 산책 길을 비추었다. "제, 꽃을 드릴까요?" 그는 장미 덤불 속에서 최초로 핀 꽃을 잘라 내게 주었다. "고맙습니다." "이곳의 해뜨는 광경은 마음에 드세요, 제인? 저 하늘의 맑고 향기로운 대기는 어떻습니까?" "참으로 좋아요." "당신의 얼굴은 창백해요. 당신을 메이슨과 둘만 남겨 두고 내가 갔다 왔으니, 무서웠지요?" "누군가가 안쪽에서 뛰쳐나올까봐 무서웠어요." "하지만 그 방에는 자물쇠를 걸어 두었어요. 열쇠는 내 주머니에 있지요. 귀여운 아기 양을 늑대 소굴에 그냥 내버려두었다면 나도 엉뚱한 양지기지요. 당신은 안전했어요." "로체스타 씨, 그레이스 풀은 앞으로도 이 집에서 살게 되나요?" "아, 그럼요. 그 여자 일로 걱정하면 안 돼요." "어젯밤에 걱정하던 위험은 이미 사라졌나요?" "메이슨이 영국에서 떠나기까지는, 아니 그 뒤에도 안 되겠어. 제인, 산다는 것은 언제 불을 뿜을지 모르는 분화구 위에 서 있는 거 같아요." "하지만 메이슨 씨는 어떻게든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분은 당신에게 고의로 상처를 주거나 하지는 않잖아요." "그럼요. 메이슨은 나에게 덤벼들지는 않아요. 하지만 자칫 부주의한 말 한마디로 내게서 영원히 행복을 앗아 갈지도 몰라요. 당신은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군요. 당신은 나의 귀여운 친구지요.?" "나는 당신의 도움이 되고 싶어요. 잘못된 일이 아니면 뭐든지 시키세요." "음, 정말 그래. 그 마음을 나는 알겠어요. 내가 잘못된 일을 부탁하면 당신은 창백한 얼굴을 내게로 돌리고 '로체스타 씨, 그건 불가능해요. 나는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그건 잘못된 일이니까요.'하겠지.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도 나의 약점을 당신에게 보일 수는 없어요." "만일 내 걱정을 안 해도 좋듯이 메이슨 씨에 대해서도 걱정을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안심이 되겠지요." "아,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 제인, 여기 정자가 있어요. 앉으세요." 정자에는 등나무가 감긴 나무 의자가 있었다. 로체스타 씨는 거기에 앉아, 내가 앉을 자리를 비켜 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앉아요. 내 옆에 앉기를 주저하는 당신은 아니겠지요. 잘못된 일입니까, 제인?" 나는 대답 대신 앉았다. 거절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아, 귀여운 친구, 나는 당신에게 한 가지 얘기를 하고 싶어요. 지금부터 당신의 상상력을 동원해 들어 주세요. 당신은 어려서부터 귀염둥이로 큰, 겁 없는 청년을 생각하세요. 먼 외국을 상상하세요. 거기서 당신은 대실패를 해요. 그 결과는 평생을 쫓아다니는 치명적인 과실이었어요. 당신은 구원을 받으려고 수단을 부립니다. 좀 이상한 수단이긴 하지만 불법도 아니고 나무랄 성질의 것도 아니죠. 하지만 당신은 불행해요. 왜냐하면 희망은 실로 인생의 문턱에서 당신을 버렸으니까. 당신은 향락 속에서 행복을 찾아 방황해요. 마음은 피로하고, 영혼은 위축되어 당신은 스스로를 추방한 몇 년 뒤에 고향으로 돌아와요. 당신은 새로운 친구를 알아요. 그 사람에게서 20년간 당신이 찾아 헤맨 좋은 자질을 많이 발견해요. 당신은 보다 좋은 날이 찾아왔음을 느껴요. 보다 놓은 희망, 보다 청순한 감정이. 당신은 인생을 새로 시작해 보고 싶은, 남은 생활을 불멸의 것으로 하려고 열망해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숲속의 장애물 - 당신의 양심도 시인하지 않는, 단순한 인습적인 방해물을 뛰어넘는 것이 당신에게는 허락될까요?" 그는 말을 끊고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만 좋을까? 로체스타 씨는 다시 질문했다. "그 방랑의 죄많은 남자, 하지만 지금은 휴식을 찾아 회개하고 있는 남자는 마음 착하고 아름답게 새 친구를 영원히 자기에게 끌어들여, 마음의 평안과 생활의 갱신을 얻으려 하고, 세속의 의견에 도전해 의존하려고 하는 것은 올바른 일일까요?" "로체스타 씨." 나는 대답했다. "방랑자의 안식이라든가, 죄인의 재생은 결코 다른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만일 당신이 알고 있는 누군가가 잘못을 저지르고 괴로워한다면 그분이 그 값을 치르는 힘과 휴식을 위한 위로를 자기보다 높은 곳에서 찾도록 해주세요." "하지만 그 수단, 그 방법이 문제예요. 신은 자기의 일을 하기 위해 그 수단을 가져요. 나 자신 - 이젠 바로 말하겠습니다 - 구원을 받을 수단을 발견했다고 생각해요. 그것은......" 그는 말을 끊었다. 새는 지저귀고 나뭇잎은 가볍게 술렁댔다. 침묵은 계속되었다. 마침내 나는 얼굴을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마치 놀란듯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귀여운 친구." 그는 어조를 달리하여 말했다. 얼굴도 변해 있었다. 상냥함과 진실함이 완전히 사라지고 괴로운 표정이 되어 있었다. "당신은 내가 잉그람 양에게 갖고 있는 마음을 대강은 알겠지요. 만일 내가 그녀와 결혼하면 그녀는 나를 철저하게 재생시켜 주리라고 생각지 않습니까?" 그는 갑자기 일어나 보도 저쪽으로 걸어갔다와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제인, 제인." 내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는 말했다. "잠을 설쳤기 때문인지 당신 얼굴이 무척 창백해 보여요. 이 다음엔 언제 나와 철야를 해주겠어요?" "언제든지 필요하실 때는." "예를 들면 나의 결혼 전야 같은 것! 아마 당신은 잠들지 못할 거예요. 그때는 나를 상대해 주겠습니까?" "네." "그녀는 대단한 미인이죠, 제인?" "네." "우람하고 당당한 여성이야, 제인. 덩치가 크고 피부가 검고, 살집이 좋고. 어이구 안 되겠다! 텐트와 링이 마구간에 있어요. 저쪽 나무 밑으로 숨어서 돌아가세요." 나와 반대 방향으로 그는 걸어갔다. 이윽고 뒤뜰에서 명랑한 목소리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메이슨은 오늘 아침, 여러분에게 인사도 못하고 떠났어요. 나는 네 시에 일어나 전송을 했어요.